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30 – 신논리학(Novum Organum) / 프렌시스 베이컨(Bacon Francis, 1561~1626)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고대 이래의 철학과 지식의 폐단을 통감한 베이컨이 이를 비판하고 자신의 새로운 방법론을 개진한 책, 당시까지의 지식의 폐단을 “종족, 동굴, 시장, 극장”의 이른바 4개의 우상으로 분석, 정리하였으며 근대과학의 실험적 방법의 기초가 된 자신의 새로운 방법을  귀납법 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식논리학. 즉 오르가논 에 대해 새롭다는 의미에서 이 같은 제목을 붙였다.


a. 생애와 작품활동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말한 베이컨을 엘리자베스 시대의 영국 철학자. 정치가, 수필가로 귀납적 방법에 의한 경험론의 기초를 마련했다. 런던에서 대법관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지식욕이 왕성하여 엘리자베스 여왕의 귀여움을 받았는데, 여왕은 그를 어린 궁정대신 이라 불렀다. 1573년(12세)에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스콜라 철학을 강요하는 학교 분위기에 불만을 품고 자퇴한 후, 부친의 권유로 프랑스에서 3년간 문학과 과학을 공부했다. 1579년(18세)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법률공부를 시작했다. 젊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관심 영역은 법률, 정치, 철학, 역사, 문학 등 폭넓은 것이었으며 능력도 뛰어났다. 그는 이미 인간지식을 총체적으로 재구성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584년 23세의 나이로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는데, 그의 처녀 연설은 엘리자베스 여왕을 불쾌하게 만들어,

의회와 궁정정치에서 보인 줄기찬 봉사에도 불구하고 그는 발탁되지 않았다. 그는 가난했지만 관리가 되려는 그의 열망에는 변함이 없었다.

한편 그는 복합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리턴 스트레이치는 그를 가리켜 보기에 따라서 색이 변하는 양색비단 같은 사람이라고 평했고, 매콜리에 의하면 그는 직함, 후원, 권위의 상징물, 관직, 대저택, 멋진 정원 등을 갈망했던 사람이었고, 강한 애정을 느낄수 없으며, 큰 위험에 맞설 수도, 위대한 희생을 할 수도 없는 사람으로 묘사했다. 그는 여왕의 애인이자 총신이었던 에식스백작의 가까운 친구였음에도 불구하고 에식스 백작이 여왕의 총애를 잃고 반란을 기도했을 때, 그에게 반란죄로 사형을 구형하였다. 이 사건으로 그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배은망덕하다는 비난을 받았음은 물론 여왕 재직시에는 빛을 보지 못했다. 제임스 1세가 즉위하자 그는 비로소 왕의 다음 자리인 대법관이 되었는데, 그의 일생에 오점을 남긴 사건이 일어났다. 소송 당사자로부터 뇌물을 받은 것이 문제가 되어 의회로부터 유죄판결을 받고, 런던탑에 4일동안 감금되었다 풀려났다. 재판관이 피고인들로부터 선물을 받은 것은 당시의 관행이었는데, 이 점에서 그 역시 시대를 초월하지 못했다. 이 사건을 두고 나는 50년이래 가장 공정한 재판관이었다. 그러나 이 판정이야말로 200년이래 의회의 가장 공정한 판결이었다 라는 코멘트를 남겼다. 그후 고향에서 조용히 학술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얼마 후 국왕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뉴 아틀란티스 라는 유토피아 문학을 저술했는데, 이는 국가와 우수한 학자군에 의하여 통치되어야 한다는 플라톤의 국가 와 비슷한 것이다. 1626년(65세) 3월 런던에서 하이게이트로 가는 도중, 고기를 눈 속에 묻어두면 얼마 동안이나 썩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그는 이것을 당장 실험해보고 싶어졌다. 한 농가에 들어가 닭 한 마리를 사가지고 털을 뽑고 배를 갈라 눈 속에 묻었다. 그러는 동안 오한과

피로가 겹쳐 가까운 저택으로 옮겼다. 죽어가면서 실험은 .... 훌륭하게 성공하였다 고 썼는데 이것이 그의 최후의 글이 되었다.


b. 저술배경과  학문의 대혁신  구상

 베이컨 이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카톨릭 교회의 교리로 채택되면서 중세학의 절대적 귄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베이컨이 생존한 16-17세기는 바야흐로 이탈리아 르네상스에서 시작된 문예부흥운동이 유럽 각국에서 새로운 지적탐구의 기운을 일으키고, 베이컨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인쇄술, 화약, 나침반 등의 3대 발명은 학문상 실제적으로 빛나는 성과를 보여주고 있었다. 당시의 영국은 엘리자베스 여왕과 제임스 1세의 절대왕정하에서 약육강식적인 초기 자본주의가 본원적 축적을 강행하며, 선진강국인 스페인에 대항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기운 속에서 제임스 1세의 대법관이었던 베이컨은 오랫동안 아리스토텔레스적 스콜라 철학에 억눌려 부진한 상태에 있었던 학문의 세계를 개혁하기 위해 학문의 대혁신 이라 일컫는 장대한 체계적 저술을 구상했던 것이다. 그는 학문의 대혁신을 위한 시도로 6부로 된 대작을 구상하였다. 제 1부는 우리 인간의 지식의 현황을 비판하고, 제 2부는 새로운 과학적 탐구방법을 기술했으며, 제 3부는 경험적인 테이터의 수집법, 제 4부는 실용적인 새로운 과학적 방법의 해설, 제 5부는 가상의 결론을 제시하고, 마지막 6부에서 새로운 방법으로 얻어진 지식을 통합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야심적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실현된 것은 3부까지인데, 특히 1부인 학문의 진보 2부인 신논리학 이 유명하다. 제 1부인 학문의 진보에서 베이컨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아는 것이 힘이다, 자연은 복종함으로써만 정복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자연의 올바른 해석을 위해 잘못된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제 2부 신논리학 에서는 4개의 이돌라(우상)을 설명하고 자연의 해석방법에 들어가는데, 여기서 귀납법을 취하는 겸험론을 제시한다, 그는 신논리학 에서 종래 편중되어온 연역법을 없애고 귀납법을 학문의 진정한 방법으로 학립할 것을 제창하였다. 중세학문은 신학중심이었기 때문에 신을 가장 보편적인 존재라고 한 교의를 제 1원리로 하여 출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때문에 논리학에 있어서도 보편적인 것에서 개별적인 것을 추론하는 연역법이 그 반대인 귀납법보다 존중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베이컨의 생각에는 연역법이 새로운 진리 발견에 결코 합당한 것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연역법을 대표하는 3단논법이 그 대전제 가운데 이미 포함되어 있는 진리를 추출하여 결론을 내리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학문의 임무는 이미 낡아 버린 쓸모 없는 논리에 집착하지 말고 자연을 정복하기 위해 새로운 진리의 발견을 목표로 해야 한다. 


c. 신논리학 의 내용

 베이컨의 저서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평가되는 신논리학은 신기관 이라고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서인 오르가논이 연역법인 것에 대항하여 새로운 연구방법이라는 의미의 신기관으로 명명하고 귀납법을 주창하였다. 본서는 2부로 나누어지는데, 전편에서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설명한다. 지식이 힘이지만 인간이 지식을 추구할때 편견이나 선입견이라는 장애물이 놓여있다. 그는 이 장애물을 우상(이돌라)라 부르고, 4개의 우상을 지적하고있다. 


 종족의 우상, 인류라는 종족에 보편적으로 내재하는 선입견으로, 모든 사물을 인간 본위로 생각하는 데서 오는 편견이다. 감각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물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든지, 자기가 기쁘다고 꽃이 자기를 보고 웃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등이다.


 동굴의 우상, 종족의 우상과는 달리 개개인이 자기 나름대로의 성격, 습관, 경험 등의 특수성 을 기준으로 모든 사물을 인식하고자 하는데서 생기는 편견이다. 그가 자라온 환경이나 그가 받은 교육 등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이를테면 배금주의자가 모든 사람을 돈의 많고 적음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는 것처럼, 자기의 편견에 빠지는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마치 그것은 좁은 동굴 안에서 넓은 세계를 보려는 일이나 다름없다. 


극장의 우상. 자기 자신의 주관보다 기존의 전통이나 권위, 학설, 등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데서 비롯된는 선입견이다. 이를테면 무대 위에서 연출되는 가공적인 이야기를 맹신하는 것과 같다. 또한 역사상 드러난 독단적인 학설들이 그러한 경우다. 


시장의 우상, 사회생활에서 언어를 잘못 사용하거나 참뜻을 잘못 이해하는데서 생기는 선입견으로, 인간의 언어가 교류되는 과정에서 개념적 약속이 틀리거나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애매한 말을 사용함에 따라 파생되는 혼란들이다. 예를 들자면 세상 소문이 사실로 믿어지는 경우이다.


귀납법, 그는 위에서 지적한 편견들을 제거함으로써 지식의 확대에 기여하지 못하는 연역적 3단 논법을 배격하고, 새로운 진리 탐구 방법으로 실험과 관찰에 기초를 둔 귀납법을 제 2편에서 중시했다. 열의 형상에 관한 예로써 귀납법을 설명한다. 먼저 태양광선, 유성, 불꽃 등과 같이 열을 발산하는 열의 목록표를 만든다. 그 다음 달빛이나 어둠 속에서 빛나는 물고기 등과 같은 다른 조건은 비슷하나. 열이 존재하지 않는 사례를 모은 열의 부재표를 만든다. 마지막으로 조건의 변화에 따라 여러 가지 정도로 열이 발견되는 사례에 관한 정도표를 작성한다. 예를 들어 말라리아의 열, 동물의 신체부위에 따라 다른 체온, 타는 석탄이나 목탄에서 발생하는 여러가지 열 등을 제시한다. 그런 다음 이 3가지를 기초로 열이란 중심에서 주변으로 퍼지며, 위로 급하게 움직이는 일종의 운동 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모든 현상이 명백한 결론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므로, 특수한 사례를 수집하는 것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d. 비판적 평가

 기존의 학계에 절대적 귄위를 유지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르네상스 이후 일기 시작한 지적 탐구의 기운으로 새로운 학문적 분석도구를 필요로 하였고, 이에 귀납법을 통한 신논리학은 시대적 요청이었다. 베이컨은 새로운 세계를 향한 문호를 개방하고 일체의 편견을 배격하였다. 그의 이러한 학문적 자세는 영국의 왕립학술원과 프랑스 계몽주의 시대의 백과전서의 집필자인 디드로와 달랑베르 등에게도 영향을 주었고, 또한 경험론에 입각한 그의 윤리사상은 홉스를 거쳐 공리주의 윤리사상으로 발전하였다. 한편 레오나르도 다빈치, 갈릴레이 이래로 과학적 추구에 있어서 이론과 실제의 결합은 존중되어왔으나. 베이컨만큼 의식적으로 그 점을 강조한 사람은 없었다. 그는 신논리학 에서 실험을 통하지 않은 이론, 체계적 이해가 없는 실험은 다 같이 무용한 것이라고 경고하고, 위대한 진보는 이론과 실제의 결합이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대담하고 솔직하게 종래의 사변적 학문을 파산선고하고. 실증적 학문의 권위를 고양시킴으로써 막 싹트기 시작한 근대자연과학의 길을 개척한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베이컨의 말처럼 지난 수천 년 동안 실험가들은 개미와 같이 논리적 뒷받침 없는 사실의 수집을 하였고, 철학자들은 거미와 같이 실험을 무시한 사색에만 열중하였던 것이다. 17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과학자들은 사고와 사실, 논리와 실험을 함께 결합시키는 꿀벌과 같은 작업을 하여 위대한 성과를 보이게 된다. 그러나 아는 것이 힘이다, 자연은 복종함으로써 정복될 수 있다 는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듯 그의 목적은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방법의 확립에 있었는데. 자연을 정복대상으로 본 그의 자연관은 최근에 와서 데카르트나 뉴턴에게 퍼붓는 유기체적 세계론자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리고 수학에 대한 몰이해 때문에 자연 속의 보편적 법칙을 양적 관계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프랑스의 데카르트와 비교되곤 한다.


C29 – 유토피아(Utopia) / 토마스 모어(Tomas More, 1467-1545)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비극적 최후로 인해 영국의 소크라테스로 인식되는 모어가 현실세계의 불합리한 모순을 파헤치고 인간의 절실한 염원을 담은 진보적 사상서, 이후 유토피아 문학의 실질적인 시작과 동시에 모델 역할을 하여, 엥겔스에 의해 베이컨의 ‘뉴아틀란티스’, 캄파넬리의 ‘태양의 도시’와 함께 르네상스 시대 3대 유토피아 작품으로 간주된다. 그 속에서 우리는 극소수의 법률로 만사가 순조롭게 운영되고 덕이 존중되는 가운데, 자유와 평등이 실현되는 영원한 사회를 만날 수 있다.


a. 생애와 작품활동

 에라스무스는 자랑스런 친구 토머스 모어가 런던탑에서 순교 했을때 토머스 모어는 누구보다도 순결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다. 영국은 과거에도, 그리고 이후로도 그와 같은 천재성을 다시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 모어는 일반적으로 영국의 법률가, 정치가,휴머니스트로 유토피아를 저술하여 근대  최초의 사회주의자로 불린다. 런던의 재판관의 아들로 태어나, 라틴어 학교에서 수학한 후 이어 옥스퍼드대학에 입학하여 그리스어와 철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2년이 지난 후 그는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이 학교를 그만두고 런던에서 법률공부를 했다. 1499년에 에라스무스와의 첫만남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그들 사이의 우정이 시작되었다. 유럽휴머니즘의 우두머리였던 에라스무스는 모어가 본래 지니고 있던 성향을 강화시켜 역사연구를 다시 시작하도록 했다. 모어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사람은 영국의 휴머니스트이자 신학교수인 존 콜렛이었다. 이 저명한 휴머니스트들과의 우정 어린 교분은 모어의 재능과 인품의 계발을 촉진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미 어린 시절에 시작된 학문연구와 당시의 경제관계에 대한 탐구를 심화시켜주었다. 그렇지만 모어는 직업적인 법률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으며, 곧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변호사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 24세 때 하원의원이 되었으나, 헨리 7세가 의회에 청구한 왕녀의 결혼비용의 삭감을 주장하여 왕의 미움을 받고 정계를 물러난다. 그후 헨리 8세가 즉위할 때까지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왕의 사절로 유럽대륙에 파견된다. 그가 대륙에 머물면서 여가를 이용해 집필한 것이 유명한 유토피아 다. 1517년 왕의 간청에 의해 청치가 생활에 복귀, 하원의장을 거쳐 1529년 대법관이 되었다. 1532년 헨리 8세는 형수이자 부인인 캐서린이 왕자를 낳지 못하자 그녀와 이혼하여 궁녀 앤 볼레인과 결혼한다. 모어는 앤 볼레인을 정통왕비로 선언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1534년 그는 국왕이 영국교회보다 우위에 있음을 골자로 하는 소위 수장령을 거부했기 때문에 대역죄로 기소되었다. 이처럼 법률가로서 또한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서의 양심을 지키다 1년동안 런던탑 에 투옥 되었다가 참수 되었다. 카톨릭 교회는 모어의 400주기 기일에 즈음하여 그가 교황 정책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그를 성자의 명부에 올린다.


b. 시대적 사상과 배경

 양이 사람을 먹어 치우다, 르네상스 휴머니즘의 탁월한 인물들 중 한 사람인 모어의 이념과 저서에는 그 시대의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의 갈등이 반영되어 있다. 15세기 말에는 16세기 초 사이에 영국에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토대를 형성한 변혁의 서막 즉 봉건질서의 해체가 일어났다. 모어는 본원적 축적의 시작과 아울러 새로운 부르주아 계급의 부상, 그리고 이와 동시에 대규모로 이루어진 농민들의

프롤레타리아화와 빈곤화를 체험했다. 에라스무스가 후텐한테 보낸 서한에 따르면 모어는 전제정치를 극도로 혐오했으며 또 그만큼 평등을 소중히 여긴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모어가 오랜 세월에 걸쳐 전문가적인 안목으로 관찰한 경제적 이면은 다음과 같다. 즉 그는 양모업에 도입되기 시작한 자본주의적인 메뉴팩쳐 경제가 마치 소름끼치는 페스트 와 같이 어떻게 온 나라를 뒤덮으며 많은 들과 집. 그리고

도시들을 파괴하고 거기에 살던 사람들을 쫓아내는지, 그리고 양을 치기위해 쳐놓은 울타리가 얼마나 엄청난 농민과 소작인들을 토지에서 몰아내는지, 그리고 직업과 고향을 잃어버린 대중들이 얼마나 빈곤하고 가련하며 또 어떻게 부랑자나 거지로 전락하게 되는지를 똑똑히 보았다. 국왕 헨리가 통치한던 시절만 해도 72,000여 명에 이르는 크고 작은 도둑들이 처형되었는데, 이를 보고 모어는 영주와 용병들이야말로 진짜 도둑들이라고 낙인찍었다. 모어는 인클로저 운동의 사회적인 결과를 인간들을 잡아먹은 양떼들로 형상화했다. 이런 점에서 모어는 마르크스로부터 자본의 본원적 축적을 탁월하게 묘사한 증인이자 비평가라는 찬사를 들었다. 그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완전히 제거시킴으로써만 착취와 적대적 계급이해관계가 해소될 수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공산제적 공동삶 추구, 사적소유관계가 존재하는 곳, 돈이 모든 가치의 척도가 되는 곳, 이런 곳에서 정당하고 행복한 정치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 국가의 복지에 이르는 유일한 길을 소유의 평등을 도입하는 길이다. 소유물을 어떤 식으로든 평등하고 정당하게 분배하고 모든 사람에게 행복을 안겨주는 유일한 수단은 온갖 사적 소유를 모두 철폐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모든 것은 공동의 것이다 라는 선언이 지배 엘리트를 향한 반면, 유토피아 의 근본명제는 유토피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공산주의적인 재산공동체를 그 핵심사상으로 한다. 모어의 유토피아 와 더불어 시작되어 길고 복잡한 길을 거친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이러한 사회질서를 옹호한 프랑스, 영국, 독일의 중요한 사상가들을 거쳐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이르렀으며, 이들에 의해 사회주의는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c. 유토피아의 주요내용

 유포피아는 그가 여행중 네델란드의 한 여행자 라파엘로부터 들은 애기를 모티브로 하여 엮은 것인데, 이 책은 2편으로 되어 있다. 1편은 당시 영국의 정치상황을 비판하고, 2편에서는 유토피아의 제도와 생활을 다루고 있다. 당시 영국에는 근대적인 산업과 상업이 싹트기 시작하여 농업위주의 장원제도가 쇠퇴하게 되자 귀족들은 저마다 공유지를 사유화했다. 따라서 농노제도는 무너지고 일반서민들의 어려움은 심각한 상황이었다. 군주와 고관은 영토나 재산증식을 목표로 광분하고 있기 때문에 국왕이 자신보다 국민의 부에 관심을 쏟아야 한다는 충고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보고, 절대왕정을 비판하는 동시에 봉건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기에 따르는 혼란을 열거했다.

특히 사유재산에 대한 획득욕심, 자본주의적 영리활동을 비난하면서 카톨릭의 가부장적 왕정을 이상으로 했다. 모어는 스스로에게 엄격하여 금욕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고, 그러기에 당시 영국귀족들의 사치를 용서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모든 범죄가 빈곤으로부터 비롯한다고 보고, 백성의 빈곤은 주로 나태한 귀족들의 사치와 탐욕의 결과라고 믿었다. 이상이 1편의 내용이다. 2편은 9장으로 나누어지는데, 여기에 그려진 유토피아의 모습을 재구성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유토피아 는 1760년의 역사를 가진 아름다운 왕국이다. 4방 200마일의 섬나라로 대륙에서 뻗어나온 갑 모양의 땅이었는데, 그 지방을 정복한 시조 유토푸스가 15마일 길이의 호를 파게 하여 대륙과 분리 시켰다. 


1. 정치, 이 섬에는 같은 크기에 같은 관습을 가진 54개의 도시가 있고. 각 도시에는 매년 한 번씩 세 사람의 대표를 수도인 아모로우트에 보내어 국정을 토론케 한다. 시민들은 주로 농상에 종사하는데, 가족단위로 일정한 기간 동안 시골의 농장에서 일하게 마련이기 때문에 누구나 농업기술을 터득하고 있다. 왕은 가장 민주적인 방법으로 선출되고, 30세대가 한 단위가 되어 시포그란트 라는 수장을 뽑고, 200명의 시포그란트가 모여 종신직 왕을 뽑는다. 왕을 뽑은 시포그란트가 지켜야 할 가장 큰 율법은 국사를 결정함에 있어서 최대의 공정을 기하며, 시민을 노예화 하거나 정권을 함부로 바꾸는 반역은 삼가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2. 경제, 주요산업은 농업이지만, 모든 시민은 제각기 한 가지씩의 기술을 가지고 있다. 1인 1기의 원칙인데, 시포그란트들은 시민들이 놀고 먹는 것을 감시한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감시하는 것이 아니고 하루 6시간 일하고, 8시간 자며, 나머지는 각자의 취미에 따라 독서를 즐기며, 지상에서의 행복을 생의 목표로 삼는다. 그렇기 때문에 수요를 공급하기에 족할 정도의 노동만이 허용된다. 6시간씩만 일해도 모두가 워낙 사치를 모르고 검소하게 살기 때문에 물자가 남아돈다 철저한 계량경제를 실시하고 있으며, 도시인구의 조절법도 마련되어있다. 한 도시에 6,000세대 이상 살 수 없으며 한 세대는 최소 10명, 최대 16명의 가족밖에 가질 수 없다. 또한 여자는 남편에게 자식들은 부모에게 절대 복종한다. 각 도시에는 병원이 4개씩 있고 환자를 제외한 나머지 시민들은 공동식당에서 공동으로 장만한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화폐의 유통이 전혀 없는 공동생활을 한다. 소를 잡는 일을 비롯하여 천한 일은 노예들이 맡는다. 유토피아는 죄를 지은 죄인들을 사형에 처하지 않고 노예로 삼아 일생 동안 일을 시킨다.


3. 학문, 학자로서 성공할 자질을 가진 사람은 노동을 면제받고, 학문에 몰두하여 높은 수준의 학식을 과시한다. 그리고 모든 어린이들은 일반교육을 받으며, 또한 대부분의 남녀들은 평생 동안 여가를 이용하여 공부를 계속한다.


4. 도덕, 시민들은 인간영혼의 사멸을 믿고 후세에 선에 상을 받고 악에 대한 처벌을 받는다고 믿는다. 그들에게 선이란 이성과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것이고, 이기심으로 남의 자유나 쾌락을 빼앗는 것은 사악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들이 추구하는 낙은 진정한 덕성과 양심을지켜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황금이나 화사한 옥에 대해서는 냉담하다 못해 죄악시 한다.


5. 결혼, 결혼에 대해서는 엄격한 율법이 있다. 남자는 22세, 여자는 18세에 결혼 할 수 있는데, 한번 결혼하면 이혼할 수 없다. 또한 간음하기 위해 남을 유혹하는 사람은 간음한 사람과 똑같은 벌을 받는다.


6. 법률, 유토피아의 법은 극소수이고, 법률가가 따로 없는 것이 특징이다. 가장 소박한 해석이 언제나 올바른 해석으로 간주되기 때문에누구나 법률 전문가다.


7. 신앙생활, 거의 완전한 신앙의 자유가 있으며, 또한 사제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으나, 기도교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역시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도 다른 사람들이 기독교를 택하는 것을 말리려 하지 않고, 기독교인을 공격하지도 않는다. 


8. 전쟁, 그들은 매일 군사훈련을 받지만 전쟁을 싫어하고 전쟁을 하더라고 전쟁에서 얻은 승리를 자랑하지 않는다. 그들은 싸움 대신 기도를 드리고 자기 편이 이기고 있으면 병사들 사이에 뛰어들어 너무 가혹한 행위를 하지 않도록 타이른다. 유혈의 승리를 좋아하지 않고 적을 지혜로 굴복 시키는 것이 권장된다.


d. 유토피아와 역 유토피아

 유토피아, 유토피아라는 단어는 모어가 그리스어의 ou와 topus를 결합해서 새롭게 만든 말로 아무 데도 없는 장소를 의미한다. 그러나 모어는 이 저서의 마지막에서 유토피아 사회의 국민생활은 다른 나라 사람들도 본받을 만한 점이 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유토피아 인들의 생활을 본받으라고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랬으면 하는 마음은 간절하다 라고 말한 것처럼, 단순히 실현 불가능한 꿈이 아니라 도달목표로서의 이상을 가리킨다고 하는 측면도 포함하고 있다. 즉 유토피아는 현실로부터 동 떨어져 있어 현실과 대립하지만, 한편으로 현실과 완전히 절연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유토피아는 존재초월자 라는 것을 그 본질로 하고 있으면서도 현실과 관련을 가지고 있고, 그 사회적인 기능으로서는 현실에 대한 비판, 변혁의 지침이 되는 것이며, 단순히 막연한 꿈, 소원, 희망이 아니라 사회체제에 관한 구상을 포함하는 것이 엄밀한 의미의 유토피아이다. 제 1부가 당시의 영국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으로 가득 차 있는 전형적인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사회에 대한 이러한 위기의식에서 제 2부의 이상사회가 구상되는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모어의 유토피아 이외에도 베이컨의 뉴 아틀란티스, 캄파넬라의  태양의 도시 등이 출판된 것은 이러한 위기의식의 소산이라 보여진다. 산업혁명이 꽃피던 19세기에도 프랑스의 생시몽, 푸리에, 오언 등에의해 유토피아 정신이 이어지고 19세기 말 벨러미는 미국에도 되돌아오면 을 출판하여 자본주의 미래사회를 낙관적으로 그렸으며,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이르러 사회주의는 과학의 수준에 도달한다.

 역 유토피아, 그러나 19세기 말에는 벨러미를 비판하는 모리스의 유토피아 소식은 기계에 의한 환경파괴와 노동의 인간지배를 극복하여, 즐거움 그 자체인 노동 이 실현되는 사회를 구상하고 자유와 평등에 대한 동경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웰스는 타임머신 이라는 공상과학소설에서 기계문명 발달의 악몽을 보여주는 역유토피아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다. 이 흐름은 1930년대를 배경으로 경제적 위기와 사회적 불안을 배경으로 하여,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탄생시키고, 오웰도 1984년에서 일당 독제의 경찰국가에 관한 악몽을 묘사하여 냉전체제하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역유토피아들은 기계기술의 진보에 관한 낙관주의나 사회계획에 대한 안이한 긍정에 대한 반발로 씌어진 것이다.


e. 현대적 의의 

 위에서 살편본 것처럼 모어는 플라톤의 국가 의 영향을 받아, 16세기 영국의 정치적 투쟁 속에서 새로운 이상향의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다. 모어가 그린 유토피아의 모습은 플라톤의 이상국가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주민들은 될 수 있는한 탐욕을 최소한 억제하도록 훈련되며, 공동생산과 균등분배로 경제생활를 영위한다. 그의 유토피아적 사회란 온건한 청교도주의와 도덕적 발전을 강조하는 인본주의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의 종교적 성격의 개혁시도는 휴머니스트의 온건함과 보수성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특히 제 2권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유토피아의 공유제도, 통치자의 선거절차와 통치형태, 신앙과 도덕의 문제, 전쟁관 등이다. 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유토피아의 통치자는 그가 반역을 음모하지 않는 한 종신제다. 그런데 선거유세시 과대한 자기 선전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통치자는 국민의 도덕적 양심에 의한 엄격한 판단을 통해 선출되고, 선출된 다음에는 국민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는다. 이런 점은 오늘날 민주주의 제도가 가질 수 있는 선거부정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모어는 헨리 8세의 이혼 문제에 끝까지 반대하여 참수형을 당했다. 확실히 그는 비도덕적인 국가권력에 맞서 자신의 양심을 지킨 근대적 지식인의 표징이었다. 모어는 신앙에 대한 확실한 신념이 있었고, 자신이 국왕에게 요구한 것도, 자신의 신념을 평화롭게 지키는 것을 허용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종교계에서는 유토피아보다 카톨릭의 휴머니스트, 순교자로서의 모어를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처럼 새로운 학문 에 헌신한 르네상스 학자, 성공한 변호사, 16세기의 근대적 특징과 새로운 경제와 새로운 통치술에 대한 반대자, 중세 수도원적 이상향의 고수자인 모어는 자신의 이념보다 더 강력한 이념에 의해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 비극적 최후로 인해 그는 영국의 소크라테스로 비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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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클로저 운동 (출처:나무위키)


최근 수정 시각: 2017-08-12 22:49:33


"양은 온순한 동물이지만 영국에서는 인간을 잡아 먹는다."- 토머스 모어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던 곳에 이제는 한 사람의 양치기와 그의 개가 있을 뿐이다." - 휴 라이머



1. 성립 개요

2. 진행 과정

3. 반발

4. 결과

1. 성립 개요[편집]


Enclosure. 영국에서 일어난 사회변화현상. 운동이라고 해서 어느 집단이 "으쌰으쌰! 이런 것을 하자!" 가 아니라 그냥 당시의 경향, 트렌드를 나타내는 용어다. 따라서 인클로저 '운동'보다는 인클로저 '신드롬'이나 인클로저 '열풍' 정도로 번역하는게 당시의 시대상황을 보다 잘 드러내는 번역일 것이다. 한국어로 풀어쓰면 울타리 치기 운동으로, 소유 개념이 모호한 공유지(共有地)나, 서로 간의 경계가 모호했던 사유지 간에 양이나 가축이 도망가지 못하게, 혹은 자신의 소유권을 명확히 하기 위해 울타리를 쳐서 자신의 영역을 확인했다. 


기원을 찾자면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대개는 16~17세기 튜더시대 인클로저를 1차, 의회에 의해 주도된 18~19세기 인클로저를 2차로 구분한다.


2. 진행 과정[편집]


14~15세기 무렵 밭을 매년 연속해서 경작할 수 있는 4윤작법이 발명되었다. 기존의 농사법은 농사를 짓고나면 3년간 밭을 묵혀두어야 하는 탓에 농민들이 자기땅을 두고도 영주의 장원을 경작해주며 식량이나 종자를 지원받는 일이 잦았으나, 4윤작법이 도입되자 굳이 자기 밭을 묵힐 필요가 없게된 농민들은 장원에 의존하지 않게 되었다. 이에 지주들은 장원을 해체하고 그땅을 농노들에게 소작지로 내주게 된다. 농민들이 자신의 밭을 가지고 농사짓기가 수월해지자, 농토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이 때문에 토지의 소유권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장원이 성행하던 시대에는 농사를 지을 수 없던 숲이나 들 등의 임야토지를 모두가 공유하고 있었다. 이 공유지는 흉년시에 먹을 야생식물[1]을 채취하거나 가축의 방목이나 벌목등을 목적으로 이용되어 왔으나, 소작계약이 성행한 뒤 토지의 수요가 높아지면서 이들 공유지도 어느덧 각각의 지주들에 의해 사유지가 되어 울타리가 쳐졌다. 


이후에도 영국사회는 계속 변화하였는데, 이를 설명하던 주장[2]은 다음과 같다.


중상주의의 대두로 해상무역과 시장을 통해 농산품을 팔수 있게 되었다.

그 중 시장을 잘 활용한 농민들은 부농이 되었고, 반대로 활용하지 못한 농민들은 빈농이 되었다.

시장경쟁에서 도태된 농민들은 자기땅을 팔고 부농들에게 고용되어 임금노동자가 되었다.

그러나 부농들은 점차 농사보다는 일손이 적게드는 양목축지를 더 선호하여 농경지를 목축지로 전환하였다.

부농의 고용은 줄어들고, 노동자가 된 빈농들은 일자리를 잃고 도시로 유입되어 도시노동자가 된다.


당시에 살았던 토마스 모어는 목축지 증가로 농경지가 줄어들어 일자리를 잃는 농촌노동자가 많아지자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표현한 바 있다. 그러나 목축지의 증가로 인한 농경지의 감소는 과장된 것으로 오히려 최근의 연구성과에서는 1차 인클로저시기에 농지가 더욱 증가하였다는 것이 밝혀졌다.[3][4] 게다가 정작 도시의 노동자들은 외지인보다는 주로 도시출신이거나 인접지역출신인 경우가 많았고, 농촌에서도 빈농들 대다수가 자기땅을 팔고 임금노동자가 되었지만 자기 고향을 떠나는 일[5]은 매우 드물었다. [6] 그러니까 3번째까지는 유효하고 그이후 항목은 무효하다. 


고용주와 노동자의 관계가 보편화되고, 임금노동자가 된 농민들은 주로 부농에게 고용되거나, 아니면 농촌의 수공업이나 상업등에 종사하게 되면서 농촌에서의 직업분화를 촉진시켰다. 


하지만 차지농과 지주를 중심으로 토지소유가 집중화, 대형화되는데에 반해 공유지들이 사라짐으로써, 영세농민들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임금노동자라고 할지라도 그리 풍족한 삶을 살지는 못하였다. 종전에는 흉작으로 피해를 입었다 하더라도 공유지에서 야생식물을 채취해서 먹고 살거나, 임목을 채취하여 연료나 자재등을 공급받았지만, 인클로저가 진행되고 공유지가 사라지면서 그러한 것이 불가능해졌다. 게다가 노동자들이 차지농에게 고용되더라도, 차지농들은 일손이 많이 필요한 수확기 가을에 주로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다른 계절에는 고용하지 않았으므로 항상 일자리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이에 농촌의 소득격차는 점점 더 벌어져갔다. 


보통 인클로저의 시기를 1차와 2차로 구분할 때에, 1차는 양목축지를 대폭 늘린 것으로 보고, 2차는 농경지를 늘린 것으로 보는 것이 기존의 의견이었으나 앞서 설명했듯이 1차 때는 목축지보다 실제로는 농경지의 증가가 더 두드러졌다. 굳이 구분하자면 1차의 경우 진행주체가 지주나 농민등 민간인 경우였고, 2차의 경우 집행주체가 지역민의 청원을 받은 의회라는 정도가 차이점이다. 전자는 주로 지주나 농민들의 단순한 합의에 의존하였으나, 후자는 의회를 통하여 법적인 절차로 소유권을 정하는 경우가 다소 많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법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지역민간에 단순합의로 진행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후자의 뚜렷한 의의는 토지에 대한 소유권이 관습 뿐만이 아니라 법으로 확인되고 보장되었다는 데에 있다.


3. 반발[편집]


원래 인클로저가 진행되기 전까지는 들이나 숲이 포함된 땅들은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일종의 공유지였고, 이 공유지에서는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소나 돼지를 방목할 수 있었고, 난방에 쓸 땔감이나, 집을 만들 자재나 농기구나 도구로 쓸 목재를 채취할 수도 있었다. 또한 흉작시에는 도토리 등과 같은 야생식물을 채집하여 먹는 등 생계에 크게 보탬이 되었다. 관습적으로 공유지에는 일종의 공공소유권 같은 것이 존재하여서 특정인이 땅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농작에서 수입이 변변치 않거나, 크게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이 공유지에 크게 의존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인클로저가 진행되면서 이 공유지와 공동권이 침해되고, 이 땅들이 사유지로 나뉘자 더이상 예전처럼 임목이나 야생색물을 채취하며 생계를 보조할 수 없었다. 이에 공유지에 의존하던 농민들은 대규모 반대운동을 펼치는데, 대표적으로 땅의 울타리등을 부수며 일어났던 1549년 케트의 난(Kett's Rebellion), 1607년 중북부에서 일어난 농민반란, 1607년 뉴턴의 난(Newton Rebellion)등이 있었다. 16~17세기 말고도, 19세기 의회 인클로저 당시에도 영세민이 많은 지역에서는 지역민들의 저항과 반발으로 인클로저가 늦게 실행되거나, 실행을 할때에도 애로사항이 많았다.


4. 결과[편집]


토지소유권이 확보되자 농토의 수확량이 증가하였고,[7] 증가한 수확량은 도시의 인구증가를 효과적으로 뒷받침 하였다. 또한 농민층이 분화하여 임금노동자가 생겨나자 농촌에서는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 외에도 고용주와 노동자라는 근대적인 근로계약이 자리잡게 되고 이들 농촌의 노동자들 중 일부는 농촌지역의 수공업에 종사하게 되면서 농촌수공업과 상공업 발전에 영향력을 끼쳤다. 


전반적으로 인클로저는 영국이 산업혁명을 수행함하는데 필요했던 도시와 농촌의 노동력을 증가시키고, 제도적으로 사유재산권과 근로계약을 확립하는 등 전국적인 산업기반을 마련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직업분화와 함께 농민들의 소득격차도 벌어짐에 따라 빈부격차와 실업율, 빈민구제에 대한 각종 사회문제가 대두되었다.



C28 – 군주론(II principe) /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 1469-1527)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분열된 조국을 위해 여우와 사자라는 군주의 두 가지 역활을 강조하는 정치 기술의 서, 즉 르네상스의 중심지로서 번영했던 중부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피렌체가 몰락하기 시작한 시대적 위기에 대응하여, 이탈리아의 구원과 갱신을 담당할 수 있는 새로운 유형의 국가를 창건할 군주에게 요구되는 정치기술을 논하고 있다. 이 책은 베일 속에 가려져 있었던 인간의 정치적 본질을 드러냄으로써, 정치를 완전히  세속적인 세계이해에 기초하여 파악한 최초의 근대적인 정치이론서로서 평가된다. 


a. 생애와 작품활동

 흔히 약육강식의 폭군지상주의로 인식되어 있는 마키아벨리, 그는 진정 권모술수의 대명사인가, 아니면 철저한 현실주의자인가? 마키아벨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과 동시대의 인물로, 르네상스 운동의 절정기인 1469년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태어난 외교관, 정치학자. 역사학자이다. 당시 이탈리아는 내부적으로 밀라노 공화국, 피렌체 공화국, 베네치아 공화국, 교황령 국가. 나폴리 군주국 등의 도시국가로 분열되어 있었고, 외부적으로는 프랑스와 독일의 침략으로 혼란한 상황이었다, 그의 젊은 시절 피렌체는 메디치 가문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지도자인 로렌초가 죽자 1494년 메디치 일가는 추방되고 피렌체는 공화제가 되었다.  그는 피렌체 공화국의 외교관이 되어 프랑스, 독일 등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각국의 권력자와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1512년 피렌체 공화국은 무너지고 메디치가가 복귀하자 그는 곧바로 사직 당했다. 그러자 그는 피렌체의 교외에서 그가 지난날 만났던 각국의 지도자들의 정치행태와 조국이 처한 정치상황을 관조하며, 14년동안 군주론 등의 저술작업에 몰두하다. 58세로 세상을 떠났다. 

 주요작품으로 군주론에서는 주권자로서의 자격와 행동원칙, 리비우스론에서는 국가의 자유와 독립보전, 전술에서는 군대와 병사, 피렌체의 흥성과 메디치가 사이의 관계를 밝힌 피렌체사 자국어에 대한 찬사와 존경을 표현한 언어에 관한 대화, 당시 사회의 모순과 비정상을 풍자한 황금당나귀, 여자에 대한 무시와 경멸을 표한한 대악마 벨화골 이야기 등이 있다. 그러나 그의 문학작품 중 최대걸작은 풍자희극  만드라골라 로, 보카치오에 의해 나타난 르레상스 기의 사회적 타락상을 그의 예리한 문학적 재능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탈리아 연극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b. 시대적 상황과 마키아벨리즘

 마키아벨리와 그의 저서 군주론 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처절하고 혼란스러웠던 이탈리아 반도의 현실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시대적 상황, 피렌체와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싹튼 르네상스시대의 이탈리아를 전 유럽의 (화원)처럼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은 정반대이다. 정치적으로는 갈등과 혼란의 연속이 19세기까지 계속되었다. 그가 생존했던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외부적으로는 프랑스, 독일이 각각 통일국가 형성을 위해 발전하는 것과는 달리, 로마제국 멸망 후부터 계속된 내부적 분열이 더욱 악화되어 프랑스와 독일의 침략이 노골화되고, 특히 십자군 전쟁 이후 발생한 여러 도시국가들은 혼란을 더욱 가증 시켰다. 르네상스의 중심지인 피렌체도 메디치가 의 독재시대로, 그가 태어날 당시에는 메디치의 손자인 로렌초가 전제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마키아벨리가 태어난 1496년은 또한 프랑스의 샤를르 8세가 분열상태의 무력한 이탈리아를 짓밟은 해였다.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태어난 마키아벨리는 그의 천재성을 조국 이탈리아를 구원하는 방향으로 발휘했다 그는 조국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은 정치적 해결에 있다고 보고, 그의 독창적인 정치사상을 구상하기 시작한다.

즉, 정치를 윤리, 도덕과 분리시켜 객관적, 과학적 기초 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하나의 통치기술로 본 것이다. 그 당시 그는 피렌체의 외교사절로서 로렌초의 사망, 프랑스 침입, 로렌초를 계승한 피에로 추방, 예언자 사보라롤라의 등장과 화형, 국가간의 무자비한 투쟁과 비윤리적인 군주를 목격하며 상호화해를 위해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바로 그 시기에 이탈리아 정계에 혜성처럼 나타나 군주론의 주인공이 된 체사레 보르지아가 부친인 교황 알렉산더와 프랑스를 업고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을 목표로 세력을 확대해나갔는데, 이에 크게 당황한 피렌체 측에서는 마키아벨리를 보르지아에게 보내 수교를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마키아벨리는 보르지아와 만남을 통해 그의 인격, 목적달성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단호한 자세, 대담성, 세심함, 행동에 있어서의 잔인함을 높이 평가하였다.  군주론 에 나타난 그의 정치적 사상은 이미 이때 확립되었던 것 같다. 여기에서 그는 보르지아 개인의 인간성이나 도덕적 행위를 정치적인 것과는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처리하는 특이한 정치철학을 구체화시켰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조국통일의 등불로 기대를 걸었던 보르지아도 1503년 부친인 교황이 별세하자 정치력을 잃어, 마키아벨리의 꿈은 수포로 돌아간다. 1512년 피렌체는 또다시 혁명이 일어나 피렌체는 다시 

메디치가 의 전제시대로 들어가고, 마키아벨리는 구정권에 재직하였다는 이유로 1년간 억류생활을 한다. 그후 다시 공직에 복귀되나 다시 오해를 받아 재투옥된다. 석방된 후 일체의 속세를 멀리하고 산카시노의 시골에서 여생을 보내면서 저작생활에 몰두한다.  

 마키아벨리즘, 근대 정치사상사의 고전적 저작 중에서 군주론 만큼 논의를 불러일으킨 것은 없다. 급기야 마키아벨리즘 이란 새로운 정치용어와 사상까지 생겨났는데, 과연 이것이 마키아벨리의 의도인지, 아니면 후세인들이 자신의 필요에 의해 아전인수격으로 왜곡한 것인지 문제제기가 불가피하다. 본서가 1532년 출판되자, 맨 먼저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종교계였다, 교황의 무능과 탐욕을 비판한 구절이 문제가 되어 교황옹호파인 예수회를 중심으로 군주론 소각 등 전면적인 탄압이 시작되어, 급기야  금서령 이 내려졌다. 이 같은 감정적인 차원의 대응과는 달리 학문적인 비판도 제기 되었다. 프랑스의 법학자 이노센트 젠틸레는 군주론 에 담긴 정치사상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여러가지 역사적 사실의 오류를 열거하고 자기의 정치사상을 표명하였다. 그가 바로 군주론의 본래 의도를 왜곡해서 마키아벨리즘 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그래서 마키아벨리의 사상은 자기의 권력확대를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술로 둔갑하여, 이후 루이 14세 등의 독재자들에게는 복음서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면 과연 마키아벨리가 울분을 머금고 은둔 생활에서 집필한 군주론 의 집필동기는 무엇이며,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군주상 은 어떤 것인가. 그는 이탈리아의 통일을 위해서는 먼저 내부적인 단결과 외세의 격퇴가 필요하다고 보고, 그를 위해 강력한 군대와 폭군적인 전제군주제가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이 새로운 군주와 그가 영도하는 국가는 과연 어떤 정책으로 이탈리아를 구제할 것인가. 이러한 논점을 그의 다년간 경험과 학식, 그리고 천재성으로 밝혀나간 것이 군주론 이다. 그는 강력한 정치체제를 위해 위대한 군주와 강력한 군대, 풍부한 재정이 필수적이며, 방법론상으로 군주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 어떤 수단도 허용되며 군주의 행동에는 도덕적 요소가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한 군주는 항상 국민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으면 군주가 역경에 처해 있을 때 아무런 자원도 갖고 있지 않는 것이 된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군주는 먼저 냉철한 심사숙고형이어야 하며 조국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종교나 도덕을 초월하여 지와 용으로 다스릴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선정을 위해 국민의 마음을 항시 파악하고, 이를 이용 또한 만족시킬 수 있는 총명함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군주의 행동요강이 바로 군주론 에서 그가 밝히고자 한 핵심사항이다. 이처럼 이탈리아의 통일을 위해 강력한 국가가 필요하며. 이것은 전재군주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일시적 수단방법이 그의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정치적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방법, 권모술수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마키아벨리즘으로 불리게 된 것은 그이 저서 군주론 에서 그가 이러한 대담한 주장을 하면서 터다. 그래서 마키아벨리의 인생은 그의 사후에 시작되었다. 는 말이 나왔다.


c. 군주론의 내용

 이 책의 전체적인 구성은 잘 정리되어 있으며 저자는 이탈리아 산문의 거장답게 아름다운 문체로 각 장을 논리적으로 서술하고 있어 이해하기 쉬운 드문 정치철학서이다.  군주론 의 중심사상은 군주란 무엇인가, 그는 어떻게 권력을 획득하였으며 그것을 어떻게 유지하는가. 그가 권력을 잃었다면 그 원인은 어디 있는가에 대한 물음과 답이다.  군주론은 메디치 가문에 바치는 내용의 서문과 전 26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 구성을 보면 1-11장: 각종의 군주국, 특히 신흥군주국의 통치방법, 12-14장: 군주의 군대와의 관계 15-25장: 군주가 추구해야 할 행위의 준칙 26장: 군중에게 호소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본서의 하이라이트는 악명 놓은 18장(군주는 어떻게 신의를 지키는가)으로 마키아벨리즘의 정수가 나타나고 있는데, 이하에서는 이 부분을 중점적으로 살펴본다.

 제 16장 관대함과 인색함에 대하여, 우선 군주는 밑에 있는 사람들을 잘 다스리기 위해 관대해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 모든 사람에게 관대해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관대하려다 보면 무능한 군주가 될 가능성이 높고, 오히려 인색하다는 평판을 듣는 군주가 더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음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군대에게 재산이나 약탈을 나눠줄

때 군주는 관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군대가 그를 배신할 가능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제 17장 잔인함과 인자함에 대하여, 사랑 받는 것과 두려움 받는 것 중 어느 편이 나은가, 그 대답은 공포와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만일 택일하려면 공포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최소한 미움은 받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래 이기주의적이 성격이 있기 때문에, 사랑에 의해 어떤 목적을 달성하면 곧 저버리게 되며, 이에 한해 공포는 처벌의 두려움으로 유지하기 때문에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제 18장 군주는 어떻게 신의를 지킬 것인가, 군주는 신의를 지키는 미덕을 갖추어야 하나, 어떤 경우에나 신의를 지키려다 보면 군주가 곤란에 빠질 수도 있으므로 상황에 따라 처신하여야 한다, 특히 새로운 군주는 운명의 흐름과 변화에 따라서 여우의 지혜와 사자의 위엄을 갖추어야 한다. 여우는 이리에게 공격 당할 수 있고, 사자는 인간이 만든 올가미에 빠질 염려가 있기 때문에, 이리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사자의 위엄 과 올가미를 발견할 수 있는 여우의 지혜를 함께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가 묘사하는 군주의 모습은 반인반수가 되어 인간과 짐승을 함께 부릴 수 있어야 하며, 그 이상적인 모습을 여우와 사자의 두 역할을 하는 군주의 모습에서 찾았다. 또한 군주의 신뢰성 유지방법에 대해 사려 깊은 군주는 자기의 이익에 위배하면서까지 신뢰를 유지하려고 할 필요는 없다, 또 약속을 지킬 수 없는 경우 설사 정당한 이유가 있더라고 그 변명을 하는 군주는 실패한다. 인간은 극히 단순하여 현재의 필요한 것에 늘 대응하고자 한다. 남을 속이는 자는 속아 넘어가는 상대를 찾게 마련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견해의 자연스런 결과로 군주에 대해 타인과의 약속은 언제나 회의적이어야 한다 고 충고하고 있다.

제 19장 경멸과 증오를 피하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군주는 신하나 백성으로부터 존경 받지는 못하더라도, 경멸 받지는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군주에 대해 군대는 강한 인상과 능력을 요구하고 백성들은 온화함과 관대함을 기대한다. 이 양쪽의 요구에 적절하게 대응하여 최소한 경멸 받지 않도록 해야 하고, 특히 백성들로부터 미움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제 20장 군주가 구축하는 요새 및 그 비슷한 것들은 과연 유익한가. 군주는 백성에게 무기를 줄 때 잘 생각해서 무장시켜야 한다. 특히 새로운 영토를 차지했을 때, 그곳 원주민들에게는 무기를 주어서는 안된다. 완전히 자기 편이라고 믿어지는 원주민들에게 무기를 줄수는 있지만 이때도 신중하여야 한다.

제 21장 명성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군주가 명성을 얻기 위해서는 위대한 사업과 싸움에서의 용맹스러움을 보여주어야 한다. 위대한 사업은 영토를 늘리는 것을 말하고, 전쟁에서는 승리하는 것도 이 포함된다. 다시 말하면 영토를 늘리고 지키는 과정에서 용맹을 떨치면 명성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또 군주는 위엄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군주국 안에 있는 단체들을 잘 장악해야 하고, 외국과도 적절한 동맹을 맺어서 국가를 지켜야 한다.

제 22장 군주의 측근대신,

제 23장 간신을 어떻게 피할것인가, 군주가 유의해야 할 일은 자기 밑의 대신들을 잘 뽑아 쓰는 일이다. 군주는 다른 사람이 행동하거나 말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할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일단 군주가 그 판단력을 가지고 선택한 신하에 대해서는 존중해주고 명예와 부를 주어 자신을 계속 따르게 해야하고, 다른 것들을 욕심내지 않도록 여건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선택할 때는 그 사람이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인지 아닌지에 대해 깊이 고려해야 한다. 또 주위에 몇몇 지혜 있는 사람들을 두어 바른 말을 할 수 있게 하되, 모든 백성과 대신들이 바른 말을 하게 해서는 군주의 위엄이 떨어지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제 24장 이탈리아 군주들은 왜 영토를 잃었는가. 나라를 잃는 이유로는 운명적인 것도 있지만, 대부분의 군주가 무능했기 때문임을 강조한다. 

제 25장 운명은 인간사에 어느 정도 힘을 가졌으며, 그 운명에 어떻게 대항할 것인가, 운명은 저항력이 없을 때에만 큰 힘을 발휘하고 제방이나 축대를 잘 쌓아놓으면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운명의 신은 여자이기 때문에 부드러운 것보다는 오히려 맹렬하게 대응하는 것이 더 좋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운명은 내 친구 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제 26장 야만인들로부터 이탈리아 해방을 위한 권고, 결론적으로 강한 지도자가 와서 이탈리아인 만으로 구성된 강한 군대를 조직하여, 야만인에게 공격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해방의 길임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끝맺고 있다.

 미덕은 폭력에 대항하여 일어난다/ 싸우면 곧 이기리라/ 이탈리아 인의 마음속에서 / 아직도 그 옛날의 용맹이 사라지지 않았거늘.  


d. 정치학적 의의와 그 영향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마키아벨리는 군주론 이란 작은 책에서 분열된 조국의 통일을 희구하면서 강력한 군주에 의한 전제정치를 주장하여, 군주권의 우위에 의한 통치자의 지배원리를 강조하였다. 그는 역사적 수난과 정치적 암흑기를 살아가면서, 로마 제국적인 유럽질서의 회복을 유일한 희망으로 생각하면서 이 최대선을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바쳐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다. 즉 그는 법에 의한 유럽사회의 회복과, 이를 위해 잠시나마 일단 무정부상태를 수습할 수 있는 인물과 수단으로 체사레 보르지아와 그의 잔인무도한 정치수단과 방법을 빌렸을 뿐, 그의 최종목적을 묘사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과정에서 저자는 인간성에 대한 존경보다는 인간의 심리적인 약점을 사정없이 폭로하면서 새로운 정치의 기술을 논하고 있는데 이러한 점에 소위 마키아벨리즘의 본질이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근대 이후 그의 영향은 지속적으로 미쳤다. 17세기 영국의 정치 철학자 홉스의 리바이어던에 영향을 미쳤고, 독재자들이 애독하는 핸드북이기도 했다. 무솔리니, 히틀러, 스탈린 등이 애독한 것으로 전해지며, 특히 나폴레옹은 밤마다 베개 밑에 군주론 을 놓고 잤다고 알려져 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반 마키아벨리즘(1740)을 써서 마키아벨리즘의 비인도성을 비판했지만. 실제로는 대왕 자신도 마키아베리즘을 구사했다. 한동안 마키아벨리는 악마의 화신처럼 증오를 받기도 했으나. 이제 정치사상가 중에서 마키아벨리를 그렇게 격렬하게 비난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늘날 마키아벨리즘은 당시 이탈리아의 정치적 상황에서 생긴 필요악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어느 역사적 사실은 그 사실이 이루어진 시대의 역사적 환경속에서만 진실하게 이해 될 수 있다 - 19세기 독일의 역사가 랑케

인류가 타락하지만 않았어도 이 모든 기술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 마키아 벨리



C27 – 고백록(Confessions) /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 - 430)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루소의 고백록, 톨스토이의 참회록,과 함께 서양의 3대 참회록으로 불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이 고백록은 그의 젊은 날의 지적 방황과 종교적 모색을 기록학 책이다. 즉 고백록은 중세 유럽이 기독교적인 사상의 틀을 갖추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그 자신의 자서전이자, 한 인간의 내면에 일어나는 어둠과 빛, 선과 악, 육체와 영혼의 처절한 갈등이 표현이라 할 수 있다.한 구도자가 보여주는 영계와의 대화가 오늘에 사는 우리의 메마른 영혼에 깊은 울림을 줄것이다


a. 생애와 작품활동

 게르만 민족의 이동이 시작된 로마 말기의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교부철학의 집대성자로 스토아 학파의 토마스 아퀴나스와 함께 중세기독교 최대의 사상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의 생애는 그의 저서  고백록 속에 잘나타나 있다. 그는 당시 로마의 속국이던 북아프리카의 루미디아 지금의 알제리에서 세금징수관이자 마니교 신자인 아버지와 독실한 크리스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시, 암송, 웅변 등에 소질을 보이기도했고, 독학으로 라틴문학, 특히 베르길리우스를 애독했으며 수사학에도 뛰어났다. 청년시절에는 타락한 생활을 하기도 했으며 19세 때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 를 읽고 철학에 눈을 떴다. 그리하여 참지혜를 구하기 시작하는 과정에서 크리스트 교에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성서의 소박한 문체나 카톨릭 교회의 보수성에 만족하지 못하여, 빛과 어둠이라는 이원론을 주장하는 마니교의 합리주의에 이끌렸다. 그뒤 9년 이상 마니교를 접하면서 마니교적인 미학서 미와 적합을 썼다. 그러나 383년 로마에서 신플라톤주의 학파를 접하고 마니교를 결별했으며, 이듬해에는 밀라노에서 수사학 교수가 되었다. 386년 플로티노스 등의 신플라톤주의 책을 읽고 불변의 빛을 보는 신비적 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때 진리의 존재를 확신하게 되었다. 또 밀라노 주교인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듣고

감동하여, 그해에 크리스트 교로 개종하였다. 개종 후 교수직을 그만두고 밀라노 교외의 산장에서 토론과 명상을 하면서 독어론 등 철학적 대화편을 저술하였다. 거기서 성서의 시편 제 4편을 읽고 받은 감동은 그의 정신에 큰 전환을 가져왔다. 388년 고향으로 돌아와 새로운 친구들과 수도원 생활을 하는 한편, 391년 히포의 주교 발레리우스의 요청에 따라 사제가 되었고, 396년 발레리우스가 죽자 히포 주교가

되었다. 민중들과의 접촉을 통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색은 성서의 문구 속에서 신의 말을 찾아내어 전달하려고 하는 해석학적인 방법을 취함으로써 더욱 깊어져 갔다. 397년 부터 고백록을 쓰기 시작하여 3년만에 끝내고, 400년경부터는  삼위일체론 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이어 426년에는  신국론 을 완성했다. 그는 34년간이나 주교직을 지켜나가면서 크리스트 교 사상의 형성에도 큰 역활을 하였다. 430년 반달족이 히포를 공격하였는데 그로부터 3개월 후 76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으나, 반달족은 3개월동안 히포를 유린하면서도 아우구스티누스의 도서관과 성당은 손대지 않았다 한다.      


b. 교부철학과 스콜라 철학

 흔히 중세를 암흑의 시대라 한다. 왜냐하면 신학이 중세의 학문과 사상을 압도하여 철학이나 자연과학 등 기타 학문은 그 시녀역활에 만족해야 했기 때문이다. 중세신학의 발전의 주체세력은 파리 대학을 중심으로 한 대학교수들이었으므로, 신학은 학교:스콜라,사람들의 학문:스콜라티스즘이란 명칭이 붙었다. 중세신학의 발전은 크게 2분될 수 있는데 1. 예수사후 8세기까지 신부들에 의해 발전된 교부철학과 2. 9세기에서 15세기까지 발전된 스콜라 철학을 들수 있다. 

 교부철학, 교부철학은 주로 크리스트 교의 정통교리를 하나로 체계화하여 교회의 권위를 확립하고자 하는 아우구스티누스 등의 교부들에 의해 발전되었는데, 그는 크리스트 교의 신앙을 그리스의 이성으로 설명하기 위해 초월적인 이데아 사상을 강조한 플라톤주의를 받아들였다.

 나는 믿기 위해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알기 위해 믿는다 는 말로써 신앙과 이성의 타협을 시도하였다. 그의 크리스트 교 사상이 잘 방영된 신국론에서 그는 신국, 즉 내세는 지상의 세속적 역사과정 속에 투영된 것으로서, 인간역사의 과정이 신의 섭리의 실현이라고 주장 하였다. 그는 또 인간은 카톨릭 교회를 통해서 신국에 들어갈 수 있으며 교회 는 인간구원을 위한 유일한 기관이라고 생각했다. 

 스콜라 철학, 스톨라 철학은 교회의 교리철학으로서 중세철학과 학문의 절정을 이룬 중세의 종합적 세계관이다. 대표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플라톤보다 아리스토테렐스에 더 가까운 수정된 실제론을 주장하여, 보편적 존재는 영원불변의 실재성을 갖지만 본질로서 개체 안에 존재한다고 주장하여 교회가 수용할 수 있는 최종적인 공식을 만들어냈다. 그는 대표적 저술인 신학대전에서 스콜라 철학의 정수를 제시하였는데, 1. 자기를 부정하는 학설을 제시하고 2. 자신이 부정하고자 하는 학설을 제시하며 3. 자기자신의 의견을 진술하고 4. 자기자신이 의존하는 논거를 제시하며 5. 최초에 지적한 이론을 논박하는 독특한 논리전개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였다. 그는 관찰된 사실에 입각하지 않는 순수한 합리적인 인간사고의 역사에 있어서 최고의 지적 성취를 이루었다.


c. 고백록의 내용 

 저자가 46세때 지은 크리스트 교로 개종하고 영세를 받은 지 12년 만에 과거의 생활을 반성하고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한편, 외롭고 선한 신을 찬미하는 내용이다. 전 13권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은 1권에서 9권까지는 주로 어머니에 관한 내용이고, 10권은 자기반성을 담은 자서전적인 부분이며, 11-13권까지는 창세기 앞부분의 뜻을 밝히고 자기의 종교적 입장을 선명히 나타낸다. 제 1권은 처음에 신을 찬미하여 하나님 안에서 쉬기까지는 평안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영원한 평안을 구하겠다는 의도를 밝힌 뒤 유년, 소년기에 저지른 죄를 상기하여 화를 낸 일, 시샘한 일 학교에 들어가서도 노는데만 열중하여 학업에 태만했던 일들을 자책한다. 제 2권은 청년기에 들어가서 사랑하고 사랑 받기만을 좋아하여 방탕한 생활에 몸을 맡긴 일을 후회한다. 제 3권에서는 카르타고로 유학하여 뛰어난 성적을 올리면서도 도시의 유혹에 빠져 연극에 열중하고 또한 불손한 연애관계를 가졌으며, 19세때에는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 를 읽고 철학적 욕구가 생겼으나 성서문체의 간소함과 철학적 내용의 빈약함에 실망한 나머지 당시 유행하던 마니교에 빠졌음을 고백한다. 제 4권은 그로부터 9년 동안이나 마니교의 미혹에 빠져 있었고, 또한 점성술을 믿었으나 지기가 마니교로 유혹한 친구가 죽기 직전에 회개한 것을 보고 크게 감동했음을 말한다. 제 5 권은 기대하고 있던 마니교의 유명한 학자 파우스투스를 만나자 실망하고, 소위 마니교의 합리적 세계관이라는 것도 실은 미숙한 청년의 상상을 만족시키는 거짓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고 열의를 잃게 되었다.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고 카르타고에서 로마로 건너가고, 다시 밀라노에서 변론술 교사가 되었으며, 주교인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듣고 사교를 버리게 되었다고 말한다. 제 6권은

암부로시우스의 가르침을 따라 점점 카톨릭 신앙을 이해하게 됨에 따라, 바른 생활을 하겠다는 결심을 하면서도 다시 예전의 죄에 빠져서 끊임없이 죽음과 심판의 공포에 떨고 있었음을 탄식한다. 제 7권은 성년기로 들어가. 마니교의 미망에서 해방되고서도 여전히 신을 형체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자유의지가 죄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카톨릭의 가르침을 전면적으로 인정하지 못했다. 또한 신플라톤 학파의 책을 읽고 비형체적인 것을 보는 눈이 열려서, 로고스의 신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겸허함을 몰랐고, 그리스도가 신과 인간의 중개자임을 깨닫지 못하다가 성서, 특히 바울의 편지을 읽고 의문이 일소되었음을 말한다. 제 8권은 이미 지적으로는 해결을 보았으면서도 낡은 습관에 사로잡혀서 쉽사리 결심하지 못했으나 모든 것을 버리고 신에게 몸을 바친 후 새로운 삶의 모습으로 변화함에 따라 낡은 의지와 새 의지와의 투쟁이 최고조에 이른다. 마침내 밀라노 정원에서 펴서 읽어라 라는 귀절의 아이들 노래소리를 하늘의 소리로 듣고 성서를 펼쳐서 읽은 후 회개한 과정을 말한다. 제 9권은 교직에서 물러나 밀라노 교회의 한 산장에서 한가로이 지내면서 영세준비를 한 뒤 암부로시우스로부터 영세를 받고. 어머니와 같이 아프리카로 가려 했으나 티베리스 강 입구에서 어머니와 사별하게 되는데. 어머니 모니카의 일생이 가장 아름답게묘사된다. 자기 자식에 대한 배려와 감화가 절대적인 어머니로부터 젖과 함께 흡수한 신앙이 새로운 사람 을 길러낸 것이고, 그의 과거생활에 대한 고백이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끝난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제 10권은 집필 당시의 자기반성으로, 먼저 신과 복된 삶을 찾아 감각적인 것으로 부터 이성적인 것으로 올라가는 길을 걷고 있는 자신을 되돌아 본다. 제 11권은 천지창조 이전에 신은 무엇을 하였는가라는 의문은 도외시 하고, 현대철학에서도 특히 주목되고 있는 정밀한 시간론 을 전개하고 있다. 제 12권은 태초에 창조된 천지는 무엇을 뜻하는가를 밝히고 있다. 제 13권은 천지창조 가사를 비유적으로 해석하고, 신이 교회에서 구원과 성화를 위해 하는 일의 상징을 인정하고 신에게 영원한 안식을 구함으로써 고백을 끝맺는다.


d. 종교사적 의의 

 그는 기독교를 신봉하는 어머니와 마니교를 신봉하는 아버지의 신앙적 갈등 속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의 방황 속에서 자신의 철학문제인 선과 악의 세계를 해결해보려고 하였으나 한계상황에 부딪치고, 마침내는 이성에 의해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기보다는 먼저 믿고 알 수 있는 신앙의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신앙고백, 이처럼 아구스티누의 고백론 은 그가 바깥 생활로부터 경험했던 모든 불안한 생활로부터 해방된어 종교적인 평화와 확신으로 축복받기까지 솔직한 그의 체험담을 적은 기록이다. 일종의 자서전적인 본서는 시종일관 선하고 자비로운 하나님에게 과거에 지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완전하게 하나님에게로 돌아와서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조망하게 된 것이다.

 신국론, 한편 그의 크리스트교 사상은 중세 사상 전개에 깊은 영향을 미친 신국론 에 잘나타나 있다. 이 책은 하늘나라 와 땅의 나라를 설명한 것으로, 천국은 신국으로 부른다. 전 22권으로 분류된 신국 은 제1권부터 10권까지는 주로 이교도에 대한 반박이고, 11권이하는 신국와 지국의 관계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역사적으로 서술했다.  신국의 일관된 내용은 인간역사의 과정이 신의 섭리임을 주장한 것으로,

교회를 통해 신국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교회는 인간구원의 유일한 기관이라는 것이다.  신국론 에 나타난 그의 사상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기독교 사상, 아구스투스는 그리스 사상 특히 플라톤사상 을 원용하여 크리스트교의 신앙을 설명한 점은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다. 인간은 태어날 때 자유의지를 부여 받았는데, 이를 남용함으로써 원죄를 짓게 되었다는 원죄사상을 폈다. 그 예로,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따먹은 금단의 열매와 카인이 아벨을 죽인 것을 들었는데, 일시에 무너지는 로마를 인간의 원죄의 결과로 보았다. 한편 아우구스투스의 신관은 전지 전능한 최고의 신이다. 인간이 선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통해서 구원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가장 가난한 신분으로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쫓아 사는 것만이 현세의 고통과 고난을 극복하고 현세적 승리를 이룬다는  구원사상 을 피력했다. 그의 윤리사상에 있어서는  믿음, 사랑, 소망 을 크리스트교의 3원덕으로 삼고, 플라톤의 4주덕  지혜, 용기, 절제, 정의를 조화시켜  7주덕 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성부, 성자, 성신은 오직 하나의 신의 3가지 모습이라는 3위 1체설 을 주장했다. 신국론 에 담긴 위와 같은 사상은 크리스트교의 세계관을 체계화 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고, 그의 또다른 저서  고백론 은 신에 대한 감사와 찬송을 서술한  영혼의 책 으로, 중세는 물론 근세에 와서도  영혼을 염려하는  내적 생활문제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어왔다. 이처럼 그의 체험에 바탕을 둔 고백론의 결론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 

 주여, 당신께서는 나를 당신에게로 향하도록 만드셨나이다. 내 영혼은 당신 품에서 휴식을 취할때까지 편안하지 않을 것입니다.(인생은 원래 고생의 연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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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교


Manicheism



1. 개요

2. 역사

3. 특징

4. 교리

5. 영향

6. 기타

1. 개요[편집]


유대교, 영지주의 크리스트교, 조로아스터교에다가 지역에 따라선 불교까지 복합으로 짬뽕해 생긴 이란 출신의 종교. 창시자인 마니(Mani)의 이름을 따서 마니교라고 한다. 많이 믿으라는 뜻이 아니다. 참고로 마니아(Mania)란 말이 이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짬뽕 종교라는 점에서 시크교를 떠올려 볼 수 있다.


2. 역사[편집]


마니가 서기 216년 오늘날의 이라크 영토인 크테시폰에서 태어나 12살 때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에게 새로운 종교를 만들라는 계시를 받고 25살 때부터 자신이 살던 제국 파르티아 주요한 종교였던 조로아스터를 비롯해 중동 각지에 퍼져 있던 크리스트교와 유대교의 교리를 짬뽕하여 자신의 이름을 붙인 마니교를 창시한다. 241년에 마니가 교리를 전파하러 인도 지역으로 떠나 여행하면서 불교와 자이나교를 많이 접하게 되고, 또 이를 마니교 교리에 흡수(!)하여 마니교 교리를 완성시켰다. 레알 짬뽕의 대가


3. 특징[편집]


최대 특징은 조로아스터교를 넘어서는 극한의 이원성으로, 조로아스터교 때부터 강조되던 선악의 대립을 넘어서 육체와 영혼의 대립까지 교리에 포함하니 철저한 자기 단속과 철저한 구원론을 한 성격으로 포함하게 되었다. 예컨대 마니교 교리 중에 "모든 형상이 있는 것을 파괴하지 말라"라는 내용이 있다. 우상이라면 환장하는 유일신교가 싫어할 만하다 이 말에 따라서 마니교 교리대로라면 목욕해서도 안 되고(목욕하면서 물의 형상을 파괴하기 때문), 땅에 농사해서도 안 된다(경작할 때 흙의 형상을 파괴하기 때문에). 


이 원칙을 그대로 지킬 때 마니교도가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엄격하다는 자이나교의 교리가 겨우(?) '생명을 파괴하지 말라'인데도 상업 정도 외에 제대로 발 붙일 업종이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저 흠좀무. 그래서 마니교에서는 성직자들에게는 이런 원칙을 최대한 요구하고 평신도는 조금 널널하게 풀어 주는 대신 자기들이 왕이 되어 갖은 재물과 음식을 가져다 바치도록 평신도층이 성직자들을 먹여살리는 의무를 지도록 했다.[1] 또한 식생활에서는 채식, 특히 과일을 요구했다. 마니교 최대 축일인 마니가 순교한 날에도 과일을 먹었다. 


또 다른 특징은 그 막장 같은 짬뽕성. 창조 설화부터가 유대교, 크리스트교, 조로아스터교에 등장하는 신들을 마구마구 버무린 환상스러운 구성을 자랑하니 여타 종교에서 핍박받을 수밖에 없었던 데다가 마니교도는 비밀 종교집단 일종으로 자신들끼리만 접촉하면서 살았는데 이것도 권력자들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 중앙 무대로는 거의 올라오지 못한 채 반정부다운 민간 종교(선악 구도가 크게 작용하므로)로만 역사에서 존속하였다.


마니교의 세계관은 당대 유대교와 기독교와 조로아스터교와 그리스 신화를 모두 합쳐 재구성했으므로 매우 복잡하고 방대하다. 아주 체계 있고 복잡하다.


4. 교리[편집]


빛과 어둠이라는 이원론적 선악 구도를 갖추고 있다.


마니교는 철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종교인 중에서 스스의 사유를 통해 자발적으로 개종하는 등의 파급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성경에서 드라마틱하게 펼쳐지는 내용으로 우주의 원리를 설명하는 것과는 정반대였다.


마니교는 금욕주의를 강조하기도 해서, 마니교의 고위 성직자는 독신으로 산다.


마니교의 '마니'는 신의 최후의 예언자로서 신을 믿는 종교다. 따라서, 기독교와 같이 예수를 인정한다. 이렇게 신을 믿고, 예수; 부처; 조로아스터 등을 과거의 예언자로 이해했다. '마니'는 빛의 예언자라고 불리며, 빛을 선한 개념으로 여겼다. 이러한 빛과 어둠의 대립은 조로아스터교에서 빌려왔다.


게다가 마니교는 보편 종교로서의 역할을 자처했다. 기존의 종교가 타민족이나 타종교인을 박해하기 바빴던 것과는 달리 매우 평화적이기 때문에 이는 분명 매력적인 점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독특한 점은 '영지주의'이다. 대부분의 종교들이 수행을 하거나, 돈을 내거나, 선행을 하거나 하는 등 일상 생활과는 거리가 있는 것을 행하기를 바라는 것과는 달랐다. 마니교에서는 '지식'을 쌓을수록 그에 비례해서 인간의 타락을 막아주고 빛에 다가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악이란 절대 사라질 수 없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지식을 쌓아야 한다고 보았다.


5. 영향[편집]


이렇듯 창시자이자 교주였던 마니가 불에 타 순교당해 죽은 후 주류로서 인정받아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종교로 그 역사 자체가 피압의 역사라 할 종교이나 이란을 벗어난 국외에서는 민간에서나마 크게 유행해 동서 종교에 모두 큰 영향을 미친 바 있었다.


그 영향력이 생각보다 매우 크다, 이집트를 비롯한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지역, 인도, 중국, 한국에 이르기 까지 사실 상 구대륙 전체를 휩쓴 종교다. 중세 시대의 전파력 치고는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그 어떤 메이저 종교보다 파급력은 더 앞서나갔다.


서방로는 2세기 이후에 로마 제국에서 상당 기간 융성하고서 크리스트교 교부로서 추앙되는 아우구스티누스도 한때 마니교 신자였을 정도. 그 후에도 선악을 극단으로 강조하고 구원을 중시하는 중세의 이단 교파는 대개 마니교에 많이 영향받았는데 대표할 정도로 전형이 될 만하거나 특징이 있는 것이 11세기·12세기 알비 카타르파.


동방으로는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까지 뻗어나간 후 민간 신앙에 크게 영향을 끼친다. 먼저 위구르 제국을 위시해 중앙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잠시 국교로 정해졌던 적이 있다. 중국식 마니교는 당나라 9세기 경에 시작된 것으로 본다. 북송 말에 강남에서 반란한 방랍의 집단에 채식주의자로 마귀를 섬긴다는 끽채사마교 신자가 포함됐던 일변으로 마니교는 미륵 신앙과 합해지면서 소위 명교, 혹은 백련교로 발전하기도 했는데 15세기 후 마니교도는 소멸했으나 백련교도는 19세기까지 청을 괴롭힐 정도로 크게 융성한 바 있었다.


6. 기타[편집]


십자군 전쟁 항목에서도 나온 <아랍에서 보는 십자군>으로 유명한 작가 아민 말루프는 <마니>라는 소설을 썼는데 말루프 자신이 레바논 태생 무슬림 출신(프랑스에서 거주중)이지만 마니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다만 비난도 했지만 서문에서는 다양한 종교 장점을 넣으며 노력한 점을 높게 평가)을 넣기도 했다. 사실 이 사람은 종교 연구도 하면서 데바닷타(국내에도 정발됨)라는 소설을 썼는데 이 소설에서 데바닷타에 대하여 좀 좋은 면도 있다고 봤으나. 광신적인 한계로 가서 스스로 파멸하니 안타깝다고 결국 결말이나 그 근본주의에 대해서는 비난하고 있다. 그렇지만 서문에서 패자이기에 더더욱 기록에서 불리하게, 왜곡되어 남았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쓸 정도로 다양한 종교에 대하여 연구하고 소설을 쓰며 중립적으로 보는 사람이다.


실제 마니교와는 상관없지만,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의 교주 이름이 이만희라서 그 종교가 마니교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백괴사전에서 마니교는 이쪽을 가리킨다.(...) 신천지도 마니교처럼 교주 마니가 죽으면 교세가 사라질지도? 그래도 마니교는 천여년넘게 영향력이 남기라도 했지,이만희 교는 대체?


[1] 마니교에서 성직자는 '선택된 자', 평신도는 '듣는 자'로 불렸는데 가톨릭의 분파인 카타리파에서도 성직자와 평신도를 완덕자(Perfecti), 평신도(Credentes)로 구분했다.(출처: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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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로아스터교


최근 수정 시각: 2017-09-11 20:52:05


종교 관련 정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80px-Faravahar-Gold.svg.png

육군조로아스터교의 가장 유명한 심볼[1]

1. 개요

2. 역사

2.1. 창시와 전파

2.2. 사산 왕조 시대

2.3. 이슬람 시대

3. 현대의 조로아스터교

3.1. 이란

3.2. 인도

4. 교리

4.1. 유일신교

4.2. 파생 종파

5. 다른 종교와의 관계

5.1. 유대교, 기독교

5.2. 브라만교, 힌두교

6. 대중문화 속의 조로아스터교

6.1. 그 외 창작물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Zoroastrianism


페르시아 지역에서 발원한 이란 계통의 종교.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 마즈다교(Mazdaism), 혹은 중국에서는 불을 숭상한다 해서 배화교라 불렸다. 조로아스터교는 창조신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를 중심으로 선과 악의 질서 및 세계를 구분하는게 특징이다.


중동의 박트리아 지방에서 자라투스트라가 세운 종교이다. 그의 창시 시기에 대해서는 기원전 1800년에서 기원전 640년경으로 의견이 다양하다. 현재는 기원전 6-7세기가 학계의 정설이다. 그 이유는 그 정도 되어서야 창시자 자라투스트라가 언급되기 때문이다. 기원전 600년경에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 1세를 통해 오늘날 이란 전역에 퍼졌으며 기원전 5세기에는 이미 그리스 지방에까지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조로아스터교'라는 이름은 창시자인 자라투스트라에게서 유래한다. 본래 이름은 아베스타어로 '자라수슈트라(Zaraϑuštra)'인데, 이게 그리스에서 전사라는 뜻의 '조로아스트레스(Ζωροάστρης, Zōroastrēs)'가 되었고, 그것이 라틴어를 거쳐 영어로 '조로아스터(Zoroaster)'가 되었다.


2. 역사[편집]




2.1. 창시와 전파[편집]


파일:external/colleenday.files.wordpress.com/tumblr_lsu0mddvqu1qlziglo1_400.jpg


창시자 자라투스트라의 생몰연도는 확실치 않으나, 평상적으로는 기원전 6-7세기라고도 본다. 기원전 660년이 보통정설이다. 대부분의 백과나 지식사전에 6-7세기로 기재되어있다. 극단적인 주장에서는 대략 BC 1500년~ 1300년 경에 이란 동부 지역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트리아 출신이라고도 한다. 조로아스터교는 동부 이란을 중심으로 여러 이란계 종족들에게 전파되기 시작하고, 조로아스터교를 추종하는 메디아와 아케메네스 왕조가 서아시아의 패권을 쥐면서 급성장했다. 하지만 아케메네스 왕조는 안정적 통치를 위해 토착 종교와 관습을 용인하는 태도를 견지했고, 조로아스터교는 이란계 종족들의 범위 이상으로 전파되지 못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으로 아케메네스 왕조가 패망하자 조로아스터교 역시 국교의 지위를 잃고 약화되었다. 이후 헬레니즘 시대와 파르티아의 지배를 거치면서 아나히타나 미트라 등 보조 신격들을 숭배하는 변종 분파들이 널리 퍼졌다. 특히 미트라 숭배는 헬레니즘 세계를 거쳐 이후 로마 제국까지 전파되기도 했다.


2.2. 사산 왕조 시대[편집]


이 추세가 반전된 것이 사산 왕조의 등장이다. 사산 왕조는 그 이전 400년 동안 이란을 지배한 파르티아인들의 유목민적 전통과 느슨한 봉건제도, 타 종교나 문화(특히 헬레니즘)에 대한 호의적 태도 등을 비난하면서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 건설을 주창했으며, 이 과정에서 조로아스터교를 국가권력 강화와 사회 통합의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였다. 


이에 따라 사산 왕조 초기 조로아스터교는 정통 교리와 경전을 확립하는 작업, 국가권력과 연계된 관료적 성직기구의 정비 작업 등을 진행하며 다시한번 국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후 제국의 정통 교리에 반하는 마니교, 마즈다크교 등이 등장하여 세력을 늘리거나 고위 성직자들을 견제하려는 황제들의 지원을 받기도 했지만, 결국 이단으로 몰려 탄압당했다.


조로아스터교의 몰락은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했던 사산 왕조의 멸망과 궤를 같이 한다. 아나톨리아와 유럽 지방을 지켜낸 동로마 제국과 달리 이란은 모든 영토가 궁극적으로 이슬람 세력에 정복당했고, 사산 왕조의 국가종교였던 조로아스터교의 입지는 크게 약화되었다.


2.3. 이슬람 시대[편집]


처음에는 아랍 정복자들도 이란 지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토착 유력자를 포섭해야 했으므로 조로아스터교는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불교나 힌두교 토속신앙과 달리 이슬람에 교리상 유대교, 기독교도와 마찬가지로 조로아스터교도 일신론에 해당하는 고등종교이기 때문에 원칙상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주었다. 8~9세기 정도만 해도 중세 페르시아어로 기록된 조로아스터교 관련 문서들이 꽤 남아 있다. 그 와중에 조로아스터교 내부에서도 이단취급 받던 마즈다크교는 시아파와 합세해서 제국에 반기를 들었기에 탄압받았다.


그러나 우마이야 왕조의 아랍인 우선주의, 비무슬림에 대한 추가 인두세 부과, 그리고 비무슬림을 차별하지 말라는 공식적 입장과 상관없이 이루어진 비공식적 차별, 특히 가혹한 세금과 더불어 조로아스터교도와 무슬림 형제가 있을 경우 조로아스터교도는 상속을 받을 수 없다는 등의 조치로 인하여 인해 점차 이란에도 무슬림 개종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또한 처음에는 고등종교로 인정하는 조치와 반대로 무슬림들은 점점 조로아스터교도들을 불을 섬기는 이교도로 취급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편견이 조로아스터교가 배화교로 불리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750년 아바스 왕조가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릴 때 이란의 비 아랍계 무슬림인 마왈리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9~10세기 정도가 되면 조로아스터교는 완전히 소수 종교가 된다. 11세기 셀주크 제국을 위시한 이란 지역의 튀르크화와 순니파 세력의 강화 역시 조로아스터교의 몰락을 가속화시켰다.


사산 왕조 멸망 이후 이란이 지속적으로 이슬람화되자, 조로아스터교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피난한 경우도 적지 않다. 이들 중 인도 지역으로 피난한 사람들은 아래 서술할 "파르시"가 되었고, 중국으로 피난한 사람들에 의해 배화교, 혹은 현교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3. 현대의 조로아스터교[편집]


현재도 적게나마 신자가 있다. 이란, 인도 공화국, 중국, 쿠르디스탄을 합쳐서 약 10~30만 명 정도이며 가장 많이 분포하는 곳은 인도다.


3.1. 이란[편집]


이란에서는 2011년 인구조사 결과 2만 5천 명 가량의 신자가 있다고 하며, 중부 야즈드(Yazd) 지역이 조로아스터교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다. 다만 워낙 고생이 심해서 성전 아베스타조차도 극히 일부분 밖에 남지 않았다. 대략 전성기의 20분의 1 정도 분량. 성경으로 예를 들자면 신약하고 구약 중 한두 편만 남고 죄다 없어졌다.(…) 1906년의 페르시아 헌법 규정에서는 의회 의석 중 1석을 반드시 조로아스터교도에게 할당하도록[2] 되어 있었으며, 이는 이슬람 혁명 이후인 지금도 유효하다. 


호메이니는 조로아스터교를 그리 좋게 보지 않았다. 다만 조로아스터교가 과거 대페르시아를 상징하는 점이 있어서 팔레비 왕조 시절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또 1971년 페르시아 건국 기념일에 조로아스터교인들이 대표처럼 나온 적이 있었다. 당시 이걸 이단 행위라고 욕하다가 '페르시아를 욕하는 저 식히는 매국노!'라고 엄청난 비난을 받고 부랴부랴 '아니 잘못 생각했어요!'라고 변명을 하며 평생 페르시아를 부정하지 않는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야했던 호메이니였으니 아무리 이교도인 조로아스터라도 페르시아 제국을 함부로 까다가 자칫하다간 페르시아를 까는 것으로 봤기에 그냥저냥 공존하게 놔두었다. 차가운 무슬림 남자 하지만 조로아스터교에게는 관대하겠지. 그러나 차별과 박해는 존재했고, 2000년대 이후에 망명하는 조로아스터교도들도 있다고 한다. 조로아스터인들은 소수이긴 하지만 '과거 페르시아가 아랍을 지배하며 호령할 때 종교가 조로아스터교인데 왜 현대에는 정작 페르시아의 후손인 이란이 아랍인의 이슬람에 정복당했다는 거냐?'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에 이란 항목에도 나오듯이 이란에서는 '대신 소수계열인 시아파를 믿으며 아랍과 대립하잖아.'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고.


3.2. 인도[편집]


인도로 피난한 조로아스터교도들은 소수민족 집단인 파르시(페르시아인이라는 의미)가 되어 잔존하게 된다. 이들은 인도의 지배종교인 힌두교와 대립하지 않기 위해 교리에 일부 규정을 더하였는데, 현재 그 중에 문제가 되는 것이 "파르시와 파르시의 결혼에서 태어난 아이만이 파르시가 될 수 있다."는 규정이다. 시뮬레이션에 의하면 이 규정을 계속 지킬 경우 현대 사회에서 파르시는 2, 3세대 안에 거의 소멸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때문에 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여 개혁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파르시들은 주로 상업에 종사하여 상당한 부를 축적한 경우가 많은데, 현재 인도 최대의 재벌그룹 타타 그룹을 소유한 타타가문이 파르시이다. 의외겠지만 재규어와 랜드로버도 타타모터스 소유다. 타타모터스 뿐만 아니라 타타그룹 자체가 농업에서 항공우주 산업까지 안하는게 없을 정도로 인도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또 퀸의 프레디 머큐리가 파르시였으며 조로아스터교 신자였다. 생전에 머큐리는 자신의 뿌리를 매우 자랑스러워 했다고 한다. 그리고 피아노 분야에서 가장 난해하고 연주하기 어려운 작품을 남긴 작곡가겸 피아니스트 카이코스루 사푸르지 소랍지도 파르시교도였다.


시체로 불이나 땅을 더럽히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화장을 기피하고, 조장(鳥葬)을 선호하고 있다. 문제는 환경오염으로 조장에 쓰이는 대머리 독수리가 점점 수가 줄어들고 있어서, 이 풍습도 위협받는 중. 시대의 변천에 따라 개고기 식용에 대한 입장 차이도 변화했다. 


4. 교리[편집]


파일:external/fabweb.org/1-zoroastrianism-prayers.jpg



조로아스터교는 흔히 불을 숭상한다 하여 배화교로 알려져 있지만, 불을 숭상하는 것이 아니라 조로아스터교도가 필수적으로 해야하는 하루 5번의 예식에 쓰이는 성스러운 불을 소중히 하는 것이다. 불 뿐만이 아니라 창조자의 피조물인 땅, 불, 물, 사람의 '마음'까지도 더럽히지 않으려 한다. 그런고로 당시 유행하던 짐승을 죽여 피로 땅을 더럽히는 제사와 사람의 시신을 땅에 묻는 것, 식물성 마약에 취해서 마음을 더럽히는 것 모두 금기시한 것이다. 불을 소중히 여기는 다른 이유로는 사산조 시기에 조로아스터교식의 '성상 파괴'가 일어나서 예술로 쓰이는 것 외에 종교 의식에서 성상을 쓰는 것을 금지하고 불을 사용하도록 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3]


주신 아후라 마즈다를 섬기는 종교로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거울의 양면으로 해석되는 "이원론적 일신교 종교"이다.[4][5]


성경도 비슷한 묘사를 사탄에게 하는데, 욥기에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6] 빛의 원리에 필적하는 어둠의 원리를 인정한다. 


그러나 둘이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동등한 것은 아니고, 악과 어둠은 선과 빛에게 결국 패배하게 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적극적인 자유 의지로 단순히 믿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악에 맞서서 투쟁할 것을 주문한다. 영적전쟁 개념과 다소 비슷하다. 또 조로아스터교는 고대 신화의 여러 신들을 모두 받아들였으므로 신은 여럿 있지만, 결국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만물의 주인, "주신"은 오직 아후라마즈다/오르마즈드 뿐이다. 조로아스터교 내의 다른 신들은 유일신인 아후라마즈다를 돕는 보조적인 신이자 선한 영으로, 기독교의 천사들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다시 말해 조로아스터교는 비록 고대의 다신교적 성격이 일부 남아 있기는 해도, 기본적으로 일신교적 성격이 강한 종교이다.


현재 남아있는 아베스타를 보면 평화와 화합, 도덕적 생활을 통한 번영을 중시여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상당수의 에피소드가 자라투스트라의 방문을 받은 마을이 거지처럼 못살다가 자라투스트라의 지도를 받고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목축민과 유목민적인 성향이 많이 반영된 유대교와는 달리, 농민과 도시민의 성향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이 점은 베다 종교(=브라만교, 힌두교)와 대비되는 경향이기도 하다.


조로아스터교에서 강조하는 신심은 예언자 자라투스트라가 강조한 세가지의 좋은 행동, 즉 '좋은 생각', '좋은 말', '좋은 행동'을 하며 살 것을 강조한다. 애초에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면, 즉 아후라마즈다의 길을 따른다면 좋은 생각이 곧 좋은 말을 낳고, 다른이들에게 좋은 말을 하면 자연스럽게 다른 이들에게 좋은 행동을 하며 살 수 있다고 보는 것인데, 결국 이러한 행동들이 바로 악을 물리치는 무기가 된다고 본다.


4.1. 유일신교[편집]


사람들이 조로아스터교에 대해 착각하는 가장 본질적인 내용은, 아후라 마즈다와 앙그라 마이뉴라는 각각의 존재에 의존해 펼쳐지는 것이 이 세계인데 왜 유일신교라고 보느냐 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조로아스터교 내에서도 차이가 있는 듯 하다. 앙그라 마이누가 창조된 존재인지 아니면 원래 있던 존재인지가 조금 갈리는 듯하다.


앙그라 마이누는 창조된 존재가 아니다.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악의 힘인 앙그라 마이누는 창조되지 않았으며 창조주이자 선의 힘인 아후라 마즈다가 나중에 그의 존재를 눈치챈다. 왜냐하면 창조는 그 자체로 선한 행위이기 때문에 악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일신교라고 보는 이유는 결과적으로는 빛의 힘에 패배하기 때문이다. 또한 페르시아가 숭배한 대상은 오로지 아후라 마즈다 뿐이었다. 


즉,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져 악한 짓을 하며 설치고 돌아다닌다 해서 유일신교라 부르지 않는 것이 결코 아니듯, 조금 더 강한 사탄이라 할 수 있는 앙그라 마이뉴가 존재한다고 해서 조로아스터교가 유일신교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부분은 주의해야 할 점이 유대교와 기독교의 경우에는 피조물이 타락한 경우이지만 앙그라 마이뉴의 경우에는 애초에 피조물이 아니었다. 애시당초 유일신교라고 하는 이유는 결과적으로는 빛이 승리하고 아무리 악이 날뛰어도 빛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앙그라 마이뉴와 동급의 존재는 스펜다 마이뉴다. 아후라 마즈다가 만들어낸 쌍둥이로 각각 빛과 어둠을 상징하는 존재. 후대에 오면서 스펜다 마이뉴의 존재감이 사라지면서 변화된 것이다.


경전에 의하면 아후라 마즈다의 성령인 스펜다 마이뉴는 선의 길을 택하고 앙그라 마이뉴는 악의 길을 택했다고 한다. 아니면 그냥 아후라 마즈다하고 앙그라 마이뉴가 그냥 쌍둥이 영이라고 묘사되어 있다.


다양한 사이트를 참조해보니 사이트마다 주장이 다른 부분이 있다. 앙그라 마이뉴가 창조된 존재인지 아닌지에 대해 이렇게 갈리는 이유는 아무래도 후대에 들어서 종교의 교리가 바뀌거나 아니면 해석의 차이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한 것으로 보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조로아스터교가 대세가 아니다 보니 주류의 의견이 확실하지가 않다.


4.2. 파생 종파[편집]


대충 이렇게 알려져 있지만 워낙 오래된 종교라서 시대에 따라 교리나 사상에 변화가 많고, 이단 종파나 분파도 많다. 특히 이슬람의 침략 이후 신자들의 수가 격감하여 그 전통이 매우 약화된 탓이 크다. 조로아스터교는 조로아스터교 이전의 고대 페르시아의 토착 신앙과 구분이 되기는 하나 일부 신들은 그 연장선 상에 있고, 향후 수백년간 나타난 여러 다른 종파와도 모호하게 구분된다.


주르반교 : 주르반교는 흔히 "쌍둥이 신"이라고 설명되는 아후라 마즈다와 앙그라 마이뉴가 세계를 지금과 같이 만들었다면, 그 동등한 쌍둥이를 만들어 낸 태초의 존재가 있으리라는 가정에서 형성되었다. 시간과 관련된 신이었던 주르반이 바로 그 태초의 존재라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주르반 항목을 보라.

미트라교 : 조로아스터교의 여러 하위신 가운데서 미트라를 특히 높이 보고 숭배하는 종파. 미트라교에서는 미트라를 아후라 마즈다와 동격, 혹은 아후라 마즈다의 계승자로 본다.

마니교 : 페르시아 출신의 예언자 마니가 조로아스터교에 크리스트교, 유대교 교리 등을 접목시켜 창시한 종교. 조로아스터교를 훼손시킨 변종 이단으로 간주되어 조로아스터교 세력으로부터 심한 탄압을 받았다.

마즈다크교 : 5~6세기 경 살았던 조로아스터교 성직자 마즈다크가 내세운 조로아스터교의 개혁 운동. 종교적으로 주류 성직자들과 대립하는 한편, 사회정치적으로 대귀족들을 공격하고 재산의 공동 소유 등을 주장해 큰 인기를 끌었다. 최초의 공산주의자들 결국 이단으로 몰려 절멸당했다.

5. 다른 종교와의 관계[편집]


5.1. 유대교, 기독교[편집]


유대인들의 귀환과 성전 재건축을 허락한 페르시아의 정복왕 키루스 2세가 조로아스터교도였다. 당시 페르시아는 영토 뿐 아니라 경제, 문화, 군사, 체제 정비 등 다른 나라들을 압도하는 오리엔트 세계의 패자로 확고한 위치에 있었던 시기로 유대인들 역시 종교뿐만 아니라 문화 전반에 페르시아의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7]


다른 종교에 미친 영향도 상당하다. 대표적으로 동정녀에 잉태되어[8] 태어날 구세주, 종말의 때에 일어날 최후의 심판, 자라투스트라가 광야에서 정진할 때 앙그라 마이뉴에게 시험받았다는 내용, 자라투스트라의 탄생 때 그를 방문했다는 마기(Magi)등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에 미친 영향력은 실로 엄청나다. 하지만 가장 큰 것은 존재 그 자체. 예컨대 아브라함계 종교에서 사탄은 본래 '고발자'라는 뜻으로, 인간의 신앙을 시험하여 신을 조롱하는 천사로 여겨지고 있었는데,[9] 조로아스터교의 이원론의 영향을 받아 신에 맞서는 악마로 바뀌어졌다.


유대교가 조로아스터교에 영향을 받았다는 학설이 지지를 받는 가장 큰 이유는 구약 성경 자체에서 본래, 그러니까 초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요소들이 어느 순간부터 등장하게 되는데, 그 요소들이 바로 조로아스터교의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히브리인의 신이던 야훼가 절대적 유일신으로 바뀐 것,[10] 야훼의 명을 받아 활동하던 사탄이 아예 야훼의 대적자가 된 것이다. 


문제는 모세오경의 영향은[11] 물론 네부카드네자르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예언자 다니엘의 존재는 역사적 교차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시기 이전까지 모세 5경은 물론 구체적인 신학적 견해도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2004년에 바빌론 유수보다 한 세기 정도 이전 시기의 유대 경전이 일부 발견되어 경전 자체는 부분적으로나마 이미 존재했던 가능성이 있다. 참조.


주의해야 하는게 영향을 주었다고 해서, 그 종교가 "조로아스터교의 파생 종교이다.'라는 주장은 옳지 않다는 것. 유대교는 아브라함 계통에서 시작됐을 뿐만 아니라, 학자들은 3500년 전부터는 있었다고 추정한다. 모세오경이나 초기 기독교 경전 구약 앞부분의 경우에는 조로아스터교보다 오히려 앞선 시기에 작성되었다. 자라투스트라의 출생이 BC 660년이고, 탈출기(출애급기)의 경우 시기가 기원전 1300-1500년 정도이며, 최종 정리가 6-7세기 정도인 것으로 봤을 때는 아무래도 후기에 들어서 영향을 받았을 수는 있어도 기독교와 유대교 자체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권에 있었다고 하기는 힘들다. 특히 창세기나 탈출기 같은 경우에는 조상에 대해 서술하는 것으로 봐서는 구전이 오래 되었을 수도 있으므로 파생 종교라고 보는 것은 한계가 있다. 특히 시편의 경우에는 기원전 1400년 전부터 500년대까지 꾸준히 기록되었는데, 상술했듯 조로아스터교보다 일찍 작성된 책 중 하나다. '구약성경에 초기에 존재하지 않던 요소들이 등장한다'라는 위의 서술도 있듯이 '초기 기독교나 유대교는 따로 있었고 페르시아 시기에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게 맞다. 과연 어디까지 영향을 주었는 지에 대해서는 확언할 수 없다. 전술한 예시들이 전부 다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고는 확신하기가 어렵다.


예수의 문제의 경우에도 비슷한 부분이 있지만, 다른 부분도 굉장히 많다. 게다가 유일신 신앙적 요소, 사탄과 천사의 개념 등은 모세오경에서도 충분히 나온다. 탈출기 때부터 자기 외에는 신이 없다는 말이 나오며 그것은 창세기도 마찬가지이다. 사탄의 원형은 창세기에 나오는 뱀이며 욥기에서 나오는 현대 그리스도교의 사탄과 근본적으로는 같다. 사탄이 40일 동안 예수에게 유혹을 시도한 사건 역시 여기서 예수가 사탄에게 반박을 한 후 예수의 말 몇마디에 줄줄이 쓸려나가버리고 그리고 나머지 악마들 역시 말 한마디면 나가는 걸로 봐서는 대부분 그냥 호구급이다. 따라서 페르시아와의 접촉으로 사탄의 존재감이 커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본질은 의외로 큰 변화가 없다. 그러니 함부로 기독교 신자나 유대교 신자, 이슬람교 신자 앞에 가서 파생 종교라는 왜곡된 말을 꺼내지 말자.


5.2. 브라만교, 힌두교[편집]


현대에는 아무래도 현대 사회의 관심 분야이기 때문에 유대교, 기독교와의 영향이 가장 주목을 끌지만, 아무래도 조로아스터교와 좀 더 연관성이 깊으면서도 대립성이 강한 종교는 인도 공화국의 종교. 브라만교와 힌두교이다.


재미있게도 조로아스터교와 브라만교는 서로의 신과 마가 뒤바뀌어 있다. 조로아스터교의 아후라 마즈다(Ahura)는 인도 신화의 아수라(Asura)와, 조로아스터교에서 저급한 악마로 보는 다에바(Daeva)는 곧 인도의 신의 데바(Deva) 신족과 동일한 기원을 가진 것으로 보고 있다.


옛 인도-이란인 (즉, 아리아인)의 원시적인 종교에서 이미 이 같은 신족의 분화가 존재했고, 이란에서는 아후라-아수라 계통의 신앙이 강화되었으나 인도에서는 데바-다에와 계통의 신앙이 강화되면서 이런 대비가 나타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12]


6. 대중문화 속의 조로아스터교[편집]


조로아스터교는 현실에서 교세가 이슬람교에 비해서 매우 약하고, 신자 수도 극소수이지만 그래도 역사적으로는 이슬람교와 함께 중동을 대표하는 종교이며 대중매체에서도 테러 등으로 부정적인 이미지가 많은 이슬람에 비해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종교이다.


모비 딕의 주인공 에이허브 선장의 보트에 탑승한 작살잡이 중에서 필리핀 출신인 페댈라가 조로아스터교 신자다. 모비 딕을 발견한지 이틀째 날에 모비 딕이 에이헤브 선장의 보트에 격돌하고 그 과정에서 실종되는데, 사흘째 날에 모비 딕의 몸체에 그물과 작살과 함께 묶엔 페댈라의 시신이 발견된다. 페댈라는 에이헤브에게 밧줄을 조심하라고 경고하며, 자신이 죽은 뒤 에이허브 선장이 죽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고, 바로 그 사흘째 날에 그의 경고와 예언이 실현된다.

페르시아의 왕자의 DOS 2편인 "그림자와 불꽃"의 후반부에서 적으로 등장한다. 제목에서 보다시피 왕자가 자파를 무찌르기 위해 조로아스터의 불을 훔치러 가는 것. 맨 위의 상징처럼 독수리 모자와 옷을 입고 등장한다.

악튜러스에 조로아스터교 관련 소재가 중요하게 등장한다.

창세기전 시리즈에서 앙그라 마이뉴 등 조로아스터교에서 차용된 소재가 많이 나온다.

중국에서는 배화교 또는 명교로 불렸기 때문에 명교 신도 주원장이 나라를 세워 국호를 '명'이라고 지은 근거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명교는 배화교뿐만이 아니라 백련교나 마니교의 짬뽕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주원장이 명교와 백련교 등을 금지시켜 토사구팽시켰다. 김용의 의천도룡기에서 이런 역사적 사실을 교묘하게 섞어 소설 배경을 만들었는데, 여기서는 주원장에 의한 토사구팽이라고 주장한다.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는 확장팩 올드 갓(Old God)에서부터 플레이 가능하게 되었다. 조로아스터교일 경우 근친혼(신성혼)을 하면 봉신들과의 관계가 올라가고 신앙심을 얻는데 유리하다. 그래서 한국에서 붙은 별명이 현관교. 거기다 근친상간 트레잇이 붙을 확률이 15% 정도밖에 안 된다. 단, AI가 너무 근친혼을 선호해서 자손이 늘지 않는다. 어린 아이와 약혼을 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렇기도 하지만 신성혼은 임신 확률이 25%밖에 되지 않는다.

위와 같은 패러독스 게임인 Europa Universalis 4에서는 단 1개 프로빈스가 조로아스터교로 등장하며, 시작 시점에서 국교로 삼은 나라는 없다. 조로아스터교 커스텀 국가를 만들어 특정 프로빈스들을 정복하라는 업적이 있는데, 게임 내 모든 종교로부터 이교도 취급을 받기 때문에 초반 운신이 힘들다.

종말의 크로니클의 9th-G

삼류무사에서는 마교로 몰려 오래 전에 멸문했다. 지상최강의 단일문파로, 그들의 수장이자 당대 명교주였던 서문탁의 [대정일검보]와 그를 곁에서 수행했던 좌우쌍사의 [일천마라형], [철화정련]은 삼류무사 세계관에서도 불패삼공으로 통한다. 명교는 교리(대표적으로 금식과 금욕, 특히 성욕의 자제를 통해 초인으로 가는 길이 열린다고 생각했다는 점)와 막강한 무공(구파일방의 고수들이 비무를 청해 서로 겨뤘지만 결국 아무도 이기지 못했다고 한다.)을 통해 교세를 확장해나갔고, 이는 당시 기득권층이었던 구파일방을 자극했다. 결국 구파일방이 당문의 독[13]을 써서 그들을 고립시키고 하나하나를 철저히 뒤쫓아 살해함으로써 명교의 세력을 뿌리 뽑았고, 그걸로도 모자라 율법자들을 만들어 명교의 불패삼공을 뒤쫓았다.

얼음과 불의 노래의 를로르교가 조로아스터교를 모델로 하였다. 마찬가지로 불을 신성시하며 빛과 불의 신 를로르와 어둠과 추위의 "말할 수 없는 거대한 다른 신"이 대립하는 이신론적인 교리를 보인다.

6.1. 그 외 창작물[편집]


무협소설

마교

명교

페르시아 명교

Fate 시리즈

어벤저(3차)

아처(도쿄 1차)

7. 관련 문서[편집]


신화 관련 정보

고대 페르시아 신화의 신들

아후라 마즈다 = 오르마즈드

앙그라 마이뉴 = 아흐리만

스펜타 마이뉴

미트라교

마니교

페르시아

프라쇼케레티



[1] 수호천사 '프라바시(faravahar)'를 묘사한 것. 고대 페르시아에서 자주 쓰였기 때문에 페르시아의 심볼로도 많이 등장한다. 그래서 호메이니 치하의 이슬람 공화국에서조차 국가적 상징으로 허용되었다.

[2] 아르메니아인, 아시리아인, 유대인도 마찬가지 적용을 받음.

[3] 출처 - 페르시아 : 고대 문명의 역사와 보물.

[4] 전무는 몰라도 후무까지는 좀 애매하다. 기독교 정통 교파에서는 이단취급하는 신사도 운동의 영적도해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결국 이원론에 근거하기 때문.(...)

[5] 조로아스터교도 완전한 이원론은 아니다. 결국 어둠의 원리가 패함으로써, 빛의 원리 하에 어둠의 원리가 있는 것이기 때문.

[6] 다만 욥기에서의 묘사는, 조로아스터교처럼 악의 원리를 확실히 하나의 존재로 두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권능 하에 사탄이 초장부터 묶여있는 듯한 묘사다.

[7] 파르시가 유대인 바리새인의 어원이라는 주장이 있었는데 실제론 기원전 2세기 하스몬 왕조 시절 헬레니즘의 유입에 맞서서 이를 거부하며 유대전통을 지키는 무리라는 정체성으로 등장했다.

[8] 근데 기독교와 다른 점은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자라투스트라의 정액이 호수에 보관되어 있다가 호수에서 목욕하는 처녀가 구세주를 잉태하게 되는 것이다.

[9] 구약성경 욥기에 이러한 측면이 나타나 있다. 그런데 이 양반이 이걸 허락하는 바람에 수많은 욥의 자식들과 하인들, 가축들이 끔살의 향연에 휘말리고 말았으니...

[10] 근데 이부분에는 반론이 존재할 수 있는게 원래 창조주였고 태초에 혼자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애시당초 유일신이었다고 할 수 있고, 히브리의 신이라는 것은 우리들을 지켜준다는 의미지 다른 신이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11] 모세오경 성립시기는 여러 학설이 있어서 단순 바빌론 시기로만 볼 이유는 없다. #.

[12] 사실 데바를 우위에 놓는 인도 신화에서도 아수라는 여전히 대단히 강하고 정의로운 존재로 나타나는 때도 많이 있고, 데바 신들은 어째 하는 짓이 정말 비열하고 악랄하다보니 거의 악당에 가까운 짓을 할 때이 많다.

[13] 마치 생물처럼 닿은 것을 모조리 강한 산성으로 변화 시키는 산(酸)의 일종이라고 한다. 이걸 써서 명교 총단의 근방의 우물물들을 모조리 오염시켜 총단을 지키던 명교도들을 굶겨 죽였다는 것.

(출처:나무위키)



Directed byYann Gozlan
Produced byWassim Béji
Thibault Gast
Matthias Weber
Written byYann Gozlan
Guillaume Lemans
Grégoire Vigneron
StarringPierre Niney
Ana Girardot
Music byCyrille Aufort
CinematographyAntoine Roch
Edited byGrégoire Sivan
Production
company
2425 Films
Wy Productions
TF1 Films Production
Mars Films
Distributed byMars Distribution
Release date
  • 18 March 2015
Running time
97 minutes
CountryFrance
LanguageFrench
Budget$5.2 million
Box office$3.8 million[1]

소설가가 꿈인 이 남자는 일일용역을 하면서 살아 가면서 자신의 글을 쓰고 있다. 하지만 출판사에서는 그의 작품을 거절하고...

물건을 옮기러 들어 갔던 대학교 강의실에서 강의 하던 여자에 반하지만 잡역이나 하면서 살아 가는 이 남자에겐 범접할 수 없는 상대...

어느날 35년을 홀로 살다 유족도 없이 죽은 어떤 남자의 집을 정리하던 중 우연히 발견한 그 남자의 '전쟁 일기'

이를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사에 내었는데 대박이 난다.

하지만 자신의 글은 단 한 줄도 쓸 수 없는 상태로

명성과 돈, 그리고 그 여자와의 사랑에 취해 살아 가지만

돈은 바닥나고 차기작을 담보로 한 착수금 받아 쓰던 것이 드디어 은행과 출판사에서도 법적 조치가 들어오고,

설상 가상으로 전쟁일기의 비밀을 하는 남자에게서 협박을 받고

그 돈을 마련하고자 장인될 사람의 물건을 훔친것이

애인의 전 남친에게 발각되어 싸우다 죽이게 되고

시체를 유기하고

글은 한 줄도 쓸 수 없고,

며칠 후 바다에 집어 넣었던 시체가 떠 오르게 되어 경찰의 수사는 시작되고

협박도 집요해 지는데

완전한 절망의 순간에 그는 작품을 쓰게 된다.

그리고 협박하는 남자를 태우고 가다가 일부러 사고를 내어서 자신이 죽은 것처럼 꾸미고

이 모든 명성에서 사라져 다시 잡역부의 인생으로 돌아 가는데....


2년후 어느날 서점에 자신의 작품이 '유고작'으로 출간 되어 있고 자신이 사랑하던 여인과 자신의 딸이 함께 있는 것을 보지만

그는 비내리는 거리의 어둠속으로 다시 사라져 간다.


우유부단하고 답답함이 중간 부분에 너무 많아 좀 짜증이 날려 했지만 마지막 부분에 나름의 반전이 있어서 좋았다.

강건한 기성사회속에 끼이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나름의 시각으로 보여 주었고, 진실성이야 말로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에 가장 큰 요소인 것을 무
뚝뚝하게 보여 주었다. 어쩌면 타인의 작품을 훔쳐서 명성을 얻었지만 이젠 자신을 죽임으로서 자신의 진정한 작품을 세상에 낼 수 있었던 한 남자를 통해서 인생의 아이러니를 보여 주었다.

201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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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26 – 정치학(Politica) /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les, BC 384 - 322)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고대 그리이스의 학문을 집대성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 관한 저서로, 최초의 정치학 교과서이다. 정치공동체의 국가의 기원과 본질, 민주정, 귀족정, 군주정 등 정치체제의 성격과 장단점, 가장 좋은 나라의 체제, 당시 국가체제들의 비판, 그리고 그 이외의 서양 정치학의 초석이 되는 기본개념과 문제들이 이 책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정치란 무엇이냐가 문제 될 때 항상 다시 논의되고 조회되는 서양 정치철학의 고전이다. 


a. 생애와 작품활동

 만학의 비조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인 플라톤과 함께 그리스 최고의 사상가로, 17세기 말까지 서양지성사의 방향과 내용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플라톤의 최대제자였으나 사상에 있어 스승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이상주의자인 스승과는 달리 현실주의적 경향을 보였는데 이 두 철학자의 긴장과 균형관계는 그리스 철학의 큰 매력이라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신흥왕국인 마케도니아의 궁정의사인 니코마코스의 아들로 부유하게 태어났다. 어릴 적 당시 풍습에 따라 가업을 잇기 위해 해부학 등 생물학 방면의 연구에 흥미를 가졌는데, 훗날 그의 현실적인 사유체제가 형성된 것은 이렇나 유년시절의 영향인 듯 하다. 그의 용모는 키와 눈이 작고, 대머리인데다 말까지 더듬어 보잘것없었는데, 그는 이 같은 신체적인 결함을 보완하려고 화려한 의복을 입는 등 남다른 치장을 했다 한다. 성격적으로는 겁이 많고 우유부단하고 현실도피적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10세 전후에 양친을 잃고 고아가 되어 친척집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에는 호메로스와 플라톤의 작품을 주로 읽었고, 17세 때 아테네에 진출하여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 에 입학하였다. 그는 거기서 학문에 전념하여 젊은 나이에 강의를 맡기도 하였는데, 독서의 폭과 깊이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한다. 스승인 플라톤은 이런 학구적인 제자를 총애하여 간혹 아리스토텔레스가 지각할 때면 그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렸다고 한다. 아카데메이아에서 그는 책벌레 또는 독서광으로 유명했으며, 남다른 노력과 뛰어난 재능으로 점자 자신의 독자적 입장을 개척하기 시작하였는데, 중요한 철학적 문제에 대해 스승과 견해차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는 스승의 학설을 비판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플라톤은 어미젖을 다 빨아먹고 발로 걷어차는 망아지 같다 그를 비난하였다 한다. 그러나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저 유명한 진리와 우애는 함께 사랑할지라도 우애보다는 진리를 더 존중할 것을 경건은 우리에게 요구한다 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사사로운 인정보다는 진리를 수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아카데메이아에서 18년 동안 공부한후 플라톤이 죽자. 플라톤의 조카가 아카데메이아 원장 자리를 상속했다. 그는 곧 아테네를 떠나, 마케도니아 왕의 왕자인 알렉산더를 3년간 개인지도하게 된다. 당시 13세의 왕자는 술마시기, 말타기 등을 좋아했고 성격이 난폭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에게 곧 염증을 느꼈으나, 왕실의 극진한 대우와 왕자의 개심으로 의욕을 내어 정치학, 윤리학, 수학, 생물학 등을 가르쳤다. 그는 알렉산더를 전통적인 그리스 정신의 상징인 호메로스의 작품으로 교육했는데, 알렉산더는 스승에게 배운 일리아드를 항상 머리맡에 두고 읽었으며, 원정중에 신기한 동식물을 보면 스승에게 보냈다고 한다. 알렉산더가 왕이 된 후 동방원정에 나설 준비를 하자 그는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 자신의 학원인 리케이온 을 열고 무보수로 제자들의 교육에 힘썼다. 알렉산더가 보내주는 막대한 연구자금과 연구자료로 리케이온은 아카데미아를 압도하고 날로 번성하였다. 늘어나는 제자들과 함께 학원안에서 함께 식사하고 제자들과 더불어 숲속을 산책하며 학문을 논하였는데 이 때문에 이 학파를 소요학파라 부르게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12년 동안 학문연구에 몰두하여 오르가논 형이상학 정치학 시학 니코마스 윤리학 영혼록 자연학 등 엄청난 저술을 하여 고대 학문체계를 완성하였다. 그의 대부분의 저서는 이때의 강의노트다. 그러나 그를 돌봐주던 알렉산더가 죽자, 아케네 시민들로부터 알렉산더의 측근자로 지목되어 고소당했다. 이에 그는 리케이온을 측근에게 인계하고, 소크라테스를 불경죄로 몰았던 아테네 시민들로 하여금, 철학자들에게 같은 실수를 두 번씩이나 저지르지 않도록  아테네를 떠나 어머니의 고향에 거처를 마련했다. 하지만 1년만에 62세로 세상을 떠났다.


b.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아리스토텔레스는 거의 모든 서양의 학문 분야에 있어 선구자적 역학을 한 백과사전적 인물이다. 정치학을 비롯한 거의 모든 학문이 그에 의하여 학문의 원천을 이루었고, 특히 그의 철학사상은 중세 스콜라 철학에 원용되어 중세를 지배하였다. 


논리학 

그는 (오르가논)에서 논리학을 집대성하고 있는데, 모든 판단에 작용하는 개념들을 10개의 범주로 구분하고 3단논법의 추리형식(연역법의 초기모습)을 체계화함으로써, 바르게 생각하는 방식을 확립하였다.  연역법이란 과학적 탐구방법의 하나로 일반적 원리에서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실을 설명하는 방법으로(후에 데카르트에 의해 비판 받음), 영국의 베이컨은 그의 저서(신기관)에서 이와 대립되는 귀납법을 창시하여 밀이 완성하였다. 


형이상학   

아리스토테렐스는 그의 저서 (형이상학)에서 플라톤과 견해를 달리하였다. 실재란 보편적인 이데아에 있지 않고 구체적인 것에 있다고 주장하고, 형상(플라톤의 이데아)과 질료는 다 함께 중요하며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이 둘이 결합함으로써 비로소 우주에 본질적 성격이 부여되는 것이라 하였다. 


자연학

(생성과 소멸에 관하여) (자연학)등의 저서에서 그는 운동하고 변화하는 사물의 원인 연구를 자연학이라 하면서 여기서 4가지 원인을 들었다. 첫째 질료인(사물이 그것으로부터 생기는 소재) 둘째 형상인(사물이  그것으로부터 형상되어지는 것, 즉 사물의 정의가 되는 것) 셋째 동력인( 그것 에 의하여 사물이 형성되는 원인) 네째 목적인(사물형성의 운동이 그것을 지향하여 이루어지는 목적)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둘째 세째 네째는 자연물에 있어서는 하나이므로 결국 질료와 형상에 의하여 자연물이 이루어지고, 자연의 존재는 질료 내에서 형상이 자기를 실현해가는 생성발전의 과정으로서 파악된다. 질료는 여기서 형상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 즉 디나미스(가능태)로서 궁극적 목적에 따라 파악되므로 궁극적 목적인 엔텔레케이아(완성태), 에네르게이아(현실태)야 말로 자연존재의 우월성을 나타낸다. 


윤리학

만물은 어떤 목표를 향해 움직인다는 목적론적 세계관을 폈던 그는 인간의 윤리적 목표(지고선)을  행복이라 보고, 행복은 중요의 덕에 의해 달성될 수 있다고 보았다. 중요의 덕은 이성의 작용에 의해 얻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이성적인 인간이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라는 그리스 철학의 전통적인 인간관이 그의 철학에 있어서도 변함없이 나타나고 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에 그의 윤리사상이 잘 드러나 있다.


정치학

아리스토테레스는 정치학을 아테네 국가제도에 관한 저술로 정치사상의 체계를 세웠다. 그는 인간은 사회적, 정치적 동물이라고 보고, 인간의 선은 공공생활 속에서 실현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윤리학은 정치학과 분리될 수 없고 정치학의 일부를 이룬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그는 플라톤과는 달리 재산과 가정이 인간생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긍정하였으나.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노예의 존재를 합리화하고 인간 불평등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의 시대는 그리이스 민주주의의 후기에 해당하여 사회적 질서가 불안하였던 때이므로 그는 강력한 1인지배를 희망하였다고 볼 수 있다. 


c. 정치학의 내용

 본래 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처음부터 (강의)할 목적으로 어떤 주제(도시국가)에 대해 일관적으로 집필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 주제에 관련된 문제에 대하여 각각 다른 시기에 이루어진 강의나 논술을 뒤에 편집한 것인 듯하다.


제1권 가족론 : 국가의 정의와 국가의 구성부분으로서의 가족이 탐구된다. 여기에서 그 유명한 인간은 본성상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명제가 등장한다. 이것은 국가가 사람들의 상호계약에 의해 성립된 것이라는 당시의 소피스트적 견해에 반론을 제기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국가의 최초 구성단위로서 가족의 부분, 즉 아버지와 아들, 부와 처, 주인과 노예의 관계 및 가정과 관계되는 재산의 문제가 논의된다.


제2권 이상국가론 : 그의 스승인 플라톤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의 이상국가론을 비판하고 있다. 그는 플라톤과는 달리 철학자와 왕의 기능을 분명하게 나누고 있다. 왕이 철학자가 되는 것은 필요하지도, 유익하지도 않다. 오히려 왕은 참된 철학자들의 충언을 들어야 한다. 나아가 스파르타,크레타, 카르타고의 국가제도를 비판한다.


제3권 시민과 헌정질서에 대한 이론 : 국민의 정의, 국민의 덕, 그리고 이 덕으로 보아 국민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정의하고 있다. 국가의 목적은 국가 공통 이익을 실현함에 있다. 이 견지에서 3가지의 선한 정체와 타락한 3가지의 정체를 논하고 있다. 선한 정체는 왕정, 귀족정, 시민정(적절한 민주정), 옳지 못한 정체는 참주정, 과두정, 극단과격한 민주정 등을 들고 있다. 좋은 통치체계는 지배자들이 자유시민 전체의 이익에 따라 통치하는 반면, 나쁜 정치체제에서는 단지 지배자의 이익만이 관심사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제4권 실제적 헌정질서와 변형 : 정치학이 다룰 과제로서 주요한 정체의 종류와 여러가지 형태를 살펴보면서 보통국가들에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최선의 정체와 특수사정아래서의 최선의 정체의 조직방법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제5권 혁명의 원인과 헌정질서의 변화 : 정체변혁과 그 일반적 원인, 각 정체의 변혁에 있어서의 특수원인과 그 변혁의 방지책 등이 논의 되고 있다.


제6권 안정질서를 위한 민주정치와 과두정치의 건설방법 : 민주제와 과두제의 여러 형태와 특징 및 각각 정당한 조직방법을 적고 있다.


제7권 정치적 이상과 민주정치와 과두정치의 건설방법 : 그는 국가의 목적을 전제로서의 공동체의 선을 보장하는 것임을 재확인한다. 최선의 정체는 그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 가정 선하게 행동할 수 있는 사회다. 그러나 행복은 덕성 있는 행동에 근거하며, 그러기에 사람이 얼마만큼 행복을 누릴 수 있는가는 그가 덕을 얼마만큼 실행할 수 있는 가에 달려 있다고 한다. 그래서 전체로서의 국가의 목적은 그 성원들로 하여금 덕을 위한 그들의 갖가지 능력들을 충족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상상할 수 있는 최선의 국가가 아니라, 실현 가능성을 가진 최선의 국가를 묘사한다. 그는 시민의 수, 국가의 크기와 본질, 도시계획 및 시민권을 향유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국가의 계급들간의 관계들이 어떤 원리에 의해서 통치되어야 하는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제8권 청소년의 교육 : 교육의 문제, 특히 음악 및 체육에 관하여 논하고 있으나 이것은 미완이다.


 8권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책은 제 1에서 3권, 4에서 6권, 7에서 8권으로 그룹을 이루고 있는데 그들 사이에는 다소 중복된 부분과 의견의 차이가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씌어진 시대의 차이와 그 동안의 저자의 사상적 발전 때문인 듯하다. 그 주제와 관한 연구방법은 주로 실증적, 귀납적이기는 하나 동시에 형이상학적, 윤리학적 이론에 의하여 방향을 결정되어 있다. 또한 이 저작은 정치에 관한 최초의 체계적 저술로 평가되며, 근세에 와서는 국가계약설이 부활될 때까지 고대와 중세를 통해 지배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렇다고 현대에 와서 그 의미가 완전히 퇴색한 것은 아니며 구미 대학에서는 여전히 텍스트로 사용되고 있다.


d. 비판적 평가

 플라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아리스토텔레스는 장년기를 지나면서 점차 독자적 세계를 구축해나갔다. 같은 철학을 둘러싸고 이들은 독자적인 관점과 생각을 자기 나름대로 발전시켜나갔다. 이들 스승과 제자 사이의 사상적 대립은 라파엘로의 그림 아테네 학당을 보면 플라톤은 하늘을 가리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을 가리키고 있는 장면을 통해 여실히 알 수 있다. 플라톤이 이상주의자, 이론원, 이데아계와

현상계, 전체주의적 귀족정치주의자인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주의자, 일원론, 형상과 질료 개인지향적 민주주의자의 성격을 가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에서 플라톤으로 이어지는 그리스철학의 완성자라는 점, 논리학의 집대성자, 중용에 의한 행복의 실현, 정치학, 자연학 등 여러 학문들을 체계화했다는 점, 그리고 빈곤은 범죄와 혁명의 양어버이라는 현대적인 사고를 가졌다는 점에서 그의 권위는 중세로부터 르네상스를 거쳐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사상계를 지배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노예제도를 인정하고 여성은 본래 열등적 존재라고 믿었던 점 등은 그도 역시 그가 속한 시대적 사고와 인습의 벽을 넘지 못했음(곰곰히 생각 해 볼 만함)을 보여준다. 그의 광범위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은 근대에 이르러 베이컨, 갈릴레이 등에 의해 불가피하게 수정을 받는 등 그의 사상의 일부는 현대에 상당히 뒤지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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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telecheia ]

요약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용어인 ‘완전현실태(完全現實態)’.

그 의미는 ‘목적에 있어 있는 것’, 즉 목적을 달성하여 완전한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한다. 때로는 현실태(現實態:에네르게이아)와 같은 의미로 쓰인다.


육체에 비해 영혼은 가능적으로 생명을 갖고 있는 자연물체의 최초의 완전현실태라고 한다(데 아니마2:2장). 현실태와 같은 뜻으로 쓰일 경우, 예컨대 ‘반절의 선(線)은, 가능태(可能態)로서는 선 전체보다 앞이요, 완전현실태(반절이 된 선의 상태)에서는 뒤’라고 한다. 따라서 개개의 사물은 가능태에 있을 때보다도 완전현실태일 때야말로 사물 그 자체라고 한다(《자연학》 제2권 제1장).


현실태와 구별된 완전현실태는 모든 운동의 시원으로서 순수형상이라든가 제1원리라든가 부동(不動)의 동자(動者)가 이에 해당하며,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사유(思惟)의 사유로서 바로 신(神)이라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엔텔레케이아 [entelecheia] (두산백과)



니코마코스윤리학

Éthika Nikomacheia

구분

철학서

저자

아리스토텔레스

시대

고대 그리스

전(全) 10권. 세계 최초의 체계적인 윤리학서이다. 학두(學頭:교장)시대의 강의 초고(講義草稿)이며, 그의 만년의 가장 원숙한 사색을 나타낸 책이다. 아들 니코마코스가 편집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불린다. 원리론(제1권∼제3권 5장)과 덕의 현상론(제3권 6장∼제10권)으로 이루어졌다.


윤리학은 모든 행위가 목적으로 하는 선(善)을 연구하는 것인데, 최고선(最高善)은 국가(폴리스)의 목적이므로, 정치학(폴리티케)과 직결된다. 인간적인 선은 개연적(蓋然的)이므로, 윤리학도 자연학이나 형이상학(形而上學)과는 달리, 개연적인 결론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학문의 청강자는 교육의 경험이 있는 자라야 하며, 너무 젊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또한 선은 행복이라는 논리에 따라 우선 행복이 우선 논의된다(제1권 4장 이하와 제10권). 행복이란 자족적(自足的)인 작용, 즉 덕(德)에 따르는 영혼의 활동을 가리킨다. 윤리적으로는 초과와 부족을 용납하지 않는 성격 상태, 즉 중용(中庸)을 본질로 하고, 용감 ·절제(節制) ·정의 기타 여러 가지 중용의 표본을 들어 현실적으로 또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제6권에서는 지성적 덕(知性的德) 중에서 이성(理性)이나 지혜(知慧)와는 다른 사려(思慮:프로네시스), 특히 정치적 사려를 강조했다. 제7권 후반과 제10권 전반에서는 쾌고(快苦)와 선악(善惡) 및 덕의 관계를 보다 발전한 형식으로 논하였으며 인간의 쾌(快)는 지복(至福)한 사람의 활동을 완전한 것으로 만든다고 주장하였다. 제8,9권의 우애론(友愛論:필리아)은 덕론(德論)을 보충하고 독자적인 이론을 전개하여 후대(T.아퀴나스 등)에 영향을 주었다. 또 제10권 종장(終章)에서 청소년의 덕의 지도에서 법률의 필요성을 말한 점도 주목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니코마코스윤리학 [─倫理學] (두산백과)



C25 – 천일야화(Alf Laila wa Lailai, One Thousand and One Nights)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아라비아, 페르시아, 인도, 이란, 이집트 등지의 문화를 솔직담백하게 엮어낸 전숭문학의 총화이자 사라센 문화를 대표하는 환상적인 설화 모음집. 15세기경 카이로에서 채록된 천일야화는 페르시아를 배경으로 하는 구전의 아랍계 이야기 모음이다. 아내의 부정에 분노하여 매일 신혼을 치르고 신부를 죽이는 일을 반복하는 왕이, 셰헤라자데라는 처녀가 들려주는 재미있는 이야기에 빠져 천일을 보내게 된다는 큰 줄거리를 뼈대로, 꿈과 로맨스를 찾아가는 환상과 대모험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a. 천일야화 의 성립과정

우리들에게는 아리바바와 40인의 도둑 알라딘과 요술램프 신드바드의 모험 등으로 친숙한 천일야화는 설화문학의 최고봉의 하나요, 세계 기서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그러나 그것이 몇 사람에 의한 합작인지, 아니면 한 사람에 의한 것인지 오늘날까지 알 길이 없지만, 아라비안 나이트 라는 제목에서 암시하듯이 아라비아 문화, 즉 이슬람 문화에 의해 형성된 책이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이슬람 문화(사라센 문화)는 10세기를 전후하여 아라비아 반도의 성지 메카에서 발생했으며, 아바스 앙조의 수도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중동일대에서 번영하여, 중세의 세계문화사에 독자적인 기반을 구축함에 따라 아라비아 문학도 아울러 발달하게 되었다. 유럽에 이 작품을 가장 먼저 번역 소개한 사람은 프랑스의 갈랑교수로, 그는 원작자는 한 사람일 것이란 견해를 피력했다.

이밖에 또 이 작품의 연구가로 유명한 레인 교수는, 이 작품의 창작방법으로 보아 한 사람이 집필하여 다른 또 한 사람이 완성시킨 것이거나, 두 사람이 협력하여 창작했을 가능성 짙다는 합작설을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아직 작가가 누구이며, 또 한 사람의 작품인지 또는 공동 작품인지조차 명확하게 규명이 되지 않고 있다.

이 작품의 기원에 대해서도 상당히 많은 설이 있지만, 오늘날에는 대체로 페르시아의 오랜 설화집 하자르 아프사나 (천의 이야기)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그 원본은 한 권도 현존되고 있지 않지만, 상당히 오래 전부터 아라비아의 문인들 사이에서 읽혀졌던 것 같은데, 아라비아 어로 번역된 것은 서기 850년경으로 추정된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 작품이 태어난 연대나 작자 혹은 편자를 확정지을 수는 없지만, 대체로 그 기원을 3-7세기경 사산 왕조가 번영하던 시기에 페르시아 민중들 사이에 유포되었던 이야기에 두고 있다. 그후 페르시아가 아랍 사람들에게 정복당한 뒤, 이 책도 아라비아 사람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고, 중세에 바그다드가 몽고군에 의해 점령당하게 되기까지 여러 가지로 수정 보완되어 보존되었다.

원래 이야기의 근원은 인도에 바탕을 두었으나, 페르시아를 거쳐 아라비아에 전해지면서, 이슬람 교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중세 페르시아에 있던 하자르 아프사나를 기초로 하여 십자군시대를 다루는 내용까지 있는 것으로 보아, 최종적으로 14-5세기에 이르러 편찬되었던 것 같다.

이 매력적인 이야기의 집대성이 유럽에 알려지고, 그리고 오늘날 세계문학 중 하나로 꼽히게 된 것은 프랑스 인 갈랑이 18세기 초엽에 프랑스 어로 번역해서  천일야화를 간행하고부터다. 그는 시리아 여성 한나로부터 듣고 쓴 이야기도 여기에 넣었는데, 여기에는 잘 알려진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알라딘과 요술 램프 등이 포함되어 있다. 갈랑의 이 번역은 유럽. 미국 등 각국에서 번역판으로 만들어졌다. 번역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영어로 번역한 버턴 판으로, 알리바바. 알라딘. 신드바드의 이야기도 있는데, 그것은 원래 어른들을 위한 작품이다.

버턴은 천일야화 의 현장무대를 찾아 다니며 아직 발견되지 않은 이야기들을 채집 분류하는 동시에, 이 작품이 지니는 의의를 직접 체험했다. 천일야화가 오늘의 완벽한 모습을 갖게 된 것은 버턴의 불굴의 의지와 피나는 노력에 의한 것이다.


b. 주요 등장인물

샤푸리야르 왕: 천일야화를 듣는 사람. 아내인 왕비의 불륜을 목격하고는, 여성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밤마다 한 처녀와 동침한 뒤, 그 다음날 아침이면 처녀를 처형한다. 그러나 셰헤라자데의 1001일간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 셰헤라자데와 결혼한다.

샤자만 왕: 샤푸리야르 왕의 동생. 아내와 형수의 불륜을 알고 괴로워하나, 후의 셰헤라자데의 동생 두냐자데와 결혼한다.

셰헤라자데: 천일야화를 이야기 하는 사람. 대신의 큰딸로 샤푸리야르 왕의 신부가 되어, 밤마다 이어지는 이야기를 왕에게 들려준다. 그런 동안 왕의 세 아들을 낳고 마침내 정식왕비가 된다.


c. 작품의 주요내용

샤푸리야르 왕과 그의 아우 이야기가 전체 줄거리가 되고 있다. 인도와 중국에 군림하고 있는 사산 왕조의 샤푸리야르 왕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마르칸드의 왕이자 아우인 샤 자만에게 보고 싶으니 와주었으면 좋겠다고 사자를 보낸다. 샤자만은 기꺼이 이에 응하고 여행길에 나섰으나, 잊고 온 것이 생각나 도중에 궁전으로 돌아와 보니 왕비가 흑인노예와 부정한 짓을 하고 있었다.

이들을 죽이고 형 곁으로 갔으나, 형마저도 그의 왕비로부터 배반당한 것을 알고 마음의 상처를 달래다가, 형도 역시 왕비를 죽이고 형제가 같이 여행길에 나선다.

그러나 여행길에서도 여심의 무서움을 보고 돌아온 샤푸리야르 왕은 그후에도 세상의 여자를 믿지 못했다. 이후부터 왕비를 맞이하기만 하면 하룻밤을 지낸 다음 날 아침에 죽여버렸기 때문에 젊은 여자들은 거의 왕도를 떠나버렸다. 드디어 처녀라고는 대신의 두 딸 셰헤라자데와 두냐자데밖에 남지 않았다. 이때 재상의 총명한 딸 셰헤라자데는, 이제 자기에게 닥칠 운명을 피하려 하지 않고 자진해서 왕에게 시집을 와, 여동생의 협력을 얻어 첫날밤부터 재미난 이야기를 시작한다.

날이 새자 셰헤라자데는 이야기를 클라이맥스에서 중단한다. 왕은 재미있는 이야기의 귀추가 궁금하여 이 신부를 죽일 것을 하루 하루 연기하는데, 그칠 줄 모르는 풍부한 갖가지 이야기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계속되어, 이야기에 끌린 왕은 천일밤 을 하룻밤처럼 지낸다. 

마침내 천하룻밤의 이야기가 모두 끝난 후 셰헤라자데는 침묵에 잠긴다. 이때 옆방문이 열리고 유모가 한 사내아이를 안고 들어온다. 셰헤라자데는 그 아이를 받아 안고  대왕이시여, 이 아이는 대왕의 소생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고 왕에게 탄원한다. 왕은 아이를 보고 울먹이면서 셰헤라자데에게  그대는 나의 왕비이니라 라고 이야기한다. 왕은 그후 마음속으로 총명하고 영리한 셰헤라자데를 사랑하게 되어 행복한 여생을 보낸다.


 알라딘과 요술램프

중국 어느 도시에 사는 가난한 소년 알라딘이 서역에서 온 요술쟁이에 의해 지하 보물창고에 넣어져 요술램프와 반지를 손에 넣고, 그것을 이용해 부자가 되고 공주를 아내로 맞으며, 뒤에 왕위를 계승한다는 파란만장한 내용이다. 원전에는 없는 내용이어서 갈랑의 창작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정직한 알리바바는 40명의 도적단이 보물을 감춘 동굴을 발견하여 큰 부자가 된다. 이로 인하여 도적들이 노리지만, 여자 노예의 기지와 용기로 이들을 물리친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 역시 원전에는 없고, 갈랑의 창작인 듯하다.


 신드바드의 모험

신드바드의 항해담은 바그다드에 사는 신드바드라는 가난한 짐꾼이 어떤 인연으로 같은 이름의 부호 응접실에 초청되어, 7회에 걸친 이상야릇한 바다의 모험을 듣게 된다는 줄거리다. 그 내용은 그리스 인이나 아랍 인 또는 아랍 인의 해상기담을 흥미진진하게 엮어나감으로써 결코 가공의 이야기가 아니며, 당시의 지리 지식에 근거를 둔 부분이 많다.


d. 감상 및 문학사적 의의

이 작품은 우선 처음 이야기부터 체인스토리 형식을 빌렸으며, 순 페르시아적인 민화를 순 아라비아적인 환경에 적응시켜서, 윤색도 하고 개작도 했다. 또한 오랜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주로 바그다드나 카이로 근처의 민화를 계속 집어넣어 내용을 풍부하게 하여, 드디어 오늘날과 같은 방대한 민화집이 성립된 것이다. 이 책의 두드러진 특징은 그 내용의 다양함과 풍부함인 동시에 인생의 온갖 측면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점이다. 등장하는 인물도 역사상 실제의 사람들, 가공적인 남녀, 선인과 악인, 미인과 독부, 천사와 요정 등 실로 천태만상이다.

이 이야기에는 180여 개의 장편에 따로 짧은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어 그 숫자를 세기가 어렵고 분류하기가 쉽지 않으나, 내용에 따라 대별하면 다음과 같다.


 연애담

이중에는 환상세계의 연애담도 있고 역사상 실재한 인물들의 사랑이야기도 있다. 한 젊은이가 어딘가 먼 나라에 있는 미인의 말을 듣고 그리움에 못 견디어 가지각색의 위험을 겪으면서도, 마침내 상대를 찾아 결합한다는 줄거리가 여럿 있으며, 이것들은 대개가 페르시아 기원의 것이다. 또 고대 아랍인들간에 전해진 연애담, 예를 들면 연인 라이카가 그리움에 빠진 나머지 미치광이가 되었다는 마주눈의 애처로운 이야기 등처럼, 아바스 왕조의 수도 바그다드를 무대로 벌어지는 사랑의 사연도 하나의 장르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대개가 연인끼리 고생을 겪은 뒤 유력한 은인의 도움으로 결합되다는 줄거리이다.


 범죄담

도적. 살인 등의 이야기가 중심이 된 것으로 탐정. 추리 등의 줄거리가 있는 한편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과 같이 착한 사람은 흥하고 악한 사람은 망친다는 권선징악의 사상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도 있다. 그러나 알리바바 이야기와 알라딘과 요술램프 등은 갈랑이 소개하고부터 세상에 알려졌지만, 대개의 아랍어 원전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출처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범죄 줄거리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것은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의 바이바르스 대왕과 16명의 경비대장의 이야기 라는 것으로, 카이로의 경비대장들이 제각기 체험한 도둑잡기 이야기를 왕에게 보고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여행담

 여러 나라의 진귀한 이야기 도 이 가운데 들어 있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것은 뱃사공 신드바드라든가 놋쇠로 된 성 은 스페인의 서쪽 끝에 놋쇠의 도시가 있으며, 이를 둘러싸고 있는 같은 금속으로 된 성벽이 있었다는 말은 아랍 사서중에도 기록되어 있다. 


 신선담

이 이야기 중에는 아랍 사람이 귀신이라 생각하는 신의 일족이 활약한다. 그들은 빛으로 만들어진 천사와 흙으로 빚어진 인간의 중간적 존재로, 알라에 의해 불에서 창조되었으며, 변화가 자유자재이며 또 공중도 날 수 있으나, 사람과 마찬가지로 죽음이 있고 남녀의 구별도 있으며, 성질에도 선악이 있다고 되어 있다. 그 일족 중에는 거대한 이리프트라든가 식인귀 구르 등도 있다. 샤푸리야르 왕과 그의 아우가 여행중 어떤 해안에서 미인을 넣은 괘를 머리에 이고 나오는 이리프트를 만나는 이야기가 나온다. 또 상인과 마왕 에서는 상인이 던진 대추야자씨에 우연히 지나가던 마왕의 아들이 맞아 죽었기 때문에, 마왕은 상인을 죽이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세 명의 장로가 각각 기구한 일신상의 지나온 일을 말하며 마왕을 기쁘게 한 뒤, 그를 구한다는 줄거리도 있다.


이처럼  천일야화 는 긴 세월을 두고 성장하여 이루어진 일대 설화집으로 아랍어로 되어 있으며, 위에 든 것 외에 이 범주에 속하는 짧은 비유, 사화. 일화 등이 적어도 100여 개의 긴 설화 중에 끼여 있다.

이렇듯 한 독립된 이야기에서 다른 또 다른 독립된 이야기를 줄줄이 교묘하게 이어가는 프레임 스토리(frame story)식으로 180여 편의 장편 스토리가 전개된다. 이러한 프레임 스토리의 구성법은 훗날 데카메론이나 캔터베리 이야기 같은 걸작에도 크게 영향을 준 바 있거니와, 그 내용 또한 끝없는 낭만과 꿈, 그리고 모험의 세계를 그리는 독자들에게 한없이 넓고 화려한 환상의 길을 열어주었다.

특히 아랍 인 특유의 유머, 폐부를 찌르는 야유, 거리낌없는 폭소 등 온갖 희로애락이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다. 특히 천일야화 에서 그대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점은 성애생활의 적나라한 묘사이다. 그러나 이러한 장면들이 매우 자연스럽고 천진난만하여 조금도 추한 감을 주지 않는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세상의 다양함과 풍부함은 이제 아랍 인들만의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것이다.

한편 이 설화집의 동양적 환상은 예술가들을 자극하였다. 들라크루아, 뒬라크 등의 그림과, 림스키코르사코프, 스트라빈스키 등의 음악에도 영향을 미쳤고 영화로도 자주 제작되었다.



C24 – 기탄잘리 (Gitanjali) /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1861-1941)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어느 가을날, 노을진 하늘을 바라보며 음미하고 싶은 한 권의 시집으로, 동양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 타고르의 노벨문학상 수상작. 인도의 시성으로 일컬어지는 타고르가 1909년에 벵골어로 출판한  기탄잘리(한 묶음의 노래) 는 제목 없이 번호만 붙인 103편의 종교적인 서정시 모음이다. 시인 자신이 영역하고, 예이츠가 서문을 썼다. 출간과 동시에 선풍을 일으켜 1913년에 노벨상을 받게 되었고, 김억의 번역본(1923)으로 우리 나라에도 소개되었다. 영혼의 영원한 자유는 사랑 속에, 위대함은 작은 것 속에, 무한은 형태의 구속 속에 있음을 노래한다.


a. 생애와 작품활동

인도의 시인. 사상가. 교육가. 음악가. 화가. 사회운동가 등 실로 다방면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20세기의 기적적 인물이다. 인도 벵골의 천 년을 헤아리는 오랜 바라문 계급의 명문 타고르가의 14번째 아들로 캘커타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그의 가계에선 많은 철학자나 예술가들이 배출되었는데, 특히 그의 부친 데벤드라나트는 평생을 종교개혁에 바쳐, 근대 인도의 정신적 부흥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부친을 따라서 히말라야 산맥 또는 아름다운 명승지를 다니면서 자연에의 신비를 엿볼 수 있었던 그는 이러한 정신적. 예술적. 학문적 분위기, 아름다운 인도의 자연 속에서 성장했다. 11세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그는 15세 때 형들과 함께 잡지를 편집, 17세 때 런던에 유학, 법률을 전공했으나, 1년도 못 채우고 귀국했다.

19세 때 첫 시집을 완성하였고, 1901년 부친이 명상의 장소로서 구도자에게 개방했던 볼푸르 숲 속의 샨티니케탄(평화의 집)을 물려받아, 청소년의 교육을 위한 학원을 설립, 오랜 전통에 기초하여 개성을 일깨우는 교육사업에 전념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타고르의 동서문화의 새로운 종합 을 이념으로 하는 비슈바바라티대학으로 발전, 인도 지성의 요람으로 수많은 지식인을 배출한 국립 종합대학이 되었다.

인간과 자연의 동화를 통한 전인교육의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 설립한 이 산타니케탄의 생활에서, 청소년들과 함께 공부하고 유희하면서 이 학원의 성장은 곧 나의 성장 이라고 그들의 인간완성을 위해 노력했다.

타고르로 하여금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게 한 시집 기탄잘리와 생명의 실현(The Realisation of Life)이란 유명한 철학서도 바로 이 샨티니케탄에서 이루어졌다.

1913년 기탄잘리 로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그의 예술적 재능은 연극. 음악에까지 발휘되어 인도의 국가도 그의 작품이며, 그 자신이 출연, 작곡하여 인도에 이른바 샨티니케 풍의 가무연극을 발달시켰다.

제1차대전시에는 매우 상심하였고, 대전이 끝남과 동시에 세계는 열광적으로 이 시성을 추앙하여, 그의 시와 사상 속에서 새로운 복음을 찾고자 하였다. 그는 여러 차례 일본을 방문하여 열광적인 환대를 받았다. 소련도 방문했지만 결코 유물론에 흔들리지 않았다.

제2차대전이 일어나자 간디와 손잡고 직접 반영운동을 하다가, 간디의 양해하에 그는 문화운동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두 사람은 서로 인도 근대사의 위대한 영혼으로 서로 존경을 아끼지 않았다. 간디의 교육정신은 타고르에게서 오고, 타고르의 평화이념은 간디의 철학과 공통된 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은 정치적 현실운동의 지도자요, 한 사람은 문화적 정신운동의 영원한 영도자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타고르는 1941년 80세를 이승의 고비로, 숭고한 이상이 무모한 전쟁과 유혈 속에서 무참히 무너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눈을 감았다.

주요작품으로는 기탄잘리의 어린이판이라 할 수 있는 초승달, 지상에 바치는 전원적인 사랑의 시라 할 수 있는 정원사, 신에게 올리는 사랑의 기원을 담은 열매 모으기, 희곡집인 우체국 등이 있다.


b. 시대적 상황과 그의 작품세계

타고르가 생존했던 인도는 정치적으로 영국의 식민지하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인도인들은 창조력을 잃고 민족적 자유의 상실을 거의 자각하지 못하고, 문화적으로는 소수의 비타협자들을 제외하고는 서양의 모방자와, 과거의 전통과 교리에서만 위안을 찾고자 하는 보수파들이 득세하는 상태였다. 종교적으로는 힌두교가 오랜 인습에 얽매여 낡은 봉건의 탈을 못 벗고 있었고, 한편에서는 바라문 교가 새롭게 등장하여, 오래된 인습을 깨뜨리고 새 시대를 열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사회적으로는 신분제가 여전히 존속하여, 국민들 사이의 동질감과 일체감이 형성되지 못한 상태였는데, 이 4성의 구별은 불교의 평등주의에도 불구하고 계속 심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암흑의 세계에 드디어 한 줄기 서광이 비추기 시작했다. 타고르의 탄생이 그것이다. 자신의 말을 빌면 자기의 삶 속에 세가지 흐름이 합류하였다고 한다.

첫째는 숭고한 지성인인 로이(Roy)에 의해 도입된 종교적인 흐름이다. 이는 매우 개혁적인 것으로, 과거의 인습과 구태의연한 형식에서 벗어나면서, 한편으로 과거의 가시덤불 속에서 이상의 싹을 찾으려는 르네상스적인 시도였다.

둘째는 벵골 문학의 개척운동이다. 그는 당시 문학이 창조력을 잃었다고 진단하고, 문학을 오랜 잠에서 깨워야 하며 문학이 새로운 힘과 운치로 넘칠 때, 그것은 아름다움의 비전을 제시해줄 것으로 기대했다.

셋째는 국민운동이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영국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것으로, 그들 스스로의 사상과 전신의 힘으로 세계를 세우려는 광범위한 민족운동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하에서 그가 고민하고 열렬히 추구하고 염원한 것은 오직 인도의 자유와 민족의 해방, 동양의 발전, 나아가서 동서양의 융합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보낸 그의 작품생활은 대개 4시기로 나누어진다.


 제1기

15세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여 벵골의 셸리(Shelley)라고 일컬어진 시대다. 최초의 시집은 바누 신하로, 익명으로 출간했으나 고전 스타일을 벗어나지 못했고, 저녁의 노래 아침의 노래를 거쳐 초기 서정시의 절정을 이루는  장조와 단조를 낸다.


 제2기

부친에게서 영지인 셀리다 관리의 위임을 받아, 자연과 가난한 농민생활과 접촉하며, 사회악과 인습에 도전하는 한편, 갠지스 강 유역의 대자연의 품에 안겨 명상을 일삼았다. 이 시기를 사다나 시기라고 하는데, 여기서 내던 잡지인 <사다나>에서 유래했다. 이 시기에 희곡 제물 치트라 등이 나오는데 초기의 서정세계에서 벗어나, 인생의 현실과 사회고발, 신에 대한 관심이 엿보인다.


 제3기

1901년부터 벵골 평론을 내면서부터 시작된다. 1905년에 영국의 벵골 분리정책에 항의하여, 펜을 휘둘러 국민의 자각을 촉구한다.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고라와 힌두교의 가정생활을 비판한 운명의 난파, 시집 교차로 등이 있다. 그러나 그의 본령은 시인인지라, 간디와 함께 하던 정치활동을 중단하고 샨티니케탄으로 가서 숲속에서 고독한 명상을 하며 삶의 심층을 더듬는다.

편협한 국수주의를 지양하여 영혼을 보편의 세계로 유도하고, 삶의 다양 속에서 영원한 하나됨을 추구하는 경건한 종교시인으로서의 예술가의 길을 지향한다. 사랑과 평화의 국제주의적 이상에 입각한 교육가로서의 사업에 헌신한다.


 제4기

1908년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두 아들 역시 계속해서 잃는다. 실의와 무상과 고독 속에서, 그는 기탄잘리 암실의 왕 우체국 등으로 대표되는 샨티니케탄(Santiniketan) 시대가 열린다. 1912년 2차 영국방문을 계기로 그는 동방의 시성으로 세계에 알려지고, 다음해에 노벨상, 또 다음해에 영국왕실에서 작위를 받는다. 그러나 1919년 암리차르에서의 대학살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반납했다. 그후 샨티니케탄에 세운 작은 학교를 사랑과 평화의 국제적인 문화의 중심이 도는 대학으로 키우는 데 헌신한다.


c. 기탄잘리 의 내용

벵골인의 정서로 아름다운 영혼을 노래한 이 작품집은 1909년에 발표된 벵골 어판에는 157편이 수록되었고, 1912년 작자가 직접 영역한 영어판에는 103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 영역판에는 예이츠가 서문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에서는 1923년 김소월의 스승인 김억에 의해 읽으라, 그러나 씹어서 읽으라 라는 역자의 말과 함께 번역. 소개되어 만해 한용운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기탄잘리라는 제목은 평화의 노래로 번역되었지만, 기트는 노래란 뜻이고, 안잘리는 합장의 뜻으로 인간과 신, 혹은 자연과의 합일의 경지를 노래하고 있다. 기탄잘리는 수록된 시마다 제목 대신 번호가 붙어 있는 것이 독특하다. 한편으로서의 독립된 뜻도 있지만, 일종의 연작시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생과 사의 문제, 그리고 인간의 시에 대한 경건한 마음과 인간의 종교적인 면의 불가피성을 노래하고 있다. 위대한 사상은 죄악의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여기 수록된 시편들을 통해서 감지할 수 있다.

이 시는 애인을 그리는 사랑의 순정으로, 신을 사모하고 신을 존경하는 감동의 서정시요, 종교적인 기도시다. 또한 영국의 속박에서 시달리는 조국 인도의 참상과 영광을 노래한 애국시요, 민족적 정열의 시다. 또 생사고뇌의 천태만상을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해 너무나도 가슴 아프게 표현한 서사적인 시요, 동시에 죽음에 임하는 마음의 자세와 그 뜻을 나름대로 풀이하는 종교적인 철학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신앙인은 자기 신앙의 뛰어난 표현을 여기서 본받을 수 잇고, 또 모든 문화 관계자는 시상의 극치를, 일반인은 생활의 목표와 행동의 지침 및 이념을 여기서 찾을 수 있으며, 전문연구가는 동양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시각을 얻을 수 있다.


 1

임께서 이 몸을 무한하게 하셨나이다. 이것이 임의 기쁨입니다. 연약한 이 그릇을 비우고 비우시어, 항상 새로운 생명으로 채우시나이다. 이 가냘픈 갈대피리를, 임은 산을 넘고 골짜기를 넘어서 가져오시어, 영원히 새로운 멜로디를 불어 넣으셨나이다. 불사의 임의 손길이 닿자, 이 가냘픈 가슴은 기쁨에 좁은 울이 터져,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말을 하나이다. 임의 무궁한 선물은 극히 작은 이 손을 타고 오나이다. 세월이 흘러도 임께서는 끝없이 퍼붓건만, 아직도 채울 곳은 남았나이다.


 23

사랑의 여행을 하시느라, 그대는 이 폭풍이 몰아치는 밤에도 밖에 계시나이까? 벗이여! 하늘은 절망에 허덕이는 자처럼, 으르렁거리나이다. 이 몸은 이 밤에 잠 한잠 이루지 못했나이다. 몇 번이고 문을 열어 어둠 속을 내다보았나이다, 벗이여! 제 앞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나이다. 임이 가시는 길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나이다. 저 푸른 강, 어느 어슴푸레한 기슭에, 저 험한 숲 어느 먼 끝에, 또 어둠 속 어느 어지러운 구렁을 지나 그대는 이 몸을 찾아오고자, 길을 더듬어 오시나이까, 벗이여?


46

얼마나 먼 옛날부터 임은 이 몸을 맞이하고자, 가까이 또 가까이 오고 계시는지 알 수가 없나이다. 임의 태양과 별은 나 몰래 영원히 임을 가리어둘 수는 없나이다. 수많은 아침과 저녁마다 임의 발길은 귀를 울려왔고 임의 전령은 내 가슴 속에 찾아와, 은밀히 나를 불렀나이다. 오늘은 어인 일로 내 삶이 이다지도 흥분하는지 알 수가 없나이다. 떨리는 기쁨의 느낌이 가슴속을 스쳐갑니다. 마치 세월이 내일을

끝마치게 하는 듯도 하나이다. 그래서 이 몸은 공기 속에서 임의 아리따운 모습의 어렴풋한 향기를 맡나이다.


95

내 처음으로 이 생명의 문을 건너던 순간을 깨닫지 못하겠나이다. 한밤중 숲속에 핀 꽃봉오리와도 같이, 이 거대한 신비로 향하여 이 몸을 열게 한 힘은 무엇입니까? 날이 밝아 광명을 바라보는 순간에, 내 이세상의 낯선 사람이 아님을 깨달았나이다. 이름도 형태도 없고, 또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나를 낳은 어머니의 모습으로, 그 팔에다 나를 안았나이다. 그럴지라도 죽으면 똑같이 미지의 것이, 일찍이 알려진 바나 다름없이 나타나리다. 그리고 내 이 생을 사랑하는 까닭에, 죽음도 사랑해야 할 줄 아나이다. 어머니가 오른편 젖에서 아기를 떼어놓으면, 아기는 소리쳐 웁니다. 바로 다음 순간 왼편 젖을 찾아내어 위안을 받으며.


103

임에게 한 번 인사를 올림으로써 내 주여, 모든 내 감각이 손을 뻗쳐 임의 발 앞에 있는 이 세계를 어루만지게 하여주소서, 아직 떨어지지 않는 소나기의 짐을 지고 나직이 떠 있는 칠월의 비구름과도 같이, 임께 한 번 인사를 올림으로써 온 이내 마음이 임의 문 앞에 머리를 숙이게 하여 주소서. 이내 모든 노래로 하여금, 갖가지 다른 가락들을 한줄기로 모아 임께 한 번 인사를 올림으로써, 침묵의 바다로 흘러가게 하여 주소서. 임에게는 한 인사로, 낮이나 밤이나 그들의 산에 있는 둥지로 되돌아 날으는, 향수에 젖은 학의 떼처럼, 나의 온 생명으로 하여금 그 영원한 안식처로 항로를 취하게 하옵소서.


d. 감상 및 문학사적 의의

 기탄잘리에 서문을 썼고, 또 감히 옥스포드 앤솔러지에 식민지 시인의 시를 넣어 편집한 예이츠의 말처럼, 타고르의 문학은 누구나 읽지 않을 수 없는 마력을 지니고 있으며,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세계를 깊이 파헤치고 들어가, 우리 개인의 세계를 발견하게 된다. 실로 인간존재의 핵심에서 우러나오는 음악이요, 이미지라 할 수 있다. 근대시인에게서 보기 드문 조화와 성숙에 이르는 길잡이로서, 그의 말 하나 움직임 하나가 모두 시요, 아름다움이요, 지혜다. 그의 시혼은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인도의 지혜의 정수에서 흘러나와, 유럽의 근대문명의 정신과 부딪쳐 일어나는 불꽃이며, 동양과 서양을 오묘하게 조화시킨 찬란한 꽃이라 할 수 있다.

최대의 자유와 무한한 개성, 나름의 철학, 또 온 세계와도 대결할 불굴의 용기와 저항의식의 호수에서 흘러나온 사상의 결정인 사리가 그의 시라 하겠다. 따라서 신비에 찬 바탕과 오묘한 음악과 뛰어난 철학에 넘치는 그의 시는 소박한 표현 속에서 가장 깊은 세계를 보이고 있다.

그가 사용한 언어에 접하면, 그의 천재적 활력은 눈부시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가 창조한 문학의 다양성과 아름다움, 박력은 실로 놀라운 감명의 샘이 된다. 몇 세기에 걸쳐도 제대로 이루지 못할 일을 그는 불과 한 생애에 이룩하여 국민에게 개화와 발전의 힘을 주었다. 그는 사상가 감정의 가장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 언어를 창출하여 동서 어느 대학에서 가르쳐도 손색없는 문학을 생산하였다. 그가 과감하게 개척하여 결실을 가져오지 못할 분야는 없었다. 그는 벵골이라는 예술의 처녀지에 세계적인 문화의 생명을 불어넣은 도화선이 되었다. 그의 작품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무리 위대한 문학의 시금석에도 저항할 수 있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e. 임을 향한 기도의 시

이 작품 속에서 시인은 자신의 속한 현실의 세계와 임이 계신 피안의 세계를 상정해놓고, 영원의 세계에 계시는 임을 현실 속에서 갈망하는

한 성자의 육성을 담고 있다.

그는 진정한 의미의 예언자요, 인간과 신의 매개자였다. 그의 천재성에 접하면 무엇이든 빛을 내고 생명이 샘솟는다. 미지의 세계에 사상의 지평선을 제시하였고, 서양과 동양 사이에 가로놓인 늪에 다리를 놓았다. 1929년 타고르는 일본을 들렀을 때 <동아일보>를 통해 한국인의 가슴에 희망과 불을 던져주었다.


f. 동방의 등불

In the golden age of Asia

Korea was one of its lamp bearer

And that lamp is waiting to be lighted once again

For the illumination in the East


아시아의 빛나는 황금시대에

코리아는 그 빛을 밝힌 한 주인공이었다.

그 등불 다시 켜지는 날에

동방은 찬란히 온 세계를 밝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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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만교


브라만교(바라문교 · 婆羅門敎 · Brahmanism) 또는 베다 시대 종교(Historical Vedic religion)는 베다 시대(1500-500 BC) 동안 인도 아대륙에서 전개된 종교로서 브라만(바라문 · 婆羅門)이라고 불리는 사제 계급을 중심으로 전개된 종교를 말한다.[1]


브라만교는 《리그베다》·《야주르베다》·《사마베다》·《아타르바베다》의 4종의 베다의 종교적 가르침을 토대로 하여 우주의 근본적 최고 원리로서의 브라만(범 · 梵)에 대한 신앙을 중심 신앙으로 하여 전개된 종교로, 훗날 힌두교로 발전되었다.[1] 그러나, 브라만교가 그 포괄 범위를 명확히 그을 수 있는 종교 체계는 아니어서, 흔히 브라만교라고 칭할 때는 명확히 규정할 수 있는 특정한 범위를 가진 한 종교 체계를 가리킨다기보다는, 인도의 전통적인 민족 생활과 사회 구조에 기반하는 전통적 철학 · 사상 · 신학 · 제사 의례 등의 종교 현상 전반을 총칭하는 경우가 많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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