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037 – 시경 (詩經) / 작자미상

 (출처 :  동서고전 200선 해제(반덕진, 가람기획))


 중국 고대인의 생활상을 노래한 중국최초의 시가집. 공자에 의해 편찬되었다고 알려져 있는 이 책은 중국 각 지역의 민요와 조정의 연회 및 제사시 불리어지던 노래의 가사를 수록하고 있다.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문학뿐 아니라 중국사회 전반에 걸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시가집이다. 현존하는 <시경>은 한나라 모공이 전하는 <모시>이며 음악의 성질에 따라 <풍><아><송>의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통하여 고대 중국의 문물제도 및 당시 중국인의 사유형태를 관찰할 수 있다.


a.<시경>의 성립

 은주왕조 건국 초기(BC 1122년경)부터 춘추 중기(BC 570경)까지의 약 500년간에 걸쳐 황하를 중심으로 한 주의 영역 내에서 불리던 시가를 모은 중국 최초의 시가집이다. 중국역사상 은대는 문명의 시원기라고 한다. 그런데 1898년 하남성 안양현 소둔촌에서 <갑골문자>가 발굴되면서 이 곳이 은왕조 최후의 왕도(BC 1384 - 1123)인 은의 구지임과 갑골문자가 은대의 문자임이 밝혀져 세인을 놀라게 했다.

  갑골문자에 의해 고증된 바에 따르면 은말은 석기와 청동기를 병용하던 시대로, 주산업은 어로와 채취 그리고 유목이고 농경은 초기단계였음이 밝혀졌다. 당시의 사회형태는 모계사회의 부족집단 체제였고 문자는 창제 중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은대 말은 원시유목사회에서 농경사회로 옮아가는 과도기였음을 알 수 있다.

  주대에 들어와서 철기가 발명되면서 농경이 급속도로 발달하여 농업이 주산업이 되자 부족들의 주거가 정착되고 부계사회가 형성되었으며 부족집단체제에서 국가조직체가 이루어졌다. 문자는 완성단계에 이르렀고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렇듯 주왕조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국가체제를 이룩한 왕조이고 중국문명의 시원이 바로 주왕조임이 사가들에 의하여 규명되었다.

  주대 이전에도 예술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원초의 무속신앙에 바탕을 둔 원시예술로서의 가무였다. 그 흔적은 복사와 주역에서 찾아볼 수 있을 뿐 문자로 기록되어 전래된 것은 없다.

여기서 소개하고자 하는 <시경>은 문자로 기록되어 전래된 중국 최초의 시가이고 문학이며 중국문명사의 첫장이 된다. <시경>은 원래 <시> 또는 <시삼백>으로 불렸다. <경>자가 붙은 것은 전국시대 말기로, 그것도 <시>와 <경>을 합쳐 부른 것이 아니고, <<시서예악역춘추는 6경이다>>(<장자>의 <천운>편)이라고 했을 뿐이다. <시경>이라고 불려진 것은 한대의 사마천의 <사기> <유림전>에서 비롯되었으며 민간에서 통칭되기는 그보다 훨씬 후대인 송대부터라고 한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고시가 원래 3천 편이었는데, 공자가 이것들을 책정하여 311편만을 남겼다고 한다. 그러나 후세학자들의 고증에 의해 공자가 <시경>을 정리했던 것은 사실이나 3천여편을 311편으로 책정한 것은 잘못된 견해라고 한다. 물론 3백여편은 더 되었겠지만 공자는 다만 중복된 것, 의미가 불분명한 것은 제외하고 정리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현존하는 <시경>은 311편이라고 하나, 그 중 6편은 제목만 있고 시사가 없으므로 실제는 305편이다.


b.<시경>의 내용

 <<꾸룩꾸룩 징경이(물수리)는 모래톱에서 우니는데, 아리따운 아가씨, 군자의 좋은 짝일러니>>로 시작되는 <시경>은 수천 년 동안 중국인의 심성을 도야시켜온 교화의 원천이었다. 내용은 주왕조의 비교적 안정되었던 시대에 걸맞는 밝은 서정시로부터 혼란기를 반영하는 어두운 서사시까지 다채로우나, 숫자상으로 가장 많은 것은 연애시다. 따라서 <시경>은 유교 이전의 고대가요의 황금시대에 꽃핀 중국 문학사상 희귀한 연애문학 또는 여류문학의 이점을 가지고 있다.

  구두로 전승된 작품이 어느 시기에 문자언어로 옮겨서 편집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현존하는 <시경>은 한나라 모공이 전하는 <모시>이며 음악의 성질에 따라 <풍><아><송>의 3부로 구성되어 있다.

  <풍>은 국풍이라고도 하는데, 15개국에서 수집해온 민가로 이른바 지방의 속악이다. <풍>은 모두 160편으로 시가의 내용은 다양하다. 가장 많은 것이 남녀간의 연가와 사회시로, 전란의 고통을 노래한 것, 사회에 대한 불만, 전장에 나간 남편에 대한 아내의 그리움과 걱정, 두고온 가정을 걱정하는 남편의 노래, 이별의 괴로움을 노래한 것 등이다.

  <아>는 소아와 대아로 분류되며 모두 111편이나, 그 중 제목만 있고 가사가 없는 6편을 제외하면 105편이 된다. 소아(74편)는 주로 연회음악이고 대아(31편)는 국중음악으로, 그 작자들은 대개 지배계급인 사대부로 알려져 있다. <아>는 <하>자와 음이 비슷하여 고대에는 통용되었다고 한다. 하는 우황이 세웠던 나라 이름으로 황하지역에서 문화의 중심지였다. 그곳에서 불리던 악곡에 맞추어 지은 시가를 <아>라고 하며, <국풍>의 속악과 구별하여 정악으로 삼았다고 한다.

  <송>은 제사지낼 때 쓰는 40편의 의식용 음악으로 셋으로 분류 되는데, <주송>(31편) <노송>(4편) <상송>(5편)으로 나누어지며, 상송은 은나라 후예가 있던 송에서 불렸던 시가였다. 사상내용에 따라 몇 개의 분류로 나누어 고찰하면 다음과 같다.


   1. <국풍>의 일부시는 사회의 계급모순을 반영하고 있는데, 노예에 대한 노예주 귀족들의 잔혹한 착취와 압박을 폭로하는 한편, 노예들의 분노항거를 표현했으며, 노예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을 반영했다. 노동에서 얻은 열매는 몽땅 노예주에게 빼앗기고 자신들은 풀뿌리로 연명해야 했던 그 시대의 계급적 대립의 엄연한 사실을 그대로 반영해주고 있다.

  쩡쩡쩡 박달나무 찍어내어 / 찍은 나무 물가에 쌓아두니

  강물은 맑고도 물결이 치네 /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았건만

  어찌하여 조 삼백전을 가지고 가는고? / 사냥도 안하건만

  어이하여 네 뜨락에 담비가 걸렸는고? / 여보소 군자님들 공밥이야 안 먹겠지?

  다음의 시는 노예들의 반항을 표현하고 있다.

  큰 쥐놈아 큰 쥐놈아 / 나의 기장 먹지 마라

  석삼 년을 살렸건만 / 나를 아니 돌보는가?

  너를 떠나가리로다 / 저 낙토로 가리로다

  낙토여 낙토여 / 내 살 곳을 찾으리라

  이런 부류의 시가는 많은 것은 아니지만 <시경>에서 제일 가치있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2. <국풍>에는 또 병역과 요역의 과중한 부담에 눌려 신음하는 노동인민들의 현실생활과 그들의 사상감정을 표현한 작품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노예들의 입을 빌어 요역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 없고, 부모조차 봉양할 수 없는 재난의 심연 속에서 헤매는 그들의 처참한 운명을 하소연하고 있다. 병역과 요역은 장정 본인들에 극심한 고통을 주었지만 집에 남은 부녀자들에게도 큰 부담을 주었다.

  수자리에 가신 낭군 / 그 기약 할 수 없네

  언제나 돌아오리? / 닭은 홰에 오르고

  해는 이미 저물어 / 소와 양떼 돌아오네

  수자리에 가신 낭군 / 어이 생각 안하리오?

   3. <국풍>의 3분의 1은 애정과 혼인에 대한 시다. 불타는 연정을 표현한 시가 있는가 하면 버림받은 여인들의 분노를 나타낸 작품들도 적지 않다. 오로지 한 처녀만을 사랑하는 깨끗한 애정을 표현하는가 하면 청춘남녀를 사이에 애정을 숨김없이 토로하는 시들도 있다. 

  진수와 유수에 봄물이 출렁인다

  총각도 처녀도 난초꽃을 들었구나

  <<가보아요>> 처녀의 다정한 말에

  <<가보았소>> 정다운 총각의 대답

  <<또 가보아요 넓디넓은 유수 가는 놀기가 좋다나요>>

  총각처녀 장난치며 서로들 함박꽃 안겨주네


c.<시경>의 연구경향 및 그 영향

 중국은 시의 나라다. 역대로 중국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시가문학이 발달하였고, 대부분의 황제들은 문학의 애호자임과 동시에 뛰어난 시인이었다. 한무제 조조 수양제 당현종이 그러한 예이며, 당대의 이백 두보 백거이 한유, 송대의 구양수 왕안석 소동파로부터 최근의 모택동에 이르기까지 시인들의 정치적 지위는 높았다. 다시 말해 중국에서는 시적 능력을 정치적 능력과 상관시키는 경향이 농후했다.

  이러한 시학과 정치학의 결합, 즉 중국식의 정치시학적 입장을 확립한 인물이 바로 공자이며 <시경>은 그러한 인물에 의해 편집된 최초의 시가집이다.

  <시경>은 대개 채시 진시 헌시의 방법으로 수집 된 것을 당시의 악관들이 선정하여 편집했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고대에는 제왕들이 채시관을 두어 매년 봄과 가을 두차례에 걸쳐 각 지방에 파견, 시를 모으도록 하여 각 곡의 민심동향과 정치의 반응을 살펴 이를 시정의 참고로 삼았다는 기록이다. 따라서 15개 국풍의 시가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수집되었으리라 여겨진다. 후세의 학자 중에는 <시경>이 특정지역 내에서 특정인들이 불렀던 것이라는 설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이에 대한 반론도 크며, 아와 송의 경우 대개 지시나 헌시의 방법으로 수집, 편찬되었으리라고 여겨진다.

  이렇게 수집된 시들은 악관의 손에 의하여 음률에 맞게 정리되고 편집되었을 것이며, 그후 공자가 다시 이것을 정리한 것이 오늘날의 <시경>이라 추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공자가 <논어>에서 <시삼백>이라는 말로 <시경>의 총 편수가 3백여 편이었다고 한 것으로 유추된다.

  공자는 <6경>, 즉 <시> <서> <예> <악> <역> <춘추>로 제자들을 가르치는 교본으로 삼았다. 그는 특히 시를 매우 중요시했으니, 그것은 시가 인간의 감정을 순화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전범이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논어> <위정>편에 <<시삼백은 한마디로 말해 사악함이 없다>>고 했으며, 또 <양화>편에서는 <사람이면서 <시경>의 주남 소남시를 배우지 않았다면 그것은 담벽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고 했다. 이렇듯 공자는 <시경>을 유가의 전범으로 삼았다. 이어 전국시대에도 공자의 사상을 계승한 맹자나 순자가 <시경>을 중시했다.

   1. 진이 천하를 통일하여 중국 역사상 최초의 전제국가를 수립하면서 시황제는 <분서갱유>를 단행했다. 이로 인해 <역경>을 제외한 모든 경전들이 불타거나 소실되었다. 뒤이어 한 왕조가 진을 멸망시키고 천하에 군림하면서 학술사상을 부흥시키고자 하여 천하에 산재한 고전적을 수집하고 학관을 세우는 한편, 전문분야의 학자들을 초빙하여 이들 중 가장 권위 있는 대표자를 박사라 했다.

   2. 당시 <시경>으로 최초로 박사가 된 사람은 문제 때 노나라 사람 중배와 연나라 사람 한영이 있다. 이들은 비록 동일한 시경학자이긴 하나 치학하는 방법에 따라 차이가 있어 이들의 시를 세칭 <노시>와 <한시>라 한다. 그후 경제 때에 또 한 사람의 시경학자가 박사에 선임되었으니 제나라 사람 원고로, 이 학파의 <시경>을 <제시>라 한다. 이렇듯 전하시대에는 <노시> <한시> <제시>의 3개 시경학파가 있었다.

  전하 말에 노나라 사람 공왕이 그의 궁전을 넓히려고 공자가 살던 옛집을 헐 때 그 집 벽 속에서 많은 고전적이 나왔는데, 그것들은 서한대에 통용되던 문자인 예서가 아니라 선진대의 문자로 되어 있었다. 이로부터 예서로 된 전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을 <금문파>, 서진대의 문자로 된 전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을 <고문파>라 이르게 되었다. 고전적 중에는 <시경>도 있었는데, 노나라 사람 모형은 금문파 학자들의 반대로 서한시대에 학관의 박사로 참여하지 못했다.

  후한 시대에 이르면서 <모시>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아지고 또 전한 말 후한의 대학자 정현이 <모시>를 연구하여 <모시>에 주석짓기에 이르러 <모시>는 단연 다른 3가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기타 3개 <시경>학파는 점차 쇠퇴하여가더니 <제시>는 위대에, <노시>는 서진대에, 마지막으로 <한시>는 북송 초에 소멸하고 말았다. 이로써 <시경>은 <모시>만이 남게 되었다. 소멸된 3가의 시는 고전적에 산재, 인용되어 그것들의 면모를 겨우 알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시경>을 <모시>라고도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3. 당대에는 공영달이 <모시정전>을 부연하여 <모시정의>를 찬술하여 당대의 통용본이 되었다. 당대부터 <모시정전> 해석에 불만을 가진 학설이 조금씩 고개를 들었으나 크게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4. 송대에 이르러 시경학계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송대 경학의 대가인 주희는 전래의 <모시정전>의 견해에 부당한 부분이 많다고 지적하면서 <시경>의 주해서로 세 번의 개작 끝에 <시집전>을 찬술, 전통학파와 큰 논란을 벌였다. 그 결과 주희의 <시집전>이 시경학계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송대의 학술이 팽배하던 시대였으므로 주희의 이러한 사상적 기여하에 해설된 <시집전>이 통용되었음은 당연한 귀추라 하겠다.

  주희의 <시집전>은 그후 원명청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권위있는 <시경> 해설서로 통용되었다. 그렇다고 <모시정전>이 소멸된 것은 아니었으며 모시 정전파의 학자들도 그 맥을 이어왔다.

   5. 청대 말에 이르러 <시집전>은 일부 진보적인 고증학자들에 의해 커다란 도전을 받았다. 즉, 종래의 시경학자들이 거의 경학적인 면으로 <시경>을 다스린 것에 반해, 이를 고증학자들은 <시경>을 경학적인 면보다 역사적인 면에 치중하여 고증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종래의 주해서에 적지 않은 모순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을 든다면 방옥윤의 <시경원시>, 요제항의 <시경통론>, <모시>와 <시집전>을 가장 신랄하게 공격한 최술의 <독풍우식> 등이 있다.

  이상을 요약하면 <시경>은 한대에 <노시> <한시> <제시> 등의 3개 학파가 형성되었으나 <모시>가 등장한 후 모두 쇠퇴하고 남송에 이르러 주희의 <시집전>이 나와 가장 권위있는 주해서로 통용되었다. 민국시대에 와서는 시경학계가 일대 변혁기를 맞게 되었다. 

  현대학자들은 <시경>은 경학이 아닌 학문으로 연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종래의 경학자들은 <시경>을 정치의 도구로, 또 예교의 도구로 이용하기 위해 각기 자기들 시대에 적용되게 왜곡시켜 주해했으나, 이제 <시경>은 <시경>의 본래적인 면모, 즉 과거 2천 년간 경학으로 연구되었던 <시경>은 오늘날 고대 문학작품으로서의 모습을 찾아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공감을 얻어가고 있다.

  비록 근대에 와서 많은 학자들의 반론에 의해 <시경>에 대한 정치적 해석이 지양되고 민요로서 순수문학적 의의가 회복되었지만 세계를 인식하고 장악하는 훌륭한 기제로서의 시적 능력을 함양시키고, 중국은 물론 한국일본 등 동아시아 제국의 문학이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이 책의 가치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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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經 (출전:나무위키)


관련 항목 : 유교,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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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곡량전

춘추공양전

논어

맹자

이아

효경



1. 개요

2. 역사

2.1. 공자의 산삭설

3. 특징

3.1. 문학적 특징

3.2. 육의(六義)

3.3. 정(正)과 변(變)

4. 번역본

5. 시경과 관련 있는 것

5.1. 류성룡의 징비록

5.2. 단어


1. 개요[편집]


유교 경전 중 하나. 이름은 시(詩)지만, 현대의 시를 의미하기 보다는 율(律)이 있는 주나라 시대의 노래를 담은 민요집에 가까운 작품이다.


내용은 본디 311편이었다고 하나, 분서갱유 과정에서 6편이 제목만 전한 채 실전되고 현전하는 것은 305편이다.[1] 현전하는 흔히 말하는 시경의 경우, 한나라 시대에 노공왕이 공자의 집을 철거할 때 나온 주나라 당대의 과두문자[2]로 기록된 죽간본 시경[3]에 모장(毛萇)과 모형(毛亨)의 양모씨에 의해 주석이 달린 모시를 근간으로 삼고, 여기에 주자의 주석이 더해진 시경집전(詩經集傳)을 근간으로 삼는다.


2. 역사[편집]


본디 주나라에서 쓰이던 많은 노래들 3000편을 공자가 산삭하여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오늘날에는 이를 사실로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후, 유교에서 중요한 경전으로 대우를 받다가 진나라 대에 벌어진 분서갱유로 모든 유교 서적들이 불태워질때 함께 소실되었다가 한나라 대에 유교가 국가의 사상으로 숭상받으면서 오경박사를 두어 훈고학을 통해 유교서적에 대한 복원이 시도되었는데, 시경 또한 다른 경전들과 함께 복원이 시도되었고, 그 결과문이 삼가시(三家詩)다.


삼가시란 제(齊)의 원고생(轅固生)에 의해 전해진 제시(齊詩), 노(魯)의 신배(申培)에 의해 전해진 노시(魯詩), 한영(韓嬰)에 의해 전해진 한시(韓詩)의 세 학파에 의해 탄생한 시경으로, 이 삼가시를 금문경이라 부른다.


삼가시는 전한대에 노공왕의 집이 철거되어 시경의 원문인 죽간본인 고문경이 발견될 때까지 시경연구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고문경이 발굴되고, 이에 주석을 단 모시(毛詩)가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삼가시는 그 명맥이 단절되었고, 후한-동진의 혼란기에 대부분 소실되어, 현재는 한시의 외전 10권만이 전하고[4], 삼가시 원문은 전하지 않게 되었다.[5]


여기에, 송나라 대에 주희가 주석을 단 집전(集傳)까지 더해져, 이후 시경은 고문경에 모씨와 주자의 주석이 달린 채로 전하게 되었다.


2.1. 공자의 산삭설[편집]


흔히 시경에 대하여, 말할때, 공자가 3000편을 편집하여, 300편으로 산삭했다는 산삭설이 널리 알려져 있으나, 현재 학계에서는 대개 이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본다.


왜냐하면, 당장 공자가 생애에 시삼백을 논한 바는 있어도, 시삼천을 논한 바는 없으며, 당대에 공자 본인이 수집할수 있었던 정보도 끽해야 주나라와 노나라의 학사에 모인 기록이 대부분이었을텐데, 이 노나라와 주나라의 학사에 전하는 시들이 300여편 정도로 시경의 편수와 그리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자가 시에서 올바른 것만 산삭했다고 하기에는[6] 풍(風)에서, 위풍 ,정풍, 빈풍 등에는 음란하다고 볼 수 있는 남여상열지사에 대한 노골적인 표현이 보이는 등[7][8] , 딱히 산삭했다고 볼수 있는 흔적이 없다. 따라서 현대 학계에서는 주나라와 노나라 학사의 문헌을 그대로 수록하고 정리했다고 보는 시각이 강하다.


3. 특징[편집]


3.1. 문학적 특징[편집]


시경의 기본적인 특징은 다름아닌 4언체다. 한 구에 4언으로 이루어진 구절이 무한히 반복되고, 당시에 실제로 불리던 노래였기 때문에 초기형태의 성조에 의한 운율이나 압운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시경의 문체는 이후 발전하여 5언체 중심의 북방문학을 발전시켜서, 초기 한시에 큰 영향을 주었다.


반대로, 이 시경의 딱딱한 4언에 반대되게 6언 또는 7언이 중심이 된 초사가 있다. 초사는 초지방에서 발생한 시로 시경에 대비되는 남방문학의 시초로, 이 시경과 초사는 각각 오언시와 칠언시의 효시가 되었고, 둘은 서로에 영향을 주어, 한대의 악부시의 형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3.2. 육의(六義)[편집]


시경을 분류할때 대표적으로 분류하는 방법에는 육의(六義)가 있다. 이 육의를 나누는 것은 시경의 대서(大序)에서 비롯되었는데, 이 대서의 경우에도 사실 누가 지었는가 말이 많다. 자장이 지었다는 말도 있고, 또 일부에서는 공자가 직접 만들었다는 말도 있다. 이 육의는 시경에 담긴 여섯가지 뜻이라는 것으로 크게 시의 성질에 따라 나눈, 풍아송(風雅頌)과 서술방식에 따라 나누는 부비흥(賦比興)으로 나뉜다. 또한 풍아송중 아(雅)를 규모에 따라 대아와, 소아로 나누어, 풍(風), 대아(大雅), 소아(小雅), 송(頌)로 나눈 것을 사시(四始)라고 한다. 또한, 부비흥의 경우, 현대로 치면 수사법에 가까운 것으로 어떤 식으로 시를 표현하는가를 의미한다.


성질에 따른 분류

풍(風): 서민의 노래. 주나라 각 제후국들의 일반적인 민요로, 각기 15개국의 민요를 담고 있다. 단 주나라 본국의 민요의 경우, 주풍이 아니라, 왕풍으로 기록되어 있다. 주남(周南)·소남(召南)·패풍(邶風)·용풍(鄘風)·위풍(衛風)·왕풍(王風)·정풍(鄭風)·제풍(齊風)·위풍(魏風)·당풍(唐風)·진풍(秦風)·진풍(陳風)·회풍(檜風)·조풍(曹風)·빈풍(豳風)의 15국풍 160편.

아(雅): 조회나 연향 때 연주하는 노래

대아(大雅): 주나라 왕실의 행사나 의식에 쓰인 왕실의 흥폐를 논한 노래. 총 31편.

소아(小雅): 제후국의 행사나 의식에 쓰이거나, 작은 정사를 논할때, 민간에서 의식이 있을경우 쓰인 노래. 대아가 왕실에서 사용되 무게가 있는 반면, 제후나 신하, 서민의 의식에 쓰여 대아에 비해 작기 때문에 소아라고 한다. 총 80편이나 6편이 실전되어 현전하는 것은 74편.

송(頌): 선현을 기리는 노래. 주나라왕실에서 쓰인 주송, 노나라제후국에서 쓰인 노송, 송나라에서 선대인 상나라를 기린 샹송상송의 3종류가 있다. 총 40편.

작법에 따른 분류

흥(興): 흥이 무엇인가는 정확하게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사실 이른바 흥이라는 것을 보면 왜 흥이라고 부르는 지는 알겠는데, 이걸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더 올바르다. 굳이 억지로 말로 표현하자면, 연역적 감정의 전파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하여 하안과 공안국은 인비연류(引譬連類)라고 표현하였으며, 주자는 감발지의(感發志意)라고 풀이하였다. 다만 하안의 해석에 대하여서는 그럼 비와 흥은 뭐가 다르냐는 반론이 따르게 되기에, 현대 학자들은 주로 주자의 감발지의의 해석을 따르고 있다.

부(賦): 하고자 하는 뜻을 있는 그대로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비(比): 하고자 하는 뜻을 무언가에 빗대어 표현한다. 비유법.

3.3. 정(正)과 변(變)[편집]


정이란, 그 내용이 교화되어 올바르고 단아한 것을 나타내며, 변(變)이란 교화가 흐트러져 그 내용이 어지럽혀 진것을 가리킨다.


풍의 경우 남(南)으로 끝나는 주남과 소남을 각기 주공과 소공의 교화아래 올바른 문화가 펼쳐져서 지어진 노래란 의미로 정풍이라 하며, 나머지 13열국풍은 교화되지 못하여 어지러워진 이후의 민요라고 하여 변풍으로 부른다.


아의 경우, 대아는 정아, 소아는 변아로 분류했고, 송의 경우도 주송과 상송은 정결하다고 하여 정송으로 보고, 노송은 흐트러져 변송으로 분류한다.


4. 번역본[편집]


국내에는 시경번역이 생각보다 많은 편이긴 한데, 시경의 경문만을 번역한 경우가 있고, 주희의 주석을 번역한 경우가 있으며, 그 외 주석가들의 주석을 함께 번역한 예도 있다. 시경의 경문만을 번역한 것으로는 이기동의 《시경강설》(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04.), 정상홍 역 《시경》(을유문화사, 2014.), 김학주 역 《시경》(명문당, 2002.)이 유명한데, 이 가운데 김학주 역은 교수신문 선정 최고의 시경 번역으로 손꼽히기도 하였다.


주희의 주석인 《집전》을 번역한 것으로는 성백효 역(전통문화연구회, 1998.), 김기평 역(아세아문화사, 2012.) 등이 있는데 둘 자체는 대동소이하다.


그 외 주석가들의 주석을 번역한 것으로는 다산의 《시경강의》(실시학사 경학연구회, 사암, 2008)가 있다.


5. 시경과 관련 있는 것[편집]


5.1. 류성룡의 징비록[편집]


임진왜란 때의 재상 류성룡이 저술한 징비록(懲毖錄)의 제목이 바로 이 시경의 한 구절에서 유래했는데, 시경 소비편의 "내가 지난 잘못을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여기징이비후환:)"라는 구절에서 따 온 것으로, 소비편은 위의 구분에서 송(頌)의 '주송'에 포함되어 있는 편이다.


5.2. 단어[편집]


'우연히 만나다'라는 뜻의 해후(邂逅)도 시경이 본 출처다.


고사성어 '절차탁마(切磋琢磨)', '훈지상화', '일취월장(日就月將)', '타산지석', '오매불망(寤寐不忘)', '연비어약(鳶飛魚躍)', '요조숙녀'도 역시 시경이 출처다.



[1] 실전된 6편은 소아(小雅)에 속하는 남해(南陔), 백화(白華), 화서(華黍), 유경(由庚), 숭구(崇丘), 유의(由儀). 이 작품들은 내용없이 이름만 전한다.

[2] 고대 서적들의 경우 과거 필기구의 발전이 미비해서 이전에는 대나무를 쪼갠 죽간에 점도가 높은 옻먹을 사용해 기록했는데, 이 때문에 처음은 유난히 두껍고 점점 가늘어져 마치 올챙이같은 모양의 글자가 쓰여졌다. 이를 과두문자라고 한다. 수호전에서도 천강지살 108호걸의 이름과 별호를 새긴 석갈천문이 과두문자로 쓰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3] 이를 고문경이라고 부른다. 이에 반해 한대에 훈고학으로 복원된 시경을 금문경이라 부른다.

[4] 원전 22권의 경우 마지막으로 존재가 확인되는 것은 다름 아닌 고려. 아마도 주변에 고서중에 있을지도 모른다!! 취소선을 친것은 한시 원전이 고려에 있다는 것은 와전된 일이고, 실제로는 송나라가 고려에게 그 책이 있으면 전해달라는 요청한 기록이다.

[5] 그나마 시경은 운이 좋은 편에 속하는 것이, 이 과정에서 서경의 경우, 원문이 발견되지 못하고, 전한대의 금문상서에 진나라 시대의 위작인 위고문상서가등장하여 그 내용이 섞여서 원전의 내용을 알 수가 없어서 가치를 많이 잃어버지만, 위고문상서가 후대의 유학자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현대에 들어서는 청화 대학에서 죽간으로 적힌 서경의 10여편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악경의 경우 내용이 남아 있지 않아, 복원조차 되지 못하여 현전하지 않는다.

[6] 흔히 말하는 시삼백을 한마디로 하자면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詩三百一言之蔽之曰思無邪)

[7] 이걸 두고 화랑의 후예에서 '공자님께서 시경에 음문을 두셨거늘' 운운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8] 이 시경의 음문문제는 역사적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떡밥이었던 부분인데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유학자들은 이걸 어떻게든 설명해 보고자 우리 공자님이 그럴리가 없어 思無邪의 邪를 마음에 반하는 것이라고 해석해서 思無邪는 마음과 달리 거짓말 하는것이 없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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