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조금씩배워보자/동서고전 200선

C50 – 전습록 (傳習錄) / 왕수인(王守仁, 王陽明, 1472-1528)

C50 – 전습록 (傳習錄) / 왕수인(王守仁, 王陽明, 1472-1528)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중국 명대의 주지주의적 주자학 풍조와 명분 지상주의를 비판하고 지행합일의 양명학을 개창한 왕수인의 사상이 담긴 책. 그의 지행합일설은 당시의 관리등용제도를 포함한 모든 주지주의적 전통을 대체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조선의 실학사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이 책에서 만사에 스러질수 없는 도덕적이고 고귀한 인간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a. 생애와 작품활동

중국 명나라의 사상가로 호는 양명, 절강성의 여요현에서 진대의 명필가 왕희지를 먼 조상으로, 장원급제한 부친 아래서 태어났다. 8개월짜리 조산아로 5세까지 말문이 트이지 않았고, 약골이어서 청년기에 이미 폐병으로 각혈을 하곤 했다. 그러나 11세에 시를 지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14세때부터는 말타기 활쏘기 등을 배우고 병법을 읽혔는데, 이는 뒷날 그가 내외우한에 시달린 명나라 조정을 위한 무인으로서의 실력을 발휘한 바탕이 되었다.

17세에 결혼하던 날 놀러 나가, 도교의 사원인 도관에서 우연히 도사를 만나 양생의 길은 정의 한 글자에 지나지 않는다 는 말을 듣고 이튿날 신부집에서 찾으러 올 때까지 밤세워 양생술을 읽혔다. 이를 계기로 그는 한때 도사가 되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으며, 그의 사상에 도교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결혼 이듬해, 한 주자학자를 만나 격물치지설과 성인은 배워서 이룰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성학에 뜻을 두게 된다. 그 유학자와의 만남은 그의 사상발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다. 그 뒤 그는 주자의 격물치지의 참뜻을 체득하기 위해 뜰 앞의 대나무(물)를 연구(격)해보기로 하고, 일주일 동안 대나무를 들여다보았으나 병만 얻고 말았다. 그때 그는 격물은 성인이 되는 공부가 될 수 없음을 깨닫고, 주자의 학설을 멀리했다.

21세와 25세 때 두 번 회시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자 대문호가 될 결심을 하고, 절에 들어가 시 모임을 갖고 매일 글 짓는 연습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변경의 위급한 상황을 보고 무예를 단련하며 병가의 비전을 섭렵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28세에 진사에 합격하여 열심히 노력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이로 인해 정치에 실망을 느끼고 고향으로 돌아와 정사를 짓고 도술을 익히나, 곧 부질없음을 깨닫고 불교에 귀의한다. 그러나 곧 이것도 버리고 유교로 돌아온다. 이러한 그의 젊은 시절의 방황, 즉 과거에 실패한 임협 기마 문사 도교 불교 등에 빠졌던 것을 왕양명의 5익 이라고 한다.

34세경에는 무종이 즉위하여 환관인 유근이 전권을 행사했다. 이에 양명은 이를 탄핵하고 투옥된 대선 등을 구하려다, 곤장 40대를 맞고 용장으로 좌천당했다. 용장에서의 외적 시련은 내적 깨달음으로 인도한 계기가 되었다. 용장에서 그는 초막이나 암굴에서 생활하면서 원주민을 잘 다스려 사부로 존경을 받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진리를 얻기 위해 밤낮으로 몰두하던 중 홀연히 격물치기의 뜻을 깨닫고 얼마나 기뻐했던지, 잠자던 주위 사람들이 놀라 일어났다 한다. 이부터 심즉리 라는 근본입장을 확립하고 외물에서 이를 추구하는 주자학적 격물론에서 탈피하여 마음속의 부정을 없애고 양심을 발휘해야 한다는 새로운 격물치지의 해석을 제시하였다.

38세 때 유근이 주살되자, 그는 순조롭게 영전을 거듭하였고, 농민반란을 진압하였다. 이 시기에 지행합일설을 제창하였다. 주자에 맞서는 육구연(육상선)의 공적을 드러내고 <대학고본>을 간행하여 주자학자들의 비난을 샀다. <전습록>을 간행하는 한편, <주자만년정론>을 편집하여 주자의 만년의 학설이 자기와 다르지 않다고 밝히기도 했다.

48세 때 왕족인 신호의 반란을 진압하여 공을 세웠으나 모함을 받아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49세 때 이러한 위기 속에서 치양지설을 제창하여 주자학을 완전히 벗어나 새로운 학설을 전개하였다.

50세 때 세종이 즉위하자 그는 높은 직책에 임명되었으나 간신배들에게 환멸을 느끼고 부임치 않았다. 그는 관직에서 떠난 후 모든 것을 잊고 학문연구와 교육에 전력하였다. 이에 제자들이 각지에서 구름처럼 모여들어 양명학파를 이루었다. 57세 때에는 야만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조정의 강력한 권유로 이를 토벌하고 돌아오다 과로로 쓰러졌다. 유언을 물으니, 이 마음이 광명하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며 눈을 감았다.


b. 양명학의 성립과 발전

   양명학의 성립

당시의 사상적 풍조는 먼저 제대로 알고 나서 행하라 라는 주자학의 가르침이었다. 그러나 과거제도의 제약 아래서 공부하는 사랍들이 자신의 앎을 행하려면 관직에 오른 후에나 가능하고, 또 그러다 보면 평생 공부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사상계에 지행합일이라는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것이 명의 중기에 나타난 양명학이다. 송대에 발달한 주자학은 주자의 이기이원론으로 성즉리를 표방하면서 사상적으로 완성되었다. 그러나 양명학은 이에 반대하여 이기일원론을 바탕으로 심즉리를 내세워, 심이 인간의 주체요, 인간이 우주의 주인이라는 사상으로 일관하고 있다. 주자학으로부터 지행합일설과 치양지설을 도출한 양명학은 명대의 침체된 사상계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왕양명은 젊은 시절 한때 주자학의 신봉자로 성인의 경지는 배워서 도달할 수 있다는 이상주의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이를 위한 방법으로 주자가 말하는 격물치지설에 대해 깊은 의문을 갖게 되면서 육구연의 심학에 기울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심즉리설을 깨우치게 된다.

주자학과 양명학은 진리를 깨닫는 방법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인다. 즉, 주자학이 오랜 기간의 연구와 수양에 의해 깨달음을 얻는 것(격물치기)이라면, 양명학은 정신의 집중에 의하여 한 순간에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주자학은 태극이론을 근본으로 독서에 의해 성인의 길을 탐구하지만, 양명학은 태극이론으로부터 인간의 윤리학은 나오지 않았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의 주체를 이루는 것은 마음이며, 이는

절대선이므로 이를 본래의 모습인 절대선으로 되돌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왕양명의 심즉리 학설이다. 이를 위해서는 심의 작용으로 가장 중요한 양지를 충분히 활동시켜야 된다고 하였다. 또 지도 단순히 아는 것만이 아니라 반드시 행동하는 지여야 하며, 여기에서 지행합일설 이 나오게 된다.

특히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욕망을 없애는 것이 절대적 조건이며, 욕망을 버리면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양지적인 인간평등을 주장하고 적극적인 행동주의를 제창하였다.


   양명학의 발전

양명학파는 왕양명의 사후 좌우파로 갈라졌다. 좌파에서는 왕간(왕심제, 후에 태주학파의 대표자)과 같은 서민사상가가 출현하여 인욕도 천리라고 주장하고, 형식화한 주자학적 도덕의 허위성을 격렬히 공격하였다. 양명학 좌파는 이지(이탁오)에 의하여 후천적인 지식이나 도덕 이전의 자자를 동심이라 하여 강조하게 된다. 이는 양지만 있으면 주색에 빠져도 성인군자가 되는 데 지장이 없다고 극언하여 주자학자들의 맹렬한 비판을 받아, 후에 자살하였다. 이지의 주장은 권위주의적인 사대부 의식에서 본다면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사상이므로 이는 심학의 횡포라고 지탄받았다.

이에 대하여 나홍선 등의 양명학 우파는 좌파의 지나친 행동주의를 반성하여, 왕양명의 양지설을 주로 하되 수양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주자학 쪽으로 접근하였다.

이와 같이 양명학은 방대한 경전을 통해 박학을 존중하는 전통적인 유학과는 달리, 많은 지식보다는 간단명료함과 정직함을 중시하는 성인이 되는 길은 박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바로 내세우는 데 있음을 강조한다. 양명학은 유교적 권위에 대하여 서슴없는 비판을 가하고 평등주의자유주의를 주장하며 이단과 욕망을 긍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그의 제자이자 그 계승자는 위험한 사상으로 탄압받기에 이르고, 이지(이탁오)의 비극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양명학은 민간의 사학인 지방의 서원을 중심으로 발달한 것일 특징이다.


c. <전습록>의 내용과 그 사상

전습록은 왕양명의 제자들이 그의 어록을 모은 것으로, 전습은 <논어>의 <학이>편의 증자의 말인 전습불평 에서 나온 것이다. 그 구성은 상중하권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상권에서는 심즉리설지행합일설 등이 제시되었다. 중하권에는 만년에 확립된 치양지설만물일체론 등을 제시하였는데, 전통적인 유학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였다.


   심즉리 (心卽理)

그는 육구연의 마음이 곧 이다라는 심학을 받아들여 마음이 곧 이다. 천하에 마음 밖에 일이나 마음 밖의 이가 있겠느냐?  마음 밖에 물이 없고 마음 밖에 일이 없다 고 하였다. 그는 이를 우주의 근본원리로 보고 이는 곧 마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즉, 모든 현상이란 마음의 인식에 의해서 비로소 존재한다는 것이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새가 울지만 마음이 없다면 아름다운 빛깔도, 고운 목소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천지만물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마음과 천지만물이 서로 통하기 때문이며, 만일 서로 통하는 바가 없다면 천지만물이란 없는 것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주자가 강조한 추상적인 이를 배격한다. 주자는 효의 이가 있기 때문에 어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며, 충의 이가 있기 때문에 임금에게 충성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였다. 효도하는 마음이나 충성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러한 이도 없다고 하였다. 주자의 사상체계에 의하면 마음의 존재여부에 관계없이 이는 영원히 존재한다. 그러나 양명의 체계에 의하면 마음이 없으면 이도 없다. 그러므로 마음은 잉법자요 우주의 근원이라는 절대적 유심론의 성격을 띤다.


   지행합일 (知行合一)

지행합일의 근거는 심즉리에 있다. 마음 안으로 돌이켜 탐구하는 방법을 이용하여 만물과 한몸이 되는 경지(물아일체)에 도달할 것을 요구한다. 그의 지행합일과 지행병진의 이론의 요지는 지식과 실천을 분리시키는 송의 정이의 학설을 반대하는 데 있었다. 양명은 모든 이가 마음에 있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지식 역시 마음에 본래부터 양지로서 갖추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충과 효를 행하는 것은 충효의 이가 마음속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며, 그것은 결국 행위가 양지의 표출이라는 뜻과 같은 것이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지와 행은 합일의 관계에 있다고 하였다. 만일 지와 행이 합일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다만 사욕의 가리움 때문이라 한다. 그리하여 그는 앎은 행동의 시작이요, 행동은 앎의 완성이다, 행동을 밝히고 살피는 것이 곧 앎을 진실하고 독실하게 하는 것이 곧 행동이다 라고 하였다.


   치양지 (致良知)

치양지란 양명학에서 말하는 마음의 본체인 양지가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발휘됨을 말하는 것으로, 심즉리와 지행합일을 하나로 묶어 적극화시킨 것이다. 사물의 도리는 책이나 외적인 사물 안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내적인 자기 마음속에서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치양지의 방법으로는 격물치지성의정심 등을 들고 있다. 주자는 격물치지에 대한 설명에서 격물을 사물의 이치를 궁리하는 것, 치지를 지식을 추구하여 얻는 것이라고 본다. 즉, 주자는 격물치지를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넓힌다 로 해석하고 있다. 반면 양명은 격물은 행위를 바로잡는다는 뜻이고  치지란 본래 마음의 본체인 양지를 실현하는 것으로 보고,  격물치지를  마음을 바로잡고 양지를 닦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양명은 양지가 실현되지 못하는 것을 물욕과 사욕으로 돌린다. 우리의 뜻하는 바가 항상 양지의 방향을 좇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물욕 또는 사욕에 가릴 수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선악문제와 공부문제가 제기된다. 마음을 올바르게 한다 함은 인욕을 물리치고 천리를 보존하는 것을 말하며, 이러한 마음의 공부를 심학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성의나 정심수신도 모두가 격물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즉, 성의는 격물과 치지가 가장 성실하게 수행되는 것이요, 성실하면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다(정심). 그러므로 정심이란 성의에 지니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수신은 마음을 바로잡아 참된 앎에 이르는 것이라 하고, 수신하게 되면 제가치국평천하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8조목은 결국 참된 앎에 이르는 것, 즉 치양지에 그 근본이 있다고 하였다.


d. 양명학의 영향

왕양명은 명나라의 지배사상이던 주자학에 대항햐여 인간평등관에 바탕을 둔 주체성 존중의 철학을 확립하고, 만물일체와 이상사회 실현을 지향하는 심즉리 치양지 지행합일이라는 사상을 전파했다. 그는 양지에 있어서는 우부라 할지라도 성인과 다름없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거리를 메운 모든 사람들이 다 성인이다고 하면서 평등사상을 외쳤다. 이와 같은 그의 사상은 <전습록>에서 일관적으로 흐르고 있는 사상으로, 결국은 지와 행을 둘로 갈라 주지주의적 경향으로 타락해버린 주자학의 공허함을 비판한 것이다.


   일본 메이지 유신

이 같은 주장을 담은 <전습록>은 수백 년 동안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전습록>에 대해 중국이 명대는 물론 청대 학술에도 비판은 있었지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은 양명학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은 1972년 왕양명 탄생 500주년 기념으로 <양명학 대계>를 내놓기도 했다.


   조선 강화학파

우리 나라에 <전습록>이 들어온 것은 왕양명의 생존시이나, 당시 조선의 분위기는 정주학이 압도하는 상황이어서 이황 이래 양명학은 이단으로 배척되어왔다. 양명학의 수용자는 대체로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사람들, 특히 남인과 소론 계통의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대개 양명학을 성리학과 대립되는 것으로 파악하기보다는, 이를 보완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양자 사이의 조화를 꾀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 양명학을 대표하는 정제두는 주자와 단절하고 강화도에서 양명학에 몰두하였다. 정제두의 대표적인 저서인 <존언>은 그의 양명학 세계를 나타내주는 것인데, 그도 주자의 해석이 아닌 경전의 본 뜻을 존중하는 복고적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비록 주자의 성리학 일변도인 조선사회에서 이단이 되기를 꺼려한 관계로, 겉으로는 주자를 표방하면서도 속으로는 왕양명을 따르는 양주음왕의 경향이 있었다.

정제두의 강화학파는 200년 동안 이어졌다. 우리 나라에서는 양명학은 실학파 중 북학파의 사상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이들이 저서에 천지만물이 한몸이다 그리고 시민평등관에 입각한 교육이념 등 도처에 양명학 사상과 공통되는 점이 많았다. 양명학의 주체사상은 한국독립운동과 직결되었다. 이종휘 등 강화학파의 사관이 신채호 박은식 정인보 송진우 등 독립운동가에게 미친 영향은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

양명학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왕수인

유교

Ru character.png

산 자를 봉양하고 죽은 자를 장사지냄에 모자람이 없게 하는 것이 왕도의 시작이다.

 

— 《맹자》 〈양혜왕 상편〉

기본 개념[보이기]

인물[보이기]

경전[보이기]

역사[보이기]

관련 항목[보이기]

v • d • e • h

Portal icon 철학 포털

양명학(陽明學)은 중국 명나라의 철학자 왕수인(王守仁)의 호인 양명(陽明)에서 이름을 따서 붙인 유가 철학(儒家哲學)의 한 학파로 주관적 실천 철학에 속한다.[1] 양명학이라는 명칭은 메이지 유신 이후에 퍼진 것으로, 그 이전에는 육왕학(陸王學) 또는 왕학(王學)이라 불렸다. 육왕학(陸王學)은 육구연(陸九淵)의 학풍을 이어 왕수인이 대성한 유학(儒學)을 뜻하고, 왕학(王學)은 왕수인의 유학을 뜻한다.


심즉리(心卽理) · 치양지(致良知) · 지행합일(知行合一)은 양명학의 3강령이다.[2]


목차  [숨기기] 

1 역사

1.1 양명학 이전

1.2 양명학의 등장

1.3 전개

1.3.1 중국

1.3.1.1 양명학 우파

1.3.1.2 양명학 좌파

1.3.2 조선

1.3.3 일본

2 양명학의 근본 사상

2.1 심즉리

2.2 치양지

2.3 지행합일

2.4 모든 물체의 인과 양지의 결합

2.5 사상마련

2.6 격물(格物)

3 양명학이 연 지평

3.1 사람의 욕구

3.2 붕우 관계의 중시

4 양명학 주요 학자

4.1 중국

4.2 조선

4.3 일본

5 같이 보기

6 각주

7 참고 문헌

8 외부 링크

역사[편집]

양명학 이전[편집]

 이 문단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지금 바로 이 문단을 편집하여, 참고하신 문헌이나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각주 등으로 표기해 주세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다면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09년 4월 1일에 문단의 출처가 요청되었습니다.)

송나라 시대를 거쳐 오면서 학자들은 유교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 수나라나 당나라 이전에는 경서의 음독이나 훈고(단어의 의미)를 중시한 훈고학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유교가 거쳐오면서 송나라 시대의 학자들은 유교 경전에 담겨진 공자나 맹자등의 본래 의미와 달리 왜곡했고, 그런 성인들의 본래의 의미를 이해 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는 인식에 이르렀다. 수, 당나라 이전의 훈고학을 가르치면서도, 훈고학 중심의 사회를 고치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 결과, 송나라 시대 이후의 유교 사상은 훈고학에서 주자학으로 새로운 학파가 생겨났다.


주자학이 중요시한 건 성인들의 말이나 경전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사상이 아니라는 데 의견을 맞추어서 새 경전을 만들었다는 점에 있다. 새 경전들은 「사서」라고 불리는 네 개의 경전이었다. 이 책은 「예기」로부터 분리된 「대학」과 「중용」, 그리고 이 책들보다는 하위 취급을 받고 있던 「논어」와 「맹자」 이 네 개의 경전이었다. 이 경전들은 내용이 짧고 잘못된 해석을 고치는 데 적당했기 때문에 이용되었다. 특히 주자학이 맹자의 「성선설」을 중요시하는 등 이 주자학은 중국 여러 지역에 점차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주자학이 중국의 여러 지역에 퍼진 까닭은 주자학이 왕이 집권하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주자학은 중국 전역뿐만이 아니라 조선, 일본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주자학도 문제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주자학이 중국 전역으로 퍼지긴 했지만, 이 주자학을 바탕으로 왕들은 왕권을 다졌고, 오히려 훈고학의 상황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성인들의 본래 의미가 전혀 다른 왕의 집권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주자학의 본래 의미는 퇴색되었다.


양명학의 등장[편집]

 이 문단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지금 바로 이 문단을 편집하여, 참고하신 문헌이나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각주 등으로 표기해 주세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다면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09년 4월 1일에 문단의 출처가 요청되었습니다.)

주자학은 군주들의 황권, 왕권 강화의 재료로써 전락됐다. 그래서 주자학은 도덕적인 측면이 없어져 갔다. 그 도덕윤리를 다시 되살리려는 노력을 한 학자가 바로 왕수인이다. 그는 당초 도덕적인 측면을 되살리려는 노력을 시도하는 학자였으며. 그래서 왕수인도 주자학을 믿었지만 사회가 변화를 보이지 않자 결국 그는 주자학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그리고 그는 양명학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주자학은 정치학, 존재론[3], 주석학[4], 윤리학[5], 방법론[6] 등을 모두 포괄하는 종합적인 학파였다 그러나 양명학은 그 중의 윤리학 및 방법론 등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유교에서는 윤리학적 측면이 가장 중요했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회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양명학은 여러 유명한 학자들을 배출시켰다.


전개[편집]

중국[편집]

중국에서는 왕수인의 제자들이 양명학을 많이 발전 시켰다. 그렇지만 양명은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칠 때, 하나의 방법을 고집하지 않고, 각자의 재질이나 습성에 따라 가르쳤다. 누구에게는 본체를 강조하는가 하면, 누구에게는 정반대로 공부를 강조하기도 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양명이 죽은 이후 제자들이 받아들인 학설의 차이에 따라 크게 귀적파(歸寂派), 수증파(修證派), 현성파(現成派)로 나뉘었다.[7] 그 뒤 양명학은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며 발전해 나갔다.


양명학 우파[편집]

양명학 유파 중 정통파(正統派)로 간주되었다. 귀적파와 수증파가 우파에 속한다. 양명의 ‘심즉리(心卽理)’는 선악을 포함한 마음이 이(理)가 아니고 마음이 발동할 때 이미 그 마음은 이(理)라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마음의 악폐(惡弊), 즉 사욕(私欲)을 극복하여서 마음을 양지(良知) 그것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유파는 양명의 〈4구결(四句訣)〉에서 선(善)도 없고 악(惡)도 없는 것은 심(心)의 체(體)라 한 것을 심(心)의 본체는 지선무악(至善無惡)이라고 하여 전통적인 성선설(性善說)과 타협하고, 심(心)의 문제를 중심으로 하는 양명 심학(陽明心學)으로부터 떠나서 점차로 주자학적 이(理)를 문제로 하여 실제적·현실적 연구를 중시하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양명의 문인 전서산(錢緖山, 1496~1574)이 왕용계(王龍溪, 1498~1583)와 〈4구결〉을 둘러싸고 대립하여 분파한 이후, 우파에는 추수익(鄒守益, 1491~1562), 나홍선(羅洪先, 1504~1564), 유종주(劉宗周, 1578~1645) 등이 있었다.


양명학 좌파[편집]

양명학 유파의 하나이다. 현성파가 여기 속한다. 이 파의 왕용계는 선(善)도 없고 악(惡)도 없는 것은 심(心)의 체(體)요, 선(善)도 있고 악(惡)도 있는 것은 의(意)의 움직임이며, 선(善)을 지(知)하고 악(惡)을 지(知)하는 것은 양지(良知)요, 선(善)을 하고 악(惡)을 버리는 것은 격물(格物)이라 한다는 왕양명의 〈4구결〉에 대하여, 이것은 일반 사인(士人)에게 설명하기 위하여 설치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는 심즉리(心卽理)·치양지(致良知)의 실천적 주체의 입장, 즉 실천을 주로 하는 도(道)·이(理)에의 오입(悟入) 내지는 그것의 체득이라고 하는 입장에서 보면 의(意)·지(知)·물(物)에 선악의 대립이 있을 리 없다는 것이다. 진정한 학문은 오득(悟得)만을 존귀하게 여긴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왕용계는 마음이 본래 무선무악(無善無惡)하면 그때 발하는 행위는 양지(良知) 그것이며, 따라서 양지는 배우지 않고 사려하지 않아도 사람이 본래 완전하게 구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사고방식은 이 파의 이탁오에게 전해지면서 한 걸음 나아가 적극적인 인욕(人欲)의 긍정으로 발전하였다. 이 파의 특색은 유(儒)·불(佛)·도(道) 3교의 혼융, 선학적(禪學的)경향, 소농(小農)·도장(陶匠)·나무꾼·염정 등의 낮은 신분의 사람들을 포함하는 서민 교육 실천, 전통의 부정이나 반체제적(反體制的)·신비적인 점 등에 있었다. 이 파는 특색있는 사조를 형성하면서도 새로운 시대를 형성하는 구체적인 사상 내용을 갖지 못하고 공론적·신비적 경향만을 강조하다 오래지 않아 소멸하였다. 왕용계, 이탁오 외에 왕간, 왕벽(王檗-東崖, 1510-1587), 안균(顔鈞-山農, 생몰년 미상), 양여원(梁汝元), 나여방(羅汝芳-近溪, 1515-1588) 등이 이 파에 속하였다.[8]


그러나 청나라 시대부터 양명학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고증학에 밀려서 쇠퇴하기 시작했고, 양명학은 성리학을 약간 보완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갈수록 쇠퇴해 갔다. 이후의 옹정제, 건륭제의 시대를 지나면서 청나라의 황제들은 성리학을 더욱 확립해 양명학은 중국에서 완전히 사라지는듯 했다.


하지만 일본에서의 메이지 유신으로 양명학의 영향이 중국에도 다시 부활했다. 1840년을 주기로 아편 전쟁 이후 중국인들은 개혁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고, 일본에서 양명학이 메이지 유신을 정당화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일본에서 양명학이 역수입되었다. 양명학은 중국 국민들에게 개혁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조선[편집]

박상(1474~1530)의 《눌재집(訥齋集)》연보 48세 조에 “왕양명 수인의 《전습록》을 변(辨)하다. 명의 학설이 동래(東來)하였는데 동유(東儒)들은 그것이 어떤 내용인지 몰랐으나 선생이 그것을 보고 선학(禪學)이라 변척하여 김십청(金十淸)과 더불어 수창(酬唱)한 삼절시(三絶詩)가 있었다.”는 내용을 볼 때 양명학 전래 시기는 중종 16년(1521년) 이전이다.[9] 이후 16세기∼18세기에 조선 유학계에서 양명학의 찬·반 논쟁이 전개되었다. 양명학 배척론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여 그 도입을 억제하고, 양명학 찬성론을 ‘사문난적(斯文亂賊)’, ‘이단(異端)’이라고 규탄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먼저 이황은 〈전습록변(傳習錄辨)〉을 지어 지행합일설을 비판하였는데, 양명학을 불교의 선학(禪學)과 동일한 것으로 보아 비판했다. 양명의 《대학》 친민설, 심즉리설도 여러 논변에서 비판했다. 그러나 이황의 비판 중에 양명학의 가장 핵심 논지인 치량지에 관한 내용이 없는 것에서 그가 양명의 모든 전적을 충분히 보지 못하고 비판한 것임을 알 수 있다.[10] 또, 유성룡은 왕양명의 주자학 비판을 조목별로 반박했다. 그 뒤로 퇴계의 문하 뿐 아니라 조선 성리학 전체가 양명학을 배척하여 양명학은 조선에 발 딛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양명학을 받아들인 학자로는 남언경(1528~1594)과 이요가 있다. 그들을 이어 장유(1587~1638), 최명길이 미미하나마 연구했으며, 특히 장유는 조선 유학계의 주자학 일변도를 개탄하였다. 또한 이익(李瀷)도 주자학의 주지주의(主知主義)적 경향의 공리공론(空理空論)을 비판하고 행(行)을 강조하였다. 이후 정제두(1649~1736)에 이르러 크게 발전했다. 근대 초 정인보·박은식까지 그 학풍이 이어진다.


일본[편집]

일본에서는 양명학이 반체제적인 성격을 가져 혁명가들이 주로 양명학을 연구하기도 했으며, 또는 양명학을 연구하게 되면 혁명적인 지향이 되기 쉽다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양명학 역시 일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나카에 도주나 구마자와 반잔이 대표적인 학자였다.


에도 시대 이후 메이지 유신에 사상적 영향력을 끼쳐서 양명학은 이후 더 발전했다. 양명학과 관련한 책이나 잡지는 수없이 만들어졌으며, 양명학 주요 책은 쇠퇴하고 있던 중국에 역수입 되었다..


양명학의 근본 사상[편집]

양명학의 사상은 《전습록》, 《주자만년정록》, 《대학문》등에 자세히 나와 있다.


심즉리[편집]

심즉리(心卽理)는 양명학의 윤리학적인 측면을 나타내는 말로 성(태어날 때 생겨난 순수한 선성)과 정(감정으로서 나타나는 마음의 움직임)을 대면시킨 마음 그 자체가 리와 다름없다고 하는 사상이다.[11]


치양지[편집]

치양지(致良知)는 양명학의 방법론적 측면을 나타내는 말로 왕수인이 독자적으로 만든 사상이다. 치양지란 양지를 전면적으로 발휘하는 것을 의미하며, 양지에 따르는 한 그 행동은 선이 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으로, 양지에 근거하는 행동은 외적인 규범에 속박 되지 않는 말이다. 마음은 선악을 넘은 것이지만, 뜻에서 선악이 태어난다. 그 선악을 아는 것이 양지 말고는 안 되며, 그러므로 선을 바로 잡기 위해서 양지를 키우라는 것이다. 맹자의 성선설의 영향을 받았다. 양지를 누구나 갖고 태어나는 것이므로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주장과 양지를 가리고 있는 선악을 제거하기 위해 공부가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나뉘어 양지는 양명 사후 제자들의 분파의 이유가 된다.[11]


지행합일[편집]

지행합일(知行合一)은 양지의 상태 중의 하나로 말과 실천은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같다는 사상이다. 말은 지, 실천은 행이란 말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을 본다는 것은 지(知)에,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은 행(行)에 속한다.[11]


모든 물체의 인과 양지의 결합[편집]

이것 역시 양지의 상태 중의 하나로,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은 하나의 육체이며, 다른 사람의 괴로움은 스스로의 괴로움이며, 그것을 달래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모든 물체의 인은 양지를 이룰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양명학은 사회 구제의 근거를 찾아낸 것이다.


사상마련[편집]

사상마련(事上磨鍊)은 수양처를 말하는 것으로, 주자학에서는 독서와 거경궁리를 통해서 수양을 한다고 하지만 왕수인은 이런 의견에 반대하여서 일상에서 양지를 닦아야 한다고 했다. 개념을 통해서가 아니고, 실제로 일을 하면서 정신을 단련한다는 뜻이다.


격물(格物)[편집]

주자는 격물을 사물에 임하여 그 이치를 궁구하는 즉물궁리(卽物窮理)라 하였으나, 양명은 격(格)을 정(正)으로, 물(物)을 사(事)로 보아 일을 바르게 하는 것이라 해석했다.[12] 전습록에 나오는 격물하고자 며칠 동안 대나무를 바라보았더니 정신만 혼미해지더라는 일화[13] 에서 주자의 격물을 비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양명학이 연 지평[편집]

사람의 욕구[편집]

양명학은 사람의 욕구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해서 사람의 욕구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했다. 사람의 욕구를 없애려고 하는 게 아니라 사람의 욕구를 잘 다스리려고 하는 노력을 했다.


붕우 관계의 중시[편집]

붕우, 즉 인간 관계를 중요시 여겼다. 유교에서는 남존여비 사상과 아이가 어른을 받드는 '상하 관계' 사상을 버리고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다는 사상이었다. 이 사상은 유교 이념이 지배적인 중국에 큰 혼란을 일으켰다.


양명학 주요 학자[편집]

중국[편집]

왕양명

전덕홍

추수익

나홍선

왕기

이지 (1527년)

왕간

양여원

조선[편집]

정제두

이광사

일본[편집]

나카에 도주

구마자와 반잔

같이 보기[편집]

유교

한국의 유교

송·명 시대의 사상

성리학

선종










     <참고문헌>

   논문 및 연재물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책의 성격상 많은 전문가의 글을 참고인용하였으나 이 책이 교양서라는 점을 고려하여 참고논문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고, 다만 그분들의 학문적 업적에 존경을 표하는 의미에서 존함을 밝혀둔다. 소속기관 편의상 논문발표 당시의 소속기관을

명시하였다.

(가나다순)

강두식(서울대), 권주적(숙명여대), 권두환(서울대), 권석봉(중앙대), 권욱현(서울대), 권중달(중앙대), 권철근(서울대), 권태억(서울대),

공재석(영남대), 금장태(동덕여대), 김경탁(고려대), 김남두(서울대), 김동욱(연세대), 김두철(서울대), 김려수(서울대), 김상운(성균관대),

김상현(한교대), 김문경(강원대), 김석원(동문연), 김세균(서울대), 김시준(서울대), 김영한(서강대), 김엽(경북대), 김용덕(중앙대),

김용옥(고려대), 김운학(동국대), 김윤식(서울대), 김인환(이화여대), 김진성(성균관대), 김정록(서울대), 김종원(부산대), 김춘진(서울대),

김학주(서울대), 김한규(부산대), 김홍명(서강대), 김효명(서울대), 김해경(강릉대), 노도양(명지대), 민성기(부산대), 박상섭(서울대),

박성봉(경희대), 박한제(서울대), 박환덕(서울대), 박희완(건국대), 방곤(경희대), 방영준(성신여대), 배종호(연세대), 백낙청(서울대),

변창구(서울대), 변태섭(서울대), 서병국(관동대), 소관희(서울대), 송민호(고려대), 송석구(동국대), 송창기(청주대), 송영배(서울대),

송하경(전북대), 송항룡(단국대), 신동욱(서울대), 신일철(고려대), 신채식(성신여대), 심재룡(서울대), 안병주(상균관대), 오금성(서울대),

안상진(서울대), 오생근(서울대), 오세영(서울대), 우용득(전북대), 유명숙(서울대), 윤사순(고려대), 유인희(연세대), 유정동(성균관대),

유종호(이화여대), 은전희(고려대), 이강수(경희대), 이경선(한양대), 이광주(전주대), 이관호(외국어대), 이기백(한림대), 이기영(한불연),

이남영(서울대), 이동렬(서울대), 이동향(고려대), 이만열(숙명여대), 이명현(서울대), 이병주(육사), 이병한(서울대), 이상옥(서울대),

이석호(연세대), 이성(청주대), 이성규(서울대), 이성무(서울대), 이영호(성균관대), 이용범(동국대), 이완재(영남대), 이운구(성균관대),

이장우(영남대), 이재호(부산대), 이종숙(서울대), 이지관(동국대), 이태수(서울대), 이태진(서울대), 이평래(충남대), 이한조(고려대),

장기근(서울대), 장왕록(서울대), 전인초(연세대), 전해종(서강대), 정범진(성균관대), 정병조(동국대), 정병학(숙명여대), 정옥자(서울대),

정운찬(서울대), 정원식(서울대), 정의채(카톨릭대), 정인재(중앙대), 조남현(서울대), 조선미(성균관대), 조성을(아주대), 조영록(동국대),

조요한(숭전대), 차주환(서울대), 채상식(부산대), 최갑수(서울대), 최병조(서울대), 최병헌(서울대), 최영희(국편위), 최완식(서울대),

최우원(부산대), 최익주(영남대), 허남진(서울대), 허벽(연세대), 허성도(서울대), 허세욱(외국어대), 홍이섭(연세대), 홍인표(충남대),

홍정식(동국대)

   단행본

계몽사, 범우사, 삼성출판사, 서울대출판부, 육문사, 을유문화사, 일신서적, 혜원출판사, 하서, 홍신문화사 등에서 발간한 각종 번역서는

낱낱히 명시하지 않고 그외의 참고 단행본은 아래와 같다. 

1. 가람기획 편집부, <한 권으로 보는 세계명작 111선>, 가람기획

2. 강용규, <인물중국사>, 학민사

3. 강인숙, <김동인>, 건국대학교 출란부

4. 고영춘, <기독교의 사조>, 신생사

5. 구인환, <고교생이 알아야 할 소설>, 신원문화사

6. 김규태, <동서문학의 조류>, 일신사

7. 김대중,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김영사

8. 김동림 외 역, <철학의 큰 스승 50>, 책세상

9. 김두헌, <서양윤리학사>, 박영사

10. 김봉군 외, <한국현대작가론>, 민지사

11. 김상홍 외, <한국문학사상사>, 계명문화사

12. 김성한, <길따라 발따라>, 사회발전연구소 출판부

13. 김영덕 외, <중국문학사>, 청년사

14. 김영식, <과학혁명>, 민음사

15. 김유조, <어니스트 헤밍웨이>, 건국대학교 출판부

16. 김진균 외, <사회학의 명저 20>, 새길

17. 김태길 외, <철학개론>, 삼중당

18. 김평옥 역, <랭킹 100 세게를 바꾼 사람들>, 에디터

19. 김학주, < 노자와 도가사상>, 태양문화사

20. 김해명, <중국문학사전1,2>, 연세대 중국문학사전 편역실

21. 김형석 외, <철학개론>, 연세대 출판부

22. 김희보, <세게문예사조사>, 종로서적

23. 김희보, <세계의 명작>, 종로서적

24. 김희보, <한국의 명작>, 종로서적

25. 나손 선생 추모논문간행위원회, <한국문학작가론>, 현대문학

26. 노명식, <자유주의>, 종로서적

27. 동서문화사, <세계백과사전>

28. 독서신문사 편, <세계문학사>, 도서출판 배제서관

29. 동아일보사,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30. 동양사학회 편, <개관동양사>, 지식산업사

31. 문병란, <일요일의 세계문학기행>, 열람원

32. 민석홍, <서양사개론>, 삼영사, 1984

33. 박병기, <포스트모던시대의 사회윤리학>, 인간사랑

34. 박선주 역, <인류의 진화와 기원>, 교보문고

35. 박은봉, <세계사 100장면>, 기람기획

36. 박종홍 외, <한국의 명저>, 현암사

37. 배종호, <한국유학사>, 연대출판부

38. 이윤희 역, <세계사 산책>, 백산서당

39. 벌핀치, <고대신화>, 정음사, 세계문학전집1

40. 변태섭, <한국사 통론>, 삼영사

41. 변형윤 외, <경제석학의 생애와 사상>, 매일경제신문사

42. 소광희 외, <철학의 제문제>, 지학사

43. 소광희 외, <현대의 학문체계>, 민음사

44. 신동아 편집부, <세계를 움직인 100권의 책>, 동아일보사

45. 신동아 편집부, <현대의 사상 77인>, 동아일보사

46. 신동아 편집부, <오늘의 사상 100인 100권>, 동아일보사

47. 신옥희 외, <원효의 생애와 사상>, 한가람 창간호

48. 신용협, <현대한국시연구>, 국학자료원

49. 신전옥 역, <세익스피어 4대 비극집>, 전예원

50. 신채식, <동양사개론>, 삼영사

51. 안정애 외, <중국사 100장면>, 가람기획

52. 유명종, <한국철학사>, 일신사

53. 유승국, <동양철학연구>, 근역서재

54. 윤사순 외, <한국의 사상>, 열음사

55. 양은창 외, <세계명작소설>, 한림출판사

56. 양은창 외, <한국현대소설>, 한림출판사

57. 유시민,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 푸른나무

58. 유정동, <퇴계의 생애와 사상>, 서문문고

59. 윤오영, <신역 순자>, 현암사

60. 이기백, <한국사 신론>, 일조각

61. 이기백, <한국사 시민강좌>, 제 10,14집

62. 이기영, <원효사상>, 홍법원

63. 이기영, <한국불교>, 세종기념사업회

64. 이문열, <삼국지>, 민음사

65. 이문호, <서양의 사상가들>, 형설출판사

66. 이민호 외, <노동계급의 형성>, 느티나무

67. 이병도, <율곡의 생애와 사상>, 현암사

68. 이을호, <정다산의 생애와 사상>, 박영문고

69. 이이화, <인물한국사>, 한길사

70. 이성범 외 역,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 범양사 출판부

71. 이정우 역, <지식의 고고학>, 민음사

72. 이정전, <두 경제학의 이야기>, 한길사

73. 이재영, <중국철학이야기>, 박우사

74. 이춘식, <중국고대사의 전개>, 신서원

75. 임헌영 외, <한국명작사전>, 한길사

76. 장기근, <이태백>, 태종출판사

77. 장도준, <정지용 시 연구>, 태학사

78. 정진일, <위대한 철인들>, 양영각

79. 정창범, <도스토예프스키>, 건국대 출판부

80. 정항희, <서양역사철학사상사>, 법경출판사

81. 전양범 역, <존재와 시간>, 시간과 공간사

82. 조동걸 외,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 창작과 비평사

83. 조태훈, <데카르트>, 유풍출판사

84. 종로서적 편집부, <기독교명저 60선>

85. <중국백과>, 신동아 1993년 1월 별책부록, 동아일보사

86. 중앙일보사, <중국의 비밀(300문 300답)>, 월간중앙 별책부록

87. 차하순, <서양사 총론>, 탐구당

88. 채만식, <탁류>, 문학사상사

89. 천재교육, <독서광장>, 1994,7월호

90. 최윤락, <어머니>, 열린책들

91. 최창규, <한국의 사상>, 서문문고

92. 최현 역, <사회계약론>, 집문당

93. 한국사상연구회, <한국사상가>, 법문사

94.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의 명저>, 새길

95. 한샘출판사, <독서와 논리>, 1994,4월호

96. 한인희 외 역, <중국을 움직인 30권의 책>

97. 황필호 역, <소크라테스불타공자예수모하메드>, 종로서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