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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조금씩배워보자/동서고전 200선

E09 –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Gargantua et Pantagruel) / 라블레(F. Rabelais, 1494~1553)

E09 –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Gargantua et Pantagruel) / 라블레(F. Rabelais, 1494~1553)

(출전: 동서고전 200선 해제3 / 반덕진 / 가람기획)


 16세기 프랑스 인문주의자인 라블레가 지은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등 전 5권은 거인 가르강튀아와 그의 아들 팡타그뤼엘 및 동료들의 모험을 다룬 익살스럽고 풍자적인 이야기다. 르네상스의 정신을 구현한 이 우스꽝스러운 패거리들의 여행과 모험을 통해 작가는, 중세적인 어리석음과 미신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으며, 교육 정치 전쟁 등 시사적인 문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내용이 외설스럽고 반종교적이라 하여 이 작품은 금서가 되었고 작가는 당국으로부터 탄압을 받기도 했다.


a. 다양한 경험과 교양을 갖춘 휴머니스트

 몽테뉴와 더불어 16세기 프랑스 르네상스 문학의 대표자인 라블레는 풍부한 익살과 기지로 새로운 시대를 연 풍자작가이자 인문주의자이다. 투렌 지방의 부유층 집안에서 태어나 1520년에 수도사로 수도원에 들어가 철학신학을 공부하는 한편, 당시 이단으로 간주되던 고대 그리스 어를 독학하고,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작품을 라틴 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527년경 수도생활을 그만두고 재속신부가 된 뒤 파리 등지에서 의학공부를 시작했다. 1530년 몽펠리에 대학 의학부에 등록한 그는 곧 의사 자격시험에 합격하고, 곧 그 대학의 의학부 사상 최초로 고대 의서를 그리스 원전에 근거한 강의를 했다. 1532년 리옹에 가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격언이 수록되어 있는 <히포크라테스의 격언집>과 갈레노스의 <육아법>을 직접 편집했다. 그후 리옹 시 시립병원 의사에 임용되었고, 1537년 몽펠리에 대학에서 의학 박사학위를 받고 사체를 이용한 해부학을 강의했다.

 이즈음 네덜란드의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를 사사하기도 했고, 1532년(38세) 저자를 알 수 없는 통속소설 <거인 가르강튀아의 위대하고 귀중한 연대기>의 성공에 자극받아 첫번째 장편소설 <제2서 팡타그뤼엘>을 가명으로 출판했다. 이 소설은 그의 이후 작품들보다 길이가 짧고 지적 깊이도 부족하지만, 그때까지 프랑스의 비슷한 문학 장르에서도 유사한 문학작품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제2서>에서 민중적인 웃음과 인문주의 및 스콜라 철학신학을 적절히 이용하여 프랑스어 산문을 구사했다. 이 책은 대체로 호평을 얻기는 했어도, 인문주의자들 중에는 라블레가 경솔하게 학자의 정도에서 벗어났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고, 파리 대학 신학부의 한 교수는 이 책을 <추악한 책>이라고 혹평했다.

 이후 그가 새 작품을 세상에 내놓을 때마다 신학부는 발매금지 처분을 내렸고, 그는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다행히 인문주의자이자 종교적 관용적 정책의 추진자였던 국왕 측근인 장 뒤벨레(Jean du Belly) 형제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이들과의 교유는 그의 시야를 정치 문화 종교 사회 각 방면으로 넓혀주는 기회가 되었다. 이제 그는 다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갖춘 휴머니스트로서 예리한 비판정신의 소유자가 되었던 것이다.

 제2서가 호평을 받자 그 전편에 속하는 <제1서 가르강튀아>(1534)(40세)를 저술했다. 이를 <제2서 팡타그뤼엘>과 비교해보면 그 차이는 분명하고, 이 제1서에서 그는 참된 자기를 발견했다고 하겠다.

 1530년대 후반 이후에는 칼뱅주의 성립과 발전에 따르는 이단에 대한 탄압이 격화된 시기였다. 복음주의 신앙을 지키면서 공식적인 문화의 경직과 기만을 풍자한 라블레는 당연히 당시 교회로부터 위험 인물시되었으며, 그가 장대하게 표현한 생의 찬가는 교조주의화한 칼맹 파의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제3서 팡타그뤼엘>(1546)(52세)과 <제4서 팡타그뤼엘>(1552)(58세)은 작가의 원숙함과 동시에, 이러한 시대를 꿋꿋하게 살아나간 그의 힘들고 어려웠던 생애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가 투옥되었다는 소문이 나돈 직후 그는 죽었다. 제5서는 그의 사후인 1564년에 출판되었다.


b. 프랑스의 르네상스와 라블레

 고전 문화의 부흥을 매개로 한 <인간과 세계의 재발견>이라 할 수 있는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활짝 개화했다. 이렇게 찬란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를 가장 먼저 그리고 적극적으로 수용한 나라는 프랑스다. 그리스의 문학예술이 로마를 거쳐 이탈리아에 전수되고 이어 프랑스에 영향을 주었다.

 프랑스 인들은 이탈리아에 활짝 핀 문학과 예술, 풍요로운 삶 등 고대문화의 향기에 심취했다. 수차에 걸친 이탈리아 원정에서 그곳의 찬란한 문화에 매혹된 프랑스 인들은 문학과 예술의 수입에 열을 올렸고, 수많은 건축가 조각가 화가 학자들을 초빙하여 프랑스 문예부흥기를 이룩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세상을 떠난 것도 프랑스였다. 더욱이 프랑수아 1세가 세운 <왕립학사원>에는 신학문에 매료된 젊은 학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본격적으로 고전을 연구하기에 이르렀고, 이탈리아처럼 라틴 어와 그리스 어를 배우는 것이 학자들의 덕목이자 교양의 필수조건이 되었다.

 이탈리아 문예부흥은 특히 조형예술에서 빛났으나 프랑스의 문예부흥은 문학방면에서 진가를 발휘했는데, 16세기 전반은 라블레, 후반은 몽테뉴가 대표했다. 의학을 공부한 수도성직자로서 고전연구에 몰두한 라블레는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에서 <<하고 싶은 대로 하라>>라는 단 하나의 규칙으로 평등하고 자유로운 젊은 남녀들이 오직 즐거움만을 위해 생활하는 이상향을 그렸다.

 라블레의 사상은 이와 같이 현세적인 쾌락과 행복을 중시하는 인간적인 본능에 도덕적 기준을 두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존재가치, 즉 인생의 의미가 인간중심의 판단기준에 따라 사고되고 평가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깔려 있다. 따라서 그의 우화적인 연대기가 시사하는 바는 인간의 자유와 자아실현을 막는 어떠한 제도나 관념도 타파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가치있는 것은 인간의 자연성, 즉 본능적으로 안락하고 행복하고자 하는 인간성의 존중이다. 그것은 현세적인 삶의 향유뿐만 아니라 무한한 자유와 지식에 대한 욕구,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정신으로 이어진다.

 또한 라블레는 이탈리아의 휴머니스트들은 물론, 에라스무스 등과 교유하며 삶의 지혜와 지식을 배워 교화함으로써 프랑스에 르네상스의 불길을 당긴 진정한 선구자가 되었다.


c. 호방한 인물 내세워 중세적 세계관 비판

 라블레의 대표작인 이 작품은 모두 5서로 구성되어 있는데, 거인 가르강튀아와 그의 아들 팡타그뤼엘 및 동료들이 벌이는 모험을 다룬 익살스럽고 풍자적인 이야기다. 이 작품에 앞서 1532년 거인 가르강튀아에 관한 작가 미상의 책이 리옹에서 간행되었다. 이 책이 인기를 얻게 되자 라블레는 그것과 같은 책을 쓰려는 계획 아래 현재 제2서로 일컬어지는 <팡타그뤼엘>을 발표했다. 이것의 성공으로 팡타그뤼엘의 부친 가르강튀아의 이야기인 <제1서 가르강튀아>를 간행했고, 이어 3서 및 4서가 간행되었으며 5서는 그의 사후에 출간되었다.


   제1서

 거인국의 왕 그랑그제의 왕자 가르강튀아는 태어나면서 <응아>하고 우는 대신 <술 줘>하고 운 호걸이다. 일정한 나이가 되자 가정교사에 의해 그의 교육이 시작되었다. 최초의 두 교사는 중세풍의 구식교육을 하고 있었다. 그 결과 가르강튀아는 머리가 이상해져 바보가 되어버렸다. 부왕은 화가 나서 아들을 포노크라트(<맹렬한 공부>의 뜻)씨에게 맡겼다. 그는 가르강튀아를 파리로 데려가 우수한 신식교육을 실시했고, 가르강튀아는 점차 그의 총명함을 되찾았다.

 그 사이에 그의 고국은 이웃 나라 왕 피크로콜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가르강튀아는 부왕의 부름을 받고 급히 귀국했다. 이 거인 왕자 앞에는 피크로콜의 포탄 따위는 하루살이 정도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뛰어난 역할을 한 것은 가르강튀아의 신하 중 한 사람으로서, 호탕한 성격에 몰골은 괴이하게 생긴데다가 끝없는 먹보인 장 신부였다. 전쟁에서 승리한 가르강튀아는 포로를 방면하고 승리의 주역인 장 신부에게 테렘 수도원을 선물했다. 수도원에는 훌륭한 용모와 명문 가문의 청춘남녀들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행하라>>라는 유일한 계율에 따라 공동생활을 하고 있는데, 작가는 수도원을 유토피아(이상향)로 묘사하고 있다.


   제2서

 가르강튀아는 나이 48세에 아들을 낳아 팡타그뤼엘(<목마르다>의 뜻)이라 이름지었다. 이 아이는 어려서부터 대단한 식욕과 날카로운 지성을 보였다. 그는 각지의 대학을 편력한 후 파리에 머물러 살게 되었다. 거기서 교활하고 겁이 많은 파뉴르즈(<뛰어난 명인>의 뜻)를 신하 겸 친구로 사귀게 되었다. 갑자기 고국이 디프소드 사람들의 침략을 당하게 됐다는 소식이 전해져 팡타그뤼엘은 디프소드 정벌을 위해 출전하게 되었다. 팡타그뤼엘의 용기와 능력(목마르게 하는 능력)을 능가하는 파뉴르즈의 활약이 그려진다.


   제3서

 이 3서는 내용에 있어 가장 심오한 부분이다. 여기서는 팡타그뤼엘이 거인의 특성을 잃고, 스토아 철학과 크리스트 교의 교리를 따르는 당대의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구현되고, 파뉴르즈는 이제 검은 것을 흰 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솜씨를 갖게 된다. 파뉴르즈는 결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망설인다. 아내에게 배신당하거나 얻어맞지는 않을까 하고 생각한 후, 결국 파뉴가 결혼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팡타그뤼엘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그 문제를 놓고 토론을 벌인다. 그 토론은 극히 반여성적이어서 여성을 비웃는 결혼론이 전개된다. 그러나 결국 결정적인 해답은 얻지 못하여 작중인물들은 <행운의 신> 디브 브티유의 신탁을 구하기 위해 배를 타고 끝없는 여행길에 나선다.


   제4서

 제4서는 팡타그뤼엘과 파뉴르즈의 대항해에 대한 묘사로 시작된다. 유명한 <파뉴르즈의 양>의 이야기며, 폭풍을 만났을 때의 파뉴르즈의 겁 많은 본성 폭로, 그리고 여러 가공의 섬들을 항해하면서 벌어지는 풍자로 독자들을 웃기고 있는데, <대항해 시대>의 반영으로서 정확한 지식과 자료를 제법 갖추고 있다. 여기서는 사법관과 구교도 및 신교도 등이 풍자와 독설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제5서

 끝없는 편력 끝에 그들은 마침내 디브 브티유를 만나게 되고 그에게서 신탁을 받게 되는데, 그것은 단 한마디 <<마셔라(Trinch)>>였다. 여기서 이 신탁을 두고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파뉴르즈와 장 신부는 <향기로운 술을 마셔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진리를 터득한 <팡타그뤼엘 주의자들>에게는 그것이 <지식의 온갖 샘물을 마셔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즉, 텔렘 수도원의 유일한 법규인 이 <<마셔라>>라는 말은 결국 무지는 불행의 원인이므로 항상 사실에 직면하여 그것을 알기 위해 힘쓰라는 것, 지식이 확대됨에 따라서 인간의 행복과 사랑은 심오해지고 확대된다는 뜻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d. 프랑스 사실주의의 원천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보아 구성이나 통일에 허술한 점이 많으나 작중인물인 거인 팡타그뤼엘의 자유분방한 삶의 태도와 인간에 대한 신뢰, 그리고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라블레를 르네상스 초기 제일의 휴머니스트로 만들고 있다.

 우화적인 황당무계한 모험, 다양한 직업인들을 등장시켜 사건에 대한 그들의 의견을 개진함으로써 인간의 과오를 객관화시키는 방법, 그리고 결론을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고 신탁을 구하러 떠나는 팡타그뤼엘의 지혜에서 더욱 큰 호소력을 느낀다. 온갖 망상과 착오와 실수로 점철된 그의 파란만장한 삶의 모험과 파노라마는 마지막 장에 이르러 거인국에 도착함으로써 마무리된다. 그곳에서의 신탁은 허망하게도 단 한마디 <마셔라>였다. 그것은 인간적인 본능에 충실하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사랑

 그의 작품을 분석해보면 일정한 형식에 의해 다듬어지지 않고 내용도 매우 복잡 다단하다. 그래서 이 작품의 전편에 흐르는 작가정신을 포착하기도 쉽지는 않다. 그러나 우선 감지되는 것은 작가의 인간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감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살았던 작가는 인간을 한없이 신뢰하고 행동하는 인간의 능력에 대해 무한한 가능성이 있음을 믿었다.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의 어린 시절의 교육을 통해 느낄 수 있는 라블레의 교육관도 인간신뢰에 기초를 두고 있고, 그의 도덕과 역시 어디까지나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인 것이다.


   자연에 대한 사랑

 작가가 묘사하는 이상사회인 텔렘 수도원의 유일한 계율은 <<멋대로 행하라>>였다. 그에게 있어서 악은 자연을 훼손하고 자연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여기에 그의 작품을 지탱하고 있는 또 하나의 기둥은 자연애이다. 라블레는 그 작품 속에서 자연에 어긋나는 것과 자연을 훼손하는 것에 대해서는 집요하게 공격한다. 종교가 강조하는 도덕, 카톨릭의 금욕주의, 신구양교의 옹고집, 금식 등이 공격의 대상이 된다. 이와같은 인간성과 자연에 대한 찬미 그리고 그것에 거슬리는 것에 대한 맹공격을 펼침에 있어 그의 사상은 사실주의로 표현되었다. 그의 사실주의는 묘사할 대상물을 오밀조밀 관측하는 소심한 사실주의가 아니라, 대상이 지니는 생명력의 자유롭고 완전한 묘사를 의미한다. 예술에서 라블레의 흥미를 끈 것은 미보다는 에너지다.

 작가는 외관상 극히 중세적이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에 르네상스 시대의 근대성을 한껏 가미하여 이것으로 하여금 이 시대 소설의 최대 걸작 중 하나가 되게 했다. 아울러 이 작품에 넘치는 인간성, 거짓에 대한 공격, 진리탐구 정신, 그리고 건강하면서도 호탕한 웃음의 정신은 중세적 세계관을 대담하게 비웃었다. 당시 종교적인 사상대립이 심화되고 이단에 대한 탄압이 심화되는 와중에 집필된 이 작품은 노골적인 자기 주장 대신 정교한 풍자와 은유가 넘치는 프랑스 르네상스의 봄과 가을을 표현한 대작이다.

 한편 라블레의 작품들은 여러 학문, 즉 스콜라 철학과 신학, 그리고 의학 및 법학을 섭렵한 사람의 작품이다. 그는 살아 있을 때 이미 인문학에 조예가 깊다는 평판을 얻었다. 그는 종교적으로 일관성을 갖고 있지는 않았으며, 그의 작품들은 금서목록에 올라가 프랑스 밖에서만 출판될 수 있었다. 그의 작품들은 후세의 프랑스 작가들, 예를 들면 볼테르와 발자크 등은 물론 스위프트, 킹슬리와 같은

외국작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