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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조금씩배워보자/동서고전 200선

E11 – 타르튀프 Tartuffe / 몰리에르(Jean Moliere, 1622~1673)

E11 – 타르튀프 Tartuffe / 몰리에르(Jean Moliere, 1622~1673)

(출전: 동서고전 200선 해제3 / 반덕진 / 가람기획)


 희극작가이자 배우로 평생을 연극에 바친 몰리에르가 거짓 종교가의 위선과 그 위선에 속아 넘어가는 어리석음을 그린 5막의 희극. 종교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5년간이나 공개상연이 금지되었던 이 작품은 풍속희극의 단초를 제시하고 성격희극을 완성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삶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연극이었던 몰리에르는 이 작품 속에서 위선의 문제를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관련시켜 고찰함과 동시에, 인간본성의 문제를 형상화함으로써 개인과 사회의 갈등이라는 현대적 문제를 선구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a. 연극에 바친 순교자적인 삶

 몰리에르는 문화예술의 후원자였던 프랑스의 루이 14세 치하에서 활약한 코르네유, 라신과 더불어 프랑스 3대 고전작가로, 부유한 궁정 실내장식업자의 장남으로 태어나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부친은 아들이 가업을 잇기를 희망했으나 몰리에르는 경제적으로 보장된 삶을 포기하고 연극인의 길을 택하는 21세의 회심 이후 그의 삶은 오로지 연극만을 위해 존재하게 된다.

 학업을 마칠 무렵 재능있는 여배우 마들렌 베자르와 함께 <유명극단>을 창립하여 예명을 몰리에르라고 했다. 이 극단은 흥행에 실패하여 빚만 잔뜩 지게 되었고, 그는 한때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극단은 결국 13년 동안의 지방 유랑의 길에 나서게 되는데, 지방귀족의 도움을 받으며 차츰 실력을 쌓아 리옹에 본거지를 두는 유력한 지방극단으로 성장했다. 그동안 그는 극단 경영자로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동시에 이탈리아 즉흥극의 계통을 있는 연기술 작극법을 익힌 것으로 짐작된다. 1658년(36세)이 되어서야 파리에 진출하여 루브르 궁전의 루이 14세 앞에서 공연하여 인정을 받았다. 이로 인해 왕실 소유의 프티 부르봉 극장 사용을 허가받았다.

 다음해에 참신한 풍자희극 <웃음거리 재녀>의 성공으로 기반을 쌓았고, 이어서 아르놀프라는 개성적 인물을 창조한 <여인학교>로 명성을 드높였다. 그는 <우수한 극시인>의 자격으로 국왕으로부터 연금을 받고 루이 14세의 총애를 받았으나 한편으로는 많은 적들을 만들었다.

사교계나 배우작가들이 악의에 찬 중상과 비판을 가해오기도 했으나 그는 용감히 싸웠으며, 이러한 투쟁속에서도 극단원들의 생활을 보살피고 왕을 즐겁게 했어야만 했다. 이 눈부신 활동과 과로의 생활 속에서 그는 13년 동안 30편에 가까운 작품을 썼는데 그 대부분이 5막극이었다.

 1662년(40세) 마들렌의 여동생(혹은 딸)과 결혼했으나 21년 연하인 이 젊은 아내와의 가정생활은 원만치 못했다. 1664년(42세)에 발표한 <타르튀프>는 거짓신앙을 묘사했기 때문에 종교에 대한 모독이라 하여 신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아 상연금지되었다. 그후 무대에 올린 <돈 주앙>은 사태를

한층 악화시켰다. 이로 인해 교회측에서는 <타르튀프>를 5년, <돈 주앙>을 평생 동안 상연금지시켰다.

 당국과의 싸움에서 몰리에르는 극단을 혼자 이끌어갈 수 밖에 없었다. 배우도 작가도 확보할 수 없었던 그는 더 많은 작품을 씀으로써 작가의 부족을 메워나갔다. 드디어 1966년(44세) 그의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인간혐오자>를 발표했는데, 처음부터 식견 있는 관객들로부터 걸작으로 평가되었다. 그후에도 <구두쇠>, <여학자들>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의학 풍자희극 <상상병 환자>가 그의 최후의 작품으로, 그 상연에서 건강악화를 무릅쓰고 주인공역을 맡은 그는 연기 도중 발작을 일으켰으나 즉흥적 연기로 위장하여 버텨나갔다. 그러나 기어이 무대 위에 쓰러져 실려나가고 각혈 끝에 숨을 거두었다. 임종때 아내 아르망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신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목사의 입회도 허락되지 않았다 한다.

 그의 사후 아르망드는 배우들을 이끌고 게네고 극장으로 옮겼으나 국왕의 명령으로 경쟁관계에 있던 오텔 드 부르고뉴 극장과 합병함으로써 새로이 <국왕의 극장>이 결성되었다. 이것은 현재의 국립극장 코메디 프랑세즈의 전신이다.

 그의 작품은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 극장의 가장 중요한 레퍼토리로서 상연을 거듭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의 작품들이 시대풍속에 대한 예민한 시각과 비판정신에 뒷받침되어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인 인간상을 묘사했기 때문으로 평가되고 있다.


b. 시대적 배경과 작품세계

르네상스 시대 다음에 오는 문학의 흐름은 고전주의였다. 프랑스적인 것의 정수는 고전주의에서 발견할 수 있다. 프랑스 고전주의는 고대와의 밀착에도 불구하고 그 나름대로 근대적이고 또 엄밀히 말해 프랑스적이다. 문학을 한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에 도전하는 치열한 지적 추구의 과정이라고 볼 때, 프랑스 고전주의도 근대의 여명기에 프랑스 인이 펼쳤던 이 지적 모험의 증언이며 인간과 세계에 대해 프랑스 인이 가졌던 인식의 영원한 유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태양왕 루이 14세

 프랑스의 당시 집권자는 <태양왕>을 자처한 절대군주 루이 14세로, 그는 화려한 궁정생활을 영위하여 유럽 군주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인물이다. 그는 6개의 궁전 중에서도 특히 파리에서 떨어진 베르사유 궁전을 좋아하여 그곳에 하나의 작은 우주를 꾸몄다.

 베르사유 궁전에서는 왕을 중심으로 한 궁정귀족들이 낮에는 산책과 수렵, 밤에는 연회와 무도회가 열리는 등 사치와 방종한 생활이 계속되었다. 이곳에는 자연스럽게 미와 기지, 사교와 에티켓, 연극과 문학이 집결되었다.

 루이 14세 자신이 청년시절에 소설과 시를 애독하고 춤과 스포츠에 열중했으므로 그는 프랑스의 문학과 예술을 후원하여 번성하게 되었다.

루이 13세 때인 1635년에 프랑스 아카데미가 창설되고 동시에 작가가 지켜야 할 <삼단일 법칙>과 <순수성의 법칙>등 문학법칙이 제정되었다.

삼단일 법칙이란 하루 동안에 동일한 장소에서 한 사건이 행해져야 한다는 규칙이고, 순수성의 법칙이란 비극은 비극적인 요소로만 그리고 희극은 희극적인 요소로만 작품을 써야 한다는 규칙을 말한다. 이 규칙 밑에서 이른바 프랑스의 3대 고전주의 작가, 즉 <르 시드>의 작가 코르네유와 <페드르>의 작가 라신, 그리고 <인간혐오자>와 <타르튀프>의 작가 몰리에르가 탄생하게 된다.


   작품세계

 앞의 두사람이 비극의 대가였던 반면 프랑스의 모든 희극적 전통은 몰리에르에게 흘러 들어와서 새롭게 흘러나온다. 그는 고대로부터 내려온 희극적 유산을 흡수하여 그것을 근대적으로 재창조하기에 성공한, 그리하여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현재성을 잃지 않고 있는 희극의 가장 높은 봉우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예술적 승리는 단순한 천재성의 결과만은 아니었다. 12년간의 긴 유랑극단 생활을 통한 연극적 수련을 거쳐 파리로 입성했을 때, 그가 내세운 희극은 당시의 규범주의자들의 요구에 배치되는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고상한 웃음과 로마네스크한 줄거리의 요구에 대해서는 당대 풍속에 대한 가차없는 풍자를, 오락으로서의 희극개념에 대해서는 현실참여로서의 희극개념을 작품의 실제를 통해 보여주었고, 그래서 그는 더욱 어려운 역경의 연속 속에 빠져들었다.

 적대적인 연극인들의 끝없는 질시, 현학적인 문사들의 이론적 시비, 종교계의 도덕적 규탄은 끝없이 지속되어, 그는 언제나 논쟁과 모함의 와중에 있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자신이 선택한 예술의 지향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고, 현실의 벽을 뚫고 나가는 예술적 방법에 대한 탐구를 계속하면서 그것을 통한 반성과 갱신의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작품들은 바로 그런 삶의 형상물들이기에 일회적인 천재성을 뛰어넘는 풍요와 깊이를 역설적으로 획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c. 종교가의 위선적 행위 비판

 <위선자>란 부제를 가진 이 5막 4짜리 운문극은 거짓신앙을 풍자한 내용으로 인해 그 공개상연을 위해 5년 동안 투쟁해야 할 만큼 문제가 되었던 작품이다. 작가는 여기서 인간의 악덕과 당시의 파리 사교계를 활보하고 다녔던 위선자들을 가차없이 풍자하고, 타르튀프와 같은 위선자가 없어질 때 프랑스가 더욱 번영하리라는 점과, 국왕이 그들의 도움 없이도 진실과 허위를 식별할 수 있음을 암시했다. 어쨌든 이 작품으로 인해 <타르튀프>의 이름은 현재에도 <위선자>를 뜻하는 보통명사로 사용될 만큼 널리 알려져 있다.


   제1막 

 돈 많은 소시민 오르공은 전처의 소생 둘을 데리고 젊은 에르밀과 재혼했다. 이 오르공의 집에는 얼마 전부터 종교가인 타르튀프가 동거하고 있다. 그는 거지와 같이 떠도는 신세로 이 집에 들어왔으나, 오르공과 오르공의 어머니는 그를 성인군자처럼 모신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가 위선자요, 사기꾼으로 비쳐지고 있다. 시골에서 돌아와서도 오르공은 가족의 안부보다는 타르튀프의 건강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는 형편이다. 주위에서 아무리 이야기해도 오르공의 생각을 바꿀 수는 없다.


   제2막

 광신자인 오르공은 딸 마리안을 그녀의 애인에게서 떨어지게 하여 타르튀프의 아내가 되게 하려고 생각한다. 마리안은 슬픔에 잠기지만 하녀인 도린이 마음 약한 그녀에게 용기를 주며 함께 저항하자고 말한다.


   제3막

 오르공의 후처인 에르밀도 타르튀프에게 마리안과의 결혼의사를 포기하라고 말하는데, 오랫동안 에르밀에게 마음을 두고 있던 타르튀프는 두 사람만 있는 자리에서 그 유명한 <<아아, 믿음이 깊다고 해서 감정조차 없는 것은 아니지요, 어디까지나 나는 사내입니다>>라며 에르밀을 유혹한다. 그 현장을 우연히 보게 된 오르공의 아들 다미스는 타르튀프를 비난하며 오르공에게 모든 사실을 폭로한다. 그러나 오르공은 아들의 말을 믿지 않고 타르튀프의 교묘한 거짓말을 그대로 믿는다. 그는 오히려 아들을 꾸중하고 자기의 재산 전부를 타르튀프에게 증여한다.


   제4막

  딸과 타르튀프의 결혼을 서둘러 성사시키려는 남편 오르공을 보고 에르밀은 한 가지 꾀를 낸다. 남편을 테이블 밑에 숨겨두고 타르튀프를 불러들여 그의 구애에 응하는 척한다. 처음에는 의심을 품고 있던 타르튀프였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본색을 드러내어 에르밀을 품에 안으려 한다. 오르공은 그제서야 자신이 속았음을 깨닫고 이 사기꾼을 쫓아내려 한다. 그러나 타르튀프는 뻔뻔스럽게 <<자네가 이 집에서 나가주게>>라고 말한다. 이미 이 집의 재산 전부는 타르튀프의 것이었다.


   제5막 

 오르공은 자기 입장이 불리하게 될 수 밖에 없는 정치상의 비밀문서가 들어 있는 상자도 타르튀프에게 넘겨 준 터였다. 사기꾼은 그 문서를 국왕에게 공개하며 오르공을 고소한다. 오르공은 체포되기 전에 도망가야만 했다. 타르튀프는 경찰관을 데리고 거드름을 피우며 등장하여 오르공을 국적 취급을 한다. 그러나 경찰관이 체포한 것은 뜻밖에도 타르튀프였다. 이자야말로 당국이 수사하던 죄인임이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국왕폐하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시기 때문에 절대로 사기꾼의 술책에는

속지 않으신다>>고 경찰관은 말한다. 왕은 오르공을 용서하고 마리안은 발레르와 결혼하게 된다.


d. 5년간 공개상연이 금지된 문제작

 이 작품은 1664년 국왕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전에서 개최한 대제전 때에 처음으로 공연되었다. 악덕 종교가 위선자를 신랄하게 꼬집은 이 작품은 종교인들의 반감을 사서 상연이 금지되었다. 그후부터 몰리에르는 국왕에게 계속 탄원했으나 1669년이 되어서야 공개상연이 정식으로 허락되었다. 어쨌던 이 작품은 통렬한 풍자극으로서 몰리에르의 걸작 중의 하나이며 그 공연은 전대미문의 대성공을 거두었다.


   탁월한 성격묘사

 이전의 희극이 줄거리나 대사, 그리고 몸짓 등 외부적인 수단으로 관객들에게 호소하려 했던 반면, 몰리에르는 성격에 모든 바탕을 두고 인간의 약점을 폭로함으로써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내려 했다. 성격의 묘사, 이것이 그가 추구했던 목적이었고 인간정신의 이면과 동기, 그리고 원동력을 심리적 리얼리즘으로 포착함으로써 당대 인간들의 평범함과 복잡함을 그려냈으며, 등장인물 하나하나에 강한 개성을 부여하고 있다.


   비판정신

 그의 작품에는 비극작가인 코르네유나 라신의 작품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 번쩍인다. 두 비극작가가 주로 인간의 고뇌와 격정을 묘사한 반면, 몰리에르는 인간과 사회의 보편적인 악과 약점을 비판했다. 그는 관객이나 독자들을 웃기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거기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한다. 그는 이러한 풍속의 비판적 묘사를 통해서 인간을 개조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 당시의 수많은 풍속을 풍자한 작가 가운데 몰리에르만이 뚜렷하게 그의 위치를 지니고 있는 이유도 그의 내부에 있는 강한 도덕적 욕구 때문이다. 그러나 군주제도나 교회의 권위, 그리고 귀족의 특권 등에 대해서는 공격적인 태도를 완화하는 보수주의적인 측면도 있었다.


   자연애

 그는 인간의 본능을 바른 것으로 믿었으며 라블레나 몽테뉴와 같이 자연은 선하며 또한 만능이라고 생각했다. 자연과 싸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며 불행과 웃음거리를 동반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자연의 법칙에 따르는 젊은이들을 편들고 이를 막는 어른들을 언제나 곯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본능에 한계를 두어 이성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점도 놓치지 않았다. 이러한 점들이 그의 작품들로 하여금 그의 시대와 인간을 총체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도록 하고, 이 총체적인 비전을 통해 한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는 독창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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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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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4세

Louis XIV

Louis XIV of France.jpg

Grand Royal Coat of Arms of France.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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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yal Crown of France.svg

프랑스왕

재위 1643년 5월 14일-1715년 9월 1일

대관식 1654년 6월 7일

전임자 루이 13세

후임자 루이 15세

섭정 안 도트리슈 (1643년–1651년)

재상

수석국무장관[보이기]

별칭

별호 태양왕

신상정보

출생일 1601년 9월 27일

출생지 프랑스-나바르 왕국 생제르맹앙레

사망일 1643년 5월 14일

사망지 프랑스-나바르 왕국 베르사유

매장지 생드니 대성당

왕조 카페 왕조

가문 부르봉 가

부친 루이 13세

모친 안 도트리슈

배우자 마리테레즈 도트리슈

자녀 본문 참조

종교 천주교

루이 14세(프랑스어: Louis XIV, 1638년 9월 5일 ~ 1715년 9월 1일)는 프랑스의 왕이자 나바라[1]의 군주이다. 본명은 루이 디외도네(프랑스어: Louis-Dieudonné)이고, 공식 칭호는 루이 드 프랑스-나바라(프랑스어: Louis de France et de Navarre)다. 그는 다섯 살 생일이 채 되기도 전에 왕위에 올랐다. 아직 정치를 개인적으로 통치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아서 이탈리아 추기경 쥘 마자랭이 1661년 죽을 때까지 사실상 역할을 대신하였다. 루이는 1715년 9월에 죽을 때까지 왕의 자리에 있었는데, 77번째 생일을 맞이하기 4일 전이었다. 그의 치세기간은 최종적으로 72년 3개월 18일으로 유럽의 군주 중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루이 14세는 세간에는 태양왕(프랑스어: Le Roi Soleil)이란 별명으로 알려져 있다. 루이 14세는 왕권신수설을 믿었기에, 국왕의 권력은 신으로부터 받는 것이라는 학설을 지지했다.


루이의 치세 상당부분은 유럽에서 프랑스의 힘과 세력을 확장시키고자 3번의 주요 전쟁─프랑스-네덜란드 전쟁,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과 스페인 왕위계승전쟁─과 2번의 작은 분쟁─상속 전쟁, 재결합 전쟁─을 치렀다. 이 시대 프랑스의 정치와 군사상 걸출한 인물의 면모를 살펴본다면 마자랭, 장바티스트 콜베르, 튀렌, 보방을 들 수 있다. 프랑스 문화 또한 이 시대 번성하여 위대한 명성을 가진 인물들이 나타났는데, 몰리에르, 장 라신, 부알로, 라 퐁텐, 르브룅, 리고, 루이 르 방, 쥘 아르두앙 망사르, 클로드 페로, 르 노트르 등이 이 시기의 사람이며, 이들의 대다수는 루이로부터 지원금을 받고 왕과 왕실을 찬양하는 작품을 쓰기도 했다.


루이 14세는 그의 전임자가 만든 중앙 집권화의 일을 계속 추진하여 프랑스의 지방에 끝까지 남아 있던 봉건제도의 잔재를 청소하고 수도에서 내려오는 지시에 따라 통치할 수 있게 만들어 갔다. 그의 성과를 방해한것은 지방의 힘있는 귀족들로 많은 이들이 반란으로 일어났고, 그들 소수를 가리켜 프롱드라고 불리었다. 루이는 이들 힘있는 귀족들을 베르사유 궁전의 자신의 곁으로 불러들여 사치스런 생활을 즐기게 하면서 서서히 약화시켰고, 이를 통해 귀족들의 힘을 제어했다. 그 결과 그는 오랫동안 유럽에서 절대 군주의 전형으로 고찰되게 되었다.


또한 절대 군주의 자리를 다져 “짐이 곧 국가니라(L'État, c'est moi)”와 같은 말을 했다고 전해지지만, 역사학계에서 이 말은 그의 정적들이나 볼테르가 퍼뜨린 헛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루이 14세는 키에 대한 콤플렉스로 하이힐을 최초로 신었고 귀족들이 그것을 따라하여 유행처럼 번졌다고 한다.


목차  [숨기기] 

1 생애

1.1 정치입문

1.2 국력과 문화발전

1.3 전쟁

1.4 낭트칙령 폐지

1.5 죽음

2 부인들과 자녀들

2.1 정부인과 적자

2.2 정부와 서자

3 갤러리

4 같이 보기

5 각주

6 외부 링크

생애[편집]


결혼식을 올리는 루이 14세

정치입문[편집]

1638년 생제르맹앙레에서 루이 13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루이 13세가 1643년에 사망했을 때 루이 14세는 겨우 5살이었다. 섭정을 맡은 모후 안 도트리슈는 국사 운영을 로마 가톨릭 추기경인 마자랭에게 맡겼다. 뛰어난 협상가였던 마자랭 추기경은 전임자인 리슐리외 추기경과 동일한 계획을 강력하게 추진하여 절대 군주제를 성립시켰다. 귀족들에게 눌렸었던 왕의 권력이 마자랭 추기경의 지도로 강해진 것이다. 마자랭 추기경은 당시 왕이였던 루이 14세의 정치수업을 지도하였는데, 덕분에 1661년 마자랭이 죽자 22살의 어른이 된 루이 14세는 재상과 같이 프랑스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국력과 문화발전[편집]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의 유럽 (1648)


루이 14세 앞에 나타난 주불 페르시아 대사들

전임자와 선왕의 낭트 칙령을 통한 위그노들에대한 수용 및 중상주의 정책으로 루이 14세는 당대 유럽의 왕들 중에서 가장 부유한국가를 물려받았었다. 에스파냐의 무적 함대를 1588년 네덜란드와 연합, 격파한 후 점점 강해지는 영국에 뒤지지 않으려고 루이지애나 등 식민지에서 돈을 징수해온 프랑스의 국력은 이윽고 영국에 맞설 만한 수준에 이르렀으나. 유명한 베르사유 궁전증축과 사치스러운 궁정생활 그리고 말년의 계속된 패전으로 이 막대한 부는 모두 사라지며 루이 15세 때에는 몇차례의 국가부도나 그에 버금가는 경제위기 등을 겪는다. 베르사이유 궁전은 착공한 지 20년 후인 1682년, 아직 완공 전이었으나 루이 14세는 왕궁과 정부를 베르사유로 모두 옮겼으며 그때부터 베르사유 궁전에는 프랑스의 왕족들 뿐만 아니라 대귀족들 전부가 이주해 와서 살게 되었고, 왕과 귀족들의 궁정 생활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베르사유 궁전은 프랑스 민중들의 희생과 부담으로 구축되었다. 민중들은 베르사유 궁전을 짓기 위한 부역에 동원되어 노동력을 수탈당했으며, 사고로 죽은 자들은 보상과 사과는커녕, 시체가 암매장되었다. 그럼에도 루이 14세는 정사를 돌보는 한편, 사냥과 기마 경기를 개최하였고, 트럼프와 당구 그리고 춤을 즐겼다. 특히 루이 14세는 발레에 지대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7세부터 직접 무용을 수련하며 최초의 직업무용수로도 꼽힌다. 1653년 15세의 나이에는 밤의 발레(Ballet de lanuit)에 '아폴로'역으로 출연해 '태양왕'의 호칭을 얻게 된다. 또한 1661년 왕립무용아카데미라는 발레학교의 효시인 무용예술원을 설립하였다. 이러한 예술에 대한 애정과 노력들로 화려한 궁정 문화가 눈부시게 꽃피워 전 유럽의 왕가에 확산되었다. 루이 14세 정부는 극히 다양한 기술에 관한 특허장을 무수히 나누어 주었다. 그중에는 예컨대 맹트농 후작 부인이 약간의 자본을 투자한 경제적 난방 방식 같은 것도 있었다.[2]


전쟁[편집]


프랑스-네덜란드 전쟁 때 로비트에서 라인 강을 건너는 루이 14세와 그의 군대

루이 14세는 피레네 산맥과 알프스 산맥, 라인 강이 프랑스의 국경이라고 선언했다. 프랑스의 국경은 하느님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그것은 자연 환경에 의해 표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뒤부터 이러한 ‘자연 국경설’을 내세우며 루이 14세는 그의 재위 기간 72년 4개월 중 31년 동안 그 당시 프랑스 영토가 아닌 라인 강 방면의 영토 획득을 위해 다른 나라에 대한 침략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침략 전쟁을 위해 프랑스군의 근대화가 행해졌고, 루이 14세는 최강을 자랑하는 군대를 편성하기 위해 징병제도를 실시 하여 유럽에서 최강을 자랑하는 육군이 편성되었다. 프랑스는 이 강력한 군대로 우선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의 틈을 타서, 1667년과 그 다음해에 걸쳐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독립한 네덜란드에 침입했다. 또한 제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때에도 네덜란드에 침입하여(1672년~1678년) 많은 영토를 빼앗았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네덜란드를 지원한 독일로부터 알자스 로렌 지방도 획득하였다.


루이 14세에 의한 침략 전쟁은 멈추어지지 않았다. 그는 다시 이번에는 독일의 팔츠 지방에 대한 계승권을 주장하며 침입했기 때문에 독일은 영국, 네덜란드, 에스파냐와 동맹을 맺어 대항하였다. 이른바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이라고도 불리는 팔츠 계승전쟁이 10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식민지 문제로 영국과 세력 다툼을 벌여 싸우게 되는 제2차 백년전쟁이 발발된 것도 루이 14세 때였다. 또한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에 뛰어드는 등 루이 14세는 영토 확장에 혈안이 되었다.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에서 초반 전세는 프랑스에 유리했으나 점차 밀리게 되었고, 결국 루이 14세의 손자 스페인의 펠리페 5세의 스페인 왕위만이 인정되어 프랑스가 얻은 이득은 없었다.


루이 14세의 무리한 전쟁수행으로 프랑스의 영토는 루이 14세가 처음 친정을 시작하던 당시의 영토로 줄어들었고 잦은 전쟁으로 빚만 산더미같이 쌓였다. 모든 도시에 거지가 들끓고 굶어 죽거나 전염병에 걸려 죽은 민중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당시 프랑스인의 평균 수명은 25살 이하였으며, 파리를 비롯한 모든 도시에는 거지들이 들끓었다. 더구나 전쟁수행에 필요한 세금때문에 민중들은 경제적으로 수탈당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계속적으로 전쟁을 치루었으니 나라가 평안할 수 없을 것은 당연했다.


낭트칙령 폐지[편집]


낭트 칙령이 폐기될 시기의 루이 14세

루이 14세는 프랑스 교회를 로마 가톨릭으로 통일하는 것이 절대왕정에 유리하다고 생각하여 용기병을 동원하여 개신교인들을 학살하고 박해해 강제로 로마 가톨릭교회로 개종시켰다.


 용기병의 박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또 퐁텐블로 칙령을 발표, 1685년 개신교 신자에 대한 차별을 금지한 낭트 칙령을 폐지, 개신교를 탄압했다. 낭트 칙령은 프랑스 내 개신교 신자들을 공직자 취임제한등의 차별로부터 보호하는 차별금지정책이었는데, 이를 폐지함으로써 탄압을 받게 된 위그노 25만 명이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네덜란드와 영국 등 세계 각국으로 망명했다. 그런데 이들의 대부분은 숙련된 상공업 기술자들이어서, 이후 프랑스의 수공업은 거의 마비되다시피 했다.


 퐁텐블로 칙령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죽음[편집]

1715년, 76살의 늙은이가 된 루이 14세는 72년 동안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무리하게 전쟁을 수행, 경제를 파탄시킨 자신의 정치행적에 대해 자각과 후회를 가져 임종을 맞기 직전에 증손자인 루이 15세에게 “너는 이웃 나라와 싸우지 말고 평화를 유지하도록 힘써라. 이 점에서 짐이 밟은 길을 따르지 말라. 국민들의 괴로움을 덜어 주는 정치를 하여라. 아쉽게도 짐은 행하지 못했었다.”라는 간곡한 유언과 “짐은 이제 죽는다. 그러나 국가는 영원하리라.”[3] 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향년 77세. 루이 14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프랑스 국민들은 조금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이 오히려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다려온 해방을 주신 하느님 앞에 감사하며 크게 기뻐했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때부터 프랑스에는 혁명의 싹이 움트기 시작하여 76년 뒤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부인들과 자녀들[편집]


루이 14세와 그의 가족들

정부인과 적자[편집]

왕비 에스파냐의 마리아 테레사

루이(1661-1711): 왕세자(Dauphin)였으나 부왕 루이 14세보다 먼저 사망하였음. 루이 15세의 조부이자 루이 16세의 고조부.

안 엘리자베트: 요절

마리 테레즈: 요절

필립 샤를: 요절

루이 프랑수아: 요절

정부와 서자[편집]

루이즈 프랑소와즈 르 블랑 드 라 발리에르³ - 라 발리에르 공작부인

샤를 (1663-1665)

필리페 (1665-1666)

라 발리에르 여공작 및 콩티 공비 마리 안 (1666-1739)³

베르망두아 백작 루이 (1667-1683)³

아테나이 드 로슈슈아르 모르트마르³ - 몽테스팡 후작부인

루이즈 프랑소와즈 드 부르봉 (1669-1672)

멘 공작 루이 오귀스트 (1670-1726)³

루이 세자르 (1672-1683)²

부르봉과 콩데 공비 루이즈 프랑수아즈 (1673-1743)³

오를레앙 공작 부인 프랑수아즈 마리 (1677-1749)³

툴루즈 백작 루이 알렉상드르 (1678-1737)³

클로드 드 빈

루이즈 드 메종블랑쉐 (1676-1718)

앙젤리크 드 퐁탕주 - 퐁탕주 공작부인

아들 (1691-1681)

프랑수아즈 도비녜 - 맹트농 후작부인

갤러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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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치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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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치의 법칙(프랑스어: Règles du théâtre classique)은 프랑스 고전 연극에서 규칙중 하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시학(詩學)>에서 비극은 "가능한 한 태양의 1회전하는 기간"에 한정하고, 그 줄거리는 "쉽사리 기억할 수 있는 크기"로, 극중의 사건은 거의가 "동시에 실현하는 것을 모방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들은 그리스 비극들을 상연할 때의 외적 조건이었으며, 스카리졔 전후(前後)에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로 들어온 문예부흥기의 연극이론은 이를 엄밀한 규칙으로 해석했으며, 샤플랭 등 지식인은 삼일치 또는 삼단일(三單一)의 법칙으로서 프랑스 고전극에 도입했던 것이다.


이를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 부알로(Boileau)의 다음의 말이다.


“한 장소에서, 하루 중에 오직 하나, 완성된 일이 마지막까지 무대를 충만시킬 수 있도록 하라.”

 

— 부알로, 《풍자시》 제3

이것은 고전극의 중요한 요건이 되어, 1637년에 코르네유의 <르 시드>의 대성공 때 생겨난 '르 시드 논쟁'의 쟁점의 하나는 이 비극이 시간적·장소적으로 단일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리슐리외의 명을 받은 샤플랭이 '<르 시드>에 관한 아카데미의 의견'을 발표하기까지 문단과 사교계가 둘로 갈라지는 등의 소동을 빚었다.


즉 코르네유에게는 이러한 법칙이 부담이었으며 라신은 이를 편하게 소화시키고 있었다. 라신의 《베레니스》 서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비극에서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은 진실다움 이외는 없다. 몇 주간이 걸려도 일어날지 어떨지 알 수 없는 많은 일들이 하루 사이에 일어나는 연극이 진실답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 라신, 《베레니스》 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