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한국사상의 흐름과 고전]
(출전 :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a. 한국사상의 원류
한국사상의 원류가 되는 고대사상으로서는 상고시대의 원시신앙과 단군신화를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우리 민족의 윤리관·가치관의 형성과 구체적인 생활양식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애니미즘·토테미즘·샤머니즘 등의 우리 원시신앙은 고대 부족국가 확립 이전에 형성된 것으로 당시 씨족사회의 생활윤리규범을 제공하였고, 우리 민족의 독자적인 공동체 의식과 전통문화를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러한 원시신앙은 단군신화에서 더욱 구체화되는데, 천인합일의 통일적 세계관과 홍익인간 이라는 인본주의가 그 중심사상을 이루고 있다. 한민족은 고대에 형성된 우리 고유사상을 기반으로 유·불·선 3교와 서양사상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우리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사상을 발전시켜왔으나, 여기서는 불교와 유교를 중심으로 우리 사상을 개관해 보고자 한다.
b. 삼국 및 통일신라 시대
b.1 불교의 전래
한국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4세기경으로, 삼국이 고대국가로서 한창 발전하고 있던 때였다. 당시 사회는 이미 씨족공동체의 폐쇄성에서 벗어나 초부족적인 상태로 변해, 씨족사회의 무속신앙이나 조상숭배 사상만으로 새로운 고대 국가의 사회생활을 이끌어 나갈 수 없었다. 따라서 불교라는 고등종교가 전래됨으로써 인간사회의 갈등이나 모순을 한 단계 높은 수준에서 이해하게 하여 고대국가의 정신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한편 불교의 전래는 종교로서의 교리나 의식만이 아닌, 음악·미술·건축·의학 등의 문화의 전파까지 수반하는 것으로, 중국뿐 아니라 인도나 중앙 아시아의 문화도 소개함으로써, 한국의 고대 문화를 성립시키는 데 기여했다. 불교가 삼국에서 공인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 백제 침류왕 1년(384), 신라 법흥왕 14년(527)이다. 고구려에서 초기에 받아들인 불교는 중국에서 노장사상으로 불교를 이해하려 했던 격의불교였다. 예를 들면 불교의 공을 노장사상의 무로 해석하려 했다. 그뒤 문자왕 때에 이르러 불교 교학의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데 중관계의 삼론종이 주류를 이루었다. 영류왕 때 일본에 간 혜관은 일본 삼론종의 시조가 되었다. 백제는 중국 남조의 불교를 받아들였는데, 주로 율종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백제의 겸익은 성왕 때 인도에 직접 가 소승불교의 논과 계율 관계의 경전을 가지고 와, 그 중 율부를 번역해 백제 율종의 시조가 되었다. 백제에서는 이외에 열반종·삼론종·성실종 등의 연구도 활발했다.
신라는 불교가 전래되기 전까지 문화수준이 가장 낮고, 고대국가의 성장도 늦었지만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고대국가의 체계를 정비하고 왕권강화를 추진하였다. 따라서 불교는 왕실과 밀착되어 상호이용의 관계를 가지고 국가적 후원 속에 확장되었다. 신라의 초기불교는 주로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다. 고구려의 승려 혜량은 진평왕 때 망명하여 최초의 국통이 되었다. 그 뒤 원광은 중국에 유학해 불교를 널리 섭렵하고 돌아와서 세속오계를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유학 이해는 조예가 깊어 세속오계 속에 반영되고 있다. 이는 당시 삼국통일을 앞두고 신라사회가 요청하던 사회적 질서·윤리를 불교의 권위를 빌어 제시한 것이다. 그 다음 자장은 대국통으로서 신라불교의 제도적 발전과 국가의 사상적 통일에 기여했다.
b.2 통일신라
삼국통일을 전후해 신라불교는 비약적 발전을 이루어, 경전을 수입하고 교설을 소개하는 데 그친 이전의 단계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독자적인 교학 발전단계로 들어갔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로는 우선 신라는 삼국통일의 주체로서 그것을 실현한 후보다 넓은 세계관을 수립하게 되었으며, 또한 삼국통일을 통해 고구려와 백제의 높은 교학 수준을 널리 섭취할 수 있었다는 점 등이 있었다.
1.원효
한편 그 당시 인도와 중국 등 동아시아의 불교계는 대립과 갈등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1중관학파와 유식학파의 대립, 즉 석가 입적 후 1000년 인도 대승불교 철학에 발생한 공·유 의 대립, #2진(출세간의 진리)·속(세간의 진리)의 차별 문제였다. 여기서 공이란 영원불변의 실체가 없음을 의미하는데, 중관학파는 공의 부정적 측면을 강조하고, 유식학파는 공의 긍정적 측면을 강조하여 대립하였다. 이 두 학파의 대립을 인도에서 해결하지 못하자 이 과제가 중국과 한국의 불교계에 넘어왔는데 이 과제를 해결한 사람이 바로 원효다. 원효는 「대승기신론소」에서 대립하는 여러 학파의 논리를 일심을 바탕으로 한 화쟁사상으로 화합했다. 대승기신론의 핵심은 한 마음에 두 가지 문이 있다는 일심이문론인데, 이 두 가지 문이란 진여문(중관학파)과 생멸문(유식학파)이다. 진여문과 생멸문은 서로 대립한 듯 보이지만 일심(중생의 마음)에 의지한다는 점에서는 통하기 때문에 둘은 화합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러한 이론에 입각해 세속적 진리와 절대적 진리 사이의 모순을 극복하는 실천원리르 제시하고, 나아가 불교의 실천운동에 힘썼다. 그는 당시 신라불교가 주로 왕실이나 귀족 지배세력에 의해 주도되고 일반민중과 유리되는 모순을 통찰해, 초탈한 행동으로 정토 사상을 통한 불교의 대중화에 전력 하였다. 원효의 사상은 당시의 중국에 수출되어 법장·징관 등에 영향을 주어 중국 화엄학 성립의 기반이 되었다.
2.의상
그와 동시대의 인물인 의상은 원효와는 달리 유학해 중국 화엄종의 제2조 지어 문화에서 화엄학을 배웠다. 그때 「화엄일승법계도」를 짓고, 신라로 돌아와 「백화도량발원문」을 지었다. 그의 저서는 주로 실천적인 목적에서 저술된 것이며, 원효의 경우와 같은 방대한 불교사상 체계나, 혹은 지엄의 문화에서 비길 만한 학문적 업적은 없다. 그는 법장의 이론적 태도와 구별되게 실천수행에 주력하여, 지엄은 의상에게는 의지, 법장에게는 문지의 호를 주었던 것이다. 의상의 이러한 경향은 그의 제자들에게 이어져, 신라 화엄학의 특징을 이룬다.
의상과 그의 제자들의 실천 중시 경향은 신라 화엄학의 이론적 발전에 한계가 되어, 새로 대두된 선종의 공격을 받게 되는 나말여초에 이르러서는, 균여로 하여금 다시 지엄이나 법장 등의 중국 화엄학을 재발굴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의상이 뒤를 이어 화엄종을 하나의 종파로서 크게 발전시켰다. 이는 원효가 제자를 양성하지 않아, 고려대에 와서 의천에 의해 추앙되기 전까지 그의 사상이 제대로 계승되지 못한 것과 대조된다. 화엄종은 신라불교의 가장 대표적인 종파일 뿐만 아니라 이후 줄곧 교종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3.원측
화엄학과 더불어 신라불교를 대표하는 사상은 유식학이다. 원측은 어려서 당에 가서 유식이론을 배우다가 후에 현장이 인도에서 귀국하자, 그에게서 호법 계통의 새로운 유식이론을 배우고, 유식학의 주요경전의 주석에 힘썼다. 현장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하던 규가의 토론을 벌일 때면 몰려든 스님들로 야단법석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원측은 법상종의 정통을 자처하던 규기와 그의 제자 혜소 등에 의해 이단시되어 배척당했다. 따라서 원측의 유식학은 중국에서는 계승되지 않고 신라에 전해져, 원측의 제자 도증이 귀국하면서 태현·경흥 등의 유식학자가 배출되었다.
4.선종의 전래
신라 하대로 들어오면서 불교계에 나타난 새로운 경향은 교종의 전통과 권위에 대항하는 선종이 성립된 것이다. 원래 선종이 들어온 것은 통일 이전부터였다. 즉 달마시대를 제1조로 삼는 중국 선종이 6조 이후 남,북종으로 갈라지기 전에 제4조 도신의 선이 신라의 승려 법랑에 의해 전해졌으며, 이어 북종선이 신행에 의해 전해졌다. 그러나 선종이 신라에서 크게 유행해 종파로 성립된 것은 821년, 남종선의 법을 도의가 귀국하면서 전한 때부터이다. 그후 계속해 홍척, 혜철, 무염, 도윤, 현욱, 범일 등 당에 유학했던 선승의 귀국과 더불어, 마조 문하의 여러 선풍이 각각 전래되면서 국내 각처에 선종 사찰이 세워져 선종 거점을 이룬 것이 이른바 구산선파이다. 통일 후의 신라불교는 화엄학과 유식학을 중심으로 교학면에서 커다란 진전을 이루었다. 그것은 고대국가의 전제 왕권이 강화되고 있었을 때 그 지배체제의 정신적 기반을 마련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선종은 교종의 기성사상 체계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사색하여 진리를 깨닫는 것이 옳다고 주장함으로써 교종이 지니는 고대적 사유방식을 극복케 하였다. 이리하여 선종의 대두는 당시 사상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중세적인 지성을 성립시키는 중요한 자극제가 되었다. 또한 선승들은 대개 육두품 출신으로 지방호족 세력과 연결되어 있었고, 사원을 중심으로 거대한 장원을 형성하였다. 특히 나말여초의 선승들은 대부분 왕건에게 후삼국통일의 이념을 제시하고 나아가 왕건과 지방호족을 연결시키는 매개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5. 유학의 전래
한국에 유학이 전래된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위만조선의 성립과 한사군의 설치를 계기로 해서 한자가 도입되어 사용되었으니, 이때 한문 문화의 핵심인 유교사상도 함께 전래된 것으로 추측한다. 삼국이 고대국가로서의 체제를 정비해나감에 따라 행정문서 및 외교문서 작성의 필요성이 증대하게 되고, 이러한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서 한문에 능통한 유학자들을 관료로 채용했다.
b.3. 삼국시대
고구려에는 태학이라는 국가교육기관에서 유학자를 양성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태학박사 이문진의 이름이 전해지고 있으며, 백제에도 박사 고흥이라는 이름이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유학사상의 독자성을 주장할 수 있는 정도의 집단을 이루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고구려, 백제에 비해 늦게 유학을 신라에서는 불교로 사상통일을 이루었지만, 내면적으로는 유교적인 덕목이 상당히 강조되었는데, 원광의 세속오계에 보이는 충효에 대한 강조와 임신 서기석에 보이는 충도에 대한 연마, 그리고 진흥왕 순수비에 보이는 자신의 내적 수양을 통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 라는 구절 등을 통해 이를 알 수 있다.
b.4 통일신라
신라에 본격적으로 유학이 채용된 것은 신문왕 2년(682) 국학이 설치되면서부터인데, 아찬 이하의 한정된 관직을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골품제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닌, 학문에 기준을 둔 관리가 일부에서나마 탄생했다는 데 중요한 의의가 있다. 당시의 유학자로서는 강수와 설총이 있었는데 모두 문장에 뛰어났고, 유교적인 의리를 강조한 점에서 일치한다. 특히 설총은 (화왕계)를 지어 군주의 도덕적 수양과 신하의 군주에 대한 참된 충성을 설파하여 당시의 유학이 전제왕권의 확립에 직접 관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 유학자들은 모두 육두품 출신이라는 계급적 특성을 지니는데, 당시의 진골귀족들이 사상적 토대로 삼고 있던 불교사상에 대해 충효라는 사회적 윤리규범을 내세워 왕권과 결합,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했다. 즉 신라의 유학사상은 왕권과 육두품의 결합에 의해 형성되었다. 이는 전제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기구의 발전과 함께하고 있다. 원성왕 4년(788), 독서삼품과를 시행한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여기서 채용된 국학 출신의 유학자들은 인이라는 보편적 원리를 근거로 한 국왕의 자애와 신하의 충성이 조화된 유교적 전체주의를 신라하대의 이상적인 정치체제로 상정하고 지방호족의 할거에 따른 혼란을 충효라는 윤리의 확보에 의해 수습하려 하였다. 반진골, 반호족적인 입장에서 전제왕권을 지지하는 경향은 최치원, 김운경, 김가기 같은 도당 유학자들에게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그들은 당의 빈공과에 합격한 후 중국의 역사책에도 이름이 오를 정도로 당시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이러한 자부심과 유학자적인 책인감을 가지고 그들은 시부책을 올리는 등 유교적인 정치를 실현하려고 노력했으나, 호족세력의 발흥으로 말미암은 왕권 약화, 골품제의 한계 등으로 인해 좌절되고 말았다.
c. 고려시대
c.1 선,교의 대립발전
신라하대 선종이 새로 성립되면서 시작된 5교 9산의 사상적 대립은 고려에 들어와서도 그대로 계속되었다. 게다가 화엄종 내에서도 남악파와 북악파로 분열되어 있었고, 선종은 각 지방의 호족세력과 연결된 채 심한 분열상을 나타냈다. 고려 광종은 불교계 혁신을 위해, 당시 불교계를 교종과 선종으로 양립시키고, 교종은 화엄종 중심으로, 선종은 중국에서 수입해온 법안종을 중심으로 통일하려 했다. 균여를 통해 화엄종단을 통합케 하고, 화엄종의 교리를 재정리하게 했다. 균여는 중국의 초기 화엄학을 재검토해, 중국의 지엄, 법장, 신라의 의상의 저서에 대해 주석을 썼다. 균여는 당시 교종의 2대 주류인 화엄종의 입장에서 법상종을 융회하는, 이른바 성상융회 사상을 폈다.
c.2 천태종
광종은 법안종을 후원함과 더불어 중국 천태종에도 유의해, 제관은 중국에 들어가 (천태사교의)를 지어 침체 되었던 중국 천태종을 부흥시켰고, 의통은 중국 천태종의 제13조가 되었다. 이처럼 광종 때의 교선통합은 천태종과 법안종이 서로 보완하는 입장에서 추구되었다. 그러나 광종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개혁정치는 다시 보수세력에 의해 무산되고, 법안종이나 천태종은 독립된 종파로 성립되지 못했다. 다만 그 융합사상은 뒤에 의천의 천태종 개창에 밑거름이 되었다. 그후 100년 뒤 왕자 출신 의천은 불교계에 일대 개혁을 시도했다. 당시는 보수적인 귀족불교를 법상종이 융성하여 화엄종과 양립하였고, 따라서 선종은 제3종단으로 밀려나 있었다. 이때 화엄종과 종측에서 등장한 의천은 법상종을 통합하고, 나아가 선종까지도 통합하려는 운동을 전개했다. 교관겸수와 지관을 중시한 그의 교선통합은 교리적
발전보다는 정치적 성격이 농후하여, 그가 죽자 천태종은 곧 쇠퇴하고 선종은 다시 독립하였으며, 화엄종은 균여파와 의천파로 분열되었다.
c.3 조계종
이후 얼마 안되어 무신란이 일어나면서 고려 불교계에는 커다란 변동이 일어난다. 그것은 선종의 부흥(조계종의 성립)과 신앙결사운동의 전개로 요약된다. 지금까지 왕실의 보호를 받던 교종세력은 무신정권에 반발하였고, 이로 인해 무신정권의 가혹한 탄압을 받아 급격히 쇠퇴하였다. 그대신 의천 이후 침체해 있던 선종세력이 최씨정권과 제휴함으로써 새로이 대두하였다. 이는 신라 말에 선종이 호족들에게 환영받았던 사실과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조계종의 세력을 크게 떨친 승려는 보조국사 지눌이었다. 지눌의 사상은 돈오점수 와 정혜쌍수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는 인간의 마음이 곧 부처라는 사실을 깨닫고(선 돈오), 이를 바탕으로 수련을 계속해야 하며(후 점수), 이 수행에 있어서는 정, 혜를 함께닦아야 한다(정혜쌍수)는 것이다. 지눌의 이러한 사상은 중국 화엄종에서 방계로 취급되는 이통현의 화엄학과, 역시 중국 화엄에서 선교통합을 주장한 종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결국 선종을 위주로 교종과 조화를 시도한 것이다.
선은 부처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 말씀이다 라고 하여 교와 선이 본래 둘이 아닌 하나임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의천이 교종을 중심으로 선종을 포섭한 천태종보다는 교리적으로 한층 발전한 것이었다.
c.4 신앙결사운동
지눌은 이러한 사상체계를 바탕으로 피폐된 당시 불교계에 대한 혁신을 도모하여 신앙결사로서 수선사를 조직하였고, 뒤를 이어 진각국사 혜심과 원감국사 충지에 의해 조계종은 계속 발전하였다. 특히 지눌의 심성론은 수선사가 주로 지방의 지식인 계층을 대상으로 하였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고려후기에 지방향리 출신의 신흥 사대부들이 성리학을 수용하는 바탕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러한 신앙결사운동은 천태종 내에서도 일어났으니, 요세에 의해 조직된 백련사가 그것이다. 수선사와 함께 무신집권기의 가장 대표적 결사라 할 수 있는 백련사도 역시 불교계의 혁신과 기층사회의 교화에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수선사가 기층민보다 지방의 지식인층을 주된 대상으로 하였음에 비하여, 백련사는 정토관에 보다 충실하여 기층사회의 교화에 전념하였다.
c.5 불교의 타락
그러나 이러한 불교계의 혁신적 기운은 몽고간섭기에 와서 단절되었다. 최씨정권과 밀착해 있던 수선사는 몽고의 억압을 받아 위축되었고, 백련사는 고려왕실 및 원황실의 원찰인 묘련사로 변질되었으며, 이에 대신해서 균여파 화엄종과 법상종, 그리고 (삼국유사)의 일연이 이끄는 선종 가지산파가 부흥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고려왕실과 원의 후원을 받으며 막대한 농장을 소유하고, 고리대나 양주를 통해 부를
축적하였다. 또한 승려는 세속화되어 혼란한 고려사회를 더이상 이끌 수 있는 정신적 역할을 못하자, 이것이 곧 성리학의 수용에 따른 유불 교체의 요인이 되었다.
c.6 유학의 발전
고려시대는 유교가 정치이념으로 채용되어 크게 발달하였다. 광종이 과거제도를 실시하고 성종이 유학자 최승로의 보필을 받아 숭유정책을 실시하였으니 유교는 정치의 사상체계로 확립되고 학문적으로도 크게 발달하였다. 유교는 이국의 본이요, 불교는 수신의 본이다 라고 한 최승로의 말은 이를 잘 나타내고 있다. 특히 지배층인 귀족이 문신들로 구성되고 문치주의를 표방함에 따라 숭문의 풍조는 더하였다. 유학이 크게 융성한 고려 문종 때, 해동공자 인 최충은 9제학당을 세웠고, 이를 모델로 하여 11개의 사학이 설립되었다. 이러한 사학의 융성은 상대적으로 관학의 쇠퇴를 가져와 숙종 때부터는 관학의 진흥책이 도모되었다. 고려가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채용함으로써 신라의 종교적 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이 지적이고 합리적인 사상체계가 성립하였으니 확실히 하나의 진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려의 유학자들은 과거준비에만 급급하여 유학의 이론이나 사상면에서의 폭넓은 연구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훈고학, 사장학에 치중한 고려의 유학은 중기 이후 귀족취향의 보수적인 경향으로 떨어지는 폐단을 초래하였다.
c.7 성리학의 전래
유학이 불교에 대항하는 새로운 이념으로 부흥되는 것은 고려의 귀족사회의 모순이 첨예화되는 13세기 후반부터이다. 권문세족의 횡포와 불교의 폐해는 신흥 사대부로 하여금 새로운 지도이념을 모색하게 하였는데, 때마침 들어온 성리학은 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성리학은 송의 주자가 완성한 것으로 한, 당시대의 훈고학적 유학 대신 우주의 근본원리와 인간의 심성문제를 철학적으로 해명하려는 신유학이다. 고려는 이미 심성화된 선종의 융성으로 성리학 수용의 터전이 마련되어 있어 그것을 용이하게 수용할 수 있었다. 이 성리학은 충렬왕 때 안향이 소개한 후, 백이정이 원에 가서 배워와 이제현, 박충좌에게 전수하였으며, 고려말에는 이색, 이숭인, 정몽주, 길재,
권근, 정도전 등이 발전시켰다. 이들 주자학자들은 자신이 처한 계급적 위치에 따라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중앙 귀족관료 출신의 온건파와, 정도전을 중심으로한 향리 출신의 급진파로 나누어진다. 온건파는 토지개혁을 점진적으로 행할 것을 주장하고 불교비판에서도 불교의 교리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닌 승려와 사찰의 폐해를 지적하는 데 그쳤다. 이에 비해 급진파는 즉각적인 토지개혁을 통한 민생안정을 주장하고,
불교에 대해서도 사상 자체의 이론적 비판을 통해 불교 자체를 완전히 말살하려고 허다. 이러한 입장 차이는 결국 고려왕조에 대한 계속적인 충성과 역성혁명에 의한 새로운 국가의 건설이라는 극단적인 대립으로 치닫게 되었고 정몽주의 피살과 조선의 개국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d. 조선시대
d.1 억불정책과 산중불교
조선시대에 들어 불교는 극심한 탄압 속에서 일종의 자기 보호책으로서 호불론을 전개하여, 유불일치를 강조하는 경향을 띤다. 조선초기의 기화는 배불론에 대해 호교론을 펴고, 종교적 갈등을 모나지 않게 해소해 공존을 추구하려는 융화적 경향을 뚜렷이 나타냈다. 그는 유, 불, 도 3교의 일치론을 최초로 주장했다. 그후 명종 때, 문정 왕후의 후원을 받은 보우는 선과 교가 하나임을 강조하고, 불교와 유교가 하나에서 유래했다는 융합론을 폈다. 그는 유교의 공자, 순자 및 노자 등 일체의 사상을 불교의 화엄일리 속에 융합시키고, 다시 여기에 선의 요소를 가미해, 교선일체에서 더 나아가 교선일체를 주장했다. 그후 휴정과 유정이 등장하여 불교사상을 진작시키고, 승병을 모집해 왜란을 극복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휴정은 유, 불, 도 3교가 각각 다른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그 궁극적인 진리에 있어서는 다 같다고 하였다. 기화가 (현정론)에서, 유교가 불교를 비난한 내용을 조목조목 들어 해명하는 방식으로 논리를 전개한 데 반해, 휴정은 거기서 더 나아가 전혀 상대를 비판함이 없이 일체임을 강조한 것이었다. 그런 그의 사상은 (선가귀감)에 잘 나타나 있다.
d.2 조선의 통치이념화된 유교
고려말 중소 지주계급 출신 사대부들이 이념적 토대가 되었던 주자학은 1392년 이성게,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급진개혁론자들이 조선왕조를 개창하자 조선의 통치이념으로 채용되었고, 곧 중세적인 조선 봉건사회를 확립하기 위한 절대이념이 되었다. 조선초의 주자학은 고려 귀족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교의 현실적인 폐해를 비판할 뿐만 아니라, 불교적 세계관이 허구라고 비판함으로써 고려 귀족사회의 정신적
기반을 허물고, 주자학에 입각한 중세적 세계관의 확립이라는 과제를 완수하기 위해 상당히 높은 수준까지 연구된다. 반면 역성혁명을 반대한 일부는 지방의 중소지주로 머물면서 향촌에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훈구파의 비리를 비판하는 가운데 정치세력으로 성장해갔으니 이들이 사림파다.
d.3 사림파
사림이 중앙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성종(재위 1469∼1494) 때부터다. 이 시기에 오면서 훈구관료 사이에 갈등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성종은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들을 언관직에 기용하였다. 길재,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으로 연결되는 이들은 훈척세력의 비리를 맹렬히 공격 하였는데, 사림을 옹호하던 성종이 죽고 연산군(재위 1494∼1506)이 즉위하자, 훈구파들이 반감을 폭발시켜 사화를 일으킨다. 네 번에 걸친 사화로 그때마다 사람들은 큰 화를 입었지만, 지방의 서원과 향약을 중심으로 잠재적 성장을 계속하여 선조대에는 결국 정계의 주류로서의 위치를 차지했다.
d.4 주리파와 주기파의 대립발전
조선의 성리학은 주리론과 주기론 의 두 계통으로 발달하였다. 주리론 은 주자의 견해를 보다 충실하게 받아들인 것으로 이기이원론의 입장에서 이 (본질, 플라톤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유사)와 기 (현상, 플라톤의 현상계,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유사)는 서로 다른 것이면서 서로 의지하는 관계에 있지만 어디까지나 이가 기를 움직이는 근본이라는 견해다. 따라서 인간의 심성문제를 해석함에 있어서도 이는 순선무악한 것이고 기는 가선가악한 것이라 하여, 역시 이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이 학설은 이언적(李彦迪, 1491~1553)에서 시작되어 이황(李滉, 1501년(연산군 7)~1570년(선조 3))에 이르러 집대성되었는데, 특히 이황은 동방의 주자 라 불릴 만큼 주자의 교리에 충실하였다. 그의 저서 (성학십도)는 성리학의 요체를 10개의 그림으로 나타낸 책이다. 그의 문하에서는 유성룡, 김성일, 정구 등이 배출되어 영남학파를 형성하였으며, 일본유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한편 주기론 은 서경덕(徐敬德, 1489(성종 20)∼1546(명종 1))이 처음으로 주자의 학설을 비판하고 이기일원론 을 주장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화담집)을 지은 서경덕은 독자적으로 중국의 기철학을 수용하여 기일원론에 입각한 독특한 기철학을 완성했다. 주기론은 (성학집요)의 저자 이이(李珥, 1536~1584)에 의해 완성을 보게 된다. 이것은 우주만물의 근원을 기에 두고 모든 현상들을 기의 변화, 운동으로 보는 입장이었으나, 여기서 이는 기를 움직이는 법칙에 불과한 것이었다. 따라서 심성론에 있어서도 본연의 성보다 기질의 성을 더욱 중요시하였으며, 정치, 경제 등 현실인식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 학문은 이이를 비롯해서 성혼, 송익필과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 등에게 이어져 기호학파를 형성하였다. 이후 영남과 기호의 두학파는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대립하면서 발전하였다.
d.5 예학의 발달
조선유학이 예학 중심의 교조적 주자학으로 변모하게 된 것은 당시 조선의 사회, 정치적 분위기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임진왜란(1592~1598), 병자호란(1636~1637)을 겪은 후 조선은 봉건사회의 모순을 극명하게 드러내면서 붕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17∼18세기에 이르면 농업기술의 향상으로 생산력이 급격히 향상되면서 농민층의 분해가 가속화되는 동시에, 통치능력의 상실에 따른 지배계급의 압박과 수탈이 더욱 가중된다. 이러한 봉건사회 자체의 해체 위기에 처하여 지배계급의 유학자들은 주자학적 명분을 더욱 강화하고 신분질서를 엄격히 함으로써 이를 극복하려 했다.
d.6 주자학에 대한 비판
조선후기에 나타난 사회경제적 변동은 주자학 일변도의 사상체계에 근본적인 반성을 요구하였다. 교조화된 주자학에 대한 비판은 이전부터 있어왔는데 윤휴와 박세당은 그 대표적 인물이다. 이들은 주자학의 절대성을 부인하고 유교경전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을 시도하였고 이러한 비판적인 동향은 양명학의 도입으로 가속화되었다. 양명학은 명의 왕양명이 일으킨 주관적 실천적인 유학체계로, 주기론의 입장을 견지하여 조선의 사회변동을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제두는 이를 학문적 체계화하였다.
d.7 실학운동
지배계급의 정통 주자학이 끝까지 명분론과 주리론을 고집하는 동안 사상계의 일각에서는 전혀 새로운 문제의식을 지닌 학문 경향이 17세기 후반부터 등장하는데 이를 실학 이라고 부른다. 실학을 담당한 계층은 양반계층 내부의 계급분화와 일부 족벌의 대토지소유로 말미암아 몰락한 양반 지식인들이다. 이들은 신분적으로는 지배계급에 속했지만 현실행활은 일반민중들과 다를 바 없어 당시 민중들의 비참한 생활상과 지배계급의 수탈상을 체험으로 깨닫게 되었고, 현실정치의 모순을 누구보다도 예리하게 볼 수 있었다. 이들은 관료로 진출하지 못한, 혹은 불우한 관료생활로 끝맺은 자신의 처지를 통하여 봉건사회의 모순을 자각하고, 주자학적인 명분론의 강화로는 현실의 구조적 모순이 도저히 극복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학문연구의 방향을 관제, 병제, 토지, 기술 등의 현실문제로 전환하고, 이러한 현실문제의 해결을 위해 그 동안 지엽적인 지식들을 백과전서식으로 탐구하고,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구의 자연과학,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학문대상에 있어서 획기적인 전환을 이룬 실학자들은 학문 방법에 있어서도 중국의 고증학을 받아들여 전통적인 주자학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경험적, 실증적인 방법을 채택함으로써 어느 정도의 근대성을 띠게 된다. 실학자들의 철학사상은 시대와 대변계급에 따라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 있으므로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대개 현실의 변혁과 개인이 욕망을 긍정하는 주기적인 경향과 경험론적인 색채를 보이고 있다.
1.경세치용학파(經世致用學派)
실학사상은 연원을 거슬러올라가면 이이에까지 소급되지만, 본격적인 실학사상은 유형원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본다. 초기의 실학은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반에 걸쳐 발전했는데, 흔히 경세치용학파로 부르기도 한다. 이는 이익에서 시작하여 그의 제자들에게 계승된 사상으로, 당시의 사회적 모순이 토지의 과점에 있다고 보고 토지개혁 문제에 주력하였으며, 당시의 소농민계층을 대변한 양심적인 관료의 사상으로 후에 일부의 제자들은 그들이 지향한 농촌사회의 이념으로 천주교를 도입하기도 한다.
2.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
18세기 중반에 일기 시작한 중기 실학은 이용후생학파라고도 하는데, 주로 중국을 다녀오고, 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북학파의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이 주축을 이룬다. 이들은 대개 서울 출신의 학자들로 당시 현저한 발전을 보였던 상업과 수공업을 중시하고, 도시빈민의 생활상을 동정하여 이들을 대변하는 중상주의적 사상을 전개했다. 그들은 생산력 발전을 위해 중국에 들어온 서구과학을 과감히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고, 그들 자신이 과학적 연구에 몰두하기도 했다. 또 당시의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양반제도를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초기와 중기와 실학사상은 정약용에 의해 집대성되는데, 그는 현실문제에 대한 여러가지 개혁안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청의 고증학을 이용한 유가경전의 재해석을 통해 수사학(유학)의 입장을 확립함으로써, 기존의 주자학에 대체될 수 있는 새로운 인간관, 세계관을 제시했다.
3.실사구시학파(實事求是學派)
19세기 초반 김정희에 이르러 일가를 이룬 학파가 바로 실사구시학파 이다. 이 학파는 경서 및 금석, 고전의 고증을 위주로 하여 학문하는 자세에 있어, 실증성과 해석을 크게 강조하였다. 이 사상은 묘하게도 김정희와 가까웠던 중인계급 학자들에 의해 후일 개화사상과 연결된다. 김정희와 더불어 초, 중기 실학과는 거리가 있으면서도, 당시 사회를 충실히 반영하는 철학체계를 구성한 학자는 최한기다. 그는 실학과 개화사상의 가교자로 평가되는데, 서구의 자연과학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외국과의 교류를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윤리적인 면에서도 유교를 옹호하여 전형적인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을 폈다. 최한기는 경험적인 인식론과 자연과학적인 학문관, 유교적인 윤리관, 정치개혁론 등이 모두 융해되는 방대한 기일원론의 철학체계를 구성하여 조선의 유학에 막을 내린다. 그의 기철학은 저서 (기학)에 담겨 있다. 이들 실학사상들은 교조적 주자학을 타파하고, 학문의 중심을 윤리, 도덕으로부터 정치, 경제, 자연에 대한 현실문제로 전환시켰다. 그들은 당시 사회적 모순이 지배계급의 부패, 무능과 더불어 토지제도, 신분제도 등의 봉건사회 자체에 내재하고 있음을 깨닫고, 토지제도의 개혁을 통한 이상적인 농촌사회의 건설, 신분제도 철폐 및 과학기술의 수용 등 여러 가지 이상적인 방안을 내놓았으나, 시대적, 계급적 제한성과 제국주의의 침탈로 말미암아 근대적 사상으로까지는 성숙하지 못했다. 그러나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세도정치가 시작됨에 따라 실학파의 활동이 부진하게 되자, 다시 성리학이 세력을 만회하였다. 그 뒤 천주교의 세력이 날로 심각해지면서, 위정척사 운동이 대두하여 외국사상과 외국문물에 대한 배격운동이 전개되었으나, 그 수구적인 운동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고, 오히려 근세에 개화혁신에 장애가 되는 측면이 많았다. 그 원인은 조선말엽의 유교계가 대부분 국제정세에 어둡고, 유교의 유신정신을 망각한 채 수구만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e. 근대이후
e.1 불교자체 정화노력
그후 한국불교는 일제의 통치를 당해, 백용성, 박한영, 한용운 등이 나타나 불교 유신을 제창했다. 백용성은 전통적인 한국 선종의 특색을 다시 드러내고, 그럼으로써 불교 본연의 진면목을 제시하고자 하여 대각교 운동을 벌였다. 박한영은 한국의 전통적 선관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제시하는 한편, 과학과 서구문물이 밀려오던 당시의 상황에서 미래를 지향하는 불교를 제시하려 했다. 한용운은 철저한 유신을 주장하여, 과학문명이 고도로 발달된 시대에 정신문명의 원천으로서 불교를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당시 이회광이 친일불교운동의 일환으로 일본 조동종과 합종할 것을 추진한 데 대해, 한국불교의 전통은 임제종이라고 선포하여 조동종과 합종할 수 없다는 운동을 이끌었다. 국권이 상실되면서 한국불교교단은 일본총독의 지배하에 30본산으로 나뉘어 전국의 사찰과 승려를 통제하는 기구가 마련되지 않았다. 1941년 봄 태고사(지금의 조계사)를 세워 총본산으로 삼아 종단의 이른을 조계종으로 결정하고, 1946년에는 기존의 명진학교를 동국대학교로 개칭하여 새로운 출발을 하였다. 그후 효봉, 청담, 성철 등 큰스님들의 구조적 신앙자세는 1980년 10,27법난에도 꿋꿋하게 한국불교를 지켜나갔고, 1990년 불교방송(BBS)의 개국과 더불어 불교발전의 기틀을 마련해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불교계는 돈오점수(頓悟漸修, 깨달은 후 계속 닦음)와 돈오돈수(頓悟頓修, 단번에 깨우쳐 단번에 닦아 마침)의 해묵은 이론적 대립문제, 중생구제보다 정치세력과 결탁하여 세속적인 교권 확대에 집착하는 일부 집단의 반종교적 행위문제, 타종교와의 융합을 통해 모든 인류가 화합하여 참된 인간을 완성하려는 불교의 이상을 실현하는 문제 등 몇 가지 해결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e.2 유학
국권침탈 이후 일제는 이른바 문화정책이라는 미명 아래 친일적인 유학자들을 이용, 성균관을 경학원 으로 격하시켜 한국유교의 맥을 단절시키고자 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전국 유림의 합의에 따라 경학원을 성균관으로 환원시키고, 1964년 전국 유림의 결합체인 유도회를 결성함과 동시에, 성균관 대학교를 창설하여 유학정신에 바탕을 둔 대학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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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의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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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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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자 가자 피안으로.
피안으로 아주 가자, 영원한 깨달음으로. ”
격의불교(格義佛敎) 또는 격의(格義)는 불교의 중국 전래 초기인 위진시대(魏晋時代: 220-420)에 나타났던 불교 교리 이해 방법 또는 불교 연구 방법이다.[1][2] 한문으로 번역된 불교 경전에 기술되어 있는 사상이나 교리를 노장사상(老莊思想)이나 유교사상(儒敎思想) 등의 전통 중국 사상의 개념을 적용하여 비교하고 유추함으로써 이해하려고 하는 방법이다.[1][2]
예를 들어, 불교 경전인 《반야경(般若經)》에 나오는 "공(空)"에 대해 노장사상의 "무"(無) 개념을 적용하여 그 내용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1] 죽림칠현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3] 하지만, 이러한 격의불교로는 불교에 대한 참다운 이해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었다.[1]
동진(東晉: 317-420) 시대의 고승이었던 도안(道安: 312-385)은 격의불교의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2] 하지만 그도 격의불교의 폐단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하였는데, 구마라습(鳩摩羅什: 344-413)이 불교 경전을 본래의 뜻에 맞게 바르게 번역한 이후에야 비로소 극복되었다.[2]
[삼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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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론종(三論宗)은 《중론》·《십이문론》·《백론》의 삼론(三論)에 의거한 중국 불교의 논종(論宗)이다[1][2]
삼론(三論)은 도안(道安: 312-385)의 권유로 쿠차국에서 초빙된 구마라습(鳩摩羅什: 344-413)이 한역한 《대품반야》·《소품반야》 등의 초기 대승경전과 이에 입각한 용수(龍樹: c.150-c.250) 계통의 중관파 논서들 가운에, 용수의 《중론(中論)》 4권(409년에 한역)과 《십이문론(十二門論)》1권(409년에 한역) 그리고 용수의 제자인 제바(提婆 · Aryadeva: 170-270)의 《백론(百論)》 2권(404년에 한역)을 가리킨다.[2][3]
구마라습 문하의 수재(秀才)들에 의해 삼론이 연구되면서 삼론학파(三論學派)가 형성되었다.[2]
반야공(般若空)의 사상을 교리의 근간(根幹)으로 삼고 있어 중관종(中觀宗) · 공종(空宗) · 무상종(無相宗) · 무득정관종(無得正觀宗) 등으로도 불린다.[2]
중국 불교의 삼론종은 인도 불교의 중관파에 대한 중국측 명칭에 해당한다.[3] 중국 불교의 삼론종은 인도 불교의 중관파와는 달리 《열반경》의 여래장사상을 수용하여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사상을 전개시킨 것에 특색이 있다.[4]
성립[편집]
《중론》·《십이문론》·《백론》의 삼론이 언제부터 용수 계통의 반야중관사상(般若中觀思想)을 대표하는 핵심적인 논서로 간주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론학은 승랑(僧朗: fl. 6세기)을 거쳐 길장(吉藏: 549-623)에 이르러서는 중국 불교의 중요한 종파 중 하나인 삼론종으로 자리잡게 되었다.[3] 이때부터 삼론종이라는 명칭은 인도 불교의 중관학파(Madhyamika)에 대한 중국측 명칭으로 통용되었다.[3]
삼론종에서 7대상승(七代相承)이라 하며 내세우는 인물은 구마라습(鳩摩羅什) · 승숭(僧嵩) · 법도(法度) · 승랑(僧朗) · 승전(僧詮) · 법랑(法朗) · 길장(吉藏)의 7사(師)를 말한다.[5]
고구려의 승려인 승랑(僧朗)은 일찍이 중국에 들어가 구마라습(鳩摩羅什)에서 승조(僧肇)로 이어지는 삼론학(三論學)을 배웠다.[5] 당시의 삼론학은 《성실론(成實論)》이란 소승적(小乘的) 유사상(有思想)에 영향을 받고 있어 본래의 삼론학의 진의(眞意)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다.[5] 승랑은 이런 사상조류를 탈피하여 새로운 삼론(三論)을 설립하였는데, 이 일은 삼론학에서 분수령을 이루어 과거의 삼론학을 고삼론(古三論)이라 부르고 승랑의 순수삼론학을 신삼론(新三論)이라 부르게 되었다.[5]
삼론의 오의(奧義)를 깊이 터득한 승랑은 중국 남방으로 떠나 회계산(會稽山) 강산사(岡山寺)에 머물렀고, 다시 종산(鐘山) 초당사(草堂寺)에 와서는, 정계로부터 은퇴해 그곳에 머물고 있던 주옹(周顒)에게 삼론학을 가르쳐 주옹(周顒)이 《삼종론(三宗論)》이란 책을 저술하는 계기가 되었다.[5]
만년에 섭산(攝山) 서하사(棲霞寺)로 와서 그의 스승이며 주지였던 법도화상(法度和尙)의 지위를 계승(500)하였다.[5] 양무제(梁武帝)는 그의 학덕을 높이 평가하여 천감(天監) 11년(512)에 우수한 학승(學僧) 10명을 선발하여 승랑의 문중(門中)에서 공부를 시켰는데 그때 학승 중 한 명인 승전(勝詮)은 스승의 학문을 계승하여 섭산(攝山 혹은 攝嶺)에 머물렀고, 또 승전을 계승한 법랑(法朗)이 흥황사(興皇寺)에 있었으므로 승랑의 삼론학 학통(學統)을 섭령흥황(攝嶺興皇) 또는 섭령상승(攝嶺相承)이라 불렀다.[5]
이렇게 계승된 승랑의 삼론학은 법랑의 제자인 길장(吉藏: 549-623) 때에 와서 독립된 종파인 삼론종(三論宗)으로 성립되었다.[5] 길장(吉藏: 549-623)은 삼론학파에 몸을 담아 법랑(法朗)의 제자가 되어 삼론에 각기 주석을 붙이는 한편, 《삼론현의(三論玄義)》를 지어 삼론종을 대성하였다.[2] 가상대사(嘉祥大師)라고 불린 길장은 가상사(嘉祥寺)에 거(居)하면서 용수(龍樹)의 공관불교(空觀佛敎)를 중국식으로 발전시켰다.[2]
사상[편집]
삼론종은 단순히 삼론의 사상을 종합 서술한 것이 아니라, 삼론을 바탕으로 하면서 "무득(無得)의 정관(正觀)"이라는 아무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입장에 선 새로운 불교 통일론을 주장하였다.[2]
이제합명중도설[편집]
이제합명중도설(二諦合明中道說)은 승랑이 제창한 인식 방법으로 그의 대표적인 사상이다.[6][7] "이제합 명중도 설"로 띄어 읽는데,[8] 문자 그대로의 뜻은 "이제(二諦)를 종합하여 중도를 밝힌다"이다. 중도(中道)는 불교의 궁극적인 진리를 의미하는데, 이 중도를 밝히는 방법으로 세제(世諦)와 진제(眞諦)의 이제(二諦)를 합명(合明)하는 방법, 즉 정반합지양(正反合止揚)시키는 방법을 쓴 것을 이제합명중도설(二諦合明中道說)이라 한다.[7][8]
승랑의 활동 당시, 삼론과 함께 《성실론》을 공부하고 있던 당시의 학승들은 모두 이제를 중시하여, 부처는 항상 이제에 의하여 설법했으며, 모든 경전은 이제를 벗어나지 않으며, 이제를 밝히면 모든 경전을 해득하게 된다는 견해를 가졌다. 승랑도 이 견해에는 같은 입장을 가졌다.[7] 그러나 승랑은 이제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이들과 견해가 달랐다.
당시의 학승들은 《성실론》의 영향을 받아 이제(二諦)를 이(理: 진리) 또는 경(境: 경지)으로 보는 약리이제설(約理二諦說)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9] 반면 승랑은 이제(二諦)를 교(敎: 방편 또는 수단)로 보는 약교이제설(約敎二諦說)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9] 약리이제설(約理二諦說)은 이제를 어떤 고귀한 "이"(理: 진리) 또는 "경"(境: 경지)으로 봄으로써 이제를 어떤 고정된 실체로 여기게 되고 이에 집착하게 되는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9] 반면 승랑의 약교이제설에서는 이제를 "교", 즉 고정된 성품이 있다는 집착을 타파하여 중도를 밝히는 "방편"으로 보기 때문에, 이제를 실체로 여기는 결함 없이 이제를 통해(즉, 이제를 사용하여) 고정된 성품이 있다는 집착을 제거함으로써 제1의제(第一義諦)인 중도, 즉 진정한 이(理: 진리)가 밝히 드러나게 할 수 있었다.[9]
당시에 승랑의 약교이제설은 공과 중도에 대한 용수의 견해에 진실로 합치하는 것이라고 여겨졌으며, 당시의 중국의 삼론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승랑을 기점으로하여 승랑 이전의 학파를 고삼론(古三論)이라고 부르고 승랑 이후의 학파를 신삼론(新三論)이라 부르게 되었다. 신삼론에서는 《성실론》을 함께 공부하던 고삼론의 태도를 버리고 오직 삼론에 의거하여 중관(中觀)을 전개하게 되었다.
각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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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의 불교학 (3) 중관-유식 양 학파의 논쟁 / 남수영
[ 권말기획 ] 논쟁의 불교학 (3) 공사상을 둘러싼 논쟁
[13호] 2002년 12월 10일 (화) 남수영 nam1988@chol.com
1. 서론
공사상은 대승불교의 근본교리이며 대승경전 가운데서 가장 먼저 공사상을 고양했던 것은 《반야경》이다.
《반야경》은 공사상을 통해서 부파불교의 법유설을 비판하였으며, 《반야경》의 사상을 계승한 용수는 《중론》과 《회쟁론》 등을 지어 《반야경》의 공사상을 정립함과 동시에 부파불교의 법유설을 체계적으로 비판하였다. 용수의 공사상을 구성하는 핵심 개념은 연기·무자성·공·가명·중도인데, 그 모두는 부파불교의 법유설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용수 이후 공사상은 대승불교의 근본교설이 되었다. 인도에서 대승불교를 대표하는 것은 중관·유식 양 학파인데, 그 두 학파는 모두 공사상을 최고의 진리로서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유식학파의 논서들 가운데에서는 중관학파를 허무론이라고 비판하고, 반대로 중관학파의 논서들 가운데에서는 유식학파를 허무론이라고 비판하는 대목이 발견된다. 이런 논쟁은 중관·유식 양 학파가 공사상을 최고 진리로 인정하면서도, 공사상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중관·유식 양 학파의 공사상은 어떤 점에서 서로 다르며, 그 양 학파의 논쟁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본고에서는 그와 같은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 중관·유식 양 학파 공사상의 상이점과 그를 둘러싼 논쟁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2. 중관·유식 양 학파 공사상의 상이점
1) 중관학파의 공사상
용수의 공사상은 《반야경》에서 설해지던 공사상을 발전시킨 것이며, 《반야경》의 공사상은 초기불교에서 설해지던 공관을 발전시킨 것이다. 공관이란 일체의 사물이 공이며, 고정 불변의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보는 관법을 말한다. 예를 들면 불타는 《숫타니파타》에서 “목건련이여, 항상 마음을 가다듬어 아견(atta?udit.t.hi)을 버리고, 세간을 공(sun??ta?이라고 관하라. 이렇게 하면 죽음(maccu)을 뛰어넘는다. 이와 같이 세간을 관찰하는 자를 死王(maccura?a?은 보지 못한다.”1)고 말한다. 《반야경》은 이와 같은 초기불교의 공관을 발전시킨 것이며, 용수의 공사상은 바로 이 《반야경》의 공사상을 계승한 것이다.
《반야경》의 공사상을 계승한 용수는 삼세의 일체법이 모두 연에 의해서 발생하고 존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자성·공·가명·중도라고 주장하면서, 부파불교의 법유설을 비판하였다. 용수는 《중론》과 《회쟁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연기인 것, 그것을 공성(s쳕?yata?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연에) 의존해서 [시설된] 가명이며, 실로 그것이 중도이다.2)
또 여러 사물에 연해서 존재하는 것, 그것을 공성이라고 말한다. 또 여러 사물에 연해서 존재하는 것, 실로 그것이 무자성인 것이다.3)
연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 아닌 법은 어떤 것도 없다. 그러므로 실로 공이 아닌 법은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4)
이처럼 용수는 연기·무자성·공·가명·중도의 다섯 개념을 통해서 부파불교의 여러 학파들이 상정했던 실유를 비판하고 공사상을 천명하였다. 용수는 연기·무자성 등의 다섯 개념을 모두 동의어로 사용하였지만, 그 다섯 개념들은 논리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즉 연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무자성이고, 무자성이기 때문에 공이라고 부른다. 또 연에 의해서 발생한 것을 가명이라고 하며, 가명이기 때문에 불생불멸인 것이고, 그러므로 일체법은 비유비무의 중도라는 것이다. 용수는 일체법이 연기이기 때문에 무자성인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또 어떻게 자성(svabha?a)이 만들어진 것이겠는가? 실로 자성은 만들어지지 않은 것,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5)
즉 일체의 사물은 연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고, 그것은 일체의 사물이 다른 것에 의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성이란 ‘만들어지지 않은 것’,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기를 인정하는 한 자성은 인정될 수 없으며, 그런 점에서 일체법은 무자성이라는 것이다. 또 용수는 《회쟁론》에서 일체법이 무자성이기 때문에 공인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와 같이 또한 나의 말도 연해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무자성이고, 무자성인 것이기 때문에 공(s쳕?ya)이라는 것이 성립한다.6)
본래 ‘공(s쳕?ya)’이란 ‘결여한, 혹은 존재하지 않는’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용수는 위의 게송에서 공을 그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다. 용수는 자신의 말 역시 여러 연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자성을 결여하고 있으며, 무자성이기 때문에 공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용수에게 공이란 연에 의해서 발생한 일체법이 자성을 결여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용어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용수의 공사상에서 무자성과 공은 논리적으로 서로 관련되어 있다.
또 연에 의해서 발생한 사물이 가명이라는 것은 마차, 중생, 혹은 모래 더미의 예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즉 바퀴 등 여러 부분에 의해서 마차라는 명칭이 시설되고, 5온에 의해서 중생이라는 명칭이 시설된다. 그러나 마차와 중생이라는 사물에 고정 불변의 단일한 실체가 없음은 모래 더미에 그 이름에 해당하는 고정 불변의 단일한 실체가 없는 것과 같다. 그런 이유로 용수는 ‘연기인 것, 그것은 (연에) 의존해서 (시설된) 가명’7)이라고 말했다.
또 ‘가명이기 때문에 중도’라는 말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즉 일체법은 여러 연에 의해서 발생한 명칭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일체법은 실은 무자성인 것으로서 발생하고 소멸하는 것이며 자성으로서는 불생불멸이다. 이처럼 일체법은 자성으로서 발생하고 소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고정 불변의 존재성도 고정 불변의 비존재성도 갖지 못한다. 그러므로 일체법은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비유비무의 중도라는 것이다. 그것을 월칭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또 이 자성의 공성, 그것이 가명 (즉 연에 의한 명칭)이다. 실로 이 공성이야말로 가명이라고 확립된다. 바퀴 등 마차의 부분에 의해서 마차가 알려진다. 그 자신의 부분에 의한 명칭인 것, 그것은 자성으로서 불생인 것이다. 또 자성으로서 불생인 것, 그것이 공성이다. 실로 이 자성으로서 불생인 것을 특징으로 하는 공성이야말로 중도라고 확립된다. (왜냐하면) 자성으로서 불생인 것, 그것의 존재성은 없으며, 또 자성으로서 불생인 것에는 소멸이 없기 때문에, 비존재성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존재와 비존재의 두 가지 극단을 떠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자성으로서 불생인 것을 특징으로 하는 공성은 중도라고 말해진다. 실로 이와 같이 공성과 가명과 중도는 연기의 다른 이름이다.8)
따라서 용수의 공사상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모든 사물은 상호 의존의 연기 관계에 있으므로(緣起) 고정 불변의 자성을 갖지 못하며(無自性), 공이란 그처럼 일체의 사물이 고정 불변의 자성을 갖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空). 이때 일체의 사물은 다만 연에 의해서 임시로 시설된 명칭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다(假名). 그러므로 세간에서 어떤 사물이 발생하고 소멸할 때, 정말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것은 명칭일 뿐이다. 이처럼 일체의 사물은 다만 명칭으로서 발생하고 소멸하는 것이므로, 고정 불변의 존재성도 고정 불변의 비존재성도 갖지 못한다. 그러므로 일체의 사물은 궁극적으로는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니라는(中道) 것이다.
이처럼 용수의 공사상에서 일체의 사물은 연기이고, 연기이기 때문에 일체의 사물은 무자성, 공, 가명, 중도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용수에 따르면 일체법은 연기이기 때문에 공이 아닌 어떤 법도 존재할 수 없고, 모든 사물은 무자성·공·가명·중도인 것이기 때문에 실재인 사물은 인정되지 않는다.
2) 유식학파의 공사상
한편 유식학파는 일체법이 연기이고 무자성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일체법이 공이고 가명이라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즉 유식학파는 허망분별(=식)과 공성은 불공(不空)이며, 따라서 일체법이 모두 공인 것만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중변분별론》 제1-1송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허망분별은 있다. 거기서 두 가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실로 여기에 공성이 있고, 그 속에 또 그것이 존재한다.9)
여기서 허망분별이란 아뢰야식을 말한다.10) 그리고 두 가지란 소취와 능취를 말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허망분별이 분별해낸 결과인 대상, 중생, 자아, 의식의 네 가지를 말한다. 이 중에서 앞의 둘은 인식 대상이며, 뒤의 둘은 인식 주관이다. 세친의 주석에 따르면 자아란 제7말나식을 의미하며, 의식이란 제6의식을 의미한다. 위의 인용문에 따르면 그와 같은 인식 대상(=所取)과 인식 주관(=能取)이 모두 허망분별의 소산이라는 것이다.11)
따라서 이 게송의 전반부는 아뢰야식은 있고, 인식 주관과 인식 대상은 모두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한편 게송의 후반부는 허망분별과 공성이 상호 포섭의 관계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는 허망분별과 공성이 둘이 아님을 의미한다. 세친은 《중변분별론》 제1-1송에 대한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와 같이 ‘어떤 것이 어떤 장소에 없을 때, 후자(즉 어떤 장소)는 전자(즉 어떤 것)에 대해서 공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여실하게 관찰한다. 또 거기에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곧 실재(sat)라고 여실하게 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이 설해진) 공성의 특징이 (이 제1송에 의해서) 분명하게 되었다.12)
여기서 세친은 유식학파 공성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공성의 특징에 대한 올바른 이해란 A라는 장소에 B라는 사물이 없으면 A는 B에 대해서 공(s쳕?ya)이지만, A에 C라는 사물이 여전히 남아 있다면 C는 실재(sat)라고 여실하게 아는 것이다. 이것은 ‘남아 있는 것의 실재’라고 부를 수 있는 유식학파의 독특한 사고이다.
허망분별과 공성이 실재라는 주장을 ‘남아 있는 것의 실재’라는 사고와 결부시켜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된다. 우리들의 인식은 인식 대상과 인식 주관의 대립에 의해서 성립한다. 그 인식 대상과 인식 주관이 곧 소취와 능취이다. 이 두 가지는 허망분별에 의해서 분별된 결과물이다. 유식학파에 따르면 이 능취와 소취는 모두 실재가 아니다. 이렇게 능취와 소취가 비실재임을 여실하게 관찰함으로써 허망분별의 결과인 능취와 소취는 더 이상 지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때에도 거기에 ‘남아 있는 것’이 있다. 즉 소취와 능취의 원인이었던 허망분별은 그때에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허망분별과 함께 거기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은 능취와 소취의 비존재성(=공성)이다. 따라서 능취와 소취가 사라진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곧 상호 구분되지 않는 허망분별과 공성이다. 그 두 가지는 능취와 소취가 사라진 후에도 ‘남아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실재이다. 유식학파는 이런 사고에 근거해서 일체법이 무자성임을 인정하면서도 허망분별과 공성을 실재라고 주장하면서 일체법이 공이라는 데에는 반대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중변분별론》 제1-2송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일체는 공도 아니고, 불공도 아니라고 말해진다. 실재이기 때문에, 비실재이기 때문에, 또 실재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중도이다.13)
세친은 위 게송을 다음과 같이 주석한다.
‘공도 아니다.’라는 것은 공성과 허망분별이 (있기) 때문이다. ‘불공도 아니다’라는 것은 소취와 능취라는 두 가지가 (없기) 때문이다. ‘일체’란 유위, 즉 허망분별이라고 말해지는 것과 무위, 즉 공성이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말해진다’는 (것은) 설명된다(는 의미이다). ‘실재이기 때문에’란 허망분별이 (실재이기 때문이고), ‘비실재이기 때문에’란 (소취와 능취의) 두 가지가 (비실재이기 때문이고), ‘또 실재이기 때문에’란 허망분별에 공성이 (있기) 때문이고, 또 그 (공성)에 허망분별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중도이다’란 일체가 일방적으로 공인 것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불공인 것도 아닌 것(을 말한다). 이렇게 여기서 말해진 것은 반야바라밀다 등에서 ‘이 일체는 공도 아니고, 또 불공도 아니다’라고 설해지는 것과 일치한다.14)
세친의 주석을 참고해서 《중변분별론》 제1-2송을 살펴보면, 우선 일체법이란 유위와 무위의 일체법이다. 유식학파는 일체법 중에서 허망분별과 공성의 실유만을 인정한다. 그 중에서 허망분별은 유위법이고, 공성은 무위법이다. 그런데 일체법 중에서 공성과 허망분별이 불공으로서 실재하기 때문에 일체법은 공이 아니다. 또 일체법 중에서 소취와 능취라는 두 가지는 공으로서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일체법은 불공도 아니다. 그리고 다시 상호 포섭 관계에 있는 허망분별과 공성이 실재한다. 따라서 일체법은 공도 아니고 불공도 아니라는 중도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 《중변분별론》 제1-14송은 허망분별과 공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실로 (소취와 능취라는) 두 가지의 비존재와 그 비존재의 존재(abha?asyabha?a, 無의 有)가 공의 특징이다. (그것은) 존재(=有)도 아니고, 또 비존재(=無)도 아니다. 또 (그것은 허망분별과) 다른 특징(을 가진 것)도 아니고, 동일한 (특징을 가진 것)도 아니다.15)
여기서 보듯이 유식학파는 소취와 능취의 비존재성(=空性)을 실재로 간주하고 있다. 소위 ‘비존재의 존재(abha?asyabha?a, 無의 有)’이다.16) 이처럼 허망분별과 공성을 실재로 간주하는 유식학파의 관점은 매우 독특한 것인데, 그것은 위에서 보았던 ‘남아 있는 것의 실재’라는 사고를 고려할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중변분별론》에서 중도는 소취와 능취의 ‘공(=非有)’, 그리고 허망분별과 공성의 ‘불공(=非無)’으로 설명된다. 따라서 유식학파는 일체법을 공도 아니고 불공도 아니라고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중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고 주장하게 된다. 이때 공인 소취와 능취는 비실재이고 불공인 허망분별과 공성은 실재이다.
이처럼 중관학파는 일체법이 연기이고 따라서 일체법은 모두 공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유식학파는 일체법 중에서 허망분별과 공성은 불공이며 실재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양 학파 공사상의 상이점이 발견된다.
3. 중관·유식 양 학파의 논쟁
1) 유식학파의 중관 공사상 비판
위에서 보았던 바와 같이 중관·유식 양 학파는 상이한 공사상을 가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서 양 학파는 상호 비판하면서 논쟁하게 된다. 중관학파의 공사상에 대한 유식학파의 비판은 《유가사지론》에서 발견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어떤 한 무리의 사람들은 대승과 관련되어 있거나, 심오한 공성과 관련되어 있는 이해하기 어려운 경전을 밀의로서 듣고서, 그 말하는 바의 의미를 여실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불합리한 분별이 인도하는 대로 생각하여, 이와 같이 보고 이와 같이 논하기를 “일체는 다만 명칭(prajn?pti)일 뿐이다. 그것이 진실이다. 이와 같이 보는 것이 바르게 보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들에게는 그 명칭의 의지처인 실재하는 사물이 없기 때문에, 일체는 명칭이 되고 모든 점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러나 어떻게 다만 명칭일 뿐이라는 것이 진실이겠는가? 이와 같은 이치에 따라 그에게는 진실과 명칭이라는 두 가지가 모두 훼손된다. 또한 명칭과 진실이 모두 훼손되기 때문에 (그들은) 극단적인 허무론자라고 알아야 한다. 지혜로운 사람과 범행을 구족한 사람은 그와 같은 허무론자와 함께 말하지 말고 함께 머물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는 자신을 파괴하며, 또한 그의 견해를 따르는 세상 사람들을 파괴한다.17)
여기서 ‘일체가 명칭(prajn?pti, 假名)일 뿐이며, 그것이야말로 진실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중관학파의 공사상을 서술한 것이다. 그러나 유식학파에 따르면 그와 같은 중관학파의 공사상은 밀의로서 설해진 심오한 공성에 대한 경전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결과일 뿐이다.
유식학파에 따르면 가명의 근거가 실재하지 않는다면 가명은 결코 시설될 수 없으므로, 일체가 다만 가명일 뿐이라는 주장은 불합리한 주장이다. 또 그런 이유로 그런 주장은 진실과 가명을 모두 비존재로 간주하도록 하는 잘못된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일체가 가명일 뿐이라는 중관학파의 공사상은 진실과 가명이라는 두 가지를 모두 훼손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결국 자신과 세간을 파괴하는 극단적인 허무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가사지론》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 무엇이 악취공인가? 이른바 어떤 사문, 바라문이 있어 공인 것에 근거해서 바라지 않고, 공인 것을 바라지 않을 때, 실로 이와 같은 것을 악취공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 공인 것은 비실재(asat)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인 것, 그것이 실재이기 때문에 공성이 있는 것이다. 또한 일체가 비존재라면, 어디서, 누가, 무엇에 근거해서 공이 있겠는가? 또한 이로 말미암아 실로 그들의 공성은 입증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것을 악취공이라고 한다.
또 무엇을 선취공이라고 하는가?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 그것에 근거해서 그것을 공이라고 바르게 관찰한다. 또 여기에 남아 있는 것, 그것은 여기에 진실로 있다고 여실하게 안다. 이것이 여실하고, 뒤바뀜 없이 공성을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한다.18)
위의 인용문은 악취공과 선취공을 설명하고 있는데, 유식학파의 입장을 선취공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자신들의 공사상은 공성을 올바르게 파악하는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선취공을 판단하는 논리적 근거는 ‘남아 있는 것의 실재’라는 사고이다. 즉 《유가사지론》에 따르면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공이라고 바르게 관찰하고, 또 여기에 남아 있는 것은 실재라고 여실하게 아는 것’이야말로 선취공이다. 또 《유가사지론》은 그렇게 아는 것이야말로 ‘여실하고, 뒤바뀜 없이 공성을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와 반대로 중관학파의 공사상은 악취공이다. 유식학파의 입장에 따르면 가명은 실재하는 식과 공성을 근거로 해서 시설될 수 있다. 그러나 중관학파는 실재를 완전히 부정하며, 중관학파의 그와 같은 공사상은 공성을 설명할 수 없는 악취공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유식학파는 중관학파에 대해서 만약 일체가 비존재(abha?a)라면 어디서, 누가, 무엇에 근거해서 공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이처럼 유식학파는 ‘남아 있는 것’을 실재로 간주하는 독특한 공사상을 근거로 해서 중관학파와는 다른 공사상을 정립하고, 그에 근거해서 중관학파의 공사상을 비판하게 되었던 것이다.
2) 중관학파의 유식 공사상 비판
유식학파는 중관학파를 허무론이라고 비판했지만, 중관학파에게 공은 유식학파가 말하는 것처럼 비실재나 비존재를 의미하는 용어가 아니다. 중관학파에게 공은 연에 의해 시설된 무자성인 사물의 ‘존재(=有)도 아니고 비존재(=無)도 아닌’ 실상을 드러내어 중생들로 하여금 사물에 대한 집착을 치유하도록 하는 목적을 가지고 설해진 실천적인 의미를 지니는 용어이다. 그러므로 중관학파의 입장에서 보면 유식학파의 비판은 오해를 내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유식학파의 발생 이후에 성립한 중기 및 후기 중관학파는 유식학파의 오해를 지적하고 중관학파의 공사상을 천명하기 위해서, 유식학파를 포함하여 불교와 인도 철학의 실유론 학파들이 상정하는 모든 실유들에 대한 비판을 다시 한번 시도하게 된다. 여기서는 중기 중관학파인 청변의 《반야등론》을 중심으로 하여 공성의 실재성 비판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앞에서 보았던 것처럼 유식학파에서 공성은 능취 소취의 비존재성을 의미하며, 이 능취 소취의 비존재성(=空性)을 실재라고 주장한다. 유식학파는 그것을 ‘남아 있는 것의 실재’, 그리고 ‘비존재의 존재’라는 관점에서 설명하였다.19) 그러나 청변은 유식학파의 공성, 즉 원성실성에 대해서 《반야등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약 (無二, 즉 능취와 소취의 비존재)가 ‘없음의 부정’이라는 의미라면, 이것은 둘이 없다고 부정함으로써 작용을 완료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비존재의 과실이 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부정을 주요 성질로 하기 때문에, 승의로서 비존재는 아니기 때문이다.20)
그러나 만약 (無二가) ‘아님의 부정’이라는 의미라면 이것은 정립을 주요 성질로 하기 때문에, 비존재와는 달리 비존재의 실체가 있는 것을 보임에 의해서 허락될 수 없다. 손감의 극단이기 때문이다.21)
위에서 보는 것처럼, 청변은 중관·유식 양 학파의 공사상을 ‘없음의 부정’과 ‘아님의 부정’이라는 두 종류의 부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 중에서 ‘없음의 부정’은 부정 그 자체를 본질로 하는 절대적 성질의 부정이며, ‘아님의 부정’은 부정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긍정하고자 하는 상대적 성질의 부정이다. 따라서 청변이 말하는 바와 같이 ‘없음의 부정’은 부정으로서 그 작용을 완료한다. 그러나 ‘아님의 부정’은 부정으로서 그 작용을 완료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긍정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아바로키타브라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없음의 부정’은 부정이 주요 성질이다. 예를 들면 ‘바라문은 없다’라고 부정함에 의해서 크샤트리야가 있음을 정립하지 않고, 다만 ‘바라문이 없다’는 부정만을 설하는 것과 같은 부정이다. ‘아님의 부정’은 정립이 주요 성질이다. 예를 들면 ‘바라문이 아니다’라고 부정함에 의해서 다만 ‘바라문이 아니다’라는 부정만을 설하지 않고, ‘크샤트리야이다’라고 정립하는 것과 같은 부정이다.22)
즉 ‘없음의 부정’은 ‘바라문은 없다’고 말하듯이 바라문의 존재를 부정하는 곳에서 가 작용이 끝나는, 부정을 그 본질로 하는 부정이다. 그러나 ‘아님의 부정’은 ‘그는 바라문이 아니다’라고 부정함으로써 ‘그는 비바라문, 예를 들면 크샤트리야, 혹은 바이샤이다’라고 하는 긍정을 목적으로 하는 부정인 것이다.
여기서 ‘없음의 부정’은 중관학파에 공사상에 해당하고, ‘아님의 부정’은 유식학파의 공사상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중관학파는 일체법이 연기이기 때문에 자성이 없다고 하는 곳에서 그 부정이 끝나지만, 유식학파는 능취 소취는 비존재이지만 그 능취 소취의 비존재성(=空性)이 실재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부정에서 긍정으로 전환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유식학파는 능취와 소취를 비존재로서 부정하지만,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능취와 소취의 비존재성을 실재로서 긍정한다. 그런데 청변에 따르면 그와 같은 유식학파의 공사상은 비존재의 실재성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극단적인 손감(損減)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청변은 그와 같은 유식학파의 사고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예를 들면) 토끼뿔의 비존재는 ‘비존재의 존재(dngos po med pa, 無의 有)’가 아니다. 이와 같이 승의로서 비존재를 ‘비존재의 존재’와 동등한 것이라고 할 때는 斷見이 성립할 것이다.23)
토끼뿔이 존재하지 않을 때 토끼뿔의 부정은 부정 그 자체로서 끝나야 하지만, 거기서 토끼뿔의 비존재를 승의로서 실재라고 인정한다면 그것은 비존재를 실재화하는 것이 되어 극단적인 단견이 성립하게 된다. 즉 청변에 따르면 능취와 소취의 존재에 대한 부정은 거기서 종결되어야 하지만, 유식학파는 능취와 소취의 존재를 부정하는데서 끝나지 않고 그 능취 소취의 비존재성을 승의로서 실재라고 주장함으로써, 오히려 극단적인 단견이 된다는 것이다.
4. 결론
불교는 불타가 깨달은 진리, 혹은 그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불교에는 여러 학파들이 있으며, 그 학파들은 모두 불타의 가르침을 최고의 진리로 삼는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불교에 여러 학파들이 생겨나게 된 것은 그들이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승 불교는 공사상을 바탕으로 하며, 대승 불교를 대표하는 것은 중관·유식 양 학파이다. 그 두 학파는 모두 공사상을 진리로서 받아들이면서도, 자세한 부분에서는 공사상에 대해서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중관학파는 일체가 공이고 가명이라고 말하였는데, 그 이유는 일체의 사물이 여러 연에 의해서 발생하고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에, 모래 더미와 같이 ‘고정 불변의 존재성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면 유식학파는 허망분별과 공성을 실재로 간주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 두 가지는 어떤 방식의 관법으로도 제거할 수 없는 ‘남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서 중관학파와 유식학파의 실재 개념은 서로 상이함을 알 수 있다. 즉 중관학파에게 실재란 ‘고정 불변의 존재성을 가지는 것’이지만, 유식학파에게 실재란 관법을 통해서 여러 법을 제거했을 때에도 끝까지 ‘남아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이유로 중관학파는 일체법의 실재를 부정하였지만, 유식학파는 허망분별과 공성의 실재를 인정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상이한 공사상을 둘러싸고 중관·유식 양 학파는 다음과 같이 상호 비판한다. 유식 학파에 따르면 명칭은 반드시 실재하는 사물이 있어야 시설될 수 있으며 공인 것은 비존재이다. 따라서 유식학파는 일체가 비존재(=空)라면 어디서, 누가, 무엇에 근거해서 공이 있을 수 있는가를 물으면서 중관학파의 공사상은 극단적인 허무론이라고 비판하였다. 한편 중관학파는 능취와 소취의 존재에 대한 부정은 그것으로서 끝나야 하며, 유식학파가 주장하는 것처럼 거기서 다시 능취와 소취위 비존재성을 실재라고 인정하는 것은 비존재를 실재화하는 것으로서 그것이야말로 오히려 극단적인 허무론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므로 중관·유식 양 학파의 상호 비판은 우리에게 다음의 두 가지를 의문으로서 남기고 있다. 첫 번째 중관학파의 공사상에 대한 유식학파의 비판으로부터 제기되는 의문은 일체가 명칭일 뿐이라면 과연 그 명칭은 실재하는 사물이 없이도 시설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며, 두 번째 유식학파의 공사상에 대한 중관학파의 비판으로부터 제기되는 의문은 능취와 소취의 비존재성인 공성을 실재라고 인정하는 것은 과연 논리적으로 타당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 첫 번째 의문은 모든 사물의 궁극적인 근거를 묻는 존재론적인 문제와 연결되며, 두 번째 의문은 유가행의 수행에서 얻어지는 각종 현상에 대한 해명을 묻는 인식론적인 문제와 연결된다고 생각된다. 그 두 가지 문제에 대한 해명은 앞으로의 연구 과제이다. ■
남수영
동국대 인도철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철학박사. 현재 동국대 강사. 역서로 <힌두이즘><용수의 공사상 연구>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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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
1.1. 조선
1.2. 일제강점기
1.3. 해방 이후
1.4. 21세기
2. 특징
2.1. 기복신앙
2.2. 가톨릭과의 관계
2.3. 정치 참여
3. 교세
3.1. 지역별
3.2. 교단별
4. 선교
4.1. 국내
4.2. 국외
5. 봉사 활동
6. 교포 사회에서의 역할
7. 교육기관
7.1. 초등학교
7.2. 중학교
7.3. 고등학교
7.4. 전문대학
7.5. 4년제 대학
8. 비판
8.1. 목사 임명에 대한 논란
8.2. 군종장교요원 특혜 논란
9. 관련 링크
10. 관련 문서
1. 역사[편집]
근대 이후로 독립 운동과 경제 발전등에 기여하여 현재까지도 대한민국에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영향을 끼친 메이저 종교란 인식이 있다.
변질된 형태에 대한 비판적 관점에서의 서술은 개독교 문서를 참조.
1.1. 조선[편집]
개신교의 한국 유입은 서학(가톨릭)의 전래보다 상당히 뒤 늦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예수회의 주도로 동양 선교에 적극적이었지만 개신교가 주류인 영국, 네덜란드, 독일, 미국 등의 북구국가들은 18세기 까진 해외선교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19세기 들어 영미를 주축으로 장로회와 감리회 선교사들이 한국에 많이 오면서 유럽의 개신교 구성과 달리[1] 우리나라의 개신교단은 장로회와 감리회가 주류가 되었다.
그러나 개신교의 전래에 가톨릭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가톨릭 교회가 조선에서 탄압을 극심하게 받고나서 지하교회화 되었고 구한말 이런 제약이 풀리면서 조선땅에 전래를 유도한 것도 가톨릭 신자들의 역할이 컸으며 선교사들을 도와 번역이나 통역 한국 안내까지 가톨릭(개신교로 개종한 신자 포함) 출신 신자들의 공이 적지 않다.
한국에 처음 개신교가 전파된 연도는 1832년으로, 유대계 독일인 루터교 목사 칼 귀츨라프에 의해 이루어졌다. 귀츨라프는 중국에서 선교활동 중에 조선의 소식을 듣고 다른 지원 없이 '혼자' 개인자격으로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의 1000t급 로드 암허스트호에 의사 겸 통역사로 낑겨(?)서 황해도와 군산만을 돌아서 1832년 7월 25일, 충청도 고대도 부근에 도착하였다. 수십여 일밖에 머무르지 않았지만 서양감자 파종법과 포도 재배를 알려주었다고 한다. 짧은 기간동안 귀츨라프 선교사는 직접 한글을 배워서 귀환 후에 중국 선교 잡지에 발표하여, 독일과 영어권에 소개했고 자신이 독자적으로 주기도문을 최초로 한국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조선에선 25일을 머문끝에 지방관과 필담을 나눴지만 중국의 허락없이 통상을 금한다는 조정의 뜻에 따라 순순이 조선을 떠나게 된다. 귀츨라프는 해당 교단과 선교회에서 허락을 맡지 못해 아무런 지원도 받지 않아서 자비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외부 지원도 없고 조선의 협조 또한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개신교계에서는 1866년 조선에 온 영국인 개신교 목사 로버트 저메인 토머스를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로 본다. 그런데 토머스 목사를 순교자로 볼것인지 여부는 개신교 내부에서도 논란이 있다. 선교중에 사망한것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비판 때문. 다만 선교 목적으로 온 것은 맞긴 하다. 일단 무장상선을 이끌고 제국주의 침략의 앞잡이(?)로 들어왔다는 일각의 인식과 달리 토머스는 이미 이전에 한국에 와서 넉 달 정도 선교를 하다 배가 파손되어서 다시 북경으로 돌아간 뒤 미국 배를 빌려 타고 잠입 중에 사망한 것이다. 자세한것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 참조.
이후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믿기 시작하면서 개신교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개화기에 이르러 외국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오면서 조선 개신교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시기 선교사들은 특히 교육 사업에 중점을 두어, 배재학당, 연희전문학교, 이화학당 등의 미션스쿨, 숭실대학 등이 설립되었다. 또한 서울 각지에 승동교회, 정동교회 등의 교회가 설립되었다. 평양은 '조선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 정도로 조선 개신교의 산실이었고 평양신학교는 한국 복음주의 개신교의 대표적인 신학교의 전신이다…[2]
이렇게 개신교가 확장된 이유는, 양반 계층 입장에서는 서구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최단 루트가 개신교 선교사를 통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고, 오랫동안 소외받았던 일반 민중 및 하층계급 입장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사상에 이끌렸기 때문이다. 특히나 평양은 오래전부터 권력에서 밀려난 비주류 세력의 지방이었고 상인들이 활동했기 때문에 그들을 통해 교세가 확장될 수 있었다.
선교 초기부터 주류 양반 계층은 제사문제때문에 서학 가톨릭이나 개신교든지 부정적인게 사실이었다. 제사를 우상숭배로 여겼기에[3] 기독교를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無父無君)' 사학(邪學)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항이후 선교제한이 풀리면서 청나라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서양인들이라 조선 조정에서도 역시 서양인들을 무서워했고, 이 때문에 외국인 선교사들이 수탈이 심한 지역에 들어가 백성들 대신 지방관들에게 대들어서 (주로 황해도 평안도) 지방관들이 전전긍긍했다. (아무래도 영남지방과 기호지방은 유림의 세가 상당했기 때문.) 민중들이 개신교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그리고 포교 과정에서 서양 신문물을 선물하며 선교했기에 신문물에 거부감이 없는 상인 계층들에게서 환영 받았고, 이전의 천주교처럼 아녀자들이 신도의 대다수가 되었다. 특히 선교사들은 지역 무당들을 집중 공략했다고 하는데 무당에게 더 쎈 존재가 있음을 납득 시키면 동네 아낙네들이 줄지어 개종하게 되는 성과(?)가 많이 나왔다.[4]
사실 제사 문제를 제외하면[5] 대부분의 교리들이 유림들 입장에서도 거부감이 없었고[6] 이 때문에 천주교와 다르게 양반 계층에도 퍼지는 것이 가능했다. 그래서 나온 표현이 다름아닌 위군위민(爲君爲民)의 종교. 특히 평양 대부흥을 기점으로 1907년 경에는 천주교와 신자수가 역전되어 개신교가 기독교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되며 한반도의 근대,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사실상 개신교가 주도했다 보아도 틀리지 않을 수준이 되었다.
1.2. 일제강점기[편집]
일제 강점기 시절 한국 개신교의 중요 사건은 저항과 파괴로 볼수 있다. 개화기 이래 선교사들에게 받아들인 개신교과 민족 학교를 비롯한 교육기관으로 자리잡아 많은 인물을 배출하며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했으며, 반대로 일제말기로 갈수록 극심한 탄압을 거치며 많은수의 기독교인들이 변절하게 된 것. 하지만 한국의 개신교는 인터넷상 반 개신교 성향에서 극딜하듯 친일에 적극 나선것은 아니다. 신사 참배 문제와 관련하여 타종교, 비종교인과 오십보 백보 또는 도찐 개찐. 같은 비판과 내부적 반성은 타당하나 아무 근거없이 개신교 개독이 친일에 앞장서 같은 헛소리는 역사 왜곡이다.[7]
단적인 예로 일제시대 내내 가장 극심한 탄압을 받은 종교는 천도교와 더불어 개신교 였고, 신사참배에 거부하여 2천명의 신도들이 체포되고 200여개의 교회가 강제폐쇄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50여명의 신자가 순교했다.
일제는 1919년 3.1운동까지 구한말 민족사학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개신교계 학교들을 통폐합시켜왔으며, 서양학문을 토대로 민권 사상등을 가르치는 통로로 여겨왔고 이는 해방까지 계속되었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중에 15인이 개신교측 인사였는데 이 당시 개신교의 교세는 전체 인구의 1.1~1.3%에 불과했다. 당연히 일제는 개신교를 통치에 방해되는 집단으로 여겼고, 지속적인 감시 대상이었다. 한편 식민지 뿐만 아니라 일본 본토에서도 개신교인을 비롯한 기독교인은 노동조합 참가자, 사회주의자들과 더불어 특별고등경찰[8]의 주 감시 대상이었는데 기독교의 교리상 국가 신토의 천황숭배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
3.1 운동의 경우처럼 제암리 교회 학살이 전세계에 널리 퍼진것도 한국교회의 희생과 선교사의 덕이었고, 3.1운동 과정 기독교인 체포자는 전체의 17.6%인 3천여명에 달했었다. (특히 유관순을 비롯한 여성 체포자는 470여명중 309명이 개신교인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개신교는 구한말 신문물과 새로운 사상의 유입을 가져왔고 이는 민족의식을 가진 지도자들을 배출하면서 반일의 집결지가 되었다. 1911년 105인 사건의 경우 개신교인이 92명이었고, 사실상 개신교단을 탄압대상으로 삼았다. 구한말 개신교 인사중 대표적인 인사들은 독립운동가중 상당비율을 차지하는데 남강 이승훈,양기탁,이회영-이시영 형제, 이갑, 조만식, 여운형,전덕기 목사, 유동열, 이동휘, 이동녕, 강우규 전도사, 이재명, 김상옥, 김마리아, 유관순, 안창호 김구, 김규식, 등은 개신교인이었다. 개신교의 대표적 인물이라며 이승만 만있다고 나머지는 친일파라고 선동과는 정반대다. 사실 근현대사는 독립운동사 인물중 개신교 인사들을 빼놓고 서술하기 어려울 정도다.
한국 개신교의 일제강점기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문제가 바로 창씨개명과 신사참배 문제이다. 그러나 당시 이 문제에 가장 거세게 항의한 종교 역시 개신교였으며, 신사참배의 경우 불교(1911년), 천주교(1913년)에 비해 20년 이상 버티다가 1930년대 후반 일본의 전시체제로 인한 압력에 의해 신사참배를 결의하기로 했다. 이는 불교의 경우 딱히 신사참배를 막을 만한 교리가 없었고 조직은 일본승려에 장악되면서 자연스럽게 일본 특유의 신불습합 문화가 그대로 조선에까지 유입되었고, 천주교는 일본의 천주교와 교황청에서 세속권력과 타협을 권했기 때문이다.[9]
그러나 서양 선교사와 선교사의 교단들마저 신사참배에 대해 극심하게 의견이 갈리고 권력에 맛본 어용목사들이 하나둘 일제의 회유에 넘어가면서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의 개신교 교단이 자발적으로 폐쇄하여 불복종하거나, 용인하여 존속하는 결정을 따르자 이에 반발한 사람들이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로 이승만, 이동휘, 김규식, 여운형이 있다. 또한 아예 박헌영처럼 유물론을 받아들여 반기독교가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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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사참배 결의한 직후, 평양신사를 참배하는 장로교 총회 임원들 모습. 1938년 9월 12일 자 <조선일보> 사진.
이하는 개신교 진보 언론 뉴스엔조이에서 개신교 과거사에 대한 철저한 반성을 위해 쓴 칼럼(이종록 한일장신대 구약학 교수)에서 인용된 내용의 일부를 재인용한 것임을 밝힌다.
소위 "개신교인이 친일을 해야 하는 성경적 이유".
북미합중국의 워싱턴 동상이 있는데 합중국 국민으로는 그 동상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고, 합중국 국기에 합중국 국민으로 누구나 다 경의를 표합니다. 합중국은 기독교국이니만치 기독교인이 대다수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다 우상숭배자로 간주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대일본 황국신민만이 국조숭모(國祖崇慕)하는 의식에 기독교인이 어찌 참례할 수 없으며 황국(皇國)을 대표한 일본 국기에 경의를 표함이 어찌 기독교인에게 죄가 되겠습니까. 전화위복(轉禍爲福)하는 자 있으나 기독교인은 그러한 의미에서 참배함은 절대로 아니요 국가 의식에 국민의 의무로서 참례(參禮)함이 당연한 줄로 각오(覺悟)하고 시인(是認)한즉 양심이 평안하고 충군애국지심(忠君愛國之心)이 날이 감을 따라 두터워집니다. 사신우상(邪神偶像)은 금수 곤충 어별(魚瞥)의 형상으로 된 것인데 어찌 우리의 조상이 그 우상과 동류(同類)가 될 수 있으랴? 그런즉 신사참배하는 일을 우상숭배라고 한다면 이(此)는 불경죄(不敬罪)에 가깝다고 말하여 둡니다.
《청년》 9, 10호, 1939년 2~3월호. 김승태,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반성〉, p.410
기독교의 설립자라고 칭할 만한 사도 바울은 자기가 로마 제국의 공민(公民)이 된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고 자랑하였습니다. 그와 같이 반도인들은 대일본 제국의 신민이 된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고 자랑할 것입니다. 그것이 반도인의 유일한 활로입니다. 반도인들은 이 기회에 죽은 과거를 청산하고 산 장래를 위하여 활동하여야 되겠습니다. 선각자가 된 기독교도들은 민중에게 이 활로를 지시할 책임이 있습니다.
같은 책, p.432
여기에 일본 측 개신교에서도 당연히 거들고 나섰다.
조선 전도부의 어용적 성격은 1919년 3․1독립운동에 대한 반응에서도 유감없이 나타났다. 3․1독립운동을 목격한 와타세는 즉각적으로 '조선 소요 사건과 그 선후책'을 《新人》 4월 호에 기고해, 3․1운동에 참가한 조선 기독교인들은 구약의 정신이 농후하고 기독교의 사랑의 정신이 없는 유대교도에 불과하다고 비난했다. 즉, 만일 기독교인들이 산상수훈의 정신을 안다면 그들은 그런 식으로 반행해서는 안 될 것이며, '하나님을 아버지로 하는 형제로서 더 포용적으로 내선일체를 대성하는 정신'에 근거하여 행동했어야만 했다고 비판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건전한 신앙을 근거로 해 건전한 사상'을 배양함으로써 유다주의를 극복하고 '양 민족의 새로운 영적 일치'를 달성하기 위한 조합교회의 조선 전도의 의의를 더욱 강조하였다.
《한국 기독교와 역사》 제5호(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6), 양현혜, 〈일본 기독교의 조선 전도〉, pp.195~196
그러나 위의 문제들은 어디까지나 교단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가결했을지는 몰라도 개개인이 모두 신사참배를 했다는 이야기는 절대로 아니다. 그리고 당시 신사참배를 했던 목사들이나 교인들 중에서는 진심으로 후회하고 뉘우친 사람들도 많다. 특히 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수많은 유명 목사들이 당시 신사참배한 사실을 공석에서 밝히고 용서를 비는 것이 유행했다.
참고로, 저 병크를 터뜨리도록 유도한 조합교회(組合教会)[10]는 해방 이후 완전히 퇴출돼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리고 유독 대한민국의 개신교에서 장로제와 목사의 개인적 권위가 강조되는 데는 이런 역사적 병크로 인한 회중제에 대한 반감이 한몫 했다는 설도 있다.
결론은 개신교계에선 많은 개신교 신자와 교회가 신사참배 굴복한 문제를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당시 역사적 사실을 발굴하고 있고, 신사참배를 거부한 순교자들을 기리나 그런 순교자들과 애국자들이 있다하여 타종교와 신사참배를 순응한 당시 식민지 치하의 동포들에게 우월감도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많은 변절과 종교적 죄를 지은것도 기독교인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계 과거 반성을 위해 나온 자료들을 반기독교계에서 적극 이용하며 마치 친일종교로 몰아가는것은 씁쓸해한다. 기독교계를 제외하면 국내에서 신사참배에 거부한것은 불교 교단의 결정과 달리 행동한 한용운이 거의 유일하고[11] 타종교와 [12] 일반 대중들은 당사자들의 투옥은 물론 가족들의 배급, 진학, 직장생활등을 포기하는 불이익 때문에 그런 시도 조차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사참배 문제는 두말할 것 없이 대한민국 개신교계의 최대의 흑역사라고 할 수 있다. 주기철, 이기동, 한상동, 이원영,손양원등 일부 목사만 거부했고 나머지는 적극적 친일에 나섰다고 비방하는 글이 있으나 대부분 사실이 아니다. 앞서 1930년부터 중일전쟁 이후부터 전체주의 교육을 강화하며 개신교계 사학들과 갈등을 빚었으며 조선 신학교나 숭실학당처럼 신사 참배를 따를수 없기에 자진 폐교하거나 군소 사학들은 사학 재단 운영권을 강탈당한 사례도 있었고, 친일적 행태를 띄는 교단, 목사에 반발하고, 일본의 현지 교단의 결정을 전혀 준수하지 않고 신사참배에 거부하여 2천명의 신도들이 체포되고 200여개의 교회가 강제폐쇄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50여명의 신자가 순교했다.
처음엔 1932년 1월 전남 광주에서 신사참배 사건이 일어났다. 남장로회에서 경영하던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가 만주사변에 대한 기원제에 참가하지 않거나 참가하더라도 신사참배를 하지 않아 도 당국의 엄중 문책을 받았다. 그 다음해 9월에는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비롯한 10여개의 기독교 학교가 평남 지사의 통첩을 무시하고 ‘만주사변 1주년 기념 전몰자 위령제’에 참석하지 않아 해당 학교가 시말서를 쓰게 되었다. 1933년 9월 18일 원산에서도 캐나다장로회 소속 진성여자보통학교가 만주사변 2주년 기념일에 거행된 순난자(殉難者) 위령제에 참석을 거부하여 문제가 되었다. 이렇게 기독교계 학교에 신사참배가 문제가 된 것은 대륙침략을 계기로 조선총독부가 정신교화 운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운데 신사참배 문제가 크게 확대되는 분수령이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1935년 11월 14일 평양 기독교계 학교의 교장들이 평안남도 지사의 지시에 불복하고 평양신사에 참배하지 않은 사건이다. 식민지 관료로 대만총독부 문교국장을 역임한 바 있는 평남지사 야스타께(安武直夫)는 기독교계 학교가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것을 그대로 볼 수 없었다. 그는 먼저 기독교계 학교 교장들을 굴복시키려 했다. 이해 11월에 들어서서 그는 이 지역 공사립 초등학교장 및 중등학교장 회의를 잇달아 소집하여 회의가 끝나는 날 평양신사에 참배토록 했다. 그러나 기독교인 학교장들은 신사에 참배하지 않았다. 그러자 14일에 개최한 중등학교장 회의에서는 야스타께 지사가 회의 전에 평양신사에 참배한 후 회의를 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러자 숭실학교장 매큔(G.S.McCune, 尹山溫)과 숭의여학교장 대리 정익성(鄭益成), 순안 의명학교 교장 리(H.M.Lee, 李希滿)는 기독교의 교리상 따를 수 없다고 거부했다. 그러자 평남도 당국과 총독부는 기독교계 학교에 대해 설득, 경고하면서 금후 교장 자신의 신사참배 의향 여부와 학생들의 신사참배 의향 여부를 서면으로 회답하도록 요구했다. 이런 요구의 배후에는 교장의 파면과 강제 폐교의 강경방침이 있었다. 그 결과 매큔에게는 1936년 1월 숭실학교장 및 숭실전문학교장직 인가가 취소되고, 스눅도 1월 22일 숭의여학교장 대리인가를 취소당했다. 그 후 총독부는 2월 21일자로 학무국장이 각 도지사를 통해 기독교 각 교파 포교관리자 및 대표자에게 ‘신사와 종교에 관한 건’이라는 통첩을 보내, 신사의 봉사는 종교가 아니며 신사참배는 국민교육상 필요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서 막나가는 일제의 강압에 맞서 외국 선교회 계열의 사학에선 여러 논의와 대응이 나왔는데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는 1936년 11월 전주에서 개최된 남장로회 선교사 연례회의에서 신사참배를 강요한다면 교육사업에서 철수할 수 밖에 없음을 결의했다. 그들은 선교본부에 연락, 해외선교부 총무 풀턴(C.D.Fulton)의 내한을 요청했다. 풀턴은 일본에서 출생한 2세 선교사로서 신도가 종교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1937년 2월에 내한하여, 신사참배를 시키기보다는 학교를 폐쇄할 것을 허락하는 13개항의 소위 ‘풀턴 성명’을 발표했다. 이를 계기로 이 해 9월에 남장로회 학교들의 폐교 신청이 잇달았는데, 광주 수피아와 숭일학교, 목포의 정명학교와 영흥학교가 1937년 9월 6일에, 전주의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 군산의 영명학교와 멜볼딘여학교가 각각 9월 8일에, 순천의 매산학교와 매산여학교는 9월 21일에 각각 폐교를 신청했다.
호주 장로교 선교부는 1936년 2월 7일 총무 맥라렌(Ch.I.McLaren, 馬羅連)의 주재 아래 회의를 열고, 산하의 기독교 학교가 신사참배를 할 수 없다고 결의했다. 그 뒤 선교본부는 교육사업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학교를 계속 경영하기를 원했고 또 일본 당국과의 관계개선을 원하여 “신사참배는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는 일본 정부의 주장을 받아들이기까지 했다. 또 1938년 9월 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후, 그들은 그 이듬해 1월 특별위원회를 소집, 신사참배와는 관계를 끊되 학교를 유지하려는 모든 노력은 그래도 경주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절충적인 노력은 한계를 들어내 그 해 대부분의 선교부 소속 학교를 폐쇄시켰고 동래 일신여학교만 1940년에 폐교되었다.
캐나다 선교부는 1930년대 초에는 학교의 문을 닫더라도 신사참배를 거부하겠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38년에 이르러, 신사에서의 행사는 애국적인 것이요 종교와 관련이 없는 것이라는 총독부 당국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그 의식들에 참가하고 학교를 계속 경영하기로 했다. 캐나다 선교부 산하의 기독교 학교는 신사참배 문제로 문을 닫아야 하는 일은 없었다. 1898년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캐나다 장로교회는 다른 세 교단보다는 신학적 입장이 자유로웠던 데다 1925년 감리교회·회중교회와 연합하여 캐나다연합교회로 개편된 후 한국에 들어온 다른 세 장로교단과는 달리 신사참배 문제를 타협적으로 처리했다. 선교학교 문제의 타협적 처리는 감리교 선교부도 마찬가지다.
1938년 2월 총독부 경무국은 ‘기독교에 대한 지도대책’을 마련하고 기독교계 기관들에 대해 변질과 개편을 강요하는 한편 기독교 연합기관을 해산시키거나 국제기구와 연결된 기관들에게는 국제기구에서 탈퇴하도록 종용하며 일본 안에 있는 동일 계열의 기구와 통폐합해 나갔다. YMCA와 YWCA, 조선주일학교연합회, 감리교의 청년회인 엡웟회 등 그 대상들을 점차 확대시켜 갔다. 한편 1937년 6월부터 1938년 3월에 걸쳐 일제가 안창호 계열에 대한 탄압을 가하여 수양동우회 사건을 일으켜 180여 명의 지식인들을 검거했다. 이어서 강압적인 사회 분위기를 더욱 조성하기 위해 1938년에는 이승만 계에 대한 흥업구락부 사건을 일으켜 관련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했다. 이는 조선의 기독교 지식인세력을 외세로부터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기독교회 외곽에 대한 이같은 강압책으로 장로교회를 집중 공격하던 일제는 1938년에 들어 각 노회별로 신사참배를 유도, 강제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친일목사로 돌변한 이승길(李承吉) 김일선(金一善) 등을 내세워 개별적으로 신사참배에 찬성하도록 설득했다. 2월 9일 조선에서 가장 교세가 강한 평북노회가 일제에 굴복, 신사는 국가의식이라 하여 신사참배를 사실상 결의했다. 뒤이어 2-3월 중에 총회 산하 전국 23개 노회 중 17개 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게 되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1938년 9월 9일 평양 서문밖예배당에서 제 27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개최되었다. 총회 전에 경찰은 주기철 이기선 김선두 등 신사참배 반대지도자들을 사전 구금했을 뿐아니라 선교사들과 총대들에게는 사전에 신사참배 결의를 방해하지 않도록 엄중히 경고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 이튿날 속회, 신사참배를 불법적으로 가결시켰다. 당시 결의를 지켜봤던 김양선의 구술을 보면
“다음날 오전 9시 30분 총회가 재개되었을 때에 교회당 내외에는 수백명의 사복경관으로 완전 포위되었고 강대 아래 전면에는 평남 경찰부장을 위시하여 고위 경관 수십명이 긴 검을 번쩍이면서 기라성같이 자리를 잡고 앉았고 총대들의 좌우에는 그 지방 경찰관 2명씩이 끼어 앉았고 실내 후면과 좌우에는 무술경관 100여명이 눈을 부라리고 서 있었다. 그 살벌한 분위기는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하였다.
주기철 목사, 이기선 목사, 김선두 목사 등 신사참배를 적극 반대하는 유력한 교회 지도자들은 사전에 모두 구금되었고 저들의 압력에 어쩔 수 없이 끌려온 27노회(만주 4노회 포함) 대표 목사 88명, 장로 88명, 선교사 30명 합계 206명이 넋을 잃고 앉아 있을 때에 10시 50분 이미 조작된 각본대로 평양·평서·안주 3노회 연합대표 평양노회장 박응률 목사의 신사참배의 결의 및 성명서 발표의 긴급제안이 있었고 박임현 목사와 길인섭 목사의 동의와 재청이 있었다. 총회장 홍택기 목사는 전신을 떨면서 ‘이 안건이 가하면 예라고 대답하십시오’라고 물었다. 이때에 제안자와 동의·재청자의 10명 미만이 떨리는 목소리로 ‘예’라고 대답했고 그들 외의 전원은 침묵을 지켰다. 그 침묵은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표시하는 것으로밖에 보여지지 않았으므로 수백 경관들은 일제히 일어서서 일대 위협을 표시했다.
당황한 총회장은 ‘부’를 묻지 않고 그냥 만장일치의 가결을 선언하였다. 이때에 이런 사태가 있을 것을 예상한 선교회는 약속해 두었던대로 방위량 선교사를 선두로 2,3명의 선교사들이 회장의 불법선포에 항의하는 한편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주장하려고 했으나 경찰관의 강력한 제지로 발언이 막히자 선교사 30명 전원은 차례로 기립하여 ‘불법이오’‘항의합니다’라고 외쳤다. 봉천노회 소속 헌트(B.F.Hunt, 韓富善)선교사는 무술경관의 제지를 뿌리치고 불법에 대한 항의를 외치다가 그들에게 붙들려 옥외로 축출당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소란 속에 총회 서기는 성명서를 낭독하였고 평양 기독교 친목회 회원 심익현 목사는 총회원 신사참배 즉시 실행을 특청하였다. 동일 12시에 부회장 김길창 목사의 안내로 전국노회장 23명이 총회를 대표하여 평양신사에 참배함으로써 장로교회마저 그들의 불법 강요에 굴하고 말았다.”
장로회 총회에서 이처럼 결정이 내려졌으나 이 날 선교사들은 따로 모여 총회에 항의서를 제출하는 등 몇 차례에 걸쳐 항의했으나 경찰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일각에선 현재 기준으로 보수-진보 따지면서 보수교단에선 진보신학자들이 친일했다 진보쪽에선 보수쪽에서 친일했다 카더라도 있지만 둘다 근거는 없다. 현재 연구로는 서울쪽에선 신사참배에 순응적이었고 오히려 평양지역이 신사참배에 더 반대했으며 선교사들 조차 선교회, 교단, 신학교 내부에서도 서로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한때 카더라로 알려진 박형룡 신사참배 용인설은 현재 연구론 조선 신학교 폐교전 박형룡등이 만주로 망명한것으로 나와 사실무근으로 밝혀졌다.
감리교회도 신사참배에 순응하게 되었다. 미 감리회 선교부가, 이 참배는 애국적인 것이요,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정부의 행사라는 일본 정부의 선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자 거의 때를 같이하여 한국 감리교 또한 신사참배를 수용하게 되었다. 1936년 양주삼 총리사는 4월 10일자 「감리회보」에 ‘신사문제에 대한 통첩’을 게재하여 감리교회가 신사참배를 문제삼지 않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 뒤 1938년 9월 3일에도 양주삼 총리사는 통고문을 내어 교단 안의 여론을 잠재우는 데에 부심했다.
“신사참배는 국민이 당연히 통행할 국가 의식이요, 종교가 아니라고 한 것을 인식하셨을 줄 압니다. 그런고로 어떤 종교를 신봉하든지 신사참배가 교리에 위반이나 신앙에 구애됨이 없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감리교 지도부의 이같은 행태가 감리교계 전체의 공감을 얻은 것은 아니다. 감리교도들 가운데서도 교단의 정책과는 달리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고난을 겪은 이들이 없지 않다. 이 밖의 여러 교단들도 제대로 항거하지 못하고 순응하는가 하면 교단자체가 해산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교단 지도부의 이같은 훼절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신사참배 정책에 불응하면서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이들이 나왔던 것이다.
침례회는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1944년 교단이 강제해산을 당한다. 성결교는 신사참배 문제로 결국 교단을 자진해산했다. 그런데 교단 인사 중에 황국신민선서와 대동아전쟁의 승전을 기원하는 기도를 하고 창씨개명을 한 인물들이 다수 있긴하다.
이후 전개로는 이런 상황에서 신차참배에 반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나타나게 된다. 신사참배가 ‘가결’되고 난 뒤에 장로교단 안에서는 개인적인 혹은 합법적인 차원에서 이에 저항하면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막아보려는 시도들이 없지 않았다. 평양신학교 학생 장홍련이 평양노회장 김일선의 기념식수를 벌목한 사건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신학생들이 신사불참배 운동을 확산시키려다가 결국 학생 다수와 박형룡 김인준 교수가 검속된 사건이 있다.
김선두(金善斗) 목사와 박관준(朴寬俊) 장로는 조선 총독부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못하도록 일본 정계의 그리스도인들을 움직이려고 노력했다. 김선두 목사는 김두영 윤필성 박형룡 등을 대동, 1938년 8월 24일 동경에 도착, 박영출의 안내로 일본 정우회 부회장 외무부장 중의원 의원 마츠야마(松山常次郞) 장로와 군부의 원로 히비키(日疋信亮) 장군(장로) 등을 방문, 한국 교회의 수난상을 진정했다. 그 결과 이를 들은 이들이 동 9월에 조선에 와서 미나미(南次郞) 총독을 만나게 되었다. 박관준 장로는 1939년 1월 안이숙 박영창을 대동하고 도일하여, 일본 제국의회 회의장에 들어가 진정서를 투척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경찰의 집요한 방해와 일제 신사참배 강요정책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이들 개인적인 차원의 합법적 저항과는 달리 반대투쟁을 조직화하여 ‘거부항쟁’의 단계로 이끈 이들도 있었다. 개인적이든 조직적이든, 저항자들 중에는 수감, 투옥되는 것은 물론이고 순교에까지 이른 이도 있었다. 신사참배 거부를 권유하고 거부자들의 결속을 강화하는 중심 인물로 국내에서는 평안남도의 주기철(朱基徹), 평안북도의 이기선(李基宣), 경상남도의 한상동(韓尙東), 전라남도의 손양원(孫良源) 등이 있었고, 만주지역에서는 박의흠(朴義欽)·김윤섭(金允燮)·헌트(B.F.Hunt, 韓富善) 등이 있었다.
신사참배 거부항쟁자들에 대해서 당국은 개별적으로 위협, 구금했던 때도 있었다. 1938년 장로회 총회를 앞두고 주기철·이기선·김선두 목사 등을 예비구금 형태로 검속한 것도 그 일례다. 당국은 이렇게 위협과 고문을 가해도 굴하지 않는 주동자들을 사회로부터 격리시켜 영향력이 확산되지 않도록 했다. 이런 경우, 예비검속 형태로 구금하여 정식 재판에 넘기지 않고 고문하고 장기구금했다. 때문에 장기적인 구금으로 순교한 이들도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사건이 평양지방법원에서 취급했던 이른바 ‘예수교도의 신사불참배 교회 재건운동사건’이다.
이 사건의 관련자들은 “모두가 조선예수교 장로파 교역자 혹은 독실한 신자들로서 1939년 8월 이래 성서의 이른 바 말세론에 기초하여 머지 않아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지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된다고 하여 궁극적으로 우리(일본) 국체를 변혁하여 천년왕국을 건설할 것을 목적으로 ‘신사불참배 재건총회 조직 준비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전국적으로 이를 확대 강화하기 위해 활동하고 또한 여러 가지 불온언사를 함부로 한다”고 했다. 일제는 이를 근거로 1940년 9월 20일 새벽을 기하여 전국적으로 신사참배 거부항쟁자 193명을 검거했다. 평양지방 검사국은 1941년 5월 15일에 이기선 목사 등 68명을 송치하고 그 1년 후인 1942년 5월 12일에 그 중 35명을 기소, 예심을 청구하고, 8명은 기소 유예, 나머지 25명은 불기소 처분했다. 예심 심리는 3년간이나 계속되어 그 동안 최봉석 목사, 주기철 목사, 최상림 목사, 박관준 장로 등 4명이 순교하여 평양지법 예심종결 결정에서 제외되었고, 이기선 목사 등 21명에 대해서는 1945년 5월 18일에야 예심종결 결정이 났다.
신사참배 거부를 위해 만주로 망명했음에도 일제는 동북삼성(만주)에서도 신사참배가 강요되었고, 신사참배 반대투쟁이 있었다. 1936년 10월부터 만주 하얼빈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던 헌트(韓富善)은 1939년 봉천노회에서 제명된 후 계속 한국인들을 격려하며 항쟁하다가 1941년 10월 하르빈 경찰서에 수감되었고 1942년 6월 강제 추방되었다. 한편 하얼빈 경찰은 헌트를 중심으로 한 이들의 활동에 주목하다가 1940년 3월 19일 약 70여명을 체포, 1942년 2월 3일 재판에 넘겼고, 김윤섭·박의흠·안영애·김신복 등은 수감 중 혹은 풀려난 지 얼마 안되어 순교했다.
국내에서도 본격화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많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투옥되었다. 그들은 치안유지법, 보안법 혹은 불경죄를 적용하여 중형 처벌했다. 주기철을 비롯하여 이영한(李榮漢, 감리), 최태현(崔泰鉉, 안식), 전치규(全穉珪, 침례), 박봉진(朴鳳鎭, 성결), 손갑전(?) 등은 옥사했고, 남은 이들은 8.15해방과 더불어 석방되었다. 오랜 동안 옥에서 시달린 결과 출옥 후에 곧 목숨을 거둔 이도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것이 얼마나 진실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제가 해방 전후에 조선 내의 기독교인들을 살해할 목적으로 명단을 작성하는 단계였는데,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사족으로 일본 측 개신교라고 해서 모두 신사참배에 긍정적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한국과 정반대로 세력이 미약한지라 간과하기 쉬운 부분이기도 한데 도키와 다카오키(常葉隆興)[13]를 필두로 한 몇몇 개혁교회 목회자들은 신사참배를 "우상숭배요 죽음에 이르는 죄악"(偶像礼拝であり、神に対して死に値する罪であった)으로 규정하고 반성한 바가 있다.
1.3. 해방 이후[편집]
해방이 되고 북한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종교가 탄압을 받자, 믿음의 자유를 찾아 평양에서 활동하였던 종교 관련인사들이 대거 월남한 역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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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6년 정부통령 선거 당시 이승만 장로와 이기붕 권사를 지지해 달라고 호소하는 포스터.
남한에는 감리교 신자인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되면서 개신교는 보수적 기치를 내걸고 반공을 외치기 시작했다.[14] 이승만 전 대통령은 은근히 불교를 탄압하였는데, 개신교회에서는 세금을 받지 않았던 것과 달리 사찰에는 세금을 따로 받고 승려들의 환속을 권장했다. 그럼에도 일부 승려들은 당시 이승만에게 아첨데레데레하며 "또 다른 부처님"이라는 망언까지 해댔다(…).[15] 지금도 한기총에선 이승만을 국부로 추앙하며 조선일보나 뉴라이트와 같이 동상을 만들자고 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극과 극은 통한다?
1970년대 근대화와 새마을 운동을 계기로 해서 개신교는 그야말로 폭발적인 성장을 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교회들이 굉장히 근대적인 이미지를 내세워서 개신교 믿으면 서양식으로 잘 살 수 있을 거란 인식이 자리잡기 시작하고[16] 이러한 이미지는 역설적으로 기복신앙적인 면과도 결합하게 되었다. 지금도 평야지대와 도시 중심가들이 대부분 뱀파이어 헌터 십자가로 점거된(…) 이유도 이 때문이다. 또한 전통 문화들 중에서 비합리적, 비생산적, 미신적인 악습이라고 여겨질 만한 문화들을 모조리 타파하고 없애는데도 개신교의 영향이 컸다.
과거 전두환 정권 시절에만 하도 도시산업 선교회 등 친 노동운동적인 교회단체가 존재했으나 정부의 탄압과 친정부적 교파의 압박으로 소멸당하거나 규모가 축소되었다. 다소 예외일 수 있겠으나, 70-80년대 빈민선교활동과 두레 공동체 운동으로 대중에게 알려졌고 10월 유신 반대로 옥고를 치렀다가 뉴라이트 연합 상임 이사가 된 김진홍 목사 같은 경우도 있다. 이렇게 전체적으로 보수화가 많이 진행되어 있는 한국 개신교는 최근 들어 더더욱 신앙적인 보수화가 이루어지고 있고, '신본주의'와 '성경주의' 등의 근본주의를 외치고 있는 교단도 있다.
민주화 운동에 관한 것으로는, 한국의 개신교인들은 학문적으로 민중신학, 해방신학처럼 기독교 신학을 사회적으로 해석하려는 진보적인 신학들을 한국 상황에 맞게 해석하여 군사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민주화 운동을 실천한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종교다원신학을 주장함으로써 종교간의 대화 곧 다른 종교를 개종과 정복의 대상이 아닌 기독교와의 공통점을 찾아 대화하려는 노력을 실천했으며, 기독교 교파에 따른 전통들의 다양성을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기독교의 공동신조에 근거하여 존중하고 일치하려는 에큐메니컬 운동으로 교회분열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였다. 또한 개발독재시기에는 자본가들의 착취와 노동운동 탄압 곧 노동자들의 권리가 자본가에 의해 짓밞혀지는 불의한 현실로 고통받는 노동자들의 편에 서서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려는 산업선교가 실천되기도 하였다. 저명한 개신교 신학자 장공 김재준 목사가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에서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라고 외치며 스스로 분신한 전태일 열사를 추모하는 예배/미사를 집전하자, "이 자리는 전태일의 죽음을 추모하는 자리가 아닌, 기독교인들의 나태를 추모하는 자리다."라고 설교한 일, 도시산업선교회가 들어오면 도산한다는 자본가들의 비방과 형사를 보내 감시하는 경찰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에 의해 도시산업선교회를 결성하여 활동한 일이 그 흔적이다. 그러나 이런 진보적 기독교인 역시 내부적으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며, 그 예로 도시산업선교회는 오늘날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1.4. 21세기[편집]
관련기사 : "기업 제품으로 치면, 개신교는 출시 불가"(…)
"안에서의 불신도 문제지만, 교회 밖에서 한국 개신교의 현주소는 훨씬 참혹했다. 무종교인의 한국 개신교 신뢰 비율은 8.4%, 불신 비율은 56%로 부정적인 평가가 7배에 달했다.(...) 세부 항목에서 개신교인의 신뢰 지수는 4.4%, 목사는 11.5%, 한국 개신교는 18.8%를 기록했다. 이 교수는 한국 개신교가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교인들만의 신앙적 게토로 변질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가톨릭과 불교에 비해서도 한국 개신교는 무종교인들에게 가장 믿을 수 없는 종교였다. 가장 신뢰하는 종교 항목에서 개신교를 꼽은 무종교인들은 8.6%에 불과했다. 반면 가톨릭과 불교는 32.7%, 26.6%의 신뢰를 받았다. 기윤실은 나이별 신뢰도에서 20대에게 최저 수준의 신뢰(12.9%)를 받은 것을 언급하며, 한국 개신교의 미래가 암울하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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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 뉴스링크 출처. 자료제공 기독교윤리실천운동.[17]
주지하듯이 가톨릭이 사회적으로 신뢰받고 존경받는 종교집단으로 빠르게 치고 올라가는 가운데, 불교 역시 완만한 신뢰성장을 보이고 있지만, 개신교의 체감 신뢰도는 급전직하하고 있다. 같은 기독교끼리 왜 이리 극과 극인지(…) 니 죄를 니가 알렸다 이에 대한 원인을 찾기 위해 시행된 통시적 설문조사에서 주목할 만한 시사점이 발견되었다. 과거만 하더라도 개신교의 신뢰회복을 위한 첫째 과제는 봉사 및 구제활동이었으나, 2013년 현재에 이르러서는 윤리와 도덕 실천 운동이 가장 시급한 문제라는 결론이 나온 것. 과거에는 개신교가 사회적으로 뭐 하는 게 있느냐는 공기취급? 반응이었다면 이제는 "너나 잘 하세요" 정도의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해 개신교가 맛 잃은 소금이 되었다는 사회적 컨센서스가 모아진 것. 현대 개신교계 내에서 한국교회의 미래에 대한 장밋빛 전망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특히 젊은 세대에게 있어 개신교의 위상은 시궁창 수준이며, 교회 내부의 어린이 및 청년 교육도 부실한 상태다. 이는 청년들이 교회 밖에서는 교회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아서 교회에 오지 않고, 교회 안에서는 교회가 싫고 잘 몰라서 교회를 떠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교계에서는 다음세대(Next Generation) 문제라 하여 중요한 화두로 여겨지고 있다. 수입이 줄어들고 있자나...!
사실, 불과 2007년만 하더라도 "평양대부흥 100주년" 이니 뭐니 하여 샴페인을 터뜨리고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던 것과 대비하면 하늘과 땅 차이의 분위기 변화. 놀라울 것도 없는 것이 이 때만 하더라도 부흥이 실제로 핵심적 화두였었다.[18] 하지만 이 해 개신교의 외적 성공에 겨워 정신줄을 놓으며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다가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로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았다. 피랍된 개신교인들이 극단적 무장단체인 탈레반에 납치된 상황에서 여론은 피랍된 개신교인들에게 상당히 나쁘게 작용했다. 이는 기존의 무차별적이고 타문화 존중이 없는 국내전도와 해외선교에 대한 염증, 배려심 없고 반성 없는 기존의 한국 개신교에 대한 반발, 그리고 교회 목사들의 각종 불법, 편법적인 행위나 사건, 사고 등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는 온라인에 숨어있던 반기독교 여론이 수면 위로 노출되는 계기가 되었다. 20세기 말부터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이전에는 교회 내부에서 쉬쉬하고 넘어간 개신교의 문제점이 온라인 상으로 노출되기 시작하였고, 온라인은 이미 반기독교, 특히 다른 교파들보다 반개신교 여론이 대세인 상태였다. 성도수 늘리기에만 집중한 성장 위주의 개신교에 대한 염증과 우려는 이미 나타나고 있는 상태였다.
때마침 서점 종교코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기독교 문제 진단서적들이 이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무신론 관련 서적들도 이 무렵에 국내에 번역되어 들어오기 시작한다. 특히 만들어진 신의 경우 15만부나 팔리는 성공을 거두었다. 전통적인 유교의 무신론적 성향과는 달리 9.11 테러 이후 나타난 리처드 도킨스, 샘 해리스, 대니얼 데닛, 크리스토퍼 히친스와 같은 종교에 비판적인 신 무신론(New Atheism)의 영향으로 21세기에는 무신론자도 급증하는 추세이다. 앞서서 설명된 20대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무신론자가 되는 추세는 높은 편이다. 서울대에는 무신론 동아리가 만들어졌다.
2007년 한국 개신교 최악의 흑역사라고 할 수 있는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 등을 겪으면서, 비로소 개신교 내에서 이런 대책없이 교세를 늘리기에만 급급하는 내실없는 '부흥' 이야기가 다소 사그라들고 암담한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위에서 언급한 평양 대부흥 건에 대해서도, "부흥" 자체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면서 이제는 "평양 대각성" 이라고 고쳐 불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이래서 빠른 스포닝 풀 후 저글링이랑 오버로드만 오지게 뽑으면 초반에는 이겨도 후반가면 털리는것이다.
2016년에 급기야는 부천 여중생 살인 사건이 발생해서[19] 개신교의 이미지에 제대로 먹칠을 해버렸다.
2015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2008년 대비 개신교 인구가 소폭 증가하고, 가톨릭과 불교 인구가 다시 감소한 것으로 집계되었다.(출처 기사) 세계금융위기 이후 먹고 살기 힘들어진 상황에서 의지할 대상을 찾다 보니 거리가 가까운 교회를 자주 찾게 된 것이 이유라 볼 수 있다.[20]
그럼에도 연령별로는 젊은층의 이탈이 여전하며, 노년층의 인구가 늘어나 '늙은 교회'가 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도 만만치 않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기존의 큰 교회 건물 짓기 같은 하드웨어 중심에서 사회 봉사활동을 늘리고 유년, 청소년 교육 중심으로 내실을 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기사
2. 특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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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가 본래 종교개혁으로 시작했으나 지금 한국의 개신교는 개혁은 커녕 썩어가는 고인 물로 전락했다는 걸 감안해 보자.[21] 오히려 그들이 비판하던 가톨릭이야말로 가장 깨끗하고 개혁적이라는 평판을 얻고 있는 실정(…) .이 정도면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는 슬로건이 무색할 지경.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대형 교단들이 싸놓은 '것'들 때문에 그나마 건전하고 원래의 개혁적 취지를 제대로 살리는 교회들까지 욕먹는 실정이다. 도대체 왜 개혁적인 교회는 코딱지만한 듣보잡이고 큰교회들은 죄다 부패한건데
2.1. 기복신앙[편집]
국내에서의 개신교는 상대적으로 기복신앙적인 측면이 강한 편이다. 한국인의 정서에 적절히 어필한 이러한 믿음은 개신교가 국내에서 부흥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으나, 기복의 의미가 참된 '영적인 복'과 '현실의 물질적인 복'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게 된 것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기복 때문에 개신교의 다른 가치인 선행이 다소 묻히는 경향이 생겨서 이에 대한 많은 내외부적인 비판이 존재한다. 그래서 교인 수평이동 같은 일도 일어난다.
한국에서의 개신교는 종교 그 자체로서의 의미보다 정치적인 의미 등 기존의 토속신앙 등과도 결부되어 "복을 내려주십시오."라는 식의 기도문을 쉽게 들을 수 있으며, 대부분의 기도의 주체는 '내가' 바라는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되는, 상당히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평범한 여느 목회자보다는 특별히 방언기도나 40일 금식 등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목회자를 선호하는 현상은 이러한 무속적 정서에 기인한다. 그래서 한국 개신교에서는 소위 용하다는 목사를 찾아다니는 현상이 있다. 한국 개신교 안에 카리스마적이고 다혈질적이며 절대권위를 가지고 독재를 행하는 목회자를 따르는 교인들이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것은 오히려 지금의 개신교의 정립에 많은 영향을 주고 또한 현재 개신교가 가장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국가 중 하나인 미국[22]의 경우와 대조적으로, 이쪽은 선교활동에는 힘쓰나 전도활동은 그 규모가 매우 낮고, 또한 사생활 침해가 되지 않는 선이며, 나, 혹은 나와 관계된 사람에게 기도하는 것보다는 지적 구원자인 하나님의 존재나 그 의미를 깨닫는 활동에 힘을 쓰고 있다. 물론 그 교리 자체는 흡사하기 때문에, 생판 모르는 사람이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라는 식의 이야기는 미국에서도 들을 수 있다.
사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한국 개신교 형성 초기에 영향을 끼친 평양지방의 분위기와 결부지어서 생각해야 한다. 초기 개신교를 받아들인 길선주 장로를 비롯한 서북(평양) 지역 신도들의 사상적 기반이 기복 사상과 도교적 영향력을 받은 것이라는 것.[23] 여기서 파생된 것이 통성기도, 새벽기도, 기복신앙이며 이들이 한국전쟁 당시 월남하여 개신교 주류의 자리로 들어서면서 한국 개신교의 특성으로 나타나게 된 것[24]
2.2. 가톨릭과의 관계[편집]
한국 개신교의 반가톨릭 역사는,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이 조선 땅을 밟기 시작한 188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근본주의 신학을 등에 업은 선교사들은 가톨릭과의 차별성을 강조하며 선교 활동을 펼쳤다. 국가 권력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개신교를 한국 사회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미국 종교로 소개했다. 종교와 정치는 분리돼야 한다고 강조하는 한편, 개신교보다 100년 일찍 선교해 온 가톨릭은 제국주의 종교로 부각했다.
기본적으로 미국 장로교 출신 선교사들에게는 가톨릭에 대한 적대감이 깔려 있었다. 19세기 중후반 미국 종교계는, 유럽에서 대거 유입되는 가톨릭계 이민자들로 인해 적개심을 가지게 됐다.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김진호 실장은 "종교개혁을 통해 개신교가 출발했기 때문에 개신교 선교사들이 가톨릭을 바라보는 시선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고 분석한다. 특히 다른 교단들과 달리 근본주의 색채가 강한 장로교 출신 선교사들이 한반도에 유입되면서, 한국 개신교에 반가톨릭 현상이 자리한 것으로 봤다.
미국 북장로회 출신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는, 1892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제5차 장로교 총공의회에서 가톨릭이 선교지의 왕실과 친밀을 도모하고, 권력층이나 세도층과 결탁해 정사나 조정의 문제에 수시로 개입한다고 비판했다. 선교 초기, 언더우드는 한국어에 능통한 신부들과 높은 인쇄술, 부지 매입에 적극적인 가톨릭을 언급하며 가톨릭이 한국을 손에 넣으려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는 "개신교인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훗날 불신자가 아니라 가톨릭교인을 회심하게 해야 하는 상황에 이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에서 개신교 선교사들이 잇달아 방한하자 가톨릭은 교세 확장을 우려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7대 교구장인 프랑스인 블랑 백 요한 주교는 "오류를 설교하는 열교[25] 목사들이 활보하고 있다"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파리 외방전교회에 보내 지원을 요청했다.
교리 논쟁도 일어났다. 1907년 가톨릭이 개신교 비판을 위한 호교론 책을 펴내자, 이듬해 감리회 신학자 최병헌이 번역한 <예수텬쥬량교변론>(정동예수교회)에는 교황의 무류성, 고해성사, 성모 마리아의 전구, 성직자/수도자의 독신 생활 등을 언급하면서 가톨릭이 성경의 내용을 왜곡하거나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개신교 선교 초기 두 기독교 교파가 항상 갈등 양상만을 보였던 것은 아니었다. 개신교는 한국 선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100여 년 앞서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벌여 왔던 가톨릭의 역사적 경험을 자료삼아 나름의 한국 선교전략을 수립했다. 개신교가 '간접 선교', 즉 학교나 병원을 중심으로 간접적인 교육선교와 의료선교를 우선적으로 펼치는 선교 전략을 채택했던 것도 가톨릭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적극적인 반추(反芻)를 통한 것이었다.
해방 이후 개신교 지도자들은 가톨릭에 대한 적대감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야당 부통령 후보로 장면이 출마했는데, 여당은 장면이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를 들며 공세를 퍼부었다. 당시 자유당 선거대책위원회 사무장이었던 박영출 목사는 선거 연설에서 "가톨릭 교인인 민주당 부통령 입후보 장면 박사가 당선되는 날에는 우리나라를 바티칸의 교황청에 팔아먹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승만 정권의 공보실장을 역임한 전성천 목사는 1956년 4월 <한국기독시보>에 가톨릭 신자가 집권할 경우 한국이 교황의 내정 간섭을 받게 된다면서 개신교 신자들은 장면에게 투표하지 말라고 썼다.
불신과 대립으로 얼룩졌던 개신교와 가톨릭의 역사는 1960년대 이후 교세 확장에 치중하면서 직접적인 충돌에서 벗어나게 된다. 가톨릭은 1964년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개신교단들을 "갈라진 형제"라고 칭하며,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이후 한국 가톨릭은 1966년 '일치 위원회'를 발족하였다. 같은 해에 개신교 쪽에서도 아카데미 하우스 준공을 계기로 '기독교와 다른 종교 간의 대화' 모임을 가지면서 가톨릭 신부들과 신자들을 초청하였다. 이와 같은 대화의 노력은 구체적인 '일치운동'으로 귀결되었다. 이후 한국 개신교와 가톨릭은 1968년 성서공동번역위원회를 조직하고 1977년 공동번역성서를 출간하기도 했다.[26] 그리고 '교회일치기도주간'을 제정하여 번갈아 가면서 일치기도운동을 벌였다.
오늘날 한국 가톨릭 신자들과 개신교인들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2가지 인식이 공존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구성하는 두 전통의 형제애가 강조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서로 상대방을 폄하(貶下)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이단시(異端視)하기까지 하는 흐름이 엄존하고 있는 것이다. 교단별로 살펴보자면, 성공회와 한국기독교장로회, 감리교는 전자 입장에 있고, 성 비오 10세회같은 천주교 내 극우파, 예장합동, 예장고신 및 기타 극우성향의 군소 장로교 보수 교단, 침례교, 순복음은 후자 입장에, 천주교 내 에큐메니컬파[27], 예장통합은 중간 입장에 있다.
1982년에 실시된 <한국교회 성장과 신앙양태에 관한 조사 연구>는 개신교인들의 각 교단 및 타종교에 대한 ‘친소도’(RDI=the relative degree of intimacy)를 조사한 바 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개신교인들은 가톨릭교회에 대해 33.8%가 친근감을 나타낸 반면에 45.5%가 경원하는 태도를 보여서 가톨릭과 개신교의 갈등이 여전히 상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35년 전 자료이다. 가톨릭에 거부감을 가진 개신교인들 중에도 이단 종파들이나 불교나 이슬람교 등 타 종교보다 더 거부감을 갖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이단 종파나 타 종교보다는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으니 케바케다.
2.3. 정치 참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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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한국의 개신교는 기본적으로 정치와 깊게 관여되어 있다. 교회에는 항상 교인이 모이고, 같은 종교라는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에 인맥화하기 매우 쉽기 때문이다. 정치색은 대체로 보수적이며 최근에 들어서는 미국식 기독교 우파를 그대로 벤치마킹 하고 있다.
전두환의 쿠데타 당시 여러 교회의 목사들이 참여한 기도회가 TV로 생중계되는 어이없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으며, 오히려 불교계에서 10.27 법난이 일어나는 등 저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전두환의 독재에 반대하여 박해받은 교회도 있었다.) 신 아래 만민이 평등하다는 식의 좌익적 개신교계를 찍어누르기 위해 박정희 정권이 최태민을 이용해 구국봉사선교단을 만들어 정권유지에 써먹으며 국가적으로 지원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물론 광복후 서북부 개신교계 단체의 난동이나 그걸 이용한 이승만의 영향도 적지 않았지만...
또한 선거철마다 특정 대형 교회의 특정 정치 세력 지지가 문제가 되곤 하는데, 주로 보수적 성향의 후보를 지지하는 발언들이 나온다. 이러한 특정 교회의 특정 세력 지지 발언의 영향력을 통계학적으로 검토해보면, 현재까지의 선거에서 단 한 번도 유의미한 영향력을 미친 적이 없다. 하지만 의미가 없다 하더라도 정교분리를 초월하려는 일부 교회의 위와 같은 행위는 부적절하므로 지양되어야 한다. 이는 다른 종교계에서도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내용이나, 다만 개신교 쪽에서 이러한 문제들이 좀 더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으로 보아 개신교에서 이를 일부 이단의 문제로만 치부하지 않고 전체적인 성찰이 필요할 것으로 여겨진다.
역대 대통령 중에는 이명박 전 대통령, 김영삼 전 대통령, 윤보선 전 대통령,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종교로, 이명박, 김영삼, 윤보선은 장로교 신자였으며 이 중 이명박과 김영삼은 장로였다. 이승만은 감리교 신자였다. 김대중 대통령의 경우 가톨릭이지만 영부인 이희호 여사는 개신교. 특히 최근들어 이승만 대통령을 건국대통령으로 평가하면서 숭앙하는 작업에 보수 개신교 세력이 상당히 연관되어 있다. 뉴스앤조이 기사
반면에 민주화 운동을 지원하며 보수 진영 정권들에 저항하고 비판하거나 진보적 성향을 띄는 교회 또한 상당수 공존한다. 대표적인 진보 진영 교단으로는 교단과 신학의 보수화에 반발하여 떨어져 나온 김재준 목사에 의해 설립된 한국기독교장로회(한신대학교의 재단)[28]와, 신학적으로 진보적인 학풍을 가지고 있는 대한성공회가 있다. 이쪽 계열에서 사회운동을 한 사람들로 문익환 목사와 정계 입문 이전의 손학규 전 경기도 지사 등이 있다. 대체적으로 신학적으로 진보적인 후기 자유주의[29] 및 신정통주의 계열의 교단은 정치적으로도 진보적인 경향이 있으나 신학적으로 보수인 경우에는 정치적 입장이 케이스 바이 케이스다.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노선을 따르는 경우, 정치 스펙트럼은 문자 그대로 걷잡을 수가 없다. 또한 그 반대도 될 수 있기에, 일반화해서는 안된다.[30]
현재에도 민중신학의 영향을 받은 진보성향의 개신교 교회와 단체들이 사회현장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한국기독교장로회와 대한성공회는 70~80년대 반독재 민주화운동, 인권운동, 노동운동에 앞장섰으며, 도시산업선교회, 크리스챤 아카데미 등의 사건으로 군사정권의 심한 탄압을 받아왔다.
촛불집회나 여러 시위와 농성현장에 가보면 전국 목회자 정의평화 협의회, 예수살기 공동체, 촛불을 드는 그리스도인, 반전평화 기독인 연대 등 여러 개신교 단체들이 선두에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진보성향의 개신교를 대변하는 언론으로 에큐메니안이 있다. http://www.ecumenian.com/
다만 어느 정도 높은 직급을 가지지 않은 신자들은 보수적이지 않은 사람들도 많은 편인데, 한국에서는 어느 종교이든 간에 정치 성향에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지역별 문단이나 기불릭, 김대중교(…) 참고.
3. 교세[편집]
개신교는 한국에서는 급속도로 성장하여 훨씬 먼저 들어온 가톨릭을 뛰어넘는 신자 수를 가지게 되었다.
이 지도는 각국의 개신교 신자 비율을 나타낸 것인데 한국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색이 칠해져 있다.
참고로 2014년 12월 11일 JTBC 뉴스룸의 앵커 브리핑에서 나온 말인데 한국의 개신교 교회 숫자는 무려 78,000개라고 한다. 편의점은 25,000개. 그 많다는 편의점보다 3배는 더 많다. 참고로 인구 95%가 이슬람인 터키가 인구 7,500만이고 여기서 이슬람 성원인 모스크 수가 63,000여개인 걸 생각하면 한국에 개신교 예배당이 얼마나 많은지 실감할 수 있다.
사회지도층에 속하는 정관계에서는 개신교 신자 비율이 한국 전체 인구 내 개신교 신자 비율보다 높은 편이다. 대한민국 전체 국민 가운데 개신교 신자 비율이 17% 정도 되는데, 국회의원 가운데 개신교 신자는 18대 국회에서는 120여 명, 19대 국회에서는 107명으로 35.7%를 차지하였으며, 20대 국회 당선자는 75명(25%)이다. 20대 국회의원 당선자 중 기독교인은 몇 명?
한국의 개신교의 교단들 중에 장로교가 가장 교세가 강한데, 장로교 선교사들이 근대 시기의 한국으로 많이 유입하여 선교한 것도 있지만, 평신도 입장에서 장로라는 감투가 있는 것도 장로교의 교세 성장에 기여했으리라는 추측도 있다. 여기에 더해 장로교단의 분열도 장로교의 교세 성장에 크게 기여했는데, 분열되어 나온 교단들이 제각기 세를 불리고자 선교, 교회 개척을 공격적으로 추진한 것도 한몫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목회자로서 자질이 의심스러운 먹사들도 양산되었지만.)[31] 본래 장로가 없는 감리교 등에서도 장로교의 영향을 받아 장로라는 직책을 만들었을 정도. 반면 유럽에서 많은 성공회와 루터교는 보기 어렵다. 구한말 부터 선교사들은 영미의 장로회와 감리회 선교사들이 많았던 영향이고 루터회는 1950년대에야 한국에 본격적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럽 대륙 개신교와 교류할 때는 주로 네덜란드와 교류하는 경우가 많다.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 개신교 인구가 처음으로 불교 인구를 앞질렀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단 종파나 가나안 신도의 숫자도 포함되어 있어 보이는 그대로 판단하기엔 무리가 있다.
3.1. 지역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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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서고동저 그러니까 서해안으로 갈수록 많아지며, 반대로 동해안으로 갈수록 줄어든다.[32][33]
위의 대한민국 각 지역별 종교인 통계에 의하면 호남지역에서 가장 강세다. 개신교는 호남과 수도권에서 강세를 보였고,(전북 26.9퍼센트, 서울 24.2퍼센트, 전남 23.2퍼센트, 인천 23.1퍼센트, 경기 23.0퍼센트) 영남, 충북에서 약세였다.(경남 10.5퍼센트, 경북 13.3퍼센트, 부산 12.1퍼센트, 대구 12.0퍼센트, 울산 10.9퍼센트, 충북 15.5퍼센트) 개신교의 지역별 신자분포 차이는 일제 강점기 때의 선교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출처
물론 신자 수로 따지면 서울, 수도권 지역의 개신교 신자 수가 훨씬 많다.[34] 서울의 경우 대부분의 지역에서 개신교 신도가 가장 많다. 그 중에서도 신도 수 비율이 많은 곳은 강남3구로,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에서 각각 25~30%대를 기록하고 있다.[35] 그 외에도 강동구, 용산구와 서울의 영등포구, 양천구, 종로구와 중구, 성동구, 동대문구, 성북구, 노원구, 서대문구, 마포구, 강서구, 도봉구, 강북구와 은평구, 중랑구와 구로구, 동작구, 관악구, 금천구에도 개신교인이 꽤 많다. 인천의 경우도 중구, 동구, 남구, 연수구 등 부촌과 구도심 등은 물론, 서구와 남동구, 부평구와 계양구 등의 신도심과 옹진군과 강화군 등의 전방에도 개신교인들이 꽤 많다. 수도권 일대 도시 지역에서는 과천시(29.86%), 의왕시(26.59%), 용인시 수지구(27.82%), 고양시 일산서구(25.16%), 성남시 분당구(25.06%) 등이 개신교인 비율이 25%를 넘는 지역으로 집계됐다. 또 광명시, 고양시 일산동구, 고양시 덕양구, 용인시 처인구, 용인시 기흥구, 수원시 장안구, 수원시 권선구, 수원시 팔달구, 수원시 영통구, 안성시, 이천시, 평택시, 양주시, 동두천시, 의정부시, 성남시 중원구, 성남시 수정구, 광주시, 하남시, 파주시, 화성시, 남양주시, 구리시, 안산시 단원구, 안산시 상록구, 부천시 소사구, 부천시 원미구, 부천시 오정구, 포천시, 연천군, 가평군, 양평군, 여주시, 오산시, 군포시, 시흥시 등도 기독교 비율이 높다. 반대로 (울릉군을 제외한) 영남 지방에선 개신교도의 비율이 매우 낮은데, 이는 영남 지방이 멀리는 신라의 중심지였던 오래 전부터 불교의 영향력이 컸고, 구한말-일제시대에는유림의 세가 상당했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포교가 원활하지 않았다. 심지어 대도시인 대구, 부산, 울산도 기독교가 낮다. 또한 제주특별자치도 역시 개신교 신자의 비율이 매우 낮다. 이유는 육지 문물에 대한 배타성과 해방 직후 서북청년단이 제주도에서 저지른 범죄 때문.[36] 당시 서북청년단의 주축이 영락교회 출신자들이었다. 다만 충청권은 조선 유력 사대부들이 많았던 지역임에도 대전광역시, 충청남도는 개신교 세가 약하지는 않다. 수도권과 비슷한 정도. 이는 충북 지역은 전통적 사대부들이 많았던 지역이지만 대전과 천안 지역은 근대에 들어서 도시가 급성장하여 외지인들이 많이 유입된 지역이며, 충남의 다른 지역은 본래 천주교인들이 도피지로 삼았던 곳임을 감안해야 한다. 또 아산, 공주, 논산, 서산, 당진, 보령, 태안, 홍성, 예산, 청양, 서천, 금산, 계룡 등에도 기독교 비율이 높으며, 대전에서도 동구, 중구, 대덕구는 물론, 서구, 유성구 등의 신도심도 기독교 비율이 높다. 세종시도 마찬가지로 기독교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그리고 강원도에서는 전방의 여러 군들(화천군, 인제군, 철원군, 양구군, 고성군 등)이 신자 비율이 높다. 아무래도 군에서 진급을 하려면 교회에 다녀야 한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에 그런 듯. 또한 외지인 비율이 높은 춘천과 원주도 기독교인 비율이 높다. 또 속초, 강릉, 태백, 동해, 정선, 영월, 삼척, 양양 등의 영동지방도 기독교인 비율이 높다. 충청북도에서도 증평, 진천, 음성과 청주에서 기독교인 비율이 높다. 충주시도 마찬가지로 기독교인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괴산군도 상당히 기독교 비율이 좀 높다. 그리고 옥천군, 영동군, 보은군, 제천시도 점차 기독교가 선방을 하고 있다.
물론 경상도에서는 교세가 낮지만, 최근 선방을 하고 있는 지역이 점차 많아지고 있는데 대구광역시의 동구, 서구, 남구, 북구, 중구 등의 구도심, 수성구, 달서구 등의 부촌 등과 부산광역시의 중구, 서구, 동구, 영도구의 구도심, 동래구, 수영구, 금정구의 인구번화가, 연제구, 부산진구, 남구, 해운대구 등의 번화가와 부촌, 북구, 사상구, 사하구, 강서구 등의 낙동강벨트 등이 개신교가 선방하는 지역으로 뽑히며, 울산광역시의 중구, 남구, 울주군과 동구, 북구, 그리고 경상북도의 구미시, 포항시, 경주시, 김천시, 영주시, 칠곡군 등은 선방을 하고 있는 지역이며 경상남도의 김해시, 거제시, 양산시, 진주시, 통영시, 창원시 성산구, 창원시 의창구, 창원시 진해구, 창원시 마산회원구, 창원시 마산합포구 등도 나름 선방을 하고 있다.
사실상 일부 산간벽지를 제외하면 전국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 셈이다.
2005년에 크게 감소했다가 그 이후로 다시 교세를 회복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대한민국 개신교는 1970년대 이래로 메이저 지위를 놓친 적이 없었다. 대체로 2005년에 큰폭으로 감소하거나 2015년 다시 증가했다고 보기보단 통계 조사시 질문 순서나 용어의 차이로 2005년엔 과소 조사되고[37], 2015년엔 개신교회에서 이탈한 신흥종교가 포함된 걸로 본다. 대체로 타 기관이나 교계 조사로는 05년 감소폭이 이상변동이었고 18~19%로 조사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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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도 전국에서 개신교 신자의 비율이 가장 높은 시/군으로 인천광역시 강화군[38], 옹진군, 전라남도 신안군, 경상북도 울릉군[39] 등 주로 서해안 쪽 섬 지역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데, 이렇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엉뚱하게도 이들 지역에서는 육지처럼 교회가 난립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육지에서 경쟁적으로 교회를 개척하는 개신교 교단들이지만, 섬 지역에서는 여건 상 각 교단별로 선교 구역을 분담하는 경우가 많아 대개 섬 하나에 교회가 하나 꼴로 존재하기 때문에 신자 수 확보를 위한 교회, 교단 간 경쟁이 육지에 비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다.
3.2. 교단별[편집]
2002년
2008년
2011년
교단
신도수
교단
신도수
교단
신도수
1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합동)
2,300,327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합동)
2,896,967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합동)
2,953,116
2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통합)
2,283,107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통합)
2,686,812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통합)
2,852,311
3
기독교대한감리회총회
1,394,515
기독교대한하나님의 성회
1,800,000
제칠안식일예수재림교회
2,201,868
4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개혁)
1,169,572
기독교대한감리회총회
1,557,509
기독교대한하나님의 성회
1,800,000
5
기독교대한하나님의 성회
1,106,712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합동정통)
866,599
기독교대한감리회총회
1,586,063
6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40]
960,459
기독교한국침례회
801,437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여의도순복음)총회
1,016,036
7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합동정통)
823,469
기독교대한성결교회총회
564,260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백석)[41]
870,583
8
기독교한국침례회
692,767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고신)
474,047
기독교대한성결교회총회
566,500
9
기독교대한성결교회총회
503,991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대신)
452,314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합동개혁)[42]
551,857
10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고신)
427,832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337,570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고신)
464,799
출처 : 이혜정, 통계를 통해서 본 종교인구와 개신교단의 변화(2015) - 문화관광부 한국의 종교 현황(2002, 2008, 2011)
파일:external/www.newsnjoy.or.kr/201196_51314_4837.png
한국교회 주요 6개 교단 교세 통계-뉴스앤조이
위의 표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한국 개신교의 대다수는 무지막지하게 분열된 예수교장로회 교단이다. 그중에서도 합동과 통합측의 교세가 가장 크다[43]. 그 외에도 감리회, 오순절교회(하나님의 성회), 침례회, 성결교회 등의 교세가 크다. 공통적으로 보수적이고 복음주의 및 근본주의적 교리가 강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이유로는 칼뱅주의 특유의 확실하고 깔끔한 교리, 심플한 인테리어와 예배 형식이 사상적 일관성을 중시하는 한국인의 정서와 잘 맞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뿌리는 다르지만 한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장로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대한감리회가 장로교 다음으로 큰 교파라는 점, 장로교 중에 칼뱅주의의 색채가 제일 덜한 기독교장로회의 교세가 작다는 점 등이 이를 뒷받침해준다.[44]
반면 진보성향 및 사회구원 성향인 기독교장로회, 성공회, 루터교회, 구세군, 기독교대한복음교회 등은 예나 지금이나 최하위권에서 맴도는 수준. 이는 상기했듯 한국인의 전반적 성향과 맞지 않아서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45] 이들 교단이 다른 교단에 비해 물량 위주의 개별 전도보다는 사회 선교에 주력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46] 특히 루터교회의 경우 구한말~일제강점기에 전파된 다른 교단보다 늦은 6.25 이후 미국을 통해 전파되었기에 교세나 인지도를 키우기에 시간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탓도 있다.그래도 루터교회가 감리교와 같은 현지화 과정을 거쳤다면 좀 더 교세가 늘 수 있었다는 점에서 좀 아쉽긴 하다.
또 주목해 볼 만한 점은, 십여 년간 급격한 교세 확장으로 오순절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여의도 순복음교회와, 마찬가지로 거대 교단이 되었지만 한국에서만 이단 취급 받고 있는 재림교회[47]다.
4. 선교[편집]
4.1. 국내[편집]
극성 예수쟁이를 위시하여 보편적 사회가치에 부합하지 않는 선교 활동이 문제시된다. 이들 예수쟁이와 일반 개신교인들의 포교활동 간의 범위가 모호해 전반적인 개신교의 선교활동이 한꺼번에 비판을 받는 경우도 있다. 태도를 막론하고 전도 자체가 타인이 종교를 믿지 않을 권리를 침해할 요소가 크기 때문이기도 하다.
국내 개신교의 역사적 특성상 종파가 매우 다양하고, 각 종파 간의 차이가 성경 해석부터 시작하여, 정치적 성향에 이르기까지 차이가 극과 극에 이르는 경우도 많으므로 개신교는 어떻다고 단정하기는 곤란한 바가 있다.
이러한 선교 활동이 비기독교인들이 수용 가능한 선에서 건전한 자원 봉사활동 등으로 이루어지는 경우에는 사회에서 긍정적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사회의 전통적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 지나치게 배타적인 선교 활동의 경우 사회적인 갈등을 야기하기도 한다. 이러한 병크가 곪고 곪아 터지는 한 예가 바로 땅밟기. 해당 문서 참조.
4.2. 국외[편집]
한국에서 신자가 많이 늘고 교세가 많이 확산되었기에, 짧은 역사도 불구하고 국외로의 활발한 선교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미국 다음으로 세계 2위였다.[48] 조용기(…)의 자랑에 의하면 무려 190개 나라에 3만 명이 있다 카더라. (출처는 월간 중앙에 조용기가 쓴 광고(…))
국외 선교활동에 대한 현지에서의 평가는 일반적으로 좋은 편이다. 이는 해외에서의 선교활동이 봉사라는 형태로 시작하기 때문으로서, 구호품 전달, 학교나 병원 설립 등 현지인들이 실질적으로 필요로 하는 부분에 도움을 많이 주고 있어 이에 대한 현지인들의 평가가 높다. 또한 이러한 선교와 봉사에 태권도, 한국 요리, 국악 등 한국 문화 전파도 함께 이루어져 외국에 한국을 알리는 데에도 기여하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봉사와 개신교에 대한 호감은 전혀 다르다. 봉사라는 형태의 재화와 서비스만 수용하고서 개신교 신앙 자체는 거부해 버리는 경우먹튀가 흔하다고. 이로 인해 물정 모르고 들어온 선교사 중에는 충격을 먹고 떠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안습.
국외에서의 개신교 선교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이 다음 단계이다. 일단 이런 선교단체에서의 봉사라는것이 기본적으로는 선교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선교가 근본적인 목적이기 때문에 선교 없이는 봉사활동도 없다는 소리. 때문에 봉사를 통한 감화라는 장기적인 계획 없이 단기간에 성과를 거두려고 하거나, 현지의 문화와 종교를 무시하고 지나치게 배타적인 포교활동을 하여 봉사와의 밸런스를 맞추지 못하게 될 경우 큰 문제가 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7년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49]
문제를 만드는 것은 일부만의 문제인가? 현지인과 문제없이 지내며 조용히 헌신하는 선교사들이 다수라고 주장되며 인터넷에서 까임의 대상으로서 언급될 때처럼 절대 다수가 아닌 것은 확실하지만, 이런 선교사들조차 눈쌀을 찌푸리게 만드는 조급증과 우월감, 배타성에서 비롯된 온갖 문제들이 지속적으로, 꽤 많은 숫자로 발생하고 있다. 사건사고 면은 선행보다 기억에 강하게 남기 마련이다.
한편, 이러한 국내외에서의 선교 및 포교 목적의 봉사 활동을 국내 개신교인들에 대한 과시, 보여주기라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봉사 활동을 위해서는 돈과 물자와 사람이 필요한 법이니 당연히 홍보야 필요하기 마련이지만, 이런 비판은 봉사에 대한 홍보가 실제보다 지나치게 부풀려지는 경우가 왕왕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런 검증되지 않은 사실들은 인터넷과 거리의 전단물 등을 통해 무차별로 확산되어 문제를 부풀린다. 국외에서 선교과정에서 일어난 수두룩한 사건들이 이를 증명하며, 이에 관련된 책으로는 〈개독교를 위한 변명〉,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 등의 목사나 선교사에 의해 쓰여진 내부 증언담이 있다.
교단들이 이런 잘못된 행동들에 대해 제대로 비판하지 않는 것 또한 비난받아야 할 것이다. 어디까지나 일부만 그렇고 대부분은 좋은 소리 듣는다면 좋은 쪽만 홍보하고 선전하며 잘못은 모른 척 하는 문제를 넘기면 안 된다.
대한민국 개신교는 더 이상 국내에서 교세 확장 등을 기대할 수 없다고 한다. 이미 교세가 늘어날 만큼 늘어났으며, 교회는 너무 많아서 경쟁이 심하다. 출생률 감소 추세와 맞물려서 교세의 성장이 둔화되었거나 마이너스로 접어들었다는 분석. 이것이 자연스럽게 다른 나라로 눈을 돌리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선교를 무조건 반대하는 시각도 옳지 않다. 어찌 보면 종교 집단의 당연한 활동이며, 불교나 천주교나 정교회나 원불교도 선교하고 봉사단체도 얼마든지 보낸다. 그런데 문제는 외국에 선교 목적으로 나가는 사람 중에 한국에선 수십여 년 사이 50년대 대비 40년 만에 10배 이상 급속도로 교인이 증가하는 유례 없는 성장세를 거두었으니 국외에서도 이와 같은 성공이 반복될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미 각국에는 그 나라의 종교가 뿌리내리고 있으며,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이슬람 국가에서 그렇게 했다간? 코로 할랄푸드를 먹는다. 코랄푸드
순례 목적으로 기독교 성지를 방문하는 것에도 문제가 있다.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기독교의 성지들은 대부분 이스라엘이나 이슬람 국가들의 영토다. 터키에선 중요한 성지들을 경비원들을 통해서 지켜준다곤 하지만, 터키의 동부는 보수적인 이슬람 동네이다. 다른 곳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개신교 찬송가를 부르면서 울부짖으면서 기도어그로하는 것은 주위의 이목을 끄는 일이며, 결코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 한국어니까 모를 것 같은가? 손에 들고 있는 것과 분위기만 봐도 뻔하게 알 수 있는 일이다. 하물며 거기 가서 땅밟기를 해대니…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똑같이 하려나 극과 극은 통하는 법
게다가 왠만한 성지들은 전부 가톨릭 아니면 정교회 등 개신교 아닌 타 기독교 종파의 소속이다. 엄연히 가톨릭인 가르멜 수녀회가 운영하는 주님의 기도 성당에는, 기도문을 수정해야 한다는 어느 한국인 개신교 목사의 주장에 따라 1960년대부터 40여 년 넘게 자리하며 순례자들을 맞이해온 가톨릭 주님의 기도문이 갑자기 철거되고 개신교식 주기도문이 설치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국어 주님의 기도문을 봉헌한 천주교 부산교구는 이 소식을 접하고 곧바로 원상 복구를 바라는 공문을 예루살렘 총대주교와 가르멜 수도회 총장, 주님의 기도 성당을 관할하는 이스라엘 주재 프랑스 대사관과 해당 가르멜 수녀원 등에 보냈다. 이에 예루살렘 총대주교는 2월 9일자로 원래대로 복구할 것이라는 답변을 보내왔고, 한국어 가톨릭 주님의 기도가 다시 설치되었다. 문제는 개신교 주기도문이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어로 된 주님의 기도가 2개나 되는 웃지 못할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예루살렘이나 시나이 산과 같은 다종교의 공동 성지에서 새해 첫날 찬송가 불러대며 울부짖는 건 민폐의 결정판. 개신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넘어 국가 이미지 손실이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종교의 자유는 있으나,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하면 안된다는 것. 예를 들어 지하철 포교는 법에 어긋나므로 하면 안되는 것이다. 헌데 지겹게 하고 법적으로 어긋난다고 해도 종교 탄압이라며 발악하잖아
그나마 21세기 들어서 개신교 신자가 늘어난 나라가 중국이다. 이미 중국 내 개신교도 인구는 일각에서는 한국 인구를 능가했다고도 전해진다.[50] 물론 중국 정부의 탄압은 나날이 거세지면서 세금을 늘린다든지 국외 출국을 금하고 목사나 교회에 대하여 세금 탈세라든지 여러가지로 딴지를 걸거나 교회를 폐쇄하기도 한다. 어쨌든 이를 두고 국내 개신교 선교층의 반응은 여러가지인데 우선은 같은 개신교로서 환영하는 분위기. 반대로 중국에서도 국외 선교를 하기에 한국 교회의 국외 선교에 라이벌이 된다고 반발하는 반응도 있다.
2016년 터키 동부에서 또 한국인인 개신교 선교단이 논란이 되고 있다… 결국 현지 터키인들의 욕설과 빗자루로 처맞고 모욕당하는게 당당하게 유튜브로 올라와있다.#
5. 봉사 활동[편집]
한국 개신교는 국내외 봉사 활동에 절대적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개중에는 포교를 목적으로 하는 봉사 활동은 물론이거니와, 포교를 표면적으로 하지 않으면서 후원하는 봉사 활동도 많다. 봉사활동이라고 보긴 어렵겠지만 지역사회 기여 같은 것도 점차 제도화되어 가는 추세라, 신도시에 지어지는 신설 교회들 중 적지 않은 수는 지역 사회를 위해 족구장이나 풋살장 같은 레저/스포츠 센터, 헬스장, 대강당, 공연장 등을 함께 무료로 운영하는 경우도 많다.
한편 포교를 목적으로 하는 봉사 활동의 경우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을 제시하는 이들도 있다. 참고로 모든 종교활동의 대외 활동의 궁극적 목표는 포교다.
6. 교포 사회에서의 역할[편집]
개신교가 강세인 영미문화권 국가[51]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는 물론이거니와 가톨릭이나 정교회가 강세인 동유럽/남유럽/중남미, 기독교가 거의 없는 일본/중동[52] 등 대부분의 이민지에서 한인교회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53]
국외 각지의 교포 사회에서는 교회 본연의 역할에 더하여 교인들 간의 커뮤니티 역할도 한다. 특히 미국의 경우 대부분의 한인 교포들이 개신교 신자들이다. 새로 이민을 오게 되는 사람들이나 유학생들이 현지에 적응하는 데 실질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고 있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교회를 나가지 않던 사람도 해외에서 교회를 다니는 경우가 매우 많다. 다만 이걸 긍정적으로만 평가할 수 없는 것이 같은 교회 다니는 교우를 돕는다는 마음가짐이 아니라 선임자의 이점을 이용해서 신임자를 소위 '낚시질'하려는 목적으로 도움을 제공하는 경우가 결코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일례로 2000년 전후해서 도쿄에서는 한인교회 소속의 재일교포들이 집 구하기 어려워하는[54] 신참 유학생들 상대로 방을 빌려준다며 낚시를 한 후, 입주할 때 다 되어서 별안간 '교인 아닌 사람에겐 못 빌려준다'며 교회에 나오기를 강요하는 사태가 빈발했던 적이 있었다.
이민 사회에서 교회가 비대하게 커지면서, 비신자들에 대한 배타성이나 한인교회 간의 다툼 또는 교회 내부에서의 힘싸움 등과 같은 부작용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이게 가볍게 볼 게 아닌 것이, LA 폭동 당시 한인교회는 몇몇 교회끼리 나뉘어져 서로 한인 교포 피해에 대해 나몰라라 하는 일까지 벌어졌고 이걸 종교 드립으로 선전하는 일도 벌어졌다.
7. 교육기관[편집]
개신교 계열의 교육기관. 한국에서는 가톨릭, 개신교, 불교, 원불교 등 기타 여러 종교에서 미션스쿨을 운영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개신교 미션스쿨이 참 많다. 아시는 대로 계속 추가 바람.
7.1. 초등학교[편집]
계성초등학교: 대구광역시에 있는 학교. 같은 재단인 계성중학교, 계성고등학교도 있다.[55]
대광초등학교
명지초등학교
서울삼육초등학교
세종초등학교
숭의초등학교
예일초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사범대학부속초등학교
중앙기독초등학교
태강삼육초등학교
한신초등학교
화랑초등학교
7.2. 중학교[편집]
경신중학교
경화여자중학교
계성중학교
계원예술학교
광성중학교
대광중학교
대전대신중학교
대전삼육중학교
동해삼육중학교
동화중학교
등촌중학교
매향중학교
명지중학교
문영여자중학교
배재중학교
배화여자중학교
브니엘예술중학교
삼성중학교
서울삼육중학교
서해삼육중학교
송림중학교
숭실중학교
숭의여자중학교
신성중학교
양곡중학교
염광중학교
영남삼육중학교
영락중학교
예원학교
예일여자중학교
원주삼육중학교
이사벨중학교
이화여자대학교사범대학부속이화금란중학교
이화여자대학교병설영란여자중학교
정의여자중학교
중앙기독중학교
팔렬중학교
한국글로벌중학교
한국삼육중학교
호남삼육중학교
7.3. 고등학교[편집]
경신고등학교
경화여자고등학교
경화여자English Business고등학교
계성고등학교: 대구광역시에 있는 학교. 서울시에 있는 계성고등학교는 가톨릭학원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본래 여고였다.
계원예술고등학교
광성고등학교
대광고등학교
대전대신고등학교
동해삼육고등학교
매향여자정보고등학교
명지고등학교
문영여자고등학교
배재고등학교
백영고등학교
브니엘고등학교
브니엘여자고등학교
브니엘예술고등학교
서울삼육고등학교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
서울예술고등학교
서해삼육고등학교
성일고등학교(익산)[56]
성지고등학교
송림고등학교
수피아여자고등학교
순천매산고등학교
순천매산여자고등학교
숭실고등학교
숭의여자고등학교
신성고등학교
양곡고등학교
염광고등학교
영남삼육고등학교
영락고등학교
영락유헬스고등학교
예일여자고등학교
예일디자인고등학교
원주삼육고등학교
은혜고등학교
이사벨고등학교
이화여자고등학교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병설미디어고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사범대학부속이화금란고등학교
인성여자고등학교
인평자동차정보고등학교
전주기전여자고등학교
전주대학교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
전주신흥고등학교
전주영생고등학교
정명여자고등학교
정신여자고등학교
정의여자고등학교
한국삼육고등학교
한국조리과학고등학교
호남삼육고등학교
호수돈여자고등학교
환일고등학교
7.4. 전문대학[편집]
명지전문대학
배화여자대학교
숭의여자대학교
전주비전대학교
7.5. 4년제 대학[편집]
백석대학교
삼육대학교
서울여자대학교
연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전주대학교
계명대학교
8. 비판 [편집]
개독교, 먹사/목레기, 근본주의 항목 참조.
8.1. 목사 임명에 대한 논란[편집]
목사로 임명받는 과정은 각 교단 별로 차이가 있지만, 정통적이라고 여겨지는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으려면 신학대학원 과정(3년)을 이수해야 하고, 자신이 소속된 교회에서 전도사로서 봉사를 하여야 한다. 참고로, 미국과 같은 경우는 youth pastor나 assistant pastor로 칭하는데, 미국의 경우는 교회에서 사역을 공식적으로 하는 사람을 pastor라고 부른다. 대다수의 교단은 미혼인 사람은 목사로 임명조차 하지 않으며, 전도사로서 봉사를 시키는 것은 해당 인물이 적합한 인물인지 평가를 위해서다. 이는 바울의 서신(디도서 1장, 디모데전서 3장)에서 나온 감독으로 합당한 자에 대한 설명을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교단 등록에 아무런 제한이 없다는 것을 이용, 기존 교단들의 이름과 비슷한 교단을 만들어 그럴 듯하게 장로교니 감리교니 침례교니 하는 이름만 빌렸을 뿐 전혀 관련이 없는 자체적인 교리와 시스템을 가지고 사이비 단체로 발전하는 경우가 있으며, 혹은 돈을 노리고 자체적으로 목사를 임명하는 프로그램을 돌리기 시작해 이른바 속성으로 목사 안수를 받게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한두 달은 양반이고 3일 속성, 7일 속성코스나 심지어 인터넷만으로도 국가에서 인정한, 합법적인 목사가 될 수 있다. 물론 신학대학을 다니지도 않고 이런 단기간의 안수로 제대로 된 목사가 될 수 있을리가 만무하기에 기존 교단들은 이러한 교단과 목사를 인정하지 않는다.
실제로 사기와 같은 범죄를 조금 더 쉽게 하기 위해서, 이러한 방향으로 목사 '타이틀'을 취득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출소 후 자신이 종교에 귀의하여 개과천선했다는 빌미로 자금을 끌어모으거나 범죄를 숨기기 위한 방패막이로 삼는 것인데, 이런 경우의 대표적인 사례가 전직 고문기술자 겸 목사 이근안[57], 한때 대도로 유명했던 조세형의 경우다. 관련기사 그 외에 옥중에서 안수를 받아 수감자 상태에서 목사가 되는 경우도 있다. 2016년 말 대한민국을 혼돈의 구렁텅이로 몰고 간 사건의 근원인 최태민도 대표적인 사례.
8.2. 군종장교요원 특혜 논란[편집]
자세한 사항은 항목 참조.
9. 관련 링크[편집]
(한국어 위키백과)대한민국의 개신교
(한국어 위키백과)한국의 기독교
10. 관련 문서[편집]
갓톡
개독교
개신교
기독교
교회
예수쟁이
먹사/목레기
청교도
한인교회
[1] 예외적으로 네덜란드와 스위스는 우리나라와 개신교 구성이 엇비슷하며, 특히 네덜란드는 같은 칼뱅주의란 공통점 때문인지 직접적인 교류가 드문데도 한국 개신교 신학계에서 생각보다 자주 언급된다.
[2] 이 대학의 후신을 자처하는 대학이 장신대학교와 총신대학교이다.
[3] 당시엔 가톨릭도 제사는 금지였다.
[4] 다만 이 과정에서 한국 토속 샤머니즘 요소가 개신교 내부에 남게 된다.
[5] 오히려 오늘날에는 천주교가 제사를 관용하는 경향을 보인다.
[6] 지금도 극도로 보수적인 개신교 교회에서는 은근히 유교 윤리와 구약 율법에 명시된 윤리가 비슷하다는 걸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7] 독립운동을 이끈 교회를 이어받은 신학교나 교회를 주축으로 친일 연구가 활발한다. 재밌는것은 개신교 학계는 물론 반기독교 성향의 일반인들도 이 자료들을 자주 애용을 한다는 점이다. 개독들 자료들은 못 믿는다면서??
[8] 일반 사법 경찰과 달리 정치범과 중요사건을 다루는 경찰조직
[9] 현재 연구로는 1933년 이전에 한국 천주교 내부적으로 신사참배를 받아들였다는 연구도 있다.
[10] 명목상 평신도 회중제로 운영하는 교회를 일컫는 말이었지만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을 통해 들어온 조합교회는 어용교단 노릇을 하면서 한국의 개신교를 분열시키는 역할을 했었다.
[11] 도리어 불교는 조선시대 숭유억불에 대한 울분 풀이랍시고 구한말부터 이동인, 이회광처럼 일제에 적극적으로 친일 부역질을 일삼은 자들이 많았다.
[12] 전통 민족신앙이라해도 대종교와 분리된 국내 단군교의 경우 적극적 친일이었다.
[13] 박형룡처럼 존 메이첸의 제자이다.
[14] 상대적으로 민주당, 그 가운데 신파는 부통령 장면을 중심으로 가톨릭 성향이 강했다. 이런 분위기는 김대중, 노무현까지 이어졌다. 다만 민주당 구파의 대표 인사인 윤보선 전 대통령은 장로회 신자였다.
[15] 고려원 "한국의 불교".
[16] 개신교를 믿는 나라들은 모두 잘 산다는 주장도 사실 이때부터 나왔던 것이다. 물론 반개신교 측에서는 일부 아프리카 국가들의 예시를 들어 개신교 국가임에도 못 사는 나라들이 수두룩했다는 반론을 편다.
[17] 그런데 기윤실은 1996년에 마이클 잭슨의 내한 반대 운동을 벌인 적이 있는 집단이며 게다가 마릴린 맨슨은 물론 레이디 가가 내한 공연 반대 운동까지 시전은 물론 각종 문화예술들 탄압을 주도하는 선두주자인 셈이다. 갱생은 개뿔... 오히려 NGO같지 않은 배후세력 집단들을 몸집늘리면서 광기어린 짓만 골라서 한다. 잭슨의 소송크리를 맞고 나서 정신차렸다 하지만 여전히 더 심하게 정신줄 놓고 개소리를 시전하니 개독인증받고 낙인찍힌 셈이다.
[18] 하지만 한국교회대부흥100주년기념상암서울대회에서 故옥한흠 사랑의교회 원로목사는 한국 개신교의 타락을 비판하고 목회자들의 회개를 촉구하기도 하였다.
[19] 딸을 죽인 아버지가 다름아닌 목사였다. 그것도 사이비, 이단 종파의 목사가 아닌 정통 교단의 목사(…).
[20] 다만 통계청에서 집계하는 개신교의 기준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개신교(성공회 포함)만이 아닌, 후기성도 교회, 여호와의 증인 등의 반삼위일체론 성향 교파와, 통일교, 천부교, 에덴성회, 영생교, 베뢰아, 다락방, 신천지, 성경침례교 등 기성 개신교에서 이단으로 규정된 신흥 교파들을 모두 포함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개신교의 성장이 아닌 신천지 등 악성 이단들의 신도 급증에 의한 결과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21] 단, 이 짤 자체는 인도의 부패문제에 대해 만들어진 것이다. 출처는 이쪽.
[22] 한인교회를 제외한 순수하게 미국의 개신교의 사상 아래에 있는 교회. 형식상으로 개신교가 미국의 국교는 아니다. 설문조사 등의 자료에서 미국인들이 매우 종교적이고 미국이 개신교 국가와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와는 별개로 국가적으로는 법으로 정교 분리를 규정했기 때문에 (혹시 헌법을 개정하지 않는 이상) 국교가 될 수는 없다. 다만 개신교 전통의 영향이 국가적으로 강한 건 사실이라 대통령 선서 등에는 성경 위에 손을 얹고 하기는 한다. 물론 이것도 절대적이지는 않아서 쿠란에 선서한 하원의원의 경우도 있다.
[23] 길선주 장로는 회심하기 전 관우를 섬기는 관성교의 신자였다. 새벽기도 역시 관성교의 새벽기도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24] 참조 : 평양 대부흥운동과 길선주 영성의 도교적 영향. 단, 해당 논문에서는 도교적 기복신앙이 사회 공동체 구원의 신앙으로 진화하였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 영향 그대로 그 대상과 방법만 바뀌었다고 보는 것이 현재 관점에서 더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25]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가톨릭에서 개신교에 대한 시선은 딱 '열교 이단'이었다.
[26] 그러나 공동번역성서는 성공회를 제외한 나머지 개신교 교단에서 예배용 성경으로 채택되지 않았다. 예장합동 등 비 KNCC 교단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KNCC 교단들 내에서도 의견 일치를 못 보았다. 이는 1993년 표준새번역 채택 때에도 반복되었다. 물론 공동번역이나 새번역 모두 대한성서공회 공인 역본인 만큼 교단 내외적 합의가 이루어지면 예배용 성경으로 사용될 수 있지만 교단 내부 및 교단간 의견 일치를 보는 것이 매우 어렵다.
[27] 타 교파 신자에 대한 영성체 허용 문제에 대해 미온적인 반응이라 이쪽으로 분류하였다.
[28] 물론 떨어져 나오기 전에 먼저 교단에서 축출당한 것. 김재준 목사는 모세오경을 쓴 것이 모세가 아니라는 주장을 하는 등 성경비평에 입각한 신정통주의 신학을 펼치다가 근본주의 신학을 하는 이들에게 비판을 받는 등 큰 소란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기장과 예장이 갈라섰다. 하지만 그 어떤 교단보다도 기장, 한신측의 전신인 조선신학교 계통 교단이 신사참배에 가장 호의적이었던 탓이 가장 크다.
[29] 2차대전 이전의 1세대 자유주의와는 좀 다르다. 자세한 것은 자유주의 문서의 신학 문단을 참조하자.
[30] 또한 신정통주의를 표방하거나 NCCK 소속 교단이라 하여 모두 진보적인 것만은 아니다.
[31] 실제로 최태민 같은 자도 목사 직함을 얻었다.
[32] 이런 추세는 일제강점기 이전 이북 지역도 마찬가지라서 서북지역과 달리 함경도나 개마고원에는 원래부터 개신교인이 별로 없었다.
[33] 영남의 강한 불교세 가운데도 선방을 하고 있는 경북 김천, 경북 포항, 경남 거제 등이 눈에 띄고, 호남의 강한 개신교세 중에서도 전북 군산, 전남 신안, 전남 여수의 초강세를 볼 수 있다.
[34] 초기 서울의 교회는 이북(특히 평안도)에서의 실향민들의 영향이 컸다. 적어도 분단 이전에는 평안도가 기독교 신자 비율이 가장 높았고 현대 개신교 원로들의 출신지가 이북, 특히 평안도 지역 출신지가 많다. 또한 1960년대 이후 호남 출신의 이주민들이 많이 이주하면서 호남 출신의 신자들이 많아지기도 했다. 또한 호남 출신들 다음으로 호서 출신들도 꽤 많은 편이다.
[35] 강남권은 개신교 뿐만 아니라 천주교 교세도 강한 지역이다.
[36] 사실 제주도는 신축민란의 여파 때문에 로마카톨릭에 대한 감정이 극악을 달렸으므로, 개신교가 퍼질 가능성도 충분이 높았던 지역이었다.
[37] 05년 조사시 1번 기독교(천주교).... 3번 기독교(개신교)로 하는 바람에 성질 급한 신도들이 3번이 아니라 1번으로 쓴거 같다는 의견이 많다. 그게 아니라면 2015년 조사에서 천주교 교세가 큰폭으로 감소하거나 개신교세가 급격하게 증가해야 하는데 실제 체감은 천주교나 개신교나 별 변동이 없기 때문
[38] 감리회와 더불어 육지에서는 마이너 교단인 성공회의 교세가 강한 편이다.
[39] 동해권에서 유일하게 개신교 교세가 강하다 볼 수 있다. 특히 침례회의 교세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하다.
[40] 일명 통일교, 전 교주 신격화로 인해 현재는 기독교와 관계가 없다.
[41] 구 합동정통
[42] 서울 관악구 남현동 소재
[43] 2015년도 뉴스앤조이 통계에 따르면 2014년 이래로 교인수 1위는 통합, 개교회·목사수 1위는 합동이다.
[44] 우리나라의 장로교인이 650만명 정도이고, 전세계의 장로교인이 약 2000만명이다. 전세계 장로교인의 1/3이 한국인이라는 말이다. 칼뱅주의가 한국인의 정서에 맞는 게 맞네...
[45] 달리 말하면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개신교의 대표 이미지가 장로교로 완전히 고착화되었단 뜻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찬밥 취급받는 교단들이 구세군을 제외하면 대체로 전례적(liturgical) 성향이 강하다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46] 성공회, 구세군 등 영국에서 전파된 개신교 교파의 경우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긴 국내 선교 역사를 지니고 있다. 성공회는 1890년, 구세군은 1908년 국내에 처음으로 선교사가 파송되었다.
[47] 재림교회의 이단 여부는 개신교 내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현재 개신교 내 최대 교파인 예수교장로회에서는 이단으로 지목하고 있다. 다만 예수교장로회 가운데 보수적인 교단에서는 천주교도 이단으로 생각하니, 판단은 각자 하도록 하자.
[48] 다만 지금은 6위다.
[49] 그 이전에도 인터콥이라든지 극단적인 선교단체가 이스라엘이나 아프가니스탄, 팔레스타인에서 대규모 부흥회를 한다고 설치다가 외교부나 대사관은 물론, 그 나라 정부에서 무슨 일 터져도 일절 한국 정부가 책임지라고 으르렁거렸던 바 있다. 특히 이스라엘 부흥회 시도 당시 이스라엘 측이 반이스라엘 폭도로 규정하고 무차별 발포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었다. 결국 모조리 무산되었거늘 인터콥 측은 이게 종교 탄압이라고 적반하장으로 발광하여 개신교 선교에 대한 어그로를 부채질했다.
[50] 그러나 여기서도 볼 수 있듯이 통계가 정확하지 않고 워낙에 제각각이라 실제로는 한국 인구만큼은 아닐 수 있다. 일단 공식적인 숫자는 2012년 기준 약 2천만 명이다. 물론 중국 교회는 인구 비율과 영향력이라는 점에서 보면 어느 통계를 기준으로 보나 중국 사회에서 미미한 현실이다.
[51] 영국,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52] 이슬람 종주국 중동, 교회 있는 거 아세요?
[53] 물론 나라에 따라 다르겠지만, 한인 이민 사회는 전통적으로 한국대사관, 주재하고있는 기업의 지사, 한인교회, 이렇게 세 곳을 중심으로 모인다. 교포 사회에서는 한인교회가 개신교 예배 장소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예를 들어 가난한 유학생들 입장에서 집에서 한 한국음식을 맛볼 수 있는 때가 주일 예배 후에 교인들과 함께 먹는 점심일 경우가 흔하다. 또 그렇게 개신교인이 되기도 하고...
[54] 일본의 웬만한 저가형 원룸 건물은 대개 노인들이 개인적으로 운영하는데 이들은 외국인 불신이 뿌리깊고 아시아인을 차별하는 경향이 있어서 돈 내도 방 안 빌려주는 곳이 꽤 많다
[55] 서울시에 있는 계성초등학교는 학교법인 가톨릭학원에서 운영하는 가톨릭 학교다.
[56] 경기도 성남시의 성일고등학교와는 다른 곳
[57] 이후 논란이 되자 목사직 박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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