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17 – 안나 카레리나 (Anna Karenina) / 톨스토이(L.N. Tolstoi, 1828~1910)

(출전: 동서고전 200선 해제3 / 반덕진 / 가람기획)

 

  상류사회의 정숙한 부인 안나의 불륜의 사랑을 중심으로, 1870년대의 러시아 귀족사회를 묘사한 가정소설이자 사회소설이다. 그는 여기서 안나와 브론스키의 구원받을 수 없는 관능적인 사랑에, 레빈과 키치의 진정한 기독교적 사랑을 대비시키고 있다. 전자가 단순한 육체적 사랑이며 이기적인 데 비해, 후자는 형이상학적 사랑의 개념이며 자기 희생이다. 바로 여기에 작가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있다. 아울러 이 작품은 19세기 러시아 사회의 한 풍속도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사실주의 소설의 걸작이다.


a. 문학가에서 구도자로

  러시아의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톨스토이 백작 집안의 4남으로 태어났다. 톨스토이 가의 영지였던 야스나야 폴랴나는 러시아로 어로 밝은 숲속의 공터 라는 뜻으로 톨스토이 문학을 탄생시킨 토양이 되었다. 그의 작품이 배후에 항상 광활한 러시아의 자연이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었으나 친척집에서 좋은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그러나 타고난 이원성, 즉 풍부한 감수성과 냉철한 이성으로 인해 불안과 동요 속에 일생을 보내야 했다. 19세에 카잔 대학에서 대학은 학문의 장지 라는 결론을 내리고 중퇴, 고향으로 돌아가 합리적인 농장관리와 영지 내의 농민생활을 개선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얼마 후 모스크바로 이주하여 방탕하게 지내다가 형의 권유로 군에 입대했다.

 이때 그는 이 아름다운 카프카스의 자연에서 여가의 대부분을 글을 쓰며 보냈는데, 어린이의 심리를 가장 매혹적으로 묘사한 (유년시대)를 비롯하여 크림 전쟁을 소재로 한 (세바스토폴 이야기)는 그가 군에서 경험한 전쟁의 참혹성과 비인도성을 생생하게 그린 작품으로 그의 작가적 위치를 확고하게 만든 출세작이기도 하다. 그후 두 차례의 서유럽 여행을 통해 문명의 해악을 실감하고 루소의 자연에 바탕을 둔 농민교육에 힘을 쏟았다.

  1862년 34세의 노총각은 전부터 알고 지내던 18세의 소피아와 결혼하여 자신의 영지에서 신혼살림을 차리고 밝고 편안한 생활을 즐기게 되었다. 결혼 후 새로운 창작열에 불타오른 톨스토이는 문학에 전념하여 양적 질적인 면에서 최대의 걸작으로 알려진 서사시적 대하소설(전쟁과 평화)(1865~1866, Russian Herald)를 발표했다. 행복한 가정생활의 찬가인 이 작품은 삶의 즐거움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어 (안나 카레니나)(1873~77)를 완성하여 세계적인 대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는데, 이 무렵부터 톨스토이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에 대한 무상 등 심한 정신적 동요를 일으켜 인생의 위기를 맞게 된다. 그는 체계적으로 섭렵했던 철학 신학 과학서적에서는 별 도움을 얻지 못했으나 농부들에게서 그 실마리를 찾았다. 농부들은 그에게 인간은 신에게 봉사해야 하며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그의 사상적인 전환점이 되었던 이 시기를 전환기라고 한다. 이때부터 그의 숙명적인 영혼의 투쟁은 시작된다. 1882년(54세) 그의 (참회)에는 그의 정신적 고뇌가 잘 나타나 있다. 그가 종교로 전향한 시기는 바로 이 시기로 도덕가적인 면모가 드러났다. 즉, 평등, 노동존중, 생활의 간소화, 반문화, 반국가, 반전 등을 내용으로 하는 종교적 인도주의, 이른바 톨스토이즘이 대두되었다. 그후부터 그의 문학활동은 주로 종교적 정신적 방향으로 기울어져갔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마침내 소설무용론으로까지 발전하여 그의 이전의 작품들을 허위의 예술이라 폄하하고 오로지 선을 추구하는 작품만이 참다운 예술이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그는 50세를 전후로하여 예술가로서의 톨스토이는

사상가 종교가로서의 톨스토이로 전환한다.

 그는 교회의 일체의 권위화 형식을 부정했다. 그는 모든 과학적인 발전에 회의를 느끼고 대중의 원시적인 신앙을 따르며 농민의 마음속에서 진리를 찾아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크리스도교는 무저항주의를 지상명령으로 보고 어떤 형식의 폭력도 비난했다. 그는 이 세상의 종교들, 즉 기독교 불교 유교 등을 연구하여 보편적인 종교를 만들려 했다. 이 점에서 그는 러시아의 정교회를 전세계의 종교로 만들려 했던 토스토예프스키와는 다르다.

  그는 이후 30년 동안 종교와 도덕에 관한 수많은 논문을 남겼고, 1885년(57세)에는 사유재산을 부정했다. 이 문제로 부인과 충돌하여 그의 저작권은 그의 부인이 관리했다. 이 무렵 병역을 거부하여 탄압을 받고 있던 이교도들의 캐나다 이주자금 조달을 위한 방편으로 쓴 (부활)(1889)이 발표된다. (부활)은 그의 정신적 종교적 마지막 참회라는 의의를 가지나, 이 작품에서 그리스 정교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정교회로부터 1901년(73세) 파문을 당하게 된다.  사유가 모든 악의 뿌리 라는 생각에 만년에 그는 재산과 저작권을 포기했는데, 이는 가족에게는 중대한 문제였기 때문에 부부간에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기독교적 이상을 품고 러시아 농민들을 위해 헌신하고자 했던 그는 자신의 뜻에 공감하지 못하고 귀족적인 분위기에 젖어 있는 아내와의 불화로 82세의 노구를 이끌고 1910년 10월 28일 새벽, 13명의 자녀 중 마지막까지 자신의 세계를 이해해준 막내딸 알렉산드라와 주치의를 데리고 집을 떠나 방랑길에 나섰다가 도중에 숨을 거두었다.


b. 톨스토이의 사상과 주요작품

  문학가로서의 톨스토이의 탁월함을 비판할 사람은 거의 없다. 그는 가장 위대한 소설가로 앞세대 러시아 소설가들의 영향보다는 루소, 스탕달, 새커리 등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상가로서의 그의 모습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그는 진리탐구에 지칠 줄 몰랐고 인간의 세계에서 절대적인 것을 탐색하고자 했다. 그 결과 그의 비타협적인 태도와 완벽하고 합리적인 설명은 그러한 강박관념에 가까운 의무감 때문에 다소 부자연스러운 면도 없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역사 교육 비폭력 예술관을 논할 때도 이런 면이 있음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의 사상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한결같이 그의 사상이 19세기 자유주의와 연관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는 소수에 의한 다수의 억압이 전세계적인 현상으로 이해했고, 이의 궁극적 해결방법은 인간의 도덕적인 성장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계급과 국가가 없는 상태를 향한 진보적 운동은 마르크스의 주장인 경제 결정론이나 폭력투쟁과는 반대로 모든 개인이 도덕적으로 완벽해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 도덕적 완성은 사랑이라는 지고의 법을 준수하고 어떤 형태의 폭력도 거부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톨스토이는 자신의 이성주의를 극단적으로 밀고나간 19세기 도덕사상가였다. 


    전쟁과 평화

  현대의 (오디세이아)라고 불리워지는 이 작품은 나폴레옹 전쟁의 역사적 경험을 배경으로 피에르와 안드레이, 그리고 로스토프 가의 기록을 중심으로 당시 러시아의 국민생활의 일대 파노라마가 선명하게 재현되고 있다.

  559명의 등장인물 중에서 명예욕이 강하고 현실적이며 전형적인 귀족인 안드레이 공작은 전장에서 부상한 이래 삶의 공허감 속에서 죽는다. 이에 반해 피에르는 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인생의 목적은 사는 데 있다는 삶의 철학을 가지고, 역시 같은 생각을 가진 발랄한 나타샤와 함께 새생활을 떠난다. 이는 당시의 톨스토이 자신이 체험한 신혼 당시의 밝은 낙천주의의 반영이다.

  안드레이 공작은 작가가 부여한 삶이라는 과제에 대하여 마이너스 방향으로 갔기 때문에 멸망한 데 반해, 피에르는 긍정적인 해답을 내려 행복한 새 삶을 살 수 있었다. 처참한 전쟁을 묘사하면서도 이 작품에서 의외로 밝은 청춘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부활

  이 작품은 코니라는 법률가 친구로부터 들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만년의 작품이다. 여죄수 마슬로바의 재판에 배심원으로 참석한 네플류도프 공작은 피고가 자신이 청년시절에 추행했던 카추샤란 것을 알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그녀와 결혼을 결심하고, 잘못된 재판으로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는 그녀를 따른다. 그러나 그녀는 네플류도프의 장래를 생각하여 마음 속으로는 사랑하면서도 그와 헤어진다. 그러던 어느 날 네플류도프는 여관에서 성서를 펴놓고 복음서 속에서 갱생의 길을 찾아낸다. 원숙하고 예리한 심리묘사, 당시 사회의 불합리성을 파헤친 이 작품을 두고 비평가들은 종교적 속죄와 영혼의 완성을 설교하는 예술적 성서라고 평가하기도한다.


c. 당대의 도덕과 애정을 형사화한 작품

  이 작품을 두고 도스토예프스키는 예술작품으로 완벽한 것이며 현대 유럽문화 가운데 견줄 만한 상대가 없는 작품 이라 평했고, 로맹 롤랑은 악에게 파멸당하고 신의 섭리 속에 분쇄되는 이 영혼의 비극, 대단히 심각한 한 폭의 그림이라 평했다.

  세계문학에서 가장 매력적인 여주인공의 하나인 안나는 젊고 아름다우며 근본적으로 선량하지만 파멸의 운명을 지닌 여성이다. 어린 나이에 숙모의 선의의 중매로 화려한 경력을 가진 장래가 촉망되는 관리와 결혼한 안나는 페테르스부르크의 사교계에서도 가장 활기찬 교제로 만족한 나날을 보낸다. 어린 아들을 사랑하고 20세나 연상인 남편을 존경하며 타고난 낙관적인 기질로 생활의 모든 즐거움을 한껏

맛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모스크바 여행에서 만난 브론스키에서 안나는 격렬한 사랑을 느낀다. 이 사랑은 그녀의 주변을 온통 바꾸어놓는다. 눈에 띄는 것은 모두가 잘못된 것이다. 모스크바에서 돌아오는 그녀를 마중하기 위해 페테르스부르크의 철도역으로 나온 카레닌의 귀가 불품 없고 지나치게 크다는 것을 그녀는 갑자기 깨닫는다. 그때까지 한 번도 남편을 비판적으로 본 적이 없었던 그녀는 그 귀에 새삼 놀라게 되는 것이다. 이제 남편은 자기 생활과 관계하는 온갖 사물의 하나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모든 것이 변했다. 그녀에 대한 브론스키의 정열은 강렬하고 하얀 광선이며, 그 빛에 조명되었던 예전의 세계는 이제 사멸된 혹성의 풍경처럼 보인다.

  안나는 남자답고 핸섬한 브론스키에서 점점 더 강렬한 애정을 느끼게 되어 이성으로는 억제할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된다. 안나는 공작부인 베트시처럼 자신의 정사를 비밀에 부칠 수 없었다. 성실하고 정열적인 안나의 성격이 속임수나 비밀에 참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안나는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을 남편에게 내주는 일에 동의하면서까지 자신의 생활을 포기하고 브론스키에게 모든 것을 바친다.

  처음에는 이탈리아에서, 다음엔 중앙 아시아의 브론스키의 영지에서 그와 함께 지낸다. 이 공공연한 정사는 사교계 사람들의 눈에는 더할 수 없는 부도덕으로 보인다. 결국 안나와 브론스키는 도시의 생활로 되돌아온다. 그녀의 정사 그 자체보다도 사교계의 관습에 대한 안나의 공공연한 도전이 위선에 찬 사교계를 분노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안나가 사교계의 노여움을 사서 냉대받고 모욕당하고 버림을 받는 데 반해 브론스키는 남자이기에 비난받는 일 없이 옛 친구들을 만나기도 하고 귀족회의 등으로 외출을 자주하여 안나의 허전함은 더해진다. 정식부인이 아닌 그녀는 브론스키가 어느 집의 딸과 결혼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늘 마음에 걸려 끊임없이 질투의 불꽃을 태운다.

  한편 브론스키는 그녀의 이러한 이기주의적이며 독점적인 애정이 차차 무거운 짐으로 느껴진다. 사소한 일로도 말다툼이 잦아지고 그때마다 광적인 포옹과 애무로 해결되지만 이튿날에는 역시 똑같은 일이 되풀이되곤 한다. 질투와 정신적 불안에 몰려 브론스키의 사랑을 잃었다고 단정해버린 안나는 절망한 나머지 달리는 열차에 투신자살한다. 안나를 잃음으로써 또한 인생의 모든 것을 잃은 브론스키는 더 이상 살아갈 희망마저 가질 수 없게 되어 때 마침 발발한 세르비아 전쟁에 의용군 부대를 이끌고 전선으로 떠난다.

  이것과 병행해서 언뜻 보기에는 연관이 없는 줄거리가 진행된다. 귀족지주인 레빈과 공작의 딸 키티와의 구애와 결혼 이야기다. 영지에 틀어박혀 농지관리에 전념하고 있던 레빈은 상경하여 키티에게 청혼하나 브론스키에게 마음이 기울어져 있던 키티는 매정하게 거절한다.

그러나 안나에게 브론스키를 잃은 키티는 정신적 타격을 입고 한동안 방황하다가 결국 청혼을 받아들인다. 둘은 결혼하여 레빈의 영지에 정주하고 농업경영에 온 정열을 기울여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생활을 영위한다. 키티와의 평화스런 생활 속에서 레빈은 가끔 심각한 의문에 봉착하게 된다.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 사람은 도대체 왜 사는 것일까 하는 의문으로 괴로워하고 번민하면서 그 해답을 구하기 위해 철학서적을 탐독하지만 어떤 철학서적도 인생의 의의 같은 것을 분명하게 제시하지는 않는다. 레빈은 주변 사람들의 생활방식에 눈을 돌려 소박한 농민들이 그런 의문 따위는 조금도 품지 않고 정직한 마음으로 신의 존재를 믿고 신의 섭리에 따라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고 감동한다.


d. 문학사적 의의

  이 작품은 문체와 서술기법에서 있어 (전쟁과 평화)와 비슷하지만 톨스토이의 인생철학은 이 두 작품을 저술하는 동안 다소 변화했다. (전쟁과 평화)는 삶을 긍정하는 낙관적인 소설이나, 1860년대 러시아 사회를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비관적이며 주인공들은 내부갈등으로 인해 인간적 파멸에 이른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불륜의 사랑은 비극적인 운명을 피할 수 없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불행한 로맨스는 톨스토이 자신의 결혼생활을 바탕으로 기술한 키티와 레빈의 고통스러운 의문, 뇌리를 떠나지 않는 자살 생각, 농부들과 어울리고자 하는 욕망 등은 당시 톨스토이가 겪고 있던 갈등이 뚜렷이 반영된 것이다.


    두 사랑 방식

  작가가 이 소설에서 전하려는 도덕적 메시지는 무엇인가는 이 소설을 다시 정독한 후 레빈과 키티의 이야기와 안나와 브론스키의 이야기를 비교해본다면 명확해질 것이다. 레빈의 결혼은 형이상학적인 사랑과 자발적인 희생이 기초가 된 반면, 안나와 브론스키의 관계는 육체적 사랑이 그 기초가 되었으며 거기에는 파국이 깃들어 있다.

  언뜻 보기에 안나는 남편 이외의 남자와 사랑에 빠짐으로 해서 사회로부터 벌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 같은 도덕은 물론 비도덕적이며 비예술적이다. 왜냐하면 같은 사회의 상류부인이라면 누구나 검은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몰래 정사를 즐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솔직하고 불행한 안나는 이 거짓의 베일을 쓰지 않았다. 사회의 규율은 일시적인 것으로, 톨스토이의 관심은 영원한 도덕적 요청에 있었다.

  여기에 톨스토이가 전하려는 참된 교훈이 있다. 말하자면 사랑은 오로지 육체적 사랑만은 존재할 없다는 것이다. 그 경우의 사랑은 이기적이며 그러기에 창조보다는 오히려 파멸을 자초하는 것이다. 이 핵심을 예술적으로 가능한 한 명확하게 제시하기 위해서 톨스토이는 놀라운 형상의 흐름 속에서 두 가지 사랑을 묘사하고 생생한 대조를 보여주었다. 브론스키와 안나의 육체적 사랑과 레빈과 키티의 진정한 기독교적 사랑이 그것이다. 물론 후자의 사랑도 충분히 관능적이지만 그것은 책임과 온화함과 진실과 가족의 즐거움이라는 순수한 분위기 속에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신에 의한 인간의 심판

  한편 성서에서 인용된 복수는 내게 맡겨라 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는 한마디로 안나를 심판할 수 있는 것은 신뿐이라는 믿음이다. 언제나 도덕률은 불변이며 이것을 어긴 자는 반드시 멸망으로 끌려가는데, 신의 법도를 범한 자를 심판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니고 신뿐이라는 사상,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는 자비의 법칙만이 있다는 것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근본사상이다. 그러나 안나를 통해 부패한 상류사회의 도덕적 타락을 보여주는 한편 그녀의 자아발견 과정에 동정하면서도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는 상황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토마스 만은 이 작품에 대해 조금의 흠집도 없이 전체의 구도나 세부의 디테일에 한 점의 티도 없는 작품 이라 평한 바 있다.



E16 – 백년 동안의 고독 (Cien Anos de Soledad, One Hundred Years of Solitude) / 마르케스(Gabriel García Márquez, 1927 ~ 2014)

(출전: 동서고전 200선 해제3 / 반덕진 / 가람기획)


  이 작품은 <콜롬비아의 세르반테스>로 불려지는 마르케스가 <마콘도>라는 가공적인 땅을 무대로, 고독한 운명을 타고난 부엔디아 집안의 비극적 역사를 그린 작품이다. 작가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마술적 사실주의> 기법을 통해 외세의 식민지배로 혼미한 라틴 아메리카 민주의 역사를 신비스러운 환상과 현실을 뒤섞어 그려내고 있다. 아울러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라틴 아메리카의 특수한 사회구조 속에서 고질적 낙후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 라틴 아메리카 인들의 정체성을 진지하게 탐색하고 있다.


a. 독재정권, 미국과 맞서 싸운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1928년 콜롬비아의 아라카타카에서 태어났다. 엄청난 폭우와 무더위가 번갈아 내습하는 이 마을은 <백년 동안의 고독>을 비롯한 그의 대부분 소설의 무대인 <마톤도>라는 가상 마을의 모델이 된다. 그는 8세까지 외조부의 슬하에서 자랐는데, 할머니가 들려준 외가 마을 과 아라카타카 마을,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 얽힌 신비스럽고 환상적인 이야기는 그의 소설의 든든한 밑천이 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괴이한 용모와 억센 고집으로 부모의 속을 무척 썩였다. 그러므로 가족들 중에 누구 하나 그에게 애정을 품거나 귀여워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 또한 집에 정을 붙일 수 없어서 어린 나이에 집을 뛰쳐나갔다. 이때부터 그는 말할 수 없는 고생을 감당해야만 했다.

  먹고 살기 위해서 그는 해보지 않은 일이 없었다. 군인이 되어 전선에 나가 싸우기도 했다. 이러한 파란 많은 삶의 편력은 타고난 문학적 재질이 풍부한 그에게 무진장한 소재로 작용했다. 그는 보고타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 기자가 되어 유럽에 잠시 체류했다가 그후 멕시코로 건너가 창작활동을 했고, 쿠바에서 혁명이 성공하자 쿠바로 건너가서 국영 통신사의 뉴욕 특파원이 되는 등 인생편력을 계속했다.

  그가 문단에 뛰어들게 된 최초의 계기는 1947년(20세) <세번째의 만남>을 쓰면서부터였다. 곧이어 1954년(27세) 친구의 권유로 콜롬비아 전국 단편소설 대회에 <토요일 하루 뒤>라는 작품으로 국가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서서히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1955년 <낙엽>이라는 작품을 발표하여 콜롬비아 문단이 30년 만에 수확한 일대 걸작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낙엽>은 침체기에 빠져 있던 콜롬비아 문단에 새바람을 불러일으켰다. 파리에 머물면서 창작에 전념하고 이듬해 콜롬비아로 귀국했다.

  1958년은 그에게 두 가지 측면에서 의미있는 해였다. 하나는 메르세데스 바르차와의 결혼이고 다른 하나는 쿠바 혁명이었다. 이해 말에 일어난 쿠바 혁명에 고무받은 그는 좌파이념을 확고한 세계관으로 받아들인다. 한때 좌익이었던 수많은 문인들이 70년대 이후 우익으로 전향한 것과는 달리 그는 좌파이념과 카스트로정권에 대한 지지를 끝내 철회하지 않았다.

 1961년(34세)에는 자신이 가장 잘 썼다고 생각하는 단편 <대령에게는 편지가 오지 않았다>를 발표하여 큰 호응을 얻는다. 다음해에 그는 파리 체류 때 써놓았던 <불행한 시간>을 발표하여 콜롬비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에소 문학상>을 받았다.

  그후 오랜 성찰과 모색의 시간을 가진 그는 5년간 침묵 끝에 1967년(40세)에 <백년 동안의 고독>을 아르헨티나에서 출판하여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으며, 이 작품으로 1982년(55세)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1967년부터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 거주한 그는 75년에 독재자의 원형을 그린 소설 <족장의 가을>을 발표하고는 멕시코로 거쳐를 옮긴다. 그는 76년 쿠데타로 집권한 칠레의 피노체트가 권좌에 있는 한 더이상 소설을 발표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는 칠레 쿠데타의 빌미를 준 다국적 기업문제를 다루는 러셀 위원회, 정치와 사상의 자유를 위해 싸우다가 투옥된 사람들의 인권회복을 위한 아베아스 재단 창설 등에 참여하고, 중남미 각국의 정치범과 실종자들을 위해 정력적인 활동을

한다.

  1981년 4월 그는 <<상황이 바뀌어서 이제는 소설을 출판하는 것이 칠레 민중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요지의 해명과 함께 소설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를 출간하다. 노벨상 수상 이후 문학의 다양한 분야에서 왕성한 필력을 자랑했지만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선보인 내용과 형식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1983년 이후 스페인의 항구도시 바르셀로나에 거주하면서 집필에 몰두하다가 오랜 방황을 끝내고 지난 92년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폐암 수술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94년 초 <사랑과 또 다른 악마>를 내는 등 지금도 계속해서 글을 쓰고 있다. 2014년 사망함.


b. 마르케스의 작품세계

   마르케스의 작가적 삶에서 두드러진 점은 그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다. 그는 자신의 조국인 콜롬비아를 비롯한 중남미의 독재 정권들과 그를 지원하는 미국에 맞서 때로는 글로, 때로는 행동으로 싸웠다.


    소설의 정치화

  그는 항상 소설작품은 모름지기 정치적 이유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소설의 정치화를 강조했다. 그런데 작품의 정치화에 대한 그의 소견은 후에 많은 작가들에게 잘못 인식되어 작품의 정치화는 곧 카스트로에 대한 지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그의 진의는 라틴 아메리카와 같이 정치적 후진성을 면치 못한 지역에서는 가장 시대적 감각에 예민한 작가들이 지성에 바탕을 둔 사실주의를 지향함으로써 라틴 아메리카의 문제성을 올바르게 의식하자는 데 있었다.

  당시는 대낮에 도시 한복판에서 권총이 난사되고 밤에는 무서워 외출도 삼가야 하는 상황에서 잘못된 정치를 미화하는 정치관련 작품들이 난무하고 있었다. 과격한 국민성 때문에 무정부 상태의 콜롬비아 상황은 마르케스로 하여금 질서의 회복을 갈구하도록 만들었다. 그의 작품 속에는 이러한 시도가 안타까울 정도로 부단하게 반복되고 있다.


    역사서술의 문제점 형상화

  그의 작품세계에서 눈에 띄는 것은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역사서술의 문제점을 극적으로 형상화했다는 점이다. 역사는 흔히 정복자들에 의해 기술된다고 한다. 정복자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역사를 기술한다는 의미다. 이런 과정에서 피정복자들의 입장은 당연히 왜곡하고 은페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실은 미국역사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미국역사는 1492년 콜럼버스가 미국을 발견 한 것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인디언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발견이 아니라 침략이나 다를 바 없다.(침략과 연이은 학살이었다.)

  이러한 역사서술의 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작품이 이 작품이다. 미국 바나나 회사에 맞서 파업을 벌이는 과정에서 계엄령이 선포되고 무려 3천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정부군에 의해 학살된다. 정부관리들은 역광장에서 기관총으로 무참하게 살해된 노동자들의 시체를 한밤중에 화물차에 실어다가 멀리 바닷물 속에 수장해버린다. 그러나 정부와 다국적 기업의 계략으로 이 엄청난 사건은 그 진상이 철저하게 은폐되고 호도된다. 파업을 직접 주도했던 호세 아우렐리아노 세군도가 사건 직후 마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말하자 그는 오히려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다.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아예 교과서에서 다루지 않고 있거나 설령 다루고 있다 하더라도 사실과는 전혀 다르게 기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역사를 기술한다는 것은 진실과는 거리가 먼 한낱 권력을 장악한 지배계급이 조작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프랑스의 역사가 미셀 푸코를 비롯하여 미국의 역사가인 헤이든 화이트, 영국의 역사가 조너선 클락 등이 주장하는 포스트 모던 역사이론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역사기술이란 소설과 같은 허구적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c. 고독과 근친상간으로 이루어진 기문의 비극

   마콘도 라는 가상의 마을을 무대로 고독을 숙명으로 타고난 한 집안의 백년 동안의 역사를 서술한 이 작품은 일단 읽기 시작하면 누구든지 끝까지 읽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다. 작품의 전개는 기상천외하고 환상적인 사실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언뜻 보기에는 환상적인 것 같지만 실은 환상속에서의 사실성이 두드러진 작품이다.

  이 소설은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와 그의 사촌 여동생 우르슬라와의 근친상간적 결혼생활부터 시작된다. 그들은 집안 대대로 살던 고향을 버리고 사람들을 피해 남미의 처녀림 속에 마콘도 라는 새로운 마을을 건설하고 살아간다.

  이들 사이에는 큰아들 호세 아르카디오가 있었는데, 그는 몸집이 크고 여색을 좋아한 인물이다. 그들이 마콘도에 도착하여 편안한 생활을 할 무렵 차남인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가 태어난다. 그의 예리한 눈은 형과 반대로 날카로웠고 성격 또한 내성적이다.

  그들이 살고 있는 원시적인 이 마을은 물질문명의 혜택을 잔뜩 누리고 변화한 도시로 발전했다가 무지개처럼 하루아침에 지상에서 사라져버린다. 이런 환상적인 무대에서 고독을 운명처럼 타고난 한 집안의 백년의 역사는 시작된다. 아버지 부엔디아 이래로 이 집안의 6대의 역사가 그려지는데, 그 속에서 줄거리를 잡는다는 것 자체가 무리다.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환상인지 좀처럼 구별할 수 없고 그 변화의 폭도 매우 넓기 때문이다.

  구상에서 완성까지 15년이라는 세월이 걸린 만큼 마르케스는 환상과 현실을 격리시키고 있는 벽을 제거하는데 무척 고심했다. 마르케스는 조부모가 들려주는 환상과 경이로 가득 찬 신비스러운 이야기의 세계에 흠뻑 젖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작품 속에서 나타나는 현실과 비현실, 사실과 환상이 독자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고 하나의 새로운 문학적인 경향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바로 옛날 할머니의 이야기 덕분인 것이다. 즉, 그는 환상적인 작품에 역사적인 현실요소를 가미함으로써 특유의 제 3현실을 창조햇다. 예를 들면 작품 속에 나오는 바나나 농장의 참사극은 실게로는 13명이 죽은 사실을 그는 3천명으로 과장하여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과장에 대해서 마르케스는 백년 후에는 3천 명이라는 숫자가 역사적 숫자로 믿어지고 13명이라는 역사적 숫자는 믿기 어려운 환상적 숫자로 퇴색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창조적 행위를 통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이루어진 제3의 현실은 독자의 개념적 세계를 환상적 세계로 대치시킨다. 바로 이러한 세계가 신비하고도 마술적인 세계라 할수 있다.

  작가가 한 작품에 이처럼 다양한 문제를 다룰 수 있었던 것은 과거와 현재, 신화와 역사, 사실과 환상을 융합하는 기법의 활용에 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어린 시절 그의 조부모가 집안과 마을의 내력을 들려줄 때 사용했던 옛날 이야기 방식이었다.

  이처럼 합리주의 시각을 가진 서양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불합리하고 비이상적인 옛날 이야기를 소설이라는 고급형식으로 격상 시킨 데에 그의 공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흐름에 여타 중남미의 작가들도 더욱 가세하여 서양에서 도입한 소설 장르에 그들 나름대로의 문화적 유산을 가미하여 본고장으로 역수출한 셈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제 중남미적 소설은 한계상황에 직면한 서구소설에 새로운 활력소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서구소설의 한계상황이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로부터 시작된 근대소설이 20세기 후반에 들어오면서 그 위기를 맞게 되는 상황을 의미한다. 소수의 전문 독자만이 읽고 즐길 수 있는 난해하고 실험적인 소설들이 등장하는가 하면, 대중성은 있으나 문학성은 떨어지는 대중소설이 양산되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대소설의 죽음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마술적 사실주의 라고 규정되고 있는 마르케스의 소설세계에 희망을 건다. 마술적 사실주의란 간단히 말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서술방식이다. 여기서는 실제 사건과 공상, 역사와 설화, 객관과 주관이 혼합된다. 소설 고유의 특성을 유지하면서도 대중에게 친숙한 설화적 서술방식을 가미함으로써 대중성의 확보에도 성공한 그의 소설은

하나의 희망을 던져주고 있다.

  아무튼 오늘날 라틴 아메리카의 문제성을 아주 실감 있게 인식하고 이것을 효과적으로 독자들에게 전달한 마르케스는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세계화에 일익을 담당했다. 파블로 네루다의 시가 그 분야에서 라틴 아메리카를 세계화시켰다면, 작가의 의식세계와 라틴 아메리카라는 실체가 지니고 있는 복합적인 사실성을 총정리한 (백년 동안의 고독)은 소설로써 그 대륙을 체계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E15 – 양철북 (Die Blechtrommdl, The Tin Drum) / 그라스(Gunter Grass, 1927~2015)

(출전: 동서고전 200선 해제3 / 반덕진 / 가람기획)


 이 작품에서 작가는 난쟁이라는 <탈사회적 존재>의 눈을 통해 악의 세계를 밑바닥의 시각에서 관찰하고 있다. 주인공은 자발적으로 나치의 토대가 된 소시민 계층의 부패한 모습과 정치적 무의식을 고발하고, 다른 한편 과거의 죄악을 의도적으로 망각하려는 전후 서독사회의 몰역사적 기회주의적 태도에 저항한다. 20세기 전반기의 독일 소시민 계층의 몰락과정과 나치의 과거를 극복하지 못한 전후 서독사회를 형상화한 전후의 위대한 역사소설의 하나다.


a. 문학활동과 정치참여 병행

 20세기 후반기 독일 최대의 작가로 평가되는 귄터 그라스는 1927년 그의 문학적 원천인 단치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단치히 교외에서 작은 식료품 가계를 경영했다. 그래서 그라스는 어린 시절부터 소시민의 비참한 환경을 목격하며 자랐다. 그라스의 사상과 작품에 있어서 <소시민성>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이는 이러한 체험에 기인한다. <양철북>의 주인공 소년 오스칼은 양철북을 힘껏 두드리면서 거친 반항을 보여주는데, 여기서도 소시민적인 절망성이 엿보인다.

 10세에 나치 소년단에 가입하게 되고 2차대전 중인 17세의 어린나이에 전차병으로 일선에 끌려갔다가 가벼운 부상을 당해 미군 포로수용소로 옮겨졌다가 18세에 겨우 풀려나왔다. 나치의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저항적 도를 교육을 받은 젊은이에게 패전은 곧 새로운 각성의 시작이었다. 그라스가 일체의 이데올로기에 저항적 태도를 취한 것은 바로 그 자신의 쓰라린 체험에 기인하고 있다.

 그는 뒷날 <<그때부터 나는 겨우 성장하기 시작했다>>고 술회한적이 있는데, 그는 이때부터 나치의 추악상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전후 독일인들이 경제발전에 매진함으로써 과거의 죄를 잊으려는 경향에 대해 강한 저항을 느꼈다. 그는 우리 세대와 다음 세대는 어떠한 책임을 져야 하는가에 깊이 통찰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문제의식은 <양철북>의 제3부에서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전후 그라스는 농부로서, 광산의 광부로서 스스로 생계를 꾸려갔다. 1946년(19세) 조각공부를 위해 뒤셀도르프 예술대학에 입학하여 석판화와 동판화를 공부했다. 그라스는 조형예술뿐만 아니라 재즈 그룹 멤버로도 활약했다. 1956년(29세)에는 독일을 떠나 부인과 함께 파리로 이주했다.

 그가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은 것은 1959년(32세) <양철북>이 발표되면서부터다. 그라스는 이 작품 하나로 전후 독일문단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며 뚜렷하게 부각되었다.

 그는 1960년(33세) 베를린으로 돌아와 1961년에 독일 사회민주당의 빌리 프란트를 도와 선거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이때부터 10년간에 걸쳐 정치에 참여하게 된다. 그는 작가로서의 직업과 시민으로서의 정치활동을 확실하게 구분했다. 작가는 문학작품을 통해서 선언이나 저항을 해서는 표현해서는 안되며,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정신적 우월감을 버리고 정치에 직접 뛰어들어야 한다고 했다. 1970년대 초부터는 정치에서 다소 물러선 후 다시 집필을 시작하여 <넙치>(1977)를 발표함으로써 그의 문학적 역량을 다시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의 분위기는 그로테스크하고 비현실적이지만, 다루는 주제와 비판정신은 매우 냉혹하고 과학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b. 20세기 전반기의 독일역사 형상화

 이 작품은 전후 서독 문학의 최대의 수확으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나치 독일, 전쟁, 패전 등으로 단절되었던 위대한 독일 장편소설의 전통이 이 작품으로 다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이 작품은 주인공 오스칼이 자신의 과거를 회고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20세기 전반기의 독일역사를 형상화한 <허구적 자서전>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시간순서에 따라 구성되어 있으며, 3부로 되어 있다. 제1부는 나치의 등장과정을, 제2부는 제2차대전과 나치의 몰락을, 제3부는 전후사회를 다룬다. 이중 제2부가 이 작품의 핵심이다. 작품의 이해를 위해 내용을 요약해 본다.

  30세의 오스칼 마첼라트는 서독의 한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다. 그는 지금 자신의 회상록을 쓰고 있다. 그는 1899년 외할머니 이야기부터 시작하고 있다. 할머니는 감자밭에서 4겹의 치마 밑에 어느 방화범을 숨겨주게 되는데, 그 방화범과 외할머니 사이에서 오스칼의 어머니가 태어난다.

  오스칼은 1924년 단치히 교외의 랑푸르 라베스베크에서 태어났는데, 그는 아버지 마첼라트를 법률상의 아버지로만 인정할 뿐, 실제의 아버지는 어머니의 사촌이자 애인인 브론스키로 믿고 있다. 오스칼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완전한 성인의 지각을 갖추고 있다. 오스칼은 아버지라고 자칭하는 사나이가 요구하는 억지 장사꾼이 되지 않기 위해 세 살 때 성장을 멈춘다. 그는 소시민 사회의 정해진 궤도를 따라가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소시민 사회 속에서 예정된 삶을 거부하려고 그는 영원한 세 살배기로 살아남기로 하고 결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지하실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성장을 멈추게 한다.

 그의 키는 94cm에서 성장이 멈춘다. 나치가 붕괴하는 1945년까지 그는 성장하지 않은 채, 세 살배기의 시점에서 세상을 관찰한다. 세 살이 된 생일날, 그는 양철북 하나를 선물받는다. 그는 항상 이북을 치고 다니며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기려 하지 않는다. 또한 그는 상당히 먼 거리에서도 소리를 질러 유리를 깨뜨릴 수 있는 특이한 재능을 갖고 있다. 그는 자신의 북을 빼앗으려는 자에 대해서는 목소리로 저항한다.

 어머니는 1937년 브로스키와 불륜관계가 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닥치는 대로 생선을 먹은 뒤 결국 황달로 죽는다. 어머니가 죽은 후 오스칼의 아버지 마첼라트는 자신의 가계에서 일할 마리아를 고용한다. 오스칼은 마리아를 애인으로 삼고자 한다. 아버지는 오스칼의 애인인 마리아와 재혼한다. 오스칼은 훗날 이 계모와 결혼하려고 하나 그녀가 응하지 않는다.

  오스칼은 음악광대 베브라와 함께 나치 점령하의 프랑스로 간다. 그곳에서 1943년부터 1944년까지 난쟁이들로 구성된 나치 위문단의 일원으로 전선 위문공연에 참여하다.

  전쟁이 끝날 무렵, 나치 당원이던 아버지 마첼라트가 나치의 휘장을 목에 삼킨 채 러시아 병사에 의해 살해된다. 그의 장례식에서 오스칼은 마첼라트의 무덤 속에 자신의 북과 북채를 묻어버리고 다시 성장하기로 결심한다. 즉, 독일의 패배와 아버지의 죽음은 그에게 새로운 삶의 시작을 의미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계모와 함께 단치히를 떠나 화물열차를 타고 서독으로 가게 되는데, 이것으로 소설의 2부가 끝난다. 여기까지가 영화화되어 있다.

 서독에 온 오스칼은 뒤셀도르프 근교에서 화폐개혁과 암거래 시장을 경험한다. 오스칼은 직업을 찾는다. 처음에는 묘비석을 깎는 석공장에서 석수로, 나중에는 미술대학에서 모델로 일한다.

  그의 성장은 다시 121cm에서 중단된다. 그는 이제 어린 아이가 아니고, 등에 혹이 난 난쟁이가 된 것이다. 이제 그에게는 소리로 유리를 깨는 능력도 사라진다. 그후 그는 다시 북을 잡는다. 그는 북 연주자로서 그 분야의 스타가 된다. 그후 그는 애매한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혐의자로 체포된다. 그는 정신이상자로 몰려 정신병원에 수용된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수상록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1954년 30세의 생일날, 그는 2년간의 집필을 끝내는데, 이것으로 소설도 끝난다.

  유유히 흐르는 바이크셀 강 연안의 민요적 목가적인 세계를 비롯하여 나치의 대두, 독일의 몰락, 전후의 혼란 등이 양철북을 두르리면 의식의 세계에 힘차게 되살아난다. 소시민의 사소한 것들이 얼마나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악의 집단에 의한 소시민의 몰락은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난쟁이 오스칼의 인생회고는 독자들을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세계 속으로 몰고갈 것이다.


c. 인간의 의식을 일깨운 난쟁이의 양철북

  20세기 독일의 역사, 특히 나치와 제3공화국을 상징적으로 다룬 역사소설인 <양철북>에 대해 그동안 수많은 연구결과가 나왔지만, 이 작품은 나치의 <비극적인 역사>와의 대결을 전제로 할 때만 궁극적 메시지를 추출해낼 수 있다.

  어른들의 세계로 대표되는 기존체제에 대한 부정과 반항으로 스스로 성장을 멈춘 오스칼은 키가 작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대상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게 된다. 즉, 사물의 밑을 관찰하는 <앙각의 퍼스펙팁>를 갖는다. 오스칼의 이러한 시각은 사물을 아래로부터 폭로하고 변형시키며 전통적 가치체계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기능을 갖고 있다. 오스칼은 이러한 독특한 시각을 이용하여 소시민 사회의 부패한 모습을 폭로하는 데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된다.

  오스칼은 <아래에서> 소시민 사회의 부패상을 폭로한 것과 마찬가지로 연단의 <뒤에서> 나치즘의 서구성과 기만성을 꿰뚫어본다. 그라스는 <<여러분은 한 번이라도 연단을 뒤에서 본 일이 있는가? 일찍이 연단을 뒤에서 본 사람은 연단 위에서 거행되는 어떠한 마술에 의해서도 동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연단의 본질을 은폐하기 위해 꾸며진 허상을 폭로한다.

  그런데 유의해야 할 점은 주인공 오스칼은 그 개인이 아니라 보편이 집약된 존재이다. 그라스 자신의 체험과 의식은 물론 하나의 계층, 한 시대 전체의 체험이 구체화되고 형상화된 모델이라는 점이다. 즉, 작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그 위에 역사적 사실들을 일치시켜 역사과정을 시간순으로 기술하고 있다. 예를 들면 오스칼의 출생은 나치 세력의 강화를, 오스칼의 어머니의 죽음은 자유도시 단치히의

몰락을 유태인 마르쿠스의 죽음은 유태인 박해를 그리고 독일인 마첼라트의 죽음은 나치의 종말을 암시하고 있다.


d. 소시민의 정치적 무관심 질타

소시민 사회 속에서 예정된 소시민적 삶을 거부하고 영원한 세살배기로 남기로 결심한 오스칼을 <소시민 계층의 메가폰>으로 볼 때, 우리는 작품 전체를 통일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된다. 당시 독일 소시민 계층은 악화일로에 있는 그들의 사회경제적 상황에 절망하여 나치즘을 받아들인다. 오스칼이 소시민 사회의 예정된 행로를 거부하고 북에만 매달린다는 사실은 몰락하는 소시민계층이 협소한 소시민적 일상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북>으로 상징되는 공격적인 나치즘에 매달린다는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고 있다.

  오스칼이 지닌 <유리 파괴의 목소리>도 이런 맥락에서 올바로 조명될 수 있다. 지금까지는 강요된 이유에서만 비명을 질러 유리를 깨던 그가 1932년 단치히의 스토크 탑에 올라가 <아무런 이유도 강요도 없이> 시립극장의 유리를 깨는 것은 나치의 집권이 임박했던 역사적 사실과 일치한다. 전쟁이 발발하자 그의 목소리는 <기적의 병기>로 둔갑되어 전쟁무기로 이용된다. 이제 소시민 사회의 공격적 분위기는

전쟁이라는 집단적 폭력으로 폭발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소설의 1, 2부에 나타나는 오스칼의 <북>과 <유리파괴의 목소리>는 그의 시대사적 기능을 명쾌하게 보여준다. 오스칼은 공격적인 시대의 분위기를 구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치의 축소판으로서 나치 독일이 전쟁이라는 대영역에서 행한 것을 소시민적 환경의 소영역에서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성장이 중단되었던 오스칼은 나치 몰락 후에 다시 성장하나 정상적인 키에는 이르지 못하고, 전후 독일사회에서는 등에 혹이 달린 불구자가 된다. 이러한 오스탈의 신체변화는 또 하나의 다른 시대사를 상징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1927년 오스칼의 성장중단은 독일 소시민 계층이 나치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함을 의미하며, 나치가 멸망한 1945년 후 오스칼은 다시 성장을 시작하는 데 이는 나치 치하에서 어떠한 정치적 책임감이나 역사의식도 지니지 못하던 소시민 계층이 그 <세 살배기 수준>을 벗어나 이제 비로소 정상성을 향해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e. 전쟁의 책임의식 일깨워

  침략과 야만의 시대가 지난 후 오스칼과 그의 동시대인들의 삶에는 평온이 찾아온다. 그러나 전후에도 오스칼의 키는 121cm에 멈추고 거기다가 등에 혹까지 붙은 불구자가 된다. 이는 전후 서독사회가 진지한 성찰과 반성을 통해 과거를 극복하려 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과거의 기억을 지우려고 함으로써 과거청산에 실패했음을 암시한다. 오스칼의 신체적 불구는 역사의 상처로 계속 남게 된다. 이는 심각한 동요를 겪은 독일사회의 반영으로 사회적 병이 개인의 병으로 전이된 것이다. 그의 병은 과거를 기피하려는 전후 서독사회의 병인 것이다.

  나치의 붕괴와 함께 오스칼의 공격적 자질이었던 <북>과 <유리파괴의 목소리>는 사라진다. 그는 전후의 새로운 사회에서 <성인으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한다. 그러나 오스칼은 위에서 언급한 반역사적 사회풍조에 반항하여 다시 북을 두드리는데, 이번에는 오스칼의 공격적인 자질의 상징이었던 북이 새로운 역할, 즉 독일인의 의식을 일깨우는 역할을 한다. 독일의 소시민들이 나치즘을 받아들이고, 전후 과거를 기피하려는 기회주의적인 모습을 보일 때 오스칼만이 주변세계와 개개의 사건을 똑바로 바라보는 눈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작가는 오스칼을 통해서 자발적으로 나치의 토대가 된 소시민 게층의 부패한 모습과 정치적 무의식을 고발하고, 다른 한편으로 과거의 죄악을 의도적으로 은폐하려는 전후 독일사회의 몰역사적 기회주의적 태도에 저항하려 했다. 이런 의미에서 <양철북>은 20세기 전반기의 독일 소시민 계층의 몰락과정을 형상화한 <소시민 계층의 만가>이며 나치의 과거를 극복하지 못한 전후 사회에 대한 <비탄의 노래>라 할 수 있다.



E14 – 수레바퀴 아래서 (Unterm Rad, Beneath the Wheel) / 헤세(Hermann Hesse, 1877~1962)

(출전: 동서고전 200선 해제3 / 반덕진 / 가람기획)


 <<시인이 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다>>고 선언하며 그가 다니던 신학교를 뛰쳐나온 천부적 시인 헤르만 헤세는 정신적 방황과 혼미를 거듭하면서도 주옥같이 아름다운 시와 글을 썼다. 이 작품은 자신의 유년시절을 수채화처럼 펼친 자전적 소설로, 소년 시절의 즐거움과 슬픔, 희망과 절망을 그의 고향 슈바벤을 배경으로 절실하게 묘사했으며, 엄격한 교육제도 아래서 희생되는 학생들의 창조적 개성을 폭로했다.


a. 동양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작가

 <데미안>의 작가로 우리에게 친숙한 헤르만 헤세는 동양인의 심성에 더 어울리는 작가다. 그의 부친은 선교사였고, 모친은 동양학자의 딸로서 인도에서 출생한 경건한 여인이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동서양의 정신을 꾸준히 탐색하여 훗날 괴테와 도스토예프스키처럼 노자 공자역선 등을 섭취하여 소위 <세계신앙>이라는 자신의 <도>에 도달했다.

 라틴 어 학교를 마친 헤세는 14세에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당당하게 관비생으로 마울브론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는 선천적인 시인의 기질로 판에 박힌 듯한 기숙사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이탈했다가, 결국 학교로부터 퇴학을 당하게 된다.

 <시인이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다>고 느껴 신학교를 도망쳐나오긴 했으나 시인이 되는 길은 요원했으며 혼미와 우울증으로 자살을 기도하는 등 생사의 기로에서 그는 몇년간 신음했다. 그는 한동안 기계공이나 서점의 점원 노릇을 하며 그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를 보내게 된다. 그런 중에도 서점의 점원으로 있으면서 괴테나 실러의 문학작품을 탐독할 수 있었던 것은 퍽 다행이었다. 가장 파란이 많았던 이 시절의 자전적 기록이 <수레바퀴 아래서>다.

 1904년(27세)에 애절하고 체념에 찬 소설 <페터 카멘친트>를 써서 문단의 호평을 받자 본격적인 작가생활에 들어가게 된다. 그해에 그는 9년 연상인 피아니스트 마리아와 결혼했고, 1906년 발표한 <수레바퀴 아래서>는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그즈음 그는 스위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을 여행했고, 1911년(34세)에는 인도를 여행하여 동양에 관한 관심이 깊어졌다. 1차대전 중에는 중립국 스위스에 살면서 군국주의와 민족주의를 배격하고 독일의 전쟁포로들과 수용자들을 위한 잡지를 편집하기도 했다.

 항상 자기를 <고독자>로 자칭한 헤세는 1919년(42세)에 독일을 떠나 스위스의 남단 아름다운 호수 몬타뇨라에 정착하여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은 채 혼자 사색과 창작에 몰두했다. 인간의 위기에 대한 심오한 감성을 지닌 작가로서, 심리학자 융이나 그의 제자들과도 교유했는데 이 영향이 <데미안>에 나타난다. 이 소설은 고뇌하는 청년의 자아인식 과정을 고찰한 작품으로, 당시 곤경에 빠진 독일국민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가정적으로는 불행하여 1919년에 마리아와 이혼하고 1931년(54세)에 재혼했다.

 1차대전중에는 순수한 휴머니즘 입장에서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수호하려는 반전논문을 발표하여 <매국노>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의 후기 문학활동은 인간본성의 이중성 탐구에 집중되었다. 1930년(53세)에 발표된 <지와 사랑>에서는 기존 종교에 만족하는 지적인 금욕주의자와 자기 자신의 구원 형태를 추구하는 예술적 관능주의자를 대비시켰다. 1946년(69세)에 20세기 문명 비판서인 미래소설 <유리알 유희>를 발표하여 동년에 <한 비극적인 시대에 인간성의 깃발을 높이 내세운 시인>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1962년 85세를 일기로 뇌출혈로 운명했다.


b. 내면의 길 추구한 작품세계

 이제는 역사 속에서 서서히 멀어져가고 있지만 제1차 세계대전은 당시 유럽인들에게 자신들이 이룩한 문명과 문화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갖게 했다. 애국과 정의라는 미명하에 엄청난 살육이 저질러지는 모습을 보고 양심적인 지식인들을 깊은 고뇌에 사로잡혔다. 헤세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당시 유럽의 불행을 지나친 물질주의 추구로 인한 인간의 자기상실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자기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을 역설했다. 전쟁이 끝나자 헤세는 이 세계와 인간 모두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기 위해 반성해야 하며, 새로운 가치 창출을 위해 힘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데미안>을 비롯하여 <싯다르타> <황야의 이리>등은 인간의 구도적인 모습을 담았고, <유리알 유희> 등은 일종의 문명비판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는 현대 독일의 양심을 대표하는 작가로, 그의 작품에는 줄곧 인간존재의 근원에 도사리고 있는 2원성의 대결, 서유럽 문화의 몰락과 동양적인 신비에의 동경, 영혼의 자유와 인간성의 고귀함 등이 나타나고 있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무엇보다 인간의 내부에 공존하고 있는 양면성을 발견하고 그 존재를 다 같이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통일과 조화로 이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자연에 사랑과 지극히 서정적이며 전원적인 시풍으로부터 출발한 그의 문학은 인간의 본질을 추구하여 <내면으로의 길>을 걷고 있는 구도자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그의 삶의 내실이 누구에게나 한결같이 반복되는 것이 아님을 역설한다. 그것은 제한된 시간 속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도정이며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완성해가는 과정이다. 헤세는 내면으로 가는 길을 발견하고, 뜨겁게 침잠하며 지혜의 핵심을 예감한 사람이었고, 자기 영혼과의 대화를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다. 후기에는 동양사상에 심취했는데, 이는 가정환경과도 무관하지 않으나 인간의 삶을 자신의 내면의 성찰로 본 그의 인생의 목표 때문이리라.


 <데미안>

 <에밀 싱클레어의 젊은 시절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작품은 불안하고 혼란한 청춘기의 고뇌와 방황을 그린 작가 자신의 젊은 날의 초상화다. <<자신은 자신으로부터 우러나온 삶을 살고자 한 것뿐인데 그것이 왜 이다지도 어렸웠던 것일까>>라는 주인공의 절규는 패전으로 실의에 빠진 독일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영혼을 상실한 구시대가 무너지면 새로운 시대가 다가온다는 이 소설의 테마는 작가 자신과 유럽 문명이 거듭나기 위한 진통의 기록이다. 제2차대전 당시 독일 전몰학도의 배낭 속에서 흔히 발견되었던 책이 이 소설이었다고 한다.


   <싯다르타>

 <데미안>에서 이런 진통을 겪은 헤세가 찾은 세계가 바로 자아의 발견과 인간의 구원이라는 근본문제를 다룬 것이 이 작품이다. 가정적으로 인도와 인연이 있었던 작가는 동양사상과 불교사상에 나름대로의 이해를 가지고 있었는데 석가모니라는 한 인간이 해탈의 경지에 이르기까지의 고난에 찬 역정이 담담하게 그려져 있다.


   <유리알 유희>

 <유리알 유희>란 모든 문화의 내용으로서 행해지는 유희이다. 일종의 정신문화사적 미래소설로 20세기 전쟁의 와중에서 정신적 권위를 되찾으려는 운동이 일어난다. 교양인들에 의해 종교적인 이상향이 건설되고 여기서 인류문화가 총집대성되어 영재교육을 실시한다. 얼핏 이 작품은 시공을 초월한 가공의 이야기 같지만, 20세기 문화에 대한 비판과 헤세가 도달한 최고의 지성이 담겨 있다.


c.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쓴 자전적 소설

 이 작품은 학교와 사회의 수레바퀴 아래서 신음하다 결국에는 서서히 죽어가는 소년의 모습을 통해 학교제도의 불합리성을 질타하는 작가 자신의 자전적 소설이다. 이 책에서 나타난 당시의 경직화된 학교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 교육의 현실에 하나의 좋은 시사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900년경, 남부독일의 작은 동네 중개업자인 요제프에게는 재능있는 아들 한스가 있다. 이런 시골에 재능있는 아들이 태어나면 으레 그 장래는 정해져 있다. 매년 시행되는 주의 시험에 합격하여 신학교에 들어가 목사가 되든가, 아니면 국비로 교사가 되는 길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소년다운 놀이를 즐길 여유가 없었고 오로지 공부에 열중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 소년 한스도 예외가 아니어서 숨돌릴 틈도 없이 공부에만 쫓기고 있었다. 이 머리 좋은 소년을 엘리트 코스로 보내는 것이 그의 부모는 물론, 목사님과 학교 선생님들의 희망사항이었기 때문이다. 첫번째 관문인 주 시험에 그는 2등으로 합격한다. 드디어 마울브론의 신학교에 진학하는 길이 열린 것이다. 그에 대한 대가로 여름방학 첫날 그는 낚시대를 메고 강으로 가서 수영도 하고 낮잠도 잘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한스는 소년시절로 돌아가 즐겁게 놀았다. 그러나 그 즐거움은 이틀을 가지 못했다.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따기 위해 방학 동안에도 밤늦게까지 히브리어나 그리스어를 공부하여야만 했다.

 기숙사 제도로 운영되는 신학교 생활은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시인 기질이 있는 주인공 한스는 권위를 싫어하는 천재적인 소년 헤르만 하이르너와 친밀한 우정을 나눈다. 하이르너는 비정스러운 교육의 수레바퀴에 힘껏 반항했지만 한스는 자기 지위를 지키기 위해 하이르너를 배반하고 만다. 얼마 뒤 하이르너는 신학교의 속박에 대한 반항심에서 탈출해버리고 만다.

 친구의 탈출을 본 한스의 영혼은 고뇌로 가득 차게 된다. 주의력은 흩어져 산만해지고 신경쇠약의 증세를 일으켜 거의 폐인이 된다. <갸름한 소년의 얼굴에 떠오른 멋적은 미소의 그늘 속에 메말라가는 한 영혼이 고뇌하고 무서움에 떨며 절망적으로 주위를 살피는 모습>을 어느 누구도 보지 못했고 심지어 신학교 선생님들조차 무관심하다. 결국 의사와 교장의 편지를 간직하고 실망에 빠진 아버지에게 돌아간다.

너무 큰 상처를 받은 두뇌는 집에 갔어도 회복되지 않았다. 그는 집에서 빈둥빈둥 지낸다.

 과실주를 담그는 가을 날, 그는 처음으로 엠마라는 연상의 여인에게서 매력을 느끼게 되고 몇 차례 짜릿한 키스의 경험을 한다. 그러나 엠마는 갑자기 한스의 곁을 떠난다. 엠마에게는 진실한 사랑이 아닌 장난기 어린 심심풀이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실의에 빠진 한스는 부친의 권고에 따라 기계공이 되기 위해, 대장간 견습공이 된다. 지금까지의 괴로움도 희망도 버리고 그는 모든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 채 일터에 나갔다. 그는 노동의 기쁨과 괴로움을 그제서야 터득했다.

 어느 일요일 날 한스는 학교동창이며 이제는 어였한 기계공이 된 아우구스트와 함께 들놀이를 갔다. 한스는 처음으로 맛보는 맥주에 취해 곤드레만드레가 되었다. 그 놀이에서 돌아오는 길에 한스는 죽음의 그림자에 이끌려 나골트 강에 몸을 던진다. 장례식 날 옆집 구둣방 주인은 선생들을 가리키며 <<저기 가는 놈들도 한스를 이런 지경으로 만드는 데 조력한 거야>>라고 말한다.


d. 비인간적인 교육제도에 경종

 이 작품에서 작가는 자신의 학창시절의 경험을 집요하게 되새기면서 편협한 학교제도야말로 재능 있는 젊은이를 좌절케 하는 장본인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인간은 자신의 생명력을 억압하고 위축시킴으로써 그릇된 길로 빠지게 되며, 자아의 붕괴를 가져오는 그런 명령과 규범, 의무와 학습내용에 질식해버리고 만다.

 학생들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나 교사들에 의해 강요된 교육이라면 결국 바퀴 밑에 깔린 것처럼 그들은 비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테마인 이 소설은 출간 즉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작품은 그때까지 가정과 학교에 팽배해온 현대의 교육관과 교육제도에 경종을 울려주었다. 대학입시만을 강요하고 학생들의 창조적 능력개발을 소홀히 하는 현대의 비인간적 교육행태 때문에 이 작품은 여전히 교육서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그의 작품은 그 자신이 걸어갔던 삶의 과정의 반영이다. 그 과정이란 어린이의 순수함과 평화로움에서 성년의 방황과 절망에 이르는 길고 긴 도정을 뜻한다. 그리고 그것은 헤세만이 아닌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 모두가 걸어가는 길이기도 하다. 순탄하지만은 않은 인생 길에서 대부분의 인간은 차츰 좌절을 경험하게 되며, 이 세계의 윤리와 가치에 회의를 지닌 채 미망의 길로 빠져든다.

 헤세의 경건하고도 매우 비판적인 정신은 소위 20세기의 잡문문화시대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 전 우주와 자아가 합일되는 것을 느끼며, 밝고 어두운 세계 등 부조리한 인생의 수많은 대립을 모두 긍정하는 전일적 인생론을 설교한 헤세는 방황하는 현대인에게 많은 구원의 책을 선사하여 큰 기쁨과 위안을 주고 있다.



E13 – 마의 산 (Der Zauberberg, The Magic Mountain) /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1955)

(출전: 동서고전 200선 해제3 / 반덕진 / 가람기획)


 스위스의 한 폐결핵 요양소를 무대로 1차세계대전 직전에 내부적으로 열병을 앓고 있던 서구의 정신상황과 시대의 문제를 풍부한 성찰과 반어로써 표현했다. 생과 사의 중간에 존재하는 폐쇄된 세계인 <마의 산>에서 주인공은 다양한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정신적 성장을 이루어나간다. 이 작품은 낭만주의적 보수주의적 휴머니즘에서 사회적 휴머니즘으로 발전해가는 작가의 세계관을 나타내고 있다.


a. 예술가 집안에서 성장

 릴케, 카프카와 함께 현대 독일문학의 3거두로 평가되는 토마스 만, 그는 독일 북구 뤼베크의 부유한 상인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으로부터 냉철하고 명석한 기질을, 그리고 남미 출신인 포르투갈 계 모친으로부터는 섬세한 감수성과 예술가적인 기질을 물려받았다. 만의 이러한 출생 배경 자체가 그의 작품 전반에 흐르는 묘사 기법인 <이중성>을 잘 암시해주고 있다. 그의 형인 하인리히 만도 소설가 겸

평론가이며, 그리고 누이동생 중 한 사람도 여배우가 되는 등 예술가 집안이었다.

 16세 때 부친의 죽음으로 예술과 문학의 중심지인 뮌헨으로 가서 한때 보험회사에서 근무하기도 했으나, 곧 사퇴하고 문학지망을 선언한다.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1년 동안 독서에 전념한 후, 1900년 집안의 역사를 다룬 장편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Buddenbrooks (Buddenbrooks – Verfall einer Familie)>을 출판하여 화려한 데뷔를 하게 된다. 그후 자신의 내부에 흐르는 예술가적 기질과 시민적 기질의 융합문제로 고뇌하다 3년 후 주옥같은 단편 <토니오 크뢰거>로 이를 정리한다. 즉, 오랜 정신적 편력 뒤에 평범한 인생을 사랑함으로써 자기의 예술을 고귀하게 만들려고 결심하는 청년시인 토니오 크뢰거를 통해 자신의 젊은 날의 자화상을 묘사했다.

 1905년(30세) 뮌헨 대학 교수의 딸과 결혼하여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고, 3남 3녀의 자녀들은 모두 자신의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했다. 이들의 행복한 생활상은 1909년 발표된 <대공 전하>에서 암시된다. 1912년(37세) 카챠 부인이 병에 걸려 스위스의 다보스 요양원에 입원한다. 간병차 거기서 3주일을 지낸 만은 그 고원 요양소에서의 견문을 바탕으로 단편소설을 구상하는데, 결국 12년 후에 장편 <마의 산>으로 출간된다.

 1914년에 일어난 1차대전은 그에게 열렬한 애국심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형과 몇몇 작가들은 전쟁을 유발한 독일에 대해 비판을 한 반면, 만을 <프리드리히와 대동맹>과 <비정치적인 인간의 고찰>을 발표하여 독일을 옹호하는 보수주의적 입장을 견지했다. 여기서 그는 밀려오는 민주주의 물결로부터 독일문화의 전통을 옹호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 만의 사고방식에는 인간의 존엄성에 바탕을 둔 민주주의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었고, 그는 이 싸움이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사고방식의 오류를 깨닫고 정신의 고귀함과 민주주의를 화해시키기 위해서는 인간성 탐구의 고된 작업이 다시 계속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가령 <독일 공화국에 대하여> <괴테와 톨스토이>같은 논문은 민주주의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는 사상적 변화의 표현이며, 그리고 그것이 문학작품으로 열매를 맺은 것이 <마의 산>(1924)인데 이로 인해 1926년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된다.

 1933년 히틀러의 집권으로 암흑사회로 변하자 그는 결연히 히틀러와 결별을 선언하고 10여 년의 망명길에 올라 유럽 각지를 순회하며 나치즘을 비판했다. 1938년에 미국으로 이주하여 프린스턴 대학의 객원교수가 되고 <다가올 민주주의의 승리에 대하여>라는 강연과 <유럽에 고한다>는 논문을 통해 그는 이제 위대한 민주주의자로 변모하게 된다. 문학적으로는 독일의 국민성이나 문화의 특질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얻어, 장편 <파우스트 박사>라는 과거의 독일문화에 대한 심각한 비판서를 남겼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는 야만은 있어도 문화는 존재하지 않았다. 독일의 문화는 미국 등지에 망명한 예술가들에 의해 보존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이 1952년부터 반공정책으로 돌아서자 스위스로 돌아왔다. 1955년(80세) 실러 150주기 기념강연을 통해 독일통일을 염원하는 <실러 시론>을 남기고 몇 달 후 운명했다.


b. 양면성의 조화 추구

 토마스 만은 독일문학사상 전환점에 선 작가다. 그가 태어난 1870년대는 독일에서 자연주의 문학이 날카로운 비판을 받기 시작했고. 새로운 문학양식이 대두되던 때였다. 낭만주의도, 피히테의 철학도, 프랑스 혁명의 열정도 이제는 시들고 말았다. 과학의 놀라운 발전으로 숨가쁜 시대가 다가온 것이다. 독일문화 전통의 막바지 인물인 그를 계기로 독일의 문화는 집대성되고 반성된다. 작가 자신이 독일문화의 장점과 단점을 자신 속에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니체, 쇼펜하우어, 바그너가 그의 문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여러 이질적 요소를 모두 자기 속에 용해시켜 자기 나름대로의 운명관 속에서 독일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켰다.

 그를 생각할 때 우리는 그의 숨막히는 고뇌와 그 심연을 건너려는 진지한 노력을 상기한다. 질식할 듯 무거운 19세기 말의 분위기 속에서 한 가닥의 구원을 모색하는 데 그만큼 정성 어린 노력을 기울인 작가도 드물다. 그러므로 그의 인생은 정지된 생이 아니라 항상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는 생성의 길이었다. 80년에 걸친 그의 일생은 참으로 완성을 위한 인내의 길이었다.

 그의 작품세계를 들여다보면 그가 공통된 주제, 즉 예술과 생활이라는 문제를 계속해서 취급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문제를 진부하고 동일한 관점에서 시작해서 동일한 결말로 이끌어 간 것은 결코 아니다. 이 문제는 작가 토마스 만의 인간적인 성숙과 더불어 점점 더 성숙되어갔던 것이다. 초기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구원할 길 없는 우울과 환멸감은 점차 만년의 작품에 이르러 조화와 해결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가 즐겨 다루던 주제는 생과 사, 정신과 삶, 감정과 이성, 예술과 생활, 현실과 이상의 모순된 두 세계로, 이러한 양면성의 조화를 추구한 사람이 만이었다. 이것은 넓은 의미로 본다면 독일문학의 특징으로 볼 수 있지만 특히 토마스 만에게는 일생을 바친 불가사의한 문제였던 것이다.


c. 당대의 인간과 사상을 폭넓게 다룬 작품

 이 작품은 스위스의 한 결핵 요양소를 무대로 제1차 세계대전전 내적으로 앓고 있던 서구의 정신상황과 시대의 문제를 풍부한 성찰과 반어로 표현하고, 연금술적 신화적 요소 등을 도입한 상징적이고 정교한 구성으로 발표되자마자 독자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지만 의학계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함부르크 가의 명문 태생인 한스 카르토르프는 스위스의 다보스에 있는 요양소로 사촌 형 요아힘 침센을 문병하기 위해 3주간의 체류 예정으로 간다. 한스는 대학시절에 조선기술에 대하여 공부를 했고, 앞으로는 실습만 남겨두고 있었다. 양친을 일찍 여의었으나 유복한 생활을 하고 있는 청년이었다.  <마의 산>은 세속적인 일상생활과는 분위기가 전혀 다른 삶과 죽음의 중간에 존재하는 폐쇄된 세계다. 그런데, 그곳 원장으로부터 그도 요양할 필요가 있다는 선고를 받고 7년간이나 <마의 산>근처에서 머물게 된다. 그는 처음에는 병 때문에 머물게 되었지만, 점차 고원지대의 분위기와 병에 대한 묘한 친근감 때문에 계속 머물게 된다. 거기서 그는 다양한 인물들을 만난다. 즉 서구적 합리주의를 대표하는 제템브리니, 신비적 교회주의와 죽음을 상징하는 예수회 수도사인 나프타, 원초적인 사랑을 가르치는 러시아 여성 쇼샤, 본능적인 감정으로 사는 걸물 페파코른 등은 정신적 백지 상태인 한스를 다양한 색깔로 물들인다. 그런 가운데서 주인공의 정신적 성장이 이루어진다. 특히 한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클라우디아 쇼샤라는 러시아 귀족부인으로, 그녀는 자신의 병과 자유를 바꾸어 얻었으며, 일체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여인이었다. 지금까지 그녀의 남편을 본 사람은 없었고, 이곳 저곳의 요양원을 떠돌아다니는 것으로만 추측되었다. 한스는 축제가 있던 날 밤에 그녀에게 접근해 그녀와 관계를 맺는다. 그런데 쇼샤 부인은 그 다음날 그곳을 떠난다.

 젊은 한스나 요아힘 침센에게 영향을 미치는 인물은 이탈리아 학자인 제템브리니로 그는 19세기 유럽의 지식인들의 특징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는 진보적인 사고와 계몽적인 교육관을 지니고 그들에게 역설했다. 사촌인 요아힘은 한스와 다르게 그가 복무하던 군으로 돌아가고 싶어했고, 어느날 원장의 경고도 무시한 채 하산했다가 병이 악화되어 다시 입산했다. 그는 입산한 뒤 얼마 되지 않아 조용히 숨을 거두고 만다. 한편 제템브리니는 완치의 가능성이 희박하여 근교의 마을로 세들어 이주한다.

 같은 숙소에 있던 예수회 수도사 나프타는 불행한 과거를 지니고 있는 유태인으로, 학문이 뛰어나 고아의 처지에서 예수회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았으나 결핵으로 쓰러져 요양중이었다. 그는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모든 것을 부정하고 원시 크리스트 교의 원시 공산제도를 옹호한다. 이에 대하여 한스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나 차차 제템브리니와 나프타 사이의 관념적 대립에 말려들게 된다. 그러나 두 관념적인 극단과 투쟁에 많은 회의를 느끼게 된다.

 어느 날 한스는 스키를 타던 도중에 눈보라를 만나 생사의 위험을 겪게 되는데, 이때 그는 비로소 <죽음의 모험은 삶 속에 있으며 그것이 없으면 삶이 되지 않는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생사의 세계를 경험한 한스는 죽음에는 어떠한 사상도 개입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생과 미래에 봉사할 것을 다짐한다. 이 부분이 소설의 절정이다.

 마침내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자, 한스는 하산하여 전쟁터로 나간다. 그는 포탄이 어지럽게 낙하하는 가운데 요양원에서 불렀던 죽음을 초월하는 삶의 노래인 <보리수>를 부르며 기꺼이 전쟁에 참여한다. 그러나 그가 전쟁에서 죽었는지 아직 살아 있는지 작가는 가르쳐주지 않는다.

 이렇듯 이 소설은 죽음과 과거, 그리고 관념에만 얽매여 있던 주인공이 삶과 미래에 봉사하는 사회적 휴머니즘으로 향해 가는 정신적 변화를 묘사하고 있다.


d. 생사합일의 인간형 제시

 이 작품은 만의 일생의 문제인 <생과 사>라는 거대한 주제가 방대하게 펼쳐진 작품이다. 그가 마의 산에 머무르는 동안 그는 관능적인 사랑을 가르치는 러시아 여인 쇼샤, 그를 세속적인 세계로 돌려보내려는 합리적 계몽주의자 제템브리니, 금욕적인 수도사 나프타, 그리고 본능적이고 감각적인 감정에 충실할 것을 권고하는 페파코른 등을 만나는 과정에서 이들의 행태는 정신적 백지 상태의 청년 한스에게 생사의 문제, 인생에 대한 여러 문제를 보여줌으로써 그를 혼란과 고민으로 몰고간다. 특히 나프타와 제템브리니의 집요한 논쟁, 즉 진보와 이성의 편에 서느냐, 반동과 독재의 편에 서느냐를 한스에게 강요하는 이 논쟁은 1차세계대전이 임박한 유럽 시민사회의 심리적정신적 상황을 부각시킨다.


e. 생사의 합일점

 그런 후 어느 날 한스는 눈보라로 조난을 당하게 되는데, 이 고립을 통해 죽음이란 삶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 포용되고 통일 되어야 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삶과 죽음 등 대립적인 요소들을 합일시켜 이해할 수 있는 인간형은 독일 시민사회의 붕괴라는 위기 앞에 그가 내놓은 새로운 인간형이다.  그는 이 작품 속에서 시민계급의 붕괴직전의 안일을 고발하고 있으며 세기말적인 시민사회의 공허감이 이렇게 처절하게 표현되고 유럽사회의 붕괴과정이 이렇게 명료하게 표출된 작품도 흔치 않다.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인간내면의 기록, 다시 말해 자아와 의식의 발전과정을 눈앞에 그려보게 된다. 만은 이것을 뛰어난 상상력과 직관으로 훌륭히 묘사하고 있다.


f. 생에 대한 긍정

 주인공 한스가 요양소에서 인간생존의 비밀을 깨닫게 되어 산을 내려와 현실 속으로 과감히 뛰어드는 부분은 결코 우연한 사건진전의 과정이 아니다. 생의 의미를 망각케 하는 음울한 마의 산에서 그가 속되고 원시적이며 초라하지만, 그러나 생명력이 넘치는 아랫세상으로 내려오는 과정은 실로 토마스 만의 생애와 작품의 발전과정에 있어서의 승리를 의미한다. 즉 <토니오 크뢰거>,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등의 초기 작품에서 거의 허무주의로까지 발전할 뻔했던 토마스 만은 이 작품을 통해 생의

성숙기에 들어서서 다시금 생을 감격적으로 긍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갈등의 극복이며 토마스 만의 승리다. 자기 부정, 자기 배반, 갈등의 청년기를 지나 이제 그는 죽음에 지배되는 무력한 고립이 아니라, 불타는 생의 이념에 봉사하는 적극적인 정신으로서의 니체적인 생의 긍정이라는 이념으로 돌아와 궁극적으로는 생에의 참여를 맞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만이 보여주는 세계는 어떤 청년의 산상생활에서의 내면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전 유럽 세계를 그 속에 투시하고 있으며, 주인공 한스가 생의 새로운 인식을 얻고 평지에서 일어난 전쟁이란 소용돌이 속으로 과감하게 참여하기까지 7년간의 영혼의 기록은 결코 주인공 한스의 내면의 기록이라기보다는 19세기 말의 퇴폐적인 경향에서 벗어나 생의 긍정을 모색하려고 몸부림치던 당시 유럽 사회의 모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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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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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 산(魔의 山; Der Zauberberg, 1924년)은 토마스 만의 장편소설이다. '사회적 휴머니즘'이라는 토마스 만 문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토마스 만의 사상 전환과 관련하여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되는데, 초기의 대립적 인생관을 극복하여 대립에 지배당하지 않고 역으로 대립을 지배하고 전진하는 것이 인간의 이상적인 생활방식이라는 사상을 제기하였다.[1] [2] 해석의 관점에 따라 교양소설, 시대소설, 시간소설, 성년입문소설 등으로 분류된다.[3]


'마의 산'은 소설의 공간적 배경인 알프스 산맥에 위치한 요양원을 상징한다. 제1차 세계 대전 전에 시민사회가 끝난다는 것을 알려주는 소설로서 토마스 만이 전통적인 문화와 사회의 죽음을 형상화하는 데 사용한 이미지는 요양원의 세계이다. 요양원의 모습을 통해 한 문화 전체가 몰락하는 것을 묘사하고, 주인공 카스토르프의 개인적 삶을 통해 시민적 주체가 사라지는 것을 형상화한다.


집필 동기[원본 편집]

1912년 토마스 만의 배우자 카티아가 폐렴이 의심되는 증상으로 스위스 그라우뷘덴 주 다보스의 요양소에 입원했을 때 토마스 만이 문병을 가 3주간 그곳에서 체재하면서 얻은 체험을 토대로 쓰여졌는데, 제1차 세계 대전이 중도에 발발했기 때문에 집필에 12년이 걸렸다.


《마의 산》은 죽음에 대해 전혀 고민해 본 적이 없는 23세의 주인공 한스 카스트로프가 죽음을 대면하면서 인식의 변화를 겪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10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의 핵심은 '인간은 선과 사랑을 위해 결코 죽음에 자기 사고의 지배권을 내주어서는 안 된다'라는 문장에 나타나 있다. 토마스 만은 이 문장만 이탤릭체로 표기했을 정도로, 잔인한 현실 앞에 이상을 저버리지 말자고 힘주어 주장하였다.[4]


줄거리[원본 편집]

23세의 상인 카스토르프는 알프스 산맥에 위치한 다보스의 요양원에 있는 사촌 형제 요아힘 침센을 문병 갔다가 그곳 의사에게서 흉부 질환이 있음을 주의받아 7년간 요양원 생활을 하게 된다. 생명의 위험이 예보(豫報)된 사람들의 사회는 반대로 생에 염증을 느낀 세계이기도 하다. 남이 하는 짓을 흉내내고, 심령술(心靈術)이나 우표수집 등의 놀이가 무질서하게 유행한다.


공기도 희박한 산악 세계의 고원에는 전 유럽에서 유복한 환자들이 모여든다. 그들은 영국, 이탈리아, 러시아, 독일 등지에서 결핵을 치료하기 위해서 오지만, 다른 환자들이 죽어가는 것을 목격하고는 그들에게도 머지않은 장래에 동일한 운명이 닥칠 것이라고 예감한다. 그리고 아직까지 죽음에 이르지 않은 사람은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서 안정을 취할 뿐이다. 그것은 죽음과 다를 바 없다.


요양원에서의 일상은 본질적으로 네 가지 일로 제한되어 있다. 먹고, 대화하고, 누워 있고, 치료를 받는 일 등이다. 하루 중 다섯 번 하게 되는 풍성한 식사는 일곱 개의 식탁이 갖추어져 있는 식당에 차려지며, 요양객들은 그곳으로 모여든다.


요양원에 있는 환자들 중에서 주인공 카스토르프의 내면 성장을 위해 교육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인물들로서 제템브리니, 나프타, 쇼샤, 페페르코른 등을 들 수 있다. 각 인물의 등장 시점과 역할은 다르다.


제템브리니는 합리주의자이며 진보주의자를 자처하는 인문주의자이다. 그는 '육체는 바로 정신'이라는 일원론자로서, 본질적으로 죽음의 세계에 친근감을 느끼는 카스토르프를 이성과 진보의 믿음이 존재하는 의무와 일의 세계인 평지 세계로 되돌려 보내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한다.


쇼샤는 키르키스인 눈처럼 회색을 띤 매력적인 푸른 눈과 관능적인 외모를 소유하고 있으며 질병과 죽음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카스토르프가 산상 요양원에 입원한 지 7개월 후 사육제 날 저녁에 쇼샤에게 사랑 고백을 하지만 그녀는 그 이튿날 요양원을 떠나가 버린다.


나프타는 예수회원 교도이며 허무한 반자본주의자이다. 육체를 타락되고 부패한 것으로 생각하고 건강을 비인간적인 것으로 보며, 오히려 병과 죽음을 찬양한다. '육체란 자연이며, 그 자연은 정신과 대립된다'고 하는 이원론자로서, 진보주의자 제템브리니와 자주 충돌하고 논쟁을 벌인다.


죽음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 미래만을 희구하는 이상주의자 제템브리니와 광신적으로 신의 나라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나프타는 갈등하며 결투를 벌인다. 나프타는 제템브리니의 휴머니즘의 허위성을 반박하다가 결투장에서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페페르코른은 커피 재배업자로 동양과 서양을 동시에 대표하고 있는 인물이다. 요양원을 떠났던 쇼샤와 함께 요양원에 등장하였다. 건강과 삶을 긍정하는 디오니소스적 인물로서, 제템브리니와 나프타를 왜소하게 만들고 쇼샤의 위험성을 줄여주며 카스토르프를 강하게 만들어주는 기능을 한다.


요아힘 침센은 병이 완쾌되지도 않았는데, 요양원 생활에 지친 나머지 하산해 다시 군대로 돌아간다. 사촌 형제를 떠나보내고 혼자가 된 카스토르프는 요양원 생활의 단조로움과 무기력함을 부끄럽게 생각해 스키를 배울 결심을 한다. 몇 차례의 연습을 통해 스키를 탈 수 있게 되고 그러다 어느 하루 스키를 타고 흰 눈이 덮인 아름다운 계곡을 따라가다가 길을 잃고 눈보라에 갇혀버리게 된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카스토르프는 꿈을 꾸는데, 시간을 잊어버리고 몽환의 상태에서 어떤 경계 지역에 도착한다. 그곳은 삶과 죽음, 각성과 꿈, 문화와 자연, 시간성과 비시간성 사이의 중간 지점이다. 시간을 잊어버린다는 것은 눈으로 뒤덮인 요양원의 세계, 지향점을 찾는 카스토르프가 겪는 혼란, 형식들의 해체, 삶과 죽음의 근접성, 지속적으로 해체되는 인간의 존재 형식을 나타내는 표지로서의 시간 개념의 상실이다.


카스토르프는 병과 죽음이 지배하는 요양원에서 하산하고 현실적 삶으로 방향을 돌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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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 앞 샘물 곁에

서 있는 보리수

나는 그 그늘 아래서

수많은 단꿈을 꾸었네.


보리수 껍질에다

사랑의 말 새겨 넣고

기쁠때나 슬플 때나

언제나 그곳을 찾았네


나 오늘 이 깊은 밤에도

그 곳을 지나지 않을 수 없었네.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두 눈을 꼭 감아버렸네.


나뭇가지들이 살랑거리면서,

꼭 나를 부르는 것 같았네.

“친구여, 내게로 오라.

여기서 안식을 찾아라!”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얼굴을 세차게 때렸네.

모자가 바람에 날려도,

나는 돌아보지 않았네.


이제 그곳에서 멀어진 지

벌써 한참이 되었네.

그래도 여전히 속삭이는 소리 들리네.

“친구여, 여기서 안식을 찾으라!”

-<겨울 나그네>, 빌헬름 뮐러, 김재혁 옮김, 민음사, 2001


E12 – 페스트 (La Peste) / 카뮈(Albert Camus, 1913~1960)

(출전: 동서고전 200선 해제3 / 반덕진 / 가람기획)


 2차대전 후의 혼란하고 무질서한 정신적 풍토위에 <부조리의 철학>이라는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기초로 사회정의를 실현하려 했던 카뮈의 대표작. 오랑 시에 페스트가 만연했다는 가정하에 인간을 전멸시키려는 악과 이에 대한 인간의 집단적인 반항을 묘사하면서, 이 과정에서 인간의 연대의식과 존엄성을 역설했다. <이방인>에서 제시된 개인주의에서 벗어나, 이러한 연대의식만이 인류평화에 도달하게 할 수 있다는 카뮈의 긍정적인 사고방식이 분명하게 전달된다.


a. 사르트르와 함께 현대 젊은이의 우상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고 모든 것이 <부조리>하다고 부르짖는다. 그러나 나의 부르짖음을 나는 의심할 수 없다.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며 <부조리>와 <반항>의 사상을 제시한 최연소 노벨 문학상 수상자 카뮈.

 카뮈는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에서 태어나 2살 때 부친이 1차대전에 참가하여 마른 전투에서 사망했다. 그의 어머니는 두 아들을 데리고 친정집으로 가서 고집 센 외할머니, 그리고 다리가 불구인 외삼촌과 함께 방 2개에 5명이 살았다. 후에 카뮈가 <<나는 <자유>를 마르크스 속에서 배우지 않고 가난 속에서 배웠다>>고 술회했듯이 어린 시절을 가난 속에서 보냈다.

 당시 의무교육 덕분으로 국민학교를 마친 카뮈는 가정형편상 더이상의 상급학교 진학이 어려웠으나, 그의 재능을 아까워한 담임 선생님의 배려로 중고교에 입학하게 된다. 노벨 문학상 수상연설이 책으로 나왔을 때 그는 이 책을 옛 스승 제르맹에게 바쳐 깊은 감사를 표했다.

그는 중고교 시절을 계속 장학생으로 지내면서 축구 등 운동에 몰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17세 되던 해 폐결핵의 첫 발작이 일어나서 좋아하던 운동도 중단해야 했다. 그러나 불행중 다행으로 철학자이자 교수인 장 그르니에를 알게 되어 철학과 문학에 뜻을 둔다. 이 스승과 제자간의 우정은 평생을 두고 꾸준히 계속되었다.

 20세에 결혼했으나 1년 만에 이혼하고 공산당에 입당하지만 다음 해에 탈당한다. 알제 대학시절에 그는 여러 종류의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는데,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해운업자에게 고용되기도 하고 자동차부품 판매원 노릇도 했다. 이러다 보니 평범한 대학생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귀중한 산 체험을 했다. 지드, 말로, 몽테를랑 등의 작품을 탐독한 것도 이때였고, 아마추어 극단을 조직하여 연극활동에 적극 참여한 것도 이때였다.

 졸업 후 진보적인 신문 <알제리 레퓌블리캥>에서 저널리스트로 활약하면서 당국의 비위를 건드려 알제리에서 추방된다. 파리로 진출하여 <파리 스와르>의 기자로 1941년(28세) 6월까지 근무했다. 그는 이때 <이방인>을 탈고하고, 에세이 <시지포스의 신화>를 쓰기 시작했다. 당시 프랑스는 독일의 파리 침공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였다. 독일 점령하의 파리에서 그는 지하신문 <콩바>의 주필 노릇을 하며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가한다.

 이 기간에 출간된 <이방인>은 부조리한 세상에서 아무 의식 없이 살다가 우연히 살인을 하고 사형선고를 받은 뫼르소가 죽음에 직면해서 비로소 인생의 부조리를 깨닫고 오히려 행복하게 죽음을 기다린다는 내용이다. <시지포스의 신화> 역시 고독과 인생의 모순을 고백적 감상형식으로 해설하여 큰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1947년 발표된 장편 <페스터>는 그의 철학의 총결산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여기에서 전염병과 맞서 싸우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과 우애를 역설하여 전후세대의 정신적 지주로 부상했다. 그는 전쟁과 사형을 반대했으며, 역사를 절대시하는 마르크스주의나 스스로를 절대시하는 사상적 예술적 니힐리즘에도 반대한다.

 그는 초기의 주요개념인 <부조리>에서 <반항>으로 옮겨갔다. 두번째 장편인 <반항적 인간>을 발표하여 사르트르와의 사상적 논쟁이 벌어져 10년간 지속되었던 우정이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가장 괴로운 시련은 자신이 태어났던 알제리에서 일어난 전쟁이었다. 그는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프랑스의 불공평한 식민정책을 비난했다.

 1956년에는 <반항적 인간>의 논리를 거꾸로 써서 그린 풍자소설 <전락>을 발표했다. 44세인 다음해에 스웨덴의 왕립한림원은 <<오늘날 인류의 양심에 제기되는 모든 문제를 명백하게 파헤친 그의 전 작품의 공로>>를 들어 그에게 노벨 문학상을 수여했다. 1960년(47세) 자전적 소설인 <최초의 인간>을 집필하는 도중 불의의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b. <부조리>와 <반항>의 문학세계

 카뮈의 문학세계는 <이방인> <시지포스의 신화> <흑사병> <반항인> <전락>등의 관계와 발전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간단히 말해 <부조리>와 <반항>의 철학이다.

 부조리란 불합리한 것,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그가 부조리한 것으로 보았던 것은 바로 인간세계에 있어서의 존재, 즉 인생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합리에의 욕망>과 세계의 <합리적이지 못한 것> 사이에 생기는 모순, 그것이 바로 작가가 내세우는 <부조리>라는 것이다. 그의 <시지포스의 신화>가 말하는 바와 같이 결국 굴러떨어지는 줄 알면서도 땀흘려 바위를 굴려 올리려는 존재, 결국

죽고 마는 허무한 존재이면서도 열심히 사는 존재, 결국 무의미해지는 인생을 의미있게 살려는 존재인 그런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인간에게 피치 못할 숙명으로 주어진 부조리는 누구나가 언제나 느끼는 것은 아니다. 흔히 우리는 부조리를 느끼지 못하고 살고 있다. 즉 의식이 졸고 있는 것이다. 그저 관습에 의해 기계적으로 살아가는 일상생활, 인생에 뜻이 있는지 없는지도 문제삼지 않는 그런 생활, 그것은 실존자의 생활이 아니다. 의식이 완전히 깨어나서 부조리를 명확하게 인식하게 될 때 비로소 인간다운 인간이라 할 수 있고, 그런 인간이라야 <실존>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카뮈의 이러한 사상을 통해 본다면 <부조리의 인식>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부조리에 대해, 부조리한 세계를 인식하고 여기에 대항하여 인간의 가치를 복권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부조리는 당연히 <반항적인 인간>을 낳는다. 이렇게 해서 <이방인>과 <시지포스의 신화>에서의 중심개념인 <부조리>는 <페스트> <반항인>에서 <반항>으로 옮겨진다. 


c. 인생의 부조리와의 투쟁을 그린 작품

 페스트가 전 도시를 죽음으로 휩쓰는 과정에서 이에 맞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숭고한 인간애를 그린 이 작품은 알제리의 오랑 시에 흑사병이 발생한다는 가상의 소설로, 출간과 더불어 베스트 셀러가 된 소설이다. 여기서 페스트는 모든 <자유>가 제한되는 상황을 의미한다.

 프랑스 영토인 알제리의 오랑에서 어느 날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쥐들이 집안과 지하실 창고, 하수구에서 몰려나와 휘청거리며 연이어 빛을 보고는 죽어갔다. 시내의 모든 쥐들이 이처럼 죽더니 이제는 사림들이 또 갑자기 고열과 임파선이 붓고 몸에 종기가 생긴 끝에, 무서운 악취를 풍기며 죽어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 원인 모를 병은 흑사병으로 밝혀졌다. 시에서는 행정적인 조치로 시외곽을 통하는 모든 수송망과 도로망을 차단시켰다. 무장한 군대가 삼엄한 경계를 맡고 도시는 죽음의 공포 속으로 떨어진다. 의사 베르나르 뤼는 병을 앓고 있는 아내를 어느 산중으로 보내고 이 사건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신문기자인 랑베르는 파리에 있는 아내를 남겨둔 채, 아랍인의 생활상을 취재하러 오랑에 들렀던 차였다. 자연히 그들은 이 도시에서 고립되게 되었다. 전염병은 날이 갈수록 더욱 악화되어 시민들의 생명을 빼앗기 시작했다. 매일 수십 명씩 죽어가더니 이제는 수백 명의 사망자수를 기록했다. 자연히 시내에서는 생필품의 품귀현상이 일어나고 환자 수용시설이나 의약품, 구호대 인원은 부족하게 되어 심각한 사태를 야기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죽음의 도시로 변한 것이다.

 환자가 일단 생기면 의사가 달려가 확인하고, 페스트 환자이면 격리수용소에 보내지게 되고 가족들도 전염 여부가 밝혀질 때까지 각기 다른 곳에 격리된다. 환자는 대개 며칠을 견디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숨졌으며, 그 시체는 가족들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매장되었다. 시체는 시간이 흐를수록 마치 쓰레기처럼 큰 구덩이 속에 던져졌고 그 위에 또 다른 시체가 던져졌다. 또한 처음에는 남녀의 구덩이가 따로 만들어졌으나 그 구별마저 지켜지지 않다가 끝내는 화장으로 처리되었다.

 한편 의사 뤼는 페스트의 고통에 빠진 환자들을 구출하려고 안간힘을 쓰며 기독교적인 사랑을 시민들에게 베푼다. 또한 랑베르에게도 지극히 안간적인 충고를 하는가 하면 달아난 아내에게 미련을 갖고 있는 글랑에게 무한한 연민의 정을 느낀다. 오랑의 호텔에 얼마 전부터 묵고 있던 타르는 뤼를 방문하여 격려하고 지원보건대를 조직한다. 그들은 악과 폭력을 앞에 두고 굳은 연대감으로 맞선다.

 랑베르는 자신이 예기치 않게 이 죽음의 도시에 묶이게 되고 더구나 파리에는 아내가 있었기에 필사적으로 이 도시를 탈출하려고 한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에게 돌아가기 위하여 시의 관문을 지키고 있는 경비병을 매수해서 탈출할 날짜까지 받는다. 그러나 의사 뤼가 자신의 몸을 희생하며, 또 봉사대가 자발적으로 조직되고, 게다가 타르와 판느루 신부까지 참석하는 것을 보고는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자신이 이곳을 떠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비록 애인에게 간다고 하여도 마음이 불편하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장장 8개월 동안이나 극성을 부리던 페스트도 점점 약화되기 시작했다. 페스트의 피해자가 드디어 줄기 시작하고, 혈청주사를 맞은 공무원과 한 처녀가 최초로 구원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뤼의 동지이자 헌신적인 봉사자 타르가 이 병의 최후의 희생자로 쓰러진다. 이어서 뤼는 휴양지에서 자신의 아내가 병사했다는 전보를 받게 된다.

 페스트는 언제 그랬냐 듯이 물러간다. 오랑 시의 문이 크게 열리고 시민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의사 뤼는 이렇게 독백한다. <<페스트 병균은 결코 죽지 않는다. 어딘가에 잠복해 있다가 행복한 도시에 불쑥 나타날지 모른다.>>


d. 대표적인 실존주의적 작품

 2차 대전을 전후해서 사르트르의 철학과 함께 세계적인 실존주의 선풍을 일으킨 이 작품은 2차대전시 경험했던 작가의 체험을 상징하고 있는 작품이다. 한 도시에 엄습한 재앙이 인간의 생존을 말살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이별하게 만드는 파괴적인 모습은 전쟁과 다를 것이 없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50년대 한국 문학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다. 전쟁의 인간살상과 타락한 인간성의 현실을 목도한 전후

한국사회의 작가들에게 큰 공감을 주었다.

 여기서 <페스트>란 전쟁을 포함한 자유를 부정하는 모든 폭력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폭력 앞에 대응하는 인간들의 양식은 다양하다.  달아나는 사람, 절망하는 사람, 정당화하는 사람 등등. 카뮈는 이들을 모두 이해한다. 취재차 오랑에 온 신문기자인 랑베르는 처음에는 무슨 수를 써서든지 오랑 시를 벗어나려고 한다. 그러나 시민들의 고통과 구조대원들의 희생적인 연대감에 탈출의 기회를 스스로 반납한다. 그는 탈출을 거부하면서 동시에 자살도 거부함으로써 카뮈의 철학적 반항을 실현하고 있다.

 삶에 대한 애착, 인간에 대한 사랑, 이것을 뒤집어 보면 악에 대한 반항이다. 카뮈에게 악이란 전쟁 독재 감금 억압 질병 빈곤 등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모든 것들이다. 그의 글들은 낯선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고독, 자신과 화해하지 못하는 개인의 소외, 악의 문제 등을 이야기함으로써 전후 지식인들의 소외의식과 환멸을 정확하게 반영했다.

 2차대전 후 황폐해진 인간정신의 위기를 간파하고 이의 극복을 위해 카뮈가 제시한 <부조리>와 <반항>의 사상은 전후의 젊은이들에게 중세의 종교 이상으로 큰 힘을 발휘한 것이 사실이다. 그는 혼란하고 무질서한 정신적 풍토 위에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하고 확립시킨 공로 이외에도 자신에의 성실과 인간의 존엄성에 기초로 한 사회정의를 실현하려 했다는 점에서 한 세대의 정신을 대표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뤼의 말처럼 <<죽고 싶지 않은 인간이 죽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부조리에 반항하는 인간의 모습은 영원할 수 있을 것이다.



e. 미완성 자전 소설 34년 만에 출간

 1960년 1월 4일 파리 근교에서 가로수를 들이받은 자동차 안에서 47세의 카뮈가 숨진 채 발견되었다. 그의 가방 속에 든 미완성 원고와 함께. 144쪽 분량의 초고는 구두점도 생략되고 속필로 써서 불완전한 상태였다. 사후 34년 만에 그의 딸이 정리해 <최초의 인간>(Le premier Homme)으로 햇빛을 본 이 작품은 빈민지대에서 보냈던 그의 어린 시절부터 고등학교 시절까지의 15년을 그린 자전적 소설이다.

 <최초의 인간>은 1994년 4월 15일 발간되어 1주일 만에 5만부가 팔리면서 파리 독서계를 흥분으로 몰아넣었다. 소설은 알제리에서 수레에 가재도구와 만삭의 아내를 싣고 황혼의 자갈길을 걸어가는 앙리 코르메리의 모습과 사내아이의 탄생으로부터 시작된다. 소설 속의 인물들은 모두 카뮈의 가족이며 아이는 카뮈 자신이다. 이 작품 속에 기록된 그의 어린 시절은 본서의 생애에서 묘사한 것과 비슷하다. 파리의 비평가들은 <<카뮈가 돌아왔다. 이 책에 카뮈의 모든 것이 있다. 감수성 충실 자비 정직 믿음 절대에 대한 갈망 꺼지지 않는 슬픔 그리고 힘이 공존한다>>고 평하고 있다. 이 유고는 그 존재가 확인되어왔으나 그의 유족들은 미완성이라는 이유로 그동안 출간을 보류해 왔다. 유고 곳곳에서 보이는 <<이름 바꾸는 것을 잊지 말라>> <<더 발전시킬 것>>이란 메모는 이 작품이 자전적 소설임을 입증한다. 다행히 최근에 김화영 교수의 한국어 번역판이 열린책들에서 출간되어 국내 독자들도 카뮈의 숨결을 한층 가깝게 느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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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 (출처 : 나무위키)


최근 수정 시각: 2017-11-03 20:40:55


Albert Cam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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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195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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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 - J.R. 히메네스

알베르 카뮈

1958 -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1. 개요

2. 생애

2.1. 알제리 전쟁

2.2. 사망

3. 문학

4. 명언

5. 기타

6. 대표작

1. 개요[편집]


1913년 11월 7일 ~ 1960년 1월 4일


프랑스 문학의 대문호이자 프랑스어권에서 존경받는 문학자 중 한명. 1913년 11월 7일 ~ 1960년 1월 4일. 프랑스와 알제리(프랑스령 알제리)의 문인, 작가, 실존주의 철학자(카뮈 본인은 스스로 실존주의와의 관계를 부정했다). 역대 최연소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흔히 알려져 있지만 사실 최연소는 러디어드 키플링이고 카뮈는 그 다음이다. 물론 그래도 40대에 노벨문학상을 받는 건 극히 드문 일이다. 이건 참 다행한 결정이라 할 수 있는데, 만일 노벨문학상을 '생애 최후의 명예'같은 느낌으로 노년의 작가한테만 수여하는 요즘 같았다면, 교통사고로 일찍 죽은 카뮈는 절대 상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2. 생애[편집]


알제리 태생이라는 사실에 알제리 아랍계로 아는 사람도 있지만, 알제리 및 이슬람계와는 관련이 없다.[1] 프랑스는 알제리를 단순 식민지가 아닌, 프랑스의 확장된 영토로 여겼다. 그래서 당시 프랑스 본토로부터 새로운 땅에서의 기회를 노리고 이주한 프랑스인들이 많았으며, 카뮈의 아버지나 어머니[2]도 그중 일부였다. 카뮈가 태어날 당시의 알제리는 그저 프랑스라는 국가의 한 지역이었고, 따라서 그는 프랑스 태생이었다. 카뮈가 알제리 태생이라는 말은, 카뮈가 사망(1960)한 후 알제리가 프랑스로부터 독립(1962)한 현재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3] 그러니까 그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순수 프랑스인이었으며[4][5], 현재의 알제리 아랍인와는 거의 무관한 인물이다.


여튼 아버지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전사하는 바람에 어린 시절엔 가난에 시달려야 했고, 학생 시절에도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지만 고질병인 결핵이 방해가 되어 대학 진학도 포기한 채 자동차 수리공 및 신문사 인턴 기자, 가정교사 같은 여러 일로 벌어먹으면서 철학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런 경험 때문인지 22살에 공산당에 가입하여 좌익사회운동을 했으며 프랑스측의 알제리 식민지배에 부정적인 글을 남기기도 했고, 베르베르족으로 흔히 알려진 이마지겐 부족에 대한 프랑스의 억압과 더불어 아랍계들의 차별도 고발하면서 깠다. 그 때문에 정부의 압력으로 일하던 신문사에서 해고당하자 이에 언론인 노조가 반발하면서 시위를 벌여 결국 복직한 일도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가 해방되자 과거를 잊고 관용과 용서를 베풀자는 주장에 맞서 반역자들을 가혹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하지만 소위 나치 청산이란 구실로 무고한 사람들이 수만 명이나 죽이는 대학살극이 벌어지자 경악하여 이를 크게 규탄했다. 


한국에선 프랑스가 반역자 청산을 잘한 것 정도로 오해하는 일이 많지만, 실상 프랑스의 청산은 36년간 식민지였던 조선이 아닌 한국전쟁 직후 한반도에서 벌어진 남북정권의 청산과 비교하는 게 더 부합한다. 꽤 유명한 사례로 독일군과 애인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린치당한 여자를 비롯하여, 독일군에게 빵을 팔거나 평소에 사이가 안 좋았단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하고, 같은 레지스탕스들끼리도 정치성향이 다르다고 서로 죽이는 등 한국전쟁 전후 한반도처럼 반동분자 청산을 구실로 무의미한 학살을 일으키는 개막장 사례가 속출했다. 때문에 샤를 드 골이 허겁지겁 이를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했다.[6]


2.1. 알제리 전쟁[편집]


그랬던 카뮈가 알제리 전쟁 당시 알제리 해방 전선(FNL)과 프랑스 정부 가운데 프랑스 정부 편을 든 것은 주변인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일로 받아들여졌다. '이 전쟁은 반란이며 새로운 아랍 제국주의와 소련 공산 폭력주의가 만나 반프랑스 움직임을 만드는 폭력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프랑스 우익들과 비슷한 주장을 한 것. 


카뮈는 알제리의 독립은 반대하되 자치권의 확대를 주장했다. '알제리의 독립은 인정할 수 없으나 프랑스인과 평등하게 살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카뮈의 옹호론자들은 당시 카뮈의 어머니가 알제리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신변을 염려하여 한 주장이라는 말도 한다. 하지만 카뮈의 제안은 프랑스측에서도 동의할 수 없는 것이었고 알제리도 마찬가지였다. 결론적으로 그는 양쪽에서 까였다. 알제리는 카뮈를 극렬 프랑스 우익으로 여겼으며 공산당 동료들과 알제리 독립을 지지하던 언론인이나 지식인들은 그를 배신자로 낙인찍고 무시했다.


그래서 알제리가 독립하자 알제리에서 그에 대한 모든 흔적은 철저하게 지워졌다. 이것은 그가 알제리를 고향으로 여겼다지만 정작 이방인 등 그의 여러 작품들 속에서는 프랑스인이 주축이지 알제리인들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점도 한 몫한 듯하다. 현재 그가 살던 집은 일반 가정집이며 노벨문학상 수상 당시 기념으로 만들어졌던 카뮈 문학기념비는 알제리에 용케 남아 있지만 카뮈의 이름은 끌로 지워진 채 방치되어 보존 상태가 엉망이라고 한다. 당연히 알제리인들은 카뮈가 누군지 잘 모른다.[7]


2.2. 사망[편집]


1960년 1월 4일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요절했다. 카뮈의 코트에는 전철표가 있었는데 전날 아내와 같이 전철을 타려고 했다. 그런데 갈리마르 출판사 사장의 조카이자 친구였던 미셸 갈리마르(Michel Gallimard)가 몰던 차를(갈리마르가 타라고 설득했다고) 타고 가던 길에 차가 플라타너스 나무를 들이박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냥 전철을 타고 갔다면 이런 일을 피할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카뮈는 현장에서 목이 부러져 즉사했고, 갈리마르도 며칠 뒤 병원에서 사망했다. 생전에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인터뷰에서 자동차 사고로 죽는 것보다 더 의미 없는 죽음은 상상할 수 없다.란 말을 남겼다. 지못미.(사고 현장을 찍은 흑백뉴스)


유작으로 다 완성하지 못한 《최초의 인간》을 남겼는데 세상을 떠날 당시 유품에 이 최초의 인간 원고가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 전철표 및 지갑, 펜, 메모지같은 것들과 같이. 미완성임에도 카뮈의 마지막 소설이라 그런지 미완성인 채로 책으로 나왔으며 국내에서도 정식번역되어 출판되었다.


3. 문학[편집]


카뮈의 문학은 '부조리 문학'으로 잘 알려져 있다. '부조리 문학'이란, 세상에는 어떠한 불변의 정의나 법칙이 없다는, 아니 있다 하더라도 이해조차 할 수 없는 '부조리'를 보여주며 이에 주인공이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렇기에 허무주의적 혹은 불가지론적인 태도를 가지는 경우가 많다. 뿐만 아니라, 부조리 문학은 주로 블랙/다크 코미디가 대다수이다.


알베르는 사람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으며, 그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사람이 만든 것이야말로 부조리라고 생각했다. 또 사람의 윤리란 매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라고 믿었고, 타협하지 않고 부조리에 저항하면서 스스로에게 거짓되지 않고 솔직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4. 명언[편집]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똑같이 어리석은 짓이다.

-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

5. 기타[편집]


원래 장래 희망은 축구선수였고 알제 대학 재학 시절 축구부에서 골키퍼로 맹활약했으나 결핵이 재발하면서 축구를 그만두게 되었다. 배우 활동에도 관심이 있었으나 여의치 않아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원래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도 없었고 소설은 그냥 자기 머리에서 나오는대로 썼다고 한다. 그러나 책을 좋아하기는 했던 듯싶다.《작가수첩》이라고 이름붙인 메모장에다가 아이디어가 머리속에 떠오르면 그 즉시 메모했다고 . 《작가수첩》은 카뮈 사후 출판되었고(방대한 양 때문에 나뉘어 출판) 한국에도 번역 출판되었다.

카뮈의 공식 프로필 키는 176cm로 기록되어 있고,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 성인 남자 평균 키가 170cm 언저리였다는 걸 감안하면 작지 않은 키다. 그러나 허버트 R. 로트먼이 쓴 카뮈 평전에서 그가 만난 카뮈의 대학 시절 축구 친구들이 카뮈를 작은 체구였다고 회상하고 있는 걸 보면 역시 176cm는 프로필상의 키고, 르네 샤르 등의 주변 인물과 찍은 사진들로 보건대 실제 키는 170~173cm 정도였던 걸로 추정된다. 골키퍼로서는 상당히 불리한 피지컬로 맹활약했다는 걸 생각하면 축구 재능도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골키퍼조차 본인이 자신이 있어서 선택한 포지션이 아니라, 축구는 하고 싶은데 체구도 작고 어릴 때부터 몸도 허약한 편이라 필드 플레이어처럼 몸싸움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다.

카뮈는 좌익운동가로 활동하다 아나키스트로 전향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그가 20대에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는 공산당에 가입은 하지만 결코 어떤 이념에 맹목적으로 세뇌당하진 않을 거라는 문구도 있다. 알제리 전쟁에서 보여준 애매모호한 회색분자 태도도 그의 성향이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는 괴물이 되어버린 자본주의든, 패배한 파시즘이든 이미 부작용을 드러내기 시작한 사회주의든 권력화한 집단은 부조리를 양산하기 마련이므로 아나키즘적인 태도를 추구했다. 즉 알제리가 독립해도 새로운 제국주의 집단의 탄생일 뿐이라는 인식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이 때문에 사르트르를 비롯한 당시 많은 사회주의자들에게 비판받았다.

2009년 12월 프랑스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는 알베르 카뮈의 문학을 깊이 존중한다고 말했으나 프랑스 좌파와 카뮈의 딸은 이를 반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공산당에 가입하고 좌익 활동 사상가로 지냈던 카뮈의 문학을 우파 대통령인 사르코지가 존중한다는 것이니.

6. 대표작[편집]


작품명 뒤에 *이 붙어 있는 작품은 표준국어대사전에 표제어로 실려 있는 작품들이다. 즉, 진정한 의미의 대표작.


이방인*

페스트*

전락*

시지프 신화*[8]

반항하는 인간*[9]

결혼

단두대에 대한 성찰

독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여름

오해

작가수첩

시사평론

정의의 사람들

칼리굴라




[1] 알제리계 출신으로 유명한 프랑스 사람은 지네딘 지단이 있다. 아버지가 알제리 전쟁 당시 아르키(Harki)라고 불리던 친프랑스 알제리 민병대원 출신으로 용케 프랑스로 이민 온 항만 노동자였다.

[2] 카뮈의 어머니는 1882년 알제에서 태어났는데 부모가 스페인 왕국 발레아레스 제도 출신의 스페인인이었다. 카뮈는 스페인을 혈통에 의한 자신의 제2의 조국이라 칭한 바 있다.

[3] 알제리는 1962년에 프랑스로부터 독립하기 전까지 하나의 독립 국가로 존재한 적이 없었고, 유사 이래 항상 특정 국가의 일부로 존재했던 지역이었다. 쉽게 말해 프랑스는 알제리라는 '국가'를 병합한 게 아니라, 바로 이전까지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알제리라는 '지역'을 자국 영토로 편입시킨 것이다. 알제리는 국가 상태에서 프랑스에 병합당한 게 아니고 국가였던 적도 없었기 때문에 카뮈가 살았던 당시 기준에서는 '프랑스령 알제리', '프랑스계 알제리인', '알제리계 프랑스인' 같은 말은 다 있을 수 없었다. 카뮈는 그냥 프랑스의 알제리 지방에서 태어난 프랑스 태생 피에느와르었다. 대략 일본 식민지 출신의 일본인 히키아게샤급인 셈이다.

[4] 이러한 사실은 그의 작품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가령 그의 대표작인 이방인이나 페스트는 배경이 각각 현재 알제리의 도시인 알제와 오랑인데, 작품 내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이방인에서 그냥 스쳐 지나가는 비중으로 나오는 아랍인들을 제외하고 전부 프랑스인이다. 카뮈가 인물 설정을 이렇게 한 이유는 결국 알제리도 프랑스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이다. 배경이 프랑스이니 등장 인물도 프랑스인인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게다가 당시 알제리의 대도시들은 전부 프랑스계, 유럽계가 주류였고 아랍계가 비주류였으니. 페스트에서는 첫 장부터 오랑 시는 프랑스의 한 도청 소재지에 불과하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5] 알베르 카뮈 전집을 번역한 김화영 교수에 의하면, 프랑스 현지에서 유학할 당시 프랑스어로 쓰인 프랑스어 사전(불불 사전)에 예문으로 카뮈의 문장이 다수 실려 있었다고 한다. 이는 카뮈가 사용한 프랑스어가 표준 프랑스어에 적합했다는 뜻이다. 알제리는 현재 아프리카에서 가장 넓은 대국이지만 지리적 연유로 도시들은 지중해 연안에 집중돼 프랑스 식민 지배의 영향으로 집중 개발되어 있었고 내륙에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데, 카뮈 역시 프랑스 본토와 가까운 연안 지역에서 태어난 인물이고 더군다나 부모가 프랑스인들이었으니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습득할 환경은 프랑스 본토인들과 차이가 없었다. 현재 알제리의 공용어인 아랍어와 베르베르어는 당연히 할 줄 몰랐다.

[6] 카뮈는 이런 무분별한 폭력뿐만 아니라 드 골이 법적으로 나치 부역자를 처벌하는 일에도 일부 반대했다. 문학가이며 언론인인 로베르 브라지야크가 나치에 부역한 죄로 처형될 때 프랑스의 문학가들이 탄원서를 쓰며 브라지야크의 처형에 반대했고 카뮈도 이에 참여했지만 드 골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7] 카뮈 연구가이자 카뮈 전집을 번역하고 프랑스로 가서 카뮈 연구에 참여한 김화영 교수는 알제리에 가서 카뮈에 대한 흔적이 철저하게 없어진 것을 아쉬워하면서도 그가 보여준 알제리에 대한 인식을 '똑같이 식민지를 겪은 한국인으로선 받아줄 수 없다'고 선을 그은 바 있다.(김화영, 《알제리 기행》 참고)

[8] 국어사전에는 일본 번역 그대로 '시시포스의 신화'로 등재되어 있다.

[9] 국어사전에는 일본 번역 그대로 '반항적 인간'으로 등재되어 있다.





E11 – 타르튀프 Tartuffe / 몰리에르(Jean Moliere, 1622~1673)

(출전: 동서고전 200선 해제3 / 반덕진 / 가람기획)


 희극작가이자 배우로 평생을 연극에 바친 몰리에르가 거짓 종교가의 위선과 그 위선에 속아 넘어가는 어리석음을 그린 5막의 희극. 종교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5년간이나 공개상연이 금지되었던 이 작품은 풍속희극의 단초를 제시하고 성격희극을 완성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삶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연극이었던 몰리에르는 이 작품 속에서 위선의 문제를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관련시켜 고찰함과 동시에, 인간본성의 문제를 형상화함으로써 개인과 사회의 갈등이라는 현대적 문제를 선구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a. 연극에 바친 순교자적인 삶

 몰리에르는 문화예술의 후원자였던 프랑스의 루이 14세 치하에서 활약한 코르네유, 라신과 더불어 프랑스 3대 고전작가로, 부유한 궁정 실내장식업자의 장남으로 태어나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부친은 아들이 가업을 잇기를 희망했으나 몰리에르는 경제적으로 보장된 삶을 포기하고 연극인의 길을 택하는 21세의 회심 이후 그의 삶은 오로지 연극만을 위해 존재하게 된다.

 학업을 마칠 무렵 재능있는 여배우 마들렌 베자르와 함께 <유명극단>을 창립하여 예명을 몰리에르라고 했다. 이 극단은 흥행에 실패하여 빚만 잔뜩 지게 되었고, 그는 한때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극단은 결국 13년 동안의 지방 유랑의 길에 나서게 되는데, 지방귀족의 도움을 받으며 차츰 실력을 쌓아 리옹에 본거지를 두는 유력한 지방극단으로 성장했다. 그동안 그는 극단 경영자로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동시에 이탈리아 즉흥극의 계통을 있는 연기술 작극법을 익힌 것으로 짐작된다. 1658년(36세)이 되어서야 파리에 진출하여 루브르 궁전의 루이 14세 앞에서 공연하여 인정을 받았다. 이로 인해 왕실 소유의 프티 부르봉 극장 사용을 허가받았다.

 다음해에 참신한 풍자희극 <웃음거리 재녀>의 성공으로 기반을 쌓았고, 이어서 아르놀프라는 개성적 인물을 창조한 <여인학교>로 명성을 드높였다. 그는 <우수한 극시인>의 자격으로 국왕으로부터 연금을 받고 루이 14세의 총애를 받았으나 한편으로는 많은 적들을 만들었다.

사교계나 배우작가들이 악의에 찬 중상과 비판을 가해오기도 했으나 그는 용감히 싸웠으며, 이러한 투쟁속에서도 극단원들의 생활을 보살피고 왕을 즐겁게 했어야만 했다. 이 눈부신 활동과 과로의 생활 속에서 그는 13년 동안 30편에 가까운 작품을 썼는데 그 대부분이 5막극이었다.

 1662년(40세) 마들렌의 여동생(혹은 딸)과 결혼했으나 21년 연하인 이 젊은 아내와의 가정생활은 원만치 못했다. 1664년(42세)에 발표한 <타르튀프>는 거짓신앙을 묘사했기 때문에 종교에 대한 모독이라 하여 신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아 상연금지되었다. 그후 무대에 올린 <돈 주앙>은 사태를

한층 악화시켰다. 이로 인해 교회측에서는 <타르튀프>를 5년, <돈 주앙>을 평생 동안 상연금지시켰다.

 당국과의 싸움에서 몰리에르는 극단을 혼자 이끌어갈 수 밖에 없었다. 배우도 작가도 확보할 수 없었던 그는 더 많은 작품을 씀으로써 작가의 부족을 메워나갔다. 드디어 1966년(44세) 그의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인간혐오자>를 발표했는데, 처음부터 식견 있는 관객들로부터 걸작으로 평가되었다. 그후에도 <구두쇠>, <여학자들>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의학 풍자희극 <상상병 환자>가 그의 최후의 작품으로, 그 상연에서 건강악화를 무릅쓰고 주인공역을 맡은 그는 연기 도중 발작을 일으켰으나 즉흥적 연기로 위장하여 버텨나갔다. 그러나 기어이 무대 위에 쓰러져 실려나가고 각혈 끝에 숨을 거두었다. 임종때 아내 아르망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신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목사의 입회도 허락되지 않았다 한다.

 그의 사후 아르망드는 배우들을 이끌고 게네고 극장으로 옮겼으나 국왕의 명령으로 경쟁관계에 있던 오텔 드 부르고뉴 극장과 합병함으로써 새로이 <국왕의 극장>이 결성되었다. 이것은 현재의 국립극장 코메디 프랑세즈의 전신이다.

 그의 작품은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 극장의 가장 중요한 레퍼토리로서 상연을 거듭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의 작품들이 시대풍속에 대한 예민한 시각과 비판정신에 뒷받침되어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인 인간상을 묘사했기 때문으로 평가되고 있다.


b. 시대적 배경과 작품세계

르네상스 시대 다음에 오는 문학의 흐름은 고전주의였다. 프랑스적인 것의 정수는 고전주의에서 발견할 수 있다. 프랑스 고전주의는 고대와의 밀착에도 불구하고 그 나름대로 근대적이고 또 엄밀히 말해 프랑스적이다. 문학을 한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에 도전하는 치열한 지적 추구의 과정이라고 볼 때, 프랑스 고전주의도 근대의 여명기에 프랑스 인이 펼쳤던 이 지적 모험의 증언이며 인간과 세계에 대해 프랑스 인이 가졌던 인식의 영원한 유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태양왕 루이 14세

 프랑스의 당시 집권자는 <태양왕>을 자처한 절대군주 루이 14세로, 그는 화려한 궁정생활을 영위하여 유럽 군주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인물이다. 그는 6개의 궁전 중에서도 특히 파리에서 떨어진 베르사유 궁전을 좋아하여 그곳에 하나의 작은 우주를 꾸몄다.

 베르사유 궁전에서는 왕을 중심으로 한 궁정귀족들이 낮에는 산책과 수렵, 밤에는 연회와 무도회가 열리는 등 사치와 방종한 생활이 계속되었다. 이곳에는 자연스럽게 미와 기지, 사교와 에티켓, 연극과 문학이 집결되었다.

 루이 14세 자신이 청년시절에 소설과 시를 애독하고 춤과 스포츠에 열중했으므로 그는 프랑스의 문학과 예술을 후원하여 번성하게 되었다.

루이 13세 때인 1635년에 프랑스 아카데미가 창설되고 동시에 작가가 지켜야 할 <삼단일 법칙>과 <순수성의 법칙>등 문학법칙이 제정되었다.

삼단일 법칙이란 하루 동안에 동일한 장소에서 한 사건이 행해져야 한다는 규칙이고, 순수성의 법칙이란 비극은 비극적인 요소로만 그리고 희극은 희극적인 요소로만 작품을 써야 한다는 규칙을 말한다. 이 규칙 밑에서 이른바 프랑스의 3대 고전주의 작가, 즉 <르 시드>의 작가 코르네유와 <페드르>의 작가 라신, 그리고 <인간혐오자>와 <타르튀프>의 작가 몰리에르가 탄생하게 된다.


   작품세계

 앞의 두사람이 비극의 대가였던 반면 프랑스의 모든 희극적 전통은 몰리에르에게 흘러 들어와서 새롭게 흘러나온다. 그는 고대로부터 내려온 희극적 유산을 흡수하여 그것을 근대적으로 재창조하기에 성공한, 그리하여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현재성을 잃지 않고 있는 희극의 가장 높은 봉우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예술적 승리는 단순한 천재성의 결과만은 아니었다. 12년간의 긴 유랑극단 생활을 통한 연극적 수련을 거쳐 파리로 입성했을 때, 그가 내세운 희극은 당시의 규범주의자들의 요구에 배치되는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고상한 웃음과 로마네스크한 줄거리의 요구에 대해서는 당대 풍속에 대한 가차없는 풍자를, 오락으로서의 희극개념에 대해서는 현실참여로서의 희극개념을 작품의 실제를 통해 보여주었고, 그래서 그는 더욱 어려운 역경의 연속 속에 빠져들었다.

 적대적인 연극인들의 끝없는 질시, 현학적인 문사들의 이론적 시비, 종교계의 도덕적 규탄은 끝없이 지속되어, 그는 언제나 논쟁과 모함의 와중에 있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자신이 선택한 예술의 지향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고, 현실의 벽을 뚫고 나가는 예술적 방법에 대한 탐구를 계속하면서 그것을 통한 반성과 갱신의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작품들은 바로 그런 삶의 형상물들이기에 일회적인 천재성을 뛰어넘는 풍요와 깊이를 역설적으로 획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c. 종교가의 위선적 행위 비판

 <위선자>란 부제를 가진 이 5막 4짜리 운문극은 거짓신앙을 풍자한 내용으로 인해 그 공개상연을 위해 5년 동안 투쟁해야 할 만큼 문제가 되었던 작품이다. 작가는 여기서 인간의 악덕과 당시의 파리 사교계를 활보하고 다녔던 위선자들을 가차없이 풍자하고, 타르튀프와 같은 위선자가 없어질 때 프랑스가 더욱 번영하리라는 점과, 국왕이 그들의 도움 없이도 진실과 허위를 식별할 수 있음을 암시했다. 어쨌든 이 작품으로 인해 <타르튀프>의 이름은 현재에도 <위선자>를 뜻하는 보통명사로 사용될 만큼 널리 알려져 있다.


   제1막 

 돈 많은 소시민 오르공은 전처의 소생 둘을 데리고 젊은 에르밀과 재혼했다. 이 오르공의 집에는 얼마 전부터 종교가인 타르튀프가 동거하고 있다. 그는 거지와 같이 떠도는 신세로 이 집에 들어왔으나, 오르공과 오르공의 어머니는 그를 성인군자처럼 모신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가 위선자요, 사기꾼으로 비쳐지고 있다. 시골에서 돌아와서도 오르공은 가족의 안부보다는 타르튀프의 건강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는 형편이다. 주위에서 아무리 이야기해도 오르공의 생각을 바꿀 수는 없다.


   제2막

 광신자인 오르공은 딸 마리안을 그녀의 애인에게서 떨어지게 하여 타르튀프의 아내가 되게 하려고 생각한다. 마리안은 슬픔에 잠기지만 하녀인 도린이 마음 약한 그녀에게 용기를 주며 함께 저항하자고 말한다.


   제3막

 오르공의 후처인 에르밀도 타르튀프에게 마리안과의 결혼의사를 포기하라고 말하는데, 오랫동안 에르밀에게 마음을 두고 있던 타르튀프는 두 사람만 있는 자리에서 그 유명한 <<아아, 믿음이 깊다고 해서 감정조차 없는 것은 아니지요, 어디까지나 나는 사내입니다>>라며 에르밀을 유혹한다. 그 현장을 우연히 보게 된 오르공의 아들 다미스는 타르튀프를 비난하며 오르공에게 모든 사실을 폭로한다. 그러나 오르공은 아들의 말을 믿지 않고 타르튀프의 교묘한 거짓말을 그대로 믿는다. 그는 오히려 아들을 꾸중하고 자기의 재산 전부를 타르튀프에게 증여한다.


   제4막

  딸과 타르튀프의 결혼을 서둘러 성사시키려는 남편 오르공을 보고 에르밀은 한 가지 꾀를 낸다. 남편을 테이블 밑에 숨겨두고 타르튀프를 불러들여 그의 구애에 응하는 척한다. 처음에는 의심을 품고 있던 타르튀프였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본색을 드러내어 에르밀을 품에 안으려 한다. 오르공은 그제서야 자신이 속았음을 깨닫고 이 사기꾼을 쫓아내려 한다. 그러나 타르튀프는 뻔뻔스럽게 <<자네가 이 집에서 나가주게>>라고 말한다. 이미 이 집의 재산 전부는 타르튀프의 것이었다.


   제5막 

 오르공은 자기 입장이 불리하게 될 수 밖에 없는 정치상의 비밀문서가 들어 있는 상자도 타르튀프에게 넘겨 준 터였다. 사기꾼은 그 문서를 국왕에게 공개하며 오르공을 고소한다. 오르공은 체포되기 전에 도망가야만 했다. 타르튀프는 경찰관을 데리고 거드름을 피우며 등장하여 오르공을 국적 취급을 한다. 그러나 경찰관이 체포한 것은 뜻밖에도 타르튀프였다. 이자야말로 당국이 수사하던 죄인임이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국왕폐하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시기 때문에 절대로 사기꾼의 술책에는

속지 않으신다>>고 경찰관은 말한다. 왕은 오르공을 용서하고 마리안은 발레르와 결혼하게 된다.


d. 5년간 공개상연이 금지된 문제작

 이 작품은 1664년 국왕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전에서 개최한 대제전 때에 처음으로 공연되었다. 악덕 종교가 위선자를 신랄하게 꼬집은 이 작품은 종교인들의 반감을 사서 상연이 금지되었다. 그후부터 몰리에르는 국왕에게 계속 탄원했으나 1669년이 되어서야 공개상연이 정식으로 허락되었다. 어쨌던 이 작품은 통렬한 풍자극으로서 몰리에르의 걸작 중의 하나이며 그 공연은 전대미문의 대성공을 거두었다.


   탁월한 성격묘사

 이전의 희극이 줄거리나 대사, 그리고 몸짓 등 외부적인 수단으로 관객들에게 호소하려 했던 반면, 몰리에르는 성격에 모든 바탕을 두고 인간의 약점을 폭로함으로써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내려 했다. 성격의 묘사, 이것이 그가 추구했던 목적이었고 인간정신의 이면과 동기, 그리고 원동력을 심리적 리얼리즘으로 포착함으로써 당대 인간들의 평범함과 복잡함을 그려냈으며, 등장인물 하나하나에 강한 개성을 부여하고 있다.


   비판정신

 그의 작품에는 비극작가인 코르네유나 라신의 작품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 번쩍인다. 두 비극작가가 주로 인간의 고뇌와 격정을 묘사한 반면, 몰리에르는 인간과 사회의 보편적인 악과 약점을 비판했다. 그는 관객이나 독자들을 웃기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거기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한다. 그는 이러한 풍속의 비판적 묘사를 통해서 인간을 개조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 당시의 수많은 풍속을 풍자한 작가 가운데 몰리에르만이 뚜렷하게 그의 위치를 지니고 있는 이유도 그의 내부에 있는 강한 도덕적 욕구 때문이다. 그러나 군주제도나 교회의 권위, 그리고 귀족의 특권 등에 대해서는 공격적인 태도를 완화하는 보수주의적인 측면도 있었다.


   자연애

 그는 인간의 본능을 바른 것으로 믿었으며 라블레나 몽테뉴와 같이 자연은 선하며 또한 만능이라고 생각했다. 자연과 싸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며 불행과 웃음거리를 동반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자연의 법칙에 따르는 젊은이들을 편들고 이를 막는 어른들을 언제나 곯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본능에 한계를 두어 이성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점도 놓치지 않았다. 이러한 점들이 그의 작품들로 하여금 그의 시대와 인간을 총체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도록 하고, 이 총체적인 비전을 통해 한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는 독창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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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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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4세

Louis XIV

Louis XIV of France.jpg

Grand Royal Coat of Arms of France.svg

Louis XIV Signature.svg

Royal Crown of France.svg

프랑스왕

재위 1643년 5월 14일-1715년 9월 1일

대관식 1654년 6월 7일

전임자 루이 13세

후임자 루이 15세

섭정 안 도트리슈 (1643년–1651년)

재상

수석국무장관[보이기]

별칭

별호 태양왕

신상정보

출생일 1601년 9월 27일

출생지 프랑스-나바르 왕국 생제르맹앙레

사망일 1643년 5월 14일

사망지 프랑스-나바르 왕국 베르사유

매장지 생드니 대성당

왕조 카페 왕조

가문 부르봉 가

부친 루이 13세

모친 안 도트리슈

배우자 마리테레즈 도트리슈

자녀 본문 참조

종교 천주교

루이 14세(프랑스어: Louis XIV, 1638년 9월 5일 ~ 1715년 9월 1일)는 프랑스의 왕이자 나바라[1]의 군주이다. 본명은 루이 디외도네(프랑스어: Louis-Dieudonné)이고, 공식 칭호는 루이 드 프랑스-나바라(프랑스어: Louis de France et de Navarre)다. 그는 다섯 살 생일이 채 되기도 전에 왕위에 올랐다. 아직 정치를 개인적으로 통치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아서 이탈리아 추기경 쥘 마자랭이 1661년 죽을 때까지 사실상 역할을 대신하였다. 루이는 1715년 9월에 죽을 때까지 왕의 자리에 있었는데, 77번째 생일을 맞이하기 4일 전이었다. 그의 치세기간은 최종적으로 72년 3개월 18일으로 유럽의 군주 중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루이 14세는 세간에는 태양왕(프랑스어: Le Roi Soleil)이란 별명으로 알려져 있다. 루이 14세는 왕권신수설을 믿었기에, 국왕의 권력은 신으로부터 받는 것이라는 학설을 지지했다.


루이의 치세 상당부분은 유럽에서 프랑스의 힘과 세력을 확장시키고자 3번의 주요 전쟁─프랑스-네덜란드 전쟁,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과 스페인 왕위계승전쟁─과 2번의 작은 분쟁─상속 전쟁, 재결합 전쟁─을 치렀다. 이 시대 프랑스의 정치와 군사상 걸출한 인물의 면모를 살펴본다면 마자랭, 장바티스트 콜베르, 튀렌, 보방을 들 수 있다. 프랑스 문화 또한 이 시대 번성하여 위대한 명성을 가진 인물들이 나타났는데, 몰리에르, 장 라신, 부알로, 라 퐁텐, 르브룅, 리고, 루이 르 방, 쥘 아르두앙 망사르, 클로드 페로, 르 노트르 등이 이 시기의 사람이며, 이들의 대다수는 루이로부터 지원금을 받고 왕과 왕실을 찬양하는 작품을 쓰기도 했다.


루이 14세는 그의 전임자가 만든 중앙 집권화의 일을 계속 추진하여 프랑스의 지방에 끝까지 남아 있던 봉건제도의 잔재를 청소하고 수도에서 내려오는 지시에 따라 통치할 수 있게 만들어 갔다. 그의 성과를 방해한것은 지방의 힘있는 귀족들로 많은 이들이 반란으로 일어났고, 그들 소수를 가리켜 프롱드라고 불리었다. 루이는 이들 힘있는 귀족들을 베르사유 궁전의 자신의 곁으로 불러들여 사치스런 생활을 즐기게 하면서 서서히 약화시켰고, 이를 통해 귀족들의 힘을 제어했다. 그 결과 그는 오랫동안 유럽에서 절대 군주의 전형으로 고찰되게 되었다.


또한 절대 군주의 자리를 다져 “짐이 곧 국가니라(L'État, c'est moi)”와 같은 말을 했다고 전해지지만, 역사학계에서 이 말은 그의 정적들이나 볼테르가 퍼뜨린 헛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루이 14세는 키에 대한 콤플렉스로 하이힐을 최초로 신었고 귀족들이 그것을 따라하여 유행처럼 번졌다고 한다.


목차  [숨기기] 

1 생애

1.1 정치입문

1.2 국력과 문화발전

1.3 전쟁

1.4 낭트칙령 폐지

1.5 죽음

2 부인들과 자녀들

2.1 정부인과 적자

2.2 정부와 서자

3 갤러리

4 같이 보기

5 각주

6 외부 링크

생애[편집]


결혼식을 올리는 루이 14세

정치입문[편집]

1638년 생제르맹앙레에서 루이 13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루이 13세가 1643년에 사망했을 때 루이 14세는 겨우 5살이었다. 섭정을 맡은 모후 안 도트리슈는 국사 운영을 로마 가톨릭 추기경인 마자랭에게 맡겼다. 뛰어난 협상가였던 마자랭 추기경은 전임자인 리슐리외 추기경과 동일한 계획을 강력하게 추진하여 절대 군주제를 성립시켰다. 귀족들에게 눌렸었던 왕의 권력이 마자랭 추기경의 지도로 강해진 것이다. 마자랭 추기경은 당시 왕이였던 루이 14세의 정치수업을 지도하였는데, 덕분에 1661년 마자랭이 죽자 22살의 어른이 된 루이 14세는 재상과 같이 프랑스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국력과 문화발전[편집]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의 유럽 (1648)


루이 14세 앞에 나타난 주불 페르시아 대사들

전임자와 선왕의 낭트 칙령을 통한 위그노들에대한 수용 및 중상주의 정책으로 루이 14세는 당대 유럽의 왕들 중에서 가장 부유한국가를 물려받았었다. 에스파냐의 무적 함대를 1588년 네덜란드와 연합, 격파한 후 점점 강해지는 영국에 뒤지지 않으려고 루이지애나 등 식민지에서 돈을 징수해온 프랑스의 국력은 이윽고 영국에 맞설 만한 수준에 이르렀으나. 유명한 베르사유 궁전증축과 사치스러운 궁정생활 그리고 말년의 계속된 패전으로 이 막대한 부는 모두 사라지며 루이 15세 때에는 몇차례의 국가부도나 그에 버금가는 경제위기 등을 겪는다. 베르사이유 궁전은 착공한 지 20년 후인 1682년, 아직 완공 전이었으나 루이 14세는 왕궁과 정부를 베르사유로 모두 옮겼으며 그때부터 베르사유 궁전에는 프랑스의 왕족들 뿐만 아니라 대귀족들 전부가 이주해 와서 살게 되었고, 왕과 귀족들의 궁정 생활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베르사유 궁전은 프랑스 민중들의 희생과 부담으로 구축되었다. 민중들은 베르사유 궁전을 짓기 위한 부역에 동원되어 노동력을 수탈당했으며, 사고로 죽은 자들은 보상과 사과는커녕, 시체가 암매장되었다. 그럼에도 루이 14세는 정사를 돌보는 한편, 사냥과 기마 경기를 개최하였고, 트럼프와 당구 그리고 춤을 즐겼다. 특히 루이 14세는 발레에 지대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7세부터 직접 무용을 수련하며 최초의 직업무용수로도 꼽힌다. 1653년 15세의 나이에는 밤의 발레(Ballet de lanuit)에 '아폴로'역으로 출연해 '태양왕'의 호칭을 얻게 된다. 또한 1661년 왕립무용아카데미라는 발레학교의 효시인 무용예술원을 설립하였다. 이러한 예술에 대한 애정과 노력들로 화려한 궁정 문화가 눈부시게 꽃피워 전 유럽의 왕가에 확산되었다. 루이 14세 정부는 극히 다양한 기술에 관한 특허장을 무수히 나누어 주었다. 그중에는 예컨대 맹트농 후작 부인이 약간의 자본을 투자한 경제적 난방 방식 같은 것도 있었다.[2]


전쟁[편집]


프랑스-네덜란드 전쟁 때 로비트에서 라인 강을 건너는 루이 14세와 그의 군대

루이 14세는 피레네 산맥과 알프스 산맥, 라인 강이 프랑스의 국경이라고 선언했다. 프랑스의 국경은 하느님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그것은 자연 환경에 의해 표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뒤부터 이러한 ‘자연 국경설’을 내세우며 루이 14세는 그의 재위 기간 72년 4개월 중 31년 동안 그 당시 프랑스 영토가 아닌 라인 강 방면의 영토 획득을 위해 다른 나라에 대한 침략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침략 전쟁을 위해 프랑스군의 근대화가 행해졌고, 루이 14세는 최강을 자랑하는 군대를 편성하기 위해 징병제도를 실시 하여 유럽에서 최강을 자랑하는 육군이 편성되었다. 프랑스는 이 강력한 군대로 우선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의 틈을 타서, 1667년과 그 다음해에 걸쳐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독립한 네덜란드에 침입했다. 또한 제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때에도 네덜란드에 침입하여(1672년~1678년) 많은 영토를 빼앗았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네덜란드를 지원한 독일로부터 알자스 로렌 지방도 획득하였다.


루이 14세에 의한 침략 전쟁은 멈추어지지 않았다. 그는 다시 이번에는 독일의 팔츠 지방에 대한 계승권을 주장하며 침입했기 때문에 독일은 영국, 네덜란드, 에스파냐와 동맹을 맺어 대항하였다. 이른바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이라고도 불리는 팔츠 계승전쟁이 10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식민지 문제로 영국과 세력 다툼을 벌여 싸우게 되는 제2차 백년전쟁이 발발된 것도 루이 14세 때였다. 또한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에 뛰어드는 등 루이 14세는 영토 확장에 혈안이 되었다.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에서 초반 전세는 프랑스에 유리했으나 점차 밀리게 되었고, 결국 루이 14세의 손자 스페인의 펠리페 5세의 스페인 왕위만이 인정되어 프랑스가 얻은 이득은 없었다.


루이 14세의 무리한 전쟁수행으로 프랑스의 영토는 루이 14세가 처음 친정을 시작하던 당시의 영토로 줄어들었고 잦은 전쟁으로 빚만 산더미같이 쌓였다. 모든 도시에 거지가 들끓고 굶어 죽거나 전염병에 걸려 죽은 민중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당시 프랑스인의 평균 수명은 25살 이하였으며, 파리를 비롯한 모든 도시에는 거지들이 들끓었다. 더구나 전쟁수행에 필요한 세금때문에 민중들은 경제적으로 수탈당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계속적으로 전쟁을 치루었으니 나라가 평안할 수 없을 것은 당연했다.


낭트칙령 폐지[편집]


낭트 칙령이 폐기될 시기의 루이 14세

루이 14세는 프랑스 교회를 로마 가톨릭으로 통일하는 것이 절대왕정에 유리하다고 생각하여 용기병을 동원하여 개신교인들을 학살하고 박해해 강제로 로마 가톨릭교회로 개종시켰다.


 용기병의 박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또 퐁텐블로 칙령을 발표, 1685년 개신교 신자에 대한 차별을 금지한 낭트 칙령을 폐지, 개신교를 탄압했다. 낭트 칙령은 프랑스 내 개신교 신자들을 공직자 취임제한등의 차별로부터 보호하는 차별금지정책이었는데, 이를 폐지함으로써 탄압을 받게 된 위그노 25만 명이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네덜란드와 영국 등 세계 각국으로 망명했다. 그런데 이들의 대부분은 숙련된 상공업 기술자들이어서, 이후 프랑스의 수공업은 거의 마비되다시피 했다.


 퐁텐블로 칙령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죽음[편집]

1715년, 76살의 늙은이가 된 루이 14세는 72년 동안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무리하게 전쟁을 수행, 경제를 파탄시킨 자신의 정치행적에 대해 자각과 후회를 가져 임종을 맞기 직전에 증손자인 루이 15세에게 “너는 이웃 나라와 싸우지 말고 평화를 유지하도록 힘써라. 이 점에서 짐이 밟은 길을 따르지 말라. 국민들의 괴로움을 덜어 주는 정치를 하여라. 아쉽게도 짐은 행하지 못했었다.”라는 간곡한 유언과 “짐은 이제 죽는다. 그러나 국가는 영원하리라.”[3] 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향년 77세. 루이 14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프랑스 국민들은 조금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이 오히려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다려온 해방을 주신 하느님 앞에 감사하며 크게 기뻐했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때부터 프랑스에는 혁명의 싹이 움트기 시작하여 76년 뒤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부인들과 자녀들[편집]


루이 14세와 그의 가족들

정부인과 적자[편집]

왕비 에스파냐의 마리아 테레사

루이(1661-1711): 왕세자(Dauphin)였으나 부왕 루이 14세보다 먼저 사망하였음. 루이 15세의 조부이자 루이 16세의 고조부.

안 엘리자베트: 요절

마리 테레즈: 요절

필립 샤를: 요절

루이 프랑수아: 요절

정부와 서자[편집]

루이즈 프랑소와즈 르 블랑 드 라 발리에르³ - 라 발리에르 공작부인

샤를 (1663-1665)

필리페 (1665-1666)

라 발리에르 여공작 및 콩티 공비 마리 안 (1666-1739)³

베르망두아 백작 루이 (1667-1683)³

아테나이 드 로슈슈아르 모르트마르³ - 몽테스팡 후작부인

루이즈 프랑소와즈 드 부르봉 (1669-1672)

멘 공작 루이 오귀스트 (1670-1726)³

루이 세자르 (1672-1683)²

부르봉과 콩데 공비 루이즈 프랑수아즈 (1673-1743)³

오를레앙 공작 부인 프랑수아즈 마리 (1677-1749)³

툴루즈 백작 루이 알렉상드르 (1678-1737)³

클로드 드 빈

루이즈 드 메종블랑쉐 (1676-1718)

앙젤리크 드 퐁탕주 - 퐁탕주 공작부인

아들 (1691-1681)

프랑수아즈 도비녜 - 맹트농 후작부인

갤러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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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치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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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치의 법칙(프랑스어: Règles du théâtre classique)은 프랑스 고전 연극에서 규칙중 하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시학(詩學)>에서 비극은 "가능한 한 태양의 1회전하는 기간"에 한정하고, 그 줄거리는 "쉽사리 기억할 수 있는 크기"로, 극중의 사건은 거의가 "동시에 실현하는 것을 모방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들은 그리스 비극들을 상연할 때의 외적 조건이었으며, 스카리졔 전후(前後)에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로 들어온 문예부흥기의 연극이론은 이를 엄밀한 규칙으로 해석했으며, 샤플랭 등 지식인은 삼일치 또는 삼단일(三單一)의 법칙으로서 프랑스 고전극에 도입했던 것이다.


이를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 부알로(Boileau)의 다음의 말이다.


“한 장소에서, 하루 중에 오직 하나, 완성된 일이 마지막까지 무대를 충만시킬 수 있도록 하라.”

 

— 부알로, 《풍자시》 제3

이것은 고전극의 중요한 요건이 되어, 1637년에 코르네유의 <르 시드>의 대성공 때 생겨난 '르 시드 논쟁'의 쟁점의 하나는 이 비극이 시간적·장소적으로 단일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리슐리외의 명을 받은 샤플랭이 '<르 시드>에 관한 아카데미의 의견'을 발표하기까지 문단과 사교계가 둘로 갈라지는 등의 소동을 빚었다.


즉 코르네유에게는 이러한 법칙이 부담이었으며 라신은 이를 편하게 소화시키고 있었다. 라신의 《베레니스》 서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비극에서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은 진실다움 이외는 없다. 몇 주간이 걸려도 일어날지 어떨지 알 수 없는 많은 일들이 하루 사이에 일어나는 연극이 진실답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 라신, 《베레니스》 서문



E10 – 수상록 (Les Sssais, The Essays) /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 1533~1592)

(출전: 동서고전 200선 해제3 / 반덕진 / 가람기획)


 <<나는 무엇을 아는가(Que sais je, What do I know)>> 등의 구절로 유명한 이 작품은 몽테뉴가 오랜 관직 생활을 청산하고 독서와 사색에 몰두한 후 부담없이 쓴 지혜의 서다. 이 책은 특정하거나 일정한 논리나 순서없이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랑 욕망 죽음 등의 문제에 대한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며 쓴 책으로, 스토이즘 회의주의 에피큐리어니즘을 거친 저자의 사상편력이 담겨 있으며, 그의 인간성 성찰은 후세의 도덕론자들에게 하나의 모티브를 제공했다.


a.고전여행과 명상 속에서 보낸 생애

 <<모두가 함께 행복해지지 않는 한 개인의 행복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한 몽테뉴는 르네상스 말기에 나타나 당시까지의 인류지성을 집약한 작가로 평가된다. 그는 변화가 심한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을 통해 가장 보편적인 인간상을 제시하여, 프랑스 르네상스의 후반기를 대표한 사상가였다. 

 몽테뉴는 프랑스의 페리고르 지방의 신흥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피에르는 젊은 시절에 프랑수아 1세의 이탈리아 원정에 종군하여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의 진수를 체득하고 귀국한 후 가세를 확장시키고 마침내 보르도 시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체험한 부친은 어린 아들의 교육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우선 갓 태어난 그를 허름한 농가에 양자로 보내 가난한 사람들의 세계를 이해하도록 했고, 4--5세가 되어 양자기간이 끝난 어린 아들에게 당시 지식인의 필수 코스인 라틴 어 교습을 위해 프랑스어를 전혀 모르는 독일인 가정교사를 초빙했다. 종들도 이 아이 앞에서는 라틴 어만을 사용하도록 엄명을 내릴 정도였다. 덕분에 몽테뉴는 6세 때 라틴 고전을 읽을 정도였고, 그때서야 모국어인 프랑스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13세 때 보르도 대학에서 철학과 고전을 공부했으며, 16세 때 툴루즈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21세부터 페리그 시의 어용금재판소의 참사가 되어 3년 동안 근무한 후, 그 재판소가 폐지되자 보르도 고등법원의 참의가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인생의 귀중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보에티와의 만남이 그것이다. 몽테뉴보다 몇 살 위인 그는 언어학자이자 문필가로서 금욕주의의 확고한 신념을 가졌던 반면, 몽테뉴는 아직도 자신에게 알맞은 역할을 모색하고 있는 젊은이였다. 두 사람은 독특하고 신비스런 방법으로 우정을 나누었고, 이런 교유는 심원한 인간관계에 대한 몽테뉴의 열망을 충족시켜주었다. 그러나 4년 후, 몽테뉴가 <<그가 곧 나다>>고까지 말했던 친구의 요절은 그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고, 그와의 우정이 지속되었더라면 몽테뉴는 수상록을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친구를 잃은 슬픔을 달래려고 2년간 숱한 연애를 했으며, 33세 때 결혼했다.

 36세 때 부친이 죽자 몽테뉴는 몽테뉴 가의 영주가 되어 막대한 재산과 넓은 영지를 물려받았다. 38세에 영지로 은퇴하여 대부분의 시간을 서재에서 라틴 고전 탐독과 명상으로 보냈다. 그후 10년(1570--1580)동안 <수상록> 1권과 2권을 쓰면서 시간을 보냈지만, 완전한 은둔생활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후 그는 곧 스위스 이탈리아 독일을 여행했으며, 여행 도중에 일찍이 부친이 역임했던 보르도 시장직에 선출되었다. 1585년까지 시장직에 재직하면서 구교와 신교간의 종교전쟁을 조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1588년에 <수상록>을 대폭 증보수정하고 제3권을 넣어 새로이 간행했다. 그후 그는 성에 은거하면서 독서와 <수상록> 가필로 여생을 보내다가 59세에 세상을 떠났다.


b. 몽테뉴가 살았던 시기의 프랑스

 몽테뉴가 살았던 시기의 프랑스는 정치적 종교적으로는 구교와 신교의 종교전쟁이 꼬리를 물었고, 사회적으로는 흑사병이 나돌았던 혼란의 시기였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도 몽테뉴는 냉철하고 객관적인 논리를 구사하여 시대적인 문제들을 하나씩 검토했다. 그는 <수상록>에서 모든 관점에서 문제를 검토하면서도 최종적인 해답은 유보했다.


   종교전쟁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새로운 예술을 낳았다면 북방 르네상스는 새로운 종교를 낳았다. 종교전쟁은 유럽의 여러 나라가 절대주의국가로 가는 도상에서 <종교>라는 이름으로 행한 정치분쟁이다.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그러하고, 프랑스의 위그노 전쟁과 독일의 30년전쟁이 유사한 성격의 전쟁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신교도인 위그노와 구교도와의 대립이 왕위계승 문제라는 정치적 대립과 얽혀 30여 년간에 걸친 내란으로 발전했다. 전쟁은 처음 프랑스 왕의 신교도 탄압에서 비롯되었으나 영국 네덜란드 스위스 독일이 신교도를 지원하고, 에스파냐 로마 교황군이 구교도를 원조하는 등 여러 나라가 간섭하여 국제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전쟁 말기에 왕위에 올라 부르봉 왕조를 개창한 앙리 4세가 <낭트 칙령>으로 신앙의 자유를 공인함으로써 내란은 종식되었다. 몽테뉴는 보르도 시장 재직시 양쪽으로부터 보르도 시를 보호하기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다했으며 그 덕분으로 보르도 시는 무사할 수 있었다.


   흑사병의 유행

 몽테뉴는 그 어려운 시장직이 거의 끝나갈 무렵 새로운 불행이 덮쳐왔다. 1585년 여름에 발생한 흑사병이 보르도 일대에 만연하여 당시 인구의 3분의 1이 죽었다. 교외지역에서 주거하고 있었던 사람은 모두 도시를 떠났고, 몽테뉴도 가족을 데리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피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페스트로 죽어가는 농민들과 그들의 죽음에 임하는 태도에 그는 깊은 감명을 받는다. <<그때 우리는 단순한 서민들에게서 불굴의 본보기를 보았다. 그들은 삶에 대한 욕망을 버리고 죽음을 의연하게 맞이했으며, 조금도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라고 그는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정신적 위기상황에서 인간에 대한 깊은 신뢰를 지닌 지혜로운 철학자 몽테뉴의 출현은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


c. 자아성찰의 서

 수상록은 1572년부터 1592년까지 약 20년에 걸쳐 집필되었다. 본서는 총 3권 107장으로 되어 있지만, 각 장 사이에 논리적 연결은 없다. 그리고 각 장의 제목은 반드시 그 장의 내용을 나타내는 것도 아니며 이야기의 실마리를 끌어내기 위한 구실이거나 혹은 이야기를 결말짓기 위한 경우가 많다.

 <수상록> 제1권에는 로마의 세네카 등 고전의 영향을 받아 자연적 이성에 따르고자 하는 스토아적인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제2권에서는 자기 성찰이 깊어지면서 스토아적인 경향을 떠나 피론(Pyrrhon)의 회의주의에 공감하게 된다. 그리고 제3권에서는 회의주의에 에피쿠로스 학파(Epicurus)적인 쾌락주의가 가미되어 소위 자연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띠게 된다. 결국 그는 쾌락주의적 자연주의에 접근하게 되어 소크라테스를 스승 중의 스승으로 삼기에 이른다.

 이 책에서 그는 보편적인 인간성의 탐구라는 전제 아래 키케로, 오비디우스, 호라티우스, 베르길리우스, 세네카 등 로마의 철학자들이나 문학가들의 말을 인용하며 자신의 성격 행동 체험 주장을 솔직하게 적고 있다. 그는 항상 흔들리고 기복이 심한 하나의 인간, 즉 자신을 책 속에 그려 봄으로써 자기 이상의 <보편적인 인간성>을 밝혀보려고 했다.

 독자에게 드리는 서문에서 <<내가 묘사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라고 밝히면서, 독자들이 자기를 여기 묘사된 그대로 자연스럽고 평범하고 꾸밈없는, 별 것 아닌 그를 보아주기 바란다고 당부하고 있다.


   제1권 

 제4장 <참된 목표가 없으면 우리의 영혼은 그 열정을 그릇된 목표에 쏟는다>에서는 <<바람은 울창한 숲이 그 진행을 가로막지 않으면 그 힘을 잃고 허공에 흩어진다>>는 그리스의 철학자 루카누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동요하는 영혼은 그 영혼에게 붙잡을 어떤 것을 제공하지 않으면 길을 잃고 방황하므로, 우리는 항상 영혼에게 그것을 목표로 삼고 그것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대상을 제공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제14장 <행불행은 대체로 우리의 견해에 의해 좌우된다>에서는 빈부는 각자의 견해에 달려 있으며 모든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행복 또는 불행하다고 생각하는가에 따라 그만큼 행복하게 살기도 하고 불행하게 살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욕구를 적절히 조절하고 현재의 자기에 만족하며, 자신의 재산이 늘어나든 줄어들든 그것에는 개의치 말고 자기의 마음에 맞는 일에 힘써 노력하는 사람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제19장 <우리의 행복은 사후가 아니면 판단해서는 안된다>에서는 <<어느 누구도 죽기 전에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항상 그의 마지막 날까지 기다려야 하며, 그의 장례식을 치를 때까지는 그의 행복을 판단할 수 없다>>는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그러면서 <<운명은 때때로 우리가 지나간 세월 동안 쌓아올린 것을 한순간에 뒤엎을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생애를 판단함에 있어 나는 항상 그가 마지막 순간에 어떻게 행동했는가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러므로 나의 생애의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는 나의 생애가 끝날 때 훌륭하게 행동하는 것, 즉 평온하고 태연하게 처신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제20장 <철학을 하는 것은 죽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는 제1권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장이다. 철학의 연구와 사색은 우리의 영혼을 우리에게서 끌어내어 우리의 영혼으로 하여금 육체 이외의 일에 분주하게 하며, 따라서 그것은 일종의 죽음의 연습이며 죽음의 모방이기 때문이다.

 제26장 <어린이 교육에 관하여>에서는 <<인간의 모든 학문 중에서 가장 어렵고 중대한 문제는 어린 아이의 양육과 교육이다>>라고 그의 교육론을 서술하고 있다. 교사가 혼자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학생에게 생각하고 말할 기회를 주고, 그 학생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어 소크라테스는 먼저 학생들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나서 자신의 생각을 말했던 점을 상기시키고, <<대부분의 경우 가르치는 사람의 권위는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 장애가 된다>>는 키케로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교육론은 후에 루소에게 연결되어 루소의 교육학 명저인 <에밀>에 영향을 주었다.

 제27장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참과 거짓을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제28장 <우정에 관하여>는 그와 보에티간의 우정을 말하고 있다. 제33장 <생명을 희생시켜서라도 관능적 쾌락을 피해야 한다>는 초기의 금욕주의 철학인 스토아 철학에 심취했었던 그의 심경을 보여준다.


   제2권

 제5장 <양심에 대하여>는 <<죄인의 가장 큰 형벌은 재판관인 자신으로부터는 결코 방면될 수 없다는 것이다>>라는 유베날리스의 말을 인용하고, <<양심이 우리를 공포로 채우듯이, 양심은 또한 우리를 확신과 신념으로 채운다>>고 서술하고 있다.

 제29장 <덕에 대하여>에서는 <<한 인간을 아주 공정하게 판단하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그를 관찰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기술했다.

 제31장 <분노에 관하여>에서 <<분노만큼 우리의 판단의 정확성을 감소시키는 감정은 없다 분노로 인해 우리의 맥박이 세차게 뛰고 우리가 흥분하고 있는 동안에는 우리는 꾸짖는 일을 뒤로 미루어야 한다. 우리의 분노가 가라앉아 평온해지면 사물은 정녕 다르게 보일 것이다. 분노에 싸여 있는 동안에는 명령하고 말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이 아니라 분노의 감정인 것이다>>라고 분노의 악영향을 경계하고 있다.


   제3권

 제3장 <3가지 교제에 대하여>는 우정 사랑 독서의 기쁨을 기술하고 있다. 우정을 나누고 싶은 사람들로는 점잖고 재능있는 사람들을 들고 있다. 그리고 아름답고 덕있는 여자들과의 사랑도 즐거움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영혼의 측면에서는 전자만큼 즐거움이 크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 교제에 있어서는 경계가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는데 자신이 젊은 시절에 경험했던 두 차례에 걸친 성병도 언급하고 있다. 세번째는 책과의 교제를 들고 있는데 <<책은 나의 인생행로에 변함없는 친구가 되어 나를 도와준다>>라며 독서를 예찬하고 있다.

 제8장 <대화의 기술>에서는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진리인 것처럼 보이는 말도 즉석에서 받아들여서는 안되며 한두 번쯤 그 말을 객관적인 시각에서 음미해보고 그가 무슨 의도로 그 같은 말을 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장에서 <<학문은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에 따라 왕의 홀이 되기도 하고 바보의 노리개가 되기도 하다는 언급도 나온다.

 고전지식의 집대성이라는 점에서 교양서로 환영받고 있는 이책은 근대의 합리주의 정신과 과학적 사고에 영향을 주었고, 그의 교육사상은 루소로 연결되어 한층 심화되었다. 또한 그 이후의 휴머니스트에게는 그의 인간성 성찰방법이 하나의 모델을 제시해주었다.


d. 몽테뉴의 지적 편력

 <<프랑스의 근대정신은 몽테뉴로부터 시작된다>>고들 말한다. 그것은 그가 <수상록>에서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추구한 다음 나아가 자기 한 개인을 초월하여 인간존재 그 자체의 본질을 예리하게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은 각기 인간의 본질을 완전히 갖추고 있다>>고 믿고 자기 성찰을 계속하여 현실의 구체적인 인간을 묘사함으로써 <보편적 인간>을 묘사하고자 했고, 현실적인 생의 관찰을 통해 생의 보편적 모럴>을 탐구하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몽테뉴의 위대한 모습을 보게 된다.


   금욕주의

 초기에 씌어진 에세이 중에는 도덕의 문제를 다룬 것이 많다. 제1권 14장 <<행불행은 대체로 우리의 견해에 의해 좌우된다>>, 19장 <<우리의 행복은 죽은 후가 아니면 판단해서는 안된다>>, 20장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죽음을 배우기 위해서이다>>, 39장 <<고독에 관하여>>, 42장 <<우리들 사이의 불평등에 대하여>> 등이 이 시기에 씌어진 것으로 이들 제목이 나타내고 있듯이 이들은 죽음 행복 불행 등 고대철학이 가장 일반적으로 다루었던 도덕적인 문제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당시 그가 공감하고 있던 도덕론은 스토아 학파의 도덕론이다. 그가 존경하는 친구 보에티와의 교제를 통해 깨끗한 청교도적인 그의 자세에 감명을 받고 스토아적인 극기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스토아 철학에 의하면 도덕의 본질은 <이성>으로써 정념을 억제하는 데 있다. 정신에 의해 육체를 지배하고 의지의 힘에 의해 인간의 욕망을 억제하면 초연한 <무감동상태<apatheia)>상태에 달할 수 있어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회의주의

 그러나 <영웅전>의 저자인 플루타크와 회의주의 철학자인 섹스토스 엠페이리코스의 저술을 읽은 후 스토아 철학으로부터 멀어진다. 플루타크의 <윤리론집>은 <플루타크 영웅전>과는 달리 범인을 다루고 있어, 그동안 그리스로마의 영웅들에게서 도덕적 교훈을 구하던 몽테뉴에게 자기 주위의 주변 인물들에게 시선을 돌리게 했다. 그래서 몽테뉴는 차츰 인간이란 얼마나 복잡하고 괴이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섹스토스 엠페이리코스의 <회의파 개설>을 읽은 후 사상의 전환기를 맞이한다. 피론<Pyrrhon>으로부터 시작된 회의파 철학은 <사물은 본디 불확실한 것이므로 사물에 대한 우리의 판단에는 항상 부정과 긍정의 양론이 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일 뿐 절대적 진리를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물에 대해 부정도 긍정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몽테뉴는 <<나는 무엇을 아는가?<Que sais-je?>>>라는 형태로 표현했다.


   자연주의

 그러나 제 3권에 들어오면서 자연의 행복에 관심을 갖게 된다. 자연의 행복 중에서도 몽테뉴가 가장 중시한 것은 육체적 쾌락이다. 그는 한때 스토아 학파의 영향을 받아 <생명을 회생시켜서라도 쾌락을 피할 것>에 찬성했지만 그후 인간의 자연적 본성에 기초를 둔 육체적 쾌락을 피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임을 깨달았다. 육체와 정신은 하나인데 이것을 둘로 나누어 어느 한 편에 편중하기 때문에 오류가 생기며, 자연의 가르침에 따르는 것이 인간으로서 올바르고 행복하게 사는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적 편력을 거쳐 그는 점차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갔으며 이러한 자기 묘사가 <수상록>의 중심과제가 된다. 그에게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새로운 의미와 중요성을 지니고 다가왔다. 자기를 묘사한다는 것은 자신을 객관화하고 고정화하는 일이다.

몽테뉴는 <수상록>을 쓰면서 자기를 관찰하고 연구검토함으로써 이제가지 알지 못했던 자기를 발견하고 새로운 자아를 창조해갔다. 이런 의미에서 <수상록>이 그를 만들고 그가 <수상록>을 만든 상호작용이 행해졌다고 할 수 있다. 자기를 묘사하고 자기를 아는 몽테뉴에게는 훌륭하게 살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 되었던 것이다.


e. 비판

 그의 주된 관심사가 항상 자기라는 소우주를 완성해가는 것이었기에 일부 비판자들은 그를 <이기주의자>라고 몰아세우기도 한다. 몽테뉴의 도덕이 개인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면이 있음은 부인할 수 없지만, 도덕의 원리를 실제의 행동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수상록> 전체를 보면 그의 사상과 행동의 기저에는 개인주의를 훨씬 초월한 인간존중을 바탕으로 한 박애주의와, 회의주의로부터 얻은 합리주의 정신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수상록>은 개인을 초월한 넓은 의미의 인간연구서이며, 현대의 살아 있는 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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