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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조금씩배워보자/동서고전 200선

C47 – 한국통사 (韓國痛史) / 박은식(朴殷植, 1859-1925)

C47 – 한국통사 (韓國痛史) / 박은식(朴殷植, 1859-1925)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임시정부의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의 저서로 1915년 출판되었다. 우리나라 역사 전반에 대한 간략한 개요와 대원군의 개혁정치, 민씨정권의 문호개방에서 비롯된 일제의 침략사와 갑신정변, 동학농민전쟁, 1911년 105인 사건에 이르는 독립운동사를 서술하였다.  한 나라의 혼을 담은 국교와 국사가 없어지지 않는 한 나라도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저자의 신념 하에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씌어진 책으로서, 민족주의의 사관에 입각해 한국근대사를 최초로 종합적으로 서술하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자(字)는 성칠(聖七)이고 호는 겸곡(謙谷), 백암(白岩·白巖·白菴), 태백광노(太白狂奴), 무치생(無恥生)이며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a. 생애와 작품활동

단재 신채호와 함께 2대 민족사학자로 꼽히는 백암 박은식. 이 두 사람은 열렬한 독립투사이면서 또 한국역사를 통해 민족혼을 일깨운 사학자이기도 했다. 백암은 황해도 황주에서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부친의 사랑을 받으며 사서삼경과 제자백가의 글을 익혔다. 그러나 부친의 의도와는 달리 과거시험 준비보다는 어수선한 나라일을 걱정하기 시작했고, 부친이 작고한 뒤에는 관서지방을 두루 여행하면서 여러 학자와 학문을 접하였다.

24세의 청년으로 서울에서 임오군란을 목격하고 그 수습방안을 올리기도 했고,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향시에 응시, 합격하여 말직에서 4년간 근무한다. 이때 평안도 관찰사 민병식이 그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동명왕릉의 책임자로 내보내 학문연구에 열중케 하는데, 그는 여기서 2년간 사색에 잠긴다.

1894년(35세)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원주로 은거했다가 1898년(39세) 상경하여 새롭게 변신하기 시작한다. 상경 직후 장지연 남궁억의 <황성신문>의 주필이 되어 부패한 관리나 일제에 야합하는 친일파를 공격하고, 일제의 침략만행을 통박하였다. 이때부터 독립협회에도 가입하였고, 자신이 지금까지 이단사상으로 배척했던 불교 기독교 서적은 물론 중국에서 전래한 신문 및 서양서적을 두루 섭렵했다. 이를 계기로 보수적 위정 척사론자에서 벗어나 개화자강 사상가로 변신하였다.

1905년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으로 <황성신문>이 폐간되자, 백암은 <대한매일신조>로 자리를 옮겨 새로 입사한 신채호와 함께 더욱 구국적인 논설을 발표했다. 1905년에서 1910년 사이에 박은식은 청말의 변법자강파인 양계초의 사상을 수용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자강론을 제시했다. 그는 사회진화론에 의거하여 당시 국제사회를 약육강식하는 진화론적 생존경쟁의 법칙이 지배하는 냉혹한 현실로 진단했다. 이러한 인식에서 국권상실의 원인이 자강력, 특히 민력의 부재에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옛 관습의 혁파와 교육 및 산업진흥을 통해서 자강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애국심 함양과 단체결성을 통해 민족의 역량을 결집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의 국가관은 종래의 왕조적 국가나 대한제국 체제가 아니라, 민의 단체적 결합으로서의 국가, 즉 국민국가에 근접하게 되었다. 따라서 국권회복운동에서 군주나 정부보다는 민권,민지, 민력 등 민의 요소가 중시되었다.

1909년 유교구신론을 발표하여 유교개혁을 주장했다. 그의 유교개혁론은 공자의 대동사상과 맹자의 민본주의라는 형식을 취했는데 #1군주중심의 유교에서 인문중심의 유교로 개혁할 것, #2공자의 구세주의적 실천정신을 회복하여 적극적으로 포교할 것, #3사변적인 주자학 대신에 실천적인 양명학을 진흥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1914년 <한국통사>를 저술하고, 1920년에는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하였다. 1923년 개최된 국민대회에서 임정에 대한 태도를 둘러싸고 창조파와 개조파가 대립할 때 개조론의 입장을 취하였다. 1924년에는 임시정부 국무총리 겸 대통령대리가 되었고, 1925년에는 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대통령 재직시 대통령책임제를 내각책임제로 바꾸었으며 이에 따라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1925년 11월  <한국통사>와 <한국운동지혈사>를 썼으니 늙었더라도 건국사를 쓰고야 죽겠다는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이국 땅에서 한많은 생애를 마쳤다. 그의 장례는 임시정부의 첫 국장으로 치러졌다. 그간 상해의 공동묘지에 묻혀 있다가 1993년 8월, 68년 만에 유해가 국내로 봉환돼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b. 백암의 역사관

   국혼론

백암의 역사관의 특징은 국혼론에 있다. 그의 국혼론적 역사인식은 다음과 같이 4단계를 거치면서 발전했다. 제1단계는 1905-1910년 자강론에 기초를 두고 자국정신과 국사를 강조한 시기이며, 제2단계는 1911년 민족정신의 표상인 민족적 영웅에 대한 연구를 수행한 시기이다. 제3단계는 1915년 <한국통사>를 저술하여 자신의 역사관을 국혼론으로 체계화한 시기다. 제4단계는 1920년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통해 국혼론적 역사인식을 독립운동사에 적용한 시기이다.

1905년 이전까지 백암은 정통 주자학자로서 한국을 유교국가로 파악하고 중화주의적 역사관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05년 이후 자강론을 제시하면서 애국심 함양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등 민족자주 의식을 강조했다. 특히 국사교육을 애국심 함양의 최선책으로 중시하였다. 그는 종래 유학자들의 중화주의적 역사학을 노예문학이라고 비판하고, 한민족의 역사와 민족사적 영웅을 중시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 기간에는 한국사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수행하지는 않았고, 과거인물들의 전기를 단편적으로 소개하거나 국사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수준에 그쳤다.


   영웅사관과 그 극복

1911년 중국 망명 직후 만주지역의 고적답사와 대종교 입교를 계기로 고대사 연구에 전력하였다. 이 해에 많은 저술을 통해 나타난 백암의 역사관은 전통적 유교사학의 중화주의적 역사관을 탈피하고, 민족의 자주독립을 지향한 실천적 역사학이라는 점에서 민족주의적 역사학의 특징을 뚜렷하게 지니고 있다. 동시에 구국의 영웅을 대망하면서 영웅들의 행적을 중심으로 민족사를 인식하는 영웅주의적 역사관의 성격을 띠고 있다.

백암은 1915년 간행된 <한국통사>에서 국혼론을 체계화하였다. 그는 동양의 전통적인 혼백론을 원용하여 국가 구성요소를 정신적인 국혼과 물질적인 국백으로 구분하여 파악했다. 여기에서 국혼(정신)은 국백(국가)보다 더 근본적인 요소로 간주되었으며, 종교언어문학역사 등을 포함하는 민족문화의 개념으로 정의되었다. 국혼은 정신적인 측면이 강조된 개념으로서 오늘날 민족정신의 개념에 준하는 것이다. 그는 국혼의 여러 요소 중에서 역사를 국혼의 소재처로 파악하고자 했다. <한국통사>의 저술동기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국혼을 유지해야 한다는 <한국통사>에서의 주장이 1920년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국혼이 강한 한국민족은 반드시 독립한다는 확신으로 굳어졌다. 말하자면 국가의 멸망이라는 통한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체계화된 역사인식은, 독립을 위한 피의 투쟁사를 서술하면서 독립에 대한 확신으로 굳어졌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국혼론적 역사인식이 지니는 관념론적이며 영웅주의적인 한계를 극복해가는 모습이 발견된다. 즉 정신 자체가 아니라 그 표현인 독립투쟁의 실천과정을 서술함으로써, 관념론적 한계를 점차 탈피해가고 있다. 또한 독립투쟁에서 노동자 농민 등 민중의 역할을 중시하면서 영웅주의적 한계를 탈피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독립운동을 민족정신의 전개과정으로 파악함으로써 정신사적 기조는 굳게 견지하고 있었다.


c. <한국통사>의 내용

구한 말부터 준비하여 1914년에 완성하고 1915년에 중국 상해에서 출판한 본서는 1864-1911년의 한국근대사를 3편 114장으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

제1편에서는 우리 나라의 지리적 환경과 역사의 대강을 다루고, 2편에서는 대원군 집권 이후부터 대한제국 성립 이전의 역사를, 제3편에서는 대한제국 성립 이후 국망까지의 역사를 서술했다. 이러한 서술체계는 동양의 전통적인 역사서술 체계인 기전체나 편년체를 따르지 않고 근대적인 역사서술 체계를 원용하여 사건 중심으로 장을 나눈 것이다. 그는 각 사건들의 내용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된 원인과 결과까지도 서술, 논평함으로써 인간관계에 입각한 근대적 서술방법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그리고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17개 부분에 대해서는 사론을 부기하는 전통적 방식을 원용하여 안이라는 단서를 붙여 사실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내렸다. 본서는 내용상으로 일제의 침략과정을 서술하고, 그 부당성을 폭로하는 한편, 이에 대응하는 한민족의 자주독립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반성한다는 의미도 있다. 그것은 한민족이 국권을 상실해가는 통한의 역사를 통해 자괴감을 유발함으로써, 독립운동의 정신적 원동력을 제공하고자 했던 것이다.

백암은 대원군의 외척 및 문벌견제, 군포제개혁, 서원철폐, 풍속교정 등 내정개혁에 대해서는 긍적적인 평가를 내렸으나 화폐정책과 전제적 정치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특히 대원군은 대혁신이 가능한 내외적 조건의 유리함에도 불구하고 배외주의적 폐쇄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중흥의 기회를 놓쳤다고 보고, 이를 애석한 일로 평가했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통사>는 대원군 집정기부터 시작한다고 했다. 또한 자수자강의 실력을 구비하지 못한 상황에서 문호를 개방한 민비정권의 개항정책도 비판하였다. 특히 한반도 주변의 정세에 대한 통찰은 예리했다. 그는 일본, 중국, 러시아 3국 사이에 세력균형이 이루어지면서 약소민족인 한국이 자주독립할 수 있으나, 어느 한 나라가 우세를 독점하면 위험하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미국, 영국 등 구미 열강은 한반도에 적극적 이해관계가 없기 때문에 한국을 이용하여 일본의 환심을 사려는 입장이었다고 보았다. 갑신정변에 대해서는 여건미숙으로 인한 실패를 애석하게 여겼다. 그러나 혁명의 여러 주역들이 일제의 술책에 말려든 결과가 되었다고 평가하면서, 타력으로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동학혁명에 대해서는 갑오동학란이라고 표현하고 정치혁명으로서의 한계를 지적했지만, 신분해방을 실현한 개혁의 선구라고 평했다.

백암은 1905년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가 내한한 목적이 한국인을 회유하고 민권신장 및 위회설립 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지적하였다. 이어 그는 일제의 한국침략에 이용당한 한국인의 왕족으로서 일본에 머문 자, 갑신정변과 갑오경장의 주모자로서 일본에 망명한 자, 일진회의 지도적 인사 등 3종류로 나누어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일본을 이용하여 독립을 도모하려는 선의의 친일파에 대해 약자가 강자를 이용하려고 하는 것은 큰 착오로서 오히려 국가와 민족을 망치는 결과가 된다고 경고했다. 이처럼 본서는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해가는 통한의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에 대한 저항운동도 중시하여 의병항쟁을 정신사적으로 영구불멸할 것이라고 높이 평가했고, 애국계몽운동 단체를 애국당으로 지칭하면서 그 교육 구국운동의 성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외의 항일투쟁도 상세하게 서술함으로써, 한국근대사의 주체적 전개과정을 밝히는 작업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본서에서 이미 독립을 위한 피의 투쟁사인 <한국독립운동지혈사>가 예비되고 있는 것이다.

본서는 중국 상해에서 간행된 이후 중국 및 러시아의 한인 교포들 사이에 널리 보급되었고, 미주에서는 한글로 번역되어 교민들의 교과서로 널리 사용되었다. 또한 국내에서도 비밀리에 유포됨에 따라 일제는 이에 대처하기 위해 1916년 조선반도사 편찬위원회를 조직하여 <조선반도사>의 간행을 준비하였다. 이처럼 본서는 암울했던 일제시대에 민족과 함께 고통과 희망을 나누면서 일제의 식민통치를 위협하는 대표적인 역사서가 되었다.


d. 백암의 역사적 의의

   민족주의 사학

백암사학은 구한말 역사학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근대 민족주의적 역사학의 체계를 확립했다는 점에서 사학사적 의의가 크다. 우선 역사서술 체계면에서 볼 때 전통적 서술체계를 탈피, 인과관계에 따라 사실을 설명 분석 비판하는 근대적 역사서술 체제를 개척하였다. 이를 통해 구한 말 역사학의 서술방식에 나타난 과도기적 현상을 극복했다는 점에서 본서는 근대적 역사서술방법에 따른 최초의 시대사였다.

또한 민족적 과제를 실현하기 위한 실천적 역사학을 수립함으로써 저항주의적이며 개혁적인 민족주의적 역사학의 전통을 수립했다. 이것은 구한말 역사학이 지니고 있던 실천성의 결여를 극복하고, 그 이후 민족주의적 역사학의 발전에 토대를 마련한 것이었다. 특히 국혼론적 역사인식에 나타난 정신사관적 요소는 이후 민족주의적 역사학의 기본적이 특성으로 자리잡게 된다. 일제하 민족주의적 역사학자 정인보가 조선의 얼 을 강조한 것은 박은식의 국혼론적 역사인식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었다.


   근대사연구 주력

백암의 실천적 관심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한 인식의 중요성을 제고하였다. 이에 따라 신채호를 비롯한 대부분의 민족주의적 역사학자들이 고대사 연구에 집중한 것과는 달리 근대사연구에 개척적인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 그의 근대사연구는 질과 양면에서 모두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특히 한국근대사를 일제의 침략과 그에 대한 저항이라는 각도로 파악하는 시각은 차후 한국근대사 연구의 기본적 구도로 자리잡게 된다. 이 점에서 그의 연구는 현재까지도 근대사연구에 토대를 이룬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백암사학의 4단계에 걸친 발전과정은 한국근대 민족주의 운동의 발전과정과 궤를 같이하면서 한국민족주의 형성에 중요한 기초를 제공했다. 그러나 그의 국혼론적 역사인식은 관념론적이며 영웅주의적인 요소를 지닌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한계는 1919년 이후 독립투쟁사 서술, 민중의 역할에 대한 중시 등으로 점차 극복되어갔지만, 그의 사학이 지니는 정신사관의 기조는 지속적으로 견지되었다. 이밖에도 그것이 국권상실의 과정을 직접 목격하였고, 또 몸소 독립운동에 참여한 필자에 의하여 저술된 점, 단순한 나열이나 연결에 그치지 않고 통사로서의 뚜렷한 목적 밑에서 저술된 점, 우리 나라 최근세사를 서술한 사서 가운데 가장 종합적으로 서술한 점 등이 의의를 가진다. 또한 이 책은 통사로 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히 국권상실과정에 있어서의 깊은 반성을 표현하고 있으며, 특히 중요한 부분에 있어서는 반드시 저자의 의견을 병술하여 뒷사람들의 이용에 크게 도움을 주고 있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

<한국통사>는 지금까지 대개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은 사실을 중심으로 엮어졌던 우리 나라의 최근세사를 민족의 주체적 활동을 중심으로 하여 다시 서술함에 있어서 중요한 지침이 될 것이다. <한국통사>가 국권상싱과정에 있어서의 일종의 반성을 위한 서술이라면 그의 또하나의 저서인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국권회복운동의 전모를 서술한 역사서다. 18세기 후반부터의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에 피로써 저항한 민족운동사인 이 저술은 갑신정변의 실패로부터 1920년대의 만주지방에서의 독립군의 활동상황까지를 서술하였는데, <한국통사>는 이 책과 함께 이용되어야만 그 가치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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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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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신문》 창간호

황성신문(皇城新聞)은 남궁억, 나수연 등이 중심이 되어 1898년(광무(光武) 2년) 9월 5일 《대한황성신문》의 판권을 인수받아 창간한 일간 신문이다. 주필로는 유근, 박은식, 장지연, 신채호 등이 활동하였다. 민간자본 신문이었으며, 국한문혼용체가 쓰였으며, 애국적 논조로 일관했다.[1] 1905년 을사조약에 대한 장지연의 항일 사설 〈시일야방성대곡〉 기사로 인해 정간당했고, 다시 1906년 복간되었다.[2] 1910년 일제강점기 때에 신문제호가 강제로 '한성신문(漢城新聞)'으로 바뀌었으며, 9월 14일 제3470호를 끝으로 종간되었다.


황성신문이 발행된 13년간 평균 발행부수는 3000부 가량이었다고 한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