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41 – 지식의 고고학 (L'archeologie du savoir/ The Archaeology of Knowledge, 1969) / 푸코(Michel Foucault, 1926 - 1984)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아날 학파의 역사학과 바슐라르 캉길렘의 인식론을 조화시킨 푸코 철학의 핵심적인 저서. 이전의 작품인 (광기의 역사) (말과 사물) 등에서 전개된 고고학적 탐구를, 체계적으로 발전시켜 서술한 (지식의 고고학)은 결국 푸코 자신에 의한 푸코 철학의 해설서이자, 현대의 반인간중심주의적 철학의 바이블이라 할 수있다. 이 책에서 정의되고 있는 언표, 언설, 언설적 실천과 언설적 형성, 실증성, 역사적 아프리오리 등의 개념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은 고고학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다.
a. 생애와 작품활동
1984년 6월 25일. 20세기의 흑사병인 AIDS로 사망한 미셸 푸코는, 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온몸으로 추구한 실천적 지성이었다. 80년대 말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의 대화에 자주 등장하는 미셸 푸코. 그의 매력은 무엇일까?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자 푸코는 엄격한 카톨릭 집안의 해부학 교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청소년 시절의 푸코는 재능있는 소년이었다. 그는 특히 철학, 역사학, 문학에서 재능을 발휘하여
전도 유망한 청년으로 성장해갔으며, 대부분 프랑스 석학들과 마찬가지로 앙리 4세의 고등학교를 거쳐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이플리트, 캉길렘, 뒤메질에게 배웠다. 여기서 철학과 심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1년에 나온 (광기의 역사)에는 이들의 영향이 보는데, 여기서 그는 인간의 이성이 이룩한 문명의 역사가 이성과 권력의 결탁의 역사임을 보여주고 있다. 서구의 역사에서 새로운 문제의 부각은1968년(42세) 5월 프랑스에서 일어난 학생운동에서 연유한다. 당시 서구사회를 휩쓴 학생운동은 마르크시즘에 대한 전면적인 반성을 요구하였다.
즉, 마르크시즘이 그 당시의 문제해결에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을 1968년의 학생운동은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불만족은 푸코로 하여금 평생 동안 일체의 권력으로부터 자유를 추구하게 했고, 이를 통해 참된 주체성을 확보하고자 노력하게 만들었다. 이 당시 뱅센 대학의 교수였던 푸코는 학생들의 운동을 이해하고 학생들과 함께 대학본부를 점거하여 경찰을 향해 돌을 던지기도 했다. 현실문제에 대해 정기적으로 논평하기도 하고, 시위에 직접 참여하는 등 항상 힘없고 소외 받는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항변했다. 그는 프랑스에서 신성시되는 실천적 지식인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여 프랑스인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실천하는 지식인으로서의 푸코는 1971년(45세) 감옥에 관한 정보 수집그룹 의 결성으로 더욱 빛났다. 이 그룹은 수감자와 그 가족들로부터 증언을 채집해서 팜플렛을 발간, 당시 프랑스의 감옥의 비참한 상태를 고발하고 개선을 도모하고자 했다. 이 당시 푸코의 활동결과는 그의 유명한 저서 (감시와 처벌)의 집필에 기초가 되었다. 이 작품은 정신병원, 감옥 등은 인간의 이성이 만든 사회적 장치라고 주장하고, 이들 장치에 대한 사회적 태도를 관찰함으로써 권력의 발달과 행사를 엿볼 수 있다고 보았다. 즉, 푸코는 감옥과 관련된 자신의 경험과 실천을 토대로 근대 감옥에서 가장 교묘하고 극명하게 행사되고 있는 권력을 해부하고 있다. 1970년 푸코는 가장 프랑스적인 연구교육기관인 콜레주 드 프랑스 의 교수가 되어, 베르그송, 메를로-퐁티, 이플리트의 뒤를 이어 죽을 때까지 사상사 교수를 지냈다. 사망 직전까지 푸코는 6권으로 된 (성의 역사)의 집필에 몰두했다. 이 책은 고대 그리스 이래 서양인이 성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왔는가를 추적한 저작으로, 비록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처음 계획과는 달리 (앎에의 의지) (쾌락의 이용) (자기에의 배려)라는 부제의 1,2,3권만 출간되고 (육체의 고백)이라는 부제의 제4권이 노트의 형태로 남아 있지만, (성의 역사)는 푸코를 평생 지배해온 주체의 문제를 가장 집중적으로 다룸으로써, 세기말의 오늘이 제기하는 권력의 문제에 대해 실질적인 시사를 던지고 있다.
b. 푸코 철학의 지적 배경
난해하기로 소문난 프랑스의 현대철학, 그중에서도 푸코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3가지의 지적 배경을 알아야 한다. 프랑스 현대철학의 특징은 구체적인 철학으로 요약된다. 이러한 프랑스 철학의 전통과 같은 성격의 철학이 있었다면 아마 그것은 그리스 철학의 전통일 것이다. 한마디로 프랑스 철학은 과학적 기초와 사회적 실천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 그 장점이 있다 하겠다.
과학사 연구 : 우선 푸코 철학의 지주인 과학적 기초를 이해해야 한다. 그에 있어 이 기초는 바로 과학사이며, 프랑스에서는 언제나 인식론이라는 과목이 과학사의 철학적 이해로 정위되어왔다는 사실도 유념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푸코 출학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콩트, 쿠르노, 푸앵카레, 바슐라르, 캉길렘 그리고 오늘날의 미셸 셰르에 이르기까지의 과학사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이 부분을 빼고 프랑스 철학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마치 존재론을 빼고 그리스 철학을 이해하겠다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구조주의 : 또 하나는 넓은 의미에 있어서의 구조주의라 불리는 20세기 중반 프랑스의 인간과학의 전반적인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특히 아날 학파의 역사학, 야콥슨 등의 언어학, 레비-스트로스의 민속학, 라캉의 정신분석학, 마루샬 게루의 철학사 서술 등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 부분은 특히 제반 인문사회과학을 전공하는 사람들과의 공동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한 철학자의 사상은 그가 속해 있던 당시의 사상 아래서 형성되는 것이므로, 구조주의에 대한 이해는 푸코 철학의 이해를 위한 전제조건이라 할 수 있다.
풍부한 교양 : 세번째 중요한 요소는 현대의 전반적인 문학, 예술에 대한 소양이다. 다른 프랑스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푸코 철학의 이해를 위해서도 문학과 예술에 대한 교양은 과학에 대한 교양 만큼이나 중요하다. 프랑스 철학자들에게 문학적, 예술적 소양은 과학적 탐구의 장식물이 아니라, 그들이 그로부터 철학적 문제의식을 이끌어내는 중요한 원천인 것이다. 현대 프랑스의 철학자로서 중요한 문학 및 예술에 대한 저작을 한 두권 남기지 않는 철학자는 거의 없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 역시 9구토)라는 걸출한 문학작품을 남기지 않았는가?
c. (지식의 고고학)의 주요내용
이 책은 푸코 철학의 이해를 위해 반드시 건너야 할 강으로 (광기의 역사) (임상의학의 탄생) (말과 사물)에서 전개되었던 그의 고고학적 탐구들에 대한 방법론적 기초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위의 책들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만큼 깊이가 있는 저작이다. 수묵화와 같은 언어를 통해 구체적인 예들이 거의 배제된 채, 처음부터 끝까지 추상적이고 정교한 인식론적 논의로 일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다.
제1장 : 제1장에서는 푸코 철학이 속해 있는 인식론적 장이 다루어지고 있다. 그에게 역사서술의 측면에서 하나의 모델을 제공해준 아날 학파, 현대과학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바슐라르, 그의 제자로서 과학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메타 과학사적인 안목을 개척해냄으로써 푸코에게 가장 본질적인 영향을 기친 캉길렘, 뱌슐라르 -캉길렘의 전통 속에서 막시즘에 과학적 기초를 제공해준 아튀세르, 바슐라르 -캉길렘 -푸코의 위대한 계열을 잇고 있는 미셸 셰르가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17세기 철학을 칸트와 헤겔의 예고편으로서가 아닌 각 철학자들의 건축학적 통일성으로서 기술함으로써 구조주의적 사유방식에 있어 결정적 일보를 내디딘 마르샬 게루, (저자의 죽음)을 논함으로써 현대의 반주관주의 철학의 형성에 영향을 준 문학을 논함으로써 현대의 반주관주의 철학의 형성에 영향을 준 문학 비평, 현대사상의 선구로 손꼽히는 마르크스와 니체, 마지막으로 구조주의가 언급되고 있다.
제2장 : 제2장에서는 고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하고 있다. 여기에서 푸코는 고고학을 언설적 형성과 그의 변환에 대한 분석으로 정의하고 그 구체적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방법론적 구도하에서 비로소 (광기의 역사) (임상의학의 탄생) (말과 사물)과 같은 책들의 인식론적 구조와 목적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언설적 형성을 대상의 형성, 언표행위적 양태의 형성, 개념의 형성, 전략의 형성으로 나누고, 각 형성들의 내용을 전개시키고 있는 이 부분을 우리는 고고학적 범주론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제3장 : 제3장에서는 고고학의 기본개념들이 정의되고 있다. 이부분은 푸코 철학의 용어확립에 매우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언표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고학은 결국 과학사적 텍스트들을 다루는 학문이고, 따라서 이 텍스트들 속에 들어있는 언어들을 어떤 관점에서 다룰 것인가 하는 점은 고고학의 기본성격을 규정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4장 : 제4장은 고고학적 사유의 성격을 고고학이 거부하고 있는 사유형태들과 비교함으로써 뚜렷이 하고 있다. 결국 고고학적 사유란 반현상학적, 반해석학적, 반변증법적 사유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20세기 중엽에 위의 사유들이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구조주의는 이들의 허구성을 날카롭게 파헤쳤던 것이다. 고고학은 이와 같은 구조주의의 연장선상 위에서 전혀 새로운 역사철학을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이 논의는 5장으로 이어져 마지막으로 주체의 개념을 옹호하는 사람들과의 논쟁 및 구조주의와 고고학의 차이점이 다루어지고 있다.
d. 철학사적 의의
미셸 푸코는 인문과학에 있어서 하나의 인식론적 전환을 이룩한 철학자의 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그는 인문과학의 중요한 문제들, 가령 인간의 지식은 어떻게 형성되고 어떻게 변화하는가, 그것은 권력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 등의 문제들을 근본적인 각도에서 제시했다. 그리고 그 해답을 진지하게 모색하고 또한 깊이 있는 업적을 남긴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인문과학의 이러한 근본적인 인식의 문제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또한 억압적인 권력의 메카니즘을 파헤치는 데 있어서 예리한 통찰력을 보였다. 그런 점에서 그가 광기와 광인의 문제를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어렵지 않게 이해될 수 있다. 그의 첫번째 정신작업은 1954년(28세) 발표된 (정신병과 인성)인데 이 책에서 그는 정신병의 원인이 무엇보다도 사회적, 정치적 관계 속에서 밝혀져야 함을 역설한다. 그 작업의 계속으로 1961년(35세)에 펴낸 (광기의 역사)는 그를 유명한 철학자의 한 사람으로 만든 책으로서, 정신의학의 허구, 더 나아가서는 서양문명의 핵심을 이루는 사고나 이성의 독단적 논리성을 파헤치고 이성과의 관계에서 희생된 비이성적 요소, 즉 광기의 참된 의미와 그것의 역사적 변화를 밝힌 것이다. 그는 1963년에 정신병과 사회제도와의 관계를 분석한 (임상의학의 탄생)을 쓰고, 1966년에는 유명한 (말과 사물)을 발표한다. 그는 이 책에서 16세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서구문화의 전개과정에서 두번의 단절이 있었음을 주장한다. 첫번째의 단절은 고전주의시대가 시작되는 17세기 중엽이며, 두번째의 단절은 근대가 열리는 19세기 초라는 것이다. 첫번째의 경우는 이렇다. 즉, 르네상스 시대의 인식구조가 유사성의 체계로 이루어져서 그 시대의 지식은 사물들 사이의 무한한 일치나 닮음의 형태를 판독하는 것이었던 반면에, 고전주의 시대는 분석정신이 지배했던 시대로서 사물들의 닮음의 형태보다는 서로 구별되는 속성 혹은 이질성을 파악하는 것이 지식의 근간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전주의적 인식체계는 사라지고, 사물의 세계 속으로 역사성이 들어선다. 인간이 뒤늦게나마 역사의 주체임을 자각하는 시대인 19세기는 역사를 창조한 시대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시대에 만들어진 생물학, 언어학, 정치경제학에서는 역사적 인식이 부각되고, 이러한 지식의 영역 속으로 인간이 개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에는 과학의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았던 인간개념이 19세기의 인식구조 속에 등장하여 인문과학의 대상으로 된다. (말과 사물)에서 푸코는 지식의 전개과정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하면서도, 그의 시각은 역사를 연속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일반적인 문화역사학자의 시각과는 엄격히 구별된다. 푸코에게는 하나의 의미로 연속된 사건들의 역사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헤겔의 역사철학, 즉 절대를 지향해가는 의식의 진행이라는 역사적 성찰에 동의하지 않는 입장을 취한다. 그에게는 무엇보다도 여러 가지 요소들이 뒤엉켜 있는 모순의 형태가 역사이며, 그러한 모순의 존재를 심충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그의 중요한
관심사가 된다. 모순의 인식론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그의 관점은 당연히 역사의 연속성이나 전체성을 보는 헤겔의 시각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오랫동안 정치적 용기의 표상이던 그는 이제 우리 곁을 떠났다. 그러나 독특한 웃음과 율 부리너 같은 민둥머리의 모습은 실천적인 지식인이 상징으로 그가 남긴 말과 함께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진정한 자신의 본래적이고 근원적인 모습을 발견하려고 하는 몸부림치는 현대인이여, 그러나 아직도 구원은 멀다. 일상성에 매몰된 그대의 눈은 결코 그대의 일상과 심지어 생명활동까지도 지배하는 잔인한 권력의 망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주체적이라고 믿는 모든 실천은 심지어 그대가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고 선봉에서 혁명을 지휘할 때조차도 그것은 권력의 효과다.
e. 푸코의 유고, 언제 빛볼까?
출간하지 말라는 푸코의 유언에 따라 그의 유고가 파리의 한 도서관에 비공개조건으로 소장되어 있어, 그의 연구자들이 공개할 날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10년 동안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그의 유고는 (성의 역사) 제4권에 해당하는 것으로, 자아와 사랑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의 역사) 3권을 발간한 갈리마르 출판사는 94년 6월 푸코 10주기에 맞춰 후속 시리즈를 출판하려 했으나,
가족들의 완강한 반대에 직면하여 이번에도 무산되었다. 푸코의 에이즈 상대이면서 사상적 동반자이기도 한 드페르는 (성의 역사) 제4권에 수록될 예정이던 미완성 논문 (육체의 고백)을 끝내 공개하지 않았고, 상속자인 누이동생도 출판사의 요청을 계속 거부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 이래 서양인들의 성에 대한 태도와 그 억압 시스템을 파헤친 (성의 역사) 시리즈는 국내에서도 3만 부 이상이 팔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가들이 흔히 사후출판을 금지하는 유언을 남기는 것은 자신의 본래 의도가 왜곡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지만, 한 편의 논문이라도 더 검토해 보려는 후세의 연구자들이 언제까지나 남겨진 원고를 그대로 놔둘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로마의 대시인 베르길리우스도 자신의 미완의 작품을 불태워버리라는 마지막 소원을 남겼으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이를 저지하여 불멸의 고전인 (아에네이스)가 빛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독자들께서는 (동서고전 200선)에서 이 작품을 만날 수 있다.
---------------------------------------------------------------------------------------------
68운동 (출처 : 나무위키)
최근 수정 시각: 2017-07-21 00:39:27
상위 문서: 사회 운동 관련 정보
파일:/image/028/2005/04/14/0090000001200504140415_13.jpg
프랑스어, 독일어: Mai 68 (68년 5월)
영어: May 1968 events in France (프랑스의 1968년 5월 사태)
한국어: 68운동, 68혁명[1].
1. 개요
2. 배경
2.1. 경제적 배경
2.2. 사상적 배경
2.3. 사회적 배경
3. 특징
3.1. 대학생이 주축이 된 운동
3.2.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
4. 영향
4.1. 프랑스에 미친 영향
4.2. 독일에 미친 영향
4.3. 네덜란드에 미친 영향
4.4. 한국에 미친 영향
4.5. 다른 국가에 미친 영향
5. 평가
5.1. 보수주의자들의 평가
5.2. 진보주의자들의 평가
6. 후폭풍과 결과
1. 개요[편집]
지식채널e "68혁명"
제1부 - 주동자가 없는 혁명
제2부 - 실패한 혁명
대략적인 분위기. 흥겹다. 체 체 게바라! 호 호 호치민!
룩 룩 룩셈부르크 아 아 아리헨티나
1968년 3월 프랑스 파리에서 프랑스의 베트남 전쟁참여에 대한 불만으로 5명의 청년들의 아메리칸 익스프레스파리지사 습격을 시작으로 프랑스 전역의 대학생 시위와 1,000만 노동자의 파업으로 확산된 전례없던 반체제[2], 반문화 운동이다. 파리에서 시작한 시위는 냉전과 베트남전 등의 시대적 문제와 결부되면서 그 해 미국, 독일, 체코, 스페인, 일본 등 세계의 젊은이들을 저항과 해방의 열망으로 들끓게 했다.
사실 프랑스의 5월 혁명은 60년대 전체를 아울러서 유럽(특히 서유럽)과 미국에 흐르던 운동이 분수령을 이룬 것이다. 60년대 초반부터 미국과 독일 등지에서 대학생의 열렬한 움직임은 꾸준히 이어졌다. [3]
2. 배경[편집]
2.1. 경제적 배경[편집]
2.2. 사상적 배경[편집]
사상적으로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철학에 영향을 받았다. 헤겔의 변증법적인 시각에 따르면, 사회는 점점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의 충격으로 인해 사회가 항상 진보하지만은 않는다는 비판이론의 시각이 확대되었다. 68운동 역시 당시 사회가 보수에 정체되었다고 여겨, 구 체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시각을 수용하였다.
하지만 68운동이 점차 변질되면서, 이들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다른 독자적인 행보를 보인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표적인 철학가인 마르쿠제, 아도르노도 처음에는 68운동을 지지했으나 과격한 68운동의 움직임을 보고 등을 돌렸다. 나중에는 학생들 진정시키려 강단에 섰다가 전천후로 조롱을 당하고 끌려내려진 경험이 있다(...). 뿐만 아니라, 비판이론의 뿌리인 위르겐 하버마스 또한 '학생들의 폭력적인 시위는 마조히즘이며, 학생운동은 좌파 파시즘에 불과하다'#라고 하였다가 운동권의 십자포화를 받아 프랑크푸르트(Frankfurt am Main)에서 슈타른베르크(Starnberg)로 교직을 옮겼다.
마오이즘과 폐쇄된 중국으로부터 알려진 왜곡된 이미지의 문화혁명도 큰 역할을 했다.
2.3. 사회적 배경[편집]
미디어의 발전 역시 68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미디어의 발전으로 인해, 대학생들은 당시 베트남 전쟁의 참상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었다. 이에 대학생들은 미국으로 대표되는 거대권력에 대한 혐오감을 갖게 되었다. 또 다른 68혁명의 특징 중 하나는 많은 국가가 이 거대한 움직임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인데, 미디어가 이 연결고리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였다.
흐름을 보면 알다시피 68운동의 거대 흐름 중 하나로 미국의 히피 역시 꼽힌다. 68운동의 움직임이 미국에서 크게 터진 사건이 바로 우드스톡 페스티벌이다.
당시 세계의 모순이 축적되어 가면서 모순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졌다. 대표적 문제로는 성차별, 인종차별, 권위주의의 문제가 있었다. 이 문제들에 비판을 하였던 것은 지식인 층과 고등교육을 받았던 중간관리층[4].으로 이들이 68 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한 마디로, 19세기적 전통으로 설명할 수 없었던 모순들, 또 그에 따른 비판들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3. 특징[편집]
3.1. 대학생이 주축이 된 운동[편집]
68운동의 특징은 바로 운동의 주축이 대학생이라는 점이다. 과거 대부분의 혁명(운동)은 부르주아지 혹은 노동자와 같이 특정 (경제)계층이 중심이었다. 반면, 68혁명은 초창기에는 대학생을 주축으로 하여 점차 다른 계층으로 확산되었다. 프랑스의 5월혁명이 분수령이 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구좌파의 대표계급인 노동자가 가담했기 때문이다. 이후 구좌파+신좌파 연합은 이탈리아로 이어진다.
이것은 시대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럽과 미국은 경제적으로 부흥하기 시작하였는데, 전쟁동안 이를 악물고 소위 '하면 된다'는 악바리 근성으로 살아온 기성세대와는 달리 풍족한 소비생활과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었던 당시 젊은이, 특히 대학생들은 지금은 60대들이라 자기 자식들이 그짓하는거 보며 말세로다 한탄 중 먹고사는 문제 뿐 아니라 사회에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5].
이 대학생들은 전체적으로 좌파이지만, 스스로를 '신좌파'로 여기며 이전의 좌익/공산계열 '구좌파'로 구획짓고 비판 대상으로 삼는다. 무자비하고 권위주의적인 권력을 혐오하기에[6] 대학생들은 저항의 움직임으로 곳곳에 자유대학을 세우면서 모두가 선생이고 학생이고자 하였다.
3.2.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편집]
(기독교가 중심이었던) 서구 사회에서는 여전히 보수적인 성향이 강했다. 68운동은 ‘금지함을 금지하라(Il est interdit d'interdire)’[7] ‘구속 없는 삶을 즐겨라’ ‘혁명을 생각할 때 섹스가 떠오른다’ 등 당시 슬로건에서 보이듯 기존 정치체제와 도덕 관습에 대한 전면적인 반란이었다. 때문에 종교적이고 경건한 삶을 혐오하였으며, 반기독교적인 성향을 보였다. 종교 인구가 급속도로 감소하였으며,[8] 오늘날 유럽인들이 생각하는 교회는 나이 든 사람이 가는 곳이라는 인식이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9]
정 반대로 동양 종교, 그중에서도 선불교가 본격적으로 고평가되기 시작했다. 물론 이보다 훨씬 전에도 불교에 관심을 갖는 서구인들은 있었지만 68운동 시기에 데시마루 다이센(弟子丸泰仙, 1914~1982)이란 일본 승려가 프랑스에 입국한 것을 계기로 유럽에 본격적으로 불교 붐이 일어나게 되었다.
4. 영향[편집]
4.1. 프랑스에 미친 영향[편집]
이 혁명으로 결과적으로 샤를 드 골 정권이 붕괴되었다.[10] 그러나 1981년 프랑수아 미테랑이 대통령 선거에서 51.7%의 득표율로 당선될때까지 보수정당이 계속 집권해있었고 심지어 오일쇼크로 경제가 어려워졌을때조차도 동거정부를 구성하지 못했다.(...) 다만 지방의회와 기초단체장은 좌파가 장악하긴 했다.[11] 하지만 정치적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어도[12] 대학 평준화[13]가 이루어지는 등의 개혁이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
방송등 미디어 업계에도 영향을 피할 수 없었다. 당시 공영방송이던 ORTF는 친정부 보도를 한다식의 욕을 얻어먹었는데 동년 10월에 상업광고를 개시하고, 더 나아가 방송국을 해체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반대로 현재 프랑스 유력 일간지 중 하나인 '리베라시옹'[14]이 창간되고 샤를리 엡도의 전신인 '아라키리'(Hara-Kiri)가 만들어지는 데도 혁명의 영향이 지대했다.
당시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졌던 중국의 문화대혁명이 유럽과 미국에 알려졌지만, 마오의 쩔어주는 능력으로 실상은 철저하게 가려진 채로 홍보되어[15] 마오는 훌륭한 사상가이자 운동가로서 찬양의 대상이 되었고[16] 마오파 학생단체가 마이너 중에서는 메이저로 상당히 활동하였던 것은 흑역사일지도. 베트남 전쟁 규탄을 위해 각국의 학생 지도자가 독일의 베를린에서 모여 토론회를 가졌던 적이 있는데, 토론회가 끝나고 열린 평화가두시위에서 학생들은 "호!호!호치민!!"을 외쳤다. 오오 세계는 하나
프랑스에서는 "혁명은 개나발, 무조건적인 기성세대 부정과 지독할 정도의 혼란만 존재했다."와 "진정으로 민주주의와 자유를 추구할 수 있었던 새로운 혁명"이란 관점이 대립하고 있다. 68혁명의 전개과정을 다룬 68혁명이란 만화가 2012년에 정발된 적이 있으니 현대 프랑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엿보길 원하는 사람들은 참고하는 것이 좋다.
4.2. 독일에 미친 영향[편집]
현대 독일에 대한 시선 중 '과거청산을 철저히 이루어낸 국가' 라는 평가는 68운동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설 der Vorleser(책 읽어주는 남자)에서 주인공 미하일의 시점에서 서술되는 독일은 과거청산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과거에 나치에 협력했던 인물들이 어떤 처벌도 받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아 있는 상황으로 묘사된다. 실제 68운동 이전의 독일은 적극적으로 과거청산을 이루려 하지 않았다. 독일의 과거청산의 가장 상징적이며 시발점이 된 Kniefall von Warschau(바르샤바에서 독일 총리 빌리 브란트가 무릎을 꿇고 사죄한 사건) 또한 1970년에나 이루어졌다.
추가 예정.
4.3. 네덜란드에 미친 영향[편집]
원조인 프랑스보다 68혁명의 영향을 아주 크게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한국인 기준에서 방종과 혼란으로 보일 정도의 자유분방한 사회 분위기는 바로 이 시기를 전후해서 형성된 것이다.
4.4. 한국에 미친 영향[편집]
사실 68혁명보다 8년 일찍 민주주의를 만끽할뻔 했다. 한국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시각이 주류이다. 왜냐하면 당시 남한은 1.21사태,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등 제2의 한국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할 정도로 무장간첩 침투와 휴전선 교전이 잦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 반공분위기가 강화되는 등 68혁명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리고 68운동은 국가가 그럭저럭 먹고 사는 궤도에 올랐을 때, 대학생을 중심으로 하여 촉발되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한국은 그럴 여력마저 없었다.
68운동이 한국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91년 소련 붕괴 이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대체하려 했던 90년대 중반 학생운동 내 PD의 후신 분파들이 그 이론을 수입하고 슬로건과 이미지를 차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인데, 결과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다만 68운동 자체와는 별도로,1980년대~90년대 초에 매우 활발한 학생운동 및 이를 주도한 386세대와 68운동의 주체인 68세대와 비교, 분석한 사례는 나오고 있다.
4.5. 다른 국가에 미친 영향[편집]
일본의 전공투역시 프랑스의 5월혁명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5. 평가[편집]
5.1. 보수주의자들의 평가[편집]
보수파에게 ‘68년 5월’은 바로 ‘무질서와 파괴’의 끔찍한 악몽으로,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지난해 대선에서 68년 5월을 도덕과 권위, 국가 정체성 위기의 근원으로서 청산돼야 할 유산으로 지목, 이 같은 입장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영국 철학자 로저 스쿠루턴도 최근 한 월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당시 차를 불태우던 젊은이들은 책임감이 없었다”며 “도덕과 정신의 재앙이었다”고 평가절하했다. 사실 68운동 이전의 프랑스 사회 분위기는 세속주의를 추구하되 최소한의 도덕과 윤리선을 넘지 못하게 하는 일명 '모랄 라이크(morale laïque)'[17]라는 형태를 따르고 있었으나 68운동 이후로는 이러한 최소한의 윤리 수준마저 무너졌다는 것이 '보수적 정교분리자'들의 견해이다.
종교계에서도 진보적 신학자였던 베네딕토 16세를 지금의 보수적인 인물로 만든 사건이기도 했다. 실제로 68운동을 전후해서 유럽의 교회와 성당 출석률은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했으며 당시 운동을 주도하던 세대들 중에는 대놓고 "예수에게 저주를!", "성경은 대중을 기만하는 비인간적인 책이다!"라며 대놓고 기독교 자체에 거부감을 드러내던 사람들도 많았었다. 거기에 비트닉과 히피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대안종교랍시고 힌두교나 불교[18]같은 동양종교에 관심을 갖던 사람들도 있었다.때문에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막론하고 보수성향 기독교인들 중에는 안 그래도 몰락해가던 유럽의 기독교가 이때를 기점으로 해서 완전히 망했어요가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5.2. 진보주의자들의 평가[편집]
진보적 입장에서 68년 5월은 정치혁명이라기 보다 억압적이고 고루한 사회 관습을 뒤바꾼 문화혁명의 분수령으로 기억된다. 프랑스 역사학자 필립 아티에르는 호주의 일간 ‘에이지(The Age)’에서 “변화가 하루 밤새 일어나지 않았지만, 학교와 가정 직장 등에 걸쳐 프랑스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고 주장했다. ‘나의 68혁명’을 펴낸 가이스마르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혼 경력 등의 화려한 사생활에다 유대계 뿌리가 있는 사르코지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도 68혁명이 만들어 놓은 문화적 변화 덕분이었다”고 주장했다. [19]
68운동의 큰 의의 중 하나는 당시까지 입을 열 수 없었던 여성, 동성애자, 장애인 등의 소수자들이 전면에 나설 수 있는 큰 기반이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68운동 당시 새로움, 평등한 연대를 부르짖으며 학생단체들이었지만 그 내부에서도 여전했던 성차별에 제대로 빡친(...) 여성들은 자신들끼리 연대하여 페미니즘 운동을 시작해갔다. 대표적인 슬로건으로는 '내가 춤출 수 없다면 그건 혁명이 아니다'[20] 사실 리버럴한 서양의 이미지는 이때부터 자리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68년 5월이 진보진영에서 무턱대고 환영 받는 것은 아니다. 개인주의를 부추겨 80년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길을 열어놓았다는 지적과 함께 히피와 마약 문화만을 남겼다는 냉소도 없지 않다. 실업과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고 있는 프랑스의 현 젊은이들에게 68세대가 보보스(BOBOSㆍ부르주아 보헤미안)라는 허울뿐인 자유주의자로 비쳐지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21] 뿐만 아니라 당시의 과격했던 68운동은 68운동 자체가 태동할 수 있는 배경과 보호막을을 제공했던 온건 자유주의자(liberal)을 공격해 타격을 줌으로서 커다란 공백을 만들고, 그 뒤 신좌파의 과격함에 질린 사람들이 가져온 반동과 함께 그 빈자리를 신보수주의가 메우게 되었다는 로버트 니스벳같은 학자의 설명도 있다.출처 즉, 달리 보자면 68운동은 잠재적 아군이었던 리버럴의 무덤임과 동시에 네오콘의 요람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당대 유력한 리버럴이었던 위르겐 하버마스나 마루야마 마사오같은 지식인들이 68운동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점을 보자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말이다. 특히 마루야마 마사오 같은 경우는 당시 68운동세력에 대해 '나치나 군국주의자보다 더한 놈들'이라고 깠을 정도.
순수하게 좌파적 시각에서 보더라도 68운동에는 명확한 비전도 기반도 없었기 때문에 비판받기도 하였다. 일례로 미국의 도시 빈민 운동가 사울 알린스키는 "그들은 사회를 바꾸는 데엔 관심이 없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일과 자신을 발견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폭로(revelation)일 뿐 혁명(revolution)이 아니다"라고 68운동을 비판하였다. 한마디로 선진국 중산층 대학생의 불장난이라는 것.
거기다가 많은 수의 히피들이 80년대 이후 히피 문화가 죽어버리자 극단주의 기독교로 전향한 것도 논란거리가 되었다. 왼쪽으로 신나게 삽질하던 녀석이 "이건 아니야아아아!"라고 비명 지르기에 정신 차린줄 알았더니, 다시보니 오른쪽으로 방향만 바꿔 삽질하는 꼴이니 그럴만도 하지만.
간단히 줄이면 이는 거대한 학생운동으로 시작되었지만 이 운동은 젊음의 해방구로써 분출구로써 그 역할을 한 시대의 조류였다. 그러나 아직도 "고루한 사회관습을 바꾼 분수령", "무질서와 파괴의 끔찍한 악몽"이란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다. 상기하다시피 첫째, 벌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생생한 현대사인데다 둘째, 이른바 문화혁명으로서 아직도 삶에 직접적인 영향과 그 흔적이 여실하게 남아있기 때문에 역사적인 연구와 판단이 매우 까다롭다는 점을 그 이유로 들 수 있겠다.
6. 후폭풍과 결과[편집]
존 레논은 이 때 영국, 미국의 반전 운동, 폴란드의 시위, 문화대혁명과 이 운동을 보고 느낀 점으로 폭력 혁명에 반대하는 'Revolution'이라는 곡을 썼다. The Beatles 앨범에도 수록. 하지만 이후 오히려 사회운동에 투신하면서 Revolution을 개사해서 부르고, 이전보다 급진적인 내용의 곡들을 발표한다.
롤링 스톤스의 보컬 믹 재거는 1968년 당시 런던의 베트남전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가 거센 시위군중의 함성에 감명을 받아 Street Fighting Man이라는 곡을 쓰게 된다. #
한편, 체코에서는 프라하의 봄을 비롯한 친소 공산정권에 반기를 드는 사회운동이 벌어졌다. 동구권의 보수파인 소련 정권에 반대하는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신좌파'의 또다른 갈래로 보기도 한다. [22]또한, 체코 말고도 다른 공산권에서도 이러한 반소, 반독재 운동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폴란드. 물론 프라하의 봄처럼 국가적 개혁 분위기를 탄것은 아니었고, 일반적 학생 운동의 규모? 또 유고슬라비아에서도 학생들이 시위를 해서 티토가 학생들의 요구안을 일부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물론 현실은 시궁창... 알렉산데르 둡체크의 '인간의 얼굴을 한 공산주의'는 소련의 탱크에 처절하게 짓밟혔고 이후 두브체크 후임으로 체코슬로바키아 서기장이 된 구스타브 후삭이 현상 유지(status quo)를 주장한 정상화(Normalization)가 1987년까지 지속됐다. 하지만, 10여년이 흐른 뒤 80년대 초반 폴란드 레흐 바웬사의 자유노조운동이나 헝가리의 온건적인 자유주의 성향의 개혁, 그리고 소련 말기 체코의 벨벳 혁명의 시점이 됐다는 평이 있다.
그 밖에 멕시코, 아르헨티나, 브라질, 일본, 독일,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파키스탄, 심지어는 강철의 공산주의 제국 소련에서도 1월달에 시위가 있었다고 하니, 당시의 분위기를 짐작할만 하다. 이들 나라의 또다른 68혁명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이 찰지게 추가바람.
결국 68혁명은 베트남 전쟁과 소신공양으로 시작해 프라하의 봄, 프랑스 5월 혁명으로 정점을 맞았지만, 프랑스 총선에서 드골파의 초압승[23][24] 소련군의 프라하 진입과 그 해 말에 있었던 리처드 닉슨의 당선, 미국의 파워를 상징하는 사건인 아폴로 8호의 달 선회 비행과 함께 끝났다.[25] 조금 심하게 말하면 혁명은 끝나고 68년은 전세계 보수세력의 승리로 마무리 되었다.[26]
좌파 사상가인 슬라보예 지젝은 이를 두고 2011년의 뉴욕 월가 점령 시위에서 "한가지만 약속해달라. 여러분은 수십년 후 맥주나 홀짝이면서 '그때 우리는 순수하고 아름다웠지'라고 말하지 말아달라"라고 부정적으로 평하기도 했다.
[1] 주로 학계는 68운동, 운동권은 68혁명으로 부른다.
[2] 전통 뿐 아니라 자본주의도 포함한다.
[3] 이하의 글에서는 68운동을 '60년대 전체를 아우른 움직임'을 지칭한다.
[4] 이 당시 사회는 물질적 풍요의 사회였기 때문에(한국과 시차가 있지만) 고등교육의 기회가 상류층만이 아니라 그 아래 사람들에게까지 확장되었다
[5] 62년 미국 포트 휴런선언에서는 "그럭저럭 배부르고 등따신 세상이지만 우리들은 여기에 불만이 있음." 라고 선언하였다
[6] 미셸 푸코도 68의 영향을 받은 철학자 중 한 명이다.
[7] 이는 68운동을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슬로건으로, 지금도 종종 쓰인다.
[8] 다만 1980년대까지는 의외로 현상유지를 하는 편이었다. 본격적으로 서구 기독교의 궤멸이니 하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90년대부터이다.
[9] 실제로 유럽 교회의 예배 풍경을 보면 사람이 많아도 그 대부분이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인 경우가 많다(...)
[10] 정확하게는 68년 6월 치러진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기성세대들의 불안감으로 보수파가 압승하였지만 이후에 샤를 드 골이 자기 자신의 입지를 강화할려고 국민투표를 시행해먹었다가 투표에서 빠꾸먹어서(...) 물러난 것.
[11] 사실 1974년 대통령 선거에서 프랑수아 미테랑이 1차 선거에서 43.3%의 득표율로 여러모로 조건이 불리했음에도(풍피두가 사망하여 선거가 치러졌다.) 보수후보를 압도했지만 토론회에서 발리고 보수층이 대거 결집하는 바람에 2차선거에서 1.6%차로 석패했고. 1978년 총선에서도 2차 선거에서 보수층이 결집하면서 우파가 근소한 차이로 과반수를 점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12] 다만 독일에선 기민/기사-사민당간의 대연정체제에서 사민-자민당의 연립정권으로 바뀌는 등의 변화가 있었긴 했다.
[13] 다만 그랑제꼴은 제외
[14] 그 유명한 사르트르가 주필을 맡았다.
[15] 홍위병의 조리돌림이나 린치는 감춰지고 구습을 타파하는 문화운동으로 홍보되었다.
[16] 1968년 5월 혁명당시 파리 소르본 대학교에는 체 게바라와 마오의 사진이 동시에 걸렸다.
[17] 1960년대 초반까지의 프랑스 초등교육 역시 이러한 방침을 따르고 있었다
[18] 때마침 당시에는 유럽과 미국에 티베트식과 일본식 선(禪)불교가 유입되고 있었다
[19] 하지만 생각해보면, 원래 프랑스 쪽은 68년 이전부터도 이미 정치인 섹스스캔들에는 상당히 너그러웠으며, 진보적 입장과는 정반대로 이를 왕정에서 왕의 사생활은 묻지 않는다는 주의에서 이어져온 것으로 보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정치인 스캔들을 더 너그럽게 봐주기 시작한 가장 큰 계기는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의 사생아 스캔들이 더 크다. 뭐 그 경우엔 숨겨둔 딸이 들통나자 아예 자신의 사생아와 함께 국가행사나 가족행사에 같이 참석하는 비범하기 그지없는 대인배 행각을 벌였으니. 섹스스캔들에 대해서는 상당히 너그러운 프랑스 기준으로도 기가 막히기 짝이 없는 대인배적 행각인지라, 문자 그대로 전 프랑스가 기겁했다.(...) 물론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유대계 헝가리 이민자들의 자식이 프랑스의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판단은...
[20] 아나키스트 엠마 골드만의 연설에서 비롯된 말이다.
[21] 사실 80년대 히피 문화에게 치명타를 날린 여피 문화를 본격적으로 널리 퍼뜨린 장본인이 유명한 히피 운동가 제리 루빈이었다는 걸 보면 뭐...
[22] 물론 1968년 이전에 체코 뿐만 아니라 헝가리에서 소련의 스탈린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이 벌어졌으나 당시 소련 서기장이었던 흐루쇼프에겐 성가신 일일 뿐이었다. 헝가리 반공시위 역시 진압을 명령한 사람은 다름아닌 흐루쇼프다.(참고로 헝가리 반공시위가 일어난건 1956년의 일로, 스탈린이 죽은지 3년 뒤의 일이다.) 물론 흐루쇼프도 처음엔 용인하려 했긴했는데(동 시기 폴란드에서 고무우카의 집권을 용인한걸 보면 아예 헝가리에 군대를 보낼 가능성이 없었었을수도 있다. 이에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항목 참조. 다만 고무우카도 나중에 루이 필리프처럼 기대에 못미치는 정치를 펼치고 이게 경기침체하고 겹쳐 지지도가 급속히 떨어져서 인민들에 의해 사실상 쫏겨나게 되었다.) WTO(바르샤바 조약기구)탈퇴 구호가 나오자 바로 때려잡기로 결정했다고(...)
[23] 485석중 394석을 우파(득표율 58.1%)가 차지했고 좌파는 단 91석(득표율 41.9%)을 차지하는데 그쳤다.
[24] 동시기 이탈리아에서도 총선이 치러졌지만 기독교민주당주도의 연립정권이 계속집권하는데 성공했다.
[25] 타임지의 1968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된게 바로 아폴로 8호의 우주비행사들이다
[26] 다만 여기서 독일은 예외였고, 그 덕을 지금까지 보고 있다.
--------------------------------------------------------------------------------------------
프랑스68혁명의 역사와 의의 (출처 : http://tip.daum.net/openknow/38763871)
킹크랩| 2007.05.30 17:30 수정됨 |조회 6436|신고
프랑스68혁명의 역사와 의의
1. 들어가며
이 리포트에서는 프랑스 68혁명의 역사와 의의를 다룬다. 이미 30년이 지난 프랑스 68혁명을 다루게 된 이유는 현재의 학생운동이 68혁명의 내용과 이미지를 상당히 많은 부분 차용하고 있다는 판단에서이다. 원래 필자의 의도는 68혁명이 어떻게 현재의 남한의 학생운동에 구체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고, 그 함의를 비판적으로 고찰해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필자의 능력과 노력의 부족으로 이 과제는 다음으로 미룰 수 밖에 없고, 이 리포트에서는 68혁명과정에 대한 역사적 파악과, 현재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68혁명의 의의만을 간략히 다루고 있다. 어쨌든 현재의 진보운동과 특히 학생운동을 이해하는데는 68혁명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므로, 나의 고민에 이 숙제가 조금의 보탬이 될 수 있었다면 성공적인 공부였다고 평가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이제까지 장님이었다.
그들은 모든 원리에 오욕을 입히고 혼란시켰다.
그들은 우리가 사람들에게 말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입까지 봉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편리에 맞춰진 인형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타도하고자 하는 것은 체제이지 '인간'이 아니다.
다시 한번 우리는 모든 가면을 벗기고, 모든 침묵을 깨뜨리고
자신의 목소리로 외치지 않으면 안 된다.
'광대'의 비밀을 간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비밀의 배후에 '부패한 국왕'의 추악한 얼굴이 숨어 있다.
우리는 이제 착취자로서의 역할을 미래에까지 연장시켜서는
안 된다. 여기에 바로 우리의 혁명적 힘의 원천이 있다.
1968. 당시에 행동위원회 성명초안 [우리들은 전진한다]에서
1. 프랑스 68혁명과정에 대한 역사적 고찰
낭트르는 파리 외곽의 대학으로, 증가하는 학생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건설한, 전통이 짧은 대학이다. 1968년 3월 22일에 8명의 학생들이 얼마 전 전국 베트남위원회의 회원 6명이 연행된 데 항의하러 데앙 학부장의 집무실로 쳐들어갔다. 그들 가운데 다니엘 콘-방디라고 불리는 사회학과 학생이 있었다. 그는 1967년 11월에 학생과밀에 반대하여 10,000-12,000명이 참여한 동맹휴업을 조직했던 그룹의 일원이었다.
68년 이전 10년 동안 학생 수는 170,000에서 514,000으로 증가하였다. 국가는 재정 일부를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도로는 거대한 학생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으며 대학교와 칼리지가 이를 떠맡을 것을 요구했다. 1962년 이후 대학면적은 두 배로 늘어났지만 학생 수는 거의 세배가 되었다. 편의시설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으며, 학생과밀은 중대한 문제가 되었다. 데앙 집무실 점거 엿새만에 경찰이 투입되어 캠퍼스가 봉쇄되었다. 대학 내부의 학생 500명은 토론그룹으로 갈라졌다. 사회학과 학생들은 시험을 보이콧하고, '우리는 왜 사회학도가 되려고 하는가?'라는 제목의 팜플렛을 제작했다. 학생들은 강의실을 상설 정치토론장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요구했다. 강사들은 편이 갈리기 시작해, 일부는 학생들의 요구를 지지했다. 대학은 공간을 제공했지만, 4월 2일 학생 1,200명이 대형강의실 중 한 곳에 모였다.
3.22 운동
부활절이 지나자, 선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점거 한 달이 되는 4월 22일에 강의실에서 집회가 열렸다. 1,500명의 학생들이 참여하여 '자본주의적 기술대학의 전면거부'를 요구하는 결의문이 제출되었으며, 잇따라 노동자계급과의 연대를 호소하였다. '3.22운동'은 캠퍼스 내 동료 학생들로부터 지지를 얻고 있었다.
대학은 콘-방디를 포함한 관련 학생 8명을 징계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5월 3일 소르본느의 징계위원회에 출석하도록 요구받았다. 이들을 변호하기 위해 강사 4명이 자원했다. 동맹휴업은 교육부장관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이전해에 로디아세따와 사비엥에서 중요한 공장파업이 있었다. 로디아세따라는 화학섬유공장의 파업에는 23일간에 걸쳐 14,000명이 참여했다. 경영진은 그 해말에 파업노동자 92명을 해고하고, 공장폐쇄로 맞서기도 하였다. 1967년 6월 프조공장은 협상기간에 전투경찰이 투입되어 두 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1968년 3월부터 5월 사이에 르노 비이앙꾸르 자동차공장에서 모두 8건의 쟁의행위가 있었다. 알랭 뚜렝이 말한 '프랑스인은 지도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라는 지적은 점점 명확해져 가고 있었다.
흑적기, 개선문에 내걸리다
5월 3일 금요일 소수 학생들이 소르본느 앞 광장에 모였다. 낭트르에서 온 학생들은 그곳 소르본느의 활동가들과 결합하였다. '낭트르의 8인'은 다가오는 월요일에 징계를 받을 예정이었다. .
군중들이 불어나기 시작해서 대학당국은 마비상태가 되었다. 오후 4시경 경찰과 폭동진압경찰이 소르본느를 봉쇄하였다. 그들은 학생들을 체포하였는데, 그들은 헬멧을 쓰고 요소에 분산 배치되었다. 소식이 급속히 퍼져 시내 전역에서 학생들이 몰려왔다. 연행자를 구출하기 위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소르본느가 강제로 폐쇄된 것은 700년 역사에서 두 번일 뿐인데, 다른 한번은 나치가 파리를 점령한 1940년의 일이다. 전국학생연합(UNEF)와 전국고등교육 교원조합(SNESup)은 즉각 파업에 돌입하여 다음과 같은 요구를 제출했다.
1. 소르본느의 재개
2. 경찰 철수
3. 연행자 석방
이 단체들은 3.22 운동과 함께 하였다. 최초의 불만은 학생과밀로부터 제기되었지만, 이제는 더 넓은 세력들과의 연대 위에서 펼쳐지기 시작했다.
폭력 경찰
5월 6일 월요일, '낭트르의 8인'은 인터내셔날가를 부르면서 경찰 방어선을 통과했다. 그들은 대학징계위원회에 출석하러 가는 길이었다. 학생들은 파리 시내를 행진하기로 결정했다. 라텡 지구로 되돌아오는 길에 생 쟈크 거리에서 경찰로부터 습격을 당했다. 학생들은 보도블럭을 깨고, 바리케이트를 만들기 위해 차를 뒤엎었다. 경찰은 최루가스를 쏘아대고 증원을 요청했다. 생 제르멩 거리는 유혈전장이 되었으며, 공식발표에 따르면 그날 하루 422명이 체포되고 경찰 345명이 부상당했다. 이 날은 '피의 월요일'로 68년 운동사에 기록되고 있다.
화요일에는 대행진이 뒤따랐고, 경찰을 조롱하듯이 흑적기가 개선문에 내걸리고 인터내셔날가가 도로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그 주는 비슷한 투쟁이 계속되어, 거리는 군중들로 생동감이 넘치고 정치토론이 활발하였다. 수요일 경 여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투
중간계급은 경찰이 학생들에게 휘두른 야만성에 진저리를 쳤으며, 대다수의 노동자계급은 국가에 맞서는 학생들의 전투욕에 고무되었다. 5월 10일 금요일 고등학생을 포함한 학생 3만명이 당페르-로쉬로 근처에 모였다. 그들은 생 제르멩 거리를 따라 소르본느를 향해 행진했다. 생 제르멩 주위의 모든 도로는 충돌에 대비한 무장경찰이 차단하였다. 시위대는 경찰의 공격에 대비해 50개의 바리케이트를 세웠다. 한 목격자가 전하길, "우리 바이케리트는 이중이다. 하나는 3피트 높이의 돌무더기이고, 다른 하나는 20야드 뒤에 나무, 자동차, 쇠기둥, 쓰레기통으로 쌓아올린 9피트 짜리이다. 우리의 무기는 돌, 쇠붙이등 거리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다."
라디오 리포터는 거리에 60개의 바리케이트가 세워졌다고 말했다. 프랑스는 유럽1 방송의 보도와 뤽상부르 라디오를 청취하기 위하여 밤을 세웠다. 정부는 요구사항 3가지 중 2가지를 양보했으나, 연행자는 석방하지 않았다. '동료를 석방하라!'는 요구는 실현되지 못했다.
탄압
바리케이트는 경찰의 공격을 받았다. 학생과 시위대는 신경가스로부터 보호하고자 소다수에 적신 손수건을 사용했다. 싸움은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주택가에 경찰이 들이닥쳤고, 사람들은 끌려가 경찰차 안에서 두들겨 맞았다. 임산부가 맞았다는 보도도 있었다. 젊은 사람들은 옷이 벗겨졌고, 일부는 결박당할 때까지 사타구니를 걷어채였다. 가투가 끝날 때까지 367명이 부상당하고 460명이 연행되었다. 토요일 아침, 바리케이트를 치우기 위해 병력 수송차량이 들어왔으며, 생 제르멩 거리를 내달릴 때에는 야유와 조롱을 받았다. 5월 13일 월요일 학생들은 석방되었으나, 이미 불길은 걷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노동조합은 하루동안 파업을 지시했고, 같은날 파리에서 가두행진이 있었다. 적게 잡아 20만이 '드골 퇴진'을 외치며 가두행진에 참여했다. 지금 정부지도자는 적으로 간주되었다. 행진 후에 해산 요구가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따랐으나, 학생들 대다수는 소르본느를 점거하기로 결의했다.
속임수를 부리는 공산당
프랑스 공산당(PCF)은 낭트르의 시위학생들을 처음부터 비난했었다. 총비서 예정자, 조르즈 마르셰는 '폭로되어야 할 엉터리 혁명'이라는 글을 출판했다. 그는 이 글에서 3.22운동이 대부분 대부르조아의 아들들이며 노동자계급 출신의 학생들을 경멸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들은 아버지 사업체의 지배인이 되기 위해 혁명의 불길을 곧 잠재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5월 8일 당지도부는 운동의 규모를 보고 나서 기조를 바꿔 봉기를 장악하려 들었다. 그들은 지금 학생들의 선례가 작업장에서도 반복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사태를 방치해 공산당의 통제를 벗어나게 하기보다는 행동을 편들고 있는 양 보여지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사태를 또 한번 오판했다. 노동총연맹(CGT, 공산당이 좌우하는 노조)지도부 또한 노동자들이 이미 주도권을 잡고 난 직후에라야 작업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동자들의 행동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루이 아라공(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공산주의 작가)은 오데옹에서 열리는 집회에서 연설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집회에 참석한 3.22운동 사람들은 '전 인민의 아버지, 스탈린 만세'라는 풍자 섞인 외침으로 그를 조롱하고 야유했다. 당 정치국원 로제 가뤼디는 학생들이 주장한 경제의 자주관리, 자치위원회와 탈집중화 원칙을 수용했다. 또한 학생들의 목표와 일치감이 확산됨에 따라 '프라하의 봄' 사건에 대해서도 사죄했다. 그는 곧 PCF에서 쫓겨났다.
당에 봉사하는 것만이 진실?
PCF는 학생운동을 대개 '바쿠닌, 트로츠키주의, 단순 모험주의의 극좌, 쁘띠부르조아적 혼합물'로 분류하였다. 이즈음 당기관지 '뤼마니떼'에 익명의 글이 실렸다. 이 글의 필자는 청년부 장관이 콘-방디와 '접촉'했으며, 3.22운동에 자금이 건네졌다고 주장했다. 이런 비난은 완전히 날조된 것으로 매우 불순한 상상력의 극치였다. 물론 공산당이 이런 류의 전술에 의존하기는 이번이 처음도 마지막도 아니었다.
소르본느는 마르크스, 레닌, 마오의 포스터가 전면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오래된 기둥들을 장식함에 따라 밤새 변해갔다. 흑적기가 베트콩 깃발과 나란히 걸렸다. 트로츠키, 카스트로, 체 게바라 사진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 '금지하는 것은 금지되었다'라는 구호와 함께 나란히 벽을 도배하였다. 소르본느의 이러한 사진들은 학생운동의 이데올로기적 혼란상태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15인 점거위원회가 5월 14일 선출되었며, 위원회의 활동은 24시간으로 제한되었다. 중앙 원형극장은 밤낮을 가리지 않는 정치토론으로 요동쳤다. 시험제도는 '자본주의 사회에 편입되는 의식'으로 비판받았다. 3.22운동은 더 많은 노동자의 자식들이 자본가가 되기보다는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구별이 철폐되기를 바랬다.
혁명적 수집품
예술학교(Ecole de Beaux Arts)는 5월 14일에 점거되었다. 매일 아침 자유주제로 집회가 열렸다. 그리고 나서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만든 포스터가 제작되었다. 이 포스터들이 거의 즉각적으로 수집가들의 수집품목이 되어 부잣집에서나 발견되었다는 것은 커다란 아이러니이다. 포스터들은 '인류는 최후의 자본가가 최후의 관료와 함께 처형된 후에라야 자유롭게 살 수 있다', '1인 독재자에 반대하는 보편적 의지(The general will against the will of the general)', '상품은 인민의 아편이다' 등과 같은 슬로건으로 뒤덮였다. 당시의 정치적 분위기는 급진적 의사, 건축가, 작가들의 점거가 이어지고 있었다. 1968년에는 장 뤽 고다르와 프랑스와 트뤼포가 전국적 파업을 지지하기 위해 영화제 홀을 장악하는 바람에 깐느 영화제까지도 중단되었다.
파업
5월 14일 낭트 근처, 남부항공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하였다. 뒤이어 클레옹, 플렝, 르 망, 불로뉴가 모두 파업에 들어갔다. 클레옹의 청년 노동자들은 작업 교대시 공장을 벗어나길 거부하고서 경영진을 사무실에 감금하였다. 노조 지도부는 노동자들의 분위기에 눌려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남부항공 같은 곳에서는 노조 간부의 자문 없이도 무기한 파업을 결의하였다. CGT지도부는 완전히 기습을 당했으나,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영향력을 잃지 않으려 발버둥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주도적으로 요구 안을 제시하고 행동을 이끌었다. 노조 지도부는 짧은 시간이지만 주인을 지키는 개처럼 따라다녔다, 왜냐하면 이것이 노동자들에 대한 얼마간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5월 16일 몇 천명의 학생들이 35,000명의 노동자가 파업 중인 불로뉴 비이앙꾸르로 몰려갔다. CGT 간부들은 교류를 저지하기 위해 공장출입문을 봉쇄하였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공장지붕에 올라가 환호성을 외쳤으며, 위험한 철제난간에서까지 토론이 벌어졌다. 연대란 바로 이런 것이었으며, 소수가 가로막고 출입문을 봉쇄한다고 해서 막을 수는 없었다. 노르망디, 파리, 리옹의 공장은 집단적으로 사실상 문을 닫았다. 5월 18일 석탄생산이 중단되었고, 파리의 공공운송 또한 멈췄다. 전국철도가 뒤이어 파업에 동참했다. 가스, 전기부문 노동자들도 직장을 장악했지만 가정용은 계속 공급하였다. 만 명이 일하고 있는 생 나제르 조선소에 적기가 내 걸렸다. 5월 19일 주말에는 파업노동자가 이 백만 명, 122개 공장이 점거 중이었다고 보고되었다.
파업의 물결
프랑스은행의 파업 가능성이 사람들을 패닉상태로 몰고감에 따라 예금인출은 500프랑으로 제한되었다. 운송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자 석유비축분이 곧 바닥을 드러냈다. 5월 20일 월요일 해협을 운항하는 여객선이 뜨지 않았으며, 여행객들은 브뤼셀, 제노바, 바르셀로나로 가는 버스나 긴급수송차량을 타기 위해 줄지어 있었다.
포르투갈, 북부 아프리카, 유고 출신의 이민노동자들이 많은 시트로엥 공장은 여전히 가동 중이었다. 5월 20일 아침 6시, 이민노동자들은 작업교대를 위해 공장으로 가는 길에 그들을 환영하는 학생들의 피켓시위을 만났다. 외국인 청년 노동자들이 학생들의 리플렛을 보고 출근을 망설이고 있을 때, 인근 공장에서 동료들의 시가행진이 들이닥쳤다. 시트로엥 공장도 그렇게 파업에 들어갔다. 5월 21일 금요일, 섬유산업과 파리의 대형백화점들도 눈덩이처럼 불어가는 총파업의 물결에 동참했다. 오를리 공항의 항공관제사와 프랑스TV(OPTF)는 이미 그 전날 목요일에 투표를 통해 파업에 돌입했다.
5월 20일 프랑스TV 스탭진은 다음과 같은 요구 안을 제출했다.
1. 일주일 40시간 근무
2. 퇴직연령 하향조정
3. 1963년에 제정된 파업금지법 폐지
4. 최소임금 일주당 1000프랑 보장
5. 정부간섭 철회
총파업
2주간에 걸친 총파업에 9백만 이상의 노동자가 참여했다. 어떤 사람은 "수요일에는 장의사까지도 파업했다. 지금은 죽기에 적당한 때가 아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노동자들은 위대한 능력을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가스와 전기부문 노동자들은 파업에 동참했지만, 몇 번의 짧은 공급중단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파리에서 식료품 공급은 초기엔 중단되었으나 정상으로 재개되었다. 체신노동자들은 긴급전보를 배달하는데 동의했다. 인쇄노동자들은 TV와 라디오의 미디어 독점을 원하지 않았으며, 신문사가 '정보전달이라고 하는 본연의 역할을 객관성을 가지고 수행'하는 한에서 신문을 찍는데 동의했다. 일부에서는 신문을 인쇄하기 전에 헤드라인과 기사내용의 수정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일은 대개 '르 피가로'나 '라 나시옹' 같은 우익 신문에서 일어났다. 어떤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의 요구에 따라 생산이 이루어졌다. 브레스에 있는 CSF공장에서 노동자들은 파업참가자들이나 시위자들 모두에게 중요한 워키토키를 생산했다. 생 우엥의 왱더 건전지공장 파업위원회는 CGT의 개혁주의 노선에 찬성하지 않았으며, 노조관료들과 대화하려하기 보다는 관계를 끊기로 결정했다.
노동자 도시
1968년의 모든 운동과 사건들은 낭트에서 그 정점에 도달했다. 5월의 일주일간 그 도시와 그 외곽지역을 노동자가 혼자 힘으로 통제하였다. 권력과 정권의 낡은 바람막이들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삶과 도시를 장악하는 광경을 무기력하게 방관하였다. 5월 24일 농민들이 노동자와 학생들간의 연대에 대해 항의함에 따라 도시 둘레에 장애물이 설치되었다. 운송 노동자들이 도로 장애물을 차지하고 모든 진입차량을 통제했다. 가솔린 공급도 통제를 받아 노동자들의 허락 없이는 유조차가 들어 올 수 없었다. 유일하게 가동되는 가솔린 급유기는 의료용으로 확보되었다. 노동자와 농민은 중간상인을 거치지 않음으로써 식료품 가격을 인하할 수 있었다. 80쌍띰므였던 우유가 이제는 50쌍띰므에 팔렸다. 토마토는 킬로당 48쌍띰므로 떨어졌다. 이같은 가격인하를 보증하기 위해, 가게는 파업위원회가 만든 스티커를 눈에 잘 띄는 곳에 붙여야만 했다. 그 스티커에는 "이 가게는 영업을 허가 받았습니다. 이곳의 가격은 조합에서 항상 감독하고 있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교사와 학생은 탁아소를 차려서 휴교기간 중에 파업노동자의 아이들을 보살폈다. 여성들은 도시 곳곳에서 매우 활발한 활동을 펼쳤는데, 파업에 참여하는 것뿐 아니라 식품공급을 담당하는 위원회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짧았던 낭트에서의 일주일은 그렇게 상이한 조건에서도 노동자들이 지역을 접수해서 사회주의 방식으로 운영할 수 있다는 최고의 본보기이다. 사회를 다양한 방식으로 창조할 수 가능성은 낭트 한 곳에 그쳤으며, 불행하게도 68년의 그날 이후 다시 원상태로 되돌아가 버렸다.
개혁과 변화를 위한 조치
정권유지에 두려움을 느끼며 사라져가는 권력을 무디게 관망하고 있던 드골은 5월 24일 텔레비젼을 통해 전국에 연설을 하게 된다. 그는 '국민들의 보다 광범위한 시위참여와 그러한 행동으로 초래될 결과에 대해 보이고 있는 직접적인 관심'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그리고 나서 드골은 '개혁과 변화를 위한 조치'로 국민투표를 제안했다. 같은 날, 3.22운동은 3만명이 바스띠유 궁까지 행진하는 시위를 조직했다. 경찰은 정부청사(the Ministries)들을 최루가스나 경찰을 동원하여 방어하였으나, 증권거래소는 무방비상태로 방치되었다. 이즈음 도끼, 각목, 쇠파이프로 무장한 다수의 시위대가 증권거래소로 몰려가 불을 질렀다.
일부 좌익그룹의 기가 꺽인 것도 이즈음이었다. 트로츠키주의 성향의 JCR(혁명적 공산주의청년단)은 시위대를 라텡 지구로 되돌렸다. 전국학생연합과 통일사회당 같은 그룹은 재무부, 법무부 건물의 장악을 막고 나섰다. 콘-방디는 이 사건을 두고서, '우리(3.22운동)가 보기에, 이 모든 하찮은 것들을 쓸어버리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인지 미처 깨닫지 못했다. ...만약 5월 25일에 파리의 가장 중요한 정부청사들이 점거되었더라면, 드골 정권은 그 즉시 짜부라져 버렸을텐데...'라고 말했다. 콘-방디는 그날 밤 이후 강제로 추방당했다.
이러한 점거로 3.22운동 소속의 학생들이 드골 체제를 붕괴시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이 보여준 투쟁정신에 고무되었던 대다수 전투적 청년노동자들의 의식은 고양시켰을 것이다. 학생들의 투쟁은 비록 혼란스러웠고 가지각색의 다양한 이데올로기를 포괄하고 있었지만 시사하는 바가 컸다. 다이너마이트가 있었고 학생 봉기는 그 도화선이었다.
정부청사를 점거했더라면 사회혁명을 향한 일보전진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 파업 중인 1,200만 노동자 가운데 이전부터 조합과 관련 있던 노동자는 단지 3백만명 뿐이었다. 전국을 마비시켰던 총파업 과정에서 제출된 노동자들의 요구는 노조 지도자들의 그것을 훨씬 능가하였다. 온 나라를 뒤흔들었던 시위의 물결 속에서 노동자들의 기대치는 상승하였다. 정부청사를 점거했더라면 투쟁의 목적이 단지 자본가와의 경제적 협정만은 아니라는 인식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행동이 취해졌더라면 노동자들을, 당시 관건은 체제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지 단지 그것을 어떻게 땜질할 것인가의 문제는 아니라는 깨달음으로 좀 더 접근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1968년에 목격했던 모든 봉기에서, 여론전의 승리를 획득하기 위하여 그리고 이러한 의식을 행동으로 촉발시켜 무엇을 획득할 수 있는지, 어떤 승리가 가능한지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조직화된 그룹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학생운동이 만약 정부건물을 장악했더라면 이러한 방향으로 한 발자욱 나가는 것이었으리라. 노동자들이 가두의 학생들이 벌인 투쟁에 고무되었다면, 전투적 노동자들은 관청 점거에 힘을 얻을 수 있었을텐데. 그리고 자본가로부터 임금 인상말고도 더욱 많은 것을 쟁취할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더라면 프랑스를 송두리째 뒤흔들 수 있었을텐데.
종결
5월 27일 월요일, 정부는 최저임금 35%, 통상임금 10%의 인상을 보장했다. 이틀 후 CGT 지도부는 50만 노동자가 파리를 가로지르는 가두행진을 조직했다. 파리는 '인민의 정부'를 요구하는 포스터로 뒤덮였다. 불행하게도 대다수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 스스로가 장악하려 나서기 보다는 지배자를 교체하려는 관점에서 사고하고 있었다. 드골과 그의 충복들은 혁명의 가능성에 질겁해서 생 디지에 전투비행장으로 피신했으며, 육군참모총장과 협의를 통해 만약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육군의 도움이 필요하게 된다면 의지할 수 있을런지 타진하였다. 5월 30일 그는 다시 프랑스 텔레비젼에 나타나서 국민투표 계획을 철회하는 대신 40일 내의 총선거를 약속했다. 드골은 상투적인 방식으로 만약 '학생들의 공부를 방해하고 노동자들이 일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런 세력(공산주의자와 아나키스트)때문에 프랑스 국민들이 정상생활을 하지 못하고 고생을 한다면', 더욱 강력한 조치를 강구하겠다고 공언했다. 드골의 연설이 있고 나서, 공장에 남아있는 파업노동자들을 해산하기 위해 CRS가 파견되었다. 6월 5일, 대부분의 파업이 끝나고 자본주의 내부에 평상시 같은 분위기가 다시 찾아들었다. 그날 이후까지 계속된 파업들은 무장차량과 화기가 동원된 군사작전으로 파괴되었다. 고립되어 벌이는 각개전투들은 이길 가능성이 없었다.
눈앞에서 날아가 버린 승리
모든 거리시위가 금지되고, PCF는 잔존하고 있는 행동위원회를 파괴하기 위해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체면을 차리려 하였다. 6월 말경 대학은 다시 문을 열었고, 흑적기는 소르본느에서 끌어내려졌다. 사람들은 이러한 패배와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보수주의의 확실성으로 돌아섰다. 총선거에서 드골은 투표의 60%를 획득했다. 권력 장악력은 다시 강화되었다. 1968년 당시의 사회체제는 오늘날 대다수 서구 유럽국가에 복제되었다. 5월 소요기간 중에 그 체제는 격랑에 휘말렸고, 드골은 대중운동을 분쇄하기 위해 군대를 투입해야 할거라고 예측했었다. 그랬더라면, 거리는 5년후의 칠레처럼 유혈이 낭자했으리라. 콘-방디와 3.22운동은 지시자와 복종자 간의 노동분업이 사라진, 노동자평의회에 기반한 무계급 사회를 고무하였다. 그러나 명백하게도 미래사회에 대한 이러한 비전은 다른 좌파와 공유되지 못했으며, 그들이 수행한 역할은 기존의 장애물을 극복하기 보다는 오히려 더 많은 난관을 조성했다. 국가권력이 붕괴되어 가자 낭트의 경우처럼, 노동자계급이 직접 주도하여 도시를 제어하고 관리할 수 있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었다. 가장 활동적인 파업 노동자는 가장 진보적이었으며 노조 지도자들보다도 더욱 통찰력이 깊었다. 노동자계급은 단순한 요구 이상으로 쟁취해야 할 것을 보여주었으며, 그러한 투쟁으로 자본가와 맞섰다.
스탈린주의자
궁극적으로 68년 혁명은 왜 실패하였는가? 사태가 결정적인 국면에 이르렀을 때 의견, 혹은 전술상의 협조는 존재하지 않았다. 상당한 영향력이 있던 PCF는 선거에서 자신들의 의석이 늘어나리라 믿었기 때문에, 그들이 통제하고 있지 못한 운동들에 대해서는 모두 적대적이었다. 노조 지도부는 노동자들의 관심을 '빵과 버터'에 국한시킴으로써 그들의 요구를 가라앉혔으며, 폭넓은 정치적 이슈들로부터 멀어지도록 조장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훌륭한 열정을 가졌지만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풍부하게 사고하고 있지 못했다. 너무 많은 것들이 우연에 내맡겨졌고, 전체 운동은 터널 끝에 존재할 것만 같은 자유의 횃불을 필사적으로 찾아나서는 눈먼 장님처럼 휘청거리는 듯 했다. 68년 반란으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우리는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가 민중들의 전체제에 대한 문제제기 속에 반란의 격랑에 휘말리는 것을 보았다.
학생들의 기개와 대담함에 불이 붙은 노동자계급이 현 체제의 한계 내에서는 수용될 수 없는 요구를 제기함에 따라 68년 사건은 매우 급속하게 전개되었다. 총파업은 노동자계급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아주 단호하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더 많은 협력과 조직이 필요하였다. 노동자들은 공장위원회 간 연대조직의 건설과 대표자가 실질적인 문제들을 다룰 수 있는 메커니즘을 창조하길 원했다.
타협에서 반란으로
반권위주의 좌파는 비록 매우 활동적이었지만, 파업 노동자들 가운데에서 너무나 미약했다. 파업 중인 여러 노동자들은 행동을 통일하여 국가를 무너뜨리려 하였다. 프랑스는 이미 경제적으로 혼란에 휘말렸으며, 국가는 약화되어 가고 있었다. 노동자위원회와 작업장의 실질적 민주주의 덕분에 좀 더 강력하게 협상에 임할 수 있었으며, 드디어는 전면적인 반란을 가능하게 하였다. 일단 공장이 자주관리 상태에 들어간다면, 국가는 패배하는 꼴이 된다. 앞서 설명한 바대로 자주관리안은 제출되지 못했다. 기층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관점을 대변해줄 효과적인 민주주의 의사결정 메커니즘을 원했다. 노조 지도부는 이를 두려워하여 교묘하게 회피하였다. 그러나 민주주의적으로 선출된 대표자를 통해 공장위원회는 국가가 수용할 수 없는 요구사항을 제시할 수 있었다. 그것은 '누가 프랑스를 책임져야 하는가?'하는 문제를 제기하였다. 자본가의 가면을 벗길 기회가 왔을 때, 확실하게 잡아채야만 한다. 체제가 약점을 노출했을 때, 그것을 파괴하고 대체해야만 한다. 그것은 단지 우리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류의 미래를 위한 길일 것이다.
2. 프랑스 68혁명의 원인과 의의
그 동안 5월 혁명의 원인에 관해서는 혁명직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학자들이나 당시 혁명참가자, 언론 등에서 수없이 많은 이론들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3가지 원인에 있어서는 대략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첫째 원인 - 대학이 당면한 문제들
프랑스 대학이 당시 고등교육정책에서 실패하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대학은 학생수의 양적 팽창으로 상류층에서 중산층 자녀들이 대거 대학에 진학하여 대중화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변화를 거부하고 따라서 효율적인 고등교육의 기능을 수행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전후 1945∼1950년의 베이비붐 세대 때 출생한 아이들이 성인이 되자 대학생들 수는 급격히 늘어나 1961년에 23만 명이었던 데 비해 1968년이 되면 2배 이상 증가하여 약 6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법학부와 인문학부는 각기 3백 퍼센트와 2백50퍼센트의 증가율을 보였다. 하지만 대학당국은 이들에게 적절한 교육시설을 지원해주지도 못하고 있었다.
대형강의실, 낡은 건물, 구태의연한 강의내용과 평가제도, 암기와 주입식에 의존하는 전통적인 교수법, 기숙사 시설과 대학교원 수의 절대적인 부족 등을 들 수 있다. 정부당국이나 정책전문가들이 대학이 처한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했다고는 할 수 없다. 당시 교육부장관이었던 알랭 르피트의 회고에 따르면 개혁을 시도하려고 했지만 대학의 실권담당자들이나 교육부 관료들의 저항으로 실행할 수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양적으로 증가한 대학생수로 인해 신세대들은 졸업 후 과거의 선배들처럼 사회의 상층으로 신분상승을 할 가능성이 줄어드는 것을 감수해야만 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이유로 당시의 대학생들이 사회의 주변부로 소외되고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따라서 당시의 대학생들은 대학이 허구적인 민주주의 이데올로기를 양산해 낸다고 보고, 일찍이 기존사회를 비판하면서 저항하였던 선배, 폴 니장이 설파하였던 '부르주아 사회를 충직하게 지키는 개'가 되는 것을 거부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기존 지식인들을 철저히 경멸하였고 그들에게 더 이상 경의를 표하지 않았고 완전한 단절을 택하였다. 대신 새로이 등장한 소장연구자들이나 대학의 조교들에게서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혁명당시의 대학생들은 알뛰세르, 레비스트로스, 라깡의 저서들을 읽고 있었으며 신학문조류였던 제3세계 연구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둘째 - 드골의 관료주의
드골의 권위주의적 관료주의 역시 혁명의 한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10년 동안 유지되어온 드골 정권의 정치적 권위에 대한 반대가 주요한 이유라는 주장이다. 드골은 2차대전기에 프랑스의 구원자, 그리고 이후 대통령 재직기간 동안 강국 프랑스의 이미지를 느끼게 해준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1950년대 말부터 60년대 초기까지에는 그의 역할을 일정부분 인정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역할은 이 시기에 국한될 뿐, 60년대말이 되면 그는 사회의 다양한 욕구와 변화를 충족시키는 정책을 펴지 못하고 구태의연한 정책으로 국민을 실망시키고 있었다. 즉 그는 변화를 읽어내는 데 실패했으며 테크노크라트와 권위주의에 의존한 정치로 인해 지나친 관료화가 빚어낸 부작용을 제때에 개혁하지 못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프랑스의 국내정치를 혁명의 주요한 원인으로 지적하는 사람들은 소수이다. 5월 혁명이 국내적 정치요인으로는 제대로 해석해낼 수 없는 한계가 워낙 분명하기 때문이다. 혁명당시에도 드골 정권 타도구호가 그렇게 많았던 것도 아니었다.
셋째 - 5월혁명의 국제적 성격
5월혁명 참가자들은 중국혁명이나 쿠바혁명에서 새로운 혁명모델을 찾기 시작하고 미국과 서유럽 나아가 소련의 제국주의에 반대했으며 체 게바라를 영웅시하는 등, 60년대 말 세계가 당면한 문제들을 한꺼번에 제기한 것으로 파악하고 이로써 5월 혁명은 세계사적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일부학자들은 68세대, 또는 5월 혁명세대라 칭하기보다 이러한 국제적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 식스티즈라는 용어를 즐겨 쓰기도 한다. 프랑스의 지식인들과 대학생들에게는 60년대 초기부터 프랑스가 철수한 베트남에 미국이 개입하자 즉시 이를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즉 미국의 베트남 북폭 중단과 미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주장하면서 베트남 민족해방을 지지하였다. 이미 1965년부터 사르트르, 보부아르, 비달나케 양켈레비치, 쟝 셰노 등과 같은 지식인들이 대거 이 운동에 가담하고 있었다. 5월 혁명 도중에 북 베트남의 깃발이 나부낀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1967년 10월, 미국의 베트남 개입을 반대하는 시위에는 38개 운동단체가 약 3만5천명의 군중을 동원할 정도로 강도 높게 전개되게 되었다.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운동과정에서 지식인들과 대학생, 고등학생들은 정치적 역량을 배양하였고 이것이 고스란히 68혁명에 이전되었던 것이다. 프랑스의 지식인들과 대학생들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한 이유로는, 우선 알제리 전쟁을 반대한 전력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알제리는 2백년 동안이나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알제리는 프랑스의 총독이 파견되어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아예 프랑스의 3개 도로 분류되고 있었고 3백만 명이나 되는 프랑스인들이 알제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2차 대전 이후 알제리가 민족해방 전쟁을 시작하자 프랑스 지식인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군부와 우파의 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알제리 해방운동을 지지하였다. 알제리는 결국 1965년 프랑스로부터 해방된다. 알제리 전쟁을 계기로 소장학자들 사이에 제3세계연구가 굉장한 열기를 가지고 유행하게 되었다. 또한 스탈린주의를 충실히 따르고 있던 당시 프랑스 공산당과 공산당 산하기관으로 간주되던 노동총동맹(CGT)의 권위주의와 관료주의에도 당연히 거부반응을 느끼고 있었다. 더구나 혁명 이후의 안락한 생활을 헌신짝처럼 벗어던지고 제3국에 가서 다시 위험하고 고된 혁명운동에 뛰어든 체 게바라는 대학생들의 우상이 될 수밖에 없었고, 특히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전도 유망한 프랑스의 청년 레지스 드브레가 목숨을 걸고 게바라의 혁명전선에 참여한 것은 대학생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게바라가 68혁명이 발생하기 직전 1967년 10월 독재권력과 미국 CIA 의 개입으로 총살당하자 제국주의에 대한 환멸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알제리 전쟁에 반대하면서 지식인들과 대학의 단체들은 연대감을 느꼈고 이미 이론무장을 한 뒤 정치적 토론에서 정부나 우파 지식인들의 논리적 궤변을 바로 지적해낼 수 있었으며, 앞서 지적한 바대로 이러한 연대감과 정치의식은 고스란히 68혁명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이러한 68혁명의 국제적 성격은 혁명 당사자들이 꼭 드골 정부의 타도만을 주장한 것은 아니었던 것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넷째 - 대량 소비적인 자본주의에 대한 거부
무제한적인 소비와 이윤을 추구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거부반응도 혁명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여기에는 마르쿠제의 현대사회 비판의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혁명 와중에 나타난 유인물이나 대자보를 살펴보면 여성에 대한 억압과 흑인들의 비참함, 인종 차별등을 고발하고 있으며, 강대국 중심의 패권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혁명 직후 일부 마르크스 경제학자들을 중심으로 1968년 3월의 금융위기를 혁명의 주요한 원인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 2차 대전 이후에 프랑스는 유례없는 경제적 호황기를 구가한다. 그러다가 1966년부터 경제적 성장이 둔화되고 1968년에 접어들면 실업률이 갑자기 증가한다. 여기에 그 동안 경제불황으로 적자가 누적되었던 영국과 미국의 여파로 고정환율제가 무너지면서 전세계적으로 찾아온 금융위기가 가중되자 세계 자본주의가 구조적 모순을 야기한 것으로 평가되었고 이것이 혁명의 주요한 촉발원인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른바 경제위기설인 이 이론에 의존할 경우 왜 노동자들이 학생들의 주장에 공감하면서 대거 파업과 시위에 돌입하게 되었는가를 더욱 용이하게 설명해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5월 혁명, 미완의 혁명인가
프랑스 5월 혁명은 학생들의 저항, 노동자 가세, 노동자 저항의 실패라는 3단계 과정으로 전개되었고 결국 이 운동은 실패한 것으로 평가되던 것이 전통적 해석이다. 장기적인 국면에서 볼 때 누구나 인정하는 대학교육의 대중화, 성의 혁명을 동반한 여권의 성장, 엘리트 문화의 대중화를 꼽고는 있다. 그러나 혁명에 도달하려던 그 원대한 포부는 실패하고 말았다고 보던 것이 일반론이었다. 전략 전술의 실패요인으로부터 대중적 저항이 노동조합의 경제적 투쟁으로 흡수됨으로써 실패하였다고 보는 견해 등 무수하나 여기서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두 가지 견해만 소개하기로 한다. 첫째는 5월 혁명으로 인해 결국 자본주의가 자체 점검을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더욱 이론을 정교화하고 교묘한 수법으로 자신의 지배를 강화시켜가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5월 혁명은 결국 미완의 혁명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혁명세력이 자본주의 사회가 대거 강요한 여성노동에 항의하자 자본주의는 여기에 걸맞는 여성의 지위를 부여해주었고, 중앙집권화의 비효율성에 대해서는 즉시 지방분권을 대안으로 삼았으며 기타 재판제도를 새로 정비하고, 교육제도를 재편함으로써 폭발적으로 터져나온 모든 요구들이 자본주의 착취제도에 용이해지도록 흡수 재조정하였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생명력이 더욱 연장되었다고 해석하고 있다. 즉 대량소비사회인 자본주의를 비판함으로써 오히려 소비사회를 강화시킨 결과가 되고 말았다는 역설을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5월 혁명에 참여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채 자본주의의 대리인이 되고 말았으며 혁명 자체도 자본주의 체제가 초래한 결과물일 뿐이며 부르주아적 개인주의 발전의 한 단계일 뿐이라는 해석이다. 둘째는 68혁명에 대한 문화적 해석이다. 즉 혁명참가자들의 주장을 자유주의와 대중주의의 요구로 파악하는 것이다. 즉 대학생과 고등학생, 교원노조원들이 기존사회와 기존의 가치관에 저항한 것은 권위주의에 대한 반대라기보다 자유주의의 요구라고 보는 관점이다. 다시 말해 혁명이후의 사회를 관찰할 때 모더니즘 사회가 끝나고 포스트 모던 사회가 도래했다는 결론을 유출하기 위해 이러한 측면을 강조하는 듯하다. 60년대를 통해 절제와 억압에 기초를 둔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저항하여 육체적 쾌락과 성의 자유가 대안으로 제시되었으며, 영화와 출판물에 있어서도 포르노화, 폭력과 잔인함이 강화되고 일반화되었으며 마약과 환각제가 대중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전통적 문화와 공리주의적 가치관과의 결별로서 기존사회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68혁명은 목적없는 혁명이었으며 미래사회에 대한 전망이 없었고 과거의 혁명과는 달리 동지도, 적도 없는 혁명이었다는 것이다. 이상의 주장을 근거로 문화적 해석은 68혁명을 계기로 전통적인 모더니즘 사회는 포스트모더니즘 사회로 이행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러한 문화적 해석에서 독창성을 찾을 수 있지만 또한 강한 염세주의도 엿볼 수 있다.
68혁명의 성과
5월혁명 직후 68년 6월 총선에서 드골 정권이 승리하였다. 이를 이유로 많은 연구자들로부터 국민들이 안정을 택함으로써 혁명은 지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5월 혁명은 패배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겨우 이듬해 1969년 국민투표에서 드골이 패배하자 스스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났기 때문에 이의 직접적인 원인을 68혁명에서 찾는 데는 동의하고 그래도 혁명의 성과는 부분적일 뿐이라는 주장이 다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68혁명의 성과를 단기적으로 파악할 것이 아니라 이후 20∼30년의 간격을 두고 장기적인 시각에서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혁명이후 프랑스 사회는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하였고 68세대들도 이후 그들의 작업을 지속했기 때문에 혁명 이후의 과정이 모두 감안되어야 한다는 시각이다. 68혁명과정에서 제기되었던 문제들에는 몇 개의 이슈라기보다 프랑스 사회가 처한 그리고 세계 자본주의사회가 처했던 거의 모든 것들이 다 포함되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68혁명이 제기하였던 문제들을 '프롤레타리아', '육체적 욕망', '구조'라는 세 개의 등식으로 파악하고 있다. 혁명세대와 지식인들은 그 이후 이들에 대한 이론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사르트르는 68혁명 이후에도 『지식인에 대한 변명, 1972』을 출간했을 뿐만 아니라 지식인과 대중과의 대화를 계속했으며(1970), 알튀세르는 자본론을 다시 읽으면서(1971) 공산당원으로 머물러 있기는 했지만 『루이스에 대한 답변』에서 당의 고루한 도그마를 비판하였고(1973), 미셸 푸코와 롤랑 바르트는 68혁명에서 제기되었던 문제들을 더욱 발전적으로 전개시켜 서구체제의 허약성과 전통적 인간의 죽음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3. 결론
이상에서 프랑스 68혁명의 역사와 그 의의를 살펴보았다. 비록 이 리포트는 사실의 파악과 기존해석을 정리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지만 한가지는 확실한 것 같다. 즉, 프랑스 68혁명이 남한의 진보운동에 줄 수 있는 메시지는 프랑스 68혁명이라는 것이 어떤 특별하고 미래에 우리가 겪을 어떤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80년대를 통해 겪어왔고, 또한 지금도 진행중인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 참고문헌 ■
편집부 편, [프랑스 5월 혁명], 백산서당
정수복, [새로운 사회운동과 참여민주주의], 문학과 지성사
월러스틴, '1989, 1968년의 연속', [반체제운동], 창작과 비평사
이가진, "연재기획 - 30주년 맞는 프랑스 68혁명의 오늘" [길], 1998년 1월-3월
신진욱, 허준석, '1968: 거부된 과거, 감추어진 미래', [학회평론] 11호, 1995.
뤽 페리, 알랭 르노, [68사상과 현대 프랑스 철학], 인간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