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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조금씩배워보자/동서고전 200선

E18 – 계원필경 (桂苑筆耕) /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908)

E18 – 계원필경 (桂苑筆耕) /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908)

(출전: 동서고전 200선 해제3 / 반덕진 / 가람기획)


 이 책은 우리 나라 한문학의 비조로 평가되는 최치원의 개인문집으로, 저자가 당나라에 있을 때 쓴 시문들을 귀국하여 모은 책이다. 청운의 꿈을 안고 당에 유학하여 과거에 합격까지 했으나, 이방인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좌절과 실의 속에 고국에 귀국한 후, 자신의 포부를 펴보고자 했으나 이것마저 불가능함을 알고 만년에 가야산에 은거하며 일생을 마친 불우한 지식인의 고뇌와 좌절이 잘 나타나 있다.


a. 성공과 좌절의 생애

  우리 나라 <한문학의 비조>인 최치원의 자는 고운이고 경주의 6두품 가문에서 성장했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던 고운은 12살의 나이로 학문적 성취와 세속적 야망을 위해 당나라로 유학했다.

  먼 길을 떠나기 전 그의 부친은 그에게 <<10년 안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는 말로 자식을 전송했다. 당에 간 그는 18세에 빈공과에 장원급제하여 부친이 정해준 기간을 4년이나 앞당겼다.

 빈공과란 외국인을 위해 당나라에서 실시했던 과거시험이었는데, 유학생들은 이 시험에 합격함으로써 당시 동양문화의 중심인 당에서 관직을 얻을 수 있고 귀국해서도 일정수준의 관직을 보장 받을 수 있는 시험이었다. 그런 점에서 진골 출신의 독무대에 눌려 있던 6두품 출신들에게는 이 시험이 매력적인 통로여서 신라에 유학 붐이 일고 있었다. 신라 출신의 합격자가 58명이나 되었다 하니 알 만하다.

  그러나 고운은 중요한 관직에는 임명되지 못하고 주로 시작에 몰두하는 한편 주변 문인들과 교유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보니 경제적으로 어려워 당시의 실력자인 회남절도사 고변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고운의 문학적 명성을 떨치게 된 계기가 온다.

고변과 인연을 맺은 고운은 고변이 9년에 걸쳐 중국 전역을 휩쓴 황소 토벌에 나섰을 때 그의 종사관으로 따라가 4년 동안 중요한 문서작성을 담당했다. 현재 <계원필경>에 전하는 글들이 대부분 이때에 이룩된 것이다. 그 유명한 <토황소격문>도 이때 지은 것이다.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너를 죽이려 하고 있고, 땅 속의 귀신들까지도 몰래 너를 죽이자고 의논했다>>라는 구절에 이르러 황소는 놀라서 침상에서 굴러떨어졌다 한다. 변방의 미미한 청년이 중원천지에서 마음껏 문재를 자랑하던 득의의 세월이었다.

 이처럼 고운은 세계제국의 중심지에서 문학적 명성을 날리는 등 후배 유학생들에게는 흠모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나, 외국인으로서의 그의 출세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그로 인해 그가 느껴야 했던 소외와 고독은 심각했다. 그러던 중 당나라도 기울어가고 고변도 퇴진하여 미래의 전망이 불투명하자 청운의 꿈을 포기하고 28세에 귀국했다.

  귀국한 그에게 헌강왕은 도당 유학생에게 의례적으로 주었던 벼슬을 하사하여, 외교문서의 작성을 담당케 했다. 그리고 이듬해 고운은 당에서 지은 저술들을 정리하여 28권의 시문집을 왕에게 바쳤으나 현존하는 것은 <계원필경> 20권뿐이다.

  이처럼 문장가로 능력은 인정받았으나 정치적 혼란과 골품제의 한계 등으로, 당에서 공부한 학문적 이상을 펴보기에는 신라사회가 너무 협소했다. 신라는 하대에 들어오면서 중앙의 권력쟁탈전과 더불어 지방세력의 반란으로 전면적인 붕괴국면에 들어간다. 외직으로 전전하던 고운은 38세 때에 진성여왕에게 <시무책 10여조>를 올려 사회적 모순과 국가체제 정비를 기원했다. 그러나 신라는 이미 자율적인 개혁능력을 상실하여 그의 충정은 별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이처럼 자신의 개혁의지가 수용되지 않자, 당과 신라 모두에서 거부당한 자신을 한탄하면서, 관직에서 물러나 대자연을 유람하다가 결국 가야산의 해인사에 은둔했다. 조국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귀국했지만 신라의 현실은 최치원을 어떤 구체적인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방관자의 위치로 밀어냈다. 다만 제자들을 양성하여 고려 건국에 사상적 기초를 제공했다는 점이 그가 시대를 위한 노력의 유일한 소산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뛰어난 재능을 역사의 변화에 연결시킬 수 없었던 지식인의 고뇌를 본다.


b. 고운의 사상과 문화

  그의 사상은 기본적으로는 유학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스스로 유학자로 자처했다. 그러면서도 불교에도 깊은 이해를 갖고 있어 선사들의 비문을 짓기도 했다. 그가 화엄종의 본산인 해인사 승려들과 교유하고 만년에는 그곳에 은거한 사실을 보면, 불교에도 상당한 이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산천을 자유로이 떠돌아다니며 활을 쏘고 소나무나 대나무를 심었으며, 책보기를 즐겨하고 바람과 달을 노래했다>>고 기록된 것처럼, 만년에는 도가풍의 면모를 보여 한국도교의 선구자로 추앙되기도 한다. 결국 고운은 그때까지 수입되어 상당히 성행한 유불도의 사상과 막연하게 전해오던 전통사상을 접목하여 풍류도라는 독특한 한국 전통사상을 확립했다. 이는 다음의 <삼국사기>에 기록된 <난랑비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나라에는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 한다. 이 가르침은 실로 삼교를 포함하고 있어서, 모든 생명과 접촉하여 교화시킨다. 또 이들은 집에 들어가서는 효도하고 나아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니 이는 유교의 가르침이며, 모든 일을 억지로 처리하지 않고 말을 하지 않고 일을 실행함은 도교의 가르침이며,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착한 행실만 행함은 불교의 가르침이다.>>

  고운이 지은 글은 매우 많은 편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것은 <계원필경>, 4명의 승려를 위한 비문인 <사산비명>과 조선의 서거정이 지은 귀중한 한문학 고전인 <동문선> 등 여기저기에 실려 있다. 그러나 문학은 유교나 불교의 어느 쪽에 비해 보더라도 모자랄 수밖에 없다는 논조를 폈다.

  <사산비명>의 하나인 <진감화상비명>의 서에서 <<초년에 중원에서 이름을 얻어 장구 사이에서 아름답고 좋은 것을 맛보았으나, 미쳐 성인의 도리를 마시어 취하지 못했으므로, 오직 진흙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이 부끄러울 따름이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성인의 도리가 문장수식보다 앞선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같다.


c. 한국 최초의 시문집

  <계원필경>은 고운이 당나라 고변의 휘하에 있을 때 쓴 글들을 귀국하여 28권으로 정리하여 왕에게 바친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 나라에 관한 글은 비교적 적고, 중국의 임금이나 고관대작들에게 보내는 글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서무에 아버지의 분부를 깊이 명심하고 당나라에 가서 피나는 노력 끝에 과거에 급제한 사연관, 고변의 종사관으로 많은 문서를 맡아보던 성공담을 적고 있다. 그러나 당나라에서의 그의 성공의 이면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어서 <당서>의 문예열전에 최치원은 들어있지 않다.

겉으로 표방하는 포용성은 주변민족을 무마하기 위한 것이고 사실은 배타적인 기풍이 강했던 당의 사회에서 그는 당시 세계제국의 내면적인 모순을 발견하고 갈등과 번민에 휩싸였다. 그런 심정을 선명하게 드러낸 <진정상태위>를 음미해보자.


    <진정상태위>

 해내수련해외인: 당나라의 누가 나를 가엾이 여기리

 문진하처시통진: 묻노라, 어느 나루가 내가 건널 만한 나루인가

 본구식녹비구리: 애초에 먹을 것이나 구하고 이익을 구하지 않았으며         

지위영친불위신: 다만 부모를 빛내려고 했지 내 몸 위하지 않았다. 

 객로이수강상우: 나그네길 이별의 시름은 강 위의 빗소리요,

 고원귀몽일변춘: 고향에 돌아가는 꿈에 봄이 아득히 멀구나

 제천신우인파고: 냇물 건너다 다행히 은혜로운 물결 듬뿍 만나서

 원탁범영십재??: 속된 갓끈의 십년 먼지를 다 씻어버렸으면

  고운은 자신이 외국에 있음을 절감하면서 깊은 고민에 사로잡혔다. 먹고사는 것이나 구하고 부모를 영화롭게 했다는 변명으로 그 고민이 해소되지는 않았다. 그런가 하면 <촉규회>라는 시에서는 <<천한 땅에 태어난 것이 스스로 부끄러워 사람들에게 버림받고도 참고 견디는>> 접시꽃에다 자기 처지를 비하기도 했다.

  이런 생각에서 고운은 자신을 가난하고 미천한 사람으로 의식하게 되고 주위의 민중의 생활에도 관심을 가질 여유를 얻었다. 그런 심정을 담은 시중 대표적인 시는 <강남녀>가 있다.

 

   <강남녀>

 강남탕풍속: 강남땅은 풍속이 음탕하여

 양녀교차린: 딸자식을 요염하게 키운다네

 치성치침선: 천성이 요염해 바느질은 싫어하고

 장성조관현: 단장하고 거문고 타는 일뿐

 소학비아음: 우아한 곡조는 배우지 못했으니

 다피춘심견: 춘정에 많이도 이끌리네

 자위방화색: 아름답고 꽃다운 그 맵시

 장점염양년: 언제나 청춘일 것으로 여기네

 각소린사녀: 가난한 이웃집 여자들

 종조롱기저: 온종일 베틀 놀리는 걸 비웃네

 기저종노신: <아무리 땀흘려 비단을 짜도

 라의불도너: 비단옷 너에게 돌아가지 않을 걸>

이 작품은 강남의 풍속에 초점을 맞추어 빈부의 사회적 갈등을 묘사한 것이다. 비록 중국인의 생활이 소재로 등장하고 있어 우리나라 부녀자들의 생활상이 직접 드러나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 주제의 측면에서 보면, 상류층 부녀자의 교만하고 방탕한 삶의 모습을 가난하고 힘겹게 살아가는 하층 여성의 삶과 비교함으로써, 빈부귀천의 모순을 지적하고 있다. 즉 부귀한 가문 출신의 부녀자들이 방탕한 생활을 하는 것에 대해 비난과 경멸의 시선을 보내면서 하층 여성의 삶에 대해 동정하고 있는 것이다.

  만년에 세상에 대한 집념을 버리고 가야산에 은거했을 때 지었다는 <추야우중>은 고운의 시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시이다.

 

   <추야우중>

 추풍유고음: 가을 바람에 괴롭게 읊조리니

 거세소지음: 넓은 세상에 내 마음 아는 이 드물고

 창외삼경우: 창 밖은 삼경인데 비만 내리고

 등전만리심: 등불 앞에 마음은 만리 밖을 달리네

  가을 바람에 괴롭게 읊조리기만 하는 만년의 심경을 잘 보여주는 시다. 당나라에서 좌절을 경험한 이래 마침내 가야산에 입산할 때까지 방황과 번민을 시로 나타내면서 자신의 심경을 시로 토로했다.

  다음의 글을 당시 중국 전역을 불안에 떨게 했던 황소가 난을 일으켰을 때, 황소를 준열히 꾸짖는 글로서 고운의 문학적 명성을 떨쳤던 명문이다.

  이로 인해 <<황소를 토벌한 것은 칼이 아니라 최치원의 글이었다>>는 말이 유행했다 한다.


    <격황소서>(제11권)

  <<광명 2년(818) 7월 8일에 황소에게 알린다. 무릇 바른 것을 치키고 떳떳함을 행하는 것을 도라고 이르고, 위험한 때를 당하여 변통하는 것을 권이라 한다. 슬기로운 이는 시기에 순응하는데서 성공하고, 어리석은 이는 이치를 거역하는 데서 패하나니, 백년 동안 목숨을 이을지라도 생사를 기약하기 어렵고, 만사는 마음으로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느니라. 

  지금 우리 천자의 군대로 말하면 은덕을 앞세우고 죽이는 것을 뒤로 한다. 장차 수도를 수복하고 진실로 큰 신의를 펴고자 하여 삼가 임금의 분부를 받들고 간사한 것들을 치우고자 한다.

  너는 본래 천민으로 갑자기 억센 도적이 되어 우연히 승세하여 감히 사람의 도리를 어지럽혔다. 드디어 불순한 마음을 품고 높은 자리를 노려보며 도성을 도성을침범하고 궁궐을 더럽혔으니 마땅히 그 죄 하늘에 미치고 반드시 패하게 되리라. ^5,5,5^햇살이 널리 비침에 어찌 요망한 기운을 마음대로 펴리오, 하늘 그물이 높이 쳐졌으니 나쁜 족속들은 반드시 제거되고 말 것이다. 하물며 너는 평민 출신으로 농촌에서 일어나 불지르고 겁탈하는 것을 좋은 짓으로 알고 살상하는 것을 급선무로 생각하여 헤아릴 수 없는 큰 죄만 있을 뿐 속죄할 수 있는 조그만 착함도 없으니, 천하 모든 사람이 다 너를 죽이려고 생각할 뿐 아니라 문득 또한 땅속의 귀신까지도 벌써 너를 남몰래 죽이기로 의논했다.>>(이 부분에서 황소는 놀라서 떨어졌다)


d. 우리 나라 한문학의 비조

  <계원필경>에는 305편의 문장과 총 60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어 시의 비중은 크지 않다. 그중 문장은 <사륙변려체>로 일관했고, 시는 당시를 따랐다. 사륙변려체란 각 구의 글자수를 4자와 6자로 대구를 맞추고 운자를 맞추는 등 형식미에 치중하는 화려한 문체로서, 중국에 보내는 외교문서나 과거시험에 많이 사용되었다.

  시 중에는 자신이 모시고 있던 고변의 업적을 찬양한 것, 그리고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것,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것 등이 주종을 이루고 있으나, 주로 중국에 관련된 것들이고, 신라와 관련되는 시문은 권말에 첨부되어 있을 뿐이다. 또한 자신의 내적 정서를 표현한 것은 드물다.

  그중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참산에서 봄을 맞으며> 등과 같은 작품은 고국에 귀국하기 직전에 쓴 것들로서, 고국에 대한 한없는 그리움을 간결한 시 속에 섬세한 필치로 노래했다. 한시의 다양한 형식을 자유자재로 활용하여 내면의 고독과 회한을 이토록 절묘하게 한시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그는 우리 나라 한문학의 비조로 평가된다.

  이규보의 <백운소설>에 보면 <<고운 최치원은 전무후무한 공을 세웠으니 우리 나라 학자들은 모두 그를 한문학의 조종으로 추대한다>>라고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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賓貢科 (출처 : 나무위키)

1. 개요[편집]

과거 제도의 일종으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시험이다.

과거 제도의 소과를 보면, 수도 지역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상공(上貢), 지방민들을 위한 향공(鄕貢), 그리고 외국인들 대상의 빈공(賓貢)으로 나뉘고, 이 3가지를 합쳐서 삼공(三貢)이라고 부른다. 왜 바칠 '공'자를 쓰느냐면, 고대 중국에서 지방의 제후가 지역 인재를 중앙의 천자에게 천거하는 행위를 '인재를 바친다'라고 해서 '공사貢士'라고 했는데, 이것이 지역에서 소과 합격자를 뽑아서 중앙에서 치르는 대과 응시자격을 주는 것과 같은 것으로 치환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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陳情上太尉(진정상태위) - 최치원(崔致遠)


海內誰憐海外人(해내수련해외인) : 해내서 누가 해외 사람을 어여삐 여기오리

問津何處是通津(문진하처시통진) : 나루를 묻노니 어디가 통하는 나루이온지

本求食祿非求利(본구식록비구리) : 본디 녹을 구함일 뿐 이를 구함은 아니요

只爲榮親不爲身(지위영친불위신) : 다만 어버이 빛내려 할뿐 제 몸 위함 아니로세

客路離愁江上雨(객로이수강상우) : 객지의 이별하는 시름은 강 위에 비내릴 때

故園歸夢日邊春(고원귀몽일변춘) : 고원에 돌아가는 꿈은 저 햇가

濟川幸遇恩波廣(제천행우은파광) : 내 건너다 요행히 은혜 물결 만나서

願濯凡纓十載塵(원탁범영십재진) : 속된 갓끈 십년 먼지를 다 씻어버리자.


問津(문진) : 논어에, “장저 걸익(桀溺)이 짝지어 밭 갈거늘 공자가 지나가다가 자로(子路)를 시켜 나루를 물었다.”라는 말이 있는데, 뒷사람이 이 말을 끌어다가 남에게 迷惑을 지시해 달라고 청구하는 뜻으로 쓴다.日邊(일변) : 여기서는 천애(天涯)와 같다는 뜻으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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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南女(강남녀)/최치원


江南蕩風俗(강남탕풍속) 강남이라 풍속도 방탕해서

養女嬌且憐(양녀교차련) 딸을 기르기를 예쁘고 귀엽게만

性冶恥針線(성야치침선) 성질이 되바라져 바느질은 부끄럽고

粧成調管絃(장성조관현) 화장하고 악기나 조율하지만

所學非雅音(소학비아음) 배운바가 고상한 음악이 아니고

多被春心牽(다피춘심견) 춘정을 끌어내는 것 뿐이라네.

自謂芳華色(자위방화색) 스스로 말하기를 “꽃 같은 내 얼굴

長占艶陽年(장점염양년) 젊고 예쁜 날을 오래오래 누리겠다.“ 하며

却笑鄰家女(각소인가녀) 도리어 비웃네. 이웃집 처녀가

終朝弄機杼(종조농기저) 아침 내내 베틀 질하는 것을

機杼縱勞身(기저종로신) “베 짠다고 네 몸 수고해봐야

羅衣不到汝(라의부도여) 그 비단옷은 네 것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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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夜雨中(추야우중) 가을밤 내리는 빗속에 


秋風唯苦吟(추풍유고음) 가을바람 속에 괴롭게 시만 읊노라. 

世路少知音(세로소지음) 이 세상에 날 알아주는 이 별로 없으니  

窓外三更雨(창외삼경우) 창문 밖에 내리는 한밤중의 빗소리 듣노라니  

燈前萬里心(등전만리심) 등잔 앞에서 만리 밖 고향으로 달려가는 이 마음.


三更 – 밤 11시 ~ 오전 1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