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28 – 군주론(II principe) /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 1469-1527)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분열된 조국을 위해 여우와 사자라는 군주의 두 가지 역활을 강조하는 정치 기술의 서, 즉 르네상스의 중심지로서 번영했던 중부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피렌체가 몰락하기 시작한 시대적 위기에 대응하여, 이탈리아의 구원과 갱신을 담당할 수 있는 새로운 유형의 국가를 창건할 군주에게 요구되는 정치기술을 논하고 있다. 이 책은 베일 속에 가려져 있었던 인간의 정치적 본질을 드러냄으로써, 정치를 완전히  세속적인 세계이해에 기초하여 파악한 최초의 근대적인 정치이론서로서 평가된다. 


a. 생애와 작품활동

 흔히 약육강식의 폭군지상주의로 인식되어 있는 마키아벨리, 그는 진정 권모술수의 대명사인가, 아니면 철저한 현실주의자인가? 마키아벨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과 동시대의 인물로, 르네상스 운동의 절정기인 1469년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태어난 외교관, 정치학자. 역사학자이다. 당시 이탈리아는 내부적으로 밀라노 공화국, 피렌체 공화국, 베네치아 공화국, 교황령 국가. 나폴리 군주국 등의 도시국가로 분열되어 있었고, 외부적으로는 프랑스와 독일의 침략으로 혼란한 상황이었다, 그의 젊은 시절 피렌체는 메디치 가문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지도자인 로렌초가 죽자 1494년 메디치 일가는 추방되고 피렌체는 공화제가 되었다.  그는 피렌체 공화국의 외교관이 되어 프랑스, 독일 등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각국의 권력자와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1512년 피렌체 공화국은 무너지고 메디치가가 복귀하자 그는 곧바로 사직 당했다. 그러자 그는 피렌체의 교외에서 그가 지난날 만났던 각국의 지도자들의 정치행태와 조국이 처한 정치상황을 관조하며, 14년동안 군주론 등의 저술작업에 몰두하다. 58세로 세상을 떠났다. 

 주요작품으로 군주론에서는 주권자로서의 자격와 행동원칙, 리비우스론에서는 국가의 자유와 독립보전, 전술에서는 군대와 병사, 피렌체의 흥성과 메디치가 사이의 관계를 밝힌 피렌체사 자국어에 대한 찬사와 존경을 표현한 언어에 관한 대화, 당시 사회의 모순과 비정상을 풍자한 황금당나귀, 여자에 대한 무시와 경멸을 표한한 대악마 벨화골 이야기 등이 있다. 그러나 그의 문학작품 중 최대걸작은 풍자희극  만드라골라 로, 보카치오에 의해 나타난 르레상스 기의 사회적 타락상을 그의 예리한 문학적 재능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탈리아 연극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b. 시대적 상황과 마키아벨리즘

 마키아벨리와 그의 저서 군주론 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처절하고 혼란스러웠던 이탈리아 반도의 현실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시대적 상황, 피렌체와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싹튼 르네상스시대의 이탈리아를 전 유럽의 (화원)처럼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은 정반대이다. 정치적으로는 갈등과 혼란의 연속이 19세기까지 계속되었다. 그가 생존했던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외부적으로는 프랑스, 독일이 각각 통일국가 형성을 위해 발전하는 것과는 달리, 로마제국 멸망 후부터 계속된 내부적 분열이 더욱 악화되어 프랑스와 독일의 침략이 노골화되고, 특히 십자군 전쟁 이후 발생한 여러 도시국가들은 혼란을 더욱 가증 시켰다. 르네상스의 중심지인 피렌체도 메디치가 의 독재시대로, 그가 태어날 당시에는 메디치의 손자인 로렌초가 전제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마키아벨리가 태어난 1496년은 또한 프랑스의 샤를르 8세가 분열상태의 무력한 이탈리아를 짓밟은 해였다.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태어난 마키아벨리는 그의 천재성을 조국 이탈리아를 구원하는 방향으로 발휘했다 그는 조국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은 정치적 해결에 있다고 보고, 그의 독창적인 정치사상을 구상하기 시작한다.

즉, 정치를 윤리, 도덕과 분리시켜 객관적, 과학적 기초 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하나의 통치기술로 본 것이다. 그 당시 그는 피렌체의 외교사절로서 로렌초의 사망, 프랑스 침입, 로렌초를 계승한 피에로 추방, 예언자 사보라롤라의 등장과 화형, 국가간의 무자비한 투쟁과 비윤리적인 군주를 목격하며 상호화해를 위해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바로 그 시기에 이탈리아 정계에 혜성처럼 나타나 군주론의 주인공이 된 체사레 보르지아가 부친인 교황 알렉산더와 프랑스를 업고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을 목표로 세력을 확대해나갔는데, 이에 크게 당황한 피렌체 측에서는 마키아벨리를 보르지아에게 보내 수교를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마키아벨리는 보르지아와 만남을 통해 그의 인격, 목적달성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단호한 자세, 대담성, 세심함, 행동에 있어서의 잔인함을 높이 평가하였다.  군주론 에 나타난 그의 정치적 사상은 이미 이때 확립되었던 것 같다. 여기에서 그는 보르지아 개인의 인간성이나 도덕적 행위를 정치적인 것과는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처리하는 특이한 정치철학을 구체화시켰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조국통일의 등불로 기대를 걸었던 보르지아도 1503년 부친인 교황이 별세하자 정치력을 잃어, 마키아벨리의 꿈은 수포로 돌아간다. 1512년 피렌체는 또다시 혁명이 일어나 피렌체는 다시 

메디치가 의 전제시대로 들어가고, 마키아벨리는 구정권에 재직하였다는 이유로 1년간 억류생활을 한다. 그후 다시 공직에 복귀되나 다시 오해를 받아 재투옥된다. 석방된 후 일체의 속세를 멀리하고 산카시노의 시골에서 여생을 보내면서 저작생활에 몰두한다.  

 마키아벨리즘, 근대 정치사상사의 고전적 저작 중에서 군주론 만큼 논의를 불러일으킨 것은 없다. 급기야 마키아벨리즘 이란 새로운 정치용어와 사상까지 생겨났는데, 과연 이것이 마키아벨리의 의도인지, 아니면 후세인들이 자신의 필요에 의해 아전인수격으로 왜곡한 것인지 문제제기가 불가피하다. 본서가 1532년 출판되자, 맨 먼저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종교계였다, 교황의 무능과 탐욕을 비판한 구절이 문제가 되어 교황옹호파인 예수회를 중심으로 군주론 소각 등 전면적인 탄압이 시작되어, 급기야  금서령 이 내려졌다. 이 같은 감정적인 차원의 대응과는 달리 학문적인 비판도 제기 되었다. 프랑스의 법학자 이노센트 젠틸레는 군주론 에 담긴 정치사상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여러가지 역사적 사실의 오류를 열거하고 자기의 정치사상을 표명하였다. 그가 바로 군주론의 본래 의도를 왜곡해서 마키아벨리즘 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그래서 마키아벨리의 사상은 자기의 권력확대를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술로 둔갑하여, 이후 루이 14세 등의 독재자들에게는 복음서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면 과연 마키아벨리가 울분을 머금고 은둔 생활에서 집필한 군주론 의 집필동기는 무엇이며,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군주상 은 어떤 것인가. 그는 이탈리아의 통일을 위해서는 먼저 내부적인 단결과 외세의 격퇴가 필요하다고 보고, 그를 위해 강력한 군대와 폭군적인 전제군주제가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이 새로운 군주와 그가 영도하는 국가는 과연 어떤 정책으로 이탈리아를 구제할 것인가. 이러한 논점을 그의 다년간 경험과 학식, 그리고 천재성으로 밝혀나간 것이 군주론 이다. 그는 강력한 정치체제를 위해 위대한 군주와 강력한 군대, 풍부한 재정이 필수적이며, 방법론상으로 군주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 어떤 수단도 허용되며 군주의 행동에는 도덕적 요소가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한 군주는 항상 국민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으면 군주가 역경에 처해 있을 때 아무런 자원도 갖고 있지 않는 것이 된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군주는 먼저 냉철한 심사숙고형이어야 하며 조국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종교나 도덕을 초월하여 지와 용으로 다스릴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선정을 위해 국민의 마음을 항시 파악하고, 이를 이용 또한 만족시킬 수 있는 총명함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군주의 행동요강이 바로 군주론 에서 그가 밝히고자 한 핵심사항이다. 이처럼 이탈리아의 통일을 위해 강력한 국가가 필요하며. 이것은 전재군주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일시적 수단방법이 그의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정치적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방법, 권모술수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마키아벨리즘으로 불리게 된 것은 그이 저서 군주론 에서 그가 이러한 대담한 주장을 하면서 터다. 그래서 마키아벨리의 인생은 그의 사후에 시작되었다. 는 말이 나왔다.


c. 군주론의 내용

 이 책의 전체적인 구성은 잘 정리되어 있으며 저자는 이탈리아 산문의 거장답게 아름다운 문체로 각 장을 논리적으로 서술하고 있어 이해하기 쉬운 드문 정치철학서이다.  군주론 의 중심사상은 군주란 무엇인가, 그는 어떻게 권력을 획득하였으며 그것을 어떻게 유지하는가. 그가 권력을 잃었다면 그 원인은 어디 있는가에 대한 물음과 답이다.  군주론은 메디치 가문에 바치는 내용의 서문과 전 26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 구성을 보면 1-11장: 각종의 군주국, 특히 신흥군주국의 통치방법, 12-14장: 군주의 군대와의 관계 15-25장: 군주가 추구해야 할 행위의 준칙 26장: 군중에게 호소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본서의 하이라이트는 악명 놓은 18장(군주는 어떻게 신의를 지키는가)으로 마키아벨리즘의 정수가 나타나고 있는데, 이하에서는 이 부분을 중점적으로 살펴본다.

 제 16장 관대함과 인색함에 대하여, 우선 군주는 밑에 있는 사람들을 잘 다스리기 위해 관대해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 모든 사람에게 관대해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관대하려다 보면 무능한 군주가 될 가능성이 높고, 오히려 인색하다는 평판을 듣는 군주가 더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음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군대에게 재산이나 약탈을 나눠줄

때 군주는 관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군대가 그를 배신할 가능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제 17장 잔인함과 인자함에 대하여, 사랑 받는 것과 두려움 받는 것 중 어느 편이 나은가, 그 대답은 공포와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만일 택일하려면 공포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최소한 미움은 받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래 이기주의적이 성격이 있기 때문에, 사랑에 의해 어떤 목적을 달성하면 곧 저버리게 되며, 이에 한해 공포는 처벌의 두려움으로 유지하기 때문에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제 18장 군주는 어떻게 신의를 지킬 것인가, 군주는 신의를 지키는 미덕을 갖추어야 하나, 어떤 경우에나 신의를 지키려다 보면 군주가 곤란에 빠질 수도 있으므로 상황에 따라 처신하여야 한다, 특히 새로운 군주는 운명의 흐름과 변화에 따라서 여우의 지혜와 사자의 위엄을 갖추어야 한다. 여우는 이리에게 공격 당할 수 있고, 사자는 인간이 만든 올가미에 빠질 염려가 있기 때문에, 이리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사자의 위엄 과 올가미를 발견할 수 있는 여우의 지혜를 함께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가 묘사하는 군주의 모습은 반인반수가 되어 인간과 짐승을 함께 부릴 수 있어야 하며, 그 이상적인 모습을 여우와 사자의 두 역할을 하는 군주의 모습에서 찾았다. 또한 군주의 신뢰성 유지방법에 대해 사려 깊은 군주는 자기의 이익에 위배하면서까지 신뢰를 유지하려고 할 필요는 없다, 또 약속을 지킬 수 없는 경우 설사 정당한 이유가 있더라고 그 변명을 하는 군주는 실패한다. 인간은 극히 단순하여 현재의 필요한 것에 늘 대응하고자 한다. 남을 속이는 자는 속아 넘어가는 상대를 찾게 마련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견해의 자연스런 결과로 군주에 대해 타인과의 약속은 언제나 회의적이어야 한다 고 충고하고 있다.

제 19장 경멸과 증오를 피하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군주는 신하나 백성으로부터 존경 받지는 못하더라도, 경멸 받지는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군주에 대해 군대는 강한 인상과 능력을 요구하고 백성들은 온화함과 관대함을 기대한다. 이 양쪽의 요구에 적절하게 대응하여 최소한 경멸 받지 않도록 해야 하고, 특히 백성들로부터 미움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제 20장 군주가 구축하는 요새 및 그 비슷한 것들은 과연 유익한가. 군주는 백성에게 무기를 줄 때 잘 생각해서 무장시켜야 한다. 특히 새로운 영토를 차지했을 때, 그곳 원주민들에게는 무기를 주어서는 안된다. 완전히 자기 편이라고 믿어지는 원주민들에게 무기를 줄수는 있지만 이때도 신중하여야 한다.

제 21장 명성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군주가 명성을 얻기 위해서는 위대한 사업과 싸움에서의 용맹스러움을 보여주어야 한다. 위대한 사업은 영토를 늘리는 것을 말하고, 전쟁에서는 승리하는 것도 이 포함된다. 다시 말하면 영토를 늘리고 지키는 과정에서 용맹을 떨치면 명성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또 군주는 위엄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군주국 안에 있는 단체들을 잘 장악해야 하고, 외국과도 적절한 동맹을 맺어서 국가를 지켜야 한다.

제 22장 군주의 측근대신,

제 23장 간신을 어떻게 피할것인가, 군주가 유의해야 할 일은 자기 밑의 대신들을 잘 뽑아 쓰는 일이다. 군주는 다른 사람이 행동하거나 말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할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일단 군주가 그 판단력을 가지고 선택한 신하에 대해서는 존중해주고 명예와 부를 주어 자신을 계속 따르게 해야하고, 다른 것들을 욕심내지 않도록 여건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선택할 때는 그 사람이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인지 아닌지에 대해 깊이 고려해야 한다. 또 주위에 몇몇 지혜 있는 사람들을 두어 바른 말을 할 수 있게 하되, 모든 백성과 대신들이 바른 말을 하게 해서는 군주의 위엄이 떨어지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제 24장 이탈리아 군주들은 왜 영토를 잃었는가. 나라를 잃는 이유로는 운명적인 것도 있지만, 대부분의 군주가 무능했기 때문임을 강조한다. 

제 25장 운명은 인간사에 어느 정도 힘을 가졌으며, 그 운명에 어떻게 대항할 것인가, 운명은 저항력이 없을 때에만 큰 힘을 발휘하고 제방이나 축대를 잘 쌓아놓으면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운명의 신은 여자이기 때문에 부드러운 것보다는 오히려 맹렬하게 대응하는 것이 더 좋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운명은 내 친구 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제 26장 야만인들로부터 이탈리아 해방을 위한 권고, 결론적으로 강한 지도자가 와서 이탈리아인 만으로 구성된 강한 군대를 조직하여, 야만인에게 공격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해방의 길임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끝맺고 있다.

 미덕은 폭력에 대항하여 일어난다/ 싸우면 곧 이기리라/ 이탈리아 인의 마음속에서 / 아직도 그 옛날의 용맹이 사라지지 않았거늘.  


d. 정치학적 의의와 그 영향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마키아벨리는 군주론 이란 작은 책에서 분열된 조국의 통일을 희구하면서 강력한 군주에 의한 전제정치를 주장하여, 군주권의 우위에 의한 통치자의 지배원리를 강조하였다. 그는 역사적 수난과 정치적 암흑기를 살아가면서, 로마 제국적인 유럽질서의 회복을 유일한 희망으로 생각하면서 이 최대선을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바쳐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다. 즉 그는 법에 의한 유럽사회의 회복과, 이를 위해 잠시나마 일단 무정부상태를 수습할 수 있는 인물과 수단으로 체사레 보르지아와 그의 잔인무도한 정치수단과 방법을 빌렸을 뿐, 그의 최종목적을 묘사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과정에서 저자는 인간성에 대한 존경보다는 인간의 심리적인 약점을 사정없이 폭로하면서 새로운 정치의 기술을 논하고 있는데 이러한 점에 소위 마키아벨리즘의 본질이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근대 이후 그의 영향은 지속적으로 미쳤다. 17세기 영국의 정치 철학자 홉스의 리바이어던에 영향을 미쳤고, 독재자들이 애독하는 핸드북이기도 했다. 무솔리니, 히틀러, 스탈린 등이 애독한 것으로 전해지며, 특히 나폴레옹은 밤마다 베개 밑에 군주론 을 놓고 잤다고 알려져 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반 마키아벨리즘(1740)을 써서 마키아벨리즘의 비인도성을 비판했지만. 실제로는 대왕 자신도 마키아베리즘을 구사했다. 한동안 마키아벨리는 악마의 화신처럼 증오를 받기도 했으나. 이제 정치사상가 중에서 마키아벨리를 그렇게 격렬하게 비난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늘날 마키아벨리즘은 당시 이탈리아의 정치적 상황에서 생긴 필요악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어느 역사적 사실은 그 사실이 이루어진 시대의 역사적 환경속에서만 진실하게 이해 될 수 있다 - 19세기 독일의 역사가 랑케

인류가 타락하지만 않았어도 이 모든 기술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 마키아 벨리



C27 – 고백록(Confessions) /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 - 430)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루소의 고백록, 톨스토이의 참회록,과 함께 서양의 3대 참회록으로 불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이 고백록은 그의 젊은 날의 지적 방황과 종교적 모색을 기록학 책이다. 즉 고백록은 중세 유럽이 기독교적인 사상의 틀을 갖추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그 자신의 자서전이자, 한 인간의 내면에 일어나는 어둠과 빛, 선과 악, 육체와 영혼의 처절한 갈등이 표현이라 할 수 있다.한 구도자가 보여주는 영계와의 대화가 오늘에 사는 우리의 메마른 영혼에 깊은 울림을 줄것이다


a. 생애와 작품활동

 게르만 민족의 이동이 시작된 로마 말기의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교부철학의 집대성자로 스토아 학파의 토마스 아퀴나스와 함께 중세기독교 최대의 사상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의 생애는 그의 저서  고백록 속에 잘나타나 있다. 그는 당시 로마의 속국이던 북아프리카의 루미디아 지금의 알제리에서 세금징수관이자 마니교 신자인 아버지와 독실한 크리스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시, 암송, 웅변 등에 소질을 보이기도했고, 독학으로 라틴문학, 특히 베르길리우스를 애독했으며 수사학에도 뛰어났다. 청년시절에는 타락한 생활을 하기도 했으며 19세 때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 를 읽고 철학에 눈을 떴다. 그리하여 참지혜를 구하기 시작하는 과정에서 크리스트 교에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성서의 소박한 문체나 카톨릭 교회의 보수성에 만족하지 못하여, 빛과 어둠이라는 이원론을 주장하는 마니교의 합리주의에 이끌렸다. 그뒤 9년 이상 마니교를 접하면서 마니교적인 미학서 미와 적합을 썼다. 그러나 383년 로마에서 신플라톤주의 학파를 접하고 마니교를 결별했으며, 이듬해에는 밀라노에서 수사학 교수가 되었다. 386년 플로티노스 등의 신플라톤주의 책을 읽고 불변의 빛을 보는 신비적 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때 진리의 존재를 확신하게 되었다. 또 밀라노 주교인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듣고

감동하여, 그해에 크리스트 교로 개종하였다. 개종 후 교수직을 그만두고 밀라노 교외의 산장에서 토론과 명상을 하면서 독어론 등 철학적 대화편을 저술하였다. 거기서 성서의 시편 제 4편을 읽고 받은 감동은 그의 정신에 큰 전환을 가져왔다. 388년 고향으로 돌아와 새로운 친구들과 수도원 생활을 하는 한편, 391년 히포의 주교 발레리우스의 요청에 따라 사제가 되었고, 396년 발레리우스가 죽자 히포 주교가

되었다. 민중들과의 접촉을 통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색은 성서의 문구 속에서 신의 말을 찾아내어 전달하려고 하는 해석학적인 방법을 취함으로써 더욱 깊어져 갔다. 397년 부터 고백록을 쓰기 시작하여 3년만에 끝내고, 400년경부터는  삼위일체론 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이어 426년에는  신국론 을 완성했다. 그는 34년간이나 주교직을 지켜나가면서 크리스트 교 사상의 형성에도 큰 역활을 하였다. 430년 반달족이 히포를 공격하였는데 그로부터 3개월 후 76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으나, 반달족은 3개월동안 히포를 유린하면서도 아우구스티누스의 도서관과 성당은 손대지 않았다 한다.      


b. 교부철학과 스콜라 철학

 흔히 중세를 암흑의 시대라 한다. 왜냐하면 신학이 중세의 학문과 사상을 압도하여 철학이나 자연과학 등 기타 학문은 그 시녀역활에 만족해야 했기 때문이다. 중세신학의 발전의 주체세력은 파리 대학을 중심으로 한 대학교수들이었으므로, 신학은 학교:스콜라,사람들의 학문:스콜라티스즘이란 명칭이 붙었다. 중세신학의 발전은 크게 2분될 수 있는데 1. 예수사후 8세기까지 신부들에 의해 발전된 교부철학과 2. 9세기에서 15세기까지 발전된 스콜라 철학을 들수 있다. 

 교부철학, 교부철학은 주로 크리스트 교의 정통교리를 하나로 체계화하여 교회의 권위를 확립하고자 하는 아우구스티누스 등의 교부들에 의해 발전되었는데, 그는 크리스트 교의 신앙을 그리스의 이성으로 설명하기 위해 초월적인 이데아 사상을 강조한 플라톤주의를 받아들였다.

 나는 믿기 위해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알기 위해 믿는다 는 말로써 신앙과 이성의 타협을 시도하였다. 그의 크리스트 교 사상이 잘 방영된 신국론에서 그는 신국, 즉 내세는 지상의 세속적 역사과정 속에 투영된 것으로서, 인간역사의 과정이 신의 섭리의 실현이라고 주장 하였다. 그는 또 인간은 카톨릭 교회를 통해서 신국에 들어갈 수 있으며 교회 는 인간구원을 위한 유일한 기관이라고 생각했다. 

 스콜라 철학, 스톨라 철학은 교회의 교리철학으로서 중세철학과 학문의 절정을 이룬 중세의 종합적 세계관이다. 대표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플라톤보다 아리스토테렐스에 더 가까운 수정된 실제론을 주장하여, 보편적 존재는 영원불변의 실재성을 갖지만 본질로서 개체 안에 존재한다고 주장하여 교회가 수용할 수 있는 최종적인 공식을 만들어냈다. 그는 대표적 저술인 신학대전에서 스콜라 철학의 정수를 제시하였는데, 1. 자기를 부정하는 학설을 제시하고 2. 자신이 부정하고자 하는 학설을 제시하며 3. 자기자신의 의견을 진술하고 4. 자기자신이 의존하는 논거를 제시하며 5. 최초에 지적한 이론을 논박하는 독특한 논리전개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였다. 그는 관찰된 사실에 입각하지 않는 순수한 합리적인 인간사고의 역사에 있어서 최고의 지적 성취를 이루었다.


c. 고백록의 내용 

 저자가 46세때 지은 크리스트 교로 개종하고 영세를 받은 지 12년 만에 과거의 생활을 반성하고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한편, 외롭고 선한 신을 찬미하는 내용이다. 전 13권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은 1권에서 9권까지는 주로 어머니에 관한 내용이고, 10권은 자기반성을 담은 자서전적인 부분이며, 11-13권까지는 창세기 앞부분의 뜻을 밝히고 자기의 종교적 입장을 선명히 나타낸다. 제 1권은 처음에 신을 찬미하여 하나님 안에서 쉬기까지는 평안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영원한 평안을 구하겠다는 의도를 밝힌 뒤 유년, 소년기에 저지른 죄를 상기하여 화를 낸 일, 시샘한 일 학교에 들어가서도 노는데만 열중하여 학업에 태만했던 일들을 자책한다. 제 2권은 청년기에 들어가서 사랑하고 사랑 받기만을 좋아하여 방탕한 생활에 몸을 맡긴 일을 후회한다. 제 3권에서는 카르타고로 유학하여 뛰어난 성적을 올리면서도 도시의 유혹에 빠져 연극에 열중하고 또한 불손한 연애관계를 가졌으며, 19세때에는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 를 읽고 철학적 욕구가 생겼으나 성서문체의 간소함과 철학적 내용의 빈약함에 실망한 나머지 당시 유행하던 마니교에 빠졌음을 고백한다. 제 4권은 그로부터 9년 동안이나 마니교의 미혹에 빠져 있었고, 또한 점성술을 믿었으나 지기가 마니교로 유혹한 친구가 죽기 직전에 회개한 것을 보고 크게 감동했음을 말한다. 제 5 권은 기대하고 있던 마니교의 유명한 학자 파우스투스를 만나자 실망하고, 소위 마니교의 합리적 세계관이라는 것도 실은 미숙한 청년의 상상을 만족시키는 거짓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고 열의를 잃게 되었다.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고 카르타고에서 로마로 건너가고, 다시 밀라노에서 변론술 교사가 되었으며, 주교인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듣고 사교를 버리게 되었다고 말한다. 제 6권은

암부로시우스의 가르침을 따라 점점 카톨릭 신앙을 이해하게 됨에 따라, 바른 생활을 하겠다는 결심을 하면서도 다시 예전의 죄에 빠져서 끊임없이 죽음과 심판의 공포에 떨고 있었음을 탄식한다. 제 7권은 성년기로 들어가. 마니교의 미망에서 해방되고서도 여전히 신을 형체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자유의지가 죄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카톨릭의 가르침을 전면적으로 인정하지 못했다. 또한 신플라톤 학파의 책을 읽고 비형체적인 것을 보는 눈이 열려서, 로고스의 신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겸허함을 몰랐고, 그리스도가 신과 인간의 중개자임을 깨닫지 못하다가 성서, 특히 바울의 편지을 읽고 의문이 일소되었음을 말한다. 제 8권은 이미 지적으로는 해결을 보았으면서도 낡은 습관에 사로잡혀서 쉽사리 결심하지 못했으나 모든 것을 버리고 신에게 몸을 바친 후 새로운 삶의 모습으로 변화함에 따라 낡은 의지와 새 의지와의 투쟁이 최고조에 이른다. 마침내 밀라노 정원에서 펴서 읽어라 라는 귀절의 아이들 노래소리를 하늘의 소리로 듣고 성서를 펼쳐서 읽은 후 회개한 과정을 말한다. 제 9권은 교직에서 물러나 밀라노 교회의 한 산장에서 한가로이 지내면서 영세준비를 한 뒤 암부로시우스로부터 영세를 받고. 어머니와 같이 아프리카로 가려 했으나 티베리스 강 입구에서 어머니와 사별하게 되는데. 어머니 모니카의 일생이 가장 아름답게묘사된다. 자기 자식에 대한 배려와 감화가 절대적인 어머니로부터 젖과 함께 흡수한 신앙이 새로운 사람 을 길러낸 것이고, 그의 과거생활에 대한 고백이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끝난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제 10권은 집필 당시의 자기반성으로, 먼저 신과 복된 삶을 찾아 감각적인 것으로 부터 이성적인 것으로 올라가는 길을 걷고 있는 자신을 되돌아 본다. 제 11권은 천지창조 이전에 신은 무엇을 하였는가라는 의문은 도외시 하고, 현대철학에서도 특히 주목되고 있는 정밀한 시간론 을 전개하고 있다. 제 12권은 태초에 창조된 천지는 무엇을 뜻하는가를 밝히고 있다. 제 13권은 천지창조 가사를 비유적으로 해석하고, 신이 교회에서 구원과 성화를 위해 하는 일의 상징을 인정하고 신에게 영원한 안식을 구함으로써 고백을 끝맺는다.


d. 종교사적 의의 

 그는 기독교를 신봉하는 어머니와 마니교를 신봉하는 아버지의 신앙적 갈등 속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의 방황 속에서 자신의 철학문제인 선과 악의 세계를 해결해보려고 하였으나 한계상황에 부딪치고, 마침내는 이성에 의해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기보다는 먼저 믿고 알 수 있는 신앙의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신앙고백, 이처럼 아구스티누의 고백론 은 그가 바깥 생활로부터 경험했던 모든 불안한 생활로부터 해방된어 종교적인 평화와 확신으로 축복받기까지 솔직한 그의 체험담을 적은 기록이다. 일종의 자서전적인 본서는 시종일관 선하고 자비로운 하나님에게 과거에 지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완전하게 하나님에게로 돌아와서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조망하게 된 것이다.

 신국론, 한편 그의 크리스트교 사상은 중세 사상 전개에 깊은 영향을 미친 신국론 에 잘나타나 있다. 이 책은 하늘나라 와 땅의 나라를 설명한 것으로, 천국은 신국으로 부른다. 전 22권으로 분류된 신국 은 제1권부터 10권까지는 주로 이교도에 대한 반박이고, 11권이하는 신국와 지국의 관계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역사적으로 서술했다.  신국의 일관된 내용은 인간역사의 과정이 신의 섭리임을 주장한 것으로,

교회를 통해 신국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교회는 인간구원의 유일한 기관이라는 것이다.  신국론 에 나타난 그의 사상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기독교 사상, 아구스투스는 그리스 사상 특히 플라톤사상 을 원용하여 크리스트교의 신앙을 설명한 점은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다. 인간은 태어날 때 자유의지를 부여 받았는데, 이를 남용함으로써 원죄를 짓게 되었다는 원죄사상을 폈다. 그 예로,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따먹은 금단의 열매와 카인이 아벨을 죽인 것을 들었는데, 일시에 무너지는 로마를 인간의 원죄의 결과로 보았다. 한편 아우구스투스의 신관은 전지 전능한 최고의 신이다. 인간이 선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통해서 구원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가장 가난한 신분으로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쫓아 사는 것만이 현세의 고통과 고난을 극복하고 현세적 승리를 이룬다는  구원사상 을 피력했다. 그의 윤리사상에 있어서는  믿음, 사랑, 소망 을 크리스트교의 3원덕으로 삼고, 플라톤의 4주덕  지혜, 용기, 절제, 정의를 조화시켜  7주덕 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성부, 성자, 성신은 오직 하나의 신의 3가지 모습이라는 3위 1체설 을 주장했다. 신국론 에 담긴 위와 같은 사상은 크리스트교의 세계관을 체계화 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고, 그의 또다른 저서  고백론 은 신에 대한 감사와 찬송을 서술한  영혼의 책 으로, 중세는 물론 근세에 와서도  영혼을 염려하는  내적 생활문제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어왔다. 이처럼 그의 체험에 바탕을 둔 고백론의 결론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 

 주여, 당신께서는 나를 당신에게로 향하도록 만드셨나이다. 내 영혼은 당신 품에서 휴식을 취할때까지 편안하지 않을 것입니다.(인생은 원래 고생의 연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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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교


Manicheism



1. 개요

2. 역사

3. 특징

4. 교리

5. 영향

6. 기타

1. 개요[편집]


유대교, 영지주의 크리스트교, 조로아스터교에다가 지역에 따라선 불교까지 복합으로 짬뽕해 생긴 이란 출신의 종교. 창시자인 마니(Mani)의 이름을 따서 마니교라고 한다. 많이 믿으라는 뜻이 아니다. 참고로 마니아(Mania)란 말이 이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짬뽕 종교라는 점에서 시크교를 떠올려 볼 수 있다.


2. 역사[편집]


마니가 서기 216년 오늘날의 이라크 영토인 크테시폰에서 태어나 12살 때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에게 새로운 종교를 만들라는 계시를 받고 25살 때부터 자신이 살던 제국 파르티아 주요한 종교였던 조로아스터를 비롯해 중동 각지에 퍼져 있던 크리스트교와 유대교의 교리를 짬뽕하여 자신의 이름을 붙인 마니교를 창시한다. 241년에 마니가 교리를 전파하러 인도 지역으로 떠나 여행하면서 불교와 자이나교를 많이 접하게 되고, 또 이를 마니교 교리에 흡수(!)하여 마니교 교리를 완성시켰다. 레알 짬뽕의 대가


3. 특징[편집]


최대 특징은 조로아스터교를 넘어서는 극한의 이원성으로, 조로아스터교 때부터 강조되던 선악의 대립을 넘어서 육체와 영혼의 대립까지 교리에 포함하니 철저한 자기 단속과 철저한 구원론을 한 성격으로 포함하게 되었다. 예컨대 마니교 교리 중에 "모든 형상이 있는 것을 파괴하지 말라"라는 내용이 있다. 우상이라면 환장하는 유일신교가 싫어할 만하다 이 말에 따라서 마니교 교리대로라면 목욕해서도 안 되고(목욕하면서 물의 형상을 파괴하기 때문), 땅에 농사해서도 안 된다(경작할 때 흙의 형상을 파괴하기 때문에). 


이 원칙을 그대로 지킬 때 마니교도가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엄격하다는 자이나교의 교리가 겨우(?) '생명을 파괴하지 말라'인데도 상업 정도 외에 제대로 발 붙일 업종이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저 흠좀무. 그래서 마니교에서는 성직자들에게는 이런 원칙을 최대한 요구하고 평신도는 조금 널널하게 풀어 주는 대신 자기들이 왕이 되어 갖은 재물과 음식을 가져다 바치도록 평신도층이 성직자들을 먹여살리는 의무를 지도록 했다.[1] 또한 식생활에서는 채식, 특히 과일을 요구했다. 마니교 최대 축일인 마니가 순교한 날에도 과일을 먹었다. 


또 다른 특징은 그 막장 같은 짬뽕성. 창조 설화부터가 유대교, 크리스트교, 조로아스터교에 등장하는 신들을 마구마구 버무린 환상스러운 구성을 자랑하니 여타 종교에서 핍박받을 수밖에 없었던 데다가 마니교도는 비밀 종교집단 일종으로 자신들끼리만 접촉하면서 살았는데 이것도 권력자들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 중앙 무대로는 거의 올라오지 못한 채 반정부다운 민간 종교(선악 구도가 크게 작용하므로)로만 역사에서 존속하였다.


마니교의 세계관은 당대 유대교와 기독교와 조로아스터교와 그리스 신화를 모두 합쳐 재구성했으므로 매우 복잡하고 방대하다. 아주 체계 있고 복잡하다.


4. 교리[편집]


빛과 어둠이라는 이원론적 선악 구도를 갖추고 있다.


마니교는 철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종교인 중에서 스스의 사유를 통해 자발적으로 개종하는 등의 파급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성경에서 드라마틱하게 펼쳐지는 내용으로 우주의 원리를 설명하는 것과는 정반대였다.


마니교는 금욕주의를 강조하기도 해서, 마니교의 고위 성직자는 독신으로 산다.


마니교의 '마니'는 신의 최후의 예언자로서 신을 믿는 종교다. 따라서, 기독교와 같이 예수를 인정한다. 이렇게 신을 믿고, 예수; 부처; 조로아스터 등을 과거의 예언자로 이해했다. '마니'는 빛의 예언자라고 불리며, 빛을 선한 개념으로 여겼다. 이러한 빛과 어둠의 대립은 조로아스터교에서 빌려왔다.


게다가 마니교는 보편 종교로서의 역할을 자처했다. 기존의 종교가 타민족이나 타종교인을 박해하기 바빴던 것과는 달리 매우 평화적이기 때문에 이는 분명 매력적인 점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독특한 점은 '영지주의'이다. 대부분의 종교들이 수행을 하거나, 돈을 내거나, 선행을 하거나 하는 등 일상 생활과는 거리가 있는 것을 행하기를 바라는 것과는 달랐다. 마니교에서는 '지식'을 쌓을수록 그에 비례해서 인간의 타락을 막아주고 빛에 다가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악이란 절대 사라질 수 없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지식을 쌓아야 한다고 보았다.


5. 영향[편집]


이렇듯 창시자이자 교주였던 마니가 불에 타 순교당해 죽은 후 주류로서 인정받아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종교로 그 역사 자체가 피압의 역사라 할 종교이나 이란을 벗어난 국외에서는 민간에서나마 크게 유행해 동서 종교에 모두 큰 영향을 미친 바 있었다.


그 영향력이 생각보다 매우 크다, 이집트를 비롯한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지역, 인도, 중국, 한국에 이르기 까지 사실 상 구대륙 전체를 휩쓴 종교다. 중세 시대의 전파력 치고는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그 어떤 메이저 종교보다 파급력은 더 앞서나갔다.


서방로는 2세기 이후에 로마 제국에서 상당 기간 융성하고서 크리스트교 교부로서 추앙되는 아우구스티누스도 한때 마니교 신자였을 정도. 그 후에도 선악을 극단으로 강조하고 구원을 중시하는 중세의 이단 교파는 대개 마니교에 많이 영향받았는데 대표할 정도로 전형이 될 만하거나 특징이 있는 것이 11세기·12세기 알비 카타르파.


동방으로는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까지 뻗어나간 후 민간 신앙에 크게 영향을 끼친다. 먼저 위구르 제국을 위시해 중앙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잠시 국교로 정해졌던 적이 있다. 중국식 마니교는 당나라 9세기 경에 시작된 것으로 본다. 북송 말에 강남에서 반란한 방랍의 집단에 채식주의자로 마귀를 섬긴다는 끽채사마교 신자가 포함됐던 일변으로 마니교는 미륵 신앙과 합해지면서 소위 명교, 혹은 백련교로 발전하기도 했는데 15세기 후 마니교도는 소멸했으나 백련교도는 19세기까지 청을 괴롭힐 정도로 크게 융성한 바 있었다.


6. 기타[편집]


십자군 전쟁 항목에서도 나온 <아랍에서 보는 십자군>으로 유명한 작가 아민 말루프는 <마니>라는 소설을 썼는데 말루프 자신이 레바논 태생 무슬림 출신(프랑스에서 거주중)이지만 마니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다만 비난도 했지만 서문에서는 다양한 종교 장점을 넣으며 노력한 점을 높게 평가)을 넣기도 했다. 사실 이 사람은 종교 연구도 하면서 데바닷타(국내에도 정발됨)라는 소설을 썼는데 이 소설에서 데바닷타에 대하여 좀 좋은 면도 있다고 봤으나. 광신적인 한계로 가서 스스로 파멸하니 안타깝다고 결국 결말이나 그 근본주의에 대해서는 비난하고 있다. 그렇지만 서문에서 패자이기에 더더욱 기록에서 불리하게, 왜곡되어 남았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쓸 정도로 다양한 종교에 대하여 연구하고 소설을 쓰며 중립적으로 보는 사람이다.


실제 마니교와는 상관없지만,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의 교주 이름이 이만희라서 그 종교가 마니교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백괴사전에서 마니교는 이쪽을 가리킨다.(...) 신천지도 마니교처럼 교주 마니가 죽으면 교세가 사라질지도? 그래도 마니교는 천여년넘게 영향력이 남기라도 했지,이만희 교는 대체?


[1] 마니교에서 성직자는 '선택된 자', 평신도는 '듣는 자'로 불렸는데 가톨릭의 분파인 카타리파에서도 성직자와 평신도를 완덕자(Perfecti), 평신도(Credentes)로 구분했다.(출처: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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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로아스터교


최근 수정 시각: 2017-09-11 20:52:05


종교 관련 정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80px-Faravahar-Gold.svg.png

육군조로아스터교의 가장 유명한 심볼[1]

1. 개요

2. 역사

2.1. 창시와 전파

2.2. 사산 왕조 시대

2.3. 이슬람 시대

3. 현대의 조로아스터교

3.1. 이란

3.2. 인도

4. 교리

4.1. 유일신교

4.2. 파생 종파

5. 다른 종교와의 관계

5.1. 유대교, 기독교

5.2. 브라만교, 힌두교

6. 대중문화 속의 조로아스터교

6.1. 그 외 창작물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Zoroastrianism


페르시아 지역에서 발원한 이란 계통의 종교.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 마즈다교(Mazdaism), 혹은 중국에서는 불을 숭상한다 해서 배화교라 불렸다. 조로아스터교는 창조신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를 중심으로 선과 악의 질서 및 세계를 구분하는게 특징이다.


중동의 박트리아 지방에서 자라투스트라가 세운 종교이다. 그의 창시 시기에 대해서는 기원전 1800년에서 기원전 640년경으로 의견이 다양하다. 현재는 기원전 6-7세기가 학계의 정설이다. 그 이유는 그 정도 되어서야 창시자 자라투스트라가 언급되기 때문이다. 기원전 600년경에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 1세를 통해 오늘날 이란 전역에 퍼졌으며 기원전 5세기에는 이미 그리스 지방에까지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조로아스터교'라는 이름은 창시자인 자라투스트라에게서 유래한다. 본래 이름은 아베스타어로 '자라수슈트라(Zaraϑuštra)'인데, 이게 그리스에서 전사라는 뜻의 '조로아스트레스(Ζωροάστρης, Zōroastrēs)'가 되었고, 그것이 라틴어를 거쳐 영어로 '조로아스터(Zoroaster)'가 되었다.


2. 역사[편집]




2.1. 창시와 전파[편집]


파일:external/colleenday.files.wordpress.com/tumblr_lsu0mddvqu1qlziglo1_400.jpg


창시자 자라투스트라의 생몰연도는 확실치 않으나, 평상적으로는 기원전 6-7세기라고도 본다. 기원전 660년이 보통정설이다. 대부분의 백과나 지식사전에 6-7세기로 기재되어있다. 극단적인 주장에서는 대략 BC 1500년~ 1300년 경에 이란 동부 지역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트리아 출신이라고도 한다. 조로아스터교는 동부 이란을 중심으로 여러 이란계 종족들에게 전파되기 시작하고, 조로아스터교를 추종하는 메디아와 아케메네스 왕조가 서아시아의 패권을 쥐면서 급성장했다. 하지만 아케메네스 왕조는 안정적 통치를 위해 토착 종교와 관습을 용인하는 태도를 견지했고, 조로아스터교는 이란계 종족들의 범위 이상으로 전파되지 못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으로 아케메네스 왕조가 패망하자 조로아스터교 역시 국교의 지위를 잃고 약화되었다. 이후 헬레니즘 시대와 파르티아의 지배를 거치면서 아나히타나 미트라 등 보조 신격들을 숭배하는 변종 분파들이 널리 퍼졌다. 특히 미트라 숭배는 헬레니즘 세계를 거쳐 이후 로마 제국까지 전파되기도 했다.


2.2. 사산 왕조 시대[편집]


이 추세가 반전된 것이 사산 왕조의 등장이다. 사산 왕조는 그 이전 400년 동안 이란을 지배한 파르티아인들의 유목민적 전통과 느슨한 봉건제도, 타 종교나 문화(특히 헬레니즘)에 대한 호의적 태도 등을 비난하면서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 건설을 주창했으며, 이 과정에서 조로아스터교를 국가권력 강화와 사회 통합의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였다. 


이에 따라 사산 왕조 초기 조로아스터교는 정통 교리와 경전을 확립하는 작업, 국가권력과 연계된 관료적 성직기구의 정비 작업 등을 진행하며 다시한번 국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후 제국의 정통 교리에 반하는 마니교, 마즈다크교 등이 등장하여 세력을 늘리거나 고위 성직자들을 견제하려는 황제들의 지원을 받기도 했지만, 결국 이단으로 몰려 탄압당했다.


조로아스터교의 몰락은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했던 사산 왕조의 멸망과 궤를 같이 한다. 아나톨리아와 유럽 지방을 지켜낸 동로마 제국과 달리 이란은 모든 영토가 궁극적으로 이슬람 세력에 정복당했고, 사산 왕조의 국가종교였던 조로아스터교의 입지는 크게 약화되었다.


2.3. 이슬람 시대[편집]


처음에는 아랍 정복자들도 이란 지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토착 유력자를 포섭해야 했으므로 조로아스터교는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불교나 힌두교 토속신앙과 달리 이슬람에 교리상 유대교, 기독교도와 마찬가지로 조로아스터교도 일신론에 해당하는 고등종교이기 때문에 원칙상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주었다. 8~9세기 정도만 해도 중세 페르시아어로 기록된 조로아스터교 관련 문서들이 꽤 남아 있다. 그 와중에 조로아스터교 내부에서도 이단취급 받던 마즈다크교는 시아파와 합세해서 제국에 반기를 들었기에 탄압받았다.


그러나 우마이야 왕조의 아랍인 우선주의, 비무슬림에 대한 추가 인두세 부과, 그리고 비무슬림을 차별하지 말라는 공식적 입장과 상관없이 이루어진 비공식적 차별, 특히 가혹한 세금과 더불어 조로아스터교도와 무슬림 형제가 있을 경우 조로아스터교도는 상속을 받을 수 없다는 등의 조치로 인하여 인해 점차 이란에도 무슬림 개종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또한 처음에는 고등종교로 인정하는 조치와 반대로 무슬림들은 점점 조로아스터교도들을 불을 섬기는 이교도로 취급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편견이 조로아스터교가 배화교로 불리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750년 아바스 왕조가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릴 때 이란의 비 아랍계 무슬림인 마왈리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9~10세기 정도가 되면 조로아스터교는 완전히 소수 종교가 된다. 11세기 셀주크 제국을 위시한 이란 지역의 튀르크화와 순니파 세력의 강화 역시 조로아스터교의 몰락을 가속화시켰다.


사산 왕조 멸망 이후 이란이 지속적으로 이슬람화되자, 조로아스터교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피난한 경우도 적지 않다. 이들 중 인도 지역으로 피난한 사람들은 아래 서술할 "파르시"가 되었고, 중국으로 피난한 사람들에 의해 배화교, 혹은 현교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3. 현대의 조로아스터교[편집]


현재도 적게나마 신자가 있다. 이란, 인도 공화국, 중국, 쿠르디스탄을 합쳐서 약 10~30만 명 정도이며 가장 많이 분포하는 곳은 인도다.


3.1. 이란[편집]


이란에서는 2011년 인구조사 결과 2만 5천 명 가량의 신자가 있다고 하며, 중부 야즈드(Yazd) 지역이 조로아스터교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다. 다만 워낙 고생이 심해서 성전 아베스타조차도 극히 일부분 밖에 남지 않았다. 대략 전성기의 20분의 1 정도 분량. 성경으로 예를 들자면 신약하고 구약 중 한두 편만 남고 죄다 없어졌다.(…) 1906년의 페르시아 헌법 규정에서는 의회 의석 중 1석을 반드시 조로아스터교도에게 할당하도록[2] 되어 있었으며, 이는 이슬람 혁명 이후인 지금도 유효하다. 


호메이니는 조로아스터교를 그리 좋게 보지 않았다. 다만 조로아스터교가 과거 대페르시아를 상징하는 점이 있어서 팔레비 왕조 시절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또 1971년 페르시아 건국 기념일에 조로아스터교인들이 대표처럼 나온 적이 있었다. 당시 이걸 이단 행위라고 욕하다가 '페르시아를 욕하는 저 식히는 매국노!'라고 엄청난 비난을 받고 부랴부랴 '아니 잘못 생각했어요!'라고 변명을 하며 평생 페르시아를 부정하지 않는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야했던 호메이니였으니 아무리 이교도인 조로아스터라도 페르시아 제국을 함부로 까다가 자칫하다간 페르시아를 까는 것으로 봤기에 그냥저냥 공존하게 놔두었다. 차가운 무슬림 남자 하지만 조로아스터교에게는 관대하겠지. 그러나 차별과 박해는 존재했고, 2000년대 이후에 망명하는 조로아스터교도들도 있다고 한다. 조로아스터인들은 소수이긴 하지만 '과거 페르시아가 아랍을 지배하며 호령할 때 종교가 조로아스터교인데 왜 현대에는 정작 페르시아의 후손인 이란이 아랍인의 이슬람에 정복당했다는 거냐?'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에 이란 항목에도 나오듯이 이란에서는 '대신 소수계열인 시아파를 믿으며 아랍과 대립하잖아.'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고.


3.2. 인도[편집]


인도로 피난한 조로아스터교도들은 소수민족 집단인 파르시(페르시아인이라는 의미)가 되어 잔존하게 된다. 이들은 인도의 지배종교인 힌두교와 대립하지 않기 위해 교리에 일부 규정을 더하였는데, 현재 그 중에 문제가 되는 것이 "파르시와 파르시의 결혼에서 태어난 아이만이 파르시가 될 수 있다."는 규정이다. 시뮬레이션에 의하면 이 규정을 계속 지킬 경우 현대 사회에서 파르시는 2, 3세대 안에 거의 소멸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때문에 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여 개혁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파르시들은 주로 상업에 종사하여 상당한 부를 축적한 경우가 많은데, 현재 인도 최대의 재벌그룹 타타 그룹을 소유한 타타가문이 파르시이다. 의외겠지만 재규어와 랜드로버도 타타모터스 소유다. 타타모터스 뿐만 아니라 타타그룹 자체가 농업에서 항공우주 산업까지 안하는게 없을 정도로 인도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또 퀸의 프레디 머큐리가 파르시였으며 조로아스터교 신자였다. 생전에 머큐리는 자신의 뿌리를 매우 자랑스러워 했다고 한다. 그리고 피아노 분야에서 가장 난해하고 연주하기 어려운 작품을 남긴 작곡가겸 피아니스트 카이코스루 사푸르지 소랍지도 파르시교도였다.


시체로 불이나 땅을 더럽히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화장을 기피하고, 조장(鳥葬)을 선호하고 있다. 문제는 환경오염으로 조장에 쓰이는 대머리 독수리가 점점 수가 줄어들고 있어서, 이 풍습도 위협받는 중. 시대의 변천에 따라 개고기 식용에 대한 입장 차이도 변화했다. 


4. 교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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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로아스터교는 흔히 불을 숭상한다 하여 배화교로 알려져 있지만, 불을 숭상하는 것이 아니라 조로아스터교도가 필수적으로 해야하는 하루 5번의 예식에 쓰이는 성스러운 불을 소중히 하는 것이다. 불 뿐만이 아니라 창조자의 피조물인 땅, 불, 물, 사람의 '마음'까지도 더럽히지 않으려 한다. 그런고로 당시 유행하던 짐승을 죽여 피로 땅을 더럽히는 제사와 사람의 시신을 땅에 묻는 것, 식물성 마약에 취해서 마음을 더럽히는 것 모두 금기시한 것이다. 불을 소중히 여기는 다른 이유로는 사산조 시기에 조로아스터교식의 '성상 파괴'가 일어나서 예술로 쓰이는 것 외에 종교 의식에서 성상을 쓰는 것을 금지하고 불을 사용하도록 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3]


주신 아후라 마즈다를 섬기는 종교로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거울의 양면으로 해석되는 "이원론적 일신교 종교"이다.[4][5]


성경도 비슷한 묘사를 사탄에게 하는데, 욥기에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6] 빛의 원리에 필적하는 어둠의 원리를 인정한다. 


그러나 둘이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동등한 것은 아니고, 악과 어둠은 선과 빛에게 결국 패배하게 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적극적인 자유 의지로 단순히 믿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악에 맞서서 투쟁할 것을 주문한다. 영적전쟁 개념과 다소 비슷하다. 또 조로아스터교는 고대 신화의 여러 신들을 모두 받아들였으므로 신은 여럿 있지만, 결국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만물의 주인, "주신"은 오직 아후라마즈다/오르마즈드 뿐이다. 조로아스터교 내의 다른 신들은 유일신인 아후라마즈다를 돕는 보조적인 신이자 선한 영으로, 기독교의 천사들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다시 말해 조로아스터교는 비록 고대의 다신교적 성격이 일부 남아 있기는 해도, 기본적으로 일신교적 성격이 강한 종교이다.


현재 남아있는 아베스타를 보면 평화와 화합, 도덕적 생활을 통한 번영을 중시여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상당수의 에피소드가 자라투스트라의 방문을 받은 마을이 거지처럼 못살다가 자라투스트라의 지도를 받고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목축민과 유목민적인 성향이 많이 반영된 유대교와는 달리, 농민과 도시민의 성향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이 점은 베다 종교(=브라만교, 힌두교)와 대비되는 경향이기도 하다.


조로아스터교에서 강조하는 신심은 예언자 자라투스트라가 강조한 세가지의 좋은 행동, 즉 '좋은 생각', '좋은 말', '좋은 행동'을 하며 살 것을 강조한다. 애초에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면, 즉 아후라마즈다의 길을 따른다면 좋은 생각이 곧 좋은 말을 낳고, 다른이들에게 좋은 말을 하면 자연스럽게 다른 이들에게 좋은 행동을 하며 살 수 있다고 보는 것인데, 결국 이러한 행동들이 바로 악을 물리치는 무기가 된다고 본다.


4.1. 유일신교[편집]


사람들이 조로아스터교에 대해 착각하는 가장 본질적인 내용은, 아후라 마즈다와 앙그라 마이뉴라는 각각의 존재에 의존해 펼쳐지는 것이 이 세계인데 왜 유일신교라고 보느냐 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조로아스터교 내에서도 차이가 있는 듯 하다. 앙그라 마이누가 창조된 존재인지 아니면 원래 있던 존재인지가 조금 갈리는 듯하다.


앙그라 마이누는 창조된 존재가 아니다.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악의 힘인 앙그라 마이누는 창조되지 않았으며 창조주이자 선의 힘인 아후라 마즈다가 나중에 그의 존재를 눈치챈다. 왜냐하면 창조는 그 자체로 선한 행위이기 때문에 악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일신교라고 보는 이유는 결과적으로는 빛의 힘에 패배하기 때문이다. 또한 페르시아가 숭배한 대상은 오로지 아후라 마즈다 뿐이었다. 


즉,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져 악한 짓을 하며 설치고 돌아다닌다 해서 유일신교라 부르지 않는 것이 결코 아니듯, 조금 더 강한 사탄이라 할 수 있는 앙그라 마이뉴가 존재한다고 해서 조로아스터교가 유일신교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부분은 주의해야 할 점이 유대교와 기독교의 경우에는 피조물이 타락한 경우이지만 앙그라 마이뉴의 경우에는 애초에 피조물이 아니었다. 애시당초 유일신교라고 하는 이유는 결과적으로는 빛이 승리하고 아무리 악이 날뛰어도 빛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앙그라 마이뉴와 동급의 존재는 스펜다 마이뉴다. 아후라 마즈다가 만들어낸 쌍둥이로 각각 빛과 어둠을 상징하는 존재. 후대에 오면서 스펜다 마이뉴의 존재감이 사라지면서 변화된 것이다.


경전에 의하면 아후라 마즈다의 성령인 스펜다 마이뉴는 선의 길을 택하고 앙그라 마이뉴는 악의 길을 택했다고 한다. 아니면 그냥 아후라 마즈다하고 앙그라 마이뉴가 그냥 쌍둥이 영이라고 묘사되어 있다.


다양한 사이트를 참조해보니 사이트마다 주장이 다른 부분이 있다. 앙그라 마이뉴가 창조된 존재인지 아닌지에 대해 이렇게 갈리는 이유는 아무래도 후대에 들어서 종교의 교리가 바뀌거나 아니면 해석의 차이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한 것으로 보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조로아스터교가 대세가 아니다 보니 주류의 의견이 확실하지가 않다.


4.2. 파생 종파[편집]


대충 이렇게 알려져 있지만 워낙 오래된 종교라서 시대에 따라 교리나 사상에 변화가 많고, 이단 종파나 분파도 많다. 특히 이슬람의 침략 이후 신자들의 수가 격감하여 그 전통이 매우 약화된 탓이 크다. 조로아스터교는 조로아스터교 이전의 고대 페르시아의 토착 신앙과 구분이 되기는 하나 일부 신들은 그 연장선 상에 있고, 향후 수백년간 나타난 여러 다른 종파와도 모호하게 구분된다.


주르반교 : 주르반교는 흔히 "쌍둥이 신"이라고 설명되는 아후라 마즈다와 앙그라 마이뉴가 세계를 지금과 같이 만들었다면, 그 동등한 쌍둥이를 만들어 낸 태초의 존재가 있으리라는 가정에서 형성되었다. 시간과 관련된 신이었던 주르반이 바로 그 태초의 존재라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주르반 항목을 보라.

미트라교 : 조로아스터교의 여러 하위신 가운데서 미트라를 특히 높이 보고 숭배하는 종파. 미트라교에서는 미트라를 아후라 마즈다와 동격, 혹은 아후라 마즈다의 계승자로 본다.

마니교 : 페르시아 출신의 예언자 마니가 조로아스터교에 크리스트교, 유대교 교리 등을 접목시켜 창시한 종교. 조로아스터교를 훼손시킨 변종 이단으로 간주되어 조로아스터교 세력으로부터 심한 탄압을 받았다.

마즈다크교 : 5~6세기 경 살았던 조로아스터교 성직자 마즈다크가 내세운 조로아스터교의 개혁 운동. 종교적으로 주류 성직자들과 대립하는 한편, 사회정치적으로 대귀족들을 공격하고 재산의 공동 소유 등을 주장해 큰 인기를 끌었다. 최초의 공산주의자들 결국 이단으로 몰려 절멸당했다.

5. 다른 종교와의 관계[편집]


5.1. 유대교, 기독교[편집]


유대인들의 귀환과 성전 재건축을 허락한 페르시아의 정복왕 키루스 2세가 조로아스터교도였다. 당시 페르시아는 영토 뿐 아니라 경제, 문화, 군사, 체제 정비 등 다른 나라들을 압도하는 오리엔트 세계의 패자로 확고한 위치에 있었던 시기로 유대인들 역시 종교뿐만 아니라 문화 전반에 페르시아의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7]


다른 종교에 미친 영향도 상당하다. 대표적으로 동정녀에 잉태되어[8] 태어날 구세주, 종말의 때에 일어날 최후의 심판, 자라투스트라가 광야에서 정진할 때 앙그라 마이뉴에게 시험받았다는 내용, 자라투스트라의 탄생 때 그를 방문했다는 마기(Magi)등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에 미친 영향력은 실로 엄청나다. 하지만 가장 큰 것은 존재 그 자체. 예컨대 아브라함계 종교에서 사탄은 본래 '고발자'라는 뜻으로, 인간의 신앙을 시험하여 신을 조롱하는 천사로 여겨지고 있었는데,[9] 조로아스터교의 이원론의 영향을 받아 신에 맞서는 악마로 바뀌어졌다.


유대교가 조로아스터교에 영향을 받았다는 학설이 지지를 받는 가장 큰 이유는 구약 성경 자체에서 본래, 그러니까 초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요소들이 어느 순간부터 등장하게 되는데, 그 요소들이 바로 조로아스터교의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히브리인의 신이던 야훼가 절대적 유일신으로 바뀐 것,[10] 야훼의 명을 받아 활동하던 사탄이 아예 야훼의 대적자가 된 것이다. 


문제는 모세오경의 영향은[11] 물론 네부카드네자르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예언자 다니엘의 존재는 역사적 교차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시기 이전까지 모세 5경은 물론 구체적인 신학적 견해도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2004년에 바빌론 유수보다 한 세기 정도 이전 시기의 유대 경전이 일부 발견되어 경전 자체는 부분적으로나마 이미 존재했던 가능성이 있다. 참조.


주의해야 하는게 영향을 주었다고 해서, 그 종교가 "조로아스터교의 파생 종교이다.'라는 주장은 옳지 않다는 것. 유대교는 아브라함 계통에서 시작됐을 뿐만 아니라, 학자들은 3500년 전부터는 있었다고 추정한다. 모세오경이나 초기 기독교 경전 구약 앞부분의 경우에는 조로아스터교보다 오히려 앞선 시기에 작성되었다. 자라투스트라의 출생이 BC 660년이고, 탈출기(출애급기)의 경우 시기가 기원전 1300-1500년 정도이며, 최종 정리가 6-7세기 정도인 것으로 봤을 때는 아무래도 후기에 들어서 영향을 받았을 수는 있어도 기독교와 유대교 자체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권에 있었다고 하기는 힘들다. 특히 창세기나 탈출기 같은 경우에는 조상에 대해 서술하는 것으로 봐서는 구전이 오래 되었을 수도 있으므로 파생 종교라고 보는 것은 한계가 있다. 특히 시편의 경우에는 기원전 1400년 전부터 500년대까지 꾸준히 기록되었는데, 상술했듯 조로아스터교보다 일찍 작성된 책 중 하나다. '구약성경에 초기에 존재하지 않던 요소들이 등장한다'라는 위의 서술도 있듯이 '초기 기독교나 유대교는 따로 있었고 페르시아 시기에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게 맞다. 과연 어디까지 영향을 주었는 지에 대해서는 확언할 수 없다. 전술한 예시들이 전부 다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고는 확신하기가 어렵다.


예수의 문제의 경우에도 비슷한 부분이 있지만, 다른 부분도 굉장히 많다. 게다가 유일신 신앙적 요소, 사탄과 천사의 개념 등은 모세오경에서도 충분히 나온다. 탈출기 때부터 자기 외에는 신이 없다는 말이 나오며 그것은 창세기도 마찬가지이다. 사탄의 원형은 창세기에 나오는 뱀이며 욥기에서 나오는 현대 그리스도교의 사탄과 근본적으로는 같다. 사탄이 40일 동안 예수에게 유혹을 시도한 사건 역시 여기서 예수가 사탄에게 반박을 한 후 예수의 말 몇마디에 줄줄이 쓸려나가버리고 그리고 나머지 악마들 역시 말 한마디면 나가는 걸로 봐서는 대부분 그냥 호구급이다. 따라서 페르시아와의 접촉으로 사탄의 존재감이 커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본질은 의외로 큰 변화가 없다. 그러니 함부로 기독교 신자나 유대교 신자, 이슬람교 신자 앞에 가서 파생 종교라는 왜곡된 말을 꺼내지 말자.


5.2. 브라만교, 힌두교[편집]


현대에는 아무래도 현대 사회의 관심 분야이기 때문에 유대교, 기독교와의 영향이 가장 주목을 끌지만, 아무래도 조로아스터교와 좀 더 연관성이 깊으면서도 대립성이 강한 종교는 인도 공화국의 종교. 브라만교와 힌두교이다.


재미있게도 조로아스터교와 브라만교는 서로의 신과 마가 뒤바뀌어 있다. 조로아스터교의 아후라 마즈다(Ahura)는 인도 신화의 아수라(Asura)와, 조로아스터교에서 저급한 악마로 보는 다에바(Daeva)는 곧 인도의 신의 데바(Deva) 신족과 동일한 기원을 가진 것으로 보고 있다.


옛 인도-이란인 (즉, 아리아인)의 원시적인 종교에서 이미 이 같은 신족의 분화가 존재했고, 이란에서는 아후라-아수라 계통의 신앙이 강화되었으나 인도에서는 데바-다에와 계통의 신앙이 강화되면서 이런 대비가 나타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12]


6. 대중문화 속의 조로아스터교[편집]


조로아스터교는 현실에서 교세가 이슬람교에 비해서 매우 약하고, 신자 수도 극소수이지만 그래도 역사적으로는 이슬람교와 함께 중동을 대표하는 종교이며 대중매체에서도 테러 등으로 부정적인 이미지가 많은 이슬람에 비해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종교이다.


모비 딕의 주인공 에이허브 선장의 보트에 탑승한 작살잡이 중에서 필리핀 출신인 페댈라가 조로아스터교 신자다. 모비 딕을 발견한지 이틀째 날에 모비 딕이 에이헤브 선장의 보트에 격돌하고 그 과정에서 실종되는데, 사흘째 날에 모비 딕의 몸체에 그물과 작살과 함께 묶엔 페댈라의 시신이 발견된다. 페댈라는 에이헤브에게 밧줄을 조심하라고 경고하며, 자신이 죽은 뒤 에이허브 선장이 죽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고, 바로 그 사흘째 날에 그의 경고와 예언이 실현된다.

페르시아의 왕자의 DOS 2편인 "그림자와 불꽃"의 후반부에서 적으로 등장한다. 제목에서 보다시피 왕자가 자파를 무찌르기 위해 조로아스터의 불을 훔치러 가는 것. 맨 위의 상징처럼 독수리 모자와 옷을 입고 등장한다.

악튜러스에 조로아스터교 관련 소재가 중요하게 등장한다.

창세기전 시리즈에서 앙그라 마이뉴 등 조로아스터교에서 차용된 소재가 많이 나온다.

중국에서는 배화교 또는 명교로 불렸기 때문에 명교 신도 주원장이 나라를 세워 국호를 '명'이라고 지은 근거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명교는 배화교뿐만이 아니라 백련교나 마니교의 짬뽕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주원장이 명교와 백련교 등을 금지시켜 토사구팽시켰다. 김용의 의천도룡기에서 이런 역사적 사실을 교묘하게 섞어 소설 배경을 만들었는데, 여기서는 주원장에 의한 토사구팽이라고 주장한다.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는 확장팩 올드 갓(Old God)에서부터 플레이 가능하게 되었다. 조로아스터교일 경우 근친혼(신성혼)을 하면 봉신들과의 관계가 올라가고 신앙심을 얻는데 유리하다. 그래서 한국에서 붙은 별명이 현관교. 거기다 근친상간 트레잇이 붙을 확률이 15% 정도밖에 안 된다. 단, AI가 너무 근친혼을 선호해서 자손이 늘지 않는다. 어린 아이와 약혼을 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렇기도 하지만 신성혼은 임신 확률이 25%밖에 되지 않는다.

위와 같은 패러독스 게임인 Europa Universalis 4에서는 단 1개 프로빈스가 조로아스터교로 등장하며, 시작 시점에서 국교로 삼은 나라는 없다. 조로아스터교 커스텀 국가를 만들어 특정 프로빈스들을 정복하라는 업적이 있는데, 게임 내 모든 종교로부터 이교도 취급을 받기 때문에 초반 운신이 힘들다.

종말의 크로니클의 9th-G

삼류무사에서는 마교로 몰려 오래 전에 멸문했다. 지상최강의 단일문파로, 그들의 수장이자 당대 명교주였던 서문탁의 [대정일검보]와 그를 곁에서 수행했던 좌우쌍사의 [일천마라형], [철화정련]은 삼류무사 세계관에서도 불패삼공으로 통한다. 명교는 교리(대표적으로 금식과 금욕, 특히 성욕의 자제를 통해 초인으로 가는 길이 열린다고 생각했다는 점)와 막강한 무공(구파일방의 고수들이 비무를 청해 서로 겨뤘지만 결국 아무도 이기지 못했다고 한다.)을 통해 교세를 확장해나갔고, 이는 당시 기득권층이었던 구파일방을 자극했다. 결국 구파일방이 당문의 독[13]을 써서 그들을 고립시키고 하나하나를 철저히 뒤쫓아 살해함으로써 명교의 세력을 뿌리 뽑았고, 그걸로도 모자라 율법자들을 만들어 명교의 불패삼공을 뒤쫓았다.

얼음과 불의 노래의 를로르교가 조로아스터교를 모델로 하였다. 마찬가지로 불을 신성시하며 빛과 불의 신 를로르와 어둠과 추위의 "말할 수 없는 거대한 다른 신"이 대립하는 이신론적인 교리를 보인다.

6.1. 그 외 창작물[편집]


무협소설

마교

명교

페르시아 명교

Fate 시리즈

어벤저(3차)

아처(도쿄 1차)

7. 관련 문서[편집]


신화 관련 정보

고대 페르시아 신화의 신들

아후라 마즈다 = 오르마즈드

앙그라 마이뉴 = 아흐리만

스펜타 마이뉴

미트라교

마니교

페르시아

프라쇼케레티



[1] 수호천사 '프라바시(faravahar)'를 묘사한 것. 고대 페르시아에서 자주 쓰였기 때문에 페르시아의 심볼로도 많이 등장한다. 그래서 호메이니 치하의 이슬람 공화국에서조차 국가적 상징으로 허용되었다.

[2] 아르메니아인, 아시리아인, 유대인도 마찬가지 적용을 받음.

[3] 출처 - 페르시아 : 고대 문명의 역사와 보물.

[4] 전무는 몰라도 후무까지는 좀 애매하다. 기독교 정통 교파에서는 이단취급하는 신사도 운동의 영적도해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결국 이원론에 근거하기 때문.(...)

[5] 조로아스터교도 완전한 이원론은 아니다. 결국 어둠의 원리가 패함으로써, 빛의 원리 하에 어둠의 원리가 있는 것이기 때문.

[6] 다만 욥기에서의 묘사는, 조로아스터교처럼 악의 원리를 확실히 하나의 존재로 두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권능 하에 사탄이 초장부터 묶여있는 듯한 묘사다.

[7] 파르시가 유대인 바리새인의 어원이라는 주장이 있었는데 실제론 기원전 2세기 하스몬 왕조 시절 헬레니즘의 유입에 맞서서 이를 거부하며 유대전통을 지키는 무리라는 정체성으로 등장했다.

[8] 근데 기독교와 다른 점은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자라투스트라의 정액이 호수에 보관되어 있다가 호수에서 목욕하는 처녀가 구세주를 잉태하게 되는 것이다.

[9] 구약성경 욥기에 이러한 측면이 나타나 있다. 그런데 이 양반이 이걸 허락하는 바람에 수많은 욥의 자식들과 하인들, 가축들이 끔살의 향연에 휘말리고 말았으니...

[10] 근데 이부분에는 반론이 존재할 수 있는게 원래 창조주였고 태초에 혼자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애시당초 유일신이었다고 할 수 있고, 히브리의 신이라는 것은 우리들을 지켜준다는 의미지 다른 신이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11] 모세오경 성립시기는 여러 학설이 있어서 단순 바빌론 시기로만 볼 이유는 없다. #.

[12] 사실 데바를 우위에 놓는 인도 신화에서도 아수라는 여전히 대단히 강하고 정의로운 존재로 나타나는 때도 많이 있고, 데바 신들은 어째 하는 짓이 정말 비열하고 악랄하다보니 거의 악당에 가까운 짓을 할 때이 많다.

[13] 마치 생물처럼 닿은 것을 모조리 강한 산성으로 변화 시키는 산(酸)의 일종이라고 한다. 이걸 써서 명교 총단의 근방의 우물물들을 모조리 오염시켜 총단을 지키던 명교도들을 굶겨 죽였다는 것.

(출처:나무위키)



C26 – 정치학(Politica) /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les, BC 384 - 322)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고대 그리이스의 학문을 집대성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 관한 저서로, 최초의 정치학 교과서이다. 정치공동체의 국가의 기원과 본질, 민주정, 귀족정, 군주정 등 정치체제의 성격과 장단점, 가장 좋은 나라의 체제, 당시 국가체제들의 비판, 그리고 그 이외의 서양 정치학의 초석이 되는 기본개념과 문제들이 이 책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정치란 무엇이냐가 문제 될 때 항상 다시 논의되고 조회되는 서양 정치철학의 고전이다. 


a. 생애와 작품활동

 만학의 비조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인 플라톤과 함께 그리스 최고의 사상가로, 17세기 말까지 서양지성사의 방향과 내용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플라톤의 최대제자였으나 사상에 있어 스승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이상주의자인 스승과는 달리 현실주의적 경향을 보였는데 이 두 철학자의 긴장과 균형관계는 그리스 철학의 큰 매력이라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신흥왕국인 마케도니아의 궁정의사인 니코마코스의 아들로 부유하게 태어났다. 어릴 적 당시 풍습에 따라 가업을 잇기 위해 해부학 등 생물학 방면의 연구에 흥미를 가졌는데, 훗날 그의 현실적인 사유체제가 형성된 것은 이렇나 유년시절의 영향인 듯 하다. 그의 용모는 키와 눈이 작고, 대머리인데다 말까지 더듬어 보잘것없었는데, 그는 이 같은 신체적인 결함을 보완하려고 화려한 의복을 입는 등 남다른 치장을 했다 한다. 성격적으로는 겁이 많고 우유부단하고 현실도피적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10세 전후에 양친을 잃고 고아가 되어 친척집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에는 호메로스와 플라톤의 작품을 주로 읽었고, 17세 때 아테네에 진출하여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 에 입학하였다. 그는 거기서 학문에 전념하여 젊은 나이에 강의를 맡기도 하였는데, 독서의 폭과 깊이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한다. 스승인 플라톤은 이런 학구적인 제자를 총애하여 간혹 아리스토텔레스가 지각할 때면 그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렸다고 한다. 아카데메이아에서 그는 책벌레 또는 독서광으로 유명했으며, 남다른 노력과 뛰어난 재능으로 점자 자신의 독자적 입장을 개척하기 시작하였는데, 중요한 철학적 문제에 대해 스승과 견해차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는 스승의 학설을 비판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플라톤은 어미젖을 다 빨아먹고 발로 걷어차는 망아지 같다 그를 비난하였다 한다. 그러나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저 유명한 진리와 우애는 함께 사랑할지라도 우애보다는 진리를 더 존중할 것을 경건은 우리에게 요구한다 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사사로운 인정보다는 진리를 수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아카데메이아에서 18년 동안 공부한후 플라톤이 죽자. 플라톤의 조카가 아카데메이아 원장 자리를 상속했다. 그는 곧 아테네를 떠나, 마케도니아 왕의 왕자인 알렉산더를 3년간 개인지도하게 된다. 당시 13세의 왕자는 술마시기, 말타기 등을 좋아했고 성격이 난폭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에게 곧 염증을 느꼈으나, 왕실의 극진한 대우와 왕자의 개심으로 의욕을 내어 정치학, 윤리학, 수학, 생물학 등을 가르쳤다. 그는 알렉산더를 전통적인 그리스 정신의 상징인 호메로스의 작품으로 교육했는데, 알렉산더는 스승에게 배운 일리아드를 항상 머리맡에 두고 읽었으며, 원정중에 신기한 동식물을 보면 스승에게 보냈다고 한다. 알렉산더가 왕이 된 후 동방원정에 나설 준비를 하자 그는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 자신의 학원인 리케이온 을 열고 무보수로 제자들의 교육에 힘썼다. 알렉산더가 보내주는 막대한 연구자금과 연구자료로 리케이온은 아카데미아를 압도하고 날로 번성하였다. 늘어나는 제자들과 함께 학원안에서 함께 식사하고 제자들과 더불어 숲속을 산책하며 학문을 논하였는데 이 때문에 이 학파를 소요학파라 부르게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12년 동안 학문연구에 몰두하여 오르가논 형이상학 정치학 시학 니코마스 윤리학 영혼록 자연학 등 엄청난 저술을 하여 고대 학문체계를 완성하였다. 그의 대부분의 저서는 이때의 강의노트다. 그러나 그를 돌봐주던 알렉산더가 죽자, 아케네 시민들로부터 알렉산더의 측근자로 지목되어 고소당했다. 이에 그는 리케이온을 측근에게 인계하고, 소크라테스를 불경죄로 몰았던 아테네 시민들로 하여금, 철학자들에게 같은 실수를 두 번씩이나 저지르지 않도록  아테네를 떠나 어머니의 고향에 거처를 마련했다. 하지만 1년만에 62세로 세상을 떠났다.


b.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아리스토텔레스는 거의 모든 서양의 학문 분야에 있어 선구자적 역학을 한 백과사전적 인물이다. 정치학을 비롯한 거의 모든 학문이 그에 의하여 학문의 원천을 이루었고, 특히 그의 철학사상은 중세 스콜라 철학에 원용되어 중세를 지배하였다. 


논리학 

그는 (오르가논)에서 논리학을 집대성하고 있는데, 모든 판단에 작용하는 개념들을 10개의 범주로 구분하고 3단논법의 추리형식(연역법의 초기모습)을 체계화함으로써, 바르게 생각하는 방식을 확립하였다.  연역법이란 과학적 탐구방법의 하나로 일반적 원리에서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실을 설명하는 방법으로(후에 데카르트에 의해 비판 받음), 영국의 베이컨은 그의 저서(신기관)에서 이와 대립되는 귀납법을 창시하여 밀이 완성하였다. 


형이상학   

아리스토테렐스는 그의 저서 (형이상학)에서 플라톤과 견해를 달리하였다. 실재란 보편적인 이데아에 있지 않고 구체적인 것에 있다고 주장하고, 형상(플라톤의 이데아)과 질료는 다 함께 중요하며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이 둘이 결합함으로써 비로소 우주에 본질적 성격이 부여되는 것이라 하였다. 


자연학

(생성과 소멸에 관하여) (자연학)등의 저서에서 그는 운동하고 변화하는 사물의 원인 연구를 자연학이라 하면서 여기서 4가지 원인을 들었다. 첫째 질료인(사물이 그것으로부터 생기는 소재) 둘째 형상인(사물이  그것으로부터 형상되어지는 것, 즉 사물의 정의가 되는 것) 셋째 동력인( 그것 에 의하여 사물이 형성되는 원인) 네째 목적인(사물형성의 운동이 그것을 지향하여 이루어지는 목적)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둘째 세째 네째는 자연물에 있어서는 하나이므로 결국 질료와 형상에 의하여 자연물이 이루어지고, 자연의 존재는 질료 내에서 형상이 자기를 실현해가는 생성발전의 과정으로서 파악된다. 질료는 여기서 형상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 즉 디나미스(가능태)로서 궁극적 목적에 따라 파악되므로 궁극적 목적인 엔텔레케이아(완성태), 에네르게이아(현실태)야 말로 자연존재의 우월성을 나타낸다. 


윤리학

만물은 어떤 목표를 향해 움직인다는 목적론적 세계관을 폈던 그는 인간의 윤리적 목표(지고선)을  행복이라 보고, 행복은 중요의 덕에 의해 달성될 수 있다고 보았다. 중요의 덕은 이성의 작용에 의해 얻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이성적인 인간이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라는 그리스 철학의 전통적인 인간관이 그의 철학에 있어서도 변함없이 나타나고 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에 그의 윤리사상이 잘 드러나 있다.


정치학

아리스토테레스는 정치학을 아테네 국가제도에 관한 저술로 정치사상의 체계를 세웠다. 그는 인간은 사회적, 정치적 동물이라고 보고, 인간의 선은 공공생활 속에서 실현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윤리학은 정치학과 분리될 수 없고 정치학의 일부를 이룬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그는 플라톤과는 달리 재산과 가정이 인간생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긍정하였으나.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노예의 존재를 합리화하고 인간 불평등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의 시대는 그리이스 민주주의의 후기에 해당하여 사회적 질서가 불안하였던 때이므로 그는 강력한 1인지배를 희망하였다고 볼 수 있다. 


c. 정치학의 내용

 본래 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처음부터 (강의)할 목적으로 어떤 주제(도시국가)에 대해 일관적으로 집필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 주제에 관련된 문제에 대하여 각각 다른 시기에 이루어진 강의나 논술을 뒤에 편집한 것인 듯하다.


제1권 가족론 : 국가의 정의와 국가의 구성부분으로서의 가족이 탐구된다. 여기에서 그 유명한 인간은 본성상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명제가 등장한다. 이것은 국가가 사람들의 상호계약에 의해 성립된 것이라는 당시의 소피스트적 견해에 반론을 제기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국가의 최초 구성단위로서 가족의 부분, 즉 아버지와 아들, 부와 처, 주인과 노예의 관계 및 가정과 관계되는 재산의 문제가 논의된다.


제2권 이상국가론 : 그의 스승인 플라톤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의 이상국가론을 비판하고 있다. 그는 플라톤과는 달리 철학자와 왕의 기능을 분명하게 나누고 있다. 왕이 철학자가 되는 것은 필요하지도, 유익하지도 않다. 오히려 왕은 참된 철학자들의 충언을 들어야 한다. 나아가 스파르타,크레타, 카르타고의 국가제도를 비판한다.


제3권 시민과 헌정질서에 대한 이론 : 국민의 정의, 국민의 덕, 그리고 이 덕으로 보아 국민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정의하고 있다. 국가의 목적은 국가 공통 이익을 실현함에 있다. 이 견지에서 3가지의 선한 정체와 타락한 3가지의 정체를 논하고 있다. 선한 정체는 왕정, 귀족정, 시민정(적절한 민주정), 옳지 못한 정체는 참주정, 과두정, 극단과격한 민주정 등을 들고 있다. 좋은 통치체계는 지배자들이 자유시민 전체의 이익에 따라 통치하는 반면, 나쁜 정치체제에서는 단지 지배자의 이익만이 관심사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제4권 실제적 헌정질서와 변형 : 정치학이 다룰 과제로서 주요한 정체의 종류와 여러가지 형태를 살펴보면서 보통국가들에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최선의 정체와 특수사정아래서의 최선의 정체의 조직방법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제5권 혁명의 원인과 헌정질서의 변화 : 정체변혁과 그 일반적 원인, 각 정체의 변혁에 있어서의 특수원인과 그 변혁의 방지책 등이 논의 되고 있다.


제6권 안정질서를 위한 민주정치와 과두정치의 건설방법 : 민주제와 과두제의 여러 형태와 특징 및 각각 정당한 조직방법을 적고 있다.


제7권 정치적 이상과 민주정치와 과두정치의 건설방법 : 그는 국가의 목적을 전제로서의 공동체의 선을 보장하는 것임을 재확인한다. 최선의 정체는 그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 가정 선하게 행동할 수 있는 사회다. 그러나 행복은 덕성 있는 행동에 근거하며, 그러기에 사람이 얼마만큼 행복을 누릴 수 있는가는 그가 덕을 얼마만큼 실행할 수 있는 가에 달려 있다고 한다. 그래서 전체로서의 국가의 목적은 그 성원들로 하여금 덕을 위한 그들의 갖가지 능력들을 충족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상상할 수 있는 최선의 국가가 아니라, 실현 가능성을 가진 최선의 국가를 묘사한다. 그는 시민의 수, 국가의 크기와 본질, 도시계획 및 시민권을 향유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국가의 계급들간의 관계들이 어떤 원리에 의해서 통치되어야 하는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제8권 청소년의 교육 : 교육의 문제, 특히 음악 및 체육에 관하여 논하고 있으나 이것은 미완이다.


 8권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책은 제 1에서 3권, 4에서 6권, 7에서 8권으로 그룹을 이루고 있는데 그들 사이에는 다소 중복된 부분과 의견의 차이가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씌어진 시대의 차이와 그 동안의 저자의 사상적 발전 때문인 듯하다. 그 주제와 관한 연구방법은 주로 실증적, 귀납적이기는 하나 동시에 형이상학적, 윤리학적 이론에 의하여 방향을 결정되어 있다. 또한 이 저작은 정치에 관한 최초의 체계적 저술로 평가되며, 근세에 와서는 국가계약설이 부활될 때까지 고대와 중세를 통해 지배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렇다고 현대에 와서 그 의미가 완전히 퇴색한 것은 아니며 구미 대학에서는 여전히 텍스트로 사용되고 있다.


d. 비판적 평가

 플라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아리스토텔레스는 장년기를 지나면서 점차 독자적 세계를 구축해나갔다. 같은 철학을 둘러싸고 이들은 독자적인 관점과 생각을 자기 나름대로 발전시켜나갔다. 이들 스승과 제자 사이의 사상적 대립은 라파엘로의 그림 아테네 학당을 보면 플라톤은 하늘을 가리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을 가리키고 있는 장면을 통해 여실히 알 수 있다. 플라톤이 이상주의자, 이론원, 이데아계와

현상계, 전체주의적 귀족정치주의자인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주의자, 일원론, 형상과 질료 개인지향적 민주주의자의 성격을 가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에서 플라톤으로 이어지는 그리스철학의 완성자라는 점, 논리학의 집대성자, 중용에 의한 행복의 실현, 정치학, 자연학 등 여러 학문들을 체계화했다는 점, 그리고 빈곤은 범죄와 혁명의 양어버이라는 현대적인 사고를 가졌다는 점에서 그의 권위는 중세로부터 르네상스를 거쳐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사상계를 지배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노예제도를 인정하고 여성은 본래 열등적 존재라고 믿었던 점 등은 그도 역시 그가 속한 시대적 사고와 인습의 벽을 넘지 못했음(곰곰히 생각 해 볼 만함)을 보여준다. 그의 광범위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은 근대에 이르러 베이컨, 갈릴레이 등에 의해 불가피하게 수정을 받는 등 그의 사상의 일부는 현대에 상당히 뒤지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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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telecheia ]

요약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용어인 ‘완전현실태(完全現實態)’.

그 의미는 ‘목적에 있어 있는 것’, 즉 목적을 달성하여 완전한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한다. 때로는 현실태(現實態:에네르게이아)와 같은 의미로 쓰인다.


육체에 비해 영혼은 가능적으로 생명을 갖고 있는 자연물체의 최초의 완전현실태라고 한다(데 아니마2:2장). 현실태와 같은 뜻으로 쓰일 경우, 예컨대 ‘반절의 선(線)은, 가능태(可能態)로서는 선 전체보다 앞이요, 완전현실태(반절이 된 선의 상태)에서는 뒤’라고 한다. 따라서 개개의 사물은 가능태에 있을 때보다도 완전현실태일 때야말로 사물 그 자체라고 한다(《자연학》 제2권 제1장).


현실태와 구별된 완전현실태는 모든 운동의 시원으로서 순수형상이라든가 제1원리라든가 부동(不動)의 동자(動者)가 이에 해당하며,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사유(思惟)의 사유로서 바로 신(神)이라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엔텔레케이아 [entelecheia] (두산백과)



니코마코스윤리학

Éthika Nikomacheia

구분

철학서

저자

아리스토텔레스

시대

고대 그리스

전(全) 10권. 세계 최초의 체계적인 윤리학서이다. 학두(學頭:교장)시대의 강의 초고(講義草稿)이며, 그의 만년의 가장 원숙한 사색을 나타낸 책이다. 아들 니코마코스가 편집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불린다. 원리론(제1권∼제3권 5장)과 덕의 현상론(제3권 6장∼제10권)으로 이루어졌다.


윤리학은 모든 행위가 목적으로 하는 선(善)을 연구하는 것인데, 최고선(最高善)은 국가(폴리스)의 목적이므로, 정치학(폴리티케)과 직결된다. 인간적인 선은 개연적(蓋然的)이므로, 윤리학도 자연학이나 형이상학(形而上學)과는 달리, 개연적인 결론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학문의 청강자는 교육의 경험이 있는 자라야 하며, 너무 젊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또한 선은 행복이라는 논리에 따라 우선 행복이 우선 논의된다(제1권 4장 이하와 제10권). 행복이란 자족적(自足的)인 작용, 즉 덕(德)에 따르는 영혼의 활동을 가리킨다. 윤리적으로는 초과와 부족을 용납하지 않는 성격 상태, 즉 중용(中庸)을 본질로 하고, 용감 ·절제(節制) ·정의 기타 여러 가지 중용의 표본을 들어 현실적으로 또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제6권에서는 지성적 덕(知性的德) 중에서 이성(理性)이나 지혜(知慧)와는 다른 사려(思慮:프로네시스), 특히 정치적 사려를 강조했다. 제7권 후반과 제10권 전반에서는 쾌고(快苦)와 선악(善惡) 및 덕의 관계를 보다 발전한 형식으로 논하였으며 인간의 쾌(快)는 지복(至福)한 사람의 활동을 완전한 것으로 만든다고 주장하였다. 제8,9권의 우애론(友愛論:필리아)은 덕론(德論)을 보충하고 독자적인 이론을 전개하여 후대(T.아퀴나스 등)에 영향을 주었다. 또 제10권 종장(終章)에서 청소년의 덕의 지도에서 법률의 필요성을 말한 점도 주목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니코마코스윤리학 [─倫理學] (두산백과)



C25 – 천일야화(Alf Laila wa Lailai, One Thousand and One Nights)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아라비아, 페르시아, 인도, 이란, 이집트 등지의 문화를 솔직담백하게 엮어낸 전숭문학의 총화이자 사라센 문화를 대표하는 환상적인 설화 모음집. 15세기경 카이로에서 채록된 천일야화는 페르시아를 배경으로 하는 구전의 아랍계 이야기 모음이다. 아내의 부정에 분노하여 매일 신혼을 치르고 신부를 죽이는 일을 반복하는 왕이, 셰헤라자데라는 처녀가 들려주는 재미있는 이야기에 빠져 천일을 보내게 된다는 큰 줄거리를 뼈대로, 꿈과 로맨스를 찾아가는 환상과 대모험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a. 천일야화 의 성립과정

우리들에게는 아리바바와 40인의 도둑 알라딘과 요술램프 신드바드의 모험 등으로 친숙한 천일야화는 설화문학의 최고봉의 하나요, 세계 기서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그러나 그것이 몇 사람에 의한 합작인지, 아니면 한 사람에 의한 것인지 오늘날까지 알 길이 없지만, 아라비안 나이트 라는 제목에서 암시하듯이 아라비아 문화, 즉 이슬람 문화에 의해 형성된 책이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이슬람 문화(사라센 문화)는 10세기를 전후하여 아라비아 반도의 성지 메카에서 발생했으며, 아바스 앙조의 수도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중동일대에서 번영하여, 중세의 세계문화사에 독자적인 기반을 구축함에 따라 아라비아 문학도 아울러 발달하게 되었다. 유럽에 이 작품을 가장 먼저 번역 소개한 사람은 프랑스의 갈랑교수로, 그는 원작자는 한 사람일 것이란 견해를 피력했다.

이밖에 또 이 작품의 연구가로 유명한 레인 교수는, 이 작품의 창작방법으로 보아 한 사람이 집필하여 다른 또 한 사람이 완성시킨 것이거나, 두 사람이 협력하여 창작했을 가능성 짙다는 합작설을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아직 작가가 누구이며, 또 한 사람의 작품인지 또는 공동 작품인지조차 명확하게 규명이 되지 않고 있다.

이 작품의 기원에 대해서도 상당히 많은 설이 있지만, 오늘날에는 대체로 페르시아의 오랜 설화집 하자르 아프사나 (천의 이야기)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그 원본은 한 권도 현존되고 있지 않지만, 상당히 오래 전부터 아라비아의 문인들 사이에서 읽혀졌던 것 같은데, 아라비아 어로 번역된 것은 서기 850년경으로 추정된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 작품이 태어난 연대나 작자 혹은 편자를 확정지을 수는 없지만, 대체로 그 기원을 3-7세기경 사산 왕조가 번영하던 시기에 페르시아 민중들 사이에 유포되었던 이야기에 두고 있다. 그후 페르시아가 아랍 사람들에게 정복당한 뒤, 이 책도 아라비아 사람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고, 중세에 바그다드가 몽고군에 의해 점령당하게 되기까지 여러 가지로 수정 보완되어 보존되었다.

원래 이야기의 근원은 인도에 바탕을 두었으나, 페르시아를 거쳐 아라비아에 전해지면서, 이슬람 교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중세 페르시아에 있던 하자르 아프사나를 기초로 하여 십자군시대를 다루는 내용까지 있는 것으로 보아, 최종적으로 14-5세기에 이르러 편찬되었던 것 같다.

이 매력적인 이야기의 집대성이 유럽에 알려지고, 그리고 오늘날 세계문학 중 하나로 꼽히게 된 것은 프랑스 인 갈랑이 18세기 초엽에 프랑스 어로 번역해서  천일야화를 간행하고부터다. 그는 시리아 여성 한나로부터 듣고 쓴 이야기도 여기에 넣었는데, 여기에는 잘 알려진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알라딘과 요술 램프 등이 포함되어 있다. 갈랑의 이 번역은 유럽. 미국 등 각국에서 번역판으로 만들어졌다. 번역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영어로 번역한 버턴 판으로, 알리바바. 알라딘. 신드바드의 이야기도 있는데, 그것은 원래 어른들을 위한 작품이다.

버턴은 천일야화 의 현장무대를 찾아 다니며 아직 발견되지 않은 이야기들을 채집 분류하는 동시에, 이 작품이 지니는 의의를 직접 체험했다. 천일야화가 오늘의 완벽한 모습을 갖게 된 것은 버턴의 불굴의 의지와 피나는 노력에 의한 것이다.


b. 주요 등장인물

샤푸리야르 왕: 천일야화를 듣는 사람. 아내인 왕비의 불륜을 목격하고는, 여성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밤마다 한 처녀와 동침한 뒤, 그 다음날 아침이면 처녀를 처형한다. 그러나 셰헤라자데의 1001일간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 셰헤라자데와 결혼한다.

샤자만 왕: 샤푸리야르 왕의 동생. 아내와 형수의 불륜을 알고 괴로워하나, 후의 셰헤라자데의 동생 두냐자데와 결혼한다.

셰헤라자데: 천일야화를 이야기 하는 사람. 대신의 큰딸로 샤푸리야르 왕의 신부가 되어, 밤마다 이어지는 이야기를 왕에게 들려준다. 그런 동안 왕의 세 아들을 낳고 마침내 정식왕비가 된다.


c. 작품의 주요내용

샤푸리야르 왕과 그의 아우 이야기가 전체 줄거리가 되고 있다. 인도와 중국에 군림하고 있는 사산 왕조의 샤푸리야르 왕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마르칸드의 왕이자 아우인 샤 자만에게 보고 싶으니 와주었으면 좋겠다고 사자를 보낸다. 샤자만은 기꺼이 이에 응하고 여행길에 나섰으나, 잊고 온 것이 생각나 도중에 궁전으로 돌아와 보니 왕비가 흑인노예와 부정한 짓을 하고 있었다.

이들을 죽이고 형 곁으로 갔으나, 형마저도 그의 왕비로부터 배반당한 것을 알고 마음의 상처를 달래다가, 형도 역시 왕비를 죽이고 형제가 같이 여행길에 나선다.

그러나 여행길에서도 여심의 무서움을 보고 돌아온 샤푸리야르 왕은 그후에도 세상의 여자를 믿지 못했다. 이후부터 왕비를 맞이하기만 하면 하룻밤을 지낸 다음 날 아침에 죽여버렸기 때문에 젊은 여자들은 거의 왕도를 떠나버렸다. 드디어 처녀라고는 대신의 두 딸 셰헤라자데와 두냐자데밖에 남지 않았다. 이때 재상의 총명한 딸 셰헤라자데는, 이제 자기에게 닥칠 운명을 피하려 하지 않고 자진해서 왕에게 시집을 와, 여동생의 협력을 얻어 첫날밤부터 재미난 이야기를 시작한다.

날이 새자 셰헤라자데는 이야기를 클라이맥스에서 중단한다. 왕은 재미있는 이야기의 귀추가 궁금하여 이 신부를 죽일 것을 하루 하루 연기하는데, 그칠 줄 모르는 풍부한 갖가지 이야기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계속되어, 이야기에 끌린 왕은 천일밤 을 하룻밤처럼 지낸다. 

마침내 천하룻밤의 이야기가 모두 끝난 후 셰헤라자데는 침묵에 잠긴다. 이때 옆방문이 열리고 유모가 한 사내아이를 안고 들어온다. 셰헤라자데는 그 아이를 받아 안고  대왕이시여, 이 아이는 대왕의 소생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고 왕에게 탄원한다. 왕은 아이를 보고 울먹이면서 셰헤라자데에게  그대는 나의 왕비이니라 라고 이야기한다. 왕은 그후 마음속으로 총명하고 영리한 셰헤라자데를 사랑하게 되어 행복한 여생을 보낸다.


 알라딘과 요술램프

중국 어느 도시에 사는 가난한 소년 알라딘이 서역에서 온 요술쟁이에 의해 지하 보물창고에 넣어져 요술램프와 반지를 손에 넣고, 그것을 이용해 부자가 되고 공주를 아내로 맞으며, 뒤에 왕위를 계승한다는 파란만장한 내용이다. 원전에는 없는 내용이어서 갈랑의 창작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정직한 알리바바는 40명의 도적단이 보물을 감춘 동굴을 발견하여 큰 부자가 된다. 이로 인하여 도적들이 노리지만, 여자 노예의 기지와 용기로 이들을 물리친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 역시 원전에는 없고, 갈랑의 창작인 듯하다.


 신드바드의 모험

신드바드의 항해담은 바그다드에 사는 신드바드라는 가난한 짐꾼이 어떤 인연으로 같은 이름의 부호 응접실에 초청되어, 7회에 걸친 이상야릇한 바다의 모험을 듣게 된다는 줄거리다. 그 내용은 그리스 인이나 아랍 인 또는 아랍 인의 해상기담을 흥미진진하게 엮어나감으로써 결코 가공의 이야기가 아니며, 당시의 지리 지식에 근거를 둔 부분이 많다.


d. 감상 및 문학사적 의의

이 작품은 우선 처음 이야기부터 체인스토리 형식을 빌렸으며, 순 페르시아적인 민화를 순 아라비아적인 환경에 적응시켜서, 윤색도 하고 개작도 했다. 또한 오랜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주로 바그다드나 카이로 근처의 민화를 계속 집어넣어 내용을 풍부하게 하여, 드디어 오늘날과 같은 방대한 민화집이 성립된 것이다. 이 책의 두드러진 특징은 그 내용의 다양함과 풍부함인 동시에 인생의 온갖 측면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점이다. 등장하는 인물도 역사상 실제의 사람들, 가공적인 남녀, 선인과 악인, 미인과 독부, 천사와 요정 등 실로 천태만상이다.

이 이야기에는 180여 개의 장편에 따로 짧은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어 그 숫자를 세기가 어렵고 분류하기가 쉽지 않으나, 내용에 따라 대별하면 다음과 같다.


 연애담

이중에는 환상세계의 연애담도 있고 역사상 실재한 인물들의 사랑이야기도 있다. 한 젊은이가 어딘가 먼 나라에 있는 미인의 말을 듣고 그리움에 못 견디어 가지각색의 위험을 겪으면서도, 마침내 상대를 찾아 결합한다는 줄거리가 여럿 있으며, 이것들은 대개가 페르시아 기원의 것이다. 또 고대 아랍인들간에 전해진 연애담, 예를 들면 연인 라이카가 그리움에 빠진 나머지 미치광이가 되었다는 마주눈의 애처로운 이야기 등처럼, 아바스 왕조의 수도 바그다드를 무대로 벌어지는 사랑의 사연도 하나의 장르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대개가 연인끼리 고생을 겪은 뒤 유력한 은인의 도움으로 결합되다는 줄거리이다.


 범죄담

도적. 살인 등의 이야기가 중심이 된 것으로 탐정. 추리 등의 줄거리가 있는 한편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과 같이 착한 사람은 흥하고 악한 사람은 망친다는 권선징악의 사상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도 있다. 그러나 알리바바 이야기와 알라딘과 요술램프 등은 갈랑이 소개하고부터 세상에 알려졌지만, 대개의 아랍어 원전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출처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범죄 줄거리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것은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의 바이바르스 대왕과 16명의 경비대장의 이야기 라는 것으로, 카이로의 경비대장들이 제각기 체험한 도둑잡기 이야기를 왕에게 보고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여행담

 여러 나라의 진귀한 이야기 도 이 가운데 들어 있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것은 뱃사공 신드바드라든가 놋쇠로 된 성 은 스페인의 서쪽 끝에 놋쇠의 도시가 있으며, 이를 둘러싸고 있는 같은 금속으로 된 성벽이 있었다는 말은 아랍 사서중에도 기록되어 있다. 


 신선담

이 이야기 중에는 아랍 사람이 귀신이라 생각하는 신의 일족이 활약한다. 그들은 빛으로 만들어진 천사와 흙으로 빚어진 인간의 중간적 존재로, 알라에 의해 불에서 창조되었으며, 변화가 자유자재이며 또 공중도 날 수 있으나, 사람과 마찬가지로 죽음이 있고 남녀의 구별도 있으며, 성질에도 선악이 있다고 되어 있다. 그 일족 중에는 거대한 이리프트라든가 식인귀 구르 등도 있다. 샤푸리야르 왕과 그의 아우가 여행중 어떤 해안에서 미인을 넣은 괘를 머리에 이고 나오는 이리프트를 만나는 이야기가 나온다. 또 상인과 마왕 에서는 상인이 던진 대추야자씨에 우연히 지나가던 마왕의 아들이 맞아 죽었기 때문에, 마왕은 상인을 죽이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세 명의 장로가 각각 기구한 일신상의 지나온 일을 말하며 마왕을 기쁘게 한 뒤, 그를 구한다는 줄거리도 있다.


이처럼  천일야화 는 긴 세월을 두고 성장하여 이루어진 일대 설화집으로 아랍어로 되어 있으며, 위에 든 것 외에 이 범주에 속하는 짧은 비유, 사화. 일화 등이 적어도 100여 개의 긴 설화 중에 끼여 있다.

이렇듯 한 독립된 이야기에서 다른 또 다른 독립된 이야기를 줄줄이 교묘하게 이어가는 프레임 스토리(frame story)식으로 180여 편의 장편 스토리가 전개된다. 이러한 프레임 스토리의 구성법은 훗날 데카메론이나 캔터베리 이야기 같은 걸작에도 크게 영향을 준 바 있거니와, 그 내용 또한 끝없는 낭만과 꿈, 그리고 모험의 세계를 그리는 독자들에게 한없이 넓고 화려한 환상의 길을 열어주었다.

특히 아랍 인 특유의 유머, 폐부를 찌르는 야유, 거리낌없는 폭소 등 온갖 희로애락이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다. 특히 천일야화 에서 그대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점은 성애생활의 적나라한 묘사이다. 그러나 이러한 장면들이 매우 자연스럽고 천진난만하여 조금도 추한 감을 주지 않는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세상의 다양함과 풍부함은 이제 아랍 인들만의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것이다.

한편 이 설화집의 동양적 환상은 예술가들을 자극하였다. 들라크루아, 뒬라크 등의 그림과, 림스키코르사코프, 스트라빈스키 등의 음악에도 영향을 미쳤고 영화로도 자주 제작되었다.



C24 – 기탄잘리 (Gitanjali) /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1861-1941)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어느 가을날, 노을진 하늘을 바라보며 음미하고 싶은 한 권의 시집으로, 동양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 타고르의 노벨문학상 수상작. 인도의 시성으로 일컬어지는 타고르가 1909년에 벵골어로 출판한  기탄잘리(한 묶음의 노래) 는 제목 없이 번호만 붙인 103편의 종교적인 서정시 모음이다. 시인 자신이 영역하고, 예이츠가 서문을 썼다. 출간과 동시에 선풍을 일으켜 1913년에 노벨상을 받게 되었고, 김억의 번역본(1923)으로 우리 나라에도 소개되었다. 영혼의 영원한 자유는 사랑 속에, 위대함은 작은 것 속에, 무한은 형태의 구속 속에 있음을 노래한다.


a. 생애와 작품활동

인도의 시인. 사상가. 교육가. 음악가. 화가. 사회운동가 등 실로 다방면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20세기의 기적적 인물이다. 인도 벵골의 천 년을 헤아리는 오랜 바라문 계급의 명문 타고르가의 14번째 아들로 캘커타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그의 가계에선 많은 철학자나 예술가들이 배출되었는데, 특히 그의 부친 데벤드라나트는 평생을 종교개혁에 바쳐, 근대 인도의 정신적 부흥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부친을 따라서 히말라야 산맥 또는 아름다운 명승지를 다니면서 자연에의 신비를 엿볼 수 있었던 그는 이러한 정신적. 예술적. 학문적 분위기, 아름다운 인도의 자연 속에서 성장했다. 11세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그는 15세 때 형들과 함께 잡지를 편집, 17세 때 런던에 유학, 법률을 전공했으나, 1년도 못 채우고 귀국했다.

19세 때 첫 시집을 완성하였고, 1901년 부친이 명상의 장소로서 구도자에게 개방했던 볼푸르 숲 속의 샨티니케탄(평화의 집)을 물려받아, 청소년의 교육을 위한 학원을 설립, 오랜 전통에 기초하여 개성을 일깨우는 교육사업에 전념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타고르의 동서문화의 새로운 종합 을 이념으로 하는 비슈바바라티대학으로 발전, 인도 지성의 요람으로 수많은 지식인을 배출한 국립 종합대학이 되었다.

인간과 자연의 동화를 통한 전인교육의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 설립한 이 산타니케탄의 생활에서, 청소년들과 함께 공부하고 유희하면서 이 학원의 성장은 곧 나의 성장 이라고 그들의 인간완성을 위해 노력했다.

타고르로 하여금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게 한 시집 기탄잘리와 생명의 실현(The Realisation of Life)이란 유명한 철학서도 바로 이 샨티니케탄에서 이루어졌다.

1913년 기탄잘리 로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그의 예술적 재능은 연극. 음악에까지 발휘되어 인도의 국가도 그의 작품이며, 그 자신이 출연, 작곡하여 인도에 이른바 샨티니케 풍의 가무연극을 발달시켰다.

제1차대전시에는 매우 상심하였고, 대전이 끝남과 동시에 세계는 열광적으로 이 시성을 추앙하여, 그의 시와 사상 속에서 새로운 복음을 찾고자 하였다. 그는 여러 차례 일본을 방문하여 열광적인 환대를 받았다. 소련도 방문했지만 결코 유물론에 흔들리지 않았다.

제2차대전이 일어나자 간디와 손잡고 직접 반영운동을 하다가, 간디의 양해하에 그는 문화운동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두 사람은 서로 인도 근대사의 위대한 영혼으로 서로 존경을 아끼지 않았다. 간디의 교육정신은 타고르에게서 오고, 타고르의 평화이념은 간디의 철학과 공통된 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은 정치적 현실운동의 지도자요, 한 사람은 문화적 정신운동의 영원한 영도자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타고르는 1941년 80세를 이승의 고비로, 숭고한 이상이 무모한 전쟁과 유혈 속에서 무참히 무너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눈을 감았다.

주요작품으로는 기탄잘리의 어린이판이라 할 수 있는 초승달, 지상에 바치는 전원적인 사랑의 시라 할 수 있는 정원사, 신에게 올리는 사랑의 기원을 담은 열매 모으기, 희곡집인 우체국 등이 있다.


b. 시대적 상황과 그의 작품세계

타고르가 생존했던 인도는 정치적으로 영국의 식민지하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인도인들은 창조력을 잃고 민족적 자유의 상실을 거의 자각하지 못하고, 문화적으로는 소수의 비타협자들을 제외하고는 서양의 모방자와, 과거의 전통과 교리에서만 위안을 찾고자 하는 보수파들이 득세하는 상태였다. 종교적으로는 힌두교가 오랜 인습에 얽매여 낡은 봉건의 탈을 못 벗고 있었고, 한편에서는 바라문 교가 새롭게 등장하여, 오래된 인습을 깨뜨리고 새 시대를 열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사회적으로는 신분제가 여전히 존속하여, 국민들 사이의 동질감과 일체감이 형성되지 못한 상태였는데, 이 4성의 구별은 불교의 평등주의에도 불구하고 계속 심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암흑의 세계에 드디어 한 줄기 서광이 비추기 시작했다. 타고르의 탄생이 그것이다. 자신의 말을 빌면 자기의 삶 속에 세가지 흐름이 합류하였다고 한다.

첫째는 숭고한 지성인인 로이(Roy)에 의해 도입된 종교적인 흐름이다. 이는 매우 개혁적인 것으로, 과거의 인습과 구태의연한 형식에서 벗어나면서, 한편으로 과거의 가시덤불 속에서 이상의 싹을 찾으려는 르네상스적인 시도였다.

둘째는 벵골 문학의 개척운동이다. 그는 당시 문학이 창조력을 잃었다고 진단하고, 문학을 오랜 잠에서 깨워야 하며 문학이 새로운 힘과 운치로 넘칠 때, 그것은 아름다움의 비전을 제시해줄 것으로 기대했다.

셋째는 국민운동이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영국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것으로, 그들 스스로의 사상과 전신의 힘으로 세계를 세우려는 광범위한 민족운동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하에서 그가 고민하고 열렬히 추구하고 염원한 것은 오직 인도의 자유와 민족의 해방, 동양의 발전, 나아가서 동서양의 융합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보낸 그의 작품생활은 대개 4시기로 나누어진다.


 제1기

15세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여 벵골의 셸리(Shelley)라고 일컬어진 시대다. 최초의 시집은 바누 신하로, 익명으로 출간했으나 고전 스타일을 벗어나지 못했고, 저녁의 노래 아침의 노래를 거쳐 초기 서정시의 절정을 이루는  장조와 단조를 낸다.


 제2기

부친에게서 영지인 셀리다 관리의 위임을 받아, 자연과 가난한 농민생활과 접촉하며, 사회악과 인습에 도전하는 한편, 갠지스 강 유역의 대자연의 품에 안겨 명상을 일삼았다. 이 시기를 사다나 시기라고 하는데, 여기서 내던 잡지인 <사다나>에서 유래했다. 이 시기에 희곡 제물 치트라 등이 나오는데 초기의 서정세계에서 벗어나, 인생의 현실과 사회고발, 신에 대한 관심이 엿보인다.


 제3기

1901년부터 벵골 평론을 내면서부터 시작된다. 1905년에 영국의 벵골 분리정책에 항의하여, 펜을 휘둘러 국민의 자각을 촉구한다.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고라와 힌두교의 가정생활을 비판한 운명의 난파, 시집 교차로 등이 있다. 그러나 그의 본령은 시인인지라, 간디와 함께 하던 정치활동을 중단하고 샨티니케탄으로 가서 숲속에서 고독한 명상을 하며 삶의 심층을 더듬는다.

편협한 국수주의를 지양하여 영혼을 보편의 세계로 유도하고, 삶의 다양 속에서 영원한 하나됨을 추구하는 경건한 종교시인으로서의 예술가의 길을 지향한다. 사랑과 평화의 국제주의적 이상에 입각한 교육가로서의 사업에 헌신한다.


 제4기

1908년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두 아들 역시 계속해서 잃는다. 실의와 무상과 고독 속에서, 그는 기탄잘리 암실의 왕 우체국 등으로 대표되는 샨티니케탄(Santiniketan) 시대가 열린다. 1912년 2차 영국방문을 계기로 그는 동방의 시성으로 세계에 알려지고, 다음해에 노벨상, 또 다음해에 영국왕실에서 작위를 받는다. 그러나 1919년 암리차르에서의 대학살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반납했다. 그후 샨티니케탄에 세운 작은 학교를 사랑과 평화의 국제적인 문화의 중심이 도는 대학으로 키우는 데 헌신한다.


c. 기탄잘리 의 내용

벵골인의 정서로 아름다운 영혼을 노래한 이 작품집은 1909년에 발표된 벵골 어판에는 157편이 수록되었고, 1912년 작자가 직접 영역한 영어판에는 103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 영역판에는 예이츠가 서문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에서는 1923년 김소월의 스승인 김억에 의해 읽으라, 그러나 씹어서 읽으라 라는 역자의 말과 함께 번역. 소개되어 만해 한용운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기탄잘리라는 제목은 평화의 노래로 번역되었지만, 기트는 노래란 뜻이고, 안잘리는 합장의 뜻으로 인간과 신, 혹은 자연과의 합일의 경지를 노래하고 있다. 기탄잘리는 수록된 시마다 제목 대신 번호가 붙어 있는 것이 독특하다. 한편으로서의 독립된 뜻도 있지만, 일종의 연작시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생과 사의 문제, 그리고 인간의 시에 대한 경건한 마음과 인간의 종교적인 면의 불가피성을 노래하고 있다. 위대한 사상은 죄악의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여기 수록된 시편들을 통해서 감지할 수 있다.

이 시는 애인을 그리는 사랑의 순정으로, 신을 사모하고 신을 존경하는 감동의 서정시요, 종교적인 기도시다. 또한 영국의 속박에서 시달리는 조국 인도의 참상과 영광을 노래한 애국시요, 민족적 정열의 시다. 또 생사고뇌의 천태만상을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해 너무나도 가슴 아프게 표현한 서사적인 시요, 동시에 죽음에 임하는 마음의 자세와 그 뜻을 나름대로 풀이하는 종교적인 철학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신앙인은 자기 신앙의 뛰어난 표현을 여기서 본받을 수 잇고, 또 모든 문화 관계자는 시상의 극치를, 일반인은 생활의 목표와 행동의 지침 및 이념을 여기서 찾을 수 있으며, 전문연구가는 동양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시각을 얻을 수 있다.


 1

임께서 이 몸을 무한하게 하셨나이다. 이것이 임의 기쁨입니다. 연약한 이 그릇을 비우고 비우시어, 항상 새로운 생명으로 채우시나이다. 이 가냘픈 갈대피리를, 임은 산을 넘고 골짜기를 넘어서 가져오시어, 영원히 새로운 멜로디를 불어 넣으셨나이다. 불사의 임의 손길이 닿자, 이 가냘픈 가슴은 기쁨에 좁은 울이 터져,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말을 하나이다. 임의 무궁한 선물은 극히 작은 이 손을 타고 오나이다. 세월이 흘러도 임께서는 끝없이 퍼붓건만, 아직도 채울 곳은 남았나이다.


 23

사랑의 여행을 하시느라, 그대는 이 폭풍이 몰아치는 밤에도 밖에 계시나이까? 벗이여! 하늘은 절망에 허덕이는 자처럼, 으르렁거리나이다. 이 몸은 이 밤에 잠 한잠 이루지 못했나이다. 몇 번이고 문을 열어 어둠 속을 내다보았나이다, 벗이여! 제 앞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나이다. 임이 가시는 길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나이다. 저 푸른 강, 어느 어슴푸레한 기슭에, 저 험한 숲 어느 먼 끝에, 또 어둠 속 어느 어지러운 구렁을 지나 그대는 이 몸을 찾아오고자, 길을 더듬어 오시나이까, 벗이여?


46

얼마나 먼 옛날부터 임은 이 몸을 맞이하고자, 가까이 또 가까이 오고 계시는지 알 수가 없나이다. 임의 태양과 별은 나 몰래 영원히 임을 가리어둘 수는 없나이다. 수많은 아침과 저녁마다 임의 발길은 귀를 울려왔고 임의 전령은 내 가슴 속에 찾아와, 은밀히 나를 불렀나이다. 오늘은 어인 일로 내 삶이 이다지도 흥분하는지 알 수가 없나이다. 떨리는 기쁨의 느낌이 가슴속을 스쳐갑니다. 마치 세월이 내일을

끝마치게 하는 듯도 하나이다. 그래서 이 몸은 공기 속에서 임의 아리따운 모습의 어렴풋한 향기를 맡나이다.


95

내 처음으로 이 생명의 문을 건너던 순간을 깨닫지 못하겠나이다. 한밤중 숲속에 핀 꽃봉오리와도 같이, 이 거대한 신비로 향하여 이 몸을 열게 한 힘은 무엇입니까? 날이 밝아 광명을 바라보는 순간에, 내 이세상의 낯선 사람이 아님을 깨달았나이다. 이름도 형태도 없고, 또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나를 낳은 어머니의 모습으로, 그 팔에다 나를 안았나이다. 그럴지라도 죽으면 똑같이 미지의 것이, 일찍이 알려진 바나 다름없이 나타나리다. 그리고 내 이 생을 사랑하는 까닭에, 죽음도 사랑해야 할 줄 아나이다. 어머니가 오른편 젖에서 아기를 떼어놓으면, 아기는 소리쳐 웁니다. 바로 다음 순간 왼편 젖을 찾아내어 위안을 받으며.


103

임에게 한 번 인사를 올림으로써 내 주여, 모든 내 감각이 손을 뻗쳐 임의 발 앞에 있는 이 세계를 어루만지게 하여주소서, 아직 떨어지지 않는 소나기의 짐을 지고 나직이 떠 있는 칠월의 비구름과도 같이, 임께 한 번 인사를 올림으로써 온 이내 마음이 임의 문 앞에 머리를 숙이게 하여 주소서. 이내 모든 노래로 하여금, 갖가지 다른 가락들을 한줄기로 모아 임께 한 번 인사를 올림으로써, 침묵의 바다로 흘러가게 하여 주소서. 임에게는 한 인사로, 낮이나 밤이나 그들의 산에 있는 둥지로 되돌아 날으는, 향수에 젖은 학의 떼처럼, 나의 온 생명으로 하여금 그 영원한 안식처로 항로를 취하게 하옵소서.


d. 감상 및 문학사적 의의

 기탄잘리에 서문을 썼고, 또 감히 옥스포드 앤솔러지에 식민지 시인의 시를 넣어 편집한 예이츠의 말처럼, 타고르의 문학은 누구나 읽지 않을 수 없는 마력을 지니고 있으며,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세계를 깊이 파헤치고 들어가, 우리 개인의 세계를 발견하게 된다. 실로 인간존재의 핵심에서 우러나오는 음악이요, 이미지라 할 수 있다. 근대시인에게서 보기 드문 조화와 성숙에 이르는 길잡이로서, 그의 말 하나 움직임 하나가 모두 시요, 아름다움이요, 지혜다. 그의 시혼은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인도의 지혜의 정수에서 흘러나와, 유럽의 근대문명의 정신과 부딪쳐 일어나는 불꽃이며, 동양과 서양을 오묘하게 조화시킨 찬란한 꽃이라 할 수 있다.

최대의 자유와 무한한 개성, 나름의 철학, 또 온 세계와도 대결할 불굴의 용기와 저항의식의 호수에서 흘러나온 사상의 결정인 사리가 그의 시라 하겠다. 따라서 신비에 찬 바탕과 오묘한 음악과 뛰어난 철학에 넘치는 그의 시는 소박한 표현 속에서 가장 깊은 세계를 보이고 있다.

그가 사용한 언어에 접하면, 그의 천재적 활력은 눈부시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가 창조한 문학의 다양성과 아름다움, 박력은 실로 놀라운 감명의 샘이 된다. 몇 세기에 걸쳐도 제대로 이루지 못할 일을 그는 불과 한 생애에 이룩하여 국민에게 개화와 발전의 힘을 주었다. 그는 사상가 감정의 가장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 언어를 창출하여 동서 어느 대학에서 가르쳐도 손색없는 문학을 생산하였다. 그가 과감하게 개척하여 결실을 가져오지 못할 분야는 없었다. 그는 벵골이라는 예술의 처녀지에 세계적인 문화의 생명을 불어넣은 도화선이 되었다. 그의 작품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무리 위대한 문학의 시금석에도 저항할 수 있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e. 임을 향한 기도의 시

이 작품 속에서 시인은 자신의 속한 현실의 세계와 임이 계신 피안의 세계를 상정해놓고, 영원의 세계에 계시는 임을 현실 속에서 갈망하는

한 성자의 육성을 담고 있다.

그는 진정한 의미의 예언자요, 인간과 신의 매개자였다. 그의 천재성에 접하면 무엇이든 빛을 내고 생명이 샘솟는다. 미지의 세계에 사상의 지평선을 제시하였고, 서양과 동양 사이에 가로놓인 늪에 다리를 놓았다. 1929년 타고르는 일본을 들렀을 때 <동아일보>를 통해 한국인의 가슴에 희망과 불을 던져주었다.


f. 동방의 등불

In the golden age of Asia

Korea was one of its lamp bearer

And that lamp is waiting to be lighted once again

For the illumination in the East


아시아의 빛나는 황금시대에

코리아는 그 빛을 밝힌 한 주인공이었다.

그 등불 다시 켜지는 날에

동방은 찬란히 온 세계를 밝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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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만교


브라만교(바라문교 · 婆羅門敎 · Brahmanism) 또는 베다 시대 종교(Historical Vedic religion)는 베다 시대(1500-500 BC) 동안 인도 아대륙에서 전개된 종교로서 브라만(바라문 · 婆羅門)이라고 불리는 사제 계급을 중심으로 전개된 종교를 말한다.[1]


브라만교는 《리그베다》·《야주르베다》·《사마베다》·《아타르바베다》의 4종의 베다의 종교적 가르침을 토대로 하여 우주의 근본적 최고 원리로서의 브라만(범 · 梵)에 대한 신앙을 중심 신앙으로 하여 전개된 종교로, 훗날 힌두교로 발전되었다.[1] 그러나, 브라만교가 그 포괄 범위를 명확히 그을 수 있는 종교 체계는 아니어서, 흔히 브라만교라고 칭할 때는 명확히 규정할 수 있는 특정한 범위를 가진 한 종교 체계를 가리킨다기보다는, 인도의 전통적인 민족 생활과 사회 구조에 기반하는 전통적 철학 · 사상 · 신학 · 제사 의례 등의 종교 현상 전반을 총칭하는 경우가 많다.[1]



C23 – 노잔유기 (老殘游記) / 유악(류어, 劉鶚,1857-1909)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20회본 장회체 장편소설로, 노잔 이라는 떠돌이 의사가 청대 말에 전국 각지를 다니면서 견문한 것을 기록한 형식의 소설이다. 주인공은 각 지방의 탐관오리들의 악정을 폭로. 고발하였을 뿐만 아니라, 청렴을 표방하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관리들의 학정이 탐관오리들에 못지않은 사회혼란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고발하는 내용이다. 이 소설은 청말, 풍전등화격인 조국의 현실을 개탄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한 작가의 통곡이라 할 수 있다.


a. 생애와 작품활동

유악은 강소성 의미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맹웅이고, 자는 철운이다. 선조는 무관이었으나, 부친은 독서인으로 진사에 급제하여 반란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부친은 차남인 유악이 독서인으로 성장하여 관리가 되기를 원했으나, 그는 소년시절에 불량소년들과 어울려 공부를 하지 않고 부모에게 걱정을 끼쳤다고, 소년시절의 친구인 나진옥은  유철운전 에서 술회하고 있다. 그러나 청년이 되면서 그는 대오각성하여 책에 파묻혔다. 20세 되던 해에 남경에서 향시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광서제 6년(1880)에는 태주학파(양명학의 좌파인 왕간 중심학파)에 심취하여, 양주에 가서 당시 양주학파의 거장인 이용천에게 사사하니, 그의 사상적 체계는 이 무렵에 성립되었다고 한다. 1885년에는 다시 과거에 응시코자 남경으로 가던 중 생각을 바꾸어 고향으로 돌아왔고, 이후 과거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다시는 응시하지 않았다 한다. 

광서제 14년(1888)에 하남성 정현에 큰 수재가 났을 때, 당시 하남순무이던 오대징을 도와 치수에 큰 공을 세웠고, 이듬해에 산동일내의 대수재시에는 산동순무이던 장요의 초빙으로 치수에 참가하여 성공하였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치수의 경험을 토대로 치하칠략 황하변천도 등의 저술을 남기기도 했다. 그후 그는 중국에서 산업진흥의 첩경은 철도의 부설과 부존자원의 개발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노한철도와 진진철도의 부설 및 산서탄광의 개발을 정부요로에 건의했으나 반대파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서양인의 자본을 들여오려 했다가 서양인의 앞잡이 매국노라 하여 지탄을 받았다.

광서제 27년(1901), 청을 도와 서양타도를 외친 반기독교집단의 봉기인 의화단 사건 때, 난군을 진압한다는 구실로 연합군이 북경에 진주하자, 그는 러시아 군이 태창을 경비하다가 태창이 방해가 되어 소각하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그들을 찾아가 교섭 끝에 양곡을 싸게 구입하여서 난민들에게 배급, 구휼에 힘썼다. 다시 상해에 나가서는 양무운동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반대파에 의해 태창의 정부양곡을 사사로이 매입했다는 죄명으로 체포되어 유배되었다가 죽었다.

그는 대단히 진보적인 인물이었으나, 혁명을 원치는 않았다. 따라서 남방에서 봉기하여 멸청흥한의 기치를 들고 의화단을 옹호하던 서태후 일파인 보수파도 싫어했다. 그는 스스로 보수적 유신파로 자처했고, 그렇게 행동했다. 즉, 어둡고 부패한 관리들은 견책했으나, 봉건독재를 수호했으며 농민들의 반제투쟁은 반대했다. 평생 그는 꽤 다양한 직업을 가졌다. 그가 펴낸 철운장구(鐵雲藏龜)는 최초의 갑골문 서적으로 갑골문 연구에도 공헌 바 크다.


b. 시대적 배경과 견책소설


 시대적 배경

무술개혁(1898)으로부터 신해혁명(1911)사이, 대략 1900-1910년 사이에 중국소설사에는 새로운 발전적인 국면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개량주의적인 정치요구를 반영하고, 사회의 암흑면 관계의 부패상 제국주의 침략자들의 만행을 견책하는  견책소설 이 대량으로 창작되었다. 이러한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중일전쟁 후 제국주의의 침략은 갈수록 더 엄중해지고 있었으나, 국가와 민족의 위기를 부패한 청조에 맡기지 않고, 스스로 나라가 약해진 원인을 찾고, 나라를 부강케 할 방도를 찾게 되었다. 

당시 지식인을 대표하는 강유위. 양계초, 담사동 등과 이들의 영향을 받은 봉건사대부들은, 개량주의적 정치운동을 일으킴으로써 나라와 민족을 구하려 하고 있었다. 소설계의 혁명은 바로 이러한 전체 개혁운동의 한 부분으로, 시대적 요청이었던 것이다. 유악이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광치제 29년(1903) 의화단사건이 끝난 2년 후가 되며, 일본과 영국이 중국과 한국을 침탈하려고 영. 일동맹(1902)을 체결한 다음 해가 된다. 청의 운명이 열강제국에 의해 풍전등화격이던 시기에 해당한다.

그 스스로가 서문에서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개인. 국가. 민족. 종교 등에 대하여 여러 가지 느낌을 가지고 있다. 그 감정이 깊으면 깊을수록 울음도 더욱 통렬하다 고 말한 바와 같이 이 소설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 통곡이라 할 수 있다.


 견책 소설

노신은 중국소설사략 에서 소설을 분류함에 있어 견책소설(censure novel)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만들고는 종전에는 이런 종류를 풍자소설의 범주에 포함시켰으나, 청말의 일부 소설은 풍자라고 하기에는 숨겨진 것을 파헤쳐 폐악을 폭로하고 시정을 규탄함에 있어, 그 언사가 지나치게 날카로워 풍자소설의 범주에 넣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중에서 이보가의  관장현형기 , 오옥요의  20년 동안에 본 기괴한 현상들 , 증박의  얼해와 를  노잔유기 와 함께 청말의 4대 견책소설이라 했다.

청말의 소설은 대부분 정치에 대한 견책, 정계 내부의 폭로라는 경향을 지녔는데, 이는 1902년 양계초가 제창한 소설계 혁명 이론에 동조한 것으로, 정치개혁을 목적으로 하는 소설이 많이 나왔다. 이러한 소설들은 현실의 부패를 폭로하며 정치적 책임을 추궁하고 있는데, 예술성은 다소 미흡하며 저널리스트의 폭로기사와 유사한 면이 있다. 그 직접적인 계보는 오경재의 유림외사 에서 찾을 수 있으나, 풍자성은 사라졌다.


c. 작품의 주요내용

 노잔유기 는 유악이 쓴 유일한 소설이자, 자전적 소설이다. 내용은 몰락한 관리의 아들인 노잔이라는 주인공이 각지를 편력하면서 당시의 정치상과 사회상을 듣고 보며 폭로, 비판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장회소설로 본편 20회와 속집 6회 등 모두 26회 본으로 내용은 크게 셋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소설의 서론부분으로, 꿈의 형식을 빌어 당시의 중국에 대한 자기의 총체적인 견해를 썼다. 떠돌이 의사 노잔은 산동의 천숭이라는 고을을 지나다가, 매년 여름이면 온몸에 종기가 나서 고생하는 산동의 부호 황서화를 만난다. 황은 거금을 뿌려 백방으로 고명한 의사와 귀한 약을 구해 썼으나 효험이 없었는데, 노잔이 이를 치료하여준다. 이로 인해 며칠 동안 그 댁에 머문다. 하루는 친구 두 사람과 함께

바닷가에 일출구경을 갔다가, 북방과 동방에서 검은 구름과 함께 폭풍이 몰려오는데 한 척의 커다란 배가 표류하다가 이 폭풍을 만나 침몰직전에 놓인 것을 보게 된다. 여기서 북방과 동방의 검은 구름은 러시아와 일본을 가리키는 것이며 거대한 배는 중국을 비유한 것이다. 그런데 침몰직전의 배 안에는 4가지 종류의 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1선장과 키잡이 #2승객들을 약탈하는 하급선원 #3혼란한 배 위에서

연설하는 사람들 #4승객들이다.

첫째 집단은 상층 통치집단인데, 이런 혼란의 원인을 그들의 책임으로 돌리지 않고, 다만 그들은 태평양에서 태평한 나날을 보내다가 갑작스런 폭풍에 당황할 뿐이라는 것이다. 즉, 청말의 위기상황에 대해 지배계급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정도의 책임만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 유형은 나라 상황은 돌보지 않고 못된 짓을 하는 하급관리들인데, 작가는 이들에게 불만을 품고 이들을 주로 견책하였다. 

셋째 유형은 손중산을 대표로 하는 부르주아 계급 혁명파들을 지칭하며, 이들을 저는 돈 벌 궁리를 하면서 남은 피를 흘리게 하는 영웅 으로 몰아세웠다.

넷째 부류는 백성들인데, 작가는 그들 중 혁명에 찬성하는 사람을 철도 모르고 남에게 이용당하는 사람들로 보았다.

노잔은 이 배를 구하는 방법은 배를 모는 사람에게 가장 정확한 나침반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여겼다. 보다 못해 그 배를 구하려고 나침반과 6분의를 가지고 그 배에 가서 선장에게 주려고 했더니, 선원들과 선동자들은 그것이 서양 것이며, 그것을 받으면 서양인들에게 팔려가게 된다면서 노잔을 매국노라고 욕하며 죽이려 한다. 그러자 배는 그만 산산조각이 나고 노잔도 함께 물에 빠진다. 문득 깨어보니 꿈이었다.

둘째, 노잔은 제남으로 발길을 돌려 중국의 아름다운 산천과 문물을 돌아보고 극장에서 중국의 훌륭한 노래를 감상한다. 여기서 잠시 천불산과 대명호에 관한 묘사를 보자. 가을날 이른 아침, 노잔은 역하정을 구경하려고 작화교 변에 와서 쪽배를 얻어타고 노를 저어 어느 사당 앞에 이르렀다. 철공사 앞에 이르러 눈을 들어 남쪽을 바라보니, 맞은 편에 천불산이 바라다 보였는데, 산 위에서는 절과 중들의 집이 창송취백들과 어깨를 다투며 서 있는데, 붉은 것은 타고 흰 것은 새하얗고 푸른 것은 남색으로 보이며, 녹색은 초록색으로 보였다. 그런 사이에 단풍이 드문드문 섞여 있었다. 마치 송대사람인 조천리의 큰 그림 한폭으로 수십리 긴 병풍을 둘러친 것 같았다. 찬탄을 마지않는데 홀연 어부의 노랫소리가 들려오기에 눈을 돌려 호수를 바라다보았다. 어느새 명호가 거울같이 맑아졌다. 천불산이 호수물 속에 거꾸로 비껴 있었다. 물속에 비친 누대와 수목이 유난히 빛나는데 호수 위에 서 있는 천불산보다 더 아름다워 보였고, 더 똑똑히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이렇듯 아름다운 강산에 천재가 일어난다. 그것은 재산과 인명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수재로 인간을 괴롭힌다. 생활이 곤궁하자 사방에 도적이 횡행하고, 관리들은 도적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된다. 중앙정부에서는 유능하고 청렴한 관리를 파견하여 도적을 잡고 백성을 위무케 한다. 그러나 이들 관리들은 청렴하다는 미명하에 도적과 내통한다는 혐의만 있으면, 죄가 있건 없건 무조건 잡아가 극형에 처한다. 이에 따라 백성들은 도적에게는 재물을 빼앗기고, 관리에게는 목숨을 빼앗기는 상황이 벌어진다. 

작가는 16회 말에 이 소설의 주지를 이렇게 자평하고 있다.  탐관오리를 미워해야 함은 누구나 알고 잇다. 그러나 청렴한 관리가 더욱 밉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탐관오리는 그들 자신의 결점이 있기 때문에 공공연히 드러내놓고 나쁜 짓을 못하나, 청렴한 관리는 돈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무엇이든 못한 짓이 없다고 생각하고는 자기 멋대로 일을 처리한다. 이런 것은 작으면 사람을 죽이나, 크면 나라까지 망치게 된다. 내 자신이 친히 본 것만도 수를 헤아릴 수 없다. 역대소설들은 모두가 탐관오리의 악을 썼을 뿐이며, 청렴한 관리의 악을 든 것은 노잔유기 가 첫번째다. 이것은 바로 이소설이 청관들의 실정을 나무라고 백성들이 어떻게 박해받는가를 폭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셋째, 주인공 노잔은 막후에 숨고, 신자평이라는 선비가 도화산에 들어가 황룡자라는 도인과 어떤 처녀와 대화하는 부분이다. 그는 공맹사상이 송대의 유학자들에 의해 왜곡되었다고 통박하고는, 예언의 형식을 빌어 북거남혁 이라는 말로 중국의 미래를 예언하고 있다. 북거는 의화단 사건으로, 이 소설을 쓰기 전에 이미 종국을 고한 것이고, 남혁은 남방에서의 혁명을 일컫는 말이나, 당시에는 이미 손문 등이 활발하게 혁명하게 활동하고 있을 때였다.


d. 감상 및 문학사적 의의

위에서 본 것처럼 노잔유기 는 견책소설로서 봉건사회의 모순과 관리들의 탐학. 비리. 폭종 등을 여실히 폭로. 고발하여 독자의 호응을 얻었다. 특히 그 자신이 평하였듯이, 청렴한 관리의 비행을 폭로한 착상은 매우 독특한 것으로, 소설로서 성공한 것이라 하겠다. 그것은 문학적인 묘사에서도 좋은 평을 받고 있다. 노잔유기 는 예술성에서도 어느 정도 성공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사물에 대한 묘사가 때때로 세밀하고 생동적이며, 선명한 색채를 띠고 있다. 예를 들면 백뉴의 아름답고 미묘한 노랫소리는 마치 그를 보면 그 소리를 듣는 듯한 감을 주도록 묘사되어 있으며, 도화산의 달밤, 얼어붙은 황하기슭의 눈과 달빛이 어울리는 경치, 특히 대명호와 더불어 천불산의 아름다운 경치는 독자들의 눈앞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특히 제남의 풍물을 묘사한 부분과 극장에서 강창하는 부분의 묘사는 매우 뛰어난 문학적 표현으로도 인정받고 있다. 이 소설은 중국소설로는 드물게 풍물도 정교하게 묘사하고 있어, 호적은  노잔유기서 에서 이 부분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유악은 문학적 천재로 그의 문학적 견해는 초탈하다. 그러나 구성이 미흡한 면이 발견되는데, 예를 들면 백뉴가 노래하는 장면은 전후사건과 유기적인 연관이 부족하다. 그리고 작가는 작중인물인 황룡자의 입을 빌어, 의화단과 자산계급 혁명파들을 요괴라고 공격하였다. 의화단은 나라를 망칠 뻔한 두려운 물건으로 볼 정도로 청왕조의 봉건통치를 유지하려 했다. 이런 점에서  노잔유기 에는 봉건사회의 본질과 제국주의의 침략야욕을 제대로 꿰뚫지 못다는 점에서 일정한 한계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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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법자강 운동]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변법자강 운동(變法自強 運動)은 캉유웨이가 추진한 정치 운동이었다.


1898년의 ‘변법자강책(變法自強策)’이다. 광서제는 당시 서태후의 손아귀에 휘둘리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 개혁 정치를 추구하기 위해 캉유웨이의 갖가지 정책을 지지하게 된다.


캉유웨이의 변법자강책에는 과거 제도 개혁, 조세 개혁, 탐관오리 혁파, 각종 경제 개혁 등이 담겨 있었고, 무술변법을 통해 이중 일부를 실행에 옮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변법은 광서제의 미약한 권위에 의존했고, 결국 서태후 등 반개혁파에게 패배해 외국으로 망명을 가는 결과로 끝이 난다. 이로 인해 무술변법은 '100일 변법'이라고도 불린다.


목차  [숨기기] 

1 개요

1.1 양무운동의 한계와 변법론의 등장

1.2 무술개혁의 백일천하

2 평가

3 최근의 연구

4 같이 보기

5 각주

6 참고 서적

7 외부 링크

개요[편집]

양무운동의 한계와 변법론의 등장[편집]

서양의 군수기술도입으로 근대화를 추진하려던 양무운동은 1874년~1875년 일어난 모란사 사건, 1884년 청불전쟁,1894년~1895년 사이 터진 청일전쟁 등의 연전연패로 그 한계점을 드러내고 말았다.


이리하여 서양의 기술만이 아닌 정치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제2단계'의 근대화 운동이 추진되었는데, 이를 변법운동이라 한다. 서양 정치를 따라 국회를 만들었고 헌법을 제정했다. 또한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 유학을 중시하는 과거제를 개혁하고 서양 학교를 설립하기도 했으며,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따라 입헌군주제도 도입하려고 했었다. 양무운동이 한창 추진되고 있던 1880년대 후반부터 변법론이 대두된 것은 먼저 대외적인 위기상황에서 굴욕적인 타협으로 인하여 양무운동의 파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이와 함께 양무운동가의 관(官)이 주도하는 기업운영방식인 '관리가 감독하고 민간이 경영하는' 형식의 군수공장 경영이 비효율적이라는 인식이 변법론으로의 전환을 가져오게 만든 것이다.


변법자강운동을 주도한 캉유웨이의 변법주장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1888년의 제1차 상서(上書)에서였다. 이와 함께 당시의 청류파 고관이었던 장지동 등이 의원제와 법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정치활동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캉유웨이는 전통적인 유교와 공자에 대한 과감한 비판을 가하면서 개혁의 이론적 기초를 마련하였다. 캉유웨이가 주목한 것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이었으며, 청일전쟁의 결과 일본이 승리한 것은 바로 이를 증명하는 것으로 단정하였다.


캉유웨이는 정치제도를 개혁하여야만 부국강병을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고 청일전쟁의 패전결과 시모노세키 조약체결 거부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리하여 변법자강운동 개혁의 전단계로서, 급진적인 캉유웨이의 지지자인 양계초,담사동 등에 의해 호남 성에서 개혁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들 급진적인 개혁론자들이 학회,학당,신문,잡지를 통해 캉유웨이의 변법개혁론을 적극적으로 고취하였다. 그러나 이는 서양근대의 자유평등주의와는 거리가 멀었고, 황종희가 주창했던 '군권'(君權) 견제론 내지는 맹자를 매개로 한 '군주정체하'(君主政體下)에서의 귀민(貴民) 정도의 온건한 것이었다.


무술개혁의 백일천하[편집]

1897년 독일이 교주만 점령에 의하여 열강에 의한 중국분할이 임박하였다고 생각한 캉유웨이는 광서제에게 다시 상서(上書)를 올려 개혁을 주장하였다. 상서의 요점은 대외적으로 영국,일본 등과 연합하여 분할국면의 타개책과 대내적으로는 '제도국'(制度局)을 설치하여 전면적인 개혁을 단행하자는 것이었고, 개혁의 초점은 '제도의 개혁'이었다.


캉유웨이는 변법개혁을 하지 않으면 황제는 물론이고 관리들도 온전 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을 고취하여 광서제의 마음을 움직이고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개혁에 착수하였다. 먼저 개혁의 중심기구로 '제도국'을 개설하여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고 황제는 이곳에서 국정을 의논하여 새로운 제도를 제정하자고 주장하였다.


1898년(무술년) 4월 23일에 광서제는 캉유웨이의 주장을 받아들여 개혁을 지향하는 특별조치를 내리면서 소위 '무술변법'을 개시하였다. 이때 캉유웨이의 중요한 활동은 황제에게 개혁내용을 건의하는 일이었다. 개혁 내용을 보면 '제도국' 개설, 개혁파 관리의 임용, 사민(士民)의 상서(上書) 허용, 상업진흥, 신식학교 설치와 자유로운 의복제도 등이었다. 개혁운동의 중심이 되는 '제도국' 설치는 보수적인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진전이 없었으나 과거제에서 팔고문의 폐지, 서원의 학당 전환 등 몇 가지 개혁이 추진되었다.


캉유웨이는 7월 19일 개혁에 방해가 되는 수구파대신의 숙청을 요청하여 예부상서를 비롯한 고급관리를 서태후의 재가도 없이 파직시켰다. 이어 담사동 등 개혁파 관리를 '군기장경'(軍機章京)으로 임명하여 제도국설치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리하여 7월 27일에는 '제2차 개혁'을 단행하여 유명무실한 관료기구의 철폐, 제도국의 성격을 갖는 '무근전'(懋勤殿)을 개설하고 황제의 군사력을 강화할 목적으로 친위군을 창설하여 '신건육군'(新建陸軍)의 창설자인 위안스카이에게 친위군을 맡기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의 진행은 결과적으로 서태후를 정점으로 하는 수구세력의 결속을 가져왔고, 개혁을 강행하다가는 광서제의 제위까지 위태롭다는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 따라서 서태후는 수구파의 기대 속에 심복부하 영록을 임시 직례총독에 임명하여 북양육군을 장악하게 하고 변법반대의 쿠데타를 비밀리에 구체화하였다. 이에 위기를 느낀 담사동은 일찍이 '강학회'의 회원이며, 신건육군을 장악하고 있던 위안스카이에게 수구세력을 타도하는 군사행동을 일으키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곧바로 변법파를 배신하고 오히려 이 사실을 서태후의 측근인 영록에게 밀고함으로써 변법운동은 역전하였다.


8월 4일 수구파의 정변(무술정변)으로 광서제가 연금되고 이어 8월 6일 캉유웨이 체포령 등 정변이 선포되었다. 이와 함께 이른바 '무술육군자'라는 담사동,양예,유광제,임욱 등 4명의 군기장경과 캉유웨이의 아우인 강광인,어사(양심수(楊深秀)) 등이 처형되었다. 변법자강운동 주도자인 캉유웨이와 양계초는 영국인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일본으로 피신하였다. 이렇게 변법자강운동(무술개혁)은 '백일천하'로 실패하였다.


평가[편집]

변법자강운동을 둘러싼 국내외적인 이해관계는 매우 복잡하게 얽혀졌다. 개혁파와 수구파의 대립이 결국 광서제와 서태후의 권력다툼, 한족과 만주족의 대립으로 이어졌고 나아가 개혁을 둘러싼 영국과 러시아간의 다툼 등이 개혁을 실패로 몰고 갔다.

특히 변법자강운동은 근대적 시민의식이나 부르주아 세력이 발달하지 못한 중국의 전통사회에서 혁신적인 지식계층에 의해 추진된 민족주의적 구국운동으로 대중기반이 취약하였기 때문에 완강한 보수,수구세력의 반대를 극복하지 못하여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최근의 연구[편집]

이외에, 최근 연구결과에 의하면,[1] 변법자강 운동 시기 변법파의 핵심인물이었던 캉유웨이는 일본 전임총리 이토 히로부미와 영국선교사 티모시 리처드 등의 꾐에 넘어가 '중국,미국,영국,일본의 4국 합방을 광서제에게 건의할 것'을 양심수(楊深秀), 송백노(宋伯魯) 등에게 지시했다고 한다.


9월 20일(8월 5일)에 양심수는 광서제에게 다음과 같이 상주하였다.


신이 청하옵니다: 우리 황제께서 빨리 대계를 결정하여 영미일의 3개국과 단단하게 결합되어, “합방”이라는 이름의 기형을 싫어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음 날인 9월 21일(팔월 엿새) 다른 변법파 관리인 송백노도 다음과 같이 상주했다.


티모시 리처드가 내방한 목적은 중, 미일영과 연합하여 합방하는 것입니다. 시절의 정세를 잘 알고, 각 국의 역사를 잘 아는 인재를 수백 명씩 선정하여, 네 나라에 군정, 세금 및 모든 외교 관계 등을 사찰하고, 군사를 훈련하고, 외국의 침범에 저항하는 ... 황제께서 신속하게 외무를 통해 중신을 선발하도록 하시옵소서. 예를 들면, 대학사 리홍장을 티모시 리처드와 이토 히로부미에게 면담하게 하시어, 방법을 강구하게 하시옵소서.

중국의 군사와 정치 권력을 다른 사람한테 넘길 뻔했던 위기의 상황이었다. 이때 서태후는 군기처에서 베껴온 사본을 통해 신정(新政)과 관련된 상주문의 내용을 파악하는 한편 어사 양숭윤의 진언에 이토 히로부미의 중국 방문이 정국에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해 주의 깊게 살펴보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양심수, 송백노가 "합방"을 주장한 상주문의 내용을 서태후가 알고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서태후는 "합방"의 음모를 알아낸 후 정변을 감행하여 "합방"계획을 무산시켰고 중국을 분할과 병탄의 위기로부터 구해냈다.



C22 – 유림외사(儒林外史) / 오경재(吳敬梓, 1701-1754)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오경재(1701-1754)의 55회본 장회체 장편소설로, 그 내용은 명대사회로 표현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청대사회를 풍자하였다. 관리를 선발하는 과거제도의 폐단과 관리사회의 부패상을 폭로. 비판하고, 또 청렴하고 유능한 이상적인 관리상을 제시하였다. 예술기교상 풍자적 수법이 뛰어나서 풍자문학의 으뜸으로 꼽히고 있다.


a. 생애와 작품활동

청의 소설가로 홍루몽의 조설근과 동시대 인물이다. 안휘의 전초 사람으로, 그의 조상들은 벼슬한 사람이 많아 백여 년을 두고 전초의 망족이었으나, 그의 부친 때부터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였다. 그의 부친 오림기는 청렴하고 부귀를 탐하지 않아 관직은 미미하였으나, 가산을 털어 학교를 세웠다. 오경재는 부친의 인품과 학문자세를 경모하였고, 이는 그의 생애를 통하여 정신적으로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오경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암송에 뛰어났으며, 문선에 정통했고 시나 부는 붓을 드는 즉시 완성했다. 13세에 모친을 잃고 23세 때 부친이 세상을 뜨자, 그의 생활에는 변화가 생겼다. 남을 돕기를 즐기며 금전과 재물에는 욕심이 없는 성격이어서, 10년도 되지 않아 가산을 탕진하고 곤궁에 빠지기 시작했다. 빈궁해서 친지들의 비난을 받자, 강녕에 옮겨 살면서 동지들을 모아 우화산 기슭에 선현의 사당을 지었는데, 자금이 부족하자 고향의 옛집을 팔았다.

이로 인해 생활이 더욱 곤궁해져서 경제적으로 절박한 상황에 이르렀다. 그는 글을 써서 팔거나 벗들의 도움을 받아 생계를 유지하였다. 주머니에 돈 한푼 없고 옷가지는 모조리 저당 잡히고 굴뚝에 연기나지 않는 형편에서, 엄동설한이면 대여섯 명의 벗들과 함께 달밤을 타서 성밖 수십 리를 돌며 발을 덥혔다. 건륭 19년(1754) 궁색하고 영락한 가운데 양주에서 54세로 죽었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곤궁한 유학자로 전락한 오경재는 세태의 변천과 인심의 간교함을 깨달았고, 이는 유림외사를 창작하는 데 기초를 제공했다. 가정의 몰락과 그 자신이 겪은 고난은 그로 하여금 지배계급의 추악상과 노동계층이 겪고 있는 고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게 했다.

그는 암흑 같은 정치에 대하여 갈수록 불만을 품게 되었고, 팔고문으로 시험치는 과거제도에 관하여 불만이 싹텄다. 팔고문이란 과거시험에서 4서 5경의 유교 경전에 대한 답안작성 형식으로, 까다롭고 엄격하여 수험생의 창의력이 제약 받았음은 물론, 나아가 명대의 사상과 학문의 발달을 저해하여, 명대의 사회와 문화에 큰 해악을 주었다.

1749년 건륭제가 남부지역을 순시하는데, 다른 문인들은 길옆에 물러서 엎드려 영접했으나, 오경재는 이를 거부하는 오만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 계급의 제약성과 유교의 봉건윤리도덕을 믿었으며, 만년에는 경학을 연구하였다. 그의 작품으로는 유림외사 외에 문목산방집(文木山房集) 12권이 있는데, 그중 4권이 전하고 있다.


b. 시대적 배경과 저술동기

일반적으로 중국 역사상 3대 승평시대란, 한의 문경지치(文景之治) 와 당의 정관. 개원지치(開元之治), 그리고 청의 강희. 옹정 건륭지치를 말하는데, 이 3대 승평시대는 각기 시대적인 성격이 다르다. 한의 문경지치는 중국의 봉건제도가 발전하여 생상력이 크게 향상된 시대였다. 당의 정관. 개원지치는 경제가 진일보한 시대로 경제와 문화 양면에 걸쳐 균형있는 발전과 번영을 이룩한 시대였다.

그러나 청의 강희. 옹건지치는 건국 후 반세기에 걸쳐서 국가기틀을 공고히 한 후, 한편으로 백성을 억압하고 한편으로 질서와 생산력을 회복한 시대였다., 청나라는 여진족(만주족)이 중국의 한족을 정복하고 세운 나라로, 중국인들에게는 자신들이 오랑캐로 간주해오던 자들로부터 정복을 당했다는 사실에 천자의 나라를 자처하던 그들의 자존심은 큰 타격을 입었다. 청은 초기에 반청 무장세력을 군사적으로 진압하고, 지속적인 문화통제 정책을 추진하였다. 특히 순치제의 변발호복 강조와, 강희제와 옹정제에 의한 문자의 옥을 중국의 한인 사대부들은 역사상 그 유례가 없는 대재난으로 받아들였다. 즉, 청에 끝까지 협력하지 않고 재야에서 학문연구에만 몰두한 정치개혁 사상가인 황종희는 명. 청의 왕조교체를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비극적 상황으로 인식하였다. 이를 단순한 왕조교체 차원을 넘어 천하가 무너지는 비극적 상황으로 인식하고, 문화적 암흑기가 도래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황종희와 함께 청대 고증학의 창시자인 고염무는 명말청초의 대재난을 역사적 비극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한차원 높은 방향으로 승화시켜 발전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다. 즉, 그는 국가의 멸망보다는 천하의 멸망이 더 중요한 것으로 보고, 국가의 멸망은 군주의 책임이나, 천하의 보존에는 민중도 그 책임을 공유한다고 주장했다.

다행히도 반청 지식인 중 3유로인 황종희. 고염무. 왕부지는 명의 멸망에 대해 명대 지식인의 책임이 크다는 인식을 갖고 경세사상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 결과 청대의 새로운 학풍인 고증학 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는 고염무의 인식처럼 만주족의 한족지배를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였고, 그 위에 강희. 옹정. 건륭제가 취한 한인학자에 대한 문화적 회유정책도 한인 지식인으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현실참여에 나서게 하였기 때문이다.

오경재가 태어난 1701년은 청조가 50년 동안 계속된 한족의 저항을 진압하고, 국가의 기초를 굳건히 한 직후였다. 한족의 항쟁은 사라지고 사람들은 오직 팔고문을 부지런히 하여 관에 나갈 생각만 하는 어두운 시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유림외사를 통해 과거제도에 대한 불만과, 허위와 가식에 찬 관료사회의 부패를 날카롭게 풍자했다.


c. 유림외사 의 주요내용

 유림외사 에서 유림 이란 선비사회를 뜻하고, 외사 란 야에 있는 자가 남몰래 쓴 역사적 사실이란 뜻이다. 원본은 50회였으나 전해지지 않으며, 현재 가장 유행하는 55회본으로, 홍루몽과 함께 청의 백화소설(구어소설)의 대표작이다.

 유림외사 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신의 체험을 통해 과거시험의 합격만을 목적으로 하는 청의 실존인물을 염두에 쓴 듯하나, 청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멀리 명대의 인물들을 등장시켰다.

 유림외사 에 표현된 당시의 세계는 입신양명의 모든 길이, 오직 과거시험으로 통했다. 중국의 과거제도는 관리의 등용이라는 목적 이외에, 전제군주제의 유지와 지식인의 사상통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는데, 과거에 합격한 자들은 세상의 부와 명예를 하루아침에 얻는 줄 알고 있었다. 반면 낙방은 단순한 실패만이 아니라, 선비로서의 품위 유지도 어려움을 뜻했으므로, 모든 지식인은 이 등용문에 오르고자 광분하며 온갖 수련을 쌓았다.


 팔고문의 해악

특히 명대에 시작된 팔고문의 답안작성법은 글자수까지 엄격히 제한하여,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성현의 말씀이나 명구만을 인용하여 답안을 작성하는 자가 유리하였다. 이를 위해 선비들은 까다로운 형식의 습득에 그들의 정력을 낭비하였고, 독창적이고 개성있는 답을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일찍이 고염무가 말하기를 팔고문의 폐해는 진시황의 분서갱유에 맞먹는 것이다. 인재를 훼손함이 선비를 들판에 묻어 죽인 것보다 더욱 심하니 그때의 일은 다니 46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고 개탄했다.


 부패한 관료사회

과거의 합격자들은 전제군주의 관료로서 백성 위에 군림하고, 그들의 무능 위에 유교의 형식주의가 가세해 부패한 관료사회를 형성했다. 거기에는 부귀와 권력에 대한 욕망. 사대주의. 몰염치. 무정견. 교활 등 온갖 인간적인 악덕이 활개를 쳤다. 이 책의 내용은 이와 같은 사회의 모습들을 그린 것인데, 작가는 이 비인간화 과정과 그 양상을 여러 등장인물의 일상생활을 추구하면서 여실히 그려나갔다. 이 소설에는 일관된 줄거리나 이야기를 마지막까지 끌어가는 특정한 주인공은 없다. 또 이렇다 할 기복도 없다. 수많은 인간이 이합집산하며 다양한 일상적 사건을 일으킨다. 그런 점에서 오락성은 작으며, 작가의 필치도 겉보기엔 담담하다. 그러나 이 담담한 필치 속에 날카로운 풍자의 칼 끝이 숨겨져 있어, 그것들이 집적되어가는 동안 온갖 강렬한 인간의 유형이 그려진다.

60살이 될 때까지 과거의 첫 시험조차 합격하지 못하고, 더욱이 생활능력도 전혀 없는 호인, 겉으로는 풍류와 의협을 가장하고 있으나 급제를 하지 못해서 불평이 대단한 귀공자, 그것을 이용해서 단물을 빨아먹는 무뢰한, 초대받은 일도 없는데 오늘은 어떤 대관의 집에서 음식대접을 받았노라고 허풍을 떠는 서생, 먹는 일과 팔고문밖에 모르는 사람, 그 외에도 무수한 인간유형이 등장한다. 

앞에 열거한 타입과는 대조적으로 과거에 관심이 없는 바람직한 인간들도 등장하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은 작가 자신을 모델로 한 것도 있다. 포도청의 관리. 소금장수. 하인. 불량배. 중. 신선가. 장돌뱅이. 농민 등 온갖 계층의 인물이 등장해서 선비와의 교섭이 전개되고, 당시 사회전체의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그 중에서도 장사꾼과 농민 등 서민의 모습은 가난하지만 가장 인간적인 모습으로 독자에게 다가온다. 어쩌면 작가도 그것을 의도하고 그렸는지도 모른다. 부패나 악덕에 대한 작가의 증오가 항상 예리한 지성과 청순한 인간애로 말미암아, 모든 인물들이 공감을 주고 있고, 악이 개인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걸 깨닫게 하는 풍자적 필력은 대단하다.


  감상 및 문학사적 의의

위에서 본 것처럼, 작가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 과거합격만을 목적으로 하는 선비들의 생활을 언급하면서, 재물과 권력에 대한 욕망, 예교의 허위성 등을 폭로하는 한편, 그들과 사귀는 상인. 승려. 배우. 농민 등의 생태에도 눈을 돌려, 부패한 상류계급과, 가난하지만 건전한 서민을 대비시킴으로써 당시의 사회구조를 냉소적인 필치로 묘사했다. 주로 전반부에는 시대의 희생자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과거에 집착하는 인물을, 후반부에서는 과거에 등을 돌리고 자유를 사랑하는 인물을 묘사하고 있다.


 풍자소설의 백미

그러나 유림외사 의 참다운 가치는 무엇보다도 풍자문학적 요소에 두어야 할 것이다. 풍자소설의 가치는 표현의 정확성과 객관적인 창작태도에 있는데 작가는 풍부한 해학성을 잃지 않고 이 작업을 완벽하게 해냈다. 노신은 오경재는 이 책을 지으면서 사심없는 마음으로 당시의 폐단은 지적하였으며, 특히 사림을 날카롭게 공격했다. 그의 문장은 완곡하면서도 풍자가 많은 까닭에 족히 풍자의 글이라고 칭할만하다 고 말했다. 한마디로 이 작품의 세계는 어둡고 비극적이다. 이것이 풍자문학으로서의 최후의 단계인 것이다. 이 책에 나타난 풍자수법은 높은 수준에 이르러, 세련되고 생동적인 언어와 풍부한 표현력으로, 중국 고전풍자문학의 걸작으로 간주되고 있다. 흔히 풍자소설의 경우엔 내부적으로 서로 모순 상반되는 두 세계를 내포하게 되는데 그것은 부정과 긍정의 양면성이다.

작품 속에는 부귀공명만을 꿈꾸는 주진. 범진 등과 부귀공명에 뜻이 없는 듯한 자태를 꾸며대며 제 스스로 청고하다 는 양집중. 경란강 같은 속물들을 묘사하고 있다. 반면 이러한 추악한 유학계의 군상과 대비시켜 이상적인 인물들도 등장시키고 있다. 이는 왕면. 두소경. 장소광 등의 세계로, 이들은 부귀공명 대신 문행출처를 중시하는 사람들이다. 이곳 사람들은 높은 꿈을 갖고 있으며, 도덕적인 면에서 훨씬 우월한 위치에 있다. 유림외사 의 작품골격은 이러한 두 세계의 대조로 형성되어 있다.


 서민에 대한 희망

이들 외에도 작품에 마지막에 나오는 시정의 소시민에게도 작가는 희망을 걸고 있는데, 시정의 소시민이란 거리에 사는 4명의 기인들을 말한다. 즉, 절에서 자랐고 글쓰기에 능한 고아 계하년, 화지통을 파는 장기선수 왕태, 그림 그리기와 책 읽기를 즐기는 개관, 거문고를 탈 줄 아는 재봉사 형원 등이다. 이들의 공통적인 특성은 노동으로 살아가면서도 권세가들에게 아부하지 않고 공명과 재물을 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작가는 현인명사들에게 실망한 나머지 소박한 노동으로 살아가는 평민들에게 희망을 거는 것이다. 

청대에는 명대에 이어 소설, 특히 장편소설의 황금기를 맞이했다. 장편소설의 종류는 애정. 의협. 사회소설로 나누어지는데, 애정소설의 대표작은 조설근의 홍루몽 이고 의협소설의 대표작은 문강의 아녀영웅전 과 석옥곤의  삼협오의 다. 사회소설의 대표작이 바로 유림외사 다.


d. 평가

오늘날 중국문학계에서 작가나 오경재 에 대한 연구열은 고조되고 있는 느낌이다. 그것은 문학사가들이 오경재를 역대 중국문인들을 제쳐놓고 굴원. 도연명. 두보. 이백과 동렬에 올려놓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민국 수립 이후에는 국어에 의한 탁월한 표현력과 사회비판정신이 인정되었다. 다만 내용에 있어, 아직 봉건적인 잔재가 남아 있으며 곽효자가 강에 들어가 부친을 찾는다는 얘기 등은 너무 산만한 감도 없지 않으나, 청말의  관장현형기 20년 동안에 본 기괴한 현상들 등의 견책소설(譴責小說) 등은 후세의 문학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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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고문

[八股文 ]

요약 중국 명·청대(明淸代)의 과거에 관한 특별한 형식의 문장.

《사서오경(四書五經)》의 한두 구(句) 또는 여러 구를 제(題)로 하여, 고인(古人) 대신 그 의미를 부연하는 것이 제정 당시의 취지였다. 1370년 8월 9일의 향시(鄕試)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후부터 1901년 폐지될 때까지 이 팔고문은 지식계급을 적잖게 괴롭혔다.


처음에는 출제방법이나 문장 형식에 특별한 형식이 없었으나, 1384년 3월에 공포된 과거성식(科擧成式:科擧定式)에서 사서는 《주자(朱子)》의 집주(集注), 《역경(易經)》은 《정씨역전(程氏易傳)》과 《주자본의(朱子本義)》처럼, 근거로 삼을 책을 각각 지정하였다. 영락(永樂) 연간에는 주로 《사서오경대전(大全)》을 쓰게 되었으며, 경문의 해석은 일원화되었다. 그 결과로 문장형식이 차차 굳어져서, 1487년의 회시(會試) 이후로는 파제(破題)·승제(承題)·기강(起講)·입제(入題)·기고(起股)·허고(虛股)·중고(中股)·후고(後股)·결속(結束)의 부분으로 구성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기·허·증·후의 '고'는 독특한 긴 대구(對句)로 되어 있는데, 마치 8개의 기둥을 세운 듯하다고 해서 팔고문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또 지정된 경서의 의미를 바탕으로 문장을 짓는다는 입장에서, 경의(經義)·제의(制義)라는 명칭도 붙어 있다.


내용은 송대(宋代)의 경의, 형식은 당대(唐代)의 율시(律詩), 출제방법은 당대의 첩경(帖經:경문의 한두 자를 가지고 수험생에게 맞추게 함)과 비슷하다. 명대의 중기 이후로는 팔고문의 참고서가 많이 만들어졌으며, 수험생은 그 예문의 자구를 암기하여 문장을 만들게 되었으므로, 자료로서의 가치가 없어졌다. 그리하여 청말에 과거의 폐단이 논의되었을 때, 팔고문도 그 대상이 되어 1901년에 폐지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팔고문 [八股文] (두산백과)


고증학

[考證學 ]

요약 중국의 명(明)말 ·청(淸)초에 일어난 실증적(實證的) 고전 연구의 학풍 또는 방법.

중국에서는 고거학(考據學), 또는 박학(朴學)으로 많이 불린다. 이 학풍이 일어난 배경은 명나라 말기부터 중국에 들어온 서양의 선교사들에게서 전해진 서양문물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성리학과 양명학으로 통해 철학적이고 추상적인 문제를 다루었던 것에 비해 현실에 바탕을 두어 사실을 밝히고자 하는 학풍이 발전하게 되었다. 현실 문제는 접어두고 성리학의 이기(理氣)니 양명학의 심성(心性)이니 하는 공허한 형이상학, 이른바 송학(宋學)에 대한 반발과 반청(反淸)감정, 시대의식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일어났다. 송학이란 이름에 맞서서 이를 한학(漢學)이라고도 불렀다. 학문 방법은 매우 치밀하고 꼼꼼하게 글자와 구절의 음과 뜻을 밝히되 고서(古書)를 두루 참고하여 확실한 실증적 귀납적 방법을 택하여, 종래의 경서 연구 방법을 혁신하였다. 


고증학을 5가지로 나누어 ① 훈고학(訓詁學) ② 음운학 ③ 금석학 ④ 잡가 ⑤ 교감학(校勘學)으로 분류한다. 이 학풍이 중국에 끼친 영향을 보면 이른바 경세치용(經世致用)을 주장하여 정치 ·민생(民生)이 우선이란 이론을 제공했고 학문 연구는 정확한 음운과 뜻[訓詁], 역사적 고증이 있어야 하는 새로운 학문풍토를 정착시켰다. 대표적인 학자는 염약거(閻若璩)  ·호위(胡謂) ·모기령(毛奇齡) ·만사대(萬斯大) ·만사동(萬斯同) 등이다. 이 학파가 극성기에 오파(吳派)와 환파(皖派)로 분파하였는데 오파에서는 혜동(惠棟)이 영수가 되고 환파에서는 대진(戴震)이 영수였는데 오파는 순수한 한학(漢學)을, 환파는 음운 ·훈고 ·수학 ·천문학 ·지리학 ·수리학(水利學)을 연구했다. 대진의 제자엔 단옥재(段玉裁)와 왕염손(王念孫) 부자(父子)가 있다.


이 고증학은 영 ·정조 때 일어난 한국 실학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磻溪隨錄)》,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마과회통(麻科會通)》,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東史綱目)》, 유득공(柳得恭)의 《발해고(渤海考)》, 박세당(朴世堂)의 《색경(穡經)》, 서유구(徐有榘)의 《임원경제십륙지(林園經濟十六志)》, 신경준(申景濬)의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 홍대용(洪大容)의 《담헌서(湛軒書)》, 이덕무(李德懋)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박지원(朴趾源)의 《연암집(燕巖集)》 등 각 분야의 실학적인 저작들이 쏟아져 나왔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증학 [考證學] (두산백과)


백화소설

[白話小說 ]

요약 중국에서 구어체(口語體)로 쓰인 소설을 이르는 호칭.

문언문(文言文), 즉 고문(古文)으로 쓰인 문언(文言) 소설의 대칭이다. 당(唐)나라 이전의 소설이란 지식인들이 문어로 써서 수록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당나라 말기부터 송나라에 걸쳐서 귀족계급의 몰락과 서민계층의 세력 증대로 민간에 구전되는 이야기의 필사본이나 그 대본에서 발달하여 점차 읽기 쉬운 구어체의 소설을 만들게 되었다. 그러나 근대 이전의 중국에서는 국가 통치의 수단이었고 지식인의 무기이기도 했던 문어체가 중시되어, 구어문장에 의한 작품이 문학의 주류로 등장한 것은 1917년의 천두슈[陳獨秀] ·후스[胡適] 등의 문학혁명 제창 이후이며, 1918년에는 루쉰[魯迅]의 백화소설 《광인일기(狂人日記)》가 발표되었다.


견책소설

[譴責小說 ]

구분

문학 > 한문학

사회개혁 특히 시정폐단의 폭도와 그에 대한 풍자를 위한 소설. 아편전쟁(1839~1842)이후 연이은 외세의 침입과 내부적인 혼란으로 청조(清朝)의 위신은 땅에 떨어지고 사회는 극도로 부패하여 나라의 운명이 그야말로 풍전등화(風前燈火)격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환경 속에서 조정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감은 날로 높았고, 뜻있는 지식인들은 못내 나라의 앞날을 근심하였다. 청(清)나라 말기 중국의 소설은 이와 같은 국가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있어 능동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 노신(魯迅)은 그의 <중국소설사략(中國小說史略)>에서 이 시대의 그러한 소설을 견책 소설(譴責小說)이라 이름하여 부르고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광서(光緖) 경자(庚子)(1900) 이후로 견책 소설이 특히 많이 출현하였다. 가경(嘉慶) 이래 여러 차례의 내란-백련교(白蓮敎) · 태평천국(太平天國) ∙ 염비(捻匪) · 회교(回敎)-이 평정되기는 하였지만, 또 여러 차례 외적-영국 · 프랑스 · 일본-의 침입을 당하였다. 이러한 터에 어리석은 백성들은 차(茶)를 마시면서 역적을 평정할 때의 무공담이나 듣기를 즐기니, 유식한 사람들은 개혁을 생각하기에 이르렀고, 적개심을 느껴 유신(維新)과 애국을 호소하며, 특히 나라의 부강에 뜻을 두었다. 그러나 무술 정변(戊戌政變)은 성공하지 못하였고, 그보다 2년 뒤인 경자년에는 의화단(義和團)의 난이 발생하였다. 이에 사람들은 그 정부에 나라의 통치를 바랄 수 없게 되었음을 알고 마침내는 정부를 공격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이 때를 당하여 소설은 숨겨진 일들을 들추어내고 그 폐단을 밝히며, 시정(時政)에 대해서는 엄중한 규탄을 퍼부었으니 혹은 일반 풍속까지도 그 나쁜 점을 들어 비난하는 데 힘들 썼다.”


청나라 말기에 이러한 내용을 담은 이른바 견책 소설(譴責小說) 작가 가운데 이보가(李寶嘉, 1867~1906) · 오옥요〔吳㓇堯, 1867~1910) · 유악(1857~1909) · 증박(曾樸, 1871~1935) 네 사람이 가장 유명하다. 이보가는 자가 백원(伯元)이고 별호가 남정정장(南亭亭長)이며 강소(江蘇) 무진(武進)사람이다. 그의 작품으로는 <관장현형기(官場現形期)> 60회 외에 <경자국변탄사(庚子國變彈詞)> · <해천홍설기(海天鴻雪記)> · <이연영(李蓮英)> · <번화몽(繁華夢)> · <활지옥(活地獄)> 등이 있고, <수상소설(繡像小說)> 중에 나누어 게재한 <문명소사(文明小史)>도 유명하다.


대표작으로 치는 <관장현형기>는 청나라 말기의 부패하고 타락한 관리들의 생활과 그들에게 압박받는 백성들의 참상을 대담하게 폭로한 내용이다. 오옥요(吳沃堯)는 자가 견인으로 광동(廣東) 남해(南海) 사람인데 불산진(佛山鎭)에서 살았으므로 필명을 아불산인(我佛山人)이라고 하였다. 그의 작품으로는 <전술기담, (電術奇談 - 번역)><구명기원(九命奇寃)> 및 <이십년목도지괴현상(二十年目睹之怪現狀)> 등이 있다. 대표작인 <이십년목도지괴현상> 108회는 그가 20년 동안 보고 들어 온 가정과 사회의 여러 가지 비정상적인 일들을 열거하면서 인정 세태를 풍자하고 곁들여 위정 당국의 부패 무능상을 폭로한 내용이다. 험한 세상에 용하게 살아 남았다 하여 주인공의 이름을 구사일생(九死一生)이라 붙여 등장시킨 것부터가 하나의 상징이다.


유악은 자가 철운(鐵雲)이고 강소(江蘇) 단도(丹徒) 사람으로 갑골학(甲骨學)의 초기 자료인 <철운장귀(鐵雲藏龜)>의 편자로도 유명하다. 그의 작품 <노잔유기(老殘遊記)>는 주인공 노잔이 떠돌이 의사로 산동 일대 각지를 다니면서 보고 들은 것을 서술하는 형식을 빌어 당시의 정치와 민생의 실태를 묘사하면서, 특히 스스로 청렴 결백하다고 내세우는 이른바 청관(淸官)의 행패가 차라리 탐관(貪官)보다 더하다고 꼬집고, 그 밑에서 압박을 받으면서 사는 백성들의 여러 가지 고통을 쓴 것이다.


증박은 자가 맹박(孟樸)이고 강소 상숙(常熟) 사람인데 1907년 동아병부(東亞病夫)라는 이름으로 <얼해화>를 발표하였으나 지금 전하여지는 30회본은 1927년에 수정한 것이다. <얼해화>는 주인공의 풍류 고사를 중심으로 청말 30년 간의 정치 · 외교 및 사회의 여러 가지 정세를 엮어 나가면서 부패타락하고 위선적인 관료 및 지식인들을 신랄하게 풍자한 작품이다. 그는 또 작품에서 손문(孫文)의 혁명 사상을 긍정 지지하여 민족주의 구호를 내걸었으며, 청조의 망국 외교에도 경고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견책소설 [譴責小說] (국어국문학자료사전, 1998., 한국사전연구사)



C21 – 정지용 전집 / 정지용((鄭芝溶, 1903-1950)

(출전: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어느덧 제2의 애국가처럼 되어버린 <향수>의 작가 정지용은 생전에 3권의 시집을 간행한 바 있다. 제1시집 정지용시집 (1935), 제2시집 백록담 (1941), 제3시집 지용시선 (1946) 등이다. 이중 지용시선 은 창작시집이 아닌 시선집으로 1집과 2집에 수록된 시들 중에 25편을 뽑아 재수록한 것이다. 정지용시집 에는 모더니즘 지향적인 시들과 민요 지향적인 시들이 혼합되어 있으나, 백록담 에는 대체로 동양적 사유를 통해 자연을 탐구한 시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의 시는 언어의 세련미와 감정의 절제라는 측면에서 한국 현대시의 한 절정을 보여준다.


a. 생애와 작품활동

북으로는 소월이 있고 남으로는 목월이 있으며, 중앙에는 지용이 있다고 한국현대시의 맥을 설명하면 어떨까. 지용은 충북 옥천출생으로 휘문고등보통학교와 1929년 일본 도지사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귀국하여 모교에서 교원으로 재직하였고, 1939년에는 <문장>의 시 추천위원으로 있으면서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등의 청록파 시인을 등단시켰다. 광복 후에는 <경향신문> 편집국장과 이화여대 교수를 역임하였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으나, 광복 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까이하는 등 좌경으로 기울었다가,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전향하여 보도연맹에 가입하였다. 1948년부터는 직장을 그만두고 녹번동에 집을 마련, 서예를 하면서 소일하다, 한려수도를 여행하던 중 6. 25를 맞아 상경하였다. 1950년 자택에서 북한군에게 연행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정인택. 김기림. 박영희 등과 같이 수감되었다. 이후 평양으로 이감되어 이광수. 계광순 등 33인이 같이 수감되었다가 폭사당했다고 전해진다. 그에 관한 연구가 남한에서는 사실상 중단되어 오다, 1988년 해금으로 다소 활기를 찾고 있다. 작품으로는 정지용시집 에 89편, 백록담 에 33편으로, 총 122편을 남겼다.


b. 정지용의 문학세계

지용이 최초로 발표한 작품은 22세 때인 1925년 <학조> 창간호에 카페 프란스 등을 실은 것이나, 명성을 얻은 것은 24세 때인 1927년 <조선지광>에 향수가 발표된 이후다. 그러므로 향수는 그의 데뷔작이라 할 수 있다.

지용은 <시문학> <구인회>의 동인이었으며, 1935년에 시문학사에서 첫시집 정지용시집 이 나왔다. 지용의 제2시집인 백록담은 1941년 <문장>사에서 발행되었고, 그 이후에는 사실상 작품활동은 중단했다.   백록담 을 내놓은 시절이 가장 정신이나 육체가 피폐한 때 라고 회고했던 것처럼, 일제말기의 문화말살정책으로 이때는 <문장> <인문평론> <동아일보> <조선일보>가 폐간된 것을 보면, 당시의 그의 심정이 이해된다.

지용은 1930년 박용철. 김영랑 등이 창간한 <시문학> 동인지 창간호에 이른 봄아침 등을 실었다. <시문학> 창간을 계기로 순수문학운동이 일어났으니, 우리 문학사에서는 소위 시문학파 라 하여 1920년 중반 이후 문단을 주도한 카프파의 계급주의 문학을 비판하고, 문학의 예술성을 주장했다. 시문학파의 대표적인 사람은 박용철, 김영랑. 이하윤, 정지용. 신석정 등이다.

다음으로 1930년대 모더니즘은 김기림에서 출발되는 것처럼 흔히 이야기되나, 신단에서는 이미 정지용. 신석정 등과 함께 김영랑. 김형구 등 모더니스트로서의 경향을 지닌 시인들이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1감정의 무절제한 유로를 배격하고 #2이미지를 중시하며 #3언어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가지고 그것의 조탁에 치중하는 1930년대 한국 모더니즘의 근거지는 <구인회>라 할 수 있는데, 9인 중 일부는 교체되기도하여 김기림. 정지용. 이상. 김광균. 신석정. 장만영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지용은 시문학파의 중심인물인 동시에 대표적인 모더니즘 시인으로 볼 수 있다.


c. 지용 시의 특징

지용의 시를 자세히 보면 바다의 시, 산의 시, 도회의 시, 향촌의 시, 신앙의 시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다양한 특징을 지닌 시인이어서, 어느 일정한 틀로 그의 전 작품을 분류할 수는 없으나, 몇 갈래의 특징적 경향은 나타난다.

먼저 고향 해바라기씨 지는 해 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민요적 경향이 강하다. 그의 민요시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로 시작되는 고향 은 소월의 산유화 진달래꽃, 목월의 나그네 와 마찬가지로 애송되는 작품이며, 따라서 지용은 전통적인 면에서는 소월과 목월 사이에 위치한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다음으로 들 수 있는 것이 순수시적 경향인데, 이는 30년대 시문학파의 활동가 무관하지 않다. 시문학파 중에서도 시가 언어예술임을 자각하고 특히 언어의 조탁에 몰두한 시인이 김영랑과 정지용이다. 그는 언어의 조탁을 위해 고어와 방언도 사용하고, 때로는 말을 만들어 쓰기도 한다. 순수시의 지향이라는 점에서는 영랑과 궤를 같이하나, 영랑이 음악성을 중시한 데 비해, 지용은 회화성에 더 치중했다는 점에서 서로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19세기 자연과학적 유물론에 반대하고, 현대의 기계문명을 비판하며 20세기 전반기에 일어난 모더니즘 기법을 수용한 한국 모더니즘의 선구라 할 수 있고,  불사조 나무 등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한국최초의 기독교 시인이 아닌가 보여지기도 한다.


d. 주요작품


향수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밭에 밤바람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워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줍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 성긴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이 시는 농경시대 한국인의 고향을 노래했다. 10개 연 중 홀수연은 고향의 잊을 수 없는 심상을 제시하고, 짝수 연은 잊을 수 없는 감정을 동어반복을 통해 강조하여, 홀수 연의 심상들을 연결하고 작품 전체에 통일성을 유지시켜준다.

소년기를 시골에서 보냈던 작가는 17세에 서울로 유학 오면서, 고향과 가족을 떠나서 지내게 되고, 22세부터는 일본에 유학가서 그곳에서 느꼈던 고립감은 조국과 고향에 대한 향수에 잠기게 했을 것이고, 그러한 상황속에서 이 시가 태어난다. 전통적이며 토속적인 시어를 써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시다. 날로 도시화, 비인간화가는 현대사회, 이 땅의 청소년들에게 옛고향의 정취에 젖어들도록 하고 있다.


고향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메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 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이 작품은 시인이 고향에 와서 읊은 것이다. 고향은 천진난만한 웃음이 있던 곳이며, 얹고 돌아가 안기면 어머니의 품 속과 같이 포근한 정을 느끼게 하는 안식처다. 그러기에 고향을 떠나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찌든 삶의 모습을 보게 되거나, 생활의 피곤함을 느끼게 될 때면 꿈의 안식처인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그런데 일제에게 짓밟히고 빼앗긴 고향은 옛 모습과 판이하게 달라져 있다. 고향은 실재하나 이미 자기의 고향이 아닌 것이다. 고향상실에 대한 이러한 자각은 비록 소극적이기는 하지만 정지용의 역사의식이 반영된 것이다. 고향회복을 염원했던 식민지시대의 실향의식을 역설적 수법으로 노래한 시다.


e. 문학사적 의의

위대한 시인은 시대 속에서 살면서도 시대를 초월하고, 유파 속에 있으면서도 그 유파를 뛰어넘는다. 우리 문학사에서 지용이 바로 그런 사람이 아닐까? 소월. 지용. 목월을 잇는 전통적 정서와 가락에 따라, 지용은 민요시인으로 꼽지 않을 수 없고, 영랑과 함께 순수문학파의 거장이었으며, 신감각파라는 원치도 않은 형용사가 붙게 되었다. 그는 또한 그 다음 세대에서는 선구자의 위치에서 김기림. 김광균. 신석정. 이상 등과 함께 모더니스트의 거장이 되었다. 그의 시는 도시의 문명적인 현대정신보다는 향토적 소재를 통한 향토정서 또는 서정성 등의 다양한 요소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김기림. 김광균과도 다른 결의 모더니스트였다. 그들은 사상적 한계를 가졌으나, 지용의 경우는 기독교적 신앙의 주제와 사상으로, 이러한 모더니즘의 한계를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8. 15 이후 지용의 사상전환은 그가 영영 문학에서 사라져버린 결과를 초래하였으나, 문학사적 위치를 볼 때 30년대 문학의 최고 정점에 섰던 그의 공적은 그가 사라진 뒤의 청록파 시인을 배출한 것으로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그리하여 현대 한국시사에서 지용의 위치를 말한다면 20년대의 소월, 30년대의 지용, 40년대의 목월로, 우리 전통시의 계보를 이어주었다.

투명한 언어, 감각적 이미지로 우리 현대시를 풍요하게 가꾸었던 지용의 문학은 오랜 공백기의 먼지를 털어내고 다시 독자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는 우리말의 무한한 가능성을 개척하는 영광스런 역할을 했으면서도, 우리 문학사에서 실종되는 비극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우리말의 비밀을 알고 말을 휘잡아 조종하고 구사하는 놀라운 천재이자. 한국인에게 영원한 고향의 이미지를 깨우쳐준 시인 으로서 그 빛을 더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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