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09 – 적과 흑(Le Rouge et le Noir) / 스탕달(Stendhal, 1783-1842)
(출전 :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1830년의 연대기라는 부제가 암시하듯, 프랑스의 1830년 7월 대혁명 직전의 지배자 교체에 따른 격동의 시대에, 한 평민 청년의 야심을 통하여 귀족. 승려. 대부르주아의 3자가 서로 세력 다툼을 벌이는 사회의 반동성을 비판적으로 묘사한 심리학과 역사철학의 연구서다. 주인공 쥘리맹 소렐이 가진 야심의 좌절과 옥중에서 성취되는 그의 내면적 구제를 통하여 역사를 통찰하는 작가의 리얼리즘과 그 역사를 넘어서는 낭만주의가 명확하게 표현되고 있다.
a. 생애와 작품활동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 / 살았노라, 썼노라, 사랑했노라(Arrigo Beyle, Milanese, Scrisse, Amo, Visse.). 전자는 로마의 영웅인 시저가 소아시아를 점령하고 로마에 보낸 전보의 내용이고, 후자는 스탕달의 유언에 따라 몽마르트 언덕의 묘비에 새겨져 있는 그의 묘비명이다. 스탕달은 19세기 전반기 프랑스 소설가로서, 발자크와 함께 근대소설의 개조로 불리며, 문필활동 외에도 나폴레옹 시대에 군인. 외교관을 지내고 수많은 연애편력으로 점철된 그의 생애는 파란이 많았다.
본명은 마리 앙리 베일레(Marie-Henri Beyle). 그는 부유한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났다. 소년 베일레의 정신생활은 매우 특이해서, 어머니를 열애했고 아버지를 증오했다. 어머니는 매력적인 사람이었고,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우리의 키스를 방해하러 올 때는 몹시 얄미웠다는 자서전의 한 구절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그는 어머니를 7세 때 잃었다. 아버지와 그 친척인 셰라피 아주머니, 가정교사였던 랠란 신부 등 세 폭군을 평생 동안 싫어한 반면, 외가 쪽 사람들은 좋아했다. 특히 그가 진정한 아버지로 생각했던 외조부는 그에게 18세기의 합리주의적 사상을, 외숙부는 돈 주앙적(쾌락주의적) 인생관을, 외종 조모는 고매한 영웅주의를 심어주었다. 그는 17세에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군에 참가하여, 그곳에서 자유와 사랑. 쾌락. 미와 음악을 알았다. 이때부터 이탈리아는 그의 정신적 고향이 되었다. 그는 19세부터 문학수업에 정진, 22세부터는 여배우 멜라니와 동거하면서 수입 식료품상의 점원, 27세에는 나폴레옹 제정에 참가, 29세에는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원정에 종군, 나폴레옹이 몰락한 31세부터는 문필생활로 생계를 유지하는 휴직 군인, 38세에는 사랑에 빠지나 계속적인 실연, 43세에 작가생활, 48세에 다시 관직으로 들어가 이탈리아 주재 프랑스 영사를 지내는 등 다채로운 경력을 소유했다. 35세에 알게 된 메틸드 덴보스키는 생애 최고의 애인이었지만 그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경험으로 연애론 을 탄생시킨다.
1814년(31세), 나폴레옹의 몰락과 함께 실직한 그는 이탈리아로 이주하여 문필활동을 계속한다. 1821년 이탈리아로부터 추방당하여 영국을 여행하고 파리로 돌아온다. 영국여행에서 셰익스피어의 문학을 발견한 것은 큰 소득이었고, 파리에서는 사교계에 출입하여 르라크루아, 메리메 등과 사귀었다. 왕정복고하의 파리에서 그는 실의에 빠진 문단의 방랑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 동안 몇몇 작품을 쓰지만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적과 흑(1830)은 그의 대표작이었지만, 발자크와 소수의 독자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냉담한 반응이었다. 기나긴 불우한 생활이 끝나고, 1830년 7월혁명과 더불어 반동정치가 붕괴됨에 따라 그는 오랫동안 숙원이던 외교관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진보사상과 자유주의는 곧 오스트리아 당국의 경계를 받게 되어 이탈리아 통일운동에 가담하고 있다는 협의로 축출되었다. 그후 10년 동안을 교황령의 소항구인 치비타 베키아영사로 주재하면서 권태롭기 이를 데 없는 세월을 보냈다. 차츰 노쇠를 자각하고 고독을 느끼기 시작하여 몇 차례에 걸쳐 결혼을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한 권태기에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가끔 파리로 돌아오거나, 영국여행을 하며 에세이류를 집필했다.
1839년 단시일에 명작 파름의 수도원을 탈고했는데, 그는 생전에 문명을 떨치지는 못했지만, 단 두 편의 소설로써 백 편이상을 쓴 발자크와 비견할 만한 자리를 문학사에서 차지하게 되었다. 오히려 20세기에 들어오면서는 위고, 발자크보다 더 많은 애독자를 가졌고, 보다 더 현대인에 가까운 선구적인 천재로서 각별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
그는 동시대의 냉담과 몰이해에 대해서 끝까지 경멸했으며, 자신의 굳은 신념을 잃지 않았다. 친구가 많지는 않았지만 메리메는 시종일관하여 그를 높이 평가하였고, 특히 1840년에 발자크는 스탕달을 찬양하는 기사를 발표하여 문인으로서 불우했던 그에게는 더없는 위안과 기쁨을 주었다. 그러나 괴팍하고 자존심이 강한 그도 만년에 이르러서는 연애와 방랑 속에서 추구하던 행복의 획득 에도 지치고, 고독의 무게를 덜 길이 없어, 자기가 기르던 두 마리 개에게 애정을 쏟으며 삭막한 만년을 담담하게 살아갔다.
1841년 요양차 파리에 머물다 이듬해 거리에 쓰러진 채 사망, 몽마르트르 언덕에 안장되었다. 사망 당시 주머니 속에는 나는 백년 후에나 유명해질 것이다라는 유서가 들어 있었다. 그의 예언대로 당시 언론은 그의 죽음을 철저하게 외면했으나, 19세기 말에 와서 어느 날 갑자기 세인들은 그의 작품을 주목하게 되었다.
b. 시대적 배경과 문학세계
b-1. 시대적 배경
이 작품은 프랑스 역사상 1814-30년 사이의 루이 18세와 샤를 10세에 의한 왕정 복고기라는 시대적 배경하에 씌어진 작품이다. 1799년부터 1814년까지의 유럽사는 프랑스 역사, 특히 나폴레옹의 역사라 할 수 있다. 나폴레옹 시대는 둘로 구분할 수 있는데, 곧 1799-1804년의 공화정시대와 1804-1814년의 제정시대다. 전자는 나폴레옹이 제1집정관으로 프랑스 혁명의 성과를 보존하면서 프랑스를 군사적. 정치적
측면에서 강화한 시대이며, 후자는 나폴레옹이 정치체제를 주로 군사력으로 유지하며 전쟁. 정복. 동맹이란 수단에 의해 프랑스 혁명 정신을 유럽 전역으로 전파한 시기였다.
프랑스 혁명은 주권재민. 국민개병. 국민교육제도. 애국심. 대의제, 특히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나폴레옹은 이러한 모든 것들을 자의로, 혹은 타의로 유럽 각지에 전달하였고, 그 반응은 심대했다. 그러나 동시에 나폴레옹은 자기가 정복한 국가 안에 자유주의와 내셔널리즘의 씨를 뿌림으로써 마침내는 자기자신의 운명을 재촉하는 결과를 낳았다.
영국에 대한 대륙봉쇄령, 각국의 저항운동, 러시아 전쟁의 실패, 유럽 각국의 해방전쟁으로 1814년 나폴레옹은 엘바 섬으로 유배되고, 프랑스 혁명중 처형된 루이 16세의 동생 루이 18세가 즉위하여 왕정 이 부활되었다. 망명귀족들이 속속 귀국하여 혁명 이전의 특권적 지위를 향유하였고, 왕은 무능하여, 많은 사람들은 물러난 지 9개월도 안된 나폴레옹을 동정하게 되고, 이러한 분위기에 자극받은 나폴레옹은 재집권의 뜻을 불태워 에바 섬을 탈출, 군중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파리에 입성했다. 그러나 유럽국가들은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격파하여 나폴레옹의 백일천하 는 막을 내린다. 이후에도 부르봉 왕가의 원정은 1830년 7월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계속된다. 적과 흑은 이러한 왕정복고의 후반기, 샤를 10세 시대를 그 배경으로 삼고 있다.
b-2. 문학세계
소설가 스탕달의 공적은 근대소설에서 사실주의의 한 형태를 수립했다는 점에 있다. 적과 흑의 부제인 1830년 연대사가 암시하는 대로 작가는 프랑스의 현실묘사를 과제로 했다. 이것은 인간은 이제 소설을 통해서만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는 성찰과 소설, 그것은 거리에서 가지고 다닐 수 있는 거울이다 라는 그의 유명한 경구에서 확인된다. 확실히 그의 소설은 발자크의 소설처럼 사회전체의 파노라마를 묘사하려는 것은 아니고, 단 한사람의 주인공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많다.
스탕달의 거울은 시대와 사회를 비추기는 했지만, 그것은 대부분 주인공이라는 렌즈를 통해서였다. 작품 중에서 내적 독백을 많이 사용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또 창작 노트에서 풍속의 묘사는 소설 중에서 재미없는 것이다. 묘사를 놀랍게 바꾸는 것이 좋다. 묘사는 하나의 감정이 될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데, 현실에 직면해서 흔들리는 주인공의 내면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신속하게 글로 옮긴다는 것이 스탕달의 창작의 최대 비밀, 즉 심리적 사실주의의 뼈대였던 것이다. 그런데 소설 안에서 특권적인 렌즈에 지나지 않는 스탕달의 주인공은 작가의 이상화된 모습이라고 흔히 말하는데, 작가 자신의 내면의 모순과 명민을 지향하면서도 감성의 발작에 발이 걸려 넘어진 실패의 패턴은, 작중인물에서 조금도 완화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소설의 줄거리는 대부분 주인공의 실패에서 그 원동력을 얻는다. 주인공에 대한 야유 또는 주석이라는 형태로 가끔 나오는 작가 개입의 기법, 내적 독백의 다양함, 인물의 놀람을 표현하기 위해 원인을 빼고 결과만을 서술하거나, 반대로 결과를 생략하는 도약적 문체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는 심리적으로는 매우 사실적인 서술법과 여러 비연속적 수법으로 자신의 소설을 구축해갔다. 발상과 수법의 참신함 때문에 생전에 많은 이해는 얻지 못했지만 죽은 뒤 그의 작품은 점차 폭넓은 독자를 획득하였다.
c. 주요 등장인물
이 작품은 인간의 행복은 외적인 사랑보다, 내적인 자아로부터 얻을 수 있음을 말하고, 아울러 위계화된 사회의 모순과 부당성을 폭로하고 좀더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질서에 대한 염원을 불러일으킨다.
쥘리앵: 지적인 성품의 소유자로, 귀족에 대한 불만과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려고 애를 쓰다 실패하는 비련의 인물.
레날 부인: 읍장의 부인으로 귀족적인 삶에 예속된 남편을 버리고 쥘리앵을 사랑하다, 오해로 그의 총에 맞아 죽게 되는 여인.
마틸드: 라몰 후작의 딸로 창백한 귀족을 싫어하고 쥘리앵을 사랑하는 여인.
d. 작품의 주요내용
이 작품은 작자의 고향인 도피네 지방에서 1827년에 일어난 베르테 사건 에 토대를 두고 있다. 미남 청년인 베르테는 가난한 대장장이의 아들로서 미슈가의 가정교사로 들어간다. 그런데 미슈 부인을 사랑하게 되어 이번에는 코르동가에 들어가는데, 여기서도 그 집 딸과 문제를 일으켜 쫓겨났다. 출세길이 막힌 그는 분노와 질투로 미사중인 미슈 부인을 피스톨로 저격하였으나 미수에 그쳤고, 그는 사형을 당했다. <법정> 신문에 연재된 이 사건의 기록을 보고 베르테를 쥘리앵으로, 미슈 부인을 레날부인으로 하여 이 소설을 썼다.
주인공 쥘리앵은 목재상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난폭한 아버지와 두 형에게 학대 받으며 성장한다. 그러나 그의 연약한 몸과 섬세한 외모의 그늘에는 불굴의 의지와 강인한 에너지를 소유하고 있었고, 이 도시를 지배하고 있는 탐욕스런 지배계급에 대한 끈질긴 증오가 숨어 있었다. 그는 나폴레옹의 숭배자로 노사제 셸랑 신부에게 접근하여 라틴 어와 신학을 공부하면서, 신부가 되려고 결심하게 된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석권하던 시절에는 빈민도 재능이 뛰어나면 출세할 수 있었지만, 왕정복고 시대에는 성직자만이 유일한 출세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사제의 추천으로 시장 레날 씨의 가정교사로 들어가게 된다. 레날 부인은 신앙심이 두터운 정숙한 부인이었는데, 남편이나 남편의 동료들에게서 볼 수 없는 순진한 청년의 인품에 감동하게 되고, 격렬한 사랑을 느끼게 된다. 쥘리앵은 처음엔 그녀를 경계했지만, 무례한 레날 씨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부인과 친하게 되고, 나중에는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 부인도 쥘리앵이 신분은 낮지만 의연한 태도와 인품에 있어서 누구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숨은 영웅을 만난 듯 대한다. 그러나 변덕스러운 그녀는 곧 자기가 노예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냉담한 태도를 취하여 쥘리앵으로 하여금 질투심을 느끼게 한다. 한편 쥘리앵은 그토록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실연의 괴로움에 부대껴 그녀의 사랑을 되찾는 데 온 정력을 쏟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레날 씨는 그를 더이상 집에 머물지 못하게 한다. 다시 쥘리앵은 부장송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고, 피라르 신부의 총애를 받게 된다. 그는 피라르 신부의 추천으로 파리에 있는 라몰 후작의 비서가 된다. 후작의 딸인 마틸드는 기품이 높은 여성으로 사교계의 창백한 귀공자들을 경멸하는 여성이었고, 좀 별난 쥘리앵을 마음에 두고 있다가 밀회를 청하게 된다. 쥘리앵은 마틸드를 정복하게 되지만, 두 사람은 증오가 섞인 묘한 연애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마틸드가 임신을 하게 되자 후작은 하는 수없이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하여, 쥘리앵은 출세의 길이 열리게 된다. 이때 쥘리앵의 과거를 폭로한 레날 부인의 편지가 날아들어 모든 것은 끝장이 나고 만다. 화가 난 쥘리앵은 성당에 있던 레날 부인을 저격하여 사형선고를 받는다. 그러나 옥중에서 그는 레날 부인에 대한 오해를 풀게 되고, 자신을 진실로 사랑한 여인은 레날 부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미련없이 단두대에 오른다. 쥘리앵은 세상에서 흔히 불리어지는 식의 단순한 출세주의자는 아니다. 그는 항상 자기의 존엄을 중히 여기고 그러한 자기를 긍정하는 것을 최대의 목적으로 하는 정신적인 귀족이다. 그러니만큼 그는 최후의 순간에서도 고고한 마음으로 단두대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물질보다 정신세계에 사는 시골청년 쥘리앵은 가정교사로 들어가 시장 부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파리에 가서는 후작의 딸 마틸드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쥘리앵은 이 두 여성을 대상으로 사랑의 꿈을 추구함으로써 자기가 멸시하는 지배계급에 대하여 복수하고 있다. 레날 부인에 대한 사랑도 따지고 보면 레날 시장에 대한 반발에서였다. 레날 부인은 이러한 사실도 모르고 쥘리앵을 사랑함으로써 행복감에 젖는다. 신앙심. 정절. 모성애 때문에 자책하면서도 쥘리앵의 사랑을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때문에 내심의 갈등을 안고서도 절대적인 헌신과 애정으로 쥘리앵을 대한다. 쥘리앵은 이 괴로워하는 여성에게서 영혼의 위대성을 발견한다. 그는 후에 마틸드와의 사랑의 체험을 통해서 레날 부인의 참된 사랑의 추억을 되살려내는데, 독자들은 이 작품에 나타난 쥘리앵의 두 번의 연애과정을 검토함으로써 그의 행복추구가 어떻게 발전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쥘리앵과 마틸드는 연애관계는 호감보다는 반감에서 시작되고, 두 자존심의 상극과 친화력으로서 나타난다. 즉 마틸드는 머리로서 사랑하는 여성인 데 반해, 레날 부인은 가슴으로 사랑하는 여인으로 대립된다.
살해사건으로 감옥에 갇힌 쥘리앵은 감옥 속에서 사회와 자기를 대립시키면서 살아온 자기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나 자신에게 말하면서도 아직 위선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라는 말로 있는 그대로 자기를 보지 못하고 위선에 빠져 있는 자기를 비판한다. 쥘리앵은 외부세계와 연결되는 사회적 존재일 때는 날카로운 이성의 소유자이고 유물론자이며 반항자이지만, 자기자신과 대면할 때는 자신이 진실하게 살지 못하고 참된 사랑을 저버린 것을 후회하는 인간인 것이다.
쥘리앵의 생애는 이처럼 외면적. 물질적 행복, 파리. 미녀. 지위. 명성. 돈에 대한 동경으로 시작되어 외부와 격리됨으로써 내면적이고 정신적인 행복에 도달하고 있다. 작품의 줄거리에서는 한 개인의 행복추구라는 문제와 특정한 시대환경을 살면서 겪는 인간의 본질적인 과제인 자아문제에 대한 작가의 훌륭한 고찰이 엿보이고 있다.
e. 감상 및 문학사적 의의
그는 이 작품에 1830년대사라는 부제를 달아놓고 있는데, 이것은 왕정복고 시대에 대한 그의 정치적 견해가 이 작품에 반영되어 있음을 뜻한다. 열렬한 나폴레옹 숭배자였던 그는 나폴레옹 실각 후 귀족. 성직자. 중산계층의 3자가 좌지우지하는 왕정복고 시기의 정치적 현실을 철저하게 비판했다.
f. 리얼리즘과 낭만주의
주인공 쥘리앵은 사회에 저항하다가 그 대가를 받는다. 이러한 과정에서는 현실주의자로서 작자의 관점이 있으나, 낭만주의자로서의 작자는 비극의 쥘리앵을 몹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회가 요구하는 위선에 젖어버릴 수 없는 순결한 심정과 불굴의 의지, 또 거기에 존재하는 총명함과 행운을 가지고서도 도리어 불행한 최후를 마치지 않으면 안되는 주인공을 설정함으로써 작자는 오히려 프랑스 당시의 사회풍조를 매섭도록 비판하고 잇는 것이다. 그러나 작자는 비속한 독자에 대한 경계심과 타고난 수치심에서 간결하고 비정한 문체를 쓰고 있음을 아울러 알 수가 있다. 한마디로 이 작품은 하류계층 출신이지만 재능이 뛰어나고 야심에 불타는 한 청년의 성공과 좌절의 이야기를 통해 왕정복고 시대의 암흑기를 묘사한 소설로, 작가의 대표작인 동시에 사실주의의 선구로 평가되고 있다. 심리소설 의 걸작으로서 정평이 나있으나, 부제가 암시하듯 사회소설. 정치소설로서의 측면도 있다. 시대를 생생하고 자세하게 묘사하였지만 발자크 풍의 사회조감도와는 달리, 명석하고 냉철하게 그리고 위선을 무기로 출세와 영달을 위해 사회와 맞서지만 끊임없이 자신의 양심과 감수성에 굴복하게 되는 주인공의 눈을 통해, 모든 것이 표현되고 있다는 의미에서 주관적 사실주의의 구현이다. 책 제목의 뜻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적은 제정시대의 영광을, 흑은 왕정복고시대의 암울의 상징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한편 작가는 평소 정력을 예찬했다. 이 정열 예찬은 그로 하여금 나폴레옹과 16세기의 이탈리아를 좋아하게 했다. 한 개인 속에 가장 많은 정열이 응집된 모델을 나폴레옹에게서 보고, 열광적인 정열의 나라를 16세기 이탈리아에서 보았던 것이다. 여기에 묘사된 주인공 쥘리앵의 정열과 반항은 프로메테우스적 인간상을 동경하는 오늘의 우리에게 야심에 찬 19세기 청년의 한 모습을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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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초기의 프랑스[편집](출전:위키피디아)
이 부분의 본문은 근대 초기의 프랑스입니다.
위그노 전쟁[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위그노 전쟁입니다.
위그노 전쟁.
16세기 후반 무렵, 프랑스의 개신교신자들인 위그노와 기존의 로마 가톨릭세력들간에 대립이 격화되어, 위그노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무려 36년간에 크고 작은 전쟁이 격렬해져갔다. 그러던중 위그노 세력의 지도자인 부르봉 왕조의 앙리 4세가 즉위하여 종교간의 대립을 중재하고자 개신교에서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낭트 칙령을 발표함으로써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간의 종교전쟁인 위그노 전쟁은 종결된다. 이후 앙리 4세는 국내산업을 진흥시키고자 해외진출등 추진에 힘을써 프랑스의 왕권강화, 즉 절대왕정의 기초를 마련한다.
절대왕정 시대[편집]
태양왕 루이 14세.
루이 14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강력한 절대군주제와 왕권의 강력통치를 위해 관료제와 상비군 체제를 정비하여 재정확보를 위해 장바티스트 콜베르를 중용하여 중상주의경제 정책을 실시해나아간다. 그럼에따라 프랑스는 국내산업을 크게 일으키고, 해외무역을 장려하여 국부를 축적하게 되면서 이를 바탕으로 강력한 군대를 양성하고,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등에 참전하는등 대외 팽창정책으로 유럽의 강국으로 변하여 갔다. 그렇지만, 베르사유 궁전을 짓느라고 지나치게 많은비용을 소비하고 국민들을 하나로 통합시키기 위해 위그노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 낭트칙령을 폐기함으로써, 상공업에 주로 종사하던 위그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영국과 네덜란드로 대거이주하게 된다. 이후 국력이 크게 소요되고, 루이 14세의 말년에는 국력이 서서히 약해져 가면서, 이후 프랑스는 전쟁,대외정책에 너무 무리하게 많은돈을 쓰는바람에 만성적 재정난에 시달리게 된다.
프랑스 대혁명과 제1제정[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프랑스 대혁명, 프랑스 제1제정, 나폴레옹 전쟁입니다.
프랑스 대혁명[편집]
배경[편집]
18세기 후반, 프랑스에서는 구제도의 모순이 심화되어있었다. 구제도 아래에서 제 1신분인 로마 가톨릭교회 성직자와 제2신분인 귀족은 여전히 면세특권을 비롯하여 봉건적 특권을 소유하고, 제3신분인 평민만이 모든 재정적인 부담들을 안고있었다. 여기에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재정상태는 사치스러운 궁정생활과 미국의 독립전쟁등 대외 전쟁 자금비용에 쏟아부을대로 쏟아부어서 파탄 상태에 이를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귀족들은 면세특권을 주장하여 재정문제 해결에 근본적인 대안이 없는 상태였다. 이러한 사회적 대립과 함께 루소같은 계몽사상가들의 혁명사상이 시민들 사이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고, 미국의 독립혁명 소식도 이들을 크게 자극하였다.
전개[편집]
시민들에게 공격받는 바스티유 감옥
장 피에르 루이 로렌트 휴엘, 수채화, 37,8 x 50,5 cm, 1789년 작.
재정문제가 심각해지면서 1789년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는 1614년이래로 단 한번도 소집하지않았던 삼부회를 소집하였다. 삼부회에서 특권신분과 평민층의 대립으로 파행을 치닫다가 제3 신분 대표들끼리 독자적으로 테니스 코트선언을 하여 국민의회를 구성하게된다. 이에 국왕 루이 16세는 국민의회를 탄압하게 되는데, 이때 파리시의 시민들이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함으로써, 프랑스 대혁명의 막이 오르기 시작한다.
국민의회는 서둘러 봉건제의 폐지를 선언하였고, 이어서 프랑스 인권선언을 발표하여 혁명의 기본이념을 천명하였다. 국민의회는 1791년 입헌 군주제와 제한선거를 골자로 하는 헌법을 제정하고 해체되었다. 그 이후 새로운 헌법에 의해 소집된 입법의회가 탄생하였는데, 혁명에 온건파세력인 지롱드 당이 주도권을 장악하였는데, 1792년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프랑스 혁명에 간섭함으로써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이와중에 파리시민들이 왕궁을 습격하여 국왕과 왕비를 잡아가둬 왕권이 정지되었고, 입법의회가 대외적,대내적으로 미온한 태도를 보이면서 곧 해산된다. 1792년 9월에는 국민공회가 소집되었다.
처형되는 루이 16세
국민공회는 강경 혁명파인 자코뱅 당이 주도권을 장악하여 공화정을 선포하고, 1793년 1월 21일 국왕 루이 16세를 단두대에서 공개처형식을 하는 등 유럽전역에 충격을 주었다. 1793년 로베스피에르는 공포정치를 실시하여 국내의 반혁명 세력들을 처형하거나 탄압하고, 봉건적 공납의 무상폐지등 급진적인 개혁등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의 지나친 공포정치에 대한 반발로 인하여 로베스피에르는 1794년 7월 28일 단두대에서 처형되었고, 다시 온건파 지롱드 당 세력들이 장악하게 된다.
1795년 입헌 공화정과 제한선거를 골자로 하는 헌법을 제정하여 5인의 총재가 협의하여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도록 하는 총재 정부를 구상하였다. 하지만, 총재 정부는 재기능을 발휘하지도 못하고, 고위층들의 무능과 부패함으로 프랑스 국민들의 실망이 커지게 된다. 결국, 나폴레옹이 이를 이용하여 쿠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통령 정부를 세우게 된다.
프랑스 제1제정[편집]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1799년 나폴레옹은 쿠테타를 일으켜 총재정부를 무너뜨리고 통령 정부를 수립하게 된다. 나폴레옹은 이어서 철저한 중앙 집권 정책을 추진하고 언론과 사상을 통제하여 독재권력을 확립하였다. 그는 대내적으로 프랑스 은행을 설립하고, 나폴레옹 법전을 편찬하여 혁명의 성과를 정착 시켰으며, 대외적으로 오스트리아 제국을 격파하고 영국과 타협하여 정권을 안정시켰다. 이렇게되자, 그는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게되고, 나폴레옹은 독재에 야망이 커져 종신 통령이 되었다가, 1804년 국민투표에 의해 나폴레옹 1세로 즉위하여 황제가 되면서 프랑스 제1 제정이 시작되었다.
나폴레옹 전쟁[편집]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하여 프랑스 제1 제정이 시작되었고, 이에 오스트리아,프로이센등은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여 나폴레옹에 대항하자, 나폴레옹은 이들 국가와의 전쟁에 나섰다. 나폴레옹은 해전에서 영국 넬슨 제독한테 트라팔가 해전에서 대패를 겪었으나, 육전에서는 오스트리아를 무너뜨리고 빈껍데기뿐인 신성로마제국을 멸망시켰으며, 프로이센과 러시아 제국을 굴복시켜 유럽대륙을 제패하였다.
유럽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폴레옹이었지만, 오직 영국만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영국을 고립시키기 위해 1806년, 영국과 유럽대륙간의 무역을 금지하는 이른바 '대륙봉쇄령'을 내리게 된다. 이 대륙봉쇄령은 성과를 거두지못하고 오히려 몰락의 단서를 제공하게 된다. 1812년 대륙 봉쇄령을 어기고 영국과 비밀리에 무역을 했던 러시아 제국을 응징하기 위해 나폴레옹은 대원정길에 나섰지만, 러시아의 혹독한 추위등으로 참패를 하였고, 뒤이어 대프랑스 동맹군과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격렬하게 맞붙어 패전함으로써 제1제정은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나폴레옹은 엘바 섬으로 유배되었고, 유배생활중 나폴레옹은 다음해에 엘바 섬에 탈출하여 재기를 꾀했으나,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다시 크게 패하여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섬으로 유배된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 각지에서는 프랑스 혁명 이념인 자유주의가 전파되고 크게 영향받아 민족주의 의식이 각성되게 된다.
왕정 복고와 제2제국[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부르봉 왕정복고, 프랑스 7월 혁명, 7월 왕정, 프랑스 2월 혁명입니다.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7월 혁명때 그린 그림이다.
1814년, 나폴레옹 1세가 실각함에 따라 프랑스 제1제정이 몰락하고, 유럽에는 빈체제가 이루어졌다. 그럼에따라 프랑스 혁명으로 멸망한 프랑스의 기존왕실인 부르봉 왕가가 복귀하여 루이 18세가 국왕으로 즉위한다. 그렇게됨으로써 프랑스는 혁명이전과 다름없는 궁정정치를 하게되었지만, 루이 18세는 입헌군주제를 지향하여 노동자나 농민등 하층민들에 대해서 온건 정책을 취함으로써 국내 안정을 도모했었다. 또한 프랑스 혁명 시절의 자유주의 사상도 제한적이지만 어느 정도 인정을 해 주었다.
그러나, 루이 18세가 사망한뒤 샤를 10세가 왕이되면서 자유주의,평등사상의 혁명정신과는 달리 선거권 제한과 로마 가톨릭의 복권 등 반동적인 정책등 특권정치를 펴게된다. 1830년7월 국민들은 이에 봉기를 하여 샤를 10세를 국외로 쫓아내게 된다.
이어서 자유주의사상과 평등주의 사상에 입각한 루이 필리프 1세가 국왕으로 즉위(1830년)한다. 루이 필리프는 입헌군주제를 실시하는 등 나름 자유주의적인 정책을 펼치게 되지만, 프랑스 국민들의 바램과는 달리 몇몇 세력있는 부르주아(자본가)계층에게만 선거권을 주는 특권정치를 부여하게되자, 1848년 2월, 프랑스 국민들은 또다시 혁명 봉기를 하게 된다. 그렇게 됨으로써, 국왕 루이 필리프역시 국외(영국)으로 도망간다. 그 이후 프랑스는 왕정복고체제에서 다시 공화정으로 돌아가게 된다.
제 2공화정과 제2제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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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된 나폴레옹 3세
2월 혁명이후, 1848년 제 2공화정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루이 나폴레옹[2]은 쿠테타를 일으켜 독재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는 1852년 국민투표로 황제로 즉위하여 나폴레옹 3세라 칭하면서 제 2제정을 열었다.
보불전쟁.
그가 즉위하자 당시 프랑스 시민들은 그의 황제 등극을 열렬히 축복했으며, 프랑스가 다시금 유럽의 지배자로 우뚝 설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고 한다. 또한 국민들의 기대대로 나폴레옹 3세는 전임 왕들의 폐단 정리와 내정개혁을 단행하고 대외 팽창을 통해 프랑스의 영광을 재현할려 했으나, 1871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크게 패하고, 나폴레옹 3세는 포로로 잡히는등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그 뒤 패전국이 된 프랑스는 알자스-로렌을 독일 제국에게 넘겨주게 되었으며, 독일이 프랑스에 배상금인 50억 프랑을 요구하였으나 단 몇개월만에 이를 갚아 전 유럽과 독일, 그리고 비스마르크 수상을 놀라게 하였으며 이로 인해 프랑스-독일의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는 이후 제 1차 세계 대전으로 가는 간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나폴레옹 3세가 보불전쟁에서 패한뒤 포로로 잡혀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자, 왕정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과 불만이 팽배해 있던 당시 프랑스 사회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파리코뮌 봉기[편집]
1871년 3월 파리 코뮌 참여자들이 쳐놓은 바리케이드
이 부분의 본문은 파리 코뮌입니다.
보불전쟁에서 프랑스의 패전 혼란속에 수도인 파리는 온갖 이념과 각종 정치세력의 대결의 장으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으며, 더욱이 '야만인의 나라'이라고 무시했던 프로이센에게 점령당한 수치로 인한 파리 시민의 소요는 극에 달해 있었다.
이로 인해 당시 일반 시민들중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무리가 무장을 하고 봉기, 1871년 파리를 장악한후 3월 18일 그들만의 사회주의적 자치 정부를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최초의 사회주의 자치정부'로 불리는 파리 코뮌이라 한다.
파리시의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자들은 파리 코뮌을 수립하고 정부에 대항하였으나, 얼마못가 정규군에 의해 1871년 5월 28일 진압되었고, 이후 제 3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파리코뮌 봉기는 마르크스나 레닌등 사회주의 운동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어 사회주의,공산주의 이념의 탄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되고 있다.
제 3 공화정[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프랑스 제3공화국입니다.
프랑스는 1870년에 일어난 보불전쟁에서 패배해 제2제정 황제였던 나폴레옹 3세를 내쫓고 1871년 아돌프 티에르 를 대통령으로 하는 제3공화국을 수립했다.
같은 해에 일어난 코뮌주의자들의 반란을 진압하고(파리 코뮌) 해군을 함정정비에 대한 계획을 세워 해군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제3공화정 8대 대통령인 레이몽 푸앵카레 대통령 재임 중이었을 때 1914년 8월, 독일 제국이 프랑스에게 선전 포고를 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 독일제국은 전쟁초기에 단숨에 프랑스를 정복할 거라 확신했었지만, 프랑스는 과거 1870년때의 보불전쟁에 대한 복수심이 강하게 불타올랐기에 저항이 강했다. 그럼에따라 마른 전투에서 독일군을 무찌르면서 전쟁의 양상은 참호전형식으로 장기전에 접어들었으며 또한 전쟁이 고착화되어 프랑스군과 영국군은 1917년까지 독일군과 대치 상황을 두고 지겹게 싸웠고 어느 한쪽 밀리지 않는 양상이 되었다. 1917년 미국이 참전하면서 막대한 물량공세를 퍼부으면서 독일군을 격파하고,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끝낸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는 패전국인 독일에 대해 베르사유조약을 통하여 가혹하게 다뤘는데, 이는 프랑스가 전쟁을 두려워했었기 때문이었다. 이 베르사유 조약은 뒷날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는 불씨가 되기도 한다.
전쟁이 끝난후 1929년 세계 대공황이 일어났을때 프랑스도 역시 불황의 늪에 시달렸었는데, 이에 프랑스 정부에서는 식민지들 하고 무역형식으로 하는 블록 경제체제로 대공황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한편, 1930년대에 독일에서 나치스가 집권하고 히틀러가 총통이 되면서 국제연맹 탈퇴, 재군비선언, 라인란트 비무장 지대 점령,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등의 주변나라를 합병하는 데에도 프랑스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제 2차 세계 대전[편집]
에투알 개선문에 진입하는 독일군
이 부분의 본문은 비시 정부, 자유 프랑스, 레지스탕스, 프랑스 국내군,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입니다.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이틀 뒤인 9월 3일 영국과 함께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연합군에 참전하였다. 1940년 5월 11일에는 아돌프 히틀러가 프랑스에 대한 전격 공격을 개시하면서, 베네룩스를 침공하게 된다. 그리고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가 점령당하고 본격적으로 프랑스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해 6월 4일에는 영국군과 싸우던 됭케르크 전선에서 패함으로써 됭케르크 철수 작전을 펼치게 된다. 6월 14일에는 독일군이 파리에 입성하고, 결국 프랑스의 국가 원수인 앙리 페탱은 6월 22일 독일에게 항복을 선언한다. 프랑스 북부지역은 독일에 의해서 직접 통치되었고, 남부에는 제1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었던 앙리 페탱에 의해 통치되는 괴뢰정부인 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비시정부는 보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개인독재에 입각했다.
프랑스가 독일에게 항복하자, 드골은 몇 안되는 이들을 데리고 간신히 프랑스를 탈출, 영국에 망명정부를 두어서 독일이 세운 남부 프랑스 지역에 세운 괴뢰정권 비시 정부에 대항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전후, 프랑스에서는 이들이 결국 프랑스의 정권을 장악해 지금의 프랑스 정부를 만들었다.
1943년 7월 10일 미국과 영국군이 시칠리아 섬에 상륙하고, 그해 9월 3일 이탈리아가 연합군에게 항복하자 프랑스를 되찾는다는 계획이 세워졌다. 그리고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통해 프랑스 상륙에 성공하면서, 노르망디 지방을 되찾았다. 이후 코트다쥐르를 시작으로 한 용기병 작전도 이어지면서 연합군은 프랑스를 수복하기 위한 공세를 펼쳤으며, 1944년 8월 25일에는 자유 프랑스군 제2기갑사단을 선봉으로 한 연합군의 공격과 레지스탕스의 궐기로 파리가 해방되면서 완전히 수복하였고 곧 이어 자유 프랑스 정부가 파리로 귀환하여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945년 5월 8일 독일이 항복하면서 유럽에서의 전쟁은 끝이 났다.
1945년 이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프랑스 제4공화국, 프랑스 제5공화국, 프랑스 1968년 5월 혁명입니다.
제4공화국[편집]
제2차 세계대전 말기 한때 임시 정부의 총리였던 드골은 전쟁 뒤의 총선거 뒤에 정당간의 협정에 실패해 하야했다. 그 뒤 제4공화국이 발족했다. 제4공화국 때의 [프랑스]는 정치적으로나[3]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지 못했다. 또한 8년간에 걸친 인도차이나 전쟁과 그에 이어 계속된 알제리 문제등으로 내전의 위험까지 안고 있었다.
제5공화국[편집]
1958년 6월 국민의회에서 절대 다수의 신임을 얻은 샤를 드골은 12년만에 총리직에 복귀했다. 이후 드골은 막강한 대통령의 권한을 인정한 새로운 헌법을 발의하고 국민 투표에서 통과되자 1959년 1월 제5공화국의 대통령에 취임했다. 드골은 대통령이 된 뒤 알제리 문제를 일단 해결하고 프랑스를 세계에서 네 번째의 핵 보유국으로 만들었다. 또한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를 수립하는 등 미국-소련이 세계를 분할해 지배하는 이른바 '냉전' 상황에서 드골은 '프랑스의 영광'을 회복하고, 국제 사회에서 프랑스의 발언권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프랑스 1968년 5월 혁명[편집]
파리 교외의 낭테르에 있는 파리 대학 분교의 문학부를 1968년 5월 3일 대학 당국이 폐쇄했다. 1967년 11월부터 이 학교에는 시설 개선을 둘러싸고 급진파 학생과 대학 당국 사이에 대립이 있었다. 1968년 3월 22일 '빨강 머리 다니'라는 애칭으로 일컬어지던 콩방디를 지도자로 하는 학생 그룹이 대학 당국의 금지령을 어기고 학내 집회를 열었고, 이에 대해 대학 당국은 경찰을 불러들여 유혈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반발한 학생들이 5월 2일에 분교를 점거했고 이것이 분교 폐쇄로 이어졌다.
콩방디의 처분을 둘러싼 조사가 본교(소르본)에서 열렸지만, 본교 당국은 다시 경찰을 불러들였다. 항의하는 무리에 마침내 일반 학생들까지 가세해 경찰과 충돌을 벌였다. 그리하여 학생 약 600명이 체포되고 본교도 폐쇄됐다. '3.22'운동의 결과, 1907년에 결성된 '프랑스 학생 전국동맹(UNEF)'도 지원을 강화했고, 학생 시위도 더욱 격렬해졌다. 5월 11일 오전 2시, 카르티에라탱 거리에는 학생 시위대와 경찰간의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학내 처우 개선 요구에서 비롯된 3.22 운동과 5.3운동은 학내 문제에 머물지 않았고 대학 교직원 조합, 노동 총동맹 들을 끌어들여 드골 정권을 뒤흔드는 전국 규모의 파업으로 발전했고, 이 시위로 드골 정권이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