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천하개지미지위미  사악이  개지선지위선  사불선이

斯(사)이, 천할/惡(악)악할,나쁘다,더럽다,추하다,못생기다,(오)미워할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고유무상생 난이상성  장단상교 고하상경  음성상화  전후상수

較(교)견줄,비교할,(각)차이/傾(경)기울/隨(수)따를,(타)게으를


是以, 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弗居. 

시이  성인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만물작언이불사  생이불유  위이불시  공성이불거

辭(사)말씀/恃(시)믿을,시어머니,의지하다, 자부하다


夫唯弗居, 是以不去.

부유불거  시이불거

夫(fú)저.그.이./그(사람)/대저,무릇


- 해석 : 천하가 모두 알듯 미를 위한 미는, 추악하다.

천하가 모두 알듯 선을 위한 선은. 선하지 못하다.

그리하여 있고 없음은 서로 살리고, 어렵고 쉬움은 서로 이루며, 길고 짧음은 서로 드러내고, 높고 낮음은 서로 기대며, 노래와 소리는 서로 어울리고,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그러므로 성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그 안에 머물고, 말없이 가르친다.

모든 것을 만들면서도 말하지 않고, 모든 것이 생겨나도 가지지 않고,

모든 것을 위하면서도 자랑하지 않고, 모든 것을 이루고도 머물지 않는다.

머무르지 않으니, 떠나지도 않는다.



- 참조 : 하늘아래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운 것이 아름답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추한 것이다. 하늘아래 사람들이 모두 선한 것이 선하다고만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선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있음과 없음은 서로 생하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루며, 김과 짧음은 서로 겨루며, 높음과 낮음은 서로 기울며, 노래와 소리는 서로 어울리며,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그러하므로 성인은 함이 없음(무위)의 일에 처하고, 말이 없음(무언)의 가르침을 행한다. 만물은 스스로 자라나는데 성인은 내가 그를 자라게 한다고 간섭함이 없고 잘 생성시키면서도 그 생성의 열매를 소유함이 없고, 잘 되어가도록 하면서도 그것에 기대지 않는다. 공이 이루어져도 그 공속에 살지 않는다. 대저 오로지 그 속에 살지 아니하니 영원히 살리로다.


*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아름다움(美)의 반대는 오(惡,추함)이다. 아름다움(美)의 문제는 선함(善)이라는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 선함의 반대는 선하지 않음 (不善)이다. 선이란 미의 연장개념일 뿐이다. 선은 곧 미라고 말해도 상관이 없다. 선은 인간에게 있어서 ‘좋음’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다. 미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 나아가 좋아하는 바의 것이다.


* 언어야말로 도를 표현하는 가장 불완전한 도구임을 자각하여야 하는 것이다. 노자의 성인은 백성의 소리, 도의 지혜의 소리를 잘 듣고 구현하는 사람인 것이다. 성인은 반드시 함이 없음의 일에 처하고, 말이 없음의 가르침을 행하여야 하는 것이다.


* 무위(無爲,함이 없음) : 여기서 위는 유위적이고 조작적인, 도의 흐름에 배치되는 사특한 행위를 말한다. 자기는 함이 없이 남으로 하여금 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며, 소리 없는 실천의 가르침을 실천할 뿐이다. 생명은 하나의 과정이다. 그러므로 생명은 자기의 공(功)이 이루어져도 그 공 속에 거주(居)할 수 없다. 거는 집착이다. 즉, 공에 집착함이 없다.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영원할 수 있는 것이다.


- 준이해석 : 천하가 모두 미는 미를 위한 것이라 알고 있으나 이는 이미 추하다. 모두 선은 선을 위한 것이라 알지만 이는 이미 불선이다. 고로 유무(있고 없음)는 서로를 낳고, 난이(어렵고 쉬움)는 서로가 되고, 장단(길고 짧음)은 서로 비교가 되고, 고하(높고 낮음)는 서로 기울고, 음성(소리와 음악)은 서로 화하고, 전후(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이와 같이 성인은 무위의 일에 처하고, 불언의 가르침을 행하고, 만물을 만드나 이로써 말을 하지 않고, 생성시키나 가지지 않고, 위하지만 기대지 않고, 공을 이루나 이에 머물지 않고, 대저 이는 가지 않음으로서 오직 머무르지 않는다. 


- 준이생각 : 요즘 들어 부쩍 이 세상 만물은 오로지 시간과 공간의 문제일 뿐이란 생각을 자주 한다. 젊음도 늙음도 그리고 죽음도, 무엇이 빠르고 느린 것도, 하루살이와 150년을 훌쩍 넘게 사는 거북이에게도 항상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인 것들... 지금 도처에 사용 되는 유리만 하더라고 다른 시간의 차원에서 바라보면 그것은 중력에 흘러 내리는 액체처럼 보일수도 있으리라, 그렇게 보여 지는 시간의 흐름이나 영원 불변의 고체처럼 보이는 인간의 시간의 흐름이 어느 것이 더 옳은지 그른지... 또는 맞고 틀린지, 아니면 바람직하고 바람직 하지 않은지....이러한 가치도 결국은 시간과 공간의 상대적인 시각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들...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결국은 추한 것....이것을 다른 시간과 다른 공간의 차원으로 생각한다면 이해 가능할 듯 싶다. 선이라는 것도, 유무, 고하,장단...하물며 의미를 찾기 힘든 음과 유의미한 성(음성이나 음악소리)마저도 이러한 시점(시간과 공간)을 달리 주면 결국은 상대적인 것이고 결국은 하나 이면서 또는 다른 것이면서도 결국은 그 구별 조차 의미 없어지는 .... 횡설 수설이 될려고 한다. 좀더 생각해 보자.


01.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其妙,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  무명천지지시  유명만물지모  고상무욕이관기묘


常有欲以觀 其徼. 此兩者同出, 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상유욕이관 기요  차양자동출  이이명  동위지현  현지우현  중묘지문

徼(요)돌,순찰하다,구하다,요구하다,막다,훔치다/此(차)이,이에/衆(중)무리,많은 물건



- 참고자료 : 도(道)라고 할 수 있는 도는 널리 알려진 도가 아니고, 명 (名)이라 할 수 있는 명도 널리 알려진 명이 아니다. 천지의 시초에는 명(名)이란 것이 없었고, 명(名)이 있으면서 만물이 생겼다. 그러므로 욕심이 없으면 그 것의 묘 (妙)함을 보고 욕심을 가지면 그 것의 움직임 (徼)을 보게 된다. 이 둘은 같은 곳에서 나왔고, 이름을 달리 하지만, 모두 그윽하다 할만하다. 그윽하고 또 그윽한 것, 그 것은 모든 묘(妙)의 문이다.


- 참조 :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지우면 그것은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을 천지의 처음이라 하고, 이름이 있는 것을 만물의 어미라 한다. 그러므로 늘 욕심이 없으면 그 묘함을 보고, 늘 욕심이 있으면 그 가장자리만 본다. 그런데 이 둘은 같은 것이다. 사람의 앎으로 나와 이름을 달리 했을 뿐이다. 그 같은 것을 일컬어 가믈타고 한다. 가믈고 또 가믈토다 ! 모든 묘함이 이 문에서 나오지 않는가 !


* 불변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원이란 “변화의 지속”일 뿐이다. 시시각각 변하지 않을 수 없는 도를 변하지 않는 우리의 생각 속에 집어넣었다. 그렇게 생각 속에 집어넣어 져 버린 도는 항상 그러한 실제의 도일 수 없다는 것이다.



- 준이해석 : 도는 도일수 있으나 항상 도이지는 않고, 명은 명이나 항상 명인 것은 아니다. 천지의 시작엔 명이 없고, 만물의 어미에겐 명이 있다, 고로 항상 욕심을 부리지 않고 그 묘함을 보고, 항상 욕심을 갖고 그 돌아감을 보면 양자(유명, 무명 등등)는 하나에서 나나 그 명은 다르다.  그것을 검다고 함께 말하고 그 검음에 더 검음이 있어니 만사의 오묘함의 문이다.


- 준이생각 : 도덕경. 그 풀이에 주석에 설명에 엄청난 수의 자료가 존재 하겠고 물론 그 모두 나름의 의미를 지니고 있겠지만, 그 해석이 수 천 년 동안 덧대진 관계로 어쩌면 글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너무 벗어난 감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그걸 다 읽어 보고 비교하는게 더 힘듦)에 그냥 나의 짧은 감으로 직역에 충실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참조는 주로 김용옥선생이 쓴 [노자와 21세기, 통나무]를 기본으로 하려고 한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