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  성인불인  이백성위추구

芻狗①쓸데없이 되어 버린 물건(物件)의 비유(比喩ㆍ譬喩)  ②짚으로 만든개/芻(刍)(추,chú) 꼴, 풀을 베다, 보잘 것 없는/狗(구,gǒu)개


天地之間其猶橐籥乎.  虛而不屈, 動而愈出.  多言數窮, 不如守中.

천지지간기유탁약호   허이불굴  동이유출   다언수궁  불여수중

猶(유)오히려,(요)움직일/橐(탁,tuó)전대/籥(약)피리/屈(qū, 굴)굽을, 억울하다, 원통하다, 굴복하다, 이치에 어긋나다, 불합리하다/愈(yù,유)병나을, 뛰어넘을, 낫다, 능가하다, ~하면 할수록 ~하다愈多愈好


- 참조 : 천지는 어질지 않아, 모든 것을 풀강아지처럼 다룬다. 성인은 어질지 않아, 백성을 풀강아지로 다룬다. 천지 사이는 풀무와 같은 것인가. 비어있으나 그침이 없고, 움직일수록 거세어진다. 말이 많으면 자주 막히니, 힘써 비워둠만 못하다.


- 참고자료 : ▷ 천지는 인자하지 않다. 만물을 풀강아지처럼 다룰 뿐이다. 성인은 인자하지 않다. 백성을 풀강아지처럼 다룰 뿐이다. 하늘과 땅 사이는 꼭 풀무와 같다. 속은 텅 비었는데, 찌부러지지 아니하고 움직일수록 더욱 더 내뿜는다. 말이 많으면 자주 궁해지네. 그 속에 지키느니만 같지 못하네.


* 자연(自然)이라는 말은 노자가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노자는 자연을 명사로 말한 적이 없다. 명사가 아니라는 것은 그것이 하나의 독립된 실체적 개념이 아니며 단지, 어떠한 사태를 기술하는 문장형태를 갖춘 것이라는 것이다. 모든 문맥에서 그것은 어김없이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뜻일 뿐이다. 쉼이 없이 변하는 집합체일 뿐이다.

* 어떤 존재이든지를 불문하고 그 존재방식이 “스스로 그러하면” 곧, 그것은 자연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이 스스로 그러할 때는 그것이 자연이다. 스스로 그러하다는 뜻은 인간의 언어적 조작의 한계를 벗어나 있다는 뜻이다. 노자가 말하는 “스스로 그러함”은 바로 만물의 존재방식이 “빔”을 극대화시키는 방식으로 유지될 때 스스로 그러하다는 것이다. 즉 항상 도는 스스로 그러할 때, 빔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 스스로 그러함은 존재의 자연이다. 여기서 우리는 허와 무위와 자연이 하나로 노자철학에

관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도(道)의 쓰임(用)이다.

* 영어에 해당하는 자연(Nature)은 천지(天地)이다. 하지만, 동양에서의 천지는 하늘이란 형체 없음을 이름하는 것이요, 땅이란 형체 있음을 이름하는 것이다.

* 옛사람들은 나의 몸의 하늘을 혼(魂)이라 했고, 나의 몸의 땅을 백(魄)이라 했다. 그리고 또 나의 몸의 하늘을 신(神)이라 했고, 나의 몸의 땅을 정(精)이라 했다. 그러므로 정신은 내 몸의 하늘과 땅을 같이하는 것이다. 정신은 마인드가 아니고 몸이다.

* 노자는 말한다. 천지는 결코 인간을 위해서 존속하는 것이 아니다. 천지는 스스로 그러함에 자신을 맡길 뿐이다. 그래서 함이 없고, 조작함이 없다. 만물은 스스로 서로 다스리며 질서를 유지한다. 그러기 때문에 인자하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인자하게 되면 반드시 조작하고 편들어 세우고 베풀고 변화시키고 하는 따위의 장난이 개입된다.

* 땅은 짐승을 위하여 풀을 생하지 않는다. 그런데 짐승은 풀을 먹는다. 천지가 만물에 대하여 조작적인 함이 없으면 만물은 제작기 그 쓰임을 얻을 뿐이다. 그리되면 넉넉하지 않음이 없게 된다.


- 준이해석 : 천지는 인仁하지 않아, 만물을 하찮게 여기고, 성인은 인하지 않아 백성을 하찮게 여긴다. 천지 사이는 풀무를 능가 하는가 ? 허하나 굽히지 않고, 동하면서 더 나온다. 말 많음이 더 궁하게 만드니, 가운데를 지키니 만 못하다.


- 준이생각 : 천지와 성인은 왜 불인할까, 왜 그래서 만물을 하찮게 만들고 백성을 하찮게 만드는 걸까?  맹자에서 본 성인은 인의의 도를 우직하게 걸어가는 거인인데 백성을 하늘처럼 여기는 사람인데 하는 마음으로 보니, 아 여기에 맹자와 노자의 가리키는 방향이 틀리구나 하는 부분이란 생각이 든다. 노자가 말하는 성인은 천지와 같은 사람이고 이는 도올의 설명을 보자면 ‘자연’그 자체가 되는 사람이다. 무위, 허, 그러하니 짐짓 의도적으로 이러쿵 저러쿵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래서 비어 있지만 굽히질 않고 움직이면서도 솟아 나온다는 것이 아닐까? 그러하니 추구(꼴로 만든 개, 쓸모 없는 것)이나 이 세상에 존재 하게 되는 것이고 있는 그 자리 그 시간에서 나름의 삶, 또는 동기를 스스로 가지게 되는게 아닐까, 그러면서 자연과 하나가 되고 또한 전체가 자연이 되는 것이리라. 이러쿵 저러쿵 말을 많이 하게 되면 오히려 많은 (쏟아 놓은 )말로 곤궁에 빠지는 것처럼 차라리 중앙中을 지키니 못하다는 뜻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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