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君子之德風也 小人之德草也> 20150529


02-01 滕定公薨 世子謂然友曰 昔者 孟子嘗與我言於宋 於心終不忘 今也不幸 至於大 故 

        등정공훙 세자위연우왈  석자 맹자상여아언어송 어심종불망 금야불행 지어대 고

薨(훙)죽을, (횡)많을


吾欲使子問於孟子然後 行事

오욕사자문어맹자연후 행사


등문공이 사망하였다. 세자가 연우더러 “전날 맹자께서 송나라에서 나더러 하신 말씀을 나는 마음속에 새겨두고, 언제나 잊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불행히 아버님의 상사(喪事)를 당하였 으니 나는 그대를 보내어 맹자의 의견을 들은 후에 상례(喪禮)를 치를까 합니다.” 


02-02 然友之鄒 問於孟子 孟子曰 不亦善乎 親喪固所自盡也 曾子曰 生事之以禮 事葬之以禮 祭之以禮 可謂孝矣 

       연우지추 문어맹자 맹자왈 불역선호 친상고소자진야  증자왈 생사지이예 사장지이예 제지이예 가외효의

鄒(추)추나라


諸侯之禮 吾未之學也 雖然吾嘗聞之矣 三年之喪 齊疏之服 飦粥之食 自天子達於庶人 三代共之 

제후지예 오미지학야 수연오상문지의 삼년지상 제소지복  전죽지식 자천자달어서인 삼대공지

疏(소)소통할 /飦(전)죽 /粥(죽)죽


연우가 추나라로 가서 맹자에게 물은즉
“참으로 좋은 말씀입니다. 친상(親喪)에는 본래 제 힘자라는 대로 해야 합니다. 증자가 말하기를 “살아계실 때 예로서 섬기고 돌아가셨을 때 예로서 장사하고 예로서 제사를 모시면 효자라 할 수 있으리라” 하였는데, 제후의 예는 아직 배우지 못했으나, 그러나 전에 들은 이야기로는 3년상을 치러야 하고, 허술한 상복을 입어야 하고 미음을 먹어야 하는 것은 제왕으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하·은·주 삼대가 모두 그랬다는 것입니다.”



02-03 然友反命 定爲三年之喪 父兄百官 皆不欲曰 吾宗國魯先君 莫之行 吾先君亦莫之行也 

       연우반명 정위삼년지상 부형백관 개불욕왈 오종국노선군 막지행 오선군역막지행야



至於子之身而反之不可 且志曰喪祭從先祖 曰吾有所受之也 

지어자지신이반지불가 차지왈상제종선조 왈오유소수지야


연우가 돌아와서 복명한즉 3년상으로 결정하였다. 그러자 집안 어른들과 여러 벼 슬아치들이 모두 싫어하며 말하기를“우리 종주국인 노나라의 선군들께서도 그렇게 하지 않으셨고, 우리나라 선군들께 서도 또한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대의 때에 와서 이 법을 뒤집는 것은 잘못입 니다. 옛날 책에도 ‘장사나 제사는 선조가 하신 대로 하라.’하였습니다. 우리들은 그렇게 들은 바가 있어서 그럽니다.” 하니,



02-04 謂然友曰 吾他日未嘗學問 好馳馬試劍 今也父兄百官不我足也 恐其不能盡於大事 子爲我問孟子 

        위연우왈 오타일미상학문 호치마시험 금야부형백관불아족야 공기불능진어대사 자위아문맹자

馳(치)달릴


然友復之鄒 問孟子 孟子曰 然不可以他求者也 孔子曰 君薨 聽於冢宰 歠粥 面深墨 卽位而哭 百官有司 

연우부지추 문맹자 맹자왈 연불가이타구자야 공자왈 군훙 청어총재 철죽  면심묵 즉위이곡 백관유사

冢(총)무덤 /宰(재)재상 /冢宰 이조판서(吏曹判書) /歠(철)들이마실 /墨(묵)먹, (미)교활할 /卽(즉)곧

哭(곡)울


莫敢不哀 先之也 上有好者 下必有甚焉者矣 君子之德風也 小人之德草也 草上之風必偃 是在世子 

막감불애 선지야 상유호자 불필유심언자의 군자지청풍야 소인지청초야 초상지풍필언 시재세자

偃(언)쓰러질


세자는 연우더러 “나는 전에 학문은 하지 않고 말달리기나 칼부림만 좋아한 지라, 이제 집안어른이나 여러 벼슬아치들이 내 말을 시원찮게 여깁니다. 상례를 제 마음먹은 대로 치르지 못할까 저어하오니, 그대가 나를 위해서 맹자께 좀 물어 봐 주구려.”
연우가 다시 추나라로 가서 맹자께 물은즉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다른데서 구할 필요 없이 공자는 ‘군왕이 돌아가시면 그동안 정사는 총재가 보살피는 것이다. 세자는 죽을 마시며 얼굴은 검정 때 낀 그대로 자리에 앉아서 통곡을 하면 모든 벼슬아치나 심부름꾼들이 슬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남 먼저 그렇게 하는 까닭이니, 이는 위에서 좋아하는 일은 아래서는 보다 더 유난하기 때문이다. 군자의 덕은 바람이요 소인의 덕은 풀이니, 풀 위에 바람이 스치면 반드시 넘어지리라.’하셨으니 이는 세자께서 하시기에 달렸습 니다.”



02-05 沿友反命 世子曰然是誠在我 五月居廬 未有命戒 百官族人 可謂曰知 及至葬 四方 來觀之 顔色之戚 

        연우반명 세자왈연시성재아 오월거려 미유명계 백관족인 가위왈지 급지장 사방 래관지 안색지숙

廬(려)농막집


哭泣之哀 吊者大悅

곡읍지애 조자대열

泣울 읍, 바람 빠를 립(입), 원활하지 않을 삽 /吊(적)이를, (조)조상할 /悅(열)기쁠


연우가 돌아와서 그대로 아뢴즉, 세자가 말하기를 “그렇소. 정말 나 하기에 달렸소.” 하고 다섯 달 동안 풀집 속에서 살며 명령이나 훈계 같은 것을 내리는 일이 없었다. 여러 벼슬아치나 친척들이 ‘알기는 아는군’이라하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장례를 모실 때가 된즉 사방에서 모여와서 참관하였다. 얼굴빛이 초라해 지고 슬피 흐느껴 우는지라, 조문객들은 크게 만족하였다. 



- 준이생각 ; 등정공이 죽자 세자가 맹자에게 어떻게 상을 치러야 할지 물어 그리 시행하려 하니 신하들이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가 나오자 세자는 다시 연우를 보내어 맹자에게 방법을 물었다.그러자 맹자는 ‘군자의 덕은 바람과 같고, 소인의 덕은 풀과 같아서 바람이 불어 오면 풀이 반드시 눕는다’ 즉 윗 사람(세자)이 먼저 뜻을 세우고 행하면 아래 사람(관리들)은 자연히 따라 오게 된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세자는 상주로서의 예를 갖추자 모든 관리들과 친족들이 장례에 달려와 조문하는 모습을 보고 기뻐 하며 따랐다고 한다. 

    유교를 이야기 하면 항상 딸려 나오는 약점이 지나친 형식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삼년상을 치르고 움막에 거주하고 죽을 먹고 얼굴에 먹칠을 하고 정사를 모두 재상에게 맡기고...하지만 이 모든 형식의 바탕에는 인간의 정신에 대한 발전 가능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는 것을, 어쩌면 그렇기에 반면으로 인간의 정신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수도 있는지에 대한 두려움도 동시에 갖고 있었고 이 모두를 엄격한 형식(예)으로 지켜 나가려 했던 것인 아닌가 싶다. 

인간의 정신과 육체는 분명히 같이 간다는 점. 살면서 절절히 느끼고 있다. 해이한 정신은 흐트러진 몸가짐으로 그대로 나타난다. 어쩌면 유교에서 말하는 지나치게 복잡한 형식들에 대해서는 적당한 타협점을 찾아 가면서 오히려 현 시대에 맞는 새로운 예의 형식을 나름 만들어 가는 것도 어쩌면 새로운 길찾기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Music Today : http://www.dailymotion.com/video/xbix4y_am-i-that-easy-to-forget-jim-reeves_music

               “Am I That Easy To Forget” - Jim Ree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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