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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조금씩배워보자/동서고전 200선

E20 – 열하일기 (熱河日記) / 박지원(朴趾源, 1737 ~ 1805)

E20 – 열하일기 (熱河日記) / 박지원(朴趾源, 1737 ~ 1805)

(출전: 동서고전 200선 해제3 / 반덕진 / 가람기획)



 a. 작가: 

  <호질> <허생전>으로 유명한 이 작품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 박지원이 쓴 중국 견문기. 청의 연경과 열하를 여행한 후 그곳 문인 명사들과 교유하고 새로운 문물제도를 접한 결과를 소상하게 기록한 이 책은, 조국의 현실 개혁을 전제로 이국 땅을 관찰하고 분석한 연암이 그의 사상을 탁월한 문학적 재능에 의해 전달한 사상서이자 뛰어난 문학작품이다.



b. 진보적인 지식인

  남한과 북한에서 공히 높게 평가되고 있는 대표적인 사상가이자 작가인 연암 박지원은 노론의 명문인 반남 박씨 집안의 둘째 아들로 출생했다. 16세에 처삼촌인 이양천에게 글을 배우고, 3년 동안 문을 걸어 잠그고 공부에 전념했다. 20대에 이미 뛰어난 글재주를 나타냈다. 1759년에는 모친이, 1760년에는 조부가, 1767년에는 부친이 별세했다. 아버지의 장지 문제로 한 관리가 사직한 것을 알고는 본의 아니게 남의 장래를 막아버린 것을 자책해 스스로 과거응시를 포기했다.

  32살 때 서울의 지금의 파고다 공원인 백탑 부근으로 이사했다. 주변에 이덕무 이서구 서상수 유득공 등 불우한 문사들이 모여 살았고, 박제가는 그의 집에 자주 출입했다. 당시 그를 중심으로 <연암그룹>이 형성되어 많은 청년 인재들이 그의 문하에서 지도를 받고 새로운 학풍을 형성해 나갔는데, 그것이 <북학파> 실학이다. 문학에서는 당시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박제가가 <4대시가>로 일컬어졌다. 이들은 모두 박지원의 제자들있으며 이서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서얼출신이었다. 이들은 나이나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세상이야기나 문학 이야기로 밤을 새웠다.

  1780년 44세 때 영조의 사위이자 자신의 친척인 박명원을 수행하여 중국의 북경과 열하 등에 다녀왔는데, 이 과정에서 청의 문물과의 접촉은 그의 사상체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인륜 위주의 사고에서 <이용후생>의 사고로 전환하게 되었다. <열하는 청나라 황제들이 거처하는 여름 별궁이 있었던 도시로, 주위에 온천들이 많아 겨울에도 강물이 얼지 않는데서 유래한 지명이다. 이런 연유에서 <열하일기>라는 제목을 붙였던 듯하다.

  그는 귀국 후 <열하일기>의 저술에 전념했다. <열하일기>는 단순한 일기가 아니라 <호질><허생전> 등의 소설도 들어 있고, 중국의 풍속 제도 문물에 대한 소개, 조선의 제도 문물에 대한 비판도 실려 있는 문명비평서였다. <열하일기>는 공간되기 이전에 이미 필사본이 많이 유포되었는데, 특히 자유분방하고도 세속스러운 문체와 당시 내에 만연되어 있던 반청 문화의식에 역행하는 것이어서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고루하고 보수적인 지식인들의 비난 때문에 정조도 1792년 그에게 반성문을 바치게 했다.

  1786년 처음 벼슬에 올라, 1797년에는 면천 군수를 지내고 정조의 농정에 대한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과농소초>를 지어 올렸다. 이 책은 농업 생산력 발전에 대한 깊이 있는 책으로, 그의 사상의 원숙한 경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평생동안 가난 속에서 살았던 연암은 한때 황해도 연암 골짜기로 들어간다. 초가삼간 주변에 과일나무도 심고, 양어장도 만들었다. 손이 부르트도록 직접 농사일도 하면서 숯도 구웠다. 이런 찌든 가난 속에서도 <<마음은 이것을 즐기며 바꿀 생각이 없다>>고 자족할 만큼 정신적인 풍요로움 속에서 일생을 마쳤다. 한편으로는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에 몸을 던지며 광인처럼 살았지만.


c. 연암의 문학세계

  박지원의 사상은 철학사상 경제사상 문학사상 등 여러 측면에서 분석이 가능하나, 그의 실학사상에 대해서는 본서 제1, 2권의 곳곳에서 간간이 언급했기에, 여기서는 그의 문학사상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는 청년기와 장년기에 11편의 소설을 썼는데, 현재는 9편이 전해지고 있다. <광문자전>에서는 광문이라는 거지의 성실성과 정직성을 말하면서 이런 표본적인 인간이 인간대접을 받지 못하는 사회를 꾸짖었다. 이런 표본적인 인간이 인간대접을 받지 못하는 사회를 꾸짖었다.

<마장전>에서도 가난하고 천한 사람들의 건강한 도덕성과 고결성을, 퇴색하고 비속화된 양반들과 대비시킴으로써 양반의 허식적 생활을 풍자, 비판했다. <예덕 선생전>에서는 똥거름 치는 근로자인 주인공 엄행수를 등장시켜 가장 훌륭한 삶의 구현자임을 밝히고, 손 하나 까닥 않는 양반을 꾸짖었다.

  장년기의 작품인 <양반전>은 양반도덕의 하위성, 위선적인 양면성, 몰염치한 착취에 기반한 무위도식, 양반의 무능성에 대한 날카로운 규탄과 폭로로 일관하고 있고, 양반몰락의 역사적 현실성과 필연성을 묘사했다. 그는 양반을 다음과 같이 풍자했다.

  <<하늘에서 사람을 낼 때 4가지 종류로 만들어냈는데, 그중에서 선비란 것이 가장 고귀하다. 선비는 양반이라고도 부르는데, 농사나 장사도 하지 않고 책이나 대충 훑으면 문과에 급제하고 적어도 진사는 따놓았다. 우선 이웃집 소를 끌어다가 밭을 갈리고, 백성들을 끌어다가 김을 매게 한다. 누가 감히 나를 괄시 하겠는가. 만일 그런 자가 있다면 그 놈의 코에 잿물을 부어넣고, 귀뺨을 때린들 감히 원망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인간관계가 엄격하게 신분제에 의해 규제되고 게다가 양반사회는 당론으로 분열되어 있어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자유로운 교제에 바탕을 둔 평등윤리로서의 우정이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을 폭로하고, 그 평등윤리인 우정의 세계를 희구하면서 그것을 서민의 생활도덕에서 찾고자 했다. 그러나 그도 그 자신이 서민들과 함께 호흡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지식인 체질이었으며,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허생처럼 재주를 가지고 고독하게 숨어살면서, 세상을 풍자하고 개탄하는 한 양심적인 지식인일 수밖에 없었다.


d. 사회개혁을 위한 문명 비평서

  연암이 박명원을 수행하면서 곳곳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으로 남긴 <열하일기>는 당시 사회제도와 양반사회의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을 독창적이고 사실적인 문체로 담았기 때문에 위정자들에게 배척당하여 필사본만 전해오다가 1901년 김택영에 의해 처음 간행되었다.

  책의 구성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1~7권은 여행경로를 기록했고, 8~26권은 보고 들은 것들을 한 가지씩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처음에 압록강의 장관에 대한 인상적인 묘사로부터 시작하여, 이후 광대한 중국의 산천풍물과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 청나라의 사회상을 다채롭고 힘찬 필치로 그려나가는 <열하일기> 앞에 독자들은 압도된다.

  <도강록>은 압록강에서 요양에 이르기까지 15일간의 기록으로 굴뚝과 구들 등 여염집의 구조와 배 우물 가마 성의 제도 등 배울 만한 것이 있으면 자세히 서술하면서, 모든 물건을 이롭게 써서 백성의 생활이 윤택해야만 덕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이용후생의 주장을 폈다. <성경잡지>는 십리하로부터 소혹산에 이르기까지의 5일간의 기록으로 여행과정에서 자유롭게 만난 평민들과 나눈 대화와 그곳의

산천과 절 등을 소개하고 있다. <일신수필>은 신광녕에서 산해관에 이르기까지의 9일간의 기록으로 저자거리 여관 교량 등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특히 수레의 제도에 관하여 자세히 기록한 것을 <허생전>의 중심사상과도 통한다.


e. 호질

  <관내정사 關內程史 >는 산해관에서 연경(북경)까지의 기록으로, 이중 특히 <호질>은 연암의 소설 중에서 <허생전>과 함께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존경받는 선비인 북곽선생(北郭先生)과 동리자(東里子)라는 수절과부의 추문을 통해 당시 선비들의 이중성을 풍자한 소설로서, 특히 동물을 의인화하여 호랑이가 인간의 비행을 나무란다는 발상은 기발하다. 제목 <호질>은 <호랑이의 질책>이라는 뜻이다.

  작품의 줄거리는 크게 3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째 단락에서는 범의 속성 및 범과 인간과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작가는 범의 신령스러움과 용맹함을 칭송하면서 범이 인간 이상의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보여준다. 호랑이와 호랑이에게 먹이를 찾아주는 귀신인 창귀들이 모여 저녁거리를 논한다. 창귀들이 권하는 메뉴에 대해 호랑이는 먹이 투정을 한다. 의사는 육체가 약한 자를 등쳐먹고, 무당은 정신이 약한 자를 등쳐먹고, 선비는 공리공론을 앞세워 백성들을 등쳐먹기 때문에 맛이 없다는 것이다.

  둘째 단락에서는 북곽선생이라는 위선적인 유학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점잖고 학식이 높은 것처럼 행세하지만 밤이면 열녀로 소문난 동리자라는 과부의 집을 찾아가 정을 통한다. 그녀의 아들들은 북곽선생을 여우가 변신한 것이라고 믿고 여우를 잡아 돈을 벌려고 하자 이를 안 북곽선생은 도망나온다. 여기서 북곽선생은 당대의 부도덕한 지배세력을 대변한다.

  셋째 단락에서는 동리자의 집에서 도망나오다 거름구덩이에 빠진 북곽선생이 범을 만나 살려달라고 애걸하는데, 여기서 양반의 위선과 이를 꾸짖는 호랑이의 준엄한 질책이 그려진다. 범은 유학자들의 이념이었던 성리학의 모순점과 그들의 허위의식, 그리고 이중적인 생활태도 등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꾸짖기를 마친 범은 썩은 선비의 고기는 역겨워 못 먹겠다고 말하고 사라진다. 호랑이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북곽선생은 서성대는 동네사람들에게 <<하늘에 제사 지내고 있는 중>>이라고 여전히 허풍을 떤다.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은 연경에서 열하로 가기까지의 기록으로 연경에 겨우 도착한 사신 일행이 열하에 피서중인 황제를 좇아 밤새워 달려가는 동안 겪었던 숱한 고생들을 현장감 있게 서술하고 있다. <태학유관록>은 열하의 태학관에 6일 동안 머물러 있는 동안의 기록인데, 중국의

명망 있는 학자들과 한국과 중국의 두 나라의 문물제도에 관해 논평하다가 이어 달세계와 지동설에 관한 문제를 토론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환연도중록, 太學留館錄>은 열하에서 다시 연경으로 돌아오면서 급히 갈 때 보지 못했던 것을 적고 있는데, 특히 교통제도에 관한 서술 등이 주목된다. <경개록>은 열하의 태학관에서 그곳의 학자 10여 명과 나눈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며, <황교문답>은 불교의 한 지파인 라마교 중에서 갈라져나온 황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아울러 각 종족과 종교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반서시말>은 황교의 법왕인 반선의 내력과 우리 사신이 반선을 만나보게 된 시말을 기록한 것이고, <찰습륜포>는 곧 반선이 살고 있는 지명으로서 그가 거쳐하는 호화로운 궁전 등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망양록, 忘羊錄>에는 주로 음악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어 그의 악론을 살필 수 있으며, <심세편>에서는 우리 나라 사람들이 청나라를 오랑캐 출신이라 하여 업신여기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곡정필담>은 중국인 곡정 왕민호와의 필담으로서 정치 경제 종교 지리 등 다방면에 걸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특히 천문에 깊은 관심을 두고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산장잡기>는 열하 산장에서 보고 느낀 바를 담은 것으로 내면에 침잠하여 얻은 깨달음을 서정적으로 엮고 있다.

  <환희기>는 황제의 만수절을 축하하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든 요술장이들을 구경한 이야기이고, <피서록>은 중국의 황제와 학자, 우리 나라 학자들의 시 등에 관한 시문 비평을 적은 것이다. <행재잡록>은 청나라 고종의 행재소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로서, 청나라가 조선에 대해 취한 정책을 적고 조선 당국자들의 청에 대한 관심과 대처가 소홀하다고 개탄하고 있다. <구외이문>은 만리장성 밖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 60여 항목이다.


f. 허생전

  <옥갑야화>에는 한국소설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허생전>이 수록되어 있다. 가난한 선비 허생은 10년 계획한 글공부를 7년 만에 그만두고 장사를 시작한다. 장안의 부자인 변씨에게 돈 1만 냥을 빌려 시작한 허생은 수완을 발휘하여 거부가 된다.

  변산 근처의 도둑떼들을 이끌고 무인도로 가서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고, 본국으로 돌아와 전국의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한 다음 서울로 돌아온다. 허생은 변씨에게 빌린 돈 10만 냥을 넘겨주고 예전처럼 독서에 열중한다. 허생의 비범함을 알게 된 변씨는 어영대장 이완에게 그를 소개하고 이완은 허생을 찾아와 인재등용에 관한 조언을 구한다.

  이에 대해 허생은 3가지를 제시한다. 이 장면에서 박지원의 실학사상이 잘 드러나는데, 첫째 제갈량과 같은 인재를 천거할 테니 임금이 삼고초려할 것, 둘째 명나라에서 이주해온 정객들에게 혼인을 주선할 것(국내 세도가들에게 국혼을 주선하는 것보다 차라리 대국이라고 섬기는 명나라 정객들에게 국혼을 주라는 빈정거림), 셋째 양반의 자제들을 뽑아 청에 첩자로 파견할 것(북벌론을 주장하면서도 청의 실정에 어두운 북벌론자들을 풍자한 것) 등인데, 명분에 사로 잡힌 이완은 하나도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고 도망나온다. 그후에 그를 다시 찾았으나 이미 허생은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이 작품은 문학의 사회적 역할을 되새겨보게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금료소초,金蓼小抄>는 의술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엮은 것이고, <황도기략>은 연경에서 관광한 문물, 제도 등을 39항목으로 나누어 그 내력과 전해오는 말들을 곁들여 기록한 것이다. <알성퇴술>은 공자의 묘를 참배하고 난 후 그 건물과 학교, 학사의 연혁과 규모 등을 10항목에 나누어 기록한 것이다. <앙엽기>는 연경 안팎에 있는 절과 궁 등 주요 명소 20군데를 구경한 기록이고, 마지막으로 <동란섭필>은 이제까지 기록한 것 이외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두서없이 적은 것이다.


g. 이용후생 사상의 집대성

  <열하일기>는 연암의 명실상부한 대표작으로 그의 위대한 창조역량과 평생에 걸쳐 이룩한 모든 예술적 성과들이 집약되어 있다. 여기서 그는 중국현실에 대한 심오한 통찰과 그에 입각한 혁신적인 개혁안, 진보적인 천문학설과 과학적 세계관을 제시하는 등 북학파의 사상을 집대성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단순한 사적 여행보고서에 그쳤던 종래의 견문록과는 다르다.

  연암은 이 책을 통해 이용후생을 비롯한 북학파의 사상을 역설하는 동시에, 구태의연한 명분론에 사로잡혀 있는 경색된 사고방식을 효과적으로 풍자하기 위하여 사실과 허구의 혼입이라는 복합구성을 도입했다. 즉, 여정과 관련시켜 삽입해놓은 일화들은 보고 들은 것일 수도 있으나 필요에 따라 창작한 것이기도 하다.

작품 속에서 그는 비속어와 저속한 표현 등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는데, 이러한 실험적 구성은 당시에 이미 <연암체<라고 일컬어진 정통을 벗어난 문장과 함께 기문으로 지목받게 되어 복고적인 문예정책을 추진하던 정조로부터 <문체반정>의 표적이 되었다. 이로 인해 반성문을 쓰기도 했지만 대화중심의 극적인 장면묘사와 유기적인 구성을 추구하는 소설적 수법, 인간심리에 대한 원숙한 통찰 등 그의 다양한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한편 <열하일기>에도 그 나름대로의 한계는 있다. 그가 여행했던 코스는 강남보다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던 중국의 강북지방이었다. 그 일면만을 보고 상업을 중심으로 한 경제적 발달상을 일방적으로 예찬한 반면, 이를 가능케 했던 보다 근원적인 요인인 농업 생산력의 발전과 농민층에 대한 상업자본의 착취수탈관계 등 중국의 심각한 농민문제와 농촌실태 파악에 소홀한 점이 있다. 그리고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타개할 것을 주장하면서도 개혁의 주체로서 각성된 사대부만 상정하고 있을 뿐, 실질적 능력을 갖춘 중인계층이나 상인층의 참여를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점도 지적된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는 연암의 개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시대적 제약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따라서 <열하일기>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한계는 곧 다음 시대의 사상과 문학이 해결해야 할 역사적 과제였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연암은 청나라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새로운 국제현실에 대한 남다른 식견을 가지고 사회개혁의 방도를 진지하게 모색한 그 시대의 선구적인 지식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