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050 – 성 (Das Schloss) /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
(출처 : 동서고전 200선 해제(반덕진, 가람기획))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적인 작가이자 20세기 최고의 문호의 한 사람인 카프카가 문이 굳게 닫혀 있는 성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헤매는 주인공 K를 통해 단순히 차별 받는 유태인의 현실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중사회 속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어가는 인간존재의 암울함을 고발하고 있다. 즉, 측량사로서 채용되기 위한 K의 노력은 오직 제자리를 맴돌 뿐 아무런 진전이 없다. 현대사회의 소외와 부조리를 통해서 인간존재의 참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대표적 현대소설이다.
a.생애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이자 20 세기 최고의 문호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카프카는 체코의 프라하에서 독일계 유태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럽의 진주 또는 황금의 도시 라고 불리어지는 프라하에도 유태인의 거주지인 게토 라는 어두운 뒷골목은 있었다. 거기서 카프카는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맨주먹으로 자수성가한 입지전적인 인물로, 얼굴이 못생기고 괴팍한 카프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모친인 유리에는 유태교 목사집안의 경건한 부인이었다. 동생 둘은 요절했고 세 명의 누이동생은 그보다 오래 생존했으나, 나치 독일에 의해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가스실에서 개처럼 학살되었다. 카프카는 서구화한 유태인이 흔히 그러하듯이 독일어로 교육을 받았고, 프라하 대학에 법률공부를 하며 후에 둘도 없는 친구이자 카프카 전집의 편집자가 된 막스 브로트와 친교를 맺게 된다. 졸업 후 노동재해보험회사에 취직하여 창작과 근무의 이중생활을 계속했다. 1908--1916년까지 여기에 근무하면서 대부분의 작품을 쓸 수 있었는데, (성)을 낳은 12페이지의 스케치인 (마을에서의 시련), 그리고 (성)과 함께 미완성의 3부작으로 되어버린 (심판) (아메리카), 또는 단편소설 (사형선고) (관찰) (소송) (변신) (유형지) (시골의사) 등이다.
1912--17년 사이에 그는 베를린 출신의 M. J라는 여자와 두번이나 약혼했다가 두 번 다 취소했다. 그 후에 있었던 다른 소녀와의 약혼도 얼마 가지 않아 또다시 취소되었다. 그는 또 다른 여성과 일시적인 관계를 맺었다고 하지만 그 여성들은 아무도 그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마지막 베를린 시절에 그는 도라 디맨트라는 유대교의 네덜란드 여자와 행복한 관계에 있었다. 그는 그녀와 결혼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의 부친인 목사가 카프카가 정통적인 유태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들의 결혼을 금했던 것이다. 1차세계대전 후의 가난으로 점점 심해진 폐결핵 때문에 1917년에 직장을 그만두고 전지요양을 했으나, 병세가 회복되기 어렵게 되자 1923년에 나머지 짧은 여생을 창작에 전념하고자 베를린으로 갔다. 그러나 병세는 점점 악화되어 비엔나 교외의 요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b.작품세계
단테나 스위프트가 그랬던 것처럼 그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생애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곧 그의 생애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의 작품을 이해할 수 없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셰익스피어나 괴테와 성격을 달리하고 있으며 작가론에서는 오히려 그의 생애에 대한 고찰이 많은 지면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이 작품을 집필하던 당시에 작가가 처해 있던 개인적 사회적 상황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외모가 추하고 성격이 원만하지 못해 부친으로부터 받은 그에 대한 몰이해는 평생 동안 그를 괴롭혔고, 가장 가까운 것이 오히려 단절을 심각하게 할 뿐인 상황 이라고 말한 마르트 로베트 부인의 말마따나 그는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숙명적인 이방인 같은 상태에서 일찌감치 정신병에 걸려버렸다. 그리하여 어려서부터 고독감 불만감 억압감 같은 악감정에 시달리며 조숙 또는 민감해졌고, 드디어는 폐병에 걸려 고향과 가족과의 관계를 끊고 전지요양에 들어간다. 흔히 키에르케고르와 카프카를 정신적 쌍둥이 라 하는데, 그들의 운명 성격 고독 불운 그리고 인생이나 문학에 대한 관념이 너무도 흡사하기 때문이리라. 그는 이미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중환자였다. 그는 막다른 상황에서의 돌파구로 결혼과 유부녀 어린 소녀와의 연애를 시도해보았으나 번번히 실패했다.
거기다가 사회적으로 유태인에 대한 심각한 차별대우는 그의 마음을 더욱 어둡게 했다. 당시 체코 거주 유태인들은 타고난 근면성으로 부를 축적, 프라하의 상류사회로 진출하지만, 체코 인들은 그들이 체코 어를 쓰지 않고 독일어를 쓰는 데 비해 은혜를 모르는 배신자로 늘 적대시했고, 또 독일인들은 유태인들이 독일의 문화와 사회에 기생하는 부류라고 생각해 업신여겨왔다. 그러고 보면 그는 살아 있는 동안 고독은 아예 그의 일부였다. 성자들이 신앙 속에서 살듯이 그는 고독 속에서 살았고 드디어는 자기 작품만을 위해 자기 작품만을 먹고 살아가는 설화적인 동물의 생태를 가지게 되었고, 프루스트처럼 산 채로 그 속에 묻혔다. 단테가 14세기에 그랬듯이 카프카는 20세기를 철저히 체험한 작가였다.
c.작품의 주요내용
어느 겨울 흰눈이 내리는 날 밤에 K로 불리는 주인공은 한 마을에 도착한다. 측량사로서 성에 초빙을 받았다고 주장하지만 성에서도, 그리고 성의 지배를 받는 마을에서도 측량사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단지 K가 성에 도전한 투쟁이 받아들여진 것만은 확실하고 K는 마을에 머물러도 좋다는 허락을 받는다. 다음 날부터 성에 도달하려는 K의 온갖 노력이 시작되지만 실패로 돌아간다. 예를 들면 성으로 가는 길이 성에서 멀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혀 가까워지는 것도 아니다. 그 K에게 성으로부터 두 사람의 조수가 파견된다. 그러나 조수란 이름 뿐이고 어리석은 수작을 부리는 감시원에 지나지 않는다. K가 호의를 갖고 희망을 걸어보는 성의 사자 바르나바스는 사실인즉 마을사람들로부터 인간취급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다.
K는 성의 관리 클람이 있는 술집 신사장에서 프리다를 애인으로 삼지만, 직속상관인 면장으로부터 이상스런 성의 지배 방식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결국 국민학교의 사환직을 얻는다. 신사장의 앞뜰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클람과 담판하려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다음, 다른 조수들과 함께 프리다를 데리고 학교 건물로 이사온 K가 교원들과 소동을 일으키는가 하면, 조수와 프리다의 관계에 의심쩍은 점이 있어서 무능한 조수 두 사람을 해고해버린다. K는 바라나바스의 집에 가서 자매인 아말리아가 성의 관리로부터 사랑을 강요당해 이를 거절했기 때문에 그 집안이 몰락의 비운에 처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자 그 사이에 프리다가 K를 배신하고 조수 한 사람과 신사장으로 거처를 옮겨 버린다. 그날 밤 K는 성의 어느 관리로부터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는데, 잘못해서 비서 뷔르거의 방으로 들어갔을 뿐더러 피로한 나머지 이 비서가 도와주겠다는 제의까지도 놓쳐버린다. 이처첨 미완으로 끝나는 이 소설은 브로트가 말하는 바에 의하여 주인공 K가 기진맥진하여 죽는 그 순간, 성으로부터 정식으로 마을에 거주하는 것은 안되지만 이 마을에서 잠정적으로 일하며 사는 것만은 허가해주겠다는 결정서를 전달되게 되었다고 한다.
d.감상 및 문학사적 의의
이 작품의 무대가 된 프라하의 오세크 성(현재는 정신병원으로 쓰이고 있음)은 카프카의 선조들이 살았던 곳으로 어린 시절 카프카가 아버지를 따라 몇 번 찾아왔던 곳이며, 훗날 유태인으로서 어느 나라에서도 환영 받지 못하는 슬픈 현실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 (성)인 듯싶다. 여기에서 카프카는 굳게 문이 닫혀 있는 성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헤매는 주인공 K를 통해 단순히 유태인의 현실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중사회 속에서 철저히 소외되어가는 인간존재의 암울함을 고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와 같은 집단의 억압과 횡포에 대해 항거하면서 인간성 회복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이 소설을 발표시킨 브로트에 의하면 주인공 K가 임종할 때에야 비로소 성에서는 비록 그에게 정식으로 권리를 인정해주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저 마을에서 살고 일해도 좋다는 정도의 허락을 내리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막스 브로트는 성을 신의 은총 내지 고귀한 지혜의 상징으로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어떤 이들은 성에 도달하려던 K의 노력을 곧 인간계(마을) 밖을, 절대의 세계를 구하려는 노력으로 간주하는 동시에 그의 편력은 (지옥계) (연옥계) (천국계)를 거친 단테의 편력에 비교하기도 한다. 그리고 끝내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게 된 K의 숙명적인 좌절상태는 실제로 괴로움을 참을 수 밖에 달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막다른 세계에 있어서의 인간의 조건에 해당되면서, 단테의 (신곡)에서 고뇌하는 인간의 그것에 비교하기도 한다.
그리고 카프카 자신이면서 (성)의 주인공인 K의 존재상태는 카프카가 약혼자의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 있는 다음과 같은 몇 마디 말 속에 잘 요약되어 있다. 저는 저의 가족 속에서 이방인처럼 아주 낯설게 살고 있습니다. 저는 저의 아버지에게 인사말 외의 다른 말을 해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누이들과는 절대로 대화를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도널드 피어스가 말했듯이 단테의 (신곡)이 하나의 탐구서였다면 카프카의 (성)도 하나의 탐구서다. 단테가 (신곡)에서 그의 시대와 인간조건을 요약해놓았다면, 카프카는 (성)에서 20세기와 20세기의 인간조건을 요약해놓고 있다. (성)은 곧 카프카의 (신곡)이다.
사실 카프카는 생존시 무명의 작가였다. (성)도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우선 프랑스에서 그 진가가 인정되고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로 세계 각국의 문학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가 유명하게 된 것은 그의 사후 20여 년이 지나서였다. 그의 유고도 카프카의 유언에 따라 불태워질 운명이었으나, 막스 브로트의 극성스런 노력으로 오늘날 카프카의 붐이 일어나게 된 것이었다.
이 작품은 종교적으로, 그리고 철학적으로 또는 순수 문학적으로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점점 브로트와 같은 종교적인 해석보다는 개별적 비유적인 요소에 구애 받지 않는 문학적 해석이 유력해지고 있다. 따라서 발표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 작품의 영향을 말한다는 것은 시기상조인 듯한 감이 있으나, 종교적인 면에서는 단테와 비유되고 철학적인 면에서는 실존주의로 해석되며 방법론상의 비유의 문제는 특이하고도 완벽한 상징주의로 해석되고 있다. (이방인)을 쓴 카뮈가 그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작가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 대해서는 아직 많은 논란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현시점에서 실제로 카프카 내지 (성)에 대한 해석이 종교적으로, 철학적으로, 문학적으로 완전히 이루어질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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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Franz Kafka
생몰년
1883년 07월 03일 ~ 1924년 06월 03일
국적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현 체코)
출신지
프라하
나는 문학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문학으로 만들어져 있다.[1]
1. 개요
2. 일생
2.1. 유년기
2.2. 작품 활동
2.3. 죽음
3. 사후
4. 작품 목록
5. 여담
6. 각종 매체에서의 카프카
6.1. 오규원의 시
1. 개요[편집]
독어권의 대문호.[2] 빈센트 반 고흐와 같이 예술적 감각이 시대를 앞서간 천재 중의 천재로 평가된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현 체코 지역에서 태어나 독일어를 썼던 유대인 소설가라는 꽤 복잡한 출생 배경을 지니고 있다고는 하나 이건 오늘날 현대인 시점에서 바라본 관점이며 체코 또는 보헤미아 지역에는 혈통이 게르만이든 슬라브든 독일어 화자가 매우 많았다.[3] 물론, 이들은 유대인이면서 체코어를 할 줄아는 체코(보헤미아)인이고 독일어를 제 1 언어로 사용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인이였기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상당히 고민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배경은 카프카 특유의 사회적 소외감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2. 일생[편집]
2.1. 유년기[편집]
1883년, 카프카는 프라하에서 부유한 상인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4](Hermann Kafka, 1852~1931)는 자수성가한 유대인 상인이었고, 어릴 적부터 병약하고 감성적이었던 프란츠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걸핏하면 프란츠에게 고함을 질렀고 마구 때리며 키웠는데, 이는 프란츠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게 된다.[5] 헤르만이 이런 식으로 아들을 기른 것은, 현실적으로 열심히 노력하여 출세한 자신과는 프란츠가 매우 달랐는데다가, 세 아들 중 두 명이 일찍 죽고 남은 프란츠에게 건 기대가 크기도 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에 아버지는 아들을 보통 사람들이 다녔던 체코어를 쓰는 학교 대신, 당시 지배층이 주로 사용했던 독일어[6]를 사용하는 학교에 보냈다. 카프카가 독일어로 소설을 쓴 배경이 여기에 있다.
2.2. 작품 활동[편집]
프라하에 보존된 생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카프카는 프라하에서 태어나 프라하에서 학교를 다니고, 프라하에서 직장 생활을 했으며 죽어서도 프라하에 묻힌 '프라하 토박이'였다. 어릴 때부터 병약했지만 독서를 즐겼으며,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학을 전공하고 노동 보험 공단에서 일하게 된다. 그의 창작 활동을 배려하지 않고 수시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던 가족들이 모두 잠든 밤에 글을 쓰는 등 틈틈히 저작 활동을 이어가 영감을 받고 하룻밤 만에 변신을 완성하기도 한다. 말이 적었지만 불친절한 성격은 아니어서 직장에서 성실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재정적으로 곤란한 사람이 있으면 도와주고 가난한 노동자들에겐 종종 친절과 선의를 베풀었다. 실제로 노동자 실태 파악을 위해 출장을 다니고, 노동 조건 개선 등에 힘쓰기도 했다. 이 밖에도 인형을 잃어버려 울고 있던 이웃집 소녀를 위해, 여행을 떠난 인형이 쓴 편지라며 자기가 쓴 편지를 주었다는 일화도 있다.[7]
생전에는 유명하지 않았지만 평생 전업 작가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직장 생활과 창작을 병행하기도 했는데, 글은 돈벌이나 인기몰이 대신 사람과 예술을 위해서만 써야 한단 신념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는 주장도 있지만, 오히려 별도로 생업에 종사하면서 힘겹게 작가의 꿈을 이어갔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실제로 카프카는 글만 쓰며 사는 삶을 모색했다는 기록이 있다. 1914년 7월 펠리체 바우어와 파혼을 한 뒤, 친구와 함께 덴마크에서 휴가를 보내는 동안 부모님께 편지를 썼는데 프라하를 떠나 독일에서 전업 작가로 활동하려는 자신의 계획에 대한 의향을 묻는 편지였다. 그러나 편지는 전달되지 않았고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노동 보험 공단은 박봉이었지만 소외된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다는 보람과 오전 8시부터 오후 2시까지인 짧은 근무 시간 때문에 그럭저럭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기업의 이의 제기에 대한 반박문 작성, 보험 회사 홍보나 기업 변호를 주로 맡았다. 2시쯤 퇴근하고 귀가한 후 3시부터 7시 반까지 잠을 자고, 밤 11시경부터 3시간쯤 글을 쓰다가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하루에 두 번 잠을 잤다는 말.
아인슈타인 평전에 따르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체코를 방문했을 때, 한 유대인 문화 예술 모임에서 프란츠를 만났다고 하는데 무슨 대화를 주고 받았는지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생전 카프카가 무명에 가까운 작가였다고 생각하면, 꽤 기적적인 세기의 명사들의 만남인 셈.
카프카는 펠리체 바우어(1887~1960)란 여성과 약혼과 파혼을 반복하다가 결국 완전히 헤어지고 만다. 이후 다른 여자들과 여러번 연애를 하나 결국 결혼하지는 못했다. 바우어 역시 미국으로 건너가서 다른 남자와 결혼하지만 가난에 시달리는데, 카프카가 죽은 후 그가 세계적인 작가가 되자 궁핍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와 주고 받았던 연애 편지를 모두 공개해 출판했다. 하지만 그에 따라 그녀는 비난까지 덩달아 받았고 생각보단 큰 돈을 받지 못했기에 결국 그녀는 비참하게 살다가 미국에서 죽었다.
훗날 카뮈와 사르트르에게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추앙받기도 하고 관련 논문이 쏟아질 정도로 유명해졌지만[8], 시대를 너무 앞서간 탓인지 생전에는 전혀 알려지지 못했다. 애초에 본인이 발표한 작품이 몇 편 없기도 했고. <변신>, <유형지에서>, <성>, <실종자>, <시골 의사> 등 걸작들이 가득했으나 그 중 출판된 단편은 극소수였고, 몇몇 평론가들이 소설을 호평하기도 했지만 말 그대로 호평 수준에서 끝났을 뿐 그의 작품을 깊숙히 탐구하기엔 너무나 부족했다. 그나마 받았던 호평도 시간에 묻혀 잊혀졌다.
그의 장편 소설들은 전부 미완이다. 스스로 상당수 작품을 찢거나 불태웠기 때문이다. 심지어 길거리에서 자신의 글을 갈기갈기 찢어 휘날리면서 미치도록 웃다가 경찰들에게 끌려간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럴 때마다 아버지는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키려고 했지만 의사가 입원이 아닌 안정이 필요할 뿐이라고 하여 강제 입원은 면했다고 한다.
2.3. 죽음[편집]
신경쇠약으로 발작까지 일으키던 카프카는 1924년 6월 3일 폐결핵으로 요절했다. 그를 평생 괴롭혔던 아버지는 아들보다 7년이나 더 살았다. 카프카는 죽을 때까지 아버지의 억압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아버지란 지위의 폭력성이 언급될 때 자주 거론되기도 한다.[9] 소설 대부분의 절망이 아버지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석하는 이론도 있으며, <심판>(Prozess) 같은 소설은 대놓고 억압적이었던 자신의 아버지를 그대로 투영했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여동생들은 나치 정권의 광기를 피하지 못한 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가스실에서 생을 마감하고 만다.
카프카는 숨을 거두며 친구였던 막스 브로트[10]에게 자신의 모든 원고를 불태워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그 소설들의 가치를 알고 있었던 브로트는 유언을 어기고 원고를 모두 보존해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재출판했다. 현재 프라하 성의 황금 소로에 있는 그의 작업실은 서점이 되어 있고 그 곳에서 집필한 <시골 의사> 등을 구입할 수 있다. 카렐교 근처에는 카프카 박물관도 있다.
물론 처음에 출간된 장편들도 성한 모습은 아니었다. 친구였던 막스 브로트가 친필 원고를 독점하고 있었기에 초기 판본들은 원문을 브로트가 편집한 형태로 나왔다. 브로트의 말로는 카프카와 나누었던 논의를 더듬어서 수정했다고 하지만 학자들이 신빙성과 적합성을 항상 의심했다. 브로트의 사후 원고는 1961년 유족들에게 넘겨졌고, 다음 해에 원고 실소유자인 여조카 마리안네 슈타이너의 요구대로 영국 독문학자인 M. 패슬리의 중재 하에 옥스퍼드대학 보들리언 도서관에 보존되었다. 패슬리가 이 원고들을 토대로 브로트의 편집본이 아닌 순수한 원고를 토대로 책을 간행한 것은 1982년부터의 일이었다.
아무튼 브로트에게 작품 일부가 간 것이 행운인 셈. 카프카는 <성>, <소송>,(혹은 심판이라는 제목으로도 출판되어 있다) <실종자>(아메리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가 고쳤다.) 등 총 3편의 장편을 썼으나, <소송>의 경우, 결말은 썼지만 부분적으로 미완, <성>과 <실종자>의 경우 결말이 없다. 그리고 특이한 것이, 이 3편 중 <성>, <소송>의 주인공의 이름이 K이며, <실종자>에서는 카알 로스만(Karl Roßmann)이라는 이름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이는 훗날 작가들의 패러디 소재가 되기도 한다. 장편들이 모두 미완이기는 하지만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 평론가들은, 완성되지 않았기에 오히려 완벽한 작품으로 카프카의 장편들을 꼽는다.
3. 사후[편집]
카프카는 몽상가였고, 그의 작품들은 꿈처럼 형상화되어 있다. 그의 작품들은 비논리적이고 답답한 꿈의 바보짓을 정확히 흉내냄으로써 생의 기괴한 그림자 놀이를 비웃고 있다. 그러나 만일 그 웃음이, 비애의 그 웃음이 우리가 가진, 우리에게 남아 있는 최상의 것임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카프카의 이러한 응시의 결과물들이 세계 문학이 낳은 가장 읽을 만한 작품들로 평가하게 될 것이다.
- 토마스 만
카프카의 소설은 실존주의자들에 의해 재발견되었다. 프랑스의 지성 사르트르도 극찬했고 <백년동안의 고독>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마르케스는 변신을 읽고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카프카의 인생과 문학관에서 소재를 따온 장편 <해변의 카프카>를 쓰기도 했고 이 작품은 체코에서 프란츠 카프카 상을 받았다. 현대 문학의 최고봉 중 한 명이라고 불리오는 밀란 쿤데라도 그의 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카프카에게서 따온 소재를 자주 언급하기도 했다.
카프카에 대한 연구는 국적을 기준으로 할 경우에는(사실 이것도 현대의 국가를 소급할 경우에) '체코 문학'의 세부 분야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하는데 독문학에서 주로 다루고 있다. 독일에서 출판된 <독일 문학사>에도 독일 작가로 기술이 되어 있다. 사실 이는 당연한 것인데, 기본적으로 작가론 연구에서는 그 작가가 사용한 언어를 기준으로 문학을 분류하기 때문이다. 독일어로 쓰였는데 어떻게 체코어 문학으로 간주하겠는가?[11] 실제로 카프카는 보헤미아 출신이지만 프라하 이주 후 독일계 김나지움(인문계 중고등학교)과 독일계 대학을 나왔다. 게다가 당시 체코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속국이었으므로 독일 문화권에서 자랐다고 할 수 있다.[12] 하지만 독일 국적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므로 '독일 작가'라고 표현하는 것보다는 '독일어권 작가'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한편 체코에서는 지금도 체코 작가로 여겨야 할 것인가 독일 작가로 여겨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많다. 유대인인데다가 독일어로 작품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비유하자면, 그는 중국계 한국인 작가로서 서울에서 일본어 작품을 남긴 것과 마찬가지인 셈.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온갖 유럽 민족이 섞인 국가였던 탓이기도 했지만. 한 술 더 떠 이스라엘에서는 유태인이니까 이스라엘 작가라고 주장하는데 이건 해외에서 무시당하고 있다.
그러나 브로트와 사귀던 여성 에스터 호페(1906~2007)와 이스라엘이 브로트가 공개하지 않은 카프카의 여러 유품 및 친필 원고의 소유권을 서로 주장하여 국제적인 논쟁이 된 바 있다. 1988년 소더비 경매에서 198만 달러라는 거액으로 (위에 나오듯이 심판이란 제목으로도 알려진)<소송> 친필 원고는 독일 현대 문학 박물관이 구입하여 소장하게 되자 이스라엘은 인정하지 않아서 독일과 논란을 빚기도 했다. 낯짝 참 두껍네 텔 아비브 도서관장 다비드 블룸버그는 유대인들의 자랑인 카프카의 자료는 이스라엘이 소장하는 게 옳다는 말을 하다가 당시 뉴욕 도서관장에게 개소리라며 카프카 본인이 그런 유서라도 남겼냐고 까이기도 했다. 이스라엘은 브로트가 이스라엘에 카프카의 모든 것을 기부한다고 했다고 주장하지만 호페는 생전 브로트의 유서를 공개하며 자신에게 상속권을 넘겼다고 반론했다. 호페가 죽고 나서 호페의 딸들이 계속 주장하던 와중인 2012년 10월, 이스라엘 법원은 카프카의 모든 유품은 이스라엘이 가져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으나 호페의 유족들은 항소하며 계속 맞서고 있다. 당연하지만 세계 곳곳으로 퍼진 유품을 소장한 측도 어이가 없다면서 개무시하고 있다.
영국의 작가 윌 셀프는 데일리 미러 지에서 "이스라엘이 카프카를 시오니즘의 성자로 둔갑시키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카프카 본인이 본다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분노하고도 남을 일이다."라고 말하며 카프카를 자국의 작가라고 주장하는 이스라엘의 행태를 비판했다.
이스라엘은, 소설 어디에서도 유태인 찬양과 관련된 것은 절대 보이지 않는 소설들을 썼던 카프카를 오로지 유대인이라는 출신을 이유로 그를 시오니즘 성자로 만든다는 국제적 비난과 비웃음과 외면을 당하고 있으며, 그를 이스라엘 작가로 간주하는 국가는 오로지 이스라엘 뿐이다. 국제 정치에서 이스라엘과 적대적 관계에 놓여 있는 대다수의 중동 아랍 국가들도 죽은 사람의 국적을 위조하는 것이냐고 비난하며, 친이스라엘 국가로 유명한 미국도 이러한 주장은 무시하니 시오니스트들의 독자적 주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4. 작품 목록[편집]
장편소설
심판(Der Prozess)
성(Das Schloss)
아메리카(Amerika)
중/단편소설 및 기타 작품
변신(Die Verwandlung)
유형지에서(In der Strafkolonie)
시골의사(Ein Landarzt)
학술원에의 보고(Ein Bericht für eine Akademie)
굴(Der Bau)
법 앞에서(Vor dem Gesetz)
판결(선고)(Das Urteil)
단식 광대 (Ein Hungerkünstler)
작은 우화(Kleine Fabel)
돌연한 출발(Der Aufbruch)
인디언이 되려는 소망(Wunsh, Indianer zu werden)
승객(Der Fahrgast)
회랑 관람석에서(Auf der Galerie)
황제의 전갈(Eine kaiserliche Botschaft)
화부
선고
추가바람
5. 여담[편집]
피터 드러커에 따르면 카프카가 노동자용 안전모를 만들었으며, 당시 노동 보험 공단에서 일하던 카프카는 이 일로 1912년에 미국 안전 협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했다.
체코 출신의 또 다른 유명 소설가인 밀란 쿤데라도 카프카처럼 체코어가 아닌 다른 언어(프랑스어)로 소설을 썼다는 공통점이 있다. 단, 카프카는 체코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체코어가 모국어가 아니었고, 그에 반해 쿤데라는 체코어를 성인이 되었을 때까지도 모국어로 사용했다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사실 쿤데라는 처음에는 체코어로 소설을 썼었으나, 1970년 이후부터는 그의 책의 출판이 금지되었고,[13] 1975년 프랑스로 망명한 이후 줄곧 프랑스어로 집필하고 있다. 외국에서 번역할 때에도 프랑스어판을 원본으로 여긴다. 그렇게 체코어의 명성은 더욱 어둠 속으로...
'카프카'라는 성씨의 본 의미는 '검은 까마귀'를 뜻하는 체코어 단어인 Kavka인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Kafka와 거의 같은 발음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kavka가 가리키는 것은 일반적인 까마귀 보다는 작으며 비둘기 정도의 크기인, 목 부분이 회색으로 칠해진 까마귀의 일종으로, 프라하에서 서울에서 비둘기 보기가 쉽듯이 많이 볼 수 있다고 한다. 이 성씨는 당시 카프카가 유대계의 독일어 구사자라는 상황 속에서도 체코 지역에서 별 차별 없이 사는 데 도움이 되었던 존재로 추측되기도 한다. 이 이름은 프란츠 카프카의 명성 때문인지 다양한 곳에 적용되는 이름이기도 하며, 예를 들어 만화가 이우일은 고양이에게 이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
6. 각종 매체에서의 카프카[편집]
1992년 스티븐 소더버그에 의하여 영화 『카프카』가 만들어진 적이 있다. 주인공이 카프카(제러미 아이언스가 연기했다)이긴 하지만 줄거리는 카프카 소설들의 소재로 꾸며진 허구의 내용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내 주요 인물인 에드몽 웰즈의 외모가 카프카를 닮았다고 표현된다.
바이오하자드 레벌레이션스 2 에서 카프카의 격언이 자주 인용된다.
미국의 현대음악 작곡가 필립 글래스는 <변신>을 모티브로 피아노 곡을 썼고, <유형지에서>와 <소송>을 오페라로 작곡했다.
일본의 만화 도쿄 구울에서 카프카의 작품들이 인용되며 에토는 타카츠키 센으로서 데뷔할 때 쓴 책의 타이틀이《친애하는 카프카》였다.
6.1. 오규원의 시[편집]
제목은 카프카, 내용 자체는 여러 가지 의미로 파격적인 시이다. 공식적으로는 1987년 오규원이 출판한 시집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에 처음 수록되었다.
――― MENU ―――
샤를르 보들레르 800원
칼 샌드버그 800원
프란츠 카프카 800원
이브 본느프와 1000원
에리카 종 1000원
가스통 바슐라르 1200원
이하브 핫산 1200원
제레미 리프킨 1200원
위르겐 하버마스 1200원
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와 앉아
커피를 마신다
제일 값싼
프란츠 카프카
애초에 내로라하는 저술가들의 이름에다 가격을 매기고 그것을 메뉴마냥 나열했다는 것만 하더라도 충격적인데 그들 중에서도 특히 문학가들은 싸구려로 취급되는 데서 이 시는 문학이 현대에서 얼마나 찬밥을 받고 있는가를 표현하고 있다. 시를 공부하겠다는 제자를 '미친 제자'로 표현한 것도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프렌치 카페 값싸도 많이 팔리는 게 안팔리는 것 보다는 나을 지도
[1] 필적감정사가 카프카의 엽서를 보고 필적의 주인공은 문학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 말에 대한 카프카의 대답.
[2] 독일어를 모국어로 하는 유대계 체코인...이라고 보기보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인이라고 보는게 옳다.
[3] 실제로 나치 독일이 체코를 병합할때 내세운 명분이 바로 이 보헤미아 지역이 속한 주데텐란트 때문이였다.
[4] 그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그는 야코프 카프카(Jacob Kafka)라는 축산업자의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적부터 매우 가난한 삶을 살았다. 원래는 체코어를 모어로 사용했으나, 유대인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독일어를 학습하여 사용한다. 병역을 끝마친 그는 프라하로 이주했고, 이후 율리 뢰비(Julie Löwy)라는 부유한 여인을 만나 결혼했다. 아내의 자산을 바탕으로 그는 사업을 시작했고, 그의 가게는 곧 번성하여 그의 가정 역시 부유해졌다.
[5] 때문에 문학사에서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라고 그러면 헤르만 카프카가 자주 언급된다.
[6] 프라하의 약 10퍼센트 정도의 지배 계층만 사용했다고 한다.
[7] <카프카와 인형의 여행>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키다리 아저씨
[8] 수잔 손탁은 이런 상황에 대해 카프카가 집단적으로 폭행당하고 있다고 대놓고 깠다.
[9]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를 보면 양육 방식부터 시작해서 원망이 가득하다.
[10] Max Brod, 1884~1968. 이스라엘 건국을 도우면서 시오니즘 찬양과 팔레스타인 학살을 찬양하는 글을 쓰면서 이스라엘 바깥에서 매장당하고 오로지 친구였던 카프카의 소설을 발굴하여 알린 사람으로만 알려졌다. 노엄 촘스키는 나치에게 당한 유태인이 나중에 팔레스타인에서 나치처럼 구는 경우로 브로트를 언급하기도 했다.
[11] 러시아 출신 작가 나보코프의 <롤리타>가 노문학이 아닌 영문학으로 분류되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12] 보헤미아가 오래 전부터 신성 로마 제국의 부속 왕국으로 있었던 만큼 독일 문화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더군다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붕괴 이후에도 1945년까지 주데텐란트는 독일계 주민들이 집중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체코의 일부 지역은 독일어권 지역이었다.
[13] 이후 22년만인 2006년, 체코에서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다시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