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40 – 진리와 방법 (Wahrheit und Methode / Truth and Method, 1960) / 가다머(Hans-Georg Gadamer, 1900 ~ 2002)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현대 해석학의 고전으로 불리는 이 책은 해석학을 단순한 문헌 이해의 방법론에서 본격적인 존재론의 철학으로 한 단계 격상시킨 작품. 독일 관념론의 현대적 2대 지주인 현상학과 해석학 중, 해석학은 슐라이어마허의 (성서) 해석으로부터 출발한다. 해석학은 어떤 텍스트나 특정상황이 역사적으로 달리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인데, 가다머는 (진리와 방법)에서 이전까지의 해석학이 주관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비판하고, 이 책에서 객관성의 원리를 확보하려고 했다.


a. 생애와 작품활동

  헨리히가 1974년 내한하여 강연할 때,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함께 세기적 철학서로 꼽은 책이 바로 가다머위 (진리와 방법)이다. 가다머는 현대독일의 대표적 철학자로 독일의 마르부르크(독일 중부 헤센주에 있는 도시)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을 통하여 그의 철학을 형성하였고,존재론의 하이데거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가다머는 하이데거의 제자이자 평생동안 그의 친구였다. 또한 하이데거는 그의 철학의 해설자라고도 말할 수 있다. 가다머는 1938년 라이프치히 대학, 1947년 프랑크푸르트 대학, 1949년부터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수를 지냈다.

그러나 두 철학자는 전혀 다른 영역에서 철학의 길을 걸었다. 그는 일반적으로 철학적 해석학의 권위자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철학적 배경은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존재론에 바탕을 두고 있으면서 해석학의 새로운 철학적 정립을 완성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기본적 문제의식은 19세기적 역사의식에 잠긴 상대주의와 공허한 교양주의를 20세기 시대경험의 입장에서 극복하고, 정신과학에 있어서의 이해와 인간존재의 역사성의 관련을 밝혀내는 일이었다. 철학적 해석학이라고 칭하는 이 시도는 (진리와 방법)이라는 결실을 가져왔다. 특히 역사해석의 다양성, 언어성, 역사성, 전통유보라는 인간존재의 기본적 형식과의 관련에서 작용사라는 이름 아래 적극적으로 의의를 부여한 이 저서는, 60년대 후반 이후 정신과학의 위기가 명료해짐에 따라 수많은 논의를 불러 일으켰다.


b. 현대철학에서의 해석학

  그리스시대부터 텍스트의 의미를 다른 정신세계에서 자기 자신의 정신세계로 옮겨놓는 것을 과제로 하는 기술은 17세기에 이르러 해석학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것은 세 가지 형태, 즉 고전적 작품의 해석에 있어서는 어문학적 해석학으로서, 성서해석에 있어서는 신학적 해석학으로서, 그리고 법전의 해석에 있어서는 법학적 해석학으로서 체계적으로 발전되었다. 슐라이어마허 해석학의 기원은 그리스 철학에까지 소급될 수 있으나, 신학으로서의 체계적 기초는 슐라이어마허에 있어서 해석학은 우선 해석법으로서, 성서나 고전들의 가장 정당한 이해를 위한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인간의 이해 자체를 문제삼았다. 그는 처음으로 이해 자체의 현상을 주목하고, 이해의 보편법칙을 파악하려고 했다. 또한 이해의 과정을 의식적으로 구체적인 언어와 직접 결합시켰다. 그에 의하면 해석학에 있어서 가장 먼저 전제되어야 할 것은 다만 언어이고, 가장 먼저 발견되어야 할 것도 언어에서 발견 되어야 하며, 해석학의 과제는 언어의 과제였다.

  딜타이 - 슐라이허마허의 뒤를 이은 딜타이는 우선 이해라는 개념을 인문과학의 방법적인 특수성을 논하면서 사용했다. 즉, 자연은 설명하고 정신생활은 이해한다 는 것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자연과학과 구별되는 인문과학의 방법론으로 해석학을 생각했지만, 삶에 대한 철학적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인간 삶 자체가 해석학적이며, 이해한다는 것이 인간 삶의 가장 본질적인 모습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신학자가 (성서)를 해석하듯이, 철학자는 역사적으로 주어진 삶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와 가다머 - 딜타이의 사상을 이어받은 하이데거는 이해를 존재론적 문제로 다루면서 인간존재의 실존적 구성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하이데거가 제시한 이해의 순환구조의 존재론적 분석을 기초로, 가다머는 그의 주저 (진리와 방법)에서 인식의 지평성, 이해의 역사성을 제시하고, 근대적 방법지의 진리개념을 비판했다.


c. (진리와 방법)의 내용

  여기서 소개하는 (진리와 방법: 철학적 해석학의 제특징)은 그 부재가 말해주듯이 철학적 해석학에 관한 저서이며, 1960년 초판이 발행된 이래 해석학의 새로운 기반을 마련해준 3부로 구성된 역작이다.


  제1부 : 제1부에서 가다머는 예술의 경험에 있어서 진리의 물음을 드러내려고 한다. 그는 여기서 근대의 미학이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 의해서 주관화되었다고 비판하고, 미학적인 차원의 초월을 서술한다. 그는 예술에 관한 인식론적 관점을 배격하고, 그것을 존재론적으로 분석한다. 예술작품은 주관적인 미학적 의식의 대상이 아니라, 작품 자체가 오히려 우리에게 자기 존재의 진리를 드러낸다고 한다. 예술작품 자체가 예술경험의 주관으로서, 우리를 자기의 존재로 불러들인다. 따라서 예술의 이해는 스스로의 존재진리를 드러내는 작품세계에 참여함으로써 수행된다. 더 나아가서 가다머는 예술작품의 존재론을 정립하고, 그의 해석학적 의미를 밝힌다. 하나의 예술작품은 일단 형태화되고 난 후에는, 그의 창작자나 해석자의 의식으로부터 독립되어 자기자신의 고유한 존재방식을 갖게 된다. 작품은 그 자체의 자율성을 가지고 창작자의 의견이나 창조적 행위로부터 원칙적으로 벗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예술작품에서 의도된 의미는 작품 자체의 존재의 진리이며, 예술작품의 존재가 그의 진리에 있어서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작품의 이해다.


  제2부 : 제2부에서 그는 진리의 물음을 정신과학에 있어서의 이해로 확대한다. 가다머는 우선 슐라이어마허의 낭만주의적 해석학, 역사학파와 낭만주의적 해석학의 결합으로서의 랑케와 드로이젠의 역사주의를 비판하고, 딜타이에 있어서 역사의 인식이론적 문제가 어떻게 정신과학 일반의 해석학적 기초로 발전되는 가를 서술한다. 정신과학에 있어서 인식론적 물음, 즉 방법론적 사고는 현상학적 탐구에 의해서, 특히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현상학적에 의해서 극복된다. 가다머는 여기서 해석학은 진리의 경험이요, 정신과학의 인식론일 수 없다는 것을 명백히 하고 자기의 사상을 해석학적 경험의 이론으로서 정립한다. 해석학적 경험은 이해의 역사성 속에서 이루어지며, 따라서 이해의 역사성은 가다머에 있어서 해석학적 원리로 된다. 그는 이해의 역사성에서 나타나는 해석학적 문제들, 즉 해석학적 순환과 선입견, 시간 간격의 해석학적 의미 등을 차례로 그의 서술의 주제로 삼는다. 이해의 역사성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한편으로는 역사적 과거의 사실과 의미연관을 이해함이며, 다른 하나는 이해자체가 하나의 역사적 사건(그러면 공부하는 것은 일련의 역사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역사를 이해하는 우리는 역사 속에서 살고 역사에 의해서 이미 규정되어 있으며, 우리 자신의 역사적 상황과 의미지평으로부터 이해하려고 한다. 따라서 이해는 객관적인 역사의 의미내용과 이해의 주관이 서로 만나고 융합하는 데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이해과정에서 가다머에게 우선 문제되는 것은 역사적 의미를 이해하려 할 때 우리는 이미 역사에 의해서 규정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즉, 우리는 이해의 선구조와 해석학적 순환 속에 있다. 그런데 가다머는 해석학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선이해라는 개념 대신에 선입견 이라는 좀더 폐쇄적으로 보이는 개념을 도입한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선입견을 계몽주의 이래 부정적 의미로 통용되는, 따라서 배척되어야 할 선입견과 분명히 구별한다. 선입견은 전통, 권위 등 일정한 역사적 지평에 의해서 제약된, 그러나 아직 학문적으로는 반성되지 않은 이해로서, 모든 이해의 통로를 마련해주는 전제요, 출발점이 된다고 한다. 그것은 이해과정에 있어서 타당성 여부에 따라 검토되고 수정될 수 있다. 그러므로 가다머는 선입견의 생산적 성격을 강조하고 그의 복권을 요구한다.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전통과 역사적, 문화적 권위 속에 존재하며, 이해에 있어서 그것에 의해 제약된 선입견으로부터 출발한다 함은 해석학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갖는 것일까? 우리는 이해함에 있어서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의 현재를 버리고 과거로 돌아가 과거와의 직접적인 관계를 재생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이나 전승된 텍스트는 그것이 주어진 우리의 현재의 상황과의 관계속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텍스트의 의미를 이해함은 곧 그것을 현지에 적용함이라고 한다. 이때 텍스트의 사실은 우리에 대해서 단지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그 속에서 생각하고 이해하는 의미지평이며, 이것은 우리의 역사성의 지평 안에 주어져 있다. 역사적 사실은 이러한 해석학적 상황 속에서 드러나며, 또한 현재와 관계하고 우리에게 이해지평을 넓혀준다. 이해는 단지 우리의 주체적 행위에 의해서 수행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와 해석자, 즉 과거와 현재의 서로 다른 역사적 지평이 만나고 융합되는 데서 이루어진다. 가다머는 이해를 자기 이해와 전통 사이의 긴장관계에서 일어나는 변증법적 매개과정으로 파악한다. 그런데 역사적 지평과 융합은 영향사적 연관성의 매개에 의하여 가능하다고 한다. 영향사란 이해에 대한 역사의 부단한 작용을 말한다. 모든 역사적 사건과 문화적 전승은 우리의 역사 안에서 작용하고 해석되며, 그래서 우리 자신의 고유한 이해지평 속으로 들어온다. 이러한 영향사적 연관성이 이해의 가능성을 매개한다.


  제3부 제3부에서 가다머는 언어를 실마리로 하여 해석학이 존재론으로 전향함을 밝힌다. 텍스트 이해의 과정은 언어적 과정이라는 것, 따라서 과거지평과 현재지평의 융합도 대화수행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언어가 해석학적 경험의 매체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가다머는 언어를 해석학적 존재론의 지평으로 파악한다.


d. 철학사적 의의 

  전후 해석학은 자연과학적 사고에 기초를 둔 과학이론과 사회비판이론의 거센 물결에 의해서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해석학이 그의 본질상 엄격한 과학적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으며, 전통적으로 사회이론과 연결되지 못한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가다머는 그의 스승인 하이데거가 그의 저서 (존재와 시간)에서 표명한 존재론적 해석학의 입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이데거에 있어서 해석학은 삶의 객관화된 형태를 실천적으로 이해하는 방법적 이론이 아니라, 이해 자체가 이미 인간적 삶의 보편적 현상이다. 그래서 삶을 현존재로 표현하는 하이데거는 자기의 기초적 존재론을 현존재의 해석학으로서 전개하였다. 가다머는 이러한 존재론적 해석학을 이해의 역사과정과 결부시키면서 영향사 이론을 정립하였다. 이해는 객관에 의한 인간의 주관적 과정, 즉 인식론적 과정이 아니라 학문 이전의

인간, 현존재의 보편적 존재양식이라고 한다. 존재론적 과정인 이해를 그의 역사성에 있어서 철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철학적 해석학의 과제이다. 따라서 가다머는 (진리와 방법)에서 방법론적 노력을 그의 철학적 해석학의 과제 영역으로부터 배제한다. 과학의 방법론은 진리로 이끄는 것이 아니고, 진리의 경험을 오히려 배제한다는 것이다. 진리의 경험은 학문적 방법의 규제영역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 대한

반론도 거세다. 아펠과 하버마스는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의 보편성 요구를 비판한다. 이들은 딜타이로부터 가다머로 연결되는 해석학은 그것이 의미하는 해석학적 지평만으로는 아직도 사회적 실천을 위한 설명으로 미흡한 것이라고 반문한다. 여기에 하버마스의 해석학적 이해의 융합지평에서는 경험과학적인 세계, 또는 딜타이의 역사적 연관을 자유로운 자기화로 해소시켜 버리고는 있지만, 해방과 개혁이라는 사회적 필요조건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버마스는 비판한다. 여기서 하버마스는 해석학적, 비판적 사회학을 주장한다. 그는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은  언어성의 관념론 이라고 공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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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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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라이어마허

프리드리히 다니엘 에른스트 슐라이어마허 (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 1768년 11월 21일 - 1834년 2월 12일)는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이며 철학자이다. 그는 계몽주의, 경건주의, 그리고 낭만주의의 영향을 통해 현대 자유주의 신학을 탄생시켰다. 그는 또한 보편 해석학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후 직관과 감정을 중시한 그의 신학방법을 통하여 현대 기독교 사상에 끼친 그의 깊은 영향력 때문에, 그는 "자유주의 신학의 시조"라고 불린다. 칼 바르트로 가장 탁월하게 대표되는 20세기의 신정통주의 운동은, 그의 영향력을 넘어서기 위한 여러 방식의 시도 중 하나이었다.


목차  [숨기기] 

1 생애

2 종교 체계

3 해석학

4 관련 자료

5 같이 읽기

6 각주

생애[편집]

실레시아에 있는 브레슬라우에서, 개혁교회(The Reformed Church, 칼뱅주의 개신교)에 소속된 프로이센 군목의 아들로 태어났다. 할레 근처의 바비와 루사티아 북부의 니에스키에 있는, 모라비안 학교에서 교육 받았다. 그러나 경건주의성격의 모라비안 신학은 날로 늘어만 가는 그의 회의를 해소시키지 못했고, 그의 아버지는 마지못해서 그에게 할레 대학교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해주었다. 당시 할레 대학교는 이미 경건주의를 포기했고,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볼프(Friedrich August Wolf)와 요한 잘로모 젬러(Johann Salomo Semler)의 이성적인 정신을 채택하였다.


신학생으로서 슐라이어마허는 교과과정과는 별도로 나름의 책읽기에 전념했으며 구약성서와 중동 지역의 언어에 대한 공부를 무시했었다. 그러나 제믈러의 강의에 참석하면서 신약성서에 대한 역사비평[1] 을 공부하게 되었고, 요한 아우구스투스 에버하르트의 강의를 통해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1796년 목사가 되어 베를린으로 옮겨 갔으며, 그곳에서 철학자 슐레겔 등 낭만파 학자와 문학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종교론>에서 종교의 본질은 행위도 이성도 아닌 감정이라고 주장하였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독일 민족 정신을 불러일으키는 설교로 루터 이후 최대의 설교자로 알려졌다.[2] 베를린 대학교 설립에 참여했으며, 베를린대학교 신학교수를 역임하기도 했다.


종교 체계[편집]

나는 슐라이어마허의 낭만주의 신학을 일생동안 진지하게 대적했습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그의 신학을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밝히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 Karl Barth, Briefe, hr. von Jürgen Fangmeier und Hinrich Stoevesandt, Zürich 1975, 466[3]

슐라이어마허는 근대신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작품은 《종교론》(1799년, 기독교 변증서)과 《신앙론》(1821/22; 2판: 1830/31)이다. 우선 그의 《종교론》에서 근대신학이 정초해 놓은 새로운 방향정위를 살펴볼 수 있다. 20세기의 새로운 신학적 사상들은 슐라이어마허와 비판 대화를 시도했으며, 이를 극복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오늘날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은 새로운 활력을 얻고 있다.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적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요약 할 수 있다.


슐라이어마허는 인간을 “주체”로 생각한 최초의 신학자이다. 여기서 주체(subjectum)은 모든 것을 지탱하는 근원을 뜻한다. '주체'로서의 인간은 모든 삶과 사유의 중심이면서, 모든 것은 바로 그 자신에 의해 이끌어져야 한다. 따라서 주체로서 인간에게 종교란 외부의 어떤 힘에 굴복하거나 순복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이 점에서 슐라이어마허의 종교는 교리를 중요시하는 정통주의와 결별한다. 이로써 그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가 된다.

슐라이어마허는 당시의 철학적 사상을 수용한다. 스피노자의 범신론적 사유를 요약하는 deus sive natura(자연과 함께 하는 하느님)를 그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그는 ‘신’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우주’에 대해 말한다. 또한 그는 ‘세계정신’‘인간성’‘역사발전’과 같은 당시의 정신사의 보편 기반을 확보하고 있던 개념들을 수용한다.

그러나 슐라이어마허는 단지 시대의 아들만은 아니었다. 그는 당시의 개념들과 정신사 작업들을 수용하면서도 그들이 무엇을 오해하고 있는지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이로써 슐라이어마허에게서 시작되는 근대신학은 근대정신을 수용, 비판하는 신학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종교를 인간의 종교 체험과 감정으로 생각하였으며, 기독교의 전통 교리와 신앙고백(Creeds)를 절대시하지 않았다. 신학보다 인간의 종교 체험과 감정을 더 우선시한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은 근대 자유주의 신학의 주요 특징중 하나이기도 하다.

해석학[편집]

근대에 ‘보편적 해석학’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단연 중심인물로 거론되는 사람이 슐라이어마허이다.[4] 해석학의 역사에서 특히 슐라이어마허의 보편적 해석학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전의 신학적 해석학이나 문헌학적 해석학과 같은 해석학의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좀 더 보편적인 지반에서 해석과 이해의 문제를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근대 이전 필론, 오리게네스, 아우구스티누스, 루터에 이르기까지 성서 해석학의 방법으로 널리 활용되었던 비유적인 해석 방식에 슐라이어마허는 회의를 품게 되었다. 비유적 해석은 텍스트의 본래적 의미 이외에 비본래적 의미를 받아들이는 한계를 노정하고 있는 것이다. 만인을 위해 쓰인 성서를 더 이상 신앙과 은총이 아니라 문법적이고 심리적으로 해석할 필요성을 절감한 슐라이어마허는 이전의 전통과 동시대인들과의 활발한 지적 교류를 통하여 해석학과 비판의 체계를 수립하게 된다.[4]


빌헬름 딜타이는 슐라이어마허의 해석학을 연구하여 다음과 같이 적었다.[4] 슐라이어마허에 의하면 해석은 하나의 구성 과정이다. 구성은 규칙(Regeln)을 잘 적용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해석자의 재능(Talent)에도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다. 해석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바로 문법적 해석이다. 이것은 저자의 언어 영역권 안에서 텍스트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과 단어의 의미는 전체적인 문맥(Kontext)으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배후에 깔고 있다. 텍스트의 해석에서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일이 또한 중요하다. 심리적 해석은 저자의 기본 생각과 본래 의도에 비추어 텍스트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요청이다. 저자에게서 우리는 자아, 품위, 자율, 자유, 자발성과 같은 심리적인 근원을 발견할 수 있다. 해석자의 예감(Divination)은 해석자의 근원을 추적하기 위한 방법으로 저자의 심리적 상태 파악은 물론 저자의 전체적 저술에 비추어 하나의 작품을 통찰함으로써 이해를 촉진시킬 수 있다. 슐라이어마허의 ‘저자가 자기 스스로를 이해한 것보다 훨씬 더 잘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러한 근거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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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딜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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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딜타이

빌헬름 딜타이(Wilhelm Dilthey, 1833년 11월 19일 ~ 1911년 10월 1일)는 독일의 배르닌 대학에서 헤겔 직(chair)의 교수이며, 역사학자이자 심리학자이고, 해석과 의미에 대한 연구를 하는 해석학 연구자이고 철학자이다. 그는 그간 경시되어 온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의 해석학 연구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그들은 독일 낭만주의운동의 일부이자 경험주의자의 일부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그의 경험주의적 주장은 독일의 문학과 철학적 전통에서 가져온 것으로 핵심적인 인식론적이며 존재론적 주장(assumptions)에서는 영국의 경험주의와 낙관주의(positivism)에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연과학에 대하여 정신 과학의 분야를 방법론적으로 확고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삶의 직접 체험에 바탕을 둔 '생의 철학'을 주창하여 창시자로 일컬어진다. 저서에 <기술적 분석적 심리학> <체험과 창작> 등이 있다.


목차  [숨기기] 

1 생애

2 사상

3 해석학

4 주요 저서

생애[편집]

빌헬름 딜타이는 1833년 11월 19일에 독일 비스바덴 시의 비브리히(Biebrich)라는 마을에서 개혁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딜타이는 비스바덴에서 김나지움을 다녔고, 졸업논문으로는 <희랍의 고대 문화가 젊은이들에게 미친 영향 연구〉(Über den Einfluß des griechischen Altertums auf die Jugend)가 있다. 이후 부모의 권유로 하이델베르크 대학교(1852)에서 신학을 전공했고, 세 학기를 다닌 후 다시 베를린 대학교(1853)로 옮겨 역사학을 공부했다. 칸트, 레싱, 게르비누스의 철학과 역사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부모의 소망에 부응하기 위해 1856년에 신학 국가시험에 합격한 후 설교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국가 시행 교사 자격시험을 치러 합격한 이후 베를린 소재 한 김나지움에서 2년 정도 교편을 잡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를 건강 문제로 포기하게 된다. 이후 약 6년간을 딜타이는 역사 및 철학에 매진하게 된다.


이전의 사상가들 중 특히 베크(J. T. Beck)와 랑케(L. von Ranke), 트렌델렌부르크(F. A. Trendelenburg), 피셔(K. Fischer)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해석학의 입장에서 역사주의 철학을 발전시키는 일에 관심을 쏟았다. 대학에서는 교회사, 원시 기독교에 대한 관심과 함께 그의 스승인 트렌델렌부르크에게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뵈크에게서는 문헌학을 수강하였다. 신학 분야 국가시험을 수석으로 졸업하였으나 지속적 학문과 생활의 안정을 위하여 김나지움 교사로 진로를 바꾸게 되었다.


1859년 슐라이어마허 재단의 현상 논문에 선정되면서 교사직을 사임하고 본격적으로 해석학과 철학 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딜타이는 1864년에 해석학의 선구자인 <슐라이어마허의 윤리학에 관한 연구>로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해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1865년 <도덕의식의 분석 시도>라는 연구로 교수 자격 논문이 통과되었다. 교수 자격 논문 통과 후 딜타이는 베를린 대학교 사강사가 된다. 그리고 1866년에는 스위스의 바젤에서 교수직을 얻어 가르쳤다. 그 이후 다시 독일의 킬(1868∼1871), 그리고 브레슬라우 등으로 자리를 옮겨 교수 생활을 하다가 1882년에서 1905년까지는 루돌프 로체의 후임으로 베를린 대학교에서 교수직을 얻어 은퇴하기까지 가르쳤다. 이 교수직은 한때 헤겔이 재직했던 자리이기도 하다. 1883년 정신과학 입문을 출간하면서 정신적으로 가장 생산적인 순간을 맞게 된 딜타이는 브레슬라우 시절부터 교제해 오던 요르크 백작(Grafen Yorck)과의 우정을 더욱 돈독히 하게 되었다. 1874년에 푸트만(Katherine Puttmann)과 결혼해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베를린 대학에 정착한 후 딜타이의 삶에서 학자로서의 학문적 강의와 저술 이외에 그다지 특이한 점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1887년 베를린 학술원 회원으로 임명된 후 칸트 전집의 출간에 공헌을 하였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후 딜타이의 대표적인 저술로는 1906년 ≪체험과 문학≫, 1907년 ≪철학의 본질≫, 1910년 ≪정신과학에서 정신세계의 구축≫ 등을 꼽을 수 있다. 딜타이는 1911년 10월 1일에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에 걸쳐 있는 남(南)티롤 지방 슐레른 강변의 자이스(Seis)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사상[편집]

새로운 학문으로서 정신과학을 기획함으로써 딜타이는 역사이성 비판의 학문으로서 철학을 혁신하고자 하였다. 나아가 역사적 세계에 대한 학문들의 이론, 사회적 체계와 그것의 연구에 대한 이론을 총체적으로 정립하고자 하였다. 칸트, 헤겔, 슐라이어마허를 넘어 딜타이는 진정한 계몽이 역사적 이성으로 완성된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딜타이가 가장 강조했던 부분은 바로 삶은 그 자체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하나의 이해의 대상으로 주어져 있고, 지각 가능하며, 이해될 수 있고, 규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 관한 학문으로서 정신과학은 따라서 삶의 자기 이해를 확장하고, 심화하는 것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해와 이해를 토대로 성립된 학문의 원천은 바로 내적 경험이다. 그 경험이란 내 자신의 고유한 삶의 연관에서 나오며, 언어와 전승을 매개로 역사적으로 형성된 그런 경험을 의미한다. 이런 전제하에서 딜타이는 인간의 삶이 전통철학에서 말하는 이성(Vernunft)에 의해서만 활성화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감성, 기분, 정서와 같은 요소들이 오히려 ‘원하고, 느끼는’ 인간 존재의 본질 규명에 더 부합하다는 것이다. 딜타이의 창작 활동이 이성적 학문인 철학에 국한되지 않고, 예술, 시학, 음악에까지 두루 미치고 있는 점은, 인간의 삶을 총체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그의 철학적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딜타이의 정신과학이 왜‘삶의 철학’으로 명명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철학뿐만 아니라 사상사나 전기(傳記) 서술 분야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종교개혁과 르네상스에 관한 문화·지성사적 저술과 해석학의 발전에 관한 사상사적 저술, 그리고 헤겔과 슐라이어마허에 대한 전기적 저술 등 숱한 연구 결과들은 이런 관심에서 나왔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의 주된 관심은 해석학을 매개로 정신과학의 인식론적 토대를 역사주의 논리로써 구축하는 비판철학에 있었다. 비록 그 견해를 끝내 분명하게 정리해 내지는 못했지만, 1883년 ≪정신과학 입문≫(전집 1권)을 쓴 이후 “정신과학의 인식론적 토대 구축”이라는 중요하고도 어려운 문제를 필생의 과업으로 삼아 연구에 매진했다. 정신과학을 위한 토대의 구축이라는 자신의 과업을 위해, 딜타이는 훔볼트와 랑케 이후에 전개되었던 역사주의 학파에게 닥친 상대주의의 위기에 맞서 싸우는 한편, 헤겔로 표상되는 전통 형이상학 및 당대의 실증주의가 펼쳤던 독단의 국면에 맞서 저항했다. 이러한 철학의 두 현안을, 그는 자연의 자리가 아닌 정신의 자리에서 벼린 칸트의 비판적 방법으로써 정초한 ‘이해의 이성’을 통해 한꺼번에 해소하려 했다.


딜타이는 ≪정신과학 입문≫ 이후의 책들, 특히 전집 5권과 7권에서, “해석학적 계획”과 “역사이성 비판”에 보다 넓고 깊게 천착함으로써 자신의 그러한 철학적 목적에 한층 더 가까이 다가섰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시도의 성취 밖에 여전히 남겨진 문제들은 많은 이들에게 한계로서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철학이 처한 중요한 문제를 우리로 하여금 보다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그가 펼쳐놓은 한계는 여전히 지금 여기의 철학의 과제로 살아 있다. 적어도 해석학 혹은 해석학적 경향들에서 딜타이를 비껴간 현재는 없고, 또 비껴갈 미래도 없을 것이다.


딜타이에게 가르침을 주었던 이들로는 랑케(Leopold von Ranke), 범신론자 피셔(Kuno Fischer), 슐라이어마허의 제자들이었던 뵈크(August Boeckh), 그리고 트렌델렌부르크(Friedrich Adolf Trendelenburg) 등이 거론될 수 있다. 그리고 딜타이의 영향을 받은 이들로는 슈펭글러(Oswald Spenglers), 립스(Hans Lipps), 놀(Herman Nohl), 리트(Theodor Litt), 슈프랑거(Eduard Spranger), 미슈(Georg Misch), 로타커(Erich Rothacker), 가다머(Hans-Georg Gadamer), 아도르노(Theodor W. Adorno), 카시러(Ernst Cassirer), 베티(Emilio Betti), 아펠(Karl-Otto Apel),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등이 있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스스로도 자신의 저작이 딜타이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고 있다고 실토하고 있다.


해석학[편집]

딜타이 해석학의 핵심적 사유는 어떤 과정을 거쳐 근대에 ‘보편적 해석학’이 정립될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단연 중심인물로 거론되는 사람이 슐라이어마허이다. 딜타이는 그를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로 그리고 고전어의 대가로 존경과 흠모를 아끼지 않았다. 해석학의 역사에서 특히 슐라이어마허의 보편적 해석학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전의 신학적 해석학이나 문헌학적 해석학과 같은 해석학의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좀 더 보편적인 지반에서 해석과 이해의 문제를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근대 이전 필로, 오리게네스, 아우구스티누스, 루터에 이르기까지 성서 해석학의 방법으로 널리 활용되었던 비유적인 해석 방식에 슐라이어마허는 회의를 품게 되었다. 비유적 해석은 텍스트의 본래적 의미 이외에 비본래적 의미를 받아들이는 한계를 노정하고 있는 것이다. 만인을 위해 쓰인 성서를 더 이상 신앙과 은총이 아니라 문법적이고 심리적으로 해석할 필요성을 절감한 슐라이어마허는 이전의 전통과 동시대인들과의 활발한 지적 교류를 통하여 해석학과 비판의 체계를 수립하게 된다.


슐라이어마허에 의하면 해석은 하나의 구성 과정이다. 구성은 규칙(Regeln)을 잘 적용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해석자의 재능(Talent)에도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다. 해석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바로 문법적 해석이다. 이것은 저자의 언어 영역권 안에서 텍스트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과 단어의 의미는 전체적인 문맥(Kontext)으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배후에 깔고 있다. 텍스트의 해석에서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일이 또한 중요하다. 심리적 해석은 저자의 기본 생각과 본래 의도에 비추어 텍스트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요청이다. 저자에게서 우리는 자아, 품위, 자율, 자유, 자발성과 같은 심리적인 근원을 발견할 수 있다. 해석자의 예감(Divination)은 해석자의 근원을 추적하기 위한 방법으로 저자의 심리적 상태 파악은 물론 저자의 전체적 저술에 비추어 하나의 작품을 통찰함으로써 이해를 촉진시킬 수 있다. 슐라이어마허의 ‘저자가 자기 스스로를 이해한 것보다 훨씬 더 잘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러한 근거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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