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020 – 대동서(大同書) / 캉유웨이(康有爲) (1858~1927)

 (출처 :  동서고전 200선 해제(반덕진, 가람기획))

 영국의 토머스 모어가 그린 <유토피아>가 서구적 이상 세계라면, <대동서>는 중국고전에 기술된 <유가의 이상세계>를 서구식 근대사상으로 재해석하여 모든 차별에서 해방된 동양적 이상세계를 그린 책이다. 즉, 무술개헉운동으로 정치적.사회적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던 강유위가 공자의 <춘추>등 6경에 나타난 공자의 근본정신을 되살려 새로운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다. 제국주의의 침략과 내부적 경직성으로 붕괴위기에 처한 중국의 현실을 타개할 방향으로 <대동세계>를 제시했던 것이다.


a.생애


 청나라 말기의 정치가. 무술변법운동(1898)의 중심인물로 중국전통사상의 마지막 보루이자 새로운 사상을 상징하는 첫인물.1858년 광동성 남해 출신으로 일찍이 유학경전과 불경.사서 및 서양서적을 널리 읽어 학문의 기초를 다졌다. 후에 그는 홍콩과 상해 등지에서 서양학문에 대한 이해를 깊이하면서 스스로 사상적 전환을 체험했다.

 1889년 그는 한낱 서생의 신분으로 처음 조정에 복궐상서하여 변법자강을 건의했다가 조롱만 당하기도 했다. 그 이듬해 그는 만본초당을 장흥리에 짓고 후학을 양성했는데, 이때 양계초도 제자로서 수학했고 강유위는 <신학위경고>를 저술했다. 그후 그는 거인.진사 등으로 천거되기도 했다.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패배한 직후인 1895년부터 그는 4년간에 걸쳐 7차의 상서를 올렸으나 채택되지 않다가, 1898년 드디어 덕종의 부름을 받아 2시간 이상의 밀담을 갖고 변법책의 대계를 도모하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원세개의 누설로 당시의 전권자였던 서태후에게 전해지자 그 계획은 이른바 <백일유신>으로 끝나고 말았다. 당시 강유위는 홍콩으로 피신했고 담사동.광인 등을 비롯한 동지들은 처형당했다. 이 사건을 <무술정변>이라 한다.

 강유위는 망명길에서 일본.타이.인도 등지를 둘어보고 캐나다 등지에서는 보황회를 조직하여 어느 변법을 수용하려 한 광서제를 지켜주기 위한 활동을 한다. 그러나 이는 황제제도를 인정하는 봉건적 정치체제를 인정한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그는 변법자강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전에 가지고 있던 개혁사상을 버린 것일까? 어쨌든 강유위는 운동이 실패한 뒤 진보진영에서 사회개혁에 책임을 지고 그것을 행동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위험한 것인가를 절감한 것 같다.

 그가 중국에 돌아온 것은 1911년 신해혁명 이후로, 1916년 원세개에게 제재를 취소할 것을 요구하기도 하지만 그것도 잠시,1917년 장훈과 결탁하여 복벽운동을 추진하는 등 1927년 병으로 세상을 뜰 때까지 사상에서나 정치에서 노골적인 보수화의 길을 걷는다. 저서로는 <대동서> 이외에도 <신학위경고> <공자개제고> <맹자미언> <춘추삼세의> <춘추공양전주> 등 방대한 양을 남겼다.


b.중국의 근대화운동과 강유위


 중국의 근대화운동은 <양무.변법.혁명>의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청조는 아편전쟁과 애로 호 사건, 내부적으로는 태평천국운동 등으로 위기에 직면하여 부국.강병을 내세우면서 서양을 모델로 하는 근대화운동을 추진했는데, 제1단계가 양무운동(洋務運動)이다. 양무운동의 <중체서용 中體西用>은 중국의 정신에 기초를 두고 서양의 과학기술,특히 군수시설을 도입하여 자강을 도모하려는 부국강병운동이었으나 청일전쟁의 패배로 실패로 끝났으며, 반면 동시에 추진했던 일본의 명치유신은 성공을 거두었다.

 서태후와 이홍장이 추진했던 양무운동이 실패하자 그 반대편에 있던 광서재 (덕종).장지동 등 황재파의 발언권이 커지고, 지배층 내부에서는 좀더 근본적인 개혁의 필요성을 실감하게 되었다. 이러한 운동의 중심에 강유위.양계초 등이 있었다. 

 무술개혁을 주도한 강유위의 변법자강운동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제1차 상서이다. 이에 앞서 강유위는 <신학위경고 新學僞經考>를 지어 전통적인 유교와 공자의 사상을 비판, 재해석하여 자신의 개혁사사상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했다. <<옛것에 비추어 오늘의 제도를 고친다>>는 말을 빌어왔다. 강유위가 특히 주목한 것은 일본의 명치유신(1868)이었으며, 청일전쟁의 결과 일본이 승리한 것은 이 때문이라고 단정했다. 강유위는 서양의 기술의 도입만이 아닌 정치제도를 개혁(변법) 해야만 부국강병을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청일전쟁의 패전결과로 맺어진 시노모세키 조약 체결 거부운동을 전개했다. 이리하여 무술개혁의 전단계로서 급진적인 강유위 지지자인 양계초.담사등 등에 의해 호남성에서 개혁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들 급진적인 개혁론자들은 학회.신문.잡지를 통해 입헌정치제, 자본주의 체제,유럽의 학술과 사상의 도입 등을 적극적으로 고취시켰고 특히 강유위의 <대동사상>과 <공자개제고 孔子改制考>가 중심이 되었다. 그는 <대동서>에서 모든 인류가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이상사회의 대동에 도달하기 위한 전제로 민권론과 평등론을 내세웠다. 한편 <공자개제고>는 성인으로 모셔지던 공자의 위상을 바꾸어 공자야말로 춘추시대의 난세를 개혁하고자 한 한 사람의 개혁자에 불과하다는 해석을 가해 변법개혁의 정당성을 찾고자 했다. 그러나 북경에서의 변법파의 활동은 서태후가 중심이 된 수구파들의 반격에 의해 저지되었고 강유위도 신변에 위협을 느껴 상해로 잠시 피신했다. 상해에서 그는 황준헌.장건 같은 당대의 개혁론자들과 어울려 개핵정책을 모색했다.

 변법들의 개혁안이 정책적으로 시행될 수 있었던 것은 독일의 교주만 점령으로 열강에 의한 중국분할이 임박한 후였는데, 강유위는 광서제에게 5번째 상서를 올려 변법개혁을 하지 않으면 황제는 물론이고 관리들도 온전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을 고취시켜 광서제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에 광서제는 1898년 제도의 개혁을 지향하는 특별조칙을 내리면서 소위 무술 백일개혁의 막은 올랐다. 이를 <변법자강운동> 또는 무술년에 있었다고 하여 <무술개혁>이라고 한다. 그해 강유위.양계초.담사동.황준헌 등이 광서제의 부름을 받았다. 광서제는 이러한 개혁세력 등에 의해 구상된 정책들을 정리하여 100여 항목이 넘는 개혁안을 발표했다. 그중 중심적인 개혁내용은 과거제 개혁, 새로운 학교제도의 도입,신문.잡지발행,인재등용,농공산업 진흥, 육해군의 근대화 등이다.

 광서제는 변법파의 활동에 제약이 되는 이홍장 등 고위관리들을 해임시켰다. 그들은 대부분 서태후에 충성하는 자들이었다. 이러한 광서제의 과감한 군사력을 가진 원세개는 개혁파를 배신하고 모든 사실을 서태후에게 밀고함으로써 변법운동은 역전되었다. 수구파의 정변으로 광서제가 연금되는 가운데 담사동 등 <무술6군자>들은 처형당하고 강유위.양계초 등 몇명은 일본으로 망명을 떠남으로써 <무술개혁>은 백일천하로 좌절되었다.

 강유위가 주도한 무술개혁은 근대적 시민의식이나 부르주아 세력이 발달하지 못한 중국 전통사회에서 혁신적인 지식계층에 의해 추진된 민족주의적 구국운동으로, 대중기반이 취약하기 때문에 완강한 보수세력의 반대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c.<대동서>의 내용


 강유위가 살았던 시대는 중국역사에서 커다란 변화의 시기였다. 중국과 서양,전통과 근대, 보수와 진보 등 여러 가치개념들이 충돌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당시 사상가들은 중국의 미래를 위한 사상적 활로를 모색하고 있었다. 강유위의 사상도 그중 하나인데, <대동서>는 그의 사상적 특징을 말해주는 저작임과 동시에 당시의 시대상을 말해주는 대표작이기도 하다. 

 그러면 <대동서>가 말하려는 중심사상은 무엇인가?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세상의 모든 생물은 괴로움에서 벗어나려 한다(?? ??).고거구락은 인간본성의 기본욕구이며 최고의 인도 법칙이다. 그리고 사람은 하늘이 낳은 것이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천부인권 사상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지닌 근대사상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그러면 궁극적으로 고거구락을 위해서 괴로움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야 할 것인데, <대동서>에서는 세상의 고뇌의 원인이 국가.계급.인종.남녀.가족.사유재산 등 9가지 구속적 존재에 있고, 이것들을 점차 제거해서 제도와 문화를 동일하고 평등하게 하는 세계정부를 실현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자유는 신선학.불학.천유학이 성해져서 모든 정신적 고뇌에서 해방된 뒤에 얻어진다고 했다.

 이 책은 10부로 나뉘어지는데, <갑부>는 <세계에 들어가 중고를 보다>란 제목 아래 현실세계의 고뇌--인생의 괴로움, 천재의 괴로움,인도의 괴로움 등이 제시된다. 그에 의하면 이 모든 괴로움은 전부 <구계>에 의해 생긴다. 따라서 이상세계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 <구계>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하여 이하 9부에서는 9계를 제거하기 위한 방법이 논술되어있다. 그 내용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제1. 국계를 떠나서 대지를 합친다. 지구상의 모든 국가의 경계를 없애고 전세계를 유일한 공정부에 의해서 통할한다. 

 제2. 급계를 떠나 민족을 공평케 한다. 즉, 모든 계급을 없애고 계급 없는 사회를 만든다.

 제3. 종계를 없애고 인류를 같게 만든다. 즉, 인종을 개량하여 전인류를 우량인종으로 만든다.

 제4. 형계를 없애고 독립을 지킨다. 즉, 완전한 남녀동등권을 실시한다.

 제5. 가계를 없애고 천민이 된다. 즉, 가족제도를 파기하여 필요한 시설은 전부 공영으로 한다.

 제6. 산계를 없애고 생업을 공으로 한다. 즉, 생산분배의 기구를 공영으로 하고 사유재산에 기초를 둔 불합리한 점을 제거한다.

 제7. 난계를 없애고 태평을 다스린다. 즉, 앞에 든 6계를 없애고 태평한 세상에 이른다.

 제8. 유계를 없애고 중생을 사랑한다. 즉, 인류평등이란 이상이 달성된 후에는 인간세계만이 아니라 전 생물계에 자비를 베푼다.

 제9. 고계를 없애고 극락에 이른다. 즉, 앞에든 온갖 고뇌를 제거하여 이 땅 위에 극락세계를 출현시킨다.

 이상이 바로 앞에서 말한 이상사회, 즉 대동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기본조건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그가 꿈꾼 사회는 말하자면 일종의 공산주의적 유토피아였다고 하겠다. 거기에는 세계정부가 이루어져서 국가가 없어지며 정부는 모든 인민의 선거로 구성되고 국가가 없어지며 가족 또한 인정되지 않는다. 아동양육과 노인의 보양은 모두 정부가 하고, 성년은 정부의 지도명령에 의해 농.공 등의 생산사업을 분담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이 땅에 극락세계가 출현한 후에는 <<인경을 떠나 선불의 경에 들어간다는 말로써 본서는 맺어져 있다.


d.사상적 평가


 전체적으로 보아 <대동서>를 구성하는 사상적 요소는 <공양삼세설> <예운편의 대동소강설> <불교의 자비평등설> <루소의 천부인권설> <기독교의 자유평등설> <유럽의 사회주의학설> 엄복에 의해 소개된 <진화론>등이다. 여기서 대동설이란 원래 유교의 고전에서 그리는 이상사회이고, 공양삼세설이란 역사가 혼탁한 거란세, 안정이 된는 승평세, 안정이 성숙되는 태평세의 평태로 발전해간다는 사상이다. 이중 승평세는 <예기>의 <예운편>에 나오는 <소강>과,태평세는 <대동>과 같다고 보았다.

 이같이 <대동서>는 형식과 내용 면에서 대동사상과 공양삼세의 뼈대 위에 근대적인 것을 전통적인 것 안에 포섭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사유재산제의 해악을 지적함으로써 생 시몽, 오언,푸리에 등의 공상적 사회주의 사상가들과 비교되기도 한다.

 어쨌든 강유위의 대동사상은 근대적인 것을 섭취하고 이것과 일정한 타협을 이루면서 중국적인 것, 전통적인 것을 재조직함으로써 형성된 것이다. 서구문명의 충격에 중국사람들이 반응한 여러가지 형태에는 전통에 완전히 집착하려는 보수파, 그와 정반대로 서구화를 주장하는 급진파,부분적인 서구화를 주장하는 파, 세계주의화를 주장하는 파 등이 있다. <대동서>만을 기준으로 보면 강유위는 세계의화를 주장하는 소수입장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강유위의 본질적으로 왕조체제를 근대적으로 수정함으로써 그 존속이나 강화를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입헌군주제와 민권을 제시함으로써 근대적인 정치체제를 수립하려 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연구자들의 견해가 일치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봉건사회에 대한 철저한 부정을 외쳤던 그가 운동이 실패한 후에는 국수주의 군주정체를 옹호하고 공화제와 혁명을 반대하는 등 보수적 전통주의자의 길을 갔기 때문이다.

 또한 <대동서>의 내용이 차분히 읽어보면, 어떤 일정한 주제를 두고 쓴 저술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하여 그냥 열거한 느낌도 없지는 않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앞에서 말한 세계가 인류진화의 궁극이라고 말하면서도 현실적으로 당시 중국사상에서 어떠한

방법으로 그것을 이루어낼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도 없다. 이런 면에서 <대동서>는 강유위가 젊은 나이에 쓴 습작 정도로 평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강유위의 대동사상이 그때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사상적으로 낙관적인 신념과 전망을 제시하여 계몽적 진보적 작용을 한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대동서> 속에 나오는 여성해방.인권문제 등은 오랫동안 지속되어왔던 봉건구습에 반대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대동서>에 나타난 강유위 사상의 특징은 전통에 대한 근본적인 자기비판이라는 문제를 남겨놓긴 하지만, 현실대응을 위해 몇 천 년간 내려온 유교자체를 과감히 수정하고 다시 해석해낸 데 있다.그리고 그의 사상은 전통에서 근대로 나아가는 과도기 사상으로서

유교자체의 존재근거를 뿌리째 흔들 만큼 이후 전개되는 근대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우리가 중국철학 사상사를 총체적으로 보려고 할 뿐만 아니라, 중국학에서 지금까지 가장 중요한 문제로 취급되는 전통과 현대의 문제에 관해서도 알고 싶다면 양쪽을 가르는 분수령으로서 강유위의 사상은 반드시 건너야 할 산이다. <대동서>가 필독서가 될 이유가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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變法自彊運動 

(출처 https://namu.wiki/w/%EB%B3%80%EB%B2%95%EC%9E%90%EA%B0%95%EC%9A%B4%EB%8F%99)


1. 개요[편집]



1898년 중국 청나라에서 광서제의 주도아래 일으킨 근대화(자강) 운동. 무술변법(戊戌變法), 100일 유신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2. 배경[편집]


1894년 청일전쟁의 패배로 인해 양무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양무운동의 상징이었던 이홍장이 정계에서 물려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1897년 독일의 교주만 점령사건이 벌어지고 열강의 청나라 분할이 가속화되어 중앙에서도 위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3. 전개[편집]


캉유웨이는 1888년부터 꾸준히 조정에 상서를 올렸는데 다섯 번째로 올린 상서가 당시 위기를 느끼고 있던 광서제의 마음을 얻게 되었다. 1898년 4월 23일 광서제는 변법을 선언하고 캉유웨이 등이 중앙정계를 장악하며 100가지가 넘는 개혁안을 내게 된다. 개혁안의 주 내용으로는 제도국 개설, 과거제 개혁, 새로운 학교제도의 도입, 신문 · 잡지 발행, 인재등용, 농공상업 진흥, 우편사업, 육해군의 근대화 등이었다.


7월 19일 광서제는 개혁에 방해가 되는 수구대신을 서태후의 재가 없이 숙청시켰는데 이것으로 서태후를 비롯한 수구파 대신들의 반발을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서제는 이토 히로부미 (!!!)를 초빙하여 고문으로 삼으려고하자 반발한 보수파들은 서태후의 원조 아래 반발을 일으켰고 이에 광서제는 독일식 훈련을 받는 신건육군을 담당하는 위안스카이에게 보수파의 제거를 맡기려고 했는데 위안스카이가 변법파를 배신하여 서태후에게 모든 것을 보고했고, 7월 20일 서태후에 의해 광서제가 연금당하고 7월 22일 서태후의 섭정령이 내려지면서 변법은 103일만에 대실패로 막을 내리게 된다. 무술정변이 실패하자 캉유웨이와 량치차오는 일본으로 망명하였지만, 무술육군자로 불리게 되는 담사동 등 6명의 개혁가는 처형당한다.


4. 총론[편집]


변법자강운동의 실패로 청나라 내부에서의 개혁세력이 상당수 숙청당하거나 망명을 떠나게 되었고 이러한 점으로 인해 청나라를 타도해야 한다는 혁명파가 대두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5. 갑신정변과의 공통점[편집]


변법자강운동은 14년전 조선에서 있었던 갑신정변과 상당히 비슷한 측면이 많다.


우선 변법자강운동과 갑신정변 모두 젊은 관료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났다. 변법자강운동 당시의 캉유웨이는 갓 40대에 진입했으며, 량치차오는 20대 중반이었다. 갑신정변 당시의 김옥균은 30대 초반, 박영효는 20대 초반이었다. 그리고 당시 군주의 지지(광서제와 고종)를 받았으며 중체서용, 동도서기로 대표되는 제한적인 근대화 운동에서 벗어나려고 했으며 메이지 유신을 표방하며 일본의 도움을 받고자 했던 적극적인 근대화 운동이었다. 마지막으로 모두 짧은 기간만에 실패로 돌아가고 실패를 주도했던 사람으로 당시 군주의 뒤에서 섭정하고 있던 보수파 여인들(서태후와 명성황후)이었다는 점. 그리고 실패 이후 주도 인물들이 모두 일본으로 망명을 갔다는 점이 있다. 


무엇보다도 변법자강운동 갑신정변 공히 위안스카이가 실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위안스카이는 변법자강운동에서는 원래 변법파 손을 들어주다가 배신을 때렸고, 갑신정변에서는 군대를 이끌고 직접 개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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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治維新 (めいじいしん) (출처:나무위키)


1. 개요[편집]


일본의 정치, 경제, 사회를 서구식으로 완전히 뒤바꿔 놓은 개혁


19세기말 일본의 에도 막부가 서양의 개항 압력에 견디지 못하고 쿠로후네 사건으로 조약을 체결하자, 이에 반발한 막부 타도 세력과 왕정 복고 세력에 의해 막부가 무너지고(1867년의 대정봉환) 덴노 중심의 국가로 복고된 대 사건을 말한다. 대개 개시 시기는 메이지 연호가 시작 된 1868년으로 본다.


한자음 그대로 명치유신(明治維新)으로,그냥 유신이라 하기도 한다. [2] 일본어로는 '메이지 이신(めいじいしん)'이라고 발음하며 영어권에서는 Meiji Restoration이라고 쓴다. 다만 메이지 유신이라는 말은 현대에서 쓰이는 역사 용어[3]로, 당시에는 '어일신(御一新, 고잇신)' 등으로 불리었다.[4]


유신 3걸(사이고 타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로 대표되는 신흥 세력에 의해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은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와쿠라 토모미는 그 중에서 최강의 흑막. 물론 그 배후에는 또 조슈 번의 요시다 쇼인이 있었고, 그의 제자들이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고 개국을 추진하게 되니 가장 큰 공로자는 요시다 쇼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5] 


분명히 당초 목표는 존왕양이를 하면서 문자 그대로 막부를 타도하고 고메이 덴노를 중심으로 쇄국을 진행하자는 것이었는데, 왜일까 도중에 방향이 바뀌더니 사쓰마의 코마츠 타테와키의 삿쵸 동맹 → 삿토 맹약 → 사카모토 료마의 신정부강령팔책에 따라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한 직후에 전면 개국을 해버린다는 괴이한 결론이 나와버렸다.


다만 이렇게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정변을 주도한 것은 사츠마와 조슈 두 번인데, 막부와의 공무합체(公武合体)파로 잔류하고 있었던 사쓰마는 번 소속의 무사가 사소한 무례[6]를 이유로 영국 상인을 살해한 것이 계기가 되어 사쓰에이 전쟁이 발발하였다.(그 이후로는 반막부 세력(신정부군)과 영국 상인들만으로의 무구(武具), 조선(造船) 통상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개군(改軍) 현상을 돋보였다.) (사쓰마와 달리) 조슈는 도막(막부 토벌) 정신으로만 일관. 존왕양이 의식을 일으키고 1864년에는 아예 시모노세키를 항해하는 4개 외국 양선(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에 발포하기까지 했으나, 곧 열강의 보복으로 국력의 격차를 실감하고 도막 정책으로 항거하는 개국만이 유일한 해결책임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전면 개항을 한 것도 이 때의 경험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일본도 막부 체제 하에서 어느 정도 서양화가 이뤄졌지만, 화혼양재라는 명목 하에 그다지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에 일본은 서양에 이와쿠라 토모미, 이토 히로부미 등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하여 직접 견학하고 많은 걸 배웠다. 이들이 내린 결론은 전면 개방 외에는 답이 없다는 것이었고, 결국 일본은 폐번치현, 신분제 폐지, 국민개병제 등 전면적인 서양화에 착수했는데 이 판단이 옳았다. 구 체제 하에서 개방을 추진했던 청나라와 조선은 모두 개혁에 실패하였는데 그로 인해 청은 반 식민지 종속국이 되었고, 조선은 일본에 강제 합병을 당하였다.


물론 일본에서도 사가 번 → 히고(구마모토) 번 → 아키쓰키 번 → 조슈 번 순으로의 사족 반란이 들이닥쳤다. 그 이후로도 정한론 무산 결과와 산발탈도령(단발령+폐도령)에 항거한 사쓰마 번 무사들은 특권 계급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뭉쳤고, 이들이 일으킨 반란이 바로 서남전쟁(현재까지로의 일본 열도의 마지막 내전)이다. 


2. 한국에 미친 영향[편집]


이 때 국서의 발신자가 쇼군에서 덴노(천황)로 바뀌게 되었는데, 이미 중국은 아편전쟁으로 서양 열강에 얻어 맞고 있었다. 중국은 개항한 이후였기 때문에 근대적 외교 관례에 맞춰 조약을 체결하여 별 문제가 안 되었지만, 아직 통상수교를 거부하고 있던 흥선대원군 집권기의 조선에선 '천황'이라는 호칭에 심히 불쾌해 하며 국서의 접수 자체를 거부해버렸다. 이미 조선 통신사가 50년 간 없었다는 점에서 근세 조-일 관계가 막장화된 시점이었던지라, 이에 더욱 격노한 일본 내에서 정한론이 힘을 얻게 되고, 그 이후 조선침략이 본격화 된다. 


물론 일본 내에서도 정한론은 찬반이 나뉘었지만 강경파와 온건파의 차이(시기를 언제로 할 것인가)일 뿐, 이미 도쿠가와 막부 말기에 정한론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메이지 유신의 급격한 중앙집권화로 인한 몰락 사무라이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고, 해외 식민지 건설을 통해 부국강병을 모색하면서 '언젠가' 조선을 침략해야겠다는 게 대세였던 듯.


한국현대사의 가장 큰 사건인 10월 유신의 유신을 메이지 유신에서 따왔다고 한다.


3.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가른 차이[편집]


21세기 사람들의 눈으로 평가하자면, 분명한 명분과 방향을 가지고 과감하고 모든 범위에 걸친 개혁을 추진하여 이를 단기간에 성공시켰느냐(메이지 유신 당시 일본), 아니면 오히려 나라 문을 걸어 잠갔다가(대원군 치하 조선) 뒤늦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어설픈 개혁을 시도했느냐(개항~을사늑약까지의 조선)여부가 양국의 운명을 갈랐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경우 어설픈 개방으로 서양의 침탈을 가속화시켜 나라를 망국으로 몰고 가던 막부를 사쓰마, 조슈 등의 네 개 번의 실력자들과 하급 무사들이 저지하는 데 성공, 구체제 자체를 갈아 엎었다. 이들은 그 대안으로 덴노를 전면에 내세웠지만, 그러면서도 신격화는 시켰지만 정작 권력은 내주지 않았기 때문에 실질적인 권력은 여전히 신정부의 실력자들에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권력을 이용해 총체적인 서구화라는 확실한 목표를 향해 모든 것을 빠른 속도로 바꿔나갔고 이에 대한 저항도 거의 없었다. 보수적 인물로 알려진 사이고 다카모리만 해도 개방 자체는 동의하되 좀 더 천천히 하는 한편, 사무라이 주도 체제를 유지하자는 정도의 입장이었다. 


반면 조선에서는, 세도정치기의 문벌가문들은 외부 상황에 별 관심도 대책도 없었고, 대원군은 내치에는 힘을 썼지만 서양에는 거부적인 태도를 드러냈으며, 대원군 실각 후에도 고종을 위시한 조정은 반강제로 개화의 삽을 떴지만 그 의지나 방향도 명확치 않았고 전개도 지지부진했다. 그나마 김옥균 등 일부만이 다소 깨어 있었다지만 이들은 스스로 개혁을 하는 게 아니라 일본을 끌어들여 개혁을 하고자 한 점에서 한계가 명백했다. 당시 근대화를 이끌어나갈만한 이른바 개화파라 부를만한 인사는 당시 조정에는 박규수가 유일했고 민영익, 김홍집, 김옥균 같은 훗날 이름을 날렸던 개화파 인사들은 1870년대쯤에나 막 30대에 관직에 오르기 시작했던 사람들이다. 


또한 단기적인 배경을 떠나 보아서 보다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측면에서도 문제를 살펴볼 수 있다. 가령 일본은 16세기인 전국시대 때부터 지방/중앙 정부 차원에서 유럽과 직접 교류를 해오며 가톨릭을 받아들이거나 조총과 같은 근대식 기술을 도입하였고 에도 시대에는 비록 쇄국을 했으나 유일하게 교류가 허락된 네덜란드로부터 주기적으로 들어오는 세계 정세에 관한 최신 정보(오란다 풍설서)와 난학[7]을 통해 지식인층 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들에게도 서양의 사상과 문물이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주입되었다. 이러한 일본의 사상적 변화는 에도 시대 중·후기에 파견된 조선 통신사들에게 큰 위화감으로 작용했을 정도로 지대했다.## 일반적으로 막부가 서양화를 거부하고 4번이나 거부한 끝에 개방했다는 인상이 짙지만 실상 막부 역시 서양화를 꾸준히 추진했다. 단지 중국의 중체서용. 조선의 동도서기와 동의어인 화혼양재가 기준이었을 뿐이다. 그나마도 수준이 넘사벽이었던 것이, 사츠마같은 일개 '지방'[8]도 증기선을 20척 가까이 보유했던 데에 비해 조선은? 대한제국 시대에야 양무호와 광제호가 전부였다(...).


외국어 통번역문화가 발달했다는 점도 상당히 중요한 점인데, 비록 막부가 쇄국 정책을 유지했을지언정 에도 시대 중후기에 이르면 수많은 난학숙(네덜란드 학문을 가르치는 학교)이 설립되어 민간인이 네덜란드어 의학서를 완역하거나 네덜란드 상인들의 거류지인 데지마에서 흘러나오는 소식들을 통해 세상 물정을 대충 접할 정도였고, 또 대대로 네덜란드어를 통번역하는 가문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덤으로 영국, 미국, 프랑스 등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의 사람들과 교류할 때도 영어와 프랑스어를 네덜란드어를 거쳐 간단하게 의사소통할수도 있었다. 반면, 조선은 서양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해 항상 청나라를 통해야만 했고 청나라에서 번역된 문서가 오기까지 엄청난 시일이 걸렸기 때문에 교류는커녕 의미 있는 의사소통을 하는 것조차 힘들었다.[9] 이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가 바로 유명한 헨드릭 하멜의 표류이다. 조선은 그들이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조차 몰라서 그저 "남만인(南蠻人)"이라고만 부르고[10][11] 별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지만, 13년 뒤 하멜 일행이 조선을 탈출해 일본 나가사키에 이르렀을 때 나가사키의 '총독(부교)'은 네덜란드어->포르투갈어[12]->일본어 통역을 통해 그들을 심문한 결과 금방 그들의 정체 및 표류, 억류, 탈출 과정 전부와, 덤으로 당시 조선의 내부 사정(!)까지 상당히 세세한 수준으로 캐냈다(...). 


결국 조선은 서양과의 교류를 직접 못 하고 중국이나 일본을 통해 간접적으로 하는 양상이 더 짙었다. 동시대 조선과 일본에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도착한 양인들의 수가 크게 차이 나며, 일본까지 가는 항로가 개척된 이후에도 조선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이다. 이 때문에 조선은 직접적으로 양인들과 교류하는 선택을 할 수도 없었다. 벨테브레와 헨드릭 하멜 일행의 표류와 같은 기회가 있었지만 비슷한 사례가 있던 일본과는 달리 조선은 그들로부터 서양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거나 다른 서양인들과의 대화 창구로 사용하지 못했고 그들로 인해 서양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는 일도 없었다.[13] 


그리고 일본과 조선의 국력차[14]도 명백했다. 조선에서는 일본을 왜적이니 오랑캐니 하면서 무시했지만, 일본의 총 국력은 아무리 늦어도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해서 엄연히 조선의 그것을 뛰어넘은 상태였다. 메이지 유신 당시 시점에서 일본과 조선의 경제력 차이는 4:1에 이르렀다. 애초에 인구도 일본이 조선의 1.5~2배나 되었고, 영토의 차도 대략 그 정도였는데다가 농업 조건도 일본이 더 좋은 편이었다[15]. 상공업의 측면에서도 전국시대 이래 꾸준히 상공업이 발달했으며, 도시화율도 더 높았고, (쇄국정책에도 불구하고) 대외 무역도 더 활발했던 일본이 조선을 앞지른 지 오래였다. 


마지막으로 정부 재정 규모를 볼 경우, 일본은 통상 35%[16], 조선은 10%[17][18]을 좀 넘기는 바 정부재정에서 상당한 차이가 발생했다. 조선은 대단히 빠듯하게 재정을 운용하는 나라였기 때문에 잉여재정이 거의 나오지 않았고, 이는 급작스러운 외부의 위협에 빠르게 대처하기 어려워지는 한 요인이 되었다. 정부가 세금을 최대한 덜 걷어 운용한다는건 농민들에겐 더 좋았겠지만...[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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