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18 – 천변풍경 (川邊風景) / 박태원(朴泰遠, 1910-1986)

(출전 :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1930년대 모더니즘 소설의 대표적인 소설로, 도시성이 명확하게 드러난 작품이다. <조광>에 1937년 1월호부터 9월호까지 걸쳐 연재된 이 장편소설은 일제 때 서울 청계천변 한 동네에서 일어난 여러 일상적 사건들을 다룬 세태소설의 본보기다. 에피소드의 병치, 끊임없는 시점의 변화, 객관적 시점의 확보, 다양한 인간상 제시, 세련된 문체의 성취 등을 특징으로 한 이 소설에서 1930년대 서울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a. 생애와 작품활동

월북 후 북한 역사소설 가운데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갑오농민전쟁(전3권)을 쓴 작가 박태원. 그의 호는 구보. 서울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유학, 호세이 대학을 중퇴하고 집에서 밤늦도록 책을 읽는 등 불규칙한 생활을 해 건강과 시력이 나빠졌다. 한때 이광수를 사사했으나 그의 계몽주의는 따르지 않았다. 1930년 단편 수염을 발표하면서부터 작가생활을 시작했다. 1933년 이태준. 이효석. 이무영. 정지용 등과 <구인회>를 만들어 예술파적 소설을 지향하였다. <구인회> 출현시기는 카프계열의 경향파 문학이 일제의 탄압에 부딪친 때로서, 새로운 문단세력으로 박태원. 이태준. 이효석 등이 활약하게 되었다. 박태원은 특히 이태준과 친하게 지내면서, 일제 강점기 하에 작가자신이 속한 서울 서민층의 변모양상을 객관적인 서술로 묘사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그 결과 시정적 소시민 사회의 현실을 저회하면서, 무기력한 패배자의 시선에 들어오는 풍경들을 그대로 그려나갔다.  천변풍경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등이 그것이다. 이외의 단편들로 딱한 사람들 길은 어둡고 전말 진통 방란장 주인 성탄제 등이 있으며 주제가 소시민적 우울을 다룬 점에서 대체로 비슷하다. 해방 직후에는 이태준과 함께 조선문학건설본부에 참여해 소설부 위원을 지냈다. 6. 25전쟁중 월북해 평양문학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조운과 함께 조선창극집 을 펴냈다. 1956년 한때 남로당 계열로 몰려 작품활동이 금지되었다가 1960년 작가로 복위, 1986면 고혈압으로 죽었다. 해방 전까지 개인의 문제, 지식층의 문제, 현재의 문제에 치중했으나, 해방 후에는 집단의 문제, 민중의 문제, 과거의 문제에 치중해 역사소설을 주로 썼다. 그의 대표작 천변풍경은 짧은 이야기 50절로 이루어진 장편으로, 철저한 3인칭 관찰자 시점을 따르고 있다. 사건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이나 뚜렷하게 내세우는 사상도 없이, 청계천변에 사는 서민층의 몰락과 가난을 시선에 잡히는 그대로 그려냈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미혼이며 홀어머니와 함께 사는 소설가 구보씨가 서울거리를 배회하면서 느끼는 내면세계의 방황과 세태풍속을 잘 그린 작품이다. 작품의 형식과 문장의 기교 등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광고 전단 등의 대담한 삽입, 쉼표의 사용에 의한 만연체 등의 시도, 중간제목의 강조, 한자의 남용 등 90년대 작가들도 감탄할 만한 독특한 문체를 낳았다.


b. 주요 등장인물

재봉이: 15-16세 가량인 이발소 사환. 이발소와 빨래터 골목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상세히 목격함.

민 주사: 재력있는 50대의 사법서사. 안성집과 취옥이 사이를 오가며 주색잡기에 골몰함.

하나코: 방년 스무 살의 카페 여급. 손주사, 은방 주인, 강서방 등의 표적이 되어 있는 미인.

이쁜이: 천변 사람들의 축복 속에 결혼했으나 친정으로 쫓겨나는, 점룡이가 짝사랑하는 인물.

금순이: 순박한 시골색시로 가족들과 헤어져 기미코, 하나코와 함께 살아가는 인물.

만돌어멈: 포악한 남편을 가진 행랑어멈.

창수: 꾀 많은 한약국집 사환. 


c. 작품의 주요내용

민주사 한약국집 가족, 포목전 주인, 양약국 주인 최진국 등은 식민지 자본주의 속에 적응하면서 약간의 부를 축적한 인물들로, 이들은 식민지 사회가 아무런 변동 없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안정희구 세력들이다. 반면 재봉이, 창수, 금순이, 만돌이 가족, 이쁜이 가족, 점룡이 모자 등은 모두 시골에서 올라와 청계천변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다. 점룡이 어머니, 이쁜이 어머니, 귀돌어멈을 비롯한 동네 아낙네들은 빨래터에 모여 수다를 떤다. 이발소집 소년인 재봉이는 이런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결코 권태를 느끼지 않는다. 민 주사는 이발소의 거울에 비친 쭈글쭈글 늙어가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한숨짓지만, 그래도 돈이 최고라는 생각에 흐뭇해진다. 재봉이는 평화 카페로 눈길을 돌린다. 여급 하나코의 어머니가 눈에 뛴다. 재봉은 하나코의 어머니가 광교 쪽을 바라보며 난처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발길을 돌리는 것을 본다. 저쪽 한약국집에서는 젊은 내외가 함께 대문을 나선다. 이들은 다정한 부부로 외출을 하는 것이다. 창수는 한약국집의 사환인데, 출세하기 위해 서울로 가야 한다는 아버지의 강권에 따라 시골에서 올라왔다. 그러나 익숙지 않은 일에 얽매여 고생하는 것은 비단 창수 혼자만의 슬픔이 아니다. 파란 색칠을 한 중문을 사이에 두고 약국 안에서는 행랑에 든 지 사흘도 안되는 만돌어멈이 안방마님의 꾸지람을 듣고 있다. 만돌어멈은 불한당 같은 남편을 피해 서울로 도망질쳤으나, 우여곡절 끝에 다시 남편과 남의 드난살이를 하는 것이다. 한편 음력 3월 중순, 이쁜이네는 오늘 큰 경사가 있다. 점룡이 어머니는 마음이 애석하다. 아들 점룡이가 은근히 이쁜이를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쁜이 어머니의 마음은 그렇게 한가로울 수가 없다. 영감이 세상을 뜬 지 이미 13년, 저만큼이나 키워서 오늘 마침내 시집을 보낸다. 결혼식은 간단히, 또한 별일없이 진행되었다. 이처럼 한쪽에서 경사가 있을 때, 신발집의 온 가족은 아직도 장가를 못 간 주인의 처남까지 몽땅 어디로 나들이라도 가는 것처럼, 스무 해를 살아온 이 동네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한번 기울어진 가운은 다시 어찌할 도리 없이 신발집이 몰락하자 청계천변 사람들의 마음은 어둡게 된다. 민 주사는 요사이 마음이 우울하다. 마작노름으로 족히 사오백원을 날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민은 그뿐이 아니다. 그는 경성부회의원 선거전에 출마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기에, 다른 후보자들의 운동원들이 이 일을 폭로할까 봐 걱정이 태산 같다. 또한 안성집이 자기 눈을 피해 젊은 학생놈하고 좋아지내는 것을 우연한 기회에 발견하고는, 가슴이 내려앉을 지경이다. 민 주사는 입안에 가득 고인 쓰디쓴 침을 길바닥에 탁 내뱉고 천변길을 우울하게 걸어간다. 신수 좋은 포목점 주인은 남쪽 천변을 걸어간다. 그는 자기의 매부가 선거에 출마하기 때문에 밑천 들지 않는 인사 라도 열심히 하려고 정신이 없다. 민 주사의 선거사무소는 제법 활기에 넘쳐 있다. 돈을 많이 뿌린 까닭이다. 그럼에도 민 주사는 자기가 어째 꼭 헛수고만 하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다. 갑자기 자기가 변변치 못한 인물로 생각 되어져 부회의원이란 것이 당치도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민 주사는 낮에는 선거 때문에 부산하고, 밤에는 학생놈과 붙어 지내는 안성집 처리문제에 마음이 괴로워, 잠깐 동안에 심신이 극도로 쇠약해졌다. 만돌어멈은 드난살이를 하던 한약국집에서도 쫓겨나, 어디론가 정처없이 사라져버린다. 동제사람들의 축복 속에 결혼식을 올린 이쁜이는 남편의 바람기에 시달린다. 그리고 선거는 마침내 끝이 났는데, 민 주사는 선거에 패배해 병석에 누웠다. 젊은 학생놈과 안성집이 눈에 삼삼하다. 마음고생한 끝에 민 주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담판을 벌이려고 안성집을 찾아간다. 순진한 시골색시였던 금순이는 가족과 헤어져 기미코, 하나코의 방에서 함께 생활한다. 조석 준비와 세탁, 그리고 재봉질이 그녀의 중요한 직무다. 광교에서는 점룡이가 아이스케키를 팔고 있다. 우연히 금순이는 헤어졌던 동생 순동이를 만난다. 순 동이는 한양 구락부라는 당구장에서 게임놀이를 하고 있다. 그러나 순동이는 모범적인 소년이었다. 아버지를 따라 각처로 밥거리를 구하여 고생이라는 고생은 다 해본 터이라 성실하였고, 그래서 주인과 감독의 신임을 얻고 있다. 아버지 용서방은 새어머니의 행실이 정숙치 못해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 그는 지금보다 불행한 적은 없었다며 입맛을 다신다. 계집 경영하기의 어려움은 용서방보다도 오히려 민 주사가 좀더 심각하게 느끼고 있다. 한편 좋은 집안의 가문으로 시집간 카페 여급이었던 하나코는 시집살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시집온 지 달반도 못되어 하나코는 극도로 마음과 몸을 상했다. 시어머니의 구박은 물론이고, 하인배들의 멸시, 그리고 믿었던 남편의 마음조차도 변해버렸다. 전처 소생의 아이들도 끊임없이 괴롭힌다. 이쁜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마침내 이쁜이는 서방에게 쫓겨 어머니에게로 돌아온다. 외로운 어머니는 이번에는 다시 이쁜이를 그 집에 보내려 하지 않고, 이튿날로 필원이를 시켜 딸의 세간을 모조리 찾아온다. 이발소의 귀여운 소년 재봉이는 젊은 이발사 김서방과 밤낮 다툼을 하면서도 좀처럼 이발소를 떠나지 않는다. 이제 얼마 안 가서 이발사 시험에 어렵잖게 합격하리라는 것이 이발소 주인의 말이다.


d. 감상 및 문학사적 의의

이 천변풍경은 박태원의 대표적인 장편으로,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 경성 도심에 대한 기록이라면 천변풍경은 도시의 주변부에 대한 관찰이다. 청계천변은 분명히 도시에 속해 있으면서도 도심과는 다른 공간이다. 현란한 도시문화의 영향으로 천변에도 카페와 구락부 같은 유흥시설이 있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아직 동네아낙들이 모여드는 빨래터가 있고 이웃집 속사정을 제 속처럼 아는 전통적 공동체가 살아 있다. 천변은 생활의 무대이며 도시문명에 속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발소와 빨래터

그런데 천변풍경에 나타나 있는 이 다양한 인물들의 갖가지 행색은 두 가지 방향에서 동시적으로 파악되고 있다. 하나는 천변에 자리잡고 있는 동네의 이발소이며, 다른 하나는 천변의 빨래터이다. 남정네들이 모여드는 이발소에서 그들의 삶의 모습이 투영되고, 빨래터에서 나오는 아낙네들의 입을 통해 온 장안의 화제가 소설 속으로 끼어든다. 이 같은 소설적인 기법은 개별화된 인물들이 보여주는 특이한 행동과 태도를 하나의 공간 속에 배치하는 데 기능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영화기법의 활용

 천변풍경 은 그러한 천변 사람들의 생활을 파노라마처럼 잡아낸다. 이 소설에 특별한 주인공은 없으며, 천변과 근처의 상점들 그리고 사람들 모두가 주인공이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을 보여주듯이, 이 소설을 한 장면(그리고 특정 한 인물)에서 다른 장면(다른 인물)으로 넘어간다. 이어지는 장면들 사이에는 주제나 사건의 영속성도 없다. 이 소설이 발표된 1936년 당시, 이는 새로운 기법으로 받아들여져서 작가의 시각이 카메라의 눈처럼 드러난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때부터 천변풍경이 영화의 기법을 활용했다는 지적은 계속되고 있다. 최재서의 평가를 빌면 박태원은 자기 사상에 의하여 어떤 가상적 스토리를 따라가면서 인물을 조종하지 않고, 그 대신 인물이 움직이는 대로 그의 카메라를 회전 내지 우회 하였다는 것이다. 이 소설 전체가 그러한 특징을 유지하고 있는데, 특히 등장하는 인물 중 이  카메라의 눈을 체현하고 있는 인물은 재봉(이발소 소년)이다.

그의 즐거움은 천변을 오고가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 관찰에는 어떠한 목적의식도 없다. 그저 그는 오가는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그들이 어떤 태도로 어디를 향해가는지를 관찰할 뿐이다. 이런 재봉의 시각은 소설 전체를 관통 하고 있는 작가의 시각, 카메라의 눈과 같다. 그러나 장면의 무조건한 배열만으로는 소설의 완결성이 획득되기 어렵다. 작가는 여기서 시. 공간적 폐쇄성이라는 장치를 마련한다. 곧 사건들의 무한한 나열을 막기 위해 시간과 무대를 제한시키고 등장인물의 운명도 이 무대에서 벗어나지 않게끔 조정하는 것이다.


시간적 폐쇄성

시간적 폐쇄성은 1년의 순환을 소설의 시간적 배경으로 하는 데서 생긴다. 이 소설은 정이월에 대독 터진다는 말이 있다. 딴은 간간이 부는 천변바람이 제법 쌀쌀하기만 하다 라는 말로 시작해, 이듬해 같은 시기를 알리는 입춘이 내일 모레라서 그렇게 생각하여 그런지는 몰라도 대낮의 햇살이 바로 따뜻한 것 같기도 하다 라는 말로 끝난다. 그런가 하면 공간적 배경은 천변에 제한되어 있다. 


공간적 폐쇄성

주요 등장인물 역시 천변으로 모아짐으로써 공간적 폐쇄성을 강화시킨다. 소설의 말미에서 이쁜이는 천변의 친정으로 돌아오고, 금순이는 가족과 해후하여 천변에 자리잡는다. 이들의 운명은 천변을 뛰어넘지 못한다. 그리고 또 하나 소설 내의 카메라 눈 이라 할 수 있는 재봉이 소설의 첫부분에서 기대했던 일(포목점 주인의 중절모가 벗겨져 개천에 떨어지는 일)이 소설이 끝날 때 일어남으로써, 중심적인 인물이나 사건이 없음으로 인해 생길 수 있는 구성의 해이함은 견제되고 있다. 세태소설인 이 작품의 가치는 일찍이 최재서가 리얼리즘의 확대와 심화 에서 피력한 바 있고, 임화에 의해 세태소설 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는 일제식민지 치하에서 사상이나 성격을 다루는 대신 외면풍경의 묘사에만 치달았음에 대한 비판이다. 외면묘사의 철저화는 내면의 심화와 평행선을 그으며 진행되는데, 이것이 변증법적 전개를 보이면서 새로운 단계를 이룩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한계를 가지며, 곧 이는 1930년대 소설의 한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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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난]


정의


노비, 혹은 그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이 일정기간 상전집에 살면서 안팎의 일을 하던 관습.


내용


노비제도가 붕괴하면서 노비들은 주인집에서 떨어져나와 살 수 있었다. 그렇지만 경제력이 빈약하였기 때문에 완전히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또한 주인도 직접 데리고 있지 못하는 노비를 밖에서 거주하도록 하였지만, 쉽사리 노비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신분제도 붕괴의 과도적 단계에서 이러한 관습이 발생하였을 것으로 추측되며, 1950년대까지도 잔존한 경우가 있었다.


드난살이는 대체적으로 세전비(世傳婢)가 많이 하였다. 대개 7세경에 드난을 시작하여 22∼25세까지 봉사를 하였으며, 드난기간 중에 혼인을 하더라도 주인의 집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 남편도 그 기간에는 동네의 다른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든가, 아니면 처와 더불어 같은 집에서 일을 하였다. 이런 경우에는 남편에게 보수가 지급되었다.


자녀가 출생하더라도 드난의 의무기간 중에는 아이를 데리고 봉사하여야 했다. 드난을 마치고 나간 비의 여식은 다시 7세가 되면 드난살이를 하였다.


한편 아들은 드난할 의무는 없었지만, 노의 신분을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비가 3, 4명의 여식을 낳았을 경우에 1명 정도는 드난이 면제되었다.


드난을 마치고 다른 지역으로 전출한 노비의 자녀는 원칙적으로 그 부모가 소속되었던 주인의 재산이 되지만, 현실적으로 소환할 수 없을 경우에는 드난을 시키지 못하였다.


드난살이를 하였던 사람들은 비록 주인집의 가구원으로서의 대우를 받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수시로 출입시키는 대가로 일상생활의 경제적인 보조를 받았고, 길흉사 특히 본인의 장례에는 도움을 얻었다.


참고문헌


『동족부락의 생활구조연구』(김택규, 일조각, 1964)

[네이버 지식백과] 드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C17 – 혈의 누 (血의 淚) / 이인직(李人稙, 1862-1916)

(출전 :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고전소설적 요소와 현대소설적 요소를 함께 가지고 있는 최초의 신소설이자 그 대표작. 1906년에 <만세보>에 연재된 바 있고 이듬해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던 신소설로, 이 소설은 청일전쟁 때에 가족과 헤어지게 된 한 소녀가 일본. 미국에서 겪는 시련을 중심사건으로 삼고 있다. 비록 왜곡되고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이 소설은 개화기 당시의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작가의식의 면에서나 서술방법의 면에서 신소설의 모델이 되고 있다.


a. 생애와 작품활동

호는 국초, 경기도 이천 출생. 1902년 정부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동경정치학교에 입학했다. 1903년 귀국하고 1904년 일본육군성 한국어 통역관으로 제1군 사령부에 배속, 1906년 <만세보>의 주필이 되어 최초의 신소설 혈의 누를 발표하면서 계속 많은 작품을 썼다. 1907년 이완용의 도움으로 경영난에 빠진 <만세보>를 인수, <대한신문>을 창간하여 사장에 취임한 후 이완용의 비서를 지내는 등, 친일적 행위를 했다. 1908년 원각사를 중심으로 신극운동을 전개, 설중매 와 같은 신소설을 신극으로 각색하기도 했으며, 같은 해에 은세계를 직접 무대에서 상연했다.

1910년 한일합병이 조인될 때는, 이완용의 수족이 되어 그 매개역할을 담당하기도 했으나 한일합병 이후 숨은 공로자임에도 불구하고 흔한 작위도 받지 못하고, 경학원 사성이라는 말직에 보임되었다. 그러나 신문학사상 근대소설의 성격을 잘 파악하고 구상력과 성격묘사에도 능했으며, 최초로 사실적 산문문장을 구사하여 신소설을 개척한 공로는 크다.

그의 작품인 귀의 성은 무기력한 양반가문의 본처와 평민층의 딸인 첩사이의 갈등을 매개로, 봉건적 가족제도의 불합리성과 몰락하는 양반계급의 무력한 면을 보여준 작품이다. 치악산은 계모를 둘러싼 고부간의 갈등, 갑오개혁 이후의 신. 구사상의 대립, 미신타파 및 하급계층의 반발 등을 내용으로 한다. 한편 그의 작품 중 주제가 가장 뚜렷하고 신극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 은세계는 처음부터 끝까지, 부패와 학정으로 양민을 수탈하는 양반관료에 대한 평민 최병도의 현실고발과 반항을 보여준 작품이다. 반봉건의식이 강한 최병도가 봉건관료에게 수탈당하기를 거부하다 맞아죽는 전반부와, 최병도의 자식인 옥순 남매가 미국에 유학갔다 귀국하여 반민중적이고 사대주의적 태도를 보여주는 후반부로 나누어져 있다.


b. 신소설과 이인직


신소설

 신소설 이란 이인직의 혈의 누를 필두로 한 20세기초에 등장한 일련의 개화기 소설의 총칭이다. 고소설과 현대소설의 교량적 역할을 한 과도기적 성격의 신소설은 정치의식의 대두와 함께 반봉건적인 주제를 담고 있으며, 인간성의 자유로운 발현을 억압하는 사회적 모순을 고발하고 있다.  신소설 이란 명칭은 신소설 작가들과 신소설을 간행한 출판사들에 의해서 사용되었는데,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일본과 중국에서도 신소설이란 용어가 등장하였다. 현재는 개화기에 출현한 소설에 대해 양식상의 명칭으로 이인직. 이해조. 최찬식 등에 의해 창작된 작품들을 지칭하는 말로 통하고 있다. 신소설이 등장하게 된 요인은 국어운동의 요구와 독서대중의 확대, 기업적 성격을 지닌 근대적 출판사의 출현과 직업적 작가의 등장, 개항에 의한 서구의 근대적인 개화사조의 수용, 일본과 중국의 영향 등을 들 수 있다. 표현면의 특징은 언문일치에 가까운 문체를 시도하고 서술의 역전을 많이 구사하여, 단선적 시간경과에 의한 사건전개를 지양했다. 그리고 사건의 분절화를 정착시켜 산문적인 문장에로의 발전을 가져왔다. 주제면의 특징은 전근대적인 가치관인 유교적 질서, 즉 가부장제. 남성위주. 신분차별 등을 비판하면서 신교육관. 신여성관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미신 등 주술적 세계관을 탈피하고 합리적 세계관을 주창하였으며, 자주독립, 근대적인 민주사상 및 악에 대한 과감한 저항과 징계를 보이고 있다. 주제상으로 보아, 신소설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문명개화에 대한 소박한 낙관주의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새로운 풍습과 지식. 문물은 곧 아름다운 미래에의 야곡이며, 그것의 원천인 바깥세계는 동경과 선망의 대상이 된다. 주인공들은 위기상황에서 흔히 일본인. 서양인의 도움을 받으며 무한한 기대를 품고 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이와 같은 안이한 낙관주의로 인해 신소설은 새로운 삶의 가능성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천박한 개화주의로 전락하였으며, 이인직 등의 작품에서는 당대의 역사적 정황을 몰각한 친일적 환상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 점은 같은 시대의 역사. 전기류가 대외적 자존의 문제에 민감한 의식을 지녔던 사실과 대조적이다.


이인직

이인직은 신소설의 특성을 파악, 뛰어난 구상력과 노련한 성격묘사 등으로 신소설을 개척한 공로가 크다. 요컨대 신소설의 문학적 가치를 확립시킴으로써 장래에 싹트게 될 한국 근대소설의 기초를 이룩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인직이 문학사적으로 갖는 의의는 크게 3가지로 볼 수 있는데, #1최초로 사실적 산문문장을 구사하여 신소설 문단을 확립한 점 #2극장 원각사를 세워 신극운동에도 공헌한 바가 크다는 점 #3 그러나 혈의 누 은세계 등의 작품을 통하여 친일의식과 반민족의식을 강렬히 드러내고 있음도 기억해야 한다.


c. 주요 등장인물

이 작품은 조선에 청일전쟁을 불러들인 봉건제도를 비판하고, 신교육. 신문명을 받아들일 것과 자주독립 및 자유연애사상을 다루고 있는 작품으로, 주요 등장인물은 다음과 같다. 

김옥련: 청일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일본인 군의관에게 구출되었다가, 다시 구완서의 도움으로 미국에 유학간 여주인공.

구완서: 부국강병의 뜻을 품은 유학생.

김관일: 옥련의 아버지. 청일전쟁을 통해 부국강병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유학감.


d. 작품의 주요내용

평양성이 청일전쟁의 와중에 휘말리자, 피난 가던 중 남편과 자식을 잃은 한 부인이 모란봉을 정신 없이 헤매며 찾고 있다. 딸의 이름을 부르며 걷는 동안, 어느새 날은 어두워져 앞길을 분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데, 마침 잃어버린 아내를 찾아 헤매던 어느 외간남자와 부딪혀 봉변을 당할 뻔했으나, 일본헌병에게 구출되어 이튿날 무사히 집에 오게 된다. 그녀의 남편 김관일은 아내를 찾아 헤매다가 집에 돌아와 걱정스레 기다리며 생각에 잠긴다. 남의 나라 사람들이 남의 땅에서 전쟁을 치르는 현실과, 평양성 백성들이 저승의 염라대왕과 평양감사 염라대왕 둘을 모셔야 하는 모순된 현실의 원인이 모두 나라가 부강하지 못한 탓이라 생각한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는 큰일을 이룰 것을 결심하고 그 길로 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이튿날 집에 돌아온 김관일 아내 최씨부인은 날마다 딸과 남편을 그리며 돌아오길 기다리나 끝내 돌아오지 않자, 비관하여 대동강물에 몸을 던진다. 그런 와중에 최씨부인의 친정 아버지 최주사는 부산에서 사위를 만나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후, 딸과 손녀의 안부를 확인코자 평양에 온다. 그러나 이미 그의 딸은 유서를 남겨놓고 자살하러간 후였다. 하지만 최씨부인은 뱃사공에게 구출되어 며칠 뒤 다시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와 극적인 상봉을 한다. 한편 옥련은 피난중 어머니를 잃고 헤매다가, 폭탄 파편에 맞아 부상을 입지만, 일본인 군의관에게 구출되어 목숨을 건지게 된다. 군의관은 옥련을 치료한 후 집으로 데려갔지만, 집엔 아무도 없고 최씨부인이 벽에 써놓은 유서만 남아 있어, 불쌍한 처지에 빠진 옥련을 자신이 거두기로 한다. 비록 부모와 헤어져 소식조차 모르는 처지이긴 하나, 옥련은 군의관 정상소령의 부인에게 보내져 그녀의 보살핌으로 오사카에서 새 삶을 시작한다. 원래 총명하고 예쁜 탓에 부인의 사랑을 받으며 일본에서 학교도 다니는 등, 어느 정도 정상적인 삶을 꾸려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정상이 전사하자 차츰 부인의 태도는 바뀌어간다. 게다가 개가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옥련으로 인해 놓치게 되자, 그녀는 옥련을 노골적으로 박해하기 시작한다. 마음 착한 옥련은 참으려고 노력해보기도 하고, 불쌍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자살하려 하기도 하나, 모두 이루지 못하고 견디다 못해 결국 가출하고 만다. 갈 곳이 없는 옥련은 단지 오사카를 떠날 결심으로 도쿄 행 기차를 타는데, 거기서 우연히 구완서와 마주친다. 처음엔 같은 조선인이고 말이 서로 통한 것 때문에 얘기를 나누던 중, 옥련의 불쌍한 사연을 전해들은 구완서는 옥련에게 자신과 함께 미국으로 유학갈 것을 권한다. 구완서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청일전쟁과 같은 불상사를 다시는 당하지 않기 위해 조선을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처럼 부강하게 만들겠다는 포부를 지니고 유학길에 오른 터였다. 따라서 그는 옥련에게도 공부를 마친 후 조선의 여자교육에 힘쓸 것을 부탁하고 옥련은 이에 동의한다. 미국에 도착한 그들은 워싱턴에서 언어장벽을 극복하고 공부하게 되며, 옥련은 고등소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기에 이른다. 조선인 여자로서 역경을 딛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기에 이른다. 조선인 여자로서 역경을 딛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게 되자 옥련에 관한 신문기사가 실리는데, 바로 옥련의 아버지 김관일이 이를 우연히 보게 된다. 그는 곧 딸을 찾기 위해 신문에 광고를 낸다. 이 광고를 보게 된 옥련은 드디어 아버지와 만나 회포를 푼다. 김관일은 그간의 사정을 듣고 난 후 딸의 혼인문제를 꺼내는데, 옥련과 구완서는 자신들의 문제이므로 자신들이 의논하여 결정할 것을 주장하고 결국 서로 결혼할 것을 약속한다. 남편으로부터 옥련의 사연을 편지로 전해들은 최씨부인은 딸이 귀국하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옥련 또한 집으로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면서 상편이 끝난다. 하편은 7년 후에 <매일신보>에 연재되다 미완으로 끝난 모란봉이다. 


e. 감상 및 문학사적 의의

최초의 신소설이면서도 대표작으로 인정되고 있는 혈의 누는 고대소설적 요소와 현대소설적 요소를 함께 지니고 있다. 이 소설은 1906년 7월 22일부터 10월 10일까지 <만세보>에 연재된 작품으로서, 청일전쟁으로 인해서 옥련일가가 뿔뿔이 흩어지는 시기에서부터 옥련이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서 아버지와 만나 어머니의 소식을 듣고, 어머니에게 편지하기까지의 10년간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구체적이고 현실감 있는 배경. 주제를 당시의 시대적 문제와 직결시켰다는 점 등이 보다 근대적 요소로 등장하였으며, 관용적인 한문구를 배제하고 일상적 구어체의 표현력을 충분히 활용한 문체 또한 현실감을 높이는 데 중요한 몫을 하고 있다.


최초의 신소설

여주인공 옥련의 일생은 고대소설 숙향전의 주인공 숙향의 일생과 비슷한 면이 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생하나, 위기 때마다 조력자를 만나 결국은 행복한 결말을 이룬다는 대체적인 일생의 유형이 동일하다. 다만 혈의 누 는 옥련의 일생을 일본. 미국 등 외국의 문물과 관련시켜서 근대적인 성향을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고대소설과 다르다. 신소설의 양면성과 과도기적 성격은 이러한 사실에서 기인된다. 신소설은 혈의 누 이후 많이 양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용과 형식상의 괴리로 인하여, 질적 향상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결과 혈의 누가 신소설의 최초의 작품이면서도 대표적인 작품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친일적 개화론

그러나 주제면에서 신교육사상이나 자유결혼사상 등의 개화사상을 보여주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권선징악적인 주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한 형식면에서도 일대기적인 형식, 해피엔딩의 구조 그리고 우연성에 의한 소설의 전개 등을 취하고 있어, 일본이나 미국의 배경 외에는 고소설을 보는 이상의 신선미를 주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신문명에 대한 일방적인 경도와 낙관적인 개화주의에 기울어 있다는 부정적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의 소설들에 등장 하는 김관일. 강동지. 최명도 등은 조선말기에 형성된 평민층의 전형이며, 그들은 개화사상을 깊이 인식하고 봉건관료의 학정에 강하게 저항한다. 작가는 이들을 통해 조선말기의 사회. 경제적 갈등을 구체적으로 그려내고 반봉건 문명개화사상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이 봉건사회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주역으로 나가지 못하고, 봉건관료체제에 대한 맹목적인 부정과 근대문물제도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에서, 결국 친일 개화론으로 기울어지는 한계를 보여준다. 이런 태도는 혈의 누와  은세계 에서는 외세에 대한 찬양으로, 귀의 성에서는 양반에 대한 평민들의 허황된 복수로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구성과 묘사에 있어 놀랄만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특히 혈의 누에서는 청일전쟁중 한 여인이 가족을 찾아 헤매는 장면을, 이전 소설의 순차적 평면적인 서술과는 달리 인과관계에 의한 입체적인 서술방식으로 그려냈다. 각자의 신분에 맞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C16 – 홍길동전(洪吉童傳) / 허균(許筠, 1569-1618)

(출전 :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서자. 천민. 여자들도 평등하게 살 수 있는 대동세계의 꿈을 가지고, 조선중기의 문인 허균이 쓴 최초의 한글소설. 우리나라의 신화. 전설 등에 나오는 영웅소설의 대표작이다. 진취적이고 영웅적인 주인공의 일생을 통하여, 적서차별과 관리들의 부정. 부패, 그로 인한 민중들의 궁핍한 생활 등 봉건사회가 야기한 사회적 갈등을 문제화하고, 그 해결방법에 있어 기존질서와 체제를 뛰어넘는 혁명적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은 17세기 이후 조선시대 서민들이 탐독한, 보이지 않는 베스트 셀러였다.


a. 생애와 작품활동

역사상 인물에 대한 평가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나, 허균만큼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도 드물 것이다. 그는 최초의 국문소설가이고, 유. 불. 선에 통달한 학자였으며, 불꽃 같은 의지로 현실을 바로잡으려는 개혁사상가였다는 평가는 오늘날의 평가이고, 당시 그에게 붙여진 이름은 반역과 이단의 표본이었다. (본관은 양천,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 또는 학산(鶴山), 성소(惺所), 성수(惺叟)로 불렸고 후에는 백월거사(白月居士)로도 불렸다.) 교산 허균은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높은 명문 가문 출신으로, 특히 그의 부친인, 서경덕의 제자 허엽과 두 형인 성. 봉은 뛰어난 수재로 동인의 우두머리였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유성룡의 문하에서 공부할 수 있었고, 서울의 명문집 자제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허균은 누이 허난설헌과 함께 서자출신으로, 당시 서자출신 삼당시인의 한 사람인 이달에게서 시를 배웠다. 허균은 재주가 많은 형제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 10세 전후부터 서울에 천재로 소문이 났고, 누이도 신동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의 시문은 그의 반대파나 심지어 중국인들까지도 인정하였다. 그는 이미 9세에 시를 지어 어른들을 놀라게 한 적도 있고 26세때에는 장원급제를 하였다. 황해도 군수 시절 관아 별실에 불상을 모셔놓고 아침저녁으로 예불을 드리다 발각돼 파직당했으며, 외교사절로 임명되어 중국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런 그가 관계에 발을 들여놓고부터는, 성품이 경박하고 여자를 좋아하여 부모의 초상을 당해도 기생들과 놀아난다는 비난이 일어 벼슬자리에서 밀려났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고 당당했다. 썩어빠진 조정에서 벼슬을 하기보다는 불우한 문인들이나 서자.

승려들과 어울려 술로 나날을 보냈다. 왜 그랬을까?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불같은 성격은 당시 왜곡된 사회구조를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때 그의 제자였던 이식의 평을 들어 보자.

 ‘세상에 전해지기를 수호전을 지은 사람은 삼대에 걸쳐 귀머거리와 벙어리가 되어 그 응보를 받는다고 했다. 도둑들이 그 책을 읽으며 높이 평가했다. 허균. 박엽 등이 그 책을 좋아해서 그 책에 나오는 도둑들의 이름을 따서 각기 불렀다. 허균이 또 홍길동전을 지어 수호전에 비겼다. 그들 무리인 서양갑. 심우영 등이 몸소 그들 행동을 답습하여, 한 마을이 시끄러웠다. 허균이 또한 모반을 꾀하다가 죽음을 당했으니, 이는 귀머거리. 벙어리가 되는 갚음보다 더욱 심했다.’ 

이 글을 보면 허균이 이단이었다는 것과,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어 돌려 읽으며 반역을 도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허균은 이런 따위의 비난에 흔들리지 않고, 괴상망측한 사람들과 계속 어울려 다녔다. 그럼에도 조정에서는 그의 재주를 인정하여 공주목사로 임명하였는데, 그는 많지 않은 녹봉으로 서자들을 뒷바라지했다. 선조와 광해군에 관한 잘못된 중국측 기록을 수정하기 위해 1614년 두 번째 중국에 가게 되는데, 많은 자금을 가지고 현응민을 데리고 갔다. 그런데 정작 그 돈으로 책을 몽땅 사와 강릉에 도서관을 만들어 보관하고 선비들에게 읽혔다. 현응민은 허균의 이런 일을 도왔고, 나중에 허균이 일대모반을 꾀할 적에 그도 함께 잡혀 죽었다.

그는 공주현감에서 밀려나 전북 함열에서 귀양살이하고 부안에 가서 살기도 했다. 당시 서양갑 등 서자들은 서자에 대한 차별해소를 조정에 건의했으나, 이것이 무시되자 그들은 무력봉기를 준비하다 적발되어 일망타진된다. 그 유명한 홍길동전은 이때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49세 때 그의 주변에는 새로운 상황변화가 오는데, 인목대비 폐비 논의가 그것이다. 당시 형조판서이던 그는 인목대비의 폐비에 찬성하고 나섰는데, 이런 내용을 담은 글을 경운궁에 투서하기도 했다. 이때 남대문에 곧 난리가 일어나니 피하라는 격문이 붙었는데, 주모자가 현응민으로 밝혀지고 허균도 이에 연루되어 잡혀왔다. 이로 인해 그는 그의 일파인 김윤황. 하인준. 현응민. 웅경방 등과 함께 저잣거리에서 능지처참당했다. 역적이란 이유로 그에 관한 글들은 모두 불태워졌고 악한 인물로 이미지가 조작되어 후세에 전해졌다. 그가 그의 다른 작품은 모두 한문으로 썼으면서 유일하게 한글로 쓴  홍길동전은 민간의 숨겨진 스테디 셀러이지 베스트 셀러로 계속 전승된다.


b. 시대적 배경과 저술동기


당쟁격화

여기서 우리는 홍길동전을 심도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허균이 살았던 조선중기 사회의 시대적 배경을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다. 허균이 생존했던 선조 광해군 시절은 사림파 내부의 붕당정치가 시작되어, 상대 당과의 공존을 바탕으로 한 상호비판 체제를 기본으로, 정치참여층의 확대와 정치운영의 활성화가 이루어진 반면, 국력의 낭비에 따른 사회적 혼란은 더욱 가중되고 있었다. 정치적인 최초의 분당은 선조 때 사림파 내부에서 동인과 서인의 분열에서 비롯되었다. 인사권을 가진 이조전랑(吏曹銓郞)직을 놓고, 먼저 심의겸과 김효원이 각각 서인과 동인으로 갈라진다. 당시 선조의 첫 왕비인 박씨에게서는 자녀가 없었는데, 후궁소생 중 가장 영특한 광해군이 대신들의 합의에 의해 세자의 물망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앞에 나서서 선조(당시 선조는 인빈 김씨의 아들인 신성군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에게 건의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쪽 같은 성격의 서인출신 정철이 선조에게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자고 직언하여 선조의 미움을 샀다. 정철의 처벌을 두고 온건파와 강경파가 맞서, 동인 내부에서 각각 남인과 북인으로 대립했다. 이런 상황에서 임진왜란을 맞게 되었다. 임진왜란 중 잠시 중단되었던 붕당정치는 전란 후 다시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와,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의 아들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로 분열되었다가, 선조 사후 정인홍 중심의 대북파가 정권을 잡자, 광해군은 친형인 임해군과 조카 능창군, 이복동생인 영창군 등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덕수궁에 유폐시키는 등 패륜적 행위를 저질렀다. 이로 인해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어, 결국 광해군은 서인들에 의해 제주도로 귀양을 간다.


신분차별

사회적으로 양반계급들은 부국강병에 무익한 성리학적 사회질서만을 고집하여, 국가전체의 공익보다는 자기가 속한 정파의 이익에 혈안이 되어서 고통받는 민중들의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과거장엔 부정이 성행하고, 관가에는 매관매직이 성행하여 민심은 이미 이반되어 있었다. 거기에 조선초부터 시작된 적서의 차별은 조광조나 이이가 그 부당성을 지적하기도 하였으나, 여전히 능력있는 서자들의 관계진출을 막아, 국가적 차원의 능률의 극대화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사회개혁

이와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당시 명문의 서자요 재사로 알려진 서양갑. 박응서. 이경준. 심우영. 박치인. 박치의. 김경손 등 7인은 임금께 서자에게도 벼슬길을 열어줄 것을 연명으로 상소하다 묵살되자, 이들은 여주강 가에 굴을 파고 무력봉기를 준비했으며, 이중 박응서가 거사자금을 마련키 위해 문경새재에서 은상인을 털던 중 잡혀, 모반계획이 탄로나 모두 체포되어 죽은 사건이 일어난다. 홍길동은 조선초 연산군 때 충청도 일대에서 활약한 의적의 두목이었다. 실존인물인 홍길동이 서자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소설에서는 그를 서자로 만들어, 부정한 재물을 털고 끝내 성공을 거둔 후, 임금에게서 서자의 굴레를 벗고, 이어 온갖 차별이 없는 율도국을 건설한다. 홍길동은 바로 서양갑을 모델로 한 것이었다.  홍길동전 은 이상과 같은 혼탁한 사회를 배경으로하여 이루어진 일종의 사회소설이다.


c. 작품의 주요내용

작품의 구체적인 배경은 세종 때로, 세종 때 홍재상의 서자 홍길동이 집에서 말썽을 부리다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더니, 섬나라로 도망쳐 왕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즉, 현실을 개혁하고 이상을 실현하는 인물의 일대기인데, 작품의 중심내용은 #1평등사상에 입각한 적서차별의 철폐, 즉 봉건 가족제도의 모순을 바로잡고 #2탐관오리의 척결과 빈민구제, 즉 유교 봉건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개혁하고 #3이상향을

실현하려는 이념을 소설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조 세종 때 서울에 사는 홍판서는 세 부인이 있는데, 홍길동은 그중 시비 춘섬의 소생이다. 홍판서가 용꿈을 꾸어 길몽이기에 정실부인을 가까이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춘섬과 관계해서 낳은 아들이 길동이다. 길동은 어려서부터 도술을 익히고 장차 훌륭한 인물이 될 기상을 보였으나, 첩의 자식인 탓으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대감이라 불러야 하며, 자신을 소자라 청하지 못하고 소인이라 해야 하는 현실에 한을 품는다.

가족들은 길동의 비범한 재주가 장래에 화근이 될까 두려워, 자객을 시켜 길동을 없애려고 한다. 길동은 위기에서 벗어나 집을 나와서 방랑의 길을 떠난다. 그러다가 도적의 소굴에 들어가 힘을 겨루어 두목이 된다. 먼저 기이한 계책으로 해인사의 보물을 탈취하고, 활빈당이라 자처하며 도술로써 8도지방의 수령들이 불의로 취한 재물들을 탈취하면서, 아무 날 전곡을 도적한 자는 활빈당 행수 홍길동이라는 방을 붙여둔다. 함경감사가 도적을 잡는 데 실패하자, 조정에 장계를 올려 좌우 포청으로 하여금 홍길동이라는 대적을 잡으라고 한다. 팔도가 다같이 장계를 올리는데 도적의 이름이 홍길동이요, 도적당한 날짜가 한날 한시였다. 우포장 이흡이 길동을 잡으러 나섰다가, 도리어 우롱만 당하고 만다. 국왕이 길동을 잡으라는 체포명령을 내리니, 전국에서 잡혀온 길동이 300여 명이나 된다. 그러나 호풍환우하고 둔갑장신하는 초인간적인 길동의 도술을 당해낼 수 없었다. 조정에서는 홍판서를 시켜 회유하고, 길동의 형인 인형도 가세하여 길동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하고 병조판서를 주어, 회유하기로 한다. 길동은 서울에 올라와 병조판서가 된다. 그 뒤 길동은 고국을 떠나, 남경으로 가다가 산수가 수려한 율도국을 발견, 그곳에 살고 있던 울동이란 요괴들을 퇴치하여, 볼모로 잡혔던 미녀 둘을 건지고 율도국 왕이 된다. 마침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고국으로 돌아와 삼년상을 마치고 율도국으로 돌아가, 이 두 미녀를 부인으로 삼아 3남 2녀의 자식을 두고 나라를 잘 다스린다.


d. 감상 및 문학사적 의의


최초의 한글소설

이 작품은 소설을 백안시하던 시대에 이런 소설, 그것도 한글로 소설을 썼다는 점에서 우선 의의를 가진다. 그 구성이나 스케일, 그리고 인물의 성격묘사는 근대문학에 미치지 못하지만, 혁명적 사회소설로서 당시의 사회모순을 대담하게 폭로하고, 민중에게 미래의 이상세계를 열어 준 우리 나라의 계몽문학, 또는 저항문학으로서 금자탑을 이루고 있다. 이 소설은 우선 최초의 한글소설이라는 점에서 주목되고, 그 이후의 소설에서 찾기 어려운 다양성을 보이고 있다. 즉, 이 작품은 도적을 주인공으로 한 영웅소설, 양반가정의 모순을 척결하고 서얼차별의 불합리성에 항거한 사회소설, 이상향을 그리는 낙원사상소설,도교적인 둔갑법. 축지법 등을 담은 도술소설 등의 다양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기본적인 성격은 사회개혁을 염원하는 사회소설이다.

사상적으로는 수호전의 혁명사상의 영향을 받은 듯하고, 도술적인 표현방법은 서유기를 모방하였으며, 길동의 요괴물 퇴치작전은 전등신화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그러나 주인공의 모델은 국내 실존인물로, 연산군 때의 홍길동이 주축이 되고 있으며, 그후로도 명종 때의 임꺽정, 선조 때의 이몽학의 영향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상국 건설에 대한 당시 선비들의 관념이 잘 반영되어 있는 점도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다.


사회비판소설

15세기 중엽에 금오신화로 출발한 한문소설은 그 동안의 쓰라린 현실적 체험을 통해 공상적 세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소설로 약진하게 되었는데, 금오신화 이후 약 150년 후에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 이 나온다. 김시습의 금오신화 가 비현실적인 성격의 괴기와 염정을 주제로 한 여성적 문학을 열었다면, 홍길동전 은 서얼문제. 탐관오리 문제 등 비교적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남성문학 의 시작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길동이 도술로 적을 물리치는 장면이 많이 등장하기는 하나, 과제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실제적인 문제, 즉 적서차별의 가족제도 문제와 탐관오리의 숙청과 빈민구제라는 사회적인 문제에 있다고 하겠다.


영웅소설

한편, 서사시나 전기소설적인 전체의 흐름은 영웅의 일대기를 기술하는 한국소설의 전통적인 면에서, 설화시대와 소설시대의 교량적 역할을 하였으며, 그 도술적 요소는 이후의 전우치전 서화담전 등의 군담소설(軍談小說)에 의해 계승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점이 우리 소설문학사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의의를 갖는다고 하겠다.


대동세계 묘사

이 작품은 인간가치의 평등을 전제로 펼쳐지고 있다. 적서차별의 철폐도 결국 정실 자식이든, 첩의 자식이든 동등한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음을 보인 것이요, 권력자들의 재산을 털어 빈민에게 나눠주는 빈민구제사상도 결국 인간적 권리의 동등함을 나타낸 것이다. 이상국을 찾아나서는 줄거리를 굳이 설정한 것은 현실에서는 이런 이념이 실현되기 어렵지만,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당위를 드러낸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동등하고 균등한 인간가치를 제약하는 요소가 바로 모순이라면 이 모순을 극복하고 누구나 인간의 존엄성이 존중되는 대동사회를 그린 소설이 바로  홍길동전 이라 하겠다.


조선의 3대 의적

홍길동. 임꺽정. 장길산, 소설로써 우리에게 친숙한 이들은 역사상 실존인물이다. 홍길동은 연산군 때 충청. 경기 일대를 무대로 활약한 의적이고, 임꺽정은 명종때 황해도를 누비면서 조정을 위협했던 대도였다. 황해도 구월산의 영웅 장길산은 숙종 때 용맹하고 신출귀몰한 도적이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당대의 사회적 차별과 경제적 불평등, 정치적 억압에 반기를 들었기에, 정부에게는 반역자였으나 민중들에게는 통쾌한 대리만족을 주었다는 점이다. 민중들로부터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던 이들은 훗날, 당대 최고의 작가들에 의해 소설로써 형상화되어, 시공을 초월한 사랑을 받고 있다. 즉, 홍길동은 광해군 때 허균이 소설화했고, 임꺽정은 이광수. 최남선과 함께 조선의 3천재로 불렀던 월북작가 홍명희가 소설화하여, 한국 역사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리고 장길산은 70-80년대에 황석영에 의해 10권짜리 역사 대하소설로 출판되어, 현재 판매부수가 50만 질 500만 권에 육박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장길산은 끝내 잡히지 않아 아직도 그 행방이 묘연한데 작가는 지금 어디에?



C15 – 어머니 (Mat') / 고리키 (Maxim Gor'kii, 1868-1936)

(출전 :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한 시대의 보편적인 이념을 자신의 삶 속에서 실현하려 했던 고리키를 만날 수 있는 작품. 노동자 출신으로 파란만장한 여정 끝에 세계적인 문호로 대성한 고리키가 1907년에 발표하여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효시로 평가되는 이 작품은 매사에 소극적인 한 어머니가 혁명운동에 뛰어든 아들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아들의 혁명적 대의를 이해하면서 따뜻한 인간으로 변모해, 마침내 여성 혁명가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a. 생애와 작품활동

 책이란 꼭 필요한 것이다. 과거에 많은 노동자들이 무의식적으로, 자연발생적으로 혁명운동에 관여해왔다면, 지금의 노동자들은 어머니를 매우 유용하게 읽고 있다... 고리키의 어머니는 노동자들이 무의식적으로 혁명운동에 가담하고 있는 이때, 진정 시의적절한 소설이다. -레닌

카이저 수염과 사람을 노려보는 무서운 눈빛이 인상적인 막심 고리키는 볼가 강 연안에서 하층계급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4세 때 부친을 여의고 조부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다. 12세에 구두 수선공을 시작으로 접시닦이. 심부름꾼. 수위. 부두노동자로 일하면서 학생. 지식인. 혁명가 등과 접촉을 시작했다. 특히 그는 인민 민주주의(일종의 사회주의)와 톨스토이를 맛보았고 톨스토이적 사회공동체를 꿈꾸었다. 훗날 사회주의 혁명가로서의 면모가 조금씩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그는 경찰의 밀정노릇을 하라는 유혹을 받기도 하고, 연애를 시도해보지만 여지없이 실패하였다. 이로 인해 염세증에 걸려 자살을 기도하는 등 보통 젊은이처럼 청춘을 앓았다. 1892년(24세) 처음으로 막심 고리키라는 필명으로  마카르 추드라 를 발표하였고, 이어  첼카쉬 를 발표하여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고리키라는 말은  고통받는 자라는 뜻으로 고난 속의 러시아 민중의 고통을 짊어지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1899년(31세)에는 그때까지 써모은 단편 등을 기록과 소설이라는 제목으로 출판, 일약 유명작가가 되었다. 1901년에 발표하여 선풍을 일으킨 산문시 바다제비의 노래 는 혁명의 횃불이 되었으며, 같은 해에 희곡  소시민 을 발표해 극작가로서도 높은 평판을 얻었다. 체호프의 격려 편지를 받은 것도 이때쯤이고, 멀리서만 바라보던 톨스토이도 만날 수 있었다. 구두닦이 인생에서 유명작가로 엄청난 신분상승을 했던 것이다. 그뒤 혁명운동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체포되나, 톨스토이의 항의로 석방되었다. 이때부터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 요양지를 찾아 전전하였다. 1902년 과학 아카데미의 명예회원으로 선출되었으나, 혁명운동과 관계가 있다는 이유로 황제에 의해 취소되었다. 이 해에 하층계급의 고통을 그린 밑바닥을 발표, 국내외에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1905년(37세) 처음으로 레닌을 만나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피의 일요일에 가폰 신부가 이끄는 시위대에 적극 참가하여 체포되었으나, 국내외의 격렬한 항의로 곧 석방되었다. 1906년에는 당의 자금 모금을 위해 미국에 갔다가 귀국거부를 당해, 할 수 없이 이탈리아의 카프리 섬에 정착하여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모델이라 불리는 어머니(1907)를 발표하였다. 한때 사상적 동요를 느껴  참회록 을 쓰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레닌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13년 대사면으로 귀국, 10월혁명에서는 볼셰비키를 지원했으나, 그 과격한 혁명방법에 대하여 <신생활>지를 통해 강하게 항의하여 레닌과 한때 결별하였다. 50세에 10월혁명이 일어나고 레닌의 혁명정부가 수립되었으며, 56세 때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선포되자 과격파에 의해 고리키 숙청이 대두되었으나, 개인적 우정을 가진 레닌이 그를 국외로 피난시킨다. 그는 유럽 지역을 여행한 후 이탈리아 소렌토에 정착했다. 그후 1924년에 레닌이 사망하고, 그 후계자로 스탈린이 등장하자 서방세계와 스탈린은 고리키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신경전을 벌인다. 새로이 정권을 장악한 스탈린은, 자신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었던 고리키의 존재가 필요했는데, 결국 스탈린의 강력한 귀국요청에 굴복하여 귀국했다. 이때 스탈린은 니즈니 노브고로드 시를 고리키 시로 개칭하는 등 대대적인 환영행사를 베풀었다. 

그는 스탈린의 배려로 작가의 최고위치인 작가동맹위원장이 되었으나, 스탈린의 비위를 거스르기도 해서 해외여행 여권이 거부되기도 했다. 1936년(68세) 그는 침실에서 죽었는데, 누군가에 의한 독살로 추정되나, 장레식 때 가장 슬퍼한 자가 스탈린이었고, 영구차를 몸소 떠메기도 했다 하니, 누가 독살한 것인지 영원한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밑바닥 노동자 출신으로 파란만장한 생의 여정 끝에 세계적인 문필가로까지 대성하여, 러시아 혁명기에는 레닌 및 스탈린과의 정치적 견해차이로 많은 갈등을 겪기도 했지만, 결국 그들을 도와 소련 사회주의 건설에 이바지했다. 특히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창시자인 그는사회주의가 몰락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다.


b. 고리키와 사회주의 리얼리즘

그는 20세기 러시아 문학의 중심이자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완성한 작가로서 문학사에서 독특한 지위를 점하고 있다. 고리키는 종래의 혁명적 소설가란 범주에서 벗어나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시대의 황금기 러시아 문학의 전통을 물려받아, 다른 문학세계로의 일대 전환점을 이룬 다음, 후배들에게 넘겨준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러시아의 혁명적인 상황의 이해를 빼놓을수 없다. 당시 19세기 말은 봉건적인 차르 체제의 몰락과 함께 뒤늦게 들어온 자본주의의 위세가 점차로 강화되던 시기였다. 그리하여 사회의 부패는 심화되고 민중들의 삶은 극도로 피폐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주의가 대두하였고, 1905년 혁명 당시 프롤레타리아가 전면에 등장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이러한 격동의 상황 속에서, 그의 문학은 강인한 주인공에 의한 사회의 부정. 부조리에 대한 공격, 인간 옹호를 목표로 하는 휴머니즘이 강한 문학이다. 그는 출신성분이 말해주듯 주로 하층민의 밑바닥을 리얼하게 그려나갔는데, 장편소설 어머니는 프롤레타리아의 모습을 그린 전형적인 작품으로, 그의 작품세계를 잘 나타낸다.

그가 창시한 것으로 알려진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혁명초기의 당성이 강하고 기계주의적인 문학 창작방법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 것으로, 소련문학의 새로운 정통성을 확립하려 했으나, 그것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했다. 동지냐, 적이냐의 단순한 인물 설정 등 초기 우리 나라의 카프 문학의 양상과 비슷한 이전의 문학경향은 자유로운 문학의 창조를 저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노선을 수정하면서 등장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먼저 현실에 충실한 역사적 구체적 묘사를 할 것, 그리고 현실을 그 혁명적 발전과정 속에서 표현할 것, 마지막으로 현실의 충실과 역사적 구체성을 가지는 예술적 표현과, 사회주의 정신에 입각한 이데올로기의 혁신과 근로자의 사상적 개조라는 과제를 일치시킬 것 등이다. 이는 주로 스탈린 시대를 배경으로 하였으며, 이전의 교조주의를 비판하거나 예술성을 주장하면 형식주의 반동문학으로 낙인을 찍히기도 했다.


b. 작품의 주요내용

이 작품은 실제로 1902년 고리키의 고향 부근인 소르모보 공장에서 있었던 표트르 자로모프 모자 체포사건을 모델로 한 작품으로, 혁명적 러시아 노동계급의 성장과 한 인간 주체로서의 어머니의 모습을 형상화시킨 기념비적인 소설이다. 파벨은 20세기 초 러시아의 선진노동자의 전형으로서, 세계 문학사에 최초로 나타난 프롤레타리아 영웅의 형상이다. 공장 노동자인 파벨은 사회의 불평등에 반발하여 사회주의 서클에 참가하면서, 귀가가 종종 늦어지게 된다. 그의 어머니는 처음에는 이것을 걱정했으나, 아들과 친구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그들이 옳다고 확신한다. 작가는 연못 복개공사비 사건, 5. 1노동절 시위사건, 그리고 법정연설이라는 세 가지 사건을 통하여 한 평범한 노동자가 노동자 계급의 강인한 전사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작가는 파벨에게서 20세기 초 러시아의 혁명적 노동자의 몇 가지 본질적인 특징, 즉 강인한 의지, 명확한 투쟁목표, 낙관적인 정신을 재현하고 있다. 법정에서의 파벨의 당당한 연설이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다. 이것은 파벨이 높은 정치의식을 지니고 이론적으로 무장한, 성숙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로 변화되었음을 의미한다. 그의 어머니는 사회의 찌꺼기에 지나지 않는 야수와 같은 남편에 대한 공포와 궁핍한 삶에 찌든 중년을 넘어선 여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그녀는 아들을 통해서, 젊은 노동자들에게 둘러싸인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점차로 그녀는 아들 파벨의 혁명운동에 동조할 뿐만 아니라 지난 세월의 공포. 순종. 희생의 굴레를 스스로 벗어 던지게 된다. 소설은 비록 혁명의 실패와 혁명적 기운의 좌절로 흐르고 있지만, 내면적으로 독자들은 혁명의 궁극적 승리를 확신한다. 파벨과 그의 동료들은 어머니를 통해서 인류애를 절실히 느끼게 된다. 바로 이것이 어머니 의 완벽한 성공이며, 그 바탕은 고리키적 낭만주의와 리얼리즘의 문학적 조화에 있는 것이다. 자식이 체포된 뒤, 법정에서 자식의 정당함을 호소하다가 체포되어, 천벌을 받을 놈들, 피바다를 이룬다 해도 진실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고 절규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 이 작품을 읽다 보면, 암울한 시절 우리의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민주화 가족협의회 소속 어머니들이 절대권력에 대해 보인 분노한 모습이 떠오른다. 이 작품은 푸드후킨 감독이 대담하게 각색 영화화하여, 무성 영화사상 명작으로 평가되는 작품이기도 한다.


c. 감상 및 문학사적 의의

이 책은 작가가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사명을 띠고 미국으로 건너갔을 때 쓴 작품으로, 러시아 국내에서 발표된 즉시 압수되었다. 이 소설은 당시 러시아의 혁명적 상황에서 그 분위기를 고조시키기에 충분한 내용을 담고 있어, 할 수 없이 작가는 그 후 재판 부분을 비롯한 많은 부분을 삭제하고 간행해야 했다.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필독서

이 소설은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고전적 작품으로, 러시아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근로자 대중과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작품이 이러한 영향력을 가지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작가가 당시 러시아의 현실에 실재하고 잇는 혁명가들의 여러 가지 특징을 발전적으로 보편화시켜, 완전한 혁명가의 한 전형을 창조하고 혁명투쟁의 영웅성과 휴머니즘을 유감없이 보여준 데 있다.


 역사발전 주체로서의 노동자

또한 이 작품 이전에도 노동계급을 등장시킨 작품은 많이 있었으나 이들 작품에서는 노동계급이 정의롭지 못한 사회의 희생물로서 동정의 대상으로만 묘사되었을 뿐, 역사를 스스로 만들어가고 불의와 맞서 싸우는, 역사발전 주체로서의 노동계급을 묘사하는 데는 미흡한 점이 있었다. 여기에 바로 역사를 정확히 관통하는 작가로서의 탁월함이 돋보이는 것이다. 확실히 이 작품에 형상화된 프롤레타리아는 종전의 작품에서 보아오던 무기력한 연민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왜 이렇게 고달픈가를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고 자각하며 역사의 변혁을 꿈꾸는 능동적인 인간으로 묘사되어 있다. 특히 이 작품의 흐름이 주인공의 어머니의 의식변화 과정에 맞추어져 있듯이, 인간은 변할 수 있는 존재로서 역사변혁의 주역이 될 수 있음을 감동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은 자연 발생적인 운동이 목적의식적인 조직적 투쟁으로 전개되어가는 과정도 묘사하고 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효시

이 모두는 작가가, 프롤레타리아 자신이 역사의 합법칙적인 발전을 이루어나가는 주체임을 확신하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당시의 파켈이나 펠라게아와 같은 인물은 그다지 대중적이라 할 수는 없었으나, 이후 1917년의 10월혁명을 가능케 한 역사의 흐름을 포착하여 당대의 본질에 접근해간 전형적인 인물이라는 점에서 고리키의 리얼리스트로서의 면모는 확인된다. 바로 이러한 점들이 당대 문예 비평가로부터 고리키를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창시자로 불리게끔 하는 것아 아닐까?

톨스토이는 고리키를 두고 고전문학과 소비에트 문학의 살아있는 다리라고 부른 바 있는데, 이는 고리키가 러시아 고전문학의 훌륭한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소비에트 문학의 개척자라는 뜻이다. 레닌도 전세계 프롤레타리아 운동에 영향을 주었고, 현재에도 지속적으로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탁월한 예술적 재능의 소유자 라고 격찬한 바 있다. 세계문학계에 지각변동을 줄 만큼 그의 어머니는 20세기 세계문학사에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C14 –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The Brothers Karamazov) / 도스토예프스키(F. M. Dostoevskii, 1821-1881)

(출전 :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이 작품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정신적 탐구과정의 집대성으로, 육욕적인 아버지 표도르와 그의 세 아들인 드미트리, 이반, 알료샤 그리고 사생아 스메르자코프를 중심으로 부친살해 라는 사건을 두고 벌이는 심리적 갈등과, 고난을 통한 인간영혼의 구원문제가 심도있게 그려지고 있다. 인간의 본질과 종교적 문제에 관한 사색을 담은 이 작품에서, 특히 이반과 알료샤 사이에 벌어지는 대심문관 논쟁은 백미를 장식한다. 이 작품은 복잡다단했던 그의 일생에 모처럼 찾아온 평온한 노년에, 일생의 문학적 탐구를 차분히 정리하면서 쓴 것이어서 문학성이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a. 생애와 작품활동

러시아의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는 모스크바의 빈민구제 병원의사의 차남으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도시적인 환경 속에서 자랐다. 부친은 엄격한 사람으로 몹시 신경질적인데다가, 만성 알코올 중독자였다. 반면 어머니는 남편의 정신적인 학대에도 불구하고, 항상 밝고 명랑한 성품을 잃지 않는 여성으로, 음악과 시에도 조예가 깊었다. 냉엄한 아버지가 군림하는 분위기 속에서, 신. 구약성서에서 발췌한 104가지 이야기를 교재로 하여, 러시아어의 읽고 쓰기를 가르친 어머니의 자애스러운 모습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유년시절에 마음 깊이 새겨져 있었다. 부친이 귀족이긴 했으나, 대지주나 귀족 출신인 톨스토이나 투르게네프와는 달리 집안의 생계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16세 때에는 그의 정신적 안식처였던 모친의 죽음을 당하고, 17세에 육군 중앙공병학교에 입학하여, 재학중 발자크, 위고, 괴테, 호프만 등의 작품을 탐독하였다. 19세에는 부인 사별 후 은둔생활을 하고 있던 부친이 숲 근처의 노상에서 농민들에게 살해당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양친의 죽음으로 도스토예프스키는 심신상실을 수반한 발작을 일으키기도 했다. 프로이트는 이 사건을 취급하여 도스토예프스키와 부친살해 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 논지는 도스토예프스키는 강렬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경향을 가지고 있어서 내심 은근히 부친의 사망을 바라고 있었는데, 그것이 현실화됐기 때문에 자기가 실제의 범인인 양 착각하게 되어, 훗날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나타난 낭비벽과 도박병 등의 이상한 행동양식으로 표출되었으리라는 것이다. 

오늘날은 당시의 그러한 견해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의 관념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암시를 해준 것만은 사실이다. 부친의 죽음에 대해 평생 입을 열지 않았던 도스토예프스키가 가장 만년의 걸작인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에서 부친살해에 대한 테마를 취급한 것은, 그의 가슴에 새겨진 손톱자국의 깊이를 여실히 말해주고 있다. 특히 이반과 스메르자코프(농노의 뜻)의 관계, 즉 이반의 사주에 의해 스메르자코프가 부친살해의 범행을 저질렀다고 하는 이야기의 설정은, 도스토예프스키와 부친을 살해한 농부와의 공범관계를 시사하여, 그가 의식의 심층에서 부친살해에 가담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24세 때 그는 네베 강의 환영 이라는 기이한 체험을 한다. 그것은 창조적 계시의 순간으로, 자신의 내부에서 새로이 탄생하려는 소설의 전모를 일순간에 엿보았던 것인데, 그는 이 계시에 따라 실패한다면 목을 매든가, 네베 강에 몸을 던진다 는 각오로 창작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가난한 늙은 관리와 의지할 곳 없는 불행한 아가씨의 깨끗한 사랑의 이야기인 그의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이 완성되었다. 이 작품을 읽은 그리고로비치, 네크라소프 등이 감동한 나머지 새로운 고골리의 출현을 외치며 성공적인 문단 데뷔를 축하했다. 당대의 평론가인 벨린스키의 격찬이 뒤따라 그의 문단데뷔는 화려한 것이었다. 훗날, 도스토예프스키는 그것은 내 생애 최고의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나는 유배지에서도 그때의 일을 회상하면 힘이 솟았다 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처녀작의 성공과는 반대로, 이후 발표한 10여 편은 비평가들의 혹평을 받았다. 그 후 유토피아 사회주의자 집단인 어느 서클에 참가하였는데, 동료 30명과 함께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사형직전에 황제의 특사를 받아 4년간 시베리아 유형을 떠난다. 이때의 죽음에 대한 공포의 체험은 그 뒤의 백치 에서 미슈킨 공작의 입을 통하여 생생하게 묘사되고 잇다. 유배중 러시아 민중들의 정서를 체험하기도 하고, 그곳에서 허용된 책은 신약성서뿐이었는데, 그는 이 책을 거듭 읽었다. 이로 인해 젊은 시절의 급진주의 사상은 기존질서에 대한 존중과 민중의 메시아적 사명에 대한 믿음으로 바뀌었다. 고통을 통해 세상을 구원한다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러시아 영성주의가 더욱 깊은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감옥은 굴욕당하고 상처입은 사람들을 더 깊이 연구하는 데 필요한 자료를 풍부하게 해주었다. 

1857년(36세) 폐병환자인 미망인 마리아와 비참한 결혼, 그후 20세 연하인 아폴리나랴와의 사랑, 잡지사 경영의 실패 등으로, 그는 도피생활을 계속하는 기구한 일생을 보내게 된다. 1871년(50세) 유럽여행에서 돌아온 후 10년간은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된다. 그의 생애를 통한 사색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썼다. 이어서 바로 알료샤가 주인공이 되어 활약하는 속편을 써서 전쟁과 평화 와 같은 대장편을 구상했으나, 그의 죽음으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 자체만으로도 위대한 예술적 가치와 심오한 사상을 지닌 세계 최대의 고전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가 죽기 직전에 푸슈킨 동상제막식에서 행한 기념연설은 러시아의 세계적 소명을 힘차고 분명하게 예언함으로써 청중들을 감동시켰다. 이것은 불우했던 그의 만년을 보상해준 사건이었다.


b. 19세기 러시아 문학과 도스토예프스키


 19세기 러시아 문학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소설가가 누군가 하는 문제는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 사이에서 판가름날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초 러시아의 바이런이라고 일컬어지는, 로망주의 시인인 푸슈킨도 있었다. 그는 러시아 풍경미를 서정시로 묘사하고, 민속담에서 시의 원천을 발견하였다. 일상생활을 주제로 하여 대중의 사랑을 받은 푸슈킨은 소설을 쓰기도 하고 희극을 남기기도 했다. 푸슈킨보다 더 젊은 고골리는 사신 이란 소설에서 러시아의 전원생활을 풍자하였다. 그의 걸작 희곡은 검찰관이며, 그는 여기서 러시아의 정부와 부패관리를 풍자, 비판하였다. 위대한 러시아의 문학은 19세기 중기 이후 투르게네프,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이들의 작품 경향은 로망주의. 리얼리즘. 이상주의가 융합되어 있다고 보는 편이 옳다. 투르게네프는 파리에서 대부분의 생애를 보냈으며, 서양사회에 처음으로 알려진 러시아 소설가였다. 그의 대표작 아버지와 아들은 과학적 사회이념을 가진 젊은 세대와, 현상유지를 원하는 낡은 세대와의 갈등을 묘사한 것이다.

 전쟁과 평화 (1862-1869)라는 장편소설에서, 1812년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원정을 다루면서 러시아 사회를 묘사한 톨스토이(1829-1910)는 도스토예프스키에 비해 덜 운명론적이긴 하지만, 역시 강력한 운명 앞의 나약한 인간을 묘사하고자 하였다. 안나 카레니나 에서는 두 연인이 공공연한 관습에 도전하는 비극을 그리고, 결국 세속생활의 허영에서 신비적인 인간애로 위안을 찾는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공산적 무정부주의자이며 소박한 생활을 예찬한 톨스토이는 부활 에서는 더욱더 사회복음적 설교를 통하여, 문명을 비판하고 단순 소박한 육체노동 생활을 권하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적 세계

그는 심리소설의 대가로 비참한 러시아 민중들의 생활을 리얼리즘 수법으로 묘사하였다. 동시에 그는 인간의 영혼이 고통으로 정화된다는 깊은 신비주의적 신념을 표현하였다.  죄와 벌로 시작되는 그의 후기의 대작은 당시의 정치적. 사상적 문제를 예민하게 반응시키면서, 동시에 인간존재의 근본문제를 제기한 점에 그 특색이 있다. 이론적 살인자 라스콜리니코프적인 인간을 그린 죄와 벌, 조화와 화해를 추구한 아름다운 인간 미슈킨 공작의 패배를 묘사한  백치, 네차예프 사건에서 소재를 얻어 혁명의 조직과 사상의 병리를 지적한  악령, 청년의 야심적 형태를 다룬  미성년, 친부 살해범을 주제로 신과 인간의 문제를 정면으로 대결시킨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등, 각 작품에서 다룬 소재는 각기 다르지만, 내면적인 통일성으로 굳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도스토예프스키적 세계 라고 일컬을 수 있다.

기구한 운명, 즉 일생 동안 괴롭힌 불치의 간질병, 사형집행 직전의 특사, 시베리아 유배생활, 광적인 도박병, 빈곤 및 가정불화 등에서도 불굴의 창작력을 발휘하였다. 그의 창작과정은 크게 두 계열로 나눌 수 있는데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 로부터  죽음의 집의 기록 까지가 전반기의 계열에 속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전반기의 창작을 통해 주로 학대받는 민중들의 숨은 고뇌와 한숨을 대변하는 인도주의적인 리얼리스트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시베리아 유배에서 돌아온 후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기점으로, 그의 문학은 철학과 사회문제를 다룬 사상소설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의 죄와 벌 은 이러한 창작경향을 완전히 구상화한 장편소설이었다. 그후 백치 악령 미성년 등을 거치는 동안 도스토예프스키의 철학적인 사색. 인간관. 세계관은 더욱 원숙미를 더해갔고, 마침내 그의 최후의 대작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에서 완성의 극치에 달했다.


c. 주요 등장인물

이 작품은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하고 있는 선과 악의 투쟁을 주제로 펼쳐지고 있는데 주요 등장인물은 다음과 같다.

표도르 카라마조프: 음탕하고 물욕이 강한 지주로, 한 여인을 두고 아들과 경쟁하다가 그가 낳은 사생아 스메르자코르에게 살해당하는 인물.

드미트리: 장남으로 거칠고 난폭한 반면, 정열적이고 순진한 면과 직선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인물.

이반: 2남. 허무적이고 철저한 무신론자. 이지적 인물.

알료샤: 3남. 순진무구하며 신앙적인 인물. 행동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미래의 새로운 세대로 상징되는 인물.

그루센카: 드미트리가 모스크바에서 데려온 여인으로 드미트리의 마음에 감회되어 그와 결혼하여 살게 되지만 배신당하는 여인.

스메르자코프: 파블로비치 집안에서 하인으로 생활하다가 자신의 출신에 대해 불안을 품고, 아버지를 살해한 뒤 자신의 뜻과 연결되지 않자 자살하는 표도르의 사생아.


d. 작품의 주요내용

세계 최대의 고전 중의 하나로 꼽히는 이 작품은 죄와 벌 과 함께 가장 널리 알려진 소설이기는 하나, 그것을 끝까지 다 읽은 우리 나라의 독자들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다. 그것은 도스토예프스키 특유의 심오한 사상성. 내면세계의 다양성, 인간심리의 부조리적인 갈등 등 그의 문학세계의 난해성이 그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독자는 우선 그 소설의 방대한 규모와 양에 위압당하는 것 같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일단 잡으면, 끝가지 읽지 않고서는 놓을 수 없는 것이 또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매력이 아닐 수 없다.


 줄거리

이 소설의 무대는 러시아의 어느 시골 도시이다. 카라마조프의 집안은 늙은 홀아비 표도르 카라마조프와 그의 자식들, 즉 장남 드미트리, 둘째 이반, 셋째 알료샤, 그리고 사생아 스메르자코프로 구성되어 있다. 이 소설에서는 그 이전의 어느 작품에서 보다 많은 유형의 상이한 성격 소유자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은 다 같이 각양각색의 인간적인 특질과 본성을 인격화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몰락한 시골귀족의 후예인 아버지 표도르는 방탕한 호색한이다. 독설가로도 유명하고, 선악의 경계를 완전히 초월한 리비도(성애)의 소유자이며 육욕과 물욕의 화신이라 할 수 있다. 장남인 드미트리는 카라마조프 가의 정열의 세계를 대표한다. 그는 아버지와 비슷한 정열적인 감정과 야성적인 생명력을 물려받고 있지만, 명예와 진리를 존중하는 고상한 일면도 지니고 있다. 둘째아들인 이반은 카라마조프가의 탐욕스런 생명력을 지성의 영역으로 바꾸어놓은 듯한 느낌을 준다. 모스크바의 최고의 하부에서 교육을 받고 재기발랄한 논문을 발표하고 있는 그는 허무주의적 견지에서 신과 종교를 부정하는 무신론자다. 드미트리가 육체적으로 부친을 증오한다면 이반은 이론적으로 증오한다. 셋째아들 알료샤는 신앙심이 강하고 누구에게나 사랑과 동정을 베푸는 착하고 어진 청년이다. 그러나 그의 내부에도 카라마조프적인 피가 흐르고 있음은 누구보다도 그 자신이 잘 알고 있다.

아버지와 세 아들은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이지만, 그들은 육친에 대한 애정에서 모인 것이 아니라, 유산상속을 둘러싼 분쟁 때문에 찾아든 것이다. 그러나 이 세 아들 중 모스크바에서 찾아온 이반만 아버지의 집에 머물고, 퇴역장교인 드미트리는 밖에 숙소를 정한다. 한편 견습 수도생으로 수도원에 들어가 기거하고 있는 알료샤는 조시마 장로 밑에서 참된 신앙의 길을 배우고 있다. 이 집안의 사정을 어북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부친 카라마조프와 백치나 다름없는 여인과 사이의 사생아인 간질병 환자 스메르자코프가 하인으로 이 집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스메르자코프는 자기자신의 저주스러운 출생을 원망하면서 세상을 분노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이 가족의 운명은 단지 이 소설의 중심을 이루고 있을 뿐, 이 광대하고 감동적인 작품 속에는 그 밖에도 수많은 모티브와 테마가 교향악처럼 조화되어 부수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드미트리와 이반은 자기 아버지에 대한 혐오와 증오라는 공통의 본능을 가지고 있다. 특히 그루센카라는 여자 때문에 질투에 불타는 드미트리는 공공연히 아버지를 죽인다고 협박한다. 한편 보다 교묘한 수단을 취하는 이반은 스메르자코프에게 모든 것은 허용된다는 사상을 불어넣고 반쯤 의식적으로 이 탐욕스런 노인을 죽이도록 교사한다. 드미트리가 그루센카를 찾아헤매던 어느날 밤, 스메르자코프는 정말로 카라마조프 노인을 살해한다. 드미트리는 마을의 술집에서 그루센카와 함께 한창 흥겹게 소동을 벌이고 있던 한밤중에 체포된다. 그러나 이반은 아버지를 죽인 진범이 드미트리가 아니라 자기가 교사한 스메르자코프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한편 스메르자코프는 아버지를 죽인 사실을 이반에게 고백하고, 목을 매 자살한다. 이반은 법정에서 드미트리의 무죄를 주장하지만 드미트리는 오판에 의해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받는다. 드미트리는 자신이 실제 살인자는 아니지만 마음속으로 언제나 살해하리라는 생각을 한 것은 사실이므로 자기의 죄를 인정하였다.


 대심문관 논쟁

이상이 외면적인 줄거리이나, 작품의 내면적인 줄거리는 알료샤를 둘러싸고 조시마 장로와 이반 사이에 전개되는 크리스트교와 무신론의 사상적 대결이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논리와 이성으로 신을 거부하는 이반에게 조시마 장로는, 우주의 비밀은 머리가 아닌 가슴과 감정, 그리고 믿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설득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의 핵심은 이반의 극시 대심문관에 있다. 목로주점에서 알료샤와 자리를 함께한 이반이 이 극시를 읽는 것으로 되어 있다.

카톨릭의 이단심문이 가장 전성기를 이루던 15세기, 스페인의 세빌랴 마을이 그 무대다. 이단자들을 화형에 처하는 광장에 홀연히 그리스도가 강림한다. 대심문관의 명령으로 그리스도는 체포되어 투옥된다. 그날 밤 대심문관은 왜 우리를 방해하러 왔는가? 하고 힐난한 뒤 그리스도가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물리쳤다고 비난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주제는 마태와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가 악마에게 세 가지 시험을 받는 문제이다.

 당신은 양심의 자유를 위해 빵을 거절했기 때문에, 인간은 빵을 곁눈질하며 시비와 선악의 판단에 괴로워해야만 하게 되었다. 또한 당신은 자유로운 신앙 때문에 기적을 거부했는데, 그것 때문에 인간은 기적과 더불어 신도 거부하고 말았다. 그리고 당신은 지상의 권력을 거절했는데, 지상의 인류가 추구하는 것은 하나의 권력 아래 전 세계적으로 결합하여 평화와 행복의 왕국을 지상에 건설하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가 인간을 너무 높이 평가하고 인간에게서 너무나 많은 것을 기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인간에게 부여한 자유, 즉 선악 선택의 자유는 인간의 의식으로는 무거운 부담이어서, 이것은 축복이 아니라 크나큰 재앙이라고 본다. 그래서 화형에 처하겠다고 규탄한다. 이 대심문관의 규탄에 대해 그리스도는 한마디 말도 없이 시종 침묵을 지킨다. 그리고 마지막에 말없이 대심문관에게 입맞춘다.

이러한 이반이라는 인간의 이름에 의한 그리스도의 말에 대해서 알료샤는 당신의 극시는 그리스도의 찬미이지 결코 비방이 아니다 라고 말한다. 이 대심문관 은 빵과 자유의 문제, 신앙과 이성의 문제, 정치권력의 문제 등 지상에서의 인간성의 역사적 모순 전체를 포함시키고 있다 고 말 할 수 있다. 여기에 신에 대한 반역의 근거가 있다. 그러나 알료샤의 말처럼 작가는 자유스러운 양심의 선택과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인간의 존엄성을 옹호하려 한 것이다.


e. 감상 및 문학사적 의의

이상에서 본 것처럼 이 작품은 음탕한 아버지와 그의 네 아들을 중심으로 아버지와 아들, 형과 아우의 애욕의 갈등을 묘사하는 한편, 이반과 조시마 장로 사이에 벌어지는 사상의 갈등을 전개한 소설이다. 심리적인 깊이에다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비극성, 신에 대한 대담한 저항과 사회생활에 대한 묘사가 뛰어나다.


 그리스도의 주제

부친의 방탕무비한 생명력이 맏아들에게는 무절제한 정열과 감정적인 충동으로, 둘째에게는 왕성한 지적 욕구로, 셋째에게는 종교적 감정으로 변형되어 나타나는데, 그들의 내재적인 본성인 카라마조프시치나(카라마조프적 기질: 인간의 도덕적 완성을 방해하는 본능)에 항거한다. 이러한 카라마조프적 기질인 탐욕과 조소는 3형제가 각각 가지는 정열. 이지. 신성의 세계에서 선악의 투쟁으로 나타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이 최후의 작품에서 추구하려고 한 내면적 주제가 현대의 그리스도였다는 점은 거의 확실한 것 같다. 이 주제는 그가 평생을 두고 추구해온 것이기도 하다. 그리스도 이상으로 아름답고, 깊고, 자비롭고, 총명하고, 용기 있고, 완전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령 그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는 진리의 밖에 있다고 말할지라도 나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머룰러 있기를 바랄 것입니다.  시베리아 감옥에서 나온 직후 작가는 이렇게 고백했다. 결국 이 작품은 끊임없이 작가의 머릿속을 자리잡고 있던 문제, 곧 인생의 부조리 때문에 신을 거부하는 러시아의 무신론적 지식인들과 대결하여, 그것을 초월하고 극복하는 인물을 창조하는 것이 그의 의도였던 것 같다.


 부친살해

그리스도의 주제와 더불어 도스토예프스키의 평생의 십자가로 되어온 것이 부친살해의 주제다. 아내의 죽음으로 시골에 은거하며 14-5세 소녀들을 차례로 임신시켜, 마을 주민들에 의해 살해된 부친의 치욕적인 죽음은 작가의 가슴에 평생토록 지울 수 없는 멍에로 남았다. 이 작품의 중심 주제의 하나인 부친살해의 테마가 우연히 떠오른 것이 아니라, 일종의 고정 관념처럼 그의 내부에 응고되어 있었던 것이다.

흔히 도스토예프스키의 리얼리즘을 환상적 리얼리즘 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그의 리얼리즘이 보통 리얼리즘과는 달리, 보다 고차원의 현실,즉 정신적 세계의 현실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러시아 최초의 도시작가 출신이며 직업작가였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어둠이 깔린 러시아의 고뇌와 인간의 내면세계에 깃들인 비밀의 곡절을 투시하고, 동포의 내적 번뇌와 눈물을 그린 인도주의적 리얼리스트였다.


 영향

도스토예프스키가 유럽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그는 유럽 전역에 여러 가지 문학조류를 불러일으켰고 수많은 작가들이 그를 모방했다. 특히 인간존재의 부조리 속에서 실존을 추구한 그의 실존주의적 발상은 프랑스 실존주의에 영향을 주었고, 헤르만 헤세, 츠바이크, 앙드레 지드 등도 그에 대해 미신적인 존경을 표했다. 영국의 한 평론가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을 아편이라고 평한 바 있다. 한번 그의 문학세계에 발을 들여놓으면 좀처럼 발을 빼기가 힘들다는 뜻이다. 그것은 문학의 한계를 초월한 형이상학적 문제들, 예를 들면, 신과 인간, 신앙과 불신, 복종과 반역의 갈등 속에서 몸부림치는 주인공들을 통해 우리는 인간실존의 부조리, 출구 없는 현실에 고민하는 현대인의 산 초상을 보기 때문이리라. 인간의 부조리와 불합리 속에서 숨은 진리를 발견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사상가적 면모가 있고, 예언자적 현대성이 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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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출처 : 나무위키)


최근 수정 시각: 2017-08-06 14:55:13


한국어: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1] 주석에는 "도스트옙스키"라 나오는데 "토"인지 "트"인지 수정바람

러시아어: Ѳедоръ Миха́йловичъ Достое́вскій

현대 러시아어 : Фёдор Миха́йлович Достое́вский.

영어: Fyodor Mikhailovich Dostoevsky (Dostoievsky, Dostojevskij, Dostoevski 등 다양한 스펠링이 있다)


1821년 11월 11일 (구력 10월 30일) ~ 1881년 2월 9일(구력 1월 28일)


러시아어 발음은 표다르 미하일라비치 다스따옙스키.


만일 누군가 내 앞에서 그리스도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면, 나는 진리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편에 서겠다.



1. 작가 소개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작가 데뷔

2.3. 처형 사건

2.4. 이후

2.5. 생애 후반

2.6. 죽음

2.7. 주변 관계

3. 유명인들의 평가

4. 작가 연보

5. 작품 목록

6. 기타


1. 작가 소개[편집]


역사상 손꼽히는 인류 최고 지성 중 하나. 소설계의 전설, 먼치킨. 천재적인 재능의 소설가.


20세기의 실존주의자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가 중 하나로 러시아 문학의 최고 거장 중 한명. 인지도는 레프 톨스토이와 함께 최고일 것이다.


20세기 학계를 뒤흔든 네임드 전세계구급 철학자, 심리학자, 소설가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 작가가 작품에서 그려낸 캐릭터와 세계는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독보적인 묘사로 불멸의 명성을 얻게 하였다.


그의 작품은 스스로의 삶에 대한 사랑과 타인에 삶에의 베풂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임사 체험이나 수 년 간의 시베리아 수감 생활 간 읽은 성경 등이 그의 세계관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래의 생애 문단에서도 언급되겠지만, 그는 어릴 적부터 고통받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 왔으며, 이러한 경험은 인류에 대한 "연민"이라는 도스토옙스키 작품 특유의 감정을 만들어냈다. 또 그에게는 기독교적인 세계관으로 해석될 수 있는 "성결한 존재에 의한 구원"에 대한 열망이 있었으며, 이는 죄와 벌의 소냐와 라스콜리니코프의 관계에서 잘 드러난다.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아버지 미하일 안드레예비치 도스토옙스키와 어머니 마리아 표도로브나 도스토옙스카야 사이에서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머니 쪽은 상인의 딸인 러시아인이지만 아버지 쪽은 직업은 의사인 리투아니아 출신.

아버지는 은퇴한 군의관(나폴레옹 전쟁에도 종군했다)의 중간계급이었으며 알코올 중독자였다고 한다. 여러가지로 자식들을 학대했다는 얘기들이 있지만 사실은 보통의 가정이었다고 한다.[2] 모스크바의 마린스키 빈민병원에서 일했으며, 이곳은 모스크바의 빈민가 중에서도 최악으로 죄수묘지와 정신병원, 고아원이 가득한 곳이었다. 이런 곳에서 어린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는 밖으로 나가는 것이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병원 밖에서 이런 환자들과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가난하고 핍박받으며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은 이때부터 다듬어졌다. 

1837년에 어머니가 결핵으로 사망하고 형제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 군사 공병학교에 보내져 수학을 공부하게 되었으나 그는 수학을 싫어했고, 여기서 대신 셰익스피어, 파스칼, 빅토르 위고,[3] E.T.A. 호프만 등의 문학을 공부했다. 이때 젊은 자기자신을 '몽상가'로 표현하며 낭만적 시와 극을 소수 쓰기도 했다. 물론 이때부터 벌써 당구에 빠져 그의 빚쟁이로써의 삶(...)도 시작된다.


2.2. 작가 데뷔[편집]


학교를 마친후 번역 작업을 하다가 1845년에 처녀작인 <가난한 사람들>을 출판했는데 이 작품을 읽어본 평론가 벨린스키가 "니콜라이 고골이 다시 태어났다" 고 감탄했다고 한다. 이 작품은 절찬을 받았으며 아직 24세인 도스토옙스키를 상트페테르부르크 문학계의 스타로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자신은 이 갑작스러운 인기와 관심에 공허한 마음이 들어 사회주의나 급진파 모임에 어울리기 시작했다. 

데뷔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하면, 초고를 편집장에게 넘겨주고 나서 잠 잘 잤지만, 당대의 유명한 문인인 네크라소프와 잡지 편집장이 당일 새벽에 "지금 잠 같은 건 문제가 아니야!"고 외치며 잠을 깨웠다는 에피소드.


2.3. 처형 사건[편집]


이런 식으로 지내던 중 1848년에 유럽 전체에 불어온 혁명의 바람에 이끌려 도스토옙스키가 몸담고 있던 페트라솁스키 클럽이 주민봉기를 계획했으며 도스토옙스키도 농노들의 자유를 위해 가담했으나 그 독선적인 성격은 여전해서 곧 모임에서 왕따당하고 빚은 빚대로 늘어날 뿐이었다.

차르 니콜라이 1세(재위 1825~1855)는 이런 개혁 모임들에 여러 스파이를 두고 있었으며 1849년 도스토옙스키와 그가 가담한 그룹 스물 세명이 체포된다[4]. 8개월을 감옥에서 보낸 후에야 형 선고를 받기 위해 꺼내졌으며, 이전에는 보통 이 정도 죄는 몇 개월 간 유배가 고작이었으므로 이들은 '이제야 끝나는구나'하고 안심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신부, 수십 명의 병사들과 수천 명의 군중, 그리고 관들이었다. 그들 앞에 한 장교가 나와 '죄인들은 모두 반역죄로 총살'이라 선고했다. 장교가 형수들의 죄명과 형을 낭독하는 동안 도스토옙스키는 정신이 멍해지면서 근처 교회의 종탑에서 쏟아내리는 금색 햇빛이 차차 구름에 가려지며 어두어지는 것을 보며 그 또한 곧 영원히 어둠의 세계에 떨어지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때에 그는 "만약 내가 죽지 않는다면, 만약 산다면 나의 삶은 끊임 없는, 영원처럼 느껴지며 일분이 백년과 같으리라, 만약 내가 살아남는다면 인생의 단 일초를 소홀히 하지 않을 텐데'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5] 

마지막으로 신부에게 고해를 본 후, 머리에 두건이 덮히고 병사들이 총을 발사하기 직전 갑자기 형장에 마차가 급히 난입해 황제가 특사로 그들의 형을 감형하였음을 알렸다.[6][7] 대신 4년간 시베리아 옴스크에서[8] 중노동 후 군입대를 하게 된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미 1844년 중위로 제대한 상태였다. 군입대는 재입대나 마찬가지였는데 이번엔 사병이었다.


2.4. 이후[편집]


도스토옙스키는 이 사건 이후로 사람이 바뀌어(...) 4년간 최악의 환경을 견디면서[9] 머릿속에 글을 썼다고 하며, 군에 들어가게 된 후 출판하는 것을 허가받게 된다.  

도스토옙스키는 이후에 죽는 날까지, 마치 페이지 하나하나, 작품 하나하나가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처럼 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등 불후의 명작을 연달아서 내게 된다. 그 전에는 글자 하나마다, 한장마다 시간을 들이며 하루종일 망상을 하던 그였지만 이후로 쉬지 않고 글을 썼으며 쓰고 있지 않을 때는 쓸 내용을 중얼거리고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탓인지는 몰라도 그의 작품들은 거의 극도로 세밀하고, 편집광적인 집념이 느껴지는 묘사가 눈에 많이 띈다. 

실제 이 경험은 도스토옙스키의 저작 백치에도 므이슈킨이 말하는 삽화로서 등장한다. 시간을 낭비하던 한 남자가 사형대 앞에 서고 나서야 1분 1초가 아깝다는 사실을 깨닫고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결심하는 이야기.[스포일러]

사형 사건 이후 그의 글은 어둡고 현실적으로 바뀌게 되지만 멜로드라마적인 요소에서부터는 탈피를 하지 못한다. 오죽이면 나보코프가[11] 도스토옙스키를 용서할 수 없다고 그랬을까. 

또한 이 시기 부터 그는 서유럽의 자유주의 사상을 멀리하고 깊은 신앙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국수주의적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그의 전기 저자에 따르면, 황태후나 차르에 대한 탄원서와 징징거리는 편지를 수도 없이 썼다고 한다. 또한 누군가 감옥에서 보낸 시간에 대해 불쌍하게 여기면 오히려 화를 냈다고 한다. 그만큼이나 그 경험에 고마워했다.

한편 시베리아 유배 생활이 끝나고 1857년에 유부녀였던 마리아 드미트리예브나 이사예바와 결혼했으나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녀는 1864년에 사망한다. 


2.5. 생애 후반[편집]


그리고 나머지 여생 동안 수많은 빚에 시달렸는데, 상트페테르부르크(제정 러시아의 수도)에서 돌아와 형 미하일과 한 출판사 일이 연거푸 실패하였고, 이 와중에 세상을 뜬 형 미하일의 빚도 자진해서 맡고 그 과부와 자식들도 지원했고, 거기다 첫째 아내가 이전 결혼생활에 낳은 자식들까지 돌보게 된다. 그런데 미하일의 미망인인 형수는 사치가 심했고 양아들인 조카 파벨도 양아치라서 그는 경제적으로 시달림이 많았다. 게다가 형수와 조카는 자신들을 먹여살리는 도스토옙스키를 고마워하지도 않았고 당연하게 여길 정도로 막장이었다.(...) 조카 파벨은 원하는 돈을 내놓지 않으면 숙부를 두들겨 패기도 하고 물고문을 할 정도로 패륜아였으나 마음 약한 그는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 형수와 양아치 조카 파벨은 도스토옙스키를 괴롭힐뿐만 아니라 아내인 안나까지 구박하자 안나도 폭발하여 남편에게 형수와 조카를 버리고 떠나자며 설득했다. 형수와 조카에게 시달린 도스토엡스키는 아내의 조언을 받아들여 잡지 「러시아 통보」에서 원고료를 가불하여 형수와 조카에게 생활비로 준다음 1867년 4월 14일 형수와 조카를 내버려두고 아내와 함께 페테르부르크를 떠나 드레스덴에 정착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원고료로 겨우 먹고 살았으며 이 때문의 그의 후기 소설들은 굉장히 길다. 소설의 길이가 늘어나면 원고료를 더 많이 받을 수 있기 때문. 그나마 돈이 조금 남으면 도박장에서 날리고 빚만 더 벌어왔다. 이렇게 돈에 쪼들리다 보니 쓰고 있던 <죄와 벌>을 급하게 완성했으며 <노름꾼>은 약 20일만에, 그것도 <죄와 벌>을 쓰는 중에 구두로 완성했다. 방 안을 돌아다니면서 소설을 중얼거리면 당시 도스토옙스키의 비서로 일하던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도스토옙스카야가 타자기로 내용을 받아 적었다고 한다(그녀는 젊은 시절부터 도스토옙스키의 열혈 팬이었다. 1866년 타자수로 고용되고 곧 도스토옙스키와 결혼한다. 이때 그녀의 나이가 21세였는데 도스토옙스키는 46세였다.(...)).

서유럽에서 선인세로 받은 돈을 원정도박으로 날리고 다시 받고 하던 즈음에는 <악령>을 집필하다 결국 러시아로 다시 귀국한다. 귀국할 돈도 도박으로 날려먹어서(...) 출판사에게 "러시아로 가서 글 써야함"이라 징징대서 간신히 차비를 뜯어냈다. 이때 그의 나이 50세. 이후 본격 좌파까기 소설인 <악령>이 성공하자 보수층과 친해진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판 조중동 신문사 주필자리를 얻게 된다. 그러나 역시 그 성격 어디 못가서 1년도 안돼서 때려치워야 했다.

그가 도박중독에 걸린 이유를 있는 돈을 다 날리는 방법으로 사형수가 되었다가 살아났을 때를 다시 느껴보고 싶어서라는 얘기가 있다. 판돈이 걸렸을 때의 느낌(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과 두근거리는 쾌감을 잊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심리를 소설 <노름꾼>에서 묘사하고 있다. 왜 도박에 빠지느냐는 질문에, '주변이 가능성으로 충만할 때, 그것을 무시하고 지나가기란 굉장히 힘든 일이다'라고 답했다. 이 말이 간지나는지 몇몇 도박광들은 이걸 그들의 좌우명쯤으로 여기고 살아간다. 

나중에 이런 경제난은 알뜰한 두번째 아내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도스토옙스카야가 출판 관리를 하게 되면서 해방되었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이런 좋은 환경에서 나왔다. 참고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미완성 작품이다. 이 작품의 서문을 보면, 자신이 앞으로 20년동안 이야기의 뒷부분을 쓸 것이라고 적었다. 하지만 문학평론가들은 프란츠 카프카의 장편들과 함께 미완성이라서 더 가치가 높은 문학작품으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뽑는다. 


2.6. 죽음[편집]


생활에 안정을 찾은 도스토옙스키는 <미성년>과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차례로 발표하고 러시아의 국민 작가로 칭송받는다. 하지만 불과 1년 뒤인 1881년 1월 26일, 재산 상속 문제로 여동생이 집에 찾아와 말다툼을 하고 간 후 갑작스럽게 각혈이 시작되고 병상에 누워 투병하다가 1월 28일 저녁 8시 38분 사망하였다. 

그의 장례식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사상 유례없을 정도의 의식이었다고 한다. 2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장례식 보러왔다고 하니 말다했다.[12] 이때, 추모사를 읽은 건 드미트리 팔름이라는 무명 작가였다. 다만 이 사람은 도스토옙스키와 매우 친했는데 바로 도스토옙스키와 처형대에 묶여서 같이 유배당했던 사람이었기 때문.(...) 러시아 황실에서도 유족들에게 매해 2천 루블 연금을 하사하게 했다. 그리고 이 연금 상속을 두고 양아들 파벨이나 아내랑 친가들이 싸우다가 러시아 황실에서 연금 및 재산에 대해 아내와 아이들에게 전적으로 상속권을 인정받게 한다고 엄명을 내린 통에 양아들이나 친척들은 데꿀멍해야했다. 아내랑 딸을 비롯한 식솔들은 경제적으로 부족함없이 살아갔지만 양아들 파벨은 뒷골목에서 찌질하게 살다가 1895년 칼에 맞아 살해당했고 사치스런 형수나 여동생같은 친가들도 거지꼴이 되어 비참하게 살아가야 했다.

하지만 보수적이었던 그를 훗날 볼셰비키 혁명으로 세워진 소련이 곱게 봐 줄 리가 없었다. 그래서 톨스토이와 달리 그는 절하, 매장당해졌고 후손들에게 주어지던 연금도 당연히 끊겼으며 소련 치하에서 눈치보며 살아가야 했다. 하지만 소설들은 워낙 뛰어났던지라 다행히 금서 지정을 피했고, 스탈린 사후 50년대 이후 장편을 기반으로 영상화가 많이 되었다. 그리고 소련이 몰락하고 러시아 공화국이 되면서 정반대가 되었다. 러시아 정교회를 비판했고 파문당한 톨스토이와는 달리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 정교회의 독실한 신자였고 그리스도는 러시아인의 그리스도라 믿었으며 극우성향의 작가였다. 현재 러시아인들에게 도스토옙스키는 푸쉬킨 다음으로 러시아를 대표하는 위대한 작가로 여겨지고 있다. 모스크바의 국립 러시아 도서관(구 레닌 도서관) 앞에도 도스토옙스키의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그의 이름을 딴 지하철 역[13]도 건립되었다. 러시아에 있는 도스토옙스키 기념관을 가면 그의 유품에서 별별 게 다 남아있다. 그가 죽던 날, 딸아이가 슬퍼하며 쓴 낙서도 그의 담뱃갑에 그대로 남아있는데 러시아어로 "1881년 1월 28일 사랑하는 아빠가 하늘로 가셨다..."라고 적혀있다. 


2.7. 주변 관계[편집]


비록 강하게 감추었지만 도스토옙스키는 후배 작가인 톨스토이에게 항상 열등감을 지니고 있었다. 당대의 비평가 스트라호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트라호프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높게 평가하는 것에 불만을 제기했다는 일화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도 안나 카레니나의 완성도에는 굴복했는데 이 작품을 읽고 도스토옙스키가 너무 흥분한 나머지 길거리를 뛰어다니며 "톨스토이는 예술의 신이다"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이러한 열광적인 반응은 작가의 개인잡지라 할 수 있는 작가의 일기에서도 확인된다. 거기서 이 작품을 "완전무결한 예술작품"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도스토옙스키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막심 고리키가 쓴 톨스토이 회상록에서 톨스토이는 도스토옙스키에 대해 "자신이 병들어있기에 모든 사람들이 병들어있다고 믿었던 사람"이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톨스토이가 그나마 가장 높게 평가한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은 죽음의 집의 기록인데 시베리아 유배지에서의 생활을 담은 내용으로 도스토옙스키의 대표작들처럼 등장인물들의 심리 묘사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등장 인물이 처한 험악한 환경 자체에 초점을 맞추기에 보통 도스토옙스키의 대표작으로는 간주되지 않는 작품이다. 악령 역시 극찬했는데 악령을 읽고 톨스토이는 '자신의 작품을 포함한 모든 문학서를 불살라버려도 도스토옙스키의 책들은 모두 보존해야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당대의 또 다른 대문호 투르게네프와의 관계도 굉장히 나빴다. 하긴 서민 출신에 러시아빠인 도스토옙스키 눈에 좋은 집안 출신의 유럽빠(특히 프랑스빠) 투르게네프가 좋게 보일리가 없다. 그래서 <악령>,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등에서 유럽 갔다와서 "프랑스 혁명을 직접 목격 했다"면서 거들먹거리는 겉멋만 든 등장인물을 계속 등장시키며 줄기차게 깠다. 그런데 웃기게도 생활난에 시달리던 그는 돈이 필요할 때마다 투르게네프에게 와서 돈 좀 빌려달라고 징징거리며 애원했다고 한다. 그리고 투르게네프는 그리도 자신을 욕하던 주제에 굶어죽을 것처럼 비굴하게 100루블을 빌려달라고 온 도스토옙스키에게 별다른 말 없이 50루블를 빌려줬다. 물론 도스토옙스키는 그 돈의 상당수를 도박으로 아낌없이 날렸다(...). 이를 보다 못한 투르게네프의 지인들이 '쓰레기같은 놈에게 왜 돈을 빌려주냐?'며 분노 어린 반응을 보이자 투르게네프는 "막상 내 욕 해놓고 돈 급하면 또 나에게 와서 오만상으로 빌어대잖아? 난 그거 보는 재미로 빌려주는 거지. 그리고 저 작자는 그 굴욕감을 글로 나를 욕하면서 씻으니 뭐 서로가 각자 피해보는 게 없잖아."라고 대꾸했다.[14]

이 때문인지 그의 작품은 높게 평가해도 사생활 면에서는 톨스토이보다 못하다는 이들도 있고 러시아에서도 호불호가 갈린다. 러시아에 유학하던 한국 유학생이 겪은 일인데 대학에서 문학 평론 과목 시간에 러시아 문과 학생들이 논쟁을 벌인 걸 보면 도스토옙스키는 사람됨에 있어서는 글러먹었다는 반응에서 사생활과 작품은 별개라고 옹호하기도 하고 종교적으로 찬양하는 이가 있는가하면 종교적으로 저러면서 도박에 중독되던 게 뭐가 찬양할 일이냐는 반론이 나오면서 극과 극이었다고 한다. 또한, 일본의 러시아어 통번역가이자 동유럽 전문가, 작가였던 요네하라 마리(1950~2006)가 소개한 일화에 따르면 소련 붕괴와 동구권 해체 직후, 러시아의 상황이 지극히 암울하던 시기 만났던 한 러시아 지식인이 당시 러시아의 상황처럼 암울하고 우울한 표정으로 도스토옙스키 특유의 종교적인 숙명론이 '진보와 발전을 거부하는 것으로 읽혀서' 끔찍하게 싫다고 술회한 사례도 있다고 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유난히 대한민국과 일본에서 더더욱 각광받는데, 그렇게 평가하는 문학 종사자들에 의하면 도스토옙프스키는 셰익스피어의 영향력을 넘는 문학 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이자 20세기를 창조한 작가라는 평을 하기도 한다.[15]

명실상부 현대 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작가들중 하나이며 20세기 실존주의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기에 무리없는 작가이다.


3. 유명인들의 평가[편집]


도스토옙스키는 내가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었던 단 한 사람의 심리학자였다. 그는 내 생애에서 가장 아름다운 행운 가운데 하나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도스토옙스키: 뭐 임마?[16]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가 낳은 악마적인 천재였다. - 막심 고리키

그는 셰익스피어에 버금가는 자리를 차지한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지금까지 쓰인 가장 장엄한 소설이고 대심문관의 이야기는 세계 문학사의 압권이다. - 지그문트 프로이트 도스토옙스키: 뭐 임마?[17]

톨스토이가 큰 산인 줄 알았는데, 조금 물러나서 보니 그 뒤에 아스라하게 뻗어있는 거대한 산맥은 도스토옙스키였다. - 앙드레 지드

도스토옙스키는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을 창조해냈다. 사람들이 광기라 부르는 그 안에 그의 천재성의 비밀이 있다. -제임스 조이스

도스토옙스키는 육체와 영혼의 고귀함보다는 불행과 악덕, 욕정과 범죄에 기독교적인 공감을 보인 작가였다. - 토마스 만

도스토옙스키는 사실상 신을 창조해야만 했다. 그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 헨리 밀러

도스토옙스키는 세계 문학사의 위대한 기독교 작가들인 단테, 세르반테스, 밀턴, 파스칼의 옆 자리를 차지한다. 단테처럼, 그는 인간 지옥의 모든 계(界)를 통과한다. 그런데 이 지옥은 '신곡'의 중세적 지옥보다 더 끔찍하다. - 콘스탄틴 모출스키

도스토옙스키는 그 어떤 과학자들보다도, 심지어 수학자 가우스보다도 나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 알버트 아인슈타인

도스토옙스키를 낳았다는 것만으로도 러시아 민족의 존재는 정당화될 수 있다. - 니콜라이 베르쟈에프

그를 알고 난 후부터 인간은, '도스토옙스키人'과 '그와는 무연한 인간'의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고 생각했다. - 니콜라이 베르쟈에프

이 세계에 있는 모든 서적, 특히 문학서적은 내 자신의 것을 포함해서 모두 불살라 버려도 무방하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만은 예외다. 그의 작품은 모두 남겨 두어야 한다. - 레프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는 저한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 한강[18]


4. 작가 연보[편집]


1821 러시아력 10월 30일, 모스크바의 말린스키 빈민구제병원에서 일등군의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도스토옙스키의 둘째아들로 태어나다.

1831 (10 세) 양친이 툴라현에다 영지를 사들이자 매년 이곳에서 여름을 지내다.

1834 (13 세) 모스크바에 있는 체르마크가 경영하는 기숙학교에 입학하다.

1836 (15 세) 문학사(文學史)를 가르치는 교사의 감화를 받아 푸시킨에 열중하다.

1837 (16 세) 2월 27일, 어머니 마리아 표도르브나 도스토옙스키야가 죽다. 5월, 형과 함께 테르스부르크로 가서 코스트바로프 기숙학교에 입학, 공병학교 입학시험 준비를 하다. 7월, 군무에서 아버지가 제대하다. 9월, 육군공병학교에 입학이 허가되다.

1838 (17 세) 1월 16일, 공병학교에 정식으로 입학. 이때부터 발자크, 위고, 호프만 등의 소설을 탐독하다. 가을 진급시험에 낙제하다.

1839 (18 세) 영지 농노들의 원한을 사서 아버지가 피살당하다.

1840 (19 세) 호메로스, 실러, 프랑스 고전 비극을 탐독하다. 11월 29일에 하사관, 12월 27일에는 견습사관이 되다.

1841 (20 세) 이해가 시작될 무렵 <보리스 고두노프>, <마리야 스추아르트>의 극작을 시도했으나 둘 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8월 5일, 공병소위로 임관되었으나 특별연구를 위해 공병학교에 남다.

1842 (21 세) 8월 11일, 중위로 진급하다.

1843 (22 세) 8월 21일, 공병학교를 졸업, 페테르스부르크 공병대에 편입되다. 23일, 제도과에 지원하여 근무하다.

1844 (23 세) 발자크의 <외제니 그랑데> 번역하다. 조르주 상드의 번역도 시도하다. 10월 19일, 중위로 진급함으로써 제대가 허락되다. <가난한 사람들> 쓰기 시작하다.

1845 (24 세) 5월, <가난한 사람들> 완성하다. 네크라소프, 벨린스키의 격찬을 받다. 여름에 <분신>을 쓰기 시작하다. 가을 <아홉 통의 편지에 담긴 소설> 쓰다. 풍자 신문 ≪즈브스칼≫의 발행을 계획하다.

1846 (25 세) 1월 15일, <가난한 사람들>을 네크라소프가 편집하는 ≪페테르스부르크 문집≫에 발표하다. 2월 1일 <분신>을 ≪조국의 기록≫에 발표하다. 봄, 페트라세프스키와 알게 되다. 10월에 <프로하르친씨> 발표하다. 12월 <네토치카 네즈바노바> 쓰기 시작하다.

1847 (26 세) 이해 첫무렵 벨린스키와 사이가 나빠져 페트라세프스키와 가까워지다. <아홉 통의 편지에 담긴 소설>을 ≪현대인≫ 1월호에 발표하다. <여주인>, <조국의 기록> 10,11 월호에 발표하다. <가난한 살마들>이 단행본으로 출간되다.

1848 (27 세) <폴준코프> 발표하다. <약한 마음>, <유부녀>, <정직한 도둑>, <크리스마스와 결혼식>, <백야>를 ≪조국의 기록≫에 발표하다.

1849 (28 세) <네토치카 네즈바노바>를 ≪조국의 기록≫ 1,2,5,6 월호에 발표하다. 3월, 페트라세프스키 집에서의 회합에서 벨린스키의 고골리에게 보낸 편지를 낭독하다. 4월 23일 페트라세프스키 회의 검거로, 다른 회원들과 함께 붙들려 페트로파블로스키 요새감옥에 감금되다. 감금된 동안 <작은 영웅>, <첫 사랑> 쓰다. 12월 22일, 사형선고를 받고 형장에 끌려갔으나 황제의 특사로 4년간의 시베리아 유형과 4년간의 병역근무를 선고받고 24일 밤에 페테르스부르크를 출발하다.

1850 (29 세) 유형지인 움스크 감옥에서 복역하다.

1854 (33 세) 2월 15일 형기가 만료되어 3월 2일 일개 병졸로 시베리아 국경수비연대 제 7 대대에 편입되다. 가을부터 그 마을의 세무관리의 아내 마리아 드미트리예브나 이사예바와 사랑을 속삭이기 시작하다.

1855 (34 세) <죽음의 집의 기록> 쓰기 시작하다.

1856 (35 세) 2월 15일, 근무성적이 좋아 하사관으로 진급되다. 3월 24일, 황제에게 사면 탄원서를 내다. 10월 1일, 척명으로 대대의 기수(旗手)가 되다.

1857 (36 세) 2월 6일,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 이사예바와 크즈네츠크에서 결혼하다. 4월 18일, 옛 신분으로 돌아가라는 척명이 내리다. 8월, <작은 영웅>을 ≪조국의 기록≫에 발표하다. 이해 말 사표를 제출하고 모스크바에서의 거주를 허가해 달라고 요청하다.

1859 (38 세) 3월 18일 소위로 임관됨과 동시에 예편, 거주지는 트베리로 한정되다. 7월 2일 트베리에 도착, 가을에 거주지 선택의 자유에 대한 탄원서를 황제에게 내다. 12월 27일, 페테르스부르크에의 거주허가가 내려 트베리를 떠나다.

1861 (40 세) 형과 함께 ≪시대≫를 창간, <학대받은 사람들>을 1월호부터 연재하다. 연재가 끝나자 단행본으로 내다. <죽음의 집의 기록>을 1월부터 ≪러시아 세계≫에 연재했으나 4월부터는 이 작품을 ≪시대≫로 옮겨 처음부터 다시 게재, 이듬해 완결하다.

1862 (41 세) 6월 7일 출발하여 파리, 런던, 제네바를 여행하다. 8월, 페테르스부르크로 돌아오다. 이해 <죽음의 집의 기록>을 단행본으로 출간하다.

1863 (42 세) 5월 폴란드 문제에 관한 스트라호프의 논문 <운명적인 문제>(4월 호) 때문에 ≪시대≫가 발행정지처분을 받다. 여름에 연인 수술로바와 함께 외국으로 떠나다. 여행중에 도박에 열중, 경제적인 궁핍으로 <도박자>를 구성하다. 수슬로바와의 사랑에 파탄이 일어, 10월 모스크바의 아내에게로 돌아오다. 겨울, 아내의 병이 악화,병석을 떠나지 않고 아내를 헌신적으로 간호하다.

1864 (43 세) 3월 24일, ≪시대≫를 계승한 새로운 잡지 ≪세기≫ 창간호를 내다. <지하 생활자의 수기>를 창간호에 게재하다. 4월 16일, 아내가 폐결핵으로 죽다. 6월 10일, 형 미하일 죽다. 12월 25일, 친구 그리고리예프 죽다. 이해 말부터 이듬해 초에 걸쳐 마르타 브라운과의 연애사건 일어나다.

1865 (44 세) 안나 그로코프스카야에게 구혼했으나 거절당하다. 4월 ≪세기≫ 폐간되다. 7월에 세번째 외국여행을 떠나다. 다시 수슬로바와 사랑을 속삭이며 도박에 열중, 궁핍하여 <죄 와 벌>을 쓰기 시작하다. 다시 사랑에 실패, 11월 러시아에 돌아오다. 출판업자에게 저작권을 팔아 버리고, 이듬해에 걸쳐 전집 3권을 출간하다.

1866 (45 세) <죄와 벌>을 ≪러시아 통보≫ 1, 2, 4, 6, 8, 11,12 월호에 연재 발표하다. 여름에 모스크바 근교 류플리노에 머물다. 10월, <도박자>를 여자 속기사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스니트키나에게 구술하여 탈고하자마자 전집 3권 속에 수록하고 곧 이어 단행본으로 출간하다.

1867 (46 세) 2월 15일, 스니트키나(20 세)와 페테르스부르크에서 결혼하다. 4월 14일, 그냐와 함께 외국으로 떠나 4년간 머물다. 6월, 드레스덴에서 투르게네프와 말다툼하다. 8월, 제네바로 옮겨가다. 9월 <작가의 일기>를 계획, 연말에 <백치>를 쓰기 시작하다. 이해에 <죄와 벌>을 단행본으로 출간하다.

1868 (47 세) <백치>를 ≪러시아 통보≫ 1, 2, 4~12 월호에 연재, 이어 단행본으로 출간하다. 2월 22일, 제네바에서 맏딸 소피야가 태어 났으나 5월에 폐렴으로 죽다. 스위스를 떠나 이탈리아로 옮겨 12월 플로렌스에 도착, 연말에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구상하기 시작하다.

1869 (48 세) 7월 말까지 플로렌스에 머물다. 스트라호프가 편집하는 ≪여명≫에 관계하다. 8월, 이탈리아를 떠나 프라하를 거쳐 다시 드레스덴에 머물다. 9월 14일, 둘째딸 류보피(에메) 태어나다. 생활이 궁핍하여 <영원한 남편>을 쓰기 시작, 12월 초에 탈고하다.

1870 (49 세) <영원한 남편>을 ≪여명≫ 1, 2 월호에 연재. 1월부터 <악령>을 쓰기 시작하여 이듬해 탈고. <죄와 벌> 제 4판이 나오다.

1871 (50 세) <악령>을 ≪러시아 통보≫ 1, 2, 4, 7, 9, 11 월호에 연재, 제 2편까지 완결했으나 그 후 1년간 중단하다. 7월 8일, <영원한 남편> 단행본으로 출간되다.

1872 (51 세) 근동 지방으로의 여행을 계획하다. <악령> 제 3 편을 ≪러시아 통보≫ 11, 12 월호에 발표하여 완결하다. 주간지 ≪시민≫의 편집국에 입사하다.

1873 (52 세) <작가의 일기>를 ≪시민≫ 1 호에 50 호까지 1년에 걸쳐 연재하다. <악령>을 단행본으로 출간하다.

1874 (53 세) 2월 말부터 정식으로 ≪시민 편집자≫가 되다. 3월 말 검열법 위반으로 구속되다. 가을부터 페테르스부르크의 남쪽 지방 온천장으로 옮기다. <미성년>을 쓰기 시작하다.

1875 (54 세) 네크라소프의 요청으로, 그가 편집하는 잡지 ≪조국의 기록≫에 <미성년>을 발표하다. 1, 2, 4, 5, 9, 11, 12 월 호에 연재하여 완결하다. 여름에 서부 독일에 머물다. 8월 둘째아들 알렉세이 태어나다. <죽음의 집의 기록> 제 4판 나오다.

1876 (55 세) 1월부터 <작가의 일기>를 원간으로 게재하다. <미성년> 단행본으로 출간하다.

1878 (57 세) 5월, 둘째아들 알렉세이 죽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쓰기 시작하다. <죄와 벌> 제 5판이 나오다.

1878 (58 세)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러시아 통보≫ 1, 2, 4, 5, 6, 8, 9, 10, 11 월호에 연재하다. 이해 <작가의 일기> 재판 발행하다. <학대받은 사람들> 제 5판이 나오다.

1880 (59 세)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러시아 통보≫ 1, 4, 7, 8, 9, 10, 11 월호에 계속 연재하다. 5월 25일 모스크바의 작가, 저널리스트가 주최한 도스토옙스키를 위한 축하회가 베풀어지다. 8월, <작가의 일기>를 복간하다. 푸시킨제(祭)에서 연설하다.

1881년 1월 28일 오후 8시 30분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영면하다. 향년 59세. 1월 31일, 페테르스부르크 대사원 묘지에 묻히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단행본으로 출간되다.

5. 작품 목록[19] [편집]


중·장편

(1846) 가난한 사람들 (Бедные люди)

(1846) 분신 (Двойник)

(1847) 여주인 (Хозяйка) [20]

(1849) 네또츠카 네즈바노바 (Неточка Незванова : 미완성소설)

(1859) 아저씨의 꿈 (Дядюшкин сон)

(1859)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Село Степанчиково и его обитатели)

(1861) 상처받은 사람들(Униженные и оскорблённые)[21]

(1862) 죽음의 집의 기록 (Записки из Мёртвого дома)

(1864) 지하로부터의 수기(지하에서 온 수기 : Записки из подполья)

(1866) 죄와 벌 (Преступление и наказание)

(1867) 노름꾼 (도박꾼 : Игрок)

(1869) 백치 (Идиот)

(1870) 영원한 남편 (Вечный муж)

(1872) 악령 (Бесы)

(1875) 미성년(Подросток)

(1880)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Братья Карамазовы)


단편

(1846) 쁘로하르친 씨 (Господин Прохарчин)

(1847) 아홉 통의 편지로 된 소설 (Роман в девяти письмах)

(1847) 빼째르부르크 연대기(Петербургская летопись)

(1848) 질투하는 남편(Ревнивый муж) 

(1848) 남의 아내 (Чужая жена)

(1848) 남의 아내와 침대 밑 남편 (Чужая жена и муж под кроватью)[22]

(1848) 약한 마음 (Слабое сердце)

(1848) 뽈준꼬프 

(1848) 정직한 도둑 (Честный вор)

(1848) 크리스마스 트리와 결혼식 (Ёлка и свадьба)

(1848) 백야 (Белые ночи)

(1849) 꼬마 영웅 (Маленький герой) 

(1862) 악몽같은 이야기 (Скверный анекдот)

(1865) 악어 (Крокодил)

(1873) 보보끄 (Бобок)[23]

(1876) 예수의 크리스마스 트리에 초대된 아이(Мальчик у Христа на ёлке)

(1876) 백 살의 노파 (Столетняя)

(1876) 농부 마레이 (Мужик Марей)

(1876) 온순한 여자 (Кроткая)

(1877) 우스운 사람의 꿈 (Сон смешного человека)


6. 기타[편집]


파일:external/www.kino-teatr.ru/54346.jpg

러시아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일생을 다룬 사극을 2010년에 방영한 적이 있다. 자세한것은 도스토옙스키 참조.


도서 갤러리에서는 도끼 선생(...)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2005년에 바뀐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기존에 쓰이던 도스토예프스키에서 도스토옙스키로 표기하기로 결정되었다. 참고1, 참고2


이름이 표도르 예멜리아넨코와 같다. '표도르'와 '표트르'는 기원이 다른데, '표트르'는 그 유명한 베드로[24]에서 기원한 이름이다.



[1] 도스토예프스키라고도 하는데 러시아어 외래어 표기법에 맞는 표기는 도스트옙스키이다.

[2] 그래도 상당히 괴팍했던 성격이었던듯 하다. 특히 화를 잘내다보니 가족들과의 불화가 심했고 하인들과 영지 농노들도 굉장히 싫어했다. 그랬던 탓인지 1839년 자신의 영지 농노들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이 일로 도스토옙스키는 큰 충격을 받았으며 공식석상에서 아버지 이야기는 꺼려했다고 한다.

[3] 나이로는 위고가 한세대 위지만 위고가 더 오래살았다. 사실상 거의 동시대를 살았다.

[4] 이 때 도스토옙스키는 클럽에서 인쇄기를 맡고 있었는데, 이는 대중 선동 담당을 뜻하기 때문에 중죄인으로 취급되었다고 한다.

[5] 몇몇 책에서는 혁명 내용은 빼고 사형 당할 뻔한 내용만 적어놓아서 도스토옙스키가 정말로 중죄인인 것 처럼 묘사된다.악마의 편집

[6] 사실은 황제가 정말로 처형할 생각은 없었고 단지 '혁명놀음'을 하겠다고 설치는 젊은이들에게 본 때를 보여주겠다고 처형쇼를 한 것일 뿐이었다. 실제로 니콜라이 1세는 소위 지식인들에 대해서는 이런 처형 연극을 즐겼고, 나름대로 효과도 있었다고 한다.

[7] 도스토옙스키는 이 때의 경험을 '죽음의 집에서의 기록'이라는 소설에서 풀어놓고 있다. 몇몇 형수들은 이 사건의 영향으로 미쳐버렸으나(...) 도스토옙스키는 '죽을 고비를 넘겨야 정신을 차리는 인간'의 표본이 되었다. 단 도박 중독은 죽는 날까지 없어지지 않았지만... 그럼 정신차린 게 아니잖아

[8] 옴스크는 현재 시베리아 연방관구 서부에 있는 도시로 그의 작품에 종종 등장한다. 옴스크를 관통하는 이르티시 강과 함께.

[9] 하지만 시베리아에서도 그 성격 못죽이고 따돌림당했다. 위에 언급된 책에서는 "동료들은 내가 너무 잘난 집안 출신이라서 날 왕따시킴"이라고 정신승리했다만...

[스포일러] 그러나 묘하게도 그 남자는 살아나게 되자 결심했던 대로 살지 못하고 다시 시간을 낭비하면서 보냈다는 결말로 끝을 맺는다(...).

[11] 문학계에서 도스토옙스키 안티로 유명하다.

[12] 열린책들 전집에는 6만명이라고 되어있다.

[13] 모스크바 지하철 10호선의 도스토옙스카야역

[14] 사실 원래부터 도스토옙스키가 투르게네프를 싫어했던 건 아니다. 그가 처음 문단에 들어섰을 때, 투르게네프를 보고 "투르게네프는 러시아의 문인들 중 한 순간에 친해지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다" 라고 표현할 정도로 투르게네프를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또한 도스토옙스키가 죽기 사흘 전 알렉산드르 푸시킨에 대한 연설회장에서 투르게네프와 극적으로 화해했다고 한다.

[15] 도스토옙스키 전집 서문 참조

[16] 도스토옙스키가 가장 혐오하던 사상 중 하나가 무신론임을 생각해보자(...) 또한 <죄와 벌>의 여주인공이자 도스토옙스키가 생각하는 이상적 인간인 소냐는, 니체의 기준에서 보자면 '노예의 도덕'을 신봉하는 부정적 인간상이기도 하다. 물론 니체가 도스토옙스키의 사상에 공감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니체는 쇼펜하우어를 좋아했지만 자신의 사상에서는 그를 깐 전례도 있고(...)

[17] 도스토옙스키가 가장 혐오하던 사상 중 하나가 무신론임을 생각해보자(...)

[18] 출처.

[19] 발표년도를 기준으로 했다.

[20] 한국에선 단편 모음집인 뻬쩨르부르그 연대기 외에 실려있다. 열린책들 기준

[21] 영어로 하면 Humiliated and Insulted이고, 굳이 직역하자면 '모욕당한 그리고 굴욕당한'이 되겠다.gg

[22] '남의 아내'와 '질투하는 남편'을 합쳐서 하나의 작품으로 묶어서 개작한 단편

[23] 이 작품부터 마지막까지 쓰여진 단편들은 전부 도스토옙스키가 쓴 「작가의 일기」라는 연재 일기의 부분으로 발표된다.

[24] 영어로는 피터(Peter), 프랑스어로는 피에르, 스페인어로는 페드로등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름.


C13 – 돈 키호테 (Don Quixote) /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1547-1616)

(출전 :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동시대의 작가 셰익스피어가 우유부단한 햄릿형 의 인물을 창조한 반면, 세르반테스는  저돌적인 돈 키호테형 적 인간을 그려냄으로써, 이후 문학사에 전형적인 두 성격 유형을 각인시킨 작품, 중세 기사도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시대착오적 편력기사의 모험과 좌절,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초래된 가치질서의 위기와 변화에 대응하는 작가의 문제의식을 찾아볼 수 있다. 돈 키호테의 모험과 좌절로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체험하는 인문주의적 인간의 자기발견의 과정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근대소설의 효시로 일컬어진다.


a. 생애와 작품활동

하나님이 인간의 오만과 타락에 대해 이를 심판하려 하자,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래도 세르반테스가 돈 키호테를 쓰지 않았습니까 라고 항변하면서 인간이 하나님께 자랑할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이 작품을 꼽았다 한다. 스페인의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세르반테스는 가난한 외과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가족과 함께 각지를 전전하며 정규교육은 거의 받지 못했다. 그러나 길가에 떨어진 종이에 글자가 적혀 있으면 반드시 주워서 읽을 정도로 독서광이었다 한다. 22세 때 이탈리아로 가서 추기경의 시중을 들었으며, 이때 르네상스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다. 다음해에는 세계 3대해전 중의 하나인 터키와의 레판토 해전에 참가하였다. 이 해전은 그야말로 처절하여 그 자신도 훗날 역사상 일찍이 없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 같지 않은 기념할 만한 숭고한 싸움 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전투에서 가슴에 총상을 두 번 입었고, 세번째 입은 총상으로 평생 왼손을 쓸 수 없게 되었다. 이로 인해 레판토의 외팔이 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 자신은 바른손의 명예를 앙양하기 위해 왼손의 자유를 잃었다 며 끝까지 이 명예로운 부상을 자랑으로 여겼다. 실제로 군인은 도망쳐서 무사한 것보다 전장에서 죽는 편이 훨씬 낫다 고 생각하고 행동한 그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자세였다. 이 해전에서 보여준 그의 용감성은 주위를 감동시켰음이 그의 상관의 증언으로 나타나고 있다. 요양한 후에 동생과 함께 전공을 세우고 스페인으로 귀환하던 중 터키 해적선의 습격을 받아 알제리에서 5년 동안 노예생활을 한다. 그러나 그는 노예생활 중에도 절망하지 않고 탈출이라는 적극적인 행동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려고 시도하였다. 도중에 네 번의 탈출시도가 있었으나, 번번이 실패하여 숨긴 자는 사형에 처한다 는 방까지 붙을 정도였다. 친구의 화를 염려한 그는 자진 출두하여 친구의 무죄를 주장하자, 성주도 그의 당당함에 감복하여 관대하게 대했다. 포로들의 신뢰를 한몸에 받고 있던 그는 잔인한 성격의 성주까지도 반하게 만드는 인간적인 매력의 소유자였다. 33세 때 특사가 되어 11년만에 스페인으로 귀국하였지만, 여기서 세르반테스의 영웅적 시기는 막을 내린다. 귀국 후 그는 문필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몇 편의 작품을 썼지만 주목 받지는 못했고, 1584년에는 18년 연하의 처녀와 결혼하여 그녀의 지참금으로 잠시 안정된 생활을 하였지만, 부친의 죽으로 가족을 부양하게 되어, 1587년 펜을 버리고 세빌랴로 가서 무적함대의 식량 징발계원이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교회에서 파문을 당하기도 하고 세빌랴에서 감옥생활도 하는 등 굴욕의 세월을 보냈다. 이러한 역경 속에서 그의 이름을 영원케 한 돈 키호테 (원제목: 재기발랄한 향사 라 만차의 돈 키호테)가 탄생했다. 본래 그는 16세기 서구사회를 휩쓸던 중세 기사들의 허황된 무협 연애담을 희화화하고 조롱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다. 즉, 그는 기사소설을 사실로 믿고 날뛰던 당시 풍조가 사실과 거짓을 뒤섞고 왜곡되게 만든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포함해 이런 환상에 빠져 있는 무리들을 진실로 돌아오도록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작품은 출판과 함께 큰 호평을 받아 판을 거듭했지만 판권을 싼 값으로 팔아 넘겼기 때문에 그의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다. 주로 금전문제로 여러가지 의혹을 받으면서 불행한 생활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만년의 그의 문학활동은 매우 활발하였다. 12편의 중. 단편을 모은 모범소설집과 1615년에는 돈 키호테 2부를 출판한 뒤, 1616년 4월 23일 셰익스피어와 같은 날에 별세했다.


b. 인간정신의 두 유형: 돈 키호테와 햄릿형


 투르게네프의 분류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는 동시대 작가로, 셰익스피어는 큰 고생을 하지 않고서도 비극적 작품을 썼다면, 세르반테스는 감옥생활과 노예생활을 하는 등 비극적 삶을 살았지만 낙천적인 작품을 남겨 같은 시대에 살았던 두 작가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두 작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햄릿과 돈 키호테 에서 제시되는  우유부단한 사색형과  저돌적인 행동형의 대명사로, 이후 문학사에 뚜렷한 자리 매김을 한다. 깊은 철학적인 사색과 비상한 관찰력으로 당대 지식인의 양심을 대변하고 있던 러시아의 대문호 투르게네프(1818-1883)는 가장 새로운 영혼의 가장 뛰어난 작품을 이미 250년 전에 쓴 위대한 두 작가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 그리고 그들의 조국인 영국과 스페인을 찬양하면서 두 작품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비교 분석하였다. 오늘날 인간정신의 두 유형으로 일컬어지는 햄릿형과 돈 키호테는 그의 분석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돈 키호테형

두 작품은 우연하게도 17세기 초기에 거의 동시에 출간되었다. 돈 키호테는 철저한 이상주의자로 그는 이상을 위하여 모든 것을 걸거나 생명을 바칠 각오마저 되어 있으며, 자신의 생명을 이상의 구현, 진리의 확립, 지상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밖에 여기지 않는다. 자기자신만을 위해 살며 자신의 일을 걱정한다는 것을 그에게는 치욕이다. 그는 다만 자기자신 이외의 것을 위해 산다. 그는 자기의 이웃과 형제들을 위해 살며 악을 근절시키는 것이 자신의 소임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그의 모습에서 에고이즘 이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으며 그 자신은 바로 자기희생의 화신인 것이다. 그는 이처럼 확고부동한 신념을 갖고 있기 때문에 결코 주저하는 법이 없이 저돌적으로 일을 추진한다. 그는 겸허한 마음과 위대한 영혼을 지닌 용감한 인물이다.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그의 투철한 신념은 그의 자유를 구속하지 않는다. 그의 의지는 불굴의 의지, 바로 그것이다. 하나의 목표에서 또 다른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추구해나가는 그의 자세에서 우리는 그의 사상이 단조롭다는 것과 그가 지닌 지혜의 편협성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고목과 같이 땅속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 어떠한 상황에서도 결코 자신의 신념을 바꾸지 않으며, 자신의 목표를 쉽게 바꾸지도 않는다. 여기서 자신의 꿈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보다 높은 가치를 지향하는 키호티즘 (quixotism)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햄릿형

반면 햄릿은 에고이즘의 화신이라 할 수 있다. 그 까닭은 햄릿에게는 확고한 신념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다만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며 따라서 그는 철저한 에고이스트다. 이는 햄릿의 사색이 그 해답을 얻지 못한 채, 그가 자기 영혼의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야 할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삶의 의의도 발견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따라서 그는 회의론자이며, 그의 머릿속은 언제나 자기자신의 문제로 가득 차 있다. 햄릿은 과장될 정도로 자신을 힐책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감시하고 자기 내부를 주시하는 것을 큰 만족으로 여긴다. 부왕이 햄릿에게 복수를 부탁하나 햄릿은 용단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며 자신의 우유부단함에 대한 구실을 찾는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세상에는 햄릿형 의 인간이 존재하며, 이런 유형의 인간은 사색적이고 뛰어난 지각력과 나아가서는 깊은 통찰력을 지니지만, 동시에 실천력의 결여로 인해 세상과 민중에 대해서는 기여하는 바가 하나도 없다. 반면 얼마쯤은 광인이라 할 수 있는 돈 키호테형 의 인간은 하나의 목표만을 추구하며, 때로는 그들이 추구하고 있는 목표가 실재하지 않는 경우조차 있지만, 이들은 그 목표 이외의 것은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이들이 인류 역사발전에 기여하고 민중을 이끌어간다고 투르게네프는 생각했다.

철학적 용어를 사용하여 표현한다면 햄릿형은 자연의 근원을 이루는 구심력 (에고이즘)을 대변해주는 인물로 자기자신을 중심체로 간주하며 자기 주변의 다른 생물체는 다만 자기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 구심력 없이 자연은 존재할 수 없듯이 자연은 또 하나의 힘인 원심력이 없이는 역시 존재할 수 없다. 원심력이란 모든 생물체는 다만 자기 이외의 다른 개체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법칙인데, 복종과 헌신의 이 원심력에 대해서 우리는 위에서 본 것처럼 돈 키호테형의 인물이 이 원칙을 표한다. 침체와 활동, 보수성과 진보성으로 대변될 수 있는 각기 상이한 이 두 힘은 모든 생명체의 근원을 이루는 힘이다. 이 두 힘은 우리에게 꽃나무가 꽃을 피우는 원리를 설명해주며, 민중의 위대한 힘이 뻗어가는 발전과정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c. 주요 등장인물

 돈 키호테 는 허황된 기사도 정신을 따르는 인간의 부정에 대한 저항과 에피소드를 담고 있는 작품으로 주요 등장인물은 다음과 같다.

돈 키호테: 라 만차 지방의 귀족으로 기사도 이야기 책을 너무 많이 읽어 정신이상인 체로, 비뚤어진 세상을 바로잡기 위하여 방랑의 길을 떠나 황당무계한 일을 일으키는 이상적이고 저돌적인 인물.

산초: 돈 키호테를 보좌하고 다니며, 주인을 궁지에 몰아넣거나 희망을 주는 현실주의적 인물.

둘시네아 델 토보소: 돈 키호테가 토보소에 산다고 믿고 있는 이상적이고 영원한 여인. 둘시네아는  달콤하다 의 뜻이다.


d. 작품의 주요내용

 돈 키호테는 총 52장으로 되어 있고, 10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에 나온 속편은 총 74장으로 이루어진, 실로 방대한 분량을 가지고 있으며, 등장인물만도 600여 명에 달한다. 그러나 역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인물은 슬픈 용모의 편력기사 돈 키호테와 그의 시종인 산초 판사, 돈 키호테가 동경하는 구원의 여인인 둘시네아 다.

 돈 키호테는 주인공 돈 키호테에 대한 소개로부터 비롯된다. 라 만차 지방의 시골귀족인 알론소 엘 부에노가 기사소설을 지나치게 탐독한 나머지 제정신을 잃게 된다. 그는 불의와 악에 대항하여 싸우고 약자들을 보호하는 편력기사가 되어 국가에 봉사하고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고자 결심한다. 그는 옛날의 훌륭한 기사들의 흉내를 내어 자신이 사랑하던 한 마을 처녀를 둘시네아 델토보소라는 숭배의 여인으로

명명하고, 말라빠짐 말은 로시난데라고 이름짓고, 헛간에서 옛날의 갑옷과 투구를 꺼내 손질한 후 우스꽝스런 모습의 기사 돈 키호테 가 되어 7월의 어느 아침, 집을 나서 벌판으로 향한다. 해질 무렵에 한 여관에 도착하여 여관을 성으로, 여관 주인을 성주로 생각하는 기사에게, 여관주인은 편력기사가 갖추어야 할 것들에 대해 충고해준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노상에서 몇 가지 사건을 접하고, 결국 기사의 첫번째 가출은 한 무리의 상인들에게서 몽둥이 찜질을 다하는 것으로 끝난다. 집에 돌아와 몇몇 마을 사람들(신부, 이발사 등)의 치료를 받은 후에 두번째의 가출을 한다. 이번에는 현실주의자인 산초 판사를 시종으로 하여 두번째 편력행각에 나서는데 여기서부터 이 소설을 큰 변화를 가져온다. 돈 키호테로부터 섬의 총독 자리를 약속받은 산초는 외모와 정신적인 면에서 그의 주인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두 사람은 여러가지 사건에 접하게 되는데, 풍차의 무리들을 만나자 거인들이라면서 창을 겨누고, 로시난테와 함께 돌진하여 때마침 돌기 시작한 풍차에 부딪쳐 쓰러지고 만다. 산초가 다가오자 저것은 요술사가 우리의 승리를 방해하기 위해서 거인을 풍차로 둔갑시킨 것이다 라고 말한다. 그는 또 양떼를 교전중인 군대로 생각하고 덤비는가 하면, 포도주가 든 가죽 주머니를 상대로 격투를 벌이기도 한다. 한편, 산초 판사는 주인과는 반대로 어떠한 경우에도 현실과의 타협을 잊지 않으며, 게으르기는 하나 어디까지나 주인에게는 충실하다. 돈 키호테는 그 자신이 흠모해 마지않는 기사 아마디스를 모방하여 둘시네아를 위한 고행의 표시로 시에라모레나에서 머무르는 등 크고 작은 모험을 벌인다. 결국 그를 고향으로 데려오려고 헌신적으로 노력하던 신부와 이발사의 계책으로 다시 집에 돌아오게 된다.

 돈 키호테 2부는 주인공의 세번째 출정으로 시작된다. 돈 키호테는 같은 마을 사람인 학사 삼손 카르라스코를 거울의 기사로 착각하여 혼을 내주고, 사자들에게 대항하기도 하며, 몬테시노스의 동굴을 방문하여 무너뜨리려 하는 등 몇몇 사건에 접하다가 공작의 궁전에 당도하게 된다. 여기에서 돈 키호테와 산초 판사는 클라빌레뇨라는 목마에 관련된 사건을 비롯하여, 산초가 바라타리아 섬의 총독에 임명되는 등의 일을 겪게 된다. 돈 키호테는 바르셀로나로 가서 이번에는 백월의 기사를 가장한 카르라스코와 겨루다가 패배를 맛본 후, 고향으로 되돌아가라는 그의 명령에 굴복하고는 집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돈 키호테와 산초는 숱한 우롱과 조소로 슬프기만 하였다. 집으로 돌아온 기사 돈 키호테는 드디어 병상에 눕게 되었고 겨우 현실로 돌아와 본래의 이름인 알론소 엘 부에노의 이름을 되찾게 된다. 그는 자신의 우매한 나날들을 성직자에게 고백하며 참회를 하게 된다. 참다운 기사도 정신을 꿈꾸었던 재기의 선비는 조용히 숨을 거둔다. 그러나 끈질기게 돈 키호테와 행동을 함께해온 현실주의자 산초는 이번에는 거꾸로 주인을 격려하는 돈 키호테적인 인물로 변하여 자기들은 다시 기사의 편력길에 오르겠다고 하자 이 모든 편력은 영원히 다 지나가버렸어, 그리고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구나. 난

이제 돈 키호테가 아니야. 난 사람들이 한번도 그렇게 불러준 적이 없는 선량한 알론소로 되돌아온 것이야. 알론소 엘 부에노로 말이야 하고 말한다.


e. 감상 및 문학사적 의의

세르반테스가 이 작품을 쓸 무렵의 스페인은 세계 도처에 대 식민지를 건설했다가 1588년 무적함대가 영국군에 격파당하는 바람에 국력이 기울기 시작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스페인 왕정은 계속 전쟁준비를 하기 위해 국민들에게 가혹하게 세금을 징수하여 원성을 사는 등 사회가 불안했는데, 이것이 돈 키호테  탄생의 배경이 된다. 당시 부조리를 고발한 이 소설에서 주인공 돈 키호테를 매우 우스꽝스러운 인물로

묘사한 것은 왕정으로부터 정치적 압력을 피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였을 것이다.


f. 시대풍자

세르반테스는 항간에 풍미하고 있는 기사도 이야기의 이기를 누르기 위해 소설을 쓴다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그는 처음에 당시 스페인에 크게 유행했던 기사도 이야기의 패러디를 쓰려고 했다. 그러나 감흥이 솟는 대로 일정한 계획도 없이 써나가는 동안 처음의 의도를 잊고 돈 키호테와 산초의 성격을 창조한다는 새로운 주제에 열중, 마침내 모든 사람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킨 대작을 썼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확실히 첫번째 편력을 묘사한 처음의 6장은 기사도 이야기의 패러디라는 느낌이 오나, 산초 판사와 둘시네아가 등장하는 두번째 편력부터는 대조적인 성격을 지닌 돈 키호테와 산초 판사의 대화를 중심으로 하여 단순한 패러디 이상의 폭과 깊이가 더해지며 극히 전위적인 근대소설의 모습까지 보여준다.

어디까지나 자기 이상에 충실하려는 돈 키호테와 현실적으로 확인되는 것만 믿으려는 우직한 산초 판사는 세르반테스가 이 작품에서 창조한 두 사람의 전형적 인물로, 돈 키호테의 재미는 두 사람이 되풀이하며 벌이는 대조적인 행동의 묘미에서 비롯된 것이 많다. 희극적인 인물 돈 키호테는 언젠가  수심어린 얼굴의 기사로 바뀌고 최후에는 작가인 세르반테스의 고결한 뜻을 지니면서도 고난을 짊어진 생애와 겹쳐져 우리들을 감동케 한다.


g. 근대소설의 효시

이 소설 속의 대립적인 두 인물, 돈 키호테와 산초 판사는 이상과 현실, 정신과 물질, 환상과 사실의 충돌을 상징한다. 그러면서도 두 인물은 서로가 협력하는 관계를 유지하면서 의지하는 인간의 양면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작중의 두 사람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그 성격을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오랜 여행중에 서로에게 영향을 받아 돈 키호테가 차츰 현실적인 세계로 접근하는 반면, 산초 판사는 도리어 돈 키호테적인 세계관을 동경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런 이야기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우리에게 의미를 주는 것은 패러디와 시문과 유머의 바닥에 흐르는 인간에 대한 끝없는 애정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당시까지의 줄거리 중심의 이야기를 부정하고 인물의 창조나 성격변화에 중점을 두고 있는 점에서 이 소설을 근대 소설의 효시로 불린다. 즉 이 작품은 운문 중심 문학에서 산문 중심으로 전환시켜 산문 중심적 근대소설의 출발점이 되었다. 초라한 갑옷을 입은 채 로시난테라는 앙상한 말을 타고, 시종인 산초와 함께 불의와 싸우기 위해 먼길을 떠나는 돈 키호테, 자신의 과오를 적당히 합리화해 잊어버리고 항상 새로운 모험에 도전하는 낙천적이면서도 미래지향적인 돈 키호테의 모습은 영원히 우리 인류의 기억에 남을 것이다.



C12 – 파우스트 (Faust) /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출전 :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괴테 개인의 성장사일 뿐만 아니라 세계문학의 보배인 이 작품은, 괴테가 젊은 질풍노도시대로부터 출발하여 고전주의를 거쳐, 만년의 종합적 완성기에 이르는 전 생애를 담고 있다. 즉 괴테 자신의 모든 인생체험과 사상을 바탕으로 인간존재의 방황. 갈등. 구원 등의 문제를 해결해보려는 거대한 노력의 산물로, 이 작품의 메시지는 인간은 자기 향상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방황하지만, 이것을 계속하는 한 결국에는 하늘에 의해 구원된다는 그의 종교관을 반영하고 있다. 우리는 이 작품에서 인간영혼의 구원과 구원을 향한 구도자로서의 괴테의 총체적인 모습을 만날 수 있다.


a. 생애와 작품활동

 여기 인간다운 인간이 있다.  이 말은 나폴레옹이 괴테를 만나고 난 후 한 말이다. 고전파의 대표자이자 영원한 로맨티스트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신성 로마제국의 추밀원 고문관을 지낸 부친에게서 엄격한 기풍을, 프랑크프르트 시장 딸인 모친에게서 상상력이 풍부한 예술가적 성격을 이어받았다. 또한 부유한 상류가정에서 철저한 교육을 받아 뒷날 천재적 대성을 이룰 바탕을 마련하였다. 부모의 나이 차이는 21년이었고, 괴테는 학교가 아닌 아버지한테 교육을 받았다. 15세에 그레첸이라는 소녀와 첫사랑을 경험한 이후 생애 동안 9명의 여성과 애정관계를 가졌다. 라이프치히 대학 법대 재학시절에는 미술과 문학에 심취하여 자유분방한 생활을 즐겼으며 1768년 중병에 걸려 고향에 돌아왔다. 요양중 46세의 경건주의적 신앙이 두터운 노처녀인 클레텐베르크를 만났고, 건강을 회복한 그는 슈트라스부르크로 유학, 학위를 받았다. 여기서 5년 선배인 헤르더를 알게 되어, 민족과 개성을 존중하는 문예관의 영향을 받아 후일 슈트품 운트 드랑(질풍노도) 문학운동의 기초가 되었다. 이때 순진한 목사의 딸인 브리온과의 연애는 숱한 새로운 사상의 원천이 되었으나, 괴테는 이상한 강박관념에 쫓겨 연인을 버린다. 이것은 괴테의 가슴에 언제나 지워지지 않고 남아, 그의 시작의 테마가 되었다.

1771년 변호사 자격증을 얻었고, 이즈음 베츨라르에서 샬로테 부프라는 여인을 알게 되었는데, 이 여인은 이미 약혼자가 있어 이들의 사랑은 결국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막을 내린다. 직후 그의 친구인 빌헬름 예루살렘이 유부녀와의 사랑 끝에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은 이 두 사건을 혼합시켜 주인공 베르테르가 이미 약혼자가 있는 여인을 사랑하다가 실패하고 결국 생을 마감한다는 내용으로, 전 유럽의 독서계를 강타했다. 이처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자전적 소설이라는 점도 있지만, 질풍노도라는 문학운동의 시발로서 큰 문학적 의의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

75년초 괴테는 셰네만과 사랑하여 약혼까지 했으나, 곧 파혼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초청되어 그곳에 갔는데, 결국 이곳이 그의 평생 안주지가 되었다. 이곳은 인구 10만에 지나지 않는 소국이었으나, 문화에 대한 의욕과 학문적 분위기가 가득 찬 곳이어서, 영주의 고문관이 되어 많은 치적을 쌓았다. 이즈음 괴테는 슈타인이라는 부인을 만난다. 26세의 괴테에 비해 33세인 그녀는 괴테의 누나이자 연인이고, 조언자였다. 이미 7자녀를 둔 그녀와의 사랑은 지금까지의 어느 사랑과도 달랐으며, 이들의 관계는 괴테의 질풍노도적인 격정을 진정. 순화시켜 질서를 존중하는 고전주의로 향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10년에 걸친 바이마르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이탈리아로 떠났다. 이탈리아는 그에게 고대예술과 고대인의 생활이 어떤 것인가를 가르쳐주었다. 한편 그는 독일의 동시대인과의 연대를 상실해갔다. 괴테는 독일에 대해 냉정한 태도로 임했다. 동시대인도 괴테를 백안시했다. 요컨대 이탈리아는 괴테를 독일로부터 격리시킨 것이다.

1788년(39세)에 크리스티아네를 만나 결혼, 자녀도 두고 비로소 가정의 행복을 맛보았다. 1794년(45세)부터 시작되는 실러와의 교우관계는 침체했던 그의 창작활동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다. 괴테가 직관적이고 소박한 데 비해, 실러는 사변적이고 의식적이었다. 이처럼 정반대의 기질을 가진 이 두 천재의 협력은 독일문학사에 새로운 고전주의시대를 초래했다. 특히 파우스트 (1부)와 빌렐름 마이스터는 실러의 격려가 결정적인 힘이 되었다. 쉴러가 타계했을 때 괴테는  내 존재의 절반을 잃었다면서 탄식했다.

1816년(67세)아내가 죽었으나, 70이 넘은 괴테는 심신의 쇠약을 보이지 않고 그 정신적 시야는 점점 확대되었다. 74세 때 19세의 꽃다운 처녀 레베초를 만나 열렬히 구애했으나 거절당했는데, 그가 만년에 쓴  마리엔트바의 비가는 이 사랑을 표현한 서정시의 백미다. 1829년(80세)에 빌헬름 마이스터를 완성했고, 23세 때부터 쓰기 시작하여 무려 60년이나 걸린 생애 최고의 대작인  파우스트 (2부)를 1831년(82세)에 완성했다. 그는 혁명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으나, 인류의 진보와 행복에 대해서는 정열을 바쳤으며, 낭만주의의 병적 경향을 싫어하여 고전주의로 전향하였으나, 만년의 작품에는 다분히 낭만적 요소가 실려 있다. 요컨대 괴테는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렵다. 금욕주의자도, 신비주의자도, 성인이나 은자도 아니며, 돈 주앙과 같은 호색한도 아니다. 다만 그는 절제된 감성적 인간의 지고한 단계에 이르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며 분투했던 것이다.


b. 파우스트의 전설

 파우스트 는 비극 제1부(1806)와 비극 제2부(1831)로 구성되어 있다. 이 희곡의 소재는 파우스트 전설에서 유래했다. 원래 15세기 말에 살았다는 학자 파우스트의 이야기가 각 지방에 여러 형태로 전해내려오던 것을 16세기 말 영국의 작가 말로가 연극화하면서부터 널리 민중극과 인형극으로 퍼졌다. 그는 약간의 과학적 지식을 이용한 마술사로 각지를 유랑한 인간인데, 여기에 갖가지 마술사 전설이 부가되면서 소위 파우스트 전설 이 등장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모든 학문을 섭렵하고도 만족을 얻을 수 없었던 파우스트는 마력의 힘을 빌어 천지의 신비를 캐고 거부를 얻으며 향락을 맛보면서 잠시만이라도 신과 필적하는 자가 될 것을 염원하여 악마와 계약을 체결한다. 계약에 따르면 24년간은 악마가 그에게 봉사하지만 이 기간이 지나면 반대로 파우스트를 악마가 마음대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서부터 파우스트는 악마를 따라 여러 곳을 구경하고, 마법의 힘으로 여러 가지 향락을 맛보며, 공작의 궁전에 살면서 죽은 사람을 살리고 공작부인을 유혹하기도 하지만, 결국 마음속으로부터의 만족은 얻지 못한다. 회개할 생각이 든 그가 신에게 간구하려 하였으나, 그때는 벌써 계약기간이 지나 폭풍이 휘몰아치는 밤에 그는 악마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마치고 영혼은 지옥에 떨어진다는 내용이다.

이상과 같은 전설이 비로소 저서 형식으로 나온 것은 1587년. 괴테의 고향인 프랑크푸르트의 서점인 쉬피스에서 간행한 것인데, 이것이 영역되어 영국의 배우 겸 극작가였던 말로의 눈에 띄어, 포스타스 박사의 비화 라는 비극이 탄생하였다. 이것이 영국 여행자에 의해 독일에 역수입되어 민중극과 인형극으로 공연되기에 이른 것이다. 소년시대에 이미 인형극이나 민중극을 통해 파우스트의 전설과 친했던 괴테가 자신도 파우스트를 써보기로 결심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 보인다.


c. 주요 등장인물

노력하며 방황하는 인간의 구원을 그린 이 작품에는 다음과 같은 인물이 등장한다.

파우스트: 16세기의 전설적인 마술사, 학자, 지칠 줄 모르는 인생 탐구자. 제1부에서는 학문에 대해서 절망을 느끼고 사랑에서 보람을 찾는다. 제2부에서는 미와 행위의 단계를 체험하고 승천한다.

메피스토펠레스: 파우스트 전설의 악마. 파우스트의 길동무가 되어 그의 영혼을 빼앗으려고 한다. 중간 무렵에 추하게 생긴 마녀 포르키아스가 된다.

바그너: 파우스트의 심부름꾼으로 공부를 하는 심리주의자. 제2부에서는 대학자가 된다.

마르가레테(그레첸): 청순하고 매력적인 서민의 딸.

헬레네: 그리스의 최고의 미인. 파우스트와 결혼한다.


d. 작품의 주요내용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존재다 

 참된 인간은 잠시 어두운 충동에 동요할지라도, 옳은 길을 망각하지 않는 법이다 

 항상 노력하는 자는 구원받을 수 있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파우스트 는 비극 제1부(1806)와 비극 제2부(1831)로 구성된 총 1만 2천여 행의 극시이다. 그 제1부만 놓고 본다면 다른 명작이나 다름없다. 파우스트의 사상적 고민, 거기서부터 자연과 인간생활에의 탈출, 그리고 그 유명한 그레첸의 비극의 사랑체험 등 작은 세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제2부가 되면  거대한 세계의 체험이 되면서 무대는 더욱 확대되는 것이다. 제1부의 그레첸의 비극에 대응하는 헬레나의 비극을 거쳐, 파우스트는 드디어 간척지를 개간하여 이상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그러나 제2부는 너무 난해하여 작가자신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썼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이 작품은 천상의 서곡으로 시작된다. 분량은 짧지만 작품 전체의 형이상학적 의미를 요약하고 있어 중요하다.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주님 앞에 나타나, 신의 걸작인 인간도 대단한 것이 못되며 허락만 한다면 신의 종인 파우스트마저 신에게서 뺏을 수 있다고 장담한다. 이 말에 신은 그가 지상에 살고 있는 한, 네가 무슨 짓을 하든 말리지 않겠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것이다라면서 파우스트를 유혹해도 좋다고 허락한다. 의기양양한 메피스토펠레스는 그 친구에게 쓰레기를 먹일 것입니다라고 말하는데, 이 말은 파우스트에게 무가치한 향락으로 유혹하여, 그의 영혼을 지옥에 떨어뜨리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물의 주인인 신이 왜 신의 위업을 부정하는 악마의 존재를 인정하는가 하는 문제도 여기에서 설명된다. 인간의 활동은 원래 이완되기 쉬운 것이어서 무제한의 휴식을 바란다. 때문에 나는 그들에게 매개물을 내세워 그들을 자극하고 재촉하는 악마로서의 일을 시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천상에서의 신과 악마와의 내기 대화를 통해, 인간의 욕구는 일시적으로 잘못을 낳을 수 있지만, 결국에는 신이 다스리는 세계의 질서와 조화하게 된다는 괴테의 낙관적인 신념을 드러내고 있다.


 제1부 

제1부의 막이 오르면서 하늘 위에서의 내기 따위는 전혀 모르는 파우스트 교수가 서재에서 독백하는 장면이 시작된다.  아! 어느새 나는 철학도, 법학도, 의학도, 게다가 쓸데없는 신학까지도 속속들이 연구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이 가엾은 바보꼴이구나, 그렇다고 예전보다 똑똑해진 나라는 인간은 조금도 현명해지지 않았다.  그는 우주의 본질을 규명하고자 인간의 지혜가 미칠 수 있는 모든 학문에 통달하였으나, 이에 실패했음을 한탄하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우주와 인간존재의 규명에 대한 학문적 노력에 회의를 느끼면서 새로운 충동을 느낀다. 즉 천국에 올라가고 싶은 욕망과 땅 위의 쾌락에 빠지고 싶은 욕망으로 번민한다. 그때 악마인 메피스토펠레스가 나타나 그를 땅 위의 쾌락으로 유도한다. 이 과정에서 파우스트는 악마와 목숨을 건 계약을 맺고 정욕의 세계로 빠져든다. 악마는 그의 종이 되어 그의 모든 소원을 들어주되, 만약 파우스트가 향락에 빠져서 정진을 그만두고 거기에 만족해버리면 그 순간에 그의 영혼을 빼앗아도 좋다는 것이었다. 즉 내가 어느 순간을 보고, 멈추어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  하고 말하면, 너는 나를 꽁꽁 묶어도 좋다. 그대로 나는 망해도 좋다.고 파우스트는 약속한다. 이리하여 파우스트를 타락시키고 그 영혼을 앗아가려는 악마와, 오히려 그 악마를 노예처럼 부리며 넓은 세계를 마음껏 체험하고 학문으로써 도달치 못한 우주의 근본이치를 규명해보려는 파우스트는 인생수업의 길을 떠나게 된다.

악마의 힘으로 젊어진 파우스트는 순수한 처녀인 그레첸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이것은 악마의 예상과는 달리 너무도 진실한 사랑이었다. 그리고 파우스트는 이 진정한 사랑을 통해, 지식보다 중요한 삶의 의미와 행복을 깨닫게 된다. 그는 그동안 자신의 내면에 잠재해 있던 사랑의 정열을 그레첸을 통해서 깨닫게 되고, 자아세계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된다. 그녀의 절대적 헌신성과 숭고한 사랑을 경험하면서 진정한 사랑을 인식하게 되고 보다 높은 차원으로 비상하는 계기를 맞게 된다. 악마의 농간으로 파우스트는 그레첸과 육체관계를 맺게 되고, 그레첸은 임신하게 되어 사생아를 살해한 죄로 감옥에 갇힌다. 파우스트는 그레첸에게 함께 도망가자고 설득하지만, 그녀는 이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린다. 하늘로부터 그 소녀는 구원되었다. 는 소리가 들리고, 승천하는 그레첸은  하인리히! 하인리히! 하고 파우스트를 부른다. 이러한 그레첸의 구원은 인간의 어떠한 죄도 진실한 인간성과 양심으로써 정화될 수 있다는 괴테 특유의 종교관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이렇게 해서 제1부는 막을 내리고, 파우스트와 그레첸의 영원한 인간적인 사랑이 다음 제2부의 마지막에서 파우스트를 궁극적으로 구원하는 열쇠가 된다.


 제2부

제2부는 5막으로, 제1부에 비해 내용이 훨씬 복잡하다. 제1부가 주인공의 가슴 속에 사는 두 영혼의 상극, 사랑의 기쁨과 거기에 유래하는 죄라는 개인적 체험(소세계)을 주요 테마로 하고 있는 데 비해, 제2부에서는 주인공의 개인적인 세계가 아닌 넓은 외부세계(대세계)와의 접촉을 통해 성장해가는 도정이 그려진다. 

파우스트와 악마는 신성로마제국의 궁전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파우스트는 재정난에 빠진 로마제국을 위해 지폐를 마구 찍어내게 하여 위기를 극복하고 황제의 궁정에서 영화를 누리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는다. 황제는 파우스트를 현자로 믿고, 그리스의 대표적 미남미녀인 파리스와 헬레네를 불러내보라는 분부를 한다. 이에 따라 파우스트는 악마와 상의하여 우주의 끝에 가서 헬레네의 형태만을 불러온다. 헬레네를 사랑하게 된 파우스트는 그녀를 소생시키기 위해 고전미의 세계인 그리스로 간다. 이 장면에서는 특히 괴테의 해박한 지식과 기발한 상상력이 종횡무진으로 발휘되고, 전대미문의 스펙터클이 벌어진다. 이곳의 묘사는 극의 진행과는 직접 관련이 없지만, 괴테의 세계관과 그리스의 미의 발생과정이 엿보인다. 드디어 현실의 연인이 된 헬레네는 파우스트와 결혼하여, 그들 사이에 오이포리온이 태어난다. 이 오이포리온은 영국의 천재시인 바이런을 암시하고 있다. 이 아이는 즉시 날 수 있게 된다. 자, 저를 뛰어오르게 해주세요, 아무리 높은 공중에서라도 치솟고 싶은 것이 저의 소망입니다. 벌써 그런 소원에 사로잡혀버렸어요 하며 하늘 높이 날아다니다가 그리스의 이카루스처럼 언덕에 떨어져 죽는다.

오이포리온의 죽음을 계기로 파우스트와 헬레네의 사랑도 끝을 고한다. 행복과 아름다움은 줄곧 합쳐 있을 수 없다는 옛말이 섭섭하게도 이 한 몸으로 증명되었습니다라고 헬레네는 말한다. 그리고 그 여자의 육신은 사라지고 의상과 면사포만 그의 팔에 남는다.

그러나 고전주의적 세계의 방문으로 이상이 풍부해져서 돌아온 파우스트는 미적 탐닉으로 이루지 못한 만족을, 인류사회의 공익을 위한 자신의 헌신적 노력으로써 얻으려 한다. 이 지구에는 아직도 위대한 일을 할 여지가 남아 있어. 놀랄 만한 일을 해내겠다. 사업이 전부일 뿐 명성은 허무한 것이다고 말하며 건설사업에 착수한다. 그는 황제로부터 광대한 습지를 받아 개간하여 만인을 위한 옥토로 만들어보려는 의욕에 불탄다. 그리하여 그는 자유로운 민중과 함께 자유로운 토지에서의 삶을 꿈꾸고 전력을 다해 노력함으로써 지상에서의 정신적 만족을 얻는다. 100세가 된 파우스트는 요녀가 뿜어낸 입김으로 눈까지 멀어 앞을 보지 못하게 되지만, 마음의 눈은 더 밝아져 그때야 비로소 인생의 참된 의의를 발견한다. 이제 곧 완성될 새 땅에 오곡이 무르익고 만백성이 살아갈 모습을 상상하고 행복한 예감에 싸여,  자유도 생명도 싸워서 차지하는 자만이/그것을 누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나는 그러한 인간의 집단을 바라보며/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백성과 함께 살고 싶은 것이다/그렇게 되면 나는 순간을 향하여 이렇게 부르짖어도 좋을 것이다/ 멈추어라, 순간이여, 너는 진정 아름답구나!라고.하고 숨을 거둔다. 악마는 당연히 파우스트의 영혼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결코 파우스트가 악마의 유혹에 빠져 향락이나 물질적 만족을 얻은 것이 아니라, 최후까지 시련을 잘 이겨낸 것이다. 그래서 그의 영혼은 구원될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때 하늘에서 천사들이 내려와, 항상 노력하는 자는 우리가 구원할 수 있다 고 약속하며 파우스트의 영혼을 악마로부터 보호하면서 그의 시체 위에 꽃송이를 뿌린다. 그러나 인간영혼의 궁극적 구원은 자력으로서는 한계가 있고, 천상의 은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괴테의 구원관이었다. 그의 영혼이 천국에 오르기까지에는 하늘로부터의 은총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때 속죄하고 있던 옛 애인이자, 단테에게 있어 구원의 여인상인 베아트리체에 해당하는 그레첸이 파우스트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성모 마리아에게 은총을 빈다. 성모는 그 기원을 들어주며 자, 이리 오너라, 보다 높은 하늘로 오르라! 그 사람도 너인 줄 짐작하면 따라오리라! 고 말한다. 뒤이어 영원히 여성적인 것만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신비의 합창으로 장편시극  파우스트 는 막을 내린다.


e. 감상 및 문학사적 의의

세계문학사의 거인 괴테는 유럽인으로서는 마지막으로 르네상스 거장다운 다재다능함과 뛰어난 솜씨를 보여준 인물이다. 그는 80년의 생애를 통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서 신의 경지를 넘나들었고, 사랑이나 슬픔에 기꺼이 그의 존재를 내맡기곤 했다. 내적 혼돈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일상적인 생활규율을 엄수하면서도 삶. 사랑. 사색의 신비가 투명할 정도로 정제되어 있는 마술적 서정시들을 창조하는 힘을 잃지 않았다. 마침내 그에게는 원하는 대로 창조력을 샘솟게 하는 자신조차도 신비스럽게 여긴 재능이 생겨나, 60년 가까이 노력해온 작품을 완성하게 되었다. 죽기 불과 몇 달 전에 완성한 파우스트 의 마지막 2행 영원히 여성적인 것만이 우리를 구원한다 는 인간존재의 양극성에 대한 작가자신의 감성을 요약한 말이다. 여성은 그에게 있어 남성의 영원한 인도자요, 창조적 삶의 원천인 동시에 정신과 영혼의 가장 숭고한 노력의 구심점이었다.


f. 파우스트적 인간

중세에 신에게만 향해졌던 사랑과 정열이, 르네상스 이후로 인간적이며 지상적인 것으로 지향하게 된다. 나아가 인간은 자연계의 비밀을 끝까지 탐구하려 하였고, 정신면이나 물질면에서 인간성을 확장하여 그 해방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간은 만족을 모르고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는데, 이런 인간을 가리켜  파우스트적 인간 이라 한다. 괴테는 이러한 파우스트를 영원히 생성. 변화되어가는 인간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당시 유행했던 인본주의적 사고방식의 영향을 받아 인간은 무한히 노력하고 발전할 수 있으며, 그러는 한 인간은 구원된다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작가는 파우스트의 형상속에 인간존재의 본질적인 사랑의 모티브를 적용시켜 인간한계의 극복과 구원의 문제를 제시했던 것이다. 자기의 영혼을 최고의 향락, 최고의 지식과 맞바꾼 전설의 파우스트 박사가 분에 넘친 욕망 때문에 파멸한 비극적 운명의 어두운 이야기를, 괴테는 밝은 빛으로 다시 조명하여 무한한 높이를 찾아 인간능력의 한계에 도전하며, 고난 속에서 정진을 계속하는 진취적 인생의 드라마로 바꿔놓고, 여기에 청순한 처녀 그레첸의 참사랑과 고전적인 헬레네의 이야기를 곁들여 근대문학의 최고 걸작품을 탄생시켰다.

이 작품은 심오한 깊이와 서로 뒤섞여 진행되는 구성으로 작품해석이 어려워, 오늘날까지 작품평가가 극히 어려운 상태이나, 문학언어의 가능성을 전대미문의 방식으로 완벽하게 보여준 극이라는 점에서는 비평사들의 견해가 일치한다.


g. 신의 은총에 의한 인간구원

그러나 독자들은 악마에게 혼을 판 파우스트가 어떻게 구원될 수 있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결국 이 작품에서 파우스트의 영혼구원의 문제는 대두될 수밖에 없다. 이 문제에 대해 만년의 괴테는 파우스트를 천상으로 인도하는 천사들의 노래인 영의 세계의 귀하신 분이/악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언제나 노력하며 애쓰는 자를/우리는 구할 수가 있습니다/게다가 이분에겐 천상으로부터의/사랑의

은혜가 관여하여 왔으니/축복받은 사람들의 무리가 진심으로 환대할 것입니다 의 구절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시구 속에 파우스트 구원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있다. 파우스트 그 사람 속에는 점차로 높은 차원에 올라가 순수하게 되는 활동이 마지막 날에 이르기까지 행해지고, 또 하늘로부터는 그를 도우려고 하는 영원한 사랑이 내리고 있다. 그것은 우리들의 종교적 관념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고, 그것에 따른다면 우리는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 하늘의 은총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은총이 내려질 때 그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C11 – 구토 (La Nause) /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

(출전 :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노벨 문학상을 거부하며, 끊임없는 사유와 참여를 통해 영원한 자유를 꿈꾸던 마지막 휴머니스트, 사르트르가 쓴 첫 번째 문학작품. 로캉탱이라는 역사 연구가의 일기 형식을 빌어 주인공이 존재의 무상성을 자각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이 형이상학적 소설은, 사르트르 초기 실존주의의 단초를 보여준다. 철학자. 극작가. 시사평론가 등 다방면에서 왕성한 활동을 했던 사르트르의 소설가로서의 면모가 가장 완결된 형태로 구현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a. 생애와 작품활동

노벨상 거부, 보부아르와의 계약결혼, 마르크시즘과의 동반 및 결별, 행동하는 지식인, 1980년 사망시 전세계의 추모 등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사르트르는 2차대전 후 개인의 자유와 인간의 존엄을 외쳐, 전세계적인 영향을 끼친 20세기 최후의 지식인이었다.

사르트르는 해군장교 출신의 부친과 적도의 성자 시바이처의 사촌인 어머니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1년 만에 부친이 별세하여 그는 외가에서 자랐는데, 독일어 교사이나 독서가인 할아버지 아래서 문학적 소양을 키웠다. 3세 때 오른쪽 눈을 거의 실명하여 말년의 불행이 이때 잉태되었다. 19세 때에는 파리의 수재들이 모이는 파리의 고등사범학교에서 레이몽, 아롱, 메를로-퐁티 등을 만나게 되고, 23세 때 수석으로 졸업한다. 그러나 교사자격 시험에는 낙방하여 1년 후에 수석으로 합격하였는데, 이때 전후 세계여성의 지성의 상징인 시몬 드 보부아르( 제2의 성의 작가)는 차석으로 합격하여, 이들의 운명적 만남은 시작된다. 세간의 화제를 뿌린 이들의 계약결혼은 애초 2년이었으나 2년후 재계약시 사르트르가 장기계약을 요청해, 결국 이들의 동반자적 관계는 80년 사르트르가 별세할 때까지 50년간 지속된다(이들은 이생을 통해 서로에게 완벽한 자유를 허용하며 문학적. 정서적 반려자가 되었다).

28세에는 베를린에 유학하여 후설의 현상학과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을 접하고, 인간존재의 총체적 이해를 가능케 하는 인간학의 정립을 모색했다. 이 시기에 상상력 자아의 초월 등을 썼는데 그의 사상적 기초는 이때 형성되었으며, 이후 1938년 존재론적인 우연성의 체험을 그대로 묘사한 듯한 장편소설 구토 를 발표하여, 철학이 뒷받침된 대담한 주제로 주목을 받았다. 그는 당시 신이 없는 세계에서 인간의 자유를 추구하고 있었는데, 그의 초기철학의 완결판이라 할 수 있는 존재와 무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기념비적인 대작이 되었다. 이 책은 철학서 사상 유례가 없는 성공을 거두어 이 책 한 권으로 중학교 교사에서 가장 혁명적인 철학자로서의 위치를 확립하게 되었다. 그는 2차대전중 소집되어 포로가 되었다가 석방되었으며, 퐁티 등과 레지스탕스 조직을 만들어 독일의 나치즘에 저항하기도 하였다. 1945년 잡지 <현대>를 만들어 문학. 철학은 물론 정치. 사회의 모든 문제를 포괄하는 광범위한 사상운동을 전개하여, 그의 존재는 전후 혼란기의 젊은이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후는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통해 사회 참여문학(앙가주망)을 제창한 시기였다. 당시는 미. 소의 심한 대립이 세계의 정치상황을 지배하고 있었는데, 그는 제3의 길을 모색하여 혁명적 민주연합 이라는 운동에 적극 참가했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 행동은 거의 소득이 없었다. 그 무렵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던 장편소설 자유를 위한 길 이 미완성으로 끝난 것은 이 때문이다. 이후 제3의 길을 완전히 버리고, 긴 논문 공산주의자와 평화에서 공산주의를 평화의 기수라고 강조한 후, 공산당의 동반자가 되어 반전 평화운동에 참가하였다. 1950년의 한국전쟁으로 인해, 그는 함께 일해오던 메를로-퐁티, 카뮈 등과 결별하게 된다. 퐁티는 공산주의 국가가 침략행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곤혹스러워한 반면, 사르트르에게 한국전쟁은 제국주의에 맞서는 사회운동 일 뿐, 중요한 것은 공산당을 중심으로 좌파 지식인이 뭉치는 것이었다. 공산주의를 평화의 기수로 보았다. 1956년 소련공산당의 스탈린 비판과 헝가리 의거, 그후의 알제리 독립전쟁 등이 일어날 때마다 자기의 입장을 표명하여 그때마다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알제리 독립전쟁시 식민지독립을 지지한 것은, 제3세계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 1964년에는 자전적 소설 말로 노벨 문학상의 수상자로 결정되었으나 노벨 상이 서구작가들에 치우쳐 공정성을 상실했다는 이유로 거부하였다. 말년에는 하나 남았던 왼쪽 시력까지 약해져 독서는 물론 집필도 못했다. 그는 작은 키에 유머 감각으로 남을 잘 웃겼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여 누구에게나 호감을 샀으며, 자기의 신념을 가지고 싸울 때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싸웠다. 1980년 4월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세계 언론이 대서특필한 사르트르의 죽음은 한 철학자의 죽음도, 한 소설가의 죽음도, 한 극작가의 죽음도 아닌, 한 시대를 마감한 최후의 지식인의 죽음이었다. 그가 죽은 해에 그를 추모하는 세미나. 심포지엄 등이 전세계적으로 개최되었는데, 서울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해 9월 이화여대 강당에서 열린 사르트르 추모 강연회는 극우반동의 도시 한복판에서 새로 나온 극좌 지식인에 대한 구애와 애도의 목소리라는 점에서 놀라운 일이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수만 명이 참석하여 빅토르 위고의 장례식을 연상시켰으나, 참석자들은 대부분 보통 사람들이었고, 사르트르가 항상 그의 글로써 권리를 지켜준 사람들이었다.


b. 사르트르의 실존철학

실존주의문학의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구토는 사물의 존재에 직면했을 때의 불안과 실존의식을 묘사하면서 인간존재의 부조리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는 이런 불합리한 존재를 깨달았을 때의 느낌을 구토 라고 표현하였다. 독자들은 이 소설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작품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실존. 자유. 주체성 등의 개념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개념들은 그의 방대한 철학서인 존재와 무에 제시되어 있다.


c. 실존주의

실존이란 원래 본질에 대한 현실 존재라는 뜻이다. 본질은 무엇이냐?를 문제삼지만, 실존은 가능성을 문제삼는다. 현실 존재는 물건의 경우에는 상대적이지만, 인간존재의 경우에 있어서는 절대적이다. 물건이나 동물인 경우에는 서로 바꿀 수도 있고 얼마든지 대신할 수도 있지만, 인간은 남과 대신될 수가 없다. ‘나’라는 무엇인가, 나 라는 개인,  나 라는 주체는 남과 절대로 바꿀 수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이며, 그 자체가 독립하여 존재하는 단독자다. 키에르케고르는 절대로 남과 바꿀수 없는 단독자, 즉 있는 그대로의 엄연한 본래적인 자기를 실존이라 불렀다. 이런 의미에서 실존철학이란 인간이 자기초월에 의해서 불안과 절망을 극복하기 위한 철학이요, 위기상황에 직면한 인간이 본래적 자기를 되찾으려는 자기회복의 철학이다.


d. 사르트르의 실존철학

사르트르에게서 실존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요, 다른 하나는 ‘실존은 주체성이다’이다. 니체, 하이데거, 사르트르 등의 무신론적 실존주의가 등장한 후, 기독교의 창조론적 세계관이 의심받자 이들의 반격은 인간이 신의 피조물이 아니라면 도대체 인간의 본질이 무엇이냐였다. 이에 대한 대답은 한마디로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존재 그 자체는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의식이 있는 존재(대자적 존재, 인간)와 의식이 없는 존재(즉자적 존재, 사물)로 나눌 수 있다. 책상의 겨우 미리 정해진 설계도에 따라 목수의 의도대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본질이 실존보다 앞선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는 그 행동이 순간순간 변화하게 되어, 잠시 후에 어떤 행위를 할지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본질이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의 경우 실존이 본질보다 앞선다 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로부터 인간의 본질을 미리 생각하고 규정해서 만들어낸 존재, 즉 신은 없다. 왜냐하면 신이 존재한다면 인간은 신의 의도를 따를 것인데, 그렇지 않고 순간순간의 행동을 자신이 창조해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 인간을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행동이 가능한 주체적 존재로서 파악하였다. 자유로운 선택과 결단에 의해서 자기 운명을 스스로 책임지며 살아가는 행동적 실존으로서 인간을 파악하였다. 즉 실존은 주체성이다 라고 주장하였다.


e. 작품의 주요내용

실존주의 문학을 창시한 이 소설은 소설 속의 주인공인 역사학자 로캉탱이 외계의 사물이나 인간에게서 느끼는 구토감을 일기로 극명하게 기록하고,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추구한 일기형식의 소설이다. 30대의 역사학자 앙트완 로캉탱은 연금을 받아 생활하고 있다. 그는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다가 지금은 부빌이라는 도시의 도서관에서, 18세기 프랑스 혁명기의 인물들의 전기를 정리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어느 날 물가에서 물수제비뜨기 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의 흉내를 내려고 돌을 집는 순간, 갑자기 구역질 같은 것을 느끼고 손을 떼고 만다. 이 손 안의 구역질 은 그 뒤에도 그를 자주 엄습한다. 그때마다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그는 1932년 1월 말부터 약 1개월간 이러한 내용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그의 생활은 무미건조한 나날들이었다. 그가 하는 일이란 기껏해야 로르봉 후작에 관한 자료들을 정리하거나, 카페에서 들려주는 언제나 가까운 날에 란 음악을 듣는 것이 고작인, 그야말로 혼자만의 생활이었다. 간혹 그는 일상생활에 안주하는 사람들을 살피기도 했고, 이 지방 특유의 것을 알아내기도 했다. 그는 자기자신의 과거를 생각하면서 그가 살아온 것은 경험이 아니라 말의 잔해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과거와 합일점을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자기자신은 과거의 그 어느 곳에서도 정착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의 일을 할 수 없다는 자괴감에 빠져, 그는 정녕 한 사람의 전기를 쓸 수 없다고 판단하기에 이른다. 그가 이러한 난해한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옛날 자신과 헤어졌던 여인이 파리에서 만나자고 편지를 보내온다. 그녀는 예전에 완벽한 자아의 충실을 기대하며 꿈꾸던 여인이었다. 그는 옛 여인을 만남으로써 자기에게 희망이 생길 수 있을 것이라는 한가닥의 희망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에게 기묘한 감각은 쉴 사이 없이 일어난다. 그의 손이 닿거나 눈길만 주어도 일어나는 이상한 감각은 그의 몸을 떠날 줄 모른다. 그리고 강력한 증오감과 함께 구토를 동반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그는 공원의 벤치에 앉아 마로니에의 나무뿌리를 보며 명상에 잠기다가 마침내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구토의 정체를 알아내게 된다. 그가 마로니에라는 나무뿌리를 생각했을 때, 마로니에 나무뿌리는 그 마로니에 나무뿌리라는 말의 형체를 벗고, 모든 부위를 통해 그의 몸으로 침입해 들어온다. 구토란 인간이나 사물의 언어에 의해 성립되는 의미나 본질을 박탈당하고 괴물처럼 흐물흐물한 무질서의 덩어리였다. 또는 무섭고 음탕한 벌거숭이의 덩어리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언어 이전의 체계였고, 세계를 체험한 본질의 것이었다. 그가 드디어 생각해낸 것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물은 전혀 존재 이유를 가지지 않고, 또 존재의 의지조차 가지지 않은 채 단지 사실상 우연히 거기에 존재할 뿐이라는 것, 즉 하나의 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생명의 본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도 이러한 생명체인 이상은 어쩔 수 없는 실존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옛 여인 아니를 만나게 된다. 그녀도 이제는 그 실존의 정체를 알아내고 그녀가 꿈꾸던 완벽한 순간을 단념한 채, 단지 살아 있는 고독하고 비만한 여인이 되어 있었다. 그는 전기집필을 포기하고 부빌을 떠나 파리도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된다. 그는 언제나 가까운 날에를 들으며, 소설을 집필하는 행위가 부조리와 대항하는 정당한 방법임을 알고 또다시 새로운 희미한 희망을 품게 된다. 즉, 모든 존재에는 존재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여 깊은 절망에 사로잡히나, 소설을 쓰는 것이 하나의 구제가 될지도 모른다는 가느다란 희망을 가지면서 이 소설을 끝맺는다.


f. 감상 및 문학사적 의의

이 작품은 부빌이라는 가공의 도시를 중심으로 역사학자인 앙트완 로캉탱의 일기형식을 빌려 쓴 작품이다. 그는 바닷가에 널려 있는 조약돌이나 문의 손잡이 따위 등에도 구토를 느끼는 인물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인간의 내면의식을 추적해가는 과정이 이 작품의 주요 줄거리이다. 그는 또 외계의 사물이나 인간에게서 자신이 느끼는 현실을 토해버리고 싶은 진한 구토감을 일기에 상세히 기술한다. 여기서 구토란 바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물이 어떠한 존재 이유도 없이, 나아가 존재의 의미마저 없이 다만 사실상 그곳에 존재하는 여분의 것 이라는, 존재의 실상에 대한 징표라 할 수 있다. 즉, 그는 모든 존재에 대하여 존재이유를 부정하는 깊은 절망감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궁극적으로 그가 찾아낸 이러한 인간의 절망감을 해소하는 방안이 소설을 쓰는 것이라고 희미한 희망을 갖게 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 이 세상을 새롭게 인식하면서 겪게 되는 어둠을 그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구원의 희망을 품는다. 음악은 물질성이 전혀 없는 순수존재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구체적인 사건에는 관심이 없고 주인공의 인식의 변화에 초점을 둔 작품이다. 카뮈는 사르트르가 삶의 추함을 과장했다고 생각했다. 어떤 이들은 에로틱한 대목들이나 여성을 죽은 뱀의 가느다란 입으로 비유한 것과 같은 소름끼치는 표현에 충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사르트르의 삶에 대한 고발의 힘을 인정했으며, 인물과 길거리들의 독특한 냄새와 같은 그의 관찰의 신기함과 정확성을 인정했다. 그들은 또한 별 차이가 없는 나날 속에 사로잡힌 영혼들의 우둔함과 걸음걸이를 느꼈거나 보았다. 여기에 집요하게 들려오는 하나의 새로운 목소리가 있다고 그들은 동의했던 것이다. 한편 이 작품은 우리가 읽어서는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시적인 것과 형이상학적인 것이 서로 혼합되어 있는데, 현대작가들 사이에서 이 작품은 프랑스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고 꼽히고 있다.  구토는 사르트르가 주장하고 있는 사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그것은 그의 사상이 실존과 존재의 부조리 및 삶의 형태를 비롯한 인간의 깊은 절망감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g.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세기적 계약결혼

20세기 대표적 지성들인 이들의 계약결혼은 사르트르의 제안으로 우선 2년간 살아보고, 좋으면 재계약한다는 조건으로 이루어졌다. 결혼식도 하지 않고,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아 자식도 두지 않는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결혼 모델이었다. 공동생활의 이점은 취하되 단점은 버리는 가운데, 서로에게 완벽한 자유를 허용하면서 50년 동안 확고한 애정관계를 유지했다. 둘은 작품활동에서나 사회활동에서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했는데, 그들은 생활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해 상대방에게 서로가 겪은 일을 모두 털어놓았다. 그들이 평생 동안 한지붕 밑에서 잔 것은 딱 하루뿐인데, 보부아르의 표현을 빌면 그날 일은  우연한 사고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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