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13 – 마의 산 (Der Zauberberg, The Magic Mountain) /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1955)

(출전: 동서고전 200선 해제3 / 반덕진 / 가람기획)


 스위스의 한 폐결핵 요양소를 무대로 1차세계대전 직전에 내부적으로 열병을 앓고 있던 서구의 정신상황과 시대의 문제를 풍부한 성찰과 반어로써 표현했다. 생과 사의 중간에 존재하는 폐쇄된 세계인 <마의 산>에서 주인공은 다양한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정신적 성장을 이루어나간다. 이 작품은 낭만주의적 보수주의적 휴머니즘에서 사회적 휴머니즘으로 발전해가는 작가의 세계관을 나타내고 있다.


a. 예술가 집안에서 성장

 릴케, 카프카와 함께 현대 독일문학의 3거두로 평가되는 토마스 만, 그는 독일 북구 뤼베크의 부유한 상인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으로부터 냉철하고 명석한 기질을, 그리고 남미 출신인 포르투갈 계 모친으로부터는 섬세한 감수성과 예술가적인 기질을 물려받았다. 만의 이러한 출생 배경 자체가 그의 작품 전반에 흐르는 묘사 기법인 <이중성>을 잘 암시해주고 있다. 그의 형인 하인리히 만도 소설가 겸

평론가이며, 그리고 누이동생 중 한 사람도 여배우가 되는 등 예술가 집안이었다.

 16세 때 부친의 죽음으로 예술과 문학의 중심지인 뮌헨으로 가서 한때 보험회사에서 근무하기도 했으나, 곧 사퇴하고 문학지망을 선언한다.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1년 동안 독서에 전념한 후, 1900년 집안의 역사를 다룬 장편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Buddenbrooks (Buddenbrooks – Verfall einer Familie)>을 출판하여 화려한 데뷔를 하게 된다. 그후 자신의 내부에 흐르는 예술가적 기질과 시민적 기질의 융합문제로 고뇌하다 3년 후 주옥같은 단편 <토니오 크뢰거>로 이를 정리한다. 즉, 오랜 정신적 편력 뒤에 평범한 인생을 사랑함으로써 자기의 예술을 고귀하게 만들려고 결심하는 청년시인 토니오 크뢰거를 통해 자신의 젊은 날의 자화상을 묘사했다.

 1905년(30세) 뮌헨 대학 교수의 딸과 결혼하여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고, 3남 3녀의 자녀들은 모두 자신의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했다. 이들의 행복한 생활상은 1909년 발표된 <대공 전하>에서 암시된다. 1912년(37세) 카챠 부인이 병에 걸려 스위스의 다보스 요양원에 입원한다. 간병차 거기서 3주일을 지낸 만은 그 고원 요양소에서의 견문을 바탕으로 단편소설을 구상하는데, 결국 12년 후에 장편 <마의 산>으로 출간된다.

 1914년에 일어난 1차대전은 그에게 열렬한 애국심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형과 몇몇 작가들은 전쟁을 유발한 독일에 대해 비판을 한 반면, 만을 <프리드리히와 대동맹>과 <비정치적인 인간의 고찰>을 발표하여 독일을 옹호하는 보수주의적 입장을 견지했다. 여기서 그는 밀려오는 민주주의 물결로부터 독일문화의 전통을 옹호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 만의 사고방식에는 인간의 존엄성에 바탕을 둔 민주주의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었고, 그는 이 싸움이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사고방식의 오류를 깨닫고 정신의 고귀함과 민주주의를 화해시키기 위해서는 인간성 탐구의 고된 작업이 다시 계속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가령 <독일 공화국에 대하여> <괴테와 톨스토이>같은 논문은 민주주의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는 사상적 변화의 표현이며, 그리고 그것이 문학작품으로 열매를 맺은 것이 <마의 산>(1924)인데 이로 인해 1926년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된다.

 1933년 히틀러의 집권으로 암흑사회로 변하자 그는 결연히 히틀러와 결별을 선언하고 10여 년의 망명길에 올라 유럽 각지를 순회하며 나치즘을 비판했다. 1938년에 미국으로 이주하여 프린스턴 대학의 객원교수가 되고 <다가올 민주주의의 승리에 대하여>라는 강연과 <유럽에 고한다>는 논문을 통해 그는 이제 위대한 민주주의자로 변모하게 된다. 문학적으로는 독일의 국민성이나 문화의 특질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얻어, 장편 <파우스트 박사>라는 과거의 독일문화에 대한 심각한 비판서를 남겼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는 야만은 있어도 문화는 존재하지 않았다. 독일의 문화는 미국 등지에 망명한 예술가들에 의해 보존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이 1952년부터 반공정책으로 돌아서자 스위스로 돌아왔다. 1955년(80세) 실러 150주기 기념강연을 통해 독일통일을 염원하는 <실러 시론>을 남기고 몇 달 후 운명했다.


b. 양면성의 조화 추구

 토마스 만은 독일문학사상 전환점에 선 작가다. 그가 태어난 1870년대는 독일에서 자연주의 문학이 날카로운 비판을 받기 시작했고. 새로운 문학양식이 대두되던 때였다. 낭만주의도, 피히테의 철학도, 프랑스 혁명의 열정도 이제는 시들고 말았다. 과학의 놀라운 발전으로 숨가쁜 시대가 다가온 것이다. 독일문화 전통의 막바지 인물인 그를 계기로 독일의 문화는 집대성되고 반성된다. 작가 자신이 독일문화의 장점과 단점을 자신 속에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니체, 쇼펜하우어, 바그너가 그의 문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여러 이질적 요소를 모두 자기 속에 용해시켜 자기 나름대로의 운명관 속에서 독일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켰다.

 그를 생각할 때 우리는 그의 숨막히는 고뇌와 그 심연을 건너려는 진지한 노력을 상기한다. 질식할 듯 무거운 19세기 말의 분위기 속에서 한 가닥의 구원을 모색하는 데 그만큼 정성 어린 노력을 기울인 작가도 드물다. 그러므로 그의 인생은 정지된 생이 아니라 항상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는 생성의 길이었다. 80년에 걸친 그의 일생은 참으로 완성을 위한 인내의 길이었다.

 그의 작품세계를 들여다보면 그가 공통된 주제, 즉 예술과 생활이라는 문제를 계속해서 취급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문제를 진부하고 동일한 관점에서 시작해서 동일한 결말로 이끌어 간 것은 결코 아니다. 이 문제는 작가 토마스 만의 인간적인 성숙과 더불어 점점 더 성숙되어갔던 것이다. 초기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구원할 길 없는 우울과 환멸감은 점차 만년의 작품에 이르러 조화와 해결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가 즐겨 다루던 주제는 생과 사, 정신과 삶, 감정과 이성, 예술과 생활, 현실과 이상의 모순된 두 세계로, 이러한 양면성의 조화를 추구한 사람이 만이었다. 이것은 넓은 의미로 본다면 독일문학의 특징으로 볼 수 있지만 특히 토마스 만에게는 일생을 바친 불가사의한 문제였던 것이다.


c. 당대의 인간과 사상을 폭넓게 다룬 작품

 이 작품은 스위스의 한 결핵 요양소를 무대로 제1차 세계대전전 내적으로 앓고 있던 서구의 정신상황과 시대의 문제를 풍부한 성찰과 반어로 표현하고, 연금술적 신화적 요소 등을 도입한 상징적이고 정교한 구성으로 발표되자마자 독자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지만 의학계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함부르크 가의 명문 태생인 한스 카르토르프는 스위스의 다보스에 있는 요양소로 사촌 형 요아힘 침센을 문병하기 위해 3주간의 체류 예정으로 간다. 한스는 대학시절에 조선기술에 대하여 공부를 했고, 앞으로는 실습만 남겨두고 있었다. 양친을 일찍 여의었으나 유복한 생활을 하고 있는 청년이었다.  <마의 산>은 세속적인 일상생활과는 분위기가 전혀 다른 삶과 죽음의 중간에 존재하는 폐쇄된 세계다. 그런데, 그곳 원장으로부터 그도 요양할 필요가 있다는 선고를 받고 7년간이나 <마의 산>근처에서 머물게 된다. 그는 처음에는 병 때문에 머물게 되었지만, 점차 고원지대의 분위기와 병에 대한 묘한 친근감 때문에 계속 머물게 된다. 거기서 그는 다양한 인물들을 만난다. 즉 서구적 합리주의를 대표하는 제템브리니, 신비적 교회주의와 죽음을 상징하는 예수회 수도사인 나프타, 원초적인 사랑을 가르치는 러시아 여성 쇼샤, 본능적인 감정으로 사는 걸물 페파코른 등은 정신적 백지 상태인 한스를 다양한 색깔로 물들인다. 그런 가운데서 주인공의 정신적 성장이 이루어진다. 특히 한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클라우디아 쇼샤라는 러시아 귀족부인으로, 그녀는 자신의 병과 자유를 바꾸어 얻었으며, 일체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여인이었다. 지금까지 그녀의 남편을 본 사람은 없었고, 이곳 저곳의 요양원을 떠돌아다니는 것으로만 추측되었다. 한스는 축제가 있던 날 밤에 그녀에게 접근해 그녀와 관계를 맺는다. 그런데 쇼샤 부인은 그 다음날 그곳을 떠난다.

 젊은 한스나 요아힘 침센에게 영향을 미치는 인물은 이탈리아 학자인 제템브리니로 그는 19세기 유럽의 지식인들의 특징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는 진보적인 사고와 계몽적인 교육관을 지니고 그들에게 역설했다. 사촌인 요아힘은 한스와 다르게 그가 복무하던 군으로 돌아가고 싶어했고, 어느날 원장의 경고도 무시한 채 하산했다가 병이 악화되어 다시 입산했다. 그는 입산한 뒤 얼마 되지 않아 조용히 숨을 거두고 만다. 한편 제템브리니는 완치의 가능성이 희박하여 근교의 마을로 세들어 이주한다.

 같은 숙소에 있던 예수회 수도사 나프타는 불행한 과거를 지니고 있는 유태인으로, 학문이 뛰어나 고아의 처지에서 예수회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았으나 결핵으로 쓰러져 요양중이었다. 그는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모든 것을 부정하고 원시 크리스트 교의 원시 공산제도를 옹호한다. 이에 대하여 한스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나 차차 제템브리니와 나프타 사이의 관념적 대립에 말려들게 된다. 그러나 두 관념적인 극단과 투쟁에 많은 회의를 느끼게 된다.

 어느 날 한스는 스키를 타던 도중에 눈보라를 만나 생사의 위험을 겪게 되는데, 이때 그는 비로소 <죽음의 모험은 삶 속에 있으며 그것이 없으면 삶이 되지 않는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생사의 세계를 경험한 한스는 죽음에는 어떠한 사상도 개입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생과 미래에 봉사할 것을 다짐한다. 이 부분이 소설의 절정이다.

 마침내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자, 한스는 하산하여 전쟁터로 나간다. 그는 포탄이 어지럽게 낙하하는 가운데 요양원에서 불렀던 죽음을 초월하는 삶의 노래인 <보리수>를 부르며 기꺼이 전쟁에 참여한다. 그러나 그가 전쟁에서 죽었는지 아직 살아 있는지 작가는 가르쳐주지 않는다.

 이렇듯 이 소설은 죽음과 과거, 그리고 관념에만 얽매여 있던 주인공이 삶과 미래에 봉사하는 사회적 휴머니즘으로 향해 가는 정신적 변화를 묘사하고 있다.


d. 생사합일의 인간형 제시

 이 작품은 만의 일생의 문제인 <생과 사>라는 거대한 주제가 방대하게 펼쳐진 작품이다. 그가 마의 산에 머무르는 동안 그는 관능적인 사랑을 가르치는 러시아 여인 쇼샤, 그를 세속적인 세계로 돌려보내려는 합리적 계몽주의자 제템브리니, 금욕적인 수도사 나프타, 그리고 본능적이고 감각적인 감정에 충실할 것을 권고하는 페파코른 등을 만나는 과정에서 이들의 행태는 정신적 백지 상태의 청년 한스에게 생사의 문제, 인생에 대한 여러 문제를 보여줌으로써 그를 혼란과 고민으로 몰고간다. 특히 나프타와 제템브리니의 집요한 논쟁, 즉 진보와 이성의 편에 서느냐, 반동과 독재의 편에 서느냐를 한스에게 강요하는 이 논쟁은 1차세계대전이 임박한 유럽 시민사회의 심리적정신적 상황을 부각시킨다.


e. 생사의 합일점

 그런 후 어느 날 한스는 눈보라로 조난을 당하게 되는데, 이 고립을 통해 죽음이란 삶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 포용되고 통일 되어야 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삶과 죽음 등 대립적인 요소들을 합일시켜 이해할 수 있는 인간형은 독일 시민사회의 붕괴라는 위기 앞에 그가 내놓은 새로운 인간형이다.  그는 이 작품 속에서 시민계급의 붕괴직전의 안일을 고발하고 있으며 세기말적인 시민사회의 공허감이 이렇게 처절하게 표현되고 유럽사회의 붕괴과정이 이렇게 명료하게 표출된 작품도 흔치 않다.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인간내면의 기록, 다시 말해 자아와 의식의 발전과정을 눈앞에 그려보게 된다. 만은 이것을 뛰어난 상상력과 직관으로 훌륭히 묘사하고 있다.


f. 생에 대한 긍정

 주인공 한스가 요양소에서 인간생존의 비밀을 깨닫게 되어 산을 내려와 현실 속으로 과감히 뛰어드는 부분은 결코 우연한 사건진전의 과정이 아니다. 생의 의미를 망각케 하는 음울한 마의 산에서 그가 속되고 원시적이며 초라하지만, 그러나 생명력이 넘치는 아랫세상으로 내려오는 과정은 실로 토마스 만의 생애와 작품의 발전과정에 있어서의 승리를 의미한다. 즉 <토니오 크뢰거>,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등의 초기 작품에서 거의 허무주의로까지 발전할 뻔했던 토마스 만은 이 작품을 통해 생의

성숙기에 들어서서 다시금 생을 감격적으로 긍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갈등의 극복이며 토마스 만의 승리다. 자기 부정, 자기 배반, 갈등의 청년기를 지나 이제 그는 죽음에 지배되는 무력한 고립이 아니라, 불타는 생의 이념에 봉사하는 적극적인 정신으로서의 니체적인 생의 긍정이라는 이념으로 돌아와 궁극적으로는 생에의 참여를 맞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만이 보여주는 세계는 어떤 청년의 산상생활에서의 내면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전 유럽 세계를 그 속에 투시하고 있으며, 주인공 한스가 생의 새로운 인식을 얻고 평지에서 일어난 전쟁이란 소용돌이 속으로 과감하게 참여하기까지 7년간의 영혼의 기록은 결코 주인공 한스의 내면의 기록이라기보다는 19세기 말의 퇴폐적인 경향에서 벗어나 생의 긍정을 모색하려고 몸부림치던 당시 유럽 사회의 모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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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 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마의 산(魔의 山; Der Zauberberg, 1924년)은 토마스 만의 장편소설이다. '사회적 휴머니즘'이라는 토마스 만 문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토마스 만의 사상 전환과 관련하여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되는데, 초기의 대립적 인생관을 극복하여 대립에 지배당하지 않고 역으로 대립을 지배하고 전진하는 것이 인간의 이상적인 생활방식이라는 사상을 제기하였다.[1] [2] 해석의 관점에 따라 교양소설, 시대소설, 시간소설, 성년입문소설 등으로 분류된다.[3]


'마의 산'은 소설의 공간적 배경인 알프스 산맥에 위치한 요양원을 상징한다. 제1차 세계 대전 전에 시민사회가 끝난다는 것을 알려주는 소설로서 토마스 만이 전통적인 문화와 사회의 죽음을 형상화하는 데 사용한 이미지는 요양원의 세계이다. 요양원의 모습을 통해 한 문화 전체가 몰락하는 것을 묘사하고, 주인공 카스토르프의 개인적 삶을 통해 시민적 주체가 사라지는 것을 형상화한다.


집필 동기[원본 편집]

1912년 토마스 만의 배우자 카티아가 폐렴이 의심되는 증상으로 스위스 그라우뷘덴 주 다보스의 요양소에 입원했을 때 토마스 만이 문병을 가 3주간 그곳에서 체재하면서 얻은 체험을 토대로 쓰여졌는데, 제1차 세계 대전이 중도에 발발했기 때문에 집필에 12년이 걸렸다.


《마의 산》은 죽음에 대해 전혀 고민해 본 적이 없는 23세의 주인공 한스 카스트로프가 죽음을 대면하면서 인식의 변화를 겪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10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의 핵심은 '인간은 선과 사랑을 위해 결코 죽음에 자기 사고의 지배권을 내주어서는 안 된다'라는 문장에 나타나 있다. 토마스 만은 이 문장만 이탤릭체로 표기했을 정도로, 잔인한 현실 앞에 이상을 저버리지 말자고 힘주어 주장하였다.[4]


줄거리[원본 편집]

23세의 상인 카스토르프는 알프스 산맥에 위치한 다보스의 요양원에 있는 사촌 형제 요아힘 침센을 문병 갔다가 그곳 의사에게서 흉부 질환이 있음을 주의받아 7년간 요양원 생활을 하게 된다. 생명의 위험이 예보(豫報)된 사람들의 사회는 반대로 생에 염증을 느낀 세계이기도 하다. 남이 하는 짓을 흉내내고, 심령술(心靈術)이나 우표수집 등의 놀이가 무질서하게 유행한다.


공기도 희박한 산악 세계의 고원에는 전 유럽에서 유복한 환자들이 모여든다. 그들은 영국, 이탈리아, 러시아, 독일 등지에서 결핵을 치료하기 위해서 오지만, 다른 환자들이 죽어가는 것을 목격하고는 그들에게도 머지않은 장래에 동일한 운명이 닥칠 것이라고 예감한다. 그리고 아직까지 죽음에 이르지 않은 사람은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서 안정을 취할 뿐이다. 그것은 죽음과 다를 바 없다.


요양원에서의 일상은 본질적으로 네 가지 일로 제한되어 있다. 먹고, 대화하고, 누워 있고, 치료를 받는 일 등이다. 하루 중 다섯 번 하게 되는 풍성한 식사는 일곱 개의 식탁이 갖추어져 있는 식당에 차려지며, 요양객들은 그곳으로 모여든다.


요양원에 있는 환자들 중에서 주인공 카스토르프의 내면 성장을 위해 교육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인물들로서 제템브리니, 나프타, 쇼샤, 페페르코른 등을 들 수 있다. 각 인물의 등장 시점과 역할은 다르다.


제템브리니는 합리주의자이며 진보주의자를 자처하는 인문주의자이다. 그는 '육체는 바로 정신'이라는 일원론자로서, 본질적으로 죽음의 세계에 친근감을 느끼는 카스토르프를 이성과 진보의 믿음이 존재하는 의무와 일의 세계인 평지 세계로 되돌려 보내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한다.


쇼샤는 키르키스인 눈처럼 회색을 띤 매력적인 푸른 눈과 관능적인 외모를 소유하고 있으며 질병과 죽음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카스토르프가 산상 요양원에 입원한 지 7개월 후 사육제 날 저녁에 쇼샤에게 사랑 고백을 하지만 그녀는 그 이튿날 요양원을 떠나가 버린다.


나프타는 예수회원 교도이며 허무한 반자본주의자이다. 육체를 타락되고 부패한 것으로 생각하고 건강을 비인간적인 것으로 보며, 오히려 병과 죽음을 찬양한다. '육체란 자연이며, 그 자연은 정신과 대립된다'고 하는 이원론자로서, 진보주의자 제템브리니와 자주 충돌하고 논쟁을 벌인다.


죽음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 미래만을 희구하는 이상주의자 제템브리니와 광신적으로 신의 나라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나프타는 갈등하며 결투를 벌인다. 나프타는 제템브리니의 휴머니즘의 허위성을 반박하다가 결투장에서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페페르코른은 커피 재배업자로 동양과 서양을 동시에 대표하고 있는 인물이다. 요양원을 떠났던 쇼샤와 함께 요양원에 등장하였다. 건강과 삶을 긍정하는 디오니소스적 인물로서, 제템브리니와 나프타를 왜소하게 만들고 쇼샤의 위험성을 줄여주며 카스토르프를 강하게 만들어주는 기능을 한다.


요아힘 침센은 병이 완쾌되지도 않았는데, 요양원 생활에 지친 나머지 하산해 다시 군대로 돌아간다. 사촌 형제를 떠나보내고 혼자가 된 카스토르프는 요양원 생활의 단조로움과 무기력함을 부끄럽게 생각해 스키를 배울 결심을 한다. 몇 차례의 연습을 통해 스키를 탈 수 있게 되고 그러다 어느 하루 스키를 타고 흰 눈이 덮인 아름다운 계곡을 따라가다가 길을 잃고 눈보라에 갇혀버리게 된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카스토르프는 꿈을 꾸는데, 시간을 잊어버리고 몽환의 상태에서 어떤 경계 지역에 도착한다. 그곳은 삶과 죽음, 각성과 꿈, 문화와 자연, 시간성과 비시간성 사이의 중간 지점이다. 시간을 잊어버린다는 것은 눈으로 뒤덮인 요양원의 세계, 지향점을 찾는 카스토르프가 겪는 혼란, 형식들의 해체, 삶과 죽음의 근접성, 지속적으로 해체되는 인간의 존재 형식을 나타내는 표지로서의 시간 개념의 상실이다.


카스토르프는 병과 죽음이 지배하는 요양원에서 하산하고 현실적 삶으로 방향을 돌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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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 앞 샘물 곁에

서 있는 보리수

나는 그 그늘 아래서

수많은 단꿈을 꾸었네.


보리수 껍질에다

사랑의 말 새겨 넣고

기쁠때나 슬플 때나

언제나 그곳을 찾았네


나 오늘 이 깊은 밤에도

그 곳을 지나지 않을 수 없었네.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두 눈을 꼭 감아버렸네.


나뭇가지들이 살랑거리면서,

꼭 나를 부르는 것 같았네.

“친구여, 내게로 오라.

여기서 안식을 찾아라!”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얼굴을 세차게 때렸네.

모자가 바람에 날려도,

나는 돌아보지 않았네.


이제 그곳에서 멀어진 지

벌써 한참이 되었네.

그래도 여전히 속삭이는 소리 들리네.

“친구여, 여기서 안식을 찾으라!”

-<겨울 나그네>, 빌헬름 뮐러, 김재혁 옮김, 민음사, 2001


Theatrical release poster
Directed byTod Williams
Produced by
Screenplay by
Based onCell
by Stephen King
Starring
Music byMarcelo Zarvos
CinematographyMichael Simmonds
Edited byJacob Craycroft
Production
company
  • Benaroya Pictures[1]
  • International Film Trust
  • 120dB Films
  • Cargo Entertainment
  • The Genre Company[1]
  • Don Nafia
Distributed by

Saban Films (US)[1]

Signature Entertainment (UK) [2]
Release date
  • June 10, 2016
Running time
98 minutes[2]
CountryUnited States
LanguageEnglish
Box office$735,841[3]


지구 종말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온 천지에 사람들이 핸드폰(Cellular Phone)을 끼고 사는 이 시대에 바로 그 핸드폰을 통해 가공할 만한 전염성 병이 생겨나서 삽시간에 퍼져 버리고 그 병에 걸린 사람은 '좀비'같이 변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 보여 주는 좀비는 좀 다르다. 이들은 무지 무지 하게 빠르고 민첩하고 마치 전체가 하나의 생명체처럼 행동한다. 따라서 이때 개개인의 좀비는 전체 생명체를 이루는 Cell 이 되는 것이다.

보잘 것 없는 자신을 사랑해 주는 아내와 아들에 대한 죄의식과 함께 왠지 잘 알수 없는 이유로 별거중인 주인공(John Cusack)은 코믹스에 괴기스런 만화를 납품하면서 살고 있는데 이런 자신을 매우 못마따하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이 그려 오던 작품과 또는 자신의 상상력의 결과물이 현실에 나타나는 상황을 마주 하고 매우 놀라면서도 결국엔 자신이 만든 이 미쳐 버린 세상에 종지부를 찍으면서 또는 그 미쳐 버린 세상에 자신 마저도 하나의 Cell이 되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참 두서 없는 영화이기도 했지만, John Cusak이 나오는 영화가 어쩌면 이런 풍이 아니었던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IMDB에서 어이 없는 낮은 점수를 받았지만 내가 보기엔 두서 없고, 결말도 두서 없지만 최소한 그 이상의 보는재미, 느끼는 재미, 생각하는 재미를 준 영화라 보여진다.


201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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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12 – 페스트 (La Peste) / 카뮈(Albert Camus, 1913~1960)

(출전: 동서고전 200선 해제3 / 반덕진 / 가람기획)


 2차대전 후의 혼란하고 무질서한 정신적 풍토위에 <부조리의 철학>이라는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기초로 사회정의를 실현하려 했던 카뮈의 대표작. 오랑 시에 페스트가 만연했다는 가정하에 인간을 전멸시키려는 악과 이에 대한 인간의 집단적인 반항을 묘사하면서, 이 과정에서 인간의 연대의식과 존엄성을 역설했다. <이방인>에서 제시된 개인주의에서 벗어나, 이러한 연대의식만이 인류평화에 도달하게 할 수 있다는 카뮈의 긍정적인 사고방식이 분명하게 전달된다.


a. 사르트르와 함께 현대 젊은이의 우상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고 모든 것이 <부조리>하다고 부르짖는다. 그러나 나의 부르짖음을 나는 의심할 수 없다.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며 <부조리>와 <반항>의 사상을 제시한 최연소 노벨 문학상 수상자 카뮈.

 카뮈는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에서 태어나 2살 때 부친이 1차대전에 참가하여 마른 전투에서 사망했다. 그의 어머니는 두 아들을 데리고 친정집으로 가서 고집 센 외할머니, 그리고 다리가 불구인 외삼촌과 함께 방 2개에 5명이 살았다. 후에 카뮈가 <<나는 <자유>를 마르크스 속에서 배우지 않고 가난 속에서 배웠다>>고 술회했듯이 어린 시절을 가난 속에서 보냈다.

 당시 의무교육 덕분으로 국민학교를 마친 카뮈는 가정형편상 더이상의 상급학교 진학이 어려웠으나, 그의 재능을 아까워한 담임 선생님의 배려로 중고교에 입학하게 된다. 노벨 문학상 수상연설이 책으로 나왔을 때 그는 이 책을 옛 스승 제르맹에게 바쳐 깊은 감사를 표했다.

그는 중고교 시절을 계속 장학생으로 지내면서 축구 등 운동에 몰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17세 되던 해 폐결핵의 첫 발작이 일어나서 좋아하던 운동도 중단해야 했다. 그러나 불행중 다행으로 철학자이자 교수인 장 그르니에를 알게 되어 철학과 문학에 뜻을 둔다. 이 스승과 제자간의 우정은 평생을 두고 꾸준히 계속되었다.

 20세에 결혼했으나 1년 만에 이혼하고 공산당에 입당하지만 다음 해에 탈당한다. 알제 대학시절에 그는 여러 종류의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는데,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해운업자에게 고용되기도 하고 자동차부품 판매원 노릇도 했다. 이러다 보니 평범한 대학생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귀중한 산 체험을 했다. 지드, 말로, 몽테를랑 등의 작품을 탐독한 것도 이때였고, 아마추어 극단을 조직하여 연극활동에 적극 참여한 것도 이때였다.

 졸업 후 진보적인 신문 <알제리 레퓌블리캥>에서 저널리스트로 활약하면서 당국의 비위를 건드려 알제리에서 추방된다. 파리로 진출하여 <파리 스와르>의 기자로 1941년(28세) 6월까지 근무했다. 그는 이때 <이방인>을 탈고하고, 에세이 <시지포스의 신화>를 쓰기 시작했다. 당시 프랑스는 독일의 파리 침공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였다. 독일 점령하의 파리에서 그는 지하신문 <콩바>의 주필 노릇을 하며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가한다.

 이 기간에 출간된 <이방인>은 부조리한 세상에서 아무 의식 없이 살다가 우연히 살인을 하고 사형선고를 받은 뫼르소가 죽음에 직면해서 비로소 인생의 부조리를 깨닫고 오히려 행복하게 죽음을 기다린다는 내용이다. <시지포스의 신화> 역시 고독과 인생의 모순을 고백적 감상형식으로 해설하여 큰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1947년 발표된 장편 <페스터>는 그의 철학의 총결산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여기에서 전염병과 맞서 싸우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과 우애를 역설하여 전후세대의 정신적 지주로 부상했다. 그는 전쟁과 사형을 반대했으며, 역사를 절대시하는 마르크스주의나 스스로를 절대시하는 사상적 예술적 니힐리즘에도 반대한다.

 그는 초기의 주요개념인 <부조리>에서 <반항>으로 옮겨갔다. 두번째 장편인 <반항적 인간>을 발표하여 사르트르와의 사상적 논쟁이 벌어져 10년간 지속되었던 우정이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가장 괴로운 시련은 자신이 태어났던 알제리에서 일어난 전쟁이었다. 그는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프랑스의 불공평한 식민정책을 비난했다.

 1956년에는 <반항적 인간>의 논리를 거꾸로 써서 그린 풍자소설 <전락>을 발표했다. 44세인 다음해에 스웨덴의 왕립한림원은 <<오늘날 인류의 양심에 제기되는 모든 문제를 명백하게 파헤친 그의 전 작품의 공로>>를 들어 그에게 노벨 문학상을 수여했다. 1960년(47세) 자전적 소설인 <최초의 인간>을 집필하는 도중 불의의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b. <부조리>와 <반항>의 문학세계

 카뮈의 문학세계는 <이방인> <시지포스의 신화> <흑사병> <반항인> <전락>등의 관계와 발전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간단히 말해 <부조리>와 <반항>의 철학이다.

 부조리란 불합리한 것,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그가 부조리한 것으로 보았던 것은 바로 인간세계에 있어서의 존재, 즉 인생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합리에의 욕망>과 세계의 <합리적이지 못한 것> 사이에 생기는 모순, 그것이 바로 작가가 내세우는 <부조리>라는 것이다. 그의 <시지포스의 신화>가 말하는 바와 같이 결국 굴러떨어지는 줄 알면서도 땀흘려 바위를 굴려 올리려는 존재, 결국

죽고 마는 허무한 존재이면서도 열심히 사는 존재, 결국 무의미해지는 인생을 의미있게 살려는 존재인 그런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인간에게 피치 못할 숙명으로 주어진 부조리는 누구나가 언제나 느끼는 것은 아니다. 흔히 우리는 부조리를 느끼지 못하고 살고 있다. 즉 의식이 졸고 있는 것이다. 그저 관습에 의해 기계적으로 살아가는 일상생활, 인생에 뜻이 있는지 없는지도 문제삼지 않는 그런 생활, 그것은 실존자의 생활이 아니다. 의식이 완전히 깨어나서 부조리를 명확하게 인식하게 될 때 비로소 인간다운 인간이라 할 수 있고, 그런 인간이라야 <실존>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카뮈의 이러한 사상을 통해 본다면 <부조리의 인식>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부조리에 대해, 부조리한 세계를 인식하고 여기에 대항하여 인간의 가치를 복권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부조리는 당연히 <반항적인 인간>을 낳는다. 이렇게 해서 <이방인>과 <시지포스의 신화>에서의 중심개념인 <부조리>는 <페스트> <반항인>에서 <반항>으로 옮겨진다. 


c. 인생의 부조리와의 투쟁을 그린 작품

 페스트가 전 도시를 죽음으로 휩쓰는 과정에서 이에 맞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숭고한 인간애를 그린 이 작품은 알제리의 오랑 시에 흑사병이 발생한다는 가상의 소설로, 출간과 더불어 베스트 셀러가 된 소설이다. 여기서 페스트는 모든 <자유>가 제한되는 상황을 의미한다.

 프랑스 영토인 알제리의 오랑에서 어느 날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쥐들이 집안과 지하실 창고, 하수구에서 몰려나와 휘청거리며 연이어 빛을 보고는 죽어갔다. 시내의 모든 쥐들이 이처럼 죽더니 이제는 사림들이 또 갑자기 고열과 임파선이 붓고 몸에 종기가 생긴 끝에, 무서운 악취를 풍기며 죽어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 원인 모를 병은 흑사병으로 밝혀졌다. 시에서는 행정적인 조치로 시외곽을 통하는 모든 수송망과 도로망을 차단시켰다. 무장한 군대가 삼엄한 경계를 맡고 도시는 죽음의 공포 속으로 떨어진다. 의사 베르나르 뤼는 병을 앓고 있는 아내를 어느 산중으로 보내고 이 사건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신문기자인 랑베르는 파리에 있는 아내를 남겨둔 채, 아랍인의 생활상을 취재하러 오랑에 들렀던 차였다. 자연히 그들은 이 도시에서 고립되게 되었다. 전염병은 날이 갈수록 더욱 악화되어 시민들의 생명을 빼앗기 시작했다. 매일 수십 명씩 죽어가더니 이제는 수백 명의 사망자수를 기록했다. 자연히 시내에서는 생필품의 품귀현상이 일어나고 환자 수용시설이나 의약품, 구호대 인원은 부족하게 되어 심각한 사태를 야기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죽음의 도시로 변한 것이다.

 환자가 일단 생기면 의사가 달려가 확인하고, 페스트 환자이면 격리수용소에 보내지게 되고 가족들도 전염 여부가 밝혀질 때까지 각기 다른 곳에 격리된다. 환자는 대개 며칠을 견디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숨졌으며, 그 시체는 가족들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매장되었다. 시체는 시간이 흐를수록 마치 쓰레기처럼 큰 구덩이 속에 던져졌고 그 위에 또 다른 시체가 던져졌다. 또한 처음에는 남녀의 구덩이가 따로 만들어졌으나 그 구별마저 지켜지지 않다가 끝내는 화장으로 처리되었다.

 한편 의사 뤼는 페스트의 고통에 빠진 환자들을 구출하려고 안간힘을 쓰며 기독교적인 사랑을 시민들에게 베푼다. 또한 랑베르에게도 지극히 안간적인 충고를 하는가 하면 달아난 아내에게 미련을 갖고 있는 글랑에게 무한한 연민의 정을 느낀다. 오랑의 호텔에 얼마 전부터 묵고 있던 타르는 뤼를 방문하여 격려하고 지원보건대를 조직한다. 그들은 악과 폭력을 앞에 두고 굳은 연대감으로 맞선다.

 랑베르는 자신이 예기치 않게 이 죽음의 도시에 묶이게 되고 더구나 파리에는 아내가 있었기에 필사적으로 이 도시를 탈출하려고 한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에게 돌아가기 위하여 시의 관문을 지키고 있는 경비병을 매수해서 탈출할 날짜까지 받는다. 그러나 의사 뤼가 자신의 몸을 희생하며, 또 봉사대가 자발적으로 조직되고, 게다가 타르와 판느루 신부까지 참석하는 것을 보고는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자신이 이곳을 떠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비록 애인에게 간다고 하여도 마음이 불편하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장장 8개월 동안이나 극성을 부리던 페스트도 점점 약화되기 시작했다. 페스트의 피해자가 드디어 줄기 시작하고, 혈청주사를 맞은 공무원과 한 처녀가 최초로 구원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뤼의 동지이자 헌신적인 봉사자 타르가 이 병의 최후의 희생자로 쓰러진다. 이어서 뤼는 휴양지에서 자신의 아내가 병사했다는 전보를 받게 된다.

 페스트는 언제 그랬냐 듯이 물러간다. 오랑 시의 문이 크게 열리고 시민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의사 뤼는 이렇게 독백한다. <<페스트 병균은 결코 죽지 않는다. 어딘가에 잠복해 있다가 행복한 도시에 불쑥 나타날지 모른다.>>


d. 대표적인 실존주의적 작품

 2차 대전을 전후해서 사르트르의 철학과 함께 세계적인 실존주의 선풍을 일으킨 이 작품은 2차대전시 경험했던 작가의 체험을 상징하고 있는 작품이다. 한 도시에 엄습한 재앙이 인간의 생존을 말살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이별하게 만드는 파괴적인 모습은 전쟁과 다를 것이 없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50년대 한국 문학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다. 전쟁의 인간살상과 타락한 인간성의 현실을 목도한 전후

한국사회의 작가들에게 큰 공감을 주었다.

 여기서 <페스트>란 전쟁을 포함한 자유를 부정하는 모든 폭력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폭력 앞에 대응하는 인간들의 양식은 다양하다.  달아나는 사람, 절망하는 사람, 정당화하는 사람 등등. 카뮈는 이들을 모두 이해한다. 취재차 오랑에 온 신문기자인 랑베르는 처음에는 무슨 수를 써서든지 오랑 시를 벗어나려고 한다. 그러나 시민들의 고통과 구조대원들의 희생적인 연대감에 탈출의 기회를 스스로 반납한다. 그는 탈출을 거부하면서 동시에 자살도 거부함으로써 카뮈의 철학적 반항을 실현하고 있다.

 삶에 대한 애착, 인간에 대한 사랑, 이것을 뒤집어 보면 악에 대한 반항이다. 카뮈에게 악이란 전쟁 독재 감금 억압 질병 빈곤 등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모든 것들이다. 그의 글들은 낯선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고독, 자신과 화해하지 못하는 개인의 소외, 악의 문제 등을 이야기함으로써 전후 지식인들의 소외의식과 환멸을 정확하게 반영했다.

 2차대전 후 황폐해진 인간정신의 위기를 간파하고 이의 극복을 위해 카뮈가 제시한 <부조리>와 <반항>의 사상은 전후의 젊은이들에게 중세의 종교 이상으로 큰 힘을 발휘한 것이 사실이다. 그는 혼란하고 무질서한 정신적 풍토 위에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하고 확립시킨 공로 이외에도 자신에의 성실과 인간의 존엄성에 기초로 한 사회정의를 실현하려 했다는 점에서 한 세대의 정신을 대표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뤼의 말처럼 <<죽고 싶지 않은 인간이 죽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부조리에 반항하는 인간의 모습은 영원할 수 있을 것이다.



e. 미완성 자전 소설 34년 만에 출간

 1960년 1월 4일 파리 근교에서 가로수를 들이받은 자동차 안에서 47세의 카뮈가 숨진 채 발견되었다. 그의 가방 속에 든 미완성 원고와 함께. 144쪽 분량의 초고는 구두점도 생략되고 속필로 써서 불완전한 상태였다. 사후 34년 만에 그의 딸이 정리해 <최초의 인간>(Le premier Homme)으로 햇빛을 본 이 작품은 빈민지대에서 보냈던 그의 어린 시절부터 고등학교 시절까지의 15년을 그린 자전적 소설이다.

 <최초의 인간>은 1994년 4월 15일 발간되어 1주일 만에 5만부가 팔리면서 파리 독서계를 흥분으로 몰아넣었다. 소설은 알제리에서 수레에 가재도구와 만삭의 아내를 싣고 황혼의 자갈길을 걸어가는 앙리 코르메리의 모습과 사내아이의 탄생으로부터 시작된다. 소설 속의 인물들은 모두 카뮈의 가족이며 아이는 카뮈 자신이다. 이 작품 속에 기록된 그의 어린 시절은 본서의 생애에서 묘사한 것과 비슷하다. 파리의 비평가들은 <<카뮈가 돌아왔다. 이 책에 카뮈의 모든 것이 있다. 감수성 충실 자비 정직 믿음 절대에 대한 갈망 꺼지지 않는 슬픔 그리고 힘이 공존한다>>고 평하고 있다. 이 유고는 그 존재가 확인되어왔으나 그의 유족들은 미완성이라는 이유로 그동안 출간을 보류해 왔다. 유고 곳곳에서 보이는 <<이름 바꾸는 것을 잊지 말라>> <<더 발전시킬 것>>이란 메모는 이 작품이 자전적 소설임을 입증한다. 다행히 최근에 김화영 교수의 한국어 번역판이 열린책들에서 출간되어 국내 독자들도 카뮈의 숨결을 한층 가깝게 느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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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 (출처 : 나무위키)


최근 수정 시각: 2017-11-03 20:40:55


Albert Cam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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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195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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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 - J.R. 히메네스

알베르 카뮈

1958 -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1. 개요

2. 생애

2.1. 알제리 전쟁

2.2. 사망

3. 문학

4. 명언

5. 기타

6. 대표작

1. 개요[편집]


1913년 11월 7일 ~ 1960년 1월 4일


프랑스 문학의 대문호이자 프랑스어권에서 존경받는 문학자 중 한명. 1913년 11월 7일 ~ 1960년 1월 4일. 프랑스와 알제리(프랑스령 알제리)의 문인, 작가, 실존주의 철학자(카뮈 본인은 스스로 실존주의와의 관계를 부정했다). 역대 최연소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흔히 알려져 있지만 사실 최연소는 러디어드 키플링이고 카뮈는 그 다음이다. 물론 그래도 40대에 노벨문학상을 받는 건 극히 드문 일이다. 이건 참 다행한 결정이라 할 수 있는데, 만일 노벨문학상을 '생애 최후의 명예'같은 느낌으로 노년의 작가한테만 수여하는 요즘 같았다면, 교통사고로 일찍 죽은 카뮈는 절대 상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2. 생애[편집]


알제리 태생이라는 사실에 알제리 아랍계로 아는 사람도 있지만, 알제리 및 이슬람계와는 관련이 없다.[1] 프랑스는 알제리를 단순 식민지가 아닌, 프랑스의 확장된 영토로 여겼다. 그래서 당시 프랑스 본토로부터 새로운 땅에서의 기회를 노리고 이주한 프랑스인들이 많았으며, 카뮈의 아버지나 어머니[2]도 그중 일부였다. 카뮈가 태어날 당시의 알제리는 그저 프랑스라는 국가의 한 지역이었고, 따라서 그는 프랑스 태생이었다. 카뮈가 알제리 태생이라는 말은, 카뮈가 사망(1960)한 후 알제리가 프랑스로부터 독립(1962)한 현재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3] 그러니까 그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순수 프랑스인이었으며[4][5], 현재의 알제리 아랍인와는 거의 무관한 인물이다.


여튼 아버지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전사하는 바람에 어린 시절엔 가난에 시달려야 했고, 학생 시절에도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지만 고질병인 결핵이 방해가 되어 대학 진학도 포기한 채 자동차 수리공 및 신문사 인턴 기자, 가정교사 같은 여러 일로 벌어먹으면서 철학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런 경험 때문인지 22살에 공산당에 가입하여 좌익사회운동을 했으며 프랑스측의 알제리 식민지배에 부정적인 글을 남기기도 했고, 베르베르족으로 흔히 알려진 이마지겐 부족에 대한 프랑스의 억압과 더불어 아랍계들의 차별도 고발하면서 깠다. 그 때문에 정부의 압력으로 일하던 신문사에서 해고당하자 이에 언론인 노조가 반발하면서 시위를 벌여 결국 복직한 일도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가 해방되자 과거를 잊고 관용과 용서를 베풀자는 주장에 맞서 반역자들을 가혹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하지만 소위 나치 청산이란 구실로 무고한 사람들이 수만 명이나 죽이는 대학살극이 벌어지자 경악하여 이를 크게 규탄했다. 


한국에선 프랑스가 반역자 청산을 잘한 것 정도로 오해하는 일이 많지만, 실상 프랑스의 청산은 36년간 식민지였던 조선이 아닌 한국전쟁 직후 한반도에서 벌어진 남북정권의 청산과 비교하는 게 더 부합한다. 꽤 유명한 사례로 독일군과 애인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린치당한 여자를 비롯하여, 독일군에게 빵을 팔거나 평소에 사이가 안 좋았단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하고, 같은 레지스탕스들끼리도 정치성향이 다르다고 서로 죽이는 등 한국전쟁 전후 한반도처럼 반동분자 청산을 구실로 무의미한 학살을 일으키는 개막장 사례가 속출했다. 때문에 샤를 드 골이 허겁지겁 이를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했다.[6]


2.1. 알제리 전쟁[편집]


그랬던 카뮈가 알제리 전쟁 당시 알제리 해방 전선(FNL)과 프랑스 정부 가운데 프랑스 정부 편을 든 것은 주변인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일로 받아들여졌다. '이 전쟁은 반란이며 새로운 아랍 제국주의와 소련 공산 폭력주의가 만나 반프랑스 움직임을 만드는 폭력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프랑스 우익들과 비슷한 주장을 한 것. 


카뮈는 알제리의 독립은 반대하되 자치권의 확대를 주장했다. '알제리의 독립은 인정할 수 없으나 프랑스인과 평등하게 살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카뮈의 옹호론자들은 당시 카뮈의 어머니가 알제리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신변을 염려하여 한 주장이라는 말도 한다. 하지만 카뮈의 제안은 프랑스측에서도 동의할 수 없는 것이었고 알제리도 마찬가지였다. 결론적으로 그는 양쪽에서 까였다. 알제리는 카뮈를 극렬 프랑스 우익으로 여겼으며 공산당 동료들과 알제리 독립을 지지하던 언론인이나 지식인들은 그를 배신자로 낙인찍고 무시했다.


그래서 알제리가 독립하자 알제리에서 그에 대한 모든 흔적은 철저하게 지워졌다. 이것은 그가 알제리를 고향으로 여겼다지만 정작 이방인 등 그의 여러 작품들 속에서는 프랑스인이 주축이지 알제리인들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점도 한 몫한 듯하다. 현재 그가 살던 집은 일반 가정집이며 노벨문학상 수상 당시 기념으로 만들어졌던 카뮈 문학기념비는 알제리에 용케 남아 있지만 카뮈의 이름은 끌로 지워진 채 방치되어 보존 상태가 엉망이라고 한다. 당연히 알제리인들은 카뮈가 누군지 잘 모른다.[7]


2.2. 사망[편집]


1960년 1월 4일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요절했다. 카뮈의 코트에는 전철표가 있었는데 전날 아내와 같이 전철을 타려고 했다. 그런데 갈리마르 출판사 사장의 조카이자 친구였던 미셸 갈리마르(Michel Gallimard)가 몰던 차를(갈리마르가 타라고 설득했다고) 타고 가던 길에 차가 플라타너스 나무를 들이박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냥 전철을 타고 갔다면 이런 일을 피할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카뮈는 현장에서 목이 부러져 즉사했고, 갈리마르도 며칠 뒤 병원에서 사망했다. 생전에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인터뷰에서 자동차 사고로 죽는 것보다 더 의미 없는 죽음은 상상할 수 없다.란 말을 남겼다. 지못미.(사고 현장을 찍은 흑백뉴스)


유작으로 다 완성하지 못한 《최초의 인간》을 남겼는데 세상을 떠날 당시 유품에 이 최초의 인간 원고가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 전철표 및 지갑, 펜, 메모지같은 것들과 같이. 미완성임에도 카뮈의 마지막 소설이라 그런지 미완성인 채로 책으로 나왔으며 국내에서도 정식번역되어 출판되었다.


3. 문학[편집]


카뮈의 문학은 '부조리 문학'으로 잘 알려져 있다. '부조리 문학'이란, 세상에는 어떠한 불변의 정의나 법칙이 없다는, 아니 있다 하더라도 이해조차 할 수 없는 '부조리'를 보여주며 이에 주인공이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렇기에 허무주의적 혹은 불가지론적인 태도를 가지는 경우가 많다. 뿐만 아니라, 부조리 문학은 주로 블랙/다크 코미디가 대다수이다.


알베르는 사람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으며, 그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사람이 만든 것이야말로 부조리라고 생각했다. 또 사람의 윤리란 매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라고 믿었고, 타협하지 않고 부조리에 저항하면서 스스로에게 거짓되지 않고 솔직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4. 명언[편집]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똑같이 어리석은 짓이다.

-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

5. 기타[편집]


원래 장래 희망은 축구선수였고 알제 대학 재학 시절 축구부에서 골키퍼로 맹활약했으나 결핵이 재발하면서 축구를 그만두게 되었다. 배우 활동에도 관심이 있었으나 여의치 않아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원래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도 없었고 소설은 그냥 자기 머리에서 나오는대로 썼다고 한다. 그러나 책을 좋아하기는 했던 듯싶다.《작가수첩》이라고 이름붙인 메모장에다가 아이디어가 머리속에 떠오르면 그 즉시 메모했다고 . 《작가수첩》은 카뮈 사후 출판되었고(방대한 양 때문에 나뉘어 출판) 한국에도 번역 출판되었다.

카뮈의 공식 프로필 키는 176cm로 기록되어 있고,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 성인 남자 평균 키가 170cm 언저리였다는 걸 감안하면 작지 않은 키다. 그러나 허버트 R. 로트먼이 쓴 카뮈 평전에서 그가 만난 카뮈의 대학 시절 축구 친구들이 카뮈를 작은 체구였다고 회상하고 있는 걸 보면 역시 176cm는 프로필상의 키고, 르네 샤르 등의 주변 인물과 찍은 사진들로 보건대 실제 키는 170~173cm 정도였던 걸로 추정된다. 골키퍼로서는 상당히 불리한 피지컬로 맹활약했다는 걸 생각하면 축구 재능도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골키퍼조차 본인이 자신이 있어서 선택한 포지션이 아니라, 축구는 하고 싶은데 체구도 작고 어릴 때부터 몸도 허약한 편이라 필드 플레이어처럼 몸싸움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다.

카뮈는 좌익운동가로 활동하다 아나키스트로 전향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그가 20대에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는 공산당에 가입은 하지만 결코 어떤 이념에 맹목적으로 세뇌당하진 않을 거라는 문구도 있다. 알제리 전쟁에서 보여준 애매모호한 회색분자 태도도 그의 성향이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는 괴물이 되어버린 자본주의든, 패배한 파시즘이든 이미 부작용을 드러내기 시작한 사회주의든 권력화한 집단은 부조리를 양산하기 마련이므로 아나키즘적인 태도를 추구했다. 즉 알제리가 독립해도 새로운 제국주의 집단의 탄생일 뿐이라는 인식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이 때문에 사르트르를 비롯한 당시 많은 사회주의자들에게 비판받았다.

2009년 12월 프랑스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는 알베르 카뮈의 문학을 깊이 존중한다고 말했으나 프랑스 좌파와 카뮈의 딸은 이를 반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공산당에 가입하고 좌익 활동 사상가로 지냈던 카뮈의 문학을 우파 대통령인 사르코지가 존중한다는 것이니.

6. 대표작[편집]


작품명 뒤에 *이 붙어 있는 작품은 표준국어대사전에 표제어로 실려 있는 작품들이다. 즉, 진정한 의미의 대표작.


이방인*

페스트*

전락*

시지프 신화*[8]

반항하는 인간*[9]

결혼

단두대에 대한 성찰

독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여름

오해

작가수첩

시사평론

정의의 사람들

칼리굴라




[1] 알제리계 출신으로 유명한 프랑스 사람은 지네딘 지단이 있다. 아버지가 알제리 전쟁 당시 아르키(Harki)라고 불리던 친프랑스 알제리 민병대원 출신으로 용케 프랑스로 이민 온 항만 노동자였다.

[2] 카뮈의 어머니는 1882년 알제에서 태어났는데 부모가 스페인 왕국 발레아레스 제도 출신의 스페인인이었다. 카뮈는 스페인을 혈통에 의한 자신의 제2의 조국이라 칭한 바 있다.

[3] 알제리는 1962년에 프랑스로부터 독립하기 전까지 하나의 독립 국가로 존재한 적이 없었고, 유사 이래 항상 특정 국가의 일부로 존재했던 지역이었다. 쉽게 말해 프랑스는 알제리라는 '국가'를 병합한 게 아니라, 바로 이전까지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알제리라는 '지역'을 자국 영토로 편입시킨 것이다. 알제리는 국가 상태에서 프랑스에 병합당한 게 아니고 국가였던 적도 없었기 때문에 카뮈가 살았던 당시 기준에서는 '프랑스령 알제리', '프랑스계 알제리인', '알제리계 프랑스인' 같은 말은 다 있을 수 없었다. 카뮈는 그냥 프랑스의 알제리 지방에서 태어난 프랑스 태생 피에느와르었다. 대략 일본 식민지 출신의 일본인 히키아게샤급인 셈이다.

[4] 이러한 사실은 그의 작품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가령 그의 대표작인 이방인이나 페스트는 배경이 각각 현재 알제리의 도시인 알제와 오랑인데, 작품 내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이방인에서 그냥 스쳐 지나가는 비중으로 나오는 아랍인들을 제외하고 전부 프랑스인이다. 카뮈가 인물 설정을 이렇게 한 이유는 결국 알제리도 프랑스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이다. 배경이 프랑스이니 등장 인물도 프랑스인인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게다가 당시 알제리의 대도시들은 전부 프랑스계, 유럽계가 주류였고 아랍계가 비주류였으니. 페스트에서는 첫 장부터 오랑 시는 프랑스의 한 도청 소재지에 불과하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5] 알베르 카뮈 전집을 번역한 김화영 교수에 의하면, 프랑스 현지에서 유학할 당시 프랑스어로 쓰인 프랑스어 사전(불불 사전)에 예문으로 카뮈의 문장이 다수 실려 있었다고 한다. 이는 카뮈가 사용한 프랑스어가 표준 프랑스어에 적합했다는 뜻이다. 알제리는 현재 아프리카에서 가장 넓은 대국이지만 지리적 연유로 도시들은 지중해 연안에 집중돼 프랑스 식민 지배의 영향으로 집중 개발되어 있었고 내륙에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데, 카뮈 역시 프랑스 본토와 가까운 연안 지역에서 태어난 인물이고 더군다나 부모가 프랑스인들이었으니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습득할 환경은 프랑스 본토인들과 차이가 없었다. 현재 알제리의 공용어인 아랍어와 베르베르어는 당연히 할 줄 몰랐다.

[6] 카뮈는 이런 무분별한 폭력뿐만 아니라 드 골이 법적으로 나치 부역자를 처벌하는 일에도 일부 반대했다. 문학가이며 언론인인 로베르 브라지야크가 나치에 부역한 죄로 처형될 때 프랑스의 문학가들이 탄원서를 쓰며 브라지야크의 처형에 반대했고 카뮈도 이에 참여했지만 드 골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7] 카뮈 연구가이자 카뮈 전집을 번역하고 프랑스로 가서 카뮈 연구에 참여한 김화영 교수는 알제리에 가서 카뮈에 대한 흔적이 철저하게 없어진 것을 아쉬워하면서도 그가 보여준 알제리에 대한 인식을 '똑같이 식민지를 겪은 한국인으로선 받아줄 수 없다'고 선을 그은 바 있다.(김화영, 《알제리 기행》 참고)

[8] 국어사전에는 일본 번역 그대로 '시시포스의 신화'로 등재되어 있다.

[9] 국어사전에는 일본 번역 그대로 '반항적 인간'으로 등재되어 있다.





E11 – 타르튀프 Tartuffe / 몰리에르(Jean Moliere, 1622~1673)

(출전: 동서고전 200선 해제3 / 반덕진 / 가람기획)


 희극작가이자 배우로 평생을 연극에 바친 몰리에르가 거짓 종교가의 위선과 그 위선에 속아 넘어가는 어리석음을 그린 5막의 희극. 종교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5년간이나 공개상연이 금지되었던 이 작품은 풍속희극의 단초를 제시하고 성격희극을 완성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삶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연극이었던 몰리에르는 이 작품 속에서 위선의 문제를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관련시켜 고찰함과 동시에, 인간본성의 문제를 형상화함으로써 개인과 사회의 갈등이라는 현대적 문제를 선구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a. 연극에 바친 순교자적인 삶

 몰리에르는 문화예술의 후원자였던 프랑스의 루이 14세 치하에서 활약한 코르네유, 라신과 더불어 프랑스 3대 고전작가로, 부유한 궁정 실내장식업자의 장남으로 태어나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부친은 아들이 가업을 잇기를 희망했으나 몰리에르는 경제적으로 보장된 삶을 포기하고 연극인의 길을 택하는 21세의 회심 이후 그의 삶은 오로지 연극만을 위해 존재하게 된다.

 학업을 마칠 무렵 재능있는 여배우 마들렌 베자르와 함께 <유명극단>을 창립하여 예명을 몰리에르라고 했다. 이 극단은 흥행에 실패하여 빚만 잔뜩 지게 되었고, 그는 한때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극단은 결국 13년 동안의 지방 유랑의 길에 나서게 되는데, 지방귀족의 도움을 받으며 차츰 실력을 쌓아 리옹에 본거지를 두는 유력한 지방극단으로 성장했다. 그동안 그는 극단 경영자로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동시에 이탈리아 즉흥극의 계통을 있는 연기술 작극법을 익힌 것으로 짐작된다. 1658년(36세)이 되어서야 파리에 진출하여 루브르 궁전의 루이 14세 앞에서 공연하여 인정을 받았다. 이로 인해 왕실 소유의 프티 부르봉 극장 사용을 허가받았다.

 다음해에 참신한 풍자희극 <웃음거리 재녀>의 성공으로 기반을 쌓았고, 이어서 아르놀프라는 개성적 인물을 창조한 <여인학교>로 명성을 드높였다. 그는 <우수한 극시인>의 자격으로 국왕으로부터 연금을 받고 루이 14세의 총애를 받았으나 한편으로는 많은 적들을 만들었다.

사교계나 배우작가들이 악의에 찬 중상과 비판을 가해오기도 했으나 그는 용감히 싸웠으며, 이러한 투쟁속에서도 극단원들의 생활을 보살피고 왕을 즐겁게 했어야만 했다. 이 눈부신 활동과 과로의 생활 속에서 그는 13년 동안 30편에 가까운 작품을 썼는데 그 대부분이 5막극이었다.

 1662년(40세) 마들렌의 여동생(혹은 딸)과 결혼했으나 21년 연하인 이 젊은 아내와의 가정생활은 원만치 못했다. 1664년(42세)에 발표한 <타르튀프>는 거짓신앙을 묘사했기 때문에 종교에 대한 모독이라 하여 신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아 상연금지되었다. 그후 무대에 올린 <돈 주앙>은 사태를

한층 악화시켰다. 이로 인해 교회측에서는 <타르튀프>를 5년, <돈 주앙>을 평생 동안 상연금지시켰다.

 당국과의 싸움에서 몰리에르는 극단을 혼자 이끌어갈 수 밖에 없었다. 배우도 작가도 확보할 수 없었던 그는 더 많은 작품을 씀으로써 작가의 부족을 메워나갔다. 드디어 1966년(44세) 그의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인간혐오자>를 발표했는데, 처음부터 식견 있는 관객들로부터 걸작으로 평가되었다. 그후에도 <구두쇠>, <여학자들>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의학 풍자희극 <상상병 환자>가 그의 최후의 작품으로, 그 상연에서 건강악화를 무릅쓰고 주인공역을 맡은 그는 연기 도중 발작을 일으켰으나 즉흥적 연기로 위장하여 버텨나갔다. 그러나 기어이 무대 위에 쓰러져 실려나가고 각혈 끝에 숨을 거두었다. 임종때 아내 아르망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신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목사의 입회도 허락되지 않았다 한다.

 그의 사후 아르망드는 배우들을 이끌고 게네고 극장으로 옮겼으나 국왕의 명령으로 경쟁관계에 있던 오텔 드 부르고뉴 극장과 합병함으로써 새로이 <국왕의 극장>이 결성되었다. 이것은 현재의 국립극장 코메디 프랑세즈의 전신이다.

 그의 작품은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 극장의 가장 중요한 레퍼토리로서 상연을 거듭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의 작품들이 시대풍속에 대한 예민한 시각과 비판정신에 뒷받침되어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인 인간상을 묘사했기 때문으로 평가되고 있다.


b. 시대적 배경과 작품세계

르네상스 시대 다음에 오는 문학의 흐름은 고전주의였다. 프랑스적인 것의 정수는 고전주의에서 발견할 수 있다. 프랑스 고전주의는 고대와의 밀착에도 불구하고 그 나름대로 근대적이고 또 엄밀히 말해 프랑스적이다. 문학을 한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에 도전하는 치열한 지적 추구의 과정이라고 볼 때, 프랑스 고전주의도 근대의 여명기에 프랑스 인이 펼쳤던 이 지적 모험의 증언이며 인간과 세계에 대해 프랑스 인이 가졌던 인식의 영원한 유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태양왕 루이 14세

 프랑스의 당시 집권자는 <태양왕>을 자처한 절대군주 루이 14세로, 그는 화려한 궁정생활을 영위하여 유럽 군주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인물이다. 그는 6개의 궁전 중에서도 특히 파리에서 떨어진 베르사유 궁전을 좋아하여 그곳에 하나의 작은 우주를 꾸몄다.

 베르사유 궁전에서는 왕을 중심으로 한 궁정귀족들이 낮에는 산책과 수렵, 밤에는 연회와 무도회가 열리는 등 사치와 방종한 생활이 계속되었다. 이곳에는 자연스럽게 미와 기지, 사교와 에티켓, 연극과 문학이 집결되었다.

 루이 14세 자신이 청년시절에 소설과 시를 애독하고 춤과 스포츠에 열중했으므로 그는 프랑스의 문학과 예술을 후원하여 번성하게 되었다.

루이 13세 때인 1635년에 프랑스 아카데미가 창설되고 동시에 작가가 지켜야 할 <삼단일 법칙>과 <순수성의 법칙>등 문학법칙이 제정되었다.

삼단일 법칙이란 하루 동안에 동일한 장소에서 한 사건이 행해져야 한다는 규칙이고, 순수성의 법칙이란 비극은 비극적인 요소로만 그리고 희극은 희극적인 요소로만 작품을 써야 한다는 규칙을 말한다. 이 규칙 밑에서 이른바 프랑스의 3대 고전주의 작가, 즉 <르 시드>의 작가 코르네유와 <페드르>의 작가 라신, 그리고 <인간혐오자>와 <타르튀프>의 작가 몰리에르가 탄생하게 된다.


   작품세계

 앞의 두사람이 비극의 대가였던 반면 프랑스의 모든 희극적 전통은 몰리에르에게 흘러 들어와서 새롭게 흘러나온다. 그는 고대로부터 내려온 희극적 유산을 흡수하여 그것을 근대적으로 재창조하기에 성공한, 그리하여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현재성을 잃지 않고 있는 희극의 가장 높은 봉우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예술적 승리는 단순한 천재성의 결과만은 아니었다. 12년간의 긴 유랑극단 생활을 통한 연극적 수련을 거쳐 파리로 입성했을 때, 그가 내세운 희극은 당시의 규범주의자들의 요구에 배치되는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고상한 웃음과 로마네스크한 줄거리의 요구에 대해서는 당대 풍속에 대한 가차없는 풍자를, 오락으로서의 희극개념에 대해서는 현실참여로서의 희극개념을 작품의 실제를 통해 보여주었고, 그래서 그는 더욱 어려운 역경의 연속 속에 빠져들었다.

 적대적인 연극인들의 끝없는 질시, 현학적인 문사들의 이론적 시비, 종교계의 도덕적 규탄은 끝없이 지속되어, 그는 언제나 논쟁과 모함의 와중에 있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자신이 선택한 예술의 지향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고, 현실의 벽을 뚫고 나가는 예술적 방법에 대한 탐구를 계속하면서 그것을 통한 반성과 갱신의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작품들은 바로 그런 삶의 형상물들이기에 일회적인 천재성을 뛰어넘는 풍요와 깊이를 역설적으로 획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c. 종교가의 위선적 행위 비판

 <위선자>란 부제를 가진 이 5막 4짜리 운문극은 거짓신앙을 풍자한 내용으로 인해 그 공개상연을 위해 5년 동안 투쟁해야 할 만큼 문제가 되었던 작품이다. 작가는 여기서 인간의 악덕과 당시의 파리 사교계를 활보하고 다녔던 위선자들을 가차없이 풍자하고, 타르튀프와 같은 위선자가 없어질 때 프랑스가 더욱 번영하리라는 점과, 국왕이 그들의 도움 없이도 진실과 허위를 식별할 수 있음을 암시했다. 어쨌든 이 작품으로 인해 <타르튀프>의 이름은 현재에도 <위선자>를 뜻하는 보통명사로 사용될 만큼 널리 알려져 있다.


   제1막 

 돈 많은 소시민 오르공은 전처의 소생 둘을 데리고 젊은 에르밀과 재혼했다. 이 오르공의 집에는 얼마 전부터 종교가인 타르튀프가 동거하고 있다. 그는 거지와 같이 떠도는 신세로 이 집에 들어왔으나, 오르공과 오르공의 어머니는 그를 성인군자처럼 모신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가 위선자요, 사기꾼으로 비쳐지고 있다. 시골에서 돌아와서도 오르공은 가족의 안부보다는 타르튀프의 건강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는 형편이다. 주위에서 아무리 이야기해도 오르공의 생각을 바꿀 수는 없다.


   제2막

 광신자인 오르공은 딸 마리안을 그녀의 애인에게서 떨어지게 하여 타르튀프의 아내가 되게 하려고 생각한다. 마리안은 슬픔에 잠기지만 하녀인 도린이 마음 약한 그녀에게 용기를 주며 함께 저항하자고 말한다.


   제3막

 오르공의 후처인 에르밀도 타르튀프에게 마리안과의 결혼의사를 포기하라고 말하는데, 오랫동안 에르밀에게 마음을 두고 있던 타르튀프는 두 사람만 있는 자리에서 그 유명한 <<아아, 믿음이 깊다고 해서 감정조차 없는 것은 아니지요, 어디까지나 나는 사내입니다>>라며 에르밀을 유혹한다. 그 현장을 우연히 보게 된 오르공의 아들 다미스는 타르튀프를 비난하며 오르공에게 모든 사실을 폭로한다. 그러나 오르공은 아들의 말을 믿지 않고 타르튀프의 교묘한 거짓말을 그대로 믿는다. 그는 오히려 아들을 꾸중하고 자기의 재산 전부를 타르튀프에게 증여한다.


   제4막

  딸과 타르튀프의 결혼을 서둘러 성사시키려는 남편 오르공을 보고 에르밀은 한 가지 꾀를 낸다. 남편을 테이블 밑에 숨겨두고 타르튀프를 불러들여 그의 구애에 응하는 척한다. 처음에는 의심을 품고 있던 타르튀프였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본색을 드러내어 에르밀을 품에 안으려 한다. 오르공은 그제서야 자신이 속았음을 깨닫고 이 사기꾼을 쫓아내려 한다. 그러나 타르튀프는 뻔뻔스럽게 <<자네가 이 집에서 나가주게>>라고 말한다. 이미 이 집의 재산 전부는 타르튀프의 것이었다.


   제5막 

 오르공은 자기 입장이 불리하게 될 수 밖에 없는 정치상의 비밀문서가 들어 있는 상자도 타르튀프에게 넘겨 준 터였다. 사기꾼은 그 문서를 국왕에게 공개하며 오르공을 고소한다. 오르공은 체포되기 전에 도망가야만 했다. 타르튀프는 경찰관을 데리고 거드름을 피우며 등장하여 오르공을 국적 취급을 한다. 그러나 경찰관이 체포한 것은 뜻밖에도 타르튀프였다. 이자야말로 당국이 수사하던 죄인임이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국왕폐하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시기 때문에 절대로 사기꾼의 술책에는

속지 않으신다>>고 경찰관은 말한다. 왕은 오르공을 용서하고 마리안은 발레르와 결혼하게 된다.


d. 5년간 공개상연이 금지된 문제작

 이 작품은 1664년 국왕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전에서 개최한 대제전 때에 처음으로 공연되었다. 악덕 종교가 위선자를 신랄하게 꼬집은 이 작품은 종교인들의 반감을 사서 상연이 금지되었다. 그후부터 몰리에르는 국왕에게 계속 탄원했으나 1669년이 되어서야 공개상연이 정식으로 허락되었다. 어쨌던 이 작품은 통렬한 풍자극으로서 몰리에르의 걸작 중의 하나이며 그 공연은 전대미문의 대성공을 거두었다.


   탁월한 성격묘사

 이전의 희극이 줄거리나 대사, 그리고 몸짓 등 외부적인 수단으로 관객들에게 호소하려 했던 반면, 몰리에르는 성격에 모든 바탕을 두고 인간의 약점을 폭로함으로써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내려 했다. 성격의 묘사, 이것이 그가 추구했던 목적이었고 인간정신의 이면과 동기, 그리고 원동력을 심리적 리얼리즘으로 포착함으로써 당대 인간들의 평범함과 복잡함을 그려냈으며, 등장인물 하나하나에 강한 개성을 부여하고 있다.


   비판정신

 그의 작품에는 비극작가인 코르네유나 라신의 작품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 번쩍인다. 두 비극작가가 주로 인간의 고뇌와 격정을 묘사한 반면, 몰리에르는 인간과 사회의 보편적인 악과 약점을 비판했다. 그는 관객이나 독자들을 웃기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거기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한다. 그는 이러한 풍속의 비판적 묘사를 통해서 인간을 개조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 당시의 수많은 풍속을 풍자한 작가 가운데 몰리에르만이 뚜렷하게 그의 위치를 지니고 있는 이유도 그의 내부에 있는 강한 도덕적 욕구 때문이다. 그러나 군주제도나 교회의 권위, 그리고 귀족의 특권 등에 대해서는 공격적인 태도를 완화하는 보수주의적인 측면도 있었다.


   자연애

 그는 인간의 본능을 바른 것으로 믿었으며 라블레나 몽테뉴와 같이 자연은 선하며 또한 만능이라고 생각했다. 자연과 싸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며 불행과 웃음거리를 동반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자연의 법칙에 따르는 젊은이들을 편들고 이를 막는 어른들을 언제나 곯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본능에 한계를 두어 이성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점도 놓치지 않았다. 이러한 점들이 그의 작품들로 하여금 그의 시대와 인간을 총체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도록 하고, 이 총체적인 비전을 통해 한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는 독창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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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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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4세

Louis XIV

Louis XIV of France.jpg

Grand Royal Coat of Arms of France.svg

Louis XIV Signature.svg

Royal Crown of France.svg

프랑스왕

재위 1643년 5월 14일-1715년 9월 1일

대관식 1654년 6월 7일

전임자 루이 13세

후임자 루이 15세

섭정 안 도트리슈 (1643년–1651년)

재상

수석국무장관[보이기]

별칭

별호 태양왕

신상정보

출생일 1601년 9월 27일

출생지 프랑스-나바르 왕국 생제르맹앙레

사망일 1643년 5월 14일

사망지 프랑스-나바르 왕국 베르사유

매장지 생드니 대성당

왕조 카페 왕조

가문 부르봉 가

부친 루이 13세

모친 안 도트리슈

배우자 마리테레즈 도트리슈

자녀 본문 참조

종교 천주교

루이 14세(프랑스어: Louis XIV, 1638년 9월 5일 ~ 1715년 9월 1일)는 프랑스의 왕이자 나바라[1]의 군주이다. 본명은 루이 디외도네(프랑스어: Louis-Dieudonné)이고, 공식 칭호는 루이 드 프랑스-나바라(프랑스어: Louis de France et de Navarre)다. 그는 다섯 살 생일이 채 되기도 전에 왕위에 올랐다. 아직 정치를 개인적으로 통치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아서 이탈리아 추기경 쥘 마자랭이 1661년 죽을 때까지 사실상 역할을 대신하였다. 루이는 1715년 9월에 죽을 때까지 왕의 자리에 있었는데, 77번째 생일을 맞이하기 4일 전이었다. 그의 치세기간은 최종적으로 72년 3개월 18일으로 유럽의 군주 중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루이 14세는 세간에는 태양왕(프랑스어: Le Roi Soleil)이란 별명으로 알려져 있다. 루이 14세는 왕권신수설을 믿었기에, 국왕의 권력은 신으로부터 받는 것이라는 학설을 지지했다.


루이의 치세 상당부분은 유럽에서 프랑스의 힘과 세력을 확장시키고자 3번의 주요 전쟁─프랑스-네덜란드 전쟁,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과 스페인 왕위계승전쟁─과 2번의 작은 분쟁─상속 전쟁, 재결합 전쟁─을 치렀다. 이 시대 프랑스의 정치와 군사상 걸출한 인물의 면모를 살펴본다면 마자랭, 장바티스트 콜베르, 튀렌, 보방을 들 수 있다. 프랑스 문화 또한 이 시대 번성하여 위대한 명성을 가진 인물들이 나타났는데, 몰리에르, 장 라신, 부알로, 라 퐁텐, 르브룅, 리고, 루이 르 방, 쥘 아르두앙 망사르, 클로드 페로, 르 노트르 등이 이 시기의 사람이며, 이들의 대다수는 루이로부터 지원금을 받고 왕과 왕실을 찬양하는 작품을 쓰기도 했다.


루이 14세는 그의 전임자가 만든 중앙 집권화의 일을 계속 추진하여 프랑스의 지방에 끝까지 남아 있던 봉건제도의 잔재를 청소하고 수도에서 내려오는 지시에 따라 통치할 수 있게 만들어 갔다. 그의 성과를 방해한것은 지방의 힘있는 귀족들로 많은 이들이 반란으로 일어났고, 그들 소수를 가리켜 프롱드라고 불리었다. 루이는 이들 힘있는 귀족들을 베르사유 궁전의 자신의 곁으로 불러들여 사치스런 생활을 즐기게 하면서 서서히 약화시켰고, 이를 통해 귀족들의 힘을 제어했다. 그 결과 그는 오랫동안 유럽에서 절대 군주의 전형으로 고찰되게 되었다.


또한 절대 군주의 자리를 다져 “짐이 곧 국가니라(L'État, c'est moi)”와 같은 말을 했다고 전해지지만, 역사학계에서 이 말은 그의 정적들이나 볼테르가 퍼뜨린 헛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루이 14세는 키에 대한 콤플렉스로 하이힐을 최초로 신었고 귀족들이 그것을 따라하여 유행처럼 번졌다고 한다.


목차  [숨기기] 

1 생애

1.1 정치입문

1.2 국력과 문화발전

1.3 전쟁

1.4 낭트칙령 폐지

1.5 죽음

2 부인들과 자녀들

2.1 정부인과 적자

2.2 정부와 서자

3 갤러리

4 같이 보기

5 각주

6 외부 링크

생애[편집]


결혼식을 올리는 루이 14세

정치입문[편집]

1638년 생제르맹앙레에서 루이 13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루이 13세가 1643년에 사망했을 때 루이 14세는 겨우 5살이었다. 섭정을 맡은 모후 안 도트리슈는 국사 운영을 로마 가톨릭 추기경인 마자랭에게 맡겼다. 뛰어난 협상가였던 마자랭 추기경은 전임자인 리슐리외 추기경과 동일한 계획을 강력하게 추진하여 절대 군주제를 성립시켰다. 귀족들에게 눌렸었던 왕의 권력이 마자랭 추기경의 지도로 강해진 것이다. 마자랭 추기경은 당시 왕이였던 루이 14세의 정치수업을 지도하였는데, 덕분에 1661년 마자랭이 죽자 22살의 어른이 된 루이 14세는 재상과 같이 프랑스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국력과 문화발전[편집]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의 유럽 (1648)


루이 14세 앞에 나타난 주불 페르시아 대사들

전임자와 선왕의 낭트 칙령을 통한 위그노들에대한 수용 및 중상주의 정책으로 루이 14세는 당대 유럽의 왕들 중에서 가장 부유한국가를 물려받았었다. 에스파냐의 무적 함대를 1588년 네덜란드와 연합, 격파한 후 점점 강해지는 영국에 뒤지지 않으려고 루이지애나 등 식민지에서 돈을 징수해온 프랑스의 국력은 이윽고 영국에 맞설 만한 수준에 이르렀으나. 유명한 베르사유 궁전증축과 사치스러운 궁정생활 그리고 말년의 계속된 패전으로 이 막대한 부는 모두 사라지며 루이 15세 때에는 몇차례의 국가부도나 그에 버금가는 경제위기 등을 겪는다. 베르사이유 궁전은 착공한 지 20년 후인 1682년, 아직 완공 전이었으나 루이 14세는 왕궁과 정부를 베르사유로 모두 옮겼으며 그때부터 베르사유 궁전에는 프랑스의 왕족들 뿐만 아니라 대귀족들 전부가 이주해 와서 살게 되었고, 왕과 귀족들의 궁정 생활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베르사유 궁전은 프랑스 민중들의 희생과 부담으로 구축되었다. 민중들은 베르사유 궁전을 짓기 위한 부역에 동원되어 노동력을 수탈당했으며, 사고로 죽은 자들은 보상과 사과는커녕, 시체가 암매장되었다. 그럼에도 루이 14세는 정사를 돌보는 한편, 사냥과 기마 경기를 개최하였고, 트럼프와 당구 그리고 춤을 즐겼다. 특히 루이 14세는 발레에 지대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7세부터 직접 무용을 수련하며 최초의 직업무용수로도 꼽힌다. 1653년 15세의 나이에는 밤의 발레(Ballet de lanuit)에 '아폴로'역으로 출연해 '태양왕'의 호칭을 얻게 된다. 또한 1661년 왕립무용아카데미라는 발레학교의 효시인 무용예술원을 설립하였다. 이러한 예술에 대한 애정과 노력들로 화려한 궁정 문화가 눈부시게 꽃피워 전 유럽의 왕가에 확산되었다. 루이 14세 정부는 극히 다양한 기술에 관한 특허장을 무수히 나누어 주었다. 그중에는 예컨대 맹트농 후작 부인이 약간의 자본을 투자한 경제적 난방 방식 같은 것도 있었다.[2]


전쟁[편집]


프랑스-네덜란드 전쟁 때 로비트에서 라인 강을 건너는 루이 14세와 그의 군대

루이 14세는 피레네 산맥과 알프스 산맥, 라인 강이 프랑스의 국경이라고 선언했다. 프랑스의 국경은 하느님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그것은 자연 환경에 의해 표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뒤부터 이러한 ‘자연 국경설’을 내세우며 루이 14세는 그의 재위 기간 72년 4개월 중 31년 동안 그 당시 프랑스 영토가 아닌 라인 강 방면의 영토 획득을 위해 다른 나라에 대한 침략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침략 전쟁을 위해 프랑스군의 근대화가 행해졌고, 루이 14세는 최강을 자랑하는 군대를 편성하기 위해 징병제도를 실시 하여 유럽에서 최강을 자랑하는 육군이 편성되었다. 프랑스는 이 강력한 군대로 우선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의 틈을 타서, 1667년과 그 다음해에 걸쳐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독립한 네덜란드에 침입했다. 또한 제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때에도 네덜란드에 침입하여(1672년~1678년) 많은 영토를 빼앗았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네덜란드를 지원한 독일로부터 알자스 로렌 지방도 획득하였다.


루이 14세에 의한 침략 전쟁은 멈추어지지 않았다. 그는 다시 이번에는 독일의 팔츠 지방에 대한 계승권을 주장하며 침입했기 때문에 독일은 영국, 네덜란드, 에스파냐와 동맹을 맺어 대항하였다. 이른바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이라고도 불리는 팔츠 계승전쟁이 10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식민지 문제로 영국과 세력 다툼을 벌여 싸우게 되는 제2차 백년전쟁이 발발된 것도 루이 14세 때였다. 또한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에 뛰어드는 등 루이 14세는 영토 확장에 혈안이 되었다.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에서 초반 전세는 프랑스에 유리했으나 점차 밀리게 되었고, 결국 루이 14세의 손자 스페인의 펠리페 5세의 스페인 왕위만이 인정되어 프랑스가 얻은 이득은 없었다.


루이 14세의 무리한 전쟁수행으로 프랑스의 영토는 루이 14세가 처음 친정을 시작하던 당시의 영토로 줄어들었고 잦은 전쟁으로 빚만 산더미같이 쌓였다. 모든 도시에 거지가 들끓고 굶어 죽거나 전염병에 걸려 죽은 민중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당시 프랑스인의 평균 수명은 25살 이하였으며, 파리를 비롯한 모든 도시에는 거지들이 들끓었다. 더구나 전쟁수행에 필요한 세금때문에 민중들은 경제적으로 수탈당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계속적으로 전쟁을 치루었으니 나라가 평안할 수 없을 것은 당연했다.


낭트칙령 폐지[편집]


낭트 칙령이 폐기될 시기의 루이 14세

루이 14세는 프랑스 교회를 로마 가톨릭으로 통일하는 것이 절대왕정에 유리하다고 생각하여 용기병을 동원하여 개신교인들을 학살하고 박해해 강제로 로마 가톨릭교회로 개종시켰다.


 용기병의 박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또 퐁텐블로 칙령을 발표, 1685년 개신교 신자에 대한 차별을 금지한 낭트 칙령을 폐지, 개신교를 탄압했다. 낭트 칙령은 프랑스 내 개신교 신자들을 공직자 취임제한등의 차별로부터 보호하는 차별금지정책이었는데, 이를 폐지함으로써 탄압을 받게 된 위그노 25만 명이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네덜란드와 영국 등 세계 각국으로 망명했다. 그런데 이들의 대부분은 숙련된 상공업 기술자들이어서, 이후 프랑스의 수공업은 거의 마비되다시피 했다.


 퐁텐블로 칙령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죽음[편집]

1715년, 76살의 늙은이가 된 루이 14세는 72년 동안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무리하게 전쟁을 수행, 경제를 파탄시킨 자신의 정치행적에 대해 자각과 후회를 가져 임종을 맞기 직전에 증손자인 루이 15세에게 “너는 이웃 나라와 싸우지 말고 평화를 유지하도록 힘써라. 이 점에서 짐이 밟은 길을 따르지 말라. 국민들의 괴로움을 덜어 주는 정치를 하여라. 아쉽게도 짐은 행하지 못했었다.”라는 간곡한 유언과 “짐은 이제 죽는다. 그러나 국가는 영원하리라.”[3] 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향년 77세. 루이 14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프랑스 국민들은 조금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이 오히려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다려온 해방을 주신 하느님 앞에 감사하며 크게 기뻐했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때부터 프랑스에는 혁명의 싹이 움트기 시작하여 76년 뒤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부인들과 자녀들[편집]


루이 14세와 그의 가족들

정부인과 적자[편집]

왕비 에스파냐의 마리아 테레사

루이(1661-1711): 왕세자(Dauphin)였으나 부왕 루이 14세보다 먼저 사망하였음. 루이 15세의 조부이자 루이 16세의 고조부.

안 엘리자베트: 요절

마리 테레즈: 요절

필립 샤를: 요절

루이 프랑수아: 요절

정부와 서자[편집]

루이즈 프랑소와즈 르 블랑 드 라 발리에르³ - 라 발리에르 공작부인

샤를 (1663-1665)

필리페 (1665-1666)

라 발리에르 여공작 및 콩티 공비 마리 안 (1666-1739)³

베르망두아 백작 루이 (1667-1683)³

아테나이 드 로슈슈아르 모르트마르³ - 몽테스팡 후작부인

루이즈 프랑소와즈 드 부르봉 (1669-1672)

멘 공작 루이 오귀스트 (1670-1726)³

루이 세자르 (1672-1683)²

부르봉과 콩데 공비 루이즈 프랑수아즈 (1673-1743)³

오를레앙 공작 부인 프랑수아즈 마리 (1677-1749)³

툴루즈 백작 루이 알렉상드르 (1678-1737)³

클로드 드 빈

루이즈 드 메종블랑쉐 (1676-1718)

앙젤리크 드 퐁탕주 - 퐁탕주 공작부인

아들 (1691-1681)

프랑수아즈 도비녜 - 맹트농 후작부인

갤러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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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치의 법칙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삼일치의 법칙(프랑스어: Règles du théâtre classique)은 프랑스 고전 연극에서 규칙중 하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시학(詩學)>에서 비극은 "가능한 한 태양의 1회전하는 기간"에 한정하고, 그 줄거리는 "쉽사리 기억할 수 있는 크기"로, 극중의 사건은 거의가 "동시에 실현하는 것을 모방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들은 그리스 비극들을 상연할 때의 외적 조건이었으며, 스카리졔 전후(前後)에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로 들어온 문예부흥기의 연극이론은 이를 엄밀한 규칙으로 해석했으며, 샤플랭 등 지식인은 삼일치 또는 삼단일(三單一)의 법칙으로서 프랑스 고전극에 도입했던 것이다.


이를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 부알로(Boileau)의 다음의 말이다.


“한 장소에서, 하루 중에 오직 하나, 완성된 일이 마지막까지 무대를 충만시킬 수 있도록 하라.”

 

— 부알로, 《풍자시》 제3

이것은 고전극의 중요한 요건이 되어, 1637년에 코르네유의 <르 시드>의 대성공 때 생겨난 '르 시드 논쟁'의 쟁점의 하나는 이 비극이 시간적·장소적으로 단일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리슐리외의 명을 받은 샤플랭이 '<르 시드>에 관한 아카데미의 의견'을 발표하기까지 문단과 사교계가 둘로 갈라지는 등의 소동을 빚었다.


즉 코르네유에게는 이러한 법칙이 부담이었으며 라신은 이를 편하게 소화시키고 있었다. 라신의 《베레니스》 서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비극에서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은 진실다움 이외는 없다. 몇 주간이 걸려도 일어날지 어떨지 알 수 없는 많은 일들이 하루 사이에 일어나는 연극이 진실답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 라신, 《베레니스》 서문



E10 – 수상록 (Les Sssais, The Essays) /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 1533~1592)

(출전: 동서고전 200선 해제3 / 반덕진 / 가람기획)


 <<나는 무엇을 아는가(Que sais je, What do I know)>> 등의 구절로 유명한 이 작품은 몽테뉴가 오랜 관직 생활을 청산하고 독서와 사색에 몰두한 후 부담없이 쓴 지혜의 서다. 이 책은 특정하거나 일정한 논리나 순서없이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랑 욕망 죽음 등의 문제에 대한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며 쓴 책으로, 스토이즘 회의주의 에피큐리어니즘을 거친 저자의 사상편력이 담겨 있으며, 그의 인간성 성찰은 후세의 도덕론자들에게 하나의 모티브를 제공했다.


a.고전여행과 명상 속에서 보낸 생애

 <<모두가 함께 행복해지지 않는 한 개인의 행복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한 몽테뉴는 르네상스 말기에 나타나 당시까지의 인류지성을 집약한 작가로 평가된다. 그는 변화가 심한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을 통해 가장 보편적인 인간상을 제시하여, 프랑스 르네상스의 후반기를 대표한 사상가였다. 

 몽테뉴는 프랑스의 페리고르 지방의 신흥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피에르는 젊은 시절에 프랑수아 1세의 이탈리아 원정에 종군하여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의 진수를 체득하고 귀국한 후 가세를 확장시키고 마침내 보르도 시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체험한 부친은 어린 아들의 교육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우선 갓 태어난 그를 허름한 농가에 양자로 보내 가난한 사람들의 세계를 이해하도록 했고, 4--5세가 되어 양자기간이 끝난 어린 아들에게 당시 지식인의 필수 코스인 라틴 어 교습을 위해 프랑스어를 전혀 모르는 독일인 가정교사를 초빙했다. 종들도 이 아이 앞에서는 라틴 어만을 사용하도록 엄명을 내릴 정도였다. 덕분에 몽테뉴는 6세 때 라틴 고전을 읽을 정도였고, 그때서야 모국어인 프랑스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13세 때 보르도 대학에서 철학과 고전을 공부했으며, 16세 때 툴루즈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21세부터 페리그 시의 어용금재판소의 참사가 되어 3년 동안 근무한 후, 그 재판소가 폐지되자 보르도 고등법원의 참의가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인생의 귀중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보에티와의 만남이 그것이다. 몽테뉴보다 몇 살 위인 그는 언어학자이자 문필가로서 금욕주의의 확고한 신념을 가졌던 반면, 몽테뉴는 아직도 자신에게 알맞은 역할을 모색하고 있는 젊은이였다. 두 사람은 독특하고 신비스런 방법으로 우정을 나누었고, 이런 교유는 심원한 인간관계에 대한 몽테뉴의 열망을 충족시켜주었다. 그러나 4년 후, 몽테뉴가 <<그가 곧 나다>>고까지 말했던 친구의 요절은 그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고, 그와의 우정이 지속되었더라면 몽테뉴는 수상록을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친구를 잃은 슬픔을 달래려고 2년간 숱한 연애를 했으며, 33세 때 결혼했다.

 36세 때 부친이 죽자 몽테뉴는 몽테뉴 가의 영주가 되어 막대한 재산과 넓은 영지를 물려받았다. 38세에 영지로 은퇴하여 대부분의 시간을 서재에서 라틴 고전 탐독과 명상으로 보냈다. 그후 10년(1570--1580)동안 <수상록> 1권과 2권을 쓰면서 시간을 보냈지만, 완전한 은둔생활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후 그는 곧 스위스 이탈리아 독일을 여행했으며, 여행 도중에 일찍이 부친이 역임했던 보르도 시장직에 선출되었다. 1585년까지 시장직에 재직하면서 구교와 신교간의 종교전쟁을 조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1588년에 <수상록>을 대폭 증보수정하고 제3권을 넣어 새로이 간행했다. 그후 그는 성에 은거하면서 독서와 <수상록> 가필로 여생을 보내다가 59세에 세상을 떠났다.


b. 몽테뉴가 살았던 시기의 프랑스

 몽테뉴가 살았던 시기의 프랑스는 정치적 종교적으로는 구교와 신교의 종교전쟁이 꼬리를 물었고, 사회적으로는 흑사병이 나돌았던 혼란의 시기였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도 몽테뉴는 냉철하고 객관적인 논리를 구사하여 시대적인 문제들을 하나씩 검토했다. 그는 <수상록>에서 모든 관점에서 문제를 검토하면서도 최종적인 해답은 유보했다.


   종교전쟁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새로운 예술을 낳았다면 북방 르네상스는 새로운 종교를 낳았다. 종교전쟁은 유럽의 여러 나라가 절대주의국가로 가는 도상에서 <종교>라는 이름으로 행한 정치분쟁이다.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그러하고, 프랑스의 위그노 전쟁과 독일의 30년전쟁이 유사한 성격의 전쟁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신교도인 위그노와 구교도와의 대립이 왕위계승 문제라는 정치적 대립과 얽혀 30여 년간에 걸친 내란으로 발전했다. 전쟁은 처음 프랑스 왕의 신교도 탄압에서 비롯되었으나 영국 네덜란드 스위스 독일이 신교도를 지원하고, 에스파냐 로마 교황군이 구교도를 원조하는 등 여러 나라가 간섭하여 국제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전쟁 말기에 왕위에 올라 부르봉 왕조를 개창한 앙리 4세가 <낭트 칙령>으로 신앙의 자유를 공인함으로써 내란은 종식되었다. 몽테뉴는 보르도 시장 재직시 양쪽으로부터 보르도 시를 보호하기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다했으며 그 덕분으로 보르도 시는 무사할 수 있었다.


   흑사병의 유행

 몽테뉴는 그 어려운 시장직이 거의 끝나갈 무렵 새로운 불행이 덮쳐왔다. 1585년 여름에 발생한 흑사병이 보르도 일대에 만연하여 당시 인구의 3분의 1이 죽었다. 교외지역에서 주거하고 있었던 사람은 모두 도시를 떠났고, 몽테뉴도 가족을 데리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피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페스트로 죽어가는 농민들과 그들의 죽음에 임하는 태도에 그는 깊은 감명을 받는다. <<그때 우리는 단순한 서민들에게서 불굴의 본보기를 보았다. 그들은 삶에 대한 욕망을 버리고 죽음을 의연하게 맞이했으며, 조금도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라고 그는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정신적 위기상황에서 인간에 대한 깊은 신뢰를 지닌 지혜로운 철학자 몽테뉴의 출현은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


c. 자아성찰의 서

 수상록은 1572년부터 1592년까지 약 20년에 걸쳐 집필되었다. 본서는 총 3권 107장으로 되어 있지만, 각 장 사이에 논리적 연결은 없다. 그리고 각 장의 제목은 반드시 그 장의 내용을 나타내는 것도 아니며 이야기의 실마리를 끌어내기 위한 구실이거나 혹은 이야기를 결말짓기 위한 경우가 많다.

 <수상록> 제1권에는 로마의 세네카 등 고전의 영향을 받아 자연적 이성에 따르고자 하는 스토아적인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제2권에서는 자기 성찰이 깊어지면서 스토아적인 경향을 떠나 피론(Pyrrhon)의 회의주의에 공감하게 된다. 그리고 제3권에서는 회의주의에 에피쿠로스 학파(Epicurus)적인 쾌락주의가 가미되어 소위 자연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띠게 된다. 결국 그는 쾌락주의적 자연주의에 접근하게 되어 소크라테스를 스승 중의 스승으로 삼기에 이른다.

 이 책에서 그는 보편적인 인간성의 탐구라는 전제 아래 키케로, 오비디우스, 호라티우스, 베르길리우스, 세네카 등 로마의 철학자들이나 문학가들의 말을 인용하며 자신의 성격 행동 체험 주장을 솔직하게 적고 있다. 그는 항상 흔들리고 기복이 심한 하나의 인간, 즉 자신을 책 속에 그려 봄으로써 자기 이상의 <보편적인 인간성>을 밝혀보려고 했다.

 독자에게 드리는 서문에서 <<내가 묘사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라고 밝히면서, 독자들이 자기를 여기 묘사된 그대로 자연스럽고 평범하고 꾸밈없는, 별 것 아닌 그를 보아주기 바란다고 당부하고 있다.


   제1권 

 제4장 <참된 목표가 없으면 우리의 영혼은 그 열정을 그릇된 목표에 쏟는다>에서는 <<바람은 울창한 숲이 그 진행을 가로막지 않으면 그 힘을 잃고 허공에 흩어진다>>는 그리스의 철학자 루카누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동요하는 영혼은 그 영혼에게 붙잡을 어떤 것을 제공하지 않으면 길을 잃고 방황하므로, 우리는 항상 영혼에게 그것을 목표로 삼고 그것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대상을 제공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제14장 <행불행은 대체로 우리의 견해에 의해 좌우된다>에서는 빈부는 각자의 견해에 달려 있으며 모든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행복 또는 불행하다고 생각하는가에 따라 그만큼 행복하게 살기도 하고 불행하게 살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욕구를 적절히 조절하고 현재의 자기에 만족하며, 자신의 재산이 늘어나든 줄어들든 그것에는 개의치 말고 자기의 마음에 맞는 일에 힘써 노력하는 사람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제19장 <우리의 행복은 사후가 아니면 판단해서는 안된다>에서는 <<어느 누구도 죽기 전에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항상 그의 마지막 날까지 기다려야 하며, 그의 장례식을 치를 때까지는 그의 행복을 판단할 수 없다>>는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그러면서 <<운명은 때때로 우리가 지나간 세월 동안 쌓아올린 것을 한순간에 뒤엎을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생애를 판단함에 있어 나는 항상 그가 마지막 순간에 어떻게 행동했는가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러므로 나의 생애의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는 나의 생애가 끝날 때 훌륭하게 행동하는 것, 즉 평온하고 태연하게 처신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제20장 <철학을 하는 것은 죽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는 제1권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장이다. 철학의 연구와 사색은 우리의 영혼을 우리에게서 끌어내어 우리의 영혼으로 하여금 육체 이외의 일에 분주하게 하며, 따라서 그것은 일종의 죽음의 연습이며 죽음의 모방이기 때문이다.

 제26장 <어린이 교육에 관하여>에서는 <<인간의 모든 학문 중에서 가장 어렵고 중대한 문제는 어린 아이의 양육과 교육이다>>라고 그의 교육론을 서술하고 있다. 교사가 혼자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학생에게 생각하고 말할 기회를 주고, 그 학생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어 소크라테스는 먼저 학생들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나서 자신의 생각을 말했던 점을 상기시키고, <<대부분의 경우 가르치는 사람의 권위는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 장애가 된다>>는 키케로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교육론은 후에 루소에게 연결되어 루소의 교육학 명저인 <에밀>에 영향을 주었다.

 제27장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참과 거짓을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제28장 <우정에 관하여>는 그와 보에티간의 우정을 말하고 있다. 제33장 <생명을 희생시켜서라도 관능적 쾌락을 피해야 한다>는 초기의 금욕주의 철학인 스토아 철학에 심취했었던 그의 심경을 보여준다.


   제2권

 제5장 <양심에 대하여>는 <<죄인의 가장 큰 형벌은 재판관인 자신으로부터는 결코 방면될 수 없다는 것이다>>라는 유베날리스의 말을 인용하고, <<양심이 우리를 공포로 채우듯이, 양심은 또한 우리를 확신과 신념으로 채운다>>고 서술하고 있다.

 제29장 <덕에 대하여>에서는 <<한 인간을 아주 공정하게 판단하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그를 관찰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기술했다.

 제31장 <분노에 관하여>에서 <<분노만큼 우리의 판단의 정확성을 감소시키는 감정은 없다 분노로 인해 우리의 맥박이 세차게 뛰고 우리가 흥분하고 있는 동안에는 우리는 꾸짖는 일을 뒤로 미루어야 한다. 우리의 분노가 가라앉아 평온해지면 사물은 정녕 다르게 보일 것이다. 분노에 싸여 있는 동안에는 명령하고 말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이 아니라 분노의 감정인 것이다>>라고 분노의 악영향을 경계하고 있다.


   제3권

 제3장 <3가지 교제에 대하여>는 우정 사랑 독서의 기쁨을 기술하고 있다. 우정을 나누고 싶은 사람들로는 점잖고 재능있는 사람들을 들고 있다. 그리고 아름답고 덕있는 여자들과의 사랑도 즐거움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영혼의 측면에서는 전자만큼 즐거움이 크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 교제에 있어서는 경계가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는데 자신이 젊은 시절에 경험했던 두 차례에 걸친 성병도 언급하고 있다. 세번째는 책과의 교제를 들고 있는데 <<책은 나의 인생행로에 변함없는 친구가 되어 나를 도와준다>>라며 독서를 예찬하고 있다.

 제8장 <대화의 기술>에서는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진리인 것처럼 보이는 말도 즉석에서 받아들여서는 안되며 한두 번쯤 그 말을 객관적인 시각에서 음미해보고 그가 무슨 의도로 그 같은 말을 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장에서 <<학문은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에 따라 왕의 홀이 되기도 하고 바보의 노리개가 되기도 하다는 언급도 나온다.

 고전지식의 집대성이라는 점에서 교양서로 환영받고 있는 이책은 근대의 합리주의 정신과 과학적 사고에 영향을 주었고, 그의 교육사상은 루소로 연결되어 한층 심화되었다. 또한 그 이후의 휴머니스트에게는 그의 인간성 성찰방법이 하나의 모델을 제시해주었다.


d. 몽테뉴의 지적 편력

 <<프랑스의 근대정신은 몽테뉴로부터 시작된다>>고들 말한다. 그것은 그가 <수상록>에서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추구한 다음 나아가 자기 한 개인을 초월하여 인간존재 그 자체의 본질을 예리하게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은 각기 인간의 본질을 완전히 갖추고 있다>>고 믿고 자기 성찰을 계속하여 현실의 구체적인 인간을 묘사함으로써 <보편적 인간>을 묘사하고자 했고, 현실적인 생의 관찰을 통해 생의 보편적 모럴>을 탐구하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몽테뉴의 위대한 모습을 보게 된다.


   금욕주의

 초기에 씌어진 에세이 중에는 도덕의 문제를 다룬 것이 많다. 제1권 14장 <<행불행은 대체로 우리의 견해에 의해 좌우된다>>, 19장 <<우리의 행복은 죽은 후가 아니면 판단해서는 안된다>>, 20장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죽음을 배우기 위해서이다>>, 39장 <<고독에 관하여>>, 42장 <<우리들 사이의 불평등에 대하여>> 등이 이 시기에 씌어진 것으로 이들 제목이 나타내고 있듯이 이들은 죽음 행복 불행 등 고대철학이 가장 일반적으로 다루었던 도덕적인 문제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당시 그가 공감하고 있던 도덕론은 스토아 학파의 도덕론이다. 그가 존경하는 친구 보에티와의 교제를 통해 깨끗한 청교도적인 그의 자세에 감명을 받고 스토아적인 극기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스토아 철학에 의하면 도덕의 본질은 <이성>으로써 정념을 억제하는 데 있다. 정신에 의해 육체를 지배하고 의지의 힘에 의해 인간의 욕망을 억제하면 초연한 <무감동상태<apatheia)>상태에 달할 수 있어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회의주의

 그러나 <영웅전>의 저자인 플루타크와 회의주의 철학자인 섹스토스 엠페이리코스의 저술을 읽은 후 스토아 철학으로부터 멀어진다. 플루타크의 <윤리론집>은 <플루타크 영웅전>과는 달리 범인을 다루고 있어, 그동안 그리스로마의 영웅들에게서 도덕적 교훈을 구하던 몽테뉴에게 자기 주위의 주변 인물들에게 시선을 돌리게 했다. 그래서 몽테뉴는 차츰 인간이란 얼마나 복잡하고 괴이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섹스토스 엠페이리코스의 <회의파 개설>을 읽은 후 사상의 전환기를 맞이한다. 피론<Pyrrhon>으로부터 시작된 회의파 철학은 <사물은 본디 불확실한 것이므로 사물에 대한 우리의 판단에는 항상 부정과 긍정의 양론이 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일 뿐 절대적 진리를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물에 대해 부정도 긍정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몽테뉴는 <<나는 무엇을 아는가?<Que sais-je?>>>라는 형태로 표현했다.


   자연주의

 그러나 제 3권에 들어오면서 자연의 행복에 관심을 갖게 된다. 자연의 행복 중에서도 몽테뉴가 가장 중시한 것은 육체적 쾌락이다. 그는 한때 스토아 학파의 영향을 받아 <생명을 회생시켜서라도 쾌락을 피할 것>에 찬성했지만 그후 인간의 자연적 본성에 기초를 둔 육체적 쾌락을 피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임을 깨달았다. 육체와 정신은 하나인데 이것을 둘로 나누어 어느 한 편에 편중하기 때문에 오류가 생기며, 자연의 가르침에 따르는 것이 인간으로서 올바르고 행복하게 사는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적 편력을 거쳐 그는 점차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갔으며 이러한 자기 묘사가 <수상록>의 중심과제가 된다. 그에게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새로운 의미와 중요성을 지니고 다가왔다. 자기를 묘사한다는 것은 자신을 객관화하고 고정화하는 일이다.

몽테뉴는 <수상록>을 쓰면서 자기를 관찰하고 연구검토함으로써 이제가지 알지 못했던 자기를 발견하고 새로운 자아를 창조해갔다. 이런 의미에서 <수상록>이 그를 만들고 그가 <수상록>을 만든 상호작용이 행해졌다고 할 수 있다. 자기를 묘사하고 자기를 아는 몽테뉴에게는 훌륭하게 살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 되었던 것이다.


e. 비판

 그의 주된 관심사가 항상 자기라는 소우주를 완성해가는 것이었기에 일부 비판자들은 그를 <이기주의자>라고 몰아세우기도 한다. 몽테뉴의 도덕이 개인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면이 있음은 부인할 수 없지만, 도덕의 원리를 실제의 행동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수상록> 전체를 보면 그의 사상과 행동의 기저에는 개인주의를 훨씬 초월한 인간존중을 바탕으로 한 박애주의와, 회의주의로부터 얻은 합리주의 정신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수상록>은 개인을 초월한 넓은 의미의 인간연구서이며, 현대의 살아 있는 고전이다.



E09 –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Gargantua et Pantagruel) / 라블레(F. Rabelais, 1494~1553)

(출전: 동서고전 200선 해제3 / 반덕진 / 가람기획)


 16세기 프랑스 인문주의자인 라블레가 지은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등 전 5권은 거인 가르강튀아와 그의 아들 팡타그뤼엘 및 동료들의 모험을 다룬 익살스럽고 풍자적인 이야기다. 르네상스의 정신을 구현한 이 우스꽝스러운 패거리들의 여행과 모험을 통해 작가는, 중세적인 어리석음과 미신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으며, 교육 정치 전쟁 등 시사적인 문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내용이 외설스럽고 반종교적이라 하여 이 작품은 금서가 되었고 작가는 당국으로부터 탄압을 받기도 했다.


a. 다양한 경험과 교양을 갖춘 휴머니스트

 몽테뉴와 더불어 16세기 프랑스 르네상스 문학의 대표자인 라블레는 풍부한 익살과 기지로 새로운 시대를 연 풍자작가이자 인문주의자이다. 투렌 지방의 부유층 집안에서 태어나 1520년에 수도사로 수도원에 들어가 철학신학을 공부하는 한편, 당시 이단으로 간주되던 고대 그리스 어를 독학하고,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작품을 라틴 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527년경 수도생활을 그만두고 재속신부가 된 뒤 파리 등지에서 의학공부를 시작했다. 1530년 몽펠리에 대학 의학부에 등록한 그는 곧 의사 자격시험에 합격하고, 곧 그 대학의 의학부 사상 최초로 고대 의서를 그리스 원전에 근거한 강의를 했다. 1532년 리옹에 가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격언이 수록되어 있는 <히포크라테스의 격언집>과 갈레노스의 <육아법>을 직접 편집했다. 그후 리옹 시 시립병원 의사에 임용되었고, 1537년 몽펠리에 대학에서 의학 박사학위를 받고 사체를 이용한 해부학을 강의했다.

 이즈음 네덜란드의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를 사사하기도 했고, 1532년(38세) 저자를 알 수 없는 통속소설 <거인 가르강튀아의 위대하고 귀중한 연대기>의 성공에 자극받아 첫번째 장편소설 <제2서 팡타그뤼엘>을 가명으로 출판했다. 이 소설은 그의 이후 작품들보다 길이가 짧고 지적 깊이도 부족하지만, 그때까지 프랑스의 비슷한 문학 장르에서도 유사한 문학작품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제2서>에서 민중적인 웃음과 인문주의 및 스콜라 철학신학을 적절히 이용하여 프랑스어 산문을 구사했다. 이 책은 대체로 호평을 얻기는 했어도, 인문주의자들 중에는 라블레가 경솔하게 학자의 정도에서 벗어났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고, 파리 대학 신학부의 한 교수는 이 책을 <추악한 책>이라고 혹평했다.

 이후 그가 새 작품을 세상에 내놓을 때마다 신학부는 발매금지 처분을 내렸고, 그는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다행히 인문주의자이자 종교적 관용적 정책의 추진자였던 국왕 측근인 장 뒤벨레(Jean du Belly) 형제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이들과의 교유는 그의 시야를 정치 문화 종교 사회 각 방면으로 넓혀주는 기회가 되었다. 이제 그는 다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갖춘 휴머니스트로서 예리한 비판정신의 소유자가 되었던 것이다.

 제2서가 호평을 받자 그 전편에 속하는 <제1서 가르강튀아>(1534)(40세)를 저술했다. 이를 <제2서 팡타그뤼엘>과 비교해보면 그 차이는 분명하고, 이 제1서에서 그는 참된 자기를 발견했다고 하겠다.

 1530년대 후반 이후에는 칼뱅주의 성립과 발전에 따르는 이단에 대한 탄압이 격화된 시기였다. 복음주의 신앙을 지키면서 공식적인 문화의 경직과 기만을 풍자한 라블레는 당연히 당시 교회로부터 위험 인물시되었으며, 그가 장대하게 표현한 생의 찬가는 교조주의화한 칼맹 파의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제3서 팡타그뤼엘>(1546)(52세)과 <제4서 팡타그뤼엘>(1552)(58세)은 작가의 원숙함과 동시에, 이러한 시대를 꿋꿋하게 살아나간 그의 힘들고 어려웠던 생애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가 투옥되었다는 소문이 나돈 직후 그는 죽었다. 제5서는 그의 사후인 1564년에 출판되었다.


b. 프랑스의 르네상스와 라블레

 고전 문화의 부흥을 매개로 한 <인간과 세계의 재발견>이라 할 수 있는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활짝 개화했다. 이렇게 찬란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를 가장 먼저 그리고 적극적으로 수용한 나라는 프랑스다. 그리스의 문학예술이 로마를 거쳐 이탈리아에 전수되고 이어 프랑스에 영향을 주었다.

 프랑스 인들은 이탈리아에 활짝 핀 문학과 예술, 풍요로운 삶 등 고대문화의 향기에 심취했다. 수차에 걸친 이탈리아 원정에서 그곳의 찬란한 문화에 매혹된 프랑스 인들은 문학과 예술의 수입에 열을 올렸고, 수많은 건축가 조각가 화가 학자들을 초빙하여 프랑스 문예부흥기를 이룩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세상을 떠난 것도 프랑스였다. 더욱이 프랑수아 1세가 세운 <왕립학사원>에는 신학문에 매료된 젊은 학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본격적으로 고전을 연구하기에 이르렀고, 이탈리아처럼 라틴 어와 그리스 어를 배우는 것이 학자들의 덕목이자 교양의 필수조건이 되었다.

 이탈리아 문예부흥은 특히 조형예술에서 빛났으나 프랑스의 문예부흥은 문학방면에서 진가를 발휘했는데, 16세기 전반은 라블레, 후반은 몽테뉴가 대표했다. 의학을 공부한 수도성직자로서 고전연구에 몰두한 라블레는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에서 <<하고 싶은 대로 하라>>라는 단 하나의 규칙으로 평등하고 자유로운 젊은 남녀들이 오직 즐거움만을 위해 생활하는 이상향을 그렸다.

 라블레의 사상은 이와 같이 현세적인 쾌락과 행복을 중시하는 인간적인 본능에 도덕적 기준을 두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존재가치, 즉 인생의 의미가 인간중심의 판단기준에 따라 사고되고 평가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깔려 있다. 따라서 그의 우화적인 연대기가 시사하는 바는 인간의 자유와 자아실현을 막는 어떠한 제도나 관념도 타파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가치있는 것은 인간의 자연성, 즉 본능적으로 안락하고 행복하고자 하는 인간성의 존중이다. 그것은 현세적인 삶의 향유뿐만 아니라 무한한 자유와 지식에 대한 욕구,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정신으로 이어진다.

 또한 라블레는 이탈리아의 휴머니스트들은 물론, 에라스무스 등과 교유하며 삶의 지혜와 지식을 배워 교화함으로써 프랑스에 르네상스의 불길을 당긴 진정한 선구자가 되었다.


c. 호방한 인물 내세워 중세적 세계관 비판

 라블레의 대표작인 이 작품은 모두 5서로 구성되어 있는데, 거인 가르강튀아와 그의 아들 팡타그뤼엘 및 동료들이 벌이는 모험을 다룬 익살스럽고 풍자적인 이야기다. 이 작품에 앞서 1532년 거인 가르강튀아에 관한 작가 미상의 책이 리옹에서 간행되었다. 이 책이 인기를 얻게 되자 라블레는 그것과 같은 책을 쓰려는 계획 아래 현재 제2서로 일컬어지는 <팡타그뤼엘>을 발표했다. 이것의 성공으로 팡타그뤼엘의 부친 가르강튀아의 이야기인 <제1서 가르강튀아>를 간행했고, 이어 3서 및 4서가 간행되었으며 5서는 그의 사후에 출간되었다.


   제1서

 거인국의 왕 그랑그제의 왕자 가르강튀아는 태어나면서 <응아>하고 우는 대신 <술 줘>하고 운 호걸이다. 일정한 나이가 되자 가정교사에 의해 그의 교육이 시작되었다. 최초의 두 교사는 중세풍의 구식교육을 하고 있었다. 그 결과 가르강튀아는 머리가 이상해져 바보가 되어버렸다. 부왕은 화가 나서 아들을 포노크라트(<맹렬한 공부>의 뜻)씨에게 맡겼다. 그는 가르강튀아를 파리로 데려가 우수한 신식교육을 실시했고, 가르강튀아는 점차 그의 총명함을 되찾았다.

 그 사이에 그의 고국은 이웃 나라 왕 피크로콜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가르강튀아는 부왕의 부름을 받고 급히 귀국했다. 이 거인 왕자 앞에는 피크로콜의 포탄 따위는 하루살이 정도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뛰어난 역할을 한 것은 가르강튀아의 신하 중 한 사람으로서, 호탕한 성격에 몰골은 괴이하게 생긴데다가 끝없는 먹보인 장 신부였다. 전쟁에서 승리한 가르강튀아는 포로를 방면하고 승리의 주역인 장 신부에게 테렘 수도원을 선물했다. 수도원에는 훌륭한 용모와 명문 가문의 청춘남녀들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행하라>>라는 유일한 계율에 따라 공동생활을 하고 있는데, 작가는 수도원을 유토피아(이상향)로 묘사하고 있다.


   제2서

 가르강튀아는 나이 48세에 아들을 낳아 팡타그뤼엘(<목마르다>의 뜻)이라 이름지었다. 이 아이는 어려서부터 대단한 식욕과 날카로운 지성을 보였다. 그는 각지의 대학을 편력한 후 파리에 머물러 살게 되었다. 거기서 교활하고 겁이 많은 파뉴르즈(<뛰어난 명인>의 뜻)를 신하 겸 친구로 사귀게 되었다. 갑자기 고국이 디프소드 사람들의 침략을 당하게 됐다는 소식이 전해져 팡타그뤼엘은 디프소드 정벌을 위해 출전하게 되었다. 팡타그뤼엘의 용기와 능력(목마르게 하는 능력)을 능가하는 파뉴르즈의 활약이 그려진다.


   제3서

 이 3서는 내용에 있어 가장 심오한 부분이다. 여기서는 팡타그뤼엘이 거인의 특성을 잃고, 스토아 철학과 크리스트 교의 교리를 따르는 당대의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구현되고, 파뉴르즈는 이제 검은 것을 흰 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솜씨를 갖게 된다. 파뉴르즈는 결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망설인다. 아내에게 배신당하거나 얻어맞지는 않을까 하고 생각한 후, 결국 파뉴가 결혼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팡타그뤼엘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그 문제를 놓고 토론을 벌인다. 그 토론은 극히 반여성적이어서 여성을 비웃는 결혼론이 전개된다. 그러나 결국 결정적인 해답은 얻지 못하여 작중인물들은 <행운의 신> 디브 브티유의 신탁을 구하기 위해 배를 타고 끝없는 여행길에 나선다.


   제4서

 제4서는 팡타그뤼엘과 파뉴르즈의 대항해에 대한 묘사로 시작된다. 유명한 <파뉴르즈의 양>의 이야기며, 폭풍을 만났을 때의 파뉴르즈의 겁 많은 본성 폭로, 그리고 여러 가공의 섬들을 항해하면서 벌어지는 풍자로 독자들을 웃기고 있는데, <대항해 시대>의 반영으로서 정확한 지식과 자료를 제법 갖추고 있다. 여기서는 사법관과 구교도 및 신교도 등이 풍자와 독설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제5서

 끝없는 편력 끝에 그들은 마침내 디브 브티유를 만나게 되고 그에게서 신탁을 받게 되는데, 그것은 단 한마디 <<마셔라(Trinch)>>였다. 여기서 이 신탁을 두고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파뉴르즈와 장 신부는 <향기로운 술을 마셔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진리를 터득한 <팡타그뤼엘 주의자들>에게는 그것이 <지식의 온갖 샘물을 마셔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즉, 텔렘 수도원의 유일한 법규인 이 <<마셔라>>라는 말은 결국 무지는 불행의 원인이므로 항상 사실에 직면하여 그것을 알기 위해 힘쓰라는 것, 지식이 확대됨에 따라서 인간의 행복과 사랑은 심오해지고 확대된다는 뜻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d. 프랑스 사실주의의 원천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보아 구성이나 통일에 허술한 점이 많으나 작중인물인 거인 팡타그뤼엘의 자유분방한 삶의 태도와 인간에 대한 신뢰, 그리고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라블레를 르네상스 초기 제일의 휴머니스트로 만들고 있다.

 우화적인 황당무계한 모험, 다양한 직업인들을 등장시켜 사건에 대한 그들의 의견을 개진함으로써 인간의 과오를 객관화시키는 방법, 그리고 결론을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고 신탁을 구하러 떠나는 팡타그뤼엘의 지혜에서 더욱 큰 호소력을 느낀다. 온갖 망상과 착오와 실수로 점철된 그의 파란만장한 삶의 모험과 파노라마는 마지막 장에 이르러 거인국에 도착함으로써 마무리된다. 그곳에서의 신탁은 허망하게도 단 한마디 <마셔라>였다. 그것은 인간적인 본능에 충실하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사랑

 그의 작품을 분석해보면 일정한 형식에 의해 다듬어지지 않고 내용도 매우 복잡 다단하다. 그래서 이 작품의 전편에 흐르는 작가정신을 포착하기도 쉽지는 않다. 그러나 우선 감지되는 것은 작가의 인간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감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살았던 작가는 인간을 한없이 신뢰하고 행동하는 인간의 능력에 대해 무한한 가능성이 있음을 믿었다.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의 어린 시절의 교육을 통해 느낄 수 있는 라블레의 교육관도 인간신뢰에 기초를 두고 있고, 그의 도덕과 역시 어디까지나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인 것이다.


   자연에 대한 사랑

 작가가 묘사하는 이상사회인 텔렘 수도원의 유일한 계율은 <<멋대로 행하라>>였다. 그에게 있어서 악은 자연을 훼손하고 자연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여기에 그의 작품을 지탱하고 있는 또 하나의 기둥은 자연애이다. 라블레는 그 작품 속에서 자연에 어긋나는 것과 자연을 훼손하는 것에 대해서는 집요하게 공격한다. 종교가 강조하는 도덕, 카톨릭의 금욕주의, 신구양교의 옹고집, 금식 등이 공격의 대상이 된다. 이와같은 인간성과 자연에 대한 찬미 그리고 그것에 거슬리는 것에 대한 맹공격을 펼침에 있어 그의 사상은 사실주의로 표현되었다. 그의 사실주의는 묘사할 대상물을 오밀조밀 관측하는 소심한 사실주의가 아니라, 대상이 지니는 생명력의 자유롭고 완전한 묘사를 의미한다. 예술에서 라블레의 흥미를 끈 것은 미보다는 에너지다.

 작가는 외관상 극히 중세적이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에 르네상스 시대의 근대성을 한껏 가미하여 이것으로 하여금 이 시대 소설의 최대 걸작 중 하나가 되게 했다. 아울러 이 작품에 넘치는 인간성, 거짓에 대한 공격, 진리탐구 정신, 그리고 건강하면서도 호탕한 웃음의 정신은 중세적 세계관을 대담하게 비웃었다. 당시 종교적인 사상대립이 심화되고 이단에 대한 탄압이 심화되는 와중에 집필된 이 작품은 노골적인 자기 주장 대신 정교한 풍자와 은유가 넘치는 프랑스 르네상스의 봄과 가을을 표현한 대작이다.

 한편 라블레의 작품들은 여러 학문, 즉 스콜라 철학과 신학, 그리고 의학 및 법학을 섭렵한 사람의 작품이다. 그는 살아 있을 때 이미 인문학에 조예가 깊다는 평판을 얻었다. 그는 종교적으로 일관성을 갖고 있지는 않았으며, 그의 작품들은 금서목록에 올라가 프랑스 밖에서만 출판될 수 있었다. 그의 작품들은 후세의 프랑스 작가들, 예를 들면 볼테르와 발자크 등은 물론 스위프트, 킹슬리와 같은

외국작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E08 – 음향과 분노 (The Sound and the Fury) / 포크너(W. Faulkner, 1897~1962)

(출전: 동서고전 200선 해제3 / 반덕진 / 가람기획)


 이 작품은 20세기 초 미국 남부 귀족사회의 명문인 톰슨 가의 붕괴를 조이스의 <의식의 흐름>의 영향을 받은 포크너가 그 특유의 기법으로 그린 소설이다. 혈육지간의 서로 다른 관점을 지닌 네 사람의 화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수법으로 구성된, 인간의 심층심리를 고도의 기법으로 파헤친 작품으로 난해하지만 읽어 낸 데 대해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감동을 준다.


a. <잃어버린 세대>의 작가

 헤밍웨이와 함께 20세기 미국의 대표적 작가로 꼽히는 포크너는 미국의 미시시피 주 뉴올버니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1902년 미시시피 주립대학이 있는 옥스퍼드 시로 이사하여 생애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냈다. 그의 집에는 디킨스 등을 비롯한 영국 고전이 상당히 소장되어 있었다. 그는 정상적인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하는 대신 닥치는 대로 독서를 하여 상상력을 키워 나갔다. 당시 이웃집 소녀인 에스텔 올드햄과 사랑에 빠져 결혼할 생각으로 할아버지의 은행에 근무했다. 그러나 에스텔은 후에 다른 사람과 결혼하여 동양으로 떠났다.

 한편 또 다른 이웃이었던 필립 스톤이 그 가족의 법률고문이 되면서 그의 독서에 조언을 해주었고, 옥스퍼드에 알려져 있지 않던 상징주의나 모더니즘 전통의 많은 책들, 예를 들면 보들레르, 베를렌, 말라르메 등의 작품을 소개해 주었다. 그는 또한 제임스 조이스, 오스카 와일드, 엘리어트 등의 글도 읽었다.

 1918년 그 역시 헤밍웨이 등 <로스트 제너레이션> 작가들처럼 1차대전에 참전하나 부상을 입고 중위로 명예 제대했다. 제대 후에는 미시시피 대학에 특별 학생으로 1년간 다녔고, 뉴욕의 서점에서 잠깐 근무한 적도 있으며, 다시 옥스퍼드로 돌아와 목수일도 했다. 마침내는 대학교 우체국장도 하며 2년간 여러 가지 잡무에 종사했다. 그가 교내 우체국에서 사퇴하던 1924년(27세)에 그의 대표적 시집 <대리석의 목신>을 간행했다.

 그는 1925년 유럽 여행중 뉴올리언스에서 6개월간 체류하면서 당시 명성을 날리던 셔우드 앤더슨과 친교하게 되었고, 그의 협조를 얻어 뉴욕에서 그의 처녀작 <병사의 보수>를 간행했다. 그의 문체는 세기말적 사조에서 큰 영향을 받고 있었는데, 그 당시 미국에선 이 사조가 아직도 무르익지 못한 시기였다. 제2의 작품은 <모기>인데, 말보다는 행동이 더 중요함을 강조한 풍자소설이다.

 1929년(32세) 포크너는 <사토리스>를 씀으로써 작가의 위치를 차지한다. 이 작품은 사토리스가 혹은 포크너가의 조상 때부터 자기세대에 이르기까지의 전설적 얘기이며, 스토리의 중심은 젊은 베이야드인데, 소위로 전쟁에 참여한 로스트 제너레이션의 한 사람이다. 이 작품은 그후 그가 쓴 여러 작품의 원천이 된 책이다.

 그해 6월 결혼에 실패한 후 중국에서 돌아와 있던 지난날의 연인인 에스텔 올드햄과 결혼하여 생활에서도 안정을 찾았다. 그의 대표작들은 대개 그 시기에 창작되었다. 10월에는 그의 대표작 <음향과 분노>가 간행되었고, 1930년에는 <성단>을 간행했는데 이 소설은 영화화되어 절찬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포크너는 본국에서보다 프랑스에서 더 호평을 받았다. 말로는 <성단>의 서문을 썼으며, 사르트르는 포크너에 관한 평론을 썼다. 1946년(49세)엔 포크너 연구가 시작되고 잡지마다 포크너에 관한 평론이 실리게 되었으며 1950년(53세)엔 노벨 문학상이 수여되었다. 그는 노벨상 수상연설에서 자멸의 위기에 처해 있는 세계에서 인간이 살아남으리라는 예언의 유명한 연설을 했다. 그는 퓰리처상을 비롯하여 여러 상을 받았다.

 그는 헤밍웨이보다 1년 뒤에 죽었고, 그의 죽음은 미국소설의 새로운 국면을 만든 한 세대가 사라졌음을 의미했다.


b. 요크나파토파의 신화

 포크너는 그의 작품의 난해성으로 인해 독자들에게 무책임한 선동가, 정신 착란자, 심지어 영어를 마스터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 이는 그의 작품이 무지와 악덕퇴폐에 대한 강한 흥미로 이루어져 있으며, 될 대로 되어 버린 남부사회에 대한 환멸절망을 반영한 정신착란 자살 살인을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품의 계보를 이루고 있는 요크나파토파 신화에 관해서는 보충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그의 작품에 나오는 요크나파토파 고을은 미시시피 주의 북부에 위치하고 있는 가공적이며, 실제적인 지방이기도 하다. 그는 이 북부 미시시피의 지리와 주민과 연혁 등에 관한 상세한 묘사를 하고 있는 동시에, 또한 자기의 작품 속에서 가감변형하여 요크나파토파란 군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포크너가 불가사의한 남부의 실상을 묘사하려고 설정한 요크나파토파 지방을 이해하려면 <사토리스>에서 1951년에 발표한 <수녀를 위한 진혼가>에 이르기까지 9편의 장편과 단편 30여 편을 읽어야 그 일관된 주제, 그 유기적인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 

 요크나파토파 신화에 나타난 내용을 주제상으로 분류하여 다섯으로 나눌 수가 있다. 그 첫째는 남부의 전설적인 얘기, 즉 인디언의 생태와 남북전쟁의 이야기들이며 이것을 나타낸 작품은 <수녀를 위한 진혼가><모세여, 내려가 주십시오><불멸의 인간상><압살롬! 압살롬!> 등이다.

둘째는 남북전쟁 이후 구세대의 몰락과 사회변천을 묘사한 것으로 <음향과 분노>와 <사토리스> 등이 이에 속한다. 셋째는 백인의 빈한한 생태와 그들이 강인하고 무지하고 교활한 점을 묘사한 것으로 <내가 누워서 죽을 때><마을><8월의 햇빛> 등이 그것이며 넷째는 현 남부사회의 퇴폐상을 그린 것으로써 <성단>과 <8월의 햇빛>등이 그것이다. 마지막으로 남부사회의 제반문제 근저에 흐르는 흑인문제를 다룬 것이다. 이에 속하는 작품으로는 <무덤으로의 침입자> <모세여. 내려가 주십시요><8월의 햇빛>등이 있다. 이러한 주제를 가지고 요크나파토파 군을 설정하여 작품을 써낸 그의 의도는 분명치 않지만, 그중 하나는 자기의 고향에 대해서 내린 예리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무지몽매한 흑인들에 대한 백인들의 학대와 비인간적인 노예 봉건제도에 대한 비판이 그것이다. 그 결과로서 나타난 남북전쟁, 이에 따르는 봉건제도의 파괴 등에서 우리는 포크너의 역사관 내지는 그의 남부(과거의)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그렇게 단순치 않다. 이러한 비판적 태도외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남부의 자기 고향에 무조건 애착심을 갖는다는 점이다. 남부인의 긍지와 향수를 풍기는 대화는 그의 작중인물의 얘기 속에 흔히 볼 수 있다.


c. 미국 남부 명문가의 몰락과정 묘사

 미국 남부를 배경으로 하여 명문 컴프슨 가의 몰락과정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3부는 컴프슨 가의 3형제들의 독백을 통해 가족사가 전개되고, 마지막 부분은 작가 자신의 객관적 묘사로 마감하는 새로운 기법을 선보이면서 많은 인물들을 통해 미국 남부의 풍속을 담아냈다.


   제1부

 1928년 4월 7일. 컴프슨 가의 셋째아들인 33세의 백치 벤지의 머리에 본능적으로 떠오른 컴프슨 가의 몰락과정이 그려지고 있다. 여기서 벤지의 의식은 갈팡질팡하여 독자에게 혼란을 준다. 남부농원의 귀족인 컴프슨 가는 붕괴의 위기를 맞고 있다. 비록 세 아들과 외동딸이 살고 있기는 하나, 집안은 몰락할 대로 몰락해 버린 뒤였다. 벤지는 어렸을 때부터 백치였는데, 흑인 하인인 러스트의 보호를 받으며 골프를 구경하러 갔다가, 화원의 울타리에 있는 대못에 옷이 걸려 위험에 직면했을 때 러스트가 구출해준 옛날을 회상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의식에서 일어나는 현실의 모습과 지나간 과거의 일들을 하나씩 회상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그의 회상 속에서는 부유한 남부의 귀족인 컴프슨 가가 몰락해가는 모습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제2부

 1910년 6월 2일. 제1부보다 18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가서 벤지의 큰형 퀘틴의 움직임과 그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여러 가지 생각, 주로 여동생 캐디에 관한 일들이 <의식의 흐름>의 서술법에 따라 묘사되고 있다. 특히 하버드 대학생인 장남 퀘틴이 강에 투신자살하기까지의 의식이 서술되고 있다. 자살하기 직전까지 퀘틴의 마음을 괴롭히던 것은 여동생 캐디였다. 그녀는 성도덕을 무시한 채, 15세가 되던 때부터 여러 남자를 거쳐 임신을 하게 되었고, 결혼식 한달전에 이미 사생아를 지닌 채, 이를 숨기고 돈 많은 은행가인 허버트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린다. 퀘틴은 어려서부터 누이동생을 매우 사랑했고, 이러한 동생의 행동을 미워하면서도 근친상간의 죄를 짓지나 않았는가 하는 마음의 가책까지 느끼고 있다. 그는 복수하려고 상대 남자를 불러냈으나 그 남자를 죽이지 못하고 결국은 자신이 강으로 뛰어든다.


   제3부

 1928년 4월 6일. 이 부분의 주인공은 제이슨으로 현재의 컴프슨 가는 퀘틴의 동생인 제이슨이 맡고 있었다. 그는 마을의 작은 가게에서 일하는 점원으로 병을 앓는 어머니와 동생 벤지, 캐디의 사생아인 퀘틴(자살한 퀘틴과 동명), 그리고 오래 전부터 컴프슨 가에서 일해오던 흑인 하인 딜시와 함께 살면서 갖은 생활고를 겪고 있다. 그런데 제이슨 4세는 그들 형제중에서 가장 이기적이다. 그는 자라면서 점점

퀘틴의 성격을 닮아가는 조카 퀘틴을 보며, 자신의 신상에 무슨 해가 미칠 것 같아 매우 불안하다. 제이슨은 사생아 퀘틴에게 무자비하며 캐디가 보내는 양육비까지 가로채 저축한다. 그러나 퀘틴은 그 돈을 훔쳐내어 곡마단 패와 달아난다. 제이슨은 뒤를 쫓아 갔으나, 결국 찾지 못하고 돌아오고 만다.


   제4부

 1928년 4월 8일. 제1부의 하루 후의 일이다. 이 부분은 등장인물을 통해서가 아니라 작가 자신의 눈으로 사건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그 집의 흑인 하녀 딜시를 중심으로 한 객관적인 묘사로 일관되는데, 이 흑인 할머니는 작가가 찬미하는 미덕을 구현하고 있는 인물로서, 그녀의 인내와 애정은 자기 중심적인 컴프슨가 사람들과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 동정심이 강하고 책임감이 있으며 건전한 윤리관을 가진 인물이다. 1928년 4월 28일 부활절 예배를 보는 것으로 이 작품은 마무리되고 있다.


d. 복잡한 실험적 기법의 난해한 명작

 작가는 이작품에서 처녀성을 잃고 집안의 체면을 위해 다른 남자와 결혼했으나 이혼당하고 거기다가 아이까지 빼앗기고 친정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외동딸 캐디의 생활방식을 축으로 남부 명가의 붕괴를 선명하게 그리고 있다. 이 작품에서 사용된 <의식의 흐름>과 <내적 독백> 등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복잡한 실험적 기법을 사용한 것으로서 포크너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옛 전통을 수호하려는 퀘틴과 컴프슨 부인, 산업주의에 편승하여 물질주의를 지향하는 제이슨, 애정의 손길이 결핍된 환경에서 자란 캐디 등 남부인들의 모습을 통해 남부의 산업화에 따르는 전통적 가치관의 붕괴와 새로운 절대적 가치관의 부재상태를 그리고 있다.

 한편으로 이 작품은 지극히 난삽하고 어려운 작품이다. 포크너는 이 작품에서 제임스 조이스 류의 <의식의 흐름>기법과 프로이트 심리학 등을 원용하여 당시로서는 극히 독창적인 창작 기교를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4개의 장이 시간적으로 서로 뒤엉켜 있고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이 인물들의 움직임과 함께 어지러울 정도로 교체되므로 같은 수법을 쓴 어느 소설보다도 동적이다. 뿐만 아니라 각 장의 주인공들은 백치, 자살 직전의 청년, 물욕적인 30대 남자 등 성격과 상황이 전혀 다르므로 각각 사용하고 있는 문체나 기교에도 상당한 차이가 있으며 각기 독특한 색조로 구분해서 묘사되고 있다.

 앙드레 지드는 이 작품을 <<20세기 초 미국 남부 귀족사회의 명문인 컴프슨 일가의 몰락과정 속에 혈육지간의 서로 다른 관점을 지닌 네 사람의 화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수법으로 구성된 인간의 심층심리를 고도의 기법으로 파헤친 난해한 명작이다>>라고 평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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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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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세대(영어: Lost Generation, 로스트제너레이션)[1] 는 일반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 후에 환멸을 느낀 미국의 지식계급 및 예술파 청년들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상실세대(喪失世代), 길 잃은 세대라고도 한다.


목차  [숨기기] 

1 직접적 계기

2 배경

2.1 제1차 세계대전 이후

2.2 획일화

2.2.1 금주운동

2.2.2 쿠클럭스클랜

2.2.3 기독교 근본주의

3 특징

4 이 시기의 작가와 대표적 작품

5 비트 제너레이션 [ beat generation ]

6 같이 보기

7 각주

8 참고문헌

9 외부 링크

직접적 계기[편집]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그의 작품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The Sun Also Rises》(1926)의 서문에 "당신들은 모두 잃어버린 세대의 사람들입니다(You are all a lost generation)"라는 거트루드 스타인이 한 말을 인용한 데서 유명해졌는데, 오늘날에는 스타인이 어떤 프랑스의 자동차수리공으로부터 들은 말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청년 지식인들이 미국의 실업사회(實業社會)를 혐오하여 대거 파리에 건너가서 쾌락적이고 허무적인 생활을 보낸 사실로 보아서는 이 명칭이 헤밍웨이 작품 이후 유명해진 것도 무리가 아니다.


배경[편집]

제1차 세계대전 이후[편집]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경제적인 번영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20년대 미국이 누리는 경제적 번영은 전쟁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국내의 상황으로 상당한 기술의 발전이 있었으며 그 기술이 경제적 번영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 시기에 두드러진 변화는 자동차 보급의 확산이었다. 자동차는 당시 미국의 번영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었을 뿐 아니라 개인의 신분의 척도 역할을 하였다. 특히 사회적인 측면에서 20년대 경제적 번영 그리고 그로 인한 물질주의의 우세는 개인들의 획일화 또는 표준화를 가져왔다.


획일화[편집]

그리고 이런 물질주의와 획일화는 쿠 클럭스 클랜(KKK), 금주운동, 교조주의인 기독교 근본주의운동의 형태로 표면화되었다.


금주운동[편집]

미국에서 금주 운동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이미 17세기 청교도 사회에서는 엄법(Blue law)을 통해 금욕과 절제를 강조하였고 프랭클린의 13가지 덕목에서도 이는 매우 중요한 삶의 기준이었다. 하지만 이민이 급증하면서 술의 제조와 판매는 급속히 확산되었다. 따라서 금주운동은 이민 배척 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쿠클럭스클랜[편집]

또한 남북 전쟁이후 남부사회를 중심으로 확산된 쿠 클럭스 클랜은 20년대 보수주의와 전통주의의 물결을 타고 확산되었다.


기독교 근본주의[편집]

특히 획일화의 경향은 당시 근본주의 신앙 운동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더 이상 미국은 정착 초기의 청교도주의를 유지할 수 없었고, 새로운 이민의 증가는 새로운 신앙들의 유입을 의미하였는데, 기독교 근본주의는 점점 미국 사회의 종교적인 동질성이 사라지고 있다는 위기의식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아닌 감성과 무의식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었으며, 그런 관심의 확산은 경제적 발전과 발맞추어 새로운 혁신의 바람을 일으켰다. 즉 20년대는 새로운 혁신의 바람이 불어 닥친 '재즈 시대'(Jazz Age)였다. 특히 흔히 '길 잃은 세대'라고 일컬어지는 일군의 작가들은 당시 미국 사회의 단면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이들은 대부분 제1차 세계대전을 몸소 경험한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전쟁을 통해 인간에 대해 깊은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20년대 미국에 팽배해있던 물질만능주의는 그들의 회의를 한층 더 악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 대다수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유럽에 머물러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의 살롱에 출입하였다. 스타인은 이들을 기존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방황한다는 의미에서 '길 잃은 세대'라고 칭하였다.


특징[편집]

상실세대는 미국 작가들과 달리 경제적 위기를 이유로 새로운 인력의 유입을 거부하는 사회체제에 대해 절망을 느끼고 있다. 이들은 선배 세대에게는 능력 발휘의 기회를 빼앗겼다는 상실감과 동료 및 후배 세대와는 생존을 건 경쟁을 벌여야 한다는 중압감으로 전쟁 후유증에 비유할 만한 정신적 공황을 겪고 있다. 또한 이 세대는 자신들이 물려받은 가치관이 더이상 전후세대와 연결되지 못했고, 하딩 대통령의 '정상 복귀' 정책 아래에서 절망적으로 편협하고, 물질주의에 물들고, 정서적으로 황폐해 보이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정신적 소외를 느끼기 때문에 길을 잃은 것이다.


이 시기의 작가와 대표적 작품[편집]

이 세대에 속하는 작가로는 헤밍웨이, F. 스콧 피츠제럴드, 존 더스 패서스, e.e. 커밍스, 아치볼드 매클리시, 하트 크레인 등과 1920년대에 파리를 문학 활동의 중심지로 삼았던 그 밖의 많은 작가들이 있다. 그들을 결코 문학의 한 파(派)로 볼 수는 없다. 1930년대에 이들이 다른 쪽으로 전향하자 그들의 작품에서는 더 이상 전후 시기의 독특한 특징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 시기의 마지막에 나온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피츠제럴드의 〈밤은 부드러워라 Tender Is the Night〉(1934)와 더스 패서스의 〈거금 The Big Money〉(1936)이 있다.


비트 제너레이션 [ beat generation ][편집]

 비트 제너레이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제2차 세계대전 후 1950년대 중반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을 중심으로 대두된 보헤미안적인 문학가․예술가들의 그룹을 지칭하기도 한다. 그들은 현대의 산업사회로부터 이탈하여, 원시적인 빈곤을 감수함으로써 개성을 해방하려고 하였다. 사회적으로는 무정부주의적인 개인주의의 색채가 짙으며, 재즈․술․마약․동양적인 선(禪) 등에 의한 도취에 의하여 '지복(至福:beatitude)'의 경지에 도달하려고 하였다.


1956년 앨런 긴즈버그(Allen Ginsberg)의 장시 《울부짖음 Howl》, 1957년 잭 케루악(Jack Kerouac) 의 장편소설 《길 위에서》이 발표되고 나서 이 말이 처음 사용되었다. 이 일파에는 그 밖에 시인 L.펄링게티, 소설가 G.스나이더, M.매클루어, K.렉스로스, W.S.버로스, N.메일러 등 여러 연령층의 작가 ․시인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개인적 차원에서 반체제적 태도를 고집하고, 극한적인 부정에 입각하여 새로운 정신적 계시를 체득하려고 하였다. 미국 로맨티시즘의 한 변형으로도 생각된다. 1960년대에 이르러 점차 쇠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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