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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조금씩배워보자/동서고전 200선

E17 – 안나 카레리나 (Anna Karenina) / 톨스토이(L.N. Tolstoi, 1828~1910)

E17 – 안나 카레리나 (Anna Karenina) / 톨스토이(L.N. Tolstoi, 1828~1910)

(출전: 동서고전 200선 해제3 / 반덕진 / 가람기획)

 

  상류사회의 정숙한 부인 안나의 불륜의 사랑을 중심으로, 1870년대의 러시아 귀족사회를 묘사한 가정소설이자 사회소설이다. 그는 여기서 안나와 브론스키의 구원받을 수 없는 관능적인 사랑에, 레빈과 키치의 진정한 기독교적 사랑을 대비시키고 있다. 전자가 단순한 육체적 사랑이며 이기적인 데 비해, 후자는 형이상학적 사랑의 개념이며 자기 희생이다. 바로 여기에 작가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있다. 아울러 이 작품은 19세기 러시아 사회의 한 풍속도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사실주의 소설의 걸작이다.


a. 문학가에서 구도자로

  러시아의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톨스토이 백작 집안의 4남으로 태어났다. 톨스토이 가의 영지였던 야스나야 폴랴나는 러시아로 어로 밝은 숲속의 공터 라는 뜻으로 톨스토이 문학을 탄생시킨 토양이 되었다. 그의 작품이 배후에 항상 광활한 러시아의 자연이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었으나 친척집에서 좋은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그러나 타고난 이원성, 즉 풍부한 감수성과 냉철한 이성으로 인해 불안과 동요 속에 일생을 보내야 했다. 19세에 카잔 대학에서 대학은 학문의 장지 라는 결론을 내리고 중퇴, 고향으로 돌아가 합리적인 농장관리와 영지 내의 농민생활을 개선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얼마 후 모스크바로 이주하여 방탕하게 지내다가 형의 권유로 군에 입대했다.

 이때 그는 이 아름다운 카프카스의 자연에서 여가의 대부분을 글을 쓰며 보냈는데, 어린이의 심리를 가장 매혹적으로 묘사한 (유년시대)를 비롯하여 크림 전쟁을 소재로 한 (세바스토폴 이야기)는 그가 군에서 경험한 전쟁의 참혹성과 비인도성을 생생하게 그린 작품으로 그의 작가적 위치를 확고하게 만든 출세작이기도 하다. 그후 두 차례의 서유럽 여행을 통해 문명의 해악을 실감하고 루소의 자연에 바탕을 둔 농민교육에 힘을 쏟았다.

  1862년 34세의 노총각은 전부터 알고 지내던 18세의 소피아와 결혼하여 자신의 영지에서 신혼살림을 차리고 밝고 편안한 생활을 즐기게 되었다. 결혼 후 새로운 창작열에 불타오른 톨스토이는 문학에 전념하여 양적 질적인 면에서 최대의 걸작으로 알려진 서사시적 대하소설(전쟁과 평화)(1865~1866, Russian Herald)를 발표했다. 행복한 가정생활의 찬가인 이 작품은 삶의 즐거움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어 (안나 카레니나)(1873~77)를 완성하여 세계적인 대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는데, 이 무렵부터 톨스토이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에 대한 무상 등 심한 정신적 동요를 일으켜 인생의 위기를 맞게 된다. 그는 체계적으로 섭렵했던 철학 신학 과학서적에서는 별 도움을 얻지 못했으나 농부들에게서 그 실마리를 찾았다. 농부들은 그에게 인간은 신에게 봉사해야 하며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그의 사상적인 전환점이 되었던 이 시기를 전환기라고 한다. 이때부터 그의 숙명적인 영혼의 투쟁은 시작된다. 1882년(54세) 그의 (참회)에는 그의 정신적 고뇌가 잘 나타나 있다. 그가 종교로 전향한 시기는 바로 이 시기로 도덕가적인 면모가 드러났다. 즉, 평등, 노동존중, 생활의 간소화, 반문화, 반국가, 반전 등을 내용으로 하는 종교적 인도주의, 이른바 톨스토이즘이 대두되었다. 그후부터 그의 문학활동은 주로 종교적 정신적 방향으로 기울어져갔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마침내 소설무용론으로까지 발전하여 그의 이전의 작품들을 허위의 예술이라 폄하하고 오로지 선을 추구하는 작품만이 참다운 예술이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그는 50세를 전후로하여 예술가로서의 톨스토이는

사상가 종교가로서의 톨스토이로 전환한다.

 그는 교회의 일체의 권위화 형식을 부정했다. 그는 모든 과학적인 발전에 회의를 느끼고 대중의 원시적인 신앙을 따르며 농민의 마음속에서 진리를 찾아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크리스도교는 무저항주의를 지상명령으로 보고 어떤 형식의 폭력도 비난했다. 그는 이 세상의 종교들, 즉 기독교 불교 유교 등을 연구하여 보편적인 종교를 만들려 했다. 이 점에서 그는 러시아의 정교회를 전세계의 종교로 만들려 했던 토스토예프스키와는 다르다.

  그는 이후 30년 동안 종교와 도덕에 관한 수많은 논문을 남겼고, 1885년(57세)에는 사유재산을 부정했다. 이 문제로 부인과 충돌하여 그의 저작권은 그의 부인이 관리했다. 이 무렵 병역을 거부하여 탄압을 받고 있던 이교도들의 캐나다 이주자금 조달을 위한 방편으로 쓴 (부활)(1889)이 발표된다. (부활)은 그의 정신적 종교적 마지막 참회라는 의의를 가지나, 이 작품에서 그리스 정교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정교회로부터 1901년(73세) 파문을 당하게 된다.  사유가 모든 악의 뿌리 라는 생각에 만년에 그는 재산과 저작권을 포기했는데, 이는 가족에게는 중대한 문제였기 때문에 부부간에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기독교적 이상을 품고 러시아 농민들을 위해 헌신하고자 했던 그는 자신의 뜻에 공감하지 못하고 귀족적인 분위기에 젖어 있는 아내와의 불화로 82세의 노구를 이끌고 1910년 10월 28일 새벽, 13명의 자녀 중 마지막까지 자신의 세계를 이해해준 막내딸 알렉산드라와 주치의를 데리고 집을 떠나 방랑길에 나섰다가 도중에 숨을 거두었다.


b. 톨스토이의 사상과 주요작품

  문학가로서의 톨스토이의 탁월함을 비판할 사람은 거의 없다. 그는 가장 위대한 소설가로 앞세대 러시아 소설가들의 영향보다는 루소, 스탕달, 새커리 등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상가로서의 그의 모습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그는 진리탐구에 지칠 줄 몰랐고 인간의 세계에서 절대적인 것을 탐색하고자 했다. 그 결과 그의 비타협적인 태도와 완벽하고 합리적인 설명은 그러한 강박관념에 가까운 의무감 때문에 다소 부자연스러운 면도 없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역사 교육 비폭력 예술관을 논할 때도 이런 면이 있음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의 사상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한결같이 그의 사상이 19세기 자유주의와 연관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는 소수에 의한 다수의 억압이 전세계적인 현상으로 이해했고, 이의 궁극적 해결방법은 인간의 도덕적인 성장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계급과 국가가 없는 상태를 향한 진보적 운동은 마르크스의 주장인 경제 결정론이나 폭력투쟁과는 반대로 모든 개인이 도덕적으로 완벽해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 도덕적 완성은 사랑이라는 지고의 법을 준수하고 어떤 형태의 폭력도 거부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톨스토이는 자신의 이성주의를 극단적으로 밀고나간 19세기 도덕사상가였다. 


    전쟁과 평화

  현대의 (오디세이아)라고 불리워지는 이 작품은 나폴레옹 전쟁의 역사적 경험을 배경으로 피에르와 안드레이, 그리고 로스토프 가의 기록을 중심으로 당시 러시아의 국민생활의 일대 파노라마가 선명하게 재현되고 있다.

  559명의 등장인물 중에서 명예욕이 강하고 현실적이며 전형적인 귀족인 안드레이 공작은 전장에서 부상한 이래 삶의 공허감 속에서 죽는다. 이에 반해 피에르는 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인생의 목적은 사는 데 있다는 삶의 철학을 가지고, 역시 같은 생각을 가진 발랄한 나타샤와 함께 새생활을 떠난다. 이는 당시의 톨스토이 자신이 체험한 신혼 당시의 밝은 낙천주의의 반영이다.

  안드레이 공작은 작가가 부여한 삶이라는 과제에 대하여 마이너스 방향으로 갔기 때문에 멸망한 데 반해, 피에르는 긍정적인 해답을 내려 행복한 새 삶을 살 수 있었다. 처참한 전쟁을 묘사하면서도 이 작품에서 의외로 밝은 청춘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부활

  이 작품은 코니라는 법률가 친구로부터 들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만년의 작품이다. 여죄수 마슬로바의 재판에 배심원으로 참석한 네플류도프 공작은 피고가 자신이 청년시절에 추행했던 카추샤란 것을 알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그녀와 결혼을 결심하고, 잘못된 재판으로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는 그녀를 따른다. 그러나 그녀는 네플류도프의 장래를 생각하여 마음 속으로는 사랑하면서도 그와 헤어진다. 그러던 어느 날 네플류도프는 여관에서 성서를 펴놓고 복음서 속에서 갱생의 길을 찾아낸다. 원숙하고 예리한 심리묘사, 당시 사회의 불합리성을 파헤친 이 작품을 두고 비평가들은 종교적 속죄와 영혼의 완성을 설교하는 예술적 성서라고 평가하기도한다.


c. 당대의 도덕과 애정을 형사화한 작품

  이 작품을 두고 도스토예프스키는 예술작품으로 완벽한 것이며 현대 유럽문화 가운데 견줄 만한 상대가 없는 작품 이라 평했고, 로맹 롤랑은 악에게 파멸당하고 신의 섭리 속에 분쇄되는 이 영혼의 비극, 대단히 심각한 한 폭의 그림이라 평했다.

  세계문학에서 가장 매력적인 여주인공의 하나인 안나는 젊고 아름다우며 근본적으로 선량하지만 파멸의 운명을 지닌 여성이다. 어린 나이에 숙모의 선의의 중매로 화려한 경력을 가진 장래가 촉망되는 관리와 결혼한 안나는 페테르스부르크의 사교계에서도 가장 활기찬 교제로 만족한 나날을 보낸다. 어린 아들을 사랑하고 20세나 연상인 남편을 존경하며 타고난 낙관적인 기질로 생활의 모든 즐거움을 한껏

맛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모스크바 여행에서 만난 브론스키에서 안나는 격렬한 사랑을 느낀다. 이 사랑은 그녀의 주변을 온통 바꾸어놓는다. 눈에 띄는 것은 모두가 잘못된 것이다. 모스크바에서 돌아오는 그녀를 마중하기 위해 페테르스부르크의 철도역으로 나온 카레닌의 귀가 불품 없고 지나치게 크다는 것을 그녀는 갑자기 깨닫는다. 그때까지 한 번도 남편을 비판적으로 본 적이 없었던 그녀는 그 귀에 새삼 놀라게 되는 것이다. 이제 남편은 자기 생활과 관계하는 온갖 사물의 하나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모든 것이 변했다. 그녀에 대한 브론스키의 정열은 강렬하고 하얀 광선이며, 그 빛에 조명되었던 예전의 세계는 이제 사멸된 혹성의 풍경처럼 보인다.

  안나는 남자답고 핸섬한 브론스키에서 점점 더 강렬한 애정을 느끼게 되어 이성으로는 억제할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된다. 안나는 공작부인 베트시처럼 자신의 정사를 비밀에 부칠 수 없었다. 성실하고 정열적인 안나의 성격이 속임수나 비밀에 참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안나는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을 남편에게 내주는 일에 동의하면서까지 자신의 생활을 포기하고 브론스키에게 모든 것을 바친다.

  처음에는 이탈리아에서, 다음엔 중앙 아시아의 브론스키의 영지에서 그와 함께 지낸다. 이 공공연한 정사는 사교계 사람들의 눈에는 더할 수 없는 부도덕으로 보인다. 결국 안나와 브론스키는 도시의 생활로 되돌아온다. 그녀의 정사 그 자체보다도 사교계의 관습에 대한 안나의 공공연한 도전이 위선에 찬 사교계를 분노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안나가 사교계의 노여움을 사서 냉대받고 모욕당하고 버림을 받는 데 반해 브론스키는 남자이기에 비난받는 일 없이 옛 친구들을 만나기도 하고 귀족회의 등으로 외출을 자주하여 안나의 허전함은 더해진다. 정식부인이 아닌 그녀는 브론스키가 어느 집의 딸과 결혼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늘 마음에 걸려 끊임없이 질투의 불꽃을 태운다.

  한편 브론스키는 그녀의 이러한 이기주의적이며 독점적인 애정이 차차 무거운 짐으로 느껴진다. 사소한 일로도 말다툼이 잦아지고 그때마다 광적인 포옹과 애무로 해결되지만 이튿날에는 역시 똑같은 일이 되풀이되곤 한다. 질투와 정신적 불안에 몰려 브론스키의 사랑을 잃었다고 단정해버린 안나는 절망한 나머지 달리는 열차에 투신자살한다. 안나를 잃음으로써 또한 인생의 모든 것을 잃은 브론스키는 더 이상 살아갈 희망마저 가질 수 없게 되어 때 마침 발발한 세르비아 전쟁에 의용군 부대를 이끌고 전선으로 떠난다.

  이것과 병행해서 언뜻 보기에는 연관이 없는 줄거리가 진행된다. 귀족지주인 레빈과 공작의 딸 키티와의 구애와 결혼 이야기다. 영지에 틀어박혀 농지관리에 전념하고 있던 레빈은 상경하여 키티에게 청혼하나 브론스키에게 마음이 기울어져 있던 키티는 매정하게 거절한다.

그러나 안나에게 브론스키를 잃은 키티는 정신적 타격을 입고 한동안 방황하다가 결국 청혼을 받아들인다. 둘은 결혼하여 레빈의 영지에 정주하고 농업경영에 온 정열을 기울여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생활을 영위한다. 키티와의 평화스런 생활 속에서 레빈은 가끔 심각한 의문에 봉착하게 된다.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 사람은 도대체 왜 사는 것일까 하는 의문으로 괴로워하고 번민하면서 그 해답을 구하기 위해 철학서적을 탐독하지만 어떤 철학서적도 인생의 의의 같은 것을 분명하게 제시하지는 않는다. 레빈은 주변 사람들의 생활방식에 눈을 돌려 소박한 농민들이 그런 의문 따위는 조금도 품지 않고 정직한 마음으로 신의 존재를 믿고 신의 섭리에 따라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고 감동한다.


d. 문학사적 의의

  이 작품은 문체와 서술기법에서 있어 (전쟁과 평화)와 비슷하지만 톨스토이의 인생철학은 이 두 작품을 저술하는 동안 다소 변화했다. (전쟁과 평화)는 삶을 긍정하는 낙관적인 소설이나, 1860년대 러시아 사회를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비관적이며 주인공들은 내부갈등으로 인해 인간적 파멸에 이른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불륜의 사랑은 비극적인 운명을 피할 수 없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불행한 로맨스는 톨스토이 자신의 결혼생활을 바탕으로 기술한 키티와 레빈의 고통스러운 의문, 뇌리를 떠나지 않는 자살 생각, 농부들과 어울리고자 하는 욕망 등은 당시 톨스토이가 겪고 있던 갈등이 뚜렷이 반영된 것이다.


    두 사랑 방식

  작가가 이 소설에서 전하려는 도덕적 메시지는 무엇인가는 이 소설을 다시 정독한 후 레빈과 키티의 이야기와 안나와 브론스키의 이야기를 비교해본다면 명확해질 것이다. 레빈의 결혼은 형이상학적인 사랑과 자발적인 희생이 기초가 된 반면, 안나와 브론스키의 관계는 육체적 사랑이 그 기초가 되었으며 거기에는 파국이 깃들어 있다.

  언뜻 보기에 안나는 남편 이외의 남자와 사랑에 빠짐으로 해서 사회로부터 벌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 같은 도덕은 물론 비도덕적이며 비예술적이다. 왜냐하면 같은 사회의 상류부인이라면 누구나 검은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몰래 정사를 즐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솔직하고 불행한 안나는 이 거짓의 베일을 쓰지 않았다. 사회의 규율은 일시적인 것으로, 톨스토이의 관심은 영원한 도덕적 요청에 있었다.

  여기에 톨스토이가 전하려는 참된 교훈이 있다. 말하자면 사랑은 오로지 육체적 사랑만은 존재할 없다는 것이다. 그 경우의 사랑은 이기적이며 그러기에 창조보다는 오히려 파멸을 자초하는 것이다. 이 핵심을 예술적으로 가능한 한 명확하게 제시하기 위해서 톨스토이는 놀라운 형상의 흐름 속에서 두 가지 사랑을 묘사하고 생생한 대조를 보여주었다. 브론스키와 안나의 육체적 사랑과 레빈과 키티의 진정한 기독교적 사랑이 그것이다. 물론 후자의 사랑도 충분히 관능적이지만 그것은 책임과 온화함과 진실과 가족의 즐거움이라는 순수한 분위기 속에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신에 의한 인간의 심판

  한편 성서에서 인용된 복수는 내게 맡겨라 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는 한마디로 안나를 심판할 수 있는 것은 신뿐이라는 믿음이다. 언제나 도덕률은 불변이며 이것을 어긴 자는 반드시 멸망으로 끌려가는데, 신의 법도를 범한 자를 심판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니고 신뿐이라는 사상,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는 자비의 법칙만이 있다는 것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근본사상이다. 그러나 안나를 통해 부패한 상류사회의 도덕적 타락을 보여주는 한편 그녀의 자아발견 과정에 동정하면서도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는 상황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토마스 만은 이 작품에 대해 조금의 흠집도 없이 전체의 구도나 세부의 디테일에 한 점의 티도 없는 작품 이라 평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