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02 – 제1부 서양 문학의 흐름과 고전 

제1장 서양문학의 흐름과 고전

(출전 :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3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신이 인간에게 책이라는 구원의 손을 주지 않았더라면 지상의 모든 영광은 망각 속에 파묻히고 말았을 것이다. >> (리처드 베리)

  모든 정신문화가 그러하듯이 문학은 시대와 함께 변천과 발전을 거듭하여 수많은 작가와 작품을 배출시키면서 한 시대의 정신적 사상적 문화유산으로 축적된다. 이러한 문학을 각 나라별로 혹은 각 시대별로 그 공통성을 추출하여 분석해보는 일은 중요한 문학 연구방법이 될 수 있다. 그것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작가의식이 작품이라는 구체적인 대상을 통해 표출되고, 그것이 종합되어 당대 문학의 주된 흐름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예사조에 대한 맹신에도 문제가 있다. 이것은 문학작품의 분석에서 얻어진 결과를 토대로 분류하는 방법론이 되지 못하고, 반대로 이에 대한 선입견이 문학작품을 보는 시각을 도식화 해버리기 때문이다. 문학작품 가운데는 어느 하나의 시조에만 국한시킬 수 없는 것도 적지 않고, 작가의 경우도 다양한 작품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어느 한 경향의 작가로 치부해버리곤 한다. 이것은 대상을 인식하는 정신작용의 편의주의적 메커니즘으로 경계해야 할 일이다.

  또 한가지, 문예사조는 칼로 물 베듯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을 뿐 아니라 선후가 중첩되거나 상호 혼재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학자들간에 의견일치가 어렵다는 점도 지적해두고 싶다. 특히 신비평구조주의해체주의 등, 최근의 현기증 나는 문학비평은 문예사조의 존대 자체를 거부하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대상을 인식하는 정신작용은 어차피 대상을 규범화시키는 인식단계에 익숙해 있으므로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서 각 문예사조를 통해 문학 작품, 특히 고전을 분석해보는 일은 의미 있는 작업으로 생각된다. 동서문학의 흐름을 기술하기에 앞서 먼저 독자들에게 이상의 두 가지 점에 대해 주의를 환기해두고 싶다.


   서양문학의 원류

  서양문학은 민족과 지역에 따라 다양하지만 그 원류로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 거론된다. 예를 들어 르네상스가 헬레니즘의 부활이라면 종교개혁은 헤브라이즘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다. 헬레니즘이 문학에 있어 사실주의 영향을 주었다면 헤브라이즘은 낭만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은 때로는 대립되기도 하고 때로는 융합하기도 하면서 서양문화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헬레니즘

  그리스 인은 어느 민족보다도 이성과 지성에 뛰어났고 예술을 사랑했다. 그들은 이성과 결합된 미를 사랑했고, 예술에는 지적 요소가 필수적이라고 믿었기에 예술표현양식에 있어서도 명쾌함을 존중했다. 이른바 <숭고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이 그리스 고전미의 극치였다. 한편 이성과 지성을 중시하고 객관적 정신에 뛰어났던 그리스인은 하나의 사건이나 현상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도 공정한 관점을 잃지 않고 사물들을 별개의 것으로 보기보다는 유기적으로 결합된 것으로 보았다. 그 결과 미의 생명인 조화와 균형, 그리고 통일을 중시했다. 그리고 그리스 인은 인간 세상을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으로 보아 현세의 삶을 소중히 여겼다. 그들이 목적으로 하는 바는 <교양의 완성>으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모든 능력이 아무런 구속 없이 발현되기를 원했다. 그리스 인의 이런 인간과 삶에 대한 강렬한 관심은 인간 본위로서 휴머니즘 정신으로 연결된다.

  이상과 같은 그리스 정신에서 비롯된 헬레니즘 내지 고전문학은 후에 서양문학의 지속적인 원동력으로 작용하게 되고 문예사조의 한 주류를 형성하게 된다.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문학을 모범으로 그 양식을 따르려는 경향이 14~16세기 르네상스와 17~18세기 고전주의인데, 이는 인간의 지적 충동과 헬레니즘의 부활이었다. 뿐만 아니라 근대문학의 사실주의 현실주의 주지주의 등도 헬레니즘의 한 양상으로 볼 수 있다.


   헤브라이즘

  또 하나의 서양문학의 흐름은 히브리적인 흐름 즉, 헤브라이즘이다. 헤브라이즘은 약소민족이었던 히브리 민족(이스라엘 인, 유대인)의 신앙으로 그리스의 다신교와는 달리 유일신인 여호와 하나님을 숭배하는 종교이다.   이러한 기독교 사상의 본질은 <<여호와를 경배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니라>>(잠9:10)라는 표현 속에 잘 나타나 있는데, 인간 자신의 의지가 아닌 신의 의지에 대한 복종이 헤브라이즘의 기본 관념이다. 따라서 인간적인 자유주의는 배제되고 신에 대한 경배와 신앙이 무엇보다 선행되며 육체 및 그 욕망은 올바른 행위의 장애물로 간주되고 금욕적이고 정신적인 미가 예찬된다.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112:1). >> 이것이 그들의 행복의 관념이다. 그들은 죄를 미워했고, 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항상 자신을 구속하는 계율의 굴레를 만들어 <양심의 엄격함>속에서 생활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리스 인처럼 현세의 삶을 존중하기보다 내세를 중시했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찬미했다. 이러한 정신은 훗날 낭만주의와 신비주의, 상징주의 및 표현주의 등에 영향을 주게 된다.

  그들의 신앙의 원천인 <성경 Bible>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39권의 구약과 예수의 생애와 제자들의 전도 및 서신기록인 27권의 신약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떤 시인이 << <이사야 서>와 <히브리 서>를 읽고 나서는 호모로스나 베로길리우스는 나에게 하찮은 것으로 느껴졌고 밀턴조차도 읽을 생각이 나지 않았다>>고 말한 것처럼 성경에는 문학적으로도 가치있는 작품들이 많다. 구약의 <시편> <잠언> 등과 신약의 <마태복음>에 나오는 <산상수훈> 등은 문학적 매력이 넘치는 대목들이다.

  그리고 서울대 선정 동서고전 200선 중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단테의 <신곡>, 괴테의 <파우스트>,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등의 작품은 물론 밀턴의 <실락원>, 번연의 <천로역정> 등도 기독교의 역사와 사상에 대한 이해 없이는 그 진수를 맛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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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학의 뿌리 -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우리가 어떤 문화에 대하여 이해하고자 할 경우에는 그 지역 문화의 근간이 되는 정신적인 기조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첩경이 될 것입니다. 서양의 문화는 두 가지의 큰 흐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입니다. 문학 역시 문화의 일부라 할 수 있으므로 다음에 살펴볼 두 기조를 잘 파악한다면 서양 문학을 접근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문학은 철학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탄생시킨 사회와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서양 각 나라의 문학은 서양 고대문학을 밑거름으로 해서 발전해 왔습니다. 따라서 서양문학의 바탕과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양문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그리스 문학과 히브리 문학의 근본 사상을 알아야 합니다.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또는 히브리즘)은 서양 정신사의 뿌리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서로 엇바뀌거나 함께 혼합하며 문학사상을 이루어 왔습니다. 헬레니즘이 우세할 때는 고전주의나 사실주의 등의 이름으로 나타나고, 헤브라이즘이 우세할 때는 낭만주의나 상징주의 등의 이름으로 나타납니다. 그 외의 다른 모습과 다른 이름으로 나타나는 모든 주의와 주장은 이 두 큰 줄기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고, 서양의 모든 문필가는 이 두 사상에 크든 적든 빚을 지고 있습니다.


헬레니즘이라는 말은 ‘반도’를 의미하는 ‘헬라스(hellas)’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그곳에 사는 민족, 즉 그리스 민족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서 그들의 사고방식과 문화를 지칭하게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기원전 334년 동방 원정을 이끌었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리스와 그리스의 숙적이었던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동쪽 인도까지 진출하면서 오리엔트와 그리스 두 세계가 하나로 융합한 신문화가 생겨났는데, 이것을 헬레니즘 문화라고 부릅니다.


※ 헬레니즘 ~ ‘말하다’, ‘그리스인처럼 행동하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hellenizein에서 유래. 그리스 고유의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가 융합[동서 문화의 융합이라기보다는 세계화한 그리스 문화로 보는 견해도 있다. 폴리스라는 좁은 울타리를 벗어난 그리스 문화는 세계제국으로 확장해 나갔다. 그 결과 헬레니즘은 세계시민주의(코스모폴리타니즘)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원자화(집단 속에서 개개인이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된 개인을 밑바탕으로 하는 것이었다.]하여 이루어진 세계주의적인 예술·사상·정신 등을 특징으로 하는 문화대계. 헤브라이즘과 함께 유럽 문화의 근간을 이룬다. 헬레니즘은 19세기 초 인도의 역사가 J. G. 드로이젠에 의해 정의되었다. 세계사 속에서 헬레니즘은 고대 그리스에서 연원된 독자성을 지닌 역사적 개념이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그리스 정신에서 ‘그리스화한’ 문화까지 포함한다. [즉, 그리스 문화가 이집트와 서아시아 지역으로 널리 퍼져 나간 현상을 가리킨다.] 역사적으로는 알렉산드로스 3세의 죽음에서 로마 제국에 의한 이집트 합병(BC 323~30)까지의 대략 3세기에 걸친 기간이며, 지역적으로는 주로 고대 그리스 본토와 알렉산드로스 3세의 뒤를 이은 여러 왕들에 의해 점령되고 지배되어 새로이 헬레니즘화한 땅에까지 이른다. 헬레니즘 문화는 한때 에게 해 주변의 전지중해 세계를 지배하고, 카르타고 등의 다른 나라에까지 확산되었으며 그 영향력이 서쪽은 영국, 동쪽은 인도의 펀자브 지방까지 뻗어갔다.


헬레니즘은 본질적으로 그리스적인 사유로서 그것의 가장 큰 특징은 이성적이라는 것과 인간중심적이라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써서 유명해진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원래 그리스의 델포이에 있는 아폴론(올림포스 12신 중 하나로, 제우스와 레토의 아들이며 아르테미스 여신과는 쌍둥이다. 레토는 제우스의 아내 헤라의 질투로 출산할 장소를 찾지 못하다가 델로스 섬으로 도망쳐 가 그곳에서 아폴론을 낳았다고 한다. 아폴론은 태양의 신인 동시에 예언의 신이기도 해서 델포이를 중심으로 그의 신전이 세워져, 무녀를 통해 신탁을 받는 일이 성행했다.) 신전에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인들은 이성과 지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의문시되는 것에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서 그 해답을 구하려고 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질문하고 대화하며 새로운 무엇을 이끌어 내려 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고, ‘이성이 이끄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자’라는 플라톤의 철학(철학 포스트 참조) 표어 역시 이성과 지성을 중시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모습을 반영한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인들은 이 세상을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으로 보고 현세의 삶을 기뻐했습니다.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이 보통 인간들처럼 사랑하고 질투하고 약탈하고 잔꾀를 부리기도 하는 인간적 정서를 지닌 신들인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인들은 예술을 사랑했는데 그 예술은 사물의 본질을 형식화해 파악하고자 하는 이성과 결합된 아름다움이며, 예술의 표현 양식에서 조화, 통일, 균형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미술에서는 조각 같은 조형예술을 추구하게 되고, 문학에 있어서는 드라마, 즉 연극이 발전했습니다.


헤브라이즘이라는 말은 ‘건너온 사람들’, ‘방랑자’를 뜻하는 ‘이브리(ibri)’에서 비롯된 말로서 외국인들이 유대인들을 경멸적으로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헤브라이즘은 히브리 민족 특유의 성격, 정신, 문화를 말합니다. 헤브라이즘의 사상은 성서에 요약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과 달리 성서에 나타나는 신은 유일신이며 완전한 인격적 존재여서 인간에게 완전한 순종과 완전한 믿음을 요구합니다. 모세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야훼(여호와)가 명한 대로 행하는 것도 그러한 순종과 믿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헤브라이즘에서는 인간적인 자유주의는 배제되고 신에 대한 경배와 신앙이 앞섭니다. 또한 현세의 삶보다 내세를 중시하기 때문에, 육체 및 욕망은 올바른 행위를 방해하는 것으로 배척되어 금욕적인 경향을 추구합니다. 눈에 보이는 사물은 본질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객관적 세계의 파악은 사물의 형태에서가 아니라 신과의 영적인 교감에 의해서 파악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신비적인 경향도 보입니다.


※ 헤브라이즘 ~ 헬레니즘과 더불어 서양사상을 형성해 온 중요한 사조(思潮). 고대 이스라엘인의 종교(구약성서)에 근원을 둔다. 그것은 BC 13세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스라엘 민족의 신과의 계약이라는 전승(傳承)에서 비롯되며, 이어 야위스트(Yahwist:야훼를 신의 이름으로 사용한 사람)나 엘로히스트(Elohist; 엘로힘을 신의 이름으로 사용한 사람) 등의 역사가와 <신명기(申命記)> 율법의 기자(記者),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예레미야 등의 활약으로 점차 뚜렷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으며, 특히 BC 6세기 초기에 남왕국(南王國) 유다가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되고 다수의 선량(選良; 뛰어난 사람으로 뽑힌 인물)이 포로가 되면서, 그 종교사상은 한층 심화되고, 제2이사야의 '고난의 종복'에서의 구제사상(救濟思想)에서 그 정점에 달했다. 이 구제관(救濟觀)은 나자렛 예수에 의해 실현되었다고 그의 제자들에 의해 전파되어, 마침내 그리스도교가 탄생하였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교는 헤브라이즘의 전통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으며, 그 형성기에 헬레니즘과 접촉, 이에 영향을 받아 이론적 · 철학적 성격을 얻게 되고, 이른바 그리스도교 신학을 형성하였다. 따라서 헤브라이즘은 그리스도교에 의해 서양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 되었다. 헤브라이즘은 유일인격신(唯一人格神)의 역사적 계시와 이에 대한 신앙을 토대로 하고, 여기서 생기는 신에 의한 우주의 창조와 세계사의 주재(主宰), 이 신과의 계약에 의한 인간의 책임을 주장하는 세계관 및 인간을 영육일체(靈肉一體)로서 파악하는 인간관에서 헬레니즘과 대립된다. 즉 헬레니즘이 우주를 신들로부터의 타락 또는 유출(流出)에서 생긴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헤브라이즘은 우주를 신이 만든 피조계(被造界)로서 파악한다. 따라서 헬레니즘에서처럼 인간의 육체나 물질계는 그 자체가 악(惡)으로 취급되지 않고 피조물의 하나로서 의의가 부여된다. 또한 인간은 운명이나 필연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인격적 결단과 책임에 의해 행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역사는 이 인간의 책임과 신의 인도에 의해 명확한 목표(종국)를 향하여 전개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종말관).


그리스 사람들과 달리 히브리 사람들에게 조각 작품이나 회화 작품이 없는 것은 그것들을 ‘우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적 사유에는 대화가 드물며, 완전한 형식을 갖춘 드라마 역시 없으며, 내면의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예술이 중심을 이룹니다. 그리스인이 예술과 과학과 철학으로 세계 문화에 공헌했다면 히브리인들은 신앙과 도덕으로 공헌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객관적이고 논리적이며 지성적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적 사유와 직관적이고 신비적이며 감성적이라고 할 수 있는 헤브라이적 사유는 상호보완적으로 작용하면서 서양 문학의 바탕을 이루게 됩니다.



※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비교

헬레니즘

헤브라이즘

인간중심적

- 우주 생명의 궁극적 패러다임을

하늘과 땅으로 봄

- 사람이 사람의 환경을 바라보는

인식의 틀

신중심적

- 인격적, 도덕적으로 완전한 존재인

신에게 복종

 

 

객관적

- 우주의 원리를 형식화

- 우주의 의문점에 관한 명백한 답

요구

주관적, 직관적

- 신과의 영적 교감 중시

 

 

외향적

내면적, 신비적

- 명상과 묵상을 중시함

현세 지향적

내세적

이성적, 지성적

- 지식의 추구

- 우주의 본질과 인간 행위에 대한

지적 탐구

감성적

- 최종적인 답은 하느님의 수중에

있으므로 설명이 불필요함

- 가슴으로 신의 음성에 귀 기울임

실용적

- 사회적으로 유익한 행동 함양

- 민주주의

신을 즐겁게 하는 제례의식의 다양화

- 강한 지도자에 의한 선민사상

- 권위적 인도자가 요구됨

형식화, 세련된 예술

- 조형미술 추구(조각, 드라마)

- 논리적 사변, 정연한 상상력

- 정제된 언어가 요구됨

무형식, 낭만적 예술

- 언어 예술의 발전

- 신비로운 황홀감, 조자연적 장엄함

- 감동적

낙관주의

비관주의

개성존중

지혜와 기술 존중

집단주의

창조주의 경배와 순종

 



※ 서양문학사(김계영), 문화로 읽는 세계사(주경철), 브리태니커세계대백과사전 등을 참조, 인용하였습니다.

[출처] [본문스크랩] 서양문학의 뿌리 _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작성자 이태두



D01 – 서문

(출전 :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3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서문

  하늘의 소리로 '사람의 도'를 밝힌 동서양의 고전을 통한 '마음 공부' 인류 역사 이래, 오늘날 우리는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했던 물질적 풍요 속에 살고 있다. 과학기술에 의해 뒷받침되는 현대문명은 우리에게 유례없는 편리함과 안락함을 제공해주고 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의 욕구충족을 위해서 자연은 물론 우주까지도 정복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의미에서 인류문명과 역사는 발전을 거듭해 왔다.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도 이러한 진보는 당분간 계속되리라는 낙관적 기대를 가질 수 있다.


    문명에 대한 성찰

  그러나 우리는 이 시점에서 현대문명과 역사의 진보에 대해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정신적 가치가 결핍된 물질문명의 발전은 이대로 좋은가, 물질적 풍요가 결과적으로 생태계를 파괴하고 자연의 죽음만이 아닌 인류의 생존까지도 위협하는 것은 아닌지, 이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 그리고 첨단 과학기술에 의한 인간의 물질적 욕구충족과 무절제한 자연정복이 과연 인간의 이상이고, 참다운 진보일 수 있는가.

  그동안 우리는 산업화의 과정에서 경제발전에만 치중한 나머지, 그보다 더욱 소중한 정신적 가치를 소홀히 해왔다. 삭막한 무한경쟁 속에서 함께 더불어 사는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은 사라지고, 심지어 '나'조차도 잃어버렸다.

  경제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우리의 국토가 황폐해간다는 생각은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만든다. 이제 옛날처럼 나비와 벌이 날고,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봄은 오지 않는다. 이제 우리가 맞이하는 봄은 약동하는 봄이 아니라, 고요한 봄 (silent spring)이다. 아니, 죽음의 정적만이 흐르는 '침묵의 봄'이다.


    정신적 빈곤

  그러나 환경파괴 못지않게 우리의 심성도 하루가 다르게 삭막해지고 있다. 인간과 생명에 대한 외경심이 희박해지고 있다. 인간존중에 기반하는 정신적 가치관 대신 물질주의적 가치관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질적 가치 못지않게 정신적 가치 역시 중요하다. 인간다운 삶이 진정 행복한 삶이다. 진리, 정의, 인간의 존엄성 등은 우리가 소중히 가꾸어 가야 할 정신적 이상이다. 이러한 정신적 가치의 포기는 인간의 포기를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는 내면적으로 고갈되고 철학적으로 빈곤하다. 현대문명은 지나치게 피상적이며 우리의 삶은 그만큼 얕고 허전하다.

  오늘의 문명은 정보는 풍요해도 정신이 빈곤하다. 특히 오늘의 청소년들은 깊은 사색보다 가벼운 쾌락에 탐닉한다. 그들은 도덕적 사회적 지적 규제로부터 벗어나 자유분방하게 자신의 순간적 욕망을 채워가며 살고자 한다. 그들의 목적은 진리탐구, 도덕적 성취, 사회적 봉사 등 정신적 가치의 창조에 앞서, 가벼운 멋을 내고 사는 데 있는 듯하다. 무거운 책을 읽기보다 가벼운 만화를 가까이 한다. 사고력의 성장이 중단된 채 감각만 발달하는 청소년들, 그들을 어찌할 것인가.


    교양교육의 중요성

  그러면 오늘날 젊은이들의 정신적 사상적 혼란은 어디서 오는가? 무엇보다 우리의 교육철학의 부재와 이로 인한 현재의 교육제도에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고교시절에 문제 푸는 기계가 되어버린 그들은 일단 대학에 오면 전문지식의 습득에만 관심을 둘 뿐 폭넓은 독서와 교양은 뒷전이다. 학생들간에는 입학 후 쓰지 않고, 읽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 소위 '3무주의'가 팽배해 있다. 따라서 인간형성에 있어 필수적인 바람직한 가치관이나 인생관의 설계가 굳건하지 못하다.

  현대처럼 학문이 다양화되고 전문화되는 상황에서 보편적인 교양인이 되기란 쉽지 않다. 대학이 추구하는 두 가지 이념인 '전문인 양성'과 '인격자 양성'은 대립적인 개념보다는 상호 보완적인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전문과 교양의 상호 조화적 전개를 통해 교양으로 하여금 전문을 보완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요즘은 과학기술 입국이라는 구호 아래 과학기술의 절대적 중요성이 강조되다 보니, 대학의 교양교육은 갈수록 위축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과학기술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내포하고 있는 위험성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과학기술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물질적인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도구적 가치를 가질 뿐, 그 자체가 목적적 가치가 될 수는 없다. 참된 가치를 식별하는 안목이 없으면 과학은 폭군이 될 수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철학이 필요하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은 생명에 대한 윤리의식의 결여에서 오는 인류의 비극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과학기술은 자연과 생명을 파괴하는 재앙이 될 수 있음을 '쥐라기 공원'에서 보지 않았는가? 다행히도 최근 대학 스스로 현실의 위기를 실감하고 교양교육의 강화를 의해 적극적인 의지를 표명하고 있어 주목된다. 서울대에서는 교양교육의 내실화 방안으로 '동서고전 200선'을 선정하여, 우선적으로 94학년도에 인문 사회과학분야의 학생들에게 고전강좌를 개설한 바 있다. 그 결과 교육적 효과와 학생들의 반응이 좋아, 96학년도부터는 교양과정의 전체 학생들에게 확대할 예정으로 있다. 그리고 고려대에서도 '바른 교육 큰 사람 만들기 위한 교육선언'을 발표하고, 교양과정에서 '명심보감'등을 교재로 인간성 교육에 역점을 두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이러한 움직임이 대학에만 국한되어서는 목적 달성이 어렵다. 초중고는 물론 직장과 각 사회단체, 그리고 언론 등으로 확대되어 인간성 회복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상적인 인간상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귀감이 될 이상적인 인간상이 제시되어야 한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본뜨고 닮고 싶은 바람직한 인간상이 없었다. 이제부터라도 일선학교와 가정에서는 역경을 자기 발전의 계기로 삼은 '인간승리'의 주역들을 바람직한 모델로 제시하여, 학생들이 항상 본받고 행위의 기준으로 삼게 해야 한다. '참된 목표가 없으면 우리의 열정은 그릇된 목표에 쏟게 된다.'는 몽테뉴의 말이 깊은 공감을 주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지금 학생들의 이상향은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도덕적 인격을 완성하려 했던 공자나, 유배지에서 눈물을 머금고 국민을 위한 행정을 펼 것을 역설한 정약용, 그리고 허약한 육체를 평생 동안 규칙적인 생활로 잘 관리하여 80세에 죽음을 맞이하면서 "이만하면 족하다"라고 정신적 만족감을 표명한 칸트 등 우리의 정신 세계를 지배한 인물들이 아니다. 그들의 우상은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는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들이 대부분이다.

  이제 우리는 그들의 마음속에 무한한 꿈과 지적 호기심을 심어 주는 과학자나, 투철한 사명감에 입각하여 자신의 젊음을 인류문화 발전에 바친 위대한 교육자, 그리고 남다른 근면과 성실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사업가들의 상을 심어주어야 한다.


    감동적인 한 권의 책

  그럼 학생들에게 어떻게 그러한 인간상을 제시해야 할까. 몇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아무래도 학생들이 직접 독서를 통해 만나는 방법이 좋을 것이다. 즉, 자신이 처한 역경을 딛고 일어서서 자신의 이상을 달성한 사람들의 삶과 사상, 그리고 어떤 보상이나 지위를 바라지 않고 오직 성취만을 위해 초지일관한 '감동적인 인간상'을 직접 대면케 하여, 소비적인 방향으로 배출구를 찾고 있는 그들의 에너지를 창조적인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

  책 속에서 마주하는 정신적 스승들의 진솔한 음성은 그들에게 신선한 지적   격을 주게 되어, 그들의 의식과 가치관을 새롭게 할 수 있다. 독서의 생활화를 통해 자꾸만 밖으로 향하는 우리의 마음을 안으로 모으고, 들떠 있는 세상의 분위기를 조금은 차분하게 가라앉혀야 하겠다.

  내 마음이 평온하면 나를 대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좋은 느낌을 주게 되고, 상대방의 마음을 순화시켜주게 된다. 내가 느낀 정신적 만족감은 나도 모르게 밖으로 발산되어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꽃향기 속에 들어와 있는 향긋한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필자가 동서고전 200선을 정리하면서 느꼈던 것 중의 하나는 역사상 존재했던 위대한 문학가와 사상가들은 밖으로 향하는 시선을 안으로 돌려, 자기의 마음을

밝혔던 분들이었다. 모든 공부 중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밝히는 '마음 공부'가 으뜸이다.


    고전 읽기 활성화

  특히 서양의 사상가나 문학가들은 어릴 적부터 그리스나 라틴 고전을 탐독했고, 동양의 사상가들은 사서삼경을 비롯한 중국의 고전을 필수적으로 숙독하여, 그들의 정신적 성장의 토대로 삼았다. 고전은 그들에게 정신적 자양분을 제공했음은 물론, 무한한 상상력과 창조력의 원천이 되었다. 그들의 지적 탐구 작업이 한계에 부딪히면, 그들은 언제고 고전의 샘물을 마시고 영감을 얻었다. 고전 앞에 그들은 영원한 학생이었다.

  이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우리가 평생 동안 살아가면서 전범으로 삼아야 할 동서고전들이 제시되어 있다. 비록 동서고전 200선이 그 내용에 있어 난해하고 무거운 점이 없지 않지만, 서두르지 않고 한권 한권 읽어나가는 동안 새로운 지혜의 눈이 열리고 사고의 깊이가 더해가는 지적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정신 없이 살아오느라 깊이 생각하지도, 철저히 진실을 추구하지도 않으며 살아왔다.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성실하지도 못했다.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보다 조용하게 생각하고, 신중하게 행동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갖추는 데 있다. 그러한 속에서 그동안 우리를 지배해왔던 물질주의적 가치관을 수정하고, 정신적 풍요와 삶의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우리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수정해야 한다.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했으나 정신적으로 빈곤했던 칭기즈칸의 후예는 오늘날 그의 존재마저 기억 속에 사라졌지만, 위대한 사상과 문학을 발전시킨 중국문명은 인류의 영원한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다. 로마제국은 오늘날 관광객들이 찾는 폐허로 남아 있지만, 로마군에 정복된 그리스는 그가 남긴 철학적 사유로 인류역사에 영원히 빛나고 있다. 정신이 결여된 물질문명은 얼마나 허망한가. 공자와 석가모니, 쾨테와 셰익스피어가 없는 인류 지성사는 얼마나 공허할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영원히 샘솟는 지성의 샘물을 주신 지적 스승들에게, 두 손 모아 감사드려야 할 것 같다.


새해 아침에 반덕진



C50 – 전습록 (傳習錄) / 왕수인(王守仁, 王陽明, 1472-1528)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중국 명대의 주지주의적 주자학 풍조와 명분 지상주의를 비판하고 지행합일의 양명학을 개창한 왕수인의 사상이 담긴 책. 그의 지행합일설은 당시의 관리등용제도를 포함한 모든 주지주의적 전통을 대체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조선의 실학사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이 책에서 만사에 스러질수 없는 도덕적이고 고귀한 인간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a. 생애와 작품활동

중국 명나라의 사상가로 호는 양명, 절강성의 여요현에서 진대의 명필가 왕희지를 먼 조상으로, 장원급제한 부친 아래서 태어났다. 8개월짜리 조산아로 5세까지 말문이 트이지 않았고, 약골이어서 청년기에 이미 폐병으로 각혈을 하곤 했다. 그러나 11세에 시를 지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14세때부터는 말타기 활쏘기 등을 배우고 병법을 읽혔는데, 이는 뒷날 그가 내외우한에 시달린 명나라 조정을 위한 무인으로서의 실력을 발휘한 바탕이 되었다.

17세에 결혼하던 날 놀러 나가, 도교의 사원인 도관에서 우연히 도사를 만나 양생의 길은 정의 한 글자에 지나지 않는다 는 말을 듣고 이튿날 신부집에서 찾으러 올 때까지 밤세워 양생술을 읽혔다. 이를 계기로 그는 한때 도사가 되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으며, 그의 사상에 도교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결혼 이듬해, 한 주자학자를 만나 격물치지설과 성인은 배워서 이룰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성학에 뜻을 두게 된다. 그 유학자와의 만남은 그의 사상발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다. 그 뒤 그는 주자의 격물치지의 참뜻을 체득하기 위해 뜰 앞의 대나무(물)를 연구(격)해보기로 하고, 일주일 동안 대나무를 들여다보았으나 병만 얻고 말았다. 그때 그는 격물은 성인이 되는 공부가 될 수 없음을 깨닫고, 주자의 학설을 멀리했다.

21세와 25세 때 두 번 회시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자 대문호가 될 결심을 하고, 절에 들어가 시 모임을 갖고 매일 글 짓는 연습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변경의 위급한 상황을 보고 무예를 단련하며 병가의 비전을 섭렵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28세에 진사에 합격하여 열심히 노력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이로 인해 정치에 실망을 느끼고 고향으로 돌아와 정사를 짓고 도술을 익히나, 곧 부질없음을 깨닫고 불교에 귀의한다. 그러나 곧 이것도 버리고 유교로 돌아온다. 이러한 그의 젊은 시절의 방황, 즉 과거에 실패한 임협 기마 문사 도교 불교 등에 빠졌던 것을 왕양명의 5익 이라고 한다.

34세경에는 무종이 즉위하여 환관인 유근이 전권을 행사했다. 이에 양명은 이를 탄핵하고 투옥된 대선 등을 구하려다, 곤장 40대를 맞고 용장으로 좌천당했다. 용장에서의 외적 시련은 내적 깨달음으로 인도한 계기가 되었다. 용장에서 그는 초막이나 암굴에서 생활하면서 원주민을 잘 다스려 사부로 존경을 받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진리를 얻기 위해 밤낮으로 몰두하던 중 홀연히 격물치기의 뜻을 깨닫고 얼마나 기뻐했던지, 잠자던 주위 사람들이 놀라 일어났다 한다. 이부터 심즉리 라는 근본입장을 확립하고 외물에서 이를 추구하는 주자학적 격물론에서 탈피하여 마음속의 부정을 없애고 양심을 발휘해야 한다는 새로운 격물치지의 해석을 제시하였다.

38세 때 유근이 주살되자, 그는 순조롭게 영전을 거듭하였고, 농민반란을 진압하였다. 이 시기에 지행합일설을 제창하였다. 주자에 맞서는 육구연(육상선)의 공적을 드러내고 <대학고본>을 간행하여 주자학자들의 비난을 샀다. <전습록>을 간행하는 한편, <주자만년정론>을 편집하여 주자의 만년의 학설이 자기와 다르지 않다고 밝히기도 했다.

48세 때 왕족인 신호의 반란을 진압하여 공을 세웠으나 모함을 받아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49세 때 이러한 위기 속에서 치양지설을 제창하여 주자학을 완전히 벗어나 새로운 학설을 전개하였다.

50세 때 세종이 즉위하자 그는 높은 직책에 임명되었으나 간신배들에게 환멸을 느끼고 부임치 않았다. 그는 관직에서 떠난 후 모든 것을 잊고 학문연구와 교육에 전력하였다. 이에 제자들이 각지에서 구름처럼 모여들어 양명학파를 이루었다. 57세 때에는 야만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조정의 강력한 권유로 이를 토벌하고 돌아오다 과로로 쓰러졌다. 유언을 물으니, 이 마음이 광명하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며 눈을 감았다.


b. 양명학의 성립과 발전

   양명학의 성립

당시의 사상적 풍조는 먼저 제대로 알고 나서 행하라 라는 주자학의 가르침이었다. 그러나 과거제도의 제약 아래서 공부하는 사랍들이 자신의 앎을 행하려면 관직에 오른 후에나 가능하고, 또 그러다 보면 평생 공부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사상계에 지행합일이라는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것이 명의 중기에 나타난 양명학이다. 송대에 발달한 주자학은 주자의 이기이원론으로 성즉리를 표방하면서 사상적으로 완성되었다. 그러나 양명학은 이에 반대하여 이기일원론을 바탕으로 심즉리를 내세워, 심이 인간의 주체요, 인간이 우주의 주인이라는 사상으로 일관하고 있다. 주자학으로부터 지행합일설과 치양지설을 도출한 양명학은 명대의 침체된 사상계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왕양명은 젊은 시절 한때 주자학의 신봉자로 성인의 경지는 배워서 도달할 수 있다는 이상주의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이를 위한 방법으로 주자가 말하는 격물치지설에 대해 깊은 의문을 갖게 되면서 육구연의 심학에 기울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심즉리설을 깨우치게 된다.

주자학과 양명학은 진리를 깨닫는 방법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인다. 즉, 주자학이 오랜 기간의 연구와 수양에 의해 깨달음을 얻는 것(격물치기)이라면, 양명학은 정신의 집중에 의하여 한 순간에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주자학은 태극이론을 근본으로 독서에 의해 성인의 길을 탐구하지만, 양명학은 태극이론으로부터 인간의 윤리학은 나오지 않았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의 주체를 이루는 것은 마음이며, 이는

절대선이므로 이를 본래의 모습인 절대선으로 되돌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왕양명의 심즉리 학설이다. 이를 위해서는 심의 작용으로 가장 중요한 양지를 충분히 활동시켜야 된다고 하였다. 또 지도 단순히 아는 것만이 아니라 반드시 행동하는 지여야 하며, 여기에서 지행합일설 이 나오게 된다.

특히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욕망을 없애는 것이 절대적 조건이며, 욕망을 버리면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양지적인 인간평등을 주장하고 적극적인 행동주의를 제창하였다.


   양명학의 발전

양명학파는 왕양명의 사후 좌우파로 갈라졌다. 좌파에서는 왕간(왕심제, 후에 태주학파의 대표자)과 같은 서민사상가가 출현하여 인욕도 천리라고 주장하고, 형식화한 주자학적 도덕의 허위성을 격렬히 공격하였다. 양명학 좌파는 이지(이탁오)에 의하여 후천적인 지식이나 도덕 이전의 자자를 동심이라 하여 강조하게 된다. 이는 양지만 있으면 주색에 빠져도 성인군자가 되는 데 지장이 없다고 극언하여 주자학자들의 맹렬한 비판을 받아, 후에 자살하였다. 이지의 주장은 권위주의적인 사대부 의식에서 본다면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사상이므로 이는 심학의 횡포라고 지탄받았다.

이에 대하여 나홍선 등의 양명학 우파는 좌파의 지나친 행동주의를 반성하여, 왕양명의 양지설을 주로 하되 수양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주자학 쪽으로 접근하였다.

이와 같이 양명학은 방대한 경전을 통해 박학을 존중하는 전통적인 유학과는 달리, 많은 지식보다는 간단명료함과 정직함을 중시하는 성인이 되는 길은 박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바로 내세우는 데 있음을 강조한다. 양명학은 유교적 권위에 대하여 서슴없는 비판을 가하고 평등주의자유주의를 주장하며 이단과 욕망을 긍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그의 제자이자 그 계승자는 위험한 사상으로 탄압받기에 이르고, 이지(이탁오)의 비극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양명학은 민간의 사학인 지방의 서원을 중심으로 발달한 것일 특징이다.


c. <전습록>의 내용과 그 사상

전습록은 왕양명의 제자들이 그의 어록을 모은 것으로, 전습은 <논어>의 <학이>편의 증자의 말인 전습불평 에서 나온 것이다. 그 구성은 상중하권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상권에서는 심즉리설지행합일설 등이 제시되었다. 중하권에는 만년에 확립된 치양지설만물일체론 등을 제시하였는데, 전통적인 유학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였다.


   심즉리 (心卽理)

그는 육구연의 마음이 곧 이다라는 심학을 받아들여 마음이 곧 이다. 천하에 마음 밖에 일이나 마음 밖의 이가 있겠느냐?  마음 밖에 물이 없고 마음 밖에 일이 없다 고 하였다. 그는 이를 우주의 근본원리로 보고 이는 곧 마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즉, 모든 현상이란 마음의 인식에 의해서 비로소 존재한다는 것이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새가 울지만 마음이 없다면 아름다운 빛깔도, 고운 목소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천지만물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마음과 천지만물이 서로 통하기 때문이며, 만일 서로 통하는 바가 없다면 천지만물이란 없는 것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주자가 강조한 추상적인 이를 배격한다. 주자는 효의 이가 있기 때문에 어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며, 충의 이가 있기 때문에 임금에게 충성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였다. 효도하는 마음이나 충성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러한 이도 없다고 하였다. 주자의 사상체계에 의하면 마음의 존재여부에 관계없이 이는 영원히 존재한다. 그러나 양명의 체계에 의하면 마음이 없으면 이도 없다. 그러므로 마음은 잉법자요 우주의 근원이라는 절대적 유심론의 성격을 띤다.


   지행합일 (知行合一)

지행합일의 근거는 심즉리에 있다. 마음 안으로 돌이켜 탐구하는 방법을 이용하여 만물과 한몸이 되는 경지(물아일체)에 도달할 것을 요구한다. 그의 지행합일과 지행병진의 이론의 요지는 지식과 실천을 분리시키는 송의 정이의 학설을 반대하는 데 있었다. 양명은 모든 이가 마음에 있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지식 역시 마음에 본래부터 양지로서 갖추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충과 효를 행하는 것은 충효의 이가 마음속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며, 그것은 결국 행위가 양지의 표출이라는 뜻과 같은 것이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지와 행은 합일의 관계에 있다고 하였다. 만일 지와 행이 합일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다만 사욕의 가리움 때문이라 한다. 그리하여 그는 앎은 행동의 시작이요, 행동은 앎의 완성이다, 행동을 밝히고 살피는 것이 곧 앎을 진실하고 독실하게 하는 것이 곧 행동이다 라고 하였다.


   치양지 (致良知)

치양지란 양명학에서 말하는 마음의 본체인 양지가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발휘됨을 말하는 것으로, 심즉리와 지행합일을 하나로 묶어 적극화시킨 것이다. 사물의 도리는 책이나 외적인 사물 안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내적인 자기 마음속에서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치양지의 방법으로는 격물치지성의정심 등을 들고 있다. 주자는 격물치지에 대한 설명에서 격물을 사물의 이치를 궁리하는 것, 치지를 지식을 추구하여 얻는 것이라고 본다. 즉, 주자는 격물치지를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넓힌다 로 해석하고 있다. 반면 양명은 격물은 행위를 바로잡는다는 뜻이고  치지란 본래 마음의 본체인 양지를 실현하는 것으로 보고,  격물치지를  마음을 바로잡고 양지를 닦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양명은 양지가 실현되지 못하는 것을 물욕과 사욕으로 돌린다. 우리의 뜻하는 바가 항상 양지의 방향을 좇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물욕 또는 사욕에 가릴 수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선악문제와 공부문제가 제기된다. 마음을 올바르게 한다 함은 인욕을 물리치고 천리를 보존하는 것을 말하며, 이러한 마음의 공부를 심학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성의나 정심수신도 모두가 격물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즉, 성의는 격물과 치지가 가장 성실하게 수행되는 것이요, 성실하면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다(정심). 그러므로 정심이란 성의에 지니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수신은 마음을 바로잡아 참된 앎에 이르는 것이라 하고, 수신하게 되면 제가치국평천하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8조목은 결국 참된 앎에 이르는 것, 즉 치양지에 그 근본이 있다고 하였다.


d. 양명학의 영향

왕양명은 명나라의 지배사상이던 주자학에 대항햐여 인간평등관에 바탕을 둔 주체성 존중의 철학을 확립하고, 만물일체와 이상사회 실현을 지향하는 심즉리 치양지 지행합일이라는 사상을 전파했다. 그는 양지에 있어서는 우부라 할지라도 성인과 다름없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거리를 메운 모든 사람들이 다 성인이다고 하면서 평등사상을 외쳤다. 이와 같은 그의 사상은 <전습록>에서 일관적으로 흐르고 있는 사상으로, 결국은 지와 행을 둘로 갈라 주지주의적 경향으로 타락해버린 주자학의 공허함을 비판한 것이다.


   일본 메이지 유신

이 같은 주장을 담은 <전습록>은 수백 년 동안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전습록>에 대해 중국이 명대는 물론 청대 학술에도 비판은 있었지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은 양명학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은 1972년 왕양명 탄생 500주년 기념으로 <양명학 대계>를 내놓기도 했다.


   조선 강화학파

우리 나라에 <전습록>이 들어온 것은 왕양명의 생존시이나, 당시 조선의 분위기는 정주학이 압도하는 상황이어서 이황 이래 양명학은 이단으로 배척되어왔다. 양명학의 수용자는 대체로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사람들, 특히 남인과 소론 계통의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대개 양명학을 성리학과 대립되는 것으로 파악하기보다는, 이를 보완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양자 사이의 조화를 꾀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 양명학을 대표하는 정제두는 주자와 단절하고 강화도에서 양명학에 몰두하였다. 정제두의 대표적인 저서인 <존언>은 그의 양명학 세계를 나타내주는 것인데, 그도 주자의 해석이 아닌 경전의 본 뜻을 존중하는 복고적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비록 주자의 성리학 일변도인 조선사회에서 이단이 되기를 꺼려한 관계로, 겉으로는 주자를 표방하면서도 속으로는 왕양명을 따르는 양주음왕의 경향이 있었다.

정제두의 강화학파는 200년 동안 이어졌다. 우리 나라에서는 양명학은 실학파 중 북학파의 사상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이들이 저서에 천지만물이 한몸이다 그리고 시민평등관에 입각한 교육이념 등 도처에 양명학 사상과 공통되는 점이 많았다. 양명학의 주체사상은 한국독립운동과 직결되었다. 이종휘 등 강화학파의 사관이 신채호 박은식 정인보 송진우 등 독립운동가에게 미친 영향은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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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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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수인

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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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를 봉양하고 죽은 자를 장사지냄에 모자람이 없게 하는 것이 왕도의 시작이다.

 

— 《맹자》 〈양혜왕 상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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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명학(陽明學)은 중국 명나라의 철학자 왕수인(王守仁)의 호인 양명(陽明)에서 이름을 따서 붙인 유가 철학(儒家哲學)의 한 학파로 주관적 실천 철학에 속한다.[1] 양명학이라는 명칭은 메이지 유신 이후에 퍼진 것으로, 그 이전에는 육왕학(陸王學) 또는 왕학(王學)이라 불렸다. 육왕학(陸王學)은 육구연(陸九淵)의 학풍을 이어 왕수인이 대성한 유학(儒學)을 뜻하고, 왕학(王學)은 왕수인의 유학을 뜻한다.


심즉리(心卽理) · 치양지(致良知) · 지행합일(知行合一)은 양명학의 3강령이다.[2]


목차  [숨기기] 

1 역사

1.1 양명학 이전

1.2 양명학의 등장

1.3 전개

1.3.1 중국

1.3.1.1 양명학 우파

1.3.1.2 양명학 좌파

1.3.2 조선

1.3.3 일본

2 양명학의 근본 사상

2.1 심즉리

2.2 치양지

2.3 지행합일

2.4 모든 물체의 인과 양지의 결합

2.5 사상마련

2.6 격물(格物)

3 양명학이 연 지평

3.1 사람의 욕구

3.2 붕우 관계의 중시

4 양명학 주요 학자

4.1 중국

4.2 조선

4.3 일본

5 같이 보기

6 각주

7 참고 문헌

8 외부 링크

역사[편집]

양명학 이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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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시대를 거쳐 오면서 학자들은 유교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 수나라나 당나라 이전에는 경서의 음독이나 훈고(단어의 의미)를 중시한 훈고학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유교가 거쳐오면서 송나라 시대의 학자들은 유교 경전에 담겨진 공자나 맹자등의 본래 의미와 달리 왜곡했고, 그런 성인들의 본래의 의미를 이해 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는 인식에 이르렀다. 수, 당나라 이전의 훈고학을 가르치면서도, 훈고학 중심의 사회를 고치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 결과, 송나라 시대 이후의 유교 사상은 훈고학에서 주자학으로 새로운 학파가 생겨났다.


주자학이 중요시한 건 성인들의 말이나 경전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사상이 아니라는 데 의견을 맞추어서 새 경전을 만들었다는 점에 있다. 새 경전들은 「사서」라고 불리는 네 개의 경전이었다. 이 책은 「예기」로부터 분리된 「대학」과 「중용」, 그리고 이 책들보다는 하위 취급을 받고 있던 「논어」와 「맹자」 이 네 개의 경전이었다. 이 경전들은 내용이 짧고 잘못된 해석을 고치는 데 적당했기 때문에 이용되었다. 특히 주자학이 맹자의 「성선설」을 중요시하는 등 이 주자학은 중국 여러 지역에 점차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주자학이 중국의 여러 지역에 퍼진 까닭은 주자학이 왕이 집권하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주자학은 중국 전역뿐만이 아니라 조선, 일본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주자학도 문제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주자학이 중국 전역으로 퍼지긴 했지만, 이 주자학을 바탕으로 왕들은 왕권을 다졌고, 오히려 훈고학의 상황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성인들의 본래 의미가 전혀 다른 왕의 집권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주자학의 본래 의미는 퇴색되었다.


양명학의 등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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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학은 군주들의 황권, 왕권 강화의 재료로써 전락됐다. 그래서 주자학은 도덕적인 측면이 없어져 갔다. 그 도덕윤리를 다시 되살리려는 노력을 한 학자가 바로 왕수인이다. 그는 당초 도덕적인 측면을 되살리려는 노력을 시도하는 학자였으며. 그래서 왕수인도 주자학을 믿었지만 사회가 변화를 보이지 않자 결국 그는 주자학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그리고 그는 양명학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주자학은 정치학, 존재론[3], 주석학[4], 윤리학[5], 방법론[6] 등을 모두 포괄하는 종합적인 학파였다 그러나 양명학은 그 중의 윤리학 및 방법론 등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유교에서는 윤리학적 측면이 가장 중요했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회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양명학은 여러 유명한 학자들을 배출시켰다.


전개[편집]

중국[편집]

중국에서는 왕수인의 제자들이 양명학을 많이 발전 시켰다. 그렇지만 양명은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칠 때, 하나의 방법을 고집하지 않고, 각자의 재질이나 습성에 따라 가르쳤다. 누구에게는 본체를 강조하는가 하면, 누구에게는 정반대로 공부를 강조하기도 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양명이 죽은 이후 제자들이 받아들인 학설의 차이에 따라 크게 귀적파(歸寂派), 수증파(修證派), 현성파(現成派)로 나뉘었다.[7] 그 뒤 양명학은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며 발전해 나갔다.


양명학 우파[편집]

양명학 유파 중 정통파(正統派)로 간주되었다. 귀적파와 수증파가 우파에 속한다. 양명의 ‘심즉리(心卽理)’는 선악을 포함한 마음이 이(理)가 아니고 마음이 발동할 때 이미 그 마음은 이(理)라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마음의 악폐(惡弊), 즉 사욕(私欲)을 극복하여서 마음을 양지(良知) 그것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유파는 양명의 〈4구결(四句訣)〉에서 선(善)도 없고 악(惡)도 없는 것은 심(心)의 체(體)라 한 것을 심(心)의 본체는 지선무악(至善無惡)이라고 하여 전통적인 성선설(性善說)과 타협하고, 심(心)의 문제를 중심으로 하는 양명 심학(陽明心學)으로부터 떠나서 점차로 주자학적 이(理)를 문제로 하여 실제적·현실적 연구를 중시하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양명의 문인 전서산(錢緖山, 1496~1574)이 왕용계(王龍溪, 1498~1583)와 〈4구결〉을 둘러싸고 대립하여 분파한 이후, 우파에는 추수익(鄒守益, 1491~1562), 나홍선(羅洪先, 1504~1564), 유종주(劉宗周, 1578~1645) 등이 있었다.


양명학 좌파[편집]

양명학 유파의 하나이다. 현성파가 여기 속한다. 이 파의 왕용계는 선(善)도 없고 악(惡)도 없는 것은 심(心)의 체(體)요, 선(善)도 있고 악(惡)도 있는 것은 의(意)의 움직임이며, 선(善)을 지(知)하고 악(惡)을 지(知)하는 것은 양지(良知)요, 선(善)을 하고 악(惡)을 버리는 것은 격물(格物)이라 한다는 왕양명의 〈4구결〉에 대하여, 이것은 일반 사인(士人)에게 설명하기 위하여 설치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는 심즉리(心卽理)·치양지(致良知)의 실천적 주체의 입장, 즉 실천을 주로 하는 도(道)·이(理)에의 오입(悟入) 내지는 그것의 체득이라고 하는 입장에서 보면 의(意)·지(知)·물(物)에 선악의 대립이 있을 리 없다는 것이다. 진정한 학문은 오득(悟得)만을 존귀하게 여긴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왕용계는 마음이 본래 무선무악(無善無惡)하면 그때 발하는 행위는 양지(良知) 그것이며, 따라서 양지는 배우지 않고 사려하지 않아도 사람이 본래 완전하게 구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사고방식은 이 파의 이탁오에게 전해지면서 한 걸음 나아가 적극적인 인욕(人欲)의 긍정으로 발전하였다. 이 파의 특색은 유(儒)·불(佛)·도(道) 3교의 혼융, 선학적(禪學的)경향, 소농(小農)·도장(陶匠)·나무꾼·염정 등의 낮은 신분의 사람들을 포함하는 서민 교육 실천, 전통의 부정이나 반체제적(反體制的)·신비적인 점 등에 있었다. 이 파는 특색있는 사조를 형성하면서도 새로운 시대를 형성하는 구체적인 사상 내용을 갖지 못하고 공론적·신비적 경향만을 강조하다 오래지 않아 소멸하였다. 왕용계, 이탁오 외에 왕간, 왕벽(王檗-東崖, 1510-1587), 안균(顔鈞-山農, 생몰년 미상), 양여원(梁汝元), 나여방(羅汝芳-近溪, 1515-1588) 등이 이 파에 속하였다.[8]


그러나 청나라 시대부터 양명학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고증학에 밀려서 쇠퇴하기 시작했고, 양명학은 성리학을 약간 보완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갈수록 쇠퇴해 갔다. 이후의 옹정제, 건륭제의 시대를 지나면서 청나라의 황제들은 성리학을 더욱 확립해 양명학은 중국에서 완전히 사라지는듯 했다.


하지만 일본에서의 메이지 유신으로 양명학의 영향이 중국에도 다시 부활했다. 1840년을 주기로 아편 전쟁 이후 중국인들은 개혁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고, 일본에서 양명학이 메이지 유신을 정당화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일본에서 양명학이 역수입되었다. 양명학은 중국 국민들에게 개혁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조선[편집]

박상(1474~1530)의 《눌재집(訥齋集)》연보 48세 조에 “왕양명 수인의 《전습록》을 변(辨)하다. 명의 학설이 동래(東來)하였는데 동유(東儒)들은 그것이 어떤 내용인지 몰랐으나 선생이 그것을 보고 선학(禪學)이라 변척하여 김십청(金十淸)과 더불어 수창(酬唱)한 삼절시(三絶詩)가 있었다.”는 내용을 볼 때 양명학 전래 시기는 중종 16년(1521년) 이전이다.[9] 이후 16세기∼18세기에 조선 유학계에서 양명학의 찬·반 논쟁이 전개되었다. 양명학 배척론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여 그 도입을 억제하고, 양명학 찬성론을 ‘사문난적(斯文亂賊)’, ‘이단(異端)’이라고 규탄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먼저 이황은 〈전습록변(傳習錄辨)〉을 지어 지행합일설을 비판하였는데, 양명학을 불교의 선학(禪學)과 동일한 것으로 보아 비판했다. 양명의 《대학》 친민설, 심즉리설도 여러 논변에서 비판했다. 그러나 이황의 비판 중에 양명학의 가장 핵심 논지인 치량지에 관한 내용이 없는 것에서 그가 양명의 모든 전적을 충분히 보지 못하고 비판한 것임을 알 수 있다.[10] 또, 유성룡은 왕양명의 주자학 비판을 조목별로 반박했다. 그 뒤로 퇴계의 문하 뿐 아니라 조선 성리학 전체가 양명학을 배척하여 양명학은 조선에 발 딛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양명학을 받아들인 학자로는 남언경(1528~1594)과 이요가 있다. 그들을 이어 장유(1587~1638), 최명길이 미미하나마 연구했으며, 특히 장유는 조선 유학계의 주자학 일변도를 개탄하였다. 또한 이익(李瀷)도 주자학의 주지주의(主知主義)적 경향의 공리공론(空理空論)을 비판하고 행(行)을 강조하였다. 이후 정제두(1649~1736)에 이르러 크게 발전했다. 근대 초 정인보·박은식까지 그 학풍이 이어진다.


일본[편집]

일본에서는 양명학이 반체제적인 성격을 가져 혁명가들이 주로 양명학을 연구하기도 했으며, 또는 양명학을 연구하게 되면 혁명적인 지향이 되기 쉽다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양명학 역시 일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나카에 도주나 구마자와 반잔이 대표적인 학자였다.


에도 시대 이후 메이지 유신에 사상적 영향력을 끼쳐서 양명학은 이후 더 발전했다. 양명학과 관련한 책이나 잡지는 수없이 만들어졌으며, 양명학 주요 책은 쇠퇴하고 있던 중국에 역수입 되었다..


양명학의 근본 사상[편집]

양명학의 사상은 《전습록》, 《주자만년정록》, 《대학문》등에 자세히 나와 있다.


심즉리[편집]

심즉리(心卽理)는 양명학의 윤리학적인 측면을 나타내는 말로 성(태어날 때 생겨난 순수한 선성)과 정(감정으로서 나타나는 마음의 움직임)을 대면시킨 마음 그 자체가 리와 다름없다고 하는 사상이다.[11]


치양지[편집]

치양지(致良知)는 양명학의 방법론적 측면을 나타내는 말로 왕수인이 독자적으로 만든 사상이다. 치양지란 양지를 전면적으로 발휘하는 것을 의미하며, 양지에 따르는 한 그 행동은 선이 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으로, 양지에 근거하는 행동은 외적인 규범에 속박 되지 않는 말이다. 마음은 선악을 넘은 것이지만, 뜻에서 선악이 태어난다. 그 선악을 아는 것이 양지 말고는 안 되며, 그러므로 선을 바로 잡기 위해서 양지를 키우라는 것이다. 맹자의 성선설의 영향을 받았다. 양지를 누구나 갖고 태어나는 것이므로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주장과 양지를 가리고 있는 선악을 제거하기 위해 공부가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나뉘어 양지는 양명 사후 제자들의 분파의 이유가 된다.[11]


지행합일[편집]

지행합일(知行合一)은 양지의 상태 중의 하나로 말과 실천은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같다는 사상이다. 말은 지, 실천은 행이란 말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을 본다는 것은 지(知)에,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은 행(行)에 속한다.[11]


모든 물체의 인과 양지의 결합[편집]

이것 역시 양지의 상태 중의 하나로,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은 하나의 육체이며, 다른 사람의 괴로움은 스스로의 괴로움이며, 그것을 달래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모든 물체의 인은 양지를 이룰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양명학은 사회 구제의 근거를 찾아낸 것이다.


사상마련[편집]

사상마련(事上磨鍊)은 수양처를 말하는 것으로, 주자학에서는 독서와 거경궁리를 통해서 수양을 한다고 하지만 왕수인은 이런 의견에 반대하여서 일상에서 양지를 닦아야 한다고 했다. 개념을 통해서가 아니고, 실제로 일을 하면서 정신을 단련한다는 뜻이다.


격물(格物)[편집]

주자는 격물을 사물에 임하여 그 이치를 궁구하는 즉물궁리(卽物窮理)라 하였으나, 양명은 격(格)을 정(正)으로, 물(物)을 사(事)로 보아 일을 바르게 하는 것이라 해석했다.[12] 전습록에 나오는 격물하고자 며칠 동안 대나무를 바라보았더니 정신만 혼미해지더라는 일화[13] 에서 주자의 격물을 비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양명학이 연 지평[편집]

사람의 욕구[편집]

양명학은 사람의 욕구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해서 사람의 욕구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했다. 사람의 욕구를 없애려고 하는 게 아니라 사람의 욕구를 잘 다스리려고 하는 노력을 했다.


붕우 관계의 중시[편집]

붕우, 즉 인간 관계를 중요시 여겼다. 유교에서는 남존여비 사상과 아이가 어른을 받드는 '상하 관계' 사상을 버리고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다는 사상이었다. 이 사상은 유교 이념이 지배적인 중국에 큰 혼란을 일으켰다.


양명학 주요 학자[편집]

중국[편집]

왕양명

전덕홍

추수익

나홍선

왕기

이지 (1527년)

왕간

양여원

조선[편집]

정제두

이광사

일본[편집]

나카에 도주

구마자와 반잔

같이 보기[편집]

유교

한국의 유교

송·명 시대의 사상

성리학

선종










     <참고문헌>

   논문 및 연재물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책의 성격상 많은 전문가의 글을 참고인용하였으나 이 책이 교양서라는 점을 고려하여 참고논문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고, 다만 그분들의 학문적 업적에 존경을 표하는 의미에서 존함을 밝혀둔다. 소속기관 편의상 논문발표 당시의 소속기관을

명시하였다.

(가나다순)

강두식(서울대), 권주적(숙명여대), 권두환(서울대), 권석봉(중앙대), 권욱현(서울대), 권중달(중앙대), 권철근(서울대), 권태억(서울대),

공재석(영남대), 금장태(동덕여대), 김경탁(고려대), 김남두(서울대), 김동욱(연세대), 김두철(서울대), 김려수(서울대), 김상운(성균관대),

김상현(한교대), 김문경(강원대), 김석원(동문연), 김세균(서울대), 김시준(서울대), 김영한(서강대), 김엽(경북대), 김용덕(중앙대),

김용옥(고려대), 김운학(동국대), 김윤식(서울대), 김인환(이화여대), 김진성(성균관대), 김정록(서울대), 김종원(부산대), 김춘진(서울대),

김학주(서울대), 김한규(부산대), 김홍명(서강대), 김효명(서울대), 김해경(강릉대), 노도양(명지대), 민성기(부산대), 박상섭(서울대),

박성봉(경희대), 박한제(서울대), 박환덕(서울대), 박희완(건국대), 방곤(경희대), 방영준(성신여대), 배종호(연세대), 백낙청(서울대),

변창구(서울대), 변태섭(서울대), 서병국(관동대), 소관희(서울대), 송민호(고려대), 송석구(동국대), 송창기(청주대), 송영배(서울대),

송하경(전북대), 송항룡(단국대), 신동욱(서울대), 신일철(고려대), 신채식(성신여대), 심재룡(서울대), 안병주(상균관대), 오금성(서울대),

안상진(서울대), 오생근(서울대), 오세영(서울대), 우용득(전북대), 유명숙(서울대), 윤사순(고려대), 유인희(연세대), 유정동(성균관대),

유종호(이화여대), 은전희(고려대), 이강수(경희대), 이경선(한양대), 이광주(전주대), 이관호(외국어대), 이기백(한림대), 이기영(한불연),

이남영(서울대), 이동렬(서울대), 이동향(고려대), 이만열(숙명여대), 이명현(서울대), 이병주(육사), 이병한(서울대), 이상옥(서울대),

이석호(연세대), 이성(청주대), 이성규(서울대), 이성무(서울대), 이영호(성균관대), 이용범(동국대), 이완재(영남대), 이운구(성균관대),

이장우(영남대), 이재호(부산대), 이종숙(서울대), 이지관(동국대), 이태수(서울대), 이태진(서울대), 이평래(충남대), 이한조(고려대),

장기근(서울대), 장왕록(서울대), 전인초(연세대), 전해종(서강대), 정범진(성균관대), 정병조(동국대), 정병학(숙명여대), 정옥자(서울대),

정운찬(서울대), 정원식(서울대), 정의채(카톨릭대), 정인재(중앙대), 조남현(서울대), 조선미(성균관대), 조성을(아주대), 조영록(동국대),

조요한(숭전대), 차주환(서울대), 채상식(부산대), 최갑수(서울대), 최병조(서울대), 최병헌(서울대), 최영희(국편위), 최완식(서울대),

최우원(부산대), 최익주(영남대), 허남진(서울대), 허벽(연세대), 허성도(서울대), 허세욱(외국어대), 홍이섭(연세대), 홍인표(충남대),

홍정식(동국대)

   단행본

계몽사, 범우사, 삼성출판사, 서울대출판부, 육문사, 을유문화사, 일신서적, 혜원출판사, 하서, 홍신문화사 등에서 발간한 각종 번역서는

낱낱히 명시하지 않고 그외의 참고 단행본은 아래와 같다. 

1. 가람기획 편집부, <한 권으로 보는 세계명작 111선>, 가람기획

2. 강용규, <인물중국사>, 학민사

3. 강인숙, <김동인>, 건국대학교 출란부

4. 고영춘, <기독교의 사조>, 신생사

5. 구인환, <고교생이 알아야 할 소설>, 신원문화사

6. 김규태, <동서문학의 조류>, 일신사

7. 김대중,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김영사

8. 김동림 외 역, <철학의 큰 스승 50>, 책세상

9. 김두헌, <서양윤리학사>, 박영사

10. 김봉군 외, <한국현대작가론>, 민지사

11. 김상홍 외, <한국문학사상사>, 계명문화사

12. 김성한, <길따라 발따라>, 사회발전연구소 출판부

13. 김영덕 외, <중국문학사>, 청년사

14. 김영식, <과학혁명>, 민음사

15. 김유조, <어니스트 헤밍웨이>, 건국대학교 출판부

16. 김진균 외, <사회학의 명저 20>, 새길

17. 김태길 외, <철학개론>, 삼중당

18. 김평옥 역, <랭킹 100 세게를 바꾼 사람들>, 에디터

19. 김학주, < 노자와 도가사상>, 태양문화사

20. 김해명, <중국문학사전1,2>, 연세대 중국문학사전 편역실

21. 김형석 외, <철학개론>, 연세대 출판부

22. 김희보, <세게문예사조사>, 종로서적

23. 김희보, <세계의 명작>, 종로서적

24. 김희보, <한국의 명작>, 종로서적

25. 나손 선생 추모논문간행위원회, <한국문학작가론>, 현대문학

26. 노명식, <자유주의>, 종로서적

27. 동서문화사, <세계백과사전>

28. 독서신문사 편, <세계문학사>, 도서출판 배제서관

29. 동아일보사,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30. 동양사학회 편, <개관동양사>, 지식산업사

31. 문병란, <일요일의 세계문학기행>, 열람원

32. 민석홍, <서양사개론>, 삼영사, 1984

33. 박병기, <포스트모던시대의 사회윤리학>, 인간사랑

34. 박선주 역, <인류의 진화와 기원>, 교보문고

35. 박은봉, <세계사 100장면>, 기람기획

36. 박종홍 외, <한국의 명저>, 현암사

37. 배종호, <한국유학사>, 연대출판부

38. 이윤희 역, <세계사 산책>, 백산서당

39. 벌핀치, <고대신화>, 정음사, 세계문학전집1

40. 변태섭, <한국사 통론>, 삼영사

41. 변형윤 외, <경제석학의 생애와 사상>, 매일경제신문사

42. 소광희 외, <철학의 제문제>, 지학사

43. 소광희 외, <현대의 학문체계>, 민음사

44. 신동아 편집부, <세계를 움직인 100권의 책>, 동아일보사

45. 신동아 편집부, <현대의 사상 77인>, 동아일보사

46. 신동아 편집부, <오늘의 사상 100인 100권>, 동아일보사

47. 신옥희 외, <원효의 생애와 사상>, 한가람 창간호

48. 신용협, <현대한국시연구>, 국학자료원

49. 신전옥 역, <세익스피어 4대 비극집>, 전예원

50. 신채식, <동양사개론>, 삼영사

51. 안정애 외, <중국사 100장면>, 가람기획

52. 유명종, <한국철학사>, 일신사

53. 유승국, <동양철학연구>, 근역서재

54. 윤사순 외, <한국의 사상>, 열음사

55. 양은창 외, <세계명작소설>, 한림출판사

56. 양은창 외, <한국현대소설>, 한림출판사

57. 유시민,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 푸른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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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이기백, <한국사 신론>, 일조각

61. 이기백, <한국사 시민강좌>, 제 10,1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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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정창범, <도스토예프스키>, 건국대 출판부

80. 정항희, <서양역사철학사상사>, 법경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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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조동걸 외,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 창작과 비평사

83. 조태훈, <데카르트>, 유풍출판사

84. 종로서적 편집부, <기독교명저 60선>

85. <중국백과>, 신동아 1993년 1월 별책부록, 동아일보사

86. 중앙일보사, <중국의 비밀(300문 300답)>, 월간중앙 별책부록

87. 차하순, <서양사 총론>, 탐구당

88. 채만식, <탁류>, 문학사상사

89. 천재교육, <독서광장>, 1994,7월호

90. 최윤락, <어머니>,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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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한국사상연구회, <한국사상가>, 법문사

94.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의 명저>, 새길

95. 한샘출판사, <독서와 논리>, 1994,4월호

96. 한인희 외 역, <중국을 움직인 30권의 책>

97. 황필호 역, <소크라테스불타공자예수모하메드>, 종로서적



C49 – 근사록 (近思錄, 1175년경) / 주희(朱憙, 1130-1200)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중국의 성리학 집대성자인 주희가 그의 친구 여동래와 함께 성리학을 공부하는 데 긴요한 622대목을 발췌하여 분류, 편찬한 책이다. 1권에서는 자연과 인간의 본질에 관해 설명하고 있고, 2권에서는 유학적 삶의 태도에 관한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다. 예로부터 성리학 입문서로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고, 성리학의 형성에 미친 영향고 크다.


a. 생애와 작품

중세 이후 동양사상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쳐온 주희는 중원의 문화로부터 멀리 떨어진 외딴 시골에서 출생하였다. 14세 때 중급관리였던 부친은 병사하였고, 그뒤 충안의 3선생(호적계 유백수 유병산)에게 사사했다. 초년에는 유교적 교양을 쌓으면서도, 노장사상과 불교철학에도 관심을 가졌다.

19세에 과거에 합격하고 24세에 임관하여 천주 동아현의 주부로 임명되어 4년간 근무하였다. 정이(정이천)의 학통을 이은 이동(이연평)을 만나 사사하고 차츰 유교로 기울어져 신유학의 정수를 계시받았다. 28세로 퇴임하고 그뒤 20여 년 관직에 나가지 않고, 국가로부터 연금을 받아 학문과 저술에 전념하였다. 그동안 이동을 여의고 장식(장남현)여조겸(여동래)과의 교류가 시작되어 그의 사상형성에 큰 영향을 받았는데, 대체로 40세 무렵에 사상적 대계가 확립되었다고 본다. 

46세때 여조겸과 함께 북송의 4대 도학자인 주돈이(주염계) 장재(장횡거) 정호(정명도) 정이(정이천)의 언론 622조를 문목별로 14권으로 나누어 <근사록>을 편찬하였다. 주희의 학문은 이 4명을 중심으로 북송의 신학풍을 받아 집대성한 것인데, 정주학이라는 명칭이 말하듯이 이정, 특히 정이의 학설을 계승전개하고 있으며, 그런 뜻에서 이 책은 주자학의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 또 그해 여조겸의 제창으로 당시 사상계 한편의 우두머리였던 육구연(육상산) 형제와 아호의 회라는 회견을 가졌다. 이뒤에도 육구연은 그의 좋은 적수가 되어 공리학파의 진량(진용천)과 나란히 가장 힘든 상대가 되었다. 이로 인해 그의 사상은 한층 원숙해졌다. 그리고 20년 동안에 다수의 저작에 착수하였는데, 이중 주목할 만한 것은 <사서집주>로 사망 직전까지 손을 대고 있었다고 한다.

주희가 <대학><중용><논어><맹자>를 사서라 하여 오경의 입문서에 위치시킨 것은 사상적으로 유기적인 관련성이 있다는 것을 고려한 것이다. 즉 하나는 유교정통을 인정하고 이것을 다시 계승하고자 하는 도통론의 측면에서, 또 하나는 성인은 배워서 이르러야 한다는 학문의 목적과 절차가 명확하게 제시되었다는 점에서이다. 그것은 한당의 훈고학적 경학과는 달리 경서를 통하여 통일적 사상을 배우고, 그 참뜻을 체득하여 자기인격의 완성을 꾀하며, 우학의 이상인 수기치인의 도를 실현하려고 하는 신유학의 성립을 의미한다.

49세에 강서성의 남강군 지사, 그뒤로 절강성에서 기근대책의 임무를 수행하였고, 61세 때 장주지사로, 그뒤로도 3-4년간 관직에 있었으나, 재상인 한탁주와 충돌하고 사임한다. 그후 한탁주 일파가 정권을 잡자 주희는 관리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그의 학문은 위학이라 하여 탄압받았으나, 굴하지 않고 죽림정사에서 강학을 계속하였다. 이것을 말리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는 화복은 명에 있는 것이다라며 태연했다 한다.

후반기의 저작에는 <역학계몽><효경간호><소학><초사집주><한문고이><의례경전통해>등이 있고, 이들은 <사서집주>와 함께 주희 및 주자학연구의 필수자료들이다. 관리로서의 현직에 있었던 기간은 짧았으나 맡은 직무에 충실하였고, 말씨나 안색 등 정중한 행동거지와 검소하고 청빈한 생활로 주위의 존경을 받았다. 

그의 철학체계는 당시에는 큰 빛을 보지 못했지만, 1313년 원에서 사서를 과거시험으로 채택하고 사서의 공식적인 주석은 주희의 <사서집주>를 따르도록 한 후부터는 완전히 학계를 지배하고 관학으로서의 위치가 확고해졌다. 우리 나라에도 주자학이 고려 말에 전래된 뒤로 조선시대에 와서 정치와 사상계를 지배하였다.


b. 주자의 사상

   사상의 형성

주희에 의해 체계화된 유교사상을 주자학 또는 성리학이라 하는데, 우주의 이치와 인간의 심성을 탐구하려는 학문적 특성이 있다. 성리학은 육조시대부터 수당시대의 사상계를 석권하고 있던 불교와 도교, 번잡하고 공허한 자구해석에 집착했던 훈고학적 유학을 극복하고 공자와 맹자의 근본사상을 밝히기 위해, 노장사상과 불교의 선종사상을 유교적 입장에서 수용하여 재구성한 유교철학이다. 주희는 깊은 철학적 고찰을 통해 우주의 본체와 인성의 본질을 밝히고자 하였다. 

성리학은 대체로 자연과 우주의 근본을 태극음양오행의 묘합으로 설명한 태극론, 세계의 두 가지 질서원리인 이기론, 인간의 심성을 탐구하는 인성론(심성론), 도덕적 인격의 완성방법으로서의 성경론(수양론), 우주의 근본원리를 깊이 연구하여 올바른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는 격물치지론, 자연의 질서에 부합되는 정치적 사회적 질서에 대한 탐색으로서의 경세론, 사상의 이론적 근거로서의 경학, 개인과 가회의 이상향을 설정하기 위한 연구로서의 사학 등으로 구분된다.

이 학설은 태극설을 주장한 주돈이에 의해 시작되고, 천리와 기일원론을 주장한 정호, 태허론을 주장한 장재, 성즉리와 이기이원론을 주장한 정이의 학설을 주희가 집대성한 것으로, 특히 정이의 학통을 계승발전시킨 것이다. 그래서 정주학이라고도 한다.

주희에 따르면 주장 이정 등은 요순 이래 공자에게 전수되고 맹자에게 이어진 이후 단절된 진정한 도를 다시 부활시킨 이들로, 자신은 그 계승자라고 자처하였다. 이 도통설과 밀접히 관련하여 공자 증자 자사 맹자로 이어지는 유학의 전수계통을 인정하고 사서를 중시하며, 여기에 학문의 목적과 그 단계를 고려, 오경의 입문과 진행순서로 삼았다. 그리고 사서에 주석을 달고 널리 경전을 연구하여 재해석을 시도하였는데, 이것을 신주라 한다.


   사상적 특성

주희의 철학은 이기철학이라 하는데, 형이하학인 기와 형이상학인 이를 내세워 상호간의 관계를 명확히 하고, 생성론 존재론에서 심성론 수양론에 걸쳐 이기에 의하여 일관된 이론체계를 완성시켰다.

 이라는 것은 어떤 사물이 왜 그렇게 존재하며,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를 말하는 것으로, 세계의 참모습으로 보았다. 반면 기는 세계의 현실적인 모습으로 이에 의해 규제된다고 보고 이가 기보다 우선한다고 보았다. 그의 학문방법은 인간이 본래 지니고 있는 것을 회복한다는 형식을 취하고 이를 위한 노력이 거경궁리(居敬窮理)이다. 양자는 서로 보완해가는 것인데, 거경이란 정신을 집중하여 마음들 다른 곳에두지 않는 것을 말하고, 궁리 란 모든 사물에 내재하는 이치를 깨닫는 것을 말한다. 주희가 생각하는 사물의 범위는 대단히 넓어서 이른바 자연학의 분야에까지 미치고 있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도덕적 규범의 보편타당한 근거를 찾는 것이었다.            


c. <근사록>의 내용

본서는 주희와 그의 친구인 여조겸이 송대 성리학의 4대가인 주돈이 장재 정호 정이 등 4명의 저서 중에서 중요한 것만 골라 서로 토론을 거친 후 1178년에 완성한 책이다. 이들 4학자의 저서에는 도를 배우려는 초보자들이 접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어, 이중 초학자의 입문에 필요한 622조를 초록하여 14권으로 분류한 것이다.

 근사 라는 말은 <논어>의 <자장편>에 절실하게 묻고 가까이 생각하면 인이 그 가운데 있다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주희와 여조겸의 말에 따르면 <근사록>은 주돈이 등 4명의 사상을 이해하는 사다리이고, 이 4명의 사상은 육경을 이해하는 사다리라는 것이다.


주돈이: <근사록>에 수록된 송대학자들의 주요사상은 다음과 같다. 주돈이(1017-1073)는 <태극도설>을 지었는데, 송대 성리학의 개조로 추앙받았다. 그의 학설은 유불도 3교를 유교사상으로 종합한 것으로, 그는 우주만유의 궁극적인 본체를 태극으로 설명하고, 태극의 동적 측면을 양 이라 하고, 정적 측면을음 이라고 하였다. 우주 내의 모든 사물은 음양의 조화에 의한 것이고, 음양이 발전하여 수화목금토의 오행을 낳았다고 하였다. 이처럼 자연과 우주의 근본을 태극 음양오행의 묘합으로 설명한 성리학의 입장이 태극론이다.


장재: 장재는 우주본체로서 태허를 말하고 태허가 바로 기다 라는 학설을 내세워, 기가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 실체이며 기의 흩아지고 모이는 변화에서 각종 사물이나 현상이 형성된다고 보았다. 이 점에서 불교나 도교의 공이나 무의 개념을 비판하였다. 즉, 우주의 본체는 지극히 허한 것이나 그것은 공이나 무가 아니라 기라는 존재라는 것이다.


정호 정이: 정호는 여전히 기일원론의 색채가 짙고, 심성론에서도 기즉성 성즉기라고 말하고 있어, 본체론보다 현상론에 치중하고 있다. 동성인 정이는 이기이원론적 발상에 입각하여 물질적 세계는 음양의 기에 의해 성립하며 기의 배후에는 음양을 음양답게 하는 이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심성론에서는 성즉리라하여, 주자의 이기론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본서의 내용은 <도체><논학><치지><존양><극치><가도><출처><치체><치법><정사><교학><계경><변별이단><총론성현>의 14편으로 구성되며, 이중 제1편인 <도체>편이 가장 난해한 철학설로, 제2편부터는 학문과 일상생활에 관한 것이어서 어렵지 않다. 이 문에 여겸조는 <도체>를 맨 뒤로 두자고 주장했으나, 주희는 <도체>를 읽어 도의 근본이치를 알고 제2부분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여, 결국 주희의 주장대로 첫머리에 두었다 한다. 물론 주희도 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1편을 읽고 이해하지 못하면 제2권부터 읽고, 후에 제1권을 읽도록 하라고 말하고 있다.( 도체(道體)·위학(爲學)·치지(致知)·존양(存養)·극기(克己)·가도(家道)·출처(出處)·치체(治體)·치법(治法)·정사(政事)·교학(敎學)·경계(警戒)·변이단(辨異端)·관성현(觀聖賢)의 14류(十四類)로 나뉘어 있다.) 

이것은 주자가 사서 가운데 <대학>을 먼저 읽도록 한 것과 유사한데, 그 이유는 사서 가운데 나타나 있는 성현의 마음을 알기 위해 먼저 <대학>을 읽고 그 강령을 알아둠에 있다. <도체>편의 본문 첫머리에 이 편은 성의 본원과 도의 체통을 논한 것으로 학문의 강령이다 라고 했으며, 또 첫머리에 주돈이의  태극도설 을 실은 것은 그가 이를 얼마나 중요시했던가를 알 수 있다.

제14편의 <총론성현>에서는 유가의 도통론을 다루고 있는데, 요순 우탕 문무 주공 공자 증자 자사 맹자로 이어진 유가의 계통이 이단의 학설에 의해 가려졌다가 송에 들어와 주돈이 정호 정이 장재로 계승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d. 동아시아에 끼친 영향

주희에 의해 완성된 성리학은 공맹사상을 잘 보존하는 동시에 더욱 체계화시켜, 학문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보게된다. 그의 사상은 청대에 왕부지 대진 등에 의해 부인되기도 하지만 중국사상사에 있어 지대한 영항력을 행사해왔으며, 송원명대에 관학으로서의 정통성을 유지해왔다. 그의 사상이 봉건시대의 통치이념으로서 가장 적절했으며, 또 그렇게 작용하였다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우리 나라에 있어서도 그의 사상은 조선의 건국과 함께 국가의 이념으로 받아들여진 후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이 등장할 때까지 거의 절대적인 권위를 유지해왔다. 조선 초의 사육신생육신의 드높은 의리관이 16세기에 오면서 이론적 차원의 탐구가 본격화됐는데, 그 주역은 이황 이이(자세한 것은 본서 1권 참조)였다. 이들에 의해 전개된 한국성리학의 특징은 #1정주학이 절대우위를 차지하여 기타 학문은 발전의 여지가 봉쇄되었고 #2학문의 성향에 있어 주지주의적 성향으로 흘렀으며 #3예를 절대시하고 #4체면 위주의 명분론적 사고가 팽배했으며 #5주리론적 보수성을 띠어왔다.

일본 역시 그의 사상을 수용하여 본건적 사유의 틀을 형성하였으며, 배적으로 주자학에 대한 반발이 진행되면서도 근대사상이 수입되기 전까지 여전히 그의 사상의 영향하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주희의 사상은 그의 생존시 한때 이단으로 몰리기도 했으나, 중국과 동아시아에 미친 지속적인 영향력은 매우 크고 광범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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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사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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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사록(近思錄, 1175년경)은 주희(朱憙)와 그 학문적 친교가 깊었던 여동래(呂東萊) 두 사람의 합작(合作)이다. 이 서(書)는 북송 시대 도학(道學)의 대표적 사상가인 주돈이, 장횡거(張橫渠), 정명도(程明道) 및 정이천(程伊川)의 저술(著述)·어록(語錄)을 발췌하여 편집한 것이다.


성립의 사정을 알기 위하여 주자의 후서(後序)를 보면 초학자(初學者)의 입문서로서 지어진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주자도 이 책을 읽어 얻은 바를 기본으로 하여 다음은 4자(四子)의 전집(全集)을 읽을 것이며 구차하고 번다하다고 노력을 피하고 간편한 맛에 편승하여 이것만으로써 만족하다고 여기는 일이 있으면, 본서 편집의 의도에 반(反)한다고 말하고 있다.


구성은 도체(道體)·위학(爲學)·치지(致知)·존양(存養)·극기(克己)·가도(家道)·출처(出處)·치체(治體)·치법(治法)·정사(政事)·교학(敎學)·경계(警戒)·변이단(辨異端)·관성현(觀聖賢)의 14류(十四類)로 나뉘어 있다. 이것에 의지하여 학문의 도(道)에 들어간 사람은 중국 뿐 아니라 한국과 일본의 학자에도 많으며 따라서 주석서도 이 3국에 많다. 그리고 또 여동래(呂東萊)의 후서(後序)에 의하면 <근사록(近思錄)>은 이미 되어 있었다고 하면서 주자가 실제의 편자요 여동래(呂東萊)는 이에 참여한 것같이 쓰고 있다.



C47 – 한국통사 (韓國痛史) / 박은식(朴殷植, 1859-1925)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임시정부의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의 저서로 1915년 출판되었다. 우리나라 역사 전반에 대한 간략한 개요와 대원군의 개혁정치, 민씨정권의 문호개방에서 비롯된 일제의 침략사와 갑신정변, 동학농민전쟁, 1911년 105인 사건에 이르는 독립운동사를 서술하였다.  한 나라의 혼을 담은 국교와 국사가 없어지지 않는 한 나라도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저자의 신념 하에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씌어진 책으로서, 민족주의의 사관에 입각해 한국근대사를 최초로 종합적으로 서술하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자(字)는 성칠(聖七)이고 호는 겸곡(謙谷), 백암(白岩·白巖·白菴), 태백광노(太白狂奴), 무치생(無恥生)이며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a. 생애와 작품활동

단재 신채호와 함께 2대 민족사학자로 꼽히는 백암 박은식. 이 두 사람은 열렬한 독립투사이면서 또 한국역사를 통해 민족혼을 일깨운 사학자이기도 했다. 백암은 황해도 황주에서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부친의 사랑을 받으며 사서삼경과 제자백가의 글을 익혔다. 그러나 부친의 의도와는 달리 과거시험 준비보다는 어수선한 나라일을 걱정하기 시작했고, 부친이 작고한 뒤에는 관서지방을 두루 여행하면서 여러 학자와 학문을 접하였다.

24세의 청년으로 서울에서 임오군란을 목격하고 그 수습방안을 올리기도 했고,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향시에 응시, 합격하여 말직에서 4년간 근무한다. 이때 평안도 관찰사 민병식이 그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동명왕릉의 책임자로 내보내 학문연구에 열중케 하는데, 그는 여기서 2년간 사색에 잠긴다.

1894년(35세)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원주로 은거했다가 1898년(39세) 상경하여 새롭게 변신하기 시작한다. 상경 직후 장지연 남궁억의 <황성신문>의 주필이 되어 부패한 관리나 일제에 야합하는 친일파를 공격하고, 일제의 침략만행을 통박하였다. 이때부터 독립협회에도 가입하였고, 자신이 지금까지 이단사상으로 배척했던 불교 기독교 서적은 물론 중국에서 전래한 신문 및 서양서적을 두루 섭렵했다. 이를 계기로 보수적 위정 척사론자에서 벗어나 개화자강 사상가로 변신하였다.

1905년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으로 <황성신문>이 폐간되자, 백암은 <대한매일신조>로 자리를 옮겨 새로 입사한 신채호와 함께 더욱 구국적인 논설을 발표했다. 1905년에서 1910년 사이에 박은식은 청말의 변법자강파인 양계초의 사상을 수용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자강론을 제시했다. 그는 사회진화론에 의거하여 당시 국제사회를 약육강식하는 진화론적 생존경쟁의 법칙이 지배하는 냉혹한 현실로 진단했다. 이러한 인식에서 국권상실의 원인이 자강력, 특히 민력의 부재에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옛 관습의 혁파와 교육 및 산업진흥을 통해서 자강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애국심 함양과 단체결성을 통해 민족의 역량을 결집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의 국가관은 종래의 왕조적 국가나 대한제국 체제가 아니라, 민의 단체적 결합으로서의 국가, 즉 국민국가에 근접하게 되었다. 따라서 국권회복운동에서 군주나 정부보다는 민권,민지, 민력 등 민의 요소가 중시되었다.

1909년 유교구신론을 발표하여 유교개혁을 주장했다. 그의 유교개혁론은 공자의 대동사상과 맹자의 민본주의라는 형식을 취했는데 #1군주중심의 유교에서 인문중심의 유교로 개혁할 것, #2공자의 구세주의적 실천정신을 회복하여 적극적으로 포교할 것, #3사변적인 주자학 대신에 실천적인 양명학을 진흥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1914년 <한국통사>를 저술하고, 1920년에는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하였다. 1923년 개최된 국민대회에서 임정에 대한 태도를 둘러싸고 창조파와 개조파가 대립할 때 개조론의 입장을 취하였다. 1924년에는 임시정부 국무총리 겸 대통령대리가 되었고, 1925년에는 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대통령 재직시 대통령책임제를 내각책임제로 바꾸었으며 이에 따라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1925년 11월  <한국통사>와 <한국운동지혈사>를 썼으니 늙었더라도 건국사를 쓰고야 죽겠다는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이국 땅에서 한많은 생애를 마쳤다. 그의 장례는 임시정부의 첫 국장으로 치러졌다. 그간 상해의 공동묘지에 묻혀 있다가 1993년 8월, 68년 만에 유해가 국내로 봉환돼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b. 백암의 역사관

   국혼론

백암의 역사관의 특징은 국혼론에 있다. 그의 국혼론적 역사인식은 다음과 같이 4단계를 거치면서 발전했다. 제1단계는 1905-1910년 자강론에 기초를 두고 자국정신과 국사를 강조한 시기이며, 제2단계는 1911년 민족정신의 표상인 민족적 영웅에 대한 연구를 수행한 시기이다. 제3단계는 1915년 <한국통사>를 저술하여 자신의 역사관을 국혼론으로 체계화한 시기다. 제4단계는 1920년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통해 국혼론적 역사인식을 독립운동사에 적용한 시기이다.

1905년 이전까지 백암은 정통 주자학자로서 한국을 유교국가로 파악하고 중화주의적 역사관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05년 이후 자강론을 제시하면서 애국심 함양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등 민족자주 의식을 강조했다. 특히 국사교육을 애국심 함양의 최선책으로 중시하였다. 그는 종래 유학자들의 중화주의적 역사학을 노예문학이라고 비판하고, 한민족의 역사와 민족사적 영웅을 중시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 기간에는 한국사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수행하지는 않았고, 과거인물들의 전기를 단편적으로 소개하거나 국사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수준에 그쳤다.


   영웅사관과 그 극복

1911년 중국 망명 직후 만주지역의 고적답사와 대종교 입교를 계기로 고대사 연구에 전력하였다. 이 해에 많은 저술을 통해 나타난 백암의 역사관은 전통적 유교사학의 중화주의적 역사관을 탈피하고, 민족의 자주독립을 지향한 실천적 역사학이라는 점에서 민족주의적 역사학의 특징을 뚜렷하게 지니고 있다. 동시에 구국의 영웅을 대망하면서 영웅들의 행적을 중심으로 민족사를 인식하는 영웅주의적 역사관의 성격을 띠고 있다.

백암은 1915년 간행된 <한국통사>에서 국혼론을 체계화하였다. 그는 동양의 전통적인 혼백론을 원용하여 국가 구성요소를 정신적인 국혼과 물질적인 국백으로 구분하여 파악했다. 여기에서 국혼(정신)은 국백(국가)보다 더 근본적인 요소로 간주되었으며, 종교언어문학역사 등을 포함하는 민족문화의 개념으로 정의되었다. 국혼은 정신적인 측면이 강조된 개념으로서 오늘날 민족정신의 개념에 준하는 것이다. 그는 국혼의 여러 요소 중에서 역사를 국혼의 소재처로 파악하고자 했다. <한국통사>의 저술동기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국혼을 유지해야 한다는 <한국통사>에서의 주장이 1920년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국혼이 강한 한국민족은 반드시 독립한다는 확신으로 굳어졌다. 말하자면 국가의 멸망이라는 통한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체계화된 역사인식은, 독립을 위한 피의 투쟁사를 서술하면서 독립에 대한 확신으로 굳어졌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국혼론적 역사인식이 지니는 관념론적이며 영웅주의적인 한계를 극복해가는 모습이 발견된다. 즉 정신 자체가 아니라 그 표현인 독립투쟁의 실천과정을 서술함으로써, 관념론적 한계를 점차 탈피해가고 있다. 또한 독립투쟁에서 노동자 농민 등 민중의 역할을 중시하면서 영웅주의적 한계를 탈피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독립운동을 민족정신의 전개과정으로 파악함으로써 정신사적 기조는 굳게 견지하고 있었다.


c. <한국통사>의 내용

구한 말부터 준비하여 1914년에 완성하고 1915년에 중국 상해에서 출판한 본서는 1864-1911년의 한국근대사를 3편 114장으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

제1편에서는 우리 나라의 지리적 환경과 역사의 대강을 다루고, 2편에서는 대원군 집권 이후부터 대한제국 성립 이전의 역사를, 제3편에서는 대한제국 성립 이후 국망까지의 역사를 서술했다. 이러한 서술체계는 동양의 전통적인 역사서술 체계인 기전체나 편년체를 따르지 않고 근대적인 역사서술 체계를 원용하여 사건 중심으로 장을 나눈 것이다. 그는 각 사건들의 내용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된 원인과 결과까지도 서술, 논평함으로써 인간관계에 입각한 근대적 서술방법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그리고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17개 부분에 대해서는 사론을 부기하는 전통적 방식을 원용하여 안이라는 단서를 붙여 사실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내렸다. 본서는 내용상으로 일제의 침략과정을 서술하고, 그 부당성을 폭로하는 한편, 이에 대응하는 한민족의 자주독립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반성한다는 의미도 있다. 그것은 한민족이 국권을 상실해가는 통한의 역사를 통해 자괴감을 유발함으로써, 독립운동의 정신적 원동력을 제공하고자 했던 것이다.

백암은 대원군의 외척 및 문벌견제, 군포제개혁, 서원철폐, 풍속교정 등 내정개혁에 대해서는 긍적적인 평가를 내렸으나 화폐정책과 전제적 정치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특히 대원군은 대혁신이 가능한 내외적 조건의 유리함에도 불구하고 배외주의적 폐쇄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중흥의 기회를 놓쳤다고 보고, 이를 애석한 일로 평가했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통사>는 대원군 집정기부터 시작한다고 했다. 또한 자수자강의 실력을 구비하지 못한 상황에서 문호를 개방한 민비정권의 개항정책도 비판하였다. 특히 한반도 주변의 정세에 대한 통찰은 예리했다. 그는 일본, 중국, 러시아 3국 사이에 세력균형이 이루어지면서 약소민족인 한국이 자주독립할 수 있으나, 어느 한 나라가 우세를 독점하면 위험하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미국, 영국 등 구미 열강은 한반도에 적극적 이해관계가 없기 때문에 한국을 이용하여 일본의 환심을 사려는 입장이었다고 보았다. 갑신정변에 대해서는 여건미숙으로 인한 실패를 애석하게 여겼다. 그러나 혁명의 여러 주역들이 일제의 술책에 말려든 결과가 되었다고 평가하면서, 타력으로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동학혁명에 대해서는 갑오동학란이라고 표현하고 정치혁명으로서의 한계를 지적했지만, 신분해방을 실현한 개혁의 선구라고 평했다.

백암은 1905년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가 내한한 목적이 한국인을 회유하고 민권신장 및 위회설립 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지적하였다. 이어 그는 일제의 한국침략에 이용당한 한국인의 왕족으로서 일본에 머문 자, 갑신정변과 갑오경장의 주모자로서 일본에 망명한 자, 일진회의 지도적 인사 등 3종류로 나누어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일본을 이용하여 독립을 도모하려는 선의의 친일파에 대해 약자가 강자를 이용하려고 하는 것은 큰 착오로서 오히려 국가와 민족을 망치는 결과가 된다고 경고했다. 이처럼 본서는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해가는 통한의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에 대한 저항운동도 중시하여 의병항쟁을 정신사적으로 영구불멸할 것이라고 높이 평가했고, 애국계몽운동 단체를 애국당으로 지칭하면서 그 교육 구국운동의 성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외의 항일투쟁도 상세하게 서술함으로써, 한국근대사의 주체적 전개과정을 밝히는 작업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본서에서 이미 독립을 위한 피의 투쟁사인 <한국독립운동지혈사>가 예비되고 있는 것이다.

본서는 중국 상해에서 간행된 이후 중국 및 러시아의 한인 교포들 사이에 널리 보급되었고, 미주에서는 한글로 번역되어 교민들의 교과서로 널리 사용되었다. 또한 국내에서도 비밀리에 유포됨에 따라 일제는 이에 대처하기 위해 1916년 조선반도사 편찬위원회를 조직하여 <조선반도사>의 간행을 준비하였다. 이처럼 본서는 암울했던 일제시대에 민족과 함께 고통과 희망을 나누면서 일제의 식민통치를 위협하는 대표적인 역사서가 되었다.


d. 백암의 역사적 의의

   민족주의 사학

백암사학은 구한말 역사학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근대 민족주의적 역사학의 체계를 확립했다는 점에서 사학사적 의의가 크다. 우선 역사서술 체계면에서 볼 때 전통적 서술체계를 탈피, 인과관계에 따라 사실을 설명 분석 비판하는 근대적 역사서술 체제를 개척하였다. 이를 통해 구한 말 역사학의 서술방식에 나타난 과도기적 현상을 극복했다는 점에서 본서는 근대적 역사서술방법에 따른 최초의 시대사였다.

또한 민족적 과제를 실현하기 위한 실천적 역사학을 수립함으로써 저항주의적이며 개혁적인 민족주의적 역사학의 전통을 수립했다. 이것은 구한말 역사학이 지니고 있던 실천성의 결여를 극복하고, 그 이후 민족주의적 역사학의 발전에 토대를 마련한 것이었다. 특히 국혼론적 역사인식에 나타난 정신사관적 요소는 이후 민족주의적 역사학의 기본적이 특성으로 자리잡게 된다. 일제하 민족주의적 역사학자 정인보가 조선의 얼 을 강조한 것은 박은식의 국혼론적 역사인식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었다.


   근대사연구 주력

백암의 실천적 관심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한 인식의 중요성을 제고하였다. 이에 따라 신채호를 비롯한 대부분의 민족주의적 역사학자들이 고대사 연구에 집중한 것과는 달리 근대사연구에 개척적인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 그의 근대사연구는 질과 양면에서 모두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특히 한국근대사를 일제의 침략과 그에 대한 저항이라는 각도로 파악하는 시각은 차후 한국근대사 연구의 기본적 구도로 자리잡게 된다. 이 점에서 그의 연구는 현재까지도 근대사연구에 토대를 이룬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백암사학의 4단계에 걸친 발전과정은 한국근대 민족주의 운동의 발전과정과 궤를 같이하면서 한국민족주의 형성에 중요한 기초를 제공했다. 그러나 그의 국혼론적 역사인식은 관념론적이며 영웅주의적인 요소를 지닌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한계는 1919년 이후 독립투쟁사 서술, 민중의 역할에 대한 중시 등으로 점차 극복되어갔지만, 그의 사학이 지니는 정신사관의 기조는 지속적으로 견지되었다. 이밖에도 그것이 국권상실의 과정을 직접 목격하였고, 또 몸소 독립운동에 참여한 필자에 의하여 저술된 점, 단순한 나열이나 연결에 그치지 않고 통사로서의 뚜렷한 목적 밑에서 저술된 점, 우리 나라 최근세사를 서술한 사서 가운데 가장 종합적으로 서술한 점 등이 의의를 가진다. 또한 이 책은 통사로 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히 국권상실과정에 있어서의 깊은 반성을 표현하고 있으며, 특히 중요한 부분에 있어서는 반드시 저자의 의견을 병술하여 뒷사람들의 이용에 크게 도움을 주고 있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

<한국통사>는 지금까지 대개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은 사실을 중심으로 엮어졌던 우리 나라의 최근세사를 민족의 주체적 활동을 중심으로 하여 다시 서술함에 있어서 중요한 지침이 될 것이다. <한국통사>가 국권상싱과정에 있어서의 일종의 반성을 위한 서술이라면 그의 또하나의 저서인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국권회복운동의 전모를 서술한 역사서다. 18세기 후반부터의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에 피로써 저항한 민족운동사인 이 저술은 갑신정변의 실패로부터 1920년대의 만주지방에서의 독립군의 활동상황까지를 서술하였는데, <한국통사>는 이 책과 함께 이용되어야만 그 가치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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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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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신문》 창간호

황성신문(皇城新聞)은 남궁억, 나수연 등이 중심이 되어 1898년(광무(光武) 2년) 9월 5일 《대한황성신문》의 판권을 인수받아 창간한 일간 신문이다. 주필로는 유근, 박은식, 장지연, 신채호 등이 활동하였다. 민간자본 신문이었으며, 국한문혼용체가 쓰였으며, 애국적 논조로 일관했다.[1] 1905년 을사조약에 대한 장지연의 항일 사설 〈시일야방성대곡〉 기사로 인해 정간당했고, 다시 1906년 복간되었다.[2] 1910년 일제강점기 때에 신문제호가 강제로 '한성신문(漢城新聞)'으로 바뀌었으며, 9월 14일 제3470호를 끝으로 종간되었다.


황성신문이 발행된 13년간 평균 발행부수는 3000부 가량이었다고 한다.[3]


C48 – 조선상고사 (朝鮮上古史) /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독립운동가, 역사학자인 신채호가 중국 중심의 역사관과 식민사관에 의해 왜곡되어가던 한국사를 바로잡기 위해, 중세의 역사관을 극복하고 근대적 역사관에 입각하여 저술한 한국근대사학의 이정표. 자료의 해석과 역사서술의 객관성, 사실성, 종합성들을 강조함으로써, 한국사학을 근대적인 사학으로 끌어올린 이 책에서, 단재(丹齋)는 새로운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하여 단군시대로부터 백제 멸망과 그 부흥운동까지의 한국고대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는 관점에서 서술하였다.


a. 생애와 작품활동

 내가 죽으면 시체가 왜놈들의 발끝에 채이지 않도록 화장하여 재를 바다에 뿌려달라며, 평생을 일제와의 비타협적인 투쟁에 일생을 바친 독립투사 단재 신채호. 한편으로 근대적 민족주의 사관을 확립한 역사가 단재 신채호. 그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여기서는 역사가로서의 단재의 모습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는 충남 대덕군에서 신숙주의 18대손으로 태어났다. 신규식(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대신), 신건식 주중대사, 신석우(조선일보 사장), 신백우(서로군정서 참모), 신기선(대한제국 학부대신) 등은 모두 그의 집안 사람들이다. 25세에 국립대학인 성균관의 교수가 되었으나, 당시의 정세는 한가하게 학문을 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구국운동에 나서기로 결심한다.

1905년 장지연의 초청을 받아 <독립신문>의 후신인 <황성신문>의 논설기자로 입사하여 계몽운동에 나서나, 이 신문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 문제가 되어 폐간당했다. 그러자 <대한매일신보> 양기탁의 초청으로 이 신문에서 활동하게 된다.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외국인이 발행인이었기 때문에 사전검열을 받지 않아도 되었다. 따라서 단재는 여기서 애국심과 국권회복을 고취시키는 열정적인 글들을 쓸 수 있었다. 

단재는 1907년 중국 양계초의 <이태리 건국 3걸전>을 번역, 간행하고, 한국역사상의 3걸로 을지문덕, 이순신, 최영을 뽑아 그들의 전기를 저술하였다. 그가 이 같은 인물들의 전기를 쓴 것은 우리 나라의 청년들이 이러한 영웅들의 행동을 본받아 일제침략자들을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하는 데 영웅적으로 투쟁하도록 고취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그는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독사신론(讀史新論)이라는 사론을 발표하여 지식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는데, 이 글을 통하여 그는 전통적인 유교사관을 통렬히 비판하는 한편, 새롭게 침투해오던 일본인들의 식민주의 사관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1910년 나라가 완전히 무너지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그곳의 독립지사들과 협력하여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해조신문>을 간행하나, 재정의 어려움과 언론에 대한 동포의 인식이 부족하여 이 신문 발행은 여러 차례 중단을 거듭했다. 이때 상해에 먼저 자리잡은 신규식, 박은식으로부터 초청을 받고, 그곳에서 신한청년단과 박달학원에서 청년들에게 우리 역사를 가르쳐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한편, 우리 나라 상고사의 연구에도 열중하였다. 예전의 우리 역사가 결코 퇴영적이 아니요, 고조선, 고구려 등이 강대한 중국에 맞서 영토를 보존해온 역사적 사실을 통해, 민족사관을 정립하는 제 온 정열을 쏟았다.

그는 이국땅에서 학문연구와 독립운동을 병행하면서 10년 세월을 보냈다. 이 사이 국내에서는 31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를 북경에서 맞이한 단재는 조선민중이 직접 나서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사실에 큰 감명을 받고 역사의 주체로서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민중을 발견하게 된다.

상해에 수립된 임시정부에 그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데, 서로 망명정부의 주도권을 잡기에만 열중하는 이승만을 임시정부가 대통령으로 선출하자, 이를 인정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동지들과 함께 <신대한>이라는 신문을 만들어 임시정부를 맹렬히 비난하였다. 1922년 무력 급진노선의 의열단 단장인 김원봉의 부탁으로 그가 보낸 무정부주의 이론가인 유자명과 함께 의열단의 혁명운동의 이념과 방법을 천명하는 선언문을 집필하는데, 이듬해 조선혁명선언을 완성한다.

 조선혁명선언은 단재의 비타협적 민족주의 사상과 유자명의 무정부 이론의 결합으로 볼 수 있는데, 이로 인해 신채호는 무정부주의에 관심을 갖게 된다.

 조선혁명선언에서 그는 강력한 일제침략세력과 맞서려면 파괴암살 등 폭력적 방법이 외교운동이나 문화운동과 같은 미온적인 방법보다 효과적임을 역설했다. 또 민족자본의 육성이나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를 통해 독립을 성취해야 한다는 준비론에도 비판을 가했다. 이러한 혁명적 수단을 강조하는 그의 논리는 일제침략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할 만큼 격렬했고, 의열단원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임시정부 내의 분열에 실망을 느끼고 한때 절에 들어가 <대승기신론>을 읽으며 침잠했던 단재는, 그의 사명이 조선사연구에 있음을 깨닫고 다시 하산하여 조선사연구에 몰두한다. 그는 조선역사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평생 동안 고심했는데, 단재사학이 일관되게 추진한 것 중의 하나가 중국에 대한 사대를 극복하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 이야기만 나오면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을 통탄하곤 했다.

한편 국내의 친지들은 그의 글을 좀더 보급하기 위해 이미 발표된 글을 모아 간행하는 한편, 미발표된 원고들을 찾아 신문지상에 발표하였다. 즉, <임꺽정>의 저자 홍명희는 <동아일보>에 발표했던 단재의 조선사 관계논문을 묶어 1930년 <조선사연구초>를 간행했고, 안재홍은 단재가 1920년대 초에 써놓았던 <조선상고사>를 1931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으며, 1910년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조선상고문화사>도 1931-1932년에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다. 감옥에서도 계속되었던 조선사연구에 대한 그의 정열은 1936년(56세) 여순감옥에서 순국함으로써 일단락이 되었지만, 일제가 싫어 평생 동안 고개를 쳐들고 세수를 하였다는 그의 기백은 그의 독립투쟁이나 역사서술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b. 단재의 역사관

단재의 역사학과 역사관은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독사신론>으로 대표되는 1905-1908년까지의 시기이고, #2<조선상고문화사>로 대표되는 1909-1920년대 초까지의 시기이고, #3<조선상고사>와 <조선사연구초>로 대표되는 1920년대 전반기인데, 그 이후는 그가 무정부주의자로 기울어져 주목할만한 역사서술이 없다.


   <독사신론>

이 글은 한국근대사학의 성립과정에서 민족주의사관을 처음 제시한 글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이 글의 서문에서 국가의 역사는 민족의 소장성쇠의 상태를 서술한 것 이라고 말하고, 민족을 버리면 역사가 없을지며 역사를 버리면 민족의 국가에 대한 관념이 크지 않을지니, 오호라 역사가의 책임이 막중할 진저 라고 하여 역사서술의 주체를 민족으로 상정하였다. 이는 중세의 왕조중심사관을 극복하고 민족사관을 정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독사신론>은 주자학적 정통론과 사대주의적인 존화사관을 철저히 비판하였다. 그는 당시의 단군-기자-마한-신라로 이어지는 정통론은 노예의 헛소리라고 비판하고, 단군-부여-고구려의 역사를 더 강조하였다. 이는 부여-고구려 주족설이라 하는데, 그가 이런 이론을 내세운 것은 부여나 고구려족이 살았던 만주의 고토에 대한 수복의식과 강자중심 역사중심의 역사관의 발로라 보여지는데, 이는 그의 사회진화론적 현실인식에서 비롯된다. 한편 <독사신론>에서 주목할 점은 당시 일본인들이 주장하던 임나일본부설을 한국을 옛날부터 자기 소유물로 인정하여 한국을 침략하기 위해 만들어낸 근거 없는 소리에 불과한 것 이라 비판하여, 한국 근대역사학의 또 하나의 과제였던 식민주의 사관의 투쟁을 시작한 최초의 글이라는 점이다.


   <조선상고문화사>

이 책은 단군조선 2천년 역사를 서술한 것이다. 이 글의 근저에 흐르는 사상은 국수보전론이다. 여기서 국수란 그 나라에 역사적으로 전래하는 풍습, 습관, 법률, 제도 등의 정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단재는 국민정신의 유지와 애국심의 환기는 이 국수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이론은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크게 확산 되면서 국수의 상징으로서 특히 단군숭배의 기운이 일어나 1909년 대종교가 창건되었다. 그리고 1910년대에 들어서는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준비하고 있던 독립운동가들의 대다수가 대종교에 입교하는 현상을 낳기도 했다.


   <조선상고사> <조선사연구초>

단재사학의 대표적인 글이다. <조선상고사>의 서문에서 단재는 역사의 정의에 대해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 밝히고 있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단순히 아와 비아의 투쟁을 역사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밑바닥에 깔린 투쟁의 정신사를 역사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 단재의 역사관의 특징적인 모습이 보인다. 즉, 단재는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사건에서 한국사를 선교, 불교, 독립사상, 진보사상 대 유교사대주의보수사상의 대립축으로 보면서, 양자가 대결하여 후자의 승리로 귀결된 결정적인 사건이 묘청의 난 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역사를 정신사사상사 중심으로 파악하고 있었는데, 이처럼 단재의 관념사관적 성격이 강하게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c. <조선상고사>내용

<조선상고사>는 단군시대부터 백제의 멸망과 부흥운동까지를 총 12편으로 나누어 기술하고 있다. <조선상고사>는 과거의 가치관이나 역사관을 부정하고 새로운 역사관 위에서 우리의 역사를 재평가하였다. 여기에는 강력한 민족의식이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역사관이 이 책의 서론인 <총론>에 잘 나타나 있다.

제1편 총론에서는 단재의 역사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여기에는 역사의 정의와 조선사의 범위, 역사의 3대 원소 등이 나타나는데, 현대의 시각에서 볼 때 비판의 여지가 없지 않으나, 당시로서는 혁명적 견해였다. 먼저 역사의 정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역사란 무엇이요? 인류사회의 아와 비아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여 공간부터 확대되는 심적활동의 상황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인류의 그리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사라 하면 조선민족의 그리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니라. 무엇을 아 라 하며 무엇을 비아라 하느뇨? 깊이 팔 것 없이 얕게 말하자면, 무릇 주관적 위치에 선자를 아라 하고 그외에는 비아라고 하나니, 그러므로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이니라 

이를 정리하면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의 정신사 라는 것이다. 즉, 그는 역사발전의 원동력을 사물의 모순 및 상극관계에서 파악하고 있는데, 이는 헤겔의 변증법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이어서 그는 역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하기 위해서는 사료의 수집비판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실증주의적 역사방법론을 강조하고, 역사는 역사를 위해서 지으란 것이요, 역사 이외에 딴 목적을 위해서 지으란 것이 아니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객관적으로 사회적 유동상태와 거기서 발생한 사실을 그대로 적은 것이 역사요, 저작자의 목적에 따라 그 사실을 좌우하거나 더하거나 혹은 고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여 역사학의 학문적 독립성을 역설했다. 이는 결국 우리의 역사학을 근대적인 역사학으로서 성립시키고자 하는 이론적 작업이다. 또한 단재는 총론에서 사대주의나 유교사상에 물든 기존의 역사가들을 비판하고 있다.

제2편 신수두시대(단군시대), 제3편 3조선시대, 즉 해씨(신조선), 기씨(불조선), 한씨(말조선), 제4편 열국쟁웅시대(대한족 격전시대), 제5편 고구려 전성시대, 고구려 성쇠와 북부여의 멸망, 제6편 고백 양국의 충돌, 제7편 남방 제국 고구려 공수동맹, 제8편 삼국혈전의 시, 제9편 고구려 대수전역, 제10편 고구려 대당전역, 제 11편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 등으로 구성되었다.

우선 주목할 수 있는 것은 단군조의 활동무대를 만주로 한 것과 단군조의 중국에 대한 식민활동이다. 여기서 그의 만주 중심의 단군조 이해는 부여 고구려 중심의 고대사 체계화 및 발해사의 한국사화와 관련되고, 또 만주 중시의 밑바탕에는 한말 일제하에 전개된 만주의 우리 국토화 운동과 독립운동의 기지화 운동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김부식 등 사대주의 역사가와 한국사의 타율성론을 강조하였던 식민사관론자들은 한국사의 본격적인 전개시기를 삼국시대 이후로 보고, 그 역사무대도 한반도가 중심이라고 애써 강조하였다. 단재는 이런 종래의 한반도 중심의 역사무대를 만주 요동반도 및 요서지방과 중국 동북지대에까지 확대한 것이었다.

또 대외 식민활동을 강조하는 단군관은 한말의 사대주의 청산작업과 자강독립운동 및 일제하의 국권회복운동의 기반구축을 단군과 관련시키려는 데 있었다. 단재가 <삼국유사>를 통하여 전통적인 사료들의 틀을 넘어서서 단군문제를 이해하려는 것은, 단군문제가 한말 일제하의 민족주체성의 과제와 연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재의 부여 고구려 중심의 고대사 인식체계는 조선후기의 학자인 이종휘의 <동사>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단재는 일찍이 이종휘의 <동사>를 섭렵했고 그를 극찬했을 뿐만 아니라, <동사>에서 체계화한 한국고대사의 골격이 단재를 거쳐 더욱 정교해졌음을 알 수 있다. 단재의 부여 고구려 중심설은 만주를중심으로 한 고구려의 웅혼성과 대외투쟁의 승리를 강조한 것으로, 이는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 보는 단재의 자강독립적인 사학정신과 상통하는 것이다.

이것은 말하자면 중국에 대한 문화적정치적 사대주의를 타파하려는 의도일 뿐 아니라, 민족적 과제를 역사학과 연결시킨 데서 가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단재가 이러한 관점에 섰을 때, 종래 사가들이 삼국과 신라에 가려서 보지 못했던 부여 가야 발해사에 대한 재조명이 가능했고, 아울러 대외항쟁의 주체였던 고구려와, 해외경략에 앞섰던 백제를 멸망시켜 한국사의 무대를 반도 내로 축소시킨 신라의  삼국통일을 김유신의 음모로까지 혹평하였다.


d. 단재사학의 역사적 의의

단재의 사학은 박은식의 사학과 함께 한국사학의 근대사적인 학문을 성립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단재는 한국사학에서 전통사학과 근대사학식민주의 사학과 민족주의 사학, 영웅사학과 민중사관이 교차되는 그 접점에 서 있다.


   근대사학의 성립

먼저 전통적인 역사학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실학시대의 역사학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삼국사기> 이래의 유교적 사학과 비유교적 사학(선교와 불교의 재야사학자)을 접목시키고 있다. 이는 단재가 유가적 분위기의 한문사료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우리 민족의 전통성과 주체성을 강조할 수 있었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 또한 일반적으로 단재의 사학과 아와 비아의 투쟁의 정신사라 하여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만 이해되어왔으나, 근래에 와서는 그의 역사학이 지닌 중세성의 극복과 근대성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즉, 역사를 편협한 의리론과 정통론적인 이데올로기 성에서 해방시켜,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밝히는 역사과학의 위치로 끌어올렸으며, 그리하여 유교적 중세사학을 완전히 청산하고 근대사학을 성립시켰다고 볼 수 있다.


   민중사관

단재의 역사학에서 보이는 역사인식 주체도 그의 사학의 근대성과 관련 지어 생각할 수 있다. 그는 역사연구의 초기에는 역사의 주체를 영웅으로 보고 갈망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08년을 전후한 시기에 이르면 그는 신민국을 강조하였는데, 기존의 영웅사관에서 국민을 역사의 주체로 보는 역사관으로 변화를 보이고 있다. 그러다가 31운동이 일어나고 1920년대의 사회주의 사상에 의한 평등사상이 고양되고 독립운동에서도 민중지도자가 나오면서 민중을 역사인식의 주체로 보는 사상적 용단을 조선혁명선언 에서 내리게 된다.

따라서 그의 역사주체 인식은 영웅-국민-민중의 순서로 변화되어 가는데, 그가 <조선상고사>를 저술하는 시기에 이르면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인식하는 근대적인 사관의 단계에 이르른다.


   민족주의 사학

이리하여 단재에 이르러 한국의 근대 민족주의 사학이 시작된다. 단재가 근대 민족주의 사학을 일으켰고, 또 그의 고대사 인식에 창조적인 혜안이 번득인다 할지라도, 그도 역시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학자에 불과하다. 그의 투철한 민족애와 자주정신, 치열한 삶이 시대를 넘어서서 두고두고 귀감이 된다 할지라도, 그가 남긴 역사연구 업적은 냉엄하게 비판받았으며 1930년대의 정인보 문일평 안재홍 등에 의해 발전되어갔고, 1940년대에는 손진태 등에 의해 관념론적 한계를 극복하면서 신민족주의 사학으로 비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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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일야방성대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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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1월 20일. 황성신문 2면 사설란에 실린 '시일야방성대곡'.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은 《황성신문》의 주필인 장지연이 1905년 11월 20일 《황성신문》에 올린 글의 제목이다. 시일야방성대곡이란 "이 날에 목놓아 통곡하노라"라는 의미이다. 장지연은 이 글에서 황제의 승인을 받지 않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고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오적을 규탄했다.

장지연은 이후 1914년~1918년 사이 총독부 어용신문사 매일신보에 주필로 활동하여 700 여편의 친일한시 및 사설을 게재했다는 의혹 때문에 2009년 11월 8일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중 언론 부문에 선정됐다.


내용[편집]

지난번 이등(伊藤) 후작이 내한했을 때에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 동양 삼국의 정족(鼎足) 안녕을 주선하겠노라 자처하던 사람인지라 오늘 내한함이 필경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공고히 부식케 할 방책을 권고키 위한 것이리라."하여 인천항에서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상하가 환영하여 마지않았다. 그러나 천하 일 가운데 예측키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 꿈 밖에 5조약이 어찌하여 제출되었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삼국이 분열을 빚어낼 조짐인즉, 그렇다면 이등 후작의 본뜻이 어디에 있었던가?

그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대황제 폐하의 성의(聖意)가 강경하여 거절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으니 조약이 성립되지 않은 것인 줄 이등 후작 스스로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슬프도다.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자들은 자기 일신의 영달과 이익이나 바라면서 위협에 겁먹어 머뭇대거나 벌벌 떨며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기를 감수했던 것이다.

아, 4천년의 강토와 5백년의 사직을 남에게 들어 바치고 2천만 생령들로 하여금 남의 노예 되게 하였으니, 저 개돼지보다 못한 외무대신 박제순과 각 대신들이야 깊이 꾸짖을 것도 없다. 하지만 명색이 참정(參政)대신이란 자는 정부의 수석임에도 단지 부(否)자로써 책임을 면하여 이름거리나 장만하려 했더란 말이냐.

김청음(金淸陰)처럼 통곡하며 문서를 찢지도 못했고, 정동계(鄭桐溪)처럼 배를 가르지도 못해 그저 살아남고자 했으니 그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제 폐하를 뵈올 것이며 그 무슨 면목으로 2천만 동포와 얼굴을 맞댈 것인가.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 2천만 동포여, 노예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과 기자 이래 4천년 국민 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같이 보기[편집]

을사늑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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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사신론

[간략정보]

한자 讀史新論

분야 역사/근대사

유형 문헌

시대 근대

성격 현대문헌|학술연구서

편저자 신채호

제작시기 1908년 8월 27일∼1908년 12월 13일

간행/발행/발급자(처) 『소년』 1910년 8월호에 「국사사론」으로 전재

소장처 단국대 도서관

집필자 

 

 

[정의]

1908년 신채호(申采浩)가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해 서술한 최초의 한국 고대사 역사서.

[개설]

『대한매일신보』에 1908년 8월 27일부터 12월 13일까지 연재되었다.

[편찬/발간 경위]

신채호는 “16년 전에 국치에 발분하여 비로소 『동국통감』을 열독(閱讀)하면서 사평체(史評體)에 가까운 「독사신론」을 지었다.”고 술회하였다.

1910년 국권 회복 운동에 전념하고자 만주로 망명한 뒤, 최남선(崔南善)이 경영하는 잡지 『소년』 1910년 8월호에 「국사사론」이라는 제목으로 전재되었는데, 이따금 표현의 차이 및 삭탈된 부분이 있다.

이를 전재하면서 최남선은 “순정사학(純正史學)의 산물로 보아주기는 너무 경솔하고, 그렇다고 순연히 감정의 결정이라고만 하기도 바르지 못한지라……조국의 역사에 대해 가장 걱정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참과 옳음을 구해 오래 파묻혔던 빛과 오래 막혔던 소리를 드러내려고……이를 수록하노라.”고 평하였다.

[서지적 사항]

이 논문은 1908년 전후의 신채호의 역사 인식을 포괄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는데, 미완성의 논문으로서 완결 편이 『조선상고사』와 『조선상고문화사』이다. 체재는 서론과 상세(上世)로 나뉘며, 서론에서 인종과 지리를 논하면서 그의 사관을 피력하였으며, 상세에서는 단군에서부터 발해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서술하였다.

[내용]

내용은 ① 단군 시대 ② 부여 왕조와 기자(箕子)·부론(附論) ③ 부여족 대발달시대 ④ 동명성왕의 공덕 ⑤ 신라 ⑥ 신라·백제와 일본의 관계 ⑦ 선비족·지나족과 고구려 ⑧ 삼국흥망의 이철(異轍) ⑨ 김춘추(金春秋)의 공죄 ⑩ 발해의 존망 순서로 논술하였다.

저자는 먼저 “국가의 역사는 민족의 소장성쇠(消長盛衰)의 상태를 서술하는 것이며, 영토의 득실을 논하는 것은 아니다”고 하여 국가주의·민족주의의 입장에서 역사를 보고 있다. 즉, 국사란 국가의 역사로서, 국가가 민족에 의해 성립된 유기체이므로 민족사가 곧 국사인 것으로 파악하였다. 따라서, 국가의 주권을 행사한 주족(主族)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한 것이다.

4천 년간의 민족사는 부여족 소장 성쇠의 역사라 하여 부여족을 주족으로 인식하였다. 이것은 부여족이 살았던 만주를 우리나라 영토화하는 동시에, 현실적인 외세의 침략에 대한 자긍 의지를 뚜렷이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단군시대부터 발해의 멸망에 이르기까지를 부여족의 활동과 다른 민족과의 교섭 과정으로서 인식하고자 하였다. 단군의 정통이 부여로, 그 다음에는 고구려·백제·신라·가야로 계승되며, 종래에 중시되던 기자·위만·한사군은 부여족의 역사에 부속시켜 서술하였다.

따라서, 정통론 사학에서 주장되던 기자조선에서 마한 또는 삼한으로 정통이 계승된 것으로 파악되던 고대사 인식 체계가 뒤집어지게 되었다. 또한, 긍정적으로 평가되던 삼국 통일의 역사적 의의를 비판해 김유신(金庾信)·김춘추 및 김부식(金富軾)의 공죄(功罪)를 논하였다. 이것은 한국의 고대사를 반도 중심으로 보았던 종래의 역사 인식 체계를 만주 중심과 단군 부여족 중심으로 본 필연적인 결과인 것이다.

[의의와 평가]

이 논문에 의거해 한국의 민족주의사학이 식민지화된 뒤에 식민사관에 대처하기 위해 성립된 것이 아니라, 이미 애국계몽운동기에 계몽 운동의 일환으로서 싹텄음이 밝혀졌고, 민족주의사학의 발생 상한선이 올라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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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일본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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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또는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 임나지왜재(任那之倭宰),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는 4세기 ~ 6세기에 왜국이 한반도 남부의 임나(가야)지역에 통치기구를 세워 한반도 남부 지방의 일부를 다스렸다는 학설이다. 일본인 학자 스에마쓰 야스카즈가 주장했다.


목차  [숨기기] 

1 개요

2 사료

3 임나일본부설 비판

4 현대의 학설

5 같이 보기

6 각주

7 참고 문헌 및 링크

개요[편집]

이 학설은 크게 3가지 사료로 나뉘어 생각되며, 이는 391년 광개토왕릉비 신묘년 기사, 《일본서기》에 진구 황후 편에 신라와 백제가 조공을 바쳤다는 내용의 기사, 백제의 칠지도 명문이다. 이 가운데 특히 8세기의 역사서 《일본서기》에 근거하여 임나일본부의 실재 여부나 그 기능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많은 이견이 있다. 2010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임나일본부설과 관련해 임나일본부의 존재 자체가 없었다는 데에 의견을 같이 했음을 밝히고 있다.[1] 다만 일본의 몇몇 교과서에는 이 내용이 그대로 실리기도 하였는데 이는 곧 임나일본부설이 공식적으로 폐기된 학설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육과정에서 이를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음을 나타낸다.[2]


사료[편집]

임나(任那)는 삼국사기 강수전의 '임나가량(任那加良)'이나 진경(眞鏡)대사 탑비에 쓰여진 '임나왕족(任那王族)인 흥무대왕 김유신'[3] 에서도 쓰고 있는 말로, 임나는 가야 연맹체의 중심이었던 가락국의 별칭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본 측 사료에서는 가야 전체를 가리키거나 가락국 뿐만 아니라 반파국, 안라국 등 가야 연맹체의 특정국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고 있다.

《일본서기》에는 진구 황후가 369년 가야 지방을 점령해 임나일본부를 두고 실질적인 통치를 하다가 562년 신라에 멸망했다고 쓰여 있다.

광개토왕릉비의 신묘년(391년)에 해당하는 기사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이 부분의 내용은 신묘년에 일어난 구체적 사건을 적은 기사라기보다는 396년부터 407년까지 사이에 고구려가 벌인 남진정책의 명분과 성과를 집약 기술한 집약문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부분은 비문이 파손되고 "海"의 경우 "每"를 고친 것으로 볼 여지가 있어서 비문의 일부가 일제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원문: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 破百殘□□新羅 以爲臣民.

백잔(백제), 신라는 과거 속민으로 조공을 해왔었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년)에 내습하니 바다를 건너 백잔, □를 격파하여 신라를 [구원하고] (모두) 신민으로 삼았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 □□ 신라를 격파하고 (모두) 신민으로 삼았다.(논란 부분을 참고할 것)

일본에서는 손상된 글자를 "任那"라고 주장하여 "왜가 바다를 건너(渡海) 백제, 임나,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4]

반면, 한국에서는 손상된 글자에 대해 같은 기사의 바로 다음에 "영락 6년에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잔을 토벌했다."고 쓰여있는 것과 당시 백제와 왜가 연합해 신라를 압박했던 상황, 광개토왕릉비의 여러 기사에서 백제와 왜가 연합하고 고구려가 왜를 궤멸시켰다고 쓰여 있는 것을 근거로 "(고구려가) 신묘년에 왜가 내습하니 백제, 왜를 격파하여 신라를 구원하고 (모두)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하는 주장이 많다.

그밖에 고구려가 백제를 상대로 남진전쟁을 일으킨 것은 백제와 연합한 왜가 제후국인 신라를 공격했기 때문이라는 전쟁 명분을 기술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최근에는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일본인 학자들도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5]


남조(南朝) 송(宋), 제(齊), 양(梁) 나라의 역사기록에 나오는 왜왕의 책봉기사도 들고 있다. 여기에는 왜왕이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제군사왜국왕(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 諸軍事倭國王)"이라는 관작(官爵)을 인정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송에서는 백제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 대한 왜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듯한 칭호를 내린 것으로 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의 칠지도(七支刀)에 대해서도 왜의 군사적 우세와 한반도 남부 지배를 인정한 '번국(蕃國)' 백제가 야마토 조정에 바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임나일본부설 비판[편집]

《일본서기》는 8세기 초에 쓰여진 책으로써 그 내용이 의심스럽고 상호 모순되는 부분이 많아 지금은 일본의 학자들도 비판을 하는 자가 상당히 많다. 임나일본부설과 관련된 일본서기의 대표적인 왜곡으로 백제의 장군 목라근자(木羅斤資)에 대한 일본서기의 서술이 있다. 일본서기 382년 기록[6] 을 보면 전쟁에서 대가야를 구원한 사람은 백제 장군인 목라근자로 되어 있다. 그러나 목라근자의 가야제국(諸國) 평정과 대가야 구원을 마치 천왕의 명에 따라 일본에 파견하여 이루어진 것처럼 왜곡되고 있다. 백제는 내륙국이였던 대가야를 바로 구원할 수 있었지만, 일본은 내륙에 있는 대가야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바다를 건너 한반도 남쪽 지역들을 뛰어넘어야 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7] 이 기록을 근거로 일본의 학자들은 일본이 가야를 200년 가까이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했었다.

'일본' 이라는 국호는 고구려,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한 7세기 이후에 사용된 것이니 만큼, 4세기에 '일본' 이라는 명칭이 들어가는 '임나일본부' 가 있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8]

임나일본부는 중요한 역사 기록 일텐데 고사기에는 전혀 기록이 되어 있지않다. 720년 편찬된 일본서기보다 8년 전 편찬된 고사기에는 신공왕후의 임나정벌과 같은 사실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9]

200년간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데 한국의 기록에 이를 입증할 만한 단서가 전혀 없다. 단지 '임나' 라는 지명만이 광개토왕릉비, 삼국사기, 진경대사탑비에 보일 뿐이다.

왜의 가야 지배를 입증할 고고학적 유물이 전혀 없다. 만약, 왜가 가야를 정복했다면 4세기에 가야 유물이 끊기고 6세기에 왜의 유물이 출토되어야 한다. 하지만, 출토된 유물은 4~6세기까지 가야유물이 계승된다.

5세기~6세기 전반에 걸쳐, 야마토왕조가 가까이 있는 구주왕조를 정복하고 있지 못했는데, 그 이전(4세기)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정복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않는다. 4세기는 백제의 근초고왕 전성기로써, 백제의 전성기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 지방을 정복할 수는 없다.

그 당시, 배의 운송 능력이 군인 25명, 말 2~3필 정도이다. 이러한 능력으로는 일본 열도로부터 한반도 남부 지방을 경영할 만한 충분한 병력과 물자를 한반도에 전달할 수 없다.

남조(南朝)의 송(宋)으로부터 받았다는 왜왕의 책봉기사 역시 왜왕이 받은 칭호의 등급이 고구려, 백제보다 낮았다는 점에서 해당 칭호는 별 의미가 없음이 중국 기사로 확인된다. 왜왕은 478년에 안동대장군을 받았는데, 백제왕은 420년에 그보다 두단계 높은 진동대장군을, 고구려왕은 백제왕보다 두단계 높은 정동대장군을 받았다. 당시 중국과의 교류가 없던 신라를 빼고, 왜왕이 중국왕조들에게서 받은 칭호는 항상 고구려, 백제보다 낮았다.

칠지도 앞면의 후왕(侯王)은 왜왕(倭王)을 가리키는 것으로 백제가 왜의 상국이었음을 뜻하고, 뒷면에 전시후생(傳示後世,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은 전형적으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명(下命)하는 형태의 문장이라는 점에서 칠지도는 백제가 왜왕에게 하사한다는 뜻으로 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현대의 학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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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일본부설에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이들 학설 가운데 몇 가지를 뽑아 보면,


일본이 가야 지방에 일본부를 두고 가야를 실제로 지배했다는 설.(스에마쓰 야스카즈, 이시모다 다다시 石母田正, 야기 아쓰루 八木充의 說, 기존 일본 학계의 통설이었던 說)

가야 지방의 일본인을 관리하기 위해 일본 조정이 세운 기관이었다는 설.(일본의 이노우에 히데오 井上秀雄의 說)

일본과 외교 관계가 돈독했던 가야 동맹의 한 나라였다는 설.[출처 필요]

교역을 위해 양국이 교류한 흔적(교역기관)이라는 설.(이병도, 이근우, 김태식과 요시다 아키라 吉田晶의 說)

가야인이 일본 열도로 건너가 세운 나라였다는 설. (김석형의 說)

백제가 가야를 지배하기 위해 세운 기관(백제군사령부)이었다는 설. (천관우, 김현구의 說)

한국의 역사학자 이병도는 일본사에서 소위 임나일본부(ヤマトノミコトモチ)란 왜관(倭館)의 관리와 같은 종류의 것으로서 이 때에는 다소의 정치활동을 겸하였던 것인 듯 하거니와, 이 역시 본질적으로 구명(究明, =규명)하면 철, 금, 은, 직물, 재보(보석), 기타 곡물의 무역취인을 주로 맡던 일종의 공(公)적 상관(商官)이라고 설명하였다.[10]

또다른 학설.(백제 성왕의 대가야 진출을 의미)

같이 보기[편집]

가야

광개토왕릉비

고훈 시대

전방후원분

칠지도

분국설

각주[편집]

이동 ↑ 여홍규 기자 (2010년 3월 23일). “한일 양국 역사학자 "임나일본부는 없었다"”. 문화방송.

이동 ↑ ““일본이 고대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說은 거짓말””.

이동 ↑ 大師諱審希俗姓新金氏其先任那王族草拔聖枝每若隣兵投於我國遠相興武大王

이동 ↑ ::자료마당::

이동 ↑ 한·일 역사공동위 결론… 日 "임나일본부설 근거없다",《세계일보》, 2008.12.21

이동 ↑ 일본서기 "百濟記云、壬午年、新羅不奉貴國。貴國遣沙至比跪令討之。新羅人莊飾美女二人、迎誘於津。沙至比跪、受其美女、反伐加羅國。加羅國王己本旱岐・及兒百久至・阿首至・國沙利・伊羅麻酒・爾汶至等、將其人民、來奔百濟。百濟厚遇之。加羅國王妹既殿至、向大倭啓云「天皇遣沙至比跪、以討新羅。而納新羅美女、捨而不討、反滅我國。兄弟人民、皆爲流沈、不任憂思。故、以來啓。」天皇大怒、卽遣木羅斤資、領兵衆來集加羅、復其社稷。一云、沙至比跪、知天皇怒、不敢公還、乃自竄伏。其妹有幸於皇宮者、比跪密遣使人問天皇怒解不、妹乃託夢言「今夜夢見沙至比跪。」天皇大怒云「比跪何敢來。」妹、以皇言報之。比跪、知不兔、入石穴而死也。"

이동 ↑ 김현구 (2002).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창작과비평사. 56~60쪽. ISBN 9788936482251.

이동 ↑ 김현구 (2002).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창작과비평사. 70~73쪽. ISBN 9788936482251. '일본(日本)'이라는 명칭은 7세기에 생겨난 말로 '일본현읍'이라는 표현이 보이는 509년에는 '일본현읍' 중의 '일본'이라는 표현은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동 ↑ 임라일본부 연구

이동 ↑ 삼한문제의 신고찰(6), 이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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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청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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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청의 난(妙淸-亂, 1135년 1월 19일(음력 1월 4일) ~ 1136년)은 고려 인종 때 승려 묘청 등이 금국정벌론과 서경천도론이 개경 귀족들의 방해로 무산되자 서경(西京)[1]에서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 군호(軍號)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하여 대위국(大爲國)을 선언하고 일으킨 반란이다. 대위국이라는 새로운 국가이념 차원의 반란은 김부식이 지휘하는 진압군의 공격을 받고 내부 분열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1년간 치열하게 지속되었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주의 사학의 선구자인 단재 신채호는 묘청의 난을 두고 '조선역사상 1천년래 제1대 사건'이라 했다.[2] 묘청의 난을 가리키는 요즘 이름으로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있다.


목차  [숨기기] 

1 배경

1.1 서경 천도 운동과 금국정벌론

1.2 서경파와 개경파의 갈등

2 개경파의 반발과 천도운동의 좌절

3 경과

3.1 묘청의 반란

3.2 정부군의 진압

4 평가

4.1 신채호의 평가

4.2 반론

4.3 묘청에 대한 비판

5 영향

6 기타

7 관련 항목

8 각주

배경[편집]

서경천도론을 처음 내세운 사람은 묘청이었다.[3] 그는 일관 백수한을 제자로 삼고 이른바 음양비술이라고 일컫는 풍수설을 바탕으로 서경세력들을 규합하고 있었다.[3] 그 결과 정지상을 비롯하여 내시낭중 김안, 홍이서, 이중부, 문공인, 임경청 등이 묘청의 풍수설에 매혹되었다.[3] 그는 유교를 신봉하는 관료들의 사대적이고 유약한 태도를 비판하면서 칭제건원, 즉 중국처럼 왕을 황제라 부르고 연호도 중국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풍수지리사상에 입각하여 개경은 이미 지세가 다 했고, 서경의 임원역에 궁궐을 지으면 36방의 주변국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릴 것이라며 왕을 설득했다.[2]


북방에서는 여진족이 힘을 길러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금(1115년)이라 한 다음 고려에게 형제관계를 맺자면서 스스로 형이라고 자처하고 있었다.[2] 묘청은 이를 두고 당치도 않은 일이라며 금나라의 국서를 내칠 것을 주장했다.


여진족은 본래 압록강 연안 및 연해주 일대에 살면서 늘 고려에게 복속해오던 민족이다. 고려의 관료들은 이같은 민족적 치욕을 당하면서도 소극적 태도를 취할 뿐이었다.[2] 묘청은 서경 천도와 아울러 금을 정벌할 것을 주장했다. 묘청 이외에도 정지상, 백수한 등이 칭제건원과 북벌에 적극 동조했다.[2]


서경 천도 운동과 금국정벌론[편집]

이런 상황에서 개경에 기반을 둔 기존 세력이 아닌 서경의 신흥 세력이 부각되었다. 이들 서경 세력은 고려 4대 국왕 광종 이후 주도권을 개경과 개경 이남의 문벌 귀족 출신에게 빼앗긴 세력이었다. 특히 서경 출신이자 빼어난 시인으로 알려진 정지상은 이자겸 제거에 공을 세운 권신 척준경을 과감히 탄핵해 그를 귀양 보내는 데 공을 세웠다. 이로써 정지상은 인종(仁宗)의 최측근으로 부상했다. 정지상은 서경 출신의 승려인 묘청의 사상을 신봉했고, 묘청을 인종에게 소개하였다.


풍수지리설의 대가(大家)로 알려졌던 묘청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고려가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은 수도인 개경의 지덕(地德)이 쇠약한 때문이라고 역설하였다. 따라서 나라를 중흥하고 국운을 융성하게 하려면 지덕이 왕성한 서경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덕(地德)이 다한 개경을 버리고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면 금나라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고, 중심국가가 될 수 있다고 묘청이 주장하였다. 묘청 일파는 역대 고려 사회의 민심을 지배해온 도참설에 의거하여, 인종의 용기를 북돋워 개경의 문벌 귀족 세력에 맞서 서경천도 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들 개경의 문벌귀족 세력을 유교주의, 사대주의 세력 또는 “개경파”로, 묘청 일파를 국수주의, 배타주의(排他主義) 세력 또는 “서경파”로 일컫기도 한다.


당시 고려 사회에는 신라 말기 이래 풍수지리설이 크게 성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묘청 등의 주장은 큰 호소력을 가지게 되었다. 1126년(인종 4) 정지상도 백수한과 더불어 묘청의 주장을 거들었다. 왕의 측근과 조정 대신들을 설득하여 묘청을 성현으로 추천하여 모든 정사의 최고 고문으로 삼을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묘청은 곧 인종의 총애와 함께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고, 묘청의 건의를 받아들인 인종은 1127년(인종 5) 이후 서경에 자주 거둥하였다. 이와 동시에 서경 천도는 곧 실현될 듯이 보였다. 처음에는 유신들이 의심하여 반대했으나 결국 그들이 내세운 풍수지리설에 설득 되어, 묘청 등은 인종의 서경행차에 성공하고 15조항의 유신정교(維新政敎)를 선포하였다.


1128년(인종 6) 묘청의 건의에 따라 임원역(林原驛)[4]에 대화세(大花勢)가 있으므로 그곳에 신궁인 대화궁을 세우면 천하통일을 이루고, 금나라 및 그밖에 많은 나라가 고려에 항복하여 조공할 것이라 하여 서경 천도 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당시 인종도 이자겸·척준경(拓俊京) 등의 난으로 궁궐이 소실되자 그해 11월부터 신궁 건설에 착수하게 되었다.


서경파와 개경파의 갈등[편집]

1131년(인종 9)에는 인종을 설복시켜 새 궁궐에 팔성당(八聖堂)을 신축하여 보살·석가·부동(不動) 등 8개의 상(像)을 그려서 안치시켰다. 이듬해 1132년 왕은 이자겸(李資謙)의 난으로 불타버린 채 있던 개경의 궁궐을 영수(營修)함에 있어 묘청과 그 일파들에게 궁터를 보게 하니, 묘청은 서경 천도를 목적으로 개경의 궁터가 서경의 그것보다 못하다고 역설하여 드디어 공사는 중지되고 왕은 묘청의 인도를 받으며 서경에 내려가 천도를 결정지으려 했으나, 김부식·이지저(李之底) 등 사대적(事大的)인 개경의 귀족이 반대하여 중지되었다.


그 후 인종은 다시 개경으로 가서 머물다가 1132년 왕궁이 수축되자 서경행을 결심한다. 묘청은 인종을 수행하여 서경까지 갔다. 왕궁을 수축하자 다시 서경으로 행차하였는데, 이때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고 돌풍이 불기 시작했다.[5] 이때문에 인종을 태우고 가던 말들이 놀라 엉뚱한 곳으로 달려가 진창에 빠져버렸고, 호종하던 시종들은 왕의 행방을 잃고 찾아다니는 사태가 발생했다. 게다가 그날 밤 눈발이 날려 낙타가 죽고 말과 사람이 다치기도 했다.[5] 서경 가는 길에 사고가 발생하자 개경파 귀족들에게 심한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묘청을 배척하는 소리가 높아갔다. 1133년 직문하성 이중, 시어사 문공유 등이 상소하여 묘청을 비롯한 그 일당들을 멀리할 것을 상소하였지만 인종은 수용하지 않았다. 인종은 오히려 1134년 묘청을 삼중대통지 누각원사로 삼고 자색의 관복을 하사하였다.[5] 인종의 신임을 확신한 묘청은 다시금 '칭제건원'을 상소하였지만 김부식이 이끄는 개경 세력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5] 이렇게 되자 조정은 묘청이 이끄는 서경세력과 김부식이 이끄는 개경 세력으로 분리되어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5]


그러나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친 왕은 마음이 바뀌었다.[6]


개경파의 반발과 천도운동의 좌절[편집]

그러나 당시 조정 안에는 서경 천도 계획에 반대하는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 김부식은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이들은 정지상·묘청 등 서경파의 의도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개경파의 반발에 초조해진 묘청 일파가 지나친 농간을 부린 것이 폭로되자 유신들의 강경한 반대가 대두되었다. 결국 인종은 서경 천도를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특히 묘청은 대화궁을 지으면 천하를 통일할 수 있고 금나라도 저절로 항복할 것이며, 그밖에 많은 나라가 와서 조공할 것이라고 장담하였으나, 준공 뒤에도 전혀 달라진 것이 없고, 오히려 자연재해가 잇따라 일어나기도 했다.


묘청은 상징 조작에 능했다. 이를 이용하여 인종의 총애를 받고 권력을 차지했다. 그러나 그 도가 지나쳐 오히려 신뢰를 잃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 가지 사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1132년(인종 10년) 음력 2월, 인종이 묘청을 따르게 하고 서경으로 가던 중 큰 폭풍우를 만나 수많은 인마가 살상되고 인종을 비롯한 대소신료가 고초를 겪었다. 이에 묘청의 입장은 난처해졌다. 폭풍우와 고생이 묘청의 탓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자 묘청은 무리수를 썼다. 기름이 들어간 떡을 강에 던졌던 것이다. 기름떡에서 흘러나온 기름이 수면에서 오색으로 빛났고, 묘청은 이를 용이 침을 토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이런 현상은 천 년에 한 번 있기도 힘든 상서로운 기운이라는 것이다. 묘청과 검교태사를 지낸 이재정 등 서경인 50여 명은 이때 금나라를 공격하자고 했다.


하지만 신중했던 인종은 결정을 미루고, 대신에 문공인과 참지정사 이준양에게‘용의 침’을 조사하게 했다. 그 결과‘용의 침’은 기름떡을 가지고 농간한 것임이 탄로났다. 묘청과 정지상 등의 정치적 위신은 크게 실추되고, 조정에서는 묘청 일파에 대한 숙청 요구가 잇따랐다. 그러나 인종은 용인하지 않았다. 오히려 얼마간은 서경의 대화궁에 행차할 것을 요청하는 묘청의 건의를 절반쯤 받아들여 옷만이라도 보내게 했다. 묘청이 무리하면서까지 대화궁 행차를 거듭 왕에게 청원한 것은 서경 천도를 기정사실화하고자 했던 때문이다.


이외에도 풍수지리상 명당이라던 대화궁이 여러 번 벼락을 맞아 불탄다거나, 극심한 가뭄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굶어죽기도 했으며, 또 대동강에서 뱃놀이하던 인종이 풍랑을 만나 큰 위험을 당하기도 했다. 이런 일이 계속되자, 인종도 묘청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중(李仲)·문공유(文公裕) 등이 묘청 배척상소를 올렸으며, 이어서 임완(林完)이 시폐(時弊)를 통론하고, 마침내 개경파의 거두인 김부식이 서경 행차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니, 그에 인종이 서경 천도를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결정적 사건이 발생한다.


경과[편집]

묘청의 반란[편집]

이렇게 사태가 반전되자 묘청은 1135년(인종 13년) 정월 어서경의 분사시랑 조광(趙匡) 및 병부상서 유참 등과 반기를 들고 개경의 중앙 정부에서 파견된 부류현(副留縣) 수령 이하 관리들과 상경인(上京人)[7]으로서 서경에 와 있던 사람을 모조리 잡아 가두었다.


한편, 자비령 이북의 길을 막고 서북면의 모든 관청, 즉 주군수까지의 관리들을 서북인만으로 충당시킨 다음 서북면 안에 있는 모든 고을의 군대를 서경에 집결하게 하고 국호를 대위국(大爲國), 연호를 천개(天開), 군대의 호칭을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고 하였다. 이어 개경으로 진격해 들어갈 뜻을 밝혔다.


정부군의 진압[편집]

인종은 사신을 보내 반란을 멈출 것을 권유했으나, 묘청 일파는 왕을 바꾸기 위해 일어난 반란이 아니며, 서경으로 천도하면 다시 충성할 것이리라고 답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신하가 군주를 오라가라 할 수 없다며, 이를 역모로 규정하고 토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조정에서는 김부식을 평서원수로 하는 진압군을 파견하였다. 김부식은 출정에 앞서 개경에 남아 있던 묘청 일파인 정지상·백수한·김안(金安) 등을 참수하였다.


김부식은 좌·중·우 3군을 지휘하여 서북면으로 진격하였다. 평산역―관산역[8]―사암역[9]을 거쳐 성천에 이르렀다. 거기서 토적(討賊)의 격문을 발하여 여러 성에 보내어 서경 주위의 여러 성(城)을 산하에 끌어들여서 이들을 달래었다. 다시 3군을 지휘하여 연주(連州)[10]를 거쳐 안북대도호부[11]에 다다랐다. 그 과정에 많은 성들이 중앙정부군(진압군)에 호응·협력하게 되어 정세는 진압군에게 유리하게 되었다.


진압군은 서경을 먼저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지역을 제압하여 서경을 고립시키는 데 주력했다. 이윽고 서경 주변 지역에 대한 제압이 끝나자 그제야 진압군은 서경을 포위하였다.


서경에는 7∼8차례 사람을 보내어 항복을 권유하였다. 승산이 없음을 안 조광 등이 묘청과 유참, 유참의 아들 유호(柳浩)의 목을 베어 분사대부 윤첨(尹瞻)을 고려 조정에 보내 항복의 뜻을 표시하고 죄를 용서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고려 중앙정부에서는 조광 등의 죄를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고, 윤첨을 옥에 가두었다. 이 사실을 안 조광은 빠져나갈 길이 없다고 판단하고, 끝까지 맞서 싸울 것을 결심한다. 그 뒤 개경 정부의 어떠한 회유 교섭도 단호하게 거절하였고, 인종과 김부식이 회유하기 위해 보낸 사절들도 죽였다.


묘청은 어이없이 죽었지만, 반란은 그 후 약 1년 동안 계속되었다. 진압군은 중·좌·우·전·후의 5군으로 나누어 평양성을 완전 포위하였으나, 반란군의 결사적인 항전으로 크게 고전하였다. 그러나 포위당한 평양성에서는 식량 부족으로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고, 1136년(인종 14) 2월 진압군은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이미 식량도 사기도 떨어진 반란군은 진압군이 성으로 진입하자, 도망가기에 이르고 반란군의 수장인 조광 등이 스스로 몸을 불태워 목숨을 끊자, 성 안의 사람들이 장수 최영(崔永)을 붙잡아 정부군에 항복함으로써 반란은 끝났다.


평가[편집]

[중립 필요] 묘청의 난에 대한 평가는 찬반이 분명하다. 조선 말 일제 강점기 초기에 활동했던 신채호는 민족사관의 입장에서 묘청의 난을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으로 평가한다 만일 성공했으면 조선사가 독립적 진취적으로 발전했으리라고 한탄한다(묘청 개인에 대하여는 광망하다는 표현을 쓰며 부정적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적지 않다. 당시 개경세력과 이에 반발한 지방 세력(서경) 간에 권력투쟁일 뿐이며, 금국정벌론 등은 단지 명분뿐이라는 것이다.


이 서경천도운동은 그들의 공리심과 서경인의 기질 등이 작용하였음은 물론이나, 그밖에 그들의 정치적 혁신의 의욕도 간과할 수 없다. 당시 국내외의 정세에 비추어 개경의 타성적이며 부패한 귀족 사회의 생태를 좌시할 수 없어, 당시 인심을 지배하고 있던 음양도참설을 교묘히 이용하여 서경인 중심의 중흥정치를 베풀어 보고자 한 것이 그들의 당초의 이상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신채호의 평가[편집]

신채호는 한국 고유의 낭가사상이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의 좌절로 단절되었다고 하였다.


서경 전역(戰域)을 역대의 사가들이 다만 왕사(王師)[12]가 반적(反賊)을 친 전역으로 알았을 뿐이었으나, 이는 근시안의 관찰이다. 실상은 이 전역이 낭(郎)·불(佛) 양가 대 유가(儒家)의 싸움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이 전역에서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승리하였으므로 조선의 역사가 사대적·보수적·속박적 사상, 즉 유교 사상에 정복되고 말았거니와, 만일 이와 반대로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 등이 승리하였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진취적 방면으로 진전하였을 것이니, 이 전역을 어찌 ‘일천년래 제일대사건(一千年來第一大事件)’이라 하지 아니하랴.

— 신채호, 《조선사연구초》

민족사학자 신채호는 묘청의 운동을 낭불양가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고,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으로 규정한 바 있다.[13] 그는 '우리 나라의 종교, 학술, 정치, 풍속이 사대주의의 노예가 된 원인이 바로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실패한 데 있다.[14]'고 하면서, 이 사건이 바로 고대 이래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진취적이고 독립적인 자주사상이 사대적 유교사상으로 바뀌는 전환점'이라 했다.[14] 그에 따르면 '낭·불 양가 대 유가, 국풍 대 한학파, 독립당 대 사대당,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전쟁이며 전자의 대표는 묘청, 후자의 대표는 김부식이다.[14]


그는 묘청의 난이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유가의 사대주의가 득세하여 고구려적인 기상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애석해 하기도 했다.[13]


반론[편집]

묘청이 주장한 금국정벌론이 현실성이 없다는 평가다.[출처 필요] 식민 치하에 있던 신채호가 묘청을 적극적으로 평가했던 것은 금국 정벌이라는 주장 때문이며, 조선의 독립 의지를 키우기 위해서라도 민족 자주적인 입장에 선 사례를 찾고자 했다는 것이다. 신채호의 기대와 달리 묘청 세력의 금국 정벌 주장은 실현은 거의 힘들었으며, 기병강국이던 금나라를 보병 위주의 고려군이 공격하여 성과를 내기는 힘들다고 주장했다. 방어자 입장에서는 전통력으로 산성 중심으로 적 기병대의 충격력과 기동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방어가 가능했으나, 만주로 공격을 하게 된다면 우수한 기병대가 절대 부족했던 고려가 만주 일대의 평원에서 치러지는 전투에서는 절대 불리할 것이란 주장이다. [출처 필요]


묘청에 대한 비판[편집]

묘청은 간신 혹은 임기응변가라는 비판도 있다.[출처 필요] 경과에서 보았듯, 자신의 군대마저 제대로 조직하지 못한 묘청에게 금국정벌론은 일종의 여론호도책이며, 묘청이 권력을 얻는 방식이나 세력을 규합하는 방법은 전형적인 간신의 방법이었다고 비판한다. 묘청과 정지상 등이 원했던 것은 단지 개경 귀족 세력이 독점한 권력을 서경 세력이 대체하는 것뿐이라는 비판이다.[출처 필요]


영향[편집]

묘청의 난이 진압된 뒤 고려사회는 표면상 평온을 되찾았으나, 이 반란이 고려사회에 끼친 영향은 컸다.


우선 권력구조에서 서경의 지위가 크게 격하되었다. 이와 함께 고려 권력구조의 균형이 깨졌다. 즉 서경 세력은 개경의 문신 귀족 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담당하여 왔는데, 서경 세력의 쇠퇴는 개경의 문신 귀족 세력의 독주를 가능하게 하였으며, 문신(文臣)의 위신을 높이고 무신(武臣)을 멸시하는 풍조를 낳게 하여 후에 무신의 난을 유발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문신 귀족 세력은 더욱 득세하게 되어 왕권마저 능멸하는 풍조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자겸의 난을 극복했던 것을 계기로 새로운 정치 질서를 수립할 수 있었던 기회를 인종은 인재 기용의 실패로 놓쳤던 것이다. 결국 뒤이어 왕위에 오른 의종은 무신의 난으로 인해 정상적인 정치체제가 붕괴되기에 이르게 된다. 인재 기용의 실패로 왕권은 땅에 떨어지게 된 것이다.


당시 문신 귀족사회가 안고 있던 정치적·사회적·경제적인 모순과 폐단은 뒤에 무신정변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기타[편집]

신채호는 김부식의 행위야 말로 그 어느 전란보다도 우리 역사를 단절, 왜곡시키는 데 악영향을 끼쳤다고 보았다. 그에게 김부식의 승리는 곧 묘청이 대표하는 민족 고유의 전통적인 '진취적 자주사상'에 대한 '사대적 보수적 속박사상-유교사상'의 승리였다.[15] 그래서 이 사건을 조선역사상 1천년래 제1대 사건이라 부른 것이다.[15]


관련 항목[편집]



C46 – 동경대전 (東經大全) / 최제우(崔濟愚, 1824-1864)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시천주(侍天主) 사상으로 외래종교사상을 수용하여 주체적인 민족종교로 창시한 동학의 바이블인 <동경대전>은, 창시자인 최제우가 지은 동학의 경전으로 <포덕문><논학문><수덕문><불연기연>(布德文, 論學文, 修德文, 不然其然)의 네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당시의 천주교 잠입과 서세동점을 직시한 최제우는 이 책에서 인내천으로 표방되는 동양의 전통적 인도주의와, 서교에서 영향 받은 종교적 요소를 적절히 조화하여 서학에 대비한 동학의 교리와 사상 전반을 압축하여 서술하고 있다.

 

a. 생애와 작품활동

경북 경주의 명문가문에서 태어난 최제우의 어릴적 이름은 복술이고, 제우는 어리석은 중생을 구한다 는 뜻으로 35세때 스스로 고친 이름이다. 어릴적부터 두뇌가 명석하고 용모가 수려했던 그는 최치원의 28대 후손이라는 양반으로의 자부심과 서자로서의 열등감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적서의 차별로 출세의 길이 막힌 상황에서 고민을 거듭하다, 민간신앙을 통한 입신의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20세 이후부터는 전국을 주유하면서 삼정문란과 외세의 침략으로 비참한 민중생활을 목격했다. 구세제민의 뜻을 품고 방랑을 계속한 그는 천명을 알기 위해 1856년(32세) 여름에 양산 통도사 뒤 천성산에서 단을 쌓고 천주강령을 염원하는 49재를 올리다가, 이틀만에 숙부의 죽음을 신통으로 알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과연 숙부가 작고해서 초상을 치르고 있었다 그 다음에 다시 천성산에 들어가 지성으로 49재를 올렸으나 응답을 얻지 못하고, 1859년(35세) 처자를 거느리고 부친이 글을 가르치던 경주 구미산 아래의 용담정으로 이사하였다. 이때 이름을 제우라 개명하였다. 그가 용담정으로 들어간 지 6개월이 지난 1860년(36세)에 몸이 마구 떨리고 가눌 수 없는 어떤 황홀한 경지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후 최제우는 마음을 가다듬어 기를 다루는 공부에 열중하였다. 그후 <용담가><교훈가> 등 한글가사를 지어 전파하고 마음속에 한울님을 모시는 일에 열중하였다. 다음해에는 정식으로 지극한 기운이 지금 이르러 크게 내리도록 비나이다. 한울님을 모셔 조화가 정해지는 것을 영생토록 잊지 아니하면 온갖 일을 알게 되나이다 라는 주문을 지어 늘 염송했다 한다. 그리고 그 도를 천도 또는 동학이라 했다.

그는 열심히 주변 사람들에게 동학을 가르쳤다. 1861년 정부의 눈총을 피해 전라도 남원 은적암에서 <권학가>를 지어 돌리고, 이듬해 3월 다시 경주로 돌아와 적극적으로 포교를 하였다. 이때 최시형이 찾아왔는데, 가문이나 학식은 보잘것없어도 지성으로 수도에 힘써온 그를 후계자로 심중에 두었다. 이에 감격한 최시형은 더욱 분발하여 수도와 포교에 힘쓰게 되었다.

반면에 동학이 널리 전파되자 정부의 감시가 더욱 심해졌고, 드디어 그 해 9월 수운은 체포되었다. 그러자 수백 명의 제자들이 찾아가서 수운의 가르침은 민속을 해치지 않는다고 탄원하여 무죄석방 되었다. 1863년(39세) 8월 최시형에게 도통을 물려주었는데, 이 무렵 조정에서는 동학의 신도들이 놀랍게 늘어나는 것을 두려움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12월 최제우는 23명의 제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달성공원에서 혹세무민과 좌도난정으로, 득도한 지 3년 만인 나이 40세에 처형되었다.

그후 2대 교주 최시형은 최제우가 남긴 글을 정리하여 <동경국전>과<용담유사>를 간행하는 등 교리의 체계화와 교세확장에 주력하였다. 그리하여 1894년 우리 역사에 한 획을 긋는 동학농민 전쟁이 일어났고, 최시형은 1897년 손병희를 후계자로 정하고 1898년 한성감옥에서 순교하였다.

조선에서 점차 일본의 지위가 굳어지자, 교도 중 이용구는 동학의 기반을 이용하여 진보회를 조직, 친일정당으로 활동하자 손병희는 교명을 천도교로 개칭하고(1905년), 망명했던 일본에서 귀국하여 교풍쇄신에 착수하였다. 그는 인내천사상과 보국안민(輔國安民) 광제창생(廣濟蒼生)을 기치로 하여 지상에 천국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였고, 1919년 천도교인 15명과 그리스도교인 16인, 불교도 2인이 31운동을 일으켰으나, 그후 일제의 탄압으로 천도교는 쇠퇴하였다.


b. 동학의 발생과 그 사상

조선 후기 사상계의 혼란 속에서 나타난 두 가지 움직임이 있었다면 하나는 천주교의 전파요, 다른 하나는 동학의 발생이다. 천주교가 서울을 중심으로 퍼져간 반면, 동학은 농촌 속에서 자라났다. 동학은 매우 강렬한 민족주의적 성격을 가진 종교로서, 당시 서양 제국주의의 위협과 천주교의 유포 등 대외적 위기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최제우가 양반사회의 유교사상을 극복하고 천주교에 대항하고자 유불선 3교를 융합하여 새로운 종교를 개창하였다.

동학이란 명칭 자체도 서학, 즉 천주교에 대항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다. 또한 동학은 초세속적이고 윤리적인 종교였다. 우선 그 교리는 당시의 민심을 반영하여 인심이 곧 천심이라는 인내천의 사상을 기본으로 하였는데, 이는 동양의 전통적인 경천사상과 밀접한 것으로, 그 가운데서도 특히 운수관으로 표현되는 천운순환론과 인도가 천도에 합치해야 한다는 도덕론이 핵심을 이루었다. 따라서 천운에의 순종과 천도에의 합치를 통해서 모든 인간은 군자가 될 수 있으며, 이런 점에서 일체의 신분계급을 떠난  평등사상을 주장한 셈이다. 동학이 주로 농민 등 억압받는 피지배층 사이에서 열렬히 신봉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농민들은 종교로부터 이러한 윤리적 측면보다는 현실구복적인 이익을 갈구하고 있었다. 따라서 동학은 질병의 치료, 길흉에 대한 예언 등 당시 유행했던 민간신앙의 요소를 흡수하였다. 이와 같은 동학은 인내천의 윤리사상과 현실구복적인 성격을 모두 갖추고 있었는데, 이 가운데 전자는 주로 잔반 등 지식층을 위한 것이었고, 후자는 무지한 일반대중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으니, 경전 역시 한문으로 된 <동경대전>과 한글로 된 노래집인 <용담유사>의 두 가지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이 두 사상을 하나로 체계회시킨 매개체는 귀신관 이었다. 귀신은 전통적인 경천사상과 연결되는 동시에 민간신앙에서도 전승되어 오는 관념적 실체로서, 우주만물의 성쇠나 사철의 변화 등은 모두 이 귀신의 조화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또 동학에서는 이 귀신을 기로 파악함으로써 주자학의 기철학과 접합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기본구조를 바탕으로 불교도교의 신비적 요소와 천주교의 형식까지

수용하였던 것이다.


c. <동경대전>의 내용

<동경대전>은 <포덕문> <논학문> <수덕문> <불연기연장> 등이고, 주문과 시문으로 된 부록을 합쳐서 총 4,846자로 된 작은 책이다. 이 책의 자매지인 <용담유사>는 순한글 가사집이다. 이 책은 최제우가 저작한 것이나, 그의 언행을 그의 제자들이 모은 부분도 있다. 이 책의 중심사상은 <포덕문>과 <논학문>이다.


   <포덕문> 

포덕문에서 밝혀진 최제우의 역사관은 #1 자연에 대한 감사도 알지 못했던 우부우민의 상고시대를 설명하고 #2 하늘을 공경하고 천리에 순응하던 요순시대의 중고시대를 흠모하고 #3 천명에 순종치 않고 각자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군대의 시대로 나누어 보았다. 

또 최제우는 이 시대를 불순도덕 미지시운 의 시대로 보고, 동학의 출현을 역사적 필연으로 보았다. 이것은 자기 의사로서가 아니라 상제의 명령에 의해 자기가 태어나서 천명을 전하는 것이라고 했다. 더구나 서양의 세력이 승승장구하니, 보국안민할 계책은 이 포덕문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다.


   <논학문>

논학문은 학문을 논한 글이다. 여기에 나오는 그의 종교체험의 순간 기록을 보자. 

이해 사월, 몸이 마구 떨리면서 밖으로는 신령과 서로 맞닿는 기운이 몸을 감싸고, 안으로는 신기한 말씀에 의한 가르침이 있었다. 그러나 애써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고 해도 들리지 않으므로 마음은 더욱 이상스럽기만 하였다. 이윽고 마음을 가다듬고 기운을 바로잡은 뒤에 어찌하여 이처럼 저에게 나타나십니까? 라고 묻자 내 뜻이 곧 네 뜻이기 때문이다. 대체 사람들이 무엇을 알랴... 라고 하느님이 대답했다. 

여기서 오심 즉 여심과 수심정기와 문답식의 주문해설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내용은 한울님을 위한 것이 대부분인데, 한울님을 위하는 마음가짐 자체가 인간이 어떤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이의 태만을 경계했다. 또 주문은 천주의 글자가 되는 것이기에, 주문을 외울 때는 자세가 단정하고 마음이 경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덕문>

수덕문은 덕을 닦는 것으로, 수도의 방법과 절차를 설명한 것이다. 이 글에선 최제우의 덕행과 제자들이 덕을 쌓는 것을 찬미한 내용들이다. 또 최제우의 가문과 용담성지를 예찬한 것이 많다. 

아름답다, 우리 도의 보람이여. 붓을 들어 글을 쓰면 사람들은 왕희지 필적인가 의심하고, 입을 열어 시구를 읊으니 누가 초부인 줄 알랴, 허물을 뉘우친 이 사람은 재벌의 부력을 탐내지 않는다, 공경과 정성을 다하여 가르치는 말이니 어기지 말라 는 문구가 들어 있다.


   <불연기연장>

불연기연장에는 우주만유는 그 생성과정에서 두가지의 상반된 원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만물은 분산고립된 것이 아니고 서로 연결된 일체의 것이며,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부단히 성장발전하는 것으로서, 한울님에 의해서 기연의 통일원리를 찾아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d. 사상적 가치

이 책에 흐르고 있는 기본사상은 인간지상주의로 인격향상을 설한 것이다. 이는 성실해라 신의를 생명같이 지켜라 등으로, 이러한 가르침은 인격의 위신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으로 요약되는 것이다. 이 <동경대전>은 천도교라는 한 교회의 경전에 그치지 않고 19세기 중엽 한국사상의 근대화 과정을 그 서민적 차원에서 대표하는 명저요, 서구세력의 아시아 침략에 대한 저항적 민족주의를 구체화한 고전이기도 하다.

이 책의 가치는 어떤 한 종교의 신앙고백이나 교리서술의 부분보다, 오히려 당시 혼란한 사회에 대한 사회비판에 있다고 보여진다. 더구나 이 경전은 현실정치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가득 차있고, 위기의 역사의식과 메시아 사상이 서민의식의 차원에서 표현된 데 사상적 의의가 있다.  

조선 후기의 서민대중의 사상적 풍토와 그 전환적 성격을 이해하는 데 있어 이만큼 뚜렷한 역사의식과 현실비판을 담은 책은 드물다. 동학사상은 그것이 한문교양에서 소외된 서민의 반항의식을 대표하기 때문에, 그 안에는 민간신앙적 요소가 다분히 존재하고 유불선이 혼재하나, 그것이 동양사상의 가치를 손상시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양반지배층의 주자학 위주의 단조로운 사상풍토와 한문학의 고식적인 동맥경화증 가운데서 독특한 민간신앙의 모습으로 평민문학의 한 국면을 장식했다는 점에서도 근대적 의식의 선봉으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이 경전은 1894년 동학혁명에서 그 사상적 근거가 되었고, 천도교가 적극 참여한 31운동시에도 민족자주의 지침이 되었으며, 일제 강점하에도 민족사상의 근간으로서, 항일독립정신의 역사적 원천으로서 그 위력을 발휘해왔다. 오늘날 일제 어용학자들이 조작해놓은 왜곡된 역사관을 바로잡고, 민족자주의 사상적 기초를 세우는데 이 동학의 명저는 귀중한 고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C45 – 의산문답(醫山問答) / 홍대용((洪大容, 1731~1783)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새로이 수용된 서구의 과학적 세계관과 전통적인 성리학적 세계관이 어떻게 결합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저술이다. 전통적 세계관을 고집하는 성리학자 허자와, 서구의 실증적인 과학을 받아들이는 실학자 실옹의 대화로 전개되는 이 책은 당시의 과학사. 철학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할 뿐 아니라, 호질의 선구가 되는 문학사적으로도 중요한 작품이다. 


a. 생애와 작품활동

 코페르니쿠스로부터 약 300년, 갈릴레이로부터는 130년 후 아시아의 한구석에도 지구가 움직인다고 외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홍대용이다. 과학사상가 홍대용은 청주 출신이다. 그는 나주목사로 오래 근무했던 관계로 부근에 살고 있던 나경진의 집에서 천문기구인 혼천의와 자명기구인 후종을 보면서 자랐다. 그는 매일 그 집에 가서 그 기구들의 원리는 물론 제작법과 이용법도 배웠다. 이들 기구를 얻기도 하고 만들기도 하면서 천문학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청주 그의 본가에서 사설 천문대인 용천각을 짓고 이들 기구를 보관하면서, 종래의 서적을 검토하고 이들 기구로 천체를 관찰했다. 

 그가 오랜 관찰과 실험 끝에 얻어낸 결론은 지구가 자전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작은아버지를 따라 청에 간 적이 있는데, 그때 청의 과학자들에게 지구자전설을 설명하여 그들을 감탄시켰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박지원 등 몇몇을 제외하고는 냉담했다. 지구가 돌면 어쨌다는 거냐, 천원지방(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난 것)은 만고의 진리인데 한낱 괴담 이라고 일축하곤 했다. 진리를 찾는 자는 예나 지금이나 외로운 법인가? 그러나 홍대용은 이런 세론에 흔들림 없이 과학탐구에 생애를 바쳤다.  

 청에 머물렀던 몇 달 동안 청의 학자들인 엄성. 반정균 등과 어울려 밤새워 학문을 논하는 가운데, 이들 사이에는 국경을 넘는 우정이 무르익었다. 홍대용이 이들에게 작별을 고할 때, 어찌나 정이 들었던지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후에 박지원이 북경에 갈 적에 홍대용은 이들에게 박지원을 소개하는 편지를 보냈으며, 엄성이 먼저 죽자 반정균은 조선의 홍대용에게 부고를 하였다. 그 후 홍대용이 죽자 박지원은 반정균에게 부고를 하였다. 죽은 뒤에도 이렇게 돈독한 우정은 계속되었다. 그러면 이들은 왜 이토록 우정이 돈독했을까? 그것은 서로가 공통적인 시대의 모순에 직면하여 이에 대한 개혁의지에 불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홍대용이 그들과 교환한 의견들을 내용으로 연기와 회우록을 기록하여 책으로 묶자, 문장가 박지원은 서문을 써서 이들의 사귐을 기렸다. 홍대용은 북경의 과학기술을 탑골에 있는 박지원의 사랑채에 모인 젊은 엘리트들에게 전파하였다. 박제가. 이덕무. 이서구. 유득공 등에게 과학기술을 통해 조선의 발전을 기약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리하여 북학파의 모임은 저절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홍대용은 청주로 내려가 기하학의 원리를 담은 주해수용(籌解需用)을 완성하였고, 또 현실개혁 방안을 담은 임하경륜(林下經綸)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이때쯤에는 자득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지식을 토대로 이론을 체계화시켜 그의 과학사상은 원숙한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러다 보니 경제적으로는 말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내키지 않는 벼슬을 10년 정도 한 후 다시 저술작업에 착수하였으나 1년 만에 중풍으로 쓰러졌다. 부음을 들은 박지원은 한걸음에 달려가 빈소에서 곤드레가 되었고, 붓을 갈겨 묘지명을 썼는데 천하의 명문으로 꼽힌다. 

  아, 슬프다. 덕보(홍대용의 자)는 툭 트이고 민첩하며, 겸손하고 아담하며 식견이 원대하고 사물의 이해가 정밀하며 일찍이 지구가 한번 돌면 하루가 된다고 하여 그의 학설이 오묘하고 깊었다. 


b. 홍대용의 과학사상: 상대주의적 세계관

 동양에서는 처음으로 지전설을 주장한 홍대용은 서양과학의 본질을 일찍이 간파하고, 이를 적극 도입하여 전통사상 속에 용해하려고 시도하였다. 그의 시도는 오늘날의 국제화에도 시사하는 점이 많다. 지구의 둘레는 9만리, 하루는 12시간이고 하루 동안 지구가 1번 돈다는 그의 지전설은 단편적인 발상이 아니라, 지구와 우주의 구조에 대해 나름대로 체계적 사색을 통해 얻은 결론이었다. 그렇기에 그에 대한 평가도 지전설 주창자로서만이 아닌 과학사상가로서 이루어져야 마땅하다. 

 서양에서는 코페르니쿠스가 이미 1543년에 지동설을 내놓았고, 갈릴레이가 종교재판에서 지동설을 부인하고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중얼거린 때(본서 1권 갈릴레이 편 참고)가 1633년으로 홍대용보다 130년 정도 앞섰다. 그러나 서양과학을 동양에 전파했던 중국의 서양 선교사들도 이단으로 판정받은 지동설을 공개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고, 중국과 일본의 학자들 가운데도 지구의 자전을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호기심과 탐구심이 많았던 홍대용은 잘못됐다는 논평과 함께 소개된 서양 천문학 책의 지동설을 읽고 오히려 지동설이 옳다는 판단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그는 지구가 너무 무거워 태양 둘레를 공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지전설의 근저에는 우주가 무한하고 외계인의 존재를 믿는 우주관이 깔려 있다. 의산문답에서 우주공간은 끝이 없고 별들도 무수히 많다고 말한다. 이 무한한 우주에는 지구를 중심으로 한 세계 말고도 얼마든지 많은 다른 세계가 있을 수 있으며, 화성의 생물은 불 속에 살면서도 차가움을 모른다며 외계생물의 존재를 주장했다. 그의 이런 우주관에 일관되게 흐르는 것은 철저한 상대주의다. 그는 심지어 생명체를 구성하는 인간. 초목. 금수 가운데 어느것이 더 귀하다고 할 수 없다고 밝혀 생태주의적 사상과도 맥을 같이하고 있다. 인간이나 지구중심주의를 벗어난 그의 상대주의적 세계관은 중국을 세계의 중심에 놓는 중화사상이나 양반과 상민의 차별을 뛰어넘는 평등주의적 사회사상으로 이어졌다. 

 홍대용은 서양과학의 강점이 수학적 방법과 실험 및 관찰에 있다고 제대로 파악했는데, 스스로 그것들을 제작하고 서양과학을 배우는 데 힘썼다. 그는 실제로 서양과학을 배워오려면 수학수준을 높일 필요가 있음을 절감하고 스스로 수학책인 주해수용을 쓰기도 했다. 


c. 의산문답의 내용

 홍대용의 사상은 담헌서에 집대성되어 있는데, 담헌서는 내집과 외집으로 나뉘어져 있다. 내집에는 #1 사서문의 삼경문변 심성문 등 경학에 관한 부분 #2 임하경륜  (정책론의 성격) #3 의산문답  (학문관. 자연관. 사회관. 국가관. 역사관 등의 종합적 성격) #4 계방일기  (세자인 정조 보좌시 쓴 일기),  외집  에는 #1 연기 건정필담  #2 항전척독  (중국 친구들과의 편지) #3 주해수용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 의산문답은 담헌 홍대용의 사상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으로 허자와 실옹이라는 두 사람의 문답체로 구성되어 있다. 은거 독서로 30년을 지낸 동해 거인 허자가 전통적인 조선의 학자를 대변하고 있고, 허자가 북경까지 가서 학문을 논해보았으나 아무 소득이 없이 돌아오는 길에 의무려산에서 은거하고 있는 서양과학을 받아들인 새로운 학자를 대변하는 실옹을 만나 문답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허자와 실옹의 대화 중 일부를 소개한다. 

 실옹: 사람의 미혹에 세 가지가 있으니, 식색에 혹하면 집안을 망치고, 이권에 혹하면 나라를 망치고, 도술에 혹하면 천하를 망치는 것이다. 그대는 도술에 혹한 데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대에게 묻노니, 그대가 말하는 현자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가?

 허자: 유가에서 현자라면 주공을 숭상하고, 정주를 배워 정학을 일으키고, 사설을 배척하고 인으로 구세하고 철로 보신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실옹: 그러니 그대가 도술에 혹하고 있다는 것을 정말 알겠구나. 슬프다. 도술이 망한 지도 오래도다. 공자가 돌아가니 제자가 공자의 뜻을 어지럽혔고, 주자가 돌아가니 제유가 주자의 뜻을 어지럽혀, 그 업만을 숭상할 뿐 그 의를 잃었구나, 말로는 정학을 일으킨다 하지만 실은 긍심에서 나왔고, 말로는 사설을 배척한다 하지만 실은 승심에서 나왔고, 구세하겠다는 그 인이란 권심에서 나왔고, 보신을 하겠다는 그 철이란 이심에서 나왔으니, 이 네 가지가 서로 어울려 천하가 도도히 허로 달음치고 있구나.

 이렇게 통론하면서 실옹은 중국역사에서 공론이 국가. 사회에 끼친 해독을 열거하면서, 허에 빠져 실을 잃은 이 나라의 장래를 은근히 걱정하고 있다. 

  의산문답에 나타나는 그의 과학지식의 상징으로는 지전설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1년에 한 바퀴씩 도는 공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지구가 지축을 중심으로 하루에 한 바퀴씩 도는 자전을 말하고 있다.  의산문답에 등장하는 여러 대목들, 즉 지전설과 그 논거로서의 일. 월 지구의 인력에 대한 것, 태양계. 우주. 태양. 지구, 달의 크기의 비례에 관한 것, 바람. 구름. 비. 눈. 서리. 우박. 우레. 번개. 무지개 등 자연현상에 관한 것, 기온, 주야의 시간차, 조수 등에관한 학설은 당시로서는 놀라운 바가 있다. 

 인간. 금수. 초목 등 세 가지 생명체는 지. 각. 혜가 있고 없음이 서로 다를 뿐이지, 어느 것이 더 귀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여 인간중심적 세계관을 배격한다. 또한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지구 위의 정계와 도계는 정해진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서로 자기가 사는 곳이 정계라 생각할 따름이다. 뿐만 아니라 우주는 무한한데, 이 속에는 지구의 인간과 비슷한 지적 존재도 더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구인과

우주인 어느 쪽이 더 귀한 것인지도 알 수가 없다.

 끝부분에서는 만약 공자가 중국 밖에서 살았더라면 그곳을 중심으로 춘추를 썼을 것이라면서, 화이의 구분은 무의미하다고 단정한다. 이 글에 흐르는 철저한 상대주의를 읽을 수 있다. 하늘에서 본다면 어찌 안팎의 구분이 있겠는가? 저마다 자기사람을 친히 여기고 자기 임금을 높이고 자기 풍속에 따라 편안히 사는 것은 화나 이나 마찬가지다 

 또한 전통적인 음양오행설을 철저하게 비판하고 주기론을 바탕으로 서양의 4원소설을 거론하고 있다.   오행의 오라는 수는 원래 정론이 있는 것이 아닌데, 술가들이 이를 근본으로 삼아 하락이 여기에 부회하고, 역상이 이를 천착하여 생극이니, 비복장황하게 되었지만은 결국은 아무 이치도 없는 것이다. 담헌은 기. 화. 수. 토의 네 가지를 만물생성의 원형으로 보았다. 이 4원소를 바탕으로 오행오가 음양을 대신 설명하고, 특히 오행이 부회천착되어 철학. 천문. 지리. 의학. 종교. 병법. 정치. 도덕. 심지어 생활감정까지도 좌우하게 된 그 고질이 아무 이유 없는 것이라고 역설한 것이다. 

 음양오행설 비판에서도 나타난 예리한 과학정신은 당시 사회의 폐단인 토속적 미신을 통박하는 데까지 미쳤다. 신선이 된다는 술법, 풍수를 가린다는 지술 등이 모두 허망한 것이요 천문이라는 이름의 점복이나 기도 또한 허망하다고 역설한다. 자연현상에 대한 담헌의 이와 같은 설명은 인류의 생성발전에 대한 설명에도 일관된다. 먼저 생명의 기원은 수. 토가 안으로 작용하고 일. 화가 밖으로 열을 가하여 원기가 모이고 만물이 생겨나니, 식물은 땅에 돋아나는 털 같은 것이요, 동물은 땅에 모인 이 같은 것이다. 


d. 사상적 평가

 이상에서 우리는 담헌의 과학정신을 중심으로, 그의 사상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사실 그의 사상은 여기에 국한하지 않고, 현실적인 정책론으로도 확장되었다. 그의 이러한 사상을 잘 보여주는 부분은 임하경론으로, 여기서 그는 사회구조의 개혁안으로서 균전제와 부병제도를 토대로 농민의 최저생활을 보장하는 동시에 재정과 국방의 기반을 튼튼히 하려 했다. 이런 기본적인 구상은 유형원의 반계수록과 비슷하나 그의 독창적인 면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장정은 노동을 해야 하며 양반이라도 노동하지 않고 놀고 먹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다. 둘째, 신분여하를 막론하고 재. 학이 있는 자는 중책에 임명하고 그렇지 못한 자는 고관의 자제라도 천한 일에 복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셋째는 지방마다 면단위까지 학교를 두어, 면 내의 자제는 8세 이상이면 신분의 여하를 막론하고 모두 교육을 받게 하고, 과거제 대신 하급교육기관에서 상급교육기관에 인물을 천거하되, 관직도 이 추천에 의해 임명할 것을 주장한다. 넷째로 신분여하를 막론하고 공적인 발언권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봉건적 신분제의 타파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역시 우리의 관심은 그의 과학정신에 집중된다. 전통적인 우리의 과학기술은 뛰어난 면이 많았지만, 공리공담에 빠진 유학자들은 과학사상을 늘 천시하여왔기에 발전을 보지 못했다. 이에 홍대용은 철저하게 이를 추구하여 우리 나라 과학기술사에 찬란한 빛을 던진 것이다. 특히 그의 기하학은 지극히 실용적인 것으로, 토지의 측량에 적절히 이용될 수 있는 이론이었다. 그가 그렇게도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주해수용이 현실에 별로 적용되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의 사상은 바로 박제가 등 후배들에게 전해지고, 이들에 의해 다시 개화사상가들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그의 사상이 담겨진  담헌서는 정신적 유산으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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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헌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담헌서》(湛軒書)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 홍대용이 자신이 지은 글을 직접 모아 엮은 시문집으로, 모두 15책으로 되어 있다. 《담헌집》(湛軒集)이라고도 하며, 홍대용이 죽은 뒤 약 150년이 지난 1939년에 홍대용의 5대손 홍영선(洪榮善)이 신조선사(新朝鮮社)에서 필사본을 바탕으로 7책의 활자본을 발간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지구의 자전설(自轉設)을 주장하여 주목을 끌었고, 중국·서양의 문물을 소개하였으며, “기(氣)·화(火)·수(水)·토(土)”의 4원소론에서 “기”를 물적(物的)인 것으로 보아 기화설(氣化說)로 모든 자연 현상을 설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회 모순, 학계의 통폐, 경제 제도의 폐단 등을 신랄히 비판하고, 보다 실제적이고 민주적이며 과학적인 대안(代案)을 제시하였다.


담헌내서 : 내집이라고도 한다.

경학 : 《사서문의(四書問疑)》, 《삼경문변(三經問辨)》, 《심성문(心性問)》 등

정책론 : 《임하경륜(林下經綸)》

학문관·자연관·사회관·국가관·역사관 등에 관한 독창적인 자기 견해의 종합적 저술 : 《의산문답(毉山問答)》

세손(世孫, 정조) 보필 시의 일기 : 《계방일기(桂坊日記)》[1]

시·서간·묘문 등 문예 작품

담헌외서

북경 기행문 : 《연기(燕記)》, 《건정필담(乾淨筆談)》

북경 방문 중에 사귄 청나라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글 : 《항전척독(杭傳尺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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