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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조금씩배워보자/동서고전 200선

C49 – 근사록 (近思錄, 1175년경) / 주희(朱憙, 1130-1200)

C49 – 근사록 (近思錄, 1175년경) / 주희(朱憙, 1130-1200)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중국의 성리학 집대성자인 주희가 그의 친구 여동래와 함께 성리학을 공부하는 데 긴요한 622대목을 발췌하여 분류, 편찬한 책이다. 1권에서는 자연과 인간의 본질에 관해 설명하고 있고, 2권에서는 유학적 삶의 태도에 관한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다. 예로부터 성리학 입문서로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고, 성리학의 형성에 미친 영향고 크다.


a. 생애와 작품

중세 이후 동양사상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쳐온 주희는 중원의 문화로부터 멀리 떨어진 외딴 시골에서 출생하였다. 14세 때 중급관리였던 부친은 병사하였고, 그뒤 충안의 3선생(호적계 유백수 유병산)에게 사사했다. 초년에는 유교적 교양을 쌓으면서도, 노장사상과 불교철학에도 관심을 가졌다.

19세에 과거에 합격하고 24세에 임관하여 천주 동아현의 주부로 임명되어 4년간 근무하였다. 정이(정이천)의 학통을 이은 이동(이연평)을 만나 사사하고 차츰 유교로 기울어져 신유학의 정수를 계시받았다. 28세로 퇴임하고 그뒤 20여 년 관직에 나가지 않고, 국가로부터 연금을 받아 학문과 저술에 전념하였다. 그동안 이동을 여의고 장식(장남현)여조겸(여동래)과의 교류가 시작되어 그의 사상형성에 큰 영향을 받았는데, 대체로 40세 무렵에 사상적 대계가 확립되었다고 본다. 

46세때 여조겸과 함께 북송의 4대 도학자인 주돈이(주염계) 장재(장횡거) 정호(정명도) 정이(정이천)의 언론 622조를 문목별로 14권으로 나누어 <근사록>을 편찬하였다. 주희의 학문은 이 4명을 중심으로 북송의 신학풍을 받아 집대성한 것인데, 정주학이라는 명칭이 말하듯이 이정, 특히 정이의 학설을 계승전개하고 있으며, 그런 뜻에서 이 책은 주자학의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 또 그해 여조겸의 제창으로 당시 사상계 한편의 우두머리였던 육구연(육상산) 형제와 아호의 회라는 회견을 가졌다. 이뒤에도 육구연은 그의 좋은 적수가 되어 공리학파의 진량(진용천)과 나란히 가장 힘든 상대가 되었다. 이로 인해 그의 사상은 한층 원숙해졌다. 그리고 20년 동안에 다수의 저작에 착수하였는데, 이중 주목할 만한 것은 <사서집주>로 사망 직전까지 손을 대고 있었다고 한다.

주희가 <대학><중용><논어><맹자>를 사서라 하여 오경의 입문서에 위치시킨 것은 사상적으로 유기적인 관련성이 있다는 것을 고려한 것이다. 즉 하나는 유교정통을 인정하고 이것을 다시 계승하고자 하는 도통론의 측면에서, 또 하나는 성인은 배워서 이르러야 한다는 학문의 목적과 절차가 명확하게 제시되었다는 점에서이다. 그것은 한당의 훈고학적 경학과는 달리 경서를 통하여 통일적 사상을 배우고, 그 참뜻을 체득하여 자기인격의 완성을 꾀하며, 우학의 이상인 수기치인의 도를 실현하려고 하는 신유학의 성립을 의미한다.

49세에 강서성의 남강군 지사, 그뒤로 절강성에서 기근대책의 임무를 수행하였고, 61세 때 장주지사로, 그뒤로도 3-4년간 관직에 있었으나, 재상인 한탁주와 충돌하고 사임한다. 그후 한탁주 일파가 정권을 잡자 주희는 관리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그의 학문은 위학이라 하여 탄압받았으나, 굴하지 않고 죽림정사에서 강학을 계속하였다. 이것을 말리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는 화복은 명에 있는 것이다라며 태연했다 한다.

후반기의 저작에는 <역학계몽><효경간호><소학><초사집주><한문고이><의례경전통해>등이 있고, 이들은 <사서집주>와 함께 주희 및 주자학연구의 필수자료들이다. 관리로서의 현직에 있었던 기간은 짧았으나 맡은 직무에 충실하였고, 말씨나 안색 등 정중한 행동거지와 검소하고 청빈한 생활로 주위의 존경을 받았다. 

그의 철학체계는 당시에는 큰 빛을 보지 못했지만, 1313년 원에서 사서를 과거시험으로 채택하고 사서의 공식적인 주석은 주희의 <사서집주>를 따르도록 한 후부터는 완전히 학계를 지배하고 관학으로서의 위치가 확고해졌다. 우리 나라에도 주자학이 고려 말에 전래된 뒤로 조선시대에 와서 정치와 사상계를 지배하였다.


b. 주자의 사상

   사상의 형성

주희에 의해 체계화된 유교사상을 주자학 또는 성리학이라 하는데, 우주의 이치와 인간의 심성을 탐구하려는 학문적 특성이 있다. 성리학은 육조시대부터 수당시대의 사상계를 석권하고 있던 불교와 도교, 번잡하고 공허한 자구해석에 집착했던 훈고학적 유학을 극복하고 공자와 맹자의 근본사상을 밝히기 위해, 노장사상과 불교의 선종사상을 유교적 입장에서 수용하여 재구성한 유교철학이다. 주희는 깊은 철학적 고찰을 통해 우주의 본체와 인성의 본질을 밝히고자 하였다. 

성리학은 대체로 자연과 우주의 근본을 태극음양오행의 묘합으로 설명한 태극론, 세계의 두 가지 질서원리인 이기론, 인간의 심성을 탐구하는 인성론(심성론), 도덕적 인격의 완성방법으로서의 성경론(수양론), 우주의 근본원리를 깊이 연구하여 올바른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는 격물치지론, 자연의 질서에 부합되는 정치적 사회적 질서에 대한 탐색으로서의 경세론, 사상의 이론적 근거로서의 경학, 개인과 가회의 이상향을 설정하기 위한 연구로서의 사학 등으로 구분된다.

이 학설은 태극설을 주장한 주돈이에 의해 시작되고, 천리와 기일원론을 주장한 정호, 태허론을 주장한 장재, 성즉리와 이기이원론을 주장한 정이의 학설을 주희가 집대성한 것으로, 특히 정이의 학통을 계승발전시킨 것이다. 그래서 정주학이라고도 한다.

주희에 따르면 주장 이정 등은 요순 이래 공자에게 전수되고 맹자에게 이어진 이후 단절된 진정한 도를 다시 부활시킨 이들로, 자신은 그 계승자라고 자처하였다. 이 도통설과 밀접히 관련하여 공자 증자 자사 맹자로 이어지는 유학의 전수계통을 인정하고 사서를 중시하며, 여기에 학문의 목적과 그 단계를 고려, 오경의 입문과 진행순서로 삼았다. 그리고 사서에 주석을 달고 널리 경전을 연구하여 재해석을 시도하였는데, 이것을 신주라 한다.


   사상적 특성

주희의 철학은 이기철학이라 하는데, 형이하학인 기와 형이상학인 이를 내세워 상호간의 관계를 명확히 하고, 생성론 존재론에서 심성론 수양론에 걸쳐 이기에 의하여 일관된 이론체계를 완성시켰다.

 이라는 것은 어떤 사물이 왜 그렇게 존재하며,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를 말하는 것으로, 세계의 참모습으로 보았다. 반면 기는 세계의 현실적인 모습으로 이에 의해 규제된다고 보고 이가 기보다 우선한다고 보았다. 그의 학문방법은 인간이 본래 지니고 있는 것을 회복한다는 형식을 취하고 이를 위한 노력이 거경궁리(居敬窮理)이다. 양자는 서로 보완해가는 것인데, 거경이란 정신을 집중하여 마음들 다른 곳에두지 않는 것을 말하고, 궁리 란 모든 사물에 내재하는 이치를 깨닫는 것을 말한다. 주희가 생각하는 사물의 범위는 대단히 넓어서 이른바 자연학의 분야에까지 미치고 있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도덕적 규범의 보편타당한 근거를 찾는 것이었다.            


c. <근사록>의 내용

본서는 주희와 그의 친구인 여조겸이 송대 성리학의 4대가인 주돈이 장재 정호 정이 등 4명의 저서 중에서 중요한 것만 골라 서로 토론을 거친 후 1178년에 완성한 책이다. 이들 4학자의 저서에는 도를 배우려는 초보자들이 접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어, 이중 초학자의 입문에 필요한 622조를 초록하여 14권으로 분류한 것이다.

 근사 라는 말은 <논어>의 <자장편>에 절실하게 묻고 가까이 생각하면 인이 그 가운데 있다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주희와 여조겸의 말에 따르면 <근사록>은 주돈이 등 4명의 사상을 이해하는 사다리이고, 이 4명의 사상은 육경을 이해하는 사다리라는 것이다.


주돈이: <근사록>에 수록된 송대학자들의 주요사상은 다음과 같다. 주돈이(1017-1073)는 <태극도설>을 지었는데, 송대 성리학의 개조로 추앙받았다. 그의 학설은 유불도 3교를 유교사상으로 종합한 것으로, 그는 우주만유의 궁극적인 본체를 태극으로 설명하고, 태극의 동적 측면을 양 이라 하고, 정적 측면을음 이라고 하였다. 우주 내의 모든 사물은 음양의 조화에 의한 것이고, 음양이 발전하여 수화목금토의 오행을 낳았다고 하였다. 이처럼 자연과 우주의 근본을 태극 음양오행의 묘합으로 설명한 성리학의 입장이 태극론이다.


장재: 장재는 우주본체로서 태허를 말하고 태허가 바로 기다 라는 학설을 내세워, 기가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 실체이며 기의 흩아지고 모이는 변화에서 각종 사물이나 현상이 형성된다고 보았다. 이 점에서 불교나 도교의 공이나 무의 개념을 비판하였다. 즉, 우주의 본체는 지극히 허한 것이나 그것은 공이나 무가 아니라 기라는 존재라는 것이다.


정호 정이: 정호는 여전히 기일원론의 색채가 짙고, 심성론에서도 기즉성 성즉기라고 말하고 있어, 본체론보다 현상론에 치중하고 있다. 동성인 정이는 이기이원론적 발상에 입각하여 물질적 세계는 음양의 기에 의해 성립하며 기의 배후에는 음양을 음양답게 하는 이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심성론에서는 성즉리라하여, 주자의 이기론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본서의 내용은 <도체><논학><치지><존양><극치><가도><출처><치체><치법><정사><교학><계경><변별이단><총론성현>의 14편으로 구성되며, 이중 제1편인 <도체>편이 가장 난해한 철학설로, 제2편부터는 학문과 일상생활에 관한 것이어서 어렵지 않다. 이 문에 여겸조는 <도체>를 맨 뒤로 두자고 주장했으나, 주희는 <도체>를 읽어 도의 근본이치를 알고 제2부분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여, 결국 주희의 주장대로 첫머리에 두었다 한다. 물론 주희도 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1편을 읽고 이해하지 못하면 제2권부터 읽고, 후에 제1권을 읽도록 하라고 말하고 있다.( 도체(道體)·위학(爲學)·치지(致知)·존양(存養)·극기(克己)·가도(家道)·출처(出處)·치체(治體)·치법(治法)·정사(政事)·교학(敎學)·경계(警戒)·변이단(辨異端)·관성현(觀聖賢)의 14류(十四類)로 나뉘어 있다.) 

이것은 주자가 사서 가운데 <대학>을 먼저 읽도록 한 것과 유사한데, 그 이유는 사서 가운데 나타나 있는 성현의 마음을 알기 위해 먼저 <대학>을 읽고 그 강령을 알아둠에 있다. <도체>편의 본문 첫머리에 이 편은 성의 본원과 도의 체통을 논한 것으로 학문의 강령이다 라고 했으며, 또 첫머리에 주돈이의  태극도설 을 실은 것은 그가 이를 얼마나 중요시했던가를 알 수 있다.

제14편의 <총론성현>에서는 유가의 도통론을 다루고 있는데, 요순 우탕 문무 주공 공자 증자 자사 맹자로 이어진 유가의 계통이 이단의 학설에 의해 가려졌다가 송에 들어와 주돈이 정호 정이 장재로 계승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d. 동아시아에 끼친 영향

주희에 의해 완성된 성리학은 공맹사상을 잘 보존하는 동시에 더욱 체계화시켜, 학문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보게된다. 그의 사상은 청대에 왕부지 대진 등에 의해 부인되기도 하지만 중국사상사에 있어 지대한 영항력을 행사해왔으며, 송원명대에 관학으로서의 정통성을 유지해왔다. 그의 사상이 봉건시대의 통치이념으로서 가장 적절했으며, 또 그렇게 작용하였다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우리 나라에 있어서도 그의 사상은 조선의 건국과 함께 국가의 이념으로 받아들여진 후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이 등장할 때까지 거의 절대적인 권위를 유지해왔다. 조선 초의 사육신생육신의 드높은 의리관이 16세기에 오면서 이론적 차원의 탐구가 본격화됐는데, 그 주역은 이황 이이(자세한 것은 본서 1권 참조)였다. 이들에 의해 전개된 한국성리학의 특징은 #1정주학이 절대우위를 차지하여 기타 학문은 발전의 여지가 봉쇄되었고 #2학문의 성향에 있어 주지주의적 성향으로 흘렀으며 #3예를 절대시하고 #4체면 위주의 명분론적 사고가 팽배했으며 #5주리론적 보수성을 띠어왔다.

일본 역시 그의 사상을 수용하여 본건적 사유의 틀을 형성하였으며, 배적으로 주자학에 대한 반발이 진행되면서도 근대사상이 수입되기 전까지 여전히 그의 사상의 영향하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주희의 사상은 그의 생존시 한때 이단으로 몰리기도 했으나, 중국과 동아시아에 미친 지속적인 영향력은 매우 크고 광범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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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사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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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의 보물에 대해서는 근사록 (보물)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근사록(近思錄, 1175년경)은 주희(朱憙)와 그 학문적 친교가 깊었던 여동래(呂東萊) 두 사람의 합작(合作)이다. 이 서(書)는 북송 시대 도학(道學)의 대표적 사상가인 주돈이, 장횡거(張橫渠), 정명도(程明道) 및 정이천(程伊川)의 저술(著述)·어록(語錄)을 발췌하여 편집한 것이다.


성립의 사정을 알기 위하여 주자의 후서(後序)를 보면 초학자(初學者)의 입문서로서 지어진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주자도 이 책을 읽어 얻은 바를 기본으로 하여 다음은 4자(四子)의 전집(全集)을 읽을 것이며 구차하고 번다하다고 노력을 피하고 간편한 맛에 편승하여 이것만으로써 만족하다고 여기는 일이 있으면, 본서 편집의 의도에 반(反)한다고 말하고 있다.


구성은 도체(道體)·위학(爲學)·치지(致知)·존양(存養)·극기(克己)·가도(家道)·출처(出處)·치체(治體)·치법(治法)·정사(政事)·교학(敎學)·경계(警戒)·변이단(辨異端)·관성현(觀聖賢)의 14류(十四類)로 나뉘어 있다. 이것에 의지하여 학문의 도(道)에 들어간 사람은 중국 뿐 아니라 한국과 일본의 학자에도 많으며 따라서 주석서도 이 3국에 많다. 그리고 또 여동래(呂東萊)의 후서(後序)에 의하면 <근사록(近思錄)>은 이미 되어 있었다고 하면서 주자가 실제의 편자요 여동래(呂東萊)는 이에 참여한 것같이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