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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조금씩배워보자/동서고전 200선

C45 – 의산문답(醫山問答) / 홍대용((洪大容, 1731~1783)

C45 – 의산문답(醫山問答) / 홍대용((洪大容, 1731~1783)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새로이 수용된 서구의 과학적 세계관과 전통적인 성리학적 세계관이 어떻게 결합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저술이다. 전통적 세계관을 고집하는 성리학자 허자와, 서구의 실증적인 과학을 받아들이는 실학자 실옹의 대화로 전개되는 이 책은 당시의 과학사. 철학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할 뿐 아니라, 호질의 선구가 되는 문학사적으로도 중요한 작품이다. 


a. 생애와 작품활동

 코페르니쿠스로부터 약 300년, 갈릴레이로부터는 130년 후 아시아의 한구석에도 지구가 움직인다고 외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홍대용이다. 과학사상가 홍대용은 청주 출신이다. 그는 나주목사로 오래 근무했던 관계로 부근에 살고 있던 나경진의 집에서 천문기구인 혼천의와 자명기구인 후종을 보면서 자랐다. 그는 매일 그 집에 가서 그 기구들의 원리는 물론 제작법과 이용법도 배웠다. 이들 기구를 얻기도 하고 만들기도 하면서 천문학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청주 그의 본가에서 사설 천문대인 용천각을 짓고 이들 기구를 보관하면서, 종래의 서적을 검토하고 이들 기구로 천체를 관찰했다. 

 그가 오랜 관찰과 실험 끝에 얻어낸 결론은 지구가 자전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작은아버지를 따라 청에 간 적이 있는데, 그때 청의 과학자들에게 지구자전설을 설명하여 그들을 감탄시켰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박지원 등 몇몇을 제외하고는 냉담했다. 지구가 돌면 어쨌다는 거냐, 천원지방(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난 것)은 만고의 진리인데 한낱 괴담 이라고 일축하곤 했다. 진리를 찾는 자는 예나 지금이나 외로운 법인가? 그러나 홍대용은 이런 세론에 흔들림 없이 과학탐구에 생애를 바쳤다.  

 청에 머물렀던 몇 달 동안 청의 학자들인 엄성. 반정균 등과 어울려 밤새워 학문을 논하는 가운데, 이들 사이에는 국경을 넘는 우정이 무르익었다. 홍대용이 이들에게 작별을 고할 때, 어찌나 정이 들었던지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후에 박지원이 북경에 갈 적에 홍대용은 이들에게 박지원을 소개하는 편지를 보냈으며, 엄성이 먼저 죽자 반정균은 조선의 홍대용에게 부고를 하였다. 그 후 홍대용이 죽자 박지원은 반정균에게 부고를 하였다. 죽은 뒤에도 이렇게 돈독한 우정은 계속되었다. 그러면 이들은 왜 이토록 우정이 돈독했을까? 그것은 서로가 공통적인 시대의 모순에 직면하여 이에 대한 개혁의지에 불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홍대용이 그들과 교환한 의견들을 내용으로 연기와 회우록을 기록하여 책으로 묶자, 문장가 박지원은 서문을 써서 이들의 사귐을 기렸다. 홍대용은 북경의 과학기술을 탑골에 있는 박지원의 사랑채에 모인 젊은 엘리트들에게 전파하였다. 박제가. 이덕무. 이서구. 유득공 등에게 과학기술을 통해 조선의 발전을 기약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리하여 북학파의 모임은 저절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홍대용은 청주로 내려가 기하학의 원리를 담은 주해수용(籌解需用)을 완성하였고, 또 현실개혁 방안을 담은 임하경륜(林下經綸)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이때쯤에는 자득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지식을 토대로 이론을 체계화시켜 그의 과학사상은 원숙한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러다 보니 경제적으로는 말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내키지 않는 벼슬을 10년 정도 한 후 다시 저술작업에 착수하였으나 1년 만에 중풍으로 쓰러졌다. 부음을 들은 박지원은 한걸음에 달려가 빈소에서 곤드레가 되었고, 붓을 갈겨 묘지명을 썼는데 천하의 명문으로 꼽힌다. 

  아, 슬프다. 덕보(홍대용의 자)는 툭 트이고 민첩하며, 겸손하고 아담하며 식견이 원대하고 사물의 이해가 정밀하며 일찍이 지구가 한번 돌면 하루가 된다고 하여 그의 학설이 오묘하고 깊었다. 


b. 홍대용의 과학사상: 상대주의적 세계관

 동양에서는 처음으로 지전설을 주장한 홍대용은 서양과학의 본질을 일찍이 간파하고, 이를 적극 도입하여 전통사상 속에 용해하려고 시도하였다. 그의 시도는 오늘날의 국제화에도 시사하는 점이 많다. 지구의 둘레는 9만리, 하루는 12시간이고 하루 동안 지구가 1번 돈다는 그의 지전설은 단편적인 발상이 아니라, 지구와 우주의 구조에 대해 나름대로 체계적 사색을 통해 얻은 결론이었다. 그렇기에 그에 대한 평가도 지전설 주창자로서만이 아닌 과학사상가로서 이루어져야 마땅하다. 

 서양에서는 코페르니쿠스가 이미 1543년에 지동설을 내놓았고, 갈릴레이가 종교재판에서 지동설을 부인하고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중얼거린 때(본서 1권 갈릴레이 편 참고)가 1633년으로 홍대용보다 130년 정도 앞섰다. 그러나 서양과학을 동양에 전파했던 중국의 서양 선교사들도 이단으로 판정받은 지동설을 공개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고, 중국과 일본의 학자들 가운데도 지구의 자전을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호기심과 탐구심이 많았던 홍대용은 잘못됐다는 논평과 함께 소개된 서양 천문학 책의 지동설을 읽고 오히려 지동설이 옳다는 판단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그는 지구가 너무 무거워 태양 둘레를 공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지전설의 근저에는 우주가 무한하고 외계인의 존재를 믿는 우주관이 깔려 있다. 의산문답에서 우주공간은 끝이 없고 별들도 무수히 많다고 말한다. 이 무한한 우주에는 지구를 중심으로 한 세계 말고도 얼마든지 많은 다른 세계가 있을 수 있으며, 화성의 생물은 불 속에 살면서도 차가움을 모른다며 외계생물의 존재를 주장했다. 그의 이런 우주관에 일관되게 흐르는 것은 철저한 상대주의다. 그는 심지어 생명체를 구성하는 인간. 초목. 금수 가운데 어느것이 더 귀하다고 할 수 없다고 밝혀 생태주의적 사상과도 맥을 같이하고 있다. 인간이나 지구중심주의를 벗어난 그의 상대주의적 세계관은 중국을 세계의 중심에 놓는 중화사상이나 양반과 상민의 차별을 뛰어넘는 평등주의적 사회사상으로 이어졌다. 

 홍대용은 서양과학의 강점이 수학적 방법과 실험 및 관찰에 있다고 제대로 파악했는데, 스스로 그것들을 제작하고 서양과학을 배우는 데 힘썼다. 그는 실제로 서양과학을 배워오려면 수학수준을 높일 필요가 있음을 절감하고 스스로 수학책인 주해수용을 쓰기도 했다. 


c. 의산문답의 내용

 홍대용의 사상은 담헌서에 집대성되어 있는데, 담헌서는 내집과 외집으로 나뉘어져 있다. 내집에는 #1 사서문의 삼경문변 심성문 등 경학에 관한 부분 #2 임하경륜  (정책론의 성격) #3 의산문답  (학문관. 자연관. 사회관. 국가관. 역사관 등의 종합적 성격) #4 계방일기  (세자인 정조 보좌시 쓴 일기),  외집  에는 #1 연기 건정필담  #2 항전척독  (중국 친구들과의 편지) #3 주해수용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 의산문답은 담헌 홍대용의 사상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으로 허자와 실옹이라는 두 사람의 문답체로 구성되어 있다. 은거 독서로 30년을 지낸 동해 거인 허자가 전통적인 조선의 학자를 대변하고 있고, 허자가 북경까지 가서 학문을 논해보았으나 아무 소득이 없이 돌아오는 길에 의무려산에서 은거하고 있는 서양과학을 받아들인 새로운 학자를 대변하는 실옹을 만나 문답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허자와 실옹의 대화 중 일부를 소개한다. 

 실옹: 사람의 미혹에 세 가지가 있으니, 식색에 혹하면 집안을 망치고, 이권에 혹하면 나라를 망치고, 도술에 혹하면 천하를 망치는 것이다. 그대는 도술에 혹한 데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대에게 묻노니, 그대가 말하는 현자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가?

 허자: 유가에서 현자라면 주공을 숭상하고, 정주를 배워 정학을 일으키고, 사설을 배척하고 인으로 구세하고 철로 보신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실옹: 그러니 그대가 도술에 혹하고 있다는 것을 정말 알겠구나. 슬프다. 도술이 망한 지도 오래도다. 공자가 돌아가니 제자가 공자의 뜻을 어지럽혔고, 주자가 돌아가니 제유가 주자의 뜻을 어지럽혀, 그 업만을 숭상할 뿐 그 의를 잃었구나, 말로는 정학을 일으킨다 하지만 실은 긍심에서 나왔고, 말로는 사설을 배척한다 하지만 실은 승심에서 나왔고, 구세하겠다는 그 인이란 권심에서 나왔고, 보신을 하겠다는 그 철이란 이심에서 나왔으니, 이 네 가지가 서로 어울려 천하가 도도히 허로 달음치고 있구나.

 이렇게 통론하면서 실옹은 중국역사에서 공론이 국가. 사회에 끼친 해독을 열거하면서, 허에 빠져 실을 잃은 이 나라의 장래를 은근히 걱정하고 있다. 

  의산문답에 나타나는 그의 과학지식의 상징으로는 지전설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1년에 한 바퀴씩 도는 공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지구가 지축을 중심으로 하루에 한 바퀴씩 도는 자전을 말하고 있다.  의산문답에 등장하는 여러 대목들, 즉 지전설과 그 논거로서의 일. 월 지구의 인력에 대한 것, 태양계. 우주. 태양. 지구, 달의 크기의 비례에 관한 것, 바람. 구름. 비. 눈. 서리. 우박. 우레. 번개. 무지개 등 자연현상에 관한 것, 기온, 주야의 시간차, 조수 등에관한 학설은 당시로서는 놀라운 바가 있다. 

 인간. 금수. 초목 등 세 가지 생명체는 지. 각. 혜가 있고 없음이 서로 다를 뿐이지, 어느 것이 더 귀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여 인간중심적 세계관을 배격한다. 또한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지구 위의 정계와 도계는 정해진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서로 자기가 사는 곳이 정계라 생각할 따름이다. 뿐만 아니라 우주는 무한한데, 이 속에는 지구의 인간과 비슷한 지적 존재도 더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구인과

우주인 어느 쪽이 더 귀한 것인지도 알 수가 없다.

 끝부분에서는 만약 공자가 중국 밖에서 살았더라면 그곳을 중심으로 춘추를 썼을 것이라면서, 화이의 구분은 무의미하다고 단정한다. 이 글에 흐르는 철저한 상대주의를 읽을 수 있다. 하늘에서 본다면 어찌 안팎의 구분이 있겠는가? 저마다 자기사람을 친히 여기고 자기 임금을 높이고 자기 풍속에 따라 편안히 사는 것은 화나 이나 마찬가지다 

 또한 전통적인 음양오행설을 철저하게 비판하고 주기론을 바탕으로 서양의 4원소설을 거론하고 있다.   오행의 오라는 수는 원래 정론이 있는 것이 아닌데, 술가들이 이를 근본으로 삼아 하락이 여기에 부회하고, 역상이 이를 천착하여 생극이니, 비복장황하게 되었지만은 결국은 아무 이치도 없는 것이다. 담헌은 기. 화. 수. 토의 네 가지를 만물생성의 원형으로 보았다. 이 4원소를 바탕으로 오행오가 음양을 대신 설명하고, 특히 오행이 부회천착되어 철학. 천문. 지리. 의학. 종교. 병법. 정치. 도덕. 심지어 생활감정까지도 좌우하게 된 그 고질이 아무 이유 없는 것이라고 역설한 것이다. 

 음양오행설 비판에서도 나타난 예리한 과학정신은 당시 사회의 폐단인 토속적 미신을 통박하는 데까지 미쳤다. 신선이 된다는 술법, 풍수를 가린다는 지술 등이 모두 허망한 것이요 천문이라는 이름의 점복이나 기도 또한 허망하다고 역설한다. 자연현상에 대한 담헌의 이와 같은 설명은 인류의 생성발전에 대한 설명에도 일관된다. 먼저 생명의 기원은 수. 토가 안으로 작용하고 일. 화가 밖으로 열을 가하여 원기가 모이고 만물이 생겨나니, 식물은 땅에 돋아나는 털 같은 것이요, 동물은 땅에 모인 이 같은 것이다. 


d. 사상적 평가

 이상에서 우리는 담헌의 과학정신을 중심으로, 그의 사상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사실 그의 사상은 여기에 국한하지 않고, 현실적인 정책론으로도 확장되었다. 그의 이러한 사상을 잘 보여주는 부분은 임하경론으로, 여기서 그는 사회구조의 개혁안으로서 균전제와 부병제도를 토대로 농민의 최저생활을 보장하는 동시에 재정과 국방의 기반을 튼튼히 하려 했다. 이런 기본적인 구상은 유형원의 반계수록과 비슷하나 그의 독창적인 면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장정은 노동을 해야 하며 양반이라도 노동하지 않고 놀고 먹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다. 둘째, 신분여하를 막론하고 재. 학이 있는 자는 중책에 임명하고 그렇지 못한 자는 고관의 자제라도 천한 일에 복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셋째는 지방마다 면단위까지 학교를 두어, 면 내의 자제는 8세 이상이면 신분의 여하를 막론하고 모두 교육을 받게 하고, 과거제 대신 하급교육기관에서 상급교육기관에 인물을 천거하되, 관직도 이 추천에 의해 임명할 것을 주장한다. 넷째로 신분여하를 막론하고 공적인 발언권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봉건적 신분제의 타파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역시 우리의 관심은 그의 과학정신에 집중된다. 전통적인 우리의 과학기술은 뛰어난 면이 많았지만, 공리공담에 빠진 유학자들은 과학사상을 늘 천시하여왔기에 발전을 보지 못했다. 이에 홍대용은 철저하게 이를 추구하여 우리 나라 과학기술사에 찬란한 빛을 던진 것이다. 특히 그의 기하학은 지극히 실용적인 것으로, 토지의 측량에 적절히 이용될 수 있는 이론이었다. 그가 그렇게도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주해수용이 현실에 별로 적용되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의 사상은 바로 박제가 등 후배들에게 전해지고, 이들에 의해 다시 개화사상가들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그의 사상이 담겨진  담헌서는 정신적 유산으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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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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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헌서》(湛軒書)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 홍대용이 자신이 지은 글을 직접 모아 엮은 시문집으로, 모두 15책으로 되어 있다. 《담헌집》(湛軒集)이라고도 하며, 홍대용이 죽은 뒤 약 150년이 지난 1939년에 홍대용의 5대손 홍영선(洪榮善)이 신조선사(新朝鮮社)에서 필사본을 바탕으로 7책의 활자본을 발간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지구의 자전설(自轉設)을 주장하여 주목을 끌었고, 중국·서양의 문물을 소개하였으며, “기(氣)·화(火)·수(水)·토(土)”의 4원소론에서 “기”를 물적(物的)인 것으로 보아 기화설(氣化說)로 모든 자연 현상을 설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회 모순, 학계의 통폐, 경제 제도의 폐단 등을 신랄히 비판하고, 보다 실제적이고 민주적이며 과학적인 대안(代案)을 제시하였다.


담헌내서 : 내집이라고도 한다.

경학 : 《사서문의(四書問疑)》, 《삼경문변(三經問辨)》, 《심성문(心性問)》 등

정책론 : 《임하경륜(林下經綸)》

학문관·자연관·사회관·국가관·역사관 등에 관한 독창적인 자기 견해의 종합적 저술 : 《의산문답(毉山問答)》

세손(世孫, 정조) 보필 시의 일기 : 《계방일기(桂坊日記)》[1]

시·서간·묘문 등 문예 작품

담헌외서

북경 기행문 : 《연기(燕記)》, 《건정필담(乾淨筆談)》

북경 방문 중에 사귄 청나라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글 : 《항전척독(杭傳尺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