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좋은 펌 글 모음

[유홍준 교수가 45년 피운 담배를 끊은 이유는?]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74807.html?_fr=sr21




[특별기고] 고별연

등록 : 2015.01.22 18:53수정 : 2015.01.22 20:25

유홍준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새해 담배를 끊었다. 값이 올라서도, 건강이 나빠져서도 아니다. 세상이 담배 피우는 사람을 미개인 보듯 하고, 담배 피울 곳이 없어 쓰레기통 옆이나 독가스실 같은 흡연실에서 피고 있자니 서럽고 처량하고 치사해서 끊은 것이다. 잘 가라, 담배여. 그동안 고마웠다, 나의 연차여.

새해로 들어서면서 나도 담배를 끊었다. 아직 금연에 성공했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는 안 피웠다. 지난해 그믐밤 마지막 담배를 한대 피우면서 이것이 고별연이라고 생각하니 쓸쓸한 마음이 절로 일어났다.

내가 담배를 피운 지 45년이다. 200년 전, 나하고 종씨인 유씨 부인은 17년간 써오던 바늘이 부러지자 이를 애도하는 <조침문>이라는 글을 남겼듯이 한생을 같이해온 이 기호품과 결별하자니 깊은 감회가 일어난다.

담배의 해독을 부정하지 않지만 순기능도 없는 것은 아니다. 옛날 영화를 보면 일터에서도, 공원에서도, 전쟁터에서도 휴식의 상징은 담배였다. 글을 쓰다 펜이 멈출 때 담배 한대 물고 잠시 사색에 잠기는 것은 큰 위안이었다. 특히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엔 담배가 약이다. 정희성은 ‘동년일행’에서 이렇게 읊었다.

“괴로웠던 사나이/ 순수하다 못해 순진하다고 할밖에 없던/ 남주는 세상을 뜨고/ 서울 공기가 숨쉬기 답답하다고/ 안산으로 나가 살던 김명수는/ 더 깊이 들어가 채전이나 가꾼다는데/ 훌쩍 떠나/ 어디 가 절마당이라도 쓸고 싶은 나는/ 멀리는 못 가고/ 베란다에 나가 담배나 피운다.”

또 누구는 말한다, 싸우지 않고는 살 수 없었고, 술이 아니면 잠들 수 없었던 저 캄캄한 시절에 담배마저 없었다면 그 간고한 세월을 어떻게 견뎠겠냐고. 유신 시절 감옥에서 출소한 어느 민주인사는 바깥세상이 감옥과 다른 것이라곤 담배 피울 수 있는 자유가 있는 것뿐이라고 했다.

담배는 사람 사이를 가깝게 해준다. 라이터가 귀하던 시절 남의 담뱃불을 빌려 불을 댕기는 모습은 인생살이의 살내음을 느끼게 한다.

<8·15해방시집>에 실린 이용악의 ‘시골사람의 노래’는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밤기차 안에서 “어디루 가는 사람들이/ 서로 담뱃불 빌고 빌리며/ 나의 가슴을 건너는 것일까”라며 침묵 속에 오가는 온정을 그렸다.

사실 나는 20년 전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둘째 권을 펴내고 나서 담배를 끊었었다. 그러던 내가 4년 만에 다시 담배를 피우게 된 것은 1997년 <북한 문화유산답사기>를 위해 방북하면서였다.

북측 인사들은 만나면 담배부터 권했다. 그때마다 나는 손을 저으며 사양했다. 모처럼 친선적 관계를 맺고자 찾아가서 손사래부터 치는 것이 멋쩍었고 그들은 나를 무슨 골샌님처럼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두번째 방북길에 올랐을 때는 담배를 듬뿍 사가지고 가 선물로 내놓고 그들이 ‘백두산’ 담배를 권하면 나는 남한의 ‘한라산’ 담배로 응했다. 그러나 피우지는 않고 시늉만 냈다.

그러다 꿈에도 그리던 백두산 정상에 올라 신령스러운 천지 못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을 때 북측 안내원이 다가와 “교수선생, 백두산 정상에는 ‘백두산’ 담배가 제격 아니겠습니까”라며 권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순간에도 한 대 피우지 않는다면 그건 감성의 동물인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담배를 건네받아 불을 댕겼다. 핑 돌거나 거부감이 일어나면 바로 버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천지가 더욱 황홀해 보였다. 이후 나는 다시 담배를 피우게 되었다.

90년대 말에는 수입 담배가 일반화되었지만 양담배에는 손이 가지 않았다. 딱히 입에 맞는 것이 없어 이것저것 피웠는데 2003년 무렵 ‘클라우드 나인’이 나왔다.

나는 담배만큼은 편의점에서 사지 않았다. 지하철 안국역 입구 가판대에선 우리 어머니보다 훨씬 나이 많아 보이는 할머니가 가게를 보고 있었다. 할머니는 나를 보면 단골손님에게 보내는 다정한 눈인사를 건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담배를 사러 갔는데 할머니가 새로 나온 담배라며 이걸 뭐라고 읽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클라우드 나인이네요. 이게 국산이에요?”

“그렇다네요. 오늘 놓고 갔어요. 그런데 이름이 꼬부랑말로 이렇게 길어 어떻게 외운담.”

“그냥 ‘큰일나요’라고 하세요.”

이후 고별연까지 내가 피운 담배는 ‘큰일나요’였다. 문화재청장 시절 한번은 대통령 기록실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대통령께서 청장님과 저녁 식사를 한 뒤 담배를 바꾸셨는데 무슨 사연이 있었냐”는 것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엄청난 골초이셨다. 식사를 하고 나면 담배를 연거푸 두대를 피우는 것이었다. 가만히 보니 대통령은 타르가 1.0㎎인 ‘에쎄’를 피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5.0㎎인 클라우드 나인을 한번 피워 보시라고 권했더니 맛있다며 묻는 것이었다.

“이게 어디 제입니까?” “국산입니다.” “클라우드 나인이 무슨 뜻입니까?” “속어로 ‘뿅 갔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런 단어를 써도 됩니까?” “외국에도 수출하다 보니 자극적인 이름이 필요했나 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담배 이름은 마약쟁이들의 비속어를 썼다고 비난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담배인삼공사 임원을 만났을 때 클라우드 나인은 아홉개의 구름이라는 뜻이니 이것은 한글소설 <구운몽>에서 나온 것이라고 둘러대라고 일러주었다.

담배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7세기로 <조선왕조실록>에선 광해군 때부터 담배 얘기가 나온다. 담배라는 말은 영어 타바코에서 나온 것이고 옛날에는 연초라고 했다. 이후 많은 애연가를 낳아 영조 때 허필이라는 문인은 호를 연객(烟客)이라고 했고, 이옥은 <연경>(烟經)이라는 저서를 짓기도 했다. 연초는 연차(煙茶)라는 매력적인 이름으로도 불렸다. 녹차, 홍차 같은 차로 불린 것이다.

위창 오세창 선생이 옛 명인들의 편지를 모아 엮은 <근묵>에 실린 정조대왕의 간찰은 어느 신하에게 “게장 한 항아리와 창덕궁에서 재배한 연차 두 봉지를 보낸다”는 물목이 들어 있다. 신하를 챙겨주던 정조대왕의 자상한 모습과 함께 담배에 어린 따뜻한 정을 새겨보게 하는 대목이다.

10여년 전부터 나는 매월 마지막 일요일이면 조계사 세미나실에서 열리는 ‘말일파초회’에서 옛사람의 간찰을 읽는다. 이때 쉬는 시간이면 재완이, 채식이와 밖으로 나와 소나무 아래서 연차를 피웠다. 우리는 이 다정한 만남을 ‘송하연차회’라 하였다. 그래서 요즘 세상에선 혈연, 지연, 학연보다 더 친밀한 것이 흡연 사이라고 한다.

이렇게 좋아하면서도 내가 담배를 끊은 이유는 담뱃값이 올라서도 아니고, 건강이 나빠져서도 아니다. 세상이 담배 피우는 사람을 미개인 보듯 하고, 공공의 유해사범으로 모는 것이 기분 나쁘고, 집에서도 밖에서도 길에서도 담배 피울 곳이 없어 쓰레기통 옆이나 독가스실 같은 흡연실에서 피우고 있자니 서럽고 처량하고 치사해서 끊은 것이다.

하기야 담배를 그만 피울 때도 됐다. 홍만선의 <산림경제>를 보면 삶의 즐거움을 쭉 열거한 ‘인생락’의 맨 마지막에 농손락(弄孫樂)이 나온다. 손주와 노는 농손락을 얻으려면 금연할 수밖에 없단다.

금연은 정말 힘들다. 찰스 디킨스는 역설적으로 말했다. “담배를 끊는 일은 아주 쉬운 일이다. 나는 백번도 넘게 끊었으니까.”

20년 전 경험에 의하건대 금연은 매정하게 결별하는 의지밖에 없다. 금연 뒤에 찾아올 기쁨을 기대하며 끊어야 한다. 이제는 아침마다 칵칵거리지 않게 되고 양치질할 때 나오는 조갯살만 한 가래도 없어질 것이다. 방에선 곰팡내가 사라질 것이고, 얼굴엔 살이 뽀송하게 오르며 피부도 맑아질 것이다.

이렇게 한껏 자위해 보지만 여전히 담배를 미워할 뜻은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내 인생의 벗이 되어 주었던 것에 깊이 감사하며 강제로 이혼당한 기분이 든다. 나는 고별연 연기를 뿜으면서 사무치는 아쉬움 속에 이별을 고했다. 잘 가라, 담배여. 그동안 고마웠다, 나의 연차여.

유홍준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