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01 – 변신 이야기(Metamorphoses) / 작가: 오비디우스(Publius Ovidius Naso, BC 43--AD 17)

(출전: 동서고전 200선 해제3 / 반덕진 / 가람기획)


 기독교와 함께 서양문화의 원천인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가장 충실한 안내서인 이 책은, 그리스로마 신화 중에서 신이 인간 또는 동물로 바뀌는 변신에 관한 내용 246편을 모은 신화집이다. 풍부한 상상력에 의한 회화적 묘사와 수려한 문체는 시공을 초월하여 끊임없이 서양인의 영감을 자극해왔다. 아울러 이 책은 인간의 본성을 탐사하는 탁월한 심리 분석서일 뿐만 아니라, 천지창조부터 로마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이르렀는가를 보여주는 로마사이기도 하다.


a. 황제의 개혁에 위반, 유배지에서 죽음

 <중세는 기독교와 오비디우스의 시대>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오비디우스가 그려낸 그리스 로마의 신화체계가 서구작가와 시인, 그리고 화가의 상상력의 원천이 되어왔다는 뜻이다. 로마 고전문학의 황금시대인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활약한 오비디우스는 호라티우스 베르길리우스와 함께 3대 시인으로 불린다.

진지하고 엄숙한 두 사람에 비해 인간성에 대한 그의 이해는 깊지는 않았지만, 시에 대한 기교와 상상력이 넘쳤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로마의 술모 출생인 그는 자신의 시에서 이 고향의 아름다운 들판을 애정이 넘치는 어조로 여러 번 언급하고 있다. 유복한 명문의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형과 함께 로마로 유학을 가서 법률과 수사학을 배웠다. 이 무렵 로마는 아우구스투스에 의한 천하통일로 그 유명한

<팍스 로마나(Pax Romana)>라는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평화와 번영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는 여기서 우수한 수사학자들에게서 배웠는데, 특히 화려한 기교를 가졌다고 알려진 아우렐리우스 푸스쿠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시에 대한 재질은 두드러졌는데 뒷날의 술회에 의하면 의회나 법정에서 할 연설문을 쓰려 해도 <말은 저절로 시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식의 출세를 바라는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계속 공부하기 위해 아테네로 유학했다. 그 당시 아테네는 상류층 젊은이들이 교양을 쌓기 위해 즐겨 찾는 장소였다. 돌아오는 길에 친구인 젊은 시인 아이밀리우스 마케르와 함께 소아시아에서 시칠리아 섬에 이르는 긴 그리스 여행을 했다.

  귀국 후 예정대로 법조계로 들어가 공직에 있었으나 이러한 딱딱한 직업은 원래 성미에 맞지 않아 시인들의 모임에 참가했다. 거기서 그는 풍족한 유산, 빛나는 기지, 노련한 사교술로 일약 사교계의 스타가 되었다.

  그의 시작활동은 먼저 당시 유행하던 연애시 분야에서 빛을 보기 시작했다. 코린나라는 여성을 중심으로 한 연애의 노래인 <사랑>이 출세작이 되었다. 이어 신화전설로 유명한 15명의 여인들이 그의 애인에게 보내는 편지형식을 통해 여성의 연애심리를 묘사한 <헤로이데스>(용감한 여인들)로 인기를 모았다.

  그러나 그 뒤에 쓴 그의 대표적인 연애시 <사랑의 기술>은 그의 명성을 높이는 동시에 풍기를 문란케 한 책이라 하여 일부의 비난을 사기도 했다. 그는 이 책에서 사랑에 대한 점잖은 교과서적인 가르침을 비웃으면서 <<보아주는 이 없는데 곱게 핀 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식으로 구체적인 연애기술, 활달한 사랑법을 가르친다. 남성에게는 여성을, 여성에게는 남성을 유혹하는 방법을 가르친 이 책은 한편에게는 <명쾌한 탁견>이었으나 다른 쪽에는 <경망한 말장난>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당시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추진하던 개혁과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 후 그는 이 시의 주장을 장난조로 철회한 <사랑의 치료법>을 발표했지만, 문제해결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뒤 연애시와 결별하고 장편서사시 제작에 몰두하여 대작 <변신 이야기> 15권을 거의 완성했고, 또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헌정할 예정으로 로마에서 전승되던 이야기와 종교행사를 제재로한 <달력>을 쓰던 중 AD 8년 갑자기 황제로부터 흑해연안의 토미스(지금의 로마니아 콘스탄차)로 추방되었다. 그 이유는 그의 <사랑의 기술>의 영향으로, 황제의 외동딸과 그녀의 딸인 율리아(동명)가 방탕해져 로마의 미풍양속을 뒤흔들자 이에 모욕감을 느낀 황제는 괘씸죄를 적용한 듯하다. 

  수도 로마에서 화려한 사교계와 안락에 젖어 있던 그에게 추방지에서의 생활은 매우 비참했다. 그러나 여러 차례 시도한 탄원도 보람없이 10년 동안 이곳에서 지내다가 죽었다.


b. 그리스로마 신화의 체계화 과정

 신화란 지극히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어 세계의 정신사상 중요한 역할을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다. 문학과 사상의 보고인 신화는 이성과 신앙의 중간에서 고유의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가 된다. 특히 우리는 그리스 신화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서는 서구 문학작품을 감상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스 신화를 모르고서 단테의 <신곡>과 밀턴의 <실락원>, 괴테의 <파우스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로마 신화를 인류의 공동재산으로 받을 수 있게 된 과정을 살펴보자.

  첫째 공로는 호메로스의 장편 서사시로 돌려야 할 것 같다. 호메로스는 두 편의 장편 서사시 <일리아드> <오디세이아>에서 그리스 신화를 체계적으로 서술한 것은 아니지만, 무엇보다도 그리스신과 영웅들을 생생하게 묘사함으로써 신화에 활력과 생명력을 주고 있다.

헤시오도스는 <신통기>에서 신권의 주재자인 우라노스와 크로노스 및 제우스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을 묘사함과 동시에 올림포스 신족과 그 자손 및 영웅의 계보를 정리하려 했다.

  그리스 신화는 이후에도 계속 <호메로스 찬가>, 핀다로스의 <경기 승리가> 등의 서정시로 노래되어, 그리스 3대 비극시인에게 제재를 제공한다. 즉,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등은 비극을 통해 신화와 전설을 그대로 전해줄 뿐만 아니라, 충분한 이성적 고찰에 의해 심화시킴으로써 후세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쳤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아는 그리스 신화에 대한 지식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서 체계화된 것이다. 이책이 불러일으킨 예술적 영감은 소설 시 그림 조각 등의 전 분야를 망라하고 낭만적인 연애를 동경하게 했다. 그는 이 작품에서 뛰어난 재치와 수사적 표현, 그리고 풍부하고 독특한 상상력을 충분히 발휘했다. 신들의 세계를 엿보고 이를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려 했던 오비디우스의 의도가 엿보이기도 한다.

  그동안 국내에서 출간된 그리스로마 신화관련 서적들이 기본 텍스트로 삼고 있는 토머스 불핀치의 저서 역시 이 책을 대부분 인용하고 있다.


b. 그리스로마 신화의 집대성

 <변신 이야기>는 15권으로 이루어진 장편 서사시로 여기저기 복잡하게 산재해 있는 그리스로마 신화들을 수집 집대성한 신화집이다. 이 이야기들은 그리스로마 신화 가운데 변신에 관한 이야기 246편을 모은 것으로, 혼돈이 질서로 변한 <천지창조>부터 케사르(시저)가 죽은 뒤에 별로 변하는 이야기까지(이것은 내전이라는 혼돈이 아우구스투스의 평화라는 질서로 바뀐 마지막 변형임) 연대순으로 나열되어 있다.

  이 책은 풍부한 상상력에 의한 회화적 묘사로 가득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신화의 세계로 이끈다. 이 책의 이야기는 모두 신이나 인간이 그 모습을 바꾸어 동물이나 식물로 변하는 변신 이야기들로서, 서구문화의 밑그림이라 할 신화 이야기들은 모두 이 책에 근거한 것이다. 우리는 이 책에서 특히 기독교의 인식체계에 물들지 않은 이전의 고대인의 순수한 세계관과 인간관을 접할 수 있다. 아울러 하늘이 열리던 아득한 때와 우리가 살고 현재 사이에 가로놓인 긴긴 세월이 소거되는 신선한 경험도 가능하게 된다.

  작품에 맨 먼저 등장하는 서사부터 시작하여, 맨 마지막의 결사에 이르는 동안 등장하는 변신 이야기, 즉 신이나 인간이 모습을 바꾸어 동물이나 식물로 변하는 재미있는 내용 중 흥미 있고 매력적인 몇 가지를 들어본다.


   서사

 마음의 원에 쫓기어 여기 만물의 둔갑 이야기를 펼치려 하오니, 바라건대 신들이시여, 만물을 이렇게 둔갑하게 한 이들이 곧 신들이시니, 내 뜻을 어여쁘게 보시어 우주가 개벽할 적부터 내가 사는 이날 이  까지의 이야기를 온전하게 풀어갈 수 있도록 힘을 빌려주소서.


   월계수가 된 다프네

 태양의 신 아폴론은 사랑의 신인 에로스(큐피드, 화살이 가득 찬 화살통을 가진 날개 달린 소년)에게 자신의 활솜씨를 자랑하며 에로스의 가느다란 활을 조롱한다. 화가 난 에로스는 그에 대한 복수로 2개의 화살을 쏜다. 하나는 황금촉 화살이고 다른 하나는 납촉 화살인데, 황금촉 화살을 맞으면 연심을 일으키고 납촉 화살은 연심을 식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에로스는 황금촉 화살은 아폴론의 심장을 향해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다프네를 향해서 쏜 것이다. 연심에 불타는 아폴론은 다프네에게 열렬히 구애했으나 다프네는 끝까지 거부한다. 에로스를 무시한 대가로 아폴론은 짝사랑의 고통을 맛보아야 했고 다프네는 아폴론이 따라다니는 것을 죽기보다도 더 싫어했다. 한번은 다프네를 뒤쫓던 아폴론이 다프네에게 바싹 따라붙자, 다프네는 아버지에게 둔갑의 기적을 애원하는 간절한 기도를 올린다. 그러자 다프네는 <월계수>가 되어 아폴론의 입술을 피할 수 있었다. 이에 아폴론이 탄식하고, 월계수로 승리의 화관을 만들어 쓰리라는 약속을 하자, 월계수는 이에 화답하여 고개를 숙였다. 이것은 인간이 식물로 변하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태양의 전차를 모는 파에톤

 또 다른 태양신인 헬리오스의 아들 파에톤은 헬리오스가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겠다고 하자 태양의 전차를 하루만 빌려달라고 했다. 위험한 줄 알면서도 약속인지라 어쩔 수 없이 내주었다. 대신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네 마리의 말이 달리는 전차의 고삐를 쥐고 신이 난 파에톤은 아버지가 준 주의를 까맣게 잊고 하늘에서 온갖 말썽을 부린다. 이런 파에톤을 보고 화가 난 제우스는 벼락을 내려 그를 전차에서 떨어뜨려 죽였다. 요정인 그의 누이들은 이를 슬퍼하다가 포플러 나무가 되었다.


   수선화가 된 나르시소스

 수다쟁이 요정인 에코는 미남 청년인 나르시소스를 사랑했다. 그러나 에코는 제우스가 다른 여자들과 밀회를 즐길 때마다 그의 아내인 헤라가 온다고 제우스에게 알려주었다. 화가 난 헤라는 에코에게 남보다 말을 먼저 할 수는 없고, 상대방이 한 말의 마지막 말만 되풀이 할 수 밖에 없게 만들어버렸다.

  그리하여 에코는 나르시소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전달하지 못하자 하루가 다르게 여위어가고 마침내 육체는 사라지고 목소리만 남게 되었다. 실연의 고통으로 몸부림치던 에코는 복수의 여신인 네메시스에게 복수를 빈다. <<제가 그를 사랑했듯이 그 역시 누군가를 사랑하게 하소서. 하시되 이 사랑을 이룰 수 없게 하소서. 이로써 사랑의 아픔을 알게 하소서. >>

  네메시스는 그녀의 간청을 받아들여 나르시소스에게 헬리컨 산의 샘에 비친 자기 모습을 들여다보는 운명을 지운다. 나르시소스는 그 샘을 들여다보면서 점점 자신의 모습에 도취되어갔다. 그는 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한 나머지 고통 속에서 몸부림쳤다. 마침내는 그의 젊음의 혈기도 시들어지고 육신도 사라졌다. 그리고 한송이 수선화가 되었다. 한편 나르시소스를 사랑했으나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사랑의 결실을 맺지 못한 에코는 죽은 뒤 <메아리>만 남겼다. 여기서 나르시시즘(narcissism. 자아도취)과 에코(echo, 메아리)란 단어가 생겼다.


   결사

 이제 내 일은 끝났다. 유피테르 대신의 분노도, 불길도, 칼도, 탐욕스러운 세월도 소멸시킬 수 없는 나의 일은 이제 끝났다. 내 육체밖에는. 앗아가지 못할 운명의 날은 언제든 나를 찾아와, 언제 끝날지 모르는 내 이승의 삶을 앗아갈 것이다. 그러나 육체보다 귀한 내 영혼은 죽지 않고 별 위로 날아오를 것이며 내 이름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로마가 정복하는 땅이면 그 땅이 어느 땅이건 백성들은 내 시를 읽을 것이다. 시인의 예감이 그르지 않다면 단언하거니와, 명성을 통하여 불사를 얻는 나는 영원히 살 것이다.


c. 서양 예술의 상상력의 원천

 사실 변신설화가 서양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나라에도 곰이 사람으로 변신하는 <단군신화>나 <전우치전>의 전우치는 비범한 도술로써 변신을 거듭하는 이야기가 적지 않다. <해모수 신화>의 해모수와 하백, <김수로왕 신화>의 김수로와 석탈해등은 자기 능력을 과시하여 상대방을 굴복시키기 위해 변신을 거듭한다. 그러나 역시 서양의 그리스 신화만큼 양적으로 풍부하지 못하고 질적으로 다양하지도 않다.

  본서는 1만 2천 행이 넘는 6행 시로 이루어진 라틴 문학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끊임없이 서양의 작가와 시인들의 영감을 자극해왔던 이 작품은 그 자체만으로도 그리스로마 신화집 역할을 하고 있다. 사실 <변신>이라는 주제의 선택은 오비디우스의 독창적 선택은 아니다. 라틴 문학 전통에는 민담이나 신화에서 따온 <변신>의 주제만을 모아놓은 여러 권의 저작이 있었다. 그중 기원전 2--3세기경에 활약했던 니칸드로 작품인 <변신>이 오비디우스의 작품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진다.

  그의 작품을 지배하고 있는 정조는 전성기의 영광을 누리던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귀족사회의 정조다. 작가는 일련의 <사랑>을 중심으로 한 작품들을 통해 자신감을 얻어 이 작품의 집필에 착수한다. 따라서 작품의 말미에서 그 자신이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 작품은 작가의 <불멸>에 대한 욕망에 의해 씌었다. 예를 들자면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신성화하기 위한 노골적인 의도가 엿보이는 케사르의 신격화라는 달갑지 않는 마지막 에피소드에 작가 운명도 살짝 끼워놓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d. 생동감 있는 신화의 세계

 그러나 작가의 자질은 분명하다. 천지창조에서 로마의 현재까지 작가가 연대별로 편집해놓은 신화들은 생동감으로 넘쳐흐른다. 특히 그의 자질은 여성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눈부시게 빛난다. 한 연구자가 지적하는 것처럼 이 작품의 빼어남은 <<우주적 현상과 개인의 운명 앞에서 거의 관능적인 방법으로 느끼는 감탄>>에 있다. 하루하루가 그저 그런 현대인에게 <운명 앞에서의 감탄>은 너무나 신선하다. 현대인이야말로 <변신>의 필요를 가장 많이 가진 존재들이 아닐까. 상업주의에 물든 가짜 신화들의 틈바구니에서 현대인은 이미 로봇이다. 이 책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신화>의 덕성, <근원으로의 회귀>에 대한 우리의 갈망을 일깨운다.


e. 서양예술의 원천

 오비디우스가 후세에 미친 영향은 그리스로마 신화의 안내자로서다. 특히 <변신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의 풍요로움에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매력적인 통로를 제공했다. 그래서 중세를 오비디우스의 시대라고도 했으며, 르네상스 이후 문학이나 회화의 모델이나 소재가 되었다. 특히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 셰익스피어의 <비너스와 아도니스> <한여름 밤의 꿈> 등은 여기에 원천을 두고 있고, 밀턴 괴테 등도 그를 좋아했다.

  최근 국내에 이 책의 완역본이 2권이나 출간되어 독자들이 그리스로마 신화의 진수를 맛볼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하나는 연세대 김명복 교수가 번역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94년 10월에 번역가 이윤기 선생이 번역한 것인데, 전자는 운문체인 원작을 그대로 번역하여 운문체의 맛을 살렸고, 후자는 매끄러운 산문체로 번역하여 소설처럼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이 방대한 저작을 유려한 문장으로 접할 수 있게

된 것은 우리 시대의 행운이 아닐 수 없다.

------------------------------------------------------------------------------------------------

그리스 신화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그리스 신화(-神話)는 고대 그리스의 신과 영웅, 우주관, 그리고 그리스 고유의 종교 의례와 의식 행위의 기원 및 의미에 대한 신화와 전설을 말한다. 그리스 신화는 고대 그리스 종교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현대의 학자들은 고대 그리스 문명의 신화를 토대로 한 연구를 통하여 고대 그리스의 종교와 정치 제도를 파악하고, 이러한 요소들이 신화로 만들어지게 된 생성 원리를 탐구한다.[1]


그리스 신화는 여러 이야기 모음집에서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도기 그림이나 봉헌물과 같은 구상 예술 작품에서도 내재적으로 나타난다. 그리스 신화는 세계의 기원과 신, 여신, 영웅과 같은 다양한 인물의 삶과 모험, 전설의 생물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구비 전승을 통해서 널리 퍼지게 된 것으로, 오늘날에는 그리스 신화를 그리스 문학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그리스 문학의 근원은 트로이아 전쟁을 다룬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이다. 호메로스와 비슷한 시대의 사람이었던 헤시오도스는 자신이 쓴 두 서사시 《신통기》, 《노동과 나날》에서 세계의 기원, 신들의 왕과 인간 시대의 변천, 인간이 겪는 불행과 제물 의식의 기원을 설명하였다. 그리스 신화는 서사시권에서 서사시의 일부인 호메로스 찬가, 서정시, 기원전 5세기의 비극 작품, 고전학자의 문서와 헬레니즘 시대의 시, 플루타르코스와 파우사니아스와 같은 로마 제국 시대의 저술가가 쓴 원문으로도 이어져 왔다.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드러난 여러 유물의 장식으로 표현되어 있는 신과 영웅들은 그리스 신화의 설명에 주요한 출처가 된다. 예를 들어 기원전 8세기경에 만들어진 기하학적 모양의 도자기에는 트로이아권과 헤라클레스의 모험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후 고졸기, 고전기, 헬레니즘 시대를 거치면서 나타난 호메로스 시가와 다양한 신화적 장면은 현존하는 문학 작품을 보충 설명하는 증거로 이용되고 있다.[2] 그리스 신화는 서양 문명의 문화, 예술,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오늘날 서양의 문화 유산과 언어 일부에도 그 영향이 남아있다.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인과 예술가들이 그리스 신화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으며, 신화의 주제가 동시대에 갖는 의미 및 관련성을 찾기도 하였다.[3]


목차  [숨기기] 

1 근원

1.1 문학적 근원

1.2 고고학적 근원

2 신화 역사의 개괄

2.1 신들의 시대

2.1.1 우주 생성론과 우주론

2.1.2 그리스 판테온

2.2 신들과 인간의 시대

2.3 영웅의 시대

2.3.1 헤라클레스와 헤라클레이다이

2.3.2 아르고나우타이

2.3.3 아트레우스 왕가와 테바이권

2.3.4 트로이아 전쟁과 여파

3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 개념

3.1 철학과 신화

3.2 헬레니즘과 로마 합리주의

3.3 융화하는 경향

4 현대적 해석

4.1 비교와 정신 분석적 접근

4.2 기원론

5 서양 예술의 주제

6 각주

6.1 1차 자료(그리스와 로마)

6.2 2차 자료

7 더 읽어보기

8 외부 링크

근원[편집]

그리스 신화는 오늘날 그리스 문학의 시작으로 알려져 있으며, 기원전 900년부터 800년까지에 이르는 기하학 시대의 시각 매체에서 묘사되기도 하였다.[4][5] 문학적, 고고학적 근원은 때때로 중간 단계에서 서로에게 협력하거나 충돌이 있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자료 집대성의 존재는 그리스 신화 요소들이 사실에 입각한 역사적인 뿌리를 갖게 되는 강력한 지표가 되었다.[6]


문학적 근원[편집]

신화적 서술로 쓰여진 연극은 대부분의 그리스 문학 장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럼에도, 그리스 고대에서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는 총체적인 신화 해설집은 동명의 아폴로도로스의 《비블리오테케》가 유일하다. 이 신화 해설집은 시인들의 상반된 이야기들을 정리하여 고대 그리스 신화와 영웅 전설을 간명하고 빠짐없이 요약하였다.[7][8] 아테네의 아폴로도로스는 신화를 주제로 많은 글을 쓴 기원전 180~120년 경의 인물이다. 《비블리오테케》가 쓰여진 시대는 그가 죽은 지 훨씬 후인 2세기 경이기 때문에, 현재는 동명이인인 저자가 쓴 서적으로 추정하고 있다.[8] 본래의 아폴로도로스는 이 신화 해설집의 초안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프로메테우스》(1868년 귀스타브 모로 작).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헤시오도스가 문헌에서 처음 알린 것으로, 아이스퀼로스의 비극 3부작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풀린 프로메테우스》, 《불을 가져다주는 프로메테우스》의 바탕이 되었다.

가장 초기의 문학 근원 중에는 호메로스의 두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있다. "서사시권"으로 이루어진 다른 서사시들도 있었으나, 이러한 후기의 소규모 서사시들은 대부분이 모두 소실되었다. 호메로스 찬가라는 이름으로 전승된 시들은, 호메로스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이 합창 찬가는 고대 그리스의 서정 시대 초기에 등장한 것이다.[9] 호메로스와 동시대의 인물로 추정되는 헤시오도스는 자신의 저서 《신통기》(신의 기원)에서 세계의 창조를 다룬 초기 그리스 신화를 비롯하여 신의 기원인 티탄과 기간테스뿐만 아니라 복잡한 가계도와 민간 설화, 기원 신화까지 자세하고 충실하게 설명하였다. 헤시오도스의 또 다른 저서 《노동과 나날》은 농경 생활에 대한 교훈 서사시로, 프로메테우스와 판도라 신화, 다섯 시대 설화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이 서사시는 위험한 세상에서 성공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으며, 신들로 인해 세상이 더 위험해질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2]


서정시는 신화에서 그 주제를 가져올 때도 있었으나, 표현에 있어서는 직접적인 서사가 아닌 암시를 많이 썼다. 핀다로스, 바킬리데스, 시모니데스와 같은 서정 시인들과 테오크리토스, 비온과 같은 목가 시인들은 각각의 신화적 사건을 서로 연관지어 표현하기도 하였다.[10] 또한, 신화는 고전 아테네 연극의 중심 소재이기도 했다. 비극 작가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는 비극의 줄거리에 트로이아 전쟁과 영웅 시대의 신화를 차용하였다. 여러가지 비극적인 줄거리(아가멤논과 그의 자녀, 오이디푸스, 이아손, 메데이아 등)의 전형적인 형태는 이러한 비극에서 잘 드러나 있다. 희곡 작가인 아리스토파네스 또한 자신의 작품 《새》, 《개구리》에서 신화를 차용하였다.[11]


역사가 헤로도토스와 디오도로스 시켈로스, 지리학자 파우사니아스, 스트라보는 그리스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그들이 들은 이야기를 글로써 기록하였는데, 이 이야기들은 수많은 지역 신화와 전설, 그리고 같은 이야기의 많이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10] 특히 헤로도토스는 자신이 들은 다양한 구전 신화를 연구하였으며, 그리스와 동방 사이의 대조를 통해서 역사적이거나 신화적인 근원을 찾았다.[12] 또한, 신화의 기원과 다른 문화적 개념을 혼합하여 융화시키고자 하였다.


헬레니즘과 로마 시대에 들어와서 시는 숭배 행위라기보다는 문학적인 목적으로 창작되는 경우가 많아졌지만, 이러한 경향으로 인해 다른 경우였다면 사라져버릴 수도 있었던 중요한 많은 세부 설명들이 포함될 수 있었다. 이 범주에 속하는 작품은 다음과 같다.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 스타티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세네카, 베르길리우스. 세르비우스의 논평.

고대 후기 시대의 그리스 시인: 논노스, 안토니노스 리베랄리스, 코인토스 스미르나이오스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시인: 로도스의 아폴로니오스, 칼리마코스, 동명의 에라토스테네스, 파르테니오스.

신화를 언급하는 같은 시대의 산문 작가로는 아풀레이우스와 페트로니우스, 롤리아누스, 헬리오도로스 등이 있다. 동명의 히기누스가 로마 작가 양식으로 쓴 《파불라에》(Fabulae)와 《아스트로노미카》(Astronomica)는 신화를 시적인 표현 없이 개요로 실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작품이다. 필로스트라투스 3세와 4세의 《이매진》(Imagines), 칼리스트라토스의 《디스크립션》(Descriptions) 또한 작품의 주제에 신화를 이용하였기 때문에 서술 양식에 대한 유용한 근거로 볼 수 있다.


마지막 사례는 비잔티움의 그리스 작가로, 상당수가 신화에 대한 여러가지 중요한 설명을 남겼는데, 지금은 소실된 초기 그리스 작품이 유래가 된 것도 많이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신화를 보존한 사람은 아르노비우스, 《수이다스》의 저자, 헤시키우스, 요한 트제트제스, 에우스타티오스 등이 있다. 이들은 대개 기독교적 도덕관의 시각에서 신화를 다루었다.[13]


고고학적 근원[편집]


5세기 원고 《베르길리우스 로마노스》에 묘사된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 자신의 저작에서 그리스 신화에 대한 많은 설명을 남겼다.

19세기 독일의 아마추어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의 미케네 문명 발견과 20세기 영국의 고고학자 아서 에번스 경의 크레타 미노아 문명의 발견은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대해 남아있던 많은 의문점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며, 신과 영웅에 대한 많은 신화적 설명의 고고학적 증거를 제공하였다. 하지만 미케네와 미노아 지역의 신화 및 의식에 대한 증거는 모두 기념적인 것에 불과하였는데, 예를 들어서 선형문자 B 기록(크레타와 그리스 본토에서 발견된 고대 그리스 문자)은 신과 영웅에 대한 이름이 애매하게 나타나 있기는 하였지만, 주로 농산물의 수확과 재산, 상품 목록을 작성하는 용도로 쓰였다.[2][14]


기원전 8세기의 도자기에 새겨진 기하학 디자인은 헤라클레스의 모험뿐만 아니라 트로이아 연대기의 장면도 묘사되어 있다.[2] 신화의 시각적 묘사는 두 가지 이유에서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많은 그리스 신화가 문학적 근원보다 항아리 묘사에서 일찍 등장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헤라클레스의 12업은 케르베로스를 생포하는 모험만이 동시대의 문헌에서 등장한다.[15] 또한, 시각적인 근원은 때때로 현존하는 문학적 근원에서 등장하지 않는 신화, 또는 신화적인 장면을 묘사한다. 어떤 경우에는, 기하학 양식에서 처음 묘사된 신화로 알려진 것이 몇 세기가 지난 후에야 고대 서사시에서 처음 언급되기도 한다.[4] 이후 고대(c. 750–c. 500 BC)와 고전(c. 480–323 BC), 헬레니즘(323–146 BC) 시대에 등장한 호메로스풍을 비롯한 다양한 신화 장면은 현존하는 문학적 증거를 보충하는 자료가 되고 있다.[2]


신화 역사의 개괄[편집]


파이드라와 그녀의 유모로 보이는 하인, 기원전 60-20년 폼페이의 프레스코화.

그리스 신화는 시간이 경과할 수록 문화의 발전에 적응하고 변화해왔으며, 이러한 변화에는 전체적인 것과 더불어 무언의 가정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는 그리스 신화의 문학 형태는 대부분이 점진적인 변화를 거친 것으로, 길버트 커스버트슨의 주장처럼 그 본질은 정치적인 것이다.[16]


농업에 종사하였던 발칸 반도의 초기 거주자들은 애니미즘 사상을 통해 자연의 모든 것에 영혼을 부여하였고, 사람의 형태로 가정된 이러한 영혼들은 지역 신화에서 신으로 등장하게 되었다.[17] 발칸 반도 북부의 부족들이 침범하게 되면서, 정복과 세력, 싸움에서의 용기, 영웅적 자질을 바탕으로 한 그들의 새로운 판테온 신들이 기존 발칸 반도의 신화에 유입되었다. 그 결과 농경 사회에 존재했던 오래된 신들은 그들의 더욱 강력한 침략자에 융합되었고, 그렇지 못한 신들은 쇠퇴하여 사라지게 되었다.[18]


고대 중반 이후에는 남신과 남성 영웅 간의 관계에 대한 신화가 더욱 빈번해지기 시작했으며, 이것은 기원전 630년 경에 확산되었다고 여겨지는 교육적 동성애(Eros paidikos, παιδικός ἔρως)의 동시적 발전과도 관계가 깊다. 기원전 5세기가 끝날 무렵, 시인들은 아레스를 제외한 모든 중요한 신과 많은 전설적 인물에게 적어도 한 명의 에로메노스(성적인 관계의 어린 소년)를 정해두었다.[19]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처럼 이전에 존재하던 신화 또한 암시적인 동성애 관계가 가미되었다.[20] 알렉산드리아의 시인들은 처음으로 자신들의 유행에 맞추어 그리스의 신화적 인물의 이야기를 각색하였으며, 초기 로마 제국의 문학 신화 수집가들에게는 이것이 더욱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다.


일련의 역사적 이야기를 만들어낸 서사시의 업적은 결과적으로 새로운 감각의 신화적 연대기로 발전하였고, 그리스 신화는 세계와 인간의 발전 모습 또한 표현하게 되었다.[21] 이러한 이야기들은 내용에서 드러나는 자기 모순적 서술 때문에 절대적인 시간 구성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대략의 연대는 파악할 수 있다. 신화에서 설명하는 "세계의 역사"는 다음과 같이 세 시대, 또는 네 시대로 나눌 수 있다.


창세 신화 또는 신들의 시대(신통기, "신들의 탄생"): 세계와 신, 인간의 기원에 대한 신화

신들과 인간의 자유 교류 시대: 초기에 신들과 반신반인, 인간이 서로 교류했던 이야기.

신들의 활동이 제한되었던 영웅의 시대. 마지막이자 가장 거대한 영웅 전설은 트로이아 전쟁과 후일담이다.(어떤 연구자들은 네 번째 시대로 나누기도 한다.)[22]

신들의 시대가 동시대의 신화 연구자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아온 반면에, 고대와 고전 고대의 그리스 작가들은 영웅의 시대를 더 선호하였다. 그들은 세상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해 설명한 후, 그 다음부터는 인간의 업적에 대한 기록과 연대를 정립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어서, 영웅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신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신통기》와 호메로스 찬가의 규모와 유행을 위축시켰다고 볼 수 있다. 호메로스의 영향으로 "영웅 숭배" 문화는 종교 생활의 개혁을 가져왔고, 죽음(영웅)의 세계에서 신들의 세계를, 올림피안에서 지하 세계의 신들을 분리하여 표현하였다.[23] 헤시오도스는 《노동과 나날》에서 인간(종족)의 시대를 금, 은, 청동, 철의 네 시대로 설명하였다.[24] 이러한 종족, 또는 시대는 신들의 창조를 기준으로 구별하는데, 금의 시대는 크로노스의 지배에 속하며, 이후의 종족은 제우스가 창조한 것이다. 헤시오도스는 청동 시대 다음에 영웅의 시대(종족)를 삽입하였다. 마지막 시대는 철의 시대로, 시인들이 활동하던 시대와 동일하였다. 시인들은 이 시대를 최악의 시대로 간주하였다. 그들은 판도라의 신화를 통해서 철의 시대부터 세상에 악(惡)이 존재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였는데, 판도라가 항아리를 열게 되면서, 인간의 모든 가능성이 좌절되고 오직 희망만이 남았다고 한다.[25] 오비디우스는 《변신 이야기》에서 헤시오도스의 네 시대 개념을 가져왔다.[26]


신들의 시대[편집]

우주 생성론과 우주론[편집]

 그리스 태초신, 그리스 신들의 가계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사랑의 신 에로스를 묘사한 Amor Vincit Omnia(사랑은 모든 것을 정복한다).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조의 1601–1602년 작품.

"근원 신화" 또는 "창조 신화"는 인간의 용어로 우주를 이해하며, 세계의 기원을 설명하는 신화를 말한다.[27] 철학적인 설명으로 시작되기는 하지만, 오늘날에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신화는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 서술되어 있다. 그는 세상이 지루한 공허인 카오스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한다. 이 공허가 끝나자 에우리노메, 가이아(대지)가 나타났고, 에로스(사랑), 무저갱(나락, 타르타로스), 에레보스와 같은 다른 근본 신들도 등장하게 되었다.[28] 가이아는 남자의 도움 없이 우라노스(하늘)를 낳았고 그와 결합하였다. 이 결합으로 거인족 티탄이 처음으로 태어났는데, 이들은 코이오스, 크리오스, 크로노스, 히페리온, 이아페토스, 오케아노스의 여섯 남자, 므네모시네, 포이베, 레아, 테이아, 테미스, 테티스의 여섯 여자로 구성되었다. 이윽고 가이아와 우라노스는 외눈박이 키클롭스와 100개의 손이 달린 헤카톤케이레스를 낳았다. 크로노스("교활하며, 가장 젊고 무서운 가이아의 자녀" [28])는 우라노스를 거세시키고 신들의 지배자가 되었으며, 누이 레아를 자신의 배우자로 삼고, 다른 형제 티탄들을 지배층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였다.


아버지와 아들 간의 대립 주제는 크로노스가 자신의 아들 제우스에게 적대를 받으며 되풀이되었다. 아버지를 배반하였던 크로노스는 자신의 자식 또한 그럴 수 있다는 두려움에 레아가 자식을 낳을 때마다 빼앗아 삼켜버렸다. 이것을 증오하던 레아는 마지막으로 낳았던 아들 제우스를 숨기고 강보에 싼 바위를 대신 주어 크로노스가 삼키도록 하였다. 성장한 제우스는 크로노스에게 약이 든 음료를 마시게 하여 구토를 하게 만들었고, 크로노스의 위장에 있던 레아의 다른 자녀들과 바위가 모두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제우스는 신들의 왕위를 차지하고자 크로노스에게 도전하여 전쟁을 벌였다. 막바지에 이르러 키클롭스(제우스가 타르타로스에서 구출)의 도움으로 제우스와 형제들은 승리하게 되었고, 패배한 크로노스와 티탄들은 내쫓겨 타르타로스에 감금되었다.[29]



아티카식 흑회식 암포라에 그려진 메티스를 삼킨 제우스의 머리에서 "재탄생"하는 아테나, 출산의 여신 에일레이투이아가 오른쪽에서 돕고 있다. 기원전 550 - 525년 경 작품.(파리 루브르 박물관)

크로노스와 같은 반란을 겪을까봐 걱정하던 제우스는, 첫 번째 아내인 메티스가 "자신보다 위대한" 신을 낳을 것이라는 예언을 듣자 아내를 삼켜버렸다.[30] 하지만 메티스는 이미 아테나를 임신하고 있었고, 아테나는 제우스에게 계속 두통을 앓게 만들다가 무장을 한 채 완전히 성장한 모습으로 그의 머리에서 나오게 되었다.[31]


초기 그리스인들은 시에 대하여 신통기를 원형적인 시 장르—원형적 미토스—로 여겼으며, 내용 대부분에 마법적인 힘이 깃들여져 있다고 생각하였다. 원형 시인 오르페우스 또한 신통기를 읊는 원형적 가수였는데, 아폴로니오스의 《아르고나우티카》에서는 바다를 잠재우거나 폭풍을 일으켰으며, 하데스로 하강하여 지하세계 신들의 냉혹한 마음을 움직이기도 하였다. 〈헤르메스에게 바치는 호메로스 찬가〉에서 헤르메스가 서정시를 고안해냈을 때 그가 처음으로 부른 노래도 신들의 탄생에 관한 것이었다.[32] 헤시오도스의 《신통기》는 전해내려오는 신들의 모든 이야기뿐만 아니라, 무사이에게 영감을 비는 긴 첫머리에서 아르카익 시인들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도 충실히 담고 있다. 신통기는 또한 오르페우스, 무사이오스, 에피메니데스, 아바리스와 그 밖의 전설적 현자가 지었다고 여겨지며, 내밀한 정화 의식과 밀교 의식에 사용되었던 소실된 많은 시들을 주제로 삼기도 하였다. 실제로 플라톤은 오르페우스교 신통기의 몇가지 이야기에 정통했다.[33] 그러나 종교 의식과 신앙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되었기 때문에, 종교의 신앙은 유지된 반면, 그 집단의 구성원들에 의한 이러한 문화의 종류의 보고는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이후 종교적 신앙이 쇠퇴하면서, 일부만이 종교 의식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문헌에서 이러한 의식에 대한 언급을 종종 찾아볼 수 있지만, 그 양상은 소실된 직접적인 문헌과 달리 글의 방향이 너무 명료하고 의도적인 것에 불과하다.[34]


도기와 종교적 예술품에 묘사된 장면들은 다양한 신화와 전설로 해석되었으며, 잘못 해석되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다. 이러한 작품의 일부는 신플라톤주의 철학자의 인용과 최근에 발견된 파피루스 조각을 통해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파피루스 조각 중의 하나인 데르베니 파피루스는 오르페우스 신앙의 천지 창조 시가 최소 기원전 5세기부터 존재했었음을 증명하는 자료가 되었다.[35]


그리스 세계에서는 최초의 철학적 우주론자들이 반대하거나 성립해온 대중적인 신화적 개념들이 한동안 존재했었다. 이러한 개념들의 일부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시에서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이다. 호메로스의 시에서는 대지가 오케아노스의 강 위에 떠있는 평평한 원판이며, 태양, 달, 별이 있는 반구형의 하늘에 둘러싸여 있다고 설명하였다. 태양(헬리오스)은 전차를 몰면서 하늘을 가로질렀고, 밤에는 황금 사발을 타고 대지 주위를 항해하였다. 태양, 대지, 하늘, 강, 바람은 발원의 대상이 되거나 입증 선언에서 이름이 불리기도 하였다. 또한 자연의 균열은 보통 하데스의 지하 세계이자 그의 전신인 죽음의 세계로 가는 입구로 생각하였다.[36] 다른 문화권의 영향은 언제나 새로운 주제를 창출해내었다.


그리스 판테온[편집]

 고대 그리스의 종교, 올림포스 12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백조로 둔갑하여 스파르타 왕비 레다를 유혹하는 제우스. 분실된 미켈란젤로 원작의 16세기 복제본.

고전 시대 신화에서는 티탄들의 패배 이후, 신들의 새로운 판테온이 세워졌다고 설명한다. 주요한 그리스 신들 중에서 올림피안은 올림포스 산 정상에서 제우스의 통치 아래 살아가는 신들을 말한다. 이들의 인원이 열두 명으로 제한된 것은 비교적 최근에 도입된 개념으로 보인다.[37] 올림피안 이외에도 그리스인들은 염소 신 판, 강의 정령 님프, 샘에 사는 나이아드, 나무의 정령 드라이어드, 바다에 사는 네레이드, 강의 신, 사티로스를 비롯한 그 지역의 다양한 신들을 숭배하였다. 여기에는 에리니에스(또는 푸리아이)처럼 혈연 관계에게 범죄를 저지른 죄인을 뒤쫓는 저승의 암흑 세력도 있었다.[38] 시인들은 그리스 판테온의 영광을 기리고자 호메로스 찬가를 지었다.(33편의 노래).[39] 그레고리 나지는 호메로스 찬가를 "각 노래마다 신에 대한 기원을 노래하는(《신통기》에 비해) 간결한 서가"로 간주하였다.[40]


그리스 신화를 구성하는 방대한 신화와 전설에서 그리스인들이 생각해낸 신들은 본질로 봤을 때는 물질적이지만 이상적인 신체를 가졌다고 묘사된다. 발터 부르케르트는 그리스의 신인 동형론의 특징에 대하여 "그리스 신들은 인간이며,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이지 않다"라는 정의를 내렸다.[41] 고대 그리스 신들은 그들의 근원적인 형태와는 별개로 많은 초자연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그들은 질병에 영향을 받지 않았고, 매우 특정한 상황에서만 상처를 입을 수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신들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특성을 불사로 보았고, 영원한 젊음과 더불어 이러한 불사의 능력은 넥타르와 암브로시아를 섭취하여 혈관에 신성한 피를 돌게 하는 방법으로 보장 받을 수 있었다.[42]


각 신들은 서로 다른 관심사를 추구하며 자신의 계보를 이어가며, 특유의 개성에 의해 좌우되는 전문적인 일정한 영역을 가지고 있다. 다만, 이러한 묘사들은 다른 것과 항상 일치하지 않는 고대 지역 전승의 다양성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시나 기원, 의식에서는 신들을 호명할 때 이름과 수식어를 결합하여 부르며, 다른 명시와는 다른 이러한 구별을 통해 그들을 식별한다.(예를 들어 아폴로 무사게테스는 "무사이의 지도자 아폴로") 수식어만을 사용하여 부르는 것은 신의 특정하고 부분적인 모습만을 식별하는 것으로 보이며, 일찍이 고대 그리스의 고전 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여겨진다.


대부분의 신들은 삶의 특정한 모습과 연관되어 있다. 예를 들어서, 아프로디테는 사랑과 미의 여신, 아레스는 전쟁의 신, 하데스는 죽음의 신, 아테나는 지혜와 용기의 여신이었다.[43] 아폴로와 디오니소스 같은 일부 신들은 복잡한 특성을 가지며 다양한 영역을 관장하기도 하였으며, 반면 헤스티아("난로")와 헬리오스("태양")처럼 좀 더 전형적인 화신의 성향을 가진 신들도 있었다. 대부분의 주요 신전들은 거대 범그리스 신앙의 중점이 되는 제한된 숫자의 신들만을 헌신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개별 종교와 마을에서는 비주류 신들을 숭배하며 의식을 치루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많은 도시에서 또한 잘 알려진 신들을 독특한 지역 의식과 함께 찬양하였으며, 다른 지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신화를 그들과 연관시키기도 하였다. 영웅 시대 동안에는 영웅(또는 반신) 숭배가 부가되기도 하였다.


신들과 인간의 시대[편집]

신들만이 살아갈 때의 시대와 인간의 문제에 신성한 간섭이 제한된 시대를 이어주는 것은 신과 인간이 함께 활동하였던 과도기의 시대였다. 이 시대는 세계의 초기 시절로, 신과 인간의 무리들이 나중의 시대와 비교할 때 서로 더 자유롭게 어울렸던 시대였다. 이러한 이야기들의 대부분은 이후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실려졌으며, 여기서는 주로 사랑 이야기와 징벌 이야기의 두 주제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44]



디오니소스와 사티로스. 브리고스 화가 카비네 드 미다이어스가 잔 안쪽에 그린 작품.

사랑 이야기는 주로 근친 상간, 또는 남자 신이 인간 여자를 유혹하거나 강간하여 영웅을 탄생시키는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다. 이 이야기에서는 일반적으로 신과 인간의 관계는 피해야할 것으로 암시하고 있는데, 상호 합의의 관계에서도 해피 엔딩으로 결말을 맺는 경우는 드물다.[45] 여자 신이 인간 남자와 관계를 맺는 경우도 드물게 있는데, 〈아프로디테에게 바치는 호메로스 찬가〉에서는 여신이 안키세스와 동침하여 아이네이아스를 낳았다고 이야기한다.[46]


두 번째 유형(징벌 이야기)은 프로메테우스가 신들에게서 불을 훔쳤을 때, 탄탈로스가 넥타르와 암브로시아를 제우스의 식탁에서 훔쳐 백성들에게 나눠주어 신들의 비밀을 누설할 때, 프로메테우스나 리카온이 제물을 날조할 때, 데메테르가 트립톨레모스에게 농업을 전수할 때, 마르시아스가 아울로스를 만들어 아폴론과 음악 경연을 펼칠 때와 같이 어떤 의미 있는 문화적 아티팩트의 전유나 발명을 포함하고 있다. 이안 모리스는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를 "신들과 인간의 역사 간의 지위"로 간주하였다.[47] 3세기에 기록된 작자 미상의 파피루스 조각에는 디오니소스가 트라키아의 왕 리쿠르고스에게 내린 형벌을 생생히 묘사하고 있는데, 뒤늦게서야 새로운 신을 알아본 리쿠르고스는 내세까지 이어지는 잔혹한 형벌을 받게 된다.[48] 디오니소스가 등장하면서 트라키아에서 그의 숭배가 시작되는 이야기는 아이스킬로스 삼대 비극의 주제이기도 하다.[49] 또 다른 비극인 에우리피데스의 《박코스 여신도들》에서는 테바이의 왕 펜테우스가 디오니소스를 경시하고 그의 여성 숭배자 마이나스를 몰래 구경하다 신의 형벌을 받게 된다.[50]



아풀리안 적회식 히드리아에 그려진 데메테르와 메타네이라, 기원전 340년 경 작품.(베를린 구 박물관)

비슷한 주제가 반영된 오래된 설화를 모티브로 한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51] 데메테르가 도소라 불리는 노파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그의 딸 페르세포네를 찾던 중 아티카 엘레우시스의 왕 켈레오스에게 환대를 받는다. 데메테르는 켈레오스에게 보답하고자 그의 아들 데모폰을 신으로 만들 의식을 치루지만, 도중에 어머니인 메타니라가 불에 휩싸인 아들을 보고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자 노여워하며 일을 그르치게 된다. 데메테르는 어리석은 인간이 신의 뜻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에 탄식한다.[52]


영웅의 시대[편집]

그리스 신화에서는 영웅들이 살았던 시대를 영웅 시대로 부른다.[53] 서사시와 계보시에서는 특정한 영웅이나 사건을 중심으로 무리를 이루는 이야기들의 순환을 만들어 내었고, 다른 이야기 속 영웅 간의 가족 관계를 설명하였으며, 이를 위해서 연속적으로 이야기들을 배열하였다. 켄 다우든에 따르면 이것은 연대기 효과로도 볼 수 있으며, 계승되는 세대의 운명을 따라가볼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21]


영웅 숭배가 등장한 이후, 영웅은 신만이 차지하였던 신성한 영역에 가세하며 맹세와 기원의 대상으로서 그 이름이 신과 함께 언급되었다.[23] 신들의 시대와는 대조적으로, 영웅 시대 동안에는 영웅들의 명단이 수정되지 않은 최종적인 형태를 취하였다. 또한, 위대한 신들은 더 이상 태어나지 않았지만, 새로운 영웅들은 언제나 죽음의 무리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영웅이 지역 단위의 무리에게 정체성의 중심이 되었다는 것 또한 신 숭배와 영웅 숭배의 중요한 차이점이다.[54]


영웅 시대의 서막은 헤라클레스의 기념비적인 모험들을 통해 열리기 시작했다. 또한, 영웅 시대에는 장대한 군사 사건인 아르고나우타이의 원정, 테바이권과 트로이아 전쟁도 포함된다.[55]


헤라클레스와 헤라클레이다이[편집]

 헤라클레스, 헤라클레이다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헤라클레스와 그의 아들 텔레포스(파리, 루브르 박물관).

일부 철학자들은 헤라클레스의 복잡하게 얽혀있는 신화가 아르고스 왕국의 종속 국가 지도자와 같은 실존 인물이 바탕이 되었을 것이라고 본다.[56] 또한, 일부 철학자는 헤라클레스의 이야기가 태양이 1년동안 황도 12궁을 통과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57] 다른 문화권의 초기 신화로 비추어 볼 때, 헤라클레스 이야기는 이미 확립된 영웅 신화의 지역화로서 보여진다는 의견도 있다. 전통적으로, 헤라클레스는 제우스와 페르세우스의 손녀 알크메네의 아들이었다.[58] 그의 환상적이고 유일무이한 공적은 그것들이 갖는 설화적 주제와 함께 인기있는 전설의 소재를 제공하였다. 그는 희생자이자 제단의 창립자, 게걸스러운 먹보로 묘사되거나 언급된다. 희극에서 등장하는 그의 이러한 역할은 그의 비참한 죽음이 많은 비극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과는 상반적이다. — 탈리아 파파도푸루는 《헤라클레스》에 대해서 "에우리피데스의 연극 연구에서 대단한 중요성을 가진 작품"이라고 평가하였다.[59] 예술과 문학에서 헤라클레스는 보통의 인간보다 막대한 힘을 가진 남성으로 등장하며, 활을 무기로 들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종종 곤봉으로 묘사되기도 하였다. 꽃병 토기에는 헤라클레스의 묘사가 다른 소재와 비할 수 없는 인기를 구가하였는데, 특히 그가 사자와 싸우는 장면은 수백 개의 토기에서 발견되었다.[60]


헤라클레스는 에트루리아와 로마의 신화 및 숭배에도 등장하며, 로마인이 쓰던 라틴어 감탄사 "mehercule"은 그리스어인 "Herakleis"에서 유래한 것이었다.[60] 이탈리아에서는 헤라클레스를 상인의 신으로 숭배하였는데, 다른 나라에서는 그의 특징적인 재능인 행운이나 위험에서의 구조를 염원하기도 하였다.[58]


헤라클레스는 도리스 왕의 시조로 공식 지정되어 높은 사회적 위신을 이루었다. 이것은 도리스인이 펠로폰니소스로 이주한 것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데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도리스 부족의 이름이기도 한 영웅 힐로스는 헤라클레스의 아들이자 헤라클레이다이(헤라클레스의 자손, 특히 힐로스의 후예를 말하며, 다른 헤라클레이다이로는 마카리아, 라모스, 만토, 비아노로, 틀레폴레모스, 텔레포스가 있다.)의 한 명이 되었다. 헤라클레이다이는 미케네와 스파르타, 아르고스의 펠로폰니소스 왕국을 정복하였으며, 전설에 입각한 주장에 따르면 조상 대대로 왕국을 지배하였다. 그들의 지배가 시작된 것을 종종 "도리스인의 침입"이라고도 부른다. 리디아인과 후기 마케도니아 왕들 또한 같은 계급의 지배자로서 헤라클레이다이가 되었다.[61]


초기 세대의 다른 영웅들은 페르세우스, 데우칼리온, 테세우스, 벨레로폰 등이 있으며, 이들은 헤라클레스와 공통적으로 많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행적은 헤라클레스처럼 혼자서 해낸, 환상적인 것들로, 동화에 가깝다고 볼 수 있으며, 키마이라와 메두사같은 괴물을 처치한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벨레로폰의 모험은 평범한 형태로, 헤라클레스와 테세우스의 모험과 유사하다. 상상으로 빚어낸 영웅의 최후는 초기 영웅 전설에서 반복되는 주제였으며, 페르세우스와 벨레로폰의 경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62]


아르고나우타이[편집]

 이 주제의 자세한 내용은 아르고나우타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아폴로니오스 로디오스(서사 시인, 철학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감독)의 《아르고나우티카》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헬레니즘 서사시로써, 이아손과 아르고나우타이가 황금 양모를 찾기 위해 신화 상의 지역인 콜키스로 항해를 떠나는 신화를 다루고 있다. 《아르고나우티카》에서 한 쪽에만 샌달을 신은 남자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네메시스라는 신탁을 받은 펠리아스 왕은 이아손에게 강제로 임무를 부여한다. 이아손은 강에서 샌달을 잃어버린 채로 펠리아스의 궁전에 도착하고, 이때부터 서사시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헤라클레스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차세대 영웅들이 이아손과 함께 아르고 호를 타고 황금 양모를 찾으러가는 모험에 가담하였다. 이 세대에는 크레타에서 미노타우로스를 무찌른 테세우스, 여걸 아탈란테, 한때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와 경쟁하던 서사시의 주인공 멜레아그로스도 있었다. 핀다로스, 아폴로니우스, 아폴로도로스는 아르고나우타이의 전체 목록을 파악하고자 하였다.[63]


아르고나우타이는 아폴로니우스가 기원전 3세기가 되어서야 쓴 서사시지만, 그 이야기 구성은 오디세이아보다 먼저 존재하였으며, 이아손의 공적을 잘 보여주고 있다.(오디세우스의 방랑은 부분적으로 이 이야기를 바탕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64] 고대에는 이 원정을 역사적 사실, 즉 그리스인이 흑해에서 무역과 식민지 사업을 개척한 사건에 관한 이야기로 생각했다.[65] 또한, 매우 인기를 끌어 여러가지 지역 전설이 덧붙여진 권을 형성하였다. 특히 메데이아의 이야기는 비극 시인들의 영감을 자극하였다.[66]


아트레우스 왕가와 테바이권[편집]

 테바이권, 테바이를 공격한 일곱 장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아르고 원정과 트로이아 전쟁 사이에는 주로 잔혹한 범죄들이 일어났던 것으로 알려진 세대가 있다. 여기에는 아트레우스와 티에스테스가 아르고스에서 벌인 사건도 포함되어 있다. 아트레우스 가문(라브다쿠스 가문과 함께 두 주요 영웅 왕조 중 하나)의 신화 뒤에는 권력 이양과 주권을 계승하는 방법에 얽힌 문제가 드러나있다. 아트레우스와 티에스테스 형제는 미케네의 권력 이양의 비극의 주역으로 출연하며, 그들의 자손들도 이것을 반복한다.[67]


테바이권은 주로 도시의 창설자인 카드모스와 연관된 사건을 다루고 있으며, 후반에는 테바이에서 일어난 라이오스와 오이디푸스 사건을 중점으로 다룬다. 이렇게 이어지는 이야기는 결국 테바이를 공격한 일곱 장수와 에피고노이의 손에 의해 도시가 함락되며 끝을 맺게 된다.[68](테바이를 공격한 일곱 장수의 초기 서사시 등장 여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오이디푸스가 관계되어있는 초기 서사시에는 그가 이오카스테가 자신의 어머니인 것이 드러난 이후에도 테바이를 계속해서 통치했으며, 두 번째 아내와 결혼하여 그녀가 자신의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비극 작품(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과 후기 신화에서 보아왔던 이야기와는 현저하게 다르다.[69]


트로이아 전쟁과 여파[편집]


엔리케 시모네의 1904년 《파리스의 심판》. 파리스가 오른손에 황금 사과를 든 채 계산적인 태도의 세 여신을 판단하고 있다.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의 《아킬레우스의 분노》(1757년, 프레스코, 300 x 300 cm, 비첸차 빌라 발마라나 소재)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이 자신의 전쟁 포로인 브리세이스를 두고 협박을 일삼는 것에 분노하여 칼을 뽑아 아가멤논을 죽이려고 한다. 이때, 갑자기 여신 아테나가 등장하여 프레스코의 묘사처럼 아킬레우스의 머리카락을 부여잡아 그를 말린다.

이 주제의 자세한 내용은 트로이아 전쟁, 서사시권 문서를 보십시오.

그리스 신화는 그리스와 트로이아 간의 트로이아 전쟁과 그 결과에서 절정을 이룬다. 호메로스 작품에서는 주된 줄거리가 이미 충분한 형태와 요지를 갖추었으며, 개별적인 주제의 경우에는 그 후에 그리스 연극과 같은 매체에서 더욱 자세해졌다. 트로이아 전쟁은 또한 아이네이아스의 이야기로 로마 문화에서 굉장한 관심을 이끌어내었다. 이 이야기에서는 트로이아의 영웅인 아이네이아스가 트로이아를 떠나 방랑하던 중 로마 제국의 건국 시조가 된 새로운 도시를 세웠다고 전하는데, 베르길리우스가 이후에 《아이네이스》라는 책으로 자세히 다루었다.(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2권에는 매우 잘 알려진 트로이아 부대 이야기가 있음.) [70] 마지막에 와서는 딕티스 크레텐시스, 다레스 프리기누스라는 이름의 저자가 썼다는 허위 연대기 두 권이 라틴어로 쓰여져 전해 내려온다.[71]


서사시 모음인 트로이아권은 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에리스와 칼리스티의 황금 사과, 파리스의 심판, 헬레네 납치, 아울리스에서 제물로 바쳐지는 이피게니아 이야기로 시작한다. 헬레네를 되찾고자 그리스는 메넬라오스의 형제이자 미케네, 또는 아르고스의 왕인 아가멤논의 지휘 아래 거대한 원정대를 보내었으나, 트로이아는 헬레네를 돌려주는 것을 거부하였다. 전쟁이 일어난지 10년 후를 배경으로 하는 《일리아스》에서는 아가멤논과 그리스의 뛰어난 전사 아킬레우스 사이의 반목, 그리고 아킬레우스의 친구인 파트로클로스와 프리아모스의 장남 헥토르의 전투에서 빚어지는 죽음에 대해서 언급한다. 헥토르의 죽음 이후 트로이아 진영에는 동맹 관계인 아마존의 여왕 펜테실레아, 에피오티아의 왕이자 새벽의 여신 에오스의 아들인 멤논이 가세하였다.[72] 아킬레우스가 이 둘을 죽였으나, 그는 파리스의 화살로 죽게 되었다. 그리스는 트로이아를 함락시키기 전에 성채에서 팔라스 아테나의 목조상(팔라디움을 훔쳤으며, 마지막에 와서는 아테나의 도움으로 트로이아 목마를 완성시켰다. 프리아모스의 딸 카산드라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트로이아인들은 그리스 진영의 탈영병으로 가장한 시논의 설득만을 믿고 그 목마를 아테나에게 바치는 공물로써 트로이아 성 안으로 들였다. 신관 라오콘이 이 목마를 파괴하려 했으나, 갑자기 나타난 바다뱀에게 물려 죽게 되었다. 밤이 되어 그리스 함대가 돌아오자, 목마에 숨어있던 그리스인들은 트로이아의 성문을 열었다. 총력을 기울인 약탈이 이루어지면서, 프리아모스와 남아있던 그의 아들들은 살해 당했고, 트로이아의 여자들은 그리스 여러 도시의 노예로 전락했다. 모험적인 그리스 지도자의 귀향 항해(아가멤논을 살해한 아이네이아스와 오디세우스의 방랑 포함)는 두 개의 서사시 《귀향》(소실된 노스토이), 호메로스가 쓴 《오디세이아》에서 다루고 있다.[73] 트로이아권은 트로이아 세대의 자녀들이 겪는 모험도 담고 있다.(오레스테스와 텔레마코스)[72]


트로이아 전쟁은 고대 그리스 예술가들에게 다양한 주제를 제공하였으며, 그들의 영감을 자극하는 주요 원천이 되었다.(예: 트로이아 약탈이 묘사된 파르테논의 메토프) 트로이아권에서 유래한 주제가 이같은 예술적 선호를 받은 사실은 이것이 고대 그리스 문명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73] 동일한 신화적 연대기 또한 후대 유럽 문학 작품의 일련에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서, 호메로스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트로이아 중세 유럽 작가는 트로이아 전설에서 영웅과 낭만적 이야기의 풍부한 원천과 함께, 이것이 그 시대에 맞게 궁정풍의 기사적인 전형으로 각색하기 쉬운 구조를 갖췄다는 것을 발견했다. 브누아 드 셍트 모르(《로망 드 트로이》, 1154-60년), 엑세터의 조셉(《드 벨로 트로이아노》, 1183년)과 같은 12세기 작가들은 전쟁을 묘사하면서 딕티스와 다레스의 이야기를 각색하였다. 이들은 호라티우스의 조언과 베르길리우스의 전례를 따라서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말하는 대신에 트로이아의 시를 다시 쓴 것이다.[74]


트로이아 전쟁에 등장하는 유명한 영웅들은 다음과 같다.


트로이아 진영:


아에네아스

헥토르

파리스

그리스 진영:


아이아스

아킬레우스

아가멤논 왕

메넬라오스

오디세우스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 개념[편집]

고대 그리스에서 신화는 일상의 중심이었다.[75] 그리스인들은 신화를 그들의 역사의 일부로 보았다. 그들은 자연 현상과 문화적 변화, 인습적인 증오와 친교를 설명하는데 신화를 사용하였다. 한 지도자가 신화적 영웅, 또는 신의 후손이라는 증거로 사용할 수 있는 자부심의 원천이기도 했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서 설명하는 트로이아 전쟁의 진실에 대해서 의문을 갖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군사 역사가, 칼럼니스트, 정치 수필가이자 전 고전학 교수인 빅터 데이비스 핸슨과 고전학 부교수 존 히스에 따르면, 그리스인들에게 호메로스 서사시의 심오한 지식은 그들의 문화 변용의 기저로 간주되었다. 호메로스는 "그리스의 학문"(Ἑλλάδος παίδευσις)이었고, 그의 시는 한 권의 "책"이었다.[76]


철학과 신화[편집]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 프레스코의 플라톤(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유사). 그는 이상적 《국가론》에서 호메로스와 비극, 관련된 신화적 전통의 연구를 배격한 철학자이다.

기원전 5세기 후반에 철학과 역사, 산문과 합리주의가 등장한 이후, 신화의 미래는 불투명해졌고, 신화적 계보도가 포함되던 역사의 구상에서도 초자연적 요소가 배제되었다.(투키디데스 역사 등)[77] 시인들과 극작가들이 여전히 신화를 개작했던 반면에, 그리스 역사가와 철학자들은 이것을 비판하기 시작했다.[9]


콜로폰의 크세노파네스와 같은 일부 급진 철학자들은 이미 기원전 6세기부터 시인들의 이야기를 신성 모독적인 거짓말로 여겼다. 크세노파네스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가 그려낸 신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는 인간에게 속하는 모든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들을 신들에게 귀속시켰다. 절도, 간통, 서로 기만하는 일들이 그것이다."[78] 이러한 경향의 표현은 플라톤의 《국가》와 《법률》에서도 광범위하게 찾을 수 있다. 플라톤은 자신만의 우의적인 신화를 만들었고(《국가》의 에르의 몽상), 신들의 부도덕한 속임수, 도둑질, 간통을 소재로 하는 구비 설화를 비판하였으며, 문학 작품에서 그들이 중심 역할로 등장하는 것에 반대하였다.[9] 신화를 "늙은 아내의 수다"[79] 로 비유한 플라톤의 비판은 호메로스 신화 전통에 대항하는 최초의 중대한 도전이었다.[76]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신화에 근접한 소크라테스 이전 시대의 철학적 접근을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헤시오도스와 신학 작가들은 그들에게 그럴듯해보이는 것에만 관심을 가졌으며, 우리를 배려하지 않았다 ... 하지만 신화적 문체로 돋보이려는 작가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가치는 없다. 우리는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하며 나아갈 그들에게 반대 심문을 해야만 한다."[77]


이러한 비판에도, 플라톤은 그 자신과 그의 집단을 신화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었다. 일례로, 소크라테스에 대한 그의 서술은 철학자들이 스승의 정직한 삶을 찬양할 때 사용되는 전통적인 서사시풍의 비극 양식을 바탕으로 하였다.[80]


어떤 이는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자네는 사형 선고를 받게 될지도 모르는 그런 삶을 살아 온 데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가?"라고 물을 것이오. 나는 그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겠소. "그것은 옳지 못한 견해요. 조금이라도 품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일을 할 때 그것이 옳은 일인가 옳지 않은 일인가, 선량한 사람이 할 일인가 악한 사람이 할 일인가 하는 것만을 생각해야 하며, 그 일을 하면 살게 되느냐 죽게 되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서는 안 되오. 당신의 견해를 따르면 저 트로이아에서 생애를 마친 반신들은 하찮은 존재들이 되는 셈이니까. 그 중에서도 테티스의 아들인 아킬레우스는 치욕을 참고 견디는 데 비하면 그런 위험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소. 나는 헥토르를 죽이려고 서두르는 그에게 어머니인 여신이 이렇게 말한 것으로 알고 있소.


내 아들아, 네가 너의 친구인 파트로클로스의 원수를 갚기 위해 헥토르를 죽이면 너 자신도 죽게 된다. 왜냐하면 헥토르의 바로 뒤에서 죽음의 신이 너를 붙들려고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호메로스의 일리아스 18권 96행)

아킬레우스는 이 말을 듣고도 죽음이나 위험은 아랑곳도 없이, 오히려 친구를 위해 원수를 갚지 않고 비겁한 자로 살아남게 되는 것을 훨씬 두려워하여 말하기를,


나의 원수에게 복수를 한 후에는 죽어도 좋습니다. 이곳에서 대지의 짐이 되면서까지 머리 굽은 배들 곁에서 웃음거리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핸슨과 히스는 호메로스 전통에 대한 플라톤의 거부가 그리스 문명의 대중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얻지는 않았다고 추정한다.[76] 오래된 신화는 지역 종교에 여전히 남아있었다. 이러한 신화들은 계속해서 시 문학에 영향을 미쳤고, 회화와 조각의 주요한 주제가 되었다.[77]


보다 적극적으로, 기원전 5세기의 비극 작가 에우리피데스는 종종 오래된 전통을 비웃는 연극을 제작하였으며, 그가 창조한 배역의 목소리를 빌어 의심의 어조를 담아내었다. 그가 제작한 연극은 언제나 예외없이 신화를 주제로 행해졌다. 이러한 많은 연극들은 과거에 같거나 비슷한 신화를 소재로 쓰인 연극의 회답으로 쓰여졌다. 에우리피데스는 주로 신에 대한 신화에 이의를 제기하였으며, 과거 크세노크라테스의 표현과 유사한 반대에 입각한 비판을 펼치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묘사된 신들은 너무 어리석게도 인간과 닮았다."[78]


헬레니즘과 로마 합리주의[편집]


키케로는 신화에 관한 개인적 회의론과 신성의 철학적 개념에 중점을 둔 그의 성향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기존 체제의 옹호자라고 생각했다.

헬레니즘 시대 동안 신화는 일정 신분만이 향유할 수 있는 일류 엘리트 지식으로 자리매김하였으며, 동시에 고전 시대의 회의적인 성향 또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81] 그리스 신화 수집가 에우헤메로스는 신화적 존재와 사건이 기초로 하는 실제 역사적 사실을 찾는 관례를 확립하였다.[82] 그의 본래 작품(Sacred Scriptures)은 유실되었지만, 디오도로스와 락탄티우스가 기록한 자료를 통해서 이 작품이 담고 있는 대부분의 내용이 알려져 있다.[83]


로마 제국 시대에 들어오면서 신화 해석학의 합리화는 스토아 철학과 에피쿠로스 철학의 물리주의 이론의 영향으로 대중에게 높은 관심을 받았다. 유헤메로스 학파가 신화를 역사적 형태로 합리화한 반면에, 스토아 학파는 신과 영웅에 대한 설명을 물리적 현상으로 해석하였다. 이와 더불어 스토아와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들은 신화적 전통의 도덕적 의의를 강조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주로 그리스 어원에 바탕을 두었다.[84] 루크레티우스는 에피쿠로스 학파의 가르침을 통해 그를 따르는 시민들의 마음에 사로잡힌 미신의 두려움을 쫓고자 하였다.[85] 리비우스 또한 신화적 전통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전설(파불라에)과 같은 이야기에 대해 직접 판단을 내리고자 할 의도는 없다고 밝혔다.[86] 로마인들에 대한 이러한 도전은 종교적 전통의 강력하고 변증적인 관념을 동반하였으며, 전통이 종종 미신의 온상이 되는 것을 방어하기도 했다. 고전학자 바로는 종교는 인간의 제도이며, 사회의 선을 보호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고, 종교적 숭배의 기원에 대한 엄밀한 연구에 헌신하였다. 그의 저서인 《신의 역사》(Antiquitates Rerum Divinarum)(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에서 일반적 접근법을 찾을 수 있다.)에서 바로는 미신에 사로잡힌 사람이 신을 두려워하는 반면, 진실로 경건한 사람은 그들을 부모로서 공경한다고 주장하였다.[85] 바로에 따르면, 로마 사회에서 신은 시인이 연극과 오락을 위해 만들어낸 신화적 가치, 도시와 사람들이 숭배를 위해 이용하는 시민적 가치, 철학자가 만들어낸 자연적 가치의 세 가지 가치로 구분된다.[87] 바로는 시민의 신학이 시적이고 신화적인 가치, 철학자의 가치와 결합된 곳이 최고의 국가라고 덧붙였다.[87]


로만 아카데믹 코타는 신화를 문자 그대로, 또는 우의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모두 조롱하였으며, 철학에는 신화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고 단언하였다.[88] 키케로 또한 일반적으로 신화를 경멸하였으나, 바로와 마찬가지로 국교와 국교의 관례에 대한 지지를 강조하였다. 이 합리주의 확장이 사회적 척도와 얼마나 동떨어졌는지 파악하기는 어렵다.[86] 키케로는 그 누구도(노파나 소년도) 하데스의 공포나 스킬라, 켄타우로스, 다른 괴물의 존재를 믿을만큼 멍청하지 않다고 하였으나,[89] 다른 한편으로는 민중의 미신적이고 잘 속는 속성에 대해서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90] 이러한 키케로의 사상은 저서인 《신들의 본성에 관하여》(De Natura Deorum)에 포괄적인 요약이 드러나 있다.[91]


융화하는 경향[편집]


로마 종교에서 그리스 신 아폴로(초기 로마 제국의 4세기 그리스 작품의 복제품, 루브르 박물관)의 숭배는 솔 인빅투스 숭배와 결합하였다. 태양 숭배는 황제와 제국의 특별한 보호자로써 기독교로 대체되기 전까지 제국의 최고 권위를 가진 종교였다.

 로마 신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고대 로마 시대에는 그리스와 다른 외래의 수많은 신들이 융합된 로마 신화가 새롭게 등장하였다. 로마 신화가 이러한 발생 과정을 갖게된 이유는 로마인들만의 신화가 적었기 때문이며, 주요 로마 신들이 그리스의 대등한 신들의 특징을 답습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그리스의 신화적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86] 주신 제우스와 주피터는 이러한 신화적 공통점의 좋은 예이다. 두 신화적 전통의 결합에 더불어 새롭게 유입된 동방 종교는 더욱 심화된 융합을 이끌었다.[92] 예를 들어서, 태양 숭배 문화는 아우렐리아누스가 시리아 출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이후에 로마에 들어온 것이다. 아시아의 신 미트라(태양이라 칭함)와 바알은 아폴로와 헬리오스에 융합되어 하나의 태양신, 솔 인빅투스(Sol Invictus)가 되었고, 집성 의식을 받으며 혼합된 속성을 띄게 되었다.[93] 아폴로는 종교에서 헬리오스, 또는 심지어 디오니소스와 점점 동일시되었을지 모르지만, 그의 신화를 개작한 문헌에서는 이러한 발달을 반영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전승 문학 신화는 실제 종교적 관습에서 갈수록 더 분리되었다.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작품인 2세기 오르페우스 찬가 모음집과 5세기 마크로비우스 암브로시우스 테오도시우스의 《사투르날리아》는 융화 경향과 합리주의 이론의 영향을 받았다. 오르페우스 찬가는 고전 이전의 시적인 구성을 취하며, 유명한 신화의 주인공인 오르페우스가 썼다고 전한다. 실제 이 시들은 몇 명의 시인이 썼을 것으로 추정되며, 선사 유럽 신화에 대한 줄거리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94] 《사투르날리아》의 목적은 마크로비우스 자신이 읽은 자료를 통해 그리스 문화를 전파하는 것이었으나, 신에 대한 시각은 베르길리우스의 해석에도 영향을 미친 이집트와 북부 아프리카 신화, 신학의 색채를 띄었다. 《사투르날리아》에서는 유헤메로스, 스토아,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신화학적 의견이 다시 등장한다.[84]


현대적 해석[편집]

 이 주제의 자세한 내용은 그리스 신화의 현대적 이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일부 철학자들은 그리스 신화의 현대적 이해의 기원을 신화를 "거짓말", 또는 전해져 오는 우화로 재해석하는 "기독교적 악의에 찬 전통적 태도"에 대한 18세기 말의 반발 작용으로 인한 것으로 평가한다.[95] 1795년경, 독일에서는 호메로스와 그리스 신화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였다. 요한 마티아스 게스너는 괴팅겐에서 그리스 연구를 다시 부활시켰고, 그와 동시에 후임자인 크리스티안 고트로프 하이네는 요한 요아힘 빙켈만과 함께 독일을 비롯한 여러 장소에서 신화 연구에 대한 기초를 다졌다.[96]


비교와 정신 분석적 접근[편집]

 비교 신화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막스 뮐러는 비교 신화학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비교 신화학》(1867년)을 통해서 초기 유럽 민족과 "미개" 민족 신화 간의 "복잡한" 유사성을 분석하였다.

19세기 비교 언어학의 발전과 20세기의 민속학적 발견이 더해져, 신화는 신화학이라는 학문 형태로 정립하게 되었다. 낭만주의 이래로 신화에 대한 연구는 모두 비교 연구 방법론을 사용하였다. 빌헬름 만하르트, 제임스 프레이저, 스티스 톰프슨은 민담과 신화의 주제들을 수집하고 분류하는 데 비교 연구 접근 방법을 사용하였다.[97] 1871년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는 그의 저서 Primitive Culture에서 비교 연구 방법을 적용하여 종교의 기원과 발달을 설명하고자 하였다.[98] 넓게 분리된 문화권들의 물질 문화, 종교와 신화를 한데 모으는 타일러의 절차는 카를 융과 조셉 캠벨에게 영향을 미쳤다. 막스 뮐러는 신화 연구에 비교 신화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도입하여 아리아인의 자연 숭배의 왜곡된 잔해를 발견하였다. 브로니슬라브 말리노프스키는 신화가 공통의 사회적 기능을 이행하는 방법에 대해서 역설하였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를 비롯한 구조주의자들은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신화들의 형식적인 관계와 유형을 비교했다.[97]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신화가 인간의 보편적이고 생물학적인 개념, 그리고 억압된 발상의 표현이라고 주장하였다.[99] 프로이트 신화 해석의 논거는 해몽으로, 프로이트의 개념인 꿈 작업은 꿈 속에서 나타난 어떤 개별 요소든지, 이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전후 관계가 중요함을 인정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이 의견은 프로이트 개념에서 신화에 대한 구조 언어학자와 정신 분석적 접근 간의 관계 회복의 중요성을 일깨웠다.[100] 카를 융은 자신의 이론 "집단 무의식"과 신화에서 흔히 보이는 부호화된 원형("태고적" 양식의 승계)을 통한 보편적이고 심리학적인 접근으로 신화를 해석했으며,[2][101] "신화 형성 구조의 요소는 무의식 정신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02] 로버트 A. 세갈은 융의 방법론과 조셉 캠벨의 이론을 비교하며 다음과 같이 결론 지었다. "캠벨의 신화 해석은 단순히 원형을 동일시한 것이다. 예를 들어 그의 《오디세이아》 해석은 오디세우스의 삶이 어떻게 영웅적 양태에 합치하는가를 보여준다. 이와 대조적으로, 융은 원형의 동일시가 단지 신화 해석의 첫 번째 단계라고 생각했다."[103] 그리스 신화의 현대적 연구의 창시자 중 한 명인 칼 케레니이는 융의 그리스 신화에 대한 원형 이론을 적용하고자 신화에 대한 자신의 초기 견해를 철회하였다.[104]


기원론[편집]

 인테르프레타티오 그라에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칼 케레니이는 신화에 대해 "신과 신과 유사한 존재에 대한 이야기에 포함된 재료의 주요부이며, 영웅의 전투와 지하세계로의 여행 —신화소(mythologem)는 이것을 표현하는 최고의 그리스어다— 이야기는 이미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이상의 재형성에 제한이 따르지 않는다."고 말하였다.[105]

현대에는 그리스 신화의 기원에 대한 다양한 이론이 있다. 성서적 이론에 따르면, 신화적 전설은 실제 사실에서 가장되고 바뀐 부분은 있으나 모두 성서 속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다.[106] 역사적 이론에서는 신화에서 언급되는 모든 인물은 실존 인물이며, 그들과 관련된 전설은 단지 후대에 덧붙여진 것이라고 본다. 이 이론에서는 아이올로스의 이야기를 아이올로스가 티레니아 해에 위치한 어떤 섬의 지배자였다는 사실에서 생겨난 것으로 추정한다.[107] 우의적 이론은 모든 고대 신화가 우의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가졌다고 추정한다. 이와는 다르게 물리적 이론에서는 공기와 불, 물의 원소가 본래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었으며, 주요한 신들이 이러한 자연의 힘을 신격화한 것이라는 생각을 따르고 있다.[108] 막스 뮐러는 인도유럽 종교의 형태를 "본래" 명시하던 아리아인의 흔적을 찾아가는 방식을 통해서 이해하고자 했다. 1891년,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19세기에 이르러 완성된 인류 고대사에 관한 최고로 중요한 발견은 ... 다음의 표본 등식이었다. 산스크리트어 디아우스 피트르 = 그리스어 제우스 = 라틴어 주피터 = 고대 노르드어 티르"[109] 서로 다른 지역의 신화에서 드러나는 특성과 기능은 밀접한 평행성을 보이고 있으며, 이것은 전승이 공유되었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우라누스와 산스크리트 바루나 또는 그리스의 모이라와 노르드 신화의 노른의 경우처럼 언어의 유사성을 보이는 증거가 부족하여 확실한 입증은 어렵다.[110]


한편, 고고학과 신화학에서는 그리스가 소아시아와 근동 문명의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 아도니스는 근동의 죽음의 신과 유사성을 띄는데, 신화보다는 숭배 의식에서 그 사실이 명확히 드러난다. 아프로디테의 도해가 셈족 여신에서 파생된 부분이 많은 반면, 키벨레는 아나톨리아 문화를 그 뿌리로 두고 있다. 초창기 신의 세대(카오스와 그의 자손들)와 에누마 엘리시의 티아마트 또한 공통점이 많다.[111] 메이어 라인홀드는 "권력을 원하는 세대의 투쟁, 폭력을 통한 신의 계승을 비롯해서 근동의 신통기적 개념은 ... 그리스 신화 속으로 들어가 있다."고 말했다.[112] 인도유럽과 근동 기원에 더하여 일부 학자들은 그리스 신화가 크레타, 미케네, 필로스, 테베, 오르코메누스와 같은 프레헬레닉 문명에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로 추측하고 있다.[113] 종교 역사학자들은 크레타와 관련된 수많은 고대의 신화 구성에 매료되어 관심을 가졌다.(황소의 신, 제우스와 에우로페, 황소와 관계를 맺어 미노타우로스를 낳은 파시파에 등) 마틴 P. 닐슨 교수는 주요한 고전 그리스 신화가 미케네 문명과 선사 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결론 지었다.[114] 그러나, 역사학자 부르케르트는 크레타 궁전 시대의 도해로 비추어 볼 때, 이러한 이론은 확증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115]


서양 예술의 주제[편집]

 이 주제의 자세한 내용은 그리스 신화와 서양 예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1485–1486년 경, 캔버스에 유화, 우피치, 플로렌스) — 고대 다신교의 새로운 관점을 목적으로 한 베누스 푸티카의 재현. 현대인을 위한 르네상스 정신의 전형으로도 통한다.[2]

광범위하게 수용된 기독교는 신화의 유행을 억제하지 않았다. 르네상스 시대에 고전고대의 재발견이 이루어지면서, 오비디우스의 시는 시인과 극작가, 음악가, 예술가들의 창조력과 영감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116] 르네상스 초기부터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와 같은 예술가들은 그리스 신화의 이교적인 주제를 전통적인 기독교적 주제와 나란히 그림으로 묘사하였다.[116] 그리스 신화는 라틴 매체와 오비디우스 작품의 유입을 통해서 이탈리아의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 단테와 같은 중세 르네상스 시인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2]



허버트 제임스 드레이퍼의 1898년 작품 《이카로스를 위한 탄식》

북부 유럽에서는 그리스 신화를 시각 예술의 주제로 채용하지 않았으나, 문학 분야에서는 그 영향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리스 신화에 영향을 받은 영국인의 예술적 창조력은 초서와 존 밀턴을 시작으로 본격화되었으며, 20세기에 이르러서는 셰익스피어와 로버트 브리지스를 통해 계속되었다. 프랑스의 라신과 독일의 괴테는 고대 신화를 개작하면서 그리스 연극을 부활시켰다.[116]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동안에 그리스 신화에 대한 저항이 유럽 전역에 퍼졌지만, 신화는 극작가들에게 여전히 천연 그대로의 중요한 소재였으며, 헨델과 모차르트의 오페라에서는 리브레토로 쓰여지기도 했다.[117] 18세기 말에 와서는 낭만주의가 그리스 신화를 비롯한 그리스 문화의 뜨거운 열풍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는데, 영국에서는 그리스 비극과 호메로스 작품의 새로운 번역물이 출간되면서 동시대의 시인(알프레드 테니슨, 키츠, 바이런, 셸리 등)과 화가(프레더릭 레이턴, 로렌스 앨머 태디마 등)에게 영향을 끼쳤다.[118] 크리스토프 글루크, 리차드 스트라우스, 자크 오펜바흐를 비롯한 여러 작곡가는 음악에 그리스 신화적 주제를 심어두기도 하였다.[2] 토머스 불핀치와 너대니얼 호손과 같은 19세기 미국 작가들은 영미 문학을 이해하는데 있어 고전 신화의 연구는 필수적이라고 여겼다.[119] 최근에 와서는, 프랑스의 장 아누이, 장 콕토, 장 지로두, 미국의 유진 오닐, 영국의 T. S. 엘리엇과 같은 극작가와 제임스 조이스, 앙드레 지드와 같은 소설가에 의해 고전적 주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이루어졌다.[2]


D03 – 문학사 개요

 (출전 :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3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1.  그리스 문학

  서양인의 영원한 마음의 고향은 그리스다. 그리스 문학을 전범으로 삼고 있는 서양문학은 기원전 8세기경 호메로스의 서사시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로마문학을 거쳐 중세와 르네상스, 그리고 고전주의 문학으로 이어졌다. 초기에는 서사시와 서정시가 발전하게 되고 아테네 전성시대에는 비극과 희극산문의 확립에 이른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시절부터 쇠퇴하기 시작하다가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하면서부터 고전시대의 그리스 문학은 종말을 고한다.


   호메로스 (Homeros, Homer, 기원전 800년 ~ 기원전 750년경에 활동)

  그리스 문학의 최초의 형식은 서사시 epic였으며 이를 대표하는 위대한 시인은 호메로스다. 호메로스는 이전부터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오던 신화들을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로 정리하여 신과 영웅들의 이야기를 펼쳐나갔다. 두 작품 모두 트로이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트로이 전쟁이 시작된 지 10년째 되던 해의 사건을 취급하고 있는 <일리아드>는 특히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우스의 사랑과 분노, 그리고 트로이의 장군 헥토르의 국가에 대한 충성을 다룬 작품이다. <오디세이아>는 전쟁이 끝난 후 그리스 영웅 오디세우스가 고향으로 귀환하던 중 겪게 되는 10년간의 방랑과 모험, 그리고 20년간 정절을 지키고 있던 부인 페넬로페와 극적 상봉을 줄거리로 하는 서사시다.

  이 과정에서 호메로스는 실존했던 역사적 인물들을 반신의 위치로 격상시켜 보통 인간이 극복할 수 없는 운명과 시련에 맞서 싸우는 인간의 위대함을 그려내고 있다. 이 두 시는 다 용의주도하게 짜여진 플롯, 시적 음악성, 상상력에의 호소, 성격묘사의 박진감 등에 있어서 인류의 영원한 고전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서사시에 뒤이어 리라 lyra라는 현악기에 맞추어 낭송되는 서정시가 헤시오도스에 의해 큰 발전을 보게 되나 아직 서사적인 국민문학 수준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헤시오도스는 농사에 대한 교훈을 담은 <일과 나날>, 그리스 신화에 관한 <신통기>를 남겼다.


   사포 (Sappho, BC 610~580년경 소아시아 레스보스 섬에서 활동한 유명한 서정시인)

  대표적인 여류시인 사포는 사랑과 비극적 감정을 심오하고 아름다운 서정시로 썼다. 또 다른 시인 핀다로스는 귀족생활을 시로 표현하고 올림픽 선수들을 찬미하는 송시를 썼다.



   3대 비극시인

  그리스인들의 최고의 문학적 성취는 비극에 있었다. 그리스 비극은 기원전 534년경 국가의 번영과 풍요를 기원하는 디오니소스 축제의 일환으로 상연되기 시작했다. 술과 풍요의 신인 디오니소스를 찬미하던 일종의 종교적 축제가 5세기경부터 본격적인 예술의 성격을 띤 비극으로 발전한 것이다. 초기의 비극은 배우의 대화 부분과 코러스, 그리고 춤이 교대로 이어지는 형식을 취했다.

  그리스 비극의 아버지 아이스킬로스(Aeschylos, BC 525/524 ~ 456 BC)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등장하고 있는 <아가멤논>을 포함하는 <오레스테이아> 3부작과 하늘에서 불을 훔치다 인간 세상에 전해준 죄로 제우스의 분노를 사 그 벌로 바위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를 그렸다.

  그리스 비극은 소포클레스(Sophocles, B.C. 497/496~B.C. 406/405)에 와서 더욱 심화된다. <오이디푸스왕>에서는 저주받은 오이디푸스가 신탁의 내용과 같이 부친을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되는 비극적 운명이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오이디푸스의 딸 안티고네가 크레온 왕의 부당한 입법을 반대하여 생매장된다는 <안티고네>는 궁극적으로 숙명적인 인간의 비극을 암시하고 있다.

  에우리피데스(Euripides, 기원전 약 480년 이전 ~ 기원전 406년)는 이전처럼 신과 영웅을 주제로 하지 않고 인간적인 욕망과 불타는 복수심이 지배하는 현세적인 이미지가 강하다. 고독한 성격으로 여성을 혐오했던 <오이디푸스 왕>처럼 일방적인 운명의 희생이 아니라 인간적인 사랑과 원한에 얽힌 애증에 기초하는 <메데이아>를 대표작으로 남겼다.

그리스 희극은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 B.C. 448 ~ B.C. 380) 로 대표된다. 그는 <리시스트라테>에서 풍부한 유머와 우스꽝스러운 소동을 통하여 인간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건강한 정신을 잃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외에 이 시대작품으로 <이솝 우화>와 <플루타크 영웅전>이 전해온다.


2. 로마 문학

  원래 로마 인은 실질적인 국민으로서 강력한 군대를 조직하고 치밀한 법률을 제정하여 대제국을 건설했으나 장쾌한 신화세계와 웅대한 서사문학을 만든 그리스 인만큼 예술적 기질이 풍부하지 못했다.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정복당한 그리스는 오히려 광포한 로마를 문화로써 재정복했다>>고 말할 정도였는데, 한마디로 로마문학은 그리스 인들을 모방하는 수준이었다.

  로마 인들이 그리스의 선진문화를 모방하려고 노력한 것은 사실이지만 상호의 민족정신이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그리스의 문화 자체가 로마의 것이 될 수는 없었다. 즉 로마의 정신이 그리스처럼 고원하지 못한 것은 로마 인들의 의무와 규율성취를 생활모토로 하는 실용적인 국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 문학이 시적이라면 로마의 문학은 산문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모방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로마문학은 후세 유럽의 문학사상언어 등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 그리스 문학이 라틴어 번역을 통해서 보존되었기에 유럽사상의 매개체로서의 라틴문학의 역할은 높이 평가될 수 있다.

  이러한 라틴 문학사를 기원전 300년부터 기원후 100년까지 3단계로 나누어 관찰할 수 있는데 그 이후는 로마사회의 정치적 불안정과 병행하여 문학도 조락기에 들어선다.


   키케로 시대

  이 시기는 라틴문학 황금기의 전반부로 이 시기를 대표하는 사람은 로마 최대의 웅변가이자 산문의 대가인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기원전 106년 1월 3일 - 기원전 43년 12월 7일), 서정시인 카툴루스 (Catullus, 기원전 84년~기원전 54년), 정치가이자 산문작가인 케사르 (Gaius Julius Caesar, BC 100년 7월 12일 ~ 44년 3월 15일) 등이 있다. 특히 키케로의 지적 활동영역은 문학 비평 정치 사상과 철학 등에 걸쳐 다양했다. 그의 문체는 르네상스 휴머니스트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18세기 영국의 저술가인 기번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의 라틴 어는 아름다움과 고전적 취향으로 인해 <키케로 라틴>이라고 불린다.


   아우구스투스 시대(Augustus, BC 63 ~ AD 14)

  기원전 31년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면서 라틴문학의 진정한 황금기가 도래한다. 아우구스투스 대제는 새 제국에 정치적 안정을 가져오고 시와 산문의 발달에 알맞는 사회적 지적 풍토를 이루어놓았다. 로마문학은 서정시 분야에서 두드러졌다. 송시나 풍자시를 지은 호라티우스를 비롯하여 오비디우스 베르길리우스 등의 일급 시인을 배출했다. 그리스의 호메로스에 필적하는 베르길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후원을 받으며 로마의 건국 서사시인 <아에네이스>에서 호메로스의 서사시 전통을 이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가 주인공이 개인의 명예회복을 위해 투쟁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는 데 반해, <아에네이스>는 미래의 국가건설이라는 보다 원대한 목표를 쟁취하려는 인물로 그려진다. 도시 출신 오비디우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 중에서 변형(변신)에 관한 내용 246편을 모은 그리스로마 신화집 <변신 이야기>에서 그리스의 서정시인 사포를 계승했다.

  로마의 시 이론가인 호라티우스는 그리스의 서정시인 알카이오스와 사포의 시풍을 모방한 풍자와 위트유머가 담긴 서정시를 썼다. 그는 고대의 모범적인 정신에 이성적 규범을 두어 문학에 질서와 조화를 도모한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백)은 시대

  이 시기의 문학작품은 이전 시대에 비길 바가 못되고 문학은 점차 쇠퇴했다. 이 시기에 폭군 네로의 가정교사였던 세네카는 철학적 에세이와 비극작품을 저술하여 르네상스 이후의 프랑스 영국에 영향을 미쳤다. 이런 흐름을 거쳐 로마문학은 결국 중세 초까지 이어져 내려왔고, 그리스 문학은 전적으로 라틴 전통 속에 포함되어 르네상스에 이르러 재발견되었다. 그후 <고전적>인 전통은 특히 17세기 작가들이 주제와 문체에서 그리스와 로마 작가들을 그대로 본받을 정도로 강력했다.

극 서정시 풍자시 역사 전기 산문 등 문학의 모든 주요 분야가 고대 그리스로마 작가들에 의해 이미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후에 발전한 분야는 대부분 이것으로부터 파생된 것에 불과하다.


3. 중세문학

  암흑기의 중세문학은 라틴어 문학과 각국어(속어) 문학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라틴 어는 지식인의 공통어로서 교회의 기도설교 대학강의 저술 등에 사용되었다. 각국어는 당시 라틴어에 대해 속어라고 불렸는데, 그것은 대부분의 유럽 인구가 지역적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의 일반대중은 라틴 어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호소하는 문학은 대중들이 사용하는 일상용어로 씌어져야만 했다.


   라틴문학

  라틴문학은 한마디로 성직자에 의해 씌어진 기독교 계통의 문학이다. 그래서 소설이나 설화와 같은 순수한 문예작품보다는 교회 역사 서간 등에 관한 종교적이고 공식적인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독창적이지 못했다. 파리대학 교수였던 아벨라르와 그의 애인 엘로이즈 사이의 <왕복서신>, 성 프란체스코의 생애를 그린 <작은 꽃>, 왕자들의 일화를 모은 <황금전설>등이 여기에 속한다.


   속어문학

  라틴문학에 비해서 속어문학은 그 주제의 다양성에 비추어 중세의 대중에게 크게 호소력을 갖고 있었다. 중세의 속어문학은 대체로 세 집단, 즉 기사문학, 도시민의 문학, 일반서민문학으로 구분되어 생각할 수 있다. 이 가운데 기사문학이 그 주제 내용 형식에 있어서 가장 풍부하여 중세문학의 큰 줄기를 이루었다.

  기사문학은 귀족들의 취향에 맞게 작품화되었는데, 그 형식은 <영웅서사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영웅서사시의 대표작으로는 영국의 <베어울프> <아서 왕의 이야기>, 독일의 <힐데브란트의 노래> <니벨룽겐의 노래>, 프랑스의 <롤랑의 노래> 등이 있다.

  이중 <아서 왕의 이야기>는 6세기 무렵 켈트 족의 전설적인 왕 아서 (Arthur)와 원탁기사단의 활약상에 관한 이야기다. 전설에 의하면 아서 왕은 브리튼 왕인 아버지가 마법사의 도움으로 귀부인과 동침해서 태어난 아이다. 젊어서 브리튼 왕이 된 아서는 보검 엑스칼리버를 얻어 이 칼로 여러 나라를 평정한다. 그는 귀족의 딸 기네비아를 왕비로 삼고 왕비를 조카인 모드레드에게 맡긴 채, 로마 원정을 떠났다.

  그러자 조카는 그의 부재중 왕위와 왕비를 빼앗았다. 아서는 원정을 중단하고 귀국하여 모드레드를 처단했으나 자신도 치명상을 입고 불가사의한 섬 애벌론으로 떠난다.

  이것이 대강의 줄거리인데 여기에 원탁의 기사단 150명의 건국 이야기와 그들의 활약과 사랑, 그리스도가 최후의 만찬 때 사용하고 아리마태아 요셉이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가 흘린 피를 받았다는 잔인 성배의 행방을 탐색하는 이야기 등 여러 전설을 총칭해서 아서 왕의 전설이라 하는데, 이 전설을 소재로 수많은 작품이 만들어졌다.

  프랑스의 대표적 무훈시 <롤랑의 노래>는 스페인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샤를마뉴 대제의 조카이며 지휘관인 롤랑이 피레네 산중에서 사라센 군에게 포위되어 장렬하게 전사하고 샤를마뉴 대제가 이를 복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독일의 대표적인 영웅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는 2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반부에서는 주인공 지그프리트의 죽음, 후반부에서는 그의 부인인 크림힐트의 복수를 다루고 있다. 괴테는 이 작품을 <<이 시는 국민이 어느 정도의 교양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야 하는 없어서는 안될 작품>>으로 평가한 바 있다.

  그리고 초서 페트라르카 보카치오 같은 몇몇 위대한 시인들과 작가들은 중세의 말기에 출현하여 중세사회를 탁월하게 해설함과 동시에 르네상스 문학의 주제와 형식을 암시했다.


4. 르네상스 시대

  1453년 터키가 그리스 문명의 마지막 보고인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자 많은 학자들이 그들의 필사본을 들고 이탈리아 전역으로 피신했는데, 이들에 의해 고대문화가 유럽에 전파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재생>이라는 의미의 르네상스 (Renaissance)는 그리스 로마의 원전을 통해 고대정신, 즉 중세의 신학에 눌려 있던 인간성에 바탕을 둔 학문과 예술의 부흥을 의미한다. 이러한 르네상스의 사상적 측면은 <휴머니즘>으로, 이는 좁은 의미로는 그리스 로마의 고전에 대한 관심을 상기시키는 운동이며, 넓은 의미로는 현세의 인간사 및 지상에 있어서의 인간의 역할에 대한 관심을 깨우치는 운동이었다. 그것은 인간성을 고양하면서 세속생활을 강조하고 개성을 표현하며 비판정신을 기르는 경향이었다. 

  이러한 고대정신을 이어받은 르네상스가 질서와 균형을 미학의 원리로 삼는 고전주의로의 길을 열었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중세적 종교관과 우주관을 극복하고 학문 전분야에 <인간> 중심의 변화를 가져오게 한 이 르네상스는 그 본류를 이탈리아에서 찾고 있다.

   이탈리아

  그 이유는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면서 고도로 발달한 그리스의 인적 물적 유산이 로마로 흘러 들어 오면서 문예중흥의 분위기가 성숙되고, 여기에 문예를 숭상하는 메디치가의 집권, 사회적으로 자본을 축적한 상공인들의 득세, 문화적으로 높은 교양과 학식을 추구하는 지식인들의 정열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정신적 태동을 알리는 첫 작품이 단테의 <신곡>이다. 단테는 중세의 모든 학문을 총괄하고 그리스의 호메로스와 로마의 베르길리우스가 쌓은 장편 서사시의 전통을 계승하여 불멸의 고전 <신곡>을 저술했다.

  아직 중세적인 신앙의 굴레를 완전히 벗지 못한 <신곡>은 악을 물리치고 선을 행하려는 인간적 의지에 바탕을 두고 있다. 특히 연옥에서 죽은 자들과의 만남은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는 인간의 세속적 희망을 보게 한다. 단테는 신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의지가 조화를 이룬 곳이 천국임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에게 삶의 빛을 던져주고 있다. 그러나 그가 인간을 탐구하는 데 있어서의 마지막 보루는 여전히 종교적 신앙이었기 때문에 단테를 완전한 인문주의자로 평가하는 데는 무리가 있어 그를 <최후의 중세인>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단테의 이러한 중세적 분위기를 벗어던진 사람이 <최초의 근대인>으로 평가되는 페트라르카이다. 그는 중세적인 문화를 철저히 배격하고 고대의 발견을 통한 인간중심 사상을 학문연구의 바탕으로 삼았다. 젊은 시절부터 베르길리우스나 키케로를 탐독하면서 이탈리아 어로 아름다운 서정시를 써서 사람과 자연을 노래했다. 그는 그의 애인인 라우라에게 보낸 많은 서정시들을 담은 <칸초니에레>를 남기고 있는데 인간적인 사랑과 고독, 삶과 죽음 등 국민 대중의 정서를 담은 노래로 천재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보카치오도 역시 고대문학 탐구에 열정을 보인 휴머니스트로 산문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당시 지식인의 덕목인 고전연구를 통해서 높은 교양을 쌓고,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인간탐구에 몰두했다. 그는 삶을 영위하는 인간이 존재하는 한, 삶을 사랑해야 하며 삶을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인 관점에서 정상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인간의 현세적인 삶을 중시한 태도로 인생에 대한 올바른 성찰과 이해, 나아가 몽테뉴적인 <삶의 지혜>에 대한 촉구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상은 수세기 동안 기독교가 지배했던 당시의 전통에 비추어볼 때 세속적이고 이단적이었다. 특히 <데카메론>은 전통적인 중세적 종교관을 외면하고 세속적 의미를 부여한 근대소설의 시조였다. 그런 의미에서 단테의 <신곡>을 <신적인 희곡>으로 부르고,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을 <인간적인 희곡>, 즉 <인곡>으로 부른다.


   프랑스

  이렇게 찬란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를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한 나라는 프랑스다. 그리스의 문학예술이 로마를 거쳐 이탈리아에 전수되고 이어 프랑스에 영향을 주었다.

  프랑스 인들은 이탈리아에 활짝 핀 문학과 예술, 풍요로운 삶등 고대문화의 향기에 심취했다. 더욱이 프랑수아 1세가 세운 <왕립학사원>에는 신학문에 매료된 젊은 학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본격적으로 고전을 연구하기에 이르렀고, 이탈리아처럼 라틴어와 그리스 어를 배우는 것이 학자들의 덕목이자 교양의 필수조건이 되었다.

  프랑스 휴머니즘의 기수 라블레는 의학을 공부한 수도 성직자로서 고전연구에 몰두하는 한편 전국을 누비며 다양한 경험과 교양을 쌓고 견문을 넓혔다. 그는 단순한 학자나 의사가 아니라 모든 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갖춘 휴머니스트로서 예리한 비판의 소유자가 되었다. 그의 개혁정신이 더욱 빛나는 것은 현학적인 공허한 논리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낙천적인 미래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는 거인 가르강튀아와 그의 아들 팡타그뤼엘 및 동료들의 모험을 다룬 익살스럽고 풍자적인 이야기인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이라는 사회풍자 작품을 남겼다. 작품이 외설스럽고 반 종교적이라 하여 이 작품은 금서가 되기도 했고 작가는 당국으로부터 탄압을 받기도 햇다.

  한편 인간 본래의 모습과 권위를 회복하기 위한 인문주의자들의 노력은 기존의 전통과 마찰이 불가피했는데, 그 충돌이 정치적으로 시민혁명과 농민전쟁이었고, 신앙적인 면에서는 종교전쟁이었다. 결국 승리는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투쟁의 고삐를 늦추지 않은 휴머니스트들에게 돌아갔지만 이에 따른 정신적 피해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16세기의 정신적 위기상황에 인간의 양식을 믿은 지혜로운 철학자 몽테뉴의 출현은 다행한 일이었다. 그의 위대한 사상은 휴머니스트들의 지나친 독단과 편견, 그리고 중세적인 봉건적 사고방식 모두에 대한 현명한 판단과 처방이었다. 휴머니즘의 철학적 성찰의 원천을 고대에서 찾은 그는 정치와 종교에 예속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독립된 개체, 자유의지에 바탕을 둔 인간을 성찰의 대상으로 삼았다.

  3권으로 된 그의 <수상록>은 인생과 철학윤리에 대한 깊은 명상과 삶에 대한 사색으로 자신의 진실된 모습을 그려나가고 있다. 개인적인 독서로 보편적인 진리를 더듬어나가는 그의 삶의 태도는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자문 속에 함축되어 있다. 

  라블레로부터 시작된 프랑스 휴머니즘이 때로는 황당무계한 거인들이 철갑을 둘러친 봉건영주의 성곽과 교회를 신나게 두드려 부수는 일에 박수를 보내기도 했으나, 이 같은 과격함에 자성과 자제를 촉구하고 나선 것이 몽테뉴다. 그는 이러한 무모한 행동보다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 지혜를 인생의 덕목으로 삼았다.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는 보편적인 지혜, 그 예지가 그가 말하는 <삶의 기술>이다. 이렇게 절제된 정신적 분위기는 16세기를 극복하고 고전주의로 향하게 하는 힘이 된다.


   영국

  영국의 르네상스는 프랑스와는 달리 이탈리아와의 간접적인 관계라는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탈리아와는 지리적으로 격리된 상태였고, 5세기경의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에 따라 독일문학의 영향이 더 컸다.

  영국 르네상스의 선구자 초서는 <데카메론>의 영향을 받아 <캔터베리 이야기>를 남겼다. 켄터베리 대성당 안의 성지를 참배하는 순례자들의 이야기를 모은 것으로, 순례자 집단에는 왕과 거지를 제외한 중세를 구성하는 모든 계층의 인물들을 등장시켜 당시 사람들의 가치 풍속 습관 등을 자세히 보여주는 한편 그들에게 살아서 숨쉬는 성격을 부여했다.

  세계문학사에 우뚝 선 셰익스피어의 출현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극문학 발전에 획기적인 전기가 되었다. 그의 연극은 사실 근대적인 극적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어 고전주의 문학에서 다루는 것도 무방하다. 그는 연극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인간 내면세계의 극한을 추구했고, 시적 표현으로 가득 찬 최고의 운문을 보여주었다.

  영국이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는 셰익스피어는 인간의 내면을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예리하게 그렸다. 특히 언어의 마술사인 작가의 절묘한 표현과 철학적 주제가 잘 어우러진 <4대 비극>은, 진실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최대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인간의 장대하고 비극적인 세계>를 제시했다.

  영국 문예부흥기의 최후의 대시인인 밀턴도 1667년에 천지창조와 낙원추방 신화를 대서사시로 형상화한 걸작 <실락원>을 남겼다. 번연은 청교도로서의 신앙체험의 문제를 우화형식으로 형상화한 일종의 종교소설 <천로역정>을 발표하여 영국 근대문학 발전에 기여했다.


   독일

  독일 지방의 학자들은 이탈리아 휴머니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나 나름대로 독자적인 지적 발전을 이루어나갔다. 이탈리아 유학에서 고전학을 배운 로이힐린은 독일 휴머니즘 운동의 두드러진 지도자였으며 <독일의 불사조>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그는 구약성서 해석을 위한 히브리 어 연구에 그의 삶을 바쳤다. 1506년에 출판한 히브리 문법은 그 계통의 최초의 것으로서 북방의 학계에 큰 자극을 주었다.

  히브리 어로 출판된 서적에 대한 탄압은 당시의 풍조여서 이를 공공연히 반대한 그는 이단으로 몰려 6년 동안 종교재판을 받게 된다. 그의 문제를 둘러싸고 신학자들과 휴머니스트 사이에 오고 간 오랜 논쟁은 자유탐구와 보수적 권위와의 싸움이었으며, 새로운 휴머니스트들의 학풍이 중세적 전통에 도전하는 과정을 상징했다.

  한편 네덜란드의 에라스무스는 <우신예찬>에서 여신 모리아가 이 세상에 어리석음이 얼마나 가득한가를 헤아려보고 자신의 힘을 뽐낸다는 이야기를 통해 교회와 세상에 대한 풍자를 담아냈다.

  스페인의 세르반테스는 동시대의 작가 셰익스피어가 <우유부단한 햄릿 형>의 인물을 창조한 반면, <저돌적인 돈 키호테 형>적 인간을 그려냄으로써, 이후 문학사에 전형적인 두 성격 유형을 각인시켰다. 그의 <돈 키호테>는 돈 키호테의 모험과 좌절을 통해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체험하는 인문주의적 인간의 자기발견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리스와 로마의 고대문학은 중세라는 침체기를 거쳐 이탈리아에 전수되었고, 르네상스 기에 들어와 인간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인간과 세계, 인간과 종교적 질서의 모순에 대해 눈을 돌렸다는 것은 하나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그러나 점차 시민정신이 함양됨에 따라 개인적 욕구는 사회적 혼란을 불러와 국민의 불안을 초래했으며, 그 결과 국가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중앙집권적인 절대군주 시대의 출현을 가져왔다. 이로써 정치는 물론이고 문학에 있어서도 절도를 미덕으로 삼는 고전주의 전통이 확립되었다.


5. 17--18세기 고전주의 문학

  17세기를 <천재의 세기>, 18세기를 <이성의 세기>라고 표현하는 것은 이 시 대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면이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문학은 인간의 개성과 감정을 자유로이 표출하는 자유분방한 문학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성으로 17--18세기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영국 독일 등에서 이성과 절도를 존중하는 고전주의가 생겨났다. 고전주의란 한마디로 그리스로마의 고전작품을 영원불멸의 모범으로 삼아 합리주의적 이성, 자연의 모방, 규칙의 존중, 균형과 조화, 합리성과 형식미를 특징으로 하는 문학이다. 이후 고전주의는 이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낭만주의와 함께 2대 문예사조를 이룬다.


   프랑스

  고전주의 문학은 프랑스에서 가장 성행했는데, 그중에서도 1660년경부터 약 200년간에 걸쳐 활약한 3대 고전주의 작가, 즉 비극작가인 라신코르네유 희극작가인 몰리에르가 대표적이다. 다행히 절대군주 루이 14세는 르네상스 기의 혼란을 가혹한 탄압으로 평정했으면서도 문예에 깊은 관심을 보인 문학 애호가여서 문인들의 후원자가 되었고, 지식인 문인 귀족계급들은 상류사회에 배타적인 사교계를 형성하여 세련된 언어로 그들의 관심사인 문학과 예술정치를 논했다. <살롱>을 중심으로 한 이러한 지적 모임은 고전주의 문학의 바탕을 이루는 인간심리 탐구의 길을 열어놓았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프랑스 고전비극의 창시자로 간주되는 코르네이유는 <르 시드>에서 가문의 명예 때문에 서로 원수가 된 사랑하는 남녀를 주인공으로 하여, 자유의지가 정념보다 명예를 선택하고 고매한 행동을 관철하도록 하는 과정을 인간 내면의 갈등을 통해 그려내어 획기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르 시드>는 전대미문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론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를 시기한 동료들로부터 <삼단일 법칙> 등 고전극의 규칙을 지키지 못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어 유명한 <르 시드>논쟁이 벌어지자 그후 3년간 붓을 꺾기도 했다. 그리스 고전극이 요구했던 <삼단일 법칙>이란 단 하루 동안에 일어난 단일한 사건을 한 장소에서 마무리해야 한다는 외적 규제장치를 말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유래한다.

  프랑스 고전규칙을 엄격히 지킨 순수비극은 라신에 와서 완성된다. 일찍이 코르네유의 연극을 제반 규칙에 어긋나는 부자연스러운 작품이라고 평한 그답게 단일한 사건에 시간과 장소라는 의적 규제를 통해 내적 필연에 이르게 하는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했다. 그에게 있어서 고전비극의 엄격한 규칙은 전혀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이 아니라 그 자체를 의식할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틀이었다.

  그의 비극은 대부분 소재를 그리스나 로마에서 빌어오고 극적 논리를 고대모방에 둠으로써 고전극의 전형을 이루었다. 더구나 논리적 귀결이 만들어내는 내적 필연은 인간적 파멸로 치달아 고도의 긴장감을 자아낸다. 코르네유의 비극이 자기 운명을 극복해 나가는 위대한 영웅의 모습을 통해 인간정신과 의지의 승리를 그렸다면, 라신은 그 운명과 정면으로 대결하여 파국에 이르는 비극적이고 장엄한 인간의 모습을 그렸다. 이 파멸이 곧 순수비극의 미학원리인 내적 갈등의 폭발이다.

  그의 <페드르>는 한 인간의 정열이 그 자체의 논리적 필연에 의해 의지와는 무관하게 어떻게 최후의 폭발점을 향해 치닫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밀도와 집중 그리고 엄밀한 구성이라는 프랑스 순수비극의 이상을 보여준다.

  라신이 인간의 보편적인 내면의 진실을 비극을 통해 구현한 데 비해 몰리에르는 같은 주제를 희극을 통해서 실천했다. 웃음을 통해 인간 내면의 진실을 드러내는 작업, 그것은 사물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과 탐색, 그리고 기지와 지혜, 표현방식이 문제가 되는데, 그의 연구 대상은 인간의 우스꽝스러운 약점과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다. 잘난 체하는 여자, 위선자, 현학자, 엉터리의사, 구두쇠 영감 등이 위선과 자기기만의 희생물들이다. 그의 대표작 <타르튀프>는 고전희극의 모범으로 개인과 사회의 갈등이라는 현대적 문제를 선구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영국

  영국의 고전주의는 엘리자베스 시대에 싹트기 시작하여 18세기에 개화한다. 프랑스 고전주의의 영향을 받아 정치 종교뿐 아니라 문학에 엄격한 형식을 부과하는 합리적인 이성이 존중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영국의 고전주의는 경직된 프랑스에 비해 훨씬 개방적이고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셰익스피어는 <삼단일 법칙>을 무시하다시피 했지만 벤 존슨은 고대작가들의 모범을 좇아 <삼단일 법칙>을 본격적으로 적용하기 시작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내면적 진실의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개인마다 현실에 달리 적응하는 심리적 특질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인간성격을 지배하는 기질이다. 그는 이러한 기질적 특성을 상반되는 성격을 가진 인물들의 충돌과 화해, 때로는 모순을 통해 구조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17세기의 대표적인 극작가 드라이든은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의 고대문학을 번역하는 한편, 그들의 문학규범을 대담하게 지킨 희극비극 등 27편의 작품을 썼다. 그는 영웅비극이라는 프랑스적 순수비극에 도전해 고전주의의 전통적 주제인 사랑과 명예를 조화롭게 다루었다.

  19세기 대표적인 작가는 포프이다. 그리스나 로마의 고전을 모범으로 삼아 문학에 간결 명료한 표현과 견고한 구성을 주려고 했던 그는 전형적인 이성존중의 <비평론>과 <인간론>을 썼다. 이 두 작품은 고전주의 문학정신이라고 할 이성존중과 귀족정신을 기리는 철학적 교훈시다.

  이밖에도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와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는 사실적 묘사와 참신한 문학정신으로 근대소설의 전형으로 평가 받고 있다. 디포는 최악의 자연조건을 극복하는 인간의 위대한 모습을 통해 청교도의 낙관주의적 삶의 철학을 보여주었고, 스위프트는 걸리버의 환상적인 여행을 통해 당대의 부르주아 사회와 정치적 모순을 풍자하고 있다.

  영국의 고전주의는 프랑스에서와 같이 형식적 논리에 전적으로 매달리지는 않았지만, 고대문학에 대한 동경과 관심, 그리고 지향이 꾸준히 계속되면서 포프에 이르어 절정을 이룬다. 그러나 새뮤얼 존슨 이후 차츰 쇠퇴하기 시작하여 19세기에 결국 낭만주의에 자리를 내주고 만다.


   독일

  독일문학에서 말하는 고전주의 시대는 프랑스와 영국의 고전주의가 쇠퇴하는 시점인 18세기 말 계몽주의의 발흥과 함께 시작된다. 인간중심의 세계관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가져왔고, 이러한 의식의 전환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이 존중되는 합리주의 정신, 즉 개인의 자각을 불러왔는데, 이것이 계몽주의 사상의 출발이다.

  1770년경 지나치게 이성만을 요구하는 계몽주의에 반대하여 인간의 자유로운 감정을 바탕으로 무미건조한 형식적 규제를 타파하고 문학에 자율과 개성을 부여한 것이 <질풍노도 Strum und Drang>다. 합리와 규칙의 존중이 아니라 인간의 본능적인 감정에 우위를 둔 이러한 질풍노도 운동을 주도한 것은 헤르더였고, 그와 교우관계에 있던 레싱과 괴테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본능적인 힘과 감정의 폭발에 예술적 형식인 균형과 질서, 즉 균제로 고전주의 미학을 확립한 것이 괴테와 실러였다. 괴테를 결정적으로 예술에 눈뜨게 한 것은 이탈리아 여행을 통한 고대예술과의 만남이다. 이탈리아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그는 <<나는 이탈리아에서 다시 태어났다>>고 실토했다. 그는 이 여행을 통해 절도와 균형이 예술적 조화를 이루는 고전미학을 발견한 것이다. 이로써 그의 젊은 시절을 사로잡았던 질풍노도적인 취향은 극복되었다.

  괴테 개인의 성장사일 뿐만 아니라 세계문학의 보배인 <파우스트>는 괴테가 젊은 질풍노도 시대로부터 출발하여 고전주의를 거쳐, 만년의 종합적 완성기에 이르는 전생애를 담고 있다. 즉, 괴테 자신의 모든 인생체험과 사상을 바탕으로 인간존재의 방황 갈등 구원 등의 문제를 해결해보려는 거대한 노력의 산물로, 이 작품의 메시지는 인간은 자기향상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방황하지만, 이것을 계속하는 한 결국에는 하늘에 의해 구원된다는 그의 종교관을 반영하고 있다. 우리는 이 작품에서 인간영혼의 구원과 구원을 향한 구도자로서의 괴테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청년기에 괴테와 함께 질풍노도 운동에 참가했던 실러는 괴테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고 셰익스피어 레싱 루소 등을 탐독했다.  처음에 사회적 부패와 정치적 압제에 반항하며 자유와 이성에 불탔던 그의 정신은 괴테와 교유하면서 차츰 문학적 성숙으로 변모해간다. 그의 <도적들>과 <돈 카를로스>는 작가의 자유이념과 정치이상을 잘 구현하고 있는 작품으로, 고매한 인격으로 이상국가를 실현하려는 인간적 믿음과 사랑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러한 실러가 46세로 요절하자 괘테는 절망감에 빠져 <<내 인생의 절반을 잃었다>>고 비통해했다한다.                        

  이와 같이 합리주의 정신에 바탕을 둔 이성존중의 계몽주의가 질풍노도와 같은 정신적 반동을 거쳐 질서와 균형이라는 고대의 규범에 승복하여 미학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러한 독일의 고전주의 경향은 19세기 초까지 계속되다가 곧 낭만주의 문학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6. 19세기 전반 낭만주의 문학

  18세기 말부터는 종래의 고전주의에 반대하여 개성과 독창성을 존중하는 낭만주의가 개화했다. 낭만주의는 이성보다 감정, 형식보다는 내용, 보편성보다는 특수성, 규범보다는 개성, 현실보다는 상상의 세계를 중시하고, 자연과 민족민중에 대한 깊은 애정을 그 본질로 한다고 할 수 있다. 1930년대에 절정에 달했던 낭만주의는 19세기 말의 상징주의, 예술 지상주의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었다. 

  당시 유럽 전역에 가득했던 낭만주의의 조류에 편승하여 러시아도 서양문학에 참여하게 되며 19세기 후반에는 우수한 장편소설로서 세계문학에 이바지하게 된다.


   프랑스

  프랑스에서도 19세기 전반을 지배한 것은 낭만주의 문학이었으며 프랑스 혁명과 루소는 모든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 낭만주의는 특히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친 루소의 영향이 컸다. 프랑스의 낭만주의는 신비적인 경향의 흐름과 개인적 자유와 사회개혁에 대한 옹호를 나타내는 두 가지 흐름이 있었다.

  신비적인 비합리성의 대표자로 샤토브리앙은 크리스트 교의 신비와 대중의 신성한 순진함 속에서 우주의 가장 장엄한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그는 이성의 인간을 위험으로부터 구제하여 신앙의 시대로 되돌리려 했다.

  한편 프랑스 낭만주의의 자유롭고 개인주의적인 면은 뮈세 상드 위고 뒤마 등의 작품에서 잘 표현되었다. 뮈세는 이지적인 면보다는 감정과 기분을 마음대로 표출하여 프랑스의 바이런으로 통했다. 어려서부터 시적 재능을 발휘하여 위고의 격려를 받기도 했던 그는 여류 소설가인 상드와 이탈리아로 사랑의 도피여행을 떠났으나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후 그는 수년 동안 <밤>이란 일련의 아름다운 서정시를 발표했다.

  상드는 목가적인 아름다운 전원생활에 관한 소설을 써서 많은 독자들을 매료시켰다. 농민이나 노동자를 소설의 주인공으로 한 최초의 작가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한 그녀는 결혼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여권을 주장하기도 했다.

  프랑스 낭만주의의 대표적 작가이자 열렬한 민주주의자인 위고는 그의 인도주의적 세계관과 기독교적인 사랑이 담긴 <레 미제라블>에서 한 인간의 사소한 죄가 영웅적인 인내로써 어떻게 보상되는가를 그려냈다. 만년에는 신에 봉사하고 신의 품안에서 인간의 완성을 도모하는 인도주의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1885년 최초로 국민장으로 치러진 그의 장례식 때 상젤리제에서 소르본까지 추도 행렬이 줄을 이었고, 지금은 <위대한 영광의 판테옹>에 안장되어 있다.

  한편 역사소설의 대가인 뒤마의 <몬테 크리스토 백작>은 오늘날에도 많이 읽혀지고 있다.


   영국

  영국 낭만주의의 위대한 선구자는 워즈워스와 콜리지다. 워즈워스는 자연에 대한 깊은 신비적인 사랑을 표현했다. 자연의 표면적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력을 결합시키는 보편적 정서로서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그리고 콜리지는 신비적이고 환상적인 시를 지었다.

  영국의 3대 낭만주의 작가는 키츠 셸리 바이런이다. 키츠는 옛 그리스 작가들이 미와 선을 동일시한 것처럼 미와 지를 동일시했다. 미는 진리요, 진리는 미라고 믿었다. 무신론자라는 이유로 옥스퍼드 대학에서 추방당했던 셸리는 후에 젊은 시절의 과격한 극단론을 수정하긴 했으나 불의를 미워하고 행복과 자유에 대한 갈망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사슬 풀린 프로메테우스>에서 인간의 완성은 사상과 행위의 완전한 자유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었다.

  10세에 남작 칭호를 이어받은 바이런은 셸리보다 더 도발적이며 모험적인 시인으로서 위선과 사회적 속박을 조소한 사람이었다. 자연과 아름다움을 찾아 유럽 일대를 방랑한 그는 대표작 <돈주앙>에 낭만주의 정신을 잘 나타내고 있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갑자기 유명해졌다>>라는 말이 통할 정도로 낭만적인 기질을 생래적으로 타고난 시인이 바이런이었다.

  시와 산문에 다 같이 능했던 왕당파인 스코트는 프랑스의 위고처럼 과거의 인물이나 전설 등을 소재로 소설을 썼다. 스코틀랜드의 전설을 주제로 한 시와 모험담인 <아이반호>는 특히 중세생활을 생생하게 재현함으로써 동시대인의 감흥을 돋구었다.

  한편 독신 여류작가 오스틴은 <오만과 편견>에서 엘리자베스와 다시라는 두 주인공이 <오만>과 <편견>의 줄다리기를 하는 동안 인간성이 완성되어간다는 이야기를 통해 가정과 여성의 삶, 그리고 결혼을 통해 시대적 반향과 내면의 성찰을 함께 드러내보이고 있다. 그리고 후에 등장하는 사실주의 수법을 예고했다.


   독일

  독일은 18세기 후반에 고전주의 작가 괴테와 실러 시대에 동시적으로 낭만파 운동이 힘차게 일어났다. 질풍노도 운동과 관련된 독일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괴테와 실러다. 두 사람은 극과 시에서 질풍노도 운동이 일으킨 격랑을 휠씬 뛰어넘었다. 괴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학시대>라는 낭만파 최고의 안내서를 지었다. 실연한 젊은이의 감상적인 사랑의 이야기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괴테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 소설로 전 유럽의 독서계를 강타했다.

  29세의 나이로 요절한 초기 낭만주의의 대표적 시인인 노발리스는 <밤의 찬가>에서 산문과 운문을 혼용해 신비로운 밤과 죽음을 예찬했고, <하인리히 폰 오프터딩엔(푸른 꽃)>은 신비에 가득찬 현실의 원래 모습에 대한 동경의 상징으로 주인공 하인리히가 찾아나서는 <푸른 꽃>은 낭만주의 문학의 상징이 되었다.

  정통적인 유대교 신자에서 크리스트 교로 개종한 부모 밑에서 성장한 하이네도 바이런처럼 사회에 대한 반항아였으며 셸리와 같은 훌륭한 서정시인이었다. 그는 자유로운 개인주의를 표방했으며 메테르니히 체제하의 보수주의에 맹렬한 비판을 가했다. 그는 전 생애를 통해 인류의 해방전쟁사업에 헌신하는 한편, 젊은이의 고뇌와 비통이 표출되어 있는 <노래의 책> 등, 그의 아름다운 서정시는 비견할 바 없는 부드러움과 우수를 담고 있어서 슈베르트나 멘델스존에 의해 음악으로 옮겨졌다.


   미국

  미국의 역사는 17세기 초부터 시작되지만 문학 측면에서는 대륙 낭만주의의 영향과 국내의 정치적 안정에 힘입어 19세기에 와서야 미국문학이 개화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미국문학은 그 뿌리를 영문학에 두었기에 대륙에 대한 식민지적 열등감이 오랫동안 잔존했다. 

  미국문학의 아버지인 어빙은 <스케치 북> 등을 통해 역사가 짧은 미국사회보다 낭만적인 분위기가 남아 있는 구대륙의 풍물을 그려냈다. 그리고 쿠퍼는 개척지를 무대로 문명과 자연의 대립, 백인 개척자와 원주민 인디언의 숙명적인 대립을 로맨틱한 모험 이야기로 표현했다.

  미국의 지성 에머슨은 하버드 대학에서 행한 <미국의 학도>라는 강연에서 지성인들에게 <미국의 지적 독립선언>으로 평가되는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는 <자연론> 등을 통해 인간 내부의 신성함을 주장하여 자기신뢰에 바탕을 둔 낙관적인 정신풍토를 확립했다. 에머슨의 사상을 대담하게 발전시킨 휘트먼은 시집 <풀잎>을 남겼고, 미국 문인들 중 세계문학에 미친 영향이 가장 크다는 시인 애드거 알란 포는 고도의 수사적 운률적 기교를 사용하여 서정적이며 쓸쓸한 가을 석양에 빛나는 청정한 호수와도 같은 순수한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그의 시 <에너벨 리>는 가장 널리 애송되는 시 중의 하나다.

  천재적인 작가 나다니엘 호손은 <주홍글씨>에서 간통을 했다는 이유로 가슴에 <A(adultery, 간음)>자를 달고 다녀야 하는 여인과, 간통으로 함께 괴로워하다 결국 죄를 고백하고 죽는 딤스데일 목사를 통해 당시의 엄격한 청교도 사회와 죄의식으로 얼룩진 인간영혼의 어두운 심연을 매우 음울하게 그렸다.

  <톰소여의 모험>과 함께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마크 트웨인의 작품이다. <톰소여의 모험>의 후편격인 이 작품은 일명 <미시시피 강의 오디세이>라고도 하는데, 미시시피강을 배경으로 한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 주인공의 타고난 순수함과 선량함이 타락한 사회와 벌이는 갈등을 보여준다. 죽음과 삶, 자유와 구속, 개인과 사회라는 명제를 재미있고 감명깊게 그리고 있다.

  그리고 멜빌은 인간과 고래의 싸움에 깊고 풍부한 의미를 부여한 <백경>을 썼으나, 당시에는 너무 어려워 완전히 묵살당했다가 20세기에 들어와 재평가되고 있다. 이들 작가들은 문학의 불모지인 아메리카에 유럽의 낭만주의를 수입하여 모방과 수정을 통해 미국적인 낭만주의를 완성했다.


6.19세기 후반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1830년대부터 20세기 초까지 서구세계의 지배적인 문예사조는 사실주의 realism였다. 고전주의는 이제 완전히 후퇴하고 낭만주의도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그 기세가 약화되었다. 꿈과 신비, 그리고 환상적이고 신비스러운 것에 잠기기를 좋아하는 낭만주의자들의 태도는 현실 속에서 인간성찰을 하는 데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첫째 사실주의는 낭만주의의 지나친 감상에 대해 반대했다. 낭만주의의 지나친 상상력에 비하여 사실주의에서는 묘사의 정확성이 강조된다. 그리고 낭만주의가 현실을 도피하여 역사성과 과거를 중요시하는 데 비해 사실주의 당대의 현실을 취급한다. 그것은 오직 <지금 그리고 여기에> 현존하는 삶의 모습에 관심이 있다. 비록 한 작가가 취급하는 경험이 과거의 일이라 해도 그것은 반드시 현재의 삶과 유기적인 연관성을 맺고 있을 때만 가능하다.

  둘째, 사실주의는 심리문제 또는 사회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작가들은 인간행위의 상충하는 경향들을 상세히 분석했으며, 환경의 좌절을 극복하기 위한 개인의 투쟁을 충실하게 묘사했다. 문학작품은 이와 같은 깊은 사회의식을 가지게 됨으로써 일종의 고발문학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셋째, 사실주의 작가들은 대개 당시의 유행하는 과학이론 내지 철학이론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점이다. 일부 작가들은 인간이 환경과 유전의 희생물이라는 <결정론>의 입장을 취하는가 하면, 다른 일부 작가들은 인간의 본성이 대체로 짐승과 같은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동물적 성질을 갖고 있다는 <진화론>에 동조하고 있었다. 또 다른 일부 사람은 사회개혁의 정열에 불타서 산업혁명이 초래한 사회악과 불평등을 규탄하는 작품을 썼다.

  이처럼 이상주의적 낭만주의가 진실을 왜곡하고 현실을 소홀히 한다는 비판에 근거한 사실주의는 그것을 극복하고 일상적이고 세속적인 현실과 그 안에 숨어 있는 진실을 문제 삼았던 것이다.

  한편 자연주의란 사실주의와의 구분이 분명치 않지만(동의어로 보기도 함) <사실주의의 한 강화된 형태>, 또는 <사실주의의 최후의 연장>으로 생각하면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다. 자연주의에서는 인간은 환경과 유전법칙에 지배당하는 동물이라는 관념을 전제로 하는 경우가 있다.


   프랑스

  리얼리즘 문학의 새로운 징조는 먼저 프랑스에서 나타났다. 특히 스탕달 발자크 플로베르 졸라 모파상등은 새로운 문학사조를 대변했으며 전세계적으로 광범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사실주의 문학의 선구자인 스탕달은 사실주의의 작품인 <적과 흑>에서 주인공 쥘리앵 소랠이 가진 야심의 좌절과 옥중에서 성취되는 그의 내면적 구제를 통하여 역사를 통찰하는 작가의 리얼리즘과 그 역사를 넘어서는 낭만주의를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발자크는 그의 모든 작품을 모은 <인간희극>에서 19세기 전반기 프랑스의 도시와 시골생활을 그렸다. 거기서 그는 주로 만년 부르주아 계급의 무식 탐욕 야비함을 적나라하게 그렸다. 그의 소설은 인간행위의 숨은 동기를 노출시키고 상류사회의 매끈한 외관속에 숨겨진 부패를 폭로했다. 그중 <잃어버린 환상>은 나약한 성격의 젊은 주인공의 삶의 궤적을 통해 한 인간상을 인상 깊게 부각시키는 동시에 이미 자본주의 초기에 접어든 프랑스 왕정복고기의 사회상을 파노라마처럼 보이는 풍속소설의 하나다.

  코르네유에서 라신에 이르는 동안 비극의 내적 논리가 발전되었다면 소설에 있어서의 내적 논리는 발자크에서 플로베르에 이르는 기간이라고 볼 수 있다. 플로베르는 자료조사를 중요시하는 사실주의자들의 최초의 스승이었다. 그의 걸작 <보바리 부인>은 인간타락에 대한 냉철한 분석으로 낭만주의적인 꿈과 일상적인 현실과의 괴리를 말함으로써 낭만주의 생활철학의 부적당함을 비판했다.

  졸라에 의해 사실주의는 자연주의 naturalism 이라는 극단적인 표현형태로 발전되었다. 자연주의는 과학적 객관성을 주제에 적용하고 소설 속의 주인공을 마치 실험실의 동물처럼 다루려는 것이었다. 인간의 동작 하나하나가 유전이나 환경에 의해 숙명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환경결정론>의 성격을 띤다. 자연주의 작가들은 당시의 과학발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젊은 시절에 가난에 쫓긴 졸라는 일반인과

사회정의에 대한 깊은 동정을 지니게 되었다. 그의 주제는 흔히 알콜 중독, 악성유전, 빈곤과 질병 등과 같은 사회적 문제를 둘러싼 것이었다. 세계역사에서 진실의 승리로 기록되는 <드레퓌스 사건>시 졸라는 <나는 고발한다>라는 공개서한을 발표하고 진실규명에 앞장섰다.

  졸라와 함께 자연주의자이자 플로베르의 조카인 모파상은 300편 이상의 단편과 6편의 장편을 통하여 인류의 미덕과 악덕을 다함께 묘사했다. 그는 인류에 대해 담담하고 냉소적인 태도를 지니면서 소설의 주인공을 풍자적인 기지로 묘사하는 한편, 그의 이야기를 칭찬이나 비난을 가미하지 않고 전개하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결론을 내리도록 했다.

  아나톨 프랑스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문장을 구사한 지성적인 문인이었다. 그는 숙명론을 체념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인간 드라마의 희비를 성찰하고 인간의 과오를 관용하려 했다. 그러나 드레퓌스 사건 때는 졸라와 함께 투쟁하여 불의를 간과하지 않았다.


   영국

  이 시기는 영국에서는 빅토리아 여왕 재위기간(1837--1901)이다. 이 당시 영국은 생활수준이 급속히 향상되고 과학기술이 발전하는 경제대국이었다. 사회적으로도 사회윤리가 확립되고 고고한 도덕의식이 충만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정신을 잘 표현한 시인은 테니슨이다. 계관시인인 그는 영국인의 감상, 형식의 존중, 깊은 진지함, 자의식 등을 이해했다는 점에서 인기를 얻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대표적 소설가인 디킨스의 작품에는 사회비판의식이 흐르고 있는데, 특히 중산층의 일상생활과 산업팽창의 지나친 사회악과 불의에 항거하는 개인들, 가난한 사람들의 투쟁을 생생히 묘사하고 있다. 그의 <위대한 유산>은 여러 사회적 요인에 의해 인간의 삶이 어떻게 영향을 받을 수 있는가를 문학적으로 보여주는 고전이다.

새커리는 영국의 상류계급을 탁월한 기지로 풍자했고, 크리스트교적 사회주의자인 킹슬리는 <올턴 록크> 등의 작품을 통해 노동계급에 동정하는 사회비평적 태도를 분명히 했다. 여류작가인 조지 엘리어트는 인간 감정 및 고통이 인간성에 미치는 효과 등에 대해 관통하는 능력을 발휘했다. 

에밀리 브론테의 유일한 작품인 <폭풍의 언덕>은 요크셔의 황야를 무대로 펼쳐지는 격정과 증오를 다룬 작품으로 풍부한 상상력이 돋보인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작가들은 점점 사실주의적 경향을 뚜렷이 했다. 그중 가장 비관적인 소설가는 하디였다. 아름다운 남영국의 시골에서 산 그는 평생 동안 부정적인 인생관을 지녔으며, 그의 소설은 시골사람들의 전원생활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보이고 있으나, 결국 인간이란 운명과 환경에 의해 좌우되는 존재임을 표현했다. 그의 대표작 <테스>에서 테스라는 젊은 여인이 비정한 인간사회에 던져진 채 세파에 시달리며 겪어야 하는 고초는 독자들로 하여금 삶의 의미에 대한 원초적인 물음을 던지게 한다.


   독일

  독일에서는 하우프트만의 드라마와 토마스 만의 소설에서 리얼리즘을 찾아볼 수 있다. 하우프트만의 사회극은 노동계급이 빈곤과 싸우는 과정이라든지 고용자에 의해 혹사당하는 노동자의 모습을 주제로 한 것이었다. 토마스 만은 상징과 신화를 이용하여 현대인간의 정신상태를 조명하고 현대 서구문명을 상징적으로 비판했다. 대표작으로는 <마의 산>이 있다.

  괴테와도 비교되는 켈러는 일찍이 유물론적 경향을 띠어 모든 낭만적 요소를 청산하고 이 지상에서 현실을 상대로 하는 문학을 건설했다. 그는 자전적 장편소설 <녹색 옷을 입은 하인리히>라는 교양소설을 남겼다.

  그밖에 노르웨이 출신의 입센은 <인형의 집>에서 사랑 없는 결혼의 부도덕성을 공격하여 중산층에 큰 충격을 주었다.


   미국

  <여인의 초상>을 쓴 헨리 제임스는 인간동기에 대한 상세한 분석을 시도했고, 미국 자연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알려진 하월즈는 근대문학의 목적은 인간과 자연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데 있다고 밝혔다. 미국의 졸라라는 칭호를 받았던 드라이저는 예술의 사회적 목적을 강조하고 예술과 도덕성을 완벽하게 일치시켰다.


   러시아

  19세기 초의 러시아의 작가 푸시킨은 러시아의 바이런이라고 일컬어지는 낭만주의 시인이었다. 그는 러시아 풍경미를 서정시로 묘사하고 민속담에서 시의 원천을 발견했다. 일상생활을 주제로 하여 대중의 사랑을 받은 그는 소설을 쓰기도 했는데 그것은 사실상 러시아 최초의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푸시킨보다 약간 더 젊은 고골리는 <사신>이란 소설을 썼는데 러시아의 전원생활을 풍자한 것이었다.

  위대한 러시아 문학은 19세기 중반 이후에 투르게네프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에 의해서 창조되어왔다. 이들의 작품경향은 사실주의라고 분명히 지칭할 수 없으며, 낭만주의 사실주의 이상주의가 융합되어 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파리에서 대부분의 생애를 보낸 투르게네프는 서양사회에 처음으로 알려진 최초의 러시아 소설가였다. 그의 대표작인 <아버지와 아들>은 과학적 사회이념을 가진 젊은 세대와 현상유지를 위한 낡은 세대 사이의 갈등을 묘사한 것이다. 주인공은 허무주의자로서 사회의 전 질서가 아무런 가치조차 없다고 주장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심리소설의 대가였다. 28세에 혁명운동의 죄목으로 시베리아 탄광에서 6년의 중노동 생활을 했던 그는 나중에 빈곤과 가정불화, 그리고 간질병 등으로 고생했다. 그는 하층민의 비참한 생활을 리얼리즘 수법으로 묘사했다. 동시에 그는 인간의 영혼이 고통으로 정화된다는 깊은 신비주의적 신념을 표현했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과 <죄와 벌>은 그의 명성을 세계적으로 떨치게 했다.

  <전쟁과 평화>에서 1812년의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원정을 통해 러시아 사회를 묘사한 톨스토이는 도스토예프스키처럼 강력한 운명 앞에 나약한 인간상을 그렸다. <안나 카레니나>에서는 1870년대의 러시아 사회의 도덕적인 모럴을 배경으로 한 여인의 불륜적인 사랑과 그 비극적인 종말을 그리고 있다. 공산적 무정부주의자이며 소박한 생활을 예찬한 그는 <부활>에서는 더욱 더 사회복음적 설교를 하여 문명을 비난하고 단순소박한 육체노동을 권하고 있다.


7. 19세기 말 상징주의

  대부분의 문학유파가 그러하듯이 상징주의도 이전 문학운동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문예사조라 할 수 있다. 1890년대는 당시의 사실주의 시대의 버팀목이던 실증주의와 과학만능 사상이 흔들리면서 유럽은 일대 정신적인 공황상태에 빠지게 된다. 당시 유럽 각국에는 정신적 퇴폐와 염세적인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 도덕과 신앙 및 기타 일체의 권위와 전통에 대하여 회의적이었고 찰나적인 향락으로 도피하는 풍조가 생겼다. 문학상 이 시기를 가리켜 <세기말>이라 하는데, 데카당스 댄디즘 탐미주의 등이 그것이다.

  이는 자연주의 문학이 현실의 부정적인 측면 묘사에 치중한 나머지 구원의 길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아름다운 인간성을 질식시켰던 것이다. 영혼의 세계를 상실해버린 고답파 시의 무감동성, 자아의 분열을 자초하는 세기말적 병리현상 등에서 야기되는 정신적 무정부 상태 속에서 유럽의 지식인들은 새로운 모럴과 문학적 이상을 탐색했다. 소위 영혼의 초월적인 상태와 절대적인 이상세계에 대한 갈망을 이론으로 내세운 문예사조가 상징주의다.

  상징주의는 예술의 순수성과 음악성, 즉 순수시의 실현을 목표로 삼고 있는 문예사조로서, 시를 통해서 수정같이 아름답고 별처럼 고결한 영혼을 가꾸고자 했다. 이러한 상징주의는 특히 프랑스에서 강하게 일어났다.


   프랑스

  자타가 공인하는 상징주의의 선구자는 보들레르다. 그는 사상의 폭과 깊이에 있어서나 시의 형식적 음악적 성과에 있어서 세계문학사에 근대시의 개화를 가능하게 해준 시인이다. 상징주의의 지침서이자 현대시의 모체가 된 그의 <악의 꽃>에는 <만물조웅>편이 있는데, 여기서 <자연은 하나의 신전>이라는 우주감각과 <향기와 빛과 울림이 서로 응답한다>는 공감각 시법을 노래했다.

  보들레르를 선구자로 해서 프랑스 상징주의는 세 줄기의 계보를 형성하면서 발전하게 된다. 즉 보들레르를 정점으로 그 바로 밑에는 베를렌, 랭보, 말라르메의 세 위대한 시인이 위치한다. 베를렌은 보들레르가 지닌 시의 보고에서 주로 <감정>의 세계를 물려받아 완벽한 표현과 음악적인 서정시를 완성시켰다. 

  그리고 랭보는 보들레르가 지닌 <감각>의 세계를 물려받아 언어의 주술성과 체계적인 환각을 시에 도입, 환상적인 시를 완성하여 후에 상징주의는 물론 초현실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마지막으로 말라르메는 보들레르가 지닌 시적 가치 중에서 주로 <지성>의 영역을 물려받아 완벽한 절대의 세계를 추구하고 사상의 정제화와 언어의 순수화를 이룩해 지성적인 시를 완성시켜 본격적인 상징주의 시인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고, 그후로는 발레리와 클로델에게까지 시의 근본적인 젖줄을 대주었다.


   영국

  영국에서는 <런던 야경>의 작가 시먼스가 <문학에 있어서 상징주의 운동>을 통해서 상징주의를 소개했다. 이책을 통해 상징주의와 친밀해진 예이츠나 엘리어트는 상징주의의 새로운 영역을 열어주었다.

  오스카 와일드는 <<예술이 인생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 예술을 모방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여 <예술을 위한 예술>을 내세웠다. 아울러 도덕적사회적 기준을 도외시한 순수한 아름다움의 추구를 강조했는데, 대표작으로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과 희곡 <살로메>가 있다.


   독일

  영미와 마찬가지로 독일문학도 프랑스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협의의 독일 상징주의는 1890년부터 약 20년간으로 간주된다. 심각한 현실과 현존재의 불행을 재현하는 자연주의가 지배하던 시기에 앞 세대의 자연주의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던 젊은이들이 순수예술을 주장했다. 그리고 그 전세대가 배격했던 꿈이나 상징을 문학의 대상으로 복귀시키고 예술 자체의 영역 안에서 새로운 문학적 현실을 창조하려 함으로써, 언어 그 자체를 더욱 중요시하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그들은 새로운 시적 언어와 영적 자발성에 대한 찬미 등을 추구하게 되는데, 이러한 추구가 상징주의를 받아들이는 토양이 되었다.

  독일의 상징주의는 비평가인 바르가 <자연주의의 극복>을 써서 상징주의를 소개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한편 말라르메와의 정신적 접근과 니체의 사상적 감화 등을 통하여 독일적인 상징주의의 형식을 가장 명확하게 형성한 시인은 게오르게로서 그는 시집 <영혼의 1년>을 남겼다.

그리고 호프만슈탈의 <치인과 죽음>, 릴케의 <말테의 수기>등을 통해 상징주의는 본격화된다.


   러시아

  러시아의 상징주의는 1880년대의 전제 폭압정치에 대한 환멸, 나로드니키(인민주의)적 이상의 붕괴, 그리고 급속히 성장한 자본주의의 토양 위에서 일군의 시인들이 사실주의의 전통에 반발하면서 생겨났다.

  이렇게 생겨난 러시아의 상징주의는 크게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진다. 러시아의 전후기 상징주의자들은 현실을 외면하고 주관적 자아 속에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반사회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점에서는 유사하다. 그러나 전기의 상징주의자들은 프랑스의 상징주의에서 영향을 받아 출발했지만 후기의 상징주의자들은 러시아 서정시의 전통의식에서 출발하여 솔로비요프의 시의 이미지와 철학적 이데아를 수용하여 주관적이고 종교적인 신비감을 자아냄으로써 어느 정도 구별된다. 문학사가들은 메레즈코프스키, 브류소프 등을 전기의 상징주의자들로, 벨르이, 이바노프, 블로크 등을 후기의 상징주의자들로 분류한다.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촉발된 러시아의 상징주의는 그 내면화 과정에서 러시아 철학과 종교적 영향을 받아들여 러시아 특유의 상징주의가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상징주의는 내용의 미흡함과 지나친 개인주의에 매몰되어 급변하는 정치사회에 적응하지 못함으로써, 고리키 등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의 비난을 받으면서 서서히 소멸되어 갔다.


8. 20세기 현대문학


   모더니즘

  인류역사에서 20세기 전반기는 제 12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인명살상과 엄청난 문명파괴 앞에 인류는 한결같이 고뇌했다. 이런 격동 속에서 문학도 심하게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제1차 대전 기간 동안 문학가들은 인간성에 절망하여 침묵하는 가운데 젊은 세대는 반역과 부정을 외치며 열심히 새로운 길을 추구했다. 이런 상황에서 표현주의 미래파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인상주의 이미지즘 등이 발생하고, 제2차 대전 후에는 실존주의가 풍미했다.

  20세기 전반기의 이러한 모든 움직임을 모더니즘(modemism, 영미에서 주로 사용, 독일의 전위주의와 유사)이라 부르는데, 이는 19세기 사실주의^5.23^ 자연주의 유물론적 세계관을 벗어나려는 20세기 전반기 문학운동의 총칭이다. 뒤에 나오는 포스트 모더니즘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모더니즘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우선 모던이라는 용어 자체가 전통적 가치와 그 표현기법을 거부하는 경향을 띤다. 또한 객체보다는 주체, 외적 경험보다는 내적 경험, 집단의식보다는 개인의식을, 의식보다는 무의식을

강조한다. 이 때문에 프로이트와 융의 심리학이 모더니즘의 한 맹아가 된다.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작가로는 우선 에즈라 파운드 루이스 로렌스 엘리어트 등을 들 수 있다. <사랑하는 연인들>에서 로렌스는 대량학살에만 골몰하고 있는 현대문명의 원인을 산업화가 인간정신에 미친 영향에서 찾고자 했다. 그리고 전래의 소설계통을 배격하고 노동자 계급의 생활을 그린 자전적인 소설 <아들과 연인>에서 그는 신화와 상징에 주목하면서 개인과 집단의 재탄생이 인간적 노력과 정열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희망을 유지한다.

  해박한 고전지식과 뛰어난 지성의 소유자인 엘리어트는 <황무지>(1922)에서 현대문명의 질곡을 정신적 공허감과 삶의 소외에서 추적했다. 로렌스와 마찬가지로 엘리어트는 종래의 시전통을 배격하고 신화와 상징에 주목했다. 그러나 자기극복에 의해서 개인과 집단의 재탄생이 가능하다고 주장한 점에서 로렌스와 다른 견해를 표명했다.

  로렌스와 엘리어트와는 달리 파운드와 루이스는 극단적인 정치적 입장을 표명했다. 두 사람은 민주주의를 위선적인 것으로 격하시키면서 경제적 이념적 조작이 현대사회의 결정적 요소라고 주장했다. 파운드의 야심적이긴 하나 매우 난해한 <칸토스>와 루이스의 <메인 스트리트>는 그들의 대표작이다.

  <데미안>의 작가 헤르만 헤세는 정신적 방황과 혼미를 거듭하면서도 주옥같이 아름다운 시와 글을 썼다. 자전적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에서 소년시절의 즐거움과 슬픔, 희망과 절망을 절실하게 묘사하면서 학생들의 창조적 개성이 엄격한 교육제도 아래서 희생되는 비극을 감동적으로 그려냈다.

  한편 1차대전 직후인 1920년대의 문학사조는 냉소주의와 비극적 운명에 대한 비관론이 지배적이었다. <잃어버린 세대 Lost Generation>의 대표적 작가인 헤밍웨이는 <무기여 잘 있거라>에서 전쟁의 어리석음과 야비함을 표현했다. 포크너는 <음향과 분노>에서 미국 남부 콤슨 가의 붕괴를 조이스의 의식의 흐름의 영향을 받아 그 특유의 기법으로 그렸다. 우울한 로맨티시즘과 부와 권력에 대한 강한 관심을 보인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도 이 시기의 작품이다.

  그리고 독일의 토마스 만은 <마의 산>에서 인간의 삶 속에 내재하는 죽음과 인간의 존재 등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깊이 파헤쳤다. 세계문학사에 <의식의 흐름>을 새겨넣은 대표적 모더니스트인 조이스는 자전적인 소설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새로운 소설기법을 사용하여 주인공의 인생에 대한 도약과 그의 예술세계 창조를 향한 웅비를 잘 표현했고, 정신분석학의 깊은 영향을 받아 <율리시즈>라는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프랑스의 프루스트는 15년 동안 병실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성했는데, 여기서 그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시간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예술적 창조의 고뇌와 환희를 묘사했다. 베토벤을 흠모했고, 여성의 인류애적인 사랑에서 구원의 빛을 보여주었던 <매혹된 영혼>의 작가 로맹 롤랑은 <장 크리스토프>에서 인간의 사랑이 인간들 사이의 불행을 제거하는 최상의 길임을 알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용의주도하게 묘사했다.

  프라하의 유대인 카프카는 <성>에서 문이 굳게 닫혀 있는 성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헤매는 주인공 K를 통해 단순히 차별받는 유대인의 현실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중사회 속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어가는 인간존재의 암울함을 고발했다.

  1930년대에 이르러 현대문학은 새 국면에 들어섰다. 경제적인 대공황은 문학의 방법과 목적을 재검토하도록 했다. 경제적 붕괴와 파시즘과 전쟁의 위협 속에서 문인들은 창작활동을 통해 무엇인가 적극적인 의미를 발견하고자 했다. 사회고발적인 성격을 띤 문학은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에서 나타나는데, 여기서 그는 현대사회 속에서 역경으로 내몰리는 빈곤한 농부들의 모습을 묘사했다.

  헤밍웨이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많은 사람들의 대의명분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것이 개인의 의미와 존엄을 찾는 것임을 강하게 시사했다. 펄벅의 <대지>, 미첼 여사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도 이 시기의 작품에 속한다.

  1940년대에는 실존주의적 경향도 가세했다. 노벨 문학상을 거부했던 마지막 휴머니스트 사르트르가 쓴 <구토>(1938)는 형이상학적 소설로, 사르트르 초기 실존주의의 단초를 보여주었다.

  2차대전 후의 혼란하고 무질서한 정신적 풍토 위에 <부조리의 철학>이라는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기초로 사회정의를 실현하려 했던 카뮈의 대표작 <페스트>는 페스트가 상징하는 악과 억압에 대해 인간의 집단적 반항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인간간의 연대감이 증대되고, 상호간의 공감만이 인류평화에 도달하게 할 수 있다는 카뮈의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분명하게 담고 있다. 이 시기에 러시아의 파스테르나크는 러시아의 몰락해가는 인텔리의 비극을 그린 <닥터 지바고>를 써서 <전쟁과 평화>에 필적하는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러시아의 반체제작가 솔제니친도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1962) 등을 써서 노벨상을 수상했다. 독일의 귄터 그라스는 <양철북>(1959)에서 세 살 때 키 그대로라는 특이한 주인공의 눈을 통하여 20세기 전반기의 독일 소시민 계층의 몰락과정과 나치의 과거를 극복하지 못한 전후 서독사회를 형상화했다. 

  한편 위와 같은 모더니즘은 반지성적이고, 서양세계를 지배해왔던 이성이나 도덕보다는 정열과 의지를 더 중시했다. 그러나 <저항문화>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모더니즘도 점차 대학강단이나 도서관 또는 미술관과 같은 제도권으로 흡수됨으로써 이제 저항문화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채, 오히려 제도권 문화로 탈바꿈했다. 그리하여 리얼리즘은 물론 모더니즘에 대해서 불만을 가졌던 작가와 예술가들은 전자매체가 압도하는 후기 산업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었다. 더이상 편협하고 폐쇄적인 모더니즘의 한계 안에서 안주할 수는 없었다. 이같은 분위기 속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포스트 모더니즘(건축분야에서 처음 사용)의 기운이 태동했다.


   포스트 모더니즘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20세기 후반은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다원화되고 상대화된 가치관이 팽배해 있는 시기다. 또한 이 시대는 엄청난 물질적 풍요와 비참한 기근이 동시에 존재하며 심각한 환경파괴, 주체의 급속한 해체, 그리고 문화의 상품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러한 독특한 시대상황은 이 시대를 관통하는 통일된 문화전통이나 예술사조를 언급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런 와중에서 1960년대 들어 구조주의와 포스트 모더니즘(post modemism)이 등장한다.  

  구조주의는 프랑스에서 1960년대 초 실존주의의 뒤를 이어 나타난 현대사상의 한 조류로 그 범위는 매우 넓어서 철학 문학 민족학 정신분석학 등 다방면에 걸친다. 이 사상의 특징은 인간과 자연에 나타나는 표면적인 현상보다 그 배후에 있는 심층적인 구조를 밝혀내어 보편적인 법칙을 발견하고 이 법칙을 근거로 다양한 현상을 파악하려 한다.

  그러나 문학에 있어 구조주의는 창작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순수문학 이론상의 사조이기 때문에 다른 문예사조와는 달리 구조주의 계열에 속하는 소설 시 등의 문학작품이나 작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편 후기 산업사회의 문명에 대한 위기의식과 이성 중심주의에 대한 반발로 태동한 포스트 모더니즘은 절대성보다는 상대성을, 일원론보다는 다원론을, 독단주의보다는 관용주의를 그 속성으로 한다. 그러나 포스트 모더니즘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포스트 모더니즘과 모더니즘과의 관계에 대한 두 가지 관점, 즉 <후기 모더니즘(부흥의 포스트 모더니즘)>과 <탈 모더니즘(저항의 포스트 모더니즘)>을 이해해야 한다.

  <부흥의 포스트 모더니즘>은 포스트 모더니즘을 모더니즘의 계승 발전형태로 보고, 모더니즘이나 낭만주의와 동일선상에 놓고 있다. 반면 <저항의 포스트 모더니즘>은 포스트 모더니즘을 모더니즘에 대한 단절과 반작용으로 파악하고 있는 견해로, 모더니즘이나 낭만주의와는 새로운 문학사조를 이해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반된 견해들로부터 두 가지 입장을 동시에 수용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포스트 모더니즘이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적 반작용일 뿐 아니라, 동시에 모더니즘의 논리적 계승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포스트 모더니즘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모더니즘의 기본입장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여 극단적인 형태로 발전시키는 한편, 다른 측면에서는 모더니즘과 상충되는 입장을 보이기도 한다.

  이들 상호간의 공통점은 전통과의 단절, 불확정성 본절과 파편화, 반리얼리즘, 전위적 실험성,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재검토 등을 들 수 있고, 상호간의 차이점은 이데올로기적인 대립의 종식, 자아와 주관성에 대한 새로운 입장, 합리주의와 상대성에 대한 새로운 자각, 주변지역의 중심화 임의성과 우연성, 장르의 확산과 탈 장르화 등을 들 수 있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포스트 모더니즘은 모더니즘에 뿌리를 둔 문학 조류이면서, 동시에 그에 대한 비판적 반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포스트 모더니즘 작품을 들면 윌리엄 비로스의 <익스터미네이터>, 노머스 핀천의 <V> <중력의 무지개>, 존 바드의 <미로에서 길을 잃어> 등이 있다.

  이상으로 서양문학사를 거대한 흐름 속에서 조망해보았으나, 현재 이 순간에도 문학의 양상과 내용에 대한 다각적인 논의와 실험을 계속되고 있다. 서양문학의 흐름을 정리하면서 신곽균 최순목 조한경 김동규 님의 글을 많이 참고했음을 밝혀 둔다.

  <참된 목표가 없으면 우리의 영혼은 그 열정을 그릇된 목표에 쏟는다.> (몽테뉴)




------------------------------------------------------------------------------------------------

그리스 3대 비극작가 

(출처:http://daheeaesthetics.tumblr.com/post/100667171205/%EA%B7%B8%EB%A6%AC%EC%8A%A4-3%EB%8C%80-%EB%B9%84%EA%B7%B9%EC%9E%91%EA%B0%80)


아이스킬로스 (B.C. 524~456)


소포클레스와 에우리피데스를 포함한 고대 그리스 3대 비극 작가 중 최초의 인물이라고 불린다. 참주정(권력을 가진 한 사람이 절대 권력을 행사한 정치.) 시대에 태어나, 아테네와 페르시아 사이에 벌어진 페르시아 전쟁과 마라톤 전투, 살라미스 해전에도 참가한다. 많은 전쟁에 참전했던 그의 경험과 전쟁에서의 영감들이 많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는 합창과 낭송만으로 이루어진 초기의 극예술을 대사와 행위가 어우러진 완전한 형태의 극예술로 끌어올린 사람이다. 또한 그는 한 명의 배우와 코러스만으로 구성되었던 당시 그리스극에 한 가지 역할 이상을 하는 제 2의 배우를 도입하였고 당시 50명이었던 코러스의 수를 12명까지 줄여 역할을 축소시켰다. 코러스의 비중이 컸던 그리스 극은 아이스킬로스에 의해 인물과 인물간의 대사 중심인 완전한 극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그는 또한 통일된 주제로 3부작을 발전시켰으며, 유혈 장면을 없애고 화려한 무대장치, 그리고 단역을 도입시킴으로서 우리가 알고 있는 오늘날의 비극의 토대를 닦았다.


기원전 456년 시실리의 겔라를 방문하게 되는 그는 이곳에서 7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독수리가 그의 머리에 거북이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즉사했다고 하는데,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다.


아이스킬로스의 대표작


Persai(페르시아인들), Hepta epi Thebas(테베를 공격하는 일곱 사람), Hiketides(탄원자들),Oresteia 3부작 Ⅰ. Agamemnon(아가멤논), Ⅱ. Choephoroi(코에포로이), Ⅲ. Eumenides(자비로운 여신들), Prometheus desmotes(결박된 프로메테우스)


소포클레스 (B.C.496~406)


아이스킬로스 및 에우리피데스와 더불어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소포클레스는 고향 아테네가 문학적,정치적,경제적으로 절정을 향하여 발전해가고 있던 B.C.5세기에복잡하고 모순된 경험을 다른 비극작가들보다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심오하게 표현했다.그는 아테네에서 해마다 열리는 디오니소스 대축제에서 상연할 희곡을 쓰고 때로는 직접 역을 맡아연극에 출연하면서 생애의 마지막까지 65년을 보냈다.


아이스킬로스의 3부작 형식을 각각 완전한 형식을 갖춘 3편의 희곡으로 바꾸었고, 아이스킬로스는 배우 2명을 택했지만, 그는 여기에 3번째 배우를 추가하여 극적 갈등의 범위를 넓혔고, 합창단의 비중을 줄였다. 이러한 혁신은 비극의 근본적인 기법과 격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 혁신을 통하여 소포클레스는 그의 독특한 표현수단,응집력과 지속적 긴장감을 지닌 상황 속에서 다양한성격묘사와 의미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1시간 남짓한 복합극을 완성할 수 있었다.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소포클레스를 다른 비극작가들보다 높이 평가하고<오이디푸스 왕>을 그의 대표작으로 선정한 것은 바로 이처럼 완벽한 형식 때문이다.


소포클레스의 대표작


Aias(아이아스), Trachiniai(트라키아 여인들), Antigone(안티고네), Oidipous Rex(오이디푸스왕), Oidipous in Kolonos(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Electra(엘렉트라), Philoktetes(필록테테스)


에우리피데스 (B.C484~406?)


에우리피데스의 작품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있는 완전하거나 완전에 가까운 극의 수는 19편이다.그 가운데 <퀴클롭스>는 이른 바 사티로스 극으로, 이런 종류의 것으로 남아있는 단 한 작품이다.다른 비극작가보다 그의 작품들이 훨씬 더 많이 보존된 이유는 기원전 4세기 뒤의 압도적인 인기에서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안 되는 동안 세상의 유행이 뒤바뀐 것이다. 아테네의 정치 변화혹은 세상의 급격한 변화도 있었지만, 역시 이 시인의 세상을 앞선 사상이나 취향이 후에 붐을 일으킨주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시대의 젊은이로서 소피스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자연히 모든 면에서 인습적인 것에 대한합리주의적 비판과 반발이 그의 작품 속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에우리피데스는 작품의 제재를관습대로 신화와 전설에서 땄지만, 극 중 인물들은 신이나 영웅이라기보다 일상의 인간으로 그려져있다.따라서 그의 작품은 비극 아닌 비극이다. 신의 섭리와 종교관보다는 남녀간의 사랑, 질투 등이 더욱확연한 그의 작품세계 속 주제인 것이다. 특히 여성의 다양한 성격과 세밀한 심리분석, 묘사에 이르러서는고대 작가로서 그를 앞지를 사람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종교적 색채가 짙은 아티카의 비극 속에 너무나강하게 인간적 요소를 넣은 에우리피데스는 어떤 면에서는 비극의 정통을 깨뜨렸다는 비방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넓은 시각으로 보면 그는 새로운 문학 조류의 선각자였으며, 그 점은 뒷날의 문학에 미친그의 절대적인 영향력에서 가장 잘 엿볼 수 있다.


에우리피데스의 대표작


Alkestis(알케스티스), Medeia(메데이아), Hyppolytos(히폴뤼토스), Heraklidai(헤라클리다이), Andromache(안드로마케), Hekabe(헤카베), Herakles(헤라클레스), Hiketides(탄원자들), Ion(이온), Troiades(트로이아 여인들), Electra(엘렉트라), Iphigeneia in Aulis(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 Iphigeneia in Taurois(타우리스의 이피게네이아), Helene(헬레네), Phoinissai(페니키아의 여인들), Orestes(오레스테스), Bakchai(박코스 여신도들), Kyklops(퀴클롭스)


* 431~403년도에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났고, 그 후 서서히 아테네는 몰락한다. 당시의 철학자들은아테네 부흥기에 일어난 오만과 탐욕, 만행으로 실망감을 느끼고 기존의 신적인 섭리에 회의를 갖게 되었다.따라서 에우리피데스의 작품들이 일상으로 들어간 것은 현대의 작품들,


ex)사무엘 베케트의 부조리극 /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 이후로는 서정시를 쓸 수 없다.” 는 발언/ 등과같은 맥락의, 출구없는 시대적 회의감 속에서 탄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및 자료와 수업:


위키백과


<시학> - 문예출판사 (아리스토텔레스, 천병희 옮김)


<그리스 비극> -동서문화사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곽복록 조우현 옮김)


OCTOBER 22, 2014


------------------------------------------------------------------------------------------------

아우구스투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 문서는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 길게 쓰여 있습니다. 문서의 본 주제에 맞도록 해당 부분들을 요약 정리하거나, 필요하다면 문서를 분할해주세요. 문서에 대한 의견은 토론란에서 나누어 주세요. (2015년 8월 21일에 문서의 요약이 요청되었습니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아우구스투스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Statue-Augustus.jpg

로마 황제

재위 기원전 27년 1월 16일 ~

14년 8월 19일

후임자 티베리우스

별칭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

신상정보

출생일 기원전 63년 9월 23일

사망일 서기 14년 8월 19일 (76세)

사망지 로마 제국 놀라

부친 가이아스 옥타비우스

모친 아티아 발바 카이소니아

배우자 클로디아 풀크라

스크리보니아

리비아 드루실라

아우구스투스(IMPERATOR·CÆSAR·DIVI·FILIVS·AVGVSTVS, 기원전 63년 9월 23일 ~ 서기 14년 8월 19일)는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재위 기원전 27년 ~ 서기 14년)이다. 또한 로마 제국의 첫 번째 황조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조의 초대 황제이기도 하다.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Gaius Octavius Thurinus)였으나, 카이사르의 양자로 입적된 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 라틴어: CAIVS IVLIVS CÆSAR OCTAVIANVS)로 불렸다. 기원전 44년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외할머니 율리아 카이사리스의 남동생이자 자신의 외종조부뻘인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유언장에 따라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어 그 후계자가 되었다. 기원전 43년, 옥타비아누스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군사 정권인 제2차 삼두 정치를 열었다. 삼두 정치를 행한 집정관의 한 사람으로서 옥타비아누스는 효과적으로 로마와 속주[1]를 지배하였고, 세력을 모아 히르티우스와 판사가 죽은 뒤 집정관에 재선되었다. 이후 제2차 삼두 정치도 깨지는데 다른 집정관이었던 레피두스는 유배되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진 뒤 자살하였다.


제2차 삼두 정치의 붕괴 후 옥타비아누스는 대외적으로 로마 공화정을 부활시키고 정부에 관한 권한은 로마 원로원에게 주었으나, 사실상 권력은 그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유일한 통치자가 다스리지만 대외적으로는 공화국 형태인 정치 체제의 기틀을 다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껍데기만 공화국인 이 나라는 훗날 로마 제국으로 불린다. 황제권은 옥타비아누스 이전에 로마를 통치했던 카이사르와 술라의 독재권과는 전혀 달랐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원로원과 시민들로부터 “독재권을 부여받았지만” 거절하였다.[2] 법에 따르면 ‘존엄자’(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원로원은 평생 동안 권력을 가지도록 하였고 “호민관 권한”(tribunitia potestas)을 가졌으며 기원전 23년까지 집정관을 역임하였다.[3] 아우구스투스는 재정적인 성공과 원정에서 얻은 물자, 제국 전체에 걸쳐 맺은 여러 피호 관계(clientela), 군인과 재향 군인의 충성, 원로원에서 부여한 여러 권한과 명예[4] 그리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 절대적인 권력을 누렸다. 아우구스투스가 가진 로마의 정예병 로마 군단 다수를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은 원로원에게 군사적인 위협이 되어 원로원의 결정을 억압하였고, 군사적 수단을 사용하여 원로원의 정적들을 제거하여 원로원이 자신에 복종하게끔 하였다.


아우구스투스의 통치는 로마의 평화라 불리는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계속되는 변방에서의 전쟁과 황위를 둘러싼 1년의 내전(기원후 69년)에도 불구하고, 지중해 세계는 두 세기가 넘게 평화를 지속할 수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의 영토를 넓혔으며 제국의 국경과 동맹국을 보호하였고 파르티아와 평화 협정을 맺었다. 그는 로마의 조세 체계를 개선하였고 파발을 위해 육로 교통망을 구축하였으며 상비군과 소수의 해군 그리고 황제의 친위대인 로마 근위대를 창설하였다. 또한 로마에 경찰청과 소방청을 설치하였고 로마 시의 상당 부분을 재개발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죽기 전에 자신의 업적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이것은 《아우구스투스 업적록》로 불리며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서기 14년 그가 죽은 직후, 원로원과 민회는 아우구스투스를 신으로 선포하였고 로마인들의 숭배를 받았다.[5] 이후 모든 로마 황제들이 그의 황제명인 ‘아우구스투스’와 ‘카이사르’를 이름으로 썼다. 또한 그를 기념하기 위해 기존의 "여섯 번째 달"(Sextilis)을 "아우구스투스"(Augustus)로 바꾸어 불렀다. 그의 황위는 의붓아들이자 양자인 티베리우스가 물려받았다.


목차  [숨기기] 

1 생애

1.1 초기 생애

1.2 권력을 향하여

1.2.1 카이사르의 후계자

1.2.2 안토니우스와의 첫 번째 분쟁

1.3 제2차 삼두 정치

1.3.1 로마 혁명

1.3.2 반란과 혼인 동맹

1.3.3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의 전쟁

1.3.4 안토니우스와의 전쟁

1.4 옥타비아누스에서 아우구스투스로

1.4.1 황제 아우구스투스

1.4.2 호민관 특권

1.5 대외 정책과 군사 작전

1.6 죽음과 후계 문제

2 기타

2.1 아우구스투스의 유산

2.2 세제 확립

2.3 8월 (Augustus)

2.4 건축

2.5 외모

3 관련 항목

4 출처

4.1 참고 서적

5 외부 링크

5.1 1차 사료

5.2 2차 사료

생애[편집]

초기 생애[편집]

그의 아버지는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이며, 원래 로마에서 4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벨리트라이라는 마을 출신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63년 9월 23일 로마 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소의 머리'라 불리는 곳에서 태어났는데 이곳은 포룸 로마눔과 매우 가까운 팔라티누스 언덕에 있던 곳이다. 옥타비우스는 아이를 들에 버리라는 점성가의 경고를 받았지만 무시하고 계속 키우기로 했다. 아이의 이름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Gaius Octavius)라고 지었다. 그러나 로마 시내가 북적거려 사람들로 넘쳐나자 어린 옥타비아누스는 아버지의 고향인 벨리트라이로 이사가 거기서 자랐다.


옥타비아누스는 회고록에서 자기 아버지에 대해 기사 가문 출신이었다고만 적었다. 그의 친증조부는 제2차 포에니 전쟁 중 시칠리아에서 군단 사령관을 맡았다. 그의 할아버지는 지방의 여러 공공기관에 재직하였다 한다. 아버지인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는 옥타비아누스가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마케도니아의 총독[6][7]을 지냈으며, 아이의 가명(家名)을 투리누스로 지었는데, 이 가명은 옥타비우스가 반란을 일으킨 노예들과 싸워 이긴 시칠리아의 투리이에서 따왔을 가능성이 크다.[8] 옥타비아누스의 어머니인 아티아 발바 카이소니아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조카딸이었다.


아버지 옥타비우스가 평민이었지만, 어머니 아티아는 카이사르의 조카딸로 귀족이었음에도 옥타비아누스는 평민층에 속하였다.[9]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어서야 비로소 귀족의 지위를 얻었다.


기원전 59년 옥타비아누스의 나이 네 살 때, 아버지 옥타비우스가 세상을 떠났다.[10] 얼마 안 돼 어머니 아티아는 시리아의 총독이었던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와 재혼하였다.[11][12] 필리푸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손이었고 기원전 56년에는 집정관을 역임하였다. 필리푸스는 어린 옥타비아누스에게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이로 인해 옥타비아누스는 누나인 소(小) 옥타비아와 함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누나이자 자신의 외할머니인 율리아 카이사리스의 손에서 자랐다.


기원전 51년, 율리아 카이사리스가 죽자, 옥타비아누스는 외할머니의 장례식에서 추모사를 낭독하였다.[11][13] 이때부터 어머니 아티아와 계부 필리푸스는 옥타비아누스를 단련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옥타비아누스는 4년 뒤인 기원전 47년부터 토가를 입게 되었고[11] 국가 사제단(Collegium Pontificum)에 선출되었다.[14][15] 다음 해에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가 세운 베누스 게네트릭스 신전에서 행해지는 그리스 경기를 관장하였다.[15] 다마스쿠스의 니콜라오스에 따르면,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아프리카 원정에 참여하고 싶었으나 어머니의 반대로 무산되었다고 한다.[16] 기원전 46년, 아티아는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히스파니아 원정에 참여하는 것에 동의하였는데, 이 원정에서 카이사르는 오랜 숙적이었던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아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싸우려 하였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병이 들어 원정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


병에서 회복한 뒤 옥타비아누스는 배를 타고 카이사르의 뒤를 쫓았으나 배는 곧 난파되었다. 육상으로부터 숙련된 정비사들이 와서 난파된 배를 수리한 후 원래 자신이 머물던 적의 영토에서 카이사르의 막사까지 배를 타고 횡단하였는데, 이 사건은 외할머니의 남동생인 카이사르에게 큰 인상을 주었다.[11]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는 카이사르가 옥타비아누스를 자기 마차에 동승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고 말하였다.[17] 로마로 돌아오고 난 뒤 카이사르는 새 유언장을 사제녀들과 함께 보관하였고 옥타비아누스를 자신의 제1 상속자로 낙점하였다.[18]


권력을 향하여[편집]

카이사르의 후계자[편집]


《카이사르의 죽음》, 장레옹 제롬이 1867년에 그린 것으로 기원전 44년 3월 15일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가이우스 카시우스가 주도한 옥타비아누스의 양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암살을 나타내고 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가 암살당할 때, 옥타비아누스는 일리리아의 아폴로니아에서 공부와 군사 훈련을 병행하고 있었다. 그는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군사들과 함께 마케도니아로 피신하라는 장교들의 조언을 거절하고 이탈리아로 가 자신의 잠재적인 정치적 세력을 규합하려 하였다.[19] 브룬디시움 근처에 있는 루피아이라는 곳에 상륙하고 난 뒤, 카이사르의 유서에 적힌 내용을 들은 옥타비아누스는 재산의 2/3를 상속받는 것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자신이 카이사르의 정치적인 진정한 후계자가 되기로 하였다.[20][19][15] 당시 카이사르에게는 살아 있는 적자녀가 없었기에[21] 그의 이손(離孫, 누이의 친손 및 외손)인 옥타비아누스가 제1 상속자이자 아들로 입양되었다.[22] 카이사르가 죽고 난 뒤 정식 입양된 옥타비아누스는 양부의 이름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를 쓰게 되었다. 로마 전통에 따라 그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이름에 ‘투리누스’ 대신 ‘옥타비아누스’(Octavianus)라는 가명을 붙여 자신의 출신 가문을 나타내었다. 아직 옥타비아누스가 당시 이 이름을 썼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존재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이 이름은 그의 출신을 명백하게 드러내게 하여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게 되었다.[23][24] 훗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가 옥타비아누스를 성적으로 총애했기 때문에 입양한 것이라며 강도 높게 비난하였지만, 이는 중상모략이었다는 의견이 있다.[25]


옥타비아누스가 로마 정국에 성공적으로 입문하려면 자신의 빈약한 재산에만 의존할 수 없었다.[26] 브룬디시움에서 카이사르의 병사들로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은 후,[27] 옥타비아누스는 파르티아와 싸우려고 카이사르가 충당했던 일부 자금을 요구하였다.[26] 이 돈은 브룬디시움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무려 7억 세스테르티우스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28] 옥타비아누스가 그 돈으로 원로원의 가장 큰 적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치려고 쓰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사라진 공금의 행방을 찾고 있었던 원로원은 이내 수사를 중단하였다.[27] 옥타비아누스는 그해에 다시 큰일을 벌였는데, 동방 속주에서 이탈리아로 보낸 조공을 공식적인 허가도 받지 않고 가로챘다.[24][29] 옥타비아누스는 과거 카이사르가 이끌던 정예병과 파르티아를 치려고 모은 군사들을 통해서 자신의 세력을 넓혔고, 특히 자신이 카이사르의 후계자임을 강조하며 많은 지지를 얻어냈다.[30][19] 그가 이탈리아 반도를 가로질러 로마로 이동할 때, 소문난 인품과 그가 새로 얻은 자금 덕분에 캄파니아에 주둔하고 있던 카이사르를 숭상한 옛 노병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24] 기원전 44년 6월까지 그는 3천 명의 충성스러운 노련한 병사들을 얻었고 봉급으로 5백 데나리우스를 주었다.[31][32][33]



20세기에 프리마 포타의 아우구스투스를 바탕으로 하여 그린 그림.

기원전 44년 5월 6일 로마에 도착한[24] 아우구스투스는 과거 카이사르의 부하였던 집정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만났다. 그리고 독재관 카이사르의 암살자들과 쉽지 않은 휴전 협정을 맺었다. 그해 3월 17일에 원로원은 이미 암살자들에게 특사령을 내렸으나 안토니우스는 그들 대부분을 로마에서 몰아냈다.[24] 카이사르의 장례식 때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복수를 외친 로마 시민의 지지를 얻어 암살자들을 몰아냈다.[24] 그러나 안토니우스도 많은 로마 시민과 카이사르 옹호자들의 지지를 잃게 되었는데, 그가 카이사르의 신격화 운동에 가장 먼저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34]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카이사르의 재산을 안토니우스에게 양도하겠다고 하였으나 무효가 되었다. 하지만 여름 동안 카이사르 옹호자들의 지원을 얻는 데 성공하였다.[35] 그해 9월 귀족파 출신의 웅변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연설에서 안토니우스를 원로원의 가장 큰 위험한 인물이라고 역설하며 극단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하였다.[36][37] 로마에서 인기가 떨어진 데다가 집정관 임기도 거의 끝나가자 안토니우스는 원래 카이사르의 암살범 가운데 한 명인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가 다스리다가 안토니우스에게 편입된 갈리아 키살피나를 통제할 모든 권한을 자신에게 일임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려 하였다.[38][39] 그동안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전임 병사들로 구성된 자신의 군대를 만들고 있었고, 11월 28일에는 안토니우스 휘하 두 개의 군단을 돈으로 현혹하여 쉽게 격파하였다.[40][41][42] 옥타비아누스의 막강한 군사력과 원로원으로부터의 공격 때문에 로마에 있는 것에 위험을 느낀 안토니우스는 갈리아 키살피나로 떠났다.


안토니우스와의 첫 번째 분쟁[편집]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갈리아 키살피나를 포기하기를 거부하자 안토니우스는 무티나에서 그를 완전 포위하였다.[43] 원로원에서는 안토니우스의 군사적 행동을 각하하는 법안을 서둘러 통과시켰는데 원로원에는 그에게 대적할 군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이미 군대를 소유하고 있었던 옥타비아누스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41] 또한 키케로는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의 출신에 관하여 조롱하는 것을 비호해 주기도 하였는데 키케로는 “요즘의 젊은이들 중 가장 전통적인 공경심을 지니고 있는 자이다.”라고 말하였다.[44] 키케로는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에게 “그대는 그대의 이름에 모든 것을 빚지고 있다.”라고 한 말을 들려주었듯이 이것은 안토니우스의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의견의 정면 반박이었다.[45][46] 과거 대표적인 반(反)카이사르파 원로원 의원인 키케로가 조작화한 이 동맹으로 원로원은 기원전 43년 1월 1일을 기해 옥타비아누스를 원로원 의원으로 임명하여 그는 전직 집정관들과 같이 투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41][42] 추가로, 옥타비아누스는 군대의 사령권을 부여받았는데, 이 권한은 옥타비아누스의 군령을 합법적으로 만들었고 곧 옥타비아누스는 당시 집정관이었던 히르티우스, 판사와 함께 무티나의 포위를 풀러 출병하였다.[47][41]기원전 43년 4월, 안토니우스군은 포룸 갈로룸 전투와 무티나 전투에서 패배하여 안토니우스를 갈리아 트란살피나로 퇴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두 집정관이 전사하자 옥타비아누스가 그들의 군대까지 지휘할 수 있는 대군의 단독 사령권을 손에 넣었다.[48][49]


안토니우스를 격파한 옥타비아누스 대신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엄청난 사례금을 준 후, 원로원은 집정관의 직속 군단의 사령권을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주려고 하자, 옥타비아누스는 이에 협조하지 않기로 하였다.[50] 심지어, 옥타비아누스는 포 계곡(Po Valley)에 주둔하면서 안토니우스에 대한 모든 공격적인 대응에 협조하는 것을 거절하였다.[51] 그해 7월, 옥타비아누스 휘하 백인대의 사절이 로마로 들어왔고 히르티우스와 판사가 남긴 집정관의 권한을 자신이 전부 받아야 함을 요구하였다.[52]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공공의 적으로 천명한 것을 무효화하는 포고문을 발표할 것을 요구하였다.[51] 그러나 이 요구가 거절되자, 그는 4만8천 명의 8개 군단을 이끌고 로마를 행진하였다.[51] 그는 로마에서 아무런 군사적 반대 세력을 만나지 않았고 기원전 43년 8월 19일 옥타비아누스는 집정관으로 임명되었고 친척인 퀸투스 페디우스는 공동 집정관이 되었다.[53][54] 한편, 안토니우스는 친(親)카이사르파인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동맹을 구축하였다.[55]


제2차 삼두 정치[편집]

로마 혁명[편집]


기원전 41년에 제2차 삼두 정치의 탄생을 축하하며 발행된 로마의 화폐 아우레우스에 새겨져 있는 안토니우스(왼쪽)와 옥타비아누스(오른쪽)가 새겨져 있다. 모두 “III VIR R P C”의 문구, 즉 “공화정의 조정을 위한 세 사람 가운데 하나”라고 새겨져 있다.[56]


기원전 18년경에 발행된 데나리우스. 앞면에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CAESAR AVGVSTVS), 뒷면에는 신성한 율리우스(DIVVSIVLIV[S])라고 새겨져 있다.

기원전 43년 10월, 볼로냐 근처에서 열린 회담에서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는 군사 독재 체제인 제2차 삼두 정치를 결성하였다.[57] 이 5년간의 명백한 월권 행위는 비공식적이었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제1차 삼두 정치와 달리 평민들에게 통과된 법안에 따라 크게 지지받았다.[58][57] 3명의 집정관은 300명의 원로원 의원과 2,000명의 기사 계급 출신을 범법자로 규정하고 추방 명령을 내렸으며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만약 그들이 국외 탈출을 기도하면 그들을 잡아 처형하였다.[59]세 집정관들은 카이사르의 암살자인 마르쿠스 브루투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곧 싸우기 위해 자신들의 병사들의 월급을 올려주어야 했기 때문에 이들은 이에 크게 자극받아 이 법안을 만들었다.[60] 3명의 집정관이 암살자들의 유산과 재산을 몰수하는 동안 암살자들에게 내건 현상금은 로마 시민을 크게 고무시켰다.[59] 세 집정관의 이러한 수단은 암살자들과 친분이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숙청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처음에는 추방 명령법을 제정하는 것에 반대하였는데 추방 명령을 받은 자신의 새 조력자, 키케로의 목숨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59] 그러나 안토니우스의 키케로에 대한 증오는 매우 커서 결국 키케로도 숙청의 희생자가 되었다.[59] 많은 수의 공화파 원로원 의원이 죽었고, 3명의 집정관은 자신의 지지자들로 원로원의 빈자리를 채웠다. 20세기의 역사학자 로널드 사임은 이를 로마 혁명(Roman revolution)이라 명명하였는데, 이 사건이 구세대 원로원 의원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정치 세력을 구축하여 뒷날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61]


기원전 42년 1월 1일 로마 원로원은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신으로 선포하고 ‘신성한 율리우스’(Divus Iulius)라 부르게 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을 ‘신의 아들’(Divi filius')임을 강조하고 자신이 하는 일에 정당성을 확보하였다.[62]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28개의 군단을 해로로 보내어 그리스에 세력을 모으고 있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군대와 싸우려 하였다.[61] 기원전 42년 10월 마케도니아의 필리피에서 두 번의 전투를 치르고 난 뒤, 로마군을 승리하고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자살하였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뒷날 이 전투들의 성과를 이용하여 옥타비아누스를 얕잡아 보이게 하려 하였는데 두 번의 필리피 전투 모두 안토니우스군이 로마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63] 추가로, 두 번의 승리의 전과를 따지는데, 안토니우스는 아그리파에게 직속 지휘권을 넘겨준 옥타비아누스를 겁쟁이라고 낙인을 찍었다.[63]


필리피 전투 이후, 제2차 삼두 정치의 집정관들 사이에서 새로운 영토 협정이 맺어졌다. 안토니우스는 갈리아를 그리고 옥타비아누스는 이탈리아와 히스파니아를 관장하기로 하였다. 안토니우스는 동쪽의 이집트로 여행을 갔는데 거기서 자신의 상관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옛 정부이자 카이사르의 어린 아들 카이사리온의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7세를 만나 동맹을 맺었다. 레피두스는 아프리카 속주로 가게 되었는데 원래 히스파니아로 가게 되었으나 안토니우스가 방해하고 옥타비아누스를 히스파니아로 가게 하였다.[64] 옥타비아누스는 마케도니아 원정 이후 곧 제대할 많은 병사를 정착시키기 위해 일단 이탈리아에 남기로 결정하였다. 이 많은 병사는 과거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공화파 쪽에서 서서 싸운 병사들로 만약 옥타비아누스가 그들을 달래지 않았으면 쉽게 그의 정적들과 연합할 수 있었으나 그는 병사들에게 토지를 지급하였다.[64] 더 이상 병사들의 정착지를 위해 분배해줄 국유지가 없자 옥타비아누스는 양자택일을 해야 했다. 로마 시민의 땅을 몰수하여 시민들을 멀리하는 것 또는 로마의 심장부에서 그에게 대적할 만만치 않은 상대가 될 수 있는 많은 로마 병사를 멀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는 전자를 택하였다.[65] 새 정착지를 만들기 위해 18개의 도시가 그 땅으로 사용되었는데 도시에 살고 있던 모든 시민들이나 일부 시민들을 쫓아내 버렸다.[66]


반란과 혼인 동맹[편집]


기원전 30년경에 만들어진 옥타비아누스의 상.

옥타비아누스가 추진했던 퇴역병의 정착 계획에 대한 많은 불만으로 인해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의 당파는 결집하였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남동생이었던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는 원로원의 다수에게 지지를 받고 있었다.[66] 한편 옥타비아누스는 풀비아와 그녀의 첫 번째 남편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의 딸인 클로디아 풀케라와 이혼하기로 결심하였다. 옥타비아누스와 클로디아의 부부 관계는 진전이 없었고 그는 클로디아를 안토니우스의 아내가 된 장모 풀비아에게 보냈다. 풀비아는 행동을 개시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녀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가 이탈리아에서 병사들을 길러 옥타비아누스를 치려 하였다. 그러나 세 집정관이 로마 병사들의 월급을 마음대로 나눠줄 수 있는 권한이 생기자, 루키우스와 풀비아는 옥타비아누스를 치기 위한 정치적·군사적 도박을 걸었다.[66] 기원전 40년 초, 루키우스와 그의 지지자들은 옥타비아누스의 강력한 응징에 페루시아(지금의 페루지아)에서의 농성을 끝내고 항복하였다.[66]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루키우스와 그의 군사들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한편 풀비아는 그리스의 시키온으로 유배되었다.[67]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루키우스에게 충성하는 많은 지지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기원전 40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기일을 맞아, 옥타비아누스는 300명의 원로원 의원과 기사 계급의 인사를 루키우스와 공조했다는 이유로 처형하였다.[68] 페루시아도 다른 장군들에게 경고하기 위해서 약탈하고 도시에 불을 질렀다.[67] 이 잔인한 사건은 옥타비아누스의 정치 인생을 더럽혔고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시인 섹스투스 프로페르티우스 등은 이를 두고두고 비난하였다.[68]


제1차 삼두 정치의 집정관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아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에게 승리한 이래, 아직 로마에 반감을 품고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39년에 제2차 삼두 정치의 집정관들과 협정을 맺어 시칠리아와 사르데냐를 가지게 되었다.[69]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파가 아닌 공화파 소속의 폼페이우스와의 동맹을 맺기 위해 서로 다투고 있었다.[68] 기원전 40년, 옥타비아누스는 폼페이우스와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는 데 성공하는데 폼페이우스의 부하이자 사위인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의 딸, 즉 폼페이우스의 외손녀인 스크리보니아와 결혼하였기 때문이다.[68] 스크리보니아는 옥타비아누스의 유일한 적녀인 율리아를 낳았는데 율리아가 태어난 이 날은 옥타비아누스가 스크리보니아와 이혼하고 훗날 로마 제국의 초대 황후가 되는 리비아 드루실라와 재혼한 날이기도 하였다.[68]


이집트에서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불륜을 저지르고 3명의 아이들을 낳았다.[70] 옥타비아누스와의 관계가 계속 악화되자,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떠났다. 기원전 40년에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와 대적할 대군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출항, 브룬디시움에 진을 쳤다. 그러나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모두 싸움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카이사르파의 중요한 정치적인 지지기반이었던 백인대장들이 싸움을 거부하였고 그들 휘하의 각 병사들은 백인대장을 따라 전투 중지를 원하였다.[71][72] 한편, 시키온에서는 안토니우스의 부인 풀비아가 급작스럽게 사망했는데 공교롭게도 안토니우스가 그녀를 보기 위해 시키온으로 가던 중이었다. 풀비아의 죽음과 백인대장들의 항명은 두 집정관을 잠정적으로 화해시켰다.[71][72] 기원전 40년 가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브룬디시움 조약에 서명하였는데 레피두스는 아프리카를, 옥타비아누스는 서방을, 그리고 안토니우스는 동방을 맡기로 하였다. 중부의 이탈리아 반도는 신병들에게 맡겨졌는데 사실 이 조약은 동방의 안토니우스에겐 무용지물이었다.[71] 기원전 40년 말엽,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의 확고한 동맹을 위해 자신의 친누나인 소 옥타비아를 안토니우스에게 시집보냈다.[71] 안토니우스와의 사이에서 옥타비아는 대 안토니아와 소 안토니아 두 명의 딸을 낳았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의 전쟁[편집]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옥타비아누스의 함대를 상대로 이긴 것을 기념하여 주조한 데나리우스. 앞에는 옥타비아누스의 함대를 이긴 기함 메시나의 파루스가, 뒤에는 괴물 스킬라가 새겨져 있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이탈리아 반도와 지중해 간의 군량 수송 거부로 이탈리아의 옥타비아누스를 위협하였는데 폼페이우스의 아들이 해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서 이탈리아에 큰 기근의 원인이 되었다.[72] 폼페이우스가 제해권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넵툰의 아들’(Neptuni filius)이라 불렀다.[73] 기원전 39년, 미세눔 조약으로 임시 평화 협정이 맺어졌는데 이탈리아의 해상 봉쇄가 풀리자 옥타비아누스는 폼페이우스에게 사르데냐, 코르시카, 시칠리아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내주었다. 그리고 폼페이우스가 기원전 35년에 집정관으로 임명되는 것을 보장해 주었다.[73][72] 세 명의 집정관과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간의 영토 협정은 기원전 38년 1월 17일 옥타비아누스가 스크리보니아와 이혼하고 리비아와 재혼하자 균형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74] 폼페이우스의 휘하 제독 중 하나가 폼페이우스를 배신하고 옥타비아누스에게 도로 사르데냐와 코르시카를 반환하였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를 공격하려면 안토니우스의 지지가 절대적이었던 옥타비아누스는 협정을 맺어 삼두 정치 체제를 연장하여 기원전 37년부터 시작하여 5년 동안 로마를 공동으로 통치하기로 합의하였다.[58][75] 옥타비아누스의 지지를 얻은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와의 원정을 위해 그의 지지 세력을 확대하였는데 그는 기원전 53년의 카르하이 전투에서의 패배를 복수하고 싶어하였다.[75] 타렌툼(Tarentum)의 협정에서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120척의 전함을 주고 옥타비아누스는 2만 명의 군사를 파르티아와 싸우려는 안토니우스에게 보내준다고 약속하였다.[76]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약속했던 병력의 불과 1/10인 2천 명밖에 보내주지 않았고 이러한 도발은 안토니우스가 6년 뒤 서로 전투에서 마주 대할 때까지 이 일을 두고두고 잊지 않았다 한다.[76]


기원전 36년 옥타비아누스와 레피두스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치기 위해 합동 작전을 개시하였다.[77] 옥타비아누스를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함대는 기원전 36년 9월 3일 나우로쿠스 전투에서 아그리파의 군대에게 거의 완파되었다.[78] 섹스투스는 남은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퇴각하였는데, 그 다음해에 폼페이우스는 안토니우스 휘하의 장군에게 잡혀 처형되었다.[78] 옥타비아누스와 레피두스는 항복한 폼페이우스의 병사를 손에 넣었는데 머지않아 레피두스는 자신이 시칠리아를 다스릴 충분한 능력이 된다 자부하고 옥타비아누스에게 떠나라 명령하였다.[78] 그러나 레피두스의 군대는 자신들이 싸우는 데 지치고 옥타비아누스가 그들을 돈으로 유혹하자 레피두스를 버리고 옥타비아누스에게로 투항하였다.[78] 레피두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하고 최고 제사장(pontifex maximus)의 직함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으나 삼두 정치 체제에서 쫓겨나고 공직 생활 역시 끝이 나면서 이탈리아의 카페 키르케이에 있는 장원으로 유배되었다.[79][78] 로마의 통치권은 이제 서방의 옥타비아누스와 동방의 안토니우스에게로 주어졌고 양분되었다. 공화국의 평화와 안정을 지키기 위해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시민의 재산권을 보장해 주었다. 옥타비아누스가 전역한 병사들에게 이탈리아 외곽에 자리를 잡게 해주는 사이, 과거 폼페이우스의 군대에 참가하기 위해 로마를 떠났던 3만여 명의 노예를 모두 주인에게 돌려주었다.[80]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로 돌아오자 자신과 리비아, 옥타비아의 신변 안전의 보장을 원로원에 요청하였다. 그 결과 옥타비아누스와 그의 아내 리비아, 누이인 옥타비아, 딸인 율리아는 주권면제권을 부여받았다.[81]


안토니우스와의 전쟁[편집]


로렌스 알마타데마가 그린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한편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원정은 상황이 매우 좋지 않게 돌아갔다. 비록 옥타비아누스가 2천 명의 군사를 보내주었지만 이는 충분하지 않았고 작전 실패로 인해 지도자로서의 그의 이미지도 추락하였다.[82] 하지만 이미 안토니우스와 결혼한 클레오파트라는 여전히 안토니우스의 군사를 다시 보충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 안토니우스는 전처인 옥타비아를 로마로 돌려보냈다.[83] 비록 안토니우스가 자신의 군사를 재건하여 다시 강대한 세력을 가지려고 계획했더라도 이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좋은 명분이 되었다. 안토니우스가 로마인 배우자를 부정하고 동방의 정부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선동을 하였고, 갈수록 안토니우스의 인기는 추락하였다.[84] 기원전 36년 옥타비아누스는 내전이 끝났으니 안토니우스가 삼두 정치 체제의 집정관 직을 사퇴하면 자신도 그리할 것이라 하였으나 안토니우스는 이를 거절하였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는 권모술수로 자신의 독재적인 이미지는 감추면서 안토니우스를 더욱 극악하고 독재적인 이미지로 만들려 하였다.[85] 기원전 34년 아르메니아가 로마군의 수중에 넘어가자 안토니우스는 아들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로 하여금 아르메니아의 왕 자리에 앉히고 클레오파트라에겐 ‘왕들의 여왕’이란 호칭을 하사하자, 옥타비아누스는 이 사건을 인용하면서 원로원에게 안토니우스가 로마의 권력을 약화시키려는 야망을 지녔다고 주장하였다.[84] 기원전 33년 1월 1일 옥타비아누스가 다시 집정관에 선출되자 그는 원로원 회의에서 안토니우스가 가지고 있는 작위와 자식들이나 친척들 그리고 ‘여왕’인 클레오파트라에게 나눠준 영토 문제에 대해 맹렬한 공격을 퍼붓기 시작하였다.[86] 망명한 전직 집정관, 원로원 의원들은 옥타비아누스의 선동[87]에 불신을 품고 안토니우스의 편에 붙었는데 기원전 32년 가을, 변절한 각료와 원로원 의원들은 다시 안토니우스를 버리고 옥타비아누스에게로 변절하였다.[88] 무나티우스 플란쿠스, 마르쿠스 티티우스와 같은 망명자들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안토니우스를 비난하기 위해 원로원의 승인을 받도록 도와주었다.[89] 베스타 처녀의 신전에 폭풍이 불자 옥타비아누스는 수석 사제녀에게 안토니우스의 비밀 유서를 내놓으라 강요하였는데 그 유서에는 로마가 정복한 영토는 자신의 아들들을 왕으로 삼아 다스리게 하고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묻힐 영묘를 알렉산드리아에 호화롭게 건설하라 쓰여 있었다.[90][91] 기원전 32년 말, 원로원은 안토니우스의 집정관의 권한을 공식적으로 박탈하고 클레오파트라가 다스리고 있는 이집트에 선전 포고하였다.[92][93]



1672년에 로렌조 카스트로가 그린 《악티움 해전》. 런던의 국립 해양 박물관 소장.

기원전 31년 초, 아그리파의 함대가 로마군을 수송하여 아드리아 해를 성공적으로 횡단하였고, 옥타비아누스는 곧 벌어질 큰 전투의 예비 단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94] 한편 아그리파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본대를 그들의 해상 보급 경로에서 차단하고 옥타비아누스는 코르푸 섬 맞은편에 위치한 본토에 도착, 남쪽으로 진군하였다.[94] 바다와 땅 모두에서 막히자, 안토니우스군의 탈영병은 하루가 머다 하고 계속 옥타비아누스에게 투항하였는데 옥타비아누스군은 전쟁 준비로 휴식이 한창이었기 때문이었다.[94] 안토니우스의 함대는 해상 차단 해제를 기도하기 위해 그리스 서쪽 해안의 악티움 만으로 나아갔다. 그곳에는 아그리파와 가이우스 소시우스의 함대가 있었는데 안토니우스의 함대보다 수는 많지만 더 작고 조종하기 더 쉬운 배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기원전 31년 9월 2일, 악티움 해전이 발발하였다.[95] 안토니우스와 남은 군사들은 근처에 기다리고 있던 클레오파트라의 함대가 막판에 노력한 끝에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96] 옥타비아누스는 그들을 추격하였고 기원전 30년 8월 1일 알렉산드리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다시 한 번 승리를 거두자 패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자살하였는데 독사가 클레오파트라를 무는 사이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칼로 몸을 찌르고 클레오파트라의 팔 쪽으로 쓰러졌다.[97]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후계자로서의 위치를 잘 이용하여 크게 성공했었기에 다른 사람들이 이를 활용하는 것이 자신에게도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두 명의 카이사르가 있으나 하나로 족하다.”라는 말을 남겼으며, 훗날의 정치 인생을 위해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아이들은 살려주는 대신에 카이사리온을 죽이도록 명령하였다.[98][99]


비록 그의 수단은 잔인했지만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상관이자 신격화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인 옥타비아누스를 과소평가하였다.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지지가 약해졌어도 ‘신의 아들’이란 이름으로 자신의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다.[100] 옥타비아누스는 이전에 적들에게 약간의 자비를 베풀어주었고 로마 시민의 호응이 없는 정책을 계속 고수하였으나 악티움 해전 이후 그는 그의 정적들에게 용서를 베풀어 신뢰를 쌓았다.[101]


옥타비아누스에서 아우구스투스로[편집]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물리친 후에 옥타비아누스는 비공식적이지만 로마 공화정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102] 아직 로마는 형식상으로는 공화정이었고 로마 시민은 군주제와 독재라면 진저리를 쳤기 때문에 옥타비아누스는 서두르지 않고 원로원과 로마 시민이 원하는 것들을 맞춰가며 차근차근 권력을 손에 넣었다.[103][104]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1년부터 8년간 해마다 집정관의 자리를 맡았다. 그중 기원전 28년과 기원전 27년은 아그리파가 동료 집정관이었다. 기원전 27년에 옥타비아누스는 내전이 종결되었으므로 자신에게 위임된 비정규적 특권을 원로원과 로마 시민에게 반납한다고 선언하였다.[105] 이로써 로마는 다시 명목상으로는 이전의 공화정 시절의 정치 체제로 회귀한 것처럼 보였다. 로마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수여한다.


황제 아우구스투스[편집]


아우구스투스의 동상. 머리 부분은 기원전 30년~기원전 20년경에 제작되었고, 몸통은 2세기에 제작되었다.

기원전 29년에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제일인자라는 뜻의 국가 제1시민(princeps civitatis)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흔히 '프린켑스'라고만 쓰는 이 칭호는 공화정 시대에 지도급 원로원 의원으로 인정받은 집정관 역임자이자 높은 위신과 덕망을 지닌 자를 뜻했다.[106]이 칭호는 실제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폼페이우스에게도 수여된 전례가 있었다.[107] 하지만 옥타비아누스에게 이 칭호는 제정으로 나아가고 있던 현실 속에서 로마의 최고 책임자라는 것을 반영한다.[108][4]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7년에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위임받았던 여러 특권을 원로원에 되돌려주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여전히 집정관이었고,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가 갖고 있는 금화, 은화 발행권을 되찾아올 만한 힘이 없었다. 또한 직접적으로 속주와 군대를 다스리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로마 제국의 병사들에게 강한 지지를 얻고 있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의 후원에 힘입어 출세한 많은 지지자, 피보호자, 어마어마한 부는 로마의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109]


대중은 엄청난 양의 부를 아우구스투스가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공공건물 건설과 가도 유지·보수에 자발적으로 기여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기대만큼 잘 진행되지 않았다. 기원전 20년에 아우구스투스는 직접 가도 건설에 나섰다.[110] 기원전 16년에 발행된 화폐에는 아우구스투스가 막대한 양의 돈을 공공기금에 기부한 후 이루어낸 가도 건설을 선전하였다.[110]


하지만 역사학자인 하워드 스컬러드(Howard Scullard)에 따르면 아우구스투스의 진정한 권력은 군대와 “최종 결제권”으로부터 나왔다고 한다.[111] 원로원은 내전을 종결시킨 아우구스투스에게 속주의 통치를 맡아 달라고 간청했다. 이 요청은 아우구스투스가 초법적인 권한을 갖는 것을 원로원이 사실상 승인한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에 출석하면서 계속해서 공직을 수행하였으며 10년 기한의 속주 통치 권한을 마지못해 수락하는 척하였다.[112][113] 아우구스투스가 통치하게 된 속주들은 갈리아, 히스파니아, 시리아, 킬리키아, 키프로스, 이집트 등 로마에 정복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속주들이었다.[112][114] 아우구스투스가 집정관일 때, 자신이 통치하는 속주에 파견할 총독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원로원으로부터 부여받는다.[115] 반면 옥타비아누스가 통치하지 않는 “원로원령 속주”[116]의 경우 원로원에서 임명한 총독이 다스렸다.[115] 속주와 군단에 대한 통치권을 얻어내었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의 권력은 점점 더 강해졌다. 하지만 아직 압도적으로 권력을 독점하지는 않았다.[117] 고대 로마의 중요한 식량 생산지였던 아프리카 속주의 경우 원로원에서 파견한 총독이 여전히 통치하고 있었으며, 시칠리아 속주 및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 등 여러 속주는 원로원에서 임명한 총독이 통치하였다.[117] 하지만 그리 많지 않은 수의 속주만 원로원에서 임명한 전직 집정관 출신의 총독이 다스렸으며, 나머지 지역은 아우구스투스가 임명한 총독이 다스렸기 때문에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에게 감히 대적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103][111] 광활하고 지리적으로 먼 '황제령' 속주에는 대다수 군단들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아우구스투스는 집정관과 법무관급 레가투스를 임명하고 자신의 재량으로 선전포고와 강화를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118]



시민관을 쓴 아우구스투스의 흉상

원로원 의원들은 감격하였고, 옥타비아누스에게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수여하였다. 이와 더불어 아우구스투스의 집 출입구의 위쪽에 시민관을 걸고 출입구의 양쪽 기둥을 월계수 묘목 장식으로 뒤덮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가 황금 방패에 공화정을 복귀시켰다는 사실을 새겨 원로원 의사당에 안치하였다.[119] 이 칭호는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였다.[101] 신의 아들(divi filius, 즉 카이사르의 아들)이라는 지위와 더불어 ‘길조’를 뜻하는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에는 초자연적인 힘이 함축되어 있었는데, 로물루스가 엄숙한 징조(augusto augurio)를 보고 로마를 창건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그는 제2의 창건자로서 또 다른 로물루스로 인정되었다고 볼 수 있었을 것이다.[120] 이를 통해 평화로운 “아우구스투스의 시대”를 내전 등 끔찍한 사건을 겪었던 “옥타비아누스의 시대”와 차별화할 수 있었다.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제2의 건국자임을 상징하기 위해서 로마의 건국자인 로물루스와 레무스에서 따온 “로물루스”라는 칭호도 고려되었지만 로물루스라는 칭호는 왕정을 연상시켰기 때문에 결국에는 “아우구스투스”를 선택한다.[121] 아우구스투스는 또한 자기 자신을 “신군 카이사르의 아들인 임페라토르”(Imperator Caesar divi filius)이라 칭했다.[122] 이는 자신이 신군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라는 것과, 승리를 상징하는 “임페라토르”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122] 하지만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받았던 특권인 보라색의 토가를 입을 수 있는 권리, 권위를 상징하는 머리띠와 홀을 쓸 수 있는 권리는 받지 않았다.[123]


호민관 특권[편집]

기원전 23년 아우구스투스의 동료 집정관이었던 테렌티우스 바로 무레나(Terentius Varro Murena)가 아우구스투스에 대항하려 한다. 그 방식은 정확하게 전해지고 있지 않으나 무레나는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칼푸르니우스 피소(Calpurnius Piso)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124][125] 피소는 널리 알려진 공화정 지지자였는데, 아우구스투스는 동료 집정관과 협력하면서 파벌에 관계없이 모든 이들과 협력하여 국정을 운영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126] 늦봄에 아우구스투스는 자칫하면 죽을 수 있었던 정도로 심하게 병을 앓았고, 사람들은 아우구스투스가 친구인 아그리파에게 자신의 인장을 넘기고 사위인 마르켈루스에게 병권을 위임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인장과, 관리하고 있던 공금 및 군단 통제권을 동료 집정관인 피소에게 위임했다.[124][127] 이러한 행동은 아우구스투스가 사실상의 황제라고 믿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일이었고,[128]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가 제정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의심을 잠시 거둔다.[124][127] 아우구스투스는 사유 재산만 자신이 지목한 상속자들에게 수여하려 했다. 당시 로마의 시민들은 여전히 군주정을 좋게 보지 않았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가 만약 권력을 자신이 지명한 후계자에게 물려주려 했다면 반란이 일어났을 것이다.[104]



서기 14년 ~ 20년경에 만들어진 시민관을 쓴 아우구스투스. 마노 세공으로 되어 있다.

건강을 회복한 후 아우구스투스는 집정관 직에서 사임한다.[127] 이후 아우구스투스가 집정관에 선출된 것은 기원전 5년과 기원전 2년뿐이다.[127][129] 하지만 군 통수권은 여전히 원로원의 요청으로 지니고 있었다.[130] 아우구스투스는 집정관직에서 사임하여 구 귀족들에게 집정관 자리에 오를 기회를 늘려 주었으며, 전통적인 공화주의자들의 우려를 불식시켰다.(계속 집정관직을 보유하는 것이 마리우스나 카이사르의 행적과 너무나 비슷했기 때문이다.)[131] 아우구스투스는 공직에 종사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전직 집정관으로 속주 통치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127][132] 또 그는 기원전 27년부터 황제령 속주에 전임 집정관의 명령권(proconsulare imperium)을 계속 보유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오히려 원로원령 속주의 명령권보다 더 우위에 있는 상급 임페리움(maius imperium)까지 얻게 되어 권한이 강화되었다. [133] 그리하여 다른 속주 총독들 위해 군림하고 필요한 경우 모든 군단에 대한 명령권을 행사할 수 있게 했다. [134] 또한 아우구스투스는 “호민관 특권”을 부여받았으며 이를 죽을 때까지 행사했다.[135] 아우구스투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면서 귀족 계급으로서 호민관에 취임할 수는 없었다.[136] 하지만 호민관 특권을 손에 넣어 거부권 행사, 선거 관리, 모든 모임에서 제일 먼저 발언할 수 있게 되었다.[129][137] 아우구스투스의 호민관 특권을 활용하여 풍기 단속을 담당하고 시민들이 공익을 보존하는지 자세히 감찰하는 역할도 하였으며 그리고 인구 조사와 원로원의 의원을 정할 수 있는 권한도 가지게 되었다.[138][139] 이 권한까지 손에 넣자 아우구스투스는 포룸에 들어올 때 전통 복장 토가를 입지 않은 사람들은 들어올 수 없게 하여 로마 애국주의의 미덕을 지키려 하였다.[140] 고대 로마의 공화정 체제에서는 아우구스투스처럼 감찰관에 선출된 적도 없던 사람이 이런 권한을 갖는 것과 한 사람이 호민관 특권과 감찰권을 동시에 가지고 있던 전례가 없었다.[141] 이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비슷한 권한을 가졌지만 인구 조사를 시행하거나 원로원 의원 명단을 좌지우지하지는 못했다. 공화정 시대와 비교해서 호민관의 위상은 격하되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호민관을 여전히 법무관이 되고자 하는 평민 계급이 거쳐야 하는 중요한 단계로의 의미는 살려둔다.[142]



폰티펙스 막시무스(최고 제사장)의 복장을 한 아우구스투스의 상.

아우구스투스는 또한 군 통수권도 손에 넣는다. 이는 이전에는 집정관이나 권한을 위임 받은 장군들만이 가지고 있던 권리였지만, 이후에는 아우구스투스만 이를 사용할 수 있었다.[143] 아우구스투스만이 가지고 있던 “절대 지휘권”은 오직 아우구스투스만이 명목상 로마군의 최고 통수권자의 자격으로 개선식을 할 수 있게 되었다.[144] 그 결과로 아우구스투스가 임명한 장군들이 전선에서 승리를 거두면 그 영예는 아우구스투스에게 돌아갔다.[144] 아우구스투스의 의붓아들이었던 티베리우스가 유일한 예외였다.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7년에 게르마니아에서의 공적으로 개선식을 거행한다.[145][146] 아우구스투스는 갖고 있던 절대 지휘권은 기원전 13년에 기한 연장 승인을 받았다. 이 승인을 기다리는 동안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에 머무르면서 퇴역 장병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이들에게 아낌없이 선심을 베푼다.[129]


앞에서 언급한 권한들의 획득은 정치적으로 매우 미묘한 위장이었다. 평민 계급이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이를 미루어 알 수 있다. 기원전 22년에 홍수와 기근이 겹쳐서 일반 서민들의 생활이 힘들어졌다. 이들은 아우구스투스에게 영구 집정관직 혹은 독재관직을 부여할 것과 그가 직접 감찰관직을 맡아 곡물 담당관직(cura annonae)를 맡아줄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134] 아우구스투스는 독재관에 취임하지는 않았지만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자비를 부담하여 짧은 시간 내에 사태를 해결하였다.[138] 8년에 다시 발생한 기근 때에는 “식량청 장관”(라틴어: praefectus annonae)[147]이라는 관직을 신설하여 로마의 식량 공급을 책임지게 하였다.[148] 기원전 19년에 원로원은 민중의 분노를 사지 않으려고 아우구스투스가 집정관의 상징을 공적인 자리에서 사용하는 권리와 두 집정관의 사이에 앉을 수 있는 권리를 허락했다.[143][149] 그 결과권력은 공식적으로도 집정관에 취임하지 않더라도 집정관처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하였다.[149]


기원전 12년에는 최고 제사장(폰티펙스 막시무스)이었던 레피두스가 죽은 후에 그 자리에 취임한다.[150] 최고 제사장은 종신제인 데다가 단 한 명만 될 수 있는 직책이었다. 기원전 2년에는 원로원과 로마 시민로부터 “국부”(라틴어: pater patriae)라는 칭호를 부여받는다.[119]


대외 정책과 군사 작전[편집]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확장된 영토. 노란색 부분은 기원전 31년 당시의 로마의 영토이다. 녹색 부분은 아우구스투스 통치 기간 동안 얻은 지역이며, 분홍색은 동맹국을 의미한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이미지를 승리와 연결시키기 위해 자신의 칭호에 개선장군을 뜻하는 “임페라토르”를 집어넣어 “신군 카이사르의 아들인 임페라토르 아우구스투스”(라틴어: Imperator Caesar Divi Filius Augustus)라 하였다.[151] 이후 13년까지 로마군은 아우구스투스가 “임페라토르”라고 불릴 만한 21회가량의 큰 승리를 거두었고 3회의 정식 개선식을 거행하였다.[152] 아우구스투스는 《아우구스투스 업적록》의 제4장에 이러한 군사적 성공으로 치른 개선식, 감사제 등에 대해 서술하였다.[151]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무력으로 점령한 지역도 적지 않았으며, 외교도 적절히 사용하였다. 한 예로 크라수스가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당했던 대패(大敗)를 직접적인 전쟁을 통해 만회하는 대신, 아르메니아 왕국에 친(親)로마 성향의 인물을 왕위에 앉힌 후에 파르티아를 압박하여 이를 외교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105]



티베리우스의 흉상. 아우구스투스의 가장 유능한 지휘관 중 하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히스파니아의 북부, 알프스 지역의 라이티아와 노리쿰, 일리리쿰, 판노니아 등을 정복하였다.[153] 기원전 25년에는 왕이 후계자도 남기지 않고 죽은 갈라티아를 전쟁을 벌이지 않고 로마의 속주로 만들었다.[154] 또한, 오늘날 스페인의 칸타브리아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을 기원전 19년에 최종적으로 진압하였으며 이 지역은 히스파니아 타라고넨시스 속주와 루시타니아 속주에 편입된다.[155] 이 지역에서 채굴되는 풍부한 광물 자원은 이후 군자금의 원천이 된다. 대표적인 곳으로 라스 메둘라스의 풍부한 금광이 있다.[155] 기원전 17년과 16년에 일리리쿰 총독 푸블리우스 실리우스 네르바가 알프스 산악 지역의 노리쿰(오늘날의 티롤, 스티리아, 잘츠부르크)에 정복 사업을 개시하여, 황제의 의붓 아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가 완수했다.[156] 그 결과 이탈리아 반도와 게르마니아 사이에 군사적 완충 지대가 생겼다. 지금의 모나코 근교에 알프스 전승기념비가 세워졌고 호라티우스는 이 승리를 예찬하는 시를 지었다.[157] 기원전 12년에는 알프스 근방에서 군사 행동을 재개하였고, 의붓아들인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 형제가 이끄는 군대가 각각 일리리쿰에서 판노니아 족, 동부 라인란트에서 게르만족을 공격하였다.[158] 작전은 성공을 거두었고 기원전 9년에 드루수스가 이끄는 군대는 엘베 강에 도달했다. 하지만 얼마 후 드루수스는 낙마하여 죽었고 티베리우스는 동생의 유해를 로마로 송환하였다.[158][159]



라스 메둘라스의 금광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의 동방을 파르티아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여러 동맹국을 완충 지대로 적극 활용하였다. 동방 방위를 위해 시리아 속주에 군단을 주둔시켰으며, 티베리우스가 파르티아와 교섭을 하였다.[160] 이 협상의 결과로 로마는 기원전 53년에 크라수스가 파르티아에 대패를 당했을 때 빼앗겼던 군단기(軍團旗)를 되찾을 수 있었다.[145] 티베리우스는 아르메니아 왕국의 티그라네스 5세를 왕위에 복위시키기도 했다.


파르티아가 언제나 위협적인 상대이기는 했지만, 실제 전쟁은 게르만 족을 상대로 대부분 라인 강, 도나우 강 근교에서 벌어졌다.[160] 안토니우스와 최종 전투를 벌이기 전에 달마티아의 부족들과 벌였던 전쟁 이후 로마군은 착실히 도나우 강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러 차례 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게르마니아 지역은 로마화하는 데 실패하였다.[160] 9년에 토이토부르크 숲에서 당한 참패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게르마니아의 총독인 바루스가 이끄는 3개 군단이 케루스키 족 출신의 아르미니우스가 이끄는 게르만 족에게 전멸한다.[161] 아우구스투스는 사태를 수습하려 했고, 티베리우스는 이후 여러 차례 라인란트로 진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162][163] 하지만 아우구스투스의 죽은 후에 계승자인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아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하였고, 이후 로마군은 라인 강과 도나우 강을 주 방어선으로 삼아 방위 체계를 구축한다.[164]


죽음과 후계 문제[편집]

기원전 23년의 자신에 대한 암살 음모가 발각되고, 건강이 크게 악화되자 아우구스투스는 후계자 선정이라는 화급한 문제에 관심을 쏟게 된다.[131] 아우구스투스는 정치 체제의 안정을 위해 후계자를 물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은 이를 대중에게 알리려 하였다.[165] 로마의 시민들, 특히 원로원 계급이 갖고 있는 군주제에 대한 공포심을 자극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이를 추진한다.[165] 기원전 25년에 아우구스투스는 누나의 아들인 마르켈루스와 자신의 딸인 율리아를 결혼시켰다.[166] 하지만 마르켈루스는 기원전 23년에 20살의 나이로 사망한다. 16살의 나이에 미망인이 된 율리아를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와 혼인시켰다.[166] 아그리파 부부는 아들 셋, 딸 둘, 총 다섯 명의 아이를 낳았다. 얼마 후, 아그리파는 5년 기한으로 전권을 부여받아 제국의 동방을 담당하게 되었고, 이와 함께 아우구스투스만 가지고 있었던 “호민관 특권”도 부여받았다.


아우구스투스는 외손자인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후계자로 삼기 위해 양자로 삼는다.[166] 이 두 사람은 아우구스투스의 배려로 기원전 5년과 기원전 2년부터 정치적 경력을 쌓기 시작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리비아가 데려온 의붓아들인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 형제도 아꼈다.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조카인 안토니아와 결혼했으며, 기원전 12년에 아그리파가 죽고 나서는 티베리우스 부부를 이혼시킨 후 티베리우스를 미망인이 된 율리아와 결혼시켰다.[166] 하지만 드루수스는 기원전 9년에 게르마니아에서 사망하고,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6년부터 로마 제국의 통치를 분담하였지만 얼마 후 로도스 섬으로 은퇴해 버린다.[167]



아우구스투스 영묘

서기 2년과 4년에 루키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차례로 요절하였다. 서기 4년에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와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를 양자로 맞아들였다. 티베리우스는 5년 기한의 호민관 특권을 부여받았고, 조카인 게르마니쿠스를 양자로 맞아들였다.[168]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아 평정과 일리리쿰, 달마티아 반란을 진압하였고, 게르마니쿠스는 그 밑에서 착실히 경험을 쌓는다. 하지만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는 방만한 행실로 인해 7년에 추방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를 후계자로 삼을 계획을 포기하게 된다. 이후, 티베리우스는 13년에 아우구스투스가 가진 모든 특권을 부여받는다.


14년 8월 19일에 아우구스투스는 놀라에서 숨을 거두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죽기 전에 건강이 갑자기 나빠지자 티베리우스를 소환해 밀담을 나누었다. 얼마 후, 황후 리비아의 품에 안긴 채 평온하고 조용하게 숨을 거두었다.[169] 티베리우스는 아들인 드루수스와 함께 아우구스투스의 추모 연설을 하였다.[170] 이후 마르스 광장을 지나 아우구스투스 영묘 앞 광장에서 유해를 화장하였고, 영묘에 묻혔다. 얼마 후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를 신격화하기로 결정하였다.


기타[편집]

아우구스투스의 유산[편집]

 아우구스투스 업적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터키 앙카라에서 발견된 《아우구스투스 업적록》의 일부


바티칸 미술관에 있는 프리마 포타의 아우구스투스

아우구스투스의 통치 시기에 수립된 정책들은 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수백 년간 지속하였다. 양부로부터 이어받은 성인 ‘카이사르’와 자신의 칭호인 ‘아우구스투스’는 이후 1400여 년간 로마 제국과 비잔티움 제국의 통치자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카이사르는 여러 언어에서 황제를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으며[171], 아우구스투스는 사후에 신격화되었다. 그 결과 많은 수의 아우구스투스 동상과 흉상이 제작되었고, 현재까지도 많이 남아 있다. 아우구스투스 신앙(Divus Augustus)은 391년에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을 때까지 계속된다. 또한, 아우구스투스는 유언장에서, 자신이 직접 쓴 《아우구스투스 업적록》(Res Gestae Divi Augusti)의 동판을 아우구스투스 영묘의 정면에 걸어 놓기를 원했다.[172] 《아우구스투스 업적록》의 사본은 아우구스투스의 사후, 로마 제국 전역에 퍼졌다.[173]


터키의 앙카라에서 발견된 사본의 경우[174], 라틴어로 되어 있는 원문을 그리스어로 번역하여 공공건물에 부착하였다. 테오도어 몸젠은 《아우구스투스 업적록》을 “금석문의 여왕”이라고 하였다.


아우구스투스의 작품은 여러 편이 알려졌다. 이 중에는 시칠리아에 대한 시집 《시칠리아》, 〈브루투스의 《카토론》 반박〉, 13권에 걸쳐 기술한 《자서전》 등이 있다.[175][176] 하지만 이 작품들은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역사학자들은 아우구스투스가 주고받은 편지들을 분석하여 작품에 대한 추가 정보를 연구하고 있다.[177][178]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황제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아우구스투스가 수립한 정책은 로마 제국이 존재하였던 기간에 계속 사용되었고 “로마에 의한 평화”(Pax Romana) 또는 “아우구스투스에 의한 평화”(Pax Augusta)라 칭송받았다. 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처럼 카리스마가 넘치는 지도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셋째 아내인 리비아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지혜와 결단력이 있고 통찰력이 있는 정치가였다. 게다가 그의 정책은 매우 오랫동안 지속하였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로마 제국은 많은 점에서 변화가 있었다. 우선 수도인 로마 시에 “경찰청”(Praefectus urbi)과 “소방청”(Praefectula vigilum)을 만들었으며, 지방 자치 단체들에 상주하는 장관들을 파견하였다.[179] 경찰청은 대대별로 500명씩이었으며, 소방청은 대대별로 500에서 1천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총 7개 대대가 14개 구의 치안과 화재 진압을 담당하였다.[180]


내전이 끝난 후, 아우구스투스는 28개 군단, 총 17만 명으로 구성된 상비군을 조직한다.[181] 이들은 각 속주의 주민들로 구성된 보조병과 함께 국방을 담당하였다.[182] 또한 역참 제도를 창설하여 “관찰장관”(praefectus vehiculorum)이라 불리는 장교들이 감독하도록 하였으며, 자비를 털어서 도로를 유지 및 보수하였다.[183] 동시에 추가로 가도를 더 건설하여, 더욱 더 빠른 통신 체계를 갖추면서 군대가 신속하게 행군할 수 있게 되었다.[184] 서기 6년, 아우구스투스는 현역 및 퇴역 군인의 연금을 지급하기 위한 재원을 마련하고자 1억 7천만 세스테르티우스를 기부하여 “군인 연금 기금”(aerarium miltare)을 만들었다.[185]


기원전 27년에는 자신의 경호를 목적으로 “근위대”를 창설하였다.[186] 근위대는 훗날 원로원에 압력 넣기, 새 황제 추대, 기존의 황제 제거 등 로마의 역사에서 영향력을 발휘한다. 근위대는 312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해체할 때까지 존속한다.[187]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 최고의 권력자였지만, 언제나 공화주의자로서의 미덕과 규범을 실천하려 애썼다. 언제나 서민들에게 관심을 두고 돌보았던 그는 관대한 정책들과 과다한 지출 삭감을 통하여 이를 실천하였다. 기원전 29년에는 25만 명의 시민에게 개인당 400세스테르티우스씩 지급하였고 식민지에 거주하고 있는 12만 명의 퇴역병에게는 1,000세스테리우스씩을 지급하였으며, 약 7억 세스테르티우스를 들여 자신의 병사들이 땅을 사서 정착할 수 있게 하였다.[188] 또한 로마의 여러 신을 모시는 신전 82곳을 복구하였다.[188] 기원전 28년에는 검소하고 관대한 모습을 강조하려고 자신의 모습을 본뜬 은상 80여 개를 녹였다.[188]



누비아의 신전에 묘사된 이집트풍의 아우구스투스

아우구스투스의 긴 통치 기간과, 이 기간에 로마 제국에 남긴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유산들도 성공의 중요한 요인이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서기 14년 당시의 젊은이들은 원수정 외의 정치 체제는 알지 못하였다.[189] 만약 아우구스투스가 일찍 죽었더라면(예: 기원전 23년)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한동안 사실상 군주정이었던 로마에서 옛 공화정 지지자들과 아우구스투스의 추종자들 간에 내전이 벌어졌을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경험과 인내심, 치밀한 전략과 정치적 통찰력으로 이러한 상황을 조율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잘 훈련된 군대가 전선에서 주둔하는 것, 제위 계승에 대한 원칙, 황제의 자비를 털어 수도를 꾸미는 것처럼 여러 분야에서 로마 제국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였다. 무엇보다도 아우구스투스가 남긴 최고의 업적은 이후 2세기간 이어진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연 것이다.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기억은 사람들에게 매우 좋게 남았고, 이는 제국 시대의 정치적 풍조 아래 좋은 황제의 패러다임으로 남게 된다. 이후 로마의 모든 황제들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Caesar Augustus)를 사용하였고, 이에 따라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는 점차 사람의 이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 황제를 지칭하는 칭호로 더 많이 사용된다.[5]


동시대인인 베르길리우스와 호라티우스는 아우구스투스를 로마의 수호자, 도덕 규율을 바로잡은 자, 제국을 짊어지고 갈 의무를 기꺼이 진 자로 묘사하였다.[190] 하지만 통치 기간에 원수정을 확립한 것 때문에 동시대인들에게 비판받기도 하였다. 동시대의 법학자, 공화정의 추종자인 마르쿠스 안티스티우스 라베오(? ~ 서기 10년 또는 11년)는 공개적으로 아우구스투스의 통치 체제를 비판하였다.[191] 타키투스는 〈연대기〉의 서문에서 아우구스투스가 교활한 방법으로 공화정 로마를 노예처럼 만들었다고 서술하였다.[191] 아우구스투스가 죽고 난 뒤에 티베리우스가 이 자리를 물려받았고, 로마의 사람들은 노예 매매와 같이 계속하여 다음 주인에게 넘어갔다.[191] 하지만 타키투스는 네르바가 “원수정”과 “자유”라는 서로 이질적인 두 생각을 잘 조화시켰다고 믿었다.[192] 3세기 역사가인 디오 카시우스는 아우구스투스가 친절하고 관대한 통치자라는 점은 인정하였지만, 동시대의 역사가들과는 달리 아우구스투스를 전제군주로 보았다.[191] 시인인 마르쿠스 아나에우스 루카누스(39년 ~ 65년)는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와 소 카토와의 전쟁에서의 승리는 로마의 전통적 자유가 끝난 상징적인 사건이라는 의견을 갖고 있었다. 역사가인 체스터 G. 스타 2세는 루카누스가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하지 않은 이유가 그러기엔 너무나도 신성불가침의 존재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라 썼다.[192]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작가인 조너선 스위프트는 Discourse on the Contests and Dissentions in Athens and Rome에서 아우구스투스를 로마에 전제군주제를 도입했다는 이유로 비판하였고 대영제국의 입헌군주정을 기원전 2세기경의 로마 공화정에 비유하였다.[193] 장군이자 역사가였던 토머스 고든(1658년 ~ 1741년)은 아우구스투스를 올리버 크롬웰과 비교하며 비판하였다.[193] 토머스 고든과 몽테스키외는 아우구스투스가 전장에서는 겁쟁이라고 평하였다.[194] 스코틀랜드의 학자인 토머스 블랙웰(Thomas Blackwell, 1701년 ~ 1757년)은 Memoirs of the Court of Augustus에서 아우구스투스를 마키아벨리 성향의 군주라 보았다.[194]


세제 확립[편집]


인도에서 발견된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화폐. 대영박물관 소장.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화폐의 모조품(인도, 1세기). 대영박물관 소장.


아라비아 반도 남부의 히먀리트 왕국에서 제작된 모조품

아우구스투스의 세제 개혁은 로마 제국의 역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전 시대에는 널리 행해졌던 속주민에 대한 특별 징세를 하지 않았으며, 새로 정복한 지역의 기반을 닦고 고정 세율로 직접세를 징수하였다.[195] 세금을 불시에 임의로 거두어 속주민의 분노를 불러오는 대신에 고정 세제를 실시하기로 한 것이다. 그 결과 세입이 증가하였고, 돈의 흐름이 안정되었으며, 해마다 속주가 내야 할 세금의 양이 일정해졌다.[195] 세금 징수를 위하여 인구 조사를 실시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각 속주마다 내야 할 세금의 양이 정해졌다.[196] 속주민과는 달리, 로마 시민권자의 경우 간접세만 납부하였다.[196] 노예 매매 시 가격의 4퍼센트를 세금으로 냈으며, 경매 시에도 1퍼센트를 납부하였으며, 재산 상속 시에도 가까운 친척이 아닌 이로부터 10만 세스테르티우스 이상의 상속을 받으면 5퍼센트의 세금을 납부하였다.[196]


또한, 세금도 민간 징수원이 징수하던 기존 방식에서, 세금 담당 공무원이 징수하는 방식으로 바뀐다. 공화정 시대의 민간 징수원들은 세금을 과다하게 걷어가며 힘을 불려나가, 점점 로마의 정치가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많은 투표권을 갖게 되었다.[195] 이들은 세금을 추가로 더 걷어서 자신의 재산을 불렸기 때문에 악명이 높았었다. 이들에 대한 관리 감독이 부실하였기 때문에 세금 납부자들에게서 부당 징수를 일삼았고, 이는 경제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직접 이집트를 정복했다는 점과 로마 정부 형태의 변화 때문에, 아우구스투스는 이집트의 비옥한 땅을 재정원으로 쓸 수 있었다.[197] 이 때문에 이집트는 로마의 속주가 아닌 아우구스투스의 사유지처럼 간주되었고, 이후에도 이집트는 황제들의 사유지로 취급된다.[198] 이집트는 원로원 계급 출신이 통치하는 대신에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임명한 기사 계급(equestrian) 출신의 총독이 다스렸다. 아우구스투스와 이후의 황제는 이집트의 농경지에서 벌어들인 많은 수입을 복지 정책, 공공 정책과 군사 원정의 자금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8월 (Augustus)[편집]

 율리우스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전에는 로마의 역법에서 “여섯 번째 달”(라틴어: Sextilis)로 불리었던 달이, 아우구스투스의 시대 이후부터 8월(라틴어: Augustus, 영어: August)이라는 지금의 호칭으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8월이 31일이 된 이유는,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이름을 딴 8월과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을 딴 7월(July)이 똑같은 날짜 수를 가지길 원해서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13세기의 학자였던 사크로보스코의 요한네스(Johannes de Sacrobosco)가 지어낸 이야기이다. 실제로 8월은 이름이 '아우구스투스'로 바뀌기 전부터 31일이었다. 암브로시우스 테오도시우스 마크로비우스에 따르면, 이름이 '아우구스투스'로 바뀐 것은 로마 원로원의 결정이라고 한다.[199]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30년 8월에 알렉산드레이아를 함락한 뒤 권좌에 오르자, 이를 기리고자 8월을 '아우구스투스'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한편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카이사르가 제정했던 율리우스력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역법에 혼란이 왔는데, 이를 바로 잡으면서 8월을 '아우구스투스'로 명명하였다고도 한다.[200]


건축[편집]


평화의 제단에 새겨진 돋을새김.


프랑스 비엔에 위치한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의 신전.

아우구스투스는 죽기 전에 “나는 진흙으로 된 로마를 물려받았고, 대리석의 로마를 물려줬다.”라고 호언장담하였다. 디오 카시우스는 이 발언이 황제의 권력에 대한 은유라고 분석하였다.[201] 아우구스투스 이전의 시대에도 건물을 지을 때 대리석을 사용했고, 그 후에 대리석의 사용량이 갑자기 증가하지도 않았다.[202] 화재의 위험이 높았던 건물이 많았던 수부라 지역의 건설에 대리석을 많이 사용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마르스 광장(Campus Martius) 근방에 평화의 제단(라틴어: Ara Pacis Augustae)과 같은 기념비적인 건물을 많이 세웠다. 평화의 제단 앞에는 해시계로 사용하기 위해 이집트로부터 가져온 거대한 오벨리스크가 놓여 있었다.[203] 《아우구스투스 업적록》에 따르면 평화의 제단에 새겨져 있는 돋을새김에는 아우구스투스의 노력으로 평화를 이룩한 것을 경축하고, 앞으로 오랫동안 로마 제국이 평화롭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고 한다.[204] 이 돋을새김에는 집정관, 여사제뿐만 아니라 로마의 시민들도 함께 새겨져 있다.[205] 아우구스투스는 또한 카이사르 신전, 아그리파 목욕탕을 지었으며, 마르스 신전이 딸려 있는 아우구스투스 포룸도 건설하였다. 다른 건설 사업들도 장려하였는데, 대표적인 건물로 아그리파가 지은 판테온, 아우구스투스가 건설 자금을 지원하고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붙인 옥타비아 회랑, 마르켈루스 극장 등이 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는 가족을 위한 무덤으로 사용하기 위해 아우구스투스 영묘를 건설하였다.[206] 악티움 해전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여 기원전 29년에는 카스토르와 폴룩스 신전 근방에 아우구스투스 개선문이 건립되었고, 기원전 19년에는 이를 확장하였다.[202] 이러한 건설 사업은 제국 전역에서 행해졌는데, 현재까지도 과거 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여러 곳에 아우구스투스의 시대에 건설된 건물이 남아 있다. 그 이후 로마 제정 시기 동안 그리스로부터 영향을 받은 코린토스 양식의 건물이 주를 이루었다.[202]


아그리파가 기원전 12년에 죽은 후,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가 개인 재산까지 기부해 가며 책임지던 수도 유지·보수 업무를 정비하여야 했다.[179] 그해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이 지정한 3명의 원로원 의원이 로마의 수로교의 유지·보수 임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179] 아우구스투스 통치 말기에는 다섯 명의 원로원 의원이 “공공사업청”(curatores locorum publicorum iudicandorum)이라 불리는 공공건물과 신전의 유지·보수를 맡았다.[179] 아우구스투스는 또한 “도로청”(curatores viarum)을 창설하여 정기적으로 각 지방의 가도 유지·보수를 담당하도록 했다.[183]


외모[편집]

수에토니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외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용모와 자태에 기품이 어려 있고, 평생 언제 어느 때나 아름다워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중략) 그의 눈은 밝고 맑으며 형형히 빛났다. (중략) 머리칼은 엷은 금색이고 약간 곱슬머리였다. 양쪽 눈썹은 붙어 있고, 귀는 보통 크기였다. 콧마루는 끝에서 약간 솟아오르고 그 밑변이 안쪽으로 약간 구부러져 있었다. 피부는 거무스름하지도 않고 희지도 않고 딱 중간이었으며, 키는 작았다.

— 수에토니우스(박광순 옮김) (1998). 《풍속으로 본 12인의 로마 황제》. 풀빛미디어. 1권 170쪽.



D02 – 제1부 서양 문학의 흐름과 고전 

제1장 서양문학의 흐름과 고전

(출전 :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3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신이 인간에게 책이라는 구원의 손을 주지 않았더라면 지상의 모든 영광은 망각 속에 파묻히고 말았을 것이다. >> (리처드 베리)

  모든 정신문화가 그러하듯이 문학은 시대와 함께 변천과 발전을 거듭하여 수많은 작가와 작품을 배출시키면서 한 시대의 정신적 사상적 문화유산으로 축적된다. 이러한 문학을 각 나라별로 혹은 각 시대별로 그 공통성을 추출하여 분석해보는 일은 중요한 문학 연구방법이 될 수 있다. 그것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작가의식이 작품이라는 구체적인 대상을 통해 표출되고, 그것이 종합되어 당대 문학의 주된 흐름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예사조에 대한 맹신에도 문제가 있다. 이것은 문학작품의 분석에서 얻어진 결과를 토대로 분류하는 방법론이 되지 못하고, 반대로 이에 대한 선입견이 문학작품을 보는 시각을 도식화 해버리기 때문이다. 문학작품 가운데는 어느 하나의 시조에만 국한시킬 수 없는 것도 적지 않고, 작가의 경우도 다양한 작품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어느 한 경향의 작가로 치부해버리곤 한다. 이것은 대상을 인식하는 정신작용의 편의주의적 메커니즘으로 경계해야 할 일이다.

  또 한가지, 문예사조는 칼로 물 베듯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을 뿐 아니라 선후가 중첩되거나 상호 혼재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학자들간에 의견일치가 어렵다는 점도 지적해두고 싶다. 특히 신비평구조주의해체주의 등, 최근의 현기증 나는 문학비평은 문예사조의 존대 자체를 거부하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대상을 인식하는 정신작용은 어차피 대상을 규범화시키는 인식단계에 익숙해 있으므로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서 각 문예사조를 통해 문학 작품, 특히 고전을 분석해보는 일은 의미 있는 작업으로 생각된다. 동서문학의 흐름을 기술하기에 앞서 먼저 독자들에게 이상의 두 가지 점에 대해 주의를 환기해두고 싶다.


   서양문학의 원류

  서양문학은 민족과 지역에 따라 다양하지만 그 원류로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 거론된다. 예를 들어 르네상스가 헬레니즘의 부활이라면 종교개혁은 헤브라이즘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다. 헬레니즘이 문학에 있어 사실주의 영향을 주었다면 헤브라이즘은 낭만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은 때로는 대립되기도 하고 때로는 융합하기도 하면서 서양문화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헬레니즘

  그리스 인은 어느 민족보다도 이성과 지성에 뛰어났고 예술을 사랑했다. 그들은 이성과 결합된 미를 사랑했고, 예술에는 지적 요소가 필수적이라고 믿었기에 예술표현양식에 있어서도 명쾌함을 존중했다. 이른바 <숭고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이 그리스 고전미의 극치였다. 한편 이성과 지성을 중시하고 객관적 정신에 뛰어났던 그리스인은 하나의 사건이나 현상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도 공정한 관점을 잃지 않고 사물들을 별개의 것으로 보기보다는 유기적으로 결합된 것으로 보았다. 그 결과 미의 생명인 조화와 균형, 그리고 통일을 중시했다. 그리고 그리스 인은 인간 세상을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으로 보아 현세의 삶을 소중히 여겼다. 그들이 목적으로 하는 바는 <교양의 완성>으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모든 능력이 아무런 구속 없이 발현되기를 원했다. 그리스 인의 이런 인간과 삶에 대한 강렬한 관심은 인간 본위로서 휴머니즘 정신으로 연결된다.

  이상과 같은 그리스 정신에서 비롯된 헬레니즘 내지 고전문학은 후에 서양문학의 지속적인 원동력으로 작용하게 되고 문예사조의 한 주류를 형성하게 된다.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문학을 모범으로 그 양식을 따르려는 경향이 14~16세기 르네상스와 17~18세기 고전주의인데, 이는 인간의 지적 충동과 헬레니즘의 부활이었다. 뿐만 아니라 근대문학의 사실주의 현실주의 주지주의 등도 헬레니즘의 한 양상으로 볼 수 있다.


   헤브라이즘

  또 하나의 서양문학의 흐름은 히브리적인 흐름 즉, 헤브라이즘이다. 헤브라이즘은 약소민족이었던 히브리 민족(이스라엘 인, 유대인)의 신앙으로 그리스의 다신교와는 달리 유일신인 여호와 하나님을 숭배하는 종교이다.   이러한 기독교 사상의 본질은 <<여호와를 경배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니라>>(잠9:10)라는 표현 속에 잘 나타나 있는데, 인간 자신의 의지가 아닌 신의 의지에 대한 복종이 헤브라이즘의 기본 관념이다. 따라서 인간적인 자유주의는 배제되고 신에 대한 경배와 신앙이 무엇보다 선행되며 육체 및 그 욕망은 올바른 행위의 장애물로 간주되고 금욕적이고 정신적인 미가 예찬된다.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112:1). >> 이것이 그들의 행복의 관념이다. 그들은 죄를 미워했고, 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항상 자신을 구속하는 계율의 굴레를 만들어 <양심의 엄격함>속에서 생활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리스 인처럼 현세의 삶을 존중하기보다 내세를 중시했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찬미했다. 이러한 정신은 훗날 낭만주의와 신비주의, 상징주의 및 표현주의 등에 영향을 주게 된다.

  그들의 신앙의 원천인 <성경 Bible>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39권의 구약과 예수의 생애와 제자들의 전도 및 서신기록인 27권의 신약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떤 시인이 << <이사야 서>와 <히브리 서>를 읽고 나서는 호모로스나 베로길리우스는 나에게 하찮은 것으로 느껴졌고 밀턴조차도 읽을 생각이 나지 않았다>>고 말한 것처럼 성경에는 문학적으로도 가치있는 작품들이 많다. 구약의 <시편> <잠언> 등과 신약의 <마태복음>에 나오는 <산상수훈> 등은 문학적 매력이 넘치는 대목들이다.

  그리고 서울대 선정 동서고전 200선 중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단테의 <신곡>, 괴테의 <파우스트>,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등의 작품은 물론 밀턴의 <실락원>, 번연의 <천로역정> 등도 기독교의 역사와 사상에 대한 이해 없이는 그 진수를 맛볼 수 없다.



-----------------------------------------------------------------------------------------------

서양문학의 뿌리 -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우리가 어떤 문화에 대하여 이해하고자 할 경우에는 그 지역 문화의 근간이 되는 정신적인 기조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첩경이 될 것입니다. 서양의 문화는 두 가지의 큰 흐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입니다. 문학 역시 문화의 일부라 할 수 있으므로 다음에 살펴볼 두 기조를 잘 파악한다면 서양 문학을 접근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문학은 철학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탄생시킨 사회와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서양 각 나라의 문학은 서양 고대문학을 밑거름으로 해서 발전해 왔습니다. 따라서 서양문학의 바탕과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양문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그리스 문학과 히브리 문학의 근본 사상을 알아야 합니다.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또는 히브리즘)은 서양 정신사의 뿌리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서로 엇바뀌거나 함께 혼합하며 문학사상을 이루어 왔습니다. 헬레니즘이 우세할 때는 고전주의나 사실주의 등의 이름으로 나타나고, 헤브라이즘이 우세할 때는 낭만주의나 상징주의 등의 이름으로 나타납니다. 그 외의 다른 모습과 다른 이름으로 나타나는 모든 주의와 주장은 이 두 큰 줄기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고, 서양의 모든 문필가는 이 두 사상에 크든 적든 빚을 지고 있습니다.


헬레니즘이라는 말은 ‘반도’를 의미하는 ‘헬라스(hellas)’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그곳에 사는 민족, 즉 그리스 민족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서 그들의 사고방식과 문화를 지칭하게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기원전 334년 동방 원정을 이끌었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리스와 그리스의 숙적이었던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동쪽 인도까지 진출하면서 오리엔트와 그리스 두 세계가 하나로 융합한 신문화가 생겨났는데, 이것을 헬레니즘 문화라고 부릅니다.


※ 헬레니즘 ~ ‘말하다’, ‘그리스인처럼 행동하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hellenizein에서 유래. 그리스 고유의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가 융합[동서 문화의 융합이라기보다는 세계화한 그리스 문화로 보는 견해도 있다. 폴리스라는 좁은 울타리를 벗어난 그리스 문화는 세계제국으로 확장해 나갔다. 그 결과 헬레니즘은 세계시민주의(코스모폴리타니즘)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원자화(집단 속에서 개개인이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된 개인을 밑바탕으로 하는 것이었다.]하여 이루어진 세계주의적인 예술·사상·정신 등을 특징으로 하는 문화대계. 헤브라이즘과 함께 유럽 문화의 근간을 이룬다. 헬레니즘은 19세기 초 인도의 역사가 J. G. 드로이젠에 의해 정의되었다. 세계사 속에서 헬레니즘은 고대 그리스에서 연원된 독자성을 지닌 역사적 개념이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그리스 정신에서 ‘그리스화한’ 문화까지 포함한다. [즉, 그리스 문화가 이집트와 서아시아 지역으로 널리 퍼져 나간 현상을 가리킨다.] 역사적으로는 알렉산드로스 3세의 죽음에서 로마 제국에 의한 이집트 합병(BC 323~30)까지의 대략 3세기에 걸친 기간이며, 지역적으로는 주로 고대 그리스 본토와 알렉산드로스 3세의 뒤를 이은 여러 왕들에 의해 점령되고 지배되어 새로이 헬레니즘화한 땅에까지 이른다. 헬레니즘 문화는 한때 에게 해 주변의 전지중해 세계를 지배하고, 카르타고 등의 다른 나라에까지 확산되었으며 그 영향력이 서쪽은 영국, 동쪽은 인도의 펀자브 지방까지 뻗어갔다.


헬레니즘은 본질적으로 그리스적인 사유로서 그것의 가장 큰 특징은 이성적이라는 것과 인간중심적이라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써서 유명해진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원래 그리스의 델포이에 있는 아폴론(올림포스 12신 중 하나로, 제우스와 레토의 아들이며 아르테미스 여신과는 쌍둥이다. 레토는 제우스의 아내 헤라의 질투로 출산할 장소를 찾지 못하다가 델로스 섬으로 도망쳐 가 그곳에서 아폴론을 낳았다고 한다. 아폴론은 태양의 신인 동시에 예언의 신이기도 해서 델포이를 중심으로 그의 신전이 세워져, 무녀를 통해 신탁을 받는 일이 성행했다.) 신전에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인들은 이성과 지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의문시되는 것에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서 그 해답을 구하려고 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질문하고 대화하며 새로운 무엇을 이끌어 내려 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고, ‘이성이 이끄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자’라는 플라톤의 철학(철학 포스트 참조) 표어 역시 이성과 지성을 중시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모습을 반영한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인들은 이 세상을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으로 보고 현세의 삶을 기뻐했습니다.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이 보통 인간들처럼 사랑하고 질투하고 약탈하고 잔꾀를 부리기도 하는 인간적 정서를 지닌 신들인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인들은 예술을 사랑했는데 그 예술은 사물의 본질을 형식화해 파악하고자 하는 이성과 결합된 아름다움이며, 예술의 표현 양식에서 조화, 통일, 균형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미술에서는 조각 같은 조형예술을 추구하게 되고, 문학에 있어서는 드라마, 즉 연극이 발전했습니다.


헤브라이즘이라는 말은 ‘건너온 사람들’, ‘방랑자’를 뜻하는 ‘이브리(ibri)’에서 비롯된 말로서 외국인들이 유대인들을 경멸적으로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헤브라이즘은 히브리 민족 특유의 성격, 정신, 문화를 말합니다. 헤브라이즘의 사상은 성서에 요약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과 달리 성서에 나타나는 신은 유일신이며 완전한 인격적 존재여서 인간에게 완전한 순종과 완전한 믿음을 요구합니다. 모세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야훼(여호와)가 명한 대로 행하는 것도 그러한 순종과 믿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헤브라이즘에서는 인간적인 자유주의는 배제되고 신에 대한 경배와 신앙이 앞섭니다. 또한 현세의 삶보다 내세를 중시하기 때문에, 육체 및 욕망은 올바른 행위를 방해하는 것으로 배척되어 금욕적인 경향을 추구합니다. 눈에 보이는 사물은 본질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객관적 세계의 파악은 사물의 형태에서가 아니라 신과의 영적인 교감에 의해서 파악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신비적인 경향도 보입니다.


※ 헤브라이즘 ~ 헬레니즘과 더불어 서양사상을 형성해 온 중요한 사조(思潮). 고대 이스라엘인의 종교(구약성서)에 근원을 둔다. 그것은 BC 13세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스라엘 민족의 신과의 계약이라는 전승(傳承)에서 비롯되며, 이어 야위스트(Yahwist:야훼를 신의 이름으로 사용한 사람)나 엘로히스트(Elohist; 엘로힘을 신의 이름으로 사용한 사람) 등의 역사가와 <신명기(申命記)> 율법의 기자(記者),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예레미야 등의 활약으로 점차 뚜렷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으며, 특히 BC 6세기 초기에 남왕국(南王國) 유다가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되고 다수의 선량(選良; 뛰어난 사람으로 뽑힌 인물)이 포로가 되면서, 그 종교사상은 한층 심화되고, 제2이사야의 '고난의 종복'에서의 구제사상(救濟思想)에서 그 정점에 달했다. 이 구제관(救濟觀)은 나자렛 예수에 의해 실현되었다고 그의 제자들에 의해 전파되어, 마침내 그리스도교가 탄생하였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교는 헤브라이즘의 전통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으며, 그 형성기에 헬레니즘과 접촉, 이에 영향을 받아 이론적 · 철학적 성격을 얻게 되고, 이른바 그리스도교 신학을 형성하였다. 따라서 헤브라이즘은 그리스도교에 의해 서양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 되었다. 헤브라이즘은 유일인격신(唯一人格神)의 역사적 계시와 이에 대한 신앙을 토대로 하고, 여기서 생기는 신에 의한 우주의 창조와 세계사의 주재(主宰), 이 신과의 계약에 의한 인간의 책임을 주장하는 세계관 및 인간을 영육일체(靈肉一體)로서 파악하는 인간관에서 헬레니즘과 대립된다. 즉 헬레니즘이 우주를 신들로부터의 타락 또는 유출(流出)에서 생긴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헤브라이즘은 우주를 신이 만든 피조계(被造界)로서 파악한다. 따라서 헬레니즘에서처럼 인간의 육체나 물질계는 그 자체가 악(惡)으로 취급되지 않고 피조물의 하나로서 의의가 부여된다. 또한 인간은 운명이나 필연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인격적 결단과 책임에 의해 행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역사는 이 인간의 책임과 신의 인도에 의해 명확한 목표(종국)를 향하여 전개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종말관).


그리스 사람들과 달리 히브리 사람들에게 조각 작품이나 회화 작품이 없는 것은 그것들을 ‘우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적 사유에는 대화가 드물며, 완전한 형식을 갖춘 드라마 역시 없으며, 내면의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예술이 중심을 이룹니다. 그리스인이 예술과 과학과 철학으로 세계 문화에 공헌했다면 히브리인들은 신앙과 도덕으로 공헌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객관적이고 논리적이며 지성적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적 사유와 직관적이고 신비적이며 감성적이라고 할 수 있는 헤브라이적 사유는 상호보완적으로 작용하면서 서양 문학의 바탕을 이루게 됩니다.



※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비교

헬레니즘

헤브라이즘

인간중심적

- 우주 생명의 궁극적 패러다임을

하늘과 땅으로 봄

- 사람이 사람의 환경을 바라보는

인식의 틀

신중심적

- 인격적, 도덕적으로 완전한 존재인

신에게 복종

 

 

객관적

- 우주의 원리를 형식화

- 우주의 의문점에 관한 명백한 답

요구

주관적, 직관적

- 신과의 영적 교감 중시

 

 

외향적

내면적, 신비적

- 명상과 묵상을 중시함

현세 지향적

내세적

이성적, 지성적

- 지식의 추구

- 우주의 본질과 인간 행위에 대한

지적 탐구

감성적

- 최종적인 답은 하느님의 수중에

있으므로 설명이 불필요함

- 가슴으로 신의 음성에 귀 기울임

실용적

- 사회적으로 유익한 행동 함양

- 민주주의

신을 즐겁게 하는 제례의식의 다양화

- 강한 지도자에 의한 선민사상

- 권위적 인도자가 요구됨

형식화, 세련된 예술

- 조형미술 추구(조각, 드라마)

- 논리적 사변, 정연한 상상력

- 정제된 언어가 요구됨

무형식, 낭만적 예술

- 언어 예술의 발전

- 신비로운 황홀감, 조자연적 장엄함

- 감동적

낙관주의

비관주의

개성존중

지혜와 기술 존중

집단주의

창조주의 경배와 순종

 



※ 서양문학사(김계영), 문화로 읽는 세계사(주경철), 브리태니커세계대백과사전 등을 참조, 인용하였습니다.

[출처] [본문스크랩] 서양문학의 뿌리 _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작성자 이태두



D01 – 서문

(출전 :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3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서문

  하늘의 소리로 '사람의 도'를 밝힌 동서양의 고전을 통한 '마음 공부' 인류 역사 이래, 오늘날 우리는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했던 물질적 풍요 속에 살고 있다. 과학기술에 의해 뒷받침되는 현대문명은 우리에게 유례없는 편리함과 안락함을 제공해주고 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의 욕구충족을 위해서 자연은 물론 우주까지도 정복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의미에서 인류문명과 역사는 발전을 거듭해 왔다.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도 이러한 진보는 당분간 계속되리라는 낙관적 기대를 가질 수 있다.


    문명에 대한 성찰

  그러나 우리는 이 시점에서 현대문명과 역사의 진보에 대해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정신적 가치가 결핍된 물질문명의 발전은 이대로 좋은가, 물질적 풍요가 결과적으로 생태계를 파괴하고 자연의 죽음만이 아닌 인류의 생존까지도 위협하는 것은 아닌지, 이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 그리고 첨단 과학기술에 의한 인간의 물질적 욕구충족과 무절제한 자연정복이 과연 인간의 이상이고, 참다운 진보일 수 있는가.

  그동안 우리는 산업화의 과정에서 경제발전에만 치중한 나머지, 그보다 더욱 소중한 정신적 가치를 소홀히 해왔다. 삭막한 무한경쟁 속에서 함께 더불어 사는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은 사라지고, 심지어 '나'조차도 잃어버렸다.

  경제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우리의 국토가 황폐해간다는 생각은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만든다. 이제 옛날처럼 나비와 벌이 날고,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봄은 오지 않는다. 이제 우리가 맞이하는 봄은 약동하는 봄이 아니라, 고요한 봄 (silent spring)이다. 아니, 죽음의 정적만이 흐르는 '침묵의 봄'이다.


    정신적 빈곤

  그러나 환경파괴 못지않게 우리의 심성도 하루가 다르게 삭막해지고 있다. 인간과 생명에 대한 외경심이 희박해지고 있다. 인간존중에 기반하는 정신적 가치관 대신 물질주의적 가치관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질적 가치 못지않게 정신적 가치 역시 중요하다. 인간다운 삶이 진정 행복한 삶이다. 진리, 정의, 인간의 존엄성 등은 우리가 소중히 가꾸어 가야 할 정신적 이상이다. 이러한 정신적 가치의 포기는 인간의 포기를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는 내면적으로 고갈되고 철학적으로 빈곤하다. 현대문명은 지나치게 피상적이며 우리의 삶은 그만큼 얕고 허전하다.

  오늘의 문명은 정보는 풍요해도 정신이 빈곤하다. 특히 오늘의 청소년들은 깊은 사색보다 가벼운 쾌락에 탐닉한다. 그들은 도덕적 사회적 지적 규제로부터 벗어나 자유분방하게 자신의 순간적 욕망을 채워가며 살고자 한다. 그들의 목적은 진리탐구, 도덕적 성취, 사회적 봉사 등 정신적 가치의 창조에 앞서, 가벼운 멋을 내고 사는 데 있는 듯하다. 무거운 책을 읽기보다 가벼운 만화를 가까이 한다. 사고력의 성장이 중단된 채 감각만 발달하는 청소년들, 그들을 어찌할 것인가.


    교양교육의 중요성

  그러면 오늘날 젊은이들의 정신적 사상적 혼란은 어디서 오는가? 무엇보다 우리의 교육철학의 부재와 이로 인한 현재의 교육제도에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고교시절에 문제 푸는 기계가 되어버린 그들은 일단 대학에 오면 전문지식의 습득에만 관심을 둘 뿐 폭넓은 독서와 교양은 뒷전이다. 학생들간에는 입학 후 쓰지 않고, 읽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 소위 '3무주의'가 팽배해 있다. 따라서 인간형성에 있어 필수적인 바람직한 가치관이나 인생관의 설계가 굳건하지 못하다.

  현대처럼 학문이 다양화되고 전문화되는 상황에서 보편적인 교양인이 되기란 쉽지 않다. 대학이 추구하는 두 가지 이념인 '전문인 양성'과 '인격자 양성'은 대립적인 개념보다는 상호 보완적인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전문과 교양의 상호 조화적 전개를 통해 교양으로 하여금 전문을 보완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요즘은 과학기술 입국이라는 구호 아래 과학기술의 절대적 중요성이 강조되다 보니, 대학의 교양교육은 갈수록 위축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과학기술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내포하고 있는 위험성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과학기술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물질적인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도구적 가치를 가질 뿐, 그 자체가 목적적 가치가 될 수는 없다. 참된 가치를 식별하는 안목이 없으면 과학은 폭군이 될 수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철학이 필요하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은 생명에 대한 윤리의식의 결여에서 오는 인류의 비극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과학기술은 자연과 생명을 파괴하는 재앙이 될 수 있음을 '쥐라기 공원'에서 보지 않았는가? 다행히도 최근 대학 스스로 현실의 위기를 실감하고 교양교육의 강화를 의해 적극적인 의지를 표명하고 있어 주목된다. 서울대에서는 교양교육의 내실화 방안으로 '동서고전 200선'을 선정하여, 우선적으로 94학년도에 인문 사회과학분야의 학생들에게 고전강좌를 개설한 바 있다. 그 결과 교육적 효과와 학생들의 반응이 좋아, 96학년도부터는 교양과정의 전체 학생들에게 확대할 예정으로 있다. 그리고 고려대에서도 '바른 교육 큰 사람 만들기 위한 교육선언'을 발표하고, 교양과정에서 '명심보감'등을 교재로 인간성 교육에 역점을 두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이러한 움직임이 대학에만 국한되어서는 목적 달성이 어렵다. 초중고는 물론 직장과 각 사회단체, 그리고 언론 등으로 확대되어 인간성 회복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상적인 인간상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귀감이 될 이상적인 인간상이 제시되어야 한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본뜨고 닮고 싶은 바람직한 인간상이 없었다. 이제부터라도 일선학교와 가정에서는 역경을 자기 발전의 계기로 삼은 '인간승리'의 주역들을 바람직한 모델로 제시하여, 학생들이 항상 본받고 행위의 기준으로 삼게 해야 한다. '참된 목표가 없으면 우리의 열정은 그릇된 목표에 쏟게 된다.'는 몽테뉴의 말이 깊은 공감을 주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지금 학생들의 이상향은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도덕적 인격을 완성하려 했던 공자나, 유배지에서 눈물을 머금고 국민을 위한 행정을 펼 것을 역설한 정약용, 그리고 허약한 육체를 평생 동안 규칙적인 생활로 잘 관리하여 80세에 죽음을 맞이하면서 "이만하면 족하다"라고 정신적 만족감을 표명한 칸트 등 우리의 정신 세계를 지배한 인물들이 아니다. 그들의 우상은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는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들이 대부분이다.

  이제 우리는 그들의 마음속에 무한한 꿈과 지적 호기심을 심어 주는 과학자나, 투철한 사명감에 입각하여 자신의 젊음을 인류문화 발전에 바친 위대한 교육자, 그리고 남다른 근면과 성실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사업가들의 상을 심어주어야 한다.


    감동적인 한 권의 책

  그럼 학생들에게 어떻게 그러한 인간상을 제시해야 할까. 몇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아무래도 학생들이 직접 독서를 통해 만나는 방법이 좋을 것이다. 즉, 자신이 처한 역경을 딛고 일어서서 자신의 이상을 달성한 사람들의 삶과 사상, 그리고 어떤 보상이나 지위를 바라지 않고 오직 성취만을 위해 초지일관한 '감동적인 인간상'을 직접 대면케 하여, 소비적인 방향으로 배출구를 찾고 있는 그들의 에너지를 창조적인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

  책 속에서 마주하는 정신적 스승들의 진솔한 음성은 그들에게 신선한 지적   격을 주게 되어, 그들의 의식과 가치관을 새롭게 할 수 있다. 독서의 생활화를 통해 자꾸만 밖으로 향하는 우리의 마음을 안으로 모으고, 들떠 있는 세상의 분위기를 조금은 차분하게 가라앉혀야 하겠다.

  내 마음이 평온하면 나를 대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좋은 느낌을 주게 되고, 상대방의 마음을 순화시켜주게 된다. 내가 느낀 정신적 만족감은 나도 모르게 밖으로 발산되어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꽃향기 속에 들어와 있는 향긋한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필자가 동서고전 200선을 정리하면서 느꼈던 것 중의 하나는 역사상 존재했던 위대한 문학가와 사상가들은 밖으로 향하는 시선을 안으로 돌려, 자기의 마음을

밝혔던 분들이었다. 모든 공부 중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밝히는 '마음 공부'가 으뜸이다.


    고전 읽기 활성화

  특히 서양의 사상가나 문학가들은 어릴 적부터 그리스나 라틴 고전을 탐독했고, 동양의 사상가들은 사서삼경을 비롯한 중국의 고전을 필수적으로 숙독하여, 그들의 정신적 성장의 토대로 삼았다. 고전은 그들에게 정신적 자양분을 제공했음은 물론, 무한한 상상력과 창조력의 원천이 되었다. 그들의 지적 탐구 작업이 한계에 부딪히면, 그들은 언제고 고전의 샘물을 마시고 영감을 얻었다. 고전 앞에 그들은 영원한 학생이었다.

  이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우리가 평생 동안 살아가면서 전범으로 삼아야 할 동서고전들이 제시되어 있다. 비록 동서고전 200선이 그 내용에 있어 난해하고 무거운 점이 없지 않지만, 서두르지 않고 한권 한권 읽어나가는 동안 새로운 지혜의 눈이 열리고 사고의 깊이가 더해가는 지적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정신 없이 살아오느라 깊이 생각하지도, 철저히 진실을 추구하지도 않으며 살아왔다.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성실하지도 못했다.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보다 조용하게 생각하고, 신중하게 행동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갖추는 데 있다. 그러한 속에서 그동안 우리를 지배해왔던 물질주의적 가치관을 수정하고, 정신적 풍요와 삶의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우리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수정해야 한다.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했으나 정신적으로 빈곤했던 칭기즈칸의 후예는 오늘날 그의 존재마저 기억 속에 사라졌지만, 위대한 사상과 문학을 발전시킨 중국문명은 인류의 영원한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다. 로마제국은 오늘날 관광객들이 찾는 폐허로 남아 있지만, 로마군에 정복된 그리스는 그가 남긴 철학적 사유로 인류역사에 영원히 빛나고 있다. 정신이 결여된 물질문명은 얼마나 허망한가. 공자와 석가모니, 쾨테와 셰익스피어가 없는 인류 지성사는 얼마나 공허할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영원히 샘솟는 지성의 샘물을 주신 지적 스승들에게, 두 손 모아 감사드려야 할 것 같다.


새해 아침에 반덕진



C50 – 전습록 (傳習錄) / 왕수인(王守仁, 王陽明, 1472-1528)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중국 명대의 주지주의적 주자학 풍조와 명분 지상주의를 비판하고 지행합일의 양명학을 개창한 왕수인의 사상이 담긴 책. 그의 지행합일설은 당시의 관리등용제도를 포함한 모든 주지주의적 전통을 대체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조선의 실학사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이 책에서 만사에 스러질수 없는 도덕적이고 고귀한 인간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a. 생애와 작품활동

중국 명나라의 사상가로 호는 양명, 절강성의 여요현에서 진대의 명필가 왕희지를 먼 조상으로, 장원급제한 부친 아래서 태어났다. 8개월짜리 조산아로 5세까지 말문이 트이지 않았고, 약골이어서 청년기에 이미 폐병으로 각혈을 하곤 했다. 그러나 11세에 시를 지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14세때부터는 말타기 활쏘기 등을 배우고 병법을 읽혔는데, 이는 뒷날 그가 내외우한에 시달린 명나라 조정을 위한 무인으로서의 실력을 발휘한 바탕이 되었다.

17세에 결혼하던 날 놀러 나가, 도교의 사원인 도관에서 우연히 도사를 만나 양생의 길은 정의 한 글자에 지나지 않는다 는 말을 듣고 이튿날 신부집에서 찾으러 올 때까지 밤세워 양생술을 읽혔다. 이를 계기로 그는 한때 도사가 되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으며, 그의 사상에 도교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결혼 이듬해, 한 주자학자를 만나 격물치지설과 성인은 배워서 이룰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성학에 뜻을 두게 된다. 그 유학자와의 만남은 그의 사상발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다. 그 뒤 그는 주자의 격물치지의 참뜻을 체득하기 위해 뜰 앞의 대나무(물)를 연구(격)해보기로 하고, 일주일 동안 대나무를 들여다보았으나 병만 얻고 말았다. 그때 그는 격물은 성인이 되는 공부가 될 수 없음을 깨닫고, 주자의 학설을 멀리했다.

21세와 25세 때 두 번 회시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자 대문호가 될 결심을 하고, 절에 들어가 시 모임을 갖고 매일 글 짓는 연습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변경의 위급한 상황을 보고 무예를 단련하며 병가의 비전을 섭렵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28세에 진사에 합격하여 열심히 노력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이로 인해 정치에 실망을 느끼고 고향으로 돌아와 정사를 짓고 도술을 익히나, 곧 부질없음을 깨닫고 불교에 귀의한다. 그러나 곧 이것도 버리고 유교로 돌아온다. 이러한 그의 젊은 시절의 방황, 즉 과거에 실패한 임협 기마 문사 도교 불교 등에 빠졌던 것을 왕양명의 5익 이라고 한다.

34세경에는 무종이 즉위하여 환관인 유근이 전권을 행사했다. 이에 양명은 이를 탄핵하고 투옥된 대선 등을 구하려다, 곤장 40대를 맞고 용장으로 좌천당했다. 용장에서의 외적 시련은 내적 깨달음으로 인도한 계기가 되었다. 용장에서 그는 초막이나 암굴에서 생활하면서 원주민을 잘 다스려 사부로 존경을 받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진리를 얻기 위해 밤낮으로 몰두하던 중 홀연히 격물치기의 뜻을 깨닫고 얼마나 기뻐했던지, 잠자던 주위 사람들이 놀라 일어났다 한다. 이부터 심즉리 라는 근본입장을 확립하고 외물에서 이를 추구하는 주자학적 격물론에서 탈피하여 마음속의 부정을 없애고 양심을 발휘해야 한다는 새로운 격물치지의 해석을 제시하였다.

38세 때 유근이 주살되자, 그는 순조롭게 영전을 거듭하였고, 농민반란을 진압하였다. 이 시기에 지행합일설을 제창하였다. 주자에 맞서는 육구연(육상선)의 공적을 드러내고 <대학고본>을 간행하여 주자학자들의 비난을 샀다. <전습록>을 간행하는 한편, <주자만년정론>을 편집하여 주자의 만년의 학설이 자기와 다르지 않다고 밝히기도 했다.

48세 때 왕족인 신호의 반란을 진압하여 공을 세웠으나 모함을 받아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49세 때 이러한 위기 속에서 치양지설을 제창하여 주자학을 완전히 벗어나 새로운 학설을 전개하였다.

50세 때 세종이 즉위하자 그는 높은 직책에 임명되었으나 간신배들에게 환멸을 느끼고 부임치 않았다. 그는 관직에서 떠난 후 모든 것을 잊고 학문연구와 교육에 전력하였다. 이에 제자들이 각지에서 구름처럼 모여들어 양명학파를 이루었다. 57세 때에는 야만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조정의 강력한 권유로 이를 토벌하고 돌아오다 과로로 쓰러졌다. 유언을 물으니, 이 마음이 광명하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며 눈을 감았다.


b. 양명학의 성립과 발전

   양명학의 성립

당시의 사상적 풍조는 먼저 제대로 알고 나서 행하라 라는 주자학의 가르침이었다. 그러나 과거제도의 제약 아래서 공부하는 사랍들이 자신의 앎을 행하려면 관직에 오른 후에나 가능하고, 또 그러다 보면 평생 공부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사상계에 지행합일이라는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것이 명의 중기에 나타난 양명학이다. 송대에 발달한 주자학은 주자의 이기이원론으로 성즉리를 표방하면서 사상적으로 완성되었다. 그러나 양명학은 이에 반대하여 이기일원론을 바탕으로 심즉리를 내세워, 심이 인간의 주체요, 인간이 우주의 주인이라는 사상으로 일관하고 있다. 주자학으로부터 지행합일설과 치양지설을 도출한 양명학은 명대의 침체된 사상계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왕양명은 젊은 시절 한때 주자학의 신봉자로 성인의 경지는 배워서 도달할 수 있다는 이상주의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이를 위한 방법으로 주자가 말하는 격물치지설에 대해 깊은 의문을 갖게 되면서 육구연의 심학에 기울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심즉리설을 깨우치게 된다.

주자학과 양명학은 진리를 깨닫는 방법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인다. 즉, 주자학이 오랜 기간의 연구와 수양에 의해 깨달음을 얻는 것(격물치기)이라면, 양명학은 정신의 집중에 의하여 한 순간에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주자학은 태극이론을 근본으로 독서에 의해 성인의 길을 탐구하지만, 양명학은 태극이론으로부터 인간의 윤리학은 나오지 않았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의 주체를 이루는 것은 마음이며, 이는

절대선이므로 이를 본래의 모습인 절대선으로 되돌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왕양명의 심즉리 학설이다. 이를 위해서는 심의 작용으로 가장 중요한 양지를 충분히 활동시켜야 된다고 하였다. 또 지도 단순히 아는 것만이 아니라 반드시 행동하는 지여야 하며, 여기에서 지행합일설 이 나오게 된다.

특히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욕망을 없애는 것이 절대적 조건이며, 욕망을 버리면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양지적인 인간평등을 주장하고 적극적인 행동주의를 제창하였다.


   양명학의 발전

양명학파는 왕양명의 사후 좌우파로 갈라졌다. 좌파에서는 왕간(왕심제, 후에 태주학파의 대표자)과 같은 서민사상가가 출현하여 인욕도 천리라고 주장하고, 형식화한 주자학적 도덕의 허위성을 격렬히 공격하였다. 양명학 좌파는 이지(이탁오)에 의하여 후천적인 지식이나 도덕 이전의 자자를 동심이라 하여 강조하게 된다. 이는 양지만 있으면 주색에 빠져도 성인군자가 되는 데 지장이 없다고 극언하여 주자학자들의 맹렬한 비판을 받아, 후에 자살하였다. 이지의 주장은 권위주의적인 사대부 의식에서 본다면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사상이므로 이는 심학의 횡포라고 지탄받았다.

이에 대하여 나홍선 등의 양명학 우파는 좌파의 지나친 행동주의를 반성하여, 왕양명의 양지설을 주로 하되 수양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주자학 쪽으로 접근하였다.

이와 같이 양명학은 방대한 경전을 통해 박학을 존중하는 전통적인 유학과는 달리, 많은 지식보다는 간단명료함과 정직함을 중시하는 성인이 되는 길은 박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바로 내세우는 데 있음을 강조한다. 양명학은 유교적 권위에 대하여 서슴없는 비판을 가하고 평등주의자유주의를 주장하며 이단과 욕망을 긍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그의 제자이자 그 계승자는 위험한 사상으로 탄압받기에 이르고, 이지(이탁오)의 비극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양명학은 민간의 사학인 지방의 서원을 중심으로 발달한 것일 특징이다.


c. <전습록>의 내용과 그 사상

전습록은 왕양명의 제자들이 그의 어록을 모은 것으로, 전습은 <논어>의 <학이>편의 증자의 말인 전습불평 에서 나온 것이다. 그 구성은 상중하권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상권에서는 심즉리설지행합일설 등이 제시되었다. 중하권에는 만년에 확립된 치양지설만물일체론 등을 제시하였는데, 전통적인 유학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였다.


   심즉리 (心卽理)

그는 육구연의 마음이 곧 이다라는 심학을 받아들여 마음이 곧 이다. 천하에 마음 밖에 일이나 마음 밖의 이가 있겠느냐?  마음 밖에 물이 없고 마음 밖에 일이 없다 고 하였다. 그는 이를 우주의 근본원리로 보고 이는 곧 마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즉, 모든 현상이란 마음의 인식에 의해서 비로소 존재한다는 것이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새가 울지만 마음이 없다면 아름다운 빛깔도, 고운 목소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천지만물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마음과 천지만물이 서로 통하기 때문이며, 만일 서로 통하는 바가 없다면 천지만물이란 없는 것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주자가 강조한 추상적인 이를 배격한다. 주자는 효의 이가 있기 때문에 어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며, 충의 이가 있기 때문에 임금에게 충성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였다. 효도하는 마음이나 충성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러한 이도 없다고 하였다. 주자의 사상체계에 의하면 마음의 존재여부에 관계없이 이는 영원히 존재한다. 그러나 양명의 체계에 의하면 마음이 없으면 이도 없다. 그러므로 마음은 잉법자요 우주의 근원이라는 절대적 유심론의 성격을 띤다.


   지행합일 (知行合一)

지행합일의 근거는 심즉리에 있다. 마음 안으로 돌이켜 탐구하는 방법을 이용하여 만물과 한몸이 되는 경지(물아일체)에 도달할 것을 요구한다. 그의 지행합일과 지행병진의 이론의 요지는 지식과 실천을 분리시키는 송의 정이의 학설을 반대하는 데 있었다. 양명은 모든 이가 마음에 있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지식 역시 마음에 본래부터 양지로서 갖추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충과 효를 행하는 것은 충효의 이가 마음속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며, 그것은 결국 행위가 양지의 표출이라는 뜻과 같은 것이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지와 행은 합일의 관계에 있다고 하였다. 만일 지와 행이 합일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다만 사욕의 가리움 때문이라 한다. 그리하여 그는 앎은 행동의 시작이요, 행동은 앎의 완성이다, 행동을 밝히고 살피는 것이 곧 앎을 진실하고 독실하게 하는 것이 곧 행동이다 라고 하였다.


   치양지 (致良知)

치양지란 양명학에서 말하는 마음의 본체인 양지가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발휘됨을 말하는 것으로, 심즉리와 지행합일을 하나로 묶어 적극화시킨 것이다. 사물의 도리는 책이나 외적인 사물 안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내적인 자기 마음속에서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치양지의 방법으로는 격물치지성의정심 등을 들고 있다. 주자는 격물치지에 대한 설명에서 격물을 사물의 이치를 궁리하는 것, 치지를 지식을 추구하여 얻는 것이라고 본다. 즉, 주자는 격물치지를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넓힌다 로 해석하고 있다. 반면 양명은 격물은 행위를 바로잡는다는 뜻이고  치지란 본래 마음의 본체인 양지를 실현하는 것으로 보고,  격물치지를  마음을 바로잡고 양지를 닦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양명은 양지가 실현되지 못하는 것을 물욕과 사욕으로 돌린다. 우리의 뜻하는 바가 항상 양지의 방향을 좇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물욕 또는 사욕에 가릴 수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선악문제와 공부문제가 제기된다. 마음을 올바르게 한다 함은 인욕을 물리치고 천리를 보존하는 것을 말하며, 이러한 마음의 공부를 심학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성의나 정심수신도 모두가 격물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즉, 성의는 격물과 치지가 가장 성실하게 수행되는 것이요, 성실하면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다(정심). 그러므로 정심이란 성의에 지니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수신은 마음을 바로잡아 참된 앎에 이르는 것이라 하고, 수신하게 되면 제가치국평천하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8조목은 결국 참된 앎에 이르는 것, 즉 치양지에 그 근본이 있다고 하였다.


d. 양명학의 영향

왕양명은 명나라의 지배사상이던 주자학에 대항햐여 인간평등관에 바탕을 둔 주체성 존중의 철학을 확립하고, 만물일체와 이상사회 실현을 지향하는 심즉리 치양지 지행합일이라는 사상을 전파했다. 그는 양지에 있어서는 우부라 할지라도 성인과 다름없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거리를 메운 모든 사람들이 다 성인이다고 하면서 평등사상을 외쳤다. 이와 같은 그의 사상은 <전습록>에서 일관적으로 흐르고 있는 사상으로, 결국은 지와 행을 둘로 갈라 주지주의적 경향으로 타락해버린 주자학의 공허함을 비판한 것이다.


   일본 메이지 유신

이 같은 주장을 담은 <전습록>은 수백 년 동안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전습록>에 대해 중국이 명대는 물론 청대 학술에도 비판은 있었지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은 양명학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은 1972년 왕양명 탄생 500주년 기념으로 <양명학 대계>를 내놓기도 했다.


   조선 강화학파

우리 나라에 <전습록>이 들어온 것은 왕양명의 생존시이나, 당시 조선의 분위기는 정주학이 압도하는 상황이어서 이황 이래 양명학은 이단으로 배척되어왔다. 양명학의 수용자는 대체로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사람들, 특히 남인과 소론 계통의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대개 양명학을 성리학과 대립되는 것으로 파악하기보다는, 이를 보완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양자 사이의 조화를 꾀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 양명학을 대표하는 정제두는 주자와 단절하고 강화도에서 양명학에 몰두하였다. 정제두의 대표적인 저서인 <존언>은 그의 양명학 세계를 나타내주는 것인데, 그도 주자의 해석이 아닌 경전의 본 뜻을 존중하는 복고적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비록 주자의 성리학 일변도인 조선사회에서 이단이 되기를 꺼려한 관계로, 겉으로는 주자를 표방하면서도 속으로는 왕양명을 따르는 양주음왕의 경향이 있었다.

정제두의 강화학파는 200년 동안 이어졌다. 우리 나라에서는 양명학은 실학파 중 북학파의 사상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이들이 저서에 천지만물이 한몸이다 그리고 시민평등관에 입각한 교육이념 등 도처에 양명학 사상과 공통되는 점이 많았다. 양명학의 주체사상은 한국독립운동과 직결되었다. 이종휘 등 강화학파의 사관이 신채호 박은식 정인보 송진우 등 독립운동가에게 미친 영향은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

양명학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왕수인

유교

Ru character.png

산 자를 봉양하고 죽은 자를 장사지냄에 모자람이 없게 하는 것이 왕도의 시작이다.

 

— 《맹자》 〈양혜왕 상편〉

기본 개념[보이기]

인물[보이기]

경전[보이기]

역사[보이기]

관련 항목[보이기]

v • d • e • h

Portal icon 철학 포털

양명학(陽明學)은 중국 명나라의 철학자 왕수인(王守仁)의 호인 양명(陽明)에서 이름을 따서 붙인 유가 철학(儒家哲學)의 한 학파로 주관적 실천 철학에 속한다.[1] 양명학이라는 명칭은 메이지 유신 이후에 퍼진 것으로, 그 이전에는 육왕학(陸王學) 또는 왕학(王學)이라 불렸다. 육왕학(陸王學)은 육구연(陸九淵)의 학풍을 이어 왕수인이 대성한 유학(儒學)을 뜻하고, 왕학(王學)은 왕수인의 유학을 뜻한다.


심즉리(心卽理) · 치양지(致良知) · 지행합일(知行合一)은 양명학의 3강령이다.[2]


목차  [숨기기] 

1 역사

1.1 양명학 이전

1.2 양명학의 등장

1.3 전개

1.3.1 중국

1.3.1.1 양명학 우파

1.3.1.2 양명학 좌파

1.3.2 조선

1.3.3 일본

2 양명학의 근본 사상

2.1 심즉리

2.2 치양지

2.3 지행합일

2.4 모든 물체의 인과 양지의 결합

2.5 사상마련

2.6 격물(格物)

3 양명학이 연 지평

3.1 사람의 욕구

3.2 붕우 관계의 중시

4 양명학 주요 학자

4.1 중국

4.2 조선

4.3 일본

5 같이 보기

6 각주

7 참고 문헌

8 외부 링크

역사[편집]

양명학 이전[편집]

 이 문단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지금 바로 이 문단을 편집하여, 참고하신 문헌이나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각주 등으로 표기해 주세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다면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09년 4월 1일에 문단의 출처가 요청되었습니다.)

송나라 시대를 거쳐 오면서 학자들은 유교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 수나라나 당나라 이전에는 경서의 음독이나 훈고(단어의 의미)를 중시한 훈고학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유교가 거쳐오면서 송나라 시대의 학자들은 유교 경전에 담겨진 공자나 맹자등의 본래 의미와 달리 왜곡했고, 그런 성인들의 본래의 의미를 이해 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는 인식에 이르렀다. 수, 당나라 이전의 훈고학을 가르치면서도, 훈고학 중심의 사회를 고치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 결과, 송나라 시대 이후의 유교 사상은 훈고학에서 주자학으로 새로운 학파가 생겨났다.


주자학이 중요시한 건 성인들의 말이나 경전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사상이 아니라는 데 의견을 맞추어서 새 경전을 만들었다는 점에 있다. 새 경전들은 「사서」라고 불리는 네 개의 경전이었다. 이 책은 「예기」로부터 분리된 「대학」과 「중용」, 그리고 이 책들보다는 하위 취급을 받고 있던 「논어」와 「맹자」 이 네 개의 경전이었다. 이 경전들은 내용이 짧고 잘못된 해석을 고치는 데 적당했기 때문에 이용되었다. 특히 주자학이 맹자의 「성선설」을 중요시하는 등 이 주자학은 중국 여러 지역에 점차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주자학이 중국의 여러 지역에 퍼진 까닭은 주자학이 왕이 집권하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주자학은 중국 전역뿐만이 아니라 조선, 일본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주자학도 문제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주자학이 중국 전역으로 퍼지긴 했지만, 이 주자학을 바탕으로 왕들은 왕권을 다졌고, 오히려 훈고학의 상황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성인들의 본래 의미가 전혀 다른 왕의 집권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주자학의 본래 의미는 퇴색되었다.


양명학의 등장[편집]

 이 문단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지금 바로 이 문단을 편집하여, 참고하신 문헌이나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각주 등으로 표기해 주세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다면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09년 4월 1일에 문단의 출처가 요청되었습니다.)

주자학은 군주들의 황권, 왕권 강화의 재료로써 전락됐다. 그래서 주자학은 도덕적인 측면이 없어져 갔다. 그 도덕윤리를 다시 되살리려는 노력을 한 학자가 바로 왕수인이다. 그는 당초 도덕적인 측면을 되살리려는 노력을 시도하는 학자였으며. 그래서 왕수인도 주자학을 믿었지만 사회가 변화를 보이지 않자 결국 그는 주자학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그리고 그는 양명학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주자학은 정치학, 존재론[3], 주석학[4], 윤리학[5], 방법론[6] 등을 모두 포괄하는 종합적인 학파였다 그러나 양명학은 그 중의 윤리학 및 방법론 등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유교에서는 윤리학적 측면이 가장 중요했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회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양명학은 여러 유명한 학자들을 배출시켰다.


전개[편집]

중국[편집]

중국에서는 왕수인의 제자들이 양명학을 많이 발전 시켰다. 그렇지만 양명은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칠 때, 하나의 방법을 고집하지 않고, 각자의 재질이나 습성에 따라 가르쳤다. 누구에게는 본체를 강조하는가 하면, 누구에게는 정반대로 공부를 강조하기도 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양명이 죽은 이후 제자들이 받아들인 학설의 차이에 따라 크게 귀적파(歸寂派), 수증파(修證派), 현성파(現成派)로 나뉘었다.[7] 그 뒤 양명학은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며 발전해 나갔다.


양명학 우파[편집]

양명학 유파 중 정통파(正統派)로 간주되었다. 귀적파와 수증파가 우파에 속한다. 양명의 ‘심즉리(心卽理)’는 선악을 포함한 마음이 이(理)가 아니고 마음이 발동할 때 이미 그 마음은 이(理)라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마음의 악폐(惡弊), 즉 사욕(私欲)을 극복하여서 마음을 양지(良知) 그것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유파는 양명의 〈4구결(四句訣)〉에서 선(善)도 없고 악(惡)도 없는 것은 심(心)의 체(體)라 한 것을 심(心)의 본체는 지선무악(至善無惡)이라고 하여 전통적인 성선설(性善說)과 타협하고, 심(心)의 문제를 중심으로 하는 양명 심학(陽明心學)으로부터 떠나서 점차로 주자학적 이(理)를 문제로 하여 실제적·현실적 연구를 중시하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양명의 문인 전서산(錢緖山, 1496~1574)이 왕용계(王龍溪, 1498~1583)와 〈4구결〉을 둘러싸고 대립하여 분파한 이후, 우파에는 추수익(鄒守益, 1491~1562), 나홍선(羅洪先, 1504~1564), 유종주(劉宗周, 1578~1645) 등이 있었다.


양명학 좌파[편집]

양명학 유파의 하나이다. 현성파가 여기 속한다. 이 파의 왕용계는 선(善)도 없고 악(惡)도 없는 것은 심(心)의 체(體)요, 선(善)도 있고 악(惡)도 있는 것은 의(意)의 움직임이며, 선(善)을 지(知)하고 악(惡)을 지(知)하는 것은 양지(良知)요, 선(善)을 하고 악(惡)을 버리는 것은 격물(格物)이라 한다는 왕양명의 〈4구결〉에 대하여, 이것은 일반 사인(士人)에게 설명하기 위하여 설치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는 심즉리(心卽理)·치양지(致良知)의 실천적 주체의 입장, 즉 실천을 주로 하는 도(道)·이(理)에의 오입(悟入) 내지는 그것의 체득이라고 하는 입장에서 보면 의(意)·지(知)·물(物)에 선악의 대립이 있을 리 없다는 것이다. 진정한 학문은 오득(悟得)만을 존귀하게 여긴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왕용계는 마음이 본래 무선무악(無善無惡)하면 그때 발하는 행위는 양지(良知) 그것이며, 따라서 양지는 배우지 않고 사려하지 않아도 사람이 본래 완전하게 구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사고방식은 이 파의 이탁오에게 전해지면서 한 걸음 나아가 적극적인 인욕(人欲)의 긍정으로 발전하였다. 이 파의 특색은 유(儒)·불(佛)·도(道) 3교의 혼융, 선학적(禪學的)경향, 소농(小農)·도장(陶匠)·나무꾼·염정 등의 낮은 신분의 사람들을 포함하는 서민 교육 실천, 전통의 부정이나 반체제적(反體制的)·신비적인 점 등에 있었다. 이 파는 특색있는 사조를 형성하면서도 새로운 시대를 형성하는 구체적인 사상 내용을 갖지 못하고 공론적·신비적 경향만을 강조하다 오래지 않아 소멸하였다. 왕용계, 이탁오 외에 왕간, 왕벽(王檗-東崖, 1510-1587), 안균(顔鈞-山農, 생몰년 미상), 양여원(梁汝元), 나여방(羅汝芳-近溪, 1515-1588) 등이 이 파에 속하였다.[8]


그러나 청나라 시대부터 양명학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고증학에 밀려서 쇠퇴하기 시작했고, 양명학은 성리학을 약간 보완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갈수록 쇠퇴해 갔다. 이후의 옹정제, 건륭제의 시대를 지나면서 청나라의 황제들은 성리학을 더욱 확립해 양명학은 중국에서 완전히 사라지는듯 했다.


하지만 일본에서의 메이지 유신으로 양명학의 영향이 중국에도 다시 부활했다. 1840년을 주기로 아편 전쟁 이후 중국인들은 개혁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고, 일본에서 양명학이 메이지 유신을 정당화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일본에서 양명학이 역수입되었다. 양명학은 중국 국민들에게 개혁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조선[편집]

박상(1474~1530)의 《눌재집(訥齋集)》연보 48세 조에 “왕양명 수인의 《전습록》을 변(辨)하다. 명의 학설이 동래(東來)하였는데 동유(東儒)들은 그것이 어떤 내용인지 몰랐으나 선생이 그것을 보고 선학(禪學)이라 변척하여 김십청(金十淸)과 더불어 수창(酬唱)한 삼절시(三絶詩)가 있었다.”는 내용을 볼 때 양명학 전래 시기는 중종 16년(1521년) 이전이다.[9] 이후 16세기∼18세기에 조선 유학계에서 양명학의 찬·반 논쟁이 전개되었다. 양명학 배척론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여 그 도입을 억제하고, 양명학 찬성론을 ‘사문난적(斯文亂賊)’, ‘이단(異端)’이라고 규탄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먼저 이황은 〈전습록변(傳習錄辨)〉을 지어 지행합일설을 비판하였는데, 양명학을 불교의 선학(禪學)과 동일한 것으로 보아 비판했다. 양명의 《대학》 친민설, 심즉리설도 여러 논변에서 비판했다. 그러나 이황의 비판 중에 양명학의 가장 핵심 논지인 치량지에 관한 내용이 없는 것에서 그가 양명의 모든 전적을 충분히 보지 못하고 비판한 것임을 알 수 있다.[10] 또, 유성룡은 왕양명의 주자학 비판을 조목별로 반박했다. 그 뒤로 퇴계의 문하 뿐 아니라 조선 성리학 전체가 양명학을 배척하여 양명학은 조선에 발 딛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양명학을 받아들인 학자로는 남언경(1528~1594)과 이요가 있다. 그들을 이어 장유(1587~1638), 최명길이 미미하나마 연구했으며, 특히 장유는 조선 유학계의 주자학 일변도를 개탄하였다. 또한 이익(李瀷)도 주자학의 주지주의(主知主義)적 경향의 공리공론(空理空論)을 비판하고 행(行)을 강조하였다. 이후 정제두(1649~1736)에 이르러 크게 발전했다. 근대 초 정인보·박은식까지 그 학풍이 이어진다.


일본[편집]

일본에서는 양명학이 반체제적인 성격을 가져 혁명가들이 주로 양명학을 연구하기도 했으며, 또는 양명학을 연구하게 되면 혁명적인 지향이 되기 쉽다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양명학 역시 일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나카에 도주나 구마자와 반잔이 대표적인 학자였다.


에도 시대 이후 메이지 유신에 사상적 영향력을 끼쳐서 양명학은 이후 더 발전했다. 양명학과 관련한 책이나 잡지는 수없이 만들어졌으며, 양명학 주요 책은 쇠퇴하고 있던 중국에 역수입 되었다..


양명학의 근본 사상[편집]

양명학의 사상은 《전습록》, 《주자만년정록》, 《대학문》등에 자세히 나와 있다.


심즉리[편집]

심즉리(心卽理)는 양명학의 윤리학적인 측면을 나타내는 말로 성(태어날 때 생겨난 순수한 선성)과 정(감정으로서 나타나는 마음의 움직임)을 대면시킨 마음 그 자체가 리와 다름없다고 하는 사상이다.[11]


치양지[편집]

치양지(致良知)는 양명학의 방법론적 측면을 나타내는 말로 왕수인이 독자적으로 만든 사상이다. 치양지란 양지를 전면적으로 발휘하는 것을 의미하며, 양지에 따르는 한 그 행동은 선이 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으로, 양지에 근거하는 행동은 외적인 규범에 속박 되지 않는 말이다. 마음은 선악을 넘은 것이지만, 뜻에서 선악이 태어난다. 그 선악을 아는 것이 양지 말고는 안 되며, 그러므로 선을 바로 잡기 위해서 양지를 키우라는 것이다. 맹자의 성선설의 영향을 받았다. 양지를 누구나 갖고 태어나는 것이므로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주장과 양지를 가리고 있는 선악을 제거하기 위해 공부가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나뉘어 양지는 양명 사후 제자들의 분파의 이유가 된다.[11]


지행합일[편집]

지행합일(知行合一)은 양지의 상태 중의 하나로 말과 실천은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같다는 사상이다. 말은 지, 실천은 행이란 말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을 본다는 것은 지(知)에,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은 행(行)에 속한다.[11]


모든 물체의 인과 양지의 결합[편집]

이것 역시 양지의 상태 중의 하나로,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은 하나의 육체이며, 다른 사람의 괴로움은 스스로의 괴로움이며, 그것을 달래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모든 물체의 인은 양지를 이룰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양명학은 사회 구제의 근거를 찾아낸 것이다.


사상마련[편집]

사상마련(事上磨鍊)은 수양처를 말하는 것으로, 주자학에서는 독서와 거경궁리를 통해서 수양을 한다고 하지만 왕수인은 이런 의견에 반대하여서 일상에서 양지를 닦아야 한다고 했다. 개념을 통해서가 아니고, 실제로 일을 하면서 정신을 단련한다는 뜻이다.


격물(格物)[편집]

주자는 격물을 사물에 임하여 그 이치를 궁구하는 즉물궁리(卽物窮理)라 하였으나, 양명은 격(格)을 정(正)으로, 물(物)을 사(事)로 보아 일을 바르게 하는 것이라 해석했다.[12] 전습록에 나오는 격물하고자 며칠 동안 대나무를 바라보았더니 정신만 혼미해지더라는 일화[13] 에서 주자의 격물을 비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양명학이 연 지평[편집]

사람의 욕구[편집]

양명학은 사람의 욕구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해서 사람의 욕구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했다. 사람의 욕구를 없애려고 하는 게 아니라 사람의 욕구를 잘 다스리려고 하는 노력을 했다.


붕우 관계의 중시[편집]

붕우, 즉 인간 관계를 중요시 여겼다. 유교에서는 남존여비 사상과 아이가 어른을 받드는 '상하 관계' 사상을 버리고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다는 사상이었다. 이 사상은 유교 이념이 지배적인 중국에 큰 혼란을 일으켰다.


양명학 주요 학자[편집]

중국[편집]

왕양명

전덕홍

추수익

나홍선

왕기

이지 (1527년)

왕간

양여원

조선[편집]

정제두

이광사

일본[편집]

나카에 도주

구마자와 반잔

같이 보기[편집]

유교

한국의 유교

송·명 시대의 사상

성리학

선종










     <참고문헌>

   논문 및 연재물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책의 성격상 많은 전문가의 글을 참고인용하였으나 이 책이 교양서라는 점을 고려하여 참고논문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고, 다만 그분들의 학문적 업적에 존경을 표하는 의미에서 존함을 밝혀둔다. 소속기관 편의상 논문발표 당시의 소속기관을

명시하였다.

(가나다순)

강두식(서울대), 권주적(숙명여대), 권두환(서울대), 권석봉(중앙대), 권욱현(서울대), 권중달(중앙대), 권철근(서울대), 권태억(서울대),

공재석(영남대), 금장태(동덕여대), 김경탁(고려대), 김남두(서울대), 김동욱(연세대), 김두철(서울대), 김려수(서울대), 김상운(성균관대),

김상현(한교대), 김문경(강원대), 김석원(동문연), 김세균(서울대), 김시준(서울대), 김영한(서강대), 김엽(경북대), 김용덕(중앙대),

김용옥(고려대), 김운학(동국대), 김윤식(서울대), 김인환(이화여대), 김진성(성균관대), 김정록(서울대), 김종원(부산대), 김춘진(서울대),

김학주(서울대), 김한규(부산대), 김홍명(서강대), 김효명(서울대), 김해경(강릉대), 노도양(명지대), 민성기(부산대), 박상섭(서울대),

박성봉(경희대), 박한제(서울대), 박환덕(서울대), 박희완(건국대), 방곤(경희대), 방영준(성신여대), 배종호(연세대), 백낙청(서울대),

변창구(서울대), 변태섭(서울대), 서병국(관동대), 소관희(서울대), 송민호(고려대), 송석구(동국대), 송창기(청주대), 송영배(서울대),

송하경(전북대), 송항룡(단국대), 신동욱(서울대), 신일철(고려대), 신채식(성신여대), 심재룡(서울대), 안병주(상균관대), 오금성(서울대),

안상진(서울대), 오생근(서울대), 오세영(서울대), 우용득(전북대), 유명숙(서울대), 윤사순(고려대), 유인희(연세대), 유정동(성균관대),

유종호(이화여대), 은전희(고려대), 이강수(경희대), 이경선(한양대), 이광주(전주대), 이관호(외국어대), 이기백(한림대), 이기영(한불연),

이남영(서울대), 이동렬(서울대), 이동향(고려대), 이만열(숙명여대), 이명현(서울대), 이병주(육사), 이병한(서울대), 이상옥(서울대),

이석호(연세대), 이성(청주대), 이성규(서울대), 이성무(서울대), 이영호(성균관대), 이용범(동국대), 이완재(영남대), 이운구(성균관대),

이장우(영남대), 이재호(부산대), 이종숙(서울대), 이지관(동국대), 이태수(서울대), 이태진(서울대), 이평래(충남대), 이한조(고려대),

장기근(서울대), 장왕록(서울대), 전인초(연세대), 전해종(서강대), 정범진(성균관대), 정병조(동국대), 정병학(숙명여대), 정옥자(서울대),

정운찬(서울대), 정원식(서울대), 정의채(카톨릭대), 정인재(중앙대), 조남현(서울대), 조선미(성균관대), 조성을(아주대), 조영록(동국대),

조요한(숭전대), 차주환(서울대), 채상식(부산대), 최갑수(서울대), 최병조(서울대), 최병헌(서울대), 최영희(국편위), 최완식(서울대),

최우원(부산대), 최익주(영남대), 허남진(서울대), 허벽(연세대), 허성도(서울대), 허세욱(외국어대), 홍이섭(연세대), 홍인표(충남대),

홍정식(동국대)

   단행본

계몽사, 범우사, 삼성출판사, 서울대출판부, 육문사, 을유문화사, 일신서적, 혜원출판사, 하서, 홍신문화사 등에서 발간한 각종 번역서는

낱낱히 명시하지 않고 그외의 참고 단행본은 아래와 같다. 

1. 가람기획 편집부, <한 권으로 보는 세계명작 111선>, 가람기획

2. 강용규, <인물중국사>, 학민사

3. 강인숙, <김동인>, 건국대학교 출란부

4. 고영춘, <기독교의 사조>, 신생사

5. 구인환, <고교생이 알아야 할 소설>, 신원문화사

6. 김규태, <동서문학의 조류>, 일신사

7. 김대중,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김영사

8. 김동림 외 역, <철학의 큰 스승 50>, 책세상

9. 김두헌, <서양윤리학사>, 박영사

10. 김봉군 외, <한국현대작가론>, 민지사

11. 김상홍 외, <한국문학사상사>, 계명문화사

12. 김성한, <길따라 발따라>, 사회발전연구소 출판부

13. 김영덕 외, <중국문학사>, 청년사

14. 김영식, <과학혁명>, 민음사

15. 김유조, <어니스트 헤밍웨이>, 건국대학교 출판부

16. 김진균 외, <사회학의 명저 20>, 새길

17. 김태길 외, <철학개론>, 삼중당

18. 김평옥 역, <랭킹 100 세게를 바꾼 사람들>, 에디터

19. 김학주, < 노자와 도가사상>, 태양문화사

20. 김해명, <중국문학사전1,2>, 연세대 중국문학사전 편역실

21. 김형석 외, <철학개론>, 연세대 출판부

22. 김희보, <세게문예사조사>, 종로서적

23. 김희보, <세계의 명작>, 종로서적

24. 김희보, <한국의 명작>, 종로서적

25. 나손 선생 추모논문간행위원회, <한국문학작가론>, 현대문학

26. 노명식, <자유주의>, 종로서적

27. 동서문화사, <세계백과사전>

28. 독서신문사 편, <세계문학사>, 도서출판 배제서관

29. 동아일보사,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30. 동양사학회 편, <개관동양사>, 지식산업사

31. 문병란, <일요일의 세계문학기행>, 열람원

32. 민석홍, <서양사개론>, 삼영사, 1984

33. 박병기, <포스트모던시대의 사회윤리학>, 인간사랑

34. 박선주 역, <인류의 진화와 기원>, 교보문고

35. 박은봉, <세계사 100장면>, 기람기획

36. 박종홍 외, <한국의 명저>, 현암사

37. 배종호, <한국유학사>, 연대출판부

38. 이윤희 역, <세계사 산책>, 백산서당

39. 벌핀치, <고대신화>, 정음사, 세계문학전집1

40. 변태섭, <한국사 통론>, 삼영사

41. 변형윤 외, <경제석학의 생애와 사상>, 매일경제신문사

42. 소광희 외, <철학의 제문제>, 지학사

43. 소광희 외, <현대의 학문체계>, 민음사

44. 신동아 편집부, <세계를 움직인 100권의 책>, 동아일보사

45. 신동아 편집부, <현대의 사상 77인>, 동아일보사

46. 신동아 편집부, <오늘의 사상 100인 100권>, 동아일보사

47. 신옥희 외, <원효의 생애와 사상>, 한가람 창간호

48. 신용협, <현대한국시연구>, 국학자료원

49. 신전옥 역, <세익스피어 4대 비극집>, 전예원

50. 신채식, <동양사개론>, 삼영사

51. 안정애 외, <중국사 100장면>, 가람기획

52. 유명종, <한국철학사>, 일신사

53. 유승국, <동양철학연구>, 근역서재

54. 윤사순 외, <한국의 사상>, 열음사

55. 양은창 외, <세계명작소설>, 한림출판사

56. 양은창 외, <한국현대소설>, 한림출판사

57. 유시민,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 푸른나무

58. 유정동, <퇴계의 생애와 사상>, 서문문고

59. 윤오영, <신역 순자>, 현암사

60. 이기백, <한국사 신론>, 일조각

61. 이기백, <한국사 시민강좌>, 제 10,14집

62. 이기영, <원효사상>, 홍법원

63. 이기영, <한국불교>, 세종기념사업회

64. 이문열, <삼국지>, 민음사

65. 이문호, <서양의 사상가들>, 형설출판사

66. 이민호 외, <노동계급의 형성>, 느티나무

67. 이병도, <율곡의 생애와 사상>, 현암사

68. 이을호, <정다산의 생애와 사상>, 박영문고

69. 이이화, <인물한국사>, 한길사

70. 이성범 외 역,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 범양사 출판부

71. 이정우 역, <지식의 고고학>, 민음사

72. 이정전, <두 경제학의 이야기>, 한길사

73. 이재영, <중국철학이야기>, 박우사

74. 이춘식, <중국고대사의 전개>, 신서원

75. 임헌영 외, <한국명작사전>, 한길사

76. 장기근, <이태백>, 태종출판사

77. 장도준, <정지용 시 연구>, 태학사

78. 정진일, <위대한 철인들>, 양영각

79. 정창범, <도스토예프스키>, 건국대 출판부

80. 정항희, <서양역사철학사상사>, 법경출판사

81. 전양범 역, <존재와 시간>, 시간과 공간사

82. 조동걸 외,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 창작과 비평사

83. 조태훈, <데카르트>, 유풍출판사

84. 종로서적 편집부, <기독교명저 60선>

85. <중국백과>, 신동아 1993년 1월 별책부록, 동아일보사

86. 중앙일보사, <중국의 비밀(300문 300답)>, 월간중앙 별책부록

87. 차하순, <서양사 총론>, 탐구당

88. 채만식, <탁류>, 문학사상사

89. 천재교육, <독서광장>, 1994,7월호

90. 최윤락, <어머니>, 열린책들

91. 최창규, <한국의 사상>, 서문문고

92. 최현 역, <사회계약론>, 집문당

93. 한국사상연구회, <한국사상가>, 법문사

94.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의 명저>, 새길

95. 한샘출판사, <독서와 논리>, 1994,4월호

96. 한인희 외 역, <중국을 움직인 30권의 책>

97. 황필호 역, <소크라테스불타공자예수모하메드>, 종로서적



C49 – 근사록 (近思錄, 1175년경) / 주희(朱憙, 1130-1200)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중국의 성리학 집대성자인 주희가 그의 친구 여동래와 함께 성리학을 공부하는 데 긴요한 622대목을 발췌하여 분류, 편찬한 책이다. 1권에서는 자연과 인간의 본질에 관해 설명하고 있고, 2권에서는 유학적 삶의 태도에 관한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다. 예로부터 성리학 입문서로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고, 성리학의 형성에 미친 영향고 크다.


a. 생애와 작품

중세 이후 동양사상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쳐온 주희는 중원의 문화로부터 멀리 떨어진 외딴 시골에서 출생하였다. 14세 때 중급관리였던 부친은 병사하였고, 그뒤 충안의 3선생(호적계 유백수 유병산)에게 사사했다. 초년에는 유교적 교양을 쌓으면서도, 노장사상과 불교철학에도 관심을 가졌다.

19세에 과거에 합격하고 24세에 임관하여 천주 동아현의 주부로 임명되어 4년간 근무하였다. 정이(정이천)의 학통을 이은 이동(이연평)을 만나 사사하고 차츰 유교로 기울어져 신유학의 정수를 계시받았다. 28세로 퇴임하고 그뒤 20여 년 관직에 나가지 않고, 국가로부터 연금을 받아 학문과 저술에 전념하였다. 그동안 이동을 여의고 장식(장남현)여조겸(여동래)과의 교류가 시작되어 그의 사상형성에 큰 영향을 받았는데, 대체로 40세 무렵에 사상적 대계가 확립되었다고 본다. 

46세때 여조겸과 함께 북송의 4대 도학자인 주돈이(주염계) 장재(장횡거) 정호(정명도) 정이(정이천)의 언론 622조를 문목별로 14권으로 나누어 <근사록>을 편찬하였다. 주희의 학문은 이 4명을 중심으로 북송의 신학풍을 받아 집대성한 것인데, 정주학이라는 명칭이 말하듯이 이정, 특히 정이의 학설을 계승전개하고 있으며, 그런 뜻에서 이 책은 주자학의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 또 그해 여조겸의 제창으로 당시 사상계 한편의 우두머리였던 육구연(육상산) 형제와 아호의 회라는 회견을 가졌다. 이뒤에도 육구연은 그의 좋은 적수가 되어 공리학파의 진량(진용천)과 나란히 가장 힘든 상대가 되었다. 이로 인해 그의 사상은 한층 원숙해졌다. 그리고 20년 동안에 다수의 저작에 착수하였는데, 이중 주목할 만한 것은 <사서집주>로 사망 직전까지 손을 대고 있었다고 한다.

주희가 <대학><중용><논어><맹자>를 사서라 하여 오경의 입문서에 위치시킨 것은 사상적으로 유기적인 관련성이 있다는 것을 고려한 것이다. 즉 하나는 유교정통을 인정하고 이것을 다시 계승하고자 하는 도통론의 측면에서, 또 하나는 성인은 배워서 이르러야 한다는 학문의 목적과 절차가 명확하게 제시되었다는 점에서이다. 그것은 한당의 훈고학적 경학과는 달리 경서를 통하여 통일적 사상을 배우고, 그 참뜻을 체득하여 자기인격의 완성을 꾀하며, 우학의 이상인 수기치인의 도를 실현하려고 하는 신유학의 성립을 의미한다.

49세에 강서성의 남강군 지사, 그뒤로 절강성에서 기근대책의 임무를 수행하였고, 61세 때 장주지사로, 그뒤로도 3-4년간 관직에 있었으나, 재상인 한탁주와 충돌하고 사임한다. 그후 한탁주 일파가 정권을 잡자 주희는 관리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그의 학문은 위학이라 하여 탄압받았으나, 굴하지 않고 죽림정사에서 강학을 계속하였다. 이것을 말리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는 화복은 명에 있는 것이다라며 태연했다 한다.

후반기의 저작에는 <역학계몽><효경간호><소학><초사집주><한문고이><의례경전통해>등이 있고, 이들은 <사서집주>와 함께 주희 및 주자학연구의 필수자료들이다. 관리로서의 현직에 있었던 기간은 짧았으나 맡은 직무에 충실하였고, 말씨나 안색 등 정중한 행동거지와 검소하고 청빈한 생활로 주위의 존경을 받았다. 

그의 철학체계는 당시에는 큰 빛을 보지 못했지만, 1313년 원에서 사서를 과거시험으로 채택하고 사서의 공식적인 주석은 주희의 <사서집주>를 따르도록 한 후부터는 완전히 학계를 지배하고 관학으로서의 위치가 확고해졌다. 우리 나라에도 주자학이 고려 말에 전래된 뒤로 조선시대에 와서 정치와 사상계를 지배하였다.


b. 주자의 사상

   사상의 형성

주희에 의해 체계화된 유교사상을 주자학 또는 성리학이라 하는데, 우주의 이치와 인간의 심성을 탐구하려는 학문적 특성이 있다. 성리학은 육조시대부터 수당시대의 사상계를 석권하고 있던 불교와 도교, 번잡하고 공허한 자구해석에 집착했던 훈고학적 유학을 극복하고 공자와 맹자의 근본사상을 밝히기 위해, 노장사상과 불교의 선종사상을 유교적 입장에서 수용하여 재구성한 유교철학이다. 주희는 깊은 철학적 고찰을 통해 우주의 본체와 인성의 본질을 밝히고자 하였다. 

성리학은 대체로 자연과 우주의 근본을 태극음양오행의 묘합으로 설명한 태극론, 세계의 두 가지 질서원리인 이기론, 인간의 심성을 탐구하는 인성론(심성론), 도덕적 인격의 완성방법으로서의 성경론(수양론), 우주의 근본원리를 깊이 연구하여 올바른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는 격물치지론, 자연의 질서에 부합되는 정치적 사회적 질서에 대한 탐색으로서의 경세론, 사상의 이론적 근거로서의 경학, 개인과 가회의 이상향을 설정하기 위한 연구로서의 사학 등으로 구분된다.

이 학설은 태극설을 주장한 주돈이에 의해 시작되고, 천리와 기일원론을 주장한 정호, 태허론을 주장한 장재, 성즉리와 이기이원론을 주장한 정이의 학설을 주희가 집대성한 것으로, 특히 정이의 학통을 계승발전시킨 것이다. 그래서 정주학이라고도 한다.

주희에 따르면 주장 이정 등은 요순 이래 공자에게 전수되고 맹자에게 이어진 이후 단절된 진정한 도를 다시 부활시킨 이들로, 자신은 그 계승자라고 자처하였다. 이 도통설과 밀접히 관련하여 공자 증자 자사 맹자로 이어지는 유학의 전수계통을 인정하고 사서를 중시하며, 여기에 학문의 목적과 그 단계를 고려, 오경의 입문과 진행순서로 삼았다. 그리고 사서에 주석을 달고 널리 경전을 연구하여 재해석을 시도하였는데, 이것을 신주라 한다.


   사상적 특성

주희의 철학은 이기철학이라 하는데, 형이하학인 기와 형이상학인 이를 내세워 상호간의 관계를 명확히 하고, 생성론 존재론에서 심성론 수양론에 걸쳐 이기에 의하여 일관된 이론체계를 완성시켰다.

 이라는 것은 어떤 사물이 왜 그렇게 존재하며,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를 말하는 것으로, 세계의 참모습으로 보았다. 반면 기는 세계의 현실적인 모습으로 이에 의해 규제된다고 보고 이가 기보다 우선한다고 보았다. 그의 학문방법은 인간이 본래 지니고 있는 것을 회복한다는 형식을 취하고 이를 위한 노력이 거경궁리(居敬窮理)이다. 양자는 서로 보완해가는 것인데, 거경이란 정신을 집중하여 마음들 다른 곳에두지 않는 것을 말하고, 궁리 란 모든 사물에 내재하는 이치를 깨닫는 것을 말한다. 주희가 생각하는 사물의 범위는 대단히 넓어서 이른바 자연학의 분야에까지 미치고 있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도덕적 규범의 보편타당한 근거를 찾는 것이었다.            


c. <근사록>의 내용

본서는 주희와 그의 친구인 여조겸이 송대 성리학의 4대가인 주돈이 장재 정호 정이 등 4명의 저서 중에서 중요한 것만 골라 서로 토론을 거친 후 1178년에 완성한 책이다. 이들 4학자의 저서에는 도를 배우려는 초보자들이 접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어, 이중 초학자의 입문에 필요한 622조를 초록하여 14권으로 분류한 것이다.

 근사 라는 말은 <논어>의 <자장편>에 절실하게 묻고 가까이 생각하면 인이 그 가운데 있다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주희와 여조겸의 말에 따르면 <근사록>은 주돈이 등 4명의 사상을 이해하는 사다리이고, 이 4명의 사상은 육경을 이해하는 사다리라는 것이다.


주돈이: <근사록>에 수록된 송대학자들의 주요사상은 다음과 같다. 주돈이(1017-1073)는 <태극도설>을 지었는데, 송대 성리학의 개조로 추앙받았다. 그의 학설은 유불도 3교를 유교사상으로 종합한 것으로, 그는 우주만유의 궁극적인 본체를 태극으로 설명하고, 태극의 동적 측면을 양 이라 하고, 정적 측면을음 이라고 하였다. 우주 내의 모든 사물은 음양의 조화에 의한 것이고, 음양이 발전하여 수화목금토의 오행을 낳았다고 하였다. 이처럼 자연과 우주의 근본을 태극 음양오행의 묘합으로 설명한 성리학의 입장이 태극론이다.


장재: 장재는 우주본체로서 태허를 말하고 태허가 바로 기다 라는 학설을 내세워, 기가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 실체이며 기의 흩아지고 모이는 변화에서 각종 사물이나 현상이 형성된다고 보았다. 이 점에서 불교나 도교의 공이나 무의 개념을 비판하였다. 즉, 우주의 본체는 지극히 허한 것이나 그것은 공이나 무가 아니라 기라는 존재라는 것이다.


정호 정이: 정호는 여전히 기일원론의 색채가 짙고, 심성론에서도 기즉성 성즉기라고 말하고 있어, 본체론보다 현상론에 치중하고 있다. 동성인 정이는 이기이원론적 발상에 입각하여 물질적 세계는 음양의 기에 의해 성립하며 기의 배후에는 음양을 음양답게 하는 이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심성론에서는 성즉리라하여, 주자의 이기론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본서의 내용은 <도체><논학><치지><존양><극치><가도><출처><치체><치법><정사><교학><계경><변별이단><총론성현>의 14편으로 구성되며, 이중 제1편인 <도체>편이 가장 난해한 철학설로, 제2편부터는 학문과 일상생활에 관한 것이어서 어렵지 않다. 이 문에 여겸조는 <도체>를 맨 뒤로 두자고 주장했으나, 주희는 <도체>를 읽어 도의 근본이치를 알고 제2부분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여, 결국 주희의 주장대로 첫머리에 두었다 한다. 물론 주희도 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1편을 읽고 이해하지 못하면 제2권부터 읽고, 후에 제1권을 읽도록 하라고 말하고 있다.( 도체(道體)·위학(爲學)·치지(致知)·존양(存養)·극기(克己)·가도(家道)·출처(出處)·치체(治體)·치법(治法)·정사(政事)·교학(敎學)·경계(警戒)·변이단(辨異端)·관성현(觀聖賢)의 14류(十四類)로 나뉘어 있다.) 

이것은 주자가 사서 가운데 <대학>을 먼저 읽도록 한 것과 유사한데, 그 이유는 사서 가운데 나타나 있는 성현의 마음을 알기 위해 먼저 <대학>을 읽고 그 강령을 알아둠에 있다. <도체>편의 본문 첫머리에 이 편은 성의 본원과 도의 체통을 논한 것으로 학문의 강령이다 라고 했으며, 또 첫머리에 주돈이의  태극도설 을 실은 것은 그가 이를 얼마나 중요시했던가를 알 수 있다.

제14편의 <총론성현>에서는 유가의 도통론을 다루고 있는데, 요순 우탕 문무 주공 공자 증자 자사 맹자로 이어진 유가의 계통이 이단의 학설에 의해 가려졌다가 송에 들어와 주돈이 정호 정이 장재로 계승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d. 동아시아에 끼친 영향

주희에 의해 완성된 성리학은 공맹사상을 잘 보존하는 동시에 더욱 체계화시켜, 학문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보게된다. 그의 사상은 청대에 왕부지 대진 등에 의해 부인되기도 하지만 중국사상사에 있어 지대한 영항력을 행사해왔으며, 송원명대에 관학으로서의 정통성을 유지해왔다. 그의 사상이 봉건시대의 통치이념으로서 가장 적절했으며, 또 그렇게 작용하였다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우리 나라에 있어서도 그의 사상은 조선의 건국과 함께 국가의 이념으로 받아들여진 후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이 등장할 때까지 거의 절대적인 권위를 유지해왔다. 조선 초의 사육신생육신의 드높은 의리관이 16세기에 오면서 이론적 차원의 탐구가 본격화됐는데, 그 주역은 이황 이이(자세한 것은 본서 1권 참조)였다. 이들에 의해 전개된 한국성리학의 특징은 #1정주학이 절대우위를 차지하여 기타 학문은 발전의 여지가 봉쇄되었고 #2학문의 성향에 있어 주지주의적 성향으로 흘렀으며 #3예를 절대시하고 #4체면 위주의 명분론적 사고가 팽배했으며 #5주리론적 보수성을 띠어왔다.

일본 역시 그의 사상을 수용하여 본건적 사유의 틀을 형성하였으며, 배적으로 주자학에 대한 반발이 진행되면서도 근대사상이 수입되기 전까지 여전히 그의 사상의 영향하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주희의 사상은 그의 생존시 한때 이단으로 몰리기도 했으나, 중국과 동아시아에 미친 지속적인 영향력은 매우 크고 광범위했다.


-----------------------------------------------------------------------------------------------

근사록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대한민국의 보물에 대해서는 근사록 (보물)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근사록(近思錄, 1175년경)은 주희(朱憙)와 그 학문적 친교가 깊었던 여동래(呂東萊) 두 사람의 합작(合作)이다. 이 서(書)는 북송 시대 도학(道學)의 대표적 사상가인 주돈이, 장횡거(張橫渠), 정명도(程明道) 및 정이천(程伊川)의 저술(著述)·어록(語錄)을 발췌하여 편집한 것이다.


성립의 사정을 알기 위하여 주자의 후서(後序)를 보면 초학자(初學者)의 입문서로서 지어진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주자도 이 책을 읽어 얻은 바를 기본으로 하여 다음은 4자(四子)의 전집(全集)을 읽을 것이며 구차하고 번다하다고 노력을 피하고 간편한 맛에 편승하여 이것만으로써 만족하다고 여기는 일이 있으면, 본서 편집의 의도에 반(反)한다고 말하고 있다.


구성은 도체(道體)·위학(爲學)·치지(致知)·존양(存養)·극기(克己)·가도(家道)·출처(出處)·치체(治體)·치법(治法)·정사(政事)·교학(敎學)·경계(警戒)·변이단(辨異端)·관성현(觀聖賢)의 14류(十四類)로 나뉘어 있다. 이것에 의지하여 학문의 도(道)에 들어간 사람은 중국 뿐 아니라 한국과 일본의 학자에도 많으며 따라서 주석서도 이 3국에 많다. 그리고 또 여동래(呂東萊)의 후서(後序)에 의하면 <근사록(近思錄)>은 이미 되어 있었다고 하면서 주자가 실제의 편자요 여동래(呂東萊)는 이에 참여한 것같이 쓰고 있다.



C47 – 한국통사 (韓國痛史) / 박은식(朴殷植, 1859-1925)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임시정부의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의 저서로 1915년 출판되었다. 우리나라 역사 전반에 대한 간략한 개요와 대원군의 개혁정치, 민씨정권의 문호개방에서 비롯된 일제의 침략사와 갑신정변, 동학농민전쟁, 1911년 105인 사건에 이르는 독립운동사를 서술하였다.  한 나라의 혼을 담은 국교와 국사가 없어지지 않는 한 나라도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저자의 신념 하에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씌어진 책으로서, 민족주의의 사관에 입각해 한국근대사를 최초로 종합적으로 서술하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자(字)는 성칠(聖七)이고 호는 겸곡(謙谷), 백암(白岩·白巖·白菴), 태백광노(太白狂奴), 무치생(無恥生)이며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a. 생애와 작품활동

단재 신채호와 함께 2대 민족사학자로 꼽히는 백암 박은식. 이 두 사람은 열렬한 독립투사이면서 또 한국역사를 통해 민족혼을 일깨운 사학자이기도 했다. 백암은 황해도 황주에서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부친의 사랑을 받으며 사서삼경과 제자백가의 글을 익혔다. 그러나 부친의 의도와는 달리 과거시험 준비보다는 어수선한 나라일을 걱정하기 시작했고, 부친이 작고한 뒤에는 관서지방을 두루 여행하면서 여러 학자와 학문을 접하였다.

24세의 청년으로 서울에서 임오군란을 목격하고 그 수습방안을 올리기도 했고,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향시에 응시, 합격하여 말직에서 4년간 근무한다. 이때 평안도 관찰사 민병식이 그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동명왕릉의 책임자로 내보내 학문연구에 열중케 하는데, 그는 여기서 2년간 사색에 잠긴다.

1894년(35세)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원주로 은거했다가 1898년(39세) 상경하여 새롭게 변신하기 시작한다. 상경 직후 장지연 남궁억의 <황성신문>의 주필이 되어 부패한 관리나 일제에 야합하는 친일파를 공격하고, 일제의 침략만행을 통박하였다. 이때부터 독립협회에도 가입하였고, 자신이 지금까지 이단사상으로 배척했던 불교 기독교 서적은 물론 중국에서 전래한 신문 및 서양서적을 두루 섭렵했다. 이를 계기로 보수적 위정 척사론자에서 벗어나 개화자강 사상가로 변신하였다.

1905년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으로 <황성신문>이 폐간되자, 백암은 <대한매일신조>로 자리를 옮겨 새로 입사한 신채호와 함께 더욱 구국적인 논설을 발표했다. 1905년에서 1910년 사이에 박은식은 청말의 변법자강파인 양계초의 사상을 수용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자강론을 제시했다. 그는 사회진화론에 의거하여 당시 국제사회를 약육강식하는 진화론적 생존경쟁의 법칙이 지배하는 냉혹한 현실로 진단했다. 이러한 인식에서 국권상실의 원인이 자강력, 특히 민력의 부재에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옛 관습의 혁파와 교육 및 산업진흥을 통해서 자강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애국심 함양과 단체결성을 통해 민족의 역량을 결집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의 국가관은 종래의 왕조적 국가나 대한제국 체제가 아니라, 민의 단체적 결합으로서의 국가, 즉 국민국가에 근접하게 되었다. 따라서 국권회복운동에서 군주나 정부보다는 민권,민지, 민력 등 민의 요소가 중시되었다.

1909년 유교구신론을 발표하여 유교개혁을 주장했다. 그의 유교개혁론은 공자의 대동사상과 맹자의 민본주의라는 형식을 취했는데 #1군주중심의 유교에서 인문중심의 유교로 개혁할 것, #2공자의 구세주의적 실천정신을 회복하여 적극적으로 포교할 것, #3사변적인 주자학 대신에 실천적인 양명학을 진흥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1914년 <한국통사>를 저술하고, 1920년에는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하였다. 1923년 개최된 국민대회에서 임정에 대한 태도를 둘러싸고 창조파와 개조파가 대립할 때 개조론의 입장을 취하였다. 1924년에는 임시정부 국무총리 겸 대통령대리가 되었고, 1925년에는 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대통령 재직시 대통령책임제를 내각책임제로 바꾸었으며 이에 따라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1925년 11월  <한국통사>와 <한국운동지혈사>를 썼으니 늙었더라도 건국사를 쓰고야 죽겠다는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이국 땅에서 한많은 생애를 마쳤다. 그의 장례는 임시정부의 첫 국장으로 치러졌다. 그간 상해의 공동묘지에 묻혀 있다가 1993년 8월, 68년 만에 유해가 국내로 봉환돼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b. 백암의 역사관

   국혼론

백암의 역사관의 특징은 국혼론에 있다. 그의 국혼론적 역사인식은 다음과 같이 4단계를 거치면서 발전했다. 제1단계는 1905-1910년 자강론에 기초를 두고 자국정신과 국사를 강조한 시기이며, 제2단계는 1911년 민족정신의 표상인 민족적 영웅에 대한 연구를 수행한 시기이다. 제3단계는 1915년 <한국통사>를 저술하여 자신의 역사관을 국혼론으로 체계화한 시기다. 제4단계는 1920년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통해 국혼론적 역사인식을 독립운동사에 적용한 시기이다.

1905년 이전까지 백암은 정통 주자학자로서 한국을 유교국가로 파악하고 중화주의적 역사관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05년 이후 자강론을 제시하면서 애국심 함양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등 민족자주 의식을 강조했다. 특히 국사교육을 애국심 함양의 최선책으로 중시하였다. 그는 종래 유학자들의 중화주의적 역사학을 노예문학이라고 비판하고, 한민족의 역사와 민족사적 영웅을 중시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 기간에는 한국사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수행하지는 않았고, 과거인물들의 전기를 단편적으로 소개하거나 국사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수준에 그쳤다.


   영웅사관과 그 극복

1911년 중국 망명 직후 만주지역의 고적답사와 대종교 입교를 계기로 고대사 연구에 전력하였다. 이 해에 많은 저술을 통해 나타난 백암의 역사관은 전통적 유교사학의 중화주의적 역사관을 탈피하고, 민족의 자주독립을 지향한 실천적 역사학이라는 점에서 민족주의적 역사학의 특징을 뚜렷하게 지니고 있다. 동시에 구국의 영웅을 대망하면서 영웅들의 행적을 중심으로 민족사를 인식하는 영웅주의적 역사관의 성격을 띠고 있다.

백암은 1915년 간행된 <한국통사>에서 국혼론을 체계화하였다. 그는 동양의 전통적인 혼백론을 원용하여 국가 구성요소를 정신적인 국혼과 물질적인 국백으로 구분하여 파악했다. 여기에서 국혼(정신)은 국백(국가)보다 더 근본적인 요소로 간주되었으며, 종교언어문학역사 등을 포함하는 민족문화의 개념으로 정의되었다. 국혼은 정신적인 측면이 강조된 개념으로서 오늘날 민족정신의 개념에 준하는 것이다. 그는 국혼의 여러 요소 중에서 역사를 국혼의 소재처로 파악하고자 했다. <한국통사>의 저술동기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국혼을 유지해야 한다는 <한국통사>에서의 주장이 1920년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국혼이 강한 한국민족은 반드시 독립한다는 확신으로 굳어졌다. 말하자면 국가의 멸망이라는 통한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체계화된 역사인식은, 독립을 위한 피의 투쟁사를 서술하면서 독립에 대한 확신으로 굳어졌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국혼론적 역사인식이 지니는 관념론적이며 영웅주의적인 한계를 극복해가는 모습이 발견된다. 즉 정신 자체가 아니라 그 표현인 독립투쟁의 실천과정을 서술함으로써, 관념론적 한계를 점차 탈피해가고 있다. 또한 독립투쟁에서 노동자 농민 등 민중의 역할을 중시하면서 영웅주의적 한계를 탈피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독립운동을 민족정신의 전개과정으로 파악함으로써 정신사적 기조는 굳게 견지하고 있었다.


c. <한국통사>의 내용

구한 말부터 준비하여 1914년에 완성하고 1915년에 중국 상해에서 출판한 본서는 1864-1911년의 한국근대사를 3편 114장으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

제1편에서는 우리 나라의 지리적 환경과 역사의 대강을 다루고, 2편에서는 대원군 집권 이후부터 대한제국 성립 이전의 역사를, 제3편에서는 대한제국 성립 이후 국망까지의 역사를 서술했다. 이러한 서술체계는 동양의 전통적인 역사서술 체계인 기전체나 편년체를 따르지 않고 근대적인 역사서술 체계를 원용하여 사건 중심으로 장을 나눈 것이다. 그는 각 사건들의 내용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된 원인과 결과까지도 서술, 논평함으로써 인간관계에 입각한 근대적 서술방법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그리고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17개 부분에 대해서는 사론을 부기하는 전통적 방식을 원용하여 안이라는 단서를 붙여 사실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내렸다. 본서는 내용상으로 일제의 침략과정을 서술하고, 그 부당성을 폭로하는 한편, 이에 대응하는 한민족의 자주독립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반성한다는 의미도 있다. 그것은 한민족이 국권을 상실해가는 통한의 역사를 통해 자괴감을 유발함으로써, 독립운동의 정신적 원동력을 제공하고자 했던 것이다.

백암은 대원군의 외척 및 문벌견제, 군포제개혁, 서원철폐, 풍속교정 등 내정개혁에 대해서는 긍적적인 평가를 내렸으나 화폐정책과 전제적 정치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특히 대원군은 대혁신이 가능한 내외적 조건의 유리함에도 불구하고 배외주의적 폐쇄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중흥의 기회를 놓쳤다고 보고, 이를 애석한 일로 평가했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통사>는 대원군 집정기부터 시작한다고 했다. 또한 자수자강의 실력을 구비하지 못한 상황에서 문호를 개방한 민비정권의 개항정책도 비판하였다. 특히 한반도 주변의 정세에 대한 통찰은 예리했다. 그는 일본, 중국, 러시아 3국 사이에 세력균형이 이루어지면서 약소민족인 한국이 자주독립할 수 있으나, 어느 한 나라가 우세를 독점하면 위험하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미국, 영국 등 구미 열강은 한반도에 적극적 이해관계가 없기 때문에 한국을 이용하여 일본의 환심을 사려는 입장이었다고 보았다. 갑신정변에 대해서는 여건미숙으로 인한 실패를 애석하게 여겼다. 그러나 혁명의 여러 주역들이 일제의 술책에 말려든 결과가 되었다고 평가하면서, 타력으로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동학혁명에 대해서는 갑오동학란이라고 표현하고 정치혁명으로서의 한계를 지적했지만, 신분해방을 실현한 개혁의 선구라고 평했다.

백암은 1905년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가 내한한 목적이 한국인을 회유하고 민권신장 및 위회설립 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지적하였다. 이어 그는 일제의 한국침략에 이용당한 한국인의 왕족으로서 일본에 머문 자, 갑신정변과 갑오경장의 주모자로서 일본에 망명한 자, 일진회의 지도적 인사 등 3종류로 나누어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일본을 이용하여 독립을 도모하려는 선의의 친일파에 대해 약자가 강자를 이용하려고 하는 것은 큰 착오로서 오히려 국가와 민족을 망치는 결과가 된다고 경고했다. 이처럼 본서는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해가는 통한의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에 대한 저항운동도 중시하여 의병항쟁을 정신사적으로 영구불멸할 것이라고 높이 평가했고, 애국계몽운동 단체를 애국당으로 지칭하면서 그 교육 구국운동의 성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외의 항일투쟁도 상세하게 서술함으로써, 한국근대사의 주체적 전개과정을 밝히는 작업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본서에서 이미 독립을 위한 피의 투쟁사인 <한국독립운동지혈사>가 예비되고 있는 것이다.

본서는 중국 상해에서 간행된 이후 중국 및 러시아의 한인 교포들 사이에 널리 보급되었고, 미주에서는 한글로 번역되어 교민들의 교과서로 널리 사용되었다. 또한 국내에서도 비밀리에 유포됨에 따라 일제는 이에 대처하기 위해 1916년 조선반도사 편찬위원회를 조직하여 <조선반도사>의 간행을 준비하였다. 이처럼 본서는 암울했던 일제시대에 민족과 함께 고통과 희망을 나누면서 일제의 식민통치를 위협하는 대표적인 역사서가 되었다.


d. 백암의 역사적 의의

   민족주의 사학

백암사학은 구한말 역사학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근대 민족주의적 역사학의 체계를 확립했다는 점에서 사학사적 의의가 크다. 우선 역사서술 체계면에서 볼 때 전통적 서술체계를 탈피, 인과관계에 따라 사실을 설명 분석 비판하는 근대적 역사서술 체제를 개척하였다. 이를 통해 구한 말 역사학의 서술방식에 나타난 과도기적 현상을 극복했다는 점에서 본서는 근대적 역사서술방법에 따른 최초의 시대사였다.

또한 민족적 과제를 실현하기 위한 실천적 역사학을 수립함으로써 저항주의적이며 개혁적인 민족주의적 역사학의 전통을 수립했다. 이것은 구한말 역사학이 지니고 있던 실천성의 결여를 극복하고, 그 이후 민족주의적 역사학의 발전에 토대를 마련한 것이었다. 특히 국혼론적 역사인식에 나타난 정신사관적 요소는 이후 민족주의적 역사학의 기본적이 특성으로 자리잡게 된다. 일제하 민족주의적 역사학자 정인보가 조선의 얼 을 강조한 것은 박은식의 국혼론적 역사인식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었다.


   근대사연구 주력

백암의 실천적 관심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한 인식의 중요성을 제고하였다. 이에 따라 신채호를 비롯한 대부분의 민족주의적 역사학자들이 고대사 연구에 집중한 것과는 달리 근대사연구에 개척적인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 그의 근대사연구는 질과 양면에서 모두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특히 한국근대사를 일제의 침략과 그에 대한 저항이라는 각도로 파악하는 시각은 차후 한국근대사 연구의 기본적 구도로 자리잡게 된다. 이 점에서 그의 연구는 현재까지도 근대사연구에 토대를 이룬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백암사학의 4단계에 걸친 발전과정은 한국근대 민족주의 운동의 발전과정과 궤를 같이하면서 한국민족주의 형성에 중요한 기초를 제공했다. 그러나 그의 국혼론적 역사인식은 관념론적이며 영웅주의적인 요소를 지닌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한계는 1919년 이후 독립투쟁사 서술, 민중의 역할에 대한 중시 등으로 점차 극복되어갔지만, 그의 사학이 지니는 정신사관의 기조는 지속적으로 견지되었다. 이밖에도 그것이 국권상실의 과정을 직접 목격하였고, 또 몸소 독립운동에 참여한 필자에 의하여 저술된 점, 단순한 나열이나 연결에 그치지 않고 통사로서의 뚜렷한 목적 밑에서 저술된 점, 우리 나라 최근세사를 서술한 사서 가운데 가장 종합적으로 서술한 점 등이 의의를 가진다. 또한 이 책은 통사로 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히 국권상실과정에 있어서의 깊은 반성을 표현하고 있으며, 특히 중요한 부분에 있어서는 반드시 저자의 의견을 병술하여 뒷사람들의 이용에 크게 도움을 주고 있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

<한국통사>는 지금까지 대개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은 사실을 중심으로 엮어졌던 우리 나라의 최근세사를 민족의 주체적 활동을 중심으로 하여 다시 서술함에 있어서 중요한 지침이 될 것이다. <한국통사>가 국권상싱과정에 있어서의 일종의 반성을 위한 서술이라면 그의 또하나의 저서인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국권회복운동의 전모를 서술한 역사서다. 18세기 후반부터의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에 피로써 저항한 민족운동사인 이 저술은 갑신정변의 실패로부터 1920년대의 만주지방에서의 독립군의 활동상황까지를 서술하였는데, <한국통사>는 이 책과 함께 이용되어야만 그 가치를 더한다.


-----------------------------------------------------------------------------------------------

황성신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황성신문》 창간호

황성신문(皇城新聞)은 남궁억, 나수연 등이 중심이 되어 1898년(광무(光武) 2년) 9월 5일 《대한황성신문》의 판권을 인수받아 창간한 일간 신문이다. 주필로는 유근, 박은식, 장지연, 신채호 등이 활동하였다. 민간자본 신문이었으며, 국한문혼용체가 쓰였으며, 애국적 논조로 일관했다.[1] 1905년 을사조약에 대한 장지연의 항일 사설 〈시일야방성대곡〉 기사로 인해 정간당했고, 다시 1906년 복간되었다.[2] 1910년 일제강점기 때에 신문제호가 강제로 '한성신문(漢城新聞)'으로 바뀌었으며, 9월 14일 제3470호를 끝으로 종간되었다.


황성신문이 발행된 13년간 평균 발행부수는 3000부 가량이었다고 한다.[3]


'Gallery - Project > 1cut / 1Day' 카테고리의 다른 글

Naomi Watts  (0) 2017.11.16
Mei Nagano  (0) 2017.11.16
무제  (0) 2017.11.01
무제  (0) 2017.11.01
scene  (0) 2017.10.1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