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谷神不死,是謂玄牝.  玄牝之門,是謂天地根. 綿綿若存, 用之不勤.

   곡신불사 시위현빈   현빈지문 시위천지근  면면약존  용지불근

谷(곡 gǔ)굴,곡식,(욕)나라이름,(록,녹)벼슬이름/곡식,조,쌀,계곡,궁지/牝(빈 pìn) (조류)암컷/綿綿 끊임 없음/綿(면 mián)솜,이어질,이어지다, 휘감다, 유연하다,부드럽다,풀솜/若(ruò,약) 만일, 만약,~와 같다,~인듯하다, 너, 당신/勤(qín)은근할 근, 부지런할 근, 부지런하다, 빈번하다, 고생하다, 정성을 다하다


- 참고1 : 골짜기의 넋은 죽지 않으니 이를 가리켜 알 수 없는 암컷이라 한다. 알 수 없는 암컷의 문은 말하자면 하늘과 땅의 뿌리이다. 있는 듯 없는 듯 이어지나,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는다.


- 참고2 : “绵绵若存, 用之不勒” 老子的养身之道————叧类解读《遣德经》之十二

“谷神”在《道德经》第六章中只能解读为“神奇的性欲”。然而,古往今来却很少有学者如此解读,以为这样就会损害老子的伟大形象。我认为谈论“性”并不低俗是极为正常的事,古今中外都是如此。而我们当今的某些学者硬要将“谷神”解读为“神奇的空间”,这样刻意粉饰古人,只能是惚忧当今遗害千秋。我们应给子孙留下一面清晰明亮的镜子,而不是留给他们-个永远也打不开的“空宝盒”。

《道德经》第六章应是老子在弟子们面前谈论性与玄牝的奇妙关系,并告诫弟子们性生活不要纵欲。

以下是《道德经》第六章原文及译文。

原文:谷神不死,是谓玄牝。玄牝之门,是谓天地根。绵绵若存,用之不勤。

译文:神奇的性欲不会死去,是因玄妙女性生殖器的缘由。玄妙女性生殖器这门学问,是连接天地造物的根本。性欲这玩艺绵绵不绝总是有,用就不要太勤。

再下是当今国学大师张松辉先生《道德经》第六章译文:空间的神妙作用是永远不会消失的,它好像-个玄妙的母体。而这个母体的生殖器官,就是产生天地万物的根源。空间永远存在着,(人和物)使用它而又看不见它。


- 참고 3 : 綿綿若存,用之不勤。

細密綿長若有若無的存在,它的作用無為而不會勞苦。

綿綿:細微柔弱之狀,此形容「玄牝」的狀態,似有若無,因此說「若存」,它的存在好像有,又好像沒有。

不勤:勤為勤勞,勞苦的意思。不勤,不勞苦,形容無為自然。或言勤為堇之假借,做「覲」解,見的意思。用之不見,指的是日常使用但卻不見其形狀。這個解釋雖然可通,但並不適當。《老子》中「見」字相當常見,沒理由再以「勤」字做假借。而「勤」字共出現三次,除了本章之外,四十一章「上士聞道,勤而行之」,五十二章「塞其兌,閉其門,終身不勤。開其兌,濟其事,終身不救」。綜觀之,勤做為勤勞之勤來解釋三章都可通,不需假借之後再將三章的勤字做三種不同的解釋。河上公、王弼也都作勤勞、勞苦解。河上公:「不當急疾勤勞也。」王弼:「用而不勞也。」



- 참고자료 : 계곡의 하느님은 죽지 않는다. 이를 일컬어 가믈한 암컷이라 한다. 가믈한 암컷의 아랫문, 이를 일컬어 천지의 뿌리라 한다. 이어지고 또 이어지니 있는 것 같네.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는 도다.

* 자태를 뽐내는 봉우리보다 자태를 감추고 있는 계곡(골)이 더 본원적이요, 더 본질적이요, 더 본연적이며 도의 모습에 가까운 것이다. 봉우리는 양(陽)이요, 계곡은 음(陰)이다. 노자는 남자의 그것보다는 여자의 그것이 우주의 본질에 가깝다고 간파한 것이다.

* 우주적 성기의 모습에 대하여 노자는 “면면(綿綿)” 이라는 하나의 상징어를 사용한다. 그것이 있다고 말하려고 하면 그 형체를 볼 수가 없고, 그것이 없다고 말하려고 하면 만물이 그로부터 생겨나고 있다. 그래서 있다고도 없다고도 말하지 않고, “면면히 있는 것 같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 준이해석 : 계곡의 신은 죽지 않는다. 이를 일컬어 현빈(검은 암새)이라 한다. 현빈의 문은 천지의 뿌리라고 일컫는다. 끊이지 않고 이어지며 존재하는 듯 하고, 그것을 씀에 노동하지 않는다(무위).


- 준이생각 : 아... 가능한 직역해 보겠다는 처음의 결심이 6번째 구절에서 벌써 벽에 막힌다. 암튼 검은암새(현빈)가 왜 계곡의 신인지 왜 그것이 불사이고 현빈의 문이 천지의 근원(뿌리)라고 하는지 열심히 여기 저기 눈팅하고 짧은 중국어 실력으로 중국의 내용을 찾아 봐서 컨닝을 한 결과 이것은 일종의 세상의 어머니쯤 되는 신기한(신묘한) 암생식기 정도로 보여 진다. 일종의 만물의 모태라고나 할까? 그런데 이것은 면면히(끊임없이 이어지며), 그것을 사용함에 있어 애써 뭔가 만들어 보려고 노동하는 것이 아니라 무위자연스럽다... 이렇게 풀어 보면 대충 맞을라나 모르겠다. 그리고 중간에 내 의견을 첨부 해 보자면 맹자 또는 유가는 인간의 삶의 철학에 대해 이야기 한다, 즉 타고난 본성에 귀 기울이고 이를 쫓아가면 인의의 도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되는데 이는 인간이 살아 가는 방식이다. 한 개인과 둘 이상의 인간 사회를 위한 철학이라면, 노자의 철학은 인간을 벗어난 자연에 대한, 즉 인간도 자연의 하나이며 또한 자연인, 세계관을 이야기 하는 것이라고 느껴진다. 유교 속에서 절망하고 포박 되던 인간들이 왜 도교를 통해서 영혼의 구원을 받는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추측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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