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07 – 허클베리 핀의 모험(The Adventures of Huckleberry Finn, 1884) / 트웨인(Mark Twain, 1835~1910)

(출전: 동서고전 200선 해제3 / 반덕진 / 가람기획)


 <톰소여의 모험>과 함께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미국의 대표적 소설이다. <톰소여의 모험>의 후편격인 이 작품은 일명 <미시시피 강의 오디세이>라고도 하는데, 미시시피 강을 배경으로 한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 주인공의 타고난 순수함과 선량함이 타락한 사회와 벌이는 갈등을 보여준다. 죽음과 삶, 자유와 구속, 개인과 사회라는 명제가 재미있고 감명 깊게 그려지고 있다.


a. 초기의 낙관주의에서 후기엔 허무주의로

  <<현대 미국문학은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비롯되었다. >>   - 헤밍웨이

 영국의 버나드 쇼가 일찍이 마크 트웨인의 저작이 장래 미국 연구가들에게 있어 불가결한 요소가 되리라고 예언했듯이 그의 생애와 작품은 미국을 아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의 본명은 새뮤얼 랭혼 클레멘스로 미주리 주 플로리다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개척민의 아들로 태어나 4세 때 가족을 따라 미시시피 강가의 허니벌로 이사했으며, 12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후 인쇄소의 견습공이 되어 일을 배우기도 하고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녔는데 이런 생활은 모험을 좋아하는 그의 성격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마크 트웨인 1857년(22세) 미시시피 강의 증기선 수로 안내인이 되었다. 허니벌로 이사한 뒤부터 이 시기까지의 생활과 경험은 후일 작가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의 필명인 <마크 트웨인>은 깊이가 <두 길>로 항해할 수 있는 안전수역을 뜻하는 뱃사람들의 용어다. 훗날 그 자신도 이때가 <<일생 동안 나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 시기였다>>고 술회했다.

  1861년(26세) 남북전쟁이 일어나 수로가 폐쇄되자 마크 트웨인은 마음을 바꾸어 네바다로 가서 은광발굴과 투기에 열중했다. 또한 저널리즘에 투신해, 서부의 왕성한 유머 문학의 명수로 인기를 모았다. 특히 1967년(32세)에 발표된 <캘러버라스 군의 뛰어오르는 개구리>란 걸작으로 일약 명성을 얻었다. 그뒤 신문사 특파원으로 유럽과 성지를 도는 관광여행단에 참가, 그때의 여행기를 정리하여 1869년(34세)에 <시골뜨기와 외유기>를 출판했다.

  그즈음 미국인이 유럽에 대해 가졌던 비굴한 태도를 버리고 구대륙의 부패되고 위선적인 사회문화를 비판하며 건전한 미국의 문화와 민주주의를 옹호한 마크 트웨인의 작품은, 그의 뛰어난 유머와 어울려 당시 유명한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1870년(35세) 동부의 부유한 탄광주 딸인 올리비아와 결혼하여 하트퍼드에 정성스럽게 지은 큰 집으로 이사했다. 그뒤 20년간 가족과 함께 살았는데 이때가 그의 생애 중 가장 행복하고 생산적인 시기였다. <톰 소여의 모험> <왕자와 거지> <미시시피 강의 생활> <허클베리 핀의 모험> 등의 작품이 이때 만들어졌다.

  그러나 서부에서 자란 야성적인 그는 고상한 취미와 교양을 지닌 아내와 성격 차이가 있었고, 동부사회의 <고상하고 품위있는> 문화전통 및 그가 C.D. 워너와 공저한 <도금시대>에서 그린 당시의 황금만능주의와 도덕적 타락 등에 위화감을 느껴 인간과 사회에 회의적인 생각을 갖게 된다. 더욱이 1896년 큰딸을 뇌막염으로 잃은 뒤 이은 아내의 죽음 등 개인적인 불행이 겹치자 그는 구제될 수 없는 염세관과 허무사상에 빠져들었다. 이러한 생각은 1906년 익명으로 발표된 작품 <인간이란 무엇인가>와 미완성인 채 유고로 남겨진 <이상한 소년>에 잘 나타나 있다.

  초기의 그는 미국인의 정신과 왕성한 생활체험을 신선한 문장으로 구사한 매우 낙관적인 작가로 독자들에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의 낙관주의가 말년에 허무사상으로 빠져들게 되었는데, 이와 같은 그의 생애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에 걸친 미국사회의 변모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b. 마크 트웨인의 3부작

 마크 트웨인은 하트퍼드의 화려한 저택에 살면서 그의 소년시절을 토대로 한 3부작을 썼는데, <톰 소여의 모험> <미시시피 강의 생활>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그것이다. 이 작품들의 소재는 허니벌 주변의 미시시피 강변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보다는 차라리 그가 어린 시절과 소년기에 익혀왔던 정경과 인생에 대한 기억에 토대를 둔 것으로 보는 편이 더 가깝다. 추억은 흔히 추악하고 달갑지 않은 세부적인 것들을 지워버리고 회상적인 허구 속에 목가적인 것만을 남겨두는 일이 많다.

  <톰 소여의 모험>은 어린 시절의 갖가지 두려움과 기쁨을 가득 담고, 톰 소여라는 발랄한 소년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는데 청소년 도서로서는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한마디로 삶의 기쁨이 담겨 있는 소설이다. <미시시피 강의 생활>은 미시시피 강의 묘사와 인상을 모은 것으로 참신한 관찰과 기억 속에서 그린 일종의 자서전이다.

  첫 작품보다 9년 뒤에 나온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두 작품을 잇는 속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결코 소년만을 위한 작품이 아니고, 일종의 민중서사시의 위치에 올라섰으며 미시시피강을 미국의 크나큰 상징으로, 그리고 인간이 끝없이 대결해야만 하고, 또 거기에 유일한 믿음을 걸 수 있는 상징으로 만들어놓은 작품이다.


c. 자연과 문명을 넘나든 소년의 모험담

 필자는 이 작품의 내용을 살피는 데 있어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왜냐하면 이 책의 첫머리에서 <<이 이야기의 동기를 찾고자 하는 자는 고소될 것이며, 교훈을 찾고자 하는 자는 추방될 것이며, 줄거리를 찾고자 하는 자는 사살될 것이다>>라고 작가가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톰 소여와 허클베리 핀의 두 소년은 동굴 속에서 도적이 숨겨둔 거액의 돈을 발견하여, 가난하고 작은 마을인 센트 피터즈버그에 일대 소동이 벌어진다. 톰과 허크는 순식간에 부자가 되었으며 부랑아인 허크는 더글러스 미망인의 집에서 살며 엄격한 교육을 받게 된다. 이것은 야성적으로 자란 허크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역이었다. 이즈음에 1년 이상이나 행방불명 되어 강에 익사한 것으로 알려졌던 주정뱅이인 허크의 아버지가 나타난다. 아버지는 허크의 돈에 눈독을 들이고 마을에서 갖은 소동을 부린다.

  결국 허크는 아버지에게 강 상류로 끌려가 그곳에 있는 낡은 오두막집에 감금된다. 허크는 이제 학교에 가는 대신 아버지와 숲에서 사냥을 하거나 강에서 고기잡이나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아버지는 술에 취하기만 하면 주먹이나 칼을 휘두르곤 했다. 때마침 미시시피 강의 범람기가 되어 도망칠 절호의 기회를 얻는다. 산돼지를 잡아 피를 오두막집에 발라두고 떠났는데 이는 부친이 없는

사이 도둑들이 자기를 살해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였다. 허크는 작슨 섬으로 도망친다. 그곳에는 놀랍게도 더글러스 미망인의 여동생 집에 있던 노예 짐이 숨어 있었다. 추적의 손길이 뻗쳐오자 허크와 짐은 뗏목을 타고 미시시피 강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기선과 충돌하여 짐과 헤어지고 육지로 올라가서 보게된 마을의 젊은 두 연인의 슬픈 사랑, 짐과의 재회 등 잇달아 여러 사건과 마주친다. 그러다가 허클베리 핀은 군중에 쫓기는 두사람을 뗏목에 태우는데, 그들은 젊은 <공작>과 늙은 <임금>을 자처하는 사기꾼들이었으며, 허클베리 핀과 짐을 하인으로 부렸다. 그들은 도시에 들어갈 때마다 회개한 해적이라고 하고, 모금한 의연금을 모아 착복하는가 하면, 연극을 한다고 입장료를 받아서 도망치기도 한다.

  그 두 악당은 다시 굉장한 일을 저지른다. 조그만 읍 가까이에서 증기선을 기다리던 그들은 그 읍의 피터 월크 씨가 조카딸 셋과 상당한 재산을 남기고 죽었다는 소문을 듣는데, 두 명의 동생 하비와 윌리엄이 영국에서 오기로 되어 있으나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그들은 하비와 윌리엄으로 가장하고 허클베리 핀을 하인으로 데리고 간다. 그들은 쉽게 조카딸들을 속여 유산을 전부 받게 된다. 그러나 맏 조카딸이 마음에 든 허클베리핀은 몰래 사실을 얘기했기 때문에 마지막 단계에서 계획은 좌절되고 만다. 게다가 진짜 동생들이 나타나 그들은 간신히 도망쳤다.

  마침내 허크는 겨우 그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와 뗏목으로 돌아왔으나 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왕>이 어느 농가에 팔아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 농가는 마침 톰 소여의 숙모네 집이어서 때마침 그곳에 와 있던 톰과 공모하여 짐을 탈출시키는 대작전이 벌어진다. 하지만 짐을 데리고 도망치던 도중 톰은 다리에 총상을 입게 되고 뗏목을 타고 도망을 치긴 했으나 톰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의사를 찾아갔다가 짐은 다시 체포되는 신세가 된다.

  그곳에 톰의 숙모 폴리가 도착한다. 더글러스 미망인의 동생은 죽으면서 톰을 자유인으로 해방시킨다는 유언을 했던 것이다. 허크의 아버지 역시 홍수로 저세상 사람이 되어 있었다. 허크에게도 그토록 그리던 자유가 찾아온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자 톰 소여의 이모인 폴리가 허클베리 핀을 맡아 교육하고 뒷바침해주려 하나 허클베리 핀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처음의 그 자유롭던 상황으로

되돌아간다. 즉 문명세계 대신 서부의 자유로운 천지로 떠나버린다.


d. 미국 현대문학의 뿌리

 <톰소여의 모험>의 후편격인 이 작품은 작가의 소년시절의 추억을 배경으로 펼쳐져고 있다. 구대륙의 문화전통에서 멀리 떨어진 남서부 미주리 주의 이름 없는 개척촌에서 자란 마크 트웨인은 미국 국민의 독자적인 체험과 성격을 신선한 언어로 표현한 작가로서, 생전에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국민적 문학가였다.


   유머로 문명사회 풍자

 제목 그대로 허크의 모험담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어린이에게도 유익한 책이다. 허크는 책임감이 있으며 동정심이 많은 소년이지만 자신이 게으르고 무법자이며 고독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허크의 맑은 눈에 비친 문명사회의 허위가 그려져 있으며 그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의 본질도 간파하고 있다.

  전체를 통해 이 거대한 강과 주변의 숲이 목가적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허클베리 핀에 관한 풍성한 이야깃거리와 은연중에 나오는 유머가 작품 전체에 배어 있다. 그러나 계속되는 모험을 꿰뚫고 있는 것은 인간에 대한 인간의 매정함, 즉 인간의 잔인성이라는 주제이다.

  한편 문학사적인 측면에서 이 작품은 주인공 허클베리 핀을 통해 미국 서부인의 자유인으로서의 의식과 사회적 인습과 위선에 대한 통렬한 풍자에 숨어 있는 인간통찰을 담고 있다. 그리고 방언의 생동감 있는 구사와 속어의 거리낌없는 사용도 이 작품의 매력을 더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가장 미국적인 작가

 작가인 마크 트웨인 역시 단순한 유머작가, 풍자작가로서만이 아니라, 시집 <풀잎>의 작가인 휘트먼과 더불어 유럽문학의 모방이 아닌 진실한 의미의 미국문학을 탄생시킨 미국적인 작가로서 평가받고 있다.

  또한 마크 트웨인은 그의 마지막 창작시기에 미제국주의의 대외 확장정책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그는 실제로 만년에 들어서 미국의 대외 확장정책과 약탈정책에 대하여 견책하는 정문론과 잡문을 많이 썼다. 그는 직접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여러 식민지를 둘러보고 침략정책의 실질을 확인했으며, 1900년 가을에 국외여행에서 돌아와 <<나는 반제국주의자다. 독수리가 남의 나라에 발톱을 거는 것을 나는

반대한다>>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그러나 자산계급 민주주의자인 마크 트웨인은 무산계급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그는 만년에 자산계급이 내세운 <민주>와 <문명>에 환멸을 느꼈으며, 보다 나은 인류의 광명한 전도는 보지 못하고 비관과 실망의 정서들을 보여주면서 생을 마쳤다.



E06 – 주홍글씨(The Scarlet Letter, 1850) / 호손(Nathaniel Hawthorne, 1804~1864)

(출전: 동서고전 200선 해제3 / 반덕진 / 가람기획)


 식민지적 열등감 속의 19세기 미국문단에 찬란한 예술의 꽃을 피웠던 천재작가 나다니엘 호손의 작품. 간통을 했다는 이유로 가슴에 A(adultery, 간음)지를 달고 다녀야 하는 여인과, 간통죄로 괴로워하다 결국 죄를 고백하고 죽는 딤스데일 목사를 통해, 당시의 엄격한 청교도 사회와 죄인의 고독한 심리를 잘 나타내고 있는 작품이다. 청교도 사회의 비정함과 형식에 치우친 신앙의 타락, 그로 인한 인간사회의 비극, 그리고 죄의식으로 얼룩진 인간영혼의 어두운 심연이 매우 음울하게 그려져 있다.


a. 어두운 인간영혼의 탐구자

 <큰바위 얼굴>의 작가로 우리에게 알려진 나다니엘 호손은 뉴잉글랜드 지방의 메사추세츠 주 세일렘의 전통적인 청교도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세일렘은 그의 조상들과 관련된 무서운 내력을 지니고 있었다. 즉 그의 조상들은 영국에서 미국의 세일렘에 정착했는데, 그의 조상 중에는 그 당시 미국 초기의 도덕적 혼란을 보여주는 마녀사냥(Witch-hunting)때 가혹하고 엄격한 판결을 내리는가 하면 어떤 퀘이커교 여성을 공개처형시킨 사람도 있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악마를 몰아낸다는 대의명분 아래 무고한 사람들을 박해하고 인간의 양심과 존엄성을 해친 조상들의 반이성적 행위는 평생 동안 그의 마음에 깊은 그늘을 드리웠다.

  그가 4살 때 선장인 아버지가 항해중 객사하자 그는 가족과 함께 외가로 가서 살았다. 9살 때 공놀이를 하다가 다리를 다친 그는 3년간 학교도 가지 못하자 집안에서 스펜서나 밀턴 등의 고전작품을 탐독함으로써 육체적인 불행을 정신적인 풍요로 대신하고자 했다. 이처럼 어린 시절을 고독과 명상, 그리고 독서 속에서 보낸 그는 감수성이 예민하고 과묵한 소년으로 성장했다.

  17세 때 보든 대학에 입학한 그는 후일 시인이 된 롱펠로, 대통령이 된 프랭클린 피어스와 친교를 맺었다. 대학시절에도 그는 고독을 즐기며 비사교적이었다. 대학졸업 후 그는 고향인 세일렘으로 돌아가 무려 12년 동안이나 세상을 등지고 고독에 찬 은둔 생활을 했다. 이 시기에 그는 홀로 방에 틀어박혀 광범위한 명상과 창작에 몰두하며 작가가 되기 위한 길고 외로운 기간을 보냈다. 이때 호손은 항상 자기 마음속에 드리워져 있던 그늘의 정체를 파헤치고자 했다. 그는 세일렘과 청교도의 역사, 선조들의 행적에 대해 열중했다. 그 결과 선조들에 대한 원죄의식과 청교도정신에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되고, 이는 그의 평생의 문학적 주제가 된다.

  31세에 자신의 대학시절을 소재로 한 로맨틱한 소설 <팬쇼우>와 33세에 <큰 바위 얼굴>이 수록되어 있는 <트와이스 톨드 테일즈>를 출판했으나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했다. 아직도 세상은 그에게 더 많은 독서와 고독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 무렵 그는 세일렘의 치과의사의 딸인 소피아를 만나 사랑에 빠지면서 그의 고독한 내면생활에서 벗어나 다소나마 정신적 안정을 되찾았다. 영혼의 빛을 되찾은 호손은 소피아의 애정 속에서 가난하지만 매우 행복한 신혼생활을 보냈다. 소피아는 생계조차 꾸려나갈 수 없는 어려운 처지에서도 호손에게 격려와 비판을 아끼지 않은 훌륭한 내조자였다.

  42세에 그들은 콩코드를 떠나 세일렘으로 돌아갔다. 아내가 임신하게 되고 생활도 몹시 궁색한 상황에서 친구 피어스의 주선으로 세일렘의 세관에 근무하기도 했다. 어느 날 그는 세관의 버려진 위층 방에서 금실로 A자 모양의 수를 놓은 주홍색 천 한 조각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이 그의 최대 걸작 <주홍글씨>를 쓰는 실마리가 되었다.

  1849년 공화당 정부가 들어서자 민주당과 가까웠던 그는 실직하게 되고, 뒤이어 모친까지 사망하게 되자 한때 실의에 빠지기도 했으나, 이 불행이 중대한 전기가 되어 그의 아내의 격려 속에 <주홍글씨>를 완성했다. <주홍글씨>는 당시 대단한 호평을 받았고, 이후 <일곱 박공으로 된 집> <블라이드데일 로맨스> 등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전개했다.

  1853년 대통령으로 취임한 피어스에 의해 리버풀 영사로 임명된 그는 영국에서 4년을 보낸 후 이탈리아에도 머무르게 되는데, 이 무렵 쓴 작품이 이탈리아를 무대로 한 <대리석의 목양신>이다. 1860년 여름 미국 보스턴으로 돌아온 그는 창작력과 함께 점점 건강도 쇠퇴했다. 그후 친구 피어스와 함께 여행을 떠난 그는 미완의 작품을 남겨놓은 채 1864년(60세) 객지에서 사망, 콩코드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b.시대적 배경과 문학세계

 그가 살았던 19세기의 미국은 사회적으로 노예제도와 남북대립에 대한 비판적 논쟁이 격렬하게 일고 있었고, 경제적으로는 산업화의 여파로 뉴잉글랜드에도 새로운 공장이 건설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앤드루 잭슨 대통령이 미국의 민주주의 전개에 획기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변화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종교적 철학적 변화였다. 1세기 이상이나 뉴잉글랜드를 지배해오던 청교주의적 신정정치에 분열이 생기고, 한편으로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는 계몽사상이 퍼진 시기였다.

  이에 따라 <유니테어리언 파>(일신론, 프로테스탄트의 일파로 3위일체설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단일성을 주장하며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파)와 <초월주의>가 출현했다. 교리보다는 윤리적 운동에 중점을 두는 유니테어리언 파는 기독교 속에서 인간성과 자유의지를 역설하는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신, 인간, 자연을 우주영혼의 공유자로 보며 자연은 신의 마음의 표현이고, 인간의 양심은 신의 음성이며, 삼라만상은 그대로 신성을 지닌 것이라는 믿음이 새로운 이상사회 건설을 추구한 지식계급에 널리 확산되던 시대였다. 따라서 당시의 미국은 인간의 천성이 선하고 인간이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풍조가 지배적이었으며, 사람들은 무한한 발전을 꿈꾸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조류의 흐름 속에서 호손은 자신의 문학적 과제인 청교도 관습과 인간상에 대한 비판의식을 더욱 굳건히 확립하고 발전시켜나갈 수 있었다. 특히 당대의 유명한 초월주의자들인 에머슨 도로 등과 직접적인 교유를 가지면서 인간은 자신을 구속하는 과거와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자유주의적 경향에 한동안 심취하게 되었다.

  1841년 호손은 새로운 세계의 이상을 꿈꾸며 일단의 초월주의자들과 함께 <브루크 팜(Brook Farm)>이라는 유토피아적 농장건설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서의 생활을 통해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이상세계>와 <현실세계>와의 차이를 통감하고 곧 농장생활을 청산했다. 청교도적 죄의식과 비관론에 사로잡혀 있던 호손은 초월주의가 주장하는 이상적인 낙관론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에머슨 등의 초월주의자들로부터 쏟아지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다시 자신만의 침묵과 우울의 세계로 돌아갔다.

  이렇듯 호손은 당시의 시대조류인 자유주의와 초월주의를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에 무작정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문학세계의 폭을 넓히는 계기로 삼았다. 그리고 생생한 현실참여와 체험을 통해서 값진 예술의 꽃을 피울 수 있었다.


c. 인간성을 억압하는 청교도사회 비판서

 이 작품은 청교도 사상이 지배하던 17세기의 보스턴을 배경으로, 삼각관계에서 발생한 간통사건과 이에 대한 청교도 사회의 냉혹한 제재를 다루고 있다.

  주요 등장인물은 미모의 젊은 유부녀 헤스터 프린, 그녀와 불륜의 관계를 맺은 덕망있는 청년 목사 딤스데일, 아내를 빼앗긴 원한으로 복수의 칼을 가는 옛 남편 칠링워드, 그리고 불륜의 씨앗인 딸 펄이다.

  영생을 얻기 위해 엄격한 종교적 계율 밑에서 현세의 쾌락을 멀리하고 엄숙하게 살아야 하는 당시의 청교도들에겐 성도덕이 특히 엄했다. 성이 개방된 지금과는 달라서 간음은 절대로 용서를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뉴잉글랜드의 한 교수대 위에는 생후 3개월이 된 아기를 안고 있는 헤스터가 앞가슴에 수놓은 주홍색 A라는 글씨가 선명한 옷을 입고 군중들의 시선 속에 서 있다. A는 간통(Adultery)의 첫 글자였다.

  그녀는 주홍글씨에 의해 영원히 일상적인 평안의 세계, 현실적인 선의 세계로부터 추방되지만, 오히려 자신의 행위를 용기있게 인정하고 자신으로 인해 야기된 모든 비극을 꿋꿋이 감수하려고 한다.

  영국에서 태어난 헤스터 프린은 그곳에서 나이가 훨씬 많은 연상의 의사와 결혼했다. 비극은 그녀가 남편을 홀로 두고 먼저 식민지인 미국땅에 건너온 데서 일어났다. 그녀의 뒤를 따라 곧 오기로 되어 있는 남편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고 소식도 끊어졌다. 사람들은 그가 틀림없이 죽었다고들 했다.

  그러는 사이에 헤스터는 지금 품안에 있는 갓난 아이를 낳은 것이다. 남편이 없는 사이에 임신하여 낳은 아이이니 정상적인 아이일리는 없다. 때문에 엄격한 청교도들은 헤스터를 간통죄로 고소하여 형무소에 감금했고 재판결과 다음과 같은 선고를 내렸다.

  <<헤스터 프린은 교수대 위에서 부정한 자식을 안고 세 시간 동안 구경거리가 된 뒤 앞으로 일생 동안 죄의 상징인 A라는 글자를 가슴에 달고 살아야 한다. >>

  그러면 헤스터의 간통 상대는 누구였을까? 그녀는 총독과 늙은 목사, 그리고 젊은 성직자인 딤스데일의 힐문에도 입을 굳게 다문채 상대방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그런데 군중 속에는 오랫동안 행방불명 되엇던 그녀의 남편 칠링워드도 끼여 있었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오는 도중 여러 가지 재난을 만났다. 그동안 겪었던 어려움으로 얼굴도 크게 변한 상태였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 헤스터의 간통 사실을 알게 되자 상대방에 대한 복수를 맹세한다. 자신의 이름도 칠링워드라 고치고 의사로서 이 도시에 머무르게 되었다.

  반면 숨은 죄인인 딤스데일 목사는 외면적으로는 청교도 사회의 성스러운 목사요, 정신적 지도자로서 존경을 받지만, 내적으로는 자신의 죄를 내적으로 고백하지 못하고 깊은 죄의식에 사로잡혀 하루하루를 처절한 고통 속에서 보내는 인물이다. 그는 은밀한 죄책감과 양심의 가책으로 자신을 점점 어둠의 골짜기로 몰아넣고 있었다. 이처럼 딤스데일이 스스로 죄를 고백하지 못하고 죄의식의 고통으로 신음하는 것은 그가 칠링워드나 다른 청교도 시민들처럼 대서양을 건너와 청교도 공동체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이상주의자였기 때문이다.

  한편 이 작품의 또 다른 죄인인 칠링워드는 아내인 헤스터의 부정을 알고서 무서운 복수를 결심한다. 늙은 그는 자기의 신분을 감추고 <냉혹한> 의미의 칠링워드라는 이름으로 사악한 정열에 사로잡혀 고립 속으로 빠져든다. 그는 펄의 아버지가 발견되지 않는 한 지상의 부정은 제거되지 않는다는 그릇된 신념을 가짐으로써 고통 속에 성격이 왜곡된다. 무서운 악마로 변신한 칠링워드는 마치 악마의 마법에

끌리듯 성스러운 목사 딤스데일에게 접근하고 마침내 마음의 병을 고백하려 하지 않는 그의 가슴 속에서 주홍글씨는 발견하게 된다. 그가 바로 자신이 찾던 펄의 아버지요, 복수의 대상임을 알아낸다.

  헤스터는 형기를 마치고 교외의 초가집에 조용히 살면서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세 살이 된 그녀의 딸 펄(마태복음의 <값진 진주>에서 따온 이름>은 친구도 없이 자유분방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러나 딤스데일은 헤스터와 나란히 형벌을 받고 싶었다. 그러나 헤스터가 그의 이름을 숨기고 싶어했기 때문에 그 기회를 잃고 말았다. 그에게는 스스로 죄를 고백하고 형벌을 받을 용기가 없었다.

  7년이 지난 어느 오월의 밤이었다. 딤스데일은 밤일에서 돌아오는 헤스터 모녀를 불러 세우고 셋이서 손잡고 교수대 위에 서자고 제의한다. 그의 고민을 알게 된 헤스터는 칠링워드에게 딤스데일을 용서해달라고 간청하지만 복수의 화신이 된 남편은 그 말을 거절한다. 헤스터는 숲에서 목사를 만나 남편의 정체를 밝혔다.

  축제일에 딤스데일 목사는 설교를 하게 되었다. 교수대 위에 서서 훌륭한 기념설교를 한 후 헤스터 모녀의 손을 잡고 손을 잡고 청중들 앞에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숨을 거둔다.

  이렇듯 칠링워드는 지상에서의 완전한 세계의 실현을 위해 인간 마음의 신성함을 짓밟는 용서받지 못할 죄악을 저지른다. 그의 존재의 의미는 어디까지나 딤스데일에게 달려 있어 복수의 대상을 잃은 칠링워드는 급격히 기력이 떨어져 1년 이내에 죽고 만다.

  호손은 그에게 일말의 동정도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칠링워드는 지적 교만에 의해 인간성을 상실하고 인간마음의 신성함을 파괴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손은 육욕과 위선의 죄를 지은 딤스데일에게는 인간으로서의 연민과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칠링워드는 반인간적 심성으로 딤스데일의 영혼을 분해하다가 풀잎처럼 시들게 되지만, 딤스데일은 불길 같은 설교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죄의 고백과 함께 치욕적이지만 떳떳한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칠링워드로부터 그의 영혼을 구한 것이다.

  딤스데일의 구원은 오랜 고행과 참된 고백으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것은 살아 있는 주홍글씨라고 할 수 있는 죄의 산물인 펄 없이는 불가능했다. 딤스데일이 헤스터와 펄을 껴안은 행위야말로 자신의 비밀을 고백한 행위이며 속죄와 구원을 동시에 얻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펄은 죄의 실체이지만 죄, 형벌, 사랑과 구원의 상징으로서의 역할을 완수함으로써 헤스터와 딤스데일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데에

소임을 다하고, 마침내 그녀의 눈물로써 죄의 상징에서 벗어난 펄은 기쁨과 슬픔 속을 걸어갈 수 있는 인간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그후 헤스터는 고국으로 돌아가 딸을 잘 키워 시집보낸 후 다시 이곳을 찾아와 바닷가 오두막에 혼자 살면서 불행한 여자들을 돕다가 여생을 마친다.

  이처럼 주홍글씨 <A>를 중심으로 상상과 현실의 세계를 넘나들며 펼쳐진 인물들간의 심리적 갈등과 고뇌는 인간과 삶에 대한 호손의 문학적 깊이가 얼마나 첨예했던가를 보여준다. 호손은 <A>자 하나로 딤스데일을 깊은 고뇌와 뉘우침으로 어둠 속을 헤매게 하고 칠링워드를 복수의 화신으로 변신케 하며, 헤스터를 치욕과 고립의 세계에서 방황케 했다.


d. 문학사적 의의

   청교도적 삶의 허구 묘사

 이 작품은 1640년대 보스턴 식민지 사회에서 일어난 일들을 소재로 하여 청교도가 지배하는 신정일치의 식민지 사회에서 억압되는 인간의 모습을 19세기의 시대정신을 통해 비판하고 있다. 호손은 유토피아적 신세계를 건설하려는 청교도인들의 불완전성을 파헤쳤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3가지 형태의 죄, 즉 세상에 드러난 죄(헤스터 프린), 숨겨진 죄(딤스데일), 그리고 용서 못할 오만의 죄(칠링워드)를 다루고 있다. 동시에 칠링워드의 타락과 죽음의 파멸을 통해 에덴 동산이 상징하는 이상주의의 꿈이 얼마나 위험하고 실현불가능한 것인가를 보여주었다.

  이에 반해 헤스터와 딤스데일은 처음부터 죄를 범한 불완전한 인간으로 묘사하면서 이들을 통해서는 죄를 범한 인간, 즉 불안전한 인간이 바로 참된 미국인의 형상이라는 것을 암시하며 동시에 기계문명 속에서 <정원의 신화>를 꿈꾸고 있는 작가와 동시대의 미국인들을 통렬히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도덕적 진실성 추구

 호손은 그의 작품들을 통해 도덕적 진실성을 밝히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그의 문학세계가 죄악으로 인해 야기된 고립과 비극이라는 인간사의 어두운 내면에 중점을 두기는 했지만 오히려 호손 문학의 진정한 의의는 죄를 통한 구원의 완성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호손은 죄를 다루되 인간은 자신의 죄로 인하여 보다 높은 차원의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깨달음을 역설적으로 전달했다. 그는 죄로 인한 비극적인 인간의 심리를 그리면서 고통받는 모든 죄인에게 동정심을 보냈으며, 죄를 미워하기보다는 용서했던 따뜻한 감성의 인본주의자였다. 따라서 그의 근본사상과 그의 작품이 갖는 궁극적인 목적은 인정이 넘치는 인간과 죄 없는 밝은 세계에 대한 열망, 그리고 그것에 이르는 올바른 길을 제시하는 데 있었다.

  이처럼 인간에게 우러나는 동정과 온화함에 대한 사고는 호손의 도덕적예술적 신념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상상이 아무리 어둡다 할지라도 문학의 세계에 있어서의 호손의 생명은 언제나 강렬한 것이었다. 그러기에 미국 최초의 문화적 르네상스기에 그는 그 열기를 주도할 수 있었으며, 미국을 넘어 세계적인 작가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인간본성 속의 신성을 믿으면서도 죄의 고통과 자각을 통한 인간구원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작가는 삶의 처음에서 끝까지 인간성의 심연을 그의 문학적 소재로 삼아 인간의 도덕적 진실을 추구했다. 그는 인간영혼의 탐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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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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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식품회사에 대해서는 퀘이커 오츠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퀘이커

종교친우회(宗敎親友會)

Religious Society of Friends ‏

퀘이커의 문장

퀘이커의 문장

결성일 17세기 영국교회로부터 분리

유형 회중교회, 종교 단체

목적 복음 전도, 예배

활동 지역 전 세계

회원 86,837여명 (미국)

공식 언어 다국어

웹사이트 http://www.quaker.org/


창설자 조지 폭스

종교친우회(宗敎親友會, 영어: Religious Society of Friends) 또는 퀘이커(영어: Quaker)는 17세기에 조지 폭스가 창시한 기독교의 교파이다. 퀘이커라는 이름은 하느님(하나님) 앞에서 떤다는 조지 폭스의 말에서 유래했다. 1650년대에 영국의 조지 폭스(George Fox)가 제창한 명상운동으로 시작하였다. 퀘이커는 올리버 크롬웰의 종교적 관용정책으로 크게 확산하였으나 이후 찰스 2세가 국가교회 정책을 펴면서 정부에 의해 탄압받았다. 퀘이커 신앙도 윌리엄 펜이 불하받은 북아메리카 식민지 영토에 도시(현 미국 펜실베이니아)를 세움으로써 종교의 자유를 허용받았다.


목차  [숨기기] 

1 명칭

2 신앙

3 예배

4 미국의 퀘이커

5 대한민국의 퀘이커

6 각주

7 외부 링크

명칭[편집]

퀘이커란 하나님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의미에서 스스로를 '친우회'라고 칭했다. 창시자 조지 폭스의 "하나님 앞에서 벌벌 떤다"는 말에 따라 퀘이커라고 불리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종교친우회'라고 명명하고 있다.


신앙[편집]

퀘이커 교도들은 청교도와는 달리 칼빈주의의 예정설과 원죄 개념을 부인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안에 신성(神性)곧 하나님의 성품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를 기르는 법을 배우기만 하면 되고, 그렇게 신성만 기른다면 모두가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1]


예배[편집]

퀘이커의 예배특징은 침묵의 예배로써, 퀘이커 각자는 침묵을 통해 내면의 빛을 볼 수 있도록 한다. 장소는 특정한 공간적 제약을 받지 않으며, 예배를 이끌어가는 별도의 성직자나 목사를 두지 않는다.


미국의 퀘이커[편집]

영국에서 많은 지지를 받지 못했던 퀘이커 교도들은 아메리카 대륙을 그들의 피난처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극히 일부는 뉴잉글랜드나 캐롤라이나로 이주했으나 대부분의 퀘이커 교도들은 자기들만의 식민지를 원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경멸섞인 눈초리를 받아온 종파였기 때문에, 궁정에서 영향력 있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 왕으로부터 식민지 건설에 필요한 특허장을 얻어내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미국의 제 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은 퀘이커 교도이다.[1]


대한민국의 퀘이커[편집]

대한민국의 유명한 퀘이커 교도로는 함석헌 선생,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박성준 교수(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남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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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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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淸敎徒, Puritan)는 로마카톨릭교회의 의식으로 부터 영국(England)교회의 순결(purify)을 추구한 16세기에서 17세기 사이의 영국 개혁주의 프로테스탄트들이다. 당시 영국교회는 오직 부분적인 개혁을 주장하고 있었다.[1] 또한 원형적이고 전통적인 복음주의[2]를 지향했던 기독교인들을 통칭한다. 이들은 개신교 교인들로서 전통적 복음주의 안에서 루터주의 계열과 칼뱅주의 계열과 잉글랜드 성공회에 소속된 이들과 전통복음주의를 추구했지만, 계열을 추구하지 않던 이들을 포함한 다양한 전통 복음주의자들을 통칭해 일컫는 말이며[3] , 이런 신앙에 있던 사람들을 청교도라고 한다.[4]청교도들은 영국 종교 개혁이 불완전한 개혁이었다고 평가하여, 영국 성공회의 정부 중심의 성향과 로마 가톨릭교회의 잔재를 철폐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도덕적인 순수성을 추구하여 낭비와 사치를 배격하고, 근면을 강조하였으므로 영국의 중산층을 형성하였다. 또한 신학적으로는 인위적 권위와 전통을 인정하지 않고, 성경에 철저하고자 한 전통 복음주의인 성서주의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다. 영국교회가 핍박을 하자 미국으로 건너와서 청교도의 부흥을 이루었다.



E05 – 젊은 예술가의 초상(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 / 조이스(James Joyce, 1882~1941)

(출전: 동서고전 200선 해제3 / 반덕진 / 가람기획)


 20세기 거장 제임스 조이스의 두번째 작품으로, 작가의 자서전적인 소설이다. 종교적 분위기에서 성장한 한 젊은 주인공 스티븐 디달러스가 종교적 구속으로부터 탈출하여, 자유로운 예술을 위해 예술의 신인 다이달로스의 도움을 기원하면서, 파리로 떠날 때까지의 예술가로서의 성장과정을 그린 교양 성장소설이다. 세계 문학사에 <의식의 흐름>을 새겨넣은 대표적 모더니스트인 작가는 이 작품에서, 새로운 소설기법을 사용함으로써 주인공의 인생에 대한 도약과 그의 예술세계 창조를 향한 웅비를 고무적으로 다루고 있다.


a. 우울한 천재작가

 버지니아 울프 프루스트와 함께 20세기 문학사에 <의식의 흐름>을 새겨넣은 대표적인 모더니스트.

  조이스는 아일랜드의 더블린의 중류가정에서 태어났다. 정치적이고 성악과 농담을 좋아하는 아버지와 카톨릭 신앙이 두터우며 피아노를 잘 치는 어머니로부터 독자적인 언어감각과 음악성을 이어받았다. 여섯 살 때 예수회에서 설립한 클롱고즈 우드 칼리지 부속학교에 입학했으나 아버지의 실직으로 퇴교했다. 1893년 벨비디어 칼리지에 3학년으로 편입하여 5년간 줄곧 우수한 성적을 나타냈고, 1896년(14세)에 낸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의 영역본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그의 가장 오래된 글로 알려져 있다.

16세 되던 1898년 예수회 학교인 유니버시티 칼리지의 영문과에 입학했다. 고고한 상념에 사로잡혀 동료학우들과의 교우를 거부한 채 대학시절 동안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3개 국어를 완전히 마스터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조이스의 대학시절은 종교에 대한 최초의 회의와 함께 편협한 국수주의적 애국심에 대한 저항이 싹트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때 예이츠의 <태서린 백작부인>을 공격하는 동료학우들의 항의문에 서명을 거부하고, 몇 편의 논문과 수필을 발표하여 서서히 비평적이고 심미안적인 문학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1903년 모친의 급환으로 파리에서 급히 귀국했으나, 임종의 자리에서 기도해주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바람을 이미 신앙을 버린 몸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는데, 이 일로 평생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그해 아내가 될 노라를 알게 되었고, 각지를 전전하며 영어교사 생활을 하며 생활해나갔다. 1903년부터 써왔던 <더블린 사람들>을 둘러싸고 아일랜드 출판사와 생긴 갈등으로 두번 다시 고국 땅을 밟지 않았다.

  결국 <더블린 사람들>은 1916년(34세)에 가서야 출판이 이루어졌다. 작가로서 처음 쓴 단편 작품집으로서는 너무나 긴 진통 끝의 결실이였다. 그동안 조이스는 아일랜드의 대표적 시인 예이츠와 그의 소개를 통해 알게 된 에즈라 파운드와 늘 교신했으며 많은 도움을 받았다. 특히 <더블린 사람들>과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미국 출판은 에즈라 파운드의 적극적인 협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더구나 뒷날 알게 된 엘리어트 등 수많은 문인들이 그의 천재적인 예술성을 인정하지 않았던들 조이스의 불운한 일대기는 하마터면 세상에 빛을 못 볼 수도 있었다. 그만큼 그의 생활은 극도로 궁핍했고 게다가 지독한 근시였던 탓에 쉬지 않고 거듭되는 안질과 열 차례가 넘는 수술은 조이스로 하여금 점점 더 깊은 자기결벽증의 폐쇄적 증상으로 빠져들게 했다.

  또한 그의 몇 편의 대작들은 실험적이며 전위적인 작품의 영향으로 발표되기까지 숱한 난관을 거쳤을 뿐만 아니라, 복잡하고 난해하여 좀처럼 쉽게 감동을 얻기 힘든 상징예술의 정수가 되었다. 따라서 조이스의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의식의 흐름>의 문체와 기법상의 문체, 그에 따른 보들레르적인 상징과 구조, 또한 그의 독특한 심미안적 예술론의 이해가 선행되어야만 한다.

  1922년(40세) 파리에서 <율리시즈>를 출판하고 1939년(57세) 마지막 작품 <피네건의 경야>를 발표했다. 후자의 경우 12번이나 고쳐 쓴 곳도 있다 한다.

1940년 2차 대전중 파리가 함락되자 가족들과 함께 취리히로 돌아와 그곳에서 죽었다. 오늘날 그의 작품만을 취급하는 2개의 정기간행물 중

한 곳에서는 전적으로 <피네건의 경야>만을 다룬다는 사실을 그가 알면 기뻐할 것이다.


b. 의식의 내면을 추구한 작가들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마르셀 프루스트 등은 이른바 <의식의 흐름>이라는 인간의 내면적 의식을 추구한 현대소설의 선구자들이다. 그들은 종래의 근대 전통문학이 고수해왔던 사실주의, 자연주의의 소설형식을 과감히 깨뜨리고 인간의 복잡미묘한 내부의식을 그리는 데 몰두했다.

  그들의 작품은 한편으로 난삽하고 실험적이어서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문체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것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이론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상징주의와 정신주의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특히 조이스와 울프 두 사람은 날카로운 감수성과 함께 병적일 만큼 결벽증이 심한 실험주의자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 두 작가가 서로 교유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두 사람이 교유관계를 맺고있던 문인들을 생각해볼 때 그 실험주의적인 문학세계에 대해 서로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더구나 두 작가는 1차 대전의 충격을 맛보았고, 1900년대 초기의 세계적인 경제위기, 사회불안 등을 지켜보면서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인 <삶과 죽음>에 관한 의식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c. 한 예술가의 내면의식의 성장사

 이 소설은 주인공 스티븐 디달러스가 카톨릭 교회와 결별하고 예술가가 자신의 천직임을 발견한다는 내용의 자전적 소설이다. 어린 시절의 불분명한 의식을 동화체로 시작하여 차츰 의식이 성장해가는 과정을 거쳐 결국 자신이 희망하는 자유롭고 창조적인 예술가의 생활을 위해 스스로 망명의 길을 택하는 순간까지 한 예술가의 의식의 성장을 그리고 있다. 이것은 내면화된 문체, 즉 <의식의 흐름> 기법을 창시한 것으로서, 그리고 마지막에 예술의 신에게 이야기하는 부분은 아일랜드 민족을 인류와 직결시키는 과감한 저자 자신의 생각을 나타낸 것이며, 후일의 작품 <율리시즈>의 서장에 해당한다.


   제1장

 이 소설의 첫머리는 스티븐의 유년시절이 잠시 환상처럼 일렁이고 난 뒤 바로 학교생활로 펼쳐진다. 스티븐은 운동장에서 친구들이 공을 차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는데, 여기서 이미 우리는 그가 겪은 친구들로부터의 소외를 엿볼 수 있다. 육체적으로 작고 연약한 그는 급우들이 즐기는 난폭한 경기에 참여할 수 없다. 그는 왜소하고 눈이 나쁜데다, 집안도 변변치 못해 친구들에게 여러 가지로 놀림을 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놀림감은, 의외의 불운에 의해 오히려 역전되는 기회를 갖게 된다.

  라틴 어 시간이었는데, 스티븐은 이전에 안경을 깨뜨렸기 때문에 수업을 받을 수가 없었다. 그는 선생님의 허락을 받고 그날의 작문쓰기에 제외되어 있었다. 그러나 마침 교육감독으로 들어왔던 무서운 돌런 신부의 눈에 띄어, <게으른 꼬마 꾀보>로 취급당한채 자초지종의 전말을 얘기할 새도 없이 혹독한 매를 맞게 된다. 급우들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교장에게 이르라고 충동질을 한다. 스티븐은 자기도 모르는 힘에 이끌려 교장실을 노크하게 되고 교장선생님의 위로를 받고 나온다. 스티븐 디달러스는 이 일, 즉 그들의 적에게 일격을 가한 그 용기로 인하여 급우들에게 작은 영웅으로 환영을 받게 된다.

  스티븐의 이러한 성장기는 특히 당시에 처해 있던 조국 아일랜드의 문제와 스티븐의 우상이자 애국자인 파넬(아일랜드 독립당의 당수였으나 간통사건으로 실각했음)의 죽음에 대해, 파넬을 지지하는 아버지와 반대하는 신부들간의 대립으로 그의 의식에 중대한 영향을 받았다. 즉, 그는 그가 예술이라는 목표를 추구하는 데 있어 종교는 한 가지 세속적 장애물이라고 자각한다.


   제2장

 이러한 환경 속에서 스티븐은 예술지향의 한 젊은이로 차차 성장해간다. 부친의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학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된 스티븐은 집에 머물면서 산보, 유희, 그리고 독서로 시간을 보낸다. 그는 고독의 기쁨을 즐기며, 시를 쓰고 싶은 충동을 자주 느낀다. 스티븐은 이제 중학교인 벨비디어 칼리지로 되돌아왔다. 여기서 그의 고독은 급우들에 의해 한층 더해진다. 교실 밖에서 친구들과 타협하기를 거절하고 이러한 거절은 친구들의 야유에 의해 한층 고조된다. 예를 들면 급우들과 위대한 시인을 두고 테니슨이냐, 바이런이냐라는 문제로 다투었다. 테니슨을 선호하는 친구들에 맞서 그는 한 예술가의 위대성은 개인적인 도덕률이나 이단에 무관하게 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로 인하여 그는 곤욕을 당하기도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는 그들에 대한 분노가 사라지게 하는 힘을 느끼기도 한다.

  스티븐은 그의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과 화합하지 못하고 그들과의 거리가 점점 멀어져가는 것을 느낀다. 그 대신 마음속에서 타는 욕망의 불꽃이 그를 압도하려 하자 그의 마음은 이 격렬한 갈망을 억제하려 무척 애를 쓴다. 그리하여 그는 밤거리를 헤매다 불가피하게 매춘부와 성적 체험을 하게 된다. 동정의 상실은 순수하고 결벽한 스티븐의 양심을 크게 짓이겨놓았다.


   제3장

 그러나 뉘우침은 즉시 찾아왔다. 종교적 묵도기간에 신부는 지옥과 영원한 저주에 대해 무서운 설교를 행한다. 신부의 설교 한마디 한마디가 그의 양심을 깊게 파헤치자 그는 견딜 수 없어 마침내 신부에게 그 사실을 고백한다. 이처럼 엄숙한 기도주간을 통하여 오염되었던 그의 몸과 마음은 씻겨지고 이번에는 청순한 금욕생활에 들어간다. 이러한 종교적인 충격은 이 작품 뒷부분의 예술론과 함께 급한 호흡을 보이는 의식의 절정을 이룬다. 이때부터 그의 예술가로서의 소양에 굳건한 발판을 마련하게 되는 셈이다.


   제4장

 스티븐은 어느 날 신부로부터 신학교의 진학을 권유받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신부로서 적당치 않음을 의식하면서 그 제의를 거절한다. 그는 자신의 운명이야말로 어떠한 종교적, 사회적 구속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자기 자신의 지혜를 스스로 획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 종교적 세계로 은퇴하는 것보다는 세상에 참여해야 한다고 다짐한다. 신과의 불화로 하늘에서 지상으로 떨어진 추락천사 루시퍼(Lucifer)와, 부친인 다이달로스의 충고를 무시하고 하늘을 너무 높이 날다 지상에 추락한 이카로스(Ikaros)의 운명을 실감하면서 그는 종교를 버리고 예술에 종사하기로 결심한다. 즉, 신부가 아니고 그리스 신화의 명장 다이달로스(Daidalos)로서의, 즉 예술가로서의 길을 소명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예술가로서의 숙명을 명상하면서 행복에 넘쳐 홀로 바닷가를 거닌다.


   제5장

 이렇게 그의 생활은 미에 대한 열렬한 추구와 신앙인으로서의 성스런 몸가짐을 가꾸면서 자기의 미래를 탐색한다. 이 무렵에 친구인 린치와 예술과 미에 대하여 주고받은 대화는 그의 예술에 대한 감각과 사유를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후 스티븐은 성직에 대한 심한 회의에 잠기게 된다. 아일랜드의 교회 및 신부의 생활과 자기의 예술관과의 괴리를 느끼고, 드디어 아름다움만을 추구할 수 있는 예술, 자유로운 예술의 획득을 위해 파리로 떠날 결심을 한다. 그리고 스티븐은 자신의 일기 속에 예술의 신 다이달로스에게 다음과 같은 기도를 적어넣었다.

  <<늙으신 아버지시여, 늙으신 기술자이시여, 지금 그리고 영원토록 저를 도와주소서.>>

  이렇게 하여 그리스 신화의 명장 다이달로스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되어줄 것을 요구하고, 그를 구속하고 있던 전통과 인습의 그물로부터의 최후의 해방을 선포한다. 어린 새가 둥지우리를 떠나며 자초한 망명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d. 20세기 대표적인 모더니즘 작품

 이 소설은 종교적인 가정에서 출생하여 한때는 신학생이 되려다가 예술의 미에 눈을 뜨게 되어 마침내 그것에 인생을 걸게 된 작가 조이스의 정신적 성장단계를 다정다감한 청년 스티븐을 통하여 진지하게 묘사해내고 있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문학사에 있어서 근대의 사실주의, 자연주의 문학과 현대문학의 한 분기점을 이루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마치 산문시와도 같은 함축미와 일관된 상징, 정교하게 짜여진 횡적 구성, 형식적인 전통을 거부하는 이지적인 실험 정신은 인간의 내면을 꿰뚫는 현대소설의 귀감이다.

  이 소설은 조이스의 성장과정을 다룬 일종의 자전적인 정신사가 의식의 축을 이루고 있다. 한 예술가의 의식의 세계를 <의식의 흐름>이라는 새로운 기법을 추구하여 소설기법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것은 이전의 소설들의 주된 흐름인 사실주의나 자연주의의 현실적 묘사에서 벗어나 인간존재의 내면세계를 투영하고 있는 점에서 두드러진다. 그의 작품들은 이와같이 등장인물들의 성격 창조보다는 주인공의 의식의 내면세계를 밀도있게 추적하면서 현대소설로의 새로운 지평을 연 셈이다.

  현대소설은 인간의 현실적 삶이 이루어지는 사회반영인 근대소설과는 달리, 인간의 심리세계로 그 시선이 전환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조이스의 소설들에서 일관된 사건이나 성격구성을 파악하기는 매우 어렵다. 작품 속에 흐르는 의식의 양태를 독자들이 나름대로 종합하고 정리하여 일관적 흐름을 파악해야 한다.

  이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주인공 디달러스의 성장기에 대한 파악도 <의식의 흐름>을 통한 정리가 필요하다. 그것은 유년시절부터 신부들에 의해 교육되는 엄격한 학교생활, 대학에서의 예술에 대한 심취와 자기각성, 인격형성, 그리고 유학의 길에 오르는 시간적 흐름이 바로 주인공의 의식변화에 초점이 맞춰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바로 이러한 주인공의 의식변화와 내성적 성격의 변화에 소설적 형식의 기법이 가미되어 있는 셈이다.

  한편 이 작품은 에즈라 파운드(T. S. 엘리어트의 스승)의 도움으로 <에고이스트>지에 연재되었고, 1916년 미국에서, 17년 영국에서 각각 출판되었다. 조이스는 뛰어난 구성력과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주인공 스티븐 디달러스의 <영원히 미숙한> 정신을 통해 형식주의와 종교나 맹목적인 애국에 대담한 반기를 들고, 역시 <미숙한> 채로 그의 심미안적 예술관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E04 – 테스(Tess of the D'urbervilles) / 하디(Thomas Hardy, 1840~1928)

(출전: 동서고전 200선 해제3 / 반덕진 / 가람기획)


부호의 아들에게 순결을 빼앗기고 농장경영을 지망하는 성직자 아들에게 희생되어, 끝내는 살인을 범하고 사형을 당하게 되는 청순한 테스를 탁월한 예술적 솜씨로 그린 이 작품에는 인간의 운명이 그것을 좌우하는 우주의 맹목적인 <내재의지>에 대한 작가의 <비관주의적 운명관>이 펼쳐지고 있다. 테스라는 한 젊은 여인이 비정한 인간사회에 던져진 채 세파에 시달리며 겪어야 하는 일련의 고초는 독자들로 하여금 삶의 의미에 대한 원초적 물음을 진지하게 던지지 않을 수 없게 한다.


a. 건축학도 출신의 작가

 디킨스와 함께 빅토리아 시대 영국 문학사의 쌍벽을 이루는 인물인 하디는 영국 남부의 도싯(Dorset) 주에서 태어났다. 건축업자인 부친은 음악을 즐겼으며, 어머니는 왕성한 독서가로 하디는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고 고독을 사랑했다.

  그는 출생하는 순간 사산으로 오인할 만큼 허약한 체질이었는데, 이러한 신체적 조건은 그의 비관주의적 사상의 원초적 원인이 되었다. 하디는 가정적으로 행복한 환경 속에서 자랐으나, 신체적 허약함 때문이지 우울한 소년시절을 보낸다. 그러나 음악과 시에 대한 감수성은 예민하여, 이 시절 하디는 뒤마의 소설과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즐겨 읽으며 문학에 대한 열정을 키워나갔다.

  16세 때 부친의 직업을 이어받기 위해 도체스터 교회 건축사인 존 힉스의 제자로 들어가 그에게서 건축의 기초와 라틴어 그리스어를 배웠다. 이 무렵의 하디는 책벌레라 불릴 만큼 독서에 열중했고, 특히 로마의 시인들을 좋아했다. 한편 그는 여기서 두 번의 교수형을 목격하는데, 이는 그에게 그의 소설 <테스>에서 테스가 사형당하는 장면으로 재현될 정도로 강한 충격을 주었다.

  20세 때 하디는 옥스퍼드 출신의 모울을 알게 되는데 그에게서 학문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 하디는 그와 교우하는 동안 상당량의 독서를 하게 된다. 특히 <아가멤논> <오이디푸스>등의 그리스 비극에 심취했다. 전지전능한 신의 장난에 의해 나약한 인간의 운명이 결정되는 장면들을 목격하고 이때부터 그의 정신세계에는 비관주의적 색채가 착색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청년 하디를 사로잡은 것은 다윈의 진화론과 쇼펜하우어의 염세철학이었다.

  29세 때 첫 소설 <가련한 남자와 숙녀>를 썼으나, 31세 때 쓴 <최후의 충고>가 사실상 그의 처녀작이 되었다. 그러나 하디가 영국 문단에 확고한 지위를 갖게 된것은 35세 때 쓴 <광란의 무리를 떠나서>다. 이 작품은 이른바 <웨섹스 소설>의 첫 작품으로 자연과 인간감정이 초래하는 비극적 결과들을 목가적 풍경 속에서 열정적으로 그려냈다.

  이 소설로 호평을 받자 그는 건축을 떠나, 결혼한 다음 고향에 <맥스 게이트>라는 저택을 짓고 평생 동안 문학에 전념했다. 하디는 <맥스 게이트>에서 살면서 계절마다 아름답고 변화하는 자연과 그 속에서 소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한한 애정을 느겼다. 그는 고향인 웨섹스(Wessex:도싯의 옛이름) 지방을 배경으로 많은 작품을 남겨 그의 소설을 <웨섹스 소설>이라 부른다.

  이후 <웨섹스 소설>들인 <테스> <비운의 주드> <귀향> <숲속의 사람들> <푸른 숲의 나무 그늘 아래서> 등이 창작된다. 하디 문학의 주제와 특성이 집약되어 있는 <웨섹스 소설> 중에서도 특히 뛰어난 작품이 <테스>와 <비운의 주드>다.

  그의 예술적 정점이라 할 수 있는 <테스>는 진지한 양심세계와 심오한 도덕성이 조화를 이룬 작품으로 그를 세계적인 작가로 만들었다. 그러나 출판 당시 비도덕적이고 반기독교적인 통속소설이라는 혹평을 받았다.

  그의 마지막 장편 소설인 <비운의 주드>는 매우 비범한 작품으로 그의 천재성이 유감없이 드러난 소설이었지만, 그 암담한 결말과 비극적 스토리로 인해 <테스>보다 더 심한 혹평을 받았다. 사상적 깊이와 예술적 완성도가 뛰어났음에도 기존 윤리관과 가치관에 막혀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하디는 <테스>와 <비운의 주드>에 쏟아진 혹평을 계기로 소설의 세계를 단념하고 못다한 문학의 열정을 시의 세계에서 실현하게 된다.

  하디가 소설에서 시로 전화하게 된 것은 자신의 소설에 대한 사회의 비난에도 그 이유가 있었지만, 보다 근원적인 원인은 시에 대한 그의 선천적인 애정 때문이기도 했다. 시 분야에서 그의 필생의 대작은 나폴레옹과 그의 시대를 그린 철학적 대하 서사시인 <제왕들>이다. 이 작품에는 삶의 온전함과 전쟁의 자제를 바라는 평화주의가 호소력을 얻고 있는데, 이러한 연유로 말년의 하디는 생존한 영국작가 중 최고로 칭송되었다.

  1928년(88세) 하디는 두번째 부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88세를 일기로 그의 생애를 마감했다. 그의 유해는 뒤늦게 그의 문학을 인정한 많은 사람들의 애도 속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b. 시대적 배경과 문학세계

 시대적 배경

 하디가 살았던 19세기는 산업혁명이 농촌중심의 영국사회를 도시중심의 산업국가로 개편하는 과정에 있었다. 또한 자유경쟁과 그에 따른 부의 증가와 불평등으로 영국 사회의 전통과 인습이 무너지는 와중이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19세기 중엽부터 대두하기 시작한 다윈의 진화론은 서구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기독교 사상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어놓았다. 다윈의 <종의 기원>은 당시 기독교 신념에 젖어 있던 하디에게도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새로이 진화론과 과학적 사고방식을 접한 하디에게 이제 더이상 신의 섭리는 의미가 없었다. 이러한 생각은 쇼펜하우어의 철학과 결합되어 <내재의지>라는 새로운

사상을 낳게 되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인간은 자신의 의지 여하에 관계없이 우주와 자연이 지배하는 맹목적인 내재의지에 의하여 행불행이 좌우된다는 하디의 비관주의적 운명관이 확립되기에 이르렀으며, 그의 문학세계의 핵심사상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문학세계

 그의 문학은 한마디로 인간의 숙명적 부조리와 대결하는 비극의 문학으로, 그에게 인생은 인간들의 진실된 욕망이 외면당한 채 파멸되는 과정에 불과하다. 인생이란 실의와 고난의 실체이며, 인간의 행복이란 인간비극에서 하나의 우연한 에피소드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의 비관주의적 사상은 허무주의적이라는 통념상의 비관주의가 아니라, 인생을 깊고 뜨겁게 공감하고 절망 속에서 괴로워하며 인생의 진실과 고뇌와 비탄에서 구제의 방법을 찾아내려는 적극적인 태도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비극을 통한 인간의 구원인 것이다.

  하디 자신은 자기가 염세주의자라기보다는 사회 개선론자라고 불려지기를 원했다. 그러한 그의 열망은 고통과 좌절의 체험을 통해서 사회의 모순됨을 인식하고 보다 나은 미래를 건설하고자 하는 개선의 의지를 갖는 소설 속의 주인공들을 통해 잘 반영되어 있다. 하디는 작품 속에서 끝없이 닥쳐오는 불운의 회오리 속에서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주인공들의 아픔을 공유하고, 운명을 극복하기 위해 끝까지 싸우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놓았다는 점에서 그를 염세주의자라기보다는 진정한 의미의 휴머니스트라고 불러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c. 비극적 운명에 희생되는 한 여인의 삶

  하디가 <테스>를 발표한 것은 그의 문학이 원숙기에 접어든 1891년(51세)이었다. 이 작품에는 창작활동 초기부터 그가 집요하게 모색해온 사회비판정신이 보다 강하게 부각되어 있다. 그리고 <테스>는 하디의 비관적 운명론의 하나의 상징인 것이다. <테스>는 운명의 장난에 휘말려든 한 순진한 아가씨의 불행한 이야기다. 웨섹스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테스가 무책임한 남자에게 처녀성을 유린당하는 데서부터 이 소설의 비극이 시작된다.

  명문 더버빌의 후손이라는 자의식에 도취되어 술로 세월을 보내는 게으른 아버지와 무능한 어머니, 그리고 많은 동생들을 둔 테스는 집안 살림을 돕기 위해 먼 친척인 스토크 더버빌의 집을 방문한다. 그곳에서 양계일은 하던 중 테스는 바람둥이 청년 알렉에게 처녀성을 잃는다. 그후 집에 돌아와 사생아를 낳는데, 그 아이는 태어난 지 얼마 안되어 세례조차 받지 못하고 죽는다.

  테스는 인생 최초의 비극을 경험하지만, 아직 삶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고향을 떠나 젖 짜는 일을 시작한다. 그녀가 새생활을 시작한 낙농장에는 농장경영을 지망하는 에인젤이라는 건실한 청년이 있었다. 목사의 아들인 에인젤은 성직에 회의를 품고 농사를 짓기 위해 이곳으로 일을 배우러 와 있었던 것이다.

  테스는 에인젤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자신이 처녀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번민하게 된다. 그러나 에인젤의 고매한 인품에 이끌려 그를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하게 된 테스는, 그가 과거의 잘못을 너그럽게 용서해줄 것으로 믿고 마침내 결혼한다. 그러나 첫날밤 과거를 고백하자 처녀성을 중시하는 에인젤은 신부를 남겨둔채 혼자 외국으로 떠나버린다. 이리하여 테스는 다시 버림받은 몸이 되었으나, 언젠가는 남편이 다시 돌아오리라는 희망을 잃지 않고, 모진 고생을 참아낸다. 그 무렵 우연히 테스를 만난 알렉은 열정에 사로잡혀 또다시 그녀를 유혹한다.

  한편 테스의 집에서는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죽고 식구들은 집에서 쫓겨나게 된다. 가족의 생계를 떠맡게 된 테스는 결국 지난날 자기의 인생을 짓밟았던 알렉의 원조의 손길을 물리치지 못하고, 그의 정부가 된다. 그때 뜻하지 않게 테스를 버리고 떠났던 남편이 정신적으로 훨씬 성장한 모습으로 그녀를 찾아온다. 그토록 기다리던 남편이 돌아왔건만 기쁜 마음으로 재회할 수 없게 된 테스는 이성을 잃고 자신을 정부의 위치로 전락시킨 알렉을 과도로 찔러 죽인다.

  그런 다음 테스는 에인젤을 뒤따라가 처음으로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1주일 뒤, 그들의 짧지만 황홀했던 행복은 막을 내리고, 테스는 뒤따라온 경찰에게 체포되어 처형된다. 작가는 마지막에 쓰기를 <<드디어 심판은 끝났다. 신들은 말하기를 <거느리는 자>는 마침내 테스에 대한 희롱을 마친 것이다. >> 결국 사회 전체가 그녀를 사형대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d.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비극적인 운명론

 <순결한 여인>이라는 부제가 내포하고 있듯이, 테스는 피해자이지 죄인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막다른 길로 몰아가는 운명의 힘에 쫓겨 마침내 엄청난 살인죄를 저지르고 사형당하게 되는 것이다. 교수형이 집행되는 날 감옥의 탑 위에서 나부끼는 검은 깃발은 하디 문학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다.

  테스가 일자리를 옮김에 따라 변화하는 웨섹스의 경관과 그 평화롭고 전원적인 분위기는 테스가 겪고 있는 불행을 한층 심화시킨다. 이렇듯 서사적인 기교와 작가의 리얼리티가 융화됨으로써 하디는 <테스>에 의해 <젊은 세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위대한 작가>로 평가받으며 불멸의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작품을 한 여인의 슬픈 이야기쯤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이 작품에는 당시 영국사회를 지배했던 인습의 모순이 예리하게 파헤쳐져 있고 비관적 운명관을 가진 작가의 사상이 전편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디는 이 작품의 곳곳에서 정신적인 정조를 강조하고 있다. 때문에 가련한 주인공 테스로 하여금 다시 소생하는 데 조금도 인색치 않았다. 간음한 여자이자 살인자인 테스를 서슴없이 순결한 여인으로 일컫는다. <<테스의 본연의 순결성은 마지막까지 온전했다고 나는 아직도 생각한다. 하긴 그녀가 쓰러졌을 때 육체적인 순결성은 사라졌을지라도. >> 그토록 험난한 운명 앞에서 인간의 힘으로 최선을

다했다는 것만으로도 구원은 내려진 것이다.

  <테스>에서 우리가 음미하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첫째 육체의 순결성보다는 정신의 순결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점, 둘재 불가항력적인 운명이 연약한 인간에게 부여하는 재난에 대한 문제, 셋째 종교적인 문제로서 죄지은 자 대신 죄 없는 자가 끊임없이 받는 형벌이라는 비극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테스>가 발표되었을 때 <타임>지의 비평자는 하디의 최고 작품이라고 갈파하는 동시에 <<인습적인 관념을 다루는 데 대담하고 애틋한 비애감이 서리는 동시에 지극히 감동적인 비극감을 자아냈다>>고 말했고, 시인 윌리엄 와트슨은 <테스>를 읽으면 인간의 지적 정서적 경험폭이 넓어진다고 말했다. 웨스트민스터의 비평가는 <<조지 엘리어트가 별세한 뒤 영국이 낳은 최고 역량의 작품>>으로 극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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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Har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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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other people named Thomas Hardy, see Thomas Hardy (disambiguation).

Thomas Hardy

Thomashardy restored.jpg

Hardy between about 1910 and 1915

Born 2 June 1840

Stinsford, Dorset, England

Died 11 January 1928 (aged 87)

Dorchester, Dorset, England

Resting place

Stinsford parish church (heart)

Poets' Corner, Westminster Abbey (ashes)

Occupation Novelist, poet, and short story writer

Alma mater King's College London

Literary movement Naturalism, Victorian literature

Notable works Tess of the d'Urbervilles,

Far from the Madding Crowd,

The Mayor of Casterbridge,

Collected Poems

Jude the Obscure

Spouse

Emma Gifford

(1874–1912)

Florence Dugdale

(1914–1928)

Signature

Thomas Hardy, OM (2 June 1840 – 11 January 1928) was an English novelist and poet. A Victorian realist in the tradition of George Eliot, he was influenced both in his novels and in his poetry by Romanticism, especially William Wordsworth.[1] He was highly critical of much in Victorian society, especially on the declining status of rural people in Britain, such as those from his native South West England.


While Hardy wrote poetry throughout his life and regarded himself primarily as a poet, his first collection was not published until 1898. Initially, therefore, he gained fame as the author of such novels as Far from the Madding Crowd (1874), The Mayor of Casterbridge (1886), Tess of the d'Urbervilles (1891), and Jude the Obscure (1895). During his lifetime, Hardy's poetry was acclaimed by younger poets (particularly the Georgians) who viewed him as a mentor. After his death his poems were lauded by Ezra Pound, W. H. Auden and Philip Larkin.[2]


Many of his novels concern tragic characters struggling against their passions and social circumstances, and they are often set in the semi-fictional region of Wessex; initially based on the medieval Anglo-Saxon kingdom, Hardy's Wessex eventually came to include the counties of Dorset, Wiltshire, Somerset, Devon, Hampshire and much of Berkshire, in southwest and south central England. Two of his novels, Tess of the d'Urbervilles and Far from the Madding Crowd, were listed in the top 50 on the BBC's survey The Big Read.[3]


Contents  [hide] 

1 Life and career

1.1 Early life

1.2 Novel writing

1.3 Final years

2 Novels

3 Literary themes

4 Poetry

5 Religious beliefs

6 Locations in novels

7 Influence

8 Works

8.1 Prose

8.2 Poetry collections

8.3 Drama

9 References

10 Biographies and criticism

11 External links

Life and career[edit]

Early life[edit]


"The Hardy Tree" in Old St Pancras churchyard, growing between gravestones moved while Hardy was working there

Thomas Hardy was born on 2 June 1840 in Higher Bockhampton (then Upper Bockhampton), a hamlet in the parish of Stinsford to the east of Dorchester in Dorset, England, where his father Thomas (1811–1892) worked as a stonemason and local builder, and married his mother Jemima (née Hand;[4] 1813–1904) in Beaminster, towards the end of 1839.[5] Jemima was well-read, and she educated Thomas until he went to his first school at Bockhampton at the age of eight. For several years he attended Mr. Last's Academy for Young Gentlemen in Dorchester, where he learned Latin and demonstrated academic potential.[6] Because Hardy's family lacked the means for a university education, his formal education ended at the age of sixteen, when he became apprenticed to James Hicks, a local architect.[7]


Hardy trained as an architect in Dorchester before moving to London in 1862; there he enrolled as a student at King's College London. He won prizes from the Royal Institute of British Architects and the Architectural Association. He joined Arthur Blomfield's practice as assistant architect in April 1862 and worked with Blomfield on All Saints' parish church in Windsor, Berkshire in 1862–64. A reredos, possibly designed by Hardy, was discovered behind panelling at All Saints' in August 2016.[8][9] In the mid-1860s, Hardy was in charge of the excavation of part of the graveyard of St Pancras Old Church prior to its destruction when the Midland Railway was extended to a new terminus at St Pancras.[10]


Hardy never felt at home in London, because he was acutely conscious of class divisions and his social inferiority. During this time he became interested in social reform and the works of John Stuart Mill. He was also introduced by his Dorset friend Horace Moule to the works of Charles Fourier and Auguste Comte. After five years, concerned about his health, he returned to Dorset, settling in Weymouth, and decided to dedicate himself to writing.


Novel writing[edit]


Max Gate in 2015

In 1870, while on an architectural mission to restore the parish church of St Juliot in Cornwall,[11] Hardy met and fell in love with Emma Gifford, whom he married in Kensington in the autumn of 1874.[5][12][13] In 1885 Thomas and his wife moved into Max Gate, a house designed by Hardy and built by his brother. Although they later became estranged, Emma's subsequent death in 1912 had a traumatic effect on him and after her death, Hardy made a trip to Cornwall to revisit places linked with their courtship; his Poems 1912–13 reflect upon her death. In 1914, Hardy married his secretary Florence Emily Dugdale, who was 39 years his junior. However, he remained preoccupied with his first wife's death and tried to overcome his remorse by writing poetry.[14] In 1910, Hardy had been awarded the Order of Merit and was also for the first time nominated for the Nobel Prize in Literature. He would be nominated for the prize eleven years later.[15]


Final years[edit]


Florence Hardy at the seashore, 1915

Hardy became ill with pleurisy in December 1927 and died at Max Gate just after 9 pm on 11 January 1928, having dictated his final poem to his wife on his deathbed; the cause of death was cited, on his death certificate, as "cardiac syncope", with "old age" given as a contributory factor. His funeral was on 16 January at Westminster Abbey, and it proved a controversial occasion because Hardy had wished for his body to be interred at Stinsford in the same grave as his first wife, Emma. His family and friends concurred; however, his executor, Sir Sydney Carlyle Cockerell, insisted that he be placed in the abbey's famous Poets' Corner. A compromise was reached whereby his heart was buried at Stinsford with Emma, and his ashes in Poets' Corner.[16] Hardy's estate at death was valued at £95,418 (£5276015 in 2015 sterling).[17]


Shortly after Hardy's death, the executors of his estate burnt his letters and notebooks, but twelve documents survived, one of them containing notes and extracts of newspaper stories from the 1820s, and research into these has provided insight into how Hardy used them in his works.[18] In the year of his death Mrs Hardy published The Early Life of Thomas Hardy, 1841–1891, compiled largely from contemporary notes, letters, diaries, and biographical memoranda, as well as from oral information in conversations extending over many years.


Hardy's work was admired by many younger writers, including D. H. Lawrence,[19] John Cowper Powys, and Virginia Woolf.[20] In his autobiography Goodbye to All That (1929), Robert Graves recalls meeting Hardy in Dorset in the early 1920s and how Hardy received him and his new wife warmly, and was encouraging about his work.


Hardy's birthplace in Bockhampton and his house Max Gate, both in Dorchester, are owned by the National Trust.


Novels[edit]


Thomas Hardy's birthplace and cottage at Higher Bockhampton, where Under the Greenwood Tree and Far from the Madding Crowd were written


View of the River Frome from the bridge at Lower Bockhampton. In Tess of the d'Urbervilles the lowland vale of the river is described as the Vale of the Great Dairies, in comparison to Tess's home, the fertile Vale of Blackmore, which is the Vale of Little Dairies.

Hardy's first novel, The Poor Man and the Lady, finished by 1867, failed to find a publisher. He then showed it to his mentor and friend, the Victorian poet and novelist, George Meredith, who felt that The Poor Man and the Lady would be too politically controversial and might damage Hardy's ability to publish in the future. So Hardy followed his advice and he did not try further to publish it. He subsequently destroyed the manuscript, but used some of the ideas in his later work.[21]


After he abandoned his first novel, Hardy wrote two new ones that he hoped would have more commercial appeal, Desperate Remedies (1871) and Under the Greenwood Tree (1872), both of which were published anonymously; it was while working on the latter that he met Emma Gifford, who would become his wife.[21] In 1873 A Pair of Blue Eyes, a novel drawing on Hardy's courtship of Emma, was published under his own name. The term "cliffhanger" is considered to have originated with the serialised version of this story (which was published in Tinsley's Magazine between September 1872 and July 1873) in which Henry Knight, one of the protagonists, is left literally hanging off a cliff.[22]


In his next novel Far from the Madding Crowd (1874), Hardy first introduced the idea of calling the region in the west of England, where his novels are set Wessex. Wessex had been the name of an early Saxon kingdom, in approximately the same part of England. Far from the Madding Crowd was successful enough for Hardy to give up architectural work and pursue a literary career. Over the next twenty-five years Hardy produced ten more novels.


Subsequently, the Hardys moved from London to Yeovil, and then to Sturminster Newton, where he wrote The Return of the Native (1878).[23] Hardy published Two on a Tower in 1882, a romance story set in the world of astronomy. Then in 1885, they moved for the last time, to Max Gate, a house outside Dorchester designed by Hardy and built by his brother. There he wrote The Mayor of Casterbridge (1886), The Woodlanders (1887), and Tess of the d'Urbervilles (1891), the last of which attracted criticism for its sympathetic portrayal of a "fallen woman" and was initially refused publication. Its subtitle, A Pure Woman: Faithfully Presented, was intended to raise the eyebrows of the Victorian middle classes.



A major location of The Return of the Native as part of Hardy's fictional Egdon Heath.

Jude the Obscure, published in 1895, met with an even stronger negative response from the Victorian public because of its controversial treatment of sex, religion and marriage. Furthermore, its apparent attack on the institution of marriage caused further strain on Hardy's already difficult marriage because Emma Hardy was concerned that Jude the Obscure would be read as autobiographical. Some booksellers sold the novel in brown paper bags, and the Bishop of Wakefield, Walsham How, is reputed to have burnt his copy.[18] In his postscript of 1912, Hardy humorously referred to this incident as part of the career of the book: "After these [hostile] verdicts from the press its next misfortune was to be burnt by a bishop – probably in his despair at not being able to burn me".[24] Despite this, Hardy had become a celebrity by the 1900s, but some argue that he gave up writing novels because of the criticism of both Tess of the D'Urbervilles and Jude the Obscure.[25] The Well-Beloved, first serialised in 1892, was published in 1897.



Hardy painted by William Strang, 1893

Literary themes[edit]

Considered a Victorian realist, Hardy examines the social constraints on the lives of those living in Victorian England, and criticises those beliefs, especially those relating to marriage, education and religion, that limited people's lives and caused unhappiness. Such unhappiness, and the suffering it brings, is seen by poet Philip Larkin as central in Hardy's works:


"What is the intensely maturing experience of which Hardy's modern man is most sensible? In my view it is suffering, or sadness, and extended consideration of the centrality of suffering in Hardy's work should be the first duty of the true critic for which the work is still waiting [. . .] Any approach to his work, as to any writer's work, must seek first of all to determine what element is peculiarly his, which imaginative note he strikes most plangently, and to deny that in this case it is the sometimes gentle, sometimes ironic, sometimes bitter but always passive apprehension of suffering is, I think, wrong-headed."[26]

In Two on a Tower, for example, Hardy takes a stand against these rules of society with a story of love that crosses the boundaries of class. The reader is forced to reconsider the conventions set up by society for the relationships between women and men. Nineteenth-century society had conventions, which were enforced. In this novel Swithin St Cleeve's idealism pits him against such contemporary social constraints.


"In a novel structured around contrasts, the main opposition is between Swithin St Cleeve and Lady Viviette Constantine, who are presented as binary figures in a series of ways: aristocratic and lower class, youthful and mature, single and married, fair and dark, religious and agnostic...she [Lady Viviette Constantine] is also deeply conventional, absurdly wishing to conceal their marriage until Swithin has achieved social status through his scientific work, which gives rise to uncontrolled ironies and tragic-comic misunderstandings."[27]

Fate or chance is another important theme. Hardy's characters often encounter crossroads on a journey, a junction that offers alternative physical destinations but which is also symbolic of a point of opportunity and transition, further suggesting that fate is at work. Far From the Madding Crowd is an example of a novel in which chance has a major role: "Had Bathsheba not sent the valentine, had Fanny not missed her wedding, for example, the story would have taken an entirely different path."[28] Indeed, Hardy's main characters often seem to be held in fate's overwhelming grip.


Poetry[edit]


Thomas Hardy by Walter William Ouless, 1922

For online poems, see "Poetry collections" below.


In 1898 Hardy published his first volume of poetry, Wessex Poems, a collection of poems written over 30 years. While some suggest that Hardy gave up writing novels following the harsh criticism of Jude the Obscure in 1896, the poet C. H. Sisson calls this "hypothesis" "superficial and absurd".[25][29] In the twentieth century Hardy published only poetry.


Thomas Hardy wrote in a great variety of poetic forms including lyrics, ballads, satire, dramatic monologues, and dialogue, as well as a three-volume epic closet drama The Dynasts (1904–08),[30] and though in some ways a very traditional poet, because he was influenced by folksong and ballads,[31] he "was never conventional," and "persistently experiment[ed] with different, often invented, stanza forms and metres,[32] and made use of "rough-hewn rhythms and colloquial diction".[33]


Hardy wrote a number of significant war poems that relate to both the Boer Wars and World War I, including "Drummer Hodge", "In Time of 'The Breaking of Nations'", and "The Man He Killed"; his work had a profound influence on other war poets such as Rupert Brooke and Siegfried Sassoon.[34] Hardy in these poems often used the viewpoint of ordinary soldiers and their colloquial speech.[34] A theme in the Wessex Poems is the long shadow that the Napoleonic Wars cast over the nineteenth century, as seen, for example, in "The Sergeant's Song" and "Leipzig".[35] The Napoleonic War is the subject of The Dynasts.


Some of Hardy's most famous poems are from "Poems of 1912–13", part of Satires of Circumstance (1914), written following the death of his wife Emma in 1912. They had been estranged for twenty years and these lyric poems express deeply felt "regret and remorse".[34] Poems like “After a Journey,” “The Voice,” and others from this collection "are by general consent regarded as the peak of his poetic achievement".[30] In a recent biography on Hardy, Claire Tomalin argues that Hardy became a truly great English poet after the death of his first wife, Emma, beginning with these elegies, which she describes as among "the finest and strangest celebrations of the dead in English poetry."[36]



A portrait of Thomas Hardy in 1923

Many of Hardy's poems deal with themes of disappointment in love and life, and "the perversity of fate", but the best of them present these themes with "a carefully controlled elegiac feeling".[37] Irony is also an important element in a number of Hardy's poems, including "The Man he Killed" and "Are You Digging on My Grave".[38] A few of Hardy's poems, such as "The Blinded Bird", a melancholy polemic against the sport of vinkenzetting, reflect his firm stance against animal cruelty, exhibited also in his antivivisectionist views and his membership in The Royal Society for the Prevention of Cruelty to Animals.[39]


A number of notable English composers, including Gerald Finzi,[40][41] Benjamin Britten,[42] and Gustav Holst,[43] set poems by Hardy to music. Holst also wrote the orchestral tone poem Egdon Heath: A Homage to Thomas Hardy in 1927.


Although his poems were initially not as well received as his novels had been, Hardy is now recognised as one of the greatest twentieth-century poets, and his verse has had a profound influence on later writers, including Robert Frost, W. H. Auden, Dylan Thomas, and, most notably Philip Larkin.[33] Larkin included twenty-seven poems by Hardy compared with only nine by T. S. Eliot in his edition of the Oxford Book of Twentieth Century English Verse in 1973.[44] There were also fewer poems by W. B. Yeats.[45]


Religious beliefs[edit]


Thomas Hardy aged 70, by William Strang

Hardy's family was Anglican, but not especially devout. He was baptised at the age of five weeks and attended church, where his father and uncle contributed to music. However, he did not attend the local Church of England school, instead being sent to Mr Last's school, three miles away. As a young adult, he befriended Henry R. Bastow (a Plymouth Brethren man), who also worked as a pupil architect, and who was preparing for adult baptism in the Baptist Church. Hardy flirted with conversion, but decided against it.[46] Bastow went to Australia and maintained a long correspondence with Hardy, but eventually Hardy tired of these exchanges and the correspondence ceased. This concluded Hardy's links with the Baptists.


The irony and struggles of life, coupled with his naturally curious mind, led him to question the traditional Christian view of God:


The Christian God – the external personality – has been replaced by the intelligence of the First Cause...the replacement of the old concept of God as all-powerful by a new concept of universal consciousness. The 'tribal god, man-shaped, fiery-faced and tyrannous' is replaced by the 'unconscious will of the Universe' which progressively grows aware of itself and 'ultimately, it is to be hoped, sympathetic'.[47]

Scholars have debated Hardy's religious leanings for years, often unable to reach a consensus. However, Hardy's religious life seems to have mixed agnosticism, deism, and spiritism. Once, when asked in correspondence by a clergyman, Dr A. B. Grosart, about the question of reconciling the horrors of human and animal life with "the absolute goodness and non-limitation of God",[48] Hardy replied,


Mr. Hardy regrets that he is unable to offer any hypothesis which would reconcile the existence of such evils as Dr. Grosart describes with the idea of omnipotent goodness. Perhaps Dr. Grosart might be helped to a provisional view of the universe by the recently published Life of Darwin and the works of Herbert Spencer and other agnostics.[49]

Hardy frequently conceived of, and wrote about, supernatural forces, particularly those that control the universe through indifference or caprice, a force he called The Immanent Will. He also showed in his writing some degree of fascination with ghosts and spirits.[49] Even so, he retained a strong emotional attachment to the Christian liturgy and church rituals, particularly as manifested in rural communities, that had been such a formative influence in his early years, and Biblical references can be found woven throughout many of Hardy's novels.


Hardy's friends during his apprenticeship to John Hicks included Horace Moule (one of the eight sons of Henry Moule), and the poet William Barnes, both ministers of religion. Moule remained a close friend of Hardy's for the rest of his life, and introduced him to new scientific findings that cast doubt on literal interpretations of the Bible,[50] such as those of Gideon Mantell. Moule gave Hardy a copy of Mantell's book The Wonders of Geology (1848) in 1858, and Adelene Buckland has suggested that there are "compelling similarities" between the "cliffhanger" section from A Pair of Blue Eyes and Mantell's geological descriptions. It has also been suggested that the character of Henry Knight in A Pair of Blue Eyes was based on Horace Moule.[51]



Grave of Thomas Hardy's heart at Stinsford parish church

Locations in novels[edit]

Sites associated with Hardy's own life and which inspired the settings of his novels continue to attract literary tourists and casual visitors. For locations in Hardy's novels see: Thomas Hardy's Wessex, and the Thomas Hardy's Wessex[52] research site, which includes maps.[53]


Influence[edit]

Hardy corresponded with and visited Lady Catherine Milnes Gaskell at Wenlock Abbey and many of Lady Catherine's books are inspired by Hardy, who was very fond of her.[54]


D. H. Lawrence's Study of Thomas Hardy (1936), indicates the importance of Hardy for him, even though this work is a platform for Lawrence's own developing philosophy rather than a more standard literary study. The influence of Hardy's treatment of character, and Lawrence's own response to the central metaphysic behind many of Hardy's novels, helped significantly in the development of The Rainbow (1915) and Women in Love (1920).[55]


Wood and Stone (1915), the first novel by John Cowper Powys, who was a contemporary of Lawrence, was "Dedicated with devoted admiration to the greatest poet and novelist of our age Thomas Hardy".[56] Powys's later novel Maiden Castle (1936) is set in Dorchester, Hardy's Casterbridge, and was intended by Powys to be a "rival" to Hardy's The Mayor of Casterbridge.[57] Maiden Castle is the last of Powys's so-called Wessex novels, Wolf Solent (1929), A Glastonbury Romance (1932), and Weymouth Sands (1934), which are set in Somerset and Dorset.[58]


Hardy was clearly the starting point for the character of the novelist Edward Driffield in W. Somerset Maugham's novel Cakes and Ale (1930).[59] Thomas Hardy's works also feature prominently in the American playwright Christopher Durang's The Marriage of Bette and Boo (1985), in which a graduate thesis analysing Tess of the d'Urbervilles is interspersed with analysis of Matt's family's neuroses.[60]


Hardy has been a significant influence on Nigel Blackwell, frontman of the post-punk British rock band Half Man Half Biscuit, who has often incorporated phrases (some obscure) by or about Hardy, into his song lyrics.[61]


Works[edit]


The title page from a first edition of Far from the Madding Crowd (1874)

Prose[edit]

Hardy divided his novels and collected short stories into three classes:[citation needed]


Novels of character and environment


The Poor Man and the Lady (1867, unpublished and lost)

Under the Greenwood Tree: A Rural Painting of the Dutch School (1872)

Far from the Madding Crowd (1874)

The Return of the Native (1878)

The Mayor of Casterbridge: The Life and Death of a Man of Character (1886)

The Woodlanders (1887)

Wessex Tales (1888, a collection of short stories)

Tess of the d'Urbervilles: A Pure Woman Faithfully Presented (1891)

Life's Little Ironies (1894, a collection of short stories)

Jude the Obscure (1895)

Romances and fantasies


A Pair of Blue Eyes: A Novel (1873)

The Trumpet-Major (1880)

Two on a Tower: A Romance (1882)

A Group of Noble Dames (1891, a collection of short stories)

The Well-Beloved: A Sketch of a Temperament (1897) (first published as a serial from 1892)

Novels of ingenuity


Desperate Remedies: A Novel (1871)

The Hand of Ethelberta: A Comedy in Chapters (1876)

A Laodicean: A Story of To-day (1881)

Hardy also produced a number of minor tales; one story, The Spectre of the Real (1894) was written in collaboration with Florence Henniker.[62] An additional short-story collection, beyond the ones mentioned above, is A Changed Man and Other Tales (1913). His works have been collected as the 24-volume Wessex Edition (1912–13) and the 37-volume Mellstock Edition (1919–20). His largely self-written biography appears under his second wife's name in two volumes from 1928 to 1930, as The Early Life of Thomas Hardy, 1840–91 and The Later Years of Thomas Hardy, 1892–1928, now published in a critical one-volume edition as The Life and Work of Thomas Hardy, edited by Michael Millgate (1984).


Short stories (with date of first publication)


"How I Built Myself A House" (1865)

"Destiny and a Blue Cloak" (1874)

"The Thieves Who Couldn't Stop Sneezing" (1877)

"The Duchess of Hamptonshire" (1878) (collected in A Group of Noble Dames)

"The Distracted Preacher" (1879) (collected in Wessex Tales)

"Fellow-Townsmen" (1880) (collected in Wessex Tales)

"The Honourable Laura" (1881) (collected in A Group of Noble Dames)

"What The Shepherd Saw" (1881) (collected in A Changed Man and Other Stories)

"A Tradition of Eighteen Hundred and Four" (1882) (collected in Wessex Tales)

"The Three Strangers" (1883) (collected in Wessex Tales)

"The Romantic Adventures of a Milkmaid" (1883) (collected in A Changed Man and Other Stories)

"Interlopers at the Knap" (1884) (collected in Wessex Tales)

"A Mere Interlude" (1885) (collected in A Changed Man and Other Stories)

"A Tryst at an Ancient Earthwork" (1885) (collected in A Changed Man and Other Stories)

"Alicia's Diary" (1887) (collected in A Changed Man and Other Stories)

"The Waiting Supper" (1887–88) (collected in A Changed Man and Other Stories)

"The Withered Arm" (1888) (collected in Wessex Tales)

"A Tragedy of Two Ambitions" (1888) (collected in Life's Little Ironies)

"The First Countess of Wessex" (1889) (collected in A Group of Noble Dames)

"Anna, Lady Baxby" (1890) (collected in A Group of Noble Dames)

"The Lady Icenway" (1890) (collected in A Group of Noble Dames)

"Lady Mottisfont" (1890) (collected in A Group of Noble Dames)

"The Lady Penelope" (1890) (collected in A Group of Noble Dames)

"The Marchioness of Stonehenge" (1890) (collected in A Group of Noble Dames)

"Squire Petrick's Lady" (1890) (collected in A Group of Noble Dames)

"Barbara of the House of Grebe" (1890) (collected in A Group of Noble Dames)

"The Melancholy Hussar of The German Legion" (1890) (collected in Wessex Tales)

"Absent-Mindedness in a Parish Choir" (1891)

"The Winters and the Palmleys" (1891)

"For Conscience' Sake" (1891) (collected in Life's Little Ironies)

"Incident in Mr. Crookhill's Life"(1891)

"The Doctor's Legend" (1891)

"Andrey Satchel and the Parson and Clerk" (1891)

"The History of the Hardcomes" (1891)

"Netty Sargent's Copyhold" (1891)

"On The Western Circuit" (1891) (collected in Life's Little Ironies)

"A Few Crusted Characters: Introduction" (1891) (collected in Life's Little Ironies)

"The Superstitious Man's Story" (1891)

"Tony Kytes, the Arch-Deceiver" (1891)

"To Please His Wife (nl)" (1891) (collected in Life's Little Ironies)

"The Son's Veto" (1891) (collected in Life's Little Ironies)

"Old Andrey's Experience as a Musician" (1891)

"Our Exploits At West Poley" (1892–93)

"Master John Horseleigh, Knight" (1893)

"The Fiddler of the Reels" (1893) (collected in Life's Little Ironies)

"An Imaginative Woman" (1894) (collected in Life's Little Ironies)

"The Spectre of the Real" (1894)

"A Committee-Man of 'The Terror'" (1896) (collected in A Changed Man and Other Stories)

"The Duke's Reappearance" (1896) (collected in A Changed Man and Other Stories)

"The Grave by the Handpost" (1897) (collected in A Changed Man and Other Stories)

"A Changed Man" (1900) (collected in A Changed Man and Other Stories)

"Enter a Dragoon" (1900) (collected in A Changed Man and Other Stories)

"Blue Jimmy: The Horse Stealer" (1911)

"Old Mrs. Chundle" (1929)

"The Unconquerable"(1992)

Poetry collections[edit]

Wessex Poems and Other Verses (1898)

Poems of the Past and the Present (1901)

Time's Laughingstocks and Other Verses (1909)

Satires of Circumstance (1914)

Moments of Vision (1917)

Collected Poems (1919)

Late Lyrics and Earlier with Many Other Verses (1922)

Human Shows, Far Phantasies, Songs and Trifles (1925)

Winter Words in Various Moods and Metres (1928)

The Complete Poems (Macmillan, 1976)

Selected Poems (Edited by Harry Thomas, Penguin, 1993)

Hardy: Poems (Everyman's Library Pocket Poets, 1995)

Thomas Hardy: Selected Poetry and Nonfictional Prose (St. Martin's Press, 1996)

Selected Poems (Edited by Robert Mezey, Penguin, 1998)

Thomas Hardy: The Complete Poems (Edited by James Gibson, Palgrave, 2001)

Online poems: Poems by Thomas Hardy[63] at Poetry Foundation and Poems by Thomas Hardy at poemhunter.com[64]


Drama[edit]

The Dynasts: An Epic-Drama of the War with Napoleon (verse drama)

The Dynasts, Part 1 (1904)

The Dynasts, Part 2 (1906)

The Dynasts, Part 3 (1908)

The Famous Tragedy of the Queen of Cornwall at Tintagel in Lyonnesse (1923) (one-act play)



E03 – 걸리버 여행기(Gulliver's Travels) / 스위프트(Jonathan Swift, 1667~1745)

(출전: 동서고전 200선 해제3 / 반덕진 / 가람기획)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와 함께 영국의 18세기 전반기를 대표하는 이 소설은 그동안 어린이용 동화로 소개되어왔으나, 사실은 비현실적인 명분에 집착하여 국민들의 생활이나 복지에는 무관심한 정치인들의 정쟁을 풍자한 작품이다. 인간의 도덕적 약점에 대한 작가의 신랄한 풍자와 인간혐오 사상이 전편에 흐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면면히 유지되고 있는 유토피아 추구의 기조는 독자들에게 아주 흥미있고 교훈적인 문학적 체험을 할 수 있게 한다.



a. 인간을 혐오했던 아일랜드 영웅

 이책은 스위프트가 <<세상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화나게 만들려고 쓴 책>>이다.

  풍자문학의 대가인 스위프트는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서 출생했다. 유복자로 태어나 큰아버지의 배려로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했다. 그러나 그는 재학중 방종하고 게을러 학교측의 특사로 겨우 졸업했다. 런던으로 나와 모친 쪽의 먼 친척인 당시 정계의 거물이었던 윌리엄 템플 경의 집에서 비서로 일했다. 이 집에서 여러 고전과 역사를 배웠으며, 여러 정치가와 접촉하며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의 지적 성숙은 여기서 이루어졌다.

  그가 스텔라라고 불렀던 에스더 존슨이라는 어린 소녀를 사랑한 것도 여기서였다. 그는 그녀를 가르쳤으며 다른 누구도 사랑하지 못할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다. 그들이 비밀리에 결혼을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그들의 관계가 서로에게 만족스러웠다는 것은 분명했다.

  한때 아일랜드로 돌아가 목사가 되었으나 1680년경(13세)부터 시문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1704년(37세) 익명으로 출간된 풍자소설 <지어낸 이야기> 중 <책들의 전쟁>과 <설교단의 이야기>는 그의 초기대표작이다. 전자는 고대와 근대 어느 쪽의 문화가 더 나은가라는 당시 논쟁에서 고전 찬미파를 지지했다. <설교단의 이야기>는 카톨릭, 프로테스탄트, 영국 국교회의 싸움을 부친으로부터 상속받은 웃옷을 서로 차지하려고 싸우는 3명의 아들에 비유하여 풍자한 작품으로, 당시의 정세에 어두운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는 둘다 읽기 어려운 작품이나 작자의 풍자능력은 뚜렷하다.

  이후 풍자와 논쟁의 능력이 인정되어 당시 휘그토리 양당의 정치논쟁이 격심한 가운데 정치 저널리즘에 등장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공명에 대한 야심으로 집필상의 원칙이 없었으며, 때마침 정치적 환경의 변화도 있고 의지했던 템플 경도 세상을 떠나 정계에 대한 야심을 단념한다.

  1713년(46세) 이후에는 더블린의 성 페트릭 교회 수석사제가 되었다. 이때에도 그는 남과 어울리기 싫어했고 이것은 더욱 통렬한 풍자의 길로 나아가게 했다. 유명한 대표작 <걸리버 여행기>는 주인공 걸리버가 차례로 여러 나라에 표착하여 이상한 경험을 한다는 줄거리이며, 매우 기발하고 묘한 착상으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세계각국에서 널리 애독되고 있다. 이 작품의 본질도 인간에 대한 그의 혐오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는 아일랜드 출신으로서 영국에서의 활동에 한계를 느끼고 1714년 이후 아일랜드로 가서 은둔했다. 그는 여기서 돌변하여 영국으로부터의 자유와 독립을 쟁취하려는 문필의 투사가 되었고, 그 때문에 그는 아일랜드의 영웅으로 추앙되기에 이르렸다. 아일랜드의 낙후성을 주로 영국 정부의 탓으로 돌리면서 동시에 아일랜드 인 스스로가 자신들의 운명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묻혀 있는 세인트 패트릭 성당의 벽면에는 그가 직접 쓴 라틴 어 비문이 새겨져 있다.

  <<신학박사이자 이 성당의 참사회장인 조나산 스위프트의 시신이 이곳에 묻혀 있다. 이제는 맹렬한 분노가 더이상 그의 마음을 괴롭힐 수 없으리라. 나그네여, 떠나시오. 그리고 가능하다면 전력을 다해 지고의 자유를 얻으려 한 이 사람을 본받으시오. >>


b. <걸리버 여행기>와 검열문제

 영국 문학사에 있어 18세기 전반기를 <오거스터스> 시대라고 한다. 이는 문예운동이 활발하여 호라티우스, 오비디우스, 베르길리우스 등이 활약한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영국의 앤 여왕 시대를 비유한 것이다. 이중 <걸리버 여행기>와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가 대표적인 소설이다.

  이 소설이 집필되던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이 서서히 그 자리매김을 시작하고, 의회파가 왕당파를 누르고 권리장전 선포와 의회 정치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사실상의 군주제가 폐기되기 시작하는 그야말로 질풍노도와 같은 격변의 시대였다. 이 작품의 원본은 상당부분이 영국의 정치적 상황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어 적지 않은 삭제를 당하는 등 수난을 겪어야 했다. 스위프트가 친구인 찰스 포드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처음부터 이 작품의 위험성을 예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여행기를 마무리하고 고치고 다시 고쳐 쓰고 정서하는 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새로 보탠 것과 함께 모두 네 부분으로 완결을 보았습니다. 세상이 이 작품을 받아들일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인쇄업자가 감옥에 갇히는 것을 각오할 용기를 갖게 되면 출판해볼 생각입니다. >>

  사실 검열의 문제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있어왔다. 작가는 검열을 의식하면서 이 작품을 썼기 때문에 어느 정도 검열과 타협한 상태에서 작품을 진행시켰다고 할 수 있다. 만약 검열이 없었다면 작가는 좀더 직접적으로 당시 영국 사회의 정치적 종교적 윤리적 타락에 대해 신랄하게 공격했을 것이다.

  그러나 검열이 없었다면 분명히 이보다 더 좋은 작품이 나왔을 것이라는 논리는 타당치 않다. 검열은 작품의 자유로운 전개를 방해하기도 하지만 어느 경우에는 좀더 좋은 작품을 쓰도록 만들기도 한다. 오히려 그 작품이 영원한 고전이 되는 경우는 그 정치적 문제를 직접 거론하는 것보다 우회적으로 제시함으로써 보다 보편적인 문학으로 승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c. 당대 유럽 사회에 대한 풍자

 걸리버의 모험을 통해서 본 세태의 비판과 부조리에 대한 저항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은 1726년(59세)에 출판되었는데 출간 즉시 성공을 거두었고, 독자들을 즐겁게 하기도 하고 화나게 하기도 했다. 배의 의사인 걸리버의 난파표류기로 된 4부작 소설이다.


   소인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의학도인 걸리버는 항상 바다를 항해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던 차에 3년 반 동안이나 항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바다여행 후 런던에서 병원을 차리고 결혼도 했다.  이후 그는 다시 배의 의사가 되어 6년간이나 떠돌아다니며 즐거운 나날을 보낸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가정에 충실하다가 바다 여행을 떠난다. 도중에 풍랑으로 배가 산산조각이 났으나 그는 운좋게 헤엄쳐 어느 섬에 닿아 쓰러져 잠들고 만다. 그가 잠에서 깨어나 보니 온몸이 밧줄로 꽁꽁 묶여 있고 그의 몸에는 6인치도 안되는 벌레같은 인간들이 사오십 명이나 기어다니고 있었다. 그가 왼팔에 힘을 주어 밧줄을 끊자 그 조그마한 병사들이 일제히 활을 쏘아 온몸이 따끔거렸다. 그는 당분간 자는 체하여 화살을 멈추게 했다.

  소인국의 수도로 옮겨진 걸리버가 소인국 사람들의 말을 배우게 되자 그는 우선 몸을 동여맨 쇠사슬을 풀어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임금은 회의를 한후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그후 걸리버는 소지품 검사를 받게 되었다. 손수건 담배갑 작은 수첩 시계 칼 권총 등이 있었는데, 소인국에서는 이 물건들이 신기하기만 했다. 그리고 걸리버는 칼과 권총이 위험한 물건임을 임금에게 알려주었다. 임금은 칼과 권총을 당분간 맡아두기로 했다.

  제1부의 압권은 소인국간의 감정대립과 전쟁에 관한 부분이다. 소인국에는 두 개의 당파가 서로 다투고 있었다. 굽이 높은 구두를 신는 당파와 낮은 굽을 신는 당파가 다투고 있었다. 그 싸우는 이유는 계란을 삶는 방법 때문이었다. 계란을 깨는 전통적인 방법은 밑부분이 넓은 쪽이었는데 현재의 국왕 할아버지가 소년시절 관습대로 계란을 깨다가 손가락을 다치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그의 아버지였던 당시 국왕은 계란을 깰 때는 밑이 좁은 방향을 깨도록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이 명령을 두고 지지파와 반대파가 대립했고, 반대파들은 반란을 일으켜 이웃 나라 블레퍼스크로 이주해버렸다. 작가는 소인국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에피소드를 통해 인간이 믿고 있는 신념과 이념의 맹목성에 비판을 가한다. 즉, 소인국의 우화를 통해 작가가 제시하고자 하는 주제는 맹목적인 신념에 사로잡힌 인간들이 벌이는 갖가지 폭력과 광기다.


   거인국

 고향에 돌아온 걸리버는 가족과 행복한 나날을 보냈으나 본래 바다를 좋아하는 천성 때문에 다시 바다로 향했다. 그러나 음료수가 떨어져 어느 섬에 머물게 되는데, 풀과 나무들을 구경하던 걸리버를 두고 배는 출항을 하고 만다. 여기는 거인국으로 그들은 키가 18미터나 되지만 단순하고 생각하기를 싫어한다. 거인국에서는 비교적 작은 편인 개, 고양이조차도 걸리버의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크고 힘이 세다. 그들의 폭력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걸리버의 모험이야말로 소년소녀들이 제일 흥미있고 읽을 만한 동화 속의 소재들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이 찾아와 주인에게 걸리버를 이용해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말해준다. 그리하여 걸리버는 수도로 옮겨져 쇼를 하게 되고 궁중에까지 알려져 왕후가 걸리버를 농부로부터 사들이게 된다. 그러나 궁중의 대학자들과 걸리버는 논쟁을 벌이게 되고 왕의 총애를 받게 된다. 그는 또 왕에게 유럽의 정세를 알려주어 감탄을 사게 되고, 후에 왕이 파리로 행차할 때, 다시 영국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거인국에서도 몸집이 작은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이기는 따위의 모험담이 전부는 아니다. 걸리버를 못살게 구는 거인국의 사람들에 대한 묘사를 통해 작가는 몸집은 크지만 올바른 정신을 갖지 못한 사람을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동화를 통해서 널리 알려져 있는 1--2부와는 달리 3--4부는 좀더 공격적인 풍자가 이루어지고 있다.


   하늘을 나는 섬의 나라

  세번째 항해를 떠나게 되었을 때, 걸리버는 해적들에게 잡혀 섬으로 끌려간다. 이 섬나라 주민들은 1--2부와는 달리 몸집은 거의 정상인에 가깝지만 행동은 전혀 다르다. 그들은 너무 지나치게 사색에 몰두해 옆사람이 뭐라고 말하든 거의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절벽이 나타나면 떨어지고 기둥이 나타나면 머리가 부딪히며, 거리에서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밀려서 아무런 대책 없이 하수구로 떨어진다.

  그래서 대화를 하기 위해 시종을 거느리고 다니는데, 그들이 머리를 때려주는 도구로 대화하는 상대방의 머리를 때려야만 비로소 옆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정도이다. 그때서야 비로소 대화가 가능하다. 그들은 매우 사색적이어서 수학과 물리 방면에는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빵조차 원뿔이나 원기둥, 평행사변형의 수학적인 도형으로 자르고 옷을 한 벌 맞출 때도 자와 콤파스를 가지고 높이를 측정한다. 그것은 나일 강의 삼각주를 측량할 때의 기하학과 동일한 방식이다.

  그들은 여자의 아름다움을 묘사할 경우에도 사다리꼴, 원, 평행사변형 등의 기하학적 용어를 구사한다. 그들은 매우 과학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비합리적이어서 개인의 상상력이나 공상, 창조적인 발명과 같은 단어는 아예 없을 정도이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매일 걱정하는 일뿐이다. 예컨대 수학적인 계산에 의하면 130년이 지난 다음 혜성이 분명히 지구를 파괴해버릴 것이라는 걱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과학을 만능이라고 믿으면서도 오히려 인간이 원래 지닌 소박한 지혜마저도 잃어버린 당시의 지적 세태를 꼬집은 것이다.


   말들의 나라

 네번째 출항은 선장이 되어 떠나게 되지만 선원들이 난동을 일으켜 걸리버는 선실에 유폐되고 미지의 땅에 버려지게 된다. 이 나라에는 인간 모습을 한 추한 짐승인 <야후>와 말과 비슷한 형상인  <휴이넘>이 공존하며 살고 있다. 걸리버는 말나라의 언어를 배우고 그 나라의 지도자들을 만나 자기 신세와 영국의 유럽의 실정을 얘기하고 이곳 사정을 자세히 알게 된다.

  말나라는 모든 것이 합리적으로 운영되는 이상적인 곳이었다. 이성이 존중되고 거짓이 없고 악이란 단어조차 없다. 결혼 출생 죽음 등 모든 사건은 순리대로 처리되고, 인구는 국가차원에서 조절되며 자녀교육은 국가가 맡고 있는 곳, 걸리버는 여기가 바로 유토피아라고 감탄하며 깊은 애착을 가진다. 그러나 더러운 야후들에게는 심한 혐오를 느낀다. 사실 이 책 중에서 제4부가 유럽의 당대의 모습을 가장 정확하고 통렬한 비판을 담고 있다. 상호간의 사소한 의견차이로 국가간에 전쟁이, 개인간에는 거짓말과 도둑질이, 가진 자와 없는 자 사이에는 착취로 나타나는데 그것이 사실은 잘못된 사회통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걸리버 자신이 깨닫게 된다. 당대의 현실을 신랄하게 꼬집은 제4부의 내용은 이 책을 오랫동안 금서의 목록에 오르도록 만들었다.

  사실 이 책은 여러 사람뜰에 의해 끔찍하고 신성 모독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어느 작가는 이 책은 비교적 재미있고 교훈적이지만 제4부의 내용은 읽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권고한 바 있다. 작가의 풍자가 너무 통렬해 그 사회와 그 사회에 몸담고 있는 인간의 치부가 너무도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어 그것을 모두 보여주는 일이 너무 끔찍하고 비교훈적이라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d. 풍자문학의 백미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소인과 거인, 지나치게 사색적인 사람과 괴물인 <야후>를 각각 그리면서 가장 바람직한 사회는 무엇인가를 강력하게 발언하고 있다.

  제1편 소인국에서는 영국의 앤 여왕 치하의 실정에 대한 시사적인 풍자가 넘쳐흐르고, 제2편 거인국에서는 그의 조국인 아일랜드 국민의 행동과 이상국가에 대한 그 자신의 생각을 펼치고 있어 스위프트의 냉철한 통찰력을 엿볼 수 있다. 제3편에서는 토론에는 열심이지만 실지로 응용에 머리를 쓰지 않는 학자들을 비웃으며, 왕립 아카데메이아를 풍자하고 있다. 제4편에서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본성들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결국 당시 영국의 정치사회종교 등 사회전반에 대한 풍자를 통해 결코 동물과 다를 것이 없는 인간사회를 그려냈던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은 신랄한 인간혐오를 드러낸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비평가들은 스위프트의 재능이 인간의 본성 중 가장 추악한 부분을 폭로하는 데 발휘되기는 했지만, 그 재능만은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문학가로서의 그의 문체는 분명하고 단순한 어휘, 복잡하지 않은 문장구조, 경제적이고 함축적인 언어가 특징이다. 그는 기교와 장식을 피했다. 표현하고자 하는 분노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의 문체는 더욱 긴장되고 절제되었다. 이 책에 얽힌 재미있는 사실은 <신중하고 심오하고 암울한> 풍자인 이 작품의 재치가 지워진 채 아동용 도서가 되는 과정에 놓인 아이러니다. 19세기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스위프트의 소설에서 잔인한 재치의 부분을 무턱대고 삭제해버림으로써 아동용 도서로

만들어낸 것은 바로 비평가들이었다. 이들은 어린이들에게 흥미있는 부분만 모아 편집해버렸다. 스위프트의 재치는 어느 부분이든 삭제를 하면 전체적인 효과에 치명상을 입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독자에게 이 작품의 완역은 필요한 일이었다. 다행히도 우리 나라에서도 최근에 3--4부를 포함한 완전한 번역이 이루어져 독자들의 욕구가 충족될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1--2부만 번역되어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만시지탄이 아닐 수 없다.



E02 – 아에네이스(Aeneis) / 베르길리우스(Publius Vergilius Maro, BC 70--BC 19)

(출전: 동서고전 200선 해제3 / 반덕진 / 가람기획)


 <아에네이스>는 로마 건국에 관한 서사시로, 트로이의 영웅이자 로마의 건국 시조인 아에네이스가 트로이 멸망 후 로마에 정착할 때까지의 고난과 사건, 그리고 사랑을 그린 미완성 작품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아에네아스를 미의 여신 베누스(비너스, 아프로디테)의 아들로 묘사하여, 로마 황제에게 신통성을 부여하고, 로마의 역사적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미래의 국가건설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쟁취하려는 영웅적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a. 진지하고 목가적인 시인

 단테의 <신곡>에서 단테를 지옥과 연옥으로 안내하고 천국에 있는 베아트리체에게 인도해준 베르길리우스. 그는 북이탈리아 만토바 부근 안데스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폭넓은 교육을 받았다. 그의 청년기는 로마 공화정 말기로 당시 이탈리아의 정치적 상황은 혼미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 격동과는 관계없이 그는 시작에 몰두했다, 그는 수줍음이 많고, 건강이 좋지 못했다. 결혼도 하지 않고 생애의 전반부를 학자이자 은자로 살았다.

  29~33세에 10편으로 된 <전원시>를 완성했는데, 여기에는 3개의 세계, 즉 그리스의 목가시인 테오크리토스가 노래한 시칠리아의 목자의 세계, 베르길리우스가 창조한 목자의 이상향 아르카디아, 내란의 혼란 속에 있는 현실의 로마가 교묘하게 어우러져 독특한 시세계를 이루고 있다. 이 책으로 당시의 유력한 정치가문인의 보호자였던 마에케나스에게 인정을 받게 되고, 아우구스투스의 신임을 얻었다.

  31세~41년에 완성한 <농경시> 4권은 헤시오도스의 교훈시에서 비롯된 시로 예술 후원자였던 마에케나스 재상에게 바쳤다. 여기에서는 농경 과수재배 목축 양봉 등을 차례로 읊었으며, 농경의 기원 원인 본질 실천에 대해 깊이 고찰했다.

제4절에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이야기를 언급하여 헬레니즘 시대의 독특한 그리스 시 기법을 엿볼 수 있다.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물리치고 천하를 평정한다. 이에 베르길리우스는 오랫동안 구상해왔던 그리스와 로마의 이상을 장편 서사시 <아에네이스>에 구현하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로마의 국민적 서사시로 구상하여, 오랫동안의 내란을 수습하고 평화를 실현시킨 아우구스투스를 기념하기 위한 의도로 씌어진 것이다.

  이 작품은 트로이의 영웅 아에네아스를 등장시켜 그의 인물상과 행동을 통해 로마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나타냈다. 11년 동안 전념했던 이 작품은 결국 미완성인 채로 남게 되었다. 그는 불태워버리라는 간곡한 유언을 남겼으나 아우구스투스가 이를 저지했다 한다.

  그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번영과 신의 현명한 섭리를 믿었으며, 고대 영웅들의 언행을 통해 높은 윤리적 세계관을 강조했다. 그의 시에 있어 호메로스의 영향이 뚜렷하지만 나름대로의 독창성을 갖고 있었고, 특히 그리스 신화와 로마 역사화의 교묘한 음합은 시인의 독창적인 착상에서 비롯되었다. 사망 후 나폴리에 묻혔고, 중세에는 위대한 시인예언자로 숭배되었다.


b. 로마의 정통성과 황제의 신격화를 위해 저술

 베르길리우스가 <아에네이스>를 저술하게 된 배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와 동시대 인물인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그 시대의 사회상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제12차 삼두정치

 삼두정치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정치형태로, 용병을 사병화한 군인정치가들의 정치를 말한다. 제1차 삼두정치(60—50 BC)는 케사르(시저)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의 정치를 말하는데, 크라수스는 전쟁에서 전사하고, 남은 두 사람이 대결하여 케사르가 승리한다. 그러나 케사르의 일당독재가 계속되자 공화파인 브루투스 일당이 케사르를 암살한다.

  케사르 암살 후 그의 부하인 안토니우스와, 케사르의 조카인 옥타비아누스, 그리고 레피두스가 이끄는 제2차 삼두정치가 수립된다. 이들은 로마의 영토를 3분하여 각각 통치하다가, 기원전 31년 옥타비아누스는 아그리파의 지휘하에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함대를 악티움 해전에서 격파, 공화정에 종지부를 찍고 아우구스투스의 제정시대를 열었다.


   아우구스투스의 개혁

 아우구스투스의 통치는 새 제국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왔다. 그러나 공화제 말기의 키케로 시대의 문인들은 이전의 공화정에 향수를 느껴 아마도 침묵을 지켰거나 또는 아우구스투스에 대해 반대했지만, 신세대들은 새 시대의 영감을 받아들였다.

  이때 베르길리우스는 무의미한 내전이 종식된 데 안도하고 아우구스투스에게 감사를 느꼈다. 아우구스투스는 국내의 평화와 안정을 이룩했으며 로마 인들에게 민족적 긍지와 용기 절약 의무등 새로운 덕목을 고취시켰다. 이처럼 아우구스투스 체제가 약속해주는 로마의 재건에 대해 열광을 느낀 베르길리우스는, 이제 자신이 평소 준비해온 로마 건국을 찬양한 장편 서사시 <아에네이스>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이 시대(기원전 31--기원후 14)는 라틴 문학의 황금기이기도 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새 제국의 시와 산문의 발달에 알맞은 사회적 지적 풍토를 이루어놓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역사가 리비우스는 <로마 건국사>를 쓰고, 호라티우스는 <조국을 위해 죽는 것은 기쁘고도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베르길리우스는 지중해를 통일한 조국 로마에 역사적 후광을 부여하고 그리스에 대한 민족적 우월성을 입증하기 위해 신화적인 전설을 만들어냈다. 사실 아에네아스는 그리스의 적이었던 트로이 인이고 전쟁 뒤 그의 행적에 관한 뚜렷한 전설이 없었으므로 위대한 로마를 건설하기에 적합한 인물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에네아스의 아들 아스카니우스는 율리우스라고도 불렸으므로 율리우스

케사르(시저)와 그의 조카인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아에네아스의 후손임을 자처했다. 오비디우스는 한 술 더 떠서 <변신 이야기>로 로마 황제를 신격화시켰다.


c. 로마 건국 서사시

 <아에네아스의 노래>란 뜻의 이 작품은 12노래로 되어 있고 각 노래마다 줄거리가 요약되어 있어 작품의 이해를 돕고 있다. 전반부는 주인공 아에네아스가 그리스 군에게 패한 후 유민이 되어 고국 트로이에서 로마에 정착할 때까지의 방황을 그렸고, 후반부는 새 조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전쟁을 다루었다.

  작품의 구성을 보면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전반부는 <오디세이아>요, 후반부는 <일리아드>라 해도 좋을 만큼 두 서사시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트로이 멸망 후 아에네아스의 오랜 망명, 끝없는 표류, 이탈리아에 도착, 전쟁과 정착의 이야기, 그밖에도 많은 사건과 인물들을 위대한 선배 시인에게서 차용해왔다. 이런 이유로 그는 호메로스의 표절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여기서 독자들에게 밝혀둘 것은 로마 신화는 그리스 신화의 복제판이기 때문에 신들의 이름만 다소 다를 뿐 내용에는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이 작품은 저자가 로마 인이기 때문에 고유명사를 로마식으로 해야 하나 그리스 명칭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혼란을 줄 가능성이 있어 본서에서는 로마식을 원칙으로 하되 괄호안에 그리스 명칭을 첨가했다. 예를 들면 유피테르(제우스), 베누스(아프로디테) 등으로 표기했다.


   아에네아스의 방랑과 사랑

 트로이는 그리스 군의 공격으로 함락되었다. 미의 여신 베누스(아프로디테)의 아들이자 트로이의 총대장 헥토르에 이어 제2인자인 아에네아스는 전쟁중에 아내를 잃어버리고, 부친과 아들, 그리고 살아남은 트로이 인들과 함께 로마 건국의 천명을 받고 트로이를 탈출한다.

일행을 태운 21척의 배는 7년 동안 바다 위를 표류한 뒤 이탈리아 땅에 접근하게 되었으나, 여신 유노(제우스의 본처인 헤라)가 방해하여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 닿는다. 유노는 이 마지막 남은 세력을 파괴하여 로마 건국을 방해하려는 것이었다.

  아에네아스는 카르타고의 디도 여왕의 친절한 환대를 받는다. 이렇게 작가는 교묘하게 로마와 카르타고의 두 민족의 연합을 시도한다.

디도는 베누스의 의도대로 아에네아스에 매혹되어 호화스런 잔치를 베풀고 트로이 함락과 그후 표류 이야기를 청해 듣는다.

  트로이는 그리스의 목마계략에 빠져 아에네아스는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는 그의 아내 클레우사의 망령의 예언에 의해 트로이 인들을 이끌고 조국을 떠난 것이다. 그들은 아폴로 신으로부터 <<영원한 어머니를 찾으라>>는 명령을 받고 이것을 크레타 섬으로 해석하고 국가건설을 시도했으나 현지에서 역병이 돌아 실패한다. 그리고 참된 어머니의 땅은 이탈리아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탈리아로 향해 가는 도중 그들은 헬레누스와 그 아내 안드로마케의 환영을 받고, 시칠리아 섬에서 아에네아스의 부친 안키세스를 잃게 된 경위를 말한다.

  이야기를 들은 여왕 디도는 여신 베누스와 유노가 이끄는 대로 아에네아스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아에네아스도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디도는 아에네아스를 위해 사냥대회를 개최했다. 그날 여신 유노가 보낸 폭풍우로 동굴에 피신한 두 사람은 깊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아에네아스는 유피테르(제우스)로부터 부여받은 로마 건국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여왕의 간청을 물리치고 탈출을 도모했다. 그를 잃게 된 여왕은 슬픔에 잠긴 나머지 저주 속에 자살했다.

  아에네아스 일행은 부친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다시 시칠리아섬에 돌아와 부친 1주기 추도경기를 개최했다. 그러나 경기에 출전하지 못한 여자들은 유노의 충동을 받아 배에 불을 질렀다. 배 4척이 불에 타고 말았지만 아에네아스의 기도 덕분으로 다른 배들은 유피테르가 내린 비에 무사하여 그는 적은 수의 부하를 데리고 이탈리아로 향하게 되었다.

  긴 항해 끝에 일행은 쿠마에 상륙했다. 아에네아스는 무녀 시뷸라에게 부친의 넋과 만나게 해달라고 간청하여 그녀를 따라 하계로 내려갔다. 그는 여왕 디도 및 부친 안키세스의 넋과 상봉했다. 부친은 앞으로 위대한 로마 건국은 아에네아스로부터 비롯될 것임을 말하고, 건국자 로물루스로부터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이르기까지의 로마의 미래 지도자들에 대해 언급했다.

  아에네아스는 시뷸라와 함께 <상아의 문>을 지나 지상으로 되돌아와 티베르 강으로 출발했다. 이 땅의 지배자 라티누스 왕에게는 라비니아라는 딸이 있어 구혼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민족 출신과 결혼해야 한다는 신탁에 의해 왕은 아에네아스에게 주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여신 유노는 이 사실을 기뻐하지 않고 구혼자 중 한 명인 투르누스 왕자를 충동질하여 트로이 인과 이탈리아 인 사이의 전쟁을 부채질했다. 아에네아스는 꿈에 나타난 티베르 강의 신의 경고에 따라 에우안데르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에우안데르는 파라티누스 언덕의 도시(로마)를 보여주며 원군과 동맹을 약속하면서 격려해주었다.


   적과의 싸움

 여신 베누스는 대장장이의 신 불카누스(헤파이스토스)로 하여금 만들게 한 무기를 그의 아들 아에네아스에게 주었다. 그중 방패에는 미래 로마의 역사 사건이 예언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에네아스가 원군을 구하러 떠난 사이에 적장 투르누스는 트로이 군의 배에 불을 지르고 진지를 포위했다. 이어 양군 사이에 격전이 벌어졌다. 투르누스는 한때 트로이 지역까지 공격해 들어오기도 했지만 오히려 큰 타격을 입게 되고 그 자신은 강을 헤엄쳐 가까스로 탈출했다.

  천상에서는 신들의 회의가 열리지만 신들 역시 신통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유피테르는 인간세계의 일은 인간 자신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고 정한다. 아에네아스는 동맹군을 이끌고 티베르 강을 내려가 용감하게 싸웠다. 격전으로 양군 모두 피해를 입었다. 도중에 잠시 휴전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끈질기게 싸움을 걸어온 투르누스도 용감한 여전사 카밀라가 전사하자 점차 힘이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아에네아스 편의 전력은 강화되어 계속 이탈리아의 거리에 불을 질렀다.

  투르누스는 아에네아스에게 1대 1의 승부를 신청했다. 이에 응하여 두 장군은 힘을 겨루게 되었다. 그야말로 용호상박의 싸움이 계속되어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다가 아에네아스가 던진 창에 투르누스는 중상을 입게 되었다.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투르누스를 보자 아에네아스는 동정심이 생긴다. 그러나 그가 입고 있는 갑옷이 옛 친구의 것임을 보고 분노하여 죽이고 만다. 이처럼 미완성인 채로 이

서사시의 대단원의 막이 내린다.


   늑대에게 양육된 로마 건국자

 이 작품은 이것으로 막을 내리고 있으나 로마의 건국신화는 계속된다. 아에네아스는 라틴 원주민과 트로이 인들의 단결을 위해 트로이 인들로 하여금 라틴식의 이름을 갖도록 하고, 그의 후손들은 대대로 왕위를 이어가며 라틴 인들을 지배했다. 그의 13대 후손 알바의 왕 프로카스 때 두 자식간에 반목이 일어나 동생 아물리우스가 형인 누미토르를 몰아내고 왕이 된다. 후환을 없애기 위해 누미토르의 아들을 살해하고 외딸인 레아 실비아는 베스타 신전의 수녀로 만들어 누미토르의 가계를 단절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레아 실비아가 베스타의 신전에 바칠 물을 얻기 위해 전쟁의 신 마르스(아레스)의 숲에 갔을 때 갑자기 늑대가 나타나 동굴 속으로 피했다. 그런데 이때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한 마르스가 나타나 교합을 갖는다. 이래서 실비아는 처녀의 몸으로 쌍둥이를 출산하게 된다. 이에 아물리우스는 크게 노하여 실비아와 아이들을 강물에 던져 죽이려 했다. 그러나 신하는 차마 어린 아이들을 죽일 수 없어 광주리에 두 아기를 담아서 티베르 강에 띄웠다. 다행히 티베르 강이 범람하여 쌍둥이를 실은 광주리가 무화과나무에 걸리게 되고, 이때 물을 마시러 온 늑대가 배고파 울고 있는 두 아기를 발견했다. 그 늑대는 두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동굴로 데리고 가서 양육했다. 어느 날 양치기가 동굴 속에 있는 두 아이를 데려다가 키웠는데, 이 두 형제가 바로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와 레무스였다.

  이 두 형제는 양치기로부터 자신들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 분개하여 아물리우스를 살해하고 아버지를 복위시켰다. 그후 로물루스는 도시건설을 둘러싸고 레무스와 의견이 맞지 않아 싸움이 일어났다. 마침내 레무스를 물리친 로물루스는 로마 시를 창건하게 되었는데, 그가 전설상의 로마의 제1대 왕이다.


d. 호메로스와 단테의 가교 역할

 이 서사시는 로마 건국의 이념과 그 과정을 노래한 장엄하고 감격적인 인간정신의 산물이다. 작가는 트로이에서 출발하여 카르타고와 시칠리아를 거쳐 티베르 강에 도착하게 되는 아에네아스의 여정을 통해, 그의 애국심과 영웅심, 그리고 신에 대한 복종심을 그리면서 이러한 그의 성품이 로마 건설의 바탕이 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 작품을 엮는 3대 인물인 아에네아스 디도 투르누스는 비평가들 사이에 끊임없는 혼동과 추측을 불러왔다. 많은 독자들은 아에네아스의 다소 냉담한 성격에 거부감을 느끼고 열정적인 디도와 격렬한 투르누스에게 공감을 할 수도 있다. 흔히 말하듯 로마 시인이 창조한 인물 가운데 유일하게 세계문학사에 길이 남은 인물이 디도다. 카르타고의 여왕으로서 로마적 생활방식과 대조를 보인 그녀는

독자들에게 너무나 진한 연민과 공감을 불러일으켜 아에네아스가 그러한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로마를 건설해야 하는지에 회의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작가의 시선은 아에네아스에게 시선을 집중시킨 듯하다. 아에네아스는 개인적 국가적인 품격의 형상화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경건하여 신의 소박한 신봉자이며 무한한 공감을 주는 인간의 벗이다. 처음에는 절망에 빠지기도 하지만 역시 그는 용감했다. 많은 고난과 역경을 겪으면서 민족의 시조로서 무거운 책임을 지고 힘겨운 문제를 잘 극복해나간다. 정치가이며 군주로서 민족의 흥망을 다스리며 국가 백년대계의 지고한 동기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그의 모습에서 아우구스투스 이래의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위대한 정신적 바탕을 느낄 수 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로마는 마치 인류의 이상향처럼 인식되어왔다. 수많은 시인 묵객 정치가 철학자들이 로마를 동경하며 로마에서 영감을 얻어 새로운 구상을 할 수 있었다. 지금도 로마에 가면 사람들은 황홀감과 경이감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한다. 이 위대한 로마, 이 기적적인 로마의 건국 서사시가 바로 이 작품인 것이다.

  구전적인 설화를 집대성하여 인류 최초의 서사시를 원형적인 수법으로 완성한 호메로스에 비해, 베르길리우스는 호메로스를 취사선택하여 다시 인간예술의 극치를 이루어냈다. 따라서 호메로스가 인간 정신의 위대함과 사건의 처리를 원형적으로 보는 데 비하여, 베르길리우스는 인간 예술의 기교를 최대한 활용하여 로마형의 새로운 서사시 장르를 이룩한 것이다.

  이 책은 당시 로마의 교과서에 실려 학생들이 즐겨 암송하는 시가 되고, 단테에게는 <신곡>의 모티브를 제공해주었으며, 오늘 우리가 읽는 소설이나 시에 나타난 애정의 표현이나 사건의 구성, 기교의 활용이 이미 이 작품에서 비롯되었음을 볼 때, 고전의 위대함을 새삼 깨닫게 된다.



E01 – 변신 이야기(Metamorphoses) / 작가: 오비디우스(Publius Ovidius Naso, BC 43--AD 17)

(출전: 동서고전 200선 해제3 / 반덕진 / 가람기획)


 기독교와 함께 서양문화의 원천인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가장 충실한 안내서인 이 책은, 그리스로마 신화 중에서 신이 인간 또는 동물로 바뀌는 변신에 관한 내용 246편을 모은 신화집이다. 풍부한 상상력에 의한 회화적 묘사와 수려한 문체는 시공을 초월하여 끊임없이 서양인의 영감을 자극해왔다. 아울러 이 책은 인간의 본성을 탐사하는 탁월한 심리 분석서일 뿐만 아니라, 천지창조부터 로마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이르렀는가를 보여주는 로마사이기도 하다.


a. 황제의 개혁에 위반, 유배지에서 죽음

 <중세는 기독교와 오비디우스의 시대>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오비디우스가 그려낸 그리스 로마의 신화체계가 서구작가와 시인, 그리고 화가의 상상력의 원천이 되어왔다는 뜻이다. 로마 고전문학의 황금시대인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활약한 오비디우스는 호라티우스 베르길리우스와 함께 3대 시인으로 불린다.

진지하고 엄숙한 두 사람에 비해 인간성에 대한 그의 이해는 깊지는 않았지만, 시에 대한 기교와 상상력이 넘쳤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로마의 술모 출생인 그는 자신의 시에서 이 고향의 아름다운 들판을 애정이 넘치는 어조로 여러 번 언급하고 있다. 유복한 명문의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형과 함께 로마로 유학을 가서 법률과 수사학을 배웠다. 이 무렵 로마는 아우구스투스에 의한 천하통일로 그 유명한

<팍스 로마나(Pax Romana)>라는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평화와 번영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는 여기서 우수한 수사학자들에게서 배웠는데, 특히 화려한 기교를 가졌다고 알려진 아우렐리우스 푸스쿠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시에 대한 재질은 두드러졌는데 뒷날의 술회에 의하면 의회나 법정에서 할 연설문을 쓰려 해도 <말은 저절로 시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식의 출세를 바라는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계속 공부하기 위해 아테네로 유학했다. 그 당시 아테네는 상류층 젊은이들이 교양을 쌓기 위해 즐겨 찾는 장소였다. 돌아오는 길에 친구인 젊은 시인 아이밀리우스 마케르와 함께 소아시아에서 시칠리아 섬에 이르는 긴 그리스 여행을 했다.

  귀국 후 예정대로 법조계로 들어가 공직에 있었으나 이러한 딱딱한 직업은 원래 성미에 맞지 않아 시인들의 모임에 참가했다. 거기서 그는 풍족한 유산, 빛나는 기지, 노련한 사교술로 일약 사교계의 스타가 되었다.

  그의 시작활동은 먼저 당시 유행하던 연애시 분야에서 빛을 보기 시작했다. 코린나라는 여성을 중심으로 한 연애의 노래인 <사랑>이 출세작이 되었다. 이어 신화전설로 유명한 15명의 여인들이 그의 애인에게 보내는 편지형식을 통해 여성의 연애심리를 묘사한 <헤로이데스>(용감한 여인들)로 인기를 모았다.

  그러나 그 뒤에 쓴 그의 대표적인 연애시 <사랑의 기술>은 그의 명성을 높이는 동시에 풍기를 문란케 한 책이라 하여 일부의 비난을 사기도 했다. 그는 이 책에서 사랑에 대한 점잖은 교과서적인 가르침을 비웃으면서 <<보아주는 이 없는데 곱게 핀 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식으로 구체적인 연애기술, 활달한 사랑법을 가르친다. 남성에게는 여성을, 여성에게는 남성을 유혹하는 방법을 가르친 이 책은 한편에게는 <명쾌한 탁견>이었으나 다른 쪽에는 <경망한 말장난>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당시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추진하던 개혁과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 후 그는 이 시의 주장을 장난조로 철회한 <사랑의 치료법>을 발표했지만, 문제해결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뒤 연애시와 결별하고 장편서사시 제작에 몰두하여 대작 <변신 이야기> 15권을 거의 완성했고, 또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헌정할 예정으로 로마에서 전승되던 이야기와 종교행사를 제재로한 <달력>을 쓰던 중 AD 8년 갑자기 황제로부터 흑해연안의 토미스(지금의 로마니아 콘스탄차)로 추방되었다. 그 이유는 그의 <사랑의 기술>의 영향으로, 황제의 외동딸과 그녀의 딸인 율리아(동명)가 방탕해져 로마의 미풍양속을 뒤흔들자 이에 모욕감을 느낀 황제는 괘씸죄를 적용한 듯하다. 

  수도 로마에서 화려한 사교계와 안락에 젖어 있던 그에게 추방지에서의 생활은 매우 비참했다. 그러나 여러 차례 시도한 탄원도 보람없이 10년 동안 이곳에서 지내다가 죽었다.


b. 그리스로마 신화의 체계화 과정

 신화란 지극히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어 세계의 정신사상 중요한 역할을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다. 문학과 사상의 보고인 신화는 이성과 신앙의 중간에서 고유의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가 된다. 특히 우리는 그리스 신화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서는 서구 문학작품을 감상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스 신화를 모르고서 단테의 <신곡>과 밀턴의 <실락원>, 괴테의 <파우스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로마 신화를 인류의 공동재산으로 받을 수 있게 된 과정을 살펴보자.

  첫째 공로는 호메로스의 장편 서사시로 돌려야 할 것 같다. 호메로스는 두 편의 장편 서사시 <일리아드> <오디세이아>에서 그리스 신화를 체계적으로 서술한 것은 아니지만, 무엇보다도 그리스신과 영웅들을 생생하게 묘사함으로써 신화에 활력과 생명력을 주고 있다.

헤시오도스는 <신통기>에서 신권의 주재자인 우라노스와 크로노스 및 제우스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을 묘사함과 동시에 올림포스 신족과 그 자손 및 영웅의 계보를 정리하려 했다.

  그리스 신화는 이후에도 계속 <호메로스 찬가>, 핀다로스의 <경기 승리가> 등의 서정시로 노래되어, 그리스 3대 비극시인에게 제재를 제공한다. 즉,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등은 비극을 통해 신화와 전설을 그대로 전해줄 뿐만 아니라, 충분한 이성적 고찰에 의해 심화시킴으로써 후세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쳤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아는 그리스 신화에 대한 지식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서 체계화된 것이다. 이책이 불러일으킨 예술적 영감은 소설 시 그림 조각 등의 전 분야를 망라하고 낭만적인 연애를 동경하게 했다. 그는 이 작품에서 뛰어난 재치와 수사적 표현, 그리고 풍부하고 독특한 상상력을 충분히 발휘했다. 신들의 세계를 엿보고 이를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려 했던 오비디우스의 의도가 엿보이기도 한다.

  그동안 국내에서 출간된 그리스로마 신화관련 서적들이 기본 텍스트로 삼고 있는 토머스 불핀치의 저서 역시 이 책을 대부분 인용하고 있다.


b. 그리스로마 신화의 집대성

 <변신 이야기>는 15권으로 이루어진 장편 서사시로 여기저기 복잡하게 산재해 있는 그리스로마 신화들을 수집 집대성한 신화집이다. 이 이야기들은 그리스로마 신화 가운데 변신에 관한 이야기 246편을 모은 것으로, 혼돈이 질서로 변한 <천지창조>부터 케사르(시저)가 죽은 뒤에 별로 변하는 이야기까지(이것은 내전이라는 혼돈이 아우구스투스의 평화라는 질서로 바뀐 마지막 변형임) 연대순으로 나열되어 있다.

  이 책은 풍부한 상상력에 의한 회화적 묘사로 가득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신화의 세계로 이끈다. 이 책의 이야기는 모두 신이나 인간이 그 모습을 바꾸어 동물이나 식물로 변하는 변신 이야기들로서, 서구문화의 밑그림이라 할 신화 이야기들은 모두 이 책에 근거한 것이다. 우리는 이 책에서 특히 기독교의 인식체계에 물들지 않은 이전의 고대인의 순수한 세계관과 인간관을 접할 수 있다. 아울러 하늘이 열리던 아득한 때와 우리가 살고 현재 사이에 가로놓인 긴긴 세월이 소거되는 신선한 경험도 가능하게 된다.

  작품에 맨 먼저 등장하는 서사부터 시작하여, 맨 마지막의 결사에 이르는 동안 등장하는 변신 이야기, 즉 신이나 인간이 모습을 바꾸어 동물이나 식물로 변하는 재미있는 내용 중 흥미 있고 매력적인 몇 가지를 들어본다.


   서사

 마음의 원에 쫓기어 여기 만물의 둔갑 이야기를 펼치려 하오니, 바라건대 신들이시여, 만물을 이렇게 둔갑하게 한 이들이 곧 신들이시니, 내 뜻을 어여쁘게 보시어 우주가 개벽할 적부터 내가 사는 이날 이  까지의 이야기를 온전하게 풀어갈 수 있도록 힘을 빌려주소서.


   월계수가 된 다프네

 태양의 신 아폴론은 사랑의 신인 에로스(큐피드, 화살이 가득 찬 화살통을 가진 날개 달린 소년)에게 자신의 활솜씨를 자랑하며 에로스의 가느다란 활을 조롱한다. 화가 난 에로스는 그에 대한 복수로 2개의 화살을 쏜다. 하나는 황금촉 화살이고 다른 하나는 납촉 화살인데, 황금촉 화살을 맞으면 연심을 일으키고 납촉 화살은 연심을 식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에로스는 황금촉 화살은 아폴론의 심장을 향해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다프네를 향해서 쏜 것이다. 연심에 불타는 아폴론은 다프네에게 열렬히 구애했으나 다프네는 끝까지 거부한다. 에로스를 무시한 대가로 아폴론은 짝사랑의 고통을 맛보아야 했고 다프네는 아폴론이 따라다니는 것을 죽기보다도 더 싫어했다. 한번은 다프네를 뒤쫓던 아폴론이 다프네에게 바싹 따라붙자, 다프네는 아버지에게 둔갑의 기적을 애원하는 간절한 기도를 올린다. 그러자 다프네는 <월계수>가 되어 아폴론의 입술을 피할 수 있었다. 이에 아폴론이 탄식하고, 월계수로 승리의 화관을 만들어 쓰리라는 약속을 하자, 월계수는 이에 화답하여 고개를 숙였다. 이것은 인간이 식물로 변하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태양의 전차를 모는 파에톤

 또 다른 태양신인 헬리오스의 아들 파에톤은 헬리오스가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겠다고 하자 태양의 전차를 하루만 빌려달라고 했다. 위험한 줄 알면서도 약속인지라 어쩔 수 없이 내주었다. 대신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네 마리의 말이 달리는 전차의 고삐를 쥐고 신이 난 파에톤은 아버지가 준 주의를 까맣게 잊고 하늘에서 온갖 말썽을 부린다. 이런 파에톤을 보고 화가 난 제우스는 벼락을 내려 그를 전차에서 떨어뜨려 죽였다. 요정인 그의 누이들은 이를 슬퍼하다가 포플러 나무가 되었다.


   수선화가 된 나르시소스

 수다쟁이 요정인 에코는 미남 청년인 나르시소스를 사랑했다. 그러나 에코는 제우스가 다른 여자들과 밀회를 즐길 때마다 그의 아내인 헤라가 온다고 제우스에게 알려주었다. 화가 난 헤라는 에코에게 남보다 말을 먼저 할 수는 없고, 상대방이 한 말의 마지막 말만 되풀이 할 수 밖에 없게 만들어버렸다.

  그리하여 에코는 나르시소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전달하지 못하자 하루가 다르게 여위어가고 마침내 육체는 사라지고 목소리만 남게 되었다. 실연의 고통으로 몸부림치던 에코는 복수의 여신인 네메시스에게 복수를 빈다. <<제가 그를 사랑했듯이 그 역시 누군가를 사랑하게 하소서. 하시되 이 사랑을 이룰 수 없게 하소서. 이로써 사랑의 아픔을 알게 하소서. >>

  네메시스는 그녀의 간청을 받아들여 나르시소스에게 헬리컨 산의 샘에 비친 자기 모습을 들여다보는 운명을 지운다. 나르시소스는 그 샘을 들여다보면서 점점 자신의 모습에 도취되어갔다. 그는 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한 나머지 고통 속에서 몸부림쳤다. 마침내는 그의 젊음의 혈기도 시들어지고 육신도 사라졌다. 그리고 한송이 수선화가 되었다. 한편 나르시소스를 사랑했으나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사랑의 결실을 맺지 못한 에코는 죽은 뒤 <메아리>만 남겼다. 여기서 나르시시즘(narcissism. 자아도취)과 에코(echo, 메아리)란 단어가 생겼다.


   결사

 이제 내 일은 끝났다. 유피테르 대신의 분노도, 불길도, 칼도, 탐욕스러운 세월도 소멸시킬 수 없는 나의 일은 이제 끝났다. 내 육체밖에는. 앗아가지 못할 운명의 날은 언제든 나를 찾아와, 언제 끝날지 모르는 내 이승의 삶을 앗아갈 것이다. 그러나 육체보다 귀한 내 영혼은 죽지 않고 별 위로 날아오를 것이며 내 이름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로마가 정복하는 땅이면 그 땅이 어느 땅이건 백성들은 내 시를 읽을 것이다. 시인의 예감이 그르지 않다면 단언하거니와, 명성을 통하여 불사를 얻는 나는 영원히 살 것이다.


c. 서양 예술의 상상력의 원천

 사실 변신설화가 서양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나라에도 곰이 사람으로 변신하는 <단군신화>나 <전우치전>의 전우치는 비범한 도술로써 변신을 거듭하는 이야기가 적지 않다. <해모수 신화>의 해모수와 하백, <김수로왕 신화>의 김수로와 석탈해등은 자기 능력을 과시하여 상대방을 굴복시키기 위해 변신을 거듭한다. 그러나 역시 서양의 그리스 신화만큼 양적으로 풍부하지 못하고 질적으로 다양하지도 않다.

  본서는 1만 2천 행이 넘는 6행 시로 이루어진 라틴 문학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끊임없이 서양의 작가와 시인들의 영감을 자극해왔던 이 작품은 그 자체만으로도 그리스로마 신화집 역할을 하고 있다. 사실 <변신>이라는 주제의 선택은 오비디우스의 독창적 선택은 아니다. 라틴 문학 전통에는 민담이나 신화에서 따온 <변신>의 주제만을 모아놓은 여러 권의 저작이 있었다. 그중 기원전 2--3세기경에 활약했던 니칸드로 작품인 <변신>이 오비디우스의 작품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진다.

  그의 작품을 지배하고 있는 정조는 전성기의 영광을 누리던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귀족사회의 정조다. 작가는 일련의 <사랑>을 중심으로 한 작품들을 통해 자신감을 얻어 이 작품의 집필에 착수한다. 따라서 작품의 말미에서 그 자신이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 작품은 작가의 <불멸>에 대한 욕망에 의해 씌었다. 예를 들자면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신성화하기 위한 노골적인 의도가 엿보이는 케사르의 신격화라는 달갑지 않는 마지막 에피소드에 작가 운명도 살짝 끼워놓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d. 생동감 있는 신화의 세계

 그러나 작가의 자질은 분명하다. 천지창조에서 로마의 현재까지 작가가 연대별로 편집해놓은 신화들은 생동감으로 넘쳐흐른다. 특히 그의 자질은 여성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눈부시게 빛난다. 한 연구자가 지적하는 것처럼 이 작품의 빼어남은 <<우주적 현상과 개인의 운명 앞에서 거의 관능적인 방법으로 느끼는 감탄>>에 있다. 하루하루가 그저 그런 현대인에게 <운명 앞에서의 감탄>은 너무나 신선하다. 현대인이야말로 <변신>의 필요를 가장 많이 가진 존재들이 아닐까. 상업주의에 물든 가짜 신화들의 틈바구니에서 현대인은 이미 로봇이다. 이 책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신화>의 덕성, <근원으로의 회귀>에 대한 우리의 갈망을 일깨운다.


e. 서양예술의 원천

 오비디우스가 후세에 미친 영향은 그리스로마 신화의 안내자로서다. 특히 <변신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의 풍요로움에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매력적인 통로를 제공했다. 그래서 중세를 오비디우스의 시대라고도 했으며, 르네상스 이후 문학이나 회화의 모델이나 소재가 되었다. 특히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 셰익스피어의 <비너스와 아도니스> <한여름 밤의 꿈> 등은 여기에 원천을 두고 있고, 밀턴 괴테 등도 그를 좋아했다.

  최근 국내에 이 책의 완역본이 2권이나 출간되어 독자들이 그리스로마 신화의 진수를 맛볼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하나는 연세대 김명복 교수가 번역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94년 10월에 번역가 이윤기 선생이 번역한 것인데, 전자는 운문체인 원작을 그대로 번역하여 운문체의 맛을 살렸고, 후자는 매끄러운 산문체로 번역하여 소설처럼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이 방대한 저작을 유려한 문장으로 접할 수 있게

된 것은 우리 시대의 행운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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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그리스 신화(-神話)는 고대 그리스의 신과 영웅, 우주관, 그리고 그리스 고유의 종교 의례와 의식 행위의 기원 및 의미에 대한 신화와 전설을 말한다. 그리스 신화는 고대 그리스 종교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현대의 학자들은 고대 그리스 문명의 신화를 토대로 한 연구를 통하여 고대 그리스의 종교와 정치 제도를 파악하고, 이러한 요소들이 신화로 만들어지게 된 생성 원리를 탐구한다.[1]


그리스 신화는 여러 이야기 모음집에서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도기 그림이나 봉헌물과 같은 구상 예술 작품에서도 내재적으로 나타난다. 그리스 신화는 세계의 기원과 신, 여신, 영웅과 같은 다양한 인물의 삶과 모험, 전설의 생물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구비 전승을 통해서 널리 퍼지게 된 것으로, 오늘날에는 그리스 신화를 그리스 문학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그리스 문학의 근원은 트로이아 전쟁을 다룬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이다. 호메로스와 비슷한 시대의 사람이었던 헤시오도스는 자신이 쓴 두 서사시 《신통기》, 《노동과 나날》에서 세계의 기원, 신들의 왕과 인간 시대의 변천, 인간이 겪는 불행과 제물 의식의 기원을 설명하였다. 그리스 신화는 서사시권에서 서사시의 일부인 호메로스 찬가, 서정시, 기원전 5세기의 비극 작품, 고전학자의 문서와 헬레니즘 시대의 시, 플루타르코스와 파우사니아스와 같은 로마 제국 시대의 저술가가 쓴 원문으로도 이어져 왔다.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드러난 여러 유물의 장식으로 표현되어 있는 신과 영웅들은 그리스 신화의 설명에 주요한 출처가 된다. 예를 들어 기원전 8세기경에 만들어진 기하학적 모양의 도자기에는 트로이아권과 헤라클레스의 모험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후 고졸기, 고전기, 헬레니즘 시대를 거치면서 나타난 호메로스 시가와 다양한 신화적 장면은 현존하는 문학 작품을 보충 설명하는 증거로 이용되고 있다.[2] 그리스 신화는 서양 문명의 문화, 예술,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오늘날 서양의 문화 유산과 언어 일부에도 그 영향이 남아있다.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인과 예술가들이 그리스 신화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으며, 신화의 주제가 동시대에 갖는 의미 및 관련성을 찾기도 하였다.[3]


목차  [숨기기] 

1 근원

1.1 문학적 근원

1.2 고고학적 근원

2 신화 역사의 개괄

2.1 신들의 시대

2.1.1 우주 생성론과 우주론

2.1.2 그리스 판테온

2.2 신들과 인간의 시대

2.3 영웅의 시대

2.3.1 헤라클레스와 헤라클레이다이

2.3.2 아르고나우타이

2.3.3 아트레우스 왕가와 테바이권

2.3.4 트로이아 전쟁과 여파

3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 개념

3.1 철학과 신화

3.2 헬레니즘과 로마 합리주의

3.3 융화하는 경향

4 현대적 해석

4.1 비교와 정신 분석적 접근

4.2 기원론

5 서양 예술의 주제

6 각주

6.1 1차 자료(그리스와 로마)

6.2 2차 자료

7 더 읽어보기

8 외부 링크

근원[편집]

그리스 신화는 오늘날 그리스 문학의 시작으로 알려져 있으며, 기원전 900년부터 800년까지에 이르는 기하학 시대의 시각 매체에서 묘사되기도 하였다.[4][5] 문학적, 고고학적 근원은 때때로 중간 단계에서 서로에게 협력하거나 충돌이 있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자료 집대성의 존재는 그리스 신화 요소들이 사실에 입각한 역사적인 뿌리를 갖게 되는 강력한 지표가 되었다.[6]


문학적 근원[편집]

신화적 서술로 쓰여진 연극은 대부분의 그리스 문학 장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럼에도, 그리스 고대에서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는 총체적인 신화 해설집은 동명의 아폴로도로스의 《비블리오테케》가 유일하다. 이 신화 해설집은 시인들의 상반된 이야기들을 정리하여 고대 그리스 신화와 영웅 전설을 간명하고 빠짐없이 요약하였다.[7][8] 아테네의 아폴로도로스는 신화를 주제로 많은 글을 쓴 기원전 180~120년 경의 인물이다. 《비블리오테케》가 쓰여진 시대는 그가 죽은 지 훨씬 후인 2세기 경이기 때문에, 현재는 동명이인인 저자가 쓴 서적으로 추정하고 있다.[8] 본래의 아폴로도로스는 이 신화 해설집의 초안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프로메테우스》(1868년 귀스타브 모로 작).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헤시오도스가 문헌에서 처음 알린 것으로, 아이스퀼로스의 비극 3부작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풀린 프로메테우스》, 《불을 가져다주는 프로메테우스》의 바탕이 되었다.

가장 초기의 문학 근원 중에는 호메로스의 두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있다. "서사시권"으로 이루어진 다른 서사시들도 있었으나, 이러한 후기의 소규모 서사시들은 대부분이 모두 소실되었다. 호메로스 찬가라는 이름으로 전승된 시들은, 호메로스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이 합창 찬가는 고대 그리스의 서정 시대 초기에 등장한 것이다.[9] 호메로스와 동시대의 인물로 추정되는 헤시오도스는 자신의 저서 《신통기》(신의 기원)에서 세계의 창조를 다룬 초기 그리스 신화를 비롯하여 신의 기원인 티탄과 기간테스뿐만 아니라 복잡한 가계도와 민간 설화, 기원 신화까지 자세하고 충실하게 설명하였다. 헤시오도스의 또 다른 저서 《노동과 나날》은 농경 생활에 대한 교훈 서사시로, 프로메테우스와 판도라 신화, 다섯 시대 설화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이 서사시는 위험한 세상에서 성공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으며, 신들로 인해 세상이 더 위험해질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2]


서정시는 신화에서 그 주제를 가져올 때도 있었으나, 표현에 있어서는 직접적인 서사가 아닌 암시를 많이 썼다. 핀다로스, 바킬리데스, 시모니데스와 같은 서정 시인들과 테오크리토스, 비온과 같은 목가 시인들은 각각의 신화적 사건을 서로 연관지어 표현하기도 하였다.[10] 또한, 신화는 고전 아테네 연극의 중심 소재이기도 했다. 비극 작가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는 비극의 줄거리에 트로이아 전쟁과 영웅 시대의 신화를 차용하였다. 여러가지 비극적인 줄거리(아가멤논과 그의 자녀, 오이디푸스, 이아손, 메데이아 등)의 전형적인 형태는 이러한 비극에서 잘 드러나 있다. 희곡 작가인 아리스토파네스 또한 자신의 작품 《새》, 《개구리》에서 신화를 차용하였다.[11]


역사가 헤로도토스와 디오도로스 시켈로스, 지리학자 파우사니아스, 스트라보는 그리스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그들이 들은 이야기를 글로써 기록하였는데, 이 이야기들은 수많은 지역 신화와 전설, 그리고 같은 이야기의 많이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10] 특히 헤로도토스는 자신이 들은 다양한 구전 신화를 연구하였으며, 그리스와 동방 사이의 대조를 통해서 역사적이거나 신화적인 근원을 찾았다.[12] 또한, 신화의 기원과 다른 문화적 개념을 혼합하여 융화시키고자 하였다.


헬레니즘과 로마 시대에 들어와서 시는 숭배 행위라기보다는 문학적인 목적으로 창작되는 경우가 많아졌지만, 이러한 경향으로 인해 다른 경우였다면 사라져버릴 수도 있었던 중요한 많은 세부 설명들이 포함될 수 있었다. 이 범주에 속하는 작품은 다음과 같다.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 스타티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세네카, 베르길리우스. 세르비우스의 논평.

고대 후기 시대의 그리스 시인: 논노스, 안토니노스 리베랄리스, 코인토스 스미르나이오스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시인: 로도스의 아폴로니오스, 칼리마코스, 동명의 에라토스테네스, 파르테니오스.

신화를 언급하는 같은 시대의 산문 작가로는 아풀레이우스와 페트로니우스, 롤리아누스, 헬리오도로스 등이 있다. 동명의 히기누스가 로마 작가 양식으로 쓴 《파불라에》(Fabulae)와 《아스트로노미카》(Astronomica)는 신화를 시적인 표현 없이 개요로 실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작품이다. 필로스트라투스 3세와 4세의 《이매진》(Imagines), 칼리스트라토스의 《디스크립션》(Descriptions) 또한 작품의 주제에 신화를 이용하였기 때문에 서술 양식에 대한 유용한 근거로 볼 수 있다.


마지막 사례는 비잔티움의 그리스 작가로, 상당수가 신화에 대한 여러가지 중요한 설명을 남겼는데, 지금은 소실된 초기 그리스 작품이 유래가 된 것도 많이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신화를 보존한 사람은 아르노비우스, 《수이다스》의 저자, 헤시키우스, 요한 트제트제스, 에우스타티오스 등이 있다. 이들은 대개 기독교적 도덕관의 시각에서 신화를 다루었다.[13]


고고학적 근원[편집]


5세기 원고 《베르길리우스 로마노스》에 묘사된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 자신의 저작에서 그리스 신화에 대한 많은 설명을 남겼다.

19세기 독일의 아마추어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의 미케네 문명 발견과 20세기 영국의 고고학자 아서 에번스 경의 크레타 미노아 문명의 발견은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대해 남아있던 많은 의문점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며, 신과 영웅에 대한 많은 신화적 설명의 고고학적 증거를 제공하였다. 하지만 미케네와 미노아 지역의 신화 및 의식에 대한 증거는 모두 기념적인 것에 불과하였는데, 예를 들어서 선형문자 B 기록(크레타와 그리스 본토에서 발견된 고대 그리스 문자)은 신과 영웅에 대한 이름이 애매하게 나타나 있기는 하였지만, 주로 농산물의 수확과 재산, 상품 목록을 작성하는 용도로 쓰였다.[2][14]


기원전 8세기의 도자기에 새겨진 기하학 디자인은 헤라클레스의 모험뿐만 아니라 트로이아 연대기의 장면도 묘사되어 있다.[2] 신화의 시각적 묘사는 두 가지 이유에서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많은 그리스 신화가 문학적 근원보다 항아리 묘사에서 일찍 등장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헤라클레스의 12업은 케르베로스를 생포하는 모험만이 동시대의 문헌에서 등장한다.[15] 또한, 시각적인 근원은 때때로 현존하는 문학적 근원에서 등장하지 않는 신화, 또는 신화적인 장면을 묘사한다. 어떤 경우에는, 기하학 양식에서 처음 묘사된 신화로 알려진 것이 몇 세기가 지난 후에야 고대 서사시에서 처음 언급되기도 한다.[4] 이후 고대(c. 750–c. 500 BC)와 고전(c. 480–323 BC), 헬레니즘(323–146 BC) 시대에 등장한 호메로스풍을 비롯한 다양한 신화 장면은 현존하는 문학적 증거를 보충하는 자료가 되고 있다.[2]


신화 역사의 개괄[편집]


파이드라와 그녀의 유모로 보이는 하인, 기원전 60-20년 폼페이의 프레스코화.

그리스 신화는 시간이 경과할 수록 문화의 발전에 적응하고 변화해왔으며, 이러한 변화에는 전체적인 것과 더불어 무언의 가정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는 그리스 신화의 문학 형태는 대부분이 점진적인 변화를 거친 것으로, 길버트 커스버트슨의 주장처럼 그 본질은 정치적인 것이다.[16]


농업에 종사하였던 발칸 반도의 초기 거주자들은 애니미즘 사상을 통해 자연의 모든 것에 영혼을 부여하였고, 사람의 형태로 가정된 이러한 영혼들은 지역 신화에서 신으로 등장하게 되었다.[17] 발칸 반도 북부의 부족들이 침범하게 되면서, 정복과 세력, 싸움에서의 용기, 영웅적 자질을 바탕으로 한 그들의 새로운 판테온 신들이 기존 발칸 반도의 신화에 유입되었다. 그 결과 농경 사회에 존재했던 오래된 신들은 그들의 더욱 강력한 침략자에 융합되었고, 그렇지 못한 신들은 쇠퇴하여 사라지게 되었다.[18]


고대 중반 이후에는 남신과 남성 영웅 간의 관계에 대한 신화가 더욱 빈번해지기 시작했으며, 이것은 기원전 630년 경에 확산되었다고 여겨지는 교육적 동성애(Eros paidikos, παιδικός ἔρως)의 동시적 발전과도 관계가 깊다. 기원전 5세기가 끝날 무렵, 시인들은 아레스를 제외한 모든 중요한 신과 많은 전설적 인물에게 적어도 한 명의 에로메노스(성적인 관계의 어린 소년)를 정해두었다.[19]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처럼 이전에 존재하던 신화 또한 암시적인 동성애 관계가 가미되었다.[20] 알렉산드리아의 시인들은 처음으로 자신들의 유행에 맞추어 그리스의 신화적 인물의 이야기를 각색하였으며, 초기 로마 제국의 문학 신화 수집가들에게는 이것이 더욱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다.


일련의 역사적 이야기를 만들어낸 서사시의 업적은 결과적으로 새로운 감각의 신화적 연대기로 발전하였고, 그리스 신화는 세계와 인간의 발전 모습 또한 표현하게 되었다.[21] 이러한 이야기들은 내용에서 드러나는 자기 모순적 서술 때문에 절대적인 시간 구성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대략의 연대는 파악할 수 있다. 신화에서 설명하는 "세계의 역사"는 다음과 같이 세 시대, 또는 네 시대로 나눌 수 있다.


창세 신화 또는 신들의 시대(신통기, "신들의 탄생"): 세계와 신, 인간의 기원에 대한 신화

신들과 인간의 자유 교류 시대: 초기에 신들과 반신반인, 인간이 서로 교류했던 이야기.

신들의 활동이 제한되었던 영웅의 시대. 마지막이자 가장 거대한 영웅 전설은 트로이아 전쟁과 후일담이다.(어떤 연구자들은 네 번째 시대로 나누기도 한다.)[22]

신들의 시대가 동시대의 신화 연구자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아온 반면에, 고대와 고전 고대의 그리스 작가들은 영웅의 시대를 더 선호하였다. 그들은 세상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해 설명한 후, 그 다음부터는 인간의 업적에 대한 기록과 연대를 정립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어서, 영웅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신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신통기》와 호메로스 찬가의 규모와 유행을 위축시켰다고 볼 수 있다. 호메로스의 영향으로 "영웅 숭배" 문화는 종교 생활의 개혁을 가져왔고, 죽음(영웅)의 세계에서 신들의 세계를, 올림피안에서 지하 세계의 신들을 분리하여 표현하였다.[23] 헤시오도스는 《노동과 나날》에서 인간(종족)의 시대를 금, 은, 청동, 철의 네 시대로 설명하였다.[24] 이러한 종족, 또는 시대는 신들의 창조를 기준으로 구별하는데, 금의 시대는 크로노스의 지배에 속하며, 이후의 종족은 제우스가 창조한 것이다. 헤시오도스는 청동 시대 다음에 영웅의 시대(종족)를 삽입하였다. 마지막 시대는 철의 시대로, 시인들이 활동하던 시대와 동일하였다. 시인들은 이 시대를 최악의 시대로 간주하였다. 그들은 판도라의 신화를 통해서 철의 시대부터 세상에 악(惡)이 존재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였는데, 판도라가 항아리를 열게 되면서, 인간의 모든 가능성이 좌절되고 오직 희망만이 남았다고 한다.[25] 오비디우스는 《변신 이야기》에서 헤시오도스의 네 시대 개념을 가져왔다.[26]


신들의 시대[편집]

우주 생성론과 우주론[편집]

 그리스 태초신, 그리스 신들의 가계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사랑의 신 에로스를 묘사한 Amor Vincit Omnia(사랑은 모든 것을 정복한다).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조의 1601–1602년 작품.

"근원 신화" 또는 "창조 신화"는 인간의 용어로 우주를 이해하며, 세계의 기원을 설명하는 신화를 말한다.[27] 철학적인 설명으로 시작되기는 하지만, 오늘날에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신화는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 서술되어 있다. 그는 세상이 지루한 공허인 카오스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한다. 이 공허가 끝나자 에우리노메, 가이아(대지)가 나타났고, 에로스(사랑), 무저갱(나락, 타르타로스), 에레보스와 같은 다른 근본 신들도 등장하게 되었다.[28] 가이아는 남자의 도움 없이 우라노스(하늘)를 낳았고 그와 결합하였다. 이 결합으로 거인족 티탄이 처음으로 태어났는데, 이들은 코이오스, 크리오스, 크로노스, 히페리온, 이아페토스, 오케아노스의 여섯 남자, 므네모시네, 포이베, 레아, 테이아, 테미스, 테티스의 여섯 여자로 구성되었다. 이윽고 가이아와 우라노스는 외눈박이 키클롭스와 100개의 손이 달린 헤카톤케이레스를 낳았다. 크로노스("교활하며, 가장 젊고 무서운 가이아의 자녀" [28])는 우라노스를 거세시키고 신들의 지배자가 되었으며, 누이 레아를 자신의 배우자로 삼고, 다른 형제 티탄들을 지배층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였다.


아버지와 아들 간의 대립 주제는 크로노스가 자신의 아들 제우스에게 적대를 받으며 되풀이되었다. 아버지를 배반하였던 크로노스는 자신의 자식 또한 그럴 수 있다는 두려움에 레아가 자식을 낳을 때마다 빼앗아 삼켜버렸다. 이것을 증오하던 레아는 마지막으로 낳았던 아들 제우스를 숨기고 강보에 싼 바위를 대신 주어 크로노스가 삼키도록 하였다. 성장한 제우스는 크로노스에게 약이 든 음료를 마시게 하여 구토를 하게 만들었고, 크로노스의 위장에 있던 레아의 다른 자녀들과 바위가 모두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제우스는 신들의 왕위를 차지하고자 크로노스에게 도전하여 전쟁을 벌였다. 막바지에 이르러 키클롭스(제우스가 타르타로스에서 구출)의 도움으로 제우스와 형제들은 승리하게 되었고, 패배한 크로노스와 티탄들은 내쫓겨 타르타로스에 감금되었다.[29]



아티카식 흑회식 암포라에 그려진 메티스를 삼킨 제우스의 머리에서 "재탄생"하는 아테나, 출산의 여신 에일레이투이아가 오른쪽에서 돕고 있다. 기원전 550 - 525년 경 작품.(파리 루브르 박물관)

크로노스와 같은 반란을 겪을까봐 걱정하던 제우스는, 첫 번째 아내인 메티스가 "자신보다 위대한" 신을 낳을 것이라는 예언을 듣자 아내를 삼켜버렸다.[30] 하지만 메티스는 이미 아테나를 임신하고 있었고, 아테나는 제우스에게 계속 두통을 앓게 만들다가 무장을 한 채 완전히 성장한 모습으로 그의 머리에서 나오게 되었다.[31]


초기 그리스인들은 시에 대하여 신통기를 원형적인 시 장르—원형적 미토스—로 여겼으며, 내용 대부분에 마법적인 힘이 깃들여져 있다고 생각하였다. 원형 시인 오르페우스 또한 신통기를 읊는 원형적 가수였는데, 아폴로니오스의 《아르고나우티카》에서는 바다를 잠재우거나 폭풍을 일으켰으며, 하데스로 하강하여 지하세계 신들의 냉혹한 마음을 움직이기도 하였다. 〈헤르메스에게 바치는 호메로스 찬가〉에서 헤르메스가 서정시를 고안해냈을 때 그가 처음으로 부른 노래도 신들의 탄생에 관한 것이었다.[32] 헤시오도스의 《신통기》는 전해내려오는 신들의 모든 이야기뿐만 아니라, 무사이에게 영감을 비는 긴 첫머리에서 아르카익 시인들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도 충실히 담고 있다. 신통기는 또한 오르페우스, 무사이오스, 에피메니데스, 아바리스와 그 밖의 전설적 현자가 지었다고 여겨지며, 내밀한 정화 의식과 밀교 의식에 사용되었던 소실된 많은 시들을 주제로 삼기도 하였다. 실제로 플라톤은 오르페우스교 신통기의 몇가지 이야기에 정통했다.[33] 그러나 종교 의식과 신앙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되었기 때문에, 종교의 신앙은 유지된 반면, 그 집단의 구성원들에 의한 이러한 문화의 종류의 보고는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이후 종교적 신앙이 쇠퇴하면서, 일부만이 종교 의식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문헌에서 이러한 의식에 대한 언급을 종종 찾아볼 수 있지만, 그 양상은 소실된 직접적인 문헌과 달리 글의 방향이 너무 명료하고 의도적인 것에 불과하다.[34]


도기와 종교적 예술품에 묘사된 장면들은 다양한 신화와 전설로 해석되었으며, 잘못 해석되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다. 이러한 작품의 일부는 신플라톤주의 철학자의 인용과 최근에 발견된 파피루스 조각을 통해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파피루스 조각 중의 하나인 데르베니 파피루스는 오르페우스 신앙의 천지 창조 시가 최소 기원전 5세기부터 존재했었음을 증명하는 자료가 되었다.[35]


그리스 세계에서는 최초의 철학적 우주론자들이 반대하거나 성립해온 대중적인 신화적 개념들이 한동안 존재했었다. 이러한 개념들의 일부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시에서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이다. 호메로스의 시에서는 대지가 오케아노스의 강 위에 떠있는 평평한 원판이며, 태양, 달, 별이 있는 반구형의 하늘에 둘러싸여 있다고 설명하였다. 태양(헬리오스)은 전차를 몰면서 하늘을 가로질렀고, 밤에는 황금 사발을 타고 대지 주위를 항해하였다. 태양, 대지, 하늘, 강, 바람은 발원의 대상이 되거나 입증 선언에서 이름이 불리기도 하였다. 또한 자연의 균열은 보통 하데스의 지하 세계이자 그의 전신인 죽음의 세계로 가는 입구로 생각하였다.[36] 다른 문화권의 영향은 언제나 새로운 주제를 창출해내었다.


그리스 판테온[편집]

 고대 그리스의 종교, 올림포스 12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백조로 둔갑하여 스파르타 왕비 레다를 유혹하는 제우스. 분실된 미켈란젤로 원작의 16세기 복제본.

고전 시대 신화에서는 티탄들의 패배 이후, 신들의 새로운 판테온이 세워졌다고 설명한다. 주요한 그리스 신들 중에서 올림피안은 올림포스 산 정상에서 제우스의 통치 아래 살아가는 신들을 말한다. 이들의 인원이 열두 명으로 제한된 것은 비교적 최근에 도입된 개념으로 보인다.[37] 올림피안 이외에도 그리스인들은 염소 신 판, 강의 정령 님프, 샘에 사는 나이아드, 나무의 정령 드라이어드, 바다에 사는 네레이드, 강의 신, 사티로스를 비롯한 그 지역의 다양한 신들을 숭배하였다. 여기에는 에리니에스(또는 푸리아이)처럼 혈연 관계에게 범죄를 저지른 죄인을 뒤쫓는 저승의 암흑 세력도 있었다.[38] 시인들은 그리스 판테온의 영광을 기리고자 호메로스 찬가를 지었다.(33편의 노래).[39] 그레고리 나지는 호메로스 찬가를 "각 노래마다 신에 대한 기원을 노래하는(《신통기》에 비해) 간결한 서가"로 간주하였다.[40]


그리스 신화를 구성하는 방대한 신화와 전설에서 그리스인들이 생각해낸 신들은 본질로 봤을 때는 물질적이지만 이상적인 신체를 가졌다고 묘사된다. 발터 부르케르트는 그리스의 신인 동형론의 특징에 대하여 "그리스 신들은 인간이며,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이지 않다"라는 정의를 내렸다.[41] 고대 그리스 신들은 그들의 근원적인 형태와는 별개로 많은 초자연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그들은 질병에 영향을 받지 않았고, 매우 특정한 상황에서만 상처를 입을 수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신들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특성을 불사로 보았고, 영원한 젊음과 더불어 이러한 불사의 능력은 넥타르와 암브로시아를 섭취하여 혈관에 신성한 피를 돌게 하는 방법으로 보장 받을 수 있었다.[42]


각 신들은 서로 다른 관심사를 추구하며 자신의 계보를 이어가며, 특유의 개성에 의해 좌우되는 전문적인 일정한 영역을 가지고 있다. 다만, 이러한 묘사들은 다른 것과 항상 일치하지 않는 고대 지역 전승의 다양성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시나 기원, 의식에서는 신들을 호명할 때 이름과 수식어를 결합하여 부르며, 다른 명시와는 다른 이러한 구별을 통해 그들을 식별한다.(예를 들어 아폴로 무사게테스는 "무사이의 지도자 아폴로") 수식어만을 사용하여 부르는 것은 신의 특정하고 부분적인 모습만을 식별하는 것으로 보이며, 일찍이 고대 그리스의 고전 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여겨진다.


대부분의 신들은 삶의 특정한 모습과 연관되어 있다. 예를 들어서, 아프로디테는 사랑과 미의 여신, 아레스는 전쟁의 신, 하데스는 죽음의 신, 아테나는 지혜와 용기의 여신이었다.[43] 아폴로와 디오니소스 같은 일부 신들은 복잡한 특성을 가지며 다양한 영역을 관장하기도 하였으며, 반면 헤스티아("난로")와 헬리오스("태양")처럼 좀 더 전형적인 화신의 성향을 가진 신들도 있었다. 대부분의 주요 신전들은 거대 범그리스 신앙의 중점이 되는 제한된 숫자의 신들만을 헌신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개별 종교와 마을에서는 비주류 신들을 숭배하며 의식을 치루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많은 도시에서 또한 잘 알려진 신들을 독특한 지역 의식과 함께 찬양하였으며, 다른 지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신화를 그들과 연관시키기도 하였다. 영웅 시대 동안에는 영웅(또는 반신) 숭배가 부가되기도 하였다.


신들과 인간의 시대[편집]

신들만이 살아갈 때의 시대와 인간의 문제에 신성한 간섭이 제한된 시대를 이어주는 것은 신과 인간이 함께 활동하였던 과도기의 시대였다. 이 시대는 세계의 초기 시절로, 신과 인간의 무리들이 나중의 시대와 비교할 때 서로 더 자유롭게 어울렸던 시대였다. 이러한 이야기들의 대부분은 이후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실려졌으며, 여기서는 주로 사랑 이야기와 징벌 이야기의 두 주제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44]



디오니소스와 사티로스. 브리고스 화가 카비네 드 미다이어스가 잔 안쪽에 그린 작품.

사랑 이야기는 주로 근친 상간, 또는 남자 신이 인간 여자를 유혹하거나 강간하여 영웅을 탄생시키는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다. 이 이야기에서는 일반적으로 신과 인간의 관계는 피해야할 것으로 암시하고 있는데, 상호 합의의 관계에서도 해피 엔딩으로 결말을 맺는 경우는 드물다.[45] 여자 신이 인간 남자와 관계를 맺는 경우도 드물게 있는데, 〈아프로디테에게 바치는 호메로스 찬가〉에서는 여신이 안키세스와 동침하여 아이네이아스를 낳았다고 이야기한다.[46]


두 번째 유형(징벌 이야기)은 프로메테우스가 신들에게서 불을 훔쳤을 때, 탄탈로스가 넥타르와 암브로시아를 제우스의 식탁에서 훔쳐 백성들에게 나눠주어 신들의 비밀을 누설할 때, 프로메테우스나 리카온이 제물을 날조할 때, 데메테르가 트립톨레모스에게 농업을 전수할 때, 마르시아스가 아울로스를 만들어 아폴론과 음악 경연을 펼칠 때와 같이 어떤 의미 있는 문화적 아티팩트의 전유나 발명을 포함하고 있다. 이안 모리스는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를 "신들과 인간의 역사 간의 지위"로 간주하였다.[47] 3세기에 기록된 작자 미상의 파피루스 조각에는 디오니소스가 트라키아의 왕 리쿠르고스에게 내린 형벌을 생생히 묘사하고 있는데, 뒤늦게서야 새로운 신을 알아본 리쿠르고스는 내세까지 이어지는 잔혹한 형벌을 받게 된다.[48] 디오니소스가 등장하면서 트라키아에서 그의 숭배가 시작되는 이야기는 아이스킬로스 삼대 비극의 주제이기도 하다.[49] 또 다른 비극인 에우리피데스의 《박코스 여신도들》에서는 테바이의 왕 펜테우스가 디오니소스를 경시하고 그의 여성 숭배자 마이나스를 몰래 구경하다 신의 형벌을 받게 된다.[50]



아풀리안 적회식 히드리아에 그려진 데메테르와 메타네이라, 기원전 340년 경 작품.(베를린 구 박물관)

비슷한 주제가 반영된 오래된 설화를 모티브로 한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51] 데메테르가 도소라 불리는 노파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그의 딸 페르세포네를 찾던 중 아티카 엘레우시스의 왕 켈레오스에게 환대를 받는다. 데메테르는 켈레오스에게 보답하고자 그의 아들 데모폰을 신으로 만들 의식을 치루지만, 도중에 어머니인 메타니라가 불에 휩싸인 아들을 보고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자 노여워하며 일을 그르치게 된다. 데메테르는 어리석은 인간이 신의 뜻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에 탄식한다.[52]


영웅의 시대[편집]

그리스 신화에서는 영웅들이 살았던 시대를 영웅 시대로 부른다.[53] 서사시와 계보시에서는 특정한 영웅이나 사건을 중심으로 무리를 이루는 이야기들의 순환을 만들어 내었고, 다른 이야기 속 영웅 간의 가족 관계를 설명하였으며, 이를 위해서 연속적으로 이야기들을 배열하였다. 켄 다우든에 따르면 이것은 연대기 효과로도 볼 수 있으며, 계승되는 세대의 운명을 따라가볼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21]


영웅 숭배가 등장한 이후, 영웅은 신만이 차지하였던 신성한 영역에 가세하며 맹세와 기원의 대상으로서 그 이름이 신과 함께 언급되었다.[23] 신들의 시대와는 대조적으로, 영웅 시대 동안에는 영웅들의 명단이 수정되지 않은 최종적인 형태를 취하였다. 또한, 위대한 신들은 더 이상 태어나지 않았지만, 새로운 영웅들은 언제나 죽음의 무리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영웅이 지역 단위의 무리에게 정체성의 중심이 되었다는 것 또한 신 숭배와 영웅 숭배의 중요한 차이점이다.[54]


영웅 시대의 서막은 헤라클레스의 기념비적인 모험들을 통해 열리기 시작했다. 또한, 영웅 시대에는 장대한 군사 사건인 아르고나우타이의 원정, 테바이권과 트로이아 전쟁도 포함된다.[55]


헤라클레스와 헤라클레이다이[편집]

 헤라클레스, 헤라클레이다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헤라클레스와 그의 아들 텔레포스(파리, 루브르 박물관).

일부 철학자들은 헤라클레스의 복잡하게 얽혀있는 신화가 아르고스 왕국의 종속 국가 지도자와 같은 실존 인물이 바탕이 되었을 것이라고 본다.[56] 또한, 일부 철학자는 헤라클레스의 이야기가 태양이 1년동안 황도 12궁을 통과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57] 다른 문화권의 초기 신화로 비추어 볼 때, 헤라클레스 이야기는 이미 확립된 영웅 신화의 지역화로서 보여진다는 의견도 있다. 전통적으로, 헤라클레스는 제우스와 페르세우스의 손녀 알크메네의 아들이었다.[58] 그의 환상적이고 유일무이한 공적은 그것들이 갖는 설화적 주제와 함께 인기있는 전설의 소재를 제공하였다. 그는 희생자이자 제단의 창립자, 게걸스러운 먹보로 묘사되거나 언급된다. 희극에서 등장하는 그의 이러한 역할은 그의 비참한 죽음이 많은 비극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과는 상반적이다. — 탈리아 파파도푸루는 《헤라클레스》에 대해서 "에우리피데스의 연극 연구에서 대단한 중요성을 가진 작품"이라고 평가하였다.[59] 예술과 문학에서 헤라클레스는 보통의 인간보다 막대한 힘을 가진 남성으로 등장하며, 활을 무기로 들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종종 곤봉으로 묘사되기도 하였다. 꽃병 토기에는 헤라클레스의 묘사가 다른 소재와 비할 수 없는 인기를 구가하였는데, 특히 그가 사자와 싸우는 장면은 수백 개의 토기에서 발견되었다.[60]


헤라클레스는 에트루리아와 로마의 신화 및 숭배에도 등장하며, 로마인이 쓰던 라틴어 감탄사 "mehercule"은 그리스어인 "Herakleis"에서 유래한 것이었다.[60] 이탈리아에서는 헤라클레스를 상인의 신으로 숭배하였는데, 다른 나라에서는 그의 특징적인 재능인 행운이나 위험에서의 구조를 염원하기도 하였다.[58]


헤라클레스는 도리스 왕의 시조로 공식 지정되어 높은 사회적 위신을 이루었다. 이것은 도리스인이 펠로폰니소스로 이주한 것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데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도리스 부족의 이름이기도 한 영웅 힐로스는 헤라클레스의 아들이자 헤라클레이다이(헤라클레스의 자손, 특히 힐로스의 후예를 말하며, 다른 헤라클레이다이로는 마카리아, 라모스, 만토, 비아노로, 틀레폴레모스, 텔레포스가 있다.)의 한 명이 되었다. 헤라클레이다이는 미케네와 스파르타, 아르고스의 펠로폰니소스 왕국을 정복하였으며, 전설에 입각한 주장에 따르면 조상 대대로 왕국을 지배하였다. 그들의 지배가 시작된 것을 종종 "도리스인의 침입"이라고도 부른다. 리디아인과 후기 마케도니아 왕들 또한 같은 계급의 지배자로서 헤라클레이다이가 되었다.[61]


초기 세대의 다른 영웅들은 페르세우스, 데우칼리온, 테세우스, 벨레로폰 등이 있으며, 이들은 헤라클레스와 공통적으로 많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행적은 헤라클레스처럼 혼자서 해낸, 환상적인 것들로, 동화에 가깝다고 볼 수 있으며, 키마이라와 메두사같은 괴물을 처치한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벨레로폰의 모험은 평범한 형태로, 헤라클레스와 테세우스의 모험과 유사하다. 상상으로 빚어낸 영웅의 최후는 초기 영웅 전설에서 반복되는 주제였으며, 페르세우스와 벨레로폰의 경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62]


아르고나우타이[편집]

 이 주제의 자세한 내용은 아르고나우타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아폴로니오스 로디오스(서사 시인, 철학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감독)의 《아르고나우티카》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헬레니즘 서사시로써, 이아손과 아르고나우타이가 황금 양모를 찾기 위해 신화 상의 지역인 콜키스로 항해를 떠나는 신화를 다루고 있다. 《아르고나우티카》에서 한 쪽에만 샌달을 신은 남자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네메시스라는 신탁을 받은 펠리아스 왕은 이아손에게 강제로 임무를 부여한다. 이아손은 강에서 샌달을 잃어버린 채로 펠리아스의 궁전에 도착하고, 이때부터 서사시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헤라클레스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차세대 영웅들이 이아손과 함께 아르고 호를 타고 황금 양모를 찾으러가는 모험에 가담하였다. 이 세대에는 크레타에서 미노타우로스를 무찌른 테세우스, 여걸 아탈란테, 한때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와 경쟁하던 서사시의 주인공 멜레아그로스도 있었다. 핀다로스, 아폴로니우스, 아폴로도로스는 아르고나우타이의 전체 목록을 파악하고자 하였다.[63]


아르고나우타이는 아폴로니우스가 기원전 3세기가 되어서야 쓴 서사시지만, 그 이야기 구성은 오디세이아보다 먼저 존재하였으며, 이아손의 공적을 잘 보여주고 있다.(오디세우스의 방랑은 부분적으로 이 이야기를 바탕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64] 고대에는 이 원정을 역사적 사실, 즉 그리스인이 흑해에서 무역과 식민지 사업을 개척한 사건에 관한 이야기로 생각했다.[65] 또한, 매우 인기를 끌어 여러가지 지역 전설이 덧붙여진 권을 형성하였다. 특히 메데이아의 이야기는 비극 시인들의 영감을 자극하였다.[66]


아트레우스 왕가와 테바이권[편집]

 테바이권, 테바이를 공격한 일곱 장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아르고 원정과 트로이아 전쟁 사이에는 주로 잔혹한 범죄들이 일어났던 것으로 알려진 세대가 있다. 여기에는 아트레우스와 티에스테스가 아르고스에서 벌인 사건도 포함되어 있다. 아트레우스 가문(라브다쿠스 가문과 함께 두 주요 영웅 왕조 중 하나)의 신화 뒤에는 권력 이양과 주권을 계승하는 방법에 얽힌 문제가 드러나있다. 아트레우스와 티에스테스 형제는 미케네의 권력 이양의 비극의 주역으로 출연하며, 그들의 자손들도 이것을 반복한다.[67]


테바이권은 주로 도시의 창설자인 카드모스와 연관된 사건을 다루고 있으며, 후반에는 테바이에서 일어난 라이오스와 오이디푸스 사건을 중점으로 다룬다. 이렇게 이어지는 이야기는 결국 테바이를 공격한 일곱 장수와 에피고노이의 손에 의해 도시가 함락되며 끝을 맺게 된다.[68](테바이를 공격한 일곱 장수의 초기 서사시 등장 여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오이디푸스가 관계되어있는 초기 서사시에는 그가 이오카스테가 자신의 어머니인 것이 드러난 이후에도 테바이를 계속해서 통치했으며, 두 번째 아내와 결혼하여 그녀가 자신의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비극 작품(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과 후기 신화에서 보아왔던 이야기와는 현저하게 다르다.[69]


트로이아 전쟁과 여파[편집]


엔리케 시모네의 1904년 《파리스의 심판》. 파리스가 오른손에 황금 사과를 든 채 계산적인 태도의 세 여신을 판단하고 있다.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의 《아킬레우스의 분노》(1757년, 프레스코, 300 x 300 cm, 비첸차 빌라 발마라나 소재)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이 자신의 전쟁 포로인 브리세이스를 두고 협박을 일삼는 것에 분노하여 칼을 뽑아 아가멤논을 죽이려고 한다. 이때, 갑자기 여신 아테나가 등장하여 프레스코의 묘사처럼 아킬레우스의 머리카락을 부여잡아 그를 말린다.

이 주제의 자세한 내용은 트로이아 전쟁, 서사시권 문서를 보십시오.

그리스 신화는 그리스와 트로이아 간의 트로이아 전쟁과 그 결과에서 절정을 이룬다. 호메로스 작품에서는 주된 줄거리가 이미 충분한 형태와 요지를 갖추었으며, 개별적인 주제의 경우에는 그 후에 그리스 연극과 같은 매체에서 더욱 자세해졌다. 트로이아 전쟁은 또한 아이네이아스의 이야기로 로마 문화에서 굉장한 관심을 이끌어내었다. 이 이야기에서는 트로이아의 영웅인 아이네이아스가 트로이아를 떠나 방랑하던 중 로마 제국의 건국 시조가 된 새로운 도시를 세웠다고 전하는데, 베르길리우스가 이후에 《아이네이스》라는 책으로 자세히 다루었다.(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2권에는 매우 잘 알려진 트로이아 부대 이야기가 있음.) [70] 마지막에 와서는 딕티스 크레텐시스, 다레스 프리기누스라는 이름의 저자가 썼다는 허위 연대기 두 권이 라틴어로 쓰여져 전해 내려온다.[71]


서사시 모음인 트로이아권은 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에리스와 칼리스티의 황금 사과, 파리스의 심판, 헬레네 납치, 아울리스에서 제물로 바쳐지는 이피게니아 이야기로 시작한다. 헬레네를 되찾고자 그리스는 메넬라오스의 형제이자 미케네, 또는 아르고스의 왕인 아가멤논의 지휘 아래 거대한 원정대를 보내었으나, 트로이아는 헬레네를 돌려주는 것을 거부하였다. 전쟁이 일어난지 10년 후를 배경으로 하는 《일리아스》에서는 아가멤논과 그리스의 뛰어난 전사 아킬레우스 사이의 반목, 그리고 아킬레우스의 친구인 파트로클로스와 프리아모스의 장남 헥토르의 전투에서 빚어지는 죽음에 대해서 언급한다. 헥토르의 죽음 이후 트로이아 진영에는 동맹 관계인 아마존의 여왕 펜테실레아, 에피오티아의 왕이자 새벽의 여신 에오스의 아들인 멤논이 가세하였다.[72] 아킬레우스가 이 둘을 죽였으나, 그는 파리스의 화살로 죽게 되었다. 그리스는 트로이아를 함락시키기 전에 성채에서 팔라스 아테나의 목조상(팔라디움을 훔쳤으며, 마지막에 와서는 아테나의 도움으로 트로이아 목마를 완성시켰다. 프리아모스의 딸 카산드라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트로이아인들은 그리스 진영의 탈영병으로 가장한 시논의 설득만을 믿고 그 목마를 아테나에게 바치는 공물로써 트로이아 성 안으로 들였다. 신관 라오콘이 이 목마를 파괴하려 했으나, 갑자기 나타난 바다뱀에게 물려 죽게 되었다. 밤이 되어 그리스 함대가 돌아오자, 목마에 숨어있던 그리스인들은 트로이아의 성문을 열었다. 총력을 기울인 약탈이 이루어지면서, 프리아모스와 남아있던 그의 아들들은 살해 당했고, 트로이아의 여자들은 그리스 여러 도시의 노예로 전락했다. 모험적인 그리스 지도자의 귀향 항해(아가멤논을 살해한 아이네이아스와 오디세우스의 방랑 포함)는 두 개의 서사시 《귀향》(소실된 노스토이), 호메로스가 쓴 《오디세이아》에서 다루고 있다.[73] 트로이아권은 트로이아 세대의 자녀들이 겪는 모험도 담고 있다.(오레스테스와 텔레마코스)[72]


트로이아 전쟁은 고대 그리스 예술가들에게 다양한 주제를 제공하였으며, 그들의 영감을 자극하는 주요 원천이 되었다.(예: 트로이아 약탈이 묘사된 파르테논의 메토프) 트로이아권에서 유래한 주제가 이같은 예술적 선호를 받은 사실은 이것이 고대 그리스 문명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73] 동일한 신화적 연대기 또한 후대 유럽 문학 작품의 일련에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서, 호메로스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트로이아 중세 유럽 작가는 트로이아 전설에서 영웅과 낭만적 이야기의 풍부한 원천과 함께, 이것이 그 시대에 맞게 궁정풍의 기사적인 전형으로 각색하기 쉬운 구조를 갖췄다는 것을 발견했다. 브누아 드 셍트 모르(《로망 드 트로이》, 1154-60년), 엑세터의 조셉(《드 벨로 트로이아노》, 1183년)과 같은 12세기 작가들은 전쟁을 묘사하면서 딕티스와 다레스의 이야기를 각색하였다. 이들은 호라티우스의 조언과 베르길리우스의 전례를 따라서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말하는 대신에 트로이아의 시를 다시 쓴 것이다.[74]


트로이아 전쟁에 등장하는 유명한 영웅들은 다음과 같다.


트로이아 진영:


아에네아스

헥토르

파리스

그리스 진영:


아이아스

아킬레우스

아가멤논 왕

메넬라오스

오디세우스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 개념[편집]

고대 그리스에서 신화는 일상의 중심이었다.[75] 그리스인들은 신화를 그들의 역사의 일부로 보았다. 그들은 자연 현상과 문화적 변화, 인습적인 증오와 친교를 설명하는데 신화를 사용하였다. 한 지도자가 신화적 영웅, 또는 신의 후손이라는 증거로 사용할 수 있는 자부심의 원천이기도 했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서 설명하는 트로이아 전쟁의 진실에 대해서 의문을 갖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군사 역사가, 칼럼니스트, 정치 수필가이자 전 고전학 교수인 빅터 데이비스 핸슨과 고전학 부교수 존 히스에 따르면, 그리스인들에게 호메로스 서사시의 심오한 지식은 그들의 문화 변용의 기저로 간주되었다. 호메로스는 "그리스의 학문"(Ἑλλάδος παίδευσις)이었고, 그의 시는 한 권의 "책"이었다.[76]


철학과 신화[편집]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 프레스코의 플라톤(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유사). 그는 이상적 《국가론》에서 호메로스와 비극, 관련된 신화적 전통의 연구를 배격한 철학자이다.

기원전 5세기 후반에 철학과 역사, 산문과 합리주의가 등장한 이후, 신화의 미래는 불투명해졌고, 신화적 계보도가 포함되던 역사의 구상에서도 초자연적 요소가 배제되었다.(투키디데스 역사 등)[77] 시인들과 극작가들이 여전히 신화를 개작했던 반면에, 그리스 역사가와 철학자들은 이것을 비판하기 시작했다.[9]


콜로폰의 크세노파네스와 같은 일부 급진 철학자들은 이미 기원전 6세기부터 시인들의 이야기를 신성 모독적인 거짓말로 여겼다. 크세노파네스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가 그려낸 신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는 인간에게 속하는 모든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들을 신들에게 귀속시켰다. 절도, 간통, 서로 기만하는 일들이 그것이다."[78] 이러한 경향의 표현은 플라톤의 《국가》와 《법률》에서도 광범위하게 찾을 수 있다. 플라톤은 자신만의 우의적인 신화를 만들었고(《국가》의 에르의 몽상), 신들의 부도덕한 속임수, 도둑질, 간통을 소재로 하는 구비 설화를 비판하였으며, 문학 작품에서 그들이 중심 역할로 등장하는 것에 반대하였다.[9] 신화를 "늙은 아내의 수다"[79] 로 비유한 플라톤의 비판은 호메로스 신화 전통에 대항하는 최초의 중대한 도전이었다.[76]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신화에 근접한 소크라테스 이전 시대의 철학적 접근을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헤시오도스와 신학 작가들은 그들에게 그럴듯해보이는 것에만 관심을 가졌으며, 우리를 배려하지 않았다 ... 하지만 신화적 문체로 돋보이려는 작가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가치는 없다. 우리는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하며 나아갈 그들에게 반대 심문을 해야만 한다."[77]


이러한 비판에도, 플라톤은 그 자신과 그의 집단을 신화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었다. 일례로, 소크라테스에 대한 그의 서술은 철학자들이 스승의 정직한 삶을 찬양할 때 사용되는 전통적인 서사시풍의 비극 양식을 바탕으로 하였다.[80]


어떤 이는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자네는 사형 선고를 받게 될지도 모르는 그런 삶을 살아 온 데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가?"라고 물을 것이오. 나는 그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겠소. "그것은 옳지 못한 견해요. 조금이라도 품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일을 할 때 그것이 옳은 일인가 옳지 않은 일인가, 선량한 사람이 할 일인가 악한 사람이 할 일인가 하는 것만을 생각해야 하며, 그 일을 하면 살게 되느냐 죽게 되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서는 안 되오. 당신의 견해를 따르면 저 트로이아에서 생애를 마친 반신들은 하찮은 존재들이 되는 셈이니까. 그 중에서도 테티스의 아들인 아킬레우스는 치욕을 참고 견디는 데 비하면 그런 위험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소. 나는 헥토르를 죽이려고 서두르는 그에게 어머니인 여신이 이렇게 말한 것으로 알고 있소.


내 아들아, 네가 너의 친구인 파트로클로스의 원수를 갚기 위해 헥토르를 죽이면 너 자신도 죽게 된다. 왜냐하면 헥토르의 바로 뒤에서 죽음의 신이 너를 붙들려고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호메로스의 일리아스 18권 96행)

아킬레우스는 이 말을 듣고도 죽음이나 위험은 아랑곳도 없이, 오히려 친구를 위해 원수를 갚지 않고 비겁한 자로 살아남게 되는 것을 훨씬 두려워하여 말하기를,


나의 원수에게 복수를 한 후에는 죽어도 좋습니다. 이곳에서 대지의 짐이 되면서까지 머리 굽은 배들 곁에서 웃음거리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핸슨과 히스는 호메로스 전통에 대한 플라톤의 거부가 그리스 문명의 대중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얻지는 않았다고 추정한다.[76] 오래된 신화는 지역 종교에 여전히 남아있었다. 이러한 신화들은 계속해서 시 문학에 영향을 미쳤고, 회화와 조각의 주요한 주제가 되었다.[77]


보다 적극적으로, 기원전 5세기의 비극 작가 에우리피데스는 종종 오래된 전통을 비웃는 연극을 제작하였으며, 그가 창조한 배역의 목소리를 빌어 의심의 어조를 담아내었다. 그가 제작한 연극은 언제나 예외없이 신화를 주제로 행해졌다. 이러한 많은 연극들은 과거에 같거나 비슷한 신화를 소재로 쓰인 연극의 회답으로 쓰여졌다. 에우리피데스는 주로 신에 대한 신화에 이의를 제기하였으며, 과거 크세노크라테스의 표현과 유사한 반대에 입각한 비판을 펼치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묘사된 신들은 너무 어리석게도 인간과 닮았다."[78]


헬레니즘과 로마 합리주의[편집]


키케로는 신화에 관한 개인적 회의론과 신성의 철학적 개념에 중점을 둔 그의 성향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기존 체제의 옹호자라고 생각했다.

헬레니즘 시대 동안 신화는 일정 신분만이 향유할 수 있는 일류 엘리트 지식으로 자리매김하였으며, 동시에 고전 시대의 회의적인 성향 또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81] 그리스 신화 수집가 에우헤메로스는 신화적 존재와 사건이 기초로 하는 실제 역사적 사실을 찾는 관례를 확립하였다.[82] 그의 본래 작품(Sacred Scriptures)은 유실되었지만, 디오도로스와 락탄티우스가 기록한 자료를 통해서 이 작품이 담고 있는 대부분의 내용이 알려져 있다.[83]


로마 제국 시대에 들어오면서 신화 해석학의 합리화는 스토아 철학과 에피쿠로스 철학의 물리주의 이론의 영향으로 대중에게 높은 관심을 받았다. 유헤메로스 학파가 신화를 역사적 형태로 합리화한 반면에, 스토아 학파는 신과 영웅에 대한 설명을 물리적 현상으로 해석하였다. 이와 더불어 스토아와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들은 신화적 전통의 도덕적 의의를 강조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주로 그리스 어원에 바탕을 두었다.[84] 루크레티우스는 에피쿠로스 학파의 가르침을 통해 그를 따르는 시민들의 마음에 사로잡힌 미신의 두려움을 쫓고자 하였다.[85] 리비우스 또한 신화적 전통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전설(파불라에)과 같은 이야기에 대해 직접 판단을 내리고자 할 의도는 없다고 밝혔다.[86] 로마인들에 대한 이러한 도전은 종교적 전통의 강력하고 변증적인 관념을 동반하였으며, 전통이 종종 미신의 온상이 되는 것을 방어하기도 했다. 고전학자 바로는 종교는 인간의 제도이며, 사회의 선을 보호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고, 종교적 숭배의 기원에 대한 엄밀한 연구에 헌신하였다. 그의 저서인 《신의 역사》(Antiquitates Rerum Divinarum)(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에서 일반적 접근법을 찾을 수 있다.)에서 바로는 미신에 사로잡힌 사람이 신을 두려워하는 반면, 진실로 경건한 사람은 그들을 부모로서 공경한다고 주장하였다.[85] 바로에 따르면, 로마 사회에서 신은 시인이 연극과 오락을 위해 만들어낸 신화적 가치, 도시와 사람들이 숭배를 위해 이용하는 시민적 가치, 철학자가 만들어낸 자연적 가치의 세 가지 가치로 구분된다.[87] 바로는 시민의 신학이 시적이고 신화적인 가치, 철학자의 가치와 결합된 곳이 최고의 국가라고 덧붙였다.[87]


로만 아카데믹 코타는 신화를 문자 그대로, 또는 우의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모두 조롱하였으며, 철학에는 신화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고 단언하였다.[88] 키케로 또한 일반적으로 신화를 경멸하였으나, 바로와 마찬가지로 국교와 국교의 관례에 대한 지지를 강조하였다. 이 합리주의 확장이 사회적 척도와 얼마나 동떨어졌는지 파악하기는 어렵다.[86] 키케로는 그 누구도(노파나 소년도) 하데스의 공포나 스킬라, 켄타우로스, 다른 괴물의 존재를 믿을만큼 멍청하지 않다고 하였으나,[89] 다른 한편으로는 민중의 미신적이고 잘 속는 속성에 대해서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90] 이러한 키케로의 사상은 저서인 《신들의 본성에 관하여》(De Natura Deorum)에 포괄적인 요약이 드러나 있다.[91]


융화하는 경향[편집]


로마 종교에서 그리스 신 아폴로(초기 로마 제국의 4세기 그리스 작품의 복제품, 루브르 박물관)의 숭배는 솔 인빅투스 숭배와 결합하였다. 태양 숭배는 황제와 제국의 특별한 보호자로써 기독교로 대체되기 전까지 제국의 최고 권위를 가진 종교였다.

 로마 신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고대 로마 시대에는 그리스와 다른 외래의 수많은 신들이 융합된 로마 신화가 새롭게 등장하였다. 로마 신화가 이러한 발생 과정을 갖게된 이유는 로마인들만의 신화가 적었기 때문이며, 주요 로마 신들이 그리스의 대등한 신들의 특징을 답습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그리스의 신화적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86] 주신 제우스와 주피터는 이러한 신화적 공통점의 좋은 예이다. 두 신화적 전통의 결합에 더불어 새롭게 유입된 동방 종교는 더욱 심화된 융합을 이끌었다.[92] 예를 들어서, 태양 숭배 문화는 아우렐리아누스가 시리아 출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이후에 로마에 들어온 것이다. 아시아의 신 미트라(태양이라 칭함)와 바알은 아폴로와 헬리오스에 융합되어 하나의 태양신, 솔 인빅투스(Sol Invictus)가 되었고, 집성 의식을 받으며 혼합된 속성을 띄게 되었다.[93] 아폴로는 종교에서 헬리오스, 또는 심지어 디오니소스와 점점 동일시되었을지 모르지만, 그의 신화를 개작한 문헌에서는 이러한 발달을 반영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전승 문학 신화는 실제 종교적 관습에서 갈수록 더 분리되었다.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작품인 2세기 오르페우스 찬가 모음집과 5세기 마크로비우스 암브로시우스 테오도시우스의 《사투르날리아》는 융화 경향과 합리주의 이론의 영향을 받았다. 오르페우스 찬가는 고전 이전의 시적인 구성을 취하며, 유명한 신화의 주인공인 오르페우스가 썼다고 전한다. 실제 이 시들은 몇 명의 시인이 썼을 것으로 추정되며, 선사 유럽 신화에 대한 줄거리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94] 《사투르날리아》의 목적은 마크로비우스 자신이 읽은 자료를 통해 그리스 문화를 전파하는 것이었으나, 신에 대한 시각은 베르길리우스의 해석에도 영향을 미친 이집트와 북부 아프리카 신화, 신학의 색채를 띄었다. 《사투르날리아》에서는 유헤메로스, 스토아,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신화학적 의견이 다시 등장한다.[84]


현대적 해석[편집]

 이 주제의 자세한 내용은 그리스 신화의 현대적 이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일부 철학자들은 그리스 신화의 현대적 이해의 기원을 신화를 "거짓말", 또는 전해져 오는 우화로 재해석하는 "기독교적 악의에 찬 전통적 태도"에 대한 18세기 말의 반발 작용으로 인한 것으로 평가한다.[95] 1795년경, 독일에서는 호메로스와 그리스 신화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였다. 요한 마티아스 게스너는 괴팅겐에서 그리스 연구를 다시 부활시켰고, 그와 동시에 후임자인 크리스티안 고트로프 하이네는 요한 요아힘 빙켈만과 함께 독일을 비롯한 여러 장소에서 신화 연구에 대한 기초를 다졌다.[96]


비교와 정신 분석적 접근[편집]

 비교 신화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막스 뮐러는 비교 신화학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비교 신화학》(1867년)을 통해서 초기 유럽 민족과 "미개" 민족 신화 간의 "복잡한" 유사성을 분석하였다.

19세기 비교 언어학의 발전과 20세기의 민속학적 발견이 더해져, 신화는 신화학이라는 학문 형태로 정립하게 되었다. 낭만주의 이래로 신화에 대한 연구는 모두 비교 연구 방법론을 사용하였다. 빌헬름 만하르트, 제임스 프레이저, 스티스 톰프슨은 민담과 신화의 주제들을 수집하고 분류하는 데 비교 연구 접근 방법을 사용하였다.[97] 1871년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는 그의 저서 Primitive Culture에서 비교 연구 방법을 적용하여 종교의 기원과 발달을 설명하고자 하였다.[98] 넓게 분리된 문화권들의 물질 문화, 종교와 신화를 한데 모으는 타일러의 절차는 카를 융과 조셉 캠벨에게 영향을 미쳤다. 막스 뮐러는 신화 연구에 비교 신화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도입하여 아리아인의 자연 숭배의 왜곡된 잔해를 발견하였다. 브로니슬라브 말리노프스키는 신화가 공통의 사회적 기능을 이행하는 방법에 대해서 역설하였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를 비롯한 구조주의자들은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신화들의 형식적인 관계와 유형을 비교했다.[97]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신화가 인간의 보편적이고 생물학적인 개념, 그리고 억압된 발상의 표현이라고 주장하였다.[99] 프로이트 신화 해석의 논거는 해몽으로, 프로이트의 개념인 꿈 작업은 꿈 속에서 나타난 어떤 개별 요소든지, 이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전후 관계가 중요함을 인정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이 의견은 프로이트 개념에서 신화에 대한 구조 언어학자와 정신 분석적 접근 간의 관계 회복의 중요성을 일깨웠다.[100] 카를 융은 자신의 이론 "집단 무의식"과 신화에서 흔히 보이는 부호화된 원형("태고적" 양식의 승계)을 통한 보편적이고 심리학적인 접근으로 신화를 해석했으며,[2][101] "신화 형성 구조의 요소는 무의식 정신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02] 로버트 A. 세갈은 융의 방법론과 조셉 캠벨의 이론을 비교하며 다음과 같이 결론 지었다. "캠벨의 신화 해석은 단순히 원형을 동일시한 것이다. 예를 들어 그의 《오디세이아》 해석은 오디세우스의 삶이 어떻게 영웅적 양태에 합치하는가를 보여준다. 이와 대조적으로, 융은 원형의 동일시가 단지 신화 해석의 첫 번째 단계라고 생각했다."[103] 그리스 신화의 현대적 연구의 창시자 중 한 명인 칼 케레니이는 융의 그리스 신화에 대한 원형 이론을 적용하고자 신화에 대한 자신의 초기 견해를 철회하였다.[104]


기원론[편집]

 인테르프레타티오 그라에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칼 케레니이는 신화에 대해 "신과 신과 유사한 존재에 대한 이야기에 포함된 재료의 주요부이며, 영웅의 전투와 지하세계로의 여행 —신화소(mythologem)는 이것을 표현하는 최고의 그리스어다— 이야기는 이미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이상의 재형성에 제한이 따르지 않는다."고 말하였다.[105]

현대에는 그리스 신화의 기원에 대한 다양한 이론이 있다. 성서적 이론에 따르면, 신화적 전설은 실제 사실에서 가장되고 바뀐 부분은 있으나 모두 성서 속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다.[106] 역사적 이론에서는 신화에서 언급되는 모든 인물은 실존 인물이며, 그들과 관련된 전설은 단지 후대에 덧붙여진 것이라고 본다. 이 이론에서는 아이올로스의 이야기를 아이올로스가 티레니아 해에 위치한 어떤 섬의 지배자였다는 사실에서 생겨난 것으로 추정한다.[107] 우의적 이론은 모든 고대 신화가 우의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가졌다고 추정한다. 이와는 다르게 물리적 이론에서는 공기와 불, 물의 원소가 본래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었으며, 주요한 신들이 이러한 자연의 힘을 신격화한 것이라는 생각을 따르고 있다.[108] 막스 뮐러는 인도유럽 종교의 형태를 "본래" 명시하던 아리아인의 흔적을 찾아가는 방식을 통해서 이해하고자 했다. 1891년,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19세기에 이르러 완성된 인류 고대사에 관한 최고로 중요한 발견은 ... 다음의 표본 등식이었다. 산스크리트어 디아우스 피트르 = 그리스어 제우스 = 라틴어 주피터 = 고대 노르드어 티르"[109] 서로 다른 지역의 신화에서 드러나는 특성과 기능은 밀접한 평행성을 보이고 있으며, 이것은 전승이 공유되었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우라누스와 산스크리트 바루나 또는 그리스의 모이라와 노르드 신화의 노른의 경우처럼 언어의 유사성을 보이는 증거가 부족하여 확실한 입증은 어렵다.[110]


한편, 고고학과 신화학에서는 그리스가 소아시아와 근동 문명의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 아도니스는 근동의 죽음의 신과 유사성을 띄는데, 신화보다는 숭배 의식에서 그 사실이 명확히 드러난다. 아프로디테의 도해가 셈족 여신에서 파생된 부분이 많은 반면, 키벨레는 아나톨리아 문화를 그 뿌리로 두고 있다. 초창기 신의 세대(카오스와 그의 자손들)와 에누마 엘리시의 티아마트 또한 공통점이 많다.[111] 메이어 라인홀드는 "권력을 원하는 세대의 투쟁, 폭력을 통한 신의 계승을 비롯해서 근동의 신통기적 개념은 ... 그리스 신화 속으로 들어가 있다."고 말했다.[112] 인도유럽과 근동 기원에 더하여 일부 학자들은 그리스 신화가 크레타, 미케네, 필로스, 테베, 오르코메누스와 같은 프레헬레닉 문명에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로 추측하고 있다.[113] 종교 역사학자들은 크레타와 관련된 수많은 고대의 신화 구성에 매료되어 관심을 가졌다.(황소의 신, 제우스와 에우로페, 황소와 관계를 맺어 미노타우로스를 낳은 파시파에 등) 마틴 P. 닐슨 교수는 주요한 고전 그리스 신화가 미케네 문명과 선사 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결론 지었다.[114] 그러나, 역사학자 부르케르트는 크레타 궁전 시대의 도해로 비추어 볼 때, 이러한 이론은 확증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115]


서양 예술의 주제[편집]

 이 주제의 자세한 내용은 그리스 신화와 서양 예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1485–1486년 경, 캔버스에 유화, 우피치, 플로렌스) — 고대 다신교의 새로운 관점을 목적으로 한 베누스 푸티카의 재현. 현대인을 위한 르네상스 정신의 전형으로도 통한다.[2]

광범위하게 수용된 기독교는 신화의 유행을 억제하지 않았다. 르네상스 시대에 고전고대의 재발견이 이루어지면서, 오비디우스의 시는 시인과 극작가, 음악가, 예술가들의 창조력과 영감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116] 르네상스 초기부터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와 같은 예술가들은 그리스 신화의 이교적인 주제를 전통적인 기독교적 주제와 나란히 그림으로 묘사하였다.[116] 그리스 신화는 라틴 매체와 오비디우스 작품의 유입을 통해서 이탈리아의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 단테와 같은 중세 르네상스 시인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2]



허버트 제임스 드레이퍼의 1898년 작품 《이카로스를 위한 탄식》

북부 유럽에서는 그리스 신화를 시각 예술의 주제로 채용하지 않았으나, 문학 분야에서는 그 영향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리스 신화에 영향을 받은 영국인의 예술적 창조력은 초서와 존 밀턴을 시작으로 본격화되었으며, 20세기에 이르러서는 셰익스피어와 로버트 브리지스를 통해 계속되었다. 프랑스의 라신과 독일의 괴테는 고대 신화를 개작하면서 그리스 연극을 부활시켰다.[116]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동안에 그리스 신화에 대한 저항이 유럽 전역에 퍼졌지만, 신화는 극작가들에게 여전히 천연 그대로의 중요한 소재였으며, 헨델과 모차르트의 오페라에서는 리브레토로 쓰여지기도 했다.[117] 18세기 말에 와서는 낭만주의가 그리스 신화를 비롯한 그리스 문화의 뜨거운 열풍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는데, 영국에서는 그리스 비극과 호메로스 작품의 새로운 번역물이 출간되면서 동시대의 시인(알프레드 테니슨, 키츠, 바이런, 셸리 등)과 화가(프레더릭 레이턴, 로렌스 앨머 태디마 등)에게 영향을 끼쳤다.[118] 크리스토프 글루크, 리차드 스트라우스, 자크 오펜바흐를 비롯한 여러 작곡가는 음악에 그리스 신화적 주제를 심어두기도 하였다.[2] 토머스 불핀치와 너대니얼 호손과 같은 19세기 미국 작가들은 영미 문학을 이해하는데 있어 고전 신화의 연구는 필수적이라고 여겼다.[119] 최근에 와서는, 프랑스의 장 아누이, 장 콕토, 장 지로두, 미국의 유진 오닐, 영국의 T. S. 엘리엇과 같은 극작가와 제임스 조이스, 앙드레 지드와 같은 소설가에 의해 고전적 주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이루어졌다.[2]


D03 – 문학사 개요

 (출전 :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3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1.  그리스 문학

  서양인의 영원한 마음의 고향은 그리스다. 그리스 문학을 전범으로 삼고 있는 서양문학은 기원전 8세기경 호메로스의 서사시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로마문학을 거쳐 중세와 르네상스, 그리고 고전주의 문학으로 이어졌다. 초기에는 서사시와 서정시가 발전하게 되고 아테네 전성시대에는 비극과 희극산문의 확립에 이른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시절부터 쇠퇴하기 시작하다가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하면서부터 고전시대의 그리스 문학은 종말을 고한다.


   호메로스 (Homeros, Homer, 기원전 800년 ~ 기원전 750년경에 활동)

  그리스 문학의 최초의 형식은 서사시 epic였으며 이를 대표하는 위대한 시인은 호메로스다. 호메로스는 이전부터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오던 신화들을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로 정리하여 신과 영웅들의 이야기를 펼쳐나갔다. 두 작품 모두 트로이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트로이 전쟁이 시작된 지 10년째 되던 해의 사건을 취급하고 있는 <일리아드>는 특히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우스의 사랑과 분노, 그리고 트로이의 장군 헥토르의 국가에 대한 충성을 다룬 작품이다. <오디세이아>는 전쟁이 끝난 후 그리스 영웅 오디세우스가 고향으로 귀환하던 중 겪게 되는 10년간의 방랑과 모험, 그리고 20년간 정절을 지키고 있던 부인 페넬로페와 극적 상봉을 줄거리로 하는 서사시다.

  이 과정에서 호메로스는 실존했던 역사적 인물들을 반신의 위치로 격상시켜 보통 인간이 극복할 수 없는 운명과 시련에 맞서 싸우는 인간의 위대함을 그려내고 있다. 이 두 시는 다 용의주도하게 짜여진 플롯, 시적 음악성, 상상력에의 호소, 성격묘사의 박진감 등에 있어서 인류의 영원한 고전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서사시에 뒤이어 리라 lyra라는 현악기에 맞추어 낭송되는 서정시가 헤시오도스에 의해 큰 발전을 보게 되나 아직 서사적인 국민문학 수준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헤시오도스는 농사에 대한 교훈을 담은 <일과 나날>, 그리스 신화에 관한 <신통기>를 남겼다.


   사포 (Sappho, BC 610~580년경 소아시아 레스보스 섬에서 활동한 유명한 서정시인)

  대표적인 여류시인 사포는 사랑과 비극적 감정을 심오하고 아름다운 서정시로 썼다. 또 다른 시인 핀다로스는 귀족생활을 시로 표현하고 올림픽 선수들을 찬미하는 송시를 썼다.



   3대 비극시인

  그리스인들의 최고의 문학적 성취는 비극에 있었다. 그리스 비극은 기원전 534년경 국가의 번영과 풍요를 기원하는 디오니소스 축제의 일환으로 상연되기 시작했다. 술과 풍요의 신인 디오니소스를 찬미하던 일종의 종교적 축제가 5세기경부터 본격적인 예술의 성격을 띤 비극으로 발전한 것이다. 초기의 비극은 배우의 대화 부분과 코러스, 그리고 춤이 교대로 이어지는 형식을 취했다.

  그리스 비극의 아버지 아이스킬로스(Aeschylos, BC 525/524 ~ 456 BC)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등장하고 있는 <아가멤논>을 포함하는 <오레스테이아> 3부작과 하늘에서 불을 훔치다 인간 세상에 전해준 죄로 제우스의 분노를 사 그 벌로 바위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를 그렸다.

  그리스 비극은 소포클레스(Sophocles, B.C. 497/496~B.C. 406/405)에 와서 더욱 심화된다. <오이디푸스왕>에서는 저주받은 오이디푸스가 신탁의 내용과 같이 부친을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되는 비극적 운명이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오이디푸스의 딸 안티고네가 크레온 왕의 부당한 입법을 반대하여 생매장된다는 <안티고네>는 궁극적으로 숙명적인 인간의 비극을 암시하고 있다.

  에우리피데스(Euripides, 기원전 약 480년 이전 ~ 기원전 406년)는 이전처럼 신과 영웅을 주제로 하지 않고 인간적인 욕망과 불타는 복수심이 지배하는 현세적인 이미지가 강하다. 고독한 성격으로 여성을 혐오했던 <오이디푸스 왕>처럼 일방적인 운명의 희생이 아니라 인간적인 사랑과 원한에 얽힌 애증에 기초하는 <메데이아>를 대표작으로 남겼다.

그리스 희극은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 B.C. 448 ~ B.C. 380) 로 대표된다. 그는 <리시스트라테>에서 풍부한 유머와 우스꽝스러운 소동을 통하여 인간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건강한 정신을 잃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외에 이 시대작품으로 <이솝 우화>와 <플루타크 영웅전>이 전해온다.


2. 로마 문학

  원래 로마 인은 실질적인 국민으로서 강력한 군대를 조직하고 치밀한 법률을 제정하여 대제국을 건설했으나 장쾌한 신화세계와 웅대한 서사문학을 만든 그리스 인만큼 예술적 기질이 풍부하지 못했다.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정복당한 그리스는 오히려 광포한 로마를 문화로써 재정복했다>>고 말할 정도였는데, 한마디로 로마문학은 그리스 인들을 모방하는 수준이었다.

  로마 인들이 그리스의 선진문화를 모방하려고 노력한 것은 사실이지만 상호의 민족정신이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그리스의 문화 자체가 로마의 것이 될 수는 없었다. 즉 로마의 정신이 그리스처럼 고원하지 못한 것은 로마 인들의 의무와 규율성취를 생활모토로 하는 실용적인 국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 문학이 시적이라면 로마의 문학은 산문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모방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로마문학은 후세 유럽의 문학사상언어 등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 그리스 문학이 라틴어 번역을 통해서 보존되었기에 유럽사상의 매개체로서의 라틴문학의 역할은 높이 평가될 수 있다.

  이러한 라틴 문학사를 기원전 300년부터 기원후 100년까지 3단계로 나누어 관찰할 수 있는데 그 이후는 로마사회의 정치적 불안정과 병행하여 문학도 조락기에 들어선다.


   키케로 시대

  이 시기는 라틴문학 황금기의 전반부로 이 시기를 대표하는 사람은 로마 최대의 웅변가이자 산문의 대가인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기원전 106년 1월 3일 - 기원전 43년 12월 7일), 서정시인 카툴루스 (Catullus, 기원전 84년~기원전 54년), 정치가이자 산문작가인 케사르 (Gaius Julius Caesar, BC 100년 7월 12일 ~ 44년 3월 15일) 등이 있다. 특히 키케로의 지적 활동영역은 문학 비평 정치 사상과 철학 등에 걸쳐 다양했다. 그의 문체는 르네상스 휴머니스트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18세기 영국의 저술가인 기번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의 라틴 어는 아름다움과 고전적 취향으로 인해 <키케로 라틴>이라고 불린다.


   아우구스투스 시대(Augustus, BC 63 ~ AD 14)

  기원전 31년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면서 라틴문학의 진정한 황금기가 도래한다. 아우구스투스 대제는 새 제국에 정치적 안정을 가져오고 시와 산문의 발달에 알맞는 사회적 지적 풍토를 이루어놓았다. 로마문학은 서정시 분야에서 두드러졌다. 송시나 풍자시를 지은 호라티우스를 비롯하여 오비디우스 베르길리우스 등의 일급 시인을 배출했다. 그리스의 호메로스에 필적하는 베르길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후원을 받으며 로마의 건국 서사시인 <아에네이스>에서 호메로스의 서사시 전통을 이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가 주인공이 개인의 명예회복을 위해 투쟁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는 데 반해, <아에네이스>는 미래의 국가건설이라는 보다 원대한 목표를 쟁취하려는 인물로 그려진다. 도시 출신 오비디우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 중에서 변형(변신)에 관한 내용 246편을 모은 그리스로마 신화집 <변신 이야기>에서 그리스의 서정시인 사포를 계승했다.

  로마의 시 이론가인 호라티우스는 그리스의 서정시인 알카이오스와 사포의 시풍을 모방한 풍자와 위트유머가 담긴 서정시를 썼다. 그는 고대의 모범적인 정신에 이성적 규범을 두어 문학에 질서와 조화를 도모한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백)은 시대

  이 시기의 문학작품은 이전 시대에 비길 바가 못되고 문학은 점차 쇠퇴했다. 이 시기에 폭군 네로의 가정교사였던 세네카는 철학적 에세이와 비극작품을 저술하여 르네상스 이후의 프랑스 영국에 영향을 미쳤다. 이런 흐름을 거쳐 로마문학은 결국 중세 초까지 이어져 내려왔고, 그리스 문학은 전적으로 라틴 전통 속에 포함되어 르네상스에 이르러 재발견되었다. 그후 <고전적>인 전통은 특히 17세기 작가들이 주제와 문체에서 그리스와 로마 작가들을 그대로 본받을 정도로 강력했다.

극 서정시 풍자시 역사 전기 산문 등 문학의 모든 주요 분야가 고대 그리스로마 작가들에 의해 이미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후에 발전한 분야는 대부분 이것으로부터 파생된 것에 불과하다.


3. 중세문학

  암흑기의 중세문학은 라틴어 문학과 각국어(속어) 문학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라틴 어는 지식인의 공통어로서 교회의 기도설교 대학강의 저술 등에 사용되었다. 각국어는 당시 라틴어에 대해 속어라고 불렸는데, 그것은 대부분의 유럽 인구가 지역적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의 일반대중은 라틴 어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호소하는 문학은 대중들이 사용하는 일상용어로 씌어져야만 했다.


   라틴문학

  라틴문학은 한마디로 성직자에 의해 씌어진 기독교 계통의 문학이다. 그래서 소설이나 설화와 같은 순수한 문예작품보다는 교회 역사 서간 등에 관한 종교적이고 공식적인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독창적이지 못했다. 파리대학 교수였던 아벨라르와 그의 애인 엘로이즈 사이의 <왕복서신>, 성 프란체스코의 생애를 그린 <작은 꽃>, 왕자들의 일화를 모은 <황금전설>등이 여기에 속한다.


   속어문학

  라틴문학에 비해서 속어문학은 그 주제의 다양성에 비추어 중세의 대중에게 크게 호소력을 갖고 있었다. 중세의 속어문학은 대체로 세 집단, 즉 기사문학, 도시민의 문학, 일반서민문학으로 구분되어 생각할 수 있다. 이 가운데 기사문학이 그 주제 내용 형식에 있어서 가장 풍부하여 중세문학의 큰 줄기를 이루었다.

  기사문학은 귀족들의 취향에 맞게 작품화되었는데, 그 형식은 <영웅서사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영웅서사시의 대표작으로는 영국의 <베어울프> <아서 왕의 이야기>, 독일의 <힐데브란트의 노래> <니벨룽겐의 노래>, 프랑스의 <롤랑의 노래> 등이 있다.

  이중 <아서 왕의 이야기>는 6세기 무렵 켈트 족의 전설적인 왕 아서 (Arthur)와 원탁기사단의 활약상에 관한 이야기다. 전설에 의하면 아서 왕은 브리튼 왕인 아버지가 마법사의 도움으로 귀부인과 동침해서 태어난 아이다. 젊어서 브리튼 왕이 된 아서는 보검 엑스칼리버를 얻어 이 칼로 여러 나라를 평정한다. 그는 귀족의 딸 기네비아를 왕비로 삼고 왕비를 조카인 모드레드에게 맡긴 채, 로마 원정을 떠났다.

  그러자 조카는 그의 부재중 왕위와 왕비를 빼앗았다. 아서는 원정을 중단하고 귀국하여 모드레드를 처단했으나 자신도 치명상을 입고 불가사의한 섬 애벌론으로 떠난다.

  이것이 대강의 줄거리인데 여기에 원탁의 기사단 150명의 건국 이야기와 그들의 활약과 사랑, 그리스도가 최후의 만찬 때 사용하고 아리마태아 요셉이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가 흘린 피를 받았다는 잔인 성배의 행방을 탐색하는 이야기 등 여러 전설을 총칭해서 아서 왕의 전설이라 하는데, 이 전설을 소재로 수많은 작품이 만들어졌다.

  프랑스의 대표적 무훈시 <롤랑의 노래>는 스페인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샤를마뉴 대제의 조카이며 지휘관인 롤랑이 피레네 산중에서 사라센 군에게 포위되어 장렬하게 전사하고 샤를마뉴 대제가 이를 복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독일의 대표적인 영웅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는 2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반부에서는 주인공 지그프리트의 죽음, 후반부에서는 그의 부인인 크림힐트의 복수를 다루고 있다. 괴테는 이 작품을 <<이 시는 국민이 어느 정도의 교양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야 하는 없어서는 안될 작품>>으로 평가한 바 있다.

  그리고 초서 페트라르카 보카치오 같은 몇몇 위대한 시인들과 작가들은 중세의 말기에 출현하여 중세사회를 탁월하게 해설함과 동시에 르네상스 문학의 주제와 형식을 암시했다.


4. 르네상스 시대

  1453년 터키가 그리스 문명의 마지막 보고인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자 많은 학자들이 그들의 필사본을 들고 이탈리아 전역으로 피신했는데, 이들에 의해 고대문화가 유럽에 전파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재생>이라는 의미의 르네상스 (Renaissance)는 그리스 로마의 원전을 통해 고대정신, 즉 중세의 신학에 눌려 있던 인간성에 바탕을 둔 학문과 예술의 부흥을 의미한다. 이러한 르네상스의 사상적 측면은 <휴머니즘>으로, 이는 좁은 의미로는 그리스 로마의 고전에 대한 관심을 상기시키는 운동이며, 넓은 의미로는 현세의 인간사 및 지상에 있어서의 인간의 역할에 대한 관심을 깨우치는 운동이었다. 그것은 인간성을 고양하면서 세속생활을 강조하고 개성을 표현하며 비판정신을 기르는 경향이었다. 

  이러한 고대정신을 이어받은 르네상스가 질서와 균형을 미학의 원리로 삼는 고전주의로의 길을 열었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중세적 종교관과 우주관을 극복하고 학문 전분야에 <인간> 중심의 변화를 가져오게 한 이 르네상스는 그 본류를 이탈리아에서 찾고 있다.

   이탈리아

  그 이유는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면서 고도로 발달한 그리스의 인적 물적 유산이 로마로 흘러 들어 오면서 문예중흥의 분위기가 성숙되고, 여기에 문예를 숭상하는 메디치가의 집권, 사회적으로 자본을 축적한 상공인들의 득세, 문화적으로 높은 교양과 학식을 추구하는 지식인들의 정열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정신적 태동을 알리는 첫 작품이 단테의 <신곡>이다. 단테는 중세의 모든 학문을 총괄하고 그리스의 호메로스와 로마의 베르길리우스가 쌓은 장편 서사시의 전통을 계승하여 불멸의 고전 <신곡>을 저술했다.

  아직 중세적인 신앙의 굴레를 완전히 벗지 못한 <신곡>은 악을 물리치고 선을 행하려는 인간적 의지에 바탕을 두고 있다. 특히 연옥에서 죽은 자들과의 만남은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는 인간의 세속적 희망을 보게 한다. 단테는 신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의지가 조화를 이룬 곳이 천국임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에게 삶의 빛을 던져주고 있다. 그러나 그가 인간을 탐구하는 데 있어서의 마지막 보루는 여전히 종교적 신앙이었기 때문에 단테를 완전한 인문주의자로 평가하는 데는 무리가 있어 그를 <최후의 중세인>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단테의 이러한 중세적 분위기를 벗어던진 사람이 <최초의 근대인>으로 평가되는 페트라르카이다. 그는 중세적인 문화를 철저히 배격하고 고대의 발견을 통한 인간중심 사상을 학문연구의 바탕으로 삼았다. 젊은 시절부터 베르길리우스나 키케로를 탐독하면서 이탈리아 어로 아름다운 서정시를 써서 사람과 자연을 노래했다. 그는 그의 애인인 라우라에게 보낸 많은 서정시들을 담은 <칸초니에레>를 남기고 있는데 인간적인 사랑과 고독, 삶과 죽음 등 국민 대중의 정서를 담은 노래로 천재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보카치오도 역시 고대문학 탐구에 열정을 보인 휴머니스트로 산문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당시 지식인의 덕목인 고전연구를 통해서 높은 교양을 쌓고,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인간탐구에 몰두했다. 그는 삶을 영위하는 인간이 존재하는 한, 삶을 사랑해야 하며 삶을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인 관점에서 정상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인간의 현세적인 삶을 중시한 태도로 인생에 대한 올바른 성찰과 이해, 나아가 몽테뉴적인 <삶의 지혜>에 대한 촉구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상은 수세기 동안 기독교가 지배했던 당시의 전통에 비추어볼 때 세속적이고 이단적이었다. 특히 <데카메론>은 전통적인 중세적 종교관을 외면하고 세속적 의미를 부여한 근대소설의 시조였다. 그런 의미에서 단테의 <신곡>을 <신적인 희곡>으로 부르고,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을 <인간적인 희곡>, 즉 <인곡>으로 부른다.


   프랑스

  이렇게 찬란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를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한 나라는 프랑스다. 그리스의 문학예술이 로마를 거쳐 이탈리아에 전수되고 이어 프랑스에 영향을 주었다.

  프랑스 인들은 이탈리아에 활짝 핀 문학과 예술, 풍요로운 삶등 고대문화의 향기에 심취했다. 더욱이 프랑수아 1세가 세운 <왕립학사원>에는 신학문에 매료된 젊은 학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본격적으로 고전을 연구하기에 이르렀고, 이탈리아처럼 라틴어와 그리스 어를 배우는 것이 학자들의 덕목이자 교양의 필수조건이 되었다.

  프랑스 휴머니즘의 기수 라블레는 의학을 공부한 수도 성직자로서 고전연구에 몰두하는 한편 전국을 누비며 다양한 경험과 교양을 쌓고 견문을 넓혔다. 그는 단순한 학자나 의사가 아니라 모든 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갖춘 휴머니스트로서 예리한 비판의 소유자가 되었다. 그의 개혁정신이 더욱 빛나는 것은 현학적인 공허한 논리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낙천적인 미래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는 거인 가르강튀아와 그의 아들 팡타그뤼엘 및 동료들의 모험을 다룬 익살스럽고 풍자적인 이야기인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이라는 사회풍자 작품을 남겼다. 작품이 외설스럽고 반 종교적이라 하여 이 작품은 금서가 되기도 했고 작가는 당국으로부터 탄압을 받기도 햇다.

  한편 인간 본래의 모습과 권위를 회복하기 위한 인문주의자들의 노력은 기존의 전통과 마찰이 불가피했는데, 그 충돌이 정치적으로 시민혁명과 농민전쟁이었고, 신앙적인 면에서는 종교전쟁이었다. 결국 승리는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투쟁의 고삐를 늦추지 않은 휴머니스트들에게 돌아갔지만 이에 따른 정신적 피해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16세기의 정신적 위기상황에 인간의 양식을 믿은 지혜로운 철학자 몽테뉴의 출현은 다행한 일이었다. 그의 위대한 사상은 휴머니스트들의 지나친 독단과 편견, 그리고 중세적인 봉건적 사고방식 모두에 대한 현명한 판단과 처방이었다. 휴머니즘의 철학적 성찰의 원천을 고대에서 찾은 그는 정치와 종교에 예속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독립된 개체, 자유의지에 바탕을 둔 인간을 성찰의 대상으로 삼았다.

  3권으로 된 그의 <수상록>은 인생과 철학윤리에 대한 깊은 명상과 삶에 대한 사색으로 자신의 진실된 모습을 그려나가고 있다. 개인적인 독서로 보편적인 진리를 더듬어나가는 그의 삶의 태도는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자문 속에 함축되어 있다. 

  라블레로부터 시작된 프랑스 휴머니즘이 때로는 황당무계한 거인들이 철갑을 둘러친 봉건영주의 성곽과 교회를 신나게 두드려 부수는 일에 박수를 보내기도 했으나, 이 같은 과격함에 자성과 자제를 촉구하고 나선 것이 몽테뉴다. 그는 이러한 무모한 행동보다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 지혜를 인생의 덕목으로 삼았다.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는 보편적인 지혜, 그 예지가 그가 말하는 <삶의 기술>이다. 이렇게 절제된 정신적 분위기는 16세기를 극복하고 고전주의로 향하게 하는 힘이 된다.


   영국

  영국의 르네상스는 프랑스와는 달리 이탈리아와의 간접적인 관계라는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탈리아와는 지리적으로 격리된 상태였고, 5세기경의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에 따라 독일문학의 영향이 더 컸다.

  영국 르네상스의 선구자 초서는 <데카메론>의 영향을 받아 <캔터베리 이야기>를 남겼다. 켄터베리 대성당 안의 성지를 참배하는 순례자들의 이야기를 모은 것으로, 순례자 집단에는 왕과 거지를 제외한 중세를 구성하는 모든 계층의 인물들을 등장시켜 당시 사람들의 가치 풍속 습관 등을 자세히 보여주는 한편 그들에게 살아서 숨쉬는 성격을 부여했다.

  세계문학사에 우뚝 선 셰익스피어의 출현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극문학 발전에 획기적인 전기가 되었다. 그의 연극은 사실 근대적인 극적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어 고전주의 문학에서 다루는 것도 무방하다. 그는 연극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인간 내면세계의 극한을 추구했고, 시적 표현으로 가득 찬 최고의 운문을 보여주었다.

  영국이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는 셰익스피어는 인간의 내면을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예리하게 그렸다. 특히 언어의 마술사인 작가의 절묘한 표현과 철학적 주제가 잘 어우러진 <4대 비극>은, 진실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최대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인간의 장대하고 비극적인 세계>를 제시했다.

  영국 문예부흥기의 최후의 대시인인 밀턴도 1667년에 천지창조와 낙원추방 신화를 대서사시로 형상화한 걸작 <실락원>을 남겼다. 번연은 청교도로서의 신앙체험의 문제를 우화형식으로 형상화한 일종의 종교소설 <천로역정>을 발표하여 영국 근대문학 발전에 기여했다.


   독일

  독일 지방의 학자들은 이탈리아 휴머니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나 나름대로 독자적인 지적 발전을 이루어나갔다. 이탈리아 유학에서 고전학을 배운 로이힐린은 독일 휴머니즘 운동의 두드러진 지도자였으며 <독일의 불사조>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그는 구약성서 해석을 위한 히브리 어 연구에 그의 삶을 바쳤다. 1506년에 출판한 히브리 문법은 그 계통의 최초의 것으로서 북방의 학계에 큰 자극을 주었다.

  히브리 어로 출판된 서적에 대한 탄압은 당시의 풍조여서 이를 공공연히 반대한 그는 이단으로 몰려 6년 동안 종교재판을 받게 된다. 그의 문제를 둘러싸고 신학자들과 휴머니스트 사이에 오고 간 오랜 논쟁은 자유탐구와 보수적 권위와의 싸움이었으며, 새로운 휴머니스트들의 학풍이 중세적 전통에 도전하는 과정을 상징했다.

  한편 네덜란드의 에라스무스는 <우신예찬>에서 여신 모리아가 이 세상에 어리석음이 얼마나 가득한가를 헤아려보고 자신의 힘을 뽐낸다는 이야기를 통해 교회와 세상에 대한 풍자를 담아냈다.

  스페인의 세르반테스는 동시대의 작가 셰익스피어가 <우유부단한 햄릿 형>의 인물을 창조한 반면, <저돌적인 돈 키호테 형>적 인간을 그려냄으로써, 이후 문학사에 전형적인 두 성격 유형을 각인시켰다. 그의 <돈 키호테>는 돈 키호테의 모험과 좌절을 통해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체험하는 인문주의적 인간의 자기발견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리스와 로마의 고대문학은 중세라는 침체기를 거쳐 이탈리아에 전수되었고, 르네상스 기에 들어와 인간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인간과 세계, 인간과 종교적 질서의 모순에 대해 눈을 돌렸다는 것은 하나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그러나 점차 시민정신이 함양됨에 따라 개인적 욕구는 사회적 혼란을 불러와 국민의 불안을 초래했으며, 그 결과 국가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중앙집권적인 절대군주 시대의 출현을 가져왔다. 이로써 정치는 물론이고 문학에 있어서도 절도를 미덕으로 삼는 고전주의 전통이 확립되었다.


5. 17--18세기 고전주의 문학

  17세기를 <천재의 세기>, 18세기를 <이성의 세기>라고 표현하는 것은 이 시 대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면이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문학은 인간의 개성과 감정을 자유로이 표출하는 자유분방한 문학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성으로 17--18세기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영국 독일 등에서 이성과 절도를 존중하는 고전주의가 생겨났다. 고전주의란 한마디로 그리스로마의 고전작품을 영원불멸의 모범으로 삼아 합리주의적 이성, 자연의 모방, 규칙의 존중, 균형과 조화, 합리성과 형식미를 특징으로 하는 문학이다. 이후 고전주의는 이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낭만주의와 함께 2대 문예사조를 이룬다.


   프랑스

  고전주의 문학은 프랑스에서 가장 성행했는데, 그중에서도 1660년경부터 약 200년간에 걸쳐 활약한 3대 고전주의 작가, 즉 비극작가인 라신코르네유 희극작가인 몰리에르가 대표적이다. 다행히 절대군주 루이 14세는 르네상스 기의 혼란을 가혹한 탄압으로 평정했으면서도 문예에 깊은 관심을 보인 문학 애호가여서 문인들의 후원자가 되었고, 지식인 문인 귀족계급들은 상류사회에 배타적인 사교계를 형성하여 세련된 언어로 그들의 관심사인 문학과 예술정치를 논했다. <살롱>을 중심으로 한 이러한 지적 모임은 고전주의 문학의 바탕을 이루는 인간심리 탐구의 길을 열어놓았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프랑스 고전비극의 창시자로 간주되는 코르네이유는 <르 시드>에서 가문의 명예 때문에 서로 원수가 된 사랑하는 남녀를 주인공으로 하여, 자유의지가 정념보다 명예를 선택하고 고매한 행동을 관철하도록 하는 과정을 인간 내면의 갈등을 통해 그려내어 획기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르 시드>는 전대미문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론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를 시기한 동료들로부터 <삼단일 법칙> 등 고전극의 규칙을 지키지 못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어 유명한 <르 시드>논쟁이 벌어지자 그후 3년간 붓을 꺾기도 했다. 그리스 고전극이 요구했던 <삼단일 법칙>이란 단 하루 동안에 일어난 단일한 사건을 한 장소에서 마무리해야 한다는 외적 규제장치를 말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유래한다.

  프랑스 고전규칙을 엄격히 지킨 순수비극은 라신에 와서 완성된다. 일찍이 코르네유의 연극을 제반 규칙에 어긋나는 부자연스러운 작품이라고 평한 그답게 단일한 사건에 시간과 장소라는 의적 규제를 통해 내적 필연에 이르게 하는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했다. 그에게 있어서 고전비극의 엄격한 규칙은 전혀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이 아니라 그 자체를 의식할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틀이었다.

  그의 비극은 대부분 소재를 그리스나 로마에서 빌어오고 극적 논리를 고대모방에 둠으로써 고전극의 전형을 이루었다. 더구나 논리적 귀결이 만들어내는 내적 필연은 인간적 파멸로 치달아 고도의 긴장감을 자아낸다. 코르네유의 비극이 자기 운명을 극복해 나가는 위대한 영웅의 모습을 통해 인간정신과 의지의 승리를 그렸다면, 라신은 그 운명과 정면으로 대결하여 파국에 이르는 비극적이고 장엄한 인간의 모습을 그렸다. 이 파멸이 곧 순수비극의 미학원리인 내적 갈등의 폭발이다.

  그의 <페드르>는 한 인간의 정열이 그 자체의 논리적 필연에 의해 의지와는 무관하게 어떻게 최후의 폭발점을 향해 치닫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밀도와 집중 그리고 엄밀한 구성이라는 프랑스 순수비극의 이상을 보여준다.

  라신이 인간의 보편적인 내면의 진실을 비극을 통해 구현한 데 비해 몰리에르는 같은 주제를 희극을 통해서 실천했다. 웃음을 통해 인간 내면의 진실을 드러내는 작업, 그것은 사물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과 탐색, 그리고 기지와 지혜, 표현방식이 문제가 되는데, 그의 연구 대상은 인간의 우스꽝스러운 약점과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다. 잘난 체하는 여자, 위선자, 현학자, 엉터리의사, 구두쇠 영감 등이 위선과 자기기만의 희생물들이다. 그의 대표작 <타르튀프>는 고전희극의 모범으로 개인과 사회의 갈등이라는 현대적 문제를 선구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영국

  영국의 고전주의는 엘리자베스 시대에 싹트기 시작하여 18세기에 개화한다. 프랑스 고전주의의 영향을 받아 정치 종교뿐 아니라 문학에 엄격한 형식을 부과하는 합리적인 이성이 존중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영국의 고전주의는 경직된 프랑스에 비해 훨씬 개방적이고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셰익스피어는 <삼단일 법칙>을 무시하다시피 했지만 벤 존슨은 고대작가들의 모범을 좇아 <삼단일 법칙>을 본격적으로 적용하기 시작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내면적 진실의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개인마다 현실에 달리 적응하는 심리적 특질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인간성격을 지배하는 기질이다. 그는 이러한 기질적 특성을 상반되는 성격을 가진 인물들의 충돌과 화해, 때로는 모순을 통해 구조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17세기의 대표적인 극작가 드라이든은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의 고대문학을 번역하는 한편, 그들의 문학규범을 대담하게 지킨 희극비극 등 27편의 작품을 썼다. 그는 영웅비극이라는 프랑스적 순수비극에 도전해 고전주의의 전통적 주제인 사랑과 명예를 조화롭게 다루었다.

  19세기 대표적인 작가는 포프이다. 그리스나 로마의 고전을 모범으로 삼아 문학에 간결 명료한 표현과 견고한 구성을 주려고 했던 그는 전형적인 이성존중의 <비평론>과 <인간론>을 썼다. 이 두 작품은 고전주의 문학정신이라고 할 이성존중과 귀족정신을 기리는 철학적 교훈시다.

  이밖에도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와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는 사실적 묘사와 참신한 문학정신으로 근대소설의 전형으로 평가 받고 있다. 디포는 최악의 자연조건을 극복하는 인간의 위대한 모습을 통해 청교도의 낙관주의적 삶의 철학을 보여주었고, 스위프트는 걸리버의 환상적인 여행을 통해 당대의 부르주아 사회와 정치적 모순을 풍자하고 있다.

  영국의 고전주의는 프랑스에서와 같이 형식적 논리에 전적으로 매달리지는 않았지만, 고대문학에 대한 동경과 관심, 그리고 지향이 꾸준히 계속되면서 포프에 이르어 절정을 이룬다. 그러나 새뮤얼 존슨 이후 차츰 쇠퇴하기 시작하여 19세기에 결국 낭만주의에 자리를 내주고 만다.


   독일

  독일문학에서 말하는 고전주의 시대는 프랑스와 영국의 고전주의가 쇠퇴하는 시점인 18세기 말 계몽주의의 발흥과 함께 시작된다. 인간중심의 세계관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가져왔고, 이러한 의식의 전환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이 존중되는 합리주의 정신, 즉 개인의 자각을 불러왔는데, 이것이 계몽주의 사상의 출발이다.

  1770년경 지나치게 이성만을 요구하는 계몽주의에 반대하여 인간의 자유로운 감정을 바탕으로 무미건조한 형식적 규제를 타파하고 문학에 자율과 개성을 부여한 것이 <질풍노도 Strum und Drang>다. 합리와 규칙의 존중이 아니라 인간의 본능적인 감정에 우위를 둔 이러한 질풍노도 운동을 주도한 것은 헤르더였고, 그와 교우관계에 있던 레싱과 괴테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본능적인 힘과 감정의 폭발에 예술적 형식인 균형과 질서, 즉 균제로 고전주의 미학을 확립한 것이 괴테와 실러였다. 괴테를 결정적으로 예술에 눈뜨게 한 것은 이탈리아 여행을 통한 고대예술과의 만남이다. 이탈리아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그는 <<나는 이탈리아에서 다시 태어났다>>고 실토했다. 그는 이 여행을 통해 절도와 균형이 예술적 조화를 이루는 고전미학을 발견한 것이다. 이로써 그의 젊은 시절을 사로잡았던 질풍노도적인 취향은 극복되었다.

  괴테 개인의 성장사일 뿐만 아니라 세계문학의 보배인 <파우스트>는 괴테가 젊은 질풍노도 시대로부터 출발하여 고전주의를 거쳐, 만년의 종합적 완성기에 이르는 전생애를 담고 있다. 즉, 괴테 자신의 모든 인생체험과 사상을 바탕으로 인간존재의 방황 갈등 구원 등의 문제를 해결해보려는 거대한 노력의 산물로, 이 작품의 메시지는 인간은 자기향상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방황하지만, 이것을 계속하는 한 결국에는 하늘에 의해 구원된다는 그의 종교관을 반영하고 있다. 우리는 이 작품에서 인간영혼의 구원과 구원을 향한 구도자로서의 괴테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청년기에 괴테와 함께 질풍노도 운동에 참가했던 실러는 괴테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고 셰익스피어 레싱 루소 등을 탐독했다.  처음에 사회적 부패와 정치적 압제에 반항하며 자유와 이성에 불탔던 그의 정신은 괴테와 교유하면서 차츰 문학적 성숙으로 변모해간다. 그의 <도적들>과 <돈 카를로스>는 작가의 자유이념과 정치이상을 잘 구현하고 있는 작품으로, 고매한 인격으로 이상국가를 실현하려는 인간적 믿음과 사랑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러한 실러가 46세로 요절하자 괘테는 절망감에 빠져 <<내 인생의 절반을 잃었다>>고 비통해했다한다.                        

  이와 같이 합리주의 정신에 바탕을 둔 이성존중의 계몽주의가 질풍노도와 같은 정신적 반동을 거쳐 질서와 균형이라는 고대의 규범에 승복하여 미학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러한 독일의 고전주의 경향은 19세기 초까지 계속되다가 곧 낭만주의 문학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6. 19세기 전반 낭만주의 문학

  18세기 말부터는 종래의 고전주의에 반대하여 개성과 독창성을 존중하는 낭만주의가 개화했다. 낭만주의는 이성보다 감정, 형식보다는 내용, 보편성보다는 특수성, 규범보다는 개성, 현실보다는 상상의 세계를 중시하고, 자연과 민족민중에 대한 깊은 애정을 그 본질로 한다고 할 수 있다. 1930년대에 절정에 달했던 낭만주의는 19세기 말의 상징주의, 예술 지상주의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었다. 

  당시 유럽 전역에 가득했던 낭만주의의 조류에 편승하여 러시아도 서양문학에 참여하게 되며 19세기 후반에는 우수한 장편소설로서 세계문학에 이바지하게 된다.


   프랑스

  프랑스에서도 19세기 전반을 지배한 것은 낭만주의 문학이었으며 프랑스 혁명과 루소는 모든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 낭만주의는 특히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친 루소의 영향이 컸다. 프랑스의 낭만주의는 신비적인 경향의 흐름과 개인적 자유와 사회개혁에 대한 옹호를 나타내는 두 가지 흐름이 있었다.

  신비적인 비합리성의 대표자로 샤토브리앙은 크리스트 교의 신비와 대중의 신성한 순진함 속에서 우주의 가장 장엄한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그는 이성의 인간을 위험으로부터 구제하여 신앙의 시대로 되돌리려 했다.

  한편 프랑스 낭만주의의 자유롭고 개인주의적인 면은 뮈세 상드 위고 뒤마 등의 작품에서 잘 표현되었다. 뮈세는 이지적인 면보다는 감정과 기분을 마음대로 표출하여 프랑스의 바이런으로 통했다. 어려서부터 시적 재능을 발휘하여 위고의 격려를 받기도 했던 그는 여류 소설가인 상드와 이탈리아로 사랑의 도피여행을 떠났으나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후 그는 수년 동안 <밤>이란 일련의 아름다운 서정시를 발표했다.

  상드는 목가적인 아름다운 전원생활에 관한 소설을 써서 많은 독자들을 매료시켰다. 농민이나 노동자를 소설의 주인공으로 한 최초의 작가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한 그녀는 결혼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여권을 주장하기도 했다.

  프랑스 낭만주의의 대표적 작가이자 열렬한 민주주의자인 위고는 그의 인도주의적 세계관과 기독교적인 사랑이 담긴 <레 미제라블>에서 한 인간의 사소한 죄가 영웅적인 인내로써 어떻게 보상되는가를 그려냈다. 만년에는 신에 봉사하고 신의 품안에서 인간의 완성을 도모하는 인도주의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1885년 최초로 국민장으로 치러진 그의 장례식 때 상젤리제에서 소르본까지 추도 행렬이 줄을 이었고, 지금은 <위대한 영광의 판테옹>에 안장되어 있다.

  한편 역사소설의 대가인 뒤마의 <몬테 크리스토 백작>은 오늘날에도 많이 읽혀지고 있다.


   영국

  영국 낭만주의의 위대한 선구자는 워즈워스와 콜리지다. 워즈워스는 자연에 대한 깊은 신비적인 사랑을 표현했다. 자연의 표면적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력을 결합시키는 보편적 정서로서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그리고 콜리지는 신비적이고 환상적인 시를 지었다.

  영국의 3대 낭만주의 작가는 키츠 셸리 바이런이다. 키츠는 옛 그리스 작가들이 미와 선을 동일시한 것처럼 미와 지를 동일시했다. 미는 진리요, 진리는 미라고 믿었다. 무신론자라는 이유로 옥스퍼드 대학에서 추방당했던 셸리는 후에 젊은 시절의 과격한 극단론을 수정하긴 했으나 불의를 미워하고 행복과 자유에 대한 갈망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사슬 풀린 프로메테우스>에서 인간의 완성은 사상과 행위의 완전한 자유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었다.

  10세에 남작 칭호를 이어받은 바이런은 셸리보다 더 도발적이며 모험적인 시인으로서 위선과 사회적 속박을 조소한 사람이었다. 자연과 아름다움을 찾아 유럽 일대를 방랑한 그는 대표작 <돈주앙>에 낭만주의 정신을 잘 나타내고 있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갑자기 유명해졌다>>라는 말이 통할 정도로 낭만적인 기질을 생래적으로 타고난 시인이 바이런이었다.

  시와 산문에 다 같이 능했던 왕당파인 스코트는 프랑스의 위고처럼 과거의 인물이나 전설 등을 소재로 소설을 썼다. 스코틀랜드의 전설을 주제로 한 시와 모험담인 <아이반호>는 특히 중세생활을 생생하게 재현함으로써 동시대인의 감흥을 돋구었다.

  한편 독신 여류작가 오스틴은 <오만과 편견>에서 엘리자베스와 다시라는 두 주인공이 <오만>과 <편견>의 줄다리기를 하는 동안 인간성이 완성되어간다는 이야기를 통해 가정과 여성의 삶, 그리고 결혼을 통해 시대적 반향과 내면의 성찰을 함께 드러내보이고 있다. 그리고 후에 등장하는 사실주의 수법을 예고했다.


   독일

  독일은 18세기 후반에 고전주의 작가 괴테와 실러 시대에 동시적으로 낭만파 운동이 힘차게 일어났다. 질풍노도 운동과 관련된 독일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괴테와 실러다. 두 사람은 극과 시에서 질풍노도 운동이 일으킨 격랑을 휠씬 뛰어넘었다. 괴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학시대>라는 낭만파 최고의 안내서를 지었다. 실연한 젊은이의 감상적인 사랑의 이야기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괴테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 소설로 전 유럽의 독서계를 강타했다.

  29세의 나이로 요절한 초기 낭만주의의 대표적 시인인 노발리스는 <밤의 찬가>에서 산문과 운문을 혼용해 신비로운 밤과 죽음을 예찬했고, <하인리히 폰 오프터딩엔(푸른 꽃)>은 신비에 가득찬 현실의 원래 모습에 대한 동경의 상징으로 주인공 하인리히가 찾아나서는 <푸른 꽃>은 낭만주의 문학의 상징이 되었다.

  정통적인 유대교 신자에서 크리스트 교로 개종한 부모 밑에서 성장한 하이네도 바이런처럼 사회에 대한 반항아였으며 셸리와 같은 훌륭한 서정시인이었다. 그는 자유로운 개인주의를 표방했으며 메테르니히 체제하의 보수주의에 맹렬한 비판을 가했다. 그는 전 생애를 통해 인류의 해방전쟁사업에 헌신하는 한편, 젊은이의 고뇌와 비통이 표출되어 있는 <노래의 책> 등, 그의 아름다운 서정시는 비견할 바 없는 부드러움과 우수를 담고 있어서 슈베르트나 멘델스존에 의해 음악으로 옮겨졌다.


   미국

  미국의 역사는 17세기 초부터 시작되지만 문학 측면에서는 대륙 낭만주의의 영향과 국내의 정치적 안정에 힘입어 19세기에 와서야 미국문학이 개화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미국문학은 그 뿌리를 영문학에 두었기에 대륙에 대한 식민지적 열등감이 오랫동안 잔존했다. 

  미국문학의 아버지인 어빙은 <스케치 북> 등을 통해 역사가 짧은 미국사회보다 낭만적인 분위기가 남아 있는 구대륙의 풍물을 그려냈다. 그리고 쿠퍼는 개척지를 무대로 문명과 자연의 대립, 백인 개척자와 원주민 인디언의 숙명적인 대립을 로맨틱한 모험 이야기로 표현했다.

  미국의 지성 에머슨은 하버드 대학에서 행한 <미국의 학도>라는 강연에서 지성인들에게 <미국의 지적 독립선언>으로 평가되는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는 <자연론> 등을 통해 인간 내부의 신성함을 주장하여 자기신뢰에 바탕을 둔 낙관적인 정신풍토를 확립했다. 에머슨의 사상을 대담하게 발전시킨 휘트먼은 시집 <풀잎>을 남겼고, 미국 문인들 중 세계문학에 미친 영향이 가장 크다는 시인 애드거 알란 포는 고도의 수사적 운률적 기교를 사용하여 서정적이며 쓸쓸한 가을 석양에 빛나는 청정한 호수와도 같은 순수한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그의 시 <에너벨 리>는 가장 널리 애송되는 시 중의 하나다.

  천재적인 작가 나다니엘 호손은 <주홍글씨>에서 간통을 했다는 이유로 가슴에 <A(adultery, 간음)>자를 달고 다녀야 하는 여인과, 간통으로 함께 괴로워하다 결국 죄를 고백하고 죽는 딤스데일 목사를 통해 당시의 엄격한 청교도 사회와 죄의식으로 얼룩진 인간영혼의 어두운 심연을 매우 음울하게 그렸다.

  <톰소여의 모험>과 함께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마크 트웨인의 작품이다. <톰소여의 모험>의 후편격인 이 작품은 일명 <미시시피 강의 오디세이>라고도 하는데, 미시시피강을 배경으로 한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 주인공의 타고난 순수함과 선량함이 타락한 사회와 벌이는 갈등을 보여준다. 죽음과 삶, 자유와 구속, 개인과 사회라는 명제를 재미있고 감명깊게 그리고 있다.

  그리고 멜빌은 인간과 고래의 싸움에 깊고 풍부한 의미를 부여한 <백경>을 썼으나, 당시에는 너무 어려워 완전히 묵살당했다가 20세기에 들어와 재평가되고 있다. 이들 작가들은 문학의 불모지인 아메리카에 유럽의 낭만주의를 수입하여 모방과 수정을 통해 미국적인 낭만주의를 완성했다.


6.19세기 후반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1830년대부터 20세기 초까지 서구세계의 지배적인 문예사조는 사실주의 realism였다. 고전주의는 이제 완전히 후퇴하고 낭만주의도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그 기세가 약화되었다. 꿈과 신비, 그리고 환상적이고 신비스러운 것에 잠기기를 좋아하는 낭만주의자들의 태도는 현실 속에서 인간성찰을 하는 데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첫째 사실주의는 낭만주의의 지나친 감상에 대해 반대했다. 낭만주의의 지나친 상상력에 비하여 사실주의에서는 묘사의 정확성이 강조된다. 그리고 낭만주의가 현실을 도피하여 역사성과 과거를 중요시하는 데 비해 사실주의 당대의 현실을 취급한다. 그것은 오직 <지금 그리고 여기에> 현존하는 삶의 모습에 관심이 있다. 비록 한 작가가 취급하는 경험이 과거의 일이라 해도 그것은 반드시 현재의 삶과 유기적인 연관성을 맺고 있을 때만 가능하다.

  둘째, 사실주의는 심리문제 또는 사회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작가들은 인간행위의 상충하는 경향들을 상세히 분석했으며, 환경의 좌절을 극복하기 위한 개인의 투쟁을 충실하게 묘사했다. 문학작품은 이와 같은 깊은 사회의식을 가지게 됨으로써 일종의 고발문학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셋째, 사실주의 작가들은 대개 당시의 유행하는 과학이론 내지 철학이론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점이다. 일부 작가들은 인간이 환경과 유전의 희생물이라는 <결정론>의 입장을 취하는가 하면, 다른 일부 작가들은 인간의 본성이 대체로 짐승과 같은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동물적 성질을 갖고 있다는 <진화론>에 동조하고 있었다. 또 다른 일부 사람은 사회개혁의 정열에 불타서 산업혁명이 초래한 사회악과 불평등을 규탄하는 작품을 썼다.

  이처럼 이상주의적 낭만주의가 진실을 왜곡하고 현실을 소홀히 한다는 비판에 근거한 사실주의는 그것을 극복하고 일상적이고 세속적인 현실과 그 안에 숨어 있는 진실을 문제 삼았던 것이다.

  한편 자연주의란 사실주의와의 구분이 분명치 않지만(동의어로 보기도 함) <사실주의의 한 강화된 형태>, 또는 <사실주의의 최후의 연장>으로 생각하면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다. 자연주의에서는 인간은 환경과 유전법칙에 지배당하는 동물이라는 관념을 전제로 하는 경우가 있다.


   프랑스

  리얼리즘 문학의 새로운 징조는 먼저 프랑스에서 나타났다. 특히 스탕달 발자크 플로베르 졸라 모파상등은 새로운 문학사조를 대변했으며 전세계적으로 광범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사실주의 문학의 선구자인 스탕달은 사실주의의 작품인 <적과 흑>에서 주인공 쥘리앵 소랠이 가진 야심의 좌절과 옥중에서 성취되는 그의 내면적 구제를 통하여 역사를 통찰하는 작가의 리얼리즘과 그 역사를 넘어서는 낭만주의를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발자크는 그의 모든 작품을 모은 <인간희극>에서 19세기 전반기 프랑스의 도시와 시골생활을 그렸다. 거기서 그는 주로 만년 부르주아 계급의 무식 탐욕 야비함을 적나라하게 그렸다. 그의 소설은 인간행위의 숨은 동기를 노출시키고 상류사회의 매끈한 외관속에 숨겨진 부패를 폭로했다. 그중 <잃어버린 환상>은 나약한 성격의 젊은 주인공의 삶의 궤적을 통해 한 인간상을 인상 깊게 부각시키는 동시에 이미 자본주의 초기에 접어든 프랑스 왕정복고기의 사회상을 파노라마처럼 보이는 풍속소설의 하나다.

  코르네유에서 라신에 이르는 동안 비극의 내적 논리가 발전되었다면 소설에 있어서의 내적 논리는 발자크에서 플로베르에 이르는 기간이라고 볼 수 있다. 플로베르는 자료조사를 중요시하는 사실주의자들의 최초의 스승이었다. 그의 걸작 <보바리 부인>은 인간타락에 대한 냉철한 분석으로 낭만주의적인 꿈과 일상적인 현실과의 괴리를 말함으로써 낭만주의 생활철학의 부적당함을 비판했다.

  졸라에 의해 사실주의는 자연주의 naturalism 이라는 극단적인 표현형태로 발전되었다. 자연주의는 과학적 객관성을 주제에 적용하고 소설 속의 주인공을 마치 실험실의 동물처럼 다루려는 것이었다. 인간의 동작 하나하나가 유전이나 환경에 의해 숙명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환경결정론>의 성격을 띤다. 자연주의 작가들은 당시의 과학발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젊은 시절에 가난에 쫓긴 졸라는 일반인과

사회정의에 대한 깊은 동정을 지니게 되었다. 그의 주제는 흔히 알콜 중독, 악성유전, 빈곤과 질병 등과 같은 사회적 문제를 둘러싼 것이었다. 세계역사에서 진실의 승리로 기록되는 <드레퓌스 사건>시 졸라는 <나는 고발한다>라는 공개서한을 발표하고 진실규명에 앞장섰다.

  졸라와 함께 자연주의자이자 플로베르의 조카인 모파상은 300편 이상의 단편과 6편의 장편을 통하여 인류의 미덕과 악덕을 다함께 묘사했다. 그는 인류에 대해 담담하고 냉소적인 태도를 지니면서 소설의 주인공을 풍자적인 기지로 묘사하는 한편, 그의 이야기를 칭찬이나 비난을 가미하지 않고 전개하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결론을 내리도록 했다.

  아나톨 프랑스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문장을 구사한 지성적인 문인이었다. 그는 숙명론을 체념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인간 드라마의 희비를 성찰하고 인간의 과오를 관용하려 했다. 그러나 드레퓌스 사건 때는 졸라와 함께 투쟁하여 불의를 간과하지 않았다.


   영국

  이 시기는 영국에서는 빅토리아 여왕 재위기간(1837--1901)이다. 이 당시 영국은 생활수준이 급속히 향상되고 과학기술이 발전하는 경제대국이었다. 사회적으로도 사회윤리가 확립되고 고고한 도덕의식이 충만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정신을 잘 표현한 시인은 테니슨이다. 계관시인인 그는 영국인의 감상, 형식의 존중, 깊은 진지함, 자의식 등을 이해했다는 점에서 인기를 얻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대표적 소설가인 디킨스의 작품에는 사회비판의식이 흐르고 있는데, 특히 중산층의 일상생활과 산업팽창의 지나친 사회악과 불의에 항거하는 개인들, 가난한 사람들의 투쟁을 생생히 묘사하고 있다. 그의 <위대한 유산>은 여러 사회적 요인에 의해 인간의 삶이 어떻게 영향을 받을 수 있는가를 문학적으로 보여주는 고전이다.

새커리는 영국의 상류계급을 탁월한 기지로 풍자했고, 크리스트교적 사회주의자인 킹슬리는 <올턴 록크> 등의 작품을 통해 노동계급에 동정하는 사회비평적 태도를 분명히 했다. 여류작가인 조지 엘리어트는 인간 감정 및 고통이 인간성에 미치는 효과 등에 대해 관통하는 능력을 발휘했다. 

에밀리 브론테의 유일한 작품인 <폭풍의 언덕>은 요크셔의 황야를 무대로 펼쳐지는 격정과 증오를 다룬 작품으로 풍부한 상상력이 돋보인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작가들은 점점 사실주의적 경향을 뚜렷이 했다. 그중 가장 비관적인 소설가는 하디였다. 아름다운 남영국의 시골에서 산 그는 평생 동안 부정적인 인생관을 지녔으며, 그의 소설은 시골사람들의 전원생활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보이고 있으나, 결국 인간이란 운명과 환경에 의해 좌우되는 존재임을 표현했다. 그의 대표작 <테스>에서 테스라는 젊은 여인이 비정한 인간사회에 던져진 채 세파에 시달리며 겪어야 하는 고초는 독자들로 하여금 삶의 의미에 대한 원초적인 물음을 던지게 한다.


   독일

  독일에서는 하우프트만의 드라마와 토마스 만의 소설에서 리얼리즘을 찾아볼 수 있다. 하우프트만의 사회극은 노동계급이 빈곤과 싸우는 과정이라든지 고용자에 의해 혹사당하는 노동자의 모습을 주제로 한 것이었다. 토마스 만은 상징과 신화를 이용하여 현대인간의 정신상태를 조명하고 현대 서구문명을 상징적으로 비판했다. 대표작으로는 <마의 산>이 있다.

  괴테와도 비교되는 켈러는 일찍이 유물론적 경향을 띠어 모든 낭만적 요소를 청산하고 이 지상에서 현실을 상대로 하는 문학을 건설했다. 그는 자전적 장편소설 <녹색 옷을 입은 하인리히>라는 교양소설을 남겼다.

  그밖에 노르웨이 출신의 입센은 <인형의 집>에서 사랑 없는 결혼의 부도덕성을 공격하여 중산층에 큰 충격을 주었다.


   미국

  <여인의 초상>을 쓴 헨리 제임스는 인간동기에 대한 상세한 분석을 시도했고, 미국 자연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알려진 하월즈는 근대문학의 목적은 인간과 자연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데 있다고 밝혔다. 미국의 졸라라는 칭호를 받았던 드라이저는 예술의 사회적 목적을 강조하고 예술과 도덕성을 완벽하게 일치시켰다.


   러시아

  19세기 초의 러시아의 작가 푸시킨은 러시아의 바이런이라고 일컬어지는 낭만주의 시인이었다. 그는 러시아 풍경미를 서정시로 묘사하고 민속담에서 시의 원천을 발견했다. 일상생활을 주제로 하여 대중의 사랑을 받은 그는 소설을 쓰기도 했는데 그것은 사실상 러시아 최초의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푸시킨보다 약간 더 젊은 고골리는 <사신>이란 소설을 썼는데 러시아의 전원생활을 풍자한 것이었다.

  위대한 러시아 문학은 19세기 중반 이후에 투르게네프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에 의해서 창조되어왔다. 이들의 작품경향은 사실주의라고 분명히 지칭할 수 없으며, 낭만주의 사실주의 이상주의가 융합되어 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파리에서 대부분의 생애를 보낸 투르게네프는 서양사회에 처음으로 알려진 최초의 러시아 소설가였다. 그의 대표작인 <아버지와 아들>은 과학적 사회이념을 가진 젊은 세대와 현상유지를 위한 낡은 세대 사이의 갈등을 묘사한 것이다. 주인공은 허무주의자로서 사회의 전 질서가 아무런 가치조차 없다고 주장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심리소설의 대가였다. 28세에 혁명운동의 죄목으로 시베리아 탄광에서 6년의 중노동 생활을 했던 그는 나중에 빈곤과 가정불화, 그리고 간질병 등으로 고생했다. 그는 하층민의 비참한 생활을 리얼리즘 수법으로 묘사했다. 동시에 그는 인간의 영혼이 고통으로 정화된다는 깊은 신비주의적 신념을 표현했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과 <죄와 벌>은 그의 명성을 세계적으로 떨치게 했다.

  <전쟁과 평화>에서 1812년의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원정을 통해 러시아 사회를 묘사한 톨스토이는 도스토예프스키처럼 강력한 운명 앞에 나약한 인간상을 그렸다. <안나 카레니나>에서는 1870년대의 러시아 사회의 도덕적인 모럴을 배경으로 한 여인의 불륜적인 사랑과 그 비극적인 종말을 그리고 있다. 공산적 무정부주의자이며 소박한 생활을 예찬한 그는 <부활>에서는 더욱 더 사회복음적 설교를 하여 문명을 비난하고 단순소박한 육체노동을 권하고 있다.


7. 19세기 말 상징주의

  대부분의 문학유파가 그러하듯이 상징주의도 이전 문학운동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문예사조라 할 수 있다. 1890년대는 당시의 사실주의 시대의 버팀목이던 실증주의와 과학만능 사상이 흔들리면서 유럽은 일대 정신적인 공황상태에 빠지게 된다. 당시 유럽 각국에는 정신적 퇴폐와 염세적인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 도덕과 신앙 및 기타 일체의 권위와 전통에 대하여 회의적이었고 찰나적인 향락으로 도피하는 풍조가 생겼다. 문학상 이 시기를 가리켜 <세기말>이라 하는데, 데카당스 댄디즘 탐미주의 등이 그것이다.

  이는 자연주의 문학이 현실의 부정적인 측면 묘사에 치중한 나머지 구원의 길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아름다운 인간성을 질식시켰던 것이다. 영혼의 세계를 상실해버린 고답파 시의 무감동성, 자아의 분열을 자초하는 세기말적 병리현상 등에서 야기되는 정신적 무정부 상태 속에서 유럽의 지식인들은 새로운 모럴과 문학적 이상을 탐색했다. 소위 영혼의 초월적인 상태와 절대적인 이상세계에 대한 갈망을 이론으로 내세운 문예사조가 상징주의다.

  상징주의는 예술의 순수성과 음악성, 즉 순수시의 실현을 목표로 삼고 있는 문예사조로서, 시를 통해서 수정같이 아름답고 별처럼 고결한 영혼을 가꾸고자 했다. 이러한 상징주의는 특히 프랑스에서 강하게 일어났다.


   프랑스

  자타가 공인하는 상징주의의 선구자는 보들레르다. 그는 사상의 폭과 깊이에 있어서나 시의 형식적 음악적 성과에 있어서 세계문학사에 근대시의 개화를 가능하게 해준 시인이다. 상징주의의 지침서이자 현대시의 모체가 된 그의 <악의 꽃>에는 <만물조웅>편이 있는데, 여기서 <자연은 하나의 신전>이라는 우주감각과 <향기와 빛과 울림이 서로 응답한다>는 공감각 시법을 노래했다.

  보들레르를 선구자로 해서 프랑스 상징주의는 세 줄기의 계보를 형성하면서 발전하게 된다. 즉 보들레르를 정점으로 그 바로 밑에는 베를렌, 랭보, 말라르메의 세 위대한 시인이 위치한다. 베를렌은 보들레르가 지닌 시의 보고에서 주로 <감정>의 세계를 물려받아 완벽한 표현과 음악적인 서정시를 완성시켰다. 

  그리고 랭보는 보들레르가 지닌 <감각>의 세계를 물려받아 언어의 주술성과 체계적인 환각을 시에 도입, 환상적인 시를 완성하여 후에 상징주의는 물론 초현실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마지막으로 말라르메는 보들레르가 지닌 시적 가치 중에서 주로 <지성>의 영역을 물려받아 완벽한 절대의 세계를 추구하고 사상의 정제화와 언어의 순수화를 이룩해 지성적인 시를 완성시켜 본격적인 상징주의 시인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고, 그후로는 발레리와 클로델에게까지 시의 근본적인 젖줄을 대주었다.


   영국

  영국에서는 <런던 야경>의 작가 시먼스가 <문학에 있어서 상징주의 운동>을 통해서 상징주의를 소개했다. 이책을 통해 상징주의와 친밀해진 예이츠나 엘리어트는 상징주의의 새로운 영역을 열어주었다.

  오스카 와일드는 <<예술이 인생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 예술을 모방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여 <예술을 위한 예술>을 내세웠다. 아울러 도덕적사회적 기준을 도외시한 순수한 아름다움의 추구를 강조했는데, 대표작으로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과 희곡 <살로메>가 있다.


   독일

  영미와 마찬가지로 독일문학도 프랑스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협의의 독일 상징주의는 1890년부터 약 20년간으로 간주된다. 심각한 현실과 현존재의 불행을 재현하는 자연주의가 지배하던 시기에 앞 세대의 자연주의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던 젊은이들이 순수예술을 주장했다. 그리고 그 전세대가 배격했던 꿈이나 상징을 문학의 대상으로 복귀시키고 예술 자체의 영역 안에서 새로운 문학적 현실을 창조하려 함으로써, 언어 그 자체를 더욱 중요시하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그들은 새로운 시적 언어와 영적 자발성에 대한 찬미 등을 추구하게 되는데, 이러한 추구가 상징주의를 받아들이는 토양이 되었다.

  독일의 상징주의는 비평가인 바르가 <자연주의의 극복>을 써서 상징주의를 소개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한편 말라르메와의 정신적 접근과 니체의 사상적 감화 등을 통하여 독일적인 상징주의의 형식을 가장 명확하게 형성한 시인은 게오르게로서 그는 시집 <영혼의 1년>을 남겼다.

그리고 호프만슈탈의 <치인과 죽음>, 릴케의 <말테의 수기>등을 통해 상징주의는 본격화된다.


   러시아

  러시아의 상징주의는 1880년대의 전제 폭압정치에 대한 환멸, 나로드니키(인민주의)적 이상의 붕괴, 그리고 급속히 성장한 자본주의의 토양 위에서 일군의 시인들이 사실주의의 전통에 반발하면서 생겨났다.

  이렇게 생겨난 러시아의 상징주의는 크게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진다. 러시아의 전후기 상징주의자들은 현실을 외면하고 주관적 자아 속에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반사회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점에서는 유사하다. 그러나 전기의 상징주의자들은 프랑스의 상징주의에서 영향을 받아 출발했지만 후기의 상징주의자들은 러시아 서정시의 전통의식에서 출발하여 솔로비요프의 시의 이미지와 철학적 이데아를 수용하여 주관적이고 종교적인 신비감을 자아냄으로써 어느 정도 구별된다. 문학사가들은 메레즈코프스키, 브류소프 등을 전기의 상징주의자들로, 벨르이, 이바노프, 블로크 등을 후기의 상징주의자들로 분류한다.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촉발된 러시아의 상징주의는 그 내면화 과정에서 러시아 철학과 종교적 영향을 받아들여 러시아 특유의 상징주의가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상징주의는 내용의 미흡함과 지나친 개인주의에 매몰되어 급변하는 정치사회에 적응하지 못함으로써, 고리키 등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의 비난을 받으면서 서서히 소멸되어 갔다.


8. 20세기 현대문학


   모더니즘

  인류역사에서 20세기 전반기는 제 12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인명살상과 엄청난 문명파괴 앞에 인류는 한결같이 고뇌했다. 이런 격동 속에서 문학도 심하게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제1차 대전 기간 동안 문학가들은 인간성에 절망하여 침묵하는 가운데 젊은 세대는 반역과 부정을 외치며 열심히 새로운 길을 추구했다. 이런 상황에서 표현주의 미래파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인상주의 이미지즘 등이 발생하고, 제2차 대전 후에는 실존주의가 풍미했다.

  20세기 전반기의 이러한 모든 움직임을 모더니즘(modemism, 영미에서 주로 사용, 독일의 전위주의와 유사)이라 부르는데, 이는 19세기 사실주의^5.23^ 자연주의 유물론적 세계관을 벗어나려는 20세기 전반기 문학운동의 총칭이다. 뒤에 나오는 포스트 모더니즘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모더니즘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우선 모던이라는 용어 자체가 전통적 가치와 그 표현기법을 거부하는 경향을 띤다. 또한 객체보다는 주체, 외적 경험보다는 내적 경험, 집단의식보다는 개인의식을, 의식보다는 무의식을

강조한다. 이 때문에 프로이트와 융의 심리학이 모더니즘의 한 맹아가 된다.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작가로는 우선 에즈라 파운드 루이스 로렌스 엘리어트 등을 들 수 있다. <사랑하는 연인들>에서 로렌스는 대량학살에만 골몰하고 있는 현대문명의 원인을 산업화가 인간정신에 미친 영향에서 찾고자 했다. 그리고 전래의 소설계통을 배격하고 노동자 계급의 생활을 그린 자전적인 소설 <아들과 연인>에서 그는 신화와 상징에 주목하면서 개인과 집단의 재탄생이 인간적 노력과 정열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희망을 유지한다.

  해박한 고전지식과 뛰어난 지성의 소유자인 엘리어트는 <황무지>(1922)에서 현대문명의 질곡을 정신적 공허감과 삶의 소외에서 추적했다. 로렌스와 마찬가지로 엘리어트는 종래의 시전통을 배격하고 신화와 상징에 주목했다. 그러나 자기극복에 의해서 개인과 집단의 재탄생이 가능하다고 주장한 점에서 로렌스와 다른 견해를 표명했다.

  로렌스와 엘리어트와는 달리 파운드와 루이스는 극단적인 정치적 입장을 표명했다. 두 사람은 민주주의를 위선적인 것으로 격하시키면서 경제적 이념적 조작이 현대사회의 결정적 요소라고 주장했다. 파운드의 야심적이긴 하나 매우 난해한 <칸토스>와 루이스의 <메인 스트리트>는 그들의 대표작이다.

  <데미안>의 작가 헤르만 헤세는 정신적 방황과 혼미를 거듭하면서도 주옥같이 아름다운 시와 글을 썼다. 자전적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에서 소년시절의 즐거움과 슬픔, 희망과 절망을 절실하게 묘사하면서 학생들의 창조적 개성이 엄격한 교육제도 아래서 희생되는 비극을 감동적으로 그려냈다.

  한편 1차대전 직후인 1920년대의 문학사조는 냉소주의와 비극적 운명에 대한 비관론이 지배적이었다. <잃어버린 세대 Lost Generation>의 대표적 작가인 헤밍웨이는 <무기여 잘 있거라>에서 전쟁의 어리석음과 야비함을 표현했다. 포크너는 <음향과 분노>에서 미국 남부 콤슨 가의 붕괴를 조이스의 의식의 흐름의 영향을 받아 그 특유의 기법으로 그렸다. 우울한 로맨티시즘과 부와 권력에 대한 강한 관심을 보인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도 이 시기의 작품이다.

  그리고 독일의 토마스 만은 <마의 산>에서 인간의 삶 속에 내재하는 죽음과 인간의 존재 등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깊이 파헤쳤다. 세계문학사에 <의식의 흐름>을 새겨넣은 대표적 모더니스트인 조이스는 자전적인 소설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새로운 소설기법을 사용하여 주인공의 인생에 대한 도약과 그의 예술세계 창조를 향한 웅비를 잘 표현했고, 정신분석학의 깊은 영향을 받아 <율리시즈>라는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프랑스의 프루스트는 15년 동안 병실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성했는데, 여기서 그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시간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예술적 창조의 고뇌와 환희를 묘사했다. 베토벤을 흠모했고, 여성의 인류애적인 사랑에서 구원의 빛을 보여주었던 <매혹된 영혼>의 작가 로맹 롤랑은 <장 크리스토프>에서 인간의 사랑이 인간들 사이의 불행을 제거하는 최상의 길임을 알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용의주도하게 묘사했다.

  프라하의 유대인 카프카는 <성>에서 문이 굳게 닫혀 있는 성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헤매는 주인공 K를 통해 단순히 차별받는 유대인의 현실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중사회 속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어가는 인간존재의 암울함을 고발했다.

  1930년대에 이르러 현대문학은 새 국면에 들어섰다. 경제적인 대공황은 문학의 방법과 목적을 재검토하도록 했다. 경제적 붕괴와 파시즘과 전쟁의 위협 속에서 문인들은 창작활동을 통해 무엇인가 적극적인 의미를 발견하고자 했다. 사회고발적인 성격을 띤 문학은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에서 나타나는데, 여기서 그는 현대사회 속에서 역경으로 내몰리는 빈곤한 농부들의 모습을 묘사했다.

  헤밍웨이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많은 사람들의 대의명분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것이 개인의 의미와 존엄을 찾는 것임을 강하게 시사했다. 펄벅의 <대지>, 미첼 여사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도 이 시기의 작품에 속한다.

  1940년대에는 실존주의적 경향도 가세했다. 노벨 문학상을 거부했던 마지막 휴머니스트 사르트르가 쓴 <구토>(1938)는 형이상학적 소설로, 사르트르 초기 실존주의의 단초를 보여주었다.

  2차대전 후의 혼란하고 무질서한 정신적 풍토 위에 <부조리의 철학>이라는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기초로 사회정의를 실현하려 했던 카뮈의 대표작 <페스트>는 페스트가 상징하는 악과 억압에 대해 인간의 집단적 반항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인간간의 연대감이 증대되고, 상호간의 공감만이 인류평화에 도달하게 할 수 있다는 카뮈의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분명하게 담고 있다. 이 시기에 러시아의 파스테르나크는 러시아의 몰락해가는 인텔리의 비극을 그린 <닥터 지바고>를 써서 <전쟁과 평화>에 필적하는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러시아의 반체제작가 솔제니친도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1962) 등을 써서 노벨상을 수상했다. 독일의 귄터 그라스는 <양철북>(1959)에서 세 살 때 키 그대로라는 특이한 주인공의 눈을 통하여 20세기 전반기의 독일 소시민 계층의 몰락과정과 나치의 과거를 극복하지 못한 전후 서독사회를 형상화했다. 

  한편 위와 같은 모더니즘은 반지성적이고, 서양세계를 지배해왔던 이성이나 도덕보다는 정열과 의지를 더 중시했다. 그러나 <저항문화>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모더니즘도 점차 대학강단이나 도서관 또는 미술관과 같은 제도권으로 흡수됨으로써 이제 저항문화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채, 오히려 제도권 문화로 탈바꿈했다. 그리하여 리얼리즘은 물론 모더니즘에 대해서 불만을 가졌던 작가와 예술가들은 전자매체가 압도하는 후기 산업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었다. 더이상 편협하고 폐쇄적인 모더니즘의 한계 안에서 안주할 수는 없었다. 이같은 분위기 속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포스트 모더니즘(건축분야에서 처음 사용)의 기운이 태동했다.


   포스트 모더니즘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20세기 후반은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다원화되고 상대화된 가치관이 팽배해 있는 시기다. 또한 이 시대는 엄청난 물질적 풍요와 비참한 기근이 동시에 존재하며 심각한 환경파괴, 주체의 급속한 해체, 그리고 문화의 상품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러한 독특한 시대상황은 이 시대를 관통하는 통일된 문화전통이나 예술사조를 언급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런 와중에서 1960년대 들어 구조주의와 포스트 모더니즘(post modemism)이 등장한다.  

  구조주의는 프랑스에서 1960년대 초 실존주의의 뒤를 이어 나타난 현대사상의 한 조류로 그 범위는 매우 넓어서 철학 문학 민족학 정신분석학 등 다방면에 걸친다. 이 사상의 특징은 인간과 자연에 나타나는 표면적인 현상보다 그 배후에 있는 심층적인 구조를 밝혀내어 보편적인 법칙을 발견하고 이 법칙을 근거로 다양한 현상을 파악하려 한다.

  그러나 문학에 있어 구조주의는 창작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순수문학 이론상의 사조이기 때문에 다른 문예사조와는 달리 구조주의 계열에 속하는 소설 시 등의 문학작품이나 작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편 후기 산업사회의 문명에 대한 위기의식과 이성 중심주의에 대한 반발로 태동한 포스트 모더니즘은 절대성보다는 상대성을, 일원론보다는 다원론을, 독단주의보다는 관용주의를 그 속성으로 한다. 그러나 포스트 모더니즘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포스트 모더니즘과 모더니즘과의 관계에 대한 두 가지 관점, 즉 <후기 모더니즘(부흥의 포스트 모더니즘)>과 <탈 모더니즘(저항의 포스트 모더니즘)>을 이해해야 한다.

  <부흥의 포스트 모더니즘>은 포스트 모더니즘을 모더니즘의 계승 발전형태로 보고, 모더니즘이나 낭만주의와 동일선상에 놓고 있다. 반면 <저항의 포스트 모더니즘>은 포스트 모더니즘을 모더니즘에 대한 단절과 반작용으로 파악하고 있는 견해로, 모더니즘이나 낭만주의와는 새로운 문학사조를 이해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반된 견해들로부터 두 가지 입장을 동시에 수용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포스트 모더니즘이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적 반작용일 뿐 아니라, 동시에 모더니즘의 논리적 계승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포스트 모더니즘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모더니즘의 기본입장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여 극단적인 형태로 발전시키는 한편, 다른 측면에서는 모더니즘과 상충되는 입장을 보이기도 한다.

  이들 상호간의 공통점은 전통과의 단절, 불확정성 본절과 파편화, 반리얼리즘, 전위적 실험성,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재검토 등을 들 수 있고, 상호간의 차이점은 이데올로기적인 대립의 종식, 자아와 주관성에 대한 새로운 입장, 합리주의와 상대성에 대한 새로운 자각, 주변지역의 중심화 임의성과 우연성, 장르의 확산과 탈 장르화 등을 들 수 있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포스트 모더니즘은 모더니즘에 뿌리를 둔 문학 조류이면서, 동시에 그에 대한 비판적 반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포스트 모더니즘 작품을 들면 윌리엄 비로스의 <익스터미네이터>, 노머스 핀천의 <V> <중력의 무지개>, 존 바드의 <미로에서 길을 잃어> 등이 있다.

  이상으로 서양문학사를 거대한 흐름 속에서 조망해보았으나, 현재 이 순간에도 문학의 양상과 내용에 대한 다각적인 논의와 실험을 계속되고 있다. 서양문학의 흐름을 정리하면서 신곽균 최순목 조한경 김동규 님의 글을 많이 참고했음을 밝혀 둔다.

  <참된 목표가 없으면 우리의 영혼은 그 열정을 그릇된 목표에 쏟는다.> (몽테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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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3대 비극작가 

(출처:http://daheeaesthetics.tumblr.com/post/100667171205/%EA%B7%B8%EB%A6%AC%EC%8A%A4-3%EB%8C%80-%EB%B9%84%EA%B7%B9%EC%9E%91%EA%B0%80)


아이스킬로스 (B.C. 524~456)


소포클레스와 에우리피데스를 포함한 고대 그리스 3대 비극 작가 중 최초의 인물이라고 불린다. 참주정(권력을 가진 한 사람이 절대 권력을 행사한 정치.) 시대에 태어나, 아테네와 페르시아 사이에 벌어진 페르시아 전쟁과 마라톤 전투, 살라미스 해전에도 참가한다. 많은 전쟁에 참전했던 그의 경험과 전쟁에서의 영감들이 많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는 합창과 낭송만으로 이루어진 초기의 극예술을 대사와 행위가 어우러진 완전한 형태의 극예술로 끌어올린 사람이다. 또한 그는 한 명의 배우와 코러스만으로 구성되었던 당시 그리스극에 한 가지 역할 이상을 하는 제 2의 배우를 도입하였고 당시 50명이었던 코러스의 수를 12명까지 줄여 역할을 축소시켰다. 코러스의 비중이 컸던 그리스 극은 아이스킬로스에 의해 인물과 인물간의 대사 중심인 완전한 극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그는 또한 통일된 주제로 3부작을 발전시켰으며, 유혈 장면을 없애고 화려한 무대장치, 그리고 단역을 도입시킴으로서 우리가 알고 있는 오늘날의 비극의 토대를 닦았다.


기원전 456년 시실리의 겔라를 방문하게 되는 그는 이곳에서 7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독수리가 그의 머리에 거북이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즉사했다고 하는데,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다.


아이스킬로스의 대표작


Persai(페르시아인들), Hepta epi Thebas(테베를 공격하는 일곱 사람), Hiketides(탄원자들),Oresteia 3부작 Ⅰ. Agamemnon(아가멤논), Ⅱ. Choephoroi(코에포로이), Ⅲ. Eumenides(자비로운 여신들), Prometheus desmotes(결박된 프로메테우스)


소포클레스 (B.C.496~406)


아이스킬로스 및 에우리피데스와 더불어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소포클레스는 고향 아테네가 문학적,정치적,경제적으로 절정을 향하여 발전해가고 있던 B.C.5세기에복잡하고 모순된 경험을 다른 비극작가들보다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심오하게 표현했다.그는 아테네에서 해마다 열리는 디오니소스 대축제에서 상연할 희곡을 쓰고 때로는 직접 역을 맡아연극에 출연하면서 생애의 마지막까지 65년을 보냈다.


아이스킬로스의 3부작 형식을 각각 완전한 형식을 갖춘 3편의 희곡으로 바꾸었고, 아이스킬로스는 배우 2명을 택했지만, 그는 여기에 3번째 배우를 추가하여 극적 갈등의 범위를 넓혔고, 합창단의 비중을 줄였다. 이러한 혁신은 비극의 근본적인 기법과 격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 혁신을 통하여 소포클레스는 그의 독특한 표현수단,응집력과 지속적 긴장감을 지닌 상황 속에서 다양한성격묘사와 의미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1시간 남짓한 복합극을 완성할 수 있었다.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소포클레스를 다른 비극작가들보다 높이 평가하고<오이디푸스 왕>을 그의 대표작으로 선정한 것은 바로 이처럼 완벽한 형식 때문이다.


소포클레스의 대표작


Aias(아이아스), Trachiniai(트라키아 여인들), Antigone(안티고네), Oidipous Rex(오이디푸스왕), Oidipous in Kolonos(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Electra(엘렉트라), Philoktetes(필록테테스)


에우리피데스 (B.C484~406?)


에우리피데스의 작품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있는 완전하거나 완전에 가까운 극의 수는 19편이다.그 가운데 <퀴클롭스>는 이른 바 사티로스 극으로, 이런 종류의 것으로 남아있는 단 한 작품이다.다른 비극작가보다 그의 작품들이 훨씬 더 많이 보존된 이유는 기원전 4세기 뒤의 압도적인 인기에서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안 되는 동안 세상의 유행이 뒤바뀐 것이다. 아테네의 정치 변화혹은 세상의 급격한 변화도 있었지만, 역시 이 시인의 세상을 앞선 사상이나 취향이 후에 붐을 일으킨주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시대의 젊은이로서 소피스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자연히 모든 면에서 인습적인 것에 대한합리주의적 비판과 반발이 그의 작품 속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에우리피데스는 작품의 제재를관습대로 신화와 전설에서 땄지만, 극 중 인물들은 신이나 영웅이라기보다 일상의 인간으로 그려져있다.따라서 그의 작품은 비극 아닌 비극이다. 신의 섭리와 종교관보다는 남녀간의 사랑, 질투 등이 더욱확연한 그의 작품세계 속 주제인 것이다. 특히 여성의 다양한 성격과 세밀한 심리분석, 묘사에 이르러서는고대 작가로서 그를 앞지를 사람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종교적 색채가 짙은 아티카의 비극 속에 너무나강하게 인간적 요소를 넣은 에우리피데스는 어떤 면에서는 비극의 정통을 깨뜨렸다는 비방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넓은 시각으로 보면 그는 새로운 문학 조류의 선각자였으며, 그 점은 뒷날의 문학에 미친그의 절대적인 영향력에서 가장 잘 엿볼 수 있다.


에우리피데스의 대표작


Alkestis(알케스티스), Medeia(메데이아), Hyppolytos(히폴뤼토스), Heraklidai(헤라클리다이), Andromache(안드로마케), Hekabe(헤카베), Herakles(헤라클레스), Hiketides(탄원자들), Ion(이온), Troiades(트로이아 여인들), Electra(엘렉트라), Iphigeneia in Aulis(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 Iphigeneia in Taurois(타우리스의 이피게네이아), Helene(헬레네), Phoinissai(페니키아의 여인들), Orestes(오레스테스), Bakchai(박코스 여신도들), Kyklops(퀴클롭스)


* 431~403년도에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났고, 그 후 서서히 아테네는 몰락한다. 당시의 철학자들은아테네 부흥기에 일어난 오만과 탐욕, 만행으로 실망감을 느끼고 기존의 신적인 섭리에 회의를 갖게 되었다.따라서 에우리피데스의 작품들이 일상으로 들어간 것은 현대의 작품들,


ex)사무엘 베케트의 부조리극 /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 이후로는 서정시를 쓸 수 없다.” 는 발언/ 등과같은 맥락의, 출구없는 시대적 회의감 속에서 탄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및 자료와 수업:


위키백과


<시학> - 문예출판사 (아리스토텔레스, 천병희 옮김)


<그리스 비극> -동서문화사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곽복록 조우현 옮김)


OCTOBER 22,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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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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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Statue-Augustus.jpg

로마 황제

재위 기원전 27년 1월 16일 ~

14년 8월 19일

후임자 티베리우스

별칭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

신상정보

출생일 기원전 63년 9월 23일

사망일 서기 14년 8월 19일 (76세)

사망지 로마 제국 놀라

부친 가이아스 옥타비우스

모친 아티아 발바 카이소니아

배우자 클로디아 풀크라

스크리보니아

리비아 드루실라

아우구스투스(IMPERATOR·CÆSAR·DIVI·FILIVS·AVGVSTVS, 기원전 63년 9월 23일 ~ 서기 14년 8월 19일)는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재위 기원전 27년 ~ 서기 14년)이다. 또한 로마 제국의 첫 번째 황조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조의 초대 황제이기도 하다.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Gaius Octavius Thurinus)였으나, 카이사르의 양자로 입적된 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 라틴어: CAIVS IVLIVS CÆSAR OCTAVIANVS)로 불렸다. 기원전 44년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외할머니 율리아 카이사리스의 남동생이자 자신의 외종조부뻘인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유언장에 따라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어 그 후계자가 되었다. 기원전 43년, 옥타비아누스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군사 정권인 제2차 삼두 정치를 열었다. 삼두 정치를 행한 집정관의 한 사람으로서 옥타비아누스는 효과적으로 로마와 속주[1]를 지배하였고, 세력을 모아 히르티우스와 판사가 죽은 뒤 집정관에 재선되었다. 이후 제2차 삼두 정치도 깨지는데 다른 집정관이었던 레피두스는 유배되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진 뒤 자살하였다.


제2차 삼두 정치의 붕괴 후 옥타비아누스는 대외적으로 로마 공화정을 부활시키고 정부에 관한 권한은 로마 원로원에게 주었으나, 사실상 권력은 그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유일한 통치자가 다스리지만 대외적으로는 공화국 형태인 정치 체제의 기틀을 다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껍데기만 공화국인 이 나라는 훗날 로마 제국으로 불린다. 황제권은 옥타비아누스 이전에 로마를 통치했던 카이사르와 술라의 독재권과는 전혀 달랐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원로원과 시민들로부터 “독재권을 부여받았지만” 거절하였다.[2] 법에 따르면 ‘존엄자’(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원로원은 평생 동안 권력을 가지도록 하였고 “호민관 권한”(tribunitia potestas)을 가졌으며 기원전 23년까지 집정관을 역임하였다.[3] 아우구스투스는 재정적인 성공과 원정에서 얻은 물자, 제국 전체에 걸쳐 맺은 여러 피호 관계(clientela), 군인과 재향 군인의 충성, 원로원에서 부여한 여러 권한과 명예[4] 그리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 절대적인 권력을 누렸다. 아우구스투스가 가진 로마의 정예병 로마 군단 다수를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은 원로원에게 군사적인 위협이 되어 원로원의 결정을 억압하였고, 군사적 수단을 사용하여 원로원의 정적들을 제거하여 원로원이 자신에 복종하게끔 하였다.


아우구스투스의 통치는 로마의 평화라 불리는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계속되는 변방에서의 전쟁과 황위를 둘러싼 1년의 내전(기원후 69년)에도 불구하고, 지중해 세계는 두 세기가 넘게 평화를 지속할 수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의 영토를 넓혔으며 제국의 국경과 동맹국을 보호하였고 파르티아와 평화 협정을 맺었다. 그는 로마의 조세 체계를 개선하였고 파발을 위해 육로 교통망을 구축하였으며 상비군과 소수의 해군 그리고 황제의 친위대인 로마 근위대를 창설하였다. 또한 로마에 경찰청과 소방청을 설치하였고 로마 시의 상당 부분을 재개발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죽기 전에 자신의 업적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이것은 《아우구스투스 업적록》로 불리며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서기 14년 그가 죽은 직후, 원로원과 민회는 아우구스투스를 신으로 선포하였고 로마인들의 숭배를 받았다.[5] 이후 모든 로마 황제들이 그의 황제명인 ‘아우구스투스’와 ‘카이사르’를 이름으로 썼다. 또한 그를 기념하기 위해 기존의 "여섯 번째 달"(Sextilis)을 "아우구스투스"(Augustus)로 바꾸어 불렀다. 그의 황위는 의붓아들이자 양자인 티베리우스가 물려받았다.


목차  [숨기기] 

1 생애

1.1 초기 생애

1.2 권력을 향하여

1.2.1 카이사르의 후계자

1.2.2 안토니우스와의 첫 번째 분쟁

1.3 제2차 삼두 정치

1.3.1 로마 혁명

1.3.2 반란과 혼인 동맹

1.3.3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의 전쟁

1.3.4 안토니우스와의 전쟁

1.4 옥타비아누스에서 아우구스투스로

1.4.1 황제 아우구스투스

1.4.2 호민관 특권

1.5 대외 정책과 군사 작전

1.6 죽음과 후계 문제

2 기타

2.1 아우구스투스의 유산

2.2 세제 확립

2.3 8월 (Augustus)

2.4 건축

2.5 외모

3 관련 항목

4 출처

4.1 참고 서적

5 외부 링크

5.1 1차 사료

5.2 2차 사료

생애[편집]

초기 생애[편집]

그의 아버지는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이며, 원래 로마에서 4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벨리트라이라는 마을 출신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63년 9월 23일 로마 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소의 머리'라 불리는 곳에서 태어났는데 이곳은 포룸 로마눔과 매우 가까운 팔라티누스 언덕에 있던 곳이다. 옥타비우스는 아이를 들에 버리라는 점성가의 경고를 받았지만 무시하고 계속 키우기로 했다. 아이의 이름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Gaius Octavius)라고 지었다. 그러나 로마 시내가 북적거려 사람들로 넘쳐나자 어린 옥타비아누스는 아버지의 고향인 벨리트라이로 이사가 거기서 자랐다.


옥타비아누스는 회고록에서 자기 아버지에 대해 기사 가문 출신이었다고만 적었다. 그의 친증조부는 제2차 포에니 전쟁 중 시칠리아에서 군단 사령관을 맡았다. 그의 할아버지는 지방의 여러 공공기관에 재직하였다 한다. 아버지인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는 옥타비아누스가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마케도니아의 총독[6][7]을 지냈으며, 아이의 가명(家名)을 투리누스로 지었는데, 이 가명은 옥타비우스가 반란을 일으킨 노예들과 싸워 이긴 시칠리아의 투리이에서 따왔을 가능성이 크다.[8] 옥타비아누스의 어머니인 아티아 발바 카이소니아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조카딸이었다.


아버지 옥타비우스가 평민이었지만, 어머니 아티아는 카이사르의 조카딸로 귀족이었음에도 옥타비아누스는 평민층에 속하였다.[9]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어서야 비로소 귀족의 지위를 얻었다.


기원전 59년 옥타비아누스의 나이 네 살 때, 아버지 옥타비우스가 세상을 떠났다.[10] 얼마 안 돼 어머니 아티아는 시리아의 총독이었던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와 재혼하였다.[11][12] 필리푸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손이었고 기원전 56년에는 집정관을 역임하였다. 필리푸스는 어린 옥타비아누스에게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이로 인해 옥타비아누스는 누나인 소(小) 옥타비아와 함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누나이자 자신의 외할머니인 율리아 카이사리스의 손에서 자랐다.


기원전 51년, 율리아 카이사리스가 죽자, 옥타비아누스는 외할머니의 장례식에서 추모사를 낭독하였다.[11][13] 이때부터 어머니 아티아와 계부 필리푸스는 옥타비아누스를 단련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옥타비아누스는 4년 뒤인 기원전 47년부터 토가를 입게 되었고[11] 국가 사제단(Collegium Pontificum)에 선출되었다.[14][15] 다음 해에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가 세운 베누스 게네트릭스 신전에서 행해지는 그리스 경기를 관장하였다.[15] 다마스쿠스의 니콜라오스에 따르면,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아프리카 원정에 참여하고 싶었으나 어머니의 반대로 무산되었다고 한다.[16] 기원전 46년, 아티아는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히스파니아 원정에 참여하는 것에 동의하였는데, 이 원정에서 카이사르는 오랜 숙적이었던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아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싸우려 하였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병이 들어 원정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


병에서 회복한 뒤 옥타비아누스는 배를 타고 카이사르의 뒤를 쫓았으나 배는 곧 난파되었다. 육상으로부터 숙련된 정비사들이 와서 난파된 배를 수리한 후 원래 자신이 머물던 적의 영토에서 카이사르의 막사까지 배를 타고 횡단하였는데, 이 사건은 외할머니의 남동생인 카이사르에게 큰 인상을 주었다.[11]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는 카이사르가 옥타비아누스를 자기 마차에 동승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고 말하였다.[17] 로마로 돌아오고 난 뒤 카이사르는 새 유언장을 사제녀들과 함께 보관하였고 옥타비아누스를 자신의 제1 상속자로 낙점하였다.[18]


권력을 향하여[편집]

카이사르의 후계자[편집]


《카이사르의 죽음》, 장레옹 제롬이 1867년에 그린 것으로 기원전 44년 3월 15일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가이우스 카시우스가 주도한 옥타비아누스의 양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암살을 나타내고 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가 암살당할 때, 옥타비아누스는 일리리아의 아폴로니아에서 공부와 군사 훈련을 병행하고 있었다. 그는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군사들과 함께 마케도니아로 피신하라는 장교들의 조언을 거절하고 이탈리아로 가 자신의 잠재적인 정치적 세력을 규합하려 하였다.[19] 브룬디시움 근처에 있는 루피아이라는 곳에 상륙하고 난 뒤, 카이사르의 유서에 적힌 내용을 들은 옥타비아누스는 재산의 2/3를 상속받는 것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자신이 카이사르의 정치적인 진정한 후계자가 되기로 하였다.[20][19][15] 당시 카이사르에게는 살아 있는 적자녀가 없었기에[21] 그의 이손(離孫, 누이의 친손 및 외손)인 옥타비아누스가 제1 상속자이자 아들로 입양되었다.[22] 카이사르가 죽고 난 뒤 정식 입양된 옥타비아누스는 양부의 이름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를 쓰게 되었다. 로마 전통에 따라 그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이름에 ‘투리누스’ 대신 ‘옥타비아누스’(Octavianus)라는 가명을 붙여 자신의 출신 가문을 나타내었다. 아직 옥타비아누스가 당시 이 이름을 썼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존재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이 이름은 그의 출신을 명백하게 드러내게 하여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게 되었다.[23][24] 훗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가 옥타비아누스를 성적으로 총애했기 때문에 입양한 것이라며 강도 높게 비난하였지만, 이는 중상모략이었다는 의견이 있다.[25]


옥타비아누스가 로마 정국에 성공적으로 입문하려면 자신의 빈약한 재산에만 의존할 수 없었다.[26] 브룬디시움에서 카이사르의 병사들로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은 후,[27] 옥타비아누스는 파르티아와 싸우려고 카이사르가 충당했던 일부 자금을 요구하였다.[26] 이 돈은 브룬디시움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무려 7억 세스테르티우스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28] 옥타비아누스가 그 돈으로 원로원의 가장 큰 적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치려고 쓰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사라진 공금의 행방을 찾고 있었던 원로원은 이내 수사를 중단하였다.[27] 옥타비아누스는 그해에 다시 큰일을 벌였는데, 동방 속주에서 이탈리아로 보낸 조공을 공식적인 허가도 받지 않고 가로챘다.[24][29] 옥타비아누스는 과거 카이사르가 이끌던 정예병과 파르티아를 치려고 모은 군사들을 통해서 자신의 세력을 넓혔고, 특히 자신이 카이사르의 후계자임을 강조하며 많은 지지를 얻어냈다.[30][19] 그가 이탈리아 반도를 가로질러 로마로 이동할 때, 소문난 인품과 그가 새로 얻은 자금 덕분에 캄파니아에 주둔하고 있던 카이사르를 숭상한 옛 노병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24] 기원전 44년 6월까지 그는 3천 명의 충성스러운 노련한 병사들을 얻었고 봉급으로 5백 데나리우스를 주었다.[31][32][33]



20세기에 프리마 포타의 아우구스투스를 바탕으로 하여 그린 그림.

기원전 44년 5월 6일 로마에 도착한[24] 아우구스투스는 과거 카이사르의 부하였던 집정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만났다. 그리고 독재관 카이사르의 암살자들과 쉽지 않은 휴전 협정을 맺었다. 그해 3월 17일에 원로원은 이미 암살자들에게 특사령을 내렸으나 안토니우스는 그들 대부분을 로마에서 몰아냈다.[24] 카이사르의 장례식 때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복수를 외친 로마 시민의 지지를 얻어 암살자들을 몰아냈다.[24] 그러나 안토니우스도 많은 로마 시민과 카이사르 옹호자들의 지지를 잃게 되었는데, 그가 카이사르의 신격화 운동에 가장 먼저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34]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카이사르의 재산을 안토니우스에게 양도하겠다고 하였으나 무효가 되었다. 하지만 여름 동안 카이사르 옹호자들의 지원을 얻는 데 성공하였다.[35] 그해 9월 귀족파 출신의 웅변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연설에서 안토니우스를 원로원의 가장 큰 위험한 인물이라고 역설하며 극단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하였다.[36][37] 로마에서 인기가 떨어진 데다가 집정관 임기도 거의 끝나가자 안토니우스는 원래 카이사르의 암살범 가운데 한 명인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가 다스리다가 안토니우스에게 편입된 갈리아 키살피나를 통제할 모든 권한을 자신에게 일임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려 하였다.[38][39] 그동안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전임 병사들로 구성된 자신의 군대를 만들고 있었고, 11월 28일에는 안토니우스 휘하 두 개의 군단을 돈으로 현혹하여 쉽게 격파하였다.[40][41][42] 옥타비아누스의 막강한 군사력과 원로원으로부터의 공격 때문에 로마에 있는 것에 위험을 느낀 안토니우스는 갈리아 키살피나로 떠났다.


안토니우스와의 첫 번째 분쟁[편집]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갈리아 키살피나를 포기하기를 거부하자 안토니우스는 무티나에서 그를 완전 포위하였다.[43] 원로원에서는 안토니우스의 군사적 행동을 각하하는 법안을 서둘러 통과시켰는데 원로원에는 그에게 대적할 군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이미 군대를 소유하고 있었던 옥타비아누스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41] 또한 키케로는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의 출신에 관하여 조롱하는 것을 비호해 주기도 하였는데 키케로는 “요즘의 젊은이들 중 가장 전통적인 공경심을 지니고 있는 자이다.”라고 말하였다.[44] 키케로는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에게 “그대는 그대의 이름에 모든 것을 빚지고 있다.”라고 한 말을 들려주었듯이 이것은 안토니우스의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의견의 정면 반박이었다.[45][46] 과거 대표적인 반(反)카이사르파 원로원 의원인 키케로가 조작화한 이 동맹으로 원로원은 기원전 43년 1월 1일을 기해 옥타비아누스를 원로원 의원으로 임명하여 그는 전직 집정관들과 같이 투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41][42] 추가로, 옥타비아누스는 군대의 사령권을 부여받았는데, 이 권한은 옥타비아누스의 군령을 합법적으로 만들었고 곧 옥타비아누스는 당시 집정관이었던 히르티우스, 판사와 함께 무티나의 포위를 풀러 출병하였다.[47][41]기원전 43년 4월, 안토니우스군은 포룸 갈로룸 전투와 무티나 전투에서 패배하여 안토니우스를 갈리아 트란살피나로 퇴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두 집정관이 전사하자 옥타비아누스가 그들의 군대까지 지휘할 수 있는 대군의 단독 사령권을 손에 넣었다.[48][49]


안토니우스를 격파한 옥타비아누스 대신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엄청난 사례금을 준 후, 원로원은 집정관의 직속 군단의 사령권을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주려고 하자, 옥타비아누스는 이에 협조하지 않기로 하였다.[50] 심지어, 옥타비아누스는 포 계곡(Po Valley)에 주둔하면서 안토니우스에 대한 모든 공격적인 대응에 협조하는 것을 거절하였다.[51] 그해 7월, 옥타비아누스 휘하 백인대의 사절이 로마로 들어왔고 히르티우스와 판사가 남긴 집정관의 권한을 자신이 전부 받아야 함을 요구하였다.[52]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공공의 적으로 천명한 것을 무효화하는 포고문을 발표할 것을 요구하였다.[51] 그러나 이 요구가 거절되자, 그는 4만8천 명의 8개 군단을 이끌고 로마를 행진하였다.[51] 그는 로마에서 아무런 군사적 반대 세력을 만나지 않았고 기원전 43년 8월 19일 옥타비아누스는 집정관으로 임명되었고 친척인 퀸투스 페디우스는 공동 집정관이 되었다.[53][54] 한편, 안토니우스는 친(親)카이사르파인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동맹을 구축하였다.[55]


제2차 삼두 정치[편집]

로마 혁명[편집]


기원전 41년에 제2차 삼두 정치의 탄생을 축하하며 발행된 로마의 화폐 아우레우스에 새겨져 있는 안토니우스(왼쪽)와 옥타비아누스(오른쪽)가 새겨져 있다. 모두 “III VIR R P C”의 문구, 즉 “공화정의 조정을 위한 세 사람 가운데 하나”라고 새겨져 있다.[56]


기원전 18년경에 발행된 데나리우스. 앞면에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CAESAR AVGVSTVS), 뒷면에는 신성한 율리우스(DIVVSIVLIV[S])라고 새겨져 있다.

기원전 43년 10월, 볼로냐 근처에서 열린 회담에서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는 군사 독재 체제인 제2차 삼두 정치를 결성하였다.[57] 이 5년간의 명백한 월권 행위는 비공식적이었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제1차 삼두 정치와 달리 평민들에게 통과된 법안에 따라 크게 지지받았다.[58][57] 3명의 집정관은 300명의 원로원 의원과 2,000명의 기사 계급 출신을 범법자로 규정하고 추방 명령을 내렸으며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만약 그들이 국외 탈출을 기도하면 그들을 잡아 처형하였다.[59]세 집정관들은 카이사르의 암살자인 마르쿠스 브루투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곧 싸우기 위해 자신들의 병사들의 월급을 올려주어야 했기 때문에 이들은 이에 크게 자극받아 이 법안을 만들었다.[60] 3명의 집정관이 암살자들의 유산과 재산을 몰수하는 동안 암살자들에게 내건 현상금은 로마 시민을 크게 고무시켰다.[59] 세 집정관의 이러한 수단은 암살자들과 친분이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숙청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처음에는 추방 명령법을 제정하는 것에 반대하였는데 추방 명령을 받은 자신의 새 조력자, 키케로의 목숨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59] 그러나 안토니우스의 키케로에 대한 증오는 매우 커서 결국 키케로도 숙청의 희생자가 되었다.[59] 많은 수의 공화파 원로원 의원이 죽었고, 3명의 집정관은 자신의 지지자들로 원로원의 빈자리를 채웠다. 20세기의 역사학자 로널드 사임은 이를 로마 혁명(Roman revolution)이라 명명하였는데, 이 사건이 구세대 원로원 의원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정치 세력을 구축하여 뒷날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61]


기원전 42년 1월 1일 로마 원로원은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신으로 선포하고 ‘신성한 율리우스’(Divus Iulius)라 부르게 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을 ‘신의 아들’(Divi filius')임을 강조하고 자신이 하는 일에 정당성을 확보하였다.[62]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28개의 군단을 해로로 보내어 그리스에 세력을 모으고 있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군대와 싸우려 하였다.[61] 기원전 42년 10월 마케도니아의 필리피에서 두 번의 전투를 치르고 난 뒤, 로마군을 승리하고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자살하였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뒷날 이 전투들의 성과를 이용하여 옥타비아누스를 얕잡아 보이게 하려 하였는데 두 번의 필리피 전투 모두 안토니우스군이 로마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63] 추가로, 두 번의 승리의 전과를 따지는데, 안토니우스는 아그리파에게 직속 지휘권을 넘겨준 옥타비아누스를 겁쟁이라고 낙인을 찍었다.[63]


필리피 전투 이후, 제2차 삼두 정치의 집정관들 사이에서 새로운 영토 협정이 맺어졌다. 안토니우스는 갈리아를 그리고 옥타비아누스는 이탈리아와 히스파니아를 관장하기로 하였다. 안토니우스는 동쪽의 이집트로 여행을 갔는데 거기서 자신의 상관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옛 정부이자 카이사르의 어린 아들 카이사리온의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7세를 만나 동맹을 맺었다. 레피두스는 아프리카 속주로 가게 되었는데 원래 히스파니아로 가게 되었으나 안토니우스가 방해하고 옥타비아누스를 히스파니아로 가게 하였다.[64] 옥타비아누스는 마케도니아 원정 이후 곧 제대할 많은 병사를 정착시키기 위해 일단 이탈리아에 남기로 결정하였다. 이 많은 병사는 과거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공화파 쪽에서 서서 싸운 병사들로 만약 옥타비아누스가 그들을 달래지 않았으면 쉽게 그의 정적들과 연합할 수 있었으나 그는 병사들에게 토지를 지급하였다.[64] 더 이상 병사들의 정착지를 위해 분배해줄 국유지가 없자 옥타비아누스는 양자택일을 해야 했다. 로마 시민의 땅을 몰수하여 시민들을 멀리하는 것 또는 로마의 심장부에서 그에게 대적할 만만치 않은 상대가 될 수 있는 많은 로마 병사를 멀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는 전자를 택하였다.[65] 새 정착지를 만들기 위해 18개의 도시가 그 땅으로 사용되었는데 도시에 살고 있던 모든 시민들이나 일부 시민들을 쫓아내 버렸다.[66]


반란과 혼인 동맹[편집]


기원전 30년경에 만들어진 옥타비아누스의 상.

옥타비아누스가 추진했던 퇴역병의 정착 계획에 대한 많은 불만으로 인해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의 당파는 결집하였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남동생이었던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는 원로원의 다수에게 지지를 받고 있었다.[66] 한편 옥타비아누스는 풀비아와 그녀의 첫 번째 남편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의 딸인 클로디아 풀케라와 이혼하기로 결심하였다. 옥타비아누스와 클로디아의 부부 관계는 진전이 없었고 그는 클로디아를 안토니우스의 아내가 된 장모 풀비아에게 보냈다. 풀비아는 행동을 개시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녀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가 이탈리아에서 병사들을 길러 옥타비아누스를 치려 하였다. 그러나 세 집정관이 로마 병사들의 월급을 마음대로 나눠줄 수 있는 권한이 생기자, 루키우스와 풀비아는 옥타비아누스를 치기 위한 정치적·군사적 도박을 걸었다.[66] 기원전 40년 초, 루키우스와 그의 지지자들은 옥타비아누스의 강력한 응징에 페루시아(지금의 페루지아)에서의 농성을 끝내고 항복하였다.[66]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루키우스와 그의 군사들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한편 풀비아는 그리스의 시키온으로 유배되었다.[67]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루키우스에게 충성하는 많은 지지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기원전 40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기일을 맞아, 옥타비아누스는 300명의 원로원 의원과 기사 계급의 인사를 루키우스와 공조했다는 이유로 처형하였다.[68] 페루시아도 다른 장군들에게 경고하기 위해서 약탈하고 도시에 불을 질렀다.[67] 이 잔인한 사건은 옥타비아누스의 정치 인생을 더럽혔고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시인 섹스투스 프로페르티우스 등은 이를 두고두고 비난하였다.[68]


제1차 삼두 정치의 집정관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아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에게 승리한 이래, 아직 로마에 반감을 품고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39년에 제2차 삼두 정치의 집정관들과 협정을 맺어 시칠리아와 사르데냐를 가지게 되었다.[69]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파가 아닌 공화파 소속의 폼페이우스와의 동맹을 맺기 위해 서로 다투고 있었다.[68] 기원전 40년, 옥타비아누스는 폼페이우스와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는 데 성공하는데 폼페이우스의 부하이자 사위인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의 딸, 즉 폼페이우스의 외손녀인 스크리보니아와 결혼하였기 때문이다.[68] 스크리보니아는 옥타비아누스의 유일한 적녀인 율리아를 낳았는데 율리아가 태어난 이 날은 옥타비아누스가 스크리보니아와 이혼하고 훗날 로마 제국의 초대 황후가 되는 리비아 드루실라와 재혼한 날이기도 하였다.[68]


이집트에서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불륜을 저지르고 3명의 아이들을 낳았다.[70] 옥타비아누스와의 관계가 계속 악화되자,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떠났다. 기원전 40년에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와 대적할 대군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출항, 브룬디시움에 진을 쳤다. 그러나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모두 싸움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카이사르파의 중요한 정치적인 지지기반이었던 백인대장들이 싸움을 거부하였고 그들 휘하의 각 병사들은 백인대장을 따라 전투 중지를 원하였다.[71][72] 한편, 시키온에서는 안토니우스의 부인 풀비아가 급작스럽게 사망했는데 공교롭게도 안토니우스가 그녀를 보기 위해 시키온으로 가던 중이었다. 풀비아의 죽음과 백인대장들의 항명은 두 집정관을 잠정적으로 화해시켰다.[71][72] 기원전 40년 가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브룬디시움 조약에 서명하였는데 레피두스는 아프리카를, 옥타비아누스는 서방을, 그리고 안토니우스는 동방을 맡기로 하였다. 중부의 이탈리아 반도는 신병들에게 맡겨졌는데 사실 이 조약은 동방의 안토니우스에겐 무용지물이었다.[71] 기원전 40년 말엽,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의 확고한 동맹을 위해 자신의 친누나인 소 옥타비아를 안토니우스에게 시집보냈다.[71] 안토니우스와의 사이에서 옥타비아는 대 안토니아와 소 안토니아 두 명의 딸을 낳았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의 전쟁[편집]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옥타비아누스의 함대를 상대로 이긴 것을 기념하여 주조한 데나리우스. 앞에는 옥타비아누스의 함대를 이긴 기함 메시나의 파루스가, 뒤에는 괴물 스킬라가 새겨져 있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이탈리아 반도와 지중해 간의 군량 수송 거부로 이탈리아의 옥타비아누스를 위협하였는데 폼페이우스의 아들이 해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서 이탈리아에 큰 기근의 원인이 되었다.[72] 폼페이우스가 제해권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넵툰의 아들’(Neptuni filius)이라 불렀다.[73] 기원전 39년, 미세눔 조약으로 임시 평화 협정이 맺어졌는데 이탈리아의 해상 봉쇄가 풀리자 옥타비아누스는 폼페이우스에게 사르데냐, 코르시카, 시칠리아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내주었다. 그리고 폼페이우스가 기원전 35년에 집정관으로 임명되는 것을 보장해 주었다.[73][72] 세 명의 집정관과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간의 영토 협정은 기원전 38년 1월 17일 옥타비아누스가 스크리보니아와 이혼하고 리비아와 재혼하자 균형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74] 폼페이우스의 휘하 제독 중 하나가 폼페이우스를 배신하고 옥타비아누스에게 도로 사르데냐와 코르시카를 반환하였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를 공격하려면 안토니우스의 지지가 절대적이었던 옥타비아누스는 협정을 맺어 삼두 정치 체제를 연장하여 기원전 37년부터 시작하여 5년 동안 로마를 공동으로 통치하기로 합의하였다.[58][75] 옥타비아누스의 지지를 얻은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와의 원정을 위해 그의 지지 세력을 확대하였는데 그는 기원전 53년의 카르하이 전투에서의 패배를 복수하고 싶어하였다.[75] 타렌툼(Tarentum)의 협정에서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120척의 전함을 주고 옥타비아누스는 2만 명의 군사를 파르티아와 싸우려는 안토니우스에게 보내준다고 약속하였다.[76]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약속했던 병력의 불과 1/10인 2천 명밖에 보내주지 않았고 이러한 도발은 안토니우스가 6년 뒤 서로 전투에서 마주 대할 때까지 이 일을 두고두고 잊지 않았다 한다.[76]


기원전 36년 옥타비아누스와 레피두스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치기 위해 합동 작전을 개시하였다.[77] 옥타비아누스를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함대는 기원전 36년 9월 3일 나우로쿠스 전투에서 아그리파의 군대에게 거의 완파되었다.[78] 섹스투스는 남은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퇴각하였는데, 그 다음해에 폼페이우스는 안토니우스 휘하의 장군에게 잡혀 처형되었다.[78] 옥타비아누스와 레피두스는 항복한 폼페이우스의 병사를 손에 넣었는데 머지않아 레피두스는 자신이 시칠리아를 다스릴 충분한 능력이 된다 자부하고 옥타비아누스에게 떠나라 명령하였다.[78] 그러나 레피두스의 군대는 자신들이 싸우는 데 지치고 옥타비아누스가 그들을 돈으로 유혹하자 레피두스를 버리고 옥타비아누스에게로 투항하였다.[78] 레피두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하고 최고 제사장(pontifex maximus)의 직함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으나 삼두 정치 체제에서 쫓겨나고 공직 생활 역시 끝이 나면서 이탈리아의 카페 키르케이에 있는 장원으로 유배되었다.[79][78] 로마의 통치권은 이제 서방의 옥타비아누스와 동방의 안토니우스에게로 주어졌고 양분되었다. 공화국의 평화와 안정을 지키기 위해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시민의 재산권을 보장해 주었다. 옥타비아누스가 전역한 병사들에게 이탈리아 외곽에 자리를 잡게 해주는 사이, 과거 폼페이우스의 군대에 참가하기 위해 로마를 떠났던 3만여 명의 노예를 모두 주인에게 돌려주었다.[80]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로 돌아오자 자신과 리비아, 옥타비아의 신변 안전의 보장을 원로원에 요청하였다. 그 결과 옥타비아누스와 그의 아내 리비아, 누이인 옥타비아, 딸인 율리아는 주권면제권을 부여받았다.[81]


안토니우스와의 전쟁[편집]


로렌스 알마타데마가 그린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한편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원정은 상황이 매우 좋지 않게 돌아갔다. 비록 옥타비아누스가 2천 명의 군사를 보내주었지만 이는 충분하지 않았고 작전 실패로 인해 지도자로서의 그의 이미지도 추락하였다.[82] 하지만 이미 안토니우스와 결혼한 클레오파트라는 여전히 안토니우스의 군사를 다시 보충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 안토니우스는 전처인 옥타비아를 로마로 돌려보냈다.[83] 비록 안토니우스가 자신의 군사를 재건하여 다시 강대한 세력을 가지려고 계획했더라도 이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좋은 명분이 되었다. 안토니우스가 로마인 배우자를 부정하고 동방의 정부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선동을 하였고, 갈수록 안토니우스의 인기는 추락하였다.[84] 기원전 36년 옥타비아누스는 내전이 끝났으니 안토니우스가 삼두 정치 체제의 집정관 직을 사퇴하면 자신도 그리할 것이라 하였으나 안토니우스는 이를 거절하였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는 권모술수로 자신의 독재적인 이미지는 감추면서 안토니우스를 더욱 극악하고 독재적인 이미지로 만들려 하였다.[85] 기원전 34년 아르메니아가 로마군의 수중에 넘어가자 안토니우스는 아들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로 하여금 아르메니아의 왕 자리에 앉히고 클레오파트라에겐 ‘왕들의 여왕’이란 호칭을 하사하자, 옥타비아누스는 이 사건을 인용하면서 원로원에게 안토니우스가 로마의 권력을 약화시키려는 야망을 지녔다고 주장하였다.[84] 기원전 33년 1월 1일 옥타비아누스가 다시 집정관에 선출되자 그는 원로원 회의에서 안토니우스가 가지고 있는 작위와 자식들이나 친척들 그리고 ‘여왕’인 클레오파트라에게 나눠준 영토 문제에 대해 맹렬한 공격을 퍼붓기 시작하였다.[86] 망명한 전직 집정관, 원로원 의원들은 옥타비아누스의 선동[87]에 불신을 품고 안토니우스의 편에 붙었는데 기원전 32년 가을, 변절한 각료와 원로원 의원들은 다시 안토니우스를 버리고 옥타비아누스에게로 변절하였다.[88] 무나티우스 플란쿠스, 마르쿠스 티티우스와 같은 망명자들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안토니우스를 비난하기 위해 원로원의 승인을 받도록 도와주었다.[89] 베스타 처녀의 신전에 폭풍이 불자 옥타비아누스는 수석 사제녀에게 안토니우스의 비밀 유서를 내놓으라 강요하였는데 그 유서에는 로마가 정복한 영토는 자신의 아들들을 왕으로 삼아 다스리게 하고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묻힐 영묘를 알렉산드리아에 호화롭게 건설하라 쓰여 있었다.[90][91] 기원전 32년 말, 원로원은 안토니우스의 집정관의 권한을 공식적으로 박탈하고 클레오파트라가 다스리고 있는 이집트에 선전 포고하였다.[92][93]



1672년에 로렌조 카스트로가 그린 《악티움 해전》. 런던의 국립 해양 박물관 소장.

기원전 31년 초, 아그리파의 함대가 로마군을 수송하여 아드리아 해를 성공적으로 횡단하였고, 옥타비아누스는 곧 벌어질 큰 전투의 예비 단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94] 한편 아그리파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본대를 그들의 해상 보급 경로에서 차단하고 옥타비아누스는 코르푸 섬 맞은편에 위치한 본토에 도착, 남쪽으로 진군하였다.[94] 바다와 땅 모두에서 막히자, 안토니우스군의 탈영병은 하루가 머다 하고 계속 옥타비아누스에게 투항하였는데 옥타비아누스군은 전쟁 준비로 휴식이 한창이었기 때문이었다.[94] 안토니우스의 함대는 해상 차단 해제를 기도하기 위해 그리스 서쪽 해안의 악티움 만으로 나아갔다. 그곳에는 아그리파와 가이우스 소시우스의 함대가 있었는데 안토니우스의 함대보다 수는 많지만 더 작고 조종하기 더 쉬운 배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기원전 31년 9월 2일, 악티움 해전이 발발하였다.[95] 안토니우스와 남은 군사들은 근처에 기다리고 있던 클레오파트라의 함대가 막판에 노력한 끝에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96] 옥타비아누스는 그들을 추격하였고 기원전 30년 8월 1일 알렉산드리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다시 한 번 승리를 거두자 패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자살하였는데 독사가 클레오파트라를 무는 사이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칼로 몸을 찌르고 클레오파트라의 팔 쪽으로 쓰러졌다.[97]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후계자로서의 위치를 잘 이용하여 크게 성공했었기에 다른 사람들이 이를 활용하는 것이 자신에게도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두 명의 카이사르가 있으나 하나로 족하다.”라는 말을 남겼으며, 훗날의 정치 인생을 위해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아이들은 살려주는 대신에 카이사리온을 죽이도록 명령하였다.[98][99]


비록 그의 수단은 잔인했지만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상관이자 신격화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인 옥타비아누스를 과소평가하였다.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지지가 약해졌어도 ‘신의 아들’이란 이름으로 자신의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다.[100] 옥타비아누스는 이전에 적들에게 약간의 자비를 베풀어주었고 로마 시민의 호응이 없는 정책을 계속 고수하였으나 악티움 해전 이후 그는 그의 정적들에게 용서를 베풀어 신뢰를 쌓았다.[101]


옥타비아누스에서 아우구스투스로[편집]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물리친 후에 옥타비아누스는 비공식적이지만 로마 공화정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102] 아직 로마는 형식상으로는 공화정이었고 로마 시민은 군주제와 독재라면 진저리를 쳤기 때문에 옥타비아누스는 서두르지 않고 원로원과 로마 시민이 원하는 것들을 맞춰가며 차근차근 권력을 손에 넣었다.[103][104]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1년부터 8년간 해마다 집정관의 자리를 맡았다. 그중 기원전 28년과 기원전 27년은 아그리파가 동료 집정관이었다. 기원전 27년에 옥타비아누스는 내전이 종결되었으므로 자신에게 위임된 비정규적 특권을 원로원과 로마 시민에게 반납한다고 선언하였다.[105] 이로써 로마는 다시 명목상으로는 이전의 공화정 시절의 정치 체제로 회귀한 것처럼 보였다. 로마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수여한다.


황제 아우구스투스[편집]


아우구스투스의 동상. 머리 부분은 기원전 30년~기원전 20년경에 제작되었고, 몸통은 2세기에 제작되었다.

기원전 29년에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제일인자라는 뜻의 국가 제1시민(princeps civitatis)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흔히 '프린켑스'라고만 쓰는 이 칭호는 공화정 시대에 지도급 원로원 의원으로 인정받은 집정관 역임자이자 높은 위신과 덕망을 지닌 자를 뜻했다.[106]이 칭호는 실제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폼페이우스에게도 수여된 전례가 있었다.[107] 하지만 옥타비아누스에게 이 칭호는 제정으로 나아가고 있던 현실 속에서 로마의 최고 책임자라는 것을 반영한다.[108][4]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7년에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위임받았던 여러 특권을 원로원에 되돌려주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여전히 집정관이었고,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가 갖고 있는 금화, 은화 발행권을 되찾아올 만한 힘이 없었다. 또한 직접적으로 속주와 군대를 다스리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로마 제국의 병사들에게 강한 지지를 얻고 있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의 후원에 힘입어 출세한 많은 지지자, 피보호자, 어마어마한 부는 로마의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109]


대중은 엄청난 양의 부를 아우구스투스가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공공건물 건설과 가도 유지·보수에 자발적으로 기여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기대만큼 잘 진행되지 않았다. 기원전 20년에 아우구스투스는 직접 가도 건설에 나섰다.[110] 기원전 16년에 발행된 화폐에는 아우구스투스가 막대한 양의 돈을 공공기금에 기부한 후 이루어낸 가도 건설을 선전하였다.[110]


하지만 역사학자인 하워드 스컬러드(Howard Scullard)에 따르면 아우구스투스의 진정한 권력은 군대와 “최종 결제권”으로부터 나왔다고 한다.[111] 원로원은 내전을 종결시킨 아우구스투스에게 속주의 통치를 맡아 달라고 간청했다. 이 요청은 아우구스투스가 초법적인 권한을 갖는 것을 원로원이 사실상 승인한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에 출석하면서 계속해서 공직을 수행하였으며 10년 기한의 속주 통치 권한을 마지못해 수락하는 척하였다.[112][113] 아우구스투스가 통치하게 된 속주들은 갈리아, 히스파니아, 시리아, 킬리키아, 키프로스, 이집트 등 로마에 정복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속주들이었다.[112][114] 아우구스투스가 집정관일 때, 자신이 통치하는 속주에 파견할 총독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원로원으로부터 부여받는다.[115] 반면 옥타비아누스가 통치하지 않는 “원로원령 속주”[116]의 경우 원로원에서 임명한 총독이 다스렸다.[115] 속주와 군단에 대한 통치권을 얻어내었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의 권력은 점점 더 강해졌다. 하지만 아직 압도적으로 권력을 독점하지는 않았다.[117] 고대 로마의 중요한 식량 생산지였던 아프리카 속주의 경우 원로원에서 파견한 총독이 여전히 통치하고 있었으며, 시칠리아 속주 및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 등 여러 속주는 원로원에서 임명한 총독이 통치하였다.[117] 하지만 그리 많지 않은 수의 속주만 원로원에서 임명한 전직 집정관 출신의 총독이 다스렸으며, 나머지 지역은 아우구스투스가 임명한 총독이 다스렸기 때문에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에게 감히 대적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103][111] 광활하고 지리적으로 먼 '황제령' 속주에는 대다수 군단들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아우구스투스는 집정관과 법무관급 레가투스를 임명하고 자신의 재량으로 선전포고와 강화를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118]



시민관을 쓴 아우구스투스의 흉상

원로원 의원들은 감격하였고, 옥타비아누스에게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수여하였다. 이와 더불어 아우구스투스의 집 출입구의 위쪽에 시민관을 걸고 출입구의 양쪽 기둥을 월계수 묘목 장식으로 뒤덮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가 황금 방패에 공화정을 복귀시켰다는 사실을 새겨 원로원 의사당에 안치하였다.[119] 이 칭호는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였다.[101] 신의 아들(divi filius, 즉 카이사르의 아들)이라는 지위와 더불어 ‘길조’를 뜻하는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에는 초자연적인 힘이 함축되어 있었는데, 로물루스가 엄숙한 징조(augusto augurio)를 보고 로마를 창건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그는 제2의 창건자로서 또 다른 로물루스로 인정되었다고 볼 수 있었을 것이다.[120] 이를 통해 평화로운 “아우구스투스의 시대”를 내전 등 끔찍한 사건을 겪었던 “옥타비아누스의 시대”와 차별화할 수 있었다.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제2의 건국자임을 상징하기 위해서 로마의 건국자인 로물루스와 레무스에서 따온 “로물루스”라는 칭호도 고려되었지만 로물루스라는 칭호는 왕정을 연상시켰기 때문에 결국에는 “아우구스투스”를 선택한다.[121] 아우구스투스는 또한 자기 자신을 “신군 카이사르의 아들인 임페라토르”(Imperator Caesar divi filius)이라 칭했다.[122] 이는 자신이 신군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라는 것과, 승리를 상징하는 “임페라토르”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122] 하지만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받았던 특권인 보라색의 토가를 입을 수 있는 권리, 권위를 상징하는 머리띠와 홀을 쓸 수 있는 권리는 받지 않았다.[123]


호민관 특권[편집]

기원전 23년 아우구스투스의 동료 집정관이었던 테렌티우스 바로 무레나(Terentius Varro Murena)가 아우구스투스에 대항하려 한다. 그 방식은 정확하게 전해지고 있지 않으나 무레나는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칼푸르니우스 피소(Calpurnius Piso)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124][125] 피소는 널리 알려진 공화정 지지자였는데, 아우구스투스는 동료 집정관과 협력하면서 파벌에 관계없이 모든 이들과 협력하여 국정을 운영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126] 늦봄에 아우구스투스는 자칫하면 죽을 수 있었던 정도로 심하게 병을 앓았고, 사람들은 아우구스투스가 친구인 아그리파에게 자신의 인장을 넘기고 사위인 마르켈루스에게 병권을 위임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인장과, 관리하고 있던 공금 및 군단 통제권을 동료 집정관인 피소에게 위임했다.[124][127] 이러한 행동은 아우구스투스가 사실상의 황제라고 믿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일이었고,[128]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가 제정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의심을 잠시 거둔다.[124][127] 아우구스투스는 사유 재산만 자신이 지목한 상속자들에게 수여하려 했다. 당시 로마의 시민들은 여전히 군주정을 좋게 보지 않았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가 만약 권력을 자신이 지명한 후계자에게 물려주려 했다면 반란이 일어났을 것이다.[104]



서기 14년 ~ 20년경에 만들어진 시민관을 쓴 아우구스투스. 마노 세공으로 되어 있다.

건강을 회복한 후 아우구스투스는 집정관 직에서 사임한다.[127] 이후 아우구스투스가 집정관에 선출된 것은 기원전 5년과 기원전 2년뿐이다.[127][129] 하지만 군 통수권은 여전히 원로원의 요청으로 지니고 있었다.[130] 아우구스투스는 집정관직에서 사임하여 구 귀족들에게 집정관 자리에 오를 기회를 늘려 주었으며, 전통적인 공화주의자들의 우려를 불식시켰다.(계속 집정관직을 보유하는 것이 마리우스나 카이사르의 행적과 너무나 비슷했기 때문이다.)[131] 아우구스투스는 공직에 종사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전직 집정관으로 속주 통치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127][132] 또 그는 기원전 27년부터 황제령 속주에 전임 집정관의 명령권(proconsulare imperium)을 계속 보유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오히려 원로원령 속주의 명령권보다 더 우위에 있는 상급 임페리움(maius imperium)까지 얻게 되어 권한이 강화되었다. [133] 그리하여 다른 속주 총독들 위해 군림하고 필요한 경우 모든 군단에 대한 명령권을 행사할 수 있게 했다. [134] 또한 아우구스투스는 “호민관 특권”을 부여받았으며 이를 죽을 때까지 행사했다.[135] 아우구스투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면서 귀족 계급으로서 호민관에 취임할 수는 없었다.[136] 하지만 호민관 특권을 손에 넣어 거부권 행사, 선거 관리, 모든 모임에서 제일 먼저 발언할 수 있게 되었다.[129][137] 아우구스투스의 호민관 특권을 활용하여 풍기 단속을 담당하고 시민들이 공익을 보존하는지 자세히 감찰하는 역할도 하였으며 그리고 인구 조사와 원로원의 의원을 정할 수 있는 권한도 가지게 되었다.[138][139] 이 권한까지 손에 넣자 아우구스투스는 포룸에 들어올 때 전통 복장 토가를 입지 않은 사람들은 들어올 수 없게 하여 로마 애국주의의 미덕을 지키려 하였다.[140] 고대 로마의 공화정 체제에서는 아우구스투스처럼 감찰관에 선출된 적도 없던 사람이 이런 권한을 갖는 것과 한 사람이 호민관 특권과 감찰권을 동시에 가지고 있던 전례가 없었다.[141] 이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비슷한 권한을 가졌지만 인구 조사를 시행하거나 원로원 의원 명단을 좌지우지하지는 못했다. 공화정 시대와 비교해서 호민관의 위상은 격하되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호민관을 여전히 법무관이 되고자 하는 평민 계급이 거쳐야 하는 중요한 단계로의 의미는 살려둔다.[142]



폰티펙스 막시무스(최고 제사장)의 복장을 한 아우구스투스의 상.

아우구스투스는 또한 군 통수권도 손에 넣는다. 이는 이전에는 집정관이나 권한을 위임 받은 장군들만이 가지고 있던 권리였지만, 이후에는 아우구스투스만 이를 사용할 수 있었다.[143] 아우구스투스만이 가지고 있던 “절대 지휘권”은 오직 아우구스투스만이 명목상 로마군의 최고 통수권자의 자격으로 개선식을 할 수 있게 되었다.[144] 그 결과로 아우구스투스가 임명한 장군들이 전선에서 승리를 거두면 그 영예는 아우구스투스에게 돌아갔다.[144] 아우구스투스의 의붓아들이었던 티베리우스가 유일한 예외였다.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7년에 게르마니아에서의 공적으로 개선식을 거행한다.[145][146] 아우구스투스는 갖고 있던 절대 지휘권은 기원전 13년에 기한 연장 승인을 받았다. 이 승인을 기다리는 동안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에 머무르면서 퇴역 장병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이들에게 아낌없이 선심을 베푼다.[129]


앞에서 언급한 권한들의 획득은 정치적으로 매우 미묘한 위장이었다. 평민 계급이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이를 미루어 알 수 있다. 기원전 22년에 홍수와 기근이 겹쳐서 일반 서민들의 생활이 힘들어졌다. 이들은 아우구스투스에게 영구 집정관직 혹은 독재관직을 부여할 것과 그가 직접 감찰관직을 맡아 곡물 담당관직(cura annonae)를 맡아줄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134] 아우구스투스는 독재관에 취임하지는 않았지만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자비를 부담하여 짧은 시간 내에 사태를 해결하였다.[138] 8년에 다시 발생한 기근 때에는 “식량청 장관”(라틴어: praefectus annonae)[147]이라는 관직을 신설하여 로마의 식량 공급을 책임지게 하였다.[148] 기원전 19년에 원로원은 민중의 분노를 사지 않으려고 아우구스투스가 집정관의 상징을 공적인 자리에서 사용하는 권리와 두 집정관의 사이에 앉을 수 있는 권리를 허락했다.[143][149] 그 결과권력은 공식적으로도 집정관에 취임하지 않더라도 집정관처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하였다.[149]


기원전 12년에는 최고 제사장(폰티펙스 막시무스)이었던 레피두스가 죽은 후에 그 자리에 취임한다.[150] 최고 제사장은 종신제인 데다가 단 한 명만 될 수 있는 직책이었다. 기원전 2년에는 원로원과 로마 시민로부터 “국부”(라틴어: pater patriae)라는 칭호를 부여받는다.[119]


대외 정책과 군사 작전[편집]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확장된 영토. 노란색 부분은 기원전 31년 당시의 로마의 영토이다. 녹색 부분은 아우구스투스 통치 기간 동안 얻은 지역이며, 분홍색은 동맹국을 의미한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이미지를 승리와 연결시키기 위해 자신의 칭호에 개선장군을 뜻하는 “임페라토르”를 집어넣어 “신군 카이사르의 아들인 임페라토르 아우구스투스”(라틴어: Imperator Caesar Divi Filius Augustus)라 하였다.[151] 이후 13년까지 로마군은 아우구스투스가 “임페라토르”라고 불릴 만한 21회가량의 큰 승리를 거두었고 3회의 정식 개선식을 거행하였다.[152] 아우구스투스는 《아우구스투스 업적록》의 제4장에 이러한 군사적 성공으로 치른 개선식, 감사제 등에 대해 서술하였다.[151]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무력으로 점령한 지역도 적지 않았으며, 외교도 적절히 사용하였다. 한 예로 크라수스가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당했던 대패(大敗)를 직접적인 전쟁을 통해 만회하는 대신, 아르메니아 왕국에 친(親)로마 성향의 인물을 왕위에 앉힌 후에 파르티아를 압박하여 이를 외교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105]



티베리우스의 흉상. 아우구스투스의 가장 유능한 지휘관 중 하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히스파니아의 북부, 알프스 지역의 라이티아와 노리쿰, 일리리쿰, 판노니아 등을 정복하였다.[153] 기원전 25년에는 왕이 후계자도 남기지 않고 죽은 갈라티아를 전쟁을 벌이지 않고 로마의 속주로 만들었다.[154] 또한, 오늘날 스페인의 칸타브리아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을 기원전 19년에 최종적으로 진압하였으며 이 지역은 히스파니아 타라고넨시스 속주와 루시타니아 속주에 편입된다.[155] 이 지역에서 채굴되는 풍부한 광물 자원은 이후 군자금의 원천이 된다. 대표적인 곳으로 라스 메둘라스의 풍부한 금광이 있다.[155] 기원전 17년과 16년에 일리리쿰 총독 푸블리우스 실리우스 네르바가 알프스 산악 지역의 노리쿰(오늘날의 티롤, 스티리아, 잘츠부르크)에 정복 사업을 개시하여, 황제의 의붓 아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가 완수했다.[156] 그 결과 이탈리아 반도와 게르마니아 사이에 군사적 완충 지대가 생겼다. 지금의 모나코 근교에 알프스 전승기념비가 세워졌고 호라티우스는 이 승리를 예찬하는 시를 지었다.[157] 기원전 12년에는 알프스 근방에서 군사 행동을 재개하였고, 의붓아들인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 형제가 이끄는 군대가 각각 일리리쿰에서 판노니아 족, 동부 라인란트에서 게르만족을 공격하였다.[158] 작전은 성공을 거두었고 기원전 9년에 드루수스가 이끄는 군대는 엘베 강에 도달했다. 하지만 얼마 후 드루수스는 낙마하여 죽었고 티베리우스는 동생의 유해를 로마로 송환하였다.[158][159]



라스 메둘라스의 금광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의 동방을 파르티아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여러 동맹국을 완충 지대로 적극 활용하였다. 동방 방위를 위해 시리아 속주에 군단을 주둔시켰으며, 티베리우스가 파르티아와 교섭을 하였다.[160] 이 협상의 결과로 로마는 기원전 53년에 크라수스가 파르티아에 대패를 당했을 때 빼앗겼던 군단기(軍團旗)를 되찾을 수 있었다.[145] 티베리우스는 아르메니아 왕국의 티그라네스 5세를 왕위에 복위시키기도 했다.


파르티아가 언제나 위협적인 상대이기는 했지만, 실제 전쟁은 게르만 족을 상대로 대부분 라인 강, 도나우 강 근교에서 벌어졌다.[160] 안토니우스와 최종 전투를 벌이기 전에 달마티아의 부족들과 벌였던 전쟁 이후 로마군은 착실히 도나우 강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러 차례 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게르마니아 지역은 로마화하는 데 실패하였다.[160] 9년에 토이토부르크 숲에서 당한 참패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게르마니아의 총독인 바루스가 이끄는 3개 군단이 케루스키 족 출신의 아르미니우스가 이끄는 게르만 족에게 전멸한다.[161] 아우구스투스는 사태를 수습하려 했고, 티베리우스는 이후 여러 차례 라인란트로 진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162][163] 하지만 아우구스투스의 죽은 후에 계승자인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아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하였고, 이후 로마군은 라인 강과 도나우 강을 주 방어선으로 삼아 방위 체계를 구축한다.[164]


죽음과 후계 문제[편집]

기원전 23년의 자신에 대한 암살 음모가 발각되고, 건강이 크게 악화되자 아우구스투스는 후계자 선정이라는 화급한 문제에 관심을 쏟게 된다.[131] 아우구스투스는 정치 체제의 안정을 위해 후계자를 물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은 이를 대중에게 알리려 하였다.[165] 로마의 시민들, 특히 원로원 계급이 갖고 있는 군주제에 대한 공포심을 자극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이를 추진한다.[165] 기원전 25년에 아우구스투스는 누나의 아들인 마르켈루스와 자신의 딸인 율리아를 결혼시켰다.[166] 하지만 마르켈루스는 기원전 23년에 20살의 나이로 사망한다. 16살의 나이에 미망인이 된 율리아를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와 혼인시켰다.[166] 아그리파 부부는 아들 셋, 딸 둘, 총 다섯 명의 아이를 낳았다. 얼마 후, 아그리파는 5년 기한으로 전권을 부여받아 제국의 동방을 담당하게 되었고, 이와 함께 아우구스투스만 가지고 있었던 “호민관 특권”도 부여받았다.


아우구스투스는 외손자인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후계자로 삼기 위해 양자로 삼는다.[166] 이 두 사람은 아우구스투스의 배려로 기원전 5년과 기원전 2년부터 정치적 경력을 쌓기 시작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리비아가 데려온 의붓아들인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 형제도 아꼈다.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조카인 안토니아와 결혼했으며, 기원전 12년에 아그리파가 죽고 나서는 티베리우스 부부를 이혼시킨 후 티베리우스를 미망인이 된 율리아와 결혼시켰다.[166] 하지만 드루수스는 기원전 9년에 게르마니아에서 사망하고,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6년부터 로마 제국의 통치를 분담하였지만 얼마 후 로도스 섬으로 은퇴해 버린다.[167]



아우구스투스 영묘

서기 2년과 4년에 루키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차례로 요절하였다. 서기 4년에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와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를 양자로 맞아들였다. 티베리우스는 5년 기한의 호민관 특권을 부여받았고, 조카인 게르마니쿠스를 양자로 맞아들였다.[168]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아 평정과 일리리쿰, 달마티아 반란을 진압하였고, 게르마니쿠스는 그 밑에서 착실히 경험을 쌓는다. 하지만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는 방만한 행실로 인해 7년에 추방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를 후계자로 삼을 계획을 포기하게 된다. 이후, 티베리우스는 13년에 아우구스투스가 가진 모든 특권을 부여받는다.


14년 8월 19일에 아우구스투스는 놀라에서 숨을 거두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죽기 전에 건강이 갑자기 나빠지자 티베리우스를 소환해 밀담을 나누었다. 얼마 후, 황후 리비아의 품에 안긴 채 평온하고 조용하게 숨을 거두었다.[169] 티베리우스는 아들인 드루수스와 함께 아우구스투스의 추모 연설을 하였다.[170] 이후 마르스 광장을 지나 아우구스투스 영묘 앞 광장에서 유해를 화장하였고, 영묘에 묻혔다. 얼마 후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를 신격화하기로 결정하였다.


기타[편집]

아우구스투스의 유산[편집]

 아우구스투스 업적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터키 앙카라에서 발견된 《아우구스투스 업적록》의 일부


바티칸 미술관에 있는 프리마 포타의 아우구스투스

아우구스투스의 통치 시기에 수립된 정책들은 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수백 년간 지속하였다. 양부로부터 이어받은 성인 ‘카이사르’와 자신의 칭호인 ‘아우구스투스’는 이후 1400여 년간 로마 제국과 비잔티움 제국의 통치자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카이사르는 여러 언어에서 황제를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으며[171], 아우구스투스는 사후에 신격화되었다. 그 결과 많은 수의 아우구스투스 동상과 흉상이 제작되었고, 현재까지도 많이 남아 있다. 아우구스투스 신앙(Divus Augustus)은 391년에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을 때까지 계속된다. 또한, 아우구스투스는 유언장에서, 자신이 직접 쓴 《아우구스투스 업적록》(Res Gestae Divi Augusti)의 동판을 아우구스투스 영묘의 정면에 걸어 놓기를 원했다.[172] 《아우구스투스 업적록》의 사본은 아우구스투스의 사후, 로마 제국 전역에 퍼졌다.[173]


터키의 앙카라에서 발견된 사본의 경우[174], 라틴어로 되어 있는 원문을 그리스어로 번역하여 공공건물에 부착하였다. 테오도어 몸젠은 《아우구스투스 업적록》을 “금석문의 여왕”이라고 하였다.


아우구스투스의 작품은 여러 편이 알려졌다. 이 중에는 시칠리아에 대한 시집 《시칠리아》, 〈브루투스의 《카토론》 반박〉, 13권에 걸쳐 기술한 《자서전》 등이 있다.[175][176] 하지만 이 작품들은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역사학자들은 아우구스투스가 주고받은 편지들을 분석하여 작품에 대한 추가 정보를 연구하고 있다.[177][178]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황제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아우구스투스가 수립한 정책은 로마 제국이 존재하였던 기간에 계속 사용되었고 “로마에 의한 평화”(Pax Romana) 또는 “아우구스투스에 의한 평화”(Pax Augusta)라 칭송받았다. 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처럼 카리스마가 넘치는 지도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셋째 아내인 리비아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지혜와 결단력이 있고 통찰력이 있는 정치가였다. 게다가 그의 정책은 매우 오랫동안 지속하였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로마 제국은 많은 점에서 변화가 있었다. 우선 수도인 로마 시에 “경찰청”(Praefectus urbi)과 “소방청”(Praefectula vigilum)을 만들었으며, 지방 자치 단체들에 상주하는 장관들을 파견하였다.[179] 경찰청은 대대별로 500명씩이었으며, 소방청은 대대별로 500에서 1천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총 7개 대대가 14개 구의 치안과 화재 진압을 담당하였다.[180]


내전이 끝난 후, 아우구스투스는 28개 군단, 총 17만 명으로 구성된 상비군을 조직한다.[181] 이들은 각 속주의 주민들로 구성된 보조병과 함께 국방을 담당하였다.[182] 또한 역참 제도를 창설하여 “관찰장관”(praefectus vehiculorum)이라 불리는 장교들이 감독하도록 하였으며, 자비를 털어서 도로를 유지 및 보수하였다.[183] 동시에 추가로 가도를 더 건설하여, 더욱 더 빠른 통신 체계를 갖추면서 군대가 신속하게 행군할 수 있게 되었다.[184] 서기 6년, 아우구스투스는 현역 및 퇴역 군인의 연금을 지급하기 위한 재원을 마련하고자 1억 7천만 세스테르티우스를 기부하여 “군인 연금 기금”(aerarium miltare)을 만들었다.[185]


기원전 27년에는 자신의 경호를 목적으로 “근위대”를 창설하였다.[186] 근위대는 훗날 원로원에 압력 넣기, 새 황제 추대, 기존의 황제 제거 등 로마의 역사에서 영향력을 발휘한다. 근위대는 312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해체할 때까지 존속한다.[187]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 최고의 권력자였지만, 언제나 공화주의자로서의 미덕과 규범을 실천하려 애썼다. 언제나 서민들에게 관심을 두고 돌보았던 그는 관대한 정책들과 과다한 지출 삭감을 통하여 이를 실천하였다. 기원전 29년에는 25만 명의 시민에게 개인당 400세스테르티우스씩 지급하였고 식민지에 거주하고 있는 12만 명의 퇴역병에게는 1,000세스테리우스씩을 지급하였으며, 약 7억 세스테르티우스를 들여 자신의 병사들이 땅을 사서 정착할 수 있게 하였다.[188] 또한 로마의 여러 신을 모시는 신전 82곳을 복구하였다.[188] 기원전 28년에는 검소하고 관대한 모습을 강조하려고 자신의 모습을 본뜬 은상 80여 개를 녹였다.[188]



누비아의 신전에 묘사된 이집트풍의 아우구스투스

아우구스투스의 긴 통치 기간과, 이 기간에 로마 제국에 남긴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유산들도 성공의 중요한 요인이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서기 14년 당시의 젊은이들은 원수정 외의 정치 체제는 알지 못하였다.[189] 만약 아우구스투스가 일찍 죽었더라면(예: 기원전 23년)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한동안 사실상 군주정이었던 로마에서 옛 공화정 지지자들과 아우구스투스의 추종자들 간에 내전이 벌어졌을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경험과 인내심, 치밀한 전략과 정치적 통찰력으로 이러한 상황을 조율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잘 훈련된 군대가 전선에서 주둔하는 것, 제위 계승에 대한 원칙, 황제의 자비를 털어 수도를 꾸미는 것처럼 여러 분야에서 로마 제국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였다. 무엇보다도 아우구스투스가 남긴 최고의 업적은 이후 2세기간 이어진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연 것이다.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기억은 사람들에게 매우 좋게 남았고, 이는 제국 시대의 정치적 풍조 아래 좋은 황제의 패러다임으로 남게 된다. 이후 로마의 모든 황제들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Caesar Augustus)를 사용하였고, 이에 따라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는 점차 사람의 이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 황제를 지칭하는 칭호로 더 많이 사용된다.[5]


동시대인인 베르길리우스와 호라티우스는 아우구스투스를 로마의 수호자, 도덕 규율을 바로잡은 자, 제국을 짊어지고 갈 의무를 기꺼이 진 자로 묘사하였다.[190] 하지만 통치 기간에 원수정을 확립한 것 때문에 동시대인들에게 비판받기도 하였다. 동시대의 법학자, 공화정의 추종자인 마르쿠스 안티스티우스 라베오(? ~ 서기 10년 또는 11년)는 공개적으로 아우구스투스의 통치 체제를 비판하였다.[191] 타키투스는 〈연대기〉의 서문에서 아우구스투스가 교활한 방법으로 공화정 로마를 노예처럼 만들었다고 서술하였다.[191] 아우구스투스가 죽고 난 뒤에 티베리우스가 이 자리를 물려받았고, 로마의 사람들은 노예 매매와 같이 계속하여 다음 주인에게 넘어갔다.[191] 하지만 타키투스는 네르바가 “원수정”과 “자유”라는 서로 이질적인 두 생각을 잘 조화시켰다고 믿었다.[192] 3세기 역사가인 디오 카시우스는 아우구스투스가 친절하고 관대한 통치자라는 점은 인정하였지만, 동시대의 역사가들과는 달리 아우구스투스를 전제군주로 보았다.[191] 시인인 마르쿠스 아나에우스 루카누스(39년 ~ 65년)는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와 소 카토와의 전쟁에서의 승리는 로마의 전통적 자유가 끝난 상징적인 사건이라는 의견을 갖고 있었다. 역사가인 체스터 G. 스타 2세는 루카누스가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하지 않은 이유가 그러기엔 너무나도 신성불가침의 존재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라 썼다.[192]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작가인 조너선 스위프트는 Discourse on the Contests and Dissentions in Athens and Rome에서 아우구스투스를 로마에 전제군주제를 도입했다는 이유로 비판하였고 대영제국의 입헌군주정을 기원전 2세기경의 로마 공화정에 비유하였다.[193] 장군이자 역사가였던 토머스 고든(1658년 ~ 1741년)은 아우구스투스를 올리버 크롬웰과 비교하며 비판하였다.[193] 토머스 고든과 몽테스키외는 아우구스투스가 전장에서는 겁쟁이라고 평하였다.[194] 스코틀랜드의 학자인 토머스 블랙웰(Thomas Blackwell, 1701년 ~ 1757년)은 Memoirs of the Court of Augustus에서 아우구스투스를 마키아벨리 성향의 군주라 보았다.[194]


세제 확립[편집]


인도에서 발견된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화폐. 대영박물관 소장.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화폐의 모조품(인도, 1세기). 대영박물관 소장.


아라비아 반도 남부의 히먀리트 왕국에서 제작된 모조품

아우구스투스의 세제 개혁은 로마 제국의 역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전 시대에는 널리 행해졌던 속주민에 대한 특별 징세를 하지 않았으며, 새로 정복한 지역의 기반을 닦고 고정 세율로 직접세를 징수하였다.[195] 세금을 불시에 임의로 거두어 속주민의 분노를 불러오는 대신에 고정 세제를 실시하기로 한 것이다. 그 결과 세입이 증가하였고, 돈의 흐름이 안정되었으며, 해마다 속주가 내야 할 세금의 양이 일정해졌다.[195] 세금 징수를 위하여 인구 조사를 실시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각 속주마다 내야 할 세금의 양이 정해졌다.[196] 속주민과는 달리, 로마 시민권자의 경우 간접세만 납부하였다.[196] 노예 매매 시 가격의 4퍼센트를 세금으로 냈으며, 경매 시에도 1퍼센트를 납부하였으며, 재산 상속 시에도 가까운 친척이 아닌 이로부터 10만 세스테르티우스 이상의 상속을 받으면 5퍼센트의 세금을 납부하였다.[196]


또한, 세금도 민간 징수원이 징수하던 기존 방식에서, 세금 담당 공무원이 징수하는 방식으로 바뀐다. 공화정 시대의 민간 징수원들은 세금을 과다하게 걷어가며 힘을 불려나가, 점점 로마의 정치가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많은 투표권을 갖게 되었다.[195] 이들은 세금을 추가로 더 걷어서 자신의 재산을 불렸기 때문에 악명이 높았었다. 이들에 대한 관리 감독이 부실하였기 때문에 세금 납부자들에게서 부당 징수를 일삼았고, 이는 경제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직접 이집트를 정복했다는 점과 로마 정부 형태의 변화 때문에, 아우구스투스는 이집트의 비옥한 땅을 재정원으로 쓸 수 있었다.[197] 이 때문에 이집트는 로마의 속주가 아닌 아우구스투스의 사유지처럼 간주되었고, 이후에도 이집트는 황제들의 사유지로 취급된다.[198] 이집트는 원로원 계급 출신이 통치하는 대신에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임명한 기사 계급(equestrian) 출신의 총독이 다스렸다. 아우구스투스와 이후의 황제는 이집트의 농경지에서 벌어들인 많은 수입을 복지 정책, 공공 정책과 군사 원정의 자금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8월 (Augustus)[편집]

 율리우스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전에는 로마의 역법에서 “여섯 번째 달”(라틴어: Sextilis)로 불리었던 달이, 아우구스투스의 시대 이후부터 8월(라틴어: Augustus, 영어: August)이라는 지금의 호칭으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8월이 31일이 된 이유는,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이름을 딴 8월과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을 딴 7월(July)이 똑같은 날짜 수를 가지길 원해서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13세기의 학자였던 사크로보스코의 요한네스(Johannes de Sacrobosco)가 지어낸 이야기이다. 실제로 8월은 이름이 '아우구스투스'로 바뀌기 전부터 31일이었다. 암브로시우스 테오도시우스 마크로비우스에 따르면, 이름이 '아우구스투스'로 바뀐 것은 로마 원로원의 결정이라고 한다.[199]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30년 8월에 알렉산드레이아를 함락한 뒤 권좌에 오르자, 이를 기리고자 8월을 '아우구스투스'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한편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카이사르가 제정했던 율리우스력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역법에 혼란이 왔는데, 이를 바로 잡으면서 8월을 '아우구스투스'로 명명하였다고도 한다.[200]


건축[편집]


평화의 제단에 새겨진 돋을새김.


프랑스 비엔에 위치한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의 신전.

아우구스투스는 죽기 전에 “나는 진흙으로 된 로마를 물려받았고, 대리석의 로마를 물려줬다.”라고 호언장담하였다. 디오 카시우스는 이 발언이 황제의 권력에 대한 은유라고 분석하였다.[201] 아우구스투스 이전의 시대에도 건물을 지을 때 대리석을 사용했고, 그 후에 대리석의 사용량이 갑자기 증가하지도 않았다.[202] 화재의 위험이 높았던 건물이 많았던 수부라 지역의 건설에 대리석을 많이 사용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마르스 광장(Campus Martius) 근방에 평화의 제단(라틴어: Ara Pacis Augustae)과 같은 기념비적인 건물을 많이 세웠다. 평화의 제단 앞에는 해시계로 사용하기 위해 이집트로부터 가져온 거대한 오벨리스크가 놓여 있었다.[203] 《아우구스투스 업적록》에 따르면 평화의 제단에 새겨져 있는 돋을새김에는 아우구스투스의 노력으로 평화를 이룩한 것을 경축하고, 앞으로 오랫동안 로마 제국이 평화롭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고 한다.[204] 이 돋을새김에는 집정관, 여사제뿐만 아니라 로마의 시민들도 함께 새겨져 있다.[205] 아우구스투스는 또한 카이사르 신전, 아그리파 목욕탕을 지었으며, 마르스 신전이 딸려 있는 아우구스투스 포룸도 건설하였다. 다른 건설 사업들도 장려하였는데, 대표적인 건물로 아그리파가 지은 판테온, 아우구스투스가 건설 자금을 지원하고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붙인 옥타비아 회랑, 마르켈루스 극장 등이 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는 가족을 위한 무덤으로 사용하기 위해 아우구스투스 영묘를 건설하였다.[206] 악티움 해전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여 기원전 29년에는 카스토르와 폴룩스 신전 근방에 아우구스투스 개선문이 건립되었고, 기원전 19년에는 이를 확장하였다.[202] 이러한 건설 사업은 제국 전역에서 행해졌는데, 현재까지도 과거 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여러 곳에 아우구스투스의 시대에 건설된 건물이 남아 있다. 그 이후 로마 제정 시기 동안 그리스로부터 영향을 받은 코린토스 양식의 건물이 주를 이루었다.[202]


아그리파가 기원전 12년에 죽은 후,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가 개인 재산까지 기부해 가며 책임지던 수도 유지·보수 업무를 정비하여야 했다.[179] 그해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이 지정한 3명의 원로원 의원이 로마의 수로교의 유지·보수 임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179] 아우구스투스 통치 말기에는 다섯 명의 원로원 의원이 “공공사업청”(curatores locorum publicorum iudicandorum)이라 불리는 공공건물과 신전의 유지·보수를 맡았다.[179] 아우구스투스는 또한 “도로청”(curatores viarum)을 창설하여 정기적으로 각 지방의 가도 유지·보수를 담당하도록 했다.[183]


외모[편집]

수에토니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외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용모와 자태에 기품이 어려 있고, 평생 언제 어느 때나 아름다워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중략) 그의 눈은 밝고 맑으며 형형히 빛났다. (중략) 머리칼은 엷은 금색이고 약간 곱슬머리였다. 양쪽 눈썹은 붙어 있고, 귀는 보통 크기였다. 콧마루는 끝에서 약간 솟아오르고 그 밑변이 안쪽으로 약간 구부러져 있었다. 피부는 거무스름하지도 않고 희지도 않고 딱 중간이었으며, 키는 작았다.

— 수에토니우스(박광순 옮김) (1998). 《풍속으로 본 12인의 로마 황제》. 풀빛미디어. 1권 1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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