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27 – 고백록(Confessions) /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 - 430)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루소의 고백록, 톨스토이의 참회록,과 함께 서양의 3대 참회록으로 불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이 고백록은 그의 젊은 날의 지적 방황과 종교적 모색을 기록학 책이다. 즉 고백록은 중세 유럽이 기독교적인 사상의 틀을 갖추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그 자신의 자서전이자, 한 인간의 내면에 일어나는 어둠과 빛, 선과 악, 육체와 영혼의 처절한 갈등이 표현이라 할 수 있다.한 구도자가 보여주는 영계와의 대화가 오늘에 사는 우리의 메마른 영혼에 깊은 울림을 줄것이다
a. 생애와 작품활동
게르만 민족의 이동이 시작된 로마 말기의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교부철학의 집대성자로 스토아 학파의 토마스 아퀴나스와 함께 중세기독교 최대의 사상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의 생애는 그의 저서 고백록 속에 잘나타나 있다. 그는 당시 로마의 속국이던 북아프리카의 루미디아 지금의 알제리에서 세금징수관이자 마니교 신자인 아버지와 독실한 크리스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시, 암송, 웅변 등에 소질을 보이기도했고, 독학으로 라틴문학, 특히 베르길리우스를 애독했으며 수사학에도 뛰어났다. 청년시절에는 타락한 생활을 하기도 했으며 19세 때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 를 읽고 철학에 눈을 떴다. 그리하여 참지혜를 구하기 시작하는 과정에서 크리스트 교에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성서의 소박한 문체나 카톨릭 교회의 보수성에 만족하지 못하여, 빛과 어둠이라는 이원론을 주장하는 마니교의 합리주의에 이끌렸다. 그뒤 9년 이상 마니교를 접하면서 마니교적인 미학서 미와 적합을 썼다. 그러나 383년 로마에서 신플라톤주의 학파를 접하고 마니교를 결별했으며, 이듬해에는 밀라노에서 수사학 교수가 되었다. 386년 플로티노스 등의 신플라톤주의 책을 읽고 불변의 빛을 보는 신비적 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때 진리의 존재를 확신하게 되었다. 또 밀라노 주교인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듣고
감동하여, 그해에 크리스트 교로 개종하였다. 개종 후 교수직을 그만두고 밀라노 교외의 산장에서 토론과 명상을 하면서 독어론 등 철학적 대화편을 저술하였다. 거기서 성서의 시편 제 4편을 읽고 받은 감동은 그의 정신에 큰 전환을 가져왔다. 388년 고향으로 돌아와 새로운 친구들과 수도원 생활을 하는 한편, 391년 히포의 주교 발레리우스의 요청에 따라 사제가 되었고, 396년 발레리우스가 죽자 히포 주교가
되었다. 민중들과의 접촉을 통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색은 성서의 문구 속에서 신의 말을 찾아내어 전달하려고 하는 해석학적인 방법을 취함으로써 더욱 깊어져 갔다. 397년 부터 고백록을 쓰기 시작하여 3년만에 끝내고, 400년경부터는 삼위일체론 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이어 426년에는 신국론 을 완성했다. 그는 34년간이나 주교직을 지켜나가면서 크리스트 교 사상의 형성에도 큰 역활을 하였다. 430년 반달족이 히포를 공격하였는데 그로부터 3개월 후 76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으나, 반달족은 3개월동안 히포를 유린하면서도 아우구스티누스의 도서관과 성당은 손대지 않았다 한다.
b. 교부철학과 스콜라 철학
흔히 중세를 암흑의 시대라 한다. 왜냐하면 신학이 중세의 학문과 사상을 압도하여 철학이나 자연과학 등 기타 학문은 그 시녀역활에 만족해야 했기 때문이다. 중세신학의 발전의 주체세력은 파리 대학을 중심으로 한 대학교수들이었으므로, 신학은 학교:스콜라,사람들의 학문:스콜라티스즘이란 명칭이 붙었다. 중세신학의 발전은 크게 2분될 수 있는데 1. 예수사후 8세기까지 신부들에 의해 발전된 교부철학과 2. 9세기에서 15세기까지 발전된 스콜라 철학을 들수 있다.
교부철학, 교부철학은 주로 크리스트 교의 정통교리를 하나로 체계화하여 교회의 권위를 확립하고자 하는 아우구스티누스 등의 교부들에 의해 발전되었는데, 그는 크리스트 교의 신앙을 그리스의 이성으로 설명하기 위해 초월적인 이데아 사상을 강조한 플라톤주의를 받아들였다.
나는 믿기 위해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알기 위해 믿는다 는 말로써 신앙과 이성의 타협을 시도하였다. 그의 크리스트 교 사상이 잘 방영된 신국론에서 그는 신국, 즉 내세는 지상의 세속적 역사과정 속에 투영된 것으로서, 인간역사의 과정이 신의 섭리의 실현이라고 주장 하였다. 그는 또 인간은 카톨릭 교회를 통해서 신국에 들어갈 수 있으며 교회 는 인간구원을 위한 유일한 기관이라고 생각했다.
스콜라 철학, 스톨라 철학은 교회의 교리철학으로서 중세철학과 학문의 절정을 이룬 중세의 종합적 세계관이다. 대표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플라톤보다 아리스토테렐스에 더 가까운 수정된 실제론을 주장하여, 보편적 존재는 영원불변의 실재성을 갖지만 본질로서 개체 안에 존재한다고 주장하여 교회가 수용할 수 있는 최종적인 공식을 만들어냈다. 그는 대표적 저술인 신학대전에서 스콜라 철학의 정수를 제시하였는데, 1. 자기를 부정하는 학설을 제시하고 2. 자신이 부정하고자 하는 학설을 제시하며 3. 자기자신의 의견을 진술하고 4. 자기자신이 의존하는 논거를 제시하며 5. 최초에 지적한 이론을 논박하는 독특한 논리전개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였다. 그는 관찰된 사실에 입각하지 않는 순수한 합리적인 인간사고의 역사에 있어서 최고의 지적 성취를 이루었다.
c. 고백록의 내용
저자가 46세때 지은 크리스트 교로 개종하고 영세를 받은 지 12년 만에 과거의 생활을 반성하고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한편, 외롭고 선한 신을 찬미하는 내용이다. 전 13권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은 1권에서 9권까지는 주로 어머니에 관한 내용이고, 10권은 자기반성을 담은 자서전적인 부분이며, 11-13권까지는 창세기 앞부분의 뜻을 밝히고 자기의 종교적 입장을 선명히 나타낸다. 제 1권은 처음에 신을 찬미하여 하나님 안에서 쉬기까지는 평안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영원한 평안을 구하겠다는 의도를 밝힌 뒤 유년, 소년기에 저지른 죄를 상기하여 화를 낸 일, 시샘한 일 학교에 들어가서도 노는데만 열중하여 학업에 태만했던 일들을 자책한다. 제 2권은 청년기에 들어가서 사랑하고 사랑 받기만을 좋아하여 방탕한 생활에 몸을 맡긴 일을 후회한다. 제 3권에서는 카르타고로 유학하여 뛰어난 성적을 올리면서도 도시의 유혹에 빠져 연극에 열중하고 또한 불손한 연애관계를 가졌으며, 19세때에는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 를 읽고 철학적 욕구가 생겼으나 성서문체의 간소함과 철학적 내용의 빈약함에 실망한 나머지 당시 유행하던 마니교에 빠졌음을 고백한다. 제 4권은 그로부터 9년 동안이나 마니교의 미혹에 빠져 있었고, 또한 점성술을 믿었으나 지기가 마니교로 유혹한 친구가 죽기 직전에 회개한 것을 보고 크게 감동했음을 말한다. 제 5 권은 기대하고 있던 마니교의 유명한 학자 파우스투스를 만나자 실망하고, 소위 마니교의 합리적 세계관이라는 것도 실은 미숙한 청년의 상상을 만족시키는 거짓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고 열의를 잃게 되었다.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고 카르타고에서 로마로 건너가고, 다시 밀라노에서 변론술 교사가 되었으며, 주교인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듣고 사교를 버리게 되었다고 말한다. 제 6권은
암부로시우스의 가르침을 따라 점점 카톨릭 신앙을 이해하게 됨에 따라, 바른 생활을 하겠다는 결심을 하면서도 다시 예전의 죄에 빠져서 끊임없이 죽음과 심판의 공포에 떨고 있었음을 탄식한다. 제 7권은 성년기로 들어가. 마니교의 미망에서 해방되고서도 여전히 신을 형체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자유의지가 죄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카톨릭의 가르침을 전면적으로 인정하지 못했다. 또한 신플라톤 학파의 책을 읽고 비형체적인 것을 보는 눈이 열려서, 로고스의 신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겸허함을 몰랐고, 그리스도가 신과 인간의 중개자임을 깨닫지 못하다가 성서, 특히 바울의 편지을 읽고 의문이 일소되었음을 말한다. 제 8권은 이미 지적으로는 해결을 보았으면서도 낡은 습관에 사로잡혀서 쉽사리 결심하지 못했으나 모든 것을 버리고 신에게 몸을 바친 후 새로운 삶의 모습으로 변화함에 따라 낡은 의지와 새 의지와의 투쟁이 최고조에 이른다. 마침내 밀라노 정원에서 펴서 읽어라 라는 귀절의 아이들 노래소리를 하늘의 소리로 듣고 성서를 펼쳐서 읽은 후 회개한 과정을 말한다. 제 9권은 교직에서 물러나 밀라노 교회의 한 산장에서 한가로이 지내면서 영세준비를 한 뒤 암부로시우스로부터 영세를 받고. 어머니와 같이 아프리카로 가려 했으나 티베리스 강 입구에서 어머니와 사별하게 되는데. 어머니 모니카의 일생이 가장 아름답게묘사된다. 자기 자식에 대한 배려와 감화가 절대적인 어머니로부터 젖과 함께 흡수한 신앙이 새로운 사람 을 길러낸 것이고, 그의 과거생활에 대한 고백이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끝난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제 10권은 집필 당시의 자기반성으로, 먼저 신과 복된 삶을 찾아 감각적인 것으로 부터 이성적인 것으로 올라가는 길을 걷고 있는 자신을 되돌아 본다. 제 11권은 천지창조 이전에 신은 무엇을 하였는가라는 의문은 도외시 하고, 현대철학에서도 특히 주목되고 있는 정밀한 시간론 을 전개하고 있다. 제 12권은 태초에 창조된 천지는 무엇을 뜻하는가를 밝히고 있다. 제 13권은 천지창조 가사를 비유적으로 해석하고, 신이 교회에서 구원과 성화를 위해 하는 일의 상징을 인정하고 신에게 영원한 안식을 구함으로써 고백을 끝맺는다.
d. 종교사적 의의
그는 기독교를 신봉하는 어머니와 마니교를 신봉하는 아버지의 신앙적 갈등 속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의 방황 속에서 자신의 철학문제인 선과 악의 세계를 해결해보려고 하였으나 한계상황에 부딪치고, 마침내는 이성에 의해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기보다는 먼저 믿고 알 수 있는 신앙의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신앙고백, 이처럼 아구스티누의 고백론 은 그가 바깥 생활로부터 경험했던 모든 불안한 생활로부터 해방된어 종교적인 평화와 확신으로 축복받기까지 솔직한 그의 체험담을 적은 기록이다. 일종의 자서전적인 본서는 시종일관 선하고 자비로운 하나님에게 과거에 지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완전하게 하나님에게로 돌아와서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조망하게 된 것이다.
신국론, 한편 그의 크리스트교 사상은 중세 사상 전개에 깊은 영향을 미친 신국론 에 잘나타나 있다. 이 책은 하늘나라 와 땅의 나라를 설명한 것으로, 천국은 신국으로 부른다. 전 22권으로 분류된 신국 은 제1권부터 10권까지는 주로 이교도에 대한 반박이고, 11권이하는 신국와 지국의 관계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역사적으로 서술했다. 신국의 일관된 내용은 인간역사의 과정이 신의 섭리임을 주장한 것으로,
교회를 통해 신국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교회는 인간구원의 유일한 기관이라는 것이다. 신국론 에 나타난 그의 사상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기독교 사상, 아구스투스는 그리스 사상 특히 플라톤사상 을 원용하여 크리스트교의 신앙을 설명한 점은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다. 인간은 태어날 때 자유의지를 부여 받았는데, 이를 남용함으로써 원죄를 짓게 되었다는 원죄사상을 폈다. 그 예로,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따먹은 금단의 열매와 카인이 아벨을 죽인 것을 들었는데, 일시에 무너지는 로마를 인간의 원죄의 결과로 보았다. 한편 아우구스투스의 신관은 전지 전능한 최고의 신이다. 인간이 선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통해서 구원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가장 가난한 신분으로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쫓아 사는 것만이 현세의 고통과 고난을 극복하고 현세적 승리를 이룬다는 구원사상 을 피력했다. 그의 윤리사상에 있어서는 믿음, 사랑, 소망 을 크리스트교의 3원덕으로 삼고, 플라톤의 4주덕 지혜, 용기, 절제, 정의를 조화시켜 7주덕 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성부, 성자, 성신은 오직 하나의 신의 3가지 모습이라는 3위 1체설 을 주장했다. 신국론 에 담긴 위와 같은 사상은 크리스트교의 세계관을 체계화 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고, 그의 또다른 저서 고백론 은 신에 대한 감사와 찬송을 서술한 영혼의 책 으로, 중세는 물론 근세에 와서도 영혼을 염려하는 내적 생활문제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어왔다. 이처럼 그의 체험에 바탕을 둔 고백론의 결론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
주여, 당신께서는 나를 당신에게로 향하도록 만드셨나이다. 내 영혼은 당신 품에서 휴식을 취할때까지 편안하지 않을 것입니다.(인생은 원래 고생의 연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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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교
Manicheism
1. 개요
2. 역사
3. 특징
4. 교리
5. 영향
6. 기타
1. 개요[편집]
유대교, 영지주의 크리스트교, 조로아스터교에다가 지역에 따라선 불교까지 복합으로 짬뽕해 생긴 이란 출신의 종교. 창시자인 마니(Mani)의 이름을 따서 마니교라고 한다. 많이 믿으라는 뜻이 아니다. 참고로 마니아(Mania)란 말이 이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짬뽕 종교라는 점에서 시크교를 떠올려 볼 수 있다.
2. 역사[편집]
마니가 서기 216년 오늘날의 이라크 영토인 크테시폰에서 태어나 12살 때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에게 새로운 종교를 만들라는 계시를 받고 25살 때부터 자신이 살던 제국 파르티아 주요한 종교였던 조로아스터를 비롯해 중동 각지에 퍼져 있던 크리스트교와 유대교의 교리를 짬뽕하여 자신의 이름을 붙인 마니교를 창시한다. 241년에 마니가 교리를 전파하러 인도 지역으로 떠나 여행하면서 불교와 자이나교를 많이 접하게 되고, 또 이를 마니교 교리에 흡수(!)하여 마니교 교리를 완성시켰다. 레알 짬뽕의 대가
3. 특징[편집]
최대 특징은 조로아스터교를 넘어서는 극한의 이원성으로, 조로아스터교 때부터 강조되던 선악의 대립을 넘어서 육체와 영혼의 대립까지 교리에 포함하니 철저한 자기 단속과 철저한 구원론을 한 성격으로 포함하게 되었다. 예컨대 마니교 교리 중에 "모든 형상이 있는 것을 파괴하지 말라"라는 내용이 있다. 우상이라면 환장하는 유일신교가 싫어할 만하다 이 말에 따라서 마니교 교리대로라면 목욕해서도 안 되고(목욕하면서 물의 형상을 파괴하기 때문), 땅에 농사해서도 안 된다(경작할 때 흙의 형상을 파괴하기 때문에).
이 원칙을 그대로 지킬 때 마니교도가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엄격하다는 자이나교의 교리가 겨우(?) '생명을 파괴하지 말라'인데도 상업 정도 외에 제대로 발 붙일 업종이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저 흠좀무. 그래서 마니교에서는 성직자들에게는 이런 원칙을 최대한 요구하고 평신도는 조금 널널하게 풀어 주는 대신 자기들이 왕이 되어 갖은 재물과 음식을 가져다 바치도록 평신도층이 성직자들을 먹여살리는 의무를 지도록 했다.[1] 또한 식생활에서는 채식, 특히 과일을 요구했다. 마니교 최대 축일인 마니가 순교한 날에도 과일을 먹었다.
또 다른 특징은 그 막장 같은 짬뽕성. 창조 설화부터가 유대교, 크리스트교, 조로아스터교에 등장하는 신들을 마구마구 버무린 환상스러운 구성을 자랑하니 여타 종교에서 핍박받을 수밖에 없었던 데다가 마니교도는 비밀 종교집단 일종으로 자신들끼리만 접촉하면서 살았는데 이것도 권력자들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 중앙 무대로는 거의 올라오지 못한 채 반정부다운 민간 종교(선악 구도가 크게 작용하므로)로만 역사에서 존속하였다.
마니교의 세계관은 당대 유대교와 기독교와 조로아스터교와 그리스 신화를 모두 합쳐 재구성했으므로 매우 복잡하고 방대하다. 아주 체계 있고 복잡하다.
4. 교리[편집]
빛과 어둠이라는 이원론적 선악 구도를 갖추고 있다.
마니교는 철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종교인 중에서 스스의 사유를 통해 자발적으로 개종하는 등의 파급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성경에서 드라마틱하게 펼쳐지는 내용으로 우주의 원리를 설명하는 것과는 정반대였다.
마니교는 금욕주의를 강조하기도 해서, 마니교의 고위 성직자는 독신으로 산다.
마니교의 '마니'는 신의 최후의 예언자로서 신을 믿는 종교다. 따라서, 기독교와 같이 예수를 인정한다. 이렇게 신을 믿고, 예수; 부처; 조로아스터 등을 과거의 예언자로 이해했다. '마니'는 빛의 예언자라고 불리며, 빛을 선한 개념으로 여겼다. 이러한 빛과 어둠의 대립은 조로아스터교에서 빌려왔다.
게다가 마니교는 보편 종교로서의 역할을 자처했다. 기존의 종교가 타민족이나 타종교인을 박해하기 바빴던 것과는 달리 매우 평화적이기 때문에 이는 분명 매력적인 점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독특한 점은 '영지주의'이다. 대부분의 종교들이 수행을 하거나, 돈을 내거나, 선행을 하거나 하는 등 일상 생활과는 거리가 있는 것을 행하기를 바라는 것과는 달랐다. 마니교에서는 '지식'을 쌓을수록 그에 비례해서 인간의 타락을 막아주고 빛에 다가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악이란 절대 사라질 수 없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지식을 쌓아야 한다고 보았다.
5. 영향[편집]
이렇듯 창시자이자 교주였던 마니가 불에 타 순교당해 죽은 후 주류로서 인정받아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종교로 그 역사 자체가 피압의 역사라 할 종교이나 이란을 벗어난 국외에서는 민간에서나마 크게 유행해 동서 종교에 모두 큰 영향을 미친 바 있었다.
그 영향력이 생각보다 매우 크다, 이집트를 비롯한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지역, 인도, 중국, 한국에 이르기 까지 사실 상 구대륙 전체를 휩쓴 종교다. 중세 시대의 전파력 치고는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그 어떤 메이저 종교보다 파급력은 더 앞서나갔다.
서방로는 2세기 이후에 로마 제국에서 상당 기간 융성하고서 크리스트교 교부로서 추앙되는 아우구스티누스도 한때 마니교 신자였을 정도. 그 후에도 선악을 극단으로 강조하고 구원을 중시하는 중세의 이단 교파는 대개 마니교에 많이 영향받았는데 대표할 정도로 전형이 될 만하거나 특징이 있는 것이 11세기·12세기 알비 카타르파.
동방으로는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까지 뻗어나간 후 민간 신앙에 크게 영향을 끼친다. 먼저 위구르 제국을 위시해 중앙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잠시 국교로 정해졌던 적이 있다. 중국식 마니교는 당나라 9세기 경에 시작된 것으로 본다. 북송 말에 강남에서 반란한 방랍의 집단에 채식주의자로 마귀를 섬긴다는 끽채사마교 신자가 포함됐던 일변으로 마니교는 미륵 신앙과 합해지면서 소위 명교, 혹은 백련교로 발전하기도 했는데 15세기 후 마니교도는 소멸했으나 백련교도는 19세기까지 청을 괴롭힐 정도로 크게 융성한 바 있었다.
6. 기타[편집]
십자군 전쟁 항목에서도 나온 <아랍에서 보는 십자군>으로 유명한 작가 아민 말루프는 <마니>라는 소설을 썼는데 말루프 자신이 레바논 태생 무슬림 출신(프랑스에서 거주중)이지만 마니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다만 비난도 했지만 서문에서는 다양한 종교 장점을 넣으며 노력한 점을 높게 평가)을 넣기도 했다. 사실 이 사람은 종교 연구도 하면서 데바닷타(국내에도 정발됨)라는 소설을 썼는데 이 소설에서 데바닷타에 대하여 좀 좋은 면도 있다고 봤으나. 광신적인 한계로 가서 스스로 파멸하니 안타깝다고 결국 결말이나 그 근본주의에 대해서는 비난하고 있다. 그렇지만 서문에서 패자이기에 더더욱 기록에서 불리하게, 왜곡되어 남았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쓸 정도로 다양한 종교에 대하여 연구하고 소설을 쓰며 중립적으로 보는 사람이다.
실제 마니교와는 상관없지만,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의 교주 이름이 이만희라서 그 종교가 마니교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백괴사전에서 마니교는 이쪽을 가리킨다.(...) 신천지도 마니교처럼 교주 마니가 죽으면 교세가 사라질지도? 그래도 마니교는 천여년넘게 영향력이 남기라도 했지,이만희 교는 대체?
[1] 마니교에서 성직자는 '선택된 자', 평신도는 '듣는 자'로 불렸는데 가톨릭의 분파인 카타리파에서도 성직자와 평신도를 완덕자(Perfecti), 평신도(Credentes)로 구분했다.(출처: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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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로아스터교
최근 수정 시각: 2017-09-11 20:52:05
종교 관련 정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80px-Faravahar-Gold.svg.png
육군조로아스터교의 가장 유명한 심볼[1]
1. 개요
2. 역사
2.1. 창시와 전파
2.2. 사산 왕조 시대
2.3. 이슬람 시대
3. 현대의 조로아스터교
3.1. 이란
3.2. 인도
4. 교리
4.1. 유일신교
4.2. 파생 종파
5. 다른 종교와의 관계
5.1. 유대교, 기독교
5.2. 브라만교, 힌두교
6. 대중문화 속의 조로아스터교
6.1. 그 외 창작물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Zoroastrianism
페르시아 지역에서 발원한 이란 계통의 종교.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 마즈다교(Mazdaism), 혹은 중국에서는 불을 숭상한다 해서 배화교라 불렸다. 조로아스터교는 창조신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를 중심으로 선과 악의 질서 및 세계를 구분하는게 특징이다.
중동의 박트리아 지방에서 자라투스트라가 세운 종교이다. 그의 창시 시기에 대해서는 기원전 1800년에서 기원전 640년경으로 의견이 다양하다. 현재는 기원전 6-7세기가 학계의 정설이다. 그 이유는 그 정도 되어서야 창시자 자라투스트라가 언급되기 때문이다. 기원전 600년경에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 1세를 통해 오늘날 이란 전역에 퍼졌으며 기원전 5세기에는 이미 그리스 지방에까지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조로아스터교'라는 이름은 창시자인 자라투스트라에게서 유래한다. 본래 이름은 아베스타어로 '자라수슈트라(Zaraϑuštra)'인데, 이게 그리스에서 전사라는 뜻의 '조로아스트레스(Ζωροάστρης, Zōroastrēs)'가 되었고, 그것이 라틴어를 거쳐 영어로 '조로아스터(Zoroaster)'가 되었다.
2. 역사[편집]
2.1. 창시와 전파[편집]
파일:external/colleenday.files.wordpress.com/tumblr_lsu0mddvqu1qlziglo1_400.jpg
창시자 자라투스트라의 생몰연도는 확실치 않으나, 평상적으로는 기원전 6-7세기라고도 본다. 기원전 660년이 보통정설이다. 대부분의 백과나 지식사전에 6-7세기로 기재되어있다. 극단적인 주장에서는 대략 BC 1500년~ 1300년 경에 이란 동부 지역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트리아 출신이라고도 한다. 조로아스터교는 동부 이란을 중심으로 여러 이란계 종족들에게 전파되기 시작하고, 조로아스터교를 추종하는 메디아와 아케메네스 왕조가 서아시아의 패권을 쥐면서 급성장했다. 하지만 아케메네스 왕조는 안정적 통치를 위해 토착 종교와 관습을 용인하는 태도를 견지했고, 조로아스터교는 이란계 종족들의 범위 이상으로 전파되지 못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으로 아케메네스 왕조가 패망하자 조로아스터교 역시 국교의 지위를 잃고 약화되었다. 이후 헬레니즘 시대와 파르티아의 지배를 거치면서 아나히타나 미트라 등 보조 신격들을 숭배하는 변종 분파들이 널리 퍼졌다. 특히 미트라 숭배는 헬레니즘 세계를 거쳐 이후 로마 제국까지 전파되기도 했다.
2.2. 사산 왕조 시대[편집]
이 추세가 반전된 것이 사산 왕조의 등장이다. 사산 왕조는 그 이전 400년 동안 이란을 지배한 파르티아인들의 유목민적 전통과 느슨한 봉건제도, 타 종교나 문화(특히 헬레니즘)에 대한 호의적 태도 등을 비난하면서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 건설을 주창했으며, 이 과정에서 조로아스터교를 국가권력 강화와 사회 통합의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였다.
이에 따라 사산 왕조 초기 조로아스터교는 정통 교리와 경전을 확립하는 작업, 국가권력과 연계된 관료적 성직기구의 정비 작업 등을 진행하며 다시한번 국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후 제국의 정통 교리에 반하는 마니교, 마즈다크교 등이 등장하여 세력을 늘리거나 고위 성직자들을 견제하려는 황제들의 지원을 받기도 했지만, 결국 이단으로 몰려 탄압당했다.
조로아스터교의 몰락은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했던 사산 왕조의 멸망과 궤를 같이 한다. 아나톨리아와 유럽 지방을 지켜낸 동로마 제국과 달리 이란은 모든 영토가 궁극적으로 이슬람 세력에 정복당했고, 사산 왕조의 국가종교였던 조로아스터교의 입지는 크게 약화되었다.
2.3. 이슬람 시대[편집]
처음에는 아랍 정복자들도 이란 지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토착 유력자를 포섭해야 했으므로 조로아스터교는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불교나 힌두교 토속신앙과 달리 이슬람에 교리상 유대교, 기독교도와 마찬가지로 조로아스터교도 일신론에 해당하는 고등종교이기 때문에 원칙상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주었다. 8~9세기 정도만 해도 중세 페르시아어로 기록된 조로아스터교 관련 문서들이 꽤 남아 있다. 그 와중에 조로아스터교 내부에서도 이단취급 받던 마즈다크교는 시아파와 합세해서 제국에 반기를 들었기에 탄압받았다.
그러나 우마이야 왕조의 아랍인 우선주의, 비무슬림에 대한 추가 인두세 부과, 그리고 비무슬림을 차별하지 말라는 공식적 입장과 상관없이 이루어진 비공식적 차별, 특히 가혹한 세금과 더불어 조로아스터교도와 무슬림 형제가 있을 경우 조로아스터교도는 상속을 받을 수 없다는 등의 조치로 인하여 인해 점차 이란에도 무슬림 개종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또한 처음에는 고등종교로 인정하는 조치와 반대로 무슬림들은 점점 조로아스터교도들을 불을 섬기는 이교도로 취급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편견이 조로아스터교가 배화교로 불리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750년 아바스 왕조가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릴 때 이란의 비 아랍계 무슬림인 마왈리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9~10세기 정도가 되면 조로아스터교는 완전히 소수 종교가 된다. 11세기 셀주크 제국을 위시한 이란 지역의 튀르크화와 순니파 세력의 강화 역시 조로아스터교의 몰락을 가속화시켰다.
사산 왕조 멸망 이후 이란이 지속적으로 이슬람화되자, 조로아스터교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피난한 경우도 적지 않다. 이들 중 인도 지역으로 피난한 사람들은 아래 서술할 "파르시"가 되었고, 중국으로 피난한 사람들에 의해 배화교, 혹은 현교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3. 현대의 조로아스터교[편집]
현재도 적게나마 신자가 있다. 이란, 인도 공화국, 중국, 쿠르디스탄을 합쳐서 약 10~30만 명 정도이며 가장 많이 분포하는 곳은 인도다.
3.1. 이란[편집]
이란에서는 2011년 인구조사 결과 2만 5천 명 가량의 신자가 있다고 하며, 중부 야즈드(Yazd) 지역이 조로아스터교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다. 다만 워낙 고생이 심해서 성전 아베스타조차도 극히 일부분 밖에 남지 않았다. 대략 전성기의 20분의 1 정도 분량. 성경으로 예를 들자면 신약하고 구약 중 한두 편만 남고 죄다 없어졌다.(…) 1906년의 페르시아 헌법 규정에서는 의회 의석 중 1석을 반드시 조로아스터교도에게 할당하도록[2] 되어 있었으며, 이는 이슬람 혁명 이후인 지금도 유효하다.
호메이니는 조로아스터교를 그리 좋게 보지 않았다. 다만 조로아스터교가 과거 대페르시아를 상징하는 점이 있어서 팔레비 왕조 시절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또 1971년 페르시아 건국 기념일에 조로아스터교인들이 대표처럼 나온 적이 있었다. 당시 이걸 이단 행위라고 욕하다가 '페르시아를 욕하는 저 식히는 매국노!'라고 엄청난 비난을 받고 부랴부랴 '아니 잘못 생각했어요!'라고 변명을 하며 평생 페르시아를 부정하지 않는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야했던 호메이니였으니 아무리 이교도인 조로아스터라도 페르시아 제국을 함부로 까다가 자칫하다간 페르시아를 까는 것으로 봤기에 그냥저냥 공존하게 놔두었다. 차가운 무슬림 남자 하지만 조로아스터교에게는 관대하겠지. 그러나 차별과 박해는 존재했고, 2000년대 이후에 망명하는 조로아스터교도들도 있다고 한다. 조로아스터인들은 소수이긴 하지만 '과거 페르시아가 아랍을 지배하며 호령할 때 종교가 조로아스터교인데 왜 현대에는 정작 페르시아의 후손인 이란이 아랍인의 이슬람에 정복당했다는 거냐?'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에 이란 항목에도 나오듯이 이란에서는 '대신 소수계열인 시아파를 믿으며 아랍과 대립하잖아.'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고.
3.2. 인도[편집]
인도로 피난한 조로아스터교도들은 소수민족 집단인 파르시(페르시아인이라는 의미)가 되어 잔존하게 된다. 이들은 인도의 지배종교인 힌두교와 대립하지 않기 위해 교리에 일부 규정을 더하였는데, 현재 그 중에 문제가 되는 것이 "파르시와 파르시의 결혼에서 태어난 아이만이 파르시가 될 수 있다."는 규정이다. 시뮬레이션에 의하면 이 규정을 계속 지킬 경우 현대 사회에서 파르시는 2, 3세대 안에 거의 소멸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때문에 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여 개혁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파르시들은 주로 상업에 종사하여 상당한 부를 축적한 경우가 많은데, 현재 인도 최대의 재벌그룹 타타 그룹을 소유한 타타가문이 파르시이다. 의외겠지만 재규어와 랜드로버도 타타모터스 소유다. 타타모터스 뿐만 아니라 타타그룹 자체가 농업에서 항공우주 산업까지 안하는게 없을 정도로 인도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또 퀸의 프레디 머큐리가 파르시였으며 조로아스터교 신자였다. 생전에 머큐리는 자신의 뿌리를 매우 자랑스러워 했다고 한다. 그리고 피아노 분야에서 가장 난해하고 연주하기 어려운 작품을 남긴 작곡가겸 피아니스트 카이코스루 사푸르지 소랍지도 파르시교도였다.
시체로 불이나 땅을 더럽히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화장을 기피하고, 조장(鳥葬)을 선호하고 있다. 문제는 환경오염으로 조장에 쓰이는 대머리 독수리가 점점 수가 줄어들고 있어서, 이 풍습도 위협받는 중. 시대의 변천에 따라 개고기 식용에 대한 입장 차이도 변화했다.
4. 교리[편집]
파일:external/fabweb.org/1-zoroastrianism-prayers.jpg
조로아스터교는 흔히 불을 숭상한다 하여 배화교로 알려져 있지만, 불을 숭상하는 것이 아니라 조로아스터교도가 필수적으로 해야하는 하루 5번의 예식에 쓰이는 성스러운 불을 소중히 하는 것이다. 불 뿐만이 아니라 창조자의 피조물인 땅, 불, 물, 사람의 '마음'까지도 더럽히지 않으려 한다. 그런고로 당시 유행하던 짐승을 죽여 피로 땅을 더럽히는 제사와 사람의 시신을 땅에 묻는 것, 식물성 마약에 취해서 마음을 더럽히는 것 모두 금기시한 것이다. 불을 소중히 여기는 다른 이유로는 사산조 시기에 조로아스터교식의 '성상 파괴'가 일어나서 예술로 쓰이는 것 외에 종교 의식에서 성상을 쓰는 것을 금지하고 불을 사용하도록 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3]
주신 아후라 마즈다를 섬기는 종교로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거울의 양면으로 해석되는 "이원론적 일신교 종교"이다.[4][5]
성경도 비슷한 묘사를 사탄에게 하는데, 욥기에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6] 빛의 원리에 필적하는 어둠의 원리를 인정한다.
그러나 둘이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동등한 것은 아니고, 악과 어둠은 선과 빛에게 결국 패배하게 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적극적인 자유 의지로 단순히 믿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악에 맞서서 투쟁할 것을 주문한다. 영적전쟁 개념과 다소 비슷하다. 또 조로아스터교는 고대 신화의 여러 신들을 모두 받아들였으므로 신은 여럿 있지만, 결국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만물의 주인, "주신"은 오직 아후라마즈다/오르마즈드 뿐이다. 조로아스터교 내의 다른 신들은 유일신인 아후라마즈다를 돕는 보조적인 신이자 선한 영으로, 기독교의 천사들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다시 말해 조로아스터교는 비록 고대의 다신교적 성격이 일부 남아 있기는 해도, 기본적으로 일신교적 성격이 강한 종교이다.
현재 남아있는 아베스타를 보면 평화와 화합, 도덕적 생활을 통한 번영을 중시여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상당수의 에피소드가 자라투스트라의 방문을 받은 마을이 거지처럼 못살다가 자라투스트라의 지도를 받고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목축민과 유목민적인 성향이 많이 반영된 유대교와는 달리, 농민과 도시민의 성향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이 점은 베다 종교(=브라만교, 힌두교)와 대비되는 경향이기도 하다.
조로아스터교에서 강조하는 신심은 예언자 자라투스트라가 강조한 세가지의 좋은 행동, 즉 '좋은 생각', '좋은 말', '좋은 행동'을 하며 살 것을 강조한다. 애초에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면, 즉 아후라마즈다의 길을 따른다면 좋은 생각이 곧 좋은 말을 낳고, 다른이들에게 좋은 말을 하면 자연스럽게 다른 이들에게 좋은 행동을 하며 살 수 있다고 보는 것인데, 결국 이러한 행동들이 바로 악을 물리치는 무기가 된다고 본다.
4.1. 유일신교[편집]
사람들이 조로아스터교에 대해 착각하는 가장 본질적인 내용은, 아후라 마즈다와 앙그라 마이뉴라는 각각의 존재에 의존해 펼쳐지는 것이 이 세계인데 왜 유일신교라고 보느냐 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조로아스터교 내에서도 차이가 있는 듯 하다. 앙그라 마이누가 창조된 존재인지 아니면 원래 있던 존재인지가 조금 갈리는 듯하다.
앙그라 마이누는 창조된 존재가 아니다.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악의 힘인 앙그라 마이누는 창조되지 않았으며 창조주이자 선의 힘인 아후라 마즈다가 나중에 그의 존재를 눈치챈다. 왜냐하면 창조는 그 자체로 선한 행위이기 때문에 악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일신교라고 보는 이유는 결과적으로는 빛의 힘에 패배하기 때문이다. 또한 페르시아가 숭배한 대상은 오로지 아후라 마즈다 뿐이었다.
즉,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져 악한 짓을 하며 설치고 돌아다닌다 해서 유일신교라 부르지 않는 것이 결코 아니듯, 조금 더 강한 사탄이라 할 수 있는 앙그라 마이뉴가 존재한다고 해서 조로아스터교가 유일신교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부분은 주의해야 할 점이 유대교와 기독교의 경우에는 피조물이 타락한 경우이지만 앙그라 마이뉴의 경우에는 애초에 피조물이 아니었다. 애시당초 유일신교라고 하는 이유는 결과적으로는 빛이 승리하고 아무리 악이 날뛰어도 빛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앙그라 마이뉴와 동급의 존재는 스펜다 마이뉴다. 아후라 마즈다가 만들어낸 쌍둥이로 각각 빛과 어둠을 상징하는 존재. 후대에 오면서 스펜다 마이뉴의 존재감이 사라지면서 변화된 것이다.
경전에 의하면 아후라 마즈다의 성령인 스펜다 마이뉴는 선의 길을 택하고 앙그라 마이뉴는 악의 길을 택했다고 한다. 아니면 그냥 아후라 마즈다하고 앙그라 마이뉴가 그냥 쌍둥이 영이라고 묘사되어 있다.
다양한 사이트를 참조해보니 사이트마다 주장이 다른 부분이 있다. 앙그라 마이뉴가 창조된 존재인지 아닌지에 대해 이렇게 갈리는 이유는 아무래도 후대에 들어서 종교의 교리가 바뀌거나 아니면 해석의 차이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한 것으로 보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조로아스터교가 대세가 아니다 보니 주류의 의견이 확실하지가 않다.
4.2. 파생 종파[편집]
대충 이렇게 알려져 있지만 워낙 오래된 종교라서 시대에 따라 교리나 사상에 변화가 많고, 이단 종파나 분파도 많다. 특히 이슬람의 침략 이후 신자들의 수가 격감하여 그 전통이 매우 약화된 탓이 크다. 조로아스터교는 조로아스터교 이전의 고대 페르시아의 토착 신앙과 구분이 되기는 하나 일부 신들은 그 연장선 상에 있고, 향후 수백년간 나타난 여러 다른 종파와도 모호하게 구분된다.
주르반교 : 주르반교는 흔히 "쌍둥이 신"이라고 설명되는 아후라 마즈다와 앙그라 마이뉴가 세계를 지금과 같이 만들었다면, 그 동등한 쌍둥이를 만들어 낸 태초의 존재가 있으리라는 가정에서 형성되었다. 시간과 관련된 신이었던 주르반이 바로 그 태초의 존재라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주르반 항목을 보라.
미트라교 : 조로아스터교의 여러 하위신 가운데서 미트라를 특히 높이 보고 숭배하는 종파. 미트라교에서는 미트라를 아후라 마즈다와 동격, 혹은 아후라 마즈다의 계승자로 본다.
마니교 : 페르시아 출신의 예언자 마니가 조로아스터교에 크리스트교, 유대교 교리 등을 접목시켜 창시한 종교. 조로아스터교를 훼손시킨 변종 이단으로 간주되어 조로아스터교 세력으로부터 심한 탄압을 받았다.
마즈다크교 : 5~6세기 경 살았던 조로아스터교 성직자 마즈다크가 내세운 조로아스터교의 개혁 운동. 종교적으로 주류 성직자들과 대립하는 한편, 사회정치적으로 대귀족들을 공격하고 재산의 공동 소유 등을 주장해 큰 인기를 끌었다. 최초의 공산주의자들 결국 이단으로 몰려 절멸당했다.
5. 다른 종교와의 관계[편집]
5.1. 유대교, 기독교[편집]
유대인들의 귀환과 성전 재건축을 허락한 페르시아의 정복왕 키루스 2세가 조로아스터교도였다. 당시 페르시아는 영토 뿐 아니라 경제, 문화, 군사, 체제 정비 등 다른 나라들을 압도하는 오리엔트 세계의 패자로 확고한 위치에 있었던 시기로 유대인들 역시 종교뿐만 아니라 문화 전반에 페르시아의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7]
다른 종교에 미친 영향도 상당하다. 대표적으로 동정녀에 잉태되어[8] 태어날 구세주, 종말의 때에 일어날 최후의 심판, 자라투스트라가 광야에서 정진할 때 앙그라 마이뉴에게 시험받았다는 내용, 자라투스트라의 탄생 때 그를 방문했다는 마기(Magi)등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에 미친 영향력은 실로 엄청나다. 하지만 가장 큰 것은 존재 그 자체. 예컨대 아브라함계 종교에서 사탄은 본래 '고발자'라는 뜻으로, 인간의 신앙을 시험하여 신을 조롱하는 천사로 여겨지고 있었는데,[9] 조로아스터교의 이원론의 영향을 받아 신에 맞서는 악마로 바뀌어졌다.
유대교가 조로아스터교에 영향을 받았다는 학설이 지지를 받는 가장 큰 이유는 구약 성경 자체에서 본래, 그러니까 초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요소들이 어느 순간부터 등장하게 되는데, 그 요소들이 바로 조로아스터교의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히브리인의 신이던 야훼가 절대적 유일신으로 바뀐 것,[10] 야훼의 명을 받아 활동하던 사탄이 아예 야훼의 대적자가 된 것이다.
문제는 모세오경의 영향은[11] 물론 네부카드네자르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예언자 다니엘의 존재는 역사적 교차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시기 이전까지 모세 5경은 물론 구체적인 신학적 견해도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2004년에 바빌론 유수보다 한 세기 정도 이전 시기의 유대 경전이 일부 발견되어 경전 자체는 부분적으로나마 이미 존재했던 가능성이 있다. 참조.
주의해야 하는게 영향을 주었다고 해서, 그 종교가 "조로아스터교의 파생 종교이다.'라는 주장은 옳지 않다는 것. 유대교는 아브라함 계통에서 시작됐을 뿐만 아니라, 학자들은 3500년 전부터는 있었다고 추정한다. 모세오경이나 초기 기독교 경전 구약 앞부분의 경우에는 조로아스터교보다 오히려 앞선 시기에 작성되었다. 자라투스트라의 출생이 BC 660년이고, 탈출기(출애급기)의 경우 시기가 기원전 1300-1500년 정도이며, 최종 정리가 6-7세기 정도인 것으로 봤을 때는 아무래도 후기에 들어서 영향을 받았을 수는 있어도 기독교와 유대교 자체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권에 있었다고 하기는 힘들다. 특히 창세기나 탈출기 같은 경우에는 조상에 대해 서술하는 것으로 봐서는 구전이 오래 되었을 수도 있으므로 파생 종교라고 보는 것은 한계가 있다. 특히 시편의 경우에는 기원전 1400년 전부터 500년대까지 꾸준히 기록되었는데, 상술했듯 조로아스터교보다 일찍 작성된 책 중 하나다. '구약성경에 초기에 존재하지 않던 요소들이 등장한다'라는 위의 서술도 있듯이 '초기 기독교나 유대교는 따로 있었고 페르시아 시기에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게 맞다. 과연 어디까지 영향을 주었는 지에 대해서는 확언할 수 없다. 전술한 예시들이 전부 다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고는 확신하기가 어렵다.
예수의 문제의 경우에도 비슷한 부분이 있지만, 다른 부분도 굉장히 많다. 게다가 유일신 신앙적 요소, 사탄과 천사의 개념 등은 모세오경에서도 충분히 나온다. 탈출기 때부터 자기 외에는 신이 없다는 말이 나오며 그것은 창세기도 마찬가지이다. 사탄의 원형은 창세기에 나오는 뱀이며 욥기에서 나오는 현대 그리스도교의 사탄과 근본적으로는 같다. 사탄이 40일 동안 예수에게 유혹을 시도한 사건 역시 여기서 예수가 사탄에게 반박을 한 후 예수의 말 몇마디에 줄줄이 쓸려나가버리고 그리고 나머지 악마들 역시 말 한마디면 나가는 걸로 봐서는 대부분 그냥 호구급이다. 따라서 페르시아와의 접촉으로 사탄의 존재감이 커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본질은 의외로 큰 변화가 없다. 그러니 함부로 기독교 신자나 유대교 신자, 이슬람교 신자 앞에 가서 파생 종교라는 왜곡된 말을 꺼내지 말자.
5.2. 브라만교, 힌두교[편집]
현대에는 아무래도 현대 사회의 관심 분야이기 때문에 유대교, 기독교와의 영향이 가장 주목을 끌지만, 아무래도 조로아스터교와 좀 더 연관성이 깊으면서도 대립성이 강한 종교는 인도 공화국의 종교. 브라만교와 힌두교이다.
재미있게도 조로아스터교와 브라만교는 서로의 신과 마가 뒤바뀌어 있다. 조로아스터교의 아후라 마즈다(Ahura)는 인도 신화의 아수라(Asura)와, 조로아스터교에서 저급한 악마로 보는 다에바(Daeva)는 곧 인도의 신의 데바(Deva) 신족과 동일한 기원을 가진 것으로 보고 있다.
옛 인도-이란인 (즉, 아리아인)의 원시적인 종교에서 이미 이 같은 신족의 분화가 존재했고, 이란에서는 아후라-아수라 계통의 신앙이 강화되었으나 인도에서는 데바-다에와 계통의 신앙이 강화되면서 이런 대비가 나타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12]
6. 대중문화 속의 조로아스터교[편집]
조로아스터교는 현실에서 교세가 이슬람교에 비해서 매우 약하고, 신자 수도 극소수이지만 그래도 역사적으로는 이슬람교와 함께 중동을 대표하는 종교이며 대중매체에서도 테러 등으로 부정적인 이미지가 많은 이슬람에 비해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종교이다.
모비 딕의 주인공 에이허브 선장의 보트에 탑승한 작살잡이 중에서 필리핀 출신인 페댈라가 조로아스터교 신자다. 모비 딕을 발견한지 이틀째 날에 모비 딕이 에이헤브 선장의 보트에 격돌하고 그 과정에서 실종되는데, 사흘째 날에 모비 딕의 몸체에 그물과 작살과 함께 묶엔 페댈라의 시신이 발견된다. 페댈라는 에이헤브에게 밧줄을 조심하라고 경고하며, 자신이 죽은 뒤 에이허브 선장이 죽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고, 바로 그 사흘째 날에 그의 경고와 예언이 실현된다.
페르시아의 왕자의 DOS 2편인 "그림자와 불꽃"의 후반부에서 적으로 등장한다. 제목에서 보다시피 왕자가 자파를 무찌르기 위해 조로아스터의 불을 훔치러 가는 것. 맨 위의 상징처럼 독수리 모자와 옷을 입고 등장한다.
악튜러스에 조로아스터교 관련 소재가 중요하게 등장한다.
창세기전 시리즈에서 앙그라 마이뉴 등 조로아스터교에서 차용된 소재가 많이 나온다.
중국에서는 배화교 또는 명교로 불렸기 때문에 명교 신도 주원장이 나라를 세워 국호를 '명'이라고 지은 근거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명교는 배화교뿐만이 아니라 백련교나 마니교의 짬뽕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주원장이 명교와 백련교 등을 금지시켜 토사구팽시켰다. 김용의 의천도룡기에서 이런 역사적 사실을 교묘하게 섞어 소설 배경을 만들었는데, 여기서는 주원장에 의한 토사구팽이라고 주장한다.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는 확장팩 올드 갓(Old God)에서부터 플레이 가능하게 되었다. 조로아스터교일 경우 근친혼(신성혼)을 하면 봉신들과의 관계가 올라가고 신앙심을 얻는데 유리하다. 그래서 한국에서 붙은 별명이 현관교. 거기다 근친상간 트레잇이 붙을 확률이 15% 정도밖에 안 된다. 단, AI가 너무 근친혼을 선호해서 자손이 늘지 않는다. 어린 아이와 약혼을 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렇기도 하지만 신성혼은 임신 확률이 25%밖에 되지 않는다.
위와 같은 패러독스 게임인 Europa Universalis 4에서는 단 1개 프로빈스가 조로아스터교로 등장하며, 시작 시점에서 국교로 삼은 나라는 없다. 조로아스터교 커스텀 국가를 만들어 특정 프로빈스들을 정복하라는 업적이 있는데, 게임 내 모든 종교로부터 이교도 취급을 받기 때문에 초반 운신이 힘들다.
종말의 크로니클의 9th-G
삼류무사에서는 마교로 몰려 오래 전에 멸문했다. 지상최강의 단일문파로, 그들의 수장이자 당대 명교주였던 서문탁의 [대정일검보]와 그를 곁에서 수행했던 좌우쌍사의 [일천마라형], [철화정련]은 삼류무사 세계관에서도 불패삼공으로 통한다. 명교는 교리(대표적으로 금식과 금욕, 특히 성욕의 자제를 통해 초인으로 가는 길이 열린다고 생각했다는 점)와 막강한 무공(구파일방의 고수들이 비무를 청해 서로 겨뤘지만 결국 아무도 이기지 못했다고 한다.)을 통해 교세를 확장해나갔고, 이는 당시 기득권층이었던 구파일방을 자극했다. 결국 구파일방이 당문의 독[13]을 써서 그들을 고립시키고 하나하나를 철저히 뒤쫓아 살해함으로써 명교의 세력을 뿌리 뽑았고, 그걸로도 모자라 율법자들을 만들어 명교의 불패삼공을 뒤쫓았다.
얼음과 불의 노래의 를로르교가 조로아스터교를 모델로 하였다. 마찬가지로 불을 신성시하며 빛과 불의 신 를로르와 어둠과 추위의 "말할 수 없는 거대한 다른 신"이 대립하는 이신론적인 교리를 보인다.
6.1. 그 외 창작물[편집]
무협소설
마교
명교
페르시아 명교
Fate 시리즈
어벤저(3차)
아처(도쿄 1차)
7. 관련 문서[편집]
신화 관련 정보
고대 페르시아 신화의 신들
아후라 마즈다 = 오르마즈드
앙그라 마이뉴 = 아흐리만
스펜타 마이뉴
미트라교
마니교
페르시아
프라쇼케레티
[1] 수호천사 '프라바시(faravahar)'를 묘사한 것. 고대 페르시아에서 자주 쓰였기 때문에 페르시아의 심볼로도 많이 등장한다. 그래서 호메이니 치하의 이슬람 공화국에서조차 국가적 상징으로 허용되었다.
[2] 아르메니아인, 아시리아인, 유대인도 마찬가지 적용을 받음.
[3] 출처 - 페르시아 : 고대 문명의 역사와 보물.
[4] 전무는 몰라도 후무까지는 좀 애매하다. 기독교 정통 교파에서는 이단취급하는 신사도 운동의 영적도해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결국 이원론에 근거하기 때문.(...)
[5] 조로아스터교도 완전한 이원론은 아니다. 결국 어둠의 원리가 패함으로써, 빛의 원리 하에 어둠의 원리가 있는 것이기 때문.
[6] 다만 욥기에서의 묘사는, 조로아스터교처럼 악의 원리를 확실히 하나의 존재로 두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권능 하에 사탄이 초장부터 묶여있는 듯한 묘사다.
[7] 파르시가 유대인 바리새인의 어원이라는 주장이 있었는데 실제론 기원전 2세기 하스몬 왕조 시절 헬레니즘의 유입에 맞서서 이를 거부하며 유대전통을 지키는 무리라는 정체성으로 등장했다.
[8] 근데 기독교와 다른 점은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자라투스트라의 정액이 호수에 보관되어 있다가 호수에서 목욕하는 처녀가 구세주를 잉태하게 되는 것이다.
[9] 구약성경 욥기에 이러한 측면이 나타나 있다. 그런데 이 양반이 이걸 허락하는 바람에 수많은 욥의 자식들과 하인들, 가축들이 끔살의 향연에 휘말리고 말았으니...
[10] 근데 이부분에는 반론이 존재할 수 있는게 원래 창조주였고 태초에 혼자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애시당초 유일신이었다고 할 수 있고, 히브리의 신이라는 것은 우리들을 지켜준다는 의미지 다른 신이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11] 모세오경 성립시기는 여러 학설이 있어서 단순 바빌론 시기로만 볼 이유는 없다. #.
[12] 사실 데바를 우위에 놓는 인도 신화에서도 아수라는 여전히 대단히 강하고 정의로운 존재로 나타나는 때도 많이 있고, 데바 신들은 어째 하는 짓이 정말 비열하고 악랄하다보니 거의 악당에 가까운 짓을 할 때이 많다.
[13] 마치 생물처럼 닿은 것을 모조리 강한 산성으로 변화 시키는 산(酸)의 일종이라고 한다. 이걸 써서 명교 총단의 근방의 우물물들을 모조리 오염시켜 총단을 지키던 명교도들을 굶겨 죽였다는 것.
(출처: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