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005 – 성학집요(聖學輯要) / 이이(李珥) (1536~1584)
이황이 주자학적 명분론을 이론적으로 완성한 학자라면 이이는 이를 더욱 세련시켜 현실정치에 실현하고자 한 사람이다. <성학집요>는 퇴계(李滉:1501∼1570)의 <성학십도>에 대응되는 율곡의 저작으로,성리학의 과제와 얼개를 밝힌 후 학문의 기초가 되는 수기의 방법에서부터 위정자의 자세까지 조목 조목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 책 자체로도 성리학의 대강과 한국 성리학의 특징을 잘 볼 수 있지만, 퇴계의 <성학십도>와 비교하면서 보면 주리파와 주기파라는 한국성리학의 두 흐름이 지닌 미묘한 차이까지 느낄 수있다.
a.생애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과거시험에 9번 응시하여 9번 모두 장원급제한 율곡과 영원한 현모양처의 상징인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한 청년 율곡이 36세 연상인 퇴계를 도산서원으로 방문하고 하직할 때 퇴계가 율곡에게 준 금언은 무엇일까?
이이 (율곡은 호)는 중종 31년 강릉의 외가인 오죽헌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의 꿈에 용이 집으로 날아들어 왔다. 하여 어릴 때 이름은 현룡 그가 태어난 방을 몽룡실이라 불렀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소문나 3세에 글을 해독했고 13세에 과거를 보아 과연 천재답게 진사에 뽑혔다. 흔히 재주가 승한 사람은 박덕하기 일쑤인데 율곡은 어려서부터 재덕을 겸비하여 이를 자랑함이 없이 학문에 더욱 정진했다. 16세에 어머니이자 스승이요, 미덕을 겸비한 이상적인 모친인 신사임당을 여의고 3년 동안 산소 앞에 움막을 짓고 근신한 다음,인생에 무상을 느끼고 금강산에 들어가 불경을 접했으나 마음의 평화는 얻지 못했다.
그러던 중 <논어>를 읽고 크게 깨달은 바 있어 하산하여 평생 동안 그의 행동규범이 되는 <자경문>즉 좌우명 11조를 지었다. 그1조가 <<조금이라도 성현에 미치지 못하면 나의 할 일이 끝난 것이 아니다>>라고 한 것을 보면 그의 학문의 궁극적 목표인 성인이 되고자 하는 <성학>에 대한 의지가 얼마나 강한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23세 되던 해 59세의 이황을 찾아가 학문을 논하여 이황에게 깊은 감명을 준다. 후에 이황은 제자인 조목에게 보낸 편지에서 <<두뇌가 명석하여 많이 보고 기억하니 후배란 두려운 것>>즉 <후생가외>라고 술회했다 한다.
평생 과거시험에 아홉 번 응시하여 모두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공>이라 불리었던 율곡은 호조좌랑, 예조좌랑, 대사헌, 이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지냈다.
그는 도량이 넓고 신중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성리학적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단순히 성리학만을 고수하지 않고,불교와 노장철학을 버릇한 제자백가 사상에도 이해가 깊었다. 또한 철학에만 조예가 깊었던 것이 아니라,정치.경제.교육.국방 등에도 탁월한 방책을 제시했다. 다소 사회참여를 기피했던 이황과는 달리 그는 적극적으로 사회개혁에 참여했는데,동서분당의 조정을 위한 노력,보국안민을 위한 10만 양병설,대동법과 사창제의 장려 등 모두가 국리민복을 위한 것이었다.
학문에 있어서는 이황과 조선시대 유학의 쌍벽을 이루는 학자로 기홍학파를 형성했다. 주요저서로는 <성학집요> <격몽요결>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을 때 어찌나 생활이 청빈했던지 그의 집에는 수의를 만들 천조차 없어 친구들이 구해다 만들 정도였고, 그의 영구가 서울을 떠나던 날 밤 애통해하는 시민들의 횃불의 행렬이 수십리나 계속되었다고 한다.
b.율곡의 사상
그의 사상은 이기론에 있어서는 <이기이원론적 주기론>즉, <기발이승일도설>과 <이통기국설> 성경론에 있어서는 <성> 사상으로 요약할 수 있다.
1.이이는 우주는 무형무위한 이와 유형유위한 기로서 구성되어 있는데 모든 현상의 변화발전을 기의 작용으로 보고, 이는 기의 작용에 내재한는 보편적 원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는 퇴계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 에 대해서도 이발이란 있을 수 없고 오직 기발이승(氣發理乘)의 한 길만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기박일승일도설에 대해 <<이는 무위인데 기는 유위이다. 그러므로 기발이승이다. 음양은 동정이요,태극이 이것을 올라타고 발하는 것은 기이며 그 기를 올라타는 것은 이다. 공자는 말하기를 <사람은 도를 넓힐 수 있되 도는 사람을 넓힐 수 없다>고 했다. 무형무위이면서 유형위의 기가 되는 것은 기이다>>고 했다.
또는 독자적인 이통기국설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통기국이라 함은 이는 대체로 형체가 없고 기는 형체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이통이란 천지만물이 동일함이란 것이요, 기국이란 천지만물이 각각 한 이가 되니 이것이 분수인 이유요, 이가 본래 일일이 아니란 것은 아니다.>> 이처럼 그의 <이통기국설>은 화담의 <일기장존설>을 부인하게 되고 <기발이승일도설>을 통해 이황의 4단7정의 구분을 7정만을 인정하게 된다. 즉, 이황은 4단은 이발기수요 7정은 기발이승으로,이의 발과 기의 발을 인정하는 호발설이다. 따라서 4단과 7정을 별개로 구분한다.
그러나 율곡은 이황의 4단인 이발을 부정하고 7정인 기발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4단과 7정을 모두 정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4단은 7정 중의 순선정만을 뽑아서 4단으로 지목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2.성경론에 있어서는 이황이 경을 강조한 데 반해 이이는 성을 강조했다. 성리학의 모든 논리와 주장이 도덕적 인격의 완성에 귀납했는데, 그것을 위해서 성리학자들은 성과 경을 중요한 덕목으로 내세웠다. 그 인격수양방법으로는 거경(어떤 일을 함에 있어 정신을 집중시켜 다른 곳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음)과 궁리(사물의 이치를 깊이 연구함)를 중시한다. 이이는 성을 천지실리 심지본체 학문의 요체, 궁행의 근본이라 봄으로써 평생을 성으로 일관했다.
c.<성학집요>의 내용
본서는 13권 7책으로 되어 있는데 선조 8년(1575)에 율곡이 40세로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을 때 선조로 하여금 <내성외왕>의 성군이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성인의 학을 공부하는데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말을 <경사>에서 뽑아 모아 학문 및 정치에 긴요한 것을 사서의 <대학>체계를 본 따 엮어서 선조에게 올린 것이다. 이는 그가 선조의 <성학>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이미 20세때 <자경문>을 통해서 <<먼저 자기의 뜻을 크게 가지어 성인으로 준칙을 삼아야 할 것이니 조금이라도 성인에 미치지 못하면 나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라고 결의했던 것처럼,스스로 학문의 궁극적인 목적을 성인이 되는 것에 두었던 포부가 40세에 이르러 그가 공부해온 바를 정리한 필생의 역저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율곡철학의 진수요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전체가 5편으로 되어 있다.
제1편 <통설>은 <중용>과 <대학>의 수장의 설을 인용하여 수기와 치인을 합하여 말했다.즉 <대학>의 명명덕과 신민과 지어지선을 개관했다.
제2편은 곧 <대학>의 명명덕을 밝히는 것으로서 모두 13제목으로 되어있다. 1장은 총론이요,2장은 입지(학문에 뜻을 세움),3 장은 수렴 (마음을 수습하여 정돈함)을 두었다. 4장의 궁리 (사물의 이치를 깊이 연구하는 것)는 곧 <대학>의 격물치지이며, 5장은 성실(사물의 진리에 성실하는 것)이요, 6장은 교기질 (기질을 본연의 성으로 교정함)이고, 7장은 양기(본연의 기를 기름)요, 8장은 정심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고,9장은 검신 (몸을 가다듬음)이요,10장은 회덕량(덕량을 바로잡음),11장은 보덕(덕을 북돋움),12장은 돈독 (독실하고 거리낌없이 일관함), 13장은 수기공효 (자기수양의 결과와 효과)를 말하고 있다.
제3편 <정가>로서 제가를 말하고 8장으로 나누어진다. 1장은 총론정가 (총론격),2장 효경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어른에게 공경함), 3장 형내 (아내와 집안을 바르게 다스림),4장 교자 (자녀를 잘 가르침),5장 친친 (친척과 서로 화목하고 우애함),6장 근엄 (부부.가족.친척과의 신분의 분별과 질서를 엄하게함),7장 절검 (사치와 낭비를 삼가고 절약함),8장 가정공효 (가정 다스림의 결과와 효과)를 서술하고 있다.
제4편 <위정>으로서,위정이라 하는 것은 <대학>의 이른바 신민으로 치국평천하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10장으로 나누어진다. 1장 총론위정 (총론격),2장 용현 (인재를 등용한 급한 일을 의식해서 실천함),5장 법선왕 (선왕의 좋은 정치를 모방함), 6장 근천계 (하늘의 뜻을 따르고 하늘의 뜻을 어기지 않음), 7장 입기강 (먼저 국가와 사회의 기강을 바로잡아야 함), 8장 안민 (안민을 편안케 해야 함), 9장 명교 (교육과 교화를 밝혀서 실시함), 10장 위정공효 (나라 다스림의 결과와 효과),
제5편 <성현도통> (유교의계통을 세움)을 서술하고 있다. 이상을 내용으로 하는 <성학집요>는 유학을 공부하고 그 가르침에 따라 자기완성을 이루며,다시 가정.사회.국가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이념적인 것을 간결하게 엮은 것이다. 그 내용의 주된 흐름은 유학에서 기본적이고도 입문서라 할 수 있는 <대학>을 성리학적 입장에서 풀이한 송대 진서산의 <대학연의>를 골격으로 삼고 그 논리적 전게에 의해 차례를 세웠다. 또 사서오경과 선현의 여러 저술을 참고하고 인용,그 고증과 설명을 곁들이고 있다.
율곡은 이 저술을 선조에 바치면서 학자들이 궁리.정심.수기치인의 도는 하지 못하면서 기통과 사장에만 얽매여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 <대학>에서 가르치는 팔덕목을 성현의 가르침과 비교하여 익히고 상용에 힘써 천덕과 왕도의 보람과 수기치인의 길을 찾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그는 관리는 말할 것도 없고 임금도 이 원리와 방식에 따라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했다. 이 <성학집요>대로 실천된다면 하.은.주3대의 이상정치는 현실적으로 부흥된다는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이 <성학집요>는 그의 실천철학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윤리관과 정치관이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유교나 주자학 자체가 그러하듯 율곡의 사상에서도 사변적인 형이상학과 실천적인 실용철학은 서로 혼용,동화 내지 불가분의 관계로 얽혀 있다. 그래서 <성학집요>에서도 그 전개과정에 있어 그의 독자적인 이기론 4단7정론.심성론.인심도심설 등이 그 밑바닥에 깔려 있음을 볼 수 있다. 선조도 이책을 받아보고 높이평가,치국안민에 큰 도움이 되리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후 율곡의 학통을 이은 기호학파는 물론,학문적으로 반대입장에 섰던 영남학파 등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들의 학문과 정사를 위해 사용했다.
d.율곡사상의 평가
고려 말에 전래된 성리학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이황과 이이에 이르러 그 절정을 이룬다. <성학십도>와 <성학집요>가 제목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그들이 얼마나 <성인의 길>을 갈구했는지를 알 수 있다. 즉,학문의 궁극적인 목적을 성인이 되고자 함에 두었다는 점,그리고 각각 독자적인 성리학의 체계를 수립했다는 점에서 그들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일생을 검소함 속에서 보내고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주리설의 입장에선 이황이 주자학의 본질인 학문과 제자양성에 주력한 반면,주기설을 주장한 이이는 주자학의 이념적인 세계를 현실에 적극적으로 적응시키고자 했다. 부패하고 어지러운 사회를 바로잡고 도탄에 빠진 민생의 구제를 위해 항상 갱신과 개혁을 주장했다. 다시 말하면 주자학의 이념과 현실사회의 실제가 들어맞는 명실상부한 유교주의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성실사상>에 입각한 <무실적 경세론>과 그는 사회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백성의 경제적인 안정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보고,정치.경제.사회.교육 등 전 분야에서의 변법(법과 제도의 개혁)을 통한 사회개혁을 주장했다. 또한 왕도정치와 언로확층을 통한 민본정치의 구현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황의 사상이 임진왜란 이후 일본 유학계와 구한말의 기정진.이진상을 거쳐 19세기 말 이항로 등의 위정척사운동의 이념적 지주가 된 반면,이이의 현실개혁 사상은 실학파에 영향을 주었고 한원진.임성주.최한기 등을 거쳐 개화사상가들과 국학자,그리고 애국계몽사상에 연결되었다.
마지막으로 퇴계와 율곡 사이에 있었던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한다. 율곡이 도산서원에 이틀을 머물고 떠나면서 36세 연상이 퇴계에게 한 말씀을 청하니 퇴계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써주었다.
지심귀재불기 입조당게희사(持心貴在不欺 入朝當戒喜事)
사람의 마음가짐에 있어서 귀한 것은
속이지 않는데 있고
벼슬하여 조정에 나아가게 되면
공을 세우려고 일만들기를 좋아해서는 안된다.
자기현시 욕구가 강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경종을 울려주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自警文 ]
율곡이 어머니를 여읜 채 상심하여 19세에 불교를 연구해 보려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가 20세 되던 해 봄에 강릉의 외조모가 계신 곳으로 돌아 나와, 자기 수양의 조문을 삼고자 지은 글의 본문을 살펴보면,
1. 先須大其志 以聖人爲準則 一毫不及聖人 則吾事未了
(선수대기지 이성인위준칙 일호불급성인 칙오사미료)
먼저 그 뜻을 크게 가져 '성인'으로서 표준을 삼아 털끝만큼이라도 성인에 미치지 못한 동안은 내 할 일이 끝난 것이 아니니라.
2. 心定者言寡 定心自寡言始
(심정자언과 정심자과언시)
마음이 안정된 사람은 말이 적다. 그러므로 마음을 안정하는 것은 말이 적은 데서부터 비롯하느니라. 말할 만한 때가 된 다음에 말을 한다면 그 말이 간략하지 않을 수 없느니라.
3. 久放之心 一朝收之 得力豈可容易 心是活物 定力未成 則搖動難安 若思慮紛擾時 作意厭惡 欲絶之 則愈覺紛擾 숙起忽滅 似不由我 假使斷絶 只此斷絶之念 橫在胸中 此亦妄念也 當於紛擾時 收斂精神 輕輕照管 勿與之俱往 用功之久 必有凝定之時 執事專一 此亦定心功夫 時然後言 則言不得不簡
(구방지심 일조수지 득력기가용이 심시활물 정력미성 칙요동난안 약사려분요시 작의염오
욕절지 칙유각분요 숙기홀멸 사불유아 가사단절 지차단절지염 횡재흉중 차역망념야 당어분요시
수렴정신 경경조관 물여지구왕 용공지구 필유응정지시집사전일 차역정심공부 시연후언 칙언불득불간)
오래도록 놓아 버렸던 마음을 하루아침에 거두어서 힘을 얻는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느냐. 마음이란 산 것이라. 안정된 힘이 이뤄지지 못하면 흔들려서 편안키 어려우니라. 만일 생각이 어지러울 적에 그게 귀찮아 마음먹고 끊어 버리려고 한다면 점점 그 어지러운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며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 같음을 알리라. 설혹 그것을 끊어 버린다 하더라도 다만 그 끊어 버렸다는 생각이 가슴 속에 가로놓여 있다면 그 또한, 허망한 생각이니라. 그러므로 마땅히 생각이 어지러울 때에 있어서는 정신을 가다듬어 가만가만 다룰 것이요, 그 생각에 이같이 애쓰기를 오랫동안 하노라면 반드시 차분히 안정되는 때가 있을 것이니, 무슨 일을 하든지 전심전력해 한다면 그 또한, 마음 안정시키는 공부가 되느니라.
4. 常以戒懼謹獨意思 存諸胸中 念念不怠 則一切邪念 自然不起 萬惡 皆從不謹獨生 謹獨然後 可知浴沂詠歸之意味
(상이계구근독의사 존제흉중 염념불태 칙일절사념 자연불기 만악 개종불근독생 근독연후 가지욕기영귀지의미)
언제나 조심스레 경계하고 혼자 있을 때에 삼가는 뜻을 가슴 속에 품은 채 시시각각 게으르지 아니하면, 모든 삿된 생각이 저절로 일어나지 못하리라. 만 가지 악이 모두 다 혼자 있을 때에 삼가지 않는 거기서 생겨나느니라. 혼자 있을 때 삼갈 줄 안 다음에야 참으로 저 자연을 사랑하며 즐길 수 있는 고상한 뜻을 알 수 있느니라.
5. 曉起 思朝之所爲之事 食後 思晝之所爲之事 就寢時 思明日所爲之事 無事則放下 有事則必思 得處置合宜之道 然後讀書 讀書者 求辨是非 施之行事也 若不省事 兀然讀書 則爲無用之學
(효기 사조지소위지사 식후 사주지소위지사 취침시 사명일소위지사 무사칙방하 유사즉필사 득처치합의지도 연후독서 독서자 구변시비 시지행사야 약불성사 올연독서 칙위무용지학)
새벽에 일어나서는 아침에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밥 먹은 뒤에는 낮에 할 일을 생각하고, 잠자리에 들어서는 내일 해야 할 일을 생각할지니, 만일 일이 없으면 그만두려니와 일이 있으면 반드시 적절하게 처리할 방법을 생각해 낸 다음에 글을 읽을지니라. 글을 읽는다는 것은 옳고 그름을 분간해서 실천에 옮기려 하는 것이니 만일 사물을 살피지 않고 똑바로 앉아 글만 읽는다면 쓸데없는 학문이 되느니라.
6. 財利榮利 雖得掃除其念 若處事時 有一毫擇便宜之念 則此亦利心也 尤可省察
(재리영리 수득소제기념 약처사시 유일호택편의지념 칙차역이심야 우가성찰)
재물, 영예, 그건 설사 그 생각을 쓸어 버릴 수 있다 하더라도 만일 일을 처리할 적에 털끝만큼이라도 편의한 것을 택할 생각을 가진다면 그 또한, 이익 탐하는 마음이니 더욱 살펴야 할지니라. 무릇 일을 만났을 적에 만일 해야 할 일이거든 정성껏 하되 싫증내고 게을리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며, 또 안 해야 될 일이라면 딱 끊어 버려 가슴 속에서 옳고 그른 것이 서로 싸우게 하지는 말지니라.
7. 凡遇事至 若可爲之事 則盡誠爲之 不可有厭倦之心 不可爲之事 則一切截斷 不可使是非交戰於胸中
(범우사지 약가위지사 칙진성위지 불가유염권지심 불가위지사 칙일절절단 불가사시비교전어흉중)
언제나 저 <맹자>에서 이른바 '한 가지 옳지 못한 일을 행하고 한 사람의 죄 없는 이를 죽이고서 천하를 얻는대도 하지 않는다.'는 그 생각을 가슴 속에 간직할지니라.
8. 常以行一不義 殺一不辜 得天下不可爲底意思 存諸胸中
(상이행일불의 살일불고 득천하불가위저의사 존제흉중)
횡액과 역경이 닥쳐올 적에 스스로를 돌이켜 보아 깊이 반성함으로써 저쪽을 감화하도록 할지니라.
9. 橫逆之來 自反而深省 以感化爲期 一家之人不化 只是誠意未盡
(횡역지래 자반이심성 이감화위기 일가지인불화 지시성의미진)
제 집안 사람들이 감화되지 못한다는 것은 다만 성의가 모자라기 때문이니라.
10. 非夜眠及疾病 則不可偃臥 不可跛倚 雖中夜 無睡思 則不臥 但不可拘迫 晝有睡思 當喚醒 此心 十分猛醒 眼皮若重 起而周步 使之惺惺
(비야면급질병 칙불가언와 불가파의 수중야 무수사 칙불와 단불가구박 주유수사 당환성 차심 십분맹성 안피약중 기이주보 사지성성)
밤에 잘 때나 아픈 때가 아니면 눕지 않아야 하고 비스듬히 기대지도 말 것이며 또 밤중일지라도 졸리는 생각이 없으면 눕지 말되, 다만 억지로 할 것은 아니니라. 그리고 낮에 졸음이 오면 마땅히 정신을 차려 바짝 깨우칠 것이요, 그래도 눈까풀이 무겁거든 일어나서 두루 거닐어 깨도록 할지니라.
11. 用功不緩不急 死而後已 若求速其效 則此亦利心 若不如此 戮辱遺體 便非人子
(용공불완불급 사이후이 약구속기효 칙차역이심 약불여차 육욕유체 변비인자)
공부에 힘쓰되 늦추지도 말고 보채지도 말며, 죽은 뒤에야 그만둘 것이니, 만일 그 효과가 빨리 나기를 구한다면 그 또한, 이익 탐하는 마음이니라. 만일, 이같이 아니 하면 어버이에게서 물려받은 몸뚱이를 욕되게 함이라. 그게 바로 사람의 아들 된 도리가 아니니라.
[네이버 지식백과] 자경문 [自警文] (Basic 고교생을 위한 윤리 용어사전, 2001. 12. 20., (주)신원문화사)
사창제(社倉制)는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이 삼정의 문란 중 가장 극심했던 환곡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리(里)를 단위로 보릿고개 때 곡식을 빌려 주는 사창을 설치하여 운영한 제도다. 보통 보릿고개 때 곡식을 빌려주고 추수를 하는 가을 정도에 이자를 조금씩 붙여서 돌려받았다(위키백과) (출처: http://yulgok.co.kr/book/jagyeong.htm)
[이이의 철학사상]
이이는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더불어 조선 중기의 한국 성리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이황의 주리론(主理論)과 서경덕(徐敬德)의 주기론(主氣論)을 조화시켜 한국 성리학의 이론을 발전시켰으며, 그의 사상은 김장생(金長生) 등에게 계승되어 기호학파(畿湖學派)를 낳았다.
고려 말기에 수용된 성리학은 16세기를 거치면서 이기론(理氣論)ㆍ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ㆍ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등을 둘러싼 학문적 논쟁을 거치면서 더욱 발전하였다. 특히 이황과 기대승(奇大升)은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에 관한 이기론적(理氣論的) 해석을 둘러싸고 1559년에서 1566년까지 8년 동안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논쟁을 벌였는데, 이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은 조선 성리학의 발달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이 논쟁에서 이황은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을 각각 이발(理發)과 기발(氣發)로 나누어 설명하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했다. 순선(純善)한 사단(四端)은 ‘이가 발함에 기가 따르는 것(理發氣隨)’이고, 선하기도 악하기도 한 칠정(七情)은 ‘기가 발함에 이가 타는 것(氣發理乘)’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이황은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관점에서 이(理)와 기(氣)를 명백히 구별되는 별개의 실재처럼 보았고, 사단을 이(理)의 발동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봄으로써 이(理)의 능동성과 우위성을 강조하는 주리론(主理論)을 주장했다.
하지만 기대승은 이황처럼 4단(四端)과 7정(七情)을 각각 이(理)와 기(氣)의 작용에 따른 것으로 나누면 4단에는 기(氣)가 없고 7정에는 이(理)가 없게 되는데, 이는 이(理)와 기(氣)가 떨어져 있을 수 없다고 한 주자의 견해와 대립된다고 보았다. 나아가 그는 “사단과 칠정의 구별이 있을 따름이요, 칠정 밖에 따로 사단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며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에 기초해 사단과 칠정이 모두 다 정(情)이라고 보는 주정설(主情說)을 주장했다.
이이는 1572년부터 성혼(成渾)과 9차례에 걸쳐 서신을 교환하면서 이황과 기대승이 논쟁을 벌인 이(理)ㆍ기(氣)와 사단(四端)ㆍ칠정(七情)의 관계에 대해 논변을 벌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기(氣)의 작용을 상대적으로 중시하는 주기론(主氣論)의 관점에 기초해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제시했다.
이이는 기대승과 마찬가지로 칠정이 사단을 포함한다는 ‘칠정포사단(七情包四端)’의 논리를 전개하며 사단과 칠정을 엄격히 구별하는 이황의 학설에 반대했다. 칠정이 정(情)의 전부이며 사단은 칠정 가운데 순선(純善)한 것만을 가려내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 도심(道心)과 인심(人心)을 엄격히 구분하는 이원론을 비판했다. 곧 도덕에 힘쓰는 마음인가 사사로운 욕심에 힘쓰는 마음인가에 따라 도심과 인심의 구별이 생겨나고, 욕망을 가진 몸속에 깃든 본성인가 그 이전의 본성인가에 따라 기질지성과 본연지성의 구별이 생겨나지만, 인간의 마음과 본성은 하나라는 것이다.
또한 그는 이(理)와 기(氣)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분리되거나 선후(先後)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으며, 이와 기를 체(體)와 용(用)의 관계로 해석했다. 이와 기는 논리적으로는 구별되지만(不相雜), 실제로 따로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不相離). 곧 이(理)는 당연의 법칙으로 우주의 체(體)이고, 기(氣)는 이(理)를 구체화하는 활동이므로 우주의 용(用)이다. 따라서 이는 기를 주재하며, 기는 이의 재료가 된다. 이처럼 하나이며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이와 기의 관계를 이이는 ‘이기지묘(理氣之妙)’라고 나타냈다.
이러한 관점에 기초해서 이이는 사단과 칠정이 모두 기(氣)의 작용으로 생기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모든 활동과 작용은 기(氣)의 운동에서 나타나며, 기(氣)가 발하면 이(理)는 단지 여기에 올라탈 뿐이라는 기발리승(氣發理乘)의 한 가지 길(一途)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곧 “발(發)하는 것은 기이고 발하는 까닭이 이”라며 이황과 달리 이(理)에서 발한다는 이발(理發)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처럼 이이의 철학은 기(氣)를 중시하는 주기론(主氣論)에 기초해 있다. 하지만 그는 서경덕의 주기(主氣) 철학에 대해서는 그가 이와 기의 구별을 무시했다고 비판했다. 서경덕은 우주의 궁극적 본질을 태허지기(太虛之氣)로 인식했는데, 이이는 태허지기가 아니라 태극지리(太極之理)를 우주의 궁극적 본질로 보아야 한다며 이와 기의 논리적 구별을 동시에 강조했다. 또한 이는 시ㆍ공간적으로 무한하지만 기는 유한하다며 서경덕의 기불멸론(氣不滅論)을 비판하며 기멸론(氣滅論)을 주장했다.
이러한 이이의 이기론은 다양한 현상 속에 보편적 원리(理)가 존재하며, 이러한 보편적 원리는 기(氣)의 작용에 의한 현실의 구체적인 현상들과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를 이이는 그릇과 그릇에 담긴 내용물의 관계를 들어 설명했는데, 곧 모난 그릇과 둥근 그릇은 다르지만 그 안에 담긴 물은 같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理)의 보편성과 기(氣)의 국한성을 설명하는 이이의 주장을 ‘이통기국론(理通氣局論)’이라고 한다.
즉, 이이는 서경덕의 기일원론적인 주기론에 대해서는 이의 중요성을 들어 비판하고, 이황의 이기이원론적인 주리론에 대해서는 기의 중요성과 이기불리(理氣不離)를 들어 비판했다. 이처럼 이이는 서경덕과 이황 등 당대 성리학자의 대립된 주장을 균형 있게 아우르며, 본체와 작용, 현실과 원리의 대립을 조화시키려는 독특한 성리학 사상을 발전시켰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이의 철학사상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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