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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48 – 조선상고사 (朝鮮上古史) /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독립운동가, 역사학자인 신채호가 중국 중심의 역사관과 식민사관에 의해 왜곡되어가던 한국사를 바로잡기 위해, 중세의 역사관을 극복하고 근대적 역사관에 입각하여 저술한 한국근대사학의 이정표. 자료의 해석과 역사서술의 객관성, 사실성, 종합성들을 강조함으로써, 한국사학을 근대적인 사학으로 끌어올린 이 책에서, 단재(丹齋)는 새로운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하여 단군시대로부터 백제 멸망과 그 부흥운동까지의 한국고대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는 관점에서 서술하였다.


a. 생애와 작품활동

 내가 죽으면 시체가 왜놈들의 발끝에 채이지 않도록 화장하여 재를 바다에 뿌려달라며, 평생을 일제와의 비타협적인 투쟁에 일생을 바친 독립투사 단재 신채호. 한편으로 근대적 민족주의 사관을 확립한 역사가 단재 신채호. 그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여기서는 역사가로서의 단재의 모습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는 충남 대덕군에서 신숙주의 18대손으로 태어났다. 신규식(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대신), 신건식 주중대사, 신석우(조선일보 사장), 신백우(서로군정서 참모), 신기선(대한제국 학부대신) 등은 모두 그의 집안 사람들이다. 25세에 국립대학인 성균관의 교수가 되었으나, 당시의 정세는 한가하게 학문을 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구국운동에 나서기로 결심한다.

1905년 장지연의 초청을 받아 <독립신문>의 후신인 <황성신문>의 논설기자로 입사하여 계몽운동에 나서나, 이 신문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 문제가 되어 폐간당했다. 그러자 <대한매일신보> 양기탁의 초청으로 이 신문에서 활동하게 된다.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외국인이 발행인이었기 때문에 사전검열을 받지 않아도 되었다. 따라서 단재는 여기서 애국심과 국권회복을 고취시키는 열정적인 글들을 쓸 수 있었다. 

단재는 1907년 중국 양계초의 <이태리 건국 3걸전>을 번역, 간행하고, 한국역사상의 3걸로 을지문덕, 이순신, 최영을 뽑아 그들의 전기를 저술하였다. 그가 이 같은 인물들의 전기를 쓴 것은 우리 나라의 청년들이 이러한 영웅들의 행동을 본받아 일제침략자들을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하는 데 영웅적으로 투쟁하도록 고취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그는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독사신론(讀史新論)이라는 사론을 발표하여 지식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는데, 이 글을 통하여 그는 전통적인 유교사관을 통렬히 비판하는 한편, 새롭게 침투해오던 일본인들의 식민주의 사관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1910년 나라가 완전히 무너지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그곳의 독립지사들과 협력하여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해조신문>을 간행하나, 재정의 어려움과 언론에 대한 동포의 인식이 부족하여 이 신문 발행은 여러 차례 중단을 거듭했다. 이때 상해에 먼저 자리잡은 신규식, 박은식으로부터 초청을 받고, 그곳에서 신한청년단과 박달학원에서 청년들에게 우리 역사를 가르쳐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한편, 우리 나라 상고사의 연구에도 열중하였다. 예전의 우리 역사가 결코 퇴영적이 아니요, 고조선, 고구려 등이 강대한 중국에 맞서 영토를 보존해온 역사적 사실을 통해, 민족사관을 정립하는 제 온 정열을 쏟았다.

그는 이국땅에서 학문연구와 독립운동을 병행하면서 10년 세월을 보냈다. 이 사이 국내에서는 31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를 북경에서 맞이한 단재는 조선민중이 직접 나서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사실에 큰 감명을 받고 역사의 주체로서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민중을 발견하게 된다.

상해에 수립된 임시정부에 그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데, 서로 망명정부의 주도권을 잡기에만 열중하는 이승만을 임시정부가 대통령으로 선출하자, 이를 인정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동지들과 함께 <신대한>이라는 신문을 만들어 임시정부를 맹렬히 비난하였다. 1922년 무력 급진노선의 의열단 단장인 김원봉의 부탁으로 그가 보낸 무정부주의 이론가인 유자명과 함께 의열단의 혁명운동의 이념과 방법을 천명하는 선언문을 집필하는데, 이듬해 조선혁명선언을 완성한다.

 조선혁명선언은 단재의 비타협적 민족주의 사상과 유자명의 무정부 이론의 결합으로 볼 수 있는데, 이로 인해 신채호는 무정부주의에 관심을 갖게 된다.

 조선혁명선언에서 그는 강력한 일제침략세력과 맞서려면 파괴암살 등 폭력적 방법이 외교운동이나 문화운동과 같은 미온적인 방법보다 효과적임을 역설했다. 또 민족자본의 육성이나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를 통해 독립을 성취해야 한다는 준비론에도 비판을 가했다. 이러한 혁명적 수단을 강조하는 그의 논리는 일제침략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할 만큼 격렬했고, 의열단원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임시정부 내의 분열에 실망을 느끼고 한때 절에 들어가 <대승기신론>을 읽으며 침잠했던 단재는, 그의 사명이 조선사연구에 있음을 깨닫고 다시 하산하여 조선사연구에 몰두한다. 그는 조선역사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평생 동안 고심했는데, 단재사학이 일관되게 추진한 것 중의 하나가 중국에 대한 사대를 극복하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 이야기만 나오면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을 통탄하곤 했다.

한편 국내의 친지들은 그의 글을 좀더 보급하기 위해 이미 발표된 글을 모아 간행하는 한편, 미발표된 원고들을 찾아 신문지상에 발표하였다. 즉, <임꺽정>의 저자 홍명희는 <동아일보>에 발표했던 단재의 조선사 관계논문을 묶어 1930년 <조선사연구초>를 간행했고, 안재홍은 단재가 1920년대 초에 써놓았던 <조선상고사>를 1931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으며, 1910년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조선상고문화사>도 1931-1932년에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다. 감옥에서도 계속되었던 조선사연구에 대한 그의 정열은 1936년(56세) 여순감옥에서 순국함으로써 일단락이 되었지만, 일제가 싫어 평생 동안 고개를 쳐들고 세수를 하였다는 그의 기백은 그의 독립투쟁이나 역사서술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b. 단재의 역사관

단재의 역사학과 역사관은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독사신론>으로 대표되는 1905-1908년까지의 시기이고, #2<조선상고문화사>로 대표되는 1909-1920년대 초까지의 시기이고, #3<조선상고사>와 <조선사연구초>로 대표되는 1920년대 전반기인데, 그 이후는 그가 무정부주의자로 기울어져 주목할만한 역사서술이 없다.


   <독사신론>

이 글은 한국근대사학의 성립과정에서 민족주의사관을 처음 제시한 글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이 글의 서문에서 국가의 역사는 민족의 소장성쇠의 상태를 서술한 것 이라고 말하고, 민족을 버리면 역사가 없을지며 역사를 버리면 민족의 국가에 대한 관념이 크지 않을지니, 오호라 역사가의 책임이 막중할 진저 라고 하여 역사서술의 주체를 민족으로 상정하였다. 이는 중세의 왕조중심사관을 극복하고 민족사관을 정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독사신론>은 주자학적 정통론과 사대주의적인 존화사관을 철저히 비판하였다. 그는 당시의 단군-기자-마한-신라로 이어지는 정통론은 노예의 헛소리라고 비판하고, 단군-부여-고구려의 역사를 더 강조하였다. 이는 부여-고구려 주족설이라 하는데, 그가 이런 이론을 내세운 것은 부여나 고구려족이 살았던 만주의 고토에 대한 수복의식과 강자중심 역사중심의 역사관의 발로라 보여지는데, 이는 그의 사회진화론적 현실인식에서 비롯된다. 한편 <독사신론>에서 주목할 점은 당시 일본인들이 주장하던 임나일본부설을 한국을 옛날부터 자기 소유물로 인정하여 한국을 침략하기 위해 만들어낸 근거 없는 소리에 불과한 것 이라 비판하여, 한국 근대역사학의 또 하나의 과제였던 식민주의 사관의 투쟁을 시작한 최초의 글이라는 점이다.


   <조선상고문화사>

이 책은 단군조선 2천년 역사를 서술한 것이다. 이 글의 근저에 흐르는 사상은 국수보전론이다. 여기서 국수란 그 나라에 역사적으로 전래하는 풍습, 습관, 법률, 제도 등의 정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단재는 국민정신의 유지와 애국심의 환기는 이 국수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이론은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크게 확산 되면서 국수의 상징으로서 특히 단군숭배의 기운이 일어나 1909년 대종교가 창건되었다. 그리고 1910년대에 들어서는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준비하고 있던 독립운동가들의 대다수가 대종교에 입교하는 현상을 낳기도 했다.


   <조선상고사> <조선사연구초>

단재사학의 대표적인 글이다. <조선상고사>의 서문에서 단재는 역사의 정의에 대해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 밝히고 있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단순히 아와 비아의 투쟁을 역사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밑바닥에 깔린 투쟁의 정신사를 역사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 단재의 역사관의 특징적인 모습이 보인다. 즉, 단재는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사건에서 한국사를 선교, 불교, 독립사상, 진보사상 대 유교사대주의보수사상의 대립축으로 보면서, 양자가 대결하여 후자의 승리로 귀결된 결정적인 사건이 묘청의 난 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역사를 정신사사상사 중심으로 파악하고 있었는데, 이처럼 단재의 관념사관적 성격이 강하게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c. <조선상고사>내용

<조선상고사>는 단군시대부터 백제의 멸망과 부흥운동까지를 총 12편으로 나누어 기술하고 있다. <조선상고사>는 과거의 가치관이나 역사관을 부정하고 새로운 역사관 위에서 우리의 역사를 재평가하였다. 여기에는 강력한 민족의식이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역사관이 이 책의 서론인 <총론>에 잘 나타나 있다.

제1편 총론에서는 단재의 역사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여기에는 역사의 정의와 조선사의 범위, 역사의 3대 원소 등이 나타나는데, 현대의 시각에서 볼 때 비판의 여지가 없지 않으나, 당시로서는 혁명적 견해였다. 먼저 역사의 정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역사란 무엇이요? 인류사회의 아와 비아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여 공간부터 확대되는 심적활동의 상황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인류의 그리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사라 하면 조선민족의 그리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니라. 무엇을 아 라 하며 무엇을 비아라 하느뇨? 깊이 팔 것 없이 얕게 말하자면, 무릇 주관적 위치에 선자를 아라 하고 그외에는 비아라고 하나니, 그러므로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이니라 

이를 정리하면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의 정신사 라는 것이다. 즉, 그는 역사발전의 원동력을 사물의 모순 및 상극관계에서 파악하고 있는데, 이는 헤겔의 변증법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이어서 그는 역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하기 위해서는 사료의 수집비판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실증주의적 역사방법론을 강조하고, 역사는 역사를 위해서 지으란 것이요, 역사 이외에 딴 목적을 위해서 지으란 것이 아니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객관적으로 사회적 유동상태와 거기서 발생한 사실을 그대로 적은 것이 역사요, 저작자의 목적에 따라 그 사실을 좌우하거나 더하거나 혹은 고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여 역사학의 학문적 독립성을 역설했다. 이는 결국 우리의 역사학을 근대적인 역사학으로서 성립시키고자 하는 이론적 작업이다. 또한 단재는 총론에서 사대주의나 유교사상에 물든 기존의 역사가들을 비판하고 있다.

제2편 신수두시대(단군시대), 제3편 3조선시대, 즉 해씨(신조선), 기씨(불조선), 한씨(말조선), 제4편 열국쟁웅시대(대한족 격전시대), 제5편 고구려 전성시대, 고구려 성쇠와 북부여의 멸망, 제6편 고백 양국의 충돌, 제7편 남방 제국 고구려 공수동맹, 제8편 삼국혈전의 시, 제9편 고구려 대수전역, 제10편 고구려 대당전역, 제 11편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 등으로 구성되었다.

우선 주목할 수 있는 것은 단군조의 활동무대를 만주로 한 것과 단군조의 중국에 대한 식민활동이다. 여기서 그의 만주 중심의 단군조 이해는 부여 고구려 중심의 고대사 체계화 및 발해사의 한국사화와 관련되고, 또 만주 중시의 밑바탕에는 한말 일제하에 전개된 만주의 우리 국토화 운동과 독립운동의 기지화 운동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김부식 등 사대주의 역사가와 한국사의 타율성론을 강조하였던 식민사관론자들은 한국사의 본격적인 전개시기를 삼국시대 이후로 보고, 그 역사무대도 한반도가 중심이라고 애써 강조하였다. 단재는 이런 종래의 한반도 중심의 역사무대를 만주 요동반도 및 요서지방과 중국 동북지대에까지 확대한 것이었다.

또 대외 식민활동을 강조하는 단군관은 한말의 사대주의 청산작업과 자강독립운동 및 일제하의 국권회복운동의 기반구축을 단군과 관련시키려는 데 있었다. 단재가 <삼국유사>를 통하여 전통적인 사료들의 틀을 넘어서서 단군문제를 이해하려는 것은, 단군문제가 한말 일제하의 민족주체성의 과제와 연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재의 부여 고구려 중심의 고대사 인식체계는 조선후기의 학자인 이종휘의 <동사>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단재는 일찍이 이종휘의 <동사>를 섭렵했고 그를 극찬했을 뿐만 아니라, <동사>에서 체계화한 한국고대사의 골격이 단재를 거쳐 더욱 정교해졌음을 알 수 있다. 단재의 부여 고구려 중심설은 만주를중심으로 한 고구려의 웅혼성과 대외투쟁의 승리를 강조한 것으로, 이는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 보는 단재의 자강독립적인 사학정신과 상통하는 것이다.

이것은 말하자면 중국에 대한 문화적정치적 사대주의를 타파하려는 의도일 뿐 아니라, 민족적 과제를 역사학과 연결시킨 데서 가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단재가 이러한 관점에 섰을 때, 종래 사가들이 삼국과 신라에 가려서 보지 못했던 부여 가야 발해사에 대한 재조명이 가능했고, 아울러 대외항쟁의 주체였던 고구려와, 해외경략에 앞섰던 백제를 멸망시켜 한국사의 무대를 반도 내로 축소시킨 신라의  삼국통일을 김유신의 음모로까지 혹평하였다.


d. 단재사학의 역사적 의의

단재의 사학은 박은식의 사학과 함께 한국사학의 근대사적인 학문을 성립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단재는 한국사학에서 전통사학과 근대사학식민주의 사학과 민족주의 사학, 영웅사학과 민중사관이 교차되는 그 접점에 서 있다.


   근대사학의 성립

먼저 전통적인 역사학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실학시대의 역사학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삼국사기> 이래의 유교적 사학과 비유교적 사학(선교와 불교의 재야사학자)을 접목시키고 있다. 이는 단재가 유가적 분위기의 한문사료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우리 민족의 전통성과 주체성을 강조할 수 있었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 또한 일반적으로 단재의 사학과 아와 비아의 투쟁의 정신사라 하여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만 이해되어왔으나, 근래에 와서는 그의 역사학이 지닌 중세성의 극복과 근대성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즉, 역사를 편협한 의리론과 정통론적인 이데올로기 성에서 해방시켜,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밝히는 역사과학의 위치로 끌어올렸으며, 그리하여 유교적 중세사학을 완전히 청산하고 근대사학을 성립시켰다고 볼 수 있다.


   민중사관

단재의 역사학에서 보이는 역사인식 주체도 그의 사학의 근대성과 관련 지어 생각할 수 있다. 그는 역사연구의 초기에는 역사의 주체를 영웅으로 보고 갈망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08년을 전후한 시기에 이르면 그는 신민국을 강조하였는데, 기존의 영웅사관에서 국민을 역사의 주체로 보는 역사관으로 변화를 보이고 있다. 그러다가 31운동이 일어나고 1920년대의 사회주의 사상에 의한 평등사상이 고양되고 독립운동에서도 민중지도자가 나오면서 민중을 역사인식의 주체로 보는 사상적 용단을 조선혁명선언 에서 내리게 된다.

따라서 그의 역사주체 인식은 영웅-국민-민중의 순서로 변화되어 가는데, 그가 <조선상고사>를 저술하는 시기에 이르면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인식하는 근대적인 사관의 단계에 이르른다.


   민족주의 사학

이리하여 단재에 이르러 한국의 근대 민족주의 사학이 시작된다. 단재가 근대 민족주의 사학을 일으켰고, 또 그의 고대사 인식에 창조적인 혜안이 번득인다 할지라도, 그도 역시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학자에 불과하다. 그의 투철한 민족애와 자주정신, 치열한 삶이 시대를 넘어서서 두고두고 귀감이 된다 할지라도, 그가 남긴 역사연구 업적은 냉엄하게 비판받았으며 1930년대의 정인보 문일평 안재홍 등에 의해 발전되어갔고, 1940년대에는 손진태 등에 의해 관념론적 한계를 극복하면서 신민족주의 사학으로 비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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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일야방성대곡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1905년 11월 20일. 황성신문 2면 사설란에 실린 '시일야방성대곡'.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은 《황성신문》의 주필인 장지연이 1905년 11월 20일 《황성신문》에 올린 글의 제목이다. 시일야방성대곡이란 "이 날에 목놓아 통곡하노라"라는 의미이다. 장지연은 이 글에서 황제의 승인을 받지 않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고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오적을 규탄했다.

장지연은 이후 1914년~1918년 사이 총독부 어용신문사 매일신보에 주필로 활동하여 700 여편의 친일한시 및 사설을 게재했다는 의혹 때문에 2009년 11월 8일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중 언론 부문에 선정됐다.


내용[편집]

지난번 이등(伊藤) 후작이 내한했을 때에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 동양 삼국의 정족(鼎足) 안녕을 주선하겠노라 자처하던 사람인지라 오늘 내한함이 필경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공고히 부식케 할 방책을 권고키 위한 것이리라."하여 인천항에서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상하가 환영하여 마지않았다. 그러나 천하 일 가운데 예측키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 꿈 밖에 5조약이 어찌하여 제출되었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삼국이 분열을 빚어낼 조짐인즉, 그렇다면 이등 후작의 본뜻이 어디에 있었던가?

그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대황제 폐하의 성의(聖意)가 강경하여 거절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으니 조약이 성립되지 않은 것인 줄 이등 후작 스스로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슬프도다.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자들은 자기 일신의 영달과 이익이나 바라면서 위협에 겁먹어 머뭇대거나 벌벌 떨며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기를 감수했던 것이다.

아, 4천년의 강토와 5백년의 사직을 남에게 들어 바치고 2천만 생령들로 하여금 남의 노예 되게 하였으니, 저 개돼지보다 못한 외무대신 박제순과 각 대신들이야 깊이 꾸짖을 것도 없다. 하지만 명색이 참정(參政)대신이란 자는 정부의 수석임에도 단지 부(否)자로써 책임을 면하여 이름거리나 장만하려 했더란 말이냐.

김청음(金淸陰)처럼 통곡하며 문서를 찢지도 못했고, 정동계(鄭桐溪)처럼 배를 가르지도 못해 그저 살아남고자 했으니 그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제 폐하를 뵈올 것이며 그 무슨 면목으로 2천만 동포와 얼굴을 맞댈 것인가.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 2천만 동포여, 노예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과 기자 이래 4천년 국민 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같이 보기[편집]

을사늑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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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사신론

[간략정보]

한자 讀史新論

분야 역사/근대사

유형 문헌

시대 근대

성격 현대문헌|학술연구서

편저자 신채호

제작시기 1908년 8월 27일∼1908년 12월 13일

간행/발행/발급자(처) 『소년』 1910년 8월호에 「국사사론」으로 전재

소장처 단국대 도서관

집필자 

 

 

[정의]

1908년 신채호(申采浩)가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해 서술한 최초의 한국 고대사 역사서.

[개설]

『대한매일신보』에 1908년 8월 27일부터 12월 13일까지 연재되었다.

[편찬/발간 경위]

신채호는 “16년 전에 국치에 발분하여 비로소 『동국통감』을 열독(閱讀)하면서 사평체(史評體)에 가까운 「독사신론」을 지었다.”고 술회하였다.

1910년 국권 회복 운동에 전념하고자 만주로 망명한 뒤, 최남선(崔南善)이 경영하는 잡지 『소년』 1910년 8월호에 「국사사론」이라는 제목으로 전재되었는데, 이따금 표현의 차이 및 삭탈된 부분이 있다.

이를 전재하면서 최남선은 “순정사학(純正史學)의 산물로 보아주기는 너무 경솔하고, 그렇다고 순연히 감정의 결정이라고만 하기도 바르지 못한지라……조국의 역사에 대해 가장 걱정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참과 옳음을 구해 오래 파묻혔던 빛과 오래 막혔던 소리를 드러내려고……이를 수록하노라.”고 평하였다.

[서지적 사항]

이 논문은 1908년 전후의 신채호의 역사 인식을 포괄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는데, 미완성의 논문으로서 완결 편이 『조선상고사』와 『조선상고문화사』이다. 체재는 서론과 상세(上世)로 나뉘며, 서론에서 인종과 지리를 논하면서 그의 사관을 피력하였으며, 상세에서는 단군에서부터 발해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서술하였다.

[내용]

내용은 ① 단군 시대 ② 부여 왕조와 기자(箕子)·부론(附論) ③ 부여족 대발달시대 ④ 동명성왕의 공덕 ⑤ 신라 ⑥ 신라·백제와 일본의 관계 ⑦ 선비족·지나족과 고구려 ⑧ 삼국흥망의 이철(異轍) ⑨ 김춘추(金春秋)의 공죄 ⑩ 발해의 존망 순서로 논술하였다.

저자는 먼저 “국가의 역사는 민족의 소장성쇠(消長盛衰)의 상태를 서술하는 것이며, 영토의 득실을 논하는 것은 아니다”고 하여 국가주의·민족주의의 입장에서 역사를 보고 있다. 즉, 국사란 국가의 역사로서, 국가가 민족에 의해 성립된 유기체이므로 민족사가 곧 국사인 것으로 파악하였다. 따라서, 국가의 주권을 행사한 주족(主族)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한 것이다.

4천 년간의 민족사는 부여족 소장 성쇠의 역사라 하여 부여족을 주족으로 인식하였다. 이것은 부여족이 살았던 만주를 우리나라 영토화하는 동시에, 현실적인 외세의 침략에 대한 자긍 의지를 뚜렷이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단군시대부터 발해의 멸망에 이르기까지를 부여족의 활동과 다른 민족과의 교섭 과정으로서 인식하고자 하였다. 단군의 정통이 부여로, 그 다음에는 고구려·백제·신라·가야로 계승되며, 종래에 중시되던 기자·위만·한사군은 부여족의 역사에 부속시켜 서술하였다.

따라서, 정통론 사학에서 주장되던 기자조선에서 마한 또는 삼한으로 정통이 계승된 것으로 파악되던 고대사 인식 체계가 뒤집어지게 되었다. 또한, 긍정적으로 평가되던 삼국 통일의 역사적 의의를 비판해 김유신(金庾信)·김춘추 및 김부식(金富軾)의 공죄(功罪)를 논하였다. 이것은 한국의 고대사를 반도 중심으로 보았던 종래의 역사 인식 체계를 만주 중심과 단군 부여족 중심으로 본 필연적인 결과인 것이다.

[의의와 평가]

이 논문에 의거해 한국의 민족주의사학이 식민지화된 뒤에 식민사관에 대처하기 위해 성립된 것이 아니라, 이미 애국계몽운동기에 계몽 운동의 일환으로서 싹텄음이 밝혀졌고, 민족주의사학의 발생 상한선이 올라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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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일본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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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또는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 임나지왜재(任那之倭宰),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는 4세기 ~ 6세기에 왜국이 한반도 남부의 임나(가야)지역에 통치기구를 세워 한반도 남부 지방의 일부를 다스렸다는 학설이다. 일본인 학자 스에마쓰 야스카즈가 주장했다.


목차  [숨기기] 

1 개요

2 사료

3 임나일본부설 비판

4 현대의 학설

5 같이 보기

6 각주

7 참고 문헌 및 링크

개요[편집]

이 학설은 크게 3가지 사료로 나뉘어 생각되며, 이는 391년 광개토왕릉비 신묘년 기사, 《일본서기》에 진구 황후 편에 신라와 백제가 조공을 바쳤다는 내용의 기사, 백제의 칠지도 명문이다. 이 가운데 특히 8세기의 역사서 《일본서기》에 근거하여 임나일본부의 실재 여부나 그 기능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많은 이견이 있다. 2010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임나일본부설과 관련해 임나일본부의 존재 자체가 없었다는 데에 의견을 같이 했음을 밝히고 있다.[1] 다만 일본의 몇몇 교과서에는 이 내용이 그대로 실리기도 하였는데 이는 곧 임나일본부설이 공식적으로 폐기된 학설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육과정에서 이를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음을 나타낸다.[2]


사료[편집]

임나(任那)는 삼국사기 강수전의 '임나가량(任那加良)'이나 진경(眞鏡)대사 탑비에 쓰여진 '임나왕족(任那王族)인 흥무대왕 김유신'[3] 에서도 쓰고 있는 말로, 임나는 가야 연맹체의 중심이었던 가락국의 별칭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본 측 사료에서는 가야 전체를 가리키거나 가락국 뿐만 아니라 반파국, 안라국 등 가야 연맹체의 특정국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고 있다.

《일본서기》에는 진구 황후가 369년 가야 지방을 점령해 임나일본부를 두고 실질적인 통치를 하다가 562년 신라에 멸망했다고 쓰여 있다.

광개토왕릉비의 신묘년(391년)에 해당하는 기사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이 부분의 내용은 신묘년에 일어난 구체적 사건을 적은 기사라기보다는 396년부터 407년까지 사이에 고구려가 벌인 남진정책의 명분과 성과를 집약 기술한 집약문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부분은 비문이 파손되고 "海"의 경우 "每"를 고친 것으로 볼 여지가 있어서 비문의 일부가 일제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원문: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 破百殘□□新羅 以爲臣民.

백잔(백제), 신라는 과거 속민으로 조공을 해왔었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년)에 내습하니 바다를 건너 백잔, □를 격파하여 신라를 [구원하고] (모두) 신민으로 삼았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 □□ 신라를 격파하고 (모두) 신민으로 삼았다.(논란 부분을 참고할 것)

일본에서는 손상된 글자를 "任那"라고 주장하여 "왜가 바다를 건너(渡海) 백제, 임나,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4]

반면, 한국에서는 손상된 글자에 대해 같은 기사의 바로 다음에 "영락 6년에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잔을 토벌했다."고 쓰여있는 것과 당시 백제와 왜가 연합해 신라를 압박했던 상황, 광개토왕릉비의 여러 기사에서 백제와 왜가 연합하고 고구려가 왜를 궤멸시켰다고 쓰여 있는 것을 근거로 "(고구려가) 신묘년에 왜가 내습하니 백제, 왜를 격파하여 신라를 구원하고 (모두)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하는 주장이 많다.

그밖에 고구려가 백제를 상대로 남진전쟁을 일으킨 것은 백제와 연합한 왜가 제후국인 신라를 공격했기 때문이라는 전쟁 명분을 기술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최근에는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일본인 학자들도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5]


남조(南朝) 송(宋), 제(齊), 양(梁) 나라의 역사기록에 나오는 왜왕의 책봉기사도 들고 있다. 여기에는 왜왕이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제군사왜국왕(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 諸軍事倭國王)"이라는 관작(官爵)을 인정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송에서는 백제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 대한 왜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듯한 칭호를 내린 것으로 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의 칠지도(七支刀)에 대해서도 왜의 군사적 우세와 한반도 남부 지배를 인정한 '번국(蕃國)' 백제가 야마토 조정에 바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임나일본부설 비판[편집]

《일본서기》는 8세기 초에 쓰여진 책으로써 그 내용이 의심스럽고 상호 모순되는 부분이 많아 지금은 일본의 학자들도 비판을 하는 자가 상당히 많다. 임나일본부설과 관련된 일본서기의 대표적인 왜곡으로 백제의 장군 목라근자(木羅斤資)에 대한 일본서기의 서술이 있다. 일본서기 382년 기록[6] 을 보면 전쟁에서 대가야를 구원한 사람은 백제 장군인 목라근자로 되어 있다. 그러나 목라근자의 가야제국(諸國) 평정과 대가야 구원을 마치 천왕의 명에 따라 일본에 파견하여 이루어진 것처럼 왜곡되고 있다. 백제는 내륙국이였던 대가야를 바로 구원할 수 있었지만, 일본은 내륙에 있는 대가야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바다를 건너 한반도 남쪽 지역들을 뛰어넘어야 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7] 이 기록을 근거로 일본의 학자들은 일본이 가야를 200년 가까이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했었다.

'일본' 이라는 국호는 고구려,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한 7세기 이후에 사용된 것이니 만큼, 4세기에 '일본' 이라는 명칭이 들어가는 '임나일본부' 가 있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8]

임나일본부는 중요한 역사 기록 일텐데 고사기에는 전혀 기록이 되어 있지않다. 720년 편찬된 일본서기보다 8년 전 편찬된 고사기에는 신공왕후의 임나정벌과 같은 사실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9]

200년간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데 한국의 기록에 이를 입증할 만한 단서가 전혀 없다. 단지 '임나' 라는 지명만이 광개토왕릉비, 삼국사기, 진경대사탑비에 보일 뿐이다.

왜의 가야 지배를 입증할 고고학적 유물이 전혀 없다. 만약, 왜가 가야를 정복했다면 4세기에 가야 유물이 끊기고 6세기에 왜의 유물이 출토되어야 한다. 하지만, 출토된 유물은 4~6세기까지 가야유물이 계승된다.

5세기~6세기 전반에 걸쳐, 야마토왕조가 가까이 있는 구주왕조를 정복하고 있지 못했는데, 그 이전(4세기)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정복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않는다. 4세기는 백제의 근초고왕 전성기로써, 백제의 전성기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 지방을 정복할 수는 없다.

그 당시, 배의 운송 능력이 군인 25명, 말 2~3필 정도이다. 이러한 능력으로는 일본 열도로부터 한반도 남부 지방을 경영할 만한 충분한 병력과 물자를 한반도에 전달할 수 없다.

남조(南朝)의 송(宋)으로부터 받았다는 왜왕의 책봉기사 역시 왜왕이 받은 칭호의 등급이 고구려, 백제보다 낮았다는 점에서 해당 칭호는 별 의미가 없음이 중국 기사로 확인된다. 왜왕은 478년에 안동대장군을 받았는데, 백제왕은 420년에 그보다 두단계 높은 진동대장군을, 고구려왕은 백제왕보다 두단계 높은 정동대장군을 받았다. 당시 중국과의 교류가 없던 신라를 빼고, 왜왕이 중국왕조들에게서 받은 칭호는 항상 고구려, 백제보다 낮았다.

칠지도 앞면의 후왕(侯王)은 왜왕(倭王)을 가리키는 것으로 백제가 왜의 상국이었음을 뜻하고, 뒷면에 전시후생(傳示後世,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은 전형적으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명(下命)하는 형태의 문장이라는 점에서 칠지도는 백제가 왜왕에게 하사한다는 뜻으로 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현대의 학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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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일본부설에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이들 학설 가운데 몇 가지를 뽑아 보면,


일본이 가야 지방에 일본부를 두고 가야를 실제로 지배했다는 설.(스에마쓰 야스카즈, 이시모다 다다시 石母田正, 야기 아쓰루 八木充의 說, 기존 일본 학계의 통설이었던 說)

가야 지방의 일본인을 관리하기 위해 일본 조정이 세운 기관이었다는 설.(일본의 이노우에 히데오 井上秀雄의 說)

일본과 외교 관계가 돈독했던 가야 동맹의 한 나라였다는 설.[출처 필요]

교역을 위해 양국이 교류한 흔적(교역기관)이라는 설.(이병도, 이근우, 김태식과 요시다 아키라 吉田晶의 說)

가야인이 일본 열도로 건너가 세운 나라였다는 설. (김석형의 說)

백제가 가야를 지배하기 위해 세운 기관(백제군사령부)이었다는 설. (천관우, 김현구의 說)

한국의 역사학자 이병도는 일본사에서 소위 임나일본부(ヤマトノミコトモチ)란 왜관(倭館)의 관리와 같은 종류의 것으로서 이 때에는 다소의 정치활동을 겸하였던 것인 듯 하거니와, 이 역시 본질적으로 구명(究明, =규명)하면 철, 금, 은, 직물, 재보(보석), 기타 곡물의 무역취인을 주로 맡던 일종의 공(公)적 상관(商官)이라고 설명하였다.[10]

또다른 학설.(백제 성왕의 대가야 진출을 의미)

같이 보기[편집]

가야

광개토왕릉비

고훈 시대

전방후원분

칠지도

분국설

각주[편집]

이동 ↑ 여홍규 기자 (2010년 3월 23일). “한일 양국 역사학자 "임나일본부는 없었다"”. 문화방송.

이동 ↑ ““일본이 고대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說은 거짓말””.

이동 ↑ 大師諱審希俗姓新金氏其先任那王族草拔聖枝每若隣兵投於我國遠相興武大王

이동 ↑ ::자료마당::

이동 ↑ 한·일 역사공동위 결론… 日 "임나일본부설 근거없다",《세계일보》, 2008.12.21

이동 ↑ 일본서기 "百濟記云、壬午年、新羅不奉貴國。貴國遣沙至比跪令討之。新羅人莊飾美女二人、迎誘於津。沙至比跪、受其美女、反伐加羅國。加羅國王己本旱岐・及兒百久至・阿首至・國沙利・伊羅麻酒・爾汶至等、將其人民、來奔百濟。百濟厚遇之。加羅國王妹既殿至、向大倭啓云「天皇遣沙至比跪、以討新羅。而納新羅美女、捨而不討、反滅我國。兄弟人民、皆爲流沈、不任憂思。故、以來啓。」天皇大怒、卽遣木羅斤資、領兵衆來集加羅、復其社稷。一云、沙至比跪、知天皇怒、不敢公還、乃自竄伏。其妹有幸於皇宮者、比跪密遣使人問天皇怒解不、妹乃託夢言「今夜夢見沙至比跪。」天皇大怒云「比跪何敢來。」妹、以皇言報之。比跪、知不兔、入石穴而死也。"

이동 ↑ 김현구 (2002).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창작과비평사. 56~60쪽. ISBN 9788936482251.

이동 ↑ 김현구 (2002).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창작과비평사. 70~73쪽. ISBN 9788936482251. '일본(日本)'이라는 명칭은 7세기에 생겨난 말로 '일본현읍'이라는 표현이 보이는 509년에는 '일본현읍' 중의 '일본'이라는 표현은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동 ↑ 임라일본부 연구

이동 ↑ 삼한문제의 신고찰(6), 이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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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청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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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청의 난(妙淸-亂, 1135년 1월 19일(음력 1월 4일) ~ 1136년)은 고려 인종 때 승려 묘청 등이 금국정벌론과 서경천도론이 개경 귀족들의 방해로 무산되자 서경(西京)[1]에서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 군호(軍號)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하여 대위국(大爲國)을 선언하고 일으킨 반란이다. 대위국이라는 새로운 국가이념 차원의 반란은 김부식이 지휘하는 진압군의 공격을 받고 내부 분열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1년간 치열하게 지속되었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주의 사학의 선구자인 단재 신채호는 묘청의 난을 두고 '조선역사상 1천년래 제1대 사건'이라 했다.[2] 묘청의 난을 가리키는 요즘 이름으로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있다.


목차  [숨기기] 

1 배경

1.1 서경 천도 운동과 금국정벌론

1.2 서경파와 개경파의 갈등

2 개경파의 반발과 천도운동의 좌절

3 경과

3.1 묘청의 반란

3.2 정부군의 진압

4 평가

4.1 신채호의 평가

4.2 반론

4.3 묘청에 대한 비판

5 영향

6 기타

7 관련 항목

8 각주

배경[편집]

서경천도론을 처음 내세운 사람은 묘청이었다.[3] 그는 일관 백수한을 제자로 삼고 이른바 음양비술이라고 일컫는 풍수설을 바탕으로 서경세력들을 규합하고 있었다.[3] 그 결과 정지상을 비롯하여 내시낭중 김안, 홍이서, 이중부, 문공인, 임경청 등이 묘청의 풍수설에 매혹되었다.[3] 그는 유교를 신봉하는 관료들의 사대적이고 유약한 태도를 비판하면서 칭제건원, 즉 중국처럼 왕을 황제라 부르고 연호도 중국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풍수지리사상에 입각하여 개경은 이미 지세가 다 했고, 서경의 임원역에 궁궐을 지으면 36방의 주변국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릴 것이라며 왕을 설득했다.[2]


북방에서는 여진족이 힘을 길러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금(1115년)이라 한 다음 고려에게 형제관계를 맺자면서 스스로 형이라고 자처하고 있었다.[2] 묘청은 이를 두고 당치도 않은 일이라며 금나라의 국서를 내칠 것을 주장했다.


여진족은 본래 압록강 연안 및 연해주 일대에 살면서 늘 고려에게 복속해오던 민족이다. 고려의 관료들은 이같은 민족적 치욕을 당하면서도 소극적 태도를 취할 뿐이었다.[2] 묘청은 서경 천도와 아울러 금을 정벌할 것을 주장했다. 묘청 이외에도 정지상, 백수한 등이 칭제건원과 북벌에 적극 동조했다.[2]


서경 천도 운동과 금국정벌론[편집]

이런 상황에서 개경에 기반을 둔 기존 세력이 아닌 서경의 신흥 세력이 부각되었다. 이들 서경 세력은 고려 4대 국왕 광종 이후 주도권을 개경과 개경 이남의 문벌 귀족 출신에게 빼앗긴 세력이었다. 특히 서경 출신이자 빼어난 시인으로 알려진 정지상은 이자겸 제거에 공을 세운 권신 척준경을 과감히 탄핵해 그를 귀양 보내는 데 공을 세웠다. 이로써 정지상은 인종(仁宗)의 최측근으로 부상했다. 정지상은 서경 출신의 승려인 묘청의 사상을 신봉했고, 묘청을 인종에게 소개하였다.


풍수지리설의 대가(大家)로 알려졌던 묘청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고려가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은 수도인 개경의 지덕(地德)이 쇠약한 때문이라고 역설하였다. 따라서 나라를 중흥하고 국운을 융성하게 하려면 지덕이 왕성한 서경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덕(地德)이 다한 개경을 버리고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면 금나라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고, 중심국가가 될 수 있다고 묘청이 주장하였다. 묘청 일파는 역대 고려 사회의 민심을 지배해온 도참설에 의거하여, 인종의 용기를 북돋워 개경의 문벌 귀족 세력에 맞서 서경천도 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들 개경의 문벌귀족 세력을 유교주의, 사대주의 세력 또는 “개경파”로, 묘청 일파를 국수주의, 배타주의(排他主義) 세력 또는 “서경파”로 일컫기도 한다.


당시 고려 사회에는 신라 말기 이래 풍수지리설이 크게 성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묘청 등의 주장은 큰 호소력을 가지게 되었다. 1126년(인종 4) 정지상도 백수한과 더불어 묘청의 주장을 거들었다. 왕의 측근과 조정 대신들을 설득하여 묘청을 성현으로 추천하여 모든 정사의 최고 고문으로 삼을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묘청은 곧 인종의 총애와 함께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고, 묘청의 건의를 받아들인 인종은 1127년(인종 5) 이후 서경에 자주 거둥하였다. 이와 동시에 서경 천도는 곧 실현될 듯이 보였다. 처음에는 유신들이 의심하여 반대했으나 결국 그들이 내세운 풍수지리설에 설득 되어, 묘청 등은 인종의 서경행차에 성공하고 15조항의 유신정교(維新政敎)를 선포하였다.


1128년(인종 6) 묘청의 건의에 따라 임원역(林原驛)[4]에 대화세(大花勢)가 있으므로 그곳에 신궁인 대화궁을 세우면 천하통일을 이루고, 금나라 및 그밖에 많은 나라가 고려에 항복하여 조공할 것이라 하여 서경 천도 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당시 인종도 이자겸·척준경(拓俊京) 등의 난으로 궁궐이 소실되자 그해 11월부터 신궁 건설에 착수하게 되었다.


서경파와 개경파의 갈등[편집]

1131년(인종 9)에는 인종을 설복시켜 새 궁궐에 팔성당(八聖堂)을 신축하여 보살·석가·부동(不動) 등 8개의 상(像)을 그려서 안치시켰다. 이듬해 1132년 왕은 이자겸(李資謙)의 난으로 불타버린 채 있던 개경의 궁궐을 영수(營修)함에 있어 묘청과 그 일파들에게 궁터를 보게 하니, 묘청은 서경 천도를 목적으로 개경의 궁터가 서경의 그것보다 못하다고 역설하여 드디어 공사는 중지되고 왕은 묘청의 인도를 받으며 서경에 내려가 천도를 결정지으려 했으나, 김부식·이지저(李之底) 등 사대적(事大的)인 개경의 귀족이 반대하여 중지되었다.


그 후 인종은 다시 개경으로 가서 머물다가 1132년 왕궁이 수축되자 서경행을 결심한다. 묘청은 인종을 수행하여 서경까지 갔다. 왕궁을 수축하자 다시 서경으로 행차하였는데, 이때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고 돌풍이 불기 시작했다.[5] 이때문에 인종을 태우고 가던 말들이 놀라 엉뚱한 곳으로 달려가 진창에 빠져버렸고, 호종하던 시종들은 왕의 행방을 잃고 찾아다니는 사태가 발생했다. 게다가 그날 밤 눈발이 날려 낙타가 죽고 말과 사람이 다치기도 했다.[5] 서경 가는 길에 사고가 발생하자 개경파 귀족들에게 심한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묘청을 배척하는 소리가 높아갔다. 1133년 직문하성 이중, 시어사 문공유 등이 상소하여 묘청을 비롯한 그 일당들을 멀리할 것을 상소하였지만 인종은 수용하지 않았다. 인종은 오히려 1134년 묘청을 삼중대통지 누각원사로 삼고 자색의 관복을 하사하였다.[5] 인종의 신임을 확신한 묘청은 다시금 '칭제건원'을 상소하였지만 김부식이 이끄는 개경 세력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5] 이렇게 되자 조정은 묘청이 이끄는 서경세력과 김부식이 이끄는 개경 세력으로 분리되어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5]


그러나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친 왕은 마음이 바뀌었다.[6]


개경파의 반발과 천도운동의 좌절[편집]

그러나 당시 조정 안에는 서경 천도 계획에 반대하는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 김부식은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이들은 정지상·묘청 등 서경파의 의도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개경파의 반발에 초조해진 묘청 일파가 지나친 농간을 부린 것이 폭로되자 유신들의 강경한 반대가 대두되었다. 결국 인종은 서경 천도를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특히 묘청은 대화궁을 지으면 천하를 통일할 수 있고 금나라도 저절로 항복할 것이며, 그밖에 많은 나라가 와서 조공할 것이라고 장담하였으나, 준공 뒤에도 전혀 달라진 것이 없고, 오히려 자연재해가 잇따라 일어나기도 했다.


묘청은 상징 조작에 능했다. 이를 이용하여 인종의 총애를 받고 권력을 차지했다. 그러나 그 도가 지나쳐 오히려 신뢰를 잃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 가지 사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1132년(인종 10년) 음력 2월, 인종이 묘청을 따르게 하고 서경으로 가던 중 큰 폭풍우를 만나 수많은 인마가 살상되고 인종을 비롯한 대소신료가 고초를 겪었다. 이에 묘청의 입장은 난처해졌다. 폭풍우와 고생이 묘청의 탓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자 묘청은 무리수를 썼다. 기름이 들어간 떡을 강에 던졌던 것이다. 기름떡에서 흘러나온 기름이 수면에서 오색으로 빛났고, 묘청은 이를 용이 침을 토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이런 현상은 천 년에 한 번 있기도 힘든 상서로운 기운이라는 것이다. 묘청과 검교태사를 지낸 이재정 등 서경인 50여 명은 이때 금나라를 공격하자고 했다.


하지만 신중했던 인종은 결정을 미루고, 대신에 문공인과 참지정사 이준양에게‘용의 침’을 조사하게 했다. 그 결과‘용의 침’은 기름떡을 가지고 농간한 것임이 탄로났다. 묘청과 정지상 등의 정치적 위신은 크게 실추되고, 조정에서는 묘청 일파에 대한 숙청 요구가 잇따랐다. 그러나 인종은 용인하지 않았다. 오히려 얼마간은 서경의 대화궁에 행차할 것을 요청하는 묘청의 건의를 절반쯤 받아들여 옷만이라도 보내게 했다. 묘청이 무리하면서까지 대화궁 행차를 거듭 왕에게 청원한 것은 서경 천도를 기정사실화하고자 했던 때문이다.


이외에도 풍수지리상 명당이라던 대화궁이 여러 번 벼락을 맞아 불탄다거나, 극심한 가뭄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굶어죽기도 했으며, 또 대동강에서 뱃놀이하던 인종이 풍랑을 만나 큰 위험을 당하기도 했다. 이런 일이 계속되자, 인종도 묘청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중(李仲)·문공유(文公裕) 등이 묘청 배척상소를 올렸으며, 이어서 임완(林完)이 시폐(時弊)를 통론하고, 마침내 개경파의 거두인 김부식이 서경 행차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니, 그에 인종이 서경 천도를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결정적 사건이 발생한다.


경과[편집]

묘청의 반란[편집]

이렇게 사태가 반전되자 묘청은 1135년(인종 13년) 정월 어서경의 분사시랑 조광(趙匡) 및 병부상서 유참 등과 반기를 들고 개경의 중앙 정부에서 파견된 부류현(副留縣) 수령 이하 관리들과 상경인(上京人)[7]으로서 서경에 와 있던 사람을 모조리 잡아 가두었다.


한편, 자비령 이북의 길을 막고 서북면의 모든 관청, 즉 주군수까지의 관리들을 서북인만으로 충당시킨 다음 서북면 안에 있는 모든 고을의 군대를 서경에 집결하게 하고 국호를 대위국(大爲國), 연호를 천개(天開), 군대의 호칭을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고 하였다. 이어 개경으로 진격해 들어갈 뜻을 밝혔다.


정부군의 진압[편집]

인종은 사신을 보내 반란을 멈출 것을 권유했으나, 묘청 일파는 왕을 바꾸기 위해 일어난 반란이 아니며, 서경으로 천도하면 다시 충성할 것이리라고 답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신하가 군주를 오라가라 할 수 없다며, 이를 역모로 규정하고 토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조정에서는 김부식을 평서원수로 하는 진압군을 파견하였다. 김부식은 출정에 앞서 개경에 남아 있던 묘청 일파인 정지상·백수한·김안(金安) 등을 참수하였다.


김부식은 좌·중·우 3군을 지휘하여 서북면으로 진격하였다. 평산역―관산역[8]―사암역[9]을 거쳐 성천에 이르렀다. 거기서 토적(討賊)의 격문을 발하여 여러 성에 보내어 서경 주위의 여러 성(城)을 산하에 끌어들여서 이들을 달래었다. 다시 3군을 지휘하여 연주(連州)[10]를 거쳐 안북대도호부[11]에 다다랐다. 그 과정에 많은 성들이 중앙정부군(진압군)에 호응·협력하게 되어 정세는 진압군에게 유리하게 되었다.


진압군은 서경을 먼저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지역을 제압하여 서경을 고립시키는 데 주력했다. 이윽고 서경 주변 지역에 대한 제압이 끝나자 그제야 진압군은 서경을 포위하였다.


서경에는 7∼8차례 사람을 보내어 항복을 권유하였다. 승산이 없음을 안 조광 등이 묘청과 유참, 유참의 아들 유호(柳浩)의 목을 베어 분사대부 윤첨(尹瞻)을 고려 조정에 보내 항복의 뜻을 표시하고 죄를 용서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고려 중앙정부에서는 조광 등의 죄를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고, 윤첨을 옥에 가두었다. 이 사실을 안 조광은 빠져나갈 길이 없다고 판단하고, 끝까지 맞서 싸울 것을 결심한다. 그 뒤 개경 정부의 어떠한 회유 교섭도 단호하게 거절하였고, 인종과 김부식이 회유하기 위해 보낸 사절들도 죽였다.


묘청은 어이없이 죽었지만, 반란은 그 후 약 1년 동안 계속되었다. 진압군은 중·좌·우·전·후의 5군으로 나누어 평양성을 완전 포위하였으나, 반란군의 결사적인 항전으로 크게 고전하였다. 그러나 포위당한 평양성에서는 식량 부족으로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고, 1136년(인종 14) 2월 진압군은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이미 식량도 사기도 떨어진 반란군은 진압군이 성으로 진입하자, 도망가기에 이르고 반란군의 수장인 조광 등이 스스로 몸을 불태워 목숨을 끊자, 성 안의 사람들이 장수 최영(崔永)을 붙잡아 정부군에 항복함으로써 반란은 끝났다.


평가[편집]

[중립 필요] 묘청의 난에 대한 평가는 찬반이 분명하다. 조선 말 일제 강점기 초기에 활동했던 신채호는 민족사관의 입장에서 묘청의 난을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으로 평가한다 만일 성공했으면 조선사가 독립적 진취적으로 발전했으리라고 한탄한다(묘청 개인에 대하여는 광망하다는 표현을 쓰며 부정적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적지 않다. 당시 개경세력과 이에 반발한 지방 세력(서경) 간에 권력투쟁일 뿐이며, 금국정벌론 등은 단지 명분뿐이라는 것이다.


이 서경천도운동은 그들의 공리심과 서경인의 기질 등이 작용하였음은 물론이나, 그밖에 그들의 정치적 혁신의 의욕도 간과할 수 없다. 당시 국내외의 정세에 비추어 개경의 타성적이며 부패한 귀족 사회의 생태를 좌시할 수 없어, 당시 인심을 지배하고 있던 음양도참설을 교묘히 이용하여 서경인 중심의 중흥정치를 베풀어 보고자 한 것이 그들의 당초의 이상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신채호의 평가[편집]

신채호는 한국 고유의 낭가사상이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의 좌절로 단절되었다고 하였다.


서경 전역(戰域)을 역대의 사가들이 다만 왕사(王師)[12]가 반적(反賊)을 친 전역으로 알았을 뿐이었으나, 이는 근시안의 관찰이다. 실상은 이 전역이 낭(郎)·불(佛) 양가 대 유가(儒家)의 싸움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이 전역에서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승리하였으므로 조선의 역사가 사대적·보수적·속박적 사상, 즉 유교 사상에 정복되고 말았거니와, 만일 이와 반대로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 등이 승리하였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진취적 방면으로 진전하였을 것이니, 이 전역을 어찌 ‘일천년래 제일대사건(一千年來第一大事件)’이라 하지 아니하랴.

— 신채호, 《조선사연구초》

민족사학자 신채호는 묘청의 운동을 낭불양가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고,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으로 규정한 바 있다.[13] 그는 '우리 나라의 종교, 학술, 정치, 풍속이 사대주의의 노예가 된 원인이 바로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실패한 데 있다.[14]'고 하면서, 이 사건이 바로 고대 이래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진취적이고 독립적인 자주사상이 사대적 유교사상으로 바뀌는 전환점'이라 했다.[14] 그에 따르면 '낭·불 양가 대 유가, 국풍 대 한학파, 독립당 대 사대당,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전쟁이며 전자의 대표는 묘청, 후자의 대표는 김부식이다.[14]


그는 묘청의 난이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유가의 사대주의가 득세하여 고구려적인 기상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애석해 하기도 했다.[13]


반론[편집]

묘청이 주장한 금국정벌론이 현실성이 없다는 평가다.[출처 필요] 식민 치하에 있던 신채호가 묘청을 적극적으로 평가했던 것은 금국 정벌이라는 주장 때문이며, 조선의 독립 의지를 키우기 위해서라도 민족 자주적인 입장에 선 사례를 찾고자 했다는 것이다. 신채호의 기대와 달리 묘청 세력의 금국 정벌 주장은 실현은 거의 힘들었으며, 기병강국이던 금나라를 보병 위주의 고려군이 공격하여 성과를 내기는 힘들다고 주장했다. 방어자 입장에서는 전통력으로 산성 중심으로 적 기병대의 충격력과 기동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방어가 가능했으나, 만주로 공격을 하게 된다면 우수한 기병대가 절대 부족했던 고려가 만주 일대의 평원에서 치러지는 전투에서는 절대 불리할 것이란 주장이다. [출처 필요]


묘청에 대한 비판[편집]

묘청은 간신 혹은 임기응변가라는 비판도 있다.[출처 필요] 경과에서 보았듯, 자신의 군대마저 제대로 조직하지 못한 묘청에게 금국정벌론은 일종의 여론호도책이며, 묘청이 권력을 얻는 방식이나 세력을 규합하는 방법은 전형적인 간신의 방법이었다고 비판한다. 묘청과 정지상 등이 원했던 것은 단지 개경 귀족 세력이 독점한 권력을 서경 세력이 대체하는 것뿐이라는 비판이다.[출처 필요]


영향[편집]

묘청의 난이 진압된 뒤 고려사회는 표면상 평온을 되찾았으나, 이 반란이 고려사회에 끼친 영향은 컸다.


우선 권력구조에서 서경의 지위가 크게 격하되었다. 이와 함께 고려 권력구조의 균형이 깨졌다. 즉 서경 세력은 개경의 문신 귀족 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담당하여 왔는데, 서경 세력의 쇠퇴는 개경의 문신 귀족 세력의 독주를 가능하게 하였으며, 문신(文臣)의 위신을 높이고 무신(武臣)을 멸시하는 풍조를 낳게 하여 후에 무신의 난을 유발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문신 귀족 세력은 더욱 득세하게 되어 왕권마저 능멸하는 풍조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자겸의 난을 극복했던 것을 계기로 새로운 정치 질서를 수립할 수 있었던 기회를 인종은 인재 기용의 실패로 놓쳤던 것이다. 결국 뒤이어 왕위에 오른 의종은 무신의 난으로 인해 정상적인 정치체제가 붕괴되기에 이르게 된다. 인재 기용의 실패로 왕권은 땅에 떨어지게 된 것이다.


당시 문신 귀족사회가 안고 있던 정치적·사회적·경제적인 모순과 폐단은 뒤에 무신정변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기타[편집]

신채호는 김부식의 행위야 말로 그 어느 전란보다도 우리 역사를 단절, 왜곡시키는 데 악영향을 끼쳤다고 보았다. 그에게 김부식의 승리는 곧 묘청이 대표하는 민족 고유의 전통적인 '진취적 자주사상'에 대한 '사대적 보수적 속박사상-유교사상'의 승리였다.[15] 그래서 이 사건을 조선역사상 1천년래 제1대 사건이라 부른 것이다.[15]


관련 항목[편집]



C46 – 동경대전 (東經大全) / 최제우(崔濟愚, 1824-1864)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시천주(侍天主) 사상으로 외래종교사상을 수용하여 주체적인 민족종교로 창시한 동학의 바이블인 <동경대전>은, 창시자인 최제우가 지은 동학의 경전으로 <포덕문><논학문><수덕문><불연기연>(布德文, 論學文, 修德文, 不然其然)의 네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당시의 천주교 잠입과 서세동점을 직시한 최제우는 이 책에서 인내천으로 표방되는 동양의 전통적 인도주의와, 서교에서 영향 받은 종교적 요소를 적절히 조화하여 서학에 대비한 동학의 교리와 사상 전반을 압축하여 서술하고 있다.

 

a. 생애와 작품활동

경북 경주의 명문가문에서 태어난 최제우의 어릴적 이름은 복술이고, 제우는 어리석은 중생을 구한다 는 뜻으로 35세때 스스로 고친 이름이다. 어릴적부터 두뇌가 명석하고 용모가 수려했던 그는 최치원의 28대 후손이라는 양반으로의 자부심과 서자로서의 열등감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적서의 차별로 출세의 길이 막힌 상황에서 고민을 거듭하다, 민간신앙을 통한 입신의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20세 이후부터는 전국을 주유하면서 삼정문란과 외세의 침략으로 비참한 민중생활을 목격했다. 구세제민의 뜻을 품고 방랑을 계속한 그는 천명을 알기 위해 1856년(32세) 여름에 양산 통도사 뒤 천성산에서 단을 쌓고 천주강령을 염원하는 49재를 올리다가, 이틀만에 숙부의 죽음을 신통으로 알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과연 숙부가 작고해서 초상을 치르고 있었다 그 다음에 다시 천성산에 들어가 지성으로 49재를 올렸으나 응답을 얻지 못하고, 1859년(35세) 처자를 거느리고 부친이 글을 가르치던 경주 구미산 아래의 용담정으로 이사하였다. 이때 이름을 제우라 개명하였다. 그가 용담정으로 들어간 지 6개월이 지난 1860년(36세)에 몸이 마구 떨리고 가눌 수 없는 어떤 황홀한 경지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후 최제우는 마음을 가다듬어 기를 다루는 공부에 열중하였다. 그후 <용담가><교훈가> 등 한글가사를 지어 전파하고 마음속에 한울님을 모시는 일에 열중하였다. 다음해에는 정식으로 지극한 기운이 지금 이르러 크게 내리도록 비나이다. 한울님을 모셔 조화가 정해지는 것을 영생토록 잊지 아니하면 온갖 일을 알게 되나이다 라는 주문을 지어 늘 염송했다 한다. 그리고 그 도를 천도 또는 동학이라 했다.

그는 열심히 주변 사람들에게 동학을 가르쳤다. 1861년 정부의 눈총을 피해 전라도 남원 은적암에서 <권학가>를 지어 돌리고, 이듬해 3월 다시 경주로 돌아와 적극적으로 포교를 하였다. 이때 최시형이 찾아왔는데, 가문이나 학식은 보잘것없어도 지성으로 수도에 힘써온 그를 후계자로 심중에 두었다. 이에 감격한 최시형은 더욱 분발하여 수도와 포교에 힘쓰게 되었다.

반면에 동학이 널리 전파되자 정부의 감시가 더욱 심해졌고, 드디어 그 해 9월 수운은 체포되었다. 그러자 수백 명의 제자들이 찾아가서 수운의 가르침은 민속을 해치지 않는다고 탄원하여 무죄석방 되었다. 1863년(39세) 8월 최시형에게 도통을 물려주었는데, 이 무렵 조정에서는 동학의 신도들이 놀랍게 늘어나는 것을 두려움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12월 최제우는 23명의 제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달성공원에서 혹세무민과 좌도난정으로, 득도한 지 3년 만인 나이 40세에 처형되었다.

그후 2대 교주 최시형은 최제우가 남긴 글을 정리하여 <동경국전>과<용담유사>를 간행하는 등 교리의 체계화와 교세확장에 주력하였다. 그리하여 1894년 우리 역사에 한 획을 긋는 동학농민 전쟁이 일어났고, 최시형은 1897년 손병희를 후계자로 정하고 1898년 한성감옥에서 순교하였다.

조선에서 점차 일본의 지위가 굳어지자, 교도 중 이용구는 동학의 기반을 이용하여 진보회를 조직, 친일정당으로 활동하자 손병희는 교명을 천도교로 개칭하고(1905년), 망명했던 일본에서 귀국하여 교풍쇄신에 착수하였다. 그는 인내천사상과 보국안민(輔國安民) 광제창생(廣濟蒼生)을 기치로 하여 지상에 천국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였고, 1919년 천도교인 15명과 그리스도교인 16인, 불교도 2인이 31운동을 일으켰으나, 그후 일제의 탄압으로 천도교는 쇠퇴하였다.


b. 동학의 발생과 그 사상

조선 후기 사상계의 혼란 속에서 나타난 두 가지 움직임이 있었다면 하나는 천주교의 전파요, 다른 하나는 동학의 발생이다. 천주교가 서울을 중심으로 퍼져간 반면, 동학은 농촌 속에서 자라났다. 동학은 매우 강렬한 민족주의적 성격을 가진 종교로서, 당시 서양 제국주의의 위협과 천주교의 유포 등 대외적 위기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최제우가 양반사회의 유교사상을 극복하고 천주교에 대항하고자 유불선 3교를 융합하여 새로운 종교를 개창하였다.

동학이란 명칭 자체도 서학, 즉 천주교에 대항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다. 또한 동학은 초세속적이고 윤리적인 종교였다. 우선 그 교리는 당시의 민심을 반영하여 인심이 곧 천심이라는 인내천의 사상을 기본으로 하였는데, 이는 동양의 전통적인 경천사상과 밀접한 것으로, 그 가운데서도 특히 운수관으로 표현되는 천운순환론과 인도가 천도에 합치해야 한다는 도덕론이 핵심을 이루었다. 따라서 천운에의 순종과 천도에의 합치를 통해서 모든 인간은 군자가 될 수 있으며, 이런 점에서 일체의 신분계급을 떠난  평등사상을 주장한 셈이다. 동학이 주로 농민 등 억압받는 피지배층 사이에서 열렬히 신봉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농민들은 종교로부터 이러한 윤리적 측면보다는 현실구복적인 이익을 갈구하고 있었다. 따라서 동학은 질병의 치료, 길흉에 대한 예언 등 당시 유행했던 민간신앙의 요소를 흡수하였다. 이와 같은 동학은 인내천의 윤리사상과 현실구복적인 성격을 모두 갖추고 있었는데, 이 가운데 전자는 주로 잔반 등 지식층을 위한 것이었고, 후자는 무지한 일반대중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으니, 경전 역시 한문으로 된 <동경대전>과 한글로 된 노래집인 <용담유사>의 두 가지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이 두 사상을 하나로 체계회시킨 매개체는 귀신관 이었다. 귀신은 전통적인 경천사상과 연결되는 동시에 민간신앙에서도 전승되어 오는 관념적 실체로서, 우주만물의 성쇠나 사철의 변화 등은 모두 이 귀신의 조화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또 동학에서는 이 귀신을 기로 파악함으로써 주자학의 기철학과 접합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기본구조를 바탕으로 불교도교의 신비적 요소와 천주교의 형식까지

수용하였던 것이다.


c. <동경대전>의 내용

<동경대전>은 <포덕문> <논학문> <수덕문> <불연기연장> 등이고, 주문과 시문으로 된 부록을 합쳐서 총 4,846자로 된 작은 책이다. 이 책의 자매지인 <용담유사>는 순한글 가사집이다. 이 책은 최제우가 저작한 것이나, 그의 언행을 그의 제자들이 모은 부분도 있다. 이 책의 중심사상은 <포덕문>과 <논학문>이다.


   <포덕문> 

포덕문에서 밝혀진 최제우의 역사관은 #1 자연에 대한 감사도 알지 못했던 우부우민의 상고시대를 설명하고 #2 하늘을 공경하고 천리에 순응하던 요순시대의 중고시대를 흠모하고 #3 천명에 순종치 않고 각자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군대의 시대로 나누어 보았다. 

또 최제우는 이 시대를 불순도덕 미지시운 의 시대로 보고, 동학의 출현을 역사적 필연으로 보았다. 이것은 자기 의사로서가 아니라 상제의 명령에 의해 자기가 태어나서 천명을 전하는 것이라고 했다. 더구나 서양의 세력이 승승장구하니, 보국안민할 계책은 이 포덕문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다.


   <논학문>

논학문은 학문을 논한 글이다. 여기에 나오는 그의 종교체험의 순간 기록을 보자. 

이해 사월, 몸이 마구 떨리면서 밖으로는 신령과 서로 맞닿는 기운이 몸을 감싸고, 안으로는 신기한 말씀에 의한 가르침이 있었다. 그러나 애써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고 해도 들리지 않으므로 마음은 더욱 이상스럽기만 하였다. 이윽고 마음을 가다듬고 기운을 바로잡은 뒤에 어찌하여 이처럼 저에게 나타나십니까? 라고 묻자 내 뜻이 곧 네 뜻이기 때문이다. 대체 사람들이 무엇을 알랴... 라고 하느님이 대답했다. 

여기서 오심 즉 여심과 수심정기와 문답식의 주문해설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내용은 한울님을 위한 것이 대부분인데, 한울님을 위하는 마음가짐 자체가 인간이 어떤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이의 태만을 경계했다. 또 주문은 천주의 글자가 되는 것이기에, 주문을 외울 때는 자세가 단정하고 마음이 경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덕문>

수덕문은 덕을 닦는 것으로, 수도의 방법과 절차를 설명한 것이다. 이 글에선 최제우의 덕행과 제자들이 덕을 쌓는 것을 찬미한 내용들이다. 또 최제우의 가문과 용담성지를 예찬한 것이 많다. 

아름답다, 우리 도의 보람이여. 붓을 들어 글을 쓰면 사람들은 왕희지 필적인가 의심하고, 입을 열어 시구를 읊으니 누가 초부인 줄 알랴, 허물을 뉘우친 이 사람은 재벌의 부력을 탐내지 않는다, 공경과 정성을 다하여 가르치는 말이니 어기지 말라 는 문구가 들어 있다.


   <불연기연장>

불연기연장에는 우주만유는 그 생성과정에서 두가지의 상반된 원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만물은 분산고립된 것이 아니고 서로 연결된 일체의 것이며,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부단히 성장발전하는 것으로서, 한울님에 의해서 기연의 통일원리를 찾아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d. 사상적 가치

이 책에 흐르고 있는 기본사상은 인간지상주의로 인격향상을 설한 것이다. 이는 성실해라 신의를 생명같이 지켜라 등으로, 이러한 가르침은 인격의 위신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으로 요약되는 것이다. 이 <동경대전>은 천도교라는 한 교회의 경전에 그치지 않고 19세기 중엽 한국사상의 근대화 과정을 그 서민적 차원에서 대표하는 명저요, 서구세력의 아시아 침략에 대한 저항적 민족주의를 구체화한 고전이기도 하다.

이 책의 가치는 어떤 한 종교의 신앙고백이나 교리서술의 부분보다, 오히려 당시 혼란한 사회에 대한 사회비판에 있다고 보여진다. 더구나 이 경전은 현실정치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가득 차있고, 위기의 역사의식과 메시아 사상이 서민의식의 차원에서 표현된 데 사상적 의의가 있다.  

조선 후기의 서민대중의 사상적 풍토와 그 전환적 성격을 이해하는 데 있어 이만큼 뚜렷한 역사의식과 현실비판을 담은 책은 드물다. 동학사상은 그것이 한문교양에서 소외된 서민의 반항의식을 대표하기 때문에, 그 안에는 민간신앙적 요소가 다분히 존재하고 유불선이 혼재하나, 그것이 동양사상의 가치를 손상시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양반지배층의 주자학 위주의 단조로운 사상풍토와 한문학의 고식적인 동맥경화증 가운데서 독특한 민간신앙의 모습으로 평민문학의 한 국면을 장식했다는 점에서도 근대적 의식의 선봉으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이 경전은 1894년 동학혁명에서 그 사상적 근거가 되었고, 천도교가 적극 참여한 31운동시에도 민족자주의 지침이 되었으며, 일제 강점하에도 민족사상의 근간으로서, 항일독립정신의 역사적 원천으로서 그 위력을 발휘해왔다. 오늘날 일제 어용학자들이 조작해놓은 왜곡된 역사관을 바로잡고, 민족자주의 사상적 기초를 세우는데 이 동학의 명저는 귀중한 고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C45 – 의산문답(醫山問答) / 홍대용((洪大容, 1731~1783)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새로이 수용된 서구의 과학적 세계관과 전통적인 성리학적 세계관이 어떻게 결합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저술이다. 전통적 세계관을 고집하는 성리학자 허자와, 서구의 실증적인 과학을 받아들이는 실학자 실옹의 대화로 전개되는 이 책은 당시의 과학사. 철학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할 뿐 아니라, 호질의 선구가 되는 문학사적으로도 중요한 작품이다. 


a. 생애와 작품활동

 코페르니쿠스로부터 약 300년, 갈릴레이로부터는 130년 후 아시아의 한구석에도 지구가 움직인다고 외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홍대용이다. 과학사상가 홍대용은 청주 출신이다. 그는 나주목사로 오래 근무했던 관계로 부근에 살고 있던 나경진의 집에서 천문기구인 혼천의와 자명기구인 후종을 보면서 자랐다. 그는 매일 그 집에 가서 그 기구들의 원리는 물론 제작법과 이용법도 배웠다. 이들 기구를 얻기도 하고 만들기도 하면서 천문학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청주 그의 본가에서 사설 천문대인 용천각을 짓고 이들 기구를 보관하면서, 종래의 서적을 검토하고 이들 기구로 천체를 관찰했다. 

 그가 오랜 관찰과 실험 끝에 얻어낸 결론은 지구가 자전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작은아버지를 따라 청에 간 적이 있는데, 그때 청의 과학자들에게 지구자전설을 설명하여 그들을 감탄시켰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박지원 등 몇몇을 제외하고는 냉담했다. 지구가 돌면 어쨌다는 거냐, 천원지방(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난 것)은 만고의 진리인데 한낱 괴담 이라고 일축하곤 했다. 진리를 찾는 자는 예나 지금이나 외로운 법인가? 그러나 홍대용은 이런 세론에 흔들림 없이 과학탐구에 생애를 바쳤다.  

 청에 머물렀던 몇 달 동안 청의 학자들인 엄성. 반정균 등과 어울려 밤새워 학문을 논하는 가운데, 이들 사이에는 국경을 넘는 우정이 무르익었다. 홍대용이 이들에게 작별을 고할 때, 어찌나 정이 들었던지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후에 박지원이 북경에 갈 적에 홍대용은 이들에게 박지원을 소개하는 편지를 보냈으며, 엄성이 먼저 죽자 반정균은 조선의 홍대용에게 부고를 하였다. 그 후 홍대용이 죽자 박지원은 반정균에게 부고를 하였다. 죽은 뒤에도 이렇게 돈독한 우정은 계속되었다. 그러면 이들은 왜 이토록 우정이 돈독했을까? 그것은 서로가 공통적인 시대의 모순에 직면하여 이에 대한 개혁의지에 불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홍대용이 그들과 교환한 의견들을 내용으로 연기와 회우록을 기록하여 책으로 묶자, 문장가 박지원은 서문을 써서 이들의 사귐을 기렸다. 홍대용은 북경의 과학기술을 탑골에 있는 박지원의 사랑채에 모인 젊은 엘리트들에게 전파하였다. 박제가. 이덕무. 이서구. 유득공 등에게 과학기술을 통해 조선의 발전을 기약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리하여 북학파의 모임은 저절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홍대용은 청주로 내려가 기하학의 원리를 담은 주해수용(籌解需用)을 완성하였고, 또 현실개혁 방안을 담은 임하경륜(林下經綸)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이때쯤에는 자득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지식을 토대로 이론을 체계화시켜 그의 과학사상은 원숙한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러다 보니 경제적으로는 말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내키지 않는 벼슬을 10년 정도 한 후 다시 저술작업에 착수하였으나 1년 만에 중풍으로 쓰러졌다. 부음을 들은 박지원은 한걸음에 달려가 빈소에서 곤드레가 되었고, 붓을 갈겨 묘지명을 썼는데 천하의 명문으로 꼽힌다. 

  아, 슬프다. 덕보(홍대용의 자)는 툭 트이고 민첩하며, 겸손하고 아담하며 식견이 원대하고 사물의 이해가 정밀하며 일찍이 지구가 한번 돌면 하루가 된다고 하여 그의 학설이 오묘하고 깊었다. 


b. 홍대용의 과학사상: 상대주의적 세계관

 동양에서는 처음으로 지전설을 주장한 홍대용은 서양과학의 본질을 일찍이 간파하고, 이를 적극 도입하여 전통사상 속에 용해하려고 시도하였다. 그의 시도는 오늘날의 국제화에도 시사하는 점이 많다. 지구의 둘레는 9만리, 하루는 12시간이고 하루 동안 지구가 1번 돈다는 그의 지전설은 단편적인 발상이 아니라, 지구와 우주의 구조에 대해 나름대로 체계적 사색을 통해 얻은 결론이었다. 그렇기에 그에 대한 평가도 지전설 주창자로서만이 아닌 과학사상가로서 이루어져야 마땅하다. 

 서양에서는 코페르니쿠스가 이미 1543년에 지동설을 내놓았고, 갈릴레이가 종교재판에서 지동설을 부인하고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중얼거린 때(본서 1권 갈릴레이 편 참고)가 1633년으로 홍대용보다 130년 정도 앞섰다. 그러나 서양과학을 동양에 전파했던 중국의 서양 선교사들도 이단으로 판정받은 지동설을 공개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고, 중국과 일본의 학자들 가운데도 지구의 자전을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호기심과 탐구심이 많았던 홍대용은 잘못됐다는 논평과 함께 소개된 서양 천문학 책의 지동설을 읽고 오히려 지동설이 옳다는 판단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그는 지구가 너무 무거워 태양 둘레를 공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지전설의 근저에는 우주가 무한하고 외계인의 존재를 믿는 우주관이 깔려 있다. 의산문답에서 우주공간은 끝이 없고 별들도 무수히 많다고 말한다. 이 무한한 우주에는 지구를 중심으로 한 세계 말고도 얼마든지 많은 다른 세계가 있을 수 있으며, 화성의 생물은 불 속에 살면서도 차가움을 모른다며 외계생물의 존재를 주장했다. 그의 이런 우주관에 일관되게 흐르는 것은 철저한 상대주의다. 그는 심지어 생명체를 구성하는 인간. 초목. 금수 가운데 어느것이 더 귀하다고 할 수 없다고 밝혀 생태주의적 사상과도 맥을 같이하고 있다. 인간이나 지구중심주의를 벗어난 그의 상대주의적 세계관은 중국을 세계의 중심에 놓는 중화사상이나 양반과 상민의 차별을 뛰어넘는 평등주의적 사회사상으로 이어졌다. 

 홍대용은 서양과학의 강점이 수학적 방법과 실험 및 관찰에 있다고 제대로 파악했는데, 스스로 그것들을 제작하고 서양과학을 배우는 데 힘썼다. 그는 실제로 서양과학을 배워오려면 수학수준을 높일 필요가 있음을 절감하고 스스로 수학책인 주해수용을 쓰기도 했다. 


c. 의산문답의 내용

 홍대용의 사상은 담헌서에 집대성되어 있는데, 담헌서는 내집과 외집으로 나뉘어져 있다. 내집에는 #1 사서문의 삼경문변 심성문 등 경학에 관한 부분 #2 임하경륜  (정책론의 성격) #3 의산문답  (학문관. 자연관. 사회관. 국가관. 역사관 등의 종합적 성격) #4 계방일기  (세자인 정조 보좌시 쓴 일기),  외집  에는 #1 연기 건정필담  #2 항전척독  (중국 친구들과의 편지) #3 주해수용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 의산문답은 담헌 홍대용의 사상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으로 허자와 실옹이라는 두 사람의 문답체로 구성되어 있다. 은거 독서로 30년을 지낸 동해 거인 허자가 전통적인 조선의 학자를 대변하고 있고, 허자가 북경까지 가서 학문을 논해보았으나 아무 소득이 없이 돌아오는 길에 의무려산에서 은거하고 있는 서양과학을 받아들인 새로운 학자를 대변하는 실옹을 만나 문답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허자와 실옹의 대화 중 일부를 소개한다. 

 실옹: 사람의 미혹에 세 가지가 있으니, 식색에 혹하면 집안을 망치고, 이권에 혹하면 나라를 망치고, 도술에 혹하면 천하를 망치는 것이다. 그대는 도술에 혹한 데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대에게 묻노니, 그대가 말하는 현자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가?

 허자: 유가에서 현자라면 주공을 숭상하고, 정주를 배워 정학을 일으키고, 사설을 배척하고 인으로 구세하고 철로 보신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실옹: 그러니 그대가 도술에 혹하고 있다는 것을 정말 알겠구나. 슬프다. 도술이 망한 지도 오래도다. 공자가 돌아가니 제자가 공자의 뜻을 어지럽혔고, 주자가 돌아가니 제유가 주자의 뜻을 어지럽혀, 그 업만을 숭상할 뿐 그 의를 잃었구나, 말로는 정학을 일으킨다 하지만 실은 긍심에서 나왔고, 말로는 사설을 배척한다 하지만 실은 승심에서 나왔고, 구세하겠다는 그 인이란 권심에서 나왔고, 보신을 하겠다는 그 철이란 이심에서 나왔으니, 이 네 가지가 서로 어울려 천하가 도도히 허로 달음치고 있구나.

 이렇게 통론하면서 실옹은 중국역사에서 공론이 국가. 사회에 끼친 해독을 열거하면서, 허에 빠져 실을 잃은 이 나라의 장래를 은근히 걱정하고 있다. 

  의산문답에 나타나는 그의 과학지식의 상징으로는 지전설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1년에 한 바퀴씩 도는 공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지구가 지축을 중심으로 하루에 한 바퀴씩 도는 자전을 말하고 있다.  의산문답에 등장하는 여러 대목들, 즉 지전설과 그 논거로서의 일. 월 지구의 인력에 대한 것, 태양계. 우주. 태양. 지구, 달의 크기의 비례에 관한 것, 바람. 구름. 비. 눈. 서리. 우박. 우레. 번개. 무지개 등 자연현상에 관한 것, 기온, 주야의 시간차, 조수 등에관한 학설은 당시로서는 놀라운 바가 있다. 

 인간. 금수. 초목 등 세 가지 생명체는 지. 각. 혜가 있고 없음이 서로 다를 뿐이지, 어느 것이 더 귀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여 인간중심적 세계관을 배격한다. 또한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지구 위의 정계와 도계는 정해진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서로 자기가 사는 곳이 정계라 생각할 따름이다. 뿐만 아니라 우주는 무한한데, 이 속에는 지구의 인간과 비슷한 지적 존재도 더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구인과

우주인 어느 쪽이 더 귀한 것인지도 알 수가 없다.

 끝부분에서는 만약 공자가 중국 밖에서 살았더라면 그곳을 중심으로 춘추를 썼을 것이라면서, 화이의 구분은 무의미하다고 단정한다. 이 글에 흐르는 철저한 상대주의를 읽을 수 있다. 하늘에서 본다면 어찌 안팎의 구분이 있겠는가? 저마다 자기사람을 친히 여기고 자기 임금을 높이고 자기 풍속에 따라 편안히 사는 것은 화나 이나 마찬가지다 

 또한 전통적인 음양오행설을 철저하게 비판하고 주기론을 바탕으로 서양의 4원소설을 거론하고 있다.   오행의 오라는 수는 원래 정론이 있는 것이 아닌데, 술가들이 이를 근본으로 삼아 하락이 여기에 부회하고, 역상이 이를 천착하여 생극이니, 비복장황하게 되었지만은 결국은 아무 이치도 없는 것이다. 담헌은 기. 화. 수. 토의 네 가지를 만물생성의 원형으로 보았다. 이 4원소를 바탕으로 오행오가 음양을 대신 설명하고, 특히 오행이 부회천착되어 철학. 천문. 지리. 의학. 종교. 병법. 정치. 도덕. 심지어 생활감정까지도 좌우하게 된 그 고질이 아무 이유 없는 것이라고 역설한 것이다. 

 음양오행설 비판에서도 나타난 예리한 과학정신은 당시 사회의 폐단인 토속적 미신을 통박하는 데까지 미쳤다. 신선이 된다는 술법, 풍수를 가린다는 지술 등이 모두 허망한 것이요 천문이라는 이름의 점복이나 기도 또한 허망하다고 역설한다. 자연현상에 대한 담헌의 이와 같은 설명은 인류의 생성발전에 대한 설명에도 일관된다. 먼저 생명의 기원은 수. 토가 안으로 작용하고 일. 화가 밖으로 열을 가하여 원기가 모이고 만물이 생겨나니, 식물은 땅에 돋아나는 털 같은 것이요, 동물은 땅에 모인 이 같은 것이다. 


d. 사상적 평가

 이상에서 우리는 담헌의 과학정신을 중심으로, 그의 사상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사실 그의 사상은 여기에 국한하지 않고, 현실적인 정책론으로도 확장되었다. 그의 이러한 사상을 잘 보여주는 부분은 임하경론으로, 여기서 그는 사회구조의 개혁안으로서 균전제와 부병제도를 토대로 농민의 최저생활을 보장하는 동시에 재정과 국방의 기반을 튼튼히 하려 했다. 이런 기본적인 구상은 유형원의 반계수록과 비슷하나 그의 독창적인 면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장정은 노동을 해야 하며 양반이라도 노동하지 않고 놀고 먹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다. 둘째, 신분여하를 막론하고 재. 학이 있는 자는 중책에 임명하고 그렇지 못한 자는 고관의 자제라도 천한 일에 복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셋째는 지방마다 면단위까지 학교를 두어, 면 내의 자제는 8세 이상이면 신분의 여하를 막론하고 모두 교육을 받게 하고, 과거제 대신 하급교육기관에서 상급교육기관에 인물을 천거하되, 관직도 이 추천에 의해 임명할 것을 주장한다. 넷째로 신분여하를 막론하고 공적인 발언권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봉건적 신분제의 타파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역시 우리의 관심은 그의 과학정신에 집중된다. 전통적인 우리의 과학기술은 뛰어난 면이 많았지만, 공리공담에 빠진 유학자들은 과학사상을 늘 천시하여왔기에 발전을 보지 못했다. 이에 홍대용은 철저하게 이를 추구하여 우리 나라 과학기술사에 찬란한 빛을 던진 것이다. 특히 그의 기하학은 지극히 실용적인 것으로, 토지의 측량에 적절히 이용될 수 있는 이론이었다. 그가 그렇게도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주해수용이 현실에 별로 적용되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의 사상은 바로 박제가 등 후배들에게 전해지고, 이들에 의해 다시 개화사상가들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그의 사상이 담겨진  담헌서는 정신적 유산으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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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헌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담헌서》(湛軒書)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 홍대용이 자신이 지은 글을 직접 모아 엮은 시문집으로, 모두 15책으로 되어 있다. 《담헌집》(湛軒集)이라고도 하며, 홍대용이 죽은 뒤 약 150년이 지난 1939년에 홍대용의 5대손 홍영선(洪榮善)이 신조선사(新朝鮮社)에서 필사본을 바탕으로 7책의 활자본을 발간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지구의 자전설(自轉設)을 주장하여 주목을 끌었고, 중국·서양의 문물을 소개하였으며, “기(氣)·화(火)·수(水)·토(土)”의 4원소론에서 “기”를 물적(物的)인 것으로 보아 기화설(氣化說)로 모든 자연 현상을 설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회 모순, 학계의 통폐, 경제 제도의 폐단 등을 신랄히 비판하고, 보다 실제적이고 민주적이며 과학적인 대안(代案)을 제시하였다.


담헌내서 : 내집이라고도 한다.

경학 : 《사서문의(四書問疑)》, 《삼경문변(三經問辨)》, 《심성문(心性問)》 등

정책론 : 《임하경륜(林下經綸)》

학문관·자연관·사회관·국가관·역사관 등에 관한 독창적인 자기 견해의 종합적 저술 : 《의산문답(毉山問答)》

세손(世孫, 정조) 보필 시의 일기 : 《계방일기(桂坊日記)》[1]

시·서간·묘문 등 문예 작품

담헌외서

북경 기행문 : 《연기(燕記)》, 《건정필담(乾淨筆談)》

북경 방문 중에 사귄 청나라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글 : 《항전척독(杭傳尺牘)》



C44 – 북학의 (北學議) / 박제가(朴齊家, 1750~1815)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조선 후기의 문장가이자 개혁사상가였던 박제가의 경제적 구국의 방책과 국가의 부강책을 담은 기행문적 대문장. 박제가는 이 책에서 조선 후기 사회의 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성리학적 명분론과 도덕 지상주의에서 벗어나, 선진적인 청의 문물제도를 과감히 받아들이고 상공업을 진흥하여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러한 박제가의 사상은 성호학파의 토지경제 사상과는 또 다른 실학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a. 생애와 작품활동

  절약보다 소비가 생산을 촉진시킨다는 박제가의 상업관은 소비가 곧 미덕임을 내세운 케인즈의 이론을 연상케하는,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 박제가는 우부승지를 지낸 박평의 서자로 태어나, 소년시절부터 시. 서. 화에 뛰어나 문명을 떨쳤으나, 조선시대의 신분차별은 그의 출세길을 막고 있었다. 10살 때 부친의 죽음으로 인해 모친은 삯바느질로 생계를 유지하며 남매를 키워 나갔다. 그는 그림. 글씨 그리고 시로써 자신의 처지를 달래곤 했는데 중국의 불운한 시인 굴원의 이소경을 읽곤 했다 한다. 

 소년시절부터 날린 그의 명성으로 19세 때부터는 박지원 등의 북학파들과 교유할 수 있었는데,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현실의 비리를 알게 되었고 경구치세의 학문에 눈을 떴다. 그는 국가개혁을 시도했던 신라의 최치원, 조선의 조헌을 추앙하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대책 마련에 부심했다. 

 그 당시 유교적 절대 계몽군주인 정조는 학풍을 진작시키고 국가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규장각(현재 창덕궁 내 비원에서 가장 경관이 빼어난 부용정 맞은편에 위치)을 설치했는데, 정조는 박제가. 이덕무. 이서구. 유득공 등 실력있는 서자들을 규장각의 검서 직책에 등용하여 학문적 보좌를 받았다. 이에 박제가는 규장각에 소장된 책들을 밤낮 없이 읽어가며 동료들과 토론을 즐겼다. 이후 13년간 임금을 보좌하면서, 지나친 독서로 시력을 잃기도 했다. 그는 규장각에 들기 전인 29세 때(1778) 채제공의 수행원으로 중국을 다녀온 것을 포함하여 모두 4차례나 청을 방문했다. 이때 청의 이주원. 반정균 등과 사귀며 식견을 넓혔으며, 처음 방문 후 이용후생을 위한 방략으로 북학의를 저술하였다. 그는 정조에게 양반. 유학자들을 도태시켜 생산계층으로 전환시키고, 상공업의 국가적 장려를 통해 부국을 꾀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국가정책으로 시행되기에는 보수세력의 벽이 너무 두꺼웠다. 

 그러나 두 차례나 그의 북학이론에 관심을 보여주었던 정조는 그를 부여현감이라는 외직으로 돌리고, 49세 때 북학의를 간추려 올리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박제가는 진북학의를 올렸다. 하지만 정조가 죽자 상황은 반전되어 안동김씨들은 정조의 측근 세력인 남인 시파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으면서 천주교를 구실로 반대편을 탄압하였다. 그 와중에서 박제가도 4년간의 유배를 떠나게 된다. 그리고 유배에서 풀려난 지 한달 후, 나라의 부강을 위해 중상주의를 제창했던 개혁자 박제가는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쓸쓸하게 이승에서의 생을 마감했다. 


b. 실학사상

 조선 후기에 발생한 실학의 학문적 성격과 실학파들의 사상에 대해서는 본서 제1권의 이익과 정약용 편에서 소개한 바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실학파 중에서도 박제가와 그 주변인물들이 주장했던 상공업 중심의 부국안민론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농촌의 건전한 발전을 토대로 한 사회개혁을 주장한 경세치용학파(유형원. 이익. 정약용)와는 달리, 서울의 도심적 분위기에서 자란 일파는 상공업의 발전을 통하여 사회의 번영을 이룩해보려는 이용후생의 학문적 경향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실학의 새로운 발전모습인데, 이것을 북학(박제가의 북학의에서 유래)이라고도 한다. 

 이용후생을 대표하는 학자로는 유수원이 있는데, 그의 저술인 우서에서 문답의 형식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대한 개혁안을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다음으로 박지원을 들 수 있는데, 그가 지은 열하일기는 1780년에 청나라로 가는 사신을 수행했을 때의 여행기로서 그 문물의 소개를 통하여 자기의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홍대용은 청에 다녀온 후 연기라는 기행문을 썼고, 특히 실옹과 허자의 문답형식으로 우주와 인간의 문제 등을 논한 그의 의산문답은 많은 주목을 끌었다. 

 이들과 거의 같은 시대에 활약했던 박제가와 이덕무도 각기 청에 갔던 견문을 쓴 북학의와 연기가 있는데, 특히 북학의는 단순한 기행문이 아니라, 항목별로 그 시대가 당면한 제반문제의 개혁을 언급한 명저다. 이들은 대체로 청의 수도인 연경(북경, 베이징)에 다녀온 일이 있어 그 기행문을 남기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 보고 들은 청 문화의 우수성을 인식하고, 조선의 현실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청의 문화를 먼저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북학자들의 주장에서 중요한 것은 청의 문화에 대한 예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개혁에 대한 강한 의욕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저서에는 당시의 양반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있었다.

 그들은 노동하지 않고 무위도식하는 양반유학자를 비판하는 반면에 상공업이나 농업을 높이 평가하였다. 특히 상공업의 발전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기술향상으로 생산을 촉진시키고, 수레나 배와 같은 교통수단을 발전시켜 국내외에 있어서의 상품을 원활하게 함으로써 국가의 경쟁력을 증강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상공업은 신분적 차별 없이 이에 종사할 수 있어야 하며, 균등한 교육에 의해 직업적 관리를 양성하여, 그들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이상적 관료기구를 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신분제도를 완전히 폐지하고, 개인의 능력에 따른 분업을 실시하여 국민의 생활을 안정시킬 것을 주장한 것이다.


c. 북학의의 내용

 본서는 내편과 외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편에서는 청의 차. 선. 도로. 교량. 목축. 시정 등 생활주변의 기구. 시설 등의 문제를 39개항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우리도 빈곤을 벗어나서 부강하게 살려면 이와 같은 청의 문물제도를 배워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외편에서는 밭거름. 뽕. 농잠총론. 과거론. 재부론. 병론 등 17항의 정책과 제도에 관한 것을 수록하여 농업정책을 개선하고 선박을 이용해서 해외 여러 나라와 무역하여 국가의 부강을 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박제가는 북학의 서문에서 청의 습속 중에서 우리 나라에서 시행할 만한 것과 날마다 쓰기에 편리한 것을 듣고 보는 대로 적고, 이로운 것과 폐가 되는 것을 논한 다음, 맹자가 진량에 대해 말한 것을 본따서 북학의라 이름한다고 밝히고 있다. 진량은 전국시대에 남중국에 살았던 농본주의자로, 북중국의 공자 학문을 배우겠다는 뜻으로 북학이라 했는데, 박제가는 청의 문화를 배운다는 뜻으로 북학 이라 이름한 것 같다. 


   상업의 중요성

  내편의 시정항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상업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현재 논자들은 백성들이 오직 상리만을 숭상하는데, 모든 백성을 귀농시켜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상업은 사민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사농고의 유무를 상통시키는 것이니, 상업은 1/4 이상이 된다. 어민은 고기를 잡으면서 농업에 종사할 수 없고, 협민은 나무하면서 농업에 종사할 수 없다. 이제 모든 백성들이 농업에만 종사한다면 농민의 생활은 더욱 어려울 것이다. 이어서 그는 종래의 미덕으로 간주되던 절약과 근검을 배격하였다. 즉, 쓸 줄 모르면 생산할 줄 모르고, 생산할 줄 모르면 민생은 더욱 피폐해진다고 하면서 상업과 농업 및 수공업의 유기적 관계를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일반적으로 재물은 샘물과 같다. 퍼내면 차 있고 버려두면 마른다. 이와 마찬가지로 비단옷을 입지 않으면 나라에 비단 짜는 사람이 없게 되어 여공이 적어지고, 깨진 그릇을 버리지 않고 기교를 좋아하지 않으면 공장과 도야의 일이 없어져 기술과 재주도 사라지게 된다. 또 농사가 황폐해서 농법을 잃고 상리가 박하여 그 업을 잃으면 사민이 모두 곤궁해져서 서로 유기적인 협조가 무너진다. 

 그는 상업이 발달하려면 차선과 도로를 개선하고 교통을 편리하게 한 후, 물자의 거래를 촉진시켜야 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특히 차선 항에서 그는 이 교통수단을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보급시킬 것을 역설하고, 교통이 발달되면 전국적인 시장이 형성되어 상품유통이 활발해지고 물가의 평준화가 이루어져, 화폐의 유통이 촉진된다고 보았다. 또 서양의 중상주의처럼 수입을 제한하고 수출장려를 강조하였으며, 상품규격을 통일하고, 금은의 축적이 국부의 기초이므로 은의 해외유출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국제무역의 중요성

  외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통상을 통하여 개국할 것을 주장한 통강남 절강상박의(通江南浙江商舶議)항이다. 쇄국시대에 개국을 부르짖은 이 글은 청과 통상을 시작하여 결국엔 해외 여러 나라와 통상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서해안에 무역항을 개설하여 밀무역을 양성화시키고, 중국의 산동 방향과 절강. 광동 등 남중국의 물자 집산지와 무역을 하고, 더 국력이 자라게 되면 그 대상국을 확장시켜 일본이나 서양 여러 나라와도 통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어역항에서는 외국어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통상활동에 필요한 중국어. 일본어. 만주어. 몽고어를 사대부에게 습득시키라 하고, 아울러 외국무역의 이점까지도 덧붙였다. 생활의 개선과 외국무역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상업적 농업과 수공업을 통한, 질적으로 우수하고 양적으로 충분한 상품생산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것을 위해 그는 강력한 국가적 후원 아래 발달된 청나라의 농업. 수공업기술과 도구를 받아들여, 서울 주변에서 농업시험장과 철공소를 두어 새로운 농. 공업기술을 연구. 보급하여야 하며, 국가의 지원 아래 상품의 대량생산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론만이 아니고 그는 몸소 생활필수품의 제조기술과 영농방법을 직접 연구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목적을 달성하려면 우선백성들의 고식적인 의식구조를 개조하고, 번거로운 습속을 간소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전통적인 주자학의 공리공담을 배격하고, 풍수지리설 따위의 허위성을 폭로하기도 했다.

 이상에서 박제가가 북학의에서 논술한 국내상업 및 외국무역의 장려. 수입금지 및 수출장려. 은의 해외유출 금지, 대량생산, 제품규격의 규제, 전국적 시장확대, 농공상업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후원에 대한 견해는 서구의 중상주의 정책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d. 사상적 평가

  북학의를 읽다 보면 두 가지 점이 거슬린다. 첫째는 중국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이되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고려하는 지혜가 부족하고, 또 하나는 중국문화에 심취한 나머지 우리말을 버리고 중국말을 배워야만 중국문화를 빨리 배울 수 있다는 비주체적인 입장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고전으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것은 다음의 몇 가지 점 때문일 것이다.

 첫번째는 과거제도. 국방제도 등 부국강병을 위한 적극적인 방안을 제시하여 사회구원의 의지를 밝힌 점이다. 그는 북학의 서문에서 지금 백성의 생활이 날마다 곤궁해지고 나라의 재물이 날마다 궁핍해지고 있다. 그런데도 사대부들은 소매에 손만 끼고 앉아서 이를 구하기 위해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고 통탄하고 있다. 

 두번째는 근대지향성을 들 수 있다. 상공업의 발달, 금속화폐의 유통촉진, 신분제의 해소, 외국무역의 강화, 문호개방 등은 19세기 후반의 개화사상가인 박규수. 김옥균 등에게 영향을 줌으로써, 우리 나라 개화사상에 미친 영향이 크다.

 세번째는 피지배 대중의 이익을 대변한 사상이라는 점이다. 지배계층의 원리인 성리학이 강조하던 수기치인의 범위를 넘어, 정치. 경제. 군사 등 각 분야에서 민본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피지배계층의 이익을 신장시키기 위한 각종 이론을 제시한 점은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현실개혁적 조처들이 한때 정조의 관심을 끌었으나, 그것이 현실정치 속에 구현되기에는 보수주의자들의 저항이 너무 집요했다. 따라서 그의 사상이 실현되기까지는 수많은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다. 여기서 또 우리 역사의 비극적인 한 단면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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離騷經(이소경)-屈原(굴원)


이별의 우수


 


帝高陽之苗裔兮(제고양지묘예혜) : 고양 임금의 후예이며

朕皇考曰伯庸(짐황고왈백용) : 내 아버지는 백용이라 하신다.

攝提貞于孟陬兮(섭제정우맹추혜) : 인녕의 정월달

惟庚寅吾以降(유경인오이강) : 겅인 일에 나는 세상에 태어났다.

皇覽揆余初度兮(황람규여초도혜) : 아버지는 나를 낳은 때를 헤아려

肇錫余以嘉名(조석여이가명) : 나에게 좋은 이름을 지어주셨으니

名余曰正則兮(명여왈정칙혜) : 이름은 “정칙”이라 하고

字余曰靈均(자여왈령균) : 자는 “영균”이라 하셨다.

紛吾既有此內美兮(분오기유차내미혜) : 게다가 나는 고운 성품을 지녔고

又重之以脩能(우중지이수능) : 또 그 위에다 훌륭한 재능을 닦았다.

扈江離與辟芷兮(호강리여벽지혜) : 강리와 벽지를 몸에 걸치고

紉秋蘭以為佩(인추란이위패) : 추란을 꿰어서 놀이개를 만들어 몽에 찬다.

汩余若將不及兮(율여약장불급혜) : 바삐 나는 쫓기는 듯 

恐年歲之不吾與(공년세지불오여) : 세월이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가 두려워

朝搴阰之木蘭兮(조건비지목란혜) : 아침에는 언덕의 목란을 캐고

夕攬洲之宿莽(석람주지숙망) : 저녁에는 섬의 숙모를 캐노라.

日月忽其不淹兮(일월홀기불엄혜) : 세월은 쉼 없이 흘러

春與秋其代序(춘여추기대서) : 봄과 가을이 교대로 바뀌어 

惟草木之零落兮(유초목지령락혜) : 초목이 시들어 떨어지니

恐美人之遲暮 (恐美人之遲暮 ) : 임이 내게 늦게 오심이 두려워진다.

不撫壯而棄穢兮(불무장이기예혜) : 젊고 건강할 동안에 더러움을 버리지 않고

何不改此度(하불개차도) : 어찌 이것을 고치지 않으실까?

乘騏驥以馳騁兮(승기기이치빙혜) : 준마 타고 달리시면 

來吾道夫先路 (來吾道夫先路 ) : 나는 앞길을 안내 하리라.

昔三后之純粹兮(석삼후지순수혜) : 옛 삼후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덕행이여

固眾芳之所在(고중방지소재) : 정말로 많은 꽃이 있는 곳이라.

雜申椒與菌桂兮(잡신초여균계혜) : 신초와 군계가 섞여 있어

豈維紉夫蕙茞(기유인부혜茞) : 어찌 혜초와 백지만 꿰었으랴.

彼堯舜之耿介兮(피요순지경개혜) : 저 요순의 빛나는 덕행이여

既遵道而得路(기준도이득로) : 이미 도리를 쫓아 제 길을 얻었니.

何桀紂之猖披兮(하걸주지창피혜) : 어찌 걸왕과 주왕의 창피스런 행동이fi

夫唯捷徑以窘步(부유첩경이군보) : 오직 지름길로만 허둥대는가?

惟夫黨人之偷樂兮(유부당인지투악혜) : 즐거움만 탐하는 무리여

路幽昧以險隘(로유매이험애) : 길이 어둡고 험난해도

豈余身之憚殃兮(기여신지탄앙혜) : 어찌 내 일신의 재앙만 꺼리랴.

恐皇輿之敗績(공황여지패적) : 임금님 수레 엎어질까 두려워라.


忽奔走以先後兮(홀분주이선후혜) : 바삐 달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여

及前王之踵武(급전왕지종무) : 선왕의 뒤를 따른다.

荃不察余之中情兮(전불찰여지중정혜) : 임은 내 마음속을 살피지도 않고

反信讒而齌怒(반신참이제노) : 도리어 모함만 믿고 화를 내신다.

余固知謇謇之為患兮(여고지건건지위환혜) : 나는 직언이 해로움이 됨을 알고서도

忍而不能舍也(인이불능사야) : 차마 버려둘 수가 없다.

指九天以為正兮(지구천이위정혜) : 맹세코 하늘은 아시리라.

夫唯靈脩之故也(부유령수지고야) : 오직 수행의 까닭임을

曰黃昏以為期兮(왈황혼이위기혜) : “황혼으로 약속으로 정한다”하더니

羌中道而改路(강중도이개로) : 낮에 중도에서 길을 고치셨다.

初既與余成言兮(초기여여성언혜) : 처음에는 내게 약속하시더니

後悔遁而有他(후회둔이유타) : 나중에 돌아서 딴 마음 가지실 줄이야

余既不難夫離別兮(여기불난부리별혜) : 나는야 이별이 어렵지 않지만

傷靈脩之數化(상령수지수화) : 임의 잦은 이별에 가슴 아파라.


余既滋蘭之九畹兮(여기자란지구원혜) : 나는 이미 구원의 난초를 기르고

又樹蕙之百畝(우수혜지백무) : 또 백무의 혜초도 심었다.

畦留夷與揭車兮(휴류이여게차혜) : 유이와 게차를 밭두둑으로 나누고

雜杜衡與芳芷(잡두형여방지) : 두형과 방지도 섞어 심었노라.

冀枝葉之峻茂兮(기지엽지준무혜) : 가지와 잎이 무성해지기를 바라고 

願俟時乎吾將刈(원사시호오장예) : 때 기다려 나는 베려했더니

雖萎絕其亦何傷兮(수위절기역하상혜) : 시들어버린들 그 무엇이 슬프랴.

哀眾芳之蕪穢(애중방지무예) : 수많은 꽃향기가 잡초에 묻혀 슬퍼도다.


眾皆競進以貪婪兮(중개경진이탐람혜) : 많은 사람들 다투어 탐욕을 부린다.

憑不猒乎求索(빙불염호구색) : 만족하지 못 하여 탐색한다.

羌內恕己以量人兮(강내서기이량인혜) : 내 마음 속 밝히듯 남을 생각함이여

各興心而嫉妒(각흥심이질투) : 각자 마음 속에 이는 마음 질투이어라.

忽馳騖以追逐兮(홀치무이추축혜) : 바쁘게 달려 쫓아감이여

非余心之所急(비여심지소급) : 내 마음에 절실한 것은 아니다.

老冉冉其將至兮(로염염기장지혜) : 늙음이 천천히 장차 다가옴이여

恐脩名之不立(공수명지불립) : 훌륭한 이름 남기지 못할까 두렵다.

昭飲木蘭之墜露兮(소음목란지추로혜) : 아침엔 목란에 구르는 이슬 먹고

夕餐秋菊之落英(석찬추국지락영) : 저녁에는 가을 국화 떨어지는 꽃잎 먹는다.

苟余情其信姱以練要兮(구여정기신과이련요혜) : 내 마음 정말 곱고 뛰어나면

長顑頷亦何傷(장함함역하상) : 오랫동안 조금 초췌한들 어찌 마음이 상하겠는가?

攬木根以結茞兮(람목근이결채혜) : 나무뿌리 캐어서 백지를 묶어

貫薜荔之落蕊(관벽려지락예) : 벽려의 뜰어진 꽃술을 꿰어서 

矯菌桂以紉蕙兮(교균계이인혜혜) : 균계를 바루어 혜초를 엮노라.

索胡繩之纚纚(색호승지리리) : 호승으로 꼬아 만든 어여쁜 끈

謇吾法夫前脩兮(건오법부전수혜) : 아, 나는 그 옛날 현인을 본받음이여

非世俗之所服(비세속지소복) : 세속의 옷도 아니어서

雖不周於今之人兮(수불주어금지인혜) : 요즈음 사람에게는 맞지 않아도

願依彭咸之遺則(원의팽함지유칙) : 팽함이 남긴 법도를 따르리라.


長太息以掩涕兮(장태식이엄체혜) : 긴 한숨에 눈물 가림이여

哀民生之多艱(애민생지다간) : 백성의 삶에 어려움 많음이 슬프다.

余雖好脩姱以鞿羈兮(여수호수과이기기혜) : 나는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여 받는 속박이여

謇朝誶而夕替(건조수이석체) : 아, 아침에 간하고 저녁에 쫓겨났다.

既替余以蕙纕兮(기체여이혜양혜) : 내가 쫓겨남은 혜초 띠 때문이라

又申之以攬茞(우신지이람茞) : 또 게다가 남채 때문 

亦余心之所善兮(역여심지소선혜) : 또한 내 마음의 착함이여 

雖九死其猶未悔(수구사기유미회) : 아홉 번 죽더라도 후회 없으리라.

怨靈脩之浩蕩兮(원령수지호탕혜) : 원망스러워라 임의 분별없음이여

終不察夫民心(종불찰부민심) : 끝내 백성의 마음을 살피지 않으십니다.

眾女嫉余之蛾眉兮(중녀질여지아미혜) : 여러 계집들 내 고운 눈썹을 질투하여

謠諑謂余以善淫(요착위여이선음) : 나를 음란하다고 헐뜯는다.

固時俗之工巧兮(고시속지공교혜) : 진정 요즈음 세속의 공교함이여

偭規矩而改錯(면규구이개착) : 그림쇠 버리고 마음대로 고쳐버린다.

背繩墨以追曲兮(배승묵이추곡혜) : 먹주을 버려두고 굽은 길 따라

競周容以為度(경주용이위도) : 다투어 비위 맞추는 것을 길로 삼는다.

忳鬱邑余侘傺兮(돈울읍여차제혜) : 우수에 쌓여 나는 실의한 속에서

吾獨窮困乎此時也(오독궁곤호차시야) : 나만 이 세상이 괴로우니

寧溘死以流亡兮(녕합사이류망혜) : 차라리 죽어 물에 흘러 없어질지언정

余不忍為此態也(여불인위차태야) : 나는 차마 이런 짓 할 수가 없다.

鷙鳥之不群兮(지조지불군혜) : 새매가 무리짓지 않음이여

自前世而固然(자전세이고연) : 전세부터 본래 그러 했었다. 

何方圜之能周兮(하방환지능주혜) : 어찌 네모와 동그라미가 맞을까?

夫孰異道而相安(부숙이도이상안) : 그 누가 길이 다른데도 서로 편안할 수 있으랴

屈心而抑志兮(굴심이억지혜) : 마음 굽히고 뜻 억눌림이여

忍尤而攘詬(인우이양후) : 허물 참고 꾸짖음을 물리친다.

伏清白以死直兮(복청백이사직혜) : 청백함에 굴복하고 정직함으로 죽음이여

固前聖之所厚(고전성지소후) : 진실로 옛 성인의 두터운 마음이라.

悔相道之不察兮(회상도지불찰혜) : 길을 잘 살피지 못함을 후회하여

延佇乎吾將反(연저호오장반) : 머뭇거리며 나는 돌아가려한다.

回朕車以復路兮(회짐차이부로혜) : 내 수레를 돌려 내 길로 돌아감이여

及行迷之未遠(급행미지미원) : 잘 못 던 길 더 멀어지기 전에

步余馬於蘭皋兮(보여마어란고혜) : 내 말을 난초 우거진 못에 거닐게 하고

馳椒丘且焉止息(치초구차언지식) : 산초 언덕을 달리게 하려 여기 잠깐 쉬게 하리라.

進不入以離尤兮(진불입이리우혜) : 나아가 들어가지 못하고 허물만 당함이여

退將復脩吾初服(퇴장부수오초복) : 물러나 다시 내 처음 옷을 가다듬으리라.


製芰荷以為衣兮(제기하이위의혜) : 마름과 연잎으로 옷을 지어 저고리 만듦이여

集芙蓉以為裳(집부용이위상) : 부용을 모야 치마 만든다.

不吾知其亦已兮(불오지기역이혜) :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그 또한 그만이어랴.

苟余情其信芳(구여정기신방) : 진실로 내 마음 향기로우면 

高余冠之岌岌兮(고여관지급급혜) : 내 갓을 우뚝 높임이고

長余佩之陸離(장여패지륙리) : 내 노리개 길게 늘이리

芳與澤其雜糅兮(방여택기잡유혜) : 향기와 악취 섞여 얽혀도

唯昭質其猶未虧(유소질기유미휴) : 오직 맑은 성품 이지러지지 않으리라.

忽反顧以遊目兮(홀반고이유목혜) : 문득 고개 돌려 돌아보며 

將往觀乎四荒(장왕관호사황) : 사방 거친 곳으로 찾아가 보리라.

佩繽紛其繁飾兮(패빈분기번식혜) : 노리개 번화하게 꾸미며 차니

芳菲菲其彌章(방비비기미장) : 향기가 물씬 풍겨 가득하다.

民生各有所樂兮(민생각유소악혜) : 사람의 삶에 저마다 좋아하는 것 있음이여

余獨好脩以為常(여독호수이위상) : 나는 착함이 좋아 법도로 삼고

雖體解吾猶未變兮(수체해오유미변혜) : 비록 내 몸이 찢겨져도 변하지 않으리니

豈余心之可懲(기여심지가징) : 어찌 내 마음 두려움 있으랴.


女嬃之嬋媛兮(녀수지선원혜) : 누님은 마음에 꺼려함이여

申申其詈予(신신기리여) : 거듭거듭 나를 꾸짖기를

曰鯀婞直以亡身兮(왈곤행직이망신혜) : “곤은 강직해서 몸을 망쳐

終然殀乎羽之野(종연요호우지야) : 끝내는 우산 들팡에서 요절한다“고 하니

汝何博謇而好脩兮(여하박건이호수혜) : 너는 어찌 충간함을 좋아하고 착함을 좋아하여

紛獨有此姱節(분독유차과절) : 혼자만 이런 좋은 절개를 지녔는가?

薋菉葹以盈室兮(자록시이영실혜) : 납가세, 조개풀, 도꼬마리 방안에 가득함이여

判獨離而不服(판독리이불복) : 판연히 혼자만 떨어져 복종하지 아니 한다.

眾不可戶說兮(중불가호설혜) : 많은 사람을 일일이 설득할 수 없음이여

孰云察余之中情(숙운찰여지중정) : 누가 우리 마음속을 살펴줄까?

世並舉而好朋兮(세병거이호붕혜) : 세상은 온통 패거리만 좋아함이여

夫何煢獨而不予聽(부하경독이불여청) : 그 어찌 외로이 혼자 내 말을 듣지 않을까?


依前聖以節中兮(의전성이절중혜) : 엣 성인 따라서 중정을 행하여

喟憑心而歷玆(위빙심이력자) : 아, 마음대로 이 세상 다니면서

濟沅湘以南征兮(제원상이남정혜) : 원수와 상수를 건너 남으로 가서

就重華而敶詞(취중화이진사) : 중화님께 나아가 말씀 올리리나.

啟九辯與九歌兮(계구변여구가혜) : 게는 구변과 구가를 얻었지만

夏康娛以自縱(하강오이자종) : 하나라 왕들은 즐기며 스스로 방탕하여

不顧難以圖後兮(불고난이도후혜) : 환난을 돌아보아 뒷날을 도모하지 않아

五子用失乎家巷(오자용실호가항) : 다섯 아들은 집을 잃고 헤매고 다니누나 

羿淫遊以佚畋兮(예음유이일전혜) : 후에는 방탕하여 돌아다니며 사냥에 빠져

又好射夫封狐(우호사부봉호) : 또한 활쏘기를 좋아하여 여우만 기르네.

固亂流其鮮終兮(고란류기선종혜) : 본래 음란한 기풍은 좋은 결과 더무니

浞又貪夫厥家(착우탐부궐가) : 한착이 또 그 아내를 탐하였다. 

澆身被服強圉兮(요신피복강어혜) : 요는 몸이 굳세고 힘이 장사여서

縱欲而不忍(종욕이불인) : 욕심을 따라 참지 못하여

日康娛而自忘兮(일강오이자망혜) : 날마다 즐겨 자신을 잊었다.

厥首用夫顛隕(궐수용부전운) : 그리하여 그 목이 잘려 떨어졌다.

夏桀之常違兮(하걸지상위혜) : 하나라 걸왕은 항상 도리에 어긋나 

乃遂焉而逢殃(내수언이봉앙) : 마침내 재앙을 만났다.

后辛之菹醢兮(후신지저해혜) : 신임금은 인육을 소금에 절이어 

殷宗用而不長(은종용이불장) : 은 왕조 오래가지 못하였네.

湯禹儼而祗敬兮(탕우엄이지경혜) : 탕왕과 우왕 존엄하고 공경스러웠다.

周論道而莫差(주론도이막차) : 주나라는 도리어 도를 논하고 어긋남이 없어

舉賢而授能兮(거현이수능혜) : 현인을 천거하고 유능한 사람에게 벼슬을 주어

循繩墨而不頗(순승묵이불파) : 보도 따라 치우침이 없었네.

皇天無私阿兮(황천무사아혜) : 하늘은 사사로움 없어서

覽民德焉錯輔(람민덕언착보) : 백성의 덕 보시고 도울 사람 내리시니

夫維聖哲之茂行兮(부유성철지무행혜) : 성인과 철인의 거룩한 행동에 달려있다.


苟得用此下土(구득용차하토) : 진실로 이 세상 땅을 차지할 수 있으니

瞻前而顧後兮(첨전이고후혜) : 앞을 살피고 뒤를 돌아보아

相觀民之計極(상관민지계극) : 백성의 갈 길을 살핀다.

夫孰非義而可用兮(부숙비의이가용혜) : 누가 의롭지 않은데 쓰여지며

孰非善而可服(숙비선이가복) : 누가 착하지 않고서 감복시킬 수 있을까?

阽余身而危死兮(점여신이위사혜) : 내 몸 위태로워 죽을 지라도

覽余初其猶未悔(람여초기유미회) : 나의 처음 뜻 보고 지금까지 후회하지 않았다.

不量鑿而正枘兮(불량착이정예혜) : 도끼 구멍도 헤아리지 않고 자루 맞추어

固前脩以菹醢(고전수이저해) : 정말로 옛 현인 소금에 절여졌다. 

曾歔欷余鬱邑兮(증허희여울읍혜) : 거듭 흐느껴지고 가슴 메인다.


哀朕時之不當(애짐시지불당) : 네가 때를 만나지 못함을 슬퍼하고

攬茹蕙以掩涕兮(람여혜이엄체혜) : 두약과 혜초를 뜯어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도 

霑余襟之浪浪(점여금지랑랑) : 내 옷깃을 적시는 눈물이 주르르 흐르네

跪敷衽以陳辭兮(궤부임이진사혜) : 무릎 꿇고 옷섶을 펼치고 말씀을 올려

耿吾既得此中正(경오기득차중정) : 환하게 나는 이미 중정을 얻었다.

駟玉虯以乘鷖兮(사옥규이승예혜) : 네 마리 흰 규룡에 봉황수레 타고

溘埃風余上征(합애풍여상정) : 바람에 티끌 날리며 올라간다.

朝發軔於蒼梧兮(조발인어창오혜) : 아침에 창오를 떠나 저녁에 현포에 이르러

夕余至乎縣圃(석여지호현포) : 잠시 이곳 천문에 와

欲少留此靈瑣兮(욕소류차령쇄혜) : 이곳 영쇄에 잠시 머물려하나?

日忽忽其將暮(일홀홀기장모) : 날이 벌써 저물려 한다.

吾令羲和弭節兮(오령희화미절혜) : 나는 희화에게 속력을 늦추게 하여

望崦嵫而勿迫(망엄자이물박) : 엄자산 쪽으로 접근하지 않게 하고

路曼曼其脩遠兮(로만만기수원혜) : 길은 까마득하고 멀어서

吾將上下而求索(오장상하이구색) : 나는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찾아다닌다.

飲余馬於咸池兮(음여마어함지혜) : 나의 말에게 함지에서 물을 먹이고 

總余轡乎扶桑(총여비호부상) : 고삐를 부상에 매어놓고 

折若木以拂日兮(절약목이불일혜) : 약목을 꺾어서 해를 털어내고

聊逍遙以相羊(료소요이상양) : 잠시 거닐며 배회하노라

前望舒使先驅兮(전망서사선구혜) : 앞에는 망서를 길잡이 삼고

後飛廉使奔屬(후비렴사분속) : 뒤에는 비렴을 따라오게 하여

鸞皇為余先戒兮(란황위여선계혜) : 난새와 봉황새 나를 위해 앞길을 지키는데

雷師告余以未具(뢰사고여이미구) : 천둥의 신은 내게 준비가 덜 되었다 한다.


吾令鳳鳥飛騰兮(오령봉조비등혜) : 나는 봉황새를 높이 날게 하여

繼之以日夜(계지이일야) : 밤낮으로 계속 날아간다.

飄風屯其相離兮(표풍둔기상리혜) : 회오리바람은 불어 모였다가 흩어지고

帥雲霓而來御(수운예이래어) : 구름과 무지개를 맞이해 이끌어온다.

紛總總其離合兮(분총총기리합혜) : 자욱이 몰려들었다가 떨어져나간다. 

斑陸離其上下(반륙리기상하) : 자욱이 떨어지며 상하로 오르락내리락 한다.

吾令帝閽開關兮(오령제혼개관혜) : 내가 하늘 문지기에게 문 열어달라고 하니 

倚閶闔而望予(의창합이망여) : 천문에 기대어 나를 바라본다.

時曖曖其將罷兮(시애애기장파혜) : 때는 어둑어둑 해가 지려하는데

結幽蘭而延佇(결유란이연저) : 그윽한 남초에 묶이어 우두커니 서있다.

世溷濁而不分兮(세혼탁이불분혜) : 세상은 혼탁해 분별이 없고

好蔽美而嫉妒(호폐미이질투) : 미덕은 가려지고 시기질투만 한다.


朝吾將濟於白水兮(조오장제어백수혜) : 아침에 나는 백수를 건너려하네

登閬風而繫馬(등랑풍이계마) : 낭풍산에 올라 말을 매어놓고

忽反顧以流涕兮(홀반고이류체혜) : 문득 돌아보니 눈물이 흘러내린다.

哀高丘之無女(애고구지무녀) : 높은 언덕에 여자 없음이 서러워하며 

溘吾遊此春宮兮(합오유차춘궁혜) : 곧 나는 이러한 봄날의 궁전에 노닌다.

折瓊枝以繼佩(절경지이계패) : 보석 같은 꽃가지 꺾어서 노리개에 이어서 

及榮華之未落兮(급영화지미락혜) : 이 화려한 꽃이 시들기 전에 

相下女之可詒(상하녀지가이) : 이 꽃을 바칠 하계의 여자를 찾으리라.

吾令豐隆乘雲兮(오령풍륭승운혜) : 나는 풍륭을 시켜서 구름을 탄다.


求宓妃之所在(구복비지소재) : 복비가 있는 곳을 찾아

解佩纕以結言兮(해패양이결언혜) : 노리개 띠를 풀어 말을 건넨다.

吾令蹇脩以為理(오령건수이위리) : 나는 건수를 중매쟁이로 삼으려 했는데

紛總總其離合兮(분총총기리합혜) : 자욱이 몰려들었다가 떨어져나간다.

忽緯繣其難遷(홀위획기난천) : 얼핏 어긋나서 돌이키기 어려워라.

夕歸次於窮石兮(석귀차어궁석혜) : 저녁에는 궁석산에 들어와 묵고

朝濯髮乎洧盤(조탁발호유반) : 아침에는 유반 머리 감는다.

保厥美以驕傲兮(보궐미이교오혜) : 그 아름다움에 교만하여 

日康娛以淫遊(일강오이음유) : 날마다 편히 즐기며 마음대로 논다.


雖信美而無禮兮(수신미이무례혜) : 정말 아름다워도 예절이 없고

來違棄而改求(래위기이개구) : 돌아와 버려두고 다시 구하리라. 

覽相觀於四極兮(람상관어사극혜) : 사방을 끝까지 돌아보고

周流乎天余乃下(주류호천여내하) : 하늘을 돌아 나는 내려왔다.

望瑤臺之偃蹇兮(망요대지언건혜) : 높이 솟은 요대를 바라보니

見有娀之佚女(견유융지일녀) : 유융의 미녀 보이고

吾令鴆為媒兮(오령짐위매혜) : 나는 짐새를 중배장이 삼았는데

鴆告余以不好(짐고여이불호) : 짐새는 내게 나쁘다고 하고

雄鳩之鳴逝兮(웅구지명서혜) : 숫 비둘기는 울며 날아가지만

余猶惡其佻巧(여유악기조교) : 나는 또 그 경박함이 싫도다.

心猶豫而狐疑兮(심유예이호의혜) : 주저하고 망설이는 내 마음이여


欲自適而不可(욕자적이불가) : 스스로 가고파도 갈 수 없다.

鳳皇既受詒兮(봉황기수이혜) : 봉황이 벌써 해를 받아갔지만

恐高辛之先我(공고신지선아) : 고신씨가 나를 앞서 갈까 두려워라.

欲遠集而無所止兮(욕원집이무소지혜) : 멀리 떠나려 해도 갈 곳이 없어

聊浮遊以逍遙(료부유이소요) : 잠시 놀면서 떠돌아 다닌다.

及少康之未家兮(급소강지미가혜) : 소강이 아직 장가들기 전에

留有虞之二姚(류유우지이요) : 우유씨의 두 딸을 남겨 두었다.

理弱而媒拙兮(리약이매졸혜) : 중매가 어설프고 서툴어서

恐導言之不固(공도언지불고) : 전하는 말 확실하지 못할까 두려워라.

世溷濁而嫉賢兮(세혼탁이질현혜) : 세상이 혼탁해 어진 사람 질투하여

好蔽美而稱惡(호폐미이칭악) : 미덕을 가리고 악함만 들추어낸다.


閨中既以邃遠兮(규중기이수원혜) : 안방은 이미 깊고도 멀어

哲王又不寤(철왕우불오) : 밝은 임금 또한 깨어나지 못해

懷朕情而不發兮(회짐정이불발혜) : 내 마음 품은채로 펴지도 못 한다.


余焉能忍與此終古(여언능인여차종고) : 내가 어찌 이들과 끝까지 참고 살 수 있을까?

索藑茅以筳篿兮(색경모이정전혜) : 경모초 구하여 접대를 만들어서

命靈氛為余占之(명령분위여점지) : 영분에게 날 위해서 점을 치게 하니

曰兩美其必合兮(왈량미기필합혜) : 아름다운 두 사람 합쳐질 것이라 한다.

孰信脩而慕之(숙신수이모지) : 진실로 아름다우면 누가 생각하지 않으리

思九州之博大兮(사구주지박대혜) : 구주의 넓고 큰 땅 생각하면

豈唯是其有女(기유시기유녀) : 어찌 이곳에만 미인이 있으랴. 

曰勉遠逝而無狐疑兮(왈면원서이무호의혜) : 애써 멀리 떠나 망설이지 말라 하니

孰求美而釋女(숙구미이석녀) : 누가 아름다운 사람을 찾으면서 그대를 버리랴. 

何所獨無芳草兮(하소독무방초혜) : 어디인들 향기로운 풀 없는 곳 있으랴.

爾何懷乎故宇(이하회호고우) : 그대는 어이하여 옛 집만 생각하나

世幽昧以昡曜兮(세유매이현요혜) : 세상은 어둑하여 빛은 어지러이 빛난다.

孰云察余之善惡(숙운찰여지선악) : 누가 우리의 선악을 살핀다고 했는가?

民好惡其不同兮(민호악기불동혜) : 사람의 좋아함과 싫어함은 각기 다르지만

惟此黨人其獨異(유차당인기독이) : 오직 이들의 무리는 특별히 달라서

戶服艾以盈要兮(호복애이영요혜) : 누구나 쑥을 허리에 가득 두르고

謂幽蘭其不可佩(위유란기불가패) : 그윽한 난초는 두를 수가 없다고 하는구나.

覽察草木其猶未得兮(람찰초목기유미득혜) : 풀과 나무도 제대로 살지 못하거늘

豈珵美之能當(기정미지능당) : 어찌 어찌 구슬 보는 눈이 바르랴. 

蘇糞壤以充幃兮(소분양이충위혜) : 썪은 흙을 주워 향주머니 채우고 

謂申椒其不芳(위신초기불방) : 신초를 향기 없다고 하는구나.


欲從靈氛之吉占兮(욕종령분지길점혜) : 영분의 길점을 따르려고 해도

心猶豫而狐疑(심유예이호의) : 주저되고 망서려지는 마음

巫咸將夕降兮(무함장석강혜) : 무함이 저녁에 내려오면

懷椒糈而要之(회초서이요지) : 산초와 고운 쌀 품고 그대를 맞으리라.

百神翳其備降兮(백신예기비강혜) : 온갖 신이 하늘을 덮고 내려와서

九疑繽其並迎(구의빈기병영) : 구의산 신령을 줄지어 맞아들이고

皇剡剡其揚靈兮(황섬섬기양령혜) : 천신은 번쩍번쩍 신령스런 기운을 드 날린다.


告余以吉故(고여이길고) : 나에게 길한 까닭을 말해 주기를 

曰勉陞降以上下兮(왈면승강이상하혜) : 힘써 위아래 오르내리며 

求矩矱之所同(구구확지소동) : 법도를 같이하는 이를 찾는다.

湯禹嚴而求合兮(탕우엄이구합혜) : 탕왕과 우왕은 엄숙하여 뜻 맞는 이 구하여

摯咎繇而能調(지구요이능조) : 지와 고요와 조화를 이우었도다.


苟中情其好脩兮(구중정기호수혜) : 정말로 마음속으로 착한 것 좋아하지만

又何必用夫行媒(우하필용부행매) : 또 어찌 반드시 중매를 해야 하는가?

說操築於傅巖兮(설조축어부암혜) : 부열은 부암에서 흙 달구질하다가

武丁用而不疑(무정용이불의) : 무정에서 등용되어 신임을 받았다.

呂望之鼓刀兮(려망지고도혜) : 여망은 칼을 치다가

遭周文而得舉(조주문이득거) : 주 문왕을 만나 천거되었고

甯戚之謳歌兮(녕척지구가혜) : 영척은 노래 부르다가 

齊桓聞以該輔(제환문이해보) : 제 환공이 듣고 보좌관 삼았다.

及年歲之未晏兮(급년세지미안혜) : 나이 더 늦기 전에

時亦猶其未央(시역유기미앙) : 계절이 다 가기 전에

恐鵜鴃之先鳴兮(공제격지선명혜) : 소쩍새 먼저 울까 두려워라.

使夫百草為之不芳(사부백초위지불방) : 저 온갖 풀들 향기 잊을까 두렵고

何瓊佩之偃蹇兮(하경패지언건혜) : 얼마나 보석놀이개가 고운가?

眾薆然而蔽之(중애연이폐지) : 사람들 모려와 덮어 가리고

惟此黨人之不諒兮(유차당인지불량혜) : 이 무리들 너그럽지 못 하여

恐嫉妒而折之(공질투이절지) : 질투에 꺾여버릴까 두려워노라.


時繽紛其變易兮(시빈분기변역혜) : 세속은 어지러워 쉽게 변하는데

又何可以淹留(우하가이엄류) : 또 어찌 오래 머물 수 있겠는가?

蘭芷變而不芳兮(란지변이불방혜) : 난초와 백지 변하여 향기롭지 못하고

荃蕙化而為茅(전혜화이위모) : 전풀과 해초 변하여 띠풀로 되었도다.

何昔日之芳草兮(하석일지방초혜) : 어찌 지난날 향기롭던 풀이

今直為此蕭艾也(금직위차소애야) : 지금은 이러한 쑥덤불이 되었는가?

豈其有他故兮(기기유타고혜) : 그 어찌 다른 까닭이 있으랴. 

莫好脩之害也(막호수지해야) : 착함을 좋아하지 않은 해로움이라.

余以蘭為可恃兮(여이란위가시혜) : 나는 난초를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羌無實而容長(강무실이용장) : 아 속은 비고 겉모양만 길도다. 

委厥美以從俗兮(위궐미이종속혜) : 그 아름다움을 버리고 속됨만 쫓으니

苟得列乎眾芳(구득렬호중방) : 구차스럽게 흔한 꽃 속에 줄을 서는구나.

椒專佞以慢慆兮(초전녕이만도혜) : 산초나무는 아첨하고 오만하고

樧又欲充夫佩幃(살우욕충부패위) : 수유나무도 향주머니 채우려하니

既干進而務入兮(기간진이무입혜) : 이미 벼슬 찾아 등용되기를 힘쓰니

又何芳之能祗(우하방지능지) : 또 어찌 언제 향기를 높이랴.

固時俗之流從兮(고시속지류종혜) : 진정 시속의 흐름을 따라

又孰能無變化(우숙능무변화) : 누가 변하지 않겠는가?

覽椒蘭其若玆兮(람초란기약자혜) : 산초와 난초도 그러한데

又況揭車與江離(우황게차여강리) : 하물며 게차와 강리에 있어서야

惟玆佩之可貴兮(유자패지가귀혜) : 오직이 노리개를 귀하게 여김이여

委厥美而歷玆(위궐미이력자) : 그 아름다움 버림받아 이에 이르고 

芳菲菲而難虧兮(방비비이난휴혜) : 꽃향기 물씬물씬 줄어들지 않고

芬至今猶未沬(분지금유미매) : 꽃내음 아직도 가시지 않았도다.

和調度以自娛兮(화조도이자오혜) : 태도를 온화하게 가져 스스로 즐겨

聊浮游而求女(료부유이구녀) : 잠깐 동안만 떠돌며 미녀를 구하리라

及余飾之方壯兮(급여식지방장혜) : 내 치장이 한참 향기로울 때

周流觀乎上下(주류관호상하) : 천하를 두루 다니며 찾아보리라.


靈氛既告余以吉占兮(령분기고여이길점혜) : 영분이 이미 나에게 길한 점괘를 주어

歷吉日乎吾將行(력길일호오장행) : 좋은 날을 가려서 나는 떠나리라.

折瓊枝以為羞兮(절경지이위수혜) : 경지를 꺾어 반찬 삼고

精瓊爢以為粻(정경미이위장) : 옥가루 빻아서 양식 삼으리라.

為余駕飛龍兮(위여가비룡혜) : 나를 위해 비룡을 끌게 하고

雜瑤象以為車(잡요상이위차) : 옥과 상아를 섞어 수레를 만들어보나

何離心之可同兮(하리심지가동혜) : 어찌 떠난 마음 하나가 되랴.

吾將遠逝以自疏(오장원서이자소) : 나는 멀리 떠나 스스로 멀어지리라.

邅吾道夫崑崙兮(전오도부곤륜혜) : 내 길을 돌아서 나는 곧 곤륜산 바라보며

路脩遠以周流(로수원이주류) : 길은 아득하여 돌고 돌아서

揚雲霓之晻藹兮(양운예지엄애혜) : 구름과 무지개 날려 하늘을 가린다.

鳴玉鸞之啾啾(명옥란지추추) : 옥란 소리 울리더니 

朝發軔於天津兮(조발인어천진혜) : 아침에 은하수 나루를 떠나

夕余至乎西極(석여지호서극) : 저녁에 서쪽 끝에 이른다.

鳳皇翼其承旂兮(봉황익기승기혜) : 봉황은 공손히 깃발을 받들고

高翱翔之翼翼(고고상지익익) : 높이 날아 가지런히 간다.

忽吾行此流沙兮(홀오행차류사혜) : 홀연히 나는 이 흐르는 모래를 걸어

遵赤水而容與(준적수이용여) : 적수를 따라 천천히 걷는다.

麾蛟龍使梁津兮(휘교룡사량진혜) : 교룡을 부려 나루에 다리 놓아

詔西皇使涉予(조서황사섭여) : 서황에게 나를 건너 주게 하리라.

路脩遠以多艱兮(로수원이다간혜) : 길은 멀고멀어 어려움이 많아

騰眾車使徑待(등중차사경대) : 수레를 지름길로 나와 기다리게 한다. 

路不周以左轉兮(로불주이좌전혜) : 부주산 왼쪽으로 돌아

指西海以為期(지서해이위기) : 서해를 가리키며 만날 약속을 했노라.

屯余車其千乘兮(둔여차기천승혜) : 내 수레가 천대나 몰리어

齊玉軑而並馳(제옥대이병치) : 옥 바퀴 나란히 달리고

駕八龍之婉婉兮(가팔룡지완완혜) : 꿈틀거리는 여덟용을 몰아

載雲旗之委蛇(재운기지위사) : 휘날리는 구름 깃발 꽂고 간다.

抑志而弭節兮(억지이미절혜) : 마음을 누르고 걸음을 늦추어도

神高馳之邈邈(신고치지막막) : 넋은 높이 날아 아득하게 달린다.

奏九歌而舞韶兮(주구가이무소혜) : 구가를 타고 구소에 춤추며

聊假日以媮樂(료가일이유악) : 잠시 시간을 빌어 즐기노라.

陟陞皇之赫戲兮(척승황지혁희혜) : 햇빛 휘황한 하늘로 오르니

忽臨睨夫舊鄉(홀림예부구향) : 갑자기 저 먼 고향이 내려 보인다.

僕夫悲余馬懷兮(복부비여마회혜) : 종도 슬퍼하고 내 말도 그리워한다

蜷局顧而不行(권국고이불행) : 뒤돌아보며 나아가지 못하노라.


亂曰(란왈) : 난사에 이르기를

已矣哉(이의재) : 모든 것 다 끝이 났다.

國無人莫我知兮(국무인막아지혜) : 나라에 사람 없어 날 알아주지 않는데

又何懷乎故都(우하회호고도) : 어찌 고향을 그리워할까?

既莫足與為美政兮(기막족여위미정혜) : 이미 함께 좋은 정치 할 만한 이 없는데

吾將從彭咸之所居(오장종팽함지소거) : 내가 정차 팽함이 있는 곳을 찾아가리라.




출처: http://hwalove.tistory.com/entry/離騷經이소경-屈原굴원-1 [빈막(賓幕)]



C43 – 물질문명과 자본주의(Civilisation matérielle, économie et capitalisme, XVe-XVIIIe siècle) / 브로델(Femand Braudel, 1902~1985)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서양 근대초기의 경제적 삶을 물질문명, 시장경제, 자본주의의 3층 구도 속에서 파악한다. 물질문명 은 자급자족의 하부경제이며, 그 위에 투명하고 규칙성을 지닌 교류의 장소인 경제생활이 있고, 맨 위에 불투명한 독점의 세계인 자본주의가 있다. 일상생활의 구조를 경제사에 결합시키고 자본주의를 특이하게  반시장으로 보는 동시에, 세계경제라는 총체적 시각을 제공한다. 그리고 산업혁명이 서유럽에서 일어난 이유를 인간의 모든 경험, 활동, 사건들을 동원해 설명하고 있다.


a. 생애와 작품활동

 프랑스의 역사가 브로델은 1902년 프랑스의 로렌 지방의 옛 그대로의 시간이 흐르고 있는 작은 마을에서 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소르본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파리 등 여러 곳에서 고등학교의 교사를 지냈으며, 지중해 세계에 강한 관심을 가졌다.

 프랑스가 독일에 패망하던 해인 1940년(38세)에 프랑스 육군중위로 싸우다가 독일군의 표로가 되어 1945년까지 뤼베크 수용소에 있었다. 그 안에서 순전히 기억에 의존하여 쓴 16세기 지중해 역사인  필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와 지중해 세계로 1947년 소르본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 그는 논문에서 역사를 장파. 중파. 단파의 3층 구조로 파악할 것을 주장하고, 특히 장기적인 지속상을 중시하는 점에서 전통적 역사학과 뚜렷한 대조를 보였다. 

지중해 세계가 집필되고, 물질문명이 간행되기까지의 30년 동안 브로델은 문자 그대로 거장의 층계를 착실하게 밟아 올라 갔다. 즉, 아날 학파의 1세대인 페브르의 뒤를 이어, 1949년(47세)부터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 1956년(54세)부터는 고등학술연구원 제6부문의 책임자가 되었고, 아날 학파의 중심적 존재로서 역사학과 여러 인간과학과의 교류에 큰 역할을 하였다. 1984년(82세)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에 선출되었다.


b. 아날 학파와 브로델의 역사관

 1929년 사회경제사 연보를 창간하여, 역사적 세계의 심층적이고 포괄적인 인식에 획기적 기여를 하고 있는 프랑스의 아날 학파는 제1세대인 페브르와 블로크를 거쳐 제2세대를 대표하는 브로델에 의해 그 이론체계를 대략 정립하였다고 할 수 있다. 

 아날의 제1세대인 페뷔르의 역사학이 심리적이었던 반면, 블로크의 사학은 사회적이었으나 기본적으로 이들은 관념적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브로델은 그들과 다르게 어떤 사건들 밑에 깔려 있는 기후. 지리. 인구. 교통. 통신 등의 지리학적 요인들을 중시하였고, 브로델의 지리학적 역사는 가장 프랑스적인 역사, 즉 새로운 역사였다. 브로델에 의하면 역사는 시간적 지속에 비례하여, 순식간의 역사(사건사), 주기적 역사(변동사), 장기지속의 역사(구조사)로 나뉘어진다. 개별적 사상과 사회상황을 중요시하며, 역사를 전체적 관련 속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브로델과 아날 학파의 진정한 역사인식은 무엇보다도 장기 지속, 즉 구조의 파악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주장된다. 

 그런데 이 구조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그들은 명확한 개념정의를 내리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지리적 제조건. 공간. 조직. 경제. 생활. 정신적. 문화적. 심리학적 테두리까지도 포함함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말하자면 개인적 생애나 사건의 역사(정치사)의 관점에서 볼 때는 변화가 없는 정체되고 있는 듯한 현상들, 즉 백년 혹은 몇 세기의 오랜 시간 속에서 지극히 완만하게 흐르고 있는 관습과 같은 것들이다. 브로델의 방법론은 이러한 것들이 사실은 변천하는 시대의 밑바닥에 있어 사회와 인간을 규제하고 있다는 인식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 

  구조는 영속하는 것이며 때때로 한 세기 이상 지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를 가로막고 방해하고, 그리하여 그 흐름을 좌우하는 것이다. 역사의 발전을 가로막고 그러면서 흐름을 좌우하는 것, 그것은 제도나 사상체계. 학문. 예술 등의 고급문화보다도 제도화되어 있지 않고 기록되지 않는 단기적인 변화를 초월한 공시적 세계에 속한다. 아날 학파는 그것을 민중의 무의식의 집합심리나 일상생활에서 브로델의 이른바 물질문명속에서 찾는다. 브로델을 위시한 아날 학파는 여러 세대 내지 몇 세기에 걸쳐 이어지면서 육체화되고 관습화되고 사회화된 것들을 찾아 사회사를 서술하는데, 그들은 그 대상을 즐겨 중세나 18세기 이전의 움직이지 않는 역사 속에서 찾는다. 산업혁명 이후 현대에서의 사회의 극대화 현상 및 대중화 상황은 국가권력 내지는 체제의 상층집단의 향배를 주제로 한 전통사학의 한계를 드러낸 지 오래되거니와 이제 아날 학파에 의해 사회, 즉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민중의 일상생활이 바로 역사인식의 최대의 주제가 된 것이다. 

 페뷔르는 역사란 본래 사회사였다라고 말한 바 있지만 지난날의 개별적 역사로서의 사회(경제)사와는 구별되는 그 심층에 이르기까지 사회에 의해 규정된 인간들의 전체상을 규명하는 진정한 사회사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브로델의 15~18세기의 물질. 문명. 경제. 자본주의를 들 수 있다.


c.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의 내용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는 많은 그림. 사진. 지도. 도표 등의 방대한 자료와 실증적 연구를 토대로 저술되어 있다. 브로델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의 서론에서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경제학은 생산 및 교환의 메커니즘을 특징으로 하는 시장경제에 의존한다. 그 명료하고 투명한 시장경제의 아래층에는 불투명하나마 거대하고 기본적인 물물교환에서 이루어진 하부경제 지대가 존재한다(이 하부경제 지대를 브로델은 물질생산 또는 물질문명이라고 부른다).

한편 시장경제의 위층에는 활발한 사회집단을 이룬 특권적 행위자(16세기 제노바나 18세기 암스테르담의 대상인 등)에 의해 구축된 자본주의의 영역이 있다. 이 물질문명, 경제, 자본주의의 삼층구조를 통해, 브로델은 15세기에 걸친 경제현실을 세계화한 시간과 공간을 관통한 비교사적 관점에서 규명한다. 15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시장경제의 상황에 관한 해독을 통해 근. 현대사회의 테두리가 보인다고 브로델은 확신한다. 


   제1권 일상생활의 구조

 제1권의 제1장은 세계인구를 추계하고 2, 3, 4장에서는 기술의 문제를, 7, 8장에서는 화폐와 도시를 다룬다. 그러면 본권의 주제이며 브로델을 비롯하여 아날 학파의 역사인식에 있어 최대의 초점인 일상생활이란 무엇인가. 본권의 머리말에서 브로델은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말해준다.

  일상생활이란 시간 및 공간 속에 끼여 들어 눈에 띄지 않는 사소한 사실이다. 잡다한 것은 되풀이되고 그리고 되풀이되는 동안에 일반성이 되며 보다 정확하게는 구조가 되기도 한다. 그것은 사회의 모든 층에 끼여 들고 끝없이 지속을 계속하는 존재양식 및 행동양식의 특징을 이룬다. 때로는 몇 가지의 에피소드에 접하기만 하여도 일상사의 등화표지에 불이 켜지고 갖가지의 생활양식을 비춰준다. 일상생활 의 심층적 파악을 통해서 의. 식. 주 등 몇 세기에 걸친 생활내용이 문명의 성질을 결정하는 요인으로 이해된다. 브로델 이전의 어느 역사가도 이러한 관찰을 하지 못했다.


   제2권 교환의 기능

 제2권에서는 물물교환에서부터 자본주의에까지 이르는 교환의 기증이 분석된다. 즉, 제1권의 주제가 비경제였다면 여기의 주제는 경제다. 특히 상업자본에 중점을 두며 관습적인 경제와 자본주의적인 고등경제가 비교. 논술되었다. 제1, 2장에서는 자본주의 이전의 장인 행상. 상점. 거래소 등이 취급되고 거기에서부터 브로델은 교환의 법칙을 도출하고자 한다. 제3, 4장에서는 생산과 자본주의의 문제가, 5장에서는 경제가 자본주의가 전체의 집합으로서의 사회의 테두리 속에서 재인식된다. 제2권의 목적은 역사의 접합점. 진화 그리고 전통적 질서를 유지하는 갖가지의 거대한 힘, 사르트르가 말하는 완만한 강한 힘; 을 식별하기 위한 시도였다. 


   제3권 세계시간

제3권에서는 세계 속을 끊임없이 유통하고 있는 세계시간과 지역 내적인 연관 및 교환에 의해 유기적인 통일성을 특징으로 하는 세계경제에 관해 논의한다. 이 부분은 사회학자가 만든 개념에 대한 역사학자로서의 교정이라 볼 수 있는데, 그는 세계경제를 경제적으로 자율적이고, 본질적으로 자족적이며, 내적연결과 교환을 통해 유기적 일체성을 부여 받는 지구상의 일부분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세계경제는 중심부. 준주변부 그리고 주변부라는 세 개의 불평등한 권역으로 나뉘며, 중심부의 중심은 베니스_앙베르_제노이_암스테르담_런던_뉴욕 등으로 이동하고 있다. 세계경제에서는 자본주의에서 노예제에 이르기까지 여러 개의 생산양식이 공존하고 있으며, 중심부와 준주변부 사이의 불평등은 결코 치유될 수 없는 인간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중심부. 준주변부. 주변부가 하나의 경제 속에 속한다는 것을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이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서 브로델은 지리적으로 닫힌 세계 속으로 흐르는 시간이라는 인지를 주목한다. 역사의 흐름을 상승 하강하는 장기적 사이클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식은 복잡 다단한 사건들을 종합적으로 인식하는 데 도움을 준다. 


d. 본서의 의의

 위에서 본 것처럼 브로델은 이 획기적 저서에서 역사적 시간을 세 가지로 구분하였다.

 첫째는 지리적 시간인데 이것은 기후. 식물. 간선교통로 등 거의 변화가 없는 장기적 시간으로서 환경 생태계의 역사다. 여기서 아날 학파의 제3세대에 의한 심성사 연구와 관련해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자연적 풍토나 지리적 환경이 브로델에 있어 정념적인 것으로 이해되었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사회적 시간인데, 이것은 경제적 주기, 사회제도, 문화등 사회집단과 사회구조가 완만하게 변동하는 사회적 역사다.

 셋째는 개인적 시간으로, 이것은 개인의 일생을 척도 삼아 측정할 수 있는 단기적 시간이며 정치사. 사건사다. 그는 이상 세 가지 시간층이 필리페 2세 시대에 있어 어떻게 역사의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가를 기술하였다. 

 브로델은 역사에서 시간의 복충성 문제와 시간의 계층이 어떠한 관련성을 지니고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역사와 사회과학_장기지속(1958)이라는 논문에서 더욱 이론적으로 탐구하여  새로운 역사학의 방향을 명확히 하였다. 

 결론적으로 말하여 일상성의 모든 측면에 대한 구체적인 관찰과 비교역사학의 뛰어난 상상력에 인도되면서 문명과 사회의 구도를, 그리고 사회적 인간, 인간적 사회의 실상을 눈에 보일 듯이 펼쳐준 이 현대의 고전은 라뒤리, 르 고프, 아리에스, 망드루, 두비 등 아날 학파의 제3세대에 훌륭하게 이어지고 있다. 역사인식의 새로운 지평을 활짝 열어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는 아날 학파와 사회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한번쯤 읽어야 하는 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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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학파 (출처 : doopedia)

[Annales School]


1929년 프랑스의 역사학자인 L.페브르와 M.블로크에 의해 창간된 《사회경제사 연보》(1946년에는 '아날 ·경제 ·사회 ·문명'으로, 1994년에는 다시 '아날 ·역사와 사회과학'으로 제명 변경)를 중심으로 형성된 학파.

랑케의 사실주의에 토대를 둔 근대 역사학은 역사철학이나 낭만주의적 역사서술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기는 하였으나, 사료의 정확성에 지나치게 집착함으로써 역사학의 폭과 깊이를 축소시키는, 그 부정적 측면을 노출하여, 결국 인문사회과학의 세계에서 자료제공자의 위치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러한 역사학의 위기 상황에서, 프랑스에서는 뒤르켐의 사회학, 비달 드 라 블라슈(Vidal de Blache)의 인문지리, 철학자인 H.베르의 역사적 종합 등이 인문사회과학을 주도하는 가운데, F.시미앙이 제기한 ‘역사가들의 3가지 우상(정치 ·개인 ·연대)’에 대한 논박, 그리고 이러한 도전에 대한 역사가로서의 수용은 새로운 역사학의 형태를 결정지었다. 정치보다는 사회, 개인보다는 집단, 연대보다는 구조를 역사인식의 기본 골격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이 학파의 정신이 된 것이다.


이렇게 출범한 이 학파가 역사학 안팎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확보한 것은 제2세대인 F.브로델에 의해서이다. 그가 1949년에 발표한 《지중해》는, 지중해세계라는 자연환경 속에서 ‘시간이 잘 마모시키지 못하는’ ‘장기지속(la longue duree)’적인 지리적인 삶, 그리고 그 위에서 완만하게 주기적으로 변하는 사회 경제적인 삶, 그리고 표면의 거품과 같은 정치적인 삶을 구조적이며 총체적으로 그린 아날학파의 교과서였다. 이후 G.뒤비, E.르 루아 라뒤리, J.르 고프 등의 제3세대는, 이러한 브로델의 역사학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집단심성(集團心性)에 대한 연구를 아날학파의 영토에 편입시켰다. 그리고 최근에 이르러, R.샤르티에는 문화현상에 대한 사회사적 접근을 시도하면서 제4세대를 이끌고 있다.


이 학파는 역사에서의 개인의 역할, 변동에 대한 설명 등에서 한계를 드러내기도 하였으나, 일상적인 사람들의 삶을 역사의 무대에 소생시켜 주었다는 점에서 사학사적인 공헌을 하였다. 이 학파는 1970년대에 특히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1970년대 말에는 한국에도 소개되었다. 최근에는 국내의 관심도 더욱 높아져, 브로델의 대작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까치, 1995)를 위시한 이 학파의 주요 연구업적들이 활발히 번역 소개되었다.



Directed byWim Wenders
Produced byPaulo Branco
Ulrich Felsberg
João Canijo
Wim Wenders
Written byWim Wenders
StarringRüdiger Vogler
Patrick Bauchau
Music byJürgen Knieper
Madredeus
CinematographyLiza Rinzler
Edited byPeter Przygodda
Anne Schnee
Distributed byAxiom Films (UK and Ireland)
Release date
1994
Running time
100 minutes
CountryGermany
Portugal
France
Spain
LanguageGerman / Portuguese / English

빔 벤더스 감독,

1994년,

포르투갈, 그리고 리스본

....

그리고 마드레데우스....



초대 엽서 한장 받아서 고물 차를 몰고, 기브스한 다리로 중간에 고장나 버린 차는 버리고, 갖은 고생을 다 하며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찾아 간 사운드 엔지니어...필립...

친구 감독 집에 문 두드리면서 하는 말.. "Winter is here" - 혼자 보면서 뿜을 뻔 했다.

암튼 예상했던 감독 친구는 보이지 않고, 작업실에 물려 있는 무성 필름.

필립은 그래도 자신의 작업을 시작한다. 필름을 보고 분석하고, 필요한 '소리'를 채집하러 리스본 구석 구석을 돌아 다니고, 동네 꼬마들과도 친구가 되어 소리로 된 놀이도 하고....

한편으론 영화의 음악을 담당한다는 'Madredeus'의 리허설이나 녹음 장면도 보면서 필립의 눈과 귀로 리스본이 관객의 눈과 귀속으로 전해져 오게 된다.

Teresa Salgueiro의 비 현실적인 듯한 미모와 미성 그리고 마드레데우스의 묘한 여운을 남기는 아름다운 곡들은 마치 완성된 예술 혼처럼, 마치 오래 전부터 그기에 있었던 것 처럼 감독의 작업실과 골목과 리스본의 거리를 채워 나가고.... 

사라진 감독(프리드리히), 남겨진 무성 필름에 사운드를 입혀 나가는 필립....리스본의 골목 골목의 풍경과 소리들... 마드레데우스의 아름다운 노래들....

그리 길지 않은 러닝 타임까지 이에 합쳐져 마치 작은 시를 읽어 내려 가는 느낌.

암튼 영화 말기가 다 되어서야 감독과의 만남의 장면이 나오고, 이 친구 이미지의 허구와 진실과 보는 사람과의 관계니 머니 하다가는 나중에는 가장 순수한 장면들을 만들고 있다면서 찍은 자기 자신 마저도 보지 않은 정말 누구도 보지 않았고 앞으로도 당분간 아무도 보지 않을 '순수한 필름들'을 보여준다.

약간 터무니 없는 듯 하다가다 한편으로는 왠지 수긍이 가기도 했지만.

암튼 필립은 이 감독 친구에게 다시 '세상으로 뛰어 나와라'는 메세지를 잘 전달하고 이제 두 사람은 함께 영화를 찍고 있다. 리스본의 트램을 타고, 그리고 그 트램의 선로 위에서...그러면서 끝 ^^

좀더 고화질의 영상과 고음질의 소리로 여러번 다시 보고 싶어 지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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