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38 – 아동지능의 근원 (The Origins of Intelligence in Children) / 피아제 (Jean Piaget, 1896-1980)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스위스의 아동심리학자인 피아제를 보통 어린이의 프로이트 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프로이트가 성인의 심리를 연구한 반면 피아제는 어린이의 심리를 연구했기 때문이다. 그의 근원적인 관심은 발생적 인식론에 있는데, 그는 이 책에서 우리의 인간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현상들(꿈, 생명과 생명체, 해와 달)은 과연 무엇이며, 그 기원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 어린이들은 과연 어떻게 인지하고

있는가?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가? 언제부터 성인과 같은 개념을 갖게 되는가? 하는 물음의 해답을 얻고자, 철학적인 방법이 아닌 심리학의 방법을 통해 탐색하고 있다.


a. 생애와 작품활동

  아동심리학자 장 피아제는 1896년 스위스의 한 대학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중세문학을 전공한 역사학자였고, 어머니는 신앙심이 돈독하고 지적인 여성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그는 일찍부터 자연에 관심을 보였고, 특히 생물에 취미가 있었으며, 10세 때에 이미 새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다행히도 청년 피아제는 코르너라는 학자와 한여름을 함께 보내는 기회를 갖게 되는데, 코르너는 생물학에만 전념하는 피아제에게 학문의 폭을 넓혀주기 위해 베르그송과 같은 철학자들의 세계로 그를 인도하여, 그의 생애에 하나의 전환점을 가져다 준다. 이리하여 피아제는 생물학 이외의 분야에도 광범위한 독서를 했는데, 철학의 한 분야인 인식론에 애정을 갖게 되어, 지식이란 무엇인가, 지식을 어떻게 알게 되는가 하는 인식론의 근본문제에 대한 탐구를 계속했다. 그러나 생물학에 대한 관심도 계속되어서, 박물관에 있으면서 연체동물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여, 뇌샤텔 대학에서 연체동물학으로 1915년에 학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중요한 학문적 생에는 1920년(24세)부터 시작된다. 소르본 대학에서 비네에게 심리학을 배우고, 심리학연구실과 정신병원에서 연구하면서 정신분석학과 프로이트, 융 등의 연구를 접할 수가 있었다. 이로 인해 그의 초기 연구에 있어서는 그가 정신분석학의 영향을 받은 뉘앙스가 풍겨지고, 그의 이론들이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았음을 부인할 수 없을 만큼 프로이트의 이론들과 용어들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1921년에서 1925년 사이에 5편의 심리학 논문을 발표하고, 1929년(33세)에 루소의 연구기관장이 되어 어린이 연구를 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피아제를 심리학과 교육학에서 중요한 인물로 만들어 주었다. 그는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어린이가 단순한 어른의 축소판은 아니고, 어린이의 사고와 어른의 사고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즉, 어린이는 어른과 다르게 생각하고 어른과 질적으로 다른 사고의 단계를 거쳐 지적 발달이 이루어진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 당시 아동의 본질이 자기중심성에 있다는 그의 아동인지 발달이론은 미국학계에서는 그렇게 큰 환영을 받지는 못했다. 그것은 1920년대와 1930년대 미국심리학의 전반적인 풍토는 행동주의 심리학에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피아제를 재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이후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위에서 본 것처럼 그는 매우 특이한 학자로서, 초기에는 생물학을 연구한 생물학도였고, 말년에는 인식론에 관심을 둔 인식론자로서, 인식론 중에서도 논리학에 심취한 논리학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가장 큰 업적을 남긴 분야는 심리학 이므로 그를 심리학자라 부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피아제의 저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방대하다.

그중에서도 영어번역판으로 출간된 대표적인 저술로서는 (아동의 도덕적 판단) (아동의 판단과 추리) (아동의 수개념) (아동의 언어와 사고) (지능의 심리학) (아동지능의 근원) (아동에 있어서의 실재의 구성) 등이 있다. 이중에서 인지발달에 관한 대표적인 저서는 후자의 3개이다.

그의 학문적 업적은 실로 방대하고 창조적이다. 그의 이론체계는 기존의 학문체계를 크게 벗어나는 것이었기 때문에, 학계에서 그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까지 상당한 시간을 요했다. 그러나 근래에 발달심리학과 교육심리학 분야에서 그의 이론에 따르는 연구가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b. 심리학의 최근 동향과 피아제의 기본 개념

    심리학의 최근 동향 : 한 인간이 태어나 어른으로 성장하기까지는 다른 동물에 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한다. 이처럼 느리고 복잡한 인간발달과정을 정확히 분석하기는 어려우나, 현재 교육학이나 발달심리학 쪽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론적 흐름은 크게 세 줄기로 나타나고 있다. 

첫번째는 프로이트의 선적 발달심리 이론으로 그는 전통적인 심리학에 대항하여 무의식의 심리학을 제시하여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 즉 내면의 갈등이나 소망이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지적하였다. 프로이트를 비롯한 정신역동적 이론가들은 개인의 성격차이를 우리 내면의 다양한 욕구들과 이들을 현실적으로 충족시켜나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갈등, 그리고 이러한 갈등에 대처하는 방식 등에서 찾고 있어, 인간이해에 대한 새로운 방향을 보여주고 있다. 

두번째 흐름은 독일태생의 미국심리학자 에릭슨의 이론으로, 그는 대표적 저서인 (우아기와 사회)에서 무의식의 개념을 인정하지만, 성적 발달에 초점을 둔 분석학파와는 달리 사회적 발달심리를 중심적 주제로 파악하고 있다. 전자들이 개인의 성격형성과 사회성 발달을 대상으로 분석한 것과는 달리, 피아제는 환경과 사물에 대한 개인의 이해 및 사고 능력 등 모든 인지능력의 발달과정을 탐구하려는 소위 인지발달 단계론 을 제시하였다. 그는 인지능력의 발달이 어린이와 그를 둘러싼 환경간의 상호작용에 의해 단계적으로 성취되며, 발달단계의 순서는 변화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발생심리학은 종래의 인지론과는 다르며, 앞으로 연구가 활발해질 것으로 보이는 분야이다.


    피아제의 기본개념 : 피아제는 자기의 부인과 자녀들을 실험대상으로, 그들의 성장과정을 면밀히 관찰하고 분석하여 그의 인지발달 이론을 정립하였다. 그의 주요관심은 어린이들의 감각, 지각능력과 사고, 추리능력, 그리고 지능, 문제 해결 능력과 같은 인지능력의 발달이었다. 피아제에 의하면 출생 직후의 영아는 한낱 생물적인 유기체에 불과하다. 이생물적인 유기체는 몇 개의 반사기능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리고 유기체는 본능으로서 몇 가지 충동을 지니고 출생한다. 그러한 충동 중에는 먹을 것을 찾는 충동, 신체의 형평을 유지하려는 충동, 환경으로부터 독립하고 환경에 적응하려는 충동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유기체는 외부세계와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발달한다. 그의 발달이론에서는 두 가지의 중요한 개념이 등장한다. 첫째는 세마(Schema)라는 개념이다. 셰마란 생물학적 구조에 비교될 수 있는 심리적인 구조라 할 수 있다. 피아제에 의하면 셰마란 지적 행동의 의미 있고 반복될 수 있는 심리적 단위이며 인지발달이란 셰마의 발달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는 동화(assimilation)와 順應 (accommodation)'이라는 개념이다. 셰마가 유기체의 적응구조를 나타내는 것인데 비해서, 동화와 조절은 적응과정을 기술하는 개념이다. 환경에의 적응을 위해서는 동화와 조절을 필요로 하는데.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동화란 외부요소들을 유기체의 내부구조 속으로 통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반해 조절이란 환경적인 영향의 결과로 개인의 조직이 수정되어가는 과정을 말한다.


c. (아동지능의 근원)의 내용

그는 위와 같은 개념을 이용하여 그의 발달이론을 구축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발달이론 중에서 교육의 이론과 실제에 있어서 가장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인지발달단계 이다. 그는 인지발달과정을 크게 4단계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그러나 이단계들은 불연속적인 단계가 아니라, 발달과정의 개념화를 위해서 연속적인 발달의 과정을 편의상 구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각 발달단계는 그것이 출현하는 차례에 있어서도 순서적이며 새로운 단계는 앞의 단계와 통합된다. 


제1단계 - 감각동작기(sensori-moter period, 0-2세) : 신생아는 태어나자마자 감각동작적 행동을 시작하고 환경 속의 사물을 지각하게 된다. 이러한 감감동작적인 행동이 인지발달의 바탕이 되는 것은 물론이다. 이 단계의 아동은

언어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 하나의 특징이다.. 비언어적이기 때문에 사물에 대한 단어가 없으며, 직접 다루고 있지 않은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이 단계의 아동에게는 자신의 심리적 세계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자기를 중심으로 보게 된다. 


제2단계 - 전조작적 사고기(preoperational period, 2-7세) : 이 단계는 일종의 과도기적 발달단계다. 감각동작적인 행동양식으로부터 개념적, 표상적 양식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해당하는 과도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단계의 아동은 사물의 이름을 알게 되고, 단일차원에서 사물들을 구분할 수 있게 되며, 또한 감각동작 능력도 정교화 하게 된다. 이 기간에 새로운 능력이 여러 가지 나타나는데, 그 중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언어의 발달이다. 단계의 아동이 나타내는 또 하나의 특징은 자기 중심성 이다. 즉 아동은 다른 사람의 역할과 생각을 고려할 줄 모르는 것이다. 그에게는 오직 자기가 생각하는 것, 자기가 생각하는 방식만 있을 뿐이다. 


제3단계 - 구체적 조작기(concrete operational period, 7-11세) : 이 단계에 이르면 아동은 본격적으로 개념을 형성하게 된다. 초보적이기는 하나 논리적 추리를 하게 되고, 분류와 관계유추의 기초적인 조작을 할 수 있게 된다. 시간, 공간, 수 등 사물의 서열화와 분류에서 요구되는 기본적인 개념을 습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논리적인 사고력은 아직 초보적이기 때문에 아동이 관찰한 사실에만 한정된다. 이 단계에서는 아동의 자기 중심성이 약화되고 다른 사람의 생각도 할 수 있게 된다. 

제4단계 – 형식적 조작기(formal operational period, 11-15세) : 인지발달의 마지막 단계이며 가장 발달한 인지적 조작을 할 수 있게 되는 시기이다. 이 단계에 들어서면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상황을 넘어서는 문제를 다룰 수 있게 된다. 이 단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내적으로만 존재하는 추상적인 사물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고, 이론을 구성하고 그것에 관한 직접적인 경험을 하지 않더라도, 어떤 논리적인 결론을 도출해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추상적인 사고력이 발달하여 추상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도 그 특징이다. 이처럼 아동의 인지발달이란 개인이 자신의 환경이나 세계에 대한 정보를 획득, 인출 그리고 수정해나가는 전체적 과정을 말한다. 이 분야는 사실상 언어의 이해와 사용, 기억과 망각, 사고와 문제해결 등과 관련된 지적 능력이나 나아가 들어감에 따라 어떻게 발달해가는가를 연구하는 분야이다. 이와 같은 연구 가운데서도 피아제의 이론이 가장 기초적이며 영향력 있는 이론으로 각광받고 있다.


d. 학문적 공헌 및 이론적 한계

  이상과 같은 피아제의 인지발달에 관한 체계적인 설명과 기술은 특히 교육심리학과 교육의 실제에 대단히 높이 평가될만한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감각 동작기로부터 형식적 조작기에 이르는 인지발달에 대한 설명은 특히 교육과정을 개편하거나 아동의 사고력을 함양하기 위한 과정을 개발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업적 중에서 또 한 가지 지적되어야 할 것은 인지발달에 관한 연구접근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는 점이다. 규범적, 기술 접근이 지배적이었던 종래의 연구방법에 새로운 차원을 첨가 시켰으며, 인위적인 상황에서의 관찰과 실험보다 자연적인 상황에서의 관찰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피아제가 즐겨 사용한 관찰방법은 아동으로 하여금 스스로 이야기하게 하거나 놀게 하고, 그들의 사고능력과 개념습득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아동발달을 관찰하기 위해서 그가 50여 개의 새로운 연구기술을 창안한 것도 높이 평가할 만한 공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피아제는 연령별로 나타나는 특징을 구별해서 그 이전 단계에서는 그런 특징들이 완전히 나타날 수 없다고 했으나, 올챙이가 하루아침에 개구리가 될 수 없듯이 지적 성장에도 단계가 있긴 하나, 훨씬 어린 시절에 이미 그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 또한 모든 아동이 동일한 속도로 발달하는 것이 아닌데도, 이러한 발달속도의 차이에 대한 언급이 미흡하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아동들의 숨은 철학 및 정신적인 발달단계에 관한 피아제의 견해는 인간의 정신적 성장에 관한 견해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다음과 같은 글에서 그의 탁월한 학문적 공헌을 읽을 수 있다. 1969년 미국심리학회(APA)는 그에게 특별과학 공헌상을 수여하면서 그의 학문적 업적을 다음과 같은 압축된 말로 표현한 바 있다. 

인간의 지식과 생물학적 지능의 본질에 관한 혁명적인 견해를 높이 평가하여, 이 상을 피아제 교수에게 수여한다. 그는 생물학자로서 출발하여 과학적 사고의 역사에 대하여 결연히 과학적 방식으로 접근하여 철학과 결별하고, 모든 인간과학을 결집한 과학으로서의 인식론을 창시하였다. 이와 같은 학문적 업적의 부산물로서, 그는 지난 반세기 동안 인간의 사고에 대한 독창적인 관찰을 진척시켜 수많은 자료를

축적하였으며, 이것은 심리학 문헌에서 특이하고 영원한 이정표로 남겨지게 되었다. 초기저술에서부터 그는 세계 어느 곳에서나 알려지고 존경의 대상이 되어왔을 뿐만 아니라 미국 심리학회의 특별과학 공헌상을 수여 받는 최초의 유럽인이 된다. 본 학회는 이 스위스의 심리학자가 인간의 인지와 발달에 관심을 가진 모든 학자들에게 효시적 영향을 미쳤음을 인정 하는 바이다.   



C37 – 존재와 시간 (Sein und Zeit, Being and Time) /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하이데거는 20세기 독일이 낳은 세계적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보통 실존철학으로 분류되는데, 그의 실존주의 사상은 철학은 물론 불트만이나 틸리히의 신학, 빈스방거로 대표되는 실존적 정신분석학에까지도 영향을 끼쳤다. (존재와 시간)은 하이데거의 주저로서 존재일반에 관한 탐구를 목적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존재일반을 탐구하는 존재는 인간뿐이기에 인간존재에 대한 탐구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a. 생애와 작품활동

독일의 대표적인 무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독일의 바덴 주에서 출생하여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공부하고 동대학의 교수, 총장을 역임하였다. 처음에는 리케르트의 가치철학, 후에는 후설의 현상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 딜타이의 생의 철학 등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현존재를 현상학적으로 해석하여 기초적 존재론을 확립하려고 하는 등 독자적인 철학체계를 지녔다.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리케르트 교수 밑에서 수학하여, 1914년 (심리주의에 있어서의 판단론)으로 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은 논리학 내지 논리적인 것은 심리적인 곳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며, 논리적인 것을 심리적인 것으로 기초 삼으려는 심리주의를 배격하는 내용이다. 1915년에는 강의허가를 취득하였고, 다음해에 리케르트의 후임으로 후설이 온 것을 그는 진심으로 환영했다. 왜냐하면 그는 대학재학시절 그의 (논리연구)를 읽어서, 그한테서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1919-1923년의 4년 동안 후설의 조교로서 많은 영향을 받고, 23년 마르부르크 대학에 부임하여 하르트만, 불트 등과 친교를 가지면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그리고 현상학을 강의 했다. 1929년 그는 후설의 후임으로 모교로 돌아와 33년에 총장직을 맡았는데, 총장취임사에서 나치즘을 열렬히 옹호하는 한편, 자기의 철학으로 나치즘의 정치적 언어를 정당화하려 하였다. 그러나 10개월 후 자신의 실수를 깨닫는다. 이로 인해 총장직을 사임하고, 다시 조용한 사색의 생활로 돌아왔다. 총장의 취임강연인 (독일대학의 자기 주장) 때문에 제2차대전후 연합군측의 종용으로 교단에서 물러났다가, 51년에 복직되었다. 1966년 9월 하이데거는 자신이 사망한 다음 5일 후에 공개하는 것을 조건으로. 30년 이상 그에게 가해진 비난에 대해 (슈피겔) 지와 회견한 바 있는데, 조건대로 그가 사망한 후인 1976년 공개된 회견문에서 하이데거는 대학의 자율권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타협했던 것 이라고 자신의 입장을 해명했다. 동시에 나치즘에서 모종의 참신함, 새로운 새벽의 가능성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다.  1933년 그는 학생들에게 어떠한 종류의 사상이나 정치적 견해일지라도 그대들의 존재의 지배자로 삼지 말라, 오직 총통 그 자신만이 독일 현실의 현재이자 미래이며, 또 법칙이라고 호소한 바 있다. 그러나 회견문에서 그는 오늘날 나는 더 이상 인용된 것과 같은 견해를 말하고 있지 않으며, 이미 1934년경부터 그러한 의견을 피력한 바 없다 라고 변명하고 있다. 퇴직 후에도 수년 동안 강의와 세미나를 계속하다가 슈바르츠말트의 한적한 산장에서 사색과 저술에 전념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b. 시대적 상황과 실존철학 

    시대적 상황 : 1910 - 20년대는 1차대전으로 인해 혼란의 열풍이 온 유럽에 밀어닥쳐 사람들은 종말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의 여파로 1918년에는 독일혁명이 일어나 독일제국이 붕괴되고, 바야흐로 바이마르 헌정에 의한 독일공화국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이러한 해체와 불안의 소용돌이에서 지주 잃은 인간존재에게 인간문화를 가장 깊은 뿌리에서 떠받치고 있는 철학은 무엇인가를 결의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무엇인가를 속 시원히 토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에 호소하여 치유되기에는 인간은 너무나 병들어 있었다. 삶의 즐거움이 전적으로 후퇴해버린 인간에게 소생의욕을 불러일으킬 유일한 길은 지적인 것에 선행하는 오직 구체적 생의 사실성과 현실성에 대한 모색이었다.


    실존 철학 : 실존철학이란 이러한 불안과 절망, 자기상실, 소유의 역전 등을 극복하고, 인간이 부단한 자기초월에 의해 본래적인 자기를 되찾으려는  자기회복의 철학이다. 다시 말하면 실존주의란 과학과 기술문명 속에 매몰되어 비인간화 되어가는 현실을 고발하고, 잃어버린 자아의 각성과 회복을 강력히 주장하는 한편, 생의 주체인 나는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느냐 하는 주체적인 진리를 문제삼는 주체성의 철학이다. 대표적 사상가로는 주체성이 진리다 란 말로 유명한 키에르케고르, 현대를 깊이 병든 위독한 시대로 규정한 야스퍼스, 신과의 신앙을 통한 성실한 대화 속에서 종교적, 인격적 실존을 부르짖었던 마르셀, 신은 죽었다고 대담하게 선언하고 권력의지, 초인사상, 영겁회귀 등으로 사상적 체계를 세운 니체,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주장한 사르트르, 그리고 하이데거 등이 있다.

하이데거는 주어진 상황에 비판없이 살아가는 것을 일상성이라 하고, 일상성에 묻혀 지내는 현대인을 다스 만(das man)' 이라고 불렀다. 또한 불안을 자각한다는 것은 본래적인 자기 모습이며 실존을 자각하는 것이므로 불안이 그의 실존사상의 기본개념이다. 불안의 근원은 인간이 죽음의 존재이기 때문이고, 불안을 느낀다는 것은 인간이 유한성을 자각한다는 것, 즉 실존을 자각한다는 말이다. 그의 용어 중 현존재란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거기+있다’라는 뜻으로, 이것은 인간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이 세상에 내던져졌다는 뜻이다. 하이데거는 그의 철학의 새로운 형이상학적 지향의 발족인 1916년의 (역사학에 있어서의 시간개념) 속에서, 어떤 종류의 형이상학적 충동이 철학 자체 속에서 눈을 떴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한 사색의 결과가 10 여 년 동안의 침묵 끝에 나오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존재의 시간)이다. 하이데거의 사상의 발전과정은 보통 30년대까지의 전기사상, 즉 기초존재론과 40년대 이후의 후기사상으로 나누어진다. (존재와 시간)은 그의 전기사상을 대표하는 주제이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c. (존재와 시간)의 내용

  1927년에 간행된 이 책은 (서론: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의 개진) 과 (제1편: 현존재에 대한 예비적 기초분석), (제2부 : 현존재와 시간성)이라는 두 부분으로 엮어져 있다. 앞부분에서는 인간, 현존재의 근본구조가 세계 내 존재 라는 것을 밝히고, 기술적 도구적인 환경속에서 다스 만으로 살아가는 비본래적인 실존의 모습이 씌어져 있다. 이에 대해 후반부는 불안이나 죽음에 대한 자각을 통해 과거로부터 자기를 되돌려 미래로 앞서나가며, 순간으로서의 현재에서 결의적으로 사는 본래적 실존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존재 일반규명 : 하이데거의 철학은 존재일반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지금까지의 철학은 존재자 만을 다루었기 때문에, 그 존재자를 존재자이게 하는 존재를 해명하는 것이 그의 철학의 과제였다. 

현존재 : 그러나 이러한 존재해명은 필연적으로 인간존재의 존재분석을 기초로 하지 않을 수 없고, 이러한  현존재의 존재분석론의 한계 내에서 실존철학이라 불리어진다. 그러나 그 자신은 실존철학이라기보다는 기초존재론 이라 불렀다.

  피투성과 다스 만 : 한편 현존재는 어떠한 세계속에 존재하고 있다. 이와 같이 현존재가 세계 내 존재 라는 사실은 현존재가 세계속에 주어져 있다는, 즉 현존재의 피투성을 의미한다. 이처럼 현존재의 피투성의 실존론적 분석은 현존재가 단순한 사물과 같은 존재가 아니며, 또한 도구적 존재자가 아님을 보여준다. 이러한 현존재는 세계 안에서 많은 다른 존재자들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오히려 그러한 관계에 있어서 자기를 상실하는 현존재를 그는 일상인, 다스만이라 부르고, 이 일상인으로서 현존재는 평균화되고, 주체성이 상실된 중성자로 전락하여 버린다. 

  불안과 공포 : 이와 같이 일상인이 비본래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한, 이와 대비하여 현존재의 본래적인 존재방식이 문제가 된다. 즉, 그와 같은 비본래적 상태로 존재하는 현존재는 불안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불안은 특정한 대상과 이유가 있는 공포와는 달리, 그 대상도 이유도 알 수 없다. 이것은 우리들이 가끔 어쩐지 불안하다 고 말할 때의 기분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불안의 근거는, 그것의 존재형식에서 보면 현존재가 세계 내 존재로서 자기를 상실하고 비본래적인 존재방식을 취하는 데 있다. 

  기투 : 그러면 일상인으로서의 현존재가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여, 본래적인 자기 존재를 근원적으로 이해하고 본래적인 자기에로 자기자신을 내던질 때, 하이데거는 이를 기투라고 말한다. 한편 현존재가 일상인으로 전락하여 자기존재의 근거를 상실하고 있는 정황에서 본래적인 존재방식의 태도를 기투적으로 취하는 것을 실존이라고 부른다. 즉 실존이란 현존재의 본래적인 존재방식을 의미한다. 이러한

현존재의 존재론적 구조는 그의 시간성에서 밝혀지지 않으면 안된다. 또한 이러한 시간성은 죽음과 양심의 현상이 실존론적으로 분석되지 않으면 안된다.

  시간성 : 현존재의 존재에의 실존론적 분석은 어디까지나 현존재의 생에 있어 가능하다. 그러나 출생으로부터 시작되는 이 생은 종말로서의 죽음에 의해서 비로소 전체적인 것이 된다. 따라서 현존재를 그 전체성에 있어서 이해하려 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죽음의 현상이 문제되지 않을 수 없다. 죽음은 그것이 도래하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것이 언제 도래할 것인가 하는 것은 무규정적인 가능성인 것이다. 그러나 현존재가,. 살고 있는 현존재로서 존재하고 있는 한 현존재는 아직 종말로서의 죽음에 직면한 것은 아니며, 죽음은 또한 아직 완료된 것이 아니다. 죽음은 현존재가 추월할 수 없는 가능성인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죽음이 비현재적인 것, 자기와 무관한 것으로 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현존재에 절박해 있다. 그렇다면 현존재의 본질은 죽음에의 존재 인 것이다. 이와 같이 현존재가 죽음에 관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다름아닌 현존재의 유한성, 즉  시간성을 말한다.

  죽음과 양심 : 한편 죽음은 현존재의 피할 수 없는 가능성이며 타자에 의해 대신될 수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적 현존재에 있어서 가장 고유한 가능성인 것이다. 죽음에 있어서 현존재는 단독자, 즉 개별자로서 그의 본래성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현존재가 현존재로서 존재하고 있는 한은 가능한 것이다. 현존재는 죽음에의 존재에 있어서 그의 본래성에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현존재의 본래성을 중시하는 현상은 다름아닌 양심이다. 따라서 양심의 현상이 현존재의 본래성이라는 관점에서 또다시 실존론적으로 해석되지 않으면 안된다. 현존재가 이러한 양심의 소리에 따를 때 현존재는 본래적인 자기 존재를 선택하게 되나, 하이데거는 이러한 자기선택이야말로 양심을 의지하는 것이며, 현존재의 이와 같은 본래적인 존재방식을 결의성이라고 부른다.

    선구와 양심 : 이리하여 죽음의 현상은 현존재의 전체성에 관계하며, 한편 양심의 현상을 현존재의 본래성에 관계한다. 따라서 죽음과 양심이라는 두 현상에서 각각 취하게 되는 현존재의 존재방식, 즉 선구와 결의성은 상호 연관에 있어서 선구적 결의성으로 통일되는 것이다. 한편 죽음에 있어서의 선구나 또는 양심에 있어서의 결의성에 임하여 현존재는 자기로서 존재하기 위하여 자기자신을 기투한다. 이와 같은 기투에 있어서 그 자신이 본래적인 자신으로 되돌아가는 현존재의 존재방식이 다름아닌 실존인 것이다.

    생기와 역사성 : 현존재는 선구적 결의성에 있어서 본래적 자기로서 존재하기 위해 기투하는 실존으로서 존재하며, 또한 동시에 절박한 죽음에 당면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존재의 3가지 존재구조의 계기, 세계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피투성으로서의 이미 있음, 자기 앞에 앞질러 존재하게 되는 기투로서의 앞질러 있음, 그리고 결의성에 있어서의 존재자의 나타남으로서의  현성되고 있음 이라는 시간성이 성립된다. 즉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서 앞질러 존재하면서, 현성하는 통일적 현존재의 존재 의미, 즉 시간성 인 것이다. 이러한 시간성은 통속적인 시간성은 따라서 비본래적인 시간관계, 즉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계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그의 시간성을 단절된 시간관계로 보지 않고 그것의 구체성에 있어서, 즉 생기라는 근본적인 성격을 지니는 역사에 있어서 이해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존재자의 존재, 현존재의 존재근거로서의 존재는 그 시간성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현시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본래적 시간성의 구체화가 다름아닌 역사성이다. 역사는 시간이며, 이 시간은 현존재를 제외하고 생기하지 않으며, 그것은 바로 현존재 자신의 사간이다.


d. 사상적 평가

  그의 철학을 한마디로 말하면 현상학적 존재론 이라 할 수 있다. 그간의 전통적인 존재론이 그의 본질적인 주제에서 일탈하여 존재자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하이데거는 근원적으로 더 깊이 들어가 존재자의 존재, 즉 존재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모든 있는 것에 대해 그것의 있음, 즉 그것이 어떻게 있는가?  라는 존재방식을 묻고, 그것을 근원적으로 해명하는 것이 다름아닌 존재론의 근본과제라고

주장했다. 1927년 (존재와 시간)이 발간되자 많은 철학자들은 새로운 철학의 시작과 실존철학의 탄생을 외쳤고, 따라서 무명의 철학도가 일약 세계무대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마 야스퍼스보다 6년이나 연소한 그가 야스퍼스의 실존철학의 주저 (철학)보다 5년이나 먼저 실존철학을 내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번도 자기자신을 실존철학자라고 공언한 적은 없다. 그는 그의 철학을 기초적 존재론 이라 부르고 있었는데, 기초적이라는 의미는 주관과 객관의 대립 이전의 존재를 기초로 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그의 철학의 근본은 존재의 의미를 해명하는 데 있다. 그의 철학은 1차세계대전의 불안한 상황을 반영하여 현대사상의 한 조류를 이루었다. 본서는 후설적 현상학을 독자적으로 발전시키고, 현대 특히 제1차대전 후의 역사적 상황 속으로 던져진 인간존재의 양상을 반영하면서 인간존재 그 자체의 본질을 훌륭하게 분석해보였다. 이 책은 출판되자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는데, 실존철학은 물론 아마도 철학사상 불후의 걸작으로 남을 것이다. 미슈는 이 저서는 비상한 흥분을 불러일으켰고, 전광석화와 같이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한 바 있다. 사실 이 저서가 발간된 후에 현상학적 존재론과 실존철학의 사조가 대두하였다. 그런 점에서 본서는 금세기의 일대 사조의 발화점이자 기념비적인 저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1970년대 중반 이후 일본, 미국, 라틴 아메리카 등에서 하이데거 철학에 대한 강력한 관심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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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리케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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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리케르트

Heinrich Rickert.jpg

이름 하인리히 리케르트

출생 1863년 5월 2일

프로이센, 단치히

사망 1936년 7월 25일 (73세)

독일, 하이델베르크

시대 19세기 철학

지역 서양 철학

학파 신칸트주의

하인리히 리케르트(Heinrich Rickert, 1863년 5월 25일 ~ 1936년 7월 25일)는 독일의 철학자이다. 빈델반트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하이데거에게 영향을 주었다. 단치히 태생으로 하이델베르크에서 사망하였다.


생애[편집]

1863년 프로이센 단치히에서 태어나, 1888년 슈트라스부르크에서 학사가 되고, 1891년에 프라이부르크에서 교수 자격을 획득하였다. 1894년에 동교의 조교수, 1896년에 릴의 후임으로 교수가 되었으며, 1916년 빈델반트의 후임으로 하이델베르크의 교수가 되었다. 프라이부르크 시대에는 하이데거가 그의 강의에 출석, 또 야스퍼스와는 하이델베르크에서 1921년 이래 동료로 지냈으며, 1932년 퇴직 후에는 야스퍼스가 후계자가 되었다. 하이델베르크에서 사망하였다.


사상[편집]

초기의 《인식의 대상》(1892)에서 인식하는 주관은 판단하는 주관으로서 인식론적인 주관이며 인식되는 대상은 초월적인 가치인 당위(當爲)라는 입장을 취했다. 《자연과학적인 개념 구성의 한계》(1896-1902), 《문화과학(文化科學)과 자연과학》(1899)에서 자연과학은 가치를 떠난 자연을 일반화의 방법에 의해 기술하는 데 대해, 문화과학은 개성적이며 가치에 관계하는 문화재를 목표로 하는 개별화의 방법에 의거한다고 하였다. 자연과학은 몰가치적(沒價値的)인 태도를 취하고, 문화과학은 가치관계적(價値關係的)이다. 이것은 빈델반트의 견해를 더욱 발전시킨 것이며 서남독일 학파가 문화가치의 철학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 문화과학의 방법론은 막스 베버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그의 철학은 가치의 철학이며, 주저 《철학의 체계》(제1부, 1921)도 문화가치의 체계이다. 가치를 가치 이외의 것과 구별하고, 세 개의 세계, 곧 객관계(客關界)·가치계(價値界)·의미실현(意味實現)의 세계를 생각하고 제3의 세계는 실재적인 것과 타당한 것이 결합된 세계로 이론적·예술적·도덕적·종교적인 생(生)의 세계라 하였다. 그것은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세계로 형이상학의 대상이 아니라 형이전학(形而前學)의 대상이다. 형이전학적 세계, 감성적 세계, 가치의 예지적인 세계가 구성하는 세계 전체를 학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철학이다. 그는 형이전학의 대상으로서 가치를 잉태하는 생을 인정하지만, 당시 유행하는 생의 철학은 반성을 결여하였다 하여 《생의 철학》(1920)에서는 이를 거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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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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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철학(生─哲學, philosophy of life)이란 합리주의에 반기를 들고 그것에 불신 내지 반항하여, 생의 응결(凝結), 생의 경화(硬化)에서 벗어나 어디까지나 싱싱하게 살아 있는 생 자체만을 파악하려는 것이 바로 이 '생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철학을 그저 한마디로 '생의 철학'이라 부를 수도 있다. 따라서 '생의 철학'이란 매우 다의적인 의미를 지닌 철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다만 협의적인 의미로서의 '생의 철학', 즉 19세기 이후 현대철학의 한 사조로서의 '생의 철학'에 관해서만 언급하고자 한다.


근세철학 사상사 전체를 통해서 볼 때 단연 우위적인 자리를 차지해 온 것은 아무래도 합리주의 사상, 즉 주지주의(主知主義) 사상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그러한 사상의 결과는 마침내 정신적인 면에선 차츰 지나친 사변적(思辨的)인 것이 인간의 심정마저 경화시켜 갔으며, 또한 물질적인 면에선 고도로 성장해 가는 기계와 기술문명이 인간 생명의 고동 소리를 압살(壓殺)해 가는 듯한 느낌마저 주었던 것이다. 조금 더 부연해 본다면 이러한 '생의 철학'은 원래 헤겔을 정점으로 하는 독일 관념론의 이성주의에 대한 비판 내지 반항에서 출발하였다고 할 수 있지만, 그 후 그것은 신(新)칸트 학파와 실증주의의 대립에서 또한 더욱 그 자리를 굳혀 갔던 것이다. 생각건대 신칸트 학파의 비판철학과 실증주의 철학이란 똑같이 반(反)헤겔적이면서도 다만 과학에 대해서만은 유독 매우 긍정적인 태도였다고 본다. 그러나 '생의 철학'에선 이러한 이성주의(理性主義) 내지 과학주의적인 것만으로는 도저히 인간의 살아 있는 진정한 생(Leben)을 파악하기가 매우 곤란하다고 보는 것이었으며, 이리하여 이성주의 내지 비판주의, 실증주의에 매서운 비판을 가하게 되었고, 생에는 로고스적인 면보다 도리어 파토스적인 비합리적인 면이 더욱더 중요한 것임을 강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생의 철학'의 대표자로서는 보통 딜타이, 짐멜, 베르그송을 들지만 그 밖에 쇼펜하우어를 포함시키기도 하고 또한 니체를 넣기도 하며, 때로는 프래그머티즘의 철학자들마저 부가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다만 앞서의 세 철학자에 관해서만 간단히 언급하기로 한다.


딜타이[편집]

딜타이는 그의 "생을 생 그 자체로부터 이해한다(Das Leben aus ihm selber verstehen)"고 우뚝 내세웠다. 그리고 "생만이 모든 현실이다"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그러면서도 그는 "생이란 본질적으로 역사적(歷史的) 생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 존재를 단지 표상(表象)하는 존재로서만이 아니라 나아가 의욕하고 정감(情感)하는 존재로서도 파악하였다. 즉 그는 인간의 정신구조를 첫째, 어떤 대상을 파악하는 표상이 가장 기초가 되어 있으나 그 위에다 어떤 대상을 설정하는 의욕이 또한 거기 있으며, 그리고 가장 드높은 자리에는 가치평가하는 감정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인간을 표상하며, 의욕하며, 감정을 지니고 있는 '전체적' 인간으로서 추구하고 파악하려 하였던 것이다. 또한 딜타이는 생이 생을 파악하는 방도로서, 체험과 체험의 표현과 그리고 그 표현의 이해 등 세 가지를 들었거니와 근원적인 생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활동이라 할 수 있는 체험(Erlebnis)을 '생의 내화(內化)'라 말하였고, 그리고 우리가 어떤 무엇을 체험할 때에 그것을 표현하지 않을 수 없게 되거니와 그 표현(Ausdruck)을 '생의 외화(外化)'라고 말하였다. 또한 그는 우리가 어떤 표현을 이해하게끔 될 때 그 이해(Verstehen)를 생의 내적(內的)인 것과 외적(外的)인 것의 통일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가 생을 생 자체에서 이해한다고 함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라고 여겨지거니와, 또한 그는 이러한 '생의 철학'을 하나의 '역사적 이성의 비판'이라 칭하기도 하여 '생의 철학'에 있어서 역사적 방법을 매우 중요시한 셈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그의 '해석학적 방법'이라고 하겠다. 즉 그는 어떤 인간의 생이란 그것이 단순한 개인적인 생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 통하여 있는 것이며, 사회적 연관을 지닌 생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개인적 존재 이상의 역사적·사회적인 실재로서 생을 철학의 대상으로 여기는 점이 바로 딜타이의 '생의 철학'의 특이한 점이라고 하겠다.


짐멜[편집]

짐멜의 '생의 철학' 사상에는 니체의 "인간이란 초극되어야 할 어떤 것이다"라고 한 말과, 괴테의 "자기를 초극하는 인간만이 자유롭다"라고 한 말이 어딘가 상통한다. 그의 철학의 특질을 우선 한마디로 말해 본다면 '생의 자기초월(自己超越, Transzen­donz des Lebens ber sich selbst)'이라고 할 수 있거니와 그는 그 생에 있어서 시간성(時間性)을 아주 중요시하였으며, 시간이 생 자체의 구체적인 존재형식이라고까지 말하곤 하였다. 그러나 그는 또 생의 특질을 단순히 끊임없이 생성한다는 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였고 항시 그 스스로에 어떤 한계를 부여하고 그것에 개성적인 어떤 형식을 주면서도, 나아가서는 그 형식을 타파하여 그것을 다시금 생의 흐름 속에다 해소하는 데 있는 것이라 하였다. 바꿔 말하면 생이란 한편 현실적으로는 한정된 자기의 형식을 부단히 초월해 가는 그의 이른바 '보다 많은 생(mehr Leben)'이면서 동시에 그 생이란 항시 창조적으로 자기에 어떤 형식을 부여하는 '생 이상의 것(mehr als Leben)'이라고 말한다. 이때 '보다 많은 생'은 쇼펜하우어의 '생의 의지(意志)'를 방불케 하는 것이라 하겠고, '생 이상의 것'은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를 연상케 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베르그송[편집]

베르그송에 있어서는, 그가 스스로의 철학적 입장을 살아 있는 것을 죽은 것으로 설명하는 유물론이 아니라, 죽은 것을 살아 있는 것으로 설명하는 입장이라고 말하였거니와 그 또한 그의 '생의 철학'의 특질을 시간성에다 둔 셈이라고 하겠다. 즉 생이란 끊임없이 생성 발전하는 것이며, 그 자신 지속적이고 시간적인 것이라 한다. 이러한 생을 파악하는 기능으로서 그는 지성(知性) 대신 '직관(intuition)'의 기능을 매우 중요시하였거니와, 이때의 직관이란 어떤 신비적 직관과 같은 것이 결코 아니었으며, 그것은 시간 속에 있어서 '생의 약동(elan vital)'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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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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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투성(彼投性, 독일어: Geworfenheit 게보어펜하이트[*])[1]은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가 도입한 개념이다. 하이데거는 인간 개인의 존재는 세상에 "던져짐(투)" "당한(피)"것이라고 했다. 던져짐이란 현존재의 임의적이고 불가해한 성질로서,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키는 무엇이다. 과거는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Sein-zum-Tode)를 통해 현존재의 일부가 된다. 현존재의 임의성을 인지 내지 인식하는 것은 자신의 선택이 아닌 사회적 관습이나 의무성 따위에 의해 이미 결정된 고통과 좌절과 함께 현재에 "던져진" 상태로 특징지어진다. 행렬로서의 과거는 선택의 결과물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결정론적이지도 않으며 여기서 피투성의 개념이 결과로 나타난다. 피투성이란 인간 존재가 맞서 투쟁하게 되는 소외의 일종이며,[2] 자유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역설적 질문을 낳게 된다.


투사물을 던진 사람은 그 역시 던져진 존재이다. 우리가 어떻게 이 자유를 해명할 수 있겠는가? 해명할 수 없다. 그것은 그저 사실이다. 유발되거나 기반한 것이 아니나 모든 유발과 기반의 환경이다.[3]



C36 – 창조적 진화 (Evolution Creatrice) / 베르그송 (Henri Bergson, 1859 - 1941)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생의 철학자 베르그송이 과학만능의 사조가 팽배하던 19세기 말에 과학적 인식의 기초가 되는 이성과 지성의 오류와 한계를 지적하고, 분석적 사고보다는 직관적 통찰의 우위를 주장하였다. 그의 이러한 사상에서 빚어진 본서는, 생명은 끊임 없는 창조적 활동으로 지속되며 그것은 언제나 생성되고 있는 과정이므로, 완성된 세계를 가정하는 기계론이나 목적론으로서는 생명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는 사상을 그 핵심으로 한다. 그러므로 생물은 물질적 결합의 복잡한 기계적 원인에 의해 진화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적 비약 에 의해 창조적으로 진화해간다는 것이다.


a. 생애와 작품활동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 제임스가 그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신은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를 읽어보셨습니까? 내가 생각하기에는 오늘날까지 씌어진 책 중에서 가장 훌륭한 책이라고 생각됩니다. 라며 신에게 감사했다 한다. 베르그송은 프랑스 유심론의 집대성자이며, 칸트의 관념론에 대립하는 실재론으로 20세기 사상을 준비한 독창적 사상가이자 유태계 프랑스 철학자이다. 베르그송은 음악교사의 아들로 파리에서 출생하여 고등학교 시절부터 문학, 과학, 수학, 기하학 등에서 발군의 천재성을 보였다. 그 시절에 사회적 진화론을 주장한 스펜서의 (제1원리)를 탐독하고 큰 감명을 받았다. 그러나 후에 스펜서의 철학을 뒷받침하는 기계론적 이론의 한계를 발견하고 철저한 비판의 입장에 선다. 대학생활중에는 특별한 활동은 하지 않으며 조용히 침묵을 지키며 혼자서 명상하고 연구에 몰두하였다. 22세 때 학업을 마치고 철학교사 자격을 얻어 오랫동안 고교교사로 재직하였다. 고교교사로 재직하면서 운동과 지속에 관한 연구에 몰두하며 (시간과 자유의지)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이어 1896년에는 (물질과 기억)을 쓰고, 1900년에는 학자로는 영예인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가 된다.

처음에는 그리스 철학을 강의하고, 후에는 현대철학을 강의하였다. 그런데 그의 강의는 수강생들을 크게 감명시켜, 창가나 복도에도 그의 강의를 듣기 휘한 사람들로 붐볐다고 한다. 1907년 (창조적 진화)를 써서 하룻밤 사이에 철학계의 거물이 되었다. 이 책은 여러 나라에 변역 소개되어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1928년(69세)에는 아름다운 문체를 인정받아 노벨 문학상을 받는데, 그 수상 이유는 가장 심각한 시대에 알맞은 새로운 철학을 전개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것을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문체로 표현했기 때문이라 하였다. 1932년 마지막 대작인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을 쓰고 1937년에는 파리에서 개최된 제9회 국제철학회에서 명예회장으로 추대를 받았다. 이때 그는 우리는 사색인으로서 행동하고, 행동인으로서 사색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1941년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유태인이었던 그는 나치 점령하에서 나는 너무 오래 산 것 같다고 말할 정도로 고통으로 받으면서도, 나치에 의해 박해 받는 유태인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왔으며, 카톨릭 편에 선 적은 결코 없었다. 베르그송은 생의 철학자로서 시인인 폐기, 소설가, 프루스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는데, 특히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문학으로 표현된 베르그송의 사상적인 평가까지 받고 있다.


b. 생의 철학과  엘랑 비탈 

 생의 철학 : 17-8세기 시민혁명의 사상적 기반이었던 계몽철학과 과학적 지성은 18세기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영국에서는 벤담과 밀의 공리주의로, 프랑스에서는 콩트를 중심으로 한 실증주의로 나타났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합리론과 관념론의 주지주의적이고 이성적인 경향에 반대하고, 인간의 현실생활 자체를 중시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유물론, 생의 철학, 실존주의 사상 등을 들 수 있다. 이중 생의 철학은 계몽철학의 주지주의와 헤겔의 이성주의와 관점을 배격하고, 인간의 의지를 중시한 반이성주의 철학으로, 생철학자들은 생을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직관적이고 비합리적인 방법을 통하여 생의 의의, 가치, 본질 등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즉, 생의 철학은 주정주의, 주의주의 비합리주의, 반이성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철학 사조다. 이처럼 콩트의 실증주의의 칸트나 헤겔의 이성주의적 인식론을 비판하면서, 오성에 의한 직관을 중시한 사람들로는 쇼펜하우어, 니체, 베르그송, 딜타이, 슈바이처, 짐멜 등이 있다. 이중 쇼펜하우어는 이 세상과 우주가 온통 생의 의지 (살려는 의지)로 가득 찼다고 보았고,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생의 의지 대신  권력의지 를 주장했다. 반면 베르그송은 생명의 비약 (엘랑 비탈, élan vital) 이라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엘랑 비탈 : 베르그송은 1907년(48세) (창조적 신화)를 통해 생물의 진화는 동물과 식물이라는 2대방향으로 진행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들의 맨 앞에 의식 있는 인간이 서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진화는 왜 일어나는 것일까? 우리의 내면에는 항상 움직이면서 예측 불가능한 충동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것을 그는 엘랑 비탈 이라 불렀다. 이것은 항상 연속적으로 생겨나는 생명의 비약이라 보았는데, 이 엘랑 비탈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창조적 진화다. 생명과 반대되는 것은 물질이다. 이렇게 진화하다 보면 마침내 죽음까지 극복하고 영원히 사는 존재가 될지 모른다. 이 세계에 충만한 생명의 힘은 새로운 창조의 원동력이 되어 끊임없이 비약하고 약진할 것이다. 베르그송은 이처럼 생명을 모든 존재의 기반이라고 보았다.


c. (창조적 진화)의 내용

  (창조적 진화)는 이러한 방법론에 근거해서 초기의 저서(시간과 자유의지)와 (물질과 기억)에서 얻은 결론을 수용하고, 다시 생명과 물질에 대한 실증적 사실을 토대로 만유를 하나의 통일된 관점에서 질서잡은 것으로, 그의 철학 거의 전체계가 웅장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거의 전체 란 표현을 쓴 이유는 이 책 이후 25년 동안 기독교 신비체험가들에 대한 엄밀한 철학적 성찰을 한 후에 나온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에서 그가 기독교의 창조성을 인정하고 ; 사랑의 비약 을 통한 열린 사회의 이념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의 철학이 갖는 중요한 철학사적 의의는 영원한 상 아래서 세계를 바라보는 존재우위의 형이상학에 근본적으로 반대해, 지속의 상 아래서 생성과 변화를 근원적 실재로 파악하는 역동적 형이상학을 구축한데 있다. 유동하는 실재를 불변성과 부동성의 차원에서 파악하려는 플라톤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원동자, 칸트의 물자체, 근대물리학의 기계적 우주관 등을 배격하고 그는 실재성을 부단한 생성과 운동, 그리고 창조의 과정 속에서 파악한다. 본서에 포함되어 있는 문제는 매우 광범위하고 다양하며 그 전부를 간단히 요약하기는 어려우므로 본서의 일관된 주요 테마만을 다루기로 한다. 그것은 우리가 사물 및 우리 사회에 대하여 품고 있는 견해 속에 부단히 비연속성을 도입하는 지성의 본성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본서가 생명 및 진화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도 지성을 그 발생과 기능에서 고찰하여 그 본성을 밝히기 위해서다. 저자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전 자연철학의 주요 과오는 생명진화를 하등한 형태에서 고등한 형태로 향하는 일직선적 진화로 보고, 식물적, 동물적, 인간적 생명을 동일한 경향의 단계로 생각한 점에 있다고 한다. 또한 이 견해는 본능과 지성을 동일선상의 진화단계의 차이로 보면서, 본능에는 아무런 정신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거기에서 인식의 유일하고 또 최고의 능력으로서 지성밖에 인정하지 않는 주지철학의 전통이 생긴다. 철학상의 그릇된 견해는 대부분 거기서 유래하고 있다. 저자가 새로이 제창하고 있는 생명진화관의 문제점은 이상 3종의 생명형태는 같은 근원적 생명활동의 지상적인 3개의 현현이므로, 첫째로는 본능과 지성은 동일근원에서 발한 것이고 같은 성질의 것이라는 점, 즉 본능도 지성과 마찬가지로 정신에 속한다는 점, 둘째로는 지성도 또한 생명진화의 한 소산으로서 물질에 작용하는 실천적 역할을 그 본래의 기능으로 삼고 있다는 점, 셋째로는 순수인식의 능력으로서는 직관 외에는 없다는 점을 증명하는 데 있다고 말하였다. 그는 진화과정 전체를 지속적으로 발전하면서 새로운 형태를 발생시키는 생명의 비약이 지속되는 것으로 보자고 제안했다. 즉 진화란 기계적이 아니라 창조적이라는 것이다. 이 발전과정에서 베르그송은 2가지의 흐름을 추적했다. 하나는 본능을 통해 곤충에 이르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지성의 진화를 통해 인간에 이르는 길이다. 그러나 이 2가지 길은 모두 세계전체에서 똑같은 생명의 비약이 활동하는 방식이다. 그의 생명이론과 진화론은 당시에 유행했던 사조, 즉 생명현상을 물리화학적 현상으로 환원하려는 유물론과, 진화의 과정을 우연적 변이와 환경의 요인으로 설명하는 다윈류의 기계론적 진화론은 물론, 목적론적 진화론도 모두 배격한다. 기계론의 비판을 들면, 예컨대 터널의 구조는 산의 지세에 따라 결정되지만 그렇다고 산이 터널의 원인 자체가 아니듯이, 생명의 진화는 환경에 대한 적응의 필연성에 좌우되기는 하나, 진화의 원동력은 독립적인 원리인 것이다. 진화의 과정은 물질의 저항을 보다 효과적으로 극복하려는 생명의 내적 원리에 근거한 것으로, 그 과정은 비약적으로 이루어진다. 그가 서로 모순되는 두 개념의 합성어인 창조적 진화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이렇다. 진화의 과정이 이전의 어떤 형태의 기계론이나 목적론에 의해서도 설명될 수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다. (사고에 대한 영화촬영술적 기계론과 기계론의 환상)이라는 제목의 마지막 장에서 철학적 사유의 역사 전체를 검토하면서, 그 동안의 모든 철학이 생성의 본성과 중요성을 올바로 파악하지 못함으로써, 정적 불연속적 개념을 끌어들여 실재의 본성을 왜곡했음을 보여주려 했다. 그러나 그는 장구한 세월을 통해 지성 일변도로 진화해 온 인간의 의식 속에 거의 퇴화된, 그러나 아직도 완전히 소멸되지 않는 가능태로서의 직관력을 이용했다. 따라서 인식론 차원에서 철학의 소임은 이러한 직관력을 개발하고 사물을 개념적 분석으로서가 아니라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d. 베르그송 철학의 의의 

    이성과 지성 대신 직관 중시 19세기 후반의 서유럽 사상이 기계적인 분석주의와 물질주의에 빠져버릴 위험성이 커지자, 그는 분석적 방법보다 직관적 인식을 주장하고 아무것도 고정된 것은 없다고 보았다. 즉, 생명의 근원은 끊임없이 유동하고 성장하며 항상 새로운 자기자신을 창조해나가는 힘에 있다고 보고, 인간의 지성은 이 끊임없이 변하는 진정한 실재를 파악하지 못하며, 예술가가 갖는 직관력에 의해 비로소 실재를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과학적 결정론에 대한 반발인 베르그송의 생명주의 철학은 프랑스의 유심론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다윈과 스펜서 등의 진화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으로, 단순한 적자생존론과 자연선택설이 아닌 생명의 창조적 진화를 주장하였다. 즉, 생명의 진화는 필연이 아니라 자유와 창조에 의해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또한 생명의 파악은 지성이나 체험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직관만을 무기로 삼아야 한다고 설파하였다. 그는 이성에 근거한 체계와 사실에 근거한 이론을 분명히 구분한다.

그의 눈에는 서양의 전통적 철학의 대부분은 사실에 대한 충실한 조화보다는 이성의 논리와 그 정합성 위에 세워진 것이며, 이러한 결함은 그가 극복하고자 한 20세기 초의 실증주의, 과학주의에서도 역시 발견된다. 왜냐하면 과학의 분석적 사고는 화이트헤드가 지적한 것처럼 잘못 놓인 구체성의 오류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적 결정론 비판 - 베르그송은 (창조적 진화)를 통해서 이성과 지성을 바탕으로 하는 전통적 과학이 지구상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과학적 만능사상에 반격을 가하였다. 특히 기계론적, 유물론적 방법에 대한 오류를 지적하였다. 그의 관점은 일종의 우주활력설로서, 생의 비약, 즉 생명 그 자체이며, 진화는 물질의 지배를 벗어나고 자아의식을 이룩하려는 생명의 에너지다. 이러한 베르그송의 사상은 당대에 열광적인 지지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 이유는 생명 비약의 이론이 기계주의적이고 유물론적인 과학주의가 제시하는 암울한 세계관을 극복하고, 정신의 자유와 창조, 그리고 희망의 지평으로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베르그송의 열렬한 예찬자였던 제임스가 사람들은 이 책에서 아침의 미풍을 들이마시고, 새들의 웃음소리를 듣게 되었다고 말한 것은 이 책의 시대적 의미를 잘 표현한 것이다. 그의 사상은 학파를 형성하지는 않았으나, 20세기의 철학, 문학, 예술일반에 광범한 영향을 미쳤다. 20세기 전반에 간행된 철학적 저작으로서 본서만큼 광범하게 양향을 미친 저작도 드물다. 그것은 단지 철학계에만 한정되지 않고, 학문, 사상, 행동의 거의 모든 영역에 미치고 있다. 특히 프랑스에 있어서 20세기 초엽의 사상계는 찬반의 어느 쪽이든 간에 베르그송의 신철학을 중심으로 한 열정적 논의로 지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르그송 철학은 그뒤 실존주의와 구조주의의 등장으로 청년들의 인기를 잃었지만, 그의 철학이 드러내는 세계상의 생생함과 다양함은 오늘날에도 철학자들에게 공감을 얻고 있다. 과학문명의 발달로 모든 것이 규격화되고 획일화 되어가는 오늘날, 인간이 목적으로서가 아닌 수단으로 전작 해가는 현실 속에서 신선한 베르그송의 철학을 접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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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주의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자 主知主義

분야 문학/현대문학

유형 개념용어

시대 근대

집필자 문덕수

 

 

[정의]

감각과 정서보다는 지성을 중요시하는 창작 태도 또는 그 경향.

[내용]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사회의 혼란과 무질서는 심각한 위기의식을 가지게 하였다. 그리하여 기존의 문화와 전통을 부정하는 반역의 고뇌에서 감각과 관능의 세계로 도피하여 탐미주의(耽美主義) 또는 주정주의(主情主義) 쪽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극복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한 필요에 의해 지성의 절대적 우위를 강조하고, 유럽 문명의 전통을 재생하며, 정신적 질서를 회복하고자 하는 문학적 태도가 생겨났다. 이러한 측면에서 주지주의는 첫째 지성의 절대적 우위, 둘째 탐미주의·주의주의(主意主義)·주정주의의 반대, 셋째 전통적 질서의 회복과 현대문명의 위기극복이라는 세 가지 기본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흔히 이지(理智, intellect)와 주지(主知, intelligence)를 구별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으나, 그 구별이 용이하지 않다는 점에서 주지는 이 둘을 포함하는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지성의 ‘절대적 우위’란 내용면에서 보면 문학작품 속의 지적 요소, 시사적(時事的) 현상, 과학적·사상적 내용 등을 의미하고, 방법면에서 보면 질서의식에 의거하여 감정이나 본능에 대한 통제나 억제 작용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주지주의는 내용도 중요하나 그 방법의 의식적 실천이 더욱 중요하다.).

탐미주의나 주의주의(主意主義) 및 주정주의의 반대란 노만주의나 감상주의 같은 감정적·감상적(感傷的) 문학을 좋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반노만주의 태도를 가리킨다.), 또 한편 본능적·영감적 동기를 문학에서 배제하고 의식적·비평적 문학이라야 함을 의미한다. 본능은 직관적이고 무의식적이며 자연발생적이나 주지는 의식적 방법을 중시한다.

여기서 낭만적 천재의 개념도 부정된다. 전통의 회복과 현대문명의 위기 극복의 시도는 주지주의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프랑스의 주지주의는 발레리(Valery, P.)를 정점으로 하고, 영국의 주지주의는 흄(Hulme, T.E.)·엘리엇(Eliot, T.S.)·리드(Read, H.)·헉슬리(Huxley, A.L.) 등으로 대표된다.

특히 흄의 불연속적 세계관은 새로운 질서 회복의 의도에서 직관적으로 추구된 사상이며, 흄의 사상적 기초에서 정립된 엘리엇의 전통과 정통(正統, orthodox)은 황폐화된 현대문명의 구제라는 의식이 그 밑에 깔려 있다. 이러한 점에서 엘리엇의 장시 <황무지 The Waste Land>(1922)와 논문 <전통과 개인적 재능 Tradition and the Individual Talent>은 이 방면의 중요 문헌이다.

주지주의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즉, 이미지즘(imagism)과 주지주의의 구별, 모더니즘(moderism)과 주지주의를 동일개념으로 보는 오류(주지주의도 모더니즘의 한 경향이다.) 등이 그것이다. 이미지즘은 주지주의의 전단계로서 하나의 유파를 형성한 운동이다.

그 특성으로 정확한 사물의 언어(이 점에서 이미지즘은 사물시, 즉 physical poetry이다), 그룹의 선전 활동, 새로운 리듬과 자유시의 시도, 지성적 태도 등을 들 수 있으나, 주지주의에 오면 감각과 사상의 통합(이러한 시를 形而上詩, 즉 metaphysical poetry라고 함.), 객관적 상관물, 중층묘사(multiple description), 강력한 전통의식 등을 들 수 있다.

한국에서 주지주의를 이론면에 본격적으로 도입한 비평가는 최재서(崔載瑞)이고, 비평과 더불어 작품으로 실천한 시인은 김기림(金起林)이다. 최재서의 <현대주지주의문학이론(現代主智主義文學理論)의 건설>(조선일보, 1934.5.2.)은 흄의 불연속적 세계관과 고전적 인간관, 엘리엇의 전통론과 시의 비개성설을 소개한 것이고, 김기림의 <예술에 있어서의 리얼리티 모럴 문제>(조선일보, 1933.10.21.∼24.)도 주지주의와 관련된 논문이다.

이밖에도 이양하(李敭河)의 리처즈(Richards, I.A.) 소개, 한세광(韓世光)의 이미지스트와 엘리엇 소개, 주지주의 기타 시의 번역 등이 이 무렵부터 계속되었고, 특히 김기림의 장시 <기상도 氣象圖>(彰文社, 1936)는 엘리엇의 <황무지>의 영향을 받은 이 무렵 주지주의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을 죽음과 재생의 패턴으로 구성한 이 시는 이미지의 동시적 병치, 객관적 상관물(objective correlative)의 방법, 풍자와 아이러니, 의식의 흐름의 수법, 사상과 감각의 통합 등의 다양한 특성을 보여준다. 한국에서 형이상학적 시의 길을 열어놓은 이 장시 이후, 김광섭(金珖燮)·김현승(金顯承) 등의 주지주의 시인들이 그 뒤를 이었다.



C35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 /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che. 1844--1900)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신은 죽었다’고 외친 무신론적 실존주의자 니체가 쓴 책. 차라투스트라가 신의 죽음을 외치고 산을 내려와 여행하면서 가르침을 전하는 과정을 특유의 박진감 넘치는 문체와 시적 표현으로 잘 나타낸 작품으로 기존의 서구사상의 중심이던 크리스트교를 부인하고 새로운 사상과 질서를 창조하기 위해 니체가 권력의지, 영원회귀 사상, 초인사상의 개념을 도입한 철학적 산문시이기도 하다. 이 책은 그 뒤의 철학자, 시인, 작가들에게 영원하고 무진장한 사유의 보고를 제공했다.


a. 생애와 작품활동

 나는 니체처럼 이렇게 젊은 나이에 이토록 성숙한 청년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니체는 천재다. 그는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은 무엇이나 능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은 니체가 스위스의 비젤 대학 교수로 초빙되었을 때 스승인 리츨 교수가 쓴 추천서의 일부이다. 전쟁을 옹호한 철학자 니체는 독일에서 시골목사의 아들로 독실한 기독교적 분위기 속에서 태어났다. 그가 6세 때 부친은 뇌진탕을 앓다가 숨져 홀로 된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는 어려서부터 시도 쓰고 작곡도 하였다. 그리스 고전과 바이런, 세익스피어등의 작품을 탐독하였고, 어학성적은 좋았으나 수학성적은 낙제점수를 겨우 면할 정도였다. 20세 때인 1864년에 본 대학에 입학하여 대학생 사교클럽에 가입하였는데, 회원들과 함께 향락에 빠져 극장출입, 음악감상, 끽연 그리고 술과 여자를 탐닉하여 한때 성병에 걸리기도 했다. 그는 어머니의 희망대로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과에 적을 두었지만 성적은 신통치 못했고, 결국 크리스트 교에 대한 회의와 스승인 리츨 교수의 권유로 신학을 버린다. 이듬해에는 스승을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겨 새로운 자세로 문헌학 연구에 몰입한다. 스승의 권유로 문헌학 연구회인 (게르마니아)를 창립한다. 이즈음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헌책 방에서 사가지고 2주일 동안 집중 탐독한 후 쇼펜하우어는 꼭 나를 위해 이 책을 쓴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것은 그가 철학과 깊은 관계를 맺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23세 때 징집되어 복무하던 중 부상을 입는데 이것은 한평생 그를 괴롭혔다. 졸업 후 스승의 추천으로 스위스의 바젤 대학 교수로 초빙되었고, 1869년 25세 때부터는 음악가 바그너의 사상과 음악의 영향을 받았다. 이듬해에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위생병으로 종군을 지원했다. 그러나 질병에 걸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제대한 후, 평생 병고에 시달리는 몸이 되었다. 그의 처녀작으로 그리스도를 비방하는 내용의 (비극의 탄생)은 바그너와 몇몇 친구를 제외하고 주위의 반감을 사서 그의 강의에 수강자가 한 명도 없을 정도였다. 이 저서는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을 빌려, 그리스 비극의 정신이 진실한 문화창조의 원천임을 인식하고, 아폴론 형 과 디오니소스 형 의 두 가지 원리로 그리스비극을 독창적으로 해석하였다. 1876년 32세 때에는 바그너에 의해 극장이 준공되고, 바그너의 인기는 절정에 올랐다.

이때 니체는 자아도취에 빠진 바그너에게서 속물근성을 보고 그가 그 동안 보냈던 애정을 철회한다. 바그너의 작품경향이 크리스트 교로 기울자 이를 비판하는 (인간적인 너무 인간적인)을 써서 바그너에게 증정하였다. 신랄한 비판에 바그너는 니체를 미워하고, 잡지에 과격한 니체 공격문을 실었다. 이후 이들은 서로 멀어졌다. 이해에 건강까지 악화되어 강의를 중단하고, 한 여류음악가를 알게 되어 성급하게

구혼하였다가 거절당했다. 35세 때에는 21세의 루살로메에게 청혼하여 또다시 고배를 마시고,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다. 39세부터 41세에 걸쳐 전에 알프스 산중에서 깨달았던 영원회귀 사상을 기반으로 한 초인사상 을 그린 철학적 서사시인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완성한다. 그러나 당시에 비판이 거세 지자, 그 답변을 위해42세 때 (도덕의 계보)를 다시 썼다. 44세 때인 1888년에는 소위 창작 삼매경에 들어가 (바그너의 경우) (디오니소스 찬가) (우상의 황혼) (반그리스도) (이 사람을 보라) (니체 대 바그너) (권력에의 의지)를 썼다. 44세 말기부터는 정신착란 증세가 나타났는데,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날벼락을 맞은 것이라고 그를 비난했고, 이후 10여 년 동안 가족들의 보호를 받으며 1900년에 세상을 떠났다.


b. 니체의 사상

  진화론에 의해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은 니체 사상의 핵심은 자연도태가 인간의 경우에도 가차없이 적용되어야 한다. 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허약하고 병든 생활 때문에 오히려  생존경쟁 을 찬미한 기이한 시인이었다. 그에 의하면 살아남는 유일한 사람의 유형은 어떤 수단이든 가리지 않고 권위를 얻는 힘있는 사람으로 자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이상적 지배자인 초인은 용기, 힘, 이기심, 잔인 등의 특성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부적격자를 끊임없이 추려낸다면 궁극에 가서는 초인의 인종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자연도태과정 이 시작되기 전에 장해가 되는 종교는 제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종교는 부적격자와 허약자를 옹호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나 사회주의도 역시, 무가치한 자와 약자를 도와 강자를 방해하기 때문에 무시되어야 한다. 이러한, 니체의 반민주적인 독재숭배는 장차 전

세계를 역사상 최악의 전쟁 속으로 몰고 간 나치즘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권력의지 -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맹목적 생존의지 대신 권력의지를 삶의 본질로 보고, 이 권력의지를 원리로 하여 모든 가치의 새로운 평가와 새로운 변혁을 부르짖고, 권력의지를 이념으로 하는 초인사상 을 전개하였다. 니체에게 있어 권력이란 정치적인 권력이 아니고, 생명의 실재로서 자기의 생애 대한 일체의 저항을 극복하고 부단히 강해지려는 주체적인 강렬한 생존의지를 말한다. 그는 나는 생명이 있는 곳에 나는 권력의지를 발견한다. 고 하고, 선이란 권력의 감각, 권력에의 의지, 그리고 권력 그 자체를 앙양시키는 것이며, 악이란 나약에서 나오는 것 이라 하였다. 이러한 권력의지가 모든 생현상의 본래의 모습이고, 이러한 권력의지를 구현한 이상적인 인간을 초인 이라고 하였다.


  영겁회귀 - 그는 우리들의 세계는 처음과 끝 모두 알 수 없다. 모든 존재의 영원한 법칙은 끝없이 되풀이되는 사이에 인간들은 나서 죽고 생물들은 왔다 가지만, 세계 그 자체는 스스로의 윤회를 거듭할 뿐이라고 한다. 삶은 괴롭다. 그러나 인생은 영겁 회귀하는 까닭에 삶의 괴로움을 피할 수 없다. 이러한 그의 영겁회귀 사상의 근저에는 중압감, 절망감, 허무감이 흐르고 있다. 의미도 없고 목표도 없고, 그러면서 무애의 종국도 없이 불가피하게 회구해가는 생명의 실상 이 허무주의의 최극단의 모습인 것이다. 그러기에 신은 이미 죽은 것이다. 신을 부정하게 된 영겁회귀는 바로 절망의 회귀인 것이다. 이러한 허무감 중에서도 그는 초인을 설교하기를 잊지 않았다.


  초인사상 - 신이 이미 죽은 이상 인간의 나아갈 목표는 초인이라고 하였으며, 인간은 초극되어야 할 존재 라고 하였다. 초인은 인간이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적 인간상이다. 초인이란 지성보다도 본능, 합리보다도 의지, 이성보다 정열, 사고보다도 육체를 존중할 줄 아는 의지의 인간을 말한다. 이 초인은 유한 속에서 무한까지도 긍정하며 죽음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는 새로운 인간이다. 요컨대 초인은 모든 인간적인 약점을 극복한 강한 인간을 의미하여, 생을 적대적으로 긍정하는 자, 자기 운명을 사랑하는 자, 생의 영겁회귀를 받아들이는 자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권력의지의 구현자라 할 수 있다. 요컨대 니체는 도덕적 이상형의 인간을 초인, 이 세상의 근본적 본질을 권력의지, 세계의 운명을 영원회귀로 파악했다. 이처럼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신에 대신할 이념으로 초인을 내세웠다. 

초인이야말로 인간이 지향하는 목표라 주장함으로써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길을 터놓았다. 그리고 그는 인간은 기계화와 대중화 때문에 병들고 왜소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기계는 인간의 개성을 말살하고 인간을 획일화 시켰다고 주장하고, 이제 인간은 새로운 가치기준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가치는 새로 결정되어야 한다. 다 파괴하라. 낡은 법칙을 모조리 파괴하라고 외쳤다. 그리고 생의 절대긍정을 외쳤다. 인생을 즐기지 않는 것, 이것이 우리들의 원죄다. 마치 춤추는 자처럼 인생을 즐겨라. 


c. 본서의 주요내용

  이 책은 전체가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의 제목에 맞게 차라투스트라가 누구에게 말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차라투스트라가 초인의 영역에 도달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으며, 내용은 비유나 설화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이 작품은 니체의 최후의 경지라 일컬어지고 있으며, 그의 사상이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작품이다. 제1부는 신의 죽음을, 2부는 권력에의 의지, 3부와 4부는 영원회귀가 중심적인 내용으로 전개되고 있다. 제1부에서는 (차라투스트라의 서설)이 먼저 나오고 뒤이어 차라투스트라가 주제에 따라 말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차라트스트라 라는 이름은 기원전 6-7 세기경에 실존인물인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의 교조의 이름을 빌려온 것인데 니체의 사상을 전달하기 위해 선택되었다.


  제1부 먼저 서설에서 30세부터 입산하여 10년간 고독을 즐기던 차라투스트라는 어느 날 새로운 가치창조라는 사명감을 갖고 태양이 침강하여 아래세계를 비추듯, 자신의 몰락에 의해 사람들과 세계를 비추기 위해 하산하여 민중 속으로 몰락 해간다. 먼저 시장에 나가 초인 에 대해 설교한다.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치기 위해서 왔노라. 초인은 대지의 뜻이다. 너희에게 초자연의 희망을 말하는 자를 신뢰하지 말라. 그들은 독을 붓는 자다. 지금은 대지에 반역하는 것이 가장 큰 죄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지상의 법이다. 간절히 원하노니, 대지에 충실하라. 그러나 상황에 만족하고 있는 민중은 차라투스트라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는 일반사람들에게 설교하는 어리석음을 깨닫고, 친구와 동행인을 구하여 그들에게만 설교하기로 결심하면서 서설이 끝난다. 먼저 기독교에서 최선이라고 인정되는 피안의 세계, 실체에 대한 경멸, 이웃에 대한 사랑등의 이상을 냉혹하게 비판함과 동시에, 시민사회에서 최선으로 인정되는 온갖 덕목의 진상을 폭로하여 새로운 가치창조를 설교한다. 그의 설교의 기본은 대지에 충실하라 는 것이며, 여기에 정신에 대한 신체의 우위, 향상의 의욕과 심연적인 것의 의욕의 상관, 생의 비밀에의 경외 등이 서술된다. 그러나 이어 친구가 제자로 되어 자기를 믿는 사람이 많아지자, 그들은 스승의 신자에서 자율적 인간이 되기를 기약하고 그들과 헤어진다. 


  제2부 다시 산에 돌아가 고독을 즐기는데, 자기의 교설이 왜곡되어 차라투스트라의 아류가 세상에 범람하고 있음을 깨닫고 다시 하산한다. 이번의 교설은 주로 현재의 인간의 여러 가지 유형에 관한 것으로, 학자, 예언자, 시인 등, 차라투스트라 자신과 무관하지 않은 사람들이 다루어지는데, 가장 주목할 부분은 자기초극에 관해 말하는 부분이다.  생명이 있는 곳에만 의지가 있다. 그것은 생명에의 의지가 아니고 권력에의 의지이다. 우리는 진리에 의해 파괴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자. 지어야 할 집은 수없이 많다.  니체의 모든 비판적 저작이 표면상으로는 당대의 잔인한 생체 해부와 같이 보이지만, 실은 항상 인간을 .위한 고해와 자기 초극의 용기에 찬 사랑의 언어였음이 여기에서 가장 명백히 논증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밤 노래) (춤노래) (무덤의 노래) (가장 조용한 시간) 에서는 인류의 운명을 자기의 운명으로 느끼는 자의 영혼이 비할 데 없는 서정적 사상시로서 그려지고 있다. 여기에서는 아직 운명의 내용은 표시되어 있지 않으나, 때가 임박하다는 적박감이 문학적으로 독자의 가슴을 친다.


  제3부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제자들과 헤어진다. 그는 바로 산으로 돌아가지 않고 또 한번 세상의 모습을 보고 돌아다닌다. 그것은 서설에서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 현대사회의 인간들의 가난함과 더러움과 비참함, 그리고 안일 이 더욱 만연하여 구제할 수 없는 인간 왜소화 가 되어 있음을 다시 한번 확실히 응시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저 유명한 구토를 참으면서 결국 산으로 돌아가는데,여기에서 비로소  구토가 인간세계로부터 이반을 촉구하는 것이 아니라, 거구로 처참한 현상도 포함한 일체의 인간적인 것을 절대적으로 긍정하기 위한 것이었음이 판명된다. 이 3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의 영원회귀 사사이다. 니체는 세계의 근본적 의미를 권력에의 의지라 했고,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을 초인 이라 했다. 그럼 이 세상은 결국 어떻게 될 것인가? 다음을 보자. 만물은 가고 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돌아간다. 만물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꽃피운다. 존재의 나이는 영원히 달린다. 만물은 소멸하고 다시 이루어진다. 만물은 헤어지고 다시 만난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자신에게 충실하다. 모든 순간은 존재를 시작케 한다. 모든 이쪽의 둘레를 저쪽의 수레바퀴가 돈다. 중심은 어디에나 있다. 


  제4부 이제 차라투스트라는 하산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 그의 동굴에 인간의 구원을 바라는 절규가 들려와서 찾아본, 2인의 왕과 양심적인 학자와 마술사와 가장 추한 인간 등 보다 높은 인간들을 만나게 된다. 이들 인간은 각각 고요한 운명을 통해서 현대의 삶에 견딜 수 없는 점에까지 도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차라투스트라와 같이 연회를 베풂으로써 각각 애욕과 고뇌를 떨어버리고, 자기들이 극도로 괴로웠던 생을 돌아보며 또한 생이란 겨우 이런 것이던가? 좋아, 다시 한번! 하고 외치게 된다. 그럼 차라투스트라가 깨달음을 얻고 나서 자신의 동굴에서 떠나는 장면을 보자. 차라투스트라는 성숙하였다.  나의 때는 왔다. 이제 나의 아침이다. 나의 한낮이 시작된다. 자, 이리로 오라, 이리로 오라, 그대 위대한 한낮이 시작된다. 자, 이리로 오라, 이리로 오라, 그대 위대한 한낮이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고 마치 어두컴컴한 산봉우리에서 솟아오르는 아침 태양처럼 찬란하고도 힘차게 자기의 동굴을 떠나갔다. 차라투스트라의 종말은 수난이나 순교도 아니고 미래와의 결합에 의한 자기용원화라는 상징이다.


d. 니체에 대한 재평가

  이책의 주제가 워낙 복잡하고 상징과 은유를 사용하고 있어 니체의 생각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나 니체가 이 작품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당시 사람들이 빠져 있던 기독교적인 몽상에서 벗어나 인간의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얻게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작품에 나타난 인간의 정신과 철학적인 사고가 보여주는 심도는 매우 깊은 것으로 평가되어, 대체로 1870년 이후 태어난 유럽의 철학자와 문학자들은 니체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반기독교적 저작으로, 다음에는 가장 과격한 모럴리스트의 서로, 마지막으로 서사적, 형이상학적 작품으로서 받아들여졌다. 한편 용렬(容悅, [명사] 남의 마음에 들도록 아첨하여 기쁜 모양을 함)한 사람들에게 광신적인 감격을 안겨주어 온갖 해악을 가져오기도 했다. 이 책의 구상은 1881년 루 살로매에게 실연당한 니체가 고독한 심정으로 실바프라나의 호숫가를 산책하던 어느 날, 피라미드 형의 거대한 바위를 발견하고 섰을 때, 6천 피트에 달하는 공중에서 영겁과 영원회귀에 관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는 환희의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이 영감적인 계시를 불과 한 달여 만에 불꽃처럼 완성했다.

이 책에 대한 지금까지의 평가는 1) 2차대전 후에 비로소 일반인들이 깨닫기 시작한 인간상황을 매우 예리하게 깊이 통찰하여, 아무도 아직 괴로워하지 않는 인간의 어려움에 오직 혼자서 대결한 예언자의 서라는 점 2) 과학적, 분석적 비판을 가장 예리하게 행사하면서, 고귀하고 심각한 예술적 정열을 담고 있어 (파우스트) 이래 시와 사상의 일체화를 성취한 점이다. 니체는 근대 유럽의 정신적 위기를 중세의 모든 가치의 근원인 크리스트교적 신의 죽음, 즉 신은 죽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 것으로 단정하고, 여기에서 발생한 사상적 공백을 새로운 가치창조에 의해 이를 극복하고자 했다. 그는 소크라테스, 플라톤,기독교주의자들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근대의 이성적 체계 내에 갇혀 있는 자들을 혐오하여  참다운 인간성의 회복 을 주창했다. 그것의 상징적인 표현이 차라투스트라가 서문에서 말한 신은 죽었다 이다.이리하여 신 대신 초인을, 불멸의 영혼 대신 영겁회귀를, 선과 참 대신 권력의지를, 신으로부터 부여받는 기쁨 대신에 심연을 거쳐서 웃는 인간의 내재적 삶을 새로운 가치로 전환시켰다.. 그는 예수를 정치범, 루터를 보수주의자로 단정하고, 복잡한 사상편력을 거치면서 그의 비정상적인 행태로 인해 한동안 미치광이 선동자로 치부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러한 전통적 해석과는 달리 건전한 비판자로 평가하려는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즉, 그의 초인사상이 히틀러 등에 의해 일방적으로 오용 당함으로써, 한때 이들과 그를 동일시하던 시각도 없지 않았지만 그 같은 단선적인 해석은 폐기된 지 오래다.


e. 아폴론형과 디오니소스형

  투르게네프가 인간유형을 햄릿형과 돈키호테형으로 분류했듯이, 니체는 아폴론형과 디오니소스형으로 분류했다. 그리스신화에서 아폴론은 태양의 신이고 디오니소스는 술의 신이다. 아폴론의 이미지는 이성, 침착, 조화이고, 디오니소스는 광기, 본능, 열광 등의 이미지다. 니체는 1872년 그리스 비극의 근원을 논한 (비극의 탄생)에서 그리스 예술이 이처럼 대립되는 두 가지의 예술적 충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나는 그리스의 회화와 조각에서 잘 나타나고 있는 밝고 명랑한 아폴론 정신이며, 다른 하나는 음악으로 대표되는 본능적이고 이성적인 충동, 바로 디오니소스적 충동이다. 니체는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갈등과 결합에 의한 최고의 걸작이라고 간주했다. 디오니소스적 인간은 존재의 일상적인 한계를 완전히 파괴 함으로써 가치를 추구하며, 극단으로 가는 길은 지혜의 궁전에 이른다. 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 아폴론적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도 냉철함을 유지한다. 이성과 광기는 서로 다른 길을 걸어 결국은 한곳에 도달한다. 우리 인간이 믿고 의지하는 밝고 높은 등대가 바로 진리의 세계다. 그곳에서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진리는 너희의 빛,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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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출처:나무위키)


최근 수정 시각: 2017-08-14 01:50:29


Also sprach Zarathustra: Ein Buch für Alle und Keinen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만인을 위한, 그러나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1. 프리드리히 니체의 저서

1.1. 개요

1.2. 주요 인용구

1.3. 이야깃거리

2.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1. 프리드리히 니체의 저서[편집]


1.1. 개요[편집]


차라투스트라를 주인공으로 삼아 니체 자신의 철학을 풀어낸 니체의 주저(主著)다. 차라투스트라가 10년 동안 머무르던 동굴에서 하산하여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펴는 내용으로, 주로 철학서로 분류되지만, 옴니버스로 구성된 소설처럼 이야기를 전개하며, 여러 등장인물과 사물, 시간과 공간에 상징이 담겨 있는 등 문학적 요소도 많은 작품이다.


총 4부로 구성되어, 1883년에 출간된 1부를 시작으로 1년 동안 집필이 계속되어 2, 3부가 각각 출판되었다. 4부는 출판사 없이 40여 부만을 사비로 간행했다. 1~4부의 합본은 1892년, 나우만(Naumann)에서 니체 전집을 기획하여 발간되었다.


1.2. 주요 인용구[편집]


모든 사람이 서서히 죽어가면서

"산다는 건 원래 이런 거야"라고 말하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새로운 우상' 中

사랑하는 자는 경멸하기 때문에 창조하려고 한다! 자신이 사랑한 것을 경멸할 줄 모르는 자가 사랑을 알겠는가!

나의 형제여, 그대의 사랑, 그대의 창조와 함께 그대의 고독 속으로 들어가라. 그러면 나중에 가서 정의가 다리를 절며 그대를 뒤따라올 것이다.

나의 형제여, 그대의 눈물과 함께 고독 속으로 들어가라. 나는 자기 자신을 넘어 창조하려고 파멸하는 자를 사랑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창조자의 길' 中

지금 이 인생을 다시 한 번 완전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라.

두려움을 알면서 두려움을 제압하는 자, 심연을 보지만 자긍심이 있는 자가 대담한 자다.

심연을 보지만 독수리의 눈으로 보는 자, 독수리의 발톱으로 붙잡는 자에게 용기가 있다.

사람은 대지와 삶이 무겁다고 말한다. 중력의 악령이 바라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가벼워지기를 바라고 새가 되기를 바라는 자는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이름이 차라투스트라라고 했던가. 그러나 그도 변했군. 그대는 자신의 타고 남은 재를 산으로 날라 갔지. 오늘은 그대의 불덩이를 골짜기로 날아 가려고 하는가? 그런데 이제 잠든 사람들에게로 가서 뭘 하자는 건가. 바닷속에 있는 듯 고독 속에서 살았고, 그 바다가 그대를 품어주었지. 그런데도 그대는 뭍에 오르려 하는가."

차라투스트라가 대답했다. "인간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오."

"하지만 이제 나는 신을 사랑하네. 인간에 대한 사랑은 나를 파멸시킬 테지."

차라투스트라가 대답했다. "사랑에 대해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소. 다만 인간들에게 선물을 주고 싶다오."

"인간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말게. 차라리 그들로부터 얼마간을 빼앗아 그것을 그들과 나누어 가지도록 하게. 그래야 인간에게 더없이 큰 도움이 될 것이네. 그들로 하여금 애걸하도록 하게."

차라투스트라가 대답했다. "자선을 베풀고 싶지는 않소, 나는 그렇게 할 만큼 가난하지는 않다오."

"그들은 은둔자를 불신하며 우리가 선물을 주려고 왔다는 것을 믿지 않네. 왜 그대는 나처럼 곰들 속의 한 마리 곰, 새들 속의 한 마리 새로 머물고자 하지 않는가. "

차라투스트라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저 늙은 성자는 숲 속에 있어서 신이 죽었다는 소식조차 듣지 못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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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이야깃거리[편집]


패러디가 많은 책이다. 내용 곳곳에 신약성서 패러디가 많으며, 책 제목도 자라투스트라[1]의 패러디로 볼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가장 숙명적 액운인 도덕이라는 오류를 창조해냈으며, 따라서 그는 그 오류를 인식한 최초의 사람이기도 하다."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하나의 운명인지 中


영원회귀, 힘을 향한 의지, 초인 등 니체 철학의 많은 개념이 한데 모이는 사실상 프리드리히 니체의 대표작으로 본인의 저작 중 가장 인지도가 높지만, 많은 니체 연구자들이 입을 모아서 "이건 절대로 처음 읽으면 안 된다! 제일 마지막으로 읽어야 한다!"라고 이 책으로 니체 철학에 입문하는 걸 만류하는 책이다.[2] 안 그래도 함축적이어서 이해가 어려운 니체의 책 가운데서도 온갖 문학적 장치로 가득 찬 수수께끼 같은 책이기 때문이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경구를 접하고서 니체에게 이끌려 이 책으로 니체 철학에 입문하는 사람이 많다.


흔히 차라투스트라, 짜라투스트라로 번역되는데, 특이하게도 '짜라두짜'라고 번역한 책이 있다. 2007년에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지>라고 나왔다가 절판되고, 2012년에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로 다시 나왔다. 인터넷에 찾아보면 백석현과 박성현[4]으로 두 책의 역자 이름이 다르지만, 사실 동일인물이다. 다른 번역에 비해 읽기가 수월하고, 각주가 충실하여 평이 상당히 좋다. 무엇보다 원문이 운문으로 쓰였다고 하는데, 그 점에 유념하고 번역했다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다만 사람에 따라선 우상으로 표상되는 기존의 가치들에 망치를 들이대며 부숴버리기를 촉구하는 패기 넘치고, 카리스마가 철철 흐르던 기존의 '차라투스트라'적 어투가 아닌 점에 대해 불만을 표하기도 한다. 그래도 내용전달이 가장 수월한 번역이라는 점은 대체로 인정받는다. 비유하자면 개역 개정 성경과 새 번역 성경의 차이 정도라고 보면 되겠다. 


어느 한 부분을 떼어 비교하자면 다음과 같다.


1부 창조자의 길(Vom Wege des Schaffenden) 中

원문

일반 번역

박성현 번역

Schaffen will der Liebende, weil er verachtet!

Was weiss Der von Liebe, der nicht gerade verachten musste, was er liebte!

사랑하는 자는 경멸하기 때문에 창조하려고 한다!

자신이 사랑한 것을 경멸할 줄 모르는 자가 사랑을 알겠는가!

<사랑하는 사람>이 창조하기 원하는 이유는 경멸하기 때문이야!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를 경멸해야만 했던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Mit deiner Liebe gehe in deine Vereinsamung und mit deinem Schaffen, mein Bruder; und spät erst wird die Gerechtigkeit dir nachhinken.

나의 형제여, 그대의 사랑, 그대의 창조와 함께 그대의 고독 속으로 들어가라. 그러면 나중에 가서 정의가 다리를 절며 그대를 뒤따라올 것이다.

형제들! <떼>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 가도록! 사랑을 간직한 채 창조하면서 혼자 가도록! 사람들이 자네를 공정하게 대우해 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말도록!

Mit meinen Thränen gehe in deine Vereinsamung, mein Bruder. Ich liebe Den, der über sich selber hinaus schaffen will und so zu Grunde geht. —

나의 형제여, 그대의 눈물과 함께 고독 속으로 들어가라. 나는 자기 자신을 넘어 창조하려고 파멸하는 자를 사랑한다.

형제들! 떨어져 나와 혼자 가도록! 자네에게 바친 내 눈물을 간직한 채 혼자 가도록! 자기 자신을 넘어서 창조하기 원하는 사람, 그리하여 그 과정에서 패하여 사그라지는 사람을 나는 사랑해.

Also sprach Zarathustra.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지.


그 외에도 알고 싶은 게 있다면 한국어 니체 전집 번역자로 참여하기도 한 니체 철학 권위자인 백승영 교수의 해제와 밑에 보이는 그녀의 강의 동영상을 보는 것을 추천한다.



2.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편집]



위의 책을 토대로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교향시. 서주[5]는 그 특유의 웅장함 덕분에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오프닝 음악으로 삽입된 바 있으며, 이후로도 LG전자의 휴대폰 브랜드인 싸이언의 TV CF 음악, WWE 선수인 릭 플레어의 테마곡, 종합격투기 선수 밥 샙 역시 테마곡으로 사용되는 등 여러 곳에 애용되고 있다.



[1]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 본명 Zaraϑuštra(자라수슈트라). 독일어로는 Zarathustra(차라투스트라)며, 영어로는 Zoroaster(조로아스터).

[2] 반대로 입문 추천작은 니체 스스로 자신의 저작들을 설명하는 《이 사람을 보라》.

[3] 이하 백승영 교수 강의 동영상 25분 20초부터 참조

[4] 서울대 정치학과 4학년 중퇴에, 미국 조지워싱턴대 경제학부 졸업생으로, 인터넷에선 '뱅모'로 유명하다. 현재 뉴데일리 주필로 재직 중.

[5] 니체의 책 목차에서 이름을 따 일출(Sunrise)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C34 – 실증철학 강의(Cours de philsophie positive) / 콩트(Auguste Comte, 1798-1857)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프랑스 실증주의 창시자인 콩트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19세기 전 유럽의 사상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과학의 실증성을 강조한 콩트는 특히 사회학을 인간들간의 사회적 관계를 연구하고 이러한 관계가 어떻게 역사과정 속에서 변해가는지를 탐구하는 학문으로 규정함으로써 사회학이 새로운 학문으로서의 지위를 가질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실증철학강의에서 그는 각 역사적 단계에서의 인간정신, 즉 과학이 그 이전의 단계에 의존하여 진보하고 있음을 증명해 보이고자 하였다.

 전의 개념이 굳은 신념으로 받아들여짐에 따라 점차 종래의 신학적 믿음과 형이상학적 사변은 과학적 설명과 지식으로 대치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불러일으켰다. 

 실증주의, 실증주의란 콩트가 창시한 것으로, 가치 있는 유일한 지식이란 실증적인 지식, 즉 과학에서 오는 지식이어야 한다는 그의 해석에서 유래하는데, 공리주의와 같이 진리가 경험, 또는 자연계의 관찰에서 온다고 하는 경험주의 철학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

이러한 실증주의의 근본원리는 실재하는 것 즉, 실질적인 것을 문제삼고, 거기서 벗어난 영역을 일절 부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증적인 것은 오직 현상뿐이므로 실증주의는 현상계만을 그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1. 현상계를 통해서 2. 주어진 일체의 사실을 일정한 법칙에 따라 정리하며 3. 여기서 도출된 법칙을 토대로 앞으로 현상계에서 나타날 사실을 예견하며, 그에 대해 대처할 준비를 갖추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예견하기 위해 알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실증주의는 경험적 사실만이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따라서 관찰과 실험을 바탕으로 한 과학만이 정당한 지식임을 주장한다. 따라서 실증주의는 경험적 사실과 과학적 방법을 초월하는 실체나 힘의 존재를 부인한다. 즉, 과학적 방법으로 환원될 수 없는 어떠한 탐구나 형이상학도 부정한다. 콩트에 의하면 철학은 과학과 다른 방법을 갖지 않으며, 철학의 임무는 모든 과학에 공통된 일반원리 들을 찾아내어 인간의 삶을 밝히고, 더 나아가 사회구성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산업혁명은 인류의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희망과 더불어 실증주의에 대한 확신을 불러 일으켰다. 

실증주의는 과학을 넘어 윤리학, 정치학, 종교에 이르기까지 파급되어 인간지식의 모든 분야를 실증적 기반 위에서 과학적 방법에 의해 재정립할 것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이중에서도 특히 카톨릭의 신학적 종교 대신 실증적 종교를 수립코자 한 시도는 후기에서 두드러진다. 그는 자칭 인간성 종교인 인도교를 발전시켜. 이 종교를 통해 모든 사람들의 정의, 박애, 자선에 공동적으로 참여할 것이라고 생각 하였다. 


a. 실증철학 강의의 주요내용

 콩트는 1820년대 중반의 실증철학의 체계의 구상이 성숙되자 그것을 강의형식으로 발표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다음 유명인사들을 모아놓고 모두 72회의 강연을 한 후 일반대중에게도 공개강연을 한다. 12년에 걸쳐 총 6권으로 완결된 실증철학강의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개설 2강, 수학 16강, 천체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각 10강, 사회학 14강으로 전체가 72강이며, 그 목적은 실증철학과 사회학의 확립에 두었다. 제 1권은 전체의 서론과 수리철학, 제 2권은 천체철학과 물리철학, 제 3권은 화학철학과 생물철학, 제 4권은 사회철학과 이론적 부분, 제 5권은 사회철학의 역사적 부분, 제 6권은 사회철학의 (보족)과 전체의 결론을 다루고 있다.


 인간정신발달의 3단계, 실증철학강의에서 콩트는 인간정신발달의 3단계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의 유명한 단계의 법칙 이다. 첫번째 단계는 신학적 단계다. 이 단계에서 세계와 세계 속의 인간의 운명은 신의 의지에 의해 설명된다는 것인데, 이 신학적 단계는 다시 3단계를 거친다. 즉, 모든 사물이 영혼을 지닌다는 만물숭배의 (물활론)단계, 다신교 의 단계, 일신교의 단계를 거친다. 두번째는 형이상학적 단계다. 여기에서는 본질, 궁극원인, 추상적인 개념들로 인간 및 세계의 운명이 설명된다. 즉 형이상학적 단계에서는 어떤 현상을 신의 의지가 아니라, 생명의 원리와 같은 추상적 개념에 의해 설명하고자 한다. 세번째는 실증적 단계다. 과학적 정신의 이 단계에서는 인간의 경험적인 관찰을 통해서, 혹은 이성적 능력을 활용해서 오직 주어진 사실을 통해서 나타나는 유사성과 계속성의 법칙만을 파악하고자 한다. 경험에 나타나는 반복되는 사실들을 관찰함으로써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불변의 법칙을 발견하고자 하며, 이 실증적 단계에서 비로소 학문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사회학의 제창, 그는 이 최종적 단계에 도달하면 모든 현상들이 단일한 법칙으로 표시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자연현상의 이해에 대해서는 실증적 단계에 도달했지만, 사회현상의 이해에 대해서는 이 단계에 도달하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이로 인해 사회현상에는 3가지 단계가 혼재하게 되었고, 이러한 지적 무정부 상태로 이해 혁명후의 프랑스가 정신적, 정치적 혼란을 면한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런 불안정한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사회현상을 지배하는 법칙을 발견하고, 이를 바탕으로 합당한 제도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법칙의 발견은 신이나 추상적 사변이 아닌, 관찰을 바탕으로 한  실증철학에 의해 가능한데, 이에 대해  사회학 을 제안했다.  


 학문의 분류, 콩트는 3단계로 인정한 실증적인 인간의 지식을 다시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사회학의 5대 현상군에 대응시켜 5개의 기초적인 추상과학을 얻고, 거기에 기초과학으로서의 수학을 넣어 6개의 실증과학 체계를 세웠다. 그리하여 그는 과학의 계통을 학문의 성격상 가장 단순한 것으로부터 더욱 복잡한 순서, 즉 수학,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사회학의 순서가 된다고 보았다. 이들 중 다른 것들은 실증적 단계에 이르렀지만 사회학만 뒤떨어져 있다면서 실증과학으로서의 사회학을 수립코자 하였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실증적 종교로서의 인류교를 제창하였다. 한편, 그는 과학의 계통에서 나중의 과학은 앞의 과학에 의존하고 있다고 보았고, 첫번째 것이 당연히 전체 실증철학의 출발점이 되며, 마지막 것이 목표가 된다. 개별과학들도 제각기 발전의 3단계를 거치는데, 이들이 다루는 현상들의 관계가 수학적 법칙의 형태를 갖추어감에 따라 실증적 차원에 도달한다고 하였다. 사회학은 앞의 모든 과학을 포함하는 가장 복잡한 성격의 학문이므로 가장 나중에 실증적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회정학과 사회동학, 콩트는 사회학을 사회정학과 사회동학으로 세분하였다. 사회정학은 우선적으로 사회 내의 질서라는 측면과 관련된다. 이 질서의 개념으로는 사회현상을 파악하는데 불충분하므로 진보의 개념이 요구되며 이것은 사회동학의 탐구영역이다. 즉, 질서에 대한 사회정학과 진보에 대응하는 사회동학으로 구별한다. 진보 없는 질서는 결국 부패를 초래할 것이며, 질서를 산출하지 못한는 변혁은 무정부 상태만을 낳을 것이다. 전자는 사회의 형태, 조직을 논하고 있는데, 그 통일적 권위는 과학(정신적 세련)과 산업(현실적 세력)에 있다. 후자는 사회의 역사적 발전을 논하며 그 근저를 인지의 발전단계에 둔다, 즉 신학적 단계인 13세기까지는 무단적 상태(신부와 무사의 지배)다, 형이상학적 단계인 14-18세기까지는 법치적 상태(철학자와 법률가의 지배)다. 실증적 단계인 대혁명 이후에는 산업적 상태(과학자와 산업가의 지배)가 각각 놓여진다.


 역사적 실례, 콩트는 카톨릭 중세사회를 안정된 질서의 사회로 보았다. 중세인들은 카톨릭 신학이 제시한 사회의 근본적 구성원리, 즉 지사의 사회제도는 절대적 신의 섭리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을 수긍하였고, 이로써 중세봉건제도가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중세의 구질서는 그 이념적 바탕이 되었던 카톨릭의 신학적 지식이 과학의 진보로 인해, 더 이상 사회내의 이념통합의 기본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되자. 흔들리기 시작했고, 결국 프랑스 혁명에 의해 와해되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계몽주의 세대로부터 프랑스 혁명에 이르는 기간을 형이상학적 단계에 해당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자연권과 주권재민, 법에 의한 보편적 통치를 이념으로 하는 이 시기를 콩트는 실증적 단계로의 진보적 이행과정이라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그 마지막 도달점인 프랑스 혁명이 그 자체로서는 부정적이고 파괴적이었으며, 또한 근본적 가정들에 있어 형이상학적이었기 때문에 사회를 재구성하는 어떠한 실질적 근거도 제시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의 실증철학의 과제는 사회를 통합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모든 사람이 긍정하는 과학에 의해 이 과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믿고, 이 임무를 수행할 집단으로서 과학과 산업의 엘리트를 제시하였다. 자연과 사회의 불변적 법칙에 관한 실증적 지식을 소유한 이들에 의해 사회는 계획되고 통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b. 비판적 평가

 위에서 본 것처럼 콩트의 실증철학의 목표는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 사회의 도덕적 무정부 상태에 새로운 질서와 통일을 부여하고 모든 사회활동을 지배하는 역사발전 법칙을 규명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이는 모든 수학이나 물리학과 같이 과학적 실증방법에 의하여 체계적으로 설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한 실증학의 최고의 것이 사회학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사회는 단순한 개인의 집합이상의 (인류태)이며 그 연구가 사회학의 목적이라고, 주장하여, 모든 과학을 여기에 사회학의 기초라 삼았다. 그런데 그는 새로운 사회질서가 도덕과 종교의 개혁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카톨릭의 초월적 신이 이미 허구적인 것으로 보여지기 시작했을 때, 그는 다른 숭배의 대상을 필요로 하였으며, 결국 그는 이것을 인류에게서 찾은 것이다. 사회의 기초적 실재는 개인이라기 보다는 인류라 생각하고, 개인의 이기주의는 인류에의 헌신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런 시각에서 그는 대존재로서의 인류에서 중세의 종교적 숭배를 대신할 신앙의 촛점을 찻았던 것이다. 즉, 중세의 카톨릭 신앙에 의해 유지되던 개인의 정신적 고양과 사회적, 통합적 기능이, 현대에 있어서는 인류에의 종교적 헌신에 의해 수행되어야 할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사회학적 측면에서 볼 때 콩트의 사상은 2가지 측면에서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하나는 사회현상의 특수성을 발견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학이 다른 학문들보다 우수한 종합학문이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이처럼 학문의 체계에서 사회학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매력적인 견해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문제점이 지적되곤 한다. 하나는 인간정신발달 3단계 법칙을 너무 좁게 서열화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경험과학적 시각을 가지고 인간경험의 총체적 지식체계를 완성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 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정학과 사회동학의 이름으로 추구했던 인류진화의 보편적 법칙을 발견한다는 시도는 새로운 과학인 사회학의 능력을 훨씬 넘어서는 것으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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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ligion of humanity[edit] (from wikipedia)(-> 인류교, 인도교)


Positivist temple in Porto Alegre

In later years, Comte developed the 'religion of humanity' for positivist societies in order to fulfil the cohesive function once held by traditional worship. In 1849, he proposed a calendar reform called the 'positivist calendar'. For close associate John Stuart Mill, it was possible to distinguish between a "good Comte" (the author of the Course in Positive Philosophy) and a "bad Comte" (the author of the secular-religious system).[10] The system was unsuccessful but met with the publication of Darwin's On the Origin of Species (1859) to influence the proliferation of various Secular Humanist organizations in the 19th century, especially through the work of secularists such as George Holyoake and Richard Congreve. Although Comte's English followers, including George Eliot and Harriet Martineau, for the most part rejected the full gloomy panoply of his system, they liked the idea of a religion of humanity and his injunction to "vivre pour autrui" ("live for others"), from which comes the word "altruism".[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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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회정학과 사회동학

 

- 콩트의 사회정학은 사회 유기체적 견해이다. 그는 사회를 노동분화에 바탕을 둔 하나의 기능적 체계로 파악하고 사회정학은 "전체로서의 사회 내에서 각 요소들 간에 이루어지는 기능적인 상호관계를 연구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사회정학은 사회가 유지되고 기능하는 질서의 법칙을 찾아내려는 것이다. 그러나 질서만이 강조되는 사회는 발전하지 못하고 침체된다. 질서가 강요되는 사회는 새로운 사상과 이념이 배척되고 새로운 이론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전통적인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다른 사상은 수용하지 않는 사고의 경직성을 지닌다. 자유주의 사상은 콩트에게 숨쉴 틈 없이 질서 있게 짜여진 경직된 사회만을 강조하지 않도록 영향을 끼쳤다. 질서는 언제나 진보의 조건이어야지 그것 자체가 목적은 아닌 것이다.

 

- 같은 인체구조를 가지고 있고 각 기관이 같은 기능을 하고 있는 아기와 어른은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르다. 크기가 다르고 인지능력이 다르고 기능이 다르다. 정상적인 어른이라면 아기보다 크고 많은 것을 할 수 있으며(기능), 복잡한 사고도 할 수 있다(인지능력). 즉 성장 · 발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회도 점점 크기가 증대되고 기능이 분화되면서 다양한 가치 · 이념 · 사고가 수용될 수 있는 보다 나은 사회로 진보한다고 본다. 사회동학은 바로 이러한 사회진보의 원리를 찾아내려는 것이다. 다시, 인체에 비유한다면 아기와 청장년과 노인의 호르몬 분비량에는 차이가 있어도 인체 각 부분의 맡은 바 기능은 다르지 않다. 즉 정태적인 것과 동태적인 것이 함께 존재한다. 사회에도 사회구조적인 변하지 않는 측면은 '사회정학'에서, 그리고 인체의 생리현상과 같이 변하는 부분은 '사회동학'에서 다루며, 사회동학은 기본적으로 인간정신의 진보를 다룬다.


(출처 : http://blog.yes24.com/blog/blogMain.aspx?blogid=rhsrap&artSeqNo=7019608)



C33 – 사회계약설(The SocialContract) /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자연으로 돌아가라.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그러나 도처에 그는 얽매여 있다. 구속을 싫어하고 자연을 좋아한 저항적인 자유인 루소가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주장한 인류해방의 고전, 프랑스 대혁명의 여명기에 쓴 이 책 속에서 루소는 사회계약-주권-일반의지의 3단계 구성을 통해 종래의 정신세계 질서에 지각변동을 일으켰고 기존의 가치관에 일대변혁을 가져와 프랑스 혁명의 성서로 불린다.


a. 생애와 작품활동

  루소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프랑스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라는 나폴레옹의 지적과 프랑스 대혁명으로 물러난 루이 16세는 나를 몰아낸 것은 바로 이 두 놈이다 라고 말한 두 놈 중 한 사람이 바로 루소이다. 프랑스의 대표적 계몽사상가이자 반문명가인 루소는 볼테르, 디드로, 달랑베르 등과 동시대인이다.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시계공의 아들로 출생했는데 그의 어머니는 출산시 사망했다. 열 살 때 부친마저 잃은(가출) 그의 유일한 낙은 어머니가 남겨준 상당한 양의 책이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 지나친 독서로 인한 두뇌비대증은 노년에 그를 정신이상으로 몰고 간 원인이 되었다. 그는 16세때 제네바에서 가출하여 고향을 등지고 방황한다. 그때 자애의 손길을 내민 어느 남작 부인이 있었다. 그 부인은 그를 신교에서 구교로 개종시켰으며, 사실상 그의 어머니 역할을 했다. 그녀의 보살핌과 사랑으로 루소는 정서적 안정 속에 여러 학문을 닦아 교양을 쌓았다. 그후 1740년(28세)경에는 잠시 가정교사 생활도 하게 되는데, 이때의 겸험이 그로 하여금 교육문제에 평생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다.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그는 1742년(30세) 파리로 나와 음악 비평가로서 생계를 유지하였고, 백과전서파의 디드로와

사귀면서 사전편찬에도 협력하여 음악항목의 집필을 담당한다. 그러나 디드로와 결별한 후 영원히 그들의 우정을 회복하지 못했다. 1750년(38세) 과학과 예술은 풍속을 좋게 만드는데 도움이 되는가(학문예술론) 라는 현상논문에 당선되어 비로소 사상가로서의 명성을 얻는다. 이 논문을 통해 그는 발달된 문명이 끼치는 해악을 낱낱이 지적하여 인간은 자연으로 돌아가라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로써 갑자기 파리사상계의 유명인이 되었다. 1752년(40세) 마을의 점쟁이라는 가극을 발표하여 또 한번 파리의 귀족들을 놀라게 하였다. 또 1754년에는 사유재산제도가 인간을 불평등하게 만들었다는 불평등 기원론을 발표하여 당시의 사회제도를 비판했다. 같은 백과전서 5권의 정치경제 항목을 집필하고, 이것을 후에 정치경제론으로 독립 출간했다. 1762년에 불평등 기원론과 정치경제론을 발전 시킨 사회계약설과 교육에 관한 혁명적인 저서인 에밀을 발표했다. 그러나 파리 제네바 등지에서 사회질서의 혼란과 크리스트 교의 가르침을 파괴한다는 이유로 금서 처분을 받는다. 실망한 루소는 파리를 떠나 제네바로 피신하려 하였으나, 제네바 정부 역시 유죄판결을 내렸다. 그래서 유럽 각지로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깊어가는 고독과 피해망상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에 대한 세상사람들의 오해를 풀기 위해 그의 자전적인 작품 고백록을 완성했다. 그가 쓸쓸하고도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에름농빌에는 루소 공원이 있고, 또 프랑스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의 무덤인 팡테옹에는 루소가 볼테르를 마주해 가장 큰 크기로 묻혀있다.


b. 자연법 사상과 사회계약설

 자연법 사상, 17세기의 정치이론은 16세기의 마키아벨리와 같은 현실정치의 직접적 반영이라기보다는, 인간의 권리란 무엇이며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하는 근본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사고의 결과였다. 한마디로 17세기는 자연법과 자연권의 고전시대였다. 17세기의 과학혁명으로 자연계의 질서와 조화를 지배하는 법칙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으며, 그것과 똑같은 법칙이 인간의 사회생활에도 있을 것이란 확신이 굳어졌다. 다시 말하면 사회의 자연적 질서가 있으며 영원불변의 자연적 법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자연법의 관념은 17세기에 활발히 논의되고 18세기의 계몽사상가들에 의해 널리 일반에게 보급되었다. 이리하여 마침내 인간의 자연권 회복은 18세기 혁명의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본질적으로 자연법이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하는 데에는 일치된 견해가 있을 수 없으나, 간단히 말해서 정과 부정내지 선악을 구별하는 기준이 되는 법이 시간과 자연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되게 적용되는 성질의 것이다. 그리고 법과 권리는 궁극적으로 모든 지역과 민족, 시대와 문화를 초월해 있다. 이러한 자연법과 자연권은 모든 인간에 있는 이성을 통해서 인식된다. 그리고 나라의 사람들이 차별 없이 합리적 능력과 이해력을 갖고 있으므로, 그들은 공통된 목적, 즉 자유, 평등, 박애를 성취하려고 할 것이다.


 사회계약설, 홉스는 17세기 과학혁명의 정신을 그의 저술 속에 잘 반영 시켰다. 그는 자연상태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로 보고, 사회계약에 있어서는 자연권의 전면적인 양도설을 내세웠으며, 정치적으로는 저항권을 인정하지 않는 절대 군주제를 옹호했다. 반면 명예혁명 시기의 로크는 자연상태와 사회계약을 전제로 한 점에서는 같았으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반대였다. 즉, 그는 자연상태를 평화로운 것으로 가정한다. 자연권의 일부를 국가에 양도한다는 일부 양도설을 주장했다. 정치적으로도 저항권을 인정했고 대다수의 의사에 따르는 대의제도를 주장했다. 바로 이 점에서 불만을 느낀 루소는 다수파가 소수파에 대해 행사하는 전제의 위험을 극복하고자 자신의 사회계약론을 주장하였다. 루소도 사회를 구성하기 위한 합의의 필요성은 인정했다. 그런데 로크는 합의를 지배자와 피지배자간의 계약으로 본 반면 루소는 인민들 상호간에 맺는 계약으로 보았다. 사람들은 상호간에 자연적 자유를 양도함으로써 전체가 융합된 일반의지(공동체자체간의 의지)를 만들며 각 개인은 절대로 그 명령에 따라야 한다. 이러한 추상적인 일반의지는 바로 주권자이며. 그것은 절대 신성하고 불가침하다. 일반의지는 다수결에 의해 결정되는 수의 문제가 아니라, 인민전체를 결합시키는 공동이익에 의해 결정된다. 루소의 일반의지 관념을 결과적으로 대의제에 의한 간접 민주정치 및 다수결 원칙 등을 거부하게 된다.


c. 사회 계약설 의 주요내용

  사회계약론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전에 발표된 인간불평등 기원에서 제기된 문제, 즉 자유와 평등을 누리던 인간이 자연상태를 상실하여 생긴 지배와 피지배 등의 해악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올바른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성격의 책이라 할 수 있다. 제 1부는 어떻게 인간이 자연상태에서 사회상태로 옮아 가는가다. 또 사회계약의 본질적 조건은 무엇인가 라는 문제이고, 제 2부는 주권과 법률, 제 3부는 정부형태, 제 4부는 국가의 체제가 다루어지는데, 제 1부가 핵심이다. 

제1 장 서두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는 태어났음에도 도처에 묶여 있다. 자신이 타인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자도 사실은 그들 이상으로 노예인 것이다. 왜 이러한 변화가 생겨났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무엇이 그것을 정당하게 만드는가를 나는 안다 여기에 보듯이 루소의 관심은  자유로운 존재로서 태어난  인간이  모든 곳에서 사슬에 묶여 있는  상태를  정당한 것 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를 묻는 데 있다. 그래서 그는 자연상태에 관한 이론부터 시작한다. 루소가 말하는 자연상태는 각 개인이 자유와 평등을 가지고 있는 상태다. 이러한 자연상태가 한계에 이르렀을 때 주권자인 개인은 서로 결합하여 자유와 평등을 확보하기 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계약을 한다는 것이다.


 1. 일반의지,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필요하며, 이 국가의 통일과 바른 정치를 위해 일반의지 라는 기준이 필요하다고 했다. 일반의지란 항상 전체(국가)가 부분 (개인)의 보존과 행복을 지향하고 법률의 원천이 되는 것 이라고 정의했다. 따라서 사회계약론은 어떻게 하면 일반의지가 관철되는 국가를 형성하고, 인간이 자연상태에서 가졌던 자유와 평등을 확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을 다루고 있다. 이를 위해 각 구성원의 합의로 각 개인의 자연권을 위임하는 대신 개인은 시민적 자유를 얻게 되고, 정치체제를 일반의지라는 최고의지(주권)에 두도록 했다. 이 일반의지가 정치기구의 최고결정자이며, 주권, 법, 권리, 정부도 모두 이 의지의 표현이요, 속성이다. 다시말해 이것은 가장 철저한 인민주권론이며, 종래의 모든 국가관을 뒤엎기에 충분한 것이다. 이 인민의 일반의지는 절대적이며 잘못되는 일도 없을뿐더러 예외를 인정하는 일도 없고, 또 타인에게 양도하거나 분할되거나 하는 일도 없다. 


 2. 주권, 일반의지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은 곧 주권이므로 주권도 또한 절대적인 불가양도, 불분할의 것으로서 확립된다. 루소는 주권이란 누구에게 양도할 수도 없고 분할할 수도 없으며 전 인민의 의사를 대변할 수 없는 신분제의회에 의해 대행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홉스의 국가론을 계승하여 그것을 역전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의지는 국가 또는 정체체제를 구성하는 일반의지의 행위가 사회계약 이다.


 3. 복종계약 거부, 사회계약설은 물론 루소 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이전의 사회계약설은 소위 복종계약설 이어서 그것은 어떤 특정 지배자의 존재를 미리 전제하고 이 지배자와 국민 사이에 계약이 맺어진다 는 것이다. 이러한 계약은 국민보다는 지배자를 위한 복종계약의 성격을 띠게 된다. 그러나 루소는 이러한 계약방식을 거부하고 사회주권을 개인간의 결합계약으로 파악하려고 했다. 루소의 이러한 착안은 큰 공적이었다. 기르케는 루소가 계약이론에서 복종계약을 배제했을 때 그것은 참으로 혁명적인 일이었다 고 말했다. 루소의 정치이론은 당시 프랑스에서 지배적이었던 백과전서파의 이론에 대한 비판이었다. 디드로가 주장한 이론은 국가의 형성을 인간의 자연적 성질인 사교성에서 설명하고, 인민의자연적인 권리, 특히 사유재산권을 지키기 위해 복종계약이 맺어 진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백과전서파의 이 사상은 실은 푸펜도르프나 로크에 의해서 대표되는 근대 자연법학의 고전이론을 계승한 것이다. 따라서 루소는 고전이론이 배척한 홉스의 사상에 깊이 감동받고 그에게서 가장 많이 배우게 된다. 홉스는 자연적 사교성의 이론을 부정하고 자연상태를 적대 관계로 파악,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절대권력을 이끌어냈다. 루소는 그 영향을 받아서 똑같이 자연적 사교성의 이론을 부정하긴 했으나 자연상태를 투쟁상태로는 보지 않고 투쟁상태를 사회상태 속에 옮겨놓음으로써 홉스와 똑같이 절대권력을 이끌어냈다. 어느 경우에서든 복종계약은 부정되었던 것이다. 단, 루소의 경우에 있어서는 인간의 자연적 선과 인민의  일반의지가 전제되어 있는데, 이 점에서는 홉스와는 다른 민주주의적인 국가론이 주장된다. 


d. 정치사상적 의의

 이상에서 살펴 본 사회계약론을 요약하면 모든 사람은 그들의 공동이익을 위해 정치적 공동체를 형성하고 구성원들의 자유의지를 묶어 일반의지라 하고 이 절대적인 일반의지에 복종케 함으로써 개인 및 전체의 자유와 평등을 도모하고자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일반의지는 반드시 다수결에 의해 결정되는 수의 문제가 아니라 인민전체를 결합시키는 공동이익 에 의해 결정된다. 루소의 일반의지 관념은 결과적으로 주권재민설에 입각한 민주주의와 공동이익을 위해 개인을 희생시키는 전체주의를 동시에 다 같이 합리화시키는 이중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즉, 그것이 선용될 때는 진정한 민주주의 역할을 하지만, 악용될 때는 전체주의 지배체제의 이론적 무기가 될 가능성도 있다. 프랑스 계몽사상가들과 루소의 사상의 차이는 디드로가 천국과 지옥의 차이 라고 당시 기술한 것처럼, 당시 프랑스의 계몽사상가인 몽테스키외나 볼테르는 보수적인 사회계혁을 주장한 면이 있다. 반면 루소의 그것은 진보적이고 혁신적이어서 부르주아에게 있어 루소의 평등사상은 매우 못마땅한 것이었다. 루소는 인간의 평등을 개인의 이성과 개성의 상위에 두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합리주의에 대한 낭만주의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아무튼 18세기 사상가 중에서 루소만큼 신비스럽고 흥미로운 인물도 드물다. 그는 당시의 이성존중 풍속에 반항하여 이성보다는 감정과 본능이 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여러 방면에 걸친 그의 관심을 발전시켜나가.  학문예술론 과 인간불평등 기원론으로 당시 문명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사회계약론으로 자유민주주의 사상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소설 신 엘로이즈는 낭만주의 소설로 퇴폐적 문명을 비난하고 단순하고 소박한 생활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교육사상을 밝힌 에밀 에서는 개인의 잠재능력과 개성의 계발을 강조하였고, 고백록 에서는 근대적인 고백문학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그는 에밀을 통해 칸트의 이상주의와 실러의 낭만주의를 낳게 했고, 현대의 심리학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칸트는 이 책에 심취한 나머지 규칙적이던 산책시간을 잊었는데, 그의 산책시간에 맞춰 저녁식사를 하곤 했던 동네부인들도 그를 기다리다 저녁준비가 늦어졌다는 일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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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계약론


社會契約論 / Theory of Social Contract


정치학, 사회학 이론의 하나이자, 그 기원이 된 도서의 제목.

1. 이론[편집]


'사회는 실체가 없이, 오로지 개별 구성원들의 계약에 의해 유지되는 인공적인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이 핵심이다. 즉, 각 구성원의 동의 없이는 사회 체제가 구성되지 않으며, 나아가 구성원 사이에 체결된 합리적인 계약으로 사회의 모습을 바꾸면 빈부격차 등 다양한 사회 문제의 해결이 가능하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사회학에서는 사회명목론의 선구적 관점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사회명목론을 설명하기 위해 드는 가장 흔한 예시 중 하나이다.


당시 들불처럼 번지던 민주주의 혁명의 동력원으로서 근대 여러나라 혁명가들의 사상의 기초가 되었고, 더 나아가 미국 독립 혁명의 정신적 배경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민주주의의 뼈대라고 할 수 있는 이론.


물론 이후로 철학적으로 비판이 좀 되었고, 장 자크 루소는 당시에는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과 대치되기도 했다.[1]

(하지만 사실 사회계약설의 시작은 홉스의 리바이어던으로 보는게 일반적이다. 홉스 항목 참조.)


1.1. 고전 사회계약론[편집]


1.1.1. 토마스 홉스의 사회계약론[편집]


리바이어던항목에도 잘 나와 있다.


홉스의 사회계약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사고실험을 통한 전제가 필요하다. 그것은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것, 인간은 모두 이기적이라는 것, 인간은 자신의 생명과 재산의 보호를 최우선의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또한 모든 인간은 합리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 상태에서는 협력을 강제할 수 있는 권한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인간은 자신의 욕구 충족 및 자기 보호를 위해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고 공격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the war of all against all)이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인간이 합리적이므로 이것을 막을 방법을 찾게 되고, 그로 인해서 사람들은 특정한 사람 혹은 집단(assembly)에게 권력을 몰아주게 되는데, 그가 바로 왕이 되는 것이고, 비로소 협력을 강제할 권력(force)를 지니게 된다. 여기서 홉스가 당대의 주요 관점이었던 왕권신수설을 부정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회 계약의 목적을 다하기 위해서 권력은 절대적이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는 신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게 된다. 즉, 병크를 터뜨리더라도 자연 상태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사회 계약을 이루고 있는 상태가 더 낫기 때문에 지도자를 함부로 바꾼다던지 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이 부분은 성악설/성선설과 함께 로크의 사회계약론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권력이 강해야 국가가 잘 돌아간다'는 관점과 왕권 신수설을 부정했다는 점은 마키아벨리의 관점과도 상당히 겹치는 편이다. 실제로 홉스가 마키아벨리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1.2. 존 로크의 사회계약론[편집]


로크에 따르면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완벽한 자유를 누린다. 그러나 권력은 없다고 해도 도덕성까지 없는 것은 아니기에, 남을 해친다던지 할 수는 없다. [2][3] 하지만 인간이 또한 합리적이고 자신의 생명, 재산을 지키려고 하는 점은 같으므로 자연 상태에서도 전쟁이 발생할 수 있다. 문제는 권력이 없으므로 전쟁이 일단 일어나면 끝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정부를 조직하여 계약을 맺음으로써 자연 상태를 탈피하여 공동선을 추구하게 된다. 그 공동선이란 타인의 생명, 건강, 자유, 재산을 침해하지 않는 것이다. 한편 홉스와는 달리 로크는 계약을 해지하는 것도 자유라고 보았는데, 계약을 통한 권력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지도자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얼마든지 저항하고 계약을 해지하여 새로운 계약을 맺을 수 있다고 보았다.


로크의 사회계약설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간의 권리는 다름아닌 재산권이다. 이 재산에는 '신체의 소유'도 포함된다. 또한 간접 민주제가 가장 이상적인 정치 형태라고 보았다.


1.1.3.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편집]


...나는 사람이 저마다 자연 상태에 머무르기 위해 쓸 수 있는 힘보다, 인간의 생존을 방해하는 모든 장애의 저항력이 더 커진 시점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새로운 힘을 만들어 내지는 못하고 다만 이미 있는 힘들을 결합하여 방향을 정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에, 생존하기 위해서는 힘들을 하나로 모아서, 저항에 이겨낼 수 있는 단결된 힘을 자신들이 만들어 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단 하나의 원동력에 따라 함께 움직이게 해야 한다...


...이 어려움은 다음과 같은 말로 나타낼 수 있다. 구성원 하나하나의 신체와 재산을 공동의 힘을 다하여 지킬 수 있는 결합 형식을 발견하는 것, 그리고 그것으로 저마다 모든 사람과 결합을 맺으며 자기 자신 이외에는 복종하지 않고 전과 다름없이 자유로울 것. 이것이야말로 사회 계약이 해결해 주는 근본적인 문제이다... 다시 말해 구성원 하나하나를 그 모든 권리와 더불어 공동체 전체에 대해 전면적으로 양도하는 것이다...


...만일 특정한 사람들 손에 얼마간의 권리가 남는다면... 자연 상태가 존속할 것이고, 또 결합은 필연적으로 압제적이게 되거나 허무한 것이 될 것이다. 요컨대 사람마다 자신을 공동체 전체에게 양도하는 것이지, 특정한 개인에게 자신을 양도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자기가 양도하는 것과 같은 권리를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받으므로, 사람은 자신이 잃는 모든 것과 같은 가치를 손에 넣고, 또 자신이 소유한 것을 보존하기 위해 좀 더 많은 힘을 키울 수 있다...


...우리는 저마다 신체와 모든 힘을 공동의 것으로 삼아 일반 의지의 최고 지도 아래에 둔다. 그리고 우리는 구성원 하나하나를 전체와 나누어질 수 없는 일부로서 받아들인다. 이 결합 행위는 곧바로 특정한 계약자 하나하나를 대신하여 하나의 정신적이고 집합적인 단체를 만들어 낸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들의 결합으로 형성되는 이 공적인 인격은, 예전에는 "도시국가" 라고 불렸으나 지금은 "공화국" 또는 "정치체" 라고 불린다.


- 장 자크 루소, 《사회계약론》(Du Contrat Social ou Principes du Droit Politique), 제 6장 中


루소에 따르면, 본디 인간은 자연상태에서 평화롭고 공상적이며, 독자적이고 소규모 집단을 이루어 산다. 경쟁이나 갈등은 없고, 모두가 내면에 감성과 양심을 갖추어 도덕적이다. 그러나 인구가 늘면서 점차 공동체가 형성되고, 노동의 분업화가 이루어지는데 이 과정에서 서로를 비교하게 된다. 이것은 서로에 대한 질투 또는 자만으로 이루어진다. 또한 사유재산의 개념으로 인해 단순하고 순수했던 인간들이 탐욕스럽고 경쟁적으로 변하며, 결국 불평등이 야기되어 누군가는 재산을 소유하고, 다른 누군가는 그들을 위해 일하는 계급이 등장하게 된다. 그리하여 재산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의 평등과 보호를 보장하기 위함이라는 이유로 사회계약을 맺게 된다. 그러나 실상은 오히려 재산을 만들어내는 불평등을 강화하게 되고, 결국 이런 사회 계약은 갈등과 경쟁을 부추기게 된다. 


루소는 "인간은 모두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어디서나 사슬에 매여 있다."고 했으며, 자연으로 돌아가기를 촉구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은 무리이므로[4], 대신 사회 계약의 목적은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된다. 그리하여 개인의 의지 중 공동선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들이 모여 보편의지(일반의지)를 이루게 된다. 따라서 보편의지가 법으로 나타난 형태인 주권은 항상 국민에게 속하며, 양도될 수 없다. 국가는 대리인으로서 법을 집행할 뿐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이런 방식은 작은 사회에서는 가능하지만 국가 수준의 큰 단위로 넘어가면 실현되기 어렵다. 한편 개인은 일반의지를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고, 법은 일반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제정된 것이므로 개인은 법에 복종해야 한다. 그리고 루소는 이 보편의지의 실현을 위해 강력한 직접 민주주의를 제시하였다.



C32 – 법의 정신 (DE L'ESPRIT DES LOIS, The Spirit of Law) / 몽테스키외(Montesquieu, Charles, 1689-1755)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3권분립으로 유명한 몽테스키외가 법의 정신에서 다룬 핵심내용은 크게 3가지다. 첫째. 정체에 대한 분류로 공화정, 군주정, 전제정으로 분류하고, 그 활동원리를 각각 덕, 명예, 공포로 보았다. 두번째는 권력분립 이론으로 당시의 영국을 모델로,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으로 나눈 것이다. 셋째로 기후가 정치에 영향을 미친다는 학설이다. 섬세하고 해학이 넘치면서도 강렬한 이 책은 정치 이론사와 법률사의 불후의 고전이다.


a. 생애와 작품활동

  볼테르, 루소와 더불어 계몽시대의 3천재로 일컬어지는 몽테스키외는 프랑스의 3권 분립론의 창시자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법관귀족 출신으로 태어난 그는 어릴 적에는 역사공부에 열중하였으나, 보르도 대학에서 법률공부를 하여 보르도 고등법원의 평정관이 되었다. 이듬해 연구를 계속하기 위하여 1713년까지 파리에 있으면서 많은 것을 배웠으며, 이국적인 것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인 듯하다. 그는 1713년 보르도로 돌아와 이듬해 법원의 평정관이 되었으며, 1715년(26세)에 잔과 결혼하여 애정과 존격의 반려자를 얻게 되었다. 이듬해(27세) 그는 백부의 뒤를 이어 법원장이 되었고, 그 해에 학술원에 들어가 정치 내지 행정에 흥미를 가지고 활동하였으며, 물리학이라든가 생물학을 주로 연구하였다. 그러면서도 그가 처음으로 낸 중요한 작품은 당시의 유럽과 페르시아의 사회, 정치, 풍속 등을 풍자적으로 논한 페르시아인의 편지였다. 이 책은 대단한 인기를 얻었으나, 관변에 좋은 인상을 주지는 못하였다. 그후 파리에 나가 많은 사람들과 사귀었으며, 1728년(39세)에는 프랑스 학술원에 들어가 불사의 40인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 그의 대표작 법의 정신을 집필하기로 결심한 것은 이 무렵이다. 그는 아카데미에 들어가자. 곧 3년간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헝가리, 독일 등 유럽여행을 떠나, 각국의 제도와 관습을 둘러보았다. 특히 영국에 2년 가까이 머무르면서, 그곳의 법률, 정치, 경제, 사회 등을 많이 연구한 듯하다. 1731년 많은 자료를 가지고 라브레드에 돌아와, 그후부터 그곳에 자리잡고 20년동안에 걸쳐 법의 정신을 저술한다. 1734년에 로마의 흥망 원인론을 발표하였다. 이 책은 로마가 공화제로부터 제국을 거쳐 멸망하기까지의 과정을 마키아벨리의 로마사론에 따라 논술한 것인데, 훗날 법의 정신의 자료가 된다. 1748년(58세) 제네바에서 익명으로 어머니 없이 낳은 자식 이라는 표어를 붙여 출판된 법의 정신 은 굉장한 성공을 거두어, 출판된지 2년도 안되어 20판을 냈다고 한다.  법의 정신은 일생 동안의 연구결과를 모은 것인데, 법률학의 고전으로서뿐만 아니라 사회학, 정치학, 지리학 등의 고전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법학연구에 처음으로 역사법학적, 비교법학적, 사회학적인 방법을 적용하여 법학의 발전에 기여하고, 3권분립론, 입헌군주론 등을 전개했다. 한편으로 그는 전제주의를 공격하면서, 법은 각국의 제반 환경에 적합한 고유한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정치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책에 대한 비난도 있어서, 그는 법의 정신의 보호를 쓰기도 했는데 한때는 금서로 취급된 일도 있었다. 몽테스키외의 사행활에 관하여 알려진 것은 극히 적은데, 이는 그가 작품 이외의 것이 알려지는 것을 극히 꺼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귀족출신으로, 지극히 귀족적인 성격의 소유자이자 재사였다는 점은 확실하다.


b. 시대적 배경과 계몽사상가

 시대적 배경, 몽테스키외가 생존했던 당시는 짐은 국가다 라고 호언하며 절대군주제를 확립하였던 루이 14세의 시대였다. 따라서 절대군주 사상이 널리 퍼져 있던 시대였다. 그런데 루이 14세의 권력이 절정에 달하자 프로테스탄트를 중심으로 하여 각 분야에서 반감의 기운에 고조되었다. 여기에 프랑스에서도 정치적 자유주의 사상이 싹트게 되었는데, 이것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영국의 시민사회 사상이었다. 영국은 일찍이 산업혁명을 완성하여 근대의 자본주의적 사회형태를 이룩하고, 그에 맞는 시민사회의 철학을 마련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우선 프랑스의 계몽사상가들은 백과전서를 편찬하고 인간의 능력을 신장시킨 다음, 합리적인 정치력으로 그것을 공공의 복리에 적용하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영국의 자연법, 민주주권 또는 대의제 사상이 프랑스에 도입되어 프랑스의 합리주의적 경향으로 이론화, 일반화, 체계화되었다.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은 이러한 사상적 배경적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계몽사상가, 18세기 계몽사상가들은 17세기의 지적 유산, 예컨대 베이컨과 데카르트, 스피노자, 특히 로크와 뉴턴의 사상 및 자연법, 자연권, 및 사회계약설을 널리 전달, 보급하였다. 그리하여 18세기는 역사상 어느 시대보다 더 뚜렷하게 권위와 전통에 대해서 회의를 나타낸 시기였다. 반면 인간이성의 능력을 확신하고 과학지식의 발달을 낙관하면서 인류문명의 진보를 기대하였던 시대였다. 계몽사상가들은

철학자가 아니라. 보급자, 혹은 평론가 라고 해야 할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일반대중이 읽지 않는 고전을 읽고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그 내용을 풀어 설명하였다. 그들은 일차적으로 문인이었으며, 자유기고가. 혹은 삼류문인 내지 저널리스트들이었다. 그들은 대중을 위해 글을 썼으며 사회악을 비판하고 개혁을 주창하는 계몽운동가들이었다. 그들은 이 세상에 있어서의 행복의 성취를 믿었으며, 이성의 힘을 통해서 그것이 가능하고 주장하였다. 계몽사상가들은 영국의 선진학문과 발달된 과학을 프랑스에 도입해서 프랑스 또는 유럽에 보급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는 지적인 면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파리에서는 문인, 학자, 혹은 사상가들이 부유층 부인들의 살롱에 모여 재치 있는 토론을 교환하였다. 살롱이란 주로 개인저택에서 열리는 저녁식사를 겸한 사교적 집회로서 거기서 사회비평뿐만 아니라 과학, 철학, 경제, 종교 등이 토론된다. 어떤 계몽사상가보다 전통에 항거하고 사회악을 과감히 비판한 사람은 파리 출신의 볼테르였다. 그러나 그는 독자적인 정치이론이 없었던 반면, 귀족 출신 몽테스키외는 체계적인 정치이론가였다. 


c. 법의 정신의 내용

 이 책은 총 31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학자들에 따라 2분법, 3분법 등 내용상 구분이 각각 다른데, 여기서는 몽테스키위 자신이 선호한 6분법으로 분석해 본다.


 1. 제 1부(1-8편), 각 정체를 공화정, 군주정, 전제정으로 나누고 각 정체의 본성과 원리를 제시한다.  공화정(共和政) 이란 국민 전체 혹은 국민 일부가 주권을 갖는 정체이고, 군주정(君主政)은 한 사람의 왕이 통치하지만 정해진 법에 의거해서 통치하는 정체이며, 전제정(専制政) 은 통치자 자신의 뜻에 따라 모든 일을 처리하는 정체를 말한다. 각 정체는 나름대로 본성을 갖는데, 특정한 공화국에서 사람들은 덕성을 갖고 있어야 하며, 어떤 전제 국가에서는 사람들이 공포심을 갖고 복종하는 본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이처럼 각 정체는 제각기 덕 명예 공포 가 그 원리로 되어 있는데, 물론 그는 이중에서 공화제를 가장 합리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2. 제 2부(9-13편), 정치적 자유의 실현을 다루고 있는데 이것은 정체의 부패가 정치적 자유의 상실과 전체로의 타락을 의미하기 때문에 국가는 정치적 자유를 실현시킬 사명을 가진다. 여기서는 제각기 각 정체의 부패요인도 검토한다. 즉 군주제는 군주가 만사를 자기 손아귀에 넣고 국가를 수도로, 수도를 궁정으로, 궁정을 자기 한 몸에 집중시키는 데서 방향을 잘못 잡게 된다고 한다. 전제정체는 그 본질상 원리가 부패되고.  민주적 공화제는 단순히 사람들이 극단적인 평등정신을 가지고, 각자가 자기에게 명령할 사람으로 선택한 사람과 평등하게 되려고 할 때 그 원리는 부패한다 고 민주주의의 위험성을 지적하기도 한다. 이처럼 어떠한 정체도 제각기 부패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으나, 이 위험을 회피하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가 영국식의 3권분립주의인 것을 입증하고 있는데, 이것이 이 책의 골자이다. 제 11편 6장 영국의 헌제에 관하여 에 그 유명한 권력분립의 원리가 제시되어 있는데, 그의 견해를 직접 옮겨 본다. 각 국가에는 세 종류의 권력이 있는데 입법권 만민법에 속하는 집행권 시민법에 속하는 집행권 이 그것이다. 첫째의 권력에 의해 군주는 일시적 또는 항구적인 법률을 제정하고, 이미 정해진 법률을 수정 또는 폐지한다. 두번째 권력에 의해 전쟁중에 당사자끼리 화해할 수 있고 전쟁을 선언할 수도 있다. 또한 외교관을 교환하고 안전을 보장하며 침략을 예방한다. 세번째 권력에 의해 죄를 처벌하고 개인의 소송사건을 심판한다. 우리는 두번째 것을 집행권 이라 부르고 다른 하나를 재판권 이라 부른다.

 

 3. 제 3부(제14-19편), 각 국의 법과 각국의 풍토와의 관계, 정치적 자유가 부정된 노예들에 관한 고찰이다. 그는 그 나라 토지의 성질이 법을 결정하는데 큰 영향력을 미치며 좋은 풍속이 있는 곳의 법은 간단해질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4. 제 4부(제20-23편), 4부의 중심문제는 국가의 번영과 국부의 문제다. 상업과 법과의 관계에서 상업은 본질적으로 서로간의 거래를 통해 평화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나, 상업의 결과로 인한 부는 사치와 낭비로 연결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또한 상업의 발전은 화폐의 사용을 권장하게 되는데, 화폐는 모든 상품의 가치를 대표하는 표시다. 4부 끝에서 당시 감소하고 있던 인구문제도 언급하고 있다.


 5. 제 5부(제24-26편), 5부의 중심문제는 종교에 관한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그는 우선 기독교를 중심으로 고찰하고 있는데, 인간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기독교는 각 민족이 가장 훌륭한 정치법과 시민법을 가질 것을 권장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종교는 대체로 법의 역할을 어느 정도 할 수 있다고 평가한다. 시민법은 사이비종교를 법규범을 통해 규제할 수 있고, 종교법은 잘못된 정치를 비판하여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 그러나 종교가 잘못된 경우에 가하는 제한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보다 실제적인 방법으로 그는 성직자들이 가진 재산을 제한해야 한다고 말한다.


 6. 제 6부(제27-31편), 6부에서는 게르만에서 기원되어 게르만적인 자유를 갖춘 프랑스 군주제 생성사가 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까지 추구된다. 제 29편에서는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와 목적, 즉 법의 정신이 무엇이고, 이 정신을 어떻게 살려나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 밝히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쓴 것은 오로지 내가 다음에 말하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이다. 즉 중용의 정신이 입법자의 정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적 선은 도덕적 선과 같이 언제나 두 극단 사이에 있다. 이렇게 법을 만드는 사람의 중용의 정신이 법의 핵심적인 정신임을 밝혀놓고 나서 법이 갖추어야 할 특성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법은 우선 어린이도 암기할 정도로 간단해야 하며 문제는 쉬워야 한다고 말한다. 아울러 법은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생각을 불러일으키게 해야 하며, 너무 정교해서도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d. 정치사적 의의

 실명할 정도로 심혈을 기울여 쓴 이 책이 제네바에서 출판되자, 비상한 관심을 불러 일으켜서 미국 헌법을 비롯해 영국의 정치사상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몽테스키외의 이론은 내부적 모순을 안고 있기도 하다. 그는 노예제와 농노제를 비난하면서도, 유색인종이 인간의 속성을 지니고 있는 점은 부인한다. 그는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면서도 귀족의 특권과 관직의 세습을 받아들인다. 또한 단순하고 명백한 원리에 거슬러올라가 거기서 어떤 필연적인 결과를 연역하려고 하였음은 데카르트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반면에 영국사상의 영향을 받아 겸험주의적인 요소를 섞어 쓰고 있는 방법론상의 혼란을 범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적 혼란은 오히려 이 책에 영원한 생명력을 불어넣었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몽테스키외의 특색은 무엇보다도 다면적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몽테스키외 속에는 고대인과 근대인이, 동시대인과 미래인이 함께 있다. 그리고 보수주의자, 귀족주의자, 민주주의자, 자연철학자, 합리주의자가 함께 있다고 할 만큼 다면적인 특색을 지닌 법의 정신은 다종 다양한 법률과 제도에 부여한 다면적 평가와 개혁지침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그 자신은 귀족 출신이었으나 전제주의를 열심히 비판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비판은 곧 이어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을 성취시킨 혁명사상을 배양하는 역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실제로 프랑스 혁명기의 혁명가들은 이 사상을 사실상 절대군주제 비판의 무기로 원용했던 것이다. 그가 시민적 자유를 확립하기 위하여 필요한 조건을 검토하고 권력분립의 사상을 만들어냈다는 유명한 사실은, 그로 하여금 공법원리의 건설자의 한 사람으로 만들어 후세 입법정체의 발달에 큰 공헌을 하였다 나아가 미국 독립 운동의 이념적 지주가 되어 민주주의적 조직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법의 정신을 서술함에 추상적으로 다루지 않고, 시간적으로 로마 이래의 역사적 배역을 기초로 하고 공간적으로는 널리 여러 나라의 지세, 기후, 종교 기타 사회사상의 배경을 기초로 해야 한다는 것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비교법학이나 사회학, 역사철학에 미친 영향 또한 지대하다. 흥미 있는 것은 당시 그가 한국에 관하여 표현한, 한국의 남쪽 사람들은 북쪽 사람들보다 용감하지 못하다 라든가. 한국의 기후가 어떻다든가 라는 등의 관심을 보였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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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주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계몽의 순간에 지혜의 신인 로마의 여신 미네르바가 빛을 비추는 동안 전세계의 종교들이 회합함, 다니엘 호도비에츠키(Daniel Chodowiecki) 1791년 작

계몽주의(啓蒙主義)란 프랑스어로 Siècle des Lumières '빛의 세기'를 뜻하는 말로 17세기, 18세기에 유럽과 신세계를 휩쓴 정치, 사회, 철학, 과학 이론 등에서 광범하게 일어난 사회 진보적, 지적 사상운동으로, 현재의 자본주의의 근간이며 계몽사상(啓蒙思想)이라고도 부른다.


계몽주의는 실제적인 도덕을 지향하였으며 형이상학보다는 상식, 경험, 과학을, 권위주의보다는 개인의 자유를, 특권보다는 평등한 권리와 교육을 지향하였다. 이 계몽주의는 1760년경 이후 강력히 대두되게 된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인간은 이성으로 적법성을 판단할 수 있으며, 이성은 권위의 요소이자 권위를 판단하는 기준이라고 주장했다.


독일과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등지에서 계몽주의 운동이 거의 동시에 이런 움직임이 일어났지만, 대서양 주변 국가에서 일어난 각종 혁명을 통해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러시아, 스칸디나비아를 비롯한 다른 유럽 국가들도 이런 움직임을 따랐으며, 라틴 아메리카 역시 아이티 혁명을 통해 이런 움직임에 동참했다. 미국 독립 선언과 영국 권리 장전, 프랑스 인권 선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 제정한 1791년 5월 3일 헌법은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1]


"계몽주의" 또는 "계몽주의 시대"라는 용어는 어떤 하나의 운동이나 사상을 뜻하지는 않는다. 여기에 속하는 사상가들은 서로 충돌되는 것을 주장하기도 했고, 매우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계몽주의는 어떤 사상의 집합체라기 보다는 가치의 집합체에 더 가까웠다. 전통적 관습, 의례, 도덕에 대한 비판적 사고가 계몽주의의 핵심이었다. 따라서 여러 대립하는 철학 사이에도 비슷한 부분이 상당했다. 심지어 계몽주의에 반대했던 철학자들까지 계몽주의의 일부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이성의 시기"는 보통 계몽주의 사상의 전주곡으로 여겨진다.[2]


목차  [숨기기] 

1 계몽주의의 뜻

2 계몽주의의 특징

3 프랑스의 계몽사상

4 영국의 계몽사상

5 독일의 계몽사상

5.1 독일 계몽주의의 발달

5.2 독일의 계몽주의와 문학

6 이탈리아의 계몽주의

7 스페인의 계몽주의

8 포르투갈의 계몽주의

9 계몽주의의 영향

10 대표적 계몽사상가

11 각주

12 참고문헌

계몽주의의 뜻[편집]

Enlightenment(프랑스어: Lumières, 독일어: Aufklärung)를 번역한 한자어 계몽(啓蒙)이란 인간의 어리석음을 깨우친다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Enlightenment 사상의 다만 한 부분을 대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자어 번역이 대개 그렇 듯, 이 번역은 한국어로 뚜렷한 뜻을 전달해 주고 있지는 않다. 한편, 칸트는 인간이 미성숙으로부터 벗어나 타인의 지도없이 이성적으로 사는 것 또는 미완성 상태에서 완성태로 나아가는 것을 계몽이라 했다


17, 18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이른바 계몽사상은 인간이 이룩한 문화와 문명에 고취되어 인간의 지성 혹은 이성을 바탕으로 문화와 문명을 진보, 발달 시키려는 사상 또는 그러한 행동을 포함하는 적극적인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다시 말해 인간의 지성 혹은 이성의 힘으로 자연과 인간 관계, 사회와 정치문제를 객관적으로 관찰해서 명료하고 자명한 보편적 진리를 발견하고 낙관적으로 발전시키려는 시대 정신이라고 볼 수 있다. 계몽사상은 이와 같은 정신으로 인간의 존엄과 평등, 자유권을 강조함으로써 유럽의 중세 시대를 지배한 전제군주와 로마 가톨릭교회와 신학의 족쇄로부터 인간 이성의 해방을 주창했다. 계몽사상의 의의는 국가·정부의 역할을 결정적으로 바꾸었다. 정부가 더이상 목적이 아니라 국민의 권리를 보장하고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민중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한 것이다. 인간의 권리와 행복을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국가는 당연히 국민의 동의를 받지않고는 존재할 수없다. 국가가 그 책임을 다하지 않고 민의를 배반한다면 민중은 혁명적인 저항권을 발동해 국가를 교체, 폐지할 수 있다[3]. 이런 연유로 계몽사상은 17, 18세기 시민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새로운 시대를 열게 한 것이다. 이 노력의 첫 장을 연 철학자로는 영국의 경험론 철학자 존 로크를 손꼽을 수 있다. 이후 계몽주의는 프랑스와 독일에서 백과전서파 (디드로, 볼테르),루소와 칸트에 영향을 주어 이후 사상들의 출현에 기여했다.


계몽주의의 특징[편집]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편찬위원회는 《근대의 사상》이라는 책에서 계몽주의의 특징으로 '이성 관용 자율 인권이라는 개념, 사회 정치 사상에 대한 과학적 방법의 적용, 인간의 진보를 가로막는 미신과 로마 가톨릭교회 성직자들의 권력에 대한 거부' 등을 꼽았다. 즉 계몽주의는 절대 왕정과 강력했던 로마 가톨릭교회의 절대 진리에 대한 도전이었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그런 권위의 원천들을 부정하고 대신 그 자리에 이성과 자유로운 탐구라는 새로운 깃발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인류 역사가 진보의 기록이라 여겼다.[4]


프랑스의 계몽사상[편집]

프랑스의 계몽 사상은 프랑스 혁명 이전에 시작되었다.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 디드로, 엘베시우스(Claude Adrien Helvétius)등 백과전서파들이 주도하였다.


계몽사상은 프랑스 혁명의 계기가 되었으며 민중들에게 지배계급의 착취와 억압은 하늘이 정한 것이 아니라 혁명을 통해 깨부수어야 한다는 강한 사회개혁 의지를 심어주었다. 민중들의 이러한 사회의식은 프랑스 혁명의 원천이 되었으며, 지금도 민중들이 그들을 억압하는 권력에 저항할 수 있다는 저항권을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헌법에 명시함으로써 존중되고 있다.[5]


볼테르나 몽테스키외, 디드로는 앙시앵 레짐(舊制度) 사회에 고착(固着)하는 종교적 편견, 사회적 기성 관념에 비판을 가했는데, 특히 볼테르는 이신론(理神論), 종교적 관용(寬容)을 가지고 교회에 대한 공격을 실시했으며, 몽테스키외는 신랄한 사회, 문명 비판을 전개했다. 이 기간, 데카르트의 이성(理性)은 정적(靜的)인 진리의 선험적(先驗的)인 보유자라는 성질에서 기능적(機能的)인 진리의 추구자(追求者)라는 성질로 변했으며, 한편에서는 영국에서 뉴턴 물리학의 경험주의, 로크의 감각론(感覺論) 등이 수입되어 이러한 요소는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1748년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이 발표되는 해는 프랑스 사회의 경제 번영, 경제 자유주의의 성장을 배경으로 계몽주의의 결전(決戰) 개시기라 불린다. 앙시앵 레짐 사회에 대한 자연법(自然法)이나 사상적·정치적 입장에서의 비판은 차츰 체계화되어, 1752년에는 ⟪백과전서(百科全書)⟫로서 결실을 보았다. 이 시기의 철학자 가운데는 콩디약, 엘베시우스, 라메트리 등과 같이 감각론, 이신론의 입장에서 유물론, 무신론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나타났다. 한편 정치 비판은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같이 전체 사회질서에서 국가의 기본 원리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있었다.


1770년경 이미 계몽주의는 시대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되어, 미국 혁명이나 프랑스를 방문한 프랭클린(1707-1790)의 정치적 활동의 영향 등에서 자극을 받아 사회·정치 변혁의 이론적 방향을 잡기 시작했다. 모루레(1727-1819)나 마블리(1709-1785) 등이 이 세대이며, 자연법을 하나의 구체적 목표로 하고 공동 소유의 사회를 상정(想定)하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 직전, 철학은 전국의 개명적(開明的) 부르주아를 사로잡아 '생각하는 대중'을 조성(造成)하는 것으로써 실천적인 변혁의 사상이 되었다. 혁명의회에서 전개되는 모든 정치사상은 이미 계몽주의에 원형(原型)으로서 내포된 것이며, 그것이 전쟁이나 경제 위기, 정치적 역관계(力關係)를 계기로 전개된 것이다. 19세기 전반기 계몽주의의 인식론, 과학론, 역사론은 콩트의 실증주의에 계승되었고, 한편 보편적 이성(理性)에의 신뢰는 루아이에 코랄, 주프로와(1796-1842) 등에 계승되었다.


영국의 계몽사상[편집]

넓은 의미로서의 영국 계몽철학은 17세기 초의 프랜시스 베이컨에서 18세기 말의 애덤 스미스, 제러미 벤담에 이르는 경험론의 철학과 거의 같다고 해석되는데, 좁은 뜻으로는 존 로크에서 스미스까지의 18세기 철학을 총칭한다. 그 가운데서 신학적으로는 이성의 우위(優位)를 설명하고 후에 무신론으로 경사(傾斜)를 보인 이신론(理神論)의 흐름(앤서니 콜린스, 존 톨런드, 제3대 샤프츠버리 백작)이 있고 도덕철학으로서는 인간에 내재(內在)하는 모랄센스를 강조하는 도덕감학파(道德感學派, 샤프츠버리)와 유물론에의 경향을 가진 공리주의(데이비드 하틀리, 조셉 프리스틀리, 버너드 맨더빌)가 대립되어 있으며, 인식론으로서는 경험과 감각을 중시하는 경향(흄)이 나타났다. 흄은 회의론(懷疑論)에 빠졌는데 이것은 오히려 예외적이며, 대세(大勢)는 도덕감을 강조하든 이기심(利己心)을 강조하든간에 밝은 낙관론(樂觀論)과 인간 중심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 계몽사상과 같은 사회 비판은 없고, 온건하고 현상(現狀) 긍정적이며, 이 점에 영국 계몽사의 특징이 있다고 하겠다. 단지 샤프츠버리에서 프랜시스 허치슨을 거쳐서 존 밀러나 애덤 퍼거슨에 이어지는 소위 스코틀랜드 역사학파에는 역사적 관점에서의 사회 비판이 나타났고, 18세기 말에는 차츰 첨예화하는 경향이 생겼다.


독일의 계몽사상[편집]

독일은 당시 시민사회의 발달이 미미했기에, 프랑스의 계몽사상의 활발한 전개에 영향을 받았는데, 프랑스와는 다르게 독자적으로 발달했다는 특징이 있다. 계몽주의가 유럽 전역에 퍼지던 17세기에 프로이센은 문화적인 관점에서는 유럽의 변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프리드리히 2세는 계몽 사상가인 볼테르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지만와의 서신 교환이 프랑스 어로 이루어진 점, 그 외에 많은 예술가와 문인, 학자들과도 프랑스 어로 이야기하였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국왕을 중심으로 한 프로이센의 문화,예술은 독일적인 것이 아니라 프랑스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문화, 예술,학문 분야에서의 서유럽 선호 현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독일적인 것으로 서서히 변화된다. 독일인 중에서도 새로운 사상과 예술을 대표하는 인물이 등장하게 되었다. 서유럽에서 철학과 정치 이론 부문에서 뉴턴의 자연 과학적 사고 방식이 널리 퍼지면서 등장한 계몽주의 철학이 독일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것은 칸트(1724~1804)가 살았던 시기였다.


독일 계몽주의의 발달[편집]

독일의 계몽주의는 영국이나 프랑스의 계몽주의보다 늦게 나타는데,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 당시 독일은 300여 개의 국가들이 신성로마제국이라는 형태 안에 연방국가로 유지되고 있었다.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당시에 외국문화가 독일인들의 생활과 사상에 깊숙이 침투하고 있을 때, 계몽주의는 외국 문화에 대한 반발로 표출되었다. 계몽주의는 다른 나라의 것을 모방하는 것에 벗어나 다양한 문화들을 수용하고 발전시키면서 독일 내에서 전성기를 맞이한다. 인간의 사고가 기존의 종교적 규범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형태로 발전하면서 계몽주의는 더 나아가 세상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를 강조한다. 계몽주의 시대의 문학 또한 인간의 합리적 이상에 도달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 것으로 간주되며, 이성과 법칙을 중요시 여겼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프랑스나 영국의 계몽주의가 국가를 대표하는 사상으로 발전하여 근대 시민 혁명의 이론을 제공한 것에 비해, 독일의 계몽주의는 혁명의 원리와 결합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이러한 사상을 받아들이고 실천할 수 있는 시민 세력이 상대적으로 미약하였던 데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독일, 특히 프로이센의 계몽주의는 점진적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장기적인 사상으로 자리를 잡아 나갔다고 할 수 있다. 또, 계몽주의를 받아들인 중심 계층에 자신을 '국가 제일의 공복'으로 자처한 프리드리히 2세와 같은 군주가 있었다. 이들에게 있어 계몽주의는 국가 혁명의 원리가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와 같은 강력한 국가 건설을 위한 서구화의 일환이었다.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군주제 국가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듯이 프로이센의 계몽주의도 프리드리히 대왕의 사망과 함께 그 성격이 변화하였다. 프리드리히 대왕 사후 프로이센의 계몽주의는 국가와 사회를 변혁시키는 실천적인 성격을 상당 부분 상실하고, 보다 관념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와 같은 경향은 대표적인 계몽주의 철학자인 칸트의 사상에서도 나타난다. 이미 초기의 독일 계몽 철학자들은 형이상학적 종교론이나 경건주의 신앙 등에 천착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칸트의 철학 세계도 계몽주의를 공적 생활과 사적 생활을 철저히 구분지음으로써 시민 정신의 자유로운 발현보다는 시민의 교양으로서 특수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독일의 계몽주의와 문학[편집]

무엇보다 독일의 계몽주의는 문학에 결과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계몽주의가 확산되면서 지나치게 규율들에 얽매이게 되어 인간의 합리적 이상에 도달하고자 하는 본연의 목적도 상실하게 되었으며, 문학에서도 작품의 내용보다 법칙들을 더 우선시하게 되어 인간의 감정에 대해 소홀하게 되었다. 이성만으로는 인간 내면의 복잡하고 깊은 심리를 표현하기 어려웠고, 감정을 나타낼 수가 없었다. 계몽주의의 문학은 인간의 다양한 행동 양식이나 감정을 표현하고, 그러한 것들에 대해 공감하고 소통하고자 하는 문학의 본래 목적과 점점 멀어져 갔다. 계몽주의의 문학은 기쁨이나 슬픔 같은 인간의 심리를 억압하는 경향을 보여주기도 했다. 몇몇 작가들은 이러한 분위기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새로운 경향의 작품을 저술하여 사회 분위기를 바꾸고자 한다. 이 때 나타난 운동이 인간 본연의 감정을 중시하던 질풍노도 운동(Sturm und Drang)이며, 젊은 시절의 괴테와 쉴러가 대표적인 작가이다.


이탈리아의 계몽주의[편집]

이탈리아는 바티칸이 자리 잡고 있는 위치상 가톨릭 교회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사상적으로 낙후되어 있는 지역이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편찬위원회는 《근대의 탄생》에서 '이탈리아의 지적 활동은 펼쳐지지 않는 책 같은 상태'라고 표현할 정도이다. 이 곳의 계몽주의 운동은 작고 고립된 그룹들로 파편화 되어 나타났다.계몽주의 운동 지지자들은 정치철학에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 슬로건을 도입했다. 이탈리아의 계몽주의의 대표주자는 체사레 베카리아(Cesare Beccaria)였다. 그는 형사재판 제도의 개혁을 다룬 《범죄와 형벌,(Dei delitti e delle pene)》을 썼다. 이 책은 형벌을 규제하는 원리들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 진술로 평가되고 있다. 베카리아는 고문과 참수형을 비판하고 종교적 죄를 범죄로 취급하는 가톨릭 교회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훗날 사형제도의 폐지 등 인권 신장에까지 크게 영향을 미쳤다. 또 루이지 갈바니, 알렉산드로 볼타 같은 과학자들이 있다.[6]


스페인의 계몽주의[편집]

스페인은 종교가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교과서적인 나라였다. 가톨릭 교회가 운영하는 종교재판소로 개신교인들이나 계몽주의 철학이 발붙일 곳이 없었다. 하지만 스페인에서 카를로스 3세의 박애적인 통치 아래서 조금씩 주요 개혁이 진행되었다. 그의 이탈리아인 재상인 스퀼라체 후작(Marques de Squillace)의 개혁 조치에 1766년 마드리드에서 대규모 폭동이 벌어졌다. 폭도들은 마드리드에서 스퀼라체 후작이 만든 새로 설치한 가로등을 파괴했다. 이 폭동으로 스퀼라체는 이탈리아로 쫓겨가고 카를로스 3세의 개혁 조치에 큰 타격을 입혔다. 카를로스 3세는 이 폭동이 예수회의 음모로 보고 예수회를 추방하고 종교재판소를 억압했다.[7]


포르투갈의 계몽주의[편집]

리스본 대지진 이후 재건을 이끈 폼발 후작은 과거 해양 개척을 선도했던 나라의 위상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폼발 후작은 1750년 남미에서 자신들만의 왕국을 꾸리고 국왕 주제 1세를 암살하려해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은 예수회를 추방시키는 등 여러 개혁에 앞장섰다. 예수회가 남미에서 자신들만의 왕국을 꾸미고 국왕 부럽지 않은 생활을 누린다는 사실은 훗날 볼테르의 소설 캉디드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계몽주의의 영향[편집]

계몽주의는 전제와 억압을 거부하며 현대의 민주주의, 인권과 시민의 자유에 대한 제도적 보장, 세속주의와 종교적 다양성, 개인의 윤리적 자율성, 과학적 태도 견지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계몽주의는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바꿀 수 있다는 믿음에 입각한 운동이었다. 계몽주의는 사상과 행동 그리고 진보를 가로막는 정통 사상과 권위를 깨부수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이러한 진보적 태도는 프랑스 혁명의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 훗날 에밀 졸라 등 프랑스의 지식인들의 사상 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또 계몽주의는 전통적인 로마 가톨릭 교리에서 벗어난 자유주의 신학에 영향을 주었으며, '하나님의 책'(The book of God)이라고 불리던 성서에 대한 자유로운 비평의 토양이 되었다.


대표적 계몽사상가[편집]

토머스 홉스 (1588년 ~ 1679년)

존 로크 (1632년 - 1704년)

샤를 드 몽테스키외 (1689년 ~ 1755년)

볼테르 (1694년 ~ 1778년)

장자크 루소 (1712년 ~ 1778년)

드니 디드로 (1713년 ~ 1784년)

장 르 롱 달랑베르 (1717년 ~ 1783년)

이마누엘 칸트 (1724년 ~ 1804년)

니콜라 드 콩도르세 (1743년 ~ 1794년)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1770년 ~ 1832년)



C31 – 정부론(Two Treatises of Civil Government) / 로크(John Locke, 1632-1704)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로크가 명예혁명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해 작성한 이 책은 정치사회의 성립이 각자의 생명, 자유,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개인들의 상호 합의적인 사회계약에 기초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책에 서술된 로크의 정치이론은 최초의 본격적인 근대유산자적 정치이론으로서, 그리고 법치국가. 대의제. 민주주의. 권력분립. 입법권 우위. 저항권등을 주창하고 있는 현대 자유민주주의 선구적 이론으로서 의의를 지닌다.

  

a. 생애와 작품활동

 영국의 버트런드 러셀은 존 로크를 가리켜 가장 행복한 철학자 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의 정치사상이 드물게 동시대인의 환영을 받았기 때문이다. 영국의 명예혁명을 대표하는 정치사상가이며 철학자인 존 로크는 봉건사회로부터 근대사회로 옮아가는 17세기의 대변혁기에, 영국이 낳은 위대한 사상가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근대정치이론의 확립자. 철학에 있어서는 인식론을 창시한 계몽사상의 개척자로 불리어지고 있다. 로크는 브리스틀 근교 링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변호사이자 찰스 1세에 대항했던 의회법학자였고. 양친 모두 근실한 청교도였다. 웨스트민스트 학교에서 6년간 그리스 어와 라틴어를 수학하였는데, 수석을 차지했다. 20세인 1652년 옥스퍼드에 입학하여 철학, 의학, 수학, 자연과학 등을 배웠다. 당시의 옥스퍼드의 분위기는 스콜라 철학이 지배적이었는데, 그는 이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데카르트나 홉스의 철학을 더 좋아하였다. 이 무렵 그는 한 여인을 사랑했는데, 그가 일생을 독신으로 보냈던 것도 이 연애에 실패한 때문인지 모른다. 1666년부터는 옥스퍼드에서 의학을 공부하였는데, 학위는 받지 못했으나 능력은 인정받았다. 그의 생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대법관 출신의 샤프츠베리 경을 만난 것도 의사로서의 활동 때문이었다. 특히 그를 수술한 것이 성공하여, 그의 주치인 겸 가정교사가 되고, 그의 저택에서 찰학과 정치학을 발전시켜나갔다. 이와 같은 의사로서의 경력과 그의 자연철학에 대한 관심은 그가 처음 관심을 가졌던 데카르트의 철학이 갖는 초월적인 형이상학을 모두 배격하고, 모든 지식의 원천을 경험에서 얻고자 하는 경험철학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1681년 샤프츠베리 경은 반역죄로 몰려 위험에 처하자 네델란드로 피신했고, 거기에서 일생을 마쳤다. 로크도 네델란드로 망명해서 스투어트 왕의 폭정이 끝날 때까지 철학연구와 인간오성론의 저술에 힘썼다. 1688년(57세)에는 명예혁명이 일어나서 큰딸인 메리와 그의 남편 월리엄 3세가 공동으로 국왕이 되자, 로크는 새 여왕이 된 큰딸과 함께 같은 배로 런던에 돌아왔다. 귀국 후 왕의 부름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한직에 있으면서 권리장전의 작성에 협력하였고 통치론(2편) 인간오성론 등을 잇따라 출판하였다. 전자는 위대한 자연법사상과 근대정치사상의 근원지가 되었고, 후자는 영국 경험론의 근원지가 되었다. 이때쯤 뉴턴과도 알게 되었다. 그는 생의 마지막 10여년을 오츠에 있는 프란시스 경과 마샴부인의 저택에서 살았다.

그곳에서도 대화와 토론을 주제하여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그는 마샴 부인이 성경에 있는 시편을 읽어주는 가운데, 1704년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임종을 지켜본 마샴부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의 죽음은 바로 그의 생애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경건하고 동시에 자연스럽고 진지한 것이었습니다. 


b. 시대적 상황과 로크의 사상

 로크의 사상은 시대적 상황과 깊은 함수관계를 맺고 있다. 그는 영국 역사에서 가장 파란이 많은 시기에 일생을 보냈다. 그런데 그 시기는 영국사회의 발전에 있어 매우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는 청교도 혁명과 명예혁명 이라는 두 차례의 혁명을 경험했다. 이와 같은 격변 속에서 영국의 정치는 절대왕정으로부터 공화정으로, 그리고 그 공화정의 지나친 진전에 대한 반동으로 말미암아 다시 국왕주권으로 복귀되었다. 그러나 결국 명예혁명을 통해서 국민주권, 제한 군주제의 확립을 보게 된다. 이 혁명의 이론적 사상을 제공한 사람이 바로 로크이다. 

정치사상, 정부론 에서 보이는 그의 사상적 의의는 매우 다양하다. 무엇보다도 자유와 평등의 기본적 인권사상과 의회정치와 권력분립으로 대변되는 현대 민주정치제도의 원리를 공식화 시켰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자유주의자의 입장에서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어 절대왕정을 반박하였다. 신으로부터 평등하게 부여 받은 자기 보존권, 즉 자연권이 왕에 의해 유린당해서는 안되다는 것이다. 그는 정치권력을 입법권, 행정권, 연합권으로 분립시키고 정부에 대한 저항권을 인정하여 명예혁명의 도덕적 정당성을 옹호 하였다. 이러한 저항권 사상은 19세기 독일혁명에, 권력분립론은 몽테스키외에게, 사회계약설은 루소에게, 그의 자유주의는 미국의 독립선언문과 프랑스의 인권선언에 영향을 미쳤다. 한편으로 그의 사회계약설은 루소에 의해 더욱 구체화되었으나. 대의제나 다수결에 대해서는 견해차이를 보인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철학적 급진파인 벤덤주의자들에게는 안내자의 역할을 했다. 벤덤의 공리주의적 목표 및 인간관은 그대로 로크의 경험적 연구방법을 따랐다.


 철학사상, 로크의 철학사상은 인간오성론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여기서 영국의 사상적 전통 속에 내려오는 경험주의를 철학적으로 체계화시켰다. 그는 인간인식의 기원을 분석하여 1. 데카르트가 말하는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다는 본유관념을 부정하고, 2. 인간의 마음은 태어날 때부터 백지상태로서, 지식이 형성되는 것은 경험의 결과라 하였다. 3. 지식이란 감각, 즉 지각, 성찰, 기억, 비판 등과 같은 경험을 통해 얻어진다고 보았다.


 교육사상, 교육에 관한 몇가지 견해에서 로크는 그의 교육론을 전개했다. 좋은 교육은 (심신) 모두에 관심을 기울이고. 좋은 교육자는 운동과 놀이와 충분한 수면을 강조한다. 어린이의 감정발산은 구속되어서는 안되고 교육자는 지식에 앞서 덕성과 지혜를 심어주어야 한다. 부모의 모범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교육효과를 낳는다고 주장했다. 


c. 정부론의 주요 내용

 정부론은 두 편의 논문으로 되어 있는데, 그의 정치이론과 정치사상이 잘 드러나고 있는 고전적 명저이다. 제 1논문의 제목은 로버트 필머 경과 그 일파의 잘못된 논리에 대한 반박 이고, 제 2논문은 시민정부의 참된 기원과 범위 및 목적에 관한 소론으로 되어있다. 

제 1편은 1680년에 출판된 로버트 필머의  가부장론을 반박하기 위해서 1681년경에 저술된 것이고, 제 2편은 로크가 1683년 네덜란드로 망명했다가 89년에 귀국할 때까지 망명지에서 저술한 것이다. 당시 영국은 청교도혁명에 뒤이은 왕정복고의 반동이 점차 격심해지고 필머의 왕권신수설이 공공연하게 주장되는 상황이었다. 특히 제임스 2세하에서는 토리 당의 전제정치가 그 절정에 이르고 있었으나. 휘그 당은 결국 1688년 제임스를 추방하는 데 성공, 이윽고 명예혁명을 성취시키게 되는데 정부론은 로크가 이 혁명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려고 집필한 것이다.

 제 1논문, 로버트 필머는 가부장론에서 왕권신수설을 기초로 하는 전제군주제를 옹호하고 있다. 이 저술을 통해 필머는 가정과 왕국, 아버지의 권력과 국왕의 권력과의 일치를 논거로 하여, 국왕의 권력은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그 후계자들의 부권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았다. 로크는 제 1논문에서 왕권신수설에 입각한 필머의 이러한 주장을 성서를 근거로 하여 아담에게는 무제한적인 절대권력이 없었고, 신은

인간에게 이성과 자기보존의 수단을 부여하였다고 반박했다. 

 제 2논문: 정치권력과 자연상태, 이 제 2논문이 속칭 시민정부론으로, 로크의정치 사상이 명백하게 논술되어 있다. 먼저 로크는 정치권력을  자연상태의 개인들의 동의에 의해서 성립되는 것으로 규정하고, 이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치사회가 성립하기 이전의 상태, 즉 자연상태가 어떤 것인가를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로크의 자연상태는 홉스가 말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상태가 아니라  평화로운 상태 이며, 각자가 자기보존의 권리를 보호하고 자유롭게 행동하면서도 타인의 생명과 권리를 침해하지 않도록 자연법의 제한을 받는 상태다. 그런데 자연상태와 정치사회의 차이점은, 자연상태에서는 자연법의 해석과 집행이 각자에게 위임되어 있기에 권위를 가진 공적인 재판관이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연상태가 전쟁상태나 예속 상태는 아니다.

 자연권과 자연법, 이어 로크는 자연상태에서 인간이 어떤 권리를 보유하는가(자연권)하는 문제를 제시하고, 그 내용을  생명, 자유, 재산 이라 규정한다. 이러한 자연권은 정치사회 이전부터 존재하는 권리이기 때문에, 어떤 정치권력도 이것을 침해할 수 없다. 그런데 로트가 말한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자기보존권, 즉 자연권은 자연법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다. 로크는 자연법을 이성에 입각한 법, 즉 인류상호간의 안전을 위하여 인간의 행동을 규제한 영원한 법칙이라고 규정했다. 자연권은 이러한 자연법의 테두린 안에서 인정되는 것이다. 이 전 인류의 보존이라는 목적과 개개인의 권리보존이라는 목적은 로크에게는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이 양자를 모순없이 조화시키는 것이 제 2편 5장 재산권에 대하여 에서 제시된, 노동이 부를 만든다는 생산력적인 사고방식이다. 즉, 로크에 의하면 세계는 모든 인류공동의 재산으로 주어진 것이므로, 각자는 노동을 가함으로써 사유재산을 만들었고, 이것이 전체적인 세계의 부를 증대시켰다. 따라서 화폐에 의한 부의 불필요한 축적이 없는 한 각자의 사유재산권은 서로 남을 침해하는 일 없이 조화 있게 존재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로크는 말한다. 

 사회계약, 이상과 같이 로크는 자연상태를 고찰한 다음 (부권)과 정치권력이 이질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고, 이어 정치권력의 문제를 다룬다. 여기서 로크는 정치사회의 목적이 자연권의 보존에 있다면서, 그를 위해 공동의 법률과 재판권을 설정하는 것이 그 본질이라고 역설한다. 그러므로 절대군주가 지배하고 백성은 소송조차 못하는 국가를 정치사회라 볼 수 없으며, 그 같은 국가는 여전히 자연상태에 머물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정치사회는 오직 그 구성원의 동의에 의해서만 성립하는 것이다. 사회계약설의 전제는 1. 모든 인간에게 어떤 도덕적 권리가 있다는 것, 2. 정부는 이 권리를 보호할 의사와 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 등이다. 이와 같은 전제 아래 사람들은 사회나 정부를 구성하는 데 합의를 보게 된다 로크에 있어서의 합의는 국가의 기초이며 주권성립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로크는 정부의 실제 운영에 있어서 대다수의 의사에 따르는  대의제를 주장하였다, 바로 이점에 불만을 느낀 루소는 다수파가 소수파에 대해 행사하는 전제의 위험을 극복하고자 그 자신의 사회계약론 을 제시하였다. 

 책임 있는 정부와 국민, 그러나 로크의 사회계약설에 의하면 이 함의는 무조건적이 아니라, 정부 쪽에서나 국민 쪽에서 상호간의 의무를 지킬 때만 유효한 것이다. 즉 국민은 이성과 책임을 가지고 방종에 흐르지 말아야 하며, 정부는 위탁된 의무를 잘 수행해야 한다. 만일 정부가 기본권인 생명, 자유, 재산의 권리를 보장하지 않고 방자해 진다면 물러나야 하며, 극단의 경우 혁명에 의해 타도 될 수도 있다, 즉 책임 있는 정부와 책임 있는 국민을 강조한다. 

 2권분립과 저항권, 로크는 사회계약에 의해 정치사회가 일단 성립하면 다수결원리가 지배한다고 말한다. 이 다수자가 스스로 정치권력을 행사할 때는 민주정제가 되고, 소수자에게 이것을 위임할 때는 과두정치가 된다, 한 사람에게 위임할 경우에는 군주정제가 된다, 로크는 입법권과 행정권 및 연합권(외교권)이라는 세 가지 권력을 내세웠는데, 이는 소위 3권을 분립시킨 것이 아니고, 입법권이 기타 권력에 우선한다고 보았다. 단지 혁명정국에는 행정권이 입법권을 우선하는 경우도 인정(국왕의 대권)하고 있으나. 어느 경우에도 국가를 구성한 원래의 목적, 즉 개인의 자연권을 보존한다는 목적은 어떤 한 권력에 의해서도 침범 받지 않으며, 이것을 침해 받을 때에는 국민이 저항 할 권리를 보유한다고 주장한다. 


d. 사상적 의의

 로크의 사상은 단지 영국혁명은 물론 미국의 독립혁명과 프랑스 혁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미합중국의 독립선언의 일절은 바로 로크의 정치사상의 간결한 요약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자명한 진리로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그리고 그들에게는 창조주로부터 만인에게 양도해줄 수 없는 일정한 권리가 부여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정부는 이러한 권리를 보전하기 위하여 국민들 사이에 세워지는 것이므로, 그 정당한 권력은 피통치자의 동의에 유래하는 것이다. 정부가 어떤 모양으로라도 이러한 목적들을 파괴하게 되면 국민은 그러한 정부를 변경시킬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되며, 그리고 국민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되는 원칙에 기초를 둔...... 새로운 정부를 세울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프랑스 혁명시의 인권선언 속에서도 권리의 보장이 확보되어 있지 않고 권력의 분립이 확정되어 있지 아니한 사회는 헌법을 갖고 있지 아니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만일 그렇다면 로크의 정부론은 근대헌법의 기본원리를 최초로 명확히 제시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같은 정치사상이 기초가 되어 민주주의 사상이 구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제시한 인간의 자유와 권력의 문제는 벤덤, 래스키 등으로 이어져, 오늘날의 중요한 민주주의적 정치원리의 출발점으로 되었다. 또한 그의 경험론은 18세기 계몽주의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미국의  독립선언과 프랑스의 인권선언 속에 구체화되었다. 그리고 세계인권선언 은 20세기에 있어서의 로크 사상의 빛나는 승리의 산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실로 근대민주주의 정치이론의 위대한 건설자였다. 그의 사상은 시대와 국경을 초월하여 현대인의 가슴 속에 강한 호소력을 갖고 있다. 적어도 민주주의의 본질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먼저 근대민주주의의 정치원리를 담은 로크의  정부론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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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혁명 (출처:나무위키)


최근 수정 시각: 2017-09-19 00:22:09


1. 개요

2. 배경

3. 과정

4. 결과

1. 개요[편집]


1688년에 일어난 영국의 역사적 사건. 


의회가 제임스 2세를 몰아내고 그의 딸을 메리 2세로 옹립한 사건... 이긴 하지만 메리 2세는 바지사장이고 그의 남편 네덜란드 공화국의 통령 오랴녜 공 빌럼이 의회와 연합하여 제임스 2세를 몰아내고 윌리엄 3세로 즉위한 사건이라 볼 수 있으며 종종 최후의 영국정복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우연찮게 이전 정복자와 이름도 같다.


피를 흘리지 않고 혁명을 이뤄냈다(=어떠한 사망자도 발생하지 않았다)하여 명예혁명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폭력 사태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2. 배경[편집]


발단은 이렇다. 올리버 크롬웰이 죽은 후 국민들의 강력한 열망에 의해 왕정복고가 이루어지고 그 자리에 찰스 1세의 아들인 찰스 왕자가 찰스 2세로 즉위했는데, 그 뒤를 이어서 왕위에 오른 제임스 2세는 독실한 가톨릭교도로서 에스파냐 같은 가톨릭 국가와의 수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했으며, 정치적으로는 왕권 강화에 힘을 쏟았기 때문에 개신교가 주류였던 의회와의 사이가 악화되었다.[1] 


3. 과정[편집]


이 와중에 제임스 2세가 늘그막에 왕자 제임스를 보게 되자[2]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의회는 당시 제임스 2세의 맏딸, 메리 공주와 결혼한 네덜란드의 월리엄 공에게 "영국의 왕위를 양도할테니 부디 영국에 와주십시오"라는 편지를 보내면서 그를 런던에 초청한다. 당시 네덜란드가 원래 신교파였기 때문에 영국이 가톨릭 국가가 되면 대단히 위태로운 상황이라 월리엄 공은 의회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영국에 상륙하고 영국군은 제임스 2세에게 등을 돌리고 월리엄 공에 가담한다. 


먼나라 이웃나라를 보면


제임스 2세 : 뭣이!! 윌리엄 짜식이 군대를 몰고 쳐들어온다고!! 사위가 장인을 노리고 쳐들어와? 햐, 세상 한번 말세로다!! 당장 윌리엄 놈의 군대를 콩가루로 만들어 버려랏!!

신하1 : 군대가 있어야 콩가루건 미숫가루건 만들죠......

제임스 2세 : 그......그런가? 그러고 보니 이거 큰일났구나야~~!!

제임스 2세 : (의회에 가서)이제부터 너희들 안 무시하고 같이 일할께! 싸인할 거 시원히 다 해줄께!!

의회 : 때는 늦으리!!! 폐하께 드릴 말씀은 오직 두 단어... 잉글랜드를 떠나라! 조사까지 세 단언데?영어로는 Leave England 니까 두 단어 맞음[3]

제임스 2세 : 얘야, 너라도 이 애비를 위해 뭔가 말좀 해 다오!

(둘째 딸인)앤 공주 : 잉글랜드를 떠나쇼.


...희극적으로 묘사해놨기는 했는데, 결과적으로 제임스 2세는 자식들에게도 버림받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다는 이야기다. 결국 그는 승산이 없음을 깨닫고 프랑스로 망명했고, 런던에 입성한 월리엄 공과 메리는 각각 월리엄 3세와 메리 여왕으로 공동 국왕이 된다.[4] 월리엄 3세의 부재 기간 동안에는 메리 여왕이 국왕으로서 직무를 수행했다고 한다.


사실 위에 인용된 먼나라 이웃나라의 설명은 오류가 있는게, 제임스 2세에게는 상당한 수준의 병력이 있었고, 제임스 2세의 권력기반인 스코틀랜드에서도 그의 명령에 따라 군대가 소집되고 있었다. 다만 이들 부대의 소집과 이동에는 당연히 시간이 많이 소모되어 소규모 정예부대를 동원해 전격적으로 밀고 들어온 윌리엄과 맞설 시간이 부족했을 뿐. 사실 잘 안 알려져있지만 제임스 2세 자신이 실전 경험이 풍부한 유능한 군인이었다.


4. 결과[편집]


이 사건을 계기로 왕의 왕권은 한층 줄어들었다. 오늘날 영국 왕실의 권력이 정립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사건이다.


따지고 보면 무혈 혁명이란건 선전에 불과하며 사실은 피를 많이 흘렸다. 윌리엄 공의 상륙 이후 제임스 2세의 군대와 몇 차례 무력충돌이 있었고,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등지에서는 아예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나, 특히 아일랜드에서는 전국을 뒤엎고 두고 두고 문제가 된 자코바이트/윌리어마이트 전쟁이라 불리는 내전이 터졌고 영국 밖에서는 제임스 2세가 왕위 탈환하려고 프랑스를 끌어들이는 바람에 윌리엄 3세 지휘하에 있던 영국과 네덜란드, 여기에 편을 들은 스페인이 맞붙은 9년 전쟁이 일어났다.[5] 다만 프랑스 대혁명과는 달리 잉글랜드 내부보다는 외적 충돌이 더 많아서[6] 무혈 혁명이라 부르는것 뿐이며, 이 또한 현재 사학계에서 대대적인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문제. 


실제로 혁명이라고 하긴 했으나 왕에 맞서 귀족과 젠트리의 이권을 보장한 측면이 강하다. 혁명은 일종의 미사여구였으며, 무혈이 덧붙여진 것은 어떻게든 이 사건의 파장을 축소시켜서 안정적으로 살고 싶은 욕망의 발현이었다. 실제로 인민의 주권이나 저항권에 따른 획기적 변화 그런 거 없고 그냥 제임스 2세가 물러나서 빈 왕좌에 다른 사람이 와서 앉는 식으로 잘 이어졌다. 사실 이때는 보통선거권같은 개념조차도 없어서 돈 있는 사람이나 선거권/투표권을 가질수 잇는 시절이었고 남성한정으로 보통선거권이 주어진것도 1885년도의 일로 거의 200년 후의 일이다. 그리고 의회는 이렇게 냉큼 왕을 쫓아내고 이권을 차지하자마자 밥그릇을 지키려고 선거권 동결하기, 있는 선거권 빼앗기, 선거권 안정적으로 물려주기를 일삼았다.[7] 그래놓고는 훗날 대혁명이 벌어지자 우리는 평화롭게 혁명했지 피분수를 일으킨 프랑스 놈들과 다르다는 선전을 덧붙인다.


명예혁명으로 인해 자코바이트 문제가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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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 (출처:나무위키)


최근 수정 시각: 2017-08-15 19:56:51


淸敎徒

puritan


1. 개요

2. 역사

3. 교육관

3.1. 칼뱅의 교육관

3.2. 교육 시설

4. 정치관

5. 기타


1. 개요[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uritanGallery.jpg

대표적인 청교도 신학자들의 초상화.


장 칼뱅에 의해 발흥된 칼뱅주의 개신교가 영국으로 건너오면서, 영국 교회의 전통주의와 대립하는 입장[1]에서 우리는 '깨끗하다'는 의미로 라틴어 Puritas 에서 유래하여 기존의 전통주의를 정화(purify)한다는 의미에서 복음주의자들이 퓨리턴(puritan)이라고 자칭한 것에서 유래된다.[2] 일본에서 근대화 시기 이 어휘를 청교도로 번역했다. 깨끗할 청을 써서 淸교도. 


2. 역사[편집]


성경중심 신앙과 금욕주의, 강경한 반로마교회 기치로 전통주의에 반대 노선을 취한 탓에 영국 국교회의 수호자인 영국 국왕들에게 탄압을 받아, 종교의 자유를 찾으러 북아메리카로 이주하여 미국의 기원이 되었다고 알려졌다. 


청교도들의 정체성이 확립된건 영국에서의 종교 탄압 때문인데 시작은 영국교회를 국가교회화여 독립시켜 영국국교회의 수장이 된 헨리 8세 시절이었다.[3] 헨리 8세는 성공회의 창시자 아니냐?는 의문이 생길수 있는데 현대의 성공회 조직과 16세기 부터 18세기 까지의 영국 국교회와는 큰 차이가 있다. 이 부분은 성공회 항목 참조. 


영국 국교회와 다른 복음주의 개신교단 사이의 관계가 원만한 현재 기준으로 생각하면, "헨리 8세가 세운 성공회(영국 국교회) 세력도 같은 개신교인데 왜 청교도를 탄압하지?" 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당시에는 사실 성공회와 종교개혁으로 생긴 개혁교회(우리가 흔히 아는 개신교 이미지의 교단들)사이는 역사적 설명이 필요하다


헨리 8세는 영국 내에서의 교황 수위권을 부정하고 영국 교회 자체를 독립시켜 국가교회화 하여 국왕이 영국 내에서의 교회 수장직위를 차지하는데 목적이 있었을 뿐, 가톨릭에서 이어진 외적인 요소들이나 세세한 교리를 뜯어 고치는 데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즉, 당시 영국 국교회는 신앙적으로 프로테스탄트의 정체성을 강하게 가진 교파였다기 보단 '교황 없는 천주교'와 다름 없었다는 것.[4] 그리하여 루터주의에 영향을 받은 윌리엄 틴들의 영어성경을 반입하거나 소지하면 화형시켰고, 가톨릭 교리인 화체설(성체 성변화설)을 부인한 옥스포드 신학교수들을 토머스 모어를 대법관으로 기용하여 40명을 고문하고 6명을 화형시킬 정도였다. 이외에도 종교적으론 가톨릭 신자보단 대륙 신학에 영향을 받은 윌리엄 틴데일 번역 성경 소지자 같은 복음주의자들을 더 많이 처형했고, 가톨릭 교회의 7성사, 가톨릭식 미사에서 거의 달라지지 않은 예배형식, 주교제 등 가톨릭 교회의 기본교리와 외적 요소에 대해선 전혀 바꾸지 않았기 때문에 교황수위권만을(그것도 영국내에서만) 부인한 가톨릭 교도나 다름 없었고 교황의 권위와 권한을 국왕에게 귀속시킨 것에 불과했다.


결국 성경중심의 신앙을 기치로 걸고 루터와 칼뱅주의 신학을 기반으로 기존 가톨릭 전통 즉 가톨릭의 교황제도는 물론이고 주교제 등 교계제도와 예배형식 가톨릭적인 교회 전통과 들을 전부 거부하는 청교도들은 루터나 칼뱅 등이 주장한 '개혁'의 범주에 훨씬 못 미치는, 다시 말해 개혁신앙이 부족하여 아직도 가톨릭적인 요소가 많이 남아있는 교파라는 이유로 영국교회의 개혁이 불완전하다 생각했다. 영국 교회의 대다수 사제들과 신자들은 로마수위권만 부인하면 기존의 신앙과 전례와 거의 유지했기 때문에 영국 국교회의 개혁을 주장한 청교도들을 박해했다. 따라서 당시 복음주의자들은 탄압을 받는 동시에 심각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 당시엔 루터주의와 칼뱅주의(츠빙글리)를 복음주의라 한 것은 당시 영국국교회에서도 가톨릭 성향, 루터주의 성향, 칼뱅주의 성향, 그냥 이것도 저것도 모르겠고 상황에 따라 "국왕이 옳다"...는 현실 성향들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기에 전례나 전통보단 성경중심을 주장하는 개혁 성향 신자들이 자신들을 개신교라 자청하기 보단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며 복음주의자라고 칭했기 때문이다.


헨리 8세 사망후, 에드워드 6세, 메리 1세 치하에서 존중과 박해를 한 번씩 겪으면서 잉글랜드에선 종교적 갈등이 격화 되었는데, 엘리자베스 1세는 집권 초기부터 개혁주의 성향의 신도들 손을 들어주지 않고 당시 강대국인 스페인의 눈치와 아직까지 상당했던 가톨릭 성향 신자들을 배려하여 중도적인 노선을 취했다. 다시 가톨릭으로는 돌아가지 않는 한편 기존의 관례였던 가톨릭식 전통에도 그다지 손을 대지 않은것이다. 특히나 국가교회에서 주교제는 영국왕 입장에서 상당히 매력적인 통치 수단이었고, 이는 개혁성향 복음주의자들에게 큰 불만으로 자리 잡았다. 일단 엘리자베스 1세 시기에는 왕권이 강력한데다가 메리 1세시기 탄압받던 처지보단 천지차이 였기 때문에 대놓고 불만을 드러내진 않았다.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엘리자베스 여왕 사후 제임스 1세때였다.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 국왕 시절 이미 스코틀랜드의 국교화가 된 칼뱅주의 교육을 받았고, 교리상으론 역시 지지했지만 잉글랜드 국왕이 된 후로는 입장이 조금 미묘해졌다. 영국의 국가교회의 주교제가 왕이 임명하는 권한이기 때문. 때문에 스코틀랜드의 개혁교회처럼 잉글랜드가 변할 것이라고 생각한 잉글랜드 청교도들은 매우 실망을 하게 된다.


1603년 4월 제임스 1세는 청교도 성향 영국교회 목사 1000명이 서명한 천인청원(Millenary Petition)을 받게 되는데 일단 청교도들은 왕과 국가에 충성함을 강조하는 동시에 영국교회의 관습에 대한 개혁을 촉구했으나 제임스는 교리상 칼뱅주의에 기울긴 했지만, 급격한 개혁으로 긁어 부스럼을 만드려고 하지 않았다. 외국출신 왕이 즉위하자마자 상당한 세력이 있는 영국교회를 개혁하기 어려운 면도 있었고, 무엇보다 청교도들의 정치관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5] 


제임스 1세는 왕권신수설 신봉자였지만 청교도들은 전혀 다른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다. 같은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았는데 왜 이러냐면 칼뱅 사후[6] 8년이 지나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이후 칼뱅주의자들은 국가권력이 탄압하고 국왕이 폭군이라면 퇴출시켜야 된다 는 입장으로 선회했기 때문이다.[7] 그리고 칼뱅주의의 본산 제네바는 공화국이라서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던 제임스에겐 청교도들을 왕권에 대적하는 세력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시기에, 때마침 가톨릭 극단주의자였던 가이 포크스 등이 저지른 영국 국회의사당 화약 폭파 음모로 영국 내 가톨릭의 입지가 위태해지자, 청교도들은 이 기회에 대대적인 가톨릭 탄압을 통해 영국내에서 가톨릭과 교황의 영향력을 뿌리뽑길 바랐다. 하지만 제임스 1세는 선대 메리 여왕 시대의 막장극을 자기 대에 되풀이해서 좋을 게 없다는 현실적인 판단 아래, 음모에 직접 가담한 자들의 처벌과 성공회의 입지 확대만을 꾀하는 정도로 마무리지으려 했다. 제임스 입장에선 가톨릭을 때려잡아봤자 이미 정치적으로 가톨릭 세력은 많이 남지 않았고 과격해진 청교도들의 입장만 대변하다간 왕이 바지저고리 신세로 전락할 여지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왕의 행동이 그동안의 미적지근한 태도에 대한 불만과 함께 스튜어트 왕조의 제임스 1세가 대륙의 30년 전쟁을 강건너 불구경했고,

특히 사위인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가 패망하는데도 소극적인데다가[8] 왕세자의 결혼을 프랑스와 스페인등 가톨릭 국가와 통혼하려 했고 실제로 왕세자였던 찰스 1세를 프랑스 공주와 결혼으로 야합하려는 모습으로만 보였기에 청교도들은 제임스 1세에 반발했고, 그때부터 청교도식 예배를 금하는 탄압이 시작되었다. 다만 제임스 1세는 청교도들만 탄압한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 가톨릭과 청교도들 사이에서 중용을 지킨다고 선언했고, "교황 추종자와 광신적 청교도들은 양극단의 멍청이들" 이라 훈계하며 배격하는 양비론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제임스 1세의 소망과는 달리 당시 영국의 나랏일은 청교도들의 협조없이는 진행하기 어려웠는데, 헨리 8세 시기 상공업을 기반으로 힘을 쌓아 납세자 중 상당수가 대륙에서 전래된 개혁신학을 받아들였고 이들이 법조계와 학계 정계에도 많이 진출한 결과 이 분야에서 청교도들의 세력이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청교도 법학자들은 왕권은 주님의 법 아래에서만 효력이 있다.[9]는 생각이 왕권신수설을 침해한다고 여긴 제임스 1세에겐 심히 불쾌했으나 청교도 법률가나 신학자들에겐 너무나도 당연한 생각이었다. 


반면 제임스 1세의 바람대로 중용을 지키는 충실한 신하인 영국 국교회(성공회의 전신)에 충성을 바치는 신도들은 많지 않았다. 통계적으로 영국 국교회(성공회) 신도수가 적은것이 아니라, 국교회와 왕의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그닥 관심이 없었던 현실주의자들이 많았다고 보면 된다. 따라서 개혁신학이란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청교도들의 불만은 숫적으로는 많지 않더라도, 제임스 1세와 그후 스튜어트 왕가 시절까지 왕당파에 대한 강력한 반대 세력이 된다.


이러한 배경속에 청교도 신분으로 박해를 피해 미국에 건너간 메이플라워 호의 사람들 역시 근왕적인 태도를 취했다.메이플라워 서약(Mayflower Compact)(영어가 귀찮다면 여기로)에서 "제임스의 충성스런 신하들..."이란 식으로 자신들은 왕권을 분쇄하는 반란 세력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왕권은 주님의 법 아래 있는 존재라는 것이지 왕권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는것. 그러나 이런 사상 역시도 당시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던 스튜어트 왕가 군주들의 기준으로는 충분히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보았다. 


천주교를 확실히 탄압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신대륙으로 떠나갔다고 주장이 있는데 불만도 있었겠지만 이미 청교도들은 이미 찰스 1세시절 국교회 켄테버리 대주교 윌리엄 로드의 종교 정책을 비판하면 종교재판소에 끌려가 코와 귀를 자르는 형벌을 받아서 원성이 높았고 1660년 왕정복고 시기 크롬웰 편을 든 청교도 독립파(회중파)들은 정치적 보복을 피해 네덜란드나 대륙으로 망명을 한데다가 애초에 이들은 영국 국교회내에서 개혁을 포기하고 새로운 교회를 설립하여 독립 하려는 취지라서 프랑스 공주가 모후이며 루이 14세가 사촌이고 처가마저 가톨릭 국가인 포르투갈 출신 왕비라 찰스 2세의 가톨릭 용인 정책이 불만만이 아니라 심각한 위협으로 느꼈다. 


청교도 주류는 영국 내에서는 소수파였음에도 상공계급(젠트리, 젠틀맨, 요먼)에서는 상당수를 차지했기에 의회에서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고, 이에 계속 영국에 잔류하며 반국왕운동을 주도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올리버 크롬웰의 철기군. 영국 스튜어트 왕가가 성공회를 유지하면서 가톨릭에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할 때 청교도는 지속적으로 내전에서 의회파를 지지했고, 청교도는 점차로 의회에서 유력해지고, 1642년에 일어난 청교도 혁명의 주체가 되어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로 하여금 정권 접수에 성공했다. 그러나 크롬웰이 정권을 잡자 청교도 다수파인 장로회파를 숙청하고, 소수파인 독립파(회중파) 청교도들만이 크롬웰의 통치에 참여하며 매우 불안정한 통치기반에서 고압적 통치를 자행하기 이른다. 통치시기 청교도 세력은 지나친 종교적 엄숙주의 강요[10] 에 답답해하는 국민적인 불만을 비롯해, 여러 곳에서 나오는 반대를 철권독재로 찍어눌렀고, 결국 독재자 크롬웰이 죽자마자 정치적으로 대대적인 비판을 받았다. 한편 청교도 혁명 당시 채택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현대 개혁교단(특히 영미권, 한국의 장로교)의 교리에 큰 영향을 주었다. 


결국 청교도의 시대는 1660년 찰스 2세의 복위로 막을 내리고, 대대적인 역공으로 많은 청교도 지도자들이 실각하고 청교도는 거의 소멸했다. 그들이 정치적으로 다시 복권의 단계를 밟은건 1688년 명예 혁명 때였으나, 이 시기부터는 이미 국교회(성공회) 우위의 상황이 유지되었기에 그 정치적 중요성은 상실되었다. 하지만 경제 및 문화적으로는 금욕, 근검, 절약 등으로 도리어 우위를 점유했다는 견해가 많은데, 여기서 가장 두드러지는 주장이 막스 베버가 주장한 청교도 자본주의다. 대표적으로 저서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있다.


한편 유럽 대륙의 네덜란드와 북독일 일부 지역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영국식 청교도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네덜란드의 경건주의 운동을 'Nadere Reformatie'(나데러 레포르마치, 2차 종교개혁)라고 부른다. 


3. 교육관[편집]


3.1. 칼뱅의 교육관[편집]


청교도적 입장에서 타락 전 세상을 가꾸라는 신의 명령(기독교계에서는 문화 명령 혹은 통치 헌장이라 불린다)을 잘 이행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바로 문화와 과학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이라 여겼다. 이러한 점은 중세 시대 가톨릭 수도 공동체 문화와 제세례파들과 대립되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이 17세기 과학혁명과 18세기 산업혁명이 일어나는데에 중요한 이바지를 했다. 

"오직 성경"을 강조하려면 모든 이가 글을 배워야 했고, 중세의. 우둔한 전례와 풍습에 비판적이려면 이성을 바탕으로 인문적 지식이 뒷받침이 되어야 하기 때문


주께서 우리가 물리학, 변증법, 수학과 같은 학문에서 불경건한 사람들의 활동과 수고로 도움 받기를 바라시니, 값없이 베푸시는 이 하나님의 선물을 무시해서 우리의 게으름 때문에 마땅한 형벌을 받지 않도록 이 도움을 잘 활용합시다.

장 칼뱅의 기독교강요 2권 2장 16절

청교도 교육관은 이성과 논리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래서 당대에는 이런 공격도 받았다고 한다. "저는 성경으로 더 충만할지 모르는 어떤 박식한 학자의 설교보다, 아무런 연구없이 그냥 성령의 활동으로 말하는 사람의 설교를 듣는 것이 더 좋습니다." [11] 이성과 믿음의 이분법적인 접근보다는 믿음이 이성을 우선하지만 이성 없이는 아무것도 볼 수 없음을 역설했다. 


3.2. 교육 시설[편집]


청교도들은 지식 교육에 있어 기독교 밖의 학문을 회피했던 제세례파와 달리 기독교 외의 학문들을 포용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기본적인 교육 방침은 성서에 기반한 신앙인을 교육하는 것이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성서 밖의 학문들을 경시하지도 않았다. 사실 이에 영향을 받아 세워진 교육 대학들은 지금도 미국에 많이 존재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하버드 대학교와 예일 대학교이다. 두 대학은 네덜란드에 망명한 분리주의파[12]였던 청교도 회중교회 출신들이 신대륙으로 건너가서 설립했다. 애초에 하버드 대학교는 목사 양성 학교였지만 시간을 거듭하며 형태가 계속적으로 변했다. 뉴잉글랜드의 첫열매를 보면 하버드 대학교를 세우던 때의 증언이 생생히 녹아있다.[13]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무 탈 없이 뉴잉글랜드로 데려다 주신 뒤로, 우리는 집을 짓고, 생필품을 마련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편한 장소를 세우고, 시민정부를 만들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우리가 간절히 바라고 구한 일 가운데 하나는 배움을 증진하고, 그것을 자손 대대로 물려주는 일이었습니다.

뉴잉글랜드의 첫 열매(New England's First Fruit(1643))

4. 정치관[편집]


아메리카에 사람들이 살게 된것은 스튜어트 왕가의 혐오스러운 폭정과 세속적이고 영적인 폭정에 대한 투쟁 덕분이었다. 

아메리카에서 정착을 계획하고, 실행하고, 완수하도록 이끌었던것은 종교뿐만 아니라 보편적 자유에 대한 사랑, 성직자, 위계조직, 전제적 지배자들에 대한 증오와 불안, 공포 때문이기도 했다.

존 애덤스의 『교회법과 봉건법에 관한 논문』(1765)

앞서 영국의 청교도들은 스튜어트 왕가와의 정치적 이념의 차이로 100여년간 극심한 갈등을 겪었다. 이들은 왕권신수설을 배격하고 칼뱅주의에 입각하여 통치자의 권력을 제한할것을 주장했고 이는 영국과 네덜란드를 거쳐 미국으로 이주한 청교도들에게도 이어진다.


그리하여 미국은 건국 이전부터 청교도들의 이주로 인구적 특성이 생겨났으며, 이런 주민들이 영국정부의 식민지 압제에 벗어나 국가를 구성했고 독립혁명의 이론적 기반은 칼뱅주의에 영향받은 공화주의와 존 로크의 사회계약설에 큰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독립헌장에서부터 "모든 사람은 평등하므로 자유롭다"고 선언했다.

프랑스 대혁명이 국가교회인 가톨릭에 반감을 많이 드러냈다면 미국 독립혁명은 청교도 윤리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현재 세속주의에서 주장하는대로 미국 건국이념은 종교와 무관하다는 주장은 건국과 독립전쟁 당시 상황을 잘 알지 못하는것으로[14] 현재 종교의 자유라는 개념이 세속화된 국가에서 어느 종교든지 믿어도 되거나 혹은 종교를 믿지않을 자유 라면 당시 17~18세기 청교도들에게 종교의 자유라면, 수정 헌법 1조에 명시 된대로 영국 국교회와 같은 국교를 두지않고, 국교와 같은 지위의 기독교내 특정종파를 인정하기 않겠다는 취지로 보는게 합당하다. 당시 유럽은 기독교 세계였고 종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 특정 교파냐 아니냐가 정치적 갈등의 주 양상이었기 때문이다.미국 청교도들의 주류는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 찰스 2세의 영국국교회(성공회) 일원화 정책에 반발하여 가장 극심한 탄압을 받던 회중교회나 재세례파들[15]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미국 청교도들의 특징이라면 오히려 현대 미국 자유주의의 원류를 옅볼수 있는데


국가교회 체제에 부정적이며 국가의 권력과 개입을 최소화한다.

개인의 신앙과 양심,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고 개인의 성경중심 신앙을 강조한다.

자유의지를 강조하기에[16] 개인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엄격하게 묻고, 따라서 금욕적인 윤리관을 갖는다.


이런 전통을 이어받아 개인주의, 제한된 권력, 작은 정부를 주장한다.


5. 기타[편집]


미국청교도들을 청교도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미국으로 건너간 이들은 영국국교회(성공회)에서 떨어져나올 것을 주장한 분리주의자들이고, 진짜 청교도들은 성공회 내부에 남아 저항을 계속한 이들이 자처한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메이플라워 같은 이들의 기록에는 청교도라는 표현이 전혀 없다.


사실 잉글랜드의 청교도(칼뱅주의자)들은 주교제 교회인 국교회 내부에 머물거나 회중제를 채택한 개혁교회를 설립하거나 아니면 아예 재세례파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침례회로 옮겨가거나 아니면 존 웨슬리가 감리회를 창설할때 아예 감리회로 가는 경우가 많았고 이들 중 상당수가 신대륙으로 이주했다. 사실 '청교도'라고 흔히 칭하는 사람들 중 이런 경우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보통 청교도들을 영국 국교회(훗날의 성공회)와는 뚜렷하게 구분지어서 생각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은데, 정작 국교회 안에 머무른 칼뱅주의자들도 적지 않다. 지금도 영국 국교회(성공회)에는 저교회파라는 이들의 영향력을 강하게 받은 분파가 있다.


대표적인 청교도 문학으로는 존 밀턴의 <실낙원(失樂園)>, 존 번연의 <천로역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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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오성론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人間悟性論 ]

요약 영국의 철학자 J.로크(1632~1704)의 주저(主著).

4권. 1690년 간행. 서론(序論) 및 제 1권에서는 인간학적인 인식론적 시점(視點)을 설정하고, 우리들 마음속에는 천성적인 원리가 발견되지 않는다고 하여 형이상학적 의론을 배격하였다. 제2권에서는 오성의 직접대상은 관념이고, 관념은 모든 경험에서 유래한다고 하였으며, 관념을 단순관념과 복합관념으로 나누었다. 이에 따라 종래 지배적이었던 신학적 형이상학의 기본개념을 이루던 실체개념은, 인간의식에 의하여 지향되는 대상개념으로 전화(轉化)하게 되었다.


제3권은 언어를 논하고, 언어를 관념의 외적 기호(外的記號)라고 생각하였다. 제4권에서는 지식을 관념의 일치 ·불일치의 지각(知覺)으로서 논하였으며, 직각적(直覺的) 지식, 논증적 지식, 감각적 지식을 음미하였고, 나아가 개연성(蓋然性)을 벗어나지 않은 판단에 대하여 논하였다. 더욱이 이 저서를 축조적(逐條的)으로 비판한 것에는 독일의 철학자 G.W.F.라이프니츠의 《인간오성 신론(新論)》(1704)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인간오성론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人間悟性論]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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