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009 – 택리지 (擇里志) / 이중환 (李重煥) (1690~1752?)


 조선후기 실학자인 이중환이 각 지방의 자연환경과 인물.풍속.인심 등을 흥미있게 서술한 인문지리서 당쟁의 희생양으로 자유의 몸이 된 후 30여 년간 전국을 방랑하면서 자연환경과 인간생활과의 관계를 연구 60이 지난 노경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 쓴 저술로, 내용이 크게 사민총론.팔도총론.복거총론(사민총론(四民總論)·팔도총론(八道總論: 평안도·함경도·황해도·강원도·경상도·전라도·충청도·경기도)·복거총론(卜居總論: 地理·生利·人心·山水)·총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종전의 군현별로 씌어진 백과사전식 지지에서 벗어나 우리 나라를 인문지리적 방법을 통해 총체적으로 다룬 새로운 지리서의 효시다.


a.생애


 이익의 제자로 조선후기 실학자.호는 청담.청화산인(자 휘조(輝祖), 호 청담(淸潭), 청화산인(靑華山人)). 숙종때 과거시험인 증광별시에 합격하여 벼슬이 병조좌랑에 올랐다. 그는 성격이

착실,공정하고 문장을 잘하고 장래가 촉망되었다. 그의 장인은 목호룡이라는 사람인데,1721--22년 경종 때 일어났던 사화(신축.임인사화)에 관련되어 영조 때 사형되자 이중환도 화를 입어 어느 고도로 귀양가게 되었다. 자유의 몸이 된후 30여 년간 전국을 방랑하면서 자연환경과 인간생활과의 관계를 연구,<택리지>를 저술했다.60이 지난 노경에 이 저서를 썼다는 사실 말고는 그에 관한 생활은 잘 알려진 바가 없다.

 그는 이 책에서 8도의 지리와 그 고장에 얽힌 역사적 배경 및 지형. 생활방식.자원과 그 유통과정 등 종합적인 인문지리서를 엮어 세계지리학계의 연구대상이 되는 저서를 남겼다. 이 책의 곳곳에 당파에 관한 이야기가 은연중에 비치어 있음은 이러한 그의 당쟁 속에서 보낸 생의 결과라 하겠다. 특히 이 책의 <인심조>의 당론에 관한 기사는 조금도 편견이 없이 냉정하고 공정한 저술자세를 보여주어 경의를 표할 만하다.


b.시대적 배경


 이중환이 이 책을 저술한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면 당시는 성리학 일변도의 사림문화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그 한계점을 노출시킨 상태였다. 도덕적 명분과 당쟁만을 일삼는 사림문화는 부국강병에는 무력했고, 청으로부터 실사구시의 고증학이 전래된 분위기 속에서 정신문화와 물질문화를 균형 있게 발전시켜 안으로 분열된 사회를 통합하고 밖으로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처하는 국가적 역량을 강화하려는 새로운 문화운동이 일어났다. 공리공론에 치우쳐 있던 종전의 유학자들과는 달리 이들 실학자들은 다른 학문과 사상도 받아들여 그 학문범위가 넓고 현실적인 문제를 놓고 해결책을 구하려는 실증적인 학풍을 지녔다.

 실학자들은 대부분 당쟁에서 패배, 초야에 묻혀 살면서 학문연구에 정진한 사람들이다. 주로 몰락한 남인학자들이 현실에 대한 불만으로 학문연구에 전념하게 되었고,영.정조의 학문장려의 분위기도 일조를 했다.

 주로 농촌에 살던 실학자들은 농촌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날로 피폐해가는 농민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해 토지개혁을 주장했다. 반계 유형원,성호 이익,다산 정약용 등이 그들인데, 이들을 <경세치용학파>라 부른다.

 한편 한양에 살면서 지금까지 천시해온 상공업을 발전시켜야 하며 청나라로부터 선진문물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과학과 기술에 정열을

쏟은 학자들이 있었다. 이들을 <북학파> 또는 <이용후생학파>라 부르는데, 박지원.박제가.홍대용.이덕무 등이 그들이다.

 이중환은 이익의 실사구시학풍을 계승한 실학자로서 인문지리 학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으며 실학의 학풍을 세우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가 쓴 <택리지>는 한국 전역에 걸친 지형.풍토.풍속.교통 및 각 지방의 고사와 인물에 이르기까지 상세히 서술한 책으로 여기에서 그는 사대부란 따로 없고 모두 민으로 되어 있으며, 이 민에 사.농.공.상의 구별이 있을 뿐이라는 평등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지리적 환경을 이용한 생산활동을 통해 인간 스스로의 의식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장 좋은 지리적 환경이란 땅이 기름진 곳이 우선이고,그 다음이 배.수레와 사람,물자가 모여들어 필요한 것을 상호교환할 수 있는 곳이라 했다. 따라서 운송수단의 개선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으며 이러한 생각은 북학파 학자들에게도 이어졌다.


c.<택리지> 의 내용


 이책은 앞머리에 <사민총론>을 두어 사농공상의 4계급에 대한 이모저모를 소개하고 있다. 이책의 주요내용은 대체로 전반의 <팔도총론>과 후반의 <복거총론>의 2편으로 나뉜다.

 <팔도총론>에서는 조선 전국토를 8도로 나누어 그 지방의 지역성을 그 지방출신인 인물과 결부시켜 밝혔고,<복거총론>에서는 <살 만한 곳>에 관해 그 입지조건을 들어 설명했다. 전자는 지방지지에, 후자는 인문지리적 총설에 속한다. 그러나 전후반을 통해 <살 만한 곳>을 찾는 데 목적을 둔 듯하다.


   1.<팔도총론>

 특히 전반에서는 사람과 자연환경과의 관계를 중시하여 현대지리학에서 문제가 되는 지인상관론을 <<사람은 땅에서 난다>>고 설파했음은 주목된다. 8도를 각 도별로 나누기 앞서 팔도총론이란 항목에서 우리 나라 지세의 개요를 다루고 있다.

 우리 나라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산이 많고 들이 적다는 표현으로 한반도 지형의 특색을 지적했다. 이와 같은 지형의 영향을 받아 국민성이 유하고 조심스러우나 도량이 작다고 밝히고 있다. 이어 덕행이 있는 어진 이를 가려 사대부로 쓰는 것이지,직업의 귀천이 어디 따로 있겠는가라고 물으면서 인간의 평등성을 강조했다. 한반도의 국토의 길이가 남북 3천리, 동서 5백리라고 우리 국토의 길이를 처음으로 측정하여 말했다.

 이 <팔도총론>에서 각도의 지리적 위치와 지형.기후.자연환경과 그 고장 지명이 생겨나게 된 연혁 등을 다루었다. 단군시대 부터 그 당시까지 그 고장에 지명에 얽힌 역사의 발자취와 각 고장의 독특한 생활방식을 다루었다. 그리고 나서 산세와 부락형성의 인문환경을 논했다. 자연환경과인간생활과의 관계를 논한 과학적인 태도와 그 체계를 세워 설명한 이러한 종류의 책으로서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물다.

 이밖에도 산형론. 부락론. 해산론 등에서 도시형성요건을 다루었으며 도시 등에 관한 그의 예리한 관찰과 분석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의 논술은 한날 이론만 내세우던 당시 학풍과는 달리 직접 그가 실증적으로 답사하여 얻은 귀중한 자료를 토대로 하여 그의 해박한 지식과 이론적인 전개 하에 엮은 것이다.

 <팔도총론>에 이어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순으로 그 고장형세와 강. 냇가. 들. 고을이름, 각 고을에 얽힌 단군시대부터 그 당시까지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을 소개했으며, 지형에 따른 그 고장인심 및 생활방식, 기후와 산업구조, 생산유통과정 등을 상세하게 요령있게 줄거리만 골라서 체계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2.<복거총론>

 후반에서는 <사람이 살 만한 곳>으로 다음과 같은 입지조건으로 1.지리 2.생리 3.인심 4.산수의 네 가지를 들고 있다.

 (1) 지리가 좋아야한다. 여기서 지리라는 것은 소위 풍수적으로 말한 것에 틀림없다. 지리를 볼 적에는 1.수구 2.야세 3.산형 4.토색 5.수리 6.조산조수의 여섯가지를 들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저자, 이중환은 풍수지리를 절대적으로 신봉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택리지> 각처에서 풍수 이야기를 할 적에는 항상 <소위>라는 말을 사용했다.

(2) 생리를 들었다. 생리라 함은 인간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여러가지 물질적 모든 재화들을 말한다. 그는 살아가는 데는 물론 예절을 지키기 위해서도 생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토지가 기름지고 물자교류가 잘되는 곳을 조건으로 삼았다. 토지가 기름져야 오곡과 목면을 얻을 수 있다. 그 기준은 한 마지기 (1두락)에 60두 이상의 산출지로 하고, 그 이하는 메마른 땅이어서 살 곳이 못된다고 했다. 한국에서 가장 기름진 토지는 전라도의 남원과 구례,경상도의 진주 등인데,이곳에선 한 마지기에 140두까지 산출된다. 목면은 황간.영동.옥천.회덕.공주 등이 가장 적지라고 했다.  물자교류도 잘되어야 살 만한 곳이 되는데, 이런 곳으로는 무엇보다도 교통이 편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 나라의 지세는 산악지대가 많고 대산맥이 남북으로 뻗어 있어 교통기관으로서 차륜보다는 마필에 의존함이 많은데, 이보다는 선박에 의하여 운송함이 이익이 많으므로 수운의 필요상 강물의 깊고 얕음을 알고 항구를 만들 필요를 역설했다.

 그는 또 외국무역에도 언급하여 개성.안주.평양 등지에서는 남쪽으로는 일본과 왕래하고 북쪽으로는 연도와 통상하여 백만금을 모아 큰 부자가 된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적어도 관혼상제의 4례에 갖추기 위해소도 어류와 식염이 자유롭게 교류되는 곳이 살 만한 곳이라고 했다. 이상의 생리적 조건을 요약하면.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경제적 기초가 되는 물자의 생산에 적당하며 또 교역하기에 편리한 곳이라 하겠다.

 (3) 인심을 들었다. 당대는 당파싸움이 심했고 저자 자신도 이를 경험한 바 있어 당색을 고려에 넣었으나, 그의 연령이 이미 환갑을 지나서인지 의외로 냉정한 것 같다.

 그는 8도서민의 인심을 대략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평안도: 순박하고 인정이 두텁고 용감하다 (순후용한)

 경상도: 견실하고 굳세다 (풍속질실) 

 함경도: 백성들이 굳세고 날래다(민개경한)

 황해도: 백성들이 사납고 포악하다 (민다녕폭)

 강원도: 산골짜기 백성들이 꾸물거린다 (협맹다?)

 전라도: 꾀가 많고 움직이기 쉽다 (전상교험)

 경기도: 백성들이나 물자가 시들어 쇠했다 (민물주?)

 충청도: 오로지 세력있는 사람을 따라 이익을 본다(전치세리)

 그리고 일반적으로 살 만한 곳의 인심을 <<시골에 내려가 거주를 정할 때에는 그곳 인심의 좋고 나쁨을 논할 것 없이 동색(당파가 같음)이 많은 곳을 찾아가서 서로 자유롭게 담화하고 학문을 연마함이 좋을 것이다. 그것보다 사대부가 없는 곳을 찾아가 문을 닫고 외부와의 교제를 그만두고 홀로 그 몸을 깨끗이 하면 농업.공업.장사에 종사하라도 그중에 즐거움이 있을 터이니,이렇게 보면 인심의 좋고 나쁨은 <살 만한 곳>의 조건이 되지 못할 것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4) 산수의 경치 좋음을 들었다. 단적으로 말해 <살 만한 곳>은 산과 물이 좋아야 한다는 것이다. 산수가 인간의 정신적 방면에 미치는 영향을 착안했는데 어떤 면에서는 독일의 빌리 헤파하의 지심리학에서 말한 것과 흡사한 면이 적지 않다. 우리 나라에는 천리가 넘는 긴 강과 백리가 되는 넓은 평야가 없어 위대한 인물이 나오지 않는다든지,우리 나라의 지형이 노인형이고 서쪽을 향하여 절하는 모양에서 사대사상을 형성시킨다는 심리적 작용에도 언급했다. 그러므로 사람이 살 만한 곳은 반드시 산수가 아름다운 곳이 좋다고 했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의 금강산.오대산.속리산.지리산 등 12명산과 그중에 있는 유명한 사찰과 검토하고,다음은 수도 또는 수도 후보지라는 5관산.삼각산.계룡산.구월산 등을 비판했다.

 뒷부분에서 바닷가에서 사는 것, 강가에서 사는 것, 시냇가에서 사는 것의 세 거주지를 비교하여 평했다. 속담에는 시냇가에 사는 것이 강가에 사는 것만 같지 못하고 강가에 사는 것은 바닷가에 사는 것과 같지 못하다고 하지만, 이는 재화를 운송하고 해산물을 얻는데 그렇다는 것이지 산수라는 입장에선 그렇지 않다. 가령 해서에는 바닷바람이 많고 음료수가 부족하고 조수가 들어오는 등 조금도 맑고 깨끗한 맛이 없다. 이에 대하여 계거는 평온하고 깨끗한 경치가 있고 물대기와 경작이 가능하며 전쟁시에도 유리하기 때문에, 속담과는 달리 해거는 강거만 못하고 강거는 계거만 같지 못하다고 했다. 그는 인간이 사는 데 물질적인 재화를 무시하지는 못하나 정신적인 방면으로서 건강.전쟁 등의 요소도 고려한 듯하다.

 이상 <살 만한 곳>의 입지조건으로서 지리.생리.인심.산수의 4요소를 들고 이중 어느 하나만 결여되어도 낙토하고 할 수 없다 했다. 가령 지리가 아무리 좋아도 생리가 넉넉하지 못하면 역시 오래 살 곳이 못되고,지리나 생리가 다 좋아도 인심이 좋지 못하면 반드시 후회할 일이 생길 것이고, 또 근처에 아름다운 산수가 없으면 호연지기를 기르고 마름을 너그럽게 펼 곳이 없을 것이니, 결국 이 네 가지 조건이 다 구비되어야 이상적인 살곳이라 했다.

 그는 살 만한 곳을 4가지로 구분하여 그 분포를 제시했다.

   1. 살 만한 곳: 공주의 갑천, 보은의 관대, 전주의 구례. 금산, 연얀 백천의 보령강변, 충주의 금천, 순홍의 죽계, 해주의 승천, 전주부, 금구, 만경 등.

   2. 피난처: 전북 용담, 금산,장수, 속리산, 청화산 등.

   3. (복지 평시나 난시 다 같이 살 만한 곳): 문경 병천, 무풍, 청도 운문산, 울산 원적산, 가야산, 지리산, 청화산 등.

   4. 은둔지: 원주의 사자산 남두릉동, 횡성의 덕은촌 등.

   5. 일시 유람지: 청하 내근산, 청송 주방산, 영동산지 등.

 그러나 결론에 가서는 위에 말한 입지조건을 갖춘 <가거지>도 좋고 경치 좋은 곳에 별장 같은 것을 짓는 것도 좋지만, 당쟁도 없고 정신적으로 편안한 곳이 살 만한 곳이 되어야 한다고 맺고 있다.


d.현대적 의의 


 조선시대의 한 지리책이 우리 나라 삶은 물론 외국인들도 많은 관심을 갖고 이 책의 가치를 높이 평가함은 무슨 까닭일까?

   1. 이 책은 우리 나라 사람이 저술한 우리 나라 지리서라는 점이다. 근세의 지리서라고 하면 대개 풍수지리인데, <택리지>는 현대 의미에서 말하는 지리책이다. 우리 전 역사를 통해서 현대적 의미에 있어서 우리 나라 지리책은 대단히 드물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2백여 년 전에 이러한 훌륭한 저술이 있었다는 것은 민족의 자랑이라 할 수 있다. 현대지리학의 시조라고 하는 독일의 카를 리터의 저술보다도 1백여 년 앞선 것이다.

   2. 이책은 우리들의 실생활에 참고가 되고 이익을 준다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 나라의 여러 곳을 실제를 예로 들어 <살 만한 곳> <복지> <피병지> <은둔지> <일시가거지> 등을 설명했다. 물론 200여 년 전의 가거지와 지금의 그것과는 큰 차이가 있을 것이나 그러나 그 원리에는 변함이 없다 하겠다.

   3. 오늘날 우리 나라의 지리학 및 지리학자, 사회학 및 사회학자에 어떤 암시를 준다는 점이다. 가령 국토개발이라는 대사업에서 이상의 여러 학자 내지 학설이 기여해야 할 역할을 암시해주는 것이다.

   4. 서술구성이 과학적이라는 점이다. 전반과 후반이 지지와 총론으로 된 점, 인걸은 지령이라고 하여 지인상관론을 주장한점 등도 돋보인다.

 어쨌든 이 저서는 18세기 중엽부터 우리 사회에 널리 읽혀지기 시작하여 중국이나 일본 등에서도 간행되어져 왔다. 비록 250년전의 저술이기는 하나, 당쟁의 부정적인 측면을 공정하게 비판하고 자기 경험으로 강원도 지역의 남벌과 관련시켜 한가의 수위가 높아짐을 염려한 점, 중국 산동성의 어민이 침략할 것을 염려 하여 평화선 설치를 예언했는가 하면, 대마도로 인해 한일관계에 체먼을 잃기 쉽다는, 오늘날 읽어도 여러가지 공감할 점이 많아 귀중한 문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經世致用學派 ]

조선 후기 실학(實學)의 발전기에 있어서 정치ㆍ경제 제도의 체계적인 개혁안을 제출하여 처음으로 실학의 체계를 세운 학파.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성호(星湖) 이익(李瀷) 등이 경세치용학파를 구성하는 대표적인 학자이다. 이들은 당대의 사회적 현실을 세밀히 분석ㆍ검토한 후에 민생고(民生苦)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토지제도의 개혁과 인재의 적절한 등용에 있음을 주장하였다.


반계류(磻溪流)의 실학은 농본 경제를 기본으로 한 제반 사회정책의 확립을 최후의 목표로 하는 경국제민(經國濟民)의 구체적 사회정책이었다. 그것은 동양적 이상국가의 재건이라는 테두리를 미처 벗어나지 못한 단계의 개혁 시도에 불과하였으나, 잘못된 정치로 인해 피폐된 사회를 전면적으로 개혁하려고 한 매우 급진적인 정책이었음에는 틀림없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세치용학파 [經世致用學派] (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



B008– 성호사설(星湖僿說) / 이익(李瀷) (1681~1763) 


 성호는 그의 호이고 사설은 <자질구레한 말> 이라는 뜻으로 성호가 겸손한 마음에서 붙인 것이다. 흔히 백과사전류로 부류되는 <성호사설>은 일시적으로 저작된 것이 아니고,40년 동안 생각나고 의심나는 것과 제자들의 질문에 답한 내용을 수시로 기록해둔 것이다. 따라서 번잡하고 중복이 많은 이 방대한 책을 그의 제자 안정복이 잘 정리하여 편찬한 것이 <성호사설>이다. 평생을 야인으로 지낸 성호가 정치.경제.사회 등 국정전반에 걸쳐 재야에서 보내는 개혁의 메시지로, 그 성격과 영향에 있어 청나라의 고증학자인 고염무가 지은 <일지록>에 견줄 만한 대저로 평가된다.



a.생애


 중농주의 실학사상의 대가인 이익의 호는 성호, 본관은 경기도 여주. 대대로 높은 관직을 누리던 집안에서 태어나 부친은 당시 언관의 총수였던 대사헌직에 있었다. 1680년(숙종 6)에 서인들이 남인들을 몰아냈던 경신대출척 때 남인이었던 그의 부친은 진주목사로 죄천되었다가 운산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9남매의 막둥이로 태어난 성호는 몸이 허약했고 뚜렸한 스승 없이 둘째형인 잠에게서 글을 배웠다.

 이처럼 조선후기의 살벌한 당쟁 속에서 노론에 밀려난 남인 가문에 태어났던 성호의 일생은 출발부터가 고난에 찬 것이었다. 25세에 향시에 합격했으나 과거장에서 부정이 판치는 것을 보고 회시에는 나가지도 않았다. 다음해에 형인 잠이 장희빈을 옹호하다가 당쟁으로 희생되자 평생 동안 벼슬을 하지 않고 학문과 교육에 전념한다. 국가에서 몇번 벼슬을 하사했으나 거절하고 고향인 첨성리 (경기도 안산.현재는 아파트 단지)에 성호장을 짓고 손수 농사를 지으면서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그의 사상은 권철신.안정복.이긍익.이중환.이기환.정약용 등에 계승되었다.

 그가 65세 되던 해데 그의 학행을 높이 산 조정이 한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끝내 야인으로 평생을 마쳤다. 이 때문에 그는 만년에 심한 가난에 빠져 <<나의 궁핍과 기아가 날로 심하여 졸지에 송곳 꽂을 만한 땅도 없다>>고 탄식할 정도였다. 저서로는 <성호집> <성호사설> <곽우록> <성호집속록> <사서삼경질서> 등이 있다.


b.실학과 이익의 사상


   1.실학사상

 실학이란 조선후기 영.정조 때 일어난 학풍으로 사회경제적 변동에 따른 사회모순에 직면하여 현실개혁을 통해 그 해결책을 찾으려는 사회개혁 사상이었다. 다시 말하면 조선의 건국과 함께 정책적으로 채택된 성리학의 자기반성과 그의 극복과정에서 나타난 발전적 국면이었다.

 이러한 학문적 기풍은 주로 경기기지방의 학자들에 의해 주로 일어났는데, 청나라에서 수입된 고증학과 서학(천주교)의 영향을 받았다. 이들의 학문적 성향과 시기를 중심으로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1) 18세기 중반 이익을 중심으로 한 <경세치용학파(經世致用學派)>다. 유형원.이익.정약용으로 이어지는 이 학파는 중농주의적 입장에서 토지.조세.교육.과거.군사제도의 개혁 등 각종제도개혁에 치중했다. 실학파의 비조인 유형원은 그의 저서 <반계수록>에서 토지의 균전론을 주장했고,이익은 <곽우록>에서 토지소유의 상한선을 정해 겸병을 막는 한전론을 주장했다. 이익은 17세기 이후에 그 폐단이 노정되기 시작한 화폐의 유통에 따른 서울의 상업 고리대자본이 농촌에 침투하여 농촌경제를 파탄시키고 이농을 <촉진하는 현실에 주목했다. 또한 당시의 이앙법의 보급과 광작운동으로 부농의 출현과 소농민의 증가현상에 그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했다. 이러한 그의 학설은 당시 성행하던 성리학의 비생산적인 관념론을 배격하고 당시의 정치경제적 현실개혁에 주안점을 두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뒤를 이어 정약용은 실학사상을 집대성한다. 이들의 사상은 당시 별로 정책에 반영되지 못했으나 구한말의 애국계몽사상가와 국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2) 18세기 후반 박지원을 중심으로 한 <이용후생(利用厚生)> 학파다. 이 학파는 유수원.홍대용.박지원.박제가.이덕무 등으로 이어지는 중상주의적 입장에서 상공업의 진흥방안을 학자들 나름대로 제시했다.

 (3) 19세기 초반 김정희에 이르러 일가를 이룬 <실사구시학파>(實事求是)다. 이학파는 경서및 금석.고전의 고증을 위주로 하여 학문하는 자세에 있어 실증성과 해석을 크게 강조했다.


   2.이익의 사상

 많은 실학자 중에서도 이익은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이.유형원에서 비롯한 실학의 물결이 <성호>라는 호수로 모여 들었으며.다시 이 호수는 여러 새 흐름의 연원을 이루었던 것이다. 역사학파의 안정복, 지리학의 윤동규, 이중환, 경학의 이병휴. 수학의 이가환, 그리고 박지원. 박제가. 정약용의 경제학은 모두 그 연원을 성호에 두고 있다. 이렇듯 실학은 이익에 이르러 하나의 학파를 형성하게 된다.

 이익은 전술한 바와 같이 유형원의 사상을 계승했다. 불교와 선비의 무실한 학풍을 배격하고 수기치인의 학문을 강조했으며 자득을 강조했다.

 (1) 경제적인 측면에서 그는 중농사상에 입각한 한전론과 사농합일을 주장하여 각 농가에 영업전을 지급하되 매매는 금지하고,그밖의 토지에는 매매를 허락하여 토지소유의 평등을 이루고자 했다. 고리대와 화폐, 환곡제도의 폐단을 지적하고 사창제도를 주장했다.

 (2) 역사인식에 있어서는 자주적 역사관과 실증성을 강조했다. 종래 중국중심의 화이관에서 벗어나 삼한 정통론을 주장하여 우리가 중국에 예속될 수 없음을 밝혔다. 또한 역사를 인식하는 데 있어서도 종래의 주관적인 태도를 벗어나 객관적이며 실증적인 태도를 강조했다.

 (3) 정치적인 면에서는 왕도정치의 실현을 궁극적 목표로 삼고 기본적으로는 덕치를 말하면서, 현실에 있어서는 제도.형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당쟁에 대한 폐단도 지적하여 당쟁은 양반수에 비해 관직수가 적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으로 보고 과거제도의 개선을 주장한다.

 (4) 사회적인 측면에서 신분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나라가 빈곤하고 농민이 피폐한 이유로 노비제도. 과거제도. 문벌제도. 게으름.승려. 기교(사치.미신) 등의 6가지를 들고 이것을 추방해야 된다고 보았다.

    

c.<성호사설>의 내용


 흔히 백과사전류로 분류되는 <성호사설>은 일시적으로 저작된 것이 아니고 40년 동안 생각나고 의심나는 것과 제자들의 질문에 답한 내용을 수시로 기록해둔 것으로, 번잡하고 중복이 많은 이 방대한 책을 그의 제자 안정복이 잘 정리하여 분량을 절반으로 줄여서 편찬했다. 이것이 <성호사설유선>이며 이것이 오늘날 말하는 <성호사설>이다.

 스스의 글을 간추리는 데 있어 신중을 기하는 안정복에게 의심스러운 것은 상의하지 말고 수정하라고 하는 등 모든 것을 그에게 맡기는 신뢰감을 보였고, 안정복과 같은 우수한 제자에 의해 <성호사설>의 간행을 보게 된 것을 기뻐했다.

 이 책의 끝에 부록으로 붙어 있는 <곽우록>은 이 책의 요약이요 결론이다.  곽우록 이란 재야에 있는 평민은 국가의 문제를 논할 자격이 없지만 국가의 정책이 잘못되면 직접 그 피해를 입기 때문에 이를 좌시할 수 없어 분에 넘치는 안을 제시하는  천민의 걱정 이란 뜻이다.

<성호사설>이 백과사전적 성격을 가진 데 반해 <곽우록>은 국정 전 분야에 걸쳐 그 폐단과 구제책을 체계적으로 논한 탁견에 가득 찬 명저다. 내용은 경연.전론.균전론.붕당론.논과거지폐 등 19개 항목으로 시급히 해결해야 할 각각의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본서는 모두 10권, 5편(천지문.만물문.인사문.경사문.시문문)으로 총 3057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1.<천지문>은 천문.지리에 관한 서술로서 해와 달, 별들, 바람과 비, 이슬과 서리, 조수, 역법과 산맥 및 옛 국가의 강역에 관한 것으로, 특히 서양기술의 정교성을 인식, 새로운 서양문물의 적극수용을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지구가 둥글다는 것과 단군과 기자조선의 강역이 요동지방까지 미쳤음을 논중하고,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민족과 국가에 대한 의식을 뚜렷이 하고 있다.

 2.<만물문>은 생활에 직접 간접으로 관련이 있는 복식.음식.농상.가축.화초 및 화폐와 도량형,병기에 서양기기등에 관한 서술이다.

 3.<인사문>은 정치와 제도, 사회와 경제,학문과 사상,인물과 사건 등을 폭넓게 다루고 있는데,노비제도 및 서얼차별제도의 폐지,과거제도의 개선,고리대의 근원인 화폐제도의 폐지등 현실문제에 대한 비판적.개혁적 내용을 담고 있다.

 4.<경사문>은 <육경사서>와 중국.한국역사서를 읽으면서 잘못 해석된 구체적인 내용과 그에 대한 자신의 견해.그리고 역사사실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붙인 사론이 실려 있다.

 5.<시문문>은 중국과 한국 역대문인의 시문에 대한 비평을 싣고 있다.


 <성호사설>에 나타나는 그의 전반적인 사상은 성호의 사상에서 살펴보았으므로 여기서는 그가 유난히 강조했던 당쟁문제에 관한 그의 견해를 <곽우록 붕당론>에서 살펴본다.

 당쟁에 대해서는 그 원인을 여러 가지로 말하는 경우가 많다. 인사권을 장악한 이조 전랑의 권한이 너무 커서 이 요직을 둘러싼 싸움이 불씨가 된다고 하는가 하면.주자학의 성격이 명분 실리를 내세워 남의 부정을 가려내는 데 준엄하여 융합의 기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는 등 다채롭다. 심지어 일인 어용학자들은 우리의 고유한 민족성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성호는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당파는 싸움에서 생기고 그 싸움은 이해에서 생기니 이해가 절실할수록 당파는 심해진다. 가령 열 사람이 모두 굶고 있는데 한상의 밥을 같이 먹게 되었다고 하자. 밥도 다 먹기 전에 반드시 싸움이 일어날 것이며, 왜 싸우느냐고 하면 건방졌다거나 손을 쳤다거니, 말이 불손했다거니 할 것이다. 그리하여 모르는 사람은 싸움이 말이나 손짓에서 비롯했다고 생각하나 실상 문제는 밥에 있는 것이다. 가령 그럴 때 여러 사람에게 각기 한 상 씩 각 상을 차려주면 의좋게 먹을 것이 아닌가. 요는 배고픈 사람은 많고 밥은 한 그릇밖에 없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며,싸움은 가지각색의 구실과 더불어 그칠 줄 모르는 것이다.

 당쟁의 시초는 한 사람의 선악, 한가지 일의 처리를 가지고 논하는 데서 비롯하여 당파가 대치하여 혈전을 벌이게 된다. 지금 정부에서 백관을 모아 인물이나 일의 시비를 묻는다면 각자 옳다고 생각하는 의견과 그르다고 생각하는 의견이 백출할 것이되 당파로 배척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면 어찌해서 당파가 생기는가? 그 원인은 1.과거를 너무 자주 보아 많은 사람을 급제시킨 것 2.벼슬에 오른 다음 인사처리에 있어 일정한 원칙이 없이 정실에 좌우되어 함부로 진퇴를 결정짓기 때문이다. 과거라는 것은 나라가 선비를 찾는 것이 아니고 선비가 벼슬을 하기 위한 것이다.과거 이외에도 조상의 덕으로 관직에 오르는 사람도 있어 벼슬하고자 하는 사람은 한없이 많은데 벼슬자리가 적고 보니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에 궁여지책으로 사람을 자꾸 바꾸어 번갈아 벼슬하게 했고 그 결과 좋은 자리에서 좌천되거나 또는 관직에서 파직되면 여기에 불만과 원망이 싹트게 마련이다. 중국에도 당쟁은 있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와 같이 2백여 년간에 걸쳐 갈수록 격화된 나라는 없다. 선조 이래 당파가 둘로 갈리더니 둘이 넷이 되고 넷이 다시 여덟이 되어 서로 역적으로 모함하는 혈전을 벌인 끝에 원한이 누적,세습되고 한 조정에서 벼슬하고 한 동리에서 살아도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도,혼인도 하지 않는다.  당파가 이렇게 심각한 양상을 띠게 된 것은 너무 많은 급제자를 뽑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해진 관직은 정승 3에 판서가 6이요 기타 벼슬도 한정되어 있으니 벼슬자리는 모자라게 될 것이며 그 결과 당파는 새로운 내분이 생긴다. 일단 당파가 갈리면 당인의 눈에는 자파의 이익만 있고 국리민복은 생각할 여유가 없으며, 당파를 위해 용감히 싸우다 죽는 자를 명절로 치고 공정한 입장을 취하는 자는 못났다고

하니 당쟁의 형세는 더욱 치열해가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책은 1.과거의 횟수를 줄이고 2.근무성적을 참작하여 무능한 자를 도태시키고 승진을 신중히 할 것 3.요직은 신중히 맡기고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오래 유임시키고 각자의 본분을 지키도록 할 것 등을 주장했다.

 이상의 것이 이 책에서 주장한 당쟁관이다. 당시의 정치내지 사회환경으로 보아 명철하고 정확한 주장이라 하겠다.


d.성호사상의 의의


 <성호사설>에 담긴 이익의 사상은 흔히  거대한 호수 에 비유된다. 성호의 학문은 유학에 기초를 두면서도 교조적인 주자학의 관념성을 극복하고 학문이 현실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경세치용의 입장을 견지했다. 이익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라 붕당문제에 대해 누구보다 관심을 표명했고, 그 원인에 대해 양반수와 관직수의 개념을 도입하여 양반도 생업에 종사해야 하며, 궁극적으로 양반과 노비 등 신분제가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자신이 피해자이기도 했던 그는 조금도 당파성이 없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당쟁을 논하고 있다. 그의 붕당론은 어릴 때부터 골똘하게 생각해온 당쟁관의 총결산이며, 당파를 초월하는 그의 양식과 우국심의 발로이자 실학정신의 정형이다.

 당시의 지식인은 관념의 세계에 빠지곤 했으나 성호는 평생을 농민과 함께 가난하게 생활했기때문에 누구보다도 농촌의 현실과 봉건제도의 모순을 잘 알고 있었다.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본 고리로서 토지문제 등 당면과제를 중심으로 전개했으나 그의 적극적이며 계몽적인 개혁사상은 정부에 수용되지 않았다.

 그는 천수를 누리는 중에도 가난 속에 살았지만 많은 제자를 기르고 방대한 저술을 남겨 우리 역사에 한 줄기 서광을 남겼다. 그의 80평생은 당대에 온갖 영화와 권세를 자랑하던 그 어떤 인물보다도 값지고 귀중한 것이었다. 그의 제세의 탁견은 살아서 햇빛을 보지 못했으나, 그의 민폐를 구하기 위한 실제적인 의견 및 모든 사회적 모순의 근본원인을 예리하고 정확하게 규명,지적한 것을 볼 때 이익이야말로 보기 드문 석학이었음을 느끼게 한다. 다만 그의 개혁이론이 봉건체제의 모순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고 온건하고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그의 사상의 한계를 지적받기도 하나, 그를 둘러싼 정치적 환경을 감안한다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僿 잘게 부술 사,잘게 부술 새  1. 잘게 부수다 2. 막다 3. 성의(誠意) 없다 4. 자질구레하다 a. 잘게 부수다 (새) b. 자질구레하다 (새) c. 무성의(無誠意) (새) [부수]亻(사람인변)



[實學 ]


a.정의


18세기를 전후하여 새롭게 나타난 범유학적(汎儒學的) 탈성리학(脫性理學的) 경향을 가진 사회개혁사상.


b.개설


오늘날 연구자들에 의해 제시되고 있는 실학의 개념은 실학의 발생배경이나 학파에 대한 이해, 또는 실학과 성리학, 실학과 개화사상에 대한 관계 설정의 특성에 따라 다양하게 규정되고 있다. 현재 학계 구성원의 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실학사상의 대체적 개념은, ’조선 후기 18세기를 전후하여 당시의 사회모순에 대한 반성의 결과로 새롭게 나타난 범유학적(汎儒學的) 탈성리학(脫性理學的) 경향을 가진 왕도정치론(王道政治論)의 일종으로서, 민본(民本)과 위민(爲民)을 주창한 전근대적 사회개혁사상의 일종”으로 규정될 수 있다.


c.실학사상의 출현과 전개과정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살펴 볼 때, 실학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시작한 때는 조선왕조의 성립을 전후한 시기였다. 이 때 자신의 학문을 실학이라고 생각하였던 대표적 인물들로는 이제현(李齊賢, 1287∼1367)과 정도전(鄭道傳, 1337∼1398) 그리고 권근(權近, 1352∼1409)을 들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새롭게 도입하고자 하던 성리학이 불교와는 비교할 바가 못 되고 훈고(訓詁)와 사장(詞章)에 치우친 한·당(漢唐)의 유학보다도 우월함을 인식하였다. 즉, 그들은 성리학이 인의충신(仁義忠信) 등의 수기(修己)로 인해서 한나라나 당나라 시대의 유학보다 ‘위기’(爲己)의 실효를 거둘 수 있는 학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충효를 비롯한 오륜과 육예(六禮) 학습을 통해서 불교보다 ‘제가·치국·평천하’의 실효를 더 거둘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성리학을 ‘실학’이라고 불렀다.


한편, 실학이라는 용어는 조선 중기 사회에서도 사용되고 있었다. 즉, 이황(李滉, 1501∼1570)이나 이이(李珥, 1536∼1584)도 수기안인(修己安人)의 설인 성리학을 실학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 성리학은 조선의 지도이념으로 확고히 자리 잡아갔다. 반면에, 조선 후기에 접어들어 예론을 전개하고 있던 윤증(尹拯)은 예학(禮學)을 실학이라고 인식하였다. 이처럼 조선왕조의 성리학자들은 대체로 주자(朱子, 朱熹)를 유일한 기준으로 삼아 유학을 해석하면서 자신의 학문체계를 ‘실학’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새로운 학풍의 맹아로서는 성리학의 대안으로 제시되었던 양명학을 우선 들 수 있다. 양명학은 성리학에의 비판의식과 관련하여 장유(張維, 1587∼1638), 최명길(崔鳴吉, 1586∼1647) 등에 의해 주목받은 바 있었고, 정제두(鄭齊斗, 1649∼1736)의 단계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연구되었다. 이들은 양명학을 인정하고 그 학문적 중요성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들의 학적 태도는 범유학의 입장에서 성리학과 구별되는 새로운 사상적 대안을 제시해보고자 한 노력으로서 평가할 수 있다.


한편 성리학이 가지고 있던 절대 권위에 대한 도전은 선진유학에 대한 연구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조선의 사상계에서 선진유학에 관심이 높아진 것은 17세기 이래 허목(許穆, 1595∼1682)을 비롯한 근기남인(近畿南人)의 학문연구를 통해서였다. 이러한 새로운 연구경향과 당시 사회의 내재적 요청, 그리고 외래의 문물에 자극 받아 실학사상이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지칭되는 사람들은 경세치용적(経世致用的) 학문을 강조하거나 자신의 저서에서 ‘실학’(實學)이라는 단어를 직접 구사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의 학문체계는 당대부터 ‘경세치용’의 학문으로 평가되어 왔다. 그리고 이익(李瀷, 1681∼1763)도 학문은 치국평천하(治国平天下)의 경세에 유용한 것을 지향해야 한다고 역설하였고, 자신이 직접 ‘실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은 ‘실학’이라는 단어를 구사하여 사장(詞章)과 기송(記誦) 그리고 훈고(訓詁)와 구별되며, 공리(功利)나 노장사상, 불교, 성리학 등과는 다른 학문체계를 제시하고자 하였다.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경우에도 농공상(農工商)의 이치를 포함하는 선비의 학문을 ‘실학’이라고 지칭하면서 농업이나 수공업,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일을 잘못하는 것은 사(士)에게 ‘실학’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한편,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그의 저서에서 ‘실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당대의 성리학을 ‘잡학’(雜學)이라고까지 폄하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치국안민(治國安民)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적(夷狄)을 물리치며 재용을 넉넉히 하고, 문장이나 행정실무에 뛰어나 어떠한 일이라도 잘 처리할 수 있는 인재의 양성을 주창하였다. 여기에서 정약용의 실학개념이 간접적으로 추출될 수 있다.


그리고 19세기의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경우에는 ‘실사구시’를 중시하는 학문태도를 강조하였다. 최한기(崔漢綺, 1803∼1879)는 사농공상에 걸친 실사(實事)를 실지(實地)로 탐구 실천할 것을 제창하면서 자신의 실학사상을 표현하였다. 이들은 대체적으로 주자(朱子) 유일기준을 거부하고 선진시대(先秦時代) 원초유학(原初儒學)의 입장에서 왕도정치론을 전개하였다. 우리 학계는 이러한 사례들과 그들의 특성 있는 연구경향에 입각하여 조선 후기 사상계의 변화 양상 가운데 그 왕도정치론의 조선적 변용을 ‘실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d.형성 배경


실학자들은 자신이 처해 있던 현실세계의 분석을 통해서 주자설에 입각한 성리학이 현실과 괴리된 것으로 판단하였다. 실학자들은 성리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왕도정치론을 존중하였지만, 여기에서도 그들은 주자 유일 기준을 거부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성리학에 대체될 수 있는 경세론으로 육경고학에 기초한 왕도정치론을 제시하였다.


조선 후기 사회에 이르러 성리학적 왕도정치론을 반대하고 실학적 왕도정치론이 제기된 데에는 일정한 배경이 있다. 즉, 실학사상의 등장 배경에는 조선 후기 사회의 해체가 강화되어 나가던 내재적 상황이 주된 역할을 담당하였고, 일부 외래적 요인도 함께 작용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실학’으로 규정하고 있는 사상의 경향에 대해 학문적으로 관심이 표시되기 시작하였던 식민지시대에는 이 사상의 형성 배경으로 청조 문물의 수용이나 서학의 전래와 같은 외래적 요인들을 주로 주목하였다.


그후 ‘실학’의 개념을 정립시켰던 해방 직후의 학계에서는 대부분이 식민사관 극복론과 민족사에 대한 주체적 인식 논리에 따라 내재적 발전론의 입장에서 실학의 발생원인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이르러 실학발생의 원인에 대한 재검토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실학 발생의 내재적 요인과 함께 외래적 요인에 대한 균형적 인식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주체적 인식을 강조하기 위해서 외래적 요인의 인정을 거부하려는 경향을 경계하였으며, 주체성의 문제는 수용의 태도나 방법에 관한 문제이지 외국의 영향을 받았는지 여부에 대한 결과의 문제가 아님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한 민족의 역사는 그 민족의 자생적 능력에 의해서 추진되고 전개되는 것이지만 밖으로부터의 외적 변수나 요인이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 제시되었다.


기존의 연구성과들을 기초로 하여 실학사상 발생의 원인에 대해서 검토해 보면 다음과 같다.


내재적 배경

실학사상 발달의 내재적 요인으로는 우선 조선 후기 사회의 경제적 변화와 발전 현상을 주목할 수 있다. 17∼18세기 이래의 농촌 사회에는 커다란 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일부 대토지 소유자에 의해 토지 겸병이 확대되고 그에 따라 대다수의 농민은 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아니면 토지를 잃고 농촌을 떠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와 함께, 또 다른 한편에서는 소작 경영이나 상업적 농업을 통해 부를 축적해 가는 경영형부농(經營型富農)이나 서민지주(庶民地主)가 나타나고 있었다. 이는 곧 농민층 분해 현상의 집중적이고 구체적인 표현이었다.


실학은 이러한 농민층 분해과정에서 이에 대한 대안적 사상으로 형성되었다. 여기에서 실학자들은 농민층 분해의 여러 방향에 따라 각기 다르게 자신의 개혁안을 구상하였던 것이다. 일부 실학자들은 농민분해 현상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서 상업적 농업경영자 및 일부 성장하고 있는 부농층의 처지를 대변하였고, 또다른 사상가들은 토지에서 이탈된 빈농들에 대한 대안을 마련해 보고자 하였다. 또 한편에서는 지주적 토지소유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지주의 토지 소유 자체는 인정하고 경영의 전환과 소작 조건의 개선방안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양란 이후 상품화폐경제의 발전 역시 실학사상의 발생에 있어서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특히 18세기 이후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의 과정에서 서울이 상업도시적 양상을 짙게 띠게 되자 이에 영향을 받은 일군의 실학자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상업과 수공업에서 새로운 동향을 주목하면서 18세기 이후 서울의 도시적 분위기에 걸맞은 유통을 중시하는 경세론을 펴게 되었다.


이와 함께 조선 후기의 사회계급적 변동 역시 실학 발달의 원인으로 들 수 있다. 전쟁 후의 조선 사회는 중세적 신분질서가 비교적 폭넓게 붕괴되어갔고, 그것은 대체로 양반의 일부와 대다수의 농민층이 경제적으로 몰락해 가는 하향방향과 서민층의 일부가 신분상승을 성취하는 상향방향으로 나타났다. 이런 변화에 직면한 일부 진보성향의 사상가들은 사회적으로 하향과정에 놓여있는 양반층의 생계대책과 함께 상향과정에 들어선 서민층의 이익을 보장하는 문제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실학자들은 사회현상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대책을 모색하였고, 이를 통하여 의 개혁적 실학사상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 실학사상이 성립하게 된 또 다른 배경으로는 성리학을 본위로 한 조선 사상계의 지형이 바뀌고 있었던 점을 주목할 수 있다. 성리학은 15세기 조선왕조의 사회질서를 수립하고 이를 유지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근간이 되던 사상이었다. 성리학은 조선 후기 사회에서도 조선왕조의 대표적 사유형태였으며, 경세론으로 의연히 작용하고 있었다. 더욱이 양란 후의 조선왕조 사회는 모든 분야에 걸쳐 그 부조리가 드러나고 변화의 조짐이 나타남에 따라 전면적이고 본질적인 개혁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에 이르러서 조선의 사상계에서 성리학의 학풍을 추구하면서도 주자 유일 기준의 입장을 벗어나서 새로운 기준에 입각한 학문경향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한백겸(韓百謙), 이수광 등으로 대표되는 이러한 경향의 학인들은 당시 성리학계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던 주자를 유일한 기준으로 삼아 공허한 논의가 성행하고 있던 상황에 대해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권득기(權得己, 1570∼1622) 및 권시(權諰, 1604∼1672) 부자나 허목의 경우에도 주자 유일 기준을 거부하고 있었다. 특히 허목의 경우에는 고문 고학을 존중하며 주자 주소의 번잡함과 폐쇄성을 탈피하여 육경을 중시하는 원초유학의 체제로 복귀하고자 하였다. 이들의 사상은 상술한 바와 같이 17세기에 이르러 새로운 상황으로 전개되어 나갔다.


이에 그들은 성리학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하여 선진시대의 원초유학으로 돌아가 왕도정치론의 견지에서 새로운 개혁안을 모색해 냈다. 그 결과 조선 후기 사회에서는 성리학적 학문체계에서 벗어난 새로운 학풍이 형성되어 갔고, 여기에서 탈성리학적, 원초유학적 입장에서 제시된 개혁사상인 실학사상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18세기에 후반기에 이르러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사회질서가 동요되던 당시의 사상계에서도 동일하게 드러났다. 그리하여 경화사족을 중심으로 한 경화학계 일각에서는 기존의 성리학적 의리지학을 반성하는 새로운 학문적 지향이 제기되었다.


이렇게 성리학의 자기극복과정에서 실학이 나타나게 된 것은 실학자 대부분이 성리학적 지식을 기본 교양으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학자들은 상술한 바와 같이 적극적으로 성리학을 부정하거나 거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 당시의 실학자들은 기득권을 장악하고 있던 성리학자들과 본격적인 갈등이나 대립을 겪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시대의 권력구조와 사회질서와 문화전통의 해석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여 전면적으로 반성 비판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이 때문에 실학사상은 조선 후기라는 중세사회 해체기에 등장한 이상사회의 중세적 재건논리였다는 특성에만 머물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실학사상 발달의 내재적 요인으로는 전쟁 후의 조선왕조 사회가 직면하고 있었던 통치질서의 경직화 현상을 들수 있다. 전쟁 후의 조선 사회에는 새로운 왕조적 통치질서가 요청되었으나 성리학적 왕도정치론에 침잠되어 있던 집권세력들은 폭 넓은 통치질서 방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다만 소변통론(小變通論)의 입장에서 보완적 대책을 세우는 데 한정되어 있을 뿐 이었다. 그러나 일부 진보적 관료와 재야 지식인들은 민생을 안정시킬 방안을 강구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16세기말 이이가 제시한 바와 같은 무실론, 즉 현실개혁론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주자 유일의 기준이 아닌 원초유학의 입장에 선 무실론을 전개하였고, 그것을 다시 발전시켜 독자적인 학문영역으로 성립시켜 나갔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에게 있어서 왕조 전기의 과학부문의 업적이나 무실론으로 대표되는 경세적 학풍들은 참고된 바가 적지 않았다.


외래적 요인

실학사상의 발달에는 내재적 요인과 함께 국제정세의 변동과 이 시기에 전래된 서학(西學) 및 청대 학문의 영향도 일정하게 작용하였다. 여기에서는 먼저 국제정세의 변동 가운데는 조선과 청이 맺고 있던 관계를 주목해 보고자 한다. 즉, 조선은 17세기 전반기 병자호란의 과정에서 참패를 당하였고, 이를 만회하기 위한 노력을 여러 측면에서 전개해 갔다. 또한 대륙에서도 명청의 교체가 일어나, 만이(蠻夷)였던 청이 중국의 정통을 이어받게 되었다.


이와 같이 새롭게 전개된 일련의 상황에서 조선의 사상계에서는 전통적인 정통론과 화이론(華夷論)에 대한 재검토 작업의 과정에서 조선중화주의(朝鮮中心主義)가 일어나서 소중화론(小中華論) 혹은 소화론(小華論)을 제시하게 되었다. 이 주장은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당시의 현실을 중화가 이미 소멸된 상황으로 규정하였던 사실을 전제로 하여야 올바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성리학을 기준으로 한 왕도정치론의 입장에서 조선만이 중화문화의 정수를 보존하고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조선의 학계가 다시 중국에 이를 전수시켜 주어야 할 책임을 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였다. 국제정세의 변동으로 인해서 초래된 이와 같은 조선중심주의적 사고방법의 출현은 실학자들의 자아각성에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실학자들의 경우에서도 정통론과 화이론의 재검토 작업이 진행되었고, 이 재검토 작업은 실학자 자신의 사상이 새롭게 정립되는 데에 적극적으로 기여하였다.


한편, 당시 국제정세의 변동은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현상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서세동점의 결과로 중국에 전해진 서학사상은 조선에도 전파되었다. 그리고 17세기 이래 중국에서 간행된 각종 한문 서학서들 가운데 상당수가 조선에 전래되어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읽히고 있었다. 이때 전해진 서학서 가운데에는 천주교 사상을 논하는 서적과 함께 수학, 천문학, 농학, 측량, 지도와 같은 과학기술 계통의 서적이 있었다.


한문 서학서를 통해 실학자들에 흡수된 서학의 종교사상은 그들의 철학적 사유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조선 후기 서학사상을 수용한 지식인층은 대체로 성리학에 대해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선진유학에 기초하여 원초유학적 입장에서 성리학적 가치체계를 변혁시켜 보려던 인물들이었다. 이러한 그들은 당시의 학문풍토가 지니고 있던 사변적 경향과 관련하여 한문 서학서 가운데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는 리편(理篇)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서 주로 논하고 있던 내용은 원초유학의 신관(神觀)에 대한 수용을 뜻하는 보유론적(補儒論的) 천주교 신앙이었다. 보유론은 서학이 유학에 대립되는 사상이 아니라 유학의 부족한 점을 보충해준다는 이론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이 기초하고 있던 원초유학적 입장을 포기하지 않고서도 서학에 접근할 수 있었다. 즉, 그들이 원초유학의 틀을 빌려 자신의 교리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던 서학에 접근할 수 있었던 까닭은 심성론을 비롯한 그들의 사상이 이미 성리학적 사상의 틀을 떠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서학서에서 논의하는 인간관 등의 개념을 원용하여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켜 나가기도 하였다. 그들은 선진유학의 재검토를 기초로 하여 성리학의 사상체계를 개혁하고자 시도하였고, 여기에서 그들은 서학 자체도 변혁의 이념으로 파악하고 이를 연구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서학은 실학이 성리학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사상체계로 발전하는 데에 일정한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또한 서학의 과학기술에 대한 이론들도 실학자들의 사상 형성 및 과학연구에 자극을 주었다. 실학자들은 서학의 자극을 받으며 천문학과 지리학 혹은 기하학 등의 연구에 박차를 가하기도 하였다. 서양의 과학기술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자는 주장도 제기됐으며, 서학서의 이론을 직접 적용하여 거중기(擧重機)와 같은 실용적인 토목공사용 기계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서양 천문학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면서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는 인식이 확대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학문의 관심이 조선과 조선 문화로 돌려질 수 있었다.


즉, 실학이 조선중심적인 사유체계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에는 서양 천문학의 영향으로 인한 지식의 확대가 중요한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명말·청초 중국의 실학적 학풍과 청대의 고증학도 조선 후기 실학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황종희(黃宗羲), 고염무(顧炎武), 왕부지(王夫之), 안원(顔元) 등에 의해 제시되었던 명말·청초의 학술 사상에서는 일종의 ‘민족의식’과 ‘민본의식’ 그리고 ‘현실개혁 의식’이 강하게 나타나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학문 경향에서 등장하는 개혁적 이상은 청조 지배층의 의도적 왜곡작업으로 인해 변질되었다. 그 개혁적 이상이 거세되고 고증학으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18세기 후반기 이후에 활동하였던 조선 실학자들은 명말 청초의 사상을 통해 자신의 개혁이념을 가꾸어 나갔다. 한편 청조의 고증학(考證學)도 조선 후기의 일부 실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청조 고증학의 영향을 받은 실학자로는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 정약용, 김정희, 이규경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정약용이 청대 고증학에 대해 동조하기보다는 오히려 냉담하기조차 하였던 사례에서 드러나듯이 조선 후기 실학에 미친 청대 고증학의 영향은 상당히 제한적인 것이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조선 후기의 실학은 고증학보다 명말·청초의 학문 경향에 좀더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e.실학사상의 특성


조선 후기 실학사상이 가지고 있는 첫 번째 특성으로는 탈성리학적 사상이라는 점이다. 탈성리학적 사상은 주자(朱子) 즉 주희(朱熹)의 가르침을 유일한 근거로 하여 유교경전을 해석해왔던 조선 성리학의 관행을 거부하고, 경전의 해석에 새로운 기준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물론 실학자들도 주희의 학문적 권위를 명시적으로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유학의 해석에 있어서 적용되어 오던 주희에 대한 맹종적 태도를 배격하였고, 그의 경전 해석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이 탈성리학적 경향은 송명(宋明) 이학(理學)의 전통을 이어받아 조선 성리학의 이념을 극복하고, 선진유학을 기초로 하여 새로운 사유체계를 형성해보려던 노력의 결과로 해석되기도 하였다. 이 경향은 허목(許穆)이나 이수광(李睟光) 단계에서부터 이미 드러난다. 또한 정약용은 성리학의 기질지성(氣質之性)에 대한 해석을 새롭게하여 기질을 선천적 제약으로 해석하였던 성리학의 입장을 거부하고, 새로운 인간관을 제시하였다. 그는 인간을 일하자아의 주체적 자율경향을 가진 존재로 새롭게 규정하였다.


즉, 실학자들은 주자주(朱子註)를 기준으로 한 성리학의 유학 해석방법을 벗어나서 새로운 철학을 구성해갔다. 이렇게 구성되어 간 철학이 탈성리학적 철학이었다. 이들은 탈성리학적, 원초유학적 입장에서 왕도정치론(王道政治論)을 제기하면서 변법적(變法的) 개혁을 추진하려던 국가재조(国家再造)의 사상을 제기하였다. 이 학인들의 사상을 뒷날 ‘조선 후기의 실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실학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두 번째의 특성은 그 연구방법론에서 드러난다. 즉 그들은 성리학에서 취하고 있던 학문연구 방법론을 비판 극복하기 위해서 원초유학의 방법론을 수용하였다. 원초유학의 방법론은 사변적이거나 심오한 것에 매달리지 않고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실제성(実際性)을 위주로 하여 학문을 연구하였다. 실학자들은 이 원초유학의 학문방법론의 회복을 주장하였다.


실학은 백과전서적 학문경향을 가지고 있으므로 실학의 연구분야는 매우 다양하다. 우선 실학은 이기(理氣) 심성(心性) 등에 관한 철학적 탐구를 시도하였다. 여기에서 그들은 조선 성리학과는 구별되는 견해에 도달할 수 있었고, 이에 근거하여 인간과 세계와 자연을 보는 새로운 안목을 키울 수 있었다. 또한 실학은 왕도정치론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갖고 연구해 나갔다. 실학은 성리학과는 구별되는 원초유학에 입각하여 왕도정치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그들이 왕도정치론을 개진해 나가던 시점은 조선 후기 중세사회 해체기였다. 그들은 이 해제기적 양상으로 각 분야에서 드러나고 있던 비리와 모순을 개혁하고 경색된 현실을 타개하여, 유교적 이상사회를 구현하려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를 위한 구체적 방법으로 각 분야를 개혁하고자 하는 과제들을 검토하였다. 이와 같은 탈성리학적 사고방식과 원초유학적 연구방법론을 통해서 실학은 자신의 개혁안에 있어서 기본이 되는 왕도정치론과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제시해 주었다. 우선 그들은 중국 고대의 삼대(三代)를 왕도정치가 구현된 이상세계로 규정하고, 이를 모범으로 삼아 조선 후기 사회의 모순을 근원적으로 극복하고자 하였다.


즉, 실학은 현실의 국가체제를 개혁하여 궁극적으로 왕도정치를 실현한다는 이상을 추구하였다. 그들의 왕도정치론은 현실의 모순을 개혁하고 경색된 현실의 타개를 주장하는 개혁론적 사상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실학에서는 왕도정치를 현실사회에서 구현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들을 모색해 나갔다. 여기에서 그들은 성리학적 왕도정치론과는 입장을 달리해서, 왕도(王道)의 기준을 인의(仁義)와 같은 도덕적 요소에 설정하기보다는 현실의 개혁을 통한 ‘안인’(安人)에 설정하였다. 실학자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던 조선왕조의 현실이 전쟁을 치른 직후나 마찬가지로 일대 변혁이 요청되는 상황으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국가를 재조(再造)하는 방략을 포기할 수 없었다.


한편, 실학사상의 또 다른 특성으로는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들 수 있다. 당시 조선 성리학은 인간의 심(心)에 관한 문제를 중요시하는 심학(心学)의 경향을 취하고 있었다. 실학도 당시 사상계의 경향에 따라 이기심성론(理気心性論)에 대한 연구를 진행시켜 나갔다. 그 결과 일단의 실학자들은 성리학과 다른 입장에서 심성론을 제기해 나갔고, 이를 통해 인간과 세계와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도달하였다.


성리학과 실학의 심성론에서 드러나는 차이는 상당히 큰 것이었다. 성리학적 심성론의 대표적 이론가인 이황(李滉)이나 이이(李珥)는 기질지성(気質之性)의 선천적 규정성을 매우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선천적 기(気)의 차이에 따라서 인간은 이미 귀천과 현우(賢愚) 그리고 선악을 규정받고 태어나는 존재로 해석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태어난 인간의 숙명을 변화시키기란 어려운 것으로 주장되었다.


그 결과는 세계 만물 가운데 인간이 갖는 독자성이나 자율성이 왜소화되는 논리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실학자들은 대체적으로 인간이 선천적 ‘기질지성’에 구애되는 것을 부인하고 스스로 주체적 사유를 할 수 있는 존재로 규정하였다. 실학은 인간의 심(心)이 활성(活性)인 것임을 강조하였고, 인간의 본질을 성(性)이 아니라 심(心)으로 인식해 갔다. 이 과정에서 실학의 인간관은 인성이 선(善)으로 정향(定向)되었다고 단정하는 성리학적 도덕률의 허구성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킬 수 있었다.


실학에서는 인간의 심(心)은 모든 이치를 깨달을 수 있는 영명성(靈明性)과 스스로 선악을 행할 수 있는 자율성(自律性)을 타고났다는 새로운 인간관을 제시하였다. 여기에서 인간의 자율과 각자의 책임 및 역할에 대한 분명한 인식도 가능하게 되었다. 실학자들은 이와 같은 재해석을 근거로 인간과 자연에 대한 독자적 이해에 도달하였고, 백성을 본위로 하는 새로운 개혁론을 제기하게 되었다.


f.실학의 연구 분야


실학은 이와 같은 새로운 철학과 왕도정치론을 총론으로 삼아 분야별 각론을 전개하였다. 실학의 각론에서는 첫 번째로 조선의 존재와 전통에 관한 문제를 들 수 있다.


우선 실학자들은 민족의 역사적 전통에 대해 관심을 쏟았으며, 자신이 제시하는 개혁안의 원리도 지난날의 역사 경험을 통해서 검증해보고자 하였다. 그들에 있어서 역사란 조선의 주체적 인식을 위한 도구였고, 자신의 개혁안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게 해주는 스승이었다. 그들은 역사를 성리학과 구별되는 독자적 학문체제로 인식하였고, 역사의 원동력이 무엇인지를 찾아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역사의 원동력으로 성리학적 윤리성를 거부하고 지리를 주목하거나 시세(時勢)를 논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들은 역사의 인식 대상을 서민층에 이르기까지 확대하였으며, 우리의 고대사에서부터 당대사에 이르기까지 그 인식의 시대적 범위를 확대시켜 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역사연구에 있어서 사료비판의 중요성을 논하기도 하였다. 한편 그들은 민족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역사지리와 인문지리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세시풍속(歲時風俗)을 비롯한 민속에 관해서도 조사와 연구를 진행시켰다.


실학자들은 민족의 존재를 확인하면서 전통적 화이관(華夷観)의 극복을 시도하였다. 여기에서 그들은 중국과는 구별되는 자아(自我)에 대한 인식을 강화시키게 되었다. 그들은 조선의 존재 자체를 정확히 이해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어와 문학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을 비롯한 민속에 관해서도 애정을 가지고 조사와 연구를 진행시켰다.


그들은 역사지리와 인문지리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조선의 역사적 전통에 대해 관심을 쏟았으며, 자신이 제시하는 개혁안의 원리도 지난날의 역사 경험을 통해서 검증해보고자 하였다. 그들에 있어서 역사란 조선의 주체적 인식을 위한 도구였고, 자신의 개혁안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게 해주는 스승이었다.


실학의 각론에서 두 번째로 지적할 수 있는 분야는 정치제도의 개혁에 관한 문제들이다. 실학자들은 왕도정치론에 관한 성찰을 통해서 군신간(君臣間)의 관계를 새롭게 확인하고자 하였다. 국정의 각 분야에 관한 연구에 힘을 기울여서 국가의 제도 개혁에 관한 문제를 논하였다. 수취 체제의 개편에 관한 광범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과거제도 등 관리 임용 방법의 개선책을 논하였다. 그들은 군사제도의 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실학의 각론에서 세 번째로는 현실 개혁을 위한 사회 경제적 문제들을 주목할 수 있다. 실학사상을 낳게 한 것은 조선 후기의 역사적 현실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실학자들은 농촌의 피폐상을 극복하기 위해 토지제도 및 농업경영의 개선책을 모색하였다.


그리고 농업생산력의 발전을 촉진시키기 위한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상공업의 발전을 위한 개선안을 내놓았다. 그들은 부당한 수취체제의 문란상을 바로 잡고자 노력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전통적 신분제도의 모순을 극복해보고자 노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들의 노력은 ‘신아구방’(新我旧邦 ; 묵은 우리나라를 새롭게 하자)라는 말 한 마디로 집약될 수 있을 것이다.


실학의 네 번째 연구분야로는 자연과학과 기술과학을 들 수 있다. 실학자들은 자연의 논리와 인간의 논리가 가지고 있는 차이점에 대해 연구하였고, 자연에 대한 과학적 관찰과 연구를 지속하였다.


실학자들은 자연의 논리와 인간의 논리를 구별하는 객관적 자연관에 입각하고자 노력한 측면이 있었다. 그리하여 일부 실학자들은 자연을 객관적인 순수존재로 파악하고 자연에 대한 과학적 관찰과 연구를 지속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농민을 중심으로 한 민중생활에 직접 관심을 가지고 농업기술의 혁신에 관해서 연구하였다. 또한 동시에 그들은 새로운 광업기술이나 공학 기술의 도입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실학의 연구 분야 가운데 다섯 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새로운 철학 연구이다. 그들은 새로운 개혁의 이념을 제시할 수 있는 철학적 기반을 정립해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실천윤리를 정립하기 위한 목적에서 철학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유학에 대한 주자(朱子)의 해석에 만족하지 않고 유학사상을 새롭게 정립하고자 하는 주체적 노력을 전개하였다. 그들의 철학에서는 성리학이 가지고 있던 절대적 권위에 대한 도전과 새로운 사회에 걸맞는 사유의 방법을 제시하고자 하는 노력이 드러나고 있다.


g.실학사상의 유형


실학사상은 그 성행하던 당시 실학사상가들이 뚜렷한 연대의식을 갖고 특정 학파를 표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사상에서는 상호 유사성이 드러난다. 이 때문에 후대의 연구자들은 실학사상의 유형화 작업을 시도하게 되었다.


한편 실학의 유형화를 위해서는 실학사상의 상한과 하한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런데 일부 연구자들은 실학의 상한을 15세기 초엽으로 잡는 경우도 있고, 16세기 중엽에 실학사상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일부 연구자들은 그 형성의 시기를 17세기의 초엽이나 중엽으로 주장하기도 하며 실학사상은 18세기 후엽에 등장한 북학사상 만으로 제한해야 함을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견해 가운데 오늘날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17세기 중엽에 살았던 유형원 이후부터를 실학사상의 발흥기로 보려는 경향이 강하고 최근에 이르러서는 18세기 후반기 설이 새롭게 제시되고 있다.


이와 같은 실학발생 시기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하여 실학의 유형을 구분하는 여러 시도들을 검토해야 한다. 이러한 시도 가운데 첫번째의 것으로는 실학의 시간적 전개과정에 따른 분류를 우선 들 수 있다. 예를 들면 천관우는 실학사상을 준비기(16세기 중엽∼17세기 중엽), 맹아기(17세기 중엽∼18세기 중엽), 전성기(18세기 중엽∼19세기 중엽)으로 나누어 실학을 관찰한 바 있다.그는 실학이 시대에 따라 달리 드러내는 특성을 기준으로 하여 실학의 분류를 시도하였다.


그리고 조기준(趙璣濬)은 실학의 전개 시기와 사회경제적 배경을 연결하여 실학의 분류를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실학을 봉건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실학(17세기 초), 과도기의 실학(17세기 중엽∼18세기 중엽), 시민계급을 대변하는 실학(18세기 말∼19세기 중엽), 전환기의 실학(19세기 말∼20세기 초)으로 분류한 바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실학이라는 동일한 용어 안에 봉건적 이데올로기로부터 시민계급의 근대사상까지가 함께 포괄되는 무리한 측면이 노정되고 있다.


한편 이우성(李佑成)은 실학의 시기적 전개과정에서 드러나는 특성에 주목하여 이를 분류하기도 하였다. 즉 실학사상은 경세치용학파(經世致用學派, 18세기 전반),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 18세기 후반) 그리고 실사구시학파(實事求是學派, 19세기 전반) 등으로 실학사상을 분류하였다.


한편 실학사상의 유형화에는 그 인적(人的) 계보를 중시한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성호(星湖) 이익의 문하를 짗칭하여 성호학파(星湖學派)라는 실학의 유형을 설정하기도 한다. 또한 실학사상이 발생한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그 사상의 유형화를 시도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근기학파(近畿學派), 강화학파(江華學派) 혹은 호남학파(湖南學派) 등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인적 유대 관계나 지역적 연대를 기초로 하여 실학사상을 유형화하는 데에는 한계가 크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실학사상의 학문적 특성과 관련하여 이를 분류하고자 하는 시도가 나타났다. 그리하여 중농학파, 중상학파 등의 개념이 차용되어 실학의 분류작업이 시도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토지제도 및 향정기구의 개편 문제를 그 주요 연구대상으로 삼았던 경세치용학파, 상공업의 발전문제와 기술부분의 혁신에 연구의 촛점을 두었던 이용후생학파, 그리고 경서(經書) 및 금석문(金石文)과 고전에 대한 고증을 위주로 하였던 실사구시학파 등의 분류도, 그 분류의 타당성 여부를 차치한다 하더라도, 학문적 성격과 일정한 관련을 가진 분류로 생각된다.


한편 최근의 북학파에 대한 주목도 그 북학이라는 사상의 탈성리학적(脫性理學的), 청조문화(淸朝文化) 수용적 경향 등을 기준으로 하여 분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h.실학연구의 과정


조선 후기의 ‘실학’에 대한 연구는 개항기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실학사상에 대한 연구가 시도되기 시작한 시점은 개항기를 들 수 있다. 이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은 국가적 위기 탈출의 방략을 마련하고 개항에 주체적으로 대응하는 길을 모색하던 과정에서 ‘조선 후기 사상계의 개혁적 인물’에 대해 일정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 구체적 사례로는 당시 신헌(申櫶)이나 강위(姜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조선 후기 개혁적 인물과 사상의 존재를 인지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던 시대의 격랑을 헤쳐가는 구국의 방략으로 삼고자 하였다. 여기에서 조선 후기 실학자에 대한 관심이 비로소 싹트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개항기 실학에 대한 관심은 1890년대 후반에 이르러 좀더 분명히 나타났다. 그 사례로 『황성신문(皇城新聞)』은 1899년에 두 차례에 걸쳐 정약용을 우리나라 ‘경제학의 큰 선생’으로 소개한 바 있었다. 그리고 조선 후기의 개혁적 인물들에 대한 관심이 국사교과서를 중심으로 하여 좀더 자주 나타나게 되었다. 이들을 경세가(經世家)나 경제가(經濟家)로 직접 지칭함으로써 그 개혁사상의 성격을 규정하고, 이를 구체적으로 개념화하려는 시도가 일어났다. 또한 1905년의 ‘을사조약’ 내지는 1907년 ‘정미7조약’이 체결된 이후에 지식인들 가운데 일부는 유교구신적(儒敎救新的) 차원에서 ‘실지학문’을 보국(保國)의 방략으로 생각하였고, 조선 후기의 ‘경세가’나 ‘경제선생’에 관한 연구를 통해서 국권회복의 길을 찾아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경향은 당시 사상계나 학계의 전반에 걸쳐서 드러나는 지배적 현상은 아니었고, 일부 선각적 개신유학 계열의 인물에 의해 제시된 소수의견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당시에 진행된 ‘조선 후기 사상계의 개혁적 경향’에 대한 언급을 통해서 애국주의 내지는 민족주의적 측면에서 조선 후기의 경세가들이 논의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된다.


조선왕조는 1910년 ‘한일합방’을 통해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식민지시대에 접어든 이후, 실학에 관한 연구 과정에서는 대략 세 가지의 주목할만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즉, 첫 번째로는 식민지 조선의 연구자들은 개항기의 연구를 이어받아 조선 후기의 개혁적 학풍에 대한 연구를 강화시켜 나갔다. 그리하여 그들은 조선 후기 개혁사상의 존재를 거듭 확인하면서 개혁적 인물들에 대한 인식의 범위와 이해의 깊이를 확대 심화시켜 갔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그 개혁사상의 성격에 대한 구체적 관심이 표출되었고, 이를 개념화하기 위한 노력이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1923년 최남선(崔南善) 단계에 이르러 조선 후기의 개혁적 학풍을 ‘실학’이란 용어로 설명하게 되었다. 최남선은 실학이란 단어를 서술어가 아닌 명사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최남선은 학문적 개념을 가진 실학이란 명사의 개발자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실학’이라는 용어는 당시 학계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얻지는 못 하였다. 그래서 당시의 연구자들은 이 학풍을 여전히 ‘실제에 근거를 두어 독자성을 구하려는 학문’(依實求獨之學) 혹은 ‘실사구시의 학’, ‘조선경제학파’ 등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 사상계의 개혁적 경향을 비로소 ‘실학’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 이르렀다. 당시의 연구자들을 실학으로 범주화하여 이에 특정 개념을 부여해 보고자 시도하였다.


한편, 식민지 시대 조선의 학계에서는 세 번째로 조선 후기의 개혁적 사상인 ‘실학’을 하나의 학파로 설정하여 계보화하여 인식해 보고자 노력하였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세 가지의 현상은 축차적으로 일어났던 일이 아니라 동시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식민지시대에 진행된 이와 같은 경향은 조선의 지식인들이 식민지화라는 정치적 좌절을 겪은 이후 민족문화의 우월성에 대한 자부심을 강화해 나가려던 노력의 표현이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조선 후기의 개혁적 사상에 대한 존재확인과 함께 개념화 및 계보화 작업이 진행되어 갔다.


식민지 시대 실학연구에 있어서 또 다른 분기점으로는 1934년에 진행된 ‘다산서세백주년기념’(茶山逝世百周年紀念) 사업을 들 수 있다. 이 사업은 조선 독립을 위한 좌우합작 기구였던 신간회가 해체된 이후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이 중심이 되어 전개한 문화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과정에서 조선 후기의 대표적 실학자인 정약용의 『여유당전서』가 간행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정약용을 비롯한 조선 후기의 개혁사상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강화되었다. 문화적 민족주의 운동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던 이 운동의 중심적 인물은 정인보(鄭寅普), 안재홍(安在鴻) 등이었다. 정인보는 정약용이 그 사상의 종지(宗旨)를 ‘묵은 우리나라를 새롭게 하자’(新我舊邦)에 두고 있음을 말하면서 조선사회의 혁신책을 제시하기 위해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도였다고 평가하였다.


특히, 식민지 시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 계열에 속하는 백남운(白南雲, 1895∼1979)은 이를 ’봉건적 쇄국주의의 계급적 양반의 도(道)에 대한 반항의식의 발로인 동시에 인인애(隣人愛)와 자유사상의 동경에서 나온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는 정약용을 ‘근세적 자유주의의 일 선구’라고 하면서도 ’아직은 봉건사상을 완전히 해탈한 것도, 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제창한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그 사상의 과도적 성격을 지적하였다. 한편, 이청원(李淸源)은 이 새로운 ’아세아적 전제국가 하에서의 소농민의 공동체적 생활을 재건하려는 것”으로 규정하여, ‘실학’을 조선 후기 봉건국가의 재건 논리의 하나로 파악하였다.


한편, 민족주의 계통의 역사연구자들 가운데 최익한(崔益翰)과 안재홍(安在鴻, 1891∼1965)은 조선 후기의 새로운 학풍에 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즉, 최익한은 정약용에 대한 연구과정에서 그를 룻소(J. J. Rousseau, 1712∼1778)나 벤담(J. Bentham, 1748∼1832) 등 유럽 근대의 사상가들과 비교하여 그의 근대성을 인정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정약용의 사상은 ’종래 계급의 반성적 요구를 반영하는 것이지 신흥계급의 대표로서의 사상체계는 아니다”라고 규정하였다.


반면에 안재홍은 정약용에 대한 적극적 평가를 시도하였다. 즉 그는 정약용이 중국에 대한 독립적 자존의식을 가진 ‘근대 국민주의의 선구’이며, 계급타파와 평등론을 제시하여 ‘근대 자유주의의 개조(開祖)’가 되었다고 이해하였다. 그는 정약용의 사상을 ‘일종의 국가적 사회민주주의’로 규정하기도 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30년대에 있어서 ‘실학’은 ‘민족문화의 우수성’ 내지는 ‘민족적 자주성’을 확인하기 위한 민족문화 재건의 논리에 입각하여 연구되었다. 비록 이 시기의 ‘실학‘ 연구는 그 범위와 대상이 매우 제한되어 있었고, 이에 관한 본격적 연구 성과도 미진한 편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일본인 연구자들에 의해 조선에서 독자적 사상이 존재한다는 사실마저 부인되던 당시의 상황을 감안할 때, 이들의 연구와 주장은 민족문화의 전통을 밝히는 데에 있어서 매우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한편, 한국역사에 있어서 현대는 일반적으로 1945년 해방 이후 오늘에 이르는 시대를 말한다. 바로 이 현대라는 시점에서 실학은 본격적으로 연구되기에 이르렀다. 해방 직후부터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이 와중에서도 남북한은 모두 민족문화 재건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통해 철저히 파괴된 민족의 문화를 다시 세워서 신생 독립국가의 기초를 다지려던 노력이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 남한에서는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하여 낙후된 사회의 발전을 위해 근대화를 강력히 추진해 갔다. 그리고 북한에서는 인민민주주의의 기초를 다지기 위한 노력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현실적 과제는 역사연구에 있어서도 투영되었고, 남북한의 연구자들은 특히 1950년대 후반기에 이르러 앞 단계의 연구를 이어받아 조선 후기의 사상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를 전개해 나갔다. 이들은 각기 상이한 역사관을 가지고 사상사의 연구에 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는 남북한의 학계가 모두 일본의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내재적 발전론을 강하게 주장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이러한 학문적 분위기와 관련하여 조선 후기 사회경제사 분야에 있어서 자생적 발전상이 속속 연구되었다. 그리고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적 발전을 반영하거나, 혹은 그 발전을 촉진시킨 사상의 존재 여부를 검증하기 위한 노력이 일어났다. 여기에서 실학사상이 주목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이 당시 실학연구에는 이와 같은 연구 분위기와 관련하여 사회경제사가들이 대거 참여하게 되었고, 근대화론적 시각이 강하게 투영되기에 이르렀다. 바로 이 과정에서 실학의 개념과 발생 배경 및 그 연구 분야 및 역사적 의의 등이 본격적으로 거론되기에 이르렀다.


먼저, 실학의 개념은 조선 후기의 시대적 특성과 함께 모색되었다. 그리하여 실학사상이 존재하던 조선 후기는 전근대적 사회로부터 근대를 지향하던 시기로 규정되었다. 실학은 이러한 시대적 성격을 설정한 기반 위에서 모색되어 갔다. 그리고 그 사상의 발생 당시 조선사회가 가지고 있던 전근대성을 극복하려던 실학의 노력에서 근대의 여명을 밝혀보고자 하였다. 이에 1960년대의 연구자 가운데 일부에서는 실학을 조선 후기 ‘자본주의 맹아의 발생’을 반영하는 사상이거나 혹은 그러한 발전을 이끌어준 사상으로 규정하기도 하였다. 이 경우 실학은 ‘허학‘(虛學)인 성리학에 대항하는 학문이라고 적극적인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또다른 연구자들은 실학사상에서 드러나는 과도기적 특성을 주목하여 이를 봉건사회의 해체기에 등장한 ‘근대지향적’ 과도기의 사상으로 보고자 하였다. 이 견해는 1967년 이후 천관우에 의해 제시되었다. 그는 실학을 근대성으로 규정하였던 1930년대 안재홍의 견해를 발전적으로 극복하여 실학사상을 새롭게 규정해서 “전근대의식에 대립하는 근대정신을, 몰민족의식(没民族意識)에 대립하는 민족정신을 뜻한다”고 말하면서, 실학사상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근대지향적, 민족주의적 성격”임을 제시하였다. 이와 같은 해석은 당시 시대적 과제가 근대화였다는 사실과, 민족주의가 강화되어 가고 있던 사회분위기와 일정한 관련이 있다.


이러한 그의 실학 개념 제시는 많은 연구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와 같은 개념 규정이 제시된 이후 많은 연구자들은 조선 후기의 사상에서 이 기준에 의해 실학적 요소를 찾으려 하였다. 그리하여 민족주의적 특성의 확인을 위해 중화문화와는 구별되는 자아 인식의 존재 여부를 검출하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기도 하였다. 그 과정에서 성리학적 화이관(華夷観)에 입각하여 청국을 이적(夷狄)으로 규정하였던 성리학자들까지도 실학자의 범주에 포함되기도 하였다.


또한 모든 제도 개혁론은 현상타파론이므로, 일반적 제도개혁론도 봉건적 현상을 타파하고 근대사회를 지향하는 것으로 확대 해석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그들은 조선 후기에 나타난 모든 개혁론을 ‘실학적 개혁’ 즉 ‘근대적 개혁’으로 확대 해석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러나 전통사회의 경우에 있어서도 자신의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성리학적 입장에서의 개혁론이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이와 같은 판단은 일종의 착오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데에서 실학의 범위는 거의 무한정하게 확대되어 나가기도 하였고, 실학 연구에 대한 회의가 싹트대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에 이르러서는 ‘근대지향적, 민족주의적‘이라는 실학 개념의 모호성에 문제를 제기하고 실학의 개념을 새롭게 규정하고자 하는 시도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실학의 개념을 ‘탈성리학’으로 규정하고 실학을 성리학과 구별되는 독자적 사상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자 시도하게 되었다. 이 새로운 시도에서도 대체로 실학 이갠지고 있는 것으로 규정되었던 근대성학의지는 민족주의적 특성이 여전히 존중되고 있었다. 그러나 의 의 일각에서는 1980년대 후반기에 이르러 실학개념에 관한 사상임을 다시 의 진전을 기반으로 하여 ‘근대지향적 성격’, ‘탈성리학적 성격’ 등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새롭게 시도되었다.


한편, 2000년대에 들어와서 실학연구는 한단계 더 심화되었다. 그리하여 실학과 성리학의 관계를 다시 검토하게 되었고, 이 양자간의 단절을 주장하던 종전의 연구와는 달리 그 연결성에 주목하는 연구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근기남인이나 소론 및 노론 낙론 계통 등 당색과 관련하여 드러나는 실학적 개혁사상의 차이에 대해서 주목하는 연구결과도 출현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학계의 분위기는 실학을 성리학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부정적 입장이 강하고 이 두 개의 사상을 별개의 것으로 규정하고자 하는 견해가 우세하다.


i.실학사상의 존재형태와 한계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실학의 개념은 연구자나 연구시기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학계에서 성취한 연구의 실학 개념은 다음과 같이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실학사상은 18세기 전후 조선 후기 봉건사회의 해체기에 등장한 사회개혁사상으로서, 주자 유일 기준을 거부하고 원초유학의 입장에서 전개되고 있던 왕도정치론의 조선적 변용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은 당대의 학인들이 직접 문호를 열고 기치를 세우며 자신의 존재를 ‘실학파’ 등으로 스스로 확인한 사상은 아니었다. 또한 그들은 자신을 실학자로 자처한 바도 없고, 자신의 학문을 실학이라고 선언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서로 모여 타자와 구별되는 배타적 견지에서 학파를 조직한 바도 없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오늘날 학계에서 당시의 학풍을 실학으로 명명하는 데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즉 유형원-이익-정약용으로 그리고 19세기 중엽 최한기에까지 이어지는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은 즉자적(對自的, an sich)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실학사상은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고 자신의 독립성을 확연히 천명하는 대자적(卽自的, für sich) 단계의 사상으로까지 전개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실학은 분명 조선 후기의 사상계에 존재하고 있었던 중요한 흐름 가운데 하나였다. 이처럼 실학사상은 조선 후기 역사 속에서 즉자적 형태로 나타난 사상이었기에 일률적인 모습을 갖기보다는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이 다양성 때문에 후대의 학자들이 이 개혁사상을 정의하고 규정하는 데에 어려움이 생기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 발생한 비판적 학풍으로서의 실학사상에는 적지 않은 한계가 드러나기도 하였다. 실학자들이 제시하였던 개혁안의 상당 부분은 왕조체제의 유지를 지향한 것이었다. 또한 이들이 제시하였던 사회개혁안은 중세사회의 해체를 막을 수 있는 방안이거나 근대사회의 출현을 적극적으로 유도하는 것으로 평가되기에는 문제가 있다. 상당수가 몰락지식인 출신이었던 실학자들은 자신의 현실개혁안을 정부당국에 제시하여 이를 관철시킬 수 있는 통로와 능력을 가지지 못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견해를 사회의 여론으로 만들기 위한 적극적 노력을 전개하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이론을 확대 재생산하기 위한 구체적 작업도 전개하지 않은 듯하다. 나아가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실학사상에서는 그 사회개혁의 의지가 약화되어가는 현상마저 드러나고 있었다. 18세기 말엽과 19세기 초엽에 걸쳐 전개된 실학사상에서는 수취체제를 비롯한 제도개혁의 의지가 강렬하게 표출된 바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중엽 이후 실학사상에서는 민생과 직결된 이와 같은 요청들이 점차 약화되어갔던 것이다.


한편, 실학사상이 유학의 이념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한, 당시의 지배적 사상이었던 성리학으로부터 배격되거나 탄압받지 않을 수 있었다. 실학사상이 범유학적이었다는 사실은 당시 조선왕조의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성리학과 실학이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그러나 성리학이 지배이데올로기의 기능을 담당하며 현실정치를 주도하는 한, 실학이 사상적 공존은 용인받을 수 있지만 그 개혁정신의 궁극적 관철은 무망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은 제도의 개혁해는 역사의 발전에 적극적으로 기여하였다기 보다는 조선 후기 사회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이를 드러내는 데에 특장이 있던 사상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이 의미 있는 사상으로 평가될 수는 있을지언정, 당시 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주도하였던 사상으로 이해되기에는 제한성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j.실학과 개화사상의 관계


한편, 개화사상도 해방 이후 남북한의 연구자들에 의해서 정립된 개념이었다. 연구자들에 따라서는 이 개화사상의 출현 시기와 그 개념에 대해서도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먼저, 북한의 연구자들은 개화사상이 1882년 임오군란을 전후로 출현하였다고 보았다. 그리고 개화사상은 구미 각국의 급격한 근대문명 발전에 영향을 받아, 낙후한 조선정부를 개조하여, 만청(満清) 봉건 통치배들과의 봉건적 종속관계를 폐기하고 ‘독립 자주’ 정신으로 내정을 개혁함으로써 조선을 급속히 개화시켜 근대국가 체제로 개혁하고자 하는 사상으로 규정되었다.


그리고 남한의 연구자들은 개화사상을 ‘1880년대 이후 한일합방 이전 시기까지 한국의 정치·경제·문화·사회 등을 지배하던 사상’으로서, ‘선각자들이 무지한 대중들을 교도하여 문명의 단계로 이끌어 보려던 경향’이며, 전근대적 사회에서 근대적 사회로 발전하기 위한 준비기의 사상으로 보았다. 반면에, 또다른 연구자들은 개화사상이 1853년 이후 중인 역관 출신 오경석(呉慶錫)에 의해서 제시되었음을 주장하였다.


즉, 오경석을 통해서 드러나는 개화사상은 조선이 처한 현실을 ‘민족적 대위기’(大危機)로 판단하고, 정치·사회·경제 분야에서 일시 혁신을 단행하고, 과학과 기술을 중시하며, 평등사회를 지향하며, 국방력을 강화하고, 자주적 개항과 통상을 추진하던 사상으로 규정되고 있다.


한편, 개화사상을 형성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사회세력 가운데 하나로 중인층이 주목되기도 하였다. 개항이전 중인층들은 양이(洋夷)가 가지고 있는 군사면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국제사회 속에서 국가의 명맥을 보전해야 된다는 생각이 작용하였다. 그리고 양반들로 하여금 이러한 면에 눈을 돌리도록 함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설명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1850년대에 개화사상을 형성하면서 실학사상의 한계를 뛰어넘어 ‘근대 부르주아 계몽사상’으로서 개화사상의 형성에 기여하였다고 보았다.


또한, 개화사상은 ‘민족적 독립’과 ‘자주와 진보’라는 두 지표로 집약되는 것으로 설명되었다. 또한, 개화사상은 박규수 오경석 유대치 등 일련의 선진적 지식인들이 양무운동(洋務運動) 단계의 청국을 직접 방문하거나 서양 사정을 소개한 청국 서적의 영향을 받아 세계사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주창한 사상으로 규정하였다. 이 사상은 개항기 일련의 개혁을 추진하는 기반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개화사상의 현실정치에 대한 적용은 시무개화파(時務開化派)에 의해서 집중적으로 시도되었다.


그런데, ‘개화’라는 용어는 1880년 이후 상소문(上疏文)이나 교서(敎書)에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개화사상은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이 귀임한 1881년 이후 일본 명치정부의 ‘문명개화론’에 자극을 받아 제시된 사상으로서, 국가주도하에 문명개화를 이끌어 내기 위한 일종의 계몽사상이었다. 그리고 1884년 당시 외교계에서는 ‘개화당(開化黨)’이란 용어가 사용되고 있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개화·개화파·개화당 등의 용어는 개항기 한국사회에서 사용되고 있었던 용어였고, 개화사상가들도 자신의 사상이 전통적 견해와는 구별되는 ‘개화사상’이라고 자각하고 있었다. 즉, 개항기 개화사상은 즉자적(卽自的) 존재였을 뿐만 아니라 대자적(對自的) 사상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였다. 요컨대,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은 해방 이후 남북한의 학계에서 새롭게 정립한 개념이었다. 그러나 이를 정립하기 위한 과정에서 그 개념에 대한 규정이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 양자 간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가 나고 있다.


실학은 즉자적 형태로 존재하였던 사상인 반면 개화사상은 즉자적 단계를 넘어서 대자적 사상으로서의 특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또한 실학은 선진 유학의 왕도정치론에 기반을 둔 국가재조론인 반면, 개화사상은 자본주의 국제질서를 체험한 이후에 제시된 국가의 자주화와 근대화를 지향하던 사상이었다. 한편, 조선왕조사의 역사가 전개되던 과정에서 18세기를 전후하여 실학의 단계가 있었고, 19세기 중엽이나 8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 개화사상이 등장하였다. 이처럼 실학과 개화사상은 상호 선후 관계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실학과 개화사상의 상호관계를 단순한 선후관계의 범위를 넘어서 인과관계로까지 이해해 보고자 하는 시도가 진행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실학의 개념과 개화사상의 개념이 발전·확정되어 가는 과정에서 이 두 사상 사이의 관계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발생하게 되었다.


k.실학과 개화의 연결론


해방 이후 실학사상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던 초기적 양상으로서 남한학계에서는 실학사상에서 근대성을 추출하기 위한 근대주의적 시도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실학사상이 근대적 성격을 가진 것이라고 한다면, 개항 이후의 신사조(新思潮)와도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하였고, 개항 이후의 개화사상가들이 실학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여기에서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의 연결론 내지는 개화사상의 원인으로 실학이 주목되어야 한다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한편, 1950년대 후반기와 1960년대 전반기 북한의 연구자들은 실학자의 토지개혁론을 사회주의적 주장과 연결하여 실학사상의 진보성을 적극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실학과 근대사상의 일종인 개화사상의 연결을 주장하였다.


한편, 1960년대 말 이후 남한이나 해외에서의 연구자들은 남북의 연구성과를 집약하여 실학과 개화사상을 상호 밀접히 연결시키고자 하는 작업을 전개하였다. 실학사상에 대한 근대주의적 접근이나 적극적 평가는 이미 1930년대의 일부 연구자들에 의해서 시도되기 시작하였다. 이 전통은 1950년대 후반기까지 남북한의 학계에 같이 영향을 미쳐주고 있었다.


그리고 북한 학계에서는 1962년 다산 정약용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는 과정에서 실학사상에 대한 적극적 평가와 더불어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의 연결에 관한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북한 학계의 입장은 1955년 최익한(崔益翰)에 의해서 제시된 바 있었다. 그는 박지원의 저작이 갑신정변을 계획하였던 개화독립당에 사상적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하여, 개화사상과 실학사상을 연결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또한 실학자의 개혁론 등을 검토해보면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이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견해가 체계적 논문을 통해서 제시되기도 하였다. 한편, 남한의 학계에서도 실학과 개화사상의 연결에 관해서 제시된 북한 학계의 연구성과로부터 일정한 자극을 받아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의 연결에 대한 문제가 1960년대 말엽부터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이 논의에 앞장선 연구자는 김영호(金泳鎬)와 조기준(趙璣濬)이었고, 개화사상을 전공하던 이광린(李光麟), 강재언(姜在彦) 등도 이 견해를 더욱 발전시켜 나가고자 하였다. 즉, 김영호(金泳鎬)는 1968년 실학과 개화사상의 연결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이를 좀더 구체화시켜서 전혀 별개의 사상 체계로 이해되던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의 연결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그는 실학사상 속에 근대적 요인이 부분적으로 있었다는 점을 주목하였고, 개화사상은 서양근대 자본주의의 동양진출과 관련하여 나타난 타율적인 근대사상으로 해석된다는 사실에 반성적으로 접근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와 같은 현상이 전통과 근대의 단절을 의미하며, 전통은 곧 전근대성을 뜻하고, 근대화는 곧 서양화라고 규정하는 ‘자기 허무주의적 역사의식’을 나타냈다고 보았다. 그리고 실학과 개화사상의 연결을 통해서 곧 전통의 내부에서 근대화로 이어지는 주체적 자기전개의 한 논리를 발견하고자 하였고, 전통과 근대의 단절 사관을 극복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 보고자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박규수(朴珪壽)가 실학과 개화사상을 연결시켜주는 교량적 인물의 하나임을 주목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김영호는 ‘민족 허무주의의 극복’을 주장하던 북한 학계의 선행 연구를 이어 받아, 실학과 개화사상의 연결이라는 주제를 별도의 논문으로 발표하였다. 그는 이 논문을 통해서 실학과 개화사상은 인적 계보를 통해서나 사상의 논리에 있어서나 매우 밀접하게 연관을 갖고 있고, 어떤 점에서는 상호 구분하기 어려운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논의가 당시 남한 학계에서 단기간에 수용될 수 있었던 것은 남한의 실학 연구자들도 실학과 개화사상의 연결 가능성에 대해서 암묵적으로 인정해 왔기 때문이었다. 김영호와 비슷한 시기에 조기준(趙璣濬)도 실학사상이 개항기 이후의 신사조(新思潮)와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는 실학사상의 전개과정을 네 단계로 구분하면서 그 마지막 단계를 ‘전환기의 실학’으로 명명하였다. 그는 이 ‘전환기의 실학’에서 실학과 개화사상의 연결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에 관한 구체적 증거로서는 호암 문일평(文一平, 1888∼1939)의 기록에 근거하여 개화사상가 김옥균이 박규수의 매개로 박지원의 사상을 접하였을 가능성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정약용의 사상이 갑오개혁에 영향을 주었다고 언급한 황현(黃玹, 1855∼1910)의 기록에 근거하여 그 인적 계보를 중요시 하였다.


실학과 개화사상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논증하고자 시도한 연구자로는 이광린(李光麟)을 들 수 있다. 그는 개화사상의 연원을 밝히려는 입장에서 실학과 개화사상의 관련성에 착목하였다. 그는 개항 이후 문명화 또는 부강화(富强化)를 표시하는 개념으로서의 개화(開化)를 일부 인사들이 받아들이는 데에는,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지적(知的) 유산인 이용후생학파의 북학론(北學論)을 주목하였다. 그는 이 사상을 토대로 나라의 부강을 이룩해야 된다는 개념으로서의 개화나 자강을 1870∼1880년대의 일부 인사들이 수용하게 되었다고 판단하였다. 이광린은 개화사상은 실학의 지적 유산과 국제정세에 대한 이해로 척사사상을 타파하고 나타날 수 있었다고 판단하였다. 물론 그는 개화사상이 실학의 영향을 받고 등장하였음을 밝힐 만한 구체적 사료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개화사상가 중에 실학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고 증언한 기록을 찾아 볼 수는 없지만, 초기 개화사상 등을 살펴보면 실학의 영향을 받았던 흔적을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는 1870년대 초에서 1890년대 중엽까지 활동하였던 개화기 지식인의 실학에 대한 인식을 논하며, 박규수(朴珪壽)가 실학을 개화사상으로 승화시켰다고 보았다. 그리고 강위(姜瑋)의 경우도 실학을 개화사상가로 발전시킨 인물 가운데 하나였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또한 신헌(申櫶)도 실학과 개화사상의 연결자로 규정하였다. 이 ‘전기 개화사상가’들은 처음에는 실학의 영향하에 있었으나, 새로운 국제환경에 부딪치자 개화사상가로 탈바꿈 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이광린은 이들 전기 개화사상가들이 실용적 실제적인 것을 추구하면서 ‘실사구시’에 대해서 어떠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정리하였다. 그리고 후기 개화사상가들은 신학(新學)과 구학(舊學)의 논의과정에서 양자의 절충을 중시하였고, 여기에서 실학의 중요성이 인지되었다고 보았다. 한편, 강재언(姜在彦)은 조선실학사상과 북학론이 근대 조선에서 원류로 될 수 있는 사상적 맹아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특히 북학파의 사상에는 근대사상으로 발전될 수 있는 풍부한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실학사상의 특성으로 새로운 지리지식에 의해서 화이사상의 명분론적 세계관의 극복, 자주적 개국론의 전개, 생산력의 발전을 촉진하기 위한 제도와 질서의 개혁 주장, 봉건적 지벌과 문벌에 대한 반대, 국내시장 형성의 전제가 되는 교통수단의 정비론, 주자학적 도그마와 속박에서 인간 이성의 해방 주장을 들었다.


강재언은 실학사상이 가지고 있는 이와 같은 근대지향적 측면을 내재적으로 계승하면서, 외발적 요인에 촉발되어 근대적 변혁사상인 개화사상으로 차츰 질적 전환을 취하여 갔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강재언은 실학자와 ‘초기 개화파’의 연결관계에 주목하였다.


강재언은 실학파 가운데 박지원과 박제가 김정희 등은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유대치) 등을 통해서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김옥균 등과 연결되었다고 해석하였다. 그리고 갑오개혁의 주역이었던 김윤식(金允植), 유길준(兪吉濬) 등 시무개화파(時務開化派)들도 박규수와 연결된다고 보았다. 그는 특히 박규수가 ‘북학파와 개화파를 결절(結節)시킨 중심인물’이라고 판단하였다.


이와 같은 연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남한의 역사학계에서 실학과 개화사상의 연결에 대해서 대개는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실학사상을 근대사상으로 평가하며, 이를 근대의 기점으로 잡고자 하였던 시도가 진행된 바 있었다. 이들은 실학과 개화사상의 연관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실학을 바로 근대사상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종래의 봉건적 규범에서 벗어나 근대사상에로 한 걸음 다가선 것으로 인식하는 정도에서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의 접합 가능성을 인정해 왔다.


특히, 실학의 개념을 정리하는 과정에서는 ’조선 후기 실학사상에서 왕조말의 개화·자강사상으로, 나아가 일본 강점기의 근대화를 전제로 한 민족주의로 이어졌고, 오늘날의 자주적 근대화의 욕구도 기저에 있어서는 그 발전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기도 하였다.


또한, 실학의 농업론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실학의 농업론이 성리학적 농업이론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었으나, 점차 반성리학적 경향으로 전환되어 지주제를 정면으로 거부한 점을 주목하였다. 그리하여 개화기에 이르러서는 봉건적 농업체제가 내포한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함으로써 국가와 농민경제의 안정을 지향하였다는 측면에서 실학의 농업론이 근대사회개혁의 이론으로 성장하고 있었음을 말하였다.


그리고 이 이론이 농민전쟁시기에는 허전(許傳, 1797∼1886), 이기(李沂, 1848∼1909), 강위(姜瑋, 1820∼1884), 김성규(金星圭) 등에 의해서 계승되어 “우리의 전통사상이 스스로 개척한 사회개혁사상·근대화론으로 발전하였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실학과 개화사상의 관계에 대한 관심은 사상의 내재적 발전의 결과로서 개화사상을 이해하고자 하면서 강화되었고, 개화사상의 연원이 실학에 있음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 논자들은 정치사상을 중심으로 하여 실학과 개화사상의 연관성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실학의 왕권강화론이 근대사상으로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하더라도 화이관의 극복 논리나 공직담임권의 확대론 등은 개화사상과 상호 논리적 연관성이 있다고 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용후생학파의 개혁적 사유가 구체적이고 실천적 운동에로까지 발전하지 못하고 좌절의 운명을 걸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운동으로서의 좌절을 의미하는 것이며, 근세 실학사상 그 자체가 내재적으로 좌절의 운명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실학사상은 개국 후에 있어서는 개화파의 사상운동을 사상 내재적으로 준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는 견해를 통해서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의 관계를 인정하였다. 그리고 오경석(吳慶錫)의 사상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실학과 개화사상의 연결성이 논의되었다. 개항기 『황성신문』(皇城新聞)의 분석과정에서도 실학과 개화사상의 연결성이 검토되었다. 그리하여 현재에 이르러서는 개항기 전공자 대부분이 조선 후기 이래 실학적 전통과 세계사적 변화에 대한 적응 노력의 결과로 개화사상이 형성될 수 있었음을 말하게 되었다.


한편, 남한의 철학계에서도 실학과 개화사상의 연결성에 대해서 긍정적 입장을 견지해 왔다. 즉, 이와 같은 경향은 실학자 개인의 철학사상을 연구하거나 실학사상의 철학적 의미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최한기(崔漢綺)의 철학을 논하면서, 그는 전통적 유학사상을 실증적·과학적인 근대화와 관련시켜 새로운 태도로 발전시킴으로써 그 근본정신을 시대적으로 살리려 하였음이 주목된 바 있었다. 그 결과 그의 사상과 개화사상의 연결성이 설명되었다.


그리고 철학적 입장에서 실학을 개화사상으로 전환시킨 인물로서 이정직(李定稷, ?∼1910)을 주목하는 연구가 발표된 바도 있었다. 이정직의 사상을 분석한 결과, 실용(實用)과 이용(利用)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이정직은 서구의 자연관과 서양철학사상을 도입하여 합리적 사고의 중요성을 말하였고, 이를 통해서 사상사적 측면에서 근대화를 촉진시키는 데에 기여할 수 있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철학계에서는 개화사상이 실학사상을 계승하였고, 개화파들이 서구의 이념과 제도를 수용하고자 할 때, 실학사상은 바로 그것들을 수용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는 견해에 동의하였다. 그리고 실학파의 철학사상과 과학사상, 사회·정치·경제사상은 당시뿐 아니라 조선근대사회에서도 생산력의 발전과 과학발전 및 철학사상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보는 입장도 이와 같은 맥락의 주장으로 주목될 수 있다.


이처럼 철학계에서는 개화사상이나 현대사상과의 관련 속에 실학사상의 해석과 평가가 앞으로는 더욱 확대될 것으로 전망하면서, 실학사상이 사상사 속에 과거적인 것으로만 머물지 않고 보편적 진실성으로서 빛을 발할 수 있도록 인식되어야 한다는 과제를 의식하면서, 이 연구에 박차가 가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상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실학은 개화사상이라는 ‘근대사상’ 또는 ‘근대지향사상’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 것으로 보는 견해는 실학과 민중운동의 연결을 논하는 데에까지 확대되어 갔다. 여기에서 말하는 민중운동은 근대사회를 도래시키는 내재적 원동력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러므로 실학과 민중운동의 관련을 주목하는 입장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실학과 개화사상의 관계를 논하는 시도의 일부로 파악된다.


한편, 김용섭은 조선 후기 사상계의 특성과 관련하여 실학파의 농업론이 민란(民亂)과 항조투쟁(抗租鬪爭) 시기의 진보적 농업론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여기에서 농민운동과 실학사상의 연결 가능성을 모색하였으며, 동학농민전쟁기 농민군 지휘부가 실학사상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즉, 그는 동학농민전쟁의 주도자인 전봉준(全琫準, 1854∼1895)이 활동하였던 지역문화의 특성을 주목하였다. 전봉준이 살았던 고부(古阜) 인근에는 유형원(柳馨遠)이 살았던 부안(扶安)이 있고, 유형원의 사상적 영향은 동림서원(東林書院)을 통해서 오랫동안 전수되고 있었고, 고부는 정약용의 유배지였던 강진(康津)과 같은 호남지방이라는 사실 등에 주목하였다. 그리하여 서당 훈장이었던 전봉준의 신정(新政)에 요컨대, 1960년대 전반기 북한 학계와 1960년대 후반기 이후 현재까지의 남한 학계에서는 실학과 개화사상의 관계를 주로 상호 연결이라는 측면에서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견해의 연장선상에서 실학과 농민운동의 연결을 논하였다.


이와 같은 연결론은 실학과 개화사상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두 사상의 지향점 내지 의도가 외적(外的)으로는 국가·사회의 개혁에 있었다는 동일점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리고 민족문화 내지는 민족사의 지적 전통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런데, 남한 학계에서 실학과 개화사상의 관계를 주목하였던 1960년대 후반기 이후 북한 학계에서는 이 양자간의 관계를 단절시켜 파악하고자 하는 견해가 우세하게 되었다.


반면 당시 남한의 역사학계에서는 강하게 대두되고 있었던 근대화론과 일정한 연관하에서 실학과 개화사상의 연결이 정설로 굳어져 갔다. 이 양자 사이의 연결 여부에 대한 근거는 지속적이지만 미약하게 제시되어 왔다.


l.실학의 역사적 의미


실학사상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규정하는 데에도 오늘의 연구자들은 완전한 합의에 이르지를 못하고 있다. 일부의 연구자들은 실학사상이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적 발전을 이끌었고, 각종 제도의 개혁을 가능케 해줌으로써 조선 후기 발전에 적극적으로 기여한 바가 있음을 강조하였다. 또한 이 사상은 조선 후기의 민중을 대변하는 사상으로서 민생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서도 기여하였고, 개항기에 이르러서는 개화사상의 형성에 원인으로 작용하였으며 동학농민전쟁기 사회개혁사상의 배경이 되었음을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이 실학사상을 긍정적으로 보아왔던 견해에 대하여 최근에 이르러서는 그 긍정 일변도의 평가에 대한 신중론이 대두되고 있다. 그리하여 당시의 사회와 실학자 개개인의 제약성으로 말미암아 실학 사상은 조선 후기 사회에 있어서 본격적 변혁이념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거나 사회의 변혁을 도출해 낸 데에는 이르지 못 하였음을 지적하기도 한다.


사실 당시의 실학자들은 자신의 현실개혁안을 정부 당국에 제시하여 이를 관철시킬 수 있는 통로와 능력을 가지지 못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견해를 조정(朝廷)이나 사회의 공론으로 만들기 위한 적극적 노력을 전개하지도 않았다. 또한 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이론을 확대 재생산하기 위한 구체적 노력을 전개하지도 않았다. 나이가서 19세기 중엽 이후 실학사상은 그 사회개혁적 의지가 약화되는 현상을 드러내었다. 한편,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의 관계에 있어서도 이 양자를 직결시키는 것은 오히려 개화사상의 근대적 측면을 매몰시키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실학에는 그 한계성이 적지 아니하게 발견된다. 이 때문에 실학의 역사적 기능을 재평가하려는 기운이 오늘의 연구자에게서는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실학사상은 당시 지배층의 성리학과는 구별되는 사상으로서 조선 후기의 사회에서 몇가지 긍정적 기능을 발휘하였다.


즉 실학사상은 조선 후기의 지식인들이 당시 동양의 사상계를 지배하던 일종의 중세적 보편주의를 극복하고 조선의 역사와 문화가 가지고 있는 개별성과 고유한 가치를 발견하는 데에 이바지하였다.


그리고 조선의 전통과 현실에 관한 연구를 촉진시켜 주었다. 이러한 발견과 인식은 분명 민족적 자각의 강화와 관계되는 현상이며, 조선의 학문적 전통을 올바로 세우려던 그들의 노력은 긍정적 평가를 받을 수 있다. 또한 실학사상은 비록 범유학적 개혁사상으로서의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당시 사회가 가지고 있는 제반 모순에 대한 그침없는 성찰의 결과를 나타낸다. 그들은 토지제도 및 군역제도의 개혁과 환곡 수취과정에서의 문제점을 바로 잡고자 하였다.


또한 그들은 노비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등 당시 사회의 신분제에 대해서도 개선의 방안을 찾고자 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성찰이 비록 현실적 개혁으로까지 직결되지는 못 하였다 하더라도, 그들이 조선 후기 사회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드러내는 것은 개혁을 향한 여론의 조성에 있어서 기초가 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비록 실학사상이 적극적인 측면에서 현실 개혁을 직접 유도해 내지는 못 하였다 하더라도, 또 다른 측면에서 실학자들이 수행한 그 현실 개선의 필요성을 강조해준 역할만은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한편 실학사상은 조선의 중세철학을 대변하는 성리학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을 통해서 조선 후기의 사람들이 객관적 자연관과 평등한 인간관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고 있었다. 즉 실학사상은 당시의 조선인들에게 새로운 사유형태를 일깨워 주었다. 이 점에서도 실학이 또 달리 발휘하고 있었던 긍정적 기능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긍정적 기능을 감안할 때 실학사상에 관해서는 좀더 깊은 연구가 우리에게는 계속 요청되고 있다.


m.연구의 전망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에 관한 연구를 위해서는 몇 가지의 과제가 확인되어야 한다.


우선 실학사상은 조선 후기 전체 사상사의 맥락에서 연구되어야 한다. 조선 후기 사상계에서는 정학(正學)이라고 불리우던 성리학과, 선진유학에 입각한 왕도정치론이었던 실학(實學), 그리고 사학(邪學) 으로 지칭되던 불교, 서학 즉 천주교, 비결신행(秘訣信行) 등 각종 종교사상들이 병존하고 있었다. 이들 다양한 사상들은 당시의 사회에서 각자 고유한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선 후기의 사사상들논할 때에는 당시 존재하던 다양한 사상들의 특성을 주목하고 각 사상론이었던 실학는 상호관계를 밝혀나가야 한다.


우리가 실학을 연구한다 하더라도 성리학조선 ‘사학(邪學)’ 과 그것의 상호 관계를 밝혀야 실학의 특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우리는 실학을 연구할 때 실학자의 이론이 당대에 어떠한 의미를 가졌으며, 어떻게 인식 평가되고 있었는가를 좀더 명확히 밝혀야 한다. 그리고 실학이 가지고 있었던 철학적 구조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켜 나가야 한다. 그들이 제시한 현실 개혁안의 철학적 기초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이해해야 그 개혁안의 역사적 의미와 기능을 올바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실학 [實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B007 – 선가귀감(禪家龜鑑) / 서산대사 휴정 (西山大師 休靜) (1520~1604) 


 일생동안 성.속의 세계를 넘나들며 살다간 휴정이 선종과 교종으로 대립하던 당시의 불교상황을 타개해하기 위해 저술한 선.교사상의 종합개론서. 선은 곧  부처의 마음 이고 교는 곧  부처의 말씀 이며 무언에서 무언으로 이르는 것은  교 라 하여 선과 교의 개념을 분명히 하고 선의 교에 대한 우월성을 인정하긴 했으나, 선과 교는 상호대립적인 관계가 아닌 보완될 수 있음을 밝힌다. <선가귀감>은 휴정이 방대한 불전을 요약하여 핵심적인 내용을 뽑아 자신의 주석을 달고 평과 송을 덧붙인, 불교 입문자를 위한 선종 입문서적인 성격을 갖는다.



a.생애


 서산대사 하면 우리는 임진란 때 의병을 이끈 스님의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게 되는데, 사실 그의 진정한 업적은 그러한 세속적인 공헌에 못지않게 <선가귀감>을 통한 선.교 양종의 융합을 시도한 종교적 측면에도 있다.

 그의 생애는 성과 속의 두 세계를 부단히 넘나든 분방한 일생이었다. 국난에 떨쳐 일어선 고승 서산대사 휴정은 1520년 평안도 안주에서 태어났다. 서산이라 본래 묘향산의 별칭인데, 만년에 그가 그곳에 오랫동안 머물렀던 까닭에 붙여진 이름이다. 법명은 휴정, 호를 서산.청허라 했다. 9세에 부모를 잃고 훗날 임꺽정을 진압한 안주목사 이사증의 양자로 입적되어 서울에 올라온다. 15세에 진사시에 낙방하자 지리산에 들어가 영관을 은사로 승려가 되어 30세에 승과에 장원급제한다.  36세에 교종과 선종의 일을 총괄하는 양종판사(교종판사와 선종판사)가 되고 이어 보우대사의 후임으로 선.교 양종의 일을 총관리하던 봉은사의 주지가 되었다. 한편 이런 불교진흥이 이루어지자 유교의 벼슬아치와 선비들은 물끓듯이 일어나 승려들을 비난했고, 그 비난은 주로 보우에게 집중되었다. 휴정은 3년 동안 이 일을 본 후 일체의 승직을 사퇴하고, 역시 명예는 자기 것이 아님을 확인하고 이어 금강산.묘향산.지리산 등을 두루 여행하게 된다. 그는 금강산에 있으나 묘향산에 있으나 항상 1000여 명의 제자들이 몰려들었고, 그는 제자들에게 칼쓰기.활쏘기 등을 가르쳤다. 임진왜란 3년 전에 정여립 모반사건도 일어나는데, 여기에 연루되었다는 누명을 쓰고 잠시 투옥된 적도 있었으나 곧 혐의가 풀려 석방되었다.

 1592년 일본군은 동래를 함락시키고 신립 장군이 충주에서 패하자 선조의 어가는 마침내 의주에 도착하고 선조는 휴정을 찾았다. 선조를 만난 휴정은  신이 비록 늙고 병들었으나 나라의 위급함을 앉아서 볼 수는 없습니다. 늙은 스님은 절에서 나라를 위해 기도하게 하고 젊은 스님들은 나라를 구하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했다. 이때 그의 나이 73세였다. 이에 선조는 휴정을 8도 16종도총섭으로 삼았고 73세의 휴정은 전국에 격문을 돌려 승려 1500명을 모으고 이들을 지휘했다. 이때 그의 제자들 중에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 유정(사명대사).영규.처영이다.

그후 승병들은 서울탈환에 공을 세웠고 전국 각지에서 많은 활약을 했다. 난이 잠잠해질 무렵 휴정은 승병의 지휘권을 유정과 처영에게 넘겨주고(영규는 금산싸움에서 조헌과 함께 전사) 1594년 다시 묘향산으로 들어가 원적암에서 조용히 여생을 마쳤다. 

 휴정의 생애는 무엇이 참된 승려의 길인가를 웅변으로 증명하고 있다. 그 여파는 마침내 전국의 승려들에게 감화를 주었고 그것이 결국 선불교 중흥의 새 장을 열기에 이른 것이다. 실로 조선불교는 휴정이라는 거대한 봉우리의 출현으로 획기적인 전환점을 가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시도 매우 잘 지어 불교의 깊고 신묘한 경지를 읊은 불교시와 애국시가 많이 남아있다. 저서에는 <청허당집><선가귀감> 등이 있다.

 

b.한국불교의 흐름과 <선가귀감>의 집필동기


   1.한국불교의 흐름

 고구려 소수림왕(372) 이 땅에 불교(교종)가 공인된 이래 통일신라의 원효에 의해 신라사회에 불교대중화가 이루어지고, 신라말에는 선종계열이 들어와  9산 을 형성하여 교종계열의  5교 와 함께 공존하게 된다. 5교 9산의 사상적 대립이 고려초에도 이어지자 교와 선을 통합하려는 운동이 일어나는데, 대각국사 의천은 교선의 교리를 융합하여  천태종 天台宗 (교종 중심의 통합)을 창시하고, 고려후기 무신정권하에서는 보조국사 지눌이 선.교겸수를 주장하며  조계종 曹溪宗 (선종 중심의 통일)을 창시한다.

 그러나 고려후기 불교는 극도로 타락하여 더 이상 고려사회의 정신적 이념역할을 할 수 없게 되자 마침 그 당시에 원나라에서 들어온 성리학(철학적 유교)이 새 시대의 지배이념으로 자리잡게 되고(유.불 교체), 이후 유교는 조선왕조의 정치와 종교(철학)의 양측면에서 지배적 이데올로기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교종이란 득도를 하는 데 있어 경전을 중시하여 왕실과 귀족이 주로 신봉했고, 정치에 적극 개입했으며, 반면에  선종은 불경보다 참선을 주로 하여 문자를 모르는 호족이나 신분상승에 한계를 느낀 6두품들이 주로 믿었으며 초세속적인 경향을 띤다.


   2.<선가귀감>의 집필동기

 <선가귀감>은 한국불교의 주류를 이루어온 선종의 사상과 방법을 간추린 것으로서 제자인 사명대사가 간행했다. 이 책의 저술동기는 사명대사가 쓴 발문에 잘 기록되어 있다.

  200여년 동안 불법이 쇠잔하여 선.교의 무리들이 각기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교를 주장하는 사람은 오직 찌꺼기에만 맛을 붙여 모래알만 셀 뿐 5교의 위에 직지인심하여 스스로 깨쳐들어가는 문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있다. 또 선만 주장하는 사람은 스스로 천진된 것만 믿어서 닦고 개치는 일에 힘쓰지 않고 돈오(깨달음)한 뒤에 비로소 발심하여 만행을 익히는 뜻을 모른다. 이렇게 선과 교가 뒤섞여 모래와 금을 구별하지 못하게 되었다. 

 아, 위태롭구나, 도가 전해지지 못함이 이같이 심할까. 겨우 이을락 말락하여 마치 한올의 머리카락으로 천근 무게를 달아 올리듯 거의 땅에 떨어진 듯하더니, 우리 스님께서 10년 동안 서산에 계시면서 소를 먹이는 틈틈에 50여의 경론과 어록을 보시다가 이중 요긴하고 간절한 것이 있으며 기록해두셨다. 그러나 모두가 너무나 미욱하여 법문이 높고 어렵다고 탈을 잡으므로 이를 불쌍히 여겨 구절마다 주해를 붙여서 해석하고 차례로 엮어놓았다. 

 이 발문대로 서산의 저술동기와 그 고심참담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의 불교계는 내우외환이 겹친 시기였다. 조선왕조는 개창과 동시에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채택하고 불교는 공식적으로(비공식적으로는 명맥이 유지되었음) 국가와 인연이 끊어지게 된다. 태조 때 도첩제(승려허가증)를 실시하고 태종과 세종은 불교종파와 사원의 수를 정리하는 등 고려시대의 전성기와는 달리 크게 위축된다. 또 승려들이 본분을 잊고 수도를 소홀히 하는 등 내부적 타락도 심했다. 이를 구제하기 위해 서산은 이 책을 저술하여 그 지침을 삼게 한 것이다. 


c.<선가귀감>의 내용


 <선가귀감>의 휴정은 첫머리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내 비록 하찮은 사람이기는 하나 바다같이 넓고 아득한 <대장경>의 세계를 헤쳐나갈 후배들의 수고를 덜어줄까 하여 가장 요긴하고 간절한 것들을 뽑아 추린다. 참으로 말은 간단하나 뜻은 두루 갖추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만약 이로써 스승을 삼아 끝까지 연구하고 묘한 이치를 깨닫는다면 마디마디에 살아 있는 석가여래가 나타나시리니 부디 힘쓸지어다. 

 <선가귀감>의 주제는 마음과 깨달음의 효용에 관한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평등하며 본래 범부와 성인이 따로 없다. 그러나 사람들 가운데 미망에 빠진 이와 깨달은 이가 있고 범부와 성인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때 스스로 가르침을 받아 문득 진실한 내가 부처와 조금도 다름이 없음을 깨닫는 일이 있으니 이른바 돈오 頓悟 라 한다

그러므로 자신을 낮게 보지 말 것이니 본래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깨달은 다음 잘못 익힌 것을 끊어서 범인이 성자가 되도록 하는 것을 점수漸修라 한다. 그러므로 자신을 높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하니 부지런히 털고 닦으라 고 한 것이 그것이다. 스스로를 낮게 보는 것은 교를 배우는 사람의 병이 되고 자신을 높게 보는 것은 것은 배우는 사람의 병이 된다. 또한 교를 배우는 이는 참선문에 오입하는 비밀한 법이 있는 것을 믿지 않고 거짓으로 가르친 문에 깊이 걸려 있어 진과 망을 다른 것으로 여기어 진이나 망에만 집착하여 관행을 닦지 않는다. 그리하여 남의 보배만을 세고 있으니 스스로를 물러나 움츠리고 있다. 한편 참선을 배우는 사람은 교문에 닦고 끊는 바른 길이 있는 것을 믿지 않아서 물든 마음과 익힌 버릇이 일어나더라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공부의 정도가 유치함에도 불구하고 법에 대한 거만한 마음이 많기때문에 말하는 것이 지나치게 높아진다. 그러므로 옳게 배워 마음을 닦는 이는 자신을 낮추지도 않고 높이지도 않는 것이다. 

 이 부분이 이 책의 핵심인데, 그는 이러한 선.교의 두 관점을 중심으로 자신의 불교관을 전개한다.  이 책의 내용은 세 부분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1선.교의 정의 #2불교승려가 지켜야 할 계육 #3선종 5가에 관한 철명이 그것이다.


   1.선.교의 정의 : 이를 부연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마음을 전하고자 하는 것은 선이요 말씀을 전하고자 하는 것은 교이다.

 (2) 선은 곧 부처의 마음이고 교는 곧 부처의 말씀이다.

 (3) 무언에서 무언으로 이르는 것은 선이요, 유언에서 유언으로 이르는 것은 교이다.

 (4) 마음은 곧, 선법이요 말은 곧 교법이다.

 이 정의는 대개 선.교에서 논하던 것이나 하나 일도일법인 선과 다도다법인 교의 구분을 이토록 선명하게 규정한 점이 탁월하다 하겠다. 도실지어구자 와  득지어구자 를 설명하여 법은 이름도 없고 형상마저도 없는 것이므로 말이나 마음으로 사량분별할 수 없는 것이어서 이를 말로 표현한다면 이미 썩어버린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는 마침내는 죽은 물건에 불과할 것이며, 마음에서 얻은 이는 시정의 잡담이라도 훌륭한 설법이 될 뿐만 아니라, 새들의 노래마저도 제법실상의 깊은 뜻을 가르치는 법문이 된다고 했다. 여기서 서산의 선교관은 선을 우위에, 교는 하위에 두는 것을 알 수 있다.


   2.불교승려가 지켜야 할 것에 대한 그 대강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1) 학자는 활구에는 들고 사구에는 들지 말라.

 (2) 공안에 들어 공부할 때의 마음가짐은 닭이 알을 품은 것같이,고양이가 쥐를 잡는 것같이,굶주릴 때 밥을 생각하는 것같이,목마를 때 물을 생각하는 것같이,아이가 어미를 그리는 것같이 꼭 투철을 기해야 한다.

 (3) 도에 통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기의 마음을 깊이 믿으면서 스스로 낮추지도 말고 스스로 높이지도 말라.

 (4) 음탕한 마음으로 참선하면 찐 모래에다 밥짓는 것 같고, 살의를 품고 참선하면 귀를 막고 소리를 듣는 것 같고,투기심을 가지고 참선하면 새는 병에 물 붓기와 같고, 망령된 생각으로 참선하면 똥냄새를 맡는 것 같아서 아무리 닦아도 마도만 이룰 뿐이라 등으로 설명한다.

   3.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각 종파,곧 임재종.조계종.운문종.법안종 등 5개 종파의 전등과 종풍을 약술하고 있다.

 

d.사상적 기여


 한국불교의 흐름에 있어서 조선 500년은 사상적 방황기이며 불교이상의 혼돈기였다. 사회의 불교에 대한 인식이 그러했고 불교 내부의 자각적 계기가 미약했다는 점에서도 그러했다. 불교의 교단은 선.교양종으로 축소되어 근근히 그 명백을 이을 따름이었다. 고려시대 이래 교종과 선종의 대립은 거의 숙명적인 성격을 띠고 있어 양자의 화합이란 거의 불가능하게 보였다. 이 양종의 대립은 상대방을 비난하며 심각한 양성에 이르고 있었다.

 이런 때에 휴정은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선과 교의 두 길을 명쾌하게 규정짓고 이들이 둘이 아님을 철두철미 역설하여, 선을 주로 하고 교를 융합하려는 통일운동을 전개했다. 이운동의 바탕이 되는 근본사상은 원효의 통불교사상과 보조의 선.교겸수 원리에 입각한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영향을 발휘하여 불교통일을 가져온 것은 휴정이라 하겠다.

 비록 양종의 융합이 휴정의 독창적 아이디어는 아니지만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그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었다. <<교에서 선에 이르는 과정>>이라는 휴정의 주장에는 확실히 선 우월적 사고가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선.교겸수와 견성성불이라는 그의 슬로건은 양분된 불교계를 하나로 뭉치게 하는 견인차였다.

 이런 점들이야말로 휴정의 사상적 기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휴정 이후 우리 나라 불교는 휴정에 귀일 하는 법류를 이루었고 휴정의 중심사항으로 거의 통일을 보았다. 그러나 휴정이 주장한 종지와 종풍은 바로 한국불교의 종지와 종풍이란 할만하다. 그의 사상적 특징은 비단 불교문제에만 국한되었던 것이 아니라,유가.불가.도가사상이 궁국적인 진리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다는 <3교통합론>을 주장한 데도 있다.

 또한 휴정의 회통사상은 하나의 이념에만 그치지 않고,진리면과 현실 면을 모두 원융무애하게 회통會通시킨 그의 생활에서도 나타난다. 임진란이 일어나자 70여 세의 노구를 이끌고 국난극복에 앞장섰으며,전란이 끝난 뒤에도 85세에 생을 마치는 날까지 나라를 걱정하여 제자들에게 됫일을 당부했던 것이다. 다만 그의 제자들이 서자전승 (대를 이어 계승함)하는 법맥을 강조하여 이른바 불교문중의식을 조장하는 폐해를 끼쳤는가 하면 한국불교의 사상적 원류를 중국에서 찾으려고 하는 바람직스럽지 못한 측면이 지적될 수 있으나,휴정은 성과 선을 긋고 자신의 아성 속에서 홀로 살다간 선승이 아니라,회통적 큰 인격이 몸에 밴 그대로의 삶을 살다간 성자였다.



B006 – 징비록(懲毖錄) / 유성룡(柳成龍) (1542~1607) 

 <징비록>은 임진왜란으로 초토화한 조국 앞에 국정의 책임자중의 한 사람인 서애(西厓) 유성룡이 바친 만년의 참회록. 유성룡은 선조대에 활약한 문신으로 정치적으로는 남인에 속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그는 병조판서,영의정 등의 직책에 있었다. <징비록>은 왜란과정의 수기와 왕에게 올린 글 및 각종 문서를 모은 것이다.전란 전의 대일관계,전쟁의 진행상황,향후의 대비책 등을 포괄적으로 개진하고 있어서,그의 문집인 <서애집>과 함께 임진왜란사 연구에 있어서 필수적인 <자주국방의 바이블>이다.


a.생애


 임진왜란을 극복한 조정의 사령탑 유성룡은 경북 의성에서 양반집 가문에서 태어난다.호는 서애.어려서부터 천부의 재질을 보여 6세 때 <대학> 8세 때 <맹자> 9세 때 <논어>를 배웠다. 21세 때 도산서원의 퇴계를 찾아가 주자가 지은 <근사록>을 공부한다. 이미 62세의 원숙한 경지에 오른 이 당대의 석학을 찾은 것은 그의 일생에 큰 전기를 가져왔다. 불과 몇 달밖에 머무르지 않았으나 유성룡은 퇴계의 학문과 인품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퇴계도 그를 하늘이 낸 사람이라 하여 장차 큰 일을 할 것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23세에 생원.지사시에 모두 합격하고 25세 때에는 대과에 급제했다. 1569년에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명에 갔다가 다음해 귀국했다. 그후 부제학.대사간.도승지.경상도관찰사.예조판서.대제학 등의 벼슬을 지내고, 1590년 우의정으로 승진하자 임진란이 있을 것을 대비하여 형조좌랑 권율을 의주목사에.정읍현감 이순신을 전라도 좌수사에 천거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로 군무를 총괄하고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모시고 평양에 이르렀으니 반대파의 모함으로 영의정에서 물러났다.그러나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 도체찰사가 되어 이듬해 명의 이여송과 함께 평양을 수복하는 데 큰 공을 세운다. 그후 충청.전라.경상도 3도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하고,이해 다시 영의정에 올라 4도 도체찰사를 겸해 군사를 총지휘했는데, 이때 군대양성.화기제조 및 성곽수축을 건의,군비확충에 노력한다. 그러나 반대파들의 모함으로 또다시 물러났다가 1600년에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은거했다. 그가 벼슬을 물러난 것은 우리 후손을 위해서는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왜냐하면 만년에 낙향하여 독서와 저술에 전념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징비록>은 빛을 불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b.<징비록>의 집필동기


 <징비록>은 임진왜란으로 초토화된 조국의 비극을 기록한 넌픽션 스토리이며 국난극복의 역사철학이다. 임진왜란후 저자가 벼슬에서 물러나 임진왜란 중에 일어났던 각종 사건과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임진왜란 이전의 대일외교관계 및 임진왜란의 원인과 전황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임진왜란의 중요한 사료는 몰론 조선왕조 사회에 관한 고전적 연구자료가 되고 있다.

 <징비>라는 말은 《시경(詩經)》의 소비편(小毖篇)의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豫其懲而毖後患)”이라는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서애는 <징비록>서문에서 이책을 저술하게 된 동기와 원인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징비록>이란 무엇인가? 임란이 일어난 후의 일을 기록한 것인데 그 중 난전의 일도 왕왕 기록한 것은 그 발단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오호라! 임진의 화는 참혹했도다. 한순간에 3도가 떨어지고 8도가 와해되어 임금이 파천했는데 그리고도 오늘이 있음은 천운이다. <시경>에 이르기를 <내가 지난 일을 징계하여 (징) 후환을 삼가노라 (비)>했는데 이것이 <징비록>을 저술한 소이다. 나같이 모자라는 사람이 어지러운 시기에 나라의 중책을 맡아 위태로운 판국을 바로잡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도 구차스럽게 생명을 이어가고 있음은 어찌 임금님의 너그러운 은혜가 아니겠는가? 걱정과 가슴 두근거림이 조금 진정됨에 지난 일을 생각할 때마다 황송하고 부끄러워 몸 둘 바가 없도다. 이에 그 한가로운 가운데 그 듣고 본 바 임진년에서 무술년까지의 일을 대략 서술했고 그 뒤에 장계.소차.문이 및 잡록을 붙여는데,비록 보잘 것은 없으나 역시 모두 당시의 일들이므로 전원에 살며 삼가 힘써 충성하고자 하는 뜻으로 또 어리석은 신하의 나라에 보답하지 못한 죄를 나타내고자 하는 바이다.  

 이 서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징비록>은 과거 우리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뚜렷한 저술의도를 가진 저술이다. 서애는 임진왜란 중 국가의 중책을 맡아 직접 견문함과 동시에 자기가 다룬 공문서를 정리하는 등 풍부한 사료와 지식으로 <징비록>을 저술했다. 그러므로 <징비록>은 임진왜란에 대한 종합적인 저작이 되는 셈이다.

 서에는 당파에 있어서는 동인이요 그 중에서도 남인에 속했다. 그러나 <징비록>을 저술함에 있어서 당색을 떠나 가능한 한 객관적 입장에 서려 했고,어떤 사건이나 인물을 평함에 있어서 그 경위나 배경을 골자로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서술은 그도 역시 당쟁 중의 인물이긴 했으나 관계를 떠나 낙향 후에 그가 <징비록>을 저술할 때는 좀더 큰 것을 생각하며 담담한 심경에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는 이때의 심경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수년간이나 경영한 것이 다만 쓸데없이 빈말이 되었구나. 지나간 것이 이와 같으나 오는 것도 또한 그러할 것이니 한없는 세월에 지사의 감개만 더할 뿐이다. 금년에 내가 눈 속에 얼어 죽는다면 내년에 누가 큰 그릇에 떡국을 먹는다 하여도 내가 알바가 아니로다. 서애는 임진왜란 중 자기와 관계한 문수 등을 정리하면서 허탈감에 사로잡힌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심경은 스스로 겪은 민족의 수난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사안을 갖게 되었다. 그러므로 <징비록>은 난전과 난중의 일을 있는 그대로 숨김없이 기록하고 있다.


c.<징비록>의 내용


 본서의 찬술이 끝난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대략 그가 낙향한 지 3,4로 추측되며, 친필로 쓴 <초본 징비록>은 지금도 하회종가에 간직되어 있다. 그리고 약30년 후에 후손에 의해 처음으로 <징비록>이 간행되어 세상에 유포 되었다. 우리는 흔히 <징비록>이라 하면 이 간행본을 말하지만,간행본도 16권본과 2권본의 2종류가 있기 때문에 <징비록>은 모두 3종이라 할 수 있다. 그 중 <초본 징비록>이 가장 근원이 된다.

 본서의 내용은 임진란의 발단으로부터 시작하여 난중의 여러 사건을 수술하고 그 뒤에 <잡록>을 싣고 있는데,그 서술방법은 한 사건씩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임진왜란을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징비록>은 임진왜란에 관한 저술이기 때문에 그 주 내용을 이루고 있는 기사는 역시 전쟁경위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정치.경제 등을 포함한 종합적인 서술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을 증명하는 한 예로 난중의 식량문제와 명군과의 정치교섭을 상세하게 기록한 것을 들 수 잇다. 난중의 군량과 식량의 부족은 심각한 문제로서 서애가 이의 해결책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것이나.명군과의 정치교섭도 직접 담당한 것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난중의 정치.민정도 저자가 직접 체험하고 시찰한 것이기 때문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기아에 허덕이는 백성들의 참상 역시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책의 내용 중 몇부분을 간추려 보기로 한다.

 <<임진란이 일어나기 전 조정에서는 일본의 동태를 걱정하여 충청.전라.경상도에 명해 병기를 정비하고 성을 수축케 했다. 그러나 태평이 오랫동안 계속되었으므로 안밖이 편안에 젖어서 백성들은 노역을 꺼려 원성이 거리에 자자했다. 나의 어떤 친구는 그것을 보며 <성을 쌓는 것이 좋은 계책이 아니며 고을 앞에 강이 있으니 어찌 날아서 건널 것인가? 공연히 성을 쌓느라고 백성들을 괴롭히는가?라고 했다.그 당시 사람들의 의견은 모두 이러했다.>>

 <<임진년 봄에 신립과 이일을 보내 변방의 군비를 순시케 했는데 점검한 것이라 겨우 활.화살.창뿐이었다. 도읍에서는 문서의 기록만으로 법을 피했다.>>

 <<17일 이른 아침에 왜군 침략의 급보가 처음으로 조정에 이르고 얼마 안되어 부산함락의 소식이 이르렀다. 순변사 이일이 서울에 있는 정병을 거느리고 가고자 병조의 병적을 가져다 보니 모두 거리의 훈련되지 않은 병정과 서리.유생이 반수나 되었다. 임시 겸열하니 유생은 관복을 갖추고 과거 보는 시험지를 들고 있으며 서리들은 평정건을 쓰고 군사로 뽑히는 것을 모면하려는 자들로 뜰에 차 있었다.>>

 이상은 우리 백성들의 심리상태나 사기 등에 관한 기록이다.

 또한 전투에 관해서도 신랄한 전략적 비판을 가하고 있다. 행주대첩과 진주성의 싸움에 대해서도 <징비록>에서는 비판하고 있으며,신립 장군의 충주패전은 조령의 험한 지세를 이용하지 못한 전략적 실패로서 슬픈 일이라고 평하고,옛사람이 말하기를 지금 후회한들 어찌하오리만은 후일의 경계가 되겠기로 상세히 기록하여둔다>>라고 했다. 임진란의 여러 장수 중에서 이순신은 가장 훌륭한 전략가로서 찬양되고 그를 추천하는 데서부터 주요 해전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물론 서애의 인물평이나 사건평은 그의 당색이나 주관을 감안해야 되겠지만 그의 여러 전투에 대한 전략적 평가는 한국전사를 연구하는 데 기본이 된다. 할 수 있다.

 그럼 백성들의 비참한 상황에 대한 기록을 보자. 

 <<임금께 군량을 제외한 나머지 곡식을 내어 굶주린 백성을 구하고자 아뢰니 허락하다. 왜군이 서울을 점거한 지 벌써 2년,전화를 입어 천리가 쓸쓸하고 백성은 농사를 짓지 못해 아사하는 자가 속출했다. 성줄에 남아 있던 백성은 내가 동파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서로 부축하고 이고 지고 하여 온 자가 헤아릴 수 없었다. 어떤 명나라 장수는 길가에서 어린애가 죽은 어미의 젖은 빨고 있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 군중에서 기르고 있다. 솔잎으로 가루를 만들어서 솔잎가루 10에 쌀1을 섞어 물에 타서 먹였으나 사람은 많고 곡식은 적어 생명을 건진 것이 얼마 되지 못했다.  어느 날 밤에 큰 비가 내리는데 굶주린 백성이 내 주위에서 신음하는 슬픈 소리를 차마 들을 수 없더니 아침에 깨어보니 쓰러져 죽은 자가 심히 많더라. 대저 서울에서 남쪽 끝까지 왜적이 가로 꿰뚫고 있었으며 때는 4월인데 인민들은 모두 산과 골짜기에 피난하여 한 곳에도 보리를 심은 곳이 없었으니 왜적이 수개월이나 있었더라면 우리백성은 죽었을 것이다.>>


d.<징비록>의 평가

 

 임진란관계의 기록으로는 우리 나라의 <조선실록>을 비롯하여 중국이나 일본에도 몇가지 기록이 있으나,이 <징비록>처럼 임진왜란을 대국적으로 관찰하고 종합적으로 기술하여 후손에게 전해준 저서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저자 자신이 국정의 최고책임자로서 전쟁을 진두지휘한 사람이므로 그의 기록은 다른 어느 것보다 신빙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서애가 본서에서 기술한 인물평이나 사건에 대한 평들도 그의 당색이나 주관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지만,일차적으로 그가 기술한 여러 전투에 대한 전략적 평가는 한국전사 연구에도 기본이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징비록>은 훌륭한 사료가 되는 동시에 또한 전쟁문학의 가치도 있으니 이것이 임진란관계의 문헌으로서 가장 중요한 책이요,당시 조선왕조 사회의 기본 사료이며 우리의 고전적 문헌으로 많은 역사적 교훈을 주는 저술이라 하겠다.

 저자는 전란 중에 처음에서 끝까지 국난을 처리했으며 전쟁 후에는 낙향하여 전원 속에서 지나간 날의 전쟁의 성패를 조용히 반추해보고, 그의 명석하고 정확한 판단력을 한 자루의 사필에 경주함으로써 앞일을 징계하여 뒷걱정을 조심한다는 국가의 대계를 토로했으니,이러한 그의 정치가다운 양심과 애국자다운 모습이 이 책 속에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 특히 내용에 있어서도 그의 유창한 필치와 탁월한 식견으로 전후 7년 동안의 조선.중국.일본 세 나라 사이의 외교관계와 전국의 추이를 명쾌하게 묘사하고 간결히 기술하여 그 당시 민족의 수난상을 우리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 현재 국제화.개방화 시대에 직면한 우리들에게 다시금 과거를 거울삼아 미래를 대비해야 하는 결의를 더 한층 환기하게 해준다.



B005 – 성학집요(聖學輯要) / 이이(李珥) (1536~1584) 


 이황이 주자학적 명분론을 이론적으로 완성한 학자라면 이이는 이를 더욱 세련시켜 현실정치에 실현하고자 한 사람이다. <성학집요>는 퇴계(李滉:1501∼1570)의 <성학십도>에 대응되는 율곡의 저작으로,성리학의 과제와 얼개를 밝힌 후 학문의 기초가 되는 수기의 방법에서부터 위정자의 자세까지 조목 조목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 책 자체로도 성리학의 대강과 한국 성리학의 특징을 잘 볼 수 있지만, 퇴계의 <성학십도>와 비교하면서 보면 주리파와 주기파라는 한국성리학의 두 흐름이 지닌 미묘한 차이까지 느낄 수있다.


a.생애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과거시험에 9번 응시하여 9번 모두 장원급제한 율곡과 영원한 현모양처의 상징인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한 청년 율곡이 36세 연상인 퇴계를 도산서원으로 방문하고 하직할 때 퇴계가 율곡에게 준 금언은 무엇일까?

 이이 (율곡은 호)는 중종 31년 강릉의 외가인 오죽헌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의 꿈에 용이 집으로 날아들어 왔다. 하여 어릴 때 이름은 현룡 그가 태어난 방을 몽룡실이라 불렀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소문나 3세에 글을 해독했고 13세에 과거를 보아 과연 천재답게 진사에 뽑혔다. 흔히 재주가 승한 사람은 박덕하기 일쑤인데 율곡은 어려서부터 재덕을 겸비하여 이를 자랑함이 없이 학문에 더욱 정진했다. 16세에 어머니이자 스승이요, 미덕을 겸비한 이상적인 모친인 신사임당을 여의고 3년 동안 산소 앞에 움막을 짓고 근신한 다음,인생에 무상을 느끼고 금강산에 들어가 불경을 접했으나 마음의 평화는 얻지 못했다.

 그러던 중 <논어>를 읽고 크게 깨달은 바 있어 하산하여 평생 동안 그의 행동규범이 되는 <자경문>즉 좌우명 11조를 지었다. 그1조가 <<조금이라도 성현에 미치지 못하면 나의 할 일이 끝난 것이 아니다>>라고 한 것을 보면 그의 학문의 궁극적 목표인 성인이 되고자 하는 <성학>에 대한 의지가 얼마나 강한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23세 되던 해 59세의 이황을 찾아가 학문을 논하여 이황에게 깊은 감명을 준다. 후에 이황은 제자인 조목에게  보낸 편지에서 <<두뇌가 명석하여 많이 보고 기억하니 후배란 두려운 것>>즉 <후생가외>라고 술회했다 한다.

 평생 과거시험에 아홉 번 응시하여 모두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공>이라 불리었던 율곡은 호조좌랑, 예조좌랑, 대사헌, 이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지냈다. 

 그는 도량이 넓고 신중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성리학적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단순히 성리학만을 고수하지 않고,불교와 노장철학을 버릇한 제자백가 사상에도 이해가 깊었다. 또한 철학에만 조예가 깊었던 것이 아니라,정치.경제.교육.국방 등에도 탁월한 방책을 제시했다. 다소 사회참여를 기피했던 이황과는 달리 그는 적극적으로 사회개혁에 참여했는데,동서분당의 조정을 위한 노력,보국안민을 위한 10만 양병설,대동법과 사창제의 장려 등 모두가 국리민복을 위한 것이었다.

 학문에 있어서는 이황과 조선시대 유학의 쌍벽을 이루는 학자로 기홍학파를 형성했다. 주요저서로는 <성학집요> <격몽요결>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을 때 어찌나 생활이 청빈했던지 그의 집에는 수의를 만들 천조차 없어 친구들이 구해다 만들 정도였고, 그의 영구가 서울을 떠나던 날 밤 애통해하는 시민들의 횃불의 행렬이 수십리나 계속되었다고 한다.


b.율곡의 사상

 

 그의 사상은 이기론에 있어서는 <이기이원론적 주기론>즉, <기발이승일도설>과 <이통기국설> 성경론에 있어서는 <성> 사상으로 요약할 수 있다.

 

   1.이이는 우주는 무형무위한 이와 유형유위한 기로서 구성되어 있는데 모든 현상의 변화발전을 기의 작용으로 보고, 이는 기의 작용에 내재한는 보편적 원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는 퇴계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 에 대해서도 이발이란 있을 수 없고 오직 기발이승(氣發理乘)의 한 길만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기박일승일도설에 대해 <<이는 무위인데 기는 유위이다. 그러므로 기발이승이다. 음양은 동정이요,태극이 이것을 올라타고 발하는 것은 기이며 그 기를 올라타는 것은 이다. 공자는 말하기를 <사람은 도를 넓힐 수 있되 도는 사람을 넓힐 수 없다>고 했다. 무형무위이면서 유형위의 기가 되는 것은 기이다>>고 했다.

 또는 독자적인 이통기국설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통기국이라 함은 이는 대체로 형체가 없고 기는 형체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이통이란 천지만물이 동일함이란 것이요, 기국이란 천지만물이 각각 한 이가 되니 이것이 분수인 이유요, 이가 본래 일일이 아니란 것은 아니다.>>  이처럼 그의 <이통기국설>은 화담의 <일기장존설>을 부인하게 되고 <기발이승일도설>을 통해 이황의 4단7정의 구분을 7정만을 인정하게 된다. 즉, 이황은 4단은 이발기수요 7정은 기발이승으로,이의 발과 기의 발을 인정하는 호발설이다. 따라서 4단과 7정을 별개로 구분한다.

그러나 율곡은 이황의 4단인 이발을 부정하고 7정인 기발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4단과 7정을 모두 정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4단은 7정 중의 순선정만을 뽑아서 4단으로 지목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2.성경론에 있어서는 이황이 경을 강조한 데 반해 이이는 성을 강조했다. 성리학의 모든 논리와 주장이 도덕적 인격의 완성에 귀납했는데, 그것을 위해서 성리학자들은 성과 경을 중요한 덕목으로 내세웠다. 그 인격수양방법으로는 거경(어떤 일을 함에 있어 정신을 집중시켜 다른 곳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음)과 궁리(사물의 이치를 깊이 연구함)를 중시한다. 이이는 성을 천지실리 심지본체 학문의 요체, 궁행의 근본이라 봄으로써 평생을 성으로 일관했다.


c.<성학집요>의 내용 


 본서는 13권 7책으로 되어 있는데 선조 8년(1575)에 율곡이 40세로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을 때 선조로 하여금 <내성외왕>의 성군이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성인의 학을 공부하는데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말을 <경사>에서 뽑아 모아 학문 및 정치에 긴요한 것을 사서의 <대학>체계를 본 따 엮어서 선조에게 올린 것이다. 이는 그가 선조의 <성학>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이미 20세때 <자경문>을 통해서 <<먼저 자기의 뜻을 크게 가지어 성인으로 준칙을 삼아야 할 것이니 조금이라도 성인에 미치지 못하면 나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라고 결의했던 것처럼,스스로 학문의 궁극적인 목적을 성인이 되는 것에 두었던 포부가 40세에 이르러 그가 공부해온 바를 정리한 필생의 역저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율곡철학의 진수요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전체가 5편으로 되어 있다.


 제1편 <통설>은 <중용>과 <대학>의 수장의 설을 인용하여 수기와 치인을 합하여 말했다.즉 <대학>의 명명덕과 신민과 지어지선을 개관했다.


 제2편은 곧 <대학>의 명명덕을 밝히는 것으로서 모두 13제목으로 되어있다. 1장은 총론이요,2장은 입지(학문에 뜻을 세움),3 장은 수렴 (마음을 수습하여 정돈함)을 두었다. 4장의 궁리 (사물의 이치를 깊이 연구하는 것)는 곧 <대학>의 격물치지이며, 5장은 성실(사물의 진리에 성실하는 것)이요, 6장은 교기질 (기질을 본연의 성으로 교정함)이고, 7장은 양기(본연의 기를 기름)요, 8장은 정심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고,9장은 검신 (몸을 가다듬음)이요,10장은 회덕량(덕량을 바로잡음),11장은 보덕(덕을 북돋움),12장은 돈독 (독실하고 거리낌없이 일관함), 13장은 수기공효 (자기수양의 결과와 효과)를 말하고 있다.


 제3편 <정가>로서 제가를 말하고 8장으로 나누어진다. 1장은 총론정가 (총론격),2장 효경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어른에게 공경함), 3장 형내 (아내와 집안을 바르게 다스림),4장 교자 (자녀를 잘 가르침),5장 친친 (친척과 서로 화목하고 우애함),6장 근엄 (부부.가족.친척과의 신분의 분별과 질서를 엄하게함),7장 절검 (사치와 낭비를 삼가고 절약함),8장 가정공효 (가정 다스림의 결과와 효과)를 서술하고 있다.


 제4편 <위정>으로서,위정이라 하는 것은 <대학>의 이른바 신민으로 치국평천하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10장으로 나누어진다. 1장 총론위정 (총론격),2장 용현 (인재를 등용한 급한 일을 의식해서 실천함),5장 법선왕 (선왕의 좋은 정치를 모방함), 6장 근천계 (하늘의 뜻을 따르고 하늘의 뜻을 어기지 않음), 7장 입기강 (먼저 국가와 사회의 기강을 바로잡아야 함), 8장 안민 (안민을 편안케 해야 함), 9장 명교 (교육과 교화를 밝혀서 실시함), 10장 위정공효 (나라 다스림의 결과와 효과),

 

 제5편 <성현도통> (유교의계통을 세움)을 서술하고 있다. 이상을 내용으로 하는 <성학집요>는 유학을 공부하고 그 가르침에 따라 자기완성을 이루며,다시 가정.사회.국가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이념적인 것을 간결하게 엮은 것이다.  그 내용의 주된 흐름은 유학에서 기본적이고도 입문서라 할 수 있는 <대학>을 성리학적 입장에서 풀이한 송대 진서산의 <대학연의>를 골격으로 삼고 그 논리적 전게에 의해 차례를 세웠다. 또 사서오경과 선현의 여러 저술을 참고하고 인용,그 고증과 설명을 곁들이고 있다.


 율곡은 이 저술을 선조에 바치면서 학자들이 궁리.정심.수기치인의 도는 하지 못하면서 기통과 사장에만 얽매여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 <대학>에서 가르치는 팔덕목을 성현의 가르침과 비교하여 익히고 상용에 힘써 천덕과 왕도의 보람과 수기치인의 길을 찾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그는 관리는 말할 것도 없고 임금도 이 원리와 방식에 따라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했다. 이 <성학집요>대로 실천된다면 하.은.주3대의 이상정치는 현실적으로 부흥된다는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이 <성학집요>는 그의 실천철학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윤리관과 정치관이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유교나 주자학 자체가 그러하듯 율곡의 사상에서도 사변적인 형이상학과 실천적인 실용철학은 서로 혼용,동화 내지 불가분의 관계로 얽혀 있다. 그래서 <성학집요>에서도 그 전개과정에 있어 그의 독자적인 이기론 4단7정론.심성론.인심도심설 등이 그 밑바닥에 깔려 있음을 볼 수 있다. 선조도 이책을 받아보고 높이평가,치국안민에 큰 도움이 되리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후 율곡의 학통을 이은 기호학파는 물론,학문적으로 반대입장에 섰던 영남학파 등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들의 학문과 정사를 위해 사용했다.


d.율곡사상의 평가


 고려 말에 전래된 성리학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이황과 이이에 이르러 그 절정을 이룬다. <성학십도>와 <성학집요>가 제목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그들이 얼마나 <성인의 길>을 갈구했는지를 알 수 있다. 즉,학문의 궁극적인 목적을 성인이 되고자 함에 두었다는 점,그리고 각각 독자적인 성리학의 체계를 수립했다는 점에서 그들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일생을 검소함 속에서 보내고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주리설의 입장에선 이황이 주자학의 본질인 학문과 제자양성에 주력한 반면,주기설을 주장한 이이는 주자학의 이념적인 세계를 현실에 적극적으로 적응시키고자 했다. 부패하고 어지러운 사회를 바로잡고 도탄에 빠진 민생의 구제를 위해 항상 갱신과 개혁을 주장했다. 다시 말하면 주자학의 이념과 현실사회의 실제가 들어맞는 명실상부한 유교주의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성실사상>에 입각한 <무실적 경세론>과 그는 사회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백성의 경제적인 안정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보고,정치.경제.사회.교육 등 전 분야에서의 변법(법과 제도의 개혁)을 통한 사회개혁을 주장했다. 또한 왕도정치와 언로확층을 통한 민본정치의 구현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황의 사상이 임진왜란 이후 일본 유학계와 구한말의 기정진.이진상을 거쳐 19세기 말 이항로 등의 위정척사운동의 이념적 지주가 된 반면,이이의 현실개혁 사상은 실학파에 영향을 주었고 한원진.임성주.최한기 등을 거쳐 개화사상가들과 국학자,그리고 애국계몽사상에 연결되었다.

 마지막으로 퇴계와 율곡 사이에 있었던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한다. 율곡이 도산서원에 이틀을 머물고 떠나면서 36세 연상이 퇴계에게 한 말씀을 청하니 퇴계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써주었다.


 지심귀재불기 입조당게희사(持心貴在不欺  入朝當戒喜事)

 사람의 마음가짐에 있어서 귀한 것은 

 속이지 않는데 있고 

 벼슬하여 조정에 나아가게 되면 

 공을 세우려고 일만들기를 좋아해서는 안된다.  


 자기현시 욕구가 강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경종을 울려주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自警文 ]


율곡이 어머니를 여읜 채 상심하여 19세에 불교를 연구해 보려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가 20세 되던 해 봄에 강릉의 외조모가 계신 곳으로 돌아 나와, 자기 수양의 조문을 삼고자 지은 글의 본문을 살펴보면,


1. 先須大其志 以聖人爲準則 一毫不及聖人 則吾事未了

 (선수대기지 이성인위준칙 일호불급성인 칙오사미료)


 먼저 그 뜻을 크게 가져 '성인'으로서 표준을 삼아 털끝만큼이라도 성인에 미치지 못한 동안은 내 할 일이 끝난 것이 아니니라.


2. 心定者言寡 定心自寡言始

 (심정자언과 정심자과언시)


 마음이 안정된 사람은 말이 적다. 그러므로 마음을 안정하는 것은 말이 적은 데서부터 비롯하느니라. 말할 만한 때가 된 다음에 말을 한다면 그 말이 간략하지 않을 수 없느니라.


3. 久放之心 一朝收之 得力豈可容易 心是活物 定力未成 則搖動難安 若思慮紛擾時 作意厭惡 欲絶之 則愈覺紛擾 숙起忽滅 似不由我 假使斷絶 只此斷絶之念 橫在胸中 此亦妄念也 當於紛擾時 收斂精神 輕輕照管 勿與之俱往 用功之久 必有凝定之時 執事專一 此亦定心功夫 時然後言 則言不得不簡

(구방지심 일조수지 득력기가용이 심시활물 정력미성 칙요동난안 약사려분요시 작의염오

욕절지 칙유각분요 숙기홀멸 사불유아 가사단절 지차단절지염 횡재흉중 차역망념야 당어분요시

수렴정신 경경조관 물여지구왕 용공지구 필유응정지시집사전일 차역정심공부 시연후언 칙언불득불간)


 오래도록 놓아 버렸던 마음을 하루아침에 거두어서 힘을 얻는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느냐. 마음이란 산 것이라. 안정된 힘이 이뤄지지 못하면 흔들려서 편안키 어려우니라. 만일 생각이 어지러울 적에 그게 귀찮아 마음먹고 끊어 버리려고 한다면 점점 그 어지러운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며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 같음을 알리라. 설혹 그것을 끊어 버린다 하더라도 다만 그 끊어 버렸다는 생각이 가슴 속에 가로놓여 있다면 그 또한, 허망한 생각이니라. 그러므로 마땅히 생각이 어지러울 때에 있어서는 정신을 가다듬어 가만가만 다룰 것이요, 그 생각에 이같이 애쓰기를 오랫동안 하노라면 반드시 차분히 안정되는 때가 있을 것이니, 무슨 일을 하든지 전심전력해 한다면 그 또한, 마음 안정시키는 공부가 되느니라.


4. 常以戒懼謹獨意思 存諸胸中 念念不怠 則一切邪念 自然不起 萬惡 皆從不謹獨生 謹獨然後 可知浴沂詠歸之意味

(상이계구근독의사 존제흉중 염념불태 칙일절사념 자연불기 만악 개종불근독생 근독연후 가지욕기영귀지의미)


 언제나 조심스레 경계하고 혼자 있을 때에 삼가는 뜻을 가슴 속에 품은 채 시시각각 게으르지 아니하면, 모든 삿된 생각이 저절로 일어나지 못하리라. 만 가지 악이 모두 다 혼자 있을 때에 삼가지 않는 거기서 생겨나느니라. 혼자 있을 때 삼갈 줄 안 다음에야 참으로 저 자연을 사랑하며 즐길 수 있는 고상한 뜻을 알 수 있느니라.


5. 曉起 思朝之所爲之事 食後 思晝之所爲之事 就寢時 思明日所爲之事 無事則放下 有事則必思 得處置合宜之道 然後讀書 讀書者 求辨是非 施之行事也 若不省事 兀然讀書 則爲無用之學

(효기 사조지소위지사 식후 사주지소위지사 취침시 사명일소위지사 무사칙방하 유사즉필사 득처치합의지도 연후독서 독서자 구변시비 시지행사야 약불성사 올연독서 칙위무용지학)


 새벽에 일어나서는 아침에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밥 먹은 뒤에는 낮에 할 일을 생각하고, 잠자리에 들어서는 내일 해야 할 일을 생각할지니, 만일 일이 없으면 그만두려니와 일이 있으면 반드시 적절하게 처리할 방법을 생각해 낸 다음에 글을 읽을지니라. 글을 읽는다는 것은 옳고 그름을 분간해서 실천에 옮기려 하는 것이니 만일 사물을 살피지 않고 똑바로 앉아 글만 읽는다면 쓸데없는 학문이 되느니라.


6. 財利榮利 雖得掃除其念 若處事時 有一毫擇便宜之念 則此亦利心也 尤可省察

 (재리영리 수득소제기념 약처사시 유일호택편의지념 칙차역이심야 우가성찰)


 재물, 영예, 그건 설사 그 생각을 쓸어 버릴 수 있다 하더라도 만일 일을 처리할 적에 털끝만큼이라도 편의한 것을 택할 생각을 가진다면 그 또한, 이익 탐하는 마음이니 더욱 살펴야 할지니라. 무릇 일을 만났을 적에 만일 해야 할 일이거든 정성껏 하되 싫증내고 게을리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며, 또 안 해야 될 일이라면 딱 끊어 버려 가슴 속에서 옳고 그른 것이 서로 싸우게 하지는 말지니라.


7. 凡遇事至 若可爲之事 則盡誠爲之 不可有厭倦之心 不可爲之事 則一切截斷 不可使是非交戰於胸中

 (범우사지 약가위지사 칙진성위지 불가유염권지심 불가위지사 칙일절절단 불가사시비교전어흉중)


 언제나 저 <맹자>에서 이른바 '한 가지 옳지 못한 일을 행하고 한 사람의 죄 없는 이를 죽이고서 천하를 얻는대도 하지 않는다.'는 그 생각을 가슴 속에 간직할지니라.


8. 常以行一不義 殺一不辜 得天下不可爲底意思 存諸胸中

  (상이행일불의 살일불고 득천하불가위저의사 존제흉중)


 횡액과 역경이 닥쳐올 적에 스스로를 돌이켜 보아 깊이 반성함으로써 저쪽을 감화하도록 할지니라.


9. 橫逆之來 自反而深省 以感化爲期 一家之人不化 只是誠意未盡

(횡역지래 자반이심성 이감화위기 일가지인불화 지시성의미진)


 제 집안 사람들이 감화되지 못한다는 것은 다만 성의가 모자라기 때문이니라.


10. 非夜眠及疾病 則不可偃臥 不可跛倚 雖中夜 無睡思 則不臥 但不可拘迫 晝有睡思 當喚醒 此心 十分猛醒 眼皮若重 起而周步 使之惺惺

(비야면급질병 칙불가언와 불가파의 수중야 무수사 칙불와 단불가구박 주유수사 당환성 차심 십분맹성 안피약중 기이주보 사지성성)


 밤에 잘 때나 아픈 때가 아니면 눕지 않아야 하고 비스듬히 기대지도 말 것이며 또 밤중일지라도 졸리는 생각이 없으면 눕지 말되, 다만 억지로 할 것은 아니니라. 그리고 낮에 졸음이 오면 마땅히 정신을 차려 바짝 깨우칠 것이요, 그래도 눈까풀이 무겁거든 일어나서 두루 거닐어 깨도록 할지니라.


11. 用功不緩不急 死而後已 若求速其效 則此亦利心 若不如此 戮辱遺體 便非人子

  (용공불완불급 사이후이 약구속기효 칙차역이심 약불여차 육욕유체 변비인자)


 공부에 힘쓰되 늦추지도 말고 보채지도 말며, 죽은 뒤에야 그만둘 것이니, 만일 그 효과가 빨리 나기를 구한다면 그 또한, 이익 탐하는 마음이니라. 만일, 이같이 아니 하면 어버이에게서 물려받은 몸뚱이를 욕되게 함이라. 그게 바로 사람의 아들 된 도리가 아니니라.

[네이버 지식백과] 자경문 [自警文] (Basic 고교생을 위한 윤리 용어사전, 2001. 12. 20., (주)신원문화사)



사창제(社倉制)는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이 삼정의 문란 중 가장 극심했던 환곡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리(里)를 단위로 보릿고개 때 곡식을 빌려 주는 사창을 설치하여 운영한 제도다. 보통 보릿고개 때 곡식을 빌려주고 추수를 하는 가을 정도에 이자를 조금씩 붙여서 돌려받았다(위키백과) (출처: http://yulgok.co.kr/book/jagyeong.htm)




[이이의 철학사상]

이이는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더불어 조선 중기의 한국 성리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이황의 주리론(主理論)과 서경덕(徐敬德)의 주기론(主氣論)을 조화시켜 한국 성리학의 이론을 발전시켰으며, 그의 사상은 김장생(金長生) 등에게 계승되어 기호학파(畿湖學派)를 낳았다.


고려 말기에 수용된 성리학은 16세기를 거치면서 이기론(理氣論)ㆍ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ㆍ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등을 둘러싼 학문적 논쟁을 거치면서 더욱 발전하였다. 특히 이황과 기대승(奇大升)은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에 관한 이기론적(理氣論的) 해석을 둘러싸고 1559년에서 1566년까지 8년 동안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논쟁을 벌였는데, 이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은 조선 성리학의 발달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이 논쟁에서 이황은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을 각각 이발(理發)과 기발(氣發)로 나누어 설명하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했다. 순선(純善)한 사단(四端)은 ‘이가 발함에 기가 따르는 것(理發氣隨)’이고, 선하기도 악하기도 한 칠정(七情)은 ‘기가 발함에 이가 타는 것(氣發理乘)’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이황은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관점에서 이(理)와 기(氣)를 명백히 구별되는 별개의 실재처럼 보았고, 사단을 이(理)의 발동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봄으로써 이(理)의 능동성과 우위성을 강조하는 주리론(主理論)을 주장했다.


하지만 기대승은 이황처럼 4단(四端)과 7정(七情)을 각각 이(理)와 기(氣)의 작용에 따른 것으로 나누면 4단에는 기(氣)가 없고 7정에는 이(理)가 없게 되는데, 이는 이(理)와 기(氣)가 떨어져 있을 수 없다고 한 주자의 견해와 대립된다고 보았다. 나아가 그는 “사단과 칠정의 구별이 있을 따름이요, 칠정 밖에 따로 사단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며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에 기초해 사단과 칠정이 모두 다 정(情)이라고 보는 주정설(主情說)을 주장했다.


이이는 1572년부터 성혼(成渾)과 9차례에 걸쳐 서신을 교환하면서 이황과 기대승이 논쟁을 벌인 이(理)ㆍ기(氣)와 사단(四端)ㆍ칠정(七情)의 관계에 대해 논변을 벌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기(氣)의 작용을 상대적으로 중시하는 주기론(主氣論)의 관점에 기초해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제시했다.


이이는 기대승과 마찬가지로 칠정이 사단을 포함한다는 ‘칠정포사단(七情包四端)’의 논리를 전개하며 사단과 칠정을 엄격히 구별하는 이황의 학설에 반대했다. 칠정이 정(情)의 전부이며 사단은 칠정 가운데 순선(純善)한 것만을 가려내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 도심(道心)과 인심(人心)을 엄격히 구분하는 이원론을 비판했다. 곧 도덕에 힘쓰는 마음인가 사사로운 욕심에 힘쓰는 마음인가에 따라 도심과 인심의 구별이 생겨나고, 욕망을 가진 몸속에 깃든 본성인가 그 이전의 본성인가에 따라 기질지성과 본연지성의 구별이 생겨나지만, 인간의 마음과 본성은 하나라는 것이다.


또한 그는 이(理)와 기(氣)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분리되거나 선후(先後)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으며, 이와 기를 체(體)와 용(用)의 관계로 해석했다. 이와 기는 논리적으로는 구별되지만(不相雜), 실제로 따로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不相離). 곧 이(理)는 당연의 법칙으로 우주의 체(體)이고, 기(氣)는 이(理)를 구체화하는 활동이므로 우주의 용(用)이다. 따라서 이는 기를 주재하며, 기는 이의 재료가 된다. 이처럼 하나이며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이와 기의 관계를 이이는 ‘이기지묘(理氣之妙)’라고 나타냈다.


이러한 관점에 기초해서 이이는 사단과 칠정이 모두 기(氣)의 작용으로 생기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모든 활동과 작용은 기(氣)의 운동에서 나타나며, 기(氣)가 발하면 이(理)는 단지 여기에 올라탈 뿐이라는 기발리승(氣發理乘)의 한 가지 길(一途)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곧 “발(發)하는 것은 기이고 발하는 까닭이 이”라며 이황과 달리 이(理)에서 발한다는 이발(理發)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처럼 이이의 철학은 기(氣)를 중시하는 주기론(主氣論)에 기초해 있다. 하지만 그는 서경덕의 주기(主氣) 철학에 대해서는 그가 이와 기의 구별을 무시했다고 비판했다. 서경덕은 우주의 궁극적 본질을 태허지기(太虛之氣)로 인식했는데, 이이는 태허지기가 아니라 태극지리(太極之理)를 우주의 궁극적 본질로 보아야 한다며 이와 기의 논리적 구별을 동시에 강조했다. 또한 이는 시ㆍ공간적으로 무한하지만 기는 유한하다며 서경덕의 기불멸론(氣不滅論)을 비판하며 기멸론(氣滅論)을 주장했다.


이러한 이이의 이기론은 다양한 현상 속에 보편적 원리(理)가 존재하며, 이러한 보편적 원리는 기(氣)의 작용에 의한 현실의 구체적인 현상들과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를 이이는 그릇과 그릇에 담긴 내용물의 관계를 들어 설명했는데, 곧 모난 그릇과 둥근 그릇은 다르지만 그 안에 담긴 물은 같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理)의 보편성과 기(氣)의 국한성을 설명하는 이이의 주장을 ‘이통기국론(理通氣局論)’이라고 한다.


즉, 이이는 서경덕의 기일원론적인 주기론에 대해서는 이의 중요성을 들어 비판하고, 이황의 이기이원론적인 주리론에 대해서는 기의 중요성과 이기불리(理氣不離)를 들어 비판했다. 이처럼 이이는 서경덕과 이황 등 당대 성리학자의 대립된 주장을 균형 있게 아우르며, 본체와 작용, 현실과 원리의 대립을 조화시키려는 독특한 성리학 사상을 발전시켰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이의 철학사상 (두산백과)



B004 – 성학십도(聖學十圖) / 이황(李滉) (1501--1570) 


 <동방의 주자>라 불리는 퇴계 이황이 68세 때 서울생활을 마감하면서 16세의 어린 선조를 <성군>으로 인도하기 위해 제왕의 길을 말씀 드리고 말로 다할 수 없어 글로 올린 것이 <성학십도>다. 여기서 퇴계는 수신이 정치의 근본이 됨과 동시에 수신의 방법과 그 철학적 근거를 밝히고 군주의 도덕적 수양을 강조하고 있다. 퇴계는 성리학의 요체를 열 개의 그림으로 나타낸 다음 자신의 해설을 덧붙이고 있는데, 우리는 여기서 성리학적 사유의 핵심과 도덕적 명분의 확립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대하는 그의 진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a.생애


 정통 성리학의 완성자, 이름은 황, 퇴계는 호. 퇴계가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부친은 세상을 떠나고, 30대 초반의 모친은 별로 배우지는 못했으나 매우 현명하고 덕성스러운 여자였다. 21세에 결혼하고 23세(중종 18년)에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던 중 과거를 세 번 보아 모두 낙방하는 쓰라린 경험을 맛본다. 교훈이기도 했다. 율곡이 과거를 아홉 번 보아 모두 장원급제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퇴계는 대기만성형이었다.

27세부터 과거에 합격하기 시작했다. 34세에 승문원 부정자라는 최하위직으로 출발하여 49세에 풍기군수를 끝으로 관에서 물러나기로 결심할 때까지 중앙에서 29종의 벼슬을 지냈다. 1545년 을사사화로 일시 파면 당하기도 했으나 곧 복직되었다. 그 후 고향에 돌아와 조그만 암자를 짓고 독서와 사색에 열중한다.

 그의 호인 퇴계는 고 이은상 선생에 의하면 <<물러나 시냇가에 거처한다>> 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49세에 은퇴하여 70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왕명으로 4번이나 서울로 올라가 성균과 대사성(국립대 총장),공조판서,예조판서 등을 거쳐 학자문사로서는 최고의 영예인 양관 대제학(왕의 정책결정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하는 홍문관과 왕의 교서를 작성하는 예문관의 장)등의 벼슬을 억지로 한다.

 16세의 어린 선조에게 <성학십도>를 올리고 68세에 완전 은퇴하여 <주자서 절요>등 저술작업과 학문연구, 그리고 제자양성에 전력한다. 그는 특히<주자전서>에 감동하여 침식을 잊고 연구한 결과 <동방의 주자>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이이와 함께 우리나라 유학사상의 대표적 학자로 주자의 <이기이원론> 을 발전시켰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이기호발설>로 이가 발하여 기가 이에 따르는 것은 4단이며,기가 발하여 이가 기를 타는 것은 7정이라 했다. 그의 학풍은 후에 영남학파를 이루어 이이의 기호학파와 대립, 동서당쟁과 관련이 있고, 그의 학설은 일본유학계와 구한말 위정척사운동에 영항을 미쳤다. 현실생활과 학문생활을 엄격히 구분하여 최후까지 학자적 태도를 지켰다.

 퇴계는 타고난 학자로서 벼슬에 있을 때나 야에 있을 때나 손에서 책을 놓는 경우가 없었다 한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고 생각하고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여 저술에 몰두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건강을 해쳐 소화불량.안질.현기증에 시달렸다. 그러나 만년에 학문을 대성하고 성인의 경지에 들었을 때는 모든 것을 달관한 탓인지 건강도 저절로 회복되고 수척하던 몸도 원숙하게 되어  마음과 더불어 보기좋게 살쪘다고 한다. 제자들은 그를 신명, 즉 신처럼 존경하고 받들었다.


b.조선시대 성리학의 두 흐름


 성리학은 송나라의 주자에 의해 체계화된 유학사상으로 이. 기 의 개념을 통해 우주와 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본성을 규명하고자 한 유교철학으로 대체로 태극론.이기론.심성론.성경론으로 구분된다. 

 조선의 성리학은 주리론과 주기론 의 두 계통으로 발달했다. 주리론은 주자의 견해를 보다 충실하게 받아들인 것으로  이기이원론의 입장에서 이(본질, 플라톤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유사)와  기(현상, 플라톤의 현상계,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흡사)는 서로 다른 것이면서 서로 의지하는 관계에 있지만 어디까지나 이가 기를 움직이는 본원이라는 견해다.

 따라서 인간의 심성문제를 해석함에 있어서도 이(목??의 ??)는 순선무악한 것이고 기(기질의 성)는 가선가악한 것이라 하여 역시 이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이 학설은 이언적에서 시작되어 이황에 이르러 집대성되었는데, 특히 이황은 동방의 주자 라 불릴 만큼 주자의 교리에 충실했다. 그의 문하에서는 유성룡.김성일.정구 등이 배출되어 영남학파를 형성했으며 일본유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한편  주기론 은 서경덕이 처음으로 주자의 학서를 비판하고  이기일원론 을 주장함으로써 시작되어 이이에 의해 대성을 보았다. 이것은 우주만물의 근원을 기에 두고 모든 현상들을 이 기의 변화.운동으로 보는 입장이었으나 여기서 이는 기를 움직이는 법칙에 불과한 것이었다.

따라서 심성론에 있어서도 본연이 성보다 기질의 성을 더욱 중요시했으며 정치.경제 등 현실인식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 학문은 이이를 비롯해서 성혼.송익필과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 등에게 이어져 기호학파를 형성했다. 이후 영남과 기호 두 학파는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대립하면서 발전했다.


c.이황의 사상


 이황의 사상은 이기론에 있어서는 이기이원론적 주리론 이기호발설과, 기대승과의  4단7정논쟁,  성경론 에 있어서는  경 사상 등으로 요약된다.


 1.이황에 의하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만물은 이와 기로 이루어진다. 이는 무형무질의 정신적인 형이상학적 존재이고, 기는 유형유질한 물질적인 형이하학적 존재라고 보았다. 이와 기는 상호의존적이나 이를 기보다 더 근원적인 존재로 파악했다. 이리하여 이 우위론적 이기론이 그의 본체론을 장식한다.


 2.이기호발설과 4단7정의 해석을 놓고 기대승과 벌인 4단7정논쟁이다. 4단이란 맹자가 말한 측은지심은 인지단이요, 수오지심은 의지단이요, 사양지심은 예지단이요, 시비지심은 지지단이다 에서 인.의.예.지를 말하며, 7정은 <예기>의 희.로.애.락.애.오.욕을 말한다.

 이황은 심성의 문제를 해명함에 있어 절대적인 이와 상대적인 기로 임했으며 언제나 인간의 심리현상은 이발기수(이가 작용하여 기가 이에 따르기도 하고)와 기발이승(기가 작용하여 이가 그 위에 타기도 함)의 이기호발설로써만 설명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리고 순선무악한 4단은 반드시 이에서 발해야 하며 가선가악한 7정은 기에서만 발할 수 있다고 보았다. 기대승은 이에 반대하여 이익의 혼륜이 정이고 그 정은 기의 작용에 의하여만 발출한다고 보고 이발을 인정치 않았다. 또한 4단은 7정에 포함되어 있고 4단과 7정의 근원은 같다고 보아 4단7정을 상대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즉, 이기는 분리할 수 없고 기를 통해서만 이를 알 수 있다고 했다.


 3.그는 평생을  경으로 일관했다.  마음을 방만하지 말고 항상 정신을 집중, 통일된 상태로 지녀야 하고 모든 지거동작을 가볍게 하지 말고 모든 일에 조심하게 삼가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따라서 말할 때에도 경해야 하고 움직일 때도 경해야 할 것이며 앉아 있을  때에도 모름지기 경해야 한다. 이는 이루러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심산이 숙연해지고 표리가 하나로 되는 경지가 되는 것이어야 한다. 또한 그는 선지후행이나 선행후지를 배격하고 지행병진론을 주장했다. 지와 행, 정과 동을 관통하는 하나의 기본이 되는 것이  성 이며 거기에 이르기 위한 방법이  경 이라 했다.


d.<성학십도>의 내용


 1568년(선조1) 서울생활을 영원히 청산하면서 68세의 노대신은 16세의 선조에게 제왕의 길을 말씀드리고 말로 다할 수 없어 글로 올린 것이 <성학십도>였는데, 어린 왕과 늙은 신하의 대면은 감격적인 장면이었다 한다. 선조를 성군으로 인도하기 위해 군왕의 도에 관한 학문의 요점을 도식으로 설명했다.

 <성학>이란 <성인을 배우는 학문> 또는 <성왕을 배우는 학문> 의 뜻으로, 쉽게 말하면 유학을 가리키며,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성인이 되도록 하기 위한 학문이 내재되어 있다는 뜻이다. <성학십도> 의 서론에 해당하는 <진성학십도차>에서 이를 확인해보면, <<임금이 된 분의 한 마음은 온갖 정무가 나오게 되는 자리이자 온갖 책임이 모이는 것이며 뭇 욕심과 간사함이 침해하는 곳입니다. 그마음이 만일 조금이라도 태만하고 소홀하여져 방종케 되면 마치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들끓는 것과 같아서 그 누구도 이것을 막아낼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임금 한 사람의 용심이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훌륭한 덕을 쌓아야 한다는 뜻으로 올린 것이다.

 공자 이후 유학에서는 이상적 정치를 군왕의 덕치. 예치라고 생각한 만큼 이황이 그 덕치의 이상실현을 위해 임금에게 덕을 쌓는 심법을 가르치고자 지은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유학의 근본정신을 언제나 <수기치인>과 <내성외왕> 에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어느 누구나 수양을 하되 현실의 문제를 도외시해서는 안되며,현실을 다루되 (외왕) 그에 앞서 누구나 성인의 조건(학식과 덕망)을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성리학의 경우에 이러한 정신을 더욱 투철하다. 따라서 이러한 점에서 보면 <성학십도>의 저술동기는 다만 군왕 한 사람의 교육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배우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성학십도>는 서론의 뜻이 담긴 <진성학십도차>와 10개의 도표와 해설로 되어 있는데, 특히 그 도에는 저작과 앞선 학자들의 것이 섞여 있다. <진성학십도차>에서는 왕 한 사람의 마음가짐이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경의 내면활동을 중요시한다.

 10도 중 1.태극도 2.서명도 3.소학도 4.대학도 5.백록동규도의 5도는 천도에 입각하여 성학을 설명한 것이고 6.심통성정 7.인설 8.심학 9.경제차 10.숙홍야매차의 5도는 심성에 근원하여 성학을 설명한다. 7개는 옛현인들이 작성한 것이고 3개(3.5.10)는 이황 자신이 작성한 것이다. <십도>의 서술내용은 도표와 함께 앞부분에 경서와 주의 및 여려 성현의 글을 인용한 다음 자신의 학설을 전개하고 있다. 이로 보면 본서는 이황의 편집과 저작의 중간형식으로 이루어진 셈이다. 일종의 편저형식을 통하여 그의 사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서 흑자는 도 자체만 가지고 말할 때 본서에는 이황의 독창성이 별로 없다고 주장할지 모르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것은 당시까지의 성리학의 요지를 열 가지로 압축,체계화한 것인데,그 당시의 성리학을 자기류로 체계화한다는 자체가 그의 독창성의 발로이기 때문이다. 이황이 특히 주희의 입장에서 성리학의 요지를 도설의 형식으로 총정리,체계화한 것이라는 데에 <성학십도>의 저술 의의가 크다. 따라서 우리는 이 한권만으로도 이황의 공헌과 그 비중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아무튼 우리 나라에서 <성학십도>만큼 숭상받은 책도 드물 것이다.이황의 철학을 대표는 <성학십도>는 선조의 명에 의해 병풍에 씌어져 애중되었고,그 이후의 역대 임금들도 경연 (임금에게 학문을 가르치고 논하는 일) 에서 자주 강의하게 했다. 임금들이 이러했으니 그

신하들의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중국에서는 청말의 양게초 같은 성학으로부터 극찬을 받은 바 있고, 일본에서는 일찍이 1655년부터 이 책이 인쇄되어 유학자들의 필독서로 숭상되었다.


e.퇴계사상의 영향


 어떤 학자들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학자 두 사람을 선택하라면 이황과 정약용을 드는 사람이 많다. 이황은 생전에 두 명의 부인,형님,아들 등의 죽음을 맞는 불운을 겪었으나 정신을 가다듬어 학문에 정진했고, 스스로 몰려드는 제자들을 가르쳐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자기의 사명이라고 깨닫고 사당을 지었다. 이와 같이 그가 평생에 역점을 두었던 일은 크게 두 가지로 학문연구와 교육운동이 그것이다.

 그의 학문과 사상에 대히서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는 인간의 심성을 구명하는 데 있어 이이와 입장을 달리했으나,구명된 인간심성을 실천으로 연결시켜 도덕적인 인간과 사회를 구현하고자 하는 것을 학문의 궁극적 목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이이와 함께 뚜렷한 공헌을 한다. 그는 저술에 매진하면서 때로는 편지로 가르치기도 하고 수양하는 방법을 일러 주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학문적 깊이는 임금들의 귀감이 되었고 뒷날 후학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는데, 일본의 메이지 유신 때에도 지도이념으로 활용되었다.

 그는 교육자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풍기군수로 재직시 백운동서원을 최초로 국가공인으로 만들엇고,성균관의 대사성자리에 있으면서 학문적 분위기를 성숙시켰느며,고향에 돌아와 도산서원을 일으켜 본격적인 제자양서에 주력한 결과 정승 10여명과 판서 30여 명을 배출했다. 그의 제자들은 뒷날 영남학파를 형성하여 중앙의 관계를 주름잡았고 향리의 학문풍토를 조성한다.

 그러나 그가 성균관의 유생을 자기 세력으로 만들고 영남학파를 당쟁에 휘말리게 했다는 비난과, 그가 너무나 큰 학자여서 학파의 흐름이 권위주의적 경향으로 흘러 개혁과 변화를 소홀히하는 보수성을 띠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미래지향성의 결여나 물질경시현상, 가족주의의 폐단 등은 유교사상의 전반적인 역기능으로 이해하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끝으로 이황의 검소한 일생을 보여주는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한다.

 권율 장군의 아버지인 권철은 영의정을 지낸 당대의 인물로 도산서원으로 이황을 찾은 적이 있었다. 식사 때가 되자 밥상이 나왔는데 보리를 반 이상 섞은 밥에 콩나물국, 반찬으로는 콩자반,귀한 손님이라고 해서 특별히 마련한 것이 북어 한 토막이 전부였다. 이황은 한 그릇을 다 먹었으나 권철은 체면치레로 몇술 뜨고 수저를 놓았다. 이튿날도 같은 식사가 나오자 목에 넘어가지 않는 식사 때문에 예정을 앞당겨 떠나기로 했다.떠나면서 좋은 말씀 한마디를 부탁했다. 이에 이황은 <<촌부가 대감께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다만 융숭한 대접을 못해드려 죄송합니다. 그러나 이 식사는 백성들이 먹는 식사에 비하면 진수성찬이올시다. 이것을 드시지 못하면 관과 민의 생활이 이처럼 동떨어져서야 어찌 백성이 진심으로 복종하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한다.


[四端七情 ]

요약

성리학(性理學)의 철학적 개념 가운데 하나.

사단(四端)은 인간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씨 즉 선천적이며 도덕적 능력을 말하며, 칠정(七情)은 인간의 본성이 사물을 접하면서 표현되는 인간의 자연적인 감정을 말한다. 사단은 《맹자(孟子)》의 〈공손추(公孫丑)〉 상편에 나오는 말로 실천도덕의 근거로 삼았다.


측은지심(惻隱之心): 남을 불쌍히 여기는 타고난 착한 마음

수오지심(羞惡之心): 자신의 옳지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옳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

사양지심(辭讓之心): 겸손하여 남에게 양보하는 마음

시비지심(是非之心): 잘잘못을 분별하여 가리는 마음


사단은 위 네 가지 도덕적 감정을 말한다. 그리고 칠정은 《예기(禮記)》의 〈예운(禮運)〉과 중용(中庸)에 나오는 말로


기쁨(희 喜)

노여움(노 怒)

슬픔(애 哀)

두려움(구 懼)

사랑(애 愛)

미움(오 惡)

욕망(욕 欲)


일곱 가지 인간의 자연적 감정을 가리킨다. 원래 사단은 인(仁)·의(義)·예(禮)·지(智)의 덕목과 관련된 윤리적 범주에, 칠정은 인간의 감정을 총칭하는 인성론의 범주에 각각 속하여 서로 다른 맥락에서 사용되던 말이었다. 그러나 송대(宋代)에 성리학이 일어나면서부터 이 두 개념은 인간 심성이 발현되는 과정에서 도덕적 성격을 띠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각각 나타내는 상반된 의미로 인식되어 대조되는 개념으로 쓰이게 되었다.


곧 성리학에서는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심성(心性)이 일치한다고 하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명제 아래, 우주 자연의 생성과 변화를 설명하기 위한 이론적 바탕으로 이기론(理氣論)을 발달시켰고 다시 이를 근거로 하여 인간 심성의 발생 과정과 그 작용을 탐구함으로써 인간의 도덕적 실천의 철학적 근거를 해명하고자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사단 칠정의 문제가 자연스럽게 부각되었다.


중국에서 사단 칠정의 문제는, 성리학의 '이기 심성론'(理氣心性論)의 탐구에 있어 하나의 과제로 다루어지기는 했어도 태극론(太極論)과 같은 우주론에 비해 그다지 비중있게 다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사단과 칠정의 발생 과정을 이기론적으로 해명하는 문제가 중요한 관심사로 떠올랐으며 이것은 대규모 논쟁으로까지 전개되었다. 이 논쟁은 이황(李滉)과 기대승(奇大升) 사이에서 처음 발생하였고 나중에 이이(李珥)와 성혼(成渾) 사이에서 다시 논의됨으로써 새로운 국면의 논쟁으로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주된 쟁점이 되었던 것은 사단이 이(理)에 속하는가 아니면 기(氣)에 속하는가 하는 문제와, 이(理)가 과연 발동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두가지 문제였다. 16세기 말에 발생하였던 이 논쟁은 당대의 저명한 성리학자들에 의해 주도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학계 전체의 문제로 확대되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성리학자가 이 문제를 다루었을 정도로 한국 유교의 전개 과정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단칠정 [四端七情] (두산백과)



B003 – [화담집] 서경덕(1489--1546)


평생을 학문과 제자들의 양성에 전념한 <기철학> 의 완성자인 서경덕의 성리학설과 시문을 그의 제자들이 편집한 책이다.

 <화담집>은 18세기 청나라의 건륭제가 거국적이고 필생의 사업으로 편찬한 <사고전서>안에 한국인의 개인 저서로서는 유일하게 소개되었을 정도로 국외에서도 인정받고 있는 책으로, 우리는 이 책에서 중국 성리학의 단순한 수용이 아닌 한국 성리학의독자적인 이해과정과 치밀한 철학적 사유의 백미와 함게 자연과 인생을 관조하며 안빈낙도하는 한 철학자의 삶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a.생애


  10년 동안 면벽수도한 지족선사는 나에게 하룻밤에 무너졌지만 화담선생은 내가 가까이한 지 오래되었지만 그분의 마음과 몸을 어지럽히지 않으셨다. 성인이시로다 고 감복한 것은 당대 최고의 명기였던 황진이었다. 황진이의 유혹을 사제간의 관계로 승화시킨 화담 서경덕은 누구인가?

 조선 전기의 학자로 황진이.박연폭포와 함게 송도삼절로 불린다. 유년기의 호담은 명석한 두뇌, 고감한 성격, 정직한 마음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14세에 개성의 어느 선생님을 찾아가 글을 배웠는데, <상서>의 기삼백(태음력의 수학적 계산)에 이르러 선생이 이 대목은 나도 배우지 못했고 세상사람 누구도 아는 이가 드물다고 하자 화담은 보름 동안 궁리 끝에 스스로 해득했으며, 18세에는 <대학>을 읽고 격물치지(사물의 이치를 깊이 연구하여 후천적인 지식을 명확히 함)의 원리를 깨달았다. 이때 감격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학문을 하는 데는 먼저 격물을 하지 않고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하고, 그날부터 화담은 천지만물의 명칭을 하나하나 써서 서재 벽위에 붙여놓고 날마다 궁리격물 하는 것으로 일과를 삼았다.

 화담의 이러한 철학적 사유는 어린 시절 어느 봄날에 나물을 캐기 위해 들에 나갔다가 새끼 종달새를 목격한 데서 비롯되었다. 종달새는 날이 지남에 따라 하루가 다르게 점차로 공중 높이 나는 현상을 주시하고 그 이치를 궁리하기에 이른다. 어린 화담의 종달새 관찰은 결국 후일 그의 이른바  기철학 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재로 작용한다.

 후일 그가 밝힌 종달새의 비상은 새의 가벼운 깃털을 이용하여 상승하는 지기 에 힘입어 날아오른다고 풀이했다. 새의 무게는 원래 하강하려는 것이 자연적 성질이나, 하늘의 양기 와 땅의  음기 가 서로 교호작용을 하는 데에 힘입어 그 가운데의 새는 상승과 하강의 날기를 자유로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학문적 방법으로 화담은 약 3년 동안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20세가 되던 해에 나는 2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한번 저지른 과오를 두 번 범하지 않는다 고 말했다. 21세가 되던 해에는 매일 서재에서 혼자 단정히 앉아 사색에 열중하던 나머지 밥맛도 몰랐고 잠도 잘 자지 못해, 이렇게 3년 동안 공부를 하는 동안 문지방도 넘지 못할 정도로 몸이 쇠약해지자 사색을 그만 두기로 결심했으나 천성적으로 탐구심이 많아서 어쩔 수 없었다. 

 이런 명성이 조정으로 알려지자 31세 되던 중종 14년 조광조에 의해 현량과에 응시하도록 추천받았으나 사양하고 학문연구에만 전력했다. 43세  때에는 어머니의 요청으로 생원시에 응시,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수습훈련을 받던 중 벼슬을 단념하고 개성 송악산의 화담으로 돌아와 성리학 연구에 전념한다. 

 언젠가 화담은 제자 이지함(<토정비결>의 저자)을 데리고 지리산으로 찾아가, 조정의 벼슬을 거절하고 산림처사를 자처하며 살아가는 남명 조식을 만난다. 중앙에서 벼슬을 지내며 주리파와 주기파의 정통을 이은 이황과 이이에 비해 조식과 서경덕은 일종의 방계였다. 이황과 조식은 같은 경상도에 살면서 때로는 우정을, 때로는 냉전의 상태를 유지했으며, 이이와 서경덕은 같은 경기도 출신으로 한때 이이가 서경덕의 학설을 배우기도 했지만 서경덕의 이론을 일부 반박하기도 했다. 

 그후로도 몇번 조정에서 벼슬을 권고했으나 그가 받아들일 리가 만무했고 자연 속에서 안빈낙도했다. 그런 유유자적한 생활 속에서 마침내 그의 학문과 철학을 정리해야 할 시기가 왔다. 56세에 병이 깊어지자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옛 성현들의 말은 선유들이 다 주석해 놓았으니 그 이상 내가 덧붙여 말할 필요가 없다. 다만 그들이 미처 설파하지 못한 것만 저서로 남기겠다. 지금 내 병이 이렇게 위독하니 나의 학설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원리기설> <이기설> <태극설> <귀신사생설> 등 4편의 논설을 지었다.


b.화담의 사상과 <화담집>


 현재 <화담선생문집>으로 전하는 <화담집>은 본집 2권과 부록 2권으로 꾸며져 있다. 화담 자신이 저술한 것은 본집 2권이며 부록 2권은 그의 연보.비명을 비롯한 여러 형식의 추모문으로 후인이 써모은 것이다. 본집 2권 중 권 1은 시문을 모은 것이고, 권2는 각종 싯구.잡저.명문을 모아 그의 철학을 밝히고 있다. 그중에서도 잡저에 있는 <원리기설> <이기설> <태허설> <귀신사생설>의 논문 4편은 그가 죽기 2년 전에 마지막으로 쓴 자신의 철학적 서술이어서 <화담집>의 핵심을 이루는데, 이를 토대로 그이 사상을 정리해본다.



   1.우주관


 화담은 우주공간에 충만해 있는 하나의 원기를 형이상학적 대상으로 삼았다. 기는 우리말로 기운 이요, 물리학적 용어로 에너지다. 이런 의미에서 화담은 참다운 과학적 철학자였다. 그가 말하는 태허는 곧 우주다. 이 기 는 우주에 가득 차 있다. 그렇다고 이 기 와 태허가 별개의 두 물건이 아니다. 기가 곧 태허요 태허는 곧 기다. 기는 우주의 질량이므로 만일 기가 없어지면 우주는 곧 파멸된다. 알다시피 이와 기는 우주와 인간의 근본원리를 규명하는 성리학의 중심개념으로 중국의 주자는 원리인 이와 그 작용인 기로 우주를 설명했는데, 화담은 정반대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형체가 없는 태허(우주생성의 이전상태)를 선천 이라 하니, 그것은 처음도 없고 끝도 없으며 쥐면 비어 있고 잡으면 없다. 이 태허에는 단 하나의 기가 있을 뿐인데 후천에는 기 속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 약동이 일어나며 동시에 개벽이 일어난다. 이 같은 동작이 일어나는 것은 무엇이 그렇게 시키는가? 제 스스로 그러한 것이니 이것을 이의 기라 한다.  주자학의 이선기후를 인정하지 않고 이를 기에 내재하는 법칙으로 보았다. 이것은 마치 아인슈타인이 우주구조에 대해 우주구면의 반경은 우주의 전질량과 비례하기 때문에 질량이 0이 되면 반경도 따라서 0이 된다. 우주의 물질과 이것을 담아놓은 공간도 다 소실되고 또 커지기도 한다는 말과 같은 우주관이다. 화담은 말하기를  이것은 주염계와 장모거와 소강절이 한마디 말도 못하고 한 자도 써내지 못한 경지 라고 크게 자부한 것이다.

 

   2.현상계


 우주본체에서 적연부동하고 있던 일기는 어떻게 현상계로 내려와서 만물을 움직여 생성하게 하는가? 화담은 이에 대하여 말하기를 일기는 저 스스로를 포함한다. 이는 무엇이냐? 그것은 음기와 양기요 동과 정이다 라고 했다. 일기는 우주공간에서 적연부동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플라톤의 이른바 순수형상인 이데아와 같은 존재가 아니요, 발하려 하나 아직 발하지 않고 동하려 하나 아직 동하지 않는 상태에 놓여 있는 순수동작이다. 그러므로 화담은 <역전계사>에 있는 말을 인용하여 느끼어 마침내 통한다. 여기서 소극적인 음기와 적극적인 양기가 생기어 서로 밀고 당기는 힘으로 천하만물을 생성, 발전케 한다.


   3.이기설


 중국의 정주학파나 우리 나라의 퇴계학파는 이와 기를 둘로 나누어 결코 일물이 아니라 했다. 그러나 화담은 기밖에 이란 없다. 이란 것은 기의 주재다. 주재란 것은 밖에서 기를 주재한 것이 아니요, 기의 움직임이 그러한 까닭에 정당성을 가리키어 이것을 주재라 한다. 이는 기보다 선행할 수 없다. 기는 본래 무시한 것이니 이도 본래 무시한 것이다. 만일 이가 기보다 선행한다고 하면 이것은 기가 유한 것이다 고 했다. 화담은 이를 기 속에 포함시켜 둘로 보지 않았다. 이것은 화담이 장모거의 기와 주자의 이를 지양, 통일하여 일원적으로 본 것이다. 이야말로 그의 독창적이 면이 돋보인다.


   4.일기장존설-기불멸설


 화담은 또 우주공간에 모였다가 흩어지는 운동은 있지만 그 기 자체는 소멸하지 않는다 했다. 기가 한곳으로 모이면 하나의 물건이 이루어지고 흩어지면 물건이 소멸한다. 비유하면 물이 얼면 얼음이 되고 얼음이 녹으면 물로 환원하는 것과 같다. 화담은 또 말하기를 일편향촉의 기라도 그것이 눈앞에 흩어지는 것을 보지만 그 남은 기운은 마침내 흩어지지 않는다. (물질불변설)고 했다. 이것은 마치 물리학에서 하나의 촛불이 연소작용을 할 때에 그것이 타서 없어지지만 거기서 나오는 모든 에너지, 즉 위치 에너지와 열 에너지와 광 에너지 등등의 총화는 촛불이 본래 가지고 있던 것과 같다고 하는 이론과 같다. 이런 것을 물리학에서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라 한다.

그러므로 화담의  기장존설 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 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이 화담이 주장한 학설의 요지다.


c.화담사상의 영향 및 평가


 먼저 외국에서의 평가를 보자. 화담은 자기의 저술이 문체는 졸렬할지 모르나 천년 이래 성현들이 미처 전하지 못한 진리만을 후학에 전하기 위해 쓰며, 동시에 중국을 비롯한 먼 외국까지 전달되어 동방에 학자가 나타났음을 알리고자 쓴다고 자부했는데, 이는 청나라의 <사고전서>안에 한국인의 개인저서로서는 유일하게 <화담집>이 소개되었다는 점에서 입증되고 있다. 그의 뜻은 과연 적중하여 2백 년이 넘은 후대에 중국에서 빛을 보고 실현된 것이다.

 퇴계는 일찍이 말하기를 화담은 다른 주석한 책을 보지 않고 자기 스스로 연구하여 이런 경지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하나의 특이한 일이다라고 평한 바 있고, 퇴계의  이기이원론적 주리론 과 화담의  이기일원론 을 통일하여  이기이원론적 주기론 (이와 기는 일이면서 이이요 이이면서 일이다)을 확립한 율곡은  화담의 이와 기가 서로 떠나지 않는다는 묘처에 이르러서는 일목요연하게 다른 사람들이 책만 보고 그대로 따라가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다. 그러므로 화담의 이기설은 옛 성현들이 다 전하지 못한 묘처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백사 이항복은 일찍이 임금께 드리는 글에서 신이 듣기로 서경덕은 총명한 자질로 그의 학문은 황무지를 개척했고 격물치지의 이치를 사색하여 다 체득했습니다. 한 걸음에 도학을 성취한 사람으로서 당대 호걸의 선비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근세 유신들이 그를 이황과 서로 견줄만하다고 합니다 고 말했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그의 학문하는 자세다. 그는 어려서부터 권위적 학설을 맹목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반드시 이해할 수 있는 경험적 실증이나 납득할 수 있는 사색으로서 확인하고 넘어갔다. 선생이 어느 한 구절을 소홀히 넘기면, 만일 알지 못할 것이라면 선유가 왜 이곳에 써서 전하려 했을까? 하고 그 뜻을 알려고 애썼다.  독서란 사색하면 터득할 수 있는 것이다 라고 하여 궁리하지 않는 독서란 소용없는 일이라고 분연히 다짐하곤 했다.

 그의 학설이 독창적이란 점에서 불교의 원효와, 그리고 그의 자연현상에 대한 세심한 관찰과 실험자세(종달새의 비상현상에 대한 관찰과 사색 등)는 피사탑에서 물체의 낙하실험을 통해 기존의 물체 낙하운동법칙을 수정한 갈릴레이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화담은 당대에도 영향을 미쳤으나 그의 문하에선 일류석학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박순.허엽.박민헌 등은 명문 출신으로 벼슬을 지낸 부류들이고, 이지함(명문출신으로 잠시 벼슬을 지냄).강문우.정개청 등은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임종시에 한 제자가 선생님, 지금 생각이 어떠십니까? 하고 묻자 살고 죽는 이치는 이미 안 지 오래다. 생각이 편안하다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 자신의 죽음을 영육이 함께 이제 태허의 기를 마치 고향에로의 복귀처럼 받아들이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는 분명히 기의 세계에서 영생을 얻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화담은 한국유학에 있어서 기철학의 전통을 수립한 대표적인 자연주의 유학자이며 조선조의 청빈한 숨은 선비로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출처 :  동서고전 200선 해제(반덕진, 가람기획)




[鬼神死生論](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7210)

분야 종교·철학/유학

유형 작품

시대 조선

성격 논설

창작연도/발표연도 1544년

작가 서경덕

집필자 한형조

 

 

[정의]

서경덕(徐敬德)이 삶과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의 영혼의 문제를 자신의 독특한 기(氣) 개념을 중심으로 해명한 논문.

[내용]

그의 만년 무렵인 56세 때의 글이다. 『화담집』에 수록되어 있다.

생사와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 정자(程子), 장횡거(張橫渠), 그리고 주자(朱子)의 상세한 논의가 있었지만, 핵심적인 문제는 지적하지 않아 아쉽다고 운을 떼었다. 이는 후학들로 하여금 스스로 깨치도록 한 배려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아, 대개는 일면만을 고집하거나 찌꺼기만을 붙들고 헤매는 형국이었다. 그는 그 핵심을 파악하기 위해 오랫동안 고민하고 연구한 끝에 비로소 천고의 의문을 깨트릴 수 있었다.

그 내용은 죽음과 삶, 사람과 귀신의 차이는 결국 기의 모이고 흩어짐[氣之聚散]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전혀 다른 이질적 세계로의 여행이나 급격한 충격이 아닌, 동일한 실재의 연속적 운동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실재하는 유일한 근원 존재는 기(氣)이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영원한 기는 정지된 실재가 아니라 부단히 자기 운동을 하는데 그 맥동의 파장이 수많은 생명을 낳고 또 거두어간다. 결국 생명은 기의 모임이고 죽음은 기의 흩어짐이다.

유의할 것은 죽음과 더불어 기는 흩어지되 결코 소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비록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같은 미물도 그 기는 마침내 흩어지는 법이 없거늘 하물며 인간의 정신지각(精神知覺)같은 크고 오랜 기임에랴.” 죽음이란 없다는 것, 여기가 이기(理氣)의 극히 오묘한 자리이다.

그가 이 통찰에 거는 자부심은 대단하다. 박이정(朴頤正)·허태휘(許太輝) 등 문도들에게 “내가 하는 논의가 비록 촌스런 문장으로 되어 있지만, 천성(千聖)이 모두 전하지 못한 자리를 간파하고 있다. 중간에 유실하지 말고 후세에 전한다면 문명의 변방인 동방에도 학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고 말하였다.

 

[참고문헌]

『화담집(花潭集)』



B002 – [삼국유사] 일연(1206~1289)

우리 삼국시대의 역사. 문학. 종교. 지리. 사상. 미술 등의 유산을 담고 있는 한국 고대문화 유산의 보고다. 정사 중심의 <삼국사기>에서 빠진 야사를 많이 채록하고 있고, 특히 단군신화와 14수의 향가의 수록은 값진 문화유산으로 평가된다. 전체는 5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2권은 고조선부터 신라 말까지의 역사를, 3~5권까지는 한국불교사를 담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13세기 원의 지배하에서 민족의 수난기를 살아가는 한 선승이자 사상가인 일연의 고뇌와 역사의식이 깊이 반영되어 있다.


a.생애

 

 <삼국요사>의 저자 일연은 역사가가 아니라 평생 선승의 길을 걸은 승려였다. 그러면 왜 선종 승려이면서 그는 <삼국유사>라는 역사서를 저술했을까? 또한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삼국유사>의 높은 사학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선승으로서의 그의 행적에 대한 의문에 대해 어떻게 답할 것인가?

 일연의 속성은 김씨요, 이름은 견명, 경상도 경산 출신이다. 1214년 9세 때 광주의 무량사에서 선학을 닦다가 1219년 출가하여 설악산 진전사의 고승인 대웅의 제자가 되어 구족계를 받았다. 어릴 적부터 천성이 총명하고 덕이 있었던 그는 온화한 인품과 학문에 대한 남다른 애착으로 불가 서적은 물론 제자백가의 사상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다. 특히 사서를 즐겨 읽어 일찍이 움직이는 역사 속에서 현실을 직관하는 예리하고도 정확한 역사의 흐름을 보는 눈을 가졌다. 1227년 승과에 급제한 되 보당암 주지로 있으면서 참선에 몰두했다.

 1237년 삼중대사가 되고 46년에 선사, 59년 대선사에 올랐다. 61년 원종의 부름을 받고 강화도로 가서 선월사 주지가 되어 보조국사 지눌의 법을 계승했다. 그뒤 경북 달성의 인홍사 등을 다니며 설법과 강론을 펴고 77년 청도 운문사에서 선풍을 크게 일으켰다. 81년 국존으로 추대되고 원경충조의 호를 받았다. 지난 역사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졌던 그는 일찍이 김부식이 엮은 <삼국사기>에서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에 대해 다루지 않아 빠진 단군신화에 대한 자료를 모으는 데 힘을 쏟기도 했다.

 그는 노모의 봉양을 위해 귀향했다가 이듬해 경북 군위의 인각사를 중건하고 당시의 선문을 전체적으로 망라하는 <구산문도회>를 개최했다. 이러한 사실은 그를 중심으로 하는 <가지산문>(선종9산 중 신라말 도의가 연 종파)이 전불교계의 교권을 확립한 것으로 파악된다. 최씨 집권기까지는 미미한 존재였던 가지산문이 원 지배기에 들어와서는 수선사를 대신할 불교계의 중심교단으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특히 원 지배기로 고려사회가 개편될 때 일연이 충렬왕에 의해 국존에 책봉될정도로 불교계에서 비중이 컸으며,이때 부각된 보수세력의 지원을 받아 가지산문이 불교계의 중추세력으로 등장했다. 

 1289년,그곳에서 84세,법랍 71세를 일기로 입적하자 전국사찰은 몰론 온 백성들이 애석해했다고 한다. 현재 인각사에 탑과 비석이 남아 있고 행적비는 운문사에 있다. 한편 한국의 고대신화와 민간설화를 정리하고 향기를 비롯한 불교관계 기사를 수록한 <삼국유사> 5권을 지었는데, 김부식의 <삼국사기> 와 함께 한국 고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b.시대적 배경과 저술동기 


 일연이 생존한 시대는 최씨 무단정권의 전성기에서 몽고의 침입과 강화 천도, 몽고에 대한 굴복 등 국난의 시기였다. 몽고군의 침략을 피해 여기저기로 전전하면서, 몽고군에 의해 불타버린 황룡사 9층탑의 처참한 모습에 울분을 머금고 경주.달성 등 경사도 지방은 물론,강화도.설악산.오대산 등 가는 곳마다 사라져가는 고문서와 설화 등을 모았으며, 유물과 유적에 대해서도 현장에서 관찰하고 고증한 것을 기록해 만년의 <삼국유사>집필에 매진했다.

 이처럼 <삼국유사>는 청장년시대를 전란 속에서 보내야 했던 그에게 일종의 정신적 반항이기도 했으리라. 따라서 <삼국유사>는 거대한 몽고군의 말발굽 아래 짓밟힌 고려사회의 민족적 각성과 비원을 배경으로 하여 이루어진 잡록적 사서이다.

 일연은 평생 동안 100여 권의 편저를 남겼으나 현재는 <삼국유사> 와 <중평조둥오위> (최근 발국)만이 전해진다. 이 저서도 일연이 입적한 뒤 정덕본이 발견되어 일연의 저술임이 밝혀진 것이다. 정덕본 마지막 첫머리에 적힌 <가지산하 인각사운운>이 바로 저자의 이름을 밝히게

된 실마리다 되었다. 가지산이란 장흥 보림산의 주산이요, 신라말 선종계열의 도의가 선문을 열었고 그유파를 <가지산문>이라 불렀다. 일연 역시 그 문하였기 때문에 가지산하라 했던 것이고, 인각사란 그가 죽을 때까지 주석했던 군위에 있는 절이었다. 이 기록도 일연 자신이 한 것이 아니고 그의 제자가 적어둔 것이라 한다. 


c. <삼국유사> 의 내용


 <삼국유사> 는 삼국의 역사 전반에 관한 사서로 엮어진 것이 아니라 저자의 관심을 끈 자료들을 선택적으로 수집,분류한 자유로운 형식의 역사서다. 김부식이 지은<삼국사기>를 보고 우리 나라 고유의 것에 대한 미비점을 보완하려는 의도가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본격적인 저술은 만년에 했다 해도 마음을 정해 자료를 모은 것은 평생 동안의 일이었으므로 이 책에는 그의 일생의 노력이 웅집되어 있다. 

 <삼국유사>의 체계는 5권 9편 144항목으로 되어 있는데,9편은 왕력. 기이. 홍법. 탑상. 의해. 신주. 감통. 피은. 효선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력>편은 삼국.가락국.후고구려.후백제 등의 간략한 연표다. 

 <기이> 편은 고저선으로부터 후삼국까지의 단편적인 역사를 57항목으로 서술했는데,서두에는 이 편을 설정하는 이유를 밝힌 서(??)가 붙어

있다.

 <홍법> 편에는 삼국이 불교를 수용하게 되는 과정 및 그 융성에 관한 6항목, 

 <탑상>편에는 탑.불상에 관한 31항목이 들어 있고, 

 <의해>편에는 원광서학조를 비롯한 신라의 고승들에 대한 전기를 중심으로 14항목.

 <신주>편에는 신라의 밀교적 신이승들에 대한 3항목, 

 <감통>편에는 신앙의 영이감응에 관한 10항목.  

 <피은>편에는 부모에 대한 효도와 선행에 대한 미담 5항목이 수록되어 있다.

 대체로 불교에 관한 기록이 많으며,이중 <홍법>편과 <의해>편은 <삼국유사>에서 가장 내용이 충실하고 잘 다듬어진 것이다.

 <왕력>과 <기이>를 제외한 각 편은 내용 그대로 삼국의 불교사라 할 만큼 불교적인 내용으로 엮어져 있다. 단군설화를 비롯,고대의 신화.전설.민속.사회.고어록.성씨록.지명의 기원.사상.신앙 등을 금석및 고전적의 인용과 견문으로 서술했다. 

 이러한 것들은 대개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유교적 합리주의적 정신으로 말미암아 버린 고기록 중 가장 한국적인 것으로 고대우리 민족생활사의 보전이다. 여기에 인용한 것들은 당시의 전적을 고중하는 데 있어 가장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 삼국 외에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삼한.사군.낙랑.대방.말갈.발해.졸본부여.후백제.가락 등의 기록도 아울러 실었다.

 여기에는 <삼국사기>에 빠진 고기의 기록을 원래대로 모아 놓았고 또한 향가 14수를 본문 중에 수록해놓았다. 이 향가는 <균여전>에 11수가 수록되어 있을 뿐 다른 책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는 국문학의 연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귀한 자료가 된다. 향가 14수의 제목을 들어보면 <서동요> <혜성가> <풍요><원앙생가> <모죽지랑가> <헌화가> <원가> <도솔가> <제망매가> <찬기파랑가> <안민가> <도천수대비가> <우적가> <처용가> 등이며, 이밖에도 많은 향가의 제목과 그 향가에 관련된 유래가 서술되어 있다. 

 또한 <단군신화> <북부여건국신화> <김알지신화> <석탈해신화> <가락국건국신화> <비형랑설화> <조신설화> <만파식적전설> <달박박설화> <선덕여왕기지설화> <지증왕설화> <사금갑설화> <지귀설화> <문회설화> <죽엽군설화> <죽적설화> <연오랑 세오녀설화> <빈녀양모설화> <거타지 설화> <욱면설화> 등이 실려 잇어 한국 고대 서사문학의 총본산을 이루고 있다.

 <삼국유사>의 본문 중 권1에 나오는 한편을 인용해 본다.


   연오랑 세오녀


 신라 8대 임금인 아달라 왕이 즉위한 지 4년이 되던 해의 일이다. 동해 바닷가 마을에 연오랑과 세오녀라는 부부가살고 있었다. 어느 날 연오랑이 바다에 나가 미역을 따는데 갑자기 웬 바위하나가 나타나 연오랑을 태우고 바다 건너 일본으로 데려갔다. 바위를 타고 나타난 연오랑을 본 일본인들은 필경 예사 사람이 아니라 여겨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런 사실을 알리 없는 세오녀는 남편이 돌아오진 않자 남편을 찾아 바닷가로 나갔다. 바닷가를 헤매던 세오녀는 어느 바위 위에 남편의 신발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세오녀가 바위위로 뛰어오르자 바위는 다시 그녀를 업고 바다를 건너 연오랑이 있는 일본으로 흘러갔다.  바위에 실려온 세오녀를 본 그 나라 사람들은 놀랍고 이상하여 왕이 된 연오랑에게 이 사실을 아뢰었고,이리하여 연오랑과 세오녀는 다시 만나 함께 나라를 다스렸다.

 그런데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일본으로 떠난 후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갑자기 빛을 잃어 온 나라 안이 어둠에 잠기는 괴변이 일어났다. 왕이 점성관에게 까닭을 물으니 <<우리 나라에 와있던 해와 달의 정기가 이제 일본으로 가는 바람에 이런 변괴가 생긴 것입니다>>하고 아뢰었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임금은 사신을 보내어 두 사람에게 돌아오기를 청했다.  이에 연오랑은 <<내가 여기에 온것은 하늘의 뜻이니 어찌 돌아갈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짐의 왕비가 가는 비단을 새로 짜놓았으니 이것을 가져가 하늘에 제사지내면 좋으리다>> 하고 비단을 주었다.

 사신이 돌아와 그 말대로 재사를 지냈더니 해와 달이 예전처럼 빛을 발했다. 그리하여 그 비단을 임금의 곳간에 소중히 보관하여 국보로 삼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그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 또는 도기야라 했다.


 우리는 연오랑.세오녀 부부가 일본의 왕이 되었다는 이 설화에서 당시 일본에 대한 신라인의 우월의식을 느낄 수있으며,비록 세오녀가 짜준 비단으로 광명을 되찾기는 했으나 일월정을 데려오지 못했으므로 일본에 대한 경계의식을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d. <삼국유사> 의 가치

 <삼국유사> 의 가치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선 그보다 150년전에 왕명을 받아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 와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삼국사기>는 기전체(紀傳體) 형식(본기.세가.열전.지.표의 인물중심의 역사서술방법) 으로 씌어진 삼국시대의 정사인 반면,<삼국유사>는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 (사건의 원인과 결과 중심으로 실증적으로 기술)에 가까운 설화중심의 야사로서,전자가 문화적 사대주의라는 평가를 받는 반면,후자는 상대적으로 주체적이고 실증적인 사관에 입각한 저서로 간주된다.

 또 전자가 유교적 윤리관을 바탕으로 합리성과 현실성을 중시한 반면, 본서는 불교 중심의 비현실적 내용도 포함하고 있으며,저자의 저자가 정치권력자인 반면,본서의 저자는 순수한 승려였으며,삼국사기는 신라.백제.고구려의 3국의 역사를 신라 중심의 반도사관으로 축소 묘사하고 있으나,<삼국유사>는 단군부터 고려시대까지 발해사를 포함하여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일연이 주도한 <가지산문>의 등장과정이 보수적인 정치세력의 지원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원 지배하의 고려사회의 모순을 극복하지 못했음은 물론,무신란 이후에 등장한 신앙결사의 단계에서 구축한 사상적 기반까지도 계승하지 못했다 한다. 이러한 공백을 성리학이 메움으로써 고려말에 사상적 전환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당시 사회모순에 대한 비판의식과 민중의식,몽고침입에 대한 자주의식에 문제가 있다는 비판도 있다.

 또한 일연과 동시대를 살면서 충렬왕의 부름을 끝까지 거절한채 고통당하고 있는 고려민중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시로 고발한 수선사 출신 충지의 행적과 비교해볼 때 이 시기의 일연의 행적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충지와 비교할 때 불교계의 타락상과 사회의 제모순을 직접 개혁하기 위해 왕실로 진출했다고 볼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그러나 일연이 걸은 선승으로서의 행적에는 충분한 설명이 어려운 부분도 없지 않지만,<삼국유사>에 대한 사학적 평가는 주목할 만하다.

 일연의 <삼국유사>는 좁게는 한국역사학의 고전적 저작이고 넓게는 한국학 분야의 잊혀질 수 없는 불멸의 금자탑이다. 고조선을 수록하고 <가락국기>를 전했으며 14수의 향가를 기록한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비록 <삼국유사>의 내용 중에는 현대인의 과학적 안목으로는 쉽게 이해될 수 없는, 예컨대 단군신하를 비롯하여 불교적 색채가 농후한 신이적 神異的 사실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서 결함으로 오해될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서술태도가 오히려 <삼국유사>가 갖는 최고의 성과라고 할 수도 있다. 

 단군신화에 나타나는 사회상이 그러하며 불교와의 관련을 중심으로 서술된 민중의 신앙과 생활상에 관한 구체적이며 신이한 기사 등이 그러하다. 그 결과 본서는 가치 높은 민족지의 성격을 갖기에 충분하다.  한 개인의 일생의 노력이 응집된 저서가 민족사의 맥을 잇는데 얼마나 중요한 디딤돌 역할을 하고 있는지는 <삼국유사>가 우리 고대문화의 총체적이고 원형적인 모습을 전해주는 금광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후대의 학자들이 여기서 고대문학의 금맥을 캐왔고 지금도 캐고 있다. 고대의 역사.지리.문학.종교 등 문화 전반에 대해 많은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일연은 고려사회가 이민족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되는 시점에 중앙의 후원으로 화려하게 각광을 받으면서 불승으로서는 최고승직자의 길을 가게 된다. 그러나 민족사의 격동기에 살아가면서 이민족의 재배가 가져온 민중의 고통과 참담한 사회상황은 일연으로 하여금 사상적 전환을 필요하게 했고, 그결과 그가 귀착한 세계는 현세구원적 관음신앙의 표방과 민중의 삶을 역사서의 형태로 승화시킨 <삼국유사>의 찬술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 곧 시대상황이 빚어낸 역사가로서의 일연과 선승으로서의 일연의  합치점이었다.





구성[편집](위키백과)

전체 5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5권 내에 다시 9편으로 나뉘어 있다. 권수는 편목의 유형에 따라 구분한 것이 아니라 분량에 따라 편의적으로 구분한 것이다. 제일(第一)이 붙어 있는 것이 왕력과 기이 두 편인 바, 왕력은 후대에 덧붙여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권1 왕력(王曆) 제1 : 간략한 제왕의 연대기로 중국 역대 왕조를 기준으로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를 대상으로 하여 기원전 57년부터 936년 고려 태조에 의한 후삼국시대의 통일기까지를 시간적 폭으로 한 연대표이다.

권1 기이(紀異) 제1 : 고조선, 위만조선, 삼한, 칠십이국, 낙랑군, 북대방, 남대방, 말갈·발해, 오가야, 부여, 이서국, 고구려, 백제 등 고조선으로부터 남북국시대 이전까지를 다루고 있으며 총 36조로 이루어져 있다.

권2 기이(紀異) 제2 : 통일신라의 출현과 이후 역대왕들 그리고 기타 등등을 다루고 있으며 총 24조. 고조선에서 고려 건국 이전까지 존재했던 여러 국가와 여러 왕(특히 신라왕)에 대한 기이한 이야기를 연대기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전체 분량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방대하다.

권3 흥법(興法) 제3 : 삼국에 불교가 처음 전래되고 흥성하는 과정을 기록했다. 총 8조.

권3 탑상(塔像) 제4 : 불교의 흥성에 따라 삼국(특히 신라)에 주목할만한 사탑이나 불상을 조성했던 사실을 기록했다. 총 29조.

권4 의해(義解) 제5 : 신라의 고승들이 보여주었던 뛰어난 행적을 통해 그들의 신앙심을 천명하였다. 총 14조.

권5 신주(神呪) 제6 : 신라 밀교계통 고승들의 기이한 행적을 통해 불교와 무속의 융합 및 호국 불교의 모습 소개. 총 3조.

권5 감통(感通) 제7 : 불심이 남달랐던 일반 신자와 승려들의 기적 체험을 통해 부처님의 가피력을 천명하였다. 총 10조.

권5 피은(避隱) 제8 : 구도 과정에서 세상을 등지고 홀로 불법을 닦은 승려들의 행적. 총 10조.

권5 효선(孝善) 제9 : 세속적 윤리인 효와 불교적 윤리(윤회, 인과응보)의 결합을 통해 신라인의 효행 사례 기록. 총 5조.



출처 :  동서고전 200선 해제(반덕진, 가람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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