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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조금씩배워보자/金剛經

3 大乘正宗分

3 大乘正宗分


不顧 須菩堤 諸菩薩 摩訶薩 應如是降伏 其心所有一切 衆生之類 若卵生 若胎生 若濕生 若化生 若有色 若無色 若有想 若無想 若非有想 非無想 我皆令入 無餘涅槃而滅度之 如是滅度 無量無數無邊 衆生實無衆生 得度者 何以故 須菩堤 若菩薩 有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卽非菩薩         


(불고 수보리 제보살 마하살 응여시항복 기심소유일체 중생지류 약난생 약태생 약습생 약화생 약유색 약무색 약유상 약무상 약비유상 비무상 아개영입 무여열반이멸도지 여시멸도 무량무수무변중생실무중생 득도자 하이고 수보리 약보살 유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즉비보살)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기를,“모든보살 마하살은 마땅히 이와같이 그 마음을 가질것이니 이 세상에 있는바 일체의 중생, 곧 생명을지닌 종류인 알에서 깐것이거나 어미 뱃속에서 나온것이거나 습한데서 생긴것이거나 화하여 생긴것이거나 형상이 있는것이거나 형상이 없는것이거나 생각이 있는것이거나 생각이 없는 것이거나를 가리지 않고 내 모조리 이를 무여열반에 들게하여 멸도할 것이니라 이와같이 한량이 없고 무수히 많고 가이없는 중생들을 제도 하여도 실은 멸도를 얻은 중생이 없으니 이 무슨 까닭이겠느냐.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곧 보살이 아니리라.” 하시었다.     


※마하살: 도가 높아 부처님 다음가는 보살을 말함.

涅槃 [nièpán] 1.[동사][불교][외래어] 열반하다. 2.[동사][불교][외래어] 부처나 중이 죽다. 입적하다. 귀원하다. 귀적하다. 천화(遷化)하다.

불도(佛道)를 완전(完全)하게 이루어 일체(一切)의 번뇌(煩惱)를 해탈(解脫)한 최고(最高)의 경지(境地). 니르바나

涅 개흙 열,개흙 녈,개흙 날  1. 개흙(갯바닥이나 늪 바닥에 있는 거무스름하고 미끈미끈한 고운 흙) 2. 진흙 3. 반석(盤石ㆍ磐石) 4. 열반(涅槃) 5. 검은 물을 들이다 6. 막다, 메우다 7. 극락(極樂)에 가다 8. 죽다 a. 개흙(갯바닥이나... [부수]氵(삼수변)

槃 쟁반 반  1. 쟁반 2. 즐기다(=般) 3. 멈추다 [부수]木(나무목)


[涅槃]

1.정의

불교에서 설하는 최고의 이상향(완성된 깨달음의 세계).

2.내용

'반열반(般涅槃)’이라고도 하며, ‘멸(滅)·적멸(寂滅)·이계(離繫)·해탈(解脫)·원적(圓寂)’의 의미를 가진다. 이 열반에 관한 사상은 우리 나라에서 열반종(涅槃宗)의 창종 이래 널리 연구, 전승되었다. 원래 열반은 불을 입으로 불어 끄는 것, 불어서 꺼진 상태 등을 나타내며, 타오르는 번뇌의 불을 없애서 깨달음의 지혜인 보리(菩提)를 완성한 경지를 말한다.

이는 곧 생사를 넘어선 각(覺)의 세계로서, 불교의 궁극적인 실천목표이다. 인간이 망집 때문에 괴로워하고 업을 짓게 되는 것은 결국 자아를 고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만일 고(苦)와 무상(無常)과 비아(非我)의 이치를 바르게 깨달아서 바른 지혜를 완성한다면, 생사윤회의 근본인 망집을 끊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까닭은 이러한 인식을 긍정하게 될 때, 이미 그 무엇을 자아 또는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여 추구하는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경지를 실현하고 진리에 대한 인식을 터득하기 위하여서는 수행에 힘쓰고 계율을 지켜 선정(禪定)을 닦아야 한다. 그러한 수행의 결과로 진리를 터득하고 망집을 단절한다면 인간은 일체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해탈의 경지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불사(不死)·안락(安樂)·적정·열반이라고 한다. 열반은 마치 바람이 활활 타오르는 불을 끄는 것과 같이,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지혜의 바람으로 불어 꺼서 모든 고뇌가 사라진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열반은 탐욕과 괴로움과 근심을 추월한 경지이기 때문에 인간의 유한한 경험 안에서는 그 어떠한 말로써도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다. 다만 체득한 자만이 이를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실천적인 문제에 있어서 불교는 세속적인 평범한 생활로는 결코 참다운 열반에 도달할 수 없음을 가르친다. 세속에는 극단적인 두 가지 생활방식이 있다. 하나는 감각적인 쾌락에 탐닉하는 생활이며, 다른 하나는 많은 수행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몸을 채찍질하는 고행의 실천이다. 이 환락과 고행이라는 양극단을 피한 불고불락(不苦不樂)의 중도에 의하여 진실에 대한 바른 인식, 바른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비로소 열반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열반에는 8종의 법미(法味)가 있다. 열반은 생멸변화가 없이 항상 머물러 있는 상주미(常住味)가 있고, 다시는 미혹된 생사가 계속하지 않는 적멸미(寂滅味)가 있으며, 영원히 늙지 않고[不老], 다시는 죽지 않으며[不死], 청정하고[淸淨味], 허허로이 통하며[虛通味], 움직이지 않고[不動味], 항상 행복한 맛[快樂味]을 갖추고 있다.


또 이 열반에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사덕(四德)이 있다. 상덕은 상주의 뜻으로 열반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생멸변화가 없는 덕을 갖추고 있음을 밝힌 것이고, 낙덕은 안락의 뜻으로 생멸변화가 없는 세계에는 생사의 고뇌가 없고 무위안락한 행복만이 있음을 밝힌 것이다.

아는 망아(妄我)를 여읜 진아(眞我)를 말하는데, 아덕은 8대자재(八大自在)를 갖춘 아를 표시하는 것이다. 정은 청정의 뜻으로, 혹(惑)·업(業)의 고통을 여의고, 담연하게 청정한 과덕이 있음을 말한다. 이 상락아정을 현대적 용어로 바꾸면 영원·행복·자재, 번뇌가 없음으로 풀어 볼 수 있다.


열반에 대해서는 2열반·3열반·4종열반 등의 분류가 있다. 2열반은 유여열반(有餘涅槃)과 무여열반(無餘涅槃)으로 구분되는데, 이에 대하여서는 소승과 대승이 그 주장을 달리한다. 소승에서는 열반을 번뇌가 다 없어진 상태라고 본다. 소승의 경우, 유여열반은 번뇌는 다했지만 육체는 아직 남아 있는 경우이고, 무여열반은 회신멸진(灰身滅眞)의 상태로서 모든 것이 아주 없어진 상태를 말한다.


대승에서는 열반을 보다 적극적으로 생각하여 상락아정의 4덕을 갖추지 못한 소승의 열반을 유여열반이라 하고, 4덕을 갖춘 열반을 무여열반이라 칭하여 이것을 최상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대승에서는 소승의 무여열반에 아직 미해결점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첫째는 삼계(三界) 안의 진리와 일에 대한 미혹은 없지만 삼계 밖의 무명번뇌가 남아 있고, 둘째는 삼계 안의 유루업(有漏業)은 없지만 삼계 밖의 무루업은 남아 있으며, 셋째는 삼계 안의 분단생사(分段生死)는 없지만 삼계 밖의 변역생사(變易生死)는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를 삼여(三餘)라 하여 번뇌여(煩惱餘)·업여(業餘)·과여(果餘)라고 한다.

우리 나라의 천태종에서는 3열반설을 따랐다. 3열반은 성정열반(性淨涅槃)·원정열반(圓淨涅槃)·방편정열반(方便淨涅槃)이다. 성정열반은 만법의 실성(實性)인 진여(眞如)를 뜻한다. 이 진여가 본래 불생불멸하여 물들일 수도 없고 깨끗이 할 수도 없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원정열반은 지혜로써 번뇌를 끊고 증득한 열반이며, 방편정열반은 지혜로써 진리를 깨달은 뒤에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출현하고, 인연이 다하면 입멸하는 것이다. 이를 나무가 다 타서 불이 꺼짐에 비유한다. 이 3열반은 열반을 체(體)·상(相)·용(用)의 이론에 맞추어 논리를 전개시킨 것이다.

4종열반은 우리 나라에서 유식종(唯識宗)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시켰다. 여기서의 4종은 본래자성청정열반(本來自性淸淨涅槃)·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이다. 본래자성청정열반은 만유와 모든 법의 진실한 성품인 진여이다. 그 진여의 성품이 청정하여 한량없는 공덕을 갖추고 생멸이 없이 적정한 열반을 가리킨다.

유여의열반은 번뇌장(煩惱障)을 끊고 나타나는 진여이다. 번뇌는 소멸하였으나 육신이 남아 있는 열반이다. 무여의열반은 유여의열반의 상태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제는 오온(五薀)이 화합한 몸까지 소멸하여 완전히 몸과 마음이 없어진 곳에 나타나는 열반이다.

무주처열반은 번뇌장뿐만 아니라 소지장(所知障)을 끊고 얻는 열반이다. 소지장마저 끊었으므로 생사와 열반에 대한 차별을 두지 않는 깊은 지혜를 얻게 되고, 대비(大悲)가 있으므로 열반에 머무르지 않고 생사계의 중생을 교화하며, 대지(大智)가 있어 생사에 머무르지 않고 영원히 미계(迷界)를 여의었으므로 무주처열반이라고 하는 것이다. 무주처열반은 대승보살 정신에 입각한 특색을 가장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 이 열반에 대한 학설을 가장 논리정연하게 전개시킨 이는 신라의 고승인 원효(元曉)이다. 그는 ≪열반경종요 涅槃經宗要≫를 통하여 당시의 열반에 대한 이설들을 총정리하고 독창적인 그의 학설을 전개시켰다.


참고문헌


『열반경종요(涅槃經宗要)』(원효)

『불교개론』(김동화, 보련각, 1954)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학중앙연구원 로고

[네이버 지식백과] 열반 [涅槃]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아상(我相) : 

  나 라는 상(相). 5온이 화합하여 조직된 것을 실아(實我)가 있다고 하고 또 내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는 것. 참다운 내가 있는 줄로 여기는 잘못된 생각.

인상(人相) : 

 5온의 화합으로 생긴것 가운데 우리는 사람이니 지옥취(地獄趣)나 축생취(畜生趣)보다 다르다고 집착하는 견해.

중생상(衆生相) : 

중생들이 잘못된 소견으로 자기의 몸은 5온이 가(假)로 화합하여 생겨난 것이라 고집하는 견해

수자상(壽者相) : 

 우리는 선천적으로 길던 짧던간에 일정한 목숨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견해

관련글 : 사상 (四相)

출처: http://studybuddha.tistory.com/942 [불교용어 사전]


-四相(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相とは、形跡である。執着すると形跡となり、心は虚空とならない。滞って自由がなく、これを相という。

妄想心があれば、良心が実現出来ない。妄想心があれば、四相がある故に、妄想がなくならない。無我の境界に入ろうとするならば、四相を滅する必要がある。

我相を滅することが出来れば、その下の三相は自ずから消える。

我相は、我が身を自愛し、一日営々として名利を追い求め、自分一身、自分の子孫の為を計る。全てこれは我相である。

人相は、他人と我を分別し、他人の威勢のよさを見ては、たよりにすることやまず、人の衰え弱っているのを見れば、怒りや嫌悪の思いがやまない。他人を嫉み、人に施すを惜しみ、彼我の観念が対立しているのが人相である。

衆生相は、宇宙の本体と万物の実相を知らずに、ただ自身の色受想行の五蘊での縁起仮合なるものを真としての誤った見方。貪瞋痴愛、これら全ては衆生相である。

寿者相は、妄りに寿命の長短をはかり、幸福と利益を望む観念を寿者相という。


<사상(四相)-아상 ․ 인상 ․ 중생상 ․ 수자상>    


   불교에서 ‘상(相)’이란 말이 상당히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불경에는 상에 얽매이다, 상에 집착하다, 상을 여의라 등의 용어가 자주 나온다. 불교에 있어서 ‘성(性)’이란 불변의 본체를 말하는데 비해, ‘상(相)’이란 변화하고 차별로 나타난 현상계의 모습을 말한다. 심리적인 측면에서는 일종의 ‘고정관념(觀念)’이라 할 수 있는데, 불교에서는 이 고정관념이 갖가지 왜곡 갈등과 번뇌의 원인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이 무의식 속의 고정관념을 내려놓는 순간 불성을 바로 볼 수 있다고 해서 <금강경>에는 모든 상(相)이 상 아님을 보면 여래를 보리라고 했다(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그런 ‘상(相)’이 중국에서 한자로 번역되기 전의 어원인 산스크리트어에는 samjna, laksana, nimitta의 세 가지가 있어서 이 말들이 같은 ‘상(相)’이라는 글자로는 번역된 것이지만 불경 내용의 쓰임에 따라 그 뜻은 다소 다르게 해석 된다.


    • samjna(산냐) - 주로 생각, 견해라는 뜻으로 쓰인다. 헌데 이러한 견해는 수백 가지 수만 가지가 있지만, <금강경>에서는 우리 중생들을 윤회에 들게 해서 그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것을 4상(四相)으로 설명하면서 이것을 끊을 것을 강조한다. 그 4상은 중생이 실재한다고 믿는 네 가지 상, 즉 아상(我相) ․ 인상(人相) ․ 중생상(衆生相) ․ 수자상(壽者相)이다. 

   그러면서 <금강경>에 만약 보살에게 아상 ․ 인상 ․ 중생상 ․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라고 말했다. 하물며 보살도 그렇거든 수행이 안 된 중생이야 그 사상(四相)을 실재한다고 믿으므로 이에 따라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 nimita(니미따) - 형상, 모습의 뜻으로 금강경에 보살은 상에 머물지 말고 보시해야한다고 할 때의 상이 여기에 해당한다. 과거로부터 많은 경험, 기억의 총합에 의한 대상을 만났을 때 생겨난 인상(일종의 선입견, 전체적인 첫 인상)을 일컫는다.

     • laksana(락샤나) - 어떤 대상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상. 특별한 모양으로서, 부처님의 ‘32상(相)과 80종호(種好)’라고 해서 부처님의 모습에 대한 특징을 말할 때의 상이 여기에 해당한다. 즉, 특수한 형태의 뜻으로서 금강경에 ‘여래의 신상(身相)으로 여래를 보았다 할 수 있겠는가’ 할 때의 상이 여기에 해당한다. 즉,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모습, 모양, 특징, 현상 등을 일컫는다.

   이상의 세 가지를 예로 들어보면, 눈으로 꽃을 본다고 했을 때에 꽃의 모양과 형상은 nimita(니미따)의 상에 해당하고, 그 꽃이 지닌 특별한 모습은 laksana(락샤나)에 해당하며, 꽃을 보고 꽃이라고 일으킨 생각들은 samjna(산냐)에 해당한다.

   헌데 이러한 세 가지 용어를 똑같이 ‘상(相)’이라는 글자로 번역한 이유는 이들 사이에는 그 의미에 있어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형상이나 모습에는 나름대로의 특징이 있게 마련이고, 저 앞에 어떤 형상이 있다는 것은 결국 내 마음에 이미 인식 된 앎이 있다는 것이니까, 이 모두는 다 함께 상이라고 표현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4상인 아상(我相) ․ 인상(人相) ․ 중생상(衆生相) ․ 수자상(壽者相)은 위의 ‘samjna(산냐)’라는 말 속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헌데 그 4상도 사람 혹은 시대에 따라 해석이 구구했다. 예컨대 ‘나’라는 관념[아상], 사람이라는 관념[인상], 중생이라는 관념[중생상], 목숨이라는 관념[수자상]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고, 더러 아상을 자기중심적 사고, 인상을 사람 중심적 사고, 중생상을 동물 중심적 사고, 수자상을 생명 중심적 사고로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에 이를 바로 잡아서, 자아가 있다는 관념[아상], 개아가 있다는 관념[인상-개아], 중생이 있다는 관념[중생상], 영혼이 있다는 관념[수자상]으로 해석을 정리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새로운 입장에서 4상을 살펴보려고 한다.     





   1) 아상(我相 atman samjna)---아상이란 고대 인도의 브라만교에서 주장한 영원불멸의 존재인 ‘아트만(atman)’에 근거한 견해로서 ‘나(我)’ 혹은 ‘자아(自我)’라는 생각을 말한다. 여기서 ‘나’라고 하는 것은 나의 육신, 나의 주장, 나의 직장, 나의 사회적 위치, 나의 능력 등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하지만 이런 것은 불교 관점에서 볼 때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두 변화하기 때문이다. 죽게 되면 모두가 해체돼버리고 육신도 결국 화장하거나 땅에 묻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에 이르러 보니 우주안의 모든 사물은 성주괴공(成住壞空)하고, 생각은 생주이멸((生住離滅)한다고 하셨다. 따라서 이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은 결국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제법무아(諸法無我)이다. 

   부처님 당시 인도는 브라만교가 지배하면서 자아를 신[브라흐만]에게 종속시키는 범아일여(凡我一如)의 신 중심 사회(神中心社會)로서 인간이 신의 노예로 전락해 있었다. 부처님은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인본중심의 새로운 사상을 세우고, 인연의 법칙에 의해 아트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아(無我)의 진리를 펼쳤다.

   그리하여 아상을 여의라고 하셨다. 즉 아상이란 오온(五蘊)을 “나, 나의 것, 자아”라는 상을 가지고 집착하는 것이라 했고, 모든 괴로움이란 한 마디로 바로 오취온고(五取蘊苦)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생은 내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 아상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상대방이 생겨나고 그로부터 모든 만물이 생겨나 이 현상계가 만들어지게 된다. 그리고 다른 상(相)들도 모두 이 아상으로 인해 비롯된다. 즉, 인상, 수자상, 중생상은 아상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4상이 각기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이다. 그 하나가 바로 아상(我相)이다.

   이와 같이 ‘나’라는 상이 일체 모든 존재의 상에 빠지는 근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나’ 라는 아상을 못 여읜다면 범부이고, ‘나’ 라는 아(我)가 멸진되고, 모든 번뇌를 다 끊어버려서 그야말로 참 무아(無我)가 돼야 비로소 해탈이 된다. 즉, 아상이 부서지면 모든 상이 다 부서지고, 아상을 버리면 해탈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五蘊 불교(佛敎)의 근본(根本) 사상(思想)의 하나로, 세계(世界)를 창조(創造)ㆍ구성(構成)하고 있는 요소(要素)를 다섯 가지로 분류(分類)한 것.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의 5요소(要素)의 결합(結合)으로, 색은 육체(肉滯), 수는 감각(感覺), 상은 상상(想像), 행은 마음의 작용(作用), 식은 의식(意識)임

蘊 쌓을 온  1. 쌓다 2. 저축하다(貯蓄--) 3. 간직하다, 감추다 4. 너그럽다, 포용하다(包容--) 5. 맺히다, 우울해지다(憂鬱---) 6. 모이다 7. (초목이)우거지다 8. 덥다, 따뜻하다 9. 속내(겉으로 드러나지 아니한... [부수]艹(초두머리)


   2) 인상(人相, 개아/個我, pudgala samjna)----붓다는 바라문들이 윤회의 주체라고 한 아트만(atman)을 현실적으로 경험이 불가능한 가공의 망상이라고 부정했다. 그러나 부파불교시대에 와서는 윤회에 있어서 중심적 주체가 없다는 점을 혼란스럽게 여겼다. 그리하여 불명 후 300년경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 독립한 독자부(犢子部)에서는 생사윤회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윤회하는 개개 존재의 인격주체로 뿌드갈라(pudgala)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했다. 즉, 변하지 않는 자아가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뿌드갈라란 중생에게 무너지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 어떤 실체가 ‘개체적으로 존재한다는 견해’로서, 나고 죽음을 영원히 반복하더라도 이 실체는 영원히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이 뿌드갈라를 구마라습은 인(人)으로 옮겼고 현장은 보특가라(補特伽羅)로 음사했다.

   모든 법은 인연에 의해 조작된 허구임을 모르고 몸과 마음속에 따로 어떤 본질이 숨어 있다고 여기는 그릇 된 착각이 인상이다. 후대 유식사상에서의 아뢰야식과도 비슷한 개념이라고 하겠는데, 아뢰야식은 윤회의 주체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연속성은 있더라도 실체적 개념은 아니며, 아뢰야식 또한 무아(無我)라고 하는 반면에 뿌드갈라는 생사를 초월한 윤회의 주체로 상정돼 있다.

   그리하여 인간은 뿌드갈라의 존재라는 우월감에 빠져 있다. 하지만 인간이 축생에 비해 우월하지만 천상의 여러 신에 비하면 미물에 불과하다. 이렇게 미천한 인간이지만 자신이 만물의 영장이고 대단한 존재라고 착각을 해서 교만하다. 바로 내가 인간이라는 그 교만한 마음의 인상(개아)을 가지고 있음으로써 해탈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해석에서는 인상(人相)을 아상(我相)처럼 집착하는 모습의 하나로서, ‘남’을 의식하는 데에서 오는 행동과 생각이라 말해왔다. 이와 같이 개아(인상)를 나와 남을 갈라놓는 분별심이라고 말하는 것은 뿌드갈라의 어의(語義)가 ‘개인’ 혹은 ‘인간’을 의미하는 개념이었기 때문에 그런 해석이 가능했을 것이다.

   어쨌든 개아라는 생각 또한 결국에는 ‘나’라는 상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나와 상대에 대한, 혹은 내가 인간이라는 생각에 대한 분별로 보더라도 이것은 ‘나’라는 상이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아상(我相)의 연장이라 하겠다.

   즉, 개아는 진아(眞我)와 대비되는 아상으로서 진아를 찾는다는 것은 곧 자기(개아)를 버림으로써 가능한 것이고, 자기(개아)를 버림은 곧 망심과 분별과 집착을 버리고 마음을 비움[공(空)]을 말함이다.  

   다만 ‘부처님께서 독자부의 뿌드갈라(pudgala)를 부정하셨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잘못된 비약이다. 왜냐 하면 뿌드갈라를 제시한 독자부가 생긴 것은 불멸 후 300년이 경과한 후의 일이기 때문에 석존께서 직접 뿌드갈라를 지적하셨다 하기엔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


部派佛敎부파불교, 석가(釋迦) 입멸(入滅) 후(後) 100년(年) 무렵에 원시 불교(佛敎)가 분열(分裂)을 거듭하여 20여 개의 교단(敎團)으로 갈라진 시대(時代)의 불교(佛敎)를 통틀어 이르는 말. 이 파들은 아비달마(阿毘達磨)라는 독차적인 불교(佛敎) 신학을 전개(展開)하여 후(後)에 유식(唯識) 사상(思想)의 성립(成立)에 중요(重要)한 역할(役割)을 하였으며, 한편 출가(出家) 본위로 소승(小乘)의 처지(處地)에 떨어졌음

阿賴耶識아뢰야식 팔식의 하나. 일체(一切) 법의 종자(種子)를 갈무리하고 일으키는 근본(根本) 심리(心理) 작용(作用)

八識 오관(五官)과 몸을 통(通)하여 외계(外界)의 사물(事物)을 인식(認識)할 수 있는 여덟 가지의 심적(心的) 작용(作用). 곧,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말나식(末那識). 아뢰야식(阿賴耶識)


   3) 중생상(衆生相, sattva samjna)---sattva란 넓게는 ‘존재하는 모든 것’ 혹은 ‘살아있는 모든 것’을 나타내는 말로서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한 모든 생명체를 의미한다. 이것을 구마라습은 중생(衆生)으로 현장은 유정(有情)으로 번역했다. 이 중생상은 깨닫지 못한 중생들이 가지는 본능적 집착을 일컫는데, 그것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첫째 괴로운 것을 싫어하고 재미있고 좋은 것만 탐내는 등 이기적인 행동이나 상념의 집착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좋은 것은 자기 것으로 하고, 나쁜 것은 남에게로 돌리려 한다.

   둘째 천당과 지옥이 따로 있다고 생각해서 천당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욕심으로 나타난다. 즉 별다른 수행도 없이 고(苦)가 없는 천계(天界)에 태어나고자 하는 욕심이다. 비슷하게 기복불교(祈福佛敎)도 중생상의 소산이라 하겠다.

   셋째 약한 사람을 억누르고 강한 사람에게 빌붙는 약육강식도 중생상이고, 자기의 일에 지나친 욕심을 갖고 남을 이기기 위해 투쟁하는 것도 중생상이다.

   넷째 중생상은 자신의 몸이 오온(五蘊)이 화합해 이루어진 참된 실체라고 고집하는 잘못된 견해를 가진다. 그리하여 살아 있는 생명체와 생명이 없는 자, 유정과 무정을 나누는 이원론적 집착으로 나타난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중생상도 그 근원에서는 ‘나’라는 아상(我相)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깨달음의 주체인 ‘나’라는 상을 상정해 놓기 때문이다.

   다섯째 나는 중생이니까 부처님과 같이 해탈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 즉, 본래 하나인 자성(自性)을 각득하지 못하는 까닭에 나는 부처가 되지 못한다고 스스로 퇴굴심을 내는 것이다. 이런 중생상은 열등의식이 바닥에 깔려 있어서인데, 초기 대승불교에서 sattva(有情-중생)를 너무 강조하다보니 부처와 다른 실재가 있는 것처럼 돼버린 것 같다.

   부처님께서 중생상을 갖지 말라고 하신 것은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이런 자기 비하적인 견해를 타파하기 위해서다. 부처와 중생들을 분별해 자신을 중생이라고 생각하고 불도를 닦는데 게을리 한다거나 불도를 닦는다고 해도 부처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없는, 이것이 중생상이다. 그러나 모든 중생들은 그 자체에 불성을 가지고 있어 누구라도 수행을 통해 불성을 닦으면 성불할 수 있다. 그것이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요, 견성성불(見性成佛)이다.




   4) 수자상(壽者相, jiva samjna)---수자상의 원어인 jiva는 영혼, 목숨, 생명이라는 말인데, 부처님 당시 자이나교에서 주장한 생사를 초월한 존재 또는 영원불멸의 ‘순수영혼’이 있다는 견해로서, 구마라습은 수(壽)로 현장은 명(命)으로 번역했다. 

   오온(五蘊)은 모두가 실체가 없어 한시도 머물지 못하는 무상한 존재인데, 이를 바로 알지 못하고 그 속에 영생불멸의 윤회하는 주체로서 순수영혼이 있어서 오온은 사라져도 이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여기는 그릇 된 착각을 한다. 그것이 수자상이다.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은 자이나교의 ‘순수영혼설’을 반박하셨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인연에 따라 일시적으로 생겨났다 사라지는 허깨비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이 부처님의 교설이다. 즉 제행무상(諸行無常)인 것이다. 따라서 생사를 초월하고 시간을 초월한 순수영혼이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상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쳤다. 

   헌데 종전에는 이 수자상을 ‘목숨’으로 이해해서 오래 살려고 하는 욕심이라 해석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이나교의 ‘순수영혼’의 존재설에 대한 거부를 표시한 것으로 이해한다.


   이상과 같이 자아, 개아, 중생, 영혼이라는 말은 부처님 당시 모두 외도들에 의해 주장된 고정된 실체적 존재이고, 우리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잘못된 보편적인 견해이기도 한데,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은 자아, 개아, 중생, 영혼이라는 관념, 즉 4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연기하는 법은 그 실체를 가지지 않는 가설(假說)인데 중생은 관념에 의해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해 분별하고 집착한다. 따라서 이러한 4상이 제거될 때 비로소 해탈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지만 4상이라는 분별과 집착에서 자유롭지 못하면 깨달음은 요원하다 하겠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http://livinglikehuman.blogspot.kr/2013/08/daum-blog-amisan51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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