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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조금씩배워보자/동서고전 200선

E12 – 페스트 (La Peste) / 카뮈(Albert Camus, 1913~1960)

E12 – 페스트 (La Peste) / 카뮈(Albert Camus, 1913~1960)

(출전: 동서고전 200선 해제3 / 반덕진 / 가람기획)


 2차대전 후의 혼란하고 무질서한 정신적 풍토위에 <부조리의 철학>이라는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기초로 사회정의를 실현하려 했던 카뮈의 대표작. 오랑 시에 페스트가 만연했다는 가정하에 인간을 전멸시키려는 악과 이에 대한 인간의 집단적인 반항을 묘사하면서, 이 과정에서 인간의 연대의식과 존엄성을 역설했다. <이방인>에서 제시된 개인주의에서 벗어나, 이러한 연대의식만이 인류평화에 도달하게 할 수 있다는 카뮈의 긍정적인 사고방식이 분명하게 전달된다.


a. 사르트르와 함께 현대 젊은이의 우상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고 모든 것이 <부조리>하다고 부르짖는다. 그러나 나의 부르짖음을 나는 의심할 수 없다.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며 <부조리>와 <반항>의 사상을 제시한 최연소 노벨 문학상 수상자 카뮈.

 카뮈는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에서 태어나 2살 때 부친이 1차대전에 참가하여 마른 전투에서 사망했다. 그의 어머니는 두 아들을 데리고 친정집으로 가서 고집 센 외할머니, 그리고 다리가 불구인 외삼촌과 함께 방 2개에 5명이 살았다. 후에 카뮈가 <<나는 <자유>를 마르크스 속에서 배우지 않고 가난 속에서 배웠다>>고 술회했듯이 어린 시절을 가난 속에서 보냈다.

 당시 의무교육 덕분으로 국민학교를 마친 카뮈는 가정형편상 더이상의 상급학교 진학이 어려웠으나, 그의 재능을 아까워한 담임 선생님의 배려로 중고교에 입학하게 된다. 노벨 문학상 수상연설이 책으로 나왔을 때 그는 이 책을 옛 스승 제르맹에게 바쳐 깊은 감사를 표했다.

그는 중고교 시절을 계속 장학생으로 지내면서 축구 등 운동에 몰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17세 되던 해 폐결핵의 첫 발작이 일어나서 좋아하던 운동도 중단해야 했다. 그러나 불행중 다행으로 철학자이자 교수인 장 그르니에를 알게 되어 철학과 문학에 뜻을 둔다. 이 스승과 제자간의 우정은 평생을 두고 꾸준히 계속되었다.

 20세에 결혼했으나 1년 만에 이혼하고 공산당에 입당하지만 다음 해에 탈당한다. 알제 대학시절에 그는 여러 종류의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는데,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해운업자에게 고용되기도 하고 자동차부품 판매원 노릇도 했다. 이러다 보니 평범한 대학생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귀중한 산 체험을 했다. 지드, 말로, 몽테를랑 등의 작품을 탐독한 것도 이때였고, 아마추어 극단을 조직하여 연극활동에 적극 참여한 것도 이때였다.

 졸업 후 진보적인 신문 <알제리 레퓌블리캥>에서 저널리스트로 활약하면서 당국의 비위를 건드려 알제리에서 추방된다. 파리로 진출하여 <파리 스와르>의 기자로 1941년(28세) 6월까지 근무했다. 그는 이때 <이방인>을 탈고하고, 에세이 <시지포스의 신화>를 쓰기 시작했다. 당시 프랑스는 독일의 파리 침공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였다. 독일 점령하의 파리에서 그는 지하신문 <콩바>의 주필 노릇을 하며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가한다.

 이 기간에 출간된 <이방인>은 부조리한 세상에서 아무 의식 없이 살다가 우연히 살인을 하고 사형선고를 받은 뫼르소가 죽음에 직면해서 비로소 인생의 부조리를 깨닫고 오히려 행복하게 죽음을 기다린다는 내용이다. <시지포스의 신화> 역시 고독과 인생의 모순을 고백적 감상형식으로 해설하여 큰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1947년 발표된 장편 <페스터>는 그의 철학의 총결산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여기에서 전염병과 맞서 싸우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과 우애를 역설하여 전후세대의 정신적 지주로 부상했다. 그는 전쟁과 사형을 반대했으며, 역사를 절대시하는 마르크스주의나 스스로를 절대시하는 사상적 예술적 니힐리즘에도 반대한다.

 그는 초기의 주요개념인 <부조리>에서 <반항>으로 옮겨갔다. 두번째 장편인 <반항적 인간>을 발표하여 사르트르와의 사상적 논쟁이 벌어져 10년간 지속되었던 우정이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가장 괴로운 시련은 자신이 태어났던 알제리에서 일어난 전쟁이었다. 그는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프랑스의 불공평한 식민정책을 비난했다.

 1956년에는 <반항적 인간>의 논리를 거꾸로 써서 그린 풍자소설 <전락>을 발표했다. 44세인 다음해에 스웨덴의 왕립한림원은 <<오늘날 인류의 양심에 제기되는 모든 문제를 명백하게 파헤친 그의 전 작품의 공로>>를 들어 그에게 노벨 문학상을 수여했다. 1960년(47세) 자전적 소설인 <최초의 인간>을 집필하는 도중 불의의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b. <부조리>와 <반항>의 문학세계

 카뮈의 문학세계는 <이방인> <시지포스의 신화> <흑사병> <반항인> <전락>등의 관계와 발전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간단히 말해 <부조리>와 <반항>의 철학이다.

 부조리란 불합리한 것,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그가 부조리한 것으로 보았던 것은 바로 인간세계에 있어서의 존재, 즉 인생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합리에의 욕망>과 세계의 <합리적이지 못한 것> 사이에 생기는 모순, 그것이 바로 작가가 내세우는 <부조리>라는 것이다. 그의 <시지포스의 신화>가 말하는 바와 같이 결국 굴러떨어지는 줄 알면서도 땀흘려 바위를 굴려 올리려는 존재, 결국

죽고 마는 허무한 존재이면서도 열심히 사는 존재, 결국 무의미해지는 인생을 의미있게 살려는 존재인 그런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인간에게 피치 못할 숙명으로 주어진 부조리는 누구나가 언제나 느끼는 것은 아니다. 흔히 우리는 부조리를 느끼지 못하고 살고 있다. 즉 의식이 졸고 있는 것이다. 그저 관습에 의해 기계적으로 살아가는 일상생활, 인생에 뜻이 있는지 없는지도 문제삼지 않는 그런 생활, 그것은 실존자의 생활이 아니다. 의식이 완전히 깨어나서 부조리를 명확하게 인식하게 될 때 비로소 인간다운 인간이라 할 수 있고, 그런 인간이라야 <실존>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카뮈의 이러한 사상을 통해 본다면 <부조리의 인식>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부조리에 대해, 부조리한 세계를 인식하고 여기에 대항하여 인간의 가치를 복권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부조리는 당연히 <반항적인 인간>을 낳는다. 이렇게 해서 <이방인>과 <시지포스의 신화>에서의 중심개념인 <부조리>는 <페스트> <반항인>에서 <반항>으로 옮겨진다. 


c. 인생의 부조리와의 투쟁을 그린 작품

 페스트가 전 도시를 죽음으로 휩쓰는 과정에서 이에 맞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숭고한 인간애를 그린 이 작품은 알제리의 오랑 시에 흑사병이 발생한다는 가상의 소설로, 출간과 더불어 베스트 셀러가 된 소설이다. 여기서 페스트는 모든 <자유>가 제한되는 상황을 의미한다.

 프랑스 영토인 알제리의 오랑에서 어느 날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쥐들이 집안과 지하실 창고, 하수구에서 몰려나와 휘청거리며 연이어 빛을 보고는 죽어갔다. 시내의 모든 쥐들이 이처럼 죽더니 이제는 사림들이 또 갑자기 고열과 임파선이 붓고 몸에 종기가 생긴 끝에, 무서운 악취를 풍기며 죽어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 원인 모를 병은 흑사병으로 밝혀졌다. 시에서는 행정적인 조치로 시외곽을 통하는 모든 수송망과 도로망을 차단시켰다. 무장한 군대가 삼엄한 경계를 맡고 도시는 죽음의 공포 속으로 떨어진다. 의사 베르나르 뤼는 병을 앓고 있는 아내를 어느 산중으로 보내고 이 사건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신문기자인 랑베르는 파리에 있는 아내를 남겨둔 채, 아랍인의 생활상을 취재하러 오랑에 들렀던 차였다. 자연히 그들은 이 도시에서 고립되게 되었다. 전염병은 날이 갈수록 더욱 악화되어 시민들의 생명을 빼앗기 시작했다. 매일 수십 명씩 죽어가더니 이제는 수백 명의 사망자수를 기록했다. 자연히 시내에서는 생필품의 품귀현상이 일어나고 환자 수용시설이나 의약품, 구호대 인원은 부족하게 되어 심각한 사태를 야기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죽음의 도시로 변한 것이다.

 환자가 일단 생기면 의사가 달려가 확인하고, 페스트 환자이면 격리수용소에 보내지게 되고 가족들도 전염 여부가 밝혀질 때까지 각기 다른 곳에 격리된다. 환자는 대개 며칠을 견디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숨졌으며, 그 시체는 가족들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매장되었다. 시체는 시간이 흐를수록 마치 쓰레기처럼 큰 구덩이 속에 던져졌고 그 위에 또 다른 시체가 던져졌다. 또한 처음에는 남녀의 구덩이가 따로 만들어졌으나 그 구별마저 지켜지지 않다가 끝내는 화장으로 처리되었다.

 한편 의사 뤼는 페스트의 고통에 빠진 환자들을 구출하려고 안간힘을 쓰며 기독교적인 사랑을 시민들에게 베푼다. 또한 랑베르에게도 지극히 안간적인 충고를 하는가 하면 달아난 아내에게 미련을 갖고 있는 글랑에게 무한한 연민의 정을 느낀다. 오랑의 호텔에 얼마 전부터 묵고 있던 타르는 뤼를 방문하여 격려하고 지원보건대를 조직한다. 그들은 악과 폭력을 앞에 두고 굳은 연대감으로 맞선다.

 랑베르는 자신이 예기치 않게 이 죽음의 도시에 묶이게 되고 더구나 파리에는 아내가 있었기에 필사적으로 이 도시를 탈출하려고 한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에게 돌아가기 위하여 시의 관문을 지키고 있는 경비병을 매수해서 탈출할 날짜까지 받는다. 그러나 의사 뤼가 자신의 몸을 희생하며, 또 봉사대가 자발적으로 조직되고, 게다가 타르와 판느루 신부까지 참석하는 것을 보고는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자신이 이곳을 떠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비록 애인에게 간다고 하여도 마음이 불편하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장장 8개월 동안이나 극성을 부리던 페스트도 점점 약화되기 시작했다. 페스트의 피해자가 드디어 줄기 시작하고, 혈청주사를 맞은 공무원과 한 처녀가 최초로 구원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뤼의 동지이자 헌신적인 봉사자 타르가 이 병의 최후의 희생자로 쓰러진다. 이어서 뤼는 휴양지에서 자신의 아내가 병사했다는 전보를 받게 된다.

 페스트는 언제 그랬냐 듯이 물러간다. 오랑 시의 문이 크게 열리고 시민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의사 뤼는 이렇게 독백한다. <<페스트 병균은 결코 죽지 않는다. 어딘가에 잠복해 있다가 행복한 도시에 불쑥 나타날지 모른다.>>


d. 대표적인 실존주의적 작품

 2차 대전을 전후해서 사르트르의 철학과 함께 세계적인 실존주의 선풍을 일으킨 이 작품은 2차대전시 경험했던 작가의 체험을 상징하고 있는 작품이다. 한 도시에 엄습한 재앙이 인간의 생존을 말살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이별하게 만드는 파괴적인 모습은 전쟁과 다를 것이 없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50년대 한국 문학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다. 전쟁의 인간살상과 타락한 인간성의 현실을 목도한 전후

한국사회의 작가들에게 큰 공감을 주었다.

 여기서 <페스트>란 전쟁을 포함한 자유를 부정하는 모든 폭력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폭력 앞에 대응하는 인간들의 양식은 다양하다.  달아나는 사람, 절망하는 사람, 정당화하는 사람 등등. 카뮈는 이들을 모두 이해한다. 취재차 오랑에 온 신문기자인 랑베르는 처음에는 무슨 수를 써서든지 오랑 시를 벗어나려고 한다. 그러나 시민들의 고통과 구조대원들의 희생적인 연대감에 탈출의 기회를 스스로 반납한다. 그는 탈출을 거부하면서 동시에 자살도 거부함으로써 카뮈의 철학적 반항을 실현하고 있다.

 삶에 대한 애착, 인간에 대한 사랑, 이것을 뒤집어 보면 악에 대한 반항이다. 카뮈에게 악이란 전쟁 독재 감금 억압 질병 빈곤 등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모든 것들이다. 그의 글들은 낯선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고독, 자신과 화해하지 못하는 개인의 소외, 악의 문제 등을 이야기함으로써 전후 지식인들의 소외의식과 환멸을 정확하게 반영했다.

 2차대전 후 황폐해진 인간정신의 위기를 간파하고 이의 극복을 위해 카뮈가 제시한 <부조리>와 <반항>의 사상은 전후의 젊은이들에게 중세의 종교 이상으로 큰 힘을 발휘한 것이 사실이다. 그는 혼란하고 무질서한 정신적 풍토 위에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하고 확립시킨 공로 이외에도 자신에의 성실과 인간의 존엄성에 기초로 한 사회정의를 실현하려 했다는 점에서 한 세대의 정신을 대표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뤼의 말처럼 <<죽고 싶지 않은 인간이 죽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부조리에 반항하는 인간의 모습은 영원할 수 있을 것이다.



e. 미완성 자전 소설 34년 만에 출간

 1960년 1월 4일 파리 근교에서 가로수를 들이받은 자동차 안에서 47세의 카뮈가 숨진 채 발견되었다. 그의 가방 속에 든 미완성 원고와 함께. 144쪽 분량의 초고는 구두점도 생략되고 속필로 써서 불완전한 상태였다. 사후 34년 만에 그의 딸이 정리해 <최초의 인간>(Le premier Homme)으로 햇빛을 본 이 작품은 빈민지대에서 보냈던 그의 어린 시절부터 고등학교 시절까지의 15년을 그린 자전적 소설이다.

 <최초의 인간>은 1994년 4월 15일 발간되어 1주일 만에 5만부가 팔리면서 파리 독서계를 흥분으로 몰아넣었다. 소설은 알제리에서 수레에 가재도구와 만삭의 아내를 싣고 황혼의 자갈길을 걸어가는 앙리 코르메리의 모습과 사내아이의 탄생으로부터 시작된다. 소설 속의 인물들은 모두 카뮈의 가족이며 아이는 카뮈 자신이다. 이 작품 속에 기록된 그의 어린 시절은 본서의 생애에서 묘사한 것과 비슷하다. 파리의 비평가들은 <<카뮈가 돌아왔다. 이 책에 카뮈의 모든 것이 있다. 감수성 충실 자비 정직 믿음 절대에 대한 갈망 꺼지지 않는 슬픔 그리고 힘이 공존한다>>고 평하고 있다. 이 유고는 그 존재가 확인되어왔으나 그의 유족들은 미완성이라는 이유로 그동안 출간을 보류해 왔다. 유고 곳곳에서 보이는 <<이름 바꾸는 것을 잊지 말라>> <<더 발전시킬 것>>이란 메모는 이 작품이 자전적 소설임을 입증한다. 다행히 최근에 김화영 교수의 한국어 번역판이 열린책들에서 출간되어 국내 독자들도 카뮈의 숨결을 한층 가깝게 느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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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 (출처 : 나무위키)


최근 수정 시각: 2017-11-03 20:40:55


Albert Cam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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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195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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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 - J.R. 히메네스

알베르 카뮈

1958 -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1. 개요

2. 생애

2.1. 알제리 전쟁

2.2. 사망

3. 문학

4. 명언

5. 기타

6. 대표작

1. 개요[편집]


1913년 11월 7일 ~ 1960년 1월 4일


프랑스 문학의 대문호이자 프랑스어권에서 존경받는 문학자 중 한명. 1913년 11월 7일 ~ 1960년 1월 4일. 프랑스와 알제리(프랑스령 알제리)의 문인, 작가, 실존주의 철학자(카뮈 본인은 스스로 실존주의와의 관계를 부정했다). 역대 최연소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흔히 알려져 있지만 사실 최연소는 러디어드 키플링이고 카뮈는 그 다음이다. 물론 그래도 40대에 노벨문학상을 받는 건 극히 드문 일이다. 이건 참 다행한 결정이라 할 수 있는데, 만일 노벨문학상을 '생애 최후의 명예'같은 느낌으로 노년의 작가한테만 수여하는 요즘 같았다면, 교통사고로 일찍 죽은 카뮈는 절대 상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2. 생애[편집]


알제리 태생이라는 사실에 알제리 아랍계로 아는 사람도 있지만, 알제리 및 이슬람계와는 관련이 없다.[1] 프랑스는 알제리를 단순 식민지가 아닌, 프랑스의 확장된 영토로 여겼다. 그래서 당시 프랑스 본토로부터 새로운 땅에서의 기회를 노리고 이주한 프랑스인들이 많았으며, 카뮈의 아버지나 어머니[2]도 그중 일부였다. 카뮈가 태어날 당시의 알제리는 그저 프랑스라는 국가의 한 지역이었고, 따라서 그는 프랑스 태생이었다. 카뮈가 알제리 태생이라는 말은, 카뮈가 사망(1960)한 후 알제리가 프랑스로부터 독립(1962)한 현재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3] 그러니까 그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순수 프랑스인이었으며[4][5], 현재의 알제리 아랍인와는 거의 무관한 인물이다.


여튼 아버지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전사하는 바람에 어린 시절엔 가난에 시달려야 했고, 학생 시절에도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지만 고질병인 결핵이 방해가 되어 대학 진학도 포기한 채 자동차 수리공 및 신문사 인턴 기자, 가정교사 같은 여러 일로 벌어먹으면서 철학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런 경험 때문인지 22살에 공산당에 가입하여 좌익사회운동을 했으며 프랑스측의 알제리 식민지배에 부정적인 글을 남기기도 했고, 베르베르족으로 흔히 알려진 이마지겐 부족에 대한 프랑스의 억압과 더불어 아랍계들의 차별도 고발하면서 깠다. 그 때문에 정부의 압력으로 일하던 신문사에서 해고당하자 이에 언론인 노조가 반발하면서 시위를 벌여 결국 복직한 일도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가 해방되자 과거를 잊고 관용과 용서를 베풀자는 주장에 맞서 반역자들을 가혹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하지만 소위 나치 청산이란 구실로 무고한 사람들이 수만 명이나 죽이는 대학살극이 벌어지자 경악하여 이를 크게 규탄했다. 


한국에선 프랑스가 반역자 청산을 잘한 것 정도로 오해하는 일이 많지만, 실상 프랑스의 청산은 36년간 식민지였던 조선이 아닌 한국전쟁 직후 한반도에서 벌어진 남북정권의 청산과 비교하는 게 더 부합한다. 꽤 유명한 사례로 독일군과 애인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린치당한 여자를 비롯하여, 독일군에게 빵을 팔거나 평소에 사이가 안 좋았단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하고, 같은 레지스탕스들끼리도 정치성향이 다르다고 서로 죽이는 등 한국전쟁 전후 한반도처럼 반동분자 청산을 구실로 무의미한 학살을 일으키는 개막장 사례가 속출했다. 때문에 샤를 드 골이 허겁지겁 이를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했다.[6]


2.1. 알제리 전쟁[편집]


그랬던 카뮈가 알제리 전쟁 당시 알제리 해방 전선(FNL)과 프랑스 정부 가운데 프랑스 정부 편을 든 것은 주변인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일로 받아들여졌다. '이 전쟁은 반란이며 새로운 아랍 제국주의와 소련 공산 폭력주의가 만나 반프랑스 움직임을 만드는 폭력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프랑스 우익들과 비슷한 주장을 한 것. 


카뮈는 알제리의 독립은 반대하되 자치권의 확대를 주장했다. '알제리의 독립은 인정할 수 없으나 프랑스인과 평등하게 살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카뮈의 옹호론자들은 당시 카뮈의 어머니가 알제리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신변을 염려하여 한 주장이라는 말도 한다. 하지만 카뮈의 제안은 프랑스측에서도 동의할 수 없는 것이었고 알제리도 마찬가지였다. 결론적으로 그는 양쪽에서 까였다. 알제리는 카뮈를 극렬 프랑스 우익으로 여겼으며 공산당 동료들과 알제리 독립을 지지하던 언론인이나 지식인들은 그를 배신자로 낙인찍고 무시했다.


그래서 알제리가 독립하자 알제리에서 그에 대한 모든 흔적은 철저하게 지워졌다. 이것은 그가 알제리를 고향으로 여겼다지만 정작 이방인 등 그의 여러 작품들 속에서는 프랑스인이 주축이지 알제리인들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점도 한 몫한 듯하다. 현재 그가 살던 집은 일반 가정집이며 노벨문학상 수상 당시 기념으로 만들어졌던 카뮈 문학기념비는 알제리에 용케 남아 있지만 카뮈의 이름은 끌로 지워진 채 방치되어 보존 상태가 엉망이라고 한다. 당연히 알제리인들은 카뮈가 누군지 잘 모른다.[7]


2.2. 사망[편집]


1960년 1월 4일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요절했다. 카뮈의 코트에는 전철표가 있었는데 전날 아내와 같이 전철을 타려고 했다. 그런데 갈리마르 출판사 사장의 조카이자 친구였던 미셸 갈리마르(Michel Gallimard)가 몰던 차를(갈리마르가 타라고 설득했다고) 타고 가던 길에 차가 플라타너스 나무를 들이박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냥 전철을 타고 갔다면 이런 일을 피할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카뮈는 현장에서 목이 부러져 즉사했고, 갈리마르도 며칠 뒤 병원에서 사망했다. 생전에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인터뷰에서 자동차 사고로 죽는 것보다 더 의미 없는 죽음은 상상할 수 없다.란 말을 남겼다. 지못미.(사고 현장을 찍은 흑백뉴스)


유작으로 다 완성하지 못한 《최초의 인간》을 남겼는데 세상을 떠날 당시 유품에 이 최초의 인간 원고가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 전철표 및 지갑, 펜, 메모지같은 것들과 같이. 미완성임에도 카뮈의 마지막 소설이라 그런지 미완성인 채로 책으로 나왔으며 국내에서도 정식번역되어 출판되었다.


3. 문학[편집]


카뮈의 문학은 '부조리 문학'으로 잘 알려져 있다. '부조리 문학'이란, 세상에는 어떠한 불변의 정의나 법칙이 없다는, 아니 있다 하더라도 이해조차 할 수 없는 '부조리'를 보여주며 이에 주인공이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렇기에 허무주의적 혹은 불가지론적인 태도를 가지는 경우가 많다. 뿐만 아니라, 부조리 문학은 주로 블랙/다크 코미디가 대다수이다.


알베르는 사람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으며, 그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사람이 만든 것이야말로 부조리라고 생각했다. 또 사람의 윤리란 매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라고 믿었고, 타협하지 않고 부조리에 저항하면서 스스로에게 거짓되지 않고 솔직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4. 명언[편집]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똑같이 어리석은 짓이다.

-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

5. 기타[편집]


원래 장래 희망은 축구선수였고 알제 대학 재학 시절 축구부에서 골키퍼로 맹활약했으나 결핵이 재발하면서 축구를 그만두게 되었다. 배우 활동에도 관심이 있었으나 여의치 않아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원래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도 없었고 소설은 그냥 자기 머리에서 나오는대로 썼다고 한다. 그러나 책을 좋아하기는 했던 듯싶다.《작가수첩》이라고 이름붙인 메모장에다가 아이디어가 머리속에 떠오르면 그 즉시 메모했다고 . 《작가수첩》은 카뮈 사후 출판되었고(방대한 양 때문에 나뉘어 출판) 한국에도 번역 출판되었다.

카뮈의 공식 프로필 키는 176cm로 기록되어 있고,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 성인 남자 평균 키가 170cm 언저리였다는 걸 감안하면 작지 않은 키다. 그러나 허버트 R. 로트먼이 쓴 카뮈 평전에서 그가 만난 카뮈의 대학 시절 축구 친구들이 카뮈를 작은 체구였다고 회상하고 있는 걸 보면 역시 176cm는 프로필상의 키고, 르네 샤르 등의 주변 인물과 찍은 사진들로 보건대 실제 키는 170~173cm 정도였던 걸로 추정된다. 골키퍼로서는 상당히 불리한 피지컬로 맹활약했다는 걸 생각하면 축구 재능도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골키퍼조차 본인이 자신이 있어서 선택한 포지션이 아니라, 축구는 하고 싶은데 체구도 작고 어릴 때부터 몸도 허약한 편이라 필드 플레이어처럼 몸싸움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다.

카뮈는 좌익운동가로 활동하다 아나키스트로 전향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그가 20대에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는 공산당에 가입은 하지만 결코 어떤 이념에 맹목적으로 세뇌당하진 않을 거라는 문구도 있다. 알제리 전쟁에서 보여준 애매모호한 회색분자 태도도 그의 성향이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는 괴물이 되어버린 자본주의든, 패배한 파시즘이든 이미 부작용을 드러내기 시작한 사회주의든 권력화한 집단은 부조리를 양산하기 마련이므로 아나키즘적인 태도를 추구했다. 즉 알제리가 독립해도 새로운 제국주의 집단의 탄생일 뿐이라는 인식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이 때문에 사르트르를 비롯한 당시 많은 사회주의자들에게 비판받았다.

2009년 12월 프랑스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는 알베르 카뮈의 문학을 깊이 존중한다고 말했으나 프랑스 좌파와 카뮈의 딸은 이를 반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공산당에 가입하고 좌익 활동 사상가로 지냈던 카뮈의 문학을 우파 대통령인 사르코지가 존중한다는 것이니.

6. 대표작[편집]


작품명 뒤에 *이 붙어 있는 작품은 표준국어대사전에 표제어로 실려 있는 작품들이다. 즉, 진정한 의미의 대표작.


이방인*

페스트*

전락*

시지프 신화*[8]

반항하는 인간*[9]

결혼

단두대에 대한 성찰

독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여름

오해

작가수첩

시사평론

정의의 사람들

칼리굴라




[1] 알제리계 출신으로 유명한 프랑스 사람은 지네딘 지단이 있다. 아버지가 알제리 전쟁 당시 아르키(Harki)라고 불리던 친프랑스 알제리 민병대원 출신으로 용케 프랑스로 이민 온 항만 노동자였다.

[2] 카뮈의 어머니는 1882년 알제에서 태어났는데 부모가 스페인 왕국 발레아레스 제도 출신의 스페인인이었다. 카뮈는 스페인을 혈통에 의한 자신의 제2의 조국이라 칭한 바 있다.

[3] 알제리는 1962년에 프랑스로부터 독립하기 전까지 하나의 독립 국가로 존재한 적이 없었고, 유사 이래 항상 특정 국가의 일부로 존재했던 지역이었다. 쉽게 말해 프랑스는 알제리라는 '국가'를 병합한 게 아니라, 바로 이전까지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알제리라는 '지역'을 자국 영토로 편입시킨 것이다. 알제리는 국가 상태에서 프랑스에 병합당한 게 아니고 국가였던 적도 없었기 때문에 카뮈가 살았던 당시 기준에서는 '프랑스령 알제리', '프랑스계 알제리인', '알제리계 프랑스인' 같은 말은 다 있을 수 없었다. 카뮈는 그냥 프랑스의 알제리 지방에서 태어난 프랑스 태생 피에느와르었다. 대략 일본 식민지 출신의 일본인 히키아게샤급인 셈이다.

[4] 이러한 사실은 그의 작품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가령 그의 대표작인 이방인이나 페스트는 배경이 각각 현재 알제리의 도시인 알제와 오랑인데, 작품 내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이방인에서 그냥 스쳐 지나가는 비중으로 나오는 아랍인들을 제외하고 전부 프랑스인이다. 카뮈가 인물 설정을 이렇게 한 이유는 결국 알제리도 프랑스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이다. 배경이 프랑스이니 등장 인물도 프랑스인인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게다가 당시 알제리의 대도시들은 전부 프랑스계, 유럽계가 주류였고 아랍계가 비주류였으니. 페스트에서는 첫 장부터 오랑 시는 프랑스의 한 도청 소재지에 불과하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5] 알베르 카뮈 전집을 번역한 김화영 교수에 의하면, 프랑스 현지에서 유학할 당시 프랑스어로 쓰인 프랑스어 사전(불불 사전)에 예문으로 카뮈의 문장이 다수 실려 있었다고 한다. 이는 카뮈가 사용한 프랑스어가 표준 프랑스어에 적합했다는 뜻이다. 알제리는 현재 아프리카에서 가장 넓은 대국이지만 지리적 연유로 도시들은 지중해 연안에 집중돼 프랑스 식민 지배의 영향으로 집중 개발되어 있었고 내륙에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데, 카뮈 역시 프랑스 본토와 가까운 연안 지역에서 태어난 인물이고 더군다나 부모가 프랑스인들이었으니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습득할 환경은 프랑스 본토인들과 차이가 없었다. 현재 알제리의 공용어인 아랍어와 베르베르어는 당연히 할 줄 몰랐다.

[6] 카뮈는 이런 무분별한 폭력뿐만 아니라 드 골이 법적으로 나치 부역자를 처벌하는 일에도 일부 반대했다. 문학가이며 언론인인 로베르 브라지야크가 나치에 부역한 죄로 처형될 때 프랑스의 문학가들이 탄원서를 쓰며 브라지야크의 처형에 반대했고 카뮈도 이에 참여했지만 드 골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7] 카뮈 연구가이자 카뮈 전집을 번역하고 프랑스로 가서 카뮈 연구에 참여한 김화영 교수는 알제리에 가서 카뮈에 대한 흔적이 철저하게 없어진 것을 아쉬워하면서도 그가 보여준 알제리에 대한 인식을 '똑같이 식민지를 겪은 한국인으로선 받아줄 수 없다'고 선을 그은 바 있다.(김화영, 《알제리 기행》 참고)

[8] 국어사전에는 일본 번역 그대로 '시시포스의 신화'로 등재되어 있다.

[9] 국어사전에는 일본 번역 그대로 '반항적 인간'으로 등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