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31 – 정부론(Two Treatises of Civil Government) / 로크(John Locke, 1632-1704)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로크가 명예혁명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해 작성한 이 책은 정치사회의 성립이 각자의 생명, 자유,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개인들의 상호 합의적인 사회계약에 기초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책에 서술된 로크의 정치이론은 최초의 본격적인 근대유산자적 정치이론으로서, 그리고 법치국가. 대의제. 민주주의. 권력분립. 입법권 우위. 저항권등을 주창하고 있는 현대 자유민주주의 선구적 이론으로서 의의를 지닌다.
a. 생애와 작품활동
영국의 버트런드 러셀은 존 로크를 가리켜 가장 행복한 철학자 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의 정치사상이 드물게 동시대인의 환영을 받았기 때문이다. 영국의 명예혁명을 대표하는 정치사상가이며 철학자인 존 로크는 봉건사회로부터 근대사회로 옮아가는 17세기의 대변혁기에, 영국이 낳은 위대한 사상가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근대정치이론의 확립자. 철학에 있어서는 인식론을 창시한 계몽사상의 개척자로 불리어지고 있다. 로크는 브리스틀 근교 링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변호사이자 찰스 1세에 대항했던 의회법학자였고. 양친 모두 근실한 청교도였다. 웨스트민스트 학교에서 6년간 그리스 어와 라틴어를 수학하였는데, 수석을 차지했다. 20세인 1652년 옥스퍼드에 입학하여 철학, 의학, 수학, 자연과학 등을 배웠다. 당시의 옥스퍼드의 분위기는 스콜라 철학이 지배적이었는데, 그는 이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데카르트나 홉스의 철학을 더 좋아하였다. 이 무렵 그는 한 여인을 사랑했는데, 그가 일생을 독신으로 보냈던 것도 이 연애에 실패한 때문인지 모른다. 1666년부터는 옥스퍼드에서 의학을 공부하였는데, 학위는 받지 못했으나 능력은 인정받았다. 그의 생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대법관 출신의 샤프츠베리 경을 만난 것도 의사로서의 활동 때문이었다. 특히 그를 수술한 것이 성공하여, 그의 주치인 겸 가정교사가 되고, 그의 저택에서 찰학과 정치학을 발전시켜나갔다. 이와 같은 의사로서의 경력과 그의 자연철학에 대한 관심은 그가 처음 관심을 가졌던 데카르트의 철학이 갖는 초월적인 형이상학을 모두 배격하고, 모든 지식의 원천을 경험에서 얻고자 하는 경험철학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1681년 샤프츠베리 경은 반역죄로 몰려 위험에 처하자 네델란드로 피신했고, 거기에서 일생을 마쳤다. 로크도 네델란드로 망명해서 스투어트 왕의 폭정이 끝날 때까지 철학연구와 인간오성론의 저술에 힘썼다. 1688년(57세)에는 명예혁명이 일어나서 큰딸인 메리와 그의 남편 월리엄 3세가 공동으로 국왕이 되자, 로크는 새 여왕이 된 큰딸과 함께 같은 배로 런던에 돌아왔다. 귀국 후 왕의 부름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한직에 있으면서 권리장전의 작성에 협력하였고 통치론(2편) 인간오성론 등을 잇따라 출판하였다. 전자는 위대한 자연법사상과 근대정치사상의 근원지가 되었고, 후자는 영국 경험론의 근원지가 되었다. 이때쯤 뉴턴과도 알게 되었다. 그는 생의 마지막 10여년을 오츠에 있는 프란시스 경과 마샴부인의 저택에서 살았다.
그곳에서도 대화와 토론을 주제하여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그는 마샴 부인이 성경에 있는 시편을 읽어주는 가운데, 1704년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임종을 지켜본 마샴부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의 죽음은 바로 그의 생애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경건하고 동시에 자연스럽고 진지한 것이었습니다.
b. 시대적 상황과 로크의 사상
로크의 사상은 시대적 상황과 깊은 함수관계를 맺고 있다. 그는 영국 역사에서 가장 파란이 많은 시기에 일생을 보냈다. 그런데 그 시기는 영국사회의 발전에 있어 매우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는 청교도 혁명과 명예혁명 이라는 두 차례의 혁명을 경험했다. 이와 같은 격변 속에서 영국의 정치는 절대왕정으로부터 공화정으로, 그리고 그 공화정의 지나친 진전에 대한 반동으로 말미암아 다시 국왕주권으로 복귀되었다. 그러나 결국 명예혁명을 통해서 국민주권, 제한 군주제의 확립을 보게 된다. 이 혁명의 이론적 사상을 제공한 사람이 바로 로크이다.
정치사상, 정부론 에서 보이는 그의 사상적 의의는 매우 다양하다. 무엇보다도 자유와 평등의 기본적 인권사상과 의회정치와 권력분립으로 대변되는 현대 민주정치제도의 원리를 공식화 시켰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자유주의자의 입장에서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어 절대왕정을 반박하였다. 신으로부터 평등하게 부여 받은 자기 보존권, 즉 자연권이 왕에 의해 유린당해서는 안되다는 것이다. 그는 정치권력을 입법권, 행정권, 연합권으로 분립시키고 정부에 대한 저항권을 인정하여 명예혁명의 도덕적 정당성을 옹호 하였다. 이러한 저항권 사상은 19세기 독일혁명에, 권력분립론은 몽테스키외에게, 사회계약설은 루소에게, 그의 자유주의는 미국의 독립선언문과 프랑스의 인권선언에 영향을 미쳤다. 한편으로 그의 사회계약설은 루소에 의해 더욱 구체화되었으나. 대의제나 다수결에 대해서는 견해차이를 보인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철학적 급진파인 벤덤주의자들에게는 안내자의 역할을 했다. 벤덤의 공리주의적 목표 및 인간관은 그대로 로크의 경험적 연구방법을 따랐다.
철학사상, 로크의 철학사상은 인간오성론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여기서 영국의 사상적 전통 속에 내려오는 경험주의를 철학적으로 체계화시켰다. 그는 인간인식의 기원을 분석하여 1. 데카르트가 말하는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다는 본유관념을 부정하고, 2. 인간의 마음은 태어날 때부터 백지상태로서, 지식이 형성되는 것은 경험의 결과라 하였다. 3. 지식이란 감각, 즉 지각, 성찰, 기억, 비판 등과 같은 경험을 통해 얻어진다고 보았다.
교육사상, 교육에 관한 몇가지 견해에서 로크는 그의 교육론을 전개했다. 좋은 교육은 (심신) 모두에 관심을 기울이고. 좋은 교육자는 운동과 놀이와 충분한 수면을 강조한다. 어린이의 감정발산은 구속되어서는 안되고 교육자는 지식에 앞서 덕성과 지혜를 심어주어야 한다. 부모의 모범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교육효과를 낳는다고 주장했다.
c. 정부론의 주요 내용
정부론은 두 편의 논문으로 되어 있는데, 그의 정치이론과 정치사상이 잘 드러나고 있는 고전적 명저이다. 제 1논문의 제목은 로버트 필머 경과 그 일파의 잘못된 논리에 대한 반박 이고, 제 2논문은 시민정부의 참된 기원과 범위 및 목적에 관한 소론으로 되어있다.
제 1편은 1680년에 출판된 로버트 필머의 가부장론을 반박하기 위해서 1681년경에 저술된 것이고, 제 2편은 로크가 1683년 네덜란드로 망명했다가 89년에 귀국할 때까지 망명지에서 저술한 것이다. 당시 영국은 청교도혁명에 뒤이은 왕정복고의 반동이 점차 격심해지고 필머의 왕권신수설이 공공연하게 주장되는 상황이었다. 특히 제임스 2세하에서는 토리 당의 전제정치가 그 절정에 이르고 있었으나. 휘그 당은 결국 1688년 제임스를 추방하는 데 성공, 이윽고 명예혁명을 성취시키게 되는데 정부론은 로크가 이 혁명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려고 집필한 것이다.
제 1논문, 로버트 필머는 가부장론에서 왕권신수설을 기초로 하는 전제군주제를 옹호하고 있다. 이 저술을 통해 필머는 가정과 왕국, 아버지의 권력과 국왕의 권력과의 일치를 논거로 하여, 국왕의 권력은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그 후계자들의 부권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았다. 로크는 제 1논문에서 왕권신수설에 입각한 필머의 이러한 주장을 성서를 근거로 하여 아담에게는 무제한적인 절대권력이 없었고, 신은
인간에게 이성과 자기보존의 수단을 부여하였다고 반박했다.
제 2논문: 정치권력과 자연상태, 이 제 2논문이 속칭 시민정부론으로, 로크의정치 사상이 명백하게 논술되어 있다. 먼저 로크는 정치권력을 자연상태의 개인들의 동의에 의해서 성립되는 것으로 규정하고, 이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치사회가 성립하기 이전의 상태, 즉 자연상태가 어떤 것인가를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로크의 자연상태는 홉스가 말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상태가 아니라 평화로운 상태 이며, 각자가 자기보존의 권리를 보호하고 자유롭게 행동하면서도 타인의 생명과 권리를 침해하지 않도록 자연법의 제한을 받는 상태다. 그런데 자연상태와 정치사회의 차이점은, 자연상태에서는 자연법의 해석과 집행이 각자에게 위임되어 있기에 권위를 가진 공적인 재판관이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연상태가 전쟁상태나 예속 상태는 아니다.
자연권과 자연법, 이어 로크는 자연상태에서 인간이 어떤 권리를 보유하는가(자연권)하는 문제를 제시하고, 그 내용을 생명, 자유, 재산 이라 규정한다. 이러한 자연권은 정치사회 이전부터 존재하는 권리이기 때문에, 어떤 정치권력도 이것을 침해할 수 없다. 그런데 로트가 말한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자기보존권, 즉 자연권은 자연법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다. 로크는 자연법을 이성에 입각한 법, 즉 인류상호간의 안전을 위하여 인간의 행동을 규제한 영원한 법칙이라고 규정했다. 자연권은 이러한 자연법의 테두린 안에서 인정되는 것이다. 이 전 인류의 보존이라는 목적과 개개인의 권리보존이라는 목적은 로크에게는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이 양자를 모순없이 조화시키는 것이 제 2편 5장 재산권에 대하여 에서 제시된, 노동이 부를 만든다는 생산력적인 사고방식이다. 즉, 로크에 의하면 세계는 모든 인류공동의 재산으로 주어진 것이므로, 각자는 노동을 가함으로써 사유재산을 만들었고, 이것이 전체적인 세계의 부를 증대시켰다. 따라서 화폐에 의한 부의 불필요한 축적이 없는 한 각자의 사유재산권은 서로 남을 침해하는 일 없이 조화 있게 존재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로크는 말한다.
사회계약, 이상과 같이 로크는 자연상태를 고찰한 다음 (부권)과 정치권력이 이질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고, 이어 정치권력의 문제를 다룬다. 여기서 로크는 정치사회의 목적이 자연권의 보존에 있다면서, 그를 위해 공동의 법률과 재판권을 설정하는 것이 그 본질이라고 역설한다. 그러므로 절대군주가 지배하고 백성은 소송조차 못하는 국가를 정치사회라 볼 수 없으며, 그 같은 국가는 여전히 자연상태에 머물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정치사회는 오직 그 구성원의 동의에 의해서만 성립하는 것이다. 사회계약설의 전제는 1. 모든 인간에게 어떤 도덕적 권리가 있다는 것, 2. 정부는 이 권리를 보호할 의사와 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 등이다. 이와 같은 전제 아래 사람들은 사회나 정부를 구성하는 데 합의를 보게 된다 로크에 있어서의 합의는 국가의 기초이며 주권성립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로크는 정부의 실제 운영에 있어서 대다수의 의사에 따르는 대의제를 주장하였다, 바로 이점에 불만을 느낀 루소는 다수파가 소수파에 대해 행사하는 전제의 위험을 극복하고자 그 자신의 사회계약론 을 제시하였다.
책임 있는 정부와 국민, 그러나 로크의 사회계약설에 의하면 이 함의는 무조건적이 아니라, 정부 쪽에서나 국민 쪽에서 상호간의 의무를 지킬 때만 유효한 것이다. 즉 국민은 이성과 책임을 가지고 방종에 흐르지 말아야 하며, 정부는 위탁된 의무를 잘 수행해야 한다. 만일 정부가 기본권인 생명, 자유, 재산의 권리를 보장하지 않고 방자해 진다면 물러나야 하며, 극단의 경우 혁명에 의해 타도 될 수도 있다, 즉 책임 있는 정부와 책임 있는 국민을 강조한다.
2권분립과 저항권, 로크는 사회계약에 의해 정치사회가 일단 성립하면 다수결원리가 지배한다고 말한다. 이 다수자가 스스로 정치권력을 행사할 때는 민주정제가 되고, 소수자에게 이것을 위임할 때는 과두정치가 된다, 한 사람에게 위임할 경우에는 군주정제가 된다, 로크는 입법권과 행정권 및 연합권(외교권)이라는 세 가지 권력을 내세웠는데, 이는 소위 3권을 분립시킨 것이 아니고, 입법권이 기타 권력에 우선한다고 보았다. 단지 혁명정국에는 행정권이 입법권을 우선하는 경우도 인정(국왕의 대권)하고 있으나. 어느 경우에도 국가를 구성한 원래의 목적, 즉 개인의 자연권을 보존한다는 목적은 어떤 한 권력에 의해서도 침범 받지 않으며, 이것을 침해 받을 때에는 국민이 저항 할 권리를 보유한다고 주장한다.
d. 사상적 의의
로크의 사상은 단지 영국혁명은 물론 미국의 독립혁명과 프랑스 혁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미합중국의 독립선언의 일절은 바로 로크의 정치사상의 간결한 요약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자명한 진리로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그리고 그들에게는 창조주로부터 만인에게 양도해줄 수 없는 일정한 권리가 부여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정부는 이러한 권리를 보전하기 위하여 국민들 사이에 세워지는 것이므로, 그 정당한 권력은 피통치자의 동의에 유래하는 것이다. 정부가 어떤 모양으로라도 이러한 목적들을 파괴하게 되면 국민은 그러한 정부를 변경시킬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되며, 그리고 국민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되는 원칙에 기초를 둔...... 새로운 정부를 세울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프랑스 혁명시의 인권선언 속에서도 권리의 보장이 확보되어 있지 않고 권력의 분립이 확정되어 있지 아니한 사회는 헌법을 갖고 있지 아니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만일 그렇다면 로크의 정부론은 근대헌법의 기본원리를 최초로 명확히 제시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같은 정치사상이 기초가 되어 민주주의 사상이 구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제시한 인간의 자유와 권력의 문제는 벤덤, 래스키 등으로 이어져, 오늘날의 중요한 민주주의적 정치원리의 출발점으로 되었다. 또한 그의 경험론은 18세기 계몽주의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미국의 독립선언과 프랑스의 인권선언 속에 구체화되었다. 그리고 세계인권선언 은 20세기에 있어서의 로크 사상의 빛나는 승리의 산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실로 근대민주주의 정치이론의 위대한 건설자였다. 그의 사상은 시대와 국경을 초월하여 현대인의 가슴 속에 강한 호소력을 갖고 있다. 적어도 민주주의의 본질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먼저 근대민주주의의 정치원리를 담은 로크의 정부론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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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혁명 (출처:나무위키)
최근 수정 시각: 2017-09-19 00:22:09
1. 개요
2. 배경
3. 과정
4. 결과
1. 개요[편집]
1688년에 일어난 영국의 역사적 사건.
의회가 제임스 2세를 몰아내고 그의 딸을 메리 2세로 옹립한 사건... 이긴 하지만 메리 2세는 바지사장이고 그의 남편 네덜란드 공화국의 통령 오랴녜 공 빌럼이 의회와 연합하여 제임스 2세를 몰아내고 윌리엄 3세로 즉위한 사건이라 볼 수 있으며 종종 최후의 영국정복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우연찮게 이전 정복자와 이름도 같다.
피를 흘리지 않고 혁명을 이뤄냈다(=어떠한 사망자도 발생하지 않았다)하여 명예혁명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폭력 사태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2. 배경[편집]
발단은 이렇다. 올리버 크롬웰이 죽은 후 국민들의 강력한 열망에 의해 왕정복고가 이루어지고 그 자리에 찰스 1세의 아들인 찰스 왕자가 찰스 2세로 즉위했는데, 그 뒤를 이어서 왕위에 오른 제임스 2세는 독실한 가톨릭교도로서 에스파냐 같은 가톨릭 국가와의 수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했으며, 정치적으로는 왕권 강화에 힘을 쏟았기 때문에 개신교가 주류였던 의회와의 사이가 악화되었다.[1]
3. 과정[편집]
이 와중에 제임스 2세가 늘그막에 왕자 제임스를 보게 되자[2]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의회는 당시 제임스 2세의 맏딸, 메리 공주와 결혼한 네덜란드의 월리엄 공에게 "영국의 왕위를 양도할테니 부디 영국에 와주십시오"라는 편지를 보내면서 그를 런던에 초청한다. 당시 네덜란드가 원래 신교파였기 때문에 영국이 가톨릭 국가가 되면 대단히 위태로운 상황이라 월리엄 공은 의회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영국에 상륙하고 영국군은 제임스 2세에게 등을 돌리고 월리엄 공에 가담한다.
먼나라 이웃나라를 보면
제임스 2세 : 뭣이!! 윌리엄 짜식이 군대를 몰고 쳐들어온다고!! 사위가 장인을 노리고 쳐들어와? 햐, 세상 한번 말세로다!! 당장 윌리엄 놈의 군대를 콩가루로 만들어 버려랏!!
신하1 : 군대가 있어야 콩가루건 미숫가루건 만들죠......
제임스 2세 : 그......그런가? 그러고 보니 이거 큰일났구나야~~!!
제임스 2세 : (의회에 가서)이제부터 너희들 안 무시하고 같이 일할께! 싸인할 거 시원히 다 해줄께!!
의회 : 때는 늦으리!!! 폐하께 드릴 말씀은 오직 두 단어... 잉글랜드를 떠나라! 조사까지 세 단언데?영어로는 Leave England 니까 두 단어 맞음[3]
제임스 2세 : 얘야, 너라도 이 애비를 위해 뭔가 말좀 해 다오!
(둘째 딸인)앤 공주 : 잉글랜드를 떠나쇼.
...희극적으로 묘사해놨기는 했는데, 결과적으로 제임스 2세는 자식들에게도 버림받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다는 이야기다. 결국 그는 승산이 없음을 깨닫고 프랑스로 망명했고, 런던에 입성한 월리엄 공과 메리는 각각 월리엄 3세와 메리 여왕으로 공동 국왕이 된다.[4] 월리엄 3세의 부재 기간 동안에는 메리 여왕이 국왕으로서 직무를 수행했다고 한다.
사실 위에 인용된 먼나라 이웃나라의 설명은 오류가 있는게, 제임스 2세에게는 상당한 수준의 병력이 있었고, 제임스 2세의 권력기반인 스코틀랜드에서도 그의 명령에 따라 군대가 소집되고 있었다. 다만 이들 부대의 소집과 이동에는 당연히 시간이 많이 소모되어 소규모 정예부대를 동원해 전격적으로 밀고 들어온 윌리엄과 맞설 시간이 부족했을 뿐. 사실 잘 안 알려져있지만 제임스 2세 자신이 실전 경험이 풍부한 유능한 군인이었다.
4. 결과[편집]
이 사건을 계기로 왕의 왕권은 한층 줄어들었다. 오늘날 영국 왕실의 권력이 정립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사건이다.
따지고 보면 무혈 혁명이란건 선전에 불과하며 사실은 피를 많이 흘렸다. 윌리엄 공의 상륙 이후 제임스 2세의 군대와 몇 차례 무력충돌이 있었고,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등지에서는 아예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나, 특히 아일랜드에서는 전국을 뒤엎고 두고 두고 문제가 된 자코바이트/윌리어마이트 전쟁이라 불리는 내전이 터졌고 영국 밖에서는 제임스 2세가 왕위 탈환하려고 프랑스를 끌어들이는 바람에 윌리엄 3세 지휘하에 있던 영국과 네덜란드, 여기에 편을 들은 스페인이 맞붙은 9년 전쟁이 일어났다.[5] 다만 프랑스 대혁명과는 달리 잉글랜드 내부보다는 외적 충돌이 더 많아서[6] 무혈 혁명이라 부르는것 뿐이며, 이 또한 현재 사학계에서 대대적인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문제.
실제로 혁명이라고 하긴 했으나 왕에 맞서 귀족과 젠트리의 이권을 보장한 측면이 강하다. 혁명은 일종의 미사여구였으며, 무혈이 덧붙여진 것은 어떻게든 이 사건의 파장을 축소시켜서 안정적으로 살고 싶은 욕망의 발현이었다. 실제로 인민의 주권이나 저항권에 따른 획기적 변화 그런 거 없고 그냥 제임스 2세가 물러나서 빈 왕좌에 다른 사람이 와서 앉는 식으로 잘 이어졌다. 사실 이때는 보통선거권같은 개념조차도 없어서 돈 있는 사람이나 선거권/투표권을 가질수 잇는 시절이었고 남성한정으로 보통선거권이 주어진것도 1885년도의 일로 거의 200년 후의 일이다. 그리고 의회는 이렇게 냉큼 왕을 쫓아내고 이권을 차지하자마자 밥그릇을 지키려고 선거권 동결하기, 있는 선거권 빼앗기, 선거권 안정적으로 물려주기를 일삼았다.[7] 그래놓고는 훗날 대혁명이 벌어지자 우리는 평화롭게 혁명했지 피분수를 일으킨 프랑스 놈들과 다르다는 선전을 덧붙인다.
명예혁명으로 인해 자코바이트 문제가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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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 (출처:나무위키)
최근 수정 시각: 2017-08-15 19:56:51
淸敎徒
puritan
1. 개요
2. 역사
3. 교육관
3.1. 칼뱅의 교육관
3.2. 교육 시설
4. 정치관
5. 기타
1. 개요[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uritanGallery.jpg
대표적인 청교도 신학자들의 초상화.
장 칼뱅에 의해 발흥된 칼뱅주의 개신교가 영국으로 건너오면서, 영국 교회의 전통주의와 대립하는 입장[1]에서 우리는 '깨끗하다'는 의미로 라틴어 Puritas 에서 유래하여 기존의 전통주의를 정화(purify)한다는 의미에서 복음주의자들이 퓨리턴(puritan)이라고 자칭한 것에서 유래된다.[2] 일본에서 근대화 시기 이 어휘를 청교도로 번역했다. 깨끗할 청을 써서 淸교도.
2. 역사[편집]
성경중심 신앙과 금욕주의, 강경한 반로마교회 기치로 전통주의에 반대 노선을 취한 탓에 영국 국교회의 수호자인 영국 국왕들에게 탄압을 받아, 종교의 자유를 찾으러 북아메리카로 이주하여 미국의 기원이 되었다고 알려졌다.
청교도들의 정체성이 확립된건 영국에서의 종교 탄압 때문인데 시작은 영국교회를 국가교회화여 독립시켜 영국국교회의 수장이 된 헨리 8세 시절이었다.[3] 헨리 8세는 성공회의 창시자 아니냐?는 의문이 생길수 있는데 현대의 성공회 조직과 16세기 부터 18세기 까지의 영국 국교회와는 큰 차이가 있다. 이 부분은 성공회 항목 참조.
영국 국교회와 다른 복음주의 개신교단 사이의 관계가 원만한 현재 기준으로 생각하면, "헨리 8세가 세운 성공회(영국 국교회) 세력도 같은 개신교인데 왜 청교도를 탄압하지?" 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당시에는 사실 성공회와 종교개혁으로 생긴 개혁교회(우리가 흔히 아는 개신교 이미지의 교단들)사이는 역사적 설명이 필요하다
헨리 8세는 영국 내에서의 교황 수위권을 부정하고 영국 교회 자체를 독립시켜 국가교회화 하여 국왕이 영국 내에서의 교회 수장직위를 차지하는데 목적이 있었을 뿐, 가톨릭에서 이어진 외적인 요소들이나 세세한 교리를 뜯어 고치는 데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즉, 당시 영국 국교회는 신앙적으로 프로테스탄트의 정체성을 강하게 가진 교파였다기 보단 '교황 없는 천주교'와 다름 없었다는 것.[4] 그리하여 루터주의에 영향을 받은 윌리엄 틴들의 영어성경을 반입하거나 소지하면 화형시켰고, 가톨릭 교리인 화체설(성체 성변화설)을 부인한 옥스포드 신학교수들을 토머스 모어를 대법관으로 기용하여 40명을 고문하고 6명을 화형시킬 정도였다. 이외에도 종교적으론 가톨릭 신자보단 대륙 신학에 영향을 받은 윌리엄 틴데일 번역 성경 소지자 같은 복음주의자들을 더 많이 처형했고, 가톨릭 교회의 7성사, 가톨릭식 미사에서 거의 달라지지 않은 예배형식, 주교제 등 가톨릭 교회의 기본교리와 외적 요소에 대해선 전혀 바꾸지 않았기 때문에 교황수위권만을(그것도 영국내에서만) 부인한 가톨릭 교도나 다름 없었고 교황의 권위와 권한을 국왕에게 귀속시킨 것에 불과했다.
결국 성경중심의 신앙을 기치로 걸고 루터와 칼뱅주의 신학을 기반으로 기존 가톨릭 전통 즉 가톨릭의 교황제도는 물론이고 주교제 등 교계제도와 예배형식 가톨릭적인 교회 전통과 들을 전부 거부하는 청교도들은 루터나 칼뱅 등이 주장한 '개혁'의 범주에 훨씬 못 미치는, 다시 말해 개혁신앙이 부족하여 아직도 가톨릭적인 요소가 많이 남아있는 교파라는 이유로 영국교회의 개혁이 불완전하다 생각했다. 영국 교회의 대다수 사제들과 신자들은 로마수위권만 부인하면 기존의 신앙과 전례와 거의 유지했기 때문에 영국 국교회의 개혁을 주장한 청교도들을 박해했다. 따라서 당시 복음주의자들은 탄압을 받는 동시에 심각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 당시엔 루터주의와 칼뱅주의(츠빙글리)를 복음주의라 한 것은 당시 영국국교회에서도 가톨릭 성향, 루터주의 성향, 칼뱅주의 성향, 그냥 이것도 저것도 모르겠고 상황에 따라 "국왕이 옳다"...는 현실 성향들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기에 전례나 전통보단 성경중심을 주장하는 개혁 성향 신자들이 자신들을 개신교라 자청하기 보단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며 복음주의자라고 칭했기 때문이다.
헨리 8세 사망후, 에드워드 6세, 메리 1세 치하에서 존중과 박해를 한 번씩 겪으면서 잉글랜드에선 종교적 갈등이 격화 되었는데, 엘리자베스 1세는 집권 초기부터 개혁주의 성향의 신도들 손을 들어주지 않고 당시 강대국인 스페인의 눈치와 아직까지 상당했던 가톨릭 성향 신자들을 배려하여 중도적인 노선을 취했다. 다시 가톨릭으로는 돌아가지 않는 한편 기존의 관례였던 가톨릭식 전통에도 그다지 손을 대지 않은것이다. 특히나 국가교회에서 주교제는 영국왕 입장에서 상당히 매력적인 통치 수단이었고, 이는 개혁성향 복음주의자들에게 큰 불만으로 자리 잡았다. 일단 엘리자베스 1세 시기에는 왕권이 강력한데다가 메리 1세시기 탄압받던 처지보단 천지차이 였기 때문에 대놓고 불만을 드러내진 않았다.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엘리자베스 여왕 사후 제임스 1세때였다.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 국왕 시절 이미 스코틀랜드의 국교화가 된 칼뱅주의 교육을 받았고, 교리상으론 역시 지지했지만 잉글랜드 국왕이 된 후로는 입장이 조금 미묘해졌다. 영국의 국가교회의 주교제가 왕이 임명하는 권한이기 때문. 때문에 스코틀랜드의 개혁교회처럼 잉글랜드가 변할 것이라고 생각한 잉글랜드 청교도들은 매우 실망을 하게 된다.
1603년 4월 제임스 1세는 청교도 성향 영국교회 목사 1000명이 서명한 천인청원(Millenary Petition)을 받게 되는데 일단 청교도들은 왕과 국가에 충성함을 강조하는 동시에 영국교회의 관습에 대한 개혁을 촉구했으나 제임스는 교리상 칼뱅주의에 기울긴 했지만, 급격한 개혁으로 긁어 부스럼을 만드려고 하지 않았다. 외국출신 왕이 즉위하자마자 상당한 세력이 있는 영국교회를 개혁하기 어려운 면도 있었고, 무엇보다 청교도들의 정치관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5]
제임스 1세는 왕권신수설 신봉자였지만 청교도들은 전혀 다른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다. 같은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았는데 왜 이러냐면 칼뱅 사후[6] 8년이 지나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이후 칼뱅주의자들은 국가권력이 탄압하고 국왕이 폭군이라면 퇴출시켜야 된다 는 입장으로 선회했기 때문이다.[7] 그리고 칼뱅주의의 본산 제네바는 공화국이라서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던 제임스에겐 청교도들을 왕권에 대적하는 세력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시기에, 때마침 가톨릭 극단주의자였던 가이 포크스 등이 저지른 영국 국회의사당 화약 폭파 음모로 영국 내 가톨릭의 입지가 위태해지자, 청교도들은 이 기회에 대대적인 가톨릭 탄압을 통해 영국내에서 가톨릭과 교황의 영향력을 뿌리뽑길 바랐다. 하지만 제임스 1세는 선대 메리 여왕 시대의 막장극을 자기 대에 되풀이해서 좋을 게 없다는 현실적인 판단 아래, 음모에 직접 가담한 자들의 처벌과 성공회의 입지 확대만을 꾀하는 정도로 마무리지으려 했다. 제임스 입장에선 가톨릭을 때려잡아봤자 이미 정치적으로 가톨릭 세력은 많이 남지 않았고 과격해진 청교도들의 입장만 대변하다간 왕이 바지저고리 신세로 전락할 여지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왕의 행동이 그동안의 미적지근한 태도에 대한 불만과 함께 스튜어트 왕조의 제임스 1세가 대륙의 30년 전쟁을 강건너 불구경했고,
특히 사위인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가 패망하는데도 소극적인데다가[8] 왕세자의 결혼을 프랑스와 스페인등 가톨릭 국가와 통혼하려 했고 실제로 왕세자였던 찰스 1세를 프랑스 공주와 결혼으로 야합하려는 모습으로만 보였기에 청교도들은 제임스 1세에 반발했고, 그때부터 청교도식 예배를 금하는 탄압이 시작되었다. 다만 제임스 1세는 청교도들만 탄압한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 가톨릭과 청교도들 사이에서 중용을 지킨다고 선언했고, "교황 추종자와 광신적 청교도들은 양극단의 멍청이들" 이라 훈계하며 배격하는 양비론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제임스 1세의 소망과는 달리 당시 영국의 나랏일은 청교도들의 협조없이는 진행하기 어려웠는데, 헨리 8세 시기 상공업을 기반으로 힘을 쌓아 납세자 중 상당수가 대륙에서 전래된 개혁신학을 받아들였고 이들이 법조계와 학계 정계에도 많이 진출한 결과 이 분야에서 청교도들의 세력이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청교도 법학자들은 왕권은 주님의 법 아래에서만 효력이 있다.[9]는 생각이 왕권신수설을 침해한다고 여긴 제임스 1세에겐 심히 불쾌했으나 청교도 법률가나 신학자들에겐 너무나도 당연한 생각이었다.
반면 제임스 1세의 바람대로 중용을 지키는 충실한 신하인 영국 국교회(성공회의 전신)에 충성을 바치는 신도들은 많지 않았다. 통계적으로 영국 국교회(성공회) 신도수가 적은것이 아니라, 국교회와 왕의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그닥 관심이 없었던 현실주의자들이 많았다고 보면 된다. 따라서 개혁신학이란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청교도들의 불만은 숫적으로는 많지 않더라도, 제임스 1세와 그후 스튜어트 왕가 시절까지 왕당파에 대한 강력한 반대 세력이 된다.
이러한 배경속에 청교도 신분으로 박해를 피해 미국에 건너간 메이플라워 호의 사람들 역시 근왕적인 태도를 취했다.메이플라워 서약(Mayflower Compact)(영어가 귀찮다면 여기로)에서 "제임스의 충성스런 신하들..."이란 식으로 자신들은 왕권을 분쇄하는 반란 세력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왕권은 주님의 법 아래 있는 존재라는 것이지 왕권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는것. 그러나 이런 사상 역시도 당시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던 스튜어트 왕가 군주들의 기준으로는 충분히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보았다.
천주교를 확실히 탄압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신대륙으로 떠나갔다고 주장이 있는데 불만도 있었겠지만 이미 청교도들은 이미 찰스 1세시절 국교회 켄테버리 대주교 윌리엄 로드의 종교 정책을 비판하면 종교재판소에 끌려가 코와 귀를 자르는 형벌을 받아서 원성이 높았고 1660년 왕정복고 시기 크롬웰 편을 든 청교도 독립파(회중파)들은 정치적 보복을 피해 네덜란드나 대륙으로 망명을 한데다가 애초에 이들은 영국 국교회내에서 개혁을 포기하고 새로운 교회를 설립하여 독립 하려는 취지라서 프랑스 공주가 모후이며 루이 14세가 사촌이고 처가마저 가톨릭 국가인 포르투갈 출신 왕비라 찰스 2세의 가톨릭 용인 정책이 불만만이 아니라 심각한 위협으로 느꼈다.
청교도 주류는 영국 내에서는 소수파였음에도 상공계급(젠트리, 젠틀맨, 요먼)에서는 상당수를 차지했기에 의회에서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고, 이에 계속 영국에 잔류하며 반국왕운동을 주도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올리버 크롬웰의 철기군. 영국 스튜어트 왕가가 성공회를 유지하면서 가톨릭에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할 때 청교도는 지속적으로 내전에서 의회파를 지지했고, 청교도는 점차로 의회에서 유력해지고, 1642년에 일어난 청교도 혁명의 주체가 되어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로 하여금 정권 접수에 성공했다. 그러나 크롬웰이 정권을 잡자 청교도 다수파인 장로회파를 숙청하고, 소수파인 독립파(회중파) 청교도들만이 크롬웰의 통치에 참여하며 매우 불안정한 통치기반에서 고압적 통치를 자행하기 이른다. 통치시기 청교도 세력은 지나친 종교적 엄숙주의 강요[10] 에 답답해하는 국민적인 불만을 비롯해, 여러 곳에서 나오는 반대를 철권독재로 찍어눌렀고, 결국 독재자 크롬웰이 죽자마자 정치적으로 대대적인 비판을 받았다. 한편 청교도 혁명 당시 채택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현대 개혁교단(특히 영미권, 한국의 장로교)의 교리에 큰 영향을 주었다.
결국 청교도의 시대는 1660년 찰스 2세의 복위로 막을 내리고, 대대적인 역공으로 많은 청교도 지도자들이 실각하고 청교도는 거의 소멸했다. 그들이 정치적으로 다시 복권의 단계를 밟은건 1688년 명예 혁명 때였으나, 이 시기부터는 이미 국교회(성공회) 우위의 상황이 유지되었기에 그 정치적 중요성은 상실되었다. 하지만 경제 및 문화적으로는 금욕, 근검, 절약 등으로 도리어 우위를 점유했다는 견해가 많은데, 여기서 가장 두드러지는 주장이 막스 베버가 주장한 청교도 자본주의다. 대표적으로 저서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있다.
한편 유럽 대륙의 네덜란드와 북독일 일부 지역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영국식 청교도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네덜란드의 경건주의 운동을 'Nadere Reformatie'(나데러 레포르마치, 2차 종교개혁)라고 부른다.
3. 교육관[편집]
3.1. 칼뱅의 교육관[편집]
청교도적 입장에서 타락 전 세상을 가꾸라는 신의 명령(기독교계에서는 문화 명령 혹은 통치 헌장이라 불린다)을 잘 이행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바로 문화와 과학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이라 여겼다. 이러한 점은 중세 시대 가톨릭 수도 공동체 문화와 제세례파들과 대립되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이 17세기 과학혁명과 18세기 산업혁명이 일어나는데에 중요한 이바지를 했다.
"오직 성경"을 강조하려면 모든 이가 글을 배워야 했고, 중세의. 우둔한 전례와 풍습에 비판적이려면 이성을 바탕으로 인문적 지식이 뒷받침이 되어야 하기 때문
주께서 우리가 물리학, 변증법, 수학과 같은 학문에서 불경건한 사람들의 활동과 수고로 도움 받기를 바라시니, 값없이 베푸시는 이 하나님의 선물을 무시해서 우리의 게으름 때문에 마땅한 형벌을 받지 않도록 이 도움을 잘 활용합시다.
장 칼뱅의 기독교강요 2권 2장 16절
청교도 교육관은 이성과 논리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래서 당대에는 이런 공격도 받았다고 한다. "저는 성경으로 더 충만할지 모르는 어떤 박식한 학자의 설교보다, 아무런 연구없이 그냥 성령의 활동으로 말하는 사람의 설교를 듣는 것이 더 좋습니다." [11] 이성과 믿음의 이분법적인 접근보다는 믿음이 이성을 우선하지만 이성 없이는 아무것도 볼 수 없음을 역설했다.
3.2. 교육 시설[편집]
청교도들은 지식 교육에 있어 기독교 밖의 학문을 회피했던 제세례파와 달리 기독교 외의 학문들을 포용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기본적인 교육 방침은 성서에 기반한 신앙인을 교육하는 것이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성서 밖의 학문들을 경시하지도 않았다. 사실 이에 영향을 받아 세워진 교육 대학들은 지금도 미국에 많이 존재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하버드 대학교와 예일 대학교이다. 두 대학은 네덜란드에 망명한 분리주의파[12]였던 청교도 회중교회 출신들이 신대륙으로 건너가서 설립했다. 애초에 하버드 대학교는 목사 양성 학교였지만 시간을 거듭하며 형태가 계속적으로 변했다. 뉴잉글랜드의 첫열매를 보면 하버드 대학교를 세우던 때의 증언이 생생히 녹아있다.[13]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무 탈 없이 뉴잉글랜드로 데려다 주신 뒤로, 우리는 집을 짓고, 생필품을 마련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편한 장소를 세우고, 시민정부를 만들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우리가 간절히 바라고 구한 일 가운데 하나는 배움을 증진하고, 그것을 자손 대대로 물려주는 일이었습니다.
뉴잉글랜드의 첫 열매(New England's First Fruit(1643))
4. 정치관[편집]
아메리카에 사람들이 살게 된것은 스튜어트 왕가의 혐오스러운 폭정과 세속적이고 영적인 폭정에 대한 투쟁 덕분이었다.
아메리카에서 정착을 계획하고, 실행하고, 완수하도록 이끌었던것은 종교뿐만 아니라 보편적 자유에 대한 사랑, 성직자, 위계조직, 전제적 지배자들에 대한 증오와 불안, 공포 때문이기도 했다.
존 애덤스의 『교회법과 봉건법에 관한 논문』(1765)
앞서 영국의 청교도들은 스튜어트 왕가와의 정치적 이념의 차이로 100여년간 극심한 갈등을 겪었다. 이들은 왕권신수설을 배격하고 칼뱅주의에 입각하여 통치자의 권력을 제한할것을 주장했고 이는 영국과 네덜란드를 거쳐 미국으로 이주한 청교도들에게도 이어진다.
그리하여 미국은 건국 이전부터 청교도들의 이주로 인구적 특성이 생겨났으며, 이런 주민들이 영국정부의 식민지 압제에 벗어나 국가를 구성했고 독립혁명의 이론적 기반은 칼뱅주의에 영향받은 공화주의와 존 로크의 사회계약설에 큰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독립헌장에서부터 "모든 사람은 평등하므로 자유롭다"고 선언했다.
프랑스 대혁명이 국가교회인 가톨릭에 반감을 많이 드러냈다면 미국 독립혁명은 청교도 윤리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현재 세속주의에서 주장하는대로 미국 건국이념은 종교와 무관하다는 주장은 건국과 독립전쟁 당시 상황을 잘 알지 못하는것으로[14] 현재 종교의 자유라는 개념이 세속화된 국가에서 어느 종교든지 믿어도 되거나 혹은 종교를 믿지않을 자유 라면 당시 17~18세기 청교도들에게 종교의 자유라면, 수정 헌법 1조에 명시 된대로 영국 국교회와 같은 국교를 두지않고, 국교와 같은 지위의 기독교내 특정종파를 인정하기 않겠다는 취지로 보는게 합당하다. 당시 유럽은 기독교 세계였고 종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 특정 교파냐 아니냐가 정치적 갈등의 주 양상이었기 때문이다.미국 청교도들의 주류는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 찰스 2세의 영국국교회(성공회) 일원화 정책에 반발하여 가장 극심한 탄압을 받던 회중교회나 재세례파들[15]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미국 청교도들의 특징이라면 오히려 현대 미국 자유주의의 원류를 옅볼수 있는데
국가교회 체제에 부정적이며 국가의 권력과 개입을 최소화한다.
개인의 신앙과 양심,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고 개인의 성경중심 신앙을 강조한다.
자유의지를 강조하기에[16] 개인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엄격하게 묻고, 따라서 금욕적인 윤리관을 갖는다.
이런 전통을 이어받아 개인주의, 제한된 권력, 작은 정부를 주장한다.
5. 기타[편집]
미국청교도들을 청교도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미국으로 건너간 이들은 영국국교회(성공회)에서 떨어져나올 것을 주장한 분리주의자들이고, 진짜 청교도들은 성공회 내부에 남아 저항을 계속한 이들이 자처한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메이플라워 같은 이들의 기록에는 청교도라는 표현이 전혀 없다.
사실 잉글랜드의 청교도(칼뱅주의자)들은 주교제 교회인 국교회 내부에 머물거나 회중제를 채택한 개혁교회를 설립하거나 아니면 아예 재세례파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침례회로 옮겨가거나 아니면 존 웨슬리가 감리회를 창설할때 아예 감리회로 가는 경우가 많았고 이들 중 상당수가 신대륙으로 이주했다. 사실 '청교도'라고 흔히 칭하는 사람들 중 이런 경우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보통 청교도들을 영국 국교회(훗날의 성공회)와는 뚜렷하게 구분지어서 생각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은데, 정작 국교회 안에 머무른 칼뱅주의자들도 적지 않다. 지금도 영국 국교회(성공회)에는 저교회파라는 이들의 영향력을 강하게 받은 분파가 있다.
대표적인 청교도 문학으로는 존 밀턴의 <실낙원(失樂園)>, 존 번연의 <천로역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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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오성론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人間悟性論 ]
요약 영국의 철학자 J.로크(1632~1704)의 주저(主著).
4권. 1690년 간행. 서론(序論) 및 제 1권에서는 인간학적인 인식론적 시점(視點)을 설정하고, 우리들 마음속에는 천성적인 원리가 발견되지 않는다고 하여 형이상학적 의론을 배격하였다. 제2권에서는 오성의 직접대상은 관념이고, 관념은 모든 경험에서 유래한다고 하였으며, 관념을 단순관념과 복합관념으로 나누었다. 이에 따라 종래 지배적이었던 신학적 형이상학의 기본개념을 이루던 실체개념은, 인간의식에 의하여 지향되는 대상개념으로 전화(轉化)하게 되었다.
제3권은 언어를 논하고, 언어를 관념의 외적 기호(外的記號)라고 생각하였다. 제4권에서는 지식을 관념의 일치 ·불일치의 지각(知覺)으로서 논하였으며, 직각적(直覺的) 지식, 논증적 지식, 감각적 지식을 음미하였고, 나아가 개연성(蓋然性)을 벗어나지 않은 판단에 대하여 논하였다. 더욱이 이 저서를 축조적(逐條的)으로 비판한 것에는 독일의 철학자 G.W.F.라이프니츠의 《인간오성 신론(新論)》(1704)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인간오성론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人間悟性論]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