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32 – 법의 정신 (DE L'ESPRIT DES LOIS, The Spirit of Law) / 몽테스키외(Montesquieu, Charles, 1689-1755)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3권분립으로 유명한 몽테스키외가 법의 정신에서 다룬 핵심내용은 크게 3가지다. 첫째. 정체에 대한 분류로 공화정, 군주정, 전제정으로 분류하고, 그 활동원리를 각각 덕, 명예, 공포로 보았다. 두번째는 권력분립 이론으로 당시의 영국을 모델로,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으로 나눈 것이다. 셋째로 기후가 정치에 영향을 미친다는 학설이다. 섬세하고 해학이 넘치면서도 강렬한 이 책은 정치 이론사와 법률사의 불후의 고전이다.
a. 생애와 작품활동
볼테르, 루소와 더불어 계몽시대의 3천재로 일컬어지는 몽테스키외는 프랑스의 3권 분립론의 창시자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법관귀족 출신으로 태어난 그는 어릴 적에는 역사공부에 열중하였으나, 보르도 대학에서 법률공부를 하여 보르도 고등법원의 평정관이 되었다. 이듬해 연구를 계속하기 위하여 1713년까지 파리에 있으면서 많은 것을 배웠으며, 이국적인 것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인 듯하다. 그는 1713년 보르도로 돌아와 이듬해 법원의 평정관이 되었으며, 1715년(26세)에 잔과 결혼하여 애정과 존격의 반려자를 얻게 되었다. 이듬해(27세) 그는 백부의 뒤를 이어 법원장이 되었고, 그 해에 학술원에 들어가 정치 내지 행정에 흥미를 가지고 활동하였으며, 물리학이라든가 생물학을 주로 연구하였다. 그러면서도 그가 처음으로 낸 중요한 작품은 당시의 유럽과 페르시아의 사회, 정치, 풍속 등을 풍자적으로 논한 페르시아인의 편지였다. 이 책은 대단한 인기를 얻었으나, 관변에 좋은 인상을 주지는 못하였다. 그후 파리에 나가 많은 사람들과 사귀었으며, 1728년(39세)에는 프랑스 학술원에 들어가 불사의 40인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 그의 대표작 법의 정신을 집필하기로 결심한 것은 이 무렵이다. 그는 아카데미에 들어가자. 곧 3년간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헝가리, 독일 등 유럽여행을 떠나, 각국의 제도와 관습을 둘러보았다. 특히 영국에 2년 가까이 머무르면서, 그곳의 법률, 정치, 경제, 사회 등을 많이 연구한 듯하다. 1731년 많은 자료를 가지고 라브레드에 돌아와, 그후부터 그곳에 자리잡고 20년동안에 걸쳐 법의 정신을 저술한다. 1734년에 로마의 흥망 원인론을 발표하였다. 이 책은 로마가 공화제로부터 제국을 거쳐 멸망하기까지의 과정을 마키아벨리의 로마사론에 따라 논술한 것인데, 훗날 법의 정신의 자료가 된다. 1748년(58세) 제네바에서 익명으로 어머니 없이 낳은 자식 이라는 표어를 붙여 출판된 법의 정신 은 굉장한 성공을 거두어, 출판된지 2년도 안되어 20판을 냈다고 한다. 법의 정신은 일생 동안의 연구결과를 모은 것인데, 법률학의 고전으로서뿐만 아니라 사회학, 정치학, 지리학 등의 고전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법학연구에 처음으로 역사법학적, 비교법학적, 사회학적인 방법을 적용하여 법학의 발전에 기여하고, 3권분립론, 입헌군주론 등을 전개했다. 한편으로 그는 전제주의를 공격하면서, 법은 각국의 제반 환경에 적합한 고유한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정치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책에 대한 비난도 있어서, 그는 법의 정신의 보호를 쓰기도 했는데 한때는 금서로 취급된 일도 있었다. 몽테스키외의 사행활에 관하여 알려진 것은 극히 적은데, 이는 그가 작품 이외의 것이 알려지는 것을 극히 꺼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귀족출신으로, 지극히 귀족적인 성격의 소유자이자 재사였다는 점은 확실하다.
b. 시대적 배경과 계몽사상가
시대적 배경, 몽테스키외가 생존했던 당시는 짐은 국가다 라고 호언하며 절대군주제를 확립하였던 루이 14세의 시대였다. 따라서 절대군주 사상이 널리 퍼져 있던 시대였다. 그런데 루이 14세의 권력이 절정에 달하자 프로테스탄트를 중심으로 하여 각 분야에서 반감의 기운에 고조되었다. 여기에 프랑스에서도 정치적 자유주의 사상이 싹트게 되었는데, 이것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영국의 시민사회 사상이었다. 영국은 일찍이 산업혁명을 완성하여 근대의 자본주의적 사회형태를 이룩하고, 그에 맞는 시민사회의 철학을 마련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우선 프랑스의 계몽사상가들은 백과전서를 편찬하고 인간의 능력을 신장시킨 다음, 합리적인 정치력으로 그것을 공공의 복리에 적용하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영국의 자연법, 민주주권 또는 대의제 사상이 프랑스에 도입되어 프랑스의 합리주의적 경향으로 이론화, 일반화, 체계화되었다.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은 이러한 사상적 배경적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계몽사상가, 18세기 계몽사상가들은 17세기의 지적 유산, 예컨대 베이컨과 데카르트, 스피노자, 특히 로크와 뉴턴의 사상 및 자연법, 자연권, 및 사회계약설을 널리 전달, 보급하였다. 그리하여 18세기는 역사상 어느 시대보다 더 뚜렷하게 권위와 전통에 대해서 회의를 나타낸 시기였다. 반면 인간이성의 능력을 확신하고 과학지식의 발달을 낙관하면서 인류문명의 진보를 기대하였던 시대였다. 계몽사상가들은
철학자가 아니라. 보급자, 혹은 평론가 라고 해야 할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일반대중이 읽지 않는 고전을 읽고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그 내용을 풀어 설명하였다. 그들은 일차적으로 문인이었으며, 자유기고가. 혹은 삼류문인 내지 저널리스트들이었다. 그들은 대중을 위해 글을 썼으며 사회악을 비판하고 개혁을 주창하는 계몽운동가들이었다. 그들은 이 세상에 있어서의 행복의 성취를 믿었으며, 이성의 힘을 통해서 그것이 가능하고 주장하였다. 계몽사상가들은 영국의 선진학문과 발달된 과학을 프랑스에 도입해서 프랑스 또는 유럽에 보급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는 지적인 면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파리에서는 문인, 학자, 혹은 사상가들이 부유층 부인들의 살롱에 모여 재치 있는 토론을 교환하였다. 살롱이란 주로 개인저택에서 열리는 저녁식사를 겸한 사교적 집회로서 거기서 사회비평뿐만 아니라 과학, 철학, 경제, 종교 등이 토론된다. 어떤 계몽사상가보다 전통에 항거하고 사회악을 과감히 비판한 사람은 파리 출신의 볼테르였다. 그러나 그는 독자적인 정치이론이 없었던 반면, 귀족 출신 몽테스키외는 체계적인 정치이론가였다.
c. 법의 정신의 내용
이 책은 총 31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학자들에 따라 2분법, 3분법 등 내용상 구분이 각각 다른데, 여기서는 몽테스키위 자신이 선호한 6분법으로 분석해 본다.
1. 제 1부(1-8편), 각 정체를 공화정, 군주정, 전제정으로 나누고 각 정체의 본성과 원리를 제시한다. 공화정(共和政) 이란 국민 전체 혹은 국민 일부가 주권을 갖는 정체이고, 군주정(君主政)은 한 사람의 왕이 통치하지만 정해진 법에 의거해서 통치하는 정체이며, 전제정(専制政) 은 통치자 자신의 뜻에 따라 모든 일을 처리하는 정체를 말한다. 각 정체는 나름대로 본성을 갖는데, 특정한 공화국에서 사람들은 덕성을 갖고 있어야 하며, 어떤 전제 국가에서는 사람들이 공포심을 갖고 복종하는 본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이처럼 각 정체는 제각기 덕 명예 공포 가 그 원리로 되어 있는데, 물론 그는 이중에서 공화제를 가장 합리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2. 제 2부(9-13편), 정치적 자유의 실현을 다루고 있는데 이것은 정체의 부패가 정치적 자유의 상실과 전체로의 타락을 의미하기 때문에 국가는 정치적 자유를 실현시킬 사명을 가진다. 여기서는 제각기 각 정체의 부패요인도 검토한다. 즉 군주제는 군주가 만사를 자기 손아귀에 넣고 국가를 수도로, 수도를 궁정으로, 궁정을 자기 한 몸에 집중시키는 데서 방향을 잘못 잡게 된다고 한다. 전제정체는 그 본질상 원리가 부패되고. 민주적 공화제는 단순히 사람들이 극단적인 평등정신을 가지고, 각자가 자기에게 명령할 사람으로 선택한 사람과 평등하게 되려고 할 때 그 원리는 부패한다 고 민주주의의 위험성을 지적하기도 한다. 이처럼 어떠한 정체도 제각기 부패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으나, 이 위험을 회피하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가 영국식의 3권분립주의인 것을 입증하고 있는데, 이것이 이 책의 골자이다. 제 11편 6장 영국의 헌제에 관하여 에 그 유명한 권력분립의 원리가 제시되어 있는데, 그의 견해를 직접 옮겨 본다. 각 국가에는 세 종류의 권력이 있는데 입법권 만민법에 속하는 집행권 시민법에 속하는 집행권 이 그것이다. 첫째의 권력에 의해 군주는 일시적 또는 항구적인 법률을 제정하고, 이미 정해진 법률을 수정 또는 폐지한다. 두번째 권력에 의해 전쟁중에 당사자끼리 화해할 수 있고 전쟁을 선언할 수도 있다. 또한 외교관을 교환하고 안전을 보장하며 침략을 예방한다. 세번째 권력에 의해 죄를 처벌하고 개인의 소송사건을 심판한다. 우리는 두번째 것을 집행권 이라 부르고 다른 하나를 재판권 이라 부른다.
3. 제 3부(제14-19편), 각 국의 법과 각국의 풍토와의 관계, 정치적 자유가 부정된 노예들에 관한 고찰이다. 그는 그 나라 토지의 성질이 법을 결정하는데 큰 영향력을 미치며 좋은 풍속이 있는 곳의 법은 간단해질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4. 제 4부(제20-23편), 4부의 중심문제는 국가의 번영과 국부의 문제다. 상업과 법과의 관계에서 상업은 본질적으로 서로간의 거래를 통해 평화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나, 상업의 결과로 인한 부는 사치와 낭비로 연결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또한 상업의 발전은 화폐의 사용을 권장하게 되는데, 화폐는 모든 상품의 가치를 대표하는 표시다. 4부 끝에서 당시 감소하고 있던 인구문제도 언급하고 있다.
5. 제 5부(제24-26편), 5부의 중심문제는 종교에 관한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그는 우선 기독교를 중심으로 고찰하고 있는데, 인간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기독교는 각 민족이 가장 훌륭한 정치법과 시민법을 가질 것을 권장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종교는 대체로 법의 역할을 어느 정도 할 수 있다고 평가한다. 시민법은 사이비종교를 법규범을 통해 규제할 수 있고, 종교법은 잘못된 정치를 비판하여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 그러나 종교가 잘못된 경우에 가하는 제한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보다 실제적인 방법으로 그는 성직자들이 가진 재산을 제한해야 한다고 말한다.
6. 제 6부(제27-31편), 6부에서는 게르만에서 기원되어 게르만적인 자유를 갖춘 프랑스 군주제 생성사가 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까지 추구된다. 제 29편에서는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와 목적, 즉 법의 정신이 무엇이고, 이 정신을 어떻게 살려나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 밝히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쓴 것은 오로지 내가 다음에 말하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이다. 즉 중용의 정신이 입법자의 정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적 선은 도덕적 선과 같이 언제나 두 극단 사이에 있다. 이렇게 법을 만드는 사람의 중용의 정신이 법의 핵심적인 정신임을 밝혀놓고 나서 법이 갖추어야 할 특성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법은 우선 어린이도 암기할 정도로 간단해야 하며 문제는 쉬워야 한다고 말한다. 아울러 법은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생각을 불러일으키게 해야 하며, 너무 정교해서도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d. 정치사적 의의
실명할 정도로 심혈을 기울여 쓴 이 책이 제네바에서 출판되자, 비상한 관심을 불러 일으켜서 미국 헌법을 비롯해 영국의 정치사상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몽테스키외의 이론은 내부적 모순을 안고 있기도 하다. 그는 노예제와 농노제를 비난하면서도, 유색인종이 인간의 속성을 지니고 있는 점은 부인한다. 그는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면서도 귀족의 특권과 관직의 세습을 받아들인다. 또한 단순하고 명백한 원리에 거슬러올라가 거기서 어떤 필연적인 결과를 연역하려고 하였음은 데카르트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반면에 영국사상의 영향을 받아 겸험주의적인 요소를 섞어 쓰고 있는 방법론상의 혼란을 범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적 혼란은 오히려 이 책에 영원한 생명력을 불어넣었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몽테스키외의 특색은 무엇보다도 다면적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몽테스키외 속에는 고대인과 근대인이, 동시대인과 미래인이 함께 있다. 그리고 보수주의자, 귀족주의자, 민주주의자, 자연철학자, 합리주의자가 함께 있다고 할 만큼 다면적인 특색을 지닌 법의 정신은 다종 다양한 법률과 제도에 부여한 다면적 평가와 개혁지침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그 자신은 귀족 출신이었으나 전제주의를 열심히 비판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비판은 곧 이어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을 성취시킨 혁명사상을 배양하는 역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실제로 프랑스 혁명기의 혁명가들은 이 사상을 사실상 절대군주제 비판의 무기로 원용했던 것이다. 그가 시민적 자유를 확립하기 위하여 필요한 조건을 검토하고 권력분립의 사상을 만들어냈다는 유명한 사실은, 그로 하여금 공법원리의 건설자의 한 사람으로 만들어 후세 입법정체의 발달에 큰 공헌을 하였다 나아가 미국 독립 운동의 이념적 지주가 되어 민주주의적 조직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법의 정신을 서술함에 추상적으로 다루지 않고, 시간적으로 로마 이래의 역사적 배역을 기초로 하고 공간적으로는 널리 여러 나라의 지세, 기후, 종교 기타 사회사상의 배경을 기초로 해야 한다는 것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비교법학이나 사회학, 역사철학에 미친 영향 또한 지대하다. 흥미 있는 것은 당시 그가 한국에 관하여 표현한, 한국의 남쪽 사람들은 북쪽 사람들보다 용감하지 못하다 라든가. 한국의 기후가 어떻다든가 라는 등의 관심을 보였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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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주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계몽의 순간에 지혜의 신인 로마의 여신 미네르바가 빛을 비추는 동안 전세계의 종교들이 회합함, 다니엘 호도비에츠키(Daniel Chodowiecki) 1791년 작
계몽주의(啓蒙主義)란 프랑스어로 Siècle des Lumières '빛의 세기'를 뜻하는 말로 17세기, 18세기에 유럽과 신세계를 휩쓴 정치, 사회, 철학, 과학 이론 등에서 광범하게 일어난 사회 진보적, 지적 사상운동으로, 현재의 자본주의의 근간이며 계몽사상(啓蒙思想)이라고도 부른다.
계몽주의는 실제적인 도덕을 지향하였으며 형이상학보다는 상식, 경험, 과학을, 권위주의보다는 개인의 자유를, 특권보다는 평등한 권리와 교육을 지향하였다. 이 계몽주의는 1760년경 이후 강력히 대두되게 된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인간은 이성으로 적법성을 판단할 수 있으며, 이성은 권위의 요소이자 권위를 판단하는 기준이라고 주장했다.
독일과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등지에서 계몽주의 운동이 거의 동시에 이런 움직임이 일어났지만, 대서양 주변 국가에서 일어난 각종 혁명을 통해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러시아, 스칸디나비아를 비롯한 다른 유럽 국가들도 이런 움직임을 따랐으며, 라틴 아메리카 역시 아이티 혁명을 통해 이런 움직임에 동참했다. 미국 독립 선언과 영국 권리 장전, 프랑스 인권 선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 제정한 1791년 5월 3일 헌법은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1]
"계몽주의" 또는 "계몽주의 시대"라는 용어는 어떤 하나의 운동이나 사상을 뜻하지는 않는다. 여기에 속하는 사상가들은 서로 충돌되는 것을 주장하기도 했고, 매우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계몽주의는 어떤 사상의 집합체라기 보다는 가치의 집합체에 더 가까웠다. 전통적 관습, 의례, 도덕에 대한 비판적 사고가 계몽주의의 핵심이었다. 따라서 여러 대립하는 철학 사이에도 비슷한 부분이 상당했다. 심지어 계몽주의에 반대했던 철학자들까지 계몽주의의 일부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이성의 시기"는 보통 계몽주의 사상의 전주곡으로 여겨진다.[2]
목차 [숨기기]
1 계몽주의의 뜻
2 계몽주의의 특징
3 프랑스의 계몽사상
4 영국의 계몽사상
5 독일의 계몽사상
5.1 독일 계몽주의의 발달
5.2 독일의 계몽주의와 문학
6 이탈리아의 계몽주의
7 스페인의 계몽주의
8 포르투갈의 계몽주의
9 계몽주의의 영향
10 대표적 계몽사상가
11 각주
12 참고문헌
계몽주의의 뜻[편집]
Enlightenment(프랑스어: Lumières, 독일어: Aufklärung)를 번역한 한자어 계몽(啓蒙)이란 인간의 어리석음을 깨우친다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Enlightenment 사상의 다만 한 부분을 대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자어 번역이 대개 그렇 듯, 이 번역은 한국어로 뚜렷한 뜻을 전달해 주고 있지는 않다. 한편, 칸트는 인간이 미성숙으로부터 벗어나 타인의 지도없이 이성적으로 사는 것 또는 미완성 상태에서 완성태로 나아가는 것을 계몽이라 했다
17, 18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이른바 계몽사상은 인간이 이룩한 문화와 문명에 고취되어 인간의 지성 혹은 이성을 바탕으로 문화와 문명을 진보, 발달 시키려는 사상 또는 그러한 행동을 포함하는 적극적인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다시 말해 인간의 지성 혹은 이성의 힘으로 자연과 인간 관계, 사회와 정치문제를 객관적으로 관찰해서 명료하고 자명한 보편적 진리를 발견하고 낙관적으로 발전시키려는 시대 정신이라고 볼 수 있다. 계몽사상은 이와 같은 정신으로 인간의 존엄과 평등, 자유권을 강조함으로써 유럽의 중세 시대를 지배한 전제군주와 로마 가톨릭교회와 신학의 족쇄로부터 인간 이성의 해방을 주창했다. 계몽사상의 의의는 국가·정부의 역할을 결정적으로 바꾸었다. 정부가 더이상 목적이 아니라 국민의 권리를 보장하고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민중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한 것이다. 인간의 권리와 행복을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국가는 당연히 국민의 동의를 받지않고는 존재할 수없다. 국가가 그 책임을 다하지 않고 민의를 배반한다면 민중은 혁명적인 저항권을 발동해 국가를 교체, 폐지할 수 있다[3]. 이런 연유로 계몽사상은 17, 18세기 시민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새로운 시대를 열게 한 것이다. 이 노력의 첫 장을 연 철학자로는 영국의 경험론 철학자 존 로크를 손꼽을 수 있다. 이후 계몽주의는 프랑스와 독일에서 백과전서파 (디드로, 볼테르),루소와 칸트에 영향을 주어 이후 사상들의 출현에 기여했다.
계몽주의의 특징[편집]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편찬위원회는 《근대의 사상》이라는 책에서 계몽주의의 특징으로 '이성 관용 자율 인권이라는 개념, 사회 정치 사상에 대한 과학적 방법의 적용, 인간의 진보를 가로막는 미신과 로마 가톨릭교회 성직자들의 권력에 대한 거부' 등을 꼽았다. 즉 계몽주의는 절대 왕정과 강력했던 로마 가톨릭교회의 절대 진리에 대한 도전이었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그런 권위의 원천들을 부정하고 대신 그 자리에 이성과 자유로운 탐구라는 새로운 깃발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인류 역사가 진보의 기록이라 여겼다.[4]
프랑스의 계몽사상[편집]
프랑스의 계몽 사상은 프랑스 혁명 이전에 시작되었다.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 디드로, 엘베시우스(Claude Adrien Helvétius)등 백과전서파들이 주도하였다.
계몽사상은 프랑스 혁명의 계기가 되었으며 민중들에게 지배계급의 착취와 억압은 하늘이 정한 것이 아니라 혁명을 통해 깨부수어야 한다는 강한 사회개혁 의지를 심어주었다. 민중들의 이러한 사회의식은 프랑스 혁명의 원천이 되었으며, 지금도 민중들이 그들을 억압하는 권력에 저항할 수 있다는 저항권을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헌법에 명시함으로써 존중되고 있다.[5]
볼테르나 몽테스키외, 디드로는 앙시앵 레짐(舊制度) 사회에 고착(固着)하는 종교적 편견, 사회적 기성 관념에 비판을 가했는데, 특히 볼테르는 이신론(理神論), 종교적 관용(寬容)을 가지고 교회에 대한 공격을 실시했으며, 몽테스키외는 신랄한 사회, 문명 비판을 전개했다. 이 기간, 데카르트의 이성(理性)은 정적(靜的)인 진리의 선험적(先驗的)인 보유자라는 성질에서 기능적(機能的)인 진리의 추구자(追求者)라는 성질로 변했으며, 한편에서는 영국에서 뉴턴 물리학의 경험주의, 로크의 감각론(感覺論) 등이 수입되어 이러한 요소는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1748년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이 발표되는 해는 프랑스 사회의 경제 번영, 경제 자유주의의 성장을 배경으로 계몽주의의 결전(決戰) 개시기라 불린다. 앙시앵 레짐 사회에 대한 자연법(自然法)이나 사상적·정치적 입장에서의 비판은 차츰 체계화되어, 1752년에는 ⟪백과전서(百科全書)⟫로서 결실을 보았다. 이 시기의 철학자 가운데는 콩디약, 엘베시우스, 라메트리 등과 같이 감각론, 이신론의 입장에서 유물론, 무신론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나타났다. 한편 정치 비판은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같이 전체 사회질서에서 국가의 기본 원리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있었다.
1770년경 이미 계몽주의는 시대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되어, 미국 혁명이나 프랑스를 방문한 프랭클린(1707-1790)의 정치적 활동의 영향 등에서 자극을 받아 사회·정치 변혁의 이론적 방향을 잡기 시작했다. 모루레(1727-1819)나 마블리(1709-1785) 등이 이 세대이며, 자연법을 하나의 구체적 목표로 하고 공동 소유의 사회를 상정(想定)하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 직전, 철학은 전국의 개명적(開明的) 부르주아를 사로잡아 '생각하는 대중'을 조성(造成)하는 것으로써 실천적인 변혁의 사상이 되었다. 혁명의회에서 전개되는 모든 정치사상은 이미 계몽주의에 원형(原型)으로서 내포된 것이며, 그것이 전쟁이나 경제 위기, 정치적 역관계(力關係)를 계기로 전개된 것이다. 19세기 전반기 계몽주의의 인식론, 과학론, 역사론은 콩트의 실증주의에 계승되었고, 한편 보편적 이성(理性)에의 신뢰는 루아이에 코랄, 주프로와(1796-1842) 등에 계승되었다.
영국의 계몽사상[편집]
넓은 의미로서의 영국 계몽철학은 17세기 초의 프랜시스 베이컨에서 18세기 말의 애덤 스미스, 제러미 벤담에 이르는 경험론의 철학과 거의 같다고 해석되는데, 좁은 뜻으로는 존 로크에서 스미스까지의 18세기 철학을 총칭한다. 그 가운데서 신학적으로는 이성의 우위(優位)를 설명하고 후에 무신론으로 경사(傾斜)를 보인 이신론(理神論)의 흐름(앤서니 콜린스, 존 톨런드, 제3대 샤프츠버리 백작)이 있고 도덕철학으로서는 인간에 내재(內在)하는 모랄센스를 강조하는 도덕감학파(道德感學派, 샤프츠버리)와 유물론에의 경향을 가진 공리주의(데이비드 하틀리, 조셉 프리스틀리, 버너드 맨더빌)가 대립되어 있으며, 인식론으로서는 경험과 감각을 중시하는 경향(흄)이 나타났다. 흄은 회의론(懷疑論)에 빠졌는데 이것은 오히려 예외적이며, 대세(大勢)는 도덕감을 강조하든 이기심(利己心)을 강조하든간에 밝은 낙관론(樂觀論)과 인간 중심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 계몽사상과 같은 사회 비판은 없고, 온건하고 현상(現狀) 긍정적이며, 이 점에 영국 계몽사의 특징이 있다고 하겠다. 단지 샤프츠버리에서 프랜시스 허치슨을 거쳐서 존 밀러나 애덤 퍼거슨에 이어지는 소위 스코틀랜드 역사학파에는 역사적 관점에서의 사회 비판이 나타났고, 18세기 말에는 차츰 첨예화하는 경향이 생겼다.
독일의 계몽사상[편집]
독일은 당시 시민사회의 발달이 미미했기에, 프랑스의 계몽사상의 활발한 전개에 영향을 받았는데, 프랑스와는 다르게 독자적으로 발달했다는 특징이 있다. 계몽주의가 유럽 전역에 퍼지던 17세기에 프로이센은 문화적인 관점에서는 유럽의 변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프리드리히 2세는 계몽 사상가인 볼테르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지만와의 서신 교환이 프랑스 어로 이루어진 점, 그 외에 많은 예술가와 문인, 학자들과도 프랑스 어로 이야기하였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국왕을 중심으로 한 프로이센의 문화,예술은 독일적인 것이 아니라 프랑스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문화, 예술,학문 분야에서의 서유럽 선호 현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독일적인 것으로 서서히 변화된다. 독일인 중에서도 새로운 사상과 예술을 대표하는 인물이 등장하게 되었다. 서유럽에서 철학과 정치 이론 부문에서 뉴턴의 자연 과학적 사고 방식이 널리 퍼지면서 등장한 계몽주의 철학이 독일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것은 칸트(1724~1804)가 살았던 시기였다.
독일 계몽주의의 발달[편집]
독일의 계몽주의는 영국이나 프랑스의 계몽주의보다 늦게 나타는데,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 당시 독일은 300여 개의 국가들이 신성로마제국이라는 형태 안에 연방국가로 유지되고 있었다.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당시에 외국문화가 독일인들의 생활과 사상에 깊숙이 침투하고 있을 때, 계몽주의는 외국 문화에 대한 반발로 표출되었다. 계몽주의는 다른 나라의 것을 모방하는 것에 벗어나 다양한 문화들을 수용하고 발전시키면서 독일 내에서 전성기를 맞이한다. 인간의 사고가 기존의 종교적 규범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형태로 발전하면서 계몽주의는 더 나아가 세상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를 강조한다. 계몽주의 시대의 문학 또한 인간의 합리적 이상에 도달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 것으로 간주되며, 이성과 법칙을 중요시 여겼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프랑스나 영국의 계몽주의가 국가를 대표하는 사상으로 발전하여 근대 시민 혁명의 이론을 제공한 것에 비해, 독일의 계몽주의는 혁명의 원리와 결합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이러한 사상을 받아들이고 실천할 수 있는 시민 세력이 상대적으로 미약하였던 데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독일, 특히 프로이센의 계몽주의는 점진적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장기적인 사상으로 자리를 잡아 나갔다고 할 수 있다. 또, 계몽주의를 받아들인 중심 계층에 자신을 '국가 제일의 공복'으로 자처한 프리드리히 2세와 같은 군주가 있었다. 이들에게 있어 계몽주의는 국가 혁명의 원리가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와 같은 강력한 국가 건설을 위한 서구화의 일환이었다.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군주제 국가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듯이 프로이센의 계몽주의도 프리드리히 대왕의 사망과 함께 그 성격이 변화하였다. 프리드리히 대왕 사후 프로이센의 계몽주의는 국가와 사회를 변혁시키는 실천적인 성격을 상당 부분 상실하고, 보다 관념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와 같은 경향은 대표적인 계몽주의 철학자인 칸트의 사상에서도 나타난다. 이미 초기의 독일 계몽 철학자들은 형이상학적 종교론이나 경건주의 신앙 등에 천착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칸트의 철학 세계도 계몽주의를 공적 생활과 사적 생활을 철저히 구분지음으로써 시민 정신의 자유로운 발현보다는 시민의 교양으로서 특수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독일의 계몽주의와 문학[편집]
무엇보다 독일의 계몽주의는 문학에 결과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계몽주의가 확산되면서 지나치게 규율들에 얽매이게 되어 인간의 합리적 이상에 도달하고자 하는 본연의 목적도 상실하게 되었으며, 문학에서도 작품의 내용보다 법칙들을 더 우선시하게 되어 인간의 감정에 대해 소홀하게 되었다. 이성만으로는 인간 내면의 복잡하고 깊은 심리를 표현하기 어려웠고, 감정을 나타낼 수가 없었다. 계몽주의의 문학은 인간의 다양한 행동 양식이나 감정을 표현하고, 그러한 것들에 대해 공감하고 소통하고자 하는 문학의 본래 목적과 점점 멀어져 갔다. 계몽주의의 문학은 기쁨이나 슬픔 같은 인간의 심리를 억압하는 경향을 보여주기도 했다. 몇몇 작가들은 이러한 분위기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새로운 경향의 작품을 저술하여 사회 분위기를 바꾸고자 한다. 이 때 나타난 운동이 인간 본연의 감정을 중시하던 질풍노도 운동(Sturm und Drang)이며, 젊은 시절의 괴테와 쉴러가 대표적인 작가이다.
이탈리아의 계몽주의[편집]
이탈리아는 바티칸이 자리 잡고 있는 위치상 가톨릭 교회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사상적으로 낙후되어 있는 지역이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편찬위원회는 《근대의 탄생》에서 '이탈리아의 지적 활동은 펼쳐지지 않는 책 같은 상태'라고 표현할 정도이다. 이 곳의 계몽주의 운동은 작고 고립된 그룹들로 파편화 되어 나타났다.계몽주의 운동 지지자들은 정치철학에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 슬로건을 도입했다. 이탈리아의 계몽주의의 대표주자는 체사레 베카리아(Cesare Beccaria)였다. 그는 형사재판 제도의 개혁을 다룬 《범죄와 형벌,(Dei delitti e delle pene)》을 썼다. 이 책은 형벌을 규제하는 원리들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 진술로 평가되고 있다. 베카리아는 고문과 참수형을 비판하고 종교적 죄를 범죄로 취급하는 가톨릭 교회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훗날 사형제도의 폐지 등 인권 신장에까지 크게 영향을 미쳤다. 또 루이지 갈바니, 알렉산드로 볼타 같은 과학자들이 있다.[6]
스페인의 계몽주의[편집]
스페인은 종교가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교과서적인 나라였다. 가톨릭 교회가 운영하는 종교재판소로 개신교인들이나 계몽주의 철학이 발붙일 곳이 없었다. 하지만 스페인에서 카를로스 3세의 박애적인 통치 아래서 조금씩 주요 개혁이 진행되었다. 그의 이탈리아인 재상인 스퀼라체 후작(Marques de Squillace)의 개혁 조치에 1766년 마드리드에서 대규모 폭동이 벌어졌다. 폭도들은 마드리드에서 스퀼라체 후작이 만든 새로 설치한 가로등을 파괴했다. 이 폭동으로 스퀼라체는 이탈리아로 쫓겨가고 카를로스 3세의 개혁 조치에 큰 타격을 입혔다. 카를로스 3세는 이 폭동이 예수회의 음모로 보고 예수회를 추방하고 종교재판소를 억압했다.[7]
포르투갈의 계몽주의[편집]
리스본 대지진 이후 재건을 이끈 폼발 후작은 과거 해양 개척을 선도했던 나라의 위상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폼발 후작은 1750년 남미에서 자신들만의 왕국을 꾸리고 국왕 주제 1세를 암살하려해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은 예수회를 추방시키는 등 여러 개혁에 앞장섰다. 예수회가 남미에서 자신들만의 왕국을 꾸미고 국왕 부럽지 않은 생활을 누린다는 사실은 훗날 볼테르의 소설 캉디드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계몽주의의 영향[편집]
계몽주의는 전제와 억압을 거부하며 현대의 민주주의, 인권과 시민의 자유에 대한 제도적 보장, 세속주의와 종교적 다양성, 개인의 윤리적 자율성, 과학적 태도 견지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계몽주의는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바꿀 수 있다는 믿음에 입각한 운동이었다. 계몽주의는 사상과 행동 그리고 진보를 가로막는 정통 사상과 권위를 깨부수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이러한 진보적 태도는 프랑스 혁명의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 훗날 에밀 졸라 등 프랑스의 지식인들의 사상 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또 계몽주의는 전통적인 로마 가톨릭 교리에서 벗어난 자유주의 신학에 영향을 주었으며, '하나님의 책'(The book of God)이라고 불리던 성서에 대한 자유로운 비평의 토양이 되었다.
대표적 계몽사상가[편집]
토머스 홉스 (1588년 ~ 1679년)
존 로크 (1632년 - 1704년)
샤를 드 몽테스키외 (1689년 ~ 1755년)
볼테르 (1694년 ~ 1778년)
장자크 루소 (1712년 ~ 1778년)
드니 디드로 (1713년 ~ 1784년)
장 르 롱 달랑베르 (1717년 ~ 1783년)
이마누엘 칸트 (1724년 ~ 1804년)
니콜라 드 콩도르세 (1743년 ~ 1794년)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1770년 ~ 183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