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06 – 위대한 유산(Great Expectations) / 디킨스(Charles Dickens, 1812-1870)

(출전 :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 주인공의 신분상승 과정을 통해, 주인공이 꿈꾸는 진정한 신사의 본질은 막대한 재산과 인위적 교육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진정한 애정에 있음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 핍이 오랜 방황 끝에 매형 조에게 깨달은 위대한 유산 이 있었기에 우리가 이 작품에서 감동을 받는 것은 아닐까. 한마디로 이 소설은 여러 사회적 요인에 의해서 인간의 삶이 어떻게 영향을 받을 수 있는가를 문학적으로 보여주는 고전적 작품이다.


a.  생애와 작품활동

영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소설가로 평가되는 디킨스는 소박한 평민이나 교양있는 사람들, 빈민이나 여왕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호소력을 가져, 생전에도 폭넓은 인기를 누렸다. 그는 하인출신인 조부, 그리고 해군 경리국에 근무하는 하급관리의 장남으로, 남부영국의 군항 포츠머스 교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존은 호인이었으나 금전관념이 희박하여 남의 빚을 갚지 못해 투옥된 일도 있었다. 그 때문에 디킨스는 소년시절부터 빈곤의 고통을 겪었으며 학교에도 거의 다니지 못하고 12세부터 공장에 나갔다. 어린 시절 한때 살았던 채텀은 잉글랜드의 정원 이라 불리는 아늑한 도시로, 그의 어린 심성에 깊은 인상을 주었고, 훗날 채텀 시대를 거의 유일한 행복했던 시절로 회고할 정도였다.

자본주의의 발흥기였던 19세기 전반의 영국 대도시에서는, 번영의 뒤안길의 심각한 빈곤과, 어린이와 부녀들의 열악한 노동조건은 사회전반을 어둡게 했다. 이러한 사회의 모순과 부정을 직접 체험한 디킨스는 빈곤의 늪에서 벗어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면서, 15세기경에 변호사 사무소의 사화, 법원 속기사를 거친 끝에 신문기자가 되어 의회에 관한 기사를 쓰게 되었다. 그는 소년시절부터 고전을 탐독하면서 일찍부터 문학에 눈을 떴는데, 여기에 기자생활로 인한 많은 여행은 풍부한 관찰과 식견을 더해주었다. 1833년 어느 잡지에 단편을 투고하여 채택된 힘입어 계속 단편. 소품 등을 여러 잡지류에 발표하고, 1836년 이들을 모은 보즈의 스케치 집이 출판되어 24세의 신진작가로 화려하게 문단에 데뷔했다. 다음해 완결한 장편소설 피크위크 클럽의 기록 은 4명(도중부터 5명)의 인물이 여행하는 도중, 곳곳에서 우스꽝스러운 사건을 일으키는 단순한 줄거리였으나, 그의 뛰어난 유머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다음 작품인 올리버 트위스트 도 베스트셀러가 되어 작가적 지위가 확립되었다.

그뒤 영국과 미국의 각계각층 독자들의 호응에 보답하여 니콜라스 니클비, 골동품 상점, 크리스마스 캐럴  등 중. 장편을 연이어 발표함으로써 문명을 떨쳤다. 이렇듯 문명이 높아진 것은 몸소 체험으로 알게 된 사회 밑바닥 생활상과 그들의 애환을 생생하게 묘사함과 동시에, 세상의 부정과 모순을 용감하게 지적하면서도 유머를 섞어 비판한 점에 있었는데, 그의 소설에 영향을 받아 연소자 학대와 재판의 비능률이 개선되기도 했다.

1850년에 완결한 자전적인 작품 데이비드 코퍼필드 를 쓸 무렵부터 작품의 질이 조금씩 변하여 그의 후기 특성이 두드러진다. 다음 작품 황폐한 집 이 그 좋은 예로 이전의 작품처럼 주인공 한 사람의 성장과 체험을 중심으로 사회 각층을 폭 넓게 바라보는 이른바 파노라마적 사회소설로 다가갔다. 작품 속에서 앞을 가로막는, 개인의 힘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한 사회체제의 벽에 가로막혀, 디킨스의 장기인 유머도 어딘지 쓴웃음으로 바뀌고, 무력감. 좌절감이 전편에 흐르게 되었다. 그러나 창작력은 조금도 쇠퇴하지 않아 공장 스트라이크를 다룬 고된 시기, 버너드 쇼에 의해  자본론 보다도 위험한 책이라고 평가된 어두운 사회소설인 어린 도릿, 프랑스 혁명을 다룬 두 두시 이야기, 다소 자전적인 위대한 유산  등의 장편 외에 많은 단편과 수필을 썼다. 또 잡지사의 경영과 편집, 자선사업에의 참가, 연극상연, 자작 공개낭독, 각지로의 여행 등 쉴 사이 없이 정력적 활동을 계속하여 건강을 잃었으나 쉬려 하지 않았다. 또한 1858년에는 20년 이상 함께 살며 10명의 아이를 낳은 아내와 별거하는 등 정신적 고통도 겹쳐 70년, 추리소설풍의 수수께끼로 가득 찬  에드윈 드루드의 수수께끼를 미완성으로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전 세계 각계각층의 애도 속에 문인 최고의 영예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죽은 뒤 그의 소설은 1세기에 걸쳐 각 나라말로 옮겨져 셰익스피어와 함께 영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인정되고 있다.


b.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소설과 디킨스의 주요작품

빅토리아 여왕(재위기간:1837-1901) 시대에 영국은 부르주아 계급의 생활수준이 급속히 향상되고, 과학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이 이루어지는 등 경제대국이 되었다. 문학사적인 측면에서 빅토리아 시대는 이성보다 감성, 형식보다 내용을 중시하는 낭만주의로 시작하여, 현실을 객관적. 과학적인 태도로 묘사하고 산업혁명의 어두운 면을 고발하는 사실주의로 끝났다.

빅토리아 시대의 주요 소설가로는 디킨스와 허영의 시장을 쓴 새커리, 올터 로크를 쓴 킹즐리, 조지 엘리어트, 하디 등이 있다. 이중 디킨스는 가장 널리 알려진 작가로 사회비판 및 항거의 기풍이 전 작품을 흐르고 있다. 그는 중산층의 일상생활과, 특히 산업팽창의 지나친 사회악과 사회불의에 항거하는 기인들, 가난한 사람들의 투쟁을 매우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디킨스는 근본적인 낙관주의와 진보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현존의 산업제도에서 유래하는 빈민굴과 빈자의 비참한 생활을 리얼하게 묘사하였는데, 거기에서 낭만주의적 요소와 사실주의적 요소가 혼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디킨스는 영국문학의 위대한 민주주의자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c.  데이비드 코퍼필드 

작가는 이 책의 서문에서 나는 나의 모든 책들에서 이 책을 가장 좋아한다 고 말한 바 있는데 그의 정력이 절정기에 있던 때의 작품이다. 주인공인 데이비드가 어린 시절의 어려움을 딛고 작가로서 성공하는 이야기를 줄거리로 하고 있는 이 작품은, 디킨스 특유의 유머가 전편에 스며 있고, 쓸쓸하고 슬픈 이야기를 밝게 처리하고 있다. 어느날 디킨스가 실수로 동네 꼬마의 인형을 망가뜨려 새로운 인형을 사주었다고 한다. 이에 대한 답례로 그 꼬마의 어머니는 좋은 책이라며 디킨스에게 한 권의 책을 선물했는데 펴보니 이 책이었다고 한다.


d.  두 도시 이야기 

근대 시민운동의 핵이었던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변호사 시드니 커튼과 그 주변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의 파란만장한 삶이 역동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이 작품은, 그의 작품 중 보기 드문 역사소설이다. 여기서 두 도시는 런던과 파리를 지칭한다.

18년간 바스티유 감옥에 유폐되었던 의사 마네트는 석방되어 런던으로 가서 점차 이성을 되찾는다. 한편 그의 딸 루시를 사랑하여 결혼한 프랑스 귀족은 전에 자기 집에 있던 충실한 머슴을 구하려고 본국으로 돌아갔다가 혁명정부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는다. 이때 은밀히 루시를 사모하던 시드니 커튼이 대신 희생하여 그를 구해낸다는 내용이다.

개인이 조직에 대하여 투쟁하는 과정에서의 저항과 사랑, 또는 삶의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굽히지 않는 신념 등을 주제로 하고 있다. 이 작품이 연재될 당시에 독자들은 주인공들의 운명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궁금하여, 기차역까지 나와 신문을 기다렸다고 한다.


e.  피크위크 클럽의 기록  

피크위크 클럽의 회장인 피크위크 씨를 중심으로 네 사람의 회원이 정처없는 여행을 다니면서 그 견문을 보고하는 형태의 소설이다. 또한 18세가 이래로 전해 내려온 이른바 악한소설의 수법도 따르고 있다.

하지만 소설의 착상은 디킨스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그 당시 어느 만화가의 연재그림에 덧붙여 쓰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피크위크 씨가 고용한 마부 샘 웰러의 터무니없는 커다란 웃음소리 등은 이 소설을 영국 소설사상 가장 생기있고 독창적인 해학 소설로 손색이 없게 만든다.


f.  올리버 트위스트 

우리 나라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작품으로, 보육원에서 자란 고아소년 올리버가 런던에 나오자마자 도적단 마수에 걸려 갖은 고생을 겪다가 후에 죽은 아버지 친구의 양아들이 된다는 줄거리이다. 구성은 디킨스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다소 조잡하지만, 정의감과 선의에 넘치는 사회의 순화를 그린 박력있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g.  주요 등장인물

우리는 이 작품 속에서 디킨스의 독특한 풍자 속에서 한 인간의 이성의 회복과 사랑을 느낄 수 있으며, 진정한 신사의 본질은 물질적인 풍요나 인위적인 교육에 의해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따뜻한 사랑이 바탕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핍: 가난한 고아로 성장해, 신분상승의 강박관념 속에서 정신적 방황을 겪다, 이성과 사랑을 되찾는 인물.

에스테일러: 미스 허비샴의 양녀로 부유하게 자라 가난한 핍의 사랑을 물리치고 드러믈과 결혼하게 되나, 실패하고 다시 핍과 사랑하게 되는 여인.

허비샴: 결혼하는 날 아침에 남자로부터 버림을 받고 평생 동안 결혼예복을 입은 채, 남자에 대한 복수심을 불태우는 여인.

탈옥수: 자신을 유배시킨 신사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가난하나 핍에게 도움을 주어 신사로 자라나게 하는 죄수.


h.  작품의 주요내용

이 작품은 고아 출신의 주인공 핍이 자기 일생을 이야기하는 식으로 전개된다. 주인공 핍은 부모가 없는 고아로 누이의 손에서 길러지는데, 대장장이인 매형 조 아래서 견습공 노릇을 하며 고독하게 살아간다. 성격이 매우 고압적이고 포악한 누이는 핍에게 언제나 큰 소리를 쳤고 따뜻한 애정이라고는 조금도 보여주지 않아, 핍은 비뚤어진 성격의 소유자로 성장한다. 그러던 어느 날 묘지에서 슬픔에 겨워 울고 있던 핍은 위압적이고 협박조인 말투로 무섭게 대하는 탈옥수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자기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핍은 겁에 질려 자신의 행위가 잘못된 것임을 알고도 누나집에서 먹을 것을 구해다 주었다. 이 죄수와의 만남이 후에 얼마나 중요한 사건으로 전개되는지는 핍 자신도 독자 자신도 알지 못한다. 핍이 사는 마을에는 보통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거부가 살고 있었다. 거부의 이름은 허비샴으로 그녀가 기거하는 집은 거대한 저택인 서티스 하우스였다. 그녀는 결혼식 날 아침에 남자에게 배신당하고, 지금은 허름하게 되어버린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조용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집에는 양녀 에스테일러가 있었다. 핍은 에스테일러와 함께 놀아주는 유일한 친구였다. 에스테일러는 마치 여왕처럼 핍에게 군림했고, 핍은 그녀에게 자신의 더러운 몸과 신분 등에 대해서 무시를 당하며 지내야 했다. 핍은 이때 자신이 비천한 신분임을 자각하고, 그 수모와 수치감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비관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허비샴의 변호사 제이거슨은 핍이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을 것이라는 것과 또 신사교육을 받으러 런던으로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핍은 새로운 마음으로 출발을 한다.

런던에 온 핍은 갑자기 돈이 생기자 그의 몸에는 벌써 허영이 가득 차 있었고, 속물적인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는 이제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매형 조가 찾아와도 반갑게 맞이하지 않았고, 자신의 옛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런던의 사교계에는 이제 우아한 숙녀로 성장한 에스테일러가 눈부신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녀의 곁에는 언제나 그녀를 따르는 남자가 즐비했고, 그녀는 그중에서도 아둔하기 이를 데 없는 드러믈과 친해졌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핍은 자신만이 아는 사랑의 고통으로 질투와 슬픔의 날들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던 중 어느 폭풍이 세차게 불던 날, 옛날에 그를 협박하던 탈옥수가 찾아오게 된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핍에게 털어놓고 이야기했다. 그는 자신을 모함하여 유배시킨 신사들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유배지에서 갖은 고생을 다하며 돈을 벌어 핍에게 신사교육을 시켰다는 것이다. 자신을 도와주던 은인이 허비샴이 아니라 탈옥수임이 밝혀지자 거대한 유산자 의 꿈은 사라지고 핍은 깊은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훌륭한 신사가 되어 아름다운 에스테일러와 결혼하려고 하였던 꿈이 일순간에 무너지고 있었다. 신사가 된 핍의 모습을 보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몰래 숨어들어왔던 탈옥수는 이제 빨리 국외로 피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탈출에 실패하고 잡히게 되는데, 그는 감옥 안에서 마지막으로 핍의 모습을 보며 평온한 마음으로 숨을 거둔다. 그럼으로써 핍은 인간본래의 순수성을 회복하기 시작한다.

허비샴은 자신의 양녀 에스테일러를 이용해 핍에게 사랑의 상처를 줌으로써, 자신이 입었던 사랑의 상처에 대해 복수한 것이었다. 핍은 그녀의 계획대로 상처를 크게 입었고, 그녀는 이런 핍의 모습을 보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 회한과 눈물로써 용서를 구했다. 그런 다음날 난로의 불이 그녀의 옷자락에 붙어, 집이 모두 타 없어지게 되었다. 핍은 그녀를 구하기 위해 불로 뛰어들었다가 중상을 입게 된다. 한편 그와 함께 신사의 과정을 밟은 허버트는 부친으로부터 무엇이 진짜  신사 인가를 배운다. 마음으로부터 신사가 아닌 사람은 태도에서도 진짜 신사가 될 수 없다고 허버트는 믿고 있다. 하류계급 출신의 핍이 에스테일러를 쫓아다니는 동안, 허버트는 일부러 돈 한푼 없는 클라라와 약혼함으로써 자기자신에 속해 있는 위선적인 계급에 도전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진정한 신사는 시골 대장간에서 묵묵히 정직한 직업인으로 살아가는 핍의 매형인 조다. 이제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어버려 의지할 곳이 없는 핍을 유일하게 간호해주는 사람은 다름아닌 조였다. 조는 비록 대장장이이기는 하나, 내면에는 진정한 신사만이 가질 수 있는 온화함이 넘쳐흐른다. 그는 영원한 핍의 보호자다. 자신을 비난하고 떠난 핍이 런던에서 죄수, 에스테일러, 빚과 열병으로 고생할 때 그는 천사와 같은 마음으로 보살폈다.

조와 함께 진실한 인간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비디인데, 그녀는 시골학교 선생으로 조의 부인이 부상당했을 때 집안사람들을 돌봐주어 결국 조의 아내가 된다. 핍이 오랜 방황 끝에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매형 조와 비디 사이에 난 딸을 핍 이라고 이름 지은 것이 다름아닌 자기에 대한 사랑의 표시임을 알게 된다. 핍은 매형에게서 위대하고 진실된 참인간을 보게 된다. 핍은 비로소 자신이 위대한 유산을

물려받았음을 깨닫게 된다.


i.  감상 및 문학사적 의의

소년기의 핍은 누나 때문에 불행했고 허비샴으로 인해 야심을 갖기도 했으며, 에스테일러로 인해 좌절을 맛보기도 했다. 또한 제이거슨이 가져온  위대한 유산 의 소식 때문에 유혹을 당하기도 했다. 핍은 이러한 유혹과 좌절을 맛보면서 점차 사람들에 대한 애정의 깊이를 깨달아갔던 것이다.


j. 신사의 본질 제시

독자는 이 책을 읽어가는 동안 디킨스의 독특한 풍자 속에서 진정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한다. 진정한 신사의 본질은 물질적 풍요나 인위적인 교육에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따뜻한 사랑이 바탕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이 작품을 읽으면서 이러한 감동을 느끼는 것도 그의 위대한 유산을 물려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는 정부관리의 아들로 비교적 평온한 신분을 보장받고 자라났으나 가계의 파탄으로 극심한 고통을 체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하루아침에 구두약 공장의 노동자가 된 것처럼, 인생을 다양하게 살아왔는데, 이러한 그의 경험과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이 작품의 모티브가 되고 있는 것이다.


k. 부조리 속의 인간관계 묘사

디킨스가 문학사에서 평가받는 점은 작가 자신이 성장과정에서 체험한 금전문제나 사회부조리의 문제들을 그의 작품에서 예리하게 지적한 데 있다. 그는 해학과 사회적 모럴에 대한 반항적인 작품도 서슴없이 썼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산업혁명 이후에 갖가지 사회악이 난무하는 한편 물질적 풍요에 대한 갈구가 강하던 시기였는데, 여기에 그의 시선이 머물렀다. 초기에는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던 악의 양상이 점차 사회적인 차원으로 발전하였고, 그에 따라 인간과 사회를 좀더 깊이있게 그려낼 수 있었다.

아마 영국 문학사에서 디킨스만큼 널리 그리고 오랫동안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작가도 흔치 않다. 당시 모임석상 등에서 나는 디킨스를 읽지 않았다 고 말하면 대화에서 소외되기가 일쑤였다고 한다. 그는 죽기 직전에 빅토리아 여왕을 단독으로 만나는 영예를 가졌고, 대중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얻었다. 다른 작가들이 생전에 얻지 못한 인기를 그는 살아 있는 동안에 얻었고, 경제적으로도 중년 이후는 풍족했다.



C05 –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 / 오스틴(Jane Austin, 1775-1817)

(출전 :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영국 최초의 위대한 여성작가 오스틴이 19세기 초의 영국 중류사회의 풍자적 단면을 보여주는 작품.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4쌍의 결혼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 수 있듯이, 이 소설은 19세기를 전후한 영국 중산층의 결혼관과 가치관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엘리자베스와 다시라는 두 주인공이 오만과 편견의 줄다리기를 하는 동안 인간성이 완성되어간다는 이야기로, 가정과 여성의 삶, 그리고 결혼을 통해 시대적 반향과 내면의 성찰을 함께 드러낸 오스틴 문학의 정수다.


a.  생애와 작품활동

영국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여류 소설가인 오스틴은 햄프셔 주의 스티븐턴에서 신앙심이 깊고 온화한 아버지와 유머가 풍부한 어머니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학교교육은 거의 받지 않고 주로 가정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문학적 성향이 뛰어난 가족들의 영향으로 처음으로 풍자적인 습작을 쓰다가, 점차 본격적인 소설을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어머니는 재치있는 여성으로 시와 이야기를 즉흥적으로 지어내는 재주로 유명했다. 이 대가족이 즐긴 오락은 연극이었는데, 오스틴 일가와 이웃들은 스티븐턴 극단을 만들어 여름휴가 때는 목사관 헛간을 소극장으로 개조해 연극을 공연하기도 했다. 활기차고 애정이 넘치는 집안 분위기는 그녀의 창작을 자극했는데, 부친의 은퇴와 죽음으로 인한 충격에 한동안 방황했으나. 제2의 고향인 초턴에서 작품활동을 재개하여 경이적인 활동을 한다.

이전의 원고를 고쳐 출판한 분별과 ‘다감(1811)’에서 이성과 낭만적 감성 사이의 갈등을 풍자했고, 젊어서부터 첫인상으로 구상해두었던 소설을 다듬어서 ‘오만과 편견(1813)’으로 출판했다. 그뒤 ‘맨스필드 공원(1814)’, ‘에머(1815)’를 연속 출판했다. 그러나 1816년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1817년 5월 눈을 감았다. 사후에 출간된 노생거 사원 은 18세기 후반에 유행하여 낭만주의를 선도한 중세를 배경으로 한 괴기소설인 고딕소설의 과잉을 풍자했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낸 오스틴은 주로 18세기 후반의 중류계급에서 일어나는 일상생활 중, 특히 남녀의 결혼을 둘러싼 문제를 극적이고 사실적으로 다루었다. 그녀는 방어적이고 풍자적인 문체는 소재의 빈약함과 작품공간의 협소함을 극복함으로써 많은 독자층을 확보했다. 특히 오만과 편견 은 두 남녀 주인공의 오만과 편견으로 인한 미묘한 심리적 갈등을 섬세하게 묘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녀의 작품에서는 시골의 여러 가족을 중심으로 한 중상류층 남녀의 연애와 결혼 이야기를 통하여 마침내는 여주인공이 많은 과오를 깨닫게 되는 과정이 밀도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소재도 좁은 편이고 동시대의 스콧과 같은 화려한 표현도 없지만, 18세기 특유의 도덕의식을 바탕에 둔 인생비평, 제한된 세계를 묘사하면서 날카로운 비판을 포함한 우수한 인물의 창조, 이야기를 극적으로 전개하는 절묘한 서술방법으로 영국 소설사상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와 같은 오스틴에 대해 19세기의 마코레나 테니슨은 셰익스피어와 견주기도 했고, 20세기를 대표하는 여류작가인 버지니어 울프도  셰익스피어라는 사람 그 자체는 그 작품에서 종잡을 수 없는데, 오스틴의 경우에도 그와 흡사하다. 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녀의 인물됨이 아무리 정겹고 허물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성격상 종잡을 수 없는 면도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그녀의 문학은 현대에 들어오면서 신선하고 예술 심리적인 문학으로 그 예술성이 인정받기 시작하고 있다.


b. 시대적 상황과 작품세계

오스틴이 살았던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는 영문학사상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 문학으로 옮겨가는 과도기였다. 따라서 이 시대에는 자연의 풍경을 묘사하거나 감상적인 탐미주의에 흐르고 있었는데, 오스틴은 그러한 낭만주의와는 거리를 두고 18세기의 고전적 정서를 강하게 지닌 그녀만의 독특한 문학세계를 구축해나갔다. 그는 풍경의 묘사보다는 짜임새 있는 구성과 정교한 인물묘사를 통하여 무조건 중세를 동경하거나 병적인 감상에 흐르던 당시의 젊은 여성들의 심리를 비웃었다.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는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경제적으로는 산업혁명이 있었으며 이에 따른 각 분야의 급격한 증가가 있었다. 

문학사적으로는 낭만주의라는 새로운 문학관과 인생관이 일기 시작했다. 이성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전통의식과 더불어 질서와 상식, 보편 타당한 합리성이 인생에 있어서나 문학에 있어서 목표가 되었던 18세기의 고전주의에 비해, 이 새로운 움직임은 개인의 감정과 상상력이 모든 판단의 기본임을 천명하고 콜리지와 워즈워스의 서정적인 발라드를 발판으로 차츰 시대를 풍미하게 된다. 초기 낭만주의의 기수들은 대부분 시인들로서 이들의 낭만정신은 자연에 심취한 워즈워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먼 이국정서를 동경한 콜리지, 아득한 이상사회를 건설하려는 혁명정신을 강조한 셸리, 미를 추구한 키츠 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와 같은 문학운동은 기존의 고전주의와는 정반대의 문학적 특징을 추구한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문학적 조류 속에서 작가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스틴은 그러한 영향을 별로 받지 않은 이색적인 작가였다. 그녀는 오히려 18세기 초의 고전주의로 회귀하는 듯한 문학세계를 펼쳤다. 그녀는 당시 유럽을 뒤흔들었던 역사적인 사건의 의미 해석이나 서술보다는 평범한 일상의 삶의 묘사에 주력하였으며, 과거에 대한 동경, 꿈과 관념의 감상주의적 경향보다는 이성적인 현실의 세계를 지향했다. 이처럼 오스틴의 생애와 작품세계는 그녀가 살았던 19세기 초 영국의 정치상황이나 사회 제반문제와는 무관한 것 같다. 현대 비평가들은 오스틴의 소설이 지닌 빈틈없는 짜임새에 매료되고, 겉보기에 평범하고 제한된 사건과 배경을 가진 이야기를 통해 존재의 희비극을 드러낼 수 있게 한 기법상의 성취에 높은 평가를 한다.


c.  주요 등장인물

인간의 진실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생각케 하는 소설로, 사람을 재산과 신분으로 평가하는 사회적 통념에 반대하는 여주인공 엘리자베스는 다시의 오만에 편견을 보이다가 사회의 편견에 편견을 가졌음을 깨닫게 되고, 재산이나 신분과 무관하게 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작가의 아이러니컬한 서술이 재미를 더해주는 작품으로, 주요 등장인물은 다음과 같다.

제인: 장녀로서 솔직성과 조심성, 포용력을 가진 정적인 인물.

엘리자베스: 둘째딸로 생기발랄하고 재기가 넘치며 인습에 맹종하지 않는 동적인 미인으로, 후에 편견 을 버리고 참된 사랑을 얻는 검은 눈동자의 소유자.

다시: 명문집안의 남자로 약간은 오만 하나, 정직하고 자상한 인물.

리디아: 단순한 성격의 소유자로 꿈과 동경에 싸여 있으며, 심성이 착하고 정열적인 인물.

베네트 부인: 즉흥적이고 부드러우며 사소한 일에도 마음을 두는 인물.

베네트: 과묵하면서도 사색적이며 자식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지니고 있는 인물.

빙글리: 원만한 성격의 소유자로 자신의 주관이 강한 인물.

위컴: 남을 공모하지만 진실된 사랑 앞에서 참회하는 인물.


d.  작품의 주요내용

 상당한 재산을 가진 남자에겐 틀림없이 아내가 필요할 것이라는 것은 보편적인 사실이다.  이 소설은 이런 말로 시작된다. 어느 작은 마을의 베네트가에는 베네트씨 부부와 다섯 딸이 함께 살고 있다. 베네트 씨는 냉소적이며 농담을 즐겨 하는 편이지만, 바탕은 온화한 사람이다. 어머니 베네트 부인은 삶의 의미를 딸들의 결혼에 두고 있는 여자다. 장녀인 제인과 둘째인 엘리자베스는 혼기가 되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자나깨나 그들의 결혼 문제만을 생각한다. 마침 근처의 네더필드라는 곳에 독신청년 빙글리가 찾아든다. 그의 수입이 4-5천 파운드나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베네트 부인과 가족은 이에 솔깃한다. 이윽고 빙글리를 환영하는 마을 무도회가 열리고 베네트 부인은 딸들을 데리고 여기에 참석한다.

드디어 여기서 빙글리의 친구인 다시와 엘리자베스가 운명적인 만남을 한다. 용모가 훤칠하고 부유한 미남청년인 다시는 뭇사람의 시선을 받는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그의 오만 한 태도에 화를 낸다. 그리고 다시에게서 예쁘지 않기 때문에 같이 춤을 출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자존심이 상해,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악화된다. 그후부터 엘리자베스는 다시와 관련된 모든 것에 우선적으로 편견을 갖고 적대감을 키우게 된다. 반면 다시는 그녀에 대해 처음에는 무관심했다가 차츰 그녀에게 감탄하게 되고, 그녀의 재치와 기지에 끌려 마침내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자존심과 진실된 자아실현의 의지를 지닌 엘리자베스는 어머니나 세상사람들이 품고 있는 돈 많은 청년이 제일이라는 편견에 동조하지 않는다. 대신 특유의 독립성과 지성으로 진실한 삶과 사랑을 이루려 한다. 이러한 그녀의 성격은 네더필드의 빙글리의 집으로 언니 제인을 데리러 가는 장면에서 잘 나타난다. 어느 날 네더필드에서 제인에게 놀러오라는 초대장이 온다. 본인보다 어머니가 더 좋아한다. 그리고 제인이 네더필드로 간 뒤 비가 와서 하룻밤이라도 더 묵게 되기를 바란다. 실제로 제인이 비를 맞아 감기가 들었다는 소식이 온다. 이에 엘리자베스는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비를 맞으며 언니를 데리러 간다. 엘리자베스의 이러한 행동에 빙글리의 여동생인 캐롤라인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은 괜한 짓이라고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다. 다시 역시 그녀의 행동에 놀라면서 무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캐롤라인은 다시에게 호의를 품고, 다시와 오빠인 빙글리가 베네트 집의 딸들과 가까이하는 것을 방해한다. 그러나 차츰 엘리자베스의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에 끌려가고 있던 다시는 캐롤라인에 대해서는 냉정한 태도를 보인다. 다시는 런던의 재산가의 아들로서 귀족으로 자랐기 때문에 오만한 태도가 남아있다. 그래서 그는 엘리자베스에게는 호의를 가지면서도, 그녀의 부모나 마을여자들을 경멸한다. 그런 다시에게 엘리자베스는 계속해서 반감을 갖는다.

이즈음 베네트 가의 먼 친척이 되는 콜린스라는 젊은 목사가 찾아온다. 그는 아들이 없는 베네트 가의 재산을 상속할 사람이다. 그는 캐서린 영부인의 알선으로 조그만 교회의 목사직을 갖고 있으며 아내 될 사람을 고르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것이다. 이 청년은 몹시 경박한 인물이어서 큰 선심이나 쓰는 것처럼 베네트 가의 딸들 중 하나와 결혼해주겠다고 의기양양하게 말을 한다. 베네트 부인은 그 제의에 맞장구를 치고 엘리자베스를 설득시키려고 한다. 어느 날 콜린스는 엘리자베스에게 구혼을 하나, 그녀는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이에 콜린스는 기대했던 것이 어긋나자 엘리자베스의 친구인 샬로트 루카스와 결혼해버린다.

엘리자베스의 동생들은 근방에 주둔하고 있는 군인들에게 내왕하고 있었는데, 그 군인 중에는 위컴이라는 청년이 있었다. 위컴은 명랑한 성격인데다 호감을 가질 수 있는 인물이기도 해서, 엘리자베스는 다소 호의를 갖게 된다. 그녀는 위컴으로부터 다시와 가까운 사람이며, 다시의 냉대로 불행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게 된다. 원래 의협심이 있는 엘리자베스는 더욱 다시를 미워하게 되고, 위컴을 동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위컴의 모함으로, 후에 위컴은 엘리자베스의 동생인 리디아와 도망을 간다.

이즈음 다시는 뜻밖에도 엘리자베스에게 청혼을 한다. 그는 자기의 자존심이 꺾이는 것은 억울하지만, 사랑은 막을 도리가 없으므로 당연히 엘리자베스의 동의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의 주위에서 그를 흠모하는 다른 여자들처럼, 그녀도 자신의 사랑과 거기에 그의 부유함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해버린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그의 오만함을 알고는 거절해버린다. 동시에 제인으로부터 빙글리를 갈라놓은 일과 위컴을 냉대한 일에 대해 비난한다. 두 사람이 서로 길러온 오만과 편견이 절정에 이르게 된 것이다.

결국 다시는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뉘우치고 겸허한 마음으로 엘리자베스에게 편지를 쓴다. 거기에는 위컴에 대한 상세한 비리와 그동안의 오해에 대한 솔직한 마음이 담겨 있다. 이 편지를 받고 엘리자베스 역시 마음의 변화를 느낀다. 또한 샬로트와 콜린스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엘리자베스는 다소 놀라면서 깨닫는 것이 있다. 즉 그것은 지금까지 스스로 타인의 기분을 측정하고 타인의 특성과 개성을 판단하는 데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심을 가졌던 것에 대한 부끄러움인 것이다. 이 점은 그녀가 다시의 편지를 읽으면서, 자신의 편견을 깨닫게 되는 것과 상통한다. 결국 그녀는 이 순간까지 나는 나 자신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게 되면서 자아발견의 성숙한 단계에 들어서는 것이다. 다시의 타고난 오만도, 엘리자베스의 편견도, 참된 사랑에 의해 극복되고 두 사람은 비로소 진실한 사랑을 맺게 된다.


e.  감상 및 문학사적 의의

이 소설은 엘리자베스와 다시가 오만과 편견의 줄다리기를 하는 동안 두 사람의 인간성이 완성되어간다는 이야기를 주된 흐름으로 하고 있다. 즉 다시가 오만이라면, 엘리자베스는  편견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서로 교차되는 두 인물이 어느 한 가지만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양자를 모두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마 이러한 뜻이 복잡하고 미묘하게 얽혀 있는 등장인물들의 심리상태가

이 작품을 이끄는 요소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들을 중심으로 5명의 딸들을 결혼시키는 것이 평생과업인 베네트 부인, 아첨꾼 목사 콜린스, 그리고 위풍당당한 귀부인 캐서린 등등의 인물군상을 등장시킴으로써, 생생한 중류사회의 드라마를 보여준다. 동시에 이 작품은 조용한 환경에서 작가의 경험을 주요 토대로 한 것들이며, 작품의 무대나 등장인물도 그녀의 삶 속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그녀의 소설무대는 18세기 말 그녀가 태어난 영국 남부의 고요한 시골마을이고 등장인물도 대부분이 그 작은 시골마을에 사는 귀족과 목사. 군인 등이다. 그들이 빚어내는 평범한 생활상이 작품의 주요 줄거리를 이룬다. 이러한 소설의 일상성은 그녀가 시골마을의 서너 집안 일이 바로 작품소재다 라고 조카에게 쓴 편지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소설을 가정소설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영국 최초의 여성작가인 그녀의 소설의 중심에는 언제나 가정이 있다. 그녀는 등장인물의 행동 자체보다도 그러한 행동을 유발한 동기라든가,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들, 즉 가정생활. 사랑. 결혼 등을 경험하는 동안에 이루어지는 내적 성장을 섬세하게 그렸는데, 이것은 오스틴 작품의 내면적 탁월성을 말해준다.

그녀의 소설의 저변에 면면히 흐르는 회의적이고 냉소적인 아이러니는 발전과 영광이라는 화려한 전면에 의해 감추어진 영국 중류계급의 퇴폐적인 치부를 풍자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 작품에는 오스틴의 문학세계가 가장 잘 반영된 것으로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질적. 양적인 면에서 그녀의 천재적인 작가역량이 발휘된 작품이다. 특히 이 소설은 가정과 여성의 삶, 그리고 결혼을 통해 시대적 반향과 내면의 자아성찰을 함께 드러낸 오스틴 문학의 특성이 가장 잘 집약되어 있다. 이른바 오스틴 문학의 정수요. 세계문학의 보석인 것이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가정사와 결혼, 사랑의 과정을 풍자와 아이러니 수법을 통해 전달하고 있다.  오만과 편견 이라는 제목이 의미하듯 이 소설을 결국 외양과 실제 차이를 두 주인공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오만과 편견의 줄다리기를 하는 과정을 아이러니와 풍자적 방법으로 보여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두 주인공의 자기발견의 과정을 꿰뚫어보게 하는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다시를

외모로만 판단하여 오만한 사람이라는 편견을 가짐으로써 갈등이 생겼던 것처럼, 다시도 큰딸인 제인을 빙글리에게 시집보내려고 애쓰는 베네트 부인의 저속함을 보고, 다른 딸들도 저속하리라는 편견을 가짐으로써 엘리자베스에게 오만한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이러한 두 사람의 관계를 통해 작가는 사물의 실체나 진실이 무엇인가를 독자에게 깨우쳐주고 있는 것이다. 작품 전체에 흐르는 오스틴의 명랑하고도 위트 있는 유머와 풍자 속에서 우리는 삶의 실체와 진실을, 그리고 당시 영국사회의 인간상과 시대상을 감지할 수 있다. 특히 작가가 지니고 있는 재질은 평범한 사건의 뒤에 숨어 있는 심리적 깊이를 파헤치는 재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배경이 극히 국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토리를 이끄는 원동력은 바로 이러한 심리적 상태를 관찰하는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가가 담담한 필체로 인생의 깊이를 포착하고 은근한 유머를 담은 작품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영국의 한 여류작가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세계문학의 대표적인 작가로 평가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C04 – 리시스트라테(Lysistrate) /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 BC 450-385)

(출전 :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에우리피데스가 아테네 문명의 해체에 대해 비극적으로 반응하였다면, 동시대인이었던 아리스토파네스는 풍자적 희극으로 반응하였다. 아테네가 시라쿠사에서 대패한 다음해인 기원전 412년에 씌어진 이 작품은 아테네가 파멸을 향해 줄달음치는 것을 막아보려는 용감한 시도 중의 하나이다. 이 구식 희극의 대표작은 당대의 상황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를 많이 담고 있지만, 그 풍부한 유머와 우스꽝스러운 소동을 통하여, 인간이 절망적인 상황하에서도 건강한 정신을 잃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a.  생애와 작품활동

서양고대 그리스의 희극시인. 페리클레스가 다스렸던 아테네 황금시대에 태어났지만, 청장년 시절이 펠로폰네소스 전쟁기간이어서 그의 작품은 정치색이 짙다. 그는 전쟁으로 농지가 황폐해지자, 고통받는 농민의 입장에서 평화론을 주장하고, 수공업자층에서 갑자기 출세한 선동정치가를 증오하며 당시 유행한 사상과 윤리를 풍자하였다.

작품 제목은 44편이 알려져 있지만, 완전한 형태로 전해지는 것은 11편이다. 현존하는 작품을 주제별로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아카르나이 사람들 에서는 국가의 계속적인 전쟁정책에 실망한 한 시민이 개인적으로 적국 스파르타와 화평을 맺어 행복해진다는 내용을 담고 있고, 농부가 풍뎅이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평화의 여신을 찾아내어 평화를 실현하는 평화 여자의 평화 등은 반전을 주제로 한 것이다. 또한 기사 에서는 야비한 방법으로 출세한 정치가 클레온을 비판하였고, 벌에서는 선동정치가에게 조종된 어리석은 사람들이 죄없는 사람들을 엉터리 재판으로 다스리는 재판제도를 비판하였다. 어리석은 인간세상을 버린 두 사람이 하늘에 이상국가를 세우는 새는 유토피아 환상이 뛰어난 작품이다. 또한 젊은 시절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겪은 작가는 개구리들 에서 에우리피데스가 그리스 비극을 망치는 것으로 묘사하였고, 또한 선동정치가들이 펠리클레스의 민정을 파괴한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구름 에서 소피스트들이 사회질서를 파괴한다고 비판하는 동시에, 또한 소크라테스를 풍자하기도 하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난 뒤부터는 그의 작품에서 격렬한 공격성이 사라졌으며, 소재도 아테네라는 지역을 벗어나 인간성을 풍자하는 내용으로 넓어졌다. 또한 재산공유와 여성에 의한 남성 공유를 노래한 여성회의에는 플라톤의  국가 에서 전개된 공산제 사상에 대한 논의가 전개되며  복의 신은 세태극이다.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격렬한 개인공격, 저속한 언어와 성적이미지의 빈번한 구사, 초윤리. 초자연적 발상의 기발함은 오늘날 일반적인 희극의 관념에서 보아도 놀랄 만하다 그의 젊은 시절의 작품  바빌로니아인에서 당시의 권력자 클레온 등을 비난하여 위험에 처하였는데, 기사에서 또다시 클레온을 공격하는 대담성을 보였다. 이는 그의 희곡이 권력자로부터 적대시되었던 것 이상으로 아테네 사회로부터는 많은 지지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의 희곡은 평소에 억압되어 잇는 폭력이나 저속성에 대한 시민들의 욕망을 무대 위에서 분출시켜, 평화나 세상변혁의 환상을 잠시나마 맛보게 하였고, 말장난과 기발한 발상으로 웃음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그는 언제나 새로운 소재를 찾아 궁리하였다고 자부하는 것처럼, 작품마다 기발한 소재를 준비하였고 관객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 최대한의 희극적 기교를 사용하였다.


b.  주요 작품내용

아테네의 젊고 아름다운 여인 리시(군대를 해산시키는 여자 라는 뜻)는 적국인 스파르타의 여인 대표 람피트와 중대한 결의를 했다. 전쟁에만 미쳐 가정을 돌보지 않는 남편들에게 전쟁을 중지시키기 위해서  섹스 스트라이크를 하자는 의논이었다. 처음에는 난처한 표정을 짓던 여인네들도 나중에는 그 말에 모두 동의하게 되었다. 람피트는 고향인 스파르타로 돌아가고 리시는 여인들을 데리고 아크로폴리스 신전으로 들어가, 자물쇠를 잠그고 말았다. 남성들에 대한 섹스를 거절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결의도 한때여서 오히려 안절부절 못하는 것은 여자편이었다. 사흘이 지나자 여자들은 몰래 성문에서 탈출하는 것이 아닌가. 리시는 그 여자들을 잡기에 정신이 없었다. 여자들은 자기 남편이 있는 곳에 보내달라고 애원하지만 리시는 그녀들을 타이르기에 진땀을 뺀다.

 우린 남자와의 접촉을 삼가야 해. 저런, 왜 돌아서는 거지? 어딜 가는 거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가로 젓고, 왜 얼굴빛은 하얗게 되는 거지? 눈물은 왜 흘리는 거지? 자, 그렇게 하겠어, 못하겠어? 왜 꾸물거리는 거야. 이런 바보같이! 거짓말은 집어치워. 남편이 보고 싶어 그런 게 뻔하지. 하지만 남자들은 우리가 보고 싶지 않은 줄 알아? 괴로운 밤을 지내고 있단 말야. 난 잘 알아. 그러니까 참아. 조금만 참고 견디면 승리는 우리 것이야. 이러한 설득을 듣고서야 여인들은 다시금 할 수 없이 성 안으로 돌아왔다. 아니나 다를까. 한 사나이가 성 안으로 다가오는 것이 성벽 위에서 보였다. 그 사나이는 리시와 함께 있는 뮤리네의 남편인 키네시아스였다. 뮤리네는 남편을 곯려줄 대로 곯려준 뒤에 성 안에 다시 들어왔다. 키네시아스가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 퇴장하자, 이번에는 아테네의 관리와 스파르타의 사자가 등장한다. 스파르타의 사자 말에 의하면 람피트의 음모로 해서 스파르타의 여성들이 일제히 남자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쩔쩔매고 있지요. 바람 속에 등잔을 들고 다니듯 모두 꾸부정하게 걷고 있는 판이요. 여편네들은 우리가 평화조약에 동의하기 전에는 건드리지 못하게 한다오. 

그 말을 들은 아테네 관리는 스파르타의 사자에게 전권대사를 보내주면 이편에서도 보내겠다고 제안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스파르타의 사자에 뒤이어 아테네의 사자가 등장하였다. 어느 편이든 여성들의 섹스 거부로 울상이 되어 있다. 거기에 리시가 등장하여 그녀의 중재로 강화조약이 성립되었다. 그녀는 우리 여인들이 정성들여 대접을 하겠습니다. 그 자리에서 서로 서약하고 보증서를 교환하십시오. 그리고 난 뒤에 각자 자기 아내를 데리고 돌아가도록 하십시오.  하며 남성들을 성내의 연회장으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일동이 기쁨 속에 노래하며 춤추는 가운데 막이 내린다.

기원전 419년에 재개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중 기원전 415-413년의 시칠리아 섬 원정의 실패는 아테네측에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 희극은 그 2년 뒤인 411년에 상연된 것으로서, 작가는 직접적인 정치비판은 지양하고, 뒷면에서 전쟁의 어리석음을 비웃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작품과는 달리 전쟁은 악화일로를 치달아 기원전 404년에 드디어 패배의 잔을 든다.


c.  감상 및 문학사적 의의

이 희극의 여주인공 리시는 젊고 아름다운 아테네의 유부녀로 교양을 갖추고 있는 여성 이다. 음탕스러운 대사가 터져나오고 외설스러운 장면이 많이 나오지만 그녀 자신은 그것들과 아무 상관이 없다. 그녀는 남성들보다 뛰어난 지도력과 결단력, 그리고 관대한 마음을 지닌 여성으로 이 극을 이끌어간다.

작품 중간중간에 리시가 가족들을 잊지 못해 가정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이탈자들을 설득하는 장면, 성욕을 억제하지 못하는 남자들의 모습, 아내를 찾아온 남자들을 따돌리고 동료들과 합류해 강화조약을 성립시키는 여자들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또한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성이라는 원초적인 문제와 결합시켰다는 점에서 작품 자체가 재미있게 짜여져 있다. 이처럼 아리스토파네스는 풍자와 재기발랄함을 통해 현실의 잘못된 점을 비꼬고 있다. 아테네의 3대 비극작가와는 달리 이 세 사람을 풍자하기까지 하면서 자신의 독특한 영역을 구축한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은 그 문제의식과 표현방식으로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아리스토파네스는 본질적으로 보수적이어서, 전원의 소박함과 평화를 사랑하는 반면, 유행과 전쟁을 증오하고, 선동정치가. 소피스트. 변론술. 민중재판. 비극시인 등을 철저하게 비판하였다. 열렬한 반전주의자인 그는 부정에 대한 분노를 풍자의 웃음 속에 감추었고, 전원에 대한 애착은 서정성 풍부한 웃음 속에 실어 표현한 것이었다. 감미로운 서정성을 지닌 그는 천재적인 패러디를 작품 곳곳에 자유롭게 구사하고 있다.



C03 – 메데이아(Medeia) / 에우리피데스(Euripides, BC 480-406)

(출전 :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14년간의 평화에 뒤이은 펠레폰네소스전쟁의 와중에서 아테네 문명의 와해를 감지하며 쓴 메데이아에서, 에우리피데스는 여성의 사회적 위치와 감정적 특성에 초점을 맞추어 남녀 사이의 대립적 관계와 사회제도의 기본적 불안정성을 천착하고 있다. 도시국가라는 문명세계가 평소에 가까스로 억제할 수 있었던 감정이, 갑자기 격렬한 힘으로 폭발하여 인간과 국가를 파괴하는 모습을 담은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은 작가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한 분석이고 반응일 뿐만 아니라, 인류와 인류가 이루어낸 사회구조나 문명의 의미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a. 생애와 작품활동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와 함께 그리스 3대 비극시인으로 꼽히는 에우리피데스는 천성이 명상적이고 사람을 싫어하는 고독한 성격이었음이 전기에 나타나 있다. 그러한 성격은 그의 작품이나 조각상에 나타나 있는 침울한 표정에서도 엿볼 수 있다. 두 번 결혼하였으나 상대는 한결같이 음란스런 여자들이었다. 그의 작품 중에는 여성을 비꼬는 말이 많다. 때문에 그는 미소지니(여성혐오)의 대명사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실제로는 누구도 감히 따르지 못하는 여성심리의 예리한 통찰자였다.

소재는 전통적인 관례에 따라 신화. 전설에서 빌려왔지만 여러 신과 영웅은 비범한 존재가 아닌, 아무 곳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보통의 남녀와 별로 다를 것 없는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메데이아와 히폴리토스만 해도 등장인물의 정념이 다소 비정상적이라고 할 정도로 격렬하지만 가정 내의 비극에 지나지 않고, 이온같은 작품도 본질적으로는 오늘날의 홈드라마와 같다. 여성의 굴절된 심리를 묘사하는 그의 수법은 정평이 나 있다. 그는 소포클레스까지의 그리스 비극의 경향, 즉  신과 영웅 을 주제로 하지 않고, 신이 내리는 정의로부터 인간중심의 도덕으로 관심을 옮겼다. 그의 희곡은 문제를 다루는 희곡이며, 비판적이고 회의적인 태도를 표현하였다. 그러나 그는 비판을 하였으나 합리성을 찾지는 못했다.

그의 작품 중 바카이의 주인공인 테베왕 펜테우스는 미친 여자들에게 붙잡혀 사지가 찢기지만, 작가 자신도 마케도니아에서 야밤에 미소년 집을 찾아가던 중 여자들에게 붙잡혀 사지가 찢겨 죽었다고 한다.

총 92편의 작품을 썼다고 하나 현존하는 것은 19편이고, 그 중 대표적인 것은 메데이아, 히폴리토스,  헤카테, 헬레네, 트로이의 여인, 바카이  등이 있다.


b.  그리스 3대 비극시인과 페르시아 전쟁

그리스 3대 비극작가를 페르시아 전쟁과 관련시켜 이들의 작품세계를 들여다보는 것도 흥미롭다. 아이스킬로스는 이 전쟁에 병사로서 참전했고, 적군 페르시아에 결정적인 타격을 준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를 축하하는 축제에서 소년 소포클레스는 소년 합창단을 지휘하였으며, 에우리피데는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 군이 승리를 쟁취하던 날 태어났다 한다. 이런 이유로 이들 3대 비극시인을 흥륭. 전성. 쇠퇴기의 시인으로 보아, 그들의 작품과 사상을 이해하는 데 상징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직접 전쟁에 참가하여 신의 섭리와 신의 위대함을 절실하게 체험한 아이스킬로스의 작품에서는,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신의 의지가 인간의 의지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인간보다 오히려 신이 극의 주역이 되고, 인간은 신의 의지의 구현도구로서 결국 신의 의지에 순응하고 귀의한다. 반면, 페르시아 전쟁에 뒤이은 조국 아테네의 가장 영광된 시기와 더불어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인하여 아테네의 미래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던 불안한 시기를 겪어야 했던 소포클레스의 작품에서는, 인간의 한계와 더불어 인간의 위대함이 주제를 이루고 있고, 신의 의지보다는 인간의 의지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인간이 극의 주역이 되고 있다. 반면, 조국의 영광스런 순간을 단지 전해들었을 뿐인 에우리피데스는 전통적인 세계관과 종교관에 회의적이고 사변적인 해석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c.  작품의 주요내용

메데이아는 태양신 헬리오스의 아들인 코르키스 왕 아이에테스와, 오케아노스의 딸인 이다이아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메데이아라는 이름은 ‘빈틈없는, 교활한’의 뜻이다. 두 아이의 어머니인 메데이아는 이국의 땅 코린토스에서 이 나라 왕가의 딸과 약혼한 남편 이아손에게 버림 받을 처지에 있다. 한때 그녀는 흑해 동부해안의 고향 콜스키에서 황금양털을 구하려고 그리스 군사들을 데리고 원정온 이아손에게 반해, 아버지를 배신하고 남동생을 죽이면서까지 이아손을 돕고 사랑의 도피를 하였다. 그런데 이아손의 고국도 안주의 땅이 되지 못하여 겨우 이곳으로 낙향해 있는 지금 눈앞에 사랑의 파국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아손이 황금양털을 구하게 되면 공주와 결혼할 수 있다는 보장을 받고 황금양털을 구하기 위해 원정을 떠난 것이다. 때마침 찾아온 구면의 아테네 왕에게 부탁하여 도피처를 확보한 그녀는 배반당한 사랑과 상처 입은 자존심으로 증오에 불타는 복수를 계획한다. 우선 독약을 바른 예복과 황금의 관을 자기의 아이를 시켜 공주에게 선물로 보낸다. 독약에 취하고 관에서 뿜어내는 불길로 불투성이가 된 공주는 그녀를 돕고자 한 부왕과 함께 불타 죽는다. 이어 자기 자식의 목숨도 끊으려 하지만, 미소 짓는 어린아이의 순진한 눈동자를 보자 마음이 흔들려, 모성애와 복수의 악마 사이에서 한동안 고민한다. 그러나 마침내 분노가 이성을 누름으로써 그녀는 칼을 잡아 자식을 죽인다. 메데이아는 죽은 자기 자식들을 품에 안고 아무도 닿을 수 없는 높은 지붕 위에 선다. 처음에는 충격을 받은 합창단이, 다음에는 메데이아의 남편 이아손이 하늘의 신과 대지의 신에게 극악무도한 잔학행위를 한 메데이아에게 복수해달라고 호소한다. 그러나 신들은 전혀 메데이아에게 복수하지 않는다. 오히려 태양의 신은 전차를 내려보내 메데이아를 개선장군처럼 아테네의 피난처로 태워다 준다. 남편에 대한 복수로 아이를 죽일 것인가를 망설이던 끝에 드디어 정념의 힘에 꺾여 죽이는 장면의 묘사는 시인의 창작이라고 하는데, 그로 인해 이 극은 정념의 비극 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인간내면의 비극적인 갈등을 묘사하는 데에 뜻을 둔 이 시인에게 어울리는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d.  감상 및 문학사적 의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작품의 결말을 두고 불합리하다고 비난했는데, 그러나 그 불합리하다는 것이야말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이 아닐까? 작가의 비극이 지닌 구조는 세련되거나 논리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적이지 않다. 에우리피데스는 자신이 정확하고 논리적인 우주 속에 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선정적인 것을 피하려고 애쓰지도 않았고, 과묵해지려고 애쓰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리스 비극에 있어서 아이스킬로스를 비극의 창시자, 소포클레스는 비극의 완성자로 본다면, 에우리피데스는 많은 면에서 정통을 벗어난 이른바 데카당스적인 작가라고 할 수 있다. 합창대의 처리방법을 비롯하여 구성면에서나 인물의 취급면에 있어서나 선인들과의 수법차이가 현저하다. 당시로서는 극단적으로까지 사실적인 수법을 썼고, 다분히 아이러니를 포함한 합리적인 해석으로 전통적인 신화와 전설에 새로운 모습을 부과하려 했다. 그 결과 신이나 영웅이 천상에서 일상의 현실적인 세계로 끌어내려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그가 생전에 받은 불평의 주된 원인이 되었지만, 근대인이 그의 예술에 공감하는 것은 이 허황된 세계가 현실적인 세계로 바뀌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생전에 있어서보다 사후에 새로운 평가로 각광을 받은 작가로서 3대 비극시인 중 그는 가장 연소자였고, 특히 인간적인 갈등을 주제로

많은 부분을 할애한 작가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평소에 자신의 생활은 매우 비사교적이었으며, 자신의 소유지인 동굴에서 하루종일 바다를 보는 사색적이고 고독한 생활로 일관했다고 한다. 또한 그가 다른 작가들보다 작품을 적게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이 오래 지속되어 현존할 수 있었던 이유도 사후에 그의 극이 붐을 이루어 부활 전승되었기 때문이다.



C02 – 오이디푸스 왕(Oedipus Tyrannus) / 소포클레스(Sophocles, BC 496-406)

(출전 :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엘렉트라 콤플렉스의 정신분석 용어의 원산지가 된 이 작품은 비극의 완성자 소포클레스에 의해 씌어진 서양문학의 대표적인 분석극으로서, 친부살해, 어머니와의 결혼 등을 소재로 한 운명비극이다.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의 힘을 초월해 있는 운명의 힘과 그 장난, 자신의 파멸을 예견하면서도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려는 오이디푸스의 확고한 의지, 그리고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는 그의 자세를 볼 수 있다.


a.  생애와 작품활동

아테네 교외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최고의 교육을 받고, 29세 때 처음으로 비극경연대회에 나가 우승한 이래, 18번 우승을 차지하고 2등 이하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 한다. 그는 처음으로 제3의 배우를 사용했고, 무대배경을 개량하였으며, 합창단의 구성원 수를 12명에서 15명으로 늘리기도 했다. 그는 뛰어난 용모와 재능은 물론, 고결한 인품의 소유자로 아테네의 우상이었으며, 정치가로서도 재무장관 등의 고위직을 지내고, 만년에는 신관까지 지낸 덕망 있고 행복한 생애를 보냈다. 그가 죽은 다음 아테네 사람들이 그를 영웅으로 숭배하고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는 것을 보더라도 그의 비극작가로서의 인기가 얼마나 높았는가를 알 수 있다. 기원전 480년 적군 페르시아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힌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를 축하하는 축제에서, 소년 소포클레스는 소년 합창단을 지휘하였다. 이때 아이스킬로스는 이 전쟁에 병사로서 직접 참전하였고, 에우리피데스는 그리스 군이 승리를 쟁취하던 날 태어났다 한다. 죽기 직전인 90세까지 창작활동을 계속하여 총 120여 편의 작품을 썼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7편이다.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가 식어버린 남편의 사랑을 되돌리려다 반대로 남편을 죽이게 되자 자신도 목숨을 끊는 트라키스의 여인들, 겉보기에는 행복한 왕이 진실을 모르는 채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의 남편이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 파멸하는  오이디푸스 왕, 죽음을 당한 아버지를 위해 동생과 함께 복수를 하는 엘렉트라 외에도 필록테테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등이 있다. 이중 오이디푸스왕과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안티고네 등은 사실상 그의 3부작이라 해도 좋을 듯싶다.

축복받은 신의 총아 소포클레스는 인간 고뇌의 극한까지 묘사하여, 온화하고 명랑한 인물에게서 가장 순수한 비극성이 생긴다는 역설을 성립시켰다. 소포클레스는 죽음과 고뇌는 인간존재의 실상이고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아, 죄없는 사람들의 고뇌를 그대로 묘사하였다. 주인공은 결정적인 상황에 놓여 있을 때 타협하지 않고 용기를 가지고 대결하며, 굴욕적인 삶보다는 죽음과 파멸을 선택한다. 이처럼 강하고도 고귀한 인간이 고뇌하는 데에 비극적인 아름다움과 숭고함이 있다. 극의 줄거리는 신화 그대로여서 관객은 사건의 진전과 결말을 알고 있다. 앞일을 모르고 있는 극중인물들의 말이나 행동이 진실을 알고 있는 관객들과 대조를 이루어 극적 효과를 크게 하는 수법은 소포클레스적인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b.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엘렉트라 콤플렉스

우리는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를 통해 오이디푸스와 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용어에 친숙하고, 그의 제자인 C. G. 융으로 인해 아가멤논의 딸인 엘렉트라보다는  엘렉트라 콤플렉스 라는 말에 더 익숙하다. 물론 이 말들은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하는 오이디푸스 왕과 엘렉트라의 비극적 운명에서 유래한 것이다.


c.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신화에 나오는 오이디푸스 왕이 생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한다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에 근거한 것으로, 남자아이는 특히 3-5세에 오이디푸스와 마찬가지로 아버지에게 적의를 품고 어머니에게는 애정을 구하고자 하는 성적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작품 속에 나오는 지금까지 꿈속에서 자기 어머니와 잠자리를 같이한 사람은 아주 많습니다 라는 유명한 대사는 프로이트의 이론보다 2천 년이나 앞서 나온 말이다. 이러한 성적 욕망이 일어나는 시기를, 오이디푸스기 또는 남근기라고 한다. 아버지에게 적의를 품기 때문에 남자아이는 그 보복으로 거세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공포를 갖는다고 한다. 이 공포가 계기가 되어 아버지처럼 되려고 하는 동일자각으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극복되고, 점차 잠재기로 이행되어간다. 또한 사춘기에 이르면 성적 충동이 강해지고 오이디푸스적 욕망은 되살아나는데, 이 욕망은 다른 이성에게로 옮겨져 극복된다. 프로이트는 도스트예프스키에게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강하게 느꼈던 듯, 도스토예프스키의 부친이 마을 사람들에게 죽자, 프로이트는 도스토예프스키와 부친살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 논지는 도스토예프스키는 강렬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경향을 가지고 있어서, 은근히 부친의 사망을 바라고 있었는데, 그것이 현실화됐기 때문에, 자기가 실제로 범인인양 착각하게 되어, 훗날 그에게 나타난 낭비벽과 도박병 등의 이상한 행동양식으로 표출되었다는 것이다. 스탕달 역시 이런 경향이 농후했는데 어머니는 매력적인 사람이었고,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우리의 키스를 방해하러 올 때는 몹시 얄미웠다는 그의 자서전의 한 구절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d. 엘렉트라 콤플렉스

여자아이는 반대로 어머니를 미워하고 아버지에게 애정을 가지는 성향을 띠게 된다.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은 트로이 전쟁 후 귀국하여 그의 아내에게 살해되는데, 그의 딸인 엘렉트라가 남동생과 협력하여 모친을 죽이고 복수한다는 그리스 신화에서 끌어내어  엘렉트라 콤플렉스 라고 융이 명명하였다.


e.  주요 등장인물

삶을 살아가면서 인간의 힘을 초월한 운명의 힘 앞에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무력한가, 또 인간의 욕망. 공명심. 오만이 얼마나 허망하고 보잘것없는가를 생각케 하는 이 작품의 주요 등장인물은 다음과 같다.

오이디푸스: 버려진 자식으로 자라나 친아버지를 죽이고 친어머니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고, 스스로 자신의 눈을 뽑은 뒤 방랑의 길을 떠나는 비극의 주인공.

이오카스테: 불길한 예언을 지니고 태어난 아들을 버리고, 출생의 비밀을 모르는 아들과 결혼한 사실을 알게 되어 자살한다.

라이오스: 오이디푸스의 친아버지로 출생의 비밀을 모르는 오이디푸스의 지팡이에 맞아 죽게 되는 인물.


f. 작품의 주요내용

테베의 왕이 라이오스는 왕비 이오카스테 사이에서 태어나는 아이가, 아버지인 자신을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고, 아이가 태어나자 하인에게 명령하여 못으로 아이의 발꿈치를 뚫어 키타이론 산에 버리게 한다. 이로 인해 오이디푸스(부어오른 발)란 말이 생겼다. 하인은 그 아이를 불쌍히 여겨 코린토스의 양치기에게 맡겼고, 양치기는 왕자가 없던 코린토스 왕에게 넘겼다. 그곳 왕가에서 왕자로 성장한 아이는 어른이 되어 어느 연회에서 그가 왕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진실을 알기 위해 델포이를 방문한다. 그는 똑같은 내용의 신탁을 듣고 그 운명을 피하기 위해 결코 코린토스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방랑길을 떠난다. 도중에 어느 삼거리에서 낯선 노인 일행과 싸우게 되자,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인다. 그런데 그가 죽인 노인이 그의 친아버지인 라이오스였다. 그가 도착한 테베에서는 괴물 스핑크스가 버티고 있어, 스핑크스가 제시한 문제를 풀지 못하면 그의 먹이가 되었다. 수수께끼란 아침에는 네 발, 낮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데, 네 발로 걸을 때가 가장 약한 것이 무엇이냐 였다. 이에 오이디푸스는 인간으로 문제를 풀자 스핑크스는 자살하고, 이에 대한 보상으로 오이디푸스는 테베의 왕위와 왕비를 얻는다. 생모인 이오카스테를 왕비로 맞이하여 안티고네 등 4명의 아이까지 낳는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 은 이 시점에서 시작되어 과거의 무서운 진실의 폭로를 향하여 전개된다. 테베를 휩쓸고 있는 역병은 선왕을 살해한 자를 벌하여야 없어진다는 신탁에 따라, 살해자 수사가 급선무가 된다. 선왕 라이오스가 살해되었을 당시 곁에 있던 심부름꾼의 말과, 테베에서 가장 믿을 만한 예언자의 말을 들으면서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살인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오카스테는 오이디푸스가 델포이에서 들었던 신탁이 자신이 예전에 들었던 신탁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오이디푸스가 더 이상 비밀을 캐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비밀을 한겹 한겹 벗겨나가고 결국 자신의 출생비밀을 알게 된다. 진실이 밝혀지자 이오카스테는 자살하고,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눈을 찔러 눈을 멀게 한다.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였던 이오카스테를 알아보지 못하고 아내로 맞이한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며, 처남이자 삼촌인 크레온을 섭정으로 남기고, 안티고네와 이스메네의 두 딸의 안내를 받아 방랑의 길을 떠난다.


g.  감상 및 문학사적 의의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자신의 성격과 과실에 의해서 파멸하고 마는데, 비록 인간적인 결함을 갖고 있긴 하나, 대체로 영웅적이고 고상한 동기에 의하여 움직인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소포클레스는 이상적인 인간을, 에우리피데스는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그린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그가 그렇게 말한 까닭도 필경 이런 데 있을 것이다. 소포클레스 극의 대화들은 단순하면서도 품위가 있어 그의 이상주의적 주인공들의 성격에 적합하다고 할 것이다. 그의 작품 중에 나오는 서정적 부분들은 아이스킬로스의 그것들만큼 극 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는 않지만 매우 우아하고 장엄한 편이다. 서양문학의 대표적인 분석극이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에서 친부살해와 어머니와의 결혼이라는 극의 중요한 사건들은 극이 시작하기 전에 있었던 일들이고, 극 자체는 단순히 비극적 분석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극적 분석은 극의 서두에서 인자한 통치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던 오이디푸스가 거리에서 아버지를 죽인 살인범과 동일인이고, 오이디푸스가 아내라고 믿었던 이오카스테가 다름아닌 그의 어머니이고, 생부가 살해되던 현장의 유일한 생존자가 오이디푸스를 갖다 버린 인물이며, 선왕의 살인범을 찾아내겠다는 오이디푸스의 성실한 노력이 오히려 그를 파국으로 이끄는 것과 같은  비극적 아이러니를 통하여 관중이나 독자를 숨막히게 하고, 짧은 시간에 극적 긴장을 지속적으로, 그리고 집중적으로 고조시키는 분석극 특유의 효과를 마음껏 발휘하는 것이다. 흔히 그리스 비극을 운명비극이라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결코 운명의 단순한 제물은 아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도 맹목적인 생존을 위하여 인간의 존엄을 포기할 수 있었다면 파멸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파멸할 줄 알면서도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비극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진정한 의미의 비극이란 신 또는 외부로부터의 의지와, 인간 또는 내부로부터의 의지 사이의 갈등과 대립이라는 절망적이고 가망없는 투쟁 속에서도 타협을 거부하고, 파멸 속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위대함과 존엄을 지키고 보여주는 데 있기 때문이다.



C01 – 오레스테이아(Oresteia) (3부작) / 아이스킬로스(Aeschylos, BC 525-456)

(출전 :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그리스 비극 전체를 통틀어 현존하는 마지막 3부작인 이 작품들은 비극의 창조자인 아이스킬로스의 심오한 사상과 종교관이 농축된 인간정신의 위대한 성취로 간주된다. 그중 아가멤논은 웅장한 구성과 심오한 종교관, 음악적인 언어, 대담한 비유로 가득차 있으며, 코에포로이는 인간의 죄과에 대한 신의 응징이 자손에게까지도 나타난다는 교훈을 준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죄과에 대한 신의 응징과 고난을 통하여 지혜에 도달한다는 그의 기본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a.  생애와 작품활동

괴테가 훔볼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가멤논이야말로 예술품중의 예술품이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짜놓은 양탄자 라고 극찬한 작품. 아이스킬로스는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와 함께 그리스 3대 비극시인 의 하나로, 이들은 대대로 전승되어오던 구비문학과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올림포스 산의 제우스를 중심으로 한 신들과 그리스 건국영웅들의 이야기를 비극의 소재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들 세 작가가 신과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방법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아이스킬로스는 아테네의 참주정치 시기에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새로운 민주정치가 확립되어가는 격동기에 청년시절을 보냈다. 페르시아와 벌인 마라톤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시칠리아에 있는 그의 묘비명에도 나타나 있는 것처럼, 그는 시인으로서보다 마라톤의 전사로서 기억되기를 원했을 만큼, 역사적인 페르시아 전쟁에 참여한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그는 이 전쟁을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표현처럼 정의와 불의, 선과 악, 자유와 예속의 투쟁으로 보았으며, 그리스 인들의 기적 같은 승리를 인간의 교만을 응징하는 신의 섭리로 보았던 것이다. 아이스킬로스의 현존하는 7개의 비극은 모두 페르시아 전쟁 이후의 작품들인데, 그의 어느 작품도 그가 이 전쟁에서 몸소 체험한 신의 섭리라는 근본사상을 떠나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그는 기원전 499년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제의 비극경연에 참가한 이래, 12차례나 우승을 차지하였다. 기원전 471년 시라쿠사의 참주 히에론의 초청을 받아 시칠리아를 여행하였으며, 기원전 468년의 비극경연에서는 후배 비극시인인 소포클레스에게 우승을 넘겨주었다. 그는 두번째 시칠리아 여행 도중 죽었다.평생 90여 편의 작품을 썼으나 현존하는 것은 7편이다. 살라미스 해전에서의 크세르크세스가 이끄는 페르시아 군의 패배를 주제로 한 페르시아인, 오이디푸스 전설을 모방하여 조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형제를 죽이는 것도 불사한 에테오클레스의 비극을 묘사한  테베로 향한 7장군, 오레스테이아 3부작( 아가멤논 코에포로이 에우메니데스), 다나오스의 딸들이 사촌과의 결혼을 싫어해서 이집트에서 아르고스로 도망하여 그곳의 펠라스고스 왕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이야기를 그린  도움을 청하는 여자들, 제우스의 뜻을 거역하고 천상에서 불을 훔쳐다가 인간에게 준 죄 때문에 카프카스 산의 바위에 결박당한 프로메테우스를 묘사한  결박 당한 프로메테우스  등이 그것이다.


b.  그리스 비극과 아이스킬로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시학 에서 밝힌 것처럼 그리스 문학의 최고의 성취는 비극에 있다. 왜냐하면 정치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서사시는 귀족체제, 서정시는 참주정, 그리고 비극은 민주정의 산물이며, 대상의 측면에서 보면, 서사시는 신화탐구에, 서정시는 자연탐구에, 비극은 인간 그 자체의 탐구에 상응하는 문학 장르이기 때문이다. 많은 위대한 작품의 경우에서와 같이 그리스 비극도 종교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데, 그리스의 비극은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의 제례의식에서 시작되었다. 로마 신화의 바쿠스에 해당하는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의 아들로, 그리스 신화에서 매우 이색적인 존재다. 격렬한 도취상태에서 광적인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포교를 위한 편력과 박해에 대한 싸움으로 일생을 보낸다. 그래서 마시고 떠드는 감정형을 디오니소스 형이라 부르고, 이와 반대로 조용하고 냉정한 지성형을 아폴론 형 이라 부른다. 아테네에서 매년 개최되는 국가행사인 대디오니소스 제의 일부로 3명의 비극시인이 3편의 비극과 1편의 사티로스 극의 4부작으로 우열을 가리는 비극 경연대회가 열린다. 이 숭배의식에서 일부 참가자들은 반인반수의 주색을 좋아하는 숲의 신, 사티로스, 또는 양인(goat-men)의 가면으로 분장하고 합창하면서, 제단앞에서 신들의 행적을 서정시로 노래하였다. 이리하여 산양(tragos)을 뜻하는 합창대(tragodoi)에서 비극(tragodia)의 형식이 나왔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극은 아이스킬로스에 와서다. 그는 합창과 낭송만으로 이루어진 초기의 극예술을 노래와 대사. 행위가 어우러진 완전한 극예술로 끌어올렸다. 이전의 그리스 연극은 한 장면에 한 배우가 나와 합창단과 대화를 주고받는 형태였다. 그런데 그는 그리스 연극에 별도의 역할과 대사를 가진 두번째 배우를 도입하여 1명의 배우와 합창단만으로 이끌어가던 관례를, 배우 2명의 연기와 합창의 역할을 줄여, 대화가 비극의 중심이 되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이 혁신으로 그리스 연극은 줄거리 구성과 대사에서 훨씬 다양해졌고 역동적인 긴장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합창단의 규모를 줄이고, 12명을 표준으로 하여 이전의 합창단에 비해 배우의 비중을 늘려 연극성을 높였다. 동시에 그는 안무가의 도움을 마다하고 합창단을 직접 훈련시켰으며, 합창단이 연기할 새로운 무용스텝을 직접 고안하기까지 했다.


c.  주요 등장인물

트로이 전쟁을 전후해 가문과 권력의 복수극에 희생되는 전쟁영웅 아가멤논의 비극적인 최후를 그린 이 작품의 주요 등장인물은 다음과 같다.

아가멤논: 오랜 트로이와의 전쟁 끝에 승리하여 돌아오나, 부정한 아내와 그녀의 정부에 의해 살해당하는 비극적인 인물.

클리타: 아가멤논의 왕비로 남편이 전쟁에 나가자,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한 후 개선한 남편을 살해하는 여인.

아이기: 왕비와 정을 통하고 왕이 돌아오자, 왕을 살해한 뒤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시키는 부정적인 인물.

오레스테스: 아가멤논의 아들로 어머니와 그 정부를 살해함으로써 부친의 원수를 갚는다.

엘렉트라: 아가멤의 딸로 오레스테스의 누이. 동생의 살해계획에 가담한다.  엘렉트라 콤플렉스 라는 심리학적 용어의 기원이 되는 인물.


d.  작품의 주요내용

 비극은 호메로스의 풍부한 식탁의 찌꺼기로 만들어진다 라는 그의 말처럼, 그의 작품소재는 예로부터 전해내려오는 신화와 전설에서 취하고 있다.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이 작품의 대체적인 줄거리는 오레스테스가 자기 아버지인 아가멤논을 죽인 어머니와 그녀의 정부에게 원수를 갚는다는 이야기이다.


e. 아가멤논

트로이 원정(트로이 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본서의 제1권, 호메로스 편 참조)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아가멤논왕이 왕비와 그 정부에 의해 살해된다는 내용이다. 아가멤논을 총대장으로 하는 그리스 군의 트로이 원정 10년째되던 어느 날 새벽, 아르고스의 왕궁에는 멀리 트로이로부터 번갈아 운반된 횃불이 도착했다. 그 신호는 그리스 국민이 애타게 기다리던 승리의 신호였다. 얼마 후 사자가 나타나 원정군의 총수인 아가멤논 왕의 귀환소식을 알렸다. 이윽고 왕궁 앞에 모인 장로들은 오랜 전쟁이 끝난 것을 기뻐하면서도 한가닥 불안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아가멤논이 왕궁을 비운 사이 왕비 클리타가 아이기와 정을 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아가멤논이 등장하자 클리타는 엄청나게 비싼 진홍의 천을 깔고 남편을 맞이한다. 아가멤논은 지나치게 호화스러운 개선은 신들을 업신여기고 백성들의 원성을 사는 오만한 것이라며, 우려를 표명한다. 그러나 클리타의 교묘한 말수작에 넘어가 진홍의 천을 밟고 왕궁에

들어간다. 이 진홍의 핏빛 천은 불길한 예감을 드리우고 있었다. 한편 개선한 아가멤논은 트로이의 왕녀 카산드라를 포로로 데리고 왔는데, 그녀는 신 아폴론으로부터 예언의 힘과 능력을 부여받은 여자였다. 조국을 잃고 왕족의 신분에서 노예로 전락하여 이국에 끌려온 그녀는 신의 가혹한 운명 앞에 정신나간 사람처럼 입을 다물고 일절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가멤논과 클리타가 왕궁으로 들어간 뒤, 문 앞에 서 있는 아폴론 신상을 보고 갑자기 반 미치광이 상태로 슬프게 울부짖으며 불길한 예언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왕궁 안에서 흉계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아가멤논과 자신이 제물이 될 것이라는

알 수 없는 내용의 예언을 중얼거린다. 얼마 후, 카산드라는 제정신을 차린 뒤 자기의 죽음을 신이 정한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순순히 왕궁 안으로 들어간다. 이윽고 왕궁 안에서 아가멤논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문이 열리자 자신의 손으로 죽인 아가멤논과 카산드라의 시체 옆에 서 있는 클리타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녀는 속죄의 기색이 전혀 없이 아가멤논을 맹렬히 비난하고, 자신이 아가멤논을 죽인 것이 정당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녀는 아가멤논이 일찍이 그리스 군을 괴롭히는 폭풍을 잠재우기 위해 딸 이피게니아를 산 재물로 바쳤는데, 오늘 그 대가를 받았다며 그의 죽음은 당연한 것이라고 말한다.

현장에 그녀의 정부 아이기가 나타나, 아가멤논의 살해계획을 세운 것은 자기이며, 그 살해동기는 자신의 아버지가 아가멤논의 부친으로부터 받은 고통에 대한 복수라고 말한다. 따라서 아가멤논을 살해한 것은 선대로부터 이어진 원한의 연쇄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같은 행위를 장로들은 비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리타는 자신을 비난하는 장로들에게 기세등등하게 자신의 승리를 확언한다.


f. 코에포로이(공양하는 여인들)

아가멤논의 딸인 엘렉트라와 아들인 오레스테스가 부친의 원수를 갚는다는 내용이다. 부친의 살해 당시 국외로 도피하여 성장한 오레스테스는 아폴론 신의 명령과 가호를 받아 귀국하여 부친의 무덤 앞에서 누이인 엘렉트라를 만나게 된다. 엘렉트라 역시 어머니 밑에서 굴욕적인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두 남매는 부친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을 것을 다짐한다. 한편 클리타는 양심의 가책으로 매일밤 무서운 악몽으로 시달리고 있었다. 그때 그녀에게 뜻하지 않은 오레스테스 사망소식이 전해진다. 그러나 그 소식을 전한 것은 나그네로 변장한 오레스테스 자신이었다. 그는 교묘한 책략으로 클리타의 정부인 아이기를 살해하자, 어머니는 그것을 알고 젖가슴을 드러내며 애원한다. 그러나 그녀 역시 죽고 만다. 오레스테스의 행위는 정당한 것이었으나, 생모 살해죄를 면할 길 없어 복수의 여신인 에리니에스에게 쫓기게 된다.


g. 에우메니데스(자비로운 여신들)

복수의 여신들에게 쫓기는 오레스테스를 그리고 있다. 복수의 여신들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임무인 복수를 하기 위해서 어머니와 계부를 살해한 오레스테스를 쫓아다닌다. 비록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것이 그의 의무였지만, 어머니를 죽인 것은 복수의 여신들의 눈에는 끔찍스런 죄였기 때문이다. 오레스테스는 아폴론신의 도움을 받아, 아테나 여신이 연 법정에서 무죄를 인정받는다. 아테나 여신은 분노한 복수의 여신들을 달래고 복수의 여신들이 앞으로 자비의 여신으로 숭앙될 것이라는 약속을 하여 화해한다. 아테네 시의 번영을 축원하는 대합창 속에 3부작 비극의 마지막 편의 막이 내린다.


h.  감상 및 문학사적 의의

이 드라마는 크고 웅장한 서사시적인 규모를 가진 오레스테스 이야기다.  아가멤논 에 나오는 파수병의 암시적인 대사로부터 작품 전체를 뒤덮는 어두운 그림자는 최후까지 계속되고, 합창대의 막연한 근심, 신들의 힘, 인간의 덧없는 운명 등은 드라마를 깊은 우수로 휩싸고 있다. 아이스킬로스는 소포클레스처럼 구성에 긴밀하고 합리적인 드라마를 만들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는 견실한 구성보다는 분위기를 중시하고, 장대한 합창단의 노래로 전체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3부작을 통하여 색채의 배분 또한 효과적이다. 진홍색으로 색칠된 제1부와는 대조적으로, 제2부에서는 검은 상복의 여자들이 무리지어 등장하고, 이야기 또한 검은 핏빛으로 물들어져 있다. 그러나 극의 구성으로서 가장 흥미있는 것은 오레스테스가 태양신인 아폴론의 요구에 따라 어머니를 살해하고 그 결과 땅의 신들의 추적을 받아 쫓기는 장면이다. 제3부는 앞의 두 작품에 비해 환상적인 색채가 강하다. 신들과 인간의 구별이 흐릿해지고, 양자 모두 우주적인 정의와 자비의 세계에 병존하게 된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원령들의 모습은 처참하여 관객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키게 할 정도였다고 한다. 원령들의 합창대에서 소용돌이치는 기묘하고 끈질긴 리듬은 오늘날에도 그 본문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이 작품은 극시적이라기보다는 서사시적이라 하여 별로 적극적인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20세기에 이르러 그의 비극시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짐에 따라, 이 작품에 대한 다양한 분석이 행하여졌다. 그 대표적인 것이 클로델과 미로에 의한 음악시적인 재현, T. S. 엘리어트의 성당의 살인과 일가족 재회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그의 작품에 흐르고 있는 일관된 사상은 인간행동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죄 하는 관념을 중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떠한 이유이든 비록 신이 내린 명령이라 하더라도 인간은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 신이 명령한 일을 실행하여 죄로 문책당하는 결과가 되면 그 인간은 두려운 딜레마에 빠진다. 이것이 시인이 만들어낸 비극적 상황이며, 최종적으로는 제우스의 정의에 의해 인간은 구제받고 신의 지혜를 배운다고 되어 있다. 그는 신들의 최후의 정의를 믿고, 인간의 정의가 언젠가는 신의 정의와 일치한다는 점을 비극에서 노래하였다. 그의 가장 진지한 희곡인  결박당한 프로메테우스 에서 아이스킬로스가 묘사한 프로메테우스는 신의 위협까지도 과감하게 물리칠 수 있는 독립심이 강하고 자존심이 센 반항적 인간의 모습이다. 그것은, 고귀하고 명예로운 행위는 항상 혹심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며, 또 불굴의 정신에 의해서 그 진정한 가치가 인식될 수 있음을 암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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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http://blog.daum.net/seonomusa/2385

       http://blog.daum.net/seonomusa/3189


[제3장 한국사상의 흐름과 고전]

(출전 :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a. 한국사상의 원류

한국사상의 원류가 되는 고대사상으로서는 상고시대의 원시신앙과 단군신화를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우리 민족의 윤리관·가치관의 형성과 구체적인 생활양식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애니미즘·토테미즘·샤머니즘 등의 우리 원시신앙은 고대 부족국가 확립 이전에 형성된 것으로 당시 씨족사회의 생활윤리규범을 제공하였고, 우리 민족의 독자적인 공동체 의식과 전통문화를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러한 원시신앙은 단군신화에서 더욱 구체화되는데, 천인합일의 통일적 세계관과 홍익인간 이라는 인본주의가 그 중심사상을 이루고 있다. 한민족은 고대에 형성된 우리 고유사상을 기반으로 유·불·선 3교와 서양사상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우리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사상을 발전시켜왔으나, 여기서는 불교와 유교를 중심으로 우리 사상을 개관해 보고자 한다.  


b.   삼국 및 통일신라 시대


b.1 불교의 전래

한국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4세기경으로, 삼국이 고대국가로서 한창 발전하고 있던 때였다. 당시 사회는 이미 씨족공동체의 폐쇄성에서 벗어나 초부족적인 상태로 변해, 씨족사회의 무속신앙이나 조상숭배 사상만으로 새로운 고대 국가의 사회생활을 이끌어 나갈 수 없었다. 따라서 불교라는 고등종교가 전래됨으로써 인간사회의 갈등이나 모순을 한 단계 높은 수준에서 이해하게 하여 고대국가의 정신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한편 불교의 전래는 종교로서의 교리나 의식만이 아닌, 음악·미술·건축·의학 등의 문화의 전파까지 수반하는 것으로, 중국뿐 아니라 인도나 중앙 아시아의 문화도 소개함으로써, 한국의 고대 문화를 성립시키는 데 기여했다. 불교가 삼국에서 공인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 백제 침류왕 1년(384), 신라 법흥왕 14년(527)이다. 고구려에서 초기에 받아들인 불교는 중국에서 노장사상으로 불교를 이해하려 했던 격의불교였다. 예를 들면 불교의 공을 노장사상의 무로 해석하려 했다. 그뒤 문자왕 때에 이르러 불교 교학의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데 중관계의 삼론종이 주류를 이루었다.  영류왕 때 일본에 간 혜관은 일본 삼론종의 시조가 되었다. 백제는 중국 남조의 불교를 받아들였는데, 주로 율종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백제의 겸익은 성왕 때 인도에 직접 가 소승불교의 논과 계율 관계의 경전을 가지고 와, 그 중 율부를 번역해 백제 율종의 시조가 되었다. 백제에서는 이외에 열반종·삼론종·성실종 등의 연구도 활발했다. 

신라는 불교가 전래되기 전까지 문화수준이 가장 낮고, 고대국가의 성장도 늦었지만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고대국가의 체계를 정비하고 왕권강화를 추진하였다. 따라서 불교는 왕실과 밀착되어 상호이용의 관계를 가지고 국가적 후원 속에 확장되었다. 신라의 초기불교는 주로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다. 고구려의 승려 혜량은 진평왕 때 망명하여 최초의 국통이 되었다. 그 뒤 원광은 중국에 유학해 불교를 널리 섭렵하고 돌아와서 세속오계를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유학 이해는 조예가 깊어 세속오계 속에 반영되고 있다.  이는 당시 삼국통일을 앞두고 신라사회가 요청하던 사회적 질서·윤리를 불교의 권위를 빌어 제시한 것이다.  그 다음 자장은 대국통으로서 신라불교의 제도적 발전과 국가의 사상적 통일에 기여했다.  


b.2 통일신라

삼국통일을 전후해 신라불교는 비약적 발전을 이루어, 경전을 수입하고 교설을 소개하는 데 그친 이전의 단계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독자적인 교학 발전단계로 들어갔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로는 우선 신라는 삼국통일의 주체로서 그것을 실현한 후보다 넓은 세계관을 수립하게 되었으며, 또한 삼국통일을 통해 고구려와 백제의 높은 교학 수준을 널리 섭취할 수 있었다는 점 등이 있었다.  


 1.원효

한편 그 당시 인도와 중국 등 동아시아의 불교계는 대립과 갈등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1중관학파와 유식학파의 대립, 즉 석가 입적 후 1000년 인도 대승불교 철학에 발생한 공·유 의 대립, #2진(출세간의 진리)·속(세간의 진리)의 차별 문제였다.  여기서 공이란 영원불변의 실체가 없음을 의미하는데, 중관학파는 공의 부정적 측면을 강조하고, 유식학파는 공의 긍정적 측면을 강조하여 대립하였다.  이 두 학파의 대립을 인도에서 해결하지 못하자 이 과제가 중국과 한국의 불교계에 넘어왔는데 이 과제를 해결한 사람이 바로 원효다.  원효는 「대승기신론소」에서 대립하는 여러 학파의 논리를 일심을 바탕으로 한 화쟁사상으로 화합했다.  대승기신론의 핵심은 한 마음에 두 가지 문이 있다는 일심이문론인데, 이 두 가지 문이란 진여문(중관학파)과 생멸문(유식학파)이다. 진여문과 생멸문은 서로 대립한 듯 보이지만 일심(중생의 마음)에 의지한다는 점에서는 통하기 때문에 둘은 화합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러한 이론에 입각해 세속적 진리와 절대적 진리 사이의 모순을 극복하는 실천원리르 제시하고, 나아가 불교의 실천운동에 힘썼다.  그는 당시 신라불교가 주로 왕실이나 귀족 지배세력에 의해 주도되고 일반민중과 유리되는 모순을 통찰해, 초탈한 행동으로 정토 사상을 통한 불교의 대중화에 전력 하였다.  원효의 사상은 당시의 중국에 수출되어 법장·징관 등에 영향을 주어 중국 화엄학 성립의 기반이 되었다.  


 2.의상

그와 동시대의 인물인 의상은 원효와는 달리 유학해 중국 화엄종의 제2조 지어 문화에서 화엄학을 배웠다.  그때 「화엄일승법계도」를 짓고, 신라로 돌아와 「백화도량발원문」을 지었다.  그의 저서는 주로 실천적인 목적에서 저술된 것이며, 원효의 경우와 같은 방대한 불교사상 체계나, 혹은 지엄의 문화에서 비길 만한 학문적 업적은 없다.  그는 법장의 이론적 태도와 구별되게 실천수행에 주력하여, 지엄은 의상에게는 의지, 법장에게는 문지의 호를 주었던 것이다.  의상의 이러한 경향은 그의 제자들에게 이어져, 신라 화엄학의 특징을 이룬다. 

의상과 그의 제자들의 실천 중시 경향은 신라 화엄학의 이론적 발전에 한계가 되어, 새로 대두된 선종의 공격을 받게 되는 나말여초에 이르러서는, 균여로 하여금 다시 지엄이나 법장 등의 중국 화엄학을 재발굴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의상이 뒤를 이어 화엄종을 하나의 종파로서 크게 발전시켰다.  이는 원효가 제자를 양성하지 않아, 고려대에 와서 의천에 의해 추앙되기 전까지 그의 사상이 제대로 계승되지 못한 것과 대조된다.  화엄종은 신라불교의 가장 대표적인 종파일 뿐만 아니라 이후 줄곧 교종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3.원측

화엄학과 더불어 신라불교를 대표하는 사상은 유식학이다.  원측은 어려서 당에 가서 유식이론을 배우다가 후에 현장이 인도에서 귀국하자, 그에게서 호법 계통의 새로운 유식이론을 배우고, 유식학의 주요경전의 주석에 힘썼다.  현장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하던 규가의 토론을 벌일 때면 몰려든 스님들로 야단법석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원측은 법상종의 정통을 자처하던 규기와 그의 제자 혜소 등에 의해 이단시되어 배척당했다.  따라서 원측의 유식학은 중국에서는 계승되지 않고 신라에 전해져, 원측의 제자 도증이 귀국하면서 태현·경흥 등의 유식학자가 배출되었다.


4.선종의 전래

신라 하대로 들어오면서 불교계에 나타난 새로운 경향은 교종의 전통과 권위에 대항하는 선종이 성립된 것이다.  원래 선종이 들어온 것은 통일 이전부터였다.  즉 달마시대를 제1조로 삼는 중국 선종이 6조 이후 남,북종으로 갈라지기 전에 제4조 도신의 선이 신라의 승려 법랑에 의해 전해졌으며, 이어 북종선이 신행에 의해 전해졌다.  그러나 선종이 신라에서 크게 유행해 종파로 성립된 것은 821년, 남종선의 법을 도의가 귀국하면서 전한 때부터이다.  그후 계속해 홍척, 혜철, 무염, 도윤, 현욱, 범일 등 당에 유학했던 선승의 귀국과 더불어, 마조 문하의 여러 선풍이 각각 전래되면서 국내 각처에 선종 사찰이 세워져 선종 거점을 이룬 것이 이른바 구산선파이다.  통일 후의 신라불교는 화엄학과 유식학을 중심으로 교학면에서 커다란 진전을 이루었다.  그것은 고대국가의 전제 왕권이 강화되고 있었을 때 그 지배체제의 정신적 기반을 마련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선종은 교종의 기성사상 체계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사색하여 진리를 깨닫는 것이 옳다고 주장함으로써 교종이 지니는 고대적 사유방식을 극복케 하였다.  이리하여 선종의 대두는 당시 사상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중세적인 지성을 성립시키는 중요한 자극제가 되었다.  또한 선승들은 대개 육두품 출신으로 지방호족 세력과 연결되어 있었고, 사원을 중심으로 거대한 장원을 형성하였다.  특히 나말여초의 선승들은 대부분 왕건에게 후삼국통일의 이념을 제시하고 나아가 왕건과 지방호족을 연결시키는 매개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5. 유학의 전래

한국에 유학이 전래된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위만조선의 성립과 한사군의 설치를 계기로 해서 한자가 도입되어 사용되었으니, 이때 한문 문화의 핵심인 유교사상도 함께 전래된 것으로 추측한다.  삼국이 고대국가로서의 체제를 정비해나감에 따라 행정문서 및 외교문서 작성의 필요성이 증대하게 되고, 이러한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서 한문에 능통한 유학자들을 관료로 채용했다. 


b.3. 삼국시대

고구려에는 태학이라는 국가교육기관에서 유학자를 양성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태학박사 이문진의 이름이 전해지고 있으며, 백제에도 박사 고흥이라는 이름이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유학사상의 독자성을 주장할 수 있는 정도의 집단을 이루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고구려, 백제에 비해 늦게 유학을 신라에서는 불교로 사상통일을 이루었지만, 내면적으로는 유교적인 덕목이 상당히 강조되었는데, 원광의 세속오계에 보이는 충효에 대한 강조와 임신 서기석에 보이는 충도에 대한 연마, 그리고 진흥왕 순수비에 보이는 자신의 내적 수양을 통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 라는 구절 등을 통해 이를 알 수 있다.  


b.4 통일신라

신라에 본격적으로 유학이 채용된 것은 신문왕 2년(682) 국학이 설치되면서부터인데, 아찬 이하의 한정된 관직을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골품제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닌, 학문에 기준을 둔 관리가 일부에서나마 탄생했다는 데 중요한 의의가 있다.  당시의 유학자로서는 강수와 설총이 있었는데 모두 문장에 뛰어났고, 유교적인 의리를 강조한 점에서 일치한다.  특히 설총은 (화왕계)를 지어 군주의 도덕적 수양과 신하의 군주에 대한 참된 충성을 설파하여 당시의 유학이 전제왕권의 확립에 직접 관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 유학자들은 모두 육두품 출신이라는 계급적 특성을 지니는데, 당시의 진골귀족들이 사상적 토대로 삼고 있던 불교사상에 대해 충효라는 사회적 윤리규범을 내세워 왕권과 결합,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했다.  즉 신라의 유학사상은 왕권과 육두품의 결합에 의해 형성되었다.  이는 전제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기구의 발전과 함께하고 있다.  원성왕 4년(788), 독서삼품과를 시행한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여기서 채용된 국학 출신의 유학자들은  인이라는 보편적 원리를 근거로 한 국왕의 자애와 신하의 충성이 조화된 유교적 전체주의를 신라하대의 이상적인 정치체제로 상정하고 지방호족의 할거에 따른 혼란을 충효라는 윤리의 확보에 의해 수습하려 하였다.  반진골, 반호족적인 입장에서 전제왕권을 지지하는 경향은 최치원, 김운경, 김가기 같은 도당 유학자들에게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그들은 당의 빈공과에 합격한 후 중국의 역사책에도 이름이 오를 정도로 당시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이러한 자부심과 유학자적인 책인감을 가지고 그들은 시부책을 올리는 등 유교적인 정치를 실현하려고 노력했으나, 호족세력의 발흥으로 말미암은 왕권 약화, 골품제의 한계 등으로 인해 좌절되고 말았다.


c.   고려시대


c.1 선,교의 대립발전

신라하대 선종이 새로 성립되면서 시작된 5교 9산의 사상적 대립은 고려에 들어와서도 그대로 계속되었다.  게다가 화엄종 내에서도 남악파와 북악파로 분열되어 있었고, 선종은 각 지방의 호족세력과 연결된 채 심한 분열상을 나타냈다.  고려 광종은 불교계 혁신을 위해, 당시 불교계를 교종과 선종으로 양립시키고, 교종은 화엄종 중심으로, 선종은 중국에서 수입해온 법안종을 중심으로 통일하려 했다.  균여를 통해 화엄종단을 통합케 하고, 화엄종의 교리를 재정리하게 했다.  균여는 중국의 초기 화엄학을 재검토해, 중국의 지엄, 법장, 신라의 의상의 저서에 대해 주석을 썼다.  균여는 당시 교종의 2대 주류인 화엄종의 입장에서 법상종을 융회하는, 이른바 성상융회 사상을 폈다.  


c.2 천태종

광종은 법안종을 후원함과 더불어 중국 천태종에도 유의해, 제관은 중국에 들어가 (천태사교의)를 지어 침체 되었던 중국 천태종을 부흥시켰고, 의통은 중국 천태종의 제13조가 되었다.  이처럼 광종 때의 교선통합은 천태종과 법안종이 서로 보완하는 입장에서 추구되었다. 그러나 광종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개혁정치는 다시 보수세력에 의해 무산되고, 법안종이나 천태종은 독립된 종파로 성립되지 못했다. 다만 그 융합사상은 뒤에 의천의 천태종 개창에 밑거름이 되었다.  그후 100년 뒤 왕자 출신 의천은 불교계에 일대 개혁을 시도했다. 당시는 보수적인 귀족불교를 법상종이 융성하여 화엄종과 양립하였고, 따라서 선종은 제3종단으로 밀려나 있었다.  이때 화엄종과 종측에서 등장한 의천은 법상종을 통합하고, 나아가 선종까지도 통합하려는 운동을 전개했다.   교관겸수와 지관을 중시한 그의 교선통합은 교리적

발전보다는 정치적 성격이 농후하여, 그가 죽자 천태종은 곧 쇠퇴하고 선종은 다시 독립하였으며, 화엄종은 균여파와 의천파로 분열되었다.


c.3 조계종

이후 얼마 안되어 무신란이 일어나면서 고려 불교계에는 커다란 변동이 일어난다. 그것은 선종의 부흥(조계종의 성립)과 신앙결사운동의 전개로 요약된다.  지금까지 왕실의 보호를 받던 교종세력은 무신정권에 반발하였고, 이로 인해 무신정권의 가혹한 탄압을 받아 급격히 쇠퇴하였다.  그대신 의천 이후 침체해 있던 선종세력이 최씨정권과 제휴함으로써 새로이 대두하였다.  이는 신라 말에 선종이 호족들에게 환영받았던 사실과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조계종의 세력을 크게 떨친 승려는 보조국사 지눌이었다.  지눌의 사상은 돈오점수 와 정혜쌍수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는 인간의 마음이 곧 부처라는 사실을 깨닫고(선 돈오), 이를 바탕으로 수련을 계속해야 하며(후 점수), 이 수행에 있어서는 정, 혜를 함께닦아야 한다(정혜쌍수)는 것이다.  지눌의 이러한 사상은 중국 화엄종에서 방계로 취급되는 이통현의 화엄학과, 역시 중국 화엄에서 선교통합을 주장한 종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결국 선종을 위주로 교종과 조화를 시도한 것이다. 

 선은 부처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 말씀이다 라고 하여 교와 선이 본래 둘이 아닌 하나임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의천이 교종을 중심으로 선종을 포섭한 천태종보다는 교리적으로 한층 발전한 것이었다.  


c.4 신앙결사운동

지눌은 이러한 사상체계를 바탕으로 피폐된 당시 불교계에 대한 혁신을 도모하여 신앙결사로서 수선사를 조직하였고, 뒤를 이어 진각국사 혜심과 원감국사 충지에 의해 조계종은 계속 발전하였다.  특히 지눌의 심성론은 수선사가 주로 지방의 지식인 계층을 대상으로 하였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고려후기에 지방향리 출신의 신흥 사대부들이 성리학을 수용하는 바탕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러한 신앙결사운동은 천태종 내에서도 일어났으니, 요세에 의해 조직된 백련사가 그것이다.  수선사와 함께 무신집권기의 가장 대표적 결사라 할 수 있는 백련사도 역시 불교계의 혁신과 기층사회의 교화에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수선사가 기층민보다 지방의 지식인층을 주된 대상으로 하였음에 비하여, 백련사는 정토관에 보다 충실하여 기층사회의 교화에 전념하였다.


c.5 불교의 타락

그러나 이러한 불교계의 혁신적 기운은 몽고간섭기에 와서 단절되었다. 최씨정권과 밀착해 있던 수선사는 몽고의 억압을 받아 위축되었고, 백련사는 고려왕실 및 원황실의 원찰인 묘련사로 변질되었으며, 이에 대신해서 균여파 화엄종과 법상종, 그리고 (삼국유사)의 일연이 이끄는 선종 가지산파가 부흥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고려왕실과 원의 후원을 받으며 막대한 농장을 소유하고, 고리대나 양주를 통해 부를

축적하였다.  또한 승려는 세속화되어 혼란한 고려사회를 더이상 이끌 수 있는 정신적 역할을 못하자, 이것이 곧 성리학의 수용에 따른 유불 교체의 요인이 되었다.  


c.6 유학의 발전

고려시대는 유교가 정치이념으로 채용되어 크게 발달하였다.  광종이 과거제도를 실시하고 성종이 유학자 최승로의 보필을 받아 숭유정책을 실시하였으니 유교는 정치의 사상체계로 확립되고 학문적으로도 크게 발달하였다.   유교는 이국의 본이요, 불교는 수신의 본이다 라고 한 최승로의 말은 이를 잘 나타내고 있다.  특히 지배층인 귀족이 문신들로 구성되고 문치주의를 표방함에 따라 숭문의 풍조는 더하였다. 유학이 크게 융성한 고려 문종 때, 해동공자 인 최충은 9제학당을 세웠고, 이를 모델로 하여 11개의 사학이 설립되었다.  이러한 사학의 융성은 상대적으로 관학의 쇠퇴를 가져와 숙종 때부터는 관학의 진흥책이 도모되었다.  고려가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채용함으로써 신라의 종교적 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이 지적이고 합리적인 사상체계가 성립하였으니 확실히 하나의 진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려의 유학자들은 과거준비에만 급급하여 유학의 이론이나 사상면에서의 폭넓은 연구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훈고학, 사장학에 치중한 고려의 유학은 중기 이후 귀족취향의 보수적인 경향으로 떨어지는 폐단을 초래하였다.


c.7 성리학의 전래

유학이 불교에 대항하는 새로운 이념으로 부흥되는 것은 고려의 귀족사회의 모순이 첨예화되는 13세기 후반부터이다.  권문세족의 횡포와 불교의 폐해는 신흥 사대부로 하여금 새로운 지도이념을 모색하게 하였는데, 때마침 들어온 성리학은 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성리학은 송의 주자가 완성한 것으로 한, 당시대의 훈고학적 유학 대신 우주의 근본원리와 인간의 심성문제를 철학적으로 해명하려는 신유학이다.  고려는 이미 심성화된 선종의 융성으로 성리학 수용의 터전이 마련되어 있어 그것을 용이하게 수용할 수 있었다.  이 성리학은 충렬왕 때 안향이 소개한 후, 백이정이 원에 가서 배워와 이제현, 박충좌에게  전수하였으며, 고려말에는 이색, 이숭인, 정몽주, 길재,

권근, 정도전 등이 발전시켰다.  이들 주자학자들은 자신이 처한 계급적 위치에 따라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중앙 귀족관료 출신의 온건파와, 정도전을 중심으로한 향리 출신의 급진파로 나누어진다.  온건파는 토지개혁을 점진적으로 행할 것을 주장하고 불교비판에서도 불교의 교리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닌 승려와 사찰의 폐해를 지적하는 데 그쳤다.  이에 비해 급진파는 즉각적인 토지개혁을 통한 민생안정을 주장하고,

불교에 대해서도 사상 자체의 이론적 비판을 통해 불교 자체를 완전히 말살하려고 허다.  이러한 입장 차이는 결국 고려왕조에 대한 계속적인 충성과 역성혁명에 의한 새로운 국가의 건설이라는 극단적인 대립으로 치닫게 되었고 정몽주의 피살과 조선의 개국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d.   조선시대


d.1 억불정책과 산중불교

조선시대에 들어 불교는 극심한 탄압 속에서 일종의 자기 보호책으로서 호불론을 전개하여, 유불일치를 강조하는 경향을 띤다.  조선초기의 기화는 배불론에 대해 호교론을 펴고, 종교적 갈등을 모나지 않게 해소해 공존을 추구하려는 융화적 경향을 뚜렷이 나타냈다.  그는 유, 불, 도 3교의 일치론을 최초로 주장했다.  그후 명종 때, 문정 왕후의 후원을 받은 보우는 선과 교가 하나임을 강조하고, 불교와 유교가 하나에서 유래했다는 융합론을 폈다.  그는 유교의 공자, 순자 및 노자 등 일체의 사상을 불교의 화엄일리 속에 융합시키고, 다시 여기에 선의 요소를 가미해, 교선일체에서 더 나아가 교선일체를 주장했다.  그후 휴정과 유정이 등장하여 불교사상을 진작시키고, 승병을 모집해 왜란을 극복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휴정은 유, 불, 도 3교가 각각 다른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그 궁극적인 진리에 있어서는 다 같다고 하였다.  기화가 (현정론)에서, 유교가 불교를 비난한 내용을 조목조목 들어 해명하는 방식으로 논리를 전개한 데 반해, 휴정은 거기서 더 나아가 전혀 상대를 비판함이 없이 일체임을 강조한 것이었다.  그런 그의 사상은 (선가귀감)에 잘 나타나 있다. 


d.2 조선의 통치이념화된 유교

고려말 중소 지주계급 출신 사대부들이 이념적 토대가 되었던 주자학은 1392년 이성게,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급진개혁론자들이 조선왕조를 개창하자 조선의 통치이념으로 채용되었고, 곧 중세적인 조선 봉건사회를 확립하기 위한 절대이념이 되었다.  조선초의 주자학은 고려 귀족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교의 현실적인 폐해를 비판할 뿐만 아니라, 불교적 세계관이 허구라고 비판함으로써 고려 귀족사회의 정신적

기반을 허물고, 주자학에 입각한 중세적 세계관의 확립이라는 과제를 완수하기 위해 상당히 높은 수준까지 연구된다.  반면 역성혁명을 반대한 일부는 지방의 중소지주로 머물면서 향촌에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훈구파의 비리를 비판하는 가운데 정치세력으로 성장해갔으니 이들이 사림파다.  


d.3 사림파

사림이 중앙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성종(재위 1469∼1494) 때부터다. 이 시기에 오면서 훈구관료 사이에 갈등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성종은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들을 언관직에 기용하였다.  길재,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으로 연결되는 이들은 훈척세력의 비리를 맹렬히 공격 하였는데, 사림을 옹호하던 성종이 죽고 연산군(재위 1494∼1506)이 즉위하자, 훈구파들이 반감을 폭발시켜 사화를 일으킨다.  네 번에 걸친 사화로 그때마다 사람들은 큰 화를 입었지만, 지방의 서원과 향약을 중심으로 잠재적 성장을 계속하여 선조대에는 결국 정계의 주류로서의 위치를 차지했다.  


d.4 주리파와 주기파의 대립발전

조선의 성리학은 주리론과 주기론 의 두 계통으로 발달하였다.   주리론 은 주자의 견해를 보다 충실하게 받아들인 것으로 이기이원론의 입장에서 이 (본질, 플라톤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유사)와 기 (현상, 플라톤의 현상계,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유사)는 서로 다른 것이면서 서로 의지하는 관계에 있지만 어디까지나 이가 기를 움직이는 근본이라는 견해다.  따라서 인간의 심성문제를 해석함에 있어서도 이는 순선무악한 것이고 기는 가선가악한 것이라 하여, 역시 이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이 학설은 이언적(李彦迪, 1491~1553)에서 시작되어 이황(李滉, 1501년(연산군 7)~1570년(선조 3))에 이르러 집대성되었는데, 특히 이황은 동방의 주자 라 불릴 만큼 주자의 교리에 충실하였다.  그의 저서 (성학십도)는 성리학의 요체를 10개의 그림으로 나타낸 책이다.  그의 문하에서는 유성룡, 김성일, 정구 등이 배출되어 영남학파를 형성하였으며, 일본유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한편 주기론 은 서경덕(徐敬德, 1489(성종 20)∼1546(명종 1))이 처음으로 주자의 학설을 비판하고 이기일원론 을 주장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화담집)을 지은 서경덕은 독자적으로 중국의 기철학을 수용하여 기일원론에 입각한 독특한 기철학을 완성했다.  주기론은 (성학집요)의 저자 이이(李珥, 1536~1584)에 의해 완성을 보게 된다.  이것은 우주만물의 근원을 기에 두고 모든 현상들을 기의 변화, 운동으로 보는 입장이었으나, 여기서 이는 기를 움직이는 법칙에 불과한 것이었다.  따라서 심성론에 있어서도 본연의 성보다 기질의 성을 더욱 중요시하였으며, 정치, 경제 등 현실인식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 학문은 이이를 비롯해서 성혼, 송익필과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 등에게 이어져 기호학파를 형성하였다.  이후 영남과 기호의 두학파는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대립하면서 발전하였다.  


d.5 예학의 발달

조선유학이 예학 중심의 교조적 주자학으로 변모하게 된 것은 당시 조선의 사회, 정치적 분위기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임진왜란(1592~1598), 병자호란(1636~1637)을 겪은 후 조선은 봉건사회의 모순을 극명하게 드러내면서 붕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17∼18세기에 이르면 농업기술의 향상으로 생산력이 급격히 향상되면서 농민층의 분해가 가속화되는 동시에, 통치능력의 상실에 따른 지배계급의 압박과 수탈이 더욱 가중된다.  이러한 봉건사회 자체의 해체 위기에 처하여 지배계급의 유학자들은 주자학적 명분을 더욱 강화하고 신분질서를 엄격히 함으로써 이를 극복하려 했다.  


d.6 주자학에 대한 비판 

조선후기에 나타난 사회경제적 변동은 주자학 일변도의 사상체계에 근본적인 반성을 요구하였다.  교조화된 주자학에 대한 비판은 이전부터 있어왔는데 윤휴와 박세당은 그 대표적 인물이다.  이들은 주자학의 절대성을 부인하고 유교경전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을 시도하였고 이러한 비판적인 동향은 양명학의 도입으로 가속화되었다.  양명학은 명의 왕양명이 일으킨 주관적 실천적인 유학체계로, 주기론의 입장을 견지하여 조선의 사회변동을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제두는 이를 학문적 체계화하였다.


d.7 실학운동

지배계급의 정통 주자학이 끝까지 명분론과 주리론을 고집하는 동안 사상계의 일각에서는 전혀 새로운 문제의식을 지닌 학문 경향이 17세기 후반부터 등장하는데 이를  실학 이라고 부른다.  실학을 담당한 계층은 양반계층 내부의 계급분화와 일부 족벌의 대토지소유로 말미암아 몰락한 양반 지식인들이다.  이들은 신분적으로는 지배계급에 속했지만 현실행활은 일반민중들과 다를 바 없어 당시 민중들의 비참한 생활상과 지배계급의 수탈상을 체험으로 깨닫게 되었고, 현실정치의 모순을 누구보다도 예리하게 볼 수 있었다.  이들은 관료로 진출하지 못한, 혹은 불우한 관료생활로 끝맺은 자신의 처지를 통하여 봉건사회의 모순을 자각하고, 주자학적인 명분론의 강화로는 현실의 구조적 모순이 도저히 극복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학문연구의 방향을 관제, 병제, 토지, 기술 등의 현실문제로 전환하고, 이러한 현실문제의 해결을 위해 그 동안 지엽적인 지식들을 백과전서식으로 탐구하고,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구의 자연과학,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학문대상에 있어서 획기적인 전환을 이룬 실학자들은 학문 방법에 있어서도 중국의 고증학을 받아들여 전통적인 주자학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경험적, 실증적인 방법을 채택함으로써 어느 정도의 근대성을 띠게 된다.  실학자들의 철학사상은 시대와 대변계급에 따라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 있으므로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대개 현실의 변혁과 개인이 욕망을 긍정하는 주기적인 경향과 경험론적인 색채를 보이고 있다.


 1.경세치용학파(經世致用學派)

실학사상은 연원을 거슬러올라가면 이이에까지 소급되지만, 본격적인 실학사상은 유형원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본다.  초기의 실학은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반에 걸쳐 발전했는데, 흔히 경세치용학파로 부르기도 한다.  이는 이익에서 시작하여 그의 제자들에게 계승된 사상으로, 당시의 사회적 모순이 토지의 과점에 있다고 보고 토지개혁 문제에 주력하였으며, 당시의 소농민계층을 대변한 양심적인 관료의 사상으로 후에 일부의 제자들은 그들이 지향한 농촌사회의 이념으로 천주교를 도입하기도 한다.


 2.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

18세기 중반에 일기 시작한 중기 실학은 이용후생학파라고도 하는데, 주로 중국을 다녀오고, 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북학파의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이 주축을 이룬다.  이들은 대개 서울 출신의 학자들로 당시 현저한 발전을 보였던 상업과 수공업을 중시하고, 도시빈민의 생활상을 동정하여 이들을 대변하는 중상주의적 사상을 전개했다.  그들은 생산력 발전을 위해 중국에 들어온 서구과학을 과감히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고, 그들 자신이 과학적 연구에 몰두하기도 했다.  또 당시의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양반제도를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초기와 중기와 실학사상은 정약용에 의해 집대성되는데, 그는 현실문제에 대한 여러가지 개혁안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청의 고증학을 이용한 유가경전의 재해석을 통해 수사학(유학)의 입장을 확립함으로써, 기존의 주자학에 대체될 수 있는 새로운 인간관, 세계관을 제시했다.  


 3.실사구시학파(實事求是學派)

19세기 초반 김정희에 이르러 일가를 이룬 학파가 바로 실사구시학파 이다.  이 학파는 경서 및 금석, 고전의 고증을 위주로 하여 학문하는 자세에 있어, 실증성과 해석을 크게 강조하였다.  이 사상은 묘하게도 김정희와 가까웠던 중인계급 학자들에 의해 후일 개화사상과 연결된다.  김정희와 더불어 초, 중기 실학과는 거리가 있으면서도, 당시 사회를 충실히 반영하는 철학체계를 구성한 학자는 최한기다. 그는 실학과 개화사상의 가교자로 평가되는데, 서구의 자연과학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외국과의 교류를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윤리적인 면에서도 유교를 옹호하여 전형적인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을 폈다.  최한기는 경험적인 인식론과 자연과학적인 학문관, 유교적인 윤리관, 정치개혁론 등이 모두 융해되는 방대한 기일원론의 철학체계를 구성하여 조선의 유학에 막을 내린다. 그의 기철학은 저서 (기학)에 담겨 있다.  이들 실학사상들은 교조적 주자학을 타파하고, 학문의 중심을 윤리, 도덕으로부터 정치, 경제, 자연에 대한 현실문제로 전환시켰다. 그들은 당시 사회적 모순이 지배계급의 부패, 무능과 더불어 토지제도, 신분제도 등의 봉건사회 자체에 내재하고 있음을 깨닫고, 토지제도의 개혁을 통한 이상적인 농촌사회의 건설, 신분제도 철폐 및 과학기술의 수용 등 여러 가지 이상적인 방안을 내놓았으나, 시대적, 계급적 제한성과 제국주의의 침탈로 말미암아 근대적 사상으로까지는 성숙하지 못했다.  그러나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세도정치가 시작됨에 따라 실학파의 활동이 부진하게 되자, 다시 성리학이 세력을 만회하였다.  그 뒤 천주교의 세력이 날로 심각해지면서, 위정척사 운동이 대두하여 외국사상과 외국문물에 대한 배격운동이 전개되었으나, 그 수구적인 운동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고, 오히려 근세에 개화혁신에 장애가 되는 측면이 많았다. 그 원인은 조선말엽의 유교계가 대부분 국제정세에 어둡고, 유교의 유신정신을 망각한 채 수구만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e.   근대이후


e.1 불교자체 정화노력

그후 한국불교는 일제의 통치를 당해, 백용성, 박한영, 한용운 등이 나타나 불교 유신을 제창했다.  백용성은 전통적인 한국 선종의 특색을 다시 드러내고, 그럼으로써 불교 본연의 진면목을 제시하고자 하여 대각교 운동을 벌였다.  박한영은 한국의 전통적 선관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제시하는 한편, 과학과 서구문물이 밀려오던 당시의 상황에서 미래를 지향하는 불교를 제시하려 했다.  한용운은 철저한 유신을 주장하여, 과학문명이 고도로 발달된 시대에 정신문명의 원천으로서 불교를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당시 이회광이 친일불교운동의 일환으로 일본 조동종과 합종할 것을 추진한 데 대해, 한국불교의 전통은 임제종이라고 선포하여 조동종과 합종할 수 없다는 운동을 이끌었다.  국권이 상실되면서 한국불교교단은 일본총독의 지배하에 30본산으로 나뉘어 전국의 사찰과 승려를 통제하는 기구가 마련되지 않았다.  1941년 봄 태고사(지금의 조계사)를 세워 총본산으로 삼아 종단의 이른을 조계종으로 결정하고, 1946년에는 기존의 명진학교를 동국대학교로 개칭하여 새로운 출발을 하였다.  그후 효봉, 청담, 성철 등 큰스님들의 구조적 신앙자세는 1980년 10,27법난에도 꿋꿋하게 한국불교를 지켜나갔고, 1990년 불교방송(BBS)의 개국과 더불어 불교발전의 기틀을 마련해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불교계는 돈오점수(頓悟漸修, 깨달은 후 계속 닦음)와 돈오돈수(頓悟頓修, 단번에 깨우쳐 단번에 닦아 마침)의 해묵은 이론적 대립문제, 중생구제보다 정치세력과 결탁하여 세속적인 교권 확대에 집착하는 일부 집단의 반종교적 행위문제, 타종교와의 융합을 통해 모든 인류가 화합하여 참된 인간을 완성하려는 불교의 이상을 실현하는 문제 등 몇 가지 해결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e.2 유학 

국권침탈 이후 일제는 이른바 문화정책이라는 미명 아래 친일적인 유학자들을 이용, 성균관을 경학원 으로 격하시켜 한국유교의 맥을 단절시키고자 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전국 유림의 합의에 따라 경학원을 성균관으로 환원시키고, 1964년 전국 유림의 결합체인 유도회를 결성함과 동시에, 성균관 대학교를 창설하여 유학정신에 바탕을 둔 대학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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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의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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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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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가자 피안으로.

피안으로 아주 가자, 영원한 깨달음으로.

 

격의불교(格義佛敎) 또는 격의(格義)는 불교의 중국 전래 초기인 위진시대(魏晋時代: 220-420)에 나타났던 불교 교리 이해 방법 또는 불교 연구 방법이다.[1][2] 한문으로 번역된 불교 경전에 기술되어 있는 사상이나 교리를 노장사상(老莊思想)이나 유교사상(儒敎思想) 등의 전통 중국 사상의 개념을 적용하여 비교하고 유추함으로써 이해하려고 하는 방법이다.[1][2]


예를 들어, 불교 경전인 《반야경(般若經)》에 나오는 "공(空)"에 대해 노장사상의 "무"(無) 개념을 적용하여 그 내용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1] 죽림칠현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3] 하지만, 이러한 격의불교로는 불교에 대한 참다운 이해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었다.[1]


동진(東晉: 317-420) 시대의 고승이었던 도안(道安: 312-385)은 격의불교의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2] 하지만 그도 격의불교의 폐단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하였는데, 구마라습(鳩摩羅什: 344-413)이 불교 경전을 본래의 뜻에 맞게 바르게 번역한 이후에야 비로소 극복되었다.[2]


[삼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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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론종(三論宗)은 《중론》·《십이문론》·《백론》의 삼론(三論)에 의거한 중국 불교의 논종(論宗)이다[1][2]


삼론(三論)은 도안(道安: 312-385)의 권유로 쿠차국에서 초빙된 구마라습(鳩摩羅什: 344-413)이 한역한 《대품반야》·《소품반야》 등의 초기 대승경전과 이에 입각한 용수(龍樹: c.150-c.250) 계통의 중관파 논서들 가운에, 용수의 《중론(中論)》 4권(409년에 한역)과 《십이문론(十二門論)》1권(409년에 한역) 그리고 용수의 제자인 제바(提婆 · Aryadeva: 170-270)의 《백론(百論)》 2권(404년에 한역)을 가리킨다.[2][3]


구마라습 문하의 수재(秀才)들에 의해 삼론이 연구되면서 삼론학파(三論學派)가 형성되었다.[2]


반야공(般若空)의 사상을 교리의 근간(根幹)으로 삼고 있어 중관종(中觀宗) · 공종(空宗) · 무상종(無相宗) · 무득정관종(無得正觀宗) 등으로도 불린다.[2]


중국 불교의 삼론종은 인도 불교의 중관파에 대한 중국측 명칭에 해당한다.[3] 중국 불교의 삼론종은 인도 불교의 중관파와는 달리 《열반경》의 여래장사상을 수용하여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사상을 전개시킨 것에 특색이 있다.[4]


성립[편집]

《중론》·《십이문론》·《백론》의 삼론이 언제부터 용수 계통의 반야중관사상(般若中觀思想)을 대표하는 핵심적인 논서로 간주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론학은 승랑(僧朗: fl. 6세기)을 거쳐 길장(吉藏: 549-623)에 이르러서는 중국 불교의 중요한 종파 중 하나인 삼론종으로 자리잡게 되었다.[3] 이때부터 삼론종이라는 명칭은 인도 불교의 중관학파(Madhyamika)에 대한 중국측 명칭으로 통용되었다.[3]


삼론종에서 7대상승(七代相承)이라 하며 내세우는 인물은 구마라습(鳩摩羅什) · 승숭(僧嵩) · 법도(法度) · 승랑(僧朗) · 승전(僧詮) · 법랑(法朗) · 길장(吉藏)의 7사(師)를 말한다.[5]


고구려의 승려인 승랑(僧朗)은 일찍이 중국에 들어가 구마라습(鳩摩羅什)에서 승조(僧肇)로 이어지는 삼론학(三論學)을 배웠다.[5] 당시의 삼론학은 《성실론(成實論)》이란 소승적(小乘的) 유사상(有思想)에 영향을 받고 있어 본래의 삼론학의 진의(眞意)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다.[5] 승랑은 이런 사상조류를 탈피하여 새로운 삼론(三論)을 설립하였는데, 이 일은 삼론학에서 분수령을 이루어 과거의 삼론학을 고삼론(古三論)이라 부르고 승랑의 순수삼론학을 신삼론(新三論)이라 부르게 되었다.[5]


삼론의 오의(奧義)를 깊이 터득한 승랑은 중국 남방으로 떠나 회계산(會稽山) 강산사(岡山寺)에 머물렀고, 다시 종산(鐘山) 초당사(草堂寺)에 와서는, 정계로부터 은퇴해 그곳에 머물고 있던 주옹(周顒)에게 삼론학을 가르쳐 주옹(周顒)이 《삼종론(三宗論)》이란 책을 저술하는 계기가 되었다.[5]


만년에 섭산(攝山) 서하사(棲霞寺)로 와서 그의 스승이며 주지였던 법도화상(法度和尙)의 지위를 계승(500)하였다.[5] 양무제(梁武帝)는 그의 학덕을 높이 평가하여 천감(天監) 11년(512)에 우수한 학승(學僧) 10명을 선발하여 승랑의 문중(門中)에서 공부를 시켰는데 그때 학승 중 한 명인 승전(勝詮)은 스승의 학문을 계승하여 섭산(攝山 혹은 攝嶺)에 머물렀고, 또 승전을 계승한 법랑(法朗)이 흥황사(興皇寺)에 있었으므로 승랑의 삼론학 학통(學統)을 섭령흥황(攝嶺興皇) 또는 섭령상승(攝嶺相承)이라 불렀다.[5]


이렇게 계승된 승랑의 삼론학은 법랑의 제자인 길장(吉藏: 549-623) 때에 와서 독립된 종파인 삼론종(三論宗)으로 성립되었다.[5] 길장(吉藏: 549-623)은 삼론학파에 몸을 담아 법랑(法朗)의 제자가 되어 삼론에 각기 주석을 붙이는 한편, 《삼론현의(三論玄義)》를 지어 삼론종을 대성하였다.[2] 가상대사(嘉祥大師)라고 불린 길장은 가상사(嘉祥寺)에 거(居)하면서 용수(龍樹)의 공관불교(空觀佛敎)를 중국식으로 발전시켰다.[2]


사상[편집]

삼론종은 단순히 삼론의 사상을 종합 서술한 것이 아니라, 삼론을 바탕으로 하면서 "무득(無得)의 정관(正觀)"이라는 아무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입장에 선 새로운 불교 통일론을 주장하였다.[2]


이제합명중도설[편집]

이제합명중도설(二諦合明中道說)은 승랑이 제창한 인식 방법으로 그의 대표적인 사상이다.[6][7] "이제합 명중도 설"로 띄어 읽는데,[8] 문자 그대로의 뜻은 "이제(二諦)를 종합하여 중도를 밝힌다"이다. 중도(中道)는 불교의 궁극적인 진리를 의미하는데, 이 중도를 밝히는 방법으로 세제(世諦)와 진제(眞諦)의 이제(二諦)를 합명(合明)하는 방법, 즉 정반합지양(正反合止揚)시키는 방법을 쓴 것을 이제합명중도설(二諦合明中道說)이라 한다.[7][8]


승랑의 활동 당시, 삼론과 함께 《성실론》을 공부하고 있던 당시의 학승들은 모두 이제를 중시하여, 부처는 항상 이제에 의하여 설법했으며, 모든 경전은 이제를 벗어나지 않으며, 이제를 밝히면 모든 경전을 해득하게 된다는 견해를 가졌다. 승랑도 이 견해에는 같은 입장을 가졌다.[7] 그러나 승랑은 이제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이들과 견해가 달랐다.


당시의 학승들은 《성실론》의 영향을 받아 이제(二諦)를 이(理: 진리) 또는 경(境: 경지)으로 보는 약리이제설(約理二諦說)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9] 반면 승랑은 이제(二諦)를 교(敎: 방편 또는 수단)로 보는 약교이제설(約敎二諦說)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9] 약리이제설(約理二諦說)은 이제를 어떤 고귀한 "이"(理: 진리) 또는 "경"(境: 경지)으로 봄으로써 이제를 어떤 고정된 실체로 여기게 되고 이에 집착하게 되는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9] 반면 승랑의 약교이제설에서는 이제를 "교", 즉 고정된 성품이 있다는 집착을 타파하여 중도를 밝히는 "방편"으로 보기 때문에, 이제를 실체로 여기는 결함 없이 이제를 통해(즉, 이제를 사용하여) 고정된 성품이 있다는 집착을 제거함으로써 제1의제(第一義諦)인 중도, 즉 진정한 이(理: 진리)가 밝히 드러나게 할 수 있었다.[9]


당시에 승랑의 약교이제설은 공과 중도에 대한 용수의 견해에 진실로 합치하는 것이라고 여겨졌으며, 당시의 중국의 삼론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승랑을 기점으로하여 승랑 이전의 학파를 고삼론(古三論)이라고 부르고 승랑 이후의 학파를 신삼론(新三論)이라 부르게 되었다. 신삼론에서는 《성실론》을 함께 공부하던 고삼론의 태도를 버리고 오직 삼론에 의거하여 중관(中觀)을 전개하게 되었다.


각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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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의 불교학 (3) 중관-유식 양 학파의 논쟁 / 남수영

[ 권말기획 ] 논쟁의 불교학 (3) 공사상을 둘러싼 논쟁

[13호] 2002년 12월 10일 (화) 남수영  nam1988@chol.com

1. 서론


공사상은 대승불교의 근본교리이며 대승경전 가운데서 가장 먼저 공사상을 고양했던 것은 《반야경》이다.


《반야경》은 공사상을 통해서 부파불교의 법유설을 비판하였으며, 《반야경》의 사상을 계승한 용수는 《중론》과 《회쟁론》 등을 지어 《반야경》의 공사상을 정립함과 동시에 부파불교의 법유설을 체계적으로 비판하였다. 용수의 공사상을 구성하는 핵심 개념은 연기·무자성·공·가명·중도인데, 그 모두는 부파불교의 법유설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용수 이후 공사상은 대승불교의 근본교설이 되었다. 인도에서 대승불교를 대표하는 것은 중관·유식 양 학파인데, 그 두 학파는 모두 공사상을 최고의 진리로서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유식학파의 논서들 가운데에서는 중관학파를 허무론이라고 비판하고, 반대로 중관학파의 논서들 가운데에서는 유식학파를 허무론이라고 비판하는 대목이 발견된다. 이런 논쟁은 중관·유식 양 학파가 공사상을 최고 진리로 인정하면서도, 공사상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중관·유식 양 학파의 공사상은 어떤 점에서 서로 다르며, 그 양 학파의 논쟁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본고에서는 그와 같은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 중관·유식 양 학파 공사상의 상이점과 그를 둘러싼 논쟁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2. 중관·유식 양 학파 공사상의 상이점


1) 중관학파의 공사상

용수의 공사상은 《반야경》에서 설해지던 공사상을 발전시킨 것이며, 《반야경》의 공사상은 초기불교에서 설해지던 공관을 발전시킨 것이다. 공관이란 일체의 사물이 공이며, 고정 불변의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보는 관법을 말한다. 예를 들면 불타는 《숫타니파타》에서 “목건련이여, 항상 마음을 가다듬어 아견(atta?udit.t.hi)을 버리고, 세간을 공(sun??ta?이라고 관하라. 이렇게 하면 죽음(maccu)을 뛰어넘는다. 이와 같이 세간을 관찰하는 자를 死王(maccura?a?은 보지 못한다.”1)고 말한다. 《반야경》은 이와 같은 초기불교의 공관을 발전시킨 것이며, 용수의 공사상은 바로 이 《반야경》의 공사상을 계승한 것이다.


《반야경》의 공사상을 계승한 용수는 삼세의 일체법이 모두 연에 의해서 발생하고 존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자성·공·가명·중도라고 주장하면서, 부파불교의 법유설을 비판하였다. 용수는 《중론》과 《회쟁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연기인 것, 그것을 공성(s쳕?yata?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연에) 의존해서 [시설된] 가명이며, 실로 그것이 중도이다.2)

또 여러 사물에 연해서 존재하는 것, 그것을 공성이라고 말한다. 또 여러 사물에 연해서 존재하는 것, 실로 그것이 무자성인 것이다.3) 

연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 아닌 법은 어떤 것도 없다. 그러므로 실로 공이 아닌 법은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4)


이처럼 용수는 연기·무자성·공·가명·중도의 다섯 개념을 통해서 부파불교의 여러 학파들이 상정했던 실유를 비판하고 공사상을 천명하였다. 용수는 연기·무자성 등의 다섯 개념을 모두 동의어로 사용하였지만, 그 다섯 개념들은 논리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즉 연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무자성이고, 무자성이기 때문에 공이라고 부른다. 또 연에 의해서 발생한 것을 가명이라고 하며, 가명이기 때문에 불생불멸인 것이고, 그러므로 일체법은 비유비무의 중도라는 것이다. 용수는 일체법이 연기이기 때문에 무자성인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또 어떻게 자성(svabha?a)이 만들어진 것이겠는가? 실로 자성은 만들어지지 않은 것,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5)


즉 일체의 사물은 연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고, 그것은 일체의 사물이 다른 것에 의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성이란 ‘만들어지지 않은 것’,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기를 인정하는 한 자성은 인정될 수 없으며, 그런 점에서 일체법은 무자성이라는 것이다. 또 용수는 《회쟁론》에서 일체법이 무자성이기 때문에 공인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와 같이 또한 나의 말도 연해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무자성이고, 무자성인 것이기 때문에 공(s쳕?ya)이라는 것이 성립한다.6)


본래 ‘공(s쳕?ya)’이란 ‘결여한, 혹은 존재하지 않는’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용수는 위의 게송에서 공을 그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다. 용수는 자신의 말 역시 여러 연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자성을 결여하고 있으며, 무자성이기 때문에 공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용수에게 공이란 연에 의해서 발생한 일체법이 자성을 결여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용어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용수의 공사상에서 무자성과 공은 논리적으로 서로 관련되어 있다.


또 연에 의해서 발생한 사물이 가명이라는 것은 마차, 중생, 혹은 모래 더미의 예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즉 바퀴 등 여러 부분에 의해서 마차라는 명칭이 시설되고, 5온에 의해서 중생이라는 명칭이 시설된다. 그러나 마차와 중생이라는 사물에 고정 불변의 단일한 실체가 없음은 모래 더미에 그 이름에 해당하는 고정 불변의 단일한 실체가 없는 것과 같다. 그런 이유로 용수는 ‘연기인 것, 그것은 (연에) 의존해서 (시설된) 가명’7)이라고 말했다.


또 ‘가명이기 때문에 중도’라는 말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즉 일체법은 여러 연에 의해서 발생한 명칭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일체법은 실은 무자성인 것으로서 발생하고 소멸하는 것이며 자성으로서는 불생불멸이다. 이처럼 일체법은 자성으로서 발생하고 소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고정 불변의 존재성도 고정 불변의 비존재성도 갖지 못한다. 그러므로 일체법은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비유비무의 중도라는 것이다. 그것을 월칭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또 이 자성의 공성, 그것이 가명 (즉 연에 의한 명칭)이다. 실로 이 공성이야말로 가명이라고 확립된다. 바퀴 등 마차의 부분에 의해서 마차가 알려진다. 그 자신의 부분에 의한 명칭인 것, 그것은 자성으로서 불생인 것이다. 또 자성으로서 불생인 것, 그것이 공성이다. 실로 이 자성으로서 불생인 것을 특징으로 하는 공성이야말로 중도라고 확립된다. (왜냐하면) 자성으로서 불생인 것, 그것의 존재성은 없으며, 또 자성으로서 불생인 것에는 소멸이 없기 때문에, 비존재성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존재와 비존재의 두 가지 극단을 떠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자성으로서 불생인 것을 특징으로 하는 공성은 중도라고 말해진다. 실로 이와 같이 공성과 가명과 중도는 연기의 다른 이름이다.8)


따라서 용수의 공사상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모든 사물은 상호 의존의 연기 관계에 있으므로(緣起) 고정 불변의 자성을 갖지 못하며(無自性), 공이란 그처럼 일체의 사물이 고정 불변의 자성을 갖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空). 이때 일체의 사물은 다만 연에 의해서 임시로 시설된 명칭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다(假名). 그러므로 세간에서 어떤 사물이 발생하고 소멸할 때, 정말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것은 명칭일 뿐이다. 이처럼 일체의 사물은 다만 명칭으로서 발생하고 소멸하는 것이므로, 고정 불변의 존재성도 고정 불변의 비존재성도 갖지 못한다. 그러므로 일체의 사물은 궁극적으로는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니라는(中道) 것이다.


이처럼 용수의 공사상에서 일체의 사물은 연기이고, 연기이기 때문에 일체의 사물은 무자성, 공, 가명, 중도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용수에 따르면 일체법은 연기이기 때문에 공이 아닌 어떤 법도 존재할 수 없고, 모든 사물은 무자성·공·가명·중도인 것이기 때문에 실재인 사물은 인정되지 않는다.


2) 유식학파의 공사상

한편 유식학파는 일체법이 연기이고 무자성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일체법이 공이고 가명이라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즉 유식학파는 허망분별(=식)과 공성은 불공(不空)이며, 따라서 일체법이 모두 공인 것만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중변분별론》 제1-1송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허망분별은 있다. 거기서 두 가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실로 여기에 공성이 있고, 그 속에 또 그것이 존재한다.9)


여기서 허망분별이란 아뢰야식을 말한다.10) 그리고 두 가지란 소취와 능취를 말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허망분별이 분별해낸 결과인 대상, 중생, 자아, 의식의 네 가지를 말한다. 이 중에서 앞의 둘은 인식 대상이며, 뒤의 둘은 인식 주관이다. 세친의 주석에 따르면 자아란 제7말나식을 의미하며, 의식이란 제6의식을 의미한다. 위의 인용문에 따르면 그와 같은 인식 대상(=所取)과 인식 주관(=能取)이 모두 허망분별의 소산이라는 것이다.11)


따라서 이 게송의 전반부는 아뢰야식은 있고, 인식 주관과 인식 대상은 모두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한편 게송의 후반부는 허망분별과 공성이 상호 포섭의 관계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는 허망분별과 공성이 둘이 아님을 의미한다. 세친은 《중변분별론》 제1-1송에 대한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와 같이 ‘어떤 것이 어떤 장소에 없을 때, 후자(즉 어떤 장소)는 전자(즉 어떤 것)에 대해서 공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여실하게 관찰한다. 또 거기에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곧 실재(sat)라고 여실하게 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이 설해진) 공성의 특징이 (이 제1송에 의해서) 분명하게 되었다.12)


여기서 세친은 유식학파 공성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공성의 특징에 대한 올바른 이해란 A라는 장소에 B라는 사물이 없으면 A는 B에 대해서 공(s쳕?ya)이지만, A에 C라는 사물이 여전히 남아 있다면 C는 실재(sat)라고 여실하게 아는 것이다. 이것은 ‘남아 있는 것의 실재’라고 부를 수 있는 유식학파의 독특한 사고이다.


허망분별과 공성이 실재라는 주장을 ‘남아 있는 것의 실재’라는 사고와 결부시켜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된다. 우리들의 인식은 인식 대상과 인식 주관의 대립에 의해서 성립한다. 그 인식 대상과 인식 주관이 곧 소취와 능취이다. 이 두 가지는 허망분별에 의해서 분별된 결과물이다. 유식학파에 따르면 이 능취와 소취는 모두 실재가 아니다. 이렇게 능취와 소취가 비실재임을 여실하게 관찰함으로써 허망분별의 결과인 능취와 소취는 더 이상 지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때에도 거기에 ‘남아 있는 것’이 있다. 즉 소취와 능취의 원인이었던 허망분별은 그때에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허망분별과 함께 거기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은 능취와 소취의 비존재성(=공성)이다. 따라서 능취와 소취가 사라진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곧 상호 구분되지 않는 허망분별과 공성이다. 그 두 가지는 능취와 소취가 사라진 후에도 ‘남아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실재이다. 유식학파는 이런 사고에 근거해서 일체법이 무자성임을 인정하면서도 허망분별과 공성을 실재라고 주장하면서 일체법이 공이라는 데에는 반대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중변분별론》 제1-2송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일체는 공도 아니고, 불공도 아니라고 말해진다. 실재이기 때문에, 비실재이기 때문에, 또 실재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중도이다.13)


세친은 위 게송을 다음과 같이 주석한다.


‘공도 아니다.’라는 것은 공성과 허망분별이 (있기) 때문이다. ‘불공도 아니다’라는 것은 소취와 능취라는 두 가지가 (없기) 때문이다. ‘일체’란 유위, 즉 허망분별이라고 말해지는 것과 무위, 즉 공성이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말해진다’는 (것은) 설명된다(는 의미이다). ‘실재이기 때문에’란 허망분별이 (실재이기 때문이고), ‘비실재이기 때문에’란 (소취와 능취의) 두 가지가 (비실재이기 때문이고), ‘또 실재이기 때문에’란 허망분별에 공성이 (있기) 때문이고, 또 그 (공성)에 허망분별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중도이다’란 일체가 일방적으로 공인 것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불공인 것도 아닌 것(을 말한다). 이렇게 여기서 말해진 것은 반야바라밀다 등에서 ‘이 일체는 공도 아니고, 또 불공도 아니다’라고 설해지는 것과 일치한다.14)


세친의 주석을 참고해서 《중변분별론》 제1-2송을 살펴보면, 우선 일체법이란 유위와 무위의 일체법이다. 유식학파는 일체법 중에서 허망분별과 공성의 실유만을 인정한다. 그 중에서 허망분별은 유위법이고, 공성은 무위법이다. 그런데 일체법 중에서 공성과 허망분별이 불공으로서 실재하기 때문에 일체법은 공이 아니다. 또 일체법 중에서 소취와 능취라는 두 가지는 공으로서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일체법은 불공도 아니다. 그리고 다시 상호 포섭 관계에 있는 허망분별과 공성이 실재한다. 따라서 일체법은 공도 아니고 불공도 아니라는 중도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 《중변분별론》 제1-14송은 허망분별과 공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실로 (소취와 능취라는) 두 가지의 비존재와 그 비존재의 존재(abha?asyabha?a, 無의 有)가 공의 특징이다. (그것은) 존재(=有)도 아니고, 또 비존재(=無)도 아니다. 또 (그것은 허망분별과) 다른 특징(을 가진 것)도 아니고, 동일한 (특징을 가진 것)도 아니다.15)


여기서 보듯이 유식학파는 소취와 능취의 비존재성(=空性)을 실재로 간주하고 있다. 소위 ‘비존재의 존재(abha?asyabha?a, 無의 有)’이다.16) 이처럼 허망분별과 공성을 실재로 간주하는 유식학파의 관점은 매우 독특한 것인데, 그것은 위에서 보았던 ‘남아 있는 것의 실재’라는 사고를 고려할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중변분별론》에서 중도는 소취와 능취의 ‘공(=非有)’, 그리고 허망분별과 공성의 ‘불공(=非無)’으로 설명된다. 따라서 유식학파는 일체법을 공도 아니고 불공도 아니라고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중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고 주장하게 된다. 이때 공인 소취와 능취는 비실재이고 불공인 허망분별과 공성은 실재이다. 

이처럼 중관학파는 일체법이 연기이고 따라서 일체법은 모두 공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유식학파는 일체법 중에서 허망분별과 공성은 불공이며 실재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양 학파 공사상의 상이점이 발견된다.


3. 중관·유식 양 학파의 논쟁


1) 유식학파의 중관 공사상 비판

위에서 보았던 바와 같이 중관·유식 양 학파는 상이한 공사상을 가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서 양 학파는 상호 비판하면서 논쟁하게 된다. 중관학파의 공사상에 대한 유식학파의 비판은 《유가사지론》에서 발견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어떤 한 무리의 사람들은 대승과 관련되어 있거나, 심오한 공성과 관련되어 있는 이해하기 어려운 경전을 밀의로서 듣고서, 그 말하는 바의 의미를 여실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불합리한 분별이 인도하는 대로 생각하여, 이와 같이 보고 이와 같이 논하기를 “일체는 다만 명칭(prajn?pti)일 뿐이다. 그것이 진실이다. 이와 같이 보는 것이 바르게 보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들에게는 그 명칭의 의지처인 실재하는 사물이 없기 때문에, 일체는 명칭이 되고 모든 점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러나 어떻게 다만 명칭일 뿐이라는 것이 진실이겠는가? 이와 같은 이치에 따라 그에게는 진실과 명칭이라는 두 가지가 모두 훼손된다. 또한 명칭과 진실이 모두 훼손되기 때문에 (그들은) 극단적인 허무론자라고 알아야 한다. 지혜로운 사람과 범행을 구족한 사람은 그와 같은 허무론자와 함께 말하지 말고 함께 머물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는 자신을 파괴하며, 또한 그의 견해를 따르는 세상 사람들을 파괴한다.17)


여기서 ‘일체가 명칭(prajn?pti, 假名)일 뿐이며, 그것이야말로 진실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중관학파의 공사상을 서술한 것이다. 그러나 유식학파에 따르면 그와 같은 중관학파의 공사상은 밀의로서 설해진 심오한 공성에 대한 경전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결과일 뿐이다.


유식학파에 따르면 가명의 근거가 실재하지 않는다면 가명은 결코 시설될 수 없으므로, 일체가 다만 가명일 뿐이라는 주장은 불합리한 주장이다. 또 그런 이유로 그런 주장은 진실과 가명을 모두 비존재로 간주하도록 하는 잘못된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일체가 가명일 뿐이라는 중관학파의 공사상은 진실과 가명이라는 두 가지를 모두 훼손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결국 자신과 세간을 파괴하는 극단적인 허무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가사지론》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 무엇이 악취공인가? 이른바 어떤 사문, 바라문이 있어 공인 것에 근거해서 바라지 않고, 공인 것을 바라지 않을 때, 실로 이와 같은 것을 악취공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 공인 것은 비실재(asat)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인 것, 그것이 실재이기 때문에 공성이 있는 것이다. 또한 일체가 비존재라면, 어디서, 누가, 무엇에 근거해서 공이 있겠는가? 또한 이로 말미암아 실로 그들의 공성은 입증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것을 악취공이라고 한다.


또 무엇을 선취공이라고 하는가?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 그것에 근거해서 그것을 공이라고 바르게 관찰한다. 또 여기에 남아 있는 것, 그것은 여기에 진실로 있다고 여실하게 안다. 이것이 여실하고, 뒤바뀜 없이 공성을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한다.18)


위의 인용문은 악취공과 선취공을 설명하고 있는데, 유식학파의 입장을 선취공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자신들의 공사상은 공성을 올바르게 파악하는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선취공을 판단하는 논리적 근거는 ‘남아 있는 것의 실재’라는 사고이다. 즉 《유가사지론》에 따르면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공이라고 바르게 관찰하고, 또 여기에 남아 있는 것은 실재라고 여실하게 아는 것’이야말로 선취공이다. 또 《유가사지론》은 그렇게 아는 것이야말로 ‘여실하고, 뒤바뀜 없이 공성을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와 반대로 중관학파의 공사상은 악취공이다. 유식학파의 입장에 따르면 가명은 실재하는 식과 공성을 근거로 해서 시설될 수 있다. 그러나 중관학파는 실재를 완전히 부정하며, 중관학파의 그와 같은 공사상은 공성을 설명할 수 없는 악취공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유식학파는 중관학파에 대해서 만약 일체가 비존재(abha?a)라면 어디서, 누가, 무엇에 근거해서 공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이처럼 유식학파는 ‘남아 있는 것’을 실재로 간주하는 독특한 공사상을 근거로 해서 중관학파와는 다른 공사상을 정립하고, 그에 근거해서 중관학파의 공사상을 비판하게 되었던 것이다.


2) 중관학파의 유식 공사상 비판

유식학파는 중관학파를 허무론이라고 비판했지만, 중관학파에게 공은 유식학파가 말하는 것처럼 비실재나 비존재를 의미하는 용어가 아니다. 중관학파에게 공은 연에 의해 시설된 무자성인 사물의 ‘존재(=有)도 아니고 비존재(=無)도 아닌’ 실상을 드러내어 중생들로 하여금 사물에 대한 집착을 치유하도록 하는 목적을 가지고 설해진 실천적인 의미를 지니는 용어이다. 그러므로 중관학파의 입장에서 보면 유식학파의 비판은 오해를 내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유식학파의 발생 이후에 성립한 중기 및 후기 중관학파는 유식학파의 오해를 지적하고 중관학파의 공사상을 천명하기 위해서, 유식학파를 포함하여 불교와 인도 철학의 실유론 학파들이 상정하는 모든 실유들에 대한 비판을 다시 한번 시도하게 된다. 여기서는 중기 중관학파인 청변의 《반야등론》을 중심으로 하여 공성의 실재성 비판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앞에서 보았던 것처럼 유식학파에서 공성은 능취 소취의 비존재성을 의미하며, 이 능취 소취의 비존재성(=空性)을 실재라고 주장한다. 유식학파는 그것을 ‘남아 있는 것의 실재’, 그리고 ‘비존재의 존재’라는 관점에서 설명하였다.19) 그러나 청변은 유식학파의 공성, 즉 원성실성에 대해서 《반야등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약 (無二, 즉 능취와 소취의 비존재)가 ‘없음의 부정’이라는 의미라면, 이것은 둘이 없다고 부정함으로써 작용을 완료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비존재의 과실이 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부정을 주요 성질로 하기 때문에, 승의로서 비존재는 아니기 때문이다.20)


그러나 만약 (無二가) ‘아님의 부정’이라는 의미라면 이것은 정립을 주요 성질로 하기 때문에, 비존재와는 달리 비존재의 실체가 있는 것을 보임에 의해서 허락될 수 없다. 손감의 극단이기 때문이다.21)


위에서 보는 것처럼, 청변은 중관·유식 양 학파의 공사상을 ‘없음의 부정’과 ‘아님의 부정’이라는 두 종류의 부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 중에서 ‘없음의 부정’은 부정 그 자체를 본질로 하는 절대적 성질의 부정이며, ‘아님의 부정’은 부정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긍정하고자 하는 상대적 성질의 부정이다. 따라서 청변이 말하는 바와 같이 ‘없음의 부정’은 부정으로서 그 작용을 완료한다. 그러나 ‘아님의 부정’은 부정으로서 그 작용을 완료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긍정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아바로키타브라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없음의 부정’은 부정이 주요 성질이다. 예를 들면 ‘바라문은 없다’라고 부정함에 의해서 크샤트리야가 있음을 정립하지 않고, 다만 ‘바라문이 없다’는 부정만을 설하는 것과 같은 부정이다. ‘아님의 부정’은 정립이 주요 성질이다. 예를 들면 ‘바라문이 아니다’라고 부정함에 의해서 다만 ‘바라문이 아니다’라는 부정만을 설하지 않고, ‘크샤트리야이다’라고 정립하는 것과 같은 부정이다.22)


즉 ‘없음의 부정’은 ‘바라문은 없다’고 말하듯이 바라문의 존재를 부정하는 곳에서 가 작용이 끝나는, 부정을 그 본질로 하는 부정이다. 그러나 ‘아님의 부정’은 ‘그는 바라문이 아니다’라고 부정함으로써 ‘그는 비바라문, 예를 들면 크샤트리야, 혹은 바이샤이다’라고 하는 긍정을 목적으로 하는 부정인 것이다.


여기서 ‘없음의 부정’은 중관학파에 공사상에 해당하고, ‘아님의 부정’은 유식학파의 공사상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중관학파는 일체법이 연기이기 때문에 자성이 없다고 하는 곳에서 그 부정이 끝나지만, 유식학파는 능취 소취는 비존재이지만 그 능취 소취의 비존재성(=空性)이 실재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부정에서 긍정으로 전환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유식학파는 능취와 소취를 비존재로서 부정하지만,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능취와 소취의 비존재성을 실재로서 긍정한다. 그런데 청변에 따르면 그와 같은 유식학파의 공사상은 비존재의 실재성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극단적인 손감(損減)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청변은 그와 같은 유식학파의 사고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예를 들면) 토끼뿔의 비존재는 ‘비존재의 존재(dngos po med pa, 無의 有)’가 아니다. 이와 같이 승의로서 비존재를 ‘비존재의 존재’와 동등한 것이라고 할 때는 斷見이 성립할 것이다.23)


토끼뿔이 존재하지 않을 때 토끼뿔의 부정은 부정 그 자체로서 끝나야 하지만, 거기서 토끼뿔의 비존재를 승의로서 실재라고 인정한다면 그것은 비존재를 실재화하는 것이 되어 극단적인 단견이 성립하게 된다. 즉 청변에 따르면 능취와 소취의 존재에 대한 부정은 거기서 종결되어야 하지만, 유식학파는 능취와 소취의 존재를 부정하는데서 끝나지 않고 그 능취 소취의 비존재성을 승의로서 실재라고 주장함으로써, 오히려 극단적인 단견이 된다는 것이다.


4. 결론


불교는 불타가 깨달은 진리, 혹은 그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불교에는 여러 학파들이 있으며, 그 학파들은 모두 불타의 가르침을 최고의 진리로 삼는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불교에 여러 학파들이 생겨나게 된 것은 그들이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승 불교는 공사상을 바탕으로 하며, 대승 불교를 대표하는 것은 중관·유식 양 학파이다. 그 두 학파는 모두 공사상을 진리로서 받아들이면서도, 자세한 부분에서는 공사상에 대해서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중관학파는 일체가 공이고 가명이라고 말하였는데, 그 이유는 일체의 사물이 여러 연에 의해서 발생하고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에, 모래 더미와 같이 ‘고정 불변의 존재성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면 유식학파는 허망분별과 공성을 실재로 간주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 두 가지는 어떤 방식의 관법으로도 제거할 수 없는 ‘남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서 중관학파와 유식학파의 실재 개념은 서로 상이함을 알 수 있다. 즉 중관학파에게 실재란 ‘고정 불변의 존재성을 가지는 것’이지만, 유식학파에게 실재란 관법을 통해서 여러 법을 제거했을 때에도 끝까지 ‘남아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이유로 중관학파는 일체법의 실재를 부정하였지만, 유식학파는 허망분별과 공성의 실재를 인정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상이한 공사상을 둘러싸고 중관·유식 양 학파는 다음과 같이 상호 비판한다. 유식 학파에 따르면 명칭은 반드시 실재하는 사물이 있어야 시설될 수 있으며 공인 것은 비존재이다. 따라서 유식학파는 일체가 비존재(=空)라면 어디서, 누가, 무엇에 근거해서 공이 있을 수 있는가를 물으면서 중관학파의 공사상은 극단적인 허무론이라고 비판하였다. 한편 중관학파는 능취와 소취의 존재에 대한 부정은 그것으로서 끝나야 하며, 유식학파가 주장하는 것처럼 거기서 다시 능취와 소취위 비존재성을 실재라고 인정하는 것은 비존재를 실재화하는 것으로서 그것이야말로 오히려 극단적인 허무론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므로 중관·유식 양 학파의 상호 비판은 우리에게 다음의 두 가지를 의문으로서 남기고 있다. 첫 번째 중관학파의 공사상에 대한 유식학파의 비판으로부터 제기되는 의문은 일체가 명칭일 뿐이라면 과연 그 명칭은 실재하는 사물이 없이도 시설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며, 두 번째 유식학파의 공사상에 대한 중관학파의 비판으로부터 제기되는 의문은 능취와 소취의 비존재성인 공성을 실재라고 인정하는 것은 과연 논리적으로 타당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 첫 번째 의문은 모든 사물의 궁극적인 근거를 묻는 존재론적인 문제와 연결되며, 두 번째 의문은 유가행의 수행에서 얻어지는 각종 현상에 대한 해명을 묻는 인식론적인 문제와 연결된다고 생각된다. 그 두 가지 문제에 대한 해명은 앞으로의 연구 과제이다. ■


남수영

동국대 인도철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철학박사. 현재 동국대 강사. 역서로 <힌두이즘><용수의 공사상 연구>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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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대한민국 (출전 : 나무위키)


최근 수정 시각: 2017-08-05 11:4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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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

1.1. 조선

1.2. 일제강점기

1.3. 해방 이후

1.4. 21세기

2. 특징

2.1. 기복신앙

2.2. 가톨릭과의 관계

2.3. 정치 참여

3. 교세

3.1. 지역별

3.2. 교단별

4. 선교

4.1. 국내

4.2. 국외

5. 봉사 활동

6. 교포 사회에서의 역할

7. 교육기관

7.1. 초등학교

7.2. 중학교

7.3. 고등학교

7.4. 전문대학

7.5. 4년제 대학

8. 비판

8.1. 목사 임명에 대한 논란

8.2. 군종장교요원 특혜 논란

9. 관련 링크

10. 관련 문서

1. 역사[편집]


근대 이후로 독립 운동과 경제 발전등에 기여하여 현재까지도 대한민국에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영향을 끼친 메이저 종교란 인식이 있다.


변질된 형태에 대한 비판적 관점에서의 서술은 개독교 문서를 참조.


1.1. 조선[편집]


개신교의 한국 유입은 서학(가톨릭)의 전래보다 상당히 뒤 늦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예수회의 주도로 동양 선교에 적극적이었지만 개신교가 주류인 영국, 네덜란드, 독일, 미국 등의 북구국가들은 18세기 까진 해외선교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19세기 들어 영미를 주축으로 장로회와 감리회 선교사들이 한국에 많이 오면서 유럽의 개신교 구성과 달리[1] 우리나라의 개신교단은 장로회와 감리회가 주류가 되었다.


그러나 개신교의 전래에 가톨릭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가톨릭 교회가 조선에서 탄압을 극심하게 받고나서 지하교회화 되었고 구한말 이런 제약이 풀리면서 조선땅에 전래를 유도한 것도 가톨릭 신자들의 역할이 컸으며 선교사들을 도와 번역이나 통역 한국 안내까지 가톨릭(개신교로 개종한 신자 포함) 출신 신자들의 공이 적지 않다.


한국에 처음 개신교가 전파된 연도는 1832년으로, 유대계 독일인 루터교 목사 칼 귀츨라프에 의해 이루어졌다. 귀츨라프는 중국에서 선교활동 중에 조선의 소식을 듣고 다른 지원 없이 '혼자' 개인자격으로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의 1000t급 로드 암허스트호에 의사 겸 통역사로 낑겨(?)서 황해도와 군산만을 돌아서 1832년 7월 25일, 충청도 고대도 부근에 도착하였다. 수십여 일밖에 머무르지 않았지만 서양감자 파종법과 포도 재배를 알려주었다고 한다. 짧은 기간동안 귀츨라프 선교사는 직접 한글을 배워서 귀환 후에 중국 선교 잡지에 발표하여, 독일과 영어권에 소개했고 자신이 독자적으로 주기도문을 최초로 한국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조선에선 25일을 머문끝에 지방관과 필담을 나눴지만 중국의 허락없이 통상을 금한다는 조정의 뜻에 따라 순순이 조선을 떠나게 된다. 귀츨라프는 해당 교단과 선교회에서 허락을 맡지 못해 아무런 지원도 받지 않아서 자비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외부 지원도 없고 조선의 협조 또한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개신교계에서는 1866년 조선에 온 영국인 개신교 목사 로버트 저메인 토머스를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로 본다. 그런데 토머스 목사를 순교자로 볼것인지 여부는 개신교 내부에서도 논란이 있다. 선교중에 사망한것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비판 때문. 다만 선교 목적으로 온 것은 맞긴 하다. 일단 무장상선을 이끌고 제국주의 침략의 앞잡이(?)로 들어왔다는 일각의 인식과 달리 토머스는 이미 이전에 한국에 와서 넉 달 정도 선교를 하다 배가 파손되어서 다시 북경으로 돌아간 뒤 미국 배를 빌려 타고 잠입 중에 사망한 것이다. 자세한것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 참조.


이후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믿기 시작하면서 개신교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개화기에 이르러 외국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오면서 조선 개신교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시기 선교사들은 특히 교육 사업에 중점을 두어, 배재학당, 연희전문학교, 이화학당 등의 미션스쿨, 숭실대학 등이 설립되었다. 또한 서울 각지에 승동교회, 정동교회 등의 교회가 설립되었다. 평양은 '조선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 정도로 조선 개신교의 산실이었고 평양신학교는 한국 복음주의 개신교의 대표적인 신학교의 전신이다…[2]


이렇게 개신교가 확장된 이유는, 양반 계층 입장에서는 서구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최단 루트가 개신교 선교사를 통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고, 오랫동안 소외받았던 일반 민중 및 하층계급 입장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사상에 이끌렸기 때문이다. 특히나 평양은 오래전부터 권력에서 밀려난 비주류 세력의 지방이었고 상인들이 활동했기 때문에 그들을 통해 교세가 확장될 수 있었다.


선교 초기부터 주류 양반 계층은 제사문제때문에 서학 가톨릭이나 개신교든지 부정적인게 사실이었다. 제사를 우상숭배로 여겼기에[3] 기독교를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無父無君)' 사학(邪學)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항이후 선교제한이 풀리면서 청나라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서양인들이라 조선 조정에서도 역시 서양인들을 무서워했고, 이 때문에 외국인 선교사들이 수탈이 심한 지역에 들어가 백성들 대신 지방관들에게 대들어서 (주로 황해도 평안도) 지방관들이 전전긍긍했다. (아무래도 영남지방과 기호지방은 유림의 세가 상당했기 때문.) 민중들이 개신교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그리고 포교 과정에서 서양 신문물을 선물하며 선교했기에 신문물에 거부감이 없는 상인 계층들에게서 환영 받았고, 이전의 천주교처럼 아녀자들이 신도의 대다수가 되었다. 특히 선교사들은 지역 무당들을 집중 공략했다고 하는데 무당에게 더 쎈 존재가 있음을 납득 시키면 동네 아낙네들이 줄지어 개종하게 되는 성과(?)가 많이 나왔다.[4]


사실 제사 문제를 제외하면[5] 대부분의 교리들이 유림들 입장에서도 거부감이 없었고[6] 이 때문에 천주교와 다르게 양반 계층에도 퍼지는 것이 가능했다. 그래서 나온 표현이 다름아닌 위군위민(爲君爲民)의 종교. 특히 평양 대부흥을 기점으로 1907년 경에는 천주교와 신자수가 역전되어 개신교가 기독교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되며 한반도의 근대,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사실상 개신교가 주도했다 보아도 틀리지 않을 수준이 되었다.


1.2. 일제강점기[편집]


일제 강점기 시절 한국 개신교의 중요 사건은 저항과 파괴로 볼수 있다. 개화기 이래 선교사들에게 받아들인 개신교과 민족 학교를 비롯한 교육기관으로 자리잡아 많은 인물을 배출하며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했으며, 반대로 일제말기로 갈수록 극심한 탄압을 거치며 많은수의 기독교인들이 변절하게 된 것. 하지만 한국의 개신교는 인터넷상 반 개신교 성향에서 극딜하듯 친일에 적극 나선것은 아니다. 신사 참배 문제와 관련하여 타종교, 비종교인과 오십보 백보 또는 도찐 개찐. 같은 비판과 내부적 반성은 타당하나 아무 근거없이 개신교 개독이 친일에 앞장서 같은 헛소리는 역사 왜곡이다.[7]


단적인 예로 일제시대 내내 가장 극심한 탄압을 받은 종교는 천도교와 더불어 개신교 였고, 신사참배에 거부하여 2천명의 신도들이 체포되고 200여개의 교회가 강제폐쇄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50여명의 신자가 순교했다.


일제는 1919년 3.1운동까지 구한말 민족사학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개신교계 학교들을 통폐합시켜왔으며, 서양학문을 토대로 민권 사상등을 가르치는 통로로 여겨왔고 이는 해방까지 계속되었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중에 15인이 개신교측 인사였는데 이 당시 개신교의 교세는 전체 인구의 1.1~1.3%에 불과했다. 당연히 일제는 개신교를 통치에 방해되는 집단으로 여겼고, 지속적인 감시 대상이었다. 한편 식민지 뿐만 아니라 일본 본토에서도 개신교인을 비롯한 기독교인은 노동조합 참가자, 사회주의자들과 더불어 특별고등경찰[8]의 주 감시 대상이었는데 기독교의 교리상 국가 신토의 천황숭배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


3.1 운동의 경우처럼 제암리 교회 학살이 전세계에 널리 퍼진것도 한국교회의 희생과 선교사의 덕이었고, 3.1운동 과정 기독교인 체포자는 전체의 17.6%인 3천여명에 달했었다. (특히 유관순을 비롯한 여성 체포자는 470여명중 309명이 개신교인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개신교는 구한말 신문물과 새로운 사상의 유입을 가져왔고 이는 민족의식을 가진 지도자들을 배출하면서 반일의 집결지가 되었다. 1911년 105인 사건의 경우 개신교인이 92명이었고, 사실상 개신교단을 탄압대상으로 삼았다. 구한말 개신교 인사중 대표적인 인사들은 독립운동가중 상당비율을 차지하는데 남강 이승훈,양기탁,이회영-이시영 형제, 이갑, 조만식, 여운형,전덕기 목사, 유동열, 이동휘, 이동녕, 강우규 전도사, 이재명, 김상옥, 김마리아, 유관순, 안창호 김구, 김규식, 등은 개신교인이었다. 개신교의 대표적 인물이라며 이승만 만있다고 나머지는 친일파라고 선동과는 정반대다. 사실 근현대사는 독립운동사 인물중 개신교 인사들을 빼놓고 서술하기 어려울 정도다.


한국 개신교의 일제강점기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문제가 바로 창씨개명과 신사참배 문제이다. 그러나 당시 이 문제에 가장 거세게 항의한 종교 역시 개신교였으며, 신사참배의 경우 불교(1911년), 천주교(1913년)에 비해 20년 이상 버티다가 1930년대 후반 일본의 전시체제로 인한 압력에 의해 신사참배를 결의하기로 했다. 이는 불교의 경우 딱히 신사참배를 막을 만한 교리가 없었고 조직은 일본승려에 장악되면서 자연스럽게 일본 특유의 신불습합 문화가 그대로 조선에까지 유입되었고, 천주교는 일본의 천주교와 교황청에서 세속권력과 타협을 권했기 때문이다.[9]


그러나 서양 선교사와 선교사의 교단들마저 신사참배에 대해 극심하게 의견이 갈리고 권력에 맛본 어용목사들이 하나둘 일제의 회유에 넘어가면서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의 개신교 교단이 자발적으로 폐쇄하여 불복종하거나, 용인하여 존속하는 결정을 따르자 이에 반발한 사람들이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로 이승만, 이동휘, 김규식, 여운형이 있다. 또한 아예 박헌영처럼 유물론을 받아들여 반기독교가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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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사참배 결의한 직후, 평양신사를 참배하는 장로교 총회 임원들 모습. 1938년 9월 12일 자 <조선일보> 사진.


이하는 개신교 진보 언론 뉴스엔조이에서 개신교 과거사에 대한 철저한 반성을 위해 쓴 칼럼(이종록 한일장신대 구약학 교수)에서 인용된 내용의 일부를 재인용한 것임을 밝힌다.


소위 "개신교인이 친일을 해야 하는 성경적 이유".


북미합중국의 워싱턴 동상이 있는데 합중국 국민으로는 그 동상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고, 합중국 국기에 합중국 국민으로 누구나 다 경의를 표합니다. 합중국은 기독교국이니만치 기독교인이 대다수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다 우상숭배자로 간주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대일본 황국신민만이 국조숭모(國祖崇慕)하는 의식에 기독교인이 어찌 참례할 수 없으며 황국(皇國)을 대표한 일본 국기에 경의를 표함이 어찌 기독교인에게 죄가 되겠습니까. 전화위복(轉禍爲福)하는 자 있으나 기독교인은 그러한 의미에서 참배함은 절대로 아니요 국가 의식에 국민의 의무로서 참례(參禮)함이 당연한 줄로 각오(覺悟)하고 시인(是認)한즉 양심이 평안하고 충군애국지심(忠君愛國之心)이 날이 감을 따라 두터워집니다. 사신우상(邪神偶像)은 금수 곤충 어별(魚瞥)의 형상으로 된 것인데 어찌 우리의 조상이 그 우상과 동류(同類)가 될 수 있으랴? 그런즉 신사참배하는 일을 우상숭배라고 한다면 이(此)는 불경죄(不敬罪)에 가깝다고 말하여 둡니다.

 

《청년》 9, 10호, 1939년 2~3월호. 김승태,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반성〉, p.410

기독교의 설립자라고 칭할 만한 사도 바울은 자기가 로마 제국의 공민(公民)이 된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고 자랑하였습니다. 그와 같이 반도인들은 대일본 제국의 신민이 된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고 자랑할 것입니다. 그것이 반도인의 유일한 활로입니다. 반도인들은 이 기회에 죽은 과거를 청산하고 산 장래를 위하여 활동하여야 되겠습니다. 선각자가 된 기독교도들은 민중에게 이 활로를 지시할 책임이 있습니다.

 

같은 책, p.432


여기에 일본 측 개신교에서도 당연히 거들고 나섰다.


조선 전도부의 어용적 성격은 1919년 3․1독립운동에 대한 반응에서도 유감없이 나타났다. 3․1독립운동을 목격한 와타세는 즉각적으로 '조선 소요 사건과 그 선후책'을 《新人》 4월 호에 기고해, 3․1운동에 참가한 조선 기독교인들은 구약의 정신이 농후하고 기독교의 사랑의 정신이 없는 유대교도에 불과하다고 비난했다. 즉, 만일 기독교인들이 산상수훈의 정신을 안다면 그들은 그런 식으로 반행해서는 안 될 것이며, '하나님을 아버지로 하는 형제로서 더 포용적으로 내선일체를 대성하는 정신'에 근거하여 행동했어야만 했다고 비판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건전한 신앙을 근거로 해 건전한 사상'을 배양함으로써 유다주의를 극복하고 '양 민족의 새로운 영적 일치'를 달성하기 위한 조합교회의 조선 전도의 의의를 더욱 강조하였다.

 

《한국 기독교와 역사》 제5호(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6), 양현혜, 〈일본 기독교의 조선 전도〉, pp.195~196


그러나 위의 문제들은 어디까지나 교단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가결했을지는 몰라도 개개인이 모두 신사참배를 했다는 이야기는 절대로 아니다. 그리고 당시 신사참배를 했던 목사들이나 교인들 중에서는 진심으로 후회하고 뉘우친 사람들도 많다. 특히 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수많은 유명 목사들이 당시 신사참배한 사실을 공석에서 밝히고 용서를 비는 것이 유행했다.


참고로, 저 병크를 터뜨리도록 유도한 조합교회(組合教会)[10]는 해방 이후 완전히 퇴출돼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리고 유독 대한민국의 개신교에서 장로제와 목사의 개인적 권위가 강조되는 데는 이런 역사적 병크로 인한 회중제에 대한 반감이 한몫 했다는 설도 있다.


결론은 개신교계에선 많은 개신교 신자와 교회가 신사참배 굴복한 문제를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당시 역사적 사실을 발굴하고 있고, 신사참배를 거부한 순교자들을 기리나 그런 순교자들과 애국자들이 있다하여 타종교와 신사참배를 순응한 당시 식민지 치하의 동포들에게 우월감도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많은 변절과 종교적 죄를 지은것도 기독교인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계 과거 반성을 위해 나온 자료들을 반기독교계에서 적극 이용하며 마치 친일종교로 몰아가는것은 씁쓸해한다. 기독교계를 제외하면 국내에서 신사참배에 거부한것은 불교 교단의 결정과 달리 행동한 한용운이 거의 유일하고[11] 타종교와 [12] 일반 대중들은 당사자들의 투옥은 물론 가족들의 배급, 진학, 직장생활등을 포기하는 불이익 때문에 그런 시도 조차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사참배 문제는 두말할 것 없이 대한민국 개신교계의 최대의 흑역사라고 할 수 있다. 주기철, 이기동, 한상동, 이원영,손양원등 일부 목사만 거부했고 나머지는 적극적 친일에 나섰다고 비방하는 글이 있으나 대부분 사실이 아니다. 앞서 1930년부터 중일전쟁 이후부터 전체주의 교육을 강화하며 개신교계 사학들과 갈등을 빚었으며 조선 신학교나 숭실학당처럼 신사 참배를 따를수 없기에 자진 폐교하거나 군소 사학들은 사학 재단 운영권을 강탈당한 사례도 있었고, 친일적 행태를 띄는 교단, 목사에 반발하고, 일본의 현지 교단의 결정을 전혀 준수하지 않고 신사참배에 거부하여 2천명의 신도들이 체포되고 200여개의 교회가 강제폐쇄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50여명의 신자가 순교했다.


처음엔 1932년 1월 전남 광주에서 신사참배 사건이 일어났다. 남장로회에서 경영하던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가 만주사변에 대한 기원제에 참가하지 않거나 참가하더라도 신사참배를 하지 않아 도 당국의 엄중 문책을 받았다. 그 다음해 9월에는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비롯한 10여개의 기독교 학교가 평남 지사의 통첩을 무시하고 ‘만주사변 1주년 기념 전몰자 위령제’에 참석하지 않아 해당 학교가 시말서를 쓰게 되었다. 1933년 9월 18일 원산에서도 캐나다장로회 소속 진성여자보통학교가 만주사변 2주년 기념일에 거행된 순난자(殉難者) 위령제에 참석을 거부하여 문제가 되었다. 이렇게 기독교계 학교에 신사참배가 문제가 된 것은 대륙침략을 계기로 조선총독부가 정신교화 운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운데 신사참배 문제가 크게 확대되는 분수령이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1935년 11월 14일 평양 기독교계 학교의 교장들이 평안남도 지사의 지시에 불복하고 평양신사에 참배하지 않은 사건이다. 식민지 관료로 대만총독부 문교국장을 역임한 바 있는 평남지사 야스타께(安武直夫)는 기독교계 학교가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것을 그대로 볼 수 없었다. 그는 먼저 기독교계 학교 교장들을 굴복시키려 했다. 이해 11월에 들어서서 그는 이 지역 공사립 초등학교장 및 중등학교장 회의를 잇달아 소집하여 회의가 끝나는 날 평양신사에 참배토록 했다. 그러나 기독교인 학교장들은 신사에 참배하지 않았다. 그러자 14일에 개최한 중등학교장 회의에서는 야스타께 지사가 회의 전에 평양신사에 참배한 후 회의를 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러자 숭실학교장 매큔(G.S.McCune, 尹山溫)과 숭의여학교장 대리 정익성(鄭益成), 순안 의명학교 교장 리(H.M.Lee, 李希滿)는 기독교의 교리상 따를 수 없다고 거부했다. 그러자 평남도 당국과 총독부는 기독교계 학교에 대해 설득, 경고하면서 금후 교장 자신의 신사참배 의향 여부와 학생들의 신사참배 의향 여부를 서면으로 회답하도록 요구했다. 이런 요구의 배후에는 교장의 파면과 강제 폐교의 강경방침이 있었다. 그 결과 매큔에게는 1936년 1월 숭실학교장 및 숭실전문학교장직 인가가 취소되고, 스눅도 1월 22일 숭의여학교장 대리인가를 취소당했다. 그 후 총독부는 2월 21일자로 학무국장이 각 도지사를 통해 기독교 각 교파 포교관리자 및 대표자에게 ‘신사와 종교에 관한 건’이라는 통첩을 보내, 신사의 봉사는 종교가 아니며 신사참배는 국민교육상 필요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서 막나가는 일제의 강압에 맞서 외국 선교회 계열의 사학에선 여러 논의와 대응이 나왔는데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는 1936년 11월 전주에서 개최된 남장로회 선교사 연례회의에서 신사참배를 강요한다면 교육사업에서 철수할 수 밖에 없음을 결의했다. 그들은 선교본부에 연락, 해외선교부 총무 풀턴(C.D.Fulton)의 내한을 요청했다. 풀턴은 일본에서 출생한 2세 선교사로서 신도가 종교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1937년 2월에 내한하여, 신사참배를 시키기보다는 학교를 폐쇄할 것을 허락하는 13개항의 소위 ‘풀턴 성명’을 발표했다. 이를 계기로 이 해 9월에 남장로회 학교들의 폐교 신청이 잇달았는데, 광주 수피아와 숭일학교, 목포의 정명학교와 영흥학교가 1937년 9월 6일에, 전주의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 군산의 영명학교와 멜볼딘여학교가 각각 9월 8일에, 순천의 매산학교와 매산여학교는 9월 21일에 각각 폐교를 신청했다.

호주 장로교 선교부는 1936년 2월 7일 총무 맥라렌(Ch.I.McLaren, 馬羅連)의 주재 아래 회의를 열고, 산하의 기독교 학교가 신사참배를 할 수 없다고 결의했다. 그 뒤 선교본부는 교육사업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학교를 계속 경영하기를 원했고 또 일본 당국과의 관계개선을 원하여 “신사참배는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는 일본 정부의 주장을 받아들이기까지 했다. 또 1938년 9월 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후, 그들은 그 이듬해 1월 특별위원회를 소집, 신사참배와는 관계를 끊되 학교를 유지하려는 모든 노력은 그래도 경주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절충적인 노력은 한계를 들어내 그 해 대부분의 선교부 소속 학교를 폐쇄시켰고 동래 일신여학교만 1940년에 폐교되었다.


캐나다 선교부는 1930년대 초에는 학교의 문을 닫더라도 신사참배를 거부하겠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38년에 이르러, 신사에서의 행사는 애국적인 것이요 종교와 관련이 없는 것이라는 총독부 당국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그 의식들에 참가하고 학교를 계속 경영하기로 했다. 캐나다 선교부 산하의 기독교 학교는 신사참배 문제로 문을 닫아야 하는 일은 없었다. 1898년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캐나다 장로교회는 다른 세 교단보다는 신학적 입장이 자유로웠던 데다 1925년 감리교회·회중교회와 연합하여 캐나다연합교회로 개편된 후 한국에 들어온 다른 세 장로교단과는 달리 신사참배 문제를 타협적으로 처리했다. 선교학교 문제의 타협적 처리는 감리교 선교부도 마찬가지다.


1938년 2월 총독부 경무국은 ‘기독교에 대한 지도대책’을 마련하고 기독교계 기관들에 대해 변질과 개편을 강요하는 한편 기독교 연합기관을 해산시키거나 국제기구와 연결된 기관들에게는 국제기구에서 탈퇴하도록 종용하며 일본 안에 있는 동일 계열의 기구와 통폐합해 나갔다. YMCA와 YWCA, 조선주일학교연합회, 감리교의 청년회인 엡웟회 등 그 대상들을 점차 확대시켜 갔다. 한편 1937년 6월부터 1938년 3월에 걸쳐 일제가 안창호 계열에 대한 탄압을 가하여 수양동우회 사건을 일으켜 180여 명의 지식인들을 검거했다. 이어서 강압적인 사회 분위기를 더욱 조성하기 위해 1938년에는 이승만 계에 대한 흥업구락부 사건을 일으켜 관련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했다. 이는 조선의 기독교 지식인세력을 외세로부터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기독교회 외곽에 대한 이같은 강압책으로 장로교회를 집중 공격하던 일제는 1938년에 들어 각 노회별로 신사참배를 유도, 강제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친일목사로 돌변한 이승길(李承吉) 김일선(金一善) 등을 내세워 개별적으로 신사참배에 찬성하도록 설득했다. 2월 9일 조선에서 가장 교세가 강한 평북노회가 일제에 굴복, 신사는 국가의식이라 하여 신사참배를 사실상 결의했다. 뒤이어 2-3월 중에 총회 산하 전국 23개 노회 중 17개 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게 되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1938년 9월 9일 평양 서문밖예배당에서 제 27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개최되었다. 총회 전에 경찰은 주기철 이기선 김선두 등 신사참배 반대지도자들을 사전 구금했을 뿐아니라 선교사들과 총대들에게는 사전에 신사참배 결의를 방해하지 않도록 엄중히 경고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 이튿날 속회, 신사참배를 불법적으로 가결시켰다. 당시 결의를 지켜봤던 김양선의 구술을 보면 


“다음날 오전 9시 30분 총회가 재개되었을 때에 교회당 내외에는 수백명의 사복경관으로 완전 포위되었고 강대 아래 전면에는 평남 경찰부장을 위시하여 고위 경관 수십명이 긴 검을 번쩍이면서 기라성같이 자리를 잡고 앉았고 총대들의 좌우에는 그 지방 경찰관 2명씩이 끼어 앉았고 실내 후면과 좌우에는 무술경관 100여명이 눈을 부라리고 서 있었다. 그 살벌한 분위기는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하였다.

주기철 목사, 이기선 목사, 김선두 목사 등 신사참배를 적극 반대하는 유력한 교회 지도자들은 사전에 모두 구금되었고 저들의 압력에 어쩔 수 없이 끌려온 27노회(만주 4노회 포함) 대표 목사 88명, 장로 88명, 선교사 30명 합계 206명이 넋을 잃고 앉아 있을 때에 10시 50분 이미 조작된 각본대로 평양·평서·안주 3노회 연합대표 평양노회장 박응률 목사의 신사참배의 결의 및 성명서 발표의 긴급제안이 있었고 박임현 목사와 길인섭 목사의 동의와 재청이 있었다. 총회장 홍택기 목사는 전신을 떨면서 ‘이 안건이 가하면 예라고 대답하십시오’라고 물었다. 이때에 제안자와 동의·재청자의 10명 미만이 떨리는 목소리로 ‘예’라고 대답했고 그들 외의 전원은 침묵을 지켰다. 그 침묵은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표시하는 것으로밖에 보여지지 않았으므로 수백 경관들은 일제히 일어서서 일대 위협을 표시했다.

당황한 총회장은 ‘부’를 묻지 않고 그냥 만장일치의 가결을 선언하였다. 이때에 이런 사태가 있을 것을 예상한 선교회는 약속해 두었던대로 방위량 선교사를 선두로 2,3명의 선교사들이 회장의 불법선포에 항의하는 한편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주장하려고 했으나 경찰관의 강력한 제지로 발언이 막히자 선교사 30명 전원은 차례로 기립하여 ‘불법이오’‘항의합니다’라고 외쳤다. 봉천노회 소속 헌트(B.F.Hunt, 韓富善)선교사는 무술경관의 제지를 뿌리치고 불법에 대한 항의를 외치다가 그들에게 붙들려 옥외로 축출당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소란 속에 총회 서기는 성명서를 낭독하였고 평양 기독교 친목회 회원 심익현 목사는 총회원 신사참배 즉시 실행을 특청하였다. 동일 12시에 부회장 김길창 목사의 안내로 전국노회장 23명이 총회를 대표하여 평양신사에 참배함으로써 장로교회마저 그들의 불법 강요에 굴하고 말았다.”


장로회 총회에서 이처럼 결정이 내려졌으나 이 날 선교사들은 따로 모여 총회에 항의서를 제출하는 등 몇 차례에 걸쳐 항의했으나 경찰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일각에선 현재 기준으로 보수-진보 따지면서 보수교단에선 진보신학자들이 친일했다 진보쪽에선 보수쪽에서 친일했다 카더라도 있지만 둘다 근거는 없다. 현재 연구로는 서울쪽에선 신사참배에 순응적이었고 오히려 평양지역이 신사참배에 더 반대했으며 선교사들 조차 선교회, 교단, 신학교 내부에서도 서로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한때 카더라로 알려진 박형룡 신사참배 용인설은 현재 연구론 조선 신학교 폐교전 박형룡등이 만주로 망명한것으로 나와 사실무근으로 밝혀졌다.


감리교회도 신사참배에 순응하게 되었다. 미 감리회 선교부가, 이 참배는 애국적인 것이요,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정부의 행사라는 일본 정부의 선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자 거의 때를 같이하여 한국 감리교 또한 신사참배를 수용하게 되었다. 1936년 양주삼 총리사는 4월 10일자 「감리회보」에 ‘신사문제에 대한 통첩’을 게재하여 감리교회가 신사참배를 문제삼지 않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 뒤 1938년 9월 3일에도 양주삼 총리사는 통고문을 내어 교단 안의 여론을 잠재우는 데에 부심했다.


“신사참배는 국민이 당연히 통행할 국가 의식이요, 종교가 아니라고 한 것을 인식하셨을 줄 압니다. 그런고로 어떤 종교를 신봉하든지 신사참배가 교리에 위반이나 신앙에 구애됨이 없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감리교 지도부의 이같은 행태가 감리교계 전체의 공감을 얻은 것은 아니다. 감리교도들 가운데서도 교단의 정책과는 달리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고난을 겪은 이들이 없지 않다. 이 밖의 여러 교단들도 제대로 항거하지 못하고 순응하는가 하면 교단자체가 해산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교단 지도부의 이같은 훼절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신사참배 정책에 불응하면서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이들이 나왔던 것이다.


침례회는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1944년 교단이 강제해산을 당한다. 성결교는 신사참배 문제로 결국 교단을 자진해산했다. 그런데 교단 인사 중에 황국신민선서와 대동아전쟁의 승전을 기원하는 기도를 하고 창씨개명을 한 인물들이 다수 있긴하다.


이후 전개로는 이런 상황에서 신차참배에 반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나타나게 된다. 신사참배가 ‘가결’되고 난 뒤에 장로교단 안에서는 개인적인 혹은 합법적인 차원에서 이에 저항하면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막아보려는 시도들이 없지 않았다. 평양신학교 학생 장홍련이 평양노회장 김일선의 기념식수를 벌목한 사건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신학생들이 신사불참배 운동을 확산시키려다가 결국 학생 다수와 박형룡 김인준 교수가 검속된 사건이 있다.

김선두(金善斗) 목사와 박관준(朴寬俊) 장로는 조선 총독부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못하도록 일본 정계의 그리스도인들을 움직이려고 노력했다. 김선두 목사는 김두영 윤필성 박형룡 등을 대동, 1938년 8월 24일 동경에 도착, 박영출의 안내로 일본 정우회 부회장 외무부장 중의원 의원 마츠야마(松山常次郞) 장로와 군부의 원로 히비키(日疋信亮) 장군(장로) 등을 방문, 한국 교회의 수난상을 진정했다. 그 결과 이를 들은 이들이 동 9월에 조선에 와서 미나미(南次郞) 총독을 만나게 되었다. 박관준 장로는 1939년 1월 안이숙 박영창을 대동하고 도일하여, 일본 제국의회 회의장에 들어가 진정서를 투척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경찰의 집요한 방해와 일제 신사참배 강요정책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이들 개인적인 차원의 합법적 저항과는 달리 반대투쟁을 조직화하여 ‘거부항쟁’의 단계로 이끈 이들도 있었다. 개인적이든 조직적이든, 저항자들 중에는 수감, 투옥되는 것은 물론이고 순교에까지 이른 이도 있었다. 신사참배 거부를 권유하고 거부자들의 결속을 강화하는 중심 인물로 국내에서는 평안남도의 주기철(朱基徹), 평안북도의 이기선(李基宣), 경상남도의 한상동(韓尙東), 전라남도의 손양원(孫良源) 등이 있었고, 만주지역에서는 박의흠(朴義欽)·김윤섭(金允燮)·헌트(B.F.Hunt, 韓富善) 등이 있었다.


신사참배 거부항쟁자들에 대해서 당국은 개별적으로 위협, 구금했던 때도 있었다. 1938년 장로회 총회를 앞두고 주기철·이기선·김선두 목사 등을 예비구금 형태로 검속한 것도 그 일례다. 당국은 이렇게 위협과 고문을 가해도 굴하지 않는 주동자들을 사회로부터 격리시켜 영향력이 확산되지 않도록 했다. 이런 경우, 예비검속 형태로 구금하여 정식 재판에 넘기지 않고 고문하고 장기구금했다. 때문에 장기적인 구금으로 순교한 이들도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사건이 평양지방법원에서 취급했던 이른바 ‘예수교도의 신사불참배 교회 재건운동사건’이다.


이 사건의 관련자들은 “모두가 조선예수교 장로파 교역자 혹은 독실한 신자들로서 1939년 8월 이래 성서의 이른 바 말세론에 기초하여 머지 않아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지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된다고 하여 궁극적으로 우리(일본) 국체를 변혁하여 천년왕국을 건설할 것을 목적으로 ‘신사불참배 재건총회 조직 준비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전국적으로 이를 확대 강화하기 위해 활동하고 또한 여러 가지 불온언사를 함부로 한다”고 했다. 일제는 이를 근거로 1940년 9월 20일 새벽을 기하여 전국적으로 신사참배 거부항쟁자 193명을 검거했다. 평양지방 검사국은 1941년 5월 15일에 이기선 목사 등 68명을 송치하고 그 1년 후인 1942년 5월 12일에 그 중 35명을 기소, 예심을 청구하고, 8명은 기소 유예, 나머지 25명은 불기소 처분했다. 예심 심리는 3년간이나 계속되어 그 동안 최봉석 목사, 주기철 목사, 최상림 목사, 박관준 장로 등 4명이 순교하여 평양지법 예심종결 결정에서 제외되었고, 이기선 목사 등 21명에 대해서는 1945년 5월 18일에야 예심종결 결정이 났다.


신사참배 거부를 위해 만주로 망명했음에도 일제는 동북삼성(만주)에서도 신사참배가 강요되었고, 신사참배 반대투쟁이 있었다. 1936년 10월부터 만주 하얼빈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던 헌트(韓富善)은 1939년 봉천노회에서 제명된 후 계속 한국인들을 격려하며 항쟁하다가 1941년 10월 하르빈 경찰서에 수감되었고 1942년 6월 강제 추방되었다. 한편 하얼빈 경찰은 헌트를 중심으로 한 이들의 활동에 주목하다가 1940년 3월 19일 약 70여명을 체포, 1942년 2월 3일 재판에 넘겼고, 김윤섭·박의흠·안영애·김신복 등은 수감 중 혹은 풀려난 지 얼마 안되어 순교했다.


국내에서도 본격화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많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투옥되었다. 그들은 치안유지법, 보안법 혹은 불경죄를 적용하여 중형 처벌했다. 주기철을 비롯하여 이영한(李榮漢, 감리), 최태현(崔泰鉉, 안식), 전치규(全穉珪, 침례), 박봉진(朴鳳鎭, 성결), 손갑전(?) 등은 옥사했고, 남은 이들은 8.15해방과 더불어 석방되었다. 오랜 동안 옥에서 시달린 결과 출옥 후에 곧 목숨을 거둔 이도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것이 얼마나 진실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제가 해방 전후에 조선 내의 기독교인들을 살해할 목적으로 명단을 작성하는 단계였는데,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사족으로 일본 측 개신교라고 해서 모두 신사참배에 긍정적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한국과 정반대로 세력이 미약한지라 간과하기 쉬운 부분이기도 한데 도키와 다카오키(常葉隆興)[13]를 필두로 한 몇몇 개혁교회 목회자들은 신사참배를 "우상숭배요 죽음에 이르는 죄악"(偶像礼拝であり、神に対して死に値する罪であった)으로 규정하고 반성한 바가 있다.


1.3. 해방 이후[편집]


해방이 되고 북한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종교가 탄압을 받자, 믿음의 자유를 찾아 평양에서 활동하였던 종교 관련인사들이 대거 월남한 역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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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6년 정부통령 선거 당시 이승만 장로와 이기붕 권사를 지지해 달라고 호소하는 포스터.


남한에는 감리교 신자인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되면서 개신교는 보수적 기치를 내걸고 반공을 외치기 시작했다.[14] 이승만 전 대통령은 은근히 불교를 탄압하였는데, 개신교회에서는 세금을 받지 않았던 것과 달리 사찰에는 세금을 따로 받고 승려들의 환속을 권장했다. 그럼에도 일부 승려들은 당시 이승만에게 아첨데레데레하며 "또 다른 부처님"이라는 망언까지 해댔다(…).[15] 지금도 한기총에선 이승만을 국부로 추앙하며 조선일보나 뉴라이트와 같이 동상을 만들자고 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극과 극은 통한다?


1970년대 근대화와 새마을 운동을 계기로 해서 개신교는 그야말로 폭발적인 성장을 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교회들이 굉장히 근대적인 이미지를 내세워서 개신교 믿으면 서양식으로 잘 살 수 있을 거란 인식이 자리잡기 시작하고[16] 이러한 이미지는 역설적으로 기복신앙적인 면과도 결합하게 되었다. 지금도 평야지대와 도시 중심가들이 대부분 뱀파이어 헌터 십자가로 점거된(…) 이유도 이 때문이다. 또한 전통 문화들 중에서 비합리적, 비생산적, 미신적인 악습이라고 여겨질 만한 문화들을 모조리 타파하고 없애는데도 개신교의 영향이 컸다.


과거 전두환 정권 시절에만 하도 도시산업 선교회 등 친 노동운동적인 교회단체가 존재했으나 정부의 탄압과 친정부적 교파의 압박으로 소멸당하거나 규모가 축소되었다. 다소 예외일 수 있겠으나, 70-80년대 빈민선교활동과 두레 공동체 운동으로 대중에게 알려졌고 10월 유신 반대로 옥고를 치렀다가 뉴라이트 연합 상임 이사가 된 김진홍 목사 같은 경우도 있다. 이렇게 전체적으로 보수화가 많이 진행되어 있는 한국 개신교는 최근 들어 더더욱 신앙적인 보수화가 이루어지고 있고, '신본주의'와 '성경주의' 등의 근본주의를 외치고 있는 교단도 있다.


민주화 운동에 관한 것으로는, 한국의 개신교인들은 학문적으로 민중신학, 해방신학처럼 기독교 신학을 사회적으로 해석하려는 진보적인 신학들을 한국 상황에 맞게 해석하여 군사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민주화 운동을 실천한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종교다원신학을 주장함으로써 종교간의 대화 곧 다른 종교를 개종과 정복의 대상이 아닌 기독교와의 공통점을 찾아 대화하려는 노력을 실천했으며, 기독교 교파에 따른 전통들의 다양성을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기독교의 공동신조에 근거하여 존중하고 일치하려는 에큐메니컬 운동으로 교회분열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였다. 또한 개발독재시기에는 자본가들의 착취와 노동운동 탄압 곧 노동자들의 권리가 자본가에 의해 짓밞혀지는 불의한 현실로 고통받는 노동자들의 편에 서서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려는 산업선교가 실천되기도 하였다. 저명한 개신교 신학자 장공 김재준 목사가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에서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라고 외치며 스스로 분신한 전태일 열사를 추모하는 예배/미사를 집전하자, "이 자리는 전태일의 죽음을 추모하는 자리가 아닌, 기독교인들의 나태를 추모하는 자리다."라고 설교한 일, 도시산업선교회가 들어오면 도산한다는 자본가들의 비방과 형사를 보내 감시하는 경찰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에 의해 도시산업선교회를 결성하여 활동한 일이 그 흔적이다. 그러나 이런 진보적 기독교인 역시 내부적으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며, 그 예로 도시산업선교회는 오늘날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1.4. 21세기[편집]


관련기사 : "기업 제품으로 치면, 개신교는 출시 불가"(…)

"안에서의 불신도 문제지만, 교회 밖에서 한국 개신교의 현주소는 훨씬 참혹했다. 무종교인의 한국 개신교 신뢰 비율은 8.4%, 불신 비율은 56%로 부정적인 평가가 7배에 달했다.(...) 세부 항목에서 개신교인의 신뢰 지수는 4.4%, 목사는 11.5%, 한국 개신교는 18.8%를 기록했다. 이 교수는 한국 개신교가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교인들만의 신앙적 게토로 변질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가톨릭과 불교에 비해서도 한국 개신교는 무종교인들에게 가장 믿을 수 없는 종교였다. 가장 신뢰하는 종교 항목에서 개신교를 꼽은 무종교인들은 8.6%에 불과했다. 반면 가톨릭과 불교는 32.7%, 26.6%의 신뢰를 받았다. 기윤실은 나이별 신뢰도에서 20대에게 최저 수준의 신뢰(12.9%)를 받은 것을 언급하며, 한국 개신교의 미래가 암울하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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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 뉴스링크 출처. 자료제공 기독교윤리실천운동.[17]


주지하듯이 가톨릭이 사회적으로 신뢰받고 존경받는 종교집단으로 빠르게 치고 올라가는 가운데, 불교 역시 완만한 신뢰성장을 보이고 있지만, 개신교의 체감 신뢰도는 급전직하하고 있다. 같은 기독교끼리 왜 이리 극과 극인지(…) 니 죄를 니가 알렸다 이에 대한 원인을 찾기 위해 시행된 통시적 설문조사에서 주목할 만한 시사점이 발견되었다. 과거만 하더라도 개신교의 신뢰회복을 위한 첫째 과제는 봉사 및 구제활동이었으나, 2013년 현재에 이르러서는 윤리와 도덕 실천 운동이 가장 시급한 문제라는 결론이 나온 것. 과거에는 개신교가 사회적으로 뭐 하는 게 있느냐는 공기취급? 반응이었다면 이제는 "너나 잘 하세요" 정도의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해 개신교가 맛 잃은 소금이 되었다는 사회적 컨센서스가 모아진 것. 현대 개신교계 내에서 한국교회의 미래에 대한 장밋빛 전망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특히 젊은 세대에게 있어 개신교의 위상은 시궁창 수준이며, 교회 내부의 어린이 및 청년 교육도 부실한 상태다. 이는 청년들이 교회 밖에서는 교회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아서 교회에 오지 않고, 교회 안에서는 교회가 싫고 잘 몰라서 교회를 떠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교계에서는 다음세대(Next Generation) 문제라 하여 중요한 화두로 여겨지고 있다. 수입이 줄어들고 있자나...!


사실, 불과 2007년만 하더라도 "평양대부흥 100주년" 이니 뭐니 하여 샴페인을 터뜨리고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던 것과 대비하면 하늘과 땅 차이의 분위기 변화. 놀라울 것도 없는 것이 이 때만 하더라도 부흥이 실제로 핵심적 화두였었다.[18] 하지만 이 해 개신교의 외적 성공에 겨워 정신줄을 놓으며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다가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로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았다. 피랍된 개신교인들이 극단적 무장단체인 탈레반에 납치된 상황에서 여론은 피랍된 개신교인들에게 상당히 나쁘게 작용했다. 이는 기존의 무차별적이고 타문화 존중이 없는 국내전도와 해외선교에 대한 염증, 배려심 없고 반성 없는 기존의 한국 개신교에 대한 반발, 그리고 교회 목사들의 각종 불법, 편법적인 행위나 사건, 사고 등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는 온라인에 숨어있던 반기독교 여론이 수면 위로 노출되는 계기가 되었다. 20세기 말부터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이전에는 교회 내부에서 쉬쉬하고 넘어간 개신교의 문제점이 온라인 상으로 노출되기 시작하였고, 온라인은 이미 반기독교, 특히 다른 교파들보다 반개신교 여론이 대세인 상태였다. 성도수 늘리기에만 집중한 성장 위주의 개신교에 대한 염증과 우려는 이미 나타나고 있는 상태였다.


때마침 서점 종교코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기독교 문제 진단서적들이 이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무신론 관련 서적들도 이 무렵에 국내에 번역되어 들어오기 시작한다. 특히 만들어진 신의 경우 15만부나 팔리는 성공을 거두었다. 전통적인 유교의 무신론적 성향과는 달리 9.11 테러 이후 나타난 리처드 도킨스, 샘 해리스, 대니얼 데닛, 크리스토퍼 히친스와 같은 종교에 비판적인 신 무신론(New Atheism)의 영향으로 21세기에는 무신론자도 급증하는 추세이다. 앞서서 설명된 20대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무신론자가 되는 추세는 높은 편이다. 서울대에는 무신론 동아리가 만들어졌다.


2007년 한국 개신교 최악의 흑역사라고 할 수 있는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 등을 겪으면서, 비로소 개신교 내에서 이런 대책없이 교세를 늘리기에만 급급하는 내실없는 '부흥' 이야기가 다소 사그라들고 암담한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위에서 언급한 평양 대부흥 건에 대해서도, "부흥" 자체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면서 이제는 "평양 대각성" 이라고 고쳐 불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이래서 빠른 스포닝 풀 후 저글링이랑 오버로드만 오지게 뽑으면 초반에는 이겨도 후반가면 털리는것이다.


2016년에 급기야는 부천 여중생 살인 사건이 발생해서[19] 개신교의 이미지에 제대로 먹칠을 해버렸다.


2015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2008년 대비 개신교 인구가 소폭 증가하고, 가톨릭과 불교 인구가 다시 감소한 것으로 집계되었다.(출처 기사) 세계금융위기 이후 먹고 살기 힘들어진 상황에서 의지할 대상을 찾다 보니 거리가 가까운 교회를 자주 찾게 된 것이 이유라 볼 수 있다.[20]


그럼에도 연령별로는 젊은층의 이탈이 여전하며, 노년층의 인구가 늘어나 '늙은 교회'가 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도 만만치 않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기존의 큰 교회 건물 짓기 같은 하드웨어 중심에서 사회 봉사활동을 늘리고 유년, 청소년 교육 중심으로 내실을 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기사


2. 특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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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가 본래 종교개혁으로 시작했으나 지금 한국의 개신교는 개혁은 커녕 썩어가는 고인 물로 전락했다는 걸 감안해 보자.[21] 오히려 그들이 비판하던 가톨릭이야말로 가장 깨끗하고 개혁적이라는 평판을 얻고 있는 실정(…) .이 정도면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는 슬로건이 무색할 지경.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대형 교단들이 싸놓은 '것'들 때문에 그나마 건전하고 원래의 개혁적 취지를 제대로 살리는 교회들까지 욕먹는 실정이다. 도대체 왜 개혁적인 교회는 코딱지만한 듣보잡이고 큰교회들은 죄다 부패한건데


2.1. 기복신앙[편집]


국내에서의 개신교는 상대적으로 기복신앙적인 측면이 강한 편이다. 한국인의 정서에 적절히 어필한 이러한 믿음은 개신교가 국내에서 부흥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으나, 기복의 의미가 참된 '영적인 복'과 '현실의 물질적인 복'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게 된 것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기복 때문에 개신교의 다른 가치인 선행이 다소 묻히는 경향이 생겨서 이에 대한 많은 내외부적인 비판이 존재한다. 그래서 교인 수평이동 같은 일도 일어난다.


한국에서의 개신교는 종교 그 자체로서의 의미보다 정치적인 의미 등 기존의 토속신앙 등과도 결부되어 "복을 내려주십시오."라는 식의 기도문을 쉽게 들을 수 있으며, 대부분의 기도의 주체는 '내가' 바라는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되는, 상당히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평범한 여느 목회자보다는 특별히 방언기도나 40일 금식 등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목회자를 선호하는 현상은 이러한 무속적 정서에 기인한다. 그래서 한국 개신교에서는 소위 용하다는 목사를 찾아다니는 현상이 있다. 한국 개신교 안에 카리스마적이고 다혈질적이며 절대권위를 가지고 독재를 행하는 목회자를 따르는 교인들이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것은 오히려 지금의 개신교의 정립에 많은 영향을 주고 또한 현재 개신교가 가장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국가 중 하나인 미국[22]의 경우와 대조적으로, 이쪽은 선교활동에는 힘쓰나 전도활동은 그 규모가 매우 낮고, 또한 사생활 침해가 되지 않는 선이며, 나, 혹은 나와 관계된 사람에게 기도하는 것보다는 지적 구원자인 하나님의 존재나 그 의미를 깨닫는 활동에 힘을 쓰고 있다. 물론 그 교리 자체는 흡사하기 때문에, 생판 모르는 사람이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라는 식의 이야기는 미국에서도 들을 수 있다.


사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한국 개신교 형성 초기에 영향을 끼친 평양지방의 분위기와 결부지어서 생각해야 한다. 초기 개신교를 받아들인 길선주 장로를 비롯한 서북(평양) 지역 신도들의 사상적 기반이 기복 사상과 도교적 영향력을 받은 것이라는 것.[23] 여기서 파생된 것이 통성기도, 새벽기도, 기복신앙이며 이들이 한국전쟁 당시 월남하여 개신교 주류의 자리로 들어서면서 한국 개신교의 특성으로 나타나게 된 것[24]


2.2. 가톨릭과의 관계[편집]


한국 개신교의 반가톨릭 역사는,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이 조선 땅을 밟기 시작한 188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근본주의 신학을 등에 업은 선교사들은 가톨릭과의 차별성을 강조하며 선교 활동을 펼쳤다. 국가 권력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개신교를 한국 사회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미국 종교로 소개했다. 종교와 정치는 분리돼야 한다고 강조하는 한편, 개신교보다 100년 일찍 선교해 온 가톨릭은 제국주의 종교로 부각했다.


기본적으로 미국 장로교 출신 선교사들에게는 가톨릭에 대한 적대감이 깔려 있었다. 19세기 중후반 미국 종교계는, 유럽에서 대거 유입되는 가톨릭계 이민자들로 인해 적개심을 가지게 됐다.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김진호 실장은 "종교개혁을 통해 개신교가 출발했기 때문에 개신교 선교사들이 가톨릭을 바라보는 시선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고 분석한다. 특히 다른 교단들과 달리 근본주의 색채가 강한 장로교 출신 선교사들이 한반도에 유입되면서, 한국 개신교에 반가톨릭 현상이 자리한 것으로 봤다.


미국 북장로회 출신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는, 1892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제5차 장로교 총공의회에서 가톨릭이 선교지의 왕실과 친밀을 도모하고, 권력층이나 세도층과 결탁해 정사나 조정의 문제에 수시로 개입한다고 비판했다. 선교 초기, 언더우드는 한국어에 능통한 신부들과 높은 인쇄술, 부지 매입에 적극적인 가톨릭을 언급하며 가톨릭이 한국을 손에 넣으려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는 "개신교인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훗날 불신자가 아니라 가톨릭교인을 회심하게 해야 하는 상황에 이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에서 개신교 선교사들이 잇달아 방한하자 가톨릭은 교세 확장을 우려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7대 교구장인 프랑스인 블랑 백 요한 주교는 "오류를 설교하는 열교[25] 목사들이 활보하고 있다"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파리 외방전교회에 보내 지원을 요청했다.


교리 논쟁도 일어났다. 1907년 가톨릭이 개신교 비판을 위한 호교론 책을 펴내자, 이듬해 감리회 신학자 최병헌이 번역한 <예수텬쥬량교변론>(정동예수교회)에는 교황의 무류성, 고해성사, 성모 마리아의 전구, 성직자/수도자의 독신 생활 등을 언급하면서 가톨릭이 성경의 내용을 왜곡하거나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개신교 선교 초기 두 기독교 교파가 항상 갈등 양상만을 보였던 것은 아니었다. 개신교는 한국 선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100여 년 앞서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벌여 왔던 가톨릭의 역사적 경험을 자료삼아 나름의 한국 선교전략을 수립했다. 개신교가 '간접 선교', 즉 학교나 병원을 중심으로 간접적인 교육선교와 의료선교를 우선적으로 펼치는 선교 전략을 채택했던 것도 가톨릭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적극적인 반추(反芻)를 통한 것이었다.


해방 이후 개신교 지도자들은 가톨릭에 대한 적대감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야당 부통령 후보로 장면이 출마했는데, 여당은 장면이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를 들며 공세를 퍼부었다. 당시 자유당 선거대책위원회 사무장이었던 박영출 목사는 선거 연설에서 "가톨릭 교인인 민주당 부통령 입후보 장면 박사가 당선되는 날에는 우리나라를 바티칸의 교황청에 팔아먹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승만 정권의 공보실장을 역임한 전성천 목사는 1956년 4월 <한국기독시보>에 가톨릭 신자가 집권할 경우 한국이 교황의 내정 간섭을 받게 된다면서 개신교 신자들은 장면에게 투표하지 말라고 썼다.


불신과 대립으로 얼룩졌던 개신교와 가톨릭의 역사는 1960년대 이후 교세 확장에 치중하면서 직접적인 충돌에서 벗어나게 된다. 가톨릭은 1964년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개신교단들을 "갈라진 형제"라고 칭하며,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이후 한국 가톨릭은 1966년 '일치 위원회'를 발족하였다. 같은 해에 개신교 쪽에서도 아카데미 하우스 준공을 계기로 '기독교와 다른 종교 간의 대화' 모임을 가지면서 가톨릭 신부들과 신자들을 초청하였다. 이와 같은 대화의 노력은 구체적인 '일치운동'으로 귀결되었다. 이후 한국 개신교와 가톨릭은 1968년 성서공동번역위원회를 조직하고 1977년 공동번역성서를 출간하기도 했다.[26] 그리고 '교회일치기도주간'을 제정하여 번갈아 가면서 일치기도운동을 벌였다.



오늘날 한국 가톨릭 신자들과 개신교인들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2가지 인식이 공존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구성하는 두 전통의 형제애가 강조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서로 상대방을 폄하(貶下)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이단시(異端視)하기까지 하는 흐름이 엄존하고 있는 것이다. 교단별로 살펴보자면, 성공회와 한국기독교장로회, 감리교는 전자 입장에 있고, 성 비오 10세회같은 천주교 내 극우파, 예장합동, 예장고신 및 기타 극우성향의 군소 장로교 보수 교단, 침례교, 순복음은 후자 입장에, 천주교 내 에큐메니컬파[27], 예장통합은 중간 입장에 있다.


1982년에 실시된 <한국교회 성장과 신앙양태에 관한 조사 연구>는 개신교인들의 각 교단 및 타종교에 대한 ‘친소도’(RDI=the relative degree of intimacy)를 조사한 바 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개신교인들은 가톨릭교회에 대해 33.8%가 친근감을 나타낸 반면에 45.5%가 경원하는 태도를 보여서 가톨릭과 개신교의 갈등이 여전히 상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35년 전 자료이다. 가톨릭에 거부감을 가진 개신교인들 중에도 이단 종파들이나 불교나 이슬람교 등 타 종교보다 더 거부감을 갖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이단 종파나 타 종교보다는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으니 케바케다.


2.3. 정치 참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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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한국의 개신교는 기본적으로 정치와 깊게 관여되어 있다. 교회에는 항상 교인이 모이고, 같은 종교라는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에 인맥화하기 매우 쉽기 때문이다. 정치색은 대체로 보수적이며 최근에 들어서는 미국식 기독교 우파를 그대로 벤치마킹 하고 있다.


전두환의 쿠데타 당시 여러 교회의 목사들이 참여한 기도회가 TV로 생중계되는 어이없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으며, 오히려 불교계에서 10.27 법난이 일어나는 등 저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전두환의 독재에 반대하여 박해받은 교회도 있었다.) 신 아래 만민이 평등하다는 식의 좌익적 개신교계를 찍어누르기 위해 박정희 정권이 최태민을 이용해 구국봉사선교단을 만들어 정권유지에 써먹으며 국가적으로 지원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물론 광복후 서북부 개신교계 단체의 난동이나 그걸 이용한 이승만의 영향도 적지 않았지만...


또한 선거철마다 특정 대형 교회의 특정 정치 세력 지지가 문제가 되곤 하는데, 주로 보수적 성향의 후보를 지지하는 발언들이 나온다. 이러한 특정 교회의 특정 세력 지지 발언의 영향력을 통계학적으로 검토해보면, 현재까지의 선거에서 단 한 번도 유의미한 영향력을 미친 적이 없다. 하지만 의미가 없다 하더라도 정교분리를 초월하려는 일부 교회의 위와 같은 행위는 부적절하므로 지양되어야 한다. 이는 다른 종교계에서도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내용이나, 다만 개신교 쪽에서 이러한 문제들이 좀 더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으로 보아 개신교에서 이를 일부 이단의 문제로만 치부하지 않고 전체적인 성찰이 필요할 것으로 여겨진다.


역대 대통령 중에는 이명박 전 대통령, 김영삼 전 대통령, 윤보선 전 대통령,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종교로, 이명박, 김영삼, 윤보선은 장로교 신자였으며 이 중 이명박과 김영삼은 장로였다. 이승만은 감리교 신자였다. 김대중 대통령의 경우 가톨릭이지만 영부인 이희호 여사는 개신교. 특히 최근들어 이승만 대통령을 건국대통령으로 평가하면서 숭앙하는 작업에 보수 개신교 세력이 상당히 연관되어 있다. 뉴스앤조이 기사


반면에 민주화 운동을 지원하며 보수 진영 정권들에 저항하고 비판하거나 진보적 성향을 띄는 교회 또한 상당수 공존한다. 대표적인 진보 진영 교단으로는 교단과 신학의 보수화에 반발하여 떨어져 나온 김재준 목사에 의해 설립된 한국기독교장로회(한신대학교의 재단)[28]와, 신학적으로 진보적인 학풍을 가지고 있는 대한성공회가 있다. 이쪽 계열에서 사회운동을 한 사람들로 문익환 목사와 정계 입문 이전의 손학규 전 경기도 지사 등이 있다. 대체적으로 신학적으로 진보적인 후기 자유주의[29] 및 신정통주의 계열의 교단은 정치적으로도 진보적인 경향이 있으나 신학적으로 보수인 경우에는 정치적 입장이 케이스 바이 케이스다.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노선을 따르는 경우, 정치 스펙트럼은 문자 그대로 걷잡을 수가 없다. 또한 그 반대도 될 수 있기에, 일반화해서는 안된다.[30]


현재에도 민중신학의 영향을 받은 진보성향의 개신교 교회와 단체들이 사회현장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한국기독교장로회와 대한성공회는 70~80년대 반독재 민주화운동, 인권운동, 노동운동에 앞장섰으며, 도시산업선교회, 크리스챤 아카데미 등의 사건으로 군사정권의 심한 탄압을 받아왔다.

촛불집회나 여러 시위와 농성현장에 가보면 전국 목회자 정의평화 협의회, 예수살기 공동체, 촛불을 드는 그리스도인, 반전평화 기독인 연대 등 여러 개신교 단체들이 선두에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진보성향의 개신교를 대변하는 언론으로 에큐메니안이 있다. http://www.ecumenian.com/ 


다만 어느 정도 높은 직급을 가지지 않은 신자들은 보수적이지 않은 사람들도 많은 편인데, 한국에서는 어느 종교이든 간에 정치 성향에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지역별 문단이나 기불릭, 김대중교(…) 참고.


3. 교세[편집]


개신교는 한국에서는 급속도로 성장하여 훨씬 먼저 들어온 가톨릭을 뛰어넘는 신자 수를 가지게 되었다.


이 지도는 각국의 개신교 신자 비율을 나타낸 것인데 한국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색이 칠해져 있다.


참고로 2014년 12월 11일 JTBC 뉴스룸의 앵커 브리핑에서 나온 말인데 한국의 개신교 교회 숫자는 무려 78,000개라고 한다. 편의점은 25,000개. 그 많다는 편의점보다 3배는 더 많다. 참고로 인구 95%가 이슬람인 터키가 인구 7,500만이고 여기서 이슬람 성원인 모스크 수가 63,000여개인 걸 생각하면 한국에 개신교 예배당이 얼마나 많은지 실감할 수 있다.


사회지도층에 속하는 정관계에서는 개신교 신자 비율이 한국 전체 인구 내 개신교 신자 비율보다 높은 편이다. 대한민국 전체 국민 가운데 개신교 신자 비율이 17% 정도 되는데, 국회의원 가운데 개신교 신자는 18대 국회에서는 120여 명, 19대 국회에서는 107명으로 35.7%를 차지하였으며, 20대 국회 당선자는 75명(25%)이다.  20대 국회의원 당선자 중 기독교인은 몇 명?


한국의 개신교의 교단들 중에 장로교가 가장 교세가 강한데, 장로교 선교사들이 근대 시기의 한국으로 많이 유입하여 선교한 것도 있지만, 평신도 입장에서 장로라는 감투가 있는 것도 장로교의 교세 성장에 기여했으리라는 추측도 있다. 여기에 더해 장로교단의 분열도 장로교의 교세 성장에 크게 기여했는데, 분열되어 나온 교단들이 제각기 세를 불리고자 선교, 교회 개척을 공격적으로 추진한 것도 한몫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목회자로서 자질이 의심스러운 먹사들도 양산되었지만.)[31] 본래 장로가 없는 감리교 등에서도 장로교의 영향을 받아 장로라는 직책을 만들었을 정도. 반면 유럽에서 많은 성공회와 루터교는 보기 어렵다. 구한말 부터 선교사들은 영미의 장로회와 감리회 선교사들이 많았던 영향이고 루터회는 1950년대에야 한국에 본격적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럽 대륙 개신교와 교류할 때는 주로 네덜란드와 교류하는 경우가 많다.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 개신교 인구가 처음으로 불교 인구를 앞질렀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단 종파나 가나안 신도의 숫자도 포함되어 있어 보이는 그대로 판단하기엔 무리가 있다.


3.1. 지역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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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서고동저 그러니까 서해안으로 갈수록 많아지며, 반대로 동해안으로 갈수록 줄어든다.[32][33]


위의 대한민국 각 지역별 종교인 통계에 의하면 호남지역에서 가장 강세다. 개신교는 호남과 수도권에서 강세를 보였고,(전북 26.9퍼센트, 서울 24.2퍼센트, 전남 23.2퍼센트, 인천 23.1퍼센트, 경기 23.0퍼센트) 영남, 충북에서 약세였다.(경남 10.5퍼센트, 경북 13.3퍼센트, 부산 12.1퍼센트, 대구 12.0퍼센트, 울산 10.9퍼센트, 충북 15.5퍼센트) 개신교의 지역별 신자분포 차이는 일제 강점기 때의 선교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출처


물론 신자 수로 따지면 서울, 수도권 지역의 개신교 신자 수가 훨씬 많다.[34] 서울의 경우 대부분의 지역에서 개신교 신도가 가장 많다. 그 중에서도 신도 수 비율이 많은 곳은 강남3구로,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에서 각각 25~30%대를 기록하고 있다.[35] 그 외에도 강동구, 용산구와 서울의 영등포구, 양천구, 종로구와 중구, 성동구, 동대문구, 성북구, 노원구, 서대문구, 마포구, 강서구, 도봉구, 강북구와 은평구, 중랑구와 구로구, 동작구, 관악구, 금천구에도 개신교인이 꽤 많다. 인천의 경우도 중구, 동구, 남구, 연수구 등 부촌과 구도심 등은 물론, 서구와 남동구, 부평구와 계양구 등의 신도심과 옹진군과 강화군 등의 전방에도 개신교인들이 꽤 많다. 수도권 일대 도시 지역에서는 과천시(29.86%), 의왕시(26.59%), 용인시 수지구(27.82%), 고양시 일산서구(25.16%), 성남시 분당구(25.06%) 등이 개신교인 비율이 25%를 넘는 지역으로 집계됐다. 또 광명시, 고양시 일산동구, 고양시 덕양구, 용인시 처인구, 용인시 기흥구, 수원시 장안구, 수원시 권선구, 수원시 팔달구, 수원시 영통구, 안성시, 이천시, 평택시, 양주시, 동두천시, 의정부시, 성남시 중원구, 성남시 수정구, 광주시, 하남시, 파주시, 화성시, 남양주시, 구리시, 안산시 단원구, 안산시 상록구, 부천시 소사구, 부천시 원미구, 부천시 오정구, 포천시, 연천군, 가평군, 양평군, 여주시, 오산시, 군포시, 시흥시 등도 기독교 비율이 높다. 반대로 (울릉군을 제외한) 영남 지방에선 개신교도의 비율이 매우 낮은데, 이는 영남 지방이 멀리는 신라의 중심지였던 오래 전부터 불교의 영향력이 컸고, 구한말-일제시대에는유림의 세가 상당했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포교가 원활하지 않았다. 심지어 대도시인 대구, 부산, 울산도 기독교가 낮다. 또한 제주특별자치도 역시 개신교 신자의 비율이 매우 낮다. 이유는 육지 문물에 대한 배타성과 해방 직후 서북청년단이 제주도에서 저지른 범죄 때문.[36] 당시 서북청년단의 주축이 영락교회 출신자들이었다. 다만 충청권은 조선 유력 사대부들이 많았던 지역임에도 대전광역시, 충청남도는 개신교 세가 약하지는 않다. 수도권과 비슷한 정도. 이는 충북 지역은 전통적 사대부들이 많았던 지역이지만 대전과 천안 지역은 근대에 들어서 도시가 급성장하여 외지인들이 많이 유입된 지역이며, 충남의 다른 지역은 본래 천주교인들이 도피지로 삼았던 곳임을 감안해야 한다. 또 아산, 공주, 논산, 서산, 당진, 보령, 태안, 홍성, 예산, 청양, 서천, 금산, 계룡 등에도 기독교 비율이 높으며, 대전에서도 동구, 중구, 대덕구는 물론, 서구, 유성구 등의 신도심도 기독교 비율이 높다. 세종시도 마찬가지로 기독교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그리고 강원도에서는 전방의 여러 군들(화천군, 인제군, 철원군, 양구군, 고성군 등)이 신자 비율이 높다. 아무래도 군에서 진급을 하려면 교회에 다녀야 한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에 그런 듯. 또한 외지인 비율이 높은 춘천과 원주도 기독교인 비율이 높다. 또 속초, 강릉, 태백, 동해, 정선, 영월, 삼척, 양양 등의 영동지방도 기독교인 비율이 높다. 충청북도에서도 증평, 진천, 음성과 청주에서 기독교인 비율이 높다. 충주시도 마찬가지로 기독교인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괴산군도 상당히 기독교 비율이 좀 높다. 그리고 옥천군, 영동군, 보은군, 제천시도 점차 기독교가 선방을 하고 있다.


물론 경상도에서는 교세가 낮지만, 최근 선방을 하고 있는 지역이 점차 많아지고 있는데 대구광역시의 동구, 서구, 남구, 북구, 중구 등의 구도심, 수성구, 달서구 등의 부촌 등과 부산광역시의 중구, 서구, 동구, 영도구의 구도심, 동래구, 수영구, 금정구의 인구번화가, 연제구, 부산진구, 남구, 해운대구 등의 번화가와 부촌, 북구, 사상구, 사하구, 강서구 등의 낙동강벨트 등이 개신교가 선방하는 지역으로 뽑히며, 울산광역시의 중구, 남구, 울주군과 동구, 북구, 그리고 경상북도의 구미시, 포항시, 경주시, 김천시, 영주시, 칠곡군 등은 선방을 하고 있는 지역이며 경상남도의 김해시, 거제시, 양산시, 진주시, 통영시, 창원시 성산구, 창원시 의창구, 창원시 진해구, 창원시 마산회원구, 창원시 마산합포구 등도 나름 선방을 하고 있다.


사실상 일부 산간벽지를 제외하면 전국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 셈이다.


2005년에 크게 감소했다가 그 이후로 다시 교세를 회복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대한민국 개신교는 1970년대 이래로 메이저 지위를 놓친 적이 없었다. 대체로 2005년에 큰폭으로 감소하거나 2015년 다시 증가했다고 보기보단 통계 조사시 질문 순서나 용어의 차이로 2005년엔 과소 조사되고[37], 2015년엔 개신교회에서 이탈한 신흥종교가 포함된 걸로 본다. 대체로 타 기관이나 교계 조사로는 05년 감소폭이 이상변동이었고 18~19%로 조사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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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도 전국에서 개신교 신자의 비율이 가장 높은 시/군으로 인천광역시 강화군[38], 옹진군, 전라남도 신안군, 경상북도 울릉군[39] 등 주로 서해안 쪽 섬 지역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데, 이렇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엉뚱하게도 이들 지역에서는 육지처럼 교회가 난립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육지에서 경쟁적으로 교회를 개척하는 개신교 교단들이지만, 섬 지역에서는 여건 상 각 교단별로 선교 구역을 분담하는 경우가 많아 대개 섬 하나에 교회가 하나 꼴로 존재하기 때문에 신자 수 확보를 위한 교회, 교단 간 경쟁이 육지에 비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다.


3.2. 교단별[편집]


2002년

2008년

2011년

교단

신도수

교단

신도수

교단

신도수

1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합동)

2,300,327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합동)

2,896,967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합동)

2,953,116

2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통합)

2,283,107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통합)

2,686,812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통합)

2,852,311

3

기독교대한감리회총회

1,394,515

기독교대한하나님의 성회

1,800,000

제칠안식일예수재림교회

2,201,868

4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개혁)

1,169,572

기독교대한감리회총회

1,557,509

기독교대한하나님의 성회

1,800,000

5

기독교대한하나님의 성회

1,106,712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합동정통)

866,599

기독교대한감리회총회

1,586,063

6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40]

960,459

기독교한국침례회

801,437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여의도순복음)총회

1,016,036

7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합동정통)

823,469

기독교대한성결교회총회

564,260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백석)[41]

870,583

8

기독교한국침례회

692,767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고신)

474,047

기독교대한성결교회총회

566,500

9

기독교대한성결교회총회

503,991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대신)

452,314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합동개혁)[42]

551,857

10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고신)

427,832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337,570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고신)

464,799

출처 : 이혜정, 통계를 통해서 본 종교인구와 개신교단의 변화(2015) - 문화관광부 한국의 종교 현황(2002, 2008, 2011)


파일:external/www.newsnjoy.or.kr/201196_51314_4837.png

한국교회 주요 6개 교단 교세 통계-뉴스앤조이


위의 표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한국 개신교의 대다수는 무지막지하게 분열된 예수교장로회 교단이다. 그중에서도 합동과 통합측의 교세가 가장 크다[43]. 그 외에도 감리회, 오순절교회(하나님의 성회), 침례회, 성결교회 등의 교세가 크다. 공통적으로 보수적이고 복음주의 및 근본주의적 교리가 강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이유로는 칼뱅주의 특유의 확실하고 깔끔한 교리, 심플한 인테리어와 예배 형식이 사상적 일관성을 중시하는 한국인의 정서와 잘 맞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뿌리는 다르지만 한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장로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대한감리회가 장로교 다음으로 큰 교파라는 점, 장로교 중에 칼뱅주의의 색채가 제일 덜한 기독교장로회의 교세가 작다는 점 등이 이를 뒷받침해준다.[44]


반면 진보성향 및 사회구원 성향인 기독교장로회, 성공회, 루터교회, 구세군, 기독교대한복음교회 등은 예나 지금이나 최하위권에서 맴도는 수준. 이는 상기했듯 한국인의 전반적 성향과 맞지 않아서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45] 이들 교단이 다른 교단에 비해 물량 위주의 개별 전도보다는 사회 선교에 주력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46] 특히 루터교회의 경우 구한말~일제강점기에 전파된 다른 교단보다 늦은 6.25 이후 미국을 통해 전파되었기에 교세나 인지도를 키우기에 시간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탓도 있다.그래도 루터교회가 감리교와 같은 현지화 과정을 거쳤다면 좀 더 교세가 늘 수 있었다는 점에서 좀 아쉽긴 하다.


또 주목해 볼 만한 점은, 십여 년간 급격한 교세 확장으로 오순절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여의도 순복음교회와, 마찬가지로 거대 교단이 되었지만 한국에서만 이단 취급 받고 있는 재림교회[47]다.


4. 선교[편집]


4.1. 국내[편집]


극성 예수쟁이를 위시하여 보편적 사회가치에 부합하지 않는 선교 활동이 문제시된다. 이들 예수쟁이와 일반 개신교인들의 포교활동 간의 범위가 모호해 전반적인 개신교의 선교활동이 한꺼번에 비판을 받는 경우도 있다. 태도를 막론하고 전도 자체가 타인이 종교를 믿지 않을 권리를 침해할 요소가 크기 때문이기도 하다.


국내 개신교의 역사적 특성상 종파가 매우 다양하고, 각 종파 간의 차이가 성경 해석부터 시작하여, 정치적 성향에 이르기까지 차이가 극과 극에 이르는 경우도 많으므로 개신교는 어떻다고 단정하기는 곤란한 바가 있다.


이러한 선교 활동이 비기독교인들이 수용 가능한 선에서 건전한 자원 봉사활동 등으로 이루어지는 경우에는 사회에서 긍정적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사회의 전통적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 지나치게 배타적인 선교 활동의 경우 사회적인 갈등을 야기하기도 한다. 이러한 병크가 곪고 곪아 터지는 한 예가 바로 땅밟기. 해당 문서 참조.


4.2. 국외[편집]


한국에서 신자가 많이 늘고 교세가 많이 확산되었기에, 짧은 역사도 불구하고 국외로의 활발한 선교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미국 다음으로 세계 2위였다.[48] 조용기(…)의 자랑에 의하면 무려 190개 나라에 3만 명이 있다 카더라. (출처는 월간 중앙에 조용기가 쓴 광고(…))


국외 선교활동에 대한 현지에서의 평가는 일반적으로 좋은 편이다. 이는 해외에서의 선교활동이 봉사라는 형태로 시작하기 때문으로서, 구호품 전달, 학교나 병원 설립 등 현지인들이 실질적으로 필요로 하는 부분에 도움을 많이 주고 있어 이에 대한 현지인들의 평가가 높다. 또한 이러한 선교와 봉사에 태권도, 한국 요리, 국악 등 한국 문화 전파도 함께 이루어져 외국에 한국을 알리는 데에도 기여하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봉사와 개신교에 대한 호감은 전혀 다르다. 봉사라는 형태의 재화와 서비스만 수용하고서 개신교 신앙 자체는 거부해 버리는 경우먹튀가 흔하다고. 이로 인해 물정 모르고 들어온 선교사 중에는 충격을 먹고 떠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안습.


국외에서의 개신교 선교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이 다음 단계이다. 일단 이런 선교단체에서의 봉사라는것이 기본적으로는 선교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선교가 근본적인 목적이기 때문에 선교 없이는 봉사활동도 없다는 소리. 때문에 봉사를 통한 감화라는 장기적인 계획 없이 단기간에 성과를 거두려고 하거나, 현지의 문화와 종교를 무시하고 지나치게 배타적인 포교활동을 하여 봉사와의 밸런스를 맞추지 못하게 될 경우 큰 문제가 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7년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49]


문제를 만드는 것은 일부만의 문제인가? 현지인과 문제없이 지내며 조용히 헌신하는 선교사들이 다수라고 주장되며 인터넷에서 까임의 대상으로서 언급될 때처럼 절대 다수가 아닌 것은 확실하지만, 이런 선교사들조차 눈쌀을 찌푸리게 만드는 조급증과 우월감, 배타성에서 비롯된 온갖 문제들이 지속적으로, 꽤 많은 숫자로 발생하고 있다. 사건사고 면은 선행보다 기억에 강하게 남기 마련이다.


한편, 이러한 국내외에서의 선교 및 포교 목적의 봉사 활동을 국내 개신교인들에 대한 과시, 보여주기라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봉사 활동을 위해서는 돈과 물자와 사람이 필요한 법이니 당연히 홍보야 필요하기 마련이지만, 이런 비판은 봉사에 대한 홍보가 실제보다 지나치게 부풀려지는 경우가 왕왕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런 검증되지 않은 사실들은 인터넷과 거리의 전단물 등을 통해 무차별로 확산되어 문제를 부풀린다. 국외에서 선교과정에서 일어난 수두룩한 사건들이 이를 증명하며, 이에 관련된 책으로는 〈개독교를 위한 변명〉,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 등의 목사나 선교사에 의해 쓰여진 내부 증언담이 있다.


교단들이 이런 잘못된 행동들에 대해 제대로 비판하지 않는 것 또한 비난받아야 할 것이다. 어디까지나 일부만 그렇고 대부분은 좋은 소리 듣는다면 좋은 쪽만 홍보하고 선전하며 잘못은 모른 척 하는 문제를 넘기면 안 된다.


대한민국 개신교는 더 이상 국내에서 교세 확장 등을 기대할 수 없다고 한다. 이미 교세가 늘어날 만큼 늘어났으며, 교회는 너무 많아서 경쟁이 심하다. 출생률 감소 추세와 맞물려서 교세의 성장이 둔화되었거나 마이너스로 접어들었다는 분석. 이것이 자연스럽게 다른 나라로 눈을 돌리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선교를 무조건 반대하는 시각도 옳지 않다. 어찌 보면 종교 집단의 당연한 활동이며, 불교나 천주교나 정교회나 원불교도 선교하고 봉사단체도 얼마든지 보낸다. 그런데 문제는 외국에 선교 목적으로 나가는 사람 중에 한국에선 수십여 년 사이 50년대 대비 40년 만에 10배 이상 급속도로 교인이 증가하는 유례 없는 성장세를 거두었으니 국외에서도 이와 같은 성공이 반복될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미 각국에는 그 나라의 종교가 뿌리내리고 있으며,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이슬람 국가에서 그렇게 했다간? 코로 할랄푸드를 먹는다. 코랄푸드


순례 목적으로 기독교 성지를 방문하는 것에도 문제가 있다.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기독교의 성지들은 대부분 이스라엘이나 이슬람 국가들의 영토다. 터키에선 중요한 성지들을 경비원들을 통해서 지켜준다곤 하지만, 터키의 동부는 보수적인 이슬람 동네이다. 다른 곳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개신교 찬송가를 부르면서 울부짖으면서 기도어그로하는 것은 주위의 이목을 끄는 일이며, 결코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 한국어니까 모를 것 같은가? 손에 들고 있는 것과 분위기만 봐도 뻔하게 알 수 있는 일이다. 하물며 거기 가서 땅밟기를 해대니…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똑같이 하려나 극과 극은 통하는 법


게다가 왠만한 성지들은 전부 가톨릭 아니면 정교회 등 개신교 아닌 타 기독교 종파의 소속이다. 엄연히 가톨릭인 가르멜 수녀회가 운영하는 주님의 기도 성당에는, 기도문을 수정해야 한다는 어느 한국인 개신교 목사의 주장에 따라 1960년대부터 40여 년 넘게 자리하며 순례자들을 맞이해온 가톨릭 주님의 기도문이 갑자기 철거되고 개신교식 주기도문이 설치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국어 주님의 기도문을 봉헌한 천주교 부산교구는 이 소식을 접하고 곧바로 원상 복구를 바라는 공문을 예루살렘 총대주교와 가르멜 수도회 총장, 주님의 기도 성당을 관할하는 이스라엘 주재 프랑스 대사관과 해당 가르멜 수녀원 등에 보냈다. 이에 예루살렘 총대주교는 2월 9일자로 원래대로 복구할 것이라는 답변을 보내왔고, 한국어 가톨릭 주님의 기도가 다시 설치되었다. 문제는 개신교 주기도문이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어로 된 주님의 기도가 2개나 되는 웃지 못할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예루살렘이나 시나이 산과 같은 다종교의 공동 성지에서 새해 첫날 찬송가 불러대며 울부짖는 건 민폐의 결정판. 개신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넘어 국가 이미지 손실이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종교의 자유는 있으나,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하면 안된다는 것. 예를 들어 지하철 포교는 법에 어긋나므로 하면 안되는 것이다. 헌데 지겹게 하고 법적으로 어긋난다고 해도 종교 탄압이라며 발악하잖아


그나마 21세기 들어서 개신교 신자가 늘어난 나라가 중국이다. 이미 중국 내 개신교도 인구는 일각에서는 한국 인구를 능가했다고도 전해진다.[50] 물론 중국 정부의 탄압은 나날이 거세지면서 세금을 늘린다든지 국외 출국을 금하고 목사나 교회에 대하여 세금 탈세라든지 여러가지로 딴지를 걸거나 교회를 폐쇄하기도 한다. 어쨌든 이를 두고 국내 개신교 선교층의 반응은 여러가지인데 우선은 같은 개신교로서 환영하는 분위기. 반대로 중국에서도 국외 선교를 하기에 한국 교회의 국외 선교에 라이벌이 된다고 반발하는 반응도 있다.


2016년 터키 동부에서 또 한국인인 개신교 선교단이 논란이 되고 있다… 결국 현지 터키인들의 욕설과 빗자루로 처맞고 모욕당하는게 당당하게 유튜브로 올라와있다.#


5. 봉사 활동[편집]


한국 개신교는 국내외 봉사 활동에 절대적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개중에는 포교를 목적으로 하는 봉사 활동은 물론이거니와, 포교를 표면적으로 하지 않으면서 후원하는 봉사 활동도 많다. 봉사활동이라고 보긴 어렵겠지만 지역사회 기여 같은 것도 점차 제도화되어 가는 추세라, 신도시에 지어지는 신설 교회들 중 적지 않은 수는 지역 사회를 위해 족구장이나 풋살장 같은 레저/스포츠 센터, 헬스장, 대강당, 공연장 등을 함께 무료로 운영하는 경우도 많다.


한편 포교를 목적으로 하는 봉사 활동의 경우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을 제시하는 이들도 있다. 참고로 모든 종교활동의 대외 활동의 궁극적 목표는 포교다.


6. 교포 사회에서의 역할[편집]


개신교가 강세인 영미문화권 국가[51]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는 물론이거니와 가톨릭이나 정교회가 강세인 동유럽/남유럽/중남미, 기독교가 거의 없는 일본/중동[52] 등 대부분의 이민지에서 한인교회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53]


국외 각지의 교포 사회에서는 교회 본연의 역할에 더하여 교인들 간의 커뮤니티 역할도 한다. 특히 미국의 경우 대부분의 한인 교포들이 개신교 신자들이다. 새로 이민을 오게 되는 사람들이나 유학생들이 현지에 적응하는 데 실질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고 있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교회를 나가지 않던 사람도 해외에서 교회를 다니는 경우가 매우 많다. 다만 이걸 긍정적으로만 평가할 수 없는 것이 같은 교회 다니는 교우를 돕는다는 마음가짐이 아니라 선임자의 이점을 이용해서 신임자를 소위 '낚시질'하려는 목적으로 도움을 제공하는 경우가 결코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일례로 2000년 전후해서 도쿄에서는 한인교회 소속의 재일교포들이 집 구하기 어려워하는[54] 신참 유학생들 상대로 방을 빌려준다며 낚시를 한 후, 입주할 때 다 되어서 별안간 '교인 아닌 사람에겐 못 빌려준다'며 교회에 나오기를 강요하는 사태가 빈발했던 적이 있었다. 


이민 사회에서 교회가 비대하게 커지면서, 비신자들에 대한 배타성이나 한인교회 간의 다툼 또는 교회 내부에서의 힘싸움 등과 같은 부작용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이게 가볍게 볼 게 아닌 것이, LA 폭동 당시 한인교회는 몇몇 교회끼리 나뉘어져 서로 한인 교포 피해에 대해 나몰라라 하는 일까지 벌어졌고 이걸 종교 드립으로 선전하는 일도 벌어졌다.


7. 교육기관[편집]


개신교 계열의 교육기관. 한국에서는 가톨릭, 개신교, 불교, 원불교 등 기타 여러 종교에서 미션스쿨을 운영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개신교 미션스쿨이 참 많다. 아시는 대로 계속 추가 바람.


7.1. 초등학교[편집]


계성초등학교: 대구광역시에 있는 학교. 같은 재단인 계성중학교, 계성고등학교도 있다.[55]

대광초등학교

명지초등학교

서울삼육초등학교

세종초등학교

숭의초등학교

예일초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사범대학부속초등학교

중앙기독초등학교

태강삼육초등학교

한신초등학교

화랑초등학교

7.2. 중학교[편집]


경신중학교

경화여자중학교

계성중학교

계원예술학교

광성중학교

대광중학교

대전대신중학교

대전삼육중학교

동해삼육중학교

동화중학교

등촌중학교

매향중학교

명지중학교

문영여자중학교

배재중학교

배화여자중학교

브니엘예술중학교

삼성중학교

서울삼육중학교

서해삼육중학교

송림중학교

숭실중학교

숭의여자중학교

신성중학교

양곡중학교

염광중학교

영남삼육중학교

영락중학교

예원학교

예일여자중학교

원주삼육중학교

이사벨중학교

이화여자대학교사범대학부속이화금란중학교

이화여자대학교병설영란여자중학교

정의여자중학교

중앙기독중학교

팔렬중학교

한국글로벌중학교

한국삼육중학교

호남삼육중학교

7.3. 고등학교[편집]


경신고등학교

경화여자고등학교

경화여자English Business고등학교

계성고등학교: 대구광역시에 있는 학교. 서울시에 있는 계성고등학교는 가톨릭학원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본래 여고였다.

계원예술고등학교

광성고등학교

대광고등학교

대전대신고등학교

동해삼육고등학교

매향여자정보고등학교

명지고등학교

문영여자고등학교

배재고등학교

백영고등학교

브니엘고등학교

브니엘여자고등학교

브니엘예술고등학교

서울삼육고등학교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

서울예술고등학교

서해삼육고등학교

성일고등학교(익산)[56]

성지고등학교

송림고등학교

수피아여자고등학교

순천매산고등학교

순천매산여자고등학교

숭실고등학교

숭의여자고등학교

신성고등학교

양곡고등학교

염광고등학교

영남삼육고등학교

영락고등학교

영락유헬스고등학교

예일여자고등학교

예일디자인고등학교

원주삼육고등학교

은혜고등학교

이사벨고등학교

이화여자고등학교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병설미디어고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사범대학부속이화금란고등학교

인성여자고등학교

인평자동차정보고등학교

전주기전여자고등학교

전주대학교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

전주신흥고등학교

전주영생고등학교

정명여자고등학교

정신여자고등학교

정의여자고등학교

한국삼육고등학교

한국조리과학고등학교

호남삼육고등학교

호수돈여자고등학교

환일고등학교

7.4. 전문대학[편집]


명지전문대학

배화여자대학교

숭의여자대학교

전주비전대학교

7.5. 4년제 대학[편집]


백석대학교

삼육대학교

서울여자대학교

연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전주대학교

계명대학교

8. 비판 [편집]


개독교, 먹사/목레기, 근본주의 항목 참조.


8.1. 목사 임명에 대한 논란[편집]


목사로 임명받는 과정은 각 교단 별로 차이가 있지만, 정통적이라고 여겨지는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으려면 신학대학원 과정(3년)을 이수해야 하고, 자신이 소속된 교회에서 전도사로서 봉사를 하여야 한다. 참고로, 미국과 같은 경우는 youth pastor나 assistant pastor로 칭하는데, 미국의 경우는 교회에서 사역을 공식적으로 하는 사람을 pastor라고 부른다. 대다수의 교단은 미혼인 사람은 목사로 임명조차 하지 않으며, 전도사로서 봉사를 시키는 것은 해당 인물이 적합한 인물인지 평가를 위해서다. 이는 바울의 서신(디도서 1장, 디모데전서 3장)에서 나온 감독으로 합당한 자에 대한 설명을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교단 등록에 아무런 제한이 없다는 것을 이용, 기존 교단들의 이름과 비슷한 교단을 만들어 그럴 듯하게 장로교니 감리교니 침례교니 하는 이름만 빌렸을 뿐 전혀 관련이 없는 자체적인 교리와 시스템을 가지고 사이비 단체로 발전하는 경우가 있으며, 혹은 돈을 노리고 자체적으로 목사를 임명하는 프로그램을 돌리기 시작해 이른바 속성으로 목사 안수를 받게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한두 달은 양반이고 3일 속성, 7일 속성코스나 심지어 인터넷만으로도 국가에서 인정한, 합법적인 목사가 될 수 있다. 물론 신학대학을 다니지도 않고 이런 단기간의 안수로 제대로 된 목사가 될 수 있을리가 만무하기에 기존 교단들은 이러한 교단과 목사를 인정하지 않는다.


실제로 사기와 같은 범죄를 조금 더 쉽게 하기 위해서, 이러한 방향으로 목사 '타이틀'을 취득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출소 후 자신이 종교에 귀의하여 개과천선했다는 빌미로 자금을 끌어모으거나 범죄를 숨기기 위한 방패막이로 삼는 것인데, 이런 경우의 대표적인 사례가 전직 고문기술자 겸 목사 이근안[57], 한때 대도로 유명했던 조세형의 경우다. 관련기사 그 외에 옥중에서 안수를 받아 수감자 상태에서 목사가 되는 경우도 있다. 2016년 말 대한민국을 혼돈의 구렁텅이로 몰고 간 사건의 근원인 최태민도 대표적인 사례.


8.2. 군종장교요원 특혜 논란[편집]


자세한 사항은 항목 참조.


9. 관련 링크[편집]


(한국어 위키백과)대한민국의 개신교

(한국어 위키백과)한국의 기독교

10. 관련 문서[편집]


갓톡

개독교

개신교

기독교

교회

예수쟁이

먹사/목레기

청교도

한인교회



[1] 예외적으로 네덜란드와 스위스는 우리나라와 개신교 구성이 엇비슷하며, 특히 네덜란드는 같은 칼뱅주의란 공통점 때문인지 직접적인 교류가 드문데도 한국 개신교 신학계에서 생각보다 자주 언급된다.

[2] 이 대학의 후신을 자처하는 대학이 장신대학교와 총신대학교이다.

[3] 당시엔 가톨릭도 제사는 금지였다.

[4] 다만 이 과정에서 한국 토속 샤머니즘 요소가 개신교 내부에 남게 된다.

[5] 오히려 오늘날에는 천주교가 제사를 관용하는 경향을 보인다.

[6] 지금도 극도로 보수적인 개신교 교회에서는 은근히 유교 윤리와 구약 율법에 명시된 윤리가 비슷하다는 걸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7] 독립운동을 이끈 교회를 이어받은 신학교나 교회를 주축으로 친일 연구가 활발한다. 재밌는것은 개신교 학계는 물론 반기독교 성향의 일반인들도 이 자료들을 자주 애용을 한다는 점이다. 개독들 자료들은 못 믿는다면서??

[8] 일반 사법 경찰과 달리 정치범과 중요사건을 다루는 경찰조직

[9] 현재 연구로는 1933년 이전에 한국 천주교 내부적으로 신사참배를 받아들였다는 연구도 있다.

[10] 명목상 평신도 회중제로 운영하는 교회를 일컫는 말이었지만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을 통해 들어온 조합교회는 어용교단 노릇을 하면서 한국의 개신교를 분열시키는 역할을 했었다.

[11] 도리어 불교는 조선시대 숭유억불에 대한 울분 풀이랍시고 구한말부터 이동인, 이회광처럼 일제에 적극적으로 친일 부역질을 일삼은 자들이 많았다.

[12] 전통 민족신앙이라해도 대종교와 분리된 국내 단군교의 경우 적극적 친일이었다.

[13] 박형룡처럼 존 메이첸의 제자이다.

[14] 상대적으로 민주당, 그 가운데 신파는 부통령 장면을 중심으로 가톨릭 성향이 강했다. 이런 분위기는 김대중, 노무현까지 이어졌다. 다만 민주당 구파의 대표 인사인 윤보선 전 대통령은 장로회 신자였다.

[15] 고려원 "한국의 불교".

[16] 개신교를 믿는 나라들은 모두 잘 산다는 주장도 사실 이때부터 나왔던 것이다. 물론 반개신교 측에서는 일부 아프리카 국가들의 예시를 들어 개신교 국가임에도 못 사는 나라들이 수두룩했다는 반론을 편다.

[17] 그런데 기윤실은 1996년에 마이클 잭슨의 내한 반대 운동을 벌인 적이 있는 집단이며 게다가 마릴린 맨슨은 물론 레이디 가가 내한 공연 반대 운동까지 시전은 물론 각종 문화예술들 탄압을 주도하는 선두주자인 셈이다. 갱생은 개뿔... 오히려 NGO같지 않은 배후세력 집단들을 몸집늘리면서 광기어린 짓만 골라서 한다. 잭슨의 소송크리를 맞고 나서 정신차렸다 하지만 여전히 더 심하게 정신줄 놓고 개소리를 시전하니 개독인증받고 낙인찍힌 셈이다.

[18] 하지만 한국교회대부흥100주년기념상암서울대회에서 故옥한흠 사랑의교회 원로목사는 한국 개신교의 타락을 비판하고 목회자들의 회개를 촉구하기도 하였다.

[19] 딸을 죽인 아버지가 다름아닌 목사였다. 그것도 사이비, 이단 종파의 목사가 아닌 정통 교단의 목사(…).

[20] 다만 통계청에서 집계하는 개신교의 기준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개신교(성공회 포함)만이 아닌, 후기성도 교회, 여호와의 증인 등의 반삼위일체론 성향 교파와, 통일교, 천부교, 에덴성회, 영생교, 베뢰아, 다락방, 신천지, 성경침례교 등 기성 개신교에서 이단으로 규정된 신흥 교파들을 모두 포함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개신교의 성장이 아닌 신천지 등 악성 이단들의 신도 급증에 의한 결과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21] 단, 이 짤 자체는 인도의 부패문제에 대해 만들어진 것이다. 출처는 이쪽.

[22] 한인교회를 제외한 순수하게 미국의 개신교의 사상 아래에 있는 교회. 형식상으로 개신교가 미국의 국교는 아니다. 설문조사 등의 자료에서 미국인들이 매우 종교적이고 미국이 개신교 국가와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와는 별개로 국가적으로는 법으로 정교 분리를 규정했기 때문에 (혹시 헌법을 개정하지 않는 이상) 국교가 될 수는 없다. 다만 개신교 전통의 영향이 국가적으로 강한 건 사실이라 대통령 선서 등에는 성경 위에 손을 얹고 하기는 한다. 물론 이것도 절대적이지는 않아서 쿠란에 선서한 하원의원의 경우도 있다.

[23] 길선주 장로는 회심하기 전 관우를 섬기는 관성교의 신자였다. 새벽기도 역시 관성교의 새벽기도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24] 참조 : 평양 대부흥운동과 길선주 영성의 도교적 영향. 단, 해당 논문에서는 도교적 기복신앙이 사회 공동체 구원의 신앙으로 진화하였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 영향 그대로 그 대상과 방법만 바뀌었다고 보는 것이 현재 관점에서 더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25]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가톨릭에서 개신교에 대한 시선은 딱 '열교 이단'이었다.

[26] 그러나 공동번역성서는 성공회를 제외한 나머지 개신교 교단에서 예배용 성경으로 채택되지 않았다. 예장합동 등 비 KNCC 교단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KNCC 교단들 내에서도 의견 일치를 못 보았다. 이는 1993년 표준새번역 채택 때에도 반복되었다. 물론 공동번역이나 새번역 모두 대한성서공회 공인 역본인 만큼 교단 내외적 합의가 이루어지면 예배용 성경으로 사용될 수 있지만 교단 내부 및 교단간 의견 일치를 보는 것이 매우 어렵다.

[27] 타 교파 신자에 대한 영성체 허용 문제에 대해 미온적인 반응이라 이쪽으로 분류하였다.

[28] 물론 떨어져 나오기 전에 먼저 교단에서 축출당한 것. 김재준 목사는 모세오경을 쓴 것이 모세가 아니라는 주장을 하는 등 성경비평에 입각한 신정통주의 신학을 펼치다가 근본주의 신학을 하는 이들에게 비판을 받는 등 큰 소란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기장과 예장이 갈라섰다. 하지만 그 어떤 교단보다도 기장, 한신측의 전신인 조선신학교 계통 교단이 신사참배에 가장 호의적이었던 탓이 가장 크다.

[29] 2차대전 이전의 1세대 자유주의와는 좀 다르다. 자세한 것은 자유주의 문서의 신학 문단을 참조하자.

[30] 또한 신정통주의를 표방하거나 NCCK 소속 교단이라 하여 모두 진보적인 것만은 아니다.

[31] 실제로 최태민 같은 자도 목사 직함을 얻었다.

[32] 이런 추세는 일제강점기 이전 이북 지역도 마찬가지라서 서북지역과 달리 함경도나 개마고원에는 원래부터 개신교인이 별로 없었다.

[33] 영남의 강한 불교세 가운데도 선방을 하고 있는 경북 김천, 경북 포항, 경남 거제 등이 눈에 띄고, 호남의 강한 개신교세 중에서도 전북 군산, 전남 신안, 전남 여수의 초강세를 볼 수 있다.

[34] 초기 서울의 교회는 이북(특히 평안도)에서의 실향민들의 영향이 컸다. 적어도 분단 이전에는 평안도가 기독교 신자 비율이 가장 높았고 현대 개신교 원로들의 출신지가 이북, 특히 평안도 지역 출신지가 많다. 또한 1960년대 이후 호남 출신의 이주민들이 많이 이주하면서 호남 출신의 신자들이 많아지기도 했다. 또한 호남 출신들 다음으로 호서 출신들도 꽤 많은 편이다.

[35] 강남권은 개신교 뿐만 아니라 천주교 교세도 강한 지역이다.

[36] 사실 제주도는 신축민란의 여파 때문에 로마카톨릭에 대한 감정이 극악을 달렸으므로, 개신교가 퍼질 가능성도 충분이 높았던 지역이었다.

[37] 05년 조사시 1번 기독교(천주교).... 3번 기독교(개신교)로 하는 바람에 성질 급한 신도들이 3번이 아니라 1번으로 쓴거 같다는 의견이 많다. 그게 아니라면 2015년 조사에서 천주교 교세가 큰폭으로 감소하거나 개신교세가 급격하게 증가해야 하는데 실제 체감은 천주교나 개신교나 별 변동이 없기 때문

[38] 감리회와 더불어 육지에서는 마이너 교단인 성공회의 교세가 강한 편이다.

[39] 동해권에서 유일하게 개신교 교세가 강하다 볼 수 있다. 특히 침례회의 교세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하다.

[40] 일명 통일교, 전 교주 신격화로 인해 현재는 기독교와 관계가 없다.

[41] 구 합동정통

[42] 서울 관악구 남현동 소재

[43] 2015년도 뉴스앤조이 통계에 따르면 2014년 이래로 교인수 1위는 통합, 개교회·목사수 1위는 합동이다.

[44] 우리나라의 장로교인이 650만명 정도이고, 전세계의 장로교인이 약 2000만명이다. 전세계 장로교인의 1/3이 한국인이라는 말이다. 칼뱅주의가 한국인의 정서에 맞는 게 맞네...

[45] 달리 말하면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개신교의 대표 이미지가 장로교로 완전히 고착화되었단 뜻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찬밥 취급받는 교단들이 구세군을 제외하면 대체로 전례적(liturgical) 성향이 강하다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46] 성공회, 구세군 등 영국에서 전파된 개신교 교파의 경우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긴 국내 선교 역사를 지니고 있다. 성공회는 1890년, 구세군은 1908년 국내에 처음으로 선교사가 파송되었다.

[47] 재림교회의 이단 여부는 개신교 내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현재 개신교 내 최대 교파인 예수교장로회에서는 이단으로 지목하고 있다. 다만 예수교장로회 가운데 보수적인 교단에서는 천주교도 이단으로 생각하니, 판단은 각자 하도록 하자.

[48] 다만 지금은 6위다.

[49] 그 이전에도 인터콥이라든지 극단적인 선교단체가 이스라엘이나 아프가니스탄, 팔레스타인에서 대규모 부흥회를 한다고 설치다가 외교부나 대사관은 물론, 그 나라 정부에서 무슨 일 터져도 일절 한국 정부가 책임지라고 으르렁거렸던 바 있다. 특히 이스라엘 부흥회 시도 당시 이스라엘 측이 반이스라엘 폭도로 규정하고 무차별 발포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었다. 결국 모조리 무산되었거늘 인터콥 측은 이게 종교 탄압이라고 적반하장으로 발광하여 개신교 선교에 대한 어그로를 부채질했다.

[50] 그러나 여기서도 볼 수 있듯이 통계가 정확하지 않고 워낙에 제각각이라 실제로는 한국 인구만큼은 아닐 수 있다. 일단 공식적인 숫자는 2012년 기준 약 2천만 명이다. 물론 중국 교회는 인구 비율과 영향력이라는 점에서 보면 어느 통계를 기준으로 보나 중국 사회에서 미미한 현실이다.

[51] 영국,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52] 이슬람 종주국 중동, 교회 있는 거 아세요?

[53] 물론 나라에 따라 다르겠지만, 한인 이민 사회는 전통적으로 한국대사관, 주재하고있는 기업의 지사, 한인교회, 이렇게 세 곳을 중심으로 모인다. 교포 사회에서는 한인교회가 개신교 예배 장소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예를 들어 가난한 유학생들 입장에서 집에서 한 한국음식을 맛볼 수 있는 때가 주일 예배 후에 교인들과 함께 먹는 점심일 경우가 흔하다. 또 그렇게 개신교인이 되기도 하고...

[54] 일본의 웬만한 저가형 원룸 건물은 대개 노인들이 개인적으로 운영하는데 이들은 외국인 불신이 뿌리깊고 아시아인을 차별하는 경향이 있어서 돈 내도 방 안 빌려주는 곳이 꽤 많다

[55] 서울시에 있는 계성초등학교는 학교법인 가톨릭학원에서 운영하는 가톨릭 학교다.

[56] 경기도 성남시의 성일고등학교와는 다른 곳

[57] 이후 논란이 되자 목사직 박탈



[제 2장 중국사상과 흐름과 고전]

(출전 : 도서명: 동서고전 200선 해제2 / 편자명: 반덕진 /   출판사명: 가람기획)




   

a. 중국사상의 원류

중국사상의 원류로는 공자로 대표되는 유가사상, 노자와 장자로 대표되는 도가사상을 들 수 있으며, 여기에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사상까지를 포함하여 동양사상의 원류로 간주한다.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 계속적인 영향력을 미쳤던 중국사상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현실주의적 경향

중국인의 사상은 현실생활에 밀착되어 있다.  추상적, 이론적 사색에 잠기지 않고 현세와 떨어진 피안 또는 형이상학적 세계 등을 추구하는 일보다는, 현실을 어떻게 사느냐, 어떻게 하면 좋은가를 생각하는 데에 큰 관심을 기울여 왔다.  


 조화적 경향

상대 개념의 사고형식이 현저하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사물을 상대되는 두 요소로 나누어 파악하는 사고방법으로서 가장 전형적인 것은 음양사상인데, 그저 단순하게 모순 대립하는 두 이질적인 성격의 것으로 구분 지어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연관적인 것으로 보는 동시에 이 양자의 조화와 안정을 중시한다.  그것은 한편에 치우치지 않는 중용을 중히 여기는 사고와도 상통하는 면이 있다.  


 천명사상

중국인은 고대 이레 근대에 이르기까지 시종 하늘 에 대한 숭앙의 염을 가지고 있었다. 하늘은 천공이지만 단순히 자연현상으로서의 천공일 뿐만 아니라 조물주 또는 조화의 근원이어서 사람 및 기타 만물을 낳고 자연계 인간계를 주재하며, 이러한 작용은 모두 천명에 의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인간이 사는 세계 전체를 천하라고 하고, 이것을 통치하는 지배자를 천자 라 일컬으며 천자는 천명에 따라 천하에 군림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늘은 이러한 모든 인간사의 주재자이므로,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 즉 사람의 길은 하늘의 길을 근간으로 해야 하며, 요컨대 사람은 하늘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화이사상

또한 천하의 관념과 관련하여 화이사상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한민족 특유의 민족의식을 표현한 것으로, 중화라는 고도의 문화를 가진 한민족에 대하여 주변의 이민족을 이적(오랑캐)이라 하여, 문화수준이 낮은 야만인으로 간주하고 이는 화의 문화를 추앙하고 화에 복속해야 하고, 중화의 문화가 미치는 모든 지역이 천하이고 그것이 세계 전체에 해당한다고 생각했다.  위와 같은 특징을 가지는 중국사상의 흐름은 대개 4기로 나눈다.


b.   태고--전한말기(BC 1세기 말)_


 중국사상의 성립

제 1기는 중국사상의 성립기로, 은나라 때인 BC 15세기 무렵 이후이다.  은나라 때에는 제로 불리는 하늘의 신을 최고 신으로 삼고, 각 씨족의 조상인, 산, 강, 초목 등 기타 여러 신들을 숭상하여, 이러한 여러 신들에게 제사를 올리고 행운을 기원하며 또 중요한 행사는 점을 쳐서 신의를 확인하고 난 뒤 실행에 옮겼다. 주나라 때에도 은나라 때의 상제신앙을 이어받아, 하늘을 신앙 하였다. 그래서 주나라 초기에 주공이 제정했다고 전해지는  주례는 하늘과 그밖의 여러 신을 모시는 종교의식임과 동시에 천하통치를 위한 정치형태이자 동시에 신분제도를 규정하는 예제이기도 하였다.


c. 제자백가 사상

중국사상은 춘추시대 후기부터 전국시대에 걸친 시기(BC 6세기말-- BC 3세기 말)에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때는 중국사상에서 최고의 황금시대로 제자백가라 불리는 수많은 학파·사상가가 배출되었다.  그 가운데 주요 사상가 군은 유가·묵가·명가·도가·법가·음양가의 6가였다.  


d. 유가사상

가장 일찍 등장한 것은 유가로서, 공구(공자)를 시조로 하여 맹가(맹자), 순황(순자)등으로 이어지면서 유력한 학파가 되었다.  유가는 전통적인 예에 입각하여 인류의 질서와 도덕을 중시하고, 이것을 실천할 수 있는 인격의 도야를 목표로 하였다. 또 그러기 위해서 실천해야 할 인·의·예·지·신등의 덕목을 강조함과 동시에 그 성과를 정치의 장으로 확대시켜, 덕치주의를 주장했다. 이 훌륭한 인격의 형성 과 이것을 기반으로 하는 덕치의 구상은 수기치인의 도라 하여 이후 오랫동안 유가사상의 근본을 이루었다.  묵적(묵자)으로 대표되는 묵가는 유가와 비슷한 점도 있지만, 유가의 형식주의와 불평등성을 신랄히 비판하고, 겸애교리, 즉 자기를 사랑하는 것과 같이 남도 사랑하여 자타가 상호간에 이익되게 해야 한다면서 인간평등을 외쳤다. 아울러 절약과 비공등 공리주의적인 주장을 폈다. 혜시·공손룡등으로

대표되는 명가는 사람의 인식과 언어의 논리를 분석하고 고찰했다. 도가의 무사상의 성립은 이같은 명가의 논리에 관한 고찰과 관계가 있었다. 


e. 도가사상

이이(노자)와 장주로 대표되는 도가의 사상은 무 라는 성격을 가진 도를 만물의 근원으로 제시하고, 사람은 그 무인 도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무위자연을 설하며, 여러 집착에서 초월하여 절대경지에 이르는 것이 진실로 자기를 완성하는 길이라 하였다. 그리고 유교의 인위적인 도덕윤리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일반백성의 저항권을 인정하고 있다. 상앙·한비로 대표되는 법가는 유가에서 중시하는 자연발생적인 불문율인 예를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 부정하고, 시대의 변화에 적합한 법(실정법)을 제정·공포함과 동시에, 신상필벌주의에 의하여 귀족·평민을 불문하고 그 법을 엄격하게 정진하도록 하여, 부국강병을 도모하고 군주권의 강화를 지향했다. 

음양가는 추연으로 대표되는 일종의 자연철학 및 역사철학을 내세운 사람들로서, 음양과 5행을 원리로하여 자연계·인간계를 망라하여 사상이 성립·변화하는 모든 양상을 설명하려 하였다.  이는 결국 중국인들로 하여금 자연현상에 대한 객관적 진리를 포기하게 만들어 중국과학 발전을 저해한 커다란 요인이 되었다.  이상의 6가 외에 농업생산의 중시를 설하는 농가, 현종연횡등 외교상의 책략을 논하는 종횡가, 병법을 논하는 병가등이 있으며 또 복수의 학파사상을 두루 지니고 있어 특정 1가의 사상으로 볼 수 없는 사상은 잡가라고 하였다. 

춘추전국시대는 주나라 초(BC 11세기)에 성립한 봉건제도의 정치제도가 붕괴되고 중앙집권체제로 옮겨가는 과정에 해당하며, 여러 나라 가운데 중앙집권화를 가장 빨리 추진한 진이 천하를 통일 하자, 그 중앙집권체제를 중국전역에 확대 시행하였다.  이와 같이 선진시대에 있어서 중국사상 형성의 주된 담당자는 사대부 안정을 얻으려면 어찌해야 하겠는가, 또 그러한 격변의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활발한 논의를 전개했다. 그것이 제자백가 사상 내용의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이 시기에 여러 유형의 사상이 성립했다.  이 가운데 예와 질서를 중시하여 수기치인의 도를 설한 유가의 사상은 치자계급의 가장 표준적인 사상이다.  묵가는 공리주의 입장에서 유가가 중시하는  예 를 비판한 분명히 성격이 다른 사상이다.  도가사상은 상식적인 사회생활에 대하여 소극적이고 비판적인 사상이었다.  법가는 봉건제에서 중앙집권체제로 변화해 가고 있던 시대의 흐름에 편승한 활동을 하였다는 점에서 다른 학파와는 성격을 달리하였다.  전국시대 말기부터 진·한 시대초에 걸쳐(BC 3세기 후반 ∼ BC 2세기 중엽) 여러 면으로 사상의 정리와 이론의 정비가 이루어졌다. 또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고 그 뒤를 한이 이어받아 강력한 제국이 성립되자 이것을 이론화시킬 정치 철학이 요구되는 동시에 사상의 통제가 시도되었다.  진나라 때에는 법가사상에 의한 사상통일이 이루어져 유가는 분서갱유라는 심한 탄압을 받았다.  


f. 관학화된 유교

한나라 초기에는 황로사상이 유행했는데, 이것은 법가사상을 토대로 하여 노자의 허정무위의 설을 도입한 통치술 및 여기에 부수되는 처세관 이었으나, 무제(BC 2세기 후반) 때부터 유가사상 존중의 경향이 나타났다.  그리고 무제는 유교사상으로 천하의 사상을 통일해야만 한다는 취지의 동중서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교 국교화의 길을 열었다. 즉 전한시대 말 성제·애제 무렵에 이르러 그 결실을 맺게 되어,제자백가의 다양한 사상 가운데서 유가사상만이 정통사상으로 인정받는 유가일존의 상황이 도래되었다.  이 당시 역사 서술에서 획기적인 발전이 있어, 전한의 사마천과 후한의 반고에 의해 사는 경에서 독립하여 독자적 학문으로 발전하였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독특한 기전체를 확립하고, 반고는 「사기」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여 「한서」를 남겼다.


g.  전한말∼북송중기 : 경학과 종교사상


 경전연구 활성화

제 2기의 시작을 이루는 유가일존의 사상은 왕망의 새로운 유교존숭 정책에 따라 더욱 강화되었다.  후한도 유교존숭 방침으로 이어져 유교가 국가지도 이념으로 공인되었고, 유교를 국책으로 하는 상황이 이후 청나라 말기의 제 3기가 끝날 때까지 거의 2000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처럼 유가사상이 권위를 갖게 되자 유교경전의 권위가 높아지고, 경전의 연구 주석이 활발히 이루어져 제 2기 동안에 각 경전에 대한 주석서가 수없이 만들어졌다.  경전도 5경에서 점차 수가 늘어나 13경이 되었다.  한편 경전의 원본 및 해석의 정리 통일을 꾀하려는 움직임도 있어서 당나라 초에 「오경정의」가 만들어진 것을 비롯하여, 그것을 확대시켜, 제 2기가 끝날 때까지 「십삼경주소」라고 불리는 표준적인 주석이 성립하였다.  이와 같이 주석을 학문으로 하는 경학이 매우 활성화되었고, 유교는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필수적인 교양으로 중시되기는 했지만, 그 권위는 다분히 형식적이었으므로 사상으로서의 활력이 부족하였다.


 도참사상

실제로 민간의 실제 생활에 깊은 연관을 갖고 있던 것은, 한나라 때에는 음양오행설이나 참위설등의 신비사상, 위진시대(3∼4세기)에는 노장사상, 남북조시대로 부터 수·당시대에 와서는 외래의 불교와 신흥의 도교였다.  음양오행 사상은 전한·후한을 통해서 성행했는데 원래는 선진시대 음양가의 계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음양오행의 변화와 결합에 따라서 자연현상과 인간계의 사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이었지만, 점차 비합리·미신적인 요소가 증가되어 신비화 되었다. 참위는 참기와 위서를 말한다.  참기는 예언서, 위서는 천인합일·재이서상의 사상 및 음양오행 사상·신선사상 등의 신비사상에 의하여 경서를 해석한 서책을 말한다.  참은 선진시대부터 행해졌지만 특히 한나라 때 유행하여 위서의 설에도 혼입 되었다.  위서는 전한시대 말부터 많이 만들어졌으며 위서의 설은 정통경학에도 도입되었다.  한나라 때에는 유가사상 전체가 신비사상 영향 아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위진시대에는 노장사상이 유행하였다.  귀족 등의 상류사회에서는 정치논의나 인물평론과 함께 현학이라 불리는 철학 논의가 성행하였는데, 삼현(「노자」「장자」「역경」)이 화제에 많이 올랐다.  죽림칠현 등으로 유명한 청담도 이러한 종류의 담론이었다.


 중국적 불교의 성립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된 연대는 분명치 않지만, 제 2기 초에 서역을 거쳐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불타가 신선과 동일시된 시기도 있었지만, 이윽고 명상에 의하여 마음을 맑게 하고 명지를 얻는 가르침으로 이해하게 되었고, 위진시대로부터 남북조에 걸쳐 점차 성행하여 많은 불전(주로 대승불교의 경전)이 반입, 한역되었다.  일반에게 그 교리를 쉽게 하기 위하여 노장사상으로 불교용어를 설명하려 한 격의불교 가 한때 유행하기도 했으나, 도안이나 인도출신의 구마라습 등의 본격적인 불전연구와 역경에 힘입어 격의의 영역을 벗어나 중국불교의 기초를 확립하고, 법현·현장 등은 직접 인도에 가서 불전을 가지고 돌아와 한역하였다.  또 도교와의 마찰로 수차례에 걸친 폐불정책의 타격을 받으면서도 발전을 거듭했으며, 특히 수·당나라 때(6세기 말∼9세기)에는 명승이 배출되어 수나라 길장등의 삼론종,지의 등의 천태종, 신행 등의 삼계교, 당나라 현장 등의 법상종, 법장 등의 화엄종, 도선 등의 율종, 북인도 사람 불공삼장 등의 밀교, 혜능·신수 등의 선종, 선도 등의 정토교 등 많은 종파가 성립하여 중국 독자적인 불교가 확립되었다.  특히 중국남방 선종의 창시자인 혜능은 제자들을 통해 「육조단경」을 남겨 인도식 불교와는 상당히 다른 중국식 불교의 특징을 잘 보여주었다.  이상 중국 불교의 전개를

살펴보면, 폐불의 시기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정치 권력의 비호를 받아 국가진호의 종교로 발전했다.  또한 교의로서는 매우 고도의 이론이 전개되었지만, 민간에서는 현세 구복적 성격이 강했다.   


 국가에 의한 도교의 발전

도교는 후한 말 장릉이 일으킨 천사도(오두미교)와 이를 발전시킨 장각의 태평도에서 시작되었다.  그후 종래의 노장사상과 불로장생을 추구하는 신선사상 등을 수용하여 건강법이나 연단술, 기타 장생과 복록을 얻는 법을 설하는 현세적인 민간종교로 성장해갔다.  도교는 어느 정도 도가의 설을 받아들였고, 노자를 교조신처럼 받들었지만 노장의 도가사상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었다.  교의로서는 도가 외에 불교와 유교의 설까지도 받아들였다.  민간종교로 출발했지만 북위와 구겸지에 이르러 도교라는 종교로 발전하게 되고, 북위의 국교가 되어 폐불사건을 일으키면서 당에 이르러서는 최대의 세력을 떨쳤다.   


h.   북송중기 - 아편전쟁: 성리학의 전개


 성리학

성리학은 원시유교나 한 당시대의 훈고학과는 다른 유학으로 송학·주자학이라고도 한다.  성리학은 이론의 학문, 즉 철학이지만 경학의 면도 갖추고 있어, 경전을 깊이 고찰·연구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불교의 이론이나 노장·도교의 설까지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종래의 유가사상에 결여되었던 고도의 철학이론을 수립, 그 이론에 의하여 경전을 새로이 해석했다.  그들이 구축한 이 독자적 철학이론 체계이론 신유학의 큰 특색이 있는데, 그 학문의 본질은 이론체계 수립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론을 생활의 기준으로 삼아 자기인격 수양에 역점을 두고 있었다.  성리학을 대성시킨 것은 남송의 주희로 북송의 주돈이(주염계), 장재(장횡거), 정호(정명도), 정이(정이천), 소옹(소강철) 등의 철학을 계승하였고, 특히 정이의 학설을 많이 수용·종합하여 주자학이라는 독자적인 학문을 완성했다.  주희의 철학이론은 「근사록」에 잘 나타나 있는데, 이와 기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이는 사물본연의 상태를 규정하는 존재원리이고 기는 물질의 근원이다.  이는 또 사람은 이렇게 존재해야 한다 는 이상적인 인간성의 전형이며, 사람은 이렇게 해야된다고 하는 도덕적 규범이다. 주희의 본체론은 모든 사물은 이 와 기 에 의하여 성립하고 존재한다고 하는 이기이원론 이지만 기보다 이를 근원적 존재로서 파악했다.  사람의 성에 있어서도 성즉리라는 명제를 내세워 이에 의하여 성을 설하며, 사람의 성은 순수하고 지극히 선하다는 성선설을 내세웠다. 그리고 사람은 모든 사물의 이를 인식하여 마음을 이에 합치시킨 상태로 유지시켜 이에 따라 행동해야 하며, 그것이 학문(수양)이라고 하였다. 또 화이의 구별과 오륜의 명분을 분명히 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후 주자학을 신봉하거나 계승하는 학자가 수없이 나왔다.  또 원나라 때에는 과거시험에서 경전의 해석으로 주자학계 주석설이 채용되었으며, 명의 영락시대(15세기 초) 이후는 관학으로서의 주자학의 위치가 더욱 강화되어 청나라 말기까지 이르렀다. 


 양명학의 등장

한편 주자학과 경향이 다른 사상으로는 심학의 경향이 있었다.  같은 유가사상 내부에서 주희와 같은 시대의 육구연은 주희가 설하는 사물의 이를 아는 것보다도, 더 직접적으로 마음의 수련에 진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진량·섭적 등의 사공학파는 공리주의적 입장에서, 주자학을 관념적이고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여 주희와 각각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중에서 심학의 요소가 성장하여, 진헌장 무렵부터 주자학을 탈피하기 시작하였고, 왕수인(왕양명)에 이르러 양명학으로 대성되었다. 왕양명의 저서 「전습록」에 잘 나타나 있는 양명학은 심즉리(心卽理), 치양지(致良知), 지행합일(知行合一) 설을 핵심으로 했고, 그중에서도 자기 마음의 양지(시비선악을 판별할 수 있는 선천적인 지력)를 신뢰하고, 양지의 판단대로 행위하라고 하는 치양지의 가르침을 궁극적으로 하는 심중지·실천중시의 철학이었다.  한편 왕수인과 같은 연대의 나흠순·왕정상 등은 주자학에서 설하는 이른바 기 보다도 근원적 존재원리인 이를 인정하지 않고, 기는 기 독자적으로 존재하고 변화·운동하여 사물을 형성 한다고 하면서 이 보다도 기를 근원적 존재로 보는 기일원론 의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기의 철학은 그 뒤에도 발전하여 청나라 중기의 대진에 이르러 이론적으로 완성되었다. 대진에 의하면 기 즉, 육체에 부수되는 정이나 욕(주자학에서는 정이나 욕은 악의 근원이라 하여 부정적으로 보았다)을 고유의 것으로 적극 긍정한 뒤 성선설을 제창했다.  주희의 이의 철학은 이 라고 하는 사회규범을 중시하는 철학이기 때문에 관학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기의 철학 은 현실생활을 중요시하는 철학이고, 왕수인의 심학은 마음의 권위, 자기의 주체성을 중시하는 철학이므로, 그런 의미에서 이 둘은 본래 비관학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둘 모두 주자학에서 설하는 규범과 별개의 원리에 따른 새로운 도덕을 확립할 수는 없었으므로, 이 점에서는 주자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고, 또 주자학을 무너뜨리고 그에 대신할 수도 없었다.  왕수인 출현 후의 주자학계에서는 주자학보다 양명학이 우세한 시기가 있었고, 왕수인이 죽은 후에 2,3개파로 나뉘어 17세기 초까지도 양명학이 성했지만 그후 쇠퇴하였고, 아울러 수양학문으로서 성리학의

발전은 더이상 없게 되었다.  


 경제학, 고증학, 공양학

명나라 말부터 청나라 초(17세기 중반)의 혼란기에는 이에 대신하여 경세치용의 실학이 제창되었고, 정치론이나 사론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청나라 조정의 중국지배가 확립되고 나라가 안정되자, 실학의 요소가 약해져 18세기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고문서를 실증하려는 청조고증학이 학계를 휩쓸었다. 그 고전연구가 성과에 의하여 종래의 고전해석에 수정을 요하는 곳이 많이 생겨났지만, 명교로서의 주자학의 권위에 흔들림이 없었다.  또한 19세기에는 정치색이 짙은 공양학이 성행하였다. 


 불교의 명맥유지 

수·당시대에 융성했던 중국의 불교는 845년 제 2기 말기에 당나라 무종과 폐불과 955년 오대 후주의 세종의 폐불 등 두 차례의 탄압으로 큰 타격을 받았지만, 그뒤 선종과 정토교가 살아남아서 제 3기에는 이 둘을 중심으로 제종겸수의 형태를 취한 융합적이고 민중적인 불교가 성립되었다. 선종은 불립문자를 표방하여 불전의 학습에 의한 것이 아닌 타좌선정을 통하여 자력으로 불교이치를 깨닫는 것을 목표로 하였으며, 오로지 염불로써 극락정토 왕생을 얻을 수 있다는 정토교는 가장 민중적인 가르침이어서 폭넓은 귀의를 얻게 되었다.  


 도교의 민간종교화

도교는 가장 융성하였던 당나라 때를 이어 송나라 때에는 민간종교로 계속 번성하였다. 남송 때 금나라가 지배하는 화북에서 새로운 도교가 생겼는데, 그 가운데 왕철이 시작한 전진교는 주술성을 배제하고 타좌수양하여 도를 깨닫는 것을 지향했으며, 윤리적인 실천을 중요시하고 교단활동도 활발히 하였다.  유·불·도 3교 사이에서 유교는 불교·도교를 이단시하고 배격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주자학이나 양명학도 원래 이들의 학설을 수용한 면도 있었고, 특히 양명학 계통에서는 3교의 조화합일을 설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  불교에서는 내부적으로 여러 종파의 융합, 겸수, 특히 선종과 정토교의 융합을 주장하였는데 명나라 말에는 다시 3교합일론이 제기되었다.  도교에서는 이러한 3교합일의 풍조를 배경으로 선서(인과응보 권선징악 사상을 기초로 사람들에게 선행을 권하는 책)를 많이 만들어 보급하였다.  


 서양학술의 전래

당나라 초(7세기)에 경교(크리스트교의 네스토리우스 파)가 전래된 일이 있었지만, 그로부터 수백년이 지난 명나라 말(16세기 말)에 예수회 선교사들이 카톨릭을 중국에 전해왔다. 1583년에 이탈리아의 마태오 리치는 중국 본토에 들어와 1601년  베이징(북경)에서 공식적인 포교활동을 시작했다.  그밖에도 상당수의 선교사가 차례로 도래하여 지식층과 민중에 대한 포교로, 어느 정도 신자를 확보했다.  그러나

크리스트교 자체보다 오히려 선교사들이 가지고 온 유럽의 과학기술(주로 수학·천문학·측량·수리·병기 등에 관한 기술)이 환영을 받았고, 특히 천문역학 면에 대해서는 조정에서도 그 뛰어남을 인정하여 공식채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유럽의 학문은 명·청 시대를 통하여 이 방면에 대한 중국인의 관심을 자극하여 학문진보에 기여한 바가 컸다.  왕수인의 심학이나 나흠순의 기의 철학 이 나온 16세기 이후(혹은 양명학이 쇠퇴한 명말 청초 17세기 이후)를 제 3기에서 제 4기로의 과도기로 본다.


i.   아편전쟁이후: 전통사상의 변용


 중국의 근대화운동

1840∼42년의 아편전쟁으로 상징되는 구미자본주의 경제의 중국진출에 따라 중국의 서양 근대문화와의 접촉이 증대하였고, 이로 인해 전통사상이 충격을 받아 중국인의 사상 또한 근대화하기에 이르렀다.  아편전쟁에서 영국군에게 패한 뒤 태평천국운동과 그 밖의 반란이 종종 일어났고 또 애로호 사건으로(1856)으로 영국·프랑스 등 연합군의 공격을 받는 등 중국은 연이어 어려운 국면을 맞았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서양의 선진과학기술을 받아들일 필요성을 통감한 유력한 관료들이 서양식 공장을 설립하여 병기나 함선제조에 힘을 쏟았다. 이를 양무운동 이라 하며 이것을 뒷받침하는 이론으로서 중체서용론 이 제시되었다.  인륜도덕 등 근본적인 정신적 기반은 중국의 전통적인 유교를 지주로 삼고, 실용적인 지식과 기술면에서도 서양의 앞선 부분을 받아들여 이용하자는 사고 방식이다. 정치면에서는 공양학자 강유위 등에 의한 변법운동 이 도모되었다.  청의 광서제는 입헌군주제를 목표로 조정의 정치대변혁을 꾀하였으므며, 이 의견을 받아들여 1898년 여러제도의 개혁에 착수하였다.  이것을 무술변법 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신정은 약 백일 만에 서태후등 보수파의 쿠데타로 무너지고 변법은 실패로 끝났다.  강유위는 「대동서」에서 제국주의의 침략과 내부적경직성으로 붕괴위기에 처한 중국의 현실을 타개할 방향으로 대동세계를 제시했다.  양무운동이나 중체서용론은 기술부문에서만 서양문화를 이용하려는 발상인 반면, 변법운동은 정치나 경제제도까지도 서양의 근대적인 요소를 수용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중국의 전통문화를 지키려는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았고 서양에 관한 지식도 충분치는 않았지만, 19세기 말부터 엄복이 T. H.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1893)를 번역한 「천연론」(1898)을 비롯하여 많은 번역서가 나와 서양사상 문화의 대량적인 소개와 수입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하여 외래의 근대적인 여러 사상괴의 본격적인 대결 또는 그 수용이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다만 이점에 대하여 중국인의 대응은 각양각색이었다.


 손문의 삼민주의

서구화 반대론이나 전통문화 수호의 주장도 끝까지 끈질기게 나왔고 여러 논점을 둘러싸고 많은 토론이 되풀이되곤 했지만, 결국 대세는 서구사상을 받아들여 중국의 사상 자체가 근대화하는 방향으로 진전되어갔다. 이에 따라 청나라 조정을 타개하기 위한 혁명사상도 활발해졌다. 그 대표적인 것이 손문의 삼민주의 로 이것은 유교적인 바탕 위에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요소를 가미한 것이다.  민족주의는 멸만흥한을 기치로 내건 반청조적인 면과 외국의 압박에 반발하는 배외적인 면을 겸한 것이었다. 현재 중국과 대만에서 국부로 추앙받고 있는 손문은 「삼민주의」를 남겨 현재까지도 중국국민당의 사상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다.  손문 등의 혁명운동은 1911년 신해혁명을 성공시켜, 청나라는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수립되었다.  다만 그뒤에는 북양군벌인 원세개 등이 계속 정권을 장악하여 혁명의 성과는 제대로 거두지 못했다.


 모택동

제1차 세계대전 종결의 강화조약이 체결되는 데 있어서 일본이 중국에 제시한 21개 조의 요구에 대한 중국인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1919년 5월 4일 베이징 학생들의 시위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 항의운동이 전국적으로 파급되었는데, 이는 정치운동에만 머물지 않고 큰 문화운동으로 발전했다.  이 사건을 5·4운동이라 한다.  그 주류를 이룬 사상은 중국의 현상황을 대외적으로 반식민지, 대내적으로 반봉건제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단계를 보고,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의 입장에서 전통사상을 비판하고 철저한 근대화를 기한 것인데, 특히 민주주의와 서양학문을 받아들일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또 다분히 사회주의 색체를 띠고 있었다.  1921년 진독수 등이 중국 공산당을 결성하였고, 손문이 주재하는 국민당은 공산당과 제휴(국공합작)하여 국민혁명을 추진했다. 손문의 뒤를 이은 장개석이 북방의 군벌을 타도하기 위한 북벌에 성공하고 남경에 국민정부를 수립, 주석에 취임했는데 장개석은 복고적인 정책을 취하여 공산당과 대립함으로써 국공은 분열되었다. 1931년 일어난 만주사변 이후 중·일전쟁, 제2차 세계대전으로 중국에는 항일전쟁 시기가 오래 계속되었다.  이 사이 공산당은 모택동이 주석이 되고 제2차 국공합작도 이루어져 항일 민족 통일전선이 결성되었으나, 1945년 일본의 항복을 사이에 두고 국공의 내전이 재연되어, 1949년 결국 공산당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고 신민주주의 노선에 입각한 사회주의국가 건설이 시작되었다.  한편 모택동은 마르크스주의와 중국혁명의 경험을 총결하여 「실천론」을 저술 했다.


 문화대혁명의 종말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 이후 모택동이 추진했던 각종 개혁과 대약진운동, 그리고 중국의 전통문화를 철저히 파괴하고 새로운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데 그 목표를 두었던 문화대혁명은 모택동의 사망(1976)과 함께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렸다.  1978년 등소평은 주도권을 잡으면서, 4대노선(농업·공업·과학기술·군사)의 현대화 추구에 주력하였고, 이러한 변화는 모택동의 개혁이 지나치게 파괴적이고 중국의 전통적인 문화가 송두리째 유린당하면서도 결국 남은 것은 경제적 빈곤과 사회적 갈등뿐이라는 현실을 중국인들이 깨닫기 시작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중국사상의 현대적 의미

개인의 내면적·도덕적인 자각을 중시하는 중국사상은 오늘날 현대 산업 사회에서 중요한 원리로서의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인간소외·배금주의·환경오염 등의 병폐현상이 만연되고 있는 오늘날, 우주와 인간본성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인간과 자연간의 조화를 추구하고자 한 중국사상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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