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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 끄적/책읽기

임어당, [생활의 발견]중에서

한번은 읽어 봐야지 하면서도 아직 읽지 못한 책들 중의 하나.

이제 읽고 있다. 이런 좋은 글을 왜 이제사 만났는지 ^^;;

그중에 특히 마음이 가는 글이 있어 여기에 조금 실어 놓고 틈틈히 다시 읽을 수 있게 하려 한다.

20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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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벗과의 정담에 대하여


  (임과 하룻밤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은 10년 동안 책을 읽는 것보다 낫다) 이것은

옛날 중국의 한 학자가 친구와 이야기를 나눈 뒤에 한 말이다. 이 말에는 많은

진리가 포함되어 있다.

  오늘날에는 (야담)이라는 말은 벗과의 유쾌한 이야기를 밤에 나누는 것을 나타내는

유행어가 되어 있다(과거의 밤에 주고받는 이야기도 좋고 이제부터 맛볼 밤

이야기라도 좋다) 벗과 더불어 마음껏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하룻밤을 보내는 것과

같은 인생에서 다시 없는 즐거움은 일생 가운데 여간해서 맛보기 어려운 즐거움이다.

이입 옹도 말했듯이 현명한 사람으로서 말 잘하는 사람은 좀처럼 없는 법이고, 말

잘하는 사람치고 현명한 인사란 찾기 어려운 법이다. 그러므로 진실로 인생의 모든

일을 이해하고 더우기 말재주도 뛰어난 그런 인물과 산속 깊은 절간에서 우연히

만난다거나 하는 일은, 천문학자가 새로운 유성을 발견하거나 식물학자가 새로운

종을 발견했을 때와 같이 인생의 가장 큰 기쁨의 하나가 아닐 수 없다. 사업계의

경황 없이 변하는 템포 때문에 벽난로를 둘러싸고 크래커 통에 걸터 앉아서 이야기를

주고 받는 화술이 점점 없어져 가고 있다고 현대인은 한탄하고 있다. 이른바

템포라는 것이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나로서는 이렇게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가정이라는 곳이 전과 달라져 통나무를 땔 수 있는 벽난로가 없는 아파트에서

살게 된 것이 화술을 파괴하는 시초가 되고 자동차의 영향이 그 파괴를 완성시킨

것이나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대체 템포라는 것 자체가 좋지 않다. 참된 친구와 주고

받는 정담이라면 여유 있는 마음을 가지고 그런 데서 비롯되는 편안함, 유우머,

가벼운 뉘앙스를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사람이 단순히 이야기를

한다는 것과, 이런 운치 있는 정담을 나눈다는 것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중국어로는 설화(Speaking)라는 말과 담화(Conversation)라는 말로 그 사이의 구별을

짓고 있지만, 담화는 설화보다는 마음 가볍고 운연한 맛이 있으며 이야기의 내용도

비교적 세세한 것이어서 사무적인 데가 적다는 것이 그 특징이다. 이와 같은 차이는

사무용 통신문과 문우와의 편지 사이에도 있을 것이다.

  사무적인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따지는 것은 어떤 상대와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밤을 세워 가면서 마음껏 환담할 수 있는 상대란 매우 적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의미에서의 담화가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재미난 작가의 작품을 읽는 기쁨

이상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거의 그것과 맞먹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물며 담화의 경우는 상대편의 목소리를 듣고 몸짓하는 동작을 보는 기쁨이 있는

것이다. 어떤 때는 과거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어떤 때는 밤기차의

끽연실에서, 또 어떤 때는 먼 여로의 객사에서 우리는 그러한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

  갖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며, 독재자와 반역자를 욕하는 통렬한 웅변에 섞여 유령의

이야기며, 여우에 홀린 이야기도 나올 것이다. 그 중에는 지금 어느 나라에서는 이런

새로운 사태가 일어나고 있는데 그것은 점점 절박해진 정권의 뒤집힘이나 정변이

일어날 전주곡이니 하며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새로운 지식을 알려 주는 식견과

앞일을 내다보는 뛰어난 안목을 가진 좌담가도 있다. 이런 이야기는 일생 동안 잊을

수 없는 추억 속에 남게 마련이 것이다.

  이야기를 서로 나누기에 가장 좋은 때는 물론 밤이다. 밝을 때 주고 받는 이야기는

어딘지 매력이 적은 법이다. 이야기를 주고 받는 장소는 어디건 좋다고 생각한다.

문학이나 철학에 대한 유쾌한 대담을 즐기는 것은 18세기 식으로 꾸민 살롱에서도 할

수 있고, 오후의 따사로운 햇볕을 받으면서 그 어느 농장 안에 놓인 빈 술통에 걸터

앉아서도 할 수 있다. 어쩌면 또 이런 경우도 있을 것이다. 바람이 부는 밤이나 비가

내리는 밤에 강을 배를 타고 여행한다. 맞은편 기슭의 배에서 비치는 불빛이

어른어른 물 위에 비치는데 이런 정취 속에서 사공들은 여왕의 공주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준다. 사실 따지고 보면 서로 주고 받는 이야기의 진짜 구수한 맛은

그 환경, 즉 장소나 시간이나 이야기 상대가 그때그때 바뀌는데 있다. 어떤 때는

강남차의 꽃이 필 무렵 산들바람이 부는 달 밝은 밤과 관련지어 그 이야기를

생각나게 하고, 또 어떤 때는 벽난로에서 통나무가 활활 타던 캄캄한 폭풍우가

몰아치던 날 밤의 기억과 함께 연상할 때도 있다. 또는 어느 누각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앉아서 강을 내려가는 몇 척인가의 작은 배를 내려다보던 것을 회상하기도

한다. 그 가운데 한 척의 배는 급류에 휩쓸려 뒤집혀졌었지. 그리고, 또 아침 한때

역 대합실에서 지낸 일도 추억에 떠오른다. 그러한 정경은 그때그때 주고 받는

이야기의 기억과 하나로 연결되어 잊혀지지 않는 것이다.

  그때 방 안에 있던 사람은 아마 두서너 명이었었지. 그리고 그날 밤은 아마 대여섯

명은 되었을 거야. 진군은 그날 밤 술이 좀 취해 있었던 것 같았어. 그리고 김선생은

코감기가 들어서 약간 코맹녕이 소리로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것은 특히 그날 밤의

기분을 더욱 짙게 했었지. (달도 차면 기울고 꽃도 피면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좋은 벗들은 언제나 서로 만나기 힘들다) 이런 것이 바로 인생이니까 우리가 이런

단순한 즐거움에 잠겨 있을 때 신들도 인간을 시새움하지는 않을 것이다.

  좋은 이야기란 언제나 친밀감을 느끼며 읽을 수 있는 뛰어난 수필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의 스타일이나 내용이 모두 수필의 그것과 비슷하다.

여우의 망령, 파리, 영국인의 기묘한 습관, 동양 문화의 서로 다른 점, 세느 강변의

노점인 헌책방, 양복점에서 일하는 음란증이 있는 여점원, 우리의 지배자, 정치가,

장군들의 숨은 이야기, 불수감(시트론의 변종)의 보존법 등 이런 것들은 모두 한담

재료로서는 안성마춤인 화제라 하겠다.

  이야기가 수필과 가장 공통된 점은 그 여유 만만한 스타일에 있다. 물론 이야기를

하다가 보면 자기 나라에서 일어난 슬픈 변화라든가 혼돈 상태에 대한 비판도 나올

것이고 자유와 인간의 품위, 나아가서는 인간이 목표로 삼는 행복까지도 앗아가

버리는 광적인 정치 사상의 종류 속에 문명 그 자체가 몰락해 가고 있는 오늘날의

현상에 대한 비판도 나올 것이다. 또한 더 나가서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진리나

정의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겠지만, 그러한 이야기들이 아무리 엄숙하고 중요한

화제라 할지라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마음 편하고 친밀감이 있고 한가한 태도로

자기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유를 약탈한 자에 대하여 아무리

격렬한 분노를 품고 있다고 하더라도 문명 사회에서는 입가나 펜 끝에 띤 가벼운

미소에 의해 그 감정을 나타내는 도리 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기의 감정을 모두

드러내 놓고 진짜 열을 띠고 이야기하는 격한 말 따위는 정말로 친절한 몇몇

친구들에게나 들려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뜻에서

기탄없는 이야기를 즐기려면, 있어서는 난처한 싫은 사람들은 빼놓고 소수의 마음

맞는 친구들만 모여서 정다운 분위기 속에서 마음 편하게 각자의 의견을 털어놓는

것이어야 한다.

  진짜 담화와 이와는 다른 정중한 의견 교환과의 다른 점은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수필과 정치가의 성명과의 다른 점을 보면 쉽사리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정치가의 성명 가운데도 특히 고상한 감정을 표현한 것도 상당히 있다. 즉 민주주의

감정, 봉사하겠다는 열의, 가난한 사람의 행복에 대한 관심, 국가에 대한 충성,

숭고한 이상주의, 평화에 대한 사랑과 변함없는 국제적인 우의의 확보, 권세욕이나

금전욕의 냄새를 절대로 풍기지 않는 태도 같은 것은 정치가의 고상한 정조의

발로라고 할 수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성장을 하고, 지나치게 짙은

화장을 한 여인처럼 마음 놓고 가까이 갈 수 없는 한가닥 악취를 풍기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진심으로 들려 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거나 또는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수필을 읽고 있을 때에는 수수한 옷을 걸쳐 입고 개울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 시골 처녀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머리칼은 약간 헝컬어지고 단추는 하나쯤 떨어져 있을지 모르지만 애교가 있고

친밀감이 있어 호감이 가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서양 부인들이 입는 실내의가

노리는 정감 있는 매력이어서 아무렇게나 꾸민 가운데 깃든 세련된 아름다움이라는

것이다. 친밀감에서 오는 이 정이 가는 매력이야말로 온갖 즐거운 이야기와 수필이

지녀야 할 공통 요소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담화가 지녀야 할 올바른 양식은 친밀감과 대범한 느낌이 하나로 어울린

양식이어야 한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자의식을 잃어버리고, 몸차림이

어떻다느니, 어떤 말투로 이야기를 한다느니, 재채기를 했다느니, 어디에 손을 얹어

놓고 있다든가 그런 것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또한 이야기가 어떠한

방향으로 진전되거나 도무지 상관하지 않는다. 이렇듯이 친한 친구들과 서로 만나

서로 마음을 편히 갖겠다는 생각을 함으로써 비로소 진짜 이야기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친구들 가운데 한 사람은 곁에 놓인 탁자 위에 두 발을 올려 놓고 있고,

또 어떤 친구는 창틀에 걸터 앉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방바닥에 털썩 주저 앉아서

소파에서 끌어내린 쿠션에 몸을 기대고 있는 형편이어서 소파의 3분의 1은 텅 빈

채로 남아 있다. 사람이란 누구나 손발이 편해지고 몸이 편안한 자세를 취하게

되어야 비로소 심장도 편히 쉴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는 바 모두 마음에 드는 친구뿐일세

  내 주위에 눈 거슬리는 놈은 아무도 없네.


  참으로 옳은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적어도 예술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온갖

한담을 주고 받는데 절대 필요한 요건이다. 무슨 이야기를 주고 받는지 그다지

신경을 쓰고 있지 않으니까 이야기에는 이렇다 할 순서도 방법도 없이 차례로

거침없이 나가게 마련이다. 이윽고 모두 유쾌한 기분을 지닌 채 흩어져 가게 되는

것이다.

  이상 이야기한 것이 한가로움과 담화와의 관계이며 또한 담화와 산문체가 흥륭하는

관계이다. 본디 나는 진실로 세련된 한 나라의 산문은 담화가 이미 하나의 예술의

경지까지 발달했을 때 비로소 생기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런 사실은 중국과 고대

그리이스에 있어서의 산문 발달의 자취를 더듬어 보면 가장 뚜렷하게 알 수 있다.

공자가 나타난 뒤 몇 세기에 걸쳐 중국 사상은 발랄한 생기를 보여 이른바

(구류학파)를 낳기에 이르렀는데, 그 원인으로서는 주로 입씨름만을 일삼는 학자

계급에 의하여 구성된 교양이 높은 시대적 배경의 발달이라는 원인 외에는 달리

생각할 수 없다.

  화술이 생길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유한적 사회에만 국한돼 있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지만 이와 마찬가지로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뛰어난 수필이 나타날 수 있는

것도 화술이 존재하는 경우에 한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화술과 훌륭한 산문 기술은

문명사상 그 모두가 비교적 늦게 발달되었다. 왜냐하면 인간 정신은 어느 정도

감정의 섬세함과 경묘함을 발달시켜야 하겠지만, 그것은 모두 한적한 생활에서만

바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공산주의자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한가함을

즐기고 가증할 유한 계급에 속한다는 것부터가 이미 반혁명적이라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는 바이지만, 공산주의나 사회주의가 추구하는 목적은 모두 대중에게 여가를

즐기게 하는 것, 즉 한가로움의 향락을 일반화시키는데 있다고 나는 확신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가함을 즐기는 것이 죄악이 될 까닭이 없다. 아니 죄악은 커녕 문화

자체의 진보가 한가로움을 총명하게 이용하는데 달려 있는 것이다. 담화는 그 한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하루 종일 말할 수 없이 바쁘게 돌아가고, 저녁 식사가

끝나면 곧 잠이 들어 소처럼 쿨쿨 코를 고는 실업가 따위는 아마도 문화의 발달에

대해 아무런 보템도 주지 못할 것이다.

  이 (한가함)이 때로는 강제적으로 주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구한다고 좀처럼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많은 뛰어난 문학적인 작품은 강제적인 한가로운 분위기

속에서 생겨났다. 창창한 앞날을 가진 문학적 천재가 아무런 소용도 없는 사회적인

모임에 여기저기 쫓아다니고 시국 문제에 대한 논문을 쓰거나 하여 정력을 소모하는

것을 보면 그를 구해낼 수 있는 가장 친절한 방법은 감옥에 집어 넣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문왕이 인생의 변화를 논한 철학의 고전 (역경)을 쓴 것도, 사마천이

한문으로 쓴 가장 훌륭한 역사인 (사기)라는 걸작을 쓴 것도 모두 감옥에 갇혔을

때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문인이 정계에 대한 야심이 무너졌을 경우, 또는

정계의 정세가 너무나 비관적인 경우, 이따금 문학과 미술의 걸작이 생겨난다.

몽고가 중국에 군림했던 시대에 위대한 원대의 화가와 희곡가가 많이 쏟아져 나왔고,

만주인이 중국을 정복했던 첫 무렵에 석도나 팔대산인과 같은 위대한 화가가 나타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애국심이 이민족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 극도의

굴욕감이라는 형태로 나타나서, 예술과 학문에 대하여 전신전령을 쏟게 했던 것이다.

석도는 말할 것도 없이 중국이 낳은 거장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거장이지만, 그의

이름이 널리 유럽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은 우연히 그렇게 된 면도 있지만, 그 중

하나는 청조의 역대 황제가 자기네 통치에 진심으로 복종하지 않았던 이들 예술가의

공적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데도 그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과거에 실패한 다른 위대한 문인들은 그들의 정력을 승화시켜 오로지 창조의 길로

정진하기 시작했다. (수호전)을 쓴 시내암의 경우, (요재지이)를 쓴 포송령의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그 (수호전) 속에 역시 시내암이 쓴 것이라고 전해지는 머리말

가운데 친구와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는 즐거움을 쓴 다음과 같은 내용의 유쾌한 글이

있다.


  친구들이 모두 내 집에 모이면 모두 합해서 열 여섯 명인데 한 명도 빠짐없이

모이는 일은 매우 드물다.

  그러나 비나 폭풍우가 부는 날이 아니고는 한 명도 오지 않는다는 것도 또한 드문

일이다. 대개 보통 날에는 여섯 명이나 일곱 명이 모이게 되는데, 그들은 집에

오자마자 곧 무엇을 생각하거나 하는 일은 없다. 마시고 싶으면 마시고 싫어지면

그만둔다. 즐거움은 술을 마시는데 있는 게 아니라 벗들과 이야기를 주고 받는데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궁정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 받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런 이야기는 우리의 격에 맞지 않는 일이기도 하고 이렇게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고장에서는 대부분의 소식은 세상 소문에 의지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남에게 전해 들은 소식은 한낱 뜬소문에 지나지 않으며,

뜬소문을 갖고 논한다는 것은 타액의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또한 세상

사람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주고 받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과실은

없는 것이며, 우리는 그들을 비방해서는 안된다. 또한 우리는 세상 사람을 놀라게

하기 위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아무도 놀라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또한 우리가 말하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 주기를 진심으로 바라지만 아직도 그렇게

뜻대로 되지도 않는다. 우리가 주고 받는 이야기는 인간의 마음 속 깊이 숨어 있는

그런 것이기 때문에 바쁜 세상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내암의 대작이 나오게 된 것은 이러한 정서 속에서였으나 그것은 그들이

한가로움을 즐겼기 때문에 얻어진 것이다.

  고대 그리이스에서 산문이 일어난 것도 분명히 이러한 한적한 사회적인 배경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이스 사상의 맑고 깨끗함과 그 명쾌한 산문체는 분명히

한담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플라톤의 (대화)라는 표제만 보아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향연)편을 보면 한떼의 희랍 학자들이 땅바닥에 비스듬히 누워

술과 과일과 미소년의 분위기 속에 싸여 유쾌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들의

사상이 굉장히 맑고 깨끗하고 문체가 매우 명쾌한 것은 화술의 수련을 쌓았기

때문이다. 현대의 아카데믹한 저자들의 저 현학적이고 거만한 문체와 얼마나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가. 고대 그리이스 사람들은 분명히 철학의 화제를 마음 가볍게

다루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리이스 철학자들의 매력적인 환담의

분위기, 그 이야기를 좋아하는 기풍, 좋은 이야기 듣기를 소중히 여긴 점, 이야기를

나누는 환경에 마음을 썼다는 것은 (파이돈)의 머리말에 아름다운 필치로 쓰여져

있다. 이 글을 읽으면 고대 그리이스의 산문이 훌륭한 원인을 잘 알 수 있다.

  플라톤이 쓴 (공화국)만 하더라도 현대의 저술가라면 능히 쓸만한, (그 발전의

연속적인 단계를 통해서 본 인류 문명은 이종으로부터 동종으로의 역학적인

운동이다)라느니 어쩌니 하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잠꼬대 같은 말로 시작되어

있지는 않다. 오히려 이같은 즐거운 문장이 첫머리에 나오고 있다. (나는 어제

아리스토의 아들인 글로코와 함께 여신을 참배하려고 페레우스로 갔다. 그리고

시민들이 어떤 모양으로 제전을 기리는지 보고 싶다고 생각하였다. 이번 제전은 처음

보는 제전이었기 때문이다)

  사색이 가장 활발하고 왕성하게 행해진 고대 중국 철학자들 사이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분위기가 (대비극 작가는 또한 대희극 작가이어야 하는가. 그래서는

안되는 것인가)와 같은 화제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그리이스 사람들 사이에도

있었다. 향연에 묘사되어 있는 그대로이다. 그곳에는 진지함과 명랑함이 뒤섞인

공기가 감돌고, 듣기에도 마음 가볍고 다정한 응답이 오가곤 했다. 한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소크라테스가 마시는 모양을 놀려 대지만, 소크라테스는 매우 태연하게

마음이 내키는 대로 술잔을 들고 기분이 내키는 대로 술잔을 내려 놓곤 한다. 손수

따라 마시는 것이니까 남에게 폐는 끼치지 않는다. 이렇듯 아리스토파네스와

아가톤을 제외하고는 모두 잠들어 버릴 때까지 밤이 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의 무리에게도 빨리 잠자리에 들도록 권하고 마지막에 혼자 남게 되면

소크라테스는 연회석상을 떠나 아침 목욕을 하러 리세움으로 간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신선한 마음으로 그날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그리이스 철학이 생겨난

것은 이러한 친근미가 넘치는 환담이 있는 분위기 속에서다.

  교양이 담긴 담화에는 그것에 필요한 경쾌한 분위기를 자아내기 위해 여성의

참가가 필요함은 말할 것도 없다. 이 경쾌한 기분이라는 것이 한가로운 이야기의

기본 정신인 것이다. 실없는 말을 하거나, 떠들어대지 않는다면 이야기는 이윽고

답답해지고, 철학 그 자체도 인생과 아무런 인연도 없는 하잘것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생활방식을 이해하는데 흥미를 갖는 문화가 존재했을 때에는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도 언제나 사교하는 자리에서 이성을 환영하는 풍습이 발달됐던 것이다.

페리클레스 시대의 아젠스에서도 그러했고, 18세기 프랑스의 살롱에서도 그랬던

것이다. 남녀가 자리를 같이 하는 것을 금지했던 중국에서조차도 남자 학자들은

말벗이 되어 주는 여성이 참석하기를 바랐었다. 화술이 수련되어 일세를 휩쓴 진,

송, 명의 3대에 있어서는 사도온, 조운, 유여시, 이밖의 재원들이 연달아 나타났다.

중국의 남성은 아내가 정숙하고 다른 남자들 앞에 나타나지 않기를 요구하면서,

한편으로는 재능이 풍부한 여성들과 함께 앉아 즐기고 싶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중국 문학사는 결국 직업적인 창녀의 생활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야기를 주고 받는 자리에 여성의 매력을 약간 보태고 싶다는 요구는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일찌기 나는 오후 5시부터 밤 11시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몇몇의 독일 여성을 만난 일이 있는데 그뒤 영국과 미국에서

내가 아무리 애써 보아도 공부할 마음이 나지 않았던 경제학에 조예가 깊은 여성들을

보고 매우 어리둥절해진 경험을 갖고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논할 수 있는

여성은 예외라고 치고, 이야기를 잘 들을 줄 알고 단정하고 생각이 깊어 보이는

여성이 몇 명 자리에 함께 있으면 이야기는 언제나 기분 좋은 자극을 얻는 것이다.

나는 멍청이같이 생긴 사나이와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는 그 편이 훨씬 유쾌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