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041 – 삼국지연의 (三國志演義) / 나관중 (羅貫中, 1330 ~ 1400년경)

 (출처 :  동서고전 200선 해제(반덕진, 가람기획))



중국 4대기서(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시내암(施耐庵)과 나관중(羅貫中)의 <수호지(水滸志)>, 오승은(吳承恩)의 <서유기(西遊記)>, 난릉소소생(蘭陵笑笑生)의 <금병매(金甁梅)>)의 하나.  명대의 나관중이 지은 중국 최초의 장편소설로, 중국인뿐 아니라 세계인들에게 가장 많이 읽힌 중국 문학작품인 (삼국지연의)는 걸출한 소설문학인 동시에 인생의 철학서요, 최고의 병법서다. 이 소설은 100년간의 한말의 정치군사적 상황을 치밀히 묘사함으로써 그동안 감추어왔던 정치적 군사적 상층사회의 내부모순을 역사상 최초로 공개하고 있다는 데에도 큰 의의를 갖는다. 또한 이 소설은 다양한 인물을 통해 중국인의 각종 지혜와 사유방식을 소개하고 있는 인류의 귀중한 유산이기도 하다.


a.(삼국지연의)의 성립

중국 역사장편소설 (삼국지연의)는 184년부터 280년까지, 즉 후한 말부터 위촉오 3국 정립시대를 거쳐 진나라에 의한 천하통일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유비 관우 장비 등 세 인물의 무용담과 제갈공명의 지모를 중심으로 하고 정사인 진수의 (삼국지)에 기초하면서  70의 사실에 30의 허구 를 섞어서 만든 소설이다. (수호전) (금병매) (서유기)와 함께 4대기서 중 하나로, 여기에 등장하는 문무를 겸비한 의리의 관우, 온후한 인군인 유비, 호탕한 호걸인 장비, 불세출의 대군사인 제갈량, 침착하고 용감한 조운(조자룡), 무용무적의 여포, 지장인 주유, 출중한 정치적 능력을 소유했으나 권모술수에 능한 모습으로 묘사된 조조 등은 중국민중이 대망하는 여러 유형의 영웅상이다.

예부터 중국인들 사이에 흥미있는 이야기로 전해내려오다 9세기 말에는 연극으로 꾸며진 흔적이 있고, 송대에는 전문적인 배우까지 나왔다. 삼국지는 적어도 수백 년간의 이야기꾼들, 저잣거리의 재간꾼은 물론 불우한 서생과 문사 등 중국인들의 공동 저서로, 나관중은 그 대표성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책으로 엮어 나온 것은 3단계를 거친다.

#1 (삼국지평화)의 성립과 간행으로 이것은 담화용 텍스트를 그대로 사용한 듯하며 읽을 거리로서는 매우 유치했다. 이 (평화)를 바탕으로 해서 소설로 꾸민 것이 

#2 명나라 초기의 나관중에 의한 (삼국지연의)다. 황당한 부분을 고치고 촉한정통론의 입장에서 유비 조조의 선악의 구분을 분명히 하고, (삼국지평화)에서의 장비 중심을 관우 중심으로 다시 쓰는 한편, (삼국지)의 배송지의 주석이나 삼국극 민간설화까지도 이용해서 10배 정도 늘려 (삼국지연의)를 만들었다. 이 나관중의 원본에 가장 가깝다고 일컬어지는 것이 24권 240절로 된 (홍치본) 또는 (가정본)인데, 그후 (이탁오평본)이 나온다.

#3 청나라 초기의 모성산모종강 부자에 의한 (모종강본)의 간행으로 이 책이 다른 책을 압도하여 정본이 되었다. 중화민국의 아동도서관 간본은 (모종강본)을 정본으로 한 것이며, 1988년에 나온 우리 나라의 이문열 평역 (삼국지)도 이것을 역본으로 쓴 것이다.


b.주요 내용

후한 말기 조정에서는 환관이 실권을 잡고 정치가 혼란하여 백성들의 불평은 극에 달해 있었다. 도교 성향의 신흥종교의 교조인 장각이 이끄는 태평도는 이 틈을 타서 181년에 황건의 난을 일으킨다. 한나라 왕실의 후예이나 몰락하여 민간에 살고 있던 유비는 관우 장비 두 장사와  도원결의를 한 후 무리를 모아서 관군을 따라 싸움터에 간다. 황건적의 반란은 유비 조조 손견의 분투와 그밖의 여러 장수의 노력으로 겨우 평정되었지만, 난중에서 세력을 얻은 지방관이 각지에서 할거하여 기세를 올리는 바람에 한 왕실은 또다시 위태로워진다. 한번은 원소를 맹주로 삼아 연합군을 조직한 군웅이 임금을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두르던 동탁을 치지만, 내분을 일으켜서 해산한 뒤에는 완전히 무정부상태가 되어 원소 원술 공손찬 여포 유표 손견 등이 서로 패권을 다투기에 이른다. 그 가운데서도 조조가 차츰 세력을 얻어 군웅을 멸하고 특히 기주의 영주인 원소를  관도의 싸움에서 격파한 후부터 천하를 통일할 형세를 보인다. 조조는 황제를 등에 업자 그 상대자는 아버지 손견, 형 손책의 뒤를 이어 강남을 다스리는 손권이 있을 뿐이었다. 유비는 각지를 전전한 후 유표에게 의탁하는데, 이 사이에 남양에 숨어사는 제갈량(공명)을  삼고초려로 맞아들여 군사로 삼았다. 유표가 죽은 뒤 그 아들 유종은 조조에게 투항했으며, 유비는 당양에서 조조의 군사와 싸웠으나 크게 패하고 말았다. 한때는 외아들 유선까지 난군 속에 잊어버렸으나 부하인 조운(자룡)이 단신으로 뛰어들어 유선을 건져내고, 장비가 단 20기로 적을 장판교에서 막아내는  초인적인 활동에다 유표의 또 다른 아들로 강하를 지키던 유기가 구원병을 이끌고 달려오는 바람에 겨우 위험을 벗어나 하구성으로 들어간다.

기주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자 손권의 진영에서는 화전 양파로 갈려서 다투던 바람에 손권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숙 주유 등의 강경한 주장과 공명의 교묘한 설득으로 싸우기로 결정하고 유비와 손잡고 조조와 맞섰다. 연합군은 공명 주유 등의 계략을 실행, (삼국지)의 압권에 해당하는 적벽대전에서 조조군의 군대를 화공으로 무찔러 대승한다. 유비는 그 사이에 기주를 점령했으나 이곳을 둘러싸고 손권과의 관계가 원만치 않아, 유비와 손권의 누이동생과 정략결혼을 성사시켰으나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유비는 익주를 정복하여 근거지로 하지만 손권이 기주를 지키는 관우를 죽이고 이 지방을 점령한다. 이 무렵 조조는 병사하고 그 아들 조비가 뒤를 이어 한나라 헌제를 폐하고 위제의 자리에 오른다. 유비는 한의 뒤를 이어 성도에서 황제에 올랐다. 나라 이름은 한이나 영토가 파촉에 한정되어 있었으므로 촉으로 불린다. 그뒤 손권도 오나라 형제를 칭하여 3국분립이 이루어졌다. 유비는 공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의제 관우의 원수를 갚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다. 그러나 도중에 장비가 암살되고 유비도 오나라 장수 육손과 이능에게 싸우다 패해 백제성에서 병사한다. 

유비의 후계자인 유선은 어리석어서 국정의 책임은 모두 공명에게 맡겨진다. 공명은 5로로 쳐들어오는 위군을 격퇴하고, 남만왕 맹획을 7번 사로잡았다가 7번 놓아주어서 심복시킨 후 오나라와 화를 맺고 오로지 위와의 싸움에 전력을 기울인다. 6번 둔산에 출진하나 그때마다 위의 명장 사마의에게 저지되어 마침내 오장원에서 병으로 쓰러진다. 그후 3국은 정치가 제대로 되지 않아 쇠약해지고 사마의 1족만이 세력을 얻는다. 264년 위는 촉한을 멸망시키나, 265년엔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이 위제를 폐하고 제위에 올라 나라를 진이라 했다. 진나라는 280년에 오를 멸망시켜 이로써 3국의 분립은 끝났다.


c.등장인물에 대한 재조명

이 소설에 묘사된 400여 명의 인물 가운데 주요인물들은 개성이 뚜렷하고 생동하는 예술적 전형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 전형적인 인물들은 곧 작자의 사상적 경향이 구체화되어 표현된 것으로,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나관중은 (삼국지연의)에서 유비를 옹호하고 조조를 배척하는 옹유반조 의 경향을 갖고 있는데, 이는 봉건 전통사상의 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즈음 유행하는 민중사관은 조조를 재평가함과 동시에 유비 집단, 특히 제갈량에 대한 비판과 의심을 여러가지로 제기하고 있다. 중국의 곽말약 이래 복권되기 시작한 조조는 이제 혁명가 또는 민중의 대변자 로 격상되고, 유비 집단은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 가치체계에 고집스럽게 집착한 보수주의자들 이며, 부패하고 타락한 한왕조를 되살리려고 애쓴 반동집단으로까지 격하되고, 그 핵심인물인 제갈량은  반동집단에 논리를 제공한 몽상가 또는 대의보다는 일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인재가 풍부하고 지배체제의 기반이 잡힌 위나 오보다는 후발집단으로 인재난에 허덕이는 촉을 책한 야심가로까지 비판한다. 과연 그럴까?


 1. 조조

조조에 대한 평가는 나관중과 (삼국지)의 저자 진수간에 다소 다르다. 진수는 조조를 다소 긍정적을 서술했으나, 나관중은 조조의 양면성을 다루되 다소 엄격했다. 조조가 걸출한 정치가요, 군사가이면서 한편 잔혹한 압제자였던 사실에 맞춰 소설속에서도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동시에 지닌 양면적인 인물로 형상화되어 있다.

먼저 정치가로서의 조조는 고도로 세련된 정치적 기술을 구사했다는 점이다. 흔히 조조를 평가할 때 협천자 영제후 란 구절을 쓴다. 그것은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했다는 뜻인데, 이는 조조가 권력의 속성과 전통성의 관계를 그만큼 파악하고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조조는 오랜 기간 실권을 잡았어도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은 없었다. 또한 정치가로서의 조조는 지극히 민중적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백성들에게 세금을 면제해주고 곡식을 풀어 백성을 부양했다는 기록은 있어도, 백성들을 무리하게 혹사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인재를 등용하는 데 있어서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고 오직 능력에 따르되, 일단 한번 등용하면 과거의 잘못을 묻지 않았다. 그 결과는 그가 그 시대에 가장 많은 인재들을 거느릴 수 있었고, 뒷날 제갈량은 자기의 동학들이 조조의 아래의 미관말직에 있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이 아직도 그런 자리에 있다니, 도대체 위에는 얼마나 많은 인재들이 있단 말인가 하고 탄식했다 한다. 한마디로 말해 조조는 현실적인정치가로서의 모든 자질을 거의 완벽하게 갖춘 것으로 평가된다. 

다음은 전략가로서의 조조는 항상 소수로써 다수를 이기고 약세로서 강세를 극복해왔다. 여포에게 거의 잡히게 된 위급한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장계취계(상대편의 계략을 미리 알아채고 그것을 이용하는 계략) 로 결국 마릉산에서 여포에게 대승하고 위기를 승리로 바꾸는 임기응변의 능력을 보인다.

또한 조조는 당대의 문장가였다. 문장가로서의 조조는 두 아들인 조비 조식과 함께 중국문학사에 기록될 정도다. 원래는 20여권의 방대한 양을 남겼으나, 아쉽게도 지금 남은 것은 30여 편의 시와 백여편의 문장이나 포고뿐이다.

한편 조조의 부정적 성격도 여실히 묘사되어 있다. 즉, 여백사의 전 가족을 몰살시킨 다음 내가 천하 사람들을 저버릴 수는 있어도 천하 사람들이 나를 배반해서는 안된다 라며 이기적 면모를 보여주는데, 이러한 성격은 유비와 대비될 때 더욱 부정적으로 묘사되어 작가의 성향을 알 수 있게 한다.

이처럼 정치가로서, 전략가로서, 문장가로서 그처럼 뛰어난 조조가 오늘날 민중들의 의식 속에 간사하고 교활한 인물로 남아있는 것은 무슨 때문일까? 

#1 한민족의 정통사관을 점령하려 했던 나관중이 혈통을 근거로 당시 국력으로 보아 조조의 1/5정도이던 유비에게 정통성을 부여한 결과 조조를 엑스트라의 위치로 전락시켰다. 마치 이순신 장군을 실제 이상으로 평가하기 위해 원균 장군을 악역을 내세운 우리처럼 말이다. 중국의 곽말약은 조조를 민중적인 혁명아로 내세운 반면 유비를 보수반동집단의 우두머리로 격하시켰고, 일본의 작가 진순신은 조조를 주인공으로 삼아 (연의)를 구상한 적이 있었다 한다. 

#2 통치자의 인간형에 대한 동양인들의 기호가 유교의 영향으로 조조의 재사형 보다는 한고조 유방이나 유비와 같은  덕장형 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조조는 한 몸에 너무 많은 재능을 갖추고 있었고, 그 중 한 가지만 가졌어도 그 분야에서 뛰어날 수 있다고 믿는 범인들의 시기심도 작용했으리라.


 2. 유비

중국의 역대 창업자 중 그만큼 해놓은 일에 비해 민중의 사랑을 많이 받은 인물도 아마 없을 것이다. 어떤 이는 그 민중적 인기의 근원을 그의 출신에서 찾는다. 고귀한 혈통이면서 삶의 밑바닥부터 출발하고 있는 그는 그의 대역이었던 출신 성분이 낮은 조조와 대비하고 있다. 어떤 이는 그를 둘러싼 집단들의 성격이 법과 제도보다 인정이나 의리와 같은 1차원적인 감정으로 형성되어 있어 수백 년 동안 관료제에 시달려온 민중들에게 호감을 살 수도 있었다고 본다. 또 어떤 이들은 정통성에 있어 유리한 유비의 혈통을 내세우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유비의 리더십의 형태일 것이다.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은 한고조 유방의  덕치(무위이 능) 를 선호했는데, 유방 자신은 이렇다 할 재주가 없으나 단지 사람을 다스리는 능력이 출중했던 것이다. 그가 내세운 게 도가의 원리에 따른 무위의 통치 였다. 2백년 이상 존속한 왕조의 창업자는 대개가 도가형의 치자가 많았다. 좀 비약해서 말한다면, 대부부늬 수명 긴 왕조는 도가형의 창업자로 시작해 유가형의 치자로 유지되다 그 유가형의 타락으로 망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유비에게 보이는 통치의 원리가 바로 도가형이다. (삼국지)에 그가 법률을 반포하고 제도를 정했다는 기록은 거의 보기 어렵다. 그가 지향한 것은 무위의 치였고 그 이 사표는 한고조 유방이었다. 따라서 백성들에게는 다재다능에 힘입은 조조의 유위의 치 보다는 훨씬 마음이 편한 통치자였을 것이다.

그밖에 유비의 민중적 인기를 더한 것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사람에 대한 투자이다. 조조는 법가적 원칙에 벗어나면 가차없이 희생시켰으나(관우에게는 예외), 유비는 남달리 눈물이 많았고,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희생시키지 않고 집단의 결속을 굳게 했다. 이러한 그의 인적 결속은 은연중에 민중들에게 전해졌으며, 또 나관중은 여기에 그를 인덕을 겸비한 인물로 묘사함으로써 그의 집단에 남다른 호감을 갖게 했다. 그에 대한 정사의 평도 대개 그러하다.  유비는 속이 넓고 굳세면서도 남에게 너그럽고 후했다. 사람을 알아보고 선비를 잘 대접해 한고조의 풍도가 있었으며 영웅의 기량을 갖추었다. 

그러나 작은 정에 집착하여 소탐대실하는 일도 있었고, 사람을 부리는 기교가 지나쳐 냉정한 관찰자에게 역겨움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다. 형주를 차지한데 이어 또 서천을 빼앗아 한참 치솟던 기세가 어이없이 꺾이고, 결국 그의 촉이 3국 중에서 가장 허약한 나라로 주저앉고 만 것은 그런 결점들의 결과가 아니었는지, 게다가 유비의 과거지향적이고 보수적인 정치이념은 근대적 이념에 물든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못마땅한 데가 없는 것이 아니다.


 3. 제갈량

사실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만큼 걸출하게 묘사된 인물은 없다. 그는 무궁한 지혜, 탁월한 재능, 그 신기묘산의 용병술, 천하의 대세를 헤아리는 안목, 상대방의 내심을 읽어내는 통찰력, 당당하고 화려한 말솜씨는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그를 비판하는 소리도 만만치 않다. 우선 그를 비판하는 논거는 삼고초려의 부인, 천하삼분론의 독창성 부인, 관우와의 권력투쟁에서 보인 야심가적 기질, 군사적 요충지역을 마속에게 맡긴 용병술에 대한 의심 등이 그것이다. 나관중은 그를 (삼국지연의)에서 동남풍을 빌고 구름을 마음대로 부르는 도교적인 술사로 부각시켜, 한실 중흥에 몸을 바친 그의 충의가 초인적 신비에 가리고 있으며, 원래 그가 가지고 있던 비범함까지 의심받게 했다. 물론 제갈량이 자란 산동성은 예부터 도교의 성지였기 때문에 그런 분위기에서 자란 그가 도교와 방술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짐작은 된다.

진수는 바로 그 제갈량에게 죽은 진식의 아들인데도 제갈량을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제갈량은 나라의 승상으로서 백성을 따뜻이 어루만지고 예의와 규범을 보여주었으며, 벼슬자리를 줄여 백성의 짐을 덜고 권위와 제도에 따랐다. 법을 어기거나 일을 게을리한 자는 비록 가까운 자라도 반드시 벌을 주었고, 죄를 지었어도 스스로 빌고 용서를 구하는 자는 그 죄가 무거워도 놓아 주었으며, 교묘한 말로 변명하려는 자는 비록 그 죄가 가벼워도 반드시 벌을 주었다. 제갈량이 젊은 시절 몰두했던 법가의 한 전형을 보는 듯하다. 거기다가 한 국가의 승상이면서도 사후 재산이 겨우 뽕나무 800그루에 밭 50고랑이라는 그 검소와 무욕을 상기하면 비범한 인물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신비한 술사로서의 묘사도 그의 면모를 손상시키지 못한다. 예부터 중국의 병가들은 전쟁에서 지형과 기후를 중히 여긴 전통이 있고, 제갈량도 마찬가지여서 거기에 관해 세밀한 관찰과 정보수집을 게을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갈량은 10년간의 은둔 후에 유비의 삼고초려에 의해 세상에 나오면서 유비, 그대는 기어이 나를 수고는 많고 얻을 것이 적은 그대의 꿈속으로 끌어들이고 마는구려. 지난 겨울 내내 달갑지 않은 명운을 피하고자 애썼지만 결국 그대를 따라 나설 수 밖에 없소 라는 공명의 이 지탄은 촉의 운명을 미리 예감이나 한 듯하다. 충신으로서의 제갈량보다 신비스런 제갈량으로 우리에게 인식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신, 은혜를 입고 감격을 이길 길 없어 이제부터 출진하려 하옵니다. 표를 바치려 하니 눈물이 앞을 가려... 로 시작하는 그의 (출사표) 한 편에는 대의에 모든 것을 바쳐 생사를 잊고 선악을 초월하는 불꽃 같은 생을 살아가는 한 남자의 삶이 이룩할 수 있는 아름다움의 극치가 담겨져 있다. 한실중흥의 대의에 불타는 고결하고 깨끗한 의지, 자나깨나 한왕조에 대한 지고지순한 충성, 이 모든 것이 가히 감동적이다.


 4. 관우

제갈공명과 함께 삼국지의 상징적인 인물로 그가 지닌 충성과 의리는 동양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를 관공 또는 관성제라고 하여 신의 경지에까지 찬양하기도 한다. 특히 유비에 대한 충의의 화신 을 보여주는 오관참장이나 지난날 은혜를 입은 조조에게 군법을 어겨가며 그를 살려주는 화용도의 이야기는 충효사상을 중시하는 민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를 모시는 관왕묘가 아직도 우리 곁에 있다.

잠시 조조의 신세를 지면서 그를 아끼는 조조로부터 유혹을 받았으나 끝내 유비를 잊지 않고 돌아가는가 하면, 또한 조조에게 진 신세를 보답할 것을 잊지 않아 그의 생명을 살려주기도 한다. 그러나 군령을 어기면서까지 가장 중요한 시기에 조조를 놓아주는 그의 의리는 천하를 위한 대의라기보다는 개인적인 차원에 끌린 소의라 할 수 있겠다.

대국을 볼 줄 모르고 마침내 살신의 화는 물론 오촉 연맹의 파괴까지를 몰고 오는 그의 처신은 개인적인 의리와 그에 대한 사소한 공명심에 집착하는 관우의 또 다른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5. 장비

관우와 항상 대립되고 교양이 부족하고 천박하지만 사랑스러운 난폭자로 묘사된다. (수호전)에서 말하면 이규에 해당될 것이다. 단순하고 난폭하긴 하나 어진 사람을 존경해서 유비에 대한 충성을 관우 못지않다. 두주불사로 부하를 다스림에 있어 사랑보다 채찍이 앞서 유비는 언제나 그 점을 충고했다. 부하의 손에 죽은 그의 최후는 그의 성격을 보여준다. 장판교 일전에서 단신으로 조조 군사를 막아내는 위용은 독자들에 대한 강한 인상을 준다.


d.(삼국지연의)의 예술성과 가치

중국의 역사에서 이야기거리가 될 만한 시대로 말하면 (열국지)의 내용이 되는 춘추전국시대는 너무 번잡하고, 항우와 유방의 다툼을 내용으로 하는 (초한지)의 시대는 단조로운 감이 있고, 오직 삼국시대는 번잡하지도 단조롭지도 않고 호화찬란한 무용과 책략이 재미있는 설화의 재료로 가장 좋았던 까닭으로 (삼국지연의)가 뛰어나다고 할 수도 있다.

(삼국지연의)는 중국문학사, 특히 소설의 발전사에서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다.  연의란 딱딱하고 어려운 이야기를 알기 쉽게 풀어서 이야기한다는 뜻이다.

이 책이 장편역사소설의 길을 열어놓은 후 역사소설이 크게 흥성했다. 희곡에 대해서도 큰 영향을 남겼는데, 통계에 의하면 경극 가운데만 하여도 삼국 이야기를 제재로 한 희곡이 140여 편이 된다고 한다. 그밖에 (삼국지연의)의 영향 하에 반백화의 비교적 알기 쉬운 역사소설이 대량으로 출현했다.

(삼국지연의)는 사회생활에도 큰 영향을 남겼는데 군사와 정치의 교과서로 쓰이기도 했다. 청나라 초기에는 만주어로 번역되어 청군에게 읽혔으며, 이자성이나 태평천국 등 농민군들도 이 책을 유일한 교과서로 삼아 싸웠다고 한다. 이 책의 이데올로기적 바탕인 전통왕조에 대한 충성은 민족독립의 사상과 연결되어 명나라 말기에는 군사의 사기를 고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그 영향이 너무 크기 때문에 젊은이는 수호지를 읽지 말고 늙은이는 삼국지를 읽지 말라 라는 말도 생겼다. 아마도 (수호전)의 음욕과 잔학성이 젊은이들의 인격형성에 미칠 영향을 염려한 것과, 노인들의 머리에 지략과 잔꾀가 늘어나는 것을 경계한 뜻일 것이다.

(삼국지)에는 능력이 있는데도 기회가 오지 않아 뜻을 펴지 못할 때 쓰는 비육지탄, 출중한 것을 가리키는 백미, 버릴 수도 쓸 수도 없을 때 쓰는 계륵, 임금과 신하 간의 우정을 나타내는 수어지교, 지극한 정성을 나타내는 삼고초려 등 많은 고사성어의 원산지 역할도 하고 있다.

그리고 각 시대의 인민들은 도원결의를 본받아 서로 믿으며 생사를 같이하는 풍조가 면면히 이어져왔고, 이와 반대로 봉건 통치자들은 충의를 이용하여 봉건황제에게 충성하고 인민들의 투쟁의식을 마비시키려고 했다. 청대의 통치자들이 도처에 관우의 사당을 지은 것도 이런 의도였다. 민국에 들어와 54운동 시대에는 가치가 인정되지 않았으나 근래에 와서 다시 높이 평가 받기에 이르렀다. 최근 곽말약은 조조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희곡 (채문희)를 썼다. 

그러나 황건 농민봉기를 부정하는 태도, 관념론적 영웅사관, 지나친 신비주의적 경향, 숙명론 등은 비판의 소지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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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志演義 (출처:나무위키)

1. 개요[편집]


원나라 ~ 명나라대의 선비인 나관중이 저술한 역사소설[1]로 흔히들 삼국지연의라고 부르지만 본래 제목은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이다. 중국 본토에서는 '삼국연의'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는 그냥 삼국지라고만 해도 역사책보다 본 문서의 연의를 가리킬 때가 더 많다.[2] 중국의 서적 중에서 전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서적 중 하나이며, 이른바 중국사대기서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동아시아권에서 현재까지도 자주 읽히는 고전소설.


“진나라 평양후 진수가 남긴 역사 전기를 

후학 나관중이 순서에 따라 편집했다. (晉平陽侯陳壽史傳, 後學羅貫中編次.)”


삼국지연의의 성격을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첫머리의 글. 삼국지연의는 역사책이 아니라 역사책을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책이라는 사실을 극명히 알 수 있다. 연의(演義)라는 말 자체가 "사실에 내용을 보태서 재미나게 설명한 책이나 창극"이라는 뜻이다. 즉, 제목을 의역하자면 "역사소설 삼국지"쯤 된다고 볼 수 있다.


즉 실제 역사는 절대로 이와 똑같지 않다. 따라서 정사 삼국지나 자치통감, 후한서 등 정식 역사서를 읽지 않은 상태에서 연의를 역사서로 받아들이면 엄청나게 잘못된 선입견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역사의 굵은 흐름을 이해하는데는 어느정도 참고가치가 있으며 "연의는 무조건 거짓이고 정사는 그 반대다" 라는 마인드로 추측하는 태도도 옳지 않다.


2. 줄거리[편집]


도원결의

황건적의 난

십상시의 난

동탁 토벌전

삼영전여포

군웅할거

계교 전투

서주 대학살

관도대전

삼고초려

천하삼분지계

적벽대전

이릉대전

도원종언

칠종칠금

추풍오장원

천하 통일

3. 상세[편집]


"천하의 대세는 오랫동안 나뉘어지면 반드시 합하게 되고, 오랫동안 합쳐져 있다면 반드시 나뉘게 된다." 

천하대세 분구필합 합구필분(天下大勢 分久必合 合久必分)


삼국지연의의 첫 문장.[3]


중국 역사에서 춘추전국시대, 초한지의 배경이 되는 시황제 사후의 시기 다음으로 대대적인 난세가 일어난 후한말~진초 까지의 역사를 다룬 소설이다. 일명 삼국지. 삼국지만 읽으면 그 시대에 유독 수많은 인재들이 있었던 것처럼 착각하기 쉬우나, 삼국지의 내용만 주목받기 때문에 생기는 착각이다. 중국이 난세가 되면 그 정도 숫자의 인재들은 항상 나타났다. 삼국지의 내용이 끝나고 바로 다음 시대가 되면 이민족들이 북쪽에서 떼거지로 내려온다. 물론 청나라의 고증학자인 조익[4]의 의견처럼 50년 남짓되는 시간에 많은 숫자의 인재가 몰려 '인재밀도'는 다른 시대에 비하면 높은 편이다.


그 시대의 인재라는 사람들이 후대에 끼친 영향력은 별 거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로 학문적으로는 훈고학, 경학의 시조로 꼽히는 정현, 논어의 주석을 남긴 하안, 노자의 주석을 남긴 왕필, 정사 삼국지를 편찬한 진수, 춘추좌전집해를 남긴 두예, 해서의 개조로 꼽히는 종요, 문학에서 유명했던 조조, 조식, 중경신부를 만든 순욱, 정치적으로는 위나라와 서진을 건국한 조비와 사마염, 둔전제를 건의한 한호나 구품관인법을 제정한 진군, 사회적으로는 황건적의 난을 일으킨 장각, 오두미도를 전파한 장로, 베트남과 관련해서 영향을 끼친 사섭 정도밖에는 손꼽히는 인물이 없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편으론 과도하게 삼국시대에만 몰린 관심(빠질)을 비판하는 의도야 이해하지만 후대에 준 영향만으로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을 평가하기는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일본 전국시대나 한국의 후삼국시대, 바로 앞 시대 중 하나인 초한전쟁시기를 살아간 사람들 중에서도 대단한 인물들이 많았지만 그중에 후대에 까지 영향을 줬다고 볼 만한 인물은 많지 않다는 것. 문학에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다고 그 시대를 만든 삼국의 군주들인 유비, 손권이 조조보다 영향력이 못하다고 할 수도 없다. 제갈량 같은 인물은 저 중에 들어가지 못하는데도 지금까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유명인이다.[5] 물론 역사학이라는 관점에서 삼국시대가 특별한 가치를 지니는 시대는 아니었고, 삼국시대만 특별히 더 대단한 인물들이 활동했던건 아니므로 과도한 빠질은 분명 경계해야 하지만 무조건 별볼일 없는 시대, 별볼일 없는 인물들이란 시각도 지양해야 한다는 시각인 것이다.


또한 나관중은 삼국지의 배경이 되는 시대의 1천 년 후에 태어난 사람이라는 점을 간과하면 안 된다. 나관중이 당시 고고학이나 문화인류학의 전문가는 당연히 아니었기 때문에, 삼국지연의의 전반적 분위기는 후한 말 당시의 느낌보다는 원나라 말기의 느낌이 더 강할 수밖에 없다. '조조의 백만 대군' 드립이나 관우가 송대 이후에나 등장하는 청룡도를 들고 나오는 것도 그래서다. 원나라 말기 쯤 되면 중국에서는 민중봉기가 크게 일어나면 보통 규모가 수십만 명 정도였다. 말 그대로 대륙 스케일.


"삼국지를 세 번 이상 읽지 않은 이와는 상대를 하지 말라"는 말을 만들어냈을 정도로 동양 최고의 고전이자 필독도서로 인정받는 소설이며[6], 그 덕분에 실제 역사와 다른 부분이 많음에도 정사 삼국지와 연의를 헷갈리는 이가 많을 정도.


나관중 이전에도 삼국지 이야기는 인기가 많았고, 그걸로 밥 벌어먹고 살았던 인물도 많았다. 그 사람들의 대본을 묶은 것이 바로 삼국지평화.[7] 정사를 뼈대로 하되 이전부터 존재했던 민담이나 설화등을 채용하여 재미의 추구에도 초점을 맞추었다. 대략 7할의 사실과 3할의 허구라는 청나라 학자 장학성(章學誠)의 평이다. 대한민국 사극과 비교하면 이것만도 감사하다 관우 신앙의 기폭제가 되었고 촉한정통론을 전면에 내세우는 등 현대 삼국지의 이미지를 정립하는데 큰 영향을 끼친 소설. 다만 이 모든 것을 나관중 개인이 정립시킨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당시에 널리 통용되던 이미지를 채용했을 뿐. 삼국지연의의 기반으로 평가받는 삼국지평화에서도 이미 이와 같은 방향성은 확립되어 있었다.


한때 촉빠위까 움직임 때문에 많이 까였지만, 찬찬히 읽어보면 오히려 나관중의 시각이 현대의 어설픈 이들보다 백 배 낫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도리어 나관중은 숨겨진 촉까가 아니냔 소리를 듣는 경우도 있다.


현대의 번역본 등에서는 대부분 누락되지만 원본에서는 각 화가 끝날 때마다 드라마 마지막처럼 결정적인 부분에서 끝내면서 "그 다음을 알고 싶다면 다음 편을 보시오!"라는 문구가 나온다.[8] 이후의 연의 판본도 모두 이 방식을 빌리고 있으며, 이것은 황석영 삼국지에서 재현되어 있다. 심지어 쌀과 소금의 시대라는 대체역사소설에서는 서양 작가가 이 문구를 빌려오기도 했다.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에서도 이런 문구를 빌려썼다.


삼국지연의의 주인공은 일단 유비다. 유비가 살아생전동안 쭉 유비로 주인공을 이어오다가 유비가 사망하는 시점에서 제갈량이 주인공으로 변경된다. 또한 그 상태에서 주인공인 제갈량은 사마의와 겨루게 되고 제갈량이 사망하면 주인공 자리를 강유에게로 넘기게 된다. 강유는 종회의 반란 직후까지 주인공으로 활약하다가 사망하며, 삼국지연의는 이 시점을 기준으로 사실상 종료된다. 까와 빠의 개념을 떠나서 삼국지연의의 주인공은 이렇게 변경된다. 사실 100년 가까이 되는 기간이 삼국지 시대의 흐름인지라 한 명이 주인공을 차지하기엔 너무나 긴 시간이기도 하다.[9]


그런데 대부분의 삼국지연의는 정비석 삼국지라든가 고우영 삼국지라든가 대부분 제갈량이 사망하면 완결된다. 연의의 시작이 184년 황건적의 난이고 제갈량이 죽은 건 234년으로 딱 50년이다. 제갈량 사후에 진이 삼국을 통일한 것이 280년이므로 실제로 제갈량의 죽음은 역사상에서 보면 중간 반환점 정도인 셈이다. 고우영 삼국지의 경우 제갈량이 사망한 후 사마염이 최대한 얌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유씨, 조씨, 손씨들을 비웃는 장면 하나가 끝이며 사마염이 중국 전토를 도적질 통일했다는 한 마디만 나오고 완결된다.


현대로 넘어오면서 일본의 작가 요시카와 에이지가 번역한 것이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요시카와 에이지 삼국지 문서를 참고.


3.1. 과연 연의는 촉빠인가[편집]


삼국지연의가 촉빠라는 설은 아무튼 송대 이후 지식인 사회에서는 촉한정통론이 대세였고, 제갈량이나 관우는 유교적 충신의 모범상으로 여겨질 정도로 촉의 인물이 높게 평가되었으므로 어쩔 수 없는 측면이 많다(…). 이에 대해 일본의 동양사학자 가토 도루(加藤徹) 교수의 견해가 흥미롭다. 그는 ‘남자’를 뜻하는 男(남), 漢(한), 士(사), 俠(협)의 예를 들며 男은 女의 상대로서 남자, 漢은 땀과 피를 흘리는 뜨거운 남자, 士는 높은 뜻을 품은 사대부의 남자, 俠은 신의를 위해 목숨도 태연히 버리는 남자라면서, 사서 ≪삼국지≫와 소설 ≪삼국연의≫가 재미있는 것은 漢ㆍ士ㆍ俠이 서로 얽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중 최고의 ‘협’으로 유비를, 이상적인 ‘사’로 제갈공명을 꼽았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중국인은 역사에서 미학(美學)을 찾는데, 천하쟁탈전에서 이기더라도 왕조의 수명은 얼마가지 않으나 역사라는 캔버스에 그려진 의(義)의 미학은 영원히 남는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유비와 공명은 죽을 때까지 완고하게 자신의 미학에 얽매인 인물이었다. 유비는 촉(蜀) 땅에 웅거한 뒤에도 협(俠)의 용병 정신을 유지했고, 공명은 사대부로 사(士)의 미학을 관철시켰다. 유비와 공명은 최고의 협(俠)과 사(士)의 조합이었으며, 이는 후세만이 아니라 동시대 상대국 사람들의 마음도 사로잡았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지라는 대하드라마에서 이들이 주인공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는 것이다.[10]


일단 실제 역사서와 비교해 봤을 때 촉한의 인물들에게 많은 비중을 할애하고 있으며, 이들의 행동을 미화하거나 업적을 날조 부풀리는 대목이 많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비교의 기준을 정사에 맞춘다면 연의는 다분히 촉빠적인 성향을 띄고 있으며, 이 사실은 반박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비교의 대상을 원대 이전 시대의 삼국지 관련 창작물, 단적으로 삼국지평화와 비교한다면 연의는 상당히 발전한 점이 많은 작품으로서 상대적으로 삼국시대의 세 세력을 균형있게 묘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삼국지연의는 단순히 유관장 중심의 통속적인 영웅물이던 삼국지평화 수준을 뛰어넘어, 군상극적인 특성을 가진 복합적이고 비극적 요소를 갖춘 '군웅물'로서 평가할 수 있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거지만 삼국지연의란 작품은 본래 나관중이 그런 내용으로 써서 사람들이 그렇게 알게 된 작품이라기보다는 그 당시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관중이 그런 내용으로 쓴 작품이다. 흔히 보이는 촉까들이나 '촉빠 나관중의 고의 왜곡' 같은 거 강하게 주장하는 이들이 종종 잊고 있는(혹은 아예 모르는)것. 누가 왜곡을 해서가 아니라 애당초 그 작품이 태어난 땅에서는 민심 자체가 늘 촉한 쪽에 기울어 있었다는 이야기, 당장 삼국지평화의 묘사를 보면 연의는 그 시대 작품치고 굉장히 다른 세력을 우대한 작품이다.


삼국지연의는 이전과는 달리 조조를 "단순하기 짝이 없는 평면적인 악당"으로만 묘사하지는 않는다. 연의의 조조는 군사적인 재능과 뛰어난 지략을 갖춘 영웅으로서의 외관을 갖추고 있으되, 내면적으론 형식적인 충심을 지녔으나 그 밑으로 끝없는 야망을 품고 있고, 의외로 인정많은 면을 지녔으되 자신을 위해 타인을 서슴없이 희생시키는 잔혹함을 동시에 갖춘 대단히 이중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는 반론이 있다. 물론 조조는 이미 예전부터 악인으로 여겨지고 있었지만, 정사 등에 표현된 그의 장점도 버리지 않고 표현했다. 조조가 죽는 장면을 보면 그의 과거의 악행의 응보를 받는 것처럼 묘사하지만, 조조 본인은 죽을 것 같자 신하들이 하늘에 제를 올려보자고 하자 "하늘이 정한 천명이니 제를 올려도 소용없다"며 죽음을 받아들이고 처첩들에게 스스로 살림을 해서 살라고 얘기한다. 그리고 조조가 죽고 난 뒤 삽입된 업중가에선 "지략도 뛰어나고 문장도 잘 짓고 부하들과도 사이가 좋고, 이만한 사람이 그냥 신하로만 있겠냐"고 얘기하고 무정하다고 얘기할 수 없다고 표현했다. 또 업중가의 마지막 구절은 죽은 사람 가지고 평하기 좋아하는 서생들을 무덤 속에선 비웃는다라고 얘기하며 끝난다. 단순 악역이라기엔 너무나도 당당한 인물로 표현하고 있다.


보통 외면의 재능이 있으면 내면으로도 좋은 품성을 가지고, 외면이 찌질하면 내면도 찌질하기 마련인 고대 소설에서 이처럼 복합적인 인물은 찾기 어렵다. 물론 당시에는 "겉과 속이 다른 간웅"을 묘사하려는 의도가 컸겠지만, 이런 묘사는 "유교적 도덕성"에 둔감해진 현대에 와서는 오히려 조조의 평가를 상승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거기다가 삼국지평화에서는 같은 장면이라도 조조를 악인으로 묘사하는 게 한두 장면이 아닌데, 일례로 관우가 유비를 찾아 떠나려고 하자 조조는 관우를 계략을 써서 잡으려고 하고, 헌제의 아들을 길가에서 참수시키는 등 완전한 악역으로 등장했다.


또 이전의 삼국지 관련작에서는, 조조를 제외한 위나라 인물은 지극히 비중이 적었다. 심지어 삼국지평화에서는 조조가 "나에게는 모사가 없다"라고 한탄하는 장면까지 있다. 사실상 창작물의 세계에서 위나라의 신하들은 거의 존재감이 없었던 것이다. 그 때문인지 왠지 장료가 모사 취급을 받기도 했다. 이에 반해서 연의에서는 곽가 등의 위나라 측 인물에게도 어느 정도 존재감을 주고 있다.


오의 경우도 이전의 삼국지 관련작에서는 단순히 손견이 잠시 출연하거나, 적벽대전에 이름을 올리거나, 관우의 죽음이나 이릉 전투에서 약간 등장하는 정도였지만, 연의에서는 오나라의 성립이나 멸망까지 잘 묘사하고 있다. 단, 손권 말년의 후계자를 둘러싼 삽질과 황실 내부의 암투가 빠져버리고, 마지막 황제 손호의 막장 행각도 대충 넘어가 실제역사보다 나아 보이게 되었다. 아마도 중국역사상 처음으로 강남에서 일어나 천하를 차지한 명대에 쓰여진 소설이라 같은 강남 기반의 오를 까기는 힘들었던 모양이다. 물론 삼국지는 군담소설이다보니 대놓고 쌈박질하거나 메인 플롯에 영향을 크게 주지 않는 만큼 굳이 다뤄야 할 필요를 못 느낀 나관중이 그냥 빼놓았을 수도 있다.


실제로 삼국지연의를 보면 위나 오의 인물들이 명백히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부분들이 짤막하게나마 많다.[11] 이런 부분에서 위나 오의 인물들은 각자 용기와 지혜를 통해 사태를 해결하는 부분을 보여주고 있어 그 전의 삼국지평화와는 차별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즉, 주인공은 촉이되 다른 세력도 최소한 자신들의 에피소드에서만큼은 주인공으로서 그리고 있다.


유비의 경우는 진수의 정사 삼국지에서는 조조에 버금가는,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고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으며, 군략에도 뒤지지 않는 효웅으로 평가받는데 반하여 연의에서는 전장에서의 활약은 전부 관우, 장비, 조운이 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전략적인 면은 죄다 제갈량의 뛰어난 지혜덕인 것으로 바꿔 놓아, 아무 활약이 없는 무능한 인간으로 만들어 놓았다. 심지어는 제갈량이 기용되기 전의 승리조차 제갈량 기용 후로 슬그머니 옮겨 가며 공로를 빼앗겼다.[12] 게다가 툭하면 울거나 신세한탄이나 늘어 놓아, 현대 독자들에게는 오히려 찌질이로 보일 지경이다. 거기다가 정사에서는 유비군도 적벽대전에 참전했고(연합군 병력도 유비군 2만, 손권군 3만으로 별로 밀리지도 않는다) 주유의 남군 공략도 도와줬는데도 불구하고 연의에선 적벽대전은 강건너 불구경하다 퇴각하는 조조군 뒷치기나 하고, 남군은 주유가 부상입으면서 필사적으로 싸워 조인을 몰아내자 손하나 까딱 안 하고 성만 낼름 먹어버리는 모습을 보인다. 손권이 계속 형주 돌려달라고 하는게 정사보다 연의가 더 정당성있어 보일 지경. 이 정도까지 오면 나관중이 위빠라도 되는 것처럼 보인다. 조조는 희대의 영웅으로, 유비는 인덕인덕 거리기만 하고 능력 없으며 최대한 찌질하게 보이도록 해놨다.


나관중이 유교와 수호지의 영향을 받아, 유비를 무보다는 문에 치중하는 유학의 이상적인 군주상으로 잡은 데다가, '스스로 나서기 보다는 호걸들을 조정하는 역'인 수호지의 송강과 비슷한 인물상으로 그리려 하다보니 현대 독자들의 눈에는 찌질하게 보이게 바뀌었다는 것이 정설이다.[13] 이렇게 인덕을 강조하기 위해서 유비의 묘사는 팔이 길고, 귓볼이 두툼한 등 부처의 81상과 닮은 모습을 제법 보인다.


그러나 인덕이 강조되었다고 하지만, 근대 이후 유비는 중국인들에게조차 무능하지만 음흉한 인물로 여겨지니[14], 이렇듯 유비의 묘사는 소설을 위해서 많이 달라진 감이 많다.


이 부분에 대해 조금 더 정리하면, 유불도 삼교의 조화를 중심으로 한 중국 정서에서 보자면 그들에게 가장 완벽한 군주는 요, 순 임금이다. 즉 '무위의 치'[15] 군주는 자비로움과 포용의 태도로 모두를 감싸안을 뿐 마구잡이로 군림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사의 유비는 능력과 결단성도 뛰어난 편이나 이러한 면들이 연의에서는 거의 모두 사라져 버렸다. 전대의 한고제 유방과도 상당히 비슷한 경우, 유방 역시 정치적인 능력, 식견, 인용술, 야심, 군사적인 능력 모두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초한지 등 창작물에서는 군림하지 않으며 한발짝 뒤에서 자신보다 뛰어난 부하들을 쓰는 모습만 강조되며 그리고 이후 토사구팽까지 무능력하고 음흉해 보이는 것과 같은 경우.


약간만 더 부연해 보자면 유비의 이런 캐릭터 상 정립은 시대가 지나면서 강고해진 촉한정통론이 유학 관점으로 재해석되는 과정에서 유비일당과 제갈량이 맨주먹으로 시작해 명분과 실리를 다 쟁취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줄타기하고 싸운 면모는 슬쩍 묻히고 유능한 선비 출신 신하(->제갈량)와 인덕있는 군주 유비라는 이상적인 군신관계 위주로 부각되어 가면서 생긴 일이기도 하다. 제갈량은 당대 이후로 최고의 재상이자 선비로서 치국의 근본을 안 인물이라며 사후에도 자국이나 적국에서나 칭송받은 인물이다. 당장 삼국을 통일한 서진의 초대군주 사마염부터가 '야, 제갈량만한 신하 어디 없냐?'라고 했을 정도에 제갈량이 남긴 팔진도를 장수들에게 학습시키는 면모를 보였고 서진시기부터 시작해 많은 선비들이 그를 흠모하는 모습을 보여주였다. 


이런데다가 제갈량이 애당초 출사한 과정이라는거 자체가 재야에 묻혀있던 '선비'가 '이상적인 군주'의 인정을 받아 등용되어 여차하면 니가 왕 하란 식으로 '전적인 신임'을 받고, 마음껏 원없이 자신의 이상과 능력을 펼치며 후대에도 명성을 날린다는 이상적인 얘기고[16]여기에 그렇잖아도 북벌을 하고 싶어 안달하던 송나라 이후 한족의 분위기까지(한국으로 따지면 병자호란 이후 사회분위기) 영합하게 되면 선비들한텐 제갈량이야말로 꿈의 화신 같은 게 된다. 기본적으로 삼국지연의 같은 소설은 당대 관직진출이 좌절된 선비들이 주로 쓰던 것이었고 때문에 더 나아가 제갈량은 선비의 사표 중의 사표가 되어야 하고 그를 등용한 군주의 캐릭터 해석도 유가적인 이상의 극치인 군주 중의 군주다운 뭔가가 필요해지는 것으로 유비의 캐릭터 정립은 바로 이런식으로 이루어진것이다. 여기에 관우 신앙까지 겹쳐져서 '그 관우'가 섬겼던 유비라는 군주 자체가 더욱 이상화되는 과정은 덤이다.


단, 나관중의 원작에 모종강 부자가 주석을 달면서 점차 친촉/반위적인 내용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나관중의 관심이 "영웅 쟁패"였다면, 모종강 부자의 그것은 "권선징악"에 가까웠다.[17] 또한 루쉰이 정리한 차이점에 따르면 나관중 본은 촉에 불리하거나 덜 멋진(…) 부분이 많다. 오랜 떡밥이던 "안량이 유비에게 관우에 대한 얘기를 듣고 말을 걸려다가 살해당한다"는 것은 나관중 본에서만 나오며 모종강 본은 삭제되어있다. 또한 손부인이 유비의 패배 소식을 듣고 자살하는 것은 모종강 본에서 추가된 것이며 심지어 나관중 본은 제갈첨이 등애에게 항복할까 망설이는 부분까지 있다. 한 마디로 나관중은 촉의 인물들도 어느 정도 인간적으로 약한 모습 등을 묘사했지만 모종강 본에 가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촉이 되는 것이다. 모종강의 인지도가 나관중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에 나관중이 자신과 관계 없는 부분까지 욕먹는 것.


제갈량의 북벌도 촉이 크게 패한 건 1차 북벌 한 번 밖에 없고 나머지 북벌에서 일어난 전투는 거의 다 이기거나 큰 피해없이 후퇴했는데 연의에선 진창에서 학소가 제갈량을 완벽히 발라버리고 사마의도 위수에서 한 번 제갈량의 작전을 간파해 큰 피해를 입히는 걸로 바뀌었다. 정작 정사에서 진창 전투는 좀 찔러보다가 안 되니까 그냥 물러난 것에 가깝고 사마의는 전투로는 제갈량을 한 번도 못 이겼다.


끝으로 정사를 참고하면서도 진나라 사관이었던 진수가 차마 건들 수 없었던 사마씨의 찬탈이나 기전체 사료의 특성인 뒤죽박죽한 부분들(예컨데 합비전투)을 나름대로 매끄럽게 정리함으로서 정사보다도 서술이 낫다라고 할 수 있는 부분들도 없진 않다. 당대에 이런 민담 수준을 뛰어넘는 고퀄리티의 역사 소설을 남길 수 있다는게 놀라운 지경. 현대 사극 작가들은 반성하도록 하자


참고

/피해자

/수혜자

삼국지연의/이명

삼국지/연표

삼국지/가공인물

3.2. 형성에 관하여[편집]


작가 나관중은 "민담"을 많이 인용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 삼국지연의를 그 이전 시대의 삼국지 관련 작품들과 비교해보면 의외로 민담의 비중은 적고, 많은 부분이 역사적 기록에 근거한 창작 과정을 거쳐서 구성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저본이 되는 삼국지평화의 내용 자체가 삼국지 연의의 총량중 10% 수준이다. 마개조라는 말로도 부족하고 사실상 재창작.


실제로 가정본(1522년의 판본) 삼국지통속연의의 서문을 써준 장대기는 나관중이 정사 삼국지를 바탕으로 연의를 편차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다만 현대의 연구에서는 정사 삼국지를 직접 참조하였다기보다는 자치통감의 축약본을 직접적인 자료로 썼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사 삼국지는 기전체라서 구조가 복잡하여 자료로 쓰기 상당히 까다롭기 때문에, 편년체 형식인 자치통감이 이야기를 만드는 자료로서는 더 나았을 것이다.


지난 원나라 시대에는 민간에 전해지는 역사를 바탕으로 평화를 만들어 이야기꾼에게 구연하게 했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오류가 많고 너무나 저속하여 교양있는 사군자들이 대부분 싫어했다. 그래서 동원 땅 출신의 나관중이 진수의 삼국지를 바탕으로 역사적 사실을 신중하게 취사선택하여 편찬하고 삼국지통속연의라 이름했다. 그 문장은 심오하지 않고, 말투는 그다지 속되지 않으며, 사실을 기록하여 역사 본연의 모습에 접근했다. 독자 모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 가정본 《삼국지통속연의》 서문 / 부산대 삼국지문화기행 교재에서 인용.


오히려 삼국지연의 이후 시대에 발생하는 민담이나 파생작품들은 대부분 삼국지연의에 기초하여 연의를 일부 변형하는 방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3.2.1. 모종강본[편집]


삼국지연의에 대해 논할때 결코 빠트릴 수 없는 판본이 바로 모종강본 판본이다. 청나라 강희 연간에 모종강 부자가 엮은 판본으로, 현대 한중일에서 가장 잘알려진 판본이 바로 이것이다. 물론 고전소설의 특성상 모종강의 임의적 판단에 의해 삭제되거나 추가되거나 개편된 장면도 많다. 때문에 나관중본을 중시하는 사람들에게는 반쯤 까야 제맛으로 통하는 판본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삼국지가 울고있네>의 저자로 잘 알려진 리동혁 역시 극렬 모종강까이고[18], 한국에서도 황석영 삼국지에서 나관중본을 역본으로 쓴 이후, 모종강본의 주가가 많이 내려갔다.[19]


그런데 그렇다고 모종강본이 삼국지연의의 품질을 떨어트린 저열한 판본인가 하면... 그렇게 일방적으로 판단하기엔 여러모로 난점이 많다. 모종강본이 가지는 가장 큰 장점은 소설로서의 매력이다. 나관중본에서 관우의 최후(라기보다는 리타이어) 장면은 싸우다말고 승천하는 것으로 처리되는 등[20] 구전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있었지만, 모종강본에서는 이를 소설에 맞게 각색했다.[21] 특히 소설로서의 재미는 극렬 모종강까인 리동혁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모종강본이 나온 다음 소설로서의 질이 훨씬 올라갔으니 말인데, 나관중본은 사실 소설로서는 어수선한 데가 많았다. 품격으로 보아 나관중본은 아직 구전 이야기의 냄새가 짙다면 모종강본은 글을 아는 사람들도 볼 만했다.

리동혁, <삼국지가 울고있네>


무려 20여가지나 난립하던 삼국지연의 판본들이, 나중에는 모종강본 기준으로 교통정리가 된 것만 보더라도 이 판본의 위력을 알 수 있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건, 청대 이후 한자문화권에서 사랑받은 삼국지연의란 대체로 모종강본을 말했다는 것이다. 또한 리동혁의 모종강 비판에 대해 삼국지연의 전문가인 정원기 교수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가정본을 나관중(원)본이라 호칭할 뿐만 아니라, 가정본이 모종강본보다 우수하다는 표현을 수차에 걸쳐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지나치게 편향적인 견해이다. 그렇다면 모종강본 출현 이후 3백 년 동안 가정본은 어디 가고 모종강본이 독서계의 주도권을 잡았단 말인가. 가정본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모종강본이 유일한 통행본이 되었다면 모종강본의 우수성이 입증된 것이다.

출처


다만 소설적 완성도와는 별개로, 모종강본에서 호오가 갈리는 것은, 소설의 주제의식과 메시지가 나관중본과는 달라졌기 때문이다. 나관중본은 '통속연의'라는 말 그대로, 여러 인물들이 보여주는 통속적인 이야기에 가까웠다. 즉 인물 개개인의 '멋짐'이라는 통속적인 면을 보여주던 소설이였다. 그런데 모종강은 여기서 강한 주제 의식을 넣기 위해, 촉한에는 버프를, 위에는 너프를 가한 것이다. 때문에 나관중본을 중시하는 쪽에서는 구시대적이고 케케묵은 가치관이 책에 배여버렸다고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 물론 모종강본을 좋아하는 쪽에서는, 오히려 이런 강력한 주제의식을 더 선호하기도 한다. 사실 권선징악이라는게 정말 구시대적이고 케케묵은 가치관이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고(...)


물론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황실이라는 이유로 한의 적통을 자처하는 유비가 어딜봐서 선이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전근대 동아시아에 공화주의가 보급된 것도 아니기에 너무 가혹한 잣대일 순 있다. 그리고 위선적이라고 비판도 많이 받지만 작중에서 그나마 주인공이라고 현대가치관으로도 긍정적인 인덕을 내세우는 군주는 유비 정도고 조조라고 딱히 민중을 위하는 혁명가도 아니다. 또 위에서도 나온 얘기인데 이러니 저러느니 해도 한때 엄청 격하된 조조 재평가의 시작은 이 삼국지연의고 모종강본이라고 이걸 아예 죽여놓지는 않았다.서주대학살조차 안 나오는게 삼국연의인데 당장 조조의 캐릭터가 확립된 유명한 여백사 에피소드가 나오는 4화에서 모종강의 서시평을 보자


조조가 백사 일가 사람들을 죽인 것은 실수였으므로 양해해줄 수 도 있다. 그러나 백사까지 죽이는 데 이르러서는 그 악독함은 극에 달했다. 그래놓고서는 다시 "차라리 내가 남을 배반할지언정, 남이 나를 배반하지는 못하도록 하겠다"고까지 말하는데, 독자들은 이에 이르러서는 그를 나무라고 욕하면서 그를 죽이려고 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점이야말로 조조가 남들보다 뛰어난 점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시험 삼아 천하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가 누구인가? 그리고 감히 입을 열어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 도덕과 학문을 강의하는 사람들은 일단 이 말을 뒤집어서 "차라리 남이 나를 배반하게 할지언정, 내가 남을 배반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은 듣는이는 나쁘지 않겠지만, 그들이 하는 행동을 자세히 살펴보면 반대로 하는 일 하나하나가 모두 조조의 이 두 마디 말을 몰래 배우고 있다. 그러므로 조조는 말과 마음이 일치한 소인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이런 무리들은 입은 옳아도 마음이 글러서, 그 말과 행동이 직설적이고 통쾌한 조조보다 도리어 못하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이것이 오히려 조조가 남들보다 뛰어난 점이다."


-삼국지연의 4회, 모종강의 서시평-


감히 말하건데, 과거 왕침의 위서부터 오늘날 소위 조조를 재평가하는 수많은 관련매체에 이르기까지 모종강의 이 평가를 능가하는 해석이 나왔던가? 아니 오히려 현대의 조조 재평가들이라는 것들이 나관중과 모종강이 수백년전 짜놓은 그물에 걸려 허우적 거리는 꼴이 아닌가?


한편 모종강본의 특징 중 하나는 각 화마다 실린 서시평들과, 본문 중간중간에 마치 나무위키 주석과 취소선 드립(...)마냥 적혀있는 협평들이다. 서시평은 각 화에 대한 모종강의 감상이고, 협평은 적절한 해설과 농담이 섞인 문장들이다. 1화의 몇몇 협평들 예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협평은 괄호 안에 굵게 표시)


건녕 2년 4월 보름날, 황제가 온덕전에 나와 옥좌에 앉으려고 할 때 전각 모퉁이로부터 광풍이 일더니 푸른 구덩이 한 마리가 대들보 위에서 스르르 내려와서 옥좌 위에 똬리를 틀고 앉았다.(백사(白蛇)를 베어죽인 후 한나라가 일어났는데[22], 청사(靑蛇)가 나타나자 한나라가 위태로워진다. 청사와 백사가 멀찍이서 서로 대(對)를 이루고 있다.)

광화 원년에는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는 일이 있었다.(이 징조는 더욱 환관들에게 들어맞는 것이다. 남자가 거세를 당하는 것은 곧 수컷이 암컷으로 변하는 것이다. 환관들이 정사에 관여하는 것은 곧 암컷이 또 수컷으로 변하는 것이다.)

황제는 일개 환관에 지나지 않는 장양을 높여서 아버지라 부르기까지 했다.(이러한 장씨 아비가 있으므로, 자연히 장각 등 장씨 형제 세 사람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당주(황건적)는 곧장 궁중으로 가서 거사계획을 고해 바쳤다.(환관은 반대로 첩자가 되고, 첩자는 반대로 자수를 하는데, 이를 통해 내부의 도적이 바같의 도적보다 더 나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덕 曰: 나는 본래 한 황실의 종친으로 성은 유, 이름은 비라고 하오. 지금 들으니 황건적이 난을 일으키고 있다는데, 도적들을 깨트려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주고 싶은 뜻은 있으나 다만 내게 힘이 없어서 할 수 없는 것이 한스러워서 길게 탄식을 했던 것이오."

장비 曰: "나에게 어느 정도 재산이 있으니 고을 안의 용사들을 불러 모아 공과 함께 큰일을 도모해보는 게 어떻겠소?"(결국 재산이 있는 사람은 큰일을 하기가 쉽다.)

황제는 대장군 하진을 불러서 군사를 동원하여 마원의를 잡아다가 목을 베도록 했다. 그 다음에는 봉서 등 관련된 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하옥시키도록 했다.(왜 즉시 죽여 버리지 않는가?)


또한 탐관오리 독오가 유비에게 뇌물을 요구하다가 트러블이 일어나고는 장비에게 털리는 유명한 에피소드에서는 이런식으로 드립을 치기도 했다.


독오가 큰 소리를 버럭 지르며 말했다: "네가 황제의 종친을 사칭하면서 공적을 거짓으로 보고하는가? 이번에 조정에서 조서를 내린 것도 바로 너 같은 엉터리 관리들을 가려내서 퇴출시키려는 것이다."

(중략)

독오가 사정했다: "현덕공, 제발 날 좀 살려주십시오!"(내가 어찌 감히! 나는 본래 황제를 사칭하고 공적을 거짓 보고했던 사람인데 어찌 감히 공을 구해줄 수 있겠는가?)

현덕은 본디 마음이 인자한 사람인지라 급히 장비를 꾸짖어 매질하는 손을 멈추도록 했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진짜로 협평의 용도는 나무위키 주석 및 취소선과 같다(...) 권선징악적 주제라는 평 때문에 무겁게 느껴질 수 있지만, 협평의 문체는 매우 유쾌하고 농담이 많은 편.


4. 비극적 성격[편집]


삼국지연의는 한 마디로 말해서 비극 작품이다.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나 그것을 이루는 것은 하늘이다. (謀事在人成事在天, 모사재인성사재천) - 제갈량


사마염이 중국을 통일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삼국지연의의 내용은 결국 유비, 조조 등 모든 영웅들의 노력이 대부분 허사로 끝났음을 보여주며, 뒷사람들 탄식하며 공연히 가슴 설레네!(後人憑弔空牢騷)[23]라는 마지막 문장은 상당히 허무주의적으로 보일 수 있다. 사실 처음 삼국지를 읽은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허무하게 사라지고 실패하는 영웅들의 최후를 보면 "재수없는 놈은 뭘 해도 안 된다"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그야말로 인생무상.


실제로 유비의 촉은 명분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힘이 없어 망해버리고, 조조의 위는 힘은 강했지만 (소설상으론)찬탈로 건설된 나라인만큼 신하였던 사마씨에게 무력하게 찬탈당하며[24], 오나라도 결국엔 세력이 밀려서 멸망한다.


중국 현대 정치사상사 전공이긴 하지만 엄연히 중국정치를 전공한 학자인 피터 R. 무디 주니어는 "The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and Popular Chinese political thought"는 이 엔딩과 전체 구성을 보고 시니컬하다고 평하기도 했다. 이건 삼국지연의라는 문학 작품에 드러난 심성에 대한 평가.


이는 애초에 동양의 군담과 서양의 기사 이야기들은 그 테마가 좀 다른데서 기인하는 평가로, 삼국지에 대해 서양식 기사 이야기를 일컫는 단어인 Romance를 붙여 번역하긴 하지만[25] 서양식 기사 이야기가 강적, 특히 이교도와 맞서 싸우며 기사도를 지켜내는 절대선에 가까운 용사를 칭송하는 이야기라고 하면 동양식 군담은 대개 권력다툼과 영웅들의 활약이 긴 역사 안에서 갖는 본질적인 허망함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선악 대립에 익숙한 서양인들이 선악의 구별이 희미하고 선도 악도 세월 속에서 스러져버리는 동양식 세계관을 염세주의적이라고 느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아예 인생무상을 아주 잘 나타냈다고 평가받는 명문으로 시작하는 헤이케모노가타리나 괜히 뒷사람이 영웅들을 추억하는 쓸쓸한 이야기라 강조하며 시작하고 끝나는 삼국지연의가 대표적인 예시.[26]


5. 일관성이 없는 부분들[편집]


삼국지연의는 현대적인 시각에서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삼국지연의에서 구전 화소들을 상당부분 채택한 결과이다. 개개의 구전 화소들이 덕지덕지 붙다 보면 역사적 사실이라든지 다른 화소들과 비교할 때 일관성이 없을 수밖에 없다.[27] 그래서 현대의 삼국지를 다루는 매체들은 이 부분을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도 꽤 많이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제갈량의 동남풍 드립은 사실 천문을 유심히 관찰해서 타이밍에 맞춘 쇼맨십이었다던가.


장각이 과거에서 떨어졌다고 서술이 나오는데, 실제로 과거제는 수나라때부터 나온다.

정원의 관직은 병주자사이며 형주자사가 아니다.(낙양입성 직후 집금오에 임명) 참고로 형주자사로 유명한 유표는 동탁 집권기에 형주자사로 임명된 사람이다.

관우의 천리행을 지도에 그려보면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빙빙 돌면서 가고 있다.

서서가 계책으로 조인을 물리치던 시점에 조인이 뜬금없이 번성에 주둔하고 있다. 번성은 유표의 거점인 양양의 바로 이웃에 있는 성인 만큼 유비가 주둔한 신야보다 남쪽에 위치하고 길도 하나뿐이라 조인이 신야를 우회해 번성으로 가서 주둔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제갈량이 적벽대전에서 동남풍을 불게 하여 이 동남풍을 이용하여 화공을 사용해 조조군을 격퇴시켰다고 묘사되었지만 그런 능력을 장합이나 사마의에게는 써먹지 못했다. 심지어 안개가 낄 것을 예측한 젊은 시절과는 달리 북벌중에는 소나기가 내릴 것도 예측 못해 상방곡에서 거의 다 잡을 뻔한 사마의를 놓치기도 한다.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화공을 받은 직후 패주하다가 복병을 여러 번 만나는데[28] 연의 내용을 보면 조조는 남군 강릉으로 가기 위해 남이릉 길을 택하는데, 하늘에 기도를 해 동남풍을 불게 하고 유비 진영으로 귀환한 제갈량이 조운에게 형주/남군 가는 길 중 형주 가는 길을 막고, 장비에게 남이릉/북이릉 가는 길 중 북이릉 길로 가라고 한다. 그리고 퇴각하던 조조는 조운을 만나 털리고[29], 남이릉 길로 가던 중 장비에게 습격당한다(…)

적벽대전 이후 주유가 남군성을 공략하는 도중에 유비군에게 강릉, 양양, 남군을 스틸당하는데 그중 양양은 어느새 관우가 형주공방전으로 공격할때 어느새 조조의 땅으로 나온다.

조비가 5로 침공전에 남만에게 촉을 공격하라고 애기하는데, 낙양과 익주의 거리가 멀고 가는 길이 험하고, 사신이 남만에 도착한다고 해도 최소 1년이 걸린다. 그럼 맹획에게 도착한 사신은 등애인가? 차라리 그 재능으로 유선이나 제갈량를 암살하지 실제로 5로 침공은 허구이며, 맹획의 거병은 손권의 명을 받고, 사섭의 권유로 통해 옹개가 끌어들여서 한것이다.

6. 조선전래 및 유행[편집]


대략적으로 연의가 조선에 들어온 시기는 16세기 초중엽 쯤으로 추정되는데 2000년대에 16세기 중엽 판본으로 추정되는 삼국지연의의 금속활자본이 발견된 적이 있다.해당기사, 이후에도 적벽가 등에서 보듯이 어느 정도 조선만의 독자적인 삼국지 관(?)이 형성되었던 듯 하다.


비슷한 시기 조선왕조실록에도 잠깐 언급되는데, 선조 2년(1569년)에 기대승이 선조 임금 앞에서 '삼국지연의라는 이 책이 나온 지가 오래되지 아니하여 소신은 아직 보지 못하였으나, 간혹 친구들에게 들으니 허망하고 터무니 없는 말이 매우 많았다고 하였습니다.' 라고 이런 책이 인출(印出, 인쇄)되기까지 했다며 개탄하고 연의와 함께 초한지, 전등신화와 태평광기까지 싸그리 모아서 깐다. 이 말 이전에 선조가 '장비의 고함에 만군이 달아났다고 한 말은 정사에는 보이지 아니하는데 연의에는 있다고 들었다'라고 한 것을 보면 어쨌거나 임금인 선조도 연의가 유행한 것을 주위에서 들었을 정도로 금세 알려진 책이던지, 아니면 선조도 실제로 봤는데(…) 대놓고 봤다고 하면 좀 그러니까 그렇게 언급한 것일 수도 있다.해당 실록기사 어쨌거나 유학자의 입장에서, 실제의 역사가 아닌 창작물이 그럴싸하게 회자되는 세태가 우려되었던 듯 하다. 근데 솔직히 그만큼 재미있긴 하다. 온갖가지 오락물이 넘쳐나는 지금도 수많은 삼덕후가 양산될 정도인데, 조선시대 사람에게 이게 얼마나 흥미진진했을지는 알 만하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 자료를 접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삼국지 문화는 현대에 별로 전달되지 못했다. 후일 문체반정을 일으켰을 정도로 문체적으로 보수적이었던 정조는 삼국지를 잡스러운 책이라고 나는 삼국지(연의)를 한 번도 보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정조는 이순신을 칭찬하면서 '제갈공명과 싸워도 누가 이길지 모른다'고도 했다지만 애시당초 조선이 성리학 국가였고 그 때문에 촉한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한 경우가 많았던 걸 생각하면 애초에 조선에서 그리도 떠받들던 주자가 정리한 역사서 강목도 촉한정통론늘 주장하니 진짜 역사서만 보고 연의는 안 봤을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홍재전서를 보면 어떤 신하가 연의의 오로침공전 에피소드와 제갈량 거문고 공성계(…)[30]를 얘기했는데 그냥 넘어갔다. 이런 걸 보면 진짜로 안 봐서 지적을 못 한 걸 수도 있다.[31]


7. 번역[편집]


현대에 들어서도 한국에선 월탄 박종화, 김구용 등 많은 작가들이 삼국지 번역을 시도했으며, 근래에는 이문열 평역 삼국지, 황석영 삼국지 등이 현대어로 번역하면서 문학적 가치를 높였다 하여 유명해졌다. 하지만 의미를 올바르게 번역하지 않았다는 비판도 제기되어 본 삼국지, 정원기 교수의 정역 삼국지, 그리고 박기봉의 완역 삼국연의 등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고 환빠들을 위한 맞춤형 장정일 삼국지도!


어째서 한학이나 중문학을 전공하지 않았을 이들 작가들이 삼국지를 번역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을 텐데, "삼국지연의" 원문은 사서삼경 원문을 독해할 정도의 실력이면 어렵지 않게 읽어 나갈 수 있다. 다만 한자학, 중국어문학, 역사학 등 전문적인 배경 지식을 갖고 번역된 게 아니므로 이들 작가들의 번역본에는 대개 '평역'이라는 말이 따라붙는다. 말하자면 아마추어 번역이다. 대신 작가들이 번역한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읽기 쉬운 문장을 쓰기 때문에 진입 장벽이 낮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 한학이나 중문학 전공자들이 번역한 작품은 번역이 충실하고 오류가 적지만 대체적으로 문장이 딱딱하고 읽기 어렵다는 단점이 생긴다.


일본의 경우, 삼국지 통속연의라는 제목으로 에도 시대에 널리 퍼졌다. 근대에는 소설가 요시카와 에이지가 번역한 판본(요시카와 에이지 삼국지)이 널리 읽혀졌으며, 이것이 우리나라에도 수입되어 국내 삼국지 번역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고우영 삼국지 등 만화로 번역되는 경우도 많다. 대상 연령층을 낮게 잡은 것이 많으며[32] 이해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지만 재미없을 것 같거나 만화로 표현하기 적당치 않은 부분을 뭉텅 잘라먹는 경우가 많다. 심할 경우 왜곡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입문서로는 쓰되 맹신하지 말자.


한국 삼국지연의의 번역본에 관해서는 삼국지/관련 작품 문서 참조.


7.1. 조루 현상[편집]


삼국연의는 대부분의 작가들이 번안 과정에서 조루 현상을 일으킨다. 작가들은 초반부에는 오리지널 에피소드를 적극적으로 섞으며 맛깔나게 창작한다. 이 때는 자신이 나관중을 능가할 수 있다는 패기가 느껴진다. 이 패기는 대개 적벽대전까지 지속된다.


그러나 적벽대전이 끝나고 나면 모든 작가들은 이 마귀 같은 대하소설에 손 댔다는 것을 후회하며 손모가지를 잘라버리고 싶은 유혹에 시달리게 되는 듯. 그도 그럴 것이 적벽대전을 지나도 삼국정립 까지는 한참 멀었다(…). 원판 연의에선 삼고초려가 37화에 펼쳐지고 화용도가 50화인데, 추풍오장원이 104화다. 즉, 적벽대전은 절반에 조금 못 미친다.[33] 추풍오장원 까지만 쓰더라도 지금까지 쓴 만큼 더 써야 한다.


서천 정벌 이후 관우, 장비, 유비가 차례대로 죽고, 메인 악역인 조조마저도 죽어버리는 84화의 이릉대전, 85화의 유비 사망에 이르면 처참한 비극에 작가는 정신적 충격을 받아 의욕을 상실한다. 그렇다고 이릉대전이 오가 대활약하는 계기가 되는 것도 아니라서 이후 오의 비중은 급감.


그 뒤로는 어떻게든 한시라도 빨리 이야기를 끝내기 위해 본래 연의의 내용에 따라 적당히 진행하게 된다. 다행히도 제갈량이 있어서 아직은 버틸 수 있다. 이제 부터는 제갈량 원 톱이다![34]


남만 정벌은 개그 캐릭터 맹획과 타사대왕, 올돌골 같은 정겨운 이민족들의 도움으로 근성 있게 버텨나간다. 사실 이미 판타지 소설이 되었으나 작가들은 아무런 위화감도 느끼지 못한다(…). 바로 전의 이릉대전이 줄초상인 걸 감안해 남만 정벌은 특별히 죽는 네임드 없이 가볍게 진행된다.


그리고 제갈량의 북벌. 드디어 최종보스인 사마의가 등장했다. 제갈량과 사마의의 치열한 대결이 벌어지자 작가들은 가까스로 남만의 독기에서 빠져나와 그나마 제정신인 내용을 쓰기 시작한다. 상대가 조조의 뒤를 책임질 "지장 스타일의 적"인 사마의라서 제갈량과 계략을 주고 받으며 싸운다. 조조와 유관장 시절 만큼의 간지폭풍 전개는 아니더라도 군담 다운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전의 이야기들이 호쾌한 활약으로 앞날이 기대되는 희망찬 전개(특히 삼고초려-적벽대전-서천정벌로 이어지는 유비군 전성기.)였다면, 북벌은 그 제갈량이 나섰는데도 온갖 사건사고로 발목 잡히고 조운도 세상 뜨고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속 터지는 전개(…).


결국 제갈량은 가을 바람 타고 세상을 떠나버린다(…). 그리고 대부분의 작가들은 여기에서 제갈량의 죽음과 함께 자신도 한계를 느껴 붓을 꺾고 쓰러지고 마는 것이다. 차라리 죽여라 사마의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싶어도 사마의는 후반부에 툭 튀어나온 감이 있고, 상대하는 인물들이 기껏해야 조상 정도라 길게 진행하기가 힘들다(다만 하후돈-조인-조진 + 조휴-조상 등으로 이어지는 범 조씨 일족과 사마씨 일족 사이의 병권 다툼은 정치적인 에피소드이긴 하지만 충분히 많은 내용을 쓸 수 있다.). 이미 최강자인 제갈량과 맞수로 싸웠는데 그의 상대로 던져줄 자가 마땅치 않다.


나관중도 제갈량 사후는 지루했는지 1권으로 압축했다. 제갈량이 죽는 부분이 연의 104화인데, 나머지 10여 화가 그 후 50여 년을 다룬다. 시대 전체로 보면, 제갈량이 사망한 시점은 삼국지에서 다루는 시기의 중간 쯤이다. 연의가 총 100여 년의 역사를 다루는데, 제갈량이 사망한 시점이 딱 오십년 쯤 흘렀을 때다. 역사적으로 분량을 제대로 맞추려면 제갈량이 죽었는데 지금까지 쓴 만큼 더 써야 한다는 것. 게다가 그 1권의 비중도 편차가 심하다. 대부분이 제갈량이 사망한 뒤 촉이 멸망하는 30년 정도만 크게 다루고 위의 멸망부터 진이 오를 정벌하여 천하통일하는 부분은 119화 마지막 몇 장 정도와 120화로 압축되었으며[35] 1권의 20분의 1 분량에 불과하다.


물론 후반부에도 강유나 등애 등 흥미를 끌 수 있는 인물들은 많으나, 이전 세대의 인물들이 워낙 캐사기급 포스를 가지고 있어서 묻히는 감이 없잖아 있다. 무엇보다도 제갈량 사후의 삼국은 전쟁을 일으키는 횟수가 많지 않았다. 촉은 다시 내정에 힘 썼고 타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삼국이 개국 초기의 혼란기를 지나 안정기에 들 시기였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예전 만큼의 재미난 장면-전쟁, 암투-이 많이 나올 수도 없다. 애초에 강유나 등애[36] 또는 다른 인물들이 자신의 포스를 발휘할 무대 자체가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아예 재미나게 쓰기가 힘든 부분이다.


그래도 나관중은 조방의 폐위와 사마소의 위왕 시해, 제갈탄의 난 제갈각, 손준의 분쟁 등 위나라와 오나라의 중요 사건들도 한 둘씩 다루며 어떻게든 결말을 맺었다. 하지만 다른 작가들은 여기에서 근성이 다 떨어지며 제갈량 사후는 다룰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많은 삼국지 관련 창작물들이 제갈량의 죽음을 삼국지의 종료로 취급하고 있다. 책에서는 요시카와 에이지 삼국지, 영웅 삼국지, 드라마 삼국은 제갈량이 죽고 다음 화에서 사마의가 쿠데타에 성공한 직후 사망하며 끝난다.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 역시 전 60권 분량 중 제갈량 사후 내용은 마지막 60권, 딱 한 권 뿐이다. 그나마도 촉이 멸망하는 시점까지만 다룬다.


대한민국의 판본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요시카와 에이지본을 원작으로 한 고우영 삼국지, 장정일 삼국지 등은 원작대로 제갈량의 사망과 함께 작품이 끝나고, 이문열 평역 삼국지는 제갈량 사후 부분이 나오기는 하지만 원본에 비해 4분의 1 정도의 분량으로 축약되어 있고, 작가가 직접 축약하겠단 뜻을 밝히는 구절이 있다. 즉 1/4권만 할애하고 바로 사마염의 통일. 참고로 제갈량 사후의 비중은 자치통감에선 1/4, 모종강 본 삼국연의에선 1/8 정도라 알려져 있다.


한국의 삼국지 번역 가운데 그나마 조루 기운이 없는 건 비교적 원본에 충실한 박종화 삼국지(여섯 권 중 마지막 권 전체가 제갈량 사후 이야기다.), 본 삼국지, 정원기 정역 삼국지, 황석영 삼국지 정도. 본 삼국지와 정원기 삼국지야 괜히 창작 같은거 안 넣고 연의를 그대로 번역했으니 당연한 이치고 황석영 삼국지도 그나마 나관중본 중심 번역이라 제갈량 사후 부분에 한 권 반(15%) 정도의 분량을 할애하니 이 정도면 연의에 비해 조루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 중 상당수는 강유에게 할애되어 있는데, 위와 오를 다룰 만 하면 다시 촉으로 넘어가고 강유가 나타나는데 사실 연의도 뭐 비슷하고.


이 조루 현상을 깨고 정상적으로 삼국지 정사와 연의를 섞어서 후반부를 풀어나간 창작물이 2010년대에 하나 나오긴 했다. 바로 웹툰 삼국전투기. 작가 최훈은 제갈량 죽었으니 삼국지 끝이라는 독자 앞에서[37] "아직 삼국지 1/4이나 더 남았는데"라고 말하는 컷을 그렸으며, 실제로 1/4을 채우고 결국 에필로그로 황건적의 난을 그려 삼국지 100년을 모두 묘사하게 되었다. 많은 독자들이 제갈량 사후의 역사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또 다른 재평가의 바람도 불고 있다. 여담으로 독발수기능의 난 등을 표현할 때는 오히려 정사 삼국지를 넘어서 진서 자료에서 구해서까지 쓰며, 최소한 삼국전투기 만큼은 그의 작품 중 조루라 불리지 않을 입지를 쌓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재미를 위해 연의와 정사를 혼합한 만화이니 사실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 작품 역시 삼국전투기 문서에도 나오지만 삼국지 후반부의 조명을 잘했다는 점은 칭찬 받을 만 하지만, 작가 스스로도 미숙한 점을 후기에 인정했을 만큼 비판도 많이 받은 작품이다. 사실 삼국전투기도 아주 조루가 없던 건 아니고 시즌 2는 제갈량과 사마의의 대결로 구성한다고 해 놓고는, 정작 제갈량은 이도 저도 아닌 색기담당으로만 굴려지다 오장원 전투에서 허무하게 죽어 지각을 기다리며 매주 챙겨 본 독자들의 공분을 사기도 했고… 여러가지로 중간에 쉬는 기간도 있었고 악명 높은 지각 연재에 결국 10여 년을 끌어 간신히 완결시켰으니... 삼국전투기 후기의 이 작품을 그리려고 참고한 서적들이나 애시당초 연의에 정사 섞어서 쓰려고 했던게 실책이었다는 최훈의 토로만 봐도 창작물에서 삼국지 관련 매체를 다루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게 된다. 삼국전투기 후기


한편, 중화권(홍콩)에선 또 하나의 삼국지 만화가 제갈량 사후 사마의의 사망까지 그리려 하고 있는데 바로 화봉요원이 그것이다. 연의와 역사적 사실을 섞은 비교적 가벼운 그림체로 그린 삼국전투기와는 달리 작가 나름대로의 해석을 통한 플롯과 각종 고전들을 인용해가면서 극화체로만 삼국전투기에선 나올수 없었던 대규모 전투신을 묘사해가면서 그려가고 있는데 15년 연재하고도 이제야 유비의 형남 4군 평정을 그리고 있으니 갈 길이 멀다. 더군다나 최훈과는 달리 이 작품의 작가 진모는 진짜 성실하게 그리면서 60여 권 가까이 그렸는데도 아직도 완결까진 한참 남았으니 가히 창작물에서 삼국지를 다루는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는 능히 짐작이 갈 것이다.


코에이의 삼국무쌍 시리즈도 이런 면을 보였지만 6편에선 이 점을 해결하고자 했는지 사마사, 사마소 등 종반기의 인물도 등장시키고 있다.


7.2. 정사드립 주화입마[편집]


삼국지연의를 개역하다가 흔히 빠지는 함정. 작가가 정사드립을 치기는 하는데 훈련이 제대로 안 된 나머지 주화입마에 걸리는 현상을 뜻한다.


정사랍시고 인용은 했는데 기전체의 특성을 잘 모르고 정사의 일부만 참조하여 다른 부분에 나온 기사를 보지 않고 "이런 일은 실제로 없었다."고 당당히 말하는 경우가 가장 대표적인 예.


정사와 연의를 뒤죽박죽으로 뒤섞어서 기억하는 경우도 있다. 연의의 인물상을 중심으로, 정사의 에피소드를 끼워넣어서 캐릭터를 판단하는 것과 같은 예. 이렇게 되면 흔히 자기가 좋을 대로만 정사를 끼워넣고, 또 자기가 좋을 대로만 연의를 인용하면서 자기 스스로도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문열 평역 삼국지에서 이런 현상을 흔히 볼 수 있어서 욕을 먹었는데, 사실 전문적으로 파고들지 않으면 이런 현상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8. 관련 작품[편집]


2차 창작물[38]등의 자료는 삼국지/관련 작품 문서 참조.

9. 기타[편집]


워낙 대작인 터라 이에 얽힌 야사도 많은데, 나관중이 이걸 쓰는 동안 반쯤 미쳐서 돌아다녔다든가(뭘 묻기만 하면 소설 내용을, 그것도 앞뒤가 안 맞게 이야기했다는 정도로), 사실은 처음에 관우를 신나게 까다가 진짜 관우가 내려와버려서 놀라 다시 썼다든가(…)하는 이야기 등이 전해내려온다. 물론 이는 그만큼 나관중이 이 작품을 잘 썼다는 이야기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서양에는 19세기에 소개되었는데 처음 연의가 소개될때 가장 인상깊게 소개된 인물은 제갈량이며, 이후에 나관중은 동양의 호메로스, 타키투스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삼국지연의가 하도 유명하다 보니 중국의 모든 시기를 따져도 역사와 소설을 혼동하는 사람이 제일 많다. 사실 삼국시대가 정작 역사적으로는 시기가 짧고 비중도 적은 시대인 주제에 소설만 무지하게 유명하다보니 이런 현상이 더 커지는 것이다. 웬만큼 배웠다는 사람도 자주 혼란을 일으키며, 정사 삼국지를 조금 읽은 사람은 무슨 마공인지 주화입마에 빠져서 연의와 정사의 내용이 머릿속에서 뒤죽박죽이 돼버리는 건 예사다. 예를 들면 낙봉파[39]에서 방사원을 어쩌고하는 시를 지었다가 소설가지고 시짓는다고 바로 깨갱하는 사태 등이 생각보다 자주 벌어졌다.


이걸 엄격히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은 전문 연구가나 골수 삼덕후들 밖에 없는데 이런 사람들도 가끔 혼란을 일으킨다(…).


중국이야 뭐 말할것도 없지만 한국의 사극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2000년대 대형 사극에서 의형제 3인방 트리오 포지션이 나오면 빼박(...)


작품 내에서 상대보다 압도적인 전력을 이끌고 온 군주가 오히려 적은 수의 적군에게 지는 경우가 많다고 느낄 수도 있는데(관도대전의 원소, 적벽대전의 조조, 이릉대전의 유비 등), 사실 대군이 패배한 경우가 묘사가 많고 임팩트가 크게 남아서 그렇지 실제 연의에서는 대병력에 발리거나 항복하는 약소군주가 훨씬 많다. 유대, 교모, 한복, 여포, 원술, 유표, 마초, 장로, 맹획, 공손연 등 이외에도 대군에게 발린 경우가 수도 없이 많고 유비조차 조조의 대병력에 숱하게 박살나며 초창기의 조조 역시 서영의 대병력에게 박살난다. 선택적 기억의 문제라고 해야 할 것이다.


기본적으로 군담소설이기 때문에 문신들은 비중이 공기에 가깝다. 제갈량이 굳이 군사의 포지션이 된 것은 후반부의 주인공인 그가 역사대로 문관이 되면 혼자 비중이 적어지기 때문일지도. 그런데 이것마저도 그나마 문신들이 비중이 높은 편에 속한다는 말이 있다. 해석은 알아서.


충무공 이순신이 애독했던 책이기도 하다. 청성잡기에 따르면 이순신에게는 은거기인 친구가 있었는데 충무공이 그 재능을 아껴 편지를 보내 같이 나랏일을 하자고 제안했지만 그 친구가 거절하면서 '중국의 선비인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을 숙독하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라며 삼국지연의를 충무공에게 보냈다고 한다. 실제 난중일기에도 가정본 삼국연의를 인용한 구절이 존재한다.#



[1] 원말명초에 나관중이 완성한 나관중 원본의 삼국지연의는 현재 소실되었다.

[2] 심지어 삼국지 문서에도 역사책에 관한 서술과 연의에 관한 서술이 함께 있다.

[3] 후한말-위촉오시대를 함축적으로 표현한 로그라인 명문으로 꼽힌다. 다만, 의외로 국내외 삼국지 평역 작품들 중에 이 문장이 그대로 인용되는 경우는 드물다. 아무래도 서두에 해당하는 지라 작가마다 개인의 감상을 적어 넣기 때문인 듯. 평역이 아닌 일반적인 번역의 삼국지는 이 문장이 있다.

[4] 이십이사차기라는 서적을 지어 청대까지 남아있는 정사서 22종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와 비판을 남겼다.

[5] 달리 말하면 관우, 제갈량처럼 아예 신으로 섬겨지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유관장 등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후대의 온갖 서적에서 이런저런 대조를 위해 회자되는 이러한 인물들이 후대에 사회/문화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이 장각 등보다 결코 못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비록 나관중 등의 필터링을 거친 형상이긴 하지만. 당장 현대에도 동아시아 3국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이 유비, 조조, 공명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6] 반대로 "삼국지를 세 번 이상 읽은 이와는 상대를 하지 말라"는 말도 있는데, 그러니까 아무하고도 상대를 하지 말란 말이다 삼국지에 워낙 온갖 교활한 술수와 책략과 사기질(…)이 넘쳐 흐르다보니 삼국지를 3번이나 열독한 사람이라면 그만큼 사기꾼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7] 다만, 삼국지평화를 읽어보면 삼국지연의와 얼마나 다른 지를 알 수 있다.

[8] 이건 나관중의 삼국지연의가 이전의 삼국지평화의 직접적 영향력 아래 있다는 증거로 이해된다. 강담사들이 다음 번에 또 들으러 오라고 절단신공을 구사한 흔적이기 때문.

[9] 참고로 보통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 184년부터 오가 멸망하는 280년까지를 삼국지 배경으로 삼는데 이 기간 중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 사람은 사마부(180년 ~ 272년)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기 전에 태어나서 서진 건국까지 보고 죽었다.

[10]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삼국지연의 마지막 주인공이 강유인 점도 납득할 수 있다. 그는 높은 뜻을 품은 사대부이자 신의를 위해 목숨도 태연히 버리는 남자였으니까.

[11] 일례로 조조가 여포, 원소등과 싸우는 부분이나, 손책이 강동을 정벌하는 부분이나, 혹은 합비공방전.

[12] 연의에서 제갈량의 첫 활약이었던 박망파 전투는 사실 유비의 작품이다. 유비가 복병을 설치해, 하루아침에 자기 병영을 불사르고 거짓으로 달아나니 하후돈 등이 이를 추격하다 복병에게 격파당했다.

[13] 수호지의 작가 시내암은 삼국지연의의 저자 나관중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14] 중국 속어중에는 유비가 아두를 땅에 던진 것은 인심을 매수하기 위해서라거나 유비는 울어서 강산을 차지했다라는 말이 있듯이. 이 속담들은 연의의 유행 이후 등장한 것이다.

[15] 물론 중국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교나 도교 단 하나만이 아닌 유불도 삼교를 모두 이해해야만 하며, 무위의 치 개념도 따라서 유교와 도교 양쪽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도교적 해석의 무위의 치는 다스리지 않으면서 다스리는 즉 순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는 정치를 말하고, 유교적 해석으로는 공자가 요순에 대해 평가했듯이 공손하게 자신의 몸을 낮추고, 자신의 몸 가짐을 바르게 하며, 어진이들을 불러 모으는 정치를 말한다. 그러므로 요순 시대를 극찬하던 것도 공자이기도 하고 여기서의 무위의 치 개념은 도교라기보다는 유교적 개념에 가깝다. 다만 그렇다고 도교와는 전혀 관련없는 개념이라는 것도 물론 아니다. 노자와 공자의 대화… 혹은 대화했다는 전설이라던가 초기 유교와 도교 개념들은 상당히 겹치는 것들이 많다.

[16] 후대에 갈수록 관중 악의보다 거의 전설상의 인물들인 이윤과 여상에 제갈량이 자꾸 비유되는것도 바로 이런 연유 때문이다. 전설적인 군주 탕왕의 재상 이윤이나 주문왕의 재상 여상도 이런식으로 재야에 머물다가 덕망있는 군주에게 등용된 케이스이기 때문. 제갈량은 여기에 더해서 선비로서 사심없이 충심을 다해 왕으로부터 전권을 이임받아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했다는 플러스 포인트도 추가된다.

[17] 본디 나관중본은 구전적 성격이 많이 남아있었고, 당연히 통속적인 성격을 지닌다. 때문에 위/촉/오의 구성이 비교적 평균적이라 어느 소속이든 슬기롭고 충성스러우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왜냐하면 말 그대로 <통속연의>이고, 아무튼 각 인물들이 멋있으면 그만이었다. 나관중본의 경우는 관우의 죽음도 그냥 하늘로 올라가 버리는 것으로 처리하기도 했다. 이를 적토마가 올가미에 걸려 넘어져 관우가 붙잡히고, 손권 앞에서 영웅적 최후를 맞는 것으로 소설적 성격이 강하게 각색한 것은 모종강본이다.

[18] 그러나 리동혁은 모종강본을 너무 싫어한 나머지 본 삼국지에서 12가지 각종 판본을 모조리 뒤섞어놓아서 내용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고 쓸데없이 나관중본을 문맥에 맞지 않게 끼워넣어 독자들에게 혼란을 가져 왔다. 비판자들은 리동혁 본 삼국지는 초판본 11권 부록밖에 가치가 없다고 평가절하 할 정도.

[19] 그러나 황석영 삼국지를 제대로 읽어보면 이게 과연 순수하게 가정본을 가지고서만 번역한 것으로 볼수있는가에는 의구심이 드는 수준이다. 실제로 다른 번역본들의 오류들이나 수정한 정도이고 전개되는 내용은 모본을 번역한 다른 번역본들과 다른 게 거의 없다.

[20] "운장은 인간 세상에 너무 오래 머물렀다. 옥황상제의 조칙이 있으니 범부와 승부를 겨루지 말라"라는 목소리를 하늘에서 듣고는, 싸우다말고 승천한다.

[21] 흔히 알려진 관우의 최후는 바로 모종강본의 모습이다.

[22] 한고조가 백사를 벤 고사를 뜻한다.

[23] 삼국지연의의 결말은 연의 전체를 되돌아보는 고풍이라는 장편 시가 장식하는데, 이 시의 마지막 수이다.

[24] 실제 작중 묘사를 보면 헌제가 한을 빼앗기는 모습과 비슷하게 묘사된다. 아예 사마소가 "너희도 한에게서 찬탈했잖느냐"면서 빈정거릴 정도.

[25] 삼국지뿐만 아니아 동아시아권 고소설들은 대체로 로망스라는 단어를 써서 설명하는 편이다.

[26] 다만 보통 역사 군담 소설이 이런 경우고, 창작 군담 소설(유충렬전 같은)들은 서양식 기사 이야기와 비슷하게 볼 수 있는 면도 꽤 많다.

[27] 구비 문학으로 시작한 문학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이를 나관중, 모종강 같은 이가 정리한다고 해도 개개의 화소들이 흥미를 불러 일으키는지라 통일성을 해친다고 무작정 쳐내지는 못하니 앞뒤 안 맞는 서술들이 남게 되는 것.

[28] 이 부분도 허구. 실제로는 복병을 만나기 전에 조조군이 무사히 퇴각하고 이후 뒤늦게 도착한 유비군이 불을 질렀다고 한다.물론 정사에서 유비네가 공을 날로 먹은건 아니고 강남을 장악한 손권이 겨우 3만 군사를 준비해올 때 한낱 객장 신분으로 2만명이나 되는 군사(+휘하 명장들)를 동원해서 온다.

[29] 이 부분은 조조가 최초에 형주/남군 중 어느 쪽으로 가는지 나와있지 않기 때문에 조조가 형주 길로 가던 중 조운의 복병을 만나 패주한 후 남군 쪽으로 방향을 틀었을 가능성도 있다.

[30] 이 공성계가 연의의 창작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데 배송지가 인용한 제갈량과 관련된 '곽충오사'라는 이야기에서 나온 것이다. 배송지 본인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며 신빙성을 대놓고 의심하는데 왜 주석으로 달아놨는지는 불명(…).

[31] 근데 재밌는 부분은 정작 정조가 칭찬한 이순신은 삼국지연의를 봤다는 점이다(…).

[32] 물론 그렇지 않은 것도 꽤 있다. 일단 고우영 삼국지부터가.

[33] 아동용 삼국지 중 5권으로 편집된 판본들에선 대개 적벽대전이 4권 쯤에 벌어진다. 엄청난 분량 삭제를 볼 수 있는 부분. 이런 삼국지들은 대개 촉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다시 말해 촉 하나만 중심으로 해도 5권이나 되고, 위, 촉, 오 전부 다루려면 분량이 무지막지하게 늘어난다.

[34] 연의에서 제갈량이 유독 띄워진 건 후반의 재미를 책임져야 할 원 톱이라 그런 걸 지도.

[35] 118~119화의 강유의 한복~종회의 난과 맞먹는다.

[36] 이들은 그나마 진태와 더불어 강유의 북벌 장면에서 활약하기라도 한다. 그 외에는 모조리 지못미.

[37] 여담으로 이 소리를 하는 독자는 최훈이 야구친구와 스카우팅 리포트에서 그렸던 최민규 캐릭터와 똑같이 생겼다.

[38] 사실 삼국지연의는 삼국지평화나 당시 떠돌던 민담, 정사 등을 섞었기에 2차 창작물이라기보다는 3차 창작물에 가깝다.

[39] 낙봉파라는 지명 자체가 허구다. 그런데 지금 중국에는 삼국지의 허구 지명들이 속속 다 생겨있다. 제갈량의 거처인 융중을 자처하는 곳도 여럿이고(이쪽은 실존했던 지명이지만). 이게 다 관광객들 대상으로 하는 돈벌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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