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017 – 순자(荀子) / 순자(荀子) (BC 315~236년경)

 (출처 :  동서고전 200선 해제(반덕진, 가람기획))



 순자는 <동양의 아리스토텔레스>라고 불린다.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플라톤이 이상주의적으로 계승한 데 반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적으로 계승했는데, 마찬가지로 공자의 사상을 맹자가 이상주의적으로 받아들였다면 순자는 현실주의적으로 이어받았다. 성악설에 입각하여 인간의 후천적인 노력을 강조한 순자는 인간을 근원적으로 사회적 동물로 보았다. 그는 사회적 분업원리를 통한 엘리트 중심의 군주국가체제를 옹호했으며, 인간에 의한 자연의 이용과 지배를 정당화하고 교육과 사회제도의 중요성을 설파함으로써 제자백가의 사상을 비판.종합하여 진한 이후 중국에서 중앙집권적 관료국가의 성립.출현에 기를을 마련했다.


a.생애


 BC 3세기경의 중국사상가.이름은 황.순자는 전국시대 조나라 사람으로 그의 출생 및 생애에 대해서는 정확하기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그가 태어난 조나라는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중국 변두리에 위치한 나라였다. 그는 50세 무렵에 문화가 발달한 제나라에 유학하여 그곳에서 학술적인 체계를 세웠다. 당시 제나라의 민왕은 학술장려에 힘써 학자를 우대하는 한편, 수도인 임치 부근에 문화지역을 마련하고 이곳에 큰 저택들을 지어 학자들이 여기서 살며 학문을 연구하도록 했다. 이곳에는 유학자들이 자유로이 토론도 하고 학문연구도 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했다. 순자는 이곳에서 선학들이 연구한 학문의 지식을 흡수,분석하면서 그의 학문적 분석체계를 세워나갔다. 순자는 민왕의 뒤를 이은 양왕에 의해 학자들의 수석의 자리라 할 수 있는 좨주(祭酒)로 초빙되었다. 후일 사마천이 <사기>에서 <<순경(경은존칭)은 조인이다. 나이 50에 처음으로 제에 유학했다. 순경은 세 번 좨주가 되었다. 제인이 순경을 참소하자 초로 갔다>>라고 밝혔듯이 순자가 당시 학자들 사이에서 명망이 높았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간신배들의 참소로 그 직책에서 물러나 제나라를 떠났다.

 그는 초나라의 재상인 춘신군의 도움으로 난능현의 장관자리를 얻게 되나, 곧 춘신군의 한 문객의 춘신군에게 그를 멀리 하도록 권해 그를 파직시켰다. 여기서 물러난 순자는 고향 조나라로 돌아왔으나 춘신군은 그를 다시 불러 다시 장관에 등용했다. 그는 제나라로 돌아오기 전에 진나라에 잠시 초빙되어 상앙의 법치주의를 채택하여 정치체제의 혁신을 통한 통일의 기틀이 마련되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거기서 그는 성문법에 바탕을 둔 통치와 행정의 능률화를 직접 눈으로 보았다. 그후 춘신군이 암살당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오직 저작에만 힘썼다.

 순자는 자기가 공자를 계승했다고 자부했으나, 그의 성악설은 맹자의 성선설과 충돌하여 이상론을 원칙으로 삼는 유교에서는 환영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제자백가 중에서도 중국 고대사상을 최후로 집대성한 위대한 학자임에 틀림없다.

 

b.순자의 사상


 공자의 유가사상은 맹자와 순자에 의해 계승되어 유가학파로 발전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다 같이 공자의 사상적 영향을 받고 있으나, 그들의 주장은 상반되는 점이 많고 후세의 학문에 미친 영향 또한 다르다. 그들의 학문계통을 보면 맹자는 공자의 직계제자인 자사의 계통이고, 순자는 특히 <예>를 강조한 자하의 계통에서 나왔다.

 같은 유학자이면서도 순자는 여러 면에서 맹자에 비판을 가했다. 그는 맹자의 성선설에 반대하여 성악설을 주장했다. 인간의 본성이 악한 증거로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욕망>을 지니고 있고, 그 욕망이 채워지지 않으며 끊임없이 갈구하고 이로 인해 사회의 혼란과 무질서가 야기되며, 이러한 욕구제한의 가장 좋은 방법은 <예>라 했다. 특히 공자나 맹자의 효제 제일주의에 비판을 가해, 효제는 소행이고 이보다 의를 좇아서 군주를 섬기는 <충의>가 더 큰 행동이라고 했다. 이는 공자 이래 효제일주의에서 탈피하여 충의를 보다 중요한 도덕적 순자의 <성악설>과 <충의론>은 다음에 오는 법가사상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

   1. 천론

 맹자의 이상주의와는 달리 순자는 철저한 현실주의자로서 초인적인 일체의 권위를 부정한다. 고대중국 전통사회는 경천사상에 바탕을 두고 천을 인간의 길흉화복을 좌우하는 인격신으로 생각했다. 공자.맹자.자사에 이르러 천의 인격적 이미지는 벗겨졌지만 천은 대덕의 근거로서 본체론적 의미를 지닌다.

 천은 인간에 앞서 있으면서 인간에 내재한다. 인간의 최고경지인 성인은 내재하는 천을 발견,발현시킴으로써 천일합일의 경지에 도달한다.순자는 <천론>편에서 전통적인 천관을 자연물이고 인간은 생물이다.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은 인간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천에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성인은 천을 알기를 구하지 않는다. 군자는 나 자신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는 문제를 신중히 하고 하늘에 달려 있는 문제를 추구하지 않는다. 하늘에는 변하지 않는 법칙이 있다. 군자는 이것을 이용한다.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거나 일식.월식이 일어나도 두려워할 것 없다. 두려운 것은 인요다. 즉,정령을 제때 발하지 못해 백성들이 굶주리고 어지러운 것을 말한다. <천론>편은 <비상>편과 아울러 순자의 과학적 성격을 잘 드러낸다.


   2. 성론

 대부분의 사회이론이 그 사람의 인성론과 깊은 관계가 있듯이 순자의 성론은 그의 사상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순자는 <성악>편에서 인성이 악함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사람의 성은 태어나면서부터 이익을 좋아함이 있다. 이것을 따르므로 쟁탈이 생겨나고 사양함이 없게 된다. 태어나면서부터 질투하고 미워함이 있다. 이에 따르므로 남을 해치는 일이 생기고 충신이 없게 된다.>> 인간이 성의 욕망에 따라 행동하면 악하게 된다. 선인이나 악인이나 본성은 마찬가지다. 성인은 악한 본성을 인위적인 노력에 의해서 변화시켰기 때문에 선한 것이다. 맹자가 인성이 선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성과 위(인위: 인간이 후천적인 노력에 의해 만들어놓은 것)를 구별하지 못한 말이라고 비판한다. 인성이 악하기 때문에 인간에는 <교육>과 <예>가 필요한 것이라고 본다.


   3. 사회사상

 순자는 <왕제>편에서 <<힘이 소만 못하고 달리는 것이 말만 못한데 소나 말이 인간의 부림을 당하는 것은 왜 그런가? 사람은 사회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인간은 사회적 동물임을 밝힌다. 그리고 <비상>편에서는 <<사람이 사람된 까닭은 두발에 털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판단력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라고 밝히고 있다. 인간의 본성은 악해 자신의 욕망만족을 먼저 추구하지만 인간에게는 판단력이 있다. 인간은 오랜 경험을 통하여 자신의 욕망을 지속적으로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타인과 협력관계를 맺음으로써 성립된 것이 라고 한다. 일종의 사회계약론이라 하겠다. 일단 사회가 구성되고 나면 질서유지가 필요하다. 질서유지는 분, 즉 신분질서에 의해 가능하다고 한다. 순자는 세습제나 종족적 특권은 부정하지만 능력에 따른 계급의 발생은 당연한 것으로 본다. <<계급의 최정상에 인군이 있고, 인군은 절대권력으로서 분을 관장해야 한다>>고 한다.


   4. 정치사상

 순자는 무엇보다도 경험을 중시한다. 그래서 과거의 축적으로서 현재를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그의 정치사상은 과거를 향한 복고적 이상주의가 아니라 미래를 향한 현실주의다. 정통유가들은 선왕들을 높이고 왕도와 패도를 대립적으로 파악한다. 이에 반해 순자는 후왕을 더 높인다. <비상>편에서 <<후왕을 버리고 상고를 이야기하는 것은 자기 임금을 버리고 남의 임금을 섬기는 것과 같다>>고 했다. 순자에 있어 후왕의 법은 곧 선왕의 법의 구체화인 것이다. <왕제>편이나 <왕패>편에 의하면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 이상정치는 왕도보다도 패도를 주장하고 있는 듯하다. 순자는 인간의 욕망을 긍정적으로 파악한다. 군과 민을 연결시키는 것은 <인의도덕>이 아니라 <이익>이다. 군이 국가를 부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신상필벌에 의한 실력정치.능력정치를 실시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민은 법을 중시하게 되고, 한편 인간의 욕망을 자극함으로써 능력있는 사람의 배출을 돕게 된다고 한다.


   5. 정명론

 <천론>편이 순자의 자연관이 과학적임을 보여준다면 <정명>은 그의 인식이론이 과학적임을 보여준다. 정명은 공자에게서 시작된다. 정명에는 윤리적.사회적 측면에서 명분을 바로잡는다는 의미와 논리적 인식적 측면에서 개념을 바로잡는다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현실지향을 버리지 못하는 중국사상가에 있어 후자의 의미도 궁극적으로는 전자에 귀일된다. 공자의 정명이 주로 전자에 속한다면 명가는 후자에 속한다. 그러나 명가는 개념을 실과 독립적으로 논하여 궤변에 빠지고 말았다. 순자는 두 측면을 다 지니면서 궤변에 빠지지 않고 명(개념).사 (판단).변설(추론)을 실과의 관계 하에서 분류하여 설명한다. 명에는 단명.겸명.별명.공명이 있는데, 명에 차이가 있는 것은 천관,즉 감각기관이 있고 감각기관을 통해 받아들여진 대상을 마음의 미지가 종합판단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처럼 순자는 개념을 분석함과 동시에 인식작용에 대해서도 해명코자 노력했다. 이상 천론.성론.사회사상.정치사상.정명론을 통해 볼 수 있었듯이 순자의 사상은 과학적이요 현실적이며 실제적이다.


c.<순자>의 내용


 오늘날 우리가 보는 <순자>는 20권 32편으로 되어 있는데 대부분은 순자 자신이 저술하고 일부는 제자들의 기록으로 보고 있다. <근학>편에서 인간의 본성은 학문을 한 후에야 선해진다는 것으로 교육의 효과를 명시하고,<수신>편에서는 본성을 교정하는 방법으로 예와 사법을 중시할 것을 논했다. <불구>편은 사리의 근본을 깊이 고찰하여 경우에 따라 적절하게 대처할 것을, <영욕>편에서는 영광과 치욕은 사람이 스스로 취함에 기인함을 논했다. <비상>편에서는 미신을 배척하고 선왕의 제도와 문물은 모두 상고할 수 없으니 명백하게 상고할 수 있는 후왕의 것을 본받아야 함을 논하고,<비12자>편에서는 맹자.자사 등 12자를 논하고 있어 그의 박식함을 알 수 있고 사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유효>편에서는 주공.공자의 도를 찬양하여 유가학설을 옹호하고 있고, <왕제>편은 인간사회의 원리를 예의로 삼았으며, <부국>편은 사람의 물욕을 배척하지 않고 예의를 잃지 않는 범위에서 공리를 경시하지 않는 생계의 원리를, <왕패론>은 정치기술을, <군도>편에서는 정치의 근본을 위정자의 인격에 두는 인격본위의 정치를 강조하여 인치와 법치의 득실을,<천론>편은 천도와 인도를 구분하여 인간이 하늘에 가리어 사람을 모르는 장자의 주장과는 반대로 인간이 자연을 극복하는 정신을 논한 것으로 그의 철학의 중요한 관건이 된다.  <정론> 편은 묵자의 공리주의를 배격했고, <예론>편에서는 예의 기원과 예의 세 가지 근본, 즉 정치적 법제와 사회적 전례, 그리고 윤리적 예의를 논했다. <악론>편에서는 음악은 사람의 성정을 다스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고 음악의 원리,음악과 인생과의 관계를 논했다. <해펴>편은 사람들이 그릇된 주장을 하는 것은 마음 한구석이 욕망이나 이익에 가리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이성이 가려지고

막힌 것을 벗겨줌으로써 올바른 사고를 할 수 있다는 일종의 심리학 이론이며, <정명>편은 바른 논리는 바른 인식에서 나온다는 논리학 이론이다.


d.순자사상의 평가


   1. 순자의 논리는 전편에 걸쳐서 인간의 성악의 관념이 일관되고 있다. 즉, 인간이 선천적인 본성에 지배되지 않고 후천적인 <인위>를 존중했다. 여기에서 맹자와 근본적인 차이점이 나타나는데, 맹자는 <예>를 <인의> 정신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보았으나, 순자는 <예>를 인성의 타고난 악한을 없애주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간주했다. 그는 도덕에 있어서 <예>를 가장 중요시했다.  공자사상의 핵심은 <인>이고 맹자는 인을 더욱 확대시켜 <인의>를 강조했으며, 순자는 <인>을 들고 <의>를 실천하는 덕으로서 <예>를 강조했다. 이리하여 <인.의.예>는 유교의 기초가 되는 3덕이 된다. 이 3덕은 중국인들이 수천 년 동안 지켜온 행동 규범이기도 하다.

   2. 순자만큼 후천적인 학문을 중시한 사람도 없다. 그는 끊임없는 노력을 중시하여 그의 중심사상을 <노력주의>라고 말하는 이도 있는데 물론 이러한 사고는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성악설에서 유래되었음은 분명하다. 그는 사람의 본성은 악하지만 후천적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고대중국에서는 재해는 하늘의 뜻으로 생각했는데, 인간의 후천적인 노력을 중시하는 순자는 이를 부정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고대의 선왕을 군주의 이상형으로 삼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반대하여 현재의 정치는 현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고 현실에 노력한 왕, 즉 후왕이 정한 정책이나 제도에 당연히 복종해야 한다는 후왕사상을 주장한 것도 그의 이러한 후천적인 노력주의 사상에 근거한다고 보여진다.

   3. 순자의 뛰어난 점 중의 하나는 그가 공자의 사상을 잘 요약했을 뿐만 아니라, 도가.법가.묵가와 같은 다른 학파의 사상을 공박하지만 않고 훌륭한 사상은 받아들여 그 자신의 학문적 성격을 넓혔다는 사실이다. <순자>에서 보이는 인식론과 논리학 이론이 보이는 것도 그의 폭넓은 학문연구의 태도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영향은 지속적으로 미쳐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한비자.이사가 모두 그의 문하에서 나와 그들의 이론을 발전시켰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법가와 순자의 사상이 근본취지는 다르지만 순자의 예(인간 욕구제한을 위한 중용적 기준)가 법에 근사한 것임을 생각하면 영향을 부인할 수 없다. 또 한무제 때의 동중서가 순자를 칭찬한 사실은 한대의 정치와 결합한 유가사상이 순자의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가 된다. 특히 그의 성악설은 한의 양웅.왕충 이하 근대에 이르기까지 인성론자들에게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당 이후 유가들이 그들의 도통을 찾기 시작하면서 순자는 차츰 유학의 울타리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당나라의 한유만 하여도 순자를 매우 높이 평가했는데, 송 이후에는 성악설, 또 한 현실과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중시하는 순자의 주장은 이상론을 원칙으로 삼는 유교에서 이단시되어오다 18세기에 접어들어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

순자

성왕이 다스리는 나라

[荀子 ]

저자

순황(荀況)

해설자

장현근(용인대학교 중국학과 교수)

목차

『순자』와 실천 유학

『순자』와 그 시대

『순자』의 핵심 관념

순자의 영향과 현대적 의미

『순자』의 한계와 가능성

더 생각해볼 문제들

추천할 만한 텍스트

『순자』와 실천 유학


사회에 대해 건강한 관심을 갖도록, 그리고 복잡다단한 인간 관계를 도덕적으로 해결하여 보다 나은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원만한 사람을 키워 내는 것이 유가 사상의 큰 목적이다. 그래서 유가 사상은 정치철학이자 사회철학이며, 교육철학이자 인생철학이기도 하다. 유가의 경전인 『시경』이나 『서경』, 『주역』 등이 확립된 시기를 주(周)나라 초로 본다면, 유가 사상은 5~6백 년의 온축을 거쳐 마침내 공자에 의해 처음으로 집대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로부터 3백여 년 동안 어떤 외부 사상의 유입도 없이 중국 내에서 자생한 제자백가의 사상은 인류 역사상 가장 빛나는 학문적 성취 중 하나다. 우주의 작동 원리에서 인간 내면의 심성 문제에 이르기까지 무한한 상상력과 치밀한 탐구로 수많은 학파와 사상가들이 출몰하였다. 『순자』는 정통 유가를 자임한 순황(荀況)이 제자백가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계승하여 초기 유가 사상을 두 번째로 집대성한 탁월한 학문적 업적을 담은 책이다. 전통 시대 중국을 지배해 온 정치적 이념으로서 유교 사상은 순자의 영향이 매우 컸다. 순자는 이렇게 얘기한다.


듣지 않음은 듣느니만 못하다. 듣는 것은 보느니만 못하다. 보는 것은 아느니만 못하다. 아는 것은 행하느니만 못하다. 학문은 그것을 행하게 되었을 때 그친다.


『순자』를 읽으면 관념적 도덕이 아니라 실천적 도덕을 생각하게 된다. 또한 갈등하는 현대 사회에서 지식인의 역할이 무엇인지 그리고 냉혹한 법치와 자본의 지배를 넘어서 인류를 위한 새로운 이념적 대안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순자』와 그 시대


순자는 정치적으로 부국강병과 실리를 숭상하던 전국 시대 말기에 왕도(王道)에 대해 목청을 높였으며, 예의로 질서를 잡아가는 예치(禮治) 국가를 세우라고 권고하였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복잡한 세금과 요역을 과감히 줄이고 투기 세력을 억제하여 농업 중심의 경제 질서를 안정시키자고 주장하였다. 사회적으로는 신분의 대변동 시대에 오히려 신분 질서의 확립을 강조하는 한편, 도덕적ㆍ학문적 성취를 통한 신분 변동은 긍정하였다. 당시 중국 천하의 통일이 눈앞에 닥친 시대 분위기와 맞물려 제자백가의 다양한 주장들이 통합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각 학파의 사상가들은 다른 학파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였으며, 그들의 저작 또한 백과사전과 같은 성향을 띠게 되었다. 『순자』는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순자의 시대는 정치적으로 전국칠웅이 첨예하게 대립하였고 사상적으로 제자백가의 다양한 경쟁이 절정에 이르렀으며, 사회적으로 계급이 동요하고 신분 변동이 극심했다. 그래서 국가간의 합종연횡이 난무하고 부국강병을 추구한 법가 사상이 우세한 환경이었지만 순자는 최고의 학자로서 스스로를 위대한 유가 사상가로 자임하였다. 유가 내부로 볼 때 당시는 공자를 추종하는 세력들 사이에 분파 현상이 치열하고, 특히 맹자(孟子)에 의해 공자 사상의 정치적 의미가 더욱 풍부해진 시기였다.


정부 사업으로 춘추전국시대 서적을 총정리했던 한나라 유향(劉向)은 순자가 남겼다는 수만 자의 문헌과 '손경의 책'이란 이름으로 돌아다닌 322편의 글 가운데 중복된 290편을 빼고 32편으로 확정하여 재정리하였다. 그리고 『손경신서(孫卿新書)』라 이름을 붙인 다음 「서록(敍錄)」을 달았다. 순자 본인의 초기 저작들은 그의 생전에 이미 널리 유행했었으며, 현존 『순자』의 상당 부분은 그 초기 작품들로 생각된다. 나머지는 그의 제자들의 기록과 후인들이 순자의 이름을 빌어 지은 글 혹은 다른 작품들이 뒤섞여 있다. 하지만 『순자』의 모든 내용은 본인의 친필 저작 여부와 무관하게 일관된 사상체계를 갖추고 있어 순자의 기본 사상을 연구하는 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현재 전해지는 『순자』 20권은 당나라 양량(楊倞)1)이 두 차례 정리하고 재편집하여 주석을 덧붙인 것이다. 『순자』는 대부분 각 편의 핵심 주제를 편명으로 삼고 있다. 그 30여 편명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하늘과 인간의 일, 정치ㆍ경제와 논리학에 이르기까지 백과사전식의 종합적인 학문을 다루고 있다.


당나라 말기 한유(韓愈)가 "맹자는 순정하고도 지순하지만, 순자는 대체로 순정하되 조금 하자가 있다"고 평한 이래 송나라 이후의 성리학에서는 한결같이 순자 사상을 부정하고 멀리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공격은 주로 『순자』의 「성악(性惡)」2)편과 「비십이자(非十二子)」편에 집중되었을 뿐, 『순자』 전체를 진지하게 연구하거나 주석한 사람은 없었다. 순자가 재조명된 것은 청나라에 이르러서이다. 많은 유학자들이 양량 주석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고, 위서 여부를 고증하였으며, 해독이 어려운 글자에 상세한 해설을 덧붙였다. 이들을 종합하여 『순자』에 관한 가장 상세하고 완전한 주석서 『순자집해(荀子集解)』를 낸 사람은 왕선겸(王先謙)3)이다.


『순자』의 핵심 관념


순자는 현세의 군주를 지극히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현실 군주를 위대한 성왕으로 만들어 도덕적인 나라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그 방법은 신분에 기초한 예의를 통해 사회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그 사고의 바탕에는 인위적인 노력으로 하늘을 제어하고 악한 본성을 교화하며, 각종 폐단을 해소해야 한다는 사유가 깔려 있다.


1) 천생인성(天生人成), 성악(性惡), 정명(正名)

순자는 사람의 사회성을 중시하였으며, 국가 권력을 개인의 자유보다 우선시하였다. 그는 사회 질서의 안정을 위한 예(禮)의 두 가지 기능을 중심으로 사유하였다. 하나는 신분 등급ㆍ도덕적 성취 등 각종 질서를 분명하게 구분시켜 주는 인위적 기능 즉 명분(明分)이며, 다른 하나는 인류로 하여금 원만하고 만족스러운 집단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기능 즉 사군(使群) 기능이다. 순자 사유의 바탕은 이 두 문제를 중심으로 엮어져 있다. 순자의 우주관과 인생관은 한마디로 자연 세계가 인문 세계에 의해 주재된다는 천생인성(天生人成)4)이다.


천지의 기운으로 세상만물이 생겨났으니 이들을 조화롭게 꾸미고 성취시키는 것은 사람, 즉 성인의 일이다.


하늘의 도와 인간 행위의 조화로 이 세계가 이루어졌으며, 예의라는 인간의 힘이 개입되었을 때 하늘은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다는 사고다. 순자는 하늘과 인간을 완전히 나누어 생각하면서 하늘을 그저 불변하는 자연체로만 파악한다. 인간 세상의 치란(治亂)은 하늘 때문이 아니라 인위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사람 스스로가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초점은 인위, 즉 예를 강조하는 데 있었다.


순자는 사람의 본성을 악하다고 생각했다. 인간이 본질적ㆍ이성적으로 악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타고난 본능 혹은 동물적 욕망의 결과가 악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탄생 후 사회적 존재가 되면서 인간의 악한 성질이 발현된다는 의미다. 그 발현 양태는 경쟁과 다툼이며 결과는 사회적 혼란이다. 순자가 성악설을 제기한 목적은 인위적인 교육과 감화를 통해 인간의 악한 성질을 바꾸어 선한 행위를 하도록 이끌려는 것, 즉 화성기위(化性起僞)5)였다. 따라서 순자 성악설의 요지는 인위적 예의를 강조하는 데 있다.


순자의 인식론은 소극적인 적폐의 해소, 즉 해폐(解蔽)6)와 적극적으로 명분을 바로 세워 공공 인식에 도달한다는 정명(正名)으로 대표된다. 인간에게 본질적으로 내재하는 맑고 깨끗한 마음이 가려져 있을 때 한 쪽으로 치우치는 폐단이 생겨나므로 인위의 결정인 예를 통해 쌓여가는 폐단을 해소하는 것이 올바른 인식에 도달하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명분을 바르게 세움으로써 공공 인식에 도달할 수 있으며, 인위의 결정체인 예의로 사회 혼란을 야기하는 인식의 헷갈림을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2) 성왕(聖王)

사람의 사회성을 강조하고 집단의 질서를 중시했던 순자는 그 질서를 관장하는 중추로서 군주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선을 향해 가는 모든 인위적 행위의 표준인 예의를 만들고 주도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성왕(聖王)이다. 현실 군주는 이 성왕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천하를 다스리는 막중한 책임뿐만 아니라 도덕적 판단의 최고의 준칙이 되어야 하는 만큼 군주의 지위와 역할은 높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적인 군주인 성왕은 인륜의 극치이고 이상적 인격의 최고 형태이다. 성왕은 우선 인격적으로 완전하고 지혜가 출중해야 한다. 예의와 그것의 역사적 원칙인 통류(統類)7)를 꿰뚫고 있어야 하며, 철저히 규범을 준수하여 왕도(王道)를 실현해야 한다. 인간의 끊임없는 적극적 행위를 통해 선을 쌓아가니 모든 인민의 가치 판단의 준거가 된다. 이러한 성인은 예의를 힘써 배우고 실천하여 역사에 관통하는 원칙을 깨달으면 누구나 될 수 있다. 즉, "길거리의 어떤 사람도 우(禹)임금처럼 성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순자는 군주 정치라는 현실적 한계 때문에 기왕에 세(勢)를 얻어 군주가 된 사람의 정치적 영향력을 인정하고, 왕도엔 못 미치지만 믿음을 강조하며 법과 인민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패도(覇道) 또한 긍정한다. 어떤 상태든지 인위적 노력만 기울일 수 있으면 예치사회가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순자』의 상당 부분은 현명한 관료의 임용, 외재적 규범 확립, 복지 정책 등 이를 위한 구체적인 정책ㆍ대안들을 다루고 있다.


3) 예치(禮治)

순자는 외재적 사회 규범을 통해 질서 있는 사회를 복원코자 하였다. 순자는 예의야말로 도덕적으로 완벽한 질서를 구가할 수 있는 매우 구체적이고도 실행 가능한 규범이며, 역사적으로 성왕의 나라에는 예의의 대원칙인 통류가 관통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시ㆍ서를 통한 내부적 성인 공부, 즉 내성(內聖)의 길보다는 예의를 드높이는 외부적 왕도의 실천 즉 외왕(外王)의 길을 더 중시하였다.


순자는 역사적으로 관통하는 예의 원칙이 지금의 정치 권력에 반영되어 모든 인민들이 그로써 예의 구체적 행위를 유추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가치관의 표준이라고 생각했다. 순자는 도덕을 실천하는 현실 속의 군주를 후대의 성왕이란 뜻에서 후왕(後王)이라 불렀고, 예의가 나라를 다스리는 원리원칙이라 보았다. 그도 공자처럼 주나라 도덕정치이념의 건설자인 주공(周公)을 따르고자 하였다. 주공의 치국 이념 속에 관통하고 있는 보편적 법칙이 선왕의 예법을 충분히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순자는 예의에 통달하는 외부적 수양만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그의 「악론(樂論)」편을 보면 내성 공부의 중요한 일면으로 내적 심성을 도야시키는 역할 또한 중시하였다. 즉, 예의로 교화를 행하여 멋진 나라를 만들려면, 예를 통한 외부적 절제와 더불어 음악을 통한 내부적 덕성의 조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백성들의 욕망을 적절히 만족시켜 줌과 동시에 신분에 따른 분수를 지키도록 알맞게 절제시키는 예와 악의 기능을 모두 중시했다. 교화를 통한 질서의 확립이라는 정치적 목적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역시 사람이다. 그래서 순자가 주장한 예의치국의 핵심은 항상 다스리는 사람, 즉 치인(治人)에게 모아진다. 통치이념이나 법제(法制)의 존재 여부보다 어떤 사람이 그 원칙을 사용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순자의 영향과 현대적 의미


천하를 주유했고 오래 살았으며 학문적 위상이 당대 최고였던 점을 감안하면, 순자의 제자들은 대단히 많았을 것이다. 진나라의 천하통일에 결정적 공헌을 하였던 한비(韓非)와 이사(李斯) 외에도, 전국시대 말기에서 진나라를 거쳐 한나라 초까지 유학을 이은 사람은 거의 순자의 문하생이거나 그의 제자의 제자들이 많았다. 특히 유가 경전에 대한 전승과 전파에서 순자 사상의 공헌은 지대한 것이었다. 한(漢)나라 때에 유학은 국가 이데올로기가 되었는데, 그 학문적 바탕인 경학은 대부분 순자의 학통을 계승한 것이었다. 특히 『시경』과 『춘추』, 『예기』는 순자의 제자 및 그 제자의 제자들에 의해 온전히 후대에 전승되었다.


순자 스스로도 "학문하는 방법은 경전을 암송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예를 읽는 데서 끝난다"고 할 정도로 경전을 중시했다. 『순자』 전체를 볼 때 『시경』 인용이 84문장, 『역경』 인용이 2곳, 『서경』 인용이 15항목에 이른다. 그 외에도 공자의 말과 격언 등을 인용하여 사회 문제에 대해 날카로운 평가를 내리고 있는 점은 『춘추』의 비판적 글쓰기 방법을 그대로 이은 것이라 하겠다. 한나라와 당나라의 유학이 사실상 경학이었음을 고려한다면 순자의 유학사에서의 위치는 대단히 중요하다. 거의 모든 유가 경전의 전승이 순자와 크든 적든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대로 성리학이 지배하는 송나라 이래 『순자』는 철저히 부정당하였다.


그러다가 서구적 근대화의 과정에서 오랫동안 동아시아 사회를 이끌어 온 유교 그 자체가 송두리째 부정당하게 되었다. 유학 스스로 현대 사회와 인류 전체를 향해 보다 적극적인 실천 대안을 스스로 마련하지 못한다면 지난 수천 년 동안 동양 사회를 이끌어 온 선인들의 지혜는 몽땅 역사 속 한 페이지로 끝나 버리고 말 것이다. 성리학적 고담준론으로만 유학을 이해하지 말고, 주자학의 극복을 통한 새로운 대안 모색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적극적 사회적 실천성과 건강한 삶의 성취라는 원시 유학 본래의 측면을 되살려야 한다. 현대적 시각에서 『순자』를 다시 읽어야 할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


순자는 예의라는 도덕의 틀을 통해 모든 사회 문제를 극복하려 하였다. 사람 사이의 원만한 관계를 의미하는 예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함으로써 순자는 예에 사회적 생명을 불어넣었다. 이 예는 동아시아 사회 전반에 걸쳐 삶과 사회의 핵심이 되었다. 공자가 유학을 보편 학문으로 승화시킨 유학 발전의 첫 번째 위업을 달성하였다면, 순자는 유학을 사회철학으로 구성해낸 유학 발전의 두 번째 위업을 달성한 것이다. 현대 사회는 법의 지배가 사회 정의의 척도가 된다. 제도보다 인간을 앞세운 것이 예이고, 사람보다 제도를 앞세우는 것이 법이다. 법을 만들고 지배하는 사람이 정치의 핵심이어야지 법이 사람을 지배하는 정치여선 안 된다. 이를 긍정한다면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데 순자의 예론(禮論)은 매우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유학에서의 군주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덕이 있는 사람이 군주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고, 하나는 군주라면 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맹자로 대표되는 전자의 입장은 정치적 혼란기에 도탄에 빠진 민중의 함성을 담고 있으며, 순자로 대표되는 후자의 입장은 정치적 안정기에 지도자들의 도덕성에 대한 강력한 요청이다. 『순자』를 읽으면 민주주의에 '갇힌' 우리의 편협한 사유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며, 정치적인 것과 정치가에 대한 새로운 자기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순자』의 한계와 가능성


순자는 사람을 중시한 인문주의자였으나, 현실 군주를 인정한 상태에서 '예의'라는 절대적인 가치 기준만을 강조했다. 이는 자칫 절대 권력을 소유한 통치자들에게 독재의 도구로 이용될 수 있다. 그의 제자 한비와 이사가 혹독한 법치주의자가 된 것은 이런 권위주의적 가능성과 무관하지 않다. 이 외에 『순자』를 읽으면 악한 인성을 소유한 인간 세계에 어떻게 성인이 출현하게 되는지 명쾌한 해답을 얻을 수 없는 등 일부 사상적 한계도 있다. 오늘의 시각에서 보면 과도하게 신분 등급을 강조하고 있는가 하면, 권리와 의무의 상호관계에 대한 제도적 구상을 하지 못한 점 등이 지적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한계를 알고 『순자』를 읽을 필요가 있으며, 배경을 버리고 보편적 사유를 끌어 내는 현대적 독해를 해야 한다.


성악설 때문에 송나라 이후 성리학자들은 순자를 거의 매장하여 버렸다. 순자 성악설의 '성(性)'자는 맹자 성선설의 '성'자와 달리 정치적ㆍ사회적 존재로써 인간의 본성을 얘기하는 개념으로 기실 성리학자들의 정치 의식과도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에 의해 혹독한 비판을 받았으니 순자 본인에겐 억울할 일이다. 고려시대 말엽 우리나라에 들어와 조선 왕조 전체를 지배한 유학은 바로 이 성리학이었다. 이 때문에 조선에서 순자는 금서였다. 그럼에도 성리학을 뛰어넘어 보려는 무수한 유학자들은 여전히 순자를 읽었으며, 거기서 많은 자극을 받은 듯하다. 예컨대 『순자』를 읽고 정약용의 글들을 읽으면 구절까지 유사한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님을 금방 알 수 있다.


전통 사상의 비판적 계승을 통해 동양과 서양의 조화, 전통과 현대의 접목을 시도할 때 순자 사상은 대안적 사유로써 새로운 유학의 건립에 매우 훌륭한 아이디어를 제공해 준다. 지배자가 제멋대로 모든 일을 처리하는 인치(人治)가 아니라, 높은 수양ㆍ엄격성ㆍ도덕성ㆍ청렴성을 갖춘 새로운 인간형의 창출에 미래 사회의 희망을 건다면, "공동체의 화해와 질서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을 길러 내는 것이 법제도보다 중요하다"는 순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볼 만하지 않는가? 이제 우리는 철학과 윤리학을 구분하고, 굳이 정치와 윤리를 구별하여 학문적 정의를 내리는 서양식 사유에서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는가?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면 어떻게 이상적 인격체로서 성인이 출현할 수 있겠는가?

순자는 텅 비어 한결같으며 고요한 상태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인간 사회에 성인이 출현할 수 있다고 한다. 그의 성악설은 사람이 천성적으로 악한 존재로 태어난다는 말이 아니라 본성은 본래 투박한데 욕망 때문에 정치적 사회적으로 악한 결과를 낳는다는 말이다. 사람이 본래 지니고 있는 맑고 투명한 마음으로부터 성인이 출현하고, 이 성인의 가르침 때문에 성악한 인간이 도덕적인 예치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이다.


2. 법치와 예치 가운데 어느 것이 사회문제 해결에 유용한가?

법치는 범죄를 공평하고 객관적인 법으로 강제하여 개인 중심의 사회 질서를 수립한다는 의미다. 주로 벌금과 형벌로 이미 저지른 '죄의 결과'를 단죄하려는 것이다. 예치는 각종 인륜을 바탕으로 도덕적인 교화를 실시하여 공동체 중심의 사회 질서를 수립한다는 의미다. 주로 예의염치(禮義廉恥)에 충실하도록 철저히 가르쳐 범죄를 '미연에 방지'하려는 것이다. 어느 쪽이 더 나은 해결책인가.


추천할 만한 텍스트


『순자』, 순황 지음, 김학주 옮김, 을유문화사, 2001.

『순자』, 순황 지음, 장현근 옮김, 책세상, 2002.


 [네이버 지식백과] 순자 [荀子] - 성왕이 다스리는 나라 (동양의 고전을 읽는다, 2006. 5. 22., 휴머니스트)



B016 – 장자(莊子) / 장자(莊子) (BC 365?--290?)

 (출처 :  동서고전 200선 해제(반덕진, 가람기획))


 모든 관념과 세상의 속박에서 벗어나 해방된 <절대자유의 경지>를 탐색한 장자,당시의 시대적 혼미를 깨우기 위해 제창된 그의 개방주의는 각파 간의 이론적 대립을 해소시키고 철학적 한계를 극복하는 데 기여했고, 사람들로 하여금 숨막히고 답답한 속박에서 벗어나 넓고 시원한 세계를 호홉하며 삶을 향유하는 청량제 구실을 했다. 우리는 <장자>속에서 일체의 전체주의적 권위와 이념적 독단론을 부정하고, 더 나아가 인륜도덕이나 문명의 발전보다는 무한한 우주의 변화 속에서 개성의 해방과 자유추구의 예술적 경지를 맛볼 수 있다.


a.생애

 

 자기 아내가 죽었을 때 노래를 불렀다는 장자는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로, 제자백가 가운데서도 노자의 철학을 발전시킨 도가의 대표자다. 우리는 흔히 유교에서의 공자와 맹자를 도교에서의 노자와 장자와의 관계로 비유하곤 한다.

 성은 장,이름은 주,전국시대에 송나라의 몽 출신으로 잠시 말단관리를 지낸 것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 중국남방의 학풍과 특히 달인 정신을 이어받아 환상이 풍부했고 모든 일에 초월,달관했던 개방주의 철학가다.

 일설에 의하면 하루는 장자가 푸강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는데 주나라 이를 다음과 같이 사양했다고 한다. <<왕의 구중궁궐 속의 존경 받는 거북이보다는 진흙탕 속에서 꼬리치는 거북이로 살고 싶다.>>

 문장을 교묘하게 잘 지어 세상일을 예리하게 직시하고 인정을 밝힘으로써 유가나 묵가를 공격했기 때문에 당시의 석학들도 그의 예봉을 꺾지 못했다 한다. 그의 말은 광대무변하면서 자유분방했기 때문에 당시 제후들은 그를 기이한 사람으로 여겨 등용하지 않았다. 논리학파의 혜시와 친하게 교유했지만 그 밖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보통 그를 가리켜 노자의 사상을 이어받고 도가사상을 집대성한 사람으로 일컬어지고 있으나, 노자의 사적과 연대가 애매하다는 사실과 두 사상의 차이 등에서 그 전후 관계에는 의문점이  많다.

 

b.시대적 배경과 장자의 사상


   1. 시대적 배경

 당시의 중국 철학계는 현실적인 문제에만 집착, 극히 협소한 가치체계 속에 말려들어 자기 학설만이 옳다고 고집하여 학파간의 논쟁이 치열했다. 순수경험에 바탕을 두고 출발했던 중국철학은 이 시기에 오면서 개인적인 주관주의로 전락, 모든 것을 자기중심에서 보고 해석하는 이른바 백가쟁명의 상황이 벌어졌다. 제가들은 각기의 문호를 폐쇄하고 남의 주장을 거부하여 극단적인 대립과 분열을 가져왔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범한 당시의 철학적 과오는 부분적인 것에 치우쳐 전체를 보지 못하는 편집과, 세상사를 인간중심.자기 위주로 하려는 망념,권위의식에 빠져들어 자연의 진면목은 여러가지 가상에가려졌으며, 여러 가상을 더듬어 생긴 단견은 다시 인간본성을 흐리게 만들었다.

 장자철학은 이 같은 가상과 가식.편집을 철저히 타파하고 본래의 자연과 적나라한 인간으로 직접 빈틈없이 만나도록 함으로써 모든 문제를 문제 이전으로 환원시키고 인생의 가장 순탄하고 자유로운 삶을 되찾도록 하는 데 그 취지를 두었다.

 이러한 시대적 혼미를 깨우기 위해 제창된 그의 개방주의는 각파 간의 갈등과 대립을 해소시키고 철학적 한계를 극복하는 데 기여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숨막히고 답답한 속박에서 벗어나 넓고 시원한 세계를 호홉하며 삶을 향유하는 슬기를 갖게 했다. 나아가 장자사상, 특히 달관적 인생관은 때로 불우에 처한 이들의 고뇌를 씻고 안위를 주는 종교적 기능도 했고, 그의 심미적 자연관은 각박하고 단조로운 인간세상을 예술의 경지로 승화, 생활의 담박과 정신적 소요를 가져다 주는 청량제 구실을 하기도 했다.

   2. 장자의 사상

 장자의 사상은 <제물론>이 기초를 이루고 있다. 제물론이란 현실의 모든 차별상을 평등시하는 일종의 관념철학으로서, 생사.귀천.대소.시비.선악 등 모든 문제의 대립상을 제일시 하는 초월적 입장을 강조하고, 그 대립상에 의해 발생하는 현실적 고뇌를 초탈하려는 것이다. 이런 높은 경지를 <도추(도의 중심)> 또는 <천균(천의 중심)>이라 했다.  그리고 세속의 속박에서 벗어나 해방된 절대자유의 경지를 <소요유>(구애받는 것이 없는 느긋한 놀이)라 이름지었고 이 경지에 도달하려는 방법을 <인순>이라 했다. 다시 표현하면, 이 세상의 모든 구별과 차별.대립은 도의 관점에서 보면 무의미하며, 선도 약도, 아름다움도 추함도, 나도 타인도,자연과 인간도 구별이 없다는 것이다.

 장자는 우주만물의 전체성을 토대로 모든 사물을 판단할 때 너와 나의 구별은 사라지고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의 경지에 있을 때만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고 했다. 즉, 천균을 따르는 경지야말로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느긋한 정신의 자유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여기에는 일종의 초월적인 종교성이 있다. 만물제동.만물제일.물이일체의 철학과 거기에 기초를 두는 인순주의(因循主義)에 의해서 정신의 자유와 평안을 추구하는 것이다.


c.<장자>의 내용


   1. <장자>의 내용

 <장자>는 총 33편으로 내편 7,외편15, 잡편11로 구분된다. 이 가운데 장자가 직접지었다는 내편(??  ?? ??)이 그의 사상을 충실하게 전하고 있고, 외편과 잡편은 후학들이 내편의 뜻을 연구.발전시킨 것으로 보고 있으며, 여기서 노자와의 절충이나 다른 사상과의 교류등을 엿볼 수 있다. 내편 중에서도 처음의 <소요유>와 <제물론>의 2편이 장자의 핵심사상을 담고 있다.

 <소요유>는 장자의 이른바 <유>즉 도를 터득한 초월자의 생활을 말한 것이고, <제물론>은 <유>의 성립근거로서의 <도>를 뚜렷이 한 것으로서, 이 <도>와 <유>가 장자사상의 기본개념이자 <장자> 내용의 중핵이다.

 장자에 의하면 <도> 란 일체의 존재를 생멸변화시키면서 그 자신의 생멸변화하는 것이 없는 것, 모든 공간과 시간 속에 편재하는 것, 현상체계의 일체의 차별과 대립상들을 하나로 싸서 인간의 분별지와 언어로써는 아무도 규정할 수 없는 큰 카오스, 즉 <혼돈>이다. 이것은 모든 시간과 공간 속에 편재하고 있으므로 일체의 차별과 대립을 포용하여 거기서는 <<서시의 미도 문둥병의 추와 같고 태산의 크기도 추모(매우 잔털)의 작음과 같다>>고 한다. 인간의 분별지에 성립되는 가치적 차별, 즉 현우미추.선악시비.성패영욕도 여기서는 상대적인 편견에 지나지 않고, 이 대립을 하나로 포용해 무한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계속 생멸변화하는 크나 큰 변화의 흐름 자체, 이것이 장자의 <도>다.

 따라서 <장자>에 있어서 도는 일단 일체의 존재를 생멸변화시키면서 그 자신의 생멸변화하는 일이 없는 불변자로서 설명되고는 있으나, 그 불변자란 고정된 형이상학적 실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불변한 변화, 즉 생멸변화하여 다하는 일이 없는 유전의 흐름 그 자체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장자>가 말하는 이와 같은 <도>는 인간이 좌상을 버리고 이 천지자연의 이법인 <도>에 허심하게 매달려서 거기서 편안하고 자유로운 생활을 즐기려고 하는 것이 <장자>의 이른바 <유>다.

 <장자>의 <유>란 한마디로 말하면 자기에게 주어진 현재를 자기의 현재로서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그 적극적인 긍정 속에서 자기의 삶을 가장 깊고 가장 풍부하게 영위해나가는 것이며, 인간의 자유로운 삶을 속박하는 분별욕이나 가치적 편견을 버리고 일체의 차별과 대립이 본래 하나인 <도>의 입장에 몸을 두고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눈으로 자기와 세계를 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현재를 자기의 현재로서 적극적으로 긍정해나가는 데에서 추도 또한 나의 추로서 사랑하고 죽음도 또한 나의 죽음으로서 긍정하는 경지가 성립되고,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눈으로 일체를 보아가는 데서 모든 개인을 존중하고, 새로운 미와 가치를 창조해가는 풍부한 입장이 실현된다. 이른바 <<생을 선으로 하고, 사를 선으로 하고>> <무용의 용>을 발견하고, <<받아서 기뻐하고 잊어서 되돌리는>> 자유인의 생활이 <장자>의 <유>다. <장자>는 이와 같은 자유인을 <지인>이라 부르고 <신인>이라고도 부르는데, 그는 이것을 9만리 상공을 나는 <대봉>에 비유하고 있다.

 장자는 이러한 <유>를 바탕으로 달관된 인생관을 형성하고 있는데, 그 인생관의 요지는 자연에 순응하라, 항상 자기를 겸허하게 하라, 피차의 입장을 바꾸어서 시비를 보라, 유용과 무용 사이에서 처신하라고 요약할 수 있다.

 자연에 순응하려면 타고난 그대로 살아라, 오리발이 짧다고 잡아 늘리고 학의 목이 길다고 짧게 줄이면 오히려 제구실을 못한다. <<감관이 없는 <혼돈>에 일곱 구멍(감관기능)을 파놓고 보니 혼돈는 죽었더라>> 고 한 장자의 비유처럼 있는 것을 다르게 개조하거나 없는 것을 인위로 만들어내면 자연의 생태가 파괴되고 형평이 깨져서 자연과 만유는 다 같이 피해를 보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장자는 <<인위를 가지고 자연을 파괴하지 마라>>고 외쳤다.

 항상 자기를 겸허하게 하려면 욕심을 버려라. 자아를 텅 비게 개방하라. <<배를 산속에 감추고 산을 또 못 속에 감추었는데 한 밤중에 도적이 와서 이를 훔쳐갔다. 그러니 천하에 천하를 감추지 (결국 내놓은 것이 된다) 않으면 지켜지지 않는다.>> 이와 같이 없는 것을 억지로 가지려는 마음, 있는 것을 언제나 지키려는 행위에서 벗어나야 속박에서 풀린다.

 세상의 혼란은 피차의 시비에서 비롯된다. 너와 나는 구별이 없고 평등하다. 본래 잘나고 못난 것이 없다. 그런데 자기만 옳은 양 남을 용납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자기 한계를 알아라. <<하루살이가 밤낮을 알 리 없고 여름벌레가 겨울을 경험했을리 없다.>> 즉, 편지는 전체를 알 수 없는데 자기 기준으로 모든 것을 규정하니 시비가 생길 수밖에 없다. <<모든 시비는 피차의 입장을 고집하는 데서 생기므로 그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지 않으면 무한히 계속된다.>> 그러니 피차 자기를 초월해서 전면을 보고 두 면을 합해서 판단하라.

 끝으로 장자철학의 실용성은 <양생>과 <처세>에 있다. 자연과 마찰 없이 순리에 따라 사는 것이 최대의 양생법이다. 즉, 자기의 자유를 잃지 않고 모든 주위와 융통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겸허해야 바람을 맞지 않는다. 이 세상에는 쓸모 없어서 꺾이는 것도 있고 쓸모가 있어서 꺾이는 수도 있다. 그러기에 장자는 <<유용과 무용 사이에 처신하라>>고 했다.


   2. 읽는 법

 <장자>는 우언. 중언. 치언의 세가지 화술로 씌어졌다. 우언은 전달하고자 하는 뜻을 비유법이나 상징법으로 언어를 넘어서서 있는 진의를 상대방으로 하여금 암시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방법이요, 중언은 자기의 말을 성인의 말처럼 가장해서 사람들을 권위적으로 심복시키는 화법이며, 치언은 어리석은 말로 자연을 대변하는 소리다. 장자는 언어의 약점과 또 그 횡포를 누구보다도 일찍 간파한 철학자다. 

 <장자>는 무엇보다도 그 문장의 특징을 이해하고 다음 순서에 따라 읽으면서 철학체계를 세워가야 한다. 즉, 잡편의 <우언>은 <장자>의 범례요, <천하>는 서론격이다. 이 2편은 <장자>의 안내와도 같은데, <천하>편은 중국철학사상 최초의 비평서라고 할 수 있다. 다음 <제물론>을 읽으며 전체구조 속에서 환위법에 의해 모든 대립과 갈등에서 해방되는 경지를 맛볼 수 있을 것이며,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소요유>에 들어가 <대붕>이 되어 우주를 향해 비상하는 장지정신의 극치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자철학의 체계는 현세간을 버리고 초월만을 일삼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덕충부> <응제왕> <전자방> 등을 읽어 인생과 자연을 개관하고 자연에 임하는 슬개를 터득한 다음, <대종사> <지북유>편에서 성숙된 인격으로 화하여 다시 <인간세> <산목> 편을 읽으면 초월해서 보았던 소요의 경지가 바로 현세간이었음을 깨닫고 본래의 자리로 환원하게 된다.


d.장자사상의 평가


 동양문화의 전통은 인간윤리의 존중과 자연과의 조화라고 할 수 있다. 공자가 내세운 <인>이나 <수기치인>은 바로 인간윤리의 전형이며, 도가에서 내세우는 <무위자연>사상은 자연과의 조화를 강조하는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유가가 지배층의 철학이라 한다면, 도가는 피지배층의 철학으로 인식되고 있다. 중국인들의 사고방식을 크게 나눈다면 <유가형>과 <도가형>으로 나누어진다고 한다.

 유가형의 사고는 엄숙하여 윤리.교육.정치 등 구체적인 현실세계를 지배했으며, 도가형의 사고는 자유분방하여 문학.예술 등 인간의 내면세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렇다고 두 사상이 반드시 대립적인 것은 아니다. 세상에 도가 행해지고 있으면 나아가 벼슬을 하고,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물러나 숨는다는 유가의 군자로서의 몸가짐이 세상의 모든 가치를 멀리하고 홀로 자연속에 은거하는 도가의 가르침과 서로 통하는 데가 있다.

 흔히 중국인들은 <공인으로서의 유가, 개인으로서의 도가> 라고 하듯이,고도의 긴장생활을 요구하는 유가와 이를 풀어주는 도가는 상호보완적인 측면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이상에서 본 동양문화의 정신은 어떻게 보면 상반되는 양면같이 보일 수도 있으나 <유가적 참여사상>과 <도가적 은퇴사상>은 동양사상을 깊이 이해하면 이들이 항상 대립되는 개념은 아니다. 동양의 지식인들은 <<써 주면 나가서 정성을 다해서 일하고, 물러날 경우에는 미련없이 물러나 자기의 지킬 도리를 다한다>>는 <행사장>의 정신에 투철했다. 즉, <달즉겸제천하>하고 <궁즉독선기신>했다.

 위에서 살편본 것처럼 장자의 사상은 1. 인간의 무력과 자연의 위대함에 대한 자각 2. 피동의 적극성 (필연으로서의 자유) 강조,즉 소극적 염세주의, 숙명론적 사고 3. 낙천주의 (인간성의 본래적 선에 대한 무한한 신뢰감) 4. 범신론적 다원적 사고(유일신의 부정) 5.개성과 개물의 존중 6. 보편화(무한대화) 사고 7.절대적 진리의 부정과 상대성 주장 등이 있다.

 맹자가 인간과 사회에 대한 굳은 신뢰로 무장하고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은 데 비해, 장자는 통일전쟁으로 치닫은 거대한 역사의 흐름 앞에서는 자신의 해박한 지식과 아무 쓸모가 없을 뿐만 아니라, 세상을 구제하겠다는 당시의 여러 사상도 혼란만 부채질할 뿐 이라는 것을 깨닫고 궁극적인 자유의 경지를 홀로 찾아나선다.

 장자는 모든 현실적 제약, 모든 상식적 통념,기존의 모든 사상으로부터 벗어난 절대적인 자유의 경지를 추구한다. 그리고 그 절대적인 자유의 경지에서 자신을 묶고 있는 모든 것을 상대화해 버린다. 상대화를 통한 자유와 추구는 장자의 아내가 죽었을 때 장자가 노래를 불렀다는 이야기 (<장자> 외편 <지락>에서 극에 달한다. 여기서 장자는 삶과 죽음을 상대화하고 기쁨과 슬픔이라는 감정까지도 상대화하는 냉정함을 보인다.

 장자는 절대적 자유를 추구했지만 절대를 규정하지도, 절대라는 이름으로 상대를 제약하지도 않았다. 장자는 모든 관념을 상대화시키면서 자신의 말까지도 상대화 시켜 버린다. 그리고 절대의 세계는 미지수의 상상력에 맡겨놓는다.



B015 – 도덕경(道德經) / 노자(老子) (기원전 6또는 4세기)

 (출처 :  동서고전 200선 해제(반덕진, 가람기획))



 이책의 저자는 노자이므로 <도덕경>은 <노자>로도 불린다. 유가 및 제자백가를 비판하고 있는 도가사상의 원전인 <도덕경>에는 우주만상의 변화발전의 총원리로서 <도>의 개념과 개체의 원리인 <덕>의 개념이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 서술방식이 대화체나 서술체인 일반적인 중국고전과는 달리 이 <도덕경>은 5천여 자로 된 짧은 철학시집으로 <도>편과 <덕>편의 2부로 구성되어 있다.


a.생애


 도가사상의 시조, 중국사상사에서 나타난 인물 중 가장 신비성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 노자다. 그의 생존연대, 출생,그리고 성명,그의 사상을 담은 <도덕경>에 관한 문제들이 그것이다.  그중에서도 학자들에 의해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그의 생존연대와 <도덕경>의 저술연대 및 그 내용에 관한 사실여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문제삼은 학자들을 살펴본다면 크게 두 방향으로 갈라지고 있는데, 하나는 노자라는 인물이 전혀 가공인물이라는 것이고,한편은 노자가 역사적 실존인물임을 주장하는 입장이다. 물론 그들 나름대로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어 어느 한쪽으로 속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무리 <도덕경>의 성립연대가 오르내리고 노자 한 사람의 유작이냐 아니냐 의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도덕경>에 담긴 사상적 성격 내지 그 철학적 근간에 있어서는 변함없이 그 특성을 보유하면서 일관되게 읽혀져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노자의 인물 내지 <도덕경>에 관한 이러한 많은 문제점들은 노자사상을 학문적으로 연구, 이해하는 데 있어 반드시 거쳐야 할 중요한 것들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는 <사기>의 <노자열전>에 나우는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사마천의 <사기>를 보면 노자의 성은 이, 이름은 이,자는 담,춘추시대에 초나라 왕실의 도서관리인을 지냈다고 한다. 

 공자가 방문하여 그를 찾아가 <예>에 관해 물으니, <<그대가 옛 성현이라고 숭배하는 이들은 그 육체와 뼈가 썩어버리고 남은 것은 공허한 말뿐이다. 또한 군자라고 하는 사람들도 때를 만나면 영화를 누리지만 그렇지 못하면 이리저리 떠돌아다닐 뿐이다. 참된 군자는 덕이 있으나 외모는 마치 어리석은 것 같다. 그대는 교만과 욕심,그리고 꾸미는 빛과 잡념을 버려라. 이런 것은 그대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내가 그대에게 하고자 하는 말은 이것뿐이다>>라고 말했다 한다. 이 말을 듣고 공자가 처소로 돌아와 제자들에게 <<달리는 놈은 덫을 놓아 잡을 수 있고 헤엄치는 놈은 그물로 잡을 수 있으며 나는 새는 활로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용은 구름과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오르며 변화가 심하여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오늘 노자를 만나보니 그는 용과 같은 사람이더라>>라고 말했다 한다. 여러 나라를 노자는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무위의 도>에 힘쓰며 지내다가, 얼마 후에 주나라가 쇠퇴하는 것을 보고 은거를 위해 서쪽으로 여행을 떠난다.

 주나라를 떠나 관문에 이르렀을 때 노자의 명망을 알고 있던 관문지기 윤희가 노자를 알아보고 <<선생께서 세상을 은둔하려 하시니 몇 글자를 남겨주십시오>>하고 강권하니, 이에 노자가 도와 덕의 뜻이 담긴 <도덕>에 관한 글, 상.하 2편으로 된 5천여 자의 문장을 남기고 홀연히 떠났는데, 그후로 그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것이 오늘날 전해지는 <도덕경>이다. 그러나 이 전설에는 의문시되는 점이 많고, 그것을 전하는 가장 오래된 사료 <사기>의 <노자전>에서도 의문을 표명하고 있어, 공자의 선배로서 BC 6세기에 활약한 인물이라는 실재성은 희박하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오늘날의 학설로서는 BC  479년에 죽은 공자보다 100년 정도 후배라는 설과, 가공의 인물로서 실재를 부정하는 설이 있다. 그의 무위자연 사상은 열자와 장자에 의해 계승되었다.


b.노자의 사상과 그 성격


   1. 사상적 성격

 중국사상사에서 오늘날까지 도도히 흘러 내려오는 세 가지 사상의 물결은 유가와 도가 그리고 불가사상이다. 불가사상은 한대에 멀리 인도에서 들어와 뒤늦게 중국사상으로 정착하는 과정을 거쳤지만, 유가와 도가사상은 중국 자체 내에서 발생하여 고대로부터 커다란 분수령을 이루어온 사상이다. 이 두 사상은 끝까지 서로를 용납하지 아니한 채 나름대로의 특질을 더욱 뚜렷이 하면서 발전해왔다. 하나는 <인성론>의 입장에서, 다른 하나는 <자연론>의 입장에서, 그리고 그 사상적 전개의 과정은 서로 대조적인, 때로는 전연 반대의 평행선적인 사유과정을 밟으면서 내려왔다. 물론 이러한 두 사상의 입장이 지양, 극복되는 속에서 보다 고차원적인 교섭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후대 송학에 와서 그렇게 된 것이요, 그러는 속에서도 두 사상은 자기상실을 가져오기는커녕 오히려 자기확보의 길을 더욱 공고히 하는 입장을 동시에 마련하면서 내려왔다고 할 수 있다.

 노자가 주창하고 장자가 발전시킨 도가사상은 공자의 유가사상과는 달리 당시의 혼란된 사회를 보는 시각이 달랐다. 노자는 춘추시대의 어지러운 세태가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여 무위자연 사상을 내걸고 현실을 외면한 은둔과 도피의 철학을 강조했다. 그는 유교의 인위적인 도덕윤리를 비판하며, 전제군주의 절대권에 대한 일반백성의 저항권을 포함시키고 개인의 독립성을 옹호하고 있다.

그런데 제자백가사상 가운데서도 도가만은 현실성을 부정하고 자연주의적인 특색을 지니고 있어서 다른 사상과 그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이 때문에 도가사상은 본래 중국사상이 아니라 인도의 요가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또 남방의 양자강 유역에서 발견한 초나라의 이질적 문화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현실주의 사상과 전혀 다른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도가의 주장은 인간의 생활을 자연에 순응시키려는 자연관과 만물의 생성에 대한 숭배.자연과 인간의 중개자로서의 군주의 역할 등에 관하여 초기 중국인의 관심을 철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2.사상 내용

 (1) <도>: 노자가 말하는 도란 우주만물을 생성시키는 근원이요, 우주를 우주일 수 있도록 하는 궁극적인 원리이자 본체라고 할 수 있다. 노자는 모든 사물과 모든 가치의 배후에 있는 참된 자연의 원리를 <도>라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이 세계에 존재하는 그 모든 것으로 하여금 그것일 수 있도록 해주는 존재의 근원을 도라고 본 것이다.

 도는 형이상학의 원리이기 때문에 보고자 해도 볼 수가 없고 듣고자 해도 들을 수 없으며 잡고자 해도 잡히지 않는다. 인간의 5관으로서는 지각할 수가 없다. 따라서 그것이 어떤 것이라고 명명할 수 없는 무명의 것이지만, 설명을 위해 편의상 붙인 이름이 <도>라는 것이다.


 (2) <덕>: 노자에 의하면 도는 만물의 생성의 근원으로서 만물의 생성과 과정에서 사람이나 사물은 근원적인 도에서 얻어지는 것이 있는데 이것을 <덕>이라고 했다. 도가 만물생성의 본원이라면 그 도에 따라 자라고 성숙하고 변화하는 성능, 즉 도에서 부여받은 어떤 자연스런 능력과 힘을 뜻한다. 즉, 덕이란 보편적인 도가 개별적인 사람이나 사물에게 깃들인 각 개체의 원리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도를 따르고 도를 지키는 것이 덕이다. 따라서 덕은 도처럼 <무위>여야만 한다. 아무리 훌륭하다고 생각되는 행위도 일단 <유위>하기만 하면 그것은 이미 덕이 아니라는 것이다.


 (3) <무위자연>: 인간은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그의 주된 관심은 인간중심적인 논리가 아니라 우주 대자연의 실상과 도리다. 그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 속에서 자기의 고유한 본성에 따라 자유스럽게 지낼 때 (덕을 지닐 때) 가장 행복하며 그때 비로소 참된 질서를 이룰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자연에 따라 사는 것을 노자는 무위자연이라 불렀다. 즉, 무리해서 무엇을 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자) 그러한 대로(연) 사는 삶으로 보았다. 이러한 삶의 태도가 다름아닌 무위자연이다. 무위자연은 자기 멋대로 하는 방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연의 순리에 따라 서로의 생명과 자유를 존중해주고 남에게 무엇을 강요하지 않는 소박한 공동체의 삶을 뜻한다. 노자는 그것이야말로 모든 사물과 모든 가치의 배후에 있는 참된 자연의 원리인 도에 따른 삶으로 보았다.


 (4) <윤리사상>: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도덕적 명령이나 규범, 그리고 그 규범을 제도적으로 강제하는 국가권력 자체에 혼란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강제는 인간의 자연적 본성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즉, 인위적인 윤리규범의 체계를 사회적 혼란의 원인이라고 본 것이다. 또한 인간의 본성은 악할 수도 있고 선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에 선악이라는 가치 판단을 내리고 또 그러므로 어떻게 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면 인간의 자연스런 본성을 해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총괄적으로 가장 진실하게 드러낸 것은 <도덕경> 총 81장 중 1장인 <체도>장으로,<도덕경> 전체의 총론이자 결론이라 할 수 있어, 제1장을 제대로 이해하고 나면 그것은 <도덕경>의 전체내용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간주된다.


c.<도덕경>의 형성과 내용


 <도덕경> (또는 <노자>)은 전체가 81장으로 되어 있는데, 상편(1--37장)에서는 <도>에 관한 내용이고 (도경), 하편(38--81장)에는 <덕>에 관한 내용(덕경)이다. 그러나 이는 후세의 사람이 편집할 때 그렇게 나눈 것이지, 본래는 도와 덕을 나누어 말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실제로 <도덕경>의 내용을 그전체적인 맥락에서 살펴보면 도와 덕은 상호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도덕경>의 구성체제에 대해서는 한 사람이 한꺼번에 저술했다는 관점과, 도가학파의 손에 의해 오랜 기간에 걸쳐 당시의 여러 사상을 융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관점이 있다. 한 사람의 전작물임을 주장하는 관점은 노자를 공자와 같은 시대의 실존인물로 보아 <도덕경>을 그의 작품으로 보는 견해이고, 부정하는 관점은 노자가 가공인물이며 설사 실존인물이라 해도 <도덕경>과는 상관이 없다고 본다. 그러나 내용을 이루는 기본사상은 변함없이 <무위자연>의 사상을 유지해오고 있다는 점에서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내용은 약 5천여 자로 문장 서술방식은 대화체나 서술체인 일반적인 중국고전과는 달리 간결하고 격언적 표현이 많고, 대구와 각운을 많이 썼으며, 의표를 찌르는 역설적인 말이 특색이다. 민간에 널리 구전되어온 속담과 격언을 모은 듯한 느낌이다. 따라서 세속적인 이야기와 함께 비유적인 난해한 어구도 많고 고대의 해석에도 이설이 많다. 노자의 사상에서 특이한 것은 <무위>와 <자연>이다. 노자가 산 춘추시대 말기에는 중국의 봉건질서의 중심인 주나라가 쇠하고 지방에 할거한 제후들이 각기 패권을 다투며 침략과 전쟁을 일삼던 때였다. 그래서 백성들은 전쟁과 가렴주구,부역,가혹한 세금에 시달리며 굶주리는 상태였다. 이와 같은 상황을 목격한 노자는 <<백성들을 제발 가만히 내버려두었으며 좋으련만>> 하는 생각이 바로 그의 무위자연의 정치사상을 자극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노자는 말하기를 <<백성을 다스리는 일을 농부가 밭을 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하면 그 나라의 명운이 무궁할 것(59장)>> 이라 하고 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작은 물고기를 삶는 일에 비유했다. 즉, <<뒤집지도,조급히 서둘지도 말고 가만히 내버려두어야 한다(60장)>>는 것. 또 노자는 이상적인 군주의 상을 그리되 <<가장 훌륭한 군주는 백성들이 오직 임금이 있다는 것만을 알 뿐(17장)>> 이라고 했다. 즉, 최상의 군주는 무위로써 백성을 다스리기 때문에 공을 이루고 일을 성취해도 백성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내가 저절로 이렇게 되었다>>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 옛날 요순시대의 농부들이 배불리 먹고 막대치기 놀이를 하며 부른 노래(밭을 갈아 밥을 먹고 우물 파서 물 마시며, 날이 새면 들일 가고 밤이 되면 잠을 자니 임금의 공이 무엇이냐)는 무위자연의 최고의 경지를 나타내고 있다고 노자는 말한다. 그러므로 유가에서 주장하는 인이나 의하는 것도 모두 천하에 무위자연의 도가 사라졌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며, 충신이란 것도 국가가

혼란해져서 생기는 것이요, 자애도 육친(부자.형제.부부)이 화목하지 못한 데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18장). 그러므로 사람이 지나친 재주와 지혜,인과 의,기교와 이익을 버리면 백성의 이로움이 백배로 늘어나고 백성들이 효도하고 자애로운 사람으로 돌아갈 것이요, 도적도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라 했다(19장).

 그러나 이 세 가지(성지.인의.교이)를 아주 끊어버리면 생활이 너무 재미없어서 백성들의 마음이 귀속할 데가 없으므로,그들의 돌아갈 수 있는 소박함을 보여주어 거기에 따르게 하면 사심과 욕망이 작아질 것이라고 했다.

 대개 노자는 무.허.정.유약.박을 높이 평가하는데, <무>는 천지만물의 근원으로 유도 무에서 나온다고 했다(1장). 허는 빈 것을 말하는데, 도는 항상 비어 있어 차는 일이 없지만 속이 깊어 거기에서 얼마든지 퍼내어 쓸 수 있다고 했다(4장). 그는 이것을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는다(6장)>>라고 표현하기도 했으며, 골짜기는 항상 비어 있어 차는 일이 없고 바닥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냇물이 모여드는데, 이 골짜기의 모습이야말로 도와 같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빈이라고도 하는데, 현은 신비하고 오묘한 것을 뜻하고 빈은 암컷을 가리키니, 만물을 생성케 하는 도는 곧 신비하고 오묘한 암컷이란 뜻이다.

 <정>은 만물이 왕성하게 낳고 자라는 데 도움이 되는 상태라고 했다. 소란스럽거나 야단스러운 것은 천지를 운영하고 만물을 생성화육하는데 해가 되지만, 도는 언제나 고요하고 안정한 상태로 있기 때문에 만물은 그 속에서 저절로 나고 자라는 길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노자는 항상 유약한 것을 찬양했다.

 그러기에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에 이로움을 주며 서로 다투지 않고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것에 가까이 있다. 그러므로 물은 거의 도에 가깝다>>(8장)라고 물을 찬양하고 암컷을 찬양했다. 물은 부드럽고 약하나 이 세상에 물보다 강한 것이 없으며, 암컷은 유약하고 조용하지만 수컷의 강함을 이긴다>> 고 했다. 그는 유약의 본을 바람에 휘어지는 나무와 어린아이에게서 구하기도 했다.

 22장의 <<휘어지는 나무는 꺾어지지 않으므로 안전하다>>와 <<어린이의 뼈는 약하고 살은 부드러우나 잡는 힘은 세다>>(55장)라고 한 말은 다 거기서 나온 말이다. 바꿔 말하면 생명이 있는 것만 이 유약하며, 생명을 잃으면 경직되므로 유약은 곧 생명력의 표현이라고 보았다.

 끝으로 노자는 소박함(박)을 도의 순수한 원형으로 보았다. <<도는 언제나 이름이 없다. 도는 박과 같다>>(32장).박이란 아무런 가공도 안한 순수한 원목이다. 그러므로 천지의 시원인 도를 상징한다. 사람이 소박한 마음을 지키다면 비록 그것이 아무리 작더라도 천하의 그 누구도 그를 신하로 삼을 수 없을 것이다. 임금이 이 소박의 도를 지킬 수만 있다면 천하의 만물은 저절로 그를 찾아 모여들 것이며, 하늘과 땅은 화합하여 감로를 내리고 백성들은 명령하지 않아도 저절로 균제될 것이다.


d.사상적 평가 및 그 영향


 이상으로 <도덕경>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았는데, 말은 간략하나 뜻은 깊고 크다. 그래서 읽는 사람에 따라 해석의 여지가 많고 각자의 해석이 상반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단정을 내리기 어려울 만큼 깊고 커서 그의 사상을 평가하는 데 있어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


   1.사상적 평가

 아마도 노자에 대해서 정당한 평가를 하는 최선의 방법은 도교와 유교를 구분해보는 것일 것이다. 이 두 체계는 도의 역할에 반대되는 입장을 대표하고 있다.

 (1) 노자에 의하면 도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하는 것> 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서> 그는 함으로써 하여지는 모든 관습과 제도를 부인했다. 그러므로 그는 문화와 미신을 비난하고 원시적이고 본능적인 것을 높였다. 그러나 유가에서는 인의예지의 덕목을 설정하여 인위적인 예교를 강조하며 자연에 따를 것을 가르치면서도 인간이 만든 문화의 가치를 중시했다.

 (2) 이 두 체계는 사물과 인간의 구별을 시인하고 현실적인 상쟁의 대립을 전제하여 사색한 것은 자연의 수수께끼가 아니라 인생의 수수께끼였다. 반면에 노자는 인간과 자연을 구별하지 않는 불상쟁의 사상을 가지고 있어 이상주의적인 경향을 띠었다.

 (3) 이 두 체계는 하늘의 개념에서도 대조적이다. 노자에 의하면 도는 우주를 위한 포괄적 원리이기 때문에 도가 하늘에 앞선다. 그러나 공자는 하늘의 개념을 최고의 것으로 인정하고 하늘의명령을 인간사에 섭리하는 살아 있는 힘이라고 주장하고 항상 외경스러운 태도를 견지했다.

 그러나 노자와 공자의 한 가지 공통점은 <중용>의 중요성을 인정했다는 점이다. 이 중용에 주요한 논거로서 어떠한 움직임이 극단으로 발전하게 되면 그것은 반드시 반대방향으로 되돌아간다는 자연의 불변의 법칙을 들고 있다. <<지나치지도 부족하지도 말라>>는 것이 두 사람의 금언이었다.


   2. 영향

 노자와 그의 사상을 담은 <도덕경>의 사상적 영향은 매우 크다. BC 2세기 한나라 초기에는 그 무위청정의 술이 실제 정치에 이용되어 한때 성공을 거두기도 했으나, 한무제 이후 유교가 국교화되면서 노자의 가르침은 정치보다 수신과 처세 면에서 존중받게 된다. 북위의 구겸지는 도가의 무위자연사상에 신선사상,음양오행설,참위설,그리고 민간의 잡다한 신앙들을 섞어 <도교>를 민간종교로 완성하고, 북위의 태무제는 유교가 이단시하는 유목민족의 중국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444년 도교를 국교로 삼기도 했다. 도가사상이 도교로 종교화함에 따라 노자는 도교의 최고의 신이 되고 도교에서 <도덕경>은 최고의 경전이 되었다.

 노자의 사상은 학문적 연구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위진남북조 시대와 같은 혼란기에는 <역경> <장자>와 함께 3현으로 존중되고 인간의 삶의 지혜를 밝혀주는 수양서로서도 받아들여졌으며, 민간신앙과 융합하면서 피지배 계급에게 호소력을 지닌 세계관의 기능을 수행했다.

 한국에서도 <도덕경>에 나오는 내용이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조선시대에는 도교의 주무관청인 소격서 폐지문제로 조광조와 중종의 독대가 새벽까지 계속된 사실만 보아도 민중의식 속에 뿌리내린 도교사상을 짐작해볼 수 있다. 또한 노자의 사상은 유학자들 특히 송.명시대의 성리학자들에게 끼친 영향은 매우 깊다. 이들이 주역을 해석함에 있어서 <도덕경>의 사상으로부터 영향받은 바가 적지 않다. 특히 <주역>에서 말하는 음양의 도를 이해함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정이천 같은 사람은 노자를 비판하면서도 노자의 도체에 대한 통찰은 높이 평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우주관의 기본 개념인 <이>와 <기>도 <도덕경>속에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현대 동양과 서양의 사상을 비교,고찰하기 위해서도 <도덕경>은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는데, 그 속에 함축된 풍부한 사상들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인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과 비교해볼 수 있고, 현대 과학철학에도 시사해주는 점이 적지 않다.

 노자는 정치적인 문제,윤리적인 문제, 그리고 인간의 모든 생활문제에 있어서 한발 물러나는 여유 속에서 인간 본연의 질서를 찾으려 했다. 이것은 오늘날 경쟁위주의 산업사회에 있어서 문제해결의 어떤 실마리를 찾게 해줄 수도 있으나, 우리에게 주는 보다 더 큰 고전적 가치는 인간의 근본적인 오류가 무엇인가 철학적 문제에 더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한계상황에 도달한 서양문명이 그 돌파구를 동양사상, 그 중에서도 도가사상에서 찾으려 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한다.



B014 – 중용(中庸) / 자사(子思) (BC 492--432?)

 (출처 :  동서고전 200선 해제(반덕진, 가람기획))



<천인합일의 도>를 제시한 유교의 <철학개론서> 윤리와 정치를 중시하는 유가사상이 생사의 문제를 밝히는 불교사상이나 무위자연의 도가사상에 비해 상대적으로 철학적 기반이 약하다는 자기반성과, 간결함을 추구하는 당시 지식인의 취향에 부응하여 주자는 당시 13경이나 되던 유가경전을 4서로 압축했다. 4서 중에서도 <중용>은 유교의 사상에 심원한 철학적 근거를 부여하고 흔히 소우주로 불린다. 즉, 우주와 인간의 근본원리를 <성>으로 설명하여 송과 명 이래 성리학의 철학적 기초를 부여한 저서다.


a.자사와 중용의 유래


 중용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쓴 것으로 전해진다. 사마천이 지은 <사기>의 <공자세기>에 <<공자가 이를 낳으니 자를 백어라 했다. 이는 나이 50에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백어가 가를 낳았는데 그의 자가 자사다. 나이 불과 12살에 송에서 곤경을 당한 일이 있고 중용은 그의 저술이다>> 라고 했다. 여기에 대해서 학자들은 대체로 긍정하고 있다.

 <중용>은 원래 <대학>과 마찬가지로 <예기> 중의 한 편(31편)이었으나,<대학>보다 앞서 그 가치가 인정되어 진작부터 단행본으로 다루어졌다. 그러나 <중용>이 본격적으로 개척된 것은 역시 송대에 와서다. 송대에 학문적 경향이 철학적으로 심화되고 유가경전 가운데서 그러한 철학적 원리를 간명하게 밝힌 서적이 요구됨에 따라 <중용>이 크게 각광을 받게 된 것이다. 따라서 송대의 여러 학자들은 공통적으로 <중용>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이정자(정호.정이 형제)가 <중용>에

주석을 붙여 <논어> <맹자> <대학> 과 함께 4서의 하나로 다루게 되었고, 주자가 이전의 모든 주석을 총정리하여 <중용장구>를 지음으로써 널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중용의 체제는 <예기> 중의 고본에 의하면 33절인데, 정자는 이것을 37절로 고쳤고, 주자는 다시 33장으로 만들었다. 즉, <천명지위성>에서부터 <천지위언.만물육언> 까지를 1장으로 하여 자사의 입언으로 삼고, 이하 10장에서 공자의 말을 이끌어 이것을 증거하고 있다.

 다음으로 <군자지도비이은>으로부터 <애공문정>까지의 20장에서 도가 천인에 일관하여 은현을 겸유하고 대소를 다 포용함을 논하고, 중용 즉, <성>된 것을 밝히고 있다. 최후로 <자성명위지성>에서 끝 장까지 <천인일관>의 의미를 반복해서 설명하고 그 입문으로 <신독>의 필요성을 논했으며, 그 도덕의 극치에 이르러서는 천지의 화육에 참여하고 무성무취의 경자에 도달케 됨을 논하여, 상장의 중화위육과 상호연관을 맺고 있다고 볼 수가 있다.

 <중용>은 한마디로 <천인일관>의 이치를 설명했고 성의 도를 밝힌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나의 성은 우주의 본체인 성의 표현이요, 이것은 바로 또 하나의 소우주라고 생각했다.


b.<중용>의 내용과 중심사상


 불교가 중국에 들어와 널리 보급되면서 유가의 전통사상에 일대충격이 가해졌다. 그 이유는 1. 유가경전이 수기치인의 도를 강조하는 것으로서 윤리와 정치를 중시하는 것임에 반해서 불교의 경전은 생사의 문제를 밝히는 철학적인 면을 가진 점이고, 2. 불교에 있어서도 중구에서는 특히 선종이 성립되여 복잡한 이론을 따질 것 없이 마음 하나를 밝히면 그대로 부처가 된다고 하는 주장이 풍미함으로써 당시의 대중들이 모두 불교에 쏠리게 되었다.

 여기에서 유가는 자기반성이 불가피해졌다. 1. 간명 직절을 추구하는 당시 교양인들의 분위기에 부응하기 위해 모두 13경이나 되는 경전의 간소화가 요구되었고, 2. 유가사상이 경국제세의 현실문제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는 깊은 철학적 원리가 뒷받침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했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응하여 4서가 출현하게 되었다. <대학>은 유학의 지향처와 차서를 밝히는 책으로서, <중용>은 유학의 철학적 배경을 밝히는 책으로서 채택되었다.

 <중용>은 그 첫머리에 <<하늘이 내려준 것을 <성>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 하고, <도>를 닦는 것을 <교>라 한다>>고 하여 유교철학의 출발점과 지향점을 제시하고 있다. 즉, 아니라 도에 바탕해 있고, 도는 우리의 본성에 바탕하고 우리의 본성은 다시 천에서 나온 것임을 밝히고 있다.

 <중용>은 33장으로 편성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전후 두 부분으로 구분해서 볼 수 있다. 전반 부분은 <중용 (중화)>을 설하고 후반 부분은 <성>을 설했다. 희로애락의 감정이 발하기 이전의 순수한 심의 상태를 <중>이라 하고, 심이 발하여 절도에 맞는 것을 <화>라고 한다. <중화>를 시간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때 이를 <중용> 이라 한다.

 제1장은 전편의 요체로서 천명.성. 도.교로써 중용의 철학적 근거를 밝힌 뒤, 사람이 중화를 이룩할 때 천지가 제자리에 위치함을 보게 되고 만물을 자라게 할 수 있다는 중용 최고의 경지를 밝히고 있다.

 제2--11장은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중용의 도를 이루는 방법을 논함으로써 1장의 뜻을 완결시켰다.

 제12--20장은 먼저 <5도>(군신.부자.부부.형제.친구의 도)과 <3덕>(지.인.용),그리고 <9경>(수신: 임금 자신의 덕을 닦을 것, ?현: 현명한 인재를 존중할 것, 친친: 어버이를 어버이로 받들 것, ?대신: 대신을 공경하는 것, ?군신: 여러 신하들의 처지를 이해해주는 것, 자?민: 백성을 친자식처럼 아껴주는 것, 래백공: 여러공인들을 모여들게 만드는 것, ?원인: 먼 곳의 사람들을 유화시키는 것, ???: 제후들을 진심으로 따르게 만드는 것)을 설명하고 <중용>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성>을 밝히고 있는데, <성>을 우주가 우주되는 원리라고 설한다.

 <<성은 하늘의 도요, 성되려는 것은 사람의 도다>>라고 하여 수양을 통해 성을 이루면 타득하여 행할 수 있다고 했다. 성은 속임이 없음이요, 그침이 없음이다. 진실,무망하고 영원불변하기 때문에 우주의 원리가 될 수 있다. 성 없이는 만물이 존재할 수 없다.

 27--33장은 지성을 체득한 성인의 도덕교화에 대해 설명했다. 사람의 도는 이 성의 원리를 깨닫고 이를 실천하는 데 있다. 이 성을 철저히 체험한 사람이 곧 성인이다. 성을 체험한 사람만이 비로소 우주와 합일될 수 있다. 여기에 유가의 궁극적인 경지인 천인합일의 세계가

전개된다.

 그밖에 <대학>에는 이용후생에 관한 사상이 경시된 인상이 있으나, <중용>에서는 <자서민> <내서민> <내백공> 등 상당한 주의가 경주되고

있다.


c.중용론 비교 (공자와 아리스토텔레스)


 인류역사를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의 지적 능력이 기원전 6--2세기에 최고수준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원시사회에서 고대국가체제로 전환되면서 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은 생산에서 자유로워진 전문적 지식인을 배출했고, 이들은 이간과 자연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으니, 이들이 서양의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동양의 공자.맹자.순자.장자.석가 등이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물질문명의 발전이 정신문화의 발전을 앞지르면서 양자간의 불균형발전이 심화되었다고 보여진다. 그런데 동양의 정신세계를 지배해온 공자와 서양학문의 아버지로 불리어지는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치 서로 정신적인 교감이 오고간 듯 그들은 <중용>을 가지고 인류행위의 준칙으로 삼으려 했다.

 그들의 공통점을 들어보면 

1.그들은 다 같이 사람들에게 덕을 밝히고 선을 행하며 지극한 선에 머물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똑같이 개인도덕과 정치도덕을 하나로 합쳐놓고서<지극한 선>이란 최후의 목표에 도달하려 하고 있다. 

2. 중용의 도가 바로 덕이 된다고 보았다. 여기서 중용이란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즉 <과불급>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며, 중용의 덕이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둘 다 똑같이 느끼고 있다. 올바른 길은 하나지만 그릇된 길은 매우 많다. 그러므로 사람이란 잘못 빠지기는 쉽지만 선으로 나아가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3. 중용이란 곧 상대적인 양극단의 중간에 위치하며 치우치지도 않고 기울지도 않고, 지나치는 일도 없고 미치지 못하지도 않는다.그리고 그 행동은 언제나 그 경우에 합당하고 어떤 일에나 꼭 알맞게 된다. 

4.모든 행등은 중용이 준칙이 되며 그 행동에는 개인의 감정과 행동 및 국가의 정치행위가 모두 포괄된다. 

5. 중용의 덕이란 마땅히 언제나 그것을 버리지 않고 꼭 지켜야만 하는 것이다.

 인류의 진보는 직선적인 것이 아니라 언제나 양극단 사이에서 굴곡을 이루는 것이므로, 중용은 그때 그때 알맞게 나아가야 하며, 그 경우와 일에 따라 계속하여 쉴새없이 언제나 꼭 알맞은 길을 추구해야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공자의 출생은 아리스토텔레스보다 100여 년이 바르다. 이들 동양의 성인과 서양의 철인은 모두 어지러운 세상에 생존했기에 당시의 학술과 사상은 지극히 복잡했다. 공자는 요임금과 순임금의 업적을 소술하고 문왕과 무왕의 다스림을 법도로서 밝혀 드러내었으며, <시경>을 편찬하고 <서경>을 정리하고 <춘추>(이설 있음)를 지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은나라와 주나라 이래의 학술과 사상을 집대성한 분이 공자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이 깊고도 넓어서 그가 연구하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여서, 그리스 학술과 사상도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집대성된 것이다.

 그런데 이들 동양의 성인과 서양의 칠인은 모두 사람들의 마음을 바로잡고 어긋남이 없게 함으로써 중용의 도로 그들을 인도하려고 애썼다. 이들은 마음도 서로 같았고 이론도 같았던 것이다.

   

d.<중용> 비평


 주자는 4서에 대하여 <논어>는 유학자의 생활태도를 익히게 하고,<맹자>는 유학원리의 정치적 적용을 알게 하며,<대학>은 학문의 지향처를 알게 하고, <중용>은 학문의 궁극처를 알게 한다고 그 의미를 부여했다.

 <중용>은 4서 중에서도 초학자가 이해하기에는 다소 추상적이고 관념적이어서 <대학> <논어> <맹자>에 이어 가장 나중에 읽는 것이 효과적이라고들 한다. 그래서 그 내용을 집약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인간은 본래 도를 알고 성을 행하는 <성>을 부여받고 태어나므로 필연적으로 도가 행해지며 <교>가 마련된다. 따라서 인간은 자주적으로 중용의 도를 걷고 그것을 배움으로써 <지.인.용>의 덕을 갖추는 동시에 그 근본에서 <성>을 뚜렷이 하고, 마침내 <성>이 <지성>이 되어 완성될 뿐만 아니라 우주정신과 일체가 되어 우주와의 조화를 이루게 된다. 그것을 완성한 것이 <성인>이고 성인 가운데는 예부터 성인의 도를 계승하여 뚜렷이 한 공자가 목표가 된다. 인간은 공자를 목표로 하여 먼저 자기를 닦는 일에서 도를 걷고 지성에 이르려야 한다고 요약할 수 있겠다. 이처럼 <중용>은 천도와 인도와의 관계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이론이 너무도 형이상학인데 기울어 일상적 도덕을 너무 고원한 것으로 만든 느낌이 있고, 너무 개인적 방면의 고찰에 치우쳐서 사회의 일면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 성을 너무 이상의 것만으로 인정한 결과 후세 유학자들로 하여금 끊임없는 논쟁을 일으키게 했다는 점 등에 있어 비판적 시각도 없지 않다.

 <중용>이 유가사상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전술한 바와 같이 실천성만을 내세우는 유교사상에 심원한 철학적 근거를 부여한 점을 들 수 있다. 원래 유교는 실천성을 요구하는 사상으로, 공자는 주로 형이하학적인 일을 대상으로 일상생활의 인륜의 교를 설파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상이 노장철학에 비해 어딘가 심원하지 못한 점이 있었다. 이에 자사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심원한 기초를 세우고 독자적인 철학을 전개했다.




[中庸思想 ]


정의


극단 혹은 충돌하는 모든 결정(決定)에 있어서 중간의 도(道)를 택하는 현명한 행동의 도.


내용


신중한 실행이나 실천을 뜻한다. 이 사상은 중국 외에도 인도와 서양에서는 그리스의 플라톤(Platon) 또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에 의하여 주로 전개되기도 하였다.


즉, 플라톤은 어디에서 그치는지를 알아 거기서 머무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최고의 지혜이며 따라서 크기의 양적 측정이 아닌 모든 가치의 질적인 비교를 중용이라 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마땅한 정도를 초과하거나 미달하는 것은 악덕이며, 그 중간을 찾는 것을 참다운 덕으로 파악하였다. 또한, 불교의 중도(中道)도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유교사상에 있어서 중용이란 현실에 적용되는 행도(行道)의 최선의 길을 뜻하며, 형이상학적인 개념에서 출발하여 가치론적인 수양방법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서, ≪중용≫의 핵심사상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전체의 핵심이며 상대가치개념의 중간인 중(中)을 인식하여 그로써 실행하는 사상인 것이다.


여기에서는 유학사상에 있어서 중용의 의미와 그 이해에 관한 접근을 다각도로 시도하고, 나아가 한국유학에 있어서 이이(李珥)와 정약용(丁若鏞)의 중용설(中庸說)을 고찰하여 그 사상적 발전양태를 살펴보기로 한다.


≪중용≫은 원래 ≪대학≫과 함께 ≪예기≫ 49편 중에 있던 것을 주희(朱熹)가 따로 뽑아내어 비로소 유교의 기본경전인 사서의 하나가 되었다. 송대에 불교의 융성에 따른 유교의 자기반성과 불교의 심성론이나 도교의 형이상학적 이론에 대항하기 위하여 유교사상 자체 내에도 깊은 철학적 원리가 뒷받침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할 시대적 요청에서 유교의 철학적 배경을 간명하고 심도 있게 밝히는 책으로 특히 취택된 것이 바로 ≪중용≫이었다.


저자에 대한 학설은 구구하나 자사(子思)와 그의 제자의 작이라는 설이 가장 지배적이다. 이 책의 가장 주된 사상이 ‘중용’과 ‘성(誠)’이라는 데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는데, 주로 중용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중용을 분석해 보면, 중은 양극(兩極)의 합일점이고, 용은 영원한 상용성(常用性), 즉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정이(程頤)는 “치우치지 않는 것을 중이라 하고 바뀌지 않는 것을 용이라 한다(不偏之謂中 不易之謂庸).”고 하였는데, 이것은 곧 중은 공간적으로 양쪽 끝 어느 곳에도 편향하지 않는 것인 데 비하여, 용은 시간적으로 언제나 변하지도 바뀌지도 않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주희는 중용을 주석하기를, “중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기대어 있지 않아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것으로서 인성(人性)이 지극히 중정(中正)하여 질서를 이룬 안정된 상태가 사물에 접하여 감이동(感而動)하기 이전의 인성본연(人性本然)을 나타내는 말이며, 용은 일상생활에 있어서 평상(平常)됨을 나타내는 뜻”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중용의 참된 뜻과 그 실현은 중과 용, 즉 알맞음과 꾸준함이 서로 떨어지지 않는 관계를 유지하면서, 치우치거나 기대어 있지도 않고 지나치거나 모자람도 없는 중덕(中德)뿐만 아니라, 꾸준한 용덕(庸德)을 겸비하여야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겠다.


위의 내용을 종합하여 살펴볼 때, 결국 중의 위치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고, 그에 따라 의로(義路)를 견지하여 불변하는 것이 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중은 객관적 대상세계에 있고 용은 주관적 자아세계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지만, 또한 변화되는 세계에 맞게[中] 쓰는[庸] 것이 곧 중용이라 할 수도 있으므로, 이로 보면 주관과 객관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일체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중용, 즉 ‘맞게 쓰는 것’의 내용은 무엇인가? 객관이 주관에 맞는 것[中]이 진(眞)이라 한다면, 주관이 객관을 쓰는 것[庸]은 이(理)라 할 수 있다. 이 진리는 중용과 마찬가지로 일정한 형식에 얽매여 있는 것이 아니며, 이 진리의 일차적 내용이 인의(仁義)이고 인의의 구체적인 내용이 예악(禮樂)인 것이다.


따라서, 인의의 이상을 예악으로써 현실에 중정하도록 쓰는 것이 곧 진리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중은 진리의 소재(所在)이고 용은 진리의 소용(所用)이라면, 진은 중용의 인식이고 이는 중용의 실행이라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인의는 중용의 이상이고 예악은 중용의 현실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유교의 교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중용의 의의는 지행(知行)의 덕을 존중하고 있다. 공자는 “도가 행하여지지 못하는 까닭을 내가 알겠도다. 지자(知者)는 지나치고 우자(愚者)는 미치지 못하는구나. 도가 밝혀지지 못하는 까닭을 내가 알겠도다. 현자(賢者)는 지나치고 불초자(不肖者)는 미치지 못하는구나(중용 제4장).”라 했다.


또 “중용은 지요(至要)한 것이나 인간들은 그것을 능히 행하지 못한 지가 이미 오래이다.”라고 하여, 중용의 도는 지와 행의 상호조화 내지는 상보적인 관계 속에서 실천될 수 있는 것임을 역설하고 있다. 또, 공자는 군자와 소인을 비교하여 말하기를, “군자는 중용을 체행(體行)하고 소인은 중용에 반(反)한다. 군자가 체행하는 중용은 군자로서 시중(時中)함이요, 소인이 중용에 반함은 소인으로서 거리낌이 없음이다(중용 제2장).”라고 하여 군자의 중용은 때에 따라 알맞게 도를 행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중용사상의 본체론적·심성론적 논리전개를 살펴보면, 우선 주자의 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주희는 ≪주자어류 朱子語類≫에서, 성정(性情)에 대해서는 중화(中和)를 말하여 중을 도의 체(體), 화를 도의 용(用)으로 보았고, 또 이의(理義)에 대해서는 중용을 말하여 중은 천하의 정도로서 용(用)으로 보아 시중의 중으로 보았다. 용은 천하의 정리로서 체로 보고 있다.


또, 중화와 중용을 비교함에 있어서는 중화는 체, 중용은 용(用)이라 하였는데, 이는 결국 중화는 성정으로 심성적인 것을 가리키는 것이고, 중용은 그것이 행위로 드러난 것을 가리킨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중화의 ‘중’은 희로애락이 아직 발현되지 않은 상태로서, 천부본연(天賦本然)의 성이며 천명의 성(天命之性)인 것이고, 그것은 미발(未發)의 상태이므로 불편불의(不偏不倚)요 과불급(過不及)이 없는 상태이며, 심지체(心之體)로서 은(隱)인 것이다. 이 미발지중(未發之中)은 곧 천명의 정으로서 천하의 대본(大本)이므로,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마음의 본체라 하겠다.


그리고 중화의 ‘화’는 희로애락이 절도에 맞는 것, 즉 중절(中節)을 말하는 것이므로 천하의 달도(達道)이며, 심지용(心之用)으로서 삼라만상에 현현(顯現)되는 것으로 비(費)라 하겠다.


한편, ≪중용≫의 첫머리에서는 천명(天命)·성(性)·도(道)·교(敎)를 말하여 중용의 철학적 근거와 내용을 밝힘으로써 ‘치중화(致中和)이면 천지위언만물육언(天地位焉萬物育焉)’이라는 중용의 최고·최후의 경지를 그렸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곧 중용의 도이다. 그런데 이렇게 숭고한 중용의 도는 오직 성인만이 능히 실현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하여 군자의 중용의 도는 해괴하거나 비현실적인 도는 아니며, 또 일상생활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도 아니다. 일반 부부의 우(愚)로도 가히 알 수 있고 부부의 불초(不肖)로도 능히 행할 수 있는 비근하고 평범한 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용의 도는 일상생활의 전역에 걸쳐 있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그 전역에 걸친 다양한 양상을 통일하는 근본원리의 제시를 전제하고 있는데, 그것이 곧 ≪중용≫ 제12장에서 밝히고 있는 이른바 ‘군자지도 비이은(君子之道 費而隱)’인 것이다.


주희는 비를 용지광(用之廣), 은을 체지미(體之微)라 주석하였는데,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중과 용, 중과 화를 비와 은으로 비교한다면, 중용의 중은 ‘비’, 용은 ‘은’이라 할 수 있으며, 중화는 체로서 은이요, 중용은 용으로서 비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유교에 있어서 중용사상의 현실적 의의를 불교나 도가철학 및 법가의 사상과 비교하여 그 의미를 되새겨 보기로 한다.


도가와 불교에서는 대체적으로 위로 고상한 이상만 추구함으로써 무위자연(無爲自然)이나 무욕(無欲)을 내세워 인간 본성의 선한 측면만 보고 거기에 무위순응(無爲順應)할 것만을 주장하며, 유위유의(有爲有意)로서의 인의·도덕·예악 등의 제도를 아래로 봄으로써, 단번에 이상을 실현하려는 상달(上達)만 내세우고 단계적인 현실긍정과 실현을 의미하는 하학(下學)을 도외시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므로, 이는 초인문(超人文)·초인도적(超人道的)인 태도로서 중용의 의의에 어긋나는 지나침(過之)인 것이다.


또, 아래로 현실타개의 방술(方術)로서 무자비한 위력으로 제도적 억제만을 내세우는 반인문(反人文)·반인도(反人道)의 법가류(法家流)는 인성을 악으로만 보고 복종만을 강요하고 있으므로, 이는 중용을 알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하는 이른바 ‘모자람(不及)’이라고 할 수 있다.


유교에서는 인성의 선악 양면을 모두 인정하고 또 일[事]의 대소후박(大小厚薄)을 참작하여 시의에 좇아 그 가운데를 취하는 것이므로 이것이 전술한 바 있는 공자의 중용지도(中庸之道)인 것이다. 이는 바로 이상과 현실의 가장 바람직한 조화를 의미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유학의 정통은 성리학을 그 철학적 기반으로 하였고, 이 성리학이 16세기 중엽 이황(李滉)과 이이를 통하여 그 절정을 이루었다. 그런데 이황과 이이는 성리설에서 서로 입장의 차이가 뚜렷해 두 봉우리를 이루었거니와, 그 성리설의 성격은 그들이 시대현실 속에서 고뇌와 사색을 통하여 발견한 해답이었다.


이황이 이기이원론의 입장에 서서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한 것도 사실은 거듭된 사화(士禍)를 거치면서 시대사회 속에서 정의와 불의가 대립된 현실을 절실히 인식하였던 사실과 연관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이 역시 이기일원론의 입장에서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하여 시대사회가 지닌 모순과 불합리성을 통찰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적극적인 참여의식과 개선의지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황이 존리사상(尊理思想)에 근거한 도덕세계에 보다 더 많은 가치를 두었다면, 이이는 이기지묘설(理氣之妙說)을 주창하여 현실적 문제에까지 관심을 집중시켰다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황은 성(誠)을 기본으로 하여 일생 동안 경(敬)의 실천에 노력한 반면, 이이는 이황보다는 현실문제와 학문의 세계를 더 연관시키려 하였다.


한편, ≪중용≫의 전체적인 내용을 요약한다면, 그 전반부는 중용의 철학적 의미를, 후반부는 그것의 실현에 대한 천도와 인도의 문제인 성을 다루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이의 중용에 대한 이해는, 실천에 중심을 둔 성에 대한 언급이 주를 이루고 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이이의 중용설은 주로 ≪성학집요 聖學輯要≫에 나타나 있다.


앞에서도 중용과 중화의 의미를 비와 은으로 살펴보았지만, 이이는 비(備)와 은(隱)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비를 이(理)가 사물 또는 인사(人事)에 산재한 바의 소당연자(所當然者), 즉 당위성으로 보고, 부자(父慈)·자효(子孝)·군의(君義)·신충(臣忠)의 유(類)로 이를 용이라 하고, 은(隱)은 그 소이연자(所以然者), 즉 존재성으로서 체라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이는 비 속에도 소이연으로서의 은, 즉 이치가 내재하여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이이는 전술한 바 있는 주자의 성정론에 대하여 자기의 견해를 <답성호원 答成浩原>에서 밝히고 있는데, 즉 미발은 태극의 체[太極之體]이며, 또 지선의 체[至善之體]로서 천명의 성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성(誠)을 천지실현(天地實現)으로서의 심(心)의 본체로 규정하고, 더 나아가 대본(大本)은 재심의 중[在心之中]이요, 달도(達道)는 재사물의 중[在事物之中]이고, 또 재심의 중은 미발의 중으로 지선 그 자체이며, 재사물의 중은 지선의 용[至善之用]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주자는 성(誠)에 대하여 진실무망(眞實無妄)한 것이며 천리(天理)의 본연이라 하였지만, 이이는 ≪율곡전서≫ 권4 성의(誠疑)에서, 성에는 실리의 성[實理之誠]과 실기심의 성[實其心之誠]이 있다고 밝혀, 실리의 성은 소이연으로서 천리의 본연이고, 실기심의 성은 소당연으로 인간의 마음을 진실되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곧 천도로서의 성이 소이연의 뜻이라면, 인도로서의 성은 소당연의 뜻이므로 성에는 실리와 실심, 즉 천도와 인도의 양면성이 있음을 말한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이이는 이황이 정주(程朱)의 존양성찰(存養省察)과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위학(爲學)의 방법을 계승, 거경궁리(居敬窮理)로써 인(仁)의 실현방법, 즉 수양론을 언급한 반면에, 주성(主誠)을 내세워 독특한 수양론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이의 성사상(誠思想)은 천인(天人)을 관통하는 것으로서 중용에 있어서의 체용의 은비관계(隱費關係)를 설명하고 있다.


정약용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까지 활약한 실학의 대가로 실학파 중에서 경세치용파의 종사(宗師)인 이익(李瀷)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켜 이를 집대성한 인물이다. 정약용의 실학사상을 근원적으로 이해하려면, 우선 그의 많은 경전주석에 나타난 경학사상을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정약용의 야심적인 경전연구를 통한 주석체계는 경학사(經學史)에서도 중요한 업적임에 틀림없을 뿐더러, 이것은 곧 그의 철학적 근본입장을 밝혀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가 자신의 경학체계를 통하여 성리학과 훈고학을 비판적으로 극복하고 유학의 근본정신을 재천명하려고 하였던 것은 단순한 복고주의라기보다 그 시대에서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여기서 다산철학(茶山哲學)의 근본견해가 유학의 본질과 전통에 따라 인간문제에 대한 관심에 초점이 놓여 있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그의 중용설을 고찰해 보기로 한다. 정약용은 <중용자잠 中庸自箴>에서, 중용이 원시유가의 실천적 행동규범임을 강조하여 그 중요성을 제시하는 한편, ≪중용≫의 사상과 내용을 ‘중용’으로써 주지(主旨)로 하고 또 일관시키고 있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는 또 중과 중화와 중용을 구분하여 중과 중화는 같고 중용은 ‘중이용(中而庸)’ 또는 ‘중화지용(中和之用)’이라 하였다. 여기서 중과 중화가 같다는 것은, 미발일 때에는 집중(執中)을 하고 이발(已發)일 때에는 중절(中節)을 하기 때문에 중·화 2자(字)는 이것을 합하여 중 1자로 하여도 무방하다는 견해인 것이며, 중용을 ‘중이용’ 또는 ‘중화지용’이라고 한 것은 중과 중화가 일시적인 데에 그치지 않고 항구불이(恒久不已)하여야 덕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인 것이다.


이것은 위에서 언급한 주자학적인 해석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또, 정약용은 <중용강의>에서, 주희가 중용의 용을 평상이라 한 것에 대하여, 이러한 문구는 불교에서 온 것이지 유가의 옛 경전에는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여 주희의 설을 반박하고 있다. 자신은 용덕(庸德)을 상덕(常德)이라 하였고, 상의 뜻을 세 가지로 나누어 항상·경상(經常)·평상이라 강조하였다.


이렇게 볼 때, 정약용의 중용해석은 다분히 분석적·구체적인 것이고 실천에 역점을 둔 이론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정약용은 성(誠)에 대하여 “성이라는 한 글자는 만덕(萬德)의 근원이 되며 ≪대학≫과 ≪중용≫의 두 책은 모두 ‘성’ 한 글자로써 수공(首功)을 삼는다.”라고 <중용자잠>에서 밝히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중용지도’와 ‘신독(愼獨)’과 ‘성’을 연관시켜 중용지도의 실현은 신독이 아니면 안 되며 신독의 공부 역시 성이 아니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여기에서도 주자의 지나친 관념적 해석에 반기를 들고, 현실적이며 구체적인 면에 입각하여 인간의 후천적인 성실성을 역설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철학이론이 유교의 한계성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점은 있으나 논리전개는 실학적인 긍정적 요소가 있다 하겠다.


이상에서 살펴본 내용을 토대로 중용사상의 현대적 의의와 의미를 조명해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현대에 있어서 객관적 진리만을 추구하고 실현하려는 과학이나, 주관적 진리에만 몰두하는 철학유파들은 각기 이상과 현실의 결여와 무시로 인한 괴리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대과학과 철학의 편중된 진리관에 반하여, 유교사상은 객관적인 자연에 대한 인식과 주관적인 인간이 하는 실용의 ‘중용’을 진리로 하기 때문에 새로운 방향제시를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의 진리는 단순한 객관적 세계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순전한 주관적 세계에만 있는 것도 아니며,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용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중용사상 [中庸思想]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B013 – 대학(大學) / 작자미상

 

(출처 :  동서고전 200선 해제(반덕진, 가람기획))


 <대학>은 유교사상의 핵심을 밝힌 <정치와 개론사>로 원래 <중용>과 함께 <예기> 중의 한 편이었으나, 이것을 주자가 그 중요성을 인정하여 지식인 필독서인 사서(논어.맹자.중용.대학)의 하나로 편찬한 때부터 널리 읽히게 되었다. <대학>이란 <대인> 성인남자의 학(교육)>을 줄인 말로 그 핵심은 수기치인도, 다시 말하면 내성외왕의 도이다. 교육의 목적(명덕.신민.지선)과 8과제(격물.처지.성의.정심.수신.제가.치국.평천하)가 논리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현실적인 <치국평천하>를 설하는 <대학>은 <천인합일의 도>를 제시하는 <중용>과는 상효 표리를 이루는 경전이라 할 것이다.


a.<대학>의 제목과 저자에 대한 논란


 <대학>은 <중용> <논어> <맹자> 와 함께 사서중 하나이며 시.서.역의 3경과 더불어 유가의 기본경전으로 꼽힌다. 시.서.역의 3경은 아득히 옛날부터 있어온 명칭이나, 4서는 송대의 주자에 의해서 비로소 생겨난 명칭이다. 오늘날 유가의 경전을 총칭하여 <13경>이라고 하는데, 이 13경은 3경과 <예기> <춘추>를 합쳐 5경이라 하고, 춘추의 3전 <좌씨전> <공양전> <곡량전> 예기의 3례 <주례> <의례> <예기>와 <논어> <맹자> <효경> <이아>를 말한다.


 <대학>이라는 명칭에 대해 몇 가지 이설이 있으나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그 하나는 <대학>을 <치자의 학>이라고 보는 설과 다른 하나는 <대인의 학>이라고 보는 설이다.  정현은 << <대학>은 그 기록함이 박대하여 이것을 배우면 가히 정치를 할 수 있다>>고 하여 대체로 전자의 입장을 취했고 사마광도 이에 동의했다. 후자는 주자가 주장한 설인데, 그는 <<<대학>을 <대인 (성년남자)의 학 (교육)>이라 했다.

 그러면 대학의 본뜻은 어느 것이 타당할까? <대학>의 핵심사상은 한마디로 <수기치인의 도>라 할 수 있는데, 먼저 자기자신을 닦고 나아가 남을 다스리는 도리를 말하고 있는 <대학>은 바로 <대인지학>이요 <치자지학>인 동시에 더 나아가 <인간지학>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원래 <대학>은 지금처럼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던 것이 아니라 5경 중의 하나의 <예기>의 49편 중 42편 <대학> 편을 당의 한유가 독립시킨 것으로, 송의 사마광이 <대학강의>를 저술한 이래 주자는 더욱 <대학>을 숭상하여 1189년 <대학장구>를 저술, <대학>문장의 순서를 고치면서 경1장과 전10장(제5장은 주자의 보전)으로 구분,경은 공자의 말, 전은 공자의 제자 증자가 부언 해설한 것이라고 했다. 공자의 가르침은 증자--자사--맹자--정자의 계통으로 전해내려왔다고 하는 <도경전>을 완성하고 또 <대학>을 4서의 하나로 삼음에 따라 중요한 위치에 섰으며, 이후 <정주학>이 유행함에 따라 읽히게 되었다.

 <대학>의 저자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이 없다. 정자는 대학이 공자의 유서라고만 했을 뿐 저자에 대해서는 확실한 언급을 하지 않았고, 주자는 <대학>을 경 1장과 전 10장(제5장은 주자의 보전)으로 구분,경은 공자의 뜻을 공자의 제자 증자가 기술한 것이고, 전은 증자의 뜻을 증자의 제자가 기술한 것이라고 했다.

 자사가 증자의 제자이니, <대학>은 결국 자사의 저작이 아닐까 하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러던 것이 청대에 고증학의 발달과 함께 <대학>의 저작 및 저작연대가 아주 달라졌다. 청대의 고증학자 최술은 자사의 작으로 정설화 되어온 <중용>도 맹자의 이후의 작이라고 규정했고, 최근 중국학자 호통.전목 같은 학자는 <대학> <중용> 의 자사 작을 부인하고 진.한 사이에 무명씨에 의해 이록된 저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대학>의 작자에 대해서 여러 주장이 있으나, 유교의 정신을 가장 조직적으로 기술했고 또 증자의 말을 가장 많이 인용한 점으로 보아 증자 이후 공문의 제자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크게 잘못이 없을 것이다.


b.<대학>의 내용 및 근본사상


 먼저 언급해둘 것은 현존 <대학>은 <예기>에 수록되었던 그대로의 <대학> (대학고본)이 아니라 주자가 새로 정리한 <대학>이란 점이다. 다시 말하면, 주자는 <예기>의 <대학>이 착간이 되어 그 순서가 뒤바뀌었다고 생각했다는 뜻이다. 착간이란 글씨를 써둔 대쪽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대쪽에 글씨를 썼는데, 그 대쪽의 앞뒤가 바뀔 수 있다. 

 주자는 <예기>에 수록된 <대학>편은 틀림없이 착간이 된 것이라고 단정하고 그 <대학>편의 내용을 지금의 현재의 순서로 정리하여 이를 <대학신본>이라고 명명했던 것이다(그러나 왕양명은 대학신본은 완본으로 탈락과 착간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주자는 <대학>의 내용이 3강령 8조목을 서술한 것이라고 파악하고, 그 집차를 경 1장, 박 10장으로 장구를 정했다.

 <대학>은 유학의 요지를 완전히 조직적으로 천명하고 있는 경전이다. <대학>의 구성은 2편으로 되어 있는데, 제 1편은 경문으로서 <대학>의 총론에 해당하며, 제 1장에는 3강령, 제 2장에는 8조목이 서술되어 있고, 제 2편 전문은 경문에 대한 각론으로 3강령 8조목에 대한 보충설명이다. 따라서  3강령 에서는 <대학>의 근본사상인 수기치인의 내용을 기술하고 있고,  8조목 에서는 구체적인 실천방법을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 3강령

 3강령은 대학 서두에 나오는 <대학지도 재명명덕 재신민 재지어지선>(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을 말하는 것으로, 첫째 명명덕, 둘째 신민, 셋째 지어지선의 3자를 완성하는 일이다.

 명덕을 밝힌다 함은 덕을 닦아 일신을 수양하는 일이고, 백성을 새롭게(친하게) 한다 함은 자기완성을 이룩한 훌륭한 인격자가 백성을 지도하여 새로운 백성으로 만든다는 뜻이다. 명덕을 밝히는 것은 수기이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은 치인이다. 지어지선은 마지막 귀착점을 말하는 것이니, 그의 심술을 지극한 경지에 둔다는 뜻이다.

 

 (1)명명덕 : 주자는<< <명덕>이란 본래 갖추고 있는 성>>이라 하고 <<명덕이란 사람이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래서 허하고 영하며 항상 빛난다. 중리를 갖추고 있으면서 만사에 합당하게 적응하는 덕이 된다. 그러나 그 본체는 항시 빛나고 있어 한시도 쉬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배우는 자들이 때 묻지 않게 하고 늘 밝게 닦아서 원래 하늘에 타고난 대로 유지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다시 말하면 명명덕이란 양심을 계발하고 덕성을 함양하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환언하면 도덕적 지.정.의를 닦는 일이라 하겠다.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하나같이 수신으로 근본을 삼아야 한다. 근본이 어지럽고서 말단이 잘 다스려질 수는 없는 일이다>>라고 한 구절은 분명히 이것을 말해주고 있다. 개인적 도덕의 완성을 꾀한 것이라 하겠다.


   (2) 신민: 이 용어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고주(왕양명계통)과 신주(정자와 주자계통)인데,고주에서는 친민이란 친애의 뜻으로서 천하국가의 인민과 친해지는 일을 말하고, 정자는 신민 즉,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주자는 이 설을 계승하여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고 있다. <<새롭다는 말은 옛것을 바꾸는 것이다. 즉 스스로의 명덕을 밝힌 후에는 마땅히 이웃도 그렇게 되도록 영향을 미쳐서 이웃으로 하여금 역시 묵은 때를 제거할 수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친>과 <신> 두 가지 견해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나 학자 수로는 주자의 의견에 따르는 사람이 많다. 아무튼 명명덕과 신민(친민)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여기에 중국사상의 근본인 정교일치가 가능케 되는 근거가 있다.


   (3) 지어지선: 지선에 머무른다 함은 도덕적 부동불이 상태에 머무르는 일을 말하는데, 여기서도 고주와 주자주 사이에 차이에 있다. 고주에 따르면 지어지선은 <<선을 행해서 미처 지극한 데 이르지 못하면 백성을 다스리기에 부족하고, 일출일입에 조수함이 없으면 또한 백성을 화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지어지선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주자는 <<지극한 선은 사리의 당연한 극치다.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은 다 지극히 선한 데에 머물러 변함이 없음을 말한다. 즉, 천성의 극을 다하고 한치의 사욕도 없는 그런 경지를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이는 주자가 말하는 우주의 본체인 이의 세계의 표현이요, 형이상학의 견지다. 동시에 명명덕이나 신민이나 모두가 이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마치 서양 스토아 학파의 아파테이아(부동심)와 비슷한 개념이다. 위에서 말한 명명덕과 신민의 개념과 지어지선의 관계는 무엇일까? 지어지선은 <대학>의 도의 도달점이요 귀결점이다. 명명덕(도덕)과 신민(정치)의 결합점인 것이다. 대학지도는 명명덕과 신민이 지어지선해서 비로소 유가의 근본사상이 계통있게 완성을 보게 되는 것이다.


   2. 8조목

 8조목은 3강령을 실천하는 순서요 단계이다. 이를 열거하면 격물.치지.성의.정심.수신.제가.치국.평천하다. 이중 개인적 실천윤리인 격물.치지.성의.정심.수신의 5조목은 정치윤리인 제가.치국.평천하의 기본이 되기 때문에, 결국 유학의 도는 그 근본이 <수신>에 있고 또 그 근저에는 <격물치지>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 8조목에는 각 조목을 설명하는 글, 즉 전이 있는데, 유독 격물치지에 관한 전은 소실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 주자가 스스로 격물치지의 전을 보완했는데 이것을 주자의 부인하고 보전장이라 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왕양명은 8조목설을 부인하고 원래의 6조목설을 주장했음). 그만큼 격물치지를 중요시한 것인데, 이 격물치지의 해석에는 72가지 설이 있었다 한다.


   (1) 격물 格物: 격물은 대학지도에 있어 가장 근저를 이루는 조목인데 그 내용에 대해서는 역시 이설이 있다. 따르면 격물은 천하사물의 이에 궁극함을 말하고, 왕양명은 격물이란 물을 바르게 하는 것이라 했다. 양자의 설을 비교하면 물은 주자에 있어서 이이고, 왕자에 있어서는 의이며,격은 주자에 있어서는 지이고, 왕자에 있어서는 정이다. 주자에 의하면 천하사물은 각기 이를 갖추고 있으나 이를 궁극해나가면 천하 사물의 표리와 실체가 훤하게 관통된다는 것이다. 왕양명은 주자의 해석이 너무 광범한 것을 반박했다.

 왕자에 의하면 물은 사물이니 나의 의지있는 것이 물이다. 나의 뜻이 사친에 있으면 사친이 곧 물이요, 나의 뜻이 사군에 있으면 사군이 곧 물이라고 했다. 즉 격물은 뜻이 있는 바의 물에 대해 부정한 마음을 바로잡는 것이다.


   (2) 치지 致知: 격물에 대해서 주자와 왕자 두 사람 사이에 이론이 있듯이 치지에 관해서도 그 설이 일치하지 않는다. 먼저 주자의 설에 의하면 치지란 지식을 다하는 일이다. 즉, 지식의 계발을 뜻한다. 주에 이르기를 <<치란 추극함이요, 지란 지식을 말한다. 나의 지식을 끝까지 추구하여 알아야 하는 일이면 모르는 일이 없도록 하고자 함이다>>라고 했다. 즉, 자기의 의식을 한없이 넓게 하고 깊게 해서 천하일체의 사물에 대해 모르는 바가 없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왕양명은 주자의 광범한 해석을 피하고 <<치자지아>>라고 했다. 즉 <<치지라고 하는 것은 후세 유가들이 이르는 것과 같이 그 지식을 충광함을 이르는 것이 아니고, 본래 타고난 내 마음의 양지에 이르는 것을 말할 뿐이다>>라고 했다. 즉, 지란 선천적으로 구비하고 있는 양지를 말하는 것이고, 치란 이 양지에 이름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치지에 대한 주.왕의 설은 현저한 차이가 있다. 하나는 보통 말하는 바의 지식을 추극하여 외부적으로 발전하여 사사물물에 불통함이 없도록 한다는 것이고, 하나는 자기자신의 내부에 구비하고 있는 선천양지에 도달케 하여 사물을 바로 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자에 있어서는 객관적 지식의 수집, 궁리주의, 선지후행설이 될 것이며, 왕자에 있어서는 선천양지의 지각,직각주의,지행합일설이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치지격물란 주자에 의하면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후천적인 지식을 명확히 한다는 뜻이고, 왕양명은 의지가 존재하는바 사물에 의해서 부정을 바로잡고 양지를 닦는다는 것이다.


   (3) 성의 誠意: <대학> 중에는 명언이 많지만 특히 <성의>에 관한 장은 독자로 하여금 감동을 주는데, <의>란 주자에 의하면 <<의자심지소발>>이라 했다. 즉, 사려.정서.욕망 등의 총칭이다. 그리고 심이란 의의 본체로서, 욕망을 의라 한다면 심은 마치 품성과 같은 것이다. 

 <성>이란 참된 것이다. 대학에 이르기를 <<이른바 자기의 생각을 성실하게 한다는 것은 자기를 속이는 일이 없도록 한다는 것이다. 나쁜 냄새를 싫어하는 것같이 악을 미워하고 잘생긴 여인을 좋아하는 것같이 성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두고 스스로 자족해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스스로 속이지 않음은 소극적인 면이요, 스스로 마음에 흡족해함은 적극적인 면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니, 스스로 속이지 아니하면 자연 스스로 흡족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속이는 것을 막고 마음에 흡족하게 되는 방법은 무엇인가? 대학은 여기에 <신독>을 말하고 있다. <신독>이란 혼자 있을 때를 삼가는 것이다. 즉, 독거에 불선을 저지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소인은 한거에 보통 불선을 저지르게 마련이며, 이것이 쌓여 사회의 불안을 조성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4) 정심 正心: 뜻이 성하게 되면 정심이 생긴다. 정심이란 마음의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감을 뜻한다. 무릇 사람의 마음에는 분노.공포와 두려움. 즐거움.우환 등의 정서가 있어 때때로 정심을 잃게 하므로, 뜻을 지성으로 갖는 동시에 그 본체인 마음을 정한 위치에 두도록 힘써야 한다. 만약 마음이 정서와 감정에 지배되어 그 정상을 잃을 때,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분간치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심부재언 시이불견 청이불문 식이부지기미>>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정심의 중요한 이치가 여기에 있다.


   (5) 수신 修身: 수신은 글자 그대로 몸을 닦는 일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인격의 수양을 말한다. <대학>의 말로 하면 수신은 곧 명명덕하는 일이다. 수신의 방법은 지금까지 말한 정신.성의 치지.격물을 바로 행하는 데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치지격물에 의해서 지를 닦고 성의로써 의지를 옳게 가지며 정심에 의해서 정서를 바로잡으면, 거기에 절로 수신이 되고 인격이 완성되어 명덕이 저절로 밝아질 것이다. 여기에 비로소 근본의 확립을 보게 된다. 이는 바로 <대학>에 나타난 신천도덕사상의 극치를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에 완성된 인격, 밝혀진 명덕은 천하국가에 사회적.객관적으로 투사되어서 제가.치국.평천하되는 것이다.


   (6) 제가 齊家: 대학에서 말하는 제가는 가족생활의 도덕적 형성을 목적으로 한다. 자신의 수양 없이 그 집안을 다스리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몽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 제가의 요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쪽에 치우치는 것, 즉 편협한 행위를 경계함이다. 사람이란 자기가 가까이하고 사랑하는 것에도 치우치게 마련이고, 자기가 천히 여기고 밉게 보는 것에는 치우치게 마련이며, 자기가 두려워하고 공경하는 것에는 치우치게 되고, 자기가 슬프고 긍휼히 여기는 것에도 치우치게 되며, 자기가 오만하고 게으르게 다루는 것에도 치우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좋아하면서도 그것의 나쁜 점을 알고, 미워하면서도 그것의 좋은 점을 아는 사람이란 천하에 드물다. 만약에 감정에 치우쳐 집안을 다스리려고 할 때 거기에 공평을 기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제가를 위해 <효제>를 강조하기도 한다.


   (7) 치국 治國: 치국의 요체는 제가에 있다고 했으니, 그 집안을 잘 다스릴 때 비로소 그 나라가 다스려질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8) 평천하 平天下: 평천하의 기본은 제가와 치국이다. 임금이 노인 섬기는 도리를 다할 때 백성들이 이것을 본받아 자기의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게 될 것이고, 또 임금이 장자를 대하는 도리를 다할 때 백성이 이것을 본받아 형제의 도를 다할 것이고, 또 임금이 불쌍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길 때 백성들 역시 마음가짐이 중후하게 되어 감히 임금께 배반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또 대학은 백성의 마음을 깊이 헤아려 치자의 마음으로 삼도록 하고 있다. 즉, <군자민지부모 민지소호호지 민지소오오지 차지위민지부모> (詩云 “樂只君子,民之父母.” 民之所好好之, 民之所惡惡之。此之謂民之父母)라고 했다. 즉, 백성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백성이 싫어하는 것을 나 또한 싫어하나니, 이것은 백성을 위주로 하는 민주주의의 기본 되는 생각이라고 본다. 이밖에도 평천하의 조항에는 이보다 의를 중히 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하고 있다.


c.<대학>에 대한 평가


 <대학>은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은 누구나 기본적으로 공부해야 하는 기본경전의 하나다. 송나라의 정이천은 <<대학>은 공자학파의 전통 속에 살아 있는 책이며, 초학자는 이곳을 지나 덕의 길로 나아가는 문이다>>라고 말했다.

 <대학>을 읽다 보면 학문을 하는 데 있어 익히고 깨달은 진리는 보편타당한 것이어야 하며, 학문의 근원을 깨닫지 못하고는 부수적인 지식이 아무리 많다. 해도 변화하는 만물의 현상을 설명할 수 없으므로, 학문하는 사람은 지식에 앞서 학문의 본질과 명철한 지혜의 눈을 뜨는 데 주력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그 행간에 도달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음이 그것이다.  그리고 학문의 방향이 인간과 사회의 활동을 위한 쪽으로 전개 되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학문을 하는 학자뿐만이 아니라 일반인도 학문을 하는 데 있어 지식도 중요하지만,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실제사회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대학에서는 3강령 실현의 수단으로 수기를 첫째로 내세우고 있음에 주목하게 된다. 대학은 그 이상실현의 수단으로 근본을 세우는 일, 즉 나 자신이 먼저 완전한 도덕적 본체가 되기를 요구한다. 이런 사고는 유교전체를 통한 근본사상의 하나로서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아울러 <대학>에서 제시하는 정치의 순서가 논리적으로 전개된다는 점에 공감할 수 있다. 즉, 대학은 평천하의 수단으로 치국을 말했고, 치국의 전제로 제가를 주장하고 있다. 사실 제가 없이 치국이 될 수 없으며, 치국 없이 평천하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 순서의 설정이 매우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대학>의 이처럼 특징적인 내용도 있으나 한 두 가지 미흡한 점도 있다. 정치적  측면에서 관념적 도덕주의에 빠져서 물질적 측면에 대한 언급이 미흡하다는 것이다. 이런 느낌은 <대학>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대학>에 있어서는 정치의 일면인 부국강병 등의 현실적인 문제가 너무 간단하게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 맹자가 유가에 입각하고 있으면서 경제적인 면에 상당한 관심을 보인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라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대학의 핵심사상은 한마디로 <수기치인도>라 할 수 있는데 즉, 먼저 자기자신을 닦고 나아가 타인을 다스리는 도라 할 수 있다. 이는 개인생활의 수양과 사회생활과의 결합, 곧 윤리와 정치와의 결합을 논하는 학문이었으나 군자의 학문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학 (책)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대학》의 원작자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는데, 주희는 경문 1장을 증자가 지었고, 전문 10장을 증자의 문인이 해설했다고 주장하였다. 경문은 성인이 직접 언급한 진리, 전문은 성인에 버금가는 현인이 경문을 정리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삼강령을 밝힌 부분을 경문으로, 팔조목을 밝힌 부분을 전문으로 보았다. 주희는 사서체제를 정립하면서 공자(논어) -> 증자 -> 자사(중용) -> 맹자(맹자)의 도통이 필요했고 이 과정에서 대학을 증자의 저서라 하진 못하더라도 증자와 관계있는 책으로 만들었다.


주희가 정이의 설을 따라 3강령 중 ‘親民’을 ‘新民’으로 고치고, 본래 있던 성의·정심·수신·제가·치국·평천하 조 앞에 격물과 치지의 장을 새로 지어 보망(補亡)한 8조목을 만든 이래, 송대 성리학을 존숭하는 이들과 고본 《대학》에 충실하고자 하는 이들 사이에 수많은 논란이 있었다. 왕수인은 ‘친민’이 옳다고 하여 고본 《대학》을 따랐으니, 주자학과 양명학의 차이점 가운데 하나가 된다. 주희는 사서를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의 순으로 읽으라 할 정도로 대학을 중요시했다.


김용옥은 대학을 순자계열의 사상가에 의해 전국시대 사상을 집대성한 책으로 본다. 저술 목적은 스승의 지위를 확립하여 황제의 권력을 제약하고 길을 제시하기 위함이었으며 집필시기는 여불위가 집대성한 여씨춘추의 집필시기와 일치한다고 보고있다. [1]


내용[편집]

《대학》은 자기 수양을 완성하고 사회 질서를 이루는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이론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대학’(大學)이라는 의미는 통치자의 학문이라는 설과 인격자의 학문이라는 설로 나눌 수 있다. 주자는 《대학》이 소학(小學)을 마치고 태학(太學)에 입하하여 처음 배우는 개설서라고 했는데, 오늘날 대학교의 기본 교양 교재와 같은 성격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학》은 유가 사상의 주요 사상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수기치인(修己治人), 곧 자신을 수양한 후에 백성을 다스리라는 것이다. 즉 사회의 지도자는 먼저 자기 자신을 수양하고 책임과 의무를 다한 후에 이를 주변 사회로 넓혀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삼강령과 팔조목에 담아 내었다.


삼강령[편집]

명명덕(明明德) : 자신의 밝은 덕을 밝게 드러내야 한다.

신민(新民) : 자신의 밝은 덕으로 백성을 새롭게 한다.

고본 《대학》에 수록된 용어는 친민(親民) : 백성과 친하게 된다.

지어지선(止於至善) : 최선을 다하여 가장 합당하고 적절하게 처신하고 행동한다.

팔조목[편집]

격물(格物) : 세상 모든 것의 이치를 찬찬히 따져보는 것 → 고본 《대학》에는 없는, 주희가 새로 지어 넣은 조목

치지(致知) : 지식과 지혜가 극치에 이르게 하는 것 → 고본 《대학》에는 없는, 주희가 새로 지어 넣은 조목

성의(誠意) : 의지를 성실히 다지는 것

정심(正心) : 마음을 바로 잡는 것

수신(修身) : 자신을 수양하는 것

제가(齊家) : 집안을 화목하게 이끄는 것

치국(治國) : 나라를 잘 다스리는 것

평천하(平天下) : 세상을 화평하게 하는 것





B012 – 맹자(孟子) / 맹자(BC 372~BC 289 추정)

 (출처 :  동서고전 200선 해제(반덕진, 가람기획))



 권력과 부귀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전국시대에 <인의>에 바탕을 둔 왕도정치를 주창했던 맹자의 정치방법론이 담긴 책, 맹자는 극심한 사회변화 속에서 절대군주 중심의 강력한 국가 공리주의를 배격하고, 성선설에 기초하여 지식인들의 자율적인 도덕원리에 입각한 <인정>과 <왕도사상>을 피력했다. <맹자>에는 이와 같은 맹자사상의 전모가 주로 그의 제자, 또는 당시 군주들과의 대화 속에 생생한 필치로 전개되고 있다.


a.생애


 자식의 교육을 위해 세 번이나 이사를 했다는 <맹모삼천지교>와, 공부기간을 다 마치기 않고 돌아온 아들에게 짜고 있던 베를 끊어 교훈을 준 <단기지훈>의 고사로 유명한 맹자와 그의 모친.

 맹자는 중국 전국시대 유교사상가로, 공자 사후 100년 정도 지난 후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진 있으나 정확한 생물연대는 알 수 없다. 맹자는 현 산동성의 추현지방인 주나라 사람이며, 노나라의 귀족인 맹손씨 집안의 자손이라 전해지고 있다. 공자와 같이 맹자도 아버지를 일찍 잃었는데, 아버지가 죽었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네 살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헌신적인 배려와 지도 속에서 자랐다. 맹자와 그의 모친은 처음에 공동묘지 근처에 살았으나, 맹자가 언제나 시체를 매장하고 장례식을 올리는 놀이를 하자 그의 어머니는 시장 근처로 이사를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고 팔고 하는 놀이를 하므로 다시 학교 근처로 이사를 가니 비로소 맹자가 공부하는 흉내를 내었다. 즉,아들을 기르는 데 좋은 환경을 찾아 세 번이나 이사를 했다는 맹모삼천지교는 그 당시부터 지금까지 생생하게 전해져오고 있다.

 젊었을 때 노나라로 유학하여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문하에서 배우고, 뒤에 제자들과 양나라의 혜왕,제나라의 선왕,추나라의 목공,등나라 문공 등에게 유세를 하고 돌아다녔으나, 만년에는 향리에서 후진들을 지도하며 그가 제후들이나 제자들과의 대화내용을 엮어 <맹자>를 집필했다. <맹자>는 오랫동안 읽히지 않다가 당나라 때 한유가 이 책을 세상에 밝혔고, 그것이 북송에 계승되어 차츰 중요시되었으며 남송의 주희가 4서의 하나로 삼았다.

 공자와 맹자는 성격상 차이점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공자는 내성적이고 세련된 선비였으며 조심성있고 말하기 앞서 깊이 생각하는 반면, 맹자는 외향적이었으며 그 시대의 위대한 예언자로 그의 재치는 널리 주목을 끌었다. 공자는 어려운 질문을 받게되면 머뭇거리기도 했으나, 이와 달이 맹자는 그의 적대자들을 몰아치는 공격적인 입장을 취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b.시대적 배경과 맹자의 사상


 공자의 유가사상은 맹자와 순자에 의해 계승되어 유가학파로 발전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다 같이 공자의 사상적 영향을 받고 있으나,그들의 주장은 상반되는 점이 많고 후세의 학문에 미친 영향 또한 다르다. 그들의 학문계통을 보면 <인의>를 강조한 맹자는 공자의 직계제자인 자사의 계통이고, 순자는 특히 <예>를 강조한 자하의 계통에서 나왔다.

 맹자가 살았던 전국시대는 유력한 제후는 스스로 왕을 칭하고 무력으로 천하의 패권을 장악하려 했다. 그들의 목표는 제나라의 환공이나 진나라 문공과 같은 패자가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맹자는 그의 이상주의적인 사상을 제후에게 유세하고 다니면서 패도를 부정하고 왕도를 제창했다.  맹자의 사상 속에서 두 개의 중요한 지주를 찾는다면, 하나는 윤리사상으로서의 성선설이요, 다른 하나는 정치사상으로서의 혁명론이 될 것이다.


   1. 맹자는 인성론에 있어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고 하는 성선설을 내세우고, 그 증거로 사람의 마음속에는 태어날 때부터 인의예지라는 4덕의 싹이 되는 4가지 마음이 있는데, 측은지심,수오지심,사양지심,시비지심이 그것들이다. 이를 <사단설>이라 한다. 이 사단설을 바탕으로 <오륜>을 설명했다. 즉,부자 사이에는 친이, 군신사이에는 의가, 부부에는 별이, 장유사이에는 서가, 붕우사이에는 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맹자의 성선설은 약 50년 후배인 순자의 성악설과 아울러 인성론의 두 전형이 되었다. 성선설에 근거를 둔 맹자의 윤리사상은 인간의 내면에 신뢰를 두는 것으로 <주관적 윤리학> 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인간의 내면에 신뢰를 두지 않고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고 하는 순자의 성악설을 <객관적 윤리학>이라고 부르는 것과 대비된다.


 2. 맹자는 정치론에 있어 <덕치주의>를 바탕으로 한 <왕도정치>를 제창했다. 이는 힘으로 다스리는 <패도정치>로써는 인심을 얻을 수 없으며, 인애에 의한 왕도로써만 민심을 얻고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는 정치철학으로 왕의 덕의 유무에 따라 천명이 따른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덕이 없는 악덕군주를 신하들이 몰아내는 것이 혁명이며,이는 민심이 천심을 따라서 행하는 일이라 하여 후세 왕조교체에 있어서의 선양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맹자와 민심에 대한 강조는 이른바 <역성혁멍>의 긍정이라는 과격한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즉,임금도 임금답지 못하면 교체할 수 있다는 민주주의 사상에 철저했다. 다음의 제의 선왕과 맹자와의 다음 문답은 그의 혁명론을 잘 나타내주는 일화로 유명하다.

 제의 선왕이 묻기를 <<무왕(의 왕)이 주(의 폭군)를 몰아 냈다고 하니 그런 일이 있습니까?>> 하고 묻자 맹자가 대답하기를 <<옛기록에 있습니다.>> <<신하가 임금을 죽여도 좋습니까?>> <<인을 해치는 자를 적이라 하고 의를 해치는 자를 잔이라 하며, 잔적지인을 일부(일개의 필부)라 합니다.일부인 주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어도 아직 임금을 죽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이 대화는 은의 마지막 왕인 주처럼 국왕이 포악무도할 경우 한갓 하찮은 사나이로 전락한 것이므로 죽여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게 맹자의 생각이다. 이 같은 맹자의 혁명론의 근거에는 그의 민주주의와 애민사상이 있다. 민과 군주와 사직의 세 가지 중에서 민이 가장 귀한 것이라고 한

맹자의 말에서 민을 나라의 근본으로 생각하는 그의 민본주의 사상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 <왕도사상>은 이상주의적인 사상이어서 결국 채택되지 않았다.


c.<맹자>의 내용


 <맹자>는 7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양혜왕편. 공손추편. 등문공. 이루편. 만장편. 고자편. 진심편으로 엮어져 있으며, 각 편을 다시 상하로 나눈 14권본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중 양혜왕.공손축.승문공 등의 3편은 맹자가 각국의 제후들을 만나 민본사상에 기반을 둔 정치를 강조하며 제후를과 나눈내용이며, 이루편 등 4편은 고향에 돌아와서 제자들과 정치에 관한 토론을 벌인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편의 대부분은 명백한 주제가 들어 있다.


   1. <양혜왕>편: 모두 23장으로 되어 있다. 그는 전란으로 시달리는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유력한 군주로 하여금 천하를 통일하게 하고 평화를 가져오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여 각국 제후들의 초청에 응했다. 제의 선왕에 가장 기대를 걸고 그에게 민생을 안정시키고 교육을 보급시켜 민중의 지지를 얻는다면 천하를 통일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즉, 무력을 위주로 하는 패도를 피하고 천명에 따라 민의를 존중하는 왕도를 제창했던 것이다. 그의 의견이 한때 수용되는 듯 했으나 제와 연이 무력으로 전쟁하자 맹자는 선왕을 포기하고 다른 제후들과 대해서 설득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들은 선왕만한 정치력을 갖고 있지 못했으므로 그의 설득은 공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그의 왕도사상에서는 천명(민의)에 바탕한 백성의 저항권이 인정되었고 <서경>과 더불어 <역성혁명이론>을 제공했다.

   2. <공손축>편: 모두 23장으로 되어 있다. 제국에 체재하는 동안 맹자가 강설했던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왕도.양기.사단에 관한 논설은 유명하다. 왕도론은 전편과 거의 같고,양기론은 마음을 주재하는 <지>이외에 육체를 지배하는 <기>의존재를 지적,이를 높이 키워서 도의와 합치시키는 것을 <호연지기>를 기른다 하여 왕도 강설자의 용기를 지탱하는 전재로 삼았다.  또한 이 입장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길을 문제삼아 과거 현자의 처세방식을 비판하고 거취의 진퇴를 분명히 한 공자를 찬양했다. 아울러 성선설의 내용을 이루는 4덕과 4단을 논하고 있다.

   3. <등문공>편: 15장으로 되어 있다. 왕도정치의 일환으로 그가 제창한 그 유명한 <정진법>이 설명된다. <정진법>이란 토지를 우물정자(정) 모양으로 나누어 중앙은 조세용 공전으로 하고 그 주위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한다는 개념인데. 이어 당시의 지식인을 매혹시킨 농가나 묵가의 사상을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며 비판했다. 자급자족의 근로생활을 제창하는 농가가 실제적으로는 교역경제에 의존하는 맹점을 공박, 사회발전 면에서 농가를 거부하고 분업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또한 절약을 중히 여겨 박장을 권장하는 묵가가 어버이의 장례만은 후하게 하는 모순을 공박,왕도를 분명히 하기 위해 이들 이단을 배척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여기서 그 유명한 <대장부론>을 토해낸다.

 <<천하라는 넓은 집에 살고 천하의 올바른 자리에 서고 천하의 대도를 실천하여 뜻을 이루면 백성들과 더불어 함께 나아가고, 뜻을 이루지 못하면 혼자서 자기의 도를 실천하여, 부귀도 그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못하고 빈천도 그의 마음을 변하게 하지 못하고 무거운 무력도 그를 굴복시키지 못하게 되어야만 그것을 대장부라 한다.>>

   4. <이루>편: 정치.윤리.교육.경전.인물평론 등에 관한 어록으로 61장으로 되어 있다. 모두가 짤막한 구절로 되어 있으며 배열도 순서와 통일이 결여되어 있어 제자들의 편집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모아진 어구 그 자체는 다른 편의 결함을 보완하고 맹자사상을 복원하는 데 도움되는 것이 많다. <<하늘에 순응하는 자는 존립할 수가 있으나 거역하는 자는 망한다.>> <<사람의 눈동자를 보면 그사람의 인품을 알 수 있다.>>

   5. <만장>편: 18장으로 상편은 제자인 만장의 물음에 대답하고, 요.순.우 등의 전설을 비판했다. 하편 역시 만장과의 대화를 통하여 왕도 강설자의 생활신조를 보다 상세하게 말했다.

   6. <고자>편: 36장이다. 상편은 주로 인성론이 들어 있는데, 전반에 있는 고자와의 논쟁은 유명하다. 논쟁은 두 사람이 모두 비유를 써가며 팽팽하게 맞섰으나, 맹자는 그것을 승리의 형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상편의 후반은 이미 나온 왕도.양기.4단 등 과 관련되는 수양론으로 밤낮으로 양심을 지키도록 노력하고,외계의 자극에 따라 악으로 달리기 쉬운 관능욕을 자제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이 입장은 단적으로 <<야기를 간직하라>>라고도 하며 <<욕을 적게 한다>>고도 하여 송유의 수양론에 영향을 주었다. 

   7. <진심>편: 84장의 짤막한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맹자는 요순 이래 500년마다 1시기로 보는 성현계보를 말한 뒤 열렬한 기백과 자신을 가지고 그 자신을 공자 다음 가는 왕도 제창자라고 규정하고 있다. 널리 알려진 <인생삼락>이 여기서 그려지는데, 1.부모형제가 안녕한 것 2.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 보아도 부끄러울 것이 없는 것 3.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기쁨이 그것인데, 천하를 얻은 것은 포함시키지 않았다. 또한 <<가는 자는 쫓지 않고 오는 자는 거부하지 않는다. 나에게서 떠나는 자는 그대로 두고 가르침을 받고자 오는 자는 그 사람의 과거에 구애됨이 없이 맞이한다.>>

 요컨대 <맹자>전체의 주축은 <왕도사상>의 강조이고, 입설의 근거로 <성선설>과 강설 때 솟아나는 기백도 간과할 수 없는 요점일 것이다. 문제는 내용에 어울리게 투지가 넘치는 박력을 나타내 보이고, 구성 및 수사도 긴밀한 추고를 거쳐 개성적이다. <장자> 내편과 함께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걸작이라 할 수 있다. 다만 교묘한 비유를 구사한 나머지 수사 그 자체에 뜻밖에 많은 기변이 숨어 있다.


d.맹자사상의 현대적 의의  


 맹자는 공자사상을 계승 발전시키고 유학의 체계를 확립하여 대체로 공자 이후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 제2의 성현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는 <인의>의 도를 확립하고 인정을 왕도의 기초로 하여 왕도.패도의 변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사람을 끄는 웅변,도덕적 용기,그리고 깊은 신념으로 공자의 가르침을 대중화시켰고, 또한 농가가 묵가 등의 이단을 철저히 배격하여 유학을 전국시기에 돋보이게 했다.

 맹자는 원래 기백이 강하고 언변에 능해서 호연지기를 설하는 곳, 대장부론을 설하는 곳, 출처진퇴를 설하는 곳에 이르러서는 감동적이다. 특히 <맹자>를 읽다 보면 마치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들의 궤변을 문답으로 몰고가 물리치는 장면을 연상케 되는데, 그의 웅변, 그리고 적절한 인용과 교묘한 비유는 탁월하다. 공자와 맹자는 거의 같은 사상을 가졌으나 성격이나 사상적인 면에서 미묘한 차이점이 있었다.

   1. 공자는 인을 주장했지만 맹자는 인의를 주장하여 <<인은 사람의 마음이요, 의는 사람의 길이다>> 라고 규정했다.

   2. 두사람 모두 훌륭한 정부에 관심을 가졌지만 공자가 군주는 전능한 성전이라는 인식과 다만 치자에 대한 백성의 신임이 중요함을 인정했을 뿐이라, 맹자는 정부는 백성을 위해서, 그리고 백성의 승인을 얻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여 백성을 군주보다 더 중요한 존재로 간주했다. 맹자는 <<왕권을 장악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가 있다. 백성을 장악하라. 백성의 마음을 장악하는 길은 오직 하나가 있다.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마련하고 그들이 싫어하는 것을 하지 말라>> 고 했다.

   3. 위와 같은 논리에서 백성에게 천명을 어긴 박덕한 군주를 교체할 수 있는 역성혁명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런 점에서 거의 현대적인 의미에서 민주주의자로도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공자는 정직이고 변함없는 관계를 밝혔을 뿐이다. <<치자는 치자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부모는 부모답게, 그리고 아들은 아들답게>>라고 <논어> 에서 밝혔다.

   4. 두 사람 다 훌륭한 정부는 물심양면의 복지에 의존한다는 견해를 용인했지만, 앞서 본 바와 같이 맹자는 그의 선생보다 훨씬 더 자세했다. 그에게는 백성이 부유하고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했다. 오히려 그는 정진법.조세관리.자원보존과 같은 앞서 말한 각 분야에서 그의 신념을 자세히 말하고 있다. 또한 <맹자>는 오랫동안 한 유가의 저작으로 제자류에 끼여 평가될 때는 찬반 양론이 있어왔는데, 당의 한유가 이 책을 옛글 중에 유일한 것으로 격찬함으로써 차츰 눈길을 끌기 시작했고, 남송의 주자가 <대학> <중용> <논어> 와 함께 4서의 하나로 삼은 이후 초학필독의 고전취급을 받았으며, 절대적 권위가 주어져 한민족의 정신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 평가를 떠나서 본서의 현대적 의의를 든다면,  

   1. 성립연대 및 성격이 뚜렷하지 않은 것이 많은 전국시대의 저작들 중에서 본서와 같은 것은 유력한 길잡이로 믿을 수 있는 사료가 되고, 사상사뿐 아니라 문화상의 연구 면에서 매우 귀중하다.

   2. 본서의 내용은 전국 유가의 사상. 감정. 생태는 물론이고, 정치.윤리,교육에 관한 제언은 현대에도 참조할 만한 많은 지혜와 교훈을 간직하고 있다.

   3. 본서는 단지 맹자 개인의 언행론으로서가 아니라 중국에서 최초로 나타난 자서문학으로서도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맹자(중국어: 孟子, 병음: Mèngzǐ, 멍쯔[*], 라틴어: Mencius 멘키우스[*], 기원전 372년?~기원전 289년?)는 공자의 사상을 이어 발전시킨 유학자이다.


전국 시대 추(鄒)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가(軻)이고, 자는 자여(子輿) 또는 자거(子車)이다. 어릴 때부터 공자를 숭상하고, 공자의 사상을 발전시켜 유교를 후세에 전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1.생애[편집]

생몰 연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공자가 죽은 지 100년쯤 뒤에 산둥 성 쩌우청 시에서 태어났다. 그가 활약한 시기는 대체로 기원전 4세기 전반기이다. 어머니 장(仉)씨는 맹자를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 세 번 이사를 했다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로 유명한 현모로서, 어머니에게도 큰 감화를 받으며 학교의 수업을 마친 뒤, 공자의 고향인 노나라로 가서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인에게서 공자가 편찬한 육경을 배웠다. 자사의 계통은 공자의 경우에는 별로 드러나지 않았던 '천(天)'의 신앙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제자백가 시대에 돌입한 당대에 묵적과 양주의 사상과 경쟁하며 유가 사상을 확립했다. 40세 이후에 인정(仁政)과 왕도정치를 주창하며 천하를 유력했다. 법가나 종횡가가 득세하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으며 은퇴했다. 60세 이후의 삶은 알려진 바가 없다.


한때 제나라에 체류했을 당시 그 인접국인 연나라에서 자지가 난을 일으킨 것을 제 선왕에게 보고하여 자지의 난을 진압하게 한 적도 있었다.


2.맹자의 사상[편집]

유교

Ru character.png

산 자를 봉양하고 죽은 자를 장사지냄에 모자람이 없게 하는 것이 왕도의 시작이다.

 

— 《맹자》 〈양혜왕 상편〉

기본 개념[보이기]

인물[보이기]

경전[보이기]

역사[보이기]

관련 항목[보이기]

v • d • e • h

저서로 맹자가 있다. <맹자> 7편은 만년의 저술이라고 하나 의문이며 실제로는 그의 제자들이 편찬한 것으로 봄이 옳을 것이다. 맹자의 사상은 하늘에 대한 숭경의 정념이라고 하겠다. 맹자는, 하늘은 인간을 포함한 만물을 낳고 그 피조물(被造物)을 지배하는 영원불변의 법칙을 정해 이를 만물창조의 목적으로 삼았다고 파악했다. 그리고 이 하늘과의 관련으로 인간 본연의 모습을 고찰하고 있다. 피조물인 인간에게는 하늘의 법칙성이 내재하고 있으며 하늘이 정한 법칙의 달성이 피조물인 인간의 목적이라는 것이 맹자의 기본적 인간관인 것이다.


공자가 인(仁)이라 부르고 '예(禮)'를 실천하는 인간의 주체성에서 발견한 인간의 덕성(德性)을, 맹자는 인간이 갖추고 있는 하늘의 목적을 지닌 법칙성으로 생각하고 이를 인간의 본성이라 하여 인간의 성(性)은 선(善)이라고 하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맹자는 은·주 이후의 전통적인 유산인 인간의 지각을 초월한 우주의 참된 실재자에 대한 숭경의 정조(情操)로 공자가 발견했던 인간의 실천적 계기를 종교적으로 기초를 닦았던 것이다.


맹자는 인간의 성은 선이라고 하는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인간의 마음에는 인(仁)·의(義)·예(禮)·지(智) 등 사덕(四德)의 사단(四端:싹)이 구비되어 있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인(仁)은 '측은(惻隱)의 마음' 혹은 '남의 어려운 처지를 그냥 보아넘길 수 없는 마음'이며, 의(義)는 불의불선(不義不善)을 부끄럽게 알고 증오하는 '수오(羞惡)의 마음', 예(禮)는 사람에게 양보하는 '사양의 마음', 그리고 지(智)는 선악시비를 판단하는 '시비(是非)의 마음'으로 설명되고 있다.


공자는 예를 실천하는 인간의 주체성을 '인'이라고 했으나 사단(四端)은 공자가 말하는 '인'의 세분화(細分化)라고 하겠다. 한편, 맹자는 '인(仁)이란 사람으로서의 덕'이라 하고 특히 그것이 위정자에 의해서 실현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즉 공자의 사고방식을 계승하는 면도 있다. 또한 맹자가 말하는 의에는 수오(羞惡)의 마음이라는 의미 이외에, 개개의 예가 적절타당하기 위해서의 원리라는 뜻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바로 그가 '예의'라고 병칭(竝稱)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 맹자는 공자의 '인'을 다시 한번 깊이 고찰했다고 하겠다. 이상과 같이 공자와 맹자로는 용어법에도 차이가 있고 또한 맹자 자신의 용어법에도 일관성이 결여되는 경우가 있으나 개괄적으로 말한다면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나름대로 발전시켰다고 말할 수 있겠다.


덕목(德目)의 정리라는 점에서는 '사단'설 외에 '오륜(五倫)'설이 유명하다. 이것은 인간관계를 다섯으로 정리한 것으로 '부자유친(父子有親)·군신유의(君臣有義)·부부유별(夫婦有別)·장유유서(長幼有序)·붕우유신(朋友有信)'이라고 한다. 맹자는 공자의 덕치주의 사상을 하늘이 만민을 낳고 그 통치자로서 유덕자(有德者)를 천자(天子)로 명한다는 <서경(書經)> 이후의 천명관(天命觀)으로 뒷받침했다. 하늘의 신앙에 의해 정치권력의 정통성에 기초를 주는 사상이다. 그리고 하늘의 의지는 민(民)의 소리와 천지의 제신(諸神)의 승인으로 알 수 있다 하여 민본주의(民本主義)의 요소가 부가되었다.


맹자는 농사의 방해가 되는 노역이나 전쟁을 하지 않고 우선 민생(民生)의 안정을 꾀하며 이어 도덕교육을 행하여 인륜(人倫)의 길을 가르치면 천하의 사람들은 기뻐하여 심복하고 귀일한다는 것으로 이것이 옛날 성왕(聖王)들의 정치, 즉 '인정(仁政)'이며 '왕도(王道)'라고 했다. 이 주장이 맹자의 '왕도론'이며 그는 또한 <서경>에 강조되고 있는 은·주 교체기(交替期)의 역성혁명(易姓革命) 사상을 확인하고 있다. 그의 논법은 민의(民意)를 배반하고 인의(仁義)에 어긋난 은나라 왕 주(紂)는 이미 군주가 아니라 한 평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나라 신하였던 주의 무왕은 필부(匹夫)인 주를 토벌한 것이지 군(君)을 시역(弑逆)한 것은 아니라는 격렬한 것이었다. 이 점에 바로 군신의 의 이상의 것으로서 천명(天命)이 설정되어 있다. 맹자는 정치적 원리로서의 하늘을 설명하지 않았던 공자보다 여기서는 앞서고 있다.맹자는 주나라 제후국 노나라 출신으로 은·주 교체기(交替期)에 대한 그의 관점은 주나라 건국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한 부분이다. 민의(民意)를 배반하고 인의(仁義)에 어긋났다는 것은 주관적인 해석으로, 왕이 부도덕하다고 게으르다고 생각하는 모든 신하들에게 쿠테타에 명분이 되는 논리로서, 맹자 스스로가 주장한 군신유의(君臣有義)에 위배된다. 맹자는 논리라면 주공단이 명분없이 섭정 할 때 은나라 후예 무경에게 주나라가 망했어야 정의로운 것이며, 역성혁명(易姓革命)의 실현이다. 역성혁명(易姓革命) 사상은 쿠테타 세력에게 자기 합리화의 길을 열어 주었다.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계승하고 공자가 수립한 인간의 실천적 주체성이나 덕에 의한 정치라는 사고방식을 전통적인 하늘의 신앙과 결부시킴으로써 이를 발전시켰다. 성선설이나 왕도론(王道論)에서 그 경위를 볼 수 있다. 그러나 맹자는 또한 5백년마다 성인이 출현한다고 하는 일종의 순환론적 역사관에 의거하여 공자의 정당성을 증명하려고 한다. 성인의 전형이라는 전설상의 제왕(帝王)인 요·순(堯·舜)부터 5백년쯤 지나 은의 탕왕(湯王)이 나오고, 탕왕에서 5백년쯤 지나 주나라의 문왕(文王), 문왕에서 5백년쯤 지나 공자가 나와서 선왕(先王)의 도(道)를 전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맹자 자신은 공자부터 당시까지 1백년쯤, 공자가 세상을 떠난 뒤부터는 아직 얼마 되지 않아서 자기는 공자의 길을 유지 확보하는 자로 위치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B%A7%B9%EC%9E%90)



B011 – 논어(論語) / 공자(BC 552--479)의 제자들

 

 우리가 서양문명을 이해하기 위해 성경과 그리스 신화를 읽듯이 동양문명을 이해하기 위해 읽어야 할 책 중의 하나가 <논어>다. <논어>는 공자와 제자들의 문답집으로 <하늘의 소리>로 사람의 일을 말한 책이다. 송의 주희가 과거 문인들의 필독서로 4서 (논어.맹자.중용.대학)를 펴내고 그것이 원대 이래 과거시험의 기본교재로 채택됨에 따라 노자의 <도덕경>과 더불어 동양의 정신문화 세계에 가장 깊은 영향을 미친 고전 중의 하나다.


a.공자의 생애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방황하는 청년들이 생애의 지침이 될만한 책을 추천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주저없이 권한 책이 <논어> 였고, 동양역사학의 아버지 사마천은 <사기>에서 노자.맹자.순자.한비자 등 다른 제자백가들은 <열전>편에 기록하면서 제후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자를 <세가>편에 기록하고 있다.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공자, 그는 누구이고, <논어>는 어떤 책인가?


 중국 춘추시대의 사상가이자 유교의 개조인 공자의 이름은 구, 공자라고 할 때의 자는 존칭이다. 공자는 노나라의 창평향 추읍에서 하급무사 출신의 숙량흘과 내연의 처인 징재와의 사이에 태어났다. 공자는 일찍이 양친을 잃고 생계를 위해 창고나 가축 관리인 노릇을 하는 동안 곡물출납이 공정했고 가축도 급속도로 번식시켰다. 정해진 스승은 없었으나 나름대로 학문에 힘썼다. 당시의 천하는 하극상 풍조가 만연해 제후들은 주나라의 권위를 업신여겼고, 노나라에서도 임금 소공은 3환은 횡포에 분노하여 무력으로 이를 토벌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제나라로 망명했다. 공자는 노나라를 떠나 제.송.위.진 등 여러 나라를 전전했다.

 생명의 위기를 여러 번 넘기며 다시 노나라로 돌아와 <예>를 탐구하다 보니 자연히 고대의 역사 .정치.사회.윤리 등 광범위한 지식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주나라로 가서 옛 의례를 연구하고 노자를 만나 예를 묻기도 했다. 공자가 주나라를 떠나려 하자 노자는 공자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를 했다고 한다.

 <<부유한 자는 금전을 주고 친절한 자는 충고를 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지금 당신에게 한마디 충고를 하고자 한다. 재기가 넘치고 추리력이 풍부한 자는 흔히 생명의 위협을 당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남을 비평하기 좋아하기 때문이다. 학문이 있고 책읽기를 즐기며 논쟁을 잘하는 자는 몸을 위태롭게 하기 쉽다. 왜냐하면 그는 남의 결점을 꼬집기 좋아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자신을 다만 한 사람의 아들이나 한 신하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53세때 노나라와 제나라 사이에 화평회의가 있었는데, 제나라의 임금은 노나라 임금을 협박하려 했다. 그러나 노나라 임금을 수행하고 있었던 공자가 제나라 임금을 질타하여 교섭을 유리하게 이끌었다.54세에 대사구 (법무대신)가 되었으며, 다음해 3환의 세력을 없애려 시도했으나 실패했다.공자의 등용 이후 노나라는 질서가 잡히고 이웃나라에서 점차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러자 이웃나라에서는 공자를 제거할 간계를 꾸미고, 임금 정공이 제나라에서 보내온 미인들에 정신이 팔려 정무를 등한히 하자 공자는 노나라를 떠났다. 그후 14년간 조.위.송.정.진.채.초 등의 여러 나라를 주유하면서 자신의 <이상정치>를 실현해보려 했으나 어느 임금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고, 그의 눈에 비친 제후들의 모습은 무력에 의한 영토확장과 권모술수에 의한 권력쟁탈전뿐이었다.

 69세에 노나라로 돌아온 뒤 정치에 대한 꿈을 단념하고 제자교육에만 전념했다.제자는 천명에 이르러 그 중 6예 (??)에 통달한 사람이 72명이었다. 유교에서는 덕행.언어.정사.문학을 이른바 공문4과라 하는데, 공자에 의하면 덕행은 안연.민자건.염백우.염중궁.언어에는 재아.자공.정사에는 염유.계로,문학에는 자우.자하가 뛰어났다고 한다. 이들을 공문10철이라 한다.  병에 걸린 공자는 자신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고 <<아아, 철인은 떠나려고 하고 있다>> 고 탄식하며 죽어갔다. 향년73세.


a.시대적 배경과 공자의 사상


   1.시대적 배경

 이민족인 견융의 침입으로 주나라가 낙양으로 동천한 후각 지방의 제후들에 대한 통제권이 약화되면서 춘추시대(BC 770--403, 5패: 환공.문공.장왕.합려.구천)와 전국시대(BC 403--221, 7웅: ??)가 시작된다. 춘추전국시대는 정치적으로는 혼란기였으나 사회.경제.사상적으로는 변화와 발전의 시대였다. 이러한 난세를 극복하고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한 제자백가의 사상적 황금시대가 펼쳐지고, 이후의 중국사상은 제자백가 사상의 재해석에 불과하다. 공자를 비롯한 사상가들은 자신의 이상을 실현키 위해 현군을 찾아 주유천하 했는데, 이들제자백가 사상은 주로 정치문제와 윤리문제 등 현실문제에 중심을 두었다. 이는 인도나 오리엔트 사회에서 보여지는 신과 내세관의 문제와는 대조적인 것으로, 중국인의 현실주의와 물질주의의 국민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

 제자백가의 사상 가운데 중국과 동아시아 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유가이다. 유가는 춘추시대의 공자가 창시했고 전국시대의 맹자와 순자가 사상적 체계를 정립했다. 진시황제에 의해 한때 탄압받기도 했으나, 한무제 때 국교화되면서 동양사상의 주류로 발전했다.


   2. 공자의 사상

 공자사상의 중심은 <인> 이며, 인의 가장 순수한 상태가 <효> (부모자식간의 사랑)와 <제>(형제간의 사랑)이다. 따라서 효제를 인간행위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삼고 있다. 그리하여 효를 바탕으로 <수신제가>를 이룬 후에 나아가 <치국평천하>를 완성하는 것이 바로 군자의 도리라 했다.

 공자의 사상이 잘 담겨 있는 <논어>를 보면, 공자의 이상은 군자를 키우는 데 있다. 즉, 유교의 정치와 목적은 소인을 군자로 끌어올리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군자는 교양이 있고 고귀한 인격자를 말하며, 군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정직성과 정의감, 군주에 대한 충성심,그리고 무엇보다도 어진 마음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군자는 이와 같은 도덕적인 덕목과 함께 현실생활에 있어서도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공자는 군자의 교육으로 <예.악>을 강조하고 있다. 한대에 유교가 관학이 되면서 의식과 예법이 특히 중요시되었고 이로 인해 동아시아의 유교문화권에서는 의식과 예절이 강조되고 예.악이 인간교육의 중심이 되었다. 인간의 내면적인 덕과 외적인 예절을 균형 있게 갖추는 중용의 행동이야 말로 유가사상의 행동원리가 되었고, 이와 같이 중도를 추구하는 타협정신은 이후 중국문화의 사상적 기반으로 정착되어갔다. 공자의 유가사상은 맹자와 순자에 의해 계승되면서 <유가학파>로 발전되었다.


   3. 유교경전

 그런데 유가사상은 다른 사상가들과는 달리 그들의 학문과 사상 속에 중국의 전통사상을 함축시켜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유교경전으로 성립시킨 장점이 있는데 유교의 경전에는 4서5경이 있다. 당나라 때까지는 5경이 중요시되었으나 송대이후 주자학의 발달로 사서를 더 중요시했다.

 5경은 <시경> <서경> <역경> <예기> <춘추>를 말한다.

 <시경>은 기원전 10세기에서 7세기까지 만들어진 300여 편의 시로 이루어져 있다. 그 내용은 정치적 사건을 읊은 시와 의례적인 송가,그리고 남녀의 사랑을 노래한 애정시 등 다양하다, 그러나 시경은 단순한 민요라기보다는 리듬과 운율을 다듬어 인위적으로 정리된 문학작품이다.

 <서경>은 주초 이래의 왕의 담화내용과 역사적 문서를 담고 있다. 한대에서부터 금문상서와 고문상서로 나뉘어졌는데, 고문상서는 상당 부분이 위작이라 하여 그 진위를 둘러싸고 시비가 끊이지 않고 있다.

 <역경> (??)은 주나라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점을 치는 내용이다. 8괘와 64괘를 중심으로 정리되어 있으며, 은나라 때 신에 문의하여 점치던 것을 주대에 와서 8괘를 이용하여 점술이 만들어진 것이다.

 <예기>는 의식과 의례에 관한 주대의 자료들을 모아서 한대에 이를 편찬한 것이다.

 <춘추>는 노나라의 역사를 간단하게 편년체로 서술한 것이다. 이 책은 간결하고 사실적이지만, 인간행위의 기본을 의리에 두고 역사를 서술했기 때문에 객관적 사실과 거리가 있다. 또 공자 자신이 이 책을 편찬했다는 전승은 잘못된 견해라는 시각도 있다.

 4서는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이다.

 이중 <대학>과 <중용>은 <예기> 가운데서 <대학> 편과 <중용>편을 독립시킨 것이다. <논어>는 공자와 제자신이의 문답집으로 제자의 질문에 대해 공자가 자세히 답한 것을 공자 사후에 제자들이 의논하여 정리한 것으로 공자사상이 가장 정확히 담겨져 있다. <맹자>는 맹자의 어록을 정리한 것이다.


b.<논어>의 내용


 지금 전해지고 있는 논어는 <학이>편으로 부터 <요왈>편까지 20편으로 되어 있고, 전반 10편을 상편, 후반 10편을 하편이라 한다. 각 편의 이름은 요즘과는 달리 각 편의 첫 문장의 두세글자를 따서 편명으로 붙였다. 즉, 1편의 <학이>편은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배우고 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의 첫머리를 딴 것이다.

 <논어>의 전반과 후반은 문체가 다르고 각 편은 서로 연결이 없는 것 같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그의 <인> 사상이 전편에 흐르고 있다. 그러나 <논어>는 그 표현된 말이 부드럽고 쉬운 반면에 뜻이 깊고 오묘해서 구절 하나를 해석하는 데도 많은 논의가 거듭되어왔다. 이러한 해석의 차이는 그것을 읽는 사람의 환경과 시대정신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지 거기에 적힌 <논어>의 본래의 뜻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정자는 <<만약 <논어>를 읽고 서도 별다른 느낌이 없다면 그것은 읽지 않은 것과 같다>> 고 했다. 

 여기에서는 각 편에서 한두 구절씩 널리 알려진 말들을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1. 학이: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면 이 또한 군자답지 아니한가?>>

   2. 위정: <<안다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곧 아는 것이다.>>

   <<나는 나이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고, 30세에 학문의 기초를 확립했으며, 40세에는 판단에 혼란이 없었고, 50세에 천명을 알았으며, 60세가 되어서는 귀로 들으면 그 뜻을 알았고, 70이 되어서는 마음이 동하는 대로 움직여도 법도를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

   3. 팔인: <<웃자리에 있으면서 너그럽지 않고, 예의를 차리는 데 공경스럽지 못하며, 상사를 당하여 슬퍼하지 않는다면 다른 무엇을 가지고 그의 사람됨을 평가하랴.>>

   4. 이인: <<옛날에는 말을 앞세우지 않았으나 그것은 실천이 따르지 못할까 봐 부끄러워했기 때문이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5. 공야장: <<약삭빠른 말, 좋은 듯이 꾸미는 얼굴, 환심을 사기 위한 공순은 좌구명(<춘추좌씨전>의 저자)도 부끄러워했거니와 나도 그것을 부끄러워한다.>>

   6. 옹야: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곧 정직함이니, 정직함이 없어 살아가는 가는 것은 다행이 화를 모면하고 있는 것이다.>>

   7. 술이: <<군자는 마음이 평탄하게넓고 소인은 항상 조심에 차있다.>>

   8. 태백: <<공손하면서 예의가 없으면 힘이 들고, 신중하면서 예의가 없으면 두려워지고, 용맹스러우면서 예의가 없으면 난동을 저지르게 되고, 곧으면서 예의가 없으면 박절해진다.>>

   <<나라에 정도가 행해지는데 빈천하게 산다는 것은 수치다. 나라에 도가 행히지지 않는데 부귀를 누리는 것은 수치다.>>

   9. 자한: <<날씨가 추워진 연후에야 소나무와 전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알 것이다.>>

   10. 향당: <<자리가 바로 깔려 있지 않으면 앉으시지 않으셨다(공자의 태도를 제자가 적은 글).>>

   11. 선진: <<사람을 섬기지 못하고서야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느냐.>>

   13. 안연: <<자기를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이다.(??).>> <<정치란 바로잡는 것이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군군,신신.부부.자자).>>

   14. 자로: <<자신이 올바르면 명령을 내린다 해도 복종하지 않는다.>>

   15. 위영공: <<잘못을 저지르고도 그 자체를 고치지 않는 것은 그 자체를 잘못이라 하겠다.>>

   16. 계씨: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상둥이다. 배워서 아는 사람이 그 다음이고, 곤란해져서 배우는 사람은 또 다음이다. 곤란해져도 배우지 아니하면 그러한 사람이 곧 하둥이다.>>

   17. 양화: <<약삭빠른 말과 좋은 듯이 꾸미는 얼굴에는 인이 드물다.>> <<나이가 마흔이 되어서도 미움을 받으면 마지막이다.>>

   18. 미자: 이 편은 공자와 은나라의 3인,백이.숙제 그밖의 현인들의 출사와 은거에 대한 기록이다.

   19. 자장: 이편은 공자의 문인들의 말을 간추린 것이 많다. 공자의 말과 같은 무게가 있다.

   20. 요왈: <<하늘의 뜻을 모르면 군자노릇을 할 길이 없다. 예를 모르면 남 앞에 나설 길이 없다. 말을 모르면 남을 알 길이 없다.>>

 비록 짧고 평이하고 당연하면서도 무한한 힘을 가지고 읽는 이의 마음에 파고드는 말이라 하겠다. 이처럼 간결하고 비약적인 스타일이기 때문에 <논어>는 독서법이 필요하다. 주희가 말한 <논어>의 독서법은  읽고 뜻을 알 수 없거든 생각을 해보아라. 생각해도 뜻이 밝혀지지 않으면 다시 읽어보아라 라고 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이 읽지 않도록 조심해라. 조금씩 읽어라. 그렇게해서 전체에 다다르게 된다 라고 했다.

     

c.공자사상의 현대적 의의 


 공자는 평생 정치와 교육의 두 분야를 추구했지만, 정치가라기보다는 교육자로서의 업적이 두드러졌다. 그는 다른 어떤 사상가보다도 철저한 현실주의자로 인간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실천을 전제로 한 개인의 도덕적 규범인 <인>과 공동의 규범인 <예>를 강조하여 궁극적으로는 도덕적 이상국가를 수립하려 했다. 그리고 이상적인 인간상으로는 <군자학>의 면려를 강조했으며 정치의식에 있어서는 <덕치주의>를 강조했다. 다시말하면 당시 어지러운 세상에서 위정자는 덕으로 백성을 다스리고 백성은 충성된 마음으로 섬겨야 하며, 가정에서는 부모에게 공경하고 형제끼리 우애하며 친척끼리 화목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공자는 이것을 지키는 것이 곧 사람다운 사람으로서의 도리라고 지적, 군자의 도를 제시했다. 한편 공자는 이전의 중국문화를 정리하여 윤리.도덕.역사.교육 등 거의 모든 부분에 걸쳐 확고한 원칙과 기준을 제시하여 미래의 방항을

잡아주었다는 점에서도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오면서 공자사상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기도 했는데 다음과 같은 점에서 지적을 받고 있다.

   1. 공자의 사랑은 너무 인간관계에만 치중하여 인격을 완성하는 데는 도움이 되나, 경제적.사회적 발전 측면에는 소극적이라는 점을 지적하다. 이러한 사상은 자본주의 하에서 변모하는 인간의 점을 지적한다. 이러한 사상은 자본주의 하에서 변모하는 인간의 물질적 필요를 경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2. 복고사상으로 인한 미래지향성의 결여다. 난세를 다스리려면 주나라 제도로 돌아가야 한다는 그의 사상은 개혁의 목표를 과거에로 지향함으로써 그의 철학은 기존세력의 계속성과 안정성을 유지하는 데에는 기여했으나 새로운 사상이나 진보세력의 발전을 저해했다. 결과적으로 1912년 신해혁명 뒤 중국에서는 진독수.호적.노신 등에 의해 정통적인 중국 유교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이 일기 시작했다. 이러한 논법은 1973년 <비림비공> 운동에서 그 정점에 이르렀으나 4인방의 실각 이후 진정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몇가지 결점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사상은 인간 대 인간 관계의 극치이며, 정치철학뿐만 아니라 윤리학에도 크게 기여했다. 만약 현대사회의 특징을 인간부재.자아상실로 요약해볼 때 이 처방에 <논어>가 가지는 가치는 무한하다고 볼수 있다. 양나라의 황간은 <<거울이 제아무리 맑아도 몸의 앞부분만을 비추지만 <논어>는 상하 좌우 다 비춰준다>>고 했다. 공자는 인류의 스승이고 <논어>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규범을 담은 전범이다.



《논어》는 모두 20편으로 나뉘어져 있다. 곧 〈학이(學而)〉ㆍ〈위정(爲政)〉ㆍ〈팔일(八佾)〉ㆍ〈이인(里仁)〉ㆍ〈공야장(公冶長)〉ㆍ〈옹야(雍也)〉ㆍ〈술이(述而)〉ㆍ〈태백(泰伯)〉ㆍ〈자한(子罕)〉ㆍ〈향당(鄕黨)〉ㆍ〈선진(先進)〉ㆍ〈안연(顔淵)〉ㆍ〈자로(子路)〉ㆍ〈헌문(憲問)〉ㆍ〈위령공(衛靈公)〉ㆍ〈계씨(季氏)〉ㆍ〈양화(陽貨)〉ㆍ〈미자(微子)〉ㆍ〈자장(子張)〉ㆍ〈요왈(堯曰)〉이 그것이다. 이것은 모두 그 편 첫머리의 첫 구절 맨 첫 자를 따서 편명으로 삼은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논어 [論語] (원불교대사전, 원불교100년기념성업회)



B010 – 목민심서(牧民心書) / 정약용 (丁若鏞, 1762~1836)


 만학의 비조이자 조선후기 실학의 집대성자인 다산 정약용이 폭정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세계를 목도하고 유배지에서 눈물로 쓴 <이도의 바이블> 소년시절부터 목민관인 부친을 따라 여러 지방을 전전하면서 백성을 다스리는 마음 자세를 배우고, 벼슬길에 오른 후에도 곡산부사 등 직접 농민들의 세계를 체험한 후 전 남갈진의 유배지에서 체험한 비참한 민중들의 세계를 보면서, 관직의 부임에서 근무, 이직할 때까지 지방관으로서 가져야 할 기본자세 및 실천해야 할 정책의 내용을 서술하고, 지방사회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한 수령의 적극적 역할을 강조한 저술이다.


a.생애


 조선후기 실학의 집대성자. 경기도 광주군 마현에서 남인 가정에서 태어나 이익의 제자들인 권철신과 이기환으로부터 성호학을 배우고 경세치용의 학문에 뜻을 둔다. 지방수령인 부친을 따라 여러 지방을 전전하고 20세에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오른다.

 그의 생애는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전반기는 대략 그의 나이 40세까지로 정조의 생존기간이며, 정조 사후 그의 후반기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당시 호학의 군주이자 조선의 르네상스를 연 정조는 정약용을 항상 곁에 두고 총애한다.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해 젊은 학자들을 대거 기용하고, 서자. 중인들 중 재능있는 자를 뽑아 벼슬을 주는 등 파격적인 정공. 이서구는 모두 서자출신으로 규장각 검서를 지냈다.

 한편 이벽에게서 서학과 서양학문을 접하고 상당한 과학지식을 쌓는다. 정조는 억울하게 죽은 부친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1년에 몇 차례씩 수원에 행차했는데, 이때 한강에 놓인 배다리는 그의 작품이다. 또한 사도세자를 위해 수원성을 쌓는데 기중기와 활차(도르레). 고륜(바퀴달린 달구지) 따위를 발명하여 정조를 감탄케 했다. 그에 대한 정조의 신임은 확고하여 정조는 명재상인 채제공--이기환—정약용 라인을 부각시켰다.

 그러나 좋은 일에는 항상 마가 따르듯, 천주교 신자인 윤지충이 모친상 때 신주를 불사르고 천주교 의식을 거행했다는 이유로 신해박해(1791)가 일어나자 첫번째로 시련을 겪게 되고, 1794년에도 두번째의 오해를 받게 된다. 그러나 그는 서양의 학문에 관심이 있을 뿐 천주교 신앙에는 뜻이 없음을 밝히고 정조의 관대함으로 무사했다.

 이 무렵 정조는 백성을 수탈하는 관리의 부정을 막기 위해 노심초사했고, 민란이 가장 빈번했던 곡산부사로 정약용을 보내자 그는 조세와 부역을 공평히 하고 옥사를 너그럽게 다스려 유능한 목민관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그에 대한 중상이 계속되어 고향인 마재로 돌아온다.

 어느 여름날 정조가 보낸 사자가 사립문을 두드리며 한서선 열 권을 내밀었다. <<다섯 권은 집안에 보관하시고 다섯권은 제목을 써서 올리라는 성상의 당부이옵니다.>> 정약용은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으나 2주 후 정조의 승하 소식을 듣는다.

 자신의 두 버팀목이었던 체제공과 정조가 1799년과 1800년에 잇따라 사망하자 정약용은 물 떠난 고기 신세가 되었고, 정조를 도와 흔들리던 왕조개혁의 꿈은 물거품이 된다.

 정조가 죽은 다음해 1801년 신유박해에서 셋째형 약종은 옥사했고 둘째형 약전도 흑산도로 유배당했으며, 그는 전라도 강진으로 18년간의 기나긴 형극의 길을 떠난다. 그러나 어디서도 유배당한 죄인을 상대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읍내 주막집 노파만이 다산을 가련하게 여겨 방을 내주었다. 유배의 괴로운 심정을 술로 달래던 다산은 초당이 있던 이 마을의 윤규로 등 3형제를 가르치면서 그들의 아버지인 윤박의 초빙으로 1808년 다산초당으로 옮겨 여기서 저술작업에 전념했다. 그는 여기서 괸리의 부정, 조정의 부패와 무능으로 인한 지방농민들의 참상을 목격하고 이를 시로 읊기도 하고 책으로 정리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나온 책이 그의 대표작인 1표 2서, 즉 국가제도의 전반적 개혁안을 담은 <경세유표> 지방수령의 부정을 막기 위해 쓴 <목민심서> 형벌을 공정하게 하기 위한 방책을 밝힌 <흠흠신서>가 그것이다. 이중에서도 특히 <목민심서>는 탐관오리들에게 수탈당하고 굶주려 죽어가는 백성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제하며 토로한 목민관이 지켜야할 금과옥조다. 그런데도 <목민심서>에서 제시한 그의 방안을 수용하기는 커녕 읽어주지도 않는 현실을 통탄했다. <<알아주는 자는 적고 비방하려는 자는 많으나, 만약 천명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한줌의 불쏘시개로 불태워버려도 좋다.>>

 그는 74세를 일기로 500여 권의 방대한 저술(여유당전서)을 남긴 채 천수를 다했다.

 

b.다산의 사상


 우리 나라 학술사상사에서 다산의 위치는 <경세치용학파>와 <이용후생학파>의 두 조류를 통합한 <집대성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다산은 성호학파의 경세치용적 실학사상을 계승하는 한편으로 연암학파의 이용후생 사상도 수용하여 서양문화의 수용에 있어서 진보적인 자세를 취했다.

 다산학, 즉 다산의 사상은 은 6경 4서에 대한 <경학연구>와 1표 2서에 나타나는 <경세학 연구>로 정리된다. 경학은 경세학의 기초로서 6경 4서학에 담겨진 철학적 과제들에 대한 다산의 해석을 말하는데, 지나치게 전문적이어서 여기서는 생략하고 다산의 일반적인 사상을 1.성리학 비판 2.실증주의 3. 실용주의 4. 민주주의관 5. 민생론 6. 변화의 수용으로 요약해본다.


   1. 그는 기존의 성리학을 통렬히 비판했다. 그는 <<이기론은 세상을 마치도록 다투고 자손에게 전해도 끝이 없으니 인생에 일이 많은데 그대와 나는 이를 할 겨를이 없다>> 고 하여 주자의 경전해석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전통적인 정주학에서 탈피하여 독자적으로 학문의 위상을 정립했으며, 성리학이나 훈고학. 문장학. 과거학. 술수학 등은 현실에서 이탈한 것일 뿐만 아니라 수사학적 본원유학을 가리는 것이라 하여 철저히 배격했다. 이런 의미에서 다산학은 근세수사학, 또는 개신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장차 6경 4서에 대한 종합적이고도 독창적인 경학연구로 발전했다.

   

   2. 그는 철저하게 원전에의 복귀를 주장했다. 그는 유학의 성론이 낙선구도하려는 고시심에서 나왔으나 불교(선종)의 영향을 받아 공자의 본래정신과 어긋난 것이 있음을 지적했다. 그가 이처럼 경전자체에 돌아가는, 즉 수사지구론을 강조한 것은 진실성을 학문적으로 관철하기 위한 비판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3. 다산의 그러한 실증적 근본취지는 실용에 있다. 수사지구론자체가 경전해석을 통해서 당시의 구도적 관념체계가 갖는 현실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경전주석에 있어 훈고학적 실증을 중시하는 입장과, 청나라 고증학의 해석방법을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서학의 과학적 사고와 신앙체계까지 수용하여 객관적 사실에서 대한 분석적 입장과 실증적 방법을 통해 인간 또는 사회적인 가치 속에서 실용의 목적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4. 다산은 그의 논문 <탕론>에서 오늘날의 민주주의와 가까운 체재개획론을 폈다. <<천하란 어찌하여 있는 것인가? 다섯 집이인이 되는데, 거기서 장으로 추대된 자가 인장이 되고 5린이 이가 되는데 여기서 장으로 추대된 자가 이장이 되고 9후 8백이 화합하지 못하면 그들이 의논하여 천자를 개선한다. 어찌 신하로서 임금을 쫓아버린다고 하겠는가.>> 이는 제왕도 간접선거를 통해 민중이 선출해야 하며,뽑힌 사람이 적당치 않으면 개선한다는 것이니 주권재민과 다를 바 없다. 그는 또한 당시의 계급제도를 강력히 비판했다. <<나의 소망이 있다면 온 나라 안이 모두 양반이 되게 하는 것이니, 곧 온 나라 안에 양반이 없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근대적인 평등관과 다를 바 없다.


   5. 그의 민생사상은 제도개혁론으로 나타난다. 그의 <목민심서> 는 백성의 삶을 구제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방법과 제도를 체계화한 것이고, <경세유표>도 국가의 정치제도를 개혁하는 방안이며, 치옥에 대한 주의와 규범을 제시한 <흠흠신서> 등에 그의 치인의 이념이 담겨 있다.


   6. 그는 변화에 대한 과감한 수용을 주장했다. 서양의 과학기술에 적극적이어서 한강의 주교 설치, 기하학의 원리를 이용한 수원성의 축조, 종두법의 연구와 실험 등 그의 과학정신은 높이 평가된다. 또한 역사와 지리에도 깊은 관심을 두고 주체적인 입장을 제시했다.


c.<목민심서>의 내용


 다산은 어릴 적 부친이 지방 관을 역임했고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관리로서의 경험, 곡산 등 지방관리로서 경험, 유배지에서의 생생한 체험을 바탕으로 지방장관이 지켜야 할 준칙을 서술한 이 책은 전체가 12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항목은 6개 조항으로 나누어 모두 72개의 조목으로 분류했다. 먼저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부임편: 제배, 치장, 사조, 계행, 상관, 이사

 2. 율기편: 칙궁, 청심, 제가, 병객, 절용, 낙시

 3. 봉공편: 첨하, 수법, 예제, 보문, 공납, 왕역

 4. 애민편: 양로, 자유, 진궁, 애상, 관질, 구재  

 5. 이전편: 속리, 어중, 용인, 거현, 찰물, 고공 

 6. 호전편: 전정, 세법, 곡부, 호적, 평부, 권농

 7. 예전편: 제사, 빈객, 교민, 홍학, 변등, 과예

 8. 병전편: 첨정, 연졸, 수병, 권무, 응변, 어구

 9. 현전편: 청송, 단옥, 신형, 휼수, 금폭, 제해

 10.공전편: 산림, 천택, 선해, 수성, 도로, 장작

 11.진황편: 비자, 권분, 규모, 설시, 보력, 준사

 12.해관편: 체대, 귀장, 원류, 걸유, 은졸, 유애

 

 앞 4편은 총론으로 관리들의 몸가짐과 기본태도, 다음6편은 각론으로 실무에 관한 사항, 끝 2편은 물러갈 때의 태도 등에 관한 것이다. 각 조의 서두에는 지방수령으로서 지켜야 할 원칙과 규범들이 간단명료하게 지적되고, 그다음에는 설정된 규범들에 대한 상세하고 구체적인 설명과 그 역사적 연원에 대한 분석을 했다. 그리고 그 아래에 고금을 통해 유명한 사업과 공적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논평하여 첨부했다. 즉, <목민심서>의 체제와 내용을 일관하여 말하면 지방관리의 부임으로부터 해임에 이르기까지 전 기간을 통해 반드시 준수하고 집행해야 할 실무상 문제들을 조항으로 설정하고 자신의 심오한 식견과 진보적 견해를 가지고 진지하게 해설해 놓았다.

 그러나 <목민심서> 서문에 쓴 바와 같이 다산은 결코 <목민심서>에 제기한 모든 문제들이 다 실현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며 또 당시의 실정으로는 실현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민심서> 근저에는 지배자들을 증오하며 일반 백성들을 동정하고 사랑하는 저자의 민주주의적 애민사상과 국가의 부강을 염원하고 외래 침략자를 반대하는 애국사상이 전편에 흐르고 있다.

 이와 같은 애민사상은 다산의 민주주의적 균민사상에 기초를 두고 있다. 다산은 원래 인간이란 모두 완전히 평등하고 신분적 차별과 빈부의 차이가 없었으며, 지배계급도 후세에 와서 백성 자신들이 스스로의 생활상 요구에 의해 선발된 것이며 따라서 지배자들은 마땅히 백성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목> <탕론> <전론>의 논문에서는 한때 급진적 개혁성향을 보기도 했다.

 다산은 본서의 서술에서 균민사상에 기초한 일반백성과 지배계급 간의 관계에 대한 정당한 관점에 입각하여 지방관리들이 준수해야 할 행정적 제원칙과 규범들을 제기했다. 그는 지방수령들이 마땅히 <백성의 소망을 이루어줄 결심을 굳게 가다듬고 매일 매일 맡은 바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 의관을 단정히 하고 목민할 연구를 하며, 여유시간만 있으면 반드시 정신을 가다듬고 백성들의 생활을 편안하게 할 방도를 연구하여야 한다.>>

 다산은 또 당시 정치제도의 모순성과 아울러 그것이 봉건적 신분제도와 결부되어 있음을 밝혔고,농민을 부담지우던 각종의 과세제도에 반대, 항의하는 한편 법규에 대해서는 <<백성을 계몽시키지 않고 형벌을 가한다는 것은 백성을 잡기 위해 그물질하는 것과도 같다>>고 하여 백성에 대한 어떤 박해와 가렴주구도 반대했다.

 그는 지방수령이 부임하면 그 즉시로 백성들이 관청에 와서 어려움을 제소할 수 있도록 하고, 동시에 선비와 백성들의 고통을 물어 좋은 의견을 제기하도록 조처를 취해 수령 자신이 백성을 수탈하지 말며, 아전.토호들의 중간착취를 근절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다산은 백성을 다스리는 관리의 성품을 매우 중요시했다.전편에 걸쳐 각 조항마다 관리들의 품성을 바로잡기 위한 문제들을 상세히 언급했다. <<고을을 다스리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니 가정을 단속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고을을 다스릴 것인가>>라고 하면서 수령은 자신을 수양하고 가정을 단속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지방수령이 된 자는 사치하지 말고 검소하며, 부화방탕하지 말고 명예와 재물을 탐내지 말며 뇌물을 받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선물로 보낸 물건이 아무리 사소하다 할지라도 이것을 통해 은정관계가 맺어지니 사정이 작용하게 된다>>고 하면서 뇌물행위가 가져오는 커다란 부작용에 대해 경고했다. 또한 다산은 나라의 부강한 발전과 백성들의 유족한 생활을 염원했다. 그는 전제개혁을 비롯한 일련의 사회경제적 개혁과 함께 국가의 생산력 발전에 대해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우선 사회적인 모든 모순을 토지제도에서 발견하여 당시의 문란하고 불공평한 토지제도를 개혁하고 새로운 토지제도를 설정할 것을 주장했다. 그 근저에는 <전론>을 비롯한 몇몇 논문들에서 발표한 <균전제> 사상이 깔려 있다.

 또한 <호전>을 비롯한 여러 편들에서, 그리고 산림.하천.영선.도로.수공업 등을 전문적으로 취급한 <공전>에서 경제 각 분야에 선진기술을 적극 도입하게 하여 조선의 농업과 함께 임업.광업.수공업.교통.운수 및 상업유통 등을 발전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대책을 논했다.

 다음으로 다산은 국가의 융성발전을 위해 전 국가적으로 인재를 선출해야 한다 하면서 인재선발의 원칙을 논했고, 세계추세에 따른 국방론으로 국가가 외국의 침공을 받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켜야 하며, 백성들이 생산에서 유리되지 않고 훈련됨으로써 비상시에 대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우리 나라의 역사를 통해 창조된 수많은 애국적 사실과 인물을 예로 들어 백성을 계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또한 나라와 백성을 위해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사한 사람들을 널리 조사하여 그들의 업적을 높이 칭송해주는 동시에 그들의 자제들을 국가적으로 보호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이 다산은 백성들에 대한 애국사상의 배양에 깊은 관심을 갖고 역대 우리 나라 인물들을 평가하면서 특히 이순신 장군의 공적을 높이 찬양하고 그의 훌륭한 인품과 애국정신을 본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상의 유교사상에 기초한 내용은 목민관들이 지방의 관료체제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사항을 간단히 제기하고 그 해답과 주석을 붙인 것이다.

 다산은 <목민심서>를 엮고 나서 <<한 백성이라도 그 혜택 입기를 바라는 것이 나의 마음이다>> 라고 밝혔듯이 전편에 걸쳐 그의 지고지순한 애국사상이 흐르고 있다. 유배지에 탐관오리들에게 수탈당하고 굶주리는 백성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제할 수 없어, 뭔가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현실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던 중에 나온 결실이 바로 <목민심서>다.


d.다산사상의 현대적 의의 


 다산은 평생의 학문연구를 통해 유학의 의미를 재발견하고 관리로서의 자신의 경륜을 펼친다는 <사>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의거하여 <경학> 과 <경세학> 연구에 몰두했으며 그 결과는 <지인> (인재를 관리로 등용하는 것) 과 <안민> (백성을 편하게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의 개혁안을 요약해보면 군주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정부의 권한을 강화하고, 군주권의 기본이 되는 농민층의 생활을 안정시키면서 양반귀족이나 지방토호층의 중간탈을 배제하려는 것으로 개혁의 방향을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상공업의 발달이 점차 진전되는 추세에 있었지만 그에게 있어 아직 국가의 주요산업은 농업이었고, 그의 개혁안 역시 농민의 고통을 해소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던 것이다. 다산은 한때 <전론> <탕론> <원목> 등을 통해 혁명적 개혁한을 제시해 부정부패가 만연한 조선후기 사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자 한 것 같다. 실제로 1817년에 국가개혁의 전반적인 개혁안을 담은 <경세유표> 의 집필에 들어가기도 했지만, 이러한 근본적 해결책은 실현이 요원한 것이어서 너무나 절박한 현실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행법의 테두리 안에서라도 목민관들의 양심에 호소해 백성들의 어려움을 덜어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후 다산의 사상은 각종 사회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당시 농민들의 주장과 다산의 개혁안은 공통점이 많았다. 그러나 농민들이 아래로부터의 급진적인 혁명을 주장한 반면, 다산은 위로부터의 개혁을 주장한 점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위로부터의 개혁이 다산사상의 특징이라면 <목민심서>는 이러한 다산사상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 이후 집권층이 나라를 개혁할 때면 으레 이 책을 교과서로 삼을 만큼 조선후기 이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뒷날 위당 정인보는 <<다산선생 한 사람에 대한 연구는 곧 조선사의 연구요, 조선 심혼의 명예 내지 전 조선 성쇠존망에 대한 연구>> 라고 평가했고 고종이 <목민심서> 등 다산의 저서가 망라되어 있는 <여유당전서> 한 질을 사본해 바치라는 영을 내릴 정도로 이 책은 시대를 넘는 고전이 되어 오늘날 그의 학문은 다산학이라는 이름으로 국제적인 관심이 되어 있다.

 <목민심서> 의 모든 구절구절들이 공인들이 실천해야 할 금과옥조이나, 그중에서도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절실히 다가오는 다산의 말씀을 재음미하면서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자


 <<벼슬 중에서도 목민관의 벼슬이 가장 어려운 벼슬이다.>>

 <<관청의 약속이 믿어지지 않으면 백성들이 그 명령을 두렵게 여기지 않을 것이니 한 약속은 반드시 미덥게 해야 한다.>>

 <<한밤중 주고 받은 뇌물도 아침이면 드러난다.>>

 <<지금 세상에서 지극히 천하고 하소연할 곳 없는 자는 백성이지만 세상에서 무겁기가 높은 산과 같은 자도 또한 백성이다. 백성을 잘 받들면 세상에 무서울 것도 못할 것도 없다.>>




[牧民心書]


파일:나무위키+유도.png

황인경의 소설에 대해서는 소설 목민심서 문서를, KBS 수목드라마(사극)에 대해서는 소설 목민심서(드라마)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1. 개요[편집]


다산 정약용이 저술한 책. 목민관, 즉 관리가 걸어야 할 올바른 길에 대해서 쓴 책이다.


정약용은 1801년 순조 1년 신유박해에서 휘말린다. 이 사건은 노론 벽파의 주도로 남인을 주축으로 한 정조의 친위세력인 시파(時派)를 완전히 몰락시킨 사건으로 남인 청류당 계열 가운데 이가환, 이승훈, 정약종, 이벽, 권철신 등 남인 내 서학에 물든 진보적 인사들이 살육 당했다. 정약용은 겨우 살아남아 16년간 귀양살이를 보내게 되며, 이런 유배 생활에서 쓰여 진 것이 바로 목민심서이다.


책 자체의 평가는 매우 높다. 관리가 해야할 마음가짐뿐으로만 해석할 것이 아니라 현대시대에서 시민으로서, 그리고 책임을 가진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로 의미를 확장해서 읽으면 굉장히 유익한 내용이 많다. 


이런 내용과는 별도로, 정약용의 개인적인 주관 등이 들어가서 의외의 재미가 있다. 논어를 딱딱한 책으로 생각하고 처음 읽어본 사람이 공자가 제자의 뒷담화를 하는 장면이나 제자가 공자에게 반항하는 장면 등을 읽으면서 놀라는 것과 비슷하다. 그 당시 목민관들 사이에 돌던 '업계의 속사정'이라던가, 시장터에서 골목대장 행세를 하는 자를 묘사한 장면 등 가볍고 재미있는 부분이 많다. 정약용 개인 취향이 보이는 부분도 있는데, 나라에서 식량을 절약하기 위해서 금주령이 내리면 설사 서울에 끈이 있는 지방의 토호라 할지라도 잡아다가 엄단할 것을 설파하던 분이, '농주(막걸리와 같은 탁주)는 식사대용도 되니까 그냥 넘어가라......'라고 약해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2. 내용[편집]


부임육조 

목민관으로 발령을 받고 고을로 부임할 때 유의사항이다.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며, 나라에서 주는 비용 외에는 한 푼도 백성의 돈을 받아서는 안 되며, 일을 처리할 때는 공과 사를 분명히 구분해야 하고, 아랫사람들이 자신 모르게 백성을 괴롭히는 일이 없도록 단속해야 한다.

除拜(임명 받기): 수령의 직분을 매관매직 피하며, 새 수령 맞이용 말의 비용은 이미 나라에서 주니 백성들에게 돈을 거두지 말아야 한다.

治裝(행장 꾸리기): 검소한 복장을 해야 하며, 고사, 시집, 의서, 병서 등등 책들을 많이 구비해야 한다.

辭朝(조정에 하직하기): 자신을 추천한 전관에게 사사로히 감사를 표하지 말고, 맞이하러 온 이방이 가라치는 팁이 담긴 읍총기를 주면 즉시 돌려주고, 이방에게 고을의 큰 폐단을 듣고 감사에게 바로 잡을 방법을 의논해봐야 한다. 맞이하러 온 이방과 하인에게 장중하고 화평하게, 또 간결하고 과묵히 접대해야 마땅하다.

啓行(부임 행차): 일찍 출발하고 해가 지기 전 일찍 쉬도록 하되, 하인들이 밥 먹고 시작하도록 수리(대빵 이방)에게 말해 준다. 미신을 물리치고 제 길로 가면서 이웃 선배 수령들을 맞이해 업무에 관해 물어봐야 하고, 취임 전 하룻밤은 백성들 폐 끼치지 않게 이웃 고을에서 자야 한다.

上官(취임): 길일을 기다리지 말고 비가 없는 빠른 시일날 취임하여 아전과 하인들을 모아 인사한다. 그 후 고을 백성들을 다스릴 준비한다.

莅事(업무 시작하기): 이튿날 새벽에 출근한여 상급관청에 올리는 보고 중 전례에 따라고 좋은 건 바로 서명하고 사리를 따져야 할것은 글을 다듬어 아전들에게 다시 쓰도록 한다. 민간에게의 명령은 꼼꼼히 검사하여 의심가는 건 수리와 담당 아전한테서 조사하여 본말을 안 후 서명한다. 백성들에게 고을 폐단에 대해 의견을 구하고 그 폐단에 대해 최대한 서명을 미루고 개혁을 도모한다. 모든 관청일에는 기약일을 넉넉히 주선할 수 있게 한 다음 이를 분명히하고 거듭 알린 후에도 기약일을 어기는 사람은 약속대로 벌을 시행한다. 화공을 구해 고을 지도를 그려 관아 벽에 걸어 두도록 한다.

율기육조

율기는 '몸을 다스리는 규율'이란 뜻으로서, 목민관이 지켜야 할 생활 원칙이다.

飭躬(바른 몸가짐): 목민관은 몸가짐을 절도 있게 해서 위엄을 갖추어야 한다. 위엄이란 아랫사람이나 백성들을 너그럽게 대하는 동시에 원칙을 지키는 것을 통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다.

淸心(청렴한 마음): 마음가짐은 언제나 청렴결백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청탁을 받아서는 안 되며, 생활은 언제나 검소하게 해야 한다.

齊家(집안을 다스림): 집안을 잘 다스리는 것도 목민관의 중요한 덕목이다. 지방에 부임할 때는 가족을 데리고 가지 말아야 하며, 형제나 친척이 방문했을 때는 오래 머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屛客(청탁을 물리침): 이는 쓸데없는 청탁이 오가고 물자가 낭비되는 일을 막기 위해서이다.

節用(씀씀이를 절약함): 모든 것을 절약하고 아껴야 한다.

樂施(베풀기를 좋아함): 이 아낀 걸로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 또한 목민관이 지켜야 할 원칙이다..

봉공육조

위로는 임금을 섬기고 아래로는 백성을 섬기는 방법이다.

宣化(가르침을 펼침): 목민관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임금의 뜻을 백성에게 잘 알리는 일이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 교문(敎文)이나 사문(赦文)과 같은 공문서를 각 고을로 내려 보내는데, 글이 너무 어려워 일반 백성들이 그 뜻을 이해하기가 힘들었으므로 목민관은 이것을 쉽게 풀어써서 백성들에게 알려 주어야 한다.

守法(법도를 지킴): 목민관은 법을 잘 지키는 한편 지방에서 내려오는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는 데 힘써야 한다.

禮際(예의있는 교제): 상대에게 예의에 맞춰 백성에게 화가 미치지 않도록 하고 특히 친분이 있더라도 감사와 감영에게 예를 극진하게 할 것이다. 상급관청이 아전과 하인들을 조사하면 지위에 맞게 순종하되, 악의 없이 과오로 나온 경우에는 죄인을 호송하는 문서에 사정을 해명하고 용서를 빈다. 만약 악의가 있을 경우엔 사직서도 써서 같이 제출해서, 감사가 굽혀서 사과하면 정서를 볼 것이고, 아니고 무례하게 굴면 사직하라.

文報(보고서): 공문서는 정해진 기간 내에 완벽하게 처리해야 한다.

貢納(공물 바치기): 또한 공납과 같은 세금을 공정하게 징수해서 아전들이 부정을 저지르는 일이 없도록 철저히 단속해야 한다.

往役(차출되는 일): 외국 선박이 표류해 들어온 경우에는 예의를 갖춰 잘 보살펴 주어야 하며, 그들에 관한 모든 것(배의 모양, 크기, 문자 등)을 빠짐없이 기록해 상부에 보고해야 한다. 이 때 그들의 좋은 점은 보고 배워야 하며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애민육조 

백성을 사랑하는 방법이다.

養老(노인 봉양): 목민관은 노인을 공경하고 불쌍한 백성을 보살펴야 할 의무가 있다.

慈幼(어린이를 보살핌): 백성들을 타일러 자기자신들의 자식들을 기르게 하고 내버려진 아이들은 거두어주고 길러주어야 한다..

振窮(가난한 자를 구제함): 특히 4궁(窮), 즉 홀아비, 과부, 고아, 늙어서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을 구제하는 데 힘써야 한다.

哀喪(상을 당한 자를 도움): 집안에 초상이 난 사람에게는 요역(水役)을 면제해 주고,

寬疾(병자를 돌봄): 환자에게는 정역(征役)을 면제해 주어야 한다.

救災(재난을 구함): 목민관은 자연 재해가 나지 않도록 항상 대비해야 하며, 재해가 생겼을 때는 백성들을 위로하고 구호하는 데 힘써야 한다.


이전편부터 공전편까지는 각 방의 세부 업무에 대해 설명한 부분이다. 조선 시대의 지방 행정 조직은 수령 아래 이(吏)·호(戶)·예(禮)·예(禮)·병(兵)·형(刑)·공(工)의 육방의 업무를 총괄하는 책임자이므로, 마땅히 모든 업무를 빈틈없이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이전육조

束吏(아전을 단속): 아무리 학문이 뛰어나더라도 아전을 단속할 줄 모르면 백성을 다스릴 수 없다. 아전을 잘 다스리기 위해서는 목민관 스스로 자기 몸을 잘 다스려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목민관은 아랫사람을 은혜로 대하고 예로 바로잡아도 고치지 않고 세력을 믿고 속이는 자이면 법으로 단속해야 한다. 단속 후 비석을 세우고 이름을 새겨 영구히 복직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너그러우면서 권한이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있도록 하여, 조종하며 통제하는 모든 일이 다른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도록 한다. 모든일에 먼저 자신의 견해를 세워 바깥의 사물에 흔들리지 않고 노여움을 다른데로 옮겨 풀지 않고 무릇 한 가지 명령과 한 가지 지시서를 내릴 때라도 마땅히 수리와 해당 아전에세 그 일의 근본과 지엽 등 자세히 알아보고 난 뒤에 결재를 하면 아전의 꾐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감사가 아전으로 수령을 염탐하기 때문에 아전에게 빌붙어 자신의 불법을 덮고자 하는 미련한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취임한지 몇달이 지나거든 아전들의 이력표를 만들어 책상에 놓아서 연초에 해당 아전에 맞는 요긴한 직책을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馭衆(관속들을 통솔함) : 청렴함에서 위엄, 성실함에서 믿음을 얻어 뭇사람을 복종시킬 수 있다. 관노 중 수령은 말이 없는데 나서서 꾸짖고 치라 명령하면 엄하게 다짐해두고, 어기는 자는 처벌해야 한다. 기생보단 수급비드을 보살펴 준다.

用人(사람 쓰기) : 백성을 잘 다스리려면 무엇보다도 인재를 등용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할 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고을에서 가장 착한 사람을 향소로 골라 수령을 보좌하게 한다. 향원에서 옛 좌수들을 후보삼아 투표를 하여 1위는 좌수, 2위는 부승으로 임명한다. 아첨 잘하는 자는 충성스럽지 못하고, 간쟁하기 좋아하는 자는 배반하지 않는다. 무반은 모두 굳세고 씩씩하여 적을 막아낼 기색이 있어야 한다. 관리를 뽑을 때는 충성과 신의를 첫째 기준으로 삼아야 하며, 재주나 지혜는 그 다음으로 보아야 한다

擧賢(인재의 추천) : 인재를 추천하는 것은 수령의 임무이다. 관내에 귀한 이와 어진 이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 마땅하며 명절마다 술과 고기를 계속 보내야 한다.

察物(물정을 살핌) : 수령은 우뚝 고립되어 있어서 자신이 앉아 있는 자리 밖에 있는 사람은 모두 속이려는 자들이다. 눈을 사방에 밝히고 귀를 사방에 통하게 해야 한다. 아전과 향청직원, 군교들의 간사하고 교활함이 저절로 행사되지 못하게, 관노비와 별졸들이 몰래 민간에 나가 토색질하고 행패 부리는 것, 또 불효불공하고 장터에서 횡탈을 일삼는 것, 향촌에서 무력으로 행하거나, 힘을 믿고 약한 이를 업신여기는 자를 금해야 하니, 별도로 염탐 및 조사가 필요하다. 부임 초기에는 2-3차례, 그 후엔 네 계절의 마지막 달에 1차례씩 향통을 마을에 놔둬 신고를 2-3일 받은 후 지적된 잘못한 바를 고칠 것이고, 민폐를 개혁할 것이요, 무고하는 것 또한 살펴야 할 것이다. 관리가 고발을 당하면, 정말 부정이 있는 자는 곧바로 조사하여 처리하고 실제 증거가 없는 일은 다시 조사해야 할 것이다. 토호나 도적이 고발을 당하면 해당 면에 경고 명령을 내린다. 매 계절의 첫달 초하룻날에 각 면의 최장자 중 행실이 바르고 일을 잘 아는 이를 4명씩 뽑아 향로로 삼아 향교에 첩문을 내려 고발장을 받아 잠자코 홀로 헤아려 별도로 몰래 알아야 한다. 자제와 빈객 가운데 단정하고 결백하며 실무에 능한 사람으로 몰래 조사하게 하여 성공한 자들에게 후하게 보수를 주어야 한다. 현 이방을 좋아하지 않는 다른 아전들을 통해 그 이방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 미세한 허물과 잘못은 그냥 보아 넘기거나 속 짐작만 하고 하고, 혹은 은밀히 그사람을 불려 따뜻한 말로 훈계하여 스스로 반성하게 하는 등 덕으로 다스려야 한다. 옆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하는 말은 모두 사사로운 의도가 들어 있음으로 그대로 듣고 믿어서는 안 된다. 수령이 직접 미행하지 말아야 한다.

考功(고과제도) : 관리가 한 일은 공과를 기록해두었다가 연말에 공적을 따져 상벌을 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백성들로 하여금 믿고 따르게 할 수 있다. 수령의 임기를 6년으로 늘리고 어사 감찰을 3년에 한번씩 좀 더 자주 하여서 신뢰를 얻고 부정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호전육조 

세금을 거두는 일이다. 소출량을 기준으로 한 세금 징수는 정확한 실태 파악이 어렵기 때문에 문제가 있었다. 정약용은 이 점을 비판하고 공정한 세금 징수를 위해 해마다 직접 조사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목민관은 원활한 조세 업무를 위해서 호적을 정비하고 부정 방지에 힘써야 한다. 또한 국민 경제의 근본인 농업을 장려하는 정책을 펴야 한다. 농사를 권장하는 핵심은 세금을 덜어주고 부역을 적게 하여 토지 개척을 장려하는 것이다. 권농 정책에는 벼농사 장려뿐만 아니라 목축과 양잠의 장려, 소의 도축을 막는 일 등이 모두 포함된다.

예전육조

제사와 손님 접대, 교육, 신분 제도 등에 대한 것이다. 목민관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정성을 다해 제(祭)를 지내는 일이다. 미풍양속을 해치는 미신적인 제사가 있다면, 사람들을 계몽하여 없애 버려야 한다. 또한 교육을 장려하고 과거 공부를 권장하여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 문란해진 신분 제도를 바로잡는 일도 목민관이 해야 할 일이다.

병전육조

군대를 키우고 잘 훈련하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야 한다. 당시에는 병역 의무자가 군대에 가는 대신 옷감을 내고 면제를 받는 제도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부정이 많았다. 목민관은 이러한 부정을 가려내어 가난한 백성들이 피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또한 병기들을 수리하고 보충하여 늘 비상사태에 대비해야 하며,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는 목숨을 걸고 지방을 지켜야 한다.

형전육조 

재판과 죄인을 다스리는 방법이다. 재판을 할 때는 사건의 전말을 모두 파악한 뒤 신중하게 판결해야 하며, 특히 옥에 가두거나 형벌을 내릴 때 잘못이 없도록 해야 한다. 또한 거짓으로 남을 고발한 사람은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 예로부터 이진 목민관은 형벌을 약하게 했으니 지나친 형벌은 피하는 것이 좋다. 옥에 갇힌 죄수에게는 집과 식량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폭력을 일삼은 흉악한 자들은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

공전육조 

산림과 수리 시설, 환경 미화 등에 대한 것이다. 목민관은 산림을 울창하게 가꾸고 농사의 기본이 되는 수리 시설을 관리할 책임이 있다. 수리 시설의 경우, 지방 토호들이 제멋대로 저수지를 파서 자기 논에만 물을 대는 행동을 막아야 한다. 도로를 닦고 건전한 공업을 육성하는 것 또한 목민관의 책임이다.

진황육조 

재해가 났을 때를 대비해 준비해야 할 사항들이다. 흉년이 들 때를 대비해서 평소에 곡식을 저축하고, 창고 안에 있는 식량의 양을 늘 파악하고 있어야 하며, 철저한 대책을 마련해 두어야 한다. 또 흉년이 들어 위급한 때는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말고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 백성을 구제하는 데는 두 가지 관점이 있는데, 첫째는 시기에 맞추는 것이며, 둘째는 원칙을 세우는 것이다. 이는 정확한 실태 파악을 바탕으로 구휼에 나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목민관은 집을 잃은 백성들에게 쉴 곳을 마련해 주고, 재해에 대한 구제가 끝나면 백성들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어야 한다.

해관육조 

해관이란 관직에서 물러난다는 뜻이다. 목민관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날 때와 그 이후의 일에 관해 말하고 있다. 벼슬에 연연하는 것은 선비의 도리가 아니며, 떠날 때 많은 재물을 가지고 가는 것 또한 선비가 할 일이 아니다. 백성들이 목민관이 떠나가는 것을 슬퍼하고 길을 막아선다면 훌륭한 목민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오랜 병으로 눕게 되면 거처를 옮겨서 공무에 지장이 없도록 해야 한다. 또 죽은 뒤에라도 백성들이 내는 돈을 받지 않도록 미리 유언으로 명령해 두어야 한다. 송덕비나 선정비는 죽은 이후에 세워야 하는 것으로 있을 때 세우는 것은 예가 아니다.

3. 트리비아[편집]


한 때 베트남의 호치민이 즐겨 읽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어느 방송에서 호치민의 유품 중에 그런 건 없다는 사실을 밝혔다는 이야기도 있고 90년대 kbs 방송국 다큐멘터리에서는 호치민의 서재를 관리하는 사서가 목민심서를 보여주며 이것이 호치민 선생의 애독서였다고 했다고도 하고, 여러가지 설이 있다. 다만 호치민이 1920년대 소련에서 공부할 때 우연하게도 박헌영과 함께 공부했다고 하는데, 그때 박헌영이 호치민에게 선물한 사실은 있다고 한다.[1]


선운사 마애불의 배꼽에는 검단선사의 비결이 들어 있어서 이것이 세상에 나오면 한양이 망한다는 전설이 있었다. 후에 동학농민운동 때 동학군이 이 비결을 빼내갔는데, 그것이 바로 목민심서였다는 전설이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도 이 책의 위세를 입어보고자 하여, 순방시 전용기 집무실에 목민심서를 놓아두고 언론에게 보도지침으로 "집무실 안에 목민심서가 눈에 띈다"라는 낯간지러운 기사를 쓰라고 지시한 적도 있다.[2]


2010년 12월 호남대학교 최병현 교수가 10년에 걸친 목민심서 영어 번역을 끝냈다. 그리고 이 영역본은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출판된다고 한다.

(출처 : 나무위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