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027 – 종의 기원, On the Origin of Species /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 ~ 1882)

(출처 :  동서고전 200선 해제(반덕진, 가람기획))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이후 자연 선택설로 다시 한번 인간의 세계관을 바꾼 책. 다원이 진화론에서 주장한 약육강식과  적자생존 등의 이론은 19세기 이후 자연과학은 물론 사회과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갈턴(Francis Galton) 의 우생학과 스펜서의 사회적 다위니즘에 영향을 미쳐 인종차별과 제국주의의 이론적 배경이 되기도 했다. 다윈이 젊은 시절 비글호 항해기간 동안 지질학, 생물학 연구를 통해 얻어진 수많은 증거들을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데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보는 것이 흥미있으며, 생물학에 있어서의 뉴턴을 표방했던 그의 과학방법론도 엿볼 수 있다.


a.생애

 자연선택설로 인간의 세계관을 바꾼 영국의 진화론자. 그의 조부도 진화론의 선구자인 그는 작은 도시의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애든버리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목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했으나 결국 박물학자가 되었다. 졸업 해인 1831년부터 5년간 해군의 측량함인 비글호에 승선하여 과학탐험을 위한 세계여행에 나선 것이 다윈의 일생에 있어 중요한 계기가 된다. 남아메리카,남태평양의 섬들,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를 여행하면서 동식물과 지질을 조사하여 진화론의 기초가 된 자료를 수집했다.

 귀국 후 지질학회의 라이엘과 가까이했다. 그는 라이엘의 저서인 <지질학원리>와 맬서스의 <인구론>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는다. 특히 <인구론>에서는 그는 식량보다 더 많은 인구가 생기는 현상을 자연계 전체에 적용시킬 경우 약한 자가 식량을 위한 투쟁에서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다윈은 그후 20년간의 용의주도하고 광범한 연구를 통해서 1859년에 마침내 <종의 기원>을 출판했다.

 그에 앞서 1858년에 당시 말레이 반도에 있던 영국의 박물학자인 월리스부터 다윈의 주장과 똑같은 내용의 진화설의 원고를 받고 미묘한 상황이 벌어진다. 즉, 우선권을 다투는 불쾌한 싸움이 될 것 같은 곤란한 사태로 번졌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공동논문으로 <자연도태, 생존경쟁에 있어서 적자가 존속하는 것에 의한 종의 진화에 관하여>를 린네학회에 발표했다. 그러나 출판계에서는 별 반응이 없었지만, 재미있게도 다음해에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판되자 초판 1,250부가 당일 매진될 정도로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켜 이어 1871년 <인간의 유래>가 출판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b.다윈 이전의 진화론과 다윈의 진화론

 생명의 진화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명의 단계>에서 엿보여지고 있으나 현대의 진화론과는 입장을 달리하고 있고, 18세기 중엽까지는 우주만물은 전지전능한 신이 창조했고 생물의 종의 불변성을 주장하는 크리스트교적 세계관이 지배적이어서 진화의 개념은 대두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근대에 와서 프랑스의 뷔퐁, 영국의 에라스무스 다윈 등에 의해 진화가 새롭게 거론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생물진화론을 체계적인 이론으로 발표한 첫번째 학자는 프랑스의 라마르크(1744-1829)였다. 라마르크는 <동물철학>(1809)에서 동물은 생활환경이 변하면 습성도 변하고 그 결과 새로운 습성에 따라서 많이 사용하는 기관은 더 발달하고 사용하지 않는 기관은 퇴화한다는 이른바  용불용설 (제1가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후천적으로 얻은 획득형질의 유전 (제2가설)을 인정한 그의 생각은 오늘날의 유전학 지식에는 맞지 않다.

 다윈은 진화론에 대해서는 본문에서 언급되나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세상에 존재하는 동식물의 종은 모두 다산이며 생존 가능한 개체수보다 훨씬 많은 자식을 만든다. 그래서 개체 간에는 생존을 위한 경쟁이 일어난다. 이때 같은 어버이로부터 출생한 개체 간에도 조금씩 변이가 보이기 때문에 생존에 유리한, 즉 가장 잘 적응한 변이를 가진 개체만이 살아남는다. 이러한 자연선택이 몇 대에 걸쳐서 계속된다면 새로운 종이 형성되고 그 유리한 변이성이 누적되어 종의 다양화가 이루어진다고 설명했다. 즉, 생물의 변이-생존경쟁-적자생존-자연선택의 과정이다는 다윈의 진화론의 핵심이다.


c.<종의 기원>의 내용

 풍부한 실증적 사실에 의거하여 진화론을 전개하고 결국 생물이 진화한다는 사상을 일반에게 인식시킨 것은 영국의 다윈이다. 다윈의 진화론이 널리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은 진화론 자체가 충분한 설득력도 있었지만, 그의 자연도태설이 산업자본주의 시기의 자유경쟁의 이념과 일치되었고, 종교와 모순되는 학설일지라도 그것이 충분한 과학적 근거를 갖는다면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적인 분위기의 영향도 컸다.

 <종의 기원>의 완전한 제목은 <자연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 내지 생존경쟁에 있어서 유리한 종족의 보존>이다.

 서론에서는 본서가 저자 학설의 요약임을 밝히고 이어 각 장의 구성의 의미를 논한 다음, 자연선택이 종의 변화의 유일하지는 않으나 가장 중요한 방도 라고 확신하고 있다.

 제1장에서는 <사육할 때의 변이>에서 사육에 의해 생물이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 즉 인위선택이 주제가 되어 있다.

 제2장에서는 자연계의 종이 변종과 구별하기 어려운 점에서 출발하여 하나의 속중의 종의 위치를 분석하고, 종의 변종에서 생성되었다고 보지 않으면 설명하기 어려움을 지적하고 있다.

 제3장에서는 생존투쟁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생존투쟁은 생물과 물리적 환경조건과의 사이, 이종의 생물 사이, 동종의 생물 사이 등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나는데 모두 생물의 격렬한 증식이 원인이 되어 생기는 것이다. 가장 격렬한 생존투쟁은 동종의 개체 간 또는 변종 간에 보이며, 이것이 자연선택의 기초를 이룬다. 다윈은 생물에 있어서 생물끼리의 관계는 모든 관계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제4장 <자연선택 또는 최적자의 생존>은 앞장에 이어 조금이라도 유리한 변이를 갖는 개체가 생존투쟁에서 살아남을 기회를 더 많이 갖는다고 말하고, 이 생존, 즉 최적자의 생존(스펜서의 표현)을 자연선택 이라고 부른다고 서술하고 있다.

 제5장에서는 최초의 2장과 다소 중복되는 점도 있지만 변이의 기본적인 성질이 정리되어 있다. 모든 변이 간의 상관성이 강조되고 기관의 용. 불용의 영향도 인정되고 있다. 변이는 원칙적으로 유전한다는 것이 다윈 이론의 전제로 되어 있다. 이론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은 5장으로 끝나고 그뒤 부분은 대체로 보론이라 할 수 있다.

 제6장에서는 자기 이론의 미비점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제7장에서는 자연선택설에 대한 주요한 이론에 대해 자연선택이란 유용한 구조의 발달단계를 설명하기에는 미흡하다는 바이바트의 의견이다. 이에 대해 다윈은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을 광범위하게 원용하고 있다.

 제8장 <본능>에서는 꿀벌. 개미 등의 고도한 본능이 어떻게 발달해왔는가 하는 점이 문제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답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제9장 <잡종>에서 잡종의 생식 불능성은 종의 창조에 있어 특별히 부여된 것이 아니라 변종으로부터 종이 생성한다는 의견을 막는 것이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 서술하고 있다.

 제10장과 11장은 지질학상의 문제, 제12장 및 13장은 생물지리학상의 문제, 제14장은 형태학상의 문제인데, 그러한 학문상의 모든 사실이 자연도태설로 설명될 수 있다는 형식으로 서술되고 있으며, 이 책의 일관된 흐름은 진화요인론이라 볼 수 있다.

 그는 5년간의 항해 동안 원시종족을 방문하기도 하고 엄청난 수의 동식물을 관찰하면서, 동식물의 종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지질시대사적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으나 아직 진화의 원인이 무엇인가는 확실히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맬서스의 <인구론>을 읽고 거기서 문제해결의 결정적인 단서를 찾았다. 그것은 바로 살아남으려고 노력하는 경쟁을 통해서 자연선택(생존 경쟁과 적자생존)이 이루어진다는 생각이다.

 다윈은 두번째로 중요한 저술인 <인간의 유래>에서 더욱 충격적인 결론을 발표했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의 선조가 오랑우탄. 침팬치. 고릴라 등의 선조와 관계가 있는 원숭이와 같은 동물이라는 결론이었다.


d.진화론의 영향 및 현대적 의의

 근대과학의 발달에 있어 그 중 물리학에 있어서는 갈릴레이와 뉴턴의 시대인 17세기, 화학의 경우에는 라부아지에와 돌턴이 활약한 18세기 후반을 그 전환점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근대생물학의 전환점을 어디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매우 어려우나 다윈과 멘델의 시기인 19세기 중엽으로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 위에서 본 것처럼 다윈의 진화론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이래 또 한번 사람들의 세계관을 변화시켰다. 진화론을 모르고서는 19세기 자연과학은 물론 사회과학의 발달을 이해할 수 없다. 그의 이론의 영향 및 현대적 의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다윈 학설의 수정

 다윈의 진화론도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다윈의 진화론은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진화의 증거를 굳힌 점과 다른 하나는 자연도태설에 집중되고 있는데, 다윈도 자연선택설에서 라마르크처럼 개체변이에 의한 획득형질이 자손에게 전달된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오늘날의 유전지식으로는 개체변이는 유전되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즉, 1870년대에 바이스만은 체세포와 생식세포는 전혀 다르다는 세포설에 입각하여 전자의 변화가 후자의 변화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후천적 성격은 단지 체세포에서만 얻어지고 부모의 생식세포 안에 있는 성격만이 유전되기 때문에 후천적 성격의 유전이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오스트리아의 성직자 멘델은 완두콩의 교배를 바탕으로 결정적인 유전법칙을 공식화했고, 폴란드의 식물학자 드 브레스는 멘델의 유전법칙에 입각한 돌연변이설을 발표했다. 그는 다윈이 주장한 것처럼 진화란 사소한 변이로 일어나지 않으며 오히려 갑작스러운 돌연변이에 의해 일어난다고 말했다. 돌연변이가 환경에 알맞을 때는 돌연변이를 한 개체가 생존경쟁에 이기며 그 후손이 그 인자를 유전받게 된다. 그의 학설은 다윈 이론의 약점을 보완하여 진화론은 다윈이 제시한 것보다 완전한 것이 되었다. 

 그는 유전이 신체적인 면에서와 같이 정신적인 면에서도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문명사회의 경우는 열악하게 태어난 자도 인도주의에 의해 생존해갈 수 있는데, 이는 자연도태원리에 위배된다는 것이며, 따라서 사회의 진보를 위해서 우수한 유전형질을 소유한 자만이 생존, 번성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단종도 불사한다는 것이다. 이 우생학은 과거 미국에서 일어난 흑인 배척운동의 일환인 이민제한법과 단종법, 그리고 2차세계대전 중 나치스 독일이 행한 유대인 배척,

대량학살과 같은 인종차별의 이론적 배경이 되었다. 1972년부터 우생학이 사회생물학으로 다시 부활되어 현재 그 존재양식을 둘러싸고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미국에서 노벨상 수상자도 참여한 정자은행 문제는 이 사상의 한 예로 나타난 것이다.


   2. 종교계의 반응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진화해왔다는 진화론은 크리스트교의 창조론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이어서 미국에서는 최근까지도 진화론을 가르치지 못하게 한 공립학교도 있으며, 진화론과 창조론 양자를 가르쳐야 한다는 법정논쟁이 있던 사실을 고려하면 이 논쟁은 1세기 이상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3. 사회적 다위니즘

 사회적 진화론이란 다윈이 생존경쟁과 적자생존 원칙을 인간과 사회에 적용한 것으로 스펜서, 헉슬리, 헤켈 등이 주장했으나 후에 인종주의와 전쟁찬미론을 야기시키고 약육강식의 상황을 정당화하는 반동적 사상으로 왜곡되어 나타나기도 했다. 즉, 우수한 민족이 열등한 민족을 착취하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제국주의의 이론적 지주가 되기도 하고 보수주의, 자유방임주의, 개인주의의 버팀목이 되었다. 그리하여 앵글로색슨 계통의 영국과 미국인들은 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 제국주의적인 자부심을 갖게 되고 러시아 민족은 범슬라브주의를 제창하며, 튜턴 계통의 독일민족은 범게르만주의를 내세웠다.

 생물학과 인류학에 혁명을 가져오고 이 세계에서 인간의 지위에 대한 우리들의 사고방식을 바꿔놓은 것은 뭐니뭐니해도 다윈의 명저 <종의 기원>의 힘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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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의 유산, 우생학 

다윈의 사촌 프랜시스 골턴이 남긴 인종차별 사상 

(Eugenics … death of the defenceless.

The legacy of Darwin’s cousin Galton)

Russell Grigg

    지난 120년 동안 프랜시스 골턴(Francis Galton) 경의 생각만큼 인류에 해악을 끼친 사상은 거의 없다. 그는 우생학(eugenics)이라는 진화론적 유사과학을 수립한 사람이었다. 오늘날, 인종 청소, ‘결함이 있는’ 태아를 제거하기 위한 낙태 시술, 영아 살해, 안락사, 연구 목적을 위한 태아 수집 등 이 모든 일들은 우생학의 적자생존 이론에 공통의 근거를 두고 있다. 그렇다면 골턴(갤튼)은 누구이며, 우생학은 무엇이며, 우생학이 인간에게 어떻게 해를 끼쳤는가?


프란시스 골턴 (Francis Galton)



.프란시스 골턴(위 합성 사진에서 오른쪽)은 1882년에 영국 버밍햄의 퀘이커(Quaker) 교도 가문에서 태어났다. 모계 쪽으로 에라스무스 다윈의 손자이며, 찰스 다윈(위 사진에서 왼쪽)의 사촌인 그는 장성한 후 일생 동안 다윈주의적(진화론적) 불가지론의 신봉자였으며 반기독교주의자였다.


그는 생후 18개월에 알파벳을 배웠고, 30개월(2살 반)에 책을 읽었으며, 5편의 시를 외우고, 여섯 살에 일리아드를 읽고 토론한 천재였다.[1] 1840년에는 캠브리지 대학에 입학해 의학과 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나 신경쇠약으로 인해 1844년 1월 졸업 당시에는 평범한 학사 학위 졸업생에 불과했다[2]. 그러나 대학 졸업하던 해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평생 일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막대한 유산을 상속했다.


남는 것이 시간이었던 청년 거부 골턴은 레저 활동을 포함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으며, 남서 아프리카 대륙 탐험 후 발표한 보고서로 1853년에는 왕립지리학회(Royal Geographic Society) 회원이 되었으며, 3년 후에는 왕립학회 회원이 되었다. 그 해, 골턴은 루이자 버틀러(Louisa Butler)와 결혼했으며, 그의 장인은 영국의 명문 사립학교인 해로우 스쿨의 교장을 역임했었다.


호기심과 열정으로 가득 찬 아마추어 과학자였던 그는 14권의 저서와 200편 이상의 논문을 집필했다.[3] 그가 발명한 것 중에는 ‘소리나지 않는’ 개 호르라기(역주: 개를 부르는 호각), 텔레타이프 프린터, 인간의 지능과 신체 기관을 측정할 수 있는 다양한 도구와 기법 등이 있으며, 날씨 지도를 발명하고, 고기압대의 존재를 발견했다.



찰스 다윈과의 교류


1859년에 출간된 다윈의 저서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은 골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1869년에 다윈에게 쓴 편지에서 ”사촌이 쓴 종의 기원의 출현으로 내 인생은 진짜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그 책으로 인해 나를 오래 동안 사로잡았던 악몽과 같은 미신을 떨쳐버리게 되었으며, 그 책이야말로 나에게 사고의 자유를 알게 한 이전에는 없었던 것이었습니다”[4]라고 쓰고 있었다.     




.소위 인류의 진화에 대한 유사과학적 삽화. 침팬지와의 유사성을 제시하여 흑인이 백인보다 덜 진화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1868년에 ‘과학의’ 이름으로 나타난 삽화. 침팬지 두개골을 과도하게 확대하고 ‘검둥이(역주: 원문에서 흑인을 비하하는 negro라고 표현하고 있음)’ 턱을 과도하게 늘려 ‘검둥이들’이 원숭이보다 훨씬 더 열등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저명한 진화론자였던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 조차도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가 인종주의자나 ‘변두리’ 문학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당대의 주요 과학 저서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오늘날의 호전적인 진화론자들은 자신들의 사상이 미치는 사회적 영향을 손쉽게 외면하려 하지만, 역사는 그렇지 않았음을 입증하고 있다. 출처 : J. C. Nott와 G. R. Gliddon의 지구의 토착 인종, J.B. Libbincott 출판사, 필라델피아, 미국, 1868년.


골턴은 ”다윈의 진화론이 인류에 미친 영향을 최초로 인식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5] 그에 생각에 의하면 재능, 성격, 지능 등의 특징들은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유전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은 그들이 처한 환경의 불행한 희생자가 된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열등하기 때문에 극빈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위에서 언급한 모든 특징들이 환경, 즉 개인에 대한 양육법과 양육 환경에 따른다는 주류 과학의 견해와는 대조적인 것이었다. 인간은 동물들처럼 선택적으로 번식할 수 있고 번식해야한다고 골턴은 믿었다.[6] 1883년에, 그가 인류의 육체적 정신적 특성들을 향상시키는 방법들을 연구하기 위해 ‘우생학(eugenics)‘이라는 용어[각각 ‘건강한, 좋은’을, ‘종류’나 ‘자식’을 뜻하는 그리스어 εύ (eu)와 γένος (genos)]를 처음 사용했다.


골턴의 견해는 인간 영혼의 존재, 인간의 마음속에 깃든 신의 은총, 남과 다르고자 하는 인간의 자유, 또는 개인의 존엄성 등에 대한 여지를 전혀 남기지 않았다. 1865년에 이를 주제로 그가 처음 기고한 기사에서, ”그는 사람의 추리력이 신으로부터 받은 재능임을 ...... 부인했으며, 아담과 이브 이후 인류가 죄의 저주를 받았음을 부인했다.” 그리고 종교적 감정을 '인간 종의 생존을 담보하기 위한 진화적 장치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했다.[8] 


원죄 의식에 관해서, 그는 ”[이것은] 내 이론에 따르면 사람은 높은 땅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낮은 땅에서 빠르게 오르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무수히 많은 세월의 야만시대를 거친 연후에 우리 인류는 최근에 이르러서야 문명과 종교를 갖게 되었다’라고 썼다.”[9]


'세습 천재(Hereditary Genius, 1869)'에서, 골턴은 이러한 개념들을 확장해 머리 좋은 남자와 부자 여자 사이의 중매결혼 제도가 궁극적으로 우수한 인종을 만들어 낼 것이라고 제의했다. 찰스 다윈은 이 책을 읽고, 골턴에게 쓴 편지에서, ”사람은 바보들을 빼고, 지능에서 크게 차이나지 않으며, 열정과 근면에서만 차이가 있었다고 항상 주장했던 사람이 나였기 때문에, 너는 어떤 의미에서 반대자 한 명을 개종시키게 된 것이지...”라고 쓰고 있었다.[5] 확실히 다윈은 골턴의 개념을 통해 자신의 진화 이론을 사람에게까지 확장시킬 수 있었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골턴을 언급하지 않았으나, 1871년 저서 '인간의 계보(Descent of Man)'에서 11번이나 골턴에 대해 언급했다.


3차례의 국제 우생학 학회(International Eugenics Congresses)가 1912년, 1921년, 1932년에 개최되었으며, 영국, 미국, 프랑스, 호주, 캐나다, 인도, 일본, 모리셔스, 케냐,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에서 온 우생학 활동가들이 참석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그 사상을 지지했던 명사들 중에는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경제학자 존 메이나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 SF 작가였던 웰스(H.G. Wells)[10], 미국 대통령인 테오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와 캘빈 쿨리지(Calvin Coolidge)가 있었다. 골턴은 1901년에 인류학 연구소로부터 헉슬리 메달(Huxley Medal)을, 1902년에 왕립 협회로부터 다윈 메달(Darwin Medal)을, 린네 협회로부터 다윈-월레스 메달(Darwin–Wallace Medal)을, 캠브리지 대학과 옥스퍼드 대학으로부터 명예 학위를 수여 받았으며, 1909년에는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러한 명예들에도 불구하고, 삶 속에서 골턴은 자신의 이론을 지지하는 최상의 옹호자는 되지 못했다. 그는 매우 오래 동안 질병을 앓았으며, 그와 그의 아내의 우수한 지능의 혈통에도 불구하고, 그들 부부는 그의 이름과 유산을 상속할 자식을 낳지 못했다. 1911년 그가 죽은 후, 그의 유언대로 런던대학교의 우생학과 골턴 우생학 연구소의 기금을 후원하도록 하였다.



작동된 우생학


인류의 신체적 및 정신적 특성들을 향상시킨다는 개념은 일견 경탄스러운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그와 같은 일을 달성하는 방법은 선택된 부모에 의한 ‘적합한 자손(fit)’의 출생률을 증가시키는 것(‘긍정적 우생학’)뿐 아니라, 향상을 손상시키는 사람들, 즉 ‘부적합한 자손(unfit)’의 출생률을 감소시키는 것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11]


예를 들면, 1913년 무렵, 미국 주의 3분의 1(1920년대부터는 반 이상)은 ‘부적합한’ 자로 간주된 보호수용자들의 강제 단종(sterilization, 불임)을 허용하는 법을 시행하고 있었다.[12] 이와 같은 강제 단종을 통해 약 7만 명의 피해자가 발생했으며, 그 피해자들에는 범죄자, 정신박약자, 약물 중독자, 극빈자, 맹인, 청각 장애자 등과 간질, 결핵, 매독 등에 걸린 환자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버지니아 주의 린치버그 시에서만 8천 건 이상의 강제 단종이 실시되었으며[13],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알려지지 않은 사례들도 많았다.[14, 15]


1935년과 1976년 사이에, 약 6만 명의 스웨덴 시민들에게 유사한 일이 일어났으며, 노르웨이와 캐나다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자행되었다.[16]


1933년 독일에서 히틀러 정부는 수감 중이거나 보호시설에 있는 자들뿐 아니라, ‘바람직하지 않은’ 장애를 지닌 모든 독일 시민들에 대해 강제 단종을 명령했다. 이 조치는 인종간 혼인으로 인해 히틀러가 바라는 ‘우월한 독일 인종’이 ‘오염’되는 것을 예방하고자 함이었다.



  우생학 협회 로고.


1938년부터 1945년까지, 그러한 쓸모없는 ‘밥 벌레’들에 대한 외과적 치료가 보다 포괄적인 방법으로 대체되었는데, 그것은 히틀러 나치 정권에 의해서 자행된 대량 학살(genocide)이었다. 이로 인해 인간 이하로써 살 가치가 없는 자들로 간주된 11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집단 학살을 당했으며, 이와 같은 내용은 뉘른베르크 재판의 공식 판결문에 기록되어있다. 학살당한 자들은 유대인, 복음주의 기독교도[17], 흑인, 집시, 공산주의자, 동성애자, 사지절단자, 정신병자 등이었다.


이는 당시 만연됐던 다윈주의(Darwinism)가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사건으로서, 자신들을 ‘적자/우성 인종’으로 여긴 학살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그들이 ‘부적자/열성 인종’으로 낙인을 찍은 수백만 인류를 학살한 사건이었다.


다윈주의의 핵심 사상은 자연선택이다.[18] 나치는 독인 민족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선택 절차를 자신들이 직접 관장해야 한다고 믿었다.[19] 그로 인해, 우생학적 유토피아(eugenics utopia)에 대한 골턴의 순진한 비전이 인종 청소라는 희대의 나치 악몽의 돌연변이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슬프게도, 인종적 우월성과 우생학의 개념은 히틀러 정권과 같이 죽지 않았다. 미국의 악명 높은 반흑인 및 반유대 인종주의자인 데이비드 듀크(David Duke)는 골턴, 웰스(H.G. Wells), 아더 키스(Arthur Keith) 등과 같은 우생학자들의 저서들과 하버드 대학의 윌슨(E.O. Wilson)과 같은 근대 사회생물학자들의 초기 저서들을 읽으면서 자신의 견해를 정립했다.[20]



21세기의 우생학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우생학이라는 말은 ‘혐오스러운 단어’가 되었다. 이제 우생학자들은 스스로를 ‘인구학자’, ‘인간 유전학자’, ‘가족 정치인’ 등으로 불렀다. 학술지의 이름도 바꾸었다. 우생학 연보(Annals of Eugenics)는 인간 유전학 연보(Annals of Human Genetics)로 바뀌었으며, 우생학 분기 보고서(Eugenics Quarterly)는 사회생물학 저널(Journal of Social Biology)로 변경되었다.[21] 그러나 홀로코스트 후 약 60년이 지난 오늘날, 골턴의 우생학이 낳은 살인적인 개념이 다시 살아나 번성하고 있으며, 의학적 존중의 상징인 실험실 가운을 덧입고 있다. 


오늘날 의사들은 태아/배아 줄기세포 연구에서 뿐만 아니라, 낙태, 유아살해, 안락사 등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창 1:26)된 인간을 일상적으로 파괴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가. 낙태


영국의 저명 신문 데일리 메일에 따르면, ”발 기형 또는 언청이나 입천장 파열과 같은 생명에 지장이 없는 기형 태아에 대한 낙태 시술이 점증하고 있으며, 보다 많은 다운증후군 아이들이 태어나지도 못하고 살해당하고 있다”고 한다.[22] 런던의 메트로폴리탄 대학의 제클린 레잉(Jacqueline Laing) 박사는 ”이러한 모습들은 기형아를 없애는데 광분한 소비주의 사회의 우생학적 추세를 나타내는 증세입니다”라고 논평한바 있다. ”이는 노골적인 우생학의 행태입니다”라고 영국 라이프 트러스티의 뉴알라 스캐리스브릭(Nuala Scarisbrick)은 말했다. ”그들은 장애인들에게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끔찍할 뿐만 아니라 혐오스러운 일이지요.”[22]


전 세계적으로, 매년 약 5천만 건의 낙태가 시술되고 있다. 신생아 3명 당 1명에 해당하며, 세계 평균으로 볼 때, 자궁 내 태아는 4분의 1 확률로 고의살해 위험에 처해있다.[23]


나. 유아 살해


중국은 가구 당 1 자녀라는 강력한 산아제한 정책을 취하고 있다. 실제로, 대부분의 가구는 아들을 원하며, 여자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는 죽을 수도 있다. 가끔씩 그와 같은 소름끼치는 법칙이 자행되고 있으며, 그나마 다행이라면 태어나기 전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인도에서는, 태아의 성감별이 일반화되어 있으며, 낙태의 대부분은 여아를 대상으로 이루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여권신장론자(feminist)들이 낙태를 지지하고 있는 것이 슬픈 현실이다.[23]


장애아들 역시 같은 위험에 놓여 있다. ‘윤리주의자’인 피터 싱어(Peter Singer)라는 사람은 일정한 나이까지의 유아 살해를 합법화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장애아를 죽이는 것이 사람을 죽이는 것과 도덕적으로 동일하지 않으며,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라고까지 쓰고 있다.[24]


다. 안락사


2001년 5월, 네덜란드에서 최초로 안락사(euthanasia)가 합법화됐으며, 그 법은 2002년 1월부터 발효되었다. 벨기에에서는 안락사가 묵인되다가, 2002년 5월에 합법화됐으며, 스위스, 노르웨이, 콜럼비아 등에서는 묵인되고 있다.[23]



결론


물론 모든 진화론자들이 살인자는 아니다. 프랜시스 골턴도 자신의 이론이 방어능력이 없는 미출생 아이들에 대한 학살은 차치하고, 수백만 명을 죽음으로 이끌게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살인 행위는 전적으로 진화론의 가르침, 즉 가장 약한 자가 도태된다는 적자생존의 법칙과 일치하는 것이다. 행동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의 결과이다. 예수는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마 7:17–18)라고 말씀하셨다.


우생학이라는 죽음의 철학과는 대조적으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 보기시에 영원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창세로부터 ”하나님의 형상대로”(창 1:26–27) 창조되었다. 하나님은 또한 살인, 즉 무죄한 자에 대한 고의적인 살인을 명시적으로 금하셨다(출 20:13). 실제로, 하나님은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셔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리게 하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으며(요 3:16–17), 우리가 그를 믿을 때에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 변화되게 하셨다(롬 8:29, 고후 3:18).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인간의 본성을 취하여(히 2:14), 마지막 아담이 되었으며(고전 15:45), 그리하여 첫 번째 사람인 아담 혈족의 구속자(Redeemer, 이사야 59:20)가 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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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생학과 스코프스 원숭이 재판 (Scopes Monkey Trial) [1]



.스코프스 재판에서 대결했던 진화론 측의 클라렌스 데로우(Clarence Darrow, 왼쪽)와 창조론 측의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


스코프스(Scopes)가 가르친 진화론 교과서였던 조지 헌터(George Hunter)의 '시민생물학(Civic Biology)'과[2] 실험 부교재는[3] 노골적일 만큼 우생학적이고 무례할 만큼 인종차별적이었다. 헌터는 인류를 다섯 인종으로 나누고, ‘에티오피아계 혹은 흑인계’로부터 유럽과 미국의 문명화된 백인 거주민로 대변되는 가장 높은 등급의 백인계까지 각 인종별로 진화 수준에 따라 등급을 매겼다.[4] '시민생물학'은 범죄와 부도덕은 가계 내에서 유전되어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으며, ”이러한 가계들은 사회의 기생충과 같은 존재가 되고 있다.... 그 사람들이 하등동물이라면, 그들을 대대적으로 제거해 그들이 사회에 퍼지는 것을 막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인류가 이를 허락하지는 않겠지만, 보호시설 또는 다른 장소에서 성적으로 격리하거나, 그러한 열등하고 퇴화된 인종이 혼인하여 영속화할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라고 쓰여 있었다.[4]


이것이 당시의 진화론자들이 스코프스가 가르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던 책이다! 이 모든 것은 데이비드 멘튼(David Menton) 박사가 만든 DVD인 Inherently Wind: a Hollywood History of the Scopes Trial (right)에 기록되어 있다.


References and notes

1. The 1925 trial in Dayton, Tennessee, USA, of high-school teacher John T. Scopes, charged with violating state law by teaching the theory of evolution. 

2. Hunter, G., A Civic Biology Presented in Problems, American Book Co., New York, USA, pp. 195–196, 1914. 

3. Hunter, G., Laboratory Problems in Civic Biology, American Book Co., New York, USA, 1916. 

4. Ref. 2, pp. 261–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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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dgment at Nuremberg




Perhaps the most frequently asked question concerning the eugenics-inspired genocide of the Holocaust is: ‘How could it have happened?’ In the 1961 MGM film Judgment at Nuremberg, about the trial of four Nazi war criminals, judges who had enforced Nazi decrees,1 one of the defendants (Judge Ernst Janning, played by Burt Lancaster) cries out to Chief Judge Dan Haywood (played by Spencer Tracy): ‘Those people—those millions of people—I never knew it would come to that. You must believe it!’ Haywood’s response was eloquent: ‘It came to that the first time you sentenced a man to death you knew to be innocent.’


Likewise today, eugenic killing of innocent preborn babies because they are thought to be less than perfect began the first time a doctor consented to kill a handicapped child in the womb. The rest is history.


[1].Based on the third Nuremberg Trial (1947), also called the ‘Judges’ Trial’ because it tried Nazi judges and prosecutors for imposing the Nazi ‘racial purity’ programme through the eugenic and racial laws. There were a total of 13 Nuremberg Trials.


The photograph (above right) comes from the first Nuremberg Trial (1945–6), the most famous and significant of them because it tried the main German leaders.

Front row (left-to-right): Hermann Göring, Rudolf Hess, Joachim von Ribbentrop, Wilhelm Keitel;

Back row: Karl Dönitz, Erich Raeder, Baldur von Schirach, Fritz Sauckel. (Courtesy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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