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42 –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The Making of the English Working Class, 1963)/ 톰슨(Edward Palmer Thompson, 1924~1993)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노동계급의 개념과 그 형성과정에 대한 대답으로 씌어진 저서. 톰슨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의 산업혁명 시기에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과정을 노동자들의 전체적 경험을 추적하여 규명한 결과, 노동계급을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자동적인 산물로 보는 천박한 마르크스주의나, 자본주의 체제의 한 구성요소로 보는 기능주의적 접근 을 비판하고, 계급의 형성을 구조와 주체간의 상호작용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민중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삶을 드러낸 대표적인 아래로부터의 역사 이다. 


a. 생애와 작품활동

 톰슨은 영국 태생으로 아프리카와 이탈리아에서 종군생활을 하였으며,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톰슨은 일찍부터 영국의 노동빈민에 관심이 많아, 그 방면의 전문서적을 탐독하였다. 그는 영국노동자들에 대한 방대한 자료들을 각 지역으로부터 수집해가면서 본서를 집필하기로 결심하였으며, 이제까지 영국노동자들에 대해 정설로 되어오던 인습적인 사회사에 반기를 들고나섰다.

 다시 말하면 노동자들의 다수집단을 자유방임주의의 희생물로 간주하는 페이비언 학설이나, 그들을 노동력의 원천이나 떠돌아다니는 이주자들로 보려는 경험론적 경제사 이론, 그리고 그들의 시대를 복지국가나 사회주의 공화국의 선구시대로 관망하려는 천로역정의 주장들을 모두 배격하고, 가난한 양말직공이나 농민. 직조공. 기술공 등 기계기술과 사회구조의 변화로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을 위하여 붓을 들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단지 떠돌아다니다가 사라지는 부랑민이 아니라, 바로 그들이 영국노동계급을 형성하여 선량한 계급의식을 수립한 시대적 선봉자들임을 입증하고자 했다. 그는 1962년 레비흄재단으로부터 연구기금을 받아 여기에 소개하고자 하는 영국노동계급의 형성이라는 책을 완성하게 되었다. 


b. 영국노동계급의 형성의 내용

 영국 노동운동사를 조금이라도 접해본 사람은 영국노동계급의 형성하면, 이제는 고전이 되어버린 이 책을 연상하게 된다. 이 책은 1780~1832년의 기간에 영국의 노동계급이 형성되었다는 가설 아래, 그들의 성립배경과 발달과정을 구명한 일종의 사회경제사의 전문서이다. 이제까지 영국사에 있어서 가장 격렬한 논쟁과 크나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문제는 16~7세기의 소위 젠트리에 관한 논쟁이며, 다른 한가지는 산업혁명기의 노동빈민에 관한 논쟁이다. 전자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이미 충분히 소개되었으나, 후자에 관해서는 아직 이렇다 할 만한 논문이나 저술이 나오고 있지 않는 실정이다. 본서가 세계학자들의 비상한 관심을 집중시키는 데에는 몇 가지의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본서의 주제는 영국노동계급이 1780~1832년의 기간에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1790년 이전의 노동자들은 토지귀족에게 예속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본서를 전 3편으로 나누어 영국노동자들의 발달과정을 논술하고 있다. 


   제1편  자유의 나무 

 1편에서는 산업혁명 이전에 있어서의 노동자들의 상황과 노동계급 형성의 배경들이 서술되고 있다. 그는 노동계급 형성의 배경으로 가난한 자의 종교였던 감리교 부흥운동, 인민대중운동, 양심과 표현의 자유를 내세우는 영국인의 생득권사상 등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이 세 가지 전통들은 경제적 변화와 더불어 일반 영국인들에게 전파되었으며, 특히 산업혁명과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운동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제2편  아담의 저주  

 2편에서는 산업혁명으로 야기된 각종 파괴적 영향들과 이에 따른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탄압정책들이 논술되고 있다. 그는 특히 현장노동자들과 기술공. 직조공 등 그 중에서도 기계기술과 사회변화에 의해 실직된 노동자들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그는 다시 장을 따로 만들어 노동자들의 생활용품과 주택, 그들의 자녀문제. 종교 기타 생활들에 대해 상술하고 있다. 


   제3편  노동계급의 출현 

 3편에서는 노동계급으로 변신하는 노동자들이 그들을 둘러싼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 나갔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는 주로 19세기 초기에 있었던 그들의 급진사상과 러다이트(기계파괴)운동, 결사금지법 반대운동 및 의회개혁운동 등을 예로 들어 노동계급의 움직임을 추적하고 있다. 그리고 편에서 저자는 계급의식을 인용하여 노동 계급의 문화를 다시 한번 주지시키고 있다. 


 톰슨의 주장을 다시 한번 요약하면 영국의 노동계급은 산업혁명 이전시대(18세기 후엽)로부터 그 전조가 배태되어, 19세기 초엽에 이르러서는 노동계급으로 성장하게 되었으며, 차티스트 운동(19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c. 본서에 대한 논란

 톰슨의 이론에 대해 우선 제기되는 문제는 과연 영국의 노동계급이 1780~1832년 사이에 형성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영국노동계급의 형성의 시기를 논의하는 가운데 자연히 계급에 관한 개념문제가 등장하게 되었다. 즉, 톰슨이 계급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였으며, 노동계급의 형성을 주장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의 계급의 개념은 구조나 카테고리로서가 아니라,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역사현상으로 파악되고 있다는 점에서 학자들의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그중 한가지는 톰슨의 계급을 상대론적 개념으로 보려는 학자들(밀스)이 등장하였다. 이것은 톰슨의 계급 개념이 어느 특정시대의 직업집단이나 노동임금 및 공장제도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생산관계에 따라 언제나 다른 계급경험을 야기시키는 성격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은 그를 청년 마르크스주의 노선에 서 있게 하여, 인간의 의지, 다시 말해서 노동자들의 자유의지를 중시하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다른 한가지는 그의 계급을 절대론적 개념으로 해석하려는 학자들(쿠리에, 하트웰)로서, 그들에 의하면 톰슨은 공장노동자들을 제외한 직조공. 기술공. 양말직공 들과 같은 기계기술과 사회변화에 의해 실직된 노동자들만을 취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장노동자들이 기초되지 않은 곳에 노동계급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계급의식 또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박은 상술한 시기에 노동계급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결론에 이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전체론적 입장에서 영국노동계급의 형성을 주장하는 그를 논박하는 사람들은 소위 분리주의 학자들이었다(말콤, 토머스). 그들은 러다이트 운동을 각 지역별로 심층연구한 결과에 의해 러다이트 운동과 개혁운동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에도 석연치 않는 점들이 있는

실정이다. 최근에 톰슨의 연구에 대한 종합적 탐색이 시도된 것은 구조 기능주의 학파에 의해서다. 그들은 사회적 갈등을 일종의 사회제도의 병폐로 간파하고, 사회구조와의 균형을 중시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톰슨의 계급개념이 중요하게 반영될 리가 없었다. 이 학파 역시 자본주의의 변호자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학자들의 논의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d. 본서에 대한 평가

 이 책은 노동사 연구에 획기적인 지표가 되었고, 그가 내린 계급의 정의는 계급연구에 있어서 새로운 기운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에서 톰슨은 노동계급을 단순히 산업자본주의의 산물 내지는 희생물로서만 보아온 기존의 역사가들의 관점에 도전하고, 노동계급은 사회. 경제적 조건에 의해 만들어진 것만이 아니라, 스스로를 만든 역사의 주체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그때까지의 계급개념에 반대하여 계급을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하는 것이라고 규정함으로써, 동적이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관계 속에서 계급을 이해하려고 시도했다. 이런 톰슨의 접근방법은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켜, 많은 역사. 사회학자들이 이에 대해 긍정적 혹은 부정적 견해를 표명했다. 첫째, 본서는 마르크스주의적 노선에 기초하여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톰슨은 역사의 발전과정을 하나의 필연적 진보의 과정으로 낙관하고, 산업혁명기간의 노동자들의 집단을 하나의 사회구조나 카테고리로 보기보다는 역사현상의 하나로 간파함으로써,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지위를 확고하게 심화시켜주는 반면, 과도한 신념과 감정, 과소한 분석과 객관으로 지나간 사실들을 도식화하였다는 학자들의 비난 또한 적지 않은 실정이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그가 모든 사회현상을 전체론적(holistic)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저자는 산업혁명 이전의 사건들은 모두 노동계급의 형성을 위해 수렴되고 있는 듯한 신념 아래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본서는 사회적 갈등(Social Conflict)의 기능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는 점이다. 저자는 사회변동이 마치 사회계급의 갈등으로부터 일어난 것으로 해석함으로써, 산업혁명 기간에 있어서 노동자들이 하나의 노동계급으로 발돋움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관망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계급의 갈등이론은 구조기능주의 학파에 의해 비판을 받게 되었다. 

 셋째, 본서는 휘그주의적(Whiggist)전통에 반기를 든, 그리하여 노동빈민과 가진 것이 없는 인민운동을 대변한 신사회사의 선봉이라는 점이다. 그는 대체로 하몬드나 루드 및 홉스봄의 접근방법을 따르고 있다고 하겠으나, 루드 등이 대중의 행동을 하나의 일탈형태로, 홉스봄이 집단현상으로 바라본 데 비해, 그는 사회기능의 한 현상으로 고양시킨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나아가서 그가 아직까지 역사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일반 대중의 사건들을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관념사나 지성사의 일익을 감당해낸 역저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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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king of the English Working Class(from Wikipedia)

Thompson's most influential work was and remains The Making of the English Working Class, published in 1963 while he was working at the University of Leeds. The massive book, over 800 pages, was a watershed in the foundation of the field of social history. By exploring the ordinary cultures of working people through their previously ignored documentary remains, Thompson told the forgotten history of the first working-class political left in the world in the late-18th and early-19th centuries. Reflecting on the importance of the book for its 50th anniversary, Emma Griffin explained that Thompson "uncovered details about workshop customs and rituals, failed conspiracies, threatening letters, popular songs, and union club cards. He took what others had regarded as scraps from the archive and interrogated them for what they told us about the beliefs and aims of those who were not on the winning side. Here, then, was a book that rambled over aspects of human experience that had never before had their historian.[4]


The Making of the English Working Class had a profound effect on the shape of British historiography, and still endures as a staple on university reading lists more than 50 years after its first publication in 1963. Writing for the Times Higher Education in 2013, Robert Colls recalled the power of Thompson's book for his generation of young British leftists:


I bought my first copy in 1968 – a small, fat bundle of Pelican with a picture of a Yorkshire miner on the front – and I still have it, bandaged up and exhausted by the years of labour. From the first of its 900-odd pages, I knew, and my friends at the University of Sussex knew, that this was something else. We talked about it in the bar and on the bus and in the refectory queue. Imagine that: young male students more interested in a book than in gooseberry tart and custard.[1]


In his preface to this book, E.P. Thompson set out his approach to writing history from below:


I am seeking to rescue the poor stockinger, the Luddite cropper, the "obsolete" hand-loom weaver, the "Utopian" artisan, and even the deluded follower of Joanna Southcott, from the enormous condescension of posterity. Their crafts and traditions may have been dying. Their hostility to the new industrialism may have been backward-looking. Their communitarian ideals may have been fantasies. Their insurrectionary conspiracies may have been foolhardy. But they lived through these times of acute social disturbance, and we did not. Their aspirations were valid in terms of their own experience; and, if they were casualties of history, they remain, condemned in their own lives, as casualties.


Thompson's thought was also original and significant because of the way he defined "class." To Thompson, class was not a structure, but a relationship:


And class happens when some men, as a result of common experiences (inherited or shared), feel and articulate the identity of their interests as between themselves, and as against other men whose interests are different from (and usually opposed to) theirs. The class experience is largely determined by the productive relations into which men are born—or enter involuntarily. Class-consciousness is the way in which these experiences are handled in cultural terms: embodied in traditions, value-systems, ideas, and institutional forms. If the experience appears as determined, class-consciousness does not. We can see a logic in the responses of similar occupational groups undergoing similar experiences, but we cannot predicate any law. Consciousness of class arises in the same way in different times and places, but never in just the same way.


By re-defining class as a relationship that changed over time, Thompson proceeded to demonstrate how class was worthy of historical investigation. He opened the gates for a generation of labour historians, such as David Montgomery and Herbert Gutman, who made similar studies of the American working classes.


A major work of research and synthesis, the book was also important in historiographical terms: with it, Thompson demonstrated the power of a historical Marxism rooted in the experience of real flesh-and-blood workers. Thompson wrote the book while living in Siddal, Halifax, West Yorkshire and based some of the work on his experiences with the local Halifax popul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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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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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트리(영어: gentry)는 영국에서 귀족으로서의 지위는 없었으나 가문의 휘장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받은 중간 계층을 이른다. 그러나 역사적인 개념으로는 요먼 이상, 귀족 이하의 토지 소유자, 즉, 부유한 지주와 법률가·성직자·개업 의사 등 전문적인 직업을 가진 자 및 부유한 상인 등을 핵심으로 한 중산계급의 상부층을 말한다.


이러한 젠트리는 16세기 이후 중산 농민인 요먼(Yeoman)의 희생 및 귀족계급의 몰락의 결과로서 발생, 영국사상 거의 지배적인 지위를 확립했으며 그 패권은 20세기 초두까지 이르렀다. 이 계층은 영국의 자본주의와 사회발전에 있어 그 근간을 이루었으며, 영국사의 모든 국면에 걸쳐 그 각인을 남기고 있다.


신사를 뜻하는 영단어인 젠틀맨(Gentleman)은 여기서 유래되었다.


목차  [숨기기] 

1 개요

2 지주 귀족의 형성

3 사회적 유동성

4 기업가로서의 젠트리

5 문학

6 각주

7 같이 보기

개요[편집]

젠트리(gentry)는 영국의 하급 지주 계층의 총칭이다. 남작 아래의 계급이지만, 귀족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나 귀족과 젠트리 사이에 칭호는 다르지만, 특권의 차이는 많이 나지 않았고, 둘 다 중세의 봉건영주였기 때문에 하나의 "지주 귀족"으로 취급된다. 치안관 등 지방 행정 조직을 무급으로 맡아 싼 행정기구의 형성을 지원하고, 중앙 관직에 인재를 공급했다. 영지 규모에 따라 준남작(baronet), 기사(Knight), 향사(Esquire), 신사(Gentleman)로 분류된다.1


지주 귀족의 형성[편집]

젠트리는 중세의 최하층 영주 신분의 총칭이었다. 영국 귀족의 대부분은 윌리엄 1세 의한 노르만 정복 시 잉글랜드 각지에 봉한 노르만족을 기원으로 하며, 그들의 아래에 위치에 있는 젠트리는 그 이전부터의 지역 유력자 영주들이었다. 14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 젠트리는 귀족의 가신이 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장미전쟁을 계기로 귀족 세력이 급감하면서 그 그늘을 벗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젠트리는 이후 흑사병과 백년전쟁을 시작으로 전란 등 봉건 사회의 동요를 거쳐 16세기에는 영주에서 지주로 전환을 시작했지만, 이후에도 단순한 토지 취득자로만 간주되지 않고, 귀족과 함께 신사 계급으로서 일정한 존경을 받으며, 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계속 유지했다.


19세기까지 영국에서 작위를 가진 귀족 가문은 다른 대륙 국가에 비해 매우 적었고, 또한 젠트리와 귀족 사이에 칭호 외 특권에 있어서 큰 차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양자는 "지주 귀족"으로서 하나의 전통적인 엘리트 계층을 형성하고 지주 지배 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다.


사회적 유동성[편집]

영국에서 젠틀맨들이 사회적 존경을 받았던 것은 그들이 사치품을 즐기는 그런 수탈적 존재가 아니라,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사회에 봉사하는 존재로 거절하지 않고, 그것을 주위에 과시하기 위한 그들의 지배야말로 최상의 사람에 의한 지배라고 생각하도록 명분을 유지하고,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솔선하여 전쟁터에 나갔고, 치안관 등의 관직을 무급으로 맡았으며 자선 사업을 했다. 이러한 행동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Buddha : noblesse oblige - 고귀한 자의 의무)라고 하며 신흥 중산층과 달리 자신의 이익을 돌보지 않는 존재(실제로는 무급직은 불로소득 이외의 정치 참여의 길이 닫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라는 인상을 심어주는데 성공했다.


16세기 중간 계층, 미드링 소트라고 불리는 사람들(곧 중산층을 형성하는)의 발흥이 시작되면서 상업적으로 성공한 그들은 명예와 존경을 요구하게 된다. 그들에게 지주가 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헨리 8세에 의한 종교개혁이다. 종교개혁으로 수도원이 해체되고, 그 영지는 국왕의 영지로 편입되었고, 그 땅은 이후 행정기구 개혁의 재원으로 삼기 위해 매각되게 되었다. 이 옛 수도원 땅을 영지로 매입하여 성공한 중간 계층의 사람들은 염원하던 젠트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사업"에 성공한 사람이 성공적인 마무리로 토지를 매입하면 지주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뿌리박힌 출세의 수단이 교역에서 식민지 경영으로 바뀌어도 계속되었다. 이것은 사회에 유동성을 갖게 하고, 성공한 인간을 기존 체제에 도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젠트리라는 체제에 포함시킴으로써 지주 지배 체제에 더욱 안정을 가져왔다.


기업가로서의 젠트리[편집]

젠트리는 지주로 땅을 일구는 본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것이 그들이 경제 활동에 소극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산업혁명에 필요한 자본을 축적했한 모직물 산업을 추진하는 역할을 했던 것도 젠트리들이다. 16, 17세기 영국에서는 모직물 산업의 중심은 수출용 반완제품 ("구 모직물")에서 "새로운 모직물"로 불리는 얇은 완제품으로 변천해 갔으며, 남쪽 네덜란드 여러 국가에서 대거 망명해온 신교도들(네덜란드 공화국 독립 시 남쪽 네덜란드 주들이 스페인령에 남아 있기 때문에)을 받아들여, 수입에 의존하던 사치품도 직접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이 "실험 기업"의 활동은 젠트리들의 지도로 진행되었다.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에 걸쳐 소규모 지주가 몰락하고 대지주가 더 융성하는 젠트리의 양극화가 일어났지만, 본래의 농업 경영에 더해진 이 "자본가적"인 경영 적응 여부에 따라 명암이 엇갈렸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여기에는 중앙에서 유리한 관직을 얻었던 경우 등 다른 관점에서 반론도 있지만, 아직 결론은 나지 않았다. 어쨌든, 이때부터 젠트리는 "자본주의적인 "경영에 적응을 했고, 이 젠트리층의 기업적인 경향은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발생한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문학[편집]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은 젠트리 사회를 그린 작품으로 당시의 영국의 상류계급은 크게 귀족원에 의석을 가지고 작위를 가지는 귀족과 그 이 외의 대지주 계급(젠트리)으로 나눌 수 있었지만, 젠트리 계급 내에서도 역사적 혈통, 친족의 질, 재산 등에 의해 격을 따지고 있었다. 일반적인 사교 의례에서는 동등하게 대우를 받았지만, 결혼 등 현실 문제에서는, 그러한 격차를 많이 따졌다. 이런 시대적 배경을 잘 그린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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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다이트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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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다이트 운동(Luddite)은 19세기 초반 영국에서 있었던 사회 운동이다. 1811년에서 1812년 사이에 있었다.


목차  [숨기기] 

1 원인

2 결과

3 의미

4 참고 자료

5 외부 링크

원인[편집]

흔히 러다이트 운동은 기계를 파괴하였다는 사실 때문에 민중들의 우매한 감정적 폭동으로만 잘못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노동자들이 자본가에 맞서 계급투쟁을 벌인 노동운동이었다. 영국의 섬유 노동자들은 자본가로부터 하청을 받아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었는데, 일하는 노동에 비해 이윤의 분배가 적은 착취로 고통받고 있었다. 실제로 그들이 받는 임금은 빵 한 개만 살 수 있어서 가족을 부양할 수 없었다. 더구나 영국 정부가 자본가와 결탁하여 단결금지법을 제정했기 때문에, 19세기 영국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결성, 단체교섭, 파업 등으로 단결하여 싸우는 노동운동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노팅엄셔·요크셔·랭커셔를 중심으로 자본가에게 빌려 사용하던 기계를 파괴함으로써 자본가의 착취에 맞서 계급투쟁을 하였는데 이를 러다이트 또는 기계파괴운동이라고 부른다.


결과[편집]

영국 정부에서는 자본가들의 편에 서서 주동자를 처형하는 등 탄압을 하였는데, 이는 민중들의 마음을 움직여 투쟁자금 모금운동이 일어났으며 바이런등의 지식인들도 "폭동은 가난때문에 생긴다."라며 노동자들을 편들었다.결국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단결투쟁에 굴복하여 노동자들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투쟁에서 승리한 노동자들은 폭력투쟁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의회민주주의로 투쟁하였는데, 이를 차티스트 운동,차티즘이라고 부른다. 노동조합이 자본가와 협상하고 협상한 내용을 단체협약으로써 문서화하는 권리인 단체교섭권도 러다이트 운동에서 유래한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싸우자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게 양보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의미[편집]

기계는 그들에게 있어서 자본주의적 생산기구 아래 도입된 것으로, 인간을 노고(勞苦)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며 노동자에게 있어서 기계는 그들의 노고를 더욱 증대시키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기계를 때려부수는 행위는 기계를 소유하는 자본가에 대한 증오를 나타내는 하나의 변형이었다. 러다이트(Luddite) 운동은 1811년과 1812년 사이에 일어난 대규모적인 기계부수기 운동이었고, 노팅엄셔·요크셔·랭커셔를 중심으로 수많은 역직기(力織機) 편기가 파괴되었다.


참고 자료[편집]

《교실밖의 세계사》-럿다이트 운동:대중들의 우매한 감정적 폭동이 아니었다/김성환 지음/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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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가 일자리 뺏는다?…역사적 해프닝으로 끝난 기계파괴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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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티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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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티스트 운동에서 넘어옴)

차티즘(Chartism), 차티스트 운동(Chartist Movement)은 19세기 중엽(1838~1848) 영국에서 있었던 사회 운동이다.


설명[편집]

제1차 선거법 개정은 자본가 계급의 요구가 실현되는 것에 그쳤다. 개정의 실현에 힘이 된 것은 노동 대중이었으나, 그들의 요구는 자본가 계급의 배신으로 전혀 실현되지 않았다. 1839년 그들은 보통 선거·비밀 선거·선거구의 공평화, 매년의 의회 개선, 의원의 재산 자격 폐지, 의원 세비 지급 등 6개항의 인민헌장(People’s Charter)을 내걸고 광범위한 정치 운동을 전개했으며, 경제적 향상을 위한 수단으로서 의회의 개혁이 한층 더 필요하다고 보고 자본가가 권력을 장악하 있는 한 이 계급을 경제적으로 정복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1843년의 패배로 계속된 불화·분열 가운데 노동자 계급의 새로운 지도자들은 노동 전선을 통일하기 위하여 직접적이고 간단한 것으로서, 보통 선거에 입각한 의회 민주주의의 요구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1838년에서 1848년에 걸쳐 런던, 버밍엄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운동이 전개되었고, 북부의 공업지대에서 선전전을 벌이는 방법으로 수백만의 서명을 얻어 의회에 청원하였다. 그러나 지도자간의 분열, 사상의 불일치, 탄압 때문에 그 최고조였던 2월 혁명을 고비로 하여 급격히 쇠퇴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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