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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조금씩배워보자/동서고전 200선

B002 – [삼국유사] 일연(1206~1289)

B002 – [삼국유사] 일연(1206~1289)

우리 삼국시대의 역사. 문학. 종교. 지리. 사상. 미술 등의 유산을 담고 있는 한국 고대문화 유산의 보고다. 정사 중심의 <삼국사기>에서 빠진 야사를 많이 채록하고 있고, 특히 단군신화와 14수의 향가의 수록은 값진 문화유산으로 평가된다. 전체는 5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2권은 고조선부터 신라 말까지의 역사를, 3~5권까지는 한국불교사를 담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13세기 원의 지배하에서 민족의 수난기를 살아가는 한 선승이자 사상가인 일연의 고뇌와 역사의식이 깊이 반영되어 있다.


a.생애

 

 <삼국요사>의 저자 일연은 역사가가 아니라 평생 선승의 길을 걸은 승려였다. 그러면 왜 선종 승려이면서 그는 <삼국유사>라는 역사서를 저술했을까? 또한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삼국유사>의 높은 사학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선승으로서의 그의 행적에 대한 의문에 대해 어떻게 답할 것인가?

 일연의 속성은 김씨요, 이름은 견명, 경상도 경산 출신이다. 1214년 9세 때 광주의 무량사에서 선학을 닦다가 1219년 출가하여 설악산 진전사의 고승인 대웅의 제자가 되어 구족계를 받았다. 어릴 적부터 천성이 총명하고 덕이 있었던 그는 온화한 인품과 학문에 대한 남다른 애착으로 불가 서적은 물론 제자백가의 사상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다. 특히 사서를 즐겨 읽어 일찍이 움직이는 역사 속에서 현실을 직관하는 예리하고도 정확한 역사의 흐름을 보는 눈을 가졌다. 1227년 승과에 급제한 되 보당암 주지로 있으면서 참선에 몰두했다.

 1237년 삼중대사가 되고 46년에 선사, 59년 대선사에 올랐다. 61년 원종의 부름을 받고 강화도로 가서 선월사 주지가 되어 보조국사 지눌의 법을 계승했다. 그뒤 경북 달성의 인홍사 등을 다니며 설법과 강론을 펴고 77년 청도 운문사에서 선풍을 크게 일으켰다. 81년 국존으로 추대되고 원경충조의 호를 받았다. 지난 역사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졌던 그는 일찍이 김부식이 엮은 <삼국사기>에서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에 대해 다루지 않아 빠진 단군신화에 대한 자료를 모으는 데 힘을 쏟기도 했다.

 그는 노모의 봉양을 위해 귀향했다가 이듬해 경북 군위의 인각사를 중건하고 당시의 선문을 전체적으로 망라하는 <구산문도회>를 개최했다. 이러한 사실은 그를 중심으로 하는 <가지산문>(선종9산 중 신라말 도의가 연 종파)이 전불교계의 교권을 확립한 것으로 파악된다. 최씨 집권기까지는 미미한 존재였던 가지산문이 원 지배기에 들어와서는 수선사를 대신할 불교계의 중심교단으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특히 원 지배기로 고려사회가 개편될 때 일연이 충렬왕에 의해 국존에 책봉될정도로 불교계에서 비중이 컸으며,이때 부각된 보수세력의 지원을 받아 가지산문이 불교계의 중추세력으로 등장했다. 

 1289년,그곳에서 84세,법랍 71세를 일기로 입적하자 전국사찰은 몰론 온 백성들이 애석해했다고 한다. 현재 인각사에 탑과 비석이 남아 있고 행적비는 운문사에 있다. 한편 한국의 고대신화와 민간설화를 정리하고 향기를 비롯한 불교관계 기사를 수록한 <삼국유사> 5권을 지었는데, 김부식의 <삼국사기> 와 함께 한국 고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b.시대적 배경과 저술동기 


 일연이 생존한 시대는 최씨 무단정권의 전성기에서 몽고의 침입과 강화 천도, 몽고에 대한 굴복 등 국난의 시기였다. 몽고군의 침략을 피해 여기저기로 전전하면서, 몽고군에 의해 불타버린 황룡사 9층탑의 처참한 모습에 울분을 머금고 경주.달성 등 경사도 지방은 물론,강화도.설악산.오대산 등 가는 곳마다 사라져가는 고문서와 설화 등을 모았으며, 유물과 유적에 대해서도 현장에서 관찰하고 고증한 것을 기록해 만년의 <삼국유사>집필에 매진했다.

 이처럼 <삼국유사>는 청장년시대를 전란 속에서 보내야 했던 그에게 일종의 정신적 반항이기도 했으리라. 따라서 <삼국유사>는 거대한 몽고군의 말발굽 아래 짓밟힌 고려사회의 민족적 각성과 비원을 배경으로 하여 이루어진 잡록적 사서이다.

 일연은 평생 동안 100여 권의 편저를 남겼으나 현재는 <삼국유사> 와 <중평조둥오위> (최근 발국)만이 전해진다. 이 저서도 일연이 입적한 뒤 정덕본이 발견되어 일연의 저술임이 밝혀진 것이다. 정덕본 마지막 첫머리에 적힌 <가지산하 인각사운운>이 바로 저자의 이름을 밝히게

된 실마리다 되었다. 가지산이란 장흥 보림산의 주산이요, 신라말 선종계열의 도의가 선문을 열었고 그유파를 <가지산문>이라 불렀다. 일연 역시 그 문하였기 때문에 가지산하라 했던 것이고, 인각사란 그가 죽을 때까지 주석했던 군위에 있는 절이었다. 이 기록도 일연 자신이 한 것이 아니고 그의 제자가 적어둔 것이라 한다. 


c. <삼국유사> 의 내용


 <삼국유사> 는 삼국의 역사 전반에 관한 사서로 엮어진 것이 아니라 저자의 관심을 끈 자료들을 선택적으로 수집,분류한 자유로운 형식의 역사서다. 김부식이 지은<삼국사기>를 보고 우리 나라 고유의 것에 대한 미비점을 보완하려는 의도가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본격적인 저술은 만년에 했다 해도 마음을 정해 자료를 모은 것은 평생 동안의 일이었으므로 이 책에는 그의 일생의 노력이 웅집되어 있다. 

 <삼국유사>의 체계는 5권 9편 144항목으로 되어 있는데,9편은 왕력. 기이. 홍법. 탑상. 의해. 신주. 감통. 피은. 효선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력>편은 삼국.가락국.후고구려.후백제 등의 간략한 연표다. 

 <기이> 편은 고저선으로부터 후삼국까지의 단편적인 역사를 57항목으로 서술했는데,서두에는 이 편을 설정하는 이유를 밝힌 서(??)가 붙어

있다.

 <홍법> 편에는 삼국이 불교를 수용하게 되는 과정 및 그 융성에 관한 6항목, 

 <탑상>편에는 탑.불상에 관한 31항목이 들어 있고, 

 <의해>편에는 원광서학조를 비롯한 신라의 고승들에 대한 전기를 중심으로 14항목.

 <신주>편에는 신라의 밀교적 신이승들에 대한 3항목, 

 <감통>편에는 신앙의 영이감응에 관한 10항목.  

 <피은>편에는 부모에 대한 효도와 선행에 대한 미담 5항목이 수록되어 있다.

 대체로 불교에 관한 기록이 많으며,이중 <홍법>편과 <의해>편은 <삼국유사>에서 가장 내용이 충실하고 잘 다듬어진 것이다.

 <왕력>과 <기이>를 제외한 각 편은 내용 그대로 삼국의 불교사라 할 만큼 불교적인 내용으로 엮어져 있다. 단군설화를 비롯,고대의 신화.전설.민속.사회.고어록.성씨록.지명의 기원.사상.신앙 등을 금석및 고전적의 인용과 견문으로 서술했다. 

 이러한 것들은 대개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유교적 합리주의적 정신으로 말미암아 버린 고기록 중 가장 한국적인 것으로 고대우리 민족생활사의 보전이다. 여기에 인용한 것들은 당시의 전적을 고중하는 데 있어 가장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 삼국 외에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삼한.사군.낙랑.대방.말갈.발해.졸본부여.후백제.가락 등의 기록도 아울러 실었다.

 여기에는 <삼국사기>에 빠진 고기의 기록을 원래대로 모아 놓았고 또한 향가 14수를 본문 중에 수록해놓았다. 이 향가는 <균여전>에 11수가 수록되어 있을 뿐 다른 책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는 국문학의 연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귀한 자료가 된다. 향가 14수의 제목을 들어보면 <서동요> <혜성가> <풍요><원앙생가> <모죽지랑가> <헌화가> <원가> <도솔가> <제망매가> <찬기파랑가> <안민가> <도천수대비가> <우적가> <처용가> 등이며, 이밖에도 많은 향가의 제목과 그 향가에 관련된 유래가 서술되어 있다. 

 또한 <단군신화> <북부여건국신화> <김알지신화> <석탈해신화> <가락국건국신화> <비형랑설화> <조신설화> <만파식적전설> <달박박설화> <선덕여왕기지설화> <지증왕설화> <사금갑설화> <지귀설화> <문회설화> <죽엽군설화> <죽적설화> <연오랑 세오녀설화> <빈녀양모설화> <거타지 설화> <욱면설화> 등이 실려 잇어 한국 고대 서사문학의 총본산을 이루고 있다.

 <삼국유사>의 본문 중 권1에 나오는 한편을 인용해 본다.


   연오랑 세오녀


 신라 8대 임금인 아달라 왕이 즉위한 지 4년이 되던 해의 일이다. 동해 바닷가 마을에 연오랑과 세오녀라는 부부가살고 있었다. 어느 날 연오랑이 바다에 나가 미역을 따는데 갑자기 웬 바위하나가 나타나 연오랑을 태우고 바다 건너 일본으로 데려갔다. 바위를 타고 나타난 연오랑을 본 일본인들은 필경 예사 사람이 아니라 여겨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런 사실을 알리 없는 세오녀는 남편이 돌아오진 않자 남편을 찾아 바닷가로 나갔다. 바닷가를 헤매던 세오녀는 어느 바위 위에 남편의 신발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세오녀가 바위위로 뛰어오르자 바위는 다시 그녀를 업고 바다를 건너 연오랑이 있는 일본으로 흘러갔다.  바위에 실려온 세오녀를 본 그 나라 사람들은 놀랍고 이상하여 왕이 된 연오랑에게 이 사실을 아뢰었고,이리하여 연오랑과 세오녀는 다시 만나 함께 나라를 다스렸다.

 그런데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일본으로 떠난 후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갑자기 빛을 잃어 온 나라 안이 어둠에 잠기는 괴변이 일어났다. 왕이 점성관에게 까닭을 물으니 <<우리 나라에 와있던 해와 달의 정기가 이제 일본으로 가는 바람에 이런 변괴가 생긴 것입니다>>하고 아뢰었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임금은 사신을 보내어 두 사람에게 돌아오기를 청했다.  이에 연오랑은 <<내가 여기에 온것은 하늘의 뜻이니 어찌 돌아갈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짐의 왕비가 가는 비단을 새로 짜놓았으니 이것을 가져가 하늘에 제사지내면 좋으리다>> 하고 비단을 주었다.

 사신이 돌아와 그 말대로 재사를 지냈더니 해와 달이 예전처럼 빛을 발했다. 그리하여 그 비단을 임금의 곳간에 소중히 보관하여 국보로 삼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그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 또는 도기야라 했다.


 우리는 연오랑.세오녀 부부가 일본의 왕이 되었다는 이 설화에서 당시 일본에 대한 신라인의 우월의식을 느낄 수있으며,비록 세오녀가 짜준 비단으로 광명을 되찾기는 했으나 일월정을 데려오지 못했으므로 일본에 대한 경계의식을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d. <삼국유사> 의 가치

 <삼국유사> 의 가치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선 그보다 150년전에 왕명을 받아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 와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삼국사기>는 기전체(紀傳體) 형식(본기.세가.열전.지.표의 인물중심의 역사서술방법) 으로 씌어진 삼국시대의 정사인 반면,<삼국유사>는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 (사건의 원인과 결과 중심으로 실증적으로 기술)에 가까운 설화중심의 야사로서,전자가 문화적 사대주의라는 평가를 받는 반면,후자는 상대적으로 주체적이고 실증적인 사관에 입각한 저서로 간주된다.

 또 전자가 유교적 윤리관을 바탕으로 합리성과 현실성을 중시한 반면, 본서는 불교 중심의 비현실적 내용도 포함하고 있으며,저자의 저자가 정치권력자인 반면,본서의 저자는 순수한 승려였으며,삼국사기는 신라.백제.고구려의 3국의 역사를 신라 중심의 반도사관으로 축소 묘사하고 있으나,<삼국유사>는 단군부터 고려시대까지 발해사를 포함하여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일연이 주도한 <가지산문>의 등장과정이 보수적인 정치세력의 지원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원 지배하의 고려사회의 모순을 극복하지 못했음은 물론,무신란 이후에 등장한 신앙결사의 단계에서 구축한 사상적 기반까지도 계승하지 못했다 한다. 이러한 공백을 성리학이 메움으로써 고려말에 사상적 전환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당시 사회모순에 대한 비판의식과 민중의식,몽고침입에 대한 자주의식에 문제가 있다는 비판도 있다.

 또한 일연과 동시대를 살면서 충렬왕의 부름을 끝까지 거절한채 고통당하고 있는 고려민중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시로 고발한 수선사 출신 충지의 행적과 비교해볼 때 이 시기의 일연의 행적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충지와 비교할 때 불교계의 타락상과 사회의 제모순을 직접 개혁하기 위해 왕실로 진출했다고 볼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그러나 일연이 걸은 선승으로서의 행적에는 충분한 설명이 어려운 부분도 없지 않지만,<삼국유사>에 대한 사학적 평가는 주목할 만하다.

 일연의 <삼국유사>는 좁게는 한국역사학의 고전적 저작이고 넓게는 한국학 분야의 잊혀질 수 없는 불멸의 금자탑이다. 고조선을 수록하고 <가락국기>를 전했으며 14수의 향가를 기록한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비록 <삼국유사>의 내용 중에는 현대인의 과학적 안목으로는 쉽게 이해될 수 없는, 예컨대 단군신하를 비롯하여 불교적 색채가 농후한 신이적 神異的 사실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서 결함으로 오해될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서술태도가 오히려 <삼국유사>가 갖는 최고의 성과라고 할 수도 있다. 

 단군신화에 나타나는 사회상이 그러하며 불교와의 관련을 중심으로 서술된 민중의 신앙과 생활상에 관한 구체적이며 신이한 기사 등이 그러하다. 그 결과 본서는 가치 높은 민족지의 성격을 갖기에 충분하다.  한 개인의 일생의 노력이 응집된 저서가 민족사의 맥을 잇는데 얼마나 중요한 디딤돌 역할을 하고 있는지는 <삼국유사>가 우리 고대문화의 총체적이고 원형적인 모습을 전해주는 금광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후대의 학자들이 여기서 고대문학의 금맥을 캐왔고 지금도 캐고 있다. 고대의 역사.지리.문학.종교 등 문화 전반에 대해 많은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일연은 고려사회가 이민족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되는 시점에 중앙의 후원으로 화려하게 각광을 받으면서 불승으로서는 최고승직자의 길을 가게 된다. 그러나 민족사의 격동기에 살아가면서 이민족의 재배가 가져온 민중의 고통과 참담한 사회상황은 일연으로 하여금 사상적 전환을 필요하게 했고, 그결과 그가 귀착한 세계는 현세구원적 관음신앙의 표방과 민중의 삶을 역사서의 형태로 승화시킨 <삼국유사>의 찬술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 곧 시대상황이 빚어낸 역사가로서의 일연과 선승으로서의 일연의  합치점이었다.





구성[편집](위키백과)

전체 5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5권 내에 다시 9편으로 나뉘어 있다. 권수는 편목의 유형에 따라 구분한 것이 아니라 분량에 따라 편의적으로 구분한 것이다. 제일(第一)이 붙어 있는 것이 왕력과 기이 두 편인 바, 왕력은 후대에 덧붙여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권1 왕력(王曆) 제1 : 간략한 제왕의 연대기로 중국 역대 왕조를 기준으로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를 대상으로 하여 기원전 57년부터 936년 고려 태조에 의한 후삼국시대의 통일기까지를 시간적 폭으로 한 연대표이다.

권1 기이(紀異) 제1 : 고조선, 위만조선, 삼한, 칠십이국, 낙랑군, 북대방, 남대방, 말갈·발해, 오가야, 부여, 이서국, 고구려, 백제 등 고조선으로부터 남북국시대 이전까지를 다루고 있으며 총 36조로 이루어져 있다.

권2 기이(紀異) 제2 : 통일신라의 출현과 이후 역대왕들 그리고 기타 등등을 다루고 있으며 총 24조. 고조선에서 고려 건국 이전까지 존재했던 여러 국가와 여러 왕(특히 신라왕)에 대한 기이한 이야기를 연대기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전체 분량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방대하다.

권3 흥법(興法) 제3 : 삼국에 불교가 처음 전래되고 흥성하는 과정을 기록했다. 총 8조.

권3 탑상(塔像) 제4 : 불교의 흥성에 따라 삼국(특히 신라)에 주목할만한 사탑이나 불상을 조성했던 사실을 기록했다. 총 29조.

권4 의해(義解) 제5 : 신라의 고승들이 보여주었던 뛰어난 행적을 통해 그들의 신앙심을 천명하였다. 총 14조.

권5 신주(神呪) 제6 : 신라 밀교계통 고승들의 기이한 행적을 통해 불교와 무속의 융합 및 호국 불교의 모습 소개. 총 3조.

권5 감통(感通) 제7 : 불심이 남달랐던 일반 신자와 승려들의 기적 체험을 통해 부처님의 가피력을 천명하였다. 총 10조.

권5 피은(避隱) 제8 : 구도 과정에서 세상을 등지고 홀로 불법을 닦은 승려들의 행적. 총 10조.

권5 효선(孝善) 제9 : 세속적 윤리인 효와 불교적 윤리(윤회, 인과응보)의 결합을 통해 신라인의 효행 사례 기록. 총 5조.



출처 :  동서고전 200선 해제(반덕진, 가람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