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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06 – 주홍글씨(The Scarlet Letter, 1850) / 호손(Nathaniel Hawthorne, 1804~1864)

(출전: 동서고전 200선 해제3 / 반덕진 / 가람기획)


 식민지적 열등감 속의 19세기 미국문단에 찬란한 예술의 꽃을 피웠던 천재작가 나다니엘 호손의 작품. 간통을 했다는 이유로 가슴에 A(adultery, 간음)지를 달고 다녀야 하는 여인과, 간통죄로 괴로워하다 결국 죄를 고백하고 죽는 딤스데일 목사를 통해, 당시의 엄격한 청교도 사회와 죄인의 고독한 심리를 잘 나타내고 있는 작품이다. 청교도 사회의 비정함과 형식에 치우친 신앙의 타락, 그로 인한 인간사회의 비극, 그리고 죄의식으로 얼룩진 인간영혼의 어두운 심연이 매우 음울하게 그려져 있다.


a. 어두운 인간영혼의 탐구자

 <큰바위 얼굴>의 작가로 우리에게 알려진 나다니엘 호손은 뉴잉글랜드 지방의 메사추세츠 주 세일렘의 전통적인 청교도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세일렘은 그의 조상들과 관련된 무서운 내력을 지니고 있었다. 즉 그의 조상들은 영국에서 미국의 세일렘에 정착했는데, 그의 조상 중에는 그 당시 미국 초기의 도덕적 혼란을 보여주는 마녀사냥(Witch-hunting)때 가혹하고 엄격한 판결을 내리는가 하면 어떤 퀘이커교 여성을 공개처형시킨 사람도 있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악마를 몰아낸다는 대의명분 아래 무고한 사람들을 박해하고 인간의 양심과 존엄성을 해친 조상들의 반이성적 행위는 평생 동안 그의 마음에 깊은 그늘을 드리웠다.

  그가 4살 때 선장인 아버지가 항해중 객사하자 그는 가족과 함께 외가로 가서 살았다. 9살 때 공놀이를 하다가 다리를 다친 그는 3년간 학교도 가지 못하자 집안에서 스펜서나 밀턴 등의 고전작품을 탐독함으로써 육체적인 불행을 정신적인 풍요로 대신하고자 했다. 이처럼 어린 시절을 고독과 명상, 그리고 독서 속에서 보낸 그는 감수성이 예민하고 과묵한 소년으로 성장했다.

  17세 때 보든 대학에 입학한 그는 후일 시인이 된 롱펠로, 대통령이 된 프랭클린 피어스와 친교를 맺었다. 대학시절에도 그는 고독을 즐기며 비사교적이었다. 대학졸업 후 그는 고향인 세일렘으로 돌아가 무려 12년 동안이나 세상을 등지고 고독에 찬 은둔 생활을 했다. 이 시기에 그는 홀로 방에 틀어박혀 광범위한 명상과 창작에 몰두하며 작가가 되기 위한 길고 외로운 기간을 보냈다. 이때 호손은 항상 자기 마음속에 드리워져 있던 그늘의 정체를 파헤치고자 했다. 그는 세일렘과 청교도의 역사, 선조들의 행적에 대해 열중했다. 그 결과 선조들에 대한 원죄의식과 청교도정신에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되고, 이는 그의 평생의 문학적 주제가 된다.

  31세에 자신의 대학시절을 소재로 한 로맨틱한 소설 <팬쇼우>와 33세에 <큰 바위 얼굴>이 수록되어 있는 <트와이스 톨드 테일즈>를 출판했으나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했다. 아직도 세상은 그에게 더 많은 독서와 고독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 무렵 그는 세일렘의 치과의사의 딸인 소피아를 만나 사랑에 빠지면서 그의 고독한 내면생활에서 벗어나 다소나마 정신적 안정을 되찾았다. 영혼의 빛을 되찾은 호손은 소피아의 애정 속에서 가난하지만 매우 행복한 신혼생활을 보냈다. 소피아는 생계조차 꾸려나갈 수 없는 어려운 처지에서도 호손에게 격려와 비판을 아끼지 않은 훌륭한 내조자였다.

  42세에 그들은 콩코드를 떠나 세일렘으로 돌아갔다. 아내가 임신하게 되고 생활도 몹시 궁색한 상황에서 친구 피어스의 주선으로 세일렘의 세관에 근무하기도 했다. 어느 날 그는 세관의 버려진 위층 방에서 금실로 A자 모양의 수를 놓은 주홍색 천 한 조각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이 그의 최대 걸작 <주홍글씨>를 쓰는 실마리가 되었다.

  1849년 공화당 정부가 들어서자 민주당과 가까웠던 그는 실직하게 되고, 뒤이어 모친까지 사망하게 되자 한때 실의에 빠지기도 했으나, 이 불행이 중대한 전기가 되어 그의 아내의 격려 속에 <주홍글씨>를 완성했다. <주홍글씨>는 당시 대단한 호평을 받았고, 이후 <일곱 박공으로 된 집> <블라이드데일 로맨스> 등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전개했다.

  1853년 대통령으로 취임한 피어스에 의해 리버풀 영사로 임명된 그는 영국에서 4년을 보낸 후 이탈리아에도 머무르게 되는데, 이 무렵 쓴 작품이 이탈리아를 무대로 한 <대리석의 목양신>이다. 1860년 여름 미국 보스턴으로 돌아온 그는 창작력과 함께 점점 건강도 쇠퇴했다. 그후 친구 피어스와 함께 여행을 떠난 그는 미완의 작품을 남겨놓은 채 1864년(60세) 객지에서 사망, 콩코드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b.시대적 배경과 문학세계

 그가 살았던 19세기의 미국은 사회적으로 노예제도와 남북대립에 대한 비판적 논쟁이 격렬하게 일고 있었고, 경제적으로는 산업화의 여파로 뉴잉글랜드에도 새로운 공장이 건설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앤드루 잭슨 대통령이 미국의 민주주의 전개에 획기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변화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종교적 철학적 변화였다. 1세기 이상이나 뉴잉글랜드를 지배해오던 청교주의적 신정정치에 분열이 생기고, 한편으로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는 계몽사상이 퍼진 시기였다.

  이에 따라 <유니테어리언 파>(일신론, 프로테스탄트의 일파로 3위일체설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단일성을 주장하며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파)와 <초월주의>가 출현했다. 교리보다는 윤리적 운동에 중점을 두는 유니테어리언 파는 기독교 속에서 인간성과 자유의지를 역설하는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신, 인간, 자연을 우주영혼의 공유자로 보며 자연은 신의 마음의 표현이고, 인간의 양심은 신의 음성이며, 삼라만상은 그대로 신성을 지닌 것이라는 믿음이 새로운 이상사회 건설을 추구한 지식계급에 널리 확산되던 시대였다. 따라서 당시의 미국은 인간의 천성이 선하고 인간이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풍조가 지배적이었으며, 사람들은 무한한 발전을 꿈꾸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조류의 흐름 속에서 호손은 자신의 문학적 과제인 청교도 관습과 인간상에 대한 비판의식을 더욱 굳건히 확립하고 발전시켜나갈 수 있었다. 특히 당대의 유명한 초월주의자들인 에머슨 도로 등과 직접적인 교유를 가지면서 인간은 자신을 구속하는 과거와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자유주의적 경향에 한동안 심취하게 되었다.

  1841년 호손은 새로운 세계의 이상을 꿈꾸며 일단의 초월주의자들과 함께 <브루크 팜(Brook Farm)>이라는 유토피아적 농장건설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서의 생활을 통해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이상세계>와 <현실세계>와의 차이를 통감하고 곧 농장생활을 청산했다. 청교도적 죄의식과 비관론에 사로잡혀 있던 호손은 초월주의가 주장하는 이상적인 낙관론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에머슨 등의 초월주의자들로부터 쏟아지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다시 자신만의 침묵과 우울의 세계로 돌아갔다.

  이렇듯 호손은 당시의 시대조류인 자유주의와 초월주의를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에 무작정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문학세계의 폭을 넓히는 계기로 삼았다. 그리고 생생한 현실참여와 체험을 통해서 값진 예술의 꽃을 피울 수 있었다.


c. 인간성을 억압하는 청교도사회 비판서

 이 작품은 청교도 사상이 지배하던 17세기의 보스턴을 배경으로, 삼각관계에서 발생한 간통사건과 이에 대한 청교도 사회의 냉혹한 제재를 다루고 있다.

  주요 등장인물은 미모의 젊은 유부녀 헤스터 프린, 그녀와 불륜의 관계를 맺은 덕망있는 청년 목사 딤스데일, 아내를 빼앗긴 원한으로 복수의 칼을 가는 옛 남편 칠링워드, 그리고 불륜의 씨앗인 딸 펄이다.

  영생을 얻기 위해 엄격한 종교적 계율 밑에서 현세의 쾌락을 멀리하고 엄숙하게 살아야 하는 당시의 청교도들에겐 성도덕이 특히 엄했다. 성이 개방된 지금과는 달라서 간음은 절대로 용서를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뉴잉글랜드의 한 교수대 위에는 생후 3개월이 된 아기를 안고 있는 헤스터가 앞가슴에 수놓은 주홍색 A라는 글씨가 선명한 옷을 입고 군중들의 시선 속에 서 있다. A는 간통(Adultery)의 첫 글자였다.

  그녀는 주홍글씨에 의해 영원히 일상적인 평안의 세계, 현실적인 선의 세계로부터 추방되지만, 오히려 자신의 행위를 용기있게 인정하고 자신으로 인해 야기된 모든 비극을 꿋꿋이 감수하려고 한다.

  영국에서 태어난 헤스터 프린은 그곳에서 나이가 훨씬 많은 연상의 의사와 결혼했다. 비극은 그녀가 남편을 홀로 두고 먼저 식민지인 미국땅에 건너온 데서 일어났다. 그녀의 뒤를 따라 곧 오기로 되어 있는 남편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고 소식도 끊어졌다. 사람들은 그가 틀림없이 죽었다고들 했다.

  그러는 사이에 헤스터는 지금 품안에 있는 갓난 아이를 낳은 것이다. 남편이 없는 사이에 임신하여 낳은 아이이니 정상적인 아이일리는 없다. 때문에 엄격한 청교도들은 헤스터를 간통죄로 고소하여 형무소에 감금했고 재판결과 다음과 같은 선고를 내렸다.

  <<헤스터 프린은 교수대 위에서 부정한 자식을 안고 세 시간 동안 구경거리가 된 뒤 앞으로 일생 동안 죄의 상징인 A라는 글자를 가슴에 달고 살아야 한다. >>

  그러면 헤스터의 간통 상대는 누구였을까? 그녀는 총독과 늙은 목사, 그리고 젊은 성직자인 딤스데일의 힐문에도 입을 굳게 다문채 상대방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그런데 군중 속에는 오랫동안 행방불명 되엇던 그녀의 남편 칠링워드도 끼여 있었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오는 도중 여러 가지 재난을 만났다. 그동안 겪었던 어려움으로 얼굴도 크게 변한 상태였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 헤스터의 간통 사실을 알게 되자 상대방에 대한 복수를 맹세한다. 자신의 이름도 칠링워드라 고치고 의사로서 이 도시에 머무르게 되었다.

  반면 숨은 죄인인 딤스데일 목사는 외면적으로는 청교도 사회의 성스러운 목사요, 정신적 지도자로서 존경을 받지만, 내적으로는 자신의 죄를 내적으로 고백하지 못하고 깊은 죄의식에 사로잡혀 하루하루를 처절한 고통 속에서 보내는 인물이다. 그는 은밀한 죄책감과 양심의 가책으로 자신을 점점 어둠의 골짜기로 몰아넣고 있었다. 이처럼 딤스데일이 스스로 죄를 고백하지 못하고 죄의식의 고통으로 신음하는 것은 그가 칠링워드나 다른 청교도 시민들처럼 대서양을 건너와 청교도 공동체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이상주의자였기 때문이다.

  한편 이 작품의 또 다른 죄인인 칠링워드는 아내인 헤스터의 부정을 알고서 무서운 복수를 결심한다. 늙은 그는 자기의 신분을 감추고 <냉혹한> 의미의 칠링워드라는 이름으로 사악한 정열에 사로잡혀 고립 속으로 빠져든다. 그는 펄의 아버지가 발견되지 않는 한 지상의 부정은 제거되지 않는다는 그릇된 신념을 가짐으로써 고통 속에 성격이 왜곡된다. 무서운 악마로 변신한 칠링워드는 마치 악마의 마법에

끌리듯 성스러운 목사 딤스데일에게 접근하고 마침내 마음의 병을 고백하려 하지 않는 그의 가슴 속에서 주홍글씨는 발견하게 된다. 그가 바로 자신이 찾던 펄의 아버지요, 복수의 대상임을 알아낸다.

  헤스터는 형기를 마치고 교외의 초가집에 조용히 살면서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세 살이 된 그녀의 딸 펄(마태복음의 <값진 진주>에서 따온 이름>은 친구도 없이 자유분방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러나 딤스데일은 헤스터와 나란히 형벌을 받고 싶었다. 그러나 헤스터가 그의 이름을 숨기고 싶어했기 때문에 그 기회를 잃고 말았다. 그에게는 스스로 죄를 고백하고 형벌을 받을 용기가 없었다.

  7년이 지난 어느 오월의 밤이었다. 딤스데일은 밤일에서 돌아오는 헤스터 모녀를 불러 세우고 셋이서 손잡고 교수대 위에 서자고 제의한다. 그의 고민을 알게 된 헤스터는 칠링워드에게 딤스데일을 용서해달라고 간청하지만 복수의 화신이 된 남편은 그 말을 거절한다. 헤스터는 숲에서 목사를 만나 남편의 정체를 밝혔다.

  축제일에 딤스데일 목사는 설교를 하게 되었다. 교수대 위에 서서 훌륭한 기념설교를 한 후 헤스터 모녀의 손을 잡고 손을 잡고 청중들 앞에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숨을 거둔다.

  이렇듯 칠링워드는 지상에서의 완전한 세계의 실현을 위해 인간 마음의 신성함을 짓밟는 용서받지 못할 죄악을 저지른다. 그의 존재의 의미는 어디까지나 딤스데일에게 달려 있어 복수의 대상을 잃은 칠링워드는 급격히 기력이 떨어져 1년 이내에 죽고 만다.

  호손은 그에게 일말의 동정도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칠링워드는 지적 교만에 의해 인간성을 상실하고 인간마음의 신성함을 파괴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손은 육욕과 위선의 죄를 지은 딤스데일에게는 인간으로서의 연민과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칠링워드는 반인간적 심성으로 딤스데일의 영혼을 분해하다가 풀잎처럼 시들게 되지만, 딤스데일은 불길 같은 설교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죄의 고백과 함께 치욕적이지만 떳떳한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칠링워드로부터 그의 영혼을 구한 것이다.

  딤스데일의 구원은 오랜 고행과 참된 고백으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것은 살아 있는 주홍글씨라고 할 수 있는 죄의 산물인 펄 없이는 불가능했다. 딤스데일이 헤스터와 펄을 껴안은 행위야말로 자신의 비밀을 고백한 행위이며 속죄와 구원을 동시에 얻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펄은 죄의 실체이지만 죄, 형벌, 사랑과 구원의 상징으로서의 역할을 완수함으로써 헤스터와 딤스데일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데에

소임을 다하고, 마침내 그녀의 눈물로써 죄의 상징에서 벗어난 펄은 기쁨과 슬픔 속을 걸어갈 수 있는 인간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그후 헤스터는 고국으로 돌아가 딸을 잘 키워 시집보낸 후 다시 이곳을 찾아와 바닷가 오두막에 혼자 살면서 불행한 여자들을 돕다가 여생을 마친다.

  이처럼 주홍글씨 <A>를 중심으로 상상과 현실의 세계를 넘나들며 펼쳐진 인물들간의 심리적 갈등과 고뇌는 인간과 삶에 대한 호손의 문학적 깊이가 얼마나 첨예했던가를 보여준다. 호손은 <A>자 하나로 딤스데일을 깊은 고뇌와 뉘우침으로 어둠 속을 헤매게 하고 칠링워드를 복수의 화신으로 변신케 하며, 헤스터를 치욕과 고립의 세계에서 방황케 했다.


d. 문학사적 의의

   청교도적 삶의 허구 묘사

 이 작품은 1640년대 보스턴 식민지 사회에서 일어난 일들을 소재로 하여 청교도가 지배하는 신정일치의 식민지 사회에서 억압되는 인간의 모습을 19세기의 시대정신을 통해 비판하고 있다. 호손은 유토피아적 신세계를 건설하려는 청교도인들의 불완전성을 파헤쳤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3가지 형태의 죄, 즉 세상에 드러난 죄(헤스터 프린), 숨겨진 죄(딤스데일), 그리고 용서 못할 오만의 죄(칠링워드)를 다루고 있다. 동시에 칠링워드의 타락과 죽음의 파멸을 통해 에덴 동산이 상징하는 이상주의의 꿈이 얼마나 위험하고 실현불가능한 것인가를 보여주었다.

  이에 반해 헤스터와 딤스데일은 처음부터 죄를 범한 불완전한 인간으로 묘사하면서 이들을 통해서는 죄를 범한 인간, 즉 불안전한 인간이 바로 참된 미국인의 형상이라는 것을 암시하며 동시에 기계문명 속에서 <정원의 신화>를 꿈꾸고 있는 작가와 동시대의 미국인들을 통렬히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도덕적 진실성 추구

 호손은 그의 작품들을 통해 도덕적 진실성을 밝히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그의 문학세계가 죄악으로 인해 야기된 고립과 비극이라는 인간사의 어두운 내면에 중점을 두기는 했지만 오히려 호손 문학의 진정한 의의는 죄를 통한 구원의 완성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호손은 죄를 다루되 인간은 자신의 죄로 인하여 보다 높은 차원의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깨달음을 역설적으로 전달했다. 그는 죄로 인한 비극적인 인간의 심리를 그리면서 고통받는 모든 죄인에게 동정심을 보냈으며, 죄를 미워하기보다는 용서했던 따뜻한 감성의 인본주의자였다. 따라서 그의 근본사상과 그의 작품이 갖는 궁극적인 목적은 인정이 넘치는 인간과 죄 없는 밝은 세계에 대한 열망, 그리고 그것에 이르는 올바른 길을 제시하는 데 있었다.

  이처럼 인간에게 우러나는 동정과 온화함에 대한 사고는 호손의 도덕적예술적 신념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상상이 아무리 어둡다 할지라도 문학의 세계에 있어서의 호손의 생명은 언제나 강렬한 것이었다. 그러기에 미국 최초의 문화적 르네상스기에 그는 그 열기를 주도할 수 있었으며, 미국을 넘어 세계적인 작가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인간본성 속의 신성을 믿으면서도 죄의 고통과 자각을 통한 인간구원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작가는 삶의 처음에서 끝까지 인간성의 심연을 그의 문학적 소재로 삼아 인간의 도덕적 진실을 추구했다. 그는 인간영혼의 탐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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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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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식품회사에 대해서는 퀘이커 오츠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퀘이커

종교친우회(宗敎親友會)

Religious Society of Friends ‏

퀘이커의 문장

퀘이커의 문장

결성일 17세기 영국교회로부터 분리

유형 회중교회, 종교 단체

목적 복음 전도, 예배

활동 지역 전 세계

회원 86,837여명 (미국)

공식 언어 다국어

웹사이트 http://www.quaker.org/


창설자 조지 폭스

종교친우회(宗敎親友會, 영어: Religious Society of Friends) 또는 퀘이커(영어: Quaker)는 17세기에 조지 폭스가 창시한 기독교의 교파이다. 퀘이커라는 이름은 하느님(하나님) 앞에서 떤다는 조지 폭스의 말에서 유래했다. 1650년대에 영국의 조지 폭스(George Fox)가 제창한 명상운동으로 시작하였다. 퀘이커는 올리버 크롬웰의 종교적 관용정책으로 크게 확산하였으나 이후 찰스 2세가 국가교회 정책을 펴면서 정부에 의해 탄압받았다. 퀘이커 신앙도 윌리엄 펜이 불하받은 북아메리카 식민지 영토에 도시(현 미국 펜실베이니아)를 세움으로써 종교의 자유를 허용받았다.


목차  [숨기기] 

1 명칭

2 신앙

3 예배

4 미국의 퀘이커

5 대한민국의 퀘이커

6 각주

7 외부 링크

명칭[편집]

퀘이커란 하나님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의미에서 스스로를 '친우회'라고 칭했다. 창시자 조지 폭스의 "하나님 앞에서 벌벌 떤다"는 말에 따라 퀘이커라고 불리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종교친우회'라고 명명하고 있다.


신앙[편집]

퀘이커 교도들은 청교도와는 달리 칼빈주의의 예정설과 원죄 개념을 부인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안에 신성(神性)곧 하나님의 성품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를 기르는 법을 배우기만 하면 되고, 그렇게 신성만 기른다면 모두가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1]


예배[편집]

퀘이커의 예배특징은 침묵의 예배로써, 퀘이커 각자는 침묵을 통해 내면의 빛을 볼 수 있도록 한다. 장소는 특정한 공간적 제약을 받지 않으며, 예배를 이끌어가는 별도의 성직자나 목사를 두지 않는다.


미국의 퀘이커[편집]

영국에서 많은 지지를 받지 못했던 퀘이커 교도들은 아메리카 대륙을 그들의 피난처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극히 일부는 뉴잉글랜드나 캐롤라이나로 이주했으나 대부분의 퀘이커 교도들은 자기들만의 식민지를 원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경멸섞인 눈초리를 받아온 종파였기 때문에, 궁정에서 영향력 있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 왕으로부터 식민지 건설에 필요한 특허장을 얻어내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미국의 제 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은 퀘이커 교도이다.[1]


대한민국의 퀘이커[편집]

대한민국의 유명한 퀘이커 교도로는 함석헌 선생,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박성준 교수(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남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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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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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淸敎徒, Puritan)는 로마카톨릭교회의 의식으로 부터 영국(England)교회의 순결(purify)을 추구한 16세기에서 17세기 사이의 영국 개혁주의 프로테스탄트들이다. 당시 영국교회는 오직 부분적인 개혁을 주장하고 있었다.[1] 또한 원형적이고 전통적인 복음주의[2]를 지향했던 기독교인들을 통칭한다. 이들은 개신교 교인들로서 전통적 복음주의 안에서 루터주의 계열과 칼뱅주의 계열과 잉글랜드 성공회에 소속된 이들과 전통복음주의를 추구했지만, 계열을 추구하지 않던 이들을 포함한 다양한 전통 복음주의자들을 통칭해 일컫는 말이며[3] , 이런 신앙에 있던 사람들을 청교도라고 한다.[4]청교도들은 영국 종교 개혁이 불완전한 개혁이었다고 평가하여, 영국 성공회의 정부 중심의 성향과 로마 가톨릭교회의 잔재를 철폐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도덕적인 순수성을 추구하여 낭비와 사치를 배격하고, 근면을 강조하였으므로 영국의 중산층을 형성하였다. 또한 신학적으로는 인위적 권위와 전통을 인정하지 않고, 성경에 철저하고자 한 전통 복음주의인 성서주의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다. 영국교회가 핍박을 하자 미국으로 건너와서 청교도의 부흥을 이루었다.



E05 – 젊은 예술가의 초상(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 / 조이스(James Joyce, 1882~1941)

(출전: 동서고전 200선 해제3 / 반덕진 / 가람기획)


 20세기 거장 제임스 조이스의 두번째 작품으로, 작가의 자서전적인 소설이다. 종교적 분위기에서 성장한 한 젊은 주인공 스티븐 디달러스가 종교적 구속으로부터 탈출하여, 자유로운 예술을 위해 예술의 신인 다이달로스의 도움을 기원하면서, 파리로 떠날 때까지의 예술가로서의 성장과정을 그린 교양 성장소설이다. 세계 문학사에 <의식의 흐름>을 새겨넣은 대표적 모더니스트인 작가는 이 작품에서, 새로운 소설기법을 사용함으로써 주인공의 인생에 대한 도약과 그의 예술세계 창조를 향한 웅비를 고무적으로 다루고 있다.


a. 우울한 천재작가

 버지니아 울프 프루스트와 함께 20세기 문학사에 <의식의 흐름>을 새겨넣은 대표적인 모더니스트.

  조이스는 아일랜드의 더블린의 중류가정에서 태어났다. 정치적이고 성악과 농담을 좋아하는 아버지와 카톨릭 신앙이 두터우며 피아노를 잘 치는 어머니로부터 독자적인 언어감각과 음악성을 이어받았다. 여섯 살 때 예수회에서 설립한 클롱고즈 우드 칼리지 부속학교에 입학했으나 아버지의 실직으로 퇴교했다. 1893년 벨비디어 칼리지에 3학년으로 편입하여 5년간 줄곧 우수한 성적을 나타냈고, 1896년(14세)에 낸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의 영역본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그의 가장 오래된 글로 알려져 있다.

16세 되던 1898년 예수회 학교인 유니버시티 칼리지의 영문과에 입학했다. 고고한 상념에 사로잡혀 동료학우들과의 교우를 거부한 채 대학시절 동안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3개 국어를 완전히 마스터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조이스의 대학시절은 종교에 대한 최초의 회의와 함께 편협한 국수주의적 애국심에 대한 저항이 싹트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때 예이츠의 <태서린 백작부인>을 공격하는 동료학우들의 항의문에 서명을 거부하고, 몇 편의 논문과 수필을 발표하여 서서히 비평적이고 심미안적인 문학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1903년 모친의 급환으로 파리에서 급히 귀국했으나, 임종의 자리에서 기도해주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바람을 이미 신앙을 버린 몸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는데, 이 일로 평생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그해 아내가 될 노라를 알게 되었고, 각지를 전전하며 영어교사 생활을 하며 생활해나갔다. 1903년부터 써왔던 <더블린 사람들>을 둘러싸고 아일랜드 출판사와 생긴 갈등으로 두번 다시 고국 땅을 밟지 않았다.

  결국 <더블린 사람들>은 1916년(34세)에 가서야 출판이 이루어졌다. 작가로서 처음 쓴 단편 작품집으로서는 너무나 긴 진통 끝의 결실이였다. 그동안 조이스는 아일랜드의 대표적 시인 예이츠와 그의 소개를 통해 알게 된 에즈라 파운드와 늘 교신했으며 많은 도움을 받았다. 특히 <더블린 사람들>과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미국 출판은 에즈라 파운드의 적극적인 협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더구나 뒷날 알게 된 엘리어트 등 수많은 문인들이 그의 천재적인 예술성을 인정하지 않았던들 조이스의 불운한 일대기는 하마터면 세상에 빛을 못 볼 수도 있었다. 그만큼 그의 생활은 극도로 궁핍했고 게다가 지독한 근시였던 탓에 쉬지 않고 거듭되는 안질과 열 차례가 넘는 수술은 조이스로 하여금 점점 더 깊은 자기결벽증의 폐쇄적 증상으로 빠져들게 했다.

  또한 그의 몇 편의 대작들은 실험적이며 전위적인 작품의 영향으로 발표되기까지 숱한 난관을 거쳤을 뿐만 아니라, 복잡하고 난해하여 좀처럼 쉽게 감동을 얻기 힘든 상징예술의 정수가 되었다. 따라서 조이스의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의식의 흐름>의 문체와 기법상의 문체, 그에 따른 보들레르적인 상징과 구조, 또한 그의 독특한 심미안적 예술론의 이해가 선행되어야만 한다.

  1922년(40세) 파리에서 <율리시즈>를 출판하고 1939년(57세) 마지막 작품 <피네건의 경야>를 발표했다. 후자의 경우 12번이나 고쳐 쓴 곳도 있다 한다.

1940년 2차 대전중 파리가 함락되자 가족들과 함께 취리히로 돌아와 그곳에서 죽었다. 오늘날 그의 작품만을 취급하는 2개의 정기간행물 중

한 곳에서는 전적으로 <피네건의 경야>만을 다룬다는 사실을 그가 알면 기뻐할 것이다.


b. 의식의 내면을 추구한 작가들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마르셀 프루스트 등은 이른바 <의식의 흐름>이라는 인간의 내면적 의식을 추구한 현대소설의 선구자들이다. 그들은 종래의 근대 전통문학이 고수해왔던 사실주의, 자연주의의 소설형식을 과감히 깨뜨리고 인간의 복잡미묘한 내부의식을 그리는 데 몰두했다.

  그들의 작품은 한편으로 난삽하고 실험적이어서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문체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것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이론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상징주의와 정신주의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특히 조이스와 울프 두 사람은 날카로운 감수성과 함께 병적일 만큼 결벽증이 심한 실험주의자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 두 작가가 서로 교유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두 사람이 교유관계를 맺고있던 문인들을 생각해볼 때 그 실험주의적인 문학세계에 대해 서로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더구나 두 작가는 1차 대전의 충격을 맛보았고, 1900년대 초기의 세계적인 경제위기, 사회불안 등을 지켜보면서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인 <삶과 죽음>에 관한 의식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c. 한 예술가의 내면의식의 성장사

 이 소설은 주인공 스티븐 디달러스가 카톨릭 교회와 결별하고 예술가가 자신의 천직임을 발견한다는 내용의 자전적 소설이다. 어린 시절의 불분명한 의식을 동화체로 시작하여 차츰 의식이 성장해가는 과정을 거쳐 결국 자신이 희망하는 자유롭고 창조적인 예술가의 생활을 위해 스스로 망명의 길을 택하는 순간까지 한 예술가의 의식의 성장을 그리고 있다. 이것은 내면화된 문체, 즉 <의식의 흐름> 기법을 창시한 것으로서, 그리고 마지막에 예술의 신에게 이야기하는 부분은 아일랜드 민족을 인류와 직결시키는 과감한 저자 자신의 생각을 나타낸 것이며, 후일의 작품 <율리시즈>의 서장에 해당한다.


   제1장

 이 소설의 첫머리는 스티븐의 유년시절이 잠시 환상처럼 일렁이고 난 뒤 바로 학교생활로 펼쳐진다. 스티븐은 운동장에서 친구들이 공을 차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는데, 여기서 이미 우리는 그가 겪은 친구들로부터의 소외를 엿볼 수 있다. 육체적으로 작고 연약한 그는 급우들이 즐기는 난폭한 경기에 참여할 수 없다. 그는 왜소하고 눈이 나쁜데다, 집안도 변변치 못해 친구들에게 여러 가지로 놀림을 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놀림감은, 의외의 불운에 의해 오히려 역전되는 기회를 갖게 된다.

  라틴 어 시간이었는데, 스티븐은 이전에 안경을 깨뜨렸기 때문에 수업을 받을 수가 없었다. 그는 선생님의 허락을 받고 그날의 작문쓰기에 제외되어 있었다. 그러나 마침 교육감독으로 들어왔던 무서운 돌런 신부의 눈에 띄어, <게으른 꼬마 꾀보>로 취급당한채 자초지종의 전말을 얘기할 새도 없이 혹독한 매를 맞게 된다. 급우들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교장에게 이르라고 충동질을 한다. 스티븐은 자기도 모르는 힘에 이끌려 교장실을 노크하게 되고 교장선생님의 위로를 받고 나온다. 스티븐 디달러스는 이 일, 즉 그들의 적에게 일격을 가한 그 용기로 인하여 급우들에게 작은 영웅으로 환영을 받게 된다.

  스티븐의 이러한 성장기는 특히 당시에 처해 있던 조국 아일랜드의 문제와 스티븐의 우상이자 애국자인 파넬(아일랜드 독립당의 당수였으나 간통사건으로 실각했음)의 죽음에 대해, 파넬을 지지하는 아버지와 반대하는 신부들간의 대립으로 그의 의식에 중대한 영향을 받았다. 즉, 그는 그가 예술이라는 목표를 추구하는 데 있어 종교는 한 가지 세속적 장애물이라고 자각한다.


   제2장

 이러한 환경 속에서 스티븐은 예술지향의 한 젊은이로 차차 성장해간다. 부친의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학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된 스티븐은 집에 머물면서 산보, 유희, 그리고 독서로 시간을 보낸다. 그는 고독의 기쁨을 즐기며, 시를 쓰고 싶은 충동을 자주 느낀다. 스티븐은 이제 중학교인 벨비디어 칼리지로 되돌아왔다. 여기서 그의 고독은 급우들에 의해 한층 더해진다. 교실 밖에서 친구들과 타협하기를 거절하고 이러한 거절은 친구들의 야유에 의해 한층 고조된다. 예를 들면 급우들과 위대한 시인을 두고 테니슨이냐, 바이런이냐라는 문제로 다투었다. 테니슨을 선호하는 친구들에 맞서 그는 한 예술가의 위대성은 개인적인 도덕률이나 이단에 무관하게 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로 인하여 그는 곤욕을 당하기도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는 그들에 대한 분노가 사라지게 하는 힘을 느끼기도 한다.

  스티븐은 그의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과 화합하지 못하고 그들과의 거리가 점점 멀어져가는 것을 느낀다. 그 대신 마음속에서 타는 욕망의 불꽃이 그를 압도하려 하자 그의 마음은 이 격렬한 갈망을 억제하려 무척 애를 쓴다. 그리하여 그는 밤거리를 헤매다 불가피하게 매춘부와 성적 체험을 하게 된다. 동정의 상실은 순수하고 결벽한 스티븐의 양심을 크게 짓이겨놓았다.


   제3장

 그러나 뉘우침은 즉시 찾아왔다. 종교적 묵도기간에 신부는 지옥과 영원한 저주에 대해 무서운 설교를 행한다. 신부의 설교 한마디 한마디가 그의 양심을 깊게 파헤치자 그는 견딜 수 없어 마침내 신부에게 그 사실을 고백한다. 이처럼 엄숙한 기도주간을 통하여 오염되었던 그의 몸과 마음은 씻겨지고 이번에는 청순한 금욕생활에 들어간다. 이러한 종교적인 충격은 이 작품 뒷부분의 예술론과 함께 급한 호흡을 보이는 의식의 절정을 이룬다. 이때부터 그의 예술가로서의 소양에 굳건한 발판을 마련하게 되는 셈이다.


   제4장

 스티븐은 어느 날 신부로부터 신학교의 진학을 권유받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신부로서 적당치 않음을 의식하면서 그 제의를 거절한다. 그는 자신의 운명이야말로 어떠한 종교적, 사회적 구속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자기 자신의 지혜를 스스로 획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 종교적 세계로 은퇴하는 것보다는 세상에 참여해야 한다고 다짐한다. 신과의 불화로 하늘에서 지상으로 떨어진 추락천사 루시퍼(Lucifer)와, 부친인 다이달로스의 충고를 무시하고 하늘을 너무 높이 날다 지상에 추락한 이카로스(Ikaros)의 운명을 실감하면서 그는 종교를 버리고 예술에 종사하기로 결심한다. 즉, 신부가 아니고 그리스 신화의 명장 다이달로스(Daidalos)로서의, 즉 예술가로서의 길을 소명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예술가로서의 숙명을 명상하면서 행복에 넘쳐 홀로 바닷가를 거닌다.


   제5장

 이렇게 그의 생활은 미에 대한 열렬한 추구와 신앙인으로서의 성스런 몸가짐을 가꾸면서 자기의 미래를 탐색한다. 이 무렵에 친구인 린치와 예술과 미에 대하여 주고받은 대화는 그의 예술에 대한 감각과 사유를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후 스티븐은 성직에 대한 심한 회의에 잠기게 된다. 아일랜드의 교회 및 신부의 생활과 자기의 예술관과의 괴리를 느끼고, 드디어 아름다움만을 추구할 수 있는 예술, 자유로운 예술의 획득을 위해 파리로 떠날 결심을 한다. 그리고 스티븐은 자신의 일기 속에 예술의 신 다이달로스에게 다음과 같은 기도를 적어넣었다.

  <<늙으신 아버지시여, 늙으신 기술자이시여, 지금 그리고 영원토록 저를 도와주소서.>>

  이렇게 하여 그리스 신화의 명장 다이달로스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되어줄 것을 요구하고, 그를 구속하고 있던 전통과 인습의 그물로부터의 최후의 해방을 선포한다. 어린 새가 둥지우리를 떠나며 자초한 망명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d. 20세기 대표적인 모더니즘 작품

 이 소설은 종교적인 가정에서 출생하여 한때는 신학생이 되려다가 예술의 미에 눈을 뜨게 되어 마침내 그것에 인생을 걸게 된 작가 조이스의 정신적 성장단계를 다정다감한 청년 스티븐을 통하여 진지하게 묘사해내고 있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문학사에 있어서 근대의 사실주의, 자연주의 문학과 현대문학의 한 분기점을 이루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마치 산문시와도 같은 함축미와 일관된 상징, 정교하게 짜여진 횡적 구성, 형식적인 전통을 거부하는 이지적인 실험 정신은 인간의 내면을 꿰뚫는 현대소설의 귀감이다.

  이 소설은 조이스의 성장과정을 다룬 일종의 자전적인 정신사가 의식의 축을 이루고 있다. 한 예술가의 의식의 세계를 <의식의 흐름>이라는 새로운 기법을 추구하여 소설기법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것은 이전의 소설들의 주된 흐름인 사실주의나 자연주의의 현실적 묘사에서 벗어나 인간존재의 내면세계를 투영하고 있는 점에서 두드러진다. 그의 작품들은 이와같이 등장인물들의 성격 창조보다는 주인공의 의식의 내면세계를 밀도있게 추적하면서 현대소설로의 새로운 지평을 연 셈이다.

  현대소설은 인간의 현실적 삶이 이루어지는 사회반영인 근대소설과는 달리, 인간의 심리세계로 그 시선이 전환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조이스의 소설들에서 일관된 사건이나 성격구성을 파악하기는 매우 어렵다. 작품 속에 흐르는 의식의 양태를 독자들이 나름대로 종합하고 정리하여 일관적 흐름을 파악해야 한다.

  이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주인공 디달러스의 성장기에 대한 파악도 <의식의 흐름>을 통한 정리가 필요하다. 그것은 유년시절부터 신부들에 의해 교육되는 엄격한 학교생활, 대학에서의 예술에 대한 심취와 자기각성, 인격형성, 그리고 유학의 길에 오르는 시간적 흐름이 바로 주인공의 의식변화에 초점이 맞춰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바로 이러한 주인공의 의식변화와 내성적 성격의 변화에 소설적 형식의 기법이 가미되어 있는 셈이다.

  한편 이 작품은 에즈라 파운드(T. S. 엘리어트의 스승)의 도움으로 <에고이스트>지에 연재되었고, 1916년 미국에서, 17년 영국에서 각각 출판되었다. 조이스는 뛰어난 구성력과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주인공 스티븐 디달러스의 <영원히 미숙한> 정신을 통해 형식주의와 종교나 맹목적인 애국에 대담한 반기를 들고, 역시 <미숙한> 채로 그의 심미안적 예술관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E04 – 테스(Tess of the D'urbervilles) / 하디(Thomas Hardy, 1840~1928)

(출전: 동서고전 200선 해제3 / 반덕진 / 가람기획)


부호의 아들에게 순결을 빼앗기고 농장경영을 지망하는 성직자 아들에게 희생되어, 끝내는 살인을 범하고 사형을 당하게 되는 청순한 테스를 탁월한 예술적 솜씨로 그린 이 작품에는 인간의 운명이 그것을 좌우하는 우주의 맹목적인 <내재의지>에 대한 작가의 <비관주의적 운명관>이 펼쳐지고 있다. 테스라는 한 젊은 여인이 비정한 인간사회에 던져진 채 세파에 시달리며 겪어야 하는 일련의 고초는 독자들로 하여금 삶의 의미에 대한 원초적 물음을 진지하게 던지지 않을 수 없게 한다.


a. 건축학도 출신의 작가

 디킨스와 함께 빅토리아 시대 영국 문학사의 쌍벽을 이루는 인물인 하디는 영국 남부의 도싯(Dorset) 주에서 태어났다. 건축업자인 부친은 음악을 즐겼으며, 어머니는 왕성한 독서가로 하디는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고 고독을 사랑했다.

  그는 출생하는 순간 사산으로 오인할 만큼 허약한 체질이었는데, 이러한 신체적 조건은 그의 비관주의적 사상의 원초적 원인이 되었다. 하디는 가정적으로 행복한 환경 속에서 자랐으나, 신체적 허약함 때문이지 우울한 소년시절을 보낸다. 그러나 음악과 시에 대한 감수성은 예민하여, 이 시절 하디는 뒤마의 소설과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즐겨 읽으며 문학에 대한 열정을 키워나갔다.

  16세 때 부친의 직업을 이어받기 위해 도체스터 교회 건축사인 존 힉스의 제자로 들어가 그에게서 건축의 기초와 라틴어 그리스어를 배웠다. 이 무렵의 하디는 책벌레라 불릴 만큼 독서에 열중했고, 특히 로마의 시인들을 좋아했다. 한편 그는 여기서 두 번의 교수형을 목격하는데, 이는 그에게 그의 소설 <테스>에서 테스가 사형당하는 장면으로 재현될 정도로 강한 충격을 주었다.

  20세 때 하디는 옥스퍼드 출신의 모울을 알게 되는데 그에게서 학문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 하디는 그와 교우하는 동안 상당량의 독서를 하게 된다. 특히 <아가멤논> <오이디푸스>등의 그리스 비극에 심취했다. 전지전능한 신의 장난에 의해 나약한 인간의 운명이 결정되는 장면들을 목격하고 이때부터 그의 정신세계에는 비관주의적 색채가 착색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청년 하디를 사로잡은 것은 다윈의 진화론과 쇼펜하우어의 염세철학이었다.

  29세 때 첫 소설 <가련한 남자와 숙녀>를 썼으나, 31세 때 쓴 <최후의 충고>가 사실상 그의 처녀작이 되었다. 그러나 하디가 영국 문단에 확고한 지위를 갖게 된것은 35세 때 쓴 <광란의 무리를 떠나서>다. 이 작품은 이른바 <웨섹스 소설>의 첫 작품으로 자연과 인간감정이 초래하는 비극적 결과들을 목가적 풍경 속에서 열정적으로 그려냈다.

  이 소설로 호평을 받자 그는 건축을 떠나, 결혼한 다음 고향에 <맥스 게이트>라는 저택을 짓고 평생 동안 문학에 전념했다. 하디는 <맥스 게이트>에서 살면서 계절마다 아름답고 변화하는 자연과 그 속에서 소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한한 애정을 느겼다. 그는 고향인 웨섹스(Wessex:도싯의 옛이름) 지방을 배경으로 많은 작품을 남겨 그의 소설을 <웨섹스 소설>이라 부른다.

  이후 <웨섹스 소설>들인 <테스> <비운의 주드> <귀향> <숲속의 사람들> <푸른 숲의 나무 그늘 아래서> 등이 창작된다. 하디 문학의 주제와 특성이 집약되어 있는 <웨섹스 소설> 중에서도 특히 뛰어난 작품이 <테스>와 <비운의 주드>다.

  그의 예술적 정점이라 할 수 있는 <테스>는 진지한 양심세계와 심오한 도덕성이 조화를 이룬 작품으로 그를 세계적인 작가로 만들었다. 그러나 출판 당시 비도덕적이고 반기독교적인 통속소설이라는 혹평을 받았다.

  그의 마지막 장편 소설인 <비운의 주드>는 매우 비범한 작품으로 그의 천재성이 유감없이 드러난 소설이었지만, 그 암담한 결말과 비극적 스토리로 인해 <테스>보다 더 심한 혹평을 받았다. 사상적 깊이와 예술적 완성도가 뛰어났음에도 기존 윤리관과 가치관에 막혀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하디는 <테스>와 <비운의 주드>에 쏟아진 혹평을 계기로 소설의 세계를 단념하고 못다한 문학의 열정을 시의 세계에서 실현하게 된다.

  하디가 소설에서 시로 전화하게 된 것은 자신의 소설에 대한 사회의 비난에도 그 이유가 있었지만, 보다 근원적인 원인은 시에 대한 그의 선천적인 애정 때문이기도 했다. 시 분야에서 그의 필생의 대작은 나폴레옹과 그의 시대를 그린 철학적 대하 서사시인 <제왕들>이다. 이 작품에는 삶의 온전함과 전쟁의 자제를 바라는 평화주의가 호소력을 얻고 있는데, 이러한 연유로 말년의 하디는 생존한 영국작가 중 최고로 칭송되었다.

  1928년(88세) 하디는 두번째 부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88세를 일기로 그의 생애를 마감했다. 그의 유해는 뒤늦게 그의 문학을 인정한 많은 사람들의 애도 속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b. 시대적 배경과 문학세계

 시대적 배경

 하디가 살았던 19세기는 산업혁명이 농촌중심의 영국사회를 도시중심의 산업국가로 개편하는 과정에 있었다. 또한 자유경쟁과 그에 따른 부의 증가와 불평등으로 영국 사회의 전통과 인습이 무너지는 와중이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19세기 중엽부터 대두하기 시작한 다윈의 진화론은 서구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기독교 사상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어놓았다. 다윈의 <종의 기원>은 당시 기독교 신념에 젖어 있던 하디에게도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새로이 진화론과 과학적 사고방식을 접한 하디에게 이제 더이상 신의 섭리는 의미가 없었다. 이러한 생각은 쇼펜하우어의 철학과 결합되어 <내재의지>라는 새로운

사상을 낳게 되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인간은 자신의 의지 여하에 관계없이 우주와 자연이 지배하는 맹목적인 내재의지에 의하여 행불행이 좌우된다는 하디의 비관주의적 운명관이 확립되기에 이르렀으며, 그의 문학세계의 핵심사상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문학세계

 그의 문학은 한마디로 인간의 숙명적 부조리와 대결하는 비극의 문학으로, 그에게 인생은 인간들의 진실된 욕망이 외면당한 채 파멸되는 과정에 불과하다. 인생이란 실의와 고난의 실체이며, 인간의 행복이란 인간비극에서 하나의 우연한 에피소드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의 비관주의적 사상은 허무주의적이라는 통념상의 비관주의가 아니라, 인생을 깊고 뜨겁게 공감하고 절망 속에서 괴로워하며 인생의 진실과 고뇌와 비탄에서 구제의 방법을 찾아내려는 적극적인 태도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비극을 통한 인간의 구원인 것이다.

  하디 자신은 자기가 염세주의자라기보다는 사회 개선론자라고 불려지기를 원했다. 그러한 그의 열망은 고통과 좌절의 체험을 통해서 사회의 모순됨을 인식하고 보다 나은 미래를 건설하고자 하는 개선의 의지를 갖는 소설 속의 주인공들을 통해 잘 반영되어 있다. 하디는 작품 속에서 끝없이 닥쳐오는 불운의 회오리 속에서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주인공들의 아픔을 공유하고, 운명을 극복하기 위해 끝까지 싸우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놓았다는 점에서 그를 염세주의자라기보다는 진정한 의미의 휴머니스트라고 불러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c. 비극적 운명에 희생되는 한 여인의 삶

  하디가 <테스>를 발표한 것은 그의 문학이 원숙기에 접어든 1891년(51세)이었다. 이 작품에는 창작활동 초기부터 그가 집요하게 모색해온 사회비판정신이 보다 강하게 부각되어 있다. 그리고 <테스>는 하디의 비관적 운명론의 하나의 상징인 것이다. <테스>는 운명의 장난에 휘말려든 한 순진한 아가씨의 불행한 이야기다. 웨섹스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테스가 무책임한 남자에게 처녀성을 유린당하는 데서부터 이 소설의 비극이 시작된다.

  명문 더버빌의 후손이라는 자의식에 도취되어 술로 세월을 보내는 게으른 아버지와 무능한 어머니, 그리고 많은 동생들을 둔 테스는 집안 살림을 돕기 위해 먼 친척인 스토크 더버빌의 집을 방문한다. 그곳에서 양계일은 하던 중 테스는 바람둥이 청년 알렉에게 처녀성을 잃는다. 그후 집에 돌아와 사생아를 낳는데, 그 아이는 태어난 지 얼마 안되어 세례조차 받지 못하고 죽는다.

  테스는 인생 최초의 비극을 경험하지만, 아직 삶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고향을 떠나 젖 짜는 일을 시작한다. 그녀가 새생활을 시작한 낙농장에는 농장경영을 지망하는 에인젤이라는 건실한 청년이 있었다. 목사의 아들인 에인젤은 성직에 회의를 품고 농사를 짓기 위해 이곳으로 일을 배우러 와 있었던 것이다.

  테스는 에인젤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자신이 처녀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번민하게 된다. 그러나 에인젤의 고매한 인품에 이끌려 그를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하게 된 테스는, 그가 과거의 잘못을 너그럽게 용서해줄 것으로 믿고 마침내 결혼한다. 그러나 첫날밤 과거를 고백하자 처녀성을 중시하는 에인젤은 신부를 남겨둔채 혼자 외국으로 떠나버린다. 이리하여 테스는 다시 버림받은 몸이 되었으나, 언젠가는 남편이 다시 돌아오리라는 희망을 잃지 않고, 모진 고생을 참아낸다. 그 무렵 우연히 테스를 만난 알렉은 열정에 사로잡혀 또다시 그녀를 유혹한다.

  한편 테스의 집에서는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죽고 식구들은 집에서 쫓겨나게 된다. 가족의 생계를 떠맡게 된 테스는 결국 지난날 자기의 인생을 짓밟았던 알렉의 원조의 손길을 물리치지 못하고, 그의 정부가 된다. 그때 뜻하지 않게 테스를 버리고 떠났던 남편이 정신적으로 훨씬 성장한 모습으로 그녀를 찾아온다. 그토록 기다리던 남편이 돌아왔건만 기쁜 마음으로 재회할 수 없게 된 테스는 이성을 잃고 자신을 정부의 위치로 전락시킨 알렉을 과도로 찔러 죽인다.

  그런 다음 테스는 에인젤을 뒤따라가 처음으로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1주일 뒤, 그들의 짧지만 황홀했던 행복은 막을 내리고, 테스는 뒤따라온 경찰에게 체포되어 처형된다. 작가는 마지막에 쓰기를 <<드디어 심판은 끝났다. 신들은 말하기를 <거느리는 자>는 마침내 테스에 대한 희롱을 마친 것이다. >> 결국 사회 전체가 그녀를 사형대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d.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비극적인 운명론

 <순결한 여인>이라는 부제가 내포하고 있듯이, 테스는 피해자이지 죄인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막다른 길로 몰아가는 운명의 힘에 쫓겨 마침내 엄청난 살인죄를 저지르고 사형당하게 되는 것이다. 교수형이 집행되는 날 감옥의 탑 위에서 나부끼는 검은 깃발은 하디 문학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다.

  테스가 일자리를 옮김에 따라 변화하는 웨섹스의 경관과 그 평화롭고 전원적인 분위기는 테스가 겪고 있는 불행을 한층 심화시킨다. 이렇듯 서사적인 기교와 작가의 리얼리티가 융화됨으로써 하디는 <테스>에 의해 <젊은 세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위대한 작가>로 평가받으며 불멸의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작품을 한 여인의 슬픈 이야기쯤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이 작품에는 당시 영국사회를 지배했던 인습의 모순이 예리하게 파헤쳐져 있고 비관적 운명관을 가진 작가의 사상이 전편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디는 이 작품의 곳곳에서 정신적인 정조를 강조하고 있다. 때문에 가련한 주인공 테스로 하여금 다시 소생하는 데 조금도 인색치 않았다. 간음한 여자이자 살인자인 테스를 서슴없이 순결한 여인으로 일컫는다. <<테스의 본연의 순결성은 마지막까지 온전했다고 나는 아직도 생각한다. 하긴 그녀가 쓰러졌을 때 육체적인 순결성은 사라졌을지라도. >> 그토록 험난한 운명 앞에서 인간의 힘으로 최선을

다했다는 것만으로도 구원은 내려진 것이다.

  <테스>에서 우리가 음미하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첫째 육체의 순결성보다는 정신의 순결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점, 둘재 불가항력적인 운명이 연약한 인간에게 부여하는 재난에 대한 문제, 셋째 종교적인 문제로서 죄지은 자 대신 죄 없는 자가 끊임없이 받는 형벌이라는 비극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테스>가 발표되었을 때 <타임>지의 비평자는 하디의 최고 작품이라고 갈파하는 동시에 <<인습적인 관념을 다루는 데 대담하고 애틋한 비애감이 서리는 동시에 지극히 감동적인 비극감을 자아냈다>>고 말했고, 시인 윌리엄 와트슨은 <테스>를 읽으면 인간의 지적 정서적 경험폭이 넓어진다고 말했다. 웨스트민스터의 비평가는 <<조지 엘리어트가 별세한 뒤 영국이 낳은 최고 역량의 작품>>으로 극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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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Har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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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other people named Thomas Hardy, see Thomas Hardy (disambiguation).

Thomas Hardy

Thomashardy restored.jpg

Hardy between about 1910 and 1915

Born 2 June 1840

Stinsford, Dorset, England

Died 11 January 1928 (aged 87)

Dorchester, Dorset, England

Resting place

Stinsford parish church (heart)

Poets' Corner, Westminster Abbey (ashes)

Occupation Novelist, poet, and short story writer

Alma mater King's College London

Literary movement Naturalism, Victorian literature

Notable works Tess of the d'Urbervilles,

Far from the Madding Crowd,

The Mayor of Casterbridge,

Collected Poems

Jude the Obscure

Spouse

Emma Gifford

(1874–1912)

Florence Dugdale

(1914–1928)

Signature

Thomas Hardy, OM (2 June 1840 – 11 January 1928) was an English novelist and poet. A Victorian realist in the tradition of George Eliot, he was influenced both in his novels and in his poetry by Romanticism, especially William Wordsworth.[1] He was highly critical of much in Victorian society, especially on the declining status of rural people in Britain, such as those from his native South West England.


While Hardy wrote poetry throughout his life and regarded himself primarily as a poet, his first collection was not published until 1898. Initially, therefore, he gained fame as the author of such novels as Far from the Madding Crowd (1874), The Mayor of Casterbridge (1886), Tess of the d'Urbervilles (1891), and Jude the Obscure (1895). During his lifetime, Hardy's poetry was acclaimed by younger poets (particularly the Georgians) who viewed him as a mentor. After his death his poems were lauded by Ezra Pound, W. H. Auden and Philip Larkin.[2]


Many of his novels concern tragic characters struggling against their passions and social circumstances, and they are often set in the semi-fictional region of Wessex; initially based on the medieval Anglo-Saxon kingdom, Hardy's Wessex eventually came to include the counties of Dorset, Wiltshire, Somerset, Devon, Hampshire and much of Berkshire, in southwest and south central England. Two of his novels, Tess of the d'Urbervilles and Far from the Madding Crowd, were listed in the top 50 on the BBC's survey The Big Read.[3]


Contents  [hide] 

1 Life and career

1.1 Early life

1.2 Novel writing

1.3 Final years

2 Novels

3 Literary themes

4 Poetry

5 Religious beliefs

6 Locations in novels

7 Influence

8 Works

8.1 Prose

8.2 Poetry collections

8.3 Drama

9 References

10 Biographies and criticism

11 External links

Life and career[edit]

Early life[edit]


"The Hardy Tree" in Old St Pancras churchyard, growing between gravestones moved while Hardy was working there

Thomas Hardy was born on 2 June 1840 in Higher Bockhampton (then Upper Bockhampton), a hamlet in the parish of Stinsford to the east of Dorchester in Dorset, England, where his father Thomas (1811–1892) worked as a stonemason and local builder, and married his mother Jemima (née Hand;[4] 1813–1904) in Beaminster, towards the end of 1839.[5] Jemima was well-read, and she educated Thomas until he went to his first school at Bockhampton at the age of eight. For several years he attended Mr. Last's Academy for Young Gentlemen in Dorchester, where he learned Latin and demonstrated academic potential.[6] Because Hardy's family lacked the means for a university education, his formal education ended at the age of sixteen, when he became apprenticed to James Hicks, a local architect.[7]


Hardy trained as an architect in Dorchester before moving to London in 1862; there he enrolled as a student at King's College London. He won prizes from the Royal Institute of British Architects and the Architectural Association. He joined Arthur Blomfield's practice as assistant architect in April 1862 and worked with Blomfield on All Saints' parish church in Windsor, Berkshire in 1862–64. A reredos, possibly designed by Hardy, was discovered behind panelling at All Saints' in August 2016.[8][9] In the mid-1860s, Hardy was in charge of the excavation of part of the graveyard of St Pancras Old Church prior to its destruction when the Midland Railway was extended to a new terminus at St Pancras.[10]


Hardy never felt at home in London, because he was acutely conscious of class divisions and his social inferiority. During this time he became interested in social reform and the works of John Stuart Mill. He was also introduced by his Dorset friend Horace Moule to the works of Charles Fourier and Auguste Comte. After five years, concerned about his health, he returned to Dorset, settling in Weymouth, and decided to dedicate himself to writing.


Novel writing[edit]


Max Gate in 2015

In 1870, while on an architectural mission to restore the parish church of St Juliot in Cornwall,[11] Hardy met and fell in love with Emma Gifford, whom he married in Kensington in the autumn of 1874.[5][12][13] In 1885 Thomas and his wife moved into Max Gate, a house designed by Hardy and built by his brother. Although they later became estranged, Emma's subsequent death in 1912 had a traumatic effect on him and after her death, Hardy made a trip to Cornwall to revisit places linked with their courtship; his Poems 1912–13 reflect upon her death. In 1914, Hardy married his secretary Florence Emily Dugdale, who was 39 years his junior. However, he remained preoccupied with his first wife's death and tried to overcome his remorse by writing poetry.[14] In 1910, Hardy had been awarded the Order of Merit and was also for the first time nominated for the Nobel Prize in Literature. He would be nominated for the prize eleven years later.[15]


Final years[edit]


Florence Hardy at the seashore, 1915

Hardy became ill with pleurisy in December 1927 and died at Max Gate just after 9 pm on 11 January 1928, having dictated his final poem to his wife on his deathbed; the cause of death was cited, on his death certificate, as "cardiac syncope", with "old age" given as a contributory factor. His funeral was on 16 January at Westminster Abbey, and it proved a controversial occasion because Hardy had wished for his body to be interred at Stinsford in the same grave as his first wife, Emma. His family and friends concurred; however, his executor, Sir Sydney Carlyle Cockerell, insisted that he be placed in the abbey's famous Poets' Corner. A compromise was reached whereby his heart was buried at Stinsford with Emma, and his ashes in Poets' Corner.[16] Hardy's estate at death was valued at £95,418 (£5276015 in 2015 sterling).[17]


Shortly after Hardy's death, the executors of his estate burnt his letters and notebooks, but twelve documents survived, one of them containing notes and extracts of newspaper stories from the 1820s, and research into these has provided insight into how Hardy used them in his works.[18] In the year of his death Mrs Hardy published The Early Life of Thomas Hardy, 1841–1891, compiled largely from contemporary notes, letters, diaries, and biographical memoranda, as well as from oral information in conversations extending over many years.


Hardy's work was admired by many younger writers, including D. H. Lawrence,[19] John Cowper Powys, and Virginia Woolf.[20] In his autobiography Goodbye to All That (1929), Robert Graves recalls meeting Hardy in Dorset in the early 1920s and how Hardy received him and his new wife warmly, and was encouraging about his work.


Hardy's birthplace in Bockhampton and his house Max Gate, both in Dorchester, are owned by the National Trust.


Novels[edit]


Thomas Hardy's birthplace and cottage at Higher Bockhampton, where Under the Greenwood Tree and Far from the Madding Crowd were written


View of the River Frome from the bridge at Lower Bockhampton. In Tess of the d'Urbervilles the lowland vale of the river is described as the Vale of the Great Dairies, in comparison to Tess's home, the fertile Vale of Blackmore, which is the Vale of Little Dairies.

Hardy's first novel, The Poor Man and the Lady, finished by 1867, failed to find a publisher. He then showed it to his mentor and friend, the Victorian poet and novelist, George Meredith, who felt that The Poor Man and the Lady would be too politically controversial and might damage Hardy's ability to publish in the future. So Hardy followed his advice and he did not try further to publish it. He subsequently destroyed the manuscript, but used some of the ideas in his later work.[21]


After he abandoned his first novel, Hardy wrote two new ones that he hoped would have more commercial appeal, Desperate Remedies (1871) and Under the Greenwood Tree (1872), both of which were published anonymously; it was while working on the latter that he met Emma Gifford, who would become his wife.[21] In 1873 A Pair of Blue Eyes, a novel drawing on Hardy's courtship of Emma, was published under his own name. The term "cliffhanger" is considered to have originated with the serialised version of this story (which was published in Tinsley's Magazine between September 1872 and July 1873) in which Henry Knight, one of the protagonists, is left literally hanging off a cliff.[22]


In his next novel Far from the Madding Crowd (1874), Hardy first introduced the idea of calling the region in the west of England, where his novels are set Wessex. Wessex had been the name of an early Saxon kingdom, in approximately the same part of England. Far from the Madding Crowd was successful enough for Hardy to give up architectural work and pursue a literary career. Over the next twenty-five years Hardy produced ten more novels.


Subsequently, the Hardys moved from London to Yeovil, and then to Sturminster Newton, where he wrote The Return of the Native (1878).[23] Hardy published Two on a Tower in 1882, a romance story set in the world of astronomy. Then in 1885, they moved for the last time, to Max Gate, a house outside Dorchester designed by Hardy and built by his brother. There he wrote The Mayor of Casterbridge (1886), The Woodlanders (1887), and Tess of the d'Urbervilles (1891), the last of which attracted criticism for its sympathetic portrayal of a "fallen woman" and was initially refused publication. Its subtitle, A Pure Woman: Faithfully Presented, was intended to raise the eyebrows of the Victorian middle classes.



A major location of The Return of the Native as part of Hardy's fictional Egdon Heath.

Jude the Obscure, published in 1895, met with an even stronger negative response from the Victorian public because of its controversial treatment of sex, religion and marriage. Furthermore, its apparent attack on the institution of marriage caused further strain on Hardy's already difficult marriage because Emma Hardy was concerned that Jude the Obscure would be read as autobiographical. Some booksellers sold the novel in brown paper bags, and the Bishop of Wakefield, Walsham How, is reputed to have burnt his copy.[18] In his postscript of 1912, Hardy humorously referred to this incident as part of the career of the book: "After these [hostile] verdicts from the press its next misfortune was to be burnt by a bishop – probably in his despair at not being able to burn me".[24] Despite this, Hardy had become a celebrity by the 1900s, but some argue that he gave up writing novels because of the criticism of both Tess of the D'Urbervilles and Jude the Obscure.[25] The Well-Beloved, first serialised in 1892, was published in 1897.



Hardy painted by William Strang, 1893

Literary themes[edit]

Considered a Victorian realist, Hardy examines the social constraints on the lives of those living in Victorian England, and criticises those beliefs, especially those relating to marriage, education and religion, that limited people's lives and caused unhappiness. Such unhappiness, and the suffering it brings, is seen by poet Philip Larkin as central in Hardy's works:


"What is the intensely maturing experience of which Hardy's modern man is most sensible? In my view it is suffering, or sadness, and extended consideration of the centrality of suffering in Hardy's work should be the first duty of the true critic for which the work is still waiting [. . .] Any approach to his work, as to any writer's work, must seek first of all to determine what element is peculiarly his, which imaginative note he strikes most plangently, and to deny that in this case it is the sometimes gentle, sometimes ironic, sometimes bitter but always passive apprehension of suffering is, I think, wrong-headed."[26]

In Two on a Tower, for example, Hardy takes a stand against these rules of society with a story of love that crosses the boundaries of class. The reader is forced to reconsider the conventions set up by society for the relationships between women and men. Nineteenth-century society had conventions, which were enforced. In this novel Swithin St Cleeve's idealism pits him against such contemporary social constraints.


"In a novel structured around contrasts, the main opposition is between Swithin St Cleeve and Lady Viviette Constantine, who are presented as binary figures in a series of ways: aristocratic and lower class, youthful and mature, single and married, fair and dark, religious and agnostic...she [Lady Viviette Constantine] is also deeply conventional, absurdly wishing to conceal their marriage until Swithin has achieved social status through his scientific work, which gives rise to uncontrolled ironies and tragic-comic misunderstandings."[27]

Fate or chance is another important theme. Hardy's characters often encounter crossroads on a journey, a junction that offers alternative physical destinations but which is also symbolic of a point of opportunity and transition, further suggesting that fate is at work. Far From the Madding Crowd is an example of a novel in which chance has a major role: "Had Bathsheba not sent the valentine, had Fanny not missed her wedding, for example, the story would have taken an entirely different path."[28] Indeed, Hardy's main characters often seem to be held in fate's overwhelming grip.


Poetry[edit]


Thomas Hardy by Walter William Ouless, 1922

For online poems, see "Poetry collections" below.


In 1898 Hardy published his first volume of poetry, Wessex Poems, a collection of poems written over 30 years. While some suggest that Hardy gave up writing novels following the harsh criticism of Jude the Obscure in 1896, the poet C. H. Sisson calls this "hypothesis" "superficial and absurd".[25][29] In the twentieth century Hardy published only poetry.


Thomas Hardy wrote in a great variety of poetic forms including lyrics, ballads, satire, dramatic monologues, and dialogue, as well as a three-volume epic closet drama The Dynasts (1904–08),[30] and though in some ways a very traditional poet, because he was influenced by folksong and ballads,[31] he "was never conventional," and "persistently experiment[ed] with different, often invented, stanza forms and metres,[32] and made use of "rough-hewn rhythms and colloquial diction".[33]


Hardy wrote a number of significant war poems that relate to both the Boer Wars and World War I, including "Drummer Hodge", "In Time of 'The Breaking of Nations'", and "The Man He Killed"; his work had a profound influence on other war poets such as Rupert Brooke and Siegfried Sassoon.[34] Hardy in these poems often used the viewpoint of ordinary soldiers and their colloquial speech.[34] A theme in the Wessex Poems is the long shadow that the Napoleonic Wars cast over the nineteenth century, as seen, for example, in "The Sergeant's Song" and "Leipzig".[35] The Napoleonic War is the subject of The Dynasts.


Some of Hardy's most famous poems are from "Poems of 1912–13", part of Satires of Circumstance (1914), written following the death of his wife Emma in 1912. They had been estranged for twenty years and these lyric poems express deeply felt "regret and remorse".[34] Poems like “After a Journey,” “The Voice,” and others from this collection "are by general consent regarded as the peak of his poetic achievement".[30] In a recent biography on Hardy, Claire Tomalin argues that Hardy became a truly great English poet after the death of his first wife, Emma, beginning with these elegies, which she describes as among "the finest and strangest celebrations of the dead in English poetry."[36]



A portrait of Thomas Hardy in 1923

Many of Hardy's poems deal with themes of disappointment in love and life, and "the perversity of fate", but the best of them present these themes with "a carefully controlled elegiac feeling".[37] Irony is also an important element in a number of Hardy's poems, including "The Man he Killed" and "Are You Digging on My Grave".[38] A few of Hardy's poems, such as "The Blinded Bird", a melancholy polemic against the sport of vinkenzetting, reflect his firm stance against animal cruelty, exhibited also in his antivivisectionist views and his membership in The Royal Society for the Prevention of Cruelty to Animals.[39]


A number of notable English composers, including Gerald Finzi,[40][41] Benjamin Britten,[42] and Gustav Holst,[43] set poems by Hardy to music. Holst also wrote the orchestral tone poem Egdon Heath: A Homage to Thomas Hardy in 1927.


Although his poems were initially not as well received as his novels had been, Hardy is now recognised as one of the greatest twentieth-century poets, and his verse has had a profound influence on later writers, including Robert Frost, W. H. Auden, Dylan Thomas, and, most notably Philip Larkin.[33] Larkin included twenty-seven poems by Hardy compared with only nine by T. S. Eliot in his edition of the Oxford Book of Twentieth Century English Verse in 1973.[44] There were also fewer poems by W. B. Yeats.[45]


Religious beliefs[edit]


Thomas Hardy aged 70, by William Strang

Hardy's family was Anglican, but not especially devout. He was baptised at the age of five weeks and attended church, where his father and uncle contributed to music. However, he did not attend the local Church of England school, instead being sent to Mr Last's school, three miles away. As a young adult, he befriended Henry R. Bastow (a Plymouth Brethren man), who also worked as a pupil architect, and who was preparing for adult baptism in the Baptist Church. Hardy flirted with conversion, but decided against it.[46] Bastow went to Australia and maintained a long correspondence with Hardy, but eventually Hardy tired of these exchanges and the correspondence ceased. This concluded Hardy's links with the Baptists.


The irony and struggles of life, coupled with his naturally curious mind, led him to question the traditional Christian view of God:


The Christian God – the external personality – has been replaced by the intelligence of the First Cause...the replacement of the old concept of God as all-powerful by a new concept of universal consciousness. The 'tribal god, man-shaped, fiery-faced and tyrannous' is replaced by the 'unconscious will of the Universe' which progressively grows aware of itself and 'ultimately, it is to be hoped, sympathetic'.[47]

Scholars have debated Hardy's religious leanings for years, often unable to reach a consensus. However, Hardy's religious life seems to have mixed agnosticism, deism, and spiritism. Once, when asked in correspondence by a clergyman, Dr A. B. Grosart, about the question of reconciling the horrors of human and animal life with "the absolute goodness and non-limitation of God",[48] Hardy replied,


Mr. Hardy regrets that he is unable to offer any hypothesis which would reconcile the existence of such evils as Dr. Grosart describes with the idea of omnipotent goodness. Perhaps Dr. Grosart might be helped to a provisional view of the universe by the recently published Life of Darwin and the works of Herbert Spencer and other agnostics.[49]

Hardy frequently conceived of, and wrote about, supernatural forces, particularly those that control the universe through indifference or caprice, a force he called The Immanent Will. He also showed in his writing some degree of fascination with ghosts and spirits.[49] Even so, he retained a strong emotional attachment to the Christian liturgy and church rituals, particularly as manifested in rural communities, that had been such a formative influence in his early years, and Biblical references can be found woven throughout many of Hardy's novels.


Hardy's friends during his apprenticeship to John Hicks included Horace Moule (one of the eight sons of Henry Moule), and the poet William Barnes, both ministers of religion. Moule remained a close friend of Hardy's for the rest of his life, and introduced him to new scientific findings that cast doubt on literal interpretations of the Bible,[50] such as those of Gideon Mantell. Moule gave Hardy a copy of Mantell's book The Wonders of Geology (1848) in 1858, and Adelene Buckland has suggested that there are "compelling similarities" between the "cliffhanger" section from A Pair of Blue Eyes and Mantell's geological descriptions. It has also been suggested that the character of Henry Knight in A Pair of Blue Eyes was based on Horace Moule.[51]



Grave of Thomas Hardy's heart at Stinsford parish church

Locations in novels[edit]

Sites associated with Hardy's own life and which inspired the settings of his novels continue to attract literary tourists and casual visitors. For locations in Hardy's novels see: Thomas Hardy's Wessex, and the Thomas Hardy's Wessex[52] research site, which includes maps.[53]


Influence[edit]

Hardy corresponded with and visited Lady Catherine Milnes Gaskell at Wenlock Abbey and many of Lady Catherine's books are inspired by Hardy, who was very fond of her.[54]


D. H. Lawrence's Study of Thomas Hardy (1936), indicates the importance of Hardy for him, even though this work is a platform for Lawrence's own developing philosophy rather than a more standard literary study. The influence of Hardy's treatment of character, and Lawrence's own response to the central metaphysic behind many of Hardy's novels, helped significantly in the development of The Rainbow (1915) and Women in Love (1920).[55]


Wood and Stone (1915), the first novel by John Cowper Powys, who was a contemporary of Lawrence, was "Dedicated with devoted admiration to the greatest poet and novelist of our age Thomas Hardy".[56] Powys's later novel Maiden Castle (1936) is set in Dorchester, Hardy's Casterbridge, and was intended by Powys to be a "rival" to Hardy's The Mayor of Casterbridge.[57] Maiden Castle is the last of Powys's so-called Wessex novels, Wolf Solent (1929), A Glastonbury Romance (1932), and Weymouth Sands (1934), which are set in Somerset and Dorset.[58]


Hardy was clearly the starting point for the character of the novelist Edward Driffield in W. Somerset Maugham's novel Cakes and Ale (1930).[59] Thomas Hardy's works also feature prominently in the American playwright Christopher Durang's The Marriage of Bette and Boo (1985), in which a graduate thesis analysing Tess of the d'Urbervilles is interspersed with analysis of Matt's family's neuroses.[60]


Hardy has been a significant influence on Nigel Blackwell, frontman of the post-punk British rock band Half Man Half Biscuit, who has often incorporated phrases (some obscure) by or about Hardy, into his song lyrics.[61]


Works[edit]


The title page from a first edition of Far from the Madding Crowd (1874)

Prose[edit]

Hardy divided his novels and collected short stories into three classes:[citation needed]


Novels of character and environment


The Poor Man and the Lady (1867, unpublished and lost)

Under the Greenwood Tree: A Rural Painting of the Dutch School (1872)

Far from the Madding Crowd (1874)

The Return of the Native (1878)

The Mayor of Casterbridge: The Life and Death of a Man of Character (1886)

The Woodlanders (1887)

Wessex Tales (1888, a collection of short stories)

Tess of the d'Urbervilles: A Pure Woman Faithfully Presented (1891)

Life's Little Ironies (1894, a collection of short stories)

Jude the Obscure (1895)

Romances and fantasies


A Pair of Blue Eyes: A Novel (1873)

The Trumpet-Major (1880)

Two on a Tower: A Romance (1882)

A Group of Noble Dames (1891, a collection of short stories)

The Well-Beloved: A Sketch of a Temperament (1897) (first published as a serial from 1892)

Novels of ingenuity


Desperate Remedies: A Novel (1871)

The Hand of Ethelberta: A Comedy in Chapters (1876)

A Laodicean: A Story of To-day (1881)

Hardy also produced a number of minor tales; one story, The Spectre of the Real (1894) was written in collaboration with Florence Henniker.[62] An additional short-story collection, beyond the ones mentioned above, is A Changed Man and Other Tales (1913). His works have been collected as the 24-volume Wessex Edition (1912–13) and the 37-volume Mellstock Edition (1919–20). His largely self-written biography appears under his second wife's name in two volumes from 1928 to 1930, as The Early Life of Thomas Hardy, 1840–91 and The Later Years of Thomas Hardy, 1892–1928, now published in a critical one-volume edition as The Life and Work of Thomas Hardy, edited by Michael Millgate (1984).


Short stories (with date of first publication)


"How I Built Myself A House" (1865)

"Destiny and a Blue Cloak" (1874)

"The Thieves Who Couldn't Stop Sneezing" (1877)

"The Duchess of Hamptonshire" (1878) (collected in A Group of Noble Dames)

"The Distracted Preacher" (1879) (collected in Wessex Tales)

"Fellow-Townsmen" (1880) (collected in Wessex Tales)

"The Honourable Laura" (1881) (collected in A Group of Noble Dames)

"What The Shepherd Saw" (1881) (collected in A Changed Man and Other Stories)

"A Tradition of Eighteen Hundred and Four" (1882) (collected in Wessex Tales)

"The Three Strangers" (1883) (collected in Wessex Tales)

"The Romantic Adventures of a Milkmaid" (1883) (collected in A Changed Man and Other Stories)

"Interlopers at the Knap" (1884) (collected in Wessex Tales)

"A Mere Interlude" (1885) (collected in A Changed Man and Other Stories)

"A Tryst at an Ancient Earthwork" (1885) (collected in A Changed Man and Other Stories)

"Alicia's Diary" (1887) (collected in A Changed Man and Other Stories)

"The Waiting Supper" (1887–88) (collected in A Changed Man and Other Stories)

"The Withered Arm" (1888) (collected in Wessex Tales)

"A Tragedy of Two Ambitions" (1888) (collected in Life's Little Ironies)

"The First Countess of Wessex" (1889) (collected in A Group of Noble Dames)

"Anna, Lady Baxby" (1890) (collected in A Group of Noble Dames)

"The Lady Icenway" (1890) (collected in A Group of Noble Dames)

"Lady Mottisfont" (1890) (collected in A Group of Noble Dames)

"The Lady Penelope" (1890) (collected in A Group of Noble Dames)

"The Marchioness of Stonehenge" (1890) (collected in A Group of Noble Dames)

"Squire Petrick's Lady" (1890) (collected in A Group of Noble Dames)

"Barbara of the House of Grebe" (1890) (collected in A Group of Noble Dames)

"The Melancholy Hussar of The German Legion" (1890) (collected in Wessex Tales)

"Absent-Mindedness in a Parish Choir" (1891)

"The Winters and the Palmleys" (1891)

"For Conscience' Sake" (1891) (collected in Life's Little Ironies)

"Incident in Mr. Crookhill's Life"(1891)

"The Doctor's Legend" (1891)

"Andrey Satchel and the Parson and Clerk" (1891)

"The History of the Hardcomes" (1891)

"Netty Sargent's Copyhold" (1891)

"On The Western Circuit" (1891) (collected in Life's Little Ironies)

"A Few Crusted Characters: Introduction" (1891) (collected in Life's Little Ironies)

"The Superstitious Man's Story" (1891)

"Tony Kytes, the Arch-Deceiver" (1891)

"To Please His Wife (nl)" (1891) (collected in Life's Little Ironies)

"The Son's Veto" (1891) (collected in Life's Little Ironies)

"Old Andrey's Experience as a Musician" (1891)

"Our Exploits At West Poley" (1892–93)

"Master John Horseleigh, Knight" (1893)

"The Fiddler of the Reels" (1893) (collected in Life's Little Ironies)

"An Imaginative Woman" (1894) (collected in Life's Little Ironies)

"The Spectre of the Real" (1894)

"A Committee-Man of 'The Terror'" (1896) (collected in A Changed Man and Other Stories)

"The Duke's Reappearance" (1896) (collected in A Changed Man and Other Stories)

"The Grave by the Handpost" (1897) (collected in A Changed Man and Other Stories)

"A Changed Man" (1900) (collected in A Changed Man and Other Stories)

"Enter a Dragoon" (1900) (collected in A Changed Man and Other Stories)

"Blue Jimmy: The Horse Stealer" (1911)

"Old Mrs. Chundle" (1929)

"The Unconquerable"(1992)

Poetry collections[edit]

Wessex Poems and Other Verses (1898)

Poems of the Past and the Present (1901)

Time's Laughingstocks and Other Verses (1909)

Satires of Circumstance (1914)

Moments of Vision (1917)

Collected Poems (1919)

Late Lyrics and Earlier with Many Other Verses (1922)

Human Shows, Far Phantasies, Songs and Trifles (1925)

Winter Words in Various Moods and Metres (1928)

The Complete Poems (Macmillan, 1976)

Selected Poems (Edited by Harry Thomas, Penguin, 1993)

Hardy: Poems (Everyman's Library Pocket Poets, 1995)

Thomas Hardy: Selected Poetry and Nonfictional Prose (St. Martin's Press, 1996)

Selected Poems (Edited by Robert Mezey, Penguin, 1998)

Thomas Hardy: The Complete Poems (Edited by James Gibson, Palgrave, 2001)

Online poems: Poems by Thomas Hardy[63] at Poetry Foundation and Poems by Thomas Hardy at poemhunter.com[64]


Drama[edit]

The Dynasts: An Epic-Drama of the War with Napoleon (verse drama)

The Dynasts, Part 1 (1904)

The Dynasts, Part 2 (1906)

The Dynasts, Part 3 (1908)

The Famous Tragedy of the Queen of Cornwall at Tintagel in Lyonnesse (1923) (one-act play)



E03 – 걸리버 여행기(Gulliver's Travels) / 스위프트(Jonathan Swift, 1667~1745)

(출전: 동서고전 200선 해제3 / 반덕진 / 가람기획)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와 함께 영국의 18세기 전반기를 대표하는 이 소설은 그동안 어린이용 동화로 소개되어왔으나, 사실은 비현실적인 명분에 집착하여 국민들의 생활이나 복지에는 무관심한 정치인들의 정쟁을 풍자한 작품이다. 인간의 도덕적 약점에 대한 작가의 신랄한 풍자와 인간혐오 사상이 전편에 흐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면면히 유지되고 있는 유토피아 추구의 기조는 독자들에게 아주 흥미있고 교훈적인 문학적 체험을 할 수 있게 한다.



a. 인간을 혐오했던 아일랜드 영웅

 이책은 스위프트가 <<세상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화나게 만들려고 쓴 책>>이다.

  풍자문학의 대가인 스위프트는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서 출생했다. 유복자로 태어나 큰아버지의 배려로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했다. 그러나 그는 재학중 방종하고 게을러 학교측의 특사로 겨우 졸업했다. 런던으로 나와 모친 쪽의 먼 친척인 당시 정계의 거물이었던 윌리엄 템플 경의 집에서 비서로 일했다. 이 집에서 여러 고전과 역사를 배웠으며, 여러 정치가와 접촉하며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의 지적 성숙은 여기서 이루어졌다.

  그가 스텔라라고 불렀던 에스더 존슨이라는 어린 소녀를 사랑한 것도 여기서였다. 그는 그녀를 가르쳤으며 다른 누구도 사랑하지 못할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다. 그들이 비밀리에 결혼을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그들의 관계가 서로에게 만족스러웠다는 것은 분명했다.

  한때 아일랜드로 돌아가 목사가 되었으나 1680년경(13세)부터 시문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1704년(37세) 익명으로 출간된 풍자소설 <지어낸 이야기> 중 <책들의 전쟁>과 <설교단의 이야기>는 그의 초기대표작이다. 전자는 고대와 근대 어느 쪽의 문화가 더 나은가라는 당시 논쟁에서 고전 찬미파를 지지했다. <설교단의 이야기>는 카톨릭, 프로테스탄트, 영국 국교회의 싸움을 부친으로부터 상속받은 웃옷을 서로 차지하려고 싸우는 3명의 아들에 비유하여 풍자한 작품으로, 당시의 정세에 어두운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는 둘다 읽기 어려운 작품이나 작자의 풍자능력은 뚜렷하다.

  이후 풍자와 논쟁의 능력이 인정되어 당시 휘그토리 양당의 정치논쟁이 격심한 가운데 정치 저널리즘에 등장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공명에 대한 야심으로 집필상의 원칙이 없었으며, 때마침 정치적 환경의 변화도 있고 의지했던 템플 경도 세상을 떠나 정계에 대한 야심을 단념한다.

  1713년(46세) 이후에는 더블린의 성 페트릭 교회 수석사제가 되었다. 이때에도 그는 남과 어울리기 싫어했고 이것은 더욱 통렬한 풍자의 길로 나아가게 했다. 유명한 대표작 <걸리버 여행기>는 주인공 걸리버가 차례로 여러 나라에 표착하여 이상한 경험을 한다는 줄거리이며, 매우 기발하고 묘한 착상으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세계각국에서 널리 애독되고 있다. 이 작품의 본질도 인간에 대한 그의 혐오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는 아일랜드 출신으로서 영국에서의 활동에 한계를 느끼고 1714년 이후 아일랜드로 가서 은둔했다. 그는 여기서 돌변하여 영국으로부터의 자유와 독립을 쟁취하려는 문필의 투사가 되었고, 그 때문에 그는 아일랜드의 영웅으로 추앙되기에 이르렸다. 아일랜드의 낙후성을 주로 영국 정부의 탓으로 돌리면서 동시에 아일랜드 인 스스로가 자신들의 운명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묻혀 있는 세인트 패트릭 성당의 벽면에는 그가 직접 쓴 라틴 어 비문이 새겨져 있다.

  <<신학박사이자 이 성당의 참사회장인 조나산 스위프트의 시신이 이곳에 묻혀 있다. 이제는 맹렬한 분노가 더이상 그의 마음을 괴롭힐 수 없으리라. 나그네여, 떠나시오. 그리고 가능하다면 전력을 다해 지고의 자유를 얻으려 한 이 사람을 본받으시오. >>


b. <걸리버 여행기>와 검열문제

 영국 문학사에 있어 18세기 전반기를 <오거스터스> 시대라고 한다. 이는 문예운동이 활발하여 호라티우스, 오비디우스, 베르길리우스 등이 활약한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영국의 앤 여왕 시대를 비유한 것이다. 이중 <걸리버 여행기>와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가 대표적인 소설이다.

  이 소설이 집필되던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이 서서히 그 자리매김을 시작하고, 의회파가 왕당파를 누르고 권리장전 선포와 의회 정치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사실상의 군주제가 폐기되기 시작하는 그야말로 질풍노도와 같은 격변의 시대였다. 이 작품의 원본은 상당부분이 영국의 정치적 상황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어 적지 않은 삭제를 당하는 등 수난을 겪어야 했다. 스위프트가 친구인 찰스 포드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처음부터 이 작품의 위험성을 예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여행기를 마무리하고 고치고 다시 고쳐 쓰고 정서하는 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새로 보탠 것과 함께 모두 네 부분으로 완결을 보았습니다. 세상이 이 작품을 받아들일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인쇄업자가 감옥에 갇히는 것을 각오할 용기를 갖게 되면 출판해볼 생각입니다. >>

  사실 검열의 문제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있어왔다. 작가는 검열을 의식하면서 이 작품을 썼기 때문에 어느 정도 검열과 타협한 상태에서 작품을 진행시켰다고 할 수 있다. 만약 검열이 없었다면 작가는 좀더 직접적으로 당시 영국 사회의 정치적 종교적 윤리적 타락에 대해 신랄하게 공격했을 것이다.

  그러나 검열이 없었다면 분명히 이보다 더 좋은 작품이 나왔을 것이라는 논리는 타당치 않다. 검열은 작품의 자유로운 전개를 방해하기도 하지만 어느 경우에는 좀더 좋은 작품을 쓰도록 만들기도 한다. 오히려 그 작품이 영원한 고전이 되는 경우는 그 정치적 문제를 직접 거론하는 것보다 우회적으로 제시함으로써 보다 보편적인 문학으로 승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c. 당대 유럽 사회에 대한 풍자

 걸리버의 모험을 통해서 본 세태의 비판과 부조리에 대한 저항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은 1726년(59세)에 출판되었는데 출간 즉시 성공을 거두었고, 독자들을 즐겁게 하기도 하고 화나게 하기도 했다. 배의 의사인 걸리버의 난파표류기로 된 4부작 소설이다.


   소인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의학도인 걸리버는 항상 바다를 항해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던 차에 3년 반 동안이나 항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바다여행 후 런던에서 병원을 차리고 결혼도 했다.  이후 그는 다시 배의 의사가 되어 6년간이나 떠돌아다니며 즐거운 나날을 보낸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가정에 충실하다가 바다 여행을 떠난다. 도중에 풍랑으로 배가 산산조각이 났으나 그는 운좋게 헤엄쳐 어느 섬에 닿아 쓰러져 잠들고 만다. 그가 잠에서 깨어나 보니 온몸이 밧줄로 꽁꽁 묶여 있고 그의 몸에는 6인치도 안되는 벌레같은 인간들이 사오십 명이나 기어다니고 있었다. 그가 왼팔에 힘을 주어 밧줄을 끊자 그 조그마한 병사들이 일제히 활을 쏘아 온몸이 따끔거렸다. 그는 당분간 자는 체하여 화살을 멈추게 했다.

  소인국의 수도로 옮겨진 걸리버가 소인국 사람들의 말을 배우게 되자 그는 우선 몸을 동여맨 쇠사슬을 풀어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임금은 회의를 한후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그후 걸리버는 소지품 검사를 받게 되었다. 손수건 담배갑 작은 수첩 시계 칼 권총 등이 있었는데, 소인국에서는 이 물건들이 신기하기만 했다. 그리고 걸리버는 칼과 권총이 위험한 물건임을 임금에게 알려주었다. 임금은 칼과 권총을 당분간 맡아두기로 했다.

  제1부의 압권은 소인국간의 감정대립과 전쟁에 관한 부분이다. 소인국에는 두 개의 당파가 서로 다투고 있었다. 굽이 높은 구두를 신는 당파와 낮은 굽을 신는 당파가 다투고 있었다. 그 싸우는 이유는 계란을 삶는 방법 때문이었다. 계란을 깨는 전통적인 방법은 밑부분이 넓은 쪽이었는데 현재의 국왕 할아버지가 소년시절 관습대로 계란을 깨다가 손가락을 다치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그의 아버지였던 당시 국왕은 계란을 깰 때는 밑이 좁은 방향을 깨도록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이 명령을 두고 지지파와 반대파가 대립했고, 반대파들은 반란을 일으켜 이웃 나라 블레퍼스크로 이주해버렸다. 작가는 소인국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에피소드를 통해 인간이 믿고 있는 신념과 이념의 맹목성에 비판을 가한다. 즉, 소인국의 우화를 통해 작가가 제시하고자 하는 주제는 맹목적인 신념에 사로잡힌 인간들이 벌이는 갖가지 폭력과 광기다.


   거인국

 고향에 돌아온 걸리버는 가족과 행복한 나날을 보냈으나 본래 바다를 좋아하는 천성 때문에 다시 바다로 향했다. 그러나 음료수가 떨어져 어느 섬에 머물게 되는데, 풀과 나무들을 구경하던 걸리버를 두고 배는 출항을 하고 만다. 여기는 거인국으로 그들은 키가 18미터나 되지만 단순하고 생각하기를 싫어한다. 거인국에서는 비교적 작은 편인 개, 고양이조차도 걸리버의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크고 힘이 세다. 그들의 폭력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걸리버의 모험이야말로 소년소녀들이 제일 흥미있고 읽을 만한 동화 속의 소재들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이 찾아와 주인에게 걸리버를 이용해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말해준다. 그리하여 걸리버는 수도로 옮겨져 쇼를 하게 되고 궁중에까지 알려져 왕후가 걸리버를 농부로부터 사들이게 된다. 그러나 궁중의 대학자들과 걸리버는 논쟁을 벌이게 되고 왕의 총애를 받게 된다. 그는 또 왕에게 유럽의 정세를 알려주어 감탄을 사게 되고, 후에 왕이 파리로 행차할 때, 다시 영국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거인국에서도 몸집이 작은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이기는 따위의 모험담이 전부는 아니다. 걸리버를 못살게 구는 거인국의 사람들에 대한 묘사를 통해 작가는 몸집은 크지만 올바른 정신을 갖지 못한 사람을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동화를 통해서 널리 알려져 있는 1--2부와는 달리 3--4부는 좀더 공격적인 풍자가 이루어지고 있다.


   하늘을 나는 섬의 나라

  세번째 항해를 떠나게 되었을 때, 걸리버는 해적들에게 잡혀 섬으로 끌려간다. 이 섬나라 주민들은 1--2부와는 달리 몸집은 거의 정상인에 가깝지만 행동은 전혀 다르다. 그들은 너무 지나치게 사색에 몰두해 옆사람이 뭐라고 말하든 거의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절벽이 나타나면 떨어지고 기둥이 나타나면 머리가 부딪히며, 거리에서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밀려서 아무런 대책 없이 하수구로 떨어진다.

  그래서 대화를 하기 위해 시종을 거느리고 다니는데, 그들이 머리를 때려주는 도구로 대화하는 상대방의 머리를 때려야만 비로소 옆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정도이다. 그때서야 비로소 대화가 가능하다. 그들은 매우 사색적이어서 수학과 물리 방면에는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빵조차 원뿔이나 원기둥, 평행사변형의 수학적인 도형으로 자르고 옷을 한 벌 맞출 때도 자와 콤파스를 가지고 높이를 측정한다. 그것은 나일 강의 삼각주를 측량할 때의 기하학과 동일한 방식이다.

  그들은 여자의 아름다움을 묘사할 경우에도 사다리꼴, 원, 평행사변형 등의 기하학적 용어를 구사한다. 그들은 매우 과학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비합리적이어서 개인의 상상력이나 공상, 창조적인 발명과 같은 단어는 아예 없을 정도이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매일 걱정하는 일뿐이다. 예컨대 수학적인 계산에 의하면 130년이 지난 다음 혜성이 분명히 지구를 파괴해버릴 것이라는 걱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과학을 만능이라고 믿으면서도 오히려 인간이 원래 지닌 소박한 지혜마저도 잃어버린 당시의 지적 세태를 꼬집은 것이다.


   말들의 나라

 네번째 출항은 선장이 되어 떠나게 되지만 선원들이 난동을 일으켜 걸리버는 선실에 유폐되고 미지의 땅에 버려지게 된다. 이 나라에는 인간 모습을 한 추한 짐승인 <야후>와 말과 비슷한 형상인  <휴이넘>이 공존하며 살고 있다. 걸리버는 말나라의 언어를 배우고 그 나라의 지도자들을 만나 자기 신세와 영국의 유럽의 실정을 얘기하고 이곳 사정을 자세히 알게 된다.

  말나라는 모든 것이 합리적으로 운영되는 이상적인 곳이었다. 이성이 존중되고 거짓이 없고 악이란 단어조차 없다. 결혼 출생 죽음 등 모든 사건은 순리대로 처리되고, 인구는 국가차원에서 조절되며 자녀교육은 국가가 맡고 있는 곳, 걸리버는 여기가 바로 유토피아라고 감탄하며 깊은 애착을 가진다. 그러나 더러운 야후들에게는 심한 혐오를 느낀다. 사실 이 책 중에서 제4부가 유럽의 당대의 모습을 가장 정확하고 통렬한 비판을 담고 있다. 상호간의 사소한 의견차이로 국가간에 전쟁이, 개인간에는 거짓말과 도둑질이, 가진 자와 없는 자 사이에는 착취로 나타나는데 그것이 사실은 잘못된 사회통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걸리버 자신이 깨닫게 된다. 당대의 현실을 신랄하게 꼬집은 제4부의 내용은 이 책을 오랫동안 금서의 목록에 오르도록 만들었다.

  사실 이 책은 여러 사람뜰에 의해 끔찍하고 신성 모독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어느 작가는 이 책은 비교적 재미있고 교훈적이지만 제4부의 내용은 읽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권고한 바 있다. 작가의 풍자가 너무 통렬해 그 사회와 그 사회에 몸담고 있는 인간의 치부가 너무도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어 그것을 모두 보여주는 일이 너무 끔찍하고 비교훈적이라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d. 풍자문학의 백미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소인과 거인, 지나치게 사색적인 사람과 괴물인 <야후>를 각각 그리면서 가장 바람직한 사회는 무엇인가를 강력하게 발언하고 있다.

  제1편 소인국에서는 영국의 앤 여왕 치하의 실정에 대한 시사적인 풍자가 넘쳐흐르고, 제2편 거인국에서는 그의 조국인 아일랜드 국민의 행동과 이상국가에 대한 그 자신의 생각을 펼치고 있어 스위프트의 냉철한 통찰력을 엿볼 수 있다. 제3편에서는 토론에는 열심이지만 실지로 응용에 머리를 쓰지 않는 학자들을 비웃으며, 왕립 아카데메이아를 풍자하고 있다. 제4편에서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본성들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결국 당시 영국의 정치사회종교 등 사회전반에 대한 풍자를 통해 결코 동물과 다를 것이 없는 인간사회를 그려냈던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은 신랄한 인간혐오를 드러낸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비평가들은 스위프트의 재능이 인간의 본성 중 가장 추악한 부분을 폭로하는 데 발휘되기는 했지만, 그 재능만은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문학가로서의 그의 문체는 분명하고 단순한 어휘, 복잡하지 않은 문장구조, 경제적이고 함축적인 언어가 특징이다. 그는 기교와 장식을 피했다. 표현하고자 하는 분노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의 문체는 더욱 긴장되고 절제되었다. 이 책에 얽힌 재미있는 사실은 <신중하고 심오하고 암울한> 풍자인 이 작품의 재치가 지워진 채 아동용 도서가 되는 과정에 놓인 아이러니다. 19세기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스위프트의 소설에서 잔인한 재치의 부분을 무턱대고 삭제해버림으로써 아동용 도서로

만들어낸 것은 바로 비평가들이었다. 이들은 어린이들에게 흥미있는 부분만 모아 편집해버렸다. 스위프트의 재치는 어느 부분이든 삭제를 하면 전체적인 효과에 치명상을 입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독자에게 이 작품의 완역은 필요한 일이었다. 다행히도 우리 나라에서도 최근에 3--4부를 포함한 완전한 번역이 이루어져 독자들의 욕구가 충족될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1--2부만 번역되어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만시지탄이 아닐 수 없다.



Profile

Movie: Daytime Shooting Star (literal title)

Romaji: Hirunaka no Ryuusei

Japanese: ひるなかの流星

Director: Takehiko Shinjo

Writer: Mika Yamamori (manga), Naoko Adachi

Producer: Kazutaka Ohara, Juichi Uehara, Kasumi Yao

Cinematographer: Mitsuru Komiyama

Release Date: March 24, 2017

Runtime:

Distributor: Toho

Language: Japanese

Country: Japan


Cast

Mei Nagano - Suzume Yosano

Shohei Miura - Satsuki Shishio

Aran Shirahama - Daiki Mamura

Maika Yamamoto - Yuyuka Nekota

Ryuta Sato - Yukichi Kumamoto

Naomi Nishida - Satoko Yosano


부모님이 갑자기 해외 부임으로 인해 아름다운 시골에서 자란 티 없이 맑은 스즈메는 토쿄로 전학을 오게 된다.

그 곳에서 반 옆자리에 앉게 된 급우와 담임선생님 사이에 사랑을 받고 사랑을 하게 되는 (어찌 보면 살짝 위험한 설정)데, 이 삼각관계속에서 친구와 사랑의 참된 의미를 '자신과 상대에게 진실하고 성실하게' 풀어 나간다는 아주 행복 발랄한 이야기

스즈메역으로 나왔는 Mei Nagano(永野芽郁)는 화장기 전혀 없어 보이는 얼굴이 어찌보면 한국인이나 중국계로 보이고 또 한편으로는 아야세 하루카의 고등학교 때 모습이면 이렇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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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rected byMike Flanagan
Produced byTrevor Macy
Written byJeff Howard
Mike Flanagan
Based onGerald's Game
by Stephen King
StarringCarla Gugino
Bruce Greenwood
Music byThe Newton Brothers
CinematographyMichael Fimognari
Edited byMike Flanagan
Production
company
Distributed byNetflix
Release date
  • September 24, 2017(Fantastic Fest)
  • September 29, 2017(United States)
Running time
103 minutes
CountryUnited States
LanguageEnglish


Cast[edit]


제시와 제랄드는 4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부부. 남편은 변호사, 바닷가에 별장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유복하게 사는 편...

언젠가 부터 새디즘적 성향을 보이는 남편과 제시는 누적되어 온 소원해진 관계를 개선 해 보려는 의도로 함께 둘만의 주말을 보내 위해 바닷가 별장으로 온다. 제롤드는 제시에게 가지고 온 수갑을 침대와 함께 연결하여 채우고 비아그라도 먹고 하지만 점 점 더 심해지는 가학적인 태도에 불편을 느낀 제시는 일단 정지를 외치고 두 사람의 언쟁은 잠시 진행되다가 제롤드에게 갑자기 심근경색(?)이 찾아와 침대위에 쓰러져 죽어 버린다.

양손은 수갑으로 침대난간에 묶여 있는 상태. 주변에 인간은 수 마일이상 나가야 있고. 쓰러진 제롤드의 시체를 발로 밀쳐 침대 밑으로 떨어뜨리긴 하지만 그 외에 어떤 동작도 무리.

바로 옆에 핸드폰도 있고, 집안은 잘 정리되 있고 냉장고에 음식도 가득차 있고, 바로 앞에 차키와 집 앞에 차도 버젓이 있지만 침대에 묶여 꼼짝 달짝 못하는 제시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제시는 패닉 상태에 빠져 버리게 되는데....

오는 길에 길에서 만난 더러운 털을 가진 잡종 견 한마리가, 이 부부의 별장까지 찾아와 비싼 고기도 얻어 먹기도 하였지만 이제는 버젓이 열린 뒷문으로 들어와 쓰러진 남편의 시체를 먹고 있다. 

패닉상태에 빠져 있는 제시에게 제롤드와 자신의 환영이 나타나 말을 걸고 함께 싸우기도 하고, 밤에는 달빛남자(아마도 사신?)도 나타나고 침대 머리 맡에는 남편의 시체와 그것을 먹고 있는 더러운 개한마리까지... 어쩌지도 못하는 절망의 상태에서 나름 번잡스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자신의 어린시절 기억이 되살아 나면서 바로 지금의 남편, 그리고 자신의 심층적 존재에 대한 이해(?)까지 하게 되면서 영화는 진지하게 전진한다.

결국 유리잔을 깨뜨리고... 하여 탈출하게 되고,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찾아 진정한 자신의 삶을 살게 된다는...

꽤 잘만든 심리영화가 아니었나 싶다. Carla Gugino의 연기도 무척 좋았다. 살짝 나이살이 드는 얼굴과 아직은 생생함이 꺼지지 않은 육체가 주는 중년의 과도기적 모습을 잘 다듬어진 연기와 함께 온 몸으로 보여 주었다. 


201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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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02 – 아에네이스(Aeneis) / 베르길리우스(Publius Vergilius Maro, BC 70--BC 19)

(출전: 동서고전 200선 해제3 / 반덕진 / 가람기획)


 <아에네이스>는 로마 건국에 관한 서사시로, 트로이의 영웅이자 로마의 건국 시조인 아에네이스가 트로이 멸망 후 로마에 정착할 때까지의 고난과 사건, 그리고 사랑을 그린 미완성 작품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아에네아스를 미의 여신 베누스(비너스, 아프로디테)의 아들로 묘사하여, 로마 황제에게 신통성을 부여하고, 로마의 역사적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미래의 국가건설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쟁취하려는 영웅적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a. 진지하고 목가적인 시인

 단테의 <신곡>에서 단테를 지옥과 연옥으로 안내하고 천국에 있는 베아트리체에게 인도해준 베르길리우스. 그는 북이탈리아 만토바 부근 안데스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폭넓은 교육을 받았다. 그의 청년기는 로마 공화정 말기로 당시 이탈리아의 정치적 상황은 혼미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 격동과는 관계없이 그는 시작에 몰두했다, 그는 수줍음이 많고, 건강이 좋지 못했다. 결혼도 하지 않고 생애의 전반부를 학자이자 은자로 살았다.

  29~33세에 10편으로 된 <전원시>를 완성했는데, 여기에는 3개의 세계, 즉 그리스의 목가시인 테오크리토스가 노래한 시칠리아의 목자의 세계, 베르길리우스가 창조한 목자의 이상향 아르카디아, 내란의 혼란 속에 있는 현실의 로마가 교묘하게 어우러져 독특한 시세계를 이루고 있다. 이 책으로 당시의 유력한 정치가문인의 보호자였던 마에케나스에게 인정을 받게 되고, 아우구스투스의 신임을 얻었다.

  31세~41년에 완성한 <농경시> 4권은 헤시오도스의 교훈시에서 비롯된 시로 예술 후원자였던 마에케나스 재상에게 바쳤다. 여기에서는 농경 과수재배 목축 양봉 등을 차례로 읊었으며, 농경의 기원 원인 본질 실천에 대해 깊이 고찰했다.

제4절에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이야기를 언급하여 헬레니즘 시대의 독특한 그리스 시 기법을 엿볼 수 있다.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물리치고 천하를 평정한다. 이에 베르길리우스는 오랫동안 구상해왔던 그리스와 로마의 이상을 장편 서사시 <아에네이스>에 구현하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로마의 국민적 서사시로 구상하여, 오랫동안의 내란을 수습하고 평화를 실현시킨 아우구스투스를 기념하기 위한 의도로 씌어진 것이다.

  이 작품은 트로이의 영웅 아에네아스를 등장시켜 그의 인물상과 행동을 통해 로마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나타냈다. 11년 동안 전념했던 이 작품은 결국 미완성인 채로 남게 되었다. 그는 불태워버리라는 간곡한 유언을 남겼으나 아우구스투스가 이를 저지했다 한다.

  그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번영과 신의 현명한 섭리를 믿었으며, 고대 영웅들의 언행을 통해 높은 윤리적 세계관을 강조했다. 그의 시에 있어 호메로스의 영향이 뚜렷하지만 나름대로의 독창성을 갖고 있었고, 특히 그리스 신화와 로마 역사화의 교묘한 음합은 시인의 독창적인 착상에서 비롯되었다. 사망 후 나폴리에 묻혔고, 중세에는 위대한 시인예언자로 숭배되었다.


b. 로마의 정통성과 황제의 신격화를 위해 저술

 베르길리우스가 <아에네이스>를 저술하게 된 배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와 동시대 인물인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그 시대의 사회상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제12차 삼두정치

 삼두정치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정치형태로, 용병을 사병화한 군인정치가들의 정치를 말한다. 제1차 삼두정치(60—50 BC)는 케사르(시저)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의 정치를 말하는데, 크라수스는 전쟁에서 전사하고, 남은 두 사람이 대결하여 케사르가 승리한다. 그러나 케사르의 일당독재가 계속되자 공화파인 브루투스 일당이 케사르를 암살한다.

  케사르 암살 후 그의 부하인 안토니우스와, 케사르의 조카인 옥타비아누스, 그리고 레피두스가 이끄는 제2차 삼두정치가 수립된다. 이들은 로마의 영토를 3분하여 각각 통치하다가, 기원전 31년 옥타비아누스는 아그리파의 지휘하에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함대를 악티움 해전에서 격파, 공화정에 종지부를 찍고 아우구스투스의 제정시대를 열었다.


   아우구스투스의 개혁

 아우구스투스의 통치는 새 제국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왔다. 그러나 공화제 말기의 키케로 시대의 문인들은 이전의 공화정에 향수를 느껴 아마도 침묵을 지켰거나 또는 아우구스투스에 대해 반대했지만, 신세대들은 새 시대의 영감을 받아들였다.

  이때 베르길리우스는 무의미한 내전이 종식된 데 안도하고 아우구스투스에게 감사를 느꼈다. 아우구스투스는 국내의 평화와 안정을 이룩했으며 로마 인들에게 민족적 긍지와 용기 절약 의무등 새로운 덕목을 고취시켰다. 이처럼 아우구스투스 체제가 약속해주는 로마의 재건에 대해 열광을 느낀 베르길리우스는, 이제 자신이 평소 준비해온 로마 건국을 찬양한 장편 서사시 <아에네이스>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이 시대(기원전 31--기원후 14)는 라틴 문학의 황금기이기도 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새 제국의 시와 산문의 발달에 알맞은 사회적 지적 풍토를 이루어놓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역사가 리비우스는 <로마 건국사>를 쓰고, 호라티우스는 <조국을 위해 죽는 것은 기쁘고도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베르길리우스는 지중해를 통일한 조국 로마에 역사적 후광을 부여하고 그리스에 대한 민족적 우월성을 입증하기 위해 신화적인 전설을 만들어냈다. 사실 아에네아스는 그리스의 적이었던 트로이 인이고 전쟁 뒤 그의 행적에 관한 뚜렷한 전설이 없었으므로 위대한 로마를 건설하기에 적합한 인물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에네아스의 아들 아스카니우스는 율리우스라고도 불렸으므로 율리우스

케사르(시저)와 그의 조카인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아에네아스의 후손임을 자처했다. 오비디우스는 한 술 더 떠서 <변신 이야기>로 로마 황제를 신격화시켰다.


c. 로마 건국 서사시

 <아에네아스의 노래>란 뜻의 이 작품은 12노래로 되어 있고 각 노래마다 줄거리가 요약되어 있어 작품의 이해를 돕고 있다. 전반부는 주인공 아에네아스가 그리스 군에게 패한 후 유민이 되어 고국 트로이에서 로마에 정착할 때까지의 방황을 그렸고, 후반부는 새 조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전쟁을 다루었다.

  작품의 구성을 보면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전반부는 <오디세이아>요, 후반부는 <일리아드>라 해도 좋을 만큼 두 서사시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트로이 멸망 후 아에네아스의 오랜 망명, 끝없는 표류, 이탈리아에 도착, 전쟁과 정착의 이야기, 그밖에도 많은 사건과 인물들을 위대한 선배 시인에게서 차용해왔다. 이런 이유로 그는 호메로스의 표절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여기서 독자들에게 밝혀둘 것은 로마 신화는 그리스 신화의 복제판이기 때문에 신들의 이름만 다소 다를 뿐 내용에는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이 작품은 저자가 로마 인이기 때문에 고유명사를 로마식으로 해야 하나 그리스 명칭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혼란을 줄 가능성이 있어 본서에서는 로마식을 원칙으로 하되 괄호안에 그리스 명칭을 첨가했다. 예를 들면 유피테르(제우스), 베누스(아프로디테) 등으로 표기했다.


   아에네아스의 방랑과 사랑

 트로이는 그리스 군의 공격으로 함락되었다. 미의 여신 베누스(아프로디테)의 아들이자 트로이의 총대장 헥토르에 이어 제2인자인 아에네아스는 전쟁중에 아내를 잃어버리고, 부친과 아들, 그리고 살아남은 트로이 인들과 함께 로마 건국의 천명을 받고 트로이를 탈출한다.

일행을 태운 21척의 배는 7년 동안 바다 위를 표류한 뒤 이탈리아 땅에 접근하게 되었으나, 여신 유노(제우스의 본처인 헤라)가 방해하여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 닿는다. 유노는 이 마지막 남은 세력을 파괴하여 로마 건국을 방해하려는 것이었다.

  아에네아스는 카르타고의 디도 여왕의 친절한 환대를 받는다. 이렇게 작가는 교묘하게 로마와 카르타고의 두 민족의 연합을 시도한다.

디도는 베누스의 의도대로 아에네아스에 매혹되어 호화스런 잔치를 베풀고 트로이 함락과 그후 표류 이야기를 청해 듣는다.

  트로이는 그리스의 목마계략에 빠져 아에네아스는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는 그의 아내 클레우사의 망령의 예언에 의해 트로이 인들을 이끌고 조국을 떠난 것이다. 그들은 아폴로 신으로부터 <<영원한 어머니를 찾으라>>는 명령을 받고 이것을 크레타 섬으로 해석하고 국가건설을 시도했으나 현지에서 역병이 돌아 실패한다. 그리고 참된 어머니의 땅은 이탈리아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탈리아로 향해 가는 도중 그들은 헬레누스와 그 아내 안드로마케의 환영을 받고, 시칠리아 섬에서 아에네아스의 부친 안키세스를 잃게 된 경위를 말한다.

  이야기를 들은 여왕 디도는 여신 베누스와 유노가 이끄는 대로 아에네아스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아에네아스도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디도는 아에네아스를 위해 사냥대회를 개최했다. 그날 여신 유노가 보낸 폭풍우로 동굴에 피신한 두 사람은 깊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아에네아스는 유피테르(제우스)로부터 부여받은 로마 건국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여왕의 간청을 물리치고 탈출을 도모했다. 그를 잃게 된 여왕은 슬픔에 잠긴 나머지 저주 속에 자살했다.

  아에네아스 일행은 부친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다시 시칠리아섬에 돌아와 부친 1주기 추도경기를 개최했다. 그러나 경기에 출전하지 못한 여자들은 유노의 충동을 받아 배에 불을 질렀다. 배 4척이 불에 타고 말았지만 아에네아스의 기도 덕분으로 다른 배들은 유피테르가 내린 비에 무사하여 그는 적은 수의 부하를 데리고 이탈리아로 향하게 되었다.

  긴 항해 끝에 일행은 쿠마에 상륙했다. 아에네아스는 무녀 시뷸라에게 부친의 넋과 만나게 해달라고 간청하여 그녀를 따라 하계로 내려갔다. 그는 여왕 디도 및 부친 안키세스의 넋과 상봉했다. 부친은 앞으로 위대한 로마 건국은 아에네아스로부터 비롯될 것임을 말하고, 건국자 로물루스로부터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이르기까지의 로마의 미래 지도자들에 대해 언급했다.

  아에네아스는 시뷸라와 함께 <상아의 문>을 지나 지상으로 되돌아와 티베르 강으로 출발했다. 이 땅의 지배자 라티누스 왕에게는 라비니아라는 딸이 있어 구혼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민족 출신과 결혼해야 한다는 신탁에 의해 왕은 아에네아스에게 주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여신 유노는 이 사실을 기뻐하지 않고 구혼자 중 한 명인 투르누스 왕자를 충동질하여 트로이 인과 이탈리아 인 사이의 전쟁을 부채질했다. 아에네아스는 꿈에 나타난 티베르 강의 신의 경고에 따라 에우안데르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에우안데르는 파라티누스 언덕의 도시(로마)를 보여주며 원군과 동맹을 약속하면서 격려해주었다.


   적과의 싸움

 여신 베누스는 대장장이의 신 불카누스(헤파이스토스)로 하여금 만들게 한 무기를 그의 아들 아에네아스에게 주었다. 그중 방패에는 미래 로마의 역사 사건이 예언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에네아스가 원군을 구하러 떠난 사이에 적장 투르누스는 트로이 군의 배에 불을 지르고 진지를 포위했다. 이어 양군 사이에 격전이 벌어졌다. 투르누스는 한때 트로이 지역까지 공격해 들어오기도 했지만 오히려 큰 타격을 입게 되고 그 자신은 강을 헤엄쳐 가까스로 탈출했다.

  천상에서는 신들의 회의가 열리지만 신들 역시 신통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유피테르는 인간세계의 일은 인간 자신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고 정한다. 아에네아스는 동맹군을 이끌고 티베르 강을 내려가 용감하게 싸웠다. 격전으로 양군 모두 피해를 입었다. 도중에 잠시 휴전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끈질기게 싸움을 걸어온 투르누스도 용감한 여전사 카밀라가 전사하자 점차 힘이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아에네아스 편의 전력은 강화되어 계속 이탈리아의 거리에 불을 질렀다.

  투르누스는 아에네아스에게 1대 1의 승부를 신청했다. 이에 응하여 두 장군은 힘을 겨루게 되었다. 그야말로 용호상박의 싸움이 계속되어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다가 아에네아스가 던진 창에 투르누스는 중상을 입게 되었다.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투르누스를 보자 아에네아스는 동정심이 생긴다. 그러나 그가 입고 있는 갑옷이 옛 친구의 것임을 보고 분노하여 죽이고 만다. 이처럼 미완성인 채로 이

서사시의 대단원의 막이 내린다.


   늑대에게 양육된 로마 건국자

 이 작품은 이것으로 막을 내리고 있으나 로마의 건국신화는 계속된다. 아에네아스는 라틴 원주민과 트로이 인들의 단결을 위해 트로이 인들로 하여금 라틴식의 이름을 갖도록 하고, 그의 후손들은 대대로 왕위를 이어가며 라틴 인들을 지배했다. 그의 13대 후손 알바의 왕 프로카스 때 두 자식간에 반목이 일어나 동생 아물리우스가 형인 누미토르를 몰아내고 왕이 된다. 후환을 없애기 위해 누미토르의 아들을 살해하고 외딸인 레아 실비아는 베스타 신전의 수녀로 만들어 누미토르의 가계를 단절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레아 실비아가 베스타의 신전에 바칠 물을 얻기 위해 전쟁의 신 마르스(아레스)의 숲에 갔을 때 갑자기 늑대가 나타나 동굴 속으로 피했다. 그런데 이때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한 마르스가 나타나 교합을 갖는다. 이래서 실비아는 처녀의 몸으로 쌍둥이를 출산하게 된다. 이에 아물리우스는 크게 노하여 실비아와 아이들을 강물에 던져 죽이려 했다. 그러나 신하는 차마 어린 아이들을 죽일 수 없어 광주리에 두 아기를 담아서 티베르 강에 띄웠다. 다행히 티베르 강이 범람하여 쌍둥이를 실은 광주리가 무화과나무에 걸리게 되고, 이때 물을 마시러 온 늑대가 배고파 울고 있는 두 아기를 발견했다. 그 늑대는 두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동굴로 데리고 가서 양육했다. 어느 날 양치기가 동굴 속에 있는 두 아이를 데려다가 키웠는데, 이 두 형제가 바로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와 레무스였다.

  이 두 형제는 양치기로부터 자신들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 분개하여 아물리우스를 살해하고 아버지를 복위시켰다. 그후 로물루스는 도시건설을 둘러싸고 레무스와 의견이 맞지 않아 싸움이 일어났다. 마침내 레무스를 물리친 로물루스는 로마 시를 창건하게 되었는데, 그가 전설상의 로마의 제1대 왕이다.


d. 호메로스와 단테의 가교 역할

 이 서사시는 로마 건국의 이념과 그 과정을 노래한 장엄하고 감격적인 인간정신의 산물이다. 작가는 트로이에서 출발하여 카르타고와 시칠리아를 거쳐 티베르 강에 도착하게 되는 아에네아스의 여정을 통해, 그의 애국심과 영웅심, 그리고 신에 대한 복종심을 그리면서 이러한 그의 성품이 로마 건설의 바탕이 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 작품을 엮는 3대 인물인 아에네아스 디도 투르누스는 비평가들 사이에 끊임없는 혼동과 추측을 불러왔다. 많은 독자들은 아에네아스의 다소 냉담한 성격에 거부감을 느끼고 열정적인 디도와 격렬한 투르누스에게 공감을 할 수도 있다. 흔히 말하듯 로마 시인이 창조한 인물 가운데 유일하게 세계문학사에 길이 남은 인물이 디도다. 카르타고의 여왕으로서 로마적 생활방식과 대조를 보인 그녀는

독자들에게 너무나 진한 연민과 공감을 불러일으켜 아에네아스가 그러한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로마를 건설해야 하는지에 회의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작가의 시선은 아에네아스에게 시선을 집중시킨 듯하다. 아에네아스는 개인적 국가적인 품격의 형상화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경건하여 신의 소박한 신봉자이며 무한한 공감을 주는 인간의 벗이다. 처음에는 절망에 빠지기도 하지만 역시 그는 용감했다. 많은 고난과 역경을 겪으면서 민족의 시조로서 무거운 책임을 지고 힘겨운 문제를 잘 극복해나간다. 정치가이며 군주로서 민족의 흥망을 다스리며 국가 백년대계의 지고한 동기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그의 모습에서 아우구스투스 이래의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위대한 정신적 바탕을 느낄 수 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로마는 마치 인류의 이상향처럼 인식되어왔다. 수많은 시인 묵객 정치가 철학자들이 로마를 동경하며 로마에서 영감을 얻어 새로운 구상을 할 수 있었다. 지금도 로마에 가면 사람들은 황홀감과 경이감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한다. 이 위대한 로마, 이 기적적인 로마의 건국 서사시가 바로 이 작품인 것이다.

  구전적인 설화를 집대성하여 인류 최초의 서사시를 원형적인 수법으로 완성한 호메로스에 비해, 베르길리우스는 호메로스를 취사선택하여 다시 인간예술의 극치를 이루어냈다. 따라서 호메로스가 인간 정신의 위대함과 사건의 처리를 원형적으로 보는 데 비하여, 베르길리우스는 인간 예술의 기교를 최대한 활용하여 로마형의 새로운 서사시 장르를 이룩한 것이다.

  이 책은 당시 로마의 교과서에 실려 학생들이 즐겨 암송하는 시가 되고, 단테에게는 <신곡>의 모티브를 제공해주었으며, 오늘 우리가 읽는 소설이나 시에 나타난 애정의 표현이나 사건의 구성, 기교의 활용이 이미 이 작품에서 비롯되었음을 볼 때, 고전의 위대함을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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