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서양사상의 흐름과 고전]

(출전 :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서양사상은 인류역사의 변천과 더불어 약 2500년 동안 다양한 특징을 지니고 발전해왔는데, 이들 사상의 공통점은 1차적으로 신과 자연, 그리고 우주에 존재하는 근본원리를 도출하여 이를 바탕으로 인간의 존재의미와 본성을 밝히려 한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의 본성을 두 가지로 제시하였는데, 하나는 이성적 측면을 중시한 사상이고, 다른 하나는 감각적 욕구충족을 중시한 사상이다. 그리스 철학, 스토이즘, 합리론, 관념론(특히 칸트)은 이성적 측면을 강조한 사상인데, 주로 보편주의적 세계관을 취하였다. 반면 키레네 학파, 에피쿠로스 학파, 경험론, 자연주의 윤리설, 공리주의 등은 감각적 측면을 강조한 사상으로, 주로 상대주의적 세계관을 취했다.


a.서양사상의 원류


 영국의 비평가 매튜 아놀드는 세계역사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사이를 오락가락한다고 했다. 이는 오늘날 서양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2개의 지주를 그리스 정신과 크리스트교 정신으로 본 것이다. 그리스 사상은 인간중심 사상으로 인간의 이성과 감정을 존중하고 인간의 현세적 의미의 긍정과 자아를 강조하여, 후에 서양의 철학, 과학, 문학(사실주의), 예술 등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반면 크리스트교 사상은 신중심으로 특히 영성과 덕성을 존중하고 내세적인 성격을 띠는데, 이는 뒤에 신학, 예술, 문학(낭만주의) 등에 영향을 주었다.


b.그리스 사상(헬레니즘)


 동양문명에 대응하는 가장 뚜렷한 서양문명의 원류는 고대 그리스의 사상과 문화에 기원을 두고 있다. 기원전 5세기경 페르시아와의 전쟁이 끝나면서 그리스 사상의 무대는 그리스 본토에 있는 아테네로 옮겨져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이때부터 서양사상의 원류가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즉, 과학과 철학, 문학과 미술, 정치와 각종 제도 등이 이전에 비해 한 차원 높은 수준에서 체계화되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리스의 철학사는 3단계의 발전과정, 즉 #1자연철학 #2소피스트(궤변학파) #3고전철학의 시기로 파악된다. 자연철학의 시기는 자연계의 본질을 탐구하려는 시기로서, 자연현상을 해석함에 있어 신화의 단계를 벗어난 수준이었고, 소피스트 학파는 주로 자연보다는 인간 문제에 관심을 쏟았다.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의 지적 혁명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대표적인 소피스트인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이 만물의 척도 라고 하면서, 인간의 감각적 경험과 그 유용성이 모든 사물에 대한 가치판단의 기준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소피스트들에게 있어서 가치판단의 주체는 곧 인간들이었다. 그러나 이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이고 상대주의적인 진리관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소피스트들의 상대주의.회의주의.개인주의에 대항하여  절대적 진리의 기준을 확립하려는 새로운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로서 그리스 고전철학이 성립되었다.


   1. 소크라테스

 고전철학 시대에는 인식론과 윤리학 및 사회철학에 있어 치밀한 체계가 나왔는데, 진정한 의미에서의 서양철학이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철학운동의 기수는 소크라테스였다. 그는 저술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제자인 플라톤이 남긴 저술에 의해 그의 사상을 분석해볼 수밖에 없다.

 소피스트들이나 소크라테스는 다 같이, 자연보다는 인간의 본질을 아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본 점에 대해서는 공통적이었으나,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의 진리의 상대성에 대해, 모든 인간의 삶에 있어서 보편적.절대적으로 실재하는 진리나 지식을 구명하고자 하였다. 그는 이러한 진리나 지식은 모든 인간에게 내재해있는 보편적 이성 활동에 의해 인식될 수 있다고 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진리와 지식을 발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는 지행합일설을 제시하였다.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인간의 보편적 이성에 의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진리나 지식을 발견하고 이를 실행할 때에 선하고 행복한 삶이 실현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실제생활 속에서 악한 행위를 저지르게 되는 까닭은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 옳고 그른지를 모르는 무지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델포이 신전에 씌어 있던  너 자신을 알라 라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무지를 스스로 자각할 것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참된 앎을 통해 덕을 쌓아 갈 때에 비로소 행복을 누린다고 하였다. 이러한 지덕복합일설은 앞에서 제시된 지행합일설과 그 맥을 같이한다.


   2. 플라톤

 인간의 이성에 근거한 소크라테스의 철학사상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졌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윤리사상을 이어받아 감각적으로 경험되는 현상의 세계는 다만 이데아 세계의 불완전한 모상에 불과할 뿐이라는 진리관을 제시하였다. 그는 선의 이데아를 모방해서 이를 실현해가는 것을 참된 삶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인간이 자신의 잠재능력을 개발하여 자아를 실현해가는 삶의 방식을 말한다.

자아실현은 구체적으로 지혜.용기.절제가 서로 조화를 이루어  정의를 실현할 때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지혜.용기.절제의 덕을 개인이 갖추어야 할 덕이라고 한다면, 정의는 개인의 덕들이 사회 속에서 실현될 때 나타나는 사회의 덕, 즉 이상국가의 덕이다.

 그의 이러한 정치사상은 정치공동체에서 인간의 삶이 가능하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들에 관한 성찰을 담고 있는 <국가>에서 철인왕에 의해 통치되는 정의로운 국가가 잘 나타나 있다. 플라톤이 제시한 이러한 4주덕은 그 이후 서양사상에서 강조된 덕목이었다.


   3.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소크라테스,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궁극적 목적을 최고선의 실현, 행복추구, 이성적 자아의 실현에 두었으며, 이를 위해서는 이성에 의해 감각적이고 육체적인 생활을 절제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덕에 대해서 말하기를 단순히 지식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선한 행위를 실천하고자 하는 선의지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의지를 함양하기 위한 실천적 덕으로서 중용(middle of the road)을 제시하였다. 중용이란, 이성에 의해 일상생활에서의 충동.정욕.감정 등을 억제함으로써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려는 의지를 습관화한 덕이다. 그는 또 인간을 정치적 동물이라고 규정하면서, 개인의 이성적 자아실현은 사회나 국가에서의 실천적 도덕생활을 통해 가능하다고 보고 정치사상은 정치학이 학문으로서의 독립된 지위를 얻게 한 그의 저서 <정치학>에 잘 표현되어 있는데, 정치공동체의 성격과 장단점, 가장 좋은 나라의 체제, 당시 국가체제들의 비판, 그 외의 서양정치학의 기본개념들이 다루어지고 있다.

 한편 그리스의 역사기술은 그 후의 역사학 발달에 크게 기여하는데, 서양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헤로도토스가 그 주역이다. 기원전 5세기 초반의 페르시아 전쟁을 그린 <역사>는 동서양의 만남을 보여주고 있는 최초의 서양 역사기록으로, 페르시아에 대한 그리스 연합군의 승리를, 폭군의 통치에 대한 법의 통치의 승리로 기록하고 있다. 여러 지방에 걸친 그의 여행과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기술된 이 책에서, 우리는 동방대국의 침략을 물리친 그리스 인의 자부심과 자아의식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단초를 읽을 수 있으나, 대체로 문화적 설화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어 나타난 위대한 과학적 역사가는 투키디데스로, 그는 사료에 대한 주의 깊은 검토를 바탕으로 역사를 자연과 구별지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아테네 인들에 대한 동정을 억제하고 객관성을 유지하여 기술하였다. 그는 과거사실에서 교훈을 얻고자 하는 교훈적 역사를 서술하고자 하였으나, 사회적.경제적인면을 도외시하였다는 점에 그의 역사관의 결함이 있었다.


c.   헬레니즘 시대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기원전 334년)부터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제국을 건설할 때(기원전 30년)까지 300년을 헬레니즘시대 라 한다. 동서융합정책으로 그리스의 이상은 대부분 상실되어, 새로운 문명 즉, 그리스 문화와 동방문화가 혼합되어 새로운 그리스 풍의 세계적인 성격을 띤 문화와 구별하여 헬레니즘 문화(Hellenistic Culture)라고 부른다.

 폴리스를 중심으로 발달한 그리스 인들의 공동체적 생활약식은 그리스와 국력이 쇠퇴함에 따라 점차 개인주의적 생활양식으로 전환되었다. 특히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으로 그리스 문화와 페르시아 지방을 위시한 동방문화가 융합되어 범세계적인 헬레니즘 문화가 발전되어감에 따라, 그리스 인들의 자유로운 안심입명을 시도하는 이기주의나 세계시민의 철학사상이 전개되었다. 이처럼 그리스 문화를 로마까지 연결시킨 교량적 역활을 한 헬레니즘 문화는 상대주의.세계주의.개인주의.도피주의를 그 특징으로 하는데, 대표적인 사상에는 스토아 학파(금욕주의 사상)와 에피쿠로스 학파(쾌락주의 사상)가 있다.

 스토아 학파의 금욕주의 사상은 기원전 4세기 말에서 3세기 초에 제논에 의해 제시되었다. 제논은 인생의 궁극목적인 최고선과 행복이,이성활동에 의해 어떤 것에도 움직이지 않는 마음의 상태(apatheia)'를 유지해나갈 때 실현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한 구체적인 생활태도로서 보편적 우주이성에 의해 지배되는 자연법칙에 따르는 생활을 들었다. 이러한 스토아 학파의 윤리사상은 그후 2세기경에 이르러 아우렐리우스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다. 이 사상은 당시 로마의 만민법과 중세 및 근대의 자연법사상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윤리사상은 스토아 학파의 사상과 거의 같은 시기에 에피쿠로스에 의해 체계화되었다. 그는 정신적인 쾌락을 통해서만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고 정신적 평정상태(ataraxia)를 얻을 수 있으며, 진정한 행복을 실현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행복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플라톤의 4주덕을 받아들였다. 그 덕들은 신과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해방시켜주고 행위를 정당하게 판별할 수 있게 해주며 윤리사상은 그후 근대 영국 경험론과 공리주의 윤리설에 영향을 미쳤다. 


d.   로마의 사상

 19세기 독일의 역사가 랑케에 의해 고대사의 호수라고 평가되는 로마는, 그리스를 비롯한 이전시대의 문화와 사상을 종합하여 전세계에 보급하는 매개체 역할을 했다. 그리스인의 독창성을 로마의 조직성으로 엮어 오늘날의 서양문명의 기초를 이룬 것이다. 그러나 로마문화가 단순한 매개체 역할에 안주한 것은 아니다. 19세기 독일의 법학자 예링은 로마는 무력과 종교와 법률로써 세계를 세 번 통일하였다.고 말했듯이, 로마의 자연법사상과 크리스트교는 중세 이후 서양문명의 중요한 요소로서 성장하게 된다. 로마법은 일개의 시민법에서 시작하여 지역과 민족을 초월한 항구불변의 자연법에 이르기까지 철학적 발전을 거듭하여, 서양세계에  자유와  평등의 관념이 싹트게 하였다. 또한 크리스트교는 로마의 국교로 인정되기까지 박해와 순교를 거듭하였으나, 서로마 멸망 후에는 유럽세계의 혼란 속에서 정신적 지도력을 발휘하여 마침내 세계종교로서 교세를 확대하였다.

 실제적인 지혜와 활동적인 생활을 높이 평가한 로마인들은 추상적인 철학적 사고에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사상과 과학적 사고에서도 그리스 인을 모방하였고, 주로 현실의 필요에서 그리스 사상을 수용하였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법률과 종교를 기피하려는 젊은 귀족층에게 호소력을 가졌으며, 일반적으로 생활에 대한 물질적 해석을 합리화하였다.

한편 스토아 학파는 낡은 전통적 방식을 존중하는 진지한 로마 인들에게 공감을 느끼게 하였다. 그것은 개인의 자제력과 의무감 및 정신적 평화를 존중하는 사상이었다. 그리하여 포에니 전쟁기간 중 영향력을 얻기 시작한 로마의 스토아 학파는 제정수립후 세네카, 아우랠리우스 등과 같은 대표적 사상가들을 배출했다.

 로마의 철학자이자 문학가로는 우선 키케로를 들 수 있다. 그는 그리스 정신에 강한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비교적 독창적인 사유를 한 사람으로, <웅변에 관하여> <공화국론>등 여러 편의 저서를 남겼다. 그중 스토아 철학의 원리에 입각하여 실천윤리의 문제를 다룬 <의무론>은 그의 대표작이며, 그의 문체는 르네상스 휴머니스트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한때 네로 황제의 가정교사를 지낸 세네카는 철학적 에세이와 비극작품을 저술하여 그리스 3대 비극시인 이후의 최고의 비극작가로 평가되었다. 이우렐리우스는 로마 평화시대 5현제의 마지막 황제이며, 대표적 스토아 철학자로서 <명상록>을 저술하였다.

 역사서술에 있어서는 타키투스가 돋보이는데, 명저 <게르마니아>에서 당시의 로마를 비판하기 위해  야만인 들의 활력에 넘치는 건강한 삶을 묘사하고 있다. 이 책에서 독자들은 로마공화정에 대한 저자의 향수도 함께 느낄 수 있다.


e.   크리스트교 사상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약 1천 년간 지속한 중세는 그리스-로마 문화의 잔잔한 호수에 새로운  불순물 이 힘차게 쏟아져 흘러 들어간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 불순물이 게르만 민족이라 할 수 있는데, 일정한 기간이 지난 후에 호수는 다시 맑아지면서 새로운 물줄기가 근대라는 큰 바다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중세 속에서 계속 줄기차게 나오는 크리스트교의 샘은 서양사상의 또 다른 원류가 되었다.

 원래 초기의 크리스트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수록된 <구약성서>를 경전으로 하는 인간적인 종교였다. 그후 구약성서에서 구세주로 예언되었던 예수(Jesus Christ)가 나타나 세계평화주의적 복음을 전파함에 따라 크리스트교는 일반대중의 정신생활 속으로 침투하게 되었다.

예수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사랑의 윤리를 강조하였다. 이어서 베드로나 바울과 같은 사도들에 의해서 크리스트교는 세계종교로서의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도들의 복음활동과 예수의 가르침을 수록한 경전이 <신양성서>이다. 로마 정부는 313년에 밀라노 칙령을 반포하여 크리스트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그후 중세에는 인간중심의 사상이 신중심의 사상으로 전환되었다. 신 중심의 사상에서는 우주의 창조주인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를 우선적으로 믿고, 이를 실천함으로써 인간의 행복과 영생이 실현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신 중심의 윤리사상은 중세 유럽의 생활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흔히 중세를 암흑의 시대 라 한다. 왜냐하면 신학이 중세의 학문과 사상을 압도하여, 철학이나 자연과학 등 기타 학문은 그 시녀역할에 만족해야 했기 때문이다. 중세의 신학발전의 주체세력은 파리대학을 중심으로 한 대학교수들이었고,중세신학의 발전은 크게 2분될 수 있다.

#1예수 사후 8세기까지 신부들에 의해 발전된 교부철학과 #2 9세기에서 15세기까지 발전된 스콜라 철학을 들 수 있다.

 교부철학은 주로 크리스트교의 정통교리를 하나로 체계화하여 교회의 권위를 확립하고자 하는 아우구스티누스 등의 교부들에 의해 발전되었는데, 그는 크리스트교의 신앙을 그리스의 이성으로 설명하기 위해 초월적인  이데아  사상을 강조한 플라톤 주의를 받아들였다. 나는 믿기 위해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알기 위해 믿는다.는 말로써 신앙과 이성의 타협을 시도하였다. 그의 크리스트교 사상이 잘 반영된 <신국론>에서 그는 신국, 즉 내세는 지상의 세속적 역사과정 속에 투영된 것으로서, 인간역사의 과정이 신의 섭리의 실현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 인간은 교회를 통해서 신국에 들어갈 수 있으며 교회는 인간구원을 위한 유일한 기관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의 자서전 <고백록>에서는 그의 젊은 날의 지적 방황과 30세가 넘어서야 기독교에 귀의한 종교적 개종과정을 담담히 고백하고 있다. 

 스콜라 철학은 교회의 교리철학으로서 중세철학과 학문의 절정을 이룬 중세의 종합적 세계관이다. 대표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플라톤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더 가까운 수정된 실재론을 주장하여, 보편적 존재는 영원불변의 실재성을 갖지만 본질로서 개체 안에 존재한다고 보며, 교회가 수용할 수 있는 최종적인 공식을 만들어냈다. 그는 대표적 저술인 <신학대전>에서 스콜라 철학의 정수를 제시하였다.


f.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근대 초기(14∼16세기)의 사상이 형성될 수 있었던 계기는 14∼16세기에 나타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운동에 찾아볼 수 있다. 르네상스는 중세 신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자연적이고 현실적인 인간본성을 다루었던 고대 그리스와 초기 로마시대의 문예로 돌아가자는 운동으로서, 기본적으로는 인본주의 성격을 띠고 있다. 한편 이 운동은 고대사상에로의 맹목적인 복귀만을 추구하지 않고, 고대사상 중에서도 형이상학이 아닌 인간현실에 바탕을 둔 지식이나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였다. 

 이 시기에 이탈리아의 마키아벨리는 역사서술에 있어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역사를 주장했는데, <군주론>에서 정치적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군주에게 수단과 방법의 광범위한 선택을 허용하여, 그간 베일 속에 가려져 있던 인간의 정치적 속성을 드러냄으로써, 정치를 완전히 세속적인 세계이해에 기초하여 파악한 최초의 근대적인 정치이론서를 저술했다.

 르네상스는 근대 자연과학의 진정한 출발점 역활도 했다. 1543년 코페르니쿠스는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에서 중세의 우주관인 천동설을 뒤엎고 지동설을 주창하였고, 동년에 인체 해부학자 메살리우스는 <인체구조론>을 저술하여 인체구조의 해명에 중요한 진전을 이록했다. 

 르네상스 운동과 동시에 일어난 종교개혁 운동의 기본정신 역시, 세속화된 중세교회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순수했던 초기 교회의 신앙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다. 중세교회의 권위와 전통은 봉건사회의 신분제를 확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며, 이로 인해 개인의 내면적인 신앙생활은 점차로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세속화되었다. 이러한 종교계 자체 내에서의 개혁운동을 시도한 대표적인 인물은 루터다. 그는 독일의 로마교회가 면제부를 판매한 것에 대하여 95개조 반박문을 제시하며 항의하였다. 이러한 운동은 그후 스위스의 츠빙글리, 칼뱅 등에 의해 계승되었고, 전 유럽에 퍼져 프로테스탄티즘을 형성시켰다. 또한 영국에서는 16세기 후반에 청교도주의(puritanism)가 나타나기도 했다. 

 이처럼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에서 나타난 사상의 핵심은 로마말기부터 중세까지 1000년 동안 지배해온 신 중심의 윤리에서 벗어나 인간의 현실적 삶을 중시하는 데 있으며, 이는 근대 서양윤리사상의 형성에 전환점을 마련해주었다.


g.   17세기 과학혁명

 근대에 들어오면서 중세문학의 여왕이던 신학은 물러가고 자연과학이 크게 발달했다. 대자연과 인간사회의 모든 현상은 자연법 이라는 영원불변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고, 그 법칙이 발견될 경우 인류의 행복이 증진되며, 그러한 자연법은 반드시 발견될 수 있다고 믿었다.

수학적 계산과 관찰에 의해 우주의 법칙이 설명되고 그로 인해 세계관의 변화까지 초래한 과학혁명은 1543년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에서 시작하여 케플러, 갈릴레이를 거쳐 1687년 뉴턴의 중력법칙에서 그 절정에 달하였다. 과학사고의 혁명은 현대인에게 자연정복의 길을 마련해놓았고(이 자연정복에 대한 가치판단은 유보), 어쨌든 현대문명의 본질을 전환시켜놓았다.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더욱 세련시켰고, 갈릴레이는 <두 우주구조에 관한 대화>에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을 확인했다. 인류역사상 경이로운 천재 중 한 사람인 뉴턴은 선행업적들을 하나의 우주원리로 종합하여 우주 내의 모든 물체의 운동을 설명할 수 있는 <프린키피아>를 발표했는데, 이로써 전통과 권위에 맞서 싸우던 1세기 반의 과학혁명 은 절정에 달했다.


h.  사상혁명

 17세기에 일어난 과학혁명으로, 우주는 수학자가 창조한 움직이는 거대한 기계이기 때문에, 이제 더이상 신의 섭리는 필요치 않다는 관념이 지배했다. 이러한 기계론적 우주관에 입각한 과학적 사고는 합리주의 정신을 성장시켜 다른 학문분야에도 폭넓게 적용되었다. 즉, 당시의 과학자들에 의해 제시된 자연과학적 방법론과 지식은, 종래의 신학적인 자연관과 세계관에서 벗어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인식과 사유의 법칙을 형성하게 하였다.

 근세의 자연과학에서 주로 사용된 방법론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그 하나는 사유와 지식의 근원을 경험으로 보고 경험적 관찰이나 실험에 의해서 얻은 지식을 중시하는 이른바 귀납적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사유와 지식의 근원을 이성으로 보고 과학적 논리나 추리에 의해서 얻은 지식을 중시하는 이른바 연역적 방법이다. 이런한 자연과학적 방법론과 지식은 전 학문영역에 적용되어, 근대적 사고의 확립에 기여하였다. 이와 관련해서 근대 중기에 영국이 경험론과 대륙의 합리론 이 형성되었는데, 전자는 인간의 경험을, 후자는 인간의 이성을 중시하였다.


i.   영국의 경험론

 영국 경험론의 대표적 인물로는 베이컨을 들 수 있다. 그는 현실생활에 도움을 주는 지식이 보편적인 지식이라고 보았으며, 이러한 지식의 원천은  경험 이라고 하였다. 즉 관찰과 실험에 의해서 인간과 외부사물을 인식하고 얻어낸 지식이 유용하고 참된 지식이며, 이를 통해서 행복한 삶이 실현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신논리학>에서 실험을 통하지 않은 이론, 또는 체계적 이론이 없는 실험은 다 같이 무용한 것이라고 경고하고, 위대한 진보는 이론과 실제의 결합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생활에서 참된 지식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의 시각에 내제하는 선입견과 편견 때문이라고 보고, 이것을 타파할 것을 역설하였다. 경험론에 입각한 베이컨의 사상은 홉스, 로크 등을 거쳐 공리주의 사상으로 발전하였다.


j.   대륙의 합리론

 대륙의 합리론은 데카르트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는 감각적 경험을 통해서 얻은 지식은 개인의 편견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단편적이며 우연한 지식이라고 보고, 철학적 사유를 통해서 완전하고도 확실한 지식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그의 저서 <방법서설>에서 그는 이성활동에 의한 진리탐구 방법을 이른바, 방법적 회의라고 하였다. 그는 확실하고 자명한 진리를 연역해내기 위해서는 절대로 의심할 수 없는 기본명제를 그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러한 기본명제를 찾기 위해 수많은 의심을 해본 결과 내가 지금 사유한다는 사실만은 결코 의심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명석한 진리를 제시하였다. 그는 이것을 사유의 제1원리 라 하였고, 여기서부터 출발하여 모든 보편적 지식을 연역하고자 하였다. 데카르트는 이성에 근거하여 보편적 지식을

추구하고자 함으로써 근대적 사고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한편으로 그는 기계적인 자연계와는 별도로 신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보고 중세적인 종교신앙을 기계적인 우주관과 조화시키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k.  사회계약설과 계몽사상

 경험론과 합리론은 대개 합리적인 개인만을 문제삼는 경향이 있었다. 반변에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사회계약설을 토대로 한 근대시민사상이 대두되었다. 17, 8세기에 나타난 계몽주의 사상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이는 근대 시민혁명의 사상적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홉스는 17세기 과학혁명의 정신을 그의 사상 속에 잘 반영시켰다. 근대시민사상에 사회계약설을 도입한 그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상태를 극복하고 모두의 생명보존을 위한 평화상태를 창출하기 위해 국가를 성립시킨다고 생각했다. 홉스는 이러한 진리관.인간관을 토대로 하여 사회계약설이라는 근대시민윤리를 도출해냈다. 그는 사회구성원들이 투쟁의 법칙만이 존재하는 자연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고, 공공이익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합의나 계약에 의한 규범을 만들고 이를 준수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홉스의 사상은 그의 <리바이어던>에 잘 나타나 있다. 

 명예혁명을 전후해 살았던 로크는 영국의 경험론을 철학적으로 체계화시키고, 시민혁명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해 <정부론>을 저술했다. 로크는 이 책에서 정치사회의 정립이 각자의 생명.자유.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개인들의 사회계약에 기초한다는 점을 밝히고, 법치국가성.대의제.권력분립.입법권 우위.저항권을 주창하고 있다. 결국 자연상태 및 사회계약을 전제로 한 점에서는 홉스와 같았지만 그 결론은 정반대였다. 

 또 다른 계몽사상가인 루소는 당시대의 이성존중의 풍조에 반대하여 이성보다 감정과 본능을 중시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라 고 외쳤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의 서두에서 사람은 태어날 때 자유로우나 현재는 어디서든지 쇠사슬에 매어 사는 것을 본다 는 말로 필요악으로서의 사회를 논하였다. 루소는 근본적으로 로크의 사회계약설에 동의하였으나, 대의제나 다수결에 관해서는 상이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사회계약론>은 프랑스 혁명의 성서라 불리며, 자유.평등.박애 의 표어도 거기서 유래한 것이다. 또한 당시 많은 지식인들의 협동작업으로서 혁명 전 프랑스 사회를 과감하게 비판한 획기적인 업적이 <백과사전>의 발간이다. 디드로를 중심으로 편찬된 이 방대한 사전은, 전통적인 권위와 사회악에 도전하여 계몽사상을 전파하는 매개체가 되었고, 사회진보를 위한 최초의 백과사전이었다.

 이 당시 역사학의 발전도 주목할 만한데, 이탈리아 출신의 비코는 <신학문의 원리>에서 역사의 순환성을 강조하면서, 역사과학의 확립을 제창했다. 영국의 기번은 이교적 문명 과 크리스트교적 야만을 비교하면서 <로마제국의 쇠망사>를 저술했다. 

 18세기의 또하나의 업적은 과학적 연구방법을 인간과 사회현상에서 적용하여, 정치학.경제학.인류학 등 사회과학이 주목할만한  발전을 했다는 것이다. 경제학의 창시자인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를 옹호하였고, 이탈리아의 법학자 베카리아는 <범죄와 형벌>에서 범죄를 사회계약의 위반으로 보고 그 예방수단으로서의 교육.형의 신속 등을 주장하였으나, 후에 중대한 오류도 지적되었다. 프랑스의 귀족출신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에서 3권분립을 제창하였다.

 근대후기 18, 9세기에 전개된 사상으로는 칸트를 중심으로 한 독일의 관념론과 벤담, 밀을 중심으로 한 영국의 공리주의, 그리고 콩트를 중심으로 한 실증주의를 들 수 있다.


l.   독일 관념론

 영국의 경험론과 대륙의 합리주의를 잘 조화하면서 과학혁명의 성과를 철학적 사고에 적절히 편입시킨 인물은 근대 비판철학의 창시자라 할 칸트였다. 18세기 계몽사상의 마지막 대변자이며, 동시에 19세기 낭만주의 철학을 함께 종합한 그의 과학의 합리성, 인류를 향한 인도주의적 관심 등을 자신의 사상 속에 심화시켰고, 그의 주저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철학적 사유의 발전에 새로운 장을 마련했으나 비판이 일자, 자신의 저작에 대한 몇 가지 오해를 제거하기 위해, 이를 재구성하여 새로 쓴 저작이 <형이상학 서설>이다.

 독일의 관념론은 그후 피히테, 셀링으로 계승되어 헤겔에 의해 절정을 이룬다. 헤겔은 개인의 인격과 자율적 동기를 중요시하는 칸트와는 달리 개인과 국가성원 전체의 역사적, 사회적 현실속에서 드러나 있는 윤리를 밝히고자 하였다. 그는 개인의 자유와 사회의 자유가 함께 실현되기 위해서는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공동체를 인륜(Sittlichkeit)이라고 정의했는데, 이런 공동체는 절대정신이

정립(These), 반정립(Antithese), 종합(Synthese)의 단계를 거쳐 변증법적 원리에 의해 가족에서부터 시작해서 시민사회를 거쳐 국가에 이르러 완성된다고 하였다. 그의 주저 <역사철학강의>에서 헤겔은 인간 개개인의 생각이 발전하는 것처럼 인간정신의 구체적 구현인 역사도 자유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발전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m.   영국의 공리주의

 근대후기에 나타났던 또 다른 사상으로 공리주의를 들 수 있다. 독일에서 칸트, 헤겔에 의해 관념론에 제기되고 있을 무렵, 영국에서는 기술혁명으로 말미암아 산업혁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영국인들은 물질적인 풍요와 편의를 누릴 수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방임주의(laissezfaire)라는 미명하에 무절제한 자유경쟁과 개인의 이윤추구현상이 대두되자, 개인의 이익과 전체의 이익을 조화시키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하여 나타난 사상이 공리주의 사상이다. 공리주의 사상에서 제시되는 인간관은, 인간이면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쾌락 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경향을 가진다는 데서 출발한다. 이는 곧 삶의 목적이 쾌락이나 행복의 추구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개개인 모두가 저마다 자기의 쾌락이나 행복만을 추구하고자 한다면 사회는 혼란상태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선한 행위란 가급적 많은 사람에게 쾌락과 행복을 주는 공리성을 전제로 해야 한다. 여기서 공리주의 윤리설이 표방하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이라는 행위원칙이 도출되었다. 이러한 공리주의 윤리설의 인물로는 벤담과 밀을 들 수 있다.

 벤담은 <법과 도덕의 원리>에서 쾌락이나 행복을 양적으로 계산할 수 있다고 보고, 개인의 쾌락이나 행복을 증대시키는 것이 사회 전체의 행복을 증대시키게 된다는 양적 공리주의를 제창하였다. 그러나 인간이 도덕적으로 행동하기 위해서는, 법률과 같은 외적 제재가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벤담이 쾌락의 양을 중시한 것에 반해, 밀은 쾌락의 질을 중시하였다. 그는 쾌락에도 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보고, 쾌락을 고상한 정신적 쾌락과 저급한 육체적 쾌락으로 구분하였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인간이 되는 것이 더 바람직하고, 만족스러운 바보보다는 불만족스러운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자유론>에서 밀은 사회주의적 자유주의체제를 옹호하고 자유주의적 민주적 개혁 및 경제체제로서의 사회주의에 찬성하지만 그가 자유에의 위협이라고 본 순수한 다수의 지배 에는 반대한다. 

 1830∼1900년대에 이르는 기간은 인류 역사상 과학기술의 전성시대로 특히 생물학과 의학의 발전은 특기할 만한 것이었다. 생물학에서의 뉴턴을 표방했던 다윈의 진화론은 코페르니쿠스 이래 다시 한번 세계관을 바꾸었고, 그가 <종의 기원>에서 주장한  약육강식과  적자생존 등의 이론은 19세기 이후 자연과학은 물론 사회과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골턴의 우생학과 스펜서의 사회적 다위니즘에 영향을 주어, 인종차별과 제국주의의 이론적 배경이 되기도 했다.

n.   프랑스의 실증주의

 한편, 19세기경에 프랑스에서는 콩트를 중심으로 한 실증주의 사상이 등장한다. 과학의 실증성을 강조한 콩트는 특히 사회학을 인간들간의 사회적 관계를 연구하고, 이러한 관계가 어떻게 역사의 과정 속에서 변해가는지를 탐구하는 학문으로 규정지음으로써 사회학의 독자성을 개척했다. <실증철학강의>에서 그는 역사적 단계에서의 인간정신, 즉 과학이 그 이전의 단계에 의존하여 진보하고 있음을 증명해 보이고자 했다.


o.   유물론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사상은, 일반적으로 합리론과 관념론에서와 같이 주지적이고 이성적인 윤리사상에 반대하고, 인간의 현실생활 자체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상으로는 유물론.생철학.실존주의 등을 들 수 있다. 유물론은 하나의 사상이라기보다는 당시의 경제.종교를 비판하기 위해 대두된 사회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포이어바흐와 마르크스에 의해 체계화되었는데, 그들은 자연의 물질들을 대상으로 하는 노동에서 인간의 본질을 찾고자 했다. 즉, 인간은 노동이라는 자기창조적 활동을 통해 자기자신을 실현해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유물론적 인간관은 후에 사회주의적 인간관으로 전개되었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제시한 마르크스는 19세기 이후 거의 모든 학문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마르크스의 사상적 배경은 19세기의 3대 지적 유산인 헤겔을 비롯한 독일의 관념철학, 스미스와 리카도의 영국  고전경제학 , 생시몽, 프리에, 오언의 프랑스 사회주의 사상이 근간을 이룬다. 마르크스는 이를 비판적으로 수용, 종합하여 <변증법적 유물론> <노동가치설>과 <잉여가치설> <계급투쟁론>과 <혁명론> 등으로 발전시켰다. 인류의 역사를 바꾼 한 권의 책인 <자본론>에서 계급갈등.인간소외.실업.빈곤.공황 등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을 부가시켰다.


p.   생철학

 생철학은 계몽철학의 주지주의와 헤겔의 이성주의적 관점을 비판하고, 인간의 의지를 중시한 반 이성주의적 철학사조다. 생철학자들은 생을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직관적이고 비합리적인 방법을 통하여 생의 의의.가치.본질을 파악하였다.


q.   실존주의

 실존주의는 반이성적 사조에 포함되는 윤리사상으로서 과학과 기술문명 속에 비인간화되어가는 현실을 고발하고, 잃어버린 자아의 각성과 회복을 강조한 철학이다. 실존주의의 선구자로는 키에르케고르를 들 수 있는데, 그는 불안과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고 참된 실존을 회복하기 위해, 신 앞에서 단독자로서 인간의 주체적 결단을 강조하였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20세기 철학의 한 주류인 생철학의 완성자요, 현대 실존철학의 창시자의 한 사람인 니체가 쓴 것으로, 서구사상의 중심이던 크리스트교를 부인하고, 새로운 사상과 질서를 창조하기 위해  권력의지, 영원회귀사상, 초인사상의 개념을 도입했다.


h.   실용주의

 한편 미국에서는 경험론의 전통을 계승하여 일상생활에의 유용성을 중시한 실용주의가 등장하였다. 대표적 사상가로는 퍼스, 제임스, 듀이 등이 있는데, 특히 듀이는 <철학의 재건>에서 일상생활 속에서 획득한 경험적 지식에 의해 미지의 세계를 실험하면서  도구적 실용주의를 강조하였다. 이 실용주의는 20세기 미국의 국가발전에 사상적 기초로 작용했다.


i.   현대의 사상

 현대사상의 두 주류는 다음과 같다. #1논리실증주의와 언어분석의 2가지를 주요분야로 하는 분석철학과 #2실존주의와 현상학의 2가지를 주요분야로 하는 유럽 대륙철학이다. 논리실증주의는 러셀과 그의 제자 비트겐슈타인이 개척한 분야로, 어떤 가치나 이념은 수학이나 물리학과 같은 과학적 영역에서 증명되지 않는 한 인정될 수 없다는 순수한 과학철학이다. 이러한 사상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사고>와 <철학적 성찰>에 잘 나타나 있다. 언어분석 운동은 무어와 비트겐슈타인의 산물인데, 무어는 다른 사람들의 주장을 검토하는 일, 즉 동시대인들의 잘못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일을 철학적으로 대중화했다. 

 1950∼60년대의 유럽 대륙철학은 현상학과 실존주의로 구별할 수 있지만 이 구분이 엄밀한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등은 두 사조에 모두 관여했던 철학자이다. 철학으로 전향한 독일의 수학자 후설은 현상학의 아버지로, 그의 현상학적 방법은 경험의 직접성을 강조하며 경험을 존재나 인과적 영향에 대한 모든 가정에서 떼어내어 그 실제적인 내재적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후설을

지지한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존재의 본질을 해명하고자 하였다. 그는 인간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언젠가는 죽음을 직시함으로써 비로소 본래적인 실존을 되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스승인 후설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특정문제에 관해서는 견해를 달리했던 프랑스 현상학의 대가인 메를로-퐁티는 <지각의 현상학>에서 인간의 신체와 지각에 근거하여, 타인의 앎을 설명하려는 이론을 제시했다.

 키에르케고르와 니체에 뿌리를 둔 유럽내륙의 실존주의는 2가지 주제, 즉 존재의 분석과 인간선택의 중심성에 대한 연구를 지향한다. 독일의 야스퍼스는 한계상황  속에서의 실존을 해명하고자 하였고, 인간상실을  파멸에 이르는 병  이라 규정지었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인간의 불안에 관심을 가지고 실존은 본질에 선행하며 실존은 주체성이라고 주장했다. 가다머는 현대해석학의 고전으로 불리는

<진리와 방법>에서 이전까지의 해석학이 감정이입의 방식을 통해 주관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비판하고 객관성의 원리를 담보하여 했다. 베르그송은 생명과 물질에 대한 실증적 사실을 토대로 하여, 존재하는 전체를 하나의 통일된 관점에서 파악하려 한 <창조적 진화>를 저술했다. 화이트헤드는 아주 폭넓고 일반적인 이해력을 바탕으로 세계를 조망하려 했고, 그의 이해력은 위대한 3부작 <과학과 현대세계> <과정과 실재> <관념의 모험>이 지향한 목표였다.

 이상의 철학분야 이외의 사상의 살펴보면 근대서구의 자본주의 정신을 예리하게 분석한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청교도 정신이 자본주의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였다. 케인즈는 1930년대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 공황을 극복케 하고 자본주의의 낙관론을 제시한 반면, 2차대전 후 새로운 보수주의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오스트리아의 경제학자 하이에크는 경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파멸을 자초할 것이라는 <예종에의 길>을 써서, 오늘날 경제에 대한 국가개입을 반대하는 신보수주의자들에게 고전이 되고 있다. 또한 슘페터는 소위 슘페터식 자본주의 붕괴론으로 알려진 <자본주위.사회주의.민주주의>에서 자본주의는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하고, 자본주의는 결국 사회주의를 후계자로 지목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대 미국의 도덕철학과 정치철학에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 롤스는 사회계약론을 보다 일반화시켜, 그 이론 속에 함축되어 있는 정의관의 중요한 구조적 특성을 밝혀냄으로써, 새로운 정의관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길을 <정의론>에서 열어놓았다. 현대 인류학에 지대한 영향을 남긴 레비-스트로스는 일종의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슬픈열대>에서 철학으로부터 인류학으로 이행한 저자의 지적 열정을 기술하고, 인간과 사회에 대한 제반문제에 대한 깊은 시사를 던져주고 있다. 루마니아 태생의 종교학자 엘리아데는 인간의 삶이 경험하는 두 차원, 즉 성속을 준거로 하여 문화를 재서술하고 있다. 1984년, AIDS의 희생자 푸코는 <광기의 역사> <말과 사물>등 초기의 그이 저작들에 관한 자신의 해설서인 <지식의 고고학>에서 역사서술의 시각, 주체의 문제 등 굵직한 문제를 다루었다. 그람시는 마르크스적 사회분석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가장 창의적인 저작으로 평가되는 <옥중수고>를 저술했고, 스위스의 아동심리학자인 피아제는, 프로이트가 성인의 심리를 연구한 반면 어린이의 심리를 연구하여  어린이의 프로이트 라 불린다. 그는 <아동지능의 근원>을 남겼다. 뒤르켐은 사회학의 고전인 <자살론>에서 자살이라는 사회현상을 공식적 통계에 입각해 검토하고, 자살이 사회적 결과임을 밝혔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을 발표하여, 뉴턴적인 3차원 공간이 아닌 4차원의 시공의 연속개념을 제시하여, 뉴턴보다 더 광범위한 우주현상을 설명했고, <부분과 전체>의 저자 하이젠베르크는 원자의 세계가 반드시 인과법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불확정성의 원리 를 제시했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프로이트는 인간의 무의식을 인간의 행위를 경정하는 주요한 요인으로 보면서, <꿈의 해석>에서 꿈의 해석을 무의식의 이해에 이르게 하는 왕도라고 하였다. 그의 제자인 융은 스승과 의견을 달리하여 <심리학과 종교>에서 종교를 심리학적으로 설명하려 했다. 미국의 쿤은 과학발전의 역사가 과학자들의 수세기에 걸친 연구업적의 단순한 누적이 아니라, 과학발전이 어느 한순간 혁명적으로 일어난다는 과학의 본질에 대한 혁명적 서술을 담고 있는 <과학혁명의 구조>를 저술했다. 또한 현대 환경의 위기에 대응하는 요나스의 윤리학적 대응이 <책임의 원리>에 잘 나타나 있다.  

 이상으로 서양사상의 흐름을 개괄적으로 조망해보았는데, 현대에 올수록 복잡다기하게 분기되고 있다. 여러 사상들이 통합될 전망은 없어 보인다. 과학적 기질과 형이상학적 기질은 여전히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으며, 실존주의의 주관성과 논리실증주의의 객관성은 아직도 경멸하면서 정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이 현대의 사상계에는 다양한 분열이 여전히 버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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