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37 – 존재와 시간 (Sein und Zeit, Being and Time) /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하이데거는 20세기 독일이 낳은 세계적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보통 실존철학으로 분류되는데, 그의 실존주의 사상은 철학은 물론 불트만이나 틸리히의 신학, 빈스방거로 대표되는 실존적 정신분석학에까지도 영향을 끼쳤다. (존재와 시간)은 하이데거의 주저로서 존재일반에 관한 탐구를 목적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존재일반을 탐구하는 존재는 인간뿐이기에 인간존재에 대한 탐구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a. 생애와 작품활동
독일의 대표적인 무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독일의 바덴 주에서 출생하여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공부하고 동대학의 교수, 총장을 역임하였다. 처음에는 리케르트의 가치철학, 후에는 후설의 현상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 딜타이의 생의 철학 등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현존재를 현상학적으로 해석하여 기초적 존재론을 확립하려고 하는 등 독자적인 철학체계를 지녔다.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리케르트 교수 밑에서 수학하여, 1914년 (심리주의에 있어서의 판단론)으로 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은 논리학 내지 논리적인 것은 심리적인 곳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며, 논리적인 것을 심리적인 것으로 기초 삼으려는 심리주의를 배격하는 내용이다. 1915년에는 강의허가를 취득하였고, 다음해에 리케르트의 후임으로 후설이 온 것을 그는 진심으로 환영했다. 왜냐하면 그는 대학재학시절 그의 (논리연구)를 읽어서, 그한테서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1919-1923년의 4년 동안 후설의 조교로서 많은 영향을 받고, 23년 마르부르크 대학에 부임하여 하르트만, 불트 등과 친교를 가지면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그리고 현상학을 강의 했다. 1929년 그는 후설의 후임으로 모교로 돌아와 33년에 총장직을 맡았는데, 총장취임사에서 나치즘을 열렬히 옹호하는 한편, 자기의 철학으로 나치즘의 정치적 언어를 정당화하려 하였다. 그러나 10개월 후 자신의 실수를 깨닫는다. 이로 인해 총장직을 사임하고, 다시 조용한 사색의 생활로 돌아왔다. 총장의 취임강연인 (독일대학의 자기 주장) 때문에 제2차대전후 연합군측의 종용으로 교단에서 물러났다가, 51년에 복직되었다. 1966년 9월 하이데거는 자신이 사망한 다음 5일 후에 공개하는 것을 조건으로. 30년 이상 그에게 가해진 비난에 대해 (슈피겔) 지와 회견한 바 있는데, 조건대로 그가 사망한 후인 1976년 공개된 회견문에서 하이데거는 대학의 자율권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타협했던 것 이라고 자신의 입장을 해명했다. 동시에 나치즘에서 모종의 참신함, 새로운 새벽의 가능성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다. 1933년 그는 학생들에게 어떠한 종류의 사상이나 정치적 견해일지라도 그대들의 존재의 지배자로 삼지 말라, 오직 총통 그 자신만이 독일 현실의 현재이자 미래이며, 또 법칙이라고 호소한 바 있다. 그러나 회견문에서 그는 오늘날 나는 더 이상 인용된 것과 같은 견해를 말하고 있지 않으며, 이미 1934년경부터 그러한 의견을 피력한 바 없다 라고 변명하고 있다. 퇴직 후에도 수년 동안 강의와 세미나를 계속하다가 슈바르츠말트의 한적한 산장에서 사색과 저술에 전념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b. 시대적 상황과 실존철학
시대적 상황 : 1910 - 20년대는 1차대전으로 인해 혼란의 열풍이 온 유럽에 밀어닥쳐 사람들은 종말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의 여파로 1918년에는 독일혁명이 일어나 독일제국이 붕괴되고, 바야흐로 바이마르 헌정에 의한 독일공화국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이러한 해체와 불안의 소용돌이에서 지주 잃은 인간존재에게 인간문화를 가장 깊은 뿌리에서 떠받치고 있는 철학은 무엇인가를 결의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무엇인가를 속 시원히 토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에 호소하여 치유되기에는 인간은 너무나 병들어 있었다. 삶의 즐거움이 전적으로 후퇴해버린 인간에게 소생의욕을 불러일으킬 유일한 길은 지적인 것에 선행하는 오직 구체적 생의 사실성과 현실성에 대한 모색이었다.
실존 철학 : 실존철학이란 이러한 불안과 절망, 자기상실, 소유의 역전 등을 극복하고, 인간이 부단한 자기초월에 의해 본래적인 자기를 되찾으려는 자기회복의 철학이다. 다시 말하면 실존주의란 과학과 기술문명 속에 매몰되어 비인간화 되어가는 현실을 고발하고, 잃어버린 자아의 각성과 회복을 강력히 주장하는 한편, 생의 주체인 나는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느냐 하는 주체적인 진리를 문제삼는 주체성의 철학이다. 대표적 사상가로는 주체성이 진리다 란 말로 유명한 키에르케고르, 현대를 깊이 병든 위독한 시대로 규정한 야스퍼스, 신과의 신앙을 통한 성실한 대화 속에서 종교적, 인격적 실존을 부르짖었던 마르셀, 신은 죽었다고 대담하게 선언하고 권력의지, 초인사상, 영겁회귀 등으로 사상적 체계를 세운 니체,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주장한 사르트르, 그리고 하이데거 등이 있다.
하이데거는 주어진 상황에 비판없이 살아가는 것을 일상성이라 하고, 일상성에 묻혀 지내는 현대인을 다스 만(das man)' 이라고 불렀다. 또한 불안을 자각한다는 것은 본래적인 자기 모습이며 실존을 자각하는 것이므로 불안이 그의 실존사상의 기본개념이다. 불안의 근원은 인간이 죽음의 존재이기 때문이고, 불안을 느낀다는 것은 인간이 유한성을 자각한다는 것, 즉 실존을 자각한다는 말이다. 그의 용어 중 현존재란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거기+있다’라는 뜻으로, 이것은 인간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이 세상에 내던져졌다는 뜻이다. 하이데거는 그의 철학의 새로운 형이상학적 지향의 발족인 1916년의 (역사학에 있어서의 시간개념) 속에서, 어떤 종류의 형이상학적 충동이 철학 자체 속에서 눈을 떴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한 사색의 결과가 10 여 년 동안의 침묵 끝에 나오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존재의 시간)이다. 하이데거의 사상의 발전과정은 보통 30년대까지의 전기사상, 즉 기초존재론과 40년대 이후의 후기사상으로 나누어진다. (존재와 시간)은 그의 전기사상을 대표하는 주제이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c. (존재와 시간)의 내용
1927년에 간행된 이 책은 (서론: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의 개진) 과 (제1편: 현존재에 대한 예비적 기초분석), (제2부 : 현존재와 시간성)이라는 두 부분으로 엮어져 있다. 앞부분에서는 인간, 현존재의 근본구조가 세계 내 존재 라는 것을 밝히고, 기술적 도구적인 환경속에서 다스 만으로 살아가는 비본래적인 실존의 모습이 씌어져 있다. 이에 대해 후반부는 불안이나 죽음에 대한 자각을 통해 과거로부터 자기를 되돌려 미래로 앞서나가며, 순간으로서의 현재에서 결의적으로 사는 본래적 실존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존재 일반규명 : 하이데거의 철학은 존재일반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지금까지의 철학은 존재자 만을 다루었기 때문에, 그 존재자를 존재자이게 하는 존재를 해명하는 것이 그의 철학의 과제였다.
현존재 : 그러나 이러한 존재해명은 필연적으로 인간존재의 존재분석을 기초로 하지 않을 수 없고, 이러한 현존재의 존재분석론의 한계 내에서 실존철학이라 불리어진다. 그러나 그 자신은 실존철학이라기보다는 기초존재론 이라 불렀다.
피투성과 다스 만 : 한편 현존재는 어떠한 세계속에 존재하고 있다. 이와 같이 현존재가 세계 내 존재 라는 사실은 현존재가 세계속에 주어져 있다는, 즉 현존재의 피투성을 의미한다. 이처럼 현존재의 피투성의 실존론적 분석은 현존재가 단순한 사물과 같은 존재가 아니며, 또한 도구적 존재자가 아님을 보여준다. 이러한 현존재는 세계 안에서 많은 다른 존재자들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오히려 그러한 관계에 있어서 자기를 상실하는 현존재를 그는 일상인, 다스만이라 부르고, 이 일상인으로서 현존재는 평균화되고, 주체성이 상실된 중성자로 전락하여 버린다.
불안과 공포 : 이와 같이 일상인이 비본래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한, 이와 대비하여 현존재의 본래적인 존재방식이 문제가 된다. 즉, 그와 같은 비본래적 상태로 존재하는 현존재는 불안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불안은 특정한 대상과 이유가 있는 공포와는 달리, 그 대상도 이유도 알 수 없다. 이것은 우리들이 가끔 어쩐지 불안하다 고 말할 때의 기분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불안의 근거는, 그것의 존재형식에서 보면 현존재가 세계 내 존재로서 자기를 상실하고 비본래적인 존재방식을 취하는 데 있다.
기투 : 그러면 일상인으로서의 현존재가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여, 본래적인 자기 존재를 근원적으로 이해하고 본래적인 자기에로 자기자신을 내던질 때, 하이데거는 이를 기투라고 말한다. 한편 현존재가 일상인으로 전락하여 자기존재의 근거를 상실하고 있는 정황에서 본래적인 존재방식의 태도를 기투적으로 취하는 것을 실존이라고 부른다. 즉 실존이란 현존재의 본래적인 존재방식을 의미한다. 이러한
현존재의 존재론적 구조는 그의 시간성에서 밝혀지지 않으면 안된다. 또한 이러한 시간성은 죽음과 양심의 현상이 실존론적으로 분석되지 않으면 안된다.
시간성 : 현존재의 존재에의 실존론적 분석은 어디까지나 현존재의 생에 있어 가능하다. 그러나 출생으로부터 시작되는 이 생은 종말로서의 죽음에 의해서 비로소 전체적인 것이 된다. 따라서 현존재를 그 전체성에 있어서 이해하려 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죽음의 현상이 문제되지 않을 수 없다. 죽음은 그것이 도래하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것이 언제 도래할 것인가 하는 것은 무규정적인 가능성인 것이다. 그러나 현존재가,. 살고 있는 현존재로서 존재하고 있는 한 현존재는 아직 종말로서의 죽음에 직면한 것은 아니며, 죽음은 또한 아직 완료된 것이 아니다. 죽음은 현존재가 추월할 수 없는 가능성인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죽음이 비현재적인 것, 자기와 무관한 것으로 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현존재에 절박해 있다. 그렇다면 현존재의 본질은 죽음에의 존재 인 것이다. 이와 같이 현존재가 죽음에 관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다름아닌 현존재의 유한성, 즉 시간성을 말한다.
죽음과 양심 : 한편 죽음은 현존재의 피할 수 없는 가능성이며 타자에 의해 대신될 수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적 현존재에 있어서 가장 고유한 가능성인 것이다. 죽음에 있어서 현존재는 단독자, 즉 개별자로서 그의 본래성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현존재가 현존재로서 존재하고 있는 한은 가능한 것이다. 현존재는 죽음에의 존재에 있어서 그의 본래성에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현존재의 본래성을 중시하는 현상은 다름아닌 양심이다. 따라서 양심의 현상이 현존재의 본래성이라는 관점에서 또다시 실존론적으로 해석되지 않으면 안된다. 현존재가 이러한 양심의 소리에 따를 때 현존재는 본래적인 자기 존재를 선택하게 되나, 하이데거는 이러한 자기선택이야말로 양심을 의지하는 것이며, 현존재의 이와 같은 본래적인 존재방식을 결의성이라고 부른다.
선구와 양심 : 이리하여 죽음의 현상은 현존재의 전체성에 관계하며, 한편 양심의 현상을 현존재의 본래성에 관계한다. 따라서 죽음과 양심이라는 두 현상에서 각각 취하게 되는 현존재의 존재방식, 즉 선구와 결의성은 상호 연관에 있어서 선구적 결의성으로 통일되는 것이다. 한편 죽음에 있어서의 선구나 또는 양심에 있어서의 결의성에 임하여 현존재는 자기로서 존재하기 위하여 자기자신을 기투한다. 이와 같은 기투에 있어서 그 자신이 본래적인 자신으로 되돌아가는 현존재의 존재방식이 다름아닌 실존인 것이다.
생기와 역사성 : 현존재는 선구적 결의성에 있어서 본래적 자기로서 존재하기 위해 기투하는 실존으로서 존재하며, 또한 동시에 절박한 죽음에 당면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존재의 3가지 존재구조의 계기, 세계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피투성으로서의 이미 있음, 자기 앞에 앞질러 존재하게 되는 기투로서의 앞질러 있음, 그리고 결의성에 있어서의 존재자의 나타남으로서의 현성되고 있음 이라는 시간성이 성립된다. 즉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서 앞질러 존재하면서, 현성하는 통일적 현존재의 존재 의미, 즉 시간성 인 것이다. 이러한 시간성은 통속적인 시간성은 따라서 비본래적인 시간관계, 즉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계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그의 시간성을 단절된 시간관계로 보지 않고 그것의 구체성에 있어서, 즉 생기라는 근본적인 성격을 지니는 역사에 있어서 이해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존재자의 존재, 현존재의 존재근거로서의 존재는 그 시간성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현시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본래적 시간성의 구체화가 다름아닌 역사성이다. 역사는 시간이며, 이 시간은 현존재를 제외하고 생기하지 않으며, 그것은 바로 현존재 자신의 사간이다.
d. 사상적 평가
그의 철학을 한마디로 말하면 현상학적 존재론 이라 할 수 있다. 그간의 전통적인 존재론이 그의 본질적인 주제에서 일탈하여 존재자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하이데거는 근원적으로 더 깊이 들어가 존재자의 존재, 즉 존재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모든 있는 것에 대해 그것의 있음, 즉 그것이 어떻게 있는가? 라는 존재방식을 묻고, 그것을 근원적으로 해명하는 것이 다름아닌 존재론의 근본과제라고
주장했다. 1927년 (존재와 시간)이 발간되자 많은 철학자들은 새로운 철학의 시작과 실존철학의 탄생을 외쳤고, 따라서 무명의 철학도가 일약 세계무대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마 야스퍼스보다 6년이나 연소한 그가 야스퍼스의 실존철학의 주저 (철학)보다 5년이나 먼저 실존철학을 내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번도 자기자신을 실존철학자라고 공언한 적은 없다. 그는 그의 철학을 기초적 존재론 이라 부르고 있었는데, 기초적이라는 의미는 주관과 객관의 대립 이전의 존재를 기초로 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그의 철학의 근본은 존재의 의미를 해명하는 데 있다. 그의 철학은 1차세계대전의 불안한 상황을 반영하여 현대사상의 한 조류를 이루었다. 본서는 후설적 현상학을 독자적으로 발전시키고, 현대 특히 제1차대전 후의 역사적 상황 속으로 던져진 인간존재의 양상을 반영하면서 인간존재 그 자체의 본질을 훌륭하게 분석해보였다. 이 책은 출판되자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는데, 실존철학은 물론 아마도 철학사상 불후의 걸작으로 남을 것이다. 미슈는 이 저서는 비상한 흥분을 불러일으켰고, 전광석화와 같이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한 바 있다. 사실 이 저서가 발간된 후에 현상학적 존재론과 실존철학의 사조가 대두하였다. 그런 점에서 본서는 금세기의 일대 사조의 발화점이자 기념비적인 저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1970년대 중반 이후 일본, 미국, 라틴 아메리카 등에서 하이데거 철학에 대한 강력한 관심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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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리케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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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리케르트
Heinrich Rickert.jpg
이름 하인리히 리케르트
출생 1863년 5월 2일
프로이센, 단치히
사망 1936년 7월 25일 (73세)
독일, 하이델베르크
시대 19세기 철학
지역 서양 철학
학파 신칸트주의
하인리히 리케르트(Heinrich Rickert, 1863년 5월 25일 ~ 1936년 7월 25일)는 독일의 철학자이다. 빈델반트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하이데거에게 영향을 주었다. 단치히 태생으로 하이델베르크에서 사망하였다.
생애[편집]
1863년 프로이센 단치히에서 태어나, 1888년 슈트라스부르크에서 학사가 되고, 1891년에 프라이부르크에서 교수 자격을 획득하였다. 1894년에 동교의 조교수, 1896년에 릴의 후임으로 교수가 되었으며, 1916년 빈델반트의 후임으로 하이델베르크의 교수가 되었다. 프라이부르크 시대에는 하이데거가 그의 강의에 출석, 또 야스퍼스와는 하이델베르크에서 1921년 이래 동료로 지냈으며, 1932년 퇴직 후에는 야스퍼스가 후계자가 되었다. 하이델베르크에서 사망하였다.
사상[편집]
초기의 《인식의 대상》(1892)에서 인식하는 주관은 판단하는 주관으로서 인식론적인 주관이며 인식되는 대상은 초월적인 가치인 당위(當爲)라는 입장을 취했다. 《자연과학적인 개념 구성의 한계》(1896-1902), 《문화과학(文化科學)과 자연과학》(1899)에서 자연과학은 가치를 떠난 자연을 일반화의 방법에 의해 기술하는 데 대해, 문화과학은 개성적이며 가치에 관계하는 문화재를 목표로 하는 개별화의 방법에 의거한다고 하였다. 자연과학은 몰가치적(沒價値的)인 태도를 취하고, 문화과학은 가치관계적(價値關係的)이다. 이것은 빈델반트의 견해를 더욱 발전시킨 것이며 서남독일 학파가 문화가치의 철학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 문화과학의 방법론은 막스 베버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그의 철학은 가치의 철학이며, 주저 《철학의 체계》(제1부, 1921)도 문화가치의 체계이다. 가치를 가치 이외의 것과 구별하고, 세 개의 세계, 곧 객관계(客關界)·가치계(價値界)·의미실현(意味實現)의 세계를 생각하고 제3의 세계는 실재적인 것과 타당한 것이 결합된 세계로 이론적·예술적·도덕적·종교적인 생(生)의 세계라 하였다. 그것은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세계로 형이상학의 대상이 아니라 형이전학(形而前學)의 대상이다. 형이전학적 세계, 감성적 세계, 가치의 예지적인 세계가 구성하는 세계 전체를 학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철학이다. 그는 형이전학의 대상으로서 가치를 잉태하는 생을 인정하지만, 당시 유행하는 생의 철학은 반성을 결여하였다 하여 《생의 철학》(1920)에서는 이를 거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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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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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철학(生─哲學, philosophy of life)이란 합리주의에 반기를 들고 그것에 불신 내지 반항하여, 생의 응결(凝結), 생의 경화(硬化)에서 벗어나 어디까지나 싱싱하게 살아 있는 생 자체만을 파악하려는 것이 바로 이 '생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철학을 그저 한마디로 '생의 철학'이라 부를 수도 있다. 따라서 '생의 철학'이란 매우 다의적인 의미를 지닌 철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다만 협의적인 의미로서의 '생의 철학', 즉 19세기 이후 현대철학의 한 사조로서의 '생의 철학'에 관해서만 언급하고자 한다.
근세철학 사상사 전체를 통해서 볼 때 단연 우위적인 자리를 차지해 온 것은 아무래도 합리주의 사상, 즉 주지주의(主知主義) 사상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그러한 사상의 결과는 마침내 정신적인 면에선 차츰 지나친 사변적(思辨的)인 것이 인간의 심정마저 경화시켜 갔으며, 또한 물질적인 면에선 고도로 성장해 가는 기계와 기술문명이 인간 생명의 고동 소리를 압살(壓殺)해 가는 듯한 느낌마저 주었던 것이다. 조금 더 부연해 본다면 이러한 '생의 철학'은 원래 헤겔을 정점으로 하는 독일 관념론의 이성주의에 대한 비판 내지 반항에서 출발하였다고 할 수 있지만, 그 후 그것은 신(新)칸트 학파와 실증주의의 대립에서 또한 더욱 그 자리를 굳혀 갔던 것이다. 생각건대 신칸트 학파의 비판철학과 실증주의 철학이란 똑같이 반(反)헤겔적이면서도 다만 과학에 대해서만은 유독 매우 긍정적인 태도였다고 본다. 그러나 '생의 철학'에선 이러한 이성주의(理性主義) 내지 과학주의적인 것만으로는 도저히 인간의 살아 있는 진정한 생(Leben)을 파악하기가 매우 곤란하다고 보는 것이었으며, 이리하여 이성주의 내지 비판주의, 실증주의에 매서운 비판을 가하게 되었고, 생에는 로고스적인 면보다 도리어 파토스적인 비합리적인 면이 더욱더 중요한 것임을 강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생의 철학'의 대표자로서는 보통 딜타이, 짐멜, 베르그송을 들지만 그 밖에 쇼펜하우어를 포함시키기도 하고 또한 니체를 넣기도 하며, 때로는 프래그머티즘의 철학자들마저 부가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다만 앞서의 세 철학자에 관해서만 간단히 언급하기로 한다.
딜타이[편집]
딜타이는 그의 "생을 생 그 자체로부터 이해한다(Das Leben aus ihm selber verstehen)"고 우뚝 내세웠다. 그리고 "생만이 모든 현실이다"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그러면서도 그는 "생이란 본질적으로 역사적(歷史的) 생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 존재를 단지 표상(表象)하는 존재로서만이 아니라 나아가 의욕하고 정감(情感)하는 존재로서도 파악하였다. 즉 그는 인간의 정신구조를 첫째, 어떤 대상을 파악하는 표상이 가장 기초가 되어 있으나 그 위에다 어떤 대상을 설정하는 의욕이 또한 거기 있으며, 그리고 가장 드높은 자리에는 가치평가하는 감정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인간을 표상하며, 의욕하며, 감정을 지니고 있는 '전체적' 인간으로서 추구하고 파악하려 하였던 것이다. 또한 딜타이는 생이 생을 파악하는 방도로서, 체험과 체험의 표현과 그리고 그 표현의 이해 등 세 가지를 들었거니와 근원적인 생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활동이라 할 수 있는 체험(Erlebnis)을 '생의 내화(內化)'라 말하였고, 그리고 우리가 어떤 무엇을 체험할 때에 그것을 표현하지 않을 수 없게 되거니와 그 표현(Ausdruck)을 '생의 외화(外化)'라고 말하였다. 또한 그는 우리가 어떤 표현을 이해하게끔 될 때 그 이해(Verstehen)를 생의 내적(內的)인 것과 외적(外的)인 것의 통일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가 생을 생 자체에서 이해한다고 함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라고 여겨지거니와, 또한 그는 이러한 '생의 철학'을 하나의 '역사적 이성의 비판'이라 칭하기도 하여 '생의 철학'에 있어서 역사적 방법을 매우 중요시한 셈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그의 '해석학적 방법'이라고 하겠다. 즉 그는 어떤 인간의 생이란 그것이 단순한 개인적인 생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 통하여 있는 것이며, 사회적 연관을 지닌 생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개인적 존재 이상의 역사적·사회적인 실재로서 생을 철학의 대상으로 여기는 점이 바로 딜타이의 '생의 철학'의 특이한 점이라고 하겠다.
짐멜[편집]
짐멜의 '생의 철학' 사상에는 니체의 "인간이란 초극되어야 할 어떤 것이다"라고 한 말과, 괴테의 "자기를 초극하는 인간만이 자유롭다"라고 한 말이 어딘가 상통한다. 그의 철학의 특질을 우선 한마디로 말해 본다면 '생의 자기초월(自己超越, Transzendonz des Lebens ber sich selbst)'이라고 할 수 있거니와 그는 그 생에 있어서 시간성(時間性)을 아주 중요시하였으며, 시간이 생 자체의 구체적인 존재형식이라고까지 말하곤 하였다. 그러나 그는 또 생의 특질을 단순히 끊임없이 생성한다는 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였고 항시 그 스스로에 어떤 한계를 부여하고 그것에 개성적인 어떤 형식을 주면서도, 나아가서는 그 형식을 타파하여 그것을 다시금 생의 흐름 속에다 해소하는 데 있는 것이라 하였다. 바꿔 말하면 생이란 한편 현실적으로는 한정된 자기의 형식을 부단히 초월해 가는 그의 이른바 '보다 많은 생(mehr Leben)'이면서 동시에 그 생이란 항시 창조적으로 자기에 어떤 형식을 부여하는 '생 이상의 것(mehr als Leben)'이라고 말한다. 이때 '보다 많은 생'은 쇼펜하우어의 '생의 의지(意志)'를 방불케 하는 것이라 하겠고, '생 이상의 것'은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를 연상케 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베르그송[편집]
베르그송에 있어서는, 그가 스스로의 철학적 입장을 살아 있는 것을 죽은 것으로 설명하는 유물론이 아니라, 죽은 것을 살아 있는 것으로 설명하는 입장이라고 말하였거니와 그 또한 그의 '생의 철학'의 특질을 시간성에다 둔 셈이라고 하겠다. 즉 생이란 끊임없이 생성 발전하는 것이며, 그 자신 지속적이고 시간적인 것이라 한다. 이러한 생을 파악하는 기능으로서 그는 지성(知性) 대신 '직관(intuition)'의 기능을 매우 중요시하였거니와, 이때의 직관이란 어떤 신비적 직관과 같은 것이 결코 아니었으며, 그것은 시간 속에 있어서 '생의 약동(elan vital)'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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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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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투성(彼投性, 독일어: Geworfenheit 게보어펜하이트[*])[1]은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가 도입한 개념이다. 하이데거는 인간 개인의 존재는 세상에 "던져짐(투)" "당한(피)"것이라고 했다. 던져짐이란 현존재의 임의적이고 불가해한 성질로서,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키는 무엇이다. 과거는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Sein-zum-Tode)를 통해 현존재의 일부가 된다. 현존재의 임의성을 인지 내지 인식하는 것은 자신의 선택이 아닌 사회적 관습이나 의무성 따위에 의해 이미 결정된 고통과 좌절과 함께 현재에 "던져진" 상태로 특징지어진다. 행렬로서의 과거는 선택의 결과물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결정론적이지도 않으며 여기서 피투성의 개념이 결과로 나타난다. 피투성이란 인간 존재가 맞서 투쟁하게 되는 소외의 일종이며,[2] 자유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역설적 질문을 낳게 된다.
투사물을 던진 사람은 그 역시 던져진 존재이다. 우리가 어떻게 이 자유를 해명할 수 있겠는가? 해명할 수 없다. 그것은 그저 사실이다. 유발되거나 기반한 것이 아니나 모든 유발과 기반의 환경이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