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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조금씩배워보자/동서고전 200선

C48 – 조선상고사 (朝鮮上古史) / 신채호(申采浩, 1880-1936)

C48 – 조선상고사 (朝鮮上古史) /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독립운동가, 역사학자인 신채호가 중국 중심의 역사관과 식민사관에 의해 왜곡되어가던 한국사를 바로잡기 위해, 중세의 역사관을 극복하고 근대적 역사관에 입각하여 저술한 한국근대사학의 이정표. 자료의 해석과 역사서술의 객관성, 사실성, 종합성들을 강조함으로써, 한국사학을 근대적인 사학으로 끌어올린 이 책에서, 단재(丹齋)는 새로운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하여 단군시대로부터 백제 멸망과 그 부흥운동까지의 한국고대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는 관점에서 서술하였다.


a. 생애와 작품활동

 내가 죽으면 시체가 왜놈들의 발끝에 채이지 않도록 화장하여 재를 바다에 뿌려달라며, 평생을 일제와의 비타협적인 투쟁에 일생을 바친 독립투사 단재 신채호. 한편으로 근대적 민족주의 사관을 확립한 역사가 단재 신채호. 그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여기서는 역사가로서의 단재의 모습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는 충남 대덕군에서 신숙주의 18대손으로 태어났다. 신규식(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대신), 신건식 주중대사, 신석우(조선일보 사장), 신백우(서로군정서 참모), 신기선(대한제국 학부대신) 등은 모두 그의 집안 사람들이다. 25세에 국립대학인 성균관의 교수가 되었으나, 당시의 정세는 한가하게 학문을 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구국운동에 나서기로 결심한다.

1905년 장지연의 초청을 받아 <독립신문>의 후신인 <황성신문>의 논설기자로 입사하여 계몽운동에 나서나, 이 신문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 문제가 되어 폐간당했다. 그러자 <대한매일신보> 양기탁의 초청으로 이 신문에서 활동하게 된다.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외국인이 발행인이었기 때문에 사전검열을 받지 않아도 되었다. 따라서 단재는 여기서 애국심과 국권회복을 고취시키는 열정적인 글들을 쓸 수 있었다. 

단재는 1907년 중국 양계초의 <이태리 건국 3걸전>을 번역, 간행하고, 한국역사상의 3걸로 을지문덕, 이순신, 최영을 뽑아 그들의 전기를 저술하였다. 그가 이 같은 인물들의 전기를 쓴 것은 우리 나라의 청년들이 이러한 영웅들의 행동을 본받아 일제침략자들을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하는 데 영웅적으로 투쟁하도록 고취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그는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독사신론(讀史新論)이라는 사론을 발표하여 지식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는데, 이 글을 통하여 그는 전통적인 유교사관을 통렬히 비판하는 한편, 새롭게 침투해오던 일본인들의 식민주의 사관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1910년 나라가 완전히 무너지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그곳의 독립지사들과 협력하여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해조신문>을 간행하나, 재정의 어려움과 언론에 대한 동포의 인식이 부족하여 이 신문 발행은 여러 차례 중단을 거듭했다. 이때 상해에 먼저 자리잡은 신규식, 박은식으로부터 초청을 받고, 그곳에서 신한청년단과 박달학원에서 청년들에게 우리 역사를 가르쳐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한편, 우리 나라 상고사의 연구에도 열중하였다. 예전의 우리 역사가 결코 퇴영적이 아니요, 고조선, 고구려 등이 강대한 중국에 맞서 영토를 보존해온 역사적 사실을 통해, 민족사관을 정립하는 제 온 정열을 쏟았다.

그는 이국땅에서 학문연구와 독립운동을 병행하면서 10년 세월을 보냈다. 이 사이 국내에서는 31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를 북경에서 맞이한 단재는 조선민중이 직접 나서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사실에 큰 감명을 받고 역사의 주체로서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민중을 발견하게 된다.

상해에 수립된 임시정부에 그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데, 서로 망명정부의 주도권을 잡기에만 열중하는 이승만을 임시정부가 대통령으로 선출하자, 이를 인정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동지들과 함께 <신대한>이라는 신문을 만들어 임시정부를 맹렬히 비난하였다. 1922년 무력 급진노선의 의열단 단장인 김원봉의 부탁으로 그가 보낸 무정부주의 이론가인 유자명과 함께 의열단의 혁명운동의 이념과 방법을 천명하는 선언문을 집필하는데, 이듬해 조선혁명선언을 완성한다.

 조선혁명선언은 단재의 비타협적 민족주의 사상과 유자명의 무정부 이론의 결합으로 볼 수 있는데, 이로 인해 신채호는 무정부주의에 관심을 갖게 된다.

 조선혁명선언에서 그는 강력한 일제침략세력과 맞서려면 파괴암살 등 폭력적 방법이 외교운동이나 문화운동과 같은 미온적인 방법보다 효과적임을 역설했다. 또 민족자본의 육성이나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를 통해 독립을 성취해야 한다는 준비론에도 비판을 가했다. 이러한 혁명적 수단을 강조하는 그의 논리는 일제침략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할 만큼 격렬했고, 의열단원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임시정부 내의 분열에 실망을 느끼고 한때 절에 들어가 <대승기신론>을 읽으며 침잠했던 단재는, 그의 사명이 조선사연구에 있음을 깨닫고 다시 하산하여 조선사연구에 몰두한다. 그는 조선역사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평생 동안 고심했는데, 단재사학이 일관되게 추진한 것 중의 하나가 중국에 대한 사대를 극복하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 이야기만 나오면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을 통탄하곤 했다.

한편 국내의 친지들은 그의 글을 좀더 보급하기 위해 이미 발표된 글을 모아 간행하는 한편, 미발표된 원고들을 찾아 신문지상에 발표하였다. 즉, <임꺽정>의 저자 홍명희는 <동아일보>에 발표했던 단재의 조선사 관계논문을 묶어 1930년 <조선사연구초>를 간행했고, 안재홍은 단재가 1920년대 초에 써놓았던 <조선상고사>를 1931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으며, 1910년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조선상고문화사>도 1931-1932년에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다. 감옥에서도 계속되었던 조선사연구에 대한 그의 정열은 1936년(56세) 여순감옥에서 순국함으로써 일단락이 되었지만, 일제가 싫어 평생 동안 고개를 쳐들고 세수를 하였다는 그의 기백은 그의 독립투쟁이나 역사서술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b. 단재의 역사관

단재의 역사학과 역사관은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독사신론>으로 대표되는 1905-1908년까지의 시기이고, #2<조선상고문화사>로 대표되는 1909-1920년대 초까지의 시기이고, #3<조선상고사>와 <조선사연구초>로 대표되는 1920년대 전반기인데, 그 이후는 그가 무정부주의자로 기울어져 주목할만한 역사서술이 없다.


   <독사신론>

이 글은 한국근대사학의 성립과정에서 민족주의사관을 처음 제시한 글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이 글의 서문에서 국가의 역사는 민족의 소장성쇠의 상태를 서술한 것 이라고 말하고, 민족을 버리면 역사가 없을지며 역사를 버리면 민족의 국가에 대한 관념이 크지 않을지니, 오호라 역사가의 책임이 막중할 진저 라고 하여 역사서술의 주체를 민족으로 상정하였다. 이는 중세의 왕조중심사관을 극복하고 민족사관을 정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독사신론>은 주자학적 정통론과 사대주의적인 존화사관을 철저히 비판하였다. 그는 당시의 단군-기자-마한-신라로 이어지는 정통론은 노예의 헛소리라고 비판하고, 단군-부여-고구려의 역사를 더 강조하였다. 이는 부여-고구려 주족설이라 하는데, 그가 이런 이론을 내세운 것은 부여나 고구려족이 살았던 만주의 고토에 대한 수복의식과 강자중심 역사중심의 역사관의 발로라 보여지는데, 이는 그의 사회진화론적 현실인식에서 비롯된다. 한편 <독사신론>에서 주목할 점은 당시 일본인들이 주장하던 임나일본부설을 한국을 옛날부터 자기 소유물로 인정하여 한국을 침략하기 위해 만들어낸 근거 없는 소리에 불과한 것 이라 비판하여, 한국 근대역사학의 또 하나의 과제였던 식민주의 사관의 투쟁을 시작한 최초의 글이라는 점이다.


   <조선상고문화사>

이 책은 단군조선 2천년 역사를 서술한 것이다. 이 글의 근저에 흐르는 사상은 국수보전론이다. 여기서 국수란 그 나라에 역사적으로 전래하는 풍습, 습관, 법률, 제도 등의 정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단재는 국민정신의 유지와 애국심의 환기는 이 국수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이론은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크게 확산 되면서 국수의 상징으로서 특히 단군숭배의 기운이 일어나 1909년 대종교가 창건되었다. 그리고 1910년대에 들어서는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준비하고 있던 독립운동가들의 대다수가 대종교에 입교하는 현상을 낳기도 했다.


   <조선상고사> <조선사연구초>

단재사학의 대표적인 글이다. <조선상고사>의 서문에서 단재는 역사의 정의에 대해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 밝히고 있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단순히 아와 비아의 투쟁을 역사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밑바닥에 깔린 투쟁의 정신사를 역사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 단재의 역사관의 특징적인 모습이 보인다. 즉, 단재는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사건에서 한국사를 선교, 불교, 독립사상, 진보사상 대 유교사대주의보수사상의 대립축으로 보면서, 양자가 대결하여 후자의 승리로 귀결된 결정적인 사건이 묘청의 난 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역사를 정신사사상사 중심으로 파악하고 있었는데, 이처럼 단재의 관념사관적 성격이 강하게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c. <조선상고사>내용

<조선상고사>는 단군시대부터 백제의 멸망과 부흥운동까지를 총 12편으로 나누어 기술하고 있다. <조선상고사>는 과거의 가치관이나 역사관을 부정하고 새로운 역사관 위에서 우리의 역사를 재평가하였다. 여기에는 강력한 민족의식이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역사관이 이 책의 서론인 <총론>에 잘 나타나 있다.

제1편 총론에서는 단재의 역사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여기에는 역사의 정의와 조선사의 범위, 역사의 3대 원소 등이 나타나는데, 현대의 시각에서 볼 때 비판의 여지가 없지 않으나, 당시로서는 혁명적 견해였다. 먼저 역사의 정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역사란 무엇이요? 인류사회의 아와 비아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여 공간부터 확대되는 심적활동의 상황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인류의 그리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사라 하면 조선민족의 그리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니라. 무엇을 아 라 하며 무엇을 비아라 하느뇨? 깊이 팔 것 없이 얕게 말하자면, 무릇 주관적 위치에 선자를 아라 하고 그외에는 비아라고 하나니, 그러므로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이니라 

이를 정리하면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의 정신사 라는 것이다. 즉, 그는 역사발전의 원동력을 사물의 모순 및 상극관계에서 파악하고 있는데, 이는 헤겔의 변증법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이어서 그는 역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하기 위해서는 사료의 수집비판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실증주의적 역사방법론을 강조하고, 역사는 역사를 위해서 지으란 것이요, 역사 이외에 딴 목적을 위해서 지으란 것이 아니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객관적으로 사회적 유동상태와 거기서 발생한 사실을 그대로 적은 것이 역사요, 저작자의 목적에 따라 그 사실을 좌우하거나 더하거나 혹은 고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여 역사학의 학문적 독립성을 역설했다. 이는 결국 우리의 역사학을 근대적인 역사학으로서 성립시키고자 하는 이론적 작업이다. 또한 단재는 총론에서 사대주의나 유교사상에 물든 기존의 역사가들을 비판하고 있다.

제2편 신수두시대(단군시대), 제3편 3조선시대, 즉 해씨(신조선), 기씨(불조선), 한씨(말조선), 제4편 열국쟁웅시대(대한족 격전시대), 제5편 고구려 전성시대, 고구려 성쇠와 북부여의 멸망, 제6편 고백 양국의 충돌, 제7편 남방 제국 고구려 공수동맹, 제8편 삼국혈전의 시, 제9편 고구려 대수전역, 제10편 고구려 대당전역, 제 11편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 등으로 구성되었다.

우선 주목할 수 있는 것은 단군조의 활동무대를 만주로 한 것과 단군조의 중국에 대한 식민활동이다. 여기서 그의 만주 중심의 단군조 이해는 부여 고구려 중심의 고대사 체계화 및 발해사의 한국사화와 관련되고, 또 만주 중시의 밑바탕에는 한말 일제하에 전개된 만주의 우리 국토화 운동과 독립운동의 기지화 운동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김부식 등 사대주의 역사가와 한국사의 타율성론을 강조하였던 식민사관론자들은 한국사의 본격적인 전개시기를 삼국시대 이후로 보고, 그 역사무대도 한반도가 중심이라고 애써 강조하였다. 단재는 이런 종래의 한반도 중심의 역사무대를 만주 요동반도 및 요서지방과 중국 동북지대에까지 확대한 것이었다.

또 대외 식민활동을 강조하는 단군관은 한말의 사대주의 청산작업과 자강독립운동 및 일제하의 국권회복운동의 기반구축을 단군과 관련시키려는 데 있었다. 단재가 <삼국유사>를 통하여 전통적인 사료들의 틀을 넘어서서 단군문제를 이해하려는 것은, 단군문제가 한말 일제하의 민족주체성의 과제와 연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재의 부여 고구려 중심의 고대사 인식체계는 조선후기의 학자인 이종휘의 <동사>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단재는 일찍이 이종휘의 <동사>를 섭렵했고 그를 극찬했을 뿐만 아니라, <동사>에서 체계화한 한국고대사의 골격이 단재를 거쳐 더욱 정교해졌음을 알 수 있다. 단재의 부여 고구려 중심설은 만주를중심으로 한 고구려의 웅혼성과 대외투쟁의 승리를 강조한 것으로, 이는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 보는 단재의 자강독립적인 사학정신과 상통하는 것이다.

이것은 말하자면 중국에 대한 문화적정치적 사대주의를 타파하려는 의도일 뿐 아니라, 민족적 과제를 역사학과 연결시킨 데서 가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단재가 이러한 관점에 섰을 때, 종래 사가들이 삼국과 신라에 가려서 보지 못했던 부여 가야 발해사에 대한 재조명이 가능했고, 아울러 대외항쟁의 주체였던 고구려와, 해외경략에 앞섰던 백제를 멸망시켜 한국사의 무대를 반도 내로 축소시킨 신라의  삼국통일을 김유신의 음모로까지 혹평하였다.


d. 단재사학의 역사적 의의

단재의 사학은 박은식의 사학과 함께 한국사학의 근대사적인 학문을 성립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단재는 한국사학에서 전통사학과 근대사학식민주의 사학과 민족주의 사학, 영웅사학과 민중사관이 교차되는 그 접점에 서 있다.


   근대사학의 성립

먼저 전통적인 역사학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실학시대의 역사학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삼국사기> 이래의 유교적 사학과 비유교적 사학(선교와 불교의 재야사학자)을 접목시키고 있다. 이는 단재가 유가적 분위기의 한문사료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우리 민족의 전통성과 주체성을 강조할 수 있었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 또한 일반적으로 단재의 사학과 아와 비아의 투쟁의 정신사라 하여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만 이해되어왔으나, 근래에 와서는 그의 역사학이 지닌 중세성의 극복과 근대성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즉, 역사를 편협한 의리론과 정통론적인 이데올로기 성에서 해방시켜,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밝히는 역사과학의 위치로 끌어올렸으며, 그리하여 유교적 중세사학을 완전히 청산하고 근대사학을 성립시켰다고 볼 수 있다.


   민중사관

단재의 역사학에서 보이는 역사인식 주체도 그의 사학의 근대성과 관련 지어 생각할 수 있다. 그는 역사연구의 초기에는 역사의 주체를 영웅으로 보고 갈망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08년을 전후한 시기에 이르면 그는 신민국을 강조하였는데, 기존의 영웅사관에서 국민을 역사의 주체로 보는 역사관으로 변화를 보이고 있다. 그러다가 31운동이 일어나고 1920년대의 사회주의 사상에 의한 평등사상이 고양되고 독립운동에서도 민중지도자가 나오면서 민중을 역사인식의 주체로 보는 사상적 용단을 조선혁명선언 에서 내리게 된다.

따라서 그의 역사주체 인식은 영웅-국민-민중의 순서로 변화되어 가는데, 그가 <조선상고사>를 저술하는 시기에 이르면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인식하는 근대적인 사관의 단계에 이르른다.


   민족주의 사학

이리하여 단재에 이르러 한국의 근대 민족주의 사학이 시작된다. 단재가 근대 민족주의 사학을 일으켰고, 또 그의 고대사 인식에 창조적인 혜안이 번득인다 할지라도, 그도 역시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학자에 불과하다. 그의 투철한 민족애와 자주정신, 치열한 삶이 시대를 넘어서서 두고두고 귀감이 된다 할지라도, 그가 남긴 역사연구 업적은 냉엄하게 비판받았으며 1930년대의 정인보 문일평 안재홍 등에 의해 발전되어갔고, 1940년대에는 손진태 등에 의해 관념론적 한계를 극복하면서 신민족주의 사학으로 비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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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일야방성대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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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1월 20일. 황성신문 2면 사설란에 실린 '시일야방성대곡'.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은 《황성신문》의 주필인 장지연이 1905년 11월 20일 《황성신문》에 올린 글의 제목이다. 시일야방성대곡이란 "이 날에 목놓아 통곡하노라"라는 의미이다. 장지연은 이 글에서 황제의 승인을 받지 않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고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오적을 규탄했다.

장지연은 이후 1914년~1918년 사이 총독부 어용신문사 매일신보에 주필로 활동하여 700 여편의 친일한시 및 사설을 게재했다는 의혹 때문에 2009년 11월 8일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중 언론 부문에 선정됐다.


내용[편집]

지난번 이등(伊藤) 후작이 내한했을 때에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 동양 삼국의 정족(鼎足) 안녕을 주선하겠노라 자처하던 사람인지라 오늘 내한함이 필경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공고히 부식케 할 방책을 권고키 위한 것이리라."하여 인천항에서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상하가 환영하여 마지않았다. 그러나 천하 일 가운데 예측키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 꿈 밖에 5조약이 어찌하여 제출되었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삼국이 분열을 빚어낼 조짐인즉, 그렇다면 이등 후작의 본뜻이 어디에 있었던가?

그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대황제 폐하의 성의(聖意)가 강경하여 거절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으니 조약이 성립되지 않은 것인 줄 이등 후작 스스로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슬프도다.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자들은 자기 일신의 영달과 이익이나 바라면서 위협에 겁먹어 머뭇대거나 벌벌 떨며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기를 감수했던 것이다.

아, 4천년의 강토와 5백년의 사직을 남에게 들어 바치고 2천만 생령들로 하여금 남의 노예 되게 하였으니, 저 개돼지보다 못한 외무대신 박제순과 각 대신들이야 깊이 꾸짖을 것도 없다. 하지만 명색이 참정(參政)대신이란 자는 정부의 수석임에도 단지 부(否)자로써 책임을 면하여 이름거리나 장만하려 했더란 말이냐.

김청음(金淸陰)처럼 통곡하며 문서를 찢지도 못했고, 정동계(鄭桐溪)처럼 배를 가르지도 못해 그저 살아남고자 했으니 그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제 폐하를 뵈올 것이며 그 무슨 면목으로 2천만 동포와 얼굴을 맞댈 것인가.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 2천만 동포여, 노예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과 기자 이래 4천년 국민 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같이 보기[편집]

을사늑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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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사신론

[간략정보]

한자 讀史新論

분야 역사/근대사

유형 문헌

시대 근대

성격 현대문헌|학술연구서

편저자 신채호

제작시기 1908년 8월 27일∼1908년 12월 13일

간행/발행/발급자(처) 『소년』 1910년 8월호에 「국사사론」으로 전재

소장처 단국대 도서관

집필자 

 

 

[정의]

1908년 신채호(申采浩)가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해 서술한 최초의 한국 고대사 역사서.

[개설]

『대한매일신보』에 1908년 8월 27일부터 12월 13일까지 연재되었다.

[편찬/발간 경위]

신채호는 “16년 전에 국치에 발분하여 비로소 『동국통감』을 열독(閱讀)하면서 사평체(史評體)에 가까운 「독사신론」을 지었다.”고 술회하였다.

1910년 국권 회복 운동에 전념하고자 만주로 망명한 뒤, 최남선(崔南善)이 경영하는 잡지 『소년』 1910년 8월호에 「국사사론」이라는 제목으로 전재되었는데, 이따금 표현의 차이 및 삭탈된 부분이 있다.

이를 전재하면서 최남선은 “순정사학(純正史學)의 산물로 보아주기는 너무 경솔하고, 그렇다고 순연히 감정의 결정이라고만 하기도 바르지 못한지라……조국의 역사에 대해 가장 걱정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참과 옳음을 구해 오래 파묻혔던 빛과 오래 막혔던 소리를 드러내려고……이를 수록하노라.”고 평하였다.

[서지적 사항]

이 논문은 1908년 전후의 신채호의 역사 인식을 포괄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는데, 미완성의 논문으로서 완결 편이 『조선상고사』와 『조선상고문화사』이다. 체재는 서론과 상세(上世)로 나뉘며, 서론에서 인종과 지리를 논하면서 그의 사관을 피력하였으며, 상세에서는 단군에서부터 발해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서술하였다.

[내용]

내용은 ① 단군 시대 ② 부여 왕조와 기자(箕子)·부론(附論) ③ 부여족 대발달시대 ④ 동명성왕의 공덕 ⑤ 신라 ⑥ 신라·백제와 일본의 관계 ⑦ 선비족·지나족과 고구려 ⑧ 삼국흥망의 이철(異轍) ⑨ 김춘추(金春秋)의 공죄 ⑩ 발해의 존망 순서로 논술하였다.

저자는 먼저 “국가의 역사는 민족의 소장성쇠(消長盛衰)의 상태를 서술하는 것이며, 영토의 득실을 논하는 것은 아니다”고 하여 국가주의·민족주의의 입장에서 역사를 보고 있다. 즉, 국사란 국가의 역사로서, 국가가 민족에 의해 성립된 유기체이므로 민족사가 곧 국사인 것으로 파악하였다. 따라서, 국가의 주권을 행사한 주족(主族)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한 것이다.

4천 년간의 민족사는 부여족 소장 성쇠의 역사라 하여 부여족을 주족으로 인식하였다. 이것은 부여족이 살았던 만주를 우리나라 영토화하는 동시에, 현실적인 외세의 침략에 대한 자긍 의지를 뚜렷이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단군시대부터 발해의 멸망에 이르기까지를 부여족의 활동과 다른 민족과의 교섭 과정으로서 인식하고자 하였다. 단군의 정통이 부여로, 그 다음에는 고구려·백제·신라·가야로 계승되며, 종래에 중시되던 기자·위만·한사군은 부여족의 역사에 부속시켜 서술하였다.

따라서, 정통론 사학에서 주장되던 기자조선에서 마한 또는 삼한으로 정통이 계승된 것으로 파악되던 고대사 인식 체계가 뒤집어지게 되었다. 또한, 긍정적으로 평가되던 삼국 통일의 역사적 의의를 비판해 김유신(金庾信)·김춘추 및 김부식(金富軾)의 공죄(功罪)를 논하였다. 이것은 한국의 고대사를 반도 중심으로 보았던 종래의 역사 인식 체계를 만주 중심과 단군 부여족 중심으로 본 필연적인 결과인 것이다.

[의의와 평가]

이 논문에 의거해 한국의 민족주의사학이 식민지화된 뒤에 식민사관에 대처하기 위해 성립된 것이 아니라, 이미 애국계몽운동기에 계몽 운동의 일환으로서 싹텄음이 밝혀졌고, 민족주의사학의 발생 상한선이 올라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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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일본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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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또는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 임나지왜재(任那之倭宰),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는 4세기 ~ 6세기에 왜국이 한반도 남부의 임나(가야)지역에 통치기구를 세워 한반도 남부 지방의 일부를 다스렸다는 학설이다. 일본인 학자 스에마쓰 야스카즈가 주장했다.


목차  [숨기기] 

1 개요

2 사료

3 임나일본부설 비판

4 현대의 학설

5 같이 보기

6 각주

7 참고 문헌 및 링크

개요[편집]

이 학설은 크게 3가지 사료로 나뉘어 생각되며, 이는 391년 광개토왕릉비 신묘년 기사, 《일본서기》에 진구 황후 편에 신라와 백제가 조공을 바쳤다는 내용의 기사, 백제의 칠지도 명문이다. 이 가운데 특히 8세기의 역사서 《일본서기》에 근거하여 임나일본부의 실재 여부나 그 기능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많은 이견이 있다. 2010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임나일본부설과 관련해 임나일본부의 존재 자체가 없었다는 데에 의견을 같이 했음을 밝히고 있다.[1] 다만 일본의 몇몇 교과서에는 이 내용이 그대로 실리기도 하였는데 이는 곧 임나일본부설이 공식적으로 폐기된 학설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육과정에서 이를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음을 나타낸다.[2]


사료[편집]

임나(任那)는 삼국사기 강수전의 '임나가량(任那加良)'이나 진경(眞鏡)대사 탑비에 쓰여진 '임나왕족(任那王族)인 흥무대왕 김유신'[3] 에서도 쓰고 있는 말로, 임나는 가야 연맹체의 중심이었던 가락국의 별칭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본 측 사료에서는 가야 전체를 가리키거나 가락국 뿐만 아니라 반파국, 안라국 등 가야 연맹체의 특정국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고 있다.

《일본서기》에는 진구 황후가 369년 가야 지방을 점령해 임나일본부를 두고 실질적인 통치를 하다가 562년 신라에 멸망했다고 쓰여 있다.

광개토왕릉비의 신묘년(391년)에 해당하는 기사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이 부분의 내용은 신묘년에 일어난 구체적 사건을 적은 기사라기보다는 396년부터 407년까지 사이에 고구려가 벌인 남진정책의 명분과 성과를 집약 기술한 집약문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부분은 비문이 파손되고 "海"의 경우 "每"를 고친 것으로 볼 여지가 있어서 비문의 일부가 일제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원문: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 破百殘□□新羅 以爲臣民.

백잔(백제), 신라는 과거 속민으로 조공을 해왔었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년)에 내습하니 바다를 건너 백잔, □를 격파하여 신라를 [구원하고] (모두) 신민으로 삼았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 □□ 신라를 격파하고 (모두) 신민으로 삼았다.(논란 부분을 참고할 것)

일본에서는 손상된 글자를 "任那"라고 주장하여 "왜가 바다를 건너(渡海) 백제, 임나,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4]

반면, 한국에서는 손상된 글자에 대해 같은 기사의 바로 다음에 "영락 6년에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잔을 토벌했다."고 쓰여있는 것과 당시 백제와 왜가 연합해 신라를 압박했던 상황, 광개토왕릉비의 여러 기사에서 백제와 왜가 연합하고 고구려가 왜를 궤멸시켰다고 쓰여 있는 것을 근거로 "(고구려가) 신묘년에 왜가 내습하니 백제, 왜를 격파하여 신라를 구원하고 (모두)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하는 주장이 많다.

그밖에 고구려가 백제를 상대로 남진전쟁을 일으킨 것은 백제와 연합한 왜가 제후국인 신라를 공격했기 때문이라는 전쟁 명분을 기술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최근에는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일본인 학자들도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5]


남조(南朝) 송(宋), 제(齊), 양(梁) 나라의 역사기록에 나오는 왜왕의 책봉기사도 들고 있다. 여기에는 왜왕이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제군사왜국왕(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 諸軍事倭國王)"이라는 관작(官爵)을 인정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송에서는 백제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 대한 왜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듯한 칭호를 내린 것으로 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의 칠지도(七支刀)에 대해서도 왜의 군사적 우세와 한반도 남부 지배를 인정한 '번국(蕃國)' 백제가 야마토 조정에 바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임나일본부설 비판[편집]

《일본서기》는 8세기 초에 쓰여진 책으로써 그 내용이 의심스럽고 상호 모순되는 부분이 많아 지금은 일본의 학자들도 비판을 하는 자가 상당히 많다. 임나일본부설과 관련된 일본서기의 대표적인 왜곡으로 백제의 장군 목라근자(木羅斤資)에 대한 일본서기의 서술이 있다. 일본서기 382년 기록[6] 을 보면 전쟁에서 대가야를 구원한 사람은 백제 장군인 목라근자로 되어 있다. 그러나 목라근자의 가야제국(諸國) 평정과 대가야 구원을 마치 천왕의 명에 따라 일본에 파견하여 이루어진 것처럼 왜곡되고 있다. 백제는 내륙국이였던 대가야를 바로 구원할 수 있었지만, 일본은 내륙에 있는 대가야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바다를 건너 한반도 남쪽 지역들을 뛰어넘어야 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7] 이 기록을 근거로 일본의 학자들은 일본이 가야를 200년 가까이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했었다.

'일본' 이라는 국호는 고구려,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한 7세기 이후에 사용된 것이니 만큼, 4세기에 '일본' 이라는 명칭이 들어가는 '임나일본부' 가 있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8]

임나일본부는 중요한 역사 기록 일텐데 고사기에는 전혀 기록이 되어 있지않다. 720년 편찬된 일본서기보다 8년 전 편찬된 고사기에는 신공왕후의 임나정벌과 같은 사실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9]

200년간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데 한국의 기록에 이를 입증할 만한 단서가 전혀 없다. 단지 '임나' 라는 지명만이 광개토왕릉비, 삼국사기, 진경대사탑비에 보일 뿐이다.

왜의 가야 지배를 입증할 고고학적 유물이 전혀 없다. 만약, 왜가 가야를 정복했다면 4세기에 가야 유물이 끊기고 6세기에 왜의 유물이 출토되어야 한다. 하지만, 출토된 유물은 4~6세기까지 가야유물이 계승된다.

5세기~6세기 전반에 걸쳐, 야마토왕조가 가까이 있는 구주왕조를 정복하고 있지 못했는데, 그 이전(4세기)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정복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않는다. 4세기는 백제의 근초고왕 전성기로써, 백제의 전성기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 지방을 정복할 수는 없다.

그 당시, 배의 운송 능력이 군인 25명, 말 2~3필 정도이다. 이러한 능력으로는 일본 열도로부터 한반도 남부 지방을 경영할 만한 충분한 병력과 물자를 한반도에 전달할 수 없다.

남조(南朝)의 송(宋)으로부터 받았다는 왜왕의 책봉기사 역시 왜왕이 받은 칭호의 등급이 고구려, 백제보다 낮았다는 점에서 해당 칭호는 별 의미가 없음이 중국 기사로 확인된다. 왜왕은 478년에 안동대장군을 받았는데, 백제왕은 420년에 그보다 두단계 높은 진동대장군을, 고구려왕은 백제왕보다 두단계 높은 정동대장군을 받았다. 당시 중국과의 교류가 없던 신라를 빼고, 왜왕이 중국왕조들에게서 받은 칭호는 항상 고구려, 백제보다 낮았다.

칠지도 앞면의 후왕(侯王)은 왜왕(倭王)을 가리키는 것으로 백제가 왜의 상국이었음을 뜻하고, 뒷면에 전시후생(傳示後世,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은 전형적으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명(下命)하는 형태의 문장이라는 점에서 칠지도는 백제가 왜왕에게 하사한다는 뜻으로 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현대의 학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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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일본부설에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이들 학설 가운데 몇 가지를 뽑아 보면,


일본이 가야 지방에 일본부를 두고 가야를 실제로 지배했다는 설.(스에마쓰 야스카즈, 이시모다 다다시 石母田正, 야기 아쓰루 八木充의 說, 기존 일본 학계의 통설이었던 說)

가야 지방의 일본인을 관리하기 위해 일본 조정이 세운 기관이었다는 설.(일본의 이노우에 히데오 井上秀雄의 說)

일본과 외교 관계가 돈독했던 가야 동맹의 한 나라였다는 설.[출처 필요]

교역을 위해 양국이 교류한 흔적(교역기관)이라는 설.(이병도, 이근우, 김태식과 요시다 아키라 吉田晶의 說)

가야인이 일본 열도로 건너가 세운 나라였다는 설. (김석형의 說)

백제가 가야를 지배하기 위해 세운 기관(백제군사령부)이었다는 설. (천관우, 김현구의 說)

한국의 역사학자 이병도는 일본사에서 소위 임나일본부(ヤマトノミコトモチ)란 왜관(倭館)의 관리와 같은 종류의 것으로서 이 때에는 다소의 정치활동을 겸하였던 것인 듯 하거니와, 이 역시 본질적으로 구명(究明, =규명)하면 철, 금, 은, 직물, 재보(보석), 기타 곡물의 무역취인을 주로 맡던 일종의 공(公)적 상관(商官)이라고 설명하였다.[10]

또다른 학설.(백제 성왕의 대가야 진출을 의미)

같이 보기[편집]

가야

광개토왕릉비

고훈 시대

전방후원분

칠지도

분국설

각주[편집]

이동 ↑ 여홍규 기자 (2010년 3월 23일). “한일 양국 역사학자 "임나일본부는 없었다"”. 문화방송.

이동 ↑ ““일본이 고대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說은 거짓말””.

이동 ↑ 大師諱審希俗姓新金氏其先任那王族草拔聖枝每若隣兵投於我國遠相興武大王

이동 ↑ ::자료마당::

이동 ↑ 한·일 역사공동위 결론… 日 "임나일본부설 근거없다",《세계일보》, 2008.12.21

이동 ↑ 일본서기 "百濟記云、壬午年、新羅不奉貴國。貴國遣沙至比跪令討之。新羅人莊飾美女二人、迎誘於津。沙至比跪、受其美女、反伐加羅國。加羅國王己本旱岐・及兒百久至・阿首至・國沙利・伊羅麻酒・爾汶至等、將其人民、來奔百濟。百濟厚遇之。加羅國王妹既殿至、向大倭啓云「天皇遣沙至比跪、以討新羅。而納新羅美女、捨而不討、反滅我國。兄弟人民、皆爲流沈、不任憂思。故、以來啓。」天皇大怒、卽遣木羅斤資、領兵衆來集加羅、復其社稷。一云、沙至比跪、知天皇怒、不敢公還、乃自竄伏。其妹有幸於皇宮者、比跪密遣使人問天皇怒解不、妹乃託夢言「今夜夢見沙至比跪。」天皇大怒云「比跪何敢來。」妹、以皇言報之。比跪、知不兔、入石穴而死也。"

이동 ↑ 김현구 (2002).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창작과비평사. 56~60쪽. ISBN 9788936482251.

이동 ↑ 김현구 (2002).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창작과비평사. 70~73쪽. ISBN 9788936482251. '일본(日本)'이라는 명칭은 7세기에 생겨난 말로 '일본현읍'이라는 표현이 보이는 509년에는 '일본현읍' 중의 '일본'이라는 표현은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동 ↑ 임라일본부 연구

이동 ↑ 삼한문제의 신고찰(6), 이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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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청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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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청의 난(妙淸-亂, 1135년 1월 19일(음력 1월 4일) ~ 1136년)은 고려 인종 때 승려 묘청 등이 금국정벌론과 서경천도론이 개경 귀족들의 방해로 무산되자 서경(西京)[1]에서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 군호(軍號)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하여 대위국(大爲國)을 선언하고 일으킨 반란이다. 대위국이라는 새로운 국가이념 차원의 반란은 김부식이 지휘하는 진압군의 공격을 받고 내부 분열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1년간 치열하게 지속되었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주의 사학의 선구자인 단재 신채호는 묘청의 난을 두고 '조선역사상 1천년래 제1대 사건'이라 했다.[2] 묘청의 난을 가리키는 요즘 이름으로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있다.


목차  [숨기기] 

1 배경

1.1 서경 천도 운동과 금국정벌론

1.2 서경파와 개경파의 갈등

2 개경파의 반발과 천도운동의 좌절

3 경과

3.1 묘청의 반란

3.2 정부군의 진압

4 평가

4.1 신채호의 평가

4.2 반론

4.3 묘청에 대한 비판

5 영향

6 기타

7 관련 항목

8 각주

배경[편집]

서경천도론을 처음 내세운 사람은 묘청이었다.[3] 그는 일관 백수한을 제자로 삼고 이른바 음양비술이라고 일컫는 풍수설을 바탕으로 서경세력들을 규합하고 있었다.[3] 그 결과 정지상을 비롯하여 내시낭중 김안, 홍이서, 이중부, 문공인, 임경청 등이 묘청의 풍수설에 매혹되었다.[3] 그는 유교를 신봉하는 관료들의 사대적이고 유약한 태도를 비판하면서 칭제건원, 즉 중국처럼 왕을 황제라 부르고 연호도 중국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풍수지리사상에 입각하여 개경은 이미 지세가 다 했고, 서경의 임원역에 궁궐을 지으면 36방의 주변국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릴 것이라며 왕을 설득했다.[2]


북방에서는 여진족이 힘을 길러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금(1115년)이라 한 다음 고려에게 형제관계를 맺자면서 스스로 형이라고 자처하고 있었다.[2] 묘청은 이를 두고 당치도 않은 일이라며 금나라의 국서를 내칠 것을 주장했다.


여진족은 본래 압록강 연안 및 연해주 일대에 살면서 늘 고려에게 복속해오던 민족이다. 고려의 관료들은 이같은 민족적 치욕을 당하면서도 소극적 태도를 취할 뿐이었다.[2] 묘청은 서경 천도와 아울러 금을 정벌할 것을 주장했다. 묘청 이외에도 정지상, 백수한 등이 칭제건원과 북벌에 적극 동조했다.[2]


서경 천도 운동과 금국정벌론[편집]

이런 상황에서 개경에 기반을 둔 기존 세력이 아닌 서경의 신흥 세력이 부각되었다. 이들 서경 세력은 고려 4대 국왕 광종 이후 주도권을 개경과 개경 이남의 문벌 귀족 출신에게 빼앗긴 세력이었다. 특히 서경 출신이자 빼어난 시인으로 알려진 정지상은 이자겸 제거에 공을 세운 권신 척준경을 과감히 탄핵해 그를 귀양 보내는 데 공을 세웠다. 이로써 정지상은 인종(仁宗)의 최측근으로 부상했다. 정지상은 서경 출신의 승려인 묘청의 사상을 신봉했고, 묘청을 인종에게 소개하였다.


풍수지리설의 대가(大家)로 알려졌던 묘청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고려가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은 수도인 개경의 지덕(地德)이 쇠약한 때문이라고 역설하였다. 따라서 나라를 중흥하고 국운을 융성하게 하려면 지덕이 왕성한 서경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덕(地德)이 다한 개경을 버리고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면 금나라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고, 중심국가가 될 수 있다고 묘청이 주장하였다. 묘청 일파는 역대 고려 사회의 민심을 지배해온 도참설에 의거하여, 인종의 용기를 북돋워 개경의 문벌 귀족 세력에 맞서 서경천도 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들 개경의 문벌귀족 세력을 유교주의, 사대주의 세력 또는 “개경파”로, 묘청 일파를 국수주의, 배타주의(排他主義) 세력 또는 “서경파”로 일컫기도 한다.


당시 고려 사회에는 신라 말기 이래 풍수지리설이 크게 성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묘청 등의 주장은 큰 호소력을 가지게 되었다. 1126년(인종 4) 정지상도 백수한과 더불어 묘청의 주장을 거들었다. 왕의 측근과 조정 대신들을 설득하여 묘청을 성현으로 추천하여 모든 정사의 최고 고문으로 삼을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묘청은 곧 인종의 총애와 함께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고, 묘청의 건의를 받아들인 인종은 1127년(인종 5) 이후 서경에 자주 거둥하였다. 이와 동시에 서경 천도는 곧 실현될 듯이 보였다. 처음에는 유신들이 의심하여 반대했으나 결국 그들이 내세운 풍수지리설에 설득 되어, 묘청 등은 인종의 서경행차에 성공하고 15조항의 유신정교(維新政敎)를 선포하였다.


1128년(인종 6) 묘청의 건의에 따라 임원역(林原驛)[4]에 대화세(大花勢)가 있으므로 그곳에 신궁인 대화궁을 세우면 천하통일을 이루고, 금나라 및 그밖에 많은 나라가 고려에 항복하여 조공할 것이라 하여 서경 천도 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당시 인종도 이자겸·척준경(拓俊京) 등의 난으로 궁궐이 소실되자 그해 11월부터 신궁 건설에 착수하게 되었다.


서경파와 개경파의 갈등[편집]

1131년(인종 9)에는 인종을 설복시켜 새 궁궐에 팔성당(八聖堂)을 신축하여 보살·석가·부동(不動) 등 8개의 상(像)을 그려서 안치시켰다. 이듬해 1132년 왕은 이자겸(李資謙)의 난으로 불타버린 채 있던 개경의 궁궐을 영수(營修)함에 있어 묘청과 그 일파들에게 궁터를 보게 하니, 묘청은 서경 천도를 목적으로 개경의 궁터가 서경의 그것보다 못하다고 역설하여 드디어 공사는 중지되고 왕은 묘청의 인도를 받으며 서경에 내려가 천도를 결정지으려 했으나, 김부식·이지저(李之底) 등 사대적(事大的)인 개경의 귀족이 반대하여 중지되었다.


그 후 인종은 다시 개경으로 가서 머물다가 1132년 왕궁이 수축되자 서경행을 결심한다. 묘청은 인종을 수행하여 서경까지 갔다. 왕궁을 수축하자 다시 서경으로 행차하였는데, 이때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고 돌풍이 불기 시작했다.[5] 이때문에 인종을 태우고 가던 말들이 놀라 엉뚱한 곳으로 달려가 진창에 빠져버렸고, 호종하던 시종들은 왕의 행방을 잃고 찾아다니는 사태가 발생했다. 게다가 그날 밤 눈발이 날려 낙타가 죽고 말과 사람이 다치기도 했다.[5] 서경 가는 길에 사고가 발생하자 개경파 귀족들에게 심한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묘청을 배척하는 소리가 높아갔다. 1133년 직문하성 이중, 시어사 문공유 등이 상소하여 묘청을 비롯한 그 일당들을 멀리할 것을 상소하였지만 인종은 수용하지 않았다. 인종은 오히려 1134년 묘청을 삼중대통지 누각원사로 삼고 자색의 관복을 하사하였다.[5] 인종의 신임을 확신한 묘청은 다시금 '칭제건원'을 상소하였지만 김부식이 이끄는 개경 세력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5] 이렇게 되자 조정은 묘청이 이끄는 서경세력과 김부식이 이끄는 개경 세력으로 분리되어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5]


그러나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친 왕은 마음이 바뀌었다.[6]


개경파의 반발과 천도운동의 좌절[편집]

그러나 당시 조정 안에는 서경 천도 계획에 반대하는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 김부식은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이들은 정지상·묘청 등 서경파의 의도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개경파의 반발에 초조해진 묘청 일파가 지나친 농간을 부린 것이 폭로되자 유신들의 강경한 반대가 대두되었다. 결국 인종은 서경 천도를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특히 묘청은 대화궁을 지으면 천하를 통일할 수 있고 금나라도 저절로 항복할 것이며, 그밖에 많은 나라가 와서 조공할 것이라고 장담하였으나, 준공 뒤에도 전혀 달라진 것이 없고, 오히려 자연재해가 잇따라 일어나기도 했다.


묘청은 상징 조작에 능했다. 이를 이용하여 인종의 총애를 받고 권력을 차지했다. 그러나 그 도가 지나쳐 오히려 신뢰를 잃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 가지 사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1132년(인종 10년) 음력 2월, 인종이 묘청을 따르게 하고 서경으로 가던 중 큰 폭풍우를 만나 수많은 인마가 살상되고 인종을 비롯한 대소신료가 고초를 겪었다. 이에 묘청의 입장은 난처해졌다. 폭풍우와 고생이 묘청의 탓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자 묘청은 무리수를 썼다. 기름이 들어간 떡을 강에 던졌던 것이다. 기름떡에서 흘러나온 기름이 수면에서 오색으로 빛났고, 묘청은 이를 용이 침을 토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이런 현상은 천 년에 한 번 있기도 힘든 상서로운 기운이라는 것이다. 묘청과 검교태사를 지낸 이재정 등 서경인 50여 명은 이때 금나라를 공격하자고 했다.


하지만 신중했던 인종은 결정을 미루고, 대신에 문공인과 참지정사 이준양에게‘용의 침’을 조사하게 했다. 그 결과‘용의 침’은 기름떡을 가지고 농간한 것임이 탄로났다. 묘청과 정지상 등의 정치적 위신은 크게 실추되고, 조정에서는 묘청 일파에 대한 숙청 요구가 잇따랐다. 그러나 인종은 용인하지 않았다. 오히려 얼마간은 서경의 대화궁에 행차할 것을 요청하는 묘청의 건의를 절반쯤 받아들여 옷만이라도 보내게 했다. 묘청이 무리하면서까지 대화궁 행차를 거듭 왕에게 청원한 것은 서경 천도를 기정사실화하고자 했던 때문이다.


이외에도 풍수지리상 명당이라던 대화궁이 여러 번 벼락을 맞아 불탄다거나, 극심한 가뭄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굶어죽기도 했으며, 또 대동강에서 뱃놀이하던 인종이 풍랑을 만나 큰 위험을 당하기도 했다. 이런 일이 계속되자, 인종도 묘청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중(李仲)·문공유(文公裕) 등이 묘청 배척상소를 올렸으며, 이어서 임완(林完)이 시폐(時弊)를 통론하고, 마침내 개경파의 거두인 김부식이 서경 행차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니, 그에 인종이 서경 천도를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결정적 사건이 발생한다.


경과[편집]

묘청의 반란[편집]

이렇게 사태가 반전되자 묘청은 1135년(인종 13년) 정월 어서경의 분사시랑 조광(趙匡) 및 병부상서 유참 등과 반기를 들고 개경의 중앙 정부에서 파견된 부류현(副留縣) 수령 이하 관리들과 상경인(上京人)[7]으로서 서경에 와 있던 사람을 모조리 잡아 가두었다.


한편, 자비령 이북의 길을 막고 서북면의 모든 관청, 즉 주군수까지의 관리들을 서북인만으로 충당시킨 다음 서북면 안에 있는 모든 고을의 군대를 서경에 집결하게 하고 국호를 대위국(大爲國), 연호를 천개(天開), 군대의 호칭을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고 하였다. 이어 개경으로 진격해 들어갈 뜻을 밝혔다.


정부군의 진압[편집]

인종은 사신을 보내 반란을 멈출 것을 권유했으나, 묘청 일파는 왕을 바꾸기 위해 일어난 반란이 아니며, 서경으로 천도하면 다시 충성할 것이리라고 답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신하가 군주를 오라가라 할 수 없다며, 이를 역모로 규정하고 토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조정에서는 김부식을 평서원수로 하는 진압군을 파견하였다. 김부식은 출정에 앞서 개경에 남아 있던 묘청 일파인 정지상·백수한·김안(金安) 등을 참수하였다.


김부식은 좌·중·우 3군을 지휘하여 서북면으로 진격하였다. 평산역―관산역[8]―사암역[9]을 거쳐 성천에 이르렀다. 거기서 토적(討賊)의 격문을 발하여 여러 성에 보내어 서경 주위의 여러 성(城)을 산하에 끌어들여서 이들을 달래었다. 다시 3군을 지휘하여 연주(連州)[10]를 거쳐 안북대도호부[11]에 다다랐다. 그 과정에 많은 성들이 중앙정부군(진압군)에 호응·협력하게 되어 정세는 진압군에게 유리하게 되었다.


진압군은 서경을 먼저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지역을 제압하여 서경을 고립시키는 데 주력했다. 이윽고 서경 주변 지역에 대한 제압이 끝나자 그제야 진압군은 서경을 포위하였다.


서경에는 7∼8차례 사람을 보내어 항복을 권유하였다. 승산이 없음을 안 조광 등이 묘청과 유참, 유참의 아들 유호(柳浩)의 목을 베어 분사대부 윤첨(尹瞻)을 고려 조정에 보내 항복의 뜻을 표시하고 죄를 용서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고려 중앙정부에서는 조광 등의 죄를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고, 윤첨을 옥에 가두었다. 이 사실을 안 조광은 빠져나갈 길이 없다고 판단하고, 끝까지 맞서 싸울 것을 결심한다. 그 뒤 개경 정부의 어떠한 회유 교섭도 단호하게 거절하였고, 인종과 김부식이 회유하기 위해 보낸 사절들도 죽였다.


묘청은 어이없이 죽었지만, 반란은 그 후 약 1년 동안 계속되었다. 진압군은 중·좌·우·전·후의 5군으로 나누어 평양성을 완전 포위하였으나, 반란군의 결사적인 항전으로 크게 고전하였다. 그러나 포위당한 평양성에서는 식량 부족으로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고, 1136년(인종 14) 2월 진압군은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이미 식량도 사기도 떨어진 반란군은 진압군이 성으로 진입하자, 도망가기에 이르고 반란군의 수장인 조광 등이 스스로 몸을 불태워 목숨을 끊자, 성 안의 사람들이 장수 최영(崔永)을 붙잡아 정부군에 항복함으로써 반란은 끝났다.


평가[편집]

[중립 필요] 묘청의 난에 대한 평가는 찬반이 분명하다. 조선 말 일제 강점기 초기에 활동했던 신채호는 민족사관의 입장에서 묘청의 난을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으로 평가한다 만일 성공했으면 조선사가 독립적 진취적으로 발전했으리라고 한탄한다(묘청 개인에 대하여는 광망하다는 표현을 쓰며 부정적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적지 않다. 당시 개경세력과 이에 반발한 지방 세력(서경) 간에 권력투쟁일 뿐이며, 금국정벌론 등은 단지 명분뿐이라는 것이다.


이 서경천도운동은 그들의 공리심과 서경인의 기질 등이 작용하였음은 물론이나, 그밖에 그들의 정치적 혁신의 의욕도 간과할 수 없다. 당시 국내외의 정세에 비추어 개경의 타성적이며 부패한 귀족 사회의 생태를 좌시할 수 없어, 당시 인심을 지배하고 있던 음양도참설을 교묘히 이용하여 서경인 중심의 중흥정치를 베풀어 보고자 한 것이 그들의 당초의 이상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신채호의 평가[편집]

신채호는 한국 고유의 낭가사상이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의 좌절로 단절되었다고 하였다.


서경 전역(戰域)을 역대의 사가들이 다만 왕사(王師)[12]가 반적(反賊)을 친 전역으로 알았을 뿐이었으나, 이는 근시안의 관찰이다. 실상은 이 전역이 낭(郎)·불(佛) 양가 대 유가(儒家)의 싸움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이 전역에서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승리하였으므로 조선의 역사가 사대적·보수적·속박적 사상, 즉 유교 사상에 정복되고 말았거니와, 만일 이와 반대로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 등이 승리하였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진취적 방면으로 진전하였을 것이니, 이 전역을 어찌 ‘일천년래 제일대사건(一千年來第一大事件)’이라 하지 아니하랴.

— 신채호, 《조선사연구초》

민족사학자 신채호는 묘청의 운동을 낭불양가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고,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으로 규정한 바 있다.[13] 그는 '우리 나라의 종교, 학술, 정치, 풍속이 사대주의의 노예가 된 원인이 바로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실패한 데 있다.[14]'고 하면서, 이 사건이 바로 고대 이래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진취적이고 독립적인 자주사상이 사대적 유교사상으로 바뀌는 전환점'이라 했다.[14] 그에 따르면 '낭·불 양가 대 유가, 국풍 대 한학파, 독립당 대 사대당,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전쟁이며 전자의 대표는 묘청, 후자의 대표는 김부식이다.[14]


그는 묘청의 난이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유가의 사대주의가 득세하여 고구려적인 기상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애석해 하기도 했다.[13]


반론[편집]

묘청이 주장한 금국정벌론이 현실성이 없다는 평가다.[출처 필요] 식민 치하에 있던 신채호가 묘청을 적극적으로 평가했던 것은 금국 정벌이라는 주장 때문이며, 조선의 독립 의지를 키우기 위해서라도 민족 자주적인 입장에 선 사례를 찾고자 했다는 것이다. 신채호의 기대와 달리 묘청 세력의 금국 정벌 주장은 실현은 거의 힘들었으며, 기병강국이던 금나라를 보병 위주의 고려군이 공격하여 성과를 내기는 힘들다고 주장했다. 방어자 입장에서는 전통력으로 산성 중심으로 적 기병대의 충격력과 기동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방어가 가능했으나, 만주로 공격을 하게 된다면 우수한 기병대가 절대 부족했던 고려가 만주 일대의 평원에서 치러지는 전투에서는 절대 불리할 것이란 주장이다. [출처 필요]


묘청에 대한 비판[편집]

묘청은 간신 혹은 임기응변가라는 비판도 있다.[출처 필요] 경과에서 보았듯, 자신의 군대마저 제대로 조직하지 못한 묘청에게 금국정벌론은 일종의 여론호도책이며, 묘청이 권력을 얻는 방식이나 세력을 규합하는 방법은 전형적인 간신의 방법이었다고 비판한다. 묘청과 정지상 등이 원했던 것은 단지 개경 귀족 세력이 독점한 권력을 서경 세력이 대체하는 것뿐이라는 비판이다.[출처 필요]


영향[편집]

묘청의 난이 진압된 뒤 고려사회는 표면상 평온을 되찾았으나, 이 반란이 고려사회에 끼친 영향은 컸다.


우선 권력구조에서 서경의 지위가 크게 격하되었다. 이와 함께 고려 권력구조의 균형이 깨졌다. 즉 서경 세력은 개경의 문신 귀족 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담당하여 왔는데, 서경 세력의 쇠퇴는 개경의 문신 귀족 세력의 독주를 가능하게 하였으며, 문신(文臣)의 위신을 높이고 무신(武臣)을 멸시하는 풍조를 낳게 하여 후에 무신의 난을 유발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문신 귀족 세력은 더욱 득세하게 되어 왕권마저 능멸하는 풍조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자겸의 난을 극복했던 것을 계기로 새로운 정치 질서를 수립할 수 있었던 기회를 인종은 인재 기용의 실패로 놓쳤던 것이다. 결국 뒤이어 왕위에 오른 의종은 무신의 난으로 인해 정상적인 정치체제가 붕괴되기에 이르게 된다. 인재 기용의 실패로 왕권은 땅에 떨어지게 된 것이다.


당시 문신 귀족사회가 안고 있던 정치적·사회적·경제적인 모순과 폐단은 뒤에 무신정변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기타[편집]

신채호는 김부식의 행위야 말로 그 어느 전란보다도 우리 역사를 단절, 왜곡시키는 데 악영향을 끼쳤다고 보았다. 그에게 김부식의 승리는 곧 묘청이 대표하는 민족 고유의 전통적인 '진취적 자주사상'에 대한 '사대적 보수적 속박사상-유교사상'의 승리였다.[15] 그래서 이 사건을 조선역사상 1천년래 제1대 사건이라 부른 것이다.[15]


관련 항목[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