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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23 – 노잔유기 (老殘游記) / 유악(류어, 劉鶚,1857-1909)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20회본 장회체 장편소설로, 노잔 이라는 떠돌이 의사가 청대 말에 전국 각지를 다니면서 견문한 것을 기록한 형식의 소설이다. 주인공은 각 지방의 탐관오리들의 악정을 폭로. 고발하였을 뿐만 아니라, 청렴을 표방하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관리들의 학정이 탐관오리들에 못지않은 사회혼란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고발하는 내용이다. 이 소설은 청말, 풍전등화격인 조국의 현실을 개탄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한 작가의 통곡이라 할 수 있다.
a. 생애와 작품활동
유악은 강소성 의미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맹웅이고, 자는 철운이다. 선조는 무관이었으나, 부친은 독서인으로 진사에 급제하여 반란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부친은 차남인 유악이 독서인으로 성장하여 관리가 되기를 원했으나, 그는 소년시절에 불량소년들과 어울려 공부를 하지 않고 부모에게 걱정을 끼쳤다고, 소년시절의 친구인 나진옥은 유철운전 에서 술회하고 있다. 그러나 청년이 되면서 그는 대오각성하여 책에 파묻혔다. 20세 되던 해에 남경에서 향시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광서제 6년(1880)에는 태주학파(양명학의 좌파인 왕간 중심학파)에 심취하여, 양주에 가서 당시 양주학파의 거장인 이용천에게 사사하니, 그의 사상적 체계는 이 무렵에 성립되었다고 한다. 1885년에는 다시 과거에 응시코자 남경으로 가던 중 생각을 바꾸어 고향으로 돌아왔고, 이후 과거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다시는 응시하지 않았다 한다.
광서제 14년(1888)에 하남성 정현에 큰 수재가 났을 때, 당시 하남순무이던 오대징을 도와 치수에 큰 공을 세웠고, 이듬해에 산동일내의 대수재시에는 산동순무이던 장요의 초빙으로 치수에 참가하여 성공하였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치수의 경험을 토대로 치하칠략 황하변천도 등의 저술을 남기기도 했다. 그후 그는 중국에서 산업진흥의 첩경은 철도의 부설과 부존자원의 개발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노한철도와 진진철도의 부설 및 산서탄광의 개발을 정부요로에 건의했으나 반대파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서양인의 자본을 들여오려 했다가 서양인의 앞잡이 매국노라 하여 지탄을 받았다.
광서제 27년(1901), 청을 도와 서양타도를 외친 반기독교집단의 봉기인 의화단 사건 때, 난군을 진압한다는 구실로 연합군이 북경에 진주하자, 그는 러시아 군이 태창을 경비하다가 태창이 방해가 되어 소각하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그들을 찾아가 교섭 끝에 양곡을 싸게 구입하여서 난민들에게 배급, 구휼에 힘썼다. 다시 상해에 나가서는 양무운동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반대파에 의해 태창의 정부양곡을 사사로이 매입했다는 죄명으로 체포되어 유배되었다가 죽었다.
그는 대단히 진보적인 인물이었으나, 혁명을 원치는 않았다. 따라서 남방에서 봉기하여 멸청흥한의 기치를 들고 의화단을 옹호하던 서태후 일파인 보수파도 싫어했다. 그는 스스로 보수적 유신파로 자처했고, 그렇게 행동했다. 즉, 어둡고 부패한 관리들은 견책했으나, 봉건독재를 수호했으며 농민들의 반제투쟁은 반대했다. 평생 그는 꽤 다양한 직업을 가졌다. 그가 펴낸 철운장구(鐵雲藏龜)는 최초의 갑골문 서적으로 갑골문 연구에도 공헌 바 크다.
b. 시대적 배경과 견책소설
시대적 배경
무술개혁(1898)으로부터 신해혁명(1911)사이, 대략 1900-1910년 사이에 중국소설사에는 새로운 발전적인 국면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개량주의적인 정치요구를 반영하고, 사회의 암흑면 관계의 부패상 제국주의 침략자들의 만행을 견책하는 견책소설 이 대량으로 창작되었다. 이러한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중일전쟁 후 제국주의의 침략은 갈수록 더 엄중해지고 있었으나, 국가와 민족의 위기를 부패한 청조에 맡기지 않고, 스스로 나라가 약해진 원인을 찾고, 나라를 부강케 할 방도를 찾게 되었다.
당시 지식인을 대표하는 강유위. 양계초, 담사동 등과 이들의 영향을 받은 봉건사대부들은, 개량주의적 정치운동을 일으킴으로써 나라와 민족을 구하려 하고 있었다. 소설계의 혁명은 바로 이러한 전체 개혁운동의 한 부분으로, 시대적 요청이었던 것이다. 유악이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광치제 29년(1903) 의화단사건이 끝난 2년 후가 되며, 일본과 영국이 중국과 한국을 침탈하려고 영. 일동맹(1902)을 체결한 다음 해가 된다. 청의 운명이 열강제국에 의해 풍전등화격이던 시기에 해당한다.
그 스스로가 서문에서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개인. 국가. 민족. 종교 등에 대하여 여러 가지 느낌을 가지고 있다. 그 감정이 깊으면 깊을수록 울음도 더욱 통렬하다 고 말한 바와 같이 이 소설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 통곡이라 할 수 있다.
견책 소설
노신은 중국소설사략 에서 소설을 분류함에 있어 견책소설(censure novel)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만들고는 종전에는 이런 종류를 풍자소설의 범주에 포함시켰으나, 청말의 일부 소설은 풍자라고 하기에는 숨겨진 것을 파헤쳐 폐악을 폭로하고 시정을 규탄함에 있어, 그 언사가 지나치게 날카로워 풍자소설의 범주에 넣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중에서 이보가의 관장현형기 , 오옥요의 20년 동안에 본 기괴한 현상들 , 증박의 얼해와 를 노잔유기 와 함께 청말의 4대 견책소설이라 했다.
청말의 소설은 대부분 정치에 대한 견책, 정계 내부의 폭로라는 경향을 지녔는데, 이는 1902년 양계초가 제창한 소설계 혁명 이론에 동조한 것으로, 정치개혁을 목적으로 하는 소설이 많이 나왔다. 이러한 소설들은 현실의 부패를 폭로하며 정치적 책임을 추궁하고 있는데, 예술성은 다소 미흡하며 저널리스트의 폭로기사와 유사한 면이 있다. 그 직접적인 계보는 오경재의 유림외사 에서 찾을 수 있으나, 풍자성은 사라졌다.
c. 작품의 주요내용
노잔유기 는 유악이 쓴 유일한 소설이자, 자전적 소설이다. 내용은 몰락한 관리의 아들인 노잔이라는 주인공이 각지를 편력하면서 당시의 정치상과 사회상을 듣고 보며 폭로, 비판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장회소설로 본편 20회와 속집 6회 등 모두 26회 본으로 내용은 크게 셋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소설의 서론부분으로, 꿈의 형식을 빌어 당시의 중국에 대한 자기의 총체적인 견해를 썼다. 떠돌이 의사 노잔은 산동의 천숭이라는 고을을 지나다가, 매년 여름이면 온몸에 종기가 나서 고생하는 산동의 부호 황서화를 만난다. 황은 거금을 뿌려 백방으로 고명한 의사와 귀한 약을 구해 썼으나 효험이 없었는데, 노잔이 이를 치료하여준다. 이로 인해 며칠 동안 그 댁에 머문다. 하루는 친구 두 사람과 함께
바닷가에 일출구경을 갔다가, 북방과 동방에서 검은 구름과 함께 폭풍이 몰려오는데 한 척의 커다란 배가 표류하다가 이 폭풍을 만나 침몰직전에 놓인 것을 보게 된다. 여기서 북방과 동방의 검은 구름은 러시아와 일본을 가리키는 것이며 거대한 배는 중국을 비유한 것이다. 그런데 침몰직전의 배 안에는 4가지 종류의 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1선장과 키잡이 #2승객들을 약탈하는 하급선원 #3혼란한 배 위에서
연설하는 사람들 #4승객들이다.
첫째 집단은 상층 통치집단인데, 이런 혼란의 원인을 그들의 책임으로 돌리지 않고, 다만 그들은 태평양에서 태평한 나날을 보내다가 갑작스런 폭풍에 당황할 뿐이라는 것이다. 즉, 청말의 위기상황에 대해 지배계급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정도의 책임만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 유형은 나라 상황은 돌보지 않고 못된 짓을 하는 하급관리들인데, 작가는 이들에게 불만을 품고 이들을 주로 견책하였다.
셋째 유형은 손중산을 대표로 하는 부르주아 계급 혁명파들을 지칭하며, 이들을 저는 돈 벌 궁리를 하면서 남은 피를 흘리게 하는 영웅 으로 몰아세웠다.
넷째 부류는 백성들인데, 작가는 그들 중 혁명에 찬성하는 사람을 철도 모르고 남에게 이용당하는 사람들로 보았다.
노잔은 이 배를 구하는 방법은 배를 모는 사람에게 가장 정확한 나침반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여겼다. 보다 못해 그 배를 구하려고 나침반과 6분의를 가지고 그 배에 가서 선장에게 주려고 했더니, 선원들과 선동자들은 그것이 서양 것이며, 그것을 받으면 서양인들에게 팔려가게 된다면서 노잔을 매국노라고 욕하며 죽이려 한다. 그러자 배는 그만 산산조각이 나고 노잔도 함께 물에 빠진다. 문득 깨어보니 꿈이었다.
둘째, 노잔은 제남으로 발길을 돌려 중국의 아름다운 산천과 문물을 돌아보고 극장에서 중국의 훌륭한 노래를 감상한다. 여기서 잠시 천불산과 대명호에 관한 묘사를 보자. 가을날 이른 아침, 노잔은 역하정을 구경하려고 작화교 변에 와서 쪽배를 얻어타고 노를 저어 어느 사당 앞에 이르렀다. 철공사 앞에 이르러 눈을 들어 남쪽을 바라보니, 맞은 편에 천불산이 바라다 보였는데, 산 위에서는 절과 중들의 집이 창송취백들과 어깨를 다투며 서 있는데, 붉은 것은 타고 흰 것은 새하얗고 푸른 것은 남색으로 보이며, 녹색은 초록색으로 보였다. 그런 사이에 단풍이 드문드문 섞여 있었다. 마치 송대사람인 조천리의 큰 그림 한폭으로 수십리 긴 병풍을 둘러친 것 같았다. 찬탄을 마지않는데 홀연 어부의 노랫소리가 들려오기에 눈을 돌려 호수를 바라다보았다. 어느새 명호가 거울같이 맑아졌다. 천불산이 호수물 속에 거꾸로 비껴 있었다. 물속에 비친 누대와 수목이 유난히 빛나는데 호수 위에 서 있는 천불산보다 더 아름다워 보였고, 더 똑똑히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이렇듯 아름다운 강산에 천재가 일어난다. 그것은 재산과 인명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수재로 인간을 괴롭힌다. 생활이 곤궁하자 사방에 도적이 횡행하고, 관리들은 도적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된다. 중앙정부에서는 유능하고 청렴한 관리를 파견하여 도적을 잡고 백성을 위무케 한다. 그러나 이들 관리들은 청렴하다는 미명하에 도적과 내통한다는 혐의만 있으면, 죄가 있건 없건 무조건 잡아가 극형에 처한다. 이에 따라 백성들은 도적에게는 재물을 빼앗기고, 관리에게는 목숨을 빼앗기는 상황이 벌어진다.
작가는 16회 말에 이 소설의 주지를 이렇게 자평하고 있다. 탐관오리를 미워해야 함은 누구나 알고 잇다. 그러나 청렴한 관리가 더욱 밉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탐관오리는 그들 자신의 결점이 있기 때문에 공공연히 드러내놓고 나쁜 짓을 못하나, 청렴한 관리는 돈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무엇이든 못한 짓이 없다고 생각하고는 자기 멋대로 일을 처리한다. 이런 것은 작으면 사람을 죽이나, 크면 나라까지 망치게 된다. 내 자신이 친히 본 것만도 수를 헤아릴 수 없다. 역대소설들은 모두가 탐관오리의 악을 썼을 뿐이며, 청렴한 관리의 악을 든 것은 노잔유기 가 첫번째다. 이것은 바로 이소설이 청관들의 실정을 나무라고 백성들이 어떻게 박해받는가를 폭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셋째, 주인공 노잔은 막후에 숨고, 신자평이라는 선비가 도화산에 들어가 황룡자라는 도인과 어떤 처녀와 대화하는 부분이다. 그는 공맹사상이 송대의 유학자들에 의해 왜곡되었다고 통박하고는, 예언의 형식을 빌어 북거남혁 이라는 말로 중국의 미래를 예언하고 있다. 북거는 의화단 사건으로, 이 소설을 쓰기 전에 이미 종국을 고한 것이고, 남혁은 남방에서의 혁명을 일컫는 말이나, 당시에는 이미 손문 등이 활발하게 혁명하게 활동하고 있을 때였다.
d. 감상 및 문학사적 의의
위에서 본 것처럼 노잔유기 는 견책소설로서 봉건사회의 모순과 관리들의 탐학. 비리. 폭종 등을 여실히 폭로. 고발하여 독자의 호응을 얻었다. 특히 그 자신이 평하였듯이, 청렴한 관리의 비행을 폭로한 착상은 매우 독특한 것으로, 소설로서 성공한 것이라 하겠다. 그것은 문학적인 묘사에서도 좋은 평을 받고 있다. 노잔유기 는 예술성에서도 어느 정도 성공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사물에 대한 묘사가 때때로 세밀하고 생동적이며, 선명한 색채를 띠고 있다. 예를 들면 백뉴의 아름답고 미묘한 노랫소리는 마치 그를 보면 그 소리를 듣는 듯한 감을 주도록 묘사되어 있으며, 도화산의 달밤, 얼어붙은 황하기슭의 눈과 달빛이 어울리는 경치, 특히 대명호와 더불어 천불산의 아름다운 경치는 독자들의 눈앞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특히 제남의 풍물을 묘사한 부분과 극장에서 강창하는 부분의 묘사는 매우 뛰어난 문학적 표현으로도 인정받고 있다. 이 소설은 중국소설로는 드물게 풍물도 정교하게 묘사하고 있어, 호적은 노잔유기서 에서 이 부분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유악은 문학적 천재로 그의 문학적 견해는 초탈하다. 그러나 구성이 미흡한 면이 발견되는데, 예를 들면 백뉴가 노래하는 장면은 전후사건과 유기적인 연관이 부족하다. 그리고 작가는 작중인물인 황룡자의 입을 빌어, 의화단과 자산계급 혁명파들을 요괴라고 공격하였다. 의화단은 나라를 망칠 뻔한 두려운 물건으로 볼 정도로 청왕조의 봉건통치를 유지하려 했다. 이런 점에서 노잔유기 에는 봉건사회의 본질과 제국주의의 침략야욕을 제대로 꿰뚫지 못다는 점에서 일정한 한계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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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법자강 운동]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변법자강 운동(變法自強 運動)은 캉유웨이가 추진한 정치 운동이었다.
1898년의 ‘변법자강책(變法自強策)’이다. 광서제는 당시 서태후의 손아귀에 휘둘리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 개혁 정치를 추구하기 위해 캉유웨이의 갖가지 정책을 지지하게 된다.
캉유웨이의 변법자강책에는 과거 제도 개혁, 조세 개혁, 탐관오리 혁파, 각종 경제 개혁 등이 담겨 있었고, 무술변법을 통해 이중 일부를 실행에 옮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변법은 광서제의 미약한 권위에 의존했고, 결국 서태후 등 반개혁파에게 패배해 외국으로 망명을 가는 결과로 끝이 난다. 이로 인해 무술변법은 '100일 변법'이라고도 불린다.
목차 [숨기기]
1 개요
1.1 양무운동의 한계와 변법론의 등장
1.2 무술개혁의 백일천하
2 평가
3 최근의 연구
4 같이 보기
5 각주
6 참고 서적
7 외부 링크
개요[편집]
양무운동의 한계와 변법론의 등장[편집]
서양의 군수기술도입으로 근대화를 추진하려던 양무운동은 1874년~1875년 일어난 모란사 사건, 1884년 청불전쟁,1894년~1895년 사이 터진 청일전쟁 등의 연전연패로 그 한계점을 드러내고 말았다.
이리하여 서양의 기술만이 아닌 정치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제2단계'의 근대화 운동이 추진되었는데, 이를 변법운동이라 한다. 서양 정치를 따라 국회를 만들었고 헌법을 제정했다. 또한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 유학을 중시하는 과거제를 개혁하고 서양 학교를 설립하기도 했으며,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따라 입헌군주제도 도입하려고 했었다. 양무운동이 한창 추진되고 있던 1880년대 후반부터 변법론이 대두된 것은 먼저 대외적인 위기상황에서 굴욕적인 타협으로 인하여 양무운동의 파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이와 함께 양무운동가의 관(官)이 주도하는 기업운영방식인 '관리가 감독하고 민간이 경영하는' 형식의 군수공장 경영이 비효율적이라는 인식이 변법론으로의 전환을 가져오게 만든 것이다.
변법자강운동을 주도한 캉유웨이의 변법주장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1888년의 제1차 상서(上書)에서였다. 이와 함께 당시의 청류파 고관이었던 장지동 등이 의원제와 법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정치활동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캉유웨이는 전통적인 유교와 공자에 대한 과감한 비판을 가하면서 개혁의 이론적 기초를 마련하였다. 캉유웨이가 주목한 것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이었으며, 청일전쟁의 결과 일본이 승리한 것은 바로 이를 증명하는 것으로 단정하였다.
캉유웨이는 정치제도를 개혁하여야만 부국강병을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고 청일전쟁의 패전결과 시모노세키 조약체결 거부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리하여 변법자강운동 개혁의 전단계로서, 급진적인 캉유웨이의 지지자인 양계초,담사동 등에 의해 호남 성에서 개혁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들 급진적인 개혁론자들이 학회,학당,신문,잡지를 통해 캉유웨이의 변법개혁론을 적극적으로 고취하였다. 그러나 이는 서양근대의 자유평등주의와는 거리가 멀었고, 황종희가 주창했던 '군권'(君權) 견제론 내지는 맹자를 매개로 한 '군주정체하'(君主政體下)에서의 귀민(貴民) 정도의 온건한 것이었다.
무술개혁의 백일천하[편집]
1897년 독일이 교주만 점령에 의하여 열강에 의한 중국분할이 임박하였다고 생각한 캉유웨이는 광서제에게 다시 상서(上書)를 올려 개혁을 주장하였다. 상서의 요점은 대외적으로 영국,일본 등과 연합하여 분할국면의 타개책과 대내적으로는 '제도국'(制度局)을 설치하여 전면적인 개혁을 단행하자는 것이었고, 개혁의 초점은 '제도의 개혁'이었다.
캉유웨이는 변법개혁을 하지 않으면 황제는 물론이고 관리들도 온전 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을 고취하여 광서제의 마음을 움직이고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개혁에 착수하였다. 먼저 개혁의 중심기구로 '제도국'을 개설하여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고 황제는 이곳에서 국정을 의논하여 새로운 제도를 제정하자고 주장하였다.
1898년(무술년) 4월 23일에 광서제는 캉유웨이의 주장을 받아들여 개혁을 지향하는 특별조치를 내리면서 소위 '무술변법'을 개시하였다. 이때 캉유웨이의 중요한 활동은 황제에게 개혁내용을 건의하는 일이었다. 개혁 내용을 보면 '제도국' 개설, 개혁파 관리의 임용, 사민(士民)의 상서(上書) 허용, 상업진흥, 신식학교 설치와 자유로운 의복제도 등이었다. 개혁운동의 중심이 되는 '제도국' 설치는 보수적인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진전이 없었으나 과거제에서 팔고문의 폐지, 서원의 학당 전환 등 몇 가지 개혁이 추진되었다.
캉유웨이는 7월 19일 개혁에 방해가 되는 수구파대신의 숙청을 요청하여 예부상서를 비롯한 고급관리를 서태후의 재가도 없이 파직시켰다. 이어 담사동 등 개혁파 관리를 '군기장경'(軍機章京)으로 임명하여 제도국설치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리하여 7월 27일에는 '제2차 개혁'을 단행하여 유명무실한 관료기구의 철폐, 제도국의 성격을 갖는 '무근전'(懋勤殿)을 개설하고 황제의 군사력을 강화할 목적으로 친위군을 창설하여 '신건육군'(新建陸軍)의 창설자인 위안스카이에게 친위군을 맡기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의 진행은 결과적으로 서태후를 정점으로 하는 수구세력의 결속을 가져왔고, 개혁을 강행하다가는 광서제의 제위까지 위태롭다는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 따라서 서태후는 수구파의 기대 속에 심복부하 영록을 임시 직례총독에 임명하여 북양육군을 장악하게 하고 변법반대의 쿠데타를 비밀리에 구체화하였다. 이에 위기를 느낀 담사동은 일찍이 '강학회'의 회원이며, 신건육군을 장악하고 있던 위안스카이에게 수구세력을 타도하는 군사행동을 일으키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곧바로 변법파를 배신하고 오히려 이 사실을 서태후의 측근인 영록에게 밀고함으로써 변법운동은 역전하였다.
8월 4일 수구파의 정변(무술정변)으로 광서제가 연금되고 이어 8월 6일 캉유웨이 체포령 등 정변이 선포되었다. 이와 함께 이른바 '무술육군자'라는 담사동,양예,유광제,임욱 등 4명의 군기장경과 캉유웨이의 아우인 강광인,어사(양심수(楊深秀)) 등이 처형되었다. 변법자강운동 주도자인 캉유웨이와 양계초는 영국인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일본으로 피신하였다. 이렇게 변법자강운동(무술개혁)은 '백일천하'로 실패하였다.
평가[편집]
변법자강운동을 둘러싼 국내외적인 이해관계는 매우 복잡하게 얽혀졌다. 개혁파와 수구파의 대립이 결국 광서제와 서태후의 권력다툼, 한족과 만주족의 대립으로 이어졌고 나아가 개혁을 둘러싼 영국과 러시아간의 다툼 등이 개혁을 실패로 몰고 갔다.
특히 변법자강운동은 근대적 시민의식이나 부르주아 세력이 발달하지 못한 중국의 전통사회에서 혁신적인 지식계층에 의해 추진된 민족주의적 구국운동으로 대중기반이 취약하였기 때문에 완강한 보수,수구세력의 반대를 극복하지 못하여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최근의 연구[편집]
이외에, 최근 연구결과에 의하면,[1] 변법자강 운동 시기 변법파의 핵심인물이었던 캉유웨이는 일본 전임총리 이토 히로부미와 영국선교사 티모시 리처드 등의 꾐에 넘어가 '중국,미국,영국,일본의 4국 합방을 광서제에게 건의할 것'을 양심수(楊深秀), 송백노(宋伯魯) 등에게 지시했다고 한다.
9월 20일(8월 5일)에 양심수는 광서제에게 다음과 같이 상주하였다.
“ 신이 청하옵니다: 우리 황제께서 빨리 대계를 결정하여 영미일의 3개국과 단단하게 결합되어, “합방”이라는 이름의 기형을 싫어하지 말아야 합니다. ”
다음 날인 9월 21일(팔월 엿새) 다른 변법파 관리인 송백노도 다음과 같이 상주했다.
“ 티모시 리처드가 내방한 목적은 중, 미일영과 연합하여 합방하는 것입니다. 시절의 정세를 잘 알고, 각 국의 역사를 잘 아는 인재를 수백 명씩 선정하여, 네 나라에 군정, 세금 및 모든 외교 관계 등을 사찰하고, 군사를 훈련하고, 외국의 침범에 저항하는 ... 황제께서 신속하게 외무를 통해 중신을 선발하도록 하시옵소서. 예를 들면, 대학사 리홍장을 티모시 리처드와 이토 히로부미에게 면담하게 하시어, 방법을 강구하게 하시옵소서. ”
중국의 군사와 정치 권력을 다른 사람한테 넘길 뻔했던 위기의 상황이었다. 이때 서태후는 군기처에서 베껴온 사본을 통해 신정(新政)과 관련된 상주문의 내용을 파악하는 한편 어사 양숭윤의 진언에 이토 히로부미의 중국 방문이 정국에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해 주의 깊게 살펴보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양심수, 송백노가 "합방"을 주장한 상주문의 내용을 서태후가 알고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서태후는 "합방"의 음모를 알아낸 후 정변을 감행하여 "합방"계획을 무산시켰고 중국을 분할과 병탄의 위기로부터 구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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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22 – 유림외사(儒林外史) / 오경재(吳敬梓, 1701-1754) (0) | 2017.09.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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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20 – 감자 / 김동인(1900-1951) (0) | 2017.09.01 |
C22 – 유림외사(儒林外史) / 오경재(吳敬梓, 1701-1754)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오경재(1701-1754)의 55회본 장회체 장편소설로, 그 내용은 명대사회로 표현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청대사회를 풍자하였다. 관리를 선발하는 과거제도의 폐단과 관리사회의 부패상을 폭로. 비판하고, 또 청렴하고 유능한 이상적인 관리상을 제시하였다. 예술기교상 풍자적 수법이 뛰어나서 풍자문학의 으뜸으로 꼽히고 있다.
a. 생애와 작품활동
청의 소설가로 홍루몽의 조설근과 동시대 인물이다. 안휘의 전초 사람으로, 그의 조상들은 벼슬한 사람이 많아 백여 년을 두고 전초의 망족이었으나, 그의 부친 때부터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였다. 그의 부친 오림기는 청렴하고 부귀를 탐하지 않아 관직은 미미하였으나, 가산을 털어 학교를 세웠다. 오경재는 부친의 인품과 학문자세를 경모하였고, 이는 그의 생애를 통하여 정신적으로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오경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암송에 뛰어났으며, 문선에 정통했고 시나 부는 붓을 드는 즉시 완성했다. 13세에 모친을 잃고 23세 때 부친이 세상을 뜨자, 그의 생활에는 변화가 생겼다. 남을 돕기를 즐기며 금전과 재물에는 욕심이 없는 성격이어서, 10년도 되지 않아 가산을 탕진하고 곤궁에 빠지기 시작했다. 빈궁해서 친지들의 비난을 받자, 강녕에 옮겨 살면서 동지들을 모아 우화산 기슭에 선현의 사당을 지었는데, 자금이 부족하자 고향의 옛집을 팔았다.
이로 인해 생활이 더욱 곤궁해져서 경제적으로 절박한 상황에 이르렀다. 그는 글을 써서 팔거나 벗들의 도움을 받아 생계를 유지하였다. 주머니에 돈 한푼 없고 옷가지는 모조리 저당 잡히고 굴뚝에 연기나지 않는 형편에서, 엄동설한이면 대여섯 명의 벗들과 함께 달밤을 타서 성밖 수십 리를 돌며 발을 덥혔다. 건륭 19년(1754) 궁색하고 영락한 가운데 양주에서 54세로 죽었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곤궁한 유학자로 전락한 오경재는 세태의 변천과 인심의 간교함을 깨달았고, 이는 유림외사를 창작하는 데 기초를 제공했다. 가정의 몰락과 그 자신이 겪은 고난은 그로 하여금 지배계급의 추악상과 노동계층이 겪고 있는 고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게 했다.
그는 암흑 같은 정치에 대하여 갈수록 불만을 품게 되었고, 팔고문으로 시험치는 과거제도에 관하여 불만이 싹텄다. 팔고문이란 과거시험에서 4서 5경의 유교 경전에 대한 답안작성 형식으로, 까다롭고 엄격하여 수험생의 창의력이 제약 받았음은 물론, 나아가 명대의 사상과 학문의 발달을 저해하여, 명대의 사회와 문화에 큰 해악을 주었다.
1749년 건륭제가 남부지역을 순시하는데, 다른 문인들은 길옆에 물러서 엎드려 영접했으나, 오경재는 이를 거부하는 오만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 계급의 제약성과 유교의 봉건윤리도덕을 믿었으며, 만년에는 경학을 연구하였다. 그의 작품으로는 유림외사 외에 문목산방집(文木山房集) 12권이 있는데, 그중 4권이 전하고 있다.
b. 시대적 배경과 저술동기
일반적으로 중국 역사상 3대 승평시대란, 한의 문경지치(文景之治) 와 당의 정관. 개원지치(開元之治), 그리고 청의 강희. 옹정 건륭지치를 말하는데, 이 3대 승평시대는 각기 시대적인 성격이 다르다. 한의 문경지치는 중국의 봉건제도가 발전하여 생상력이 크게 향상된 시대였다. 당의 정관. 개원지치는 경제가 진일보한 시대로 경제와 문화 양면에 걸쳐 균형있는 발전과 번영을 이룩한 시대였다.
그러나 청의 강희. 옹건지치는 건국 후 반세기에 걸쳐서 국가기틀을 공고히 한 후, 한편으로 백성을 억압하고 한편으로 질서와 생산력을 회복한 시대였다., 청나라는 여진족(만주족)이 중국의 한족을 정복하고 세운 나라로, 중국인들에게는 자신들이 오랑캐로 간주해오던 자들로부터 정복을 당했다는 사실에 천자의 나라를 자처하던 그들의 자존심은 큰 타격을 입었다. 청은 초기에 반청 무장세력을 군사적으로 진압하고, 지속적인 문화통제 정책을 추진하였다. 특히 순치제의 변발호복 강조와, 강희제와 옹정제에 의한 문자의 옥을 중국의 한인 사대부들은 역사상 그 유례가 없는 대재난으로 받아들였다. 즉, 청에 끝까지 협력하지 않고 재야에서 학문연구에만 몰두한 정치개혁 사상가인 황종희는 명. 청의 왕조교체를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비극적 상황으로 인식하였다. 이를 단순한 왕조교체 차원을 넘어 천하가 무너지는 비극적 상황으로 인식하고, 문화적 암흑기가 도래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황종희와 함께 청대 고증학의 창시자인 고염무는 명말청초의 대재난을 역사적 비극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한차원 높은 방향으로 승화시켜 발전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다. 즉, 그는 국가의 멸망보다는 천하의 멸망이 더 중요한 것으로 보고, 국가의 멸망은 군주의 책임이나, 천하의 보존에는 민중도 그 책임을 공유한다고 주장했다.
다행히도 반청 지식인 중 3유로인 황종희. 고염무. 왕부지는 명의 멸망에 대해 명대 지식인의 책임이 크다는 인식을 갖고 경세사상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 결과 청대의 새로운 학풍인 고증학 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는 고염무의 인식처럼 만주족의 한족지배를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였고, 그 위에 강희. 옹정. 건륭제가 취한 한인학자에 대한 문화적 회유정책도 한인 지식인으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현실참여에 나서게 하였기 때문이다.
오경재가 태어난 1701년은 청조가 50년 동안 계속된 한족의 저항을 진압하고, 국가의 기초를 굳건히 한 직후였다. 한족의 항쟁은 사라지고 사람들은 오직 팔고문을 부지런히 하여 관에 나갈 생각만 하는 어두운 시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유림외사를 통해 과거제도에 대한 불만과, 허위와 가식에 찬 관료사회의 부패를 날카롭게 풍자했다.
c. 유림외사 의 주요내용
유림외사 에서 유림 이란 선비사회를 뜻하고, 외사 란 야에 있는 자가 남몰래 쓴 역사적 사실이란 뜻이다. 원본은 50회였으나 전해지지 않으며, 현재 가장 유행하는 55회본으로, 홍루몽과 함께 청의 백화소설(구어소설)의 대표작이다.
유림외사 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신의 체험을 통해 과거시험의 합격만을 목적으로 하는 청의 실존인물을 염두에 쓴 듯하나, 청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멀리 명대의 인물들을 등장시켰다.
유림외사 에 표현된 당시의 세계는 입신양명의 모든 길이, 오직 과거시험으로 통했다. 중국의 과거제도는 관리의 등용이라는 목적 이외에, 전제군주제의 유지와 지식인의 사상통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는데, 과거에 합격한 자들은 세상의 부와 명예를 하루아침에 얻는 줄 알고 있었다. 반면 낙방은 단순한 실패만이 아니라, 선비로서의 품위 유지도 어려움을 뜻했으므로, 모든 지식인은 이 등용문에 오르고자 광분하며 온갖 수련을 쌓았다.
팔고문의 해악
특히 명대에 시작된 팔고문의 답안작성법은 글자수까지 엄격히 제한하여,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성현의 말씀이나 명구만을 인용하여 답안을 작성하는 자가 유리하였다. 이를 위해 선비들은 까다로운 형식의 습득에 그들의 정력을 낭비하였고, 독창적이고 개성있는 답을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일찍이 고염무가 말하기를 팔고문의 폐해는 진시황의 분서갱유에 맞먹는 것이다. 인재를 훼손함이 선비를 들판에 묻어 죽인 것보다 더욱 심하니 그때의 일은 다니 46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고 개탄했다.
부패한 관료사회
과거의 합격자들은 전제군주의 관료로서 백성 위에 군림하고, 그들의 무능 위에 유교의 형식주의가 가세해 부패한 관료사회를 형성했다. 거기에는 부귀와 권력에 대한 욕망. 사대주의. 몰염치. 무정견. 교활 등 온갖 인간적인 악덕이 활개를 쳤다. 이 책의 내용은 이와 같은 사회의 모습들을 그린 것인데, 작가는 이 비인간화 과정과 그 양상을 여러 등장인물의 일상생활을 추구하면서 여실히 그려나갔다. 이 소설에는 일관된 줄거리나 이야기를 마지막까지 끌어가는 특정한 주인공은 없다. 또 이렇다 할 기복도 없다. 수많은 인간이 이합집산하며 다양한 일상적 사건을 일으킨다. 그런 점에서 오락성은 작으며, 작가의 필치도 겉보기엔 담담하다. 그러나 이 담담한 필치 속에 날카로운 풍자의 칼 끝이 숨겨져 있어, 그것들이 집적되어가는 동안 온갖 강렬한 인간의 유형이 그려진다.
60살이 될 때까지 과거의 첫 시험조차 합격하지 못하고, 더욱이 생활능력도 전혀 없는 호인, 겉으로는 풍류와 의협을 가장하고 있으나 급제를 하지 못해서 불평이 대단한 귀공자, 그것을 이용해서 단물을 빨아먹는 무뢰한, 초대받은 일도 없는데 오늘은 어떤 대관의 집에서 음식대접을 받았노라고 허풍을 떠는 서생, 먹는 일과 팔고문밖에 모르는 사람, 그 외에도 무수한 인간유형이 등장한다.
앞에 열거한 타입과는 대조적으로 과거에 관심이 없는 바람직한 인간들도 등장하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은 작가 자신을 모델로 한 것도 있다. 포도청의 관리. 소금장수. 하인. 불량배. 중. 신선가. 장돌뱅이. 농민 등 온갖 계층의 인물이 등장해서 선비와의 교섭이 전개되고, 당시 사회전체의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그 중에서도 장사꾼과 농민 등 서민의 모습은 가난하지만 가장 인간적인 모습으로 독자에게 다가온다. 어쩌면 작가도 그것을 의도하고 그렸는지도 모른다. 부패나 악덕에 대한 작가의 증오가 항상 예리한 지성과 청순한 인간애로 말미암아, 모든 인물들이 공감을 주고 있고, 악이 개인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걸 깨닫게 하는 풍자적 필력은 대단하다.
감상 및 문학사적 의의
위에서 본 것처럼, 작가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 과거합격만을 목적으로 하는 선비들의 생활을 언급하면서, 재물과 권력에 대한 욕망, 예교의 허위성 등을 폭로하는 한편, 그들과 사귀는 상인. 승려. 배우. 농민 등의 생태에도 눈을 돌려, 부패한 상류계급과, 가난하지만 건전한 서민을 대비시킴으로써 당시의 사회구조를 냉소적인 필치로 묘사했다. 주로 전반부에는 시대의 희생자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과거에 집착하는 인물을, 후반부에서는 과거에 등을 돌리고 자유를 사랑하는 인물을 묘사하고 있다.
풍자소설의 백미
그러나 유림외사 의 참다운 가치는 무엇보다도 풍자문학적 요소에 두어야 할 것이다. 풍자소설의 가치는 표현의 정확성과 객관적인 창작태도에 있는데 작가는 풍부한 해학성을 잃지 않고 이 작업을 완벽하게 해냈다. 노신은 오경재는 이 책을 지으면서 사심없는 마음으로 당시의 폐단은 지적하였으며, 특히 사림을 날카롭게 공격했다. 그의 문장은 완곡하면서도 풍자가 많은 까닭에 족히 풍자의 글이라고 칭할만하다 고 말했다. 한마디로 이 작품의 세계는 어둡고 비극적이다. 이것이 풍자문학으로서의 최후의 단계인 것이다. 이 책에 나타난 풍자수법은 높은 수준에 이르러, 세련되고 생동적인 언어와 풍부한 표현력으로, 중국 고전풍자문학의 걸작으로 간주되고 있다. 흔히 풍자소설의 경우엔 내부적으로 서로 모순 상반되는 두 세계를 내포하게 되는데 그것은 부정과 긍정의 양면성이다.
작품 속에는 부귀공명만을 꿈꾸는 주진. 범진 등과 부귀공명에 뜻이 없는 듯한 자태를 꾸며대며 제 스스로 청고하다 는 양집중. 경란강 같은 속물들을 묘사하고 있다. 반면 이러한 추악한 유학계의 군상과 대비시켜 이상적인 인물들도 등장시키고 있다. 이는 왕면. 두소경. 장소광 등의 세계로, 이들은 부귀공명 대신 문행출처를 중시하는 사람들이다. 이곳 사람들은 높은 꿈을 갖고 있으며, 도덕적인 면에서 훨씬 우월한 위치에 있다. 유림외사 의 작품골격은 이러한 두 세계의 대조로 형성되어 있다.
서민에 대한 희망
이들 외에도 작품에 마지막에 나오는 시정의 소시민에게도 작가는 희망을 걸고 있는데, 시정의 소시민이란 거리에 사는 4명의 기인들을 말한다. 즉, 절에서 자랐고 글쓰기에 능한 고아 계하년, 화지통을 파는 장기선수 왕태, 그림 그리기와 책 읽기를 즐기는 개관, 거문고를 탈 줄 아는 재봉사 형원 등이다. 이들의 공통적인 특성은 노동으로 살아가면서도 권세가들에게 아부하지 않고 공명과 재물을 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작가는 현인명사들에게 실망한 나머지 소박한 노동으로 살아가는 평민들에게 희망을 거는 것이다.
청대에는 명대에 이어 소설, 특히 장편소설의 황금기를 맞이했다. 장편소설의 종류는 애정. 의협. 사회소설로 나누어지는데, 애정소설의 대표작은 조설근의 홍루몽 이고 의협소설의 대표작은 문강의 아녀영웅전 과 석옥곤의 삼협오의 다. 사회소설의 대표작이 바로 유림외사 다.
d. 평가
오늘날 중국문학계에서 작가나 오경재 에 대한 연구열은 고조되고 있는 느낌이다. 그것은 문학사가들이 오경재를 역대 중국문인들을 제쳐놓고 굴원. 도연명. 두보. 이백과 동렬에 올려놓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민국 수립 이후에는 국어에 의한 탁월한 표현력과 사회비판정신이 인정되었다. 다만 내용에 있어, 아직 봉건적인 잔재가 남아 있으며 곽효자가 강에 들어가 부친을 찾는다는 얘기 등은 너무 산만한 감도 없지 않으나, 청말의 관장현형기 20년 동안에 본 기괴한 현상들 등의 견책소설(譴責小說) 등은 후세의 문학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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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고문
[八股文 ]
요약 중국 명·청대(明淸代)의 과거에 관한 특별한 형식의 문장.
《사서오경(四書五經)》의 한두 구(句) 또는 여러 구를 제(題)로 하여, 고인(古人) 대신 그 의미를 부연하는 것이 제정 당시의 취지였다. 1370년 8월 9일의 향시(鄕試)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후부터 1901년 폐지될 때까지 이 팔고문은 지식계급을 적잖게 괴롭혔다.
처음에는 출제방법이나 문장 형식에 특별한 형식이 없었으나, 1384년 3월에 공포된 과거성식(科擧成式:科擧定式)에서 사서는 《주자(朱子)》의 집주(集注), 《역경(易經)》은 《정씨역전(程氏易傳)》과 《주자본의(朱子本義)》처럼, 근거로 삼을 책을 각각 지정하였다. 영락(永樂) 연간에는 주로 《사서오경대전(大全)》을 쓰게 되었으며, 경문의 해석은 일원화되었다. 그 결과로 문장형식이 차차 굳어져서, 1487년의 회시(會試) 이후로는 파제(破題)·승제(承題)·기강(起講)·입제(入題)·기고(起股)·허고(虛股)·중고(中股)·후고(後股)·결속(結束)의 부분으로 구성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기·허·증·후의 '고'는 독특한 긴 대구(對句)로 되어 있는데, 마치 8개의 기둥을 세운 듯하다고 해서 팔고문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또 지정된 경서의 의미를 바탕으로 문장을 짓는다는 입장에서, 경의(經義)·제의(制義)라는 명칭도 붙어 있다.
내용은 송대(宋代)의 경의, 형식은 당대(唐代)의 율시(律詩), 출제방법은 당대의 첩경(帖經:경문의 한두 자를 가지고 수험생에게 맞추게 함)과 비슷하다. 명대의 중기 이후로는 팔고문의 참고서가 많이 만들어졌으며, 수험생은 그 예문의 자구를 암기하여 문장을 만들게 되었으므로, 자료로서의 가치가 없어졌다. 그리하여 청말에 과거의 폐단이 논의되었을 때, 팔고문도 그 대상이 되어 1901년에 폐지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팔고문 [八股文] (두산백과)
고증학
[考證學 ]
요약 중국의 명(明)말 ·청(淸)초에 일어난 실증적(實證的) 고전 연구의 학풍 또는 방법.
중국에서는 고거학(考據學), 또는 박학(朴學)으로 많이 불린다. 이 학풍이 일어난 배경은 명나라 말기부터 중국에 들어온 서양의 선교사들에게서 전해진 서양문물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성리학과 양명학으로 통해 철학적이고 추상적인 문제를 다루었던 것에 비해 현실에 바탕을 두어 사실을 밝히고자 하는 학풍이 발전하게 되었다. 현실 문제는 접어두고 성리학의 이기(理氣)니 양명학의 심성(心性)이니 하는 공허한 형이상학, 이른바 송학(宋學)에 대한 반발과 반청(反淸)감정, 시대의식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일어났다. 송학이란 이름에 맞서서 이를 한학(漢學)이라고도 불렀다. 학문 방법은 매우 치밀하고 꼼꼼하게 글자와 구절의 음과 뜻을 밝히되 고서(古書)를 두루 참고하여 확실한 실증적 귀납적 방법을 택하여, 종래의 경서 연구 방법을 혁신하였다.
고증학을 5가지로 나누어 ① 훈고학(訓詁學) ② 음운학 ③ 금석학 ④ 잡가 ⑤ 교감학(校勘學)으로 분류한다. 이 학풍이 중국에 끼친 영향을 보면 이른바 경세치용(經世致用)을 주장하여 정치 ·민생(民生)이 우선이란 이론을 제공했고 학문 연구는 정확한 음운과 뜻[訓詁], 역사적 고증이 있어야 하는 새로운 학문풍토를 정착시켰다. 대표적인 학자는 염약거(閻若璩) ·호위(胡謂) ·모기령(毛奇齡) ·만사대(萬斯大) ·만사동(萬斯同) 등이다. 이 학파가 극성기에 오파(吳派)와 환파(皖派)로 분파하였는데 오파에서는 혜동(惠棟)이 영수가 되고 환파에서는 대진(戴震)이 영수였는데 오파는 순수한 한학(漢學)을, 환파는 음운 ·훈고 ·수학 ·천문학 ·지리학 ·수리학(水利學)을 연구했다. 대진의 제자엔 단옥재(段玉裁)와 왕염손(王念孫) 부자(父子)가 있다.
이 고증학은 영 ·정조 때 일어난 한국 실학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磻溪隨錄)》,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마과회통(麻科會通)》,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東史綱目)》, 유득공(柳得恭)의 《발해고(渤海考)》, 박세당(朴世堂)의 《색경(穡經)》, 서유구(徐有榘)의 《임원경제십륙지(林園經濟十六志)》, 신경준(申景濬)의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 홍대용(洪大容)의 《담헌서(湛軒書)》, 이덕무(李德懋)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박지원(朴趾源)의 《연암집(燕巖集)》 등 각 분야의 실학적인 저작들이 쏟아져 나왔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증학 [考證學] (두산백과)
백화소설
[白話小說 ]
요약 중국에서 구어체(口語體)로 쓰인 소설을 이르는 호칭.
문언문(文言文), 즉 고문(古文)으로 쓰인 문언(文言) 소설의 대칭이다. 당(唐)나라 이전의 소설이란 지식인들이 문어로 써서 수록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당나라 말기부터 송나라에 걸쳐서 귀족계급의 몰락과 서민계층의 세력 증대로 민간에 구전되는 이야기의 필사본이나 그 대본에서 발달하여 점차 읽기 쉬운 구어체의 소설을 만들게 되었다. 그러나 근대 이전의 중국에서는 국가 통치의 수단이었고 지식인의 무기이기도 했던 문어체가 중시되어, 구어문장에 의한 작품이 문학의 주류로 등장한 것은 1917년의 천두슈[陳獨秀] ·후스[胡適] 등의 문학혁명 제창 이후이며, 1918년에는 루쉰[魯迅]의 백화소설 《광인일기(狂人日記)》가 발표되었다.
견책소설
[譴責小說 ]
구분
문학 > 한문학
사회개혁 특히 시정폐단의 폭도와 그에 대한 풍자를 위한 소설. 아편전쟁(1839~1842)이후 연이은 외세의 침입과 내부적인 혼란으로 청조(清朝)의 위신은 땅에 떨어지고 사회는 극도로 부패하여 나라의 운명이 그야말로 풍전등화(風前燈火)격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환경 속에서 조정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감은 날로 높았고, 뜻있는 지식인들은 못내 나라의 앞날을 근심하였다. 청(清)나라 말기 중국의 소설은 이와 같은 국가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있어 능동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 노신(魯迅)은 그의 <중국소설사략(中國小說史略)>에서 이 시대의 그러한 소설을 견책 소설(譴責小說)이라 이름하여 부르고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광서(光緖) 경자(庚子)(1900) 이후로 견책 소설이 특히 많이 출현하였다. 가경(嘉慶) 이래 여러 차례의 내란-백련교(白蓮敎) · 태평천국(太平天國) ∙ 염비(捻匪) · 회교(回敎)-이 평정되기는 하였지만, 또 여러 차례 외적-영국 · 프랑스 · 일본-의 침입을 당하였다. 이러한 터에 어리석은 백성들은 차(茶)를 마시면서 역적을 평정할 때의 무공담이나 듣기를 즐기니, 유식한 사람들은 개혁을 생각하기에 이르렀고, 적개심을 느껴 유신(維新)과 애국을 호소하며, 특히 나라의 부강에 뜻을 두었다. 그러나 무술 정변(戊戌政變)은 성공하지 못하였고, 그보다 2년 뒤인 경자년에는 의화단(義和團)의 난이 발생하였다. 이에 사람들은 그 정부에 나라의 통치를 바랄 수 없게 되었음을 알고 마침내는 정부를 공격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이 때를 당하여 소설은 숨겨진 일들을 들추어내고 그 폐단을 밝히며, 시정(時政)에 대해서는 엄중한 규탄을 퍼부었으니 혹은 일반 풍속까지도 그 나쁜 점을 들어 비난하는 데 힘들 썼다.”
청나라 말기에 이러한 내용을 담은 이른바 견책 소설(譴責小說) 작가 가운데 이보가(李寶嘉, 1867~1906) · 오옥요〔吳㓇堯, 1867~1910) · 유악(1857~1909) · 증박(曾樸, 1871~1935) 네 사람이 가장 유명하다. 이보가는 자가 백원(伯元)이고 별호가 남정정장(南亭亭長)이며 강소(江蘇) 무진(武進)사람이다. 그의 작품으로는 <관장현형기(官場現形期)> 60회 외에 <경자국변탄사(庚子國變彈詞)> · <해천홍설기(海天鴻雪記)> · <이연영(李蓮英)> · <번화몽(繁華夢)> · <활지옥(活地獄)> 등이 있고, <수상소설(繡像小說)> 중에 나누어 게재한 <문명소사(文明小史)>도 유명하다.
대표작으로 치는 <관장현형기>는 청나라 말기의 부패하고 타락한 관리들의 생활과 그들에게 압박받는 백성들의 참상을 대담하게 폭로한 내용이다. 오옥요(吳沃堯)는 자가 견인으로 광동(廣東) 남해(南海) 사람인데 불산진(佛山鎭)에서 살았으므로 필명을 아불산인(我佛山人)이라고 하였다. 그의 작품으로는 <전술기담, (電術奇談 - 번역)><구명기원(九命奇寃)> 및 <이십년목도지괴현상(二十年目睹之怪現狀)> 등이 있다. 대표작인 <이십년목도지괴현상> 108회는 그가 20년 동안 보고 들어 온 가정과 사회의 여러 가지 비정상적인 일들을 열거하면서 인정 세태를 풍자하고 곁들여 위정 당국의 부패 무능상을 폭로한 내용이다. 험한 세상에 용하게 살아 남았다 하여 주인공의 이름을 구사일생(九死一生)이라 붙여 등장시킨 것부터가 하나의 상징이다.
유악은 자가 철운(鐵雲)이고 강소(江蘇) 단도(丹徒) 사람으로 갑골학(甲骨學)의 초기 자료인 <철운장귀(鐵雲藏龜)>의 편자로도 유명하다. 그의 작품 <노잔유기(老殘遊記)>는 주인공 노잔이 떠돌이 의사로 산동 일대 각지를 다니면서 보고 들은 것을 서술하는 형식을 빌어 당시의 정치와 민생의 실태를 묘사하면서, 특히 스스로 청렴 결백하다고 내세우는 이른바 청관(淸官)의 행패가 차라리 탐관(貪官)보다 더하다고 꼬집고, 그 밑에서 압박을 받으면서 사는 백성들의 여러 가지 고통을 쓴 것이다.
증박은 자가 맹박(孟樸)이고 강소 상숙(常熟) 사람인데 1907년 동아병부(東亞病夫)라는 이름으로 <얼해화>를 발표하였으나 지금 전하여지는 30회본은 1927년에 수정한 것이다. <얼해화>는 주인공의 풍류 고사를 중심으로 청말 30년 간의 정치 · 외교 및 사회의 여러 가지 정세를 엮어 나가면서 부패타락하고 위선적인 관료 및 지식인들을 신랄하게 풍자한 작품이다. 그는 또 작품에서 손문(孫文)의 혁명 사상을 긍정 지지하여 민족주의 구호를 내걸었으며, 청조의 망국 외교에도 경고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견책소설 [譴責小說] (국어국문학자료사전, 1998., 한국사전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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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21 – 정지용 전집 / 정지용((鄭芝溶, 1903-1950)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어느덧 제2의 애국가처럼 되어버린 <향수>의 작가 정지용은 생전에 3권의 시집을 간행한 바 있다. 제1시집 정지용시집 (1935), 제2시집 백록담 (1941), 제3시집 지용시선 (1946) 등이다. 이중 지용시선 은 창작시집이 아닌 시선집으로 1집과 2집에 수록된 시들 중에 25편을 뽑아 재수록한 것이다. 정지용시집 에는 모더니즘 지향적인 시들과 민요 지향적인 시들이 혼합되어 있으나, 백록담 에는 대체로 동양적 사유를 통해 자연을 탐구한 시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의 시는 언어의 세련미와 감정의 절제라는 측면에서 한국 현대시의 한 절정을 보여준다.
a. 생애와 작품활동
북으로는 소월이 있고 남으로는 목월이 있으며, 중앙에는 지용이 있다고 한국현대시의 맥을 설명하면 어떨까. 지용은 충북 옥천출생으로 휘문고등보통학교와 1929년 일본 도지사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귀국하여 모교에서 교원으로 재직하였고, 1939년에는 <문장>의 시 추천위원으로 있으면서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등의 청록파 시인을 등단시켰다. 광복 후에는 <경향신문> 편집국장과 이화여대 교수를 역임하였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으나, 광복 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까이하는 등 좌경으로 기울었다가,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전향하여 보도연맹에 가입하였다. 1948년부터는 직장을 그만두고 녹번동에 집을 마련, 서예를 하면서 소일하다, 한려수도를 여행하던 중 6. 25를 맞아 상경하였다. 1950년 자택에서 북한군에게 연행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정인택. 김기림. 박영희 등과 같이 수감되었다. 이후 평양으로 이감되어 이광수. 계광순 등 33인이 같이 수감되었다가 폭사당했다고 전해진다. 그에 관한 연구가 남한에서는 사실상 중단되어 오다, 1988년 해금으로 다소 활기를 찾고 있다. 작품으로는 정지용시집 에 89편, 백록담 에 33편으로, 총 122편을 남겼다.
b. 정지용의 문학세계
지용이 최초로 발표한 작품은 22세 때인 1925년 <학조> 창간호에 카페 프란스 등을 실은 것이나, 명성을 얻은 것은 24세 때인 1927년 <조선지광>에 향수가 발표된 이후다. 그러므로 향수는 그의 데뷔작이라 할 수 있다.
지용은 <시문학> <구인회>의 동인이었으며, 1935년에 시문학사에서 첫시집 정지용시집 이 나왔다. 지용의 제2시집인 백록담은 1941년 <문장>사에서 발행되었고, 그 이후에는 사실상 작품활동은 중단했다. 백록담 을 내놓은 시절이 가장 정신이나 육체가 피폐한 때 라고 회고했던 것처럼, 일제말기의 문화말살정책으로 이때는 <문장> <인문평론> <동아일보> <조선일보>가 폐간된 것을 보면, 당시의 그의 심정이 이해된다.
지용은 1930년 박용철. 김영랑 등이 창간한 <시문학> 동인지 창간호에 이른 봄아침 등을 실었다. <시문학> 창간을 계기로 순수문학운동이 일어났으니, 우리 문학사에서는 소위 시문학파 라 하여 1920년 중반 이후 문단을 주도한 카프파의 계급주의 문학을 비판하고, 문학의 예술성을 주장했다. 시문학파의 대표적인 사람은 박용철, 김영랑. 이하윤, 정지용. 신석정 등이다.
다음으로 1930년대 모더니즘은 김기림에서 출발되는 것처럼 흔히 이야기되나, 신단에서는 이미 정지용. 신석정 등과 함께 김영랑. 김형구 등 모더니스트로서의 경향을 지닌 시인들이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1감정의 무절제한 유로를 배격하고 #2이미지를 중시하며 #3언어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가지고 그것의 조탁에 치중하는 1930년대 한국 모더니즘의 근거지는 <구인회>라 할 수 있는데, 9인 중 일부는 교체되기도하여 김기림. 정지용. 이상. 김광균. 신석정. 장만영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지용은 시문학파의 중심인물인 동시에 대표적인 모더니즘 시인으로 볼 수 있다.
c. 지용 시의 특징
지용의 시를 자세히 보면 바다의 시, 산의 시, 도회의 시, 향촌의 시, 신앙의 시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다양한 특징을 지닌 시인이어서, 어느 일정한 틀로 그의 전 작품을 분류할 수는 없으나, 몇 갈래의 특징적 경향은 나타난다.
먼저 고향 해바라기씨 지는 해 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민요적 경향이 강하다. 그의 민요시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로 시작되는 고향 은 소월의 산유화 진달래꽃, 목월의 나그네 와 마찬가지로 애송되는 작품이며, 따라서 지용은 전통적인 면에서는 소월과 목월 사이에 위치한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다음으로 들 수 있는 것이 순수시적 경향인데, 이는 30년대 시문학파의 활동가 무관하지 않다. 시문학파 중에서도 시가 언어예술임을 자각하고 특히 언어의 조탁에 몰두한 시인이 김영랑과 정지용이다. 그는 언어의 조탁을 위해 고어와 방언도 사용하고, 때로는 말을 만들어 쓰기도 한다. 순수시의 지향이라는 점에서는 영랑과 궤를 같이하나, 영랑이 음악성을 중시한 데 비해, 지용은 회화성에 더 치중했다는 점에서 서로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19세기 자연과학적 유물론에 반대하고, 현대의 기계문명을 비판하며 20세기 전반기에 일어난 모더니즘 기법을 수용한 한국 모더니즘의 선구라 할 수 있고, 불사조 나무 등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한국최초의 기독교 시인이 아닌가 보여지기도 한다.
d. 주요작품
향수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밭에 밤바람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워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줍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 성긴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이 시는 농경시대 한국인의 고향을 노래했다. 10개 연 중 홀수연은 고향의 잊을 수 없는 심상을 제시하고, 짝수 연은 잊을 수 없는 감정을 동어반복을 통해 강조하여, 홀수 연의 심상들을 연결하고 작품 전체에 통일성을 유지시켜준다.
소년기를 시골에서 보냈던 작가는 17세에 서울로 유학 오면서, 고향과 가족을 떠나서 지내게 되고, 22세부터는 일본에 유학가서 그곳에서 느꼈던 고립감은 조국과 고향에 대한 향수에 잠기게 했을 것이고, 그러한 상황속에서 이 시가 태어난다. 전통적이며 토속적인 시어를 써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시다. 날로 도시화, 비인간화가는 현대사회, 이 땅의 청소년들에게 옛고향의 정취에 젖어들도록 하고 있다.
고향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메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 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이 작품은 시인이 고향에 와서 읊은 것이다. 고향은 천진난만한 웃음이 있던 곳이며, 얹고 돌아가 안기면 어머니의 품 속과 같이 포근한 정을 느끼게 하는 안식처다. 그러기에 고향을 떠나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찌든 삶의 모습을 보게 되거나, 생활의 피곤함을 느끼게 될 때면 꿈의 안식처인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그런데 일제에게 짓밟히고 빼앗긴 고향은 옛 모습과 판이하게 달라져 있다. 고향은 실재하나 이미 자기의 고향이 아닌 것이다. 고향상실에 대한 이러한 자각은 비록 소극적이기는 하지만 정지용의 역사의식이 반영된 것이다. 고향회복을 염원했던 식민지시대의 실향의식을 역설적 수법으로 노래한 시다.
e. 문학사적 의의
위대한 시인은 시대 속에서 살면서도 시대를 초월하고, 유파 속에 있으면서도 그 유파를 뛰어넘는다. 우리 문학사에서 지용이 바로 그런 사람이 아닐까? 소월. 지용. 목월을 잇는 전통적 정서와 가락에 따라, 지용은 민요시인으로 꼽지 않을 수 없고, 영랑과 함께 순수문학파의 거장이었으며, 신감각파라는 원치도 않은 형용사가 붙게 되었다. 그는 또한 그 다음 세대에서는 선구자의 위치에서 김기림. 김광균. 신석정. 이상 등과 함께 모더니스트의 거장이 되었다. 그의 시는 도시의 문명적인 현대정신보다는 향토적 소재를 통한 향토정서 또는 서정성 등의 다양한 요소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김기림. 김광균과도 다른 결의 모더니스트였다. 그들은 사상적 한계를 가졌으나, 지용의 경우는 기독교적 신앙의 주제와 사상으로, 이러한 모더니즘의 한계를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8. 15 이후 지용의 사상전환은 그가 영영 문학에서 사라져버린 결과를 초래하였으나, 문학사적 위치를 볼 때 30년대 문학의 최고 정점에 섰던 그의 공적은 그가 사라진 뒤의 청록파 시인을 배출한 것으로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그리하여 현대 한국시사에서 지용의 위치를 말한다면 20년대의 소월, 30년대의 지용, 40년대의 목월로, 우리 전통시의 계보를 이어주었다.
투명한 언어, 감각적 이미지로 우리 현대시를 풍요하게 가꾸었던 지용의 문학은 오랜 공백기의 먼지를 털어내고 다시 독자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는 우리말의 무한한 가능성을 개척하는 영광스런 역할을 했으면서도, 우리 문학사에서 실종되는 비극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우리말의 비밀을 알고 말을 휘잡아 조종하고 구사하는 놀라운 천재이자. 한국인에게 영원한 고향의 이미지를 깨우쳐준 시인 으로서 그 빛을 더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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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20 – 감자 / 김동인(1900-1951)
(출전 :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환경적 요인이 인간 내면의 도덕적 본질을 타락시켜가는 과정을 그린 자연주의 작품으로, 가난하지만 정직한 농가에서 자란 여주인공 복녀가 환경의 노예가 되어, 도덕성 제로상태의 동물인간으로 타락해가는 과정을 폭로하고 있다. 특히 결말 부분 복녀의 시체를 놓고 왕서방과 한의사, 복녀남편 사이의 금전거래 장면은 비정한 인심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문체. 짜임 등에서 한국 단편소설의 전형을 보여준다.
a. 생애와 작품활동
이광수와 함께 한국근대소설의 선구자 김동인은 자연주의 작가, 탐미주의 작가(유미주의, 예술지상주의 작가)로 불린다. 호는 금동. 춘사. 평양의 대부호의 아들로 출생하여 금시계가 아니면 차지 않을 정도로 유아독존격으로 성장했다. 1912년 김동인은 기독교계 숭덕소학교를 졸업하고 숭실중학교에 입학하나, 성경과목에 대한 불만이 계기가 되어 중퇴, 1914년 도일하여 1917년 일본 메이지 학원 중학부 2학년에 편입한다. 그의 유학의 본래 목적은 의사나 변호사가 되는 것이었으나,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그의 자존심과 빈번한 영화감상, 탐정소설과 문학작품 탐독으로 점차 예술 쪽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그가 당시 가장 경모한 작가는 톨스토이뿐으로, 그를 제외한 문학, 특히 일본문학은 경시했으며, 빅토르 위고까지도 통속작가라 경멸한 작가였다. 1917년 메이치 학원 중학부를 졸업한 그는 부친 사망으로 일시 귀국, 이듬해 거부의 딸 김혜인과 결혼하고 다시 도일하여 그림에 뜻을 두어 가와바타 미술학교에 입학했으나 중퇴했다. 그의 문학적 경력은 1919년 전후해 시작되는데, 주요한. 전영택 등과 한국 최초의 문예동인지인 <창조>(1919)를 도쿄에서 자비로 간행했으며, 여기에 우리말로 쓴 처녀작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한국 최초의 리얼리즘, 또는 자연주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같은해 3월 3. 1운동으로 귀국, 아우의 부탁으로 격문을 초하여 주었다가 출판법 위반협의를 받아 6개월 동안 투옥되기도 했다. 1920년 단편 피아노의 울림, 중편 마음이 옅은 자여 를 발표하여 문학비평가의 역할의 문제를 에워싸고 염상섭과 논쟁을 벌인다. 1921년에는 그의 대표적 단편 중의 하나로 쾌락주의의 인생관을 바탕으로 한 심미주의 사상을 표현한 배따라기 를 발표한다. 그러나 이 무렵의 김동인은 경영난으로 <창조>를 폐간하며, 사적으로는 화류계 여성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방탕한 생활을 시작한다. 방탕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작품을 발표하여, 1923년에는 단편 이 잔을 태형 등을 발표한다. 특히 이 잔을 은 예수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로, 그의 기독교에 대한 관심과 태도를 보여주는 이색적인 작품이다. 이어 환경 결정론의 사상이 엿보이는 자연주의 경향의 작품 감자 시골 황서방 눈보라 등을 발표했다. 그러나 수년간의 방턍생활로 많은 가산을 탕진했을 뿐만 아니라, 잇따른 사업의 실패, 부인의 가출과 이혼으로 인한 가정파탄 등으로 불행과 시련을 겪게 되며, 정신적인 고초로 말미암아 이때부터 심한 불면증에 시달리게 된다. 그러나 시련의 몇 년을 지내 후 1929년경부터는 그는 다시 창작활동을 재개, 단편 광염 소나타 를 발표하는데, 1935년에 발표하는 광화사 와 함께 악마적 심미주의를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다. 1930년 재혼한 김동인은 1932년까지 많은 장. 단편을 발표한다. 그 중 중요한 것으로는 죄와 벌 신앙으로 발가락이 닮았다 붉은 산 등이 있다. 이중 신앙으로 는 극심한 삶의 시련을 겪은 후 그의 신앙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가 엿보이는 작품이며, 붉은 산 은 그의 민족의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김동인은 1933년 장편 운현궁의 봄 을 발표하나, 모친 별세를 당하고 이후 불면증 증세가 악화되어 강한 최면제를 복용하게 되어 약물중독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이듬해에는 이광수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작가론이며 지금까지도 가장 우수한 평론의 하나로 인정되는 춘원연구 를 비롯, 나의 문단생활 회고기 를 발표한다. 1935년경에는 그의 순수 문학적 창작활동은 이미 현저하게 감퇴되어 광화사 외에 1938년에 단편 가두, 1939년에 김연실전 , 1941년에 곰네 등의 발표가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문학외적 활동으로 1939년 박영희. 임학수 등과 함께 소위 북지황군위문작가단 의 일원으로 1개월간 만주를 다녀옴으로써 민족적 분노를 사기도 한다. 방탕한 생활과 사업의 실패로 재산과 아내를 잃고 초래된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신문. 잡지 등에 닥치는 대로 역사소설 사담 등을 썼으며 아편중독에 불면증까지 걸렸다. 6.25중에 서울 자택에서 중병으로 사망했을 때 누구도 지켜보는 사람이 없이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너무나 비참한 최후였고, 너무나 기구한 운명이었다. 그를 기념하기 위해 현재 <조선일보>사에서 동인문학상을 제정, 수여하고 있다.
b. 문학적 특성
간결한 문체와 양식적 완결성이 잘 드러난 그의 작품은 한국 근대 단편소설의 한 전형을 이루었다. 또한 모든 작품에서 김동인은 이광수의 계몽적 교훈주의를 배척하고, 예술지상주의를 내세운 순수문학운동을 벌였다. 그의 작품의 한국문학사적 업적을 요약해보면, #1 계몽주의를 거부하고 서구적 자연주의 경향의 문학을 확립했으며 #2 본격적인 단편소설( 배따라기 붉은 산 )을 개척한 점(그는 단편에서는 성공했지만 장편에서는 실패한 것으로 평가된다) #3 단편이 지니는 속성의 하나인 유머와 위트, 패러독스를 단일한 구성 속에 도입했으며 #4 문장을 혁신했고 #5 사재를 들여 본격적인 순수문예지 <창조>를 발간한 점 #6 구어체 문장을 개척한 점 #7근대적 문예비평을 개척한 점을 들 수 있다. 김동인은 그의 조선근대소설고 에서 이광수의 불완전한 구어체 문장에 대하여 자신을 중심으로 한 <창조> 동인은 보다 철저한 구어체
문장의 확립을 위해 노력하였다고 주장하며, 그 특징으로 #1 -더라, -이라 등의 구두에서 탈피, #2 현재형 시제에서 과거행 시제의 개척 #3 영어의 He, She 등을 그 라는 대명사로 표기한 점 #4 사투리의 처음 사용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상당하다. 김동인의 문학적 특성은 일찍이 백철이 그를 예술지상주의 작가로 규정한 이래 김동리에 의해 자연주의의 작가, 혹은 조연현에 의하여 예술지상적 또는 자연주의적인 것으로 다양하게 규정되어왔다. 이러한 여러 규정은 김동인 문학세계의 다양성 혹은 그 사조적 바탕의 혼재성을 시사해주는 것으로 계속 논란의 여지는 있다. 결국 그의 문학세계는 자연주의와 유미주의의 두 봉우리로 가름할 수 있는데, 그 대표작이 감자와 광화사 다.
자연주의
자연주의 문학이 인생을 위한 예술 이라고 한다면 탐미주의 문학은 예술을 위한 예술 이라고 할 수 있다. 김동인 문학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자연주의다. 20년대에 한국문학에 수용, 혼류된 근대적 문예사조의 하나로서 자연주의의 가장 뚜렷한 영향과 흔적을 볼 수 있는 작가가 김동인이다. 그의 문학의 자연주의적 특성은 물질주의적. 결정론적 인간관과 반도덕성 등으로 그의 문학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는 유년기부터 욕구충족이 용이한 부유한 가정환경과 그의 선천적 기질로 말미암아 청년기에는 강렬한 쾌락주의적 인생태도를 지니게 된 듯하다. 전통적인 신앙에서 모든 존재와 가치의 궁극적, 초월적 근거인 신에 대한 이러한 거부의 태도 속에는 인간을 다만 자연적. 동물적 존재로 규정하는 물질주의적 인간관과 도덕적 가치를 부정하는 자연주의적 가치관이 내재되어 있다. 감자는 이러한 자연주의적 인간관과 가치관을 완전한 형식을 통하여 극명하게 구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작자는 가난하지만 정직한 농가에서 규칙 있게 자란 막연하나마 도덕이라는 것에 대한 기품을 가지고 있는 복녀라는 한 여인이 생존을 위협하는 가난한 환경때문에 도덕의식을 상실하고 동물적 인간으로 점차 타락해, 마침내 파멸에 이르는 과정을 관찰자적인 냉정한 필치로 그리고 있다. 감자에서 작자는 반사회적인 환경으로 인해 도덕성을 상실하고 동물적 존재로 전락해가는 한 여인의 삶의 과정을 통해서 인간존재와 운명의 결정요인으로서의 환경을 강조하는 환경결정론과 도덕적 가치부정의 자연주의적 인간관 가치관을 구현하고 있다.
탐미주의
김동인의 반도덕적이며 병적 광기를 내포한 쾌락주의는 그가 자연주의적인 일련의 작품들을 창작하던 1920년대 전반에 걸쳐 그의 삶을 지배한 듯하다. 그는 수년간 광포한 방탕생활을 하며 마침내 파산과 가정파탄이라는 개인적 파국에 이른다. 그리하여 그가 새롭게 출발한 사상이 감자 등의 자연주의적인 작품을 통해 부정하고 거부한 신이나 도덕 대신 그가 진정한 가치로 선언한 미 가 절대적 가치로 지향의 대상이 되는 소위 탐미주의다. 이러한 사고의 기초 위에서 탐미주의적 특성을 보여주는 두 작품 광염 소나타 광화사 가 창작되며, 이들 작품에서 작자는 일찍이 그가 보인 이광수식의 계몽주의에 대한 격렬한 반대입장과는 달리, 직접 그의 탐미사상의 설교사가 된다. 김동인의 탐미사상은 사상적으로 미숙한 것으로 그의 탐미주의 작품은 근원적인 예술충동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예술지상론을
펴기 위한 이데아의 산물로 볼 수 있다. 또한 그의 탐미주의는 그의 자연주의 작품에 비해 작품적 실천에 있어 뚜렷한 성취를 보여주지는 못하였다. 이 점은 가령 오스카 와일드 같은 외국의 탐미주의 작가들이 무엇보다 자신의 작품의 형식이나 기교를 중시하며, 어휘나 문체의 미적효과나 작품의 미적구성에 큰 비중을 둔 것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c. 주요 등장인물
복녀: 규율 있는 출신이지만 환경에 의해 지배를 받아 전락, 비극적 죽음을 맞음.
남편; 천성적 게으름뱅이. 아내로 하여금 매음으로 돈을 벌게 하고 자신은 무위도식함.
왕서방: 중국인 지주. 한동안 돈으로 복녀를 샀다가 본부인을 얻게 되자 냉정하게 복녀를 버림.
d. 작품의 주요내용
무대는 싸움. 간통. 살인. 도둑. 징역 등 이 세상의 모든 비극과 활극의 근원지인 칠성문 밖 빈민굴 이다. 복녀는 원래 가난하나마 정직한 농가에서 규율 있게 자라난 처녀이다. 이러한 복녀가 전락하는 것은 극도로 게으르고 무능한 남편과 결혼 하고 부터다. 복녀를 데려오느라 조금 있던 재산을 다 써버린 20년 연상의 남편은 게으름과 불성실한 처신으로 호구의 방책을 놓쳐버리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이로부터 전락을 거듭하게 된 복녀의 집은 마침내 칠성문 밖으로 나앉게 된 것이다. 가만히 앉아 있다간 굶어 죽을 판이 된 복녀는 거지로 나선다. 그러나 젊은 나이의 그녀에겐 그 일조차도 쉽지 않다. 그리하여 복녀는 하루 32전 벌이인 송충이잡이에 나선다. 매일 송충이잡이를 나가던 복녀에게 이상한 현상이 눈에 뜨인다. 젊은 여인들 몇이 늘 놀다시피 하면서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 비결이 다름아닌 몸을 파는 것임을 알게 된 복녀는 자신도 못 이기는 체 이러한 거래에 동참하게 된다. 막상 나서니 이보다 좋은 벌이가 없다. 사람으로 못할 일도 아니고, 일 안하고도 돈 더 받고 긴장된 재미가 있고, 빌어먹는 것보다 점잖기 때문이다. 이러한 근거로 복녀는 점점 도덕의 구속으로부터 일탈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날 밤 복녀는 감자밭에 들어가 감자 몇 알을 훔치다 밭 주인인 중국인 왕서방에게 들킨다. 이미 자기 육체의 위력을 알고 있는 복녀는 왕서방에게 죄값으로 몸을 주고 오히려 돈까지 얻어 나온다. 이로부터 왕서방과의 관계는 남편이 묵인하는 가운데 노골적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는 오래 가지 못한다. 왕서방이 정식으로 부인을 얻어 성례를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왕서방으로 인해 신세가 바뀌어지고 있던 복녀는 이 소식을 듣고 눈이 뒤집힌다. 왕서방의 혼례가 있던 날 밤, 복녀는 낫을 준비하여 강짜를 부리지만 그날 밤 싸늘한 시신이 되어 나오는 것은 복녀의 몸뚱아리다. 낫을 들고 강짜를 부리다 그 낫을 왕서방에게 빼앗겨 오히려 자신의 목을 찔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녀가 죽은 뒤 사태수습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묘사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사흘이 지났다. 한밤중 복녀의 시체는 왕서방의 집에서 남편의 집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시체 앞에는 세 사람이 둘러앉았다. 한 사람은 복녀의 남편, 한 사람은 왕서방, 또 한 사람은 어떤 한방의사, 왕서방은 말없이 돈주머니를 꺼내어 십 원짜리 지폐 세 장을 복녀의 남편에게 주었다. 한방의사의 손에도 십 원짜리 두 장이 갔다. 다음날 복녀는 뇌일혈로 죽었다는 한방의사의 진단으로 공동묘지로 실려갔다.
e. 감상 및 문학사적 의의
김동인의 문학은 춘원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비롯한 것이라 해도 좋을 만큼, 그의 문학사적 위치는 문단 선배인 이광수와 깊이 연계되어 규정된다. 이는 김동인이 춘원의 소설을 사회교화 도구라 비판하고 자신의 문학적 지향을 참인생. 참예술의 완성에 두었던 데서 잘 드러난다. 1925년 <조선문단>에 이 소설이 발표되었을 때 몇몇 프로 비평가들은 빈궁한 삶을 소재로 하여 그 비참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이를 신경향파적인 작품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감자에서 작가의 관심은 사회적인 모순을 드러내고 분노를 터뜨리는 데 있지 않다. 정직한 농가에서 절도있게 자란 처녀 인 복녀가 빈민굴의 매음녀가 되고 결국 죽음을 맞게 되는 과정이 별다른 감정 없이 그저 제시되는 것이다. 환경의 변화(얌전한 농가에서 빈민굴로 전락)에 따라 복녀라는 인물은 변화한다. 입체적인 인물의 성격과 행동이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는 결정론 의 영향을 여기서 볼 수 있는데, 이런 변화에 의해 감자 의 인물들은 어떤 자의식도 갖지 못한다. 몸을 팔아 번 돈을 남편에게 자랑스럽게 내 보이는 복녀나, 아내의 죽음을 30원과 맞바꾸는 남편에게는 윤리나 도덕에 대한 의식이 없다. 그들은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할 뿐이다. 이런 특징들, 특히 결정론의 영향을 지적하는 데서 감자를 자연주의로 보려는 견해가 생겨난다. 김동인의 작품 중 자연주의라는 평을 듣고 있는 것에는 배따라기 감자 김연실전 등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감자 는 자연주의의 정신이 잘 구현되어 있다는 평을 받는다. 도덕이나 윤리. 법이라는 치장을 걸치기 전 생물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잘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감자 는 김동인이 지향한 문학정신의 한 결정체라 할 작품이다. 한국의 근대단편이 시작된 이래 가장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인물로 창조된 복녀, 결정적 반전으로 경악을 안겨주는 극적인 구성, 이에 동원된 간결 명료한 문체, 특히 감자 에서 처음 시도된 것으로 평가되는 방언의 문체화, 이런 것들은 김동인이 한편으로 춘원을 시샘하며 한편으로 그를 극복하고자 하였기에 이룰 수 있었던 대표적 성과다. 그러나 이 작품도 김동인의 문학을 말할 때 흔히
C22 – 유림외사(儒林外史) / 오경재(吳敬梓, 1701-1754) (0) | 2017.09.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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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19 – 탁류 (濁流) / 채만식(蔡萬植, 1902-1950) (0) | 2017.08.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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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17 – 혈의 누 (血의 淚) / 이인직(李人稙, 1862-1916) (0) | 2017.08.29 |
C19 – 탁류 (濁流) / 채만식(蔡萬植, 1902-1950)
(출전 :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예리한 현실비판 의식과 문학에 대한 진지한 탐구, 그리고 풍자정신을 통해 한국 근대문학의 새로운 장을 연 채만식의 장편소설. 이 작품은 군산지방과 옥구지방을 배경으로 하여, 몰락한 정주사의 큰딸 초봉이의 삶을 통해 30년대 식민지사회의 어지러운 시대상을 날카롭게 그려내고 있다. 작품 속에는 사기와 간통, 모함과 살인사건이 이어지고, 일제의 경제적 침탈과 이로 인해 한국인들이 속악해지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이른바 세태소설이다.
a. 생애와 작품활동
한국에서 처음으로 풍자성을 도입한 풍자작가 채만식은 전북 옥구군에서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1918년 보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중앙고등학교에 입학한다. 1920년 그는 집안 어른들의 권고로 고향에서 결혼했으나, 자의에 의하지 않았던 그의 결혼 및 가정생활은 내내 행복하지 못했다.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혼자 상경, 생활하던 채만식은 1922년 중앙고보를 졸업하고 도일,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에 입학하나, 이듬해 관동 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했다. 그는 1924년 <조선문단>에 단편 세 길로 가 추천됨으로써, 문단에 등단한다. 1926년 <조선일보> 기자를 지내며 단편 산적을 비롯한 다수의 단편. 희곡작품을 발표했으나, 초기의 작품들은 별반 주목을 끌지 못했다.
1930년대 초 그는 카프 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동반자적 입장에서 1932년에 단편 부농 농민의 회계보고 1933년에 중편 인형의 집을 나와 1934년에 레디메이드 인생을 발표한다. 그의 자전적 소설인 레디메이드 인생 은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로, 사회현실에 낙오되어 좌절한 교양적인 지식인의 초상을 통해서 지식인을 소외시키는 당대사회의 물질적인 맹목성을 비판한 것이다. 1936년 채만식은 <조선일보>를 사직, 본격적인 문학창작에 전념한다. 단편 명월을 비롯해 쑥국새 순공있는 일요일 사호일단 등 서민생활에 어린 전래의 생활감정을 그린 작품 등을 발표하는가 하면, 식민지사회 세태를 풍자 혹은 폭로한 다수의 작품들을 발표한다. 1937년에 발표된 치숙은 부정되어야 할 인간형을 긍정하고, 긍정되어야 할 인간형을 부정하여 풍자소설의 전형을 보여준다. 태평천하 (1938), 탁류 (1939)는 그의 문학의 사회의식과 풍자적 특성을 포괄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장편인데, 태평천하는 단순한 인물의 풍자가 아니라 이민족의 지배를 받는 현실을 태평천하로 믿는 고리대금업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시대의 암흑을 풍자한 작품이고, 탁류는 군산이라는 지방도시를 배경으로, 1930년대 소도시의 생활을 제시하면서 초봉이라는 기구한 여인의 일생을 그린 작품이다. 태평천하가 부정적인 인물들의 몰락과정을 그리면서 마지막에 긍정적인 인물이 나타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면, 탁류는 긍정적인 인물의 몰락과정을 보이면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것이라는 점을 암시했다. 1940년에 단편 차 안의 풍속 냉동어 등을 발표한 채만식은 가난과 지병에 시달리며 계속 다수의 작품을 발표하나, 일제의 탄압과 강요에 의해 그들의 성전신체제에 동조하는 태도를 보이고 만다. 1945년 옥구로 낙향하여 해방을 맞고 이듬해 이리로 이사한 그는 창작을 계속, 단편 미스터 방 처자 민족의 죄인 등을 발표하고 중편 소년은 자란다를 발표하나, 무리한 집필과 가난으로 지병이 악화, 1950년 사망했다.
b. 문학적 특성
채만식에 대한 논의는 1970년대 들어 본격화된다. 왜냐하면 1960년대만 해도 동반자 작가 세태소설가 풍자소설가 등으로 규정되어, 비평가들이나 문학가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는 최서해나 김유정의 경우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대한 평가는 70년대 들어 김윤식. 김현. 신동욱 등에 의하여 그의 문학의 사회의식이 집중적으로 조명됨으로써 긍정론의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고 있다. 그의 문학에 관한 사회적인 논의는 불가피하게 그의 문학의 또 하나의 주요 특징인 풍자적 수법과 미의식의 문제와 관련되는데, 기왕의 연구업적의 재검토를 포함하여 앞으로 방법론의 심화와 개별적인 작품론 등에 의하여 양자의 관계가 보다 선명하게 밝혀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비판정신과 풍자성
현실에 대한 비판정신은 채만식 문학의 중요한 특성의 하나가 되고 있는데, 이러한 식민지시대의 한국사회와 현실에 대한 비판정신은 그의 20년대 초기작에서부터 해방 이후의 후기작품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비판정신은 직접적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식민지시대의 여건하에서 제약을 면할 수 없었고, 당대의 부정적 사회현실에 대한 우회적 비판의 방법으로 그가 취한 것이 풍자였다. 채만식은 초기에는 당시 유행하고 있던 프로문학에 대한 동반자적 경향을 보이다가, 그후 우리 나라 지식인이 처했던 근대적 운명을 소재로 그의 독특한 재치를 가미시킨 풍자성이 강한 사회소설로 전환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풍자 방법은 그의 문학활동 시기 및 작품의 제재에 따라 상당한 굴곡을 드러낸다. 그의 문학의 풍자적 특성은 레디메이드 인생 명일 등과 같은 실직 인텔리를 다룬 작품에서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실직 인텔리를 대표하는 작중인물들은 작가와 동일한 환경과 처지에 있어서 대상에 대한 비판이 자기에게로 향하고, 따라서 자기풍자의 성격을 띠고 있다. 풍자를 통한 채만식의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은 해방 후 그의 일련의 작품 속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일제시의 살인강도가 해방후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관이 된다는 이야기의 맹 순사나, 일제의 하수인이었던 자가 해방 후 애국애족을 부르짖으며 국회의원에 입후보한다는 이야기의 도야지 등은 해방 후 혼란한 시대현실을 풍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역사의식 및 시대정신
채만식의 문학은 순수문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1930년대 문학적 풍토 위에서 매우 분명한 사회의식을 보여주며 전개된다. 문단 등장 후 1930년 무렵까지는 대체로 자전적 요소가 짙다. 그러나 30년대 이후 그는 구체적인 현실문제를 통해서 매우 뚜렷한 사회의식을 보여준다. 채만식의 사회적 관심사는 첫째, 당대의 실직 인텔리들의 고뇌와 궁핍한 생활의 실상이다. 이러한 제재를 다룬 대표작이 레디메이드 인생 이다. 여기서 그는 주인공 P를 대표하는 당대 실직 인텔리의 모습은 명일의 주인공 범수, 치숙에서 병든 사회주의자인 아저씨, 소망에서 광태를 연출하는 남편, 패배자의 무덤 에서 자기분열의 자책 끝에 자살하는 종택 등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두번째 사회적 관심사는 하층민들의 생활양상인데, 부촌 농민의 회계보고 등에서 식민지시대의 모순된 농촌사회의 구조에 대한 관심이 도시를 배경으로 한 장편 탁류에서는 도시 하층민의 현실로 나타난다. 탁류에서 도시의 밑바닥에서 최저한의 생활수준과 최대한의 각박하고 빈약한 정신상황 속에서 살고 있는 도시 하층민들의 삶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줌으로써, 그의 당대 사회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주고 있다. 채만식의 사회의식은 30년대 말경부터 40년대에 씌어진 제향날 어머니 등 개화기를 배경으로 한 일련의 역사소설을 통해 보다 포괄적으로 드러난다. 이들 작품은 대부분 도식적 역사주의, 성격창조의 미비 등으로 말미암아 당대의 현실을 포괄적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지만, 개화기라는 신. 구 역사세력의 교체기에 닫힌 사회에 충격을 가해 진보의 지평을 여는 평민부농. 중인 양반계층의 자발적 이탈자들이 보여주는 비극을 그림으로써, 민중세력 속에서 역사의 추진력을 찾는 민족적 진보주의라는 진보주의적 사관을 보여주고 있다.
c. 주요 등장인물
정주사: 노름에 빠져 가정을 파탄에 빠뜨리는 초봉의 아버지.
초봉이: 여주인공. 예쁘고 착하나 봉건적인 여성관으로 희생당하는 처녀.
박제호: 탐학한 인물로 제중당 주인.
남승재: 초봉을 사랑하고 의협심이 강한 인물.
장형보: 꼽추이며 간교한 인물.
d. 작품의 주요내용
금강...이 강은 지도를 펴놓고 앉아 가만히 들여다보노라면 이렇게 어렵사리 서로 만나...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 하나가 올라앉았다. 이것이 군산이란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풀려나간다. 정주사의 딸 초봉은, 아름답지만 극히 수동적인 인물이다. 그는 자기 집에서 하숙 하는 의학도 남승재를 사모하지만, 부모의 타산적인 강권에 따라 은행원인 고태수와 결혼한다. 그러나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태수는 정을 통하고 있던 여인의 남편에게 죽고, 초봉은 그를 탐내는 꼽추 장형보에게 겁탈당한다. 태수가 죽은 직후, 초봉이 일하던 약국 주인이었던 박제호가 초봉을 첩으로 삼고, 그 얼마 후 초봉은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르는 딸을 낳는다. 딸 송희에게만 정성을 쏟는 초봉에게 제호는 곧 싫증을 내 장형보에게 초봉을 넘긴다. 초봉은 자기 신세를 서러워하면서도 장형보에게 돈을 요구해 친가의 살림을 돕는다. 그러나 어느 날, 딸에게 함부로 구는 형보에게 격분을 참지 못한 초봉은 그를 발길로 차 죽이게 된다. 그리고는 자살을 결심하지만, 집으로 찾아온 승재와 여동생 계봉은 이를 만류한다. 의사가 된 승재는 그 사이 초봉과는 딴판으로, 적극적이며 주관이 뚜렷한 계봉과 사랑하는 사이가 된 처지다. 그러나 이 사실을 모르는 초봉은, 승재가 자신을 아직 사랑하며 기다려줄 것을 믿고, 자살 대신 징역살이를 택하겠다고 한다. 위에서 본 것처럼 초봉의 아버지 정주사와 어머니 유씨는 물질적인 풍요를 무엇보다도 중히 여기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윗감으로 태수를 택할 때도 은행원인 태수가 초봉에게 풍족한 생활을 보장함은 물론, 자신들에게도 물질적인 도움을 줄 것을 기대하며 자식을 희생시킨 부모다. 채만식은 이들에게 비판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으며, 특히 정 주사의 묘사에 있어서는 그의 장기인 풍자도 활용하고 있다. 사실 초봉은 가난한 의학도 남승재를 사모하면서도 부모의 강권대로 태수와 결혼하고, 거기에 심한 갈등을 느끼지도 않는다. 따라서 그녀는 이 작품 속에서 속물화된 세계에 의해 짓밟히는 여인상이다. 신교육을 받았고 아리따우며 기품있는 초봉은 그러나 자기 나름의 주관이나 의지가 결여된 인물이다. 딸 송희를 향한 애정이 초봉이 지니고 있는 특징으로서는 유일하게 적극적인 것이다. 수동적이기 때문에 그는 부모의 의사에 따라 자기 운명이 굴절되도록 하고, 태수. 제호. 형보는 모두 1930년대 한국사회의 타락상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e. 감상 및 문학사적 의의
풍자와 냉소, 욕설과 좌절감이 충만하고 음울한 모함과 사기. 살인이 전반을 통해 흐르는 탁류는 1930년대 한국의 사회상을 집약한 것으로 분석된다. 이러한 계열의 작품은 풍속 세태소설로 평가되기도 하는데, 사회의 한 단면을 예리하게 풍자한 점은 이 작품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초봉의 운명을 지배하는 세 남자는 1930년대 한국사회의 타락상을 보여주는 인물들로, 방탕한 노름에 사기와 횡령을 행하는 은행원인 태수, 제약회사를 차리나 소득을 모두 향락에 탕진하는 제호, 그리고 형보는 외무에서부터 기묘한 인물이다. 이런 인물들이 순결한 여인 초봉의 운명을 농락하는 세계가 곧 채만식이 말하는 바 탁류 다. 자본주의적 근대화가 진행되었지만 봉건적인 구습이 남아 있고, 자본주의화라는 것도 왜곡된 탐욕으로 대표되는 사회가 작가가 본 1930년대의 한국사회였다는 것이다. 이 탁류에 실려가는 초봉은 마지막까지도 환각에서 깨어나지 못한다. 작가가 부여한 청순가련형의 이미지에 의해 더욱 비극적인 측면이 강조되는 초봉의 운명은 결국 탁류의 거대한 물결에 휩쓸려 버린 것이다. 주인공 초봉이의 비극의 주된 원인이 된 하층민의 궁핍한 현실과 낡은 도덕관, 그리고 부정적 인물인 고태수나 장형보의 파멸의 원인이 된 물질 및 쾌락 추구적 가치관은, 식민지 당대의 시대적 궁핍상과 전통적 가치관의 붕괴에 따른 사회적 황폐화 현상과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작자의 시대의식은 남승재와 계봉과 같은 당대의 탁류를 헤치고 살아갈 만한 구도자적 인물의 설정을 통해서도 암시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는 전라도 방언을 포함해 사투리와 우리 고유어를 풍부하게 구사한 것인데, 그의 문체는 당대 소설가 중에서도 일본 문장이나 번역 문투가 거의 배어 있지 않는 뛰어난 것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설화체 문장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설화체 문장을 사용해 평면적인 이야기를 입체화하고 생동력있게 만들었다.
C21 – 정지용 전집 / 정지용((鄭芝溶, 1903-1950) (0) | 2017.09.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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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20 – 감자 / 김동인(1900-1951) (0) | 2017.09.01 |
C18 – 천변풍경 (川邊風景) / 박태원(朴泰遠, 1910-1986) (0) | 2017.08.31 |
C17 – 혈의 누 (血의 淚) / 이인직(李人稙, 1862-1916) (0) | 2017.08.29 |
C16 – 홍길동전(洪吉童傳) / 허균(許筠, 1569-1618) (0) | 2017.08.29 |
C18 – 천변풍경 (川邊風景) / 박태원(朴泰遠, 1910-1986)
(출전 :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1930년대 모더니즘 소설의 대표적인 소설로, 도시성이 명확하게 드러난 작품이다. <조광>에 1937년 1월호부터 9월호까지 걸쳐 연재된 이 장편소설은 일제 때 서울 청계천변 한 동네에서 일어난 여러 일상적 사건들을 다룬 세태소설의 본보기다. 에피소드의 병치, 끊임없는 시점의 변화, 객관적 시점의 확보, 다양한 인간상 제시, 세련된 문체의 성취 등을 특징으로 한 이 소설에서 1930년대 서울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a. 생애와 작품활동
월북 후 북한 역사소설 가운데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갑오농민전쟁(전3권)을 쓴 작가 박태원. 그의 호는 구보. 서울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유학, 호세이 대학을 중퇴하고 집에서 밤늦도록 책을 읽는 등 불규칙한 생활을 해 건강과 시력이 나빠졌다. 한때 이광수를 사사했으나 그의 계몽주의는 따르지 않았다. 1930년 단편 수염을 발표하면서부터 작가생활을 시작했다. 1933년 이태준. 이효석. 이무영. 정지용 등과 <구인회>를 만들어 예술파적 소설을 지향하였다. <구인회> 출현시기는 카프계열의 경향파 문학이 일제의 탄압에 부딪친 때로서, 새로운 문단세력으로 박태원. 이태준. 이효석 등이 활약하게 되었다. 박태원은 특히 이태준과 친하게 지내면서, 일제 강점기 하에 작가자신이 속한 서울 서민층의 변모양상을 객관적인 서술로 묘사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그 결과 시정적 소시민 사회의 현실을 저회하면서, 무기력한 패배자의 시선에 들어오는 풍경들을 그대로 그려나갔다. 천변풍경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등이 그것이다. 이외의 단편들로 딱한 사람들 길은 어둡고 전말 진통 방란장 주인 성탄제 등이 있으며 주제가 소시민적 우울을 다룬 점에서 대체로 비슷하다. 해방 직후에는 이태준과 함께 조선문학건설본부에 참여해 소설부 위원을 지냈다. 6. 25전쟁중 월북해 평양문학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조운과 함께 조선창극집 을 펴냈다. 1956년 한때 남로당 계열로 몰려 작품활동이 금지되었다가 1960년 작가로 복위, 1986면 고혈압으로 죽었다. 해방 전까지 개인의 문제, 지식층의 문제, 현재의 문제에 치중했으나, 해방 후에는 집단의 문제, 민중의 문제, 과거의 문제에 치중해 역사소설을 주로 썼다. 그의 대표작 천변풍경은 짧은 이야기 50절로 이루어진 장편으로, 철저한 3인칭 관찰자 시점을 따르고 있다. 사건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이나 뚜렷하게 내세우는 사상도 없이, 청계천변에 사는 서민층의 몰락과 가난을 시선에 잡히는 그대로 그려냈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미혼이며 홀어머니와 함께 사는 소설가 구보씨가 서울거리를 배회하면서 느끼는 내면세계의 방황과 세태풍속을 잘 그린 작품이다. 작품의 형식과 문장의 기교 등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광고 전단 등의 대담한 삽입, 쉼표의 사용에 의한 만연체 등의 시도, 중간제목의 강조, 한자의 남용 등 90년대 작가들도 감탄할 만한 독특한 문체를 낳았다.
b. 주요 등장인물
재봉이: 15-16세 가량인 이발소 사환. 이발소와 빨래터 골목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상세히 목격함.
민 주사: 재력있는 50대의 사법서사. 안성집과 취옥이 사이를 오가며 주색잡기에 골몰함.
하나코: 방년 스무 살의 카페 여급. 손주사, 은방 주인, 강서방 등의 표적이 되어 있는 미인.
이쁜이: 천변 사람들의 축복 속에 결혼했으나 친정으로 쫓겨나는, 점룡이가 짝사랑하는 인물.
금순이: 순박한 시골색시로 가족들과 헤어져 기미코, 하나코와 함께 살아가는 인물.
만돌어멈: 포악한 남편을 가진 행랑어멈.
창수: 꾀 많은 한약국집 사환.
c. 작품의 주요내용
민주사 한약국집 가족, 포목전 주인, 양약국 주인 최진국 등은 식민지 자본주의 속에 적응하면서 약간의 부를 축적한 인물들로, 이들은 식민지 사회가 아무런 변동 없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안정희구 세력들이다. 반면 재봉이, 창수, 금순이, 만돌이 가족, 이쁜이 가족, 점룡이 모자 등은 모두 시골에서 올라와 청계천변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다. 점룡이 어머니, 이쁜이 어머니, 귀돌어멈을 비롯한 동네 아낙네들은 빨래터에 모여 수다를 떤다. 이발소집 소년인 재봉이는 이런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결코 권태를 느끼지 않는다. 민 주사는 이발소의 거울에 비친 쭈글쭈글 늙어가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한숨짓지만, 그래도 돈이 최고라는 생각에 흐뭇해진다. 재봉이는 평화 카페로 눈길을 돌린다. 여급 하나코의 어머니가 눈에 뛴다. 재봉은 하나코의 어머니가 광교 쪽을 바라보며 난처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발길을 돌리는 것을 본다. 저쪽 한약국집에서는 젊은 내외가 함께 대문을 나선다. 이들은 다정한 부부로 외출을 하는 것이다. 창수는 한약국집의 사환인데, 출세하기 위해 서울로 가야 한다는 아버지의 강권에 따라 시골에서 올라왔다. 그러나 익숙지 않은 일에 얽매여 고생하는 것은 비단 창수 혼자만의 슬픔이 아니다. 파란 색칠을 한 중문을 사이에 두고 약국 안에서는 행랑에 든 지 사흘도 안되는 만돌어멈이 안방마님의 꾸지람을 듣고 있다. 만돌어멈은 불한당 같은 남편을 피해 서울로 도망질쳤으나, 우여곡절 끝에 다시 남편과 남의 드난살이를 하는 것이다. 한편 음력 3월 중순, 이쁜이네는 오늘 큰 경사가 있다. 점룡이 어머니는 마음이 애석하다. 아들 점룡이가 은근히 이쁜이를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쁜이 어머니의 마음은 그렇게 한가로울 수가 없다. 영감이 세상을 뜬 지 이미 13년, 저만큼이나 키워서 오늘 마침내 시집을 보낸다. 결혼식은 간단히, 또한 별일없이 진행되었다. 이처럼 한쪽에서 경사가 있을 때, 신발집의 온 가족은 아직도 장가를 못 간 주인의 처남까지 몽땅 어디로 나들이라도 가는 것처럼, 스무 해를 살아온 이 동네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한번 기울어진 가운은 다시 어찌할 도리 없이 신발집이 몰락하자 청계천변 사람들의 마음은 어둡게 된다. 민 주사는 요사이 마음이 우울하다. 마작노름으로 족히 사오백원을 날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민은 그뿐이 아니다. 그는 경성부회의원 선거전에 출마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기에, 다른 후보자들의 운동원들이 이 일을 폭로할까 봐 걱정이 태산 같다. 또한 안성집이 자기 눈을 피해 젊은 학생놈하고 좋아지내는 것을 우연한 기회에 발견하고는, 가슴이 내려앉을 지경이다. 민 주사는 입안에 가득 고인 쓰디쓴 침을 길바닥에 탁 내뱉고 천변길을 우울하게 걸어간다. 신수 좋은 포목점 주인은 남쪽 천변을 걸어간다. 그는 자기의 매부가 선거에 출마하기 때문에 밑천 들지 않는 인사 라도 열심히 하려고 정신이 없다. 민 주사의 선거사무소는 제법 활기에 넘쳐 있다. 돈을 많이 뿌린 까닭이다. 그럼에도 민 주사는 자기가 어째 꼭 헛수고만 하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다. 갑자기 자기가 변변치 못한 인물로 생각 되어져 부회의원이란 것이 당치도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민 주사는 낮에는 선거 때문에 부산하고, 밤에는 학생놈과 붙어 지내는 안성집 처리문제에 마음이 괴로워, 잠깐 동안에 심신이 극도로 쇠약해졌다. 만돌어멈은 드난살이를 하던 한약국집에서도 쫓겨나, 어디론가 정처없이 사라져버린다. 동제사람들의 축복 속에 결혼식을 올린 이쁜이는 남편의 바람기에 시달린다. 그리고 선거는 마침내 끝이 났는데, 민 주사는 선거에 패배해 병석에 누웠다. 젊은 학생놈과 안성집이 눈에 삼삼하다. 마음고생한 끝에 민 주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담판을 벌이려고 안성집을 찾아간다. 순진한 시골색시였던 금순이는 가족과 헤어져 기미코, 하나코의 방에서 함께 생활한다. 조석 준비와 세탁, 그리고 재봉질이 그녀의 중요한 직무다. 광교에서는 점룡이가 아이스케키를 팔고 있다. 우연히 금순이는 헤어졌던 동생 순동이를 만난다. 순 동이는 한양 구락부라는 당구장에서 게임놀이를 하고 있다. 그러나 순동이는 모범적인 소년이었다. 아버지를 따라 각처로 밥거리를 구하여 고생이라는 고생은 다 해본 터이라 성실하였고, 그래서 주인과 감독의 신임을 얻고 있다. 아버지 용서방은 새어머니의 행실이 정숙치 못해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 그는 지금보다 불행한 적은 없었다며 입맛을 다신다. 계집 경영하기의 어려움은 용서방보다도 오히려 민 주사가 좀더 심각하게 느끼고 있다. 한편 좋은 집안의 가문으로 시집간 카페 여급이었던 하나코는 시집살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시집온 지 달반도 못되어 하나코는 극도로 마음과 몸을 상했다. 시어머니의 구박은 물론이고, 하인배들의 멸시, 그리고 믿었던 남편의 마음조차도 변해버렸다. 전처 소생의 아이들도 끊임없이 괴롭힌다. 이쁜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마침내 이쁜이는 서방에게 쫓겨 어머니에게로 돌아온다. 외로운 어머니는 이번에는 다시 이쁜이를 그 집에 보내려 하지 않고, 이튿날로 필원이를 시켜 딸의 세간을 모조리 찾아온다. 이발소의 귀여운 소년 재봉이는 젊은 이발사 김서방과 밤낮 다툼을 하면서도 좀처럼 이발소를 떠나지 않는다. 이제 얼마 안 가서 이발사 시험에 어렵잖게 합격하리라는 것이 이발소 주인의 말이다.
d. 감상 및 문학사적 의의
이 천변풍경은 박태원의 대표적인 장편으로,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 경성 도심에 대한 기록이라면 천변풍경은 도시의 주변부에 대한 관찰이다. 청계천변은 분명히 도시에 속해 있으면서도 도심과는 다른 공간이다. 현란한 도시문화의 영향으로 천변에도 카페와 구락부 같은 유흥시설이 있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아직 동네아낙들이 모여드는 빨래터가 있고 이웃집 속사정을 제 속처럼 아는 전통적 공동체가 살아 있다. 천변은 생활의 무대이며 도시문명에 속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발소와 빨래터
그런데 천변풍경에 나타나 있는 이 다양한 인물들의 갖가지 행색은 두 가지 방향에서 동시적으로 파악되고 있다. 하나는 천변에 자리잡고 있는 동네의 이발소이며, 다른 하나는 천변의 빨래터이다. 남정네들이 모여드는 이발소에서 그들의 삶의 모습이 투영되고, 빨래터에서 나오는 아낙네들의 입을 통해 온 장안의 화제가 소설 속으로 끼어든다. 이 같은 소설적인 기법은 개별화된 인물들이 보여주는 특이한 행동과 태도를 하나의 공간 속에 배치하는 데 기능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영화기법의 활용
천변풍경 은 그러한 천변 사람들의 생활을 파노라마처럼 잡아낸다. 이 소설에 특별한 주인공은 없으며, 천변과 근처의 상점들 그리고 사람들 모두가 주인공이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을 보여주듯이, 이 소설을 한 장면(그리고 특정 한 인물)에서 다른 장면(다른 인물)으로 넘어간다. 이어지는 장면들 사이에는 주제나 사건의 영속성도 없다. 이 소설이 발표된 1936년 당시, 이는 새로운 기법으로 받아들여져서 작가의 시각이 카메라의 눈처럼 드러난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때부터 천변풍경이 영화의 기법을 활용했다는 지적은 계속되고 있다. 최재서의 평가를 빌면 박태원은 자기 사상에 의하여 어떤 가상적 스토리를 따라가면서 인물을 조종하지 않고, 그 대신 인물이 움직이는 대로 그의 카메라를 회전 내지 우회 하였다는 것이다. 이 소설 전체가 그러한 특징을 유지하고 있는데, 특히 등장하는 인물 중 이 카메라의 눈을 체현하고 있는 인물은 재봉(이발소 소년)이다.
그의 즐거움은 천변을 오고가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 관찰에는 어떠한 목적의식도 없다. 그저 그는 오가는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그들이 어떤 태도로 어디를 향해가는지를 관찰할 뿐이다. 이런 재봉의 시각은 소설 전체를 관통 하고 있는 작가의 시각, 카메라의 눈과 같다. 그러나 장면의 무조건한 배열만으로는 소설의 완결성이 획득되기 어렵다. 작가는 여기서 시. 공간적 폐쇄성이라는 장치를 마련한다. 곧 사건들의 무한한 나열을 막기 위해 시간과 무대를 제한시키고 등장인물의 운명도 이 무대에서 벗어나지 않게끔 조정하는 것이다.
시간적 폐쇄성
시간적 폐쇄성은 1년의 순환을 소설의 시간적 배경으로 하는 데서 생긴다. 이 소설은 정이월에 대독 터진다는 말이 있다. 딴은 간간이 부는 천변바람이 제법 쌀쌀하기만 하다 라는 말로 시작해, 이듬해 같은 시기를 알리는 입춘이 내일 모레라서 그렇게 생각하여 그런지는 몰라도 대낮의 햇살이 바로 따뜻한 것 같기도 하다 라는 말로 끝난다. 그런가 하면 공간적 배경은 천변에 제한되어 있다.
공간적 폐쇄성
주요 등장인물 역시 천변으로 모아짐으로써 공간적 폐쇄성을 강화시킨다. 소설의 말미에서 이쁜이는 천변의 친정으로 돌아오고, 금순이는 가족과 해후하여 천변에 자리잡는다. 이들의 운명은 천변을 뛰어넘지 못한다. 그리고 또 하나 소설 내의 카메라 눈 이라 할 수 있는 재봉이 소설의 첫부분에서 기대했던 일(포목점 주인의 중절모가 벗겨져 개천에 떨어지는 일)이 소설이 끝날 때 일어남으로써, 중심적인 인물이나 사건이 없음으로 인해 생길 수 있는 구성의 해이함은 견제되고 있다. 세태소설인 이 작품의 가치는 일찍이 최재서가 리얼리즘의 확대와 심화 에서 피력한 바 있고, 임화에 의해 세태소설 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는 일제식민지 치하에서 사상이나 성격을 다루는 대신 외면풍경의 묘사에만 치달았음에 대한 비판이다. 외면묘사의 철저화는 내면의 심화와 평행선을 그으며 진행되는데, 이것이 변증법적 전개를 보이면서 새로운 단계를 이룩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한계를 가지며, 곧 이는 1930년대 소설의 한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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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난]
정의
노비, 혹은 그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이 일정기간 상전집에 살면서 안팎의 일을 하던 관습.
내용
노비제도가 붕괴하면서 노비들은 주인집에서 떨어져나와 살 수 있었다. 그렇지만 경제력이 빈약하였기 때문에 완전히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또한 주인도 직접 데리고 있지 못하는 노비를 밖에서 거주하도록 하였지만, 쉽사리 노비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신분제도 붕괴의 과도적 단계에서 이러한 관습이 발생하였을 것으로 추측되며, 1950년대까지도 잔존한 경우가 있었다.
드난살이는 대체적으로 세전비(世傳婢)가 많이 하였다. 대개 7세경에 드난을 시작하여 22∼25세까지 봉사를 하였으며, 드난기간 중에 혼인을 하더라도 주인의 집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 남편도 그 기간에는 동네의 다른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든가, 아니면 처와 더불어 같은 집에서 일을 하였다. 이런 경우에는 남편에게 보수가 지급되었다.
자녀가 출생하더라도 드난의 의무기간 중에는 아이를 데리고 봉사하여야 했다. 드난을 마치고 나간 비의 여식은 다시 7세가 되면 드난살이를 하였다.
한편 아들은 드난할 의무는 없었지만, 노의 신분을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비가 3, 4명의 여식을 낳았을 경우에 1명 정도는 드난이 면제되었다.
드난을 마치고 다른 지역으로 전출한 노비의 자녀는 원칙적으로 그 부모가 소속되었던 주인의 재산이 되지만, 현실적으로 소환할 수 없을 경우에는 드난을 시키지 못하였다.
드난살이를 하였던 사람들은 비록 주인집의 가구원으로서의 대우를 받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수시로 출입시키는 대가로 일상생활의 경제적인 보조를 받았고, 길흉사 특히 본인의 장례에는 도움을 얻었다.
참고문헌
『동족부락의 생활구조연구』(김택규, 일조각, 1964)
[네이버 지식백과] 드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C20 – 감자 / 김동인(1900-1951) (0) | 2017.09.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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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19 – 탁류 (濁流) / 채만식(蔡萬植, 1902-1950) (0) | 2017.08.31 |
C17 – 혈의 누 (血의 淚) / 이인직(李人稙, 1862-1916) (0) | 2017.08.29 |
C16 – 홍길동전(洪吉童傳) / 허균(許筠, 1569-1618) (0) | 2017.08.29 |
C15 – 어머니 (Mat') / 고리키 (Maxim Gor'kii, 1868-1936) (0) | 2017.08.28 |
C17 – 혈의 누 (血의 淚) / 이인직(李人稙, 1862-1916)
(출전 :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고전소설적 요소와 현대소설적 요소를 함께 가지고 있는 최초의 신소설이자 그 대표작. 1906년에 <만세보>에 연재된 바 있고 이듬해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던 신소설로, 이 소설은 청일전쟁 때에 가족과 헤어지게 된 한 소녀가 일본. 미국에서 겪는 시련을 중심사건으로 삼고 있다. 비록 왜곡되고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이 소설은 개화기 당시의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작가의식의 면에서나 서술방법의 면에서 신소설의 모델이 되고 있다.
a. 생애와 작품활동
호는 국초, 경기도 이천 출생. 1902년 정부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동경정치학교에 입학했다. 1903년 귀국하고 1904년 일본육군성 한국어 통역관으로 제1군 사령부에 배속, 1906년 <만세보>의 주필이 되어 최초의 신소설 혈의 누를 발표하면서 계속 많은 작품을 썼다. 1907년 이완용의 도움으로 경영난에 빠진 <만세보>를 인수, <대한신문>을 창간하여 사장에 취임한 후 이완용의 비서를 지내는 등, 친일적 행위를 했다. 1908년 원각사를 중심으로 신극운동을 전개, 설중매 와 같은 신소설을 신극으로 각색하기도 했으며, 같은 해에 은세계를 직접 무대에서 상연했다.
1910년 한일합병이 조인될 때는, 이완용의 수족이 되어 그 매개역할을 담당하기도 했으나 한일합병 이후 숨은 공로자임에도 불구하고 흔한 작위도 받지 못하고, 경학원 사성이라는 말직에 보임되었다. 그러나 신문학사상 근대소설의 성격을 잘 파악하고 구상력과 성격묘사에도 능했으며, 최초로 사실적 산문문장을 구사하여 신소설을 개척한 공로는 크다.
그의 작품인 귀의 성은 무기력한 양반가문의 본처와 평민층의 딸인 첩사이의 갈등을 매개로, 봉건적 가족제도의 불합리성과 몰락하는 양반계급의 무력한 면을 보여준 작품이다. 치악산은 계모를 둘러싼 고부간의 갈등, 갑오개혁 이후의 신. 구사상의 대립, 미신타파 및 하급계층의 반발 등을 내용으로 한다. 한편 그의 작품 중 주제가 가장 뚜렷하고 신극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 은세계는 처음부터 끝까지, 부패와 학정으로 양민을 수탈하는 양반관료에 대한 평민 최병도의 현실고발과 반항을 보여준 작품이다. 반봉건의식이 강한 최병도가 봉건관료에게 수탈당하기를 거부하다 맞아죽는 전반부와, 최병도의 자식인 옥순 남매가 미국에 유학갔다 귀국하여 반민중적이고 사대주의적 태도를 보여주는 후반부로 나누어져 있다.
b. 신소설과 이인직
신소설
신소설 이란 이인직의 혈의 누를 필두로 한 20세기초에 등장한 일련의 개화기 소설의 총칭이다. 고소설과 현대소설의 교량적 역할을 한 과도기적 성격의 신소설은 정치의식의 대두와 함께 반봉건적인 주제를 담고 있으며, 인간성의 자유로운 발현을 억압하는 사회적 모순을 고발하고 있다. 신소설 이란 명칭은 신소설 작가들과 신소설을 간행한 출판사들에 의해서 사용되었는데,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일본과 중국에서도 신소설이란 용어가 등장하였다. 현재는 개화기에 출현한 소설에 대해 양식상의 명칭으로 이인직. 이해조. 최찬식 등에 의해 창작된 작품들을 지칭하는 말로 통하고 있다. 신소설이 등장하게 된 요인은 국어운동의 요구와 독서대중의 확대, 기업적 성격을 지닌 근대적 출판사의 출현과 직업적 작가의 등장, 개항에 의한 서구의 근대적인 개화사조의 수용, 일본과 중국의 영향 등을 들 수 있다. 표현면의 특징은 언문일치에 가까운 문체를 시도하고 서술의 역전을 많이 구사하여, 단선적 시간경과에 의한 사건전개를 지양했다. 그리고 사건의 분절화를 정착시켜 산문적인 문장에로의 발전을 가져왔다. 주제면의 특징은 전근대적인 가치관인 유교적 질서, 즉 가부장제. 남성위주. 신분차별 등을 비판하면서 신교육관. 신여성관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미신 등 주술적 세계관을 탈피하고 합리적 세계관을 주창하였으며, 자주독립, 근대적인 민주사상 및 악에 대한 과감한 저항과 징계를 보이고 있다. 주제상으로 보아, 신소설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문명개화에 대한 소박한 낙관주의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새로운 풍습과 지식. 문물은 곧 아름다운 미래에의 야곡이며, 그것의 원천인 바깥세계는 동경과 선망의 대상이 된다. 주인공들은 위기상황에서 흔히 일본인. 서양인의 도움을 받으며 무한한 기대를 품고 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이와 같은 안이한 낙관주의로 인해 신소설은 새로운 삶의 가능성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천박한 개화주의로 전락하였으며, 이인직 등의 작품에서는 당대의 역사적 정황을 몰각한 친일적 환상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 점은 같은 시대의 역사. 전기류가 대외적 자존의 문제에 민감한 의식을 지녔던 사실과 대조적이다.
이인직
이인직은 신소설의 특성을 파악, 뛰어난 구상력과 노련한 성격묘사 등으로 신소설을 개척한 공로가 크다. 요컨대 신소설의 문학적 가치를 확립시킴으로써 장래에 싹트게 될 한국 근대소설의 기초를 이룩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인직이 문학사적으로 갖는 의의는 크게 3가지로 볼 수 있는데, #1최초로 사실적 산문문장을 구사하여 신소설 문단을 확립한 점 #2극장 원각사를 세워 신극운동에도 공헌한 바가 크다는 점 #3 그러나 혈의 누 은세계 등의 작품을 통하여 친일의식과 반민족의식을 강렬히 드러내고 있음도 기억해야 한다.
c. 주요 등장인물
이 작품은 조선에 청일전쟁을 불러들인 봉건제도를 비판하고, 신교육. 신문명을 받아들일 것과 자주독립 및 자유연애사상을 다루고 있는 작품으로, 주요 등장인물은 다음과 같다.
김옥련: 청일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일본인 군의관에게 구출되었다가, 다시 구완서의 도움으로 미국에 유학간 여주인공.
구완서: 부국강병의 뜻을 품은 유학생.
김관일: 옥련의 아버지. 청일전쟁을 통해 부국강병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유학감.
d. 작품의 주요내용
평양성이 청일전쟁의 와중에 휘말리자, 피난 가던 중 남편과 자식을 잃은 한 부인이 모란봉을 정신 없이 헤매며 찾고 있다. 딸의 이름을 부르며 걷는 동안, 어느새 날은 어두워져 앞길을 분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데, 마침 잃어버린 아내를 찾아 헤매던 어느 외간남자와 부딪혀 봉변을 당할 뻔했으나, 일본헌병에게 구출되어 이튿날 무사히 집에 오게 된다. 그녀의 남편 김관일은 아내를 찾아 헤매다가 집에 돌아와 걱정스레 기다리며 생각에 잠긴다. 남의 나라 사람들이 남의 땅에서 전쟁을 치르는 현실과, 평양성 백성들이 저승의 염라대왕과 평양감사 염라대왕 둘을 모셔야 하는 모순된 현실의 원인이 모두 나라가 부강하지 못한 탓이라 생각한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는 큰일을 이룰 것을 결심하고 그 길로 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이튿날 집에 돌아온 김관일 아내 최씨부인은 날마다 딸과 남편을 그리며 돌아오길 기다리나 끝내 돌아오지 않자, 비관하여 대동강물에 몸을 던진다. 그런 와중에 최씨부인의 친정 아버지 최주사는 부산에서 사위를 만나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후, 딸과 손녀의 안부를 확인코자 평양에 온다. 그러나 이미 그의 딸은 유서를 남겨놓고 자살하러간 후였다. 하지만 최씨부인은 뱃사공에게 구출되어 며칠 뒤 다시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와 극적인 상봉을 한다. 한편 옥련은 피난중 어머니를 잃고 헤매다가, 폭탄 파편에 맞아 부상을 입지만, 일본인 군의관에게 구출되어 목숨을 건지게 된다. 군의관은 옥련을 치료한 후 집으로 데려갔지만, 집엔 아무도 없고 최씨부인이 벽에 써놓은 유서만 남아 있어, 불쌍한 처지에 빠진 옥련을 자신이 거두기로 한다. 비록 부모와 헤어져 소식조차 모르는 처지이긴 하나, 옥련은 군의관 정상소령의 부인에게 보내져 그녀의 보살핌으로 오사카에서 새 삶을 시작한다. 원래 총명하고 예쁜 탓에 부인의 사랑을 받으며 일본에서 학교도 다니는 등, 어느 정도 정상적인 삶을 꾸려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정상이 전사하자 차츰 부인의 태도는 바뀌어간다. 게다가 개가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옥련으로 인해 놓치게 되자, 그녀는 옥련을 노골적으로 박해하기 시작한다. 마음 착한 옥련은 참으려고 노력해보기도 하고, 불쌍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자살하려 하기도 하나, 모두 이루지 못하고 견디다 못해 결국 가출하고 만다. 갈 곳이 없는 옥련은 단지 오사카를 떠날 결심으로 도쿄 행 기차를 타는데, 거기서 우연히 구완서와 마주친다. 처음엔 같은 조선인이고 말이 서로 통한 것 때문에 얘기를 나누던 중, 옥련의 불쌍한 사연을 전해들은 구완서는 옥련에게 자신과 함께 미국으로 유학갈 것을 권한다. 구완서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청일전쟁과 같은 불상사를 다시는 당하지 않기 위해 조선을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처럼 부강하게 만들겠다는 포부를 지니고 유학길에 오른 터였다. 따라서 그는 옥련에게도 공부를 마친 후 조선의 여자교육에 힘쓸 것을 부탁하고 옥련은 이에 동의한다. 미국에 도착한 그들은 워싱턴에서 언어장벽을 극복하고 공부하게 되며, 옥련은 고등소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기에 이른다. 조선인 여자로서 역경을 딛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기에 이른다. 조선인 여자로서 역경을 딛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게 되자 옥련에 관한 신문기사가 실리는데, 바로 옥련의 아버지 김관일이 이를 우연히 보게 된다. 그는 곧 딸을 찾기 위해 신문에 광고를 낸다. 이 광고를 보게 된 옥련은 드디어 아버지와 만나 회포를 푼다. 김관일은 그간의 사정을 듣고 난 후 딸의 혼인문제를 꺼내는데, 옥련과 구완서는 자신들의 문제이므로 자신들이 의논하여 결정할 것을 주장하고 결국 서로 결혼할 것을 약속한다. 남편으로부터 옥련의 사연을 편지로 전해들은 최씨부인은 딸이 귀국하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옥련 또한 집으로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면서 상편이 끝난다. 하편은 7년 후에 <매일신보>에 연재되다 미완으로 끝난 모란봉이다.
e. 감상 및 문학사적 의의
최초의 신소설이면서도 대표작으로 인정되고 있는 혈의 누는 고대소설적 요소와 현대소설적 요소를 함께 지니고 있다. 이 소설은 1906년 7월 22일부터 10월 10일까지 <만세보>에 연재된 작품으로서, 청일전쟁으로 인해서 옥련일가가 뿔뿔이 흩어지는 시기에서부터 옥련이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서 아버지와 만나 어머니의 소식을 듣고, 어머니에게 편지하기까지의 10년간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구체적이고 현실감 있는 배경. 주제를 당시의 시대적 문제와 직결시켰다는 점 등이 보다 근대적 요소로 등장하였으며, 관용적인 한문구를 배제하고 일상적 구어체의 표현력을 충분히 활용한 문체 또한 현실감을 높이는 데 중요한 몫을 하고 있다.
최초의 신소설
여주인공 옥련의 일생은 고대소설 숙향전의 주인공 숙향의 일생과 비슷한 면이 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생하나, 위기 때마다 조력자를 만나 결국은 행복한 결말을 이룬다는 대체적인 일생의 유형이 동일하다. 다만 혈의 누 는 옥련의 일생을 일본. 미국 등 외국의 문물과 관련시켜서 근대적인 성향을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고대소설과 다르다. 신소설의 양면성과 과도기적 성격은 이러한 사실에서 기인된다. 신소설은 혈의 누 이후 많이 양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용과 형식상의 괴리로 인하여, 질적 향상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결과 혈의 누가 신소설의 최초의 작품이면서도 대표적인 작품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친일적 개화론
그러나 주제면에서 신교육사상이나 자유결혼사상 등의 개화사상을 보여주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권선징악적인 주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한 형식면에서도 일대기적인 형식, 해피엔딩의 구조 그리고 우연성에 의한 소설의 전개 등을 취하고 있어, 일본이나 미국의 배경 외에는 고소설을 보는 이상의 신선미를 주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신문명에 대한 일방적인 경도와 낙관적인 개화주의에 기울어 있다는 부정적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의 소설들에 등장 하는 김관일. 강동지. 최명도 등은 조선말기에 형성된 평민층의 전형이며, 그들은 개화사상을 깊이 인식하고 봉건관료의 학정에 강하게 저항한다. 작가는 이들을 통해 조선말기의 사회. 경제적 갈등을 구체적으로 그려내고 반봉건 문명개화사상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이 봉건사회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주역으로 나가지 못하고, 봉건관료체제에 대한 맹목적인 부정과 근대문물제도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에서, 결국 친일 개화론으로 기울어지는 한계를 보여준다. 이런 태도는 혈의 누와 은세계 에서는 외세에 대한 찬양으로, 귀의 성에서는 양반에 대한 평민들의 허황된 복수로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구성과 묘사에 있어 놀랄만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특히 혈의 누에서는 청일전쟁중 한 여인이 가족을 찾아 헤매는 장면을, 이전 소설의 순차적 평면적인 서술과는 달리 인과관계에 의한 입체적인 서술방식으로 그려냈다. 각자의 신분에 맞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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