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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 끄적/책읽기

[가난한 아줌마 이야기, 하루키]

하루키의 장편소설이나 수필, 단편소설 그 나름대로의 맛과 향이 뚜렷하여 어느것을 읽어도 즐겁게 읽을수 있어서 좋다.

그중 한달음에 읽을수 있는 분량중에서 특히 내가 좋아하는 단편.

5분만 시간 내서 읽어 보시고 찡 ~하신 분들은 일단 하루키의 '단편소설집'을 추천!!

 

 

 

 

    가난한 아줌마 이야기

  이야기의 발단은 투정부릴 수조차 없을 만큼 맑게 갠, 7월의 일요일 오후였다.  

7월의 첫 일요일이었다.

  조그마한 구름덩이가 둘인가 셋, 잘 음미된 품위 있는 구두점인 양, 머나먼 하

늘에 하얗게 떠 있었다.   태양의 햇살은 그 무엇에도 막힘이 없이, 한껏 대지로 

내리쏟아지고 있었다.  잔디밭  위에 똘똘 뭉쳐서 버려진 초콜릿 은종이마저, 그

런 7월의 왕국에서는, 호수 속 전설의 수정(水晶)처럼 자랑스럽게 광채를 발산하

고 있었다.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상자 속에 상자가 있는  장치처럼, 광채 속에 또 하나 

다른 광채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광채 속의 광채는 마치 무수하게 자잘한 

꽃가루처럼 보였다.  불투명하고 부드러운 꽃가루였다.  그것들은 공중을 어디나 

없이 떠돌다가, 이윽고 서서히 시간을 들여 춤추듯 땅에 내려앉았다.

  나는 산책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미술관 앞 광장에  들렀다.  그리고 연못 가에 

앉아서, 동행과 둘이서 별 하는 일도 없이 맞은편에 있는 일각수(一角獸) 동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 초여름 장마가 그제서야 막 갠 참이었다.   바람에 떡갈나무 잎이 희미하

게 팔락거리고, 얕은 못물 수면(水面)은 이따금씩 잔물결을 일으키곤 했다.

  시간은 그런  식으로 움직였다가는 멈추고, 멈추었다가는  움직였다.  맑은 물 

속에는 콜라  깡통이 숱하게 잠겨 있었다.   그것은 나에게 수몰되어  버린 고대 

도시의 폐허를 연상케 했다.

  모두가 똑같은 유니폼 차림의 동네 야구 팀, 자전거를 탄 아이들, 개를 데리고 

온 노인, 조깅 셔츠를 걸친 외국인 청년 하나가 우리 앞을 가로질러 갔다.

  잔디밭 위에 놓인 대형  트랜지스터 라디어로부터 달콤한 멜로디의 팝송이 바

람을 타고 희미하게 들려 왔다.  잃어버린 사랑이라느니, 잃어버릴 것만 같은 사

랑이라느니, 하는 노래였다.

  어디선가 전에 들은  기억이 있는 것 같은 멜로디였는데, 확실히  들었다고 확

신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그저 다른  그 무엇인가를 닮았을 뿐인지도 몰랐다.   

나는 멍하게 그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태양의 햇살이 나의  벌거숭이 양팔에 흡수되어 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소리도 없이 아주  평온하고, 조용하게.  나는  이따금씩 팔을 얼굴 앞으로 올려 

꼿꼿하게 뻗쳐 보았다.  여름이 막 왔던 것이다.

  그런 일요일 오후에, 어째서 하필이면 가난한  아줌마가 나의 마음을 붙잡았는

지, 나로선  짐작도 가지 않는다.   주위에는 가난한 아줌마의  모습은 없었으며, 

가난한 아줌마의 존재를 상상케 하는 '그 무엇'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아줌마는 나를  찾아왔다가 사라져 갔다.   

겨우 몇백 분의  1초의 순간이긴 해도, 그녀는 나의  마음 속에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뒤에 불가사의한 사람 형상의 공백을 남겨  놓고 갔다.  마치 창 밖을 

누군가가 쓱 지나쳐 그대로 사라져 버린 느낌이 들었다.

  급히 창께로 뛰어가서 얼굴을 내밀었다.  하지만 거기엔 이미 아무도 없었다.

  가난한 아줌마?

  나는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여름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찾

아왔다가, 그리고  사라져 갔던 것이다.   어휘는 투명한 탄도(彈道)처럼, 일요일 

오후의 한낮 속에 빨려 들어가 있었다.

  시작이란 항상 그렇다.  어느 순간에는 모든 것이 존재하며, 다음 순간에는 모

든 것이 상실된다.

  "난 가난한 아줌마 이야기를 써보고 싶어."

  나는 동행에게 그렇게 말해 보았다.  나는 소설을 쓰려고 하는 사람이다.

  "가난한 아줌마? 왜 그럴까? 왜 가난한 아줌마일까?"

  그녀는 좀  놀란 모양이었다.  그녀는  뭔가 눈으로 재기라도 하듯이  잠시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왜 그렇다니, 난들 알게 뭐야.  무슨 일인지 항상 나를 사로잡고 있으니 알다

가도 모르겠어."

  그리고 나서  잠시 동안 우리는 말없이  있었다.  나는 그동안  가슴속에 남아 

있는 사람 형상의 공백을, 손가락으로 그려 보았다.

  "그런 이야길 누가 읽고 싶어할까?"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야 읽을 거리로는 매력적이지 않을지도 모르지"

하고 나는 수긍했다.

  "그럼 왜 그런 걸 쓰려고 해?"

  "그건 말로 딱 떨어지게 설명할 순 없어.  내가 왜 가난한 아줌마에 대한 소설

을 써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소설을 써야만 하고, 

또 거기에 대한 소설을 다 쓰고 나면, 그  소설을 써야 할 이유를 설명할 이유도 

없어지는 거 아닐까?"

  그녀는 말없이 미소 지으며  주머니에서 꾸깃꾸깃한 담배를 끄집어 내어 불을 

붙였다.  그녀는 항상 담배를  꾸긴다.  때로는 너무나 꾸겨져서 불이 붙지 않을 

때도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쉽게 불이 붙었다.

  "그래, 당신 친척 중에 가난한 아줌마 있어?"

  "아니, 없어."

  "내 친척 중에는 가난한 아줌마가  한 분 있어.  그분은 정말 진짜배기야.  진

짜 가난한 아줌마.  몇 년간 함께 산 적도 있어."

  나는 그녀의 눈을 보았다.  그녀의 눈은 평소나 다름없이 아주 조용했다.

  "하지만 난 아줌마  이야기는 아무것도 쓰고 싶지 않아.   한마디도 쓰고 싶지 

않아."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다른  노래가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앞에  것과 비슷

한 노래였는데, 이번 노래의 멜로디는 전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당신한테는 가난한 아줌마가  한 사람도 없어.   그러면서도 가난한 아줌마에 

대한 이야기를 뭔가 쓰고 싶어하지.   나한테는 진짜 가난한 아줌마가 있어.  그

런데도 그에 대해서는 쓰려 하지 않아.  어쩐지 좀 이상하지 않아?"

  나는 그럴싸해서 수긍했다.

  "왜 그럴까?"

  그녀는 약간 고개를 갸우뚱했을 뿐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뒤로 

돌아앉은 채 가느다란 손가락  끝으로 물 속을 휘젓고 있었다.   마치 나의 질문

이 그녀의 손가락 끝을 타고 물 속의 폐허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틀림없이 지금도  저 물 밑에는 나의  물음표가 닦고 또 닦은  금속 조각처럼, 

반짝반짝 빛나면서 가라앉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주위의 콜라 깡통을 향

해 똑같은 질문을 해대고 있지나 않을까.

  왜 그럴까?  왜 그럴까?  왜 그럴까?

  그녀는 꾸깃꾸깃 꾸겨진 담배 끝에서 꾸깃꾸깃한 담뱃재를 땅바닥에다 떨구었

다.

  "솔직히 말해서 그 가난한 아줌마에 대해서는 나도 할 이야기가 많은 것 같아.  

하지만 나는 그것에 대한  적당한 표현을 알아낼 수 없단 말이야.   나로서는 감

당할 수 없어.  난 진짜 가난한 아줌마를 알고 있으니까."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건 모르긴 해도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먼 데까지 뿌리가 뻗어 

있을걸."

  나는 다시 한 번 일각수 동상을 올려다보았다.   두 마리의 일각수는 어딘가에 

내팽개쳐진 시간의 흐름을  향해 초조하다는 듯이 네  개의 앞발을 치켜 올리고 

있었다.   그녀는 물에 담그고 있던  손가락을 셔츠 자락으로 몇  번인가 훔치고 

나서 정면을 보았다.

  "당신은 가난한 아줌마에  대해 쓰려 하고 있어.  당신은  그것을 받아 들이려 

하고 있고,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걸 받아들인다는 건 동시에 그걸  구제하는 일

도 되거든.  하지만  지금의 당신 형편으로 그걸 할 수 있을지  어떨지?  당신한

테는 진짜배기 가난한 아줌마조차도 없으면서."

  나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었다.

  "미안해."

  "아니야, 상관없어.  그 말이 옳은 것 같애."

  그렇다.  내게는 진짜배기 가난한 아줌마조차도 없다...

  이건 마치 노래 구절 같잖아.

  당신 친척 중에도 역시 가난한 아줌마는 없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나하고 당

신은 '가난한 아줌마를 갖고 있지 않다'는 공통점을 가진 셈이다.

  기묘한 공통점이다.  마치  조용한 아침의 물구덩이 같은 공통점이다.  하지만 

당신도 뭐 누군가의  결혼식에서 가난한 아줌마의 모습  정도는 본 적이 있을텐

데.  어느 서가에나 오랫동안 잊혀져  있는 책이 한 권 정도 있듯이, 또 어느 옷

장에나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셔츠 한 벌이 있듯이, 어느  결혼식에나 한 사람의 

가난한 아줌마는 있게 마련이다.

  그녀는 누구에게 소개되는 적도 거의  없고, 누가 말을 거는 적도 없다.  연설

을 권유받는  적도 없다.  그녀는  낡은 우유병처럼 테이블 앞에  그저 얌전하게 

앉아 있을 뿐이다.

  눈치를 살피듯이 소리  나지 않도록 콘소메 수프를 먹고, 생선용  포크로 샐러

드를 먹고, 강낭콩을 잘 집지도 못하고, 막판에는 아이스크림 스푼이 모자란다는 

꼴을 하면서.

  그녀가 보낸 선물을 운이 좋으면 옷장 속에  간직되어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

으면 이사할 때에, 먼지 투성이의 뭔지 모를  트로피들과 함께 버려지고 말 터이

다.

  가끔씩 끌려 나오는 결혼식 앨범에도 그녀는 말이  찍혀 있을뿐, 그 모습을 마

치 허울 좋은 익사체를 방불하고 있다.

  여기 있는 이  여잔 누구지?  여기 이  두 번째 줄에 안경 낀...   으응 아무도 

아니야, 하고 젊은 남편은 대답한다.  그저 가난한 아줌마일 뿐이야.

  그녀에게는 이름도 없다.  그저 가난한 아줌마일 뿐이다.

  물론 이름 같은 거야 언젠가는 소멸될 수도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여러 가지 소멸 방법이 있을 것이다.

  우선 맨 먼저 죽음과 동시에 이름마저 소멸되는  경우.  이건 간단하다.  '강물

은 마르고 고기는  죽어 소멸되라', 혹은 '불길은 숲을 에워싸고  새들은 타서 소

멸되라'...우리는 그들의 죽음을 애도한다.

  또한 낡은 텔레비전처럼,  죽은 후에도 하얀 빛이 화면 위로  깜박깜박 헤매다

가, 어느 날  갑자기 뚝 끊어지는 경우.   이것도 나쁘진 않다.  길을  잃은 인도 

코끼리의 발자국 같긴 하지만, 그런 대로 괜찮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하나, 죽기 전부터 이미 이름이 없어지고 마는 경우, 이

른바 가난한 아줌마들이다.

  하지만 나 역시도  때로 가난한 아줌마와 같은 상실  상태에 빠져 들 때가 있

다.  저녁  때 터미널의 혼잡 속에서는, 내가  가야 할 곳이며, 이름이며, 주소가 

머리 속에서 싹 지워져 버린다.   물론 아주 짧은 순간, 5초나 10초 동안의 일이

긴 하지만.

  이런 일도 있다.

  "당신 이름이 아무래도 생각나지 않아요"

하고 누군가가 말한다.

  "좋아요, 마음 쓰지 말아요.  별로 대단한 이름도 아니니까요."

  그러자 그는 자신의 목젖께를 몇 번이고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까지 나올 뻔했지만 말이지."

  그럴 때면 나는 흙 속에 파묻혀 있으면서 왼쪽 발끝만을 땅 위로 내놓고 있는 

그런 기분이 든다.  누군가 때로는 거기  걸려서, 그리고 빗나가기 시작한다.  이

거 실례, 하는 말이 여기까지 나와 있긴 하지만 말이야.......

  자 그럼, 잊혀진 이름은 도대체 그 모습이  어디로 사라져 버리는 것일까?  이 

미로와 같은 도시에서 그들이 살아  남을 확률은 모르긴 해도 지극히 낮을 것임

이 분명하다.

  그들에게 있는 것은, 수송  트럭에 치어 노상에서 납작해지고, 또 누군가는 그

저 마침  잔돈이 없다는 이유로 전차도  타지 못하고 객사를 하고,  또 누군가는 

주머니 가득한 훈장을 저울추 삼아 깊은 강물에 가라앉아 버리는 그런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들 중의 몇 사람은  용케 살아 남아, 잊혀진  이름의 거리에 

당도해서, 거기다  조용한 공동체를 쌓아 올렸을지도  모른다.  작은,  정말 작은 

거리다.  그리고 그 입구에는 틀림없이 이런  간판이 서 있었을 것이라고 여겨진

다.

  외인 출입 금지.

  용건 없이 끼여든 자는, 물론 그 나름대로의  사소한 앙갚음을 받게 되는 것이

다.

  그건 어쩌면 나를  위해 준비된 사소한 앙갚음이었는지도 모른다.   나의 잔등

에는 작은 가난한 아줌마가 붙어 있었다.

  그녀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8월  중순이었다.  어떤 동기로 해서 알

게 되었다는 건 아니다.  그저 문득 느꼈을 뿐이다.  내 잔등에는 가난한 아줌마

가 있다고.

  그건 결코 불쾌한 감각을  아니었다.  대단한 무게도 아니었고, 귓전에다 구린

내 나는  입김을 토해대지도 않았다.   그녀는 표백된 그림자처럼 내  잔등에 착 

달라붙어 있을 뿐이었다.  어지간히 주의해 보지  않고는 붙어 있는 사실조차 남

들은 몰랐다.

  동거하고 있는 고양이들도 처음 이삼 일은  그녀를 의심스런 눈으로 보았지만, 

그녀 쪽에 자기들의 구역을 짓밟을 의사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이내 그 

존재에 익숙해졌다.

  몇몇 친구들은 마음이 놓이지 않는 눈치였다.   마주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틈

에, 내 등뒤에서 그녀가 가끔씩 얼굴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불안한 걸."

  "염려할 거 없어.  얌전한데다 무슨 해코지를 하는 것도 아니니."

  "아니, 그야 잘 알고 있긴 하지만 말이야, 그래도 어쩐지 청승맞아 보여서."

  "되도록 안 보면 되잖아."

  "글세 말이야, 그런데 도대체 어디서 그런 걸 들쳐 업고 왔나?"

하고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특별히 어디랄 것도  없어.  그저 줄창 이런저런  생각을 했었지.  그것 뿐이

야."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지었다.

  "알 만하네.  자넨 옛날부터 성격이 그랬으니까."

  "응."

  우리는 마음이 내키지 않는 채로 한 시간쯤 위스키를 마셨다.

  "이것 봐, 도대체 어디가 그토록 청승맞단 말인가?"

  "말하자면 말이지, 왠지 어머니가 엿보고 있는 그런 느낌이 드는 거야."

  "그건 또 왜 그럴까?"

  "왜 그렇다니.....아무래도 자네  잔등에 달라붙어 있는 것이  우리 어머니 같단 

말야"

하고 그는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몇 사람인가의 그러한 인상을 종합해 보니-나 자신은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없

었으니까-내 잔등에 붙어  있는 것은, 하나의 형상으로 고정된  가난한 아줌마가 

아니고, 보는  사람 나름대로의 심상에 따라,  형상이 만들어지는 일종의 에테르

(精氣)와 같은 그런 모양이었다.

  어느 친구의 경우는, 그것이 작년 가을에 식도암으로 죽은 아키타 개(犬)였다.

  "열 다섯 나이에 말이지,  벌써 비리비리한 늙은 개지 뭐야.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식도암이라니 참 안됐어."

  "식도암?"

  "그래, 식도에 생긴 암.  못 견딜 일이지.  나도 그것만은 질색이야.   매일같이 

찍찍 울어댔다니까.  그렇다고  목소리가 온전하게 나오는 것도 아니고.  웬만하

면 안락사를 시켜 줄 까도 생각했지만, 어머니가 반대하는 바람에."

  "왜?"

  "알게 뭐야.  틀림없이 당신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던 게지, 뭐"

  그는 별 재미도 없다는 듯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아무튼 한두 달 동안을 물만 먹고 살았다니까.  헛간 바닥에서 말이야.  그건 

정말 지독한 냄새였다구."

  거기서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대단한 개도 아니었지.  겁쟁이라서 사람만 보면 짖어대고, 아무런 쓸모도 없

었어.  귀찮기만 하고, 주제에 피부병까지 앓고 말이야."

  나는 수긍이 갔다.

  "숫제 개가 아닌  매미로 태어났던들 본인으로서도 무척  행복했을 지 모르지.  

아무리 울어대도 사람들이 싫증내지 않았을 테고,  식도암에 걸리는 일도 없었을 

테니 말이야."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개로서, 입에 플라스틱 튜브를  내민 채로 내 잔등에 달

라붙어 있었다.

  어느 부동산업자의 경우, 그것은 훨씬 옛날의 국민학교 여교사였다.

  "1950년 분명 한국전쟁이 시작되던 해였지요."

  그는 두꺼운 타월로 얼굴의 땀을 닦으면서 말을 이었다.

  "한 2년동안  그분은 저희 반  담임을 맡았죠.   정말 그때가  그리워지는군요.  

그립다고 할까, 실은 거의 잊고 있었지만."

  그는 내가 그 여교사의 친척쯤 되는 것처럼 나에게 시원한 보리차를 권하면서 

말했다.

  "생각해 보면 참 불쌍한 분이었지요.   결혼하던 해에 남편이 징용으로 끌려가 

버렸는데, 수송선을 타고 가는  도중에 펑, 그게 그러니까 1943년의 일이었던가? 

그분은 그대로 국민학교  교사로 있었는데, 이듬해의 공습으로  화상을 입었다지 

뭐요.  왼쪽 뺨에서부터 왼쪽 팔까지 말입니다."

  그는 왼쪽 뺨에서부터 왼쪽 팔에다 길게 선을 내리그으면서 자기 보리차를 단

숨에 들이키고 나서 타월로 또 땀을 닦았다.  

  "곱상하게 생긴 분이었는데  가엾게끔....., 듣자하니까 성격까지도 딴판으로  달

라졌다지 뭡니까.  살아 계신다면 벌써 예순에 가깝겠지요.  1950년이라....."

  이처럼 거리의 지도며, 결혼식의 좌석 표가 만들어져 갔다.  나의 잔등을 중심

으로 가난한 아줌마의 고리가 조금씩 넓어져 갔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내 주위에서도 한  사람 한 사람, 마치  빛살이 빠지듯이 

친구들이 사라져 갔다. 

  "그 친구 자체는  나쁜 녀석을 아니었지만 만날 때마다, 그  청승맞은 어머니-

식도암으로 죽은 늙은 개,  혹은 화상 입은 흉터가 남아 있는  여교사-의 얼굴이 

엿보이는 건 좀....."

  나는 어쩐지 나 자신이 치과 의사가 되어 버린  그런 느낌이 들었다.  누가 나

를 책망하는 것도 아니었고, 누가 나를 미워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다

들 나를 피했고,  어디선가 얼굴을 대하더라도 그럴듯하게 구실을 대어  이내 모

습을 감추었다.

  "당신하고 둘이 있다 보면 아무래도 어색해요"

하고 어느 여자아이가 아주 민망하다는 듯이, 하지만 정직하게 말했다.

  "만약 당신이 등에 짊어지고 있는 것이 우산  꽂이나 뭐 그런 거라면, 나도 참

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우산 꽂이.

  그래 좋아, 하고 나는 생각했다.  원래부터가 남하고 사귀는 일에 능숙한 편이 

아니니까.  게다가 나는 우산 꽂이를 짊어지고 살아가고 싶진 않단 말이다.

  그런 식으로 친구들은  나를 피했지만, 그 대신에 매스컴이 앞을  다투어 취재

차 나를 찾아왔다.  그  대부분이 주간지였다.  그들은 하루 건너 찾아와서 나와 

아줌마의 사진을 찍고, 그녀의 모습이 잘  찍히지 않는다고 투덜대고는 얼토당토

않은 질문만 산더미처럼 퍼붓고는 돌아갔다.

  나로서는 잡지에 실림으로 해서  가난한 아줌마에 대해 뭔가 새로운 발견이나 

전개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그러나 거기엔 아무런 발견도 없었거

니와 전개도 없었다.  피로만이 겹쳐 갈 뿐이었다.

  텔레비전의 모닝 쇼에도 출연한 적이 있다.   아침 6시 전에 두들겨 깨워져 자

동차로 방송국 스튜디어에 나가 정체 모를 커피를 얻어 마셨다.

  주위에서는 누군지 모를 동아리들이, 뭐가 뭔지 모를 짓들을 하고 있었다.  나

는 그대로 스튜디오  문을 박차고 나가 버리고 싶어졌다.   하지만 멈칫멈칫하는 

동안에 내 차례가 오고 말았다.

  사회자는 카메라에 비치지 않을 때는 아주 심통스럽고, 오만하며, 천박한 사내

였다.  사사건건 주위 사람들을 못살게 굴었다.   나는 첫눈에 그 사내가 싫었다.  

그런데 다시금 카메라에 붉은 불이 켜지자, 그는 돌변했다.  그는 상냥하고 지적

이며 인상 좋은 중년 남자가 되었다.

  "자, 그럼 '세상에는 이런 일도 있다'코너입니다."

하고 그는 카메라를 향해 말했다.

  "지금 여기 계시는  OO씨는 우연한 일로 잔등에다 가난한 아줌마를  짊어지게 

되셨습니다.  어쨌든  잔등에 가난한 아줌마가 달라붙어 있는 분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그렇게 된 경위라든가 고충담을 들어 보려고 합니다."

  그는 내 쪽을 보며 말을 이었다.

  "어떻습니까? 무슨 불편을 느끼시는 일은 없으신지요?"

  "특별하게 불편하다든가 고생스럽다든가 하는 건 없습니다.  무거운 것도 아니

고, 먹고 마시는 것도 아니니까요."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럼 어깨가 결린다거나 뭐 그런 일도...."

  "없습니다."

  "언제부터 거기 달라붙어 있었습니까?"

  나는 일각수 동상이  있는 광장에서의 이야기를 짤막하게  말했지만, 사회자는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이를테면 말씀입니다."

  그는 헛기침을 하고 나서 말했다.

  "선생님께서 연못 가에 앉아 있는데, 그 연못 속에 가난한 아줌마가 숨어 있다

가 선생님의 뒷잔등에 달라붙었다, 그 말입니까?"

  "아닙니다"

  하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이구 답답해,  하고 나는 생각했다.   역시 이런 

곳에는 오지 말았어야  했다.  결국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그런 식의 웃음거리 

아니면 이류(二流)의 괴담일 뿐이었다.

  "가난한 아줌마는 유령이 아닙니다.  어디에 숨어 있지도 않았거니와 누구한테 

달라붙은 적도 없어요.   그건 이를테면 그저  평범한 낱말일 뿐이지요.  평범한 

언어일 뿐입니다."

  나는 시들해지면서 그렇게 설명했다.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말하자면, 언어라는 것은  의식에 접속된 전극과도 같은 것이니까, 그것을  통

해서 똑같은  자극을 계속적으로 보내고  있노라면, 거기에 반드시  뭔가 반응이 

일어나게 마련이지요.  물론 개인에 따라 그 반응의 종류는 전혀 다르겠지만, 제 

경우 그것은 독립된 존재감  같은 것입니다.  꼭 입 안에서  혓바닥이 자꾸만 부

어오르는 그런 기분이지요.  제 잔등에 붙어 있는 것도, 결국은 가난한 아줌마라

는 말에 불과합니다.  거기엔  의미도 없고 형체도 없지요.  굳이 말한다면 그건 

개념적인 기호같은 것입니다."

  사회자는 어쩐지 난처하다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의미도 없고 형체도 없다고 하셨습니다만, 우리는 현재 댁의 등에서 확실하게 

뭔가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그것은 우리에게  나름대로의 생각을 갖게 하고 있

습니다."

  나는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기호라는 건 그러한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지워  버리려는 마음만 있다면 자신의  의지로 그 이미지든 존재든 

자유롭게 지워 버릴 수 있다, 그 말씀이겠군요"

하고 젊은 여성 보조 진행자가  어색함이 보이기 시작한 상황을 바꾸기 위해 끼

여들어 질문했다.

  "아니지요.  그건  의지하고는 관계없이 계속 존재하지요.  기억이나  다름없습

니다.  예를 들어  잊고 싶은데 아무리 해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란 것이 있지

요.  바로 그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젊은 여성 진행자는 납득이 가지 않는 상태에서 질문을 계속했다.

  "예를 들어서요, 아까 말씀하신 말을 개념적인 기호로 만드는 작업은 저에게도 

가능한 일일까요?"

  "잘될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원리적으로는 가능합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때 사회자가 말참견을 했다.

  "가령 제가 개념적이라는 말을 매일같이 되풀이했다고 합시다.  그럼 언젠가는 

제 잔등에도 개념적인 모습이 나타날지도 모르겠군요?"

  "대개 원리적으로는 가능합니다"

하고 나는 대답을 기계적으로 되풀이했다.

  " '개념적'이란 말의 '개념적인 기호화'가 행해진다, 그 말이군요"

  "바로 그렇습니다."

  스튜디오의 강한 라이트와  역겨운 냄새가 밴 공기  탓으로 나는 머리가 아파 

왔다.  사람들의 요란한 목소리도 나의 고통을 조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개념적'이란 도대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요?"

하고 사회자가 물었다.  몇몇 방청객들이 웃었다.

  "몰라요"

하고 나는 대답했다.   나는 그런 것에 대해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나는 이미 

있는 가난한 아줌마 한 사람을 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벅찬 형편이었으니까.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 일이 절실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다만 다음 광고 

시간이 되기까지 뭔가 지껄이고 있었을 뿐이란 말이다.

  물론 세계 전체가 광대다.   누가 거기서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강한 빛에 

노출된 방송국의 스튜디어로부터 어두운  숲속 깊은 곳 은둔자의 암자에 이르기

까지, 상황의 뿌리는 모두가 하나다.    나는 잔등에 가난한 아줌마를 짊어진 채 

그러한 세계를  걷고 있었다.  물론  나는 그런 광대의 세계  속에서도 두드러진 

광대였다.  어쨌든 가난한 아줌마를 등에 짊어지고 있었으니까.

  짐작컨대 그 여자아이가 말했듯이  나는 차라리 우산 꽂이라도 짊어졌어야 옳

았다.  그랬더라면  사람들은 나를 동아리 속에  깨워 주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격주로 그 우산 꽂이의 색깔을  바꾸어 가며 온갖 파티마다 얼굴을 내밀었을 게 

아닌가.

  "이번 주 우산 꽂이는 핑크색이네"

하고 누군가 말하면,

  "그래 맞아"

하고 나는 대답한다.

  "다음주에는 블리티시 그린으로 바꾼다."

  핑크색 우산 꽂이를 짊어진 사내와 침대에 파고드는 일에 흥미를 느끼는 여자

아이가 세상에 있을지 누가 알겠나.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내가 짊어진 것은 우산  꽂이가 아닌 가난한 아줌마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와  내가 짊어지고 있는 아줌마에 대한 세상의  흥미는 자꾸

자꾸 희미해져 갔다.

  결국은-나의 동행이 말했듯이-누구도 가난한 아줌마에 대해 흥미를 가지지 않

을 것이다.  당초에 있었던 약간의 진지함이 가야  할 길을 다 가고 나서 소멸되

고 나면, 나중에는 바다 밑과  같은 침묵밖에 남지 않는다.  그것은 나하고 가난

한 아줌마가 일체화해 버린 그러한 깊은 침묵이었다.

  "당신이 출연한 텔레비전 프로 봤어"

하고 나의 동행이 말했다.  우리들은 전과 다름없이 연못 가에 앉아 있었다.  그

녀를 만난 것은 3개월 만이고,  지금은 벌써 초가을이다.  시간은 눈 깜짝 할 사

이에 흘러 버렸다.   그만큼 오래도록 그녀를 만나지 않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

었다.

  "좀 피곤해 보이더군."

  "몹시 피곤했다구."

  "당신이 너무나 달라 보였어."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랬었지, 아닌게아니라 나는 나답지가 않았었다.

  그녀는 무릎 위에다 트레이너  셔츠의 긴 소매를 몇 번이나 접고  있었다.  접

었다가는 펴고, 폈다가는 접고 했다.  마치 시간을 보냈다 당겼다 하듯이.

  "당신도 이제야 겨우 자기 몫의 가난한 아줌마를 갖게 되었나 봐"

하고 그녀는 말했다.

  "겨우"

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 기분이 어때?"

  "마치 우물 속에 빠진 수박 같은 기분이야."

  그녀는 무릎 위에  착 접힌 부드러운 트레이너 셔츠를, 마치  고양이를 쓰다듬

듯이 만지작거리면서 웃었다.

  "그녀에 대해 뭐 좀 알아낸 게 있어?"

  "조금은 알아냈다고 생각해.  적어도 조금은."

  "그래서 얼마나 썼어?"

  "아니야"

하고 나는 고개를 약간 저었다.

  "전혀 쓸 수  없어.  쓰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아.  어쩌면 이대로 못 쓸지도 

몰라."

  "엄살은."

  "언젠가 네게 말했듯이 내가 아무것도 구제할  수 없다면, 내가 가난한 아줌마

에 대해 뭔가 쓴다는 건 아무 의미가 없잖아?"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한참을 잠자코 있었다.

  "그러지 말고 나한테 뭐든지 물어 봐.  조금은 도움이 될지도 모를 테니."

  "가난한 아줌마에 대한 권위로 말이야?"

  "그래, 물어 봐.  내가  가난한 아줌마에 대해 뭐든 지껄여 보고 싶은 그런 기

분이 드는 일은 앞으로 두 번 다시 없을 테니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그것을 가다듬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때때로, 도대체 어떤 사람이  가난한 아줌마가 되는 걸까 생각해 보거든.  가

난한 아줌마는 나면서부터  가난한 아줌마일까, 아니면 가난한  아줌마라는 상황

이 개귀신처럼 거리  모퉁이에 딱 입을 벌리고 있으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삼

켜 가지고 몽땅 가난한 아줌마로 둔갑시켜 버리는 걸까 하고 말이지."

  그녀는 여러 번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은 질문을 했다는 듯이.

  "그건 대개 어느 쪽이건 똑같을 거야."

하고 그녀는 말했다.

  "똑같다고?"

  "응, 이를테면,  가난한 아줌마한테는 가난한 아줌마적인  소녀 시절이 있었고, 

청춘이 있었을지도 몰라.  아니면  없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건 그 어느 쪽

이든 상관없어.  이 세상에는 몇백만의 결과를  위한 몇백만 개의 이유가 넘쳐나

고 있으니까, 이유를  붙이기 위한 몇백만 개의  이유라든가.  그런 따위야 전화 

한 번만 걸면, 한무더기 간단하게  손에 넣을 수 있잖아.  하지만 당신이 원하고 

있는 건 그런 게 아닐 테지?"

  "글세, 그거하곤 다르다고 생각해"

  "그녀는 존재하는 거야.   그러니 당신은 그걸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해.  이

유고 원인이고  그런 거야 아무러면 어때.   가난한 아줌마는 그저  거기 존재할 

뿐이야.  가난한 아줌마란, 그 존재 자체가 이유거든.  우리가 특별한 이유도, 원

인도 없이 이렇게 현재 이 자리에 존재하고 있는 것과 꼭 같은 거야."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줄창 연못 가에 앉아 있었다.  해맑은 가

을 햇빛이 그녀의 옆 얼굴에 작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이봐, 당신 잔등에 무엇이 보이느냐고 내게 묻지 않을래?"

하고 그녀가 말했다.

  "내 잔등에 뭐가 보이지?"

하고 내가 물어 보았다.

  "아무것도 안 보여.  당신밖에 보이지 않아"

하고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다.

  "고마워"

하고 나는 말했다.

  

  물론 시간은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만들어 가겠지.  마치  노상에서 죽기까

지 늙은 말을 후려치는 저 마부처럼.   하지만 그것은 지독하게 조용한 타박이기

에, 스스로가 맞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자는 얼마 없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가난한  아줌마라는 이른바 수족관의 유리창을  통해서, 그

런 상황의 버둥거림을 목격할 수  있다.  답답한 유리 상자 속에서 시간은, 가난

한 아줌마를 오렌지를 짜내듯 짜고 또 짰다, 즙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다.

  나를 끌어당기는 것은, 그녀 속의 그 같은 완벽함이다.

  더는 정말이지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 거야!

  그렇다.  완벽함은  마치 빙하 속에 갇혀  버린 시체처럼, 아줌마란 존재의 핵

(核) 위에 걸터 앉아 있다.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들었나 싶을 정도의 훌륭한 빙

하다.  아마 1만 년의 태양만이 그 빙하를 녹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물론 가난한 아줌마가 1만 년이나  살아 있을 리는 만무하니까, 그녀는 

그 완벽주의와 함께 살고, 그 완벽주의와 함께 죽어, 그 완벽주의와 함께 장사지

내게 되는 것이다.

  흙 속의 완벽함과 아줌마.

  그럼, 1만년  후에는 어둠 속에서 빙하가  녹고 완벽주의는 무덤을  비집어 열 

듯이 지표 위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될지도 모른다.  지표의  양상은 분명 완전

하게 달라져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 자리에 결혼식이라는 의식이  의연하게 존재하고 있다면, 가난

한 아줌마가 남겨  놓은 완벽주의는 그 자리에 불려가, 사치스런  테이블 매너로 

코스를 끝내고, 일어나서 정성껏 축사를 늘어놓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그런  이야기는 그만두기로 하자.  결국 그건  서기 11980년의 일

일 테니까.

  가난한 아줌마가 나의 잔등에서 떨어져 나간 것은 늦가을의 일이었다.

  겨울이 되기 전에 끝내야 할 볼일이 생각나서,  나는 아줌마와 함께 교외선 전

차에 올랐다.   오후의 교외선 전차에는  숫자로 셀 만큼의 승객밖에  타고 있지 

않았다.

  장거리 외출은 정말 오랜만이었기에 나는 창 밖의 풍경을 지루한 줄도 모르고 

바라보고 있었다.   공기는 상큼하게 맑았고, 산은 부자연스러우리만큼 푸르렀으

며, 선로 가의 나무들은 군데군데 빨간 열매를 매달고 있었다.

  돌아오는 전차칸에서 맞은편 좌석에  앉은 사람은 30대 중반의 갈강갈강한 엄

마와 두 아이였다.   엄마 왼편에 앉아 있는 큰 여자아이는  유치원 제복인지 감

색 서지의 원피스를 입었고,  빨간 리본이 달려 있는 새 펠트  모자를 쓰고 있었

다.  폭이 좁고 둥근 챙이 달려 있는 예쁜 모자였다.

  엄마 오른편에는 세 살 정도의 사내아이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특별히 남의 

눈을 끌 만한 특징이  있는 건 아니었다.  얼굴 생김새며  옷차림이 모두 수수했

다.

  엄마는 커다란 보따리를 들고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기야 대개의 엄

마들은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는 법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전차에 올라와서  통로를 거쳐 나와 맞은 편 자리에 앉았을 때, 

한 번 흘끔 보았을 뿐이다.  그 다음부터 나는 줄창 문고본만 읽고 있었다.

  하지만 이윽고 칭얼칭얼대는  여자아이 소리가 내 귀에 들렸다.   아이의 목소

리에는 뭔가 호소하는 듯한 절박한 초조함이 담겨 있었다.  

  "시끄러워, 전차 안에서는 조용히 하라고 했잖아"

  하는 엄마의 말이 들렸다.   엄마는 무릎 위에다 보따리를 올려 놓은 채, 잡지

를 펼쳐 들고 열심히 읽고 있었다.

  "있잖아, 엄마 내 모자가....."

하고 그 여자아이가 말했다.

  "그만해"

하고 엄마가 톡 쏘아붙였다.   여자아이는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그 말을 그대

로 삼켜 버린 채, 불만스러운 듯이 입을 다물었다.  엄마를 가운데 놓고 앉아 있

는 사내아이가 조금 전까지  누나 머리에 있던 모자를 손에 들고,  두 손으로 장

난을 치고 있었다.  여자아이는  손을 뻗어 그걸 빼앗으려 했다.  하지만 사내아

이는 몸을 피하면서 절대로 놓으려 하지 않았다.  

  "모자가 망가진단 말이야"

하고 여자아이가 울상이 되어 말했다.  엄마는  귀찮다는 듯이 사내아이 쪽을 흘

깃 보고, 앉은 채로 손을  내밀어 모자를 빼앗으려 했다.  그러나 사내아이는 두 

손으로 힘껏 모자를 움켜쥔  채 고집스럽게 놓지 않았다.  엄마는  하는 수 없이 

깨끗하게 단념했다.

  "잠시 그대로 가지고 놀게 하려무나.  어차피 이내 싫증이 날 테니까"

  하는 식으로 엄마는 딸에게 말했다.  여자아이는  죽어도 승복할 수 없다는 얼

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해서 그 말에 달리 말대꾸하지는 않았다.  말대꾸해 

봤댔자 꾸중만 들을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아이는 입을  꼭 악문  채 남동생의 손에  있는 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엄마는 그런 동안에도 줄곧 잡지만 읽고 있었다.

  잠시 후, 사내아이가 이번에는 모자에 달려 있는  빨간 리본을 잡아 당기기 시

작했다.  엄마의  무관심이 그를 부추기고 있는  듯했다.  그는 리본을 주무르는 

일이 누나를 초조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으

면서 그는 일부러 리본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건 정말 짓궂은  행위였다.  내가 보아도  조금 화가 치밀었다.  어지간하면 

일어나서 사내아이 손에서 모자를 빼앗아 버릴까도 싶을 정도였다.

  여자아이는 꼼짝 않고 남동생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뭔가 생각하고 있는 모

양이었다.  그녀는  순간 벌떡 일어나 손바닥으로 남동생의 뺨을  찰싹 때리고는 

상대방이 주춤하는 틈에 잽싸게 모자를 낚아채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굉장히 재빠른 동작이었다.  모든 행위가  순간적으로 일어났으므로 엄마와 동

생이 그 행위의 의미를 이해하기까지엔  심호흡을 한 번 해야 할 만큼의 시간이 

걸렸다.

  동생이 갑자기 큰소리로 울음을 터뜨리고, 그와  동시에 엄마의 손바닥이 여자

아이의 드러내  놓은 무릎을 찰싹 때렸다.   그리고 나서 사내아이의  뺨을 쓸어 

주며 울음을 그치게 하려 했다.  그러나  사내아이는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않았

다.

  "하지만 엄마, 내 모자가....."

하고 여자아이는 말했다.

  "전차칸에서 시끄럽게 구는 아이는 우리 아이가 아니야"

하고 엄마는  말했다.  여자아이는 입술을  깨문 채 얼굴을 숙이고  자기 모자를 

물끄러미 보았다.

  "저리 가서 앉아."

  엄마는 내  옆의 빈자리를 가리켰다.   여자아이는 눈을 외면한 채  곧장 뻗어 

있는 엄마의 손가락을  무시하려고 시도했지만, 엄마의 손가락은  공중에 얼어붙

은 채로 한참 동안이나 내 왼편 자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자아, 어서 저리 가지 못하니.  너는 이제 우리 집 아이가 아니니까."

  여자아이는 체념한  듯이 모자와 가방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통로를 가로질러 와, 내 옆자리에  앉아 얼굴을 숙였다.  그리고 무릎 위에 올려 

놓은 모자의 챙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정말 나쁜 건  동생이라고 여자아이는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자기 모자

의 리본을 데어 버리려고 했으니까.  아래를 보고  있는 아이의 뺨에 몇 줄기 눈

물이 흘러내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때는 이미 저녁 나절이 가까웠다.  차내 

전 등의  희미한 노란 빛이, 마치  슬프게 보이는 나방의 비늘  가루처럼 주위를 

반짝반짝 춤추듯 날고  있었다.  그것은 공중에  감돌며, 사람들 코며 입을 통해 

소리 없이 몸속에 흡수되었다.

  나는 책을 덥고 나서  무릎 위에 두 손을 얹어 놓고, 한참 동안  내 자신의 손

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 손바닥을 그처럼 차근차근 들여다본 것은, 생

각하면 무척 오랜만의 일이었다.       차내 전 등의 희미한 불빛  아래서 내 손

은 유난히도 거무칙칙하게 더럽혀져 있었다.   그건 내 손 같지가 않았다.  그건 

내 마음을 슬프게조차 만들었다.   그 손은 아무리 보아도 앞으로  그 누구도 행

복하게 해줄 손으로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는 손같이 보이지도 

않았다.      나는 옆자리에서  훌쩍훌쩍 울고 있는 그 여자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고, 달래 주고  싶었다.  네가 한  일은 전혀 잘못되지 않았고,  모자를 빼앗을 

때의 그 솜씨는 정말 장한 것이었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물론  여자아이에게 손도 대지 않았거니와  아무 말도 하지 않았

다.  그런 말을  했다가는 그 여자아이를 더욱 혼란에 빠뜨려  한층 겁에 질리게 

만들지도 모른다.  더구나 무엇보다도 내 손은 이렇게 더러워져 있지 않은가.

  전차에서 내리자  주위에는 이미 겨울바람이  불고 있었다.   스웨터의 계절이 

가고 두꺼운 코트의 계절이 거리에 다가서고 있었다.

  나는 잠시 겨울  코트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새로운 코트를 사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그런 생각이었다.

  그리고 나서 계단을 내려와 개찰구를 빠져 나왔을 즈음에 나는 갑자기 생각했

다.  알고 보니 가난한 아줌마가 어느  틈엔가 내 잔등으로부터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을.

  언제 그녀가 없어졌는지 나는 짐작도 못했다.   그녀는 올 때나 다름없이 누구

에게도 들키지  않고 내 잔등에서 살며시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가 본래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장소로 돌아가고, 나도 본래의 나 

자신으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본래의 내가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나는 확신을 가질 수가  없게 되었

다.  그것은 원래의 나 자신을 꼭 닮은, 또 하나의 나 자신으로 여겨졌다.

  이제부터 어쩌면 좋을지 나는 막막하기만 했다.  사막 한복판에 서 있는, 글씨

가 지워져 버린  표식과도 같이, 나는 완전히  나 혼자뿐이었다.  그리고 방향의 

판단이 서지 않았다.

  나는 주머니를 뒤져서 거기에 들어  있던 잔돈을 몽땅 공중 전화에다 털어 넣

고, 그녀의 아파트 전화 번호를 돌렸다.  여덟 번 벨이 울리고 아홉 번째에 그녀

가 받았다.

  "자고 있었어"

하고 그녀는 흐리멍텅한 목소리로 말했다.

  "초저녁 6시에?"

하고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어젯밤부터 줄곧 작업이 밀려 있어서, 그걸  겨우 처리한 게 바로 2시간 전이

었어."

  "깨워서 미안해.  이런 말하는 거 좀 이상할 지 모르지만 그냥 진짜로 네가 살

아 있는지 어떤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구.  솔직히 말해서."

  나는 전화 저편에 있는 그녀의 차분한 미소를 느낄 수가 있었다.

  "염려해 줘서 고마워.   염려하지 마, 살아 있으니까.   계속 살기 위해 열심히 

일했더니, 덕분에 졸리고 또 졸려서 죽을 것만 같아.  이제 됐어?  안심했어?"

  "안심했어."

  "이봐, 산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야"

하고 그녀는 털어놓듯이 말했다.

  "하긴 그래"

하고 나는 말했다.  사실 그 말이 맞다.  산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웬만하면 이제부터 함께 식사라도 하지 않을래?"

하고 나는 물었다.

  "안됐지만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  지금은  그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푹 

자고만 싶어.  그뿐이야."

  "나도 별로 배고픈 건 아니야.   단지 너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뿐이지.  할

말이 많아서."

  수화기 저편의 그녀는 잠시 잠잠했다.   그녀는 입술을 잘근거리며 새끼손가락 

끝을 눈썹에 댄다.  나는 그녀의 그런 행동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나중에"

하고 그녀는 천천히 끊듯이 그렇게 말한 후 계속 말을 이었다.

  "지금은 아무튼 자게 내버려둬.  잠깐이라도 좋아.  아주 조금만 자고 나면 틀

림없이 뭔가 잘될 거 같아.  일어나면 당신한테 전화할게.  알았지?"

  "알았어.  안녕."

  "안녕히."

  하지만 그녀는 한순간 망설였다.

  "그런데 그거 급한 이야기야?"

  "급한 건 아니야.  특별히 급할 거 없다구.  나중이라도 상관없어."

  하기야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   1만 년이고 2만 년이고 나는 기다릴 수 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안녕'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손에 있는 노란 수화기를 

잠시 바라보고 나서조용히 제자리에 놓았다.

  전화를 끊자  갑자기 엄청나게 배가  고팠다.  미칠  것만 같은 공복감이었다.   

뭐든지 닥치는 대로 무작정  먹고만 싶었다.  입에 넣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

이건 상관없다.  그들이 나에게 뭐든지 주기만 한다면, 나는 땅바닥에 엎드려 그

들의 손가락까지도 빨아먹을지 모른다.

  좋아, 나는 자네들의  손가락을 빨지.  그리고 나서 비에  씻긴 침목(枕木)처럼 

곯아떨어져 잠을 자겠다.   누가 걷어찬다 하더라도 나는 다시는  일어나지 않겠

다.  나는 1만 년 동안 푹 자는 것이다.

  나는 전화기에 기대 서서  머리 속을 텅 비워 놓고 눈을  감았다.  몇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파도처럼 나를 씻어 주고 있었다.   사람들은 어디까지

나 어디까지나 끝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터벅터벅 그들은 발걸음을 아로새기고 

있었다.

  가난한 아줌마는 도대체 어디로  돌아갔단 말인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

고 나는 도대체 어디로 돌아왔단 말인가?

  만약, 하고 나는 생각한다.   만약 1년 후에 가난한 아줌마들만의 사회가 출현

한다고 하면, 나를 위하여 그녀들은 거리의 문을 열어 줄까?

  그곳은 가난한 아줌마들에 의해 선택된 가난한  아줌마들의 정부가 있고, 관청

이 있고, 가난한 아줌마들이  핸들을 잡은, 가난한 아줌마들을 위한 전차가 달리

고, 가난한 아줌마들의  손에 의해 씌어진 가난한 아줌마들을 위한  소설이 존재

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지, 그녀들은 그  따위 것들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정부

도, 전차도, 소설도.

  그녀들은 오히려 거대한  식초병 같은 것을 수없이 만들어서, 그  속에 들어가 

호젓하고 차분하게  살기를 원할지도 모른다.   하늘에서 바로다보면, 그러한 병

들, 수만,수십만 개가 온통  지표 위를 뒤덮고 있는 것이 보일 테지.   그리고 그

건 아마도 숨이 막힐 만큼 아름다운  경관일 것이다.     그렇다.  만약 그 세계

에, 한 편의 시가 비집고 들어갈 틈새가 있다면, 나는 거기에 대해 시를 써도 좋

다.  그리고 나는 가난한 아줌마들의 세계의 영예로운 최초의 계관(桂冠) 시인이 

되는 것이다.

  나쁘지 않아, 하고 나는 생각했다.

  녹색 유리병에 밝게 비치는 태양을 노래하고, 그  발 아래 펼쳐지는 아침 이슬

에 빛나는 풀의 바다를 노래하자.

  하지만 결국, 그것은 서기  11980년의 이야기다.  그리고 1만 년이라는 세월은 

기다리기엔 너무나 긴  시간이다.  그때까지 나는 무수한 겨울을  넘기지 않으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